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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 이승만 대통령 이야기 2023/ 07.01 아버지 代에선 반목했어도 초대 대통령 기념관 위해 뭉친 2세들 - 11-23 이승만기념관 최적지는 서울 송현동

상림은내고향 2023. 12. 13. 19:38

국부 이승만 대통령 이야기 2023

07.01 아버지 代에선 반목했어도 초대 대통령 기념관 위해 뭉친 2세들

▲‘이승만대통령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에 참여하는 전직 대통령 아들들

 
 

 

이번에 발족한 ‘이승만대통령기념관건립추진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 아들 박지만 EG 대표이사, 노태우 전 대통령 아들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이사장, 김현철 김영삼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 김홍업 김대중평화센터이사장이 참여한다. 전직 대통령 아들 4명이 아직 초대 대통령 기념관이 없다는 문제 의식에 공감하고 정파와 진영을 초월해 힘을 보태고 있다.

 

박정희·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악연을 갖고 있다. 박정희 정권 반대 투쟁에 앞장섰던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가택연금, 사형선고 등 많은 고초를 겪었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생의 라이벌이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 시절 내란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이를 보고 자란 2세들이 아버지 대(代)의 반목과 갈등에서 자유롭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버지들이 남긴 정치적 유산도 2세들에겐 부담이다. 언행에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정치 양극화와 국민 분열이 극심한 상황에서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뜻밖의 정치적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다. 그로 인해 아버지에게 누를 끼칠 수 있다는 부담도 클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 네 사람이 초대 대통령 기념관 건립에 뜻을 같이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 과거에 악연이 있고, 지금도 정견을 달리한다 해도 대한민국이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함께 할 수 있는 일에는 함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모습이 너무나 아쉬운 상황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전 대통령이 나라의 방향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잡았으며, 6·25 남침에서 나라를 지켰고, 그 후 한미동맹을 맺어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구는 주춧돌을 놓았다는 데 대해선 누구도 이견을 달기 어렵다. 박정희,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들이 뜻을 모았듯이 민주당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기념관 건립에 뜻을 보탠다면 국민이 민주당을 보는 시선이 달라질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

 

 

07.05 원로배우 신영균 “이승만기념관에 서울 땅 4000평 기부”

▲신영균 한주홀딩스코리아 명예회장이 지난 5월 조선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빨간 마후라’ ’연산군’ ‘미워도 다시 한번’ 등에 출연하며 한국 영화의 '살아 있는 역사'로 불리는 신 회장은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에 서울 땅 4000평을 기부한다고 밝혔다./장련성 기자

 

한국 영화의 살아있는 역사인 원로배우 신영균(95)이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에 서울 땅 4000평(약 1만3223㎡)을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신영균 한주홀딩스코리아 명예회장은 5일 본지 통화에서 “제가 가진 땅 중 이 대통령이 낚시를 즐기던 한강변 고덕동 땅 4000평이 있다”며 “지난달 28일 이 대통령 기념관 건립 추진위 발족식에서 이 땅을 모두 기증하겠다고 밝혔다”고 했다.

 

신 회장 고향은 황해도 평산으로 이 대통령과 동향이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위원장인 추진위엔 신 회장도 위원으로 위촉돼 참여하고 있다. 신 회장은 “위원 위촉 연락이 왔을 때 제 고향도 평산이고, 건국의 아버지인 이 대통령을 존경해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했다.

 

▲28일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이승만대통령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발족식에서 참석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이인수 박사 배우자인 조혜자 여사, 인보길 뉴데일리 회장, 안병훈 기파랑 사장, 신영균 한주홀딩스코리아 명예회장, 김황식 호암재단 이사장(추진위원장), 이영일 대한민국역사와미래 고문, 김길자 대한민국사랑회 회장,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 한화갑 한반도평화재단 총재, 이윤생 오성회계법인 대표, 김군기 영남대 교수, 김석규 코리아글로브 상임이사, 황성욱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 한용외 인클로버재단 이사장, 김현철 김영삼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 김홍업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신철식 우호문화재단 이사장, 복거일 소설가, 주대환 죽산조봉암기념사업회 부회장, 정용상 동국대 명예교수, 조태열 전 주유엔대사, 조보현 배재학당 이사장, 이진만 변호사./이승만대통령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제공

 

신 회장은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기념관이 아직도 하나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세웠을 뿐 아니라 6·25전쟁 때 미국을 참전시켜 나라를 지켜냈다”고 했다. “이 대통령이 없었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었다”고 강조한 신 회장은 “늦었지만 뜻깊은 일이 제대로 추진되는 것 같아 다행스럽고, 내가 참여할 수 있다는 것도 자랑스럽다”고 했다.

 

서울대 치의학과를 나와 치과의사로 일하다가 1960년 조긍하 감독의 영화 ‘과부’로 데뷔한 신 회장은 이후 3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1960~70년대 한국 영화는 그를 빼놓으면 설명하기 곤란하다. ‘연산군’(1961) ‘열녀문’(1962) ‘빨간 마후라’(1964) ‘미워도 다시 한번’ 시리즈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신 회장은 제15·16대 국회의원을 지낸 뒤 나눔의 삶을 실천하고 있다. 2010년 사재 500억원을 문화예술계에 기부하며 ‘신영균 예술문화재단’(이사장 안성기)을 설립했다. 2013년엔 모교 서울대에 100억원 상당 제주도 토지를 기부하며 ‘신영균·서울대 발전기금’을 설립했다. 2016년엔 재단법인 ‘통일과 나눔’에 10억원, 지난해엔 모교인 서울대 치대에 10억원을 기부했다.

 

신 회장은 “윤석열 대통령의 결단으로 기념관 사업이 추진되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럽고 뜻깊은 일”이라며 “뒤늦게나마 역사 바로잡기가 순조롭게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고 많은 국민이 동참하길 염원한다”고 했다. 신 회장이 기부 의사를 밝힌 땅은 현재 그린벨트로 정부가 기념관 등 건립을 결정한다면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 회장 측은 땅을 현물로 기부한다는 방침이다.

조선일보 원선우 기자

 

07.29 대한민국을 만든 이승만 대통령의 두 말뚝

미국 대통령보다 먼저 세계정세 확실히 읽은 亡命客
자본주의·자유주의 터 잡고 한미동맹으로 번영 길 닦아

6·25전쟁 정전(停戰) 70주년을 기념하는 뜻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하는 기본 조건인 자유(自由)를 지켜낸 기적을 기리는 것이다. 이 싸움에서 100만 명이 넘는 국민이 죽거나 다쳤다. 김일성 군대 22만 명은 스탈린이 준 탱크와 대포로 무장했다. 마오쩌둥은 중국 내전(內戰)에서 공산군과 한편이 돼 싸운 조선 출신을 딸려 보냈다. 당시 국군 병력은 9만8000명. 주말 외출을 나갔다가 긴급 파견된 주일(駐日) 미군은 소수에 불과했다. UN군은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

 

1950년 8월 4일 국군과 미군은 낙동강 남쪽으로 후퇴했다. 백선엽 장군은 다부동 전투 선두에 서서 낙동강 북부 방어선을 지켰다. 미국과 유럽 신문은 ‘부산은 한국의 됭케르크가 될 것인가’라고 보도했다. 됭케르크는 1940년 5월 히틀러 군대에 포위된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영국 본토로 탈출했던 프랑스 항구다. 영국군 34만은 탈출했고 프랑스군 4만은 포로가 됐다. 국군과 미군 포함, UN군은 인천을 ‘한국의 노르망디’로 만드는 대반격을 펼쳐 서울을 수복하고 김일성 군대를 38선 이북으로 밀어냈다.

 

마오쩌둥이 이때 중공군을 대규모로 투입하지 않았다면 ‘분단(分斷) 70년’이란 단어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중국 군사과학원의 ‘중국군 한국전쟁사’는 중국군 전투 손실 36만4000명, 비전투원 손실 2만500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투입 병력은 그 몇 배에 달했을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가 6·25의 시작·전개·종결 과정을 모르는 전후(戰後) 출생이어서 UN군 참전 용사와 정전을 기념하는 것은 뜻이 깊다.

 

정전 70주년의 또 하나 의의(意義)는 그 후 대한민국과 북한이 앞으로 걸어갈 경로(經路)가 사실상 정해졌기 때문이다. 한국과 북한은 1945년 세계 민족 독립 물결 속에서 쌍둥이로 태어났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도 운명이 다르듯 남과 북은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사주(四柱) 때문이 아니다. 수많은 선택의 결과다. 1인당 소득, 수출, 수입, 발전량 경제지표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분단 당시 북한이 공업 지대를 차지하고 대한민국은 방직 공장 몇 개뿐이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첫 선택이 차이를 만들었다. 미국과 소련은 2차 대전에서 연합국으로 함께 싸웠다. 두 나라가 43년간 이어질 냉전(冷戰)을 시작하리라고 예상한 독립국가 지도자는 세계에 두 사람밖에 없었다. 세계 공산 혁명을 기획하던 소련 스탈린과 스탈린의 속을 들여다본 영국 총리 처칠이다. 1945년 3월 처칠의 ‘철의 장막(iron curtain)’ 연설은 그래서 역사에 남았다.

 

루스벨트·트루먼 등 미국 대통령들도 긴가민가하면서 소련 심기(心氣)를 거슬리지 않으려고 신경을 썼다. 이 상황에서 망명객으로 30년 동안 세계를 떠돌던 이승만은 세계 정세에 대한 확실한 전망(展望) 아래 대한민국 둥지를 서방(西方) 자본주의 자유 진영에 틀었다.

 

이승만의 선택에 대한 좌파와 중간파의 비방(誹謗)과 중상(中傷)은 당시는 물론이고 70년간 계속됐다. 좌파는 의도를 갖고 있어서, 중간파는 세계 정세에 무지(無知)해서다. 6·25는 이승만이 읽은 대로 세계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자유주의와 전체주의 간 대결장이란 사실을 증명했다.

 

이승만은 이 연장선상에서 대한민국을 북한·소련·중공의 위협으로부터 지키고 나라를 개방(開放)과 번영으로 이끌 두 번째 선택을 했다. 1953년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이승만이 박은 두 말뚝을 벗어나지 않고 지도자와 국민이 합심(合心)해 만든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북한 노동당 당원은 특수 신분(身分)이다. 인구의 10%가량이다. 이들은 아침 7시 반이면 출근해 사무실에 걸린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사진을 향해 절을 하고 혹시 먼지가 묻었나 깨끗이 닦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매일 ‘생활 총화’, 매월 ‘월간 총화’ 시간을 갖고 당 방침에 어긋난 생활을 하지 않았는지 반성한다. 8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 국가안전보위부원과 수십만 명에 달하는 그 정보요원들이 그들을 감시한다. 교회도 사찰도 없다. 민노총도 전교조도 없다. 정부 공격 신문도 없다. 소설다운 소설, 시다운 시를 쓰는 작가도 없다.

 

이승만 대통령이 박은 두 말뚝은 ‘국가가 곧 감옥’인 이런 생지옥으로부터 5100만 한국 국민을 지켜온 기둥이다. 정전 70주년 기념일은 이런 ‘당연한 일’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한번 떠올려 보는 날이다.

조선일보 강천석 고문

 

 

08.04 '이승만 지우기'로 생긴 역사의 공백을 채우고 싶었다

이승만 소재 대하소설 『물로 씌어진 이름』 펴낸 복거일

체감 온도가 섭씨 40도에 육박할 정도로 폭염이 끓던 지난 2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우남(雩南) 이승만(1875~1965)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 합장 묘역에 백발이 성성한 노신사가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3kg(총 2700여쪽)이 넘는 소설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정중하게 제물처럼 다섯권의 책을 묘소에 올리더니 잠시 고개를 숙이고 묵상했다. 볼에는 금세 물방울이 맺혔다.

 

 

▲소설가 복거일 씨가 대하소설 『물로 씌어진 이름』을 들고 지난 2일 국립서울현충원의 이승만 전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 합장 묘역을 찾아 참배했다. 장진영 기자

 

소설가 복거일(77). 2016년부터 7년에 걸쳐 '월간중앙'에 이승만을 소재로 연재해온 대하 전기소설을 최근 『물로 씌어진 이름』(백년동안)으로 발간했다. 지난 2015년 4월 벚꽃 흩날리던 묘소를 참배하며 이승만과 그의 시대를 조명하는 소설을 쓰겠다던 약속을 8년 만에 실천한 셈이다. 『물로 씌어진 이름』은 2012년 암 선고 이후 항암 치료를 마다하며 쓴 작품이다. '광복'을 큰 주제로 이번에 출간한 1부 다섯 권에 이어 2부(건국)와 3부(호국)를 합쳐 다섯 권으로 쓰는 작업도 시작했다. 그는 세상을 향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커지는 암세포도 꺾지 못한 마음속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항암 치료 마다하며 7년간 집필

내면풍경보다 시대 묘사에 집중

"한·일 수교 실기, 3선 개헌 오점
그래도 공이 과를 압도하는 인물

이승만의 삶은 역사를 보는 창
우남 외면하면 정체성 망각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에서 시작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미드웨이 해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히틀러 정권의 아우슈비츠 대학살, 스페인 내전,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 소련의 대미 공작, 얄타회담 등 세계사를 종횡으로 넘나들면서 '급진적 혁명가' 이승만의 고뇌와 선택을 그려냈다. '역사를 보는 창'으로 표현된 이승만의 전기소설이라지만, 역사 다큐멘터리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복 작가는 "없는 것을 보태지 않아서 소설답지 않은 소설을 썼다"며 겸손해했다.

 ▲소설가 복거일 씨가 7년만에 출간한 대하전기소설 '물로 씌어진 이름'. [사진 백년동안]

너무 쉽게 잊힌 업적을 비유한 제목

-출간까지 장장 7년 세월이 걸렸다.

 

"2012년 봄에 간암 판정을 받으니 세상이 달라 보였다. 이미 상당히 진행돼 치료가 쉽지 않을 것 같아 항암 치료 없이 그냥 글을 쓰기로 했다. 병 때문인지 나이 때문인지 힘이 달린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오히려 집중이 더 잘 됐다. 허허."

 

-묘소에 책을 바치며 마음속으로 건넨 말이 있을 것 같다.
"시대와 세상을 앞서간 위대한 지식인의 내면 풍경을 그리는 데는 실패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남은 수수께끼로 남은 위인이다. 다만 이전에 알던 것보다 업적이 훨씬 위대하다는 사실을 글을 쓰면서 깨달았다는 고백의 말씀을 드렸다."

 

-현대사 인물 중에 이승만을 유독 주목한 계기는.
"원로 언론인 이도형(1933~2020, 전 한국논단 대표) 선생께서 권했는데 처음엔 사양했다. 사학자들은 가볍게 여기고 문학가들은 주류에서 벗어난다고 여기는 것이 역사소설이다. 쓰기는 힘들고 문학적 보답은 적다는 이유에서 내키지 않았다. 그러자 정색하시며 '지금 이 나라에서 이승만 소설 쓸 사람이 복 선생 말고 누가 또 있소'라며 자극을 주셨다."

 

제1권 제1장 첫 부분과 저자가 쓴 작품 해제('역사를 보는 창')를 보면 책 제목을 『물로 씌어진 이름』으로 지은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영국 시인 존 키츠의 자작 묘비명에 '여기 누워 있다/그의 이름이 물로 씌어진 사람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경구('사람들의 나쁜 행태는 청동에 새겨져 남는다. 그들의 덕행을 우리는 물로 쓴다')에 나오듯 이 대통령의 업적은 물로 쓴 것처럼 쉽게 잊히고, 일부 허물만 지나치게 부각된 현실을 책 제목으로 꼬집은 것이다.

 

'이화장 문서'가 고증에 큰 도움

-역사 고증에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우남은 사소한 영수증까지 기록을 많이 남겼는데, 전집으로 출간된 ‘이화장 문서’가 큰 도움이 됐다. 10만 장이 넘는 이화장 문서 분류와 고증은 얼마 전에 별세한 유영익 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가 주도했다. 과격한 주장을 하면 추앙받는 나라에서 명분론보다 현실론을 중시한 유 교수 덕분에 우남을 바라보는 시각을 정립할 수 있었다. 1945년 우남이 얄타회담 밀약(미국과 영국이 조선을 궁극적으로 러시아에 넘기겠다는 내용)을 폭로해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았는데, 이번에 이화장 문서를 뒤지다 우남에게 제보했던 실존 인물을 확인했다. 당초 추정된 에밀 구베로라는 인물이 미국의 실존 언론인 에밀 헨리 고브로(1891~1956)란 사실을 최초로 규명했다."

 

 ▲1945년 2월 흑해 연안의 소련 휴양도시 얄타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 종지부를 찍은 역사적인 얄타회담이 열렸다.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 프랭클린 루스만민공동회벨트 미국 대통령,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수상. [중앙포토]

 

-이 대통령의 어떤 면을 집중 조명하려 했나.

"우남은 구한말 만민공동회 시절(1897~1899)부터 1960년 물러날 때까지 역사의 중심인물이었다. 그 사실을 외면하면 우리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이승만이라는 인물을 역사에서 지우려 애쓰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역사의 공백을 조금이라도 채우겠다는 생각으로 글을 썼다. 그분을 홀대하는 것은 우리의 문제이고 부끄러움이다. 그에 관한 사실이 더 많이 알려지면 공정한 평가로 이어질 것이라 기대한다."


-1부에서 가장 애정이 가는 대목은.

"얄타회담에 얽힌 이야기들이 핵심이다. 현대사의 가장 큰 수수께끼는 ‘나치 독일에 패배할 뻔했던 러시아가 어떻게 2차대전 뒤 유라시아의 태반을 차지했나’하는 것이다. 그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이 가장 보람이었다."

 

-이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1954년의 '사사오입' 3선 개헌을 빼면 뚜렷한 잘못이 별로 안 보인다. 4·19혁명이 일어나자 변명 없이 본인이 모두 책임지고 물러났다. 얄타회담에서 비밀 협약이 있었다고 폭로해 당시 미국 국무부의 부인하는 성명을 끌어낸 일이 가장 큰 업적이고 동시에 가장 위험한 일이었다. 그렇게 중대한 판단의 근거를 밝혀내는 것이 이번 작품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한·일관계 정상화 늦어 아쉬움도

-5권 말미의 '해제'에서 우남의 실기와 허물도 지적했던데.
"우남이 1951년 한·일 국교 정상화 시작은 잘했다. 하지만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한·일 관계는 1950년대 중반에 정상화됐을 것이고, 박정희 정부 때인 1965년의 한·일 협정보다 한국에 유리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아쉽게도 실기했다. 제헌의회 선거에 이어 1950년 5월 2대 총선도 민주적으로 치르면서 건국이 사실상 완성됐지만, 6·25전쟁으로 의미가 퇴색했다. 1953년 가을 무렵 우남이 생전에 이루고자 했던 것들을 다 이뤘는데, 세 번째 대통령 임기를 욕심내는 바람에 자신이 주도해 세운 대한민국의 기초와 스스로의 업적을 허물었으니 통탄할 일이다."

 

 

▲1954년 7월 28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하는 모습. 윤석열 대통령은 한미 동맹 70주년을 계기로 미국을 국빈 방문해 지난 4월 27일 같은 자리에서 연설했다. [중앙포토, 연합뉴스]

 

-독립·건국·호국에 성공했으나 분단이란 숙제도 남겼다.

"자유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정권은 타협이 불가능하다. 지금 우리는 북한만이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해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하든 공산주의자들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침투하려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이승만 라인'으로 독도를 사수한 이 대통령이 일각에서는 친일파라고 매도당한다.

"친일파 몰이는 근거가 없다. 의도적으로 유포된 결과다. 1945년 해방 직후 한반도에 상륙할 때부터 미군정청은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경찰 조직을 거의 그대로 활용했다. 1948년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는 미군정청이 물려준 경찰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 대통령을 헐뜯는 세력은 그런 상황을 친일파 득세로 몰아 비난해왔다."

 

이승만기념관, 자녀 교육의 장 됐으면

-이승만의 공훈을 압축하면.
"대한제국이 러일 전쟁에 휘말려 풍전등화이던 1904년 11월 이승만은 미국의 도움을 구하라는 민영환·한규설의 지시로 제물포(인천)에서 기선을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당시엔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수십 년 각고의 노력 끝에 1953년 대통령으로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고, 이듬해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연설했다. 1904년에 받는 사명을 50년 만에 완수하면서 그의 삶은 정점을 찍었다."

 

-이승만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김황식 전 총리)가 활동을 시작했다.
"그 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다. 많은 시민이, 특히 조부모가 손자녀의 손을 잡고 함께 가서 대한민국이 어떻게 세워졌는지 보고 배우는 공간으로 만들기 바란다. 미국의 조지 워싱턴 기념관과 링컨 기념관처럼 억지로 주입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느껴서 스며들도록 하면 좋겠다."

