橫說竪說(동아일보) 2024-03/
03-01(금) 신청사 흑역사

아방궁, 돈방궁, 베르사유궁…. 민선 단체장이 치적 남기듯 짓는 신청사엔 명예롭지 않은 별명이 붙기 마련이다. 낮은 재정자립도는 생각도 않고 과시용 외양에 혈세를 펑펑 쓰는 탓이다. 민선 자치제가 부활한 1995년 이후 5년 동안에만 59개 신청사에 2조5000억 원이 들어 ‘호화 청사’ 논란이 거셌다. 이후 잠잠하던 신청사 건립 바람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일고 있다. 지역 경제 살리기와 주민 편의시설 확충을 내세우는데 수천억 원의 건설비에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서울에선 강남 강서 광진 동작 서초 종로구가 신청사 건립을 추진 중이다. 동작구는 올 하반기 완공을 목표로 인근 상인들까지 입점시키는 전국 최초 ‘관상복합’ 청사를 짓고 있다. 강남구는 대치동 세텍 부지에 ‘랜드마크’ 청사를 계획 중이다. 경기 동두천시와 여주시도 새 청사 마련에 나섰다. 최근엔 서울시의회가 을지로 옛 미국문화원 자리에 22층짜리 신청사 건립 계획안을 만들어 시에 전달했다. 건립 비용이 1200억 원이다.
▷요즘 청사를 지으려면 행정안전부의 상한 면적 기준을 준수하고 타당성 조사와 중앙 투자 심사도 받아야 한다. 이런 제한 규정이 마련된 2010년 이전에는 으리으리한 호화 청사가 많았다. 경기 성남시는 수입 대리석과 화강석으로 장식한 스텔스 전투기 모양 청사에 3222억 원을 썼다. 인구 100만도 안 되는 도시가 1000만 도시 서울 신청사(3000억 원)보다 많은 돈을 들인 것이다. 1974억 원짜리 경기 용인시 신청사도 2005년 준공되자 ‘용인궁’으로 불렸다. 2010년 완공된 서울 용산구 신청사엔 금싸라기 땅값만 빼고도 1522억 원이 들었다.
▷호화 청사는 대개 외벽을 통유리로 지어 에너지를 낭비하고, 주민 편의를 내세우면서도 전망 좋은 맨 꼭대기 층엔 단체장 집무실을 배치해 주민들 접근을 어렵게 한다. 안목 없는 설계로 도시 미관을 해치는 것도 문제다. 거대한 유리 상자 모양의 용산구 청사는 건축가들이 선정한 ‘최악의 건축물’ 8위에 올랐다. 성남시는 인구가 늘 줄 알고 시의원들 사무실을 넉넉히 만들어두었는데 인구가 줄어 쓸모없게 됐고, 반대로 용인시는 인구 증가를 내다보지 못해 준공 13년 후부터는 청사 밖 여기저기서 셋방살이를 하는 신세다.
▷서울시의회도 청사가 비좁아 인근 건물에 흩어져 일하다 보니 효율이 떨어진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선진국들은 청사가 낡고 좁다고 새로 짓기보다 고쳐 쓰고 주변 건물에 세를 얻어 일한다. 요즘은 원격근무도 하는데 물리적으로 한 공간에 모여 있을 필요가 있나. 단체장이 되면 번듯한 청사 건립의 유혹에 빠지기 마련이라지만 조심해야 한다. 호화 청사로 구설에 오른 성남시장, 용인시장, 용산구청장 모두 다음 선거에서 낙선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3-02(토) 변론에 손 놓고 의뢰인 등치는 불량 변호사

“제가 몸이 안 좋아 병원에 있었습니다.” 의뢰인의 문자를 받은 지 사흘 만에야 A 변호사는 이런 내용의 답신을 보냈다. 하지만 이후 A 변호사는 의뢰인과 연락을 끊었다. 항소이유서 제출 등 업무는 일절 하지 않았고, 공판에도 출석하지 않았다. 의뢰인이 피해자에게 주라고 건넨 합의금도 행방이 묘연하다. A 변호사는 대한변호사협회로부터 정직 1년의 징계를 받았다. 대한변협이 최근 공개한 2019∼2022년 징계 사례 316건 가운데 하나다.
▷의뢰인을 속 터지게 하는 변호사의 대표적 유형은 연락이 두절되고 재판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사기 피의자 변호를 맡은 B 변호사는 구속영장실질심사 당일 오전 의뢰인에게 “골프 미안하네요”라는 문자를 보낸 뒤 전화를 받지 않았고 오후에 열린 심사에 불참했다. 결국 구속된 의뢰인의 심정이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대여금 소송을 맡은 C 변호사는 3년 동안 별 이유 없이 소장조차 제출하지 않는 등 불성실한 변론으로 정직 1년 징계를 받았다. 이들 외에도 변호인이 시한 내에 항소, 상고를 하지 않거나 이의신청 기간을 놓쳐 의뢰인을 울린 사례가 다수 있다.
▷의뢰인을 등치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태를 보인 변호사들도 징계 리스트에 올랐다. 주택조합을 상대로 한 분담금 반환 청구 소송에서 승소한 뒤 의뢰인에게 전달해야 할 약 7000만 원을 지급하지 않은 변호사는 정직 1년 처분을 받았다. 단순히 법원에서 공탁금을 출급받는 업무를 맡고서는 성공보수 명목으로 공탁금의 20%를 받아서 ‘과다한 보수를 챙겼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은 변호사도 있었다. 변론에 손을 놓고도 수임료는 돌려주지 않은 낯 두꺼운 변호사들도 적잖다.
▷변호사의 행동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법한 일을 저지른 이들도 있다. 한 변호사는 자신이 변호하는 성폭행 피해자를 집으로 데려가 몸을 만졌고, 술집에서 소란을 피우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여성 경찰관을 추행한 변호사도 있었다. 필로폰을 7차례 투약한 변호사, 의뢰인의 부탁을 받고 서류를 위조해 경찰에 제출한 변호사, 소송 상대방에게 “× 같은 ××야” 등 욕설을 퍼부은 변호사 역시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변호사는 의뢰인의 법적 권리를 보호하고 소송의 승패를 좌우하는 막중한 역할을 맡고 있다. 변호사법에서 변호사를 ‘공공성을 지닌 법률 전문직’으로 규정하면서 품위 유지 등의 의무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이유다. 이를 어기면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런데 변호사 자격을 완전히 박탈하는 ‘영구제명’은 지금까지 단 1명에 불과하고 대부분 1년 이하의 정직이나 과태료, 견책 처분을 받았다. 이런 솜방망이 징계로는 ‘불량 변호사’들의 일탈을 막기 어려울 것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3-04(월) “태아 성별과 낙태는 무관”… 이젠 여아 선호가 걱정?

우리나라 산부인과 진료실에선 의사와 예비 부모들 사이에서 선문답 같은 알쏭달쏭한 대화가 흔히 오간다. 초음파 검사를 하다가 뜬금없이 아기 옷은 무슨 색깔이 좋을지, 어떤 장난감을 준비할지 등을 묻는 식이다. 서구에선 임신 4, 5개월쯤 의사가 태아 성별을 알려주고 부모는 이를 기념하는 성별 공개 파티를 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임신 32주까진 의료진이 태아 성별을 알릴 수 없게 한 법조항 때문에 부모들이 눈치껏 성별을 알아채야 한다.
▷이 법이 최근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정을 받았다. 37년 전 제정 당시 팽배했던 남아 선호 사상이 확연히 퇴조했고, 대부분의 낙태가 성별을 알지 못하는 임신 10주차 전에 이뤄진다는 게 주된 이유다. 다만 재판관 9명 중 3명은 성별 공개에 신중해야 한다는 소수의견을 냈다. ‘남아 선호가 아니더라도 부모가 원하는 성별로 자녀를 한 명만 낳으려 할 경우 성별에 따라 낙태가 이뤄질 개연성이 있다.’ 여아 선호로 인한 낙태 가능성 역시 우려된다는 취지다.
▷재판관들은 여아 선호를 보여주는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비중 있게 인용했다. 지난해 조사에서 응답자 중 59%는 ‘딸이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답했는데 ‘아들이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응답은 절반 수준인 34%에 그쳤다. 딸이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답변은 모든 연령대에서 아들보다 더 높게 나왔다.
▷여아 선호 현상은 자녀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에 자식은 가계에 기여할 노동력이자 부모의 노후 대책 성격이 강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딸보단 아들이 유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녀 양육이 ‘고비용’ 그 자체인 요즘엔 그런 공식이 적용되기 어렵다. 여성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직장을 포기하고 육아만 할 경우 기회비용이 일단 크다. 대학 졸업 후에도 안정적인 직장을 못 잡고 부모에게 얹혀사는 자녀가 많다. 자녀의 경제력은 부모 세대를 넘어서기 어렵고, 노후 돌봄은 자녀가 아닌 국가의 몫으로 옮겨가고 있다.
▷요즘 부모들이 자식에게 기대하는 가치는 정서적 친밀감이다. 키울 때 애교가 많고, 노후엔 부모를 살뜰히 챙기는 건 아들보단 딸인 경우가 많다. 딸은 정서적인 면에서 평생 보험이란 말도 있다. 또 맞벌이 부부들 중에는 “육아에 할애할 시간과 자원이 부족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부모 말에 잘 따르고 빨리 철드는 딸을 선호하게 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인구 전문가들은 남아를 선호했던 나라 중에 한국처럼 급격하게 여아 선호로 바뀐 사례를 찾기 힘들다고 한다. 최근 여아 선호 현상은 저성장, 청년실업, 열악한 육아 환경 등 우리의 고질적 문제와 연결돼 있어 ‘한국적 현상’으로도 볼 수 있다. 해결 기미가 잘 보이지 않는 문제들인 만큼 태아 성별 공개를 무작정 허용해선 안 된다는 헌재 재판관들의 소수의견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3-05 무너지는 ‘영끌’, 쏟아지는 부동산 경매

