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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2/ [11회] 중공군, 정교한 ‘덫’의 전술 - [20회]상처투성이 정전협정 70년

상림은내고향 2023. 8. 16. 18:22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2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 소장 동아일보

2023-07-14

[11회] 중공군, 정교한 ‘덫’의 전술

동아일보 산하 화정평화재단은 정전(停戰) 70주년을 맞아 6·25 전쟁 3년을 재조명하는 기획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를 연재합니다. 아픈 과거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취지로 회고록과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전쟁을 통해 각국이 추구했던 목표의 허실을 조망하고 아울러 전국에 산재한 6·25 격전 현장을 찾아 당시 격전 상황도 재구성합니다.


 수풍댐 상류, 영하 10도의 압록강 물속으로 방한복과 신발 양말을 벗어 등 뒤에 묶은 반나체의 병사들이 걸어 들어갔다. 강을 건너왔을 때는 온몸에 얼음이 주렁주렁 매달려 은색 갑옷을 착용한 유령 같았다. 응급처치를 담당하는 여군도 마찬가지였다. 강이 얼어붙기 전 이렇게 수 만명이 건넜다. 주간에는 동굴, 기차 선로 터널, 탄광 갱도, 마을 초가집에 숨어 있다가 어두워지면 이동했다.’(웨이트라웁, 43쪽)

중공군은 북한에 들어온 뒤 미군의 공군력을 두려워해 야간에 병력을 이동시켰다. 낮에는 병사 한사람 한사람이 야산의 나무를 베서 등에 지고 이동하다가 미 공군기가 뜨면 그 나무를 세워 놓고 주저앉아 공습을 피했다. 산 가득히 나무를 태워 그 연기로 연막을 형성해 미군 조종사의 시야로부터 숨기도 했다.(백선엽 1권, 196쪽)
 

중공 항미원조지원군 훙쉐즈(洪學之) 제1부사령관은 “1950년 10월 19일 4개군과 3개 포병사단이 안둥(安東·이하 단둥), 창뎬허커우(長甸河口) 지안(集安) 3곳 다리를 건너 씩씩하게 조선으로 들어갔다”고 했다.(훙쉐즈, 64쪽). 하지만 많은 병력은 야음을 틈타 다리가 아닌 강물을 직접 건넜다.

 

중국 랴오닝성 단둥 ‘압록강 단교’위에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가 병력을 이끌고 도강하는 장면을 재현해 놓았다. 참전 중공군을 ‘인민지원군’이라고 한 것은 국가가 전쟁에 나선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지원해서 나선 것이라는 의미다. 전국에서 연인원 120만 명 이상을 동원한 전쟁에 맞지 않는 ‘눈가리고 아웅’식 명분일 뿐이다. 단둥 = 홍진환 기자

 

● ‘13일의 재결정’, “압록강 다리 폭파 전 일거에 투입”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해 빠른 속도로 북진해 중공군의 참전은 시간 문제였다.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간 중공군 파병을 둘러싼 막판 신경전 끝에 파병이 최종 재결정된 것은 10월 13일 0시 이후여서 중국측 연구서는 ‘13일의 재결정’이라 부른다고 한다. 소련군 공군 지원이 없어 마오쩌둥이 갑자기 출병 중지 명령을 내리는 우여곡절이 있어 출병 날짜는 19일로 늦춰졌다. 초기 투입 병력은 1차 25만여 명, 2차 15만 명, 3차 20만 명으로 총 60만 명이었다.(이상호, 252쪽)

북한 파병 준비를 위해 단둥(丹東)에 온 중국인민지원군 부사령관 훙쉐즈는 10월 7일 미군 전투기가 단둥이나 압록강대교를 폭격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전쟁 확대를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은 후에 알았다. 그는 미군 전투기가 압록강 철교를 폭파하기 전에 4개군(군단)을 투입하기로 했다고 술회했다.(훙쉐즈, 53쪽)

