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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속과 저항의 섬’ 타이완(대만)/ 청나라·일본·국민당의 잇단 지배, 타이완이 버틴 힘은? - 2024.01 대만 총통 선거 현장을 가다

상림은내고향 2024. 5. 11. 19:32

타이완(대만) 

2023

10.28 청나라·일본·국민당의 잇단 지배, 타이완이 버틴 힘은?

‘복속과 저항의 섬’ 타이완

어린 시절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공’으로, 국민당정부 타이완을 ‘자유중국’으로 부를 때, 타이완이 중국의 중심부인 줄로 알았다. 역사 공부를 시작한 후 타이완이 중국 중심부에서 얼마나 먼 곳이었나 확인하면서 놀란 일이 여러 번 있었다.

 

펑후(澎湖)군도가 타이완보다 무려 400년 앞서 중국 행정체계에 편입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다시 놀랐다. 타이완해협(약 180㎞ 폭) 중 타이완 쪽 가까이(약 50㎞ 거리) 있어서 타이완의 부속도서처럼 보이는 펑후는 원나라 초(1281) 강절행성(江浙行省) 동안현(同安縣) 관할에 들어갔다. 대만부(臺灣府) 설치는 1684년이었다.

17세기 말에야 중국 영토로 편입
해협 건너편은 13세기에 평정돼

중국과 또 다른 ‘남양문명’의 저력?
‘국가의 통치’ 피하고, 이용한 재간

다양한 역사가 쌓여온 주민 구성
‘일국’이 되어도 ‘양제’ 필요한 곳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거점

 ▲2016년 타이완 원주민 축제에 참여한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왼쪽). 원주민은 타이완 인구의 2.38%로 공식 집계되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많다. 평야 지대 원주민은 장기간의 동화를 통해 한족이 되었고 혼혈 자손도 한족이 되었다. 푸젠·광둥 출신 ‘한족’ 이주민의 혈통에도 ‘남양인’ 유전자가 상당수 있었을 것이다. 타이완인 85%가 원주민 혈통을 가졌다는 유전자 연구가 몇 해 전 발표돼 큰 파문을 일으켰다. [사진 위키피디아]

 

타이완은 왜 그렇게 오래도록 중국인의 관심 밖에 있었을까. 중국과 일본 사이의 징검다리 노릇을 한 류구열도와 달리 배후에 망망대해밖에 없는 타이완의 외진 위치가 지적된다. 하지만 펑후보다도 오래 방치된 사실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푸젠·광둥 등 중국 남해안의 한화(漢化)는 남송시대(1127~1279)에 급속히 진행되고, 이어 중국인의 동남아시아 이주가 시작되었다. 15세기 초 정화(鄭和) 항해 때는 동남아시아 여러 항구에서 중국인 이주민 집단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17세기 중엽 네덜란드 사람들이 타이완에 세운 젤란디아 요새(安平古堡)를 그린 수채화. [사진 위키피디아]

 

그런데 17세기 초까지 타이완 이주는 미미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타이난(臺南) 부근에 거점을 만들 때(1624)도 중국인 정착지가 거의 없었다.

 

타이완의 한화(漢化)가 늦었던 이유를 지도에 나타나는 객관적 조건들로 설명할 수 없다면, 지도에 나타나지 않는 고유한 특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원주민이 한화를 거부하는 특별히 강한 성향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유럽문명에 가려진 ‘남양문명’

 ▲젤란디아 요새 유적. 자바에서 벽돌을 실어왔다고 한다. [사진 위키피디아]

 

여기서 ‘남양(南洋)문명’의 존재를 생각해 보게 된다. 남양어족(Austronesian Language Family) 개념은 19세기에 확립되었다. 언어의 공유가 문명권 형성의 중요한 조건인데도 ‘남양문명’ 개념이 떠오르지 않은 것은 당시의 편협한 문명관 때문이었다. 문명의 표준은 유럽문명에 있었고, 다른 문명권의 존재도 그 잣대에 따라 판정받았다.

 

한화에 대한 타이완의 저항력을 남양문명 전통의 힘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타이완 원주민은 남양어의 가장 오랜 형태를 지켜온 집단이다. 육지세력이 농업 발전을 통해 큰 힘을 키우기 전에는 남양인이 도서지역만이 아니라 대륙의 해안지역에도 널리 자리 잡고 있었다. 물러나는 남양세력이 끝까지 버틴 곳이 타이완이었다. 21세기 들어 유전자 연구 등을 통해 남양인의 모습을 찾는 노력이 늘어나고 있으나 아직 ‘남양문명’을 논할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장래의 숙제로 남겨둔다.

 

해적의 본분에 투철했던 정지룡

 ▲명나라와 네덜란드, 해적 사이에서도 세력을 키운 정지룡의 활약을 그린 호쿠사이(葛飾北斎·1760~1849)의 우키요에(浮世畵). [사진 위키피디아]

 

1662년 정성공(鄭成功·1624~1662) 세력의 네덜란드인 축출 때 타이완의 중국인 이주민은 약 5만 명까지 늘어나 있었다. 식량 생산 등 노동력 확보를 위해 이주를 장려한 결과다.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鄭芝龍· 1604~1661)은 당시 ‘해적’의 진면목을 보여준 인물이다. 초년에 마카오에서 포르투갈어를 익히고 일본에 가서 해적이 된 후 그의 강점 하나는 네덜란드인과의 소통 능력이었다. 1628년 명나라에 ‘귀순’한 후에도 해적 노릇을 계속하면서 명 조정과 네덜란드인, 그리고 해적집단, 3개 세력 사이의 줄타기를 통해 세력을 키웠다.

 

 ▲1947년 타이완 대학살 사건(2·28사건)을 그린 황룽찬(黃榮燦·1920~1952)의 판화. 황룽찬처럼 외성인 중에도 학살에 분노한 사람이 많았다. [사진 위키피디아]

 

그가 1646년 청나라에 항복한 것도 또 한 차례 줄타기 시도였을까. 북경 함락(1644) 후 남경에 세워진 남명(南明) 조정은 이듬해 남경 함락 후 푸젠으로 옮겨왔다. 지역 최대의 군사력을 가진 정지룡은 조정의 최고 예우를 받았으나(황제가 정지룡의 아들을 양자로 삼아 ‘성공’이란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콕싱가(Koxinga·國姓爺)’란 별명이 생겼다.) 조정 수호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조정이 무너진 직후 청나라에 ‘귀순’했다. 아들 정성공은 항쟁을 계속했다.

 

부자간에 귀순-항쟁의 다른 길을 걸은 데 뭔가 속셈이 있었지 않았나 의심이 든다. 명나라 귀순 때도 속셈이 있었는데, 이번 귀순이라고 달랐겠는가. 아버지의 측근들이 아들 곁에 남아 군사력을 지켜준 사실도 이런 의심을 뒷받침한다.

 

 ▲정지룡의 아들 정성공. [사진 위키피디아]

 

당장 맞설 수 없는 청나라의 힘 앞에서 정지룡은 자신을 인질로 제공하면서 아들이 세력을 지키게 하여 시간을 두고 협상할 길을 열어놓은 것 같다. 그의 처형은 15년 후(1661) 정성공이 타이완을 점거해 독립을 지킬 뜻을 분명히 한 때였다.

 

외부의 억압은 내부 대립 불러와

정씨 세력과 네덜란드인 사이에는 수시로 충돌도 있었으나 오랫동안 협력 관계가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정씨 세력이 군사비 조달을 위해 네덜란드인과 분점하던 교역 사업의 지분을 늘릴 필요가 생겼고 대륙을 벗어난 근거지 확보도 필요하게 되어 네덜란드인을 축출하기에 이르렀다.

 

정씨 세력이 동녕국(東寧國)을 세우며 ‘명나라 회복’을 외친 것은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지키기 위한 구호였다. 이것이 청나라 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대안으로 받아들여져 1683년 평정될 때까지 이주민이 10만 명 선으로 늘어났다. 그래서 청나라가 평정 후 대만부를 설치하게 되었다.

