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橫說竪說(동아일보) 2024-06/ 06-01(토) ‘1조3800억’ - 06-29(토) 쉰 목소리와 어눌한 말투로 TV토론 완패한 바이든

상림은내고향 2024. 6. 19. 19:15

橫說竪說(동아일보) 2024-06/

06-01(토) ‘1조3800억’ 이혼으로 29년 만에 소환된 ‘노태우 비자금’

 

“1991년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부친 고 노태우 전 대통령 측으로부터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부친 고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 측에 상당한 규모의 자금이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이혼소송 2심 판결문에서 재판부는 ‘1조3800억 원 재산 분할’의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이 판결로 29년 전 한국 사회와 재계를 뒤흔들었던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다시 소환되고 있다.

▷재판부가 ‘상당한 규모의 자금 유입’ 근거로 본 건 노 관장의 어머니 김옥숙 여사가 보관해온 선경건설(현 SK에코플랜트) 명의 50억 원짜리 약속어음 실물 4장과 사진 2장이다. 김 여사는 1998, 1999년에 지인들에게 맡겨둔 비자금 내역도 따로 메모해 뒀다고 한다. 메모에는 ‘선경 300억 원’뿐 아니라 노 전 대통령의 동생 노재우 씨 등의 이름과 액수, ‘맡긴 돈 667억+90억’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노 관장 측은 300억 원어치 어음이 돈을 맡기고 받은 일종의 ‘차용증’이라고 설명한다. 또 ‘친정’에서 유입된 300억 원이 SK그룹의 성장에 기여한 만큼 재산 분할에 고려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최 회장 측은 “비자금을 받은 바 없고, 어음은 노 전 대통령 퇴임 후 활동비를 지원하기 위해 건넨 것”이라는 입장이다. 재판부는 과거 비자금 사건 재판 때 밝혀진 내용과 김 여사 메모에 들어 있는 300억 원 외의 기록들이 여럿 일치한다는 점을 들어 노 관장 측 주장에 신빙성이 있다고 봤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은 노 전 대통령이 재임기간(1988∼1993년) 중 대기업 회장들로부터 돈을 걷어 비밀자금을 조성한 사건이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10월 박계동 당시 민주당 의원이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신한은행 서소문지점에 예치된 128억2700만 원 계좌의 예금 조회표를 공개하며 ‘4000억 원 비자금설’을 폭로했다. 노 전 대통령은 구속됐고, 12·12쿠데타 가담에 대한 수사까지 이어져 징역 17년, 추징금 2628억 원을 선고받았다. 노 전 대통령은 1999년 특별사면을 받아 풀려났고, 일가는 이후 추징금을 완납했다.

▷이번 소송을 통해 300억 원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숨겨진 비자금이 더 있었는지 의혹이 제기된다. 다만 노 전 대통령이 사망해 불법 자금이란 점을 입증하기 어렵고, 수뢰죄 공소시효도 끝나 처벌, 환수는 힘들 것으로 전망된다. 그렇다고 해도 불법 비자금에서 파생된 재산을 이혼소송으로 분할하는 게 타당한지 논란이 일 수밖에 없다. 오래전 사돈 간에 오간 ‘부정한 돈’까지 들춰낸 대기업 총수 부부의 이혼 소송은 지켜보는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6-03(월) ‘성추문 입막음’ 유죄 평결 트럼프, 대선 출마 자격은…

 

우리나라는 대통령직 등 공직 출마에서 유죄 선고에 따른 여러 제한 규정을 두고 있다.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고 실효되지 않는 자’ 등의 규정이 그것이다. 미국은 ‘출생에 의해 미국 시민이 아닌 자, 연령이 35세에 미달한 자, 14년간 미국 내의 주민이 아닌 자’에 대해서만 연방 대통령 출마 자격을 제한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출생에 의한 미국인인지 공화당 쪽에서 문제 삼은 바 있다. 그러나 유죄 선고를 받은 적이 있는지는 묻지 않는다.

▷미국은 공권력의 정당성은 선거에서 나오고 선거가 우위라는 사고가 강하다. 지사와 의원은 물론이고 판사까지도 선거로 뽑는 주(州)가 적지 않다. 연방에서는 법관을 선거로 뽑지는 않지만 선거로 뽑힌 대통령이 선거로 뽑힌 상원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기 때문에 선거 우위의 원칙이 관철되고 있다. 남북전쟁의 여파로 연방 상·하원의원과 연방 대통령 선거인에는 반란죄를 저지른 사람이 도전할 수 없다. 연방 대통령에게는 그런 제한도 없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주 뉴욕주 법원 1심에서 ‘성추문 입막음 돈’과 관련한 혐의로 배심원단에 의해 유죄 평결이 내려졌다. 형량은 판사가 결정한다. 판사는 공화당 전국 전당대회 직전인 7월 11일을 선고 기일로 잡았다. 최대 징역 4년형을 선고할 수 있다. 물론 그날 선고는 1심 선고일 뿐이다. 그러나 유죄 판결이 확정돼도 대선 출마 자격에는 문제가 없다.

▷트럼프는 혐의가 중죄이긴 하지만 가장 낮은 급의 중죄다. 고령인 데다 전과도 없어 징역형 실형이 선고돼 수감될 가능성은 작다. 그러나 수감된다면 문제가 복잡하다. 옥중 출마를 할 수 있지만 유세를 다닐 수 없다. 대통령에 당선돼도 연방법이 아닌 주법에 따라 유죄 선고를 받았기 때문에 셀프 사면을 할 수 없다. 형기를 마칠 때까지 옥중 업무를 봐야 하는 비정상적이고 비효율적인 사태가 발생한다. 공화당 전국 전당대회 직전에 트럼프를 수감하는 선고가 내려지면 전당대회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미국 헌법의 기초자들은 직접선거로 뽑는 연방 상·하원의원과 달리 연방 대통령은 선거인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뽑기 때문에 부적절한 인물을 걸러낼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정당 정치가 강화되면서 특정 후보 지지 선서를 하지 않으면 선거인으로 뽑히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안이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특정 후보 지지 선서를 강제하는 규정은 없다. 당 내부에 분열이 생기면 ‘선서하지 않은(unpledged)’ 선거인이 나오거나 특정 후보 지지 선서를 했지만 정치적 불이익을 감수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신의 없는(faithless)’ 선거인이 나올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6-04  20년 전에 없어진 지구당, 뜬금없는 부활론의 허실

 

20년 전 사라진 과거 정치문화인 지구당이 정치권 화두로 떠올랐다. 22대 국회 첫날인 지난달 30일 여야에서 각각 지구당 부활과 관련한 정당법·정치자금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주목할 점은 전현직 당 대표를 비롯해 당권주자로 거론되는 이들이 논쟁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불을 붙인 데 이어 나경원 안철수 윤상현 의원 등이 찬성했고, 더불어민주당은 이재명 대표가 필요성을 언급했다.

▷지구당 부활을 거론하는 속내는 제각각이지만 주요 명분은 현역 의원과 원외 정치인 간 형평성 문제다. 현역과 달리 원외 인사들은 선거 기간이 아니면 사무실을 열고 정치활동을 할 수 없다. 이런 탓에 총선 때마다 아무 연고도 없는 명망가들이 낙하산 공천을 받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청년 정치, 풀뿌리 민주주의 강화 등을 위해 원외 인사들에게도 활동 공간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각 당엔 ‘당협위원장’(국민의힘) 또는 ‘지역위원장’(민주당)이라는 직책이 있다. 각 선거구를 관리하는 지역 책임자다. 변호사 자격이 있는 원외 위원장들은 변호사 사무실을 지구당 사무실처럼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일부 위원장들은 ○○연구소, ○○학교와 같은 간판을 내걸고 사무실을 운영하는 편법 사례가 있다. 이마저도 어려운 이들은 당협위원장이라는 타이틀 하나로 4년 동안 돌아다니며 유권자들을 만난다. 합법적인 사무소, 여기에 후원금과 중앙당의 인력·자금까지 받을 수 있다면 이들에겐 엄청난 힘이 된다.

 

▷지구당이 2004년 폐지된 이유는 불법 정치자금 때문이다. 사무실을 열면 임차료와 인건비 등으로 월 1000만 원 이상의 운영비가 든다고 한다. 연 1억2000만 원, 254개 지역구로 확대하면 연 300억 원이 넘는 돈이다. 이런 액수도 외부에 드러난 것일 뿐 실제로는 조직동원비 등으로 더 많은 금액이 소요된다는 것이 정가의 경험담이다. 그나마 현역의 경우엔 후원금이 있고, 국회 보좌진에게 사무실 운영을 맡겨 인건비를 아낄 수 있다. 그러나 원외 위원장은 사비를 털어야 한다. 이 때문에 시의원, 구의원들이 사무실 운영비를 갹출하거나 지역 내 사업가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건네는 경우도 많았다.

▷현역과 원외 인사, 정치 신인 사이에 놓인 불공정한 장벽은 해소돼야 한다. 하지만 그 대안이 지구당 부활인지는 따져봐야 한다. 지역 내 또 다른 정치 카르텔이 만들어질 수도 있고, 원외 위원장에게만 사무실과 후원금을 허용한다면 당의 선택을 받지 못한 정치 신인에게는 또 다른 차별이 될 수도 있다. 그동안 아무런 논의도 없다가 전당대회를 앞두고 원외 당협위원장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 불쑥 던질 이슈는 아니란 얘기다.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06-05 또 터진 도요타의 인증조작 스캔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차는 일본 도요타의 준중형 코롤라다. 1966년 출시돼 지금까지 5300만 대 이상 팔렸다. 성능이 뛰어나면서도 가격이 저렴해 일본의 ‘국민차’이자 세계적으로 마이카 붐을 주도한 차로 평가받는다. 한 광고에선 ‘자녀를 과잉보호하는 부모를 위해’라는 카피를 넣어 화제가 됐다. 안전엔 지나침이 없다, 품질엔 타협이 없다는 철학을 강조한 것이다. 이랬던 코롤라에 일본 국민들이 뒤통수를 세게 맞았다.

