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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 한국인이 본 20세기 일본사]02/ 2023-01-06 패전 아픔도 잠시, ‘맥아더 개혁’ 열광한 日 민중 -12-08 세계 지리 수용해 중화주의 탈피

상림은내고향 2023. 12. 20. 18:54

[박훈 한국인이 본 20세기 일본사]02/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동아일보

2023

01-06 패전 아픔도 잠시, ‘맥아더 개혁’ 열광한 日 민중

▲1945년 9월 2일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가 도쿄만에 정박한 미주리함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왼쪽 사진). 같은 해 9월 27일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총사령부 총사령관(오른쪽 사진 왼쪽)을 만나 포즈를 취한 히로히토 천황. 편안한 자세의 맥아더와 긴장한 듯한 천황의 모습이 대비를 이룬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동아일보DB

 

《1945년 8월 15일 정오, 사상 처음으로 일본 천황의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었다. ‘옥구슬 같은 목소리(玉音放送)’는 아니었다. 연합국이 제시한 무조건 항복(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인다는 내용이다. 히로히토 천황은 적군이 “새롭게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자꾸 무고한 백성을 살상하고 있으니, 참화가 어디에 미칠지 실로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 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수십만 명이 즉사했으니 ‘잔학한 폭탄’인 것은 맞지만 히로히토, 그가 할 말은 아니었다.》

 

 역사상 최초 외국군 日 본토 점령

 히로히토는 “앞으로 제국이 맞게 될 고난은 분명 심각할 것”이라며 “격정에 사로잡혀 함부로 일을 일으키거나 동포끼리 배척하고 시국을 어지럽혀 대도를 그르치고 세계에 대하여 신의를 잃을 것”을 경고했다(유인선 외 ‘사료로 보는 아시아사’ 중 일본근현대 편). 내가 ‘결단’을 내려 전쟁을 끝냈으니 앞으로도 내 말을 잘 따르라는 말투다.

그러나 그런 허세와는 달리 히로히토와 천황제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히틀러도 무솔리니도 이미 이승에 없었으니, 히로히토도 그리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1500년 계속돼 온 천황제 자체가 폐지되든가, 천황제는 유지하되 히로히토를 처벌 혹은 처형하든가, 아니면 최소한 히로히토 퇴위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그 목숨 줄을 쥐고 있는 사람은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였다.

 

일본은 남들은 다 받는 외침을 거의 받지 않은 희한한 역사를 가진 나라다. 맥아더 군대가 들어오기 전까지 일본 땅에 발을 들여놓은 외국군은 13세기 몽골군이 유일했다(해적 침입이나 작은 변경분쟁 제외). 고려·송나라 병사와 함께였다. 주지하다시피 이들은 규슈 북부에서 가마쿠라(鎌倉) 막부 군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태풍을 만나 패퇴했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가미카제(신풍·神風)다. 침략은 받았지만 단기간이었고 그나마 변경 지역에 국한되었다. 이때 전쟁을 이끌었던 막부 싯켄(執權) 호조 도키무네(北條時宗)는 19세기 중반 이후 페리가 개항을 요구해 위기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구국의 영웅으로 자주 소환되었다.

역사상 두 번째, 그리고 700년 만에 경험하는 외국군이 맥아더 군대였으니 일본인들의 충격을 짐작할 만하다. 외국군에 점령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비록 전쟁은 끝난 상태였지만 이번에는 변경이 아니라 수도, 즉 천황이 있는 곳에 외국군이 진주했고, 천황과 일본의 운명이 그들 손에 있었다.

일본은 무조건 납작 엎드리는 길을 선택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죽창 들고 “미국 놈들 때려죽이자”던 국민들은 맥아더를 칭송하는 수십만 통의 편지를 전국 각지에서 보냈다. 한 시골 노인은 “옛날에는 천황 사진을 놓고 아침마다 경배했지만 지금은 장군님 사진을 놓고 그렇게 하고 있다”는 취지의 편지를 보내, 맥아더를 흐뭇하게 했다. 끊이지 않던 ‘지사(志士)’들의 테러도 온데간데없이 사려졌고, 그 ‘용맹’하다던 ‘황군(皇軍)’은 점령군에게 총 한 발 쏘지 않았다. 일본 정부와 의회는 유지되었지만, 사실상의 ‘일본 총독’ 맥아더가 그 후 6년간 일본을 좌지우지했다. 그것은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보다 훨씬 긴 시간이다.

 

 맥아더-천황, 사뭇 다른 촬영 자세

미국은 독일을 직접 통치한 데 비해 일본에는 간접 통치를 택했다. 일본 정부와 의회를 해체시키지 않고, 그들을 통해 점령 정책을 펼친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예상보다 일본이 훨씬 빨리 항복해서 점령 준비를 미처 다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45년 9월 27일 히로히토 천황은 주일 미국대사관으로 맥아더를 예방했다. 히로히토의 부동자세와 맥아더의 건방진(?) 포즈가 대조적이다. 이에 당황한 당시 내무대신 야마자키 이와오는 언론사에 게재 금지를 명령했지만, 그 따위 명령이 통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사진에 나타난 천황의 초라한 모습은 많은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 사진이 보여주는 것처럼 둘 사이의 권력 관계는 명백했다.

그러나 맥아더와 미군정은 결코 건방지지 않았고, 오히려 대단히 신중했다. ‘죽창 들고 본토결전!’을 외치던 일본군은 미군이 일본에 들어올 때 순한 양이 되어 있었고, 해외 각지에 흩어져 있던 300만 명의 군대도 저항 없이 단기간 내에 스스로 무장 해제했다. 모두가 천황의 무장 해제 명령에 찍소리 안 하고 순응한 것이다. 이 ‘놀라운 힘’을 목도한 맥아더는 천황의 활용 가능성을 알아채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 갤럽 여론조사에서 미 국민 70% 이상이 어떤 식으로든 천황의 처형·처벌을 원했고, 중국·필리핀 등 아시아 국민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맥아더는 천황을 통해 일본을 다스리는 편한 길을 택했다. 결국 천황-정부-의회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그 안의 사람들만 군부 독재에 반대하던 이들로 채워졌다. 그래서 필자는 미국의 일본 점령이 일본 지배층에서 군부만 도려낸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적인 성격이 다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그리고 기존의 일본 지배층이 전후 그토록 신속하게 회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日 진보 열망 개혁 이룬 미군정

 ▲1946년 일본 이치카와에서 열린 극동연합군 군사재판소 대법정 피고인석에 출석한 일본인 전범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미군정의 정책은 그야말로 그동안 일본의 진보세력이 열망하던 것들이었다. 아무리 투쟁하고 외쳐대도 기성세력의 벽 앞에서 어림도 없었던 정책들이 ‘개명적 외세’에 의해 하루아침에 실현되고 있었다. 맥아더는 일본에 들어오자마자 군수생산 전면 중지, 육해군 해체, 전범 체포를 단행했다. 이어서 ‘민주화에 관한 5대 개혁지령’을 발표했다. 이로써 노동 3권이 역사상 최초로 보장되었고, 여성도 참정권을 갖게 되었고, 재벌은 해체되었으며, 천황에 대한 비판도 허용되었다. 이때 재벌이 해체되지 않았다면 소니, 혼다 같은 혁신 기업이 등장할 무대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가장 중요한 것은 농지 개혁이었다. 그 결과, 1941년 무려 46%에 달하던 소작지는 1950년 9.9%로 격감했다. 이로써 살 만하게 된 농민들은 10여 년 후 세탁기·냉장고·텔레비전 등의 강력한 소비자가 되어 고도 경제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나카무라 마사노리 ‘일본전후사 1945∼2005’). 일본의 사례는 토착 지배 세력이 아니라 민중(국민)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자주’와 ‘외세’의 문제가 생각만큼 간단치 않다는 것을 웅변한다. 흥미롭지만, 아슬아슬한 얘기다.

 

 

02-03 맥아더 ‘수족’ 넘어 ‘절친’된 요시다… 戰後 일본 회생시켜

▲시가 애호가였던 요시다 시게루(왼쪽)의 모습.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195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은 미국과 안전보장조약을 맺었다. 현재 맹위를 떨치고 있는 미일동맹, 바로 그 조약이다. 불과 6년 전까지 사생결단으로 태평양 전역에서 싸웠던 두 나라, 승전국이 패전국을 점령하여 지배하에 둔 관계였던 두 나라가 갑자기 군사동맹이 된 것이다. 소련이 팽창하고 중국이 공산화되고, 무엇보다 미국이 일본을 점령한 동안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일본의 전략적 가치가 급격히 상승했기 때문이었다. 》

 

경제 개발 올인… ‘요시다 독트린’

얼마 전 일본 정부는 방위예산을 국내총생산(GDP)의 2%로 늘리고, 상대방의 공격을 단념시키는 ‘반격 능력 확보’를 선언해 일본 우파의 오랜 숙원이었던 자위대 ‘국군화’에 코앞까지 다가섰다. 이렇게 하는 구실 중 하나가 북한의 안보 위협이니, 그때나 지금이나 북한은 일본 우파에는 천우신조(天佑神助) 같은 존재다.

미군정의 일본 측 파트너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였다. 미군 점령하에서 일본 내각의 총리를 5번이나 역임했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은 기록이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요시다 독트린’으로 불리는 국가 노선을 확립하여 전후 일본을 회생시켰다. 외교는 철저히 친서방 노선을 취하고, 국방은 미국에 맡겨 군사력을 갖지 않으며, 일본은 오로지 경제발전에만 매진하는 방침이었다. 국제정세의 변화로 오히려 미국이 일본 재무장을 주장했으나, 요시다는 이에 저항하여 ‘비무장-경제개발’ 노선을 관철했다.

 

요시다는 메이지 정부에 격렬하게 저항했던 자유민권운동의 메카, 도사(土佐) 출신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중국 펑톈 총영사, 이탈리아와 영국 대사 등을 역임해 국제 정세에 아주 밝았고, 군부의 삼국동맹론(독일,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어 미국, 영국에 대항하자는 노선)에 비판적이었다. 군부의 존재감이 커져갈수록 그의 입지가 좁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의 군부정권하에서 그는 ‘재야 인사’였다. 패전 직전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의 상주문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헌병에 체포됐지만, 40여 일 후 석방되었다. 아무리 군사독재 정권이라 하더라도 전직 대사에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顯·메이지유신을 일으킨 오쿠보 도시미치의 아들로 내대신 지냄)의 사위인 그를 더 이상 탄압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헌병에 체포된 사실은 일종의 ‘별을 단’ 셈이 되어, 미군정하에서 정치적 훈장이 되었다.

 

5회 역임, 역대 최다 집권 총리

1946년 5월 요시다는 내각총리대신, 즉 총리가 되었다. 아직 새로운 헌법이 만들어지기 전이었기에, 대일본제국 헌법에 따라 천황이 조각의 ‘대명(大命)’을 그에게 내렸다. 말하자면 그는 구 헌법에 따른 최후의 총리였다. 외교관 경력만 있고 국회의원을 한 적도 없는 그에게 총리 자리는 ‘굴러들어 온 복’이었다. 원래 총리는 그의 오랜 친구이자 당시 일본자유당 총재였던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가 예약해 놓은 자리였다. 1946년 패전 후 최초의 총선거에서 자유당이 제1당이 되었다. 4월 30일, 전례에 따라 당시 총리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郎)는 천황을 만나 하토야마를 후계 총리로 주청했다. 그런데 며칠 뒤인 5월 4일 점령군 총사령부는 군국주의에 협력했다며 그를 공직에서 쫓아내 버렸다.

