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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雜事(한국사) 2023-3/ 09-09 중·이슬람양식에 전통 접목한 ‘간의대’ - 12.29 그림자도 쉬어 가는 곳, 그곳에 서린 핏빛 권력 다툼

상림은내고향 2023. 12. 13. 17:32

역사속의 雜事(한국사) 2023-3/

09-09 중·이슬람양식에 전통 접목한 ‘간의대’… 세종이후 매일 밤 천문 관

▲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관상감’ 이 남긴 천문과학 유산

천체 운행 측정한 ‘혼천의’
일종의 천문시계 기능
지구본 모양의 우주본 ‘혼상’
당시 최고의 과학 결정체

해그림자로 시간 아는 해시계
앙부일구는 절기도 알게 해줘

측우기는 강우량 측정장비
현대적 계측기와도 비슷
서양보다 200년이나 앞서


간의대와 각종 천문 관측기구들

관상감 관원들은 조선 천문 과학의 유산들을 남겼는데, 우선 간의대를 꼽을 수 있다. 경복궁의 경회루 북쪽에 설치된 석축 간의대는 높이 6.3m, 길이 9.1m, 넓이 6.6㎡의 천문관측대였다. 이 간의대에는 혼천의, 혼상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간의대와 주변 시설물들은 중국과 이슬람 양식에다 조선의 전통 양식을 혼합한 것이었는데, 1438년(세종 20년) 3월부터 이 간의대에서 서운관(관상감) 관원들이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간의대에 설치된 혼천의란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는 기계로 중국 고대 우주관 중 하나인 혼천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혼천의는 천구의와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된 것으로써 일종의 천문시계 기능을 하고 있었다. 또 간의대에 설치되었던 혼상은 일종의 우주본으로 지구본처럼 둥글게 되어 있으며, 둥글게 만든 씨줄과 날줄을 종이로 감싼 모양이다. 어설프게 보이는 이 천문관측기는 당시로는 최고의 과학적 결정체였다.

이 외에도 간의대에 방위와 절기, 시각을 측정하는 도구인 규표와 태양시와 별의 시간을 측정하는 일성정시의가 설치되어 있었다.

 

각종 시계와 측우기, 활자

천문학의 발전은 시계의 발명을 가져왔다. 당시의 시계는 해시계와 물시계로 대표되는데, 해시계는 앙부일구·현주일구·천평일구·정남일구 등이 있었으며, 물시계는 자격루와 옥루가 있었다.

해시계를 일구(日咎)라고 한 것은 해 그림자로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구들은 모양과 기능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인 앙부일구는 그 모양이 ‘솥을 받쳐놓은 듯한(仰釜)’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이것은 혜정교와 종묘 남쪽 거리에 설치되어 있었다.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는 규모가 작은 일종의 휴대용 시계였고 정남일구는 시곗바늘 끝이 항상 ‘남쪽을 가리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장영실 등이 만든 앙부일구는 단순히 해시계를 발명했다는 측면 외에 더 중요한 과학적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다른 나라의 해시계가 단순히 시간만을 알 수 있게 해준 데 반해 앙부일구는 바늘의 그림자 끝만 따라가면 시간과 절기를 동시에 알게 해주는 다기능 시계였기 때문이다. 또한 앙부일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반구로 된 해시계였다. 앙부일구가 반구로 된 점에 착안해서 그 제작 과정을 연구해보면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당시 사람들이 해의 움직임뿐 아니라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지금과 같은 지구 구형설이나 지동설에 따른 것이 아니라 혼천설에 따른 것이었다.

해시계는 이처럼 조선의 시계 문화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다주었지만 기능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 해시계는 해의 그림자를 통해 시간과 절기를 알게 해주는 것이었기에 흐린 날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 이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물시계였다.

물시계로는 자격루와 옥루가 있었다.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시보장치가 달린 이 물시계는 일종의 자명종 시계다. 1434년 세종의 명을 받아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고안한 자격루는 시, 경, 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종, 북, 징을 쳐서 시간을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1437년에는 장영실이 독자적으로 천상시계인 옥루를 발명했고, 세종은 경복궁에 흠경각을 지어 옥루를 설치했다. 옥루는 중국 송·원 시대의 모든 자동시계와 중국에 전해진 아라비아 물시계에 관한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한 끝에 고안한 독창적인 것으로서 중국이나 아라비아의 시계보다 훨씬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해시계·물시계와 더불어 천문학의 발전으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뜻깊은 발명품은 측우기였다. 측우기는 1441년에 발명되어 조선시대의 관상감과 각 도의 감영 등에서 강우량 측정용으로 쓰인 관측 장비로, 현대적인 강우량 계측기와 유사하다. 이는 갈릴레오의 온도계나 토리첼리의 수은기압계보다 200년이나 앞선 세계 최초의 기상 관측 장비다. 측우기의 발명으로 조선은 새로운 강우량 측정 제도를 마련할 수 있었고, 이를 농업에 응용하게 되어 농업기상학에서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룩하였다. 또 강우량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 홍수 예방에도 도움이 되었다.

 

조선의 ‘위대한 손’ 장영실과 세종의 과학 혁명

조선 천문 과학을 논하자면 장영실을 빼놓곤 이야기할 수 없다. 그는 세종의 과학 정책을 현실화시킨 ‘위대한 손’이었기 때문이다.

장영실에 대해 ‘세종실록’은 그의 아버지가 원나라 소항주(蘇杭州) 사람이며 어머니가 기생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가 동래현의 관노 신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장영실의 성씨를 감안할 때, 그의 아버지는 원나라 사람이긴 했지만 몽골인이 아닌 한족이었고, 장영실이 관노였다는 사실을 통해 그의 어머니는 관비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장영실은 몽골 지배 시절의 한족 아버지와 고려 동래현에 예속된 관기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였다는 뜻이다.

동래의 관노 신분인 장영실을 궁궐로 불러올린 사람은 태종이었고, 그의 뛰어난 능력을 알아본 사람은 세종이었다. 세종은 관노 신분이었던 장영실을 종3품 대호군의 벼슬까지 주면서 능력 발휘를 독려했다.

세종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장영실이 일궈낸 과학적 쾌거를 열거하자면 대표적으로 혼천의, 혼상, 물시계, 해시계, 측우기, 간의대, 갑인자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장영실 혼자 이 일을 해낸 것은 아니었다. 주로 정초와 정인지, 세종 등이 이론과 원리를 설명하고 이순지·김담 등이 수학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이천이 현장을 지휘했다. 하지만 실제 이 기계들을 제작한 기술자는 장영실이었다.

장영실이 세계 과학사에 빛나는 업적들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의 뛰어난 지도력과 안목 덕분이었다. 학문은 물론이고 기술적인 측면에도 지대한 관심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세종은 측우기의 제작에 왕세자를 직접 참여시키는 열성을 보였는가 하면, 출신 성분과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학자와 기술자를 등용하기도 했다. 장영실은 세종의 그와 같은 실용적 가치관에 힘입어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조선은 과학 혁명을 이룰 수 있었으며 15세기 문예부흥을 구가할 수 있었다.


■ 용어설명 - 혼천설(渾天說)

중국 고대에 형성된 우주 개념 중 하나다. 고대 중국에서는 우주의 원리에 대해 개천설과 혼천설이 대립했는데, 개천설(蓋天說)에서는 우주의 모양에 대해 하늘이 땅 위를 덮고 있는 형태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혼천설에서는 땅은 둥글고 하늘은 주변을 둥글게 감싸고 있는 형태라고 주장한다. 또 개천설에서는 하늘의 중심을 북극으로 설정하고 북극을 중심으로 하늘이 회전하며, 하늘과 땅은 평면이라고 주장한다. 혼천설은 하늘과 땅을 곡면으로 설정하고 천체의 모양을 달걀 모양이라고 주장하며 개천설의 한계를 극복한다.

문화일보 박영규 작가

 
 
 

09.13 추억을 긷다 ‘포니의 시간’

일제시대 당시 신작로(新作路)가 생기기 전 조랑말 값이 금값과 같대서 생긴 말이 등금말[等金馬]이었다. 새마을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신작로가 마을 속 깊숙이 드나들면서 이 조랑말은 동물원 짐승의 사료로 전락, 값싼 근(斤)값인 등근말 신세로 추락했다.

그러나 조랑말이란 뜻의 현대자동차 ‘포니’가 등장해 신작로를 넘어 세계시장을 주름잡는 국민차가 되었다. 오는 10월 8일까지 서울시 강남구 소재 ‘현대모터스튜디오 서울’에서 열리는 ‘포니의 시간’은 켜켜이 쌓인 현대차 포니의 과거·현재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1976년 6대의 포니가 에콰도르로 수출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 수출이었다.

 
 

▲현대모터스튜디오 서울’에서 전시 중인 포니 픽업(왼쪽)과 포니1 승용차다.

 
 

포니가 국내 언론에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일보》 1974년 9월 26일 자 2면에서다. 〈재계단신: 현대 국민차 명(名) ‘포니’로〉. 내용은 이랬다. ‘포니 소형차는 1250cc급으로 5인승인데 오는 11월 이탈리아 토리노의 국제자동차박람회에 첫선을 보이게 되며 내년에 국내 시판할 예정인데 가격은 100만원 선이라고.’

 

《조선일보》 1976년 1월 25일 자 2면에 5인승 소형 승용차 포니의 판매계약을 접수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대당 가격은 228만9200원. 포니의 배기량은 1238cc, 4기통, 80마력이었다.

1976년 당시 서울 서초구 반포아파트 22평형이 680만~730만원이었다. 그렇게 최초의 한국형 국민차 포니는 국산 승용차 시대의 선구자로 쾌속 질주하게 되었다.⊙

 

▲1976년 에콰도르에 수출되어 20년 동안 150만km를 주파한 현대 포니1.

 
 

 

▲포니 웨건.

 
 

▲지난달 처음으로 공개된 ‘포니 쿠페 콘셉트’ 복원 모델.

 
 

▲포니를 탄생시킨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Giorgetto Giugiaro)의 디자인 회고 자료들의 모습이다.

 
 

▲고성능 수소 하이브리드 롤링랩(Rolling Lab) ‘N 비전 74’.

 
 

▲전시관 4층엔 포니의 개발 배경과 과정을 담았다. 포니 생산 공정을 미니어처로 보여주고 있다.

월간조선 09월 호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09.15 술 빚고 김치 담근 선비 김유, 그가 품은 큰 뜻은…

 

16세기 안동 지역 요리책 『수운잡방』

 

16세기 경북 안동에 살던 한 사족 남성이 요리책을 썼다. 유교 지식의 자장 내에 있는 선비로는 이례적인데, 그의 이웃에는 농암 이현보(1467~1555)와 퇴계 이황(1501~1570)이 살고 있었다. 남성의 이름은 탁청정(濯淸亭)이라는 호를 가진 김유(金綏·1491~1555)이고 책 이름은 『수운잡방(需雲雜方)』이다. 『수운잡방』에 실린 음식은 모두 121종류. 술이 60종류로 절반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장류·김치류·식초류·과자·탕 등이다. 가양주의 비중이 큰 것은 손님 접대가 관건이었기 때문이다.

 사대부로는 드물게 조리서 집필
장류·식초·탕 등 음식 121종 담아

“한번 사는 인생인데 즐겁게” 선언
벼슬길 그만두고 부모 봉양 힘써

친가·외가 모두 의학·농학서 남겨
주변 대접하며 자녀들 미래 기약

 

 1986년 450여년 만에 공개

 ▲김유의 『수운잡방 』에 실린 요리 일부를 재연한 모습. 간장 2종, 전어탕, 치저, 집산적, 삼색어아탕이다. [사진 수운잡방연구원, 문화재청, 안동시, 중앙포토]

 

김유의 3남 김부륜의 종가에서 450여년을 보관해 오던 『수운잡방』이 1986년 세간에 모습을 드러내자 안동 지역 사족 문화의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지게 되었다. 요리서에 언급된 식품 재료의 생산과 이동 경로 등의 물질적인 것부터 음식을 대하는 태도와 사상에 이르기까지, 500년 전의 음식문화를 읽어내려는 의욕이 줄을 이었다. 관심을 더 확장하여 향촌 사족 김유의 사상과 혼인 관계, 그리고 가족생활까지 엿보게 되었다.

 

조선시대 학인(學人)은 대개 벼슬길에 나가 명성을 얻거나 아니면 학문을 통해 ‘자신’을 완성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꿈꾸었다. 그런데 출사(出仕)하여 명성을 얻는 방법이 일률적이지 않듯이 학문을 옆에 끼고 재야의 삶을 꾸려가는 방식 또한 천차만별이었다. 탁청정 김유는 벼슬길 진입에 실패하자 삶의 목표를 바꾸게 된 경우다. 그는 “한번 사는 인생 즐겁게 하는 것이 어떤가. 꼭 세상의 명예를 뒤쫓을 필요가 있을까”라고 한다. 35세에 생원시에 합격한 김유는 활쏘기에 능해 무과에도 여러 번 응시하지만 모두 실패하여 과거 보기를 아예 포기한다. 이참에 벼슬길에 나간 형 김연(1487~1544)을 대신하여 부모 봉양을 자신의 임무로 삼게 되었다. 그런 그에게 이웃 선비 퇴계는 “출세에는 비록 뜻을 접었지만 향리에서 스스로 자족하는 삶을 살았네”라며 인생 총평을 한다.(『퇴계집』 46 ‘생원 김유의 묘지명’)

 

탁청정, 스스로 맑은 선비 자임

김유는 탁청정의 호가 말해주듯 스스로 충실한 맑은 선비이기를 자임했다. 탁청(濯淸)이란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라고 한 공자의 말에 연원을 둔 것으로, 물이 어떤가에 따라 용도가 달라지듯이 자신 또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묻고 있다. 이렇게 세상의 명예를 포기하고 ‘즐거운 인생’을 추구한 그에게 더 큰 명예가 찾아온 것은 500년의 기다림이 있었지만 가히 역설적이다. 반복되는 일상사를 일정한 체계를 통해 이해하고 기록한 『수운잡방』이 준 선물이다.

 

유교 지식인들의 보편적인 글쓰기와는 전혀 다른 조리서 저술에는 전제되어야 할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사물에 대한 관찰과 분석, 실험이라는 과학 기술적인 접근이 필요하고, 맛을 구별하고 차별화할 수 있는 안목에다 음식에 대한 기호와 미각이 있어야 한다. 또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닌 음식 취향을 논할라치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야 한다. 그런 점에서 김유의 음식책을 가능케 한 지식의 계보와 연원, 그리고 집안의 경제 상황이 궁금해진다. 유교 지식인 김유가 조리서 『수운잡방』을 쓰게 된 전방위적인 관심이라 할 수 있다.

 

어머니가 전수한 손끝의 맛

 ▲『수운잡방』 표지를 열면 정욕을 줄이고 성색을 절제하자(少情 寡欲, 節聲色薄滋樂. 時有四不出, 大風 大雨 大暑 大寒也)는 등의 내용이 나온다. [사진 수운잡방연구원, 문화재청, 안동시, 중앙포토]

 

과학적 글쓰기의 한 방식인 요리서 저술의 배경에 주목하다 보면 의서(醫書) 및 농서(農書)를 집필한 김유의 친·외가 선조를 만나게 된다. 김유의 어머니 양성(陽城) 이씨로 내려온 지식 전통에는 조선 전기의 과학자 이순지(1406~1465)가 있다. 이순지는 천문학과 수학에 기초한 조선의 역법 『칠정산외편』를 저술했는데, 그의 손녀가 김유의 어머니다. 손녀 이씨는 안동의 부유한 사족 김효로와 혼인하여 2남 2녀를 낳았고, 90이 넘도록 장수했다.

 

김유는 거의 전 인생을 어머니와 함께하면서 손끝으로 전해지는 맛을 의논하고 기록한 것이다. 친가 쪽으로는 조선 개국기의 대표적인 의학자 김희선(?~1408)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김유의 종고조부다. 광산 김씨 안동 입향조인 고조 김무(金務), 그 형이 바로 『향약제생집성방』을 저술한 김희선이다. 외증조와 종고조의 전공과 김유의 음식책은 과학과 실용을 근간으로 한다는 점에서 방법론적으로 매우 가깝다.

 

과학과 실용, 그리고 풍류

 ▲김유가 노닐던 탁청정 전경. 탁청정은 김유의 호(號)이자 정자 이름이다. [사진 수운잡방연구원, 문화재청, 안동시, 중앙포토]

 

누구보다 중요한 가족으로는 김유에게 다방면의 유산을 남긴 고모부이자 양부(養父)인 김만균이 있다. 안동 처가 마을에 살던 김만균은 자식이 없어 처조카인 김유를 양자로 삼아 어릴 때부터 사랑으로 양육하고 교육한다. 그런데 김만균의 아버지 김담(1416~1464) 또한 과학자로 이순지와 함께 『칠정산외편』을 저술한 인물이다. 세종 시대의 과학 사업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이순지와 김담은 동료로서의 인연을 혼인 가족으로 연장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순지의 손녀가 김유의 어머니이고, 김유의 고모가 김담의 며느리이다.

 

 ▲탁청정 현판. [사진 수운잡방연구원, 문화재청, 안동시, 중앙포토]

 

김유는 양부 김만균의 교육을 통해 자연 및 사회 현상에 대한 관찰과 기록, 해석의 작업이 갖는 의미를 알게 된다. 퇴계에 의하면, 김만균은 성품이 곧고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여유와 품격을 갖춘 인물이었다. 부유하기로 이름난 그의 재산을 받은 김유는 친가의 상속분에 더하여 그 지역에서 으뜸이었다.(『퇴계집』 46) 요컨대 『수운잡방』은 가족적 전통에서 길러진 과학과 실용에 대한 감각이 풍류와 여유의 인생 철학을 만나 빚어진 산물이다.