 

 ▲지난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을 맞아 경북 칠곡군 '다부동 전적 기념관' 마당에 세워진 이승만 전 대통령과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 동상. 북한의 남침을 격퇴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지켰다. [연합뉴스]

 

-앞으로 계획은.
"1부를 쓰는 데 7년이 걸렸고 다시 2, 3부를 합쳐 7년을 예상한다. 그때까지 살 자신은 없지만… (웃음). 2017년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희곡 『박정희의 길』을 썼다.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근근이 공연했는데, 이제 사회 분위기가 바뀌었으니 좀 나은 공연을 시도해볼 생각이다."


복거일=1946년 충남 아산 출생. 부친은 남로당 당원이었다. 대전상고,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한국과학연구원 부설 선박연구소 연구개발실장을 역임했다. 문화미래포럼 대표로서 우파 논객이자 사회평론가로 활동해오고 있다. 작품으로는 데뷔작 『비명을 찾아서』 외에 『역사 속의 나그네』『파란 달 아래』『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한국의 자유주의』『한반도에 드리운 중국의 그림자』『프란체스카』 등이 있다.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월간조선 08월 호

위대한 만남, 李承晩·트루먼 이야기

자유세계를 지킨 韓國戰의 두 최고 사령관은 69년 만에 多富洞에서 동상으로 다시 만났다. 한국인은 비로소 背恩忘德을 면했다!

 
 

참혹한 6·25전쟁 이후 황폐화된 한국 사회에선 《정감록》의 ‘해도진인설(海島眞人說)’이 퍼졌다. ‘바다섬에서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나타난 진인(眞人)’이 ‘트루먼’이란 것이었다. ‘Truman’을 ‘Trueman’으로 오해한 것인데 기댈 곳이 없는 민초들 사이에선 ‘해도’, 즉 바다섬도 미국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인 줄 오해하고 하늘을 가르는 전투기를 ‘호주댁’이 부탁하여 보내준 ‘호주기’라고 부르던 시절이다. 이런 낭설(浪說)에는 그러나 사실적 근거가 작은 조각처럼 숨어 있는 경우가 있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이승만(李承晩) 초대(初代) 대통령과 함께 남북한에 걸쳐 사는 대한민국 8000만 국민의 생존과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그는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原爆) 투하를 결단, 한민족(韓民族)을 해방시켰고 2년 뒤엔 소련의 팽창에 대응한 트루먼 독트린 선포로 반공노선을 분명히 했다. 1948년에는 대한민국 건국에 유엔이 산파 역할을 하도록 했다. 그 2년 뒤 북한군 남침 때는 즉석에서 미군 파병을 결단했으며, 그해 가을 중공군의 남침으로 유엔군이 총퇴각할 때 한국 사수(死守) 정책을 고수했고, 미국의 엄청난 경제력을 총동원한 본격적인 대소(對蘇) 봉쇄 작전으로 그 40년 뒤 소련제국이 무너지는 길을 열었다. 적어도 세 번 한국인을 살린 셈인데 한국에선 푸대접을 받는다. 트루먼이 맥아더의 원폭 투하 요구를 거절, 북진(北進) 통일이 좌절되었다고 오해하는 한국인들은 맥아더를 치켜세우기 위하여 트루먼을 깎아내린다. 이런 풍조의 반영이 인천 자유공원에 당당히 서 있는 맥아더 동상과 임진각 한구석에 초라하게 버려진 트루먼 동상일 것이다.


자수성가한 기업인의 꿈

▲이승만·트루먼 대통령 동상 제막식을 알리는 플래카드. 민간 주도로 만든 동상이 다부동에 들어서는 데에는 경북도와 칠곡군의 협조가 있었다.

 

냉전(冷戰)에서 자유세계가 이기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하여 20세기 3대 전쟁 중 하나로 꼽히는 한국전쟁의 결전장 경북 칠곡군 다부동(多富洞)에, 휴전 70주년을 맞은 올해 이 전쟁의 두 최고사령관 이승만·트루먼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져 7월 27일 제막식을 가진다.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등 한국 제1의 기념물 조각가로 꼽히는 김영원(金永元) 선생이 빚은 높이 420cm 대작이다. 민간이 주도하여 만든 동상을 국가(경북도, 칠곡군)가 기증받아 세웠다는 점에서 순수한, 그래서 모범적인 기념물 건립 사례로 남을 것이다.

두 동상을 만든 ‘이승만·트루먼·박정희동상건립추진모임(동건추)’은 앨트웰민초(民草)장학회 설립자 김박(金博) 앨트웰텍 회장의 발의(發議)로 2016년 5월 2일 발족한 이후 오늘의 번영과 자유를 있게 한 세 위인의 동상을 세우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해 왔다. 민간인의 정성을 모으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김박 회장은 소년가장 출신의 자수성가한 기업인인데 “내가 먹고살게 된 것은 이 세 분 덕분이다”면서 감사의 표시를 하려고 했다. 2017년 11월 14일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서울 상암동에 있는 박정희대통령기념관에 박정희 동상을 기증, 세우려 했으나 반대 세력에 휘둘린 당국의 비협조로 아직까지 성사되지 못하고 있다(그해로 예정되었던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도 취소되었다).

동건추는, 2019년부터 이철우(李喆雨) 경북도지사와 접촉, 이승만·트루먼 대통령 동상을 다부동 전적지에 세우기로 합의, 주민 설득과 행정적 절차를 진행해 왔다. 한국 현대사를 긍정하고 한미동맹을 강화하는 윤석열(尹錫悅) 정부가 들어서고, 마침 휴전 및 한미동맹 70주년을 맞는 2023년 7월 27일에 두 영웅의 동상을 적지(適地)에 세우게 된 것은 역사적 의미를 더욱 깊게 한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듯이 다부동에 선 두 동상도 투쟁의 결과물이다.

트루먼 푸대접

▲2009년 필자가 찍은 트루먼 대통령의 동상 사진. 지금은 평화공원 기념비 광장으로 옮겨졌다.

  

10여 년 전 필자는 임진각의 평화공원을 찾아가 관리인에게 “여기 트루먼 동상이 있다는데 어디죠?” 라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그런 게 있다고요?” 였다. 작년 이곳을 찾은 이하원 《조선일보》 논설위원도 같은 경험을 했다고 한다.

〈임진각 주변 어느 곳에도 트루먼 동상 안내판이 없었다. 10여 분간 여기저기를 찾아 헤매다가 간신히 동상을 발견했다. 변색이 진행되고 칠이 벗겨지고 왕거미들이 집을 짓고 있었다. 〉

이하원 논설위원은,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가, 〈해리 S. 트루먼-평범한 인간의 비범한 리더십〉에서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한국인들의 운명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평하면서 트루먼을 “대한민국의 대부(代父)”라고 불렀다는 점을 소개하면서 동상이 거미들의 놀이터가 되게 한 것을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고 개탄했었다.

 

미국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에 있는 트루먼 도서관 관장을 역임한 마이클 디바인 씨는 2015년 8월 4일 《코리아 타임스》에 “트루먼 기념물을 세울 때이다”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다. 그는 1945년과 1950년에 트루먼이 내린 결단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번영하는 한국은 존재할 수가 없는데 맥아더 동상만 있고 트루먼 동상은 없는 게 아쉽다고 했다. “트루먼과 그 행정부의 업적을 무시하는 것은 한국인 그 자신들이 스스로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박탈하는 것이다”고 칼럼을 마무리했다.

이런 점에서 다부동에 민관(民官) 협력으로 세워진 이승만·트루먼 동상은 한국인들이 배은망덕(背恩忘德)하다는 비판을 면하게 해줄 것이다.


위대한 인간

▲이승만 대통령 동상 비문에는 6·25 전쟁 발발 직후 “남녀노소가 몽둥이와 돌멩이를 들고서라도 싸울 것”이라고 한 이 대통령의 말이 새겨져 있다.

 

이승만·트루먼은 위대한 지도자이기 전에 위대한 인간이었다. 20세기 인류에 대한 최대 도전이었던 국제 공산주의를 무너뜨리는 데 손잡았던 동지였으며, 기독교와 반공(反共)자유민주주의 신념을 공유한 불굴의 투사였지만 그 바탕은 소박하고 겸손한 인격체였다.

1875년에 출생한 이승만은 1884년에 태어난 해리 S. 트루먼보다 아홉 살이 많았고 1950년 한국전으로 연결되기 전까지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트루먼은 고졸이고 이승만은 박사 출신). 이승만은 ‘최초’와 인연이 많다. 대한민국과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 최초의 박사, 최초의 일간신문(《매일신문》) 대표, 최초의 공산주의 비판자, 미국 대통령(시어도어 루스벨트)을 만난 최초의 한국인, 미 의회 최초 연설, 최초의 본격적 정치평론서(《독립정신》) 저자, 최초의 국제적 베스트셀러 작가(《Japan Inside Out》) 등등. 그는 개화운동가, 독립운동가, 교육자, 건국 지도자, 전쟁 지도자, 근대화 혁명가, 시인[漢詩], 최고의 명필(名筆), 그리고 십자가를 진 한 어린양이었다. 개화, 독립, 건국, 호국, 근대화의 주역이었던 그가 거대한 90년의 생애(生涯)를 마감한 곳은 조국이 아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0년 6월 25일 북한군 남침 보고를 받은 직후 존 J. 무초 미국 대사를 불러 한 말 “남녀노소가 몽둥이와 돌멩이를 들고서라도 싸울 것이다”는 국제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총력전(總力戰) 선포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그해 7월 19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전쟁은 남과 북의 싸움이 아니라 소수의 공산당 대(對) 한민족(韓民族) 전체의 대결’이라고 한 것이나, 김일성 세력을 ‘공산파쇼 집단(Comminazis)’이라 조롱하고, 유엔이 국경을 뛰어넘어 세계시민 정신으로 세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싸우고 있다고 정의(定義)한 것은 남침을 세계사적 차원의 사상전쟁으로 보았다는 이야기이다.

 

"벅은 여기서 멈춘다"

▲트루먼 대통령은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를 자신의 모토로 삼았다.

 

트루먼 대통령 또한 한국전에 대한 관점이 이승만과 일치하였다. 미국 미주리주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를 지원했으나 시력이 나빠 포기한 뒤로 대학에 가지 않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던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에서 포병 대위로 싸웠다. 지방 판사로 뽑히는 등 지역 정치의 바닥에서 출발, 상원의원이 된 뒤엔 제2차 세계대전에 따른 군수(軍需) 사업의 효율성을 점검한 ‘트루먼 위원회’를 이끌어 명성을 얻었다. 1944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고, 이듬해 4월 루스벨트 급서(急逝)로 대통령직을 인수했다.

트루먼은 솔직 담백한 성격 그대로 결정적 시기에 신속한 결단으로 전후(戰後) 세계질서를 만들어갔다. 그가 결정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의 타이밍은 한반도의 운명을 갈랐다. 일찍 투하했더라면 소련의 참전을 막아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고 늦게 떨어뜨렸다면 소련군은 부산까지 내려와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1945년 12월 이승만은 전후(戰後) 세계 정치 지도자로선 처음으로 공산당을 문명 파괴 세력으로 규정, 결별을 선언하는데 트루먼 또한 공산주의를 만악(萬惡)의 근원으로 본 사람이었다(두 사람은 이상주의자 우드로 윌슨 숭배자였다는 공통점도 있다). 1947년 소련의 공산주의 확산 전략에 정면 대응을 선포한(트루먼 독트린) 그는 소련의 위협에 대비한 서유럽 부흥계획인 마셜 플랜, 베를린 봉쇄에 대한 대규모 공수작전, NATO 출범 등을 밀어붙이는데 이는 대소(對蘇) 봉쇄작전과 냉전(冷戰)의 시작이었다.

1948년, 트루먼 대통령은 유엔이 한국과 이스라엘 건국에 산파 역할을 하도록 했다. 그해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트루먼은 미국 역사상 가장 극적인 역전승(逆轉勝)으로 재선(再選)되었다(그의 부인조차 낙선을 예상했고 《시카고 트리뷴》은 개표가 시작되자마자 ‘트루먼이 낙선했다’는 기사를 찍어 희대의 오보를 했다). 이 선거는 한국인의 운명에도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집무실 책상 위에 명패 대신 놓아둔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남침에 대한 전광석화(電光石火) 같은 대응을 예고했다. 결단의 사나이 트루먼이 북한군이 남침한 그날 백악관의 주인으로 있도록 한 미국인들의 선택이 한국과 자유세계를 살렸다.


“개자식과 같은 마적단의 습격 사건”

▲트루먼 대통령 동상 비문에는 6·25 발발 소식을 듣고 트루먼 대통령이 했던 “딘,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개자식들을 막아야 합니다(Dean, we've got to stop those sons of bitches no matter what)”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트루먼 대통령은 6월 25일 딘 애치슨 국무장관의 전황(戰況) 보고를 받자 “딘,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개자식들을 막아야 합니다(Dean, we've got to stop those sons of bitches no matter what)”고 말하고 미군 파병을 결단한다.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하여” 연인원 약 180만 명의 군인들을 보내 약 15만 명이 죽고 다쳤다. 이는 세계 최대 강국이 아무런 영토적 이해관계가 없는 작은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자국(自國)의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투입한,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당시 트루먼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클라크 클리포드(나중에 국방장관 역임)는 회고록에서 “나는 제국을 보존한다는 목표가 아니라 이상(理想)을 지키기 위해 지구의 반 바퀴나 떨어진 곳의 전쟁에 참여할 나라가 (미국 말고는) 지구상에 달리 없다고 생각했다”고 썼다.

트루먼은 나중에 한국전 참전 결단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결정보다 더 어려웠다고 고백했다. 그는 1950년 6월 29일 기자회견에서 유엔군 기치하의 파병이 갖는 합법성과 정당성을 정확하게 규정했다.

“한국은 유엔의 도움으로 세워졌습니다. 유엔 회원국들이 공인(公認)한 정부인데 마적단으로부터 불법적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유엔 회원국들은 한국에 대한 마적단 습격 사건을 진압하기 위하여 한국을 구원하기로 하였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김일성의 남침을 “개자식과 같은 마적단의 습격 사건”으로 부른 셈이다. 자존심이 강한 이승만·트루먼은 김일성을 스탈린의 꼭두각시로 생각하였으므로 ‘김일성’이란 이름을 거의 입에 담지 않았다. 이승만은 김일성을 규탄해야 할 대목에선 스탈린을 비판했다. “나는 스탈린을 상대하지 너 같은 인간은 무시한다”는 경멸감이 느껴진다. 링컨도 남북전쟁 때 ‘전쟁’이란 말을 거의 쓰지 않았고 ‘반란’이라고 했다. 이승만, 트루먼, 링컨, 레이건, 닉슨, 박정희 같은 위대한 지도자들은 이념적이고 용어 선택이 정확하다.

북한노동당 정권을 ‘마적단’이라고 부른 또 다른 이로 김정일의 명령으로 납치되었다가 살아 돌아온 신상옥(申相玉) 감독도 있다. 1989년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김정일이 주최한 파티에서 간부들이 남한 유행가도 부른다는데 어떤 분위기였습니까”라고 물었다. 신 감독은 “딱 마적단이에요. 북한이란 마을을 점령, 분탕질하는 마적단”이라 했었고 이게 가장 정확한 규정임을 뒤에 알게 되었다.

 
 

 迂廻전략

1950년 8월에 전개된 다부동 전투는 한미군(韓美軍)이 최초의 연합작전으로 북한군 주력을 저지, 부산 교두보를 지켜냄으로써 인천상륙작전과 북진의 시간을 번 세계사적 결전이었고 한미동맹을 예약한 승리였다. 한미군을 주력으로 한 유엔군의 항전(抗戰)으로 대만이 살았고 일본이 경제 부흥, 서독이 재무장, NATO가 군사동맹체로 강화되었으며, 미국은 군사비를 네 배로 늘려 본격적인 대소(對蘇)봉쇄 정책에 나섰고, 한국은 ‘자유의 방파제’ 덕분에 번영의 길을 달려 그 40년 뒤 소련 및 동구 공산주의체제가 무너졌다. 1989년 동구 공산권 붕괴의 한 촉매제는 88서울올림픽의 ‘벽을 넘어서’ 정신이었다. 이승만·트루먼은 거대한 우회(迂廻)전략으로 소련제국을 무너뜨린 대전략가였다.

이승만과 트루먼은 한니발의 칸나에식 우회작전을 폈다. 스탈린의 소련이 김일성을 하수인으로 삼아 자유세계 전체에 대한 도전장을 던졌다는 인식하에서, 국제연합군을 조직하여 정면대응, 중앙돌파를 저지한 뒤 평화의 시간을 벌고 악의 제국을 배후에서 무너뜨리는 우회로를 선택했던 것이다. 한국전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이 무너지자 중공군이 개입하고 이를 소련 공군이 지원, 판이 커졌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으로 무승부가 된 것 같았으나 이승만·트루먼과 뒤를 이은 두 나라 지도자들은 자유와 돈을 무기로 삼아 평화공세를 폈다.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이, 로마군의 중앙군을 묶어놓고 기병을 동원한 측면 우회 포위 공격으로 로마군을 전멸시킨 칸나에 전투의 개념을 범(汎)지구적 규모로 확대시킨 대전략이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 진영은, 공산군 남침을 저지하고 소련과의 핵전쟁을 피하면서 자유세계가 가진 우월한 힘을 총동원, 소련 공산 제국의 경제적 기반을 흔들어 악의 제국이 핵폭탄을 껴안고 총 한 방 쏘지 못하고 무너지도록 한 것이다. 냉전(冷戰) 승리의 기초를 만든 이승만·트루먼과 마무리를 잘한 레이건 및 부시 대통령이야말로 냉전 시대의 최고 전략가였다. 중국과 소련을 떼어내어 세계 판도를 바꾼 닉슨 대통령은 부통령 시절 한국을 방문, 이승만을 만난 뒤 이 노인의 전략 감각에 감탄했다(회고록).

〈나는 한국인의 용기와 인내심, 그리고 이승만의 힘과 지혜에 깊은 감동을 받고 떠났다. 나는 이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를 상대할 때는 ‘예측 불가능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통찰력 있는 충고를 한 데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그 후 더 많이 여행하고 더 많이 배움에 따라서 그 노인의 현명함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


“이승만은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마크 클라크 장군.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에 서명한 유엔군 사령관은 마크 W. 클라크 대장이었다. 그는 전역(轉役)한 뒤 《다뉴브에서 압록강까지》라는 회고록을 써 자신이 상대하였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생생한 관찰기를 남겼다. 유엔군, 특히 미국의 도움으로 전쟁을 치르면서도 자존심을 세우면서 고집스럽게 국익(國益)을 추구하는 노(老)투사의 모습을, 존경심을 깔고 객관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는 휴전을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 때문에 많은 곤욕을 치렀지만 기술(記述)은 결코 적대적이지 않다. 이승만 대통령의 애국심과 교양, 그리고 용기에 감동한 사람처럼 썼다.

〈한국전을 통하여 이승만은 아시아에서 장제스(蔣介石), 네루와 버금가는 위상(位相)을 확보하였다. 그는 아시아의 반공국가 및 비(非)공산국가군(群)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공산주의자들과의 투쟁을 통하여서뿐 아니라 때로는 미국과 맞서기를 서슴지 않는 행동을 한다는 사실을 통하여 그런 지도자가 되었다. 이승만은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그는 아시아인이었다. 그는 강력한 지도자였다. 성장하는 강력한 군대를 갖고 있었다. 그는 반공지도자일 뿐 아니라 반(反)식민지 지도자였다. 많은 아시아 사람에게 이승만은 극동 지역에 존엄과 자존심을 가져다준 인물이었다. 이런 이미지는 그가 동맹 강국들의 의지(意志)에 끌려가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맞서 전쟁을 자신의 뜻대로 이끌고 있다는 점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평판과 자존심으로 그는 다른 아시아 정부를 상대할 때도 정상급(頂上級)보다 낮은 직급자는 만나려 하지 않았다. 〉


한국전의 정치적 負傷者

1950년 11월 중공군의 본격적 개입으로 유엔군이 총퇴각을 시작하고 맥아더 사령관은 미군 철수를 거론하는데 영국마저 한국 포기를 설득할 때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이승만) 편에 섰다. 맥아더에게 “싸우다가 져서 철수하는 건 몰라도 미리 철수는 안 된다”고 못 박았고 애틀리 영국 수상에겐 “미국은 친구가 어려울 때 버리는 나라가 아니다. 미군이 물러나면 우리를 믿고 싸웠던 한국인들이 다 죽는다”고 했다.

그는 휴전협상의 가장 큰 쟁점이었던 반공포로 문제에서도 인도주의적 원칙을 견지, ‘본인 의사에 따른 송환 원칙’을 밀어붙였다. 이 때문에 협상이 지연되어 미군 전사자가 늘었지만 그는 이미 파병 결단 때 ‘자유의 대가는 비쌀 것’이라 예견했었고 그 부담을 안았다. 트루먼은 “우리는 인간들을 넘겨주어 도륙당하게 하는 방식으로 휴전을 사지는 않을 것이다”고 선언해버렸다. 휴전 협상 기간 중 전사한 미군은 약 2만 명이다.

