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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의 슬픈 중국10/ <91회>조선 유생들의 한문 실력은 과연 어땠을까? 변방의 중국몽 <9회> - <100회>지린성 북한 노동자 폭동, 변방의 중국몽 <18회>

상림은내고향 2024. 1. 27. 19:19

송재윤의 슬픈 중국10/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 조선일보 2023

2023.10.21

<91회>조선 유생들의 한문 실력은 과연 어땠을까?

변방의 중국몽 <9회>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의 반상도(班常圖). /공공부문

 

한문에 빠졌던 조선 유생들, 무엇을 얻었나?

인간은 언어적 존재이자 정치적 동물이다. 인간은 어디서나 언어를 사용해서 권력을 놓고 싸움을 일삼는다. 언어의 싸움에서 외래어의 사용은 때론 큰 힘을 발휘한다. 어느 사회에서나 언어 실력은 강력한 무기고, 외래어 구사력은 비밀 병기다.

 

조선 유생들은 왜 그토록 중화 문명에 매료되었을까? 실질적인 정치적 이해관계를 배제할 순 없겠지만, 매번 조선 유생의 문집을 들추다 보면 중화 문명을 우러러보고 떠받들었던 그들의 순수한 경외감을 확인하게 된다. 그 경외감의 8할 이상이 중화 문명의 지적 유산이 그 실질적 내용보다는 한문(漢文)이라는 고전 언어로 전수됐기 때문이라면 과언일까.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2-1571)이 임종 직전까지 주자 문집을 들추며 “리도(理到)”의 의미를 고구(考究)했던 이유도 한문이라는 고전 언어 자체의 지배력과 무관할 수 없다. 리도라 하면 뭔가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한데, 한국어로 풀어서 “리가 온다”고 하면 그다지 대수롭잖게 들릴 수 있다. 리(理)를 순우리말로 풀어서 “결”이나 “무늬”라고 하면 더더욱 그 의미가 하찮게 들린다.

 

주변부 지식인들에게 외래어가 내뿜는 마력은 비단 한문에 국한되지 않는다. 한 언어학 연구에 따르면, 현대 영어는 어휘의 29%가 라틴어, 29%가 불어, 26%가 독일어로 구성돼 있다. 소위 고급 영어 문장에는 라틴어나 불어에서 유래한 어휘들이 많이 쓰인다. “ipso facto,” “ad hoc,” “bona fide,” “caveat,” “de facto,” “verbatim” 등은 영어권 사람들이 일상어에서도 흔히 쓰는 라틴어들이다. 라틴어 단어를 섞어 쓰면 유식한 느낌을 풍길뿐더러 때론 힙(hip)하고 쿨(cool)하게 들리기도 한다. 몰라도 생활에 큰 불편은 없지만, 익혀서 잘 쓰면 학계나 비즈니스계나 정치판에서나 매사 유리할 수밖에 없다.

 

캐나다에서 초중고 모두 불어 학교를 나오고 대학에서 그리스 고전학을 전공한 후 현재 한 고등학교에서 불어와 라틴어 등을 가르치고 있는 크리스(Christopher Miller)는 한국인과 결혼하여 한국어도 꽤 잘하고, 한자 공부도 열심히 한다. 언젠가 그는 내게 “어려운 영어 단어는 거의 다 쉬운 라틴어 단어(all the difficult English words are easy Lantin words)”라면서 마찬가지로 “어려운 한국어 단어는 거의 다 쉬운 중국어 단어가 아니냐?”고 물은 적이 있다. 생각할수록 문화 접변에서 발생하는 언어적 위계를 지적하는 날카로운 질문이란 생각이 든다.

 

바다와 대양(大洋), 땅과 대지(大地), 사람과 인간, 나라와 국가, 풀밭과 초원, 사슴뿔과 녹용, 살림살이와 경제생활 등등 순우리말과 한자어를 대비해 보면, 한자어에 학술적 전문성과 공식적 권위가 실림을 부인할 수 없다. 선진 문명의 외래어는 토착어보다 더 고상하고 우아하고 심오하고 문화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같은 의미라도 외래어를 쓰면 교양 있고 박식해 보이는 까닭은 언어가 의상만큼이나 민감한 패션의 매체이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고상한 언어는 그 자체로 타인의 마음을 열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권력이다.

 

<<논어(論語)>> 문구를 순우리말로 풀어서 인용하면 고리타분한 덕담처럼 들릴 수도 있다. 같은 문구를 한문 그대로 읊조리면,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진리의 언어처럼 들린다. “기소불욕(己所不欲)이면 물시어인(勿施於人)이라 했다”고 하면 그럴싸하다. “내가 싫은 건 남에게도 하지 말라!”고 뜻을 풀어서 말하면 뻔한 소리 같다. 옛날 시골 노인들이 입만 열면 문자를 쓰는 까닭은 경전의 언어로서 한문이 갖는 권위에 있다.

 

조선의 유생들은 평생의 노력으로 힘겹게 한문을 익혀서 과연 무엇을 얻었는가? 공리공담에 허송세월했다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한문을 익힌 덕분에 그들은 양반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 사회에서 양반이라면 전답과 가택과 노비를 소유해야 하지만, 경전을 졸졸 암송하는 문화적 교양이 못잖게 중요했다. 필요할 땐 언제든 붓을 들고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유장한 문장을 지을 수 있는 한문 실력이 있어야만 양반 행세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유생들의 한문 실력은?

조선 시대 유생들의 한문 실력이 어느 정도였을까? 그들이 중국의 최고 지식인들만큼 수려하고 정교한 문장을 지을 수 있었을까? 과연 그들이 오늘날 고등 교육을 받은 한국의 교양인이 한글로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 있듯이 거침없이 자유롭게 문장을 지을 수 있었을까?

 

한평생 중국의 유학 전통을 탐구한 두웨이밍(杜維明) 전(前) 하버드대학 교수는 2000년대 초반 왕양명(王陽明)의 󰡔전습록(傳習錄)󰡕을 강독하는 대학원 수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한 한국인 교수에게서 󰡔율곡전서(栗谷全書)󰡕를 선물로 받아서 읽어보았는데, 조선(朝鮮)의 이이(李珥, 1536-1584)가 왕양명과 비교해도 전혀 모자라지 않는 유려한 한문 문장으로 매우 정교한 논리를 펼치고 있어서 실로 감탄했다.”

 

두 교수는 그렇게 이이가 문장력만으로도 당대 동아시아 최고 수준을 자랑했음을 흔쾌히 인정했다. 중국학 대가의 평가라는 점에서 두 교수의 이 발언은 의미심장하지만, 그래도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이는 너무나 비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이가 누구인가? 여덟 살에 시를 짓고, 열세 살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아홉 차례 과거에서 모두 장원으로 발탁되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던 조선이 낳은 최고의 천재 문장가였다. 그런 이이가 두 교수를 감탄하게 할 정도의 수려한 한문 문장을 지었다면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두 교수의 평가가 공정하고 정확하다고 할지라도 이이의 문장으로 조선 유생들의 문장 수준을 가늠할 순 없다.

 

▲이이의 문집 율곡전서(栗谷全書).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도의 전설적인 수학자 라마누잔(Srinivasa Ramanujan, 1887-1920)은 정규교육도 거치지 않았지만 15세부터 혼자 책만 보고 수학의 대가가 되어 해석학, 정수론, 무한급수 분야에서 큰 공헌을 했다. 그렇다고 라마누잔의 수학 실력이 당시 인도 지식인의 수학 실력을 대표한다고 믿을 바보는 없다. 마찬가지로 이이의 한문 문장력을 근거로 조선조 평범한 지식인의 한문 실력을 평가할 순 없다.

 

대다수 조선 유생에게 한문은 평생의 노력으로도 쉽게 넘을 수 없는 높다란 언어의 장벽이었다. 29세부터 46세까지 네 차례에 걸쳐서 명나라 북경을 다녀오고, 또 명나라 사신들을 응접했던 성현(成俔, 1439-1504)은 최후의 저서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우리나라(我國)와 중조(中朝, 중국의 황조[皇朝], 곧 중국)의 차이를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책을 읽을 때 소리마다 토씨를 달아서 읽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배울 수가 없다. 중국 사람들은 말하는 바가 곧 문자라서 따로 소리의 의미를 해석하는 구결(口訣)을 쓰지 않아서 배움이 쉽게 나아간다.”

 

성현의 이 한마디 속엔 변방에 살면서 중원의 중심 문화를 익혀야 하는 조선 유생들의 처절한 고통의 체험이 반영되어 있다. 실시간 인터넷을 통해서 영어권의 일상어를 자유롭게 접할 수 있는 요즘에도 외국에서 자라난 사람들이 자유자재로 영어를 구사하기란 절대로 쉽지가 없다. 천자문(千字文)으로 기초 한자를 익히고 나선 곧바로 유가 경전의 세계로 들어가서 한문을 학습해야 했던 조선 유생들이 과연 한문을 얼마나 자유롭게 쓸 수 있었을까?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 1686-1761) “현이도(賢已圖) 장기놀이.” 견본채색. 31.5 x 43.4 cm. 간송 미술관 소장

 

조선 땅에서 평생 중국 본토의 사람과는 말 한마디 섞을 일 없는 절대다수의 조선 유생들은 오로지 책만 읽고 외는 방법으로 한문을 정복하려 했다. 외국어 학습의 측면에서 본다면, 구어와 완전히 떨어진 문어의 학습은 최악의 공부 방법이다. 대다수 조선 유생은 이이처럼 명문장을 지을 능력도, 과거에 통과할 재간도 없었다.

 

그러한 조선 유생의 고충을 무시하고선 왜 그들이 숭명(崇明) 사상과 소중화(小中華) 의식에 빠졌는지 이해할 수 없다. 변방의 외국인으로서 아무리 익히고 써도 쉽게 한문으로 멋진 문장을 지을 수 없기에 더더욱 중화 문명 최고 지식인들의 한문 문장이 천의무봉(天衣無縫)의 명문(名文)처럼 보이는 것이다.

 

99.9%의 사람들은 모차르트처럼 훌륭한 교향곡을 쓸 수는 없지만, 그의 음악을 감탄하면서 즐길 수 있다. 마찬가지로 대다수 조선 유생은 한문 교육을 통해서 좋은 한문 문장을 읽고 이해하고 인용하고 음미할 수 있는 실력을 갖췄지만, 독특한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창출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할 수 없었다.

 

한평생 노력으로 제아무리 문장을 써도 주자(朱子)처럼 훌륭한 문장을 지을 수가 없다면 주자의 위대함을 칭송하고 그의 인격을 존숭(尊崇)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구어와 유리된 문어로 사유하고 글을 써야 하는 변방 지식인의 불행한 숙명이었다.

 

조선 5백 년 문과 급제자의 총수는 14,600명에 불과했다. 연평균 과거 합격자가 29명 정도였다. 거의 모두가 한평생 유가 경전을 배우고 익혀서 정기적으로 과거에 응시하고 낙방하는 인생을 강요받았다. 그들 대다수는 낙방생의 좌절감에 시달렸기에 도리어 유가 경전의 위대함과 숭고함을 칭송하진 않았을까? 그래야만 낙방으로 점철된 인생이 어리석은 공염불이 아니라 숭고한 구도행으로 인정되는 심리적 보상을 받을 수 있으므로.

 

중국도 마찬가지로 중앙과 변방의 갈등이

한반도의 유생들이 유가 경전을 읽으며 힘겹게 한문을 공부할 때, 중화 대륙의 유생들은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갔을까? 성현이 말하듯 중국 사람들은 구어와 문어가 분리되지 않아서 구결도, 토씨도 달지 쉽게 한문을 익혀서 자유롭게 쓸 수 있었을까? 한 꺼풀만 벗기고 들어가 보면, 성현의 일반론이 중국에서도 잘 통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자가 전통 시대 중국을 통일했다는 주장은 로마자가 중세 유럽을 통일했다는 말만큼이나 어폐가 있다. 현재 유럽 대륙에서는 200여 개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고, 현대 중화 대륙에서는 300여 개의 각기 다른 지방어가 사용되고 있다. 언어학적 연구에 따르면, 중국 푸젠성에서 사용되는 민화(閩話)와 중국 북서부 산시(陝西)성의 지방어 사이에는 영어와 스웨덴어, 혹은 포르투갈어와 루마니아어 정도의 커다란 차이가 있다. 베이징 사람은 따로 공부하지 않으면 광둥어를 단 한 마디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쓰촨 사람은 상하이 사람들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2002년 나는 저장(浙江)성 진화(金華) 지방에서 지방사 연구팀의 일원이 되어 여름을 났다. 그때 중국 지방어의 다양함에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인구 400만의 진화 지방에는 전통적으로 예닐곱 개의 현이 존재해 왔는데, 지금도 그 현의 행정 경계를 넘으면 언어가 달라져서 통역을 따로 써야 할 정도였다. 한국으로 놓고 보면, 강원도 영월의 말과 바로 인근의 평창, 정선, 제천 말이 다 달라서 지방민들끼리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얘기다. 전통 시대 중국에서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 사람들이 한문을 익히고 배울 때도 조선 유생들을 절망하게 했던 거대한 절벽 같은 언어적 장벽에 직면해야 했다. 변방 중국인들이 중심의 중화 문명을 익히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19세기 말 미국 성경 협회(American Bible Society)가 쑤저우(蘇州) 지방어의 로마자 표기법을 개발하여 번역 출판한 신약성서의 “마태복음” 첫 장

 

20세기 초반까지 중국의 남방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아가던 대다수 인민은 한문은커녕 만다린이라 불리는 북방 중심의 언어를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편전쟁 이후 푸젠성에 들어가서 전도 활동을 벌였던 개신교 선교사들은 결국 푸젠성 일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민화(閩話)의 로마자 표기법을 개발해서 기독교 성경을 통째로 번역하는 전략을 취했다.

 

1870년대에서 1920년대까지 선교사들은 한커우(漢口), 쑤저우(蘇州), 상하이(上海), 닝보(寧波), 항저우(杭州), 원저우(溫州) 등등 중국 남부 지역의 주요 지방어의 로마자 표기법을 개발하여 성경을 번역·출판했다. 이미 성경은 한문 및 베이징 지역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었지만, 지방 사람들 거의 모두가 한문은 고사하고 한자도 읽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남부의 지방어들이 북방의 구어와는 완전히 다른 중국 내부의 외국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점에서 관해선 다음 주에 상세히 살펴볼 예정이다. <계속>

 

<92회>中共의 지방어 말살 정책, 홍콩 시민 “광둥어가 좋아요!”

변방의 중국몽 <10회>

<2018년 광둥어 보호를 위해서 모여 시위하는 ‘항어학(港語學)’ 협회의 회원들. “나의 모어(母語)는 광둥어다”라는 구호가 보인다. /rfa.org>

 

보통화 강요, 광둥어 말살 정책

2023년 8월 홍콩의 국가 보안 경찰은 영장도 없이 지난 10년간 광둥어 보호 운동에 앞장서 왔던 단체 ‘항어학(港語學, 홍콩어학)’ 협회의 회장 앤드루 찬(Andrew Chan, 28세)의 자택을 급습했다. 경찰은 가족을 압박하여 호주에 체류 중인 그에게 협회 웹사이트에 올라 있는 단편소설 한 편을 삭제하라 요구했다. 3년 전 그 협회에서 개최한 광둥어 작품 경연대회에서 최종심에 오른 이 작품은 독재정권이 지워버린 홍콩의 역사를 되찾기 위해 분투하는 한 청년의 투쟁을 다루고 있다. 가족이 볼모로 잡혔음을 깨달은 찬은 부득이 협회의 해산을 결정했다.

 

홍콩 사람들의 모어(母語)와 입말(口語)은 광둥어(廣東語)다. 남방 월족(粤族)의 말, 곧 월어(粤語)다, 홍콩말이란 의미로 항어(港語)라고도 한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광둥어의 언중(言衆)이 현재 1억여 명에 달한다. 중국공산당은 현재 오랜 역사를 지닌 그 아름다운 언어를 말살하려 하고 있다. 중국의 지역 언어 말살 정책은 이미 10년 넘게 지속되었다. 2010년부터 광저우 아시안 게임 즈음해서 중국 정부는 광둥성 지역 방송국에서 광둥어 대신 보통화로 방송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이때 광둥성의 네티즌들은 “광둥어는 방언이 아니라 지역의 공통어(lingua franka)”라는 구호 아래 거세게 반발하는 온라인 집단 시위를 연출했다. 광둥성 사람들이 고유의 모어와 입말을 지키려는 운동은 그 자체가 중공 중앙의 전일적 지배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다. 이후 2014년과 2019년 두 차례에 걸쳐서 홍콩의 시민들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대규모 반중 시위를 연출했다. 이에 작심한 중공 중앙의 본격적인 홍콩 탄압이 시작되었다.

 

 ▲2010년 베이징 중앙정부가 보통화를 강요할 때 홍콩에서 “나는 광둥어를 사랑해요! 나는 보통화를 몰라요!”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시민. 비꼬기 위해서 보통화(普通話)를 광둥어로 발음이 같은 “煲冬瓜”로 적었는데, 그렇게 되면 의미가 “삶은 겨울 오이”가 된다. /Lisa Lim, South China Morning Post. “Language Matter (9/29/2017)

 

2020년 6월 30일 홍콩 국가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킨 후, 중공 중앙의 탄압은 더욱 강력해지고 있다. 비단 홍콩만의 문제가 아니다. 중공 중앙의 지방 언어 정책은 티베트족과 위구르족 등 중국의 소수민족뿐만 아니라 중국 전역에서 표준어가 아닌 소위 “방언(方言)”을 쓰고 있는 모든 지역 주민을 겨냥한 지방어 말살 정책이다.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구호 아래 조선어 금지령을 내리고 조선인의 언어생활과 사고 습관까지 통제하려 했던 일제의 강압적 통일 정책을 그대로 닮아있다.

 

언어 획일주의와 지방어의 쇠락

과거 동아시아의 공통어는 한문이었다. 19세기 중엽 이후 한국, 일본, 베트남에서는 다수 언중의 일상어를 제 나라의 말로 삼는 “자국어 혁명(vernacular revolution)”이 일어났다. 한문을 버리고 백화(白話)를 채택했다는 점에서 중국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쳐 갔지만, 최소 300여 개의 소위 “방언(方言)”이 뒤섞여 사용되고 있는 대륙 국가 중국에서 전국을 언어적으로 통합하는 과정은 지난했다.

 

표면상 오늘날 중국은 이미 보통화(普通話) 정책으로 언어적 통일을 이룬 듯한 모습이다. 보통화의 연막을 걷어내고 중국인의 언어적 현실을 직시하면, 국민의 80% 이상이 한 개 이상의 지역 “방언”을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접하게 된다. 중국에선 흔히 “방언”을 독자적 언어가 아닌 표준어의 사투리 정도로 취급하지만, 언어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중국의 방언은 유럽 여러 나라의 다양한 언어들에 비견되는 개별적 독립 언어이다.

 

사투리라 해봐야 크게 다르지 않아서 북한말까지 이해할 수 있는 한국 사람들로선 오늘날 중국의 언어적 다양성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들은 흔히 한자(漢字)가 표의(表意) 문자라서 시대적 변화와 지역적 차이를 넘어서 보편적인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말은 안 통해도 한자로 쓰면 다 통할 듯하지만, 필담 능력이 실은 외국어 구사력과 다르지 않다. 베이징 사람과 필담이 되려면 보통어 문법을 따라야 한다.

