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중앙일보) 2023-08/
08.01(화) 학폭 법률만능주의
1995년 청소년폭력예방재단(현 푸른나무재단)이 설립됐다. 학교 폭력서클에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만든, 최초의 학교폭력 관련 시민단체였다. 학폭이 사회문제로 인식된 계기다. 그해 경찰은 2개월간 단속을 벌여 9068명을 구속했다. 폭력서클 근절 중심이던 학교폭력 정책은 서서히 변화했다. 2004년 ‘학교폭력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이하 ‘학폭예방법’)이 시행됐고, 피해학생 보호조치가 처음 명문화됐다. 세월은 흘러 최근 5년(2018~2022년)간 학폭으로 구속된 청소년은 65명에 그친다. 그러나 학폭 피로도는 20여년 전보다 높은 듯하다. 법만 있으면 다 된다는 법률만능주의가 교육을 지배한 탓이다.
학폭예방법은 그간 십수 차례 개정됐다. 2019년에는 경미한 사안은 학교장 재량으로 처분하는 근거를 마련하고 교육지원청 산하기구에 심의 기능을 넘겼다. 그러나 사안 접수, 피·가해 분리의사 확인, 교육지원청 보고, 사안 조사 및 관련 학생 면담, 학부모 면담, 교내 전담기구 심의를 거쳐 다시 교육지원청에 보고하고 최종 조치 결정을 생활기록부에 기록·이행하는 건 학폭 담당 교사 몫이다.
법에 따라 교사는 비밀을 유지하고, 처분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중립을 지켜야 한다. 매뉴얼을 따르지 않으면 민·형사 소송에 휘말릴 수 있다. 매뉴얼대로 하면 학생과 학부모가 공감해주지 않는다며 불만을 제기한다. 학교폭력 담당 교사들은 교육자가 아니라 경찰이자 학부모의 민원을 상대하는 감정노동자라는 자괴감을 느낄 정도다.
가해 학생에 대한 조치를 생활기록부에 기재하기 시작한 2012년 이후 학폭 징계에 불복하는 행정소송과 행정심판이 급증했다. 대입에 불이익을 받느니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소송으로 학교와 피해자를 괴롭히는 갑질을 택하는 거다. 올해 정부가 내놓은 학폭 근절 종합대책에선 가해 기록을 졸업 후 최장 4년까지 남기는 것으로 강화했다. 힘 있는 학부모들이 법 기술자를 동원해 더 정교한 갑질에 나설지도 모르겠다. 저출산에 자녀가 귀한 시대인지라 학폭도 아닌 걸 피해자라며 신고하는 부모들도 있다. 초등 저학년까지 학폭 논란에 휘말리니 아이들은 놀면서, 다투면서 배울 기회를 잃는다. 법으로만 모든 걸 해결하는 학교에서 교육이 설 자리는 없어 보인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8.02 철근 빼먹기
철근 콘크리트의 발명은 바벨탑에서 멈춘 인류의 높이를 향한 꿈을 자극했다. 그전까지 주요 건축재료는 벽돌과 콘크리트였다. 성경에 따르면 바벨탑도 벽돌에 역청을 발라 올렸다. 콘크리트는 응회암 분말, 석회, 모래를 물에 섞는 방식으로 고대부터 사용됐다. 로마 판테온 신전의 주 자재도 콘크리트다. 문제는 높이. 건물이 높아질수록 벽돌은 무한대로 커져야 했고, 콘크리트는 인장력에 약해 무너질 위험이 커졌다.
해법은 우연한 곳에서 나왔다. 프랑스 정원사 조제프 모니에가 잘 깨지지 않는 화분을 만들기 위해 콘크리트 안에 철망(철근)을 넣어 화분을 만들었다. 모니에는 1855년 이 기술로 특허를 얻고, 이를 활용해 계단과 교량 등을 만들었다. 5층 정도에 머물던 건축물은 20층을 훌쩍 넘기 시작했다. 압축력에 강한 콘크리트와 인장력에 강한 철근이 서로 약점을 보완한 결과다. 1931년 미국 뉴욕에 들어선 381m 높이의 세계 최고층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엔 철강재만 약 5만7000톤 사용됐다. 철근은 ‘더 높게’라는 인류의 욕망을 실현해줬다.