 ▲요시다 시게루에게 총리 자리를 내줬던 하토야마 이치로 당시 일본자유당 총재의 손자,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가 2015년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찾아 일제 만행에 대해 무릎 꿇고 사과하는 모습. 동아일보DB 

 

우왕좌왕하던 자유당 지도자들은 결국 정치적으로 무색무취하며 권력 욕심이 없어 보이는 요시다에게 총리직 수락을 압박했다. 한동안 버티던(버티는 척하던?) 그는 결국 세 가지 조건을 하토야마에게 내걸고 마지 못한 듯 받아들였다. 첫째, 정치자금 조성은 못 한다. 둘째, 각료 인선은 간섭하지 말라. 셋째가 가관인데, 그만두고 싶어지면 언제라도 그만두겠다였다. 그만두기는커녕 하토야마가 그만두라고 압박해도 그는 그 후로 8년 동안 5차례나 총리직을 탐냈고, 정계 은퇴할 때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기시감이 있지 않은가. ‘이민우 파동’말이다. 1980년대 정치규제로 공식적인 정치활동을 벌일 수 없었던 김영삼은 오랜 정치적 동지 이민우에게 신한민주당의 총재직을 맡겼다. 자기 대신 당분간 해달라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후한 성품으로 김영삼에게 충성스러웠던 그도 결국 내각제 개헌 수용을 시사하는 듯한 이른바 ‘이민우 구상’으로 김영삼과 갈라섰다. 권력의 맛은 정말 강렬한 모양이다. 참고로 요시다에게 뒤통수 맞은 하토야마는 절치부심 끝에 1954년 벌써 되었어야 할 총리에 취임하여 2년간 재임했다. 최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무릎 꿇고 “사과는 피해자가 용서할 때까지 끊임없이 하는 것”이라는 발언으로 한국 언론의 주목을 받은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총리가 그의 손자다.

 

도와주며 실리 챙긴 ‘맥아더 절친’

 ▲미 점령군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왼쪽)과 다정하게 팔짱을 낀 전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 요시다는 일각에서 ‘미국의 푸들’이라 불린 아베 신조 전 총리보다도 더 미국에 협조적이었으며 ‘훌륭한 패자’가 될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요시다 시게루는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철두철미 협조적이었다. 맥아더가 국내의 군국주의 세력을 뿌리 뽑고 좌파 세력을 견제할 때 기꺼이 그의 수족이 되어 주었다. 얼마 전 작고한 아베 신조 총리가 미국에 순종적이라고 하여 ‘미국의 푸들’이라는 비판을 들었지만, 요시다야말로 최초의 푸들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전쟁엔 졌지만 외교엔 이긴다”며 ‘훌륭한 패자’가 될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맥아더와는 ‘절친’이 되었다. 한번은 요시다가 아사자 발생을 우려하며 맥아더에게 450만 t의 식량 지원을 요청했다. 결국 70만 t만 들어왔지만, 아사자는 없었다. 이에 맥아더가 70만 t으로도 거뜬하지 않았냐, 일본 정부 통계는 엉성하다고 놀리자, 요시다는 “당연하죠. 만일 일본의 통계가 정확했다면 그런 뚱딴지같은 전쟁은 하지 않았겠죠. 통계대로였다면 일본이 이겼어요”라고 되받아 맥아더의 폭소를 자아냈다고 한다.

요시다와 흔히 비교되는 인물이 이승만이다. 둘 다 아시아의 공산화를 우려한 반공 정치가였고, 미국을 최우선으로 하는 외교 노선을 취했다. 그러나 이승만이 점령군 사령관 하지는 물론이고 미국 정부까지 심심치 않게 들이받은 데 비하면, 요시다는 시종 온화한 태도로 미국을 대했다. 아무래도 이승만에게 ‘푸들’의 이미지는 없다. 2년의 시차를 두고 미일동맹, 한미동맹이 체결되었는데, 미일동맹이 요시다와 맥아더, 나아가 미국 정부 간에 형성된 신뢰감으로 성사되었다면, 한미동맹은 이승만의 북진통일 협박 등 훨씬 험한 과정을 통해 이뤄졌다. 한국전쟁이라는 아수라장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쳤던 이승만에 비하면, 요시다는 그가 좋아하는 시가(cigar)를 즐길 여유가 훨씬 많았다.

 

 

03-03 갑자기 찾아온 해방… 독립 협상 전무했던 韓日

▲1953년 4월 제2차 한일회담 재산청구권위원회 회의에서 일본 측 대표 구보타 간이치로(동그라미 안)와 한국 측 대표 김용식 당시 주일 공사가 악수하고 있다. 아사히신문 제공

 

《1951년에 열린 제1차 한일회담 예비회담에서 한국 측 양유찬 대표가 “Let us bury the hatchet(화해합시다)”라고 하자 일본 측 지바 고(千葉皓) 대표가 “What is bury the hatchet?(뭘 화해하자는 말입니까?)”라고 했다. 양 대표는 기가 막혔을 테지만, 이보다 식민지배에 대한 한일 양국의 인식 차를 잘 보여주는 장면은 없을 것이다. 이어 1953년 10월 15일 제3차 한일회담 재산청구권위원회 회의에서는 일본 측 수석대표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의 발언이 문제가 되었다. 유명한 ‘구보타 망언’이다.》

 

“日 덕에 조선 발전” 구보타 망언

▲1953년 6월 구보타가 작성한 극비 외교문서 ‘일한회담 무기 휴회안’. “이승만이 세계의 고아가 되려는 정책을 취하며 세계의 지탄을 받고 머지않아 어쩔 수 없이 은퇴하게 될 것”이란 내용이 담겨 있다. 동아일보DB

 

구보타는 “일본은 36년간 많은 이익을 한국인에게 주었다. 일본이 (한국에) 진출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은 중국이나 러시아에 점령돼 더욱 비참한 상태에 놓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한국 측 수석대표 홍진기는 “마치 일본이 점령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인은 잠만 자고 있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말하고 있으나, 한국인은 스스로 근대국가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 발언으로 인해 한일회담은 그 후 4년 반 동안이나 열리지 못했다(이원덕 ‘한일과거사처리의 원점’).

이 발언들이 어느 정도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느냐는 차치하더라도, 아마 이 두 가지 인식이 일제 식민지시대를 바라보는 한일 양국민의 대체적인 입장일 것이다. 물론 패전 후 오랫동안 일본의 진보, 리버럴 지식인들을 비롯해 적잖은 일본 시민들이 식민지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견지해 왔으나, 나는 많은 일본인들의 속내에는 ‘그래도 일본 때문에 조선이 발전한 면도 많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한편에 있음을 수시로 느껴 왔다. 표현하지 못했던 그런 속내가 최근의 우경화 분위기 속에서 분출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인들은 패전 직후 이미 식민지배에 대한 입장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1946년 9월 일본 정부 대장성(大藏省)은 외무성과 협의하고, ‘재외재산 조사회’를 설치해 ‘(극비)일본인의 해외활동에 관한 역사적 조사’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모두 35권에 달하는 방대한 문서인데, 그중 총 10권이 조선편이다. 여기에 경성제국대 교수였던 스즈키 다케오(鈴木武雄)가 쓴 ‘조선통치의 성격과 실적―반성과 반비판’이라는 문서가 실려 있는데, 아마도 조선식민지에 대한 당시 일본 정부와 엘리트들의 입장을 대표한 내용일 것이다. 그는 일본의 식민지배는 결과적으로 여러 가지 미숙한 점이 있어 조선인의 지지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 주관적 의도만큼은 조선을 발전시키려고 한 것이었다는 이른바 ‘선의의 악정’론을 주장했다. 

 

他 식민지들의 ‘독립 협상’ 

다른 칼럼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 조선식민지에는 식민지 역사상 특이한 점이 많이 있다. 1910년이라는, 세계사적으로는 제국이 해체되던 가장 늦은 시점에 이미 민족의식이 충만한 국민을 무리하게 식민지화했다는 점, 식민지배 기간이 35년으로 식민사상 가장 짧았다는 점, 오랫동안 역사와 문화를 공유해 온 이웃 나라를 식민지화했다는 점 등이다. 거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장래의 식민지 독립에 관한 논의가 식민본국-식민지 간에 일절 없었다는 점이다. 다른 지역의 경우 식민본국과 식민지 사이에 장래에 대한 일종의 ‘로드맵’이 있었거나, 적어도 그에 관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예를 들어 영국과 인도는 공동의 적에 대한 투쟁(인도는 제1차 세계대전에 150만, 2차 세계대전에 250만의 군인을 제공했고,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과정에서 미래에 대한 협상을 진행했으며, 그 과정에서 독립이나 자치를 포함해 식민지의 존재 양태에 대한 다양한 안들이 검토되었다(박지향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 프랑스와 베트남의 경우는 식민지배 기간과 전쟁(1945년 이후 베트남의 독립전쟁) 과정에서 길고 지루한 협상을 계속했다. 미국과 필리핀은 필리핀의 장래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으며 1930년대 중반 필리핀 독립에 관한 법안이 미 의회를 통과했고, 2차 대전 종결 후 필리핀은 즉각 독립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식민지의 리더들은 다가올 미래를 어느 정도 예견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자신들의 입장을 조절할 수 있었으며, 식민본국에 대한 감정도 완화, 또는 상대화할 수 있었다. 이들에게 독립은 돌발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노력과 협상 여하에 따라 그 경로가 어느 정도는 통제 가능한 것이었다. 반면 조선의 해방은 친일 세력뿐 아니라 독립운동 세력에게도 뜻밖의 것이었다. 적어도 해방 5년 전까지만 해도 5년 후의 해방을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정말 “도둑처럼 해방이 찾아왔다”(함석헌).