 

 중국 단둥의 압록강 단교, 강 중간부터 북한쪽으로 다리가 끊겨 교각만 남아있다. 강 건너편은 북한 신의주. 단둥 = 홍진환 기자

 

● 유엔군의 빠른 북진으로 작전 변경

중공군은 당초 압록강을 건넌 뒤 북한의 허리부분까지 진격해 방어선을 구축하려고 했으나 유엔군 북진 속도가 빨라 작전을 변경했다. 압록강을 넘어오기 전부터 북쪽 산악지대에서 진지전과 기동전을 배합한 반격 습격 매복 등을 구상했다.(훙쉐즈, 68쪽).

미군은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와 산악지대에 숨어있는 것을 몰랐고 중공군은 미군과 국군이 압록강에 그렇게 빨리 도달할지 예상 못했다. 초반에는 서로가 서로를 잘 모르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후 상반된 대처가 전황을 갈랐다. 중국은 현대화된 장비와 해공군을 갖춘 미군과 정면 대결하기 보다 우회 공격과 분산, 은폐 등으로 대응했다.


<중공군의 미군 대응 전술 지침 >

지구전, 적 측면 우회 각개 격파

접근전, 야간전, 속전속결, 적의 강한 화력의 장점 발휘 방지

낮에는 병력 분산 은폐해 공습 회피

전투기 활동 제한되는 야간전투

폭격 우려있는 철로 도로 이동 회피

진지 매복후 북진하는 상대 공격

 

<중공군의 7차례 공세>

순서 시기 기간(일) 특이 사항
1 1950년 10월 25일〜11월 5일 12 공세 후 중공군 잠적
2 〃 11월 25일〜12월 10일 15 장진호 전투
3 〃 12월 31일〜1951년 1월 10일 11 1·4 후퇴
4 1951년 2월 11〜18일 7 유엔군 37도선까지 후퇴
5 〃 4월 22〜30일 9 1차 춘계공세, 최대 단일 군사작전으로 70만 명 동원
6 〃 5월 16〜20일 5 2차 춘계공세, 공세 실패 후 본격 지구전, 전선 교착 상태 지속
7 1953년 7월 13 〜27일 15 휴전 서명 직전 최후 공세
 

중국 랴오닝성 단둥 항미원조기념관 외부에 중공군 중포가 대규모로 전시되어 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 ‘7차례 공세’를 알리는 신호탄 운산 전투

미군이 중공군의 공세에 일정한 패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3차례나 당한 뒤였다. 1주일에서 보름 가량 ‘인해전술(人海戰術)’로 공격을 해오다 일정 기간 휴지 기간을 지난 뒤 다시 공격하는 패턴이 반복됐다.

중공군 출병을 신고한 운산전투(1950년 10월 25일~11월 3일)에서 중공군에게 일격을 당한 뒤에도 중공군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실패하고 교훈을 얻지 못한 댓가는 ‘무사안일 북진’하던 미군과 국군의 전황을 훅 뒤집을 정도로 컸다.

운산전투는 국군 제1사단과 미군 제1기병사단이 중공군과 처음으로 치른 전투다. 중국은 첫 전투가 벌어진 10월 25일을 참전 기념일로 삼고 있다. 중공군은 “미군의 최정예라는 제1기병 사단의 콧대를 꺾어 흥분되는 일이었다”고 평가했다.(훙쉐즈, 108쪽)

국군 1사단 15연대는 25일 금광으로 유명한 운산에서 박격포 세례를 받았다. 첫날 전투에서 35세 가량의 포로 한 명이 생포됐다. 두툼하게 누빈 무명 방한복으로 겉은 카키색, 속은 흰색이어서 눈이 오면 위장복도 됐다. 그는 자신이 제39군 소속으로 광둥성 출신이라고 밝힌 뒤 인근에 2만 명 가량의 중공군이 있다고 술술 털어놨다. 직접 신문한 백선엽 사단장은 미 8군을 통해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에 보고했다. 도쿄 사령부는 조선족 의용병이 가담한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15연대는 운산에서 ‘전투부대로서 존재하기를 멈췄다’고 할 정도로 괴멸됐다. 미 제8기병 연대도 중공군에게 포위돼 병력 과반수를 잃었다. 중공군 포로 한 명의 진술을 흘려버린 댓가였다.