 

한자가 문자로서 기능하는 이유는 표음 문자 이상으로 소리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한자의 80% 이상이 소리와 뜻이 합쳐진 형성자(形聲字)이다. 한자로 표기되는 말은 특정 지역의 특정 언어일 수밖에 없다. 그 지역의 일상어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따로 공부하지 않는 한 한자로 적힌 그 지방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

 

 ▲1910년대부터 “신청년”지 등의 매체에서 적극적으로 백화 운동을 벌였던 현대 중국철학의 거장 후쓰(胡適, 1891-1962). /공공부문

 

광둥어를 한자로 표기하면 베이징 사람들은 읽을 수가 없다. 광둥어와 베이징어의 차이가 영어와 불어의 차이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영국 사람이 불어를 읽으면 알 수가 없듯, 베이징 사람은 광둥어를 읽지 못한다. 한자로 쓰면 다 알지 않냐고 생각하겠지만, 한자로 표기된 광둥어 책자를 보면 베이징 사람들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른바 어기(語氣) 조사(助詞)가 즐비하다. 예컨대 吖, 嗄, 呀, 𠵝, 咓, 𠻺 등은 로마자로 표기하면 모두 aa가 되며, 성조가 각기 1, 2, 3, 4, 5, 6성에 해당한다. 광둥어 특유의 조사가 섞인 문장을 다른 지방 사람들은 따로 학습하지 않은 한 알 길이 없다.

 

언어학자들은 두 언어 사이의 상관성을 밝히기 위해서 보통 어휘 통계학(lexicostatistics)에 의존한다.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기초단어의 유사성을 따져 보면, 두 언어 사이의 원근 거리를 판별할 수가 있다. 두 언어 사이에서 기초단어의 어휘적 유사성(lexical similarity)은 서로의 연관성을 나타내는 지표다. 기초단어의 목록을 놓고 영어와 독어를 비교하면 60% 정도의 어휘적 유사성이 있는데, 불어와 비교하면 27%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어휘적 유사성이 85%에 달하면 같은 언어의 사투리라 말할 수 있다. 그 기준에서 보면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영어, 독어, 불어는 별개의 독립적 언어임이 분명하다.

 

 ▲“우리 모두 보통화를 사용하여 언어와 문자의 규범화를 이루자” 2008년 상하이의 한 유치원 담벼락에 붙은 표준어 보급 구호. /공공부문

 

어휘적 유사성에 따라 현재 중국의 여러 지방어를 비교·분석해 보면, 중국의 언어적 다양성에 놀라게 된다. 중국인들이 흔히 방언이라 부르는 여러 지방의 말들은 각기 서로 다른 독립된 언어들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대부분 중국-티베트어족(Sinitic-Tibetan langauges)에 속한다고 하지만, 중국 지방어들 사이의 차이는 여느 유럽어 사이의 차이보다 크다. 예컨대 베이징어와 광둥어의 어휘적 유사성은 24%밖에 되지 않는다.

쑤저우(蘇州, 장쑤) 28.9% 푸저우(福州, 푸젠) 26.9% 원저우(溫州, 저장) 21.7%

차오저우(潮州, 광둥) 21.3% 광저우(廣州, 광둥) 24% 메이셴(梅縣, 광둥) 21.4%

샤먼(廈門, 푸젠) 19.8% 난창(南昌, 장시) 44.2% 창사(長沙, 후난) 46.1%

지난(齊南, 산둥) 67.1% 청두(成都, 쓰촨) 44.7% 한커우(漢口, 후베이) 미상

<지방어와 베이징어의 어휘적 유사성 (%), (Tang and van Heuven, 2007)>

 

14억의 인구가 뒤섞여 사는 중국에 이 정도 언어적 다양성이 있음은 자연스럽다. 유럽에 여러 언어가 있듯 중국에도 여러 언어가 있다. 다만 중국에선 고래로 한자를 써왔기 때문에 여러 지역의 수많은 개별 언어는 제대로 표기되지 못한 채 입말로만 사용됐을 뿐이다. 한글 창제 이전 글로 표기되지 못한 한국어와 상황이 비슷하다. 이두나 구결을 쓰기는 했지만, 한국어를 한자로 표기하기는 힘들었다. 한글 창제 이후에야 언문일치의 표기가 가능해졌다.

 

광둥어를 제외한 중국 여러 지방어는 한자 표기법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중공 중앙은 지방어를 개별 언어가 아니라 방언, 지방어, 사투리 정도로 격하한다. 언중 1억의 광둥어가 독립적인 개별 언어의 지위를 갖게 되면, 중국은 공식적으로 다언어 국가로 전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에선 진시황(秦始皇) 이래 문자를 획일화하고 관화(官話, 만다린)를 보급하는 언어 통일 정책이 여러 조대(朝代)에 걸쳐 장시간 꾸준히 이어져 왔다. 1910년대부터 중국 지식인들은 백화(白話)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때 백화란 실은 베이징 관화를 전국적으로 보급하는 언어 통일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국 남방에서 지방어를 쓰며 자란 사람들이 백화체의 문장을 읽고 쓰려면 당연히 북방의 구어와 베이징 관화를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구미 선교사들이 발견한 중국의 개별 언어들

15세기 이래 점진적으로 라틴어의 영향에서 벗어난 여러 지역의 다양한 유럽인들은 각자 집안과 마을에서 배우고 익힌 모어(母語)와 입말의 로마자 표기법을 개발했다. 그 결과 유럽에서는 라틴어에 눌려서 문어(文語)의 지위를 누릴 수 없었던 토속어(vernacular)가 새롭게 형성되는 민족국가의 자국어로 발전했다. 장시간 라틴어를 공통언어로 써왔던 유럽의 지성계는 순식간에 수십 개의 언어를 가진 다언어의 대륙으로 재탄생되었다.

 

근세 유럽인들에게 모어의 발견은 중대한 사건이었다. 누구나 엄마 품에서 배우고 자라 길거리에서 마을 사람들과 주고받은 바로 그 말을 사용해서 자유롭게 글을 쓰고, 나아가 최고의 지적 활동까지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박사 논문까지 라틴어로 썼던 독일의 대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50세가 넘어 근대 철학의 고전이 된 3대 비판서를 독일어로 집필했다. 근대 독일 철학이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의 긴 역사에서 한자는 여러 지역에서 다채롭게 펼쳐지는 아기자기한 지방어들 사이의 차이와 갈등을 숨기고 억누르는 기능을 수행해 왔다. 만약 중국의 수많은 지방어를 모두 로마자로 표기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전 세계 모든 언어는 로마자로 표기될 수 있다. 중국의 여러 지방어도 예외가 아니다.

 

아편 전쟁 이후 구미의 선교사들은 한문도, 한자도 모르는 중국의 평범한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중국 전 지역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민중의 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17세기부터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들은 선교 목적으로 베트남어를 익히기 위해서 로마자 표기법을 개발했다. 그러한 경험 위에서 19세기 구미 선교사들은 중국의 여러 지역 다양한 지방어의 로마자 표기법을 개발했다. 푸젠 샤먼에서는 1840년대부터 미국과 영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전도를 시작했고, 1850년엔 지방어의 로마자 표기법을 개발했다. 문맹인 다수 민중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예배를 보려면 찬송가를 함께 부르고 성경 구절을 낭송해야 하는데, 지방 사람들에게 한자는 전혀 쓸모가 없기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 남방의 대다수 민중은 문맹이었으며, 북방의 관화는 아예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푸젠성 동부에서 19세기 말 민난어 일종인 싱화(興化)어로 번역된 창세기. /공공부문

 

새로 개발한 표기법에 따라서 선교사들은 광둥, 푸젠, 저장, 장쑤 등지의 주요 지방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사업을 전개했다. 동시에 지식인들을 위해서 지방어의 한자 표기법을 써서 성경을 번역하기도 했지만, 개신교 선교사들은 민중 전도의 목적에 부합하는 로마자 번역 사업을 더욱 중시했다. 특히 광둥성 동부 해안의 산터우(汕头), 푸젠성의 샤먼(廈門), 대만 등지에서 널리 사용되는 로마자 민난어(閩南語)는 1세기 이상 성경 번역뿐 아니라 다양한 출판물과 저술 활동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1852년에는 로마자 샤먼어(Romanized Amoy, 민난어의 일종) 교과서가 출판되었고, 1873년에는 신약성서가 바로 그 언어로 완역되었다. 1888년부터는 로마자 샤먼어로 교회 월간지를 출판했다. 곧이어 로마자 샤먼어로 번역된 기독교 관련 서적 외에도 생리학, 지리학, 천문학, 수학, 중국사, 이집트사, 심지어는 유교 경전도 출판되었다. 현대 베트남어가 로마자로 표기되듯, 민난어가 새로운 문자언어로 탄생했다. 덕분에 그 지방의 많은 민중이 문맹에서 탈피하여 문자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만약 베트남처럼 로마자가 한자를 대신했다면 오늘날 중국은 유럽 이상으로 다양한 언어들이 다채롭게 전개되는 다언어의 제국이 되지 않았을까. 19세기의 로마자 표기법이 더 널리 퍼졌다면, 중국은 지금처럼 공산당 일당독재 아래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위해 일사불란하게 돌아가는 전체주의적 통일성은 유지되기 힘들었을 듯하다, 대신 독일어와 네덜란드어가 우열 없는 별개의 독립 언어로 인정되듯이 중국의 여러 지방어는 모두 독자적인 문자 표기법을 갖춘 독립 언어로 기능했을 수 있다.

 

 

▲대만에서 사용된 로마자 민난어(샤만어) 성경 (廈門羅馬字聖經). 로마자 표기법에 따라 번역되었다. 1933년 대만에서 출판

 

진(秦) 제국 이래 중국의 언어 통일 정책은 지방어를 비문화적인 사투리 정도로 격하시켜 사장하는 일종의 말살 전략 위에서 추진되었다. 그 결과 중국에서 살아가는 80%의 이중언어 사용자들은 어려서 어머니의 품에서 배우고 익힌 모어(母語)와 입말로는 창의적 생각도, 독창적 문학 활동도 할 수가 없다.

 

10여 년 전 광둥어 수호 투쟁에 나섰던 많은 광둥 지방의 민중은 광폭한 독재정권의 탄압 아래서 물밑으로 숨었지만, 잃어버린 모어와 입말을 찾기 위한 그들의 저항은 계속되고 있다. 그 어떤 인간도 모어와 입말을 자유롭게 쓸 수 없다면, 속마음이 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계속>

 

<93회>“인구 절반”을 노비 삼은 주자학(朱子學)의 나라 조선

변방의 중국몽 <11회>

 김홍도(金弘道, 1745-1816),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畵帖), 종이에 담채, 27cm x 22.7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614년 문서 한 장에 담긴 노비의 사회사

때론 오래된 낡은 종이 한 장에도 한 사회의 사회경제적 실상이 응축되어 있다. 전라남도 해남(海南) 윤씨(尹氏) 종가 녹우당(綠雨堂)에서 1980년대 초에 발견된 매매(買賣) 문서 한 장이 그러하다. 아래 문서에서 오른쪽 직사각형의 큰 종이가 당사자들이 작성한 본래의 매매문서이고, 왼쪽으로 붙은 세 장의 문서들은 서리들이 정부에서 발급한 매매 증명서다.

 

 1614년 사노 뒷간 노비 매매문서. /“고문서집성(古文書集成),” 3권

 

이 문서 맨 앞에 적힌 연도는 명(明)나라 만력(萬曆) 42년이다. 서기로 환산하면 1614년. 이 문서에는 18세 종남(終男)이와 5세 말 한 필을 맞바꾸는 과정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18세 사내종을 사기 위해 말을 끌고 온 자는 ‘두잇간(斗伊叱間)’이라 적혀 있다. ‘두잇간’은 뒷간, 곧 변소라는 뜻이다. 그 당시 노비들은 성(姓)도 갖지 못한 채 인격을 비하하고 억누르는 모욕적인 이름만으로 불렸다. 뒷간도 그런 일례이지만 그보다 심한 경우도 수없이 많았다. 인격 모독성 노비 이름들에 대해선 앞으로 차차 살펴보기로 하고······.

 

뒷간은 관에 속한 시노(寺奴, 이때 ‘寺’는 시라 발음)이거나 절에 딸린 사노(寺奴)일 수도 있다. 이 당시 사료에 등장하는 “寺奴”는 절에 딸린 사노보다는 관에 딸린 시노의 사례가 더 많지만, 여기선 어느 것이라 확정할 수는 없다. 뒷간이 사내종을 사기 위해 말을 끌고 나온 이유는 쉽게 설명된다. 재산의 매매, 처분 같은 궂은일은 주인보다는 수노(首奴), 곧 우두머리 사내종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18세 사내종 종남을 데려와 말과 맞바꾸는 거래 당사자는 고(故) 윤사회(尹思誨)의 부인 김씨(金氏)이다. 문서에는 김씨 부인이 종남이의 노주(奴主)라 기재되어 있다. 종남이의 소유권이 의심의 여지 없이 김씨 부인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당시의 법적 형식에 따라 이 문서에는 구체적인 매매의 사유가 기재되어 있다. 부득이 노비를 팔게 된 것은 “전란을 겪고 나서 집안이 궁핍해져 장례를 치를 비용도 없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종남의 신원을 증명하는 노비의 계보가 나온다. 종남은 집안의 계집종 근덕(斤德)의 셋째 아들이며, 근덕은 죽은 남편 윤사회의 사내종 정련(鄭連)이가 사 온 계집종 석금(石今)이의 딸이다. 윤사회가 생전에 사내종 정련을 시켜서 계집종 석금을 사 왔고, 석금은 근덕을 낳았고, 근덕은 또 종남을 낳았다. 이 사실을 기록한 이유는 종남이 그 집안 소유의 사내종이라는 사실을 법적으로 증명하기 위함이다. 본래 노비의 신원은 모계로 추적하고 확인한다. 암소 주인은 그 암소의 새끼들에 대한 소유권을 갖게 되는 이치와 같다.

 

문서 말미엔 김득록(金得祿)과 김득명(金得命) 두 명 증인의 성명이 기재돼 있으며, 그 옆에 직접 붓을 들고 문서를 작성한 필집(筆執, 문서 작성인) 김우(金遇)의 이름도 있다. 증인으로 참여한 김득록과 김득명의 이름자 앞에는 양반 신분을 알려주는 유학(幼學)이라는 칭호가 붙어 있다.

 

왼편으로 덧붙인 세 장의 작은 문서들은 정부에서 발급한 증명서들이다. 문서를 작성한 51세의 김우, 증인으로 참여한 연령 미상의 김득록과 32세의 김득명이 이 문서를 들고 관아로 가서 매매가 합법적으로 이뤄졌음을 확인해달라 청원하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지방정부 현감(縣監)의 명의로 매매의 합법성을 확인하고 공증하는 문서가 발급되었다.

 

이로써 말과 교환된 종남과 이후 태어날 그의 자손들에 대한 소유권은 다른 주인에게로 넘어갔다. 문서 끝에 자자손손 대대로 “영영방매(永永放賣, 영원히 팔아치우다)”한다는 구절이 특히 눈에 띈다. 종남이 계집종이 아니라 양녀(良女)와 혼인하여 자식을 낳을 경우, 그 소유권이 모두 종남의 주인에게 넘어간다는 의미이다.

 

 관아에서 매매 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서 제출하는 문서 발급 청원서. 이러한 문서를 보통 초사(招辭)라 부른다. / “고문서집성(古文書集成),” 3권

 

짧다면 짧은 이 문서에는 모두 10명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중 다섯 명은 노비, 나머지 다섯 명은 평민이나 양반 신분이다. 실명이 나오진 않지만, 지방 관아의 서리들과 현감도 등장하여 증명서를 발급하여 소유권 이전을 법적으로 공증하는 역할을 한다. 이 문서를 통해서 우리는 최소 다섯 가지의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 1610년대 조선 전라도에서 18세 노(奴) 1구(口, 노비를 세는 단위)와 5세 말 한 필(匹)이 일대일로 교환된 사례가 있다. 이는 노비 한 명의 가격을 말 1필 가격에 해당하는 “저화(楮貨) 4천 장”이자 666일의 노동이라 명시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규정에 대체로 부합한다.

2. 노비의 소유권은 모계로 추적하며, 정부가 그 법적 효력을 보증한다.

3. 노비 매매의 현장에는 최소 2명의 증인이 참석한다.

4. 노비 매매는 거래 당사자가 법률 형식에 맞는 서류 양식을 작성하여 지방정부 관아에 증명서 발급을 청원한다.

5. 아전들이 문서를 공증하고, 최종적으로 그 고을 사또인 현감(縣監)이 인준함으로써 노비 매매 문서의 법적 효력이 발생한다.

 

성리학의 조선은 노비제의 나라

성리학(性理學)을 국교로 삼고 주자(朱子)를 정신의 스승으로 숭앙했던 조선 사회는 인류사에 보기 드물게 가혹한 노비제(奴婢制) 사회였다. 여러 차례 명(明)나라를 드나든 성현(成俔, 1439-1504)은 “중국은 사람들이 모두 국인(中朝則人皆國人)”인데 “우리나라 인구는 절반이 노비(我國人物, 奴婢居半)”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여기서 국인(國人)이란 독립된 양인(良人)으로서 국가에 귀속되는 인격체이지만, 노비란 천민(賤民)으로서 타인의 재산으로 등록된 예속인(隸屬人)을 가리킨다. 성현의 관찰은 전혀 과장되지 않았다. 17세기 초반 경상도 여러 지역의 호적을 살펴보면 인구의 40~50%가 노비로 등록되어 있다. 한때 수도 주변에는 인구의 75%가 노비로 등록된 곳도 있었다.

 

노비의 주인은 언제든 노비를 사고팔고, 상속하고, 증여하고, 양인(良人)으로 방면할 수도 있었다. 주인이 잘못한 노비를 혼쭐내고 때리다가 그 노비를 죽여도 주인은 법적으로 처벌당하지 않았다. 주인과 노비 사이의 주종적(主從的) 상하관계는 엄격하게 국법으로 보장되었다. 일례로 1422년 조선 조정은 노비가 주인을 고소할 수 없고, 고소하면 교형(絞刑)에 처한다는 법을 제정했다.

 

조선 시대 양반들이 주자(朱子)를 떠받들며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읊조릴 때, 그 밑에서 노비들은 주인의 수족(手足)이 되어 농장일, 집안일, 부엌일, 심부름 등 시키면 궂든 힘들든 군말 없이 죽도록 일해야만 했다. 조선의 신분제는 너무나 철저하여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압도했다. 양반의 자손은 대대로 양반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고, 노비의 자식들은 웬만해선 “근본 천생(賤生)”의 굴레를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반세기 전부터 구미의 학자들은 한국사의 가장 큰 특징으로 노비제를 꼽았다. 구미 세계사 교과서를 살펴보면, 한국사가 세계에서 가장 길고도 철저한 “노예사회(slave society)”였다고 단정하는 대목들이 눈에 띈다. 10세기, 심지어는 12세기에 걸친 최장의 노예제가 한반도에서 유지되었다는 주장이 지금도 널리 퍼져 있다.