 

“사물을 기를 때 필요한 게 음식”

 ▲탁청정에 걸린 시판. 김유가 퇴계로부터 받은 시를 새겨 놓았다. [사진 수운잡방연구원, 문화재청, 안동시, 중앙포토]

 

책 이름 『수운잡방』에서 수운(需雲)은 『주역』의 5번째 괘인 수괘(需卦)에서 온 것인데, 수는 음식의 도(道)다. “사물의 어린 것은 길러주기를 기다려 이루어지니, 사물을 기를 때 필요한 것은 음식이다.”(『주역전(周易傳)』 수괘) 또 “수(需)는 구름이 하늘에 오르는 격이니, 군자가 음식으로 연락(宴樂)하는” 것이다. 수괘의 대의(大意)는 ‘기다림’인데, 음식을 먹으면서 기체를 양성하는 가운데 큰 뜻이 이루어질 것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수운은 구름 상태로 기다린다는 의미로 연회와 같은 음식을 통한 행사를 상징한다. 김유는 무엇을 기다렸을까.

 

김유의 호(號)이면서 정자 이름이기도 한 탁청정에는 인근에 살던 선비들이 모여 놀았고, 안동 예안을 지나던 선비들이 들러가는 곳이었다. “주방에는 맛있는 음식이 즐비하며 항아리엔 향기로운 술이 넘쳐나네. 그것으로 조상을 섬기고 부모를 봉양하며 잔치를 즐기었네. 반갑고 귀한 손님이 모여드는 것을 생전의 그는 크게 기뻐했네.”(『퇴계집』46) 김유의 정자에는 많은 명사가 방문했는데, 정장(亭長)이 가장 공을 들인 명사는 농암 이현보와 퇴계 이황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김유는 농암 이현보의 딸을 맏며느리로 맞이했고, 자신의 딸은 퇴계 이황의 조카와 혼인시켰다. 그리고 김유는 자질(子姪) 모두를 퇴계의 문하로 들여보낸다. 그들은 모두 학덕(學德)을 두루 갖춘 ‘오천칠군자(烏川七君子)’로 불리며 지역의 품격을 대변하는 인물로 성장했다.

 

“시론(時論)에 동요하지 마라” 권고

 ▲김유의 자손을 일컫는 ‘오천칠군자’에서 유래한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군자마을. [사진 수운잡방연구원, 문화재청, 안동시, 중앙포토]

 

김유가 선비들을 불러 음식을 대접하며 우의를 다진 것은 궁극적으로 자녀와 조카들의 미래를 기다린 셈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김유의 조카이자 김연의 장남인 김부필(1516~1677)은 10개 항목으로 된 ‘계자첩(戒子帖)’을 지어 부모 대가 남긴 전통을 재확인한다. 조선시대 학인들의 보편적인 이상을 담고 있지만 3개 항목은 이 가족의 특수성을 보인다.

 

즉 인정을 중시하고 과격한 행동을 하지 말 것, 도량을 키워 화를 내는 일이 없도록 할 것, 시론(時論)에 동요하지 말 것이 그것이다. 바로 김유가 원하던 것이다.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욕심을 줄이자. 성색을 절제하고 쾌락에 빠지지 말자. 이런 네 가지 경우에는 바깥출입을 하지 말자. 바람이 사나운 날, 큰비 있는 날, 무더운 날, 매섭게 추운 날.”(『수운잡방』 첫 장)

 

현존하는 『수운잡방』은 25매의 한지에 행서와 초서 두 가지 문체로 기록된 한문 필사본이다. 조부의 유묵(遺墨)에 손자 김령(1577~1641)이 전체 4분의 1 분량을 추가하여 볼륨을 높인 것으로, 80여년의 시차를 보인다. 김유가 여러 갈래의 조상으로부터 얻은 관찰과 실험의 방법으로 조리서를 썼다면 김령은 조부의 성과에 완성도를 높이고자 한 것이다. 조손(祖孫)이 함께한 저술이라는 점에서도 『수운잡방』의 역사적 위치는 독보적이다.

중앙일보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09.17 美 ‘펀치볼 묘지’ 사진 한 장, 70년 미공개 이승만 한미동맹의 흔적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54년 8월 10일 미국 하와이주 오아후섬에 있는 ‘펀치볼 묘지’로 불리는 국립태평양기념묘지를 방문해 클라크 라프너 미 태평양 육군사령관(소장)과 악수하고 있다. 이 사진은 펀치볼 묘지 관리소에 전시되어 있었으나 그동안 한국 언론 등에 한 번도 공개된 바 없다. photo 이서영 주호놀룰루 총영사 제공

‘US UNKNOWN, KOREA’.

짙푸른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미국 하와이주 오아후섬 사화산(死火山) 중턱에 조성된 묘지에는 이런 문구가 적힌 석판 수백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묘지 또 다른 편에 있는 석판들을 보고 비로소 이 문구가 의미하는 것을 이해했다.

 

‘무명의 미군용사, 한국전 참전’.

이 석판은 다름 아닌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사망한 무명용사의 묘비였다. 묘비가 위치한 곳은 미국 국립태평양기념묘지(National Memorial Cemetery of the Pacific). 높이 150m의 원뿔 모양 사화산인 펀치볼 분화구 내에 위치하기 때문에 ‘펀치볼 묘지’라고 불리는 이 국립묘지는 미군에 복무했던 용사들을 기념하기 위해 설립됐다. 이 국립묘지에는 제1·2차 세계대전부터 베트남전쟁까지 참전 전몰용사 6만3000명이 묻혀있고, 6·25 참전용사들도 1만명이 잠들어 있다.

 

▲펀치볼 묘지의 묘비는 일반 묘비의 비석처럼 세로로 곧추서 있지 않고 바닥에 눕혀 있다. 이런 모양으로 묘비를 만든 이유는 2차대전과 6·25전쟁 전후로 묘지가 조성되면서 밀려드는 전사자 시체를 다 감당할 수 없어서라고 한다. 비를 세우는 것보다 바닥에 눕히는 것이 조성비용이나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립묘지 측은 지금까지도 같은 방식으로 묘를 조성한다.

 

펀치볼 국립묘지는 한·미동맹의 가장 상징적인 장소다. 6·25전쟁에 참전했다 전사한 미군 용사들뿐만 아니라 무명의 한국군인들도 여전히 이곳에 묻혀 있다. 지금도 미국 국방부 전쟁포로·실종자확인국(DPAA·Defense POW/MIA Accounting Agency)이 전 세계를 돌며 가져온 유해들을 우선 이곳에 묻는다. 이후 한 구 한 구 신원확인 작업을 거쳐 확인된 유해는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지난 7월 26일 밤 성남 서울공항을 통해 돌아온 6·25전쟁 국군전사자 7위의 유해도 미국이 이곳 하와이에 DPAA에 보관하고 있었다.

 

▲펀치볼 국립묘지 전경. 정면에 보이는 흰색 국기게양대가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54년 방문해 사진을 촬영했던 곳이다. 당시만 해도 묘지에 이렇다 할 시설이 없었으나, 현재는 6·25전쟁을 비롯한 여러 전쟁 관련 기록들이 묘지 곳곳에 조성되어 있다. photo 박혁진

한·미동맹의 상징적 장소, 펀치볼 국립묘지

이곳에 보관 중인 6·25 참전용사 유해들은 6·25전쟁 당시 및 이후 미군이 직접 수습했거나 북한이 1990~1994년 함경남도 장진, 평안북도 운산 등에서 발굴해 미국으로 송환한 유해(1995년 208상자, 2018년 55상자 송환), 1996~2005년 미군과 북한군이 공동 발굴해 미국으로 송환한 유해 등이다. 이곳의 유해들을 대상으로 한·미가 공동감식 작업을 벌여 일단 국군전사자로 판단된 유해 7위를 지난 7월 한국으로 보낸 것이다. 당시 유해는 신범철 국방부 차관이 미국 하와이 히캄 공군기지에서 DPAA로부터 인수해 우리 공군 특별수송기(KC-330)로 봉환했다. 이런 한·미 간에 특별한 사연이 담긴 국립묘지이기에 하와이를 방문한 역대 대통령들은 우선 펀치볼 국립묘지에 방문해 헌화하며 참전용사들의 넋을 기렸다.

 

미공개 1954년 이승만 방문 사진

당시 기록을 찾아보면 이 전 대통령은 미국 본토 순방을 마치고 1954년 8월 9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이 전 대통령은 200여명의 한인 동포들과 펠릭스 스텀프 태평양함대 사령관 등의 환대를 받고, 진주만(Pearl Harbor)에 있는 마칼라파 영빈관에 투숙했다. 다음날 이 전 대통령 일행은 사무엘 킹 하와이 주지사를 만났는데 이 자리에서 이 전 대통령은 킹 주지사에게 이상범 화백의 ‘아침’이라는 한국화를 선물했다. 당시 이 전 대통령이 킹 주지사에게 그림을 선물하는 장면도 자료사진으로 남아 있는데, 그동안 이 전 대통령 하와이 순방 관련 사진으로 공개된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당시 이 전 대통령은 하와이 주지사와 만나고 하와이의 신문사 두 곳을 방문한 후 펀치볼 국립묘지를 전격 방문했다. 이날 이 전 대통령을 영접한 인사는 클라크 라프너 미 육군 태평양 육군 사령관(소장)이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 10군단 참모장이었고, 이후 한국에서 미 2사단을 지휘한 바 있다. 주간조선이 입수한 사진을 보면 이 전 대통령과 라프너 사령관은 펀치볼 국립묘지 입구에 있는 국기게양대에서 헌병의 경례를 받으며 악수하고 있다. 사진 속 국기게양대 뒤편은 국립묘지를 조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듯 이렇다 할 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다. 70년이 지난 지금은 묘지 뒤편에 ‘레이디 콜롬비아 여신상(Lady Columbia)’을 비롯해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 그리고 베트남전쟁까지 20세기 미군이 참전한 주요 전투 과정 및 전쟁 피해 상황 등이 그려진 조형물과 벽이 설치돼 있다.

 

이서영 호놀룰루 총영사는 이 사진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이 정전협정 체결 다음해인 1954년 국빈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해 아이젠하워 대통령 등을 만나고, 귀국길에 이곳을 찾아 미군 참전용사들에게 헌화하며 직접 고마움을 표했다는 것은 이 전 대통령이 한·미동맹을 얼마나 각별하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며 “이승만 전 대통령과 라프너 사령관의 사진이 국립묘지 한편에 전시되고 있었다는 것은 미국 역시 한국과의 동맹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총영사는 “지금껏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이 사진은 한·미동맹 역사와 한국 근현대사에 있어서 대단히 가치가 있는 사료”라고 평가했다.

 

“한·미동맹의 중요성 보여주는 사진”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미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언급했듯이 올해는 미주 한인 이주 120주년이 되는 해다. 1902년 인천 제물포에서 하와이주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일하기 위해 이민을 떠난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이민이다. 이날 이민자 121명은 일본을 거쳐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했고, 최종적으로 102명이 정착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다.

 

하와이는 한·미동맹과 그 뿌리가 되는 독립운동에 있어서도 중요한 장소로 꼽힌다. 이주노동자들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며 15~20달러의 월급을 받았는데 어떤 사람들은 10달러, 어떤 사람들은 2~3달러씩을 독립운동자금으로 냈다는 사료가 남아 있다. 이 돈의 상당수가 상하이임시정부로 넘어가 독립운동자금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당시 하와이에서 상하이임시정부로 넘어간 독립운동자금이 총 200만달러 정도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오아후섬에 있는 민간묘지에 가면 지금도 독립운동을 했던 지사들의 묘비를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대해 하와이 한·미동맹재단 김동균 회장은 “하와이 교민들은 이곳이 미국 이민의 시작점, 첫 해외 이민의 시작점이라는 데 많은 자긍심을 갖고 있다”며 “뿐만 아니라 많은 동포들이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참여한 데 대해서도 자긍심이 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하와이를 빼놓고 독립운동이나 한·미동맹을 얘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와이는 한·미동맹의 과거이자 현재이기도 하다. 현재 하와이에는 미국 인도태평양 사령관, 태평양 육해공군 사령관 각 3명 등 모두 4명의 4성 장군이 보직되어 근무하고 있다. 육군 소장 출신으로 워싱턴의 주미대사관 국방무관을 지낸 이서영 총영사에 설명에 따르면 미국의 4성 장군 40명 중에 4명을 한곳에 배치한 곳은 펜타곤을 제외하고는 호놀룰루가 유일하다고 한다. 그만큼 하와이를 미국이 전략적으로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 총영사는 “전시에 대한민국에서의 전투작전 수행은 한미연합사가 담당하지만, 미군 증원 전력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 증원 전력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령부가 바로 하와이에 있는 인도태평양사령부”라며 “하와이는 한국의 안보와 한·미동맹을 지키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라고 설명했다. 이 총영사는 “하와이에 있는 인도태평양 사령부와 각 구성군 사령부는 한·미동맹의 과거와 현재이자 미래에 있어서도 중요하다”며 “한·미동맹은 통일의 과정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와이 한인회 관계자들에 따르면 한·미동맹의 상징적 장소이기 때문인지 한국 교민들이나 관광객들에 대한 하와이 사람들의 대우는 매우 좋다고 한다. 최근 오아후 이웃섬인 마우이 지역에서 산불피해가 나자 우리나라에서 전 세계 국가 중 가장 먼저 200만달러를 쾌척한 것도 하와이에서는 큰 뉴스가 됐다는 설명이다.

 

이런 분위기에 따라 최근 하와이 곳곳에서 한·미동맹 강화를 위한 정부와 군, 민간 차원의 교류가 강화되고 있다. 지난 9월 6일에는 공군사관학교 4학년 생도 150명과 육군사관학교 생도 50명이 하와이를 찾아 한·미동맹 관련 장소들을 방문하며 동맹의 중요성을 되새기는 프로그램들에 참여했다. 공군사관학교 생도들은 9월 7일 USS미주리호 선상에서 인도태평양함대 몇몇 장성들과 6·25전쟁 참전용사들을 초청하는 한·미 친선의 밤을 갖기도 했다. USS미주리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맥아더 사령관이 일본으로부터 항복 문서에 서명을 받은 조인식이 열린 곳이기도 하다. 육사 생도들은 펀치볼 국립묘지와 애리조나 메모리얼 등 2차 세계대전 및 한·미동맹 관련 장소들을 견학하기도 했다. 하와이 주호놀룰루 총영사관에서 만난 육군사관학교 이승민 생도는 “펀치볼 국립묘지에서 참전용사들의 이름이 새겨진 벽을 보면서 우리가 이분들 희생의 중요성을 너무 잊고 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다른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게 쉽지 않은데, 우리도 나서서 도우면서 더 강한 동맹을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말했다. 생도 대표이기도 한 이승민 생도는 이날 건배제의를 통해 “다가올 한·미동맹 100주년은 우리들이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호눌룰루 = 글·사진 박혁진 기자

 

 

09-17 안중근 의사 등 ‘독립운동가 6인 인사카드’ 대만서 최초 발굴…광복군 87명 임정문서도

▲1940∼50년대 중국 국민정부 총통부 군사위원회에서 생산한 인사등기권(人事登記卷), 즉 인사카드로 안중근(대한민국장) 의사 인사카드. 이밖에 안정근(독립장),신익희(대한민국장),홍진(독립장),지청천(대통령장), 조소앙(대한민국장) 선생 등 총 6인의 인사카드가 발굴됐다. 국가보훈부 제공

보훈부,대만서 사료 수집…안정근·신익희·홍진·지청천·조소앙 선생 등 인사카드
김첨생(김창순 목사 추정) 선생 등 광복군 제1지대 대원 87명 명단 수록 임정 문서도 발굴
카이로회담 ‘한국의 자유 독립 보장’ 관련 장제스 주석에 감사 표시 서한도 공개
독립유공자 포상되지 않은 광복군 독립운동가 40여명 확인…여성 광복군 등 상당수

 

일제강점기, 조국 독립을 위해 중국에서 활동한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인사카드와 100명에 가까운 한국광복군 제1지대 소속 대원들의 명단이 수록된 임시정부 문서가 발굴돼 언론에 처음 공개됐다. 6인의 인사카드는 해방 전후 중국 국민정부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최고위 요인들에 대한 인사기록을 별도로 생산·관리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특히 안중근 의사 동생 안정근 의사에 대해 중국 정부가 높이 평가한 사실 등이 새롭게 확인됐다.

국가보훈부는 한국광복군 창군(1940년 9월 17일) 83주년을 맞은 17일, 1940~1950년대 중국 국민정부 총통부 군사위원회에서 생산한 독립운동가 6명의 인사카드와 한국광복군 제1지대 대원 87명의 성명과 성별 등이 상세히 기록된 문서를 최초로 발굴했다고 밝혔다.공개 자료는 보훈부가 독립유공자 발굴·포상을 위한 자료 수집과 대만 사료 소장기관과의 협력 강화, 주요 사적지 조사를 위해 지난 8월 추진한 대만 지역 사료 수집 활동 과정 중 대만국사관에서 발굴됐다.

첫 번째 발굴자료는 1940∼50년대 중국 국민정부 총통부 군사위원회에서 생산한 인사등기권(人事登記卷), 즉 인사카드로 안중근(대한민국장), 안정근(독립장),신익희(대한민국장),홍진(독립장),지청천(대통령장), 조소앙(대한민국장) 선생 등 총 6인의 인사카드다. 보훈부는 " 6인의 인사카드는 해방 전후 중국 국민정부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최고위 요인들에 대한 인사기록을 별도로 생산·관리했음을 보여준다"며 "특히 신익희 지사의 인사카드에는 와세다 대학 재학, 임시정부 내무·법무총장 역임, 해방 후의 국회의장 역임 등 신상 이력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안중근 의사 동생인 안정근 의사의 경우, 지금까지 1940년대 활동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지만, 인사카드에는 ‘한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며 "‘임시정부 요직에서 일했고’, ‘영미(英美) 정부와 직접 연계 가능’하며 중앙 차원에서 관계를 맺어야 하는 인물로 평가했다"고 덧붙였다.