중공군은 운산 전투 후 잠적했다. 병사들이 휴대한 식량과 탄약이 바닥나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중공군의 대규모 투입 사실을 모르는 것을 역이용해 더 큰 승리를 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고 했다.(훙쉐즈, 111쪽). 일시적 후퇴로 일종의 진공상태를 만든 다음 전투력이 더욱 우수한 적을 추가로 유인해 매복전술로 섬멸하려는 계략이었다. 중공군의 노림수는 적들에게 겁을 먹고 후퇴하고 있다는 그릇된 인상을 주는 것이었다.유엔군은 이런 중공군의 계략에 말려들었다. (웨이트라웁, 45쪽)

애치슨은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10월 26일부터 11월 17일까지 3주일이라고 했다. ‘한국에서 재난으로 가는 것을 막을 마지막 기회를 잃었다’고 했다.(애치슨, 602쪽). 1차 대공세 이후 중공군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것을 지적한 것이다.

 

 중국 랴오닝성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중공군 각 부대의 출병 및 귀국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 ‘미끼 던지고 보름달 계산하고’, 정교한 덫

1차 공세 후 매복하고 있던 중공군은 유엔군의 북진 속도가 느려진 것을 걱정했다.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서는 적이 먼저 밀고 올라와야 했기 때문이다. 중공군은 의도적으로 비호산, 덕천 등을 포기해 상대를 유인했다. 후퇴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워 작전이 노출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고 한다. 주력 부대는 10여km 후방에 있고, 소규모 부대로 기습공격을 해 공격개시선까지 쫓아오도록 했다.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운산 전투 후 바로 자취를 감추는 등 일부러 약하게 보이려고 했다고 했다. 적을 교만하게 만들어 깊이 유인하려는 전술이었다는 것이다.(펑더화이, 426쪽).

2차 공세를 앞두고는 핵심 정예부대를 ‘미끼’로 던졌다. 항일전쟁과 국공 내전에서 ‘철군(鐵軍)’으로 알려진 112사단을 적의 공격해 노출시켰다. 대비가 허술하다고 판단하고 적이 진격해 오도록 한 것이었다.

3차 대공세 전에는 달뜨는 시기를 살폈다. “보름달 뜨기 며칠전이 공격 개시에 가장 좋다. 전투가 최고조에 이를 때 보름달이 되어 가장 밝다.” 우리에게 신정 공세로 알려진 12월 31일 3차 공세 개시 날짜는 그렇게 정해졌다.(훙쉐즈, 192쪽).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채 안가고, 연말연시 경계심이 풀어진 틈을 이용하자는 계산도 있었다. 중공군은 밤에 산악을 이동할 때는 고무 군화를 신고 어두운 산허리를 소리도 없이 돌아다니다가 침입해 왔다.(리지웨이 회고록, ‘향군’ 3월호, 122쪽)

중공군이 70만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5차 대공세를 편 것은 미군이 동해안 통천 원산 등으로 상륙할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에 따라 반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38선을 치고 올라오면서 상륙작전으로 39도선의 안주~원산선으로 측면 공격해오면 주요 보급선이 차단돼 큰 위협이 된다고 봤다.