협상이 질질 지연되면서 38도선을 따라 참혹한 고지전(高地戰)이 계속되었고 사상자가 늘어나자 트루먼에 대한 미국 여론의 지지도 떨어지고 공화당의 비판도 거세졌다. 답답한 트루먼은 1952년 1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공산 정권과 상대하는 건 정직한 사람이 마약 조폭 조직 두목과 협상하는 것과 같다. 중국이 휴전을 요구한 이유는 시간을 벌어 일선에 물자를 보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올바른 접근법은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닐까? 열흘간의 시한을 설정, 최후통첩을 하는 것이다. 모스크바에 ‘중국의 해안을 봉쇄할 것이며, 만주의 모든 군사시설을 파괴할 것이고, 방해하면 어떤 항구나 도시도 없애버릴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이를 피하려면 한반도에서 중공군이 철수해야 하고, 러시아는 중국에 대한 전쟁물자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고 통보하는 것이다. “자유세계는 너무 오래 고통을 당했으니 만약 최후통첩에 응하지 않으면 전면전을 하겠다. 이번이 소련 정권이 죽느냐 사느냐를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다”-이렇게 할까?〉


출마 포기

《전쟁 대통령들》이란 책에서 이 일기를 소개한 저자(著者) 마이클 베슐로스는 스트레스를 받은 트루먼의 판타지라고 평했다. 1950년 가을의 중공군 개입은 한국의 북진 통일을 저지했을 뿐 아니라 트루먼과 맥아더의 운명도 바꿔놓았다. 중공군 개입 없이 한반도가 통일되었더라면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선 현직 민주당 대통령 트루먼과 공화당 후보 맥아더의 대결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중공군 개입을 예고하는 수많은 정보를 묵살한 맥아더는 중공군 공세에 밀리자 중국 본토 봉쇄, 만주폭격 등 확전(擴戰)을 요청하면서 한국 포기 카드까지 꺼내 트루먼에게 대들고, 영국의 노동당 정부 또한 확전 반대는 물론 원자폭탄을 쓰지 말라면서 한국을 버리자고 압박했다. 트루먼은 1950년 12월 15일 2차 세계대전 때도 취하지 않았던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특별연설에서 전세(戰勢)가 불리해졌음을 인정하고 미군의 현역 병력을 350만 명까지 두 배 이상 늘리고 전쟁물자 생산도 가속화할 계획이라면서 인플레는 피할 수 없고 “여러분은 세금을 더 내고 공장에서, 광산에서,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할 것이며 문명의 미래는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했다. 국력을 총동원, 다른 방법으로 공산당을 꺾겠다는 전략의 피력이었다. 40년 뒤 국제공산주의가 무너지도록 한 결단이었다.

전선이 고지전으로 교착되자 파병을 결단했을 때 압도적 지지를 보였던 여론도 돌변했다. 1951년 1월엔 지지율이 36%까지 떨어졌고 한국 파병에 대해 잘못했다는 여론이 49%, 잘했다는 여론은 28%였다. 트루먼이 다음 해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아이젠하원와 대결할 경우 59대 28%로 질 것이란 예측도 나왔다.

1952년 3월 29일 트루먼 대통령은 민주당 행사에 나와 불출마 발표를 했다. 그는 “공화당원들은 한국에서 철수하면 인기가 오를 것이라 하고 다른 이들은 원자폭탄을 터트려야 한다고 말한다”면서 “만약 원자폭탄이 투하된다면 큰소리치는 이들이 제일 먼저 방공호로 뛰어갈 것이다”고 했다. 이어서 그는 “나는 오랜 시간 나라를 위하여 효율적으로, 정직하게 봉사해 왔다고 생각하는데 더 이상 후보 지명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 말이 갑자기 나와서 민주당원들은 영문도 모르고 박수를 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트루먼은 맥아더와 함께 한국전의 정치적 부상자(負傷者)가 되었다. 그가 물러날 때 지지율은 22%로 탄핵 직전 사퇴한 닉슨보다도 낮은 역대 최저였다.


트루먼, 퇴임 연설에서 冷戰 승리 예고

냉전 승리 후 트루먼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는 극적으로 높아져 요사이는 역대 45명의 미국 대통령 중 5~9위이다. 1953년 1월 15일 트루먼은 퇴임 직전의 작별 연설에서 승리를 예언했다.

〈역사는 나의 재임 기간에 대해서 냉전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그림자를 드리운 시기라고 기억할 것입니다. 하루도 이런 전면적 투쟁의 영향을 받지 않고 지낸 날이 없었습니다. 그 배후엔 항상 원자폭탄이란 존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나의 재임 기간을 냉전의 시작이라고 본다면, 이 8년간 그 냉전을 이길 수 있는 진로(進路)가 설정되었다는 점을 인정할 것입니다. 〉

왜 미국 정부는 한국전을 냉전 승리의 시작으로 보는가? 미 국방부 장관실 공간사(公刊史)인 《전쟁의 시련(1950~53)[The Test of War, History of the Office of the Secretary of Defense]》은 결론 부분에서 한국전이 세계사의 흐름에 끼친 영향을 이렇게 요약하였다.

〈한국전은 20세기 후반의 세계정세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제2차 세계대전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주장할 만하다. 특히 중공군의 1950년 11월 대공세는, NSC-68(미국 국가안보회의 전략문서)이 건의한 정책과 재무장 방안의 채택을 합리화시켜주었다.

트루먼 행정부는 소련이 북한과 중국의 공격을 사주하였으며 다른 곳에서도 그런 짓을 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미국은 유럽의 NATO 맹방(盟邦)들을 지키는 것을 최고의 우선순위로 두었다. 한국전은, 늘어가는 소련의 핵무기 재고(在庫)에 대응하여 미국이 핵무기 제조와 운반 수단(폭격기, 미사일, 잠수함)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하였다.

평화시에도 외국과 군사동맹(NATO)을 유지한다는 것은 미국 역사상 가장 이례적인 외교 정책이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미국과 대부분의 유럽 회원국조차도 NATO를 서류상의 존재로 인식하였다. 아시아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이 유럽에 대한 소련의 위협을 증폭시켜 NATO 회원국들로 하여금 통합 지휘 체제를 구성하고 더 많은 군사력과 자원을 이 동맹에 제공하도록 만든 것은 일종의 패러독스이다. 〉

 

한국전은 NATO와 다른 나라에 대한 미국의 군사 원조를 세 배나 늘리게 하였다. 1953~54년 미국 방위비(원자력 에너지 및 기타 비국방부 예산 포함)는 연방 예산의 3분의 2를 차지하게 되었고, 병력은 두 배 이상 늘었으며, 한국전에 자극받은 미국인들은 평화시에도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게 뒷받침하였다.

북한군 남침 직전인 1950년 6월 미군 병력은 146만 명이었고, 해외 주둔은 그 20%인 28만1000명이었다. 3년 뒤인 1953년 6월 30일 현재 미군은 355만5000명, 해외 주둔은 27%인 96만3000명으로 늘었다. 독일, 일본, 한국의 주둔 병력이 가장 많았다. 외국에 주둔하는 미군과 관련한 민간인들과 그 가족의 숫자는 130만 명에 달하였다.


美 의회 연설에서 퇴임한 트루먼에게 감사

휴전과 함께 온 축복인 한미동맹은 함께 피 흘린 두 나라의 약속이었다. 동건추는, 다부동 이승만·트루먼 동상에 “맹방의 약속, 이제는 자유통일이다”는 말을 새겼다. 한미동맹은 트루먼의 후임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에 성사되었지만 그 토대를 만든 이는 이승만·트루먼이었다. 1954년 7월 28일, 미국을 방문한 이 대통령은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에서 퇴임한 트루먼 전 대통령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도 여러분처럼 워싱턴이나 제퍼슨이나 링컨에게서 영감(靈感)을 받아왔습니다. 나도 여러분처럼 여러분의 영광스러운 선조들이 전 인류를 위하여 추구했던 자유를 수호하겠다고 스스로 맹세해 온 사람입니다. 저는 한국인이지만, 교육과 정서를 놓고 봤을 때는, 미국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고립무원(孤立無援)한 나라를 파멸로부터 구출하여주었으며, 그 순간 진정한 집단안전보장(集團安全保障)의 횃불은 일찍이 없이 찬란히 빛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 파병이란 획기적 결정을 내림으로써 우리가 바다로 밀려나지 않게 구원해준 트루먼 전 대통령에게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나는 이 기회에 미군의 어머니들에게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깊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장 암담한 처지에 놓여 있던 시기에 그들은 육·해·공군 및 해병대에서 복무하는 자식을, 남편을, 그리고 형제를, 한국으로 보내주었습니다. 두 나라 군인들의 영혼이 우리나라의 계곡과 산등성이에서 함께 하느님 앞으로 올라갔다는 사실을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추모하듯이 전능의 신도 그들을 쓰다듬어주시기를 빌어 마지않습니다.”

최초이자 마지막 만남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8월 5일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의 트루먼 전 대통령 자택에서 트루먼 전 대통령과 만났다.

 

1954년 8월 5일 오전, 이승만 대통령 일행은 미 공군기 편으로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에 도착했다. 일행은 국무부가 내준 차편으로 인디펜던스의 트루먼 자택으로 출발했다. 트루먼 내외가 현관 앞으로 나와 일행을 맞았다. 집 앞 길거리에서 약 500명의 주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이 트루먼 전 대통령에게 말했다.

“참으로 반갑습니다. 나는 귀하가 미군을 파병해 우리가 생존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결단을 내리신 귀하에게 나와 한국 국민의 변치 않는 감사를 표합니다. 귀하의 결정은 우리 국민의 사기를 북돋아줬고, 우리가 공산주의자들과 싸워 물리칠 수 있도록 해줬습니다. 한국인 모두가 이를 고마워하고 있으며, 이러한 감사의 뜻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트루먼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가 환담한 후 밖으로 나온 이승만 대통령은 집 앞에 모인 군중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이 세계를 자기네 통치하에 놓기 위해 밤낮없이 준동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을에서, 학교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가정에서도 그들과 투쟁해야 합니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옆에 있는 트루먼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나는 1950년 비 오는 날 깜깜한 새벽, 기도했고 주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싸우지 않고 공산주의자들을 이 세상에서 몰아낼 방법은 없습니다. 부디 건강하세요.”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이것이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다. 트루먼은 한국에 온 적이 없다. 이런 그들이 69년이 흘러 2023년 7월 27일 동상으로 다부동에서 재회(再會)한다.

한국 유학생과 트루먼의 만남

 ▲한종우 전 국민대 이사장은 미국 유학생 시절 트루먼 대통령과 만났다.

 

1957년 여름 미국 캔자스대학교 대학원에 유학 중이던 한종우(韓鍾愚, 故人, 동양통신 전무, 코리아 헤럴드 사장, 국민대학교 이사장, 성곡언론재단 이사장 역임)씨 등 30여 명의 유학생들이 캔자스시티에 있는 연방은행 건물 내 트루먼 전 대통령 사무실을 찾아갔다. 기념도서관이 서기 전이라 캔자스시티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학생들은 백악관 시절부터 비서로 일했던 할머니의 안내로 집무실로 들어갔다. 학생들이 도열하여 인사를 하니 트루먼 대통령은 일어나서 학생들을 쭉 훑어보다가 한종우씨 앞에 섰다.

“어디서 왔어요?”

한종우씨는 트루먼이 자신을 일본 학생으로 생각하는 듯하여 큰 소리로 말했다.

“각하, 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트루먼은 자신의 파병 결단으로 살아난 나라에서 온 젊은이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 듯, 반갑게 손을 잡고 앞으로 끌었다. 책상 위에 놓인, 자개로 만든 담배 상자를 가리키면서 자랑하듯이 말했다.

“이건 당신 나라의 이승만 대통령이 나에게 준 겁니다.”

그러곤 기념사진을 찍었다. 자개 담뱃갑은 아마도 이승만 대통령이 트루먼 자택을 방문하였을 때 선물한 것으로 추정된다.⊙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조갑제TV 대표

 

 

08.21 이인호 “대한민국의 75번째 생일을 축하하기가 이리도 힘든가?”

[김윤덕이 만난 사람] 역사학자 이인호의 ‘1948 건국론’

▲2023년 8월 16일 조선일보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 그는 "대한민국 건국 75주년 생일을 기념하고 축하하지 않는 모습에 역사학자로서 비애를 느낀다"고 말했다. /김지호 기자 

1919년이냐, 1948년이냐.

최근 재점화된 ‘건국 논쟁’에 역사학자 이인호는 단호했다. “1919년 건국설은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국가의 정체성을 훼손하기 위해 내놓은 주장입니다. 1948년 5·10 선거로 국회를 구성하고 헌법을 제정해 대통령을 선출한 뒤 건국의 마지막 단계로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해 세계에 선포한 이 명백한 사실을 왜 부정하려 합니까.”

 

그는 8·15 광복절 윤석열 대통령의 경축사도 아쉽다고 했다. “해방 후 공산주의와 치열하게 싸우면서 마침내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을 출범시킨 건국 75주년의 의미를 강조했어야 하는데, 그걸 언급하지 않아 이 소모적인 논쟁을 잠재울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고 했다.

 

87세 노(老)학자는 대한민국의 75번째 생일을 축하하기가 이렇게 힘든 것이냐며 “비애를 느낀다”고 했다.

 

◇건국 원년은 1948년

-’대한민국 원년은 1919년’이라는 주장에 대해 ‘역사 왜곡’이라고 반박하셨더군요.

“반(反)대한민국 세력에게 이용당하기 딱 좋으니까요. 그리고 ‘광복 78주년’이라는 올해 경축식 제목부터 틀렸어요. 제대로 쓰려면 ‘해방 78주년, 건국 75주년 기념 광복절’이라고 해야지요. 해방이 광복은 아니었잖습니까.”

 

-해방과 광복이 다른가요?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일제 치하에서 놓여난 겁니다. 그 감격이야 말할 것도 없지요. 하지만 우리 힘으로 해방을 얻은 게 아니고, 나라도 미국 소련으로 분단 점령된 상황이라 독립국가가 되지는 못했어요. 1948년 정부를 수립하고 자유민주공화국으로 독립을 선포하면서 광복은 비로소 이뤄집니다.”

 

-윤 대통령의 경축사는 왜 아쉬웠습니까.

“독립운동은 건국운동이었고 대한민국이 얼마나 많은 성취를 이뤘는가에 대해선 말씀하셨는데, 그게 다 1948년 나라가 건국됐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언급이 없었어요.”

 

-건국 논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걸까요?

“건국이 어떻게 논쟁이 됩니까? 대한민국 사람이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탄생한 걸 기뻐해야 당연하지요. 세계 어디라도 물어보세요. 대한민국 탄생이 언제인지.”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이 대한민국 원년이 되면 어떤 문제가 생깁니까?

“임시정부는 말 그대로 임의 단체였고, 국가적 기능을 하진 못했어요. 국민을 보호할 능력이 없었고, 국민들도 임정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임정과 독립운동을 폄하하는 발언으로 들리지 않을까요?

“그분들이 추구했던 게 독립이고 독립을 이룬 게 1948년인데, 그게 왜 독립운동가를 폄훼하는 겁니까.”

 

-미국도 독립 선언을 한 1776년 7월 4일을 독립기념일로 정하지 않았나요?

“미국은 영국 식민지였지만 처음 형성될 때부터 각 주별로 자치정부가 있었어요. 독립을 선포한 건 영국에서 부과하는 세금이 과다해 그걸 못 내겠다고 한 데서 출발한 거지, 나라는 이미 스스로 운영하고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독립 선포가 곧 독립이 될 수 있지만, 우리는 달라요. 일본 법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우리가 독립을 선언했다고 해서 그게 독립이 됩니까?”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15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열린 제78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참석자들과 광복절 노래를 제창하고 있다. /대통령실

◇단독정부? 공산화 막기 위한 고육지책

-이승만 대통령도 대한민국 원년이 1919년이라고 했다던데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독립선포 식사(式辭)에 ‘대한민국 30년’이란 대목이 나오긴 합니다. 하지만 앞부분엔 이렇게 썼어요. ‘8월 15일 오늘에 거행하는 식은 우리의 해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우리 민국이 새로 탄생하는 것을 겸하여 경축한 것입니다.’ 국가의 새로운 탄생이 1948년 8월 15일에 드디어 이뤄졌다는 뜻입니다.”

 

-’1948년 건국론’을 비판하는 사람은 모두 좌파입니까?

“1948년이 건국의 해라고 말하길 주저하는 사람들 중에는 좌파가 아닌 사람도 물론 있었어요. 영구 분단에 대한 우려 때문이죠. 김구 선생도 그중 한 분인데, 이승만 박사는 나라 전체가 공산화되는 위협을 막으려면 남한만이라도 독립을 시켜야 한다고 설득한 겁니다.”

 

-실제로 좌파 역사학자들은 1948년 단독정부 수립이 분단의 시작이라고 비판합니다.

“북한은 이미 1946년 2월부터 공산국가 체제를 만들기 시작해요. 이를 간파한 이승만이 우리도 서둘러 주권국가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쪽에 넘어갈 수 있다며 ‘정읍 연설’을 합니다. 좌파들은 이를 분단 획책이라 비판하지만 남한까지도 공산화되는 걸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보는 게 맞아요. 그리고 우리 헌법에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 전체라고 명시돼 있어요. 아직 우리 법의 권능이 북한까지 미치진 못하지만 언젠가 회복해야 할 영토로 남아 있는 겁니다.”

 

-KBS 이사장 시절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에 공로가 없다’고 발언해 논란이 됐었지요?

“난 사실을 말한 겁니다. 김구는 이승만처럼 국제 정세에 밝지 못해 한반도가 분단으로 가고 있는 걸 인지하지 못했어요. 처음엔 김구도 정읍 연설에 동조했는데 ‘장덕수 암살 사건’을 계기로 두 분 사이가 갈라지면서 단독정부 추진을 비난하기 시작하죠. 김구 선생이 독립운동가로서 큰 공헌을 했지만 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유엔에도 지지하지 말라고 한 건 사실이기 때문에 건국에 공로가 없다고 한 겁니다.”

 

▲1965년 7월 27일, 이승만 대통령 장례식 모습. 영결식이 열린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서 남대문과 제1한강교를 지나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100만명의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고인을 애도했다./공보처

◇김구 앞세운 이승만 죽이기

-이승만과 김구 모두 공산주의에 반대했는데 두 분은 왜 좌우의 대립 구도에 서게 됐을까요.

“좌익이 김구를 이승만 죽이기의 도구로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암살당한 김구를 성역화해서 대한민국 하면 김구 선생이 떠오르도록 기획한 거죠. 그 일환으로 이승만을 악마화한 ‘백년전쟁’이 만들어졌고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독재 하면 박정희, 전두환을 떠올렸어요. 그런데 1990년대 소련이 무너지고부터 독재자 하면 이승만을 떠올립니다. 이상하잖아요? 이승만은 합법적으로 대통령이 된 사람입니다. 4·19 의거도 헌법이 국민의 항의권을 보장하는 민주적 토대를 만들어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죠. 그런 이승만이 갑자기 독재자의 상징이 된 건 운동권에 종북 세력이 침투했기 때문입니다. 김구를 이용해 이승만 죽이기 작업을 하고, 1948년을 부정하고,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가 되고요. 이 대통령의 운구가 하와이에서 돌아와 서울에서 장례식 치를 때 어마어마한 인파가 도심을 메우고 애도했습니다. 4·19 주역들이 왜 이승만 대통령 묘역을 찾아갔겠습니까?”

 

-대한민국에서 제대로 된 혁명은 1948년 건국혁명이라고 하셨더군요.

“북한과 우리를 보세요. 똑같이 능력 있고 부지런하고 자식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민족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어떻게 달라져 있습니까. 우리가 국민의 역량이 최대한으로 발휘될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만들었기 때문에 선진국 반열에 올랐어요. 1948년 제헌 헌법이 계급 간 차별 금지, 남녀 평등을 선포해 모두가 평등하게 투표하고 교육받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건국은 혁명입니다.”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 추진위에 합류하셨지요?

“이승만 기념관은 한 사람의 공과를 평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게 아니에요. 독립 투쟁과 건국, 그리고 13년 동안 대통령을 한 사람의 족적을 알아야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웠고 어떤 난관에 부딪혔으며 어떻게 극복했는지 알게 됩니다. 또, 이 대통령은 기록을 꼼꼼히 남긴 분이에요. 기념관이 생겨 모든 자료가 다 공개되면 이승만뿐 아니라 동시대 활동했던 김구, 안창호 같은 분들에 대해서도 소상히 밝혀지겠죠.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는 건 그간의 거짓말이 들통날까봐 두려워하는 이들입니다.”

 

-이승만 우상화, 신격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누가 이승만을 신격화합니까. 이승만의 족적을 그대로 보여주자는 거지. 기념관의 장점은 사료를 통해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볼 수 있게 한다는 거예요. 이 박사가 프린스턴 대학에 다닐 때 쓴 일기를 보고 내가 충격을 받았어요. 학교 생활에 대한 건 없고, 오늘 제일감리교회 가서 강연을 하고 2달러를 벌었다, 오늘은 어디서 8달러를 벌었다…. 그만큼 하루하루 절박하게 살며 독립운동을 했어요. 그런데 좌파들은 이승만은 어딜 가든지 돈 냄새가 난다고 비하해요. 참 나쁜 사람들 아닙니까?”