▷일본 국토교통성은 도요타를 비롯해 마쓰다, 혼다, 스즈키 등 5개 업체가 자동차 성능시험에서 부정을 저지른 것으로 확인됐다고 3일 밝혔다. 도요타의 경우 코롤라 필더와 코롤라 악시오, 소형차 야리스 크로스 등 현재 생산 중인 3개 모델과 크라운, 아이시스, 시엔타, 렉서스RX 등 과거 만들었던 4개 모델이 해당된다. 2014년부터 약 170만 대에 이른다. 이 중 코롤라와 아이시스는 일본 내수 전용이지만 나머지 모델은 해외로까지 팔려 나갔다.

▷도요타의 인증 조작은 여섯 가지 방식으로 이뤄졌다. 충돌 검사 시 에어백이 자동으로 터지도록 타이머를 설치했다. 규정과 다르게 시험 차량의 무게를 조정해 충돌 시험을 했다. 보행자와 자동차의 충돌 시험에선 한 방향의 결과만 가지고 양쪽 방향에 모두 적용했다. 엔진 출력이 제대로 나오지 않자 컴퓨터 제어를 조정해 데이터를 조작했다. 국토성은 현재 생산 모델에 대해 출하 정지를 지시했고, 도요타는 공장 두 곳의 생산라인 가동을 6일부터 중단하기로 했다.

 

▷도요타의 부정행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2년 상용차 자회사인 히노자동차가 20년 동안 배기가스와 연비 데이터를 조작해온 사실이 드러났다. 지난해 말엔 경차 전문 자회사 다이하쓰공업에서, 올해 초엔 디젤 엔진을 납품하는 도요타자동직기에서 인증 부정이 발각됐다. 국토성은 다른 업체도 이런 문제가 없는지 조사하도록 했다. 일부 자회사의 일탈일 뿐임을 증명하고 싶었겠지만, 오히려 도요타 본사를 비롯해 일본 자동차업계 전체에 부정이 만연해 있다는 사실만 드러나 버렸다.

▷2015년 독일 폭스바겐의 배기가스 조작 사건이 벌어지자 외신들은 도요타의 ‘안돈 코드’에 주목했다. 안전과 품질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작업자가 곧바로 생산라인을 멈출 수 있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효율 경영과 성과주의만 강조되고 사내 소통 문화가 경직되면서 도요타의 품질 우선주의는 빛이 바랬다. 한국 자동차 업계는 도요타의 위기에 반사이익만 기대할 것이 아니라 품질 관리 시스템과 조직 문화 전반을 재점검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브랜드 신뢰를 쌓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6-06  6월4일 中의 두 얼굴… 천안문 지우기 vs 달 뒷면 탐사

 

중국에는 6월 4일이 없다. 그제는 ‘5월 35일’이었다. 포털에서 6월 4일을 검색하면 “해당 결과를 찾을 수 없다”는 글이 뜬다. 중국 메신저에선 6월 4일이 포함돼 있으면 문자가 전달되지 않는다. 8964라는 숫자도 마찬가지다. 1989년 봄 중국에서 개방파 공산당 총서기가 숨진 뒤 시작된 민주화 및 반부패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덩샤오핑이 무자비하게 탱크로 진압한 날이 바로 6월 4일이다. 젊은이들은 그래서 5월 35일, 8의 제곱(64), 로마숫자 VIIV(64)로 검열을 피하고 있다.

▷35년 전에도 무자비했지만 1인당 소득이 1만3000달러에 이른 지금도 그날의 기억을 지우겠다는 당국의 뜻은 여전하다. 그제 네덜란드 기자가 중국 외교부 대변인에게 “사실상의 학살이었던 그 사건”을 평가해 달라고 하자 “항의 풍파(소동)는 이미 끝난 일”이란 답이 돌아왔다. 그런 뒤 외교부는 이 대목을 삭제한 속기록을 공개했다. 톈안먼(天安門) 망루 관광이 하루 중단됐고, 정치적 메시지를 담는 걸 막기 위해 온라인 게임 사용자가 프로필 사진이나 아이디를 변경하는 것이 금지됐다. 일요일에 발간된 홍콩 종교 전문 주간신문의 1면은 백지로 나왔다.

▷같은 6월 4일이지만 달에선 중국의 우주 굴기(崛起)가 빛을 발했다. 중국의 무인 달 탐사선 ‘창어(달의 여신) 6호’는 달 뒷면에 착륙한 지 이틀 만에 로봇 팔로 토양과 암석 2kg 정도를 채취한 뒤 지구 복귀에 나섰다. 달 뒷면 착륙도, 뒷면 암석 채취도 인류 최초다. 달은 자전주기와 지구를 도는 공전주기가 모두 28일이다. 그래서 지구를 향해 늘 같은 쪽 절반(앞면)만 보여 준다. 역사상 달 토양 채취는 미국이 5번, 옛 소비에트가 3번 성공했지만 모두 앞면의 일이었다.

 

▷달의 뒷면은 앞면보다 울퉁불퉁해 착륙이 더 어렵고, 지구와는 직선 무선 통신이 불가능하다. 중국은 오작교라는 이름을 붙인 통신 중계위성을 미리 띄워 뒷면-오작교-베이징 3자 통신에 성공했다. 달 뒷면은 헬륨 3가 더 많아 광물 자원화 가능성이 더 크고, 소행성 충돌도 잦아 달 생성과 진화의 비밀을 풀 열쇠를 지녔다고 한다. 1969년 닐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내려서서 성조기를 내건 뒤 미국이 달을 잊은 듯한 사이 중국은 오성홍기를 달 뒷면에 펼쳤다.

▷6월 4일의 두 얼굴은 중국에 대해 묻게 만든다. 억압과 창의는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 걸까. 달 뒷면 탐사는 과학 역량은 물론이고 가 보지 않은 길을 가겠다는 도전정신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국가적 투자는 물론 과학자의 자유로운 사고와 연구 투명성이 불가결한 요소다. 베이징 권부가 개개인의 기억마저 장악하려는 6월 4일의 비극과 상충된다. 중국은 자유와 통제의 기로에 선 걸까. 아니면 국가 과학이 억압과 공생하는 두 얼굴이 상당 기간 유지되는 것인가.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6-07 한국계 첫 美 상원의원 노리는 42세 앤디 김

 

미국 연방하원에 진출한 한국계 의원 4명 중 하나인 앤디 김의 아버지는 고아원 출신에 소아마비로 힘든 유년기를 보냈다. 어린 시절 서울역 등지에서 한때 동냥을 했을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국비 장학생 기회를 잡아 1970년대 미국에 갈 수 있었다. 다행히 매사추세츠공대(MIT)와 하버드대를 나와 유전공학 박사로 자수성가했다. 김 의원의 어머니는 공립병원 간호사로 일했다. 그는 어린 남매를 데리고 워싱턴 국회의사당을 구경시키며 “네게 모든 것을 선사한 나라(미국)를 사랑하고 가슴에 새기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42세의 김 의원은 오바마 행정부 때 국무부를 거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으로 재직했다. 그가 2018년 백인 밀집지인 뉴저지 3선거구에서 연방하원 의원에 당선됐을 때 ‘아메리칸 드림의 기적’이란 평가가 나왔다. 이제 3선인 그는 최근 민주당의 뉴저지주 연방 상원의원 후보로 선출됐다. 뉴저지는 민주당이 지난 50년간 내리 상원의원을 배출한 텃밭이다. 대선과 함께 치러지는 11월 선거에서도 김 의원이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첫 한국계 미 연방 상원의원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민주당 상원의원 50명 하나하나가 다 대통령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야심작인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추진 초기에 조 맨친 상원의원의 반대에 부딪히자 답답함을 이렇게 토로했다. 상원은 민주당과 공화당이 거의 반반이어서 여당에서 한 명이라도 이탈하면 정부가 정책 추진에 애를 먹는다. 그만큼 한 표의 영향력이 막대하다. 주별로 2명인 상원의원 100명은 권위와 희소성이 있어 주지사들과 함께 대권주자로 여겨진다.

 

▷소수인종인 데다 조직력과 자금력이 약한 김 의원은 당내 상원의원 경선에서 승산이 낮았다. 뉴저지주는 당 지도부의 입김이 강하고, 많은 정치인이 뇌물 수수로 물러날 정도로 금권선거의 잔재가 남아 있는 곳이다. 현직 상원의원도 지난해 뇌물 혐의로 기소됐다. 그 틈에 경선에 나선 김 의원은 당내 기득권 개혁을 승부수로 던졌다. 통상 도전자는 출마 전 지도부에 지지를 구하는데 이를 건너뛰고 출마 선언을 해 주도권을 잡았다. 지도부가 자신들이 미는 후보를 투표용지 맨 위로 올리고 다른 후보는 구석에 배치해온 관행에도 제동을 걸었다.

▷이민 1세대인 부모가 미국에 정착하기 위해 끌어내야 했던 강인함을 김 의원 역시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유복한 교육을 받고 미 주류사회로 진입하긴 했지만 당국자들이 한반도 안보나 무역정책을 결정할 때 한국의 목소리를 별로 고려하지 않는 걸 보며 정치를 결심했다고 한다. 그가 상원의원이 된다면 한국은 든든한 대변자를 얻게 되고, 미국에도 ‘기회의 땅’이란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6-08(토) 일제가 만든 ‘조선인 지옥섬’ 밀리환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벌인 일본은 태평양의 섬들을 군사기지로 만들어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으로 활용했다. 일본 해군이 막강할 땐 통하는 전략이었지만 1943년 이후 전세가 기울면서 이 섬들은 일본군의 무덤이 됐다. 미국은 전력이 약한 섬을 골라 띄엄띄엄 점령하고 나머지 섬들은 해상만 봉쇄하는 ‘개구리 뛰기’ 작전을 폈다. 그렇게 식량과 무기 보급을 차단하면 고립무원에 갇힌 일본군은 굶주림의 지옥으로 내몰렸다.