 

 중국 랴오닝성 단둥 압록강 상류에 중공군이 도강했던 지점이라며 표지석과 병사들 동상을 세워놓았다. 뒤의 압록강에는 당시 임시 다리를 세웠던 흔적이 남아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 ‘북한의 산악지대로 유인’

중공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할 때부터 유엔군을 북한의 산악지대로 유인했다는 분석도 있다. 중국은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간 북한에 후방 역습을 경고했지만 상륙작전이 성공한 후에는 미군이 북한까지 진격하도록 지상군 투입을 늦췄다는 것이다. 북한 최북단 산악지역에서 맞붙는 것이 중공군의 보급선도 짧고 방어에도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미리 투입해 중공군이 38선까지 내려간 뒤 미군이 함흥이나 남포 등 더 북쪽으로 상륙하면 불리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쑤이, 155쪽)

미군이 압록강으로 진군할 때 마오쩌둥은 “맥아더가 고집과 오만을 부릴수록 우리에겐 유리하다. 오만한 적은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다”면서 미군이 최대한 북쪽으로 올라와 보급로에 문제가 생기기만을 기다렸다.(핼버스탬, 569쪽)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미 육군 2사단 마크. 단둥 = 홍진환 기자

 

<전쟁 기간 중공군 병력 수 증가>

구분 1950.10.28 1950.12월 초 1951.7.10 1953.7.27
사단 갯수 18 31 51 58
병력(명) 203,640 531,500 948,299 1,221,058
시기 첫 참전 2차 공세 휴전회담 시작 정전협정 서명

 

● 미 2사단, 군우리 전투 ‘인디언 태형’ 굴욕

중공군의 ‘매복과 덫’의 전술에 처절한 패배를 당한 것이 군우리 전투다. 국군 6사단을 시작으로 미군과 국군이 압록강에 도달한 직후부터 중공군의 맹렬한 기세로 이제는 포위망을 뚫고 후퇴하기 급급했다. 압록강에 처음 도달했던 국군 2군단 6사단은 초산에서 매복 포위당해 괴멸됐다. 7사단과 8사단 역시 중공군 공격에 하룻밤 사이 무너졌는데 두 사단의 사단장은 부대를 이탈한 뒤 서울 거리를 떠돌다 헌병에 체포돼 군법재판에서 무거운 판결을 받았다.

낙동강 전선에서 일제히 북진할 때 호남지방을 돌며 후방 게릴라 잔병 소탕을 하던 미 2사단이 국군 2군단이 무너져 뚫린 곳에 급거 투입됐다. 미 2사단은 청천강변의 평남 개천군 군우리의 좁은 계곡에서 중공군 제42군의 포위망에 걸려들었다. 미리 매복하고 있던 중공군이 정찰을 맡은 전차 소대를 통과시켰고, 뒤따르는 헌병 정찰대와 수색중대 정찰대, 본대를 분리 타격했다.

군우리 전투는 적이 매복하고 있을지도 모를 골짜기를 야간에 이동한 것부터 큰 실책이었다. 낮이라면 미군의 공군 및 화력지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야간에는 홀로 적과 맞서야 한다. 카이저 사단장은 곧 바로 현직에서 물러났다. 미군의 전사(戰史)는 카이저 소장의 실수를 상세히 기록해 교훈으로 삼는다고 한다. (백선엽 1권, 125쪽).

미 2사단은 앞뒤가 차단된 상황에서 계곡 위에서 집중 포격과 사격을 받아 사흘만에 병력의 20% 만이 살아남았다. 전투가 끝난 뒤 트럭과 장비, 야포와 각종 무기 그리고 막대한 양의 물자가 고스란히 중공군에 넘어갔다. 그중 상당수는 베이징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이 있는 최고 지도부에게도 전해졌다고 한다.(핼버스탬, 131쪽)

미 2사단의 부대 마크가 ‘인디언 헤드’이고 인디언들이 계곡 양측에서 공격하는 전술과 닮아 ‘인디언 태형’을 당했다고 미 전사는 기록한다. 군우리 전투(1950년 11월 29일~12월 1일)는 6·25 당시 미군의 사단급 부대가 당한 최악의 피해였다.(남도현, 279쪽).