 

▲2023년 8월 16일 조선일보에서 인터뷰 하고 있는 이인호 교수. 그는 "광장의 국민들은 건국 75년을 축하하는데, 이 나라 지도자들은 그렇지 않다"면서 "1919년 건국론은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을 부정하려는 세력에 이용 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지호 기자

◇조작과 선동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386세대가 공부를 안 해서 종북세력에 이용당했다고 개탄하셨지요?

“독재 타도하자고 싸운 기간이 1972년부터 1987년까지 15년인데 이때 제대로 된 역사서를 읽고 고민하고 토론했다면 시비를 가릴 능력이 생겼을 겁니다. 그래서 나는 386 운동권 세대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들이라고 봅니다. 80년대 초 내가 일간지에 기고한 글이 있어요. 시위하는 학생들을 전부 폭도로 몰면 이 나라엔 희망이 없다고. 그런데 그들이 기득권이 되면서 민주화 정신과는 전혀 다른 길로 가게 된 겁니다.”

 

-문재인 정부 때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나는 죽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 학자들의 비겁함이죠. 역사는 객관적이어야 한다면서 현대사를 가르치지 않았어요. 이 공백을 우리 역사에 부정적 시각을 가진 이들, 선전선동의 귀재인 좌파들 손에 다 내주게 된 겁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건 조작과 선동에 휘둘리지 않는 지성을 키우기 위해서라고도 하셨지요.

“지도자의 판단은 49대51의 상황에서 51을 택하는 거지, 흑백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 통찰과 지혜는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하는데 파렴치한 자들이 역사를 조작하고 정치도구화해 나라를 흔들고 있어요. 사실 요즘 나는 비애에 빠져 있어요. 내가 얼마나 게으르게 살았는가, 완전히 어항에서 살았구나, 하는. 가난한 나라에 태어나 세계에서 제일 좋다는 학교를 장학금으로 다녔을 만큼 빚이 많은 내가 후대들은 그렇게 교육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큽니다. 그래서 미안하고 아픕니다.”

 

☞이인호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 때 해방을 맞았다. 서울대 사학과에 다니다 미국 웰슬리대로 유학,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 하버드대에서 러시아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서울대 교수를 거쳐 1996년 핀란드 대사로, 1998년 러시아 대사로 임명돼 건국 최초 여성 대사가 됐다. 박근혜 정부 때 KBS 이사장을 지냈다.

조선일보 김윤덕 선임기자

 

 

09.02 노태우 아들, 이승만 아들… 곳곳에서 ‘조용한 화해’

이승만 아들, 4·19 묘지 참배

 ▲"이승만 아들로서, 4·19 희생자께 사과드립니다" - 고(故)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92) 박사가 1일 서울 국립 4·19 민주묘지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 4·19 혁명 이후 63년 만에 이뤄지는 첫 공식 참배다. 이 박사는 "대통령의 아들로서 63년 만에, 4·19 민주 영령들에게 제대로 참배하고 명복을 빌 수 있게 되었는데 항상 국민을 사랑하셨던 선친께서 '참 잘하였노라' 무척 기뻐하실 것 같다"고 말했다. /남강호 기자 

 

1일 아침 서울 국립 4·19 민주묘지에 이승만 전 대통령의 아들 이인수(92) 박사가 탄 차량이 들어섰다. 이 박사가 탄 차는 무궁화와 태극기로 장식된 4·19 민주 영령 묘역을 천천히 지나 유영봉안소 앞에서 멈췄다. 휠체어로 옮겨 탄 이 박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감개무량합니다.”

 

그는 휠체어를 밀고 안으로 들어가 이곳에 잠든 4·19 민주 영령 515위의 영정 사진과 마주했다. 영령들은 63년 전 시간이 멈춰버린 흑백 사진 속에서 대개 교복이나 낡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이 박사는 주변의 부축을 받으며 아내 조혜자(81)씨와 함께 앞으로 걸어나가 향을 피웠고, 고개를 숙여 묵념했다. ‘이화장(이 전 대통령의 사저) 대표 이인수’라 적힌 큼지막한 흰 국화 다발도 따로 올렸다. 그러곤 꼬깃꼬깃한 종이를 펼쳐 읽어 내려갔다. 혹여 실수라도 할까봐 가슴에 품고 다니며 낭독 연습을 반복했다는 흔적이 고스란히 밴 종이였다.

 

“저는 오늘 63년 만에 4·19 민주 영령들에게 참배하고 명복을 빌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아들로서 4·19혁명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께 깊은 위로와 아울러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저의 참배와 사과에 대해서 항상 국민을 사랑하셨던 아버님께서도 ‘참 잘하였노라’ 기뻐하실 것입니다. 오늘 참배가 국민 모두의 ‘통합’과 ‘화해’에 도움이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4·19 참배한 이인수 - 고(故)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가운데) 박사가 1일 서울 강북구 국립 4·19 민주 묘지 유영봉안소에서 4·19 민주 영령들을 참배하고 성명서를 읽는 모습. /남강호 기자

 

아내 조혜자씨도 “생전에 이승만 대통령께서도 ‘내가 맞아야 할 총알을 청년들이 맞았다’며 울먹이셨다”며 “늘 빚진 마음으로 젊은이들을 생각했다”고 했다. 이 박사는 “내 마음은 우리 국민과 똑같다″며 “우리의 진심을 알아 달라”고도 했다.

 

1960년 4·19혁명 발생 63년 만에 처음으로 이 박사가 이 전 대통령 유족을 대표해 4·19 민주묘지에서 공식 참배하고 사과했다. 이 박사와 동행한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의 황교안 회장과 문무일 사무총장, 김문수 상임고문 등 관계자 100여 명도 차례로 헌화·분향한 뒤 짧게 묵념했다.

 

이날 참배에 4·19 관련 단체 회원들이 동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 단체 관계자들은 본지에 “이 박사가 희생 영령 묘역을 살피고 가시도록 국립묘지 측에 사전 부탁을 해 놓았고, 참배를 반대하는 회원들의 시위도 우리가 못 하게 막았다”면서 “과거와 비교하면 놀라운 발전”이라고 전했다. 이 박사는 2011년 4·19 민주묘지 참배를 시도했으나 당시엔 “사죄에 진정성이 없다”는 유족 단체의 강력한 거부로 인해 입장조차 못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공식 기록상 1960년 4·19혁명 당시 사망자는 186명, 부상자는 6026명이다. 4월 19일 이후에도 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과 시위가 계속되자 이 전 대통령은 4월 26일 하야했다.

 

이 전 대통령 기념사업회 황교안 회장은 “미래로 나아가는 사과가 오늘 이루어졌다”고 했다. 문 사무총장은 “이 박사가 최근 ‘세상 떠나기 전에 4·19 희생자들에게 꼭 사과하고 싶다’는 뜻을 주변에 자주 밝혔고 오늘 성사가 돼 정말 기뻐하셨다”며 “이 전 대통령이 작고하신 지 58년이 됐는데 비로소 구원(舊怨)의 사슬을 끊고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향해서 나갈 초석이 닦였다”고 했다. 기념사업회 측은 “4·19 관련 단체들도 따로 만나 사과 메시지를 전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참배를 계기로 4·19 단체들과의 접촉점을 조금씩 늘려갈 계획이다.

 

▲5·18 참배했던 노재헌 -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인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원장이 2019년 8월 23일 광주광역시 국립5·18 민주 묘지를 찾아 묘비 앞에 무릎 꿇고 참배하고 있다. /국립 5·18민주묘지

조선일보 양지혜 기자

 

 

09.02 4·19혁명공로자 회장 “이승만 유족의 사과, 꼬인 매듭 풀라고 있는 것”

박훈 4·19혁명공로자회장 인터뷰

 ▲박훈 4·19혁명공로자회장. /4·19혁명 공로자회

 

“이승만 전 대통령 유족과 기념사업회 분들이 4·19 영령들에게 참배한 것을 높이 평가합니다. 이제는 저희도 마음 열고 대화할 용의가 있습니다.”

 

박훈(81) 4·19혁명공로자회장은 1일 이승만 전 대통령의 아들인 이인수(92) 박사가 서울 강북구 수유동 국립 4·19 민주 묘지에서 참배를 마치자 “고령에 건강도 안 좋으신 분이 직접 영령들을 찾아뵙고 용서를 구하는 모습에 진심을 느꼈다”고 했다. 4·19혁명공로자회와 민주혁명회, 혁명희생자유족회 등 관련 단체들은 “먼저 사과가 있어야 만날 수 있다”는 이유로 이날 참배 현장에 오지 않았다.

 

그는 “벌써 (4·19로부터) 63년이 지났다. 이 전 대통령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공과가 있는데, 이제는 서로가 이해하면서 발전적인 대화를 해야 할 시기라고 느낀다”면서 “계속 응어리진 채 살 수는 없다. 우리가 한국 현대사의 ‘꼬인 매듭 1세대’인 셈인데, 매듭은 풀라고 있는 거지 더 엉켜서는 안 된다. 앞으론 매듭을 푸는 방향으로 노력하겠다”고 했다.

 

박 회장은 4·19혁명 때 고3 학생이었다. 시위 현장에 끝까지 남아 부상자들을 돌본 점을 인정받아 2010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그는 “용기 있는 자만이 용서할 수 있다고 한다. 과거는 묻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미래”라면서 “앞으로 4·19 관련 단체들을 설득해 현충원에 있는 이 전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하는 방안도 고려해 보겠다”고 했다.

 

앞서 5·18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도 가해자 측의 참회를 받아들였다. 시민군 상황실장을 맡았던 박남선(69) 사단법인 국민화합 상임이사는 계엄군에 체포돼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3년간 복역했지만 2021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하나가 된 대한민국을 위해 화해하고 용서했으면 한다”고 말해 큰 울림을 줬다. 그는 당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제는 화합·통합의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분단된 나라가 통일되기는커녕 지역·정파·계층으로 나뉘어 더 갈등하고 싸우면 안 되지 않나”라고 했다.

조선일보 양지혜 기자

 

 

09.02 YS 아들 김현철도 DJ 아들 김홍업도 이승만 기념관 추진위

▲역대 대통령 가족 6명이 지난 7월 29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본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우리 대통령들의 이야기'를 관람하고 있다. 이날 행사에는 조혜자 여사(이승만 전 대통령 며느리), 윤상구 (주)동서코포레이션 대표(윤보선 전 대통령 아들), 박지만 EG 대표이사(박정희 전 대통령 아들),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이사장(노태우 전 대통령 아들), 김현철 김영삼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김영삼 전 대통령 아들), 김홍업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김대중 전 대통령 아들)이 참석했다. /문화체육관광부 제공

 

한국 현대사의 아픈 매듭을 풀어나가려는 화해의 움직임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 추진 위원회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 아들 박지만(65) EG 대표이사, 노태우 전 대통령 아들 노재헌(58) 동아시아문화센터 이사장, 김현철(64) 김영삼 대통령 기념재단 이사장, 김홍업(73) 김대중 평화센터 이사장이 참여하고 있다. 전직 대통령 아들 4명이 아직 초대 대통령 기념관이 없다는 문제의식에 공감하고 정파와 진영을 초월해 힘을 보태는 것이다.

 

이들의 부친이 과거 악연으로 얽혔던 것을 고려하면 놀라운 행보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 반대 투쟁에 앞장섰다가 가택연금과 사형선고 등 고초를 겪었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생의 라이벌이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 시절 내란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이런 굴곡의 역사를 보고 자란 2세들이지만 아버지 대(代)의 반목과 갈등을 끊고 대한민국이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함께한다는 통합의 메시지를 보여줬다.

 

이 네 명은 올 2월 첫 식사 자리를 가진 뒤 메신저 단체 대화방을 개설하고 수시로 대화를 주고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돌아가며 밥값을 내 정기적인 식사 자리도 갖는다. 김홍업 이사장은 “사회를 위해 봉사할 방법도 논의하고 있다”고 했다.

 

한편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이사장은 2019년 8월 광주광역시 국립 5·18 민주 묘지를 찾아 묘비 앞에 무릎 꿇고 참배했다. 노 이사장의 사죄는 5‧18과 관련해 ‘주요 책임자’로 지목된 인사들의 가족 중 처음이었다. 그는 5‧18 진압 과정에서 죽거나 다친 피해자 가족들의 모임인 ‘오월어머니집’에도 방문해 재차 사죄의 뜻을 전했다.

 

노 이사장은 “(아버지는) 항상 5·18 얘기가 나올 때마다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부분에 대해 마음 아파하셨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지난 2002년 전립선암 수술 이후 투병하다 2021년 별세했다. 그는 “치유와 화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100번이고 1000번이고 사과해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양지혜 기자

 

 

09.11 국민 손으로… ‘이승만 기념관’ 첫발 떼다

“통합과 기억의 공간” 오늘부터 모금 시작

왕정 시대에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꿈꿨던 사람이었다. 평생 독립 운동에 투신했고, 일제의 야욕과 공산주의의 모순을 꿰뚫어봤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대한의 사람들이 자유와 평화 속에서 살아갈 기틀을 놨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고(故) 이승만 전 대통령(1875~1965)의 생애다. 그러나 기적 같은 대한민국 역사의 시발점인 초대 대통령의 기념관이 없다.

 

 ▲1948년 정부 수립 경축식 - 1948년 8월 15일 서울 중앙청 광장(현재 광화문 주변)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 축하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을 정부 인사들과 시민들이 듣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 추진위원회는 11일부터 범국민 모금 운동에 나선다. /이승만기념관 홈페이지 

 

11일부터 ‘이승만대통령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가 범국민 모금 운동에 나선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위원장을 맡았고, 이영일 대한민국역사와미래재단 고문,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 주대환 조봉암기념사업회 부회장, 한화갑 한반도평화재단 총재 등 23명이 건립추진위원으로 참여한 단체다.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 사업은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전액 정부 예산으로 진행할 수 있지만, 추진위는 온 국민의 참여 속에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해 범국민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 국민 모금으로 전체 건립 비용의 70%를 충당하고, 나머지 30%를 정부가 지원한다. 김 위원장은 “국민의 손으로 짓는 기념관인 만큼 얼마나 많은 국민이 자발적으로 동참하느냐에 사업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은 좌우를 뛰어넘는 화해의 역사로 기록될 전망이다. 추진위원회에는 4·19 혁명 인사와 진보 정치인 등 과거 이 전 대통령 측과 반대 입장이었던 사람도 다수 참여했다. 이 전 대통령의 정적(政敵)이라 불렸던 죽산 조봉암(1898~1959) 기념사업회의 주대환 부회장은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이 없었다는 것 자체가 비정상”이라고 했다. 민주당 대표를 지낸 한화갑 한반도평화재단 총재는 4·19 혁명을 주도했으며 오랜 기간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보좌했다. 이영일 대한민국역사와미래재단 고문,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 등도 4·19 혁명을 이끌었으며 이제는 이 전 대통령의 과보다 공을 높이 평가하며 추진위에 참여한다.

 

전직 대통령의 아들 5명도 동참한다. 이 전 대통령의 아들인 이인수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상임고문과 박정희 전 대통령 아들 박지만 EG 대표이사, 노태우 전 대통령 아들 노재헌 재단법인 동아시아문화센터 이사장, 김영삼 전 대통령 아들 김현철 김영삼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 김홍업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등이 추진위 고문을 맡았다. 전직 대통령 아들 5명이 아직 초대 대통령 기념관이 없다는 문제의식에 공감하고 정파와 진영을 초월해 힘을 보태는 것이다.

 

추진위 측은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은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과 건국 이념이 무엇이고, 우리가 어떤 난관들을 극복하여 오늘과 같이 자유롭고 번영된 민주국가로 키워왔는지를 기록하고 알리는 기억의 공간이 될 것”이라고 했다. (재)이승만대통령 기념재단 기부금에는 영수증은 물론 세제 혜택이 부여되며, 분할 납부하는 약정 기부도 가능하다.

 

후원금 계좌번호 (예금주) : (재) 이승만대통령 기념재단

농협 301-0334-1185-31

국민 815601-04-182916

우리 1005-104-553918

하나 109-910035-23404

신한 100-036-637911

홈페이지 : rheesyngmanfoundation.or.kr 전화 : 02-777-0391

조선일보 양지혜 기자

 

 

09.12 첫날 2052명 “이승만 기념관에 힘 보탭니다”... 배우 이영애도 동참

전국 각지 평범한 시민들이 나서

 ▲이승만대통령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가 범국민 모금 운동을 시작한 첫날 시민 2052명이 후원의 손길을 보냈다. 모금 목표는 320억원인데 하루 만에 약 3억원의 후원금이 모였다. 사진은 서울시 중구 장충동 자유총연맹 광장에 있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 동상. /연합뉴스

 

‘이승만대통령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가 범국민 모금 운동을 시작한 11일, 새벽부터 ‘(재) 이승만대통령 기념재단’ 후원 계좌에 뜨거운 성원이 쏟아졌다. 첫날에만 2052명으로부터 약 3억원의 후원금이 모였다. 추진위원장인 김황식 전 국무총리는 “국민 모금으로 전체 건립 비용의 70%를 충당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국민 여러분의 자발적인 동참이 기념관 건립 여부를 좌우한다”면서 “정성을 모아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했다.

 

전국 각지의 평범한 시민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에 뜻을 함께했다. 신동협(42)씨는 “프랑스에 가면 수도 파리 한복판에 ‘건국의 아버지’ 샤를 드골을 기념하는 광장이 있는데, 우리나라만 건국 대통령을 폄훼하고 소홀히 취급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평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공과가 있겠지만 그분이 ‘건국 대통령’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념관 건립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강원 원주에 거주하는 윤재희(60)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시간이 흘러 재해석되듯이, 이승만 대통령도 ‘건국 대통령’으로서 마땅히 재평가받아야 한다”며 “생애 후반부의 과(過)로 인해 평생의 공적이 부정당하는 상황이 마음 아팠다”고 했다. 전기 공사 업체를 운영하는 김철성(71)씨는 “이번 후원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기념관 설계가 끝나면 전기 공사를 맡아서 할 계획도 있다”며 “시대를 앞서갔던 이승만 대통령은 내치(內治)로 남녀평등·무상교육·토지개혁 등 숱한 개혁을 실시했을 뿐만 아니라, 외치(外治)로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 굵직한 업적을 쌓았다. 이런 분의 기념관이 없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했다. 작은 정성도 모이면 큰 힘이 된다. 이날 본지 홈페이지에도 “늦었지만 작으나마 기쁜 마음으로 적극 동참한다” “하루 벌어 먹고 살지만 작으나마 동참하겠다” 등 익명의 ‘후원 인증글’이 잇따라 올라왔다.

 

▲이영애./뉴스1

 

해외 교민들의 동참 움직임도 시작됐다. 특히 한국 근현대사의 아픈 기억을 공유하는 재일 교포들의 호응이 뜨거운 것으로 알려졌다. 김옥채 주일 요코하마 총영사는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는 일인 이승만 기념관 건립에는 국민 누구나 동참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재일 교포들에게 기념관 건립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면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업적은 마땅히 인정받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어 곧 조직적인 모금 운동이 현지에서 진행될 것”이라고 했다. 배우 이영애(52)씨도 모금 운동 첫날 추진위원회 측에 후원 참여 의사를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평소 소아암 환우 구급차 지원과 순직 군인 및 6.25 참전 용사 자녀 교육비 지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꾸준한 선행을 펼치며 한국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전파해왔다.

 

추진위원회는 이번 기념관 모금 목표를 320억원으로 책정하고 있다. 건립 전체 비용 중 국민 모금으로 70%를, 나머지 30%는 정부 지원으로 충당한다. (재)이승만대통령 기념재단 기부금에는 영수증은 물론 세제 혜택이 부여되며, 분할 납부하는 약정 기부도 가능하다.

조선일보 양지혜 기자

 

 

09.13 베트남 활동 사업가, SM그룹 회장… “자유의 가치 지킨 이승만 기억해야”

기념재단에 각각 10억·1억 후원

“세계를 무대로 사업을 펼치다 보면 ‘자유’의 소중함을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대한민국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하게 돼 기쁩니다.”

 ▲사업가 정혁진, 우오현 SM그룹 회장

 

베트남에 거주하는 정혁진(69)씨는 12일 ‘(재)이승만대통령 기념재단’ 후원 계좌에 10억원을 쾌척하며 ‘이승만대통령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의 범국민 모금 운동에 참여했다. 스스로를 “베트남에서 양말 제조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한 그는 “곧 일흔이라 나라를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에 힘을 보탤 수 있어서 기쁘다”라고 했다.