부동산 고수와 현금 부자들이 모여 있는 경매 시장은 부동산 경기 선행지표로 통한다. 경매를 찾는 발걸음이 뜸해지면 부동산이 하락기에 접어들었다는 뜻이며, 반대로 경매 시장이 꿈틀대면 침체기가 끝났다는 신호로 본다. 요즘 경매 시장은 매물은 쌓이는데 입찰에 참여하는 사람이 줄면서 역대급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올 1월 전국 법원에 들어온 신규 경매 신청은 1만 건을 넘어서며 월별 통계로 10년 6개월 만에 가장 많았다.
▷고금리와 경기 침체의 직격탄을 맞은 가계와 기업, 자영업자들이 빚을 제때 갚지 못하면서 경매로 넘어가는 부동산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 기업 10곳 중 4곳이 번 돈으로 이자도 못 내는 형편이고, 한계에 부닥친 소상공인·자영업자의 줄폐업이 이어지다 보니 아파트형 공장이나 상가도 줄줄이 경매에 나오고 있다. 지난달엔 서울 명동 중심거리의 꼬마빌딩이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경매에 나왔지만 새 주인을 찾지 못하고 유찰됐다고 한다.
▷무엇보다 경매로 날리는 ‘영끌족’의 부동산이 수두룩하다. 지난해 경매가 진행된 서울 아파트는 7년 새 가장 많았고, 최근 교통이나 학군 좋은 대단지 아파트도 대거 경매로 쏟아지고 있다. 통상 3개월 이상 이자가 연체되면 은행 등 금융회사가 경매를 신청할 수 있는데, 부동산 급등기에 무리하게 대출받아 집을 산 영끌족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자를 더는 감당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소득 기반이 취약한데도 과도하게 빚을 낸 20, 30대 영끌족의 충격이 더 크다. 지난해 가계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가처분소득은 1%대로 늘어난 반면 물가 영향을 뺀 이자 비용은 27% 넘게 치솟았다니 예견된 결과라 할 만하다.
▷여기에다 전세 사기와 역전세난의 여파로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세입자들이 법원에 강제 매각을 신청하는 강제경매 또한 늘고 있다. 1월 수도권에서 강제경매를 신청한 아파트·오피스텔·빌라는 역대 가장 많았다. 이 중 전세를 끼고 갭투자한 2030세대가 집주인인 매물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경매로 넘어간 서울 빌라 10채 가운데 1채 정도만이 낙찰되는 수준이어서 보증금을 날릴 위기에 처한 세입자들은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있다.
▷아파트부터 상가, 빌라까지 경매 물건이 쌓이지만 수차례 유찰에도 주인을 찾지 못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최근 2년간 시중은행이 경매를 신청한 4건 중 1건은 아직 낙찰자를 찾지 못했고, 그나마 매각에 성공한 4건 중 1건도 은행이 돌려받아야 할 금액보다 낙찰가가 낮았다고 한다. 부동산 시장 침체와 고금리 폭탄의 파장이 영끌족의 눈물을 거쳐 금융권 부실로 옮겨가고 있어 우려스럽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3-06 가톨릭 국가 佛, 세계 최초로 헌법에 ‘낙태의 자유’ 명시

여권 운동의 역사는 낙태할 권리 쟁취사이기도 하다. 고대에는 가장의 권위, 중세엔 신에 대한 도전으로 근대 형법에 이르기까지 금지됐던 낙태는 1968년 프랑스 68혁명과 1973년 미국의 ‘로 대(對) 웨이드’ 연방대법원 판결을 계기로 여성의 권리로 널리 허용되기 시작했다. 2022년 미 연방대법원이 다시 그 판결을 뒤집고 낙태권을 제한하자 프랑스가 16년 만에 헌법을 개정해 낙태는 ‘보장된 자유’라고 못 박고 8일 세계 여성의 날에 헌법 국새 날인식을 열기로 했다.
▷헌법상 낙태할 자유를 보장한 나라는 프랑스가 처음이다. 이미 법으로 임신 14주까지 낙태를 허용하고 있어 달라지는 건 없다. 낙태권을 제한하는 입법을 막는 효과는 있다. 낙태의 ‘권리’와 ‘자유’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현지 법조계에선 별 차이는 없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정치적 수사를 쓴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초당적 지지로 성사된 개헌에 대해 프랑스 대통령은 “프랑스의 자부심”, 총리는 “여성의 몸은 여성의 것이라는 역사적 메시지를 전 세계에 보낸 것”이라고 평가했다.
▷프랑스에 낙태죄가 등장한 건 혁명기인 1791년 최초로 만들어진 근대적 형법이다. 1차대전으로 인구가 줄자 1920년 피임과 낙태 금지법을 제정했고, 2차대전 후 베이비붐이 일고 워킹맘이 늘면서 돌봄 공백에 방치되는 아이들이 생기자 1967년 피임, 1975년엔 낙태를 허용했다. 낙태 합법화의 분수령이 된 사건이 1971년 ‘343명의 선언’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 프랑수아즈 사강, 카트린 드뇌브 등 저명한 여성 343명이 ‘나는 낙태했다’는 선언문을 발표한 것이다.
▷이후 낙태 허용 기간은 점차 확대됐고, 2013년부터는 비용 전액을 건강보험에서 지원하는 ‘무상 낙태’를 시행하고 있다. 최근 29개국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프랑스가 스웨덴에 이어 두 번째로 낙태하기 좋은 나라로 꼽혔다. 4명 중 1명이 낙태 경험이 있다고 한다. 미국에선 낙태가 나라를 두 쪽 내는 이슈이지만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임에도 성인 86%가 개헌에 찬성했다. 1905년 정교분리의 세속주의 ‘라이시테’를 법제화해 시행해 온 영향일 것이다.
▷한국에선 출산 장려와 산아 제한의 수단으로 낙태를 금지하거나 제한적으로 허용해 오다 2019년 4월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낙태죄가 폐지됐다. 정부는 임신 14주까지는 무조건, 15∼24주는 제한적으로 낙태를 허용하는 대체 입법안을 냈으나 국회에 제동이 걸려 있다. 낙태 가능 시기와 비용이 병원마다 제각각이어서 여성들만 위험에 내몰려 있는 상태다. ‘프랑스의 자부심’이라는 이번 개헌이 입법 공백의 부끄러움을 일깨우는 자극제가 되길 바란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3-07 ‘사법 보다 정치’… 美 연방대법원의 트럼프 결정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대선 출마 자격을 박탈한 콜로라도주(州) 대법원의 판결이 연방대법원에서 뒤집혔다. 논리는 간단하다. 주는 연방대통령의 출마 자격을 박탈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미 수정헌법 제14조 3항은 “폭동이나 반란에 가담한 자는 공직에 취임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연방대법원은 트럼프가 여기에 해당하는지는 판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함의는 트럼프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해도 연방 공직 후보자인 트럼프의 출마 자격을 박탈할 권리는 연방의회에만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사법적 책임을 묻는 절차와 정치적 책임을 묻는 절차를 구별해 사법적 책임은 법원에서 다루지만 정치적 책임은 의회에서 다룬다. 정치적 책임을 묻는 절차의 대표적인 것이 탄핵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탄핵 소추는 국회, 탄핵 심판은 헌법재판소가 하지만 미국은 탄핵 소추는 하원, 탄핵 심판은 상원이 한다. 연방 공직 후보자의 출마 자격 박탈도 사법적 책임을 묻는 것이라고 보기 어려워 연방의회에 권한이 있다고 본 것이다. 현재 연방의회에서 상원은 민주당이 다수이지만 하원은 공화당이 다수다. 공화당 후보가 될 것이 확실한 트럼프의 출마 자격 박탈이 하원을 통과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트럼프가 출마 자격을 박탈당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반란 가담 혐의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탄핵이 돼도 탄핵 사유에 해당하는 범죄에 대한 재판은 별도로 이뤄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난해 8월 미국 법무부 특별검사는 그를 반란 혐의로 기소했다. 이에 트럼프는 대통령 재직 시 공무 중 행위는 퇴임 후에도 처벌할 수 없다며 법원에 면책을 요구했다. 연방지방법원과 항소법원은 기각했고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연방대법원은 말도 안 되는 면책 요구에 대해 구두변론까지 연 뒤 6월에나 판단할 예정이다. 대선은 11월에 열린다. 연방대법원이 하급심처럼 면책 요구를 기각한다고 한들 본안인 반란 혐의 재판 결과는 대선 전에 나오기 힘들다. 앞서 연방대법원은 트럼프 재판을 신속 심리로 진행해달라는 특검의 요구를 거부했다. 사법 절차가 정치 일정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연방대법원은 사법 절차를 늦추는 방식으로 국민의 정치적 선택에 우선권을 준 것으로 보인다.
▷다른 혐의도 아니고 반란 혐의로 기소된 사람에게 대선 출마 자격을 줘도 되는가 의문이 든다. 그러나 기소됐다는 이유만으로 유죄로 몰아가지 않는 확고한 재판중심주의의 나라가 미국이다. 트럼프는 재선에 성공한다면 대통령의 사면권을 이용해 ‘셀프 사면’을 할 가능성이 크다. 정치와 사법의 관계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연방대법원의 결정이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3-08 출국금지 중에 호주대사로 임명된 전 국방장관