 

이영훈 교수의 실증적 연구에 따르면, 고려 말기까지도 노비는 전인구의 5~10% 정도에 머물렀다. 한국사에서 노비 수가 폭증한 시기는 15세기 이후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 와서였다. 양반가의 압박에 밀려서 조선 조정이 부모 중 한 명만 노비면 노비가 되는 일천즉천(一賤則賤)의 원칙을 국법으로 채택한 이후 노비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얼마 안 지나 조선은 인구의 30~40%가 타인의 재산으로 등재되는 기괴한 노비 사회가 되었다. 이는 도망 중인 노비들을 제외한 수치라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노비와 노예가 다를 수 있는가?

한국 학자들은 노비(奴婢)를 노예(slaves)라 보는 구미 학계의 견해에 예민하게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일부 학자들은 노비를 노예로 볼 수 없다며 노비를 “slave”라 번역하지 말고 로마자로 음역해서 “nobi”라고 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주인에게 직접 사역하는 대신 신공(身貢)을 바치는 납공노비(納貢奴婢)의 사례를 들어서 노비가 그저 사회 기층의 농민이나 농노에 가깝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그러한 반발은 대부분 구미 언어에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slave”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다.

 

간단히 정의하면, 노예란 타인에게 소유된 인간을 의미한다. 타인의 소유물로 전락한 인간은 주인이 요구할 때 노동력이나 서비스를 제공해야만 하는 존재적 예속성을 갖는다. 모든 노예는 타인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노예들의 생활상은 천차만별일 수 있다.

 

예컨대 17세기 뉴암스테르담(New Armsterdam, 현재 미국 뉴욕시 맨해튼의 남쪽 위치)에서 네덜란드 서인도회사 소유의 흑인 노예들은 의식주를 제공받고, 텃밭을 일굴 땅도 얻고, 병원에서 의료혜택을 누렸다. 그들은 교회에 다니면서 세례를 받을 수 있었고, 연애하여 결혼하고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실질적으로 회사에 고용된 노무자의 삶과 크게 다를 바 없었지만, 법적으로 그들은 서인도회사의 소유물로 등록된 노예들이었다.

 

19세기 초반 미국 플로리다에서는 인디언이 흑인 노예를 소유한 경우가 있었는데, 신분상으로 노예였음에도 그 흑인들은 상당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1856년 미국 버지니아에서 유색인종이 자발적으로 노예가 될 수 있다는 법이 제정되자 다수의 자유 흑인이 여러 현실적인 동기에 따라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Lawrence Aje and Catherine Armstrong, Many Faces of Slavery: New Perspectives on Slave Ownership and Experience in the Americas, Bloomsbury Academic, 2020).

 

아직도 조선 노비가 세계 다른 지역의 노예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한다면,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의 <<반계수록(磻溪隧錄)>>의 “노예(奴隸)”란 문장을 읽을 필요가 있다. 가혹한 노비제의 개선을 촉구하는 이 글에서 유형원은 노비를 노예로, 노예를 노비라 지칭하며,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사전적 의미로 노비(奴婢)란 사내종과 계집종의 통칭이다. 노는 사내종, 비는 계집종을 의미한다. 종은 노예의 순우리말이다.

 

직접 노역을 바치는 입역노비(立役奴婢)든 몸값으로 공물만 바치는 납공노비든 노비의 영어 번역은 “slaves”일 수밖에 없다. 세계 노예 학계의 일반적 개념에 따르면, 어떤 이유에서건 타인에게 신분이 속박되어 노역이나 몸값을 바쳐야 하는 모든 인간은 노예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자식에게로 신분이 세습된다면 상대적으로 더 가혹한 노예제라 인식된다. 조선의 노비제가 그에 해당한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 가혹한 신분 차별의 법제화

세계사 여러 지역에서 보이는 다양한 형태의 노예들은 크게 자식에게 노예 신분을 대물림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들 수 있다. 물론 세습 노예제가 신분이 비(非)세습적 노예제보다 훨씬 더 가혹한 제도였다.

 

조선 노비는 타인에 소유되어 매매, 증여, 상속이 가능한 존재일뿐더러 그들의 자손들도 모두 노비의 굴레를 쉽게 벗어던질 수 없었다. 현전하는 조선 시대 노비 매매 문서를 보면 “그 자손들도 영원히 팔아버린다(後所生幷以永永放賣)”는 문구가 어김없이 나온다. 노비의 신분이 엄격하게 세습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서다.

 

 ▲김홍도, “타작(打作).”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畵帖). 종이에담채, 27cm x 22.7cm, 국립 중앙박물관 소장

 

세습 노예제도 신분 세습의 형태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부모 일방의 더 낮은 신분이 자식에게 대물림되는 “더 나쁜 조건(deterior condicio)”의 세습제와 부모 일방의 더 나은 신분이 자식에게 대물림되는 “더 좋은 조건(melior condicio)의” 세습제로 나뉜다. 조선은 일천즉천(一賤則賤)의 원칙에 따라 부모 중 한 명만 노나 비의 신분이면 자식은 모조리 노비가 되는 “더 나쁜 조건”의 세습제였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이 지독하고 가혹하고 악랄한 종천법을 300년 넘게 유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비교사적 관점에서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가령 3천 500여 년 전 고대 중동 구(舊) 바빌로니아 제국의 관습법에 따르면, 자유민 남자와 노예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자유민으로 인정되었다. 그 아비가 자기 자식임을 인정하는 순간, 노예 여인도 자유민의 신분을 얻었다. 아비가 자기 자식이라 인정하면 그 아이는 자기 몫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으며, 아이의 어미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아이의 아비가 그 아이를 제 아이라 인정할 때 노예 여인은 노예 신분에서 풀려나 자유민의 새 이름을 얻었다는 기록도 있다. (Keith Bridley et al., eds., The Cambridge World History of Slavery, Vol. 1,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pp. 10-11).

 

조선이 3천 500년 전 중동의 율법보다 더 가혹한 인격 차별의 신분제를 법제화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조선 시대 종천법(從賤法)에 따르면 부모 중 한쪽이 양인(良人)일지라도 다른 쪽이 천출(賤出)이면 천한 신분이 세습된다. 예컨대 사내종이 양녀(良女)와 결혼하여 낳은 자식이나 계집종이 양부(良夫)와 결혼하여 낳은 자식은 모두 노비가 되었다. 양반가에선 집안의 계집종을 주변의 양부에게 시집을 보낸 후, 그 자식들을 모두 자기 노비로 삼는 관습이 퍼져나갔다. 양녀의 자식은 아비가 종이라도 양민이 된다는 종모법(從母法)은 1669년 처음 도입되었으나 양반가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표류하다가 1731년 영조(英祖) 연간에야 제대로 시행되었다.

 

주자학의 나라 조선에 과연 유교적 인본주의(人本主義)가 있었는가? 홍익인간(弘益人間)이나 인내천(人乃天)과 같은 인류적 보편이념을 추구했는가? 조선의 주자학자들은 대체 어떤 인간관을 가졌기에 인류사 최악의 신분제를 그토록 긴 시간 유지할 수 있었는가? <계속>

 

<94회>갓난아기까지 조사해서 758구의 노비를 나눠 가진 9남매

변방의 중국몽 <12회>

▲고누놀이, 단원 김홍도 (檀園 金弘道, 1745 – 1816) 작품,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畵帖). 종이에담채, 27 cm x 22.7 cm, 국립 중앙박물관 소장. /공공부문

 

어느 권문세족의 노비 상속문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갈 수 있다면, 그 옛날의 실상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까? 절대 그럴 수는 없을 듯하다. 우리 스스로 현재 이 순간 바로 여기에 살면서도 이 세상의 진상을 알지 못한다. 언제 어디서든 현실은 복잡하고 인간사의 진실은 켜켜이 깔린 무지와 은폐의 장막에 가리어져 있다. 작은 범죄 하나의 진실을 밝히려 해도 수개월이나 수년이 걸리고, 때론 수십 년이 지나도 실상이 드러나지 않는 미제(未濟) 사건이 수두룩하다.

 

외국에 가서 주마간산으로 관광지를 둘러봐도 그 나라에 대해 제대로 알 순 없다. 언젠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간다고 해도 과거사의 실상을 밝히려면 결국 힘겨운 진실 탐구의 과정을 거쳐 가야만 한다. 역사·지리학자 로웬털(David Lawenthal)의 책 제목처럼 “과거는 낯선 나라이다(The Past is a Foreign Country).” 과거사의 실상을 밝히려면 중요한 자료를 찾아내서 실증적으로 분석하는 방법밖에 없다. 가령 15세기 말 조선의 한 가문이 제작한 아래 문서와 같은······.

 

 ▲1494년 이애(李璦) 남매 화회문기(和會文記), /한국고문서자료관

 

세로 길이 89cm에 가로 길이가 4.47미터로 188항에 달하는 이 커다란 문서에는 767명의 역사적 실존 인물이 등장한다. 그중 9명은 양반가 남매들이고 나머지 758명은 그들이 상속한 집안의 노비들이다. 그 아홉 남매는 1460년 임금 앞에서 치르는 전시(殿試)에서 명경과(明經科)에 장원급제한 재령(載寧) 이씨(李氏) 이맹현(李孟賢, 1436-1487)의 일곱 아들과 두 딸이다. 세조(世祖, 재위 1455-1468)의 총애를 받은 이맹현은 이조참판을 지낸 걸출한 인물로 훈척(勳戚) 가문 윤곤(尹坤, ?-1422)의 증손녀와 혼인하여 처가에서 큰 재산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제아무리 떵떵거리는 권문세족이라 해도 15세기 말엽 조선에서 한 집안이 무려 758명의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심히 의아스럽다. 19세기 미국 남부 목화 플랜테이션에서 부리는 노예 수는 평균 잡아 50명 안쪽이었다. 수백 명 노예를 부리는 농장도 없지 않았지만, 극소수였다. 당시 미국에서 생산된 면화는 75%가 무역 항로를 타고 전 세계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1860년대 미국 남부에서 생산된 면화는 전 세계에서 소비되는 면화의 3분의 2에 달했다. 당시 미국 남부는 세계시장을 가진 근대 상업경제의 허브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노예주는 50명 이하의 노예만 부렸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온 나라 전 인구가 고작 3~4백만 명(1519년 374만 명 정도)에 불과했던 15세기 말 조선에서 과연 어떻게 한 집안이 758명의 노비를 소유할 수 있었을까? 이 난해하고도 중요한 질문에 대해선 연구자들에 따라 해석이 분분하다. 이 큰 질문은 잠시 미뤄두고 일단 이 문서에 등장하는 노비들이 과연 누구였는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우선 살펴보자.

 

문서에 등장하는 노비들은 누구인가?

형제자매들이 모여서 윗대에서 물려받은 재산을 배분하는 분재기(分財記)는 정부의 공증을 받아서 법적 효력을 발휘했던 중요한 재산 문서이다. 그 당시 재산이라 하면 크게 가옥, 전답, 노비, 가축, 농기구, 가사 도구 등등을 꼽을 수 있다. 이 문서는 그중에서도 특히 노비에 관련되는 노비안(奴婢案)이다.

 

아홉 남매를 대신하여 붓을 들고 직접 이 문서를 쓴 이른바 “필집(筆執)”의 역할은 이맹현의 사위이자 장녀의 남편 윤화명(尹化溟)이 맡았다. 그는 종8품 벼슬인 부사맹(副司猛)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이 집안 큰사위로 그 역시 실질적인 상속의 수혜자이지만 관료로서의 그의 이력이 문서에 대한 법적 신빙성을 높여 준다.

 

 ▲“이애 남매 분급기”의 맨 끝, 분재에 참여한 형제들의 개인별 서명이 보인다. 붓을 들고 이 문서를 직접 쓴 사람, 곧 필집(筆執)은 장녀의 남편 윤화명(尹化溟)이다. /한국고문서자료관

 

이 문서를 보면 빽빽하게 해서체(楷書體)의 한자들이 숲을 이루고 있으나 그 당시 관아에서 주로 쓰는 이두(吏讀/吏頭)로 기술되어 있어 한자를 아는 한국인이면 기초 수업만 몇 시간 들어도 어렵잖게 읽어낼 수 있다. 이 문서 앞부분에 상투적인 법률 문구 몇 줄이 있을 뿐, 나머지는 소유권을 밝히기 위한 노비 목록에 불과하다.

 

아홉 남매가 서로 나눠 가진 노비의 수를 보면 장남이 108구(口, 노비 세는 단위), 차남 88구, 장녀 84구, 3남 79구, 4남 82구, 5남 79구, 차녀 78구, 6남 82구, 7남 78구이다. 장남이 스무 구쯤 더 받았으나 대체로 조선 초기 남녀 균분의 관례를 따랐다고 볼 수 있다. 문서에는 노비들의 이름자 말고도 그들이 흩어져 살고 있는 지역이 기재되어 있다. 놀랍게도 그 노비들은 전국 전역 “조선 팔도”의 72개 읍(邑)에 흩어져 있다.

 

문서를 직접 읽어가며 9남매들 사이에서 분배되는 노비들의 이름과 연령과 모계(母系) 등 신원 정보를 하나하나 확인하다 보면, 실제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날아가서 1494년 당시 조선 땅 어디에선가 타인의 소유물로 등재된 채 살아가던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내가 태어나 자라난 그 땅에서 일상적으로 보았던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마주 대하는 느낌이랄까. 언젠가 어디선가 한 번쯤 마주친 듯한 데자뷔(déjà vu, 기시감) 같은······.

 

일례로 공조(工曹) 좌랑(佐郞)의 벼슬을 지냈던 장남 이상(李瑺) 몫(衿)의 노비들을 살펴보자. 맨 앞에 함안(咸安) 살던 계집종 도리장(道里莊)이 여섯째로 낳았다는 여든한 살의 늙은 비(婢, 계집종) 안금(內隱今)이가 맨 먼저 등장하고, 그 뒤를 안금이의 셋째인 아들 강만(姜萬, 쉰 살)이와 넷째(본문에는 셋째로 기입)인 딸 자근더기(小斤德, 마흔네 살)가 따른다. 이어서 자근더기의 둘째인 딸 길더기(吉德, 스물두 살)와 셋째인 아들 정산(丁山, 열여덟 살)과 넷째인 연비(燕非, 열다섯 살)가 등장한다. 그다음 스물두 살 길더기의 첫딸인 세 살배기 동더기(同德)가 나온다.

 

이 집안에 내려온 노비들의 혈통을 모계로 추적해 보면, 도리장은 안금이를 낳고, 안금이는 자근더기를 낳고, 자근더기는 길더기를 낳고, 길더기는 동더기를 낳았다. 도리장→안금이→자근더기→길더기→동더기, 다섯 세대 줄줄이 이어지는 천비(賤婢)들의 종살이 계보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편 안금이는 도리장이 생산한 여섯 번째 자식이다. 다시 말해 도리장은 안금이를 낳기 전에 이미 다섯 자식이 있었다. 그 다섯 명도 천출로 종살이를 면할 수 없었음이 분명하지만, 이 문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안금이가 그해 여든한 살이었으니 나머지는 모두 죽지 않았을까 싶은데, 각자 다른 집안 종살이를 했을 수 있다.

 

사내종들은 옆집 계집종 말고 양녀를 취해야

농부에겐 새끼를 낳는 암소가 수소보다 더 큰 가치가 있듯, 노주(奴主)에겐 노비를 생산할 수 있는 계집종이 사내종보다 더 중했다. 노주 입장에서 사내종이 타인 소유가 아닌 양녀(良女)를 취(娶)해 자식을 낳으면 주인의 재산이 불어나지만, 옆집 계집종과 눈이 맞으면 그만큼 큰 손실이었다. 물론 노주는 어떻게든 사내종과 옆집 계집종의 로맨스를 막으려 했다.

 

사내종이 다른 집 계집종을 사랑하여 아내로 삼고자 하면 큰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의 <<묵재일기(默齋日記)>>를 보면, 자기 집 사내종 네 명이 다른 집 계집종과 혼인하자 네 명 모두 처벌하고, 그중 한 명에겐 재산을 바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노비가 재산을 상전에 바치는 행위를 보통 기상(記上)이라 했다(권내현,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역사비평사, 2014).

 

15세기 조선 조정은 일천즉천(一賤則賤)의 원칙에 따라 자식은 부모 일방의 천한 신분을 물려받는 종천법(從賤法)을 시행했다. 그 법에 따라서 사내종이 양녀(良女)와 혼인하여 자식을 낳으면 모두 주인의 재산으로 등록되었다. 실제로 한 사내종은 다섯 아들 모두 양녀와 혼인시켜서 숱한 노비를 낳아 주인의 재산을 불려주고는 그 공을 인정받아 주인에게서 노역을 면제받은 사례도 있었다. 종천법은 노주의 이익에 복무하는 최악의 신분법이었지만, 바로 그 법의 시행 결과 조선의 노비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이애 남매 화회문기”에도 이 집안의 사내종들이 양녀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았다는 기록이 상당수 발견된다. 장남 이상이 물려받은 108구 노비 중에서 14구가 그 집안 사내종이 양녀와 결혼하여 낳은 이른바 양처(良妻) 소생의 노비다. 차남 이위(李瑋)가 물려받은 88구의 노비 중 17구, 장녀 이씨가 받은 84구 노비 중 17구, 3남 이래(李琜)가 받은 79구의 노비 중 17구가 사내종의 양처 소생 노비들이다.

 

이러한 사례로 미루어 당시 노주들이 재산 증식을 위해 사내종과 양녀의 결혼을 장려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가문 장남이 상속한 노비 목록을 보면, 강진의 계집종 효도(孝道)가 낳은 셋째 사내종 막금(莫金, 쉰일곱 살)이와 그가 양녀를 취해서 낳은 넷째 사내종 강수(姜守, 아홉 살)가 함께 들어가 있다.

 

장녀가 상속한 노비 목록엔 사내종이 대를 이어 양녀를 취하는 사례도 보인다. 함경도 안변(安邊, 현재 강원도)의 사내종 막지(莫只)는 양녀를 취하여 첫째 사내종 은정(銀丁)을 낳았고, 은정 역시 양녀와 혼인하여 둘째 사내종 귀진(貴珍)을 낳았다. 이 문서 작성 시 은정은 서른아홉 살, 귀진은 다섯 살이었다. 아울러 사내종 막지가 낳은 다섯째 계집종 신금(新今)이도 함께 상속되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어미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 같은 비에게서 태어났다고 볼 수도 있고, 막지가 다른 양녀를 둘째 처로 삼았을 가능성도 있다. 여하튼 사내종이 양녀를 취해 낳아 기른 사내종이 다시 양녀를 취해서 사내종을 낳음으로써 3대가 대를 이어 한 주인에게 부역하면서 그 집안 재산을 늘려주었음이 확인된다.

 

타인의 재산 목록에 올라간 아이들

이 문서에 올라간 758명 중에는 이름을 얻지 못한 노비들이 적지 않다. 대부분 네 살 이하의 영유아들이다. 아래 이미지의 붉은 네모 안을 보면 노(奴)나 비(卑)자 아래 이름자 대신 빈칸이 있고, 그 아래로 “네 살(年四),” “두 살(年二),” “한 살(年一),” “한 살(年一)”이라 적혀 있음을 볼 수 있다. 문서 전체를 보면 대략 스무 명 넘는 무명의 영유아가 노비안에 올라 있다. 그 지역적 분포는 경기, 강원도, 함경도, 전라도 등 다양하다.