 

정씨는 1990년 필리핀에서 첫 해외 사업을 시작한 뒤 인도네시아와 중국 등을 거쳐 현재 베트남에 정착했다. 그는 “해외에서 기업인으로 활동하며 자유의 소중함을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껴왔다”며 “오늘날 한국인들이 글로벌 무대에서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는 것도 ‘자유’ 덕분이다. 그 씨앗을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에 뿌려줬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정씨는 “해방 전후 많은 사람이 사회주의에 경도될 때, 오직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 민주주의를 강력하게 밀어붙여 대한민국의 오늘날이 가능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정씨는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을 연구·교육하는 ‘이승만 학당’과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등에도 후원을 해왔다. 그는 “이번 기념관 건립이 대중에게 이 대통령을 널리 알리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우오현(70) SM그룹 회장도 이날 재단에 1억원을 쾌척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SM그룹은 호남 기반 건설사로 시작해 현재 경북 구미 SM벡셀 배터리 공장과 대구 SM티케이케미칼을 운영하는 등 영호남을 아우르는 재계 30위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한국 사회의 화해와 통합을 추구하는 이승만 기념관 건립에 의미 있는 후원이다. 우 회장은 “이 정도 시간이 흘렀으면 과거에 대한 용서와 화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국민 모두가 이번 모금 운동에 동참하기를 바랐고, 호남에서도 적극적인 호응이 있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참여했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인으로 살면서 시대를 앞서 꿰뚫어보는 국가 지도자의 혜안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해 왔다”고 했다. “해외엔 건국의 지도자를 기리는 시설들이 잘 되어있는데, 그 나라들이 지도자의 과(過)보다 공(功)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모두가 한마음이 돼 그분의 공적을 기릴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배우 이영애(52)씨도 이날 재단에 5000만원을 기부했다. 이씨는 편지를 통해 “우리 사회가 잘한 일을 칭찬하며 화합한다면 우리 아이들이 더 평안하고 좋은 나라에서 살게 되리라 믿는다”면서 “저희 가족은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재단에도 후원을 하고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 양지혜 기자

 

 

09.15 기념관 건립 모금 1만명 돌파… 박진 장관도 참여

▲박진 외교부 장관./뉴시스

 

박진(67) 외교부 장관도 ‘(재) 이승만 대통령 기념 재단’에 300만원을 후원했다. 윤석열 정부 현직 장관 중에서 첫 참여다. 박 장관은 지난 3월 이 전 대통령 탄생 148주년 기념식에서 “지난 70년의 우리 역사가 한미동맹을 이끌어냈던 이승만 대통령님의 혜안이 옳고 또 옳았음을 여실히 입증해주고 있다”며 “이승만 대통령의 탁월한 외교력과 불굴의 뚝심, 당당한 외교는 70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 후배 외교관들과 국민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고 했다.

 

‘(재) 이승만 대통령 기념 재단’은 14일까지 약 1만1000명의 시민이 후원에 참여해 25억여 원의 기금이 모였다고 밝혔다. 재단 측은 “현재 이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공식 추진하는 곳은 ‘(재) 이승만 대통령 기념 재단’뿐임을 유념해달라”고 밝혔다.

조선일보 양지혜 기자

 

 

09.15 “이승만 존경한 아버지, 천국서 웃을 것” 미공개 사진·500만원 기부한 할머니

신단여씨, 부친과 이승만 부부가
전주서 함께 찍은 단체 사진 전해

 ▲이승만(둘째 줄 가운데) 대통령 내외가 1946년 6월 5일 전북 전주를 방문해 ‘애국청년회’ 회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이 대통령이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 가능성을 처음 언급한 ‘정읍 발언(6월 3일)’ 직후 찍은 것으로 학술 사료의 가치도 높은 것으로 평가됐다./신단여씨 제공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하는 제 마음에 비하면 작은 돈입니다. 하지만 평범한 할머니로 사는 형편에선 큰돈입니다. 함께 기증하는 사진도 이 대통령의 기념관을 빛내기를 바랍니다.”

 

전북 부안 출신의 신단여(75)씨는 지난 13일 ‘(재)이승만대통령 기념재단’ 후원 계좌에 500만원을 쾌척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 모금 소식을 조선일보를 통해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면서 “천국에 계신 아버지가 이런 날을 손꼽아 기다리셨을 것이다. 딸인 제가 아버지를 대신해 동참할 수 있어 가슴이 벅차다”고 했다.

 

▲신단여씨

 

신씨의 부친 고(故) 신영상(1910~1985)씨는 전주북중(현 전주고) 재학 때 독립운동을 하다가 퇴학당하고 서대문형무소에 1년간 투옥됐다. 광복 후엔 애국청년회 활동을 활발히 했다. 이 때문에 6·25 전쟁 초기엔 호남을 장악한 북한 인민군으로부터 우익 인사로 분류돼 사형될 뻔하는 고초도 겪었다. 그가 맞서 싸웠던 일제와 공산주의는 이 대통령이 평생에 걸쳐 투쟁했던 대상이기도 하다. 신씨는 “아버지가 ‘이승만 대통령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오늘은 없었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며 “이 대통령의 가르침이 우리 집안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제가 딸이어도 원없이 공부할 기회를 누렸던 것도 남녀평등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던 이 대통령의 말씀 덕분”이라고 했다.

 

신씨는 특별한 사진 한 장도 재단에 기증했다. 애국청년회 회원이었던 신씨의 부친이 1946년 6월 5일 전북 전주를 방문한 이 대통령 부부와 함께 찍은 단체사진이다. 사진을 살펴본 김정민 박사(연세대 이승만연구원)는 “처음 공개된 데다 역사적 맥락도 남달라 학술 사료로서 가치가 뛰어나다”고 평했다.

 

사진은 이 대통령이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 가능성을 처음 언급한 ‘정읍 발언(6월 3일)’ 직후 전북 전주를 찾았을 때 촬영됐는데 당시 호남 지역 애국청년회원들이 정장과 한복 등을 차려입고 큰북과 트럼펫·튜바 등 여러 악기를 동원해 이 대통령의 방문을 뜨겁게 환영했던 분위기가 읽힌다. 신씨는 “가보처럼 소중하게 보관해왔던 사진이 드디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아 기쁘다”면서 “저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이 대통령 기념관 건립에 더 많이 참여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조선일보 양지혜 기자

 

 

09-15 ‘이승만 기념관’ 성금 4일만에 1만2000명… 모금액 26억 돌파

우오현 SM그룹 회장 1억원 등
재단 “국민 열기 더 고조될 것”

이승만대통령기념관 건립을 위한 국민성금 동참자가 4일 만에 1만2000명에 달하고 모금액이 26억 원을 돌파했다.

15일 박재원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 사무국 홍보팀장은 “지난 11일 국민성금 모금을 시작한 지 4일 만인 지난 14일 집계로 국민 후원자 1만2000명, 모금액이 26억4000만 원을 넘은 것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배우 이영애 씨는 지난 12일 재단에 5000만 원을 기부했다. 이 씨는 지난 7월 이승만대통령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발족 소식이 알려진 직후 기부 의사를 전했으며 이날 기부금과 함께 재단의 김황식 이사장에게 편지를 전달했다. 이 씨는 내년에도 5000만 원을 기부할 뜻을 밝혔다고 기념재단 측이 설명했다. 이 씨는 편지에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과도 있지만, 오늘날 자유대한민국의 초석을 다져놓으신 분”이라며 “초대 대통령 기념관을 건립한다는 소식을 외면할 수 없어 건립 모금에 동참했다”고 밝혔다.

이어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은 재임 중 잘못한 것들도 있지만 잘한 것도 많다고 본다”며 “잘못한 것만 비난하며 국민을 갈등하게 만드는 것보다 잘한 것을 칭찬하며 화합을 할 수 있도록 한다면 우리 아이들이 더 평안하고 좋은 나라에서 살게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 씨는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재단에도 후원을 이어오고 있다.

우오현 SM그룹 회장도 ‘이승만대통령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에 1억 원을 후원하며 범국민 모금 운동에 참여했다.

박진 외교부 장관도 300만 원을 기부했다. 박 장관은 지난 3월 이승만 전 대통령 탄생 148주년 기념식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당당한 외교는 70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 후배 외교관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정충신 선임기자 csjung@munhwa.com

 
 
 

09.18 박민식 “이승만이야말로 86세대가 추앙하는 ‘혁명 투사’… 보훈 가치, 미래에 있어”

[김윤덕이 만난 사람] 박민식 초대 국가보훈부 장관

 ▲9월 8일 오전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서울 용산구 집무실에서 조선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총선 출마 가능성을 묻자 "미래는 언제나 반반"이라며 웃은 그는, 요즘 국제 상이 군인 체육대회인 '인빅터스 게임' 유치 등 보훈 외교에도 힘쓰고 있다. /이태경기자

 

박민식 장관을 보고 세 번 놀랐다. 왕방울만 한 눈에 한 번, 곱상한 입에서 튀어나오는 “치아라” “마, 됐다” 류의 사투리에 두 번, 그리고 휴대폰 번호가 큼지막하게 적힌 명함에 세 번! 명함에 관한한 보좌진은 극구 만류했으나 고집을 꺾지 않았다. “장관이라고 개인 번호를 명함에 넣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의원 시절에도 지역구민들 목소리를 (휴대폰으로) 직접 들었다.”

 

국가보훈부로 승격한 뒤엔 뉴스의 중심에 섰다. “인민군을 인민군이라 부르는 게 왜 색깔론인가”란 ‘어록’을 남기더니, 최근엔 “백선엽 장군이 친일이면 문재인 전 대통령 부친도 친일”이라고 해 고소를 당했다. 그는 “나라를 바로 세우는 데 감수해야 할 영광”이라고 응수했다.

 

◇친일의 기준 대체 뭔가?

-국회에서 작심하고 싸우더라.

“내 자리가 아직도 의원석에 있는 줄 착각하는 것 같다(웃음).”

 

-보수층에선 한동훈 장관보다 인기라던데.

“아이고, 무슨 말씀. 제가 제 급을 안다.”

 

-대통령이 장관들더러 ‘전사가 돼 싸우라’ 주문한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이승만, 백선엽, 정율성 등등 보훈부와 관련된 이슈가 있어서 발언하는 것이지 대통령 지시가 온 적은 한번도 없다.”

 

-정권이 바뀐 걸 보훈부를 보며 느낀다는 사람도 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부실하면 반도체를 잘 만들고, 탱크를 수출하고, K컬처가 성공해도 모든 게 사상누각이 된다. 국가의 품격은 누구를 어떻게 기억하는가에 달려 있고, 이를 좌우하는 보훈은 나라를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본질이다.”

 

-’백선엽이 친일이면 문재인 대통령 부친도 친일’이란 발언과 관련해, 문 전 대통령이 사자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나는 백선엽 장군이든 문 대통령 부친이든 일제라는 아픔의 시대를 살았던 모든 이에겐 같은 잣대가 적용돼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를 한 것이다. 언제까지 친일을 전가의 보도로 삼을 것인가. 젊은 세대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웃픈’ 현실이다.”

 

-민주당은 문 대통령 부친이 흥남시 농업계장을 한 건 해방 이후였다고 주장한다.

“문 대통령 부친은 1940년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했다. 최소 1945년까지는 일제 치하에서 관직을 맡았다는 뜻이다.”

 

-백선엽 장군 안장 기록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란 문구를 삭제해 ‘친일면죄부’란 비판도 받더라.

“나는 대한민국이 친일파 낙인 찍기에 주눅이 들어 왔다고 생각한다. 이승만, 박정희, 백선엽도 친일로 몰아가지 않나. 친일로 찍히면 사회적으로 매장되니 아예 싸울 생각도 안 한다. 그런데 무엇이 친일파인가. 1948년 반민특위 때는 친일로 규정한 사람이 680여 명에 불과했다. 노무현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선 1006명으로 늘어났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엔 무려 4000명이 넘는다. 어느 장단에 발을 맞춰야 하나. 이번 기회에 무엇이 친일이고 애국인지 정면으로 논쟁해야 한다.”

 

▲6·25전쟁 정전 70주년과 백선엽 장군 3주기를 맞아 고(故) 백선엽 장군(1920~2020) 동상 제막식이 지난 9월 5일 오후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열렸다. 백 장군 맏딸 백남희씨,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이철우 경북도지사,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 김관진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이사장을 비롯한 내빈들이 동상 제막 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뉴스1

◇누가 광주를 고립시키나

-정율성 역사기념공원 논란을 두고 강기정 광주시장은 박민식 장관이 광주를 고립시키려고 한다고 주장한다.

“정율성에 왜 지역을 들먹이나. 누가 광주를, 호남을 고립시키나. 광주가 대한민국이고 대한민국이 곧 광주다. 그런 진부한 전략이 호남의 젊은 세대에게 어필이 될까. 지역을 볼모로 표를 호소해온 정치인들의 철 지난 논리다.”

 

-친북이 문제라면 밀양의 김원봉 의열단 공원, 통영의 윤이상음악제도 없애야 할까.

“정율성은 6·25 때 대한민국에 총부리를 겨눈 적이자 국군과 유엔군, 그리고 우리 국민 수백 만을 희생시킨 전범이라 기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밀양의 경우 김원봉이란 이름 없이 그냥 ‘의열기념공원’으로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을 기념하는 시설이다. 윤이상은 생애 후반부에 친북 행적이 있으나 대한민국을 위협한 인물은 아니다.”

 

-홍범도 흉상 이전 논란 와중에 보훈부는 이중 서훈을 문제 삼았다.

“이중 서훈으로 처음 문제가 된 건 여운형이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별 4개 건국훈장을 받았는데 불과 2년 반 만에 별 5개 최고 등급을 또 한 번 받는다. 그것도 노 대통령 퇴임을 이틀 남기고. 훈장을 주려면 공적 조사가 추가로 필요한데 당시 보훈부가 심사한 자료는 전혀 없다. 외부의 힘에 의해 행안부가 급히 처리한 것이다.”

 

-홍범도 지사도 그런가?

“1962년에 이어 2021년 문재인 정부 때 최고 등급 훈장을 수훈했다. 안중근, 안창호, 김구 선생도 한 번만 받은 훈장을 홍범도 지사가 두 번 받은 건 장군의 유해를 카자흐스탄에서 모셔올 때 멋진 ‘그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서훈이 정치적 도구로 가볍게 이용돼선 안 된다.”

 

-홍범도 논란을 비난한 중국 언론에 ‘내정 간섭 하지 말라’고도 했더라.

“윤 대통령의 대만 관련 발언에 중국 외교부가 ‘불용치훼’, 즉 내정에 간섭하지 말라고 한 걸 되돌려준 것뿐이다. 아직도 그들은 마치 500년 전 조공 받던 시대에 살고 있는 양 착각을 한다. 황당하고 가소롭지 않은가. 시인 윤동주 생가와 안중근 지사의 기념 전시실도 폐쇄해 한국인 관람객들에게 큰 피해를 주고 있다. 심지어 윤동주 시인은 중국인, 안중근 의사는 조선족으로 구분해놨다. 윤동주가 시 한 편이라도 중국말로 쓴 게 있나. 국가가 영토를 빼앗겨서는 안 되듯 자국의 국민을 빼앗겨서도 안 된다. 중국 당국에 강력히 시정을 요청하고 있다”

 

-국가유공자 공적 재심사를 두고 ‘역사를 권력 앞에 줄 세우는 것’이란 비판도 나온다.

“지난 정부에서 시작한 작업이다. 그때는 잘한다고 박수 치다가 왜 이제 와 욕하는지 모르겠다. 국가유공자로 서훈이 되면 국민 세금으로 막대한 보상금을 지급하고 예우해야 하므로 공적엔 한 치의 거짓도 없어야 한다.”

 

 ▲9월 8일 오전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서울 용산구 집무실에서 현안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 있다. 벽에 걸린 캐치프레이즈 '영웅을 기억하는 나라'는 박 장관이 직접 지은 것이다. /이태경기자

◇영웅을 기억하는 나라

-이승만 대통령에겐 언제 꽂히셨나.

“보훈처장 되기 전엔 3·15부정선거, 자유당 독재로만 알고 있었다. 스무 권의 책을 읽어 보니 이분이 참 억울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검사 출신인 제 입장에서 볼 땐 ‘정의’라는 관념에 맞지 않을 만큼 폄훼돼 있었다. 그분이 실제 이룬 성취와 후대의 평가가 극명하게 차이 나는 건 특정 세력에 의한 것이라고밖엔 볼 수 없었다.”

 

-당신도 86세대다.

“그래서 더욱 빠져들었다. 이승만이야말로 86세대가 추앙하는 ‘혁명 투사’ 아닌가. 왕정에 반대해 공화정을 세우려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다. 동료 장관들에게도 물어봤다. 놀랍게도 결론이 똑같더라.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걸출한 인물. 운동권 출신 원희룡 장관조차. 그런데도 방치해 온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을 세우겠다 공언한 건가.

“이승만 대통령 서거일, 탄신일에 국무회의도 빠지면서 참석했다. 박정희·김영삼·김대중·노무현 기념관도 둘러봤다. 건국 대통령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기에 기념관이 하나 없나 자괴감이 들더라. 그래서 액셀을 밟았다.”

 

-정작 기념관 건립은 민간이 주도한다.

“대통령 기념관은 건립 비용의 30%만 행안부가 지원할 수 있다. 안중근·김구 기념관처럼 보훈부가 주도하면 100% 비용을 댈 수 있지만 그러면 기념관 명칭에서 ‘대통령’ 자를 빼야 하는 딜레마가 있다. 다행히 국민 모금 첫날부터 2000명 넘는 분이 3억원에 달하는 성금을 보내 주셨다고 한다. 국민들이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을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 절감했다. 보훈부도 곧 ‘비밀 병기’를 공개할 것이다.”

 

-’영웅을 기억하라’는 캐치프레이즈는 직접 만들었나.

“그렇다. 권위주의, 독재정권에 대한 반발 심리 탓인지 우리는 제복 입은 사람을 폄훼한다. 군인은 ‘군바리’, 경찰은 ‘짭새’라 부르지 않나. 외국 정상들은 반드시 무명용사들 비부터 참배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 국립묘지를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처럼 수많은 사람이 찾는 호국의 성지로 만들고 싶다. 6월 6일에만 반짝하는 게 아니라 1년 365일 국민과 호흡하는 곳으로. 이미 음악회, 영화제, 패션쇼를 열었다. 보훈의 가치는 미래에 있다.”

 

 ▲박민식(오른쪽에서 둘째) 국가보훈부 장관과 해리 영국 왕자 등이 대한민국과 미국·영국·우크라이나 선수들로 구성된 연합팀과 이탈리아팀의 '인빅터스 게임' 휠체어 럭비 예선전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국방부 공동취재단

◇군인 아버지가 자랑스럽다

-윤석열 대통령과는 검사 시절부터 인연이 있더라.

“중앙지검 특수1부 수석검사일 때 사표를 냈더니 중국집으로 불러내 ‘너 같은 놈은 나가서 돈 벌기 어렵다’며 만류하더라(웃음).”

 

-대통령 윤석열은 어떤가.

“보훈에 진심이시다. 말려야 할 정도로. 지난 현충일에도 갑자기 시나리오에 없던 월남 참전자 묘역과 대간첩작전 전사자 묘역에 가고 싶다고 하셔서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천안함 티셔츠는 너무 자주 입는 것 아닌가?

“일반 정치인 같으면 한두 번 스포트라이트 받으면 더는 입지 않는다. 표라는 게 천안함에만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런데 대통령은 그런 계산이 없다. 답답할 정도로 쇼와는 거리가 먼 분이다.”

 

-해병대 채수근 상병에겐 보훈부가 빛의 속도로 보국훈장을 수여했다.

“나라 위해 희생한 이들의 상처는 국가가 보듬어야 한다. 아들을 양지바른 곳에 묻어 달라는 아버님 소망도 그래서 들어드렸다. 대통령이 ‘서해 수호의 날’ 전사자 55분의 이름을 호명한 걸 기억하나. TV엔 대통령이 울컥하는 장면만 나왔지만 현장은 울음바다였다. 김춘수의 시처럼, 이름을 불러주니 잊힌 전사자들이 영웅으로 되살아왔다.”

 

-그러나 20대 남성들에게 군대는 여전히 회피하고 싶은 곳이다.

“예비군 훈련 갔다고 교수들이 결석 처리했다는 기사를 보고 화가 났다. 더 예우를 해도 모자란데 벌점이라니. 그래서 보훈부가 군 복무한 청년들에게 정신적·물질적으로 보상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히어로즈 카드’다. 일상에서 다양한 혜택을 받게 할 것이다.”

 

-월남전에서 전사한 박순유 중령은 보훈부 장관이 된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길까.

“일곱 살 때 동네 사람들이 아버지 군복을 태우며 진혼굿을 하던 장면이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학교에서 원호 대상자로 손을 들어야 할 때마다 부끄러웠다. 그런데 그런 기억들이 국가유공자 자녀를 위한 히어로즈 패밀리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한번만 만날 수 있다면 ‘아버지가 정말 자랑스럽습니다’란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

 

-홀로 6남매를 키운 어머니가 올해 87세더라.

“아버지 전사하신 뒤 매일 새벽 4시면 일어나 예불을 드리신다. 소원을 빌어야 할 자손들 사진을 올려놓고. 작년부터는 대통령과 내 사진을 올려놓고 기도하신단다(웃음).”