 

1895년까지 청나라 치하에서 타이완 인구는 약 250만 명으로 늘어났고, 1945년까지 일본 통치 기간을 통해 약 600만 명에 이르렀다. 현재 약 2335만 명으로 집계된다. 그중 원주민은 2.38%를 점하는 약 57만 명으로 파악되고, 95% 이상을 점하는 한족은 본성인(本省人)과 외성인(外省人)으로 구분된다. 본성인은 1945년 이전부터 살아온 집안이고 외성인은 국민당 정권과 함께 건너온 100여만 명 집단과 그 자손이다.

 

본성인 내에도 갈등이 심한 집단이 있었다. 푸젠 출신 혹로인(福佬人, 인구 70%)과 광둥 출신 학까인(客家人, 15%)은 청나라와 일본 통치 아래 치열한 상쟁을 이어 왔다. 그러나 국민당 정권이 2·28사건(1947) 이래 본성인에 대한 억압정책을 펴면서 외성-본성 대립이 더 크게 부각되었다.

 

1987년 계엄령 해제 이후 모든 층위에서 인구집단 간의 갈등이 완화되었다. 독재정치가 사회 내 대립을 격화시키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다. 오랜 억압체제를 벗어난 타이완인이 자기 정체성과 자기 미래를 숙고할 수 있는 모처럼의 환경을 맞았다.

 

일본어도 중국 표준어도 안 써

 ▲민족이나 독립을 말하지 않고 문화와 민주만을 추구했던 린셴탕. [사진 위키피디아]

 

청나라-일본제국-국민당정권의 지배를 연이어 겪는 동안 지배자를 대한 타이완인의 자세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린셴탕(林獻堂·1881~1956)을 살펴볼 만하다. 위세 높은 타이완 5대 가문의 으뜸 우펑(霧峰) 린씨의 가주(家主)로서 타이완 민간 권력을 대표하던 인물이다.

 

일본 당국은 린셴탕을 일본 귀족원 의원으로 임명하는 등 회유에 많은 공을 들였다. 그러나 그가 적극적 항일을 삼가면서도 친일에까지 나서지는 않았음을 일본어를 익히지 않은 사실이 말해준다.

 

 ▲무술변법(1898) 실패 후 일본에서 지내며 정치 변혁보다 문화 양성을 중시한 량치차오. [사진 위키피디아]

 

린이 존경하던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는 무장항쟁보다 실력 양성에 힘쓸 것을 린에게 권했다고 한다. 그 후 린의 정치적 자세는 이 권유에 부합한다. 정치보다 문화사업에 힘을 쏟고, 지방의회 설치와 자치권 획득 등 ‘일본제국 내의 타이완 발전’을 추구했다.

 

이런 온건노선마저 중·일전쟁 발발(1937)로 좌절된 후 린셴탕이 중국을 바라보게 된 것은 보통화(普通話)를 배우기 시작한 사실에서 알아볼 수 있다. 종전 후 국민당에 가입도 했다. 그러나 국민당정권이 본성인을 참혹하게 탄압한 2·28사건 후 공직을 벗어나려 애쓰다가 1949년 신병 치료차 일본으로 가서 7년 후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일본 통치에 대해서나 국민당 통치에 대해서나 린셴탕의 태도는 ‘쿨한’ 느낌을 준다. 어쩌면 국가에 대한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자세를 타이완인의 한 특성으로 볼 수는 없을까. 동남아시아인의 ‘국가기피증’을 그린 제임스C 스콧의 『통치를 피하는 재간』(2009)을 읽으며 떠오른 생각이다. ‘남양문명’의 존재를 상상하는 하나의 실마리다.

 중앙일보 김기협 역사학자

 

12.09 대만 스케치

 ●한국 넘어 일본도 추월할 기세의 善進國

⊙ 겉모습은 동남아 중진국 같아 보이지만, 경제력·시민의식은 선진국 수준
⊙ 장제스는 동상 철거 논의될 정도로 낮은 평가 받고 있지만, 그의 아내 쑹메이링은 현대 여성의 롤모델로 인기
⊙ 2023년 글로벌 상위 상장기업 7914개 중 대만 기업 97개, 시가총액 1조1670억 달러
⊙ 국민당의 억압적 통치, 중국공산 정권 겪으면서 식민지배했던 일본에 대한 호감 형성

劉敏鎬
1962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일본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 졸업(15기) / 딕 모리스 선거컨설팅 아시아 담당, 《조선일보》 《주간조선》 등에 기고 / 現 워싱턴 에너지컨설팅 퍼시픽21 디렉터 / 저서 《일본직설》(1·2), 《백악관의 달인들》(일본어), 《미슐랭 순례기》(중국어) 등

▲내년 1월 총통 선거를 앞두고 국민당은 중국과의 대화를 강조하고 있다. 국민당 지지자들은 대개 60대 이상층이다. 사진=유민호

 

‘정신 차리고 보니, 미국 일방 승리.’

최근 일본 신문에 실린 사설의 제목이다. 해학적 타이틀이지만, 내용은 정치·경제·군사·외교 문제로 채워져 있다. 3년간 팬데믹을 거친 뒤 나타난 2023년 이후 글로벌 현황을 다루고 있다. 결론은 ‘미국 1강(?)’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서방 선진국과 중국·러시아를 제치고 팬데믹 이전 상태에 도달한 유일한 나라가 미국이다. 올해 3분기 미국의 경제성장률은 1년 전과 비교해 4.9% 상승했다.

같은 기간 한국은 0.6%, 유럽과 일본은 마이너스 0.1%를 기록했다. 기대를 모았던 중국 또한 4.9% 상승. 하지만 이는 공산당 정부의 반짝 이벤트에 불과하다. 부동산 추락, 수출 침체로 인해 중국 경제는 전체적으로 어둡다. 전체주의·공산주의 역사가 그러하듯, 세우는 것도 무너지는 것도 빠르다. 금융 시장을 봐도 달러 초강세와 함께 전 세계 돈이 미국으로 몰려든다. 반도체와 전기자동차(EV)를 비롯한 첨단 기업도 전원 미국행이다. 대적할 라이벌 자체가 없는 미국 1강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가자 전쟁은 미국의 의미와 역할을 한층 더 절실하게 만드는 아메리카 파워의 현장이다. 미국이 도와주지 않을 경우, 푸틴의 야욕은 우크라이나를 넘어 유럽연합(EU) 전체로 퍼질 것이다. 유럽 내 반미(反美) 선두 주자 독일이나 프랑스조차도 갑자기 미국에 매달리는 이유다. 이미 두 달째 접어든 가자 전쟁도 마찬가지다. 원만하게 매듭짓지 못할 경우, 피해는 미국이나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슬람권에 밀려들 것이다.

 

유가 급등으로 전 세계 겨울 난방비도 급등할 것이다. 이슬람권은 입(口) 지원만 할 뿐, 하마스 지원에 소극적이다. 이슬람권 대부분은 석유 자금으로 지탱되는 독재 정권 국가들이다. 가자 전쟁이 아니라, 내부의 반대파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의 내분이 한층 더 우려된다. 결국 사방팔방이 달러와 무기는 물론 미국의 권위에 매달리게 된다. 우크라이나가 망하든, 가자 전쟁이 주변 전쟁으로 확산되든 말든, 미국 1강과는 무관하다.

미국 ‘1 強’ 시대와 대만

중국도 예외가 아니다. 11월 미중(美中)정상회담의 칼자루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쥐고 있다.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習近平)의 체면도 살려주고, 급추락하는 중국 경제를 조금이나마 붙잡아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유일한 나라가 미국이다. 필자의 지론이지만, 미국은 중국 없이 살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은 미국 없이 살 수 없다. 미중 디커플링 이후 두 나라의 상황이 증거다.

이런 상황에서 거의 5년 만에 대만(臺灣)의 타이베이(臺北)를 방문했다. 초읽기에 들어섰다는 중국의 대만 침략, 내년 1월에 시행될 총통 선거를 앞두고 현지 분위기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크게 보면 대만 전체를 좀 더 구체적으로 관찰하자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다. 대만의 모습을 정확히 보려면 책이나 비디오에 쏟는 100시간보다, 현장 공기를 1시간 정도 살피는 것이 더 낫다.

한국인들의 평균 정서일 듯하지만, 대만에 대한 인지도나 평가는 ‘아주’ 낮다. 중국이 워낙 크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섬나라 대만이라고 하면 작고 무시해도 될 만한 대상으로 여긴다.