특히, 1910년에 순국한 안중근 의사의 인사카드는 순국 35년이 지난 1945년에 등록됐다는 점에서 안중근 의사와 안 의사의 의거에 대한 당시 중국 국민정부의 평가를 짐작할 수 있다. 대만 지역 한국 독립운동 자료 전문가인 김영신(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는 "중국 측에서 주요 한인에 대한 조사 보고를 작성하였음을 확인시켜주는 사료"라며 "무엇보다 한국독립운동가에 대한 인사기록 카드 실물이 소개된 경우가 드물다는 점에서 이번 발굴 사료의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국가보훈부는 중국 국민정부 총통부 군사위원회에서 생산한한국광복군 제1지대 대원 87명의 성명과 성별 등이 상세히 기록된 문서를 최초로 발굴했다고 밝혔다. 한국광복군 제1지대 명단. 국가보훈부 제공

 

 두 번째 발굴자료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중국 국민정부에 보낸 문서인 한국임시정부양식부안권(韓國臨時政府糧食部案卷)이다. 1941∼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계열 단체에서 중국 국민정부 행정원에 보낸 양식공급 요청 문서를 모아놓은 문서철이다. 이 자료는 한국광복군 등 임시정부 예하 단체들이 국민정부에 보낸 공문과 단체의 소속 대원 성명·성별·나이·주소·소속 등이 수록돼 있다.

이 문서에는 임시정부 예하 광복군이 직접 보낸 공문과 소속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보훈부는 "그중에서도 ‘한국광복군제1지대관병대원권속청구평가화명책(韓國光復軍第1支隊官兵隊員眷屬請購平價花名冊)’ 에서는 이종건(독립장), 김정숙(애국장) 등 광복군 제1지대 요원 87명의 명단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보훈부는 "이들 중 현재 독립유공자로 포상되지 않은 광복군 독립운동가 40여명이 확인돼 향후 독립유공자 발굴·포상 업무에 유용하게 활용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여기에 여성 인명이 많이 발견돼 그동안 입증자료가 부족했던 해외 여성 독립운동가의 발굴포상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광복군 연구자인 황선익 국민대 교수는 "광복군과 그 가족 명단이 상세히 기재돼 있어 소속 인원에 대한 역사적 사실관계를 고증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자료" 라며 "기존 문서와 비교해 전후 맥락을 파악할 수 있는 문건들이 풍부해 당대 독립운동의 현실 파악에 기여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보훈부는 1943년 12월 7일 중국 장제스(蔣介石) 주석에게 발송된 ‘단향산한미문화협회주석김첨생박사서전(檀香山韓美文化協會主席金詹生博士書傳)’도 발굴했다. 이는 하와이 호놀룰루의 한미문화협회 주석인 ‘김첨생’ 박사가 카이로회담에서 결정된 한국의 자유 독립 보장에 관해 장주석에게 감사를 표시한 서한이다.

서한은 "한미문화협회와 호놀룰루 예수교회 등을 포함한 재미한인들’은 ‘카이로회의 결정이 2300만 한인들로 하여금 해방을 맞게 하였다"며 장위원장에게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한미문화협회는 이승만 계열 한인 단체로 1940년대 민족운동과 외교활동 분야에서 활약했다. ‘김첨생’은 이를 지원한 하와이의 김창순(1904∼1977) 목사로

추정된다. 보훈부는 "이는 미주 한인 단체가 카이로회담 당시 중국 국민정부를 상대로 한국 독립선언을 위해 외교활동을 전개했음을 보여 준다"며 "1940년대 루스벨트 대통령과 미국 국무부뿐만 아니라 중국 국민당 정부에도 직접 서신을 발송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전을 펼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민식 장관은 "보훈부는 앞으로도 지속적인 사료 수집 등을 통해 알려지지 않는 독립운동가를 발굴·포상하는 한편, 독립운동 역사에 대한 보다 심도있는 연구를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에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문화일보 정충신 선임기자

 
 
 

10.06 “모기” “빈대” 으르렁댄 노·소론, 껍데기 유학의 폐단

 

논산 황산서원과 이념 갈등

오늘날 우리나라 정치지형은 지역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역 요인 중에서도 영남과 호남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다. 그래서 여당과 야당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영남당’ ‘호남당’이라고 하면 어느 당을 지칭하는지 금세 안다. 그럴 정도로 양당은 50년 넘게 영남과 호남을 기반으로 각자의 지지층을 확보해 왔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해져 특정 지역에서 특정 정당이 의석을 독점하는 기형적 현상이 일반화하고 있다. 정당은 계층과 집단 등 다양한 이해를 대변하는 조직이어야 하는데 지역 요인에 의해 당의 정체성이 좌우되는 형편이다.

 

 금강 절경과 어울리는 황산서원
노론 송시열의 ‘거친 입’과 대비

주자 해석 둘러싸고 나라가 분열
잇단 음모와 탄핵에 혼인도 기피

‘서원의 고장’ 논산의 뜻은 어디에…
진영 싸움에 갇힌 지금을 보는 듯

 

 특정 지역에 의존하는 한국 정치

 ▲금강 하류에 위치한 황산서원 내부 모습.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소론에 맞선 곳이다. [사진 김정탁]

 

물론 이런 현상을 꼭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미국에서도 지역에 따른 정치지형이 분명히 존재한다. 크게 보아 민주당은 동부와 서부해안에서 강하고, 공화당은 남부와 중서부에서 강하다. 그렇더라도 특정 지역에서 한 정당이 독식하는 경우는 드물고, 또 특정 지역이라도 지지층의 변화는 계속된다. 남북전쟁 이후 북쪽의 공화당과 대항하기 위해 남부를 배경으로 성장한 민주당이 그렇다.

 

그래서 남부는 원래 민주당의 아성이었는데 지금은 공화당 텃밭으로 바뀌었다. 지금 우리로선 이런 변화를 상상하기 힘들다. 영남이 더불어민주당의 기반이 되고, 호남이 국민의힘 기반이 된 것과 같아서다.

 

 ▲금강 하류에 위치한 황산서원 외부 모습.

 

지역에 따른 정치지형은 우리나라에서 그 뿌리가 깊어 이미 조선 중기부터 있었다. 선조 때 사림(士林)이 훈구세력을 대신해 영향력을 키우자 일단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졌다. 동인과 서인이란 이름은 김효원과 심의겸이 이조정랑 자리를 두고 다퉜을 때 김효원이 한양 동쪽에 살고, 심의겸이 서쪽에 살아서다.

 

그런데 이는 편의상의 구분이고, 지역에 따른 정치지형이 실제로 존재했다. 서인은 자신의 세를 경기도 북부인 파주에서 시작해 기호지방으로 확장했고, 동인은 그 한 갈래인 북인이 광해군 몰락과 함께 사라지자 남인으로 명맥이 이어지면서 영남을 기반으로 뿌리를 내렸다.

 

학문인가 종교인가, 주자학의 변질

 ▲윤증의 집인 명재고택. 사진 가운데의 사랑채 앞에는 담이 없다. [사진 김정탁]

 

영남이 남인의 본거지가 된 데는 퇴계의 영향력이 무엇보다 크다. 남인의 원조 격인 동인이 퇴계를 종주로 삼아서다. 퇴계가 세운 안동 도산서원은 남인에겐 정신적 의지처였다. 반면 서인은 송익필과 그의 수제자 김장생, 또 그의 아들 김집이 조선 유학의 맥을 예학(禮學)으로 이었는데, 그 중심에 논산 돈암서원이 있었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예학이 조선왕조를 지탱해준 기반이 되면서 서인은 정계 실세로 부상했다. 게다가 송시열과 송준길 대에선 주자학이 조선 성리학의 주류가 되었는데, 이때 주자학은 서인에게 학문을 넘어서 종교로 변질하였다. 그 결과 당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서인 예학의 근거지인 돈암서원. [사진 김정탁]

 

한편 율곡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사후에 서인의 종주로 받들어졌기에 억울해할 수 있다. 율곡은 개혁성에서 이들 서인과 큰 차이를 보여서다. 서인, 그중에서도 노론은 예학의 강화를 통해 노비를 해방하는 면천법 폐지와 조세 비리를 차단하는 대동법에 대체로 반대했다. 반면 율곡은 개혁적 성리학자로 면천법과 대동법의 원조인 대공수미법 실시에 누구보다도 앞장섰다. 율곡의 이런 개혁적 태도가 이들 서인에 이르러서 예학으로 변한 건 조선 성리학이 사회 변화를 흡수하지 못하고 관념에 빠져서다. 그렇다면 이들은 율곡 사상의 진수를 계승한 게 아니라 껍데기 학맥만을 이은 셈이다.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진 서인

이런 서인도 숙종 때는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다. 서인의 실력자 김석주가 빌미를 제공했는데 숙종의 외삼촌 김석주가 숙종의 장인 김만기와 함께 척신정치를, 또 어영대장 김익훈과 함께 공작정치를 벌여 상당수 남인을 제거했다. 그러자 서인 내에서도 이들의 행동을 두고 논란이 크게 일었다.

 

 ▲우암 송시열

 

이때 송시열이 스승의 손자인 김익훈을 처벌할 수 없다고 하자 박세채가 송시열을 비판했다. 이에 박세채는 신진 사림의 희망으로 떠오르면서 소론 영수로 추대되었다. 윤증(尹拯)도 남인을 적으로 모는 김석주 태도에 반대해 박세채와 함께 소론을 이끌었다. 한편 송시열을 옹호한 사람들은 노론을 형성했다.

 

그 후 노론과 소론 간에 벌어진 당쟁은 이전에 동인과 서인 간에 벌어진 당쟁 못지않게 치열했다. 얼마나 치열했는지 노론은 소론을 ‘모기’라 부르고, 소론은 노론을 ‘빈대’라 부른 데서도 잘 나타난다. 상대방을 모기와 빈대로 호칭한 건 소론은 틈만 나면 물기를 일삼고, 노론은 끊임없이 음모를 잘 꾸며서라고 보아서다.

 

송시열과 윤증, 대 이은 갈등

 ▲소론 윤문거·윤선거·윤증을 배향한 노강서원 입구. 지금은 수리 중이다. [사진 김정탁]

 

이런 가운데 이인좌의 난이 발생하고, 소론 김일경의 탄핵으로 노론 사대신인 김창집·이이명·조태채·이건명이 죽는 일까지 벌어지자 노론과 소론은 도저히 화해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혼인도 서로 기피했는데 같은 지역에 살던 안동 김씨와 안동 권씨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노론과 소론의 갈라짐은 송시열과 윤증의 아버지인 윤선거(尹宣擧) 간에 이미 잉태되었다. 이는 윤휴에 대한 서로 다른 태도에서 비롯되는데 윤휴는 효종의 뜻에 따라 청나라를 치기 위한 북벌을 실제로 준비했다. 그러니 말로만 북벌을 외친 송시열에겐 부담스러웠다.

 

또 송시열은 주자 해석만을 받든 데 반해 윤휴는 성리학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내놨다. 송시열이 이런 윤휴를 두고 사문난적으로 몰자 윤선거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자 윤휴보다 먼저 벌 받을 거라는 악담을 윤선거에게 퍼부었다. 이런 갈등은 윤선거 아들로까지 이어져 윤증과 송시열이 벌인 유명한 회니시비(懷尼是非)를 낳았다.

 

윤증 고택에 담이 없는 까닭

 ▲명재고택 옆에 위치한 궐리사. [사진 김정탁]

 

송시열이 윤선거에게 험한 말을 퍼부은 곳이 논산의 황산서원(黃山書院)이다. 지금은 죽림서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서원으로 아담하게 지어져 처음 찾아갔어도 왠지 친근감이 느껴진다. 또 그 옆에 흐르는 금강은 비단처럼 아름다워 황산서원과 조화를 잘 이룬다. 이런 곳에서 송시열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왔다는 게 좀체 믿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논산은 좋은 서원이 많기로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김장생과 김집을 배향한 돈암서원과 윤황·윤문거·윤선거·윤증을 배향한 노강서원이 으뜸이다. 두 서원은 서인과 소론을 각기 대표하는 서원인데 서로 가깝게 있는 게 이채롭다.

 

 ▲명재 윤증

 

또 논산에는 공자가 태어나고 자란 중국 권리촌(闕里村)의 이름을 따 만든 궐리사란 사당이 있다. 이 사당은 송시열이 원래 세우려고 했는데 정읍에서 사약을 먹고 일찍 죽는 바람에 제자들에 의해 세워졌다. 그리고 궐리사 바로 옆에는 소론의 영수였던 윤증의 집이 있다. 이 집은 윤증의 호를 따 명재(明齋) 고택이라 불린다.

 

노론은 하필 윤증의 집 바로 옆에 궐리사를 지었을까. 윤증의 집에 누가 드나드는지 감시하기 위해서라는 설이 있는데 이를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명재 고택에는 담이 없다. 누가 드나드는지 노론에게 죄다 공개하겠다는 윤증의 역발상 때문이다.

 

나라 전체가 ‘당쟁의 논산’이 된 듯

 ▲박경민 기자

 

논산이란 지명에는 특이하게 논(論)이란 단어가 있다. ‘논’이란 ‘말하다’ ‘사리를 밝히다’라는 걸 뜻하는데 지명에 어째서 이런 단어가 들어갔는지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논산이란 지명은 영조 때 편찬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처음 등장하는데 한자어 ‘답산(畓山)’과 실제 부르는 ‘논뫼’ 간에 차이가 커서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자 그 음과 뜻을 살려 논산으로 표기했다고 한다. 지금의 논산은 일제강점기 때 강경읍과 연산현·노성현·은진현 일부가 통합돼 만들어졌다. 그렇더라도 노론과 소론 간의 당쟁에서 보듯이 논쟁(論)이 많아 논산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도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은 나라 전체가 논산처럼 돼간다는 느낌이 든다. 정치권이 진영 논리만 내세워 합의는 사라지고 논쟁이 넘쳐나서다. 한편 윤석열 대통령은 소론 영수였던 윤증의 후손이고, 이해찬 전 총리는 충남 청양이 고향인데 여기는 노론 세가 절대적이다. 그래서인지 조선의 당파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드는 데 이건 비단 필자만의 생각인지….

중앙일보 김정탁 노장사상가

 

 

10.20 세종의 귀염둥이 막내아들, 왕실판 ‘사랑과 전쟁’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영응대군과 세 아내

경기도 시흥시 군자봉 기슭에는 영응대군과 세 아내의 묘소가 있다. 대군과 두 아내를 합장한 하나의 묘와 한 아내의 단독 묘로 이루어진 쌍분 형태다. 묘주는 600여 년 전인 1430년대에 태어나 짧게는 33년, 길게는 80년 가까이 살다 간 사람들이다. 죽은 지 오백 수십 년이 된 사람들이다. 영응대군의 묘소는 다른 집안의 조상 묘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묘석에 새겨진 네 사람의 면면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역사적 이야기를 생성한 자들이다. 지금 여기 누워있는 영응대군과 그 아내들인 여산 송씨, 해주 정씨, 연안 김씨는 누구이며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

 

“끝까지 막내 챙겨라” 세종의 유지

 ▲경기도 시흥시에 있는 영응대군 묘소. 오른쪽 무덤에 대군과 정실부인 두 명이 함께, 왼쪽 무덤에 측실이 잠들어 있다. [사진 전주 이씨 영응대군파종친회, 해주 정씨 종가, 문화재청]

 

영응대군 이염(李琰·1434~1467)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8남 2녀 막내로 태어났다. 늦둥이 아들이 온화한 성품과 총명한 기상에 글씨와 그림, 음률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자 아버지 세종은 체모(體貌) 따윈 안중에 없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너는 15세가 될 때까지 나를 아버지라 부르고 상(上)이라 하지 말라.”(‘영응대군신도비명’) 다른 대군에게는 어림도 없는 주문이다.

글·그림·음악 빼어나 세종이 총애
두 번의 강제 이혼과 은밀한 통정

‘사인사색’ 사랑, 그 안의 돈과 권력
단종·세조까지 얽힌 ‘가문의 대결’

살아서 얼굴조차 피했던 세 여인
남편과 함께 한 곳에 묻힌 사연은…

 

 영응과의 일화는 성군(聖君) 세종도 어쩔 수 없는 ‘한 인간 아버지’임을 보여준다. 세종은 영응을 시양(侍養)했거나 영응에게 글을 가르친 사람이면 넉넉한 재물과 파격적인 벼슬로 응답했다. 그런 세종을 보고 김흔지는 영응의 등신불을 만들어 바치는데, 이 일로 승지에 임명되자 사람들은 그를 ‘등신승지’로 불렀다.(『문종실록』 2년 3월 22일)

 

세종은 자신의 사후에도 이 아들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도록 ‘몸채가 높고 넓으며 사랑과 행랑이 연이은, 궁궐에 비등한’ 저택을 짓는 한편 내탕고의 보물은 몽땅 영응의 것으로 못 박는다. 세종은 영응의 나이 11살이 되자 간택으로 여산 송씨를 배필로 정한다. 그런데 송씨는 혼인 4년 만에 병(病)을 구실로 이혼을 당하는데, 시아버지의 눈밖에 난 것이다. 다시 전국을 뒤져 영응의 배필을 찾지만 결국 가까이 있던 자신의 형수이자 효령대군의 부인 정씨의 친정 조카를 선택하여 아들의 재혼을 성사시킨다. 몇 달 후 세종은 영응의 아내 해주 정씨의 남동생 정종(鄭悰)을 세자(문종)의 사위로 영입하는데, 영응의 미래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쫓겨난 첫 부인 ‘여산 송씨’의 복귀

 ▲위에서 내려다본 영응대군 부부와 후손들의 무덤. 대군 무덤 아래로 아들 청풍군, 손자 화림군 묘소 등이 있다. [사진 전주 이씨 영응대군파종친회, 해주 정씨 종가, 문화재청]

 

영응이 새집에서 새 부인과 생활한 지 반년 남짓, 세종은 막내아들의 사저 동별궁에서 눈을 감는다. 그런데 4년 사이 왕실의 주인이 문종에서 단종으로 바뀐 어느 날, 영응의 견평방(현재 인사동 일대) 저택 안주인 해주 정씨는 국왕이 내린 이혼장을 받게 된다. 춘성부부인(春城府夫人) 정씨에게 봉작한 사령장을 거두고 영응의 부인으로 송씨를 다시 봉한다는 것이다.(『단종실록』 1년 11월 28일) 그동안 영응대군은 전 부인 송씨와 잠통(潛通)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조정 신하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문벌의 후예인 정씨를 배필로 삼아 잘살아 왔는데 까닭 없이 내보내는 이유”를 따지거나 “선왕이 거부한 송씨가 아닌 명족(名族)에서 다시 뽑을 것”을 제안한다. 때는 수양대군(세조)이 단종의 측근을 제거한 계유정난 직후라는 점에서 이 이혼이 시사하는 바가 가볍지 않다. 이혼당한 정씨는 단종과 경혜 공주의 측근이고, 재결합하게 된 송씨는 세조 측근이라는 점, 정씨와의 이혼 반대가 단종을 지키려는 사육신 계열에서 나왔다는 점도 흥미롭다.