▷남태평양 마셜제도에 있는 산호초 섬 밀리환초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섬에는 일본군 3600여 명 외에 군사시설 건설 목적으로 전남 지역에서 강제 징용된 조선인 1000여 명이 있었다. 미군 함정이 이 섬을 포위하면서 보급선의 접근이 어려워지자 일본군은 섬 안의 군인들에게 각자도생하라고 지시했다. 해안가엔 미군이 있어 물고기를 잡긴 어려웠고, 벌레나 쥐를 잡아 겨우 연명했다.

▷조선인들 중에는 노역에 끌려 나갔다가 실종되는 이들이 늘어갔다. 일본군이 조선인을 살해해 인육을 먹는다는 공포가 확산됐다. 일본군이 고래고기라며 고깃덩어리를 던져준 날, 몇몇 조선인들은 사라진 동료를 찾아 나섰다가 충격적인 현장을 목격했다. 허벅지 살이 도려진 채 뼈만 남은 조선인의 시체가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굶어 죽거나, 잡아먹히게 될 운명 앞에서 조선인들은 다른 선택이 없었다. 일본군 감시병을 제압한 뒤 미군에 투항하자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1945년 3월 감시병 11명 중 7명을 제거하고 탈출을 시도했지만 살아 도주한 병사가 군 병력을 데리고 왔다. 조선인 55명이 학살됐고, 나머지는 야자나무 위 등으로 숨어 목숨을 건졌다.

 

▷밀리환초 조선인 학살 사건이 알려지기까지 30년 넘게 일제 강제동원을 연구해온 일본인 사학자가 큰 몫을 했다. 역사교사 출신인 다케우치 야스토 씨는 밀리환초 생존자 이인신 씨를 인터뷰한 동아일보 기사(1990년 11월 3일자)를 보고 이 사건 연구를 결심했다고 한다. 기사에는 “나무 열매를 먹으며 버티다 미군 함정으로 헤엄쳐 갔다. 함께 탈출을 기도했던 조선인 150여 명이 죽었다” 등의 상세한 증언이 담겨 있다. 다케우치 씨는 일본 정부가 한국에 제공한 징용사망자 명부를 수작업으로 분석해 밀리환초에서 사망한 조선인을 한 명 한 명 찾아냈다. 그는 1942∼1945년 학살과 기아, 강제노동으로 희생된 218명의 명단을 최근 광주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했다.

▷당시 미군에 구조된 조선인들 사진을 보면 아무 옷도 걸치지 않은 채 온몸이 까맣게 타 있고 뼈만 앙상한 모습이다. 밀리환초 사건은 일본 제국주의의 민낯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국가는 섬에 고립된 아군을 버렸고, 버림받은 군인들이 타국에서 끌려온 노동자들을 학살하도록 방치한 나라가 ‘제국주의’ 일본이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6-10(월) “괴롭힘 당했다” 거짓 신고… 법 악용하는 ‘오피스 빌런’

 

자동차 부품 업체, 보건소, 전투기 제작 업체, 시·군청, 금융회사, 해경, 대기업…. 모두 최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자살한 직원이 나왔거나 그랬다는 의혹이 제기된 곳이다. 괴롭힘 피해는 직종을 가리지 않는다. 자살로 끝난 산업재해의 절반 이상은 과로와 함께 직장 내 괴롭힘이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2019년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개정 근로기준법)이 시행됐지만 비극이 여전히 끊이지 않는 실정이다.

▷하지만 부당한 피해를 막는 법이 생기면 악용하는 이들도 나타나기 마련이다. 사적 이익을 노리거나 잘못을 지적하는 상사에게 복수하려고 없는 사실을 지어내 허위 신고를 하는 이들이다. 비자발적 퇴사로 인정받아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상사가 괴롭혔다’고 거짓 신고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정당한 업무 지시를 상습적으로 이행하지 않다가 징계를 받게 되자 ‘괴롭힘을 당했다’고 신고하기도 한다. 인사 발령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부서장을 갈아 치우려고 거짓 신고하는 사례도 있다. 좋은 취지의 법이 ‘오피스 빌런’(직장 내 악당)의 무기가 된 셈이다.

▷서유정 한국직업능력연구원 연구위원 등의 관련 실태 연구에 따르면 허위 신고자는 보상금이나 고용 계약 연장 등 보상을 먼저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통상의 괴롭힘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의 분리나 가해 중단을 주로 원하는 것과 달랐다. 같은 행위에 대한 반복 신고도 많았다. 회사는 책임을 회피하며 피신고인에게 모든 책임을 지라고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거짓 신고를 당한 사람 5명 중 1명은 부당한 징계까지 받았다고 한다. 허위 신고가 또 다른 유형의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학계에선 모호한 법 규정이 허위 신고의 여지를 주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우리 법은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고통을 주거나 근무 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금지한다. 이에 비해 비슷한 법을 가진 나라들은 대부분 조항에 지속성이나 반복성 규정을 두고 있다. 대체로 6개월∼1년 이상 또는 주 1회 이상 계속돼야 괴롭힘이 인정된다는 것이다. 구체적 기준은 우리 사정에 맞게 바꾼다고 해도 객관성이 보완될 필요성은 있어 보인다.

▷허위 신고의 폐해는 신고당한 개인에 그치지 않는다. 거짓 신고가 횡행하면 진짜 피해자의 신고도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들이 많아지게 마련이다. 지금도 직장 내 폭행·폭언 피해자 10명 중 6명이 불이익이 두려워 신고하지 못한다는데, 신고가 더 위축될 수도 있다. 가짜 사건으로 근로감독관 업무에 과부하가 걸리면 피해 구제에 시간이 오래 걸리게 된다. 부작용을 막기 위해선 회사가 취업규칙에 허위 신고인을 징계하도록 하는 등의 지침을 마련하도록 한 해외 사례를 검토할 만하다. 제도의 실효성이 떨어지면 진짜 약자가 피해를 본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06-11 ‘서학개미’ 美 주식 4년 반만에 10배… 800억 달러 넘었다

 

‘국장(국내 증시) 대신 미장(미국 증시)으로.’ 코로나19 이후 주식시장에 입문했던 이른바 ‘동학개미’들이 깃발을 내리고 ‘서학개미’로 바뀌는 모습이 두드러지고 있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6일 기준 국내 투자자의 미국 주식 보유 금액은 821억1849만 달러(약 113조 원)로, 사상 처음 8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코로나19 직전인 2019년 말만 해도 84억 달러 정도였는데, 4년 반 만에 10배로 늘었다. 국내 주식시장 시가총액 3위인 LG에너지솔루션(82조6020억 원) 주식을 전부 사고도 30조 원이 남을 만큼 엄청난 규모다.

▷서학개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엔비디아를 필두로 한 인공지능(AI) 관련주다. 엔비디아는 올해 들어서만 147% 오르는 등 연일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국내 주식 투자자들이 가장 많이 보유한 주식은 엔비디아, 테슬라,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순이다. 요즘엔 주식을 1주 미만으로 거래하는 소수점 거래를 통해 소액으로 꾸준하게 해외 주식을 사 모으는 청년들이 늘고 있다. 상속과 증여 목적으로 유망 종목을 골라 장기 투자하는 부모도 많다.

▷국내 투자자들이 해외에 자산을 많이 보유한 것을 전적으로 나쁘게만 볼 일은 아니지만, 문제는 지지부진한 국내 주식시장이다. 올해 들어 국내 투자자들의 미국 주식 보유액이 150억 달러(약 21조 원) 늘어나는 동안 유가증권시장에서 개인투자자들이 11조5000억 원을 순매도했다. 개미들이 국내 증시를 외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수익률이다. 올해 들어 이달 7일까지 미국 S&P500지수는 12.74% 상승했지만 코스피는 2.54% 오르는 데 그쳤다.

 

▷한국은 AI발 글로벌 증시 랠리에서 소외돼 있는 데다 지난해 증시를 이끈 2차전지 관련주도 주춤해 마땅한 주도주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수익률은 낮은데 배당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고 변동성은 심하다. 테마주, 주가 조작 등이 판을 치면서 도박판으로 변질되고 있다. 상장지수펀드(ETF) 시장에서 미국 투자 상위 상품은 배당·테크 관련인 데 반해 국내 상품은 단기 투자 성격의 ‘레버리지’ 상품에 쏠려 있다.

▷올해 4월 한 온라인 재테크 커뮤니티가 2030세대 투자자 593명에게 물어보니 5명 중 4명(78.8%)은 현재 한국 주식에 투자하고 있지 않거나 앞으로 투자 비중을 줄이겠다고 답했다. 기업들의 주된 자금 조달 통로인 주식시장의 물길이 마르면 기업과 한국 경제의 성장에도 제동이 걸리게 된다. 기업의 체질 개선을 통해 실적을 높이고 후진적 자본시장을 업그레이드하지 못하면 한국 증시를 버리고 미국으로 향하는 서학개미의 마음을 붙잡을 수 없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6-12 승진 거부권 달라는 대기업 노조

 

직장인들의 로망이 ‘굵고 짧게’에서 ‘가늘고 길게’로 바뀐 계기는 1997년 외환위기다. 외환위기 이후 조기 퇴직이 일상화됐지만 개인의 노후 준비나 사회 안전망은 이를 쫓아가지 못하면서다. 20년이 더 흘러 워라밸을 챙기는 2030세대의 등장으로 ‘임포자’(임원 포기자), ‘승포자’(승진 포기자) 같은 신조어가 쏟아졌다. 일찍 임원 달고 일찍 집에 가느니 ‘만년 부장’, ‘만년 과장’으로 장수하겠다는 직장인이 늘어난 것이다. 호봉·직급 체계가 엄격한 공무원 사회나 금융권에선 실제 승진 발령을 거절한 사례가 나왔다.

▷대기업 노사의 임금협상 테이블에 ‘승진 거부권’을 처음 올린 건 현대자동차 노조다. 2016년 임협에서 일반·연구직 직원들에게 과장 승진을 거부할 권리를 달라고 요구했다. 과장이 되면 노조를 탈퇴해야 하고 성과연봉제도 적용받는데, 인사고과 압박과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관리자가 되느니 노조 울타리 안에서 정년을 보장받겠다는 취지였다. 그해 현대중공업 노조도 승진 거부권을 요구하면서 두 회사 노조는 동맹 파업을 강행했다.