 

대만의 글로벌 위상은 한국이 보는 것과 많이 다르다.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작지만 크고, 외면보다는 내실, 총론보다 각론, 말보다 행동에 근거한 나라가 대만이다. 눈에 보이는 파워가 아니라 영향력으로 자신을 지켜나가는 나라다. 국가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메이드 인 타이완(Made in Taiwan)’이란 브랜드로 생존해나간다. 모두를 놀라게 할 슈퍼파워나 만리장성급 이벤트는 ‘전혀’ 없다. 그러나 잠시라도 안 보이면 주변 모두가 찾고 그리워할 대상이다. 그린(Green) 시대의 총아인, 신소재로 만든 1만 달러짜리 대만제 자전거는 그 예이다.

8년간에 걸친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의 리더십은 소프트웨어(software) 강국, 세계 최첨단 ‘메이드 인 타이완’을 창조해냈다. 지도자 하나 잘 만나면 나라 전체가 비약할 수 있다는 증거를 차이 총통이 보여줬다.

뉴스로도 전해졌지만, 지난해 대만의 1인당 국민소득이 한국을 앞질렀다. 한국은 3만2886달러, 대만은 3만3565달러로 한국보다 679달러 높다. 올해는 한층 더 벌어질 전망이다.


대만 기업, 질적으로도 한국 능가

▲11월 9일 열린 ‘제1회 리궈징상’ 시상식. 가운데가 차이잉원 총통, 그 오른쪽이 TSMC 창업자이자 리궈징상 수상자인 모리스 창, 맨 오른쪽은 미국 반도체회사 엔비디아 CEO인 젠슨 황. 사진=차이잉원 페이스북

 
 

미중 디커플링의 결과지만, 대만 기업은 글로벌 체제로 나아가고 있다. 2023년 글로벌 상위 상장기업 7914개 가운데, 대만 기업은 97개에 달한다. 한국은 하나 더 많은 98개다(11월 3일 기준). 그러나 기업 시가총액으로 본다면 대만이 앞서 있다. 97개 대만 기업의 시가총액은 1조1670억 달러다. 한국은 1조570억 달러로 1100억 달러 열세다. 차이가 얼마 안 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인구 비례로 보면 달라진다. 한국 인구는 5100만 명, 대만은 2300만 명이다. 인구 비례로 따진다면, 한국 글로벌 상장기업 규모나 시가총액이 대만의 두 배 이상에 달해야 한다. 그러나 반대다.

대만은 양(量)으로서만이 아닌, 산업구조의 질(質)이라는 측면에서도 한국을 제압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하이테크 산업이 대만의 주력 산업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대만 최고 기업은 반도체 전문 TSMC다. 글로벌 13위 기업으로, 시가총액이 4692억 달러에 달한다. 한국의 간판 삼성전자는 어떨까? 글로벌 24위, 시가총액 3466억 달러다. 미중 디커플링 이후 상황이지만, 전 세계가 보조금까지 제공하면서 특급 손님으로 모시는 기업이 TSMC다. TSMC는 미국뿐만 아니라, 일본과 독일에도 새로운 공장을 짓고 있다.

대만의 親日, 한국의 反日

한국인이 갖는 대만에 관한 일반적 이미지는 어떤 것이 있을까?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우선 한국인 입장에서 타이베이 도착 즉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바로 친일(親日) 공기다. 대만은 일본을 좋아하고, 일본을 최고 모델로 삼으면서 일본 기업에 취직하는 것을 출세의 하나로 여긴다. 일본을 염두에 두면서 지금도 열심히 배우고 따라가는 나라가 대만이다. 도시 어디에 가도 일본어가 통하고, 일본 노래도 들린다. 젊은이들의 일본에 대한 열의나 관심도 대단하다. 수많은 번역판 일본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케이블 채널로 24시간 방영된다. 과정과 수단이 아니라, 일상과 목적으로서의 일본이다.

한국만큼 전 세계에서 일본을 눈 아래에 두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도든, 한국인 상당수는 ‘공식적으로’ 일본을 무시한다. ‘눈 아래에 두는 것이 잘못된 거냐’라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문제는 ‘무조건’ 눈 아래로 처리한다는 점에 있다. 도쿄발(東京發) 뉴스의 상당 부분은 ‘일본=내일이 없거나 한물간 나라’로 묘사돼 있다. 언제부턴가 한국이 우월감을 느낄 만한 얘기들도 넘친다. 일본 전체가 K-팝에 난리라는 식의 보도가 일상적이다. ‘흠뻑, 발칵’과 같은 부사와 함께 K-세계가 일본을 제압한 느낌이다. 거꾸로 J-팝 콘서트 한국 공연이 전원 매진 상태에서 거의 매달 펼쳐진다는 얘기에는 귀를 닫는다.

한국인 대부분은 대만의 친일 공기를 접하는 순간 의문이 든다. “왜 일본을 이렇게 좋아하지?” 사실, 의문 속에는 ‘50년에 걸친 식민지 교육의 잔재’라는 나름의 답안도 갖고 있을 듯하다. 주자학적(朱子學的) 세계관의 극치지만, ‘정체성(正體性)과 혼(魂)을 잃은 나라’라는 식의 단정도 한다.


대만은 묻는다.

“왜 한국은 일본을 싫어하는가? 일본 음식도 좋아하고, 일본 노래도 즐기면서 일본을 찾는 최대 관광객이 한국이라는데, 왜 한국은 일본을 멀리하는가?”

한국은 대만이 일본을 좋아하는 이유가 궁금하고, 대만은 거꾸로 한국이 왜 일본을 싫어하는지 알고 싶다. 출발점 자체가 180도 다르다. 따라서 서로가 납득할 만한 답을 얻기 어렵다. 일본을 대하는 눈은, 한국인과 대만인이 가진 유전자(遺傳子)의 차이 그 자체일지 모른다.

 
 

 ‘구관이 명관’

대만이 친일국가가 된 이유는, 역사적·환경적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대만 출신자와 중국 출신 외지인(外地人) 사이 모순과 갈등이 친일의 가장 큰 배경이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역사도 중요하지만, 냉전(冷戰) 당시 ‘점령군’ 중국국민당이 보여준 공포정치와 이후 공산독재 정권 중국이 보여준 위압적인 자세가 ‘대만=친일’로 몰아세운 일등공신이다. 전부 악랄하고 잔인한 상태에서, 마지막 남은 것이 어제의 식민지배자였던 일본이다. ‘구관(舊官)이 명관(名官)’인 셈이다.

대만은 단순히 감정 차원의 친일에 머물지 않았다. 일본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익히고 배우는 분위기가 일반화되었다. 일본도 1970년대부터 대만에 적극 투자하면서 특별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한국은 1992년 중국과 수교(修交)하면서 대만과의 관계를 전면 중단했다. 대만인들은 단교(斷交) 당시 한국이 보여준 차갑고도 무례한 외교 모습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한국은 한중수교에 매달리는 과정에서, 상하이(上海)임시정부 이래 지속된 자유우방 대만을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쳤다.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대만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가장 믿었던 친구가 칼로 등을 찌른 느낌이었다”고 증언했다.

일본은 한국보다 20년 전인 1972년 대만과 단교했다. 한국과는 달리 대만인들의 자존심을 살리고 위로하면서 끝낸 ‘아름다운 단교’였다. 정부 간 공식 채널은 끊어졌지만, 반민반관(半民半官) 형식의 일본-대만 교류협회를 만들어 정치·경제·사회·문화에 걸친 다양한 만남이 이어졌다. 대만인들은 대만과의 관계를 특별히 강조했던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를 지금도 기리고 있다.


대만은 善進國

▲타이베이그랜드호텔. 대만 근현대사가 얽혀 있는 곳이다. 사진=유민호

 

 대만 체재 중 머문 곳은 타이베이그랜드호텔(圓山大飯店)이다. 호텔로서가 아니라, 대만 근현대사의 무대란 점에서 오래전부터 관심이 가던 곳이다.

그랜드호텔 자리는 한국 남산에 해당하는 곳이다. 남산에는 일본 천황을 기리는 조선신궁(朝鮮神宮)이 있었다. 그랜드호텔 자리에는 대만신궁(臺灣神宮)이 있었다. 남산처럼 타이베이 전체를 내려다보는 명당자리다.