 

남편 죽자 돈과 권력 차지한 첫 부인

 ▲영응대군의 신주를 모신 사당 경효사(敬孝祠). [사진 전주 이씨 영응대군파종친회, 해주 정씨 종가, 문화재청]

 

재결합에 성공한 송씨는 대방부부인(帶方府夫人)에 봉작되어 영응대군의 저택으로 들어와 거만(巨萬)의 부와 권력을 행사한다. 부왕이 사랑한 아들이라는 이유로 세조는 아우 영응을 각별히 예우하고, 송씨는 그 관계를 백분 활용한다. 송씨는 자신의 친정 조카를 단종의 비(정순왕후 송씨)로 들이는가 하면, 왕실 행사에 부부의 저택을 제공하고 미래 권력인 어린 왕자들을 솔선하여 양육한다.

 

성종과 연산군도 왕자 시절에 이 집에서 자랐다. 국중 거부로 이름난 영응대군이 33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뜨자 그 재산은 송씨 차지가 되었다. 권력과 재물에 탁월한 감각을 가진 송씨의 행보는 영응대군 사후 더 활발해지는데, 왕실을 등에 업고 송사 중인 재산·전답·노비 등을 차지하고, 왕실 재산인 답십리의 채전(菜田)과 양천의 초장(草場)을 불하받는 방식이다.

 

명문가 출신의 측실 ‘연안 김씨’

 ▲경북 성주군에 있는 세종대왕 왕자들의 태실(胎室). 영응대군 것도 포함됐다. [사진 전주 이씨 영응대군파종친회, 해주 정씨 종가, 문화재청]

 

영응대군은 측실 연안 김씨에게서 1남 2녀를 얻는다. 영응과 김씨의 혼인에는 후사를 얻도록 한 세조의 안배가 보인다. 상대가 대군이라 해도 측실의 지위는 한계가 있는 데다 승부욕과 질투심이 유난히 강한 정실 송씨는 버거운 존재였을 것이다. 영응대군도 송씨를 두려워하여 누군가에게 베풀고 싶어도 송씨의 허락을 받아야 했고 그나마 거절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죽을 무렵의 영응이 몸에 지니고 있던 패물을 아들 청풍군에게 건네주자 송씨가 도로 빼앗아 그 일부만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예종실록』 1년 10월 6일)

 

활발한 행보를 보인 정실부인에 가려져 있지만 측실 김씨야 말로 명족(名族)의 후예다. 김씨의 조부는 개국공신 김로(金輅)이고, 부친은 계유정난의 공신 김영철이다. 숙부 김영륜은 민무질의 사위로 태종의 처족이고 그녀의 외가 또한 명문거족이다. 조선 초기 명족으로 내외친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연안 김씨 집안은 된서리를 맞는데, 부친이 세조 초기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권력의 측근이란 집안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집안을 몰락시키기도 한다는 사실은 역사 속의 다양한 사례가 말해준다.

 

이혼당한 둘째 ‘해주 정씨’의 재산

 ▲1451년 영응대군 둘째 부인 해주 정씨가 어머니 민씨로 부터받은 상속 문서. [사진 전주 이씨 영응대군파종친회, 해주 정씨 종가, 문화재청]

 

이혼당한 해주 정씨는 그 후의 삶 60여 년을 어떻게 살아냈을까. 자녀를 남기지 않아 영응대군과의 인연이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는데, 왜 그녀는 전 남편 곁에 묻혀 있는 걸까. 스스로를 ‘영응대군기별부인(永膺大君棄別夫人)’이라 칭한 정씨는 상속 문서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기별(棄別) 40년이 지난 1494년(성종 25)에 정씨는 친정 조카 정미수(鄭眉壽, 남동생 정종과 경혜 공주의 아들)에게 자신의 재산 일체를 분급하고, 다시 15년이 지난 1509년(중종 25)에는 유루분(遺漏分)까지 상속한다.

 

두 차례에 걸쳐 조카에게 상속한 정씨의 재산은 부모로부터 받은 노비 115구와 자신이 살던 낙선동의 기와집 1채, 그리고 양주와 면천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논 163마지기다. 문서에는 노비의 이름과 나이, 거주 장소를 상세히 밝혀 놓았다.

 

해주 정씨는 “너(정미수)는 나에게 유일한 동성 삼촌(三寸) 조카로 부모가 일찍 돌아가시어 내가 어머니 같을 뿐 아니라 나도 죽은 후 의탁할 데가 없다”고 하고, 일체의 가재(家財)를 남김없이 준다고 썼다. 그리고 정씨는 “젊은 나이에 홀로 살며 모든 일을 오로지 살아가는 것을 바랄 뿐이었다. 내가 죽은 후에 너의 사당에 붙여주길 바란다”고 한다.

 

300년 뒤에 복권된 ‘해주 정씨’

 ▲영응대군 영정. [사진 전주 이씨 영응대군파종친회, 해주 정씨 종가, 문화재청]

 

노비의 가옥 안에 있는 텃밭까지 관리한 정씨의 기록을 보면 자기 소유의 전민(田民)에 대한 애착이 그녀를 살게 한 동력이었던 것 같다. 그녀의 상속 문서는 조부 정도공 정역(鄭易)의 종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친정 사당에 있어야 할 정씨가 전 남편 영응대군 집안으로 다시 돌아온 사연은 한 편의 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17세기 말에 기록된 『선원록』을 근거로 18세기 영조 대에는 해주 정씨를 영응대군의 원배(元配)로 돌려놓는 복작(復爵) 운동이 일어나 당시 대리청정을 하던 사도세자의 승인을 받게 된다. 『선원록』의 정보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지만 어찌 되었건 해주 정씨의 뜻과는 별개로 그녀는 이씨 문중의 일원이 되었다.

 

측실 후손이 주도한 추숭 작업

 ▲영응대군 신도비. [사진 전주 이씨 영응대군파종친회, 해주 정씨 종가, 문화재청]

 

영응대군의 입장에서 볼 때 세 아내는 어떤 의미를 남겼을까. 먼저 영응대군의 추숭과 기억의 역사는 연안 김씨 소생 청풍군 이원(1460~1505)과 그 후손들이 주도하였다. 반면에 영응대군의 물질적 유산은 송씨 소생의 길안현주와 사위 구수영이 차지했다. 조선의 권문세족 능성 구씨 가문은 영응대군의 저택과 세종의 내탕고에서 나온 것이다.

 

아쉽게도 구씨의 계보에서 영응대군과 여산 송씨의 존재는 사라지는데, 조선사회 유교화에 따른 당연한 결과다. 즉 “부(父)의 부(父)를 거슬러 올라가 백세(百世) 위에 닿더라도 내 조상인 줄 알지만 모(母)의 모(母)를 거슬러 올라가면 삼세(三世) 이상은 누가 누군지 알지 못하는” 구조다.

 

각기 다른 곳에 묻혀 있던 영응대군과 세 아내가 후손들에 의해 군자봉 기슭에 다시 모였다. 살아서는 대면조차 꺼리던 세 여성이 가족의 이름으로 함께 있는 이곳에서 그녀들의 영혼은 편안하신지.

중앙일보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10.21 ‘지식인’ 안중근, 한·중·일 평화공존 사상 싹 틔웠다

[근현대사 특강] 26일 하얼빈 의거 114주년

20세기 초 동아시아의 대석학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는 ‘추풍단등곡(秋風斷藤曲’)을 지어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를 찬양했다. 차가운 가을바람이 단단한 등나무를 쪼갰다는 뜻의 제목이다. 찬 기운이 도는 요즘, 10월 26일이 그 의거 날이다. 114년의 세월이 흘렀다.

 

안중근(1879~1910)은 의거 당시 만 30세였다. 공자는 『논어』에서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고 20세 약관에 열심히 공부하고 30세에 뜻을 세웠다(立志)고 했다. 공자의 기준으로 봐도 안중근은 조숙이 차고 넘치는 인물이다.

 

앞서 살폈던, 일본제국의 장래를 결정짓는 ‘유수록(幽囚錄)’을 남기고 죽은 일본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도 도쿠가와 막부 타도를 외치다가 29세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근현대사 특강’ 2회, 6월 7일) 요즈음 기준으로는 취업 문제로 고민하는 연령대인데 그들은 국가 대사로 목숨을 바쳤다. ‘유수록’은 섬나라 일본이 구미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기 위해 서구의 우수한 기술을 속히 배워 그들보다 먼저 주변국을 차지해야 한다는 침략주의 사상을 담아 본받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이에 반해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은 한·중·일이 함께 사는 길을 찾는 평화공존 사상이다.

 

동아시아 석학 량치차오, 하얼빈 의거 찬양

 ▲삼흥학교 교장 시절의 안중근. 윤병석 편, 『안중근 문집』(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1) [중앙포토]

 

필자는 언젠가부터 안중근은 지식인으로 조명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안중근은 요시다 쇼인이 죽은 지 20년 뒤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다. 무술 익히기를 즐기던 그는 1897년 19세에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두 해 전 1895년 2월 군주가 내린 ‘교육조령(詔令)’이 준 자극도 컸다. 나라의 수모를 씻을, 나라의 원한을 갚을, 나라의 정치를 이끌어 갈 ‘국민’ 창출을 위해 덕·체·지 3양(養) 의 신교육을 시작한다는 선언이었다. 영국의 존 로크가 내세운 근대 교육론이 이 땅의 교육 강령으로 채택되었다. 청일전쟁의 침략을 당하면서 겪은 수모와 고초를 극복하기 위한 심기일전의 선언이었다.

 

이 무렵 약관의 나이에 접어든 안중근은 『독립신문』(1896.4.7 창간)과 신서적들에 다가갔다. 세례를 집전해 준 빌렘 신부의 서재에는 서양 서적들이 가득했다. 안중근은 그 책들을 읽기 위해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24세가 되던 1904년에 서울로 올라와 명동 성당의 뮈텔 신부를 찾아 대학 설립을 요청했다. 뮈텔 신부는 한국에는 아직 대학이 필요치 않다고 말하자 안중근은 천주는 모시되 서양인은 못 믿겠다고 분노했다.

 

 ▲죠셉 빌렘 신부. 안중근은 자서전 『안응칠 역사』 끝에 빌렘 신부 서재에 서양 서적이 많다고 적었다. [중앙포토]

 

1905년 11월 ‘보호조약’이 강제되자 안중근은 국권 회복 투쟁 기지를 찾아 중국 상하이로 갔다. 거기서 우연히 홍콩을 다녀오는 황해도 교구 소속 르각 신부를 만난다. 신부는 안중근이 상하이에 온 사연을 듣고 우리 알자스-로렌 사람들이 프로이센 사람들의 침략을 받았을 때 뒷날을 기약하면서 밖으로 많이 나온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지금 네가 할 일은 돌아가서 교육 운동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안중근은 진남포로 돌아와 삼흥(三興) 학교를 세웠다. 사흥(士興)-민흥(民興)-국흥(國興), 즉 지식인이 많아지면 국민이 일어나고 나라가 흥한다는 뜻이다.

 

1907년 2월 일제가 대한제국 정부에 씌운 빚 갚기 운동이 대구에서 시작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퍼졌다. 나라가 억울하게 진 빚을 갚는 것은 국민의 의무라고 했다. 의무를 앞세운 국민 탄생, 서구 역사에서도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안중근은 국채보상운동 평안도 진남포 지역 책임자로 뛰었다. 그해 7월에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광무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자 안중근은 해외 무장 투쟁의 길에 나선다. 그는 열차로 부산으로 가서 거기서 배를 타고 원산을 거쳐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곳 대동공보사에 본부를 둔 대한의군(大韓義軍)을 찾았다. 의군은 국군을 뜻하는 의병의 새 명칭이다. 그는 연해주 곳곳에 나와 살던 동포들을 찾아 무장·교육 투쟁을 독려했다. 150여 명의 부대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동양평화론, 국제연맹 탄생 9년 전에 제시

1909년 10월 초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의군 본부는 한국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으로 온다는 신문 보도를 보고 그를 처단하기 위해 특파대를 구성한다. 안중근은 자원하여 특파대대장이 되어 3명의 대원을 지휘하여 10월 26일 오전 하얼빈 철도정거장에서 이토 히로부미 처단에 성공한다. 그가 쥔 브라우닝 권총을 빠져나간 총탄 3발이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과 복부에 명중하고 다른 3발은 그를 수행하던 일본 관헌의 몸에 박히거나 스쳤다. 내가 쏜 저 늙은이가 이토 히로부미가 아닐지 모른다는 순간적 의구심으로 그를 따르던 관헌들을 겨냥했다. 권총을 바닥에 내려놓고 ‘꼬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세 번 외쳤을 때 1발이 남아 있었다.

 

안중근은 일본 검찰과 경찰로부터 각 10여 차례 신문을 받는다. 일본 정부는 수사 초동 단계에 안중근 형량(극형)을 미리 정해 놓고 관동도독부 법관들을 감독했다. 뤼순 법원은 1910년 2월 4일에 7일 공판 개시를 공고했다. 3일 앞둔 개정 공고는 예가 없다. 법정은 국선 변호사만 허용한다고 하여 변호의 길도 차단했다. 대동공보사 측이 구성한 국제변호인단은 방청석에서 공판을 지켜봐야 했다.

 

필자는 『안중근 선생 공판기』(1946)를 읽으면서 안중근 연구를 시작했다. 그때 ‘지식인 안중근’을 처음 발견했다. 안중근은 법관들을 향해 이렇게 4번이나 외쳤다. 나는 대한의군 참모 중장으로 적장을 처단한 것이니 나에게 적용할 법은 오로지 1899년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채택한 ‘육전(陸戰) 포로에 관한 법’이다. 당시 이 국제법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2월 14일 1주일 만에 열린 여섯 번째 공판에서 그는 사형 선고를 받는다.

 

 ▲‘청취서’(한국역사연구원 편, 『그들이 기록한 안중근 하얼빈 의거』, 2021). 미 완고 ‘동양평화론’의 요지가 담겨있다.

 

사형 선고 뒤 행적도 의연하기 그지없다. 그는 곧 법원장 면담을 신청해 2월 17일 대면이 이루어진다. 한국어 통역 담당 일본인 경찰이 대화를 받아 적어 남긴 ‘청취서’란 자료가 전한다. 안중근은 히라이시 우진토(平石氏人) 법원장을 만나자 내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상고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상고하는 순간 일제 침략 체제를 인정하는 것이 되므로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동양평화론’은 거짓이라고 비판했다. 일본이 앞장서 러시아의 동양 진출을 막는 것이 동양 평화의 길이라고 선전하여 러일전쟁에서 한국인과 중국인들이 일본을 돕기도 했는데 전쟁이 끝난 뒤 일본은 한국의 주권을 빼앗고 만주 진출을 노리고 있으니 이토를 어떻게 그냥 둘 수 있느냐고 했다.

 

이어서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동양 평화 구상은 다르다고 했다. 법원장은 그것이 무엇이냐고 다그쳤다. 그는 이미 안중근을 흠모하고 있었다. 안중근은 한·중·일 3국이 서양 세력을 막으려면 뤼순에 3국 공동 군단을 세우고 또 공용화폐를 발행하는 은행을 설립해 경제력을 함께 키워야 한다고 했다. 군단 소속의 3국 젊은이들은 서로의 이해를 위해 상대국 언어를 익혀야 한다고 했다. 1919년 미국 지식인들이 윌슨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국제연맹을 탄생시키기 9년 전의 일이다. 공용화폐 발행 착상은 그때도 누구도 하지 못한 것이다. 어찌 극동의 30세 청년의 가슴에 이런 뜨거운 평화 사상이 싹텄을까. 한민족 특유의 평화 DNA라고 하려니 부끄러움이 앞선다.

 

일본 호세이대학의 마키노 에이지(牧野英二) 교수는 아무래도 안중근이 빌렘 신부 서재에서 프랑스어 번역본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읽은 것 같다고 했다. 마키노 교수는 일본 칸트 철학회 회장을 역임한 칸트 전공 권위자이다. 이 말을 듣고 나의 ‘지식인 안중근’ 코드에 ‘평화공존 사상의 선구’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안중근은 사형 집행 때까지 50여 일간 매일 한두 편의 유묵을 써서 신념을 후세에 남겼다.

 

동아시아 대 석학 량치차오는 자신이 1910년 창간한 『국풍보(國風報』) 2월 28일 자 제2호 ‘세계기사’ 난에 ‘안중근 사형’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사형 선고를 받고서도 안색이 흔들리지 않고 평시처럼 의기양양하다. 국치를 한 번 씻었으니 기꺼이 죽겠다고 말했다. 오호라 참으로 열사로다!

중앙일보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11-03 세자 가르치고 ‘그림자 보필’… 출세 쉽지만 심기 건드려 목숨 잃기도

▲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교육·호위 담당 ‘세자시강원’·‘세자익위사’

학자들 1일 3회 경서·교양 강의
무신들은 수업 중에도 철저 경호

연산군 수업 태도 꾸짖은 조지서
엄하게 가르치다 결국 보복 당해

암살 공포 정조 보호해준 홍국영
인사권 꿰차고 세도정치 일삼아

정조, 정적 시선 洪에 돌려 놓고
규장각 확대 등 왕권 기틀 다져


1. 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의 기능

 

궁궐 안에는 세자궁을 위한 두 개의 관청이 있었는데, 그것은 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다. 세자시강원은 세자를 모시고 경서와 역사를 강론하며, 나라의 군주로서 갖춰야 할 인격과 교양을 가르치는 임무를 맡은 곳이다.