 

-그래서 에너지가 넘치시나?

“특수부 검사 시절 새벽에 눈을 뜨면 오늘은 어떤 센 놈을 잡아 넣을까 하며 설레었다. 지금도 비슷하다. 사명감이 솟구친다. 나라를,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사명감!”

 

-근데 사투리는 잘 안 고쳐지나 보다.

“외교부에서 일하다 검사가 됐다. 특수부 유명한 선배 검사가 ‘박 검사는 사투리가 심해서 영어가 안 된다. 그래서 외교부에서 퇴출돼 여기로 왔다’고 농담하더라. 전혀 근거 없는 얘긴 아닌 것 같다, 하하!”

 

☞박민식

1965년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88년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무부에서 재직하다 1993년 사법시험에 합격, 2006년까지 검사로 근무했다. 18대, 19대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지냈고, 2022년 윤석열 정부 국가보훈처장으로 임명됐다가 올해 국가보훈부로 승격되며 장관이 됐다.

조선일보 김윤덕 선임기자

 

 

09.20 이승만 기념관, 1만5500명 후원 35억 모여

與 청년 지방의원들도 십시일반

 ▲국민의힘 청년지방의원협의회 이상욱 서울시의원 및 회원들이 지난 19일 오후 서울 중구 이승만 재단 사무실에서 이승만대통령 기념관 건립과 관련, 성금을 김황식 재단 이사장에게 전달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남강호 기자

 

“세비를 쪼개서 모은 돈입니다. 나라의 근본을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청년 의원들이 흔쾌히 동참했습니다.”

 

19일 오후 서울 중구 배재빌딩에 있는 (재)이승만대통령 기념재단 사무실에 청년 손님 10여 명이 찾아와 500만원을 전달했다. 국민의힘 청년지방의원협의회 회원들로,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국민의힘 청년 지방의원(만 45세 미만) 310명을 대표해서 왔다. 회장을 맡은 이상욱 서울시의원은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애썼던 정치인 이승만의 신념을 존경한다”면서 “보다 많은 국민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소셜미디어에서 ‘기부 인증 릴레이 캠페인’도 진행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들을 맞이한 김황식 이사장(전 국무총리)은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은 국민들의 십시일반 모금으로 지어지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며 “더 많은 청년이 참여하도록 힘을 보태 달라”고 당부했다.

 

재단 측은 19일 기준 약 1만5500명이 후원에 동참해 35억여 원이 조성됐다고 밝혔다. 이준용(85) DL 명예회장도 1억원을 기부했다. 사랑의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서울대 등 사회 곳곳에 수백억원 규모의 기부를 해온 그는 “우리나라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이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 후원에 동참했다.

 

한편 행정안전부는 20일부터 세종시 대통령기록관에서 열리는 ‘이승만 대통령 서한문으로 살펴보는 한미 동맹의 시작’ 특별 전시에서 1953년 한미 동맹 체결 과정에서 이 전 대통령이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주고받은 외교 서한 40여 점을 공개한다고 밝혔다. 이 전 대통령은 서한에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서 한국은 전략적 중심이자 충직하고 효과적인 동맹으로서 배려되어야 한다’ 등의 내용을 적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1953년 8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가(假)조인한 뒤 이 전 대통령에게 선물한 낚싯대도 공개된다. 안대희 대통령기록관 연구관은 “당시 방한한 덜레스 미 국무장관이 이 전 대통령에게 전달한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양지혜 기자 박진성 기자

 
 
 

09.25 ‘프란체스카 여사 모국’ 오스트리아 한인회도 모금 추진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위한 해외 교민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재)이승만대통령 기념재단 관계자는 24일 “오스트리아 한인회가 최근 범국민 모금 운동에 동참할 계획을 준비 중이라고 알려왔다”고 전했다.

 

오스트리아는 이승만 전 대통령 부인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1900~1992) 여사의 모국이다. 그는 1933년 스위스 제네바를 여행하던 도중 ‘망명 정치인 이승만’을 처음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나라도 없는 데다 가난하고 스물다섯 살 많은 아시아 남자의 반려자가 되는 선택을 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세련된 매너와 영어·프랑스어·독일어 등에 두루 능한 외국어 실력 등을 바탕으로 이 전 대통령의 든든한 독립운동 동지가 되어주었다. 그는 스스로를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한국인”이라고 여겼고, 유언으로 이 전 대통령이 독립운동 시절 사용하던 태극기를 관에 넣어달라고 부탁할 만큼 남편과 대한민국을 사랑했다.

 

이 전 대통령 외교 운동의 주 무대였던 미국에서도 교민들이 지역별 한인 단체와 영사관 등을 통해 모금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재단 관계자는 “교민 여러분의 뜨거운 관심에 감사드린다”며 “해외 송금은 국제 송금 코드(Swift Code)를 입력해야 하는 등 절차가 복잡해, 재단 홈페이지의 ‘해외 후원 안내’를 참고해달라”고 당부했다. ‘해외 후원 안내’를 클릭하면 국제 송금 코드와 영문으로 기록해야 하는 수취인 정보 등이 나와 있다. 재단은 24일까지 국내외에서 약 1만7000명이 참여해 41억원이 모였다고 밝혔다.

​조선일보 양지혜 기자

 

 

09.25 “이승만 기리는 일, 하와이 동포가 빠질 순 없죠” 기념관 3만달러 기부

▲작년 7월 ‘이승만 박사 서거 57주기 추모 행사’가 이 전 대통령의 동상이 있는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에서 열렸다. 한인기독교회는 1918년 이 전 대통령의 주도로 설립됐으며 헌금을 모아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소장(앞줄 가운데)을 비롯해 하와이 교민들이 참석해 이 전 대통령의 뜻을 기렸다./건국대통령이승만재단 

 

“이승만 대통령을 기리는 일에 하와이 동포들이 빠질 순 없습니다. 최근 초대형 산불로 하와이가 혼란스러운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흔쾌히 정성이 모였습니다.”

 

하와이 동포 사회가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위해 지난 22일 (재)이승만대통령 기념재단에 3만 달러(약 4000만원)를 기부했다. 해외 동포로는 첫 사례로, 지난 18일 공식 모금 운동을 시작해 단 3일 만에 걷힌 돈이다. 하와이 한인회와 하와이의 민간단체 ‘건국대통령이승만재단’ 등 각종 단체와 교민들이 참여했다. 지난 8월 발생한 마우이섬 초대형 산불 여파로 하와이 전체가 뒤숭숭한 상황이었지만 한국에서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 추진 소식이 전해지자 일사천리로 모금 운동에 착수했다. 한 교민은 “향후 최대 5만 달러를 추가로 기부하겠다”고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향한 하와이 한인들의 마음은 각별하다. 이 전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26년간 벌였고, 4·19 혁명으로 인한 하야 후 다시 하와이로 돌아와 눈감을 때까지 5년간 지냈다. 그의 90년 생애 중 3분의 1인 31년을 보낸 ‘제2의 고향’이다. 이서영 주호놀룰루 총영사는 “하와이는 이승만 대통령이 애국지사들과 ‘대한민국’의 독립과 번영을 위해 힘썼던 역사의 현장”이라면서 “하와이 교민들의 정성이 국내외 동포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촉매제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1916년 12월 25일 하와이 호놀룰루시 인근에서 여학생 기숙사 건설을 위한 땅 고르기 작업에 나선 이승만(흰 점선) 전 대통령과 하와이 교포들. 오른쪽에서 넷째가 이 전 대통령이다. 오늘날 학교 부지엔 ‘한국 학교’를 의미하는 ‘쿨라 콜레아(Kula Kolea)’가 도로명으로 남아 있다./기파랑 제공

 

하와이는 한인들의 미국 이민 시초가 된 곳이다. 120년 전인 1903년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한인 102명이 상륙하면서 한인의 미국 이민 역사가 시작된다. 당시 하와이에 발을 디딘 한인들은 사탕수수밭에서 힘겨운 노동을 하는 상황에서도 돈을 모아 나라의 독립을 위해 기부했다. 하와이 이민 1세대들은 땡볕 아래 사탕수수 농장에서 백인 농장주의 욕설과 채찍질을 감당하며 이 섬에 뿌리내렸다. 노예 수준의 저임금을 받았지만 그 돈을 모아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 약 200만달러를 지원해 이봉창·윤봉길 의사 의거를 도왔다. 임시정부 재정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규모였다. 안중근 의사의 재판 경비도 하와이 교민들이 댔다. 현재 하와이 인구 140만명 중 약 5%가 한국계다.

 

서른여덟 독립운동가 이승만은 1913년 2월 호놀룰루에 와서 동포 5000명과 함께 ‘대한민국’ 건국을 준비했다. 교육자이자 언론 출판인, 기업인 등 여러 역할을 했고, 이 경험은 그가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자마자 의무교육과 농지개혁 등 수많은 정책에 반영시켰다. 특히 교육이 독립의 근본이라고 믿었던 이 전 대통령은 남녀공학인 ‘한인기독학원’을 설립하고 사탕수수밭 한인 노동자들의 자녀를 세계 시민으로 길러내기 위해 애썼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그는 하와이 동포들과 교감했고, “6·25 전쟁 이후 폐허가 된 조국을 재건할 인재 양성을 위해 MIT(매사추세츠공과대학) 같은 학교가 필요하다”고 뜻을 피력하자 하와이 동포들이 한인기독학원 부지를 매각해 설립 자금을 보탰다. 그 학교 터는 현재 ‘쿨라 콜레아(Kula Kolea)’라는 거리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렇게 1954년 세워진 학교가 인하공대로, ‘인천’과 ‘하와이’의 머리글자를 따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이름을 지었다.

 

하와이 동포들은 이 전 대통령 하야 후에도 그를 초청해 생을 마칠 때까지 생활비를 다 댔을 만큼 이승만의 영원한 우군이자 동지로 남았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기념관 건립 사업에 동참하며 뜻을 이었다.

 

 ▲올해 7월 열린 '이승만 박사 서거 58주기 추모행사'./건국대통령이승만재단

양지혜 기자

 

 

09.26 육사 총동창회, 이승만 기념관 건립에 1억 기부

“이 前 대통령, 육사와 인연 깊어
밴 플리트 장군에 육사 개혁 요청”

 ▲육군사관학교 총동창회의 박종선(왼쪽 셋째) 회장이 25일 서울 중구 이승만대통령 기념재단 사무실에서 김황식(왼쪽 넷째) 재단 이사장에게 육사 총동창회 기부금 1억원을 전달했다. 왼쪽부터 총동창회 김군기 사무국장·김영진 감사·박 회장, 김 이사장, 총동창회 김점술 사무국장·주영윤 기획국장. /육사 총동창회 

 

육군사관학교 총동창회가 25일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위해 (재)이승만대통령 기념재단에 1억여원을 기부했다. 공군·해군사관학교 총동창회 등 다른 군 단체도 기부 참여를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49대 육사 교장(2011~2012·중장)을 지낸 육사 34기 박종선 육사 총동창회장은 “지난 13일부터 20일까지 공식 모금 운동을 했다”면서 “많은 회원이 십시일반으로 정성을 모아 일주일 만에 1억원이 넘는 돈이 걷혔다”고 말했다.

 

육사 13기로 31대 육사 교장(1986~1987)을 지낸 최문규 장군, 육사 31기로 육군참모총장·합참의장·국방부 장관을 지낸 한민구 장군 등 620여 명의 육사인들이 참여했다. 최문규 장군은 여러 달 연금에서 떼어 모아둔 500만원을 이번에 쾌척했다고 한다. 구한말 항일 의병장인 청암 한봉수의 손자인 한민구 전 장관은 “우남 이승만 대통령은 대표적인 항일 지사이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6·25전쟁에서 나라를 지킨 애국 지사”라면서 “우리 군인의 모범이 되는 분”이라고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육사 건립의 토대를 놓은 인물로 평가된다. 육사 총동창회에 따르면, 이 전 대통령은 초대 대통령으로서 6·25전쟁 중에도 정예 장교 양성을 위해 당시 미 8군의 제임스 밴 플리트 사령관에게 육사를 미 웨스트포인트와 같은 엘리트 군 교육기관으로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밴 플리트 사령관은 웨스트포인트의 교육 훈련 제도를 육사에 도입해 지금과 같은 4년제 정규 군사학교로 탈바꿈시켰다는 것이다. 이 전 대통령은 전후 육사에 매년 방문하는 등 남다른 애정을 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대통령은 1957년 3월 육사 별칭을 ‘화랑대’로 제정한 인물이기도 하다. 육사 생도들이 신라의 화랑도 정신을 계승하라는 의미로 지었다고 한다.

 

박 회장은 “이 전 대통령은 육사와 인연이 깊고 독립운동을 직접 하셨고, 신생 자유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애국 지사 중의 지사”라면서 “육사의 정체성과 정신에 부합하는 육사인의 사표가 되기에 이번 기념관 건립 기금에 동참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부자 대부분은 연금에 의지해 살아가는 퇴역 군인이지만 육사 정신 실천에 기여한다는 자부심으로 적지 않은 돈을 흔쾌히 내놓았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노석조 기자

 

 

09.27 “이승만은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 ‘여명 808’ 남종현 회장 1억 기부

“기념관 건립, 진작 추진돼야 했던 일인데…
이번 기회로 마음 전달해 매우 기뻐”

 ▲남종현 회장. /주식회사 그래미 제공

 

숙취 해소 음료로 유명한 ‘여명 808′의 남종현(79) 그래미 회장이 (재)이승만대통령 기념재단에 1억원을 기부했다.

 

남 회장은 “이승만 전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이라며 “이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은 진작에 추진됐어야 할 일인데 이번 기회로 마음을 보탤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그는 “이 전 대통령의 공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그동안 기념관 건립은커녕 세워져있던 동상들마저 줄줄이 철거된 현실이 안타까웠다”면서 “이 전 대통령은 우리 후손들이 영원히 기억해야 할 인물이고, 그러기 위해선 기념관 건립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남 회장은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한국 선수에게 500만원을 포상하겠다는 약속도 내걸었다. 그는 “지금 중국 항저우에서 우리 선수들이 ‘대한민국’ 이름 아래서 메달 싸움을 하고 있는데,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노선을 걸어왔기에 오늘날의 영광이 있다고 본다”면서 “전직 대통령을 악마화하는 것은 모두에게 상처만 주는 비극이다. 이제는 우리 사회가 통합해야할 때”라고 했다.

조선일보 양지혜 기자

 

 

09.27 前대통령 아들들도 모금 동참하기로

100만원씩 전달할 예정

 ▲김현철(왼쪽부터) 김영삼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 김홍업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박지만 EG 회장,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이사장이 지난 25일 서울에서 저녁 식사 모임을 가졌다. /김현철 김영삼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

 

박정희 전 대통령 아들인 박지만(65) EG 회장과 노태우 전 대통령 아들 노재헌(58) 동아시아문화센터 이사장, 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인 김현철(64) 김영삼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과 김대중 전 대통령 차남인 김홍업(73)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이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 모금에 동참하기로 했다.

 

김현철 이사장은 26일 본지 통화에서 “저를 포함한 전직 대통령 2세 네 명이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 추진위 고문으로만 활동할 게 아니라 모금에도 동참하기로 뜻을 모았다”며 “똑같이 100만원씩 기념관 건립에 힘을 보태기로 했다”고 했다. 김홍업 이사장은 “모금을 한다고 해서 개인이 하든 재단 이름으로 하든 각자 편한 방식으로 모금에 동참하기로 했다”고 했다.

 

박지만 회장과 노재헌·김현철·김홍업 이사장은 전날인 25일 서울 시내에서 저녁 식사 모임을 했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이뤄진 만남에서 자연스럽게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과 관련한 대화가 오고 갔고 모금에 동참키로 뜻을 모았다고 한다. 이 넷은 지난 6월 김황식 전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이승만대통령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가 닻을 올릴 당시 추진위 고문으로 위촉됐다. 김현철 이사장은 “뜻깊은 일에 액수가 크지는 않더라도 함께 힘을 보태자는 데 모두 동의했다”고 했다.

 

전직 대통령 아들 네 명은 올해 2월 “우리끼리는 싸우지 말자”며 첫 만남을 가진 이후 지난 5월 두 번째 회동을 했다. 이번 모임을 앞두고 이들은 앞으로 각 재단이 함께 사용할 친환경 기념품을 마련했다. 스타트업 업체가 폐현수막과 폐비닐, 폐페트병을 재활용해 만든 우산인데 각 재단 명칭은 빼고 ‘다함께’라는 문구만 넣었다.

 

김홍업 이사장은 “우리가 모여서 큰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정치권 상황 때문인지 주위에서 좋게 봐주시는 것 같다”며 “앞으로도 편안하게 만나고 싶다”고 했다. 김현철 이사장은 “모두 노무현 대통령 아들 노건호씨도 앞으로 모임에 함께하면 좋겠다는 생각이어서 적극 추진하기로 했다”고 했다.

조선일보 김민서 기자

 

 

10.03 이승만 대통령 다룬 영화 만든 권순도 감독

 

퓨어웨이 픽쳐스 권순도(權純道·44) 감독이 이승만 대통령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독립영화 〈기적의 시작〉을 완성했다. 〈기적의 시작〉은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건국을 시작으로 6·25 전쟁, 대한민국 산업화의 기반을 다지는 과정 등을 그려냈다. 권 감독은 이번 영화의 제목을 〈기적의 시작〉이라고 지은 데 대해 “대한민국의 근대사는 이승만 대통령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며 “세계 최빈국이었던 대한민국이 오늘날 10위권 경제 대국이 된 시초는 공산 세력의 남하를 막아낸 이승만 대통령이었다”고 말했다.

 

권 감독은 군 복무 시절이었던 2001년 UN 평화유지군으로 동티모르에 파견됐다. 이후 배낭여행으로 73개국을 다녔으며 2007년 〈그의 선택〉을 시작으로 다큐멘터리와 영화 등을 총 13편 냈다. 주요 작품으로는 탈북민의 사연을 다룬 〈약혼〉, 유관순 열사의 이야기를 다룬 〈소녀의 기도〉, 자비를 털어 독도를 지켜낸 울릉도 청년들의 이야기인 〈독도의 영웅들〉 등이 있다.⊙

글 : 김광주 월간조선 기자 kj961009@chosun.com

 

 

10.06 박민식 보훈장관 모친·아들 3代, ‘이승만 기념관’ 건립에 1000만원 기부

▲박민식(왼쪽) 국가보훈부 장관과 모친 김순용(가운데) 여사, 그리고 박 장관의 군 복무 중인 아들. 이들 3대는 4일 이승만 초대 대통령 기념관 건립에 기부금 1000만원을 내놓았다. 국가보훈부 제공

 

모친 김순용 여사 제안으로 군 복무 아들과 함께 뜻 모아
정우택·최형두 등 여당 의원들도 기부금 행렬 동참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과 모친 김순용 여사, 그리고 현재 육군 복무 중인 박 장관 아들을 비롯한 3대(代)가 ‘이승만 기념관’ 건립을 위해 1000만원을 기부했다.

재단법인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은 박 장관이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기념관 건립에 써 달라며 기부금을 김황식 재단 이사장에게 전달했다고 5일 밝혔다.

이번 기부는 박 장관 모친 김 여사 제안에 따른 것으로서 박 장관의 급여 630만원과 김 여사의 보훈급여금 300만원, 박 장관 아들의 군 복무 월급 70만원을 모았다고 한다.

박 장관 부친 고(故) 박순유 중령은 베트남전 전사자다. 이에 박 장관 모친 김 여사는 정부로부터 보훈급여금을 받고 있다.

이와 관련 김 여사는 "나라에서 주는 남편의 보훈급여금으로 6남매를 잘 키웠다"며 "이제 그 돈을 아들(박 장관)의 제안으로 시작한 이승만 기념관 건립에 좀 더 의미 있게 쓰고 싶다"고 밝혔다.

최근 추석연휴를 맞아 외박을 나온 박 장관 아들도 "현역으로 군 복무를 하면서 할아버지(박 중령)의 헌신이 얼마나 고귀한 줄 알게 됐다"며 "할머니의 큰 뜻과 아버지가 하는 일에 얼마 되지 않지만 군 복무 급여를 함께 보태고 싶었다"고 전했다.

박 장관은 "지난해에 국가보훈처장으로 취임한 후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란 어젠다를 던졌을 때 초기 상황은 정말 어려웠지만, 이젠 거기에 대해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며 "이런 초기 동력이 (기념관 건립) 성금, 부지 등 모든 것들이 해결될 때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보훈부 장관으로서 나름 역할을 모색해보겠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여당 국회의원들 기부도 이어졌다. 정우택(국민의힘) 국회 부의장은 지난달 26일 이승만 대통령 기념 재단에 300만원을 기부했다. 그는 "잘못 알려진 역사를 바로잡고, 나라의 뿌리를 찾기 위한 여정에 동참하고자 한다"면서 "선친과 이승만 전 대통령의 소중한 인연도 가슴에 새기고 있다"고 했다. 정 부의장은 "탁월한 국제적 감각으로 대한민국의 초석을 놨던 이 전 대통령의 공적이 널리 기억되길 바란다"고 했다.