그랜드호텔은 1949년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대만으로 피란 온 뒤 곧바로 지은 당대 아시아 최대 규모의 호텔이다. 대만신궁을 허물고 중국풍 초대형 호텔을 지은 것이다. 호텔 건설비는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이 부담했다. 따라서 호텔 주인이자 총책임자는 쑹메이링이었다. 대만을 찾는 외국 정상(頂上)의 숙소로 활용되고 장제스 또한 이 호텔을 자주 찾아 사실상 총통의 개인사무실로도 활용되었다.

타오위안(桃園) 공항에서 호텔까지는 로컬 버스로 이동했다. 항상 강조하지만, 느리고 싼 로컬 버스가 이국(異國) 체험의 첫 출발점이다. 함께 자리한 현지 사람들과 천천히 펼쳐지는 차창 밖 풍경을 통해 현지 공기를 체득할 수 있다.

로컬 버스터미널은 공항 뒤 구석에 있다. 차비가 얼마인지, 현금으로도 지불할 수 있는지 여성 경찰에게 물어봤다. 그는 며칠이나 머무를 건지 되물었다. 한 달 이상이라고 답하자, 따라오라더니 대중교통 한 달 이용카드 판매기 앞으로 안내했다. 한국도 유사한 카드를 곧 도입한다고 들었는데, 버스·전철·모노레일 심지어 자전거도 한 달 내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만능 카드(5만원대)다. 도심까지의 고속기차가 왕복 1만3000원이란 점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싸다. 50대 여성 경찰은 자신도 이용하는 교통카드라면서, “타이베이에 머무는 한 택시 탈 일이 없을 것”이라고 알려줬다.

국격(國格)의 지표로, ‘선진국(善進國)’ 지수(指數)에 관한 것이 있다. 농담 같은 지표지만, 선의를 얼마나 베푸느냐에 따라 국격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디지털 경쟁이 아니라, 인간을 대하는 마음 자세가 ‘선(善)진국’ 결정 요소다. 1인당 소득 10만 달러인 나라라도, 불친절하고 어두울 경우 ‘선(善)진국’이라고 할 수 없다. 여유롭고 친절하며 밝은 자세는 ‘선(善)진국’ 대만의 얼굴이자 상징이다. 대만에 36일간 머무르면서 실감했지만, 대만인은 잘 웃고 친절하며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일제 흔적 보존하고 있는 대만·중국

▲대만 총통부 건물은 일제의 대만총독부 건물이다. 사진=대만 총통부

 
 

그랜드호텔은 이름에 걸맞게 초대형 빌딩이다. 황금색 지붕에다 높이 87m에 12층으로 된 건물이다. 대만신궁 흔적을 보고 싶었지만,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만신궁은 예외적이지만, 대만은 식민지 당시 건물이나 흔적을 거의 대부분 보존하고 있다. 타이베이 곳곳에 식민지 당시 건물이 남아 있다. 총독부 건물을 아예 없애버린 한국은 이상하게 보겠지만, 대만은 일제의 대만총독부 건물을 지금도 총통부(總統府)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공산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 동북 지방으로 가면 만주 철도와 일본군이 사용했던 건물 대부분이 아직도 남아 있고 재활용되고 있다.

대만신궁의 풍수를 보기 위해 호텔 최고층에 올라가 보았다. 왼쪽으로 강이 흐르고 호텔 정면 남쪽에는 현대식 건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1945년 이전에는 나무로 빽빽하게 뒤덮인 울창한 숲이었을 것이다. 남산처럼 서울을 완전히 내려다볼 수 있는 파노라마 풍경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타이베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명당임에는 틀림없다.

그랜드호텔 풍수를 살펴본 뒤, 현대 대만 역사 발굴에 들어갔다. 호텔 지배인에게 장제스가 남긴 문장이나 글씨가 있는지 물어봤다. 놀랍게도 호텔 안에는 장제스의 흔적이 ‘전혀’ 없다고 한다. 장제스에 대한 반감 때문에 관련 기념물을 호텔 안에 둘 수 없다고 한다.

장제스에 대한 평가는 해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1949년 중국에서 피란 온 국민당 출신자들과 그 가족들이 줄고, 민주진보당(민진당)을 응원하는 대만 출신자들이 늘어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장제스는 대만에서 1949년부터 1975년까지 26년간 1인 독재자로 군림했다. 집권 기간 중 중국공산당의 무력(武力)침략도 막아냈지만, 이 과정에서 반대파를 처단하고 일반인도 공산당과 연관 지어 무차별 투옥·처벌했다. 그 주된 피해자는 현 집권당인 민진당의 기반인 대만 출신자들이다. 1947년 1만8000명의 대만 출신자들이 희생된 백색테러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필자가 보기에 20대 이하 대만인들에게 장제스는 악(惡)의 대명사다.


차이잉원, 쑹메이링 장학금으로 유학

▲중정기념관에 있는 장제스 동상은 철거 위기에 직면해 있다. 사진=유민호

 
 

장제스상(像)이나 기념관 폐쇄도 이어지고 있다. 타이베이 한복판에 있는 장제스를 기리는 중정(中正)기념관 내 동상 철거 문제는 이번 총통 선거의 이슈로 떠올랐다. 대만 출신자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동상은 물론 기념관 자체도 사라지게 될 운명이다.

 

▲쑹메이링 기념우표. 사진=유민호

 
 

이에 반해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은 현대 여성의 롤모델로 부상(浮上)하고 있다. 쑹메이링은 장제스가 숨진 뒤 대만을 영원히 떠났다. 장제스의 첫째 부인이 낳은 아들 장징궈(蔣經國)가 총통이 되면서 사실상 미국 망명을 떠난 셈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좋지 않았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뉴욕으로 간 쑹메이링은 칩거 생활을 하면서 정치적 활동도 거의 중단했다. 자신이 만든 장학재단을 통해 대만 젊은이의 해외 유학을 돕는 활동 정도만 했다. 차이 총통이 1980년대에 쑹메이링이 세운 장학재단의 도움으로 해외 유학을 한 주인공이다. 평소 쑹메이링은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여성의 사회 진출을 적극 응원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쑹메이링은 상하이(上海) 출신 쑹 씨 세 자매[쑹아이링(宋藹齡)·쑹칭링(宋慶齡)·쑹메이링(宋美齡)] 중 막내다. ‘돈을 사랑한 첫째 쑹아이링, 중국을 사랑한 둘째 쑹칭링, 권력을 사랑한 셋째 쑹메이링’이란 수식어로 표현되는, 현대 중국의 역사 그 자체다. 파란만장한 세 자매의 인생을 통해 중국과 대만 현대사를 읽을 수 있다.

쑹메이링의 노력 덕분인지는 몰라도 현재 대만 여성의 정치 참여 비율은 아시아 최고 수준에 올라 있다. 거의 50%대로, 북유럽권에 육박할 정도다.

박정희 사진을 만나다

▲그랜드호텔에는 1966년 박정희 대통령 방문 당시의 사진이 걸려 있다. 오른쪽부터 박정희 대통령, 장제스, 육영수 여사. 사진=유민호

 
 

기념품을 사러 호텔 내 선물 코너에 들렀다. 쑹메이링 관련 우표와 사진은 넘치지만, 장제스와 관련한 기념물은 하나도 없었다. 종업원에게 장제스에 대해 묻자, 호텔 로비에서 2층으로 오르는 계단 끝을 가리키며 가보라고 말한다. 귀빈(貴賓)들의 호텔 방문 당시 기념사진이 전시된 곳이다. 50여 장의 흑백사진이 길게 장식돼 있었다. ‘반공전선(反共戰線)’ 대만을 찾은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와 존슨을 비롯해 20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의 지도자들이 장제스와 함께하고 있는 사진들이었다. 세계 지도자와 별도로 만나는 쑹메이링의 사진도 많았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1966년 대만 방문 당시의 흑백사진도 걸려 있어 반가웠다. 연미복(燕尾服) 차림을 한 49세의 젊은 대통령과 한복 차림의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장제스의 안내로 로비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이다. 쑹메이링의 모습도 사진 속에 있었다.