하지만 허술한 욕망은 허물어지는 법이다. 1968~1972년 서울에 집중적으로 지은 도시 빈민을 위한 시민아파트가 그랬다.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이 추진한 사업이었는데, 대부분 산 위에 건설됐다. 위험하고 주민도 불편하지 않겠냐는 의견에 김 시장은 “높은 곳에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니냐”고 답했다고 한다. 김 시장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육사 후배다. 박 대통령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에 김 시장은 와우아파트도 마포구 와우산 중턱에, 그것도 6개월 만에 지었다. 이 아파트는 준공 4개월 만인 1970년 4월 오전 6시40분쯤 무너졌다. 33명이 사망했다. 조사 결과 철근 70개를 넣어야 할 기둥에 5개밖에 안 넣은 것으로 드러났다.
또 ‘철근 빼먹기’가 논란이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조사 결과, LH가 발주한 아파트에서만 15곳에서 철근 누락이 발견됐다. 경기 양주회천의 LH 단지는 154개 기둥 전체에 철근이 없었다. 민간 시행 아파트는 더 심각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더 높게’라는 인류의 꿈을 앞당겼던 철근이, 지금 한국 사회에선 ‘더 싸게’라는 건설업자의 욕망을 부추기는 도구로 추락했다.
윤성민 정치에디터
08.03 돌아온 괴물
지난 2006년 봉준호 감독이 선보인 영화 ‘괴물’은 국내외 영화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한강물 속에서 튀어나와 둔치를 질주하며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공격하는 괴물의 실감 나는 영상은 압권이었다. 여기에 탄탄한 스토리와 배우들의 열연이 더해지며 1000만 관객을 달성했고, 각종 영화제에서 작품·연기상을 휩쓸었다. 이제는 지구촌 문화 콘텐트의 대세로 자리매김한 ‘한류’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 비슷했다. 이후 봉 감독은 ‘기생충’으로 할리우드도 접수했다.
2일 메이저리그(MLB) 야구장에도 괴물이 나타났다.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36)이 캐나다 토론토 로저스 센터에서 열린 볼티모어 오리올스전에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선발 투수로 마운드에 올랐다. 지난해 왼쪽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을 받은 이후 1년 2개월, 426일 만에 치른 복귀전이다.
류현진이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을 받은 건 동산고 2학년이던 2004년 이후 18년 만이다. 30대 중반에, 그것도 앞서 수술한 부위에 다시 칼을 대는 건 선수 생명을 건 도박이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류현진은 과감히 수술대에 올랐다.
영화 ‘괴물’이 K컬처를 이끌었다면, 야구판 괴물은 K스포츠를 떠받쳤다. 대학 야구를 거쳐 곧장 빅 리그로 향한 선배 박찬호와 달리 류현진은 KBO리그에서 기량 검증을 마친 뒤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첫 사례다. 류현진이 ‘믿고 쓰는 KBO리그 출신’ 이미지를 만들면서 강정호·박병호·김광현·김현수·양현종·김하성 등 KBO리그 간판급 선수들이 줄줄이 빅 리그에 상륙할 수 있었다.
모르긴 해도 메이저리그판 ‘괴물 2’ 개봉을 준비하며 흘린 류현진의 땀과 눈물이 단순히 선수 개인의 자존심 회복을 위한 노력만은 아닐 것이다. KBO리그와 메이저리그를 이은 개척자로서 건재한 모습을 보여주려는 책임감이 상당 부분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괴물의 컴백 첫 경기 성적표는 기대치에 못 미쳤다. 5이닝 9피안타 4실점, 투구 수 80개. 하지만 한 번의 경기만으로 올 시즌 최종 결과를 속단할 수 없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영화에서도 한강 둔치에 괴물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아주 살짝 지루했다.
송지훈 스포츠부 기자
08.04(금) 정치인의 균형감각
마오쩌둥(毛澤東)이 1958년 쓰촨성(四川省)의 농촌 마을을 방문했을 때다. 참새가 곡식을 쪼아 먹는 모습을 본 그는 “참새는 해로운 새”라고 말했다. 당시 중국 전역에 대기근이 닥친 상황이었다. 이후 마오쩌둥과 14개 당 서기들은 4가지 해로움을 제거하자는 운동을 펼친다. 모기·파리·들쥐, 그리고 참새 박멸이다.
결과는 참혹했다. 참새 숫자가 줄어들자 해충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곡식 수확량이 크게 감소했다. 학계 추산으로 1960년까지 3년간 최소 3000만 명이 굶어 죽었다고 한다. 정치 지도자가 한쪽으로 치우친 판단을 내렸을 때 나라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서양에서도 정치인의 주요 덕목으로 균형감각을 강조해왔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정치만의 윤리 규범을 이론화했다. 그는 정치는 전업 정치가가 해야 한다고 했다. 1919년 뮌헨에서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주제로 강연하면서 그가 꼽은 정치인의 자질은 세 가지다. 열정, 책임감, 목측능력이다.