세간의 시선에서 잠시 멀어진 듯했던 해병대 채모 상병 순직 사고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 사건과 관련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수사를 받고 있는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이 4일 주호주 대사로 임명되면서부터다. 더욱이 이 전 장관은 이미 1월부터 출국금지 된 상태다. 수사를 위해 출국을 막아 놓은 피의자를 해외에서 일하는 공관장에 앉히는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지난해 7월 수해 실종자 수색에 나섰던 스무 살 해병대원의 안타까운 희생에 온 국민이 애도했고, 여야 가릴 것 없이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 그런데 사건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이 전 장관은 초동 수사를 맡은 해병대 수사단이 수사 기록을 경찰에 넘기는 것을 승인했다가 하루 만에 ‘이첩 보류’를 지시했다. 그런데 수사단은 이틀 뒤 수사 기록을 이첩했다. 이를 놓고 ‘항명이냐 외압이냐’는 논란이 커졌고 정치적 이슈로 번졌다.
▷외압 의혹의 핵심은 이 전 장관이 왜 지시를 바꿨느냐다. 박정훈 전 수사단장 측은 당시 임성근 해병대 1사단장에게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한 것에 윤석열 대통령이 격노하자 장관이 지시를 번복했다는 취지로 주장한다. 반면 국방부는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하고 있다. 이 전 장관은 “(박 전 단장이) 보고했기에 수고했다고 결재했다가 다음 날 다시 짚어봐야겠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지만, 수사를 통해서 확인돼야 할 부분이다. 공수처에서 이 전 장관을 출금 조치한 이유였을 것이다.
▷부실 검증 의혹이 제기되자 대통령실은 “우리로선 이 전 장관이 출금됐는지 알 길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대통령실이 독립적 수사기관인 공수처에 자료 제출 등을 요구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돼 있다는 것이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야당과 시민단체에서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한 이 전 장관이 공수처의 핵심 수사 대상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공수처가 지난달 국방부와 해병대를 압수수색하면서 수사에 속도를 내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런 시점에 굳이 이 전 장관을 외국에 보내는 인사를 해야 했나. 공수처가 어제 이 전 장관을 불러서 조사하기는 했지만, 수사 상황에 따라서는 추가 소환이 필요할 가능성도 있다.
▷이 전 장관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당시 보고선상에 있던 임종득 전 국가안보실 2차장은 경북 영주-영양-봉화, 신범철 전 국방부 차관은 충남 천안갑에 여당의 단수공천을 받았다. 임 전 차장은 해병대 수사단이 기록을 이첩한 직후 김계환 해병대사령관과 통화한 것으로 밝혀져 외압 관여 의혹이 제기됐고, 신 전 차관도 당시 김 사령관에게 ‘장관 지시를 따르라’고 종용했다는 의혹이 있다.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을 대사로 임명하고, 여당 후보로 낙점한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인가.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3-09(토) 韓 ‘일하는 여성 환경’ 12년째 OECD 꼴찌

한국이 선진국 29개국 가운데 직장 내 여성 차별이 가장 심한 국가로 꼽혔다.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유리천장 지수(The glass-ceiling index)’에서 꼴찌를 기록한 것이다. 2013년 첫 발표 이후 12년 연속 부동의 꼴찌다. 매년 순위가 엎치락뒤치락하지만 최하위권은 일정하다. 이코노미스트는 한국, 일본, 튀르키예 ‘바닥권 3인방’에 대해 “이젠 익숙한 이름”이라고 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 성별 간 임금 격차, 기업 내 여성 임원 비율, 여성 국회의원 비율 등 10개 지표로 지수를 산출한다. 한국은 대부분의 지표에서 바닥권이었다. 남녀 임금 격차는 31.1%로 꼴찌, 여성 임원 비율(12.8%)은 끝에서 두 번째다. 여성의 노동참여율은 남성보다 17.2%포인트 낮은 27위다. 남성이 유급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기간은 두 번째로 길지만 실제 사용하는 남성은 드물다고 이코노미스트는 꼬집었다.
▷20대에선 여성의 고용률이 남성보다 높지만, 30대 이후부턴 역전된다. 결혼과 출산, 육아 과정을 거치며 노동시장에서 이탈하는 여성이 많다. 임신과 출산, 영유아 육아전쟁을 버텨낸 여전사들도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이라는 장벽 앞에 무너지곤 한다. 이후 노동시장에 돌아와도 남는 자리는 저임금의 비정규직뿐이다. 선배들의 고군분투를 지켜본 여성 후배들은 결국 비혼과 비출산을 선택하게 된다.
▷육아와 가사의 부담이 여성에게만 쏠리는 것도 문제다. 가사 분담을 꽤 한다는 남편들도 ‘아내를 도와준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더 오래 일하고 회사에 절대 충성하기를 원하는 전투적 근무환경 역시 문제다.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클로디아 골딘 미 하버드대 교수는 이를 ‘탐욕스러운 일자리(greedy work)’로 표현했다. 일과 가정의 양자택일 상황에서 장시간의 강도 높은 노동으로 두둑한 보수를 받는 일자리는 남성에게, 근무시간이 유연한 일자리는 여성에게 돌아간다. 이에 따라 소득과 승진 등에서 격차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여성에게 차별적인 노동환경을 바꾸는 것은 국가 전체적으로도 중요한 과제다. 지난해 12월 방한한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한국이 근로시간의 성별 격차를 OECD 국가 평균 수준으로 줄이면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8% 증가할 것”이라고 했다. 한국경제인협회는 여성의 경력 단절에 따른 경제적 손실이 연간 44조 원에 이른다고 추산하기도 했다. 여성이 행복한 일터를 만들어야 소득도 높아지고 출산율도 올라 더 나은 미래를 가져올 수 있단 얘기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3-11(월) 테라 권도형 한국 온다니 “미국으로 보내라”는 피해자들

유럽 발칸반도 소국인 몬테네그로 법원이 가상자산 테라·루나 폭락 사태 주범인 테라폼랩스 대표 권도형 씨를 미국으로 인도하라고 했다가 최근 항소심에서 이를 뒤집고 한국 송환을 결정했다. 국내 피해자만 20만 명이 넘어 다행스러운 소식 같지만 “차라리 미국으로 보내라”는 피해자가 적지 않다. 적은 돈이나마 보상받기 위해 어렵게 민사소송을 하느니 권 씨가 미국 감옥에 평생 갇혀 죗값이라도 치르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권 씨는 현지 법원에 한국에서 재판받게 해달라고 요구해 왔다. 그래야 빠져나갈 구멍이 많다고 본 것인데 틀린 계산이 아니다. 그를 자본시장법상 사기 거래로 처벌하려면 코인도 주식 같은 증권에 해당한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우리는 코인의 증권성에 대한 판단을 정립하지 못한 상태다. 다행히 유죄 판결이 난다고 해도 처벌에 한계가 있다. 우리는 여러 혐의가 유죄여도 가장 무거운 혐의에 대한 형량의 2분의 1까지만 가중할 수 있다. 현재까지 경제사범의 최대 형량은 40년이다. 반면 개별 혐의별 형량을 모두 합산하는 미국에선 100년형도 가능하다. 게다가 미국은 루나·테라 코인을 이미 증권으로 간주해 이익환수 소송을 진행 중이다.
▷글로벌 무대의 범죄자들에게 미국 사법체계는 재앙 그 자체다.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를 운영한 손정우도 2020년 미국이 우리 법원에 범죄인 인도 요청을 해오자 미국행을 필사적으로 회피했다. 당시 손정우를 종신형까지 선고될 수 있는 미국으로 보내자는 여론이 들끓자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불법 계좌를 만들어 범죄수익을 은폐했다며 고소했다. 그로 인한 추가 수사와 재판이 이어지며 그의 미국 인도는 불발됐다. 손정우는 성착취 관련 혐의로는 1년 6개월을 선고받는 데 그쳤다.
▷권 씨가 한국으로 올 경우 그의 ‘법원 쇼핑’은 성공하는 셈이 된다. 그러니 그를 미국으로 보내 평생 감옥에 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법도 하다. 다만 피해자 중 일부라도 피해 보전을 받으려면 우리 사법체계로 그를 단죄해야 한다. 검찰은 지난해 서울 성동구 성수동 고급 주상복합을 포함해 권 씨의 국내 자산 2300억 원을 추징·보전해 놓은 상태다. 미국이 추산한 전 세계 테라 사기 피해액 52조 원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소액이나마 보상을 기대할 순 있다.
▷우리 손으로 테라 사건을 처리하다 보면 ‘제2의 권도형’을 막을 법과 제도를 정비할 계기를 만들 수도 있다. 루나·테라는 가치가 ‘0원’으로 완전히 증발하면서 피해가 명확해졌지만 일부 코인의 경우 사기성 투자 권유나 은밀한 시세 조종이 벌어지는데도 아직 피해가 구체화되지 않은 사례들이 있다. 권 씨를 수사하고 재판하면서 규제 공백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가상자산 관련 제도를 촘촘히 보완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3-12 할마 할빠들의 육아휴직

맞벌이 가정에 조부모는 든든한 육아 지원군이다. 집 근처에 아이들 할머니가 사는 경우 엄마의 노동시장 참여율이 4∼10%포인트 상승하고, 외할머니와 함께 살면 아이의 생존 확률과 학교에 다니는 비율이 높아진다는 해외 연구도 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신년호에서 15억 명으로 급증한 전 세계 조부모 인구가 ‘조부모 시대’를 열며 어린이 복지와 여성의 사회 진출에 긍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에서도 친정엄마가 아이를 봐주면 금수저, 시어머니가 봐주면 은수저라는 ‘워킹맘 수저론’이 있다. 정부 실태조사에 따르면 워킹맘의 10.5%가 조부모에게 아이를 맡기는 금수저, 은수저들이다. 가구 소득이 월 700만 원이 넘는 고소득층은 그 비율이 13%로 더 높다. 급할 때 잠깐 맡기는 경우까지 포함하면 조부모 의존 비중은 40%까지 올라간다. 손주를 엄마 아빠처럼 돌보는 할마(할머니+엄마)와 할빠(할아버지+아빠)들은 “인생은 80부터”라며 황혼 육아에서 벗어날 날을 고대한다.
▷손주 돌봄 대가로 정기적인 현금을 받는 경우는 40%밖에 안 된다. 정기적으로 받는 경우 월평균 액수는 73만 원. 육아 시간이 하루 평균 6.8시간, 조부모들이 육아에 투입한 노동 가치가 2019년 3조 원을 넘겼다는데 대부분 무료 봉사를 하고 있는 셈이다. 요즘은 지방자치단체들이 조부모 돌봄 수당을 신설하는 추세다. 서울은 생후 24∼36개월 아이 한 명은 30만 원, 두 명은 45만 원, 세 명은 60만 원을 준다. 중위소득 150% 이하 가구로 월 40시간 이상 아이를 돌보는 조건이다.
▷조부모에게 육아휴직을 주는 나라도 있다. 호주의 조부모 육아휴직은 무급인데 주 보호자인 경우엔 양육비도 지원한다. 헝가리는 육아휴직을 쓰는 조부모에게 월 123만 원을 준다. 핀란드는 부모가 돌볼 수 없는 경우 육아휴직 급여를 실제 아이를 보는 사람에게 지급한다. 일본은 기업과 지자체별로 조부모 육아휴직제를 운영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최근엔 우리 정부도 조손 가정이나 아이가 부모와 떨어져 조부모 집에서 크는 경우에 한해 조부모 육아휴직제 도입을 검토 중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조부모 육아 수당은 다들 찬성하는데 육아휴직제에 대해선 조부모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것 아니냐며 여론이 갈린다. 황혼 육아를 하면 인지 기능과 삶의 만족도는 높아지는 반면 손목 허리 무릎 관절이 모두 아픈 ‘손주병’으로 병원은 자주 가게 된다고 한다. 부모만 쓸 수 있도록 돼 있는 육아휴직 제도를 유연화할 필요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아이는 부모가 키울 수 있어야 한다. 자식 농사 끝낸 사람에게 자식의 자식 농사까지 지으라 부담을 줄 수는 없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3-13 안전·위험자산 동시에 오르는 ‘에브리싱 랠리’