어떤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지, 어느 연령대인지, 어디 출신인지에 따라 이 사진들에 대한 감회나 해석도 다를 듯하다. 분명한 것은 복수적(複數的)·입체적 세계관에 기초한 평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어제를 오늘의 잣대로, 오늘을 어제의 잣대로 규정짓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들의 역사관은 조화·평화·교훈이 아닌, 투쟁·반목·전쟁으로서의 역사관일 뿐이다. 한여름밤 폭죽처럼, 눈요깃감은 되겠지만 결코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숨어 있는 대만의 진짜 모습

▲대만의 1인당 국민소득은 우리보다 높지만 타이베이 시내의 이발요금은 우리 돈으로 5000원 정도에 불과하다. 사진=유민호

 

 

대만에 머물면서 내린 결론이지만, 대만은 이미 아시아의 최첨단 선진국 자리에 오른 나라다. 1인당 국민소득이나 TSMC의 세계 제패(制霸)는 우등생 대만이 가진 수많은 얼굴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대만은 한국을 이미 추월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일본도 따라잡을 나라가 대만이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필자의 이러한 평가에 의문을 가질 것이다.

타이베이를 장식하는 도시 풍경이라고 하면, 거리에 촘촘히 늘어선 싸구려 식당이나 발마사지 센터부터 떠오른다. 곳곳에 펼쳐지는 야시장(夜市場)과 만둣집 방문이 대만 관광의 일상이다. 미국·유럽 나아가 일본 같은 선진국의 모습과는 다른, 동남아시아의 중진국(中進國) 같은 풍경이 대만의 일상이다. 사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미국 1강도 알아채기 어렵다.

대만의 진짜 모습은 타이베이에서 벗어나야 보인다. 대만 경제의 원동력은 서쪽의 신주(新竹)와 남쪽의 가오슝(高雄), 나아가 중국에 포진해 있다. TSMC 공장 하나의 규모는 서울 월드컵경기장 3개 정도 크기에 달한다. 단일 건물로, 대략 가로·세로 600m에 달한다. 주변 부대시설을 합칠 경우, 가로·세로 3km 정도의 부지다. TSMC는 이 같은 초대형 공장을 대만 안에서만 무려 17개, 외국에는 신규 공장을 포함해 6개나 갖고 있다. 이런 모습은 도심지에서는 안 보인다.

1970년대 한국 풍경과 겹쳐지는 타이베이지만, 반대로 해석해 보면 대만의 저력(底力)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국가경쟁력의 원천이 20세기풍(風) 대만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선진국 수준의 시민의식

허름하고 작지만, 가게를 보면 거품 하나 없이 ‘꽉 차’ 있다. 최저가 물건을 제공하기 위해, 장식이나 부수적인 모든 것을 전부 생략한다. 아파트를 봐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곧바로 자기 집 문 앞으로 연결되는 식의 구조다. 로비도 없이, 공간 활용의 극대화라 할 수 있다. 외면이 아닌 내실이 우선이다.

이 결과, 대만 물가는 합리적이다. 필자가 체험한 서민 시장에서의 체감 물가는 생필품의 경우 한국의 거의 절반 정도다. 음식과 관련된 물가는 한국의 3분의 1, 아니 4분의 1 정도에 그친다. 거리 식당에서의 식사 한 끼도 2000원 정도면 해결된다. 소모품의 경우 1000원 이하 상품들이 즐비하다. 옷이나 신발도 1만원 정도면 충분하다. 한국인이라면 대만에 발을 딛는 순간, 부자가 된 느낌이 들 것이다.

높은 시민의식은 대만을 선진국이라 부를 수 있는 가장 큰 근거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대만인들의 준법정신 수준은 가히 세계 최고다. 횡단보도를 오가는 사람, 오토바이와 자동차 사이의 신호등 질서가 거의 완벽하게 지켜진다.

 

줄 서기 문화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새치기 없이 줄을 서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앞사람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버스가 올 경우라도 허물어지지 않고 지켜지는 줄 서기 문화가 진짜 선진국형이다.

시간 엄수도 마찬가지다. 대만 체재 중 대학 수영장에 매일 다녔는데 개장·폐장 시각이나 청소·휴식 시각이 1분도 틀리지 않고 정확했다. 수영장은 대만의 복지 수준을 체험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일반 시민도 이용할 수 있는 50m 올림픽 사이즈 수영장이 도시 곳곳에 널려 있다. 5만원 정도만 내면 한 달 내내 이용할 수 있다.

거리 청결도 세계 최고다. 쓰레기통이 아예 없고 청소부도 보이지 않지만, 도시 전체가 깨끗하다. 일본인처럼 쓰레기는 버리지 않고 집으로 갖고 간다.


자유세계, 대만 수호 의지 강해

▲관광상품용 티셔츠들. ‘臺灣’ ‘FOMOSA’라는 표기나 디자인은 대만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진=유민호

 

 중국-대만 전쟁이 3~4년 내에 터질 것이란 얘기가 무성하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중국이 대만을 공격할 경우 곧바로 개입하겠다는 의사를 3번이나 공언했다. 반도체 때문만이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 수호라는 점에서 대만 수호를 약속한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자유세계의 대만 수호 결의는 한국 방어 의지보다 한층 더 강하다. 극단적으로 말해 대만과 한국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대만을 우선시하는 분위기다.

왜일까? 한반도보다 대만과 관련한 이익이 더 크기 때문이다. 최첨단 반도체도 문제지만, 대만이 중국에 점령될 경우 중국의 태평양 진출은 물론 해상운송로(Sea Lane)도 차단될 수 있다. 한국도 직접적인 피해를 입을 것이고, 미국·유럽·일본의 국익(國益)에 반하는 대재앙이 시작될 것이다.

일본과 유럽연합(EU)의 대만 수호 의지는 이미 행동으로 나타난 상태다. 영국·프랑스·독일은 최근 일본과 함께 남중국을 무대로 한 합동군사훈련에 들어갔다. 대만전쟁 발발 시 미국만이 아니라 일본·유럽·호주 모두가 지원에 나선다는 의미다.

한국은 아직 대만지원전선에 동참하지 않고 있는 상태다. 윤석열 대통령이 나토(NATO)에 대한 외교를 막 시작했지만, 한반도 전쟁 시 과연 EU가 도와줄지는 의문이다. 대만 지원 동참은 대만과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나토를 포함하는 자유세계 전체와 연결되는 ‘안보보험’에 해당된다. 하루라도 빨리 구체화하는 것이 가치와 원칙에 근거한 외교에도 어울린다.

한국은 미국의 동맹국이란 프리미엄 하나에 매달린다. 그러나 지정학적(地政學的) 차원의 글로벌 역학(力學)관계로 보면 대만의 위상이 한국을 능가한다.


一枝草 一點露

2024년은 글로벌 선거의 해다. 4월에는 한국 총선이, 11월에는 미국 대선이 있다. 전쟁 중인 러시아는 3월에, 우크라이나는 여름에 대선이 예정되어 있다. 5월에는 인도가 총선을 치른다. 러시아처럼 결과가 뻔한 선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선거 결과에 따라 국가 정책이 180도 돌변할 수 있다. 팬데믹 이후 정치 현상인데, 타협이나 중간이 없다.

대만도 1월 총통 선거가 예정되어 있다. 결과에 따라 나라 전체가 뒤집어질 수도 있다. 국민당 후보는 ‘더러운 평화론’ 신봉자다. 전쟁 대신 대화를 통해 중국과 평화롭게 살자고 주장한다. 민진당 지지자들은, ‘국민당 총통 탄생=중국공산당의 대만 안방 점령’으로 본다. 홍콩보다 더 쉽게 중국이 무혈(無血)입성하고 결국은 중국과의 합병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이다.

대만의 순수 고사성어(故事成語)로 ‘일지초 일점로(一枝草 一點露)’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약하고 작은 풀잎에라도 이슬 한 점이 내려올 수 있다’는 의미다. 대만인들이 평소 자주 인용하는 말로, 하늘의 선물(이슬)은 금수저·흙수저, 갑을(甲乙)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내려진다는 뜻이다. 기아와 전쟁을 포함한 그 어떤 시련이 와도 헤쳐나갈 길이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문제가 있다면 본인 스스로에게 있을 뿐, 적든 많든 자기에게 내려진 이슬의 가치를 알고 거기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남 탓과 남의 떡에 주목하는 2023년 한국 세태와 정반대 되는 세계관이다.