▷사측이 인사권 침해라며 거절했던 승진 거부권을 현대중공업 노조가 올해 임단협에서 재차 요구하고 나섰다. 8년 전에는 승진 거부 요구가 월권이다, 기상천외하다는 비판 일색이었지만 지금은 뜬금없지만은 않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승진·출세보다는 워라밸과 안정을 선호하는 MZ세대와 준비 안 된 노후 공포에 시달리는 중장년층 직장인에게 어필할 수 있는 이슈라는 얘기다.

 

▷대기업 노조들이 올해 임단협에서 일제히 ‘정년 연장’을 꺼내든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현대차·기아 노조를 비롯해 HD현대그룹 조선 3사, LG유플러스 노조 등이 60세 정년을 64세나 65세로 올리자고 요구하고 있다. 법정 정년은 2013년 60세로 연장된 뒤 변함없는데, 국민연금을 받는 나이는 지난해 63세에서 2028년 64세, 2033년 65세로 계속 늦춰지면서 ‘소득 절벽’이 길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노동시장에서 퇴장하는 실질 은퇴 나이는 72.3세일 정도로 수많은 고령층이 정년 이후에도 일자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

▷우리보다 먼저 초고령사회로 진입한 일본은 수십 년에 걸쳐 정년을 높인 데 이어 기업들이 65세까지 ‘정년 연장’, ‘재고용을 통한 계속 고용’ ‘정년 폐지’ 중 하나를 택하도록 의무화했다. 비슷한 길을 뒤따라 걷는 한국이 참고할 만한 대안이다. 다만 노동계 주장대로 무작정 정년을 연장하면 기업 부담이 커지고 청년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논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인구 소멸 걱정이 없던 때에 굳어진 호봉제 중심의 임금 체계, 노동시장 경직성, 법적 노인 연령 등을 함께 풀어야 정년 연장도, 일손 부족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6.13 대왕고래 프로젝트’ 자료 비공개 전환 이유 뭘까

 

1987년 12월 8일 최창락 동력자원부 장관이 기자회견을 열고 “대륙붕 6-1광구에서 국내 최초로 양질의 대규모 가스층이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부산 동쪽 120km 해상 ‘돌고래3’ 시추공에서 생산 가능성을 시험한 결과 10시간 동안 가스가 분출돼 불길이 타올랐다는 것. 국내 대륙붕 시추 사상 처음이라고 했다. ‘신군부의 일원인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이 될 것이냐, 아니면 민주 정부냐’, 운명을 가를 대통령 선거일을 1주일여 앞둔 시점이었다.

▷‘산유국의 꿈이 가시권에 들어왔다’며 흥분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매장 추정량을 묻는 물음에 기술진은 답을 꺼렸다. 정부는 “내년부터 3개의 평가정을 뚫어 경제성 여부를 판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사실 1972년 첫 시추 이래 국내 대륙붕에서 미량의 천연가스나 유층(油層)이 발견된 건 여러 차례 있었다. 경제성이 없었을 뿐이다. 일부 언론 매체들은 발표 시점이 미묘하다는 점을 짚으며 섣부른 기대나 낙관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듬해 매장량 평가 시추에서 결국 경제성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선거를 앞두고 장관이 호들갑을 떤 셈이 됐다.

▷한국석유공사가 경북 포항 영일만 앞 심해에서 석유·가스를 탐사하는 ‘대왕고래’ 프로젝트 자료 일부를 비공개로 전환해 논란이 일고 있다. 원래는 정보공개포털에 자료 상당수를 ‘부분공개’ 상태로 올려놨는데, 최근 탐사 시추 관련 자료 등을 비공개로 바꾼 것이다. 공사는 “개인정보가 포함된 문서 등을 전환했다”고 했다. ‘등’자가 붙었으니, 개인정보 외 다른 이유로 비공개한 자료도 있다는 얘기다. 공사는 야당의 자료 요구도 ‘국가 자원안보 중요 정보’라며 거부하고 있다. ‘대왕고래’가 몸을 숨긴 것이다.

 

▷자원 부국의 꿈이 실현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1987년 돌고래3 발표 당시엔 생산 가능성 시험 결과라도 있었다. 이번엔 탐사 시추도 안 한 채 갖고 있던 자료만 새로 분석했다고 한다. 분석한 기업 액트지오의 대표가 브리핑까지 했지만 여러 의문이 깔끔하게 풀리진 않았다. 국민은 ‘대왕고래’가 얼마나 유망하길래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깜짝 발표’한 건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자원 개발은 특성상 언론이나 국민이 검증할 수 있는 수단이 별로 없다. 최근 한 설문조사에선 이번 유전 탐사 결과 발표에 대해 10명 중 6명이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아직 첫 삽도 안 떴는데 정부가 믿음을 잃은 것이다. 이런 식이면 비단 이번 프로젝트가 아니더라도 뚝심 있는 탐사가 필요한 유전 개발이 초장부터 좌초할 우려가 있다. ‘대왕고래’ 프로젝트가 돌고래3의 재판이 되지 않으려면 국익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투명한 정보 공개가 무엇보다 우선이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06-14  41년 만에 납입한도 올렸지만 쓸 곳 없는 청약통장

 

성인이 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주택청약통장을 만드는 일이라고 했지만 요즘에는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 2022년 6월 2703만1911명으로 정점을 찍었던 청약통장 가입자 수는 올해 4월 2556만1356명으로 줄었다. 2년도 안 돼 청약통장 147만 개가 사라진 것이다. 분양가가 치솟으면서 저렴하게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다는 이점이 줄었다. 상황이 이렇자 정부가 시들어가는 청약통장의 인기를 되살리기 위해 불씨를 지피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공공분양주택 청약 때 인정되는 청약통장 월 납입액 한도를 10만 원에서 25만 원으로 올린다고 13일 밝혔다. 납입 인정액이 늘어나는 것은 1983년 이후 41년 만에 처음이다. 매월 2만∼50만 원을 자유롭게 저축할 수 있지만, 지금까지는 월 10만 원까지만 납입액으로 인정돼 더 넣을 유인이 없었다. 월 25만 원까지 넣으면 올해부터 300만 원으로 늘어난 청약통장 소득공제 한도도 모두 채울 수 있다.

▷일견 한도가 늘어나면 무주택 청년에게 기회가 더 돌아갈 수 있다. 공공주택은 청약통장 저축총액 순으로 당첨자를 정하는데, 현재 당첨선은 1200만∼1500만 원으로 최소 10년은 기다려야 한다. 지난해 서울의 공공주택에 당첨되려면 평균 18년 이상을 부어야 했다. 납입기간이 짧은 청년들에겐 절대적으로 불리한 구조다. 납입 인정액이 늘어나 그만큼 더 저축하면 청년층도 예전보다 짧은 기간에 당첨선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으로 납입액을 늘리면 생각보다 기간은 길어질 수 있다.

 

▷월 10만 원을 넣기도 버거운 저소득층의 당첨 가능성은 더 낮아져 중산층에게만 유리한 개편이 될 것이란 우려도 있다. 늦게 시작했더라도 더 많이 납입한 사람에게 역전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유 있는 사람들은 10년 2000만 원 증여 기본공제 한도 내에서 미성년 자녀의 청약통장까지 대신 납입해 줄 수도 있다. 이러니 정부가 청약통장 납입 한도를 늘리려는 진짜 이유는 청약통장 저축액을 재원으로 하는 주택도시기금 확충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납입액 한도를 높이는 게 청년들의 내 집 마련의 꿈을 앞당겨 줄 수 있을지는 궁극적으로 의문이다. 통장이 있어도 마땅히 사용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LH의 공공분양 공급 목표는 6만 채였지만 실제 공급은 3185채로 목표 대비 5.3%에 그쳤다. 원자재 가격, 인건비 등 공사비 상승으로 민간 공급이 크게 위축된 상황에서 공공마저 손을 놓고 있으면 수급 불안을 해소할 수 없다. 청약할 곳 자체가 없으면 당첨 가능성이 높아져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6-15(토) “385만 원짜리 디올 가방 원가는 8만 원”

 

명품은 비싸도 원가는 얼마 되지 않는다. 대부분 브랜드 값이다. 자동차 중에서 마진율이 높은 테슬라 전기차가 20% 내외인데 3대 명품 에루샤(에르메스 루이뷔통 샤넬)의 마진율은 60∼70%다. 최근에는 프랑스 브랜드인 디올의 385만 원짜리 가방 원가가 8만 원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인건비를 후려친 결과다.

▷이탈리아 밀라노 법원은 하청업체의 노동 착취를 방치·조장한 혐의를 받고 있는 디올 이탈리아 지사의 가방 제조업체에 1년간 사법 행정관의 감독을 받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34쪽짜리 법원 결정문에는 중국인이 운영하는 하청업체 4곳이 최저 위생 기준에도 못 미치는 공장에서 이민자들을 먹이고 재우며 가방을 만든 것으로 나온다. 전기 사용량으로 추정해보니 공장은 24시간 휴일도 없이 풀가동됐고, 작업 속도를 높이기 위해 기계의 안전장치는 제거된 상태였다. 업체는 가방 한 개에 53유로(약 8만 원)를 받고 디올에 넘겼는데 이 가방의 매장가는 2600유로(약 385만 원)다.

▷이민자를 동원해 노동 법규를 어겨가며 작업하는 방식은 이탈리아 명품업계에선 드문 일이 아니다. 이탈리아는 세계 명품 생산의 50∼55%를 커버하는데 ‘메이드 인 이탈리아’의 상당 부분을 밀라노, 피렌체, 프라토 등에 몰려 사는 중국계 이민자들이 만든다. 값싼 중국 노동력을 이용하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탈리아 브랜드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는 위기감이 높다. 올 4월에는 아르마니 가방 하청업체가 불법 체류 중국인들을 시간당 2∼3유로에 쓰다가 적발됐다. 개당 출고가는 14만 원, 판매가는 267만 원이다.