세자에게 하는 강의를 서연(書筵)이라 했는데 이는 임금께 하는 강의인 경연(經筵)과 비슷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연은 오전, 오후, 저녁 하루에 세 번 열렸으며 주로 ‘논어’ ‘맹자’ 같은 유교 경전과 ‘춘추좌전’ 같은 역사책을 배웠다.

세자는 왕이 될 사람이라 세자교육에는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스승으로 동원되었다. 영의정이 세자의 최고 스승이 되고, 좌의정이나 우의정 중 한 사람이 또한 스승을 맡는 등 정승판서들까지 스승으로 나서게 된다. 이들이 스승이 됨으로써 세자는 자연스럽게 정치적인 식견과 국가관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승판서들은 정사에 바쁜 사람들이었기에 세자교육을 주로 맡아 하던 사람은 종3품의 보덕 1명을 비롯하여 필선, 문학, 사서, 설서 등 총 5명의 문관들이었다.

이렇듯 세자시강원이 세자의 학문을 담당하는 곳이라면 세자익위사는 세자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은 곳으로 세자 경호군대라고 할 수 있다. 장차 나라의 임금이 될 세자의 신변을 보호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곳의 관리는 모두 무술에 능한 무신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늘 세자 주변에서 보필하는 이들이기에 무신 중에서도 특히 교양이 풍부한 사람으로 가려 뽑았다. 이들은 세자가 행차할 때는 앞에서 인도하고, 수업을 받을 때에는 섬돌 아래에서 호위하면서 그림자같이 세자를 보필했다.

세자익위사엔 정5품 좌익위, 우익위 각 한 명씩을 우두머리로 하여 좌사어, 우사어 등 총 14명이 근무하였다.


2. 연산군에 밉보여 목숨을 잃은 조지서

세자의 학문을 담당하던 세자시강원의 문관들은 대개 세자가 왕이 된 뒤에 중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까닭에 세자시강원도 출세의 디딤돌이 될 수 있는 직장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세자시강원 출신이라 해서 반드시 미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때론 그들 중에 세자에게 밉보여 되레 출셋길이 막히고 심지어 목숨을 잃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양녕대군이나 연산군처럼 공부를 싫어하는 세자를 가르치는 경우엔 남달리 처세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혹여 수업 중에 세자의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심기를 상하게 했을 경우 훗날 보복을 당할 우려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폭군 연산군은 세자 시절 자신을 가르치던 스승을 죽였다. 연산군이 세자로 있을 때, 그를 가르치던 문관 중에 허침과 조지서란 인물이 있었다. 이들은 학문과 명망이 높아 성종이 친히 세자를 맡아달라고 부탁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공부를 싫어하는 연산군을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달랐고, 그 태도로 인해 완전히 다른 운명이 되었다.

조지서는 평소에 엄하고 깐깐한 성품으로 연산군이 수업을 비우거나 과제를 소홀히 하는 것을 쉽게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연산군이 수업을 비우거나 수업 태도가 나쁘면 상감에게 고해바치겠다고 으름장을 놓곤 했다. 이에 비해 허침은 성격이 유하여 늘 웃으면서 연산군을 대하며 부드러운 말투로 타이르곤 했다. 이런 까닭에 어린 연산군은 조지서를 싫어하고 허침을 좋아했다. 그래서 하루는 벽에다 연산군은 이렇게 써놓았다.

 

‘조지서는 대소인배요, 허침은 대성인이다.’

그런데 이때만 해도 조지서는 이 글의 의미가 자신에게 어떤 운명을 가져다줄지 전혀 몰랐다. 그저 어린 마음에 속상해서 쓴 단순한 낙서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연산군은 자신을 질책하거나 위협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절대 용납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거기다 집요하고 잔인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스승에 대한 불만과 증오심을 확대하여 결국 왕이 된 뒤에 조지서를 죽여 버렸던 것이다.

 

3. 정조의 방패막이가 된 세도가 홍국영

하지만 세자시강원 문관들 중에 조지서와 같이 불행한 죽음을 맞이한 인물은 그다지 많지 않다. 대개는 세자를 가르친 인연 덕분에 관직 생활이 무난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다고 세자시강원이 권력의 발판이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런데 정조대의 기린아 홍국영은 세자시강원에서 근무한 덕분에 20대의 젊은 나이에 엄청난 권력자가 되어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도대체 홍국영은 어떻게 젊은 나이에 그토록 엄청난 권력을 가지게 되었을까? 여기엔 그를 엄청난 권력자로 만든 정조의 치밀한 계획이 숨어 있었다.

홍국영은 24세 때인 177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 벼슬살이를 시작했고, 이후 세자시강원 관원이 되어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를 보필했다. 정조는 세손 시절에 노론과 대립한 까닭에 암살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이때 홍국영은 세자익위사의 관원들을 지휘하며 세손을 지켜냈다. 그리고 마침내 1776년에 무사히 정조를 왕위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홍국영을 일약 정3품 동부승지로 전격 발탁하고 이내 도승지로 승진시켰으며, 근위부대인 숙위소를 설치하여 홍국영으로 하여금 숙위대장을 겸하도록 했다. 이때 홍국영의 나이는 불과 29세밖에 되지 않았다.

이처럼 정조의 신임을 한몸에 받은 홍국영은 실권을 장악하게 되자 삼사의 소계, 팔도의 장첩, 묘염, 전랑직의 인사권 등을 모두 총괄하였고, 이에 따라 백관들은 물론 팔도감사나 수령들까지도 그에게 머리를 숙이게 되었다. 그리고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이 되게 함으로써 정권을 한 손에 쥐게 되었다. 모든 관리는 그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으므로 이른바 ‘세도(勢道)’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홍국영의 세도 정치는 4년밖에 가지 못했다. 그가 정조의 후궁으로 바친 누이동생 원빈은 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고, 정조 또한 그에게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조는 그가 스스로 조정에서 물러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홍국영은 오히려 정권을 독점하기 위해 왕비 효의왕후를 독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가 이것이 발각되어 집권 4년 만인 1780년에 가산을 몰수당하고 전리로 방출되고 말았다.

 

사실, 정조는 홍국영의 4년 세도 정치 기간 충실히 규장각을 확대하고 인재를 끌어모았다. 즉, 모든 신하의 눈을 홍국영에게 집중시킨 다음, 자신은 앞으로 펼칠 자신의 정치를 위해 치밀하게 준비했던 것이다. 이는 그가 고의로 홍국영의 세도 정치를 부추기거나 방치했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 말하자면 홍국영을 자신의 왕권 확립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다 용도가 끝났다고 판단되자, 가차 없이 토사구팽해 버린 것이다.


문화일보  박영규 작가


■ 용어설명 - 세도 정치(勢道政治)

조선 후기에 한 명 혹은 극소수의 권세가를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던 정치형태. 조선 후기에 신료의 발언권이 강해짐에 따라 유학자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산림이 세도의 당사자로 지목되곤 했다. 권세가의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비판하던 황현, 안확 등의 논자들이 ‘세상 가운데의 도리’를 뜻하는 세도(世道)를 세도(勢道)로 바꾸어 표현함에 따라 세도 정치의 용어가 성립했다.

 

 

11.03 남녘의 절해고도, 영국은 왜 이곳을 점령했나

‘동양의 지브롤터’ 거문도

전남 여수에서 쾌속정을 타고 남쪽으로 2시간 정도 달리면 동백나무가 무성한 섬을 만난다. 거문도다. 거문도는 동백나무 숲이 무성해 이 숲길을 걸으면 한낮에도 어둡다. 그래서 어둡다는 검음에서 거문도란 이름이 생겨났다는 설이 있다.

 

이 섬은 동도·서도·고도로 구성되는데 세 섬이 삼각형 형태로 병풍처럼 둘러쳐져 그 안이 호수처럼 잔잔한 천혜의 항구다. 그런데 이런 잔잔함과 달리 거문도는 19세기 말 국제정치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제정 러시아가 동북아 진출을 위해 거문도에 눈독을 들이자 영국이 이를 눈치채고 미리 점거해 동양의 지브롤터가 되어서다.

19세기 말 국제정치의 압축파일
러시아 남진정책에 영국 견제구

국토 앗기고도 조선은 속수무책
지배층 분열에 열강의 싸움터로

청일전쟁·러일전쟁 잇따라 터져
개혁기회 놓치며 백성만 피눈물

 

 이베리아 반도와 한반도

▲남쪽에서 바라본 거문도. 오른쪽 섬이 거문도항이 있는 고도다. 영국군은 여기에 군사기지를 만들었다. [사진 김정탁]

 

지브롤터는 스페인 최남단의 영국령인데 아프리카 대륙과 인접해서 마주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요충지다. 수에즈 운하가 완성되기 전까진 이탈리아·그리스·튀르키예 등 지중해권 나라가 여기를 통과하지 못하면 대서양에 진출하지 못했다. 러시아도 마찬가지여서 흑해함대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간신히 빠져나와 지중해로 나와도 지브롤터에서 막히면 대서양 진출은 물거품이 된다. 영국이 여기를 1713년부터 점거했으니 러시아로선 큰 낭패였다. 영국의 거문도 점령도 마찬가지 효과를 지녀 동북아 진출을 노리는 러시아에는 동양의 지브롤터와 같았다.

 

▲김경진 기자 

 

영국은 어째서 이베리아반도 끝과 우리 남해안에서 러시아의 발목을 잡았을까.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 이후 유럽의 신흥강국으로 부상했는데 부동항이 없는 지리적 한계로 인해 영토 확장을 위해서 노심초사했다. 이에 남진 정책을 과감히 펼쳤는데 영국에게는 자신의 식민지를 위협하는 중대한 도전이었다. 그래서 두 나라는 19세기 내내 세계 도처에서 대립했고, 마침내 크림전쟁(1854~1856)으로 충돌했다. 크림전쟁은 나이팅게일의 신화로 유명하지만, 영국이 러시아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서 벌인 최초의 전쟁이다.

 

러시아는 크림전쟁에 패했어도 미국과 전략적 제휴를 통해 또다시 영국을 견제했다. 이에 따라 크림전쟁이 끝나고 5년 후에 발발한 미국 남북전쟁(1861~65)에서 남군을 지원한 영국과 달리 러시아는 링컨의 북군을 지원했다. 그리고 2년 후인 1867년 알래스카를 미국에 헐값에 팔았다. 크림전쟁 여파로 생겨난 러시아의 재정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서였는데 알래스카를 획득한 미국을 통해 당시 영국령이던 캐나다를 지리적으로 압박하려는 속셈도 있었다.

 

러시아의 남진 “부동항을 찾아라”

▲북쪽에서 바라본 거문도. 왼쪽이 동도, 오른쪽이 서도인데 그 사이에 고도가 있다. 왼쪽 다리가 동도와 서를 잇는 다리다. [사진 김정탁]

 

러시아의 남진 정책은 방향을 틀어 중앙아시아로 향했다. 그래서 이미 점령한 우즈베키스탄·투르키스탄·타지키스탄·키르기스스탄에서 남쪽으로 더 내려가 아프가니스탄으로 이동했는데 이는 인도양으로 나가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인도를 식민지로 둔 영국과의 마찰이 불가피해졌는데 러시아는 이에 개의치 않고 남진의 범위를 동북아로 확장했다. 1858년에는 청(淸)과 아이훈조약을 통해 연해주를 차지해 동북아 진출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 2년 후인 1860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차지해 부동항을 확보했다. 1891년에는 육로로도 눈을 돌려 9300㎞에 달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 착수했다.

 

▲거문도 고도에 있는 영국군 묘지. [사진 김정탁]

 

그런데도 러시아는 한반도 부근에서 새로운 부동항을 찾기 위해 애썼다. 블라디보스토크보다 효용 가치가 높은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따라 1860년부터 40년간에 걸쳐 조선·일본·중국 연안 등지에서 부동항을 물색했다. 그 결과 영흥만(원산만)과 제주도, 쓰시마가 최종 물망에 올랐고, 1861년에는 러시아 군함이 쓰시마에 반년이나 머물렀다. 러시아는 이 중에서 영흥만을 가장 탐내 1884년에 조선과 서둘러서 통상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톈진 주재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조선조정 외교 고문인 묄렌도르프의 도움을 받아 청의 위안스카이(袁世凱) 간섭에 오랫동안 지친 조선에 친러의 씨앗을 심었다.

 

러시아가 군사교관 파견의 대가로 영흥만을 차지했다는 소문에 영국은 1885년 4월 거문도로 향했다. 이때가 청일전쟁의 원인이 된 리훙장과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 톈진조약이 체결된 직후이고,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하기 10년 전이었다. 영국의 동양함대 사령관 도웰 제독이 군함 3척을 거느리고 일본 나가사키·항을 출발해 다음 날 거문도를 점령했다. 그리고 유니온 잭 기를 게양하고 포대를 구축해 병영을 건설한 뒤 군사기지로 만들고서 영국 해군장관의 이름을 따 해밀턴항으로 명명했다. 처음 200명이던 병사가 800명으로 늘고, 함대도 10척 규모로 커지자 조그만 섬이 갑자기 북적거렸다.

 

‘아시아의 발칸반도’가 된 조선

▲거문도 고도의 거문초등학교. 이곳에 영국군 기지 사령부가 있었는데 이 운동장에 우리나라 최초의 테니스장이 만들어졌다. [사진 김정탁]

 

조선은 영국 공사관을 통해 거문도를 점령했다는 통보를 받았어도 발만 동동 굴려야 했다. 청이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인정하는 분위기였고, 일본과 미국도 관망하거나 동조해서다. 이들 국가는 러시아의 남하를 큰 위협으로 느껴 영국을 통해 이를 견제하고자 했다. 이에 힘입은 영국은 거문도를 조차하기 위해 조선의 보호국임을 자처하는 청과 교섭했다. 그런데 조선의 속국화에 관심이 많던 리훙장의 반대로 교섭이 더디어지자 조선과 직접 교섭에 나섰다. 이때 영국은 거문도 임차비용으로 매년 5000파운드(현재 기준 약 35억원)를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에도 러시아로 기울었던 조선 조정이 돈으로 영토를 거래하는 건 불가하다며 교섭을 거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충돌했던 영국과 러시아 간에 협상이 타결돼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할 명분이 없어졌다. 그래서 영국은 2년 만에 거문도에서 철수했는데 이 과정에서 조선은 극도의 무력감을 나타냈다. 한반도가 열강의 각축장으로 변해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음에도 지배층의 무지와 무능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한편 청은 거문도 사건의 해결에 중재자를 자처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더욱 강화했다. 그러자 한반도는 유럽의 발칸반도처럼 동북아의 화약고가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연쇄적으로 터졌다.

 

친청파·친일파·친러파의 갈등

▲거문도 서도 남쪽 끝에 있는 등대. 인천 팔미도 등대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등대다. [사진 김정탁]

 

이런 상황인데도 조선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지배층은 친청파·친일파·친러파 등으로 나누어져 청·일·러시아의 앞잡이 내지는 대변자로 둔갑했다. 또 고종과 민씨 일족은 친일에서 친청으로, 다시 친러로 입장을 계속 바꾸었다. 동북아에서 부동항 획득은 러시아에는 생명선 확보와 같아서 어차피 조선에 접근해야 했다. 그런데도 고종과 민씨 정권은 권력에 집착하고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러시아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오히려 애썼다. 이에 따라 베베르 러시아 공사와 2주 만에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서울 정동의 22만 평 땅을 거의 공짜에 파는 등 온갖 편의를 러시아에 제공했다.

 

▲차준홍 기자

 

 

급기야 고종은 아관파천까지 단행했다. 민비가 살해된 후 신변에 불안을 느껴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하니 어처구니가 없다. 이런 인간이 왕이었으니 백성만 불쌍하다는 느낌이 든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김홍집 내각이 추진한 갑오경장으로 왕정(王政) 대신 입헌군주제에 따른 헌정(憲政)이 시작되는 게 싫어 피신한 거라고 주장하는데 그러면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고종의 무능함만 더욱 드러낼 뿐이다. 아관파천 이후 조선에선 더 이상의 개혁은 고사하고, 이미 시작된 갑오경장의 개혁마저 뒷걸음쳤다.

 

 

▲거문도 주민이 영국인과 어울려 찍은 사진. [사진 김정탁]

 

 거문은 ‘클 거(巨)’에 ‘글월 문(文)’인데 여기에는 일화가 있다. 조선조정이 점령군 영국군과 교섭하기 위해 거문도에 갔을 때 청의 북양함대 사령관 띵루창(丁汝昌)도 동행했다. 그런데 띵루창의 눈에 집집이 사서삼경이 있고 경전을 읽는 사람이 많아 이에 놀란 나머지 ‘큰 문(巨文)’이란 이름이 이때 생겨났다고 한다.

 

이런 섬에 물고기를 잘 잡는 실학이 아니라 과거를 위한 학문이 깊게 스며들어 안타깝긴 해도 당시 거문도 주민은 조선의 지배층보다 잘 처신했다고 본다. 절해고도에 주둔한 영국군의 약한 고리를 잘 활용해 영국군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선진문물을 접할 기회로 삼아서다.

중앙일보 김정탁 노장사상가

 

 

11.18 元 통치 100년 받으며 고기 국물 음식, 고소리술 유행

  우리나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제주의 제주마(濟州馬). /문화재청

 

최근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를 찾은 우리나라 여행객 사이에 '몽탄 신도시'라는 신조어가 생겼어요. 한국식 아파트, 편의점, 카페, 제과점 등이 경기도 '동탄 신도시'와 비슷하고, 한글로 된 간판도 많기 때문이에요. 몽골은 우리나라가 고려 시대 100여 년간 원 간섭기를 겪으며 교류가 많았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제주(탐라)가 원의 직할지로 가장 오랜 기간 직접 원의 지배를 받았던 곳이라는 사실, 알고 있나요? 몽골 지배 기간 제주의 변화와, 고려가 제주에서 몽골 세력을 몰아내는 과정을 알아보겠습니다.