대표적 안전자산인 금과 ‘디지털 금’으로 불리는 비트코인, 위험자산의 대표인 주식 가격이 동시에 급등하고 있다. 안전자산과 위험자산이 함께 오르는 이른바 ‘에브리싱 랠리(everything rallly)’다. 글로벌 자금시장에서 도는 돈이 한쪽으로 쏠리면 다른 쪽에선 돈이 밀물처럼 빠져나가 가격이 하락하는 게 일반적이어서 이례적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뉴욕상품거래소(COMEX)에서 그제 4월 인도분 금 선물은 전 거래일보다 3.10달러 상승한 트로이온스(31.1g)당 2188.60달러로 거래돼 사상 최고 수준을 이어가고 있다. 장중 한때 2200달러 선까지 육박했다. 중국 등이 달러 의존을 줄이려고 금을 사들이는 데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6월 금리 인하 가능성을 내비치면서 금값은 천정부지다. 금리가 내려 달러 가치가 떨어질까 봐 글로벌 투자자들이 금을 사서 위험을 분산하기 때문이다.
▷한국 가상화폐 시장에서 비트코인 값은 개당 1억 원을 처음 넘어섰다. 비트코인은 총 발행량이 2100만 개로 제한돼 금처럼 희소성이 있고, 미국 금융당국이 현물 상장지수펀드(ETF)를 허용해 제도권에 진입한 뒤 가격 움직임이 더욱 금을 닮아가고 있다. 채굴량이 절반으로 주는 반감기가 다음 달 돌아오는 만큼 당분간 강세를 보일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글로벌 증시는 갈수록 끓어오르고 있다. 미국, 일본, 대만 증시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사상 최고치 경신 소식이 전해진다. 인공지능(AI) 혁명의 영향이 AI 반도체 업체 엔비디아 등을 보유한 미국, 엔비디아의 주문을 받아 반도체를 만들어주는 TSMC가 있는 대만, 세계 굴지의 반도체 장비·소재 업체가 즐비한 일본 증시로 번지고 있다.
▷금, 비트코인 값 상승의 근저에는 달러화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미국의 국가부채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100% 선을 넘어 100일마다 1조 달러(약 1310조 원)씩 증가하고 있다. 미국의 재정이 악화되면 결국 돈을 더 찍어낼 수밖에 없고, 안전자산인 달러화 가치가 흔들릴 수 있어 대신 금 등을 사들인다는 거다.
▷이번 랠리에서 한국 경제는 멀찍이 떨어져 소외된 느낌이다. AI 열풍의 영향은 AI 반도체용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만드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 그친다. 한국은행 자산 중 금 비중은 1% 정도이고, 11년째 금을 사지 않고 있어 값이 올라도 별 도움이 안 된다. 다만 일부 청년층 사이에선 비트코인 계좌를 인증하며 “내게 이런 날이 오다니”라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모든 게 다 오르는 시장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 없다는 점만은 잊지 말아야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3-14 중2 모집책까지 고용한 도박사이트

온라인 불법 도박 범죄자들은 회원 모집책을 ‘총판’이라고 부른다. 최근 중학교 2학년 학생들마저 총판으로 고용한 일당이 경찰에 붙잡혔다. 이들은 5000억 원대 도박사이트를 운영하며 중고교생 12명을 모집책으로 썼다. 도박에 중독된 아이들에게 돈을 주고 친구를 도박에 끌어들이거나 텔레그램 채팅방 등에서 도박사이트를 홍보하도록 했다. 말이 좋아 총판이지 경찰에 붙잡힐 위험을 해외에 있는 총책 대신 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이들을 총알받이로 쓴 것이다.
▷‘산에 가야 범을 잡고, 물에 가야 고기 잡고, 자, 돈 놓고 돈 먹기.’ 교묘한 눈속임으로 행인들의 쌈짓돈을 뜯어내던 과거 야바위꾼도 아이들은 상대하지 않았다. 어른들의 틈을 비집고 아이가 머리를 들이밀면 야바위꾼은 사설(辭說)에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를 끼워 넣었다. 요즘엔 ‘무슨 짓을 저지르든 돈만 벌면 된다’는 사고가 팽배하다 보니 범죄자들이 아이들을 동원해 아이들에게 도박을 권한다. ‘도박으로 한 번에 큰돈을 벌었다’고 친구들에게 자랑하라고 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범죄자들 탓에 도박이 교실을 좀먹어 들어가고 있다. 청소년 사범, 중독 환자, 상담 수가 모두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아이들은 친구 얘기를 듣고 마음이 동하거나, 공짜 웹툰과 드라마를 보려고 접속한 불법 공유 사이트에서 호기심에 배너 광고를 눌렀다가 도박을 시작하게 된다. 도박에 중독된 아이가 부모님의 지갑에 손을 대거나 절도, 온라인 사기 등 범죄의 길로 빠져드는 사례도 적지 않다. 청소년이 청소년에게 도박비를 고리로 빌려주는 ‘작업 대출’ 생태계까지 있다고 한다.
▷10대 자녀를 뒀다면 아이가 평범한 게임을 하는 건지 도박에 빠진 건지 눈여겨 살펴야 한다. 아이들이 하는 온라인 도박은 카지노처럼 딱 봐도 도박처럼 생긴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사다리 타기나 게임형 도박은 얼핏 봐선 일반 게임 앱과 구별하기 쉽지 않다. 불법 스포츠토토 도박사이트 역시 ‘요즘 아이가 스포츠 경기에 관심이 많구나’ 하고 오해할 수 있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불법 도박은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다.
▷청소년의 뇌는 어른보다 중독에 더 취약하다. 신경세포가 쉽게 흥분할 뿐 아니라 보상 및 여러 중독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파민이 어른보다 많이 분비된다. 즉석에서 보상이 생기는 도박에 쉽게 빠져드는 이유다. 초중고교의 도박중독 예방 교육은 2022년부터 음주 흡연 마약 등 다른 예방 교육과 함께 의무화됐지만 잘 이뤄지지 않는 실정이라고 한다. 흡연 등의 예방 교육을 우선시하는 경우가 많은 탓이다. 교육이 형식적으로 진행되는 일도 적지 않다고 한다. 성장기에 도박에 중독되면 나중에 헤어나오기도 힘들다. 학교와 학부모가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03-15 민간 취업하려고 심사받는 공무원만 年 1000명

일본 정부는 지난해부터 한국의 행정고시에 해당하는 국가공무원 종합직 시험의 응시 연령을 만 19세로 한 살 낮췄다. 또 공무원도 근무시간을 조정해 평일 하루를 쉴 수 있도록 주 4일 근무제를 확대하기로 했다. ‘일본을 움직이는 꽃’으로 선망받던 공무원의 인기가 수직낙하하자 내놓은 대책이다. 박봉에다 잦은 야근, 상명하복이 당연시되는 공직 사회를 일본 청년들이 기피하면서 공무원 지원자는 10년 새 반 토막 났다고 한다.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한때 100 대 1에 육박했던 9급 공무원 시험의 경쟁률은 올해 22 대 1로 32년 만에 가장 낮았다. 출세의 지름길로 통하던 5급 공채(옛 행시) 지원자도 1만여 명에 그쳐 2000년 이후 가장 적었다. 몇 년 전 미국의 한 일간지가 한국의 공시 열풍을 소개하며 “한국에서 공무원이 되는 건 하버드대 입학보다 어렵다”고 했는데 격세지감이다.
▷게다가 어렵게 관문을 통과해 놓고 공직을 내려놓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민간 기업으로 이직하기 위해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의 취업 심사를 받는 퇴직 공무원은 해마다 늘어 지난해 1000명에 육박했다. 과거엔 장차관이나 고위 공무원이 임기를 마치고 민간으로 자리를 옮겼다면, 요즘에는 국·과장급 베테랑 공무원에 이어 20, 30대 공무원까지 가세하고 있다. 로스쿨이나 의학전문대학원 진학, 구체적인 취업계획 없는 단순 퇴직 등을 모두 포함하면 지난해 퇴직한 5년 차 미만 공무원은 1만3000명을 웃돈다.
▷엘리트 공무원들이 선호하는 경제·외교부처에서 직원 이탈이 가속화하는 것도 최근 몇 년 새 뚜렷해진 현상이다. 급여나 워라밸 등 근무 조건은 열악한데 인사 적체는 해결될 기미가 없고, 지시는 정권이 내리는데 책임은 공무원이 지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젊은 엘리트 관료들의 사기가 꺾인 결과다. 리더가 될 만한 인재들이 줄줄이 떠나면서 정권의 지시만 충실히 따르는 ‘영혼 없는 관료’만 남게 될까 봐 걱정이라는 얘기들이 관가 안팎에서 나오는 이유다.
▷앞으로 이탈 행렬은 계속될 듯하다. 한국행정연구원의 실태조사에서 중앙 및 지방 공무원 10명 중 4명꼴로 기회가 되면 이직할 의향이 있다고 했다. 9급 공무원 초봉이 올해 처음 3000만 원을 넘기고, 공무원 임금이 민간의 83%인 상황에서 이직 이유로는 ‘낮은 보수’가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규제를 만들어내는 ‘철밥통’ 공직 사회보다 도전과 창의력이 강조되는 민간 영역에 인재가 몰려든다는 측면에서 탈(脫)공무원 움직임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자부심과 꿈을 잃은 젊은 공무원의 엑소더스는 정부 위기의 신호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3-16(토) 야구배트보다 긴 비례대표 투표용지