 

▷향수도 제조 원가율이 5∼15%로 낮다. 패션 전문회사들이 향수 제작을 병행하는 이유다. 고급 향수일수록 비싼 원료를 쓰지만 워낙 극소량만 들어가기 때문에 고가든 아니든 원가는 거기서 거기다. 최근에는 재스민 원산지인 이집트에서 명품 브랜드용 재스민 수확에 어린이를 동원하는 실태가 영국 BBC 보도로 드러났다. 재스민은 꽃잎이 햇볕에 상하기 전인 새벽에 따야 하는데 이 시간대 아동 노동은 불법이다. 방송에서는 새벽 3시에 일어나 어린 자녀 넷과 재스민꽃 1.5kg을 따 1.5달러를 손에 쥔 어머니 사례가 나온다.

▷원가의 세 배 네 배 가격을 주고 명품을 사는 건 그만큼 무형의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가죽 가방’이 아니라 ‘디올 가방’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 업체는 비쌀수록 잘 팔리는 심리를 악용해 실적 개선이 필요할 때마다 질이 아닌 가격을 올려버린다. 가뜩이나 높은 마진율을 더 높여보려 ‘장인의 한 땀 한 땀’ 대신 약자의 노동력 착취에 의지하는 민낯까지 드러났다. 분별력 있는 소비가 기업의 탐욕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6-17(월) 11시간 지연에 거짓 해명 논란까지, 이런 항공사 믿고 탈 수 있나


13일 국내 저비용항공사(LCC) 티웨이항공을 통해 인천공항에서 일본 오사카로 떠나려던 승객들은 여행의 설렘이 악몽으로 바뀌는 끔찍한 경험을 했다. 낮 12시 5분 출발 예정이었는데 기체 점검 등을 이유로 예정보다 4시간 늦게 탑승했다. 기내에서도 3시간 넘게 머물러야 했다. 다시 항공기에서 내려 기다린 끝에 오후 11시 4분에야 이륙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승객은 공황장애를 호소하며 쓰러졌고, 탑승객 310명 중 204명이 출국을 포기했다.

▷운항 지연도 문제지만 이유를 알고 보면 더 어이가 없다. 당초 오사카행 비행기는 HL8500편이었는데 실제 출발한 건 HL8501편이었다. 먼저 출발 예정이었던 크로아티아 자그레브행 항공기가 기체 결함으로 지연되자 오사카행을 대신 투입한 것이다. 일각에선 티웨이 측이 회사 손해를 줄이기 위해 오사카행 승객에게 피해를 떠넘긴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유럽연합(EU)에선 항공사 문제로 지연·결항될 경우 환불 외에 최대 600유로 상당의 보상을 해야 하는데, 티웨이 측이 이 비용을 아끼기 위해 항공기를 바꿔치기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항공사의 거짓 해명 논란도 불거졌다. 티웨이 측은 오후 6시 45분에 정비를 모두 마쳤지만, 승객들이 내려달라고 요구하면서 시간이 지연됐다고 설명했다. 곧 이륙할 수 있었는데 승객들 탓에 늦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 탑승객들은 기장이 기체에 문제가 있다고 안내 방송을 한 것은 오후 6시 57분이었다고 주장한다. 오후 9시 30분경까지도 사다리차가 항공기 꼬리 부분에 설치돼 있는 등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을 봤다는 증언도 있다.

 

▷오사카행 승객들이 발을 구르던 시간 태국 방콕에서도 티웨이항공 승객들의 발이 묶여 있었다. 13일 0시 5분(현지 시간) 방콕에서 청주공항으로 출발 예정이던 여객기가 정기 점검을 이유로 20시간이나 출발이 지연됐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해 LCC의 중대사고 14건 중 8건이 티웨이에서 발생했다. 국토부의 지난해 ‘항공운송서비스 평가’에서도 티웨이의 이용자 만족도는 국내 항공사 10곳 중 9위에 그쳤다.

▷단거리 노선 중심이던 LCC들은 최근 미국 유럽 등 장거리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티웨이의 경우 지난달 자그레브 노선을 취항해 국내 LCC 최초로 유럽 노선 운항을 시작했고, 하반기엔 파리 로마 등 유럽 4개 노선 취항을 앞두고 있다. 여객 운송에서 LCC의 비중이 커지고 있지만 크고 작은 사고가 반복되면서 불안감은 여전하다. 사고를 예방하는 게 우선이겠지만, 문제가 생겼을 때는 정직하게 설명하고 재발 방지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 승객들이 LCC를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6-18 갈수록 ‘수포자’도 늘고 ‘국포자’도 늘어서야

 

요즘 입학 대기 줄이 가장 긴 학원은 독서·논술 학원이다. 국어는 사교육비가 두 자릿수씩 증가하는 과목이기도 하다. 한글을 읽고 쓸 수 있는데도 문해력이 떨어지는 ‘국포자’(국어를 포기한 자)가 늘고 있어서다. 상수나 함수 같은 단어를 이해하지 못해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자)를 만들기도 한다. 17일 발표된 지난해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에선 학생 10명 중 1명이 ‘국포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매년 실시되는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는 중3, 고2 학생을 대상으로 국어, 수학, 영어 과목별 기초학력 도달 여부를 측정하는 시험이다.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를 진단하는 것이라 문제 자체가 그다지 어렵지는 않다. 국어라면 비유법에 해당하는 문장을 고른다거나, 수학이라면 기본적인 인수분해를 하는 정도다. 따라서 ‘기초학력 미달’에 해당한다면 교실에 앉아 있어도 아예 수업을 이해 못 한다고 보면 된다. 그 위 단계로는 기초→보통→우수 학력 순으로 나눈다.

▷특히 고2 학생의 기초학력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지난해 기초학력 미달 비율은 국어 8.6%, 수학 16.6%를 기록했다. 표집 조사가 시작된 2017년 이후 가장 높았다. 중3 학생은 국어, 수학, 영어 모두 기초학력 미달 비율이 약간 줄긴 했지만 덩달아 보통학력 이상인 중상위권 학생도 급감했다. 기초학력이 개선됐다기보다 하향 평준화에 가깝다.

▷교육 당국은 기초학력 미달 비율이 늘어난 건 코로나19 유행 동안 학교가 문을 닫은 탓이 크다고 분석한다. 그 기간 사교육 참여 시간, 스마트폰 사용 시간, 학습 공간 확보 등 개인적인 환경에 따라 학력 격차가 벌어진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코로나19가 지나가고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음에도 기초학력 미달 비율이 되레 늘어났다는 점이다. 학교가 ‘코로나 후유증’을 치유하고 교육 사다리를 재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일 텐데, ‘코로나 세대’의 학력 격차가 평생에 걸친 직업과 소득 격차로 이어질까 봐 우려스럽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대부분이 학업성취도 평가를 시행한다. 학생들의 실력을 제대로 진단해야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처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학업성취도 평가를 하고 학교별, 과목별 점수뿐만 아니라 성별, 인종별, 부모의 소득에 따른 점수까지 공개한다. 이 점수가 낮은 학교일수록 예산을 더 지원해 코로나19 학력 격차 해소에 나서고 있다. 국내서는 학업성취도 평가를 두고 ‘학교 줄 세우기’라는 교육계의 거부감이 큰 탓에 전국 학생의 3%만 표집 조사를 한다. 사실상 학교 간 비교는 불가능해 맞춤형 지원이 이뤄질 수 없다. 경쟁을 터부시하며 무기력증에 빠진 학교부터 바뀌어야 ‘국포자’ ‘수포자’ 학생도 줄어들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6-19 SNS에도 술·담배처럼 경고문 붙여야

 

올해 1월 미국 상원 법제사법위원회는 아동 성 착취물 확산에 대한 빅테크의 책임을 추궁하는 청문회를 열었다. 증인으로 출석한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는 방청석을 향해서 “누구도 겪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날 방청석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괴롭힘을 당하거나 우울증이 유발돼 자살한 자녀를 둔 부모들이 앳된 모습의 자녀 사진을 들고 침묵시위를 하고 있었다. 기절할 때까지 숨을 참는 ‘블랙아웃 챌린지’ 영상을 찍다 사망한 자녀를 둔 부모도 있었다. 울음을 삼킨 채 방청석을 지킨 부모들은 SNS가 어떤 비극을 초래했는지 침묵으로 증언했다.

▷2010년대 들어 미국에선 10대 청소년의 우울, 불안, 자해가 급증했다. SNS가 대중화된 시기와 일치한다. SNS의 위험성에 대한 각성이 일어나며 이를 규제하려는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미국 공중보건 최고책임자인 비벡 머시 의무 총감은 17일 뉴욕타임스 기고문을 통해 술과 담배처럼 SNS에 청소년 건강에 치명적이라는 경고를 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주치의’로 불리는 의무 총감의 이 같은 발언은 빅테크에 아동 보호 책임을 부과하는 법안 통과에 힘을 실어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청소년 정신 건강도 응급 상황이라는 진단이 나오고, 그 원인 중 하나로 SNS가 지목된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우리 청소년 10명 중 7명이 SNS를 사용한다. 청소년기는 전두엽이 완성되지 않아 충동이나 감정 조절에 미숙하다 보니 SNS의 부정적인 영향이 극대화된다. 하루 3시간 이상 SNS를 사용하는 청소년은 우울증, 불안과 같은 정신 건강 문제를 겪을 가능성이 두 배로 늘어난다. 또래 압력에 취약해 마른 몸을 동경하며 거식증을 앓거나, 자해나 자살 같은 유해 콘텐츠에도 쉽게 중독된다.

 

▷3년 전 메타가 10대 여학생들에게 인스타그램이 악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의 내부 연구 보고서를 은폐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사실이 내부 고발로 폭로됐다. 청소년 정신 건강에 덜 해로운 알고리즘 모델을 적용하면 이용자 수가 줄어들 것을 우려한 것이다. 이는 미국 42개 주가 메타를 대상으로 ‘청소년 중독을 유도하도록 설계했다’며 소송에 나선 배경이 됐다.