 

日패전에 직접 대화 없었던 韓日 

게다가 조선을 통치하던 일본은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영국, 프랑스, 미국의 경우는 승전국이었기 때문에 식민지에 식민본국의 통치력이 유지되는 가운데 식민권력과 현지 엘리트 사이에 협상 과정을 거치면서 권력이 점진적으로 이양되었다(프랑스-베트남은 협상 결렬로 전쟁 발발). 그러나 조선의 엘리트들에게 전쟁 후 독립을 논의할 상대는 일본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식민본국과의 협상 경험과 축적도, 그들과의 협상채널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분리가 이뤄졌다. 한일은 협상과 논쟁을 통해 식민 지배를 ‘정산’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1945년 7월 독일 포츠담에서 미국, 영국, 소련 등 연합국 정상들이 만나 제2차 세계대전의 처리를 논의하는 모습.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당황하기는 일본 측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카이로와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여 조선을 포기하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지만, 그 인식에 있어서는 혼선을 보였다. 일본 역시 조선의 독립이라는 프로그램을 거의 상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포츠담선언 수락(1945년)과 동시에 조선이 독립한 것인지, 대한민국 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1948년), 아니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1952년)로 조선 독립이 인정된 것인지 명확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35년간의 식민 지배를 어떻게 위치 지을 것인지, 그리고 그를 가져온 1910년의 한일합방조약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이런 상태에서 해방 후 6년 만에 대면한 양국 엘리트 사이에 벌어진 저 대화는 ‘미정산’ 상태인 역사 인식의 현격한 차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이후 일본은 과거사에 대해 십수 차례 사과했지만 곧 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갖가지 ‘망언’들을 해왔고, 이는 한국인의 대일 감정을 악화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03-31 ‘통절한 사죄’ 이끌었던 日 전후역사학 쇠퇴

▲1955년 일본 사회당의 전성기 당시 전당대회 광경(위 사진). 전후 역사학은 일본 내 진보운동의 우군이었다. 그러나 이론과 교조에 매여 끝내 혁신을 거부한 역사학은, 만년 야당에 만족하다가 결국 몰락한 일본 사회당과 닮았다. 아래 사진은 1960년 규슈의 미쓰이미이케 탄광 쟁의 당시 모습. 필자 제공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은 소위 ‘의식화 교육’에서 사회과학과 역사서를 많이 읽었다. 그중에 ‘도야마 시게키(遠山茂樹)-시바하라 다쿠지(芝原拓自) 논쟁’이란 게 있었다. 자본주의 이행 문제를 둘러싼 ‘모리스 돕-폴 스위지 논쟁’만큼 주목받지는 않았으나, 일종의 ‘쓰키다시(곁들이찬)’로 논의된 적이 있었다. 요점만 말하자면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추동한 힘인 국내적 요인과 국제적 압력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중요한 것이었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 논쟁은 1960년대 일본의 이른바 ‘전후(戰後) 역사학자’들이 벌인 것이었다.》

 

韓 ‘운동권 의식화’ 영향 준 日사학계

▲전후 역사학을 이끈 대표적 사가인 도야마 시게키. 필자 제공

 

1980년대라면 도야마(1914∼2011), 시바하라(1935∼) 두 사람 모두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지만, 이웃 나라에서 자신들의 연구가 저렇게 활용(?)되고 있는 줄은 몰랐을 것이다(저 생몰연대를 보니 일본은 정말 장수의 나라다). 사실 당시 운동권에서 탐독하던 책들은 거의 다 일본 책을 번역한 것이었다. 영어나 다른 유럽 언어로 쓰인 책들도 일본어를 중역(重譯)한 것들이 많았다. 그 운동권 학생들이 지금은 이 사회의 지배자가 되어 ‘노 저팬’도 하고, 한일 협력 방침에 대해 요란한 현수막도 내걸지만, 그때 ‘문제 서적’들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운동권만 그랬던 게 아니라 일부 학계도 그랬다. 일본의 연구 성과에 의지한 글을 쓰면서도 그 정도를 축소하거나 아예 숨기는 경우도 있었다.

방송 프로그램이나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1990년대 잠깐 신문사에서 일할 때 선배들은 ‘나와바리(담당구역)’ ‘하리코미(잠복근무)’ ‘미다시(제목)’ 같은 용어를 태연하게 썼다.(지금은 없어졌겠지?) 건설현장에서 쓰이던 ‘도키다시(인조대리석)’ 같은 말을 기억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요컨대 전문용어에는 20세기 말까지 ‘일제 잔재’가 많이 남아있었다. 말만 남아있었던 게 아니라 그 말이 기반하고 있는 시스템이 다분히 일본식이었다.

왜 그랬을까? ‘문명의 힘’ 때문이다. 강한 놈이 약한 놈을 집어삼킨다. 그 강함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고, 오랜 기간 노력을 거듭해서 쌓아 올린 것이다. 약한 놈이 아무리 억울해도 그 정도의 축적을 이루지 못하면 강한 놈에게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그러면 그 힘의 축적은 어디서 배우나?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자에게서다. 그게 가장 쉬운, 빠른, 그리고 피하려 해도 피하기 힘든 길이다.

 

황국사관에 반발한 ‘강좌파’

전후역사학을 얘기하려다 옆으로 많이 샜다. 20세기 초부터 일본의 역사학은 일본이라는 국민국가의 건설, 나아가 제국주의적 팽창을 근저에서 지탱해왔다. 이에 대한 반발은 역사학 바깥, 특히 사회과학자들에게서 나왔다. 훗날 ‘강좌파(講座派)’라고 불리게 될 이들은 당시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마르크시즘의 역사발전 단계론을 받아들인 후, 메이지유신을 어떻게 위치 지을 것인가를 둘러싸고 논쟁했다.

 

메이지유신을 절대주의 단계에 위치 짓고, 이를 타도하기 위해 부르주아 민주혁명을 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편찬한 책이 유명한 ‘일본 자본주의 발달사 강좌’다. ‘강좌파’라는 이름도 여기서 나왔다(반면 메이지유신을 불완전하나마 부르주아 혁명을 달성한 것으로 보고, 이에 따라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한 그룹이 ‘노농파(勞農派)’다). 이 연구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일본 공산당원이었으며, 공산당은 소련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으니 ‘혁명적 실천’, ‘변혁과업’이라는 명분으로 학문이 정치에 종속되는 경향이 다분히 있었다.

황국사관 수립에 종사한 역사학자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사료 편찬 사업에 매달리며 정치와 거리를 두고 때를 기다렸다. 전후역사학을 이끈 근대사가 도야마가 대표적이다. 그는 24세이던 1938년 유신사료편찬사무국이라는 정부기관의 편찬관보(編纂官補)로 취직했다. 유신사료편찬사무국이 메이지유신과 관련된 방대한 사료편찬 사업을 마무리하고 황국사관에 입각한 통사 ‘유신사(維新史)’(전 5권, 부록 1권) 간행에 착수한 해다.

그는 황국사관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았지만, 거기서 방대한 양의 사료를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13년 후인 1951년, 37세의 나이에, 이제는 고전이 된 ‘메이지유신’을 간행했다. 38세의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가 ‘일본정치사상사연구’를 펴내기 1년 전이었다.


이후 일본 지성계는 이 두 책을 등대 삼아 진보 마르크시즘과 근대주의(리버럴)가 서로 경쟁하며 판도를 양분해왔다. 역사학계는 하루아침에 분리수거된 황국사관을 대신하여 ‘강좌파’를 계승하는 사적 유물론자들이 주류 자리를 차지했다.

이들은 군국주의에 대해 강렬한 비판의식을 갖고 있었고, 그 연원을 메이지유신의 절대주의 체제 성립에서 찾았다. 제국 일본에 반감을 갖고 있었으니 피식민지민들에 대해서는 동정적이었다. 소위 ‘양심적 일본지식인’들이다. 역대 일본 정부가 식민지배에 대해 감히 헛소리를 못 하고 20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통절한 사죄와 반성’을 표하게 된 데에는 한국 외교관들과 함께 이들의 역할이 컸다.

 

현실 직시 못하고 활력 상실하다

그런데 지금 그 거대했던 전후역사학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일본 유학 시절 대부분의 일본 학생들은 촌락사 같은 사회경제사를 연구 주제로 삼고 있었다. 사회경제사 전공의 교수조차 ‘좀 다른 주제도 연구하라’며 탄식조로 말하던 장면이 생각난다. 그분이 그런 분위기를 만든 장본인 중 한 명이었겠지만, 그도 걱정할 정도로 연구 풍조가 경직되어 있었다. 학위 통과와 교수 자리를 꿈꾸는 학생들이 알아서 일렬종대로 줄 섰던 것이다.

그때가 1996년,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진 후였는데도 이런 상태였으니 그 전 상황은 짐작할 만하다. 정치와 이데올로기에서 과감히 독립하지 못하고, 방법론의 혁신을 거부하며 수십 년간 안주하는 사이에 전후역사학은 서서히 그 활력을 상실해갔다. 일반 사회는 물론이고 인근 학문 분야에도 새바람이 불고 있었거늘 전후역사학은 요지부동, 변화를 거부했다.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역사소설이 전 국민의 역사 인식을 사로잡는 걸 보면서도 ‘역사학의 주인은 우리’라며 NHK 대하드라마에 점잖게 고증, 자문하는 걸로 만족해했다. 그 모습은 오래된 이론과 교조에 얽매여 혁신을 거부하고 만년 야당을 ‘즐기다’ 몰락한 일본사회당과 닮았다. 역사의 신은 누구의 발이 땅에 붙어 있지 않고 허공에서 팔랑거리는지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다. 분리수거를 위해.

 

 

05-26 日 여러 번 사과에도, 韓 왜 또 요구할까

《3월 윤석열 대통령의 방일로 징용 문제에 대해 한국이 물컵의 반을 채웠으니, 이제 일본이 나머지 반을 채워야 한다는 얘기가 많다. 한국의 여론상 그것은 일본의 ‘또 한 번’의 사과를 의미하는 것 같다. ‘또 한 번’이라고 한 것은 우리 머릿속에는 잘 안 떠오르는 일이지만 지난 수십 년간 일본은 여러 차례 사과해왔기 때문이다. 사과를 주저하는 일본의 여론에는 ‘이번에 사과하면 정말 마지막일까?’라는 마음도 숨겨져 있는 듯하다.》

 

日 수십 차례 과거사 사과

▲1998년 김대중 대통령(왼쪽)과 오부치 게이조 당시 일본 총리가 도쿄 영빈관에서 ‘21세기 새 시대를 위한 공동 선언’에 서명하고 있다. 동아일보DB

 

3월 18일 김태효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1차장은 “우리 외교부가 집계한 일본의 우리에 대한 공식 사과가 20차례가 넘는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 고위 당국자가 ‘일본은 이미 많이 사과했다’는 취지의 말을 한 것을 나는 과문한 탓인지 처음 듣는다. 이어 3월 21일 윤 대통령은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일본은 이미 수십 차례에 걸쳐 우리에게 과거사 문제에 대해 반성과 사과를 표한 바 있습니다. 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일본이 한국 식민 지배를 따로 특정해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과 표명을 한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과 2010년 ‘간 나오토 담화’입니다”라고 했다. 한국 대통령의 이런 말은 확실히 처음 듣는다. 실제로 인터넷에서 ‘일본 과거사 사과’로 검색하면 ‘천황, 총리, 정부대변인, 외무대신, 의회’ 등의 사과 기록을 줄줄이 볼 수 있다. 여기서 잠시 일본의 사죄사(謝罪史)를 살펴보자.

광복 후 한일이 처음으로 공식 대면한 1951년 10월 국교정상화를 위한 예비회담 석상에서 한국 양유찬 대표가 “Let us bury the hatchet(화해합시다)”이라고 하자, 일본 지바 고 대표가 “What is bury the hatchet?(뭘 화해하자는 말입니까)”라고 했던 건 잘 알려진 얘기다. 1953년 회담에서 구보타 간이치로 일본 대표는 “식민지배 시절 유익한 일을 했으므로 일본에도 청구권이 있다” “일본은 36년간 많은 이익을 한국인에게 주었다”라는 폭탄발언을 해 그 후 회담은 5년간 중지됐다.

 

식민통치관 있는 보수들의 망언도

저런 발언들이 튀어나온 배경에는 일본 보수우익에 잠재돼 있는 식민통치관이 있다. 그것은 첫째, 일제의 동화정책은 조선을 식민지가 아니라 같은 일본으로 만들려고 한 선의에서 비롯됐던 것이고, 이 점에서 서구 제국주의와는 다르다는 점, 둘째, 식민통치는 경제, 의료, 교육, 인구 증가 면에서 발전을 이뤄 조선사회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점, 셋째, 당시는 제국주의가 세계적 대세였는데 일본만 비난받는 건 억울하다는 점, 넷째, 일본이 식민지로 삼지 않았으면 러시아나 청나라가 침략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인식은 표면적으로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아직도 암암리에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1990년 5월 왕궁 만찬석상에서 아키히토 일왕(오른쪽)이 “귀국의 국민이 맛본 고통을 생각하니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다”며 한일 과거사에 대해 유감을 표한 뒤 노태우 당시 대통령에게 건배를 제의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저런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수십 차례의 사과 표명을 이끌어내기까지는 일본 내 양식 있는 사람들의 투쟁과 한국 외교의 끈질긴 노력이 있었다. 1965년 한일조약 가서명 당시 시이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상은 과거사에 대해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로 깊이 반성한다”고 첫 반성의 뜻을 표했다. 이어 1983년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1984년에는 히로히토가 일왕으로서는 처음으로 유감의 뜻을 표했다.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이 방일했을 때 아키히토 일왕은 “귀국의 국민이 맛본 고통을 생각하니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 없다”고 했다.