4월 10일 실시되는 22대 총선의 유권자들은 투표소에서 어지간한 성인 남성 키의 절반 정도 되는 긴 초록색 용지를 1장씩 받게 될 것 같다. 노란색 용지는 지역구, 초록색은 비례대표용 투표용지인데 비례대표 선거에 후보를 내는 정당이 크게 늘기 때문이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고 기표했다가는 자칫 엉뚱한 정당에 표를 주거나 무효표를 양산할 가능성이 커졌다.
▷15일 현재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됐거나 창당을 준비 중인 정당은 71개다. 위성정당을 만든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을 뺀 나머지 69개 정당이 모두 비례대표 후보를 낸다면 투표용지 길이는 88.9cm가 된다. 야구 배트 평균 길이 83.82cm보다도 길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21대 총선부터 정당 득표율에 비해 지역구 의석을 적게 얻은 정당이 비례대표 의석 배분에서 유리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되면서다. 비례대표 할당 하한선인 ‘정당 득표율 3%’만 넘기면 예전보다 많은 의석을 가져갈 수 있다는 기대에 너나없이 욕심을 내보는 상황이 됐다.
▷유권자들로서는 비례대표 투표가 더 복잡해지게 됐다. 좁은 기표소 안에서 긴 투표용지를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지지 정당의 이름을 찾아야 하는데, 눈이 어둡거나 거동이 불편한 이들은 실수하기 쉬운 환경이다. 이는 무효표 증가로 이어진다. 실제로 21대 총선 비례대표 선거에서 무효표는 122만여 표로 20대 총선 66만여 표의 2배 가까이로 늘었다. 비례대표 후보를 낸 정당 수가 14개 증가했고, 투표용지 길이도 15cm가량 길어진 것이 주된 요인으로 분석됐다.
▷그렇다고 이런 불편을 감수할 만큼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순기능을 하는지도 의문이다. 21대 총선에서 35개 정당 중 비례대표 당선자를 낸 정당은 5개에 불과했고, 비례 의석 대부분을 거대 양당의 위성정당이 차지했다. 소수 정당의 원내 진출을 늘린다는 이 제도의 본래 취지가 무색해졌다. 14개 정당은 0.1%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미한 지지율을 얻었다. 이름을 처음 듣는 정당이 대부분인 이번 총선 역시 비슷한 양상이 반복될 소지가 크다. 긴 투표용지를 만드느라 종이만 낭비하고, 174억 원을 들여 도입한 신형 분류기와 심사계수기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허무한 결과로 끝날 수도 있다.
▷이런 문제점들은 4년 전에 이미 다 드러났고, 여야 모두 개선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다. 민주당은 한동안 이런저런 방안을 고민하는 듯하더니 결국 ‘현상 유지’를 택했고, 이를 비판하던 국민의힘은 되레 민주당보다 먼저 위성정당을 만들었다. 총선이 끝나면 ‘떴다방 선거’가 돼버린 비례대표 선거를 비판하는 여론이 다시 한번 분출할 것이다. 이번에는 말로 끝나서는 안 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3-18(월) 日 ‘금리 있는 세계’로 복귀하나

일본의 중앙은행인 일본은행(BOJ)이 오늘부터 이틀간 열리는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마이너스 금리’를 중단할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일본은 버블 붕괴에서 시작된 30여 년의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하락)을 극복하기 위해 단기금리를 ―0.1%로 유지해 왔다. 이달 결정되지 않더라도 BOJ의 마이너스 금리 종료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BOJ는 2007년 2월 이후 금리를 계속 낮췄다. 한 번도 올린 적이 없다. 2016년 2월에는 결국 금리가 바닥을 뚫고 마이너스로 떨어졌다. 은행에 돈을 넣어두면 손해가 나니 대신 더 투자하고, 더 쓰라는 의도였다. 하지만 버블 붕괴 시절 자산가치 폭락을 경험한 일본인들은 지갑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새 엔화 가치가 하락하고 성장률도 바닥을 헤매면서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은 한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러던 일본이 달라졌다. 작년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3.1%로 41년 만에 최고로 높아졌다. 성장률도 1.7%로 1.4%인 한국보다 높았다. 디플레 늪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신호가 잇따르면서 일본 정부와 BOJ는 마이너스 금리 중단을 위한 ‘마지막 시금석’으로 임금 상승률에 주목해 왔다. 근로자들의 임금이 물가 이상으로 오르지 않으면 결국 소비만 위축돼 경제가 다시 고꾸라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 최대 노조인 일본노동조합총연합이 올해 기업들과의 임금협상(춘투·春鬪) 결과를 중간 집계해 내놓은 평균 임금 인상률은 5.28%. 1991년 이후 처음 등장한 5%대 인상률이다. ‘관제 춘투’란 말이 나올 만큼 정부는 임금 대폭 상승을 독려했고, 엔저로 인한 수출 호조와 사업구조 개선으로 실적이 나아진 일본 기업들이 적극 호응했기 때문이다.
▷8년여 만에 일본이 ‘금리 있는 세계’로 복귀하는 건 경제가 정상화된다는 신호다. 하지만 다른 쪽에서 피치 못할 부작용도 생긴다.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260%나 되는 국가부채가 제일 큰 문제다. 일본 정부 한 해 예산의 4분의 1에 이르는 국채 이자 부담이 금리 인상으로 증가하기 때문이다. BOJ가 금리를 올리더라도 수준은 0∼0.1%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이 많은 이유다.
▷미국, 유럽연합(EU)이 이르면 올해 6월부터 기준금리를 낮추고, 일본은 반대로 금리를 높인다면 일본으로 글로벌 자금이 몰리면서 달러, 유로에 비해 엔화 가치가 상대적으로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엔화와 비교한 원화 가치도 약세로 돌아설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 기업과 해외에서 경합하는 한국 수출 기업엔 반가운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뒤늦게 일본 여행을 준비하는 이들이라면 씀씀이를 좀 줄여서 계획을 짤 필요가 있겠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3-19 매크로 돌린 암표상 처벌

옛날 야구장이나 콘서트장 앞에서 웃돈을 주고 암암리에 사고팔던 암표를 요즘 디지털 세대는 ‘플미’(프리미엄) 티켓이라고 부르고, 시간 안 되고 손 느린 사람들은 ‘댈티’(대리 티케팅)를 시킨다. 온라인 공간에서 매크로 프로그램을 이용해 재빨리 티켓을 선점한 뒤 비싸게 되파는 식의 암표가 확산되면서 벌어진 일이다. 컴맹이어도 몇만 원에 프로그램을 구매해 쓸 수 있다 보니 티켓 예매뿐만 아니라 대학교 수강 신청, 캠핑장 예약 등에도 매크로가 활용된다고 한다.
▷매크로는 자주 사용하는 여러 개의 명령어를 하나로 묶어 자동 반복 작업을 시키는 프로그램이다. 통상 티켓을 예매하려면 사이트 로그인→부정사용 방지 문자 입력→좌석 선택→결제 등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매크로를 동원하면 클릭 한 번으로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다. 몇 년 전부터는 보안 절차를 무너뜨리는 자체 매크로를 개발하는 건 물론이고 예매 총책부터 티켓 운반책, 자금 모집책 등을 두고 표를 싹쓸이하는 조직화된 암표상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이렇다 보니 ‘피케팅’(피가 튈 만큼 치열한 티케팅)이 벌어지는 공연이나 스포츠 경기의 암표는 부르는 게 값이다. 지난달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서울시향 얍 판 츠베덴 음악감독의 협연 연주회는 예매 창이 열린 지 1분 만에 매진되더니, 당일 중고거래 사이트에 15만 원짜리 R석 티켓이 100만 원 넘는 암표로 등장했다. 롤드컵(리그오브레전드 월드 챔피언십) 결승전은 400만 원, 가수 임영웅 콘서트는 500만 원까지 암표 가격이 치솟았다. 부모님을 위해 효도 한번 해보려던 자녀들이 엄두도 못 낼 금액이다.
▷늦었지만 이달 22일부터 ‘매크로 암표상’이 처벌 대상이 된다. 개정된 공연법에 따라 매크로를 동원해 사재기한 공연 티켓을 팔다 적발되면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 원 이하 벌금이 부과되는 것이다.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도 최근 국회 문턱을 넘어 이르면 8월부터 스포츠 경기 암표를 팔다 적발돼도 같은 처분을 받는다. 하지만 법의 그물이 성글어 벌써부터 실효성이 크지 않을 거라는 얘기가 나온다.
▷매크로가 사용됐는지 확인하기가 어려운 데다 암표 몇 장만 팔아도 벌금을 충당할 수 있을 정도로 처벌 수위가 낮은 탓이다. 최근 공연 현장에서 ‘본인 확인’을 강화하자 암표상들이 제3의 아이디로 예매한 뒤 구매자 아이디로 곧장 바꾸는 ‘아옮’(아이디 옮기기)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속속 만드는 실정이다. 일본, 대만처럼 아예 제도적으로 티켓을 웃돈 주고 판매하는 것 자체를 금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K컬처의 위상은 세계적 수준으로 높아지는데 암표를 뿌리 뽑을 법과 제도는 언제나처럼 뒤늦게 따라오고 있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3-20 바이든의 ‘자학 개그’