▷SNS를 끊을 수 없는 건 개인의 의지가 부족해서라기보다 뇌의 쾌락 중추를 자극하는 알고리즘 탓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빅테크들이 돈벌이를 포기하고 스스로 알고리즘을 바꿀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머시 의무 총감은 “자동차 사망 사고가 늘자 안전벨트를 도입했던 것처럼, SNS에도 안전 규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도 SNS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할 방안을 공론화할 때가 됐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6-20 오송참사 겪고도 침수 대비 손 놓은 지하차도 87%

“국민 생명과 재산 보호를 위해 1억2000만 원을 쓸 수 없다는 인식이 안타깝다.” 청주지법 재판부가 지난달 31일 ‘오송 참사’를 일으킨 공사 현장소장에 대해 법정최고형인 징역 7년 6개월을 선고하면서 한 말이다. 이 돈이면 지난해 7월 충북 청주 미호천교 도로 확장 공사장에 홍수 방호벽을 설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건설사는 콘크리트 방호벽 대신 흙으로 임시 둑을 쌓았다. 제대로 다지지도 않았고, 높이도 모자랐다. 부실 공사였다. 이 둑이 무너지면서 인근 오송 궁평2지하차도에서 14명이 귀중한 목숨을 잃었다. 판사는 “최소 징역 15년은 선고해야 했는데 한없는 무기력함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다음 주면 전국이 대부분 장마권에 든다. 요즘엔 집중 극한 호우 탓에 하천 범람 위험이 더욱 커졌다. 그제 감사원이 지하 공간 침수 대비 실태를 점검한 보고서를 냈는데, 전국 지하차도 1086곳 중 제방 붕괴 시 침수 우려가 있는 곳이 최소 182곳이나 됐다. 그 가운데 159곳(87%)은 차량 진입 통제 기준에 인근 하천 홍수주의보 같은 외부 위험요인이 빠져 있는 등 기준조차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채였다. 132곳(73%)은 차량 진입 차단시설이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오송 참사’를 겪고도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이다. 지방자치단체가 행정안전부에 예산 지원을 요청한 지하차도 40곳 중 17곳은 지원을 받지 못해 차량 진입 차단시설을 설치하지 못했다고 한다. 환경부의 홍수 관리 대책은 시작부터 구멍이 나 있었다. 용역 계약을 맺었던 업체가 전체 하천의 6.3%인 235개 하천을 분석 대상에서 누락한 것이다.

 

▷사실 오송 참사 역시 그로부터 3년 전 부산 침수 사고와 양상이 판박이였다. 집중호우가 쏟아진 2020년 7월 부산 동구 초량제1지하차도에서 침수 사고가 났다. 차량 6대가 잠겨 3명이 숨지고 4명이 다쳤다. 당시 지하차도 출입 통제 시스템은 3년째 고장 나 있었고, 배수펌프는 작동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행안부는 부랴부랴 자동차단 시설 구축과 원격 차단, 상황 전파 시스템 구축 등 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3년 뒤 오송의 궁평2지하차도에도 침수 시 차량 진입을 자동 차단하는 시설은 없었다. 두 달 뒤에야 설치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배수펌프가 먹통이었던 것도 그대로다. 막상 물이 지하로 밀려들자 작동을 멈췄다.

▷지하 침수 사고가 반복됐던 7월이 코앞이다. 감사원 지적에 대해 행안부와 국토교통부는 대책을 마련했다고 했지만 현장에서 실제 얼마나 이행됐는지는 알 수 없다. 비가 좀 많이 내리는 날이면 운전자들이 지하차도에 진입해도 될지 말지 불안해하는 게 우리 재난 안전 수준이다. 같은 비극을 얼마나 되풀이한 뒤에야 비로소 참사 예방에 전력을 다하려 하는가.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06-21 15년간 등록금 동결… 대학 경쟁력 퇴보 언제까지

자녀가 대학에 가면 부모는 ‘에듀푸어’에서 졸업한다. 다달이 수십만 원, 많게는 100만 원 넘게 통장에서 빠져나가며 가계 살림을 옥죄던 사교육비가 굳기 때문이다. 대학 등록금을 내야 하지만 학원비에 비하면 큰 부담이 아니다. 지난해 국공립대 연간 등록금(394만 원)은 초등학생 사교육비(554만 원)보다 적고, 사립대(733만 원)는 고교생 사교육비(888만 원)보다 못 한 수준이다. 모든 물가가 오르는 동안 대학 등록금은 ‘반값 등록금’ 규제에 묶여 15년간 동결된 탓이다.

▷등록금 고지서에 찍히는 명목 등록금은 2011년 이후 큰 변화가 없지만 물가상승률을 반영한 실질 등록금은 855만2000원에서 685만9000원으로 14년 새 20%나 줄었다. 최근 10년 사이 미국 대학 등록금은 1만7200달러→3만2000달러, 영국은 4980달러→1만2300달러, 일본은 8040달러→8740달러로 올랐는데 한국만 역주행한 셈이다. 법에는 ‘직전 3개년 평균 물가상승률의 1.5배 내’에서 올릴 수 있게 돼 있지만 이 경우 정부의 지원을 못 받기 때문에 사실상 사문화된 규정이다. 대학이 법정 기준만큼 등록금을 올리지 못해 발생한 결손액이 28조 원에 이른다.

▷정부 재정이 들어가는 국립대와 달리 재정의 63%를 등록금 수입에 의존하던 사립대는 학생 수 급감까지 덮쳐 재정 파탄 위기에 내몰린 상태다. 생존하려니 투자를 줄일 수밖에 없다. 50만 개가 넘던 강좌 수를 43만 개로 줄였고 연구비, 실험실습비, 도서구입비, 시설투자비도 내리 삭감했다. 연구 역량과 교육의 질이 좋아질 리 있겠나. 중고교보다 못한 시설에 놀란 학생들이 “등록금 올려도 좋으니 빔프로젝터 바꾸고 화장실 좀 고쳐 달라”고 요구하는 학교도 있다.

 

▷한국만큼 대학에 돈을 안 쓰는 나라는 드물다. 초중고교생 1인당 공교육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상위권, 대학생 공교육비는 최하위권이다. 대학생 교육비가 초등학생보다 적은 나라는 그리스, 콜롬비아, 한국뿐이다. 정부가 투자도 않으면서 등록금도 못 올리게 하니 대학 졸업장이 제 구실을 못 한다. 한국은 OECD 회원국에 비해 대졸자 비율은 높지만 대졸자 취업률이 크게 떨어지고 고졸 대비 대졸자의 상대적 임금 수준도 낮다. 헐값에 졸업장만 내어 주는 교육이 무슨 의미가 있나.

▷전국 135개 대학 총장들이 최근 한국대학교육협의회 하계 세미나에서 대학 등록금 규제를 풀어 달라고 호소했다. 대학 경쟁력을 위해 고민해야 하는 자리에서 10년 넘게 같은 요구를 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정부 지원 포기하고 등록금 올리느냐, 지원금 받고 등록금 포기하느냐는 구시대적 고민을 호기롭게 교육 규제 철폐를 내세운 정부에서도 계속 하고 있는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6-22(토) ‘전세사기’ 반지하에 묶여 잠 못드는 피해 청년들

 

“불안하지만 별수 있나요. 그저 버틸 수밖에요.” 동아일보가 장마철을 앞두고 전세사기 피해 건물을 돌아봤더니 임대인이 잠적해 방치된 탓에 심각한 하자가 발생한 건물이 수두룩했다. 전국적인 전세사기 피해가 공론화된 지 2년이 되어가지만, 피해자의 고통은 끝나지 않고 있다. 보증금을 떼이고 빚더미 수렁에 빠진 피해자는 하루하루를 정말 어렵게 버티고 있다. 지긋지긋하지만 집을 떠날 수도 없다. 피해자 대다수가 관리되지 않는 부실 건물에서 불안에 떨며 살고 있다고 한다.

▷인천 계양구 하모 씨의 반지하 집은 문을 열면 복도에 물이 찰랑거린다. 하루 3번 펌프를 돌리며 버티고 있다. 그는 전세사기로 보증금 8000만 원을 떼이고 투잡, 스리잡을 하며 빚을 갚고 있다. 돈이 드는 수리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부산 수영구 정모 씨는 오피스텔 현관 입구에 모래주머니를 쌓아 놓고 산다. 지난해 장마 당시 배수시설이 미흡해 물이 넘쳤던 악몽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아서다. 그 역시 대출금을 고스란히 날리고 갈 곳이 없어 버티고 있다. 전국 곳곳에 소방관로가 터졌거나 외벽 마감재가 떨어졌는데도 임대인이 잠적해 관리가 중단된 건물이 있었다.

▷5월 기준 전세사기 피해자는 1만6606명이고, 이들의 10명 중 7명은 2030 청년층이다. 사기를 당한 것도, 그래서 집주인 빚을 떠안은 것도 억울한데 누수, 균열, 승강기 고장 등 건물 관리 부실의 피해까지 감내하고 있다. 전세사기 전국대책위원회에 따르면, 피해자 절반 이상이 열악한 주거 환경에 처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세사기가 사회적 재난 수준으로 번진 것은 제도적 맹점을 방치한 정부의 책임이 크다. 피해가 집중적으로 발생한 다가구의 경우, 등기부 등본을 봐도 선순위 대출이나 다른 전세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전세보증보험도 허술하게 관리돼 피해를 키웠다. 나태한 행정으로 전세사기를 방치한 정부가 장마철 홍수 피해가 걱정되는 위험한 건물에서 살고 있는 피해자들을 외면하고 있다. 17개 시도 중 피해자가 사는 건물에 대한 실태조사가 일부라도 이뤄진 곳은 5개 시도뿐이었다.