 

 ▲노비안에 기록된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영유아 노비들. 기록자는 나중에 이름을 기입하기 위해 빈칸을 두었다. /이애 남매 회회문기

 

예컨대, 전라도 임실(任實) 계집종 용더기(龍德)의 첫째 자식 네 살배기 아들, 임실의 계집종 분가(粉加)의 둘째 자식 두 살배기 딸, 강원도 강릉(江陵府) 우계(羽溪)현의 계집종 안금이의 둘째 자식 세 살배기 딸, 황해도 봉산(鳳山)의 서른 살 계집종 돗가(都叱加)의 둘째 자식 여섯 살 난 딸, 경상도 칠곡부(漆谷府) 팔거(八莒)의 노비 최산(崔山)이 양처를 얻어 낳은 셋째 자식 한 살배기 아들 등이 장남 이상의 재산으로 올라가 있다. 아직 영유아의 이름까지는 다 기록하지 못했지만, 이 집안에서 전국에 흩어져 살며 그 집안 노비들이 생산한 갓난아이의 존재까지 훤히 꿰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문서에 기록된 아기 노비들은 신분제의 굴레에 묶여 죽도록 노비로 살아갔던 역사적 실존 인물들이었다. 그 점은 의심의 여지 없는 견고한 사실(hard fact)이다. 이름이 없어 남겨둔 노(奴)나 비(婢)자 뒤의 빈칸 하나하나가 실은 그들 한 명, 한 명이 이 땅에 살다 갔음을 알려주는 빼도 박도 못할 증거다.

 

그 빈칸들을 뚫어지게 한참 바라보는데 내 귓가에 갓난아기들의 요란한 울음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온다. 만약 내 자식들이 출생 직후 국민이 아니라 노비로서 내 상전의 재산 목록에 기재돼야 한다면······. 그러한 거친 상상만으로도 살갗이 돋고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 무명의 노비들은 그 당시의 현실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관해 많은 점을 암시한다. 우선 15세기 후반 재령 이씨 명문가의 노비 관리가 상당히 철저했음을 보여준다. 수백 리 떨어져 사는 집안 노비들이 자식을 낳을 때마다 노주는 노비안을 갱신하며 재산의 증감을 기록했다는 얘기다. 그 모습은 마치 정부가 세금 징수를 위해서 정기적 인구조사를 연상시킨다. 축산농가에서 갓 태어난 송아지를 챙기는 모습도 떠오른다.

 

한 살배기든, 두 살배기든 모두 그 집안의 소유물이란 점을 상기하면, 당연한 처사라 할 수 있다. 노비안에 등장하는 상투적인 문구처럼 그 모든 노비는 그 집안에서 “자자손손 전해 받아서 가지고 마음껏 사용할(子孫傳持鎭長使用爲齊)” 재산이었다. 법률 용어로 정의하자면 노비는 그들의 동산(動産, chattel property)이었다.

 

쉽게 말하면, 평생 부려 먹을 그들의 종이며, 하인이며, 노예들이었다. 당연히 샅샅이 조사해서 노비안에 정확하게 그 존재를 기록해 놔야만 했다. 그래야만 나중에 “분쟁을 당하는 일이 있다면 관아에 고해서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인 즉(爭望隅有去等, 告官辨正爲乎).”

 

 ▲“이애 남매 화회 문기”의 서두엔 자손 대대로 물려받은 노비를 맘껏 사용하고 쟁송이 발생하면 관아에 고소하여 변정(辨正)하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위의 본문 참조. /한국고문서자료관

 

설사 주인이 갓난쟁이의 이름을 모르더라도 사내종이나 계집종의 어미, 할미, 증조 할미, 고조 할미로 이어지는 혈통의 모계 정보만 꽉 쥐고 있으면, 해당 노비는 꼼짝없이 한평생 신공을 바치거나 노역을 져야만 한다.

 

바로 그런 이유로 노비안 작성 시 어미가 비(婢)인 경우엔 따로 아이의 아비가 누구인지 적지 않았다. 노(奴)가 양처를 취해 낳은 아이일 경우에만 아비의 이름자를 밝혔다. 어미가 비(婢)라면 자식은 100%로 노비가 되므로 아비를 따로 기재할 필요는 없다. 반면 어미가 양녀 신분일 경우엔 아비가 노주의 사내종이란 사실을 분명히 기재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 자식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기록 방식은 노주의 소유권을 분명히 밝히기 위한 치밀한 장치다.

 

일천즉천의 사회사,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갓난아기가 이름도 없이 노비안에 바로 올라갔던 당시의 현실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볼 것인가? 일부 연구자들은 남녀 균등 상속 원칙을 보이는 조선 초기의 양반가 분재기를 “공정과 합리의 장”이라 칭송하지만, 역사의 실상은 정치적 수사나 이념적 미사여구로는 절대로 포착되지 않는다.

 

지난 회에서 이미 밝혔듯, 세계사적 견지에서 평가하자면, 조선의 종천법은 3천 500여 년 전 구(舊) 바빌로니아의 관습법보다도 비할 바 없이 더 가혹했다. 자유와 인권의 관점에서 조선의 종천법은 비인간적인 노예제의 악법이었다고 비판할 수 있겠지만, 섣불리 포폄(褒貶)의 잣대를 휘두르면 단순화의 오류에 빠진다. 평가 이전에 우선 조선 노비의 생활상이 깊이 탐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다만 민족의식에 사로잡혀 조선의 노비제까지 옹호한다면, 시대착오란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요즘 연구자들은 “오늘의 가치로 과거를 평가하지 말라”는 역사적 상대주의의 금언에 따라 웬만해선 조선 노비제의 잔혹함을 연구하지도, 비판하지 않는다. 나아가 교묘한 언어와 그럴싸한 이론으로 은근히 그 제도를 옹호하고 미화하려는 풍조도 보인다.

 

반면 17세기 조선의 개혁사상가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은 종천법의 잔인함을 혹독하게 비판하면서 일갈했다. “노비는 인류(人類)임에도 금수로 취급하니 어찌 법이라 하겠는가?(人類而處以禽獸, 豈法也哉!)” 유형원은 주자학(朱子學)의 영향 속에서 자라나 유가 경전을 참조하며 경세(經世)의 방책과 치국(治國)의 대안을 모색했던 조선의 유생이었다. 15~16세기 조선 유생들은 왜 유형원처럼 노비제의 모순과 부조리를 비판할 수 없었을까? 노비를 같은 인류라 믿었던 유형원과는 대조적으로 그들은 진정 노비를 짐승이라 여겼음일까? <계속

 

<95회>암캐, 담사리, 말똥, 빗자루···· 노비 이름에 숨겨진 조선왕조의 비밀

변방의 중국몽 <13회>

▲일제강점기 함경도 문천군 관노비의 모습. /한국학중앙연구원

 

사람에게 이름은 인격(人格)의 집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金春洙, 1922-2004)의 시구처럼 인간에게 이름은 자아의 거처이며 의식의 출발점이다. 소설 “투명 인간(Invisible Man)”으로 유명한 미국 흑인 작가 랄프 엘리슨(Ralph Ellison, 1913-1994)은 “타인이 선사한 이름을 인간은 자기 것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고 썼다. 누구인가 나에게 붙여준 이름은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내 존재의 기호(記號, sign)이다. 만약 우리를 가리키는 존재의 기호가 우리의 현재 이름이 아니라 “말똥(馬㖯)”이나 “암캐(雌介)”처럼 흔하디흔한 조선 노비의 이름이었다면, 우리는 과연 지금 무엇이 되었을까?

 

미치광이 전술인가, 노비제의 유습인가?

한국어의 존댓말은 부드럽고 아름답지만, 반말은 거칠고 상스럽다. 50세의 공직자를 향해선 “어린놈” 타령하고 대통령 부인을 두고선 “암컷” 운운하는 정치권의 폭언과 망발의 릴레이를 보면서 문득 드는 질문이다. 글로벌 팝 문화를 이끄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 왜 그토록 투박하고 저열한 연령차별과 여성 혐오의 문화가 남아있는가? 언제 어디서든 위아래를 가려 말을 높이거나 낮추는 한국 특유의 언어 차별은 대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조선에서 500년 지속됐던 광범위한 노비제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듯하다. 조선은 한때 인구 절반을 노비 삼아서 하대하고 천시하고 가혹하게 부렸던 노비제의 나라였다. 관습의 힘은 강하고도 질기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과거 신분제의 유습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시대가 바뀌어도 과거에서 이어받은 문화와 관습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급변하는 사회에서 흔히 관찰되는 문화 지체(cultural lag)의 현상이다.

 

10여 년 전 한반도 남동부의 어느 아름다운 예향(禮鄕)에서 나고 자랐다는 한 학자에게 직접 전해 들은 이야기다. 열 살 남짓했을 때 그는 집안 심부름으로 푸줏간에 가서 나이 지긋한 주인에게 “돼지고기 한 근 주이소!”하고 존댓말을 하자 뒤에 서 있던 “동네 아제가 귓방망이를 쌔리 갈기며 ‘으데 천한 백정에게 말을 높이고 그래 쌌노!’” 했단다. 1970년대까지 한국 사회에 그토록 가혹한 신분 차별의 유습이 남아있었음을 말해주는 사례이다. 진정 인간 사회에선 악습(惡習)이 양속(良俗)을 구축(驅逐)해야만 하는가?

 

짐승의 똥오줌으로 불리던 조선 노비들

노비는 성(姓, surname)이 없었다. 성이란 가부장 사회의 전통에 따라 부계(父系)의 혈통을 나타내는 가족 이름(family name)이다. 노비는 신원을 모계로 추적해 기록할뿐더러 언제든 다른 주인에게 상속되거나 증여되거나 팔려 갈 수 있었기에 성을 따로 가질 이유도 없었다. 노비는 언제든 주인이 원할 때면 가족을 떠나 입역(入役)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조선 노비는 가족 단위가 아니라 제각각 개별적으로 노주(奴主)에게 소유된 존재였다. 같은 가족인데 주인이 다 다른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의 “노상알현도(路上謁見圖).” 조선 후기의 신분 질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풍속도. /공공부문

 

조선 노비제의 가혹함은 노비의 이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돌쇠(乭金)나 마당쇠(馬堂金), 방자(房子) 등 널리 알려진 사내종의 이름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삼월(三月)이나 구월(九月이), 막동(莫同)이나 끝동(末叱同)처럼 태어난 달이나 순서에 따라 붙인 이름은 그나마 좋다. 빗자루(光自里), 소코리(小古里), 화덕(禾里德)처럼 생활 도구를 딴 이름도 그러려니 할 수 있다.

 

도야지(道也之, 刀也只), 강아지(江牙之), 송아지(松牙之), 두꺼비(斗去非) 등 짐승이나 미물에 빗댄 이름부턴 악의가 읽힌다. 더부사리(多夫沙里), 담사리(淡沙里) 등 빈한 처지를 노골적으로 가리키는 이름은 평생 종으로 더불어 살거나 담장 아래 붙어 살라는 주문(呪文) 같다. 곱단(古邑丹), 넙덕(汝邑德), 작은년(自斤連), 어린년(於仁連) 등처럼 외모 특성을 딴 이름은 여성을 노리개 삼는 문화를 보여준다. 마침내 개부리(介不里), 개노미(介老未), 개조지(介助之), 소부리(牛不里), 거시기(巨時只) 등 짐승의 성기에 빗댄 이름을 볼 때면 할 말을 잃게 된다.

 

한평생 그런 이름으로 불렸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어떤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했을까? 내 본명이 개똥(犬㖯)이고, 동생의 본명이 말똥(馬㖰)이고, 아들의 본명이 소똥(牛㖰)이라면 진정 어떠했을까? 내 딸이 암캐나 누렁개였다면?

 

학대당한 흑인 노예들의 멋진 이름들

전 세계 노예제 연구의 성과 중엔 문서에 등장하는 노예 이름들에 대한 섬세한 분석이 다수 존재한다. 예컨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17세기 말부터 200년에 걸쳐 아홉 개의 대규모 쌀 생산 플랜테이션을 경영했던 볼(Ball) 가문은 1720년부터 1865년까지 소유했던 수천 명 노예들의 출생 및 사망 기록을 남겼다. 그 장부에 적혀 있는 노예들의 이름자를 시기별로 상세하게 분석해 보면 그 지방 노예의 생활상과 변화하는 의식구조에 관한 많은 정보를 알아낼 수 있다.

 

노예주는 노예들을 혼동 없이 식별하기 위해 다양한 이름을 사용했다. 그 결과 그 농장에서 태어난 제1세대 노예들부터 대부분 성(姓)을 갖게 되었으며, 직계 가족뿐 아니라 친척까지 같은 성을 공유하는 사례도 발견된다(Cody, 1987, p.572). 이후 노예들이 기독교도가 된 후에는 성경 이름들을 취했다. 아울러 노예들은 성경 가르침대로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형성하면서 가족 이름을 공유하게 되었다. 예컨대 윈저(Windsor)와 앙골라(Angola) 아메(Ame) 부부는 1743년부터 15년에 걸쳐 두 아들과 다섯 딸을 낳았는데, 플랜테이션 주인이 그 아이들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예컨대 1743년 성탄절에 태어난 큰아들은 크리스마스(Christmas), 이듬해 부활절 하루 전에 태어난 딸은 이스터(Easter)라는 이름을 받았다(같은 논문, p. 573).

 

노예제가 아무리 성행해도 상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같은 인간의 이름을 말똥이나 소똥, 암캐나 누렁개 따위로 지어 부르기란 쉽지 않다. 1761년 어느 백인 노예주의 일지를 보면, 그가 사들인 노예들은 나에미나(Naemina), 쿠바(Coobah), 수키(Sukey) 등의 아프리카 이름을 받거나 마리아(Maria), 폼페이(Pompey), 윌(Will), 딕(Dick) 같은 평범한 영어 이름을 갖게 되었다. 장구한 인류사의 상식이 그러하다. 불교가 성행하던 고려시대 노비들은 만적(萬積), 덕적(德積), 금광(金光), 평량(平亮) 등 모두가 거룩한 불교식 이름으로 불렸다(이영훈, 2018). 놀랍게도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 와서야 지극히 예외적으로 노비 이름이 더럽고 하찮은 오예(汚穢)의 비칭(卑稱)으로 변해버렸다는 사실을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흑인 노예의 신체를 검사하여 판매하고 있는 장면. 1854년 출판된 판화 인쇄물. /Library of Congress LOT 4422-A-1

 

물론 동서고금의 다양한 지역에서 노예에게 짐승 이름을 붙여서 낮춰 부른 사례가 없지는 않다. 예컨대 17세기 대서양을 누비던 노예 사냥꾼들은 아프리카에서 포획한 노예들을 지칭할 때, 사내들은 버크(Buck, 수사슴)이나 쇼우트(Shoat, 새끼 돼지)로, 계집들은 웬치(Wench, 처녀)나 필리(Filly, 암말) 등으로 통칭하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사내 노예는 중장년이 되어도 보이(Boy, 소년)라 불렀다. 하지만 그러한 악습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흑인 노예들은 백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정식 이름을 갖게 되었고, 어른이 된 사내 노예는 보이가 아니라 엉클(uncle, 아저씨)이라 불렸다.

 

미국학계의 한 연구에 따르면, 1619년에서 1799년 사이 장부에 기록된 972명 흑인 남자 노예들을 이름을 보면, 톰(Tom), 해리(Harry), 샘(Sam), 위(Will) 등이 대부분이었다. 시저(Caesar)나 프린스(Prince) 같은 고귀한 신분의 이름도 보인다. 같은 시기 흑인 여자 노예들의 이름도 베티(Betty), 메리(Mary), 제인(Jane), 해나(Hanna), 사라(Sarah) 등이 가장 많았다. 노예제 초창기부터 미국 남부의 노예주들은 적어도 노예의 본명을 개똥, 말똥 따위로 짓지는 않았다. 채찍으로 등짝을 후려갈길지언정 짐승의 똥오줌을 노예의 이름으로 삼는 짓은 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천한 이름, 노비를 노예화하는 간교한 장치

대체 왜 조선 양반들은 자기 노비들에게 그토록 모욕적이고 혐오스러운 이름을 부여했을까? 노비의 뇌리에 노예 의식을 각인하려는 노주들의 간지였을까? 영아 사망률이 높던 시절 악귀를 쫓고 재앙을 물리치려는 민간신앙의 반영이었을까? 관련된 사료를 좀처럼 찾아볼 수 없어 그 이유를 확실히 알 순 없다. 다만 주인이 날마다 노비의 비천한 이름을 외치며 호령할 때 발생하는 커다란 사회적 효과는 쉬이 짐작할 수 있다.

 

그 효과는 고대 율법에 따라 중죄인에게 내리는 육형(肉刑)의 원리와 상통한다. 코가 잘리거나 얼굴에 문신을 받거나 발꿈치를 잘리는 가혹한 신체형을 받은 중죄인은 그 순간부터 인간 사회 내부에서 불가촉(不可觸)의 천민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육형은 그렇게 죄인과 일반 백성을 분리해서 차별하기 위한 잔혹한 장치였다.

 

세계사의 여러 노예제를 돌아보면, 노예와 자유민을 눈에 띄게 구분하기 위해 도입된 여러 장치가 보인다. 문신을 새기거나 머리 스타일이나 복식을 달리하는 조치 등이다. 미국의 흑인 노예처럼 피부색이 달라서 노예와 자유인의 분간이 전혀 힘들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처럼 같은 인종, 비슷한 사람들이 노예로 전락하는 경우엔 이마나 팔다리에 특별한 문신을 새기는 경우가 흔했다. 노예의 몸에 식별할 수 있는 노예의 표식(標式)을 찍는 관례였다.

 

노예제에서 가장 곤란한 상황은 동족이나 이웃 부족을 노예 삼을 때에 발생한다. 조선의 노비제는 긴 세월 같은 공동체 속에서 함께 살아온 멀쩡한 이웃 사람들을 일천즉천(一賤則賤)의 원칙에 따라 천민으로 전락시킨 부조리한 제도였다. 그러한 부조리를 은폐하기 위해서 양반은 노비에게 비천한 이름을 주고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그 이름을 부르며 호령했다. 노비의 비천한 이름은 세상 사람들이 노비를 노비로 인지하고 확인하고 차별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오명(social stigma)이었다.

 

방자, 향단이, 돌쇠, 마당쇠, 종말, 끝둥이, 삼월이, 사월이, 시월이, 황진이 등등 조선에선 누구든 그러한 노비의 이름을 갖게 되면 한평생 노비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한국 사람들은 노비 이름만 들어도 대번에 그들이 노비였음을 알아챌 수 있다. 노비의 비천한 이름은 노비를 노비로 만드는 브랜드-마크(brand-mark)였다. 동시에 노비의 뇌리에 노예 의식을 주입하고 노비의 몸뚱이에 노예적 근성을 심는 문화적 세뇌 장치였다. 태어난 순간부터 도야지나 더부사리나 개부리나 개노미로 불린다면, 누구든 노비가 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조선 노비의 비천한 이름은 그들의 영혼에 아로새겨진 노예의 표식이었다. 얼굴에 문신을 받은 노예는 언제든 주인을 향한 저항심과 적대감을 가질 수 있다. 반면 한평생 “빗자루”나 “소코리,” “개부리”나 “개조지”로 불린 노예는 절대로 쉽게 주인에게 저항심을 가질 수가 없다. 나면서부터 멸시와 조롱을 겪으며 노비의 정체성을 체화했기 때문이다. 노예 연구의 석학 올란도 패터슨(Orlando Patterson, 1940- )이 주장하듯, 그들은 몸은 살아 있지만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사회적 죽음(social death)에 내몰린 존재였다. 조선 노비제의 존속 비밀이 그 수많은 노비의 천한 이름들 하나하나에 숨겨져 있다고 하면 과언일까?