국민의힘 최형두 의원도 최근 200만원을 재단에 기부했다. 그는 "독일 현대사를 공부하면서 이 전 대통령을 재발견하게 됐다"면서 "자유민주주의와 한미 동맹 덕분에 ‘한강의 기적’이 가능했고 대한민국이 잿더미 속에서 일어났다"고 했다. 박상돈 천안시장은 지자체장 최초로 재단에 100만원을 기부하면서 "이번 기념관 건립이 앞으로 이 전 대통령 공적 재평가의 발판이 되길 소망한다"고 했다.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에 따르면 이승만 기념관 건립 후원엔 지난달 14일까지 국민 1만2000여명이 동참해 총 26억여원의 성금이 모였다.
문화일보 정충신 선임기자

 
 
 

10-12 이승만 업적 재평가 속… ‘광화문에 동상 건립’ 추진위 발족

 

인하대서도 ‘동상 복원’ 움직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70주년인 올해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업적에 대한 재평가가 일어나면서 이 전 대통령의 동상을 서울 광화문광장에 설치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동상 광화문광장 건립 추진위원회’ 준비위원장을 맡은 변정일 전 의원은 12일 문화일보와 통화에서 “이 박사가 이 나라를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건국했고, 6·25전쟁에서 나라를 지켰고 한·미 동맹을 맺음으로써 안보 불안을 해소했다”고 동상 건립 취지를 설명했다. 다만 광화문광장의 경우 이미 이순신 장군·세종대왕상이 설치돼 있고, 이 전 대통령의 공과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는 점에서 진보 세력의 반발도 예상된다. 4·19 당시 대학 1학년으로 ‘이승만 하야’를 외쳤다는 변 전 의원은 “손 놓고 있으면 영원히 안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단체는 오는 18일 창립행사를 열고 동상 건립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할 예정이다.

개교 70주년을 앞둔 인천 인하대에서도 동문 사이에서 대학 설립 주역인 이 전 대통령의 동상을 다시 세우자는 움직임이 확산하고 있다. 인하대는 이 전 대통령이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와 같은 대학을 설립해 공업을 발전시키자는 뜻을 밝힌 뒤 하와이 교포들의 성금과 한인기독교학교 매각 대금을 기초로 1954년 설립됐다. 이 전 대통령 사후인 1979년 교내 인경호 인근에 이 전 대통령의 동상(사진)이 세워졌지만 운동권 학생들에 의해 1984년 철거된 뒤 지금껏 창고에 보관되고 있다.
조재연 기자 jaeyeon@munhwa.com

 
 
 

10.18 이승만 박사의 자유민주주의와 동반성장 정신

 
 

한민족의 역사 속에서 지난 75년(1948~2023)은 눈 깜짝할 시간이라 할 정도로 짧은 기간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우리 국민이 이룬 업적은 눈부실 만큼 찬란하다. 오랫동안 우리를 옥죄던 절대빈곤에서 벗어났고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변신했다. 극동의 분단국이 자유와 풍요를 누리는 경제 대국이 되었다.

 

그 성공의 비결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국가의 기틀로 삼은 데 있다. 이를 바탕으로 토지개혁에 성공하고, 북한의 침략을 막아냈다.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도 큰 몫을 했다. 이러한 공(功)은 누구보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돌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가 북한처럼 공산 독재국가가 되었다면 우리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자유가 박탈된 곳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토지개혁과 한미방위조약 등으로
오늘날 대한민국 발전 기틀 마련
공산주의 맞서 경제적 평등 역설
함께 잘사는 사회의 가치 일깨워

아직까지도 이승만 박사는 공은 가려지고 잘못만 주로 부각되는 비운의 지도자다. 일단 한 시대를 이끌고 떠난 분들은 위대하든 아니든 그 시대로 들어가 평가되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그분들의 역사적 기여와 공로를 강조하고 가르쳐야, 우리 역사를 긍정적으로 보고 현실을 적극적으로 타개해 나가는 개척정신을 기를 수 있다.

 

내가 이승만 대통령을 직접 본 것은 1960년 4월 26일, 중학교에 막 입학했을 무렵이다. 당시 나는 이화장 부근의 동숭동 산동네에 살고 있었다. 그날 이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며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돌아왔다. 운집한 시민들을 향해 여윈 손을 흔들며 눈시울을 붉히던 노신사의 모습이 지금도 내 기억에 선명하다.

 

그로부터 52년 후인 2012년 10월 3일, 이승만 박사의 모교인 프린스턴 대학교는 한국 동문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한 강의실을 ‘이승만 렉처 홀’로 명명했다. 김종석 교수(홍익대)의 사회로 진행된 기념식에 이어 나는 자리를 옮겨 강당을 메운 청중들에게 제1회 이승만 박사 추모 강연을 했다. 제목은 ‘Hope, Compassion and the Can-do Spirit: President Syngman Rhee and Korea’s Path Forward’로, 한국은 희망, 연민, 도전이라는 이승만 정신으로 지속적 성장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강의가 끝난 후 프린스턴 대학신문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만일 그분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한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중국을 개혁·개방으로 이끈 덩샤오핑은 누구나 70%만 좋으면 좋은 사람이라며 문화혁명의 주역인 마오쩌둥을 ‘공칠과삼(功七過三)’으로 평했는데, 이 대통령은 ‘공칠과삼’보다 훨씬 높은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마침 올해는 하와이에서 활동하던 이승만 박사가 『태평양잡지』에 ‘공산당의 당(當) 부당(不當)’(1923)이란 논설을 쓴지 꼭 100년이 되는 해다. 요지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프랑스 혁명과 미국 공화제 성립 이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신분 계급 제도가 혁파되고 노예 해방이 이루어져 인민의 평등주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자본주의 발달로 빈부 격차가 생기고 경제적 노예 계층과 계급 제도가 만들어졌다.

 

공산당이 이를 평등하게 하자는 주장은 옳다. 그러나 (재산을) 균등하게 나누자는 주장은 틀렸다.’

 

이 박사는 공산주의를 ‘자유를 바라는 인간의 본성을 거역하면서 국민을 지배하려는 사상체계로 규정하고, 공산주의는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한 지 불과 6년 만에 공산당의 실체를 꿰뚫어 보고 반공사상을 확립한 이 박사의 혜안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공산주의에 솔깃한 상당수의 서구 지식인들이 러시아를 칭송한 것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이 박사는 극심한 대립을 겪던 해방공간에서 우리에게 경제적 평등의 중요성과 함께 자유민주주의라는 커다란 선물을 안겨주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저성장과 불평등을 푸는 하나의 단서는 동반성장이다. 동반성장은 ‘함께 성장하고 공정하게 나누어 다 같이 잘사는 사회’를 만드는 방안이다. 훌륭한 교육으로 길러진 인재들이 창의와 혁신으로 성장을 추구하는 동시에,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지고 경쟁은 공정하며 누구나 경제적 격차를 줄일 수 있다고 희망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함께 잘사는 사회를 이룰 수 있다. 성숙한 자유민주주의는 바로 이러한 동반성장 사회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우남 이승만 박사는 세계사의 흐름을 간파하고 조선 사회의 누적된 모순을 타파하고자 진력한 선각자요,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을 통해 국민을 일깨우고자 했던 사상가이자 탁월한 국제정치 전문가였다. 동북아는 물론 세계적으로 국제정세가 불안정할수록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의 혜안과 리더십을 높게 평가해야 한다.

중앙일보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

 

 

10.26 잊혀가는 독도와 ‘평화선’ 드라마

어제는 ‘독도의 날’
그러나 실질적으로 독도 실효 지배 완성은 이승만의 ‘평화선’ 선포
힘없는 나라가 힘에 의한 외교로 영토 지킨 한 편의 드라마

 ▲'독도의 날'인 25일 오전 대구 달서구 장기동 달서아트센터에서 열린 '독도의 날 캠페인'에 참여한 하늘정원유치원 어린이들과 구청 직원, 달서구 주민 등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도야 사랑해"라고 외치고 있다. 2023.10.25/뉴스1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어제는 ‘독도의 날’이었다. 대한제국이 1900년 10월 25일 독도를 울릉도 부속 섬으로 제정했다. 20여 년 전부터 민간 차원에서 이날을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독도의 날은 10월 25일보다는 1월 18일이 더 실질적이라고 생각한다. 1월 18일은 대한민국이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할 수 있게 쐐기를 박은 날이다.

 

대한제국이 독도 주권을 선언했다고 해도 실질적 의미가 없었다. 곧 일본에 병합돼 한반도 전체가 일본 영토가 됐으니 국제법적으로 독도도 일본에 속하게 됐다. 다시 일본이 미국에 항복하며 한국 일본의 모든 영토가 미국 관할이 됐고 독도 역시 이에 포함됐다. 독도의 곡절도 시작됐다.

 

일본 총독이던 맥아더는 ‘맥아더 라인’을 선포했다. 일본 선박이 나아갈 수 있는 한계선이었다. 독도는 맥아더 라인 밖에 있었다. 자연스레 독도는 한국에 속하게 되는 논리적 결과를 낳았다. 연합군 최고 사령관 각서 1033호도 구체적으로 일본 선박의 독도 해역 출입을 막았다. 주권이 없는 일본은 이에 항의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곧 두 가지 심각한 문제가 불거졌다. 6·25 남침으로 한국과 미국이 전쟁에 정신이 없어지자 일본 어선들이 노골적으로 맥아더 라인을 무시하고 독도 인근에 출현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1951년 일본의 주권을 회복해 주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최종 합의됐다. 독도를 놓고 한일 간 싸움에 끼어있던 미국은 아예 이 조약에서 독도를 빼버린다. 일본의 주권이 회복됨과 동시에 맥아더 라인도 무효화됐다.

 

독도 영유에 대한 국제법적 보호가 일시에 사라지는 위기가 닥쳤는데 당시 한국의 해양력은 너무나 보잘것없었다. 세계적 해양 국가인 일본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에는 외교 귀신과도 같은 이승만 대통령이 있었다. 이 대통령은 부산 피란 시절임에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발효되기 직전인 1952년 1월 18일 일방적으로 ‘평화선’을 선언했다. 바다 60해리까지 우리 영해라는 발표였다.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50해리 정도였으니 독도를 영토로 포함하기 위한 선언이었다. 당시 국제법상 영해 기준은 3해리였다.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는 이승만 라인에 일본은 물론이고 국제사회도 어이가 없었다. 중공군 개입을 맞아 함께 피 흘리며 싸우던 미국까지 반대했다.

 

세상이 모두 비난했지만 이 대통령은 평화선을 넘는 일본 배들에 사정없이 총격을 가하고 나포했다. 평화선 선포 1년 뒤에는 독도의용수비대가 독도를 지키기 시작했다. 이 대통령 입장에서 육지에선 중공과 싸우고 바다에선 일본과 싸우는 형국이었다. 1965년 한일어업협정으로 평화선이 없어질 때까지 300척이 넘는 일본 선박이 나포됐다. 4000명 가까운 일본인이 한국 형무소에 구금됐고 40여 명은 사망하기까지 했다. 일본은 독도가 자기들 영토라고 주장은 했지만 실효적 조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독도에 대한 한국의 실효적 지배는 바로 이 평화선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젊은 층은 ‘평화선’을 거의 모르지만 아무 힘도 없던 나라가 ‘힘에 의한 외교’로 영토를 지킨 드라마 같은 사례다. 6·25전쟁과 평화선 선포, 한미 동맹 체결까지 실로 이승만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이승만의 외교적 선견은 알수록 감탄하게 된다. 중공군 개입 뒤 유엔군에선 일본군 투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일본군이 오면 먼저 일본군을 물리친 다음에 중공군과 싸울 것”이라고 선언했다. 존망 위기에 빠진 나라는 외부 도움은 무엇이든 받으려 한다. 하지만 그때 만약 일본군이 왔다면 두고두고 문제가 됐을 것이다. 1953년엔 대만군 투입도 논의됐다. 대만은 같은 반공 국가였지만 이승만은 이조차 거부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중국에 눌려 발전하지 못했는데 다시 중국인 도움을 받을 수는 없다’고 했다.

 

전쟁이 끝나고 1954년 이승만은 미국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최악의 한미 정상회담을 한다. 아이젠하워가 한일 관계 정상화를 요구하자 이승만은 단호히 거절했다. 화가 난 아이젠하워가 방을 나가버렸다. 돌아온 아이젠하워가 다른 문제를 논의하자고 하자 이번에는 이승만이 선약을 이유로 퇴장해버렸다. 그는 일본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이승만은 이때 미국 의회 연설에서 “공산국가인 중국은 언젠가는 자유세계를 크게 위협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1954년 당시 중국은 몹시 낙후한 나라여서 이 예언은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일본 진주만 공격 예언처럼 69년 전 그의 중국 위협론도 오늘날 현실이 됐다.

 

이제 한국과 일본은 자유 민주 가치를 공유하고 중국, 북한의 위협에 함께 대처해야 하는 관계다. 재일 동포 고교 야구팀의 방한까지 막았던 이승만식 ‘반일’은 더 이상 국익이 아니다. 그런데 국내 일부에서 이승만을 ‘친일’이라고 매도하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힌다. 다른 사람들도 아니라 한때 정권을 맡았던 문재인 쪽 사람들 얘기다. 이들이 2019년엔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아 독립운동가 10인을 선정하면서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을 뺐다. 그들이 얼마나 무지하며 심각한 편견에 빠져있는지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수 없다.

조선일보 양상훈 주필

 

 

11.01 “反이승만 선봉에 섰던 아버지도 이승만을 한미동맹 주역으로 평가”

윤보선 前대통령 아들 윤상구
이승만 기념관 건립에 동참

해위윤보선기념사업회(이사장 김성수 대한성공회 주교)와 윤보선민주주의연구원(원장 김용호 인하대 명예교수)등 고(故) 윤보선 대통령을 기리는 기념 단체가 이승만 기념관 건립에 동참한다.

 

 ▲해위윤보선기념사업회 이사이자 윤보선 전 대통령 장남인 윤상구씨는 31일 "이승만기념관 건립에 동참하겠다"고 밝혔다.

 

윤보선 전 대통령 장남이자 윤보선기념사업회 이사인 윤상구 전 국제로터리재단 부이사장은 31일 “아버지는 이승만 정부와 싸운 적은 있지만 이 대통령을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주역이면서 한미 동맹을 이끈 주인공으로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했다고 평가하셨다”면서 “김성수 이사장과 김용호 원장도 국민 통합 차원에서 이승만 기념관 건립에 참여하는 데 흔쾌히 동의하셨다”고 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아들 박지만 EG 대표이사, 노태우 전 대통령 아들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이사장, 김현철 김영삼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 김홍업 김대중평화센터이사장 등 전직 대통령 아들 4명이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에 참여한 데 이어 이승만 대통령과 직접 맞섰던 윤보선 대통령 아들까지 기념관 건립에 나선 것이다.

 

윤보선 대통령은 광복 직후 한국민주당(한민당) 창당에 참여했고, 1948년 정부 수립 직후 서울시장과 상공부 장관으로 발탁될 만큼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다. 하지만 1952년 이 대통령 재선을 위한 발췌개헌안 통과 이후 결별했다. 1954년 한민당을 계승한 민국당 국회의원 후보로 정치 1번지 종로에서 당선됐다.

 

1955년 현 야당의 뿌리인 민주당을 창당, 중앙위원회 의장, 최고위원을 맡으면서 반(反)이승만 대열의 중심에 섰다. 3·15 부정선거 때는 민주당 조사단장을 맡아 “마산 시민 봉기는 애국 시민의 의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대통령이 4·19로 하야한 이후 민·참의원 합동회의에서 대통령에 선출됐다.

 

윤상구씨는 “아버지는 상해 임시정부 시절부터 이 대통령과 인연을 맺어왔다”면서 “밑에 있는 분들이 이 대통령과 아버지 사이를 안 좋게 만들었지만 실제론 오래된 인연”이라고 했다. 또 “(이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병석에 있을 때 어머니(공덕귀 여사)를 모시고 병문안하러 간 적 있다”면서 “프란체스카 여사가 돌아가셨을 때도 어머니가 장례식에 참석해서 추도사를 하셨다”고 말했다.

 

윤보선기념사업회와 윤보선민주주의연구원은 2일 오후1시30분 서울 종로2가 YMCA에서 여는 심포지엄 ‘한미일 협력의 역사와 미래’에서 이승만기념관 건립 기부금 500만원을 전달할 예정이다.

조선일보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11.12 “추운 날씨 걱정” 방한 6·25 참전 용사에 패딩 선물한 회장님

박민식 “약 3000만원 지원… 따뜻한 뉴스, 큰 박수 쳐드리자”
김 회장, 7월엔 다부동 전적지에 이승만·트루먼 동상 세워

 ▲6·25 참전 용사를 기리기 위해 방한한 참석자가 김박 회장이 선물한 패딩을 입고 있다./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페이스북

 

김박(81) 앨트웰 회장이 6·25 참전 용사를 추모하는 기념식인 ‘턴 투워드 부산’에 참석한 6·25 참전 용사와 후손들을 위해 방한 패딩을 선물했다. 앞서 김 회장은 경북 칠곡군 다부동 전적지에 백선엽 장군 동상과 이웃해 이승만 대통령, 트루먼 미 대통령 동상을 세우는 일을 주도했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11일 페이스북에서 “추운 날에 따뜻한 뉴스 하나 올린다”며 이 같은 소식을 전했다. 박 장관은 “어제 받은 문자”라며 “우리나라를 방문한 76명의 UN군 6·25 참전 용사와 그 후손들이 이 추위에 감기가 걸릴까봐, 김박 회장이 이분들께 방한 패딩 입혀드려야겠다는 내용”이라고 했다.

 

▲김박 회장이 지난 10일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페이스북

박 장관은 “즉시 연결해 드렸다. 약 3000 만원!” 이라며 “73년전 이름도 모르는 나라를 도와주러 달려왔던 노병들의 헌신을 결코 잊지 않겠다. 김박 회장님에게 큰 박수를 쳐 드립시다”라고 했다.

 

박 장관이 올린 문자 메시지 사진을 보면, 김 회장은 “참전 용사분들이 한국에 오신 것 같은데 고령이신데 갑자기 추운 날씨에 감기드실까 걱정됩니다. 패딩 자켓을 준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비용은 소생이 지불하겠습니다”라고 박 장관에게 문자를 보냈다.

 

▲김박 회장이 지난 8월 서울 강남구 알트웰 빌딩에서 진행된 본지 인터뷰에서 이승만 대통령 동상 제작과 관련해 이야기기하고 있다./이태경 기자

 

김 회장은 한미 동맹 70주년인 올해 7월 다부동 전적지에 이승만·트루먼 대통령 동상을 세웠다. 김 회장이 지난 2016년 ‘이승만·트루먼·박정희동상건립추진모임’을 만들고, 동상 건립 비용 15억원을 자비로 지불했다.

 

이와 관련, 김 회장은 지난 8월 본지 인터뷰에서 “두 분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건 트루먼 대통령 퇴임 후인 1954년 8월 미국 미주리주의 자택이었다고 한다. 그후 69년 만에 다부동에서 재회한 것”이라며 “(다부동 전투는) 최초의 한미 연합 작전으로 인천상륙작전의 토대가 됐으니 양국의 최고사령관을 모시기에 그 이상의 자리는 없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김 회장은 앨트웰민초장학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2000년 재단을 설립해 매년 100여명의 장학생을 선발해 장학금을 준다. 작년까지 총 763명이 205억원의 장학금을 받았다고 한다. 김 회장은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일 ‘2023 지방시대 엑스포 및 지방자치·균형발전의 날 기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 중 최고 등급인 무궁화장을 수상했다.

조선일보 김정환 기자

 

 

11.13 建國 부정 세력의 왜곡에 맞서 ‘진짜 이승만’ 보여주니 국민이 울었다

[김윤덕이 만난 사람]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시로 기념관 건립 초석 다진 안병훈

 ▲조선일보 퇴임 후 보수를 표방한 출판사 기파랑을 차린 안병훈 대표는 가장 아끼는 책으로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을 꼽았다. /남강호 기자

 

1995년 2월 4일 예술의전당에서 개막한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시는 일종의 도박이었다. 당시만 해도 ‘이승만’이란 이름은 ‘독재자’를 연상시키는 금기어였다. 이승만의 생애를 너비 7m, 길이 44m에 달하는 거대 연표와 사진으로 구성한 전시 기법도 낯설었다. 망하기 딱 좋은 전시였다.

 

그러나 첫날부터 대성황을 이뤘다. 일부 대학생이 몰려와 ‘반(反)이승만’ 구호를 외쳤지만 전시를 보고 나온 관람객들이 “전시부터 본 뒤 데모하든 말든 하라”며 학생들 손을 잡아 이끌었다. 개막 20일 만에 관람객 10만명을 돌파, 전국 순회전까지 40만명에 이르는 관객을 끌어모았다.