삼별초 항쟁 계기로 제주에 몽골인 거주

'고려사' 원종 때 기록에 따르면 당시 제주에는 주민 1만2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어요. 1273년 원과 고려 연합군이 삼별초 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에 군대를 파견했는데, 항쟁을 진압한 뒤 '탐라초토사(耽羅招討司)'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몽골군 700여 명이 주둔했어요. 이때 몽골인의 제주 거주 역사가 시작하고, 제주가 원 직할지가 된 것이죠.

제주를 남송과 일본을 공격할 군사적 요충지로 여긴 원은 말을 기를 목마장을 제주에 설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충렬왕 때 말 160필을 방목했고, '동아막'과 '서아막'이라 부르는 목마장을 설치했어요. '아막'은 넓게는 고려의 도(道)나 군(郡)에 해당하는 행정 단위이고, 좁게는 목장을 관리하는 본부 역할을 했어요. 동서 아막 안에는 몽골인의 전통 집인 게르와 성(城)이 있었다고 추정해요. 목마장에는 말뿐 아니라 소, 낙타, 당나귀, 양 등도 방목해 키웠어요.

목장을 설치한 초기, 원 제국은 제주에서 말을 실어 내지 않았지만, 1295년 이후에는 관리를 보내 말을 실어 날랐어요. 1320년쯤에는 제주 목마장이 원의 대표적 목장 14곳에 들어갈 만큼 번성했지요. 원의 직할 지배를 받은 제주는 고려 영토에 일시적으로 포함되기도 했지만, 원의 경제적 지배와 수탈은 계속됐어요.

원이 제주를 직할지로 지배하면서 목마장을 운영하는 관리인 '목호(牧胡)', 일반 주민과 군인, 원 정권에서 밀려난 유배자, 죄인 등이 원에서 제주로 이주했어요. 원 제국 군인과 목호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했으나, 상당수는 제주에서 통혼해 정착했어요. 초기 통혼은 몽골인과 제주 여성 사이에서 이뤄졌고, 점차 세대를 거치면서 그들의 자녀끼리도 혼인했어요. 몽골인뿐만 아니라 통혼한 사람도 제주에서 지배층을 형성하며 점차 세력을 강화해 나갔어요.

원의 지배와 몽골인의 제주 이주는 음식 문화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원래 제주 사람은 해산물과 채소류를 주로 먹었는데, 몽골인이 대거 이주한 후에는 고기를 많이 먹기 시작해요. 몽골인은 양고기를 물에 끊인 음식 '슐루'를 많이 먹었는데, 그 영향으로 제주에서는 돼지고기와 소고기에 각종 채소를 넣고 끓이는 국물 요리가 유행했습니다. 몽골인은 양의 내장으로 순대(게데스)를 만들었는데, 그 요리법이 전해져 제주에서는 돼지 내장으로 순대를 만들어 먹었어요. 또 몽골에서는 발효한 젖술(마유주)을 증류해 무색 투명하고 알코올 농도가 짙은 소주를 빚었는데, 제주에서는 조나 보리를 사용해 만든 고소리술이 유행했어요.


말 관리하며 득세한 '목호' 세력 정벌

공민왕 때는 제주에서 '하치'라고 부르던 목호 세력이 지배층을 형성했습니다. 이들은 원이 설치한 국립 목장 '아막'에 소속돼 말, 소 등을 사육했어요. 그러나 원이 쇠퇴하고 중국 강남 지역에 명(明)이 들어서면서 제주 목호 세력도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공민왕이 반원(反元) 정책을 시행하고 제주 목호 세력을 압박하자 목호들은 제주에 파견된 고려 관리를 살해했습니다. 고려와 목호 세력 간 첫 충돌이었고, 원 멸망 후에도 제주에서는 목호들이 세력을 유지해 이런 충돌이 지속됐습니다. 당시 고려는 명이 원을 대신해 제주를 지배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어요.

명은 공민왕 21년(1372년) 관리를 보내 제주의 말을 실어 가려고 했습니다. 고려는 명에서 파견한 관리, 고려 관리, 말 운반에 필요한 인력을 제주로 보냈으나, 목호 세력은 이들 대부분을 살해했어요. 공민왕 23년(1374년)에는 명의 사신이 "원이 말 2만~3만필을 제주에 남겨 둬 방목했으니, 많이 번식했을 것이다. 고려 왕이 좋은 말 2000필을 가려 뽑아 보내오게 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고려에 전했어요. 하지만 제주 목호 세력은 말 300필만 내줬어요. 결국 고려는 새로 등장한 명과 외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목호 세력 토벌을 결정합니다.

공민왕은 목호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최영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최영은 전국에서 차출한 정예군 2만5605명과 전함 314척으로 출정군을 구성했어요. 총사령관 최영과 휘하 장군은 홍건적과 왜구 토벌 과정에서 성장한 군인 출신이었고, 전투 경험이 풍부했어요. 이성계가 요동 정벌을 위해 출정한 병사가 3만8830명이었으니, 목호 세력을 정벌하기 위한 군대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겠죠. 목호 세력은 기병 3000여 명과 보병을 거느리고 있었어요. 초기 전투에서는 고려군이 패배했으나, 최영은 1개월 전투 끝에 목호 세력을 서남부로 밀어냈어요. 전투에서 밀린 목호 세력은 서귀포 앞바다 범섬으로 피신했다가 항복하거나 자살했어요.

최영이 이끄는 고려군은 목호 세력 토벌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최영이 목호 세력을 정벌하는 동안 공민왕이 시해됐고, 10세의 어린 우왕이 즉위했어요. 명은 우왕에게 말을 계속 바치라고 요구했죠. 우왕 이후 고려는 말 약 3만여 필을 명에 바치는데, 그중 약 2만필이 제주에서 키운 말이었어요. 우왕과 최영이 명에 반감을 갖게 된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겠죠. 또 우왕은 최영이 제주를 정벌하느라 개경에 없었기 때문에 공민왕이 시해됐다고 생각했어요. 우왕은 최영이 직접 요동 정벌을 나가는 데 반대했고, 그 결과 이성계가 정벌군을 이끌고 요동으로 가다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했죠. 이렇게 보면 최영의 제주 목호 세력 정벌이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최영 장군 표준 영정. /한국문화정보원

 

 제주 서귀포시 법환동 해변에 최영 장군이 목호 세력을 토벌한 것을 기념해 세운 승전비. /제주학 연구센터

조선일보 이환병 관악고 교감 기획·구성=김윤주 기자

 
 
 

11.21 백정의 아들이 선사한 서양의학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가면 한쪽 구석에 아늑한 역사관이 있다. 다들 모르고 그쪽을 찾지 않기 때문에 아주 조용하다. 병들어 고생하는 가족들을 힘겹게 돌보는 보호자들이 평화롭게 잠시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이다. 그 역사관 전시물이 중점적으로 다루는 내용은 세브란스병원의 창립자라 할 수 있는 에비슨(Oliver Avison)의 생애와 업적이다. 캐나다 출신 선교사 겸 의사였던 에비슨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활동에 감명을 받아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이었던 제중원의 책임자로 부임하면서 1893년 한국에 왔고, 고종 황제의 주치의도 맡게 되었다. 그 후 에비슨은 미국의 자선사업가 세브란스(Louis Severance)의 지원을 받아 제중원을 세브란스병원으로 크게 재설립했다.

 

세브란스병원 창립 에비슨 박사
천민 집안 박서양을 의사로 키워
양반이 꺼리던 외과 수술서 명성
힘들고 험했던 의사의 과업 귀감

 

얼마 전 그 전시물에서 보고 놀라운 감동을 받은 내용이 있었는데, 에비슨이 아끼며 키웠던 제자 박서양의 이야기이다. 그의 아버지는 천민 중에도 가장 경멸당하는 백정이었는데, 장티푸스로 사경을 헤매던 중 우연한 인연으로 소개받은 에비슨 선생에게 치료받고 완쾌된 후 서양의학과 기독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재능 있는 자기 아들에게 서양의학을 공부시켜보겠다는 꿈도 꾸었다. 그의 간절한 부탁을 받은 에비슨은 1900년도에 제중원 의학교를 설립하면서 제1회 입학생으로 박서양을 받아주었다. 그 동기 중 7명만이 무사히 학업을 마치고 1908년에 서양식 의사 자격증을 따게 되었는데, 그중에 천민 박서양이 당당히 끼었다.

 

박서양은 졸업 후 모교에서 교편을 잡고 후진들을 길러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만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현지에서 학교를 세워서 한국계 동포들을 교육하고, 독립운동단체 대한국민회의 군의관으로 재직하며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만주에서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이 여의치 않자 귀국하여 황해도에서 의료활동을 하다가 1940년 해방을 못 보고 50대 중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생애는 SBS 드라마 ‘제중원’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박서양이 의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일부 학생들이 그의 천민 신분을 문제 삼자 “내 속에 있는 500년 묵은 백정의 피를 보지 말고, 과학의 피를 보고 배워라”라고 질책하며 독려했다는 일화가 있다. 전통사회에서 천시받았던 사람이 외국에서 들어온 학문을 선구적으로 배워 자신을 아껴주지도 않던 사회에 너그러운 기여를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시대 조선에 서양의학을 도입한 것이 왜 중요했는가에 대해선 차근차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서양의학도 사실 그 당시에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항생제도 없었고 엑스레이 찍는 기술조차 정립되기 전이었다. 의학의 과학적 기반이 되는 생리학, 생화학, 유전학도 현대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리 발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전통의학보다 현저히 우월한 점이 적어도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전염병을 통제하는 방역에 대한 지식이었다. 일단 감염이 된 환자는 잘 치료하지 못 했지만 공중보건 정책을 써서 병이 퍼지는 것을 상당히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19세기 서양의학이 고안해 낸 환자 격리, 접촉자 추적조사, 소독약 사용 등의 방법은 지금까지도 전염병 관리의 초석이다. 최근에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다시 상기하게 된 점들이다. 1895년에 조선 땅에 콜레라가 돌았을 때 에비슨은 방역 책임자로 임명되어 큰 공로를 세웠고 우리 정부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얻은 영향력으로 그는 고종 황제에게 신분 차별을 완화하는 조치들을 권유했고, 그 덕분에 박서양 같은 천민들도 갓을 쓰고 양반들과 같이 당당히 예배를 보고 공공장소에도 나올 수 있게 되었다.

 

또 하나 서양의학에서 보여준 것은 수술이었다. 우리 전통 의술에는 사람의 몸에 칼을 대는 법이 없었다. 명성황후가 1871년에 낳은 첫 왕자는 항문이 없이 태어나서 며칠 만에 사망하였는데, 수술로 해결했으면 간단했을지 모른다. 한국 최초의 외과 의사라 칭해지는 박서양이 백정 집안 출신이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다. 피를 튀기며 사람의 몸을 자르고 도려내고 꿰매는 것은 백정이 할 일이지, 어떻게 양반이 손을 대었겠는가. 유럽 의학의 역사를 봐도 초기에는 내과 의사에 비해 외과 의사의 사회적 지위가 훨씬 낮았다. 그러나 서양 의학이 약진하기 시작했던 것은 훌륭한 이론 때문이 아니라 더럽고 끔찍하고 천한 해부와 수술을 감행하면서 인체의 신비를 하나하나 배워 나갔기 때문이었다. 박서양은 백정의 피 대신 과학의 피를 보라 했지만, 백정의 피와 과학의 피는 따지고 보면 긴밀히 섞여 있다.

 

대학입시에서 의대가 최고 인기인 것은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경제적으로도 윤택한 장래가 보장된다는 생각에서이리라. 그러나 진정한 의사의 과업이 절대 편하고 고상하지 않다는 것은 직접 해 보지 않더라도 잠시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중앙일보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과학철학

 

 

11-24 나폴레옹도 감탄한 조선시대 갓… 그 매력의 재발견

《갓을 쓴 양반을 빼고 조선시대를 상상할 수 있을까. 근대화를 거치면서 불필요한 전통문화를 상징했던 갓이 최근 여러 매체를 통해 새롭게 소개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을 제외하면 정작 세계 어디에서도 비슷한 모자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멀게는 200년 전 나폴레옹이 격찬했고, 구한말 한국을 방문한 서양 여행가들은 입을 모아 ‘한국은 모자의 나라’라는 기록을 남겼다.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킹덤’이라는 영화에 화려한 갓이 등장하여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고, 엉뚱하게도 중국에서 갓의 기원은 중국이라며 불필요한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도대체 갓은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언제부터 우리와 함께했을까. 유물이 전하는 그 역사를 함께 살펴보자. 》

 
 

한국의 갓, 고구려에서 시작

 갓이라는 모자는 챙이 달려서 햇빛을 피하는 것이 주목적으로 한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다. 중국 신장의 실크로드에서는 2500년 전부터 짧은 챙이 달린 모자를 쓴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고깔을 썼다. 추운 초원에서 빠르게 말을 달려야 하는 지리적 특성을 감안한 결과이다. 현재 우리가 쓰는 갓과 같은 형태의 모자는 고구려의 감신총 벽화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리고 둔황의 막고굴에 그려진 고구려인의 모습에서도 갓이 보인다. 따라서 현재까지의 자료로 볼 때 갓을 처음 쓴 사람은 고구려인일 가능성이 크다. 동아시아에서 기마문화가 발달한 흉노를 비롯한 유목국가나 중국 어디에서도 비슷한 넓은 챙의 갓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갓은 일본으로 전해졌다. 일본 무사를 빚은 토기 인형(하니와)에서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사진 출처 영국박물관 

 
 

또 실물 갓의 흔적은 신라의 고분인 천마총과 금령총에서 발견되었다. 여기에서 출토된 갓은 자작나무로 만든 챙 부분이다. 그 위에는 고구려의 벽화를 연상시키는 각종 신화 속의 새와 기마인이 그려져 있어서 고구려와의 관련성을 방증한다. 다만 머리에 쓰는 부분은 빠져 있다. 신라 고분 출토품으로 볼 때 삼국시대의 갓은 평소에는 관모를 쓰다가 갓이 필요하면 바깥의 양태(차양) 부분만 따로 쓰는 일종의 조립식이었을 것 같다. 고구려의 갓은 일본으로도 건너갔으니, 우리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고훈시대의 인물형 토기(하니와)에도 갓과 같은 모자를 쓴 무사들이 보인다.

 
 

몽골 영향받은 패랭이

▲패랭이 같은 모자를 쓴 몽골의 석인상. 몽골 영향으로 고려는 물론 유라시아 전역에서 비슷한 모자가 널리 쓰였다. 강인욱 교수 제공

 
 

삼국시대의 갓은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으로 큰 변화를 겪으니, 당시 동아시아 전역에 영향을 준 몽골의 영향이 결합되어서 챙이 짧은 패랭이가 등장한다. 패랭이의 흔적은 멀리 제주도의 돌하르방에도 남아 있다. 몽골제국의 곳곳에 남아 있는 석인상도 패랭이 같은 모자를 쓰고 있어서 외형상 돌하르방과 가장 유사하다. 실제 몽골 간섭기에 제주도에 몽골인이 오래 거주했으니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제주도뿐 아니라 몽골식의 패랭이 모자는 전국 곳곳에 퍼졌다. 밀양 고법리에서 발견된 고려 말기에 문신으로 활동한 박익(1332∼1398)의 무덤에 남겨진 벽화에는 몽골 모자와 닮은 패랭이 같은 갓을 쓴 사람의 모습이 잘 남아 있다.

비록 실물 자료는 없지만 공민왕 대에 검은색의 갓은 양반이 쓰고 흰 갓은 평민이 쓰는 법을 정했다고 하니, 지금 우리에게 친숙한 양반의 갓인 흑립(黑笠)은 이때 본격적으로 등장한 셈이다. 하지만 갓이 널리 유행한 것은 조선시대이다. 조선 왕조는 성리학적 통치질서를 확립하며 엄격한 신분 질서를 강조했고, 각종 관직의 품계에 따라 갓과 장식을 규정했다. 갓은 단순한 모자를 넘어서 새로이 등장한 사대부 계급의 상징이 되면서 더욱 다양해지고 화려하게 발달하며 조선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반면 고려시대로부터 전하던 패랭이는 평민의 것으로 남았다.

이렇게 갓이 한국 문화를 대표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수천 년간 이어진 한국의 상투이다. 2500년 전 고조선의 인물상과 2000년 전 부여의 인물상은 모두 빠짐없이 상투를 틀었다. 조선의 양반들도 멋있는 갓을 쓰기 위해서 머리를 다듬어 작은 달걀만 한 상투의 꼭지를 얹었다. 반면에 같은 시기 중국은 만주족의 변발이 널리 유행했으니 갓 같은 모자는 아예 발달할 수 없었다. 이렇듯 갓은 대외적으로는 한국을 대표하였고, 조선 사회 내에서는 성공한 양반들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조선시대 후기가 되어 양반의 수가 증가하고 신흥 부자들이 많아지며 갓 장식이 발달해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게 되었다.

 
 

 갓의 위엄에 반한 나폴레옹

▲1816년 조선을 방문한 배질 홀이 쓴 책에 들어간 삽화. 나폴레옹은 그림 속 갓 쓴 노인의 위엄을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사진 출처 배질 홀 ‘조선 서해안과 유구 항해기’

 
 

화려한 한국의 갓에 주목한 최초의 유럽인은 놀랍게도 유명한 프랑스의 나폴레옹이었다. 200년 전 유럽을 뒤흔들었던 나폴레옹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대패하고 결국 실각하여 세인트헬레나섬에 감금된 채 실의에 빠져 여생을 보냈다. 당시 영국 해군 장교였던 배질 홀(1788∼1844)은 1816년에 한국의 서부 해안과 일본 오키나와를 탐사하고 돌아가는 길에 나폴레옹이 유배돼 있던 세인트헬레나섬에 들렀다. 세상을 모두 잃고 좌절한 나폴레옹은 적국인 영국의 하급 장교와 만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홀의 아버지가 나폴레옹과 군사학교 동창이라 마지못해 만났고 대화도 무미건조했다.