 

자유를 외치는 현 정권, “노비 인명사전”을 편찬해야

놀랍게도 한국학계엔 지금까지 노비의 이름을 분석한 제대로 된 연구가 거의 없는 듯하다. 양반가 분재기(分財記)에 무수히 등장하는 그 숱한 노비들은 학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고 여겼던 까닭인가? 양반가 재산 목록에 노비로 기재된 역사적 실존 인물들 한 명, 한 명은 역사의 과정을 묘사하고 설명할 때 큰 중요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까? 성현(成俔, 1439-1504)의 말대로 인구 절반이 노비였다면, 노비는 그야말로 전근대 한국사 연구의 핵심 주제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노비안. 노비의 변동 사항을 기록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선양해 온 현 정권은 한국학의 국제화를 위해서 조속히 국가 예산을 투입해서라도 “노비 인명사전”을 편찬하라 제안하고 싶다. 개똥, 말똥, 뒷간, 거시기, 어린년, 곱단 등 노비 이름 하나하나가 노비제의 실상을 보여주는 증거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역사의 증거물을 방치한 채로 국왕, 왕족, 사대부 문신 관료 중심의 역사를 기술해 봐야 한국 밖의 지식인들은 조금도 감동하지 않는다. 1970년대 한국의 시청자들은 아프리카에서 사냥꾼에게 잡혀 노예로 팔려 간 자기 조상의 일대기를 그린 미국 작가 알렉스 헤일리(Alex Haley, 1921-1992)의 <<뿌리(Roots)>를 보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세계인들은 조선 노비제의 실상이 어떠했는지 있는 그대로 알고 싶어 한다.

 

조선 성리학과 노비제의 상관관계

2016년에서 2019년까지 여름 방학마다 나는 한국학 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구미와 아시아의 유수 대학에서 한국학을 전공하는 10여 명의 석박사 학생들과 함께 조선시대 다양한 문서들을 강독하는 “장서각 여름 한문 워크샵(workshop)”을 감독했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20대 젊은 학인(學人)들과 함께 양반가 분재기에 등장하는 노비들의 이름자를 하나씩 짚어가며 해석할 때마다 나는 깊은 의구심에 휩싸였다.

 

 ▲1755년(영조 31) 보령(保寧) 비장 홍상선(洪尙善)이 남포향교(藍浦鄕校) 소속의 노비 여덟 명을 살 때 작성한 매매문서, 공증을 위해 관에 올린 청원서(所志)와 비인현(庇仁縣)에서 이를 인증한 문서(立案)가 함께 붙은 노비매매 일괄 문서. /국립중앙박물관

 

밤낮으로 유가 경전만 읊었다는 조선 양반들이 어떻게 노비들에게 그토록 경멸적인 인격 비하의 이름을 부여할 수 있었을까? 조선 성리학자들이 말하는 “인(人)”이란 누구를 가리키는가? 노비를 제외한 인류를 의미하는가? 그렇다면 그들은 대체 무슨 근거로 노비를 인류에서 제외하였는가?

 

그들이 전개했던 사단칠정(四端七情)의 고담준론(高談峻論), 인성(人性)·물성(物性)의 성리(性理) 논쟁은 대체 다 무슨 의미였는가? 성리학이란 외래사상이 그들에게 노비를 개돼지라 불러도 좋다는 이념적 면허증을 주었는가? 유가 경전의 그 아름다운 경구를 밤낮으로 읽으면서 그들은 어떻게 같은 땅에 함께 살아온 이웃을 종 삼아서 짐승의 똥오줌이라 부리며 일상적으로 경멸하고, 천시하고, 모욕주고, 학대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성리학자들이 인간을 개돼지에 빗대 부르는 풍속을 조장할 수 있었는가? 요컨대 조선 성리학과 조선 노비제의 상관관계(correlations)는 무엇인가?

 

 ▲율곡 이이(李珥, 1537-1584) 남매 분재기. /공공부문

 

노예제를 연구하는 미국의 학자들은 지난 150여 년 동안 남북전쟁 이전 미국의 기독교와 노예제의 관계를 심층적으로 파헤친 굵직한 연구서들을 다수 펴냈다. 남북전쟁 전의 미국 남부는 기독교적 노예제(Chrstian slavery)의 사회였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구의 30% 이상이 노예였으며, 그들의 노동력이 경제적 생산 활동의 중추였고, 노예주를 포함한 절대다수 구성원은 기독교 신자들이었다.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살펴보면, 기원후 1세기부터 미국 남북전쟁에 이르기까지 노예주들은 노예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기독교 성경을 이용했음을 확인하게 된다. 미국 남부의 노예주들은 성경이 노예제를 합리화한다고 믿었다. 그중에는 신이 아프리카의 이교도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노예제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부류도 있었다. 물론 모든 기독교도가 노예제를 옹호하지는 않았다. 1680년대 필라델피아의 “독일마을 퀘이커교도들(Germantown Quakers)”은 미국에서 최초로 노예제 폐지를 부르짖으며 항거했다. 그럼에도 퀘이커교에서 노예제 폐지를 공식 입장으로 채택하기까지는 1세기가 걸렸다. 기독교의 전 역사에서 기독교와 노예제가 공존하고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만민평등과 전 인류적 사랑을 설파하는 기독교가 어떻게 노예제의 옹호 논리로 악용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기독교가 노예제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했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양자가 큰 무리 없이, 때론 상보적으로, 장시간에 걸쳐 공존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역사에 무지한 기독교 신자는 그러한 상관성을 부인할지 모르지만, 인간의 역사는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 차 있게 마련이다.

 

조선 성리학과 조선 노비제의 관계도 이와 다를 수 없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은 노비제의 나라이기도 했다. 세계 학계는 한국의 학자들을 향해서 양자의 상관관계를 더 적극적으로 구명하라 요구한다. 17~19세기 미국 남부가 기독교적 노예제 사회였다면, 15~18세기 조선은 성리학적 노비제 사회였음이 자명하다.

 

한 세기 넘게 구미 학계는 집요하게 캐물었다. 기독교적 도덕 공화국을 꿈꾸었던 미국의 기독교 시민들은 대체 어떻게 가혹한 노예제를 두 세기 넘게 지속할 수 있었는가? 역사의 진실을 탐구하는 학자라면, 조선 노비제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성리학적 도덕 국가를 꿈꾸었던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대체 왜 인구의 절반을 노비로 만들고선 개돼지의 똥오줌에 빗대어 부르며 500년 장구한 세월 동안 가혹한 신분제를 유지할 수 있었는가? <계속>

 

<96회>조선 왕실(王室)의 수많은 노비는 누가 어떻게 조달했나?

변방의 중국몽 <14회>

▲창경궁(昌慶宮) 명정전(明政殿). /공공부문

 

조선은 유교의 이상을 내건 군주제 국가였다. 유가의 교리에 따르면, 임금이란 하늘을 받들어 온 백성을 돌보는 혜민(惠民)의 영수(領袖)이자 성인(聖人)의 가르침으로 백성을 일깨우는 교화(敎化)의 사표(師表)이어야 한다. 물론 현실의 군주가 유교의 이상을 몸소 실현한 사례는 드물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유교를 국시(國是)로 내건 한 나라의 국왕이 어떻게 인구의 절반이 노비가 되는 현실을 방치하고, 심지어 조장할 수 있었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조선 전기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조선이란 나라에서 가장 많은 노비를 소유한 주체는 조선의 정부이며 조선 왕실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조선 최대의 노주(奴主)는 조선 왕실

15~16세기 중앙 정부의 각 기관에 소속된 이른바 각사(各司) 노비는 대략 23만~27만을 헤아렸다. 왕실 재정을 맡은 내수사(內需司)나 궁방 소속의 내노비(內奴婢) 혹은 왕실 노비도 정확한 수를 알 순 없으나 상당한 규모라고 짐작된다. 아래 살펴보겠지만, 왕실은 정부에 속한 각사 노비를 왕실 소속의 내수사로 끌어오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썼다. 가령 다음 문서를 살펴보자.

 

 ▲1631년 2월 28일 국왕 인조(仁祖, 재위 1623-1649)가 둘째 아들 봉림대군(鳳林大君, 1619-1659)에게 53구의 관노비(官奴婢)를 하사할 때 작성한 교지(敎旨). /'조선시대 상속문서, 분재기'(장서각, 2014), 28쪽

 

위의 문서는 봉림대군(鳳林大君, 1619-1659)이 14세 나던 1631년에 그의 부친인 인조가 직접 내린 교지(敎旨)이다. 여기서 교지란 국왕의 명령이나 의중이 담긴 공식 문서를 지칭한다. 봉림대군은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1637) 이후 그의 형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던 인물이다.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자 1649년 왕에 즉위하였다. 그가 바로 북벌을 내걸고 군사력을 강화하고, 대동법을 확대·실시했으며, 상평통보를 주조하고 유통했다는 바로 그 효종(孝宗, 재위 1649-1659)이다.

 

인조는 1631년 2월 28일 3장, 1632년 1월 10일 다시 2장의 교지를 작성하여 갓 봉작(封爵)을 받은 10대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에게 모두 250구의 노비를 하사했다. 위의 문서는 1631년 발급된 교지로 50명 노비의 지역, 이름, 출생 연도가 열거되어 있다. 250명 노비는 전국 각지의 다양한 정부 관사에서 복역하는 관노비들이었다.

 

이 문서는 인조가 전국 여러 지방 관사에 소속돼 있던 관노비들을 둘째 아들 몫으로 돌려서 상속한 사실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250구의 관노비들이 일개 왕자의 사유물로 전환되는 장면이다. 관사에 소속된 노비가 왕명에 의해 왕자의 소유물로 전환되면 해당 관사의 업무 부담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왕실의 이익과 정부의 이익이 충돌하는 순간이다.

 

 ▲동궐도에 묘사된 승정원 청사 '은대.' /공공부문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631년 3월 14일 기사를 보면, 인조의 왕명으로 비(妃) 4구를 잃게 된 의금부(義禁府)가 타사의 노비로 대신 써달라고 건의하여 국왕의 승인을 받는 기록이 보인다. 표면적으로 봉림대군에게 하사된 노비 중에서 등 의금부 소속의 네 명 계집종은 신역(身役)을 피해 도망한 전력이 있는 불온한 인물들이라는 이유를 들었지만, 실제론 해당 관사에서 부릴 수 있는 노비 수가 줄어드는 데에 대한 관료적 저항이라 볼 수 있다.

 

왕족의 수족 노릇을 하던 왕실 노비는 엄밀히 말해 정부의 공복이라 할 수가 없다. 아래 상세히 보겠지만, 1502년 (연산군 8년) 7월 5일 영의정 한치형(韓致亨, 1434-1502)은 왕실 재정을 맡은 관청 내수사(內需司)의 노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중대한 발언을 남겼다.

 

“정부의 각 기관과 내수사를 비교하면 경중이 판연합니다. 내수사는 노비가 없어도 되지만, 정부의 각사(各司)엔 노비가 없어선 안 됩니다. 더구나 지금 내수사의 노비가 다 없어진 것도 아닌데, 다시 각사의 노비를 빼앗아 여러 군(君, 왕자)들에게 줄 수는 없습니다.”

 

한치형의 이 발언은 왕실이 정부 각 기관에서 수족처럼 부리는 관노비를 빼앗아 사유화하는 관행을 질타한 것이다. 어느 왕조나 세대가 늘어날수록 왕족 자손에 대한 예우가 큰 골칫거리였다. 일례로 1620년대 10만 명에 달하는 명나라 황족은 통상적으로 집안에서 내시를 노예처럼 부렸고, 그 까닭에 전국의 내시가 10만 명에 달했다. 명나라와 달리 조선 전기 왕실의 내시는 그 수가 대략 140~160명 정도였다. (홍순민, 2004). 대신 노비를 부렸던 조선 왕실은 노비를 늘리기 위해 무던히 애썼던 기록이 다수 보인다.

 

봉림대군에게 하사된 250구 노비는 조선 왕족의 전례에 비춰 특별히 많은 수라 할 순 없다. 널리 알려져 있듯,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의 아들 중에서 5남 광평대군(廣平大君, 1425-1445)과 8남 영응대군(永膺大君, 1434-1467)은 1만 구 이상의 노비를 소유했다고 알려진다. 세자도 아닌 이 두 왕자가 이토록 많은 노비를 소유한 까닭은 무엇인가? 학계에선 흔히 두 왕자의 부인들이 각자 친정에서 많은 노비를 상속받았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송수환, 1990)

 

조선 왕실은 원하는 가문과 사돈을 맺을 수 있는 “늑혼(勒婚, 강제 혼인)”의 특권을 갖고 있었다. 이 관례에 따라서 조선 왕실은 대개 부잣집과 혼사를 맺었고, 그 과정에서 왕족의 재력이 크게 불어날 수 있었다. 그러한 학계의 설명은 일면 그럴싸하지만, 더 큰 의문을 남긴다.

 

12회에서 살펴보았듯, 재령 이씨 이맹현(李孟賢)의 집안이 소유한 노비 758구가 현전하는 15세기 기록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기 때문이다. 758구는 1만 구의 7.5%에 지나지 않는다. 상세한 기록은 없지만, 단순히 처변(妻邊, 처가 친족)의 재산만으로 두 왕자가 1만 구의 노비를 소유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맹현 집안의 노비는 758구였지만, 이를 9남매 각각 상속받은 수는 평균 80여 명 정도였다. 광평대군과 영응대군의 처들도 다 형제자매가 있었을 텐데 과연 1만 명에 달하는 노비를 상속받을 수 있었을까?

 

그보다는 두 왕자가 왕실 자체에서 상속받은 노비의 수가 본래 적잖았으며, 이후 적극적인 가계 경영으로 계속 노비의 규모를 확충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기록이 과장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만약 1만 명이 정확한 숫자라면, 그것은 재정 압박에 시달렸던 조선 왕실이 노비 수를 늘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 결과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조선 왕실은 정부 여러 관사의 공노비나 한미한 집안의 사노비를 다양한 방법으로 유인하여 빼앗는 관례를 보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왕실 재정과 노비의 역할

위에서 잠시 언급했듯 17세기 무렵 명나라 황실은 자금성에 1만 명의 내시를, 전국적으로 10만에 달하는 내시를 수족(手足)과 이목(耳目)처럼 부리며 황실 재정을 운영했다. (Tsai, 1991) 오늘날 영국 왕실의 재정은 군주 기금(sovereign grant), 내탕금(privy purse)과 왕의 개인 재신으로 꾸려진다. 어느 왕실이나 튼튼한 재정이 없다면 제대로 유지될 수 없다.

 

전기 왕실은 크게 민간의 특정 토지에서 조세를 징수하고(收租權),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고(長利), 노비를 직접 부리거나 신공(身貢)을 받아서 재정을 유지했다. 왕실이 조세를 징수하거나 이자를 받아낼 때는 보통 왕실 노복(奴僕)이나 위차(委差)라 불리던 서리들을 내려보냈다. 노복과 서리는 왕실의 위세를 등에 업고 백성을 가혹하게 침탈하여 원망을 사는 경우가 잦았다. 결국 1443년 세종(世宗)은 왕실의 고리대를 금지하였고, 16세기부터는 왕실의 수조권도 대폭 축소되었다. (송수환, 1990; 박성준, 2017)

 

 ▲당나라 장회태자(章懷太子) 묘 벽화 속의 내시들. 제작 연도 706년. /공공부분

 

대신 왕실은 어장(漁場), 염전(鹽田), 토지 등을 확보하여 살림을 꾸려나가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 이후부터는 무주(無主)의 황량한 땅을 궁방전(宮房田)이라는 이름으로 확보하여 재정을 운영했다. 궁방전의 관리에서도 왕실은 여전히 노복이나 서리에게 징수 업무를 위임했는데, 17세기 중엽 이후 이들은 도장(導掌)이라 불렸다. 왕실을 팔아 호가호위하는 도장의 횡포는 뭇 백성의 원망을 샀다는 기록이 상당수 보인다.

 

예컨대 1660년 충주(忠州)에서 80여 명의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헌부에 민간의 토지를 침탈하는 도장의 횡포를 고소했다. 1694년에도 과도한 징수에 격분한 전라도 무장(茂長), 영광(靈光), 장성(長城) 지역 사람들의 항의가 잇따랐다. (박성준, 2017) 이러한 사례들은 단순히 도장의 무도한 행동이라기보단, 재정난에 처한 왕실이 수족을 압박한 결과라 볼 수 있다.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서 왕실은 부득이 노비의 확충에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왕자녀는 노비를 구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 우선 먼 친족에게서 증여받는 기진(寄進)이나 11회에서 보았든 직접 노비를 사들이는 매입(買入)의 방법 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노비를 빼앗아 점유하는 탈점(奪占)의 수단이 동원되었다.

 

노비 탈점의 주체는 주로 왕실 재정을 담당하는 내수사(內需司)였다. 내수사는 공·사노비를 유인해서 빼돌리는 방법으로 왕실 노비를 늘렸다. 도망치거나 호적에서 누락된 노비를 샅샅이 뒤져서 잡아 오는 추쇄(推刷)도 노비 확충의 주요한 방법이었다. 노비를 본래 주인에게서 빼돌려 내수사에 귀속시킬 때는 주로 진고(陳告)의 방법이 사용됐다. 진고란 주변 사람들이 관아에 부정한 사실을 고발하는 행위를 이른다. 신분을 세탁한 노비나 호적에서 누락된 노비를 가족·친지·이웃 등 주변 사람들이 관아에 고발하면 포상이 뒤따랐다. 무엇보다 왕실이 내수사의 종들을 시켜서 적극적으로 노비 확충에 나섰던 정황도 읽힌다.

 

내수사의 ‘간교한’ 사내종 흥수(興守) 이야기

<<성종실록(成宗實錄)>>에는 내수사의 사내종 흥수(興守)의 이야기가 나온다. 흥수는 가혹한 노역에 시달리는 공·사노비들에게 몰래 접근하여 고발장을 내도록 꼬드긴 후 내수사의 선두안(宣頭案, 노비 명부)에 올리는 방법으로 왕실 노비를 확충했던 인물이다. 주인을 배반하려는 사천(私賤)과 본역(本役)을 피하려는 관노(官奴)들이 흥수에게 왕실 노비가 되기 위해 뇌물을 썼을 정도였다.

 

흥수는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5-1506) 때에도 계속 내수사에 노비를 조달했다. 결국 1502년 조정 대신들의 격렬한 항의로 유형을 받았다. 흥수에 관해서 사신(史臣)은 간힐(奸黠, 간사하고 약삭빠른)한 인물이라 기록했다. 1497년 (연산군 3년) 1월 13일 기사엔 모계(謀計)를 써서 성총(聖聰, 임금의 총명함)을 흐린 흥수는 진(秦)나라를 망친 환관 조고(趙高, 기원전 207 사망)보다 더 간악한 인물이란 대간(臺諫)의 평가도 실렸다. 대체 일개 노비의 악행이 어떠했기에 조고에 비견되었을까?