1990년대는 그야말로 ‘사과 릴레이’가 이어졌는데, 그 표현의 수위도 점점 높아졌다.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는 “일본의 침략행위와 식민지 지배 등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슬픔을 준 것을 깊이 반성하고 사과한다”며 ‘침략’ ‘식민지’란 말을 구체적으로 들어 사과했다. 같은 해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군의 간여와 강제성을 인정하며 “종군위안부로서…심신에 걸쳐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께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는 유명한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2015년 8월 전후 70년 담화에서 “일본은 지난 세계대전에서의 행동에 대해 반복적으로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죄의 마음을 표명해왔다”고 밝혀 논란을 일으켰다. 동아일보DB

 

1995년 일본 중의원은 ‘깊은 반성’을 표명하는 사과 결의를 채택했고, 무라야마 총리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많은 손해와 고통을 줬다…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한다”는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997년의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이 바탕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한국병합 100주년을 맞이한 2010년에도 간 나오토 총리는 “아픔을 준 측은 잊기 쉽고, 당한 측은 그것을 쉽게 잊을 수 없는 법입니다. 이 식민지 지배가 가져온 다대한 손해와 고통에 대해, 이에 다시금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죄의 마음을 표명합니다”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한국인들이 불만스러워하는 아베 신조 총리도 재임 기간 중 19차례 사과했다. 이런 배경에서 “언제까지 사과하란 말이냐”는 일본인들의 반응도, “뒷세대의 아이들에게 사과를 계속할 숙명을 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라는 아베 총리의 발언도 나왔을 것이다. 실제 한국에 호의적인 내 일본인 친구들 중에도 ‘일본이 오랜 기간 수십 차례에 걸쳐 사과해 온 점은 한국이 좀 인정해줬으면 좋겠다’는 이들이 많다.

 

韓日, 역사에 성숙한 자세 보여야

그런데 왜 한국인들은 계속 사과를 요구하는 걸까. 우선은 위에 소개한 일본의 사과 사실 자체를 기억하는 한국 시민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일본인들의 ‘망언’이다. ‘창씨 개명은 조선인이 원해서 한 것’ ‘식민지 시대에 일본은 좋은 일도 했다’ ‘전쟁터의 위안부는 필요한 제도였다’ 등 수시로 터져 나오는 ‘망언’들은 위의 ‘사과 릴레이’를 순식간에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게다가 ‘망언’을 한 사람들이 민간인들이 아니라 현직 장관, 유력 정치인들이니 더욱 심각하다. 한국인들이 일본의 사과를 ‘진정성이 없다’며 의심하는 것은 대부분 이 때문일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세계를 리드해야 할 국가들이다. 우리는 일본이 ‘뭘 화해하자는 말이냐’에서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죄’까지 역사 인식을 진전시켜 오며 수십 차례 사과한 것을 인정하고 평가하자. 다만 그 진정성을 의심케 하는 책임 있는 당국자의 ‘망언’은 용서할 수 없다고 단단히 못을 치자. 그게 ‘또 한 번’의 사과 요구보다 더 성숙한 자세가 아닐까.

 

06-22 위안스카이, ‘中의 위협 요소’라며 조선 독립과 개혁 막아

《최근 정치권과 언론에서 느닷없이 위안스카이(袁世凱·1859∼1916) 이름이 오르내렸다.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가 한국의 제1당 대표 앞에서 한국 정부의 외교 정책을 거칠게 비판한 데 대한 반응이었다. 나는 일단 ‘위안스카이가 한국인들에게 이렇게 많이 알려져 있었나?’ 하고 놀랐다. 하긴 요즘 메이지유신 주역 중 한 명인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이름도 술술 대는 일반인들을 자주 본다. 동아시아 역사에 대한 한국 시민들의 인식이 점점 깊어지고 있는 거 같아 반갑다.》

 

20대 중반 中관리, 조선 내정 간섭

▲1880년대 서울에 부임해 내정간섭에 앞장섰던 20대 중반 시절 위안스카이의 모습.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사람들 입길에 오르내린 김에 위안스카이와 그를 둘러싼 당시 한중일 정세를 한번 살펴보자. 전근대 조선과 중국은 조공책봉 관계였다. 이게 독립과 종속밖에 모르는 근대인의 개념에서 보면 참 이해하기 어려운 관계인데, 긴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고 일단 중국은 조선에 군대와 관리(외교관)를 상주시키지 않았다. 정기적인 조공사절단과 그보다 훨씬 빈도수가 적은 칙사 파견이 사실상 관계의 전부여서, 조선의 내정과 외교는 조선 국왕이 자유롭게 했다. 형식상 대등한 관계지만 서울 한복판에 군대와 대사관을 두고 한국 내정에 깊이 개입했던 해방 후 한미 관계와 비교해 볼 일이다. 그런데 이 관계가 1882년 발발한 임오군란으로 뒤집혔다. 대원군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해 청은 병자호란(1637년) 이후 처음으로 군대를 파견했고, 관리를 상주시켰다. 이때부터 청은 조선 내정에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 주역이 아직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20대 청년 위안스카이였다.

위안스카이는 과거에 연거푸 낙방한 후 임오군란 때 오장경(吳長慶) 부대를 따라 23세의 나이로 조선에 왔다. 갑신정변(1884년) 때 김옥균 세력을 전격적으로 진압한 것도 그였다. 그 후 잠시 귀국했다가 임오군란 당시 청으로 잡혀 갔던 흥선대원군을 데리고 1885년 다시 나타났다. 그해 청과 일본은 톈진조약을 맺었는데, 이 조약으로 일본은 사실상 조선에서 손을 떼었다. 일본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이홍장(李鴻章)에게 청이 주도권을 쥐고 조선 내정을 개혁해 달라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자 청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紮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에 임명된 위안스카이의 독판이 펼쳐졌다. 실제로 그는 명함에 통감(統監)을 의미하는 ‘Resident’를 박아 넣고 다녔다.

 

걷지 않고 가마 타고 대궐 들어가

▲1888년 1월 17일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박정양 조선 초대 주미 공사 일행을 그린 삽화. 위안스카이는 박정양의 주미 공사 파견을 집요하게 방해했다. 사진 출처 하퍼스 위클리

 

위안스카이는 서양이 조선에서 세력을 갖기 전에 “고위 관원을 특별히 파견하여 감국(監國)을 설치하고 대규모 병력을 통솔하면서 내치와 외교를 모두 대신 처리하고자 한다면, 지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 조선은 류큐나 베트남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만약 다른 나라에 도움이 되게 한다면 중국이 어찌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간청하건대, 먼저 증기선 군함 십수 척과 육군 수천 명을 파견하여 남의 나라에 앞서 주둔시켜야 합니다”(‘원세개전집1·袁世凱全集1’)라며 조선 내정 개입을 앞장서 주장했다. 조선 정부와 조선 주재 외국 공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청국의 일개 공사에 불과했지만, 위안스카이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공사라는 직함을 한사코 거부했고, 다른 나라 공사와 다른 특별대우를 강요했다. 청이 ‘공사(公使)’라는 명칭을 수용한 것은 1899년에나 가서였다. 외국 공사는 대궐 문 앞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지만 그는 가마 타고 들어가기를 고집했다. 이번 ‘싱하이밍 사건’도 그가 스스로를 여느 대사와 동렬이라고 생각했다면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19세기 말 청이 조선에 설치해 운영한 전신선. 청은 조선의 독립 움직임을 봉쇄하려 전신선 회수 요구를 묵살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위안스카이의 내정 간섭에 대해서는 러시아와 밀약을 시도했던 고종을 폐위하려 했던 사건, 그리고 1887년 박정양의 주미 공사 파견을 집요하게 방해한 일 등이 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는 최근 나온 서울대 김형종 교수의 연구(‘19세기 한중관계사론’)에 의거해 다른 문제를 살펴보자. 먼저 전신선 설치 문제다. 청은 갑신정변 후인 1885년 조선에 차관을 제공해 서로전선(西路電線·의주∼인천선)을 가설하기 시작했다. 이어 한성∼인천 간 전신선과 경부·원산선도 청이 설치하고 운영했다. 조선은 서로전선 회수를 요구했지만 묵살당했고, 북로전선(北路電線·한성∼함흥선) 설치를 시도했으나 청의 거부로 1891년에나 실현되었다. 남로전선(南路電線·한성∼부산선)도 조선 정부가 가설하려고 시도했으나 청이 장악해 버렸다. 당시 전신선의 장악이 군사·외교·안보에서 갖는 중요성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조선의 정보 중추신경을 완전히 장악했던 것이다. 전신선뿐 아니라 세관 장악, 다른 외국과의 차관 교섭 방해, 화폐 주조 개입 등으로 청과 위안스카이는 조선이 자주적으로 개혁하려는 움직임을 봉쇄했다.

 

독립하려는 조선, 군림하려는 청

청에서 독립하려는 조선과 그런 조선을 찍어 누르려는 위안스카이 간의 갈등은 1890년 승하한 신정왕후 조대비(神貞王后趙大妃) 조문 문제를 두고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서울 주재 각국 외교관들은 함께 모여 조문 방식에 대해 의논하고자 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조선과 청의 관계는 특수하다며 이를 거부하고 따로 입궁하여 조문하려 했지만, 조선 조정에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그는 다른 수를 들고나왔다. 당시 조대비 승하 소식을 알리러 베이징에 간 조선 사신(고부사·告訃使)은 청의 조문 사절을 사양하며 부의(賻儀)만 받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전통대로 조문 칙사를 파견하면, 조선 국왕은 서대문 밖 모화관(慕華館)에 나가 고두(叩頭)의 예로 영접해야 했다. 이미 독립 의식을 갖게 된 조선 조정은 이를 피하기 위해 굳이 칙사 파견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을 표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사대질서 회복의 기회라고 생각한 위안스카이는 칙사 파견을 강행했다. 20세기를 불과 10년 앞둔 시점에 벌어진 일이다. 하는 수 없이 칙사를 맞이하며 고두례(叩頭禮)를 행한 고종,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조선 백성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김형종 교수는 “(위안스카이는) ‘속국’ 조선의 조정 위에 군림하면서, 상관 이홍장의 지시와 후원 아래 누구보다도 강경하게 조선을 감시·억압하고, 그 이익을 훼손시키면서 청의 국익을 일방적으로 앞세우는 정책을 실행하였다. 또한 조선이 국제법적으로 사실상 청의 속국임을 끊임없이 확인하고자 하여 조선의 자주·독립의 의지를 꺾고자 하였다”고 평가했다. 적어도 청일전쟁(1894년) 때까지 조선의 독립과 개혁을 방해한 것은 일본이 아니라 청과 위안스카이였다

 

 

07-20 “이승만 자유-민주 위해 反日… 지금 일본 비판은 뭘 위한 건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경축식에서 손을 잡고 있는 이승만(왼쪽)과 김구. 동아일보DB

 

《‘가장 유명하나 완전히 잊혀진 인물’, 나는 이승만이 한국인에게 이런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승만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한국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초대 대통령 하다 부정선거로 하야했다는 것 말고 그에 대해 더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불명예스럽게 퇴장했고, 그의 정적들이 곧바로 집권했으며, 뒤이은 박정희 정권도 그를 ‘띄울’ 이유는 딱히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베스트셀러로 워싱턴서 유명해져

사회인들을 상대로 한일 근대사에서 이승만이 한 역할에 대해 강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가 20대 때인 1899년 투옥되어 5년 7개월간 감옥 생활을 한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청중이 거의 없었다. 만민공동회에서 고종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였다. 어떤 분은 ‘그렇게 옛날 사람이었나?’라며 놀라기도 했다. 1875년생이다. 김구(1876년), 안창호(1878년), 안중근(1879년)이 비슷한 시기 태어났다.