▷사회에 갓 진출한 2030 청년들이 저축을 깨고 대출을 받아 마련한 집이었다. 그 집은 이제 ‘전세 지옥’이라고 불린다. 반지하나 옥탑방을 벗어나 그저 조금 햇빛이 잘 들고 깨끗한 보금자리를 꿈꾼 대가로서는 너무 가혹하다. 피해자들은 “승강기, 소방시설, 전기 설비 등의 안전 관리를 지자체가 지원해 주거나, 비용 보조를 해 줬으면 한다”고 했다. 혹시 무너질까, 물이 넘칠까 하는 걱정에 피해자가 뜬눈으로 밤을 새우지 않도록 지자체가 최소한 시설 안전만큼은 지원에 나섰으면 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6-24(월) 82세 바이든-78세 트럼프 메모장 하나 들고 90분 토론

 

미국 대선에서 최초의 TV 토론은 1960년 존 F 케네디와 리처드 닉슨 사이에 열렸다. 케네디가 젊음으로 어필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케네디 43세, 닉슨 47세로 두 사람의 나이 차는 그리 많지 않았다. 40대 후보 간에 시작된 대선 TV 토론이 어느새 80세 안팎의 후보들 간 토론이 됐다.

▷올 미국 대선 민주당 후보가 될 것이 확실한 조 바이든 대통령의 나이는 82세, 공화당 후보가 될 것이 확실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나이는 78세다. 두 사람이 사흘 뒤인 27일 첫 TV 토론을 벌인다. CNN방송이 진행하는 토론에서는 메모장과 펜, 물 한 병이 주어진다. 90분간의 토론 중간에 광고 시간이 두 번 있으나 그때도 캠프 관계자와 접촉할 수 없다. 둘의 국정 이해도나 순발력을 적나라하게 비교해 볼 수 있는 시간인 것이다.

▷바이든과 트럼프를 빼면 미국 대선에서 최고령 후보는 1984년 재선에 도전한 당시 73세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다. 상대편 민주당 후보는 56세의 월터 먼데일이었다. 두 사람이 TV 토론에서 나이를 두고 나눈 유명한 얘기가 있다. 먼데일이 “대통령의 나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공격적으로 파고들었다. 레이건은 “이번 선거에서 나이를 문제 삼지 않겠다”며 거꾸로 된 듯한 대답을 했다. 먼데일이 무슨 말이냐고 묻자 레이건은 “당신이 젊고 경험이 없는 걸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특유의 유머 감각을 발휘한 역공을 펼쳤다. 미국 전체의 TV 앞이 웃음바다가 됐고 먼데일은 패배했다.

 

▷젊음만이 매력이 아니라 노련함도 매력이라고 호소할 수 있는 것도 평균 기대수명보다 적을 때 얘기다. 바이든과 트럼프는 둘 다 오늘날 미국의 평균 기대수명인 77세를 넘겼다. 평균 기대수명을 넘긴 후보들이 기억력 하나만 갖고 토론을 벌이게 되는 상황이 흥미롭다.

▷바이든 대통령은 공개 석상에서 자신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 모르는 듯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여러 차례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최근 한 유세 현장에서는 30초 넘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역대 TV 토론이 모두 달랑 메모장 하나 갖고 했지만 이번에 이 사실이 더 주목받는 것은 두 사람이 빚을지 모르는 실수 때문이다.

▷두 사람은 여전히 국정 전반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대중의 환호를 불러일으키는 뛰어난 연설가다. 그러나 프롬프트 의존도도 높다. 할 말을 잊는 불상사는 없길 바란다. 이들에게 통계 수치의 정확성을 따지는 건 젊은 후보들이나 하는 유치한 것일 수 있다. 주로 식견을 다투는 토론이 되겠지만 80세 안팎의 후보들의 젊은 후보들 못지않은 열띤 토론을 볼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멋진 장면이 될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6-25 ‘김호중 방지법’ 입법 추진… 도주 후 ‘술 타기’ 철퇴 맞나

 

최근 기소된 트로트 가수 김호중 씨가 음주운전 혐의를 피할 수 있었던 데에는 사고 후 편의점에서 샀던 캔맥주 4캔이 큰 역할을 했다. 김 씨는 지난달 9일 밤 서울 강남에서 택시를 들이받고 경기도의 한 호텔로 도주한 뒤 그 앞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샀다. 보통의 음주 뺑소니범들은 알 만한 곳으로 도주해 몇 시간이면 잡히는데 김 씨는 추적이 어려운 외딴 호텔에 숨어 있다 17시간 뒤에야 경찰서에 나타났다. 이렇게 시간을 지연시켜 놓고, 맥주까지 사 마셨으니 경찰이 아무리 정교하게 추정한다고 한들 김 씨의 운전 당시 혈중 알코올 농도가 0.03% 이상이었다는 걸 입증하긴 어렵다.

▷음주 사고 후 일부러 술을 더 마셔 사고 당시 알코올 농도를 특정할 수 없게 만드는 ‘술타기’는 음주운전자들이 자주 쓰는 수법이다. 음주운전을 하다가 앞에서 경찰이 단속 중이면 황급히 편의점으로 가 소주를 들이켜거나, 집에서 술을 마시며 경찰이 오기를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수사기관이 제때 음주 측정을 못 한 경우 사후에 혈중 알코올 농도를 역산하는 ‘위드 마크 공식’이 있긴 하지만 사고 후 2차 음주는 이마저 무력화시킨다.

▷대법원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이런 꼼수를 단죄하지 못하는 무력감을 토로한 적이 있다. 2020년 음주 상태로 승용차를 들이받은 화물차 운전사가 경찰에 잡히기 전 소주 1병을 더 마시는 바람에 혈중 알코올 농도가 0.169%에 달했음에도 무죄 판결을 한 사건에서다. 대법원은 “음주운전자가 처벌을 회피하게 되는 결과를 용인하는 것은 정의 관념에 맞지 않지만 이를 처벌할 입법적 조치가 없는 현재로선 불가피한 결론”이라고 했다.

 

▷김 씨는 일단 도주 후 술타기 전략으로 음주운전 혐의를 피하는 데는 성공했다. 검찰은 형량이 더 무거운 혐의로 그를 재판에 넘겼다. 음주 영향으로 사고를 내 사람을 다치게 한 위험운전치상 혐의다. 혈중 알코올 농도는 없어도 되지만 ‘정상적인 운전이 곤란한 상태’였다는 걸 입증하는 게 관건이다. 판결이 어떻게 나오든 김 씨가 그토록 피하려 했던 음주운전자 꼬리표보다 ‘역대급 사법 방해자’라는 오명이 연예인에겐 더 치명적일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김 씨 사건이 남긴 ‘순기능’이 하나 있다면 음주운전 처벌에 있어 입법의 공백을 여실히 확인시켜준 점이다.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가는 행태를 막지 못하면 형량을 아무리 높여도 소용이 없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검찰이 음주운전 처벌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술을 더 마시면 음주측정 거부죄와 동일하게 처벌하는 ‘김호중 방지법’을 추진하고 있고, 국회에서도 유사한 법안이 속속 발의되고 있다. 진작 나왔어야 할 법인데 이제라도 촘촘히 만들어 음주운전자들이 꼼수 부릴 틈을 완전히 없애야 한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6-26 기생충에 꿰맨 양말까지… 北 궁핍 만방에 알린 오물풍선

 

북한의 오물풍선 공세에 골머리를 앓던 우리 당국이 선택한 대응법은 저강도 심리전에 가깝다. 통일부와 군 당국은 그제 오전 오물풍선이 또 날아올 정황을 파악한 뒤 풍선 속 오물의 실체를 일부 공개했다. 인분이 든 퇴비, 칼로 난도질한 청바지, 다 쓴 건전지, 체제 선전물 조각 등이었다. 북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제 밤 5번째로 풍선 350여 개를 날려 보냈다. 하지만 1개월 동안 날아든 2000개 안팎의 풍선에는 공작을 주도한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이 예상치 못한 북한의 속살이 여럿 담겨 있었다.

▷통일부에 따르면 오물에선 사람의 DNA도 나왔다. 인체에 있던 회충 편충 등 기생충이 토양에 섞인 것으로 당국은 추정했다. 퇴비에 인분을 썼거나, 화장실 부족으로 일어난 일일 것이다. 7년 전 판문점에서 북 병사가 귀순했을 때도 기생충이 뉴스가 됐었다. 총상을 수술한 이국종 아주대 의대 교수가 수십 cm 길이의 기생충 수십 마리를 제거한 적이 있다. 상대적으로 영양 상태가 좋았을 최전방 병사에게서 벌어진 일이다. 풍선에는 찢어진 걸 몇 겹이고 기운 장갑, 구멍 난 곳을 여러 번 덧댄 양말, 옷감을 겹쳐 조악하게 만든 마스크도 있었다.

▷북 당국이 정보 노출을 막으려고 신경 쓴 흔적이 없지는 않았다. 병뚜껑에선 안쪽이 뜯겨 있었고, 플라스틱 병에선 라벨을 일일이 떼어낸 듯했다. 하지만 물자 부족을 드러낼 물건들을 전수 조사로 걸러내지는 못했다. 특히 오물의 DNA 분석까지 할 것으로는 북측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풍선 속에서 훼손된 김정은 찬양물이 나왔다는 점이다.

▷풍선에는 “김일성 대원수님의 교시”와 같은 선전물이 있었다. 쓰레기와 함께 담겼다는 것도 경을 칠 일이지만, “위대한 령도자(…)”에서 잘려 나간 것도 있었다. 북한에선 신성모독과 다를 바 없는 일로, 형법상 사형까지 가능하다. 2016년 평양 양각도 호텔에서 체제 선전물을 훼손한 혐의로 장기간 억류된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를 떠올려 보라. 엄격한 처벌을 모를 리 없는 북쪽의 누군가가 ‘령도자’ 관련 인쇄물을 훼손했고, 그걸 남쪽으로 내려보내는 과정도 꼼꼼하게 걸러지지 않았다.