16일 오후 10시 미국 워싱턴 그랜드하이엇호텔에서 열린 만찬 무대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올라섰다. 바이든은 시계를 힐끔 보며 말문을 열었다. “내 취침 시간보다 6시간이나 지났네요(Six hours past my bedtime).” 좌중에서 폭소가 터졌다. 82세인 그의 재선 도전에 고령 논란이 커지자 ‘자학 개그’로 받아친 것이었다. 바이든은 이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78)을 겨냥했다. “민주당과 공화당 대선 후보가 정해졌는데 한 명은 너무 늙은 데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다. 다른 한 명이 바로 나다.”
▷이날 행사는 미국 중견 언론인들이 대통령 등 권력자들을 초청해 격의 없이 소통하는 ‘그리드아이언(Gridiron)’ 만찬이다. 1885년 시작된 이후 역대 대통령 대부분이 초청됐다. 세계 초강대국 지도자인 미국 대통령도 이때만큼은 ‘최고 폭소 책임자(CFO·Chief Fun Officer)’로서 면모를 드러내는 게 중요하다. 잘만 하면 야당과 국민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전세를 반전시킬 기회로 만들 수 있다.
▷“오늘밤, 사상 최초로 저의 출생 비디오를 공개합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2011년 이 만찬에서 중대 발표를 했다. 당시 트럼프 등 보수 인사들이 오바마 출생지 의혹을 제기하며 오바마는 아프리카 케냐에서 태어나 선거법상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던 때였다. 오바마의 엄중한 표정에 만찬장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곧 대형 화면에 영상이 재생됐다. 아프리카 평원에서 새끼 사자가 태어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의 한 장면이었다. 배꼽을 잡는 참석자들 사이에서 트럼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후 7년 뒤인 2018년 트럼프 역시 같은 무대에 섰다. 행사 며칠 전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 당시 백악관 선임고문이 족벌정치 논란 끝에 기밀 접근권을 박탈당했는데 트럼프는 이를 빗대 인사말을 했다. “늦게 와서 미안합니다. 사위가 보안 검사를 통과하지 못해 오래 걸렸네요.” 트럼프는 당시 참모들의 연이은 사퇴에 대해 “요즘 백악관을 떠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다음은 누굴까. 멜라니아(영부인)일까”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마이크만 들고 서서 말로 관객을 웃기는 스탠드업 코미디는 미국에서 웬만한 가수 콘서트 못지않은 인기 공연이다. 이런 문화가 정치에도 투영돼 유머감각은 정치인의 자질 중 하나로 평가된다. 미 대선에서도 “내가 낙선하면 피바다가 될 것(트럼프)” “트럼프는 히틀러 앵무새(바이든)” 같은 험한 말들이 오가지만 가끔 등장하는 자학 개그는 격해진 긴장을 풀어주는 순기능이 있다. 상대의 정곡을 찌르고 유권자의 공감을 얻는 데도 촌철살인이 담긴 유머는 위력을 발휘한다. 우리 정치에도 다 같이 빵 터지는 순간들이 많아지면 막말과 혐오의 언어가 조금은 줄어들 것이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3-21 “대파 한 단에 875원이면 합리적 가격”

“그래도 875원이면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생각된다.” 18일 서울 서초구 농협 하나로마트 양재점을 찾은 윤석열 대통령이 대파 한 단(1kg) 가격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농협유통 대표가 “지난해 생산량 부족으로 대파가 1700원 정도 하는데 (현재) 875원에 판매 중”이라고 설명한 뒤에 나온 평가였다. 4000원대에 구입하던 소비자들은 “도대체 어디서 살 수 있는 거냐”며 의아해했다. 1000원 정도인 소포장 손질 대파와 헷갈린 것 아니냐는 반응도 나왔다.
▷윤 대통령이 이날 마트를 방문한 것은 민생경제점검회의에 앞서 현장 물가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대통령에게 소개된 875원짜리 대파 한 단은 모든 지원을 끌어모아야 가능했다. 대형마트 권장판매가격 4250원에서 납품단가 지원 2000원, 농협 자체 할인 1000원, 정부 할인(30%) 쿠폰 375원을 반영했다. 생산단가를 낮춘 게 아니어서 농민들에게 피해가 가는 건 아니지만 단순히 가격만 보면 ‘합리적’인 수준이 아니라 파격적이다. 2020년 도매가격이 1000원을 밑돌자 농민들은 생산비도 못 건진다며 대파밭을 갈아엎었다.
▷이 매장이 대파 한 단을 875원에 팔기 시작한 것은 윤 대통령이 방문한 18일부터였다. 1인당 5단씩 하루 1000단을 한정 판매했다. 이달 11∼13일엔 농림축산식품부 지원 20% 할인 행사라며 2760원에 팔았다. 14일부터 1250원으로 가격을 낮췄다가 대통령 방문 당일에는 정부 할인 30%를 반영해 875원으로 내렸다. 원래는 20일까지 사흘 동안만 할인을 진행하려 했지만, ‘대통령 방문 특가’ 논란이 커지자 27일까지로 연장했다.
▷최근 금값이 된 과일, 채소 때문에 빈 장바구니를 든 서민들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채소류 물가는 1년 전보다 12.2% 올랐다. 주요 산지인 전남 등에 한파와 폭설 피해가 이어지며 파 가격은 전년보다 50.1%, 배추값도 1년 전보다 21.0% 올랐다. 대통령이 2022년 8월 이후 1년 7개월 만에 마트를 찾아 물가 대책을 논의한 것도 이 때문이다. 대통령에게 파격적으로 싼 특가 상품을 보여주는 건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부는 농축산물 물가를 잡기 위해 납품단가와 할인 지원, 수입 과일 관세 인하 등 총력전을 펴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돈을 풀어 가격 낮추기만 시도할 순 없다. 농산물 생산 및 유통구조 안정화 등 근본적인 대책을 찾아야 한다. 대통령이 찾은 마트는 다음 주부터 대파를 제외한 대부분 농산물 가격을 인상한다고 한다. 대통령 방문 같은 보여주기식 깜짝 이벤트만으론 물가를 잡을 수 없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3-22 “손해 봐도 미리 타자” 국민연금 조기 수급 급증

국민연금을 애초 받을 나이보다 1∼5년 앞당겨 일찍 타가는 걸 조기노령연금이라고 한다.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퇴직한 사람들의 노후 소득을 보장해주기 위해 1999년 도입됐다. 국민연금 가입 기간이 10년 넘고 소득이 일정 수준 이하면 신청할 수 있지만, 미리 당겨 받는 만큼 일종의 페널티가 있다. 1년 일찍 받을 때마다 연금액이 연 6%씩 깎여 3년 먼저 받으면 18%가, 5년 미리 받으면 30%가 감액된다.
▷원래 받을 나이가 됐다고 연금액이 다시 올라가지도 않는다. 5년 일찍 받으면 당초 받을 연금의 70%를 죽을 때까지 받는다는 얘기다. 조기노령연금을 ‘손해연금’으로 부르는 이유다. 그런데 이렇게 손해를 보면서도 조기에 연금을 타가는 사람이 지난해 11월 현재 85만 명에 육박했다. 10년 새 갑절 이상으로 불어난 규모다. 이 속도라면 조기연금 수급자는 올해 96만 명을 거쳐 내년이면 100만 명을 넘어선다고 한다.
▷조기 수령자가 급속도로 늘어나는 건 은퇴는 점점 빨라지는데 노후 준비는 턱없이 모자란 탓이 크다. 지난해 한국의 55∼64세가 가장 오래 일한 직장을 그만둔 나이는 평균 49.4세에 그쳤다. 법정 정년은 60세이지만 현실 정년은 49세라는 뜻이다. 이런데도 은퇴하지 않은 가구 중 노후 준비가 잘된 가구는 8%가 안 되고, 이미 은퇴한 가구도 열에 여섯은 생활비가 부족한 형편이다. 은퇴 후 먹고살기가 빠듯해 국민연금이라도 당겨 받아야 할 처지라는 얘기다.
▷여기에다 국민연금을 받는 나이마저 늦춰지면서 은퇴 후 ‘소득 크레바스’(소득 절벽)가 길어지고 있다. 연금 수급 나이가 과거엔 법정 정년과 똑같은 60세였다가 2013년부터 5년마다 한 살씩 늦춰지도록 변경됐다. 마침 지난해도 연금 수급 연령이 62세에서 63세로 한 살 늦춰졌는데, 원래 연금을 탈 순번이던 1961년생이 1년을 더 기다리지 못하고 조기연금을 대거 신청했다고 한다. 수급 연령이 늦춰지는 5년마다 조기노령연금 신청이 눈에 띄게 늘어나는 배경이다.
▷앞으로 1965년생, 1969년생 등 ‘낀 세대’가 1년 더 길어질 소득 공백기를 견디지 못하고 조기에 연금을 타갈 여지가 적지 않다. 문제는 지난해 조기노령연금 평균 수령액이 월 66만 원 정도에 그친다는 점이다. 은퇴 후 부부에게 필요한 최소 생활비(월 231만 원)의 30%도 안 되는 수준이다. 안 그래도 생애평균소득 대비 국민연금으로 받는 돈이 40%에 불과한데, 미리 타간다고 페널티까지 받으니 노후 버팀목이 되기에 한참이나 부족한 것이다. 쥐꼬리 수준의 공적연금 안에서도 빈익빈 부익부가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씁쓸하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3-23(토) “살 자격 있는 고객에만 팝니다” 고소당한 에르메스