 

 

● 남진(南進) 속도와 범위두고 공산측 내부 이견

미군이 중공군 공세에 38선 남쪽으로 철수한 것은 12월 16일이지만 중공군이 뒤따라 넘은 것은 열흘 뒤인 26일이다. 마오는 12월 4일 평양에 들어온 뒤 서울까지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펑더화이는 너무 멀리 내려가는 것은 보급선도 길어지고 유인 작전에 걸릴 수 있어 서울 점령은 북한군에 맡겨야 한다고 했다.(쑤이, 248쪽).

1951년 1월 8일, 펑더화이는 부대의 진공을 멈추고 전군 2개월간의 재정비를 명령했다. 중공군이 38선을 넘고 서울을 재점령한 뒤에는 중공군을 남쪽으로 더 유인한 다음 육해공 공동 상륙작전을 펴서 독 안에 든 쥐처럼 만들려는 계획인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펑더화이는 “37도선에서 공격을 멈췄는데 우리를 낙동강으로 깊이 유인하려던 적은 우리 방어가 견고하게 완성되지 않은 것을 알고 1월 하순 반격을 가했다”고 당시를 분석했다.(펑더화이, 429쪽)

북한주재 소련대사 라자예프는 “전투에 이기고도 적을 추격하지 않는 작전을 지시하는 사령관은 누구냐?”고 항의하다 스탈린에 의해 조기 귀국당했다.(훙쉐즈, 203쪽).
 

 

 중국 랴오닝성 단둥의 ‘압록강 단교’에서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단교 왼편으로 북중 교역의 주요 통로인 ‘중조우의교’로 불리는 압록강 철교가 보인다. 철로와 도로로 쓰인다. 단둥 = 홍진환 기자

 

 ● 중소의 ‘제한전’

미국에서도 맥아더의 만주 폭격 등 확전론과 트루먼의 제한전론 간에 갈등이 있었지만 중소도 확전을 피하고자 했다. 1951년 4월 11일 트루먼이 맥아더를 해임하자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공포로부터 해방됐다’고 반겼다고 한다. 전쟁이 한반도에 국한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에 따라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하고 지원했던 소련과 중국은 미군이 신속히 지상군을 보내 참전하자 직접적인 대결이나 확전을 막으려고 했다.

중공은 공중전을 확대시키지 않아 미국의 핵공격 또는 중국 본토에 대한 보복행위의 위험을 피하려고 했다. 트루먼이 중국 본토로 전쟁을 확대하지 않은 데는 중국이 공군력 행사에 신중한 것도 한 요인이라는 분석이다.(쑤이, 260쪽) 소련도 미국과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기 위해 공군 작전에서 제한을 두었다. 전쟁에 참가했다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이유는 다르지만 미국도 소련 공군의 참전 사실을 비밀로 했다. 소련 참전한 것이 부각되면 여론을 자극해 전쟁이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선즈화, 504쪽).


소련 공군 참전 및 교전 수칙

  • 소련 영토에서 이륙해 작전 투입 금지
  • 중국 혹은 조선비행기로 위장, 조종사는 중국 군복 착용
  • 조선 작전 투입 사실 누설 금지 각서와 선서
  • 비행 중 러시아어 사용금지
  • 유엔군 통제구역 혹은 전선 인접지역 비행 금지
  • 서해 상공 교전 금지
  • 평양〜원산 남쪽(39도선) 적기 추격 금지

 

절반만 끊어진 ‘압록강 단교(鴨綠江 斷橋)

중국 랴오닝성 단둥의 ‘압록강 단교’. 강 가운데부터 북한쪽은 1950년 11월 미군 폭격으로 부서져 교각만 남아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중국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의 압록강 단교(斷橋)는 북한쪽이 없고 중국쪽 교각만 남아있다. 다리의 절반만 폭격으로 부서진 것이다. ‘압록강 단교’로 보존되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 이곳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한 6·25 전쟁을 읽는 중요한 코드가 담겨 있다.