 

이 파격 전시를 기획한 이가 안병훈(85) 당시 조선일보 편집인이다. 그는 “서거 60년이 되어서야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는 데에 만시지탄을 느낀다”고 했다.

 

◇이승만이 금기어였던 시대

-1995년 ’이승만 전시’는 이 대통령을 본격 조명한 사실상 첫 시도였습니다. 근 30년 전 어떻게 그런 발상을 했는지요.

“편집국장 시절부터 내 숙원이었어요. 건국 대통령이자, 한국 근현대사에서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이 거인을 우리가 이렇게 괄세해도 되나 하는 반성에서 출발했지요.”

 

-4·19 세대인데 이승만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습니까?

“대학 4학년 때 4·19혁명을 겪었고 종로에서 데모대에도 합류했지만 적개심은 없었어요. 하야를 결정한 뒤 ‘이제 한 사람의 국민으로 돌아왔으니 관용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집으로 가겠다’고 한 대통령 뒤를 따라 시민들도 함께 걷던 모습을 잊지 못해요. 이화장에 들어간 대통령이 나무를 손질하려는 듯 전지가위를 들고 나타나자 담장 밖 시민들이 환호했지요. 비록 하야는 했지만 국민한테 버림받은 건 아니었어요.”

 

-그래서 장례식 인파가 엄청났군요.

“영구차가 나가는데 광화문의 인도와 차도가 애도 인파로 가득 찼어요. 그때 나는 조선일보 수습기자여서 광화문 한 건물 옥상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봤던 기억이 납니다.”

 

-이승만이란 이름은 왜 금기시됐을까요?

“하야 후 30년 동안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려는 세력이 이 대통령의 숱한 공적은 외면하고 과오만 내세워 왜곡한 탓이지요. 바로잡으려는 학자도 거의 없었고요. 그러다 보니 국민 마음에서 점차 이승만이 떠나버렸습니다.”

 

-신문사 안에서도 전시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고요.

“이승만 때문에 부수가 떨어질까 봐서(웃음). 그만큼 (이승만이) 인기가 없었어요.”

 

-개막까지 거의 10년을 준비했다고요.

“1986년부터 미국과 일본 등지에 나가 이승만 관련 사진 1000여종과 문서를 수집했지요. 각종 저서와 친필 유묵까지 모두 1260여 점을 모아 거대한 연보를 제작한 겁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도배하다시피 했지요.”

 

-관객이 왜 그렇게 많이 왔을까요?

“진짜 이승만을 본 거예요. 우리 근현대사가 얼마나 왜곡돼 왔는지 깨달은 거죠. 이 대통령에 대한 일종의 미안함이었을 겁니다.”

 

-진짜 이승만이란 어떤 이승만입니까?

“이승만은 우리 역사의 흐름을 바꿔놨어요. 군주전제정의 막을 내리고 민주공화정 대한민국을 만들어 첫 대통령이 된 인물이죠. 김일성이 스탈린, 마오쩌둥과 합작해 일으킨 남침 전쟁에서는 유엔군 참전을 이끌어내 땅을 단 한 평도 빼앗기지 않고 나라를 지켜냈어요. 서방 세계 지도자들에게 뭇매를 맞으면서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쟁취했고, 이 방위조약이 휴전선상의 ‘만리장성’이 되어 지난 70년 동안 한반도 평화를 지속시킨 겁니다.”

 

 ▲광복 50주년과 창간 75주년을 맞아 1995년 2월 5일부터 3월 7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최된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展./조선일보 DB

◇김대중의 유연한 정치력

-전시 개막식에 ‘조용필 마이크’를 설치했다는 건 무슨 얘기인가요?

“김영삼 대통령을 전시에 초대했더니 청와대에서 질이 좋은 마이크를 준비해 달라고 하더군요. 수소문했더니 조용필 밴드가 쓰는 마이크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거라고 해서 직접 빌려 왔어요. 그런데 정작 축사는 안 하고 가시는 바람에 쓸모가 없게 됐지요(웃음).”

 

-3년 뒤 열린 ‘대한민국 50년, 우리들의 이야기’는 이승만 전시의 속편이었죠? 이 대통령의 취임 선서 육성으로 시작하는 이 전시도 첫날부터 관객이 꼬리를 물고 밀려들었더군요.

“IMF 위기 때 희망과 용기를 준 전시였죠. 무너진 경제에 탄식하던 국민들이 부모 세대가 어떻게 국난을 극복해왔는지 전시를 통해 본 겁니다. 한 초로(初老)의 여성은 실물로 재현한 가발 공장 앞에서 눈시울을 붉히며 한참을 서 있더군요.”

 

-김대중 대통령이 개막식에서 대한민국 50년을 자랑스러운 역사라고 평가해 다들 놀랐다고요.

“‘공산주의자들 반대를 물리치고 건국한 과정부터 6·25의 시련을 극복하고 한강의 기적을 이룬 대한민국 역사는 자랑스러운 것’이라고 했지요. 그런 연설을 DJ가 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이승만의 건국, 박정희의 산업화를 인정하고 자신은 민주화를 완성했다고 정의한 겁니다.”

 

-2000년에 열린 ‘아! 6·25′ 전시는 남북 정상회담으로 무산될 뻔했다던데요.

“전시가 김일성 남침을 강조하는 내용이라 중단 위기에 처했지요. 그런데 오히려 정부에서 정상회담과 상관없이 전시를 추진하라고 하더군요. 평양을 다녀온 김대중 대통령 내외도 개막식에 오셨습니다.”

 

-DJ에겐 정치적 유연함이 있었군요.

“문재인과는 달랐어요. 언론과 잡음이 나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한 거죠. 나는 DJ의 사상은 싫어하지만 그가 나라를 위해 잘해보려고 애썼던 건 인정합니다.”

 

 ▲1952년 12월 극비리에 한국을 방문한 미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가 미군부대를 사찰하던 도중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태극기를 선물 받는 모습. /기파랑 제공

◇건국 대통령 찬양이 우상화?

-최근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어 기쁘시겠습니다.

“기쁘지요.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언급하고 정부가 관여해 부지 매입 등을 상의해주니 아주 희망적이에요.”

 

-’이승만 우상화’라는 비판도 있습니다만.

“미국을 비롯해 선진국 어느 나라도 자기네 건국 대통령을 국민이 찬양하는 것을 두고 우상화라고 비판하지 않아요. 국민 마음이 살아 움직여 자발적 모금 운동이 일어난 것을 우상화라고 할 수 있나요. 오히려 이렇게 늦어진 것을 부끄러워해야지요.”

 

-배우 이영애씨는 기념관 건립에 기부했다가 공격받고 있습니다.

“새로운 일이 아니라 놀랍지도 않아요. 이승만을 폄훼하려는 세력은 언제나 그랬으니까요. 참 나쁜 사람들입니다.”

 

-퇴임 후 출판사 기파랑을 세운 것도 이 대통령 때문이라던데 사실입니까?

“퇴임해 서점에 가 보니 좌편향 출판물 일색이더군요. 보수의 가치를 지키려는 학자들 책을 내주는 출판사는 거의 없었어요. 이영훈, 박지향 교수 등이 집필한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이 여러 곳에서 퇴짜를 맞았다는 얘기를 듣고 결심했습니다.”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이란 책도 내셨지요?

“건국 대통령 위상에 걸맞은 책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전 세계에 흩어진 이승만 관련 사진을 모은 뒤 이승만 연구자들의 저서, 맥아더·트루먼의 회고록, 올리버·밴플리트·정일권 등 이승만과 접촉한 사람들의 증언, 주고받은 편지, 신문·통신문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자료를 인용해 제작했지요.”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진이 있습니까?

“이승만 대통령이 아이젠하워 대통령, 그리고 맥아더 장군과 찍은 사진이에요. 6·25에 유엔군을 참전시키고, 정전 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내는 역사적 장면이지요.”

 

-태영호 의원의 ‘3층 서기실의 암호’는 기파랑의 베스트셀러지요?

“18만부가 나갔으니까요. 기파랑이 망하지 않게 기여해준 책이죠(웃음). 역사를 바로잡으려고 펴낸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도 여러 산고를 겪었지만 4만부가 나갔어요. 젊은이들이 기파랑 책을 통해 우리 역사를 바로 보게 되었다고 말해줄 때 큰 보람을 느낍니다.”

 

 ▲1948년 10월19일 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가 일본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을 하네다 공항에서 맞이하는 모습. /기파랑 제공

◇돈도 권력도 펜대를 꺾을 수 없어

-정치는 왜 안 하셨습니까.

“YS가 비서실장을 제안했지만, 나는 신문기자로 일생을 끝내고 싶었습니다.”

 

-박근혜 경선 캠프엔 참여하셨지요?

“여성이 도와달라고 하니 거절할 수 없더군요(웃음).”

 

-정치부장 시절 인연이 있던데요.

“박정희 정권 시절 김영삼 총재가 제명당한 기사를 크게 썼더니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회사에 해임 압력을 넣었지요. 그런데 당시 영애였던 박근혜가 이를 대통령에게 보고해 김재규가 호되게 야단맞고 나를 복직시킨 일이 있어요. ‘김재규가 자른 안병훈 목을 박근혜가 다시 붙여줬다’는 우스개가 한동안 회자됐지요(웃음). 하지만 박 대통령은 누구와 안다고 해서 깊은 친분을 드러내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7인회의 한 사람 아니었나요?

“7인회는 언론에서만 떠들었지 실체는 없는 모임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자문했는지 몰라도 나는 아니예요. 경선 패배 후 일체 만난 적이 없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됐을 때 충격을 받으셨겠네요.

“그분 성격과 대인 관계 스타일이 독특해서…. 여성이라 당한 것도 크지요.”

 

-김재순 전 국회의장과의 대담집 ‘어느 노정객과의 시간여행’을 펴냈더군요.

“기파랑을 차릴 때 그분이 있던 샘터 사옥에 사무실을 얻고 출판에 대해 많이 배웠어요. 학구적이고 품격 있는 정치인이었죠. 회고록은 한사코 싫다고 해서 저와 대담하는 형식으로 구성한 책입니다.”

 

-책의 마지막에 ‘당신 인생은 한마디로 뭐였냐’고 묻자 김 의장이 ‘그저 열심히 살았습니다’라고 하더군요. 똑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뭐라고 답하겠습니까.

“나 또한 주어진 모든 일에 몰두했어요. 일에 미쳐서 살았지요(웃음).”

 

-시계를 되돌릴 수 있다면 언제로 가고 싶은가요?

“편집국장 시절이죠. 그때는 신문에 힘이 있었어요. 쓰레기를 줄이자고 캠페인을 하면 온 국민이 쓰레기 줄이기에 동참했고, 샛강을 살리자고 하면 기업도 나섰지요.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 캠페인을 할 땐 빌 게이츠가 조선일보를 방문했어요. ‘당신 손끝에 모든 정보를(Information on Your Fingertips)’이란 문장을 쓰고 갔지요.”

 

-다시 태어나도 기자가 되겠습니까.

“다른 걸 해본 적이 없어서(웃음).”

 

-후배 기자들에게 조언해주신다면.

“진실 편에 설 때 언론은 살아요. 진실을 외면하면 언제고 위기가 오지요. 돈도 권력도 펜대를 좌지우지할 수 없어야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통령 경선 후보였던 시절 공동선거대책본부장으로 참여했던 안병훈 대표(오른쪽). /조선일보DB

☞안병훈

1938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법대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조선일보 정치부장, 편집국장, 편집인, 부사장을 지내며 ‘쓰레기를 줄입시다’ ‘샛강을 살립시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 등 전 국민 캠페인을 주도했다. 퇴임 후 ‘통일과 나눔’ 재단 이사장을 지냈으며,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생애’ ‘어느 노정객과의 시간여행’ 등을 펴냈다.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조선일보 김윤덕 선임기자

 

 

11.20 송현동 '이승만 기념관'과 오세훈의 선택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과 마지막 주석을 지냈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역임한 이승만(1875~1965). 평생을 항일 투쟁과 건국 운동에 바쳤고 6·25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지켜낸 그의 업적을 후대에 알리기 위한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 사업이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6월 28일 각계 인사들이 참여한 건립추진위원회가 발족했다.

 

▲전국의 초중생 40여명이 이승만대통령기념관 모금 운동에 동참한 모습.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

 

지난 9월 11일 시작한 모금 운동은 2개월여 만에 국내외에서 남녀노소 2만6000여명이 동참해 이미 60억원을 돌파했다. 추진위는 최소 320억원, 가능하면 1000억원까지 모으겠다는 각오다. 지난 9월에는 초·중생 40여명이 서울 중구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을 참관하고 성금을 전달했다. 육사 동창회, 해병대 전우회, ROTC 중앙회 등 군인 가족의 참여가 눈에 띈다.


미국·일본·스페인 등 교민들의 성금도 답지하고 있다. 싱가포르 교포 사업가는 10억원을 쾌척했고, 이 대통령의 해외 독립운동 근거지였던 하와이 교민들은 별도 모금 운동을 펴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500만원을, 오세훈 서울시장이 400만원을 냈다. 한류스타 이영애(52) 씨도 5000만원을 기탁했다.

 

추진위 "최적의 공간은 송현동"
오 시장 "의견 모이면 적극 검토"
분열 극복, 통합 기회로 삼아야

 

추진위는 더 많은 20~30세대의 참여를 위해 전국 순회 토크 콘서트('함께 대한민국과 이승만을 논하다')를 시작했는데, 지난 15일 영남대 행사장에 대학생 등 200여 명이 몰렸다. 기념관 추진 상황을 듣기 위해 김황식(75) 추진위원장을 만났다. 전남 장성 출신으로 대법관·감사원장·총리를 역임한 그는 각계의 추천으로 '이승만 대통령기념재단' 초대 이사장과 추진위원장을 맡아 동분서주하고 있다.

 

▲각계 인사들이 참여한 이승만대통령기념관 추진위원회.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

 

-추진위 발족 5개월의 소회와 성과는.
"많은 국민과 교민이 동참 의향을 밝혀 고무적이다. 이 대통령과 동시대를 살았던 국민이 이제 극소수인데도, 이 대통령과 그 시대에 대한 역사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그만큼 기념관 건립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박정희·노태우·김영삼·김대중 등 전직 대통령 가족들도 추진위에 참가했다.
"특정 정파나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다. 4·19 혁명 세대가 지난 3월 국립서울현충원 이승만 묘역을 참배해 화해했고, 이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 박사가 작고하기 전에 4·19 민주 묘지에서 희생자와 유족에게 사과했다. 이 대통령의 역사적 공과(功過)를 사실대로 밝히고 국민 통합을 이루는 것이 목표다."


-국민께 전할 메시지는.
"이 대통령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을 늘 하셨다. 갈등과 분열이 심한 우리나라에 지금 가장 절실한 가치가 통합이다. 작은 차이를 극복해 크게 단합해야 한다. 기념관 건립을 국민이 하나 되는 계기로 만들 것이다. 기부금 액수보다 더 많은 국민이 동참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 박사가 지난 9월 1일 서울 강북구 수유동 4·19 민주 묘지에 설치된 유영봉안소를 참배하고 희생자와 유족에게 사과하고 있다. [뉴스1]

 
 

그렇다면 기념관 부지 물색은 어떻게 되고 있을까. 지난해 8월 '이승만 VR 기념관' 제작을 주도했던 손병두(82) 전 서강대 총장은 추진위원 겸 부지선정위원장으로 뛰고 있다. 부지선정위원들은 용산공원·배재학당·청와대 등 여러 후보지의 장단점을 검토해 송현동 부지가 최적지라는 의견을 최근 오세훈 서울시장을 면담해 전달했다.


-왜 송현동이 최적지인가.
"이 대통령이 이왕가(李王家)를 설득해 송현동 부지를 주한미국대사관 숙소로 활용해오다 1997년 돌려받았다. 한미동맹을 성사시킨 이 대통령과 인연이 깊은 땅이다. 1948년 정부 수립을 선포한 중앙청(경복궁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 바로 옆이 송현동이다. 대한민국의 상징 거리인 광화문과 가까워 접근성이 좋다."


-앞으로 남은 절차는.
"송현동 기념관은 '열린 송현 녹지광장' 3만7117㎡의 극히 일부(약 3300㎡)를 활용하자는 것이다. 서울시에 부지 사용 허가를 요청한 상태다. 오세훈 시장은 '의견을 모아주면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빈 땅이라 허가만 나오면 내년 봄에 착공해 2026년 8월까지 완공이 가능하다. '이건희 기증관'과 연계해 저층(지상 3층)으로 잘 설계하면 세계적 명소가 될 거라 확신한다."

 

▲여권의 차기 주자로 거론되는 오세훈 서울시장,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 한동훈 법무부 장관. [중앙포토, 연합뉴스] 

 

대한민국의 안보와 경제 번영의 주춧돌을 놓은 초대 대통령의 기념관이 없는 현실은 개탄스럽다. 이 대통령의 손자 이병구(54)씨는 "기념관이 국민 통합의 상징적 공간이 된다면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기뻐하실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제 오 시장의 결단만 남았다. 오 시장은 차기 후보군으로 거론되는 유망한 정치인이다. "보수의 정체성이 약하고 좌고우면한다"는 일각의 의구심을 떨칠 호기다. 송현동 '이승만 기념관'이 오 시장에게 화룡점정(畵龍點睛)의 한 수가 될지 주목된다.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11-23 이승만기념관 최적지는 서울 송현동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 前 서울대 교수

 

2010년 무렵, 여수엑스포 유치를 위해 재계의 어느 인사가 체코를 방문했을 때다. 바츨라프 하벨 전 대통령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네 나라는 어떻게 해서 공산화의 위기를 모면했습니까?” 체코는 마르틴 루터보다 100년 앞서 종교개혁의 횃불을 올린 나라다. 유럽에서 자유의 전통이 가장 깊은 국가다. 그런 나라도 좌우합작, 곧 공산주의와 타협하는 길에 들어섰다가 공산화의 재앙을 면치 못했다. 체코에 비한다면 한국은 자유의 전통이 거의 없는 나라다. 그런데도 어찌해서 그 재앙을 면했는가. 하벨 대통령은 그를 찾아온 한국의 유력 인사에게 평소의 궁금증을 던진 것이다.

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우리나라엔 자유 이념의 강력한 신봉자인 이승만이란 인물이 있었고, 해방 후 대다수 한국인은 그를 믿고 따랐다”이다. 1945년 한국을 해방한 미국과 소련은 좌우합작의 임시정부를 세우고 이를 일정 기간 신탁통치한 다음 독립시킬 계획이었다. 두 점령국의 위세를 거부하기는 힘들었지만, 이승만은 한사코 저항했다. 이승만은 외쳤다. “공산주의는 콜레라와 같다.” “몸의 반쪽에 병이 들었으면 나머지 반쪽의 건강을 지킨 다음, 병든 반쪽의 건강을 회복할 일이다.” 미군정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남한 주민의 3분의 2 이상이 벌써 그를 ‘국부(國父)’라 칭하면서 추종했기 때문이다.

독립을 선포한 뒤 껍데기뿐인 나라에 내실을 채우는 과업도 거의 이승만 개인의 신념에 의존했다. △대통령중심제 정부와 대통령 국민 직선제 △양원제 국회와 지방의회 및 지방자치 △평화선 선포와 독도 편입 △반공포로 석방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귀속재산 불하와 자유기업제 정착 △문맹 퇴치와 교육 혁명 등 집권 12년간 그가 이룩한 이 업적 위에 오늘날의 번영이 구가된다. 이 모든 과업은 야당의 격렬한 반대 속에서, 때로는 심각한 정변을 초래하면서 관철됐다. 야당과 지식인은 헌정 수호를 외치며 그를 독재자라 비난했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의 지지는 견고했다.

우리나라는 1894년 갑오개혁 이래 파란만장한 근대사에서 어느 특정 정치가가 그에게 부여된 카리스마를 오로지 건실한 국민국가의 수립을 위해 투여했던 축복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1965년 그의 주검을 맞은 박정희 대통령은 그에게 바친 추도사에서 “과연 역사를 헤치고 나타나 자기 몸소 역사를 지었다”고 했는데, 정말이지 이 말은 이승만 대통령의 평가로선 더없이 훌륭한 수사다. 그런데도 나라에서는 여태 그를 기리는 기념관 하나 짓지 못했다.

윤석열 정부 들어 드디어 ‘이승만대통령기념관’이 건립된다. 서울시 소관인 송현문화공원 예정지의 일부도 후보지라고 한다. 공원 부지에 접해선 삼성가가 국가에 기증한 미술품을 전시할 이건희미술관의 건립도 예정돼 있다. 몇 년 뒤 이들 시설이 어울리게 들어서면 송현문화공원은 인근의 경복궁 및 국립현대미술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더불어 국내외의 전 관심을 모으는 최고급 역사·문화공간이 될 것이다. 당초 오세훈 서울시장이 공원 부지로 약속한 땅이다. 기념관의 건립은 그 약속에 배치되지 않으며, 오히려 선진 대한민국의 품격을 높이는 데 기여할 것이다. 오 시장의 남다른 추진력을 높이 평가하며 역사의 밝은 내일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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