‘정신 차리고 보니, 미국 일방 승리와 대만 비약(飛躍)’이라고 할까? 일본을 모델로 삼으며 배우고 익힌 결과 조만간 일본 추월도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나라가 대만이다. K-국뽕과 내로남불에 취해 있는 한국과 달리, 대만은 중국을 상대로 한 생존에 모든 것을 건 나라다. 대만은 풀 하나, 이슬 하나 전부 모아 대항하는 총력(總力) 생존 전략을 펴고 있다.

한때 한국이 대만을 앞서가면서 대만의 롤모델로 여겨졌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시절은 갔다. 대만을 여전히 우리보다 뒤처진 동남아 중진국 정도로 여기는 한, 한국과 대만의 국격과 국력차는 한층 더 벌어질 것이다.⊙

월간조선 12월 호
 
 
 

월간조선 2024.01월 호

●대만 총통 선거 현장을 가다

 “反中? 親中? 젊은 세대는 둘 다 진저리친다”

⊙ 친중·반중보다는 민생·경제에 관심
⊙ 중앙당 가 보니 민진당은 젊고 활기찬 반면, 국민당은 관료주의적 분위기
⊙ “차이잉원 총통에게 감사하지만, 총통 선거에서는 중국 관광객 오게 할 허우유이 찍겠다”
⊙ “실리주의 추구하고, 내 삶 변화시켜줄 커원저-민중당 끝까지 지지할 것”
⊙ 국민당 세대교체 빨라질 듯… 장제스 증손자 장완안(45) 타이베이 시장이 차기 대선 주자로 유력

牟鍾赫
1971년생. 중국정법대학 경제법학과. 한국투자기업 노무관리 컨설턴트 / 중국문제 기고가, 방송 VJ·PD, 취재 코디네이터로 활동 / 저서 《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 웹소설 《七天的愛在新疆》(중국어

 

 ▲1월 11일 타이베이에서 열린 유세에 함께 나선 차이잉원 총통과 라이칭더 후보. 민진당은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12년 연속 집권을 기록했다. 사진=라이칭더 SNS

 

1월 13일 치러진 대만(臺灣) 총통 선거에서 민주진보당(이하 민진당)의 라이칭더(賴淸德·65) 후보가 당선됐다. 반중친미(反中親美) 노선을 분명히 한 라이 후보는 친중(親中) 성향의 중국국민당(이하 국민당) 허우유이(侯友宜·67) 후보를 6.55% 차이로 눌렀다.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지난 1월 4일 필자는 대만 타오위안(桃園)공항에 도착했다. 대만 방문은 이번이 5번째로, 2019년 12월에 이어 4년 1개월 만이었다. 그날부터 22일까지 대만에 머물면서 북부인 타이베이(臺北)부터 신주(新竹), 타이중(臺中), 난터우(南投), 타이난(臺南), 가오슝(高雄), 핑둥(屛東) 그리고 최남단인 컨딩(墾丁)까지 찾았다. 이전엔 가보지 않았던 대만 중남부의 주요 도시를 모두 방문한 것이다.

수도 타이베이는 예상외로 너무나 조용했다. 1월 13일의 제16대 대만 총통 선거와 제11대 입법위원 선거를 불과 일주일 앞둔 시점이었는데, 선거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대만은 대통령제를 취하고 있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총통중심제 국가다. 총통은 임기가 4년이고 연임(連任)이 가능하다. 현임 차이잉원(蔡英文·68) 총통은 8년 임기를 꽉 채웠다. 따라서 이번 총통 선거에서 집권당인 민진당은 차이 총통 밑에서 부총통을 지낸 라이칭더를 대선 후보로 내세웠다. 8년 전 정권을 빼앗긴 뒤 와신상담했던 국민당은 허우유이를 후보로 선출했다.


사전 투표·부재자 투표 없어

 ▲타이베이 시내에 크게 붙어 있는 한 민진당 입법위원 출마자의 현수막. 민진당 입법위원 출마자들은 한결같이 라이칭더 총통 후보를 옆에 내세웠다.

 

한국의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입법위원 선거에서는 민진당이 69개 전 지역구에 후보를 내보냈고, 국민당은 64개 지역구에 후보를 출마시켰다. 비례대표는 양당 모두 34명씩 입후보했다.

총통 선거와 입법위원 선거가 동시에 열리는 데도 불구하고, 타이베이에서는 지역구마다 입법위원 후보자가 내건 포스터를 보기 어려웠다. 입법위원 출마자의 정책을 홍보하는 현수막은 아예 없었다. 심지어 지역구마다 누가 출마하는지 선거위원회가 내건 후보자 포스터도 없었다.

너무 이상해서 5일 낮에 만난 대만인 친구에게 한국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대만의 현실과 비교했다. 그는 “대만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선거위원회(선거관리위원회)가 도와주는 일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선거위원회에서 출마자의 포스터를 모아 붙여주거나 후보자의 정보를 우편물로 보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만 중앙선거위원회 홈페이지에서는 선거구마다 정당별 출마자를 일일이 찾아야 했다. 후보자에 대한 정보도 사진과 출생월일, 성별 등만 소개했다. 따라서 입법위원 출마자는 정당과 개인의 재력(財力)에 의존해서 자신과 정책을 홍보해야 했다. 당세(黨勢)가 작은 군소(群小)정당 출마자나 무소속 출마자에게는 극히 불리한 상황인 것이다.

게다가 대만은 사전(事前) 투표와 부재자(不在者) 투표 제도가 없다. 유권자는 오직 1월 13일에 거주지로 등록된 곳에서만 투표할 수 있다. 투표 시간도 한국보다 짧아 오후 4시까지다. 투표가 끝난 뒤에는 투표소가 바로 개표소로 전환되어 수개표가 진행된다.


분위기가 전혀 다른 민진당과 국민당

 ▲민진당 중앙당부 1층 중앙홀은 야구를 좋아하는 라이칭더 후보를 앞세워 꾸며졌다.

 

1월 5일 오후 양당의 중앙당부를 찾아갔다. 민진당 중앙당부 앞에는 경찰의 SUV와 버스, 방송국 중계차량 등이 서 있었다. 1층 중앙홀로 들어가니, 이번 선거에서 민진당이 공약한 여성을 위한 정책과 그를 홍보하는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었다.

과거에는 여성, 특히 젊은 유권자는 민진당의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다. 하지만 2023년 5월 말부터 잇달아 터진 ‘미투(me too)’와 불륜(不倫) 파문은 젊은 여성의 등을 돌리게 했다. 한 당원이 페이스북에 당내 성(性)희롱 피해 사실을 밝힌 이후 “나도 성희롱을 당했다”는 폭로가 계속 이어졌다.

게다가 피해 당원들은 당 간부에게 사실을 보고했지만 묵살당하거나 2차 가해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여성 친화적이고 성소수자를 우대한다고 평가받았던 민진당의 명성은 땅에 떨어졌다.

작년 6월 하순에는 총통부 대변인인 예관링(葉冠伶)이 2022년 전국지방선거 출마 당시 경호원이던 경찰관과 불륜을 저질렀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경찰관 부인의 폭로로 인해 차이 총통의 신임을 받던 예관링은 사직했고 경찰관은 직위해제됐다. 잇단 성비위에 차이 총통과 민진당의 지지율은 순식간에 6~7%가 빠졌다. 그 뒤 라이칭더의 지지율은 30% 초·중반대에서 정체(停滯)됐다.

그러나 민진당 중앙당부에서 일하는 자원봉사자들은 대부분 30~40대의 여성이었다. 필자가 찾아온 용무를 밝히자, 한 여성 자원봉사자는 생수를 건네며 중앙홀 곳곳을 열정적으로 소개했다. 중앙홀은 야구를 좋아하는 라이칭더 후보의 취향이 한껏 배어 있었다. 홀로그램을 이용하여 야구공과 야구배트를 만들어 관심을 유발시켰다. 그러면서 민진당의 선거 구호인 ‘팀 타이완(Team Taiwan)’을 구체화했다. ‘팀 타이완’은 라이칭더 후보, 민진당과 함께 민주주의의 섬 대만을 지키고 경제를 발전시키자는 뜻이다. 이를 상징하는 캐릭터와 그림을 배치해서 젊은 세대의 호감을 사도록 했다.