 

 ▲종실록 (오대산본) 표지와 권51 본문시작 부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왕의 수하에 놓인 내수사 노비들은 그야말로 왕권의 기반이었다. 예컨대 1492년(성종 23년) 2월 7일 내수사 노비의 부역 면제를 두고 성종과 신하들이 갑론을박을 벌였다. 신하들은 내수사 노비는 잡역이 없어서 여러 공·사노비가 호시탐탐 내수사에 들어오려 하는데, 내수사 노비의 부역을 또 덜어주면 다른 백성에게 피해가 간다며 성종을 압박했다. 성종(成宗, 재위, 1469-1494)은 내수사 노비들이 둘째 아들 계성군(桂城君, 1480-1504)의 집을 짓고 있어서 잠시 부역을 면제했을 뿐이라고 해명했으나 신하들은 오히려 왕자녀인데 지나치게 크고 높다며 따졌고, 성종은 창경궁을 짓고 남은 목재를 써서 그렇게 되었다고 항변했다. 신하들은 왕실 건물을 지을 때는 내수사 종들을 쓰지 말고 정식으로 토목 사업을 관장하는 선공감(繕工監)에 맡기라며 성종을 다그쳤다. 이에 대해 사신(史臣)은 다른 왕자녀의 집도 계성군의 집처럼 크게 짓다 보니 충청도, 황해도의 목재를 운반하는 수레가 줄을 잇고 선박이 꼬리를 물었다고 힐난조로 기록했다.

 

내수사에 노비를 조달하는 흥수의 활약상은 <<연산군일기>>에도 보이며, <<중종실록>>에도 그의 악행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특히 1497년 (연산군 3년) 1월 6일 대간(臺諫)은 흥수가 포상을 노리고 문서를 조작하여 서울과 지방의 공노비들을 내수사로 이적시키고 있다며 법에 따라 그를 벌해야 한다는 서계(書啓, 보고서)를 올렸다. 물론 희대의 폭군으로 악명 높은 연산군은 대간의 충언을 무시했고, 내수사에 노비를 조달하는 흥수의 행적은 1502년 다시 조정에서 거론되었다. 1502년 (연산군 8년) 7월 5일에는 영의정 한치형을 비롯한 조정의 삼정승(三政丞)이 작심하고 흥수와 작당하여 5백여 명의 노비를 불법으로 소유한 내수사의 서리 최자호(崔自湖) 무리의 곤장을 치고 전 가족을 유형에 처하라 간언했다.

 

 ▲서울 종로구 내수동 72, 조선 왕실의 재정을 관리하던 관아 내수사가 있던 터. 1907년에 폐지되었다. /공공부문

 

놀랍게도 연산군은 다른 무리는 모두 유배를 보내라 명했지만, 흥수만은 지키려 했다. 영의정 한치형은 흥수는 간사한 꾀가 극심하여 “통분함을 견딜 수 없다며” 거듭 흥수를 벌하라 요청했고, 연산군은 결국 못 이기고 흥수를 유형에 처하라 명했다. 삼정승이 나서서 흥수를 먼 곳으로 유배 보내라 요구하고, 연산군은 완강히 버티며 흥수를 곁에 두려 했다는 사실은 왕실과 조정 사이의 이해충돌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정사(正史)에서야 흥수가 모계를 써서 성총을 가린 악한으로 묘사되지만, 왕실이 더 많은 노비를 갖기 위해 내수사의 종과 서리를 다그치고 포상했음이 분명하다. 흥수와 결탁한 내수사의 서리가 무려 500여 명의 노비를 사유화했다는 실록의 기록이 정확하다면, 조선 왕실의 부패상은 실로 드라마 작가의 상상을 초월한다.

 

15~16세기 조선의 왕실 재정은 정부 재정에 속하지 않는 독자적 재산에 기초했으며, 내수사 소속의 대규모 노비 군단이 왕실 재정의 중추였다. 최근 이메일 교신에서 한국 노비제의 대가 이영훈 교수가 제기한 질문이다. “조선의 역대 국왕이 모든 백성을 공민(公民)으로 지배하지 않고, 그 절반을 사민(私民)으로 삼아 양반 관료들과 분할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계속>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박성준, “17~18세기 궁방전에서 도장(導掌)의 발생과 역할,” <<역사문화연구>> 64 (2017): 43-82.

송수환, “조선 전기의 왕실 노비,” <<민족문화>> 13 (1990): 67-102.

염정섭, “17세기 후반~18세기 초반 궁방전의 변화 추이,” <<인문학연구>> 60 (2020).

이영훈, <<한국경제사(I): 한국인의 역사적 전개>>(일조각, 2017).

문숙자, 안승준 논고, <<조선시대 재산상속 문서, 분재기>>, 한국학중앙연구원 (2014).

홍순민, “조선왕조 내시부의 구성과 내시 수효의 변천,” <<역사와 현실>> 52 (2004): 219-263.

Robert B. Crawford, “Eunuch Power in the Ming Dynasty,” T’oung Pao, 49.3 (1961): 115-148.

Shih-shan Henry Tsai, “The Demand and Supply of Ming Eunuchs,” Journal of Asian Studies, 25.2 (1991): 121-146.

 

<97회>“동국(東國)의 양법(良法)”? 조선 유생들의 노비제 옹호론

변방의 중국몽 <15회>

▲1900년경, 광화문 전경. /“The_passing_of_Korea,” Homer Hulbert 공공부문

 

한국사의 수수께끼: 왜 조선은 노비제의 나라가 되었나?

지난주 14회 마지막에 소개한 한국 경제사의 석학 이영훈 교수의 질문을 다시 음미해 보자. “조선의 역대 국왕은 왜 모든 백성을 공민(公民)으로 지배하지 못했는가? 왜 그 절반을 사민(私民)으로 삼아서 양반 관료들과 나눠서 소유하려 했던가?”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의 아들 중에서 5남 광평대군(廣平大君, 1425-1445)과 8남 영응대군(永膺大君, 1434-1467)은 각각 1만 구 이상의 노비를 갖고 있었다. 왕자가 1만 명이 넘는 인구를 노비로 거느릴 수 있었다면, 그들은 일면 스스로 백성을 거느린 작은 봉국(封國)의 영주(領主)처럼 보인다. 그 점에서 조선의 정치체제는 분명 각자 봉토와 백성을 가진 제후들이 다수 공존하는 봉건 모델의 정부를 닮은 면이 있다.

 

고대 주대(周代)의 분봉제(分封制)나 도쿠가와(德川) 막부(幕府) 체제만큼은 아니라 해도 조선의 정치체제도 유심히 관찰하면 국가 안에 여러 소국(小國)이 섞여 있는 기묘한 “다자 지배(polyarchy)”의 구조가 엿보인다. 물론 광평군과 영응군은 특별히 많은 노비를 소유한 예외적인 경우였으며, 조선에선 독자적 “지방 무력(武力)”이 형성되지 않았다. 형식상 조선은 봉건제의 국가가 아니었다. 문제는 조선이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를 표방했음에도 군주의 대민 지배력은 모든 백성에 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선 국왕은 조선 땅에 살아가던 15~16세기 인구의 사실상 절반만을 공민(公民)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인구의 나머지 절반은 제각기 정부, 왕실, 양반가에 소유된 동산(動産, chattel)이었다. 사적인 백성, 곧 사민(私民)이었다. 다시 말해, 조선 국왕은 전체 국인(國人, 나라 사람)의 절반에 대해서만 임금 노릇했을 뿐, 인구 절반의 노비들에 대해선 사실상의 지배를 포기한 상태였다. 노비들은 왕의 백성이 아니라 타인에게 소유된 예속적 존재였다.

 

그 점에서 조선의 노비제는 왕족과 양반의 협업(partnership)으로 유지되었던 독특한 ‘백성 나눠 갖기’의 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정부는 노비에 대한 양반의 인신 지배를 법적으로 인정했으며, 국가 행정력을 이용하여 떨어져 사는 납공노비의 신공 수취를 돕고, 양반의 요청에 부응하여 도망간 노비의 추쇄(推刷)에 공권력을 사용했다. 조선 정부는 양반가의 노비 소유를 법적으로 용인했을 뿐 아니라 그 노비제의 유지와 확충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 점에서 조선 노비제는 전근대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기묘한 한국형 신분제, 한민족(韓民族) 고유의 카스트(caste) 제도였다. 왜 한반도에서 그런 특이한 제도가 생겨나 그토록 장시간 유지되었을까? 섣불리 포폄(褒貶)의 칼날을 휘두르기보단 세계사의 큰 맥락에서 조선 역사의 특이성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왜 동아시아 전근대 다른 지역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노비제가 유독 조선에서 그토록 번성했을까?

 

봉건제 출현의 세계사적 설명

세계사에서 봉건제의 출현은 의외로 쉽게 설명된다. 어떤 국가든 중앙 정부의 행정력이 지방까지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선 자연스럽게 지방 세력이 형성된다. 중앙 정부와 강성해진 지방 세력이 권력 다툼에 돌입하면 그야말로 전국시대의 피바람이 불 수밖에 없다. 전쟁을 피하고 공존을 모색하기 위해선 중앙 정부의 권위가 적정 수준에서 유지되어야 한다. 만약 중앙 정부의 무력이 지방 세력보다 훨씬 더 강한 경우엔 관료행정을 지방까지 확장할 수 있지만, 중앙과 중앙을 둘러싼 지방 전체가 군사적·정치적 세력 균형을 이룰 때는 양자 사이에 쌍무적 신사협정이 가능해진다.

 

 ▲고대 중국 서주(西周)의 분봉제(分封制). 12세기 남송의 경학자 당중우(唐仲友, 1136-1188)의 <<제왕경세도보(帝王經世圖譜)>>에 수록된 그림

 

고대 중국에선 주나라 분봉제도가 무너지면서 전국시대가 펼쳐졌고, 중세 일본에선 전국시대의 참화 끝에 도쿠가와 막부의 강력한 지도력 위에서 비로소 봉건 질서가 이뤄졌다. 흔히 오해하지만, 동아시아 역사에서 봉건시대란 전국시대가 아니라 그와 정반대로 전국의 상황이 종식된 분권화된 평화의 시기를 이른다. 고전 유학의 정치이론에 따르면, 봉건의 질서가 무너지면 전국시대가 펼쳐지고, 전국시대가 종료되면 봉건의 질서가 확립된다. 바로 그 점에 착안하여 중국 역대의 정치사상가들이 전국시대를 최악의 분열기로 묘사하면서 진(秦) 제국이 아니라 서주(西周)의 분봉제를 이상화했다. 18~19세기 일본 미토(水戶) 학파의 사상가들은 도쿠가와 막부의 봉건 질서가 유가적 이상 질서를 구현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요컨대 봉건제란 중앙권력이 지방 세력을 제거할 정도로 크지는 않고, 지방 세력에 제압될 만큼 약하지 않은 세력 균형의 상태에서 생겨나는 다자 공존의 질서이다.

 

물론 조선에는 독자적 무력을 갖추고 여러 지역에 할거하는 봉건 영주 따위는 없었다. 통일신라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전근대 한국사는 군현제를 기본으로 하였다. 그 점에서 조선은 봉건제 국가는 전혀 아니었고, 표면상 중앙집권적 행정 체계를 갖추고 있었지만, 정치 제도만으로 한 사회의 실상을 파악할 수는 없다. 교통, 통신, 경제력, 무력 등 모든 면에서 전근대 국가의 권력은 현대 국가에 비할 바 없이 약했다.

 

 ▲1903년 제작된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지도. /공공부문

 

산업화 이후 등장하는 근대국가의 군사·행정력 및 대민(對民) 장악력과 비교해 보면, 전근대적 국가의 중앙권력이란 미약한 수준이었다. 중앙권력이 강했던 11세기 이후의 중국은 방대한 대륙에서 군현제를 유지하면서 지방 엘리트의 복종을 유도할 수 있었고, 지방 무력이 상대적으로 강했던 일본은 16세기 말 봉건 질서를 확립하고 거의 300년간 성공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왕권이 취약하고 지방 세력도 강성하지 못했던 조선에선 독특한 노비제가 생겨났다. 쉽게 말해, 국가권력이 약했던 조선왕조는 온 백성을 공적 신민(臣民)으로 지배할 수 없었기에 인구의 절반을 양반 계층과 함께 사민으로 지배했다는 것이다. 양반은 사유재산의 핵심이었던 노비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으며, 국가는 양반을 제압할 정도로 강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조선 왕실, 정부, 양반 계층 사이에서 생겨난 절묘한 세력 균형이 조선 노비제로 표출되었다고 하면 과언일까?

 

모화주의(慕華主義)적 자학 사관? 조선 유생 노비제 옹호론

다음 회에 살펴보겠지만, “천생증민(天生烝民),” 곧 “하늘이 온 백성을 낳았다”는 정통 유학의 대전제는 조선의 노비제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 점을 조선의 유생들은 물론 국왕까지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노비제가 유학의 보편적 인간관에 배치된다는 점을 잘 알았기에 노비를 거느린 조선의 양반 계층은 입만 열면 노비제가 기자(箕子)에서 이어지는 “우리나라(我國)” 고유의 전통이라 옹호했다.

 

기자는 고대 중국 은(殷)나라 현인(賢人)으로서 주(周)나라 무왕의 명령으로 한반도에 분봉되어 조선에 중화 문명을 전했다고 알려진 전설의 인물이다. <<논어(論語)>><미자(微子)>장에는 은나라 세 현인 중 한 명이었던 기자가 상나라 최후의 독재자 주왕(紂王)에게 미친 척하며 “그의 노예가 되었다(箕子爲之奴)”는 구절이 보인다. 바로 그 기자가 전했다는 팔조법(八條法)의 제3조 “도둑질한 자는 재산을 몰입하고 노비로 삼는다”는 구절은 고려 때부터 노비제 옹호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조선 유생들도 같은 논리로 노비제야말로 동국(東國) 고유의 제도라고 주장했다.

 

1553년 명종(明宗, 재위 1545-1567) 8년 10월 9일 조선 조정에서 적서 차별의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다음 논쟁을 살펴보자. 명종(明宗)은 서자의 관계 진출을 근원적으로 차단하는 서얼방금법(庶孼防禁法)의 폐지를 시도했다. 이때 조정 대신들은 완강하게 반대하면서 적서(嫡庶), 노주(奴主), 적첩(嫡妾)의 구분은 중국과는 다른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이라는 논리를 펼쳤다. 사간원(司諫院)이 왕에게 다음과 같은 간언(諫言)을 올렸다.

 

“중국에서는 적서(嫡庶) [차별 없이 인재를] 다 쓸 뿐 아니라 노주(奴主, 노예와 주인) 사이에도 정해진 분수가 없어서 문무(文武)에 능하면 천한 노예라도 벼슬을 할 수 있고, 문무를 제대로 익히지 못하면 관인의 자식이라도 천민이 되고 맙니다.”

 

사간원 대신들은 일단 중국은 적서 차별 자체가 없고 문무에 능하면 천한 노예도 벼슬을 할 수 있는 이상적 사회라고 미화하고, 이어서 “우리나라”는 기자(箕子)의 유지를 받아 노비제를 유지하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달라 기자가 들어와서 노예와 주인을 엄격히 구별했음에도 이따금 기강(紀綱)과 상도(常度)가 무너지는 변고가 있었습니다. 지금 노주 사이에 정해진 분수가 없는 중국 법을 흉내 내면서 이 나라가 어지러워지지 않기를 바란다면 이 어찌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적서의 구분에 있어서 중국은 우리나라와 같지 않아 아내가 반드시 모두 좋은 집안의 딸은 아니고 첩이 반드시 아내보다 비천하지는 않으며, 선후나 후박(厚薄)으로 적첩(嫡妾)을 구분합니다. 중국에서 따로 서자의 출사(出仕)를 방금(防禁)을 하지 않아도 폐단이 없음은 대개 그래서입니다.”

 

중국은 적서 차별도, 노주의 구분도 없으며, 정부인과 첩 사이를 따지지 않아도 잘 돌아가는 문명의 제국이라는 사대주의적 발언이다. 반면 동국(東國)은 고대의 기자에게서 화하(華夏) 문명을 전해 받아서 그나마 문명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자기 폄하의 주장이다. 사간원은 이후 동국의 역대 왕조는 모두가 적서, 노주, 적첩의 차별을 엄격하게 지켰기에 그나마 존속될 수 있었다면서 자기비하적으로 노비제를 옹호하고 있다. 그 상세한 내용은 다음 문단에 제시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땅덩이가 작고 예의가 없으면 상하가 어지럽게 되므로 적서를 구분하고 노비를 대대로 전하는 세습법을 역대로 행하였으나 오랫동안 아무런 폐단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는 양법(良法)이라 할 만한데, 지금 한두 사람의 호소로 인하여 허물어뜨릴 수 있겠습니까.”

 

 ▲사간원은 조선시대 간쟁과 논박을 관장하던 관청이었다. 1402년에 설립되었고, 1894년에 폐지되었다. 동궐도(東闕圖)에 묘사된 사간원 대청. /공공부문

 

땅이 크고 넓고 문명이 발달한 중국은 노예도 문무에 능하면 벼슬을 할 수 있으며, 처첩의 차별도 없어 서얼도 관계에 진출할 수 있지만, 조선은 작은 나라라서 노비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유교 이념이나 역사 현실에 비춰볼 때, 조선 유생의 이러한 주장은 실상 일말의 설득력도 없다. 그저 노비제의 유지·강화를 위한 궤변이라 치부한다면 현대인의 무리한 평가인가?

 

우선 기자는 문헌적 근거도 희박한 고대의 전설적 인물에 불과하다. 게다가 기자가 전했다는 팔조법은 도둑질한 범죄자의 재산을 몰수해서 노예로 삼으라고 했을 뿐 아무 죄없이 세상에 태어난 숱한 사람들에 자자손손 노예의 멍에를 대물림하라 요구하진 않았다. 중국은 큰 나라라서 노비제가 없이도 유지될 수 있고, 조선은 작은 나라라서 노비제의 강화 없이 존속될 수 없다는 주장 또한 상식에 어긋난다. 작은 나라라면 노비제 없이 더 잘 살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유가 경전의 보편적 인간관에 비춰봐도 그러한 주장은 노비를 절대 잃지 않으려는 노주(奴主)의 교묘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노비제를 유지하려는 양반 계급의 물욕과 탐심이 이러한 궤변의 악순환을 만들어 냈다. 우리는 지금 조선 유생의 극단적인 모화(慕華)사상이 자기비하적 현상 유지의 논리로 뒤바뀌어 노비제의 기반을 다시 구축하는 이념적 콘크리트로 활용되고 있는 부조리한 장면을 목격하고 있다.

 

무엇보다 노비제가 양법(良法) 곧 좋은 제도라는 사간원의 주장을 과연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미국에선 남북전쟁 이전 노예제를 옹호한 숱한 인물들의 행적을 조사해서 낱낱이 밝히는 운동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지만, 과거의 악인을 찾아내서 단죄한들 역사가 바로잡힐 리 없다. 우리에겐 그저 망각의 늪에서 과거사를 건져내서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분석하고 평가하고 기억해야 할 임무가 있을 뿐. <계속>

 

<98회>조선사의 최대 모순: 천민(賤民)도 천민(天民)이라면, 노비는 누구인가?

변방의 중국몽 <16회>

▲송은(松隱) 박익(朴翊, 1332-1398)의 묘에 그려진 벽화 가운데 인물도. 앞의 작은 인물은 노비 추정. /공공부문

 

세계 노예제의 역사를 돌아보면, 노예주도 자신이 소유한 노예가 똑같은 인간이란 사실을 모르지 않았음을 여러 경로로 확인할 수 있다. 노예주들은 억지 논리와 변명거리를 지어내어 노예들을 인간 이하(subhuman)의 존재로 취급하려 했지만, 인간은 인간을 알아본다. 피부, 머리털, 눈동자의 색깔이 달라도 얼굴을 마주 보고 말 한마디 섞어 보면 누구나 같은 사피엔스임을 느낀다.