베버는 그중에서도 목측능력(目測能力)을 “정치가의 결정적인 심리적 자질”로 꼽았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목측능력이란 “사물과 인간에 대해 거리를 두는 것”인데, 쉽게 말해 균형감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믿기지 않겠지만 한국 국회의원 사이에서도 “우리당 의원들은 열정, 책임감이 강한 반면 균형감각이 부족하다”는 자성이 나온다.
오늘날 정치인의 자질로 균형감각 말고도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바로 좋은 언어, 바른 언어다. 정치는 곧 말이고 정치가는 말하는 사람이다. 정치인은 말밖에 가진 게 없지만 말로 변화를 만들어내는 사람이기도 하다. 김은경 더불어민주당 혁신위원장이 3일 대한노인회를 찾아 ‘노인 폄하’ 논란을 불러온 자신의 발언에 대해 나흘 만에 사과했다. 아들과의 대화를 인용하며 ‘여명(餘命) 비례 투표’를 합리화하는 듯한 발언이 화근이었다. 김호일 대한노인회장이 “손찌검하면 안 되니까 사진이라도 뺨을 한 대 때리겠다”며 김 위원장 사진을 손으로 내리치는 장면까지 벌어졌다.
좋은 말은 좋은 정치를 낳고 사나운 말은 사나운 정치를 낳는다. 좋은 언어도 결국은 균형감각이다.
위문희 정치부 기자
08.07(월) 바비
환갑잔치는 이미 했고, 몇 년 후면 칠순이다. 1959년 3월 9일 태어난 바비(Barbie)는 당시엔 혁신 상품이었다. 이때까지 인형은 대체로 갓난아기 모습이었다. 마텔의 공동 창업자 엘리엇 핸들러의 아내 루스는 딸 바버라(바비)가 종이인형을 갖고 놀다가 종종 어른 역할을 하는 것을 보고 성인 여성을 닮은 인형을 구상했다. 마텔의 이사진은 루스의 제안을 외면했다.
이후 루스는 유럽 여행 중 독일 대중지 빌트의 연재만화의 캐릭터에 기반한 인형 ‘릴리’를 만나게 된다. 릴리는 목과 팔다리를 움직일 수 있고 앉아도 다리가 벌어지지 않는 특수 고관절을 갖춘 제품이었다. 특히 붉은 매니큐어가 돋보이는 손에 빌트지를 쥔 멋쟁이 인형이다. 미국으로 돌아온 루스는 릴리 2개를 마텔 디자이너에게 넘겼다. 릴리를 베낀 바비는 뉴욕 장난감박람회에서 첫선을 보였다.
‘패션 돌’의 대명사 바비는 이후 60여년 간 장난감 세계를 지배했다. 마텔에 따르면 1초에 3개의 바비가 팔린다. 처음 TV 광고를 한 장난감이며 랜덤하우스에서 출간된 자서전도 있다. 세계관도 마블 어벤저스 부럽지 않다. 2004년 남자친구 켄(핸들러 부부의 아들 이름에서 따왔다)과 결별을 발표하고 몇 년 뒤 재결합 소식을 전해 화제가 됐다.
지난달 19일 개봉한 영화 ‘바비’가 북미 중심으로 흥행 호조를 보이면서 이미 10억 달러(약 1조3000억원)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흥행에 힘입어 영화에 출연하는 각종 바비는 현재 모두 완판이다. 2000년대 들어 비판받으며 고전해 온 바비는 올해 매출 신기록을 올릴 전망이다.
한국에선 이 영화의 성적이 저조한(5일 기준 50만6000명) 편이다. 일부 외신은 “한국에선 페미니스트 딱지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고전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한국 여성 혹은 한국 페미니즘에 대한 꽤 기분 나쁜 오해다. 우선 영화 ‘바비’의 전개는 출연 배우들의 연기력이 아까울 정도로 엉망진창이다. 무엇보다 바비의 최전성기인 80~90년대 성장한 한국 여성의 대표 마론인형은 바비가 아닌 ‘미미’다. 북미 관객이야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만나는 것이라 영화의 허술함을 참아 낼 여지가 크다. 한국 관객에 동일한 감정이입을 바라는 건 욕심으로 보인다.