다리가 절반만 끊어진 것은 ‘중공군에 대한 미군의 공습은 저기까지’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압록강 중간이 국경인데 북한쪽 절반만 폭격한 것은 중국으로의 확전을 막겠다는 트루먼 대통령과 군 및 보급품 차단을 위해 다리를 끊어야 한다는 맥아더 사령관의 절충점을 보여준다. 중공군 개입에 대응하기 위해 다리는 폭격하지만 절반 밖에 하지 못한 확전론과 제한전의 갈등이 절반만 파괴된 끊어진 다리에 응축되어 있다.

 

중국 랴오닝성 단둥의 ‘압록강 단교’ 끝에는 ‘역사의 귀감’으로 삼는다며 폭격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 단둥 = 홍진환 기자

 

“워싱턴이 내린 제한 명령으로 나는 중공군의 대량 개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취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만은 남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스트레트메이어 장군에게 B29 폭격기 90대로 압록강 철교를 폭파하라고 명령했다. 폭격을 잘못하여 폭탄이 만주 땅에 떨어질 위험이 있어서 나는 그때까지 그 명령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맥아더, 222쪽)


1950년 11월 6일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압록강 대교 등을 폭격하겠다는 스트레이트마이어 극동공군사령관의 전보를 받고 워싱턴이 발칵 뒤집혔다. 중간선거 전날 캔사스시에 있던 트루먼에게 애치슨이 긴급 전화를 걸었다. “사안이 중대해서 즉각적인 결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트루먼은 “아군에 대한 즉각적이고 심각한 위협이 있을 경우에 한해서 허락할 것”이라고 했다. 미 합참은 도쿄에서 폭격기가 이륙하기 1시간 20분 전 전문을 발송했다. 영국과 협의없이 만주에 영향을 미치는 행동을 취하지 않기로 했다고 알렸다. 명령이 있을 때까지 국경 5마일 이내 표적에 대한 폭격을 연기하라고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맥아더가 “대규모 병력 및 물자가 압록강 전 교량을 통해 만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고 있어 휘하 부대를 위태롭게 하고 궁극적으로 와해되도록 위협하고 있다”며 폭격의 필요성을 강조한 긴 전문을 보냈다. “합참의 지시는 중대한 재난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즉시 대통령이 제기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애치슨, 600쪽)

브래들리 합참의장이 맥아더의 전문을 전화로 트루먼에게 그대로 읽어주었다. 부대가 위협을 당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 트루먼은 결정을 번복했다. 다만 “압록강 교량의 한반도측 연결 부분을 포함하는 한만 국경에 대한 폭격을 허락한다. 압록강의 댐이나 수풍발전소 폭격을 허락하는 것은 아니다” “만주의 영토와 영공을 침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북한 신의주의 압록강 건너편의 중국 랴오닝성 단둥은 변경 관광도시 중 하나다. ‘압록강 단교’가 변경 10대 관광명소 중 한 곳이라는 안내문과 포토존이 마련되어 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스트레이트마이어는 “워싱턴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허가했다. 다리 절반만 폭격하려면 압록강 하류에서 일직선으로 비행하면서 폭격해야 한다. 그러면 적은 비행 코스를 알고 고사포를 발사할 것이다”고 했다. 실제로 이 작전으로 대공포 사격을 받아 부상을 입은 조종사는 “워싱턴과 유엔은 도데체 누구 편입니까”라고 물었다. 맥아더는 ‘절반 폭격’ 지시에 반발해 자신을 해임하라고 요청하는 전보 문안을 준비했다가 참모들의 만류로 찢어버리고 보내지 않았다.(맥아더, 224쪽). 맥아더는 “미국 역사상 야전 사령관에게 주어진 결정 중에서 이처럼 융통성이 없고 무모한 결정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영화 ‘디보션’에는 미 항모에서 출격한 비행기가 대공 사격을 받으며 아슬아슬하게 교각 사이를 지나며 폭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1950년 11월 미군의 압록강 철교 폭격 장면.