▷상상도 못 할 오물풍선 공작은 탈북자 단체가 북으로 날려보낸 대북전단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시작한 것은 맞다. 북한 매체들은 탈북자들을 “인간쓰레기”라고 비난해 왔으니 북한 나름대로는 형식 논리를 갖췄다고 여겼을 것이다. 오물풍선은 우리 불안감은 고조시켰지만, 북 무인기가 서울 상공을 헤집고 돌아다닐 때처럼 남남갈등은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헛웃음을 자아냈다. 하지만 지금의 긴장이 이렇게 끝날 리가 없다는 점에서 긴장해야 한다. 북은 남북이 더 이상 단일 민족이 아니라고 선언했고, 러시아와 동맹 수준으로 관계를 격상시켰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6-27 고교생 제자에 심히 부적절한 편지 보낸 교총 회장

 

박정현 인천 부원여중 교사(44)는 얼마 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 77년 역사상 최연소 회장으로 선출됐다. 주로 교수들이 맡아온 회장 자리에 평교사 출신이 오른 것은 박 회장이 세 번째다. 그런데 20일 임기 시작 일주일도 되지 않아 교총 회원들의 사퇴 요구를 받고 있다. 11년 전 인천국제고 근무 시절 제자에게 보낸 ‘부적절한 편지’가 공개됐는데 그 수위가 높다.

▷처음엔 ‘부적절한 쪽지’가 논란이었다. 회장 선거 기간 중 인천국제고 박 회장 반이었다는 누리꾼 등이 박 회장이 제자에게 ‘사랑한다’ ‘차에서 네 향기가’ ‘어제보다 오늘 더 사랑한다’고 적은 쪽지를 건넸다고 폭로했다. 박 회장은 22일 사과문을 내고 “한 제자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입시에서 좋은 성과를 낼 것 같아 쪽지를 보내 격려했는데 과했던 것 같다”고 해명했다. 이 일로 ‘품위유지 위반’에 따른 ‘견책’ 조치를 받았으며 견책 처분은 3년 만에 말소됐고 올 2월 사면도 받았다는 것이다. 교총도 “성비위는 아닌 것으로 확인했고 회원들도 문제없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3일 후 박 회장이 당시 제자에게 보낸 편지 사본 12장이 교육전문매체를 통해 추가로 공개됐다. 몇 구절만 옮기면 이렇다. “당장이라도 안아주고 싶었어” “차에 떨어지는 빗소리, 당신의 향기” “얼굴 한번 마주치기 어렵지만 자기를 떠올리는 일만으로도 행복해요” “어젠 기숙사에서 자며 자기 생각 참 많이 했어요”. 교총 회원들은 “회장이 사퇴하지 않으면 내가 탈퇴하겠다”고 하고, 학부모 단체는 “신임 회장 당선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야당에선 “권력에 의한 성범죄”라며 진상조사와 자진 사퇴를 요구한 상태다.

 

▷현재로선 편지를 받은 학생이 성적 수치심을 느꼈는지 확인되지 않아 성범죄라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우월적 지위에 있는 교사가 사제 간 신뢰 관계를 악용해 미성년자에게 부적절한 언행을 한 것은 지탄받을 일이다. 교사의 제자 성희롱이 드물지 않은데 당하는 학생들은 “내가 공부를 잘해서 예뻐하고 격려하신다”거나 “내가 형편이 어려워 각별히 챙겨주시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미숙한 제자가 먼저 접근해도 바로잡아 줘야 하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다.

▷교권 침해 사례가 늘면서 교총의 교권 보호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초중고교생이 여교사에게 “남자 잘 꼬시죠” 같은 막말을 하는 일이 벌어질 때면 교총은 “교사가 어린 학생에게 도 넘은 성희롱을 당하는 현실”을 개탄해 왔다. 그런데 어린 학생에게 도 넘은 편지를 보낸 교사를 교원 대표로 뽑았다. 박 회장이 “교권 보호”를 호소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가 여제자에게 보낸 연서의 낯 뜨거운 구절을 떠올릴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6-28 ‘가족이라고 무조건 절도·사기죄 안 묻는 건 헌법불합치

 

일반인들에게는 낯선 법률 용어였던 ‘친족상도례’가 널리 알려진 것은 방송인 박수홍 씨 사건 때문이었다. 박 씨의 형이 박 씨 돈을 횡령한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됐을 때, 갑자기 박 씨의 아버지가 ‘박수홍의 돈은 형이 아니라 내가 썼다’며 주장하고 나서면서다. 부모는 자녀의 동의 없이 돈을 빼내도 처벌받지 않는 ‘친족상도례’ 조항을 이용해 큰아들의 처벌을 면해 주려 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무성했던 것. 헌법재판소가 어제 ‘친족상도례’ 조항의 적용을 중지하고 내년 말까지 법을 개정하라며 헌법불합치를 결정했다.

▷친족상도례의 대상은 두 부류다. 먼저 직계혈족, 배우자, 동거친족 등은 절도 사기 횡령 등의 재산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형(刑)이 저절로 면제된다. 사이가 좋든 나쁘든, 범죄 액수가 많든 적든 예외가 없다. 다음으로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친족은 피해자가 고소를 하는 경우 수사와 기소를 할 수 있다. 이른바 ‘친고죄’다. 이 중 헌재가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단한 부분은 ‘형 면제’ 부분이다. “일률적으로 형을 면제할 경우 피해자의 권리를 일방적으로 희생시킬 우려가 있다”는 게 헌재의 판단이다.

▷친족상도례는 “법은 가정의 문턱을 넘지 않는다”는 로마법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에서는 1953년 형법 제정 당시부터 이 조항이 있었다. 대가족 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농경사회에선 친족상도례 조항이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71년이 흐르는 동안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크게 바뀌었다. 호주제는 폐지된 지 오래고, 1인 가구의 비중이 전체의 3분의 1을 넘는다.

 

▷더구나 돈의 유혹이 커지면서 부모 자식과 형제자매의 재산을 노리는 ‘불량 가족’이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이번에 헌법소원 사건에도 지적장애인 조카의 돈을 빼돌린 삼촌, 노모의 예금을 횡령한 자녀와 그 배우자의 사례가 문제가 됐다. 이들은 피해자 측으로부터 고소를 당했지만 친족상도례가 적용돼 모두 불기소 처분됐다. 일반인들의 법 감정이나 상식으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악행이 법 조항 때문에 면죄부를 받았던 셈이다. 정부와 국회도 이런 문제를 알고 있었지만 법 개정은 번번이 무산됐다.

▷정부는 1992년 친족 사이의 범죄를 기본적으로 친고죄로 규정해 처벌 가능성을 열어두는 형법 개정안을 제출했지만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21대 국회에서도 친족상도례를 폐지하거나 축소하는 법안이 여러 건 발의됐지만 흐지부지됐다. 가족 문제에 국가의 과도한 개입을 막는다는 친족상도례의 취지는 살려야 한다는 의견까지 감안해서 정부와 국회가 부작용을 줄일 방법을 진작 찾았어야 했다. 이제라도 법 개정을 서둘러,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두 손 놓고 보고만 있어야 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6-29(토) 쉰 목소리와 어눌한 말투로 TV토론 완패한 바이든

 

100년 동안 미국 대통령 후보들은 경제 정책과 대외 전략과 함께 개인적 인품, 인생 역정을 기준으로 유권자의 선택을 받았다. 하지만 올 11월 대선을 앞두고 어제 CNN 본사에서 열린 첫 TV토론을 본 시청자들은 건강과 스태미나라는 새 기준을 떠올렸을 것이다.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전직 대통령으로는 132년 만에 재선에 도전하는 가운데 81세(바이든)와 78세(트럼프)의 초고령 경쟁이 본격 시작됐다.

▷TV토론을 누가 더 잘했느냐는 여론조사에서 트럼프는 완승했다. 67% 대 33%. 승부는 두 후보의 목소리에서 갈렸다. 청소년 시절 말 더듬는 습관을 노력으로 극복했던 바이든은 유난히 더듬었고, 발음도 번번이 샜다. 잔뜩 쉬고 힘 없는 목소리에선 미국 대통령다운 단호함과 명료함이 안 보였다. 민주당이 토론 도중에 “감기 탓”이라고 해명을 내놓을 정도였다. 트럼프는 “방금 전 그 말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바이든 본인은 알까”라고 꼬집었는데, 바이든의 민주당 지지층도 반박하기 어려웠다.

▷악수도 없이 시작한 토론답게 두 후보는 후벼 파는 말을 앞세웠다. 바이든은 트럼프가 성인물 여배우와 불륜을 저지르고 회삿돈을 꺼내 입막음용으로 준 사실을 상기시켰다. “당신은 아내가 임신한 그때 포르노 배우와 잤다”며 공화당 주류의 가족 중시 정서를 건드렸다. 또 “당신이 미군 전사자를 가리켜 썼던 호구(sucker)와 패배자(loser)는 바로 트럼프”라고 몰아세웠다. 대표적 신사 정치인인 바이든답지 못한 이런 강공은 곧 빛을 잃었다. 평소와 달리 비속어나 조롱성 발언을 절제한 트럼프의 변신이 더 눈길을 끌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멕시코 불법이민 등 정책 이슈가 나왔을 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도 바이든에겐 뼈아팠다. 트럼프는 늘 그렇듯 과장하고 왜곡해가며 “내 재임 시절 미국 경제가 최고였다”고 자랑했다. 이런 식의 왜곡은 미 언론이 수년간 팩트체크로 반박한 것이었지만, 바이든은 현장에서 반박할 능력이 없는 듯했다. 자신을 중국으로부터 돈을 받는 “만주(滿洲)의 대통령 후보”라고 부르는데도 별 대응을 못 했다. 하나하나가 바이든의 순발력과 집중력 부족을 부각시켰다.

▷미국 대선 TV토론은 1960년 처음 도입됐다. 당시 닉슨-케네디 중 승자는 젊은 상원의원 케네디 후보였다. “카메라 덕을 가장 크게 본 후보는 케네디”라는 말이 60년 넘게 힘을 얻고 있지만, 트럼프가 그 주인공이 될 듯하다. 바이든의 고민은 이제부터다. 삼삼오오 모여서 수군거리던 고령 문제가 공론의 장에 올려졌다. 같은 편인 민주당 지지층이 더 아우성이다. 통상적이라면 바이든이 부통령 후보를 지명하는 축제의 장이 될 8월 전당대회까지 민주당과 백악관은 큰 혼돈과 마주하게 됐다. 2차 TV토론은 9월 10일이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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