전영선 K엔터팀장
08.08 잼버리 ‘재난’
영국 남부에 있는 조그만 섬인 브라운시(Brownsea). 우거진 숲에 붉은 다람쥐·공작·왜가리 같은 야생 동물이 어울려 사는 아름다운 섬이다. 영국 육군 중장이었던 로버트 베이든 파월은 1907년 브라운시섬으로 휴가를 떠났다. 어릴 적 형제들과 작은 배를 타고 건너가 모험을 하던 추억의 섬이었다.
파월은 보어전쟁(1899~1902년)의 영웅이었다. 참혹한 전쟁 한가운데서 살아 돌아온 생존자이기도 했다. 그가 경험한 전쟁의 위기는 나이와 신분, 성별을 가리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의 전조가 나타나기 시작하던 때, 그는 오랫동안 구상했던 일을 실행에 옮겼다. 브라운시섬은 그 ‘실험’을 하기에 제격이었다.
파월은 그해 8월 20명의 소년을 섬으로 불러모았다. 귀족에서 농민까지, 출신은 다양했다. 신분에 따라 교육·생활 환경이 크게 달랐던 당시 영국에선 혁신적인 선택이었다. 파월이 의도한 일이었다. 그가 할 훈련은 특권층이 아닌 모든 이를 위한 것이었다.
파월은 20명 소년과 함께 야영을 시작했다. 오두막 만들기, 낯선 곳에서 길 찾기, 동물과 식물 관찰, 화재 진압과 생존 수영, 구조 활동, 응급 처치까지. 다양한 생존 훈련이 9일간 이어졌다. 용기와 봉사, 시민의 의무에 대한 교육도 빠지지 않았다. 파월이 내세운 신조는 ‘준비하라(Be prepared)’였다.
파월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08년 『소년을 위한 스카우트 활동(Scouting for Boys)』이란 책을 써냈다. 출간과 동시에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5개 언어로 번역됐다. 1909년 영국을 시작으로 스카우트는 172개국 1억여 명 회원을 둔 조직으로 성장했다.
한국 새만금에서 ‘2023년 세계스카우트잼버리’가 열리고 있다. 153개국 4만여 청소년이 즐겨야 할 축제는 악몽이 됐다. 폭염과 벌레, 비위생적인 환경, 턱없이 부실한 음식에 환자가 속출했다.
영국과 미국, 싱가포르 대표단이 조기 철수에 나섰다. 정부도 태풍을 이유로 대피 겸 철수를 결정했지만 “꿈이 악몽으로 변했다”(로이터통신), “끔찍하다. 난장판이다”(가디언), “재난으로 낙인 찍혔다”(인디펜던트)는 각국 비판이 이미 나온 뒤다. ‘준비하라’는 스카우트 모토를 철저히 망각한 대가다.
조현숙 경제부 기자
08.09 에이지즘
누구나 늙는다. 몸 기능이 조금씩 떨어진다. 죄도 아닌데 때론 조롱 대상이다. 구체적인 차별의 피해자가 되는 일도 드물지 않다. 1969년 미국의 노인의학 전문의 로버트 버틀러는 이런 현상을 에이지즘(Ageism, 연령차별)이라고 정의했다. 나이에 근거한 고정관념이나 특정 연령층을 향한 배타적 행위를 가리킨다.
에이지즘은 꼭 나이듦을 향하지 않는다. 넓은 의미에서 연령차별 그 자체다. ‘초딩’이나 ‘MZ세대’에 담긴 비하의 의미가 그 예다. 그만큼 일상적이고, 뿌리도 깊다. 성차별이나 인종차별이 그렇듯 모르는 사이 차별을 조장 또는 묵인하는 행위를 할 수 있다. 특별한 주의가 필요한 이유다.
“자기 나이로부터 여명까지 비례적으로 투표해야 한다”는 김은경 더불어민주당 혁신위원장의 발언은 그래서 비난받는다. 아들의 아이디어를 소개한 것이라 해명했지만 ‘합리적’ ‘맞는 말’이라고 스스로 평가한 걸 보면 영 마음이 없는 소리는 아닌 모양이다. 도울 요량으로 나선 양이원영 의원의 “지금 투표하는 많은 이들이 미래에 살아 있지도 않을 사람”이란 발언은 더욱 끔찍하다. 연령과 머릿수를 그저 표로만 계산하는 평소 사고가 녹아 있어서다.