그러고 보면 1870년대는 훗날 한국의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수준 높게 건설해간 인물들이 무더기로 태어난 시기다. 그들의 선배들이 이끈 갑오개혁은 파격적인 근대화 정책으로 방향은 옳게 잡았으나, 청일전쟁의 와중이기도 해서 일본의 영향력하에 있었다. 그에 비해 이 ‘1870년대생’의 젊은 활동가들이 활약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근대와 자주라는 시대적 방향을 제대로 체현한 세대로 주목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정신사에서 최양질(最良質)의 자산은 거의 이들에게서 발원했다.

 

최근 이승만이 쓴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류광현 번역·비봉출판사·원제: Japan Inside out·사진)’를 읽었다. 이 책은 진주만 기습(1941년 12월)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기 불과 넉 달 전에 출판되었다. 태평양전쟁을 예견한 이 책은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는 워싱턴에서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다. 소설 ‘대지’의 작가 펄 벅 여사는 서평에서 “이것은 무서운 책이다. … 나는 이 박사가 미국 사람들이 거의 알지 못하고 있는 사실, 즉 미국이 1905년에 조미(朝美)수호통상조약(1882년)을 수치스럽게 파기했고, 그로 인하여 일본이 한국을 집어삼키도록 허용했다고 말해준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썼다.

 

美의 조미수호조약 파기 세게 질타

▲1882년 인천 제물포에서 조선과 미국 간에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그린 당시 삽화. 이승만은 그의 저서를 통해 미국이 이 조약을 파기했고, 그로 인해 일본이 한국을 침략할 수 있는 길을 터 주었다고 지적했다. 나무위키 제공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제야 읽은 걸 반성했다. 이것은 대학의 일본 근대사 수업에 그대로 교재로 써도 될 만큼 수준 높은 저작이다. 미국의 당국자와 시민들에게 일본의 침략 야욕을 강렬하게 경고하면서 때로는 어조에 감정이 실리기도 하지만, 그 주장의 근거는 언제나 탄탄하다. 대략 1939년부터 2년간 집필했다고 하는데 빈한한 망명객이 어디서 이런 자료를 모을 여유가 있었는지 의아했는데, 최근의 연구들로 의문이 풀렸다(김정민 ‘이승만의 신문 스크랩을 통해 본 Japan Inside Out의 국제정치사’, 김명섭 ‘위싱턴회의 시기 이승만의 외교활동과 신문 스크랩, 1921-1922’). 그는 신문 스크랩광이었던 것이다. 그는 식사 비용까지 꼼꼼히 적어놓을 정도의 메모광이기도 했지만, 다년간에 걸친 신문 스크랩에 대한 집착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의 피가 조금만 덜 뜨거웠다면 혁명가가 아니라 학자로서도 크게 성공했을 것이다.

그는 개항 이후 한동안은 일본이 ‘한국 개화파의 친구’였다고 인정한다(30쪽). 사실 이런 인식은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도 나온다. 그러므로 개항 이후 한국근대사의 좌절을 모두 일본 탓으로 돌리는 ‘일본 환원주의’는 수정되어야 한다. 당시를 살았던, 최고의 ‘반일투사’들이 한결같이 이런 얘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그런 일본이 을사보호조약으로 한국 개화파들을 배신한 것을 시종일관 규탄하고, 미국이 그런 일본과 가쓰라-태프트밀약을 맺어 조미수호조약에서 한국에 무슨 일이 생길 때에는 중재권을 행사하겠다(use its good offices)고 했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린 것을 집요하게 질타한다. 앞에서 말한 펄 벅 여사도 그 점에 반응했던 것이다.

 

反日 통해 가려는 지향점이 중요

이 책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드넓은 국제정치적 시야다. 특히 이 점에 관해서는 일본근대사 전문가인 내가 그동안 읽은 어느 책보다 훌륭하다. 도대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일본의 대륙 팽창이란 게 전 세계적인 측면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행위인지, 그리고 그것이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는 미국에 장차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그런 거대하고 장기적인 시야에서 한국 독립이란 게 어떤 인류사적 의미가 있는지를 웅장한 어조로 갈파한다. 포효에 가깝다. 아마도 그 어떤 한국인의 주장보다 국제사회 설득에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21세기 또다시 불끈거리는 지정학의 한복판에 서 있는 한국인들이 가져야 할 안목과 취향과 자세가 이 책에 있다.

군데군데 보이는 날카로운 지적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일본의 중국 침략이 반드시 실패할 이유로 두 가지를 들고 있는데, 하나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잠재해 있다가 이제 깨어나고 있는 중국인들의 애국정신을 정확하게 평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모두가 일본군 앞에서 저항 한번 못 하고 흩어지는 중국인들을 조롱하는 분위기에서, 이승만은 중국 내셔널리즘의 발흥을 꿰뚫어 보고 있다. 또 하나는 일본이 한국 병합 때처럼 “인내심을 가지고 완만하고 은밀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중국에 있는 서구 열강의 이권을 거칠게 침탈하고 있어 둘 사이의 대립이 초래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 병합 당시 일본 지도층의 노회한 전략에 비해, 한없이 어설픈 군국주의자들의 전략을 비웃고 있다(58∼59쪽).

이승만은 이 책에서 격렬한 반일 민족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지만, 그저 일본이라서 증오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의 일본이 자유와 민주, 인권과 평화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고 있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다. 그가 ‘반일’을 통해 추구하려 했던 것은 자유와 민주였다. ‘반일’을 통해 전체주의나 공산주의로 가는 것은 그가 한사코 저지하고자 했던 길이다. ‘반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하려고 하는 반일인가’가 중요하다. 최대의 ‘반일’ 국가는 북한이지만, 이승만도 우리도 ‘반일’을 통해 그리로 가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08-17 “태양의 자손” “만국의 중심”… 日 ‘자존망대’의 역사

《19세기 후반 서양세력이 동아시아를 압박했을 때 중국은 화이사상을 고수하며 오만한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반면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중국의 ‘자존망대(自尊妄大·함부로 잘난 체함)’를 비웃으며 민첩하게 대응했다. 중국의 ‘자존망대’야 모두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일본이라고 그렇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오늘은 일본인의 자기 인식과 대외관에 대해서 살펴보자.》

 

日, 스스로 神國으로 여겨

▲1904년 러일전쟁을 앞두고 러시아를 큰 사람, 일본을 작은 개로 묘사한 풍자화. 일본은 모두의 예상을 깨며 러일전쟁에서 승리했고, 일본 내 ‘자존망대’적 발상은 더욱 힘을 받게 된다. 사진 출처 MIT Visualizing Cultures 홈페이지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 국가에 대해 우월의식을 표출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서기’ 9권에는 신라 임금이 일본에 대해 “지금부터 천지와 함께 오랫동안 말먹이꾼으로 따르겠습니다. … 바닷길이 먼 것을 꺼리지 않고 해마다 남자와 여자를 공물로 바치겠습니다”라고 했다고 되어 있다. 역사적 사실로 믿기 어려운 이런 기록들을 바탕으로 한국 경시는 때때로 표출됐으며, 메이지유신 전후 일본 민족주의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더욱 공고해졌다.

중세에도 일본인은 세계가 진단(중국), 천축(인도), 신국(일본)으로 이뤄져 있다며 ‘센터 의식’을 발휘했다. 그야말로 ‘자존망대’다. 근세(도쿠가와 시대)에 들어와서도 조선, 류큐(현 오키나와), 네덜란드 등 에도(江戶·현 도쿄)를 방문한 사절단을 조공사절단이라고 선전했다. 현재의 몇몇 일본 연구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일본형 화이체제’의 형성이라는, 납득하기 힘든 학설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현대판 ‘자존망대’다.

 

‘자존망대’의 극치는 19세기 들어서 서양 열강의 침입 때 벌어졌다. 일본 중심주의를 주창한 후기미토학자(後期水戶學者) 아이자와 야스시(會澤安)는 “신주(神州)는 태양이 나오는 곳이고 원기(元氣)가 시작하는 곳이며 태양의 자손이 대대로 황위(皇位)를 맡는 것이 영원히 변함없다. 원래부터 대지의 원수(元首)이며 만국의 중심이다”라며 그의 책 ‘신론(新論)’을 시작한다. 일본인이 자국을 신주, 신국(神國), 즉 신의 나라로 여긴 것은 전통이 유구한데, 놀랍게도 2000년 5월 당시 일본 총리 모리 요시로(森喜郞)는 “일본은 참으로 천황을 중심으로 한 신의 나라”라고 발언한 적이 있었다. 한국, 중국, 그리고 일본 민주시민들의 반발로 사과하기는 했지만 참으로 ‘유구한 전통’이다.

 

가쓰 가이슈 “조선은 나약한 나라”

아이자와는 세계가 ‘전국시대’에 들어섰다고 봤다. 청나라, 무굴제국, 페르시아, 오스만튀르크, 신성로마제국, 러시아, 그리고 일본이 ‘전국칠웅(戰國七雄)’으로 대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정확한 억측이지만 스스로를 G7으로 인식했다는 게 중요하다. 진단, 천축, 일본의 정립이든, 칠웅의 각축이든 일본은 빠지지 않는다. 이러니 다른 소국들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아이자와는 조선과 베트남은 약소국이라 손꼽을 만하지 못하므로 논하지 않는다고 했고, 비교적 조선에 우호적이었던 가쓰 가이슈도 “원래 조선은 나약한 나라로 … 무기를 소홀히 하여 궁술을 중요하게 여기는 정도로, 나머지는 돌팔매질 외에는 없다”는 인식을 보였다(‘개국기원·開國起源’). 얘기가 잠시 새지만 조선인들이 싸우거나 소동을 일으킬 때 돌팔매질을 한다는 기록은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1960년대 일본 학생운동에서와는 달리 1980년대 한국의 학생 데모의 주력 무기는 돌팔매질이었다. 그 역시 ‘유구한 전통’인가.