 

조선 사람들도 예외였을 수 없다. 그들이 남긴 문장을 읽어보면, 천민(賤民)도 천민(天民, 하늘의 백성)이란 구절도 보이며, 노비도 동포(同胞)라는 선언도 나온다. 그들도 인간일진대 하늘의 백성을, 동포의 절반을 노비 삼아서 부리면서 죄책감을 못 느꼈을 리 없다.

 

양민, 천민 모두가 하늘이 낸 백성

1415년(太宗, 15년) 음력 1월 20일, 형조판서 심온(沈溫, 1375-1419) 등이 태종(太宗, 재위, 1400-1418)에게 상소했다. 당시 노비의 소유권을 놓고 형제자매가 쟁송(爭訟)하는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이에 대해 심온은 임금을 향해 다음과 같이 아뢴다.

 

“하늘이 내신 백성은 본래 양민(良民)도, 천민(賤民)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천민(天民, 하늘의 백성)임에도 [그 일부를] 사유재산으로 삼고선 아버지, 할아버지의 노비라 따지면서 기강도 한계도 없이 쟁송(爭訟)을 벌여서 심지어 골육을 상잔하고 풍속을 훼상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으니 가슴 아픕니다(天之生民, 本無良賤, 將一般天民, 以爲私財, 稱父祖奴婢, 相爲爭訟, 無有紀極, 以至骨肉相殘, 敗傷風俗, 可謂痛心.).”

 

천민(天民)이란 말 그대로 하늘의 백성, 하늘이 낸 백성이란 뜻이다. 그 전거(典據)는 “하늘이 온 백성을 낳으셨으니 만물엔 법칙이 있네(天生烝民, 有物有則)”라는 <<시경(詩經)>>의 시구이다. 조선 유생들이 졸졸 외던 바로 그 구절에서 “모두가 하늘의 백성이다”란 보편명제가 나왔다.

 

양천(良賤) 구분 없이 모두가 천민(天民)이라 선언한 후 심온은 임금을 향해 어떻게 하늘의 백성을 노예로 삼을 수 있냐고 항의하고 있다. 이 항변 속에는 모든 인간은 하늘의 아들딸이라는 만민 평등의 대전제가 깔려 있다.

 

그 대전제는 한민족(韓民族) 고유의 인내천(人乃天) 사상과 상통하고,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과 공명한다. “하늘이 온 백성을 낳았으니, 사람이 곧 하늘이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 하늘을 우러르며 조선 초기의 일부 사대부 대관들은 노비제의 부조리를 지적하고 비판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의 말대로 천민(賤民)도 천민(天民)이라면 조선의 노비제는 천민(天民)을 천민(賤民) 삼는 역천(逆天)의 제도가 아닌가? 임금이 스스로 천민(賤民) 역시 천민(天民)이라 생각했다면, 어떻게 그 수많은 천민(天民)을 천민(賤民) 상태로 방치할 수 있었을까?

 

하늘의 백성을 노비 삼을 수 있나?

1444년(世宗, 26년) 윤칠월 24일,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은 노비를 함부로 때리거나 죽이지 말라며 “하물며 노비가 비록 천민(賤民)이라 해도 모두가 천민(天民)임에랴”(況奴婢雖賤, 莫非天民也.)고 역설했다. 세종은 “하늘이 낸 백성을 부리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형별로 무고한 사람을 죽여서 되겠는가?” 반문한다.

 

1488년인 성종(成宗, 재위 1470-1495) 19년 6월 18일, 홍문관 부제학 안호(安瑚, 1437-1503) 등은 임금에게 포악한 노비는 엄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성종은 다음과 같이 받아친다. “하늘이 온 백성을 낳으실 때 본래 귀천이 없었다. 비록 노비와 주인이라 하나 애초 모두 천민(天民)이다. 지금 사람마다 자기 노복이라며 잔학하게 대한다면, 이는 하늘의 백성을 해치는 것이니 어찌 임금과 법이 있다고 하겠는가?(天生蒸民, 本無貴賤。 雖名爲奴主, 初一天民也。 今若人人謂爲己奴僕而逞其殘虐, 則是害天民也, 其謂之有君有法乎?)”

 

25대에 걸친 472년의 방대한 기록 <<조선왕조실록>>에서 양민과 천민 모두 하늘이 낸 백성이라 정의하는 대목은 이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와 <<명종실록(明宗實錄)>>에는 불가의 승려도 천민(天民)이라는 구절이 한두 번 등장하지만, 이는 노비가 아니라 불교에 관한 언급이라 일단 논외로 한다.

 

지난주 15회에서 보았듯 조선의 양반 계층은 노비제를 동국(東國)의 양법(良法)이라 미화하면서 기자(箕子)의 팔조법(八條法)을 근거로 삼았으나 위의 사례들은 “천생증민(天生烝民)”의 유교적 대전제가 조선의 노비제와 충돌함을 조선의 유생들은 물론 국왕까지도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실록>>에 보이는 다음 사례는 그 점을 더욱 명확하게 보여준다.

 

신분 해방을 꿈꾸던 승노(僧奴) 해심의 좌절

1431년 (세종 13) 3월 17일 조선 조정에서 거론된 사건이다. 당시 조선 땅에 해심(海心)이란 법명의 승려가 살고 있었다. 신분상 그는 판목사(判牧事)를 지냈던 김사청(金士淸)의 사내종 신분이었다. 당시 표현으로 그는 승노(僧奴), 곧 머리 깎고 중이 된 노예였다. 불가에 귀의한 해심은 예속의 멍에를 벗고 양인의 신분을 얻기 위해서 소송 중에 있었다.

 

 ▲송은(松隱) 박익(朴翊, 1332-1398)의 묘에 그려진 벽화 가운데 인물도. /공공부문

 

해심은 타인을 사주하여 주인 김사청의 범죄를 관아에 고소하는 꾀를 내었다. 김사청을 관아에 고발한 사람은 궁궐에서 일하는 이천부(李天富)란 사내였다. 이천부의 고소에 따르면, 김사청은 자신의 농막을 보수하기 위해 감히 조선 태조(太祖, 재위 1392-1398) 이성계(李成桂, 1335-1408)가 묻힌 건원릉(健元陵)의 나무를 베는 범죄를 저질렀다. 형조·의금부의 관리들은 당장 건원릉에 가서 현장을 조사했는데, 김사청이 베었다는 나무는 능의 교목(喬木)이 아니라 능 주변의 잡목에 불과했다. 또한 김사천을 고소한 이천부는 심문 과정에서 김사천의 사내종 해심이 시켰다고 실토했다.

 

의금부의 조사 결과를 보고 받은 세종은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기각하려 했는데······. 조정 대신들은 거세게 반발하면서 이 사건은 노비가 직접 관에 주인을 고소한 사건은 아니라 해도 신분제의 강상(綱常)에 직결된 사건이므로 반드시 전말을 밝혀서 엄중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통촉했다.

 

엿새 후인 1431년 (세종 13) 3월 23일, 이 사건의 전말을 보고받은 세종은 고심에 빠졌다. 해심은 비록 천민이었으나 당시 양민이 되기 위해서 소송 중에 있었다. 1420년 이후 조선의 국법은 노비가 주인을 고소할 수 없게 했다. 만약 해심을 천민으로 본다면 노비가 주인을 고소한 사례에 해당하므로 그는 교형을 당해야 한다. 실제로 1422년 형조(刑曹)는 주인을 고소한 노비는 주인의 죄목을 따지지 말고 무조건 교형(絞刑,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며, 세종은 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주인을 고소한 종놈을 교수형에 처하소서!”

작은 일로 노비를 교형에 처하기는 꺼렸던 세종의 고심이 깊어졌다. 해심의 현재 신분은 천민이지만, 그는 소양(訴良) 중이었다. 소양이란 양인이 되기 위한 노비의 소송을 의미한다. 해심은 양인이 될 가능성을 가진 천민이었다. 그러한 해심을 일방적으로 주인을 고소한 노비로 간주하여 교형에 처한다면 부당할 수 있다. 세종은 판단을 유보한 채 조정 대신에게 논의하라 했다. 대신들의 의견은 극적으로 엇갈렸다.

 

우의정 맹사성(孟思誠, 1360-1438), 이조판서 권진(權軫, 1357-1435) 등 다수파는 이 사건을 종이 주인을 고발한 사건이라 주장했다. 그들은 해심이 비록 양인의 신분을 얻기 위한 소송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소송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천민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의금부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해심의 형제와 친족은 모두 김사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는 노비들이었다. 오직 해심만이 양인이 되기 위해 소송장을 내고 은둔 상태에서 타인을 사주하여 고발장을 냈다. 대신들은 그러한 정황을 볼 때 해심이 종의 신분으로 주인을 고발했다고 봐야 합당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맞선 이조참판 정연(鄭淵, 1389-1444)과 공조참판 박신생(朴信生, ?~?) 등은 해심이 직접 김사천을 고발하지도 않았으며, 이미 양인이 되려는 해심의 소송이 수리되어 심의 중이니 그 결과를 본 후에 판단해야 합당하다는 소수 의견을 냈다.

 

다수파는 해심이 주노의 강상을 어긴 중죄인이라며 임금을 압박했고, 소수파는 신중론을 펼쳤다. 쉽게 말해, 해심의 목숨을 놓고 다수파는 죽이라 하고, 소수파는 웬만하면 살려주자고 하는 상황이었다. 본래 이 사건을 기각하려 했던 임금이었지만, 육조(六曹) 중 호조(戶曹)를 제외한 오조(五曹)의 판서들이 다 들고 일어나 죽이라 외쳐대자 결국 해심의 처형을 결정했는데····.

 

죽이느냐, 살리느냐? 세종의 번뇌

이틀 후인 3월 25일 의금부는 임금에게 승노 해심을 종으로서 주인을 고소한 죄를 물어 마땅히 교형에 처해야 한다고 아뢨다. 이에 세종은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좌대언(左代言) 김종서(金宗瑞, 1383-1453)에게 교형에 처하지 말고 곤장 100대를 치는 장형(杖刑)과 3천 리의 유형(流刑)을 내리라 명했다. 세종은 그가 양인의 신분을 얻기 위해 소송 중이라는 점과 직접 주인을 소송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그의 목숨만은 살려주었다. 교형을 요구하는 대신들에 비한다면 어질다면 어진 처사라 할 수 있지만, 세종이 제시하는 감형의 논리는 그 당시의 엄격한 신분법에서 벗어나진 않는다.

 

 ▲1965년 100원 지폐에 인쇄된 세종대왕의 초상화. 조폐공사. /공공부문

 

우선 세종은 해심이 승소하여 양민이 되더라도 그전까지는 천민의 신분이므로 소송을 중단하고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는 조정 다수파의 궤변을 “너무나 교묘한 말”이라며 비판했다. 세종은 그러나 주인과 노비의 관계를 임금과 신하의 관계에 비유하면서 노비가 양인이 되기 위해 소송을 하려는 생각 자체가 주인에 대한 배신이라는 묘한 말을 한다. 다만 해심이 이미 두세 번이나 소송을 제기했으며 결국 정부는 그 소송을 수리했다는 객관적 상황을 인정한 후, 직접 소송을 하지 않고 타인을 통해서 했다는 사건의 특수성을 참작한 후, 해심의 중죄는 인정되나 교형보다는 장형과 유형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세종은 1420년 (세종 2) 9월 “노비가 주인을 고소하면 수리하지 말고 참형에 처하라”는 예조판서 허조(許稠)의 제안에 동의했다. “천하, 국가, 가족에는 인륜이 있으며 제각기 군신과 상하의 구분이 반드시 있으니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고 침범하는 마음은 조금도 용납할 수 없음”이 노비의 주인 고소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한 이념적 근거였다. 1431년 세종은 11년 전 스스로 제정한 법의 노끈이 한 승노의 숨통을 조이기 직전 군주의 재량권을 발휘하여 그의 목숨만은 구해주었다. 모든 법은 시대적 한계가 있으며 역사적 맥락이 있다지만, 해심을 살려준 성은이 망극하다 할 수 있을까?

 

노비가 주인을 고소하면 참형에 처하라는 법을 만든 임금은 세종이었다. 그 법이 비틀어 해심을 딱 안 죽을 만큼 때려서 유배한 임금도 세종이었다. 세종의 두 얼굴은 천민(賤民)도 천민(天民)이라 부르짖으면서 그 절반을 노비로 만든 조선의 모순된 인간관을 보여준다. <계속>

 

 <99회>노예제 국가 북한에 팽(烹)당한 남한 “86세대” 운동권

변방의 중국몽 <17회>

▲김일성 동상 앞에서 절하는 북한 인민들. /공공부문

 

지난 세밑 북한 국무위원장 김정은은 공식적으로 “우리민족끼리” 전략을 파기했다. 대한민국의 국민이 더는 “동족”이 아니라 “미국의 식민지 졸개에 불과한 괴이한 족속들”이라며 그는 북한의 국격과 지위상 함께 통일 논의를 할 수 없다고 했다. 74년 전 북한은 “민족 해방”의 깃발을 들고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전쟁을 일으켰다. 이제 핵무장을 끝낸 북한의 수령은 남한 사람들이 동족이 아니라며 유사시 핵무기 사용 불사를 선언하고 있다.

 

김정은이 미국의 식민지 졸개라 부르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잠시 돌아보자. 625전쟁 이래 대한민국은 한미 군사동맹의 엄호 아래서 개방형 수출입국 정책에 따라 파죽지세로 세계시장을 향해 뻗어나가 최첨단 기술력을 갖춘 세계적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대한민국의 성공은 국경을 넘어,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 세계의 모든 민족과 어울려 함께 이룩한 접촉과 확산, 교류와 혼융의 성과다.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적극적으로, 창조적으로, 주체적으로 적응해 간 결과다. 북한을 제외한 전 세계 어느 나라도 대한민국을 미국의 식민지라 생각하지 않는다.

 

반면 오늘날 북한은 어떤가? 스탈린식 전체주의 명령경제와 낡아빠진 민족 지상의 광기와 자폐적 유일주의가 결합한 인류사 최악의 전체주의 세습 전제 정권이다. 40년 전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했음에도 북한은 고작 ‘김일성 유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수백만 명이 아사하는데도 핵 개발에만 몰두해 왔다. 북한의 주체사상은 인민은 국가에 종속되고 국가는 수령의 사유물에 불과하다는 폭압적 세습 전제정의 궤변에 불과하다.

 

그러한 북한의 김정은이 이제 제 입으로 남한 사람들과의 동족 의식을 버리겠다고 했다. 1980년대 이래 북한과 더불어 주야장천 “우리민족끼리”를 노래 불러온 남한의 주사파, 반미·종북파, 반외세 자주파 세력은 이제 무엇으로 살아가나? “86세대”의 정치권 퇴출이 시대정신이 되어가는 지금, 남한의 주사파들은 갈지자 파행을 면할 수 없게 됐다. 사냥개처럼 북한에 돈과 시간을 벌어준 그들이 이제 핵 무장한 북한에 삶겨 먹히는 신세가 되었다면 과언일까?

 

 ▲남북한의 차이를 한 눈에 보여주는 위성사진. /공공부문

 

“우리민족끼리”의 환상이 깨지다

지난 70여 년 북한은 남한을 향해 “민족 해방”의 이념 공세를 펼쳐왔다. 북한의 주체사상은 1980년대 이래 대한민국의 운동권을 파고들어 소위 86세대의 의식을 지배했다. 김일성을 맹종하던 1980년대의 주사파는 “반미구국” 투쟁을 전개했다. 당시 그들의 구호는 “반전반핵 양키고홈”이었다.

 

“우리민족끼리”라는 구호가 남북 정부의 공동선언문에 등장한 시기는 10여 년이 지난 후였다. 2000년 6월13일~6월15일까지 평양에서 정상회담 후 발표된 “남북공동선언문” 제1조를 보면 “우리민족끼리”가 적혀 있다. 2005년 7월 20일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 작가대회의 선언문에도 “우리민족끼리”가 나온다. 당시 남북한의 작가들은 서로 얼싸 끌어안고 민족적 동질성을 확인하며 민족 통일의 문학을 추구하자고 부르짖었다.

 

 ▲1992년 5월 13일 건국대학교에서 열린 전대협 행사. 북한의 인공기, 태극기, 한반도기가 나란히 걸려 있다. /공공부문

 

전 세계 게르만족이 모여서 “우리민족끼리”를 외친다면 어떨까? 유대민족이 “우리민족끼리”를 부르짖는다면? 한국인을 포함한 전 세계인이 경악할 수밖에 없다. “우리민족끼리”란 그만큼 인류의 보편사에 어긋나는 시대착오적인 종족주의의 구호이다. 그 구호가 “615 남북공동선언” 제1조의 기본정신으로 천명되었다는 사실은 남북한 모두 병적인 민족지상주의에 포박당해 있었음을 말해준다.

 

지금에서야 김정은 스스로 동족 의식을 버린다니 만시지탄(晩時之歎)이나 다행이다. 남한의 86세대 주사파 집단은 “우리민족끼리”의 주술에 사로잡혀서 김일성을 동족의 수령으로 섬기는 지적 아둔함과 종교적 광신을 보였다. 그들은 진정 히틀러를 아리안족의 영웅으로 추앙하던 독일 제3 제국의 나치 추종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김씨 왕조의 수령을 “우리 민족”이라 여겼기에 그들은 북한의 인권 유린과 정치 범죄에 대해선 극구 침묵해 왔다. 이제 그들은 입을 닫을 명분을 상실했다. 북한 스스로 “우리민족끼리”의 원칙을 폐기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흔히 말하듯, 민족의 환상을 버리면 비로소 계급 모순이 보인다. 북한의 계급 모순은 강제 수용소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북한은 세계 최악의 노예제 국가

현대판 노예제 청산을 목표로 활동 중인 국제 인권 단체 ‘워크 프리(Walk Free)’는 매년 전 세계 160개 국가의 실태를 조사하여 글로벌 노예제 인덱스(Global Slavery Index, GSI)를 발표하고 있다. 현대판 노예제는 강제 노동, 강제 혼인, 부채 속박(debt bondage), 강제 매춘, 인신매매, 아동 판매 및 착취 등을 이른다. 이 발표 따르면, 2021년 현재 세계에는 대략 5천만 명이 노예 상태로 연명하고 있다. 2016년에 비해 그 수가 무려 1천만 명이나 증가했다.

 

현대판 노예제는 대부분 국가권력의 사각지대에서 범죄조직이나 일탈적 개인들에 의해 자행되는 특징이 있다. 20세기 후반부터 국가권력에 의한 개인의 노예화는 대부분 나라에서 불법화되었다. 그럼에도 2021년 현재 전 세계에선 대략 390만 명 정도가 국가권력 아래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고 있다. 국가권력에 의한 인민의 노예화는 크게 강제 수용소 노동(55.8%, 220만 명), 강제 징집 및 군대의 인권 유린(110만 명, 26.9%), 경제 개발 목적의 강제 노역 (70만 명, 17.3%) 등으로 분류된다. 그 390만 명의 국가 노예 중에서 69%에 달하는 270만 명이 북한 사람들이다.