더욱 놀라운 건 나이란 키워드를 대하는 한가한 인식이다. 한국의 65세 이상 고령 인구 비중은 2년 뒤 20%를 넘어서 초고령사회에 진입한다. 종착지는 세계 최고령 국가다. 경제성장은 물론 노동·연금·의료 등 공들여 구축한 나라 체계가 통째로 흔들릴 위기다. 어느 하나 쉬운 게 없는데 그냥 두면 모두 다음 세대의 짐이다. 미래 세대의 투표권까지 걱정하는 이들이 정작 발등에 떨어진 불은 보지 못하는 모양이다.
마침 인구학자 브래들리 셔먼이 쓴 책 『슈퍼 에이지 이펙트』가 화제다. 고령사회가 위기가 아닌 기회가 될 거란 발상의 전환이 신선하다. 그는 전제조건으로 에이지즘 극복을 꼽는다. 그래야 노동·소비 등을 노년층이 주도하는 ‘엘더노믹스(eldernomics)’가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리턴십(Returnship) 확대’ 등 경청해야 할 아이디어가 적지 않다. 진짜 미래 세대가 걱정된다면 책도 보고, 공부도 좀 하길 바란다. 정치인이라면 이런 데 머리를 굴려야 한다. 수 얕은 표 계산이 아니라.
장원석 증권부 기자
08.10 다크 브랜든
지난 4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X(옛 트위터)’에 9초짜리 동영상을 올렸다. 머그컵에 담긴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 뒤 “난 커피를 다크하게 즐기지”라고 읊조린 게 전부다. 그 머그컵엔 숫자 ‘2024’와 눈에서 적색 레이저 빔을 내쏘는 바이든의 캐릭터가 그려졌다.
이 캐릭터의 이름은 다크 브랜든이다. 바이든 대통령의 단정하며 다소 유약한 이미지의 본캐(본래 캐릭터)를 뒤집은 부캐(서브 캐릭터)로, 근육질 몸매와 쾌도난마 스타일의 터프가이다. 커피색 얼굴, 붉은 광선을 뿜어내는 눈, 하얀 치아를 드러낸 채 음험하게 웃는 다크 브랜든의 모습은 강인하고 공격적이다.
다크 브랜든은 바이든 반대자들의 조롱에서 탄생했다. 2021년 미국 남부에서 열린 자동차 경주대회에서 한 기자가 우승자 브랜든 브라운을 인터뷰할 때 관중들이 일제히 바이든 대통령을 조롱하는 구호를 외쳤다. 기자는 “관중들이 ‘레츠 고 브랜든’을 연호한다”고 얼버무렸고, 이 문장 자체가 ‘바이든에 대한 욕설’을 뜻하는 은어가 됐다.
여기에 공화당 지지자들이 트럼프 전 대통령을 띄우기 위해 만든 ‘다크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 구호가 결합하면서 다크 브랜든이 완성됐다. 미국 매체 복스는 “트럼프 지지자들의 바람과 달리, ‘브랜든’은 더 이상 바이든을 조롱하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대신 고령의 바이든에 ‘어둠의 영웅’ ‘초사이언’ 이미지를 덧입혀 젊은층과 유색인종 사이에서 호감도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다크 브랜든 밈(meme)의 인기가 다크 마가를 앞서자 바이든 지지자들은 열광했다. 펜주립대 제시카 마이릭 교수는 “캐릭터가 잘될수록 이를 만들어준 트럼프 지지자의 고통이 증폭되고, 이는 바이든 지지자의 기쁨을 배로 만들어준다”고 설명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바이든과 트럼프의 가상 대결 결과는 43대 43으로 팽팽했다. 아슬아슬한 승부에서 후보들이 정책 대신 밈 대결에 집중하는 모습이 씁쓸하다.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의 저자 티머시 스나이더 예일대 교수는 “선거철엔 소셜미디어를 끊고 신문을 읽으며 사실을 치열하게 수집하라”고 조언했다. 유권자가 확인할 건 다크 브랜든과 다크 마가가 아닌 바이든과 트럼프의 민낯이다.
박형수 국제부 기자
08.11(금) 행복이란 파랑새
행복경제학의 창시자 리처드 이스털린은 『지적행복론』에서 행복의 3요소로 ①물질적 부 ②건강 ③가족을 포함한 사회관계를 꼽았다. 부는 다른 요소와 달리 일정 수준에 이르면 행복도를 높이지 않는다. 물질 소유로 인한 행복의 한계효용은 계속 낮아지고 결국 0에 수렴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스털린의 역설’이다.