이에 반해 뒤이어 방문한 국민당 중앙당부는 들어가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입구부터 일반인은 입장을 막았다. 필자 또한 여권을 보여주고 용무를 자세히 말해서야 입장할 수 있었다. 그러고 만난 당직자에게서는 “다음 주에 여는 외신 기자회견장에서 질문해달라”는 답변만 들었다. 관료주의가 강한 국민당의 조직 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 지지율에서 줄곧 뒤처진 현실도 반영된 듯싶었다. 1월 2일 여론조사 공표금지 시한 직전에 발표된 여론조사에서 라이칭더 후보는 32%, 허우유이 후보는 27%를 기록했다. 3위는 민중당의 커원저(柯文哲·65) 후보로 21%의 만만치 않은 지지세를 과시했다.


“반중? 친중? 둘 다 진절머리가 난다”

1월 6일 타이베이에서 전철로 신주로 가면서 라이칭더 후보의 지지율이 오르지 못하는 또 다른 배경을 알게 되었다. 옆 좌석에 앉은 커원저 사진을 가방에 붙인 지지자 장리주안(29) 씨는 “외국 언론이 이번 총통 선거를 반중(反中) 민진당과 친중(親中) 국민당의 대결이라는 구도로 해서 일방적으로 보도한다는 걸 안다”면서 “현재 대만 젊은 세대는 이런 현실에 진저리를 치고 있다”고 말했다. 장 씨는 “이전 두 차례의 총통 선거에서 모두 차이잉원에게 투표했다”면서도 “1인당 GDP가 한국을 뛰어넘었다고 하지만 내 임금은 지난 수년 동안 별로 오르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2022년 대만의 1인당 GDP는 3만2811달러로 한국의 3만2237달러보다 많았다. 이로써 대만은 2004년 이후 처음으로 1인당 GDP가 한국을 앞섰다. 대만 정부와 언론은 이런 사실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실제로 대만 경제부는 2023년 4월에 《최근 수년간 대만과 한국의 경제무역 발전 비교 분석》, 7월에는 《대만과 한국의 수출입 유형 변화 탐구》라는 이슈 리포트를 발간했다. 최근 수년 동안 대만 당국이 특정 국가를 지목해 자국(自國)과 비교한 경우는 두 리포트가 유일할 정도였다. 하지만 한국의 1인당 GDP는 1년 만에 대만을 다시 추월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사실 대만 젊은 세대가 받는 임금은 한국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낮다. 2023년 3월 대만 노동부가 발표한 《15~29세 청년 노동자의 취업상황 조사통계 결과》에 따르면, 2022년 청년 노동자가 받는 평균 임금은 3만4019대만달러(약 143만원)에 불과했다. 이것도 대만 정부와 민진당이 최저임금법 제정에 드라이브를 걸면서 기업계에 압력을 가했던 덕분이다. 2020년에는 2만7425대만달러, 2021년에는 3만2287대만달러였다. 최저임금법은 차이 총통의 대선 공약이었으나, 8년 동안 입법이 지지부진하다가 2023년 12월에야 입법원을 통과해서 올해부터 실시되었다.

장 씨는 이조차 “선거를 의식한 민진당의 선심성 행보”라고 평가절하했다. 그러면서 “2023년 대만의 경제 상황이 전반적으로 악화됐기 때문에 이를 상쇄하는 대책으로 추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당초 대만 당국은 2023년 경제성장률을 2.8%로 전망했다. 하지만 지금은 1.4%로 예상된다.

1월 4일 타이베이에서 만난 김준규(53) KOTRA 타이베이무역관장은 “대만 경제는 수출 의존도(수출액÷명목 GDP)가 63%로 한국(41%)보다 훨씬 높은데, 수출이 부진하면서 성장의 발목을 잡았다”고 말했다. 2023년 1~11월 대만의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11.5%로, 한국(-8.5)보다 악화됐다.

 

 

 

TSMC는 선방했으나 반도체 업계 전체 침체

 ▲김준규 KOTRA 타이베이무역관장.

 

물론 대만의 전체 기업이 부진을 겪은 것은 아니다. 대만 GDP에서 비중이 7%대로 단일 기업으로서는 가장 큰 TSMC는 선방했다. 2022년 하반기 이래 전 세계적인 반도체 불황에도 불구하고 2023년 1~11월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4.1%만 감소한 것이다. 오히려 3분기에는 매출이 5467억3300만 대만달러(약 23조1213억원)로 2분기보다 13.7%가 증가했다. 순이익은 2110억 대만달러(약 8조9231억원)로 2분기보다 16.1%가 늘었다. 이런 실적은 2023년 내내 적자 행진을 내면서 14조원대의 손실을 낼 것으로 전망되는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과 비교된다.

그러나 김준규 관장은 “대만 반도체 산업의 전반적인 실적이 부진했던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김 관장은 “1~11월 매출이 파운드리 분야에서 TSMC를 제외하면 UMC가 -20.2%, PSMC가 -43.6%였고 팹리스 분야는 미디어텍이 -23.6%, 리얼텍이 -14.9%였다”고 밝혔다. 시스템반도체를 생산하는 파운드리 분야에서 전 세계 1위 업체는 TSMC로, 2023년 3분기 점유율이 57.9%에 달했다. 2위는 삼성전자(12.4%)이고, 3위가 UMC(6%)였다. 김 관장은 “대만 수출에서 반도체 다음으로 기여도가 높은 전자제품 업계도 매출이 10% 이상 감소했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대만 IT 산업의 메카인 신주과학원구는 분위기가 썩 좋지 못했다. 과학원구 내 기업 중 TSMC를 제외하고 대부분 업체가 임금을 동결했기 때문이다. 커피전문점에서 만난 한 UMC 직원은 “코로나19 시기에는 해마다 두둑한 상여금을 받았으나 올해는 임금이 깎이지 않는 걸 감지덕지할 판이다”고 밝혔다.

그나마 봉급 생활자는 상황이 나은 편이다. 자영업자는 코로나19 사태의 여파로 실질적인 수입이 줄어들었다. 2020년 2월부터 시작된 매장 내 취식 금지 조치가 2023년 2월에야 끝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만은 2023년부터 정상적인 일상이 회복되었다.


중국 관광객, 418만 명 → 1만 명

 ▲구족문화촌. 대만 원주민들이 전통 결혼식을 재연하고 있다.

 

사실 자영업자 입장에서는 국내외 관광객이 뿌리는 돈이 아주 소중하다.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관계가 악화되기 이전에는 중국 관광객이 대만 자영업자에게 큰 힘이 되었다. 2008년에 집권한 국민당 출신 마잉주(馬英九) 전 총통은 중국과의 경제 협력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2010년 중국과 자유무역협정인 양안경제합작협의(ECFA)가 체결됐다. ECFA 이후 중국 관광객은 물밀듯이 대만으로 건너왔다. 중국 관광객은 2009년 97만 명에서 2011년 178만 명, 2013년 287만 명으로 늘었고 2015년 418만 명으로 최고치를 찍었다. 하지만 2016년 차이잉원 총통이 집권한 이후 감소했다. 2016년 351만 명, 2019년 271만 명으로 줄어들었고 코로나19 시기인 2021년에는 1만 명대까지 주저앉았다.

이렇듯 중국 관광객의 감소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관광지가 구족(九族)문화촌이다. 구족문화촌은 내륙인 난터우현에 대만 원주민의 문화와 생활을 보여주기 위해서 세워진 테마파크다. 원주민은 혈통적으로 말레이인종이고 인도네시아계 언어를 사용한다. 언제부터 대만에 정착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족(漢族)보다 먼저 진출했다. 청일전쟁 이후 대만을 통치한 일본은 이들을 산지에 사는 고산족(高山族)과 평지에 사는 평포족(平埔族)으로 구분했고, 다시 9갈래로 나누었다.

구족문화촌의 구족은 이런 일본의 분류법에 따른 것으로, 대만 전체의 원주민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쓰였다. 그러나 20세기 말부터 원주민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해지면서, 원주민의 민족 수는 16갈래로 늘어났다. 2022년 말 이들의 인구는 58만 명으로 대만 전체 인구의 2.4%를 차지했다. 원주민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에 달했던 2011년 구족문화촌을 찾은 관광객은 201만 명에 달했다. 그 뒤 입장객이 줄어들었지만, 대만인의 빈자리를 중국인이 채우면서 2015년까지는 100만 명대를 유지했다. 하지만 대만을 방문하는 중국 관광객이 감소하면서 2018년에는 70만 명대까지 줄어들었다.