 ▲‘신론’의 저자 아이자와 야스시.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전국시대라면 일본은 어찌해야 할까. 여기서 등장하는 게 ‘웅비론(雄飛論)’이다. 남이 들이닥치기 전에 먼저 쳐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소개한 ‘신론’은 필사로 유포되는 과정에서 제목이 ‘웅비론’으로 바뀌기도 했다.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는 먼저 조선과 만주를 장악한 다음, 이를 발판으로 중국을 공격하는 방책을 제시했다. 그리고 천황이 직접 구마모토에서 발진하여 양쯔강을 타고 올라가 난징을 취하여 이를 임시 황거로 삼자는 것이다(‘혼동비책·混同祕策’). 서양의 외압도 없고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 아무런 변동 조짐이 없던 19세기 초의 책에서다. 기이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국내에 있는 아이자와 야스시의 ‘신론’ 필사본. 신론은 일본이 “원래부터 대지의 원수이며 만국의 중심이다”라며 일본 중심주의를 주창한 대표적인 책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세계가 결국 하나의 국가에 의해 통일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아이자와는 “러시아는 세계를 석권하여 이를 모두 신하로 만들지 않고서는 멈추지 않을 것”(‘신론’)이라 했고, 하시모토 사나이(橋本左內)도 지금의 정세로 볼 때 “5대주는 결국 하나가 될 것이며 맹주를 세워야 전쟁이 멈추게 될 것”이라며 그 맹주는 영국이나 러시아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러시아와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무라타 우지히사에게 쓴 편지’). 세계의 최종 승자를 일본으로 생각한 사람도 있다. 홋타 마사요시(堀田正睦)는 일본의 개항을 결정한 막부 로주(老中), 즉 수상이었다. 그는 무역을 통해 국력을 기르고 군사력을 튼튼히 하면 마침내 일본은 세계만방의 대맹주가 될 것이고, 만국이 일본의 지휘를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대일본고문서: 막말외국관계문서·大日本古文書: 幕末外國關係文書 18권’). 

 

中 ‘자존망대’에 日도 편승하려 하나

물론 이런 주장들은 1930년대까지는 정책에 반영되지 않았다. 현실주의적 정치가들이 이런 주장을 잘 통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아이자와의 ‘신론’ 같은 책은 1930년대 젊은 장교들에게 필독서였다고 한다. 아마 다른 책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책들로 무장했지만 권력에서 소외된 우익 이데올로그들도 군부 인사들에게 이런 사상을 펌프질했다. 당시 군부의 전략가로 대외 침략을 주도한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의 ‘세계최종전론’도 이런 데 영향받았을 가능성이 작지 않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전 세계가 소련, 미주(美洲), 유럽, 동아시아라는 4개 국가연합으로 나뉘었다며, 4개 연합 사이에 일종의 준결승이 벌어져 소련과 유럽이 탈락하고 일본과 미국이 최종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자존망대’적 발상이 초래한 파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다.

패전 후 일본은 ‘자존망대’를 버리고 평화국가의 길을 잘 걸어왔다. 그런데 21세기 초두인 지금 중국은 ‘도광양회(韜光養晦)’를 버리고 다시금 ‘자존망대’하기 시작했으며, 세계는 다시 ‘전국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그에 올라타 일본의 ‘유구한 전통’도 다시 꿈틀대려는 듯하다. 한국과 일본 같은 미들 파워(middle power) 국가가 선택할 길은 아니다. 나의 기우겠지만 그런 조짐이 있다면 부디 자중하길 바란다.
 

 

 

09-14 자기 세력보다 사회 중시… 에도 내준 가쓰의 ‘질서 있는 퇴각’

▲가쓰 가이슈(1823∼1899년)의 얼굴 사진.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가쓰 가이슈(勝海舟·1823∼1899), 한국 독자들에게 좀 낯선 이름이다. 소프트뱅크의 손정의(孫正義) 회장이 존경했다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스승이었다고 하면 조금은 더 가깝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막부의 가신으로 메이지 유신군이 도쿠가와 막부의 수도 에도(江戶·지금의 도쿄)까지 쳐들어왔을 때 막부 측 총사령관이었다. 말하자면 역사의 패배자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멋있고, 의미를 남긴 패배자를 알지 못한다. 오늘은 ‘멋진 패배자’의 얘기다.》

 

이기면 관군, 지면 역적

막부의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는 정치적 후각이 타고난 사람이었다. 막부에 반란을 일으켰던 조슈번(長州藩) 정벌에 실패하자, 권력을 유지할 길은 막부를 포기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대정봉환(大政奉還), 스스로 270년간 계속되던 막부를 폐지하고 자신도 쇼군 자리에서 내려왔다. 막부를 지탄하던 여론이 순식간에 바뀌어 그의 용단을 지지했다. 그가 노린 대로였다. 요시노부의 노림수는 지지 여론을 모아 천황 밑에 신정부를 세우고 그 실권자가 되려는 것이었다. 막부의 무력타도를 계획했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당황했고, 그 반전을 꾀한 것이 왕정복고 쿠데타다.

‘이기면 관군(官軍), 지면 역적이다.’ 쿠데타로 천황을 손아귀에 넣은 그들은 하루아침에 ‘관군’이 되어 ‘역적’ 도쿠가와 세력을 치러 에도로 행군했다. 그들을 막아선 사람이 갑자기 막부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가쓰 가이슈다. 그는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다. 탁월한 재능 덕에 승진을 거듭했지만, 막부 주류 세력을 좇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막부의 여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막부의 종말을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든 최대한 의미 있게 ‘마무리’해야 할 것이었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슬러 괴롭히지는 않겠소.”(김광진 ‘편지’). 권력에 대한 미련은 연인보다 더 질긴 법이지만, 역사의 대세를 거스르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그러나 그걸 통찰하는 사람은 드물거니와, 통찰했다 해도 미련을 끊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진영 뛰어넘은 두 호걸의 만남

막부 주류 세력들은 그의 노선을 경멸하고 한직으로 내쳤다. 좌절하지 않고 해군 건설에 뛰어들었다. 자기를 내쳤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작은 해군조련소 설립을 지원해 달라고 호소했다. 머지않아 막부도 번(藩·봉건국가)도 없어진 다음에는 새로운 일본을 건설해야 할 터인데, 그 일본을 지켜주는 것은 해군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함께 일했던 사람이 사카모토 료마다. 젊은 료마는 누나에게 “요즘은 천하에 둘도 없는 군학자(軍學者) 가쓰 린타로(가쓰 가이슈)라는 대선생님의 문인이 되어 굉장히 귀여움을 받고 있어. (중략) 가까운 장래에 오사카에서 40km 정도 떨어진 곳에 해군을 가르칠 곳을 설립하고, 80m, 90m 정도 되는 배를 만들 거야. 제자들도 400∼500명 정도 각지로부터 모여들고 있어”라고 하며 신나했다. 그러나 집권자들은 이를 지원하지 않았다.

가쓰는 반막부세력의 중심인 사쓰마번의 리더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도 친교를 맺었다. 1864년 사이고를 만나 막부독재를 허물고 웅번(雄藩·큰 봉건국가들) 연합정권이 세워져야 한다고 속내를 밝혔다. 놀란 것은 사이고였다. 그는 이를 ‘공화정치’라 명명했다. “(가쓰는) 실로 놀라운 인물로, 두들겨 패줄 심산으로 만났지만 완전히 머리를 숙이고 말았다. 얼마만큼 지략이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학문과 견식은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이 시기 최고의 양학자)이 발군이지만, 실제 일을 다루는 솜씨에서는 가쓰 선생이 최고다. 정말 반해 버렸다”고 토로했다. 반하기는 가쓰도 마찬가지. “그(사이고)를 만나 봤더니 식견과 논리 면에서는 내가 오히려 더 나았지만, 이른바 천하대사를 짊어지는 것은 결국 사이고가 아닐까.”

▲가쓰 가이슈와 관군 총사령관인 사이고 다카모리는 이틀간 협상을 벌였다. 가쓰는 무고한 희생을 막기 위해 막부의 본거지인 에도를 관군에 내어준다. 당시 협상을 그린 삽화.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진영을 뛰어넘은 두 호걸의 만남은 몇 년 후 일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관군’이 에도성 총공격을 앞두고 있을 때, 얄궂게도(다행히도?) 양군을 지휘하고 있던 것은 두 사람이었다. ‘공화정치’에 뜻을 같이했던 사람이 싸울 일은 없었다. 에도성 외곽에서 단둘이 이틀 동안 회담했다. 둘은 외세침입을 목전에 둔 마당에 오직 ‘일본’이라는 국가만을 생각하자고 했다. 사이고는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고, 가쓰는 예상치 못한 양보안을 내놓았다. 사이고는 점령군이었지만 깍듯이 예의를 갖췄다. “사이고는 나에 대해 막부중신의 예우를 잃지 않았다. 담판할 때 시종 자세를 바로 하고 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 조금도 승리한 위광으로 패장을 경멸하는 듯한 모습은 없었다.” 이 담판 없이 총공격이 이뤄졌다면 100만 명의 에도 시민은 참화를 겪었을 것이다. 그리고 양군 간에 벌어졌을 처절한 전투는 두고두고 깊은 원한과 분열을 초래했을 것이다.

 

끝까지 ‘패자의 품격’을 지킨 가쓰

▲천황을 등에 업은 관군이 에도를 함락하기 위해 진군하는 과정에서 도쿠가와 막부와 벌인 고슈·가쓰누마 전투(1868년)를 그린 삽화. 이 전쟁의 패배로 막부는 더욱 수세에 몰렸고, 당시 막부군 총사령관이었던 가쓰 가이슈는 항복을 결심하게 된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에도를 점령한 사이고는 잠시 교토로 떠나게 되자 “어떠십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지금부터의 일은 가쓰 선생께서 어떻게든 해주시겠지요”라며 치안 책임을 가쓰에게 맡겨 버렸다. (이상 직접 인용은 졸저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승자는 승자다운 품격이 있어야 한다. 조그만 승리에 우쭐해서 점령군처럼 행세하는 자들에게 승복할 패자는 없다.

가쓰는 패자의 품격을 지켰다. 회담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하는 막부군을 끝까지 설득했고, 막부 가신들을 이끌고 도쿠가와 세력의 본거지 시즈오카로 선선히 물러났다. 막부 가신들은 그를 사쓰마, 조슈와 타협해서 막부를 팔아먹은 자라고 매도했지만, 그는 변명하지 않았다. 이후 메이지 정부의 거듭된 입각 요청에 응하지 않고, 남은 생애 동안 그가 한 일은 주군을 잃고 가록(家祿)을 잃어, 명예도 생계도 막막해진 막부 가신들과 그 식솔들을 챙기는 것이었다. 한 사회의 변혁 과정에서는 승리한 세력의 행태도 중요하지만, 패자의 ‘패배하는 방식’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할 때가 많다. 대세를 읽지 못하고 무모한 집착을 부리면, 무고한 인명은 손상되고 사회적 비용도 엄청나게 커진다. 물러나면서 행한 총질로 폐허가 되면 사회 재건은 그만큼 어렵다. 자기 세력을 넘어서 사회 전체의 존망을 염두에 두고, 미련을 끊어 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지도자다. 가쓰 가이슈가 이끈 ‘질서 있는 퇴각’이 일본을 살렸다.
 

 
 

10-13 270개 번에서 한 국가로… 日 국가주의의 강화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일본사회는 국가주의로 치달았다. 낮에는 반미시위에 참여하고 밤에는 이불 속에서 재즈를 듣는 사람도 있었다지만, 전반적으로 일본 국민들은 ‘국가’를 자기 이에(家)나 무라(村)와 같은 공동체로 내면화하기 시작했다. 한국 ‘국가주의’의 정점이었을 유신 시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나도 국가주의라는 것과 대면했지만, 그건 어딘가 엉성한 것이었다.》

 

국가와 천황과 나를 동일시

오후 6시였던가, 국기하강식의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길을 걷다가도 모두들 멈춰서 가슴에 손을 얹었지만, 내 기억 속의 그 장면은 엄숙하다기보다는 살짝 코믹한 것이었다. 애국가가 채 끝나기도 전에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의 표정은, ‘이 노무 거, 언제까지 해야 하나’, 뭐 그런 쪽이었다. 나는 TV 속 태극기 앞의 근엄한 사람들보다, 어쩐지 이들이 더 미더웠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때 금 모으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이때 ‘에이 씨∼’ 하며 멈췄던 걸음을 재촉했던 그분들이었을 것이다.