 

 

트루먼의 수정 명령에 따라 압록강 교량에 대한 폭파가 11월 8일부터 14일까지 진행됐다. 8일 스트레이트마이어의 일기는 이렇게 기록했다. “첫 비행에서 B-29 3대가 교각 사이의 수면위로 비행하며 폭격을 했다. 중공군은 (실력은) 보잘 것 없었지만 대공포격을 해왔다. 두 번째 비행에서는 4대의 B-29가 다른 쪽 교량 첫 번째 교각 사이 수면위로 비행했는데 결과에 만족한다. 내일은 B-29가 남은 교량들을 휩쓸고 지나갈 예정이다.”

 

※참고문헌

남도현 지금, 『6·25, 끝나지 않은 전쟁』, 플래닛미디더, 2010.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
데이빗 쑤이(徐澤榮) 지음, 한국전략문제연구소 옮김. 『中國의 6·25 戰爭 參戰』, 한국전략문제연구소, 2011.
딘 애치슨, 『Present at the Creation』, Norton & Company Inc., 1969.
백선엽 지음, 유광종 정리, 『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 1권, 2020.
선즈화(沈志華) 지음, 김동길 옮김, 『조선 전쟁의 재탐구』, 도서출판 선인, 2014.
스탠리 웨인트라웁 지음, 송승종 옮김,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작전』, 북코리아, 2015.
이상호 지음, 『맥아더와 한국전쟁』, 푸른역사, 2012.
펑더화이(彭德懷) 지음, 이영민 옮김, 『나, 펑더화이에 대해 쓰다』, 앨피, 2018.
훙쉐즈(洪學智) 지음, 홍인표 옮김, 『중국이 본 한국전쟁』, 한국학술정보, 2008.
『향군』 1991년 3월호, 대한민국재향군인회, 1991.


[12회]혹한과 인해전술 이긴 장진호 철수작전(上)

미국 워싱턴 DC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에 장진호 전투에 참가한 미군을 형상화한 동상이 세워져 있다. 앞쪽에 ‘알지 못하는 나라, 만난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라는 국가의 부름을 받고 나선 우리의 아들 딸들에게 국가는 경의를 표한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워싱턴 = 구자룡 기자

 

중국 랴오닝성 단둥의 항미원조기념관에 있는 미 7사단 31연대 깃발. 중국은 장진호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기념관의 초입에 걸어 놓았다. 단둥 = 홍진환 기자 

 

미국 워싱턴 DC 링컨기념관 앞 좌측에 있는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에는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작전에 투입된 형상의 병사들 기념비가 있다. 6·25 전쟁 장진호 전투에 참가한 미 제1 해병사단 병사들이다. 중국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 항미원조기념관은 내부 전시를 시작하는 곳에 장진호 전투에서 뺏은 미 제7사단 31연대 깃발을 걸어놨다. 장진호 전투는 미국과 중국 모두에게 한국전쟁을 대표하는 전투이자 서로의 자존심이 걸린 역사의 한 장면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윤석열 대통령이 4월 27일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미군은 장진호 전투에서 12만명의 인해전술을 돌파하는 기적같은 성과를 거뒀다”고 발언하자 의원들이 기립 박수를 보냈다. 다음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장진호 전투는 중국이 위대한 승리를 거둔 것”이라고 반발했다.

 

1950년 10월 원산에 상륙하는 미 해군 등 유엔 각 국의 선박이 원산항으로 들어가고 있다. 