하지만 홀이 가져온 조선의 그림을 보는 순간 나폴레옹은 눈을 반짝이며 깊은 관심을 보였다. 나폴레옹은 “노인네가 큰 모자, 긴 흰수염에 손에는 기다란 파이프를 쥐고 있네. 하! 정말 잘 그렸어!” 라며 감탄했다. 평소에도 위엄 있는 이미지로 보이길 바랐고 큰 키가 아니어서 언제나 옷에 신경 쓰며 위엄을 드러냈던 나폴레옹이었다. 그러니 머나먼 조선에서 화려한 갓으로 위엄을 부린다는 것이 무척 와닿았던 것이다.

나폴레옹 이후 구한말 한국을 여행한 서양 여행가들은 ‘한국은 모자의 나라’라고 감탄하며 작은 키를 커버하고 화려한 패션을 자랑하는 훌륭한 예술 작품이라 격찬했다. 그런데 외부의 평가는 국권을 침탈당하는 1900년대 이후에 급변하였다. 망해가는 조선에서 갓 쓴 양반을 보고 쓸데없이 큰 모자는 낙하산으로 쓰냐는 비아냥거림으로 이어졌다. 일본에서도 조선 침탈을 본격화하며 유교에 사로잡혀 망국의 길로 간다는 침략 논리를 강화했고, 그 본보기로 화려한 갓을 대표로 들었다. 국운이 쇠하는 시점에서 갓은 망해가는 나라의 상징이 된 것이다. 나라를 잃어버리자 조선을 대표하던 갓은 근대화를 늦춘 구세대를 대표하여 망국의 상징이 되었다.

 

이후 한국이 해방된 이후에도 ‘갓 쓰고 자전거 타기’ 같은 속담처럼 나폴레옹마저 감탄한,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 명품인 갓은 구한말을 거치며 쓸모없는 것을 대표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양한 매체에서 재현된 갓은 천편일률적으로 검은색의 흑립이고 옷도 흰색 도포여서 그리 멋있어 보이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드라마와 대중문화에서 갓이 화려한 장식과 다양한 컬러의 의복과 어울려 재현되자 세계는 마치 200년 전의 나폴레옹처럼 다시 한국의 갓에 환호하기 시작했다.

 
 

세계 곳곳에 챙이 달린 모자는 많이 있지만 갓만큼 다채롭게 그 복식문화를 꽃피운 것은 없으니, 갓은 가히 한국의 미를 대표함에 부족함이 없다. 이렇게 갓에 대한 재평가가 일어나자 중국 일각에서 갓이 중국제라는 주장도 나왔지만 갓은 고조선과 부여에서 유행했던 상투에 유목민들의 전투 모자가 결합된 대표적인 한국적 의복이다. 한국의 복식에는 갓뿐 아니라 북방 유목 전사들의 옷에서 기원한 철릭도 있다. 철릭도 고려시대에 몽골의 영향으로 도입된 이후 조선시대에 양반 신분을 대표하는 화려한 외출복이 되었으니 갓과 비슷하다. 이렇듯 중국과 다른 한국 고유의 복식문화 배경에는 북방의 여러 문화를 수입하고 자신의 사회에 맞게 발전시켰던 문화적 저력이 있다. 하지만 구한말 속절없이 외세의 침략을 당하면서 가장 자랑스러운 물건에서 가장 창피한 물건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최근 한국의 여러 대중문화가 세계적으로 환영받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를 둘러싼 지정학적 상황은 위태롭다. 바로 갓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이중적인 의미가 아닐까.

동아일보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11.24 ‘임꺽정’의 홍명희, 남양 화교 사회서 뭘 배웠을까

 

우리가 몰랐던 남양(南洋·동남아) 문화

 벽초(碧初) 홍명희(1888~1968)는 1914년 말에서 1917년 말까지 3년간 남양(싱가포르 등)에서 지냈다. 이 시기 그의 모습은 많이 밝혀져 있지 않다. 훗날 회고 중에도 이 시기에 관해서는 단편적인 에피소드뿐, 무엇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며 지냈는지 정색하고 밝힌 내용이 별로 없다.

 

27세에서 30세까지, 누구의 인생에서나 매우 중요한 시기다. 그에게는 특히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1910년 초 4년간의 일본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했고, 몇 달 후 조선 망국에 이어 부친 홍범식(1871~1910)의 자결을 겪었다. 아버지는 유서에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나 조선사람으로서의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잃어진 나라를 기어이 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20대 후반을 싱가포르 등서 지내
나라 되살리는 새로운 방안 궁리

화교들의 본국 혁명 지원에 자극
무장투쟁보다 실력 양성에 눈떠

“남양은 미개지역”은 오래된 편견
‘근대=서양’ 고정관념서 벗어나야

 

홍명희가 탈상 직후 중국으로 떠난 것은 복국(復國)의 길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가 6년 후 귀국할 때까지 실제로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은 남양(南洋)이었다. 독립운동의 중심지 상하이에 독립운동을 위해 찾아갔던 이 청년이 남양이라는 미지의 땅으로 넘어가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홍명희에게 특별했던 신규식

 ▲충북 괴산군에 있는 역사소설 『임꺽정(林巨正)』의 작가 벽초 홍명희의 생가. 1910년 한일병합에 항거하며 자결한 부친 홍범식의 고택이기도 하다.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문화재청, 위키피디아]

 

홍명희의 남양 행은 신규식(1880~ 1922)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신이 홍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는 신의 타계 소식을 들었을 때 잡지의 조사(弔詞) 청탁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일화가 보여준다. 1922년 10월 1일자 ‘동명’에는 너무 애통해서 글도 못 짓겠다고 홍명희가 편집자 최남선에게 보낸 편지가 조사 대신 실렸다.

 

대한제국 무관이던 신규식은 합방 후 자결 시도에 실패하고 중국으로 가 동맹회에 가입하고 그곳 혁명지도자들과 친교를 맺었다. 임시정부가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을 길을 연 최대의 공로자였다.

 

신규식은 상하이에 온 홍명희를 매우 아꼈다. 순국의 뜻을 먼저 이룬 인물의 아들에게서 뛰어난 천품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청년을 새로운 방식의 독립운동으로 이끌고 싶은 마음에서 남양 행을 권했을 것이다.

 

 ▲홍명희의 옛집에서 가까운 괴강가 제월대 광장에 있는 벽초 홍명희 문학비.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문화재청, 위키피디아]

 

자결 시도 때 한쪽 눈 시력을 잃고 ‘애꾸’란 뜻의 예관(睨觀)을 아호를 쓴 신규식은 시야가 넓은 사람이었다. 실력 양성이 외적 타도보다 독립운동의 더 중요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홍명희에게 남양 행을 권했다면 중국혁명을 지원한 화교 사회와 같은 역할을 맡을 한교(韓僑)사회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홍명희는 남양에서 3년을 지내고 상하이에 돌아온 후 곧 귀국했다. 남양 사업은 포기했으나 ‘실력 양성’의 길은 한결같이 지켰다. 귀국 후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인 사업이 신간회였고, 신간회가 좌절된 후 『임꺽정』 집필에 전념했다.

 

그의 1918년 귀국은 해외 무장항쟁보다 국내의 실력 양성 운동으로 방향을 잡은 결과였다. 귀국 후 신간회 등 조직사업에 주력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되자 소설 집필에 집중했다. 『임꺽정』 집필은 그에게 주어진 여건에서 가능한 최선의 독립운동이었다.

 

동남아 화교, 19세기 말에 1000만

 ▲동맹회 싱가포르 지부 간부들과 함께한 쑨원(앞줄 가운데). 1905년 일본에서 여러 혁명단체를 통합해 설립된 동맹회는 이듬해 싱가포르 지부를 만들고 쑨원의 혁명활동을 지원했다.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문화재청, 위키피디아]

 

신규식이 생각한 남양은 당시 중국인이 화교 사회를 중심으로 생각하던 남양이었다. 대부분 식민지 상태에 있던 동남아에서 인구의 4~5%를 점하는 화교는 준 지배계급의 위치를 누리고 있었다. 많은 인력을 현지에 데려올 수 없던 유럽인 지배자들이 높은 문화-기술 수준을 갖고 원주민과 유리된 정체성을 가진 화교 집단을 다각적으로 활용한 결과였다.

 

남양 화교 인구는 19세기 초 100만 명 선에서 19세기 말 1000만 명 선으로 늘어났다. 유럽인의 식민지배가 자리 잡던 기간이었다. 유럽인 지배 아래 화교는 상당한 혜택을 누리면서 현지 민중의 미움받이가 되기도 했다. 화교 박해 사태는 대개 식민지배 체제 아래 일어났다. 식민지배가 없을 때는 이주자들이 단순히 적응에 전념했으나 식민지배 아래서는 준 지배계급의 복잡한 입장에 섰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의 영역. 인접한 주요 문명권인 중국과 인도로부터 상당한 거리를 두고 기본적 자연조건을 그 안에서 공유하는 하나의 큰 영역이다.

 

원래 남양 화교는 국가 정체성이 약한 집단이었다. 중국인 정체성을 지키더라도 출신 지역과 가문에 대한 소속감을 통한 것이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별로 없었다. 19세기를 지나며 변화가 일어났다. 원주민과 유럽인 지배자들 사이에 끼인 입장에서 ‘본국’의 뒷받침을 아쉬워하게 된 것이다.

 

당시 중국인의 위기의식은 국가의 중흥을 바라보는 ‘변법(變法)’과 국가체제의 교체를 바라보는 ‘혁명’ 두 갈래로 갈라졌다. 애초에 국가의식이 약하던 화교 사회는 혁명 쪽으로 치우쳤고, 무술변법(1898) 실패 후 본국의 조류가 혁명으로 기울자 혁명파의 지원 기지로 떠올랐다. 쑨원(孫文, 1866~1925)은 1903년 이후 아홉 차례나 남양을 방문하며 지원을 호소했고, 신규식이 가입한 동맹회는 그 지원의 통로 역할을 맡은 조직이었다.

 

왜 홍명희는 결국 남양을 접었나

 ▲홍명희

 

홍명희가 깊이 존경하던 신규식의 권유를 따르지 못하고 남양 사업을 포기한 이유는 무엇일까. 신이 전해 듣던 상황과 홍이 직접 겪으며 파악한 상황 사이의 간격을 추측할 수 있다.

 

남양에 관한 신규식의 정보는 동맹회에서 얻은 것이었다. 혁명의 지원 기지로서 화교 사회의 역할을 중시하는 동맹회 관점에서 현지 원주민은 지배-교화의 대상인 미개한 존재였다. 동남아에서 화교는 식민지배자에 가까운 입장이었다.

 

화교 사회 비슷한 한교 사회를 동남아에 건설할 수 있다면 독립운동의 유력한 방략이 되었을 것이다. 실현 가능성도 꽤 생각할 만한 사업이었다. 독립운동가 중에는 재력가들도 있었고 무력을 양성할 인적 자원도 있었다. 신흥무관학교 설립(1911) 등 중국 땅에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려는 노력과 비교한다면 동남아는 관헌(官憲)의 압력이 약하다는 점에서 좋은 조건이었다.

 

 ▲신규식

 

그러나 홍명희는 현지 경험을 통해 신규식의 막연한 전망을 넘어서는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원주민도 차츰 근대문명에 적응하며 민족주의 단계에 접근하고 있었다. 화교가 누려온 여건이 그대로 한교에게까지 보장될 형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화교와의 이해관계 충돌도 동맹회의 도움만으로 완전히 회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홍명희가 남양 사업을 포기한 결정적 이유는 목표로 하는 한교 사회 설계의 구조적 어려움에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본국의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입장에서 현지 식민지배자들과의 관계에 어떻게 임할 것인가. 독립운동을 위한 자원을 현지에서 확보하면서 원주민에게 가해자가 되는 길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화교와 협력관계는 어느 선까지 가능할 것인가.

 

근대에 대한 철저한 자기성찰 필요

홍명희가 남양을 전전하던 때로부터 1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그 지역 사정이 많이 연구되고 알려졌다. 대략 지금의 동남아다.

 

100년 동안 많은 연구성과가 쌓여 왔는데도 이 지역에 대한 일반적 시각은 크게 바뀌지 않고 있다. 요컨대 외래문명(중국문명, 힌두문명, 이슬람문명, 유럽문명)의 정복(또는 감화) 대상으로 보는 ‘타자화’ 시각이다. 외래인들은 이 지역에서 얻을 이득만 생각했지, 이 지역의 경험에서 ‘자기성찰’의 기회를 찾지 않았다.

 

교섭 상대로부터 자기성찰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상대와 나를 아우르는 ‘우리’의 입장을 세워야 한다. 상대를 ‘타자’ 아닌 ‘우리’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통상적 기준이 ‘문명’이다. 문명을 갖지 못한 미개인은 인간의 조건을 완전히 충족시키지 못하는 존재이므로 우선 감화(또는 정복)를 통해 문명인으로 만들어놓아야 ‘우리’의 일부가 될 수 있다.

 

‘동양’ ‘서양’과 별개의 ‘남양문명’을 상상해 본다. 문명의 주도권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동남아 같은 곳의 ‘문명’을 들먹인다는 것이 엉뚱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한 문명의 관념이 서양식 근대문명의 기준에 얽매여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광대한 영역의 많은 인구가 장기간에 걸쳐 한 어족(語族)의 언어들을 사용해 온 것은 사실이고, 그 후손들이 21세기 상황에서 상당 범위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근대화 뒤집기’란 제목으로 2년간 진행해 온 이 연재의 목적은 ‘근대의 반성’에 있다. 근대의 흐름 안에서만 근대를 바라보며 근대의 의미를 제대로 살피기 어려웠던 질곡을 벗어날 필요를 느낀 것이다. 이제부터 고찰을 남양(동남아)에 집중하려 한다. 근대적 변화를 줄곧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서 나름의 정체성을 지켜온 지역. 복잡다단한 근대적 변화의 의미를 폭넓게 비쳐 보여주는 좋은 거울이 될 것 같다.

중앙일보 김기협 역사학자

 

 

12-13 ‘말·목장 관리’ 숨은 요직… ‘뒷돈’ 챙기는 부정·부패 사건도 빈번

▲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말 조련·치료 등 책임 맡아
궁궐 관청중 딸린 식구 최다
관원 외 일꾼 등 600명 넘어

목장 말숫자 관리 ‘점마별감’
좋은 집안 출신이 자리 꿰차
중국 진헌할 말 바꿔치기하고

빼돌려 팔아 이익 챙기기도
새 관리에 ‘말값’ 받기 폐습도


1. 알고 보면 매우 중요한 관청, 사복시

 

사복시(司僕寺)는 수레와 말, 그리고 목장에 관한 일을 맡은 곳으로 고려 시대 때부터 있던 관청이다. 사복시는 내사복시와 외사복시가 있는데, 내사복시는 경복궁 영추문 안쪽과 창경궁 홍문관 남쪽에 있었고, 외사복시는 지금의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있었다. 따라서 궁궐에 근무하는 사복시 관원은 내사복시에 한정된다.

사복시의 소속 관원으로는 제조 2인이 있고, 그 아래로 정3품의 정 1인, 종3품 부정 1인, 종4품 첨정 1인, 종5품 판관 1인, 종6품 주부 2인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안기 1인, 조기 1인, 이기 2인, 보기 2인, 마의 10인이 예속되어 있었다. 종6품 안기부터 종9품 보기까지는 모두 잡직관이다.

잡직관들의 임무를 살펴보면 안기(安驥)는 말을 조련하고 보양하는 임무를 총괄하는 직책이다. 종7품 조기(調驥)는 임금이 타는 수레와 말을 책임진 관리고, 종8품 이기(理驥)는 조기와 함께 가마와 수레를 관리하는 직책이며, 종9품 보기(保驥) 역시 조기와 이기를 보조하여 수레와 말을 관리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품계가 없는 마의(馬醫)는 말을 치료하는 의사를 말합니다.

사복시에는 이들 관원 외에도 서리가 15인이 있고, 그 아래 일꾼 600인, 차비노 14인, 근수노 8인, 이마 4인, 견마배 11인, 고직 4인, 대청직 1인, 사령 11인, 군사 2인이 배치되었다. 차비노와 근수노는 심부름하는 관노이며, 이마는 말을 관리하는 직책이다. 또 고직은 창고지기를 말하며, 대청직은 건물관리인이며, 사령은 관아를 지키거나 심부름하는 나졸을 일컫는다.

이렇듯 사복시는 궁궐 속 관청들 중에서 딸린 식구가 가장 많은 조직이었다. 거기다 사복시는 각 지역의 목장을 관리하는 업무도 있었기 때문에 지방 조직도 있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타난 지방의 목장 수는 53개였으며, ‘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지방의 목장 수는 87개,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목장 수는 114개, ‘증보문헌비고’에는 209개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목장들은 각 도의 관찰사 관할 아래 감목관이 지휘·감독하였고, 감목관 아래로는 군두·군부·목자 등 말을 생산하고 관리하기 위한 많은 인원이 배치되었다.

조선사회에서 말은 가장 요긴한 이동 수단이었을 뿐 아니라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동물이었다. 그런 까닭에 목장 관리는 군사력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일이었다. 따라서 사복시는 알고 보면 조선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관청이었다.

 

2. 누구나 탐냈던 점마별감 자리

사복시에는 각 도의 목장에서 기르는 말을 점고(點考), 즉 숫자를 세고 기록하는 임무를 맡은 별감이 있었는데, 이들을 점마별감(點馬別監)이라고 했다. 실록에는 이 점마별감들에 얽힌 사건들을 많이 전한다. 주로 이들이 저지른 부정에 관한 일들인데, 태종 10년(1410년) 7월 12일의 기사에 이런 내용이 전한다.

유겸이 북경에서 돌아와 말하였다. “박희중·최진성이 점마별감으로 의주에 이르러 역환(易換) 마필을 점고하여 보내는데, 의주 등처의 군민의 요구에 따라, 임의로 진헌할 좋은 말과 군민의 나쁜 말을 바꾸어 해송(解送)하였습니다.”