국가주의를 대하는 일본인들의 태도는 이보다는 훨씬 진지했다. 코믹한 분위기도 삐딱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 진지함이 지나치다 보니 국가와 천황과 나를 동일시하며, 무슨 사교집단처럼 가미카제(神風) 자살특공대까지 만들어 버렸다. 한국의 유신정권도, 타이완의 계엄정권도, 중국의 공산정권도, 심지어는 북한의 김씨 정권도 이르지 못한 경지다.(아마도 북한은 전쟁 전 일본 국가주의와 가장 비슷한 체제일 것이다. 그래서 학계에는 북한 체제를 전쟁 전 일본 천황제의 유산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조선시대 ‘백성’이 ‘국가’에 대해 갖는 감각은 그 종류도 강도도 오늘날의 ‘국민’과는 퍽 달랐을 것이다. 근대의 발명품인 국민국가(nation state)는 ‘백성’에게 국가라는 존재를 주입시키려는 시도를 줄기차게 해왔고, 그 결과 ‘국민(nation)’이 형성되었음은 이제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그 방법은 국기, 국가, 국경일의 제정, 의무교육, 징병제 등 비슷했지만, 그 과정은 나라마다 다양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1868년) 직후인 1870년대에는 취학률이 25∼50%에 머물렀지만, 1890년대에는 90%를 넘어섰고, 러일전쟁 무렵인 1905년에는 남아의 98%, 여아의 93%가 취학했다. 어떻게 이토록 단기간 내에 국가가 인민 속에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일까.

  

“번은 애국심의 사범학교”

 ▲천황이 미국과 수호조약을 체결한 막부에 불만을 표하는 내용을 담아 몰래 미토번(水戶藩)에 보낸 무오밀칙. 이 일로 막부와 천황 사이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진다. 사진 출처 히코네성 박물관 홈페이지

 

이에 대해 메이지 시대 유명 저널리스트 야마지 아이잔(山路愛山)은 “일본 국민은 애국심의 사범학교로서 번(藩)이라는 것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야마지 아이잔 ‘日漢文明異同論’). 도쿠가와 시대는 최대 영주인 도쿠가와 막부와 약 270개 내외의 번(봉건국가)으로 이뤄져 있었다. 이 번들은 대부분 한 가문(다이묘·大名)이 세습하면서 통치했고, 그 밑에는 가신단과 영민(領民)이 있었다. 가신단의 첫 번째 충성 대상은 막부가 아니라 자기 번과 다이묘였다. 그들은 자기 번을 ‘구니(國)’라고 불렀다. 도쿠가와 시대 후기로 갈수록 번 당국은 번조(藩祖·번을 세운 다이묘) 현창 사업이나 다이묘의 지역 순행을 빈번히 시행함으로써 영민들 사이에서 번의 존재감을 확산시켜 갔다. 이를 학계에서는 ‘번국가화(藩國家化)’ 현상이라고 한다. 번이라는 것이 규모가 큰 것이라도 우리 경기도만 한 면적에 인구 70만 정도였으니, ‘번국가’의 침투도 상대적으로 용이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지방 백성보다 일본 어느 한 번의 백성이 ‘번국가’에 대해 느끼는 밀도(密度)는 더 높았을 것이다.

1853년 페리 출현 이후 도쿠가와 체제가 크게 동요하고 번을 뛰어넘어 ‘일본’ 전체의 방위 필요성이 절박해지자, ‘번국가’ 의식 역시 기로에 처하게 된다. 강대한 서양 세력과 맞서려면 번이 따로따로 행동해서는 안 되었다. 전국의 번을 강고하게 결합할 새로운 구심점이 절실해지자 천황을 추앙하는 존왕사상(尊王思想)이 확산되었다. ‘번국가(다이묘)’에서 일본(천황)으로 충성의 대상은 전환되기 시작했다.(박훈 외 ‘근대 일본인의 국가주의’)
 

 

번에서 국가로, 확장된 국가의식

 ▲조슈번 소속으로 존왕양이, 막부타도를 외치다 29세에 막부에 의해 처형당한 요시다 쇼인. 조선 침략 등 해외 팽창을 적극 주장한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스승이기도 하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그러나 그 전환은 그렇게 용이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상대가 천황이라 하더라도 수백 년을 섬겨온 주군(다이묘)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는 것은 사무라이로서 하기 힘든 배신 행위였다. 이 시기 ‘유신지사’들은 주군과 천황 사이에서 자기 분열을 겪으며 거기서 빠져나오기 위해 고뇌에 찬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존왕양이 사상의 주창자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나는 모리가(毛利家·조슈번의 다이묘)의 신하다. 따라서 주야로 모리가에 봉사하기 위해 연마한다”(吉田松陰全集 8권)고 했고, 천황이 미토번(水戶藩)에 내린 밀칙(무오밀칙·戊午密勅)을 둘러싸고 다이묘의 명령을 거부했던 다카하시 다이치로(高橋多一郞)는 스스로를 ‘죄신(罪臣)’이라고 자칭했다. 사쓰마번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도 번 당국과 불화하자 “사정(私情)으로는 누대에 걸친 신하이니, 감정상 가만히 있기 어렵고 도외시할 수가 없다”(大久保利通文書 3권)며 고심했다. 그렇지만 이들은 사정(私情)을 억누르고 번을 폐지하여 천황직할체제를 만들어 버렸다(폐번치현·廢藩置縣·1871년). 다이묘를 앞장세워 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유신을 일으킨 지 3년 반 만이었다.

 ▲1871년 폐번치현(廢藩置縣)이 발표되는 가운데 천막으로 얼굴이 가려진 천황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다이묘들을 그린 삽화.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메이지천황은 다이묘들을 불러모아 폐번치현을 선언했다. 폐번치현을 주도하고 그 현장에 입회해 있던 조슈번 사무라이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는 기뻐 날뛰는 대신 울었다. “(조슈번 다이묘께서는) 50, 60명의 다이묘들과 나란히 엎드려 듣고 계셨다. 해악(海嶽)도 미치지 못할 높은 은혜를 내게 주신 주군이시다. 감정이 가슴에 차올라 눈물이 줄줄 흐르는지도 몰랐다.”(木戶孝允일기 2권)

 ▲왕정복고 후 벌어진 무신전쟁 당시 조슈번의 사무라이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고뇌와 번민이 있었지만 ‘작은 국가’(번)에서 이미 익숙해 있던 국가의식을 ‘큰 국가’(일본)에서 사이즈 업(size up)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특히 ‘구니(國)’에 강한 일체의식을 갖고 있던 사무라이 출신들은 새로운 국가에 대한 충성에 쉽게 적응해 갔다. 그리고 ‘백성’에게 국가의식을 주입하여 ‘국민’으로 만드는 데에도 열성적이었다. 이렇게 보면 일본 국가주의의 뿌리는 유별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제대로 된 군부도 없는 나라를 ‘군국주의’라고 비판하는 것도 난센스겠지만, 일본의 리버럴한 측면만을 강조하는 것도 일본 이해로서는 애꾸눈이라 할 것이다.

 

 

11-10 정당, 표만 좇지 말고 진리 찾아야… 日나카에의 경고

《“차라리 3김 때가 나았어.” 요즘 정치판을 보며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을 자주 만난다. 사람은 다 지나간 때를 아름답게 기억하려는 경향이 조금씩은 있지만, 그저 그래서만은 아닌 것 같다. 그만큼 요즘 우리 정치풍경은 목불인견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라는 데 있다. 미국을 비롯해 영국, 프랑스 등 인류에게 민주주의를 선사했던 나라들도 이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정치 현상들을 보이기 시작한 지 오래다. 이런 상황들을 보며 시진핑, 블라디미르 푸틴, 심지어는 김정은조차 “민주주의, 좋아하시네!” 하며 냉소하고 있을까 걱정된다.》

 

19세기 말 민주주의 수용한 일본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인 것은 맞지만, 우리가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에 대해 깊은 성찰을 쌓아왔다고 하긴 어렵다. 광복 후 그저 미국 따라 받아들였을 뿐이라는 것이 솔직한 말일 것이다. 그후 80년간 민주주의는 마치 성리학의 ‘대의(大義)’처럼 그저 떠받들어졌을 뿐, 지적 탐구와 비판의 과녁에서는 벗어나 있었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외치긴 했지만, 시원한 물 한잔 마시고 맨 정신으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철학·정치학·역사학적으로 들여다본 적은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

▲1890년 7월 1일 치러진 일본 최초의 국회의원(중의원) 총선거 투표장을 그린 삽화. 사진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다른 건 몰라도 민주주의는 일본보다 한국이 한 수 위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19세기 말 일본인들이 (대의)민주주의에 대면하면서 겪었던 지적 고투는 지금 민주주의를 고민하는 데 좋은 참고자료다. 우리와 달리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맨땅에서부터 하나하나 이해하고, 번역하고, 수용 여부와 수용 범위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었기에, 이를 둘러싸고 수많은 탐색과 논전이 벌어졌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자유, 헌법, 의회, 대의민주주의, 정당, 권리 등의 용어는 이런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19세기 말 서구 민주주의를 연구해 일본에 소개하고 그 자신이 직접 제1회 총선거에 나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했던 사상가이자 언론인 나카에 조민.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그중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나카에 조민(中江兆民·1847∼1901)이라는 사람이다. 일본 자유민권운동의 근거지인 도사번(土佐藩)에서 태어나 사상가, 언론인으로 민주주의를 탐구, 소개하고 1890년 제1회 총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장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번역하는 등의 업적으로 ‘동양의 루소’라고 불리기도 했다. 다른 메이지시대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나카에 역시 서양의 정치사상을 수용하면서 한학(漢學)의 개념과 용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활용된 것이 전통적인 공(公)과 사(私)의 개념으로, 나카에는 루소의 ‘일반의지’를 ‘공지(公志)’로 번역했다.(이하 김태진 ‘근대 초기 일본의 대의민주주의의 수용’)

 

정당은 진리를 탐구하는 곳

▲1890년 제1회 총선거로 뽑힌 일본 제국의회 의원들과 그 명단을 담은 그림. 한국보다 반세기 이상 빨리 서구 대의민주주의를 받아들인 일본은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자유, 헌법, 정당과 같은 민주주의의 기본 개념을 이해하고 수용 범위를 정하는 지적 고투를 거쳐야 했다. 사진 출처 규슈 오이타현 교육위원회 홈페이지

 

심의를 통해 일반의지가 도출된다는 루소의 견해를 설명하면서, 나카에는 ‘의(議·토의)’가 사를 공으로 바꾸는 작업의 핵심이라고 했다. 그는 다수결이 공지(公志)를 도출한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단순히 인민들의 뜻을 정치에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 공지는 찾을 수 없다. 정당들은 단순히 정치적 견해를 같이하는 것을 넘어 진리를 탐구하는 곳이며, 진리를 중시하는 학파와 같은 정당이 국회를 조직하고, 그들이 ‘토의’를 거듭할 때 공지에 다다를 수 있다. 진정한 당은 “다른 당 중에 옳은 바가 있음을 알아차린 때는 갑자기 뜻을 고쳐 이를 따라도 조금도 마음에 개의하는 바가 없다.”(나카에 조민 ‘정당론’·김태진 번역)

작금 우리의 정당들은 어떤가. 공지 따위 탐색하는 의원은 거의 없는 듯하며 여론조사, 팬덤 지지자 추종을 민주주의처럼 받아들인다. 상대 당의 의견이 옳을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기는커녕 내가 내심 말하려 했던 것도 상대가 먼저 표명하면 표변하며 공격해댄다. ‘진리(공지)를 중시하는 학파와 같은 정당’까진 아니더라도, ‘토의’ 중에 코인 투자를 탐구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 아닌가.