한국의 1인당 GDP는 1953년 67달러에서 2023년 3만2142달러로 480배 늘었지만 행복은 그만큼 커지지 않았다. 유엔 ‘세계행복지수’ 순위는 조사가 처음 시작된 2012년 56위에서 2022년 59위로 떨어졌다.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20여년째 1위다. 특히 30세 이상에선 감소 추세지만 10~20대에선 되레 늘고 있다. 20대 우울·불안장애 환자도 2017~2021년 13만 명에서 28만 명으로 급증했다.
외형적으론 10위권의 경제대국에, 세계가 열광하는 K컬처의 나라지만 국민 개개인은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어릴 적부터 치열한 경쟁에 내몰리며, 누적된 좌절 속에 열패감이 쌓이기 쉽다. 타인과의 비교는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어쩌다 한번 잘되면 과시와 갑질을 한다. 압박과 스트레스가 일상인 ‘하이 텐션(high tension·고도불안) 사회’의 전형적 모습이다.
최근 ‘묻지마 범죄’의 급증도 이와 무관치 않다.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다”던 조선(33)이나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다”는 정유정(24)은 ‘소용돌이 사회’가 낳은 괴물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온 국민이 명문대와 전문직, 좋은 아파트를 향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가지만 현실의 대다수는 경쟁에서 낙오한다. 도피처로 찾는 SNS에서 물신화한 명품과 사치스러운 소비행태를 보며 상대적 박탈감만 커진다.
가장 시급한 건 사회 양극화 해소다. 하지만 개인의 의식변화도 필요하다. “산 너머 행복을 찾아 친구 따라갔다 눈물만 머금고 왔다”(Uber den Bergen, 산 너머)는 독일 시인 칼 붓세의 말처럼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타인과 비교하는 대신 자존감을 키우고, 가진 것에 만족하며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세상이 정한 획일적 목표에 끌려가지 않고, 주체적 결단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게 행복의 본질이다(존 스튜어트 밀).
윤석만 논설위원
08.11 [알림] 글로벌경제 전문가 17인의 통찰…‘마켓 나우’ 14일부터 찾아갑니다
▲폴 도너번 UBS 수석이코노미스트, 스티븐 도버 프랭클린템플턴 연구소장, 조너선 커티스 프랭클린에쿼티 디렉터, 크리스티 탠 프랭클린템플턴 투자전략가, 사이라 말릭 누빈자산운용 최고투자책임자, 조 자이들 블랙스톤 최고투자전략가, 미셸 치 이스트스프링차이나 주식투자책임자, 라지브 비스워스 S&P글로벌마켓인텔리전스, 크리스 윌리엄슨 S&P글로벌마켓인텔리전스 수석이코노미스트, 박선영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박철완 서정대 스마트자동차과 교수, 이수화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겸임교수, 신민영 홍익대 경제학부 초빙교수, 이병훈 포스텍 반도체공학과 주임교수, 안병억 대구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나가이 시게토 전 일본은행 국제국장 (필진, 왼쪽 위부터〉) 루이즈 루 옥스퍼드이코노믹스 이코노미스트 수석이코노미스트
글로벌 경제가 불확실성으로 가득차 가고 있습니다. 인플레이션과 미국 상업용 부동산 불안, 기준금리 인상, 양적 긴축(QT), 침체 가능성 등 위기의 요인도 다양해졌습니다. 여기에 주요국의 정치 리더십 불안, 전쟁, 그리고 미국과 중국 간의 패권 경쟁 등 거대 사건으로 연일 국제경제는 요동치고 있습니다. 개인과 비즈니스 리더 모두 앞날을 예측하고 대비하기가 어느 때보다 어려워진 시대입니다. 글로벌 경제 속의 내비게이션이 절실한 때입니다.
중앙일보가 국내외 경제 스페셜리스트 17명의 필진이 참여해 혜안과 통찰을 나누는 코너인 ‘마켓 나우(Market Now)’를 오픈하는 이유입니다. 오는 14일부터 주 5일(월~금), 오래도록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기존의 ‘분수대’(29면) 자리에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마켓 나우의 필진들은 거시와 금융, 투자, 반도체, 배터리, 규제, 일본·중국 등 지역경제의 최고 전문가들입니다. 특히 해외의 금융그룹과 자산운용사, 경제분석 전문기관의 스페셜리스트로 현장의 흐름을 가장 잘 아는 11명이 함께 참여합니다. 글로벌 마켓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소개하고, 그 숨은 의미를 독자 여러분께 디코딩해 드릴 것입니다.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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