“중국 관광객 오게 할 후보 찍겠다”

 ▲자영업자를 집중적으로 공략했던 국민당 허우유이 후보. 사진=허우유이 SNS

 

1월 8일에 찾은 구족문화촌은 입장객이 많지 않았다. 마침 현장 학습을 나온 중학생들을 제외하고 가족과 연인끼리 방문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다만 대만 원주민에 관심 있는 외국 관광객은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경내 상점에서 물건을 파는 양잉(여) 씨에게 차이잉원 총통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아미(阿美)족이라는 양 씨는 “원주민들은 차이 총통에게 언제나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차이 총통은 2016년 5월에 열린 취임식에서 국가 제창보다 앞서 원주민 복장을 한 어린이들과 함께 방언으로 민요를 불렀다. 또한 같은 해 8월 1일을 ‘원주민의 날’로 지정하였다. 아울러 차이 총통은 총통부로 초청한 16갈래 원주민 대표들에게 과거 국민당 집권 시기 원주민 문화를 말살했던 과거사에 대해서 사과했다.

차이 총통은 선조가 푸젠성(福建省)에서 온 객가(客家)의 후예지만, 산지에서 살았던 파이완(排灣)족의 혈통도 섞여 있다. 따라서 임기 내내 원주민의 권익 향상을 위해서 앞장섰다. 양잉 씨가 차이 총통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

하지만 양 씨는 “이번 총통 선거에서는 허우유이를 찍을 생각”이라고 밝혔다. 그 이유에 대해서 “우리 입장에서는 중국 관광객이 다시 오는 게 절실한데, 허우유이가 양안 관계의 개선을 약속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경제와 민생을 얘기하면서 자신의 삶을 개선시켜줄 후보를 선택하려는 상황은 중부의 타이중과 타이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월 10일 타이중공원에서 만난 왕궈창(26) 씨는 “2022년 한국 출생률이 0.82명에 불과했다는 뉴스를 봤다”며 “한국만큼 출생률이 낮은 나라가 대만”이라고 말했다.

이는 단순한 엄살이 아니다. 2023년 10월 대만 위생복리부가 발표한 《출생 통보 통계연보》에 따르면, 2022년 대만의 신생아 수는 13만9110명으로 출생률은 0.92명을 기록했다. 아직 공식 통계가 나오지 않았지만, 2023년 출생률은 0.8명대로 예상된다. 한국과 큰 차이가 없는 수치다.

게다가 인구가 자연 감소하기 시작한 해도 한국과 똑같은 2020년이다. 대만 당국은 2070년 전체 인구를 1502만~1708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왕 씨는 “한국 젊은이들이 불안정한 일자리와 천정부지로 뛰어오른 부동산으로 인해 결혼을 포기하거나 아이를 안 낳는다고 언론에서 보도하는데, 이런 현실은 대만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대만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거의 없고 건설한 지 20~30년이 지난 건물이 즐비하다. 그러나 타이베이의 대다수 주택은 ㎡당 50만~60만 대만달러(약 2114만~2537만원)를 호가한다. 젊은 세대의 낮은 임금을 고려한다면, 평생 일해도 살 수 없는 가격이다.


“야권 분열로 라이칭더 당선될 것”

 ▲1월 12일 마지막 유세에서 연설하는 대만 민중당의 커원저 후보. 절반의 성공만 거두었다. 사진=커원저 SNS

 

왕궈창 씨는 “이번 총통 선거는 야권이 분열해서 라이칭더의 당선이 확실시된다”고 전망했다. 그럼에도 “중국과 사사건건 충돌하는 민진당이나 친중 성향의 국민당보다 실리주의를 추구하고 미래에 내 삶을 변화시켜줄 커원저와 민중당을 끝까지 지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1월 12일 타이난의 도교사원에서 만난 리웨이(54) 씨는 “오래전부터 민진당 지지자라서 이번에도 라이칭더를 찍을 것”이라고 밝혔다. 타이난은 가오슝과 함께 전통적인 민진당의 텃밭이다. 주민 대다수가 민난화(閩南話)를 구사하는 푸젠성 출신이기 때문이다. 명(明)·청(淸) 시대부터 대만에서 살아온 이들을 본성인(本省人)이라고 부른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이 1949년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패배하여 대륙에서 대만으로 건너온 외성인(外省人)이다. 대만 북부에 주로 살고 표준 중국어를 구사한다. 과거 국민당의 주류는 외성인으로 이루어졌다. 마잉주 전 총통이 대표적이다.

리웨이 씨는 “젊은 세대가 민진당에 실망해서 커원저를 지지하는 현실은 충분히 이해된다”면서 “그래도 차이잉원 통치 기간 대만이 경제적으로 성장한 성과는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투표일인 1월 13일 필자는 타이난에서 가오슝으로 내려왔다. 가오슝은 1947년 2·28사건 당시 국민당 정부가 일으킨 학살과 탄압으로 인해 인명 피해가 가장 컸던 도시다.

이로 인해 가오슝은 민주화 이후 줄곧 민진당을 지지해왔다. 물론 2018년 전국지방선거에서는 국민당의 한궈위(韓國瑜)를 시장으로 당선시킨 전력도 있다. 하지만 한궈위가 시정(市政)을 소홀히 하고 2020년 총통 선거에 올인하자 한궈위를 주민소환 투표로 하야(下野)시켰다.


與小野大

1월 13일 오후 4시에 모든 투표가 끝나자, 곧바로 개표에 들어갔다. 대만 중앙선거위원회가 발표한 최종 투표율은 71.8%였다. 차이 총통이 압승을 거두었던 2020년의 74.9%보다 오히려 떨어진 수치였다. 개표 초반부터 줄곧 앞서가던 라이칭더 후보는 결국 558만 표(40%)를 득표해 제16대 대만 총통으로 당선되었다.

2위는 467만 표(33.4%)를 얻은 허우유이 후보였다. 3위는 369만 표(26.4%)를 득표한 커원저 후보였다. 후보 단일화에 실패해 야권이 분열된 현실이 가장 큰 패인(敗因)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온 제11대 입법위원 선거 결과는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했다.

 

첫째, 민진당은 51석을 얻어 과반수 획득에 실패했다. 비례대표 정당 득표에서는 1위를 했지만, 지역구에서 국민당에 밀리면서 2020년보다 12석이 줄어들어 제2당으로 밀려났다. 국민당은 52석을 얻어 제1당에 올랐는데, 4년 전보다 14석이나 증가했다. 2008년 이래 집권당이 입법원을 계속 장악해왔는데, 이번에는 여소야대(與小野大)로 변화한 것이다.

둘째, 커원저 후보는 4년 후를 기약할 수 있으나 당장 당세를 확장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번 총통 선거에서 커원저 후보는 만만치 않은 득표력을 과시하며 양당 구도에 균열을 냈다. 하지만 야권 단일화를 걷어차고 그가 완주한 것은 입법위원 선거에서 민중당 출마자를 대거 당선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성과는 미미해서 기존의 5석에서 8석으로 3석을 늘리는 데 그쳤다. 특히 지역구 당선자가 한 명도 없어 양당의 높은 벽을 실감해야 했다.

국민당, 세대교체 빨라질 듯

 ▲장완안 타이베이 시장.

 

셋째, 향후 국민당의 세대교체가 빨라지게 됐다. 이번 총통 선거에서 허우유이는 가장 나이가 많았고 올드한 이미지가 있었다.

국민당은 이를 상쇄시키기 위해서 2022년 전국지방선거에서 타이베이 시장으로 당선됐던 장완안(蔣萬安·45)을 전면에 내세웠다. 장완안 시장은 대만의 국부(國父)라고 할 수 있는 장제스(蔣介石) 전 총통의 증손자이다. 뛰어난 학벌과 경력, 수려한 외모까지 갖춰 국민당의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에 따라 4년 뒤에는 국민당 총통 후보로 나설 가능성이 크다.

선거가 끝난 다음 날 가오슝의 분위기는 생각 외로 차분했다. 거리에서 만난 한 시민은 “이번에도 가오슝은 라이칭더과 민진당에 열성적인 지지를 보냈지만, 민생을 개선시키지 못하면 다음에는 2018년처럼 국민당 후보를 뽑을 것”이라고 말했다.⊙

월간조선 글 : 모종혁 중국 전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