에르메스백은 명품백의 끝판왕이다. 그중에서도 최고 인기 라인은 버킨백과 켈리백으로 연간 구매 한도가 2개여서 ‘쿼터(quota)백’으로 불린다. 나머지 ‘아더(other)백’은 6개까지 살 수 있다. 버킨백은 제일 싼 게 1500만 원인데 벨트, 스카프, 신발 같은 비인기 제품을 수천만 원어치 사들인 ‘실적’을 쌓아야 구매 자격이 주어진다. 살 사람 골라 파는 에르메스의 갑질을 참지 못한 미국 소비자들이 독점금지법 위반이라며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에 참여한 캘리포니아 거주 여성은 에르메스 매장에서 수만 달러를 쓴 뒤 버킨백 구입을 문의했지만 “에르메스의 사업을 꾸준히 지원해준 고객만 살 수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 다른 원고도 “에르메스 액세서리 등을 사야 버킨백의 잠재적 고객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소송에 참여했다. 이들은 수요보다 훨씬 적은 공급으로 시장 지배력을 강화한 후 이를 이용해 다른 제품과 ‘묶음 판매’하는 것은 독점금지법 위반이라고 주장한다.
▷에르메스가 소량 생산으로 수요를 제한하는 ‘디마케팅 전략’을 통해 시장 지배력을 유지하는 것은 맞다. 에르메스백은 3년 과정의 사내 가죽학교와 2년의 수련 과정을 거친 장인들이 만드는데 버킨백과 켈리백은 이후 수년간 경력을 추가로 쌓아야 만들 수 있다. 한 사람이 모든 공정을 전담하느라 한 달에 4개 정도 만든다고 한다. 연간 생산량은 공개하지 않는다. 대기자 명단에 오르기도 어렵지만 올라도 1년 정도 기다려야 한다. 희소템이다 보니 투자 가치도 높다. 1500만 원짜리 버킨백의 중고가는 3000만 원이 넘는다.
▷버킨백을 원하는 사람들은 묶음 판매를 ‘실적 쌓기’라 부른다. 온라인에는 실적 쌓기 요령을 묻고 답하는 콘텐츠가 넘쳐난다. “실적템 5000만 원어치 채웠는데 얼마나 더 사야 버킨백 구경할 수 있나” “액수도 중요하지만 실적템으로 가구나 남자 코트 같은 악성 재고품을 골라야 셀러가 좋아한다”는 식이다. “4만 달러 넘게 썼더니 달래기용으로 아더백만 보여주고 쿼터백은 감감무소식이다” “6만 달러 썼더니 ‘버킨백 한번 보시겠어요’ 하더라”는 경험담도 많다.
▷에르메스의 묶음 판매가 불법인지에 대해 법조계 시각은 회의적이라고 뉴욕타임스가 전했다. 반독점법은 주로 필수품에 관한 규정으로 모든 사람이 살 필요가 없는 사치품엔 적용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명품업계에선 “원한다고 가질 수 있다면 누가 탐내겠느냐”며 “버킨백을 버킨백답게 하는 건 아무나 가질 수 없다는 점”이라고 한다. 버킨백 한 번 ‘알현’하려고 수천만 원 써가며 ‘호갱’ 노릇 하는 소비자들 얘기를 들으니 4만9900원짜리 자라백을 멘 ‘1조 원의 사나이’ 오타니 쇼헤이의 아내가 더 멋있어 보인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3-25(월) ‘국왕도, 며느리도 암’ 신비주의 포기한 英 왕실

영국 윌리엄 왕세자의 부인 캐서린 왕세자빈(42)은 영국인들에게 왕실의 완벽함을 상징해온 인물이다. 캐서린은 6년 전 셋째인 루이 왕자를 낳은 날 출산 7시간 만에 빨간색 드레스에 하이힐 차림으로 병원을 나와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첫째 조지 왕자, 둘째 샬럿 공주가 태어난 날에도 캐서린은 말끔하게 단장한 모습으로 등장해 로열 베이비를 건강하게 출산한 세손빈으로서 대중의 기대에 부응했다.
▷하지만 그가 22일 소셜미디어에 올린 영상메시지는 영국은 물론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1월 복부 수술 후 검사에서 암이 발견돼 화학치료를 받고 있다.” 암의 종류나 단계를 밝히진 않았지만 암 진단 사실을 직접 공개한 것이다. 올 들어 공개 석상에서 자취를 감춘 캐서린을 둘러싸고 최근 가족사진 편집 논란이 확산되며 건강 위중설, 부부 불화설 등 온갖 루머가 돌던 와중에 나온 발표였다.
▷왕실 인사들의 건강 상태를 공개하는 건 오래전부터 왕실의 금기였다. 약한 군주로 비쳐 외세 침략의 빌미가 될 수 있고, 대내적으론 민심의 혼란을 부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왕실의 신비주의가 그런 명분으로 유지됐다. ‘군주제는 대낮의 햇빛을 받으면 마법이 사라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1948년과 1950년 임신을 했을 때 왕실은 “여왕이 흥미로운 상태(interesting condition)에 있다”고만 했고, 여왕의 어머니가 1960년대 암을 앓았던 사실도 40년 뒤에야 전기 작가를 통해 알려졌다.
▷찰스 3세 영국 국왕이 지난달 암 투병 사실을 공개했을 때 역사학자들이 “다른 군주들은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일”이라고 평가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발표가 나온 데에는 국민들이 왕족의 일거수일투족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왕실의 치부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순식간에 확산되는 환경에서 암을 숨기는 게 불가능하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서거 이후 군주제 지지 여론이 약화되면서 “불평도 하지 않고, 설명도 하지 않는다”는 왕실의 오랜 방침을 고수하기도 어려워졌다. 캐서린 왕세자빈 역시 암 치료를 받는 병원의 직원들이 자신의 의료기록에 접근한 사실이 알려지자 결국 카메라 앞에서 서게 됐다는 분석이 많다.
▷왕실 신비주의가 통하기 어려운 요즘 왕족들은 사치와 안락함을 누리는 대가로 대중의 동경과 비난을 한 몸에 받는 공적인 존재가 됐다. SNS 시대에 왕관의 무게를 견딘다는 건 사생활의 자유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도 포함한다. 다만 산악자전거를 타고 럭비를 즐길 정도로 건강했던 캐서린 왕세자빈의 부쩍 수척해진 얼굴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만들어진 이미지의 완벽한 왕실보다 국왕과 며느리가 줄줄이 암 치료를 받게 된 진솔한 모습의 왕실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3-26 ‘대입 우회로’ 된 검정고시, 10대 응시생 역대 최대

1950년부터 시행된 고졸 검정고시는 가난해서, 아파서 정규 교육에서 소외된 이들이 제2의 인생에 도전할 기회였다.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합격한 신문 배달 소년, 뒤늦게 만학의 꿈을 이룬 어머니,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장애인…. 역경을 극복한 검정고시 합격자들의 사연은 절절하고도 치열했다. 가난이나 여식(女息) 차별로 못 배운 한을 풀기 위해 응시했던 과거와 달리 요즘 검정고시는 되레 서울 강남·서초 지역 고교 학생의 응시가 늘고 있다고 한다. ‘고교 자퇴→검정고시→수능’ 코스가 대학 진학의 우회로로 통하고 있어서다.
▷4월 고졸 검정고시에 응시한 10대 학생(13∼19세)이 1만6332명으로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2022년 4월 1만2051명에 비하면 2년 새 35%가량 늘었다. 자퇴하고 수능에 올인한 고등학생들이 늘어난 때문으로 분석된다. 고졸 검정고시는 국어 수학 영어 사회 과학 한국사 6과목과 선택 과목 1과목을 포함해 7과목이 출제된다. 학교 내신보다 공부할 과목이 줄고, 한 해 두 차례 응시가 가능하기 때문에 현역 고등학생이라면 어렵지 않게 합격한다.
▷특히 내신 경쟁이 치열한 서울 강남·서초 고교생들이 내신 성적이 부족하다 싶으면 검정고시를 보고 수능에 올인하는 전략을 선택하고 있다. 2022년 전국 고교생의 학업 중단율은 1.9%인 데 반해 서울 강남·서초 지역 고교 중에는 5%에 이르는 곳도 있었다. 상대평가 과목이 몰려 있는 고교 1학년 성적을 2, 3학년에 뒤집기 어렵다 보니 대입 경쟁에서 밀려났다고 판단하면 고1에 일찌감치 자퇴하는 것이다. 이듬해 검정고시와 수능을 보고 성적이 잘 나오면 대학 진학을 앞당기고, 그렇지 않으면 1년 더 공부해 수능을 한 번 더 친다. 학교에서만 배울 수 있는 인성 교육이나 교우 관계를 포기하고서라도 오로지 대입을 위해서만 내달리는 것이다.
▷국내에서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홈스쿨링, 대안학교, 국제학교가 늘어난 이유도 있다. 이 학교들을 졸업한 학생들이 국내 대학에 진학하려면 검정고시를 치르고 고졸 학력을 인정받아야 한다. 반복 응시도 늘고 있다 한다. 대학마다 다르지만 검정고시 성적이 95점 이상이면 보통 내신 2, 3등급을 받을 수 있다. 중위권 학생들은 반복 응시로 성적을 올린 뒤 내신 위주 수시 전형에 도전한다.
▷그 덕분에 검정고시 전문학원이나 검정고시 코스를 개설한 재수종합학원이 붐비고 있다. 부모가 매달 300만 원에 달하는 재수종합학원 비용을 댈 수 있다면, 아이는 고학의 상징이던 검정고시를 대입에 활용해서라도 학교 밖에서 길을 찾을 수 있다. 공교육이 포섭하지 못한 아이들이 사교육으로 몰려가는 동안, 여전히 학교가 전부인 아이들이 있다. 공교육이 따뜻하게 품고 제대로 가르쳐야 할 대상은 이런 아이들일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3-27 행동주의 펀드의 표적 된 韓기업 4년 새 10배로

행동주의 펀드의 장단점이 있는데도 한국에서 유독 ‘기업 사냥꾼’이라는 나쁜 이미지가 굳어진 건 외국계 펀드의 ‘먹튀’가 잇따르면서다. 지배구조 개선을 명분 삼아 기업을 압박한 뒤 주가가 오르면 막대한 시세 차익을 챙겨 떠난 사례가 반복된 것이다. 소버린이 SK그룹을 공격해 1조 원 가까운 차익을 올렸고, 칼 아이칸은 KT&G를 상대로 1500억 원을 벌었다. 엘리엇매니지먼트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제동을 걸더니 한국 정부를 상대로 1조 원짜리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을 제기했다.
▷요즘 개미투자자들에게는 단 1%의 지분으로 K팝 지형을 뒤흔든 토종 행동주의 펀드가 유명하다. 이창환 대표가 이끄는 얼라인파트너스는 SM엔터테인먼트와 라이크기획 간의 계약을 문제 삼아 경영권 분쟁을 촉발시키더니 ‘이수만 없는 SM’의 전환점을 만들어냈다. 이보다 앞서 한진그룹과 경영권 분쟁을 벌인 KCGI, 일명 강성부펀드는 한진 오너 일가의 갑질 논란에 대한 사회적 공분을 등에 업고 이름을 날렸다. 한때 개미들 사이에선 ‘강따’(강성부 따라잡기) 투자법이 유행하기도 했다.
▷그런데 행동주의 펀드들의 표적이 되는 한국 기업이 갈수록 늘고 있다고 한다. 한국경제인협회가 낸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을 받은 한국 기업은 77곳으로, 4년 만에 10배 가까이 급증했다. 조사 대상 23개국 가운데 미국, 일본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규모다. 한국 기업들이 팬데믹을 거치며 역대급 실적을 올렸는데도 주가는 저평가된 곳이 많다 보니 국내외 펀드들의 먹잇감이 되는 것이다.
▷올 들어 정부가 증시 저평가를 해소하겠다며 ‘기업 밸류업’ 대책을 내놓자 이에 편승한 행동주의 펀드의 공습이 더 거세지고 있다. 3월 주주총회에서 배당·자사주 매입 확대, 경영진 교체, 감사위원 선출 등을 요구한 펀드가 한둘이 아니다. 전략도 더 치밀해졌다. 늑대가 무리 지어 먹잇감을 사냥하듯 소수 지분을 가진 펀드들이 뭉쳐 한 기업을 공격하는 ‘울프 팩’ 전술이다. 삼성물산 주총에선 영국계 시티오브런던 등 5개 펀드가 연합해 회사가 계획한 것보다 8000억 원이나 많은 주주 환원을 요구하다가 표 대결에서 졌다.
▷해외에서는 행동주의 펀드가 기업의 사회·환경적 책임을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는 긍정적 평가도 받지만, 단기 주가 부양에만 매달려 경영권을 위협하고 기업의 성장 동력을 갉아먹는 펀드가 적지 않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차등의결권, 포이즌필 같은 투기적 펀드에 맞설 경영권 방어 장치는 여전히 국내에 도입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통 크게 주주 환원을 확대하라고 하는 건 총 없이 전쟁터에 나가라는 말이나 다를 바가 없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3-28 부모에게 자녀란 ‘돈 많이 드는 인생의 기쁨’