내용인즉, 중국에 진헌할 말을 바꿔치기했다는 것인데, 이 말을 듣고 태종은 즉시 순금사로 하여금 그들을 조사하게 했고, 결국 유겸의 말이 사실로 밝혀졌다. 순금사의 조사에 의하면 박희중이 바꾼 말은 24필이었고, 최진성이 바꾼 말은 22필이었다. 이를 장물로 계산하면 참형에 해당하는 중대 범죄였다. 하지만 태종은 이들을 죽이지는 않고 유배형으로 끝냈다. 둘 다 한성에서 내로라하는 집안의 자식들인 데다 박희중은 이조 정랑, 최진성은 예조 정랑이라는 요직에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점마별감들 중에는 말을 바꿔치기하는 것을 넘어 아예 말을 빼돌려 팔아먹는 경우도 있었다.

세종 23년(1441년) 3월 2일의 일이다. 경기의 점마별감을 맡은 사복시 직장 배지눌과 충청의 점마별감을 맡은 사복시 윤 이완이 각각 목장의 말을 팔아먹었다는 고발이 있었다. 세종은 곧 이들을 사헌부로 잡아와 추국하도록 했다.

우선 배지눌은 추국 끝에 말 6필을 팔아넘겼다는데, 3필은 자신의 아버지의 종에게, 그리고 나머지 3필은 역리의 이름을 도용하여 별도로 팔아넘겼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조사해보니, 말을 산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 했다. 그러자 세종은 그들을 의금부로 넘겨 다시 추국하도록 했다.

배지눌과 함께 이완도 의금부에 내려 추국하도록 했는데, 역시 말의 행방이 묘연했다. 결국, 말을 산 자들은 밝혀내지 못한 채 둘 다 장 100대에 도(徒·감옥살이) 3년에 처했다. 그런데 이완은 공신의 아들이라 귀양 보내는 것으로 종결되었고, 배지눌만 결장 100대를 맞고, 3년 징역형을 살아야 했다.

이 두 사건 외에도 실록엔 점마별감들이 말을 빼돌리거나 바꿔치기한 사건이 많이 등장한다. 또 점마별감으로 파견된 자들은 한결같이 좋은 집안 출신의 관리들이었다. 이는 곧 누구나 점마별감 자리를 탐냈다는 뜻이다. 물론 그만큼 뒤로 챙기는 이익이 보장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3. 사복시에 바치는 말값

조선 초에 관리가 막 된 신참들은 사복시에 말값을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1401년 윤 3월에 태종이 이와 관련하여 경연 중에 이런 질문을 한다.

“일찍이 들으니, 사복시에 신참의 말값을 바치는 법이 있다던데, 사실인가?”

그러자 시독관이 있다고 대답했다. 이에 태종이 다시 물었다.

“처음에 이런 법을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시독관이 다시 대답했다.

“예전에 참외관(參外官)은 말을 타지 못하고, 배참(拜參)하여 말을 준 연후에야 탈 수 있었기 때문에, 그 값을 바치는 것입니다. 지금은 말을 주는 법은 없어지고 값을 바치는 법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참외관이란 정7품 이하의 무관 잡직을 일컫는다. 또 배참이란 지방으로 내려갈 때 쉬어갈 역참을 배정받는 것을 일컫는다. 말하자면 말값이라는 것은 무관 잡직들이 관직을 받고 배속되면 궁궐에 들어올 때 말값이라고 하여 사복시에 일종의 통과세를 낸 것을 의미한다. 사실, 조선 시대의 잡직들은 대개 이런 통과세를 주요 수입원으로 삼았다. 지방관들도 발령이 나면 궁궐을 지키는 문지기나 별장들에게 통과세를 내야만 궁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

태종은 이런 관행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웃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말을 주고 그 값을 바치게 하는 것도 틀린 일인데, 하물며 말을 주지 않고 값을 바치게 하는 것이겠는가. 의정부에 내리어 없애도록 하라.”

하지만 이런 왕명에도 불구하고 사복시 관원들은 말값을 계속 받았다. 사복시 관원들 중 잡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겐 말값이 아주 중요한 수입원이었기 때문에 암암리에 계속 받아 챙겼던 것이다.


■ 용어설명 - 잡직(雜職)

조선 시대 문반 또는 무관의 정직 이외에 천인들이 종사하던 관직이다. 이들이 정직(正職)에 임명될 경우에는 체아직 때의 품계에서 1품계를 낮추었고, 최고품계는 정6품으로 한정되었다. 액정서·공조·교서관 등의 문반 품계직과 파진군·대졸·팽배·도화서 등의 무반 품계직이 속해 있었다. 그곳에 제수된 자는 대부분 양인 이하 천인인 까닭에 점차 천역시되었다.

문화일보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작가

 

 

12.25  1월엔 이승만 전 대통령…2024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38명

▲국가보훈부가 25일 발표한 2024년도 이달의 독립운동가 38명. 첫번째줄 왼쪽부터 이승만, 김원식, 김창환, 데이지 호킹, 마가렛 샌더먼 데이비스, 이사벨라 멘지스, 채찬, 루이 마랭, 프레드릭 에이 맥켄지, 플로이드 윌리엄 톰킨스, 김갑수, 이의경, 황진남, 곽낙원, 이은숙, 임수명, 허은, 박영준, 신순호, 안춘생, 조순옥, 박창운, 임천택, 김영백, 최세윤, 어거스틴 스위니, 토마스 다니엘 라이언, 패트릭 도슨. 국가보훈부=뉴스1

 
 

국가보훈부는 25일 ‘세계 속의 독립운동’을 주제로 조국 대한민국의 독립을 세계에 호소하며 헌신한 ‘2024년도 이달의 독립운동가’ 38명을 선정ㆍ발표했다.

 

선정된 인물은 다음과 같다

▶1월=이승만 전 대통령

▶2월=만주 정의부에서 활동한 김창환ㆍ이진산ㆍ윤덕보ㆍ김원식 독립지사

▶3월=부산 일신여학교 학생들과 3ㆍ1운동을 함께 한 호주인 마거릿 샌더먼 데이비스ㆍ이사벨라 멘지스ㆍ데이지 호킹

▶4월=하얼빈 총영사관 의거에 참여한 유기동ㆍ김만수ㆍ최병호 독립지사

▶5월=대한민국임시정부 직할대 참의부에서 활동한 채찬ㆍ김창균ㆍ장창헌ㆍ이춘화 독립지사

▶6월=영국과 미국, 프랑스 등지에서 한국 독립을 호소한 프레드릭 에이 매켄지ㆍ플로이드 윌리엄 톰킨스ㆍ루이 마랭

▶7월=독일에서 일제를 규탄하고 항일의지를 알린 황진남ㆍ이의경ㆍ김갑수 독립지사

▶8월=여성독립운동가인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신팔균의 부인인 임수명, 이회영의 부인인 이은숙, 허위의 손녀인 허은

▶9월=광복군 활동을 한 안춘생ㆍ조순옥ㆍ박영준ㆍ신순호 독립지사

▶10월=중남미에서 조국 독립에 헌신한 임천택ㆍ서병학ㆍ박창운

▶11월=의병활동을 하다 순국한 최세윤ㆍ정원집ㆍ김영백 지사

▶12월=제주도 교인들에게 일본의 실태를 폭로한 아일랜드 선교사인 패트릭 도슨과 토마스 다니엘 라이언, 오거스틴 스위니

보훈부는 지방자치단체와 관련 기관, 기념사업회 등으로부터 총 265명의 인물을 추천받은 뒤 보훈부ㆍ광복회ㆍ독립기념관ㆍ근현대사 전공학자 등으로 구성된 선정위원회를 통해 내년도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정했다.

조문규 기자 chomg@joongang.co.kr

 

 

12.29 그림자도 쉬어 가는 곳, 그곳에 서린 핏빛 권력 다툼

담양 식영정과 송강 정철의 기축옥사

김정탁 노장사상가

 

한 동네에 명승이 세 곳 있으면 일동지삼승(一洞之三勝)이라 하는데 식영정·환벽당·소쇄원이 모여 있는 데가 그러하다. 행정상으론 식영정과 소쇄원은 담양이고, 환벽당은 광주에 속해 있지만 서로 가까이에 있다. 부근에는 면앙정·송강정·독수정 등 10여 개 정자가 널려 있어 여기는 예로부터 아름다운 풍광을 뽐내왔다. 뒤로는 송림이 울창하고 앞에는 창계천이 흐르고, 멀리에는 무등산이 위치해서다. 지금은 창계천에 댐을 쌓아 광주호가 생겨나서 예전 모습을 찾기 힘들지만, 수몰 전에는 창계천 계곡에 배롱나무가 많아 여름에는 붉은 꽃이 구름처럼 산에 뭉게뭉게 피어났다고 한다.

 

자연 속 신선놀이, 가사문학 산실
서인 송강, 동인을 사지로 몰아가

송강 자신도 거짓 상소로 유배행
당파 선명성 따지다 비참한 최후

식영정 인근엔 환벽당과 소쇄원
권력 등지고 물과 숲 품은 선비들

 

환벽당, 푸름이 고리를 두른 곳

 

▲전남 담양군 식영정. 방을 가운데 배치하는 일반 정자와 달리 한 쪽 귀퉁이에 방을 만들고, 앞면과 옆면에 마루를 깐 게 특이하다. [사진 김정탁, 남수, 중앙포토]

 

식영정(息影亭)은 조선 명종 때 김성원(金成遠·1525~1597)이 세웠는데 그의 스승이자 장인인 임억령이 ‘그림자(影)를 쉬게 하는(息)’ 정자로 이름 지었다. 임억령은 을사사화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에 환멸을 느낀 데다 아우 임백령마저 윤형원 일파인 소윤(小尹)의 일원으로 윤임 일파인 대윤(大尹)을 처단하는 데 앞장서자 아우와의 인연을 끊고 담양 부사를 끝으로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식영정에서 8년간 은거하며 고경명·기대승·송순·정철에게 학문과 시를 가르쳤다. 김윤제·김인후·백광훈·송익필·양산보 등은 그를 흠모해 식영정에 드나들면서 아름다운 시문으로 화답해 이들과 함께 호남시학의 지평을 열었다.

 

환벽당(環碧堂)은 근처 충효마을에 살던 김윤제(金允悌)가 지었는데 식영정과는 불과 250m 떨어진 곳에 있다. 환벽은 ‘푸르름(碧)이 고리(環)를 두른다’라는 뜻인데 푸른 숲과 푸른 강으로 둘리어져 이런 이름이 생겨났다고 본다. 흥미로운 건 환벽당의 김윤제가 식영정의 김성원과 왕래하기 위해 창계천에 무지개다리를 놓았다고 하니 사뭇 노장다운 분위기를 연출했다고 본다. 한편 창계천 너머 지실마을에 살던 정철은 14세 때 환벽당 아래 낚시터인 조대(釣臺)에서 우연히 김윤제를 만나서 이 인연으로 27세 관직에 나갈 때까지 10여 년간 환벽당에 유숙했다.

 

맑고 산뜻한 정원, 소쇄원

▲식영정 바로 옆에 있는 서하당(오른쪽 건물). 왼쪽은 부용당이다. [사진 김정탁, 남수, 중앙포토]

 

소쇄원(瀟灑園)은 ‘맑고 깨끗하고 산뜻한’ 정원이란 뜻이다. ‘물 맑고 깊을 소(瀟)’와 ‘소탈할 쇄(灑)’는 사람 이름에나 가끔 쓰이지 일상에선 거의 쓰지 않는 단어인데 이를 사용해 정원 이름을 지은 게 특이하다. 이 정원은 인근 창암촌에 살던 양산보(梁山甫)가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가 죽자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지은 별서(別墅) 정원이다. 조선시대 정원 중에 자연미와 구도 면에서 첫손에 꼽을 만큼 빼어나 여기도 노장다운 분위기가 짙다. 게다가 은둔을 위해 지은 건물인데도 풍광이 뛰어나 많은 문인이 방문해서 조선시대 원림(園林) 문화를 일구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그런데 식영정·환벽당·소쇄원 중에 어느 곳이 가장 노장다운 분위기를 자아낼까. 건축과 조경 차원은 몰라도 이름으론 ‘그림자를 쉬게 하는 정자’인 식영정이 으뜸이다. 또 식영정과 붙어 있다시피 한 서하당(棲霞堂)은 김성원이 자신의 호를 따 지은 집인데 ‘노을(霞)이 깃들다(棲)’라는 뜻이므로 여기도 우리들의 인문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식영’이 어째서 노장다운 분위기를 자아내는지는 『장자』의 외경오적(畏影惡迹), 즉 ‘그림자가 두렵고 발자국이 싫다’라는 내용을 접하면 금방 이해된다.

 

“그림자가 두렵고 발자국이 싫어 이것들을 떠나 멀리 달아나려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발이 움직일수록 발자국이 더 많아지고, 달릴수록 더 빨라져 그림자가 그의 몸을 떠나지 못했다.
그런데도 더디게 달려서라고 여겨 쉬지 않고 빨리 달리다가 마침내 힘이 떨어져서 죽었다.
그늘에 머물면 그림자가 사라지고, 조용히 머물면 발자국이 없어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서인데 그의 어리석음도 지나치다!”

 

욕망에 찌들었던 지난 흔적 지우기

▲식영정과 불과 250m 떨어진 환벽당. [사진 김정탁, 남수, 중앙포토]

 

임억령이 이 글을 접했을 때 욕망에 찌든 자신을 그림자로, 살아온 흔적을 발자국으로 여겼으리라. 그래서 욕망에 찌들고, 또 이 욕망을 위해 발품을 팔며 바삐 살아온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늦게나마 이런 삶에서 벗어나고파 은퇴 후에 자신이 머물 곳을 ‘그림자를 쉬게 하는 정자’로 이름 지었다.

 

사람들은 식영정을 가리켜서 사선정(四仙亭)으로도 불렀다. 임억령·고경명·김성원·정철이 식영정의 ‘네 신선’이었는데 이들이 여기서 자연과 함께 시를 지으며 신선다운 삶을 즐겨서다. 또 신선처럼 살다 간 이들의 흔적은 『식영정이십영』에 잘 반영돼 있다. 이 책은 식영정 뒤 성산(星山)의 경치 좋은 곳 20곳을 택해 각자 20수씩 읊어서 총 80수의 영(詠)으로 구성된 책이다. 송강 정철이 지은 20영은 그 후 『성산별곡』의 밑바탕이 되었으니 식영정은 송강 문학의 산실인 셈이다.

 

정철은 식영정에서 문학의 꿈만 키운 게 아니다. 처세의 꿈도 함께 키웠는데 그 꿈은 기축옥사로 파탄이 났다. 기축옥사는 정여립이 모반했다는 고변으로 관련자가 천 명이나 죽은 사건이다. 이는 선조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지만 정철의 의지도 분명히 작용했다. 정여립 사건이 일단락되는 시점에 이발이 정여립과 관련됐다는 양천회의 상소가 있었는데 이 상소를 정철이 사주해서다. 또 최영경을 길상봉이라 무고했던 양천경의 거짓 상소도 정철의 부탁으로 이뤄져서다. 양천회·양천경 형제는 소쇄원을 지은 양산보 손자라 정철과도 잘 통했다. 정여립 사건이 이들의 상소로 크게 확대됐으니 정철이 이 책임에서 벗어나긴 힘들다.

 

10살 아들마저 고문으로 잃은 이발

▲조선시대 원림(園林) 문화를 대표하는 소쇄원. [사진 김정탁, 남수, 중앙포토]

 

기축옥사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은 이발이다. 이발과 그 형제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들의 어머니도 82세 고령인데 곤장을 맞다 죽었다. 또 이발의 아들은 10살 나이에 고문으로 숨졌다. 그의 조카들 대부분도 고문으로 숨져 나주에 살던 광산 이씨 가문은 풍비박산이 났다. 이발·이길 형제의 묘가 아무 연고가 없는 경기도 광명에 있는 건 이래서다. 이들이 비참하게 죽어 두려워서 아무도 오지 못하자 사돈 홍가신이 옷을 벗어 시신을 수습하고, ‘오리대감’ 이원익이 자신의 선산에 묘를 쓰도록 배려했다. 효령대군 후손으로 9대조부터 이발에 이르기까지 급제자를 계속 배출한 호남 제일 명문가의 말로가 이러했다.

 

정철은 어째서 이발 집안을 이렇게까지 도륙했을까. 이들은 호남을 대표하는 유자(儒子)의 지위를 놓고 심하게 경쟁했다. 게다가 속한 당파마저 달라 둘의 경쟁은 치열했다. 정철은 서인인데 강경 서인이었고, 이발도 강경 동인이었다. 당시 호남에선 동인 세와 서인 세가 병립했다. 나주에선 두 세력이 엇비슷했어도 나주를 중심으로 서남쪽인 영광·무안·해남·화순에선 동인 세가 강한 데 반해 동북쪽인 장성·광주·보성· 순천에선 서인 세가 강했다. 그런데 기축옥사를 계기로 이 균형이 깨져 호남 서인의 사랑방이었던 식영정은 그 후 더욱 주목을 받게 되었다.

 

지금 정치권에도 정철의 그림자

▲송강 정철

 

그런데 정철의 말로는 좋지 않았다. 양천경에게 거짓 상소를 하게 한 죄로 함경도 극변에 유배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좌의정으로 복귀했어도 이내 선조의 미움을 사 관직에서 물러났다. 막판에는 생활도 곤궁해져 끼니 이을 식량이 없어 지인에게 끼니 부탁하는 편지도 써야 했다. 결국에는 가난과 실의 속에 강화도 외딴 곳에서 쓸쓸히 죽었는데 동인은 그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김우옹은 정철이 죽은 이듬해에 그를 탄핵해 관직을 박탈했고, 2년 후에는 정인홍의 참소로 부관참시도 당할 뻔했다. ‘동인 백정’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기축옥사 때 구원(舊怨)이 이런 식으로 그에게 되돌아왔다.

 

정철의 삶은 이처럼 비참하게 끝났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 선명함만 따지다가 모든 걸 극단적으로 처리한 게 결정적이 아니었을까. 지금의 정치권도 이와 다르지 않아 정철과 같은 인물이 수두룩하다. 정철은 식영정에서 신선과 같은 삶을 즐겼는데 정치인으로서 왜 이렇게 모나게 행동했을까. 식영정에 은거했던 임억령이나 신선 놀이를 함께했던 동료들이 이런 정철을 보았다면 크게 안타까워했으리라.

중앙일보 김정탁 노장사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