 

‘민주주의의 위기’ 보완책 필요

나카에가 생각한 대의정치란 여러 소인의 가슴속(胸腹)에 있는 ‘사리사욕’의 덩어리를 국회라는 큰 냄비에서 끓이고 다시 끓여, 구름이 되고 안개가 돼 푸른 층루(層樓)인 내각에까지 밀어 올리는(冲上) 것이다(‘군자소인’). 그럴 때 국회는 국가의 ‘일대뇌수(一大腦髓)’가 된다. 여론에 추종만 하는 게 아니라 그 여론에 기초하되, 숙고와 숙의(熟議)를 거듭해 공지를 도출해내는, 신체의 뇌와 같은 존재다. 그러나 그후 일본정치는 국민들의 여론수렴, 의원들 간의 숙의, 이해타산을 조정한 공공성에 기초한 정책 결정, 그 어디에서도 흡족한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집권당은 80년이 흘러도 제대로 교체되지 않았고, 국회 구성원들 중 상당수는 세습 의원이며, 지역 이익유도 정치가 이들의 주요 임무가 돼 왔다. 숙의보다는 표 계산, 여론에 대한 설득보다는 영합이 횡행해 의회에 대한 신뢰는 현저히 낮다(필자의 졸고 ‘근대일본의 공론정치와 민주주의’).

현재의 한국 국회도 이에 못지않다. ‘사리사욕’의 덩어리들이 토의라는 담금질을 통해 구름과 안개가 되기는커녕 덩어리 그 자체로 난무하고 있다. 내각(정부)은 ‘푸른 층루’를 나와 다른 데로 옮긴 탓인지, 또 하나의 덩어리가 돼 같이 막춤을 춘다. 100여 년 전 중국 혁명가 장빙린(章炳麟)은 선거를 해봤자 지역 토호들이 당선될 것이며, 이름은 국회이나 실은 간부(奸府)가 생겨나 백성들을 괴롭힐 거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대의정치는 반드시 선한 전제정치만 못하다”고 일갈했다(‘代議然否論’). 지금 중국 공산당의 입장과 흡사하다. 민주주의의 혼미에 넌더리를 낸 사람들이 이런 의견에 끌릴 날이 오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

나는 위에 소개한 논문의 결론에서 아래와 같이 쓴 적이 있다. 혼미하는 민주주의 문제에 대면할 때 “우리는 동아시아의 역사적 경험을 편견과 과장 없이 발굴해내어 그것을 내재적으로 해석한 다음 거기서 지혜와 시사를 얻어야 할 것이다. 그때 근대 서양의 성취를 상대화할 필요는 있겠지만, 그것을 무리하게 폄하하는 ‘아시아주의’적 자세는 금물이다. 이 같은 기본적 태도를 전제한 위에서 현재의 정당·선거·의회제도, 여론조달의 프로세스(여론조사의 남용, 인터넷의 위력), 유식자 회의의 역할(한국 헌법재판소의 막대한 권한과 역할은 이런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대중 집회의 효과와 문제점, 심지어는 지역구 선거·다수결의 정당성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디가 아픈지 잘 살펴보자. 민주주의를 응원한다.

 

 

12-08 세계 지리 수용해 중화주의 탈피… 日도쿠가와 지식인들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주된 관심사는 자국 조선의 특성이나 전통이 아니라 우주, 사회, 인간을 떠받치고 있는 보편 원리였고, 이를 바탕으로 형성·유지되고 있는 보편문명(중화문명)에 있었다. 그러니 이황, 이이나 송시열에게서 제대로 된 ‘조선론’을 볼 수 없는 것도, 19세기 말 소개된 민족주의를 낯설어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일본은 사정이 좀 달랐다. 그들은 일찌감치 국제 관계 속의 ‘자국일본’에 대해 사고하기 시작했다.》

 

비주류 머문 일본의 중화론자들

도쿠가와 시대 일본의 성리학자이자 중화론자인 후지와라 세이카. 조선과 달리 이 같은 중화론자들은 일본 지식계에서 끝내 주류가 되지 못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도쿠가와 시대에 들어서자 일본에도 유학이 퍼지면서 중화론자들이 등장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국일본보다는 성신(誠信), 혹은 안민(安民) 같은 유학적 덕목이었다. 임진왜란 와중에 포로로 끌려온 조선의 성리학자 강항(姜沆)에게 일본의 성리학자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는 말한다. “일본인민이 곤궁한 것이 지금처럼 심한 적이 없었다. 만약 조선이 명나라와 함께 인민을 이 물불 같은 고통에서 구할 것을 표방하며 군대를 파견하고, 조금이라도 인민의 이익을 침범하는 짓을 하지 않는다면, 쉽사리 도호쿠 변경인 시라카와관(白河關)까지 진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일본인이 조선에서 저지르고 있는 것 같은 살인, 약탈 행위를 한다면 쓰시마(對馬)조차도 취할 수 없을 것이다.”(강항 ‘간양록’) 여기서는 자국, 타국이라는 의식을 넘어 ‘보통 사람들의 편안함과 이익’이라는, 보편적 관점이 도도하게 설파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지식계에서 이런 관점은 끝내 주류가 되지 못했다. 많은 지식인들은 국가라는 단위를 중시하고, 일본을 그저 자기 나라라는 이유로 추켜세우려는 경향이 확산되었다.(박훈 ‘18세기 말∼19세기 초 일본에서의 ‘戰國’적 세계관과 해외팽창론’) 야마가 소코(山鹿素行)는 사람들이 “일본은 소국이기 때문에 중국에는 모든 것이 미치지 못하고, 성인도 중국에만 출현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들에만 한하는 것이 아니라, 고금의 학자가 모두 그렇게 생각하여 중국을 흠모하고 배워 왔다. 근자에 처음으로 이 생각이 잘못임을 알았다.”(山鹿素行 ‘配所殘筆’)라며 지식계의 중국 숭배를 비판하고 일본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그런데 일본이 중국보다 우월하다고 제시한 이유가 흥미롭다. 중국은 국경이 오랑캐들과 접하고 있어 방위가 곤란하고, 그 때문에 만리장성 건설 노역 같은 것으로 백성을 괴롭히고 있는 점, 한족이 아닌 이민족의 지배를 받고 있는 점, 만세일계(萬歲一系)의 천황을 갖고 있는 일본과 달리 정치적 변동이 잦은 점 등이다. 즉, 군사적 우월성, 황통의 안정성 등을 그 이유로 삼고 있는데, 이것들은 앞에서 본 후지와라의 성신·안민 같은 가치 기준과는 사뭇 달라진 것이었다.

 

일본 자국 이익이 우선

 18세기 말 일본인과 중국인, 유럽인의 교류를 그린 그림. 위키원드

 

더욱이 도쿠가와 시대 제일의 성리학자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에 이르면 그 변화는 뚜렷해진다. 어느 날 중화문명을 열심히 설파하는 야마자키에게 제자들이, 만일 그토록 훌륭한 중화의 성인들이 군대를 이끌고 일본을 쳐들어온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야마자키는 “중국이 일본을 무력으로 복속시키려고 한다면, 요순문무(堯舜文武)가 대장이 되어 온다고 하더라도 석화시(石火矢)로 깨부수는 것이 대의다. 예의덕화(禮義德化)로 복종시키려 해도 신하가 되지 않는 것이 옳다. 이것이 춘추(春秋)의 도다.”(淺見炯齋 ‘靖獻遺言講義’ 卷7)라고 대답했다. 당연한 얘기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달리 생각하는 우리 선조들도 있었다. ‘황사영백서’에서 보듯이, 조선 천주교도들은 서양 군함들이 들이닥쳐 신앙을 퍼뜨려줄 것(예의덕화)을 바랐고,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은 조선의 전제정부에 대해 일본이 군사 행동을 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세계지도 보며 일본 위치 직시

 니시카와 조켄이 쓴 ‘증보화이통상고’에 수록된 세계지도(왼쪽 사진). 이 책에는 5대주라는 지리 개념과 전 세계 129개국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다. 일본은 17세기부터 유럽과 교류를 통해 세계 지리 지식을 받아들였고, 그로 인해 중국이 중심이라는 ‘중화주의’를 탈피할 수 있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일본이 중국 중심주의를 탈피하는 데에는 당시 세계 지리 지식이 널리 보급된 것이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니시카와 조켄(西川如見·1648∼1724)이 쓴 ‘화이통상고(華夷通商考·1695년)’와 ‘증보화이통상고(增補華夷通商考·1708년)’는 5대주라는 지리 개념을 소개하며, 무려 129개국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후에도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1657∼1725)의 ‘채람이언(采覽異言)’(1713년)과 ‘서양기문(西洋紀聞)’, 데라지마 료안(寺島良安·1654?∼?)의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繪·1713년)’, 다카하시 가게야스(高橋景保)의 ‘신정만국전도(新訂萬國全圖·1810년)’ 등이 간행되었다. 세계지도와 지구본도 널리 보급되어 일본인의 세계 지리에 대한 정보는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일본인들은 지구본을 신기한 듯 빙글빙글 돌리면서 중국이 크고 중요한 나라이긴 하지만 세계의 중심은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 마찬가지로 일본 역시 만세일계의 훌륭한 나라이긴 하지만, 지구본 위의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야마자키의 문하생 아시미 게이사이(淺見炯齋·1652∼1711)는 “무릇 하늘은 땅을 감싸고 땅은 하늘을 받들지 않는 곳이 없다. 그렇다면 각각 그 지역의 풍속이 미치는 곳은 각자 나름의 천하이니 존비귀천 같은 것은 없다”(‘中國弁’)며 국가 간의 대등성을 주장했고, 따라서 중국을 중화라고 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거꾸로 일본을 중화라 하고 중국을 오랑캐라고 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자국, 타국을 부를 때는 그저 오국(吾國), 이국(異國)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도쿠가와 시대 일본 주류 지식인들의 국제관은 크고 작은 나라들이 나뉘어 존재한다는 만국병립론이었다. 당시 일본에 약 270개의 봉건국가가 병립해 있는 실정은 이런 이미지를 유추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만국 중에 일본은 얼마나 훌륭한 나라인가를 설명하기 위한 논의도 등장했다. 19세기에 들어 안보위기 의식이 커지자 만국병립론은 만국대치론으로 급속히 바뀌어 갔다. 단순히 나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패권을 노리며 할거·대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바로 불과(!) 200, 300년 전 자기 땅에서 실제로 전개되었던 전국시대(戰國時代·1467∼1573년)를 떠올리게 했으며, 당시 지식인들은 실제로 이를 전국시대의 재래(再來)라고 파악했다. 잠재해 있던 일본의 선민의식은 이때부터 폭주하기 시작하는데, 국학(國學)과 미토학(水戶學)이 큰 역할을 했다. 이에 대해서는 본 칼럼에 이미 쓴 바 있으니, 참조해주시기 바란다.(2023년 8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