한국인은 왜 아이를 낳지 않는가. 그 이유야 차고도 넘치겠지만 한국인의 가치관 측면에서 이를 분석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인구보건복지협회가 가임기(20∼44세) 미혼과 기혼 남녀를 대상으로 출산과 자녀에 대한 가치관을 나열하고 동의하는 정도를 물은 것이다. ‘성장기에 비용이 많이 든다’는 데 동의한 비율(96%)이 가장 높았다. 이어 ‘자녀를 키우며 정신적으로 성장한다’ ‘자녀의 성장은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이다’라는 데 각각 92%, 83%가 동의했다. 부모에게 자녀란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인생의 기쁨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자녀 양육 비용이 많이 든다’는 데 동의하는 비율은 혼인 여부나 성별에 따른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자녀의 성장이 인생의 기쁨’이라는 데는 기혼 남녀가 높은 비율로 동의했다. 반면 미혼 남성은 82%, 미혼 여성은 77%만 동의했다. ‘자녀=기쁨’에 동의하지 않으므로 출산을 기피한다는 해석도, 자식을 낳아 봐야만 그 기쁨의 실체를 알 수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선후 관계는 알 수 없으나 자녀에 대한 가치관이 저출산의 변수라는 것은 분명하다.
▷자녀를 낳지 않겠다고 응답한 비율은 자녀가 기쁨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 집단일수록 높았다. 미혼 여성의 21%가 자녀를 낳을 생각이 없었고, 이어 미혼 남성(13.7%), 기혼 여성(6.5%), 기혼 남성(5.1%) 순이었다. 이는 희망 자녀 수에도 영향을 미쳤다. 기혼 남성은 1.79명을 낳고 싶어 했고 미혼 여성은 1.43명을 낳고 싶어 했다.
▷한국에서 자녀가 주는 정서적 가치를 마음껏 누리기에는 출산과 양육에 드는 비용이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돈 먹는 하마’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자녀를 만 19세까지 키우는 데 2억5200만 원이 들 것으로 예상한 최근 조사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조사는 경제적인 부담이 해소되더라도 자녀에 대한 가치관이 바뀌지 않으면 출산율이 반등하진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2021년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가 17개국을 대상으로 ‘당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을 물었더니 13개국에서 ‘가족’을 1위로 꼽았다. 한국만 ‘물질적 안녕’이라고 답한 것과 비교된다.
▷흔히 부모의 사랑은 무조건적 사랑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다 보면 그 반대도 성립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식은 부모의 지위나 배움에 상관없이 절대적인 사랑을 주고, 아무 조건 없이 미숙함을 용서한다. 그런 관계를 경험하고 나면 자녀가 인생의 기쁨이라는 데 동의하기 마련이다. 전례 없는 한국의 저출산은 아이를 낳고 기르기 힘든 환경을 개선해 나가되 자녀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답도 다시 찾아야만 바뀔 수 있을 것 같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3-29 ‘공관 주재관에 갑질’ 신고당한 주중대사

미중일러 ‘4강’ 대사는 전직 총리나 장관, 중진 의원, 고위 외교관 등이 주로 임명되는 자리다. 그만큼 외교적 비중이 크고 공관 직원, 교민 관리도 중요해서다. 그런데 정재호 주중 한국대사가 부하 직원에게 갑질을 했다는 신고가 접수돼 외교부가 사실관계 확인에 나섰다. 소규모 해외공관에서는 간혹 벌어지는 일이지만 4강 대사에게 갑질 논란이 제기된 전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베이징 주중대사관에 근무 중인 주재관 A 씨는 이달 초 ‘정 대사에게서 폭언을 들었다’며 정 대사의 발언을 녹음해 외교부에 제출했다고 한다. A 씨는 다른 부처에서 파견된 공무원으로, 정 대사가 수차례 인신공격성 발언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 대사는 “일방의 주장”이라고 반박했고, 의혹의 진위는 조사를 통해 확인될 것이다. 하지만 대사의 입이 문제가 돼 갑질 신고가 접수됐고,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는 것 자체가 가벼이 넘길 문제가 아니다.
▷서울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그는 2022년 8월 윤석열 정부 초대 주중대사로 발탁됐다. 학자가 4강 대사로 직행한 것은 이례적이어서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업무 수행을 놓고 구설이 이어진 것이 사실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현지 특파원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월례 브리핑 방식이다. 미리 이메일로 받은 질문에 한해 준비된 답변만 읽고 끝낸다. 취임 직후 특파원 간담회에서 일부 언론이 정 대사의 발언을 ‘관계자’가 아닌 ‘실명’으로 보도한 것에 항의하며 이런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고 한다. 본인은 공직자이고 언론은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는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을 망각한 것이다.
▷정 대사가 중국 정부와 원활하게 소통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취임 이후 10개월간 네트워크 구축비를 이용해 중국 외교부와 접촉한 것은 단 1건뿐이었다고 한다. 지난해 중국 정부가 탈북민을 대거 강제 북송했을 때도 대사관은 모르고 있었다. 대사 취임 일성으로 “무엇보다 한중 간 안정적 소통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던 그의 다짐이 무색하다. 중국통인 그가 외교력을 발휘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목소리도 이제는 쏙 들어갔다.
▷주중 한국대사관은 지난해 윤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 대해 비판적 기사를 쓴 중국 관영매체들에 항의 서한을 보내고 이를 국내 언론에 공개해 중국 측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외교가에선 한중 관계가 냉각된 상황이지만 중국에 할 말은 하되 조용히, 효과적으로 전달했어야 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그는 재임 1년 반 동안 대중 외교에서 우군이 돼야 할 직원, 언론, 교민도 끌어안지 못한 듯하다. 학자로서는 손꼽히는 중국 전문가라지만 외교관으로서의 자질에는 큰 의문부호가 남는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3-30(토) 쌍둥이 버스, 묵언 유세… 위성정당 선거운동 꼼수

‘한 당인 듯 한 당 아닌’ 총선 선거운동이 4년 전에 이어 다시금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 4·10총선을 앞두고 각각 국민의미래와 더불어민주연합이라는 위성정당을 또 꾸린 탓이다. 공직선거법은 후보자 등이 다른 정당을 위해 선거운동을 하는 걸 금한다. 매수된 후보가 상대 후보를 위해 뛰는 등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다. 한데도 모(母) 정당과 위성정당이 연합해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한 몸처럼 선거운동을 벌이는 장면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4년 전 민주당과 그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은 똑같은 디자인의 선거유세용 ‘쌍둥이 버스’를 운영하다 선관위로부터 시정명령을 받았다. 비례대표 후보자는 기호가 적힌 유세 차량을 사용할 수 없는데, 두 정당의 기호이면서 선거일(4월 15일)을 의미하는 1과 5를 버스에 커다랗게 적는 꼼수를 썼던 것이다. 이번 선거에선 기호를 빼고 쌍둥이 버스를 만들었다. 모 정당과 위성정당의 기호(이번 총선에선 1, 3번)를 나란히 보여주는 수법은 대신 ‘더 몰빵 13 유세단’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
▷요즘 유세 현장에서 국민의힘을 지원하러 나온 국민의미래 비례대표 후보들은 입은 있는데 말은 없다. 어법에도 맞지 않는 “국민 여러분 미래합시다” 등의 문구가 쓰인 손팻말을 든 채 멀뚱히 섰을 뿐이다. 침묵 시위를 벌이는 것도 아니고 묵언 유세다. 물론 선거법 위반을 피하려는 꼼수다. 지난 총선에서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의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 원유철 대표가 당 기호를 가리려고 점퍼를 뒤집어 입거나 가슴에 스티커를 붙였던 것과 비슷한 촌극이 재현되는 모양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위성정당을 직접 홍보할 수 있고,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못 한다. 한 위원장은 불출마했지만 이 대표는 지역구에 출마한 후보자 신분이기 때문이다. 4년 전 이해찬 민주당 대표,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의 경우와는 반대다. 그러나 이재명 대표는 최근 공개 석상에서 “더불어민주연합 비례 24번 서승만이었습니다. 24번까진 당선시켜야지요”라고 말했다가 선거법 위반 논란이 일었다. 국민의미래 후보도 ‘불러서는 안 될’ 국민의힘 후보 이름을 연호하다 지적을 받았다. 이 당이나 그 당이나 마음속으론 어차피 한 당이니 헷갈리기도 할 것이다.
▷지난해 7월 헌법재판소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합헌으로 판단하면서 거대 정당의 위성정당 창당을 막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데도 두 거대 정당은 방지책은커녕 또다시 위성정당을 만들고 선거법을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피해가며 양당 체제만 강화하는 중이다. 입법자들이 앞장서 국민과 법을 농락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가 갈수록 우스워지고 있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