 

세계 160개국 인구 당 노예 비율의 국가별 순위를 보면, 북한이 단연 세계 1위이다. 북한은 1천 명 중에서 무려 104.6명이 노예로 분류된다. 다시 말해, 북한 인구의 10.4%가 노예이다. 그 뒤를 아프리카 북동부의 에리트레아(9%), 아프리카 북서부의 모리타니아(3.2%), 사우디아라비아(2.1%), 튀르키예(1.56%), 타지키스탄(1.4%) 등이 따른다. 인구의 10% 이상이 노예로 살고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북한밖에 없다. 전 세계 여러 국가 중에서 정부가 노예제 퇴치를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나라는 영국, 호주, 네델란드 등이며, 정부의 노력이 가장 소극적인 나라는 북한, 에리트레아, 이란, 리비아, 소말리아 등을 꼽을 수 있다.

 ▲현대판 노예제 국가별 순위 1~10등. 아래 표 참조. /walkfree.org

 

 

참고로 대한민국의 노예 인구는 대략 18만 명, 1천 명당 3.5명꼴, 전체 인구의 0.35%이며, 노예가 없는 순위로는 세계 160개국 중에서 117위이다. 일본은 14만 4천 명 정도, 1천 명당 1.1명꼴, 전체 인구의 0.11%로 세계 152위이다.

 

북한의 현대판 노예제: 국가권력에 의한 인민의 노예화

북한의 현대판 노예제는 국가가 직접 공권력을 사용하여 10%가 넘는 인민을 조직적으로 노예화하고 있다는 중대한 특징을 보여준다. 북한은 국가권력에 의한 합법적 노예화가 일반화된 국가 노예제(state slavery)의 나라이다.

 

21세기 현재 국가 노예제는 대략 두 가지 형태를 보인다. 그 첫 번째는 20세기 공산국가의 강제 수용소이다. 1920-30년대 소련의 굴라그(gulag)나 1949년 이래 중국의 라오가이(勞改)가 대표적이다. 2005년 당시 중국에는 대략 천 개의 라오가이 수용소가 있었다. 두 번째 형태는 정부가 재정 수입을 올리기 위해 국민의 일부를 노예로 삼는 경우이다. 우즈베키스탄의 정부가 어린 학생들을 목화 농장에서 강제로 부린 사례가 대표적이다. 1993년 에티오피아에서 독립한 에리트레아는 1998년 이후 전 국민을 무기한 징집하여 군역을 부과할 수 있는 국가 노예제의 나라가 되었다. (Rhoda E. Howard-Hassmann, “State Enslavement in North Korea,” Contemporary Slavery [UBC Press, 2017])

 

북한은 이 두 가지 형태를 모두 갖춘 세계 최악의 국가 노예제의 나라이다. 1997년 발표한 한 연구에 따르면, 1948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북한의 강제 수용소에서 최소한 백오십만 명이 사망했다. 2005년도 발표된 다른 연구에 따르면, 수용소에 끌려가는 연평균 20만~30만 명의 포로 중에서 10%가 사망한다는 가정에 따라 1948년 이래 사망자 수를 대략 100만 명으로 추산했다. 강제 수용소에서 가장 중요한 사망원인은 “의도적인 기아선상의 배식(intentional starvation-level rations)”에 따른 상시적 굶주림이다. 포로들은 일본에 수출되는 목재 생산에 투입되기도 하고, 도로 건설, 광산, 채석장, 핵시설 등에서 살인적인 노동에 동원되기도 한다. 하루 평균 노동시간이 16.5시간인데, 일을 하고 나면 쉴 틈도 없이 강력한 이념 투쟁 교육을 받아야만 한다. 수용소에선 청소년들, 심지어는 5세 아동까지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같은 논문)

 

2009년도 인권감시단(Human Rights Watch)의 보고에 따르면, 1,500여 명의 북한 사람들이 러시아에서 벌목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1년에 단 이틀만 쉬면서 살인적인 강제 노역에 내몰렸는데,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처벌을 받았다. 놀랍게도 이들은 외화를 벌기 위해 자원한 노동자들이었다. 북한 정권은 그들이 받은 임금의 대부분을 고스란히 착취했다. 러시아 외에도 불가리아, 중국, 이라크, 쿠웨이트, 몽골 등지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들이 상당수 있는데, 이들의 임금은 북한 정권의 계좌로 송금된다. 2012년 당시 6만~6만 5천 명의 북한 노동자들이 40여 개 국가에서 일하고 있었다. 2010년 당시 개성공단에서 일하던 4만 4천 명의 노동자들 역시 국제 노동기준에 훨씬 못 미치는 열악한 환경에서 중노동에 시달렸으며, 그들의 임금은 북한 정부에서 가져갔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2008년 제작된 영화 “크로싱(Crossing)”에 재현된 북한 요덕수용소의 모습. /공공부문

 

북한의 국가 노예제를 설명하기 위해선 북한 특유의 수령 유일주의, 파시스트적 종족주의, 병적인 피해망상증 등 이념적 병폐 외에도 북한 사회에 만연한 인권 유린의 문화와 부정부패의 현실을 고려해야만 한다. 북한은 최소한의 인권도, 경제적 자유도, 법치도 없는 굴라그 사회이다. 나라 전체가 통째로 김씨 왕조를 위해 존재하는 거대한 수용소라 할 수 있다. 대체 어떻게 한반도의 역사에서 북한 같은 세계 최악의 괴물 국가가 생겨날 수 있었는가?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에선 지난 여섯 회에 걸쳐서 조선 노비제의 역사를 다뤄왔다. 조선 노비제와 북한의 국가 노예제는 과연 무관할 수 있을까? 양자 사이에 모종의 연속성이 있다면, 우리는 과연 어떠한 방법으로 조선 노비제와 북한의 국가 노예제 사이의 역사적 상관성(correlations)을 논구할 수 있을까? <계속>

 

 

2024.01.27

 <100회>지린성 북한 노동자 폭동, 현대판 노예 반란인가?

변방의 중국몽 <18회>

▲2019년 12월 5일 북한과 국경을 맞댄 중국 단둥시에서 공장으로 출근하는 북한 노동자들. /공공부문

 

대체 김일성과 김정일이 무슨 노력을 했는가?

지난 19일 대한민국 제1 야당의 대표는 군사 도발을 이어가는 북한 김정은을 향해서 적대 행위를 중단하라며 “선대들, 우리 북한의 김정일, 또 김일성 주석의 노력들이 폄훼되지 않도록, 훼손되지 않도록 애써야 할 것”이라 말했다. 부랑아의 행패를 막기 위해 그 할아비와 아비는 안 그랬다고 타이르는 화법인데, 대를 이은 김씨 왕조의 패악질을 상기한다면 어불성설의 궤변이고 언어도단의 망언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이 대체 무엇을 위해 무슨 노력을 어떻게 했다는 말인가?

 

김일성은 스탈린의 허락을 받아 소련제 무기로 중무장하고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킨 특급 전범이며, 전 인민을 노예적 삶으로 내몰며 죽을 그날까지 거의 50년간 병적인 전체주의 유일 지배 아래 묶어 둔 시대착오적 파시스트 독재자였다. 권력을 세습한 김정일은 250만에서 350만명을 굶겨 죽이면서도 국가의 모든 재원을 총동원하여 핵무기 개발에만 전념했던 반인류적 정치범죄와 군사 테러의 주범이었다.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전 세계의 일반적 평가가 그러함에도 한국 정치판에선 제1야당의 대표가 “우리 김정일, 김일성 주석의 노력들” 운운하는 부조리극이 벌어지고 있다. 대중 정치인이 그런 발언을 할 땐 정치적 계산속이 없었을 리 없다. 지금도 대한민국에선 김씨 왕조를 “우리 민족”이라 여겨 동정하고 옹호하는 반미·친북의 정서가 널리 퍼져 있기에 제1 야당 대표는 그러한 비상식적 발언을 하고도 큰 탈 없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김일성 광장 주석단 아래 게시된 김씨 왕조 3대 독재자의 사진. /공공부문

 

중국 지린성 북한 노동자들의 파업과 폭동

제1야당 대표가 “우리 김정일, 김일성 주석의 노력들”을 운운하던 바로 그날이다. 지난 19일 일본 산케이 신문(産經新聞)은 중국의 북한 노동자 관련 특종 보도를 내보냈다. 이 보도에 따르면, 중국 지린성의 여러 공장에서 강제노역과 노예 노동에 내몰려 온 수천 명 북한 노동자들이 임금 체불(滯拂)에 항의하여 대규모 파업을 벌이고, 폭동을 일으켰다.

 

산케이 신문에 이 소식을 제보한 탈북 외교관 제1호인 고영환 통일부 장관 특보는 중국 동북 3성에 나와 있는 북한 관리들과의 직접 교신을 통해서 이 사실을 알아냈다. 필자와의 교신에 따르면, 고 특보는 2개 이상의 소식통을 직접 대조·검토했다고 한다.

 

 ▲2017년 10월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인근 건설 현장의 북한 노동자들. /VOA

 

코비드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2020년 이래 2년 넘게 북·중 왕래가 끊기었다. 그 기간 북한 국방성 산하의 복수 회사들은 중국 측에서 지급한 노동자 임금 거의 전액을 본국에 상납하고 있었다. 회사 측은 북한 노동자들이 귀국할 때 일괄적으로 임금을 돌려주겠다고 해명해 왔지만, 작년부터 북·중 간 국경 왕래가 서서히 재개되면서 북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벌어들인 임금을 김씨 정권이 착복하고 있는 현실에 눈뜨게 되었다.

 

격분한 북한 노동자들은 1월 11일 조업 거부에 들어갔다. 머잖아 파업은 지린성 내의 의류 생산, 수산물 가공 공장으로 퍼져나갔다. 공장을 점거한 후 북한 노동자들은 북한 간부를 인질로 잡고서 공장의 기기를 파괴하는 명실공히 폭동을 일으켰다. 이 소동을 “특대형 사건”으로 규정한 김정은 정권은 선양에 주재하는 북한 영사관 비밀경찰 국가보위성의 요원을 현장에 급파하여 체불 임금을 즉각 주겠다고 약속하며 사태 수습에 나섰다. 지금은 임금의 일부를 주어서 성난 노동자들을 일단 진정시켰지만, 가혹한 노예 노동이 지속되는 한 파업과 폭동이 언제든 쉽게 재개될 수 있어 보인다.

 

 ▲2007년 카타르 주택 공사 현장의 북한 노동자들. /조선일보DB

 

노동자의 시위인가? 노예들의 반란인가?

1980년대부터 북한은 외화벌이를 위해서 전 세계에 노동자들을 파견해 왔다. 김정은 정권도 외화벌이를 위해서 수만 명의 노동자들을 전 세계 40여 개 국가들에 내보냈다. 북한 노동자들은 러시아 시베리아의 벌목장에서, 중국 둥베이(東北)의 공장 지대에서, 중동의 건설 현장과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북한 정권의 삼엄한 감시를 받으며 가혹한 노동에 시달려 왔다.

 

해외에 파견되어 북한 노동자들은 주말도 없이 거의 매일 14~16시간 중노동에 내몰린다. 그들이 쉴 수 있는 날은 한 달에 고작 하루 정도에 불과하다. 위험천만의 작업 환경에서 기초적 의료 혜택도 없이 강제 노역에 시달리지만, 그 임금의 90% 이상은 북한 정부의 몫이다. 바로 그 점에서 국제 인권 단체의 여러 보고서는 그들의 노역을 노예 노동으로, 그들의 신분을 국가의 노예로 규정하고 있다.

 

 ▲북한 노동자들이 파견된 나라들. /northkoreaintheworld.org

 

그러한 인권유린의 실태를 조사한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2017년 채택한 결의에서 중국을 포함한 회원국에 대해서 2019년 말까지 북한 노동자를 북한으로 돌려보내라 요구했다. 중국은 유엔의 결의에 동조하지 않았다. 2020년 팬데믹이 터지면서 중국과 러시아엔 여전히 많은 북한 노동자가 그대로 억류되어 있었다.

 

2022년 11월 21일 미국 의회의 초당적 협력체인 ‘의회·행정부 중국위원회’는 연례 보고서를 통해서 미국 정부에 중국을 ‘최하위 인신매매국’으로 지정할 것을 권고했다. 그 주요 이유로 중국이 강제 노역과 가혹한 노동조건에 처해 있는 2만~10만 명의 북한 노동자의 본국 송환을 거부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급기야 최근 지린성의 북한 노동자 수천 명이 파업에 동참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그 정도면 현대판 노예 반란이다. 물론 그들의 역량은 전체주의 북한 정권에 맞서기엔 미약하지만, 그 자체로 북한식 국가 노예제의 균열을 보여주는 사건임엔 틀림없어 보인다.

 

북한의 실패가 미국 책임이라는 반미 선동

북한은 대체 어떻게 21세기 현실에서 세계 최악의 국가 노예제 국가가 되었는가? 이 활달한 정보 혁명의 시대에 대체 왜 한반도의 “우리 민족” 절반은 노예의 멍에를 지고서 살아가야만 하는가? 대체 무슨 역사적 과오, 그 어떤 제도적 모순이 휴전선 이북을 오늘날의 북한으로 만들었는가? 북한은 왜 지금도 병영 국가(garrison state)로 남아 있어야 하는가? 북한과 달리 어떻게 남한은 최첨단의 기술력과 문화 역량을 갖춘 세계 10대의 부국으로 웅비할 수 있었는가?

 

이상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가장 중대한 질문들이지만, 정작 한국의 역사학자나 사회과학자들은 그다지 큰 관심이 없는 듯하다. 북한의 국가 노예제의 실태를 조사한 연구도 흔치 않으며, 그 역사적 기원을 탐구한 논문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반면 한국 밖에서 한국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에게 위의 질문들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핵심적 물음이다.

 

지난 40년의 세월 미국 한국학을 대표해 온 시카고 대학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 교수는 북한이 오늘날의 북한이 된 책임이 전적으로 미국에 있다는 주장을 줄기차게 펼쳐 왔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북한 전역을 석기시대로 돌리는 무자비한 폭격을 가했기 때문에 오늘날 북한이 저 모양 저 꼴이 되었다는 설명이다. 그는 주장한다.

 

“북한은 왜 병영 국가인가? 그 주된 원인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경험한 홀로코스트에 있다. [Why is it a garrison state? Primarily because of the holocaust that the North experienced during the Korean War].” (Bruce Cummings, North Korea, New Press, 2011)”

 

 ▲625 전쟁 당시 생포된 북한군 포로들. /공공부문

 

커밍스는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북한에 대해 홀로코스트를 자행했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홀로코스트란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의 나치 정권이 독일 점령지의 유럽에서 6백만 명의 유대인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사건을 가리킨다. 중국군이 인해전술로 한반도를 뒤덮을 때 폭격을 가한 유엔군의 군사작전이 홀로코스트인가? 그런 식이라면, 독일 드레스덴을 타격한 2차 대전 유엔군의 공습도 홀로코스트라 해야 한다. 커밍스의 발언은 학문적 엄밀성도 없을뿐더러 문학적 비유로서도 타당하지 않다.

 

커밍스의 주장대로 미국의 폭격 때문에 북한이 병영 국가로 남았다면, 원폭 당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주민들은 지금도 땅굴을 파고 들어가서 반미의 깃발을 들고 살아가야 하지 않나? 연합국 폭격으로 박살 났던 독일은 지금도 나치 치하의 병영 국가이어야 하지 않나? 수십 년 전쟁을 겪은 베트남은 왜 북한과 달리 개혁개방에 성공했나? 역사를 돌아보면, 전후 신속한 복구작업을 통해서 경제를 일으키고, 문화를 창달하고, 인권을 신장한 사례가 수두룩하다. 멀리 볼 것 없이 대한민국의 성공 사례가 그 점을 웅변한다.

 

북한을 감싸고도는 커밍스의 주장은 비딱하고도 섣부른 구세대 미국인 반민주의자의 궤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한국전쟁에 관한 커밍스의 수정주의 이론은 1980년대 한국 역사학계를 휩쓸었다. 1980~90년대 한국 대학가에 커밍스류의 수정주의 이론이 판을 쳤기에 결국 김일성을 숭배하는 주사파 세력이 학원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한반도 모든 모순의 책임을 미국에 전가하는 극단적인 삼류 반미주의가 한국 지식인 사회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한국의 지식계에서 커밍스는 이성을 마비시키는 우상처럼 군림했다. ‘반미·구국 투쟁’을 외치던 운동권은 전쟁의 책임을 온전히 미국과 이승만 정권에 전가한 그를 존경하고 추종했다. 덕분에 1990년대 구소련의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수정주의가 무너진 후에도 그는 2007년 제1회 김대중 학술상을 받는 영예를 누릴 수 있었다.” (송재윤, 조선 칼럼, 2023. 4. 14)

 

북한식 국가 노예제는 역사적 기원

북한이 오늘날 북한이 된 책임은 미국이 아니라 김씨 왕조가 져야 한다. 김씨 왕조의 엉터리 국가 이념과 폭압적 전제 통치와 잘못된 사회·경제적 제도가 오늘날의 북한을 저 모양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38선 이북의 북한을 점령한 후 스탈린은 소비에트 연방 붉은 군대에 입대하여 육군 대위의 계급장을 달고 있던 서른세 살의 김일성을 북한의 수령으로 낙점했다. 스탈린의 아바타로서 북한을 장악한 김일성은 1940년대 30대의 나이로 북한에서 스탈린식 전체주의를 그대로 흉내 내었다. 김일성의 신격화·우상화는 이미 1940년대 이뤄졌다. 625전쟁 이전 북한 황해도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한 재미교포 할머니는 당시 날마다 학교에서 불렀던 노래를 지금도 기억한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오늘도 자유 조선 꽃다발 우에

력력히 비쳐 주는 거룩한 자욱

아~ 그 이름도 그리운 우리의 장군

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장군”

 

서른여덟 살 김일성은 스탈린의 지원을 받아 38선을 넘어 남침하는 도박을 감행했고, 유엔군의 개입으로 파멸의 위기에 섰을 때, 마오쩌둥의 군사개입으로 그는 가까스로 연명했다. 전쟁을 겪고 나서 권력투쟁을 겪는 과정에서 김일성은 우상화의 고삐를 더욱 강하게 당겼지만, 위의 노랫말이 증명하듯 625전쟁 이전 북한에선 이미 김일성 우상화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중국에서 마오쩌둥 인격 숭배가 시작되기도 전이었다.

 

 ▲북한 사회에서 김일성 우상화의 실태를 보여주는 장면. /공공부문

 

오늘날 북한이 노예제 국가로 전락한 가장 근본적 이유는 전쟁 당시 미국의 폭격 때문이 아니라 스탈린식 전체주의로 전 인민을 장악하려 했던 김일성이라는 시대착오적 파시스트 독재자와 그를 인민의 우상으로 만들어 부귀영화를 누렸던 소수 북한 엘리트 집단의 정신병적 권력욕에서 찾아야 한다.

 

아울러 수백 년 지속됐던 조선조 노비제의 유습도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조선은 양천(良賤) 구분의 신분 차별이 제도화된 엄격한 계급 사회(classed society)였다. 오늘날의 북한 또한 인민의 성분(成分)을 “핵심 계급,” “동요 계급,” “적대계급”으로 분류하고, 신분 차별을 법제화한 가혹한 신분제 사회이다. 과연 조선에서 북한으로 이어지는 차별적 신분제의 연속성이 부정될 수 있는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