 

● 미 10군단 뒤늦은 원산 상륙

10월 1일 38선을 돌파한 동부전선의 국군 1군단은 10일 원산을 점령했다. 6사단이 초산에서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던 10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원산에 찾아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연설을 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미 8군과 10군단의 지휘권을 2원화해 10군단은 육로로 북진하지 않고 다시 인천으로 돌아가 바다로 한반도를 돌아오느라 26일에야 원산항에 상륙했다. 맥아더가 미 10군단을 원산에 상륙시킨 것은 워커의 미 8군이 평양으로 진격할 때 동쪽에서 협공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10군단이 원산에 상륙한 10월 26일 국군은 이미 원산을 점령한 뒤 보름이 지난 뒤였다. 평양도 19일 국군 1사단과 미 제1해병사단에 의해 탈환한 후였다. 

 

 

● 국군 6사단 ‘초산 과속’의 역풍

평양 점령을 돕기 위해 서진(西進)할 필요가 없어지자 11월 15일 맥아더는 군단의 진격 방향을 바꿨다. 장진호 서쪽의 유담리를 거쳐 자강도 무평리와 강계 등 서북 방향으로 올라가 중공군의 후방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러스, 116쪽) 하지만 10군단이 원산에 상륙한 10월 26일 8군 지휘하의 국군 2군단 6사단은 이미 초산에서 압록강에 도달했다. 6사단은 ‘초산 과속’으로 압록강 도달 이튿날부터 중공군의 매복 포위 공격을 받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 여파는 2군단 전체의 참패로 이어졌다.

 

 

국군 6사단이 초산에 도달했을 때 전선을 보면 좌우 부대와의 보조없이 불쑥 튀어나와 있다. 19일 압록강을 건너와 매복해 기다리고 있던 중공군에게 돌출된 6사단은 공격의 호재를 제공했다. 측후방에 빈틈이 많기 때문이다. 6사단은 퇴로가 차단됐고 6사단을 도우려던 2군단 예하 7사단도 큰 타격을 입었다. 중공군의 분리 포위 타격에 당한 것이다.

압록강에 가장 먼저 도달했던 6사단 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보급이 두절되고 탄약이 떨어져 진퇴유곡이었다”며 사단장으로부터 휴대용 전투 장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파괴 또는 소각하고 이동(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임부택, 319쪽).

6사단의 원래 주둔지는 탄광과 석회광이 있어 광산 개발이 활발했고 광물회사가 보유한 트럭이 많은 강원도 춘천과 영월 일대였다. 전쟁 후 이들 트럭을 징발해 기동력이 뛰어나 개전 초기 춘천 홍천전투 등에서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압록강 북진 작전에서는 홀로 앞서나갔던 것이 오히려 역풍을 불렀다.

 

● 구멍 뚫리고 퇴로 차단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6·25 전쟁에 투입되는 중공군 병사들이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원조하고, 가정과 국가를 지킨다’는 구호를 외치는 사진이 걸려 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초산 과속’으로 괴멸된 6사단과 7사단, 즉 국군 2군단에 구멍이 뚫렸다. 워커와 알몬드간 지휘권 분할로 동서부 전선 사이에 80km 이상의 틈이 있는데다 두 전선 사이의 2군단 마져 무너지자 중공군은 유유히 내려와 11월 9일 원산을 점령한 뒤 미 3사단을 위로 쫓아 올렸다. 이때 멀리 함경북도까지 진격해 있던 미 10군단과 국군 1군단은 퇴로가 끊겼다. 이후 개마고원의 인공호수 장진호에서의 혹한 전투, 흥남 해상철수, 10만 피란민의 눈물 등이 이어졌다.(애플먼, 24쪽)

 

 

동부 전선에서 아군 퇴로가 차단되고 포위 공격을 받는 급박한 상황인데도 11월 24일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대공세’가 나왔다. 크리스마스에는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대공세를 펼치라는 명령이었다. 알몬드 10군단장은 현장의 실상을 전하기는 커녕 사령관의 뜻에 부응해 북진에 가속명령을 내린 것이 11월 27일이었다.

중공군은 1차 공세(10월 25일~11월 5일) 이후 잠적하듯 모습을 감췄지만 미 10군단 제1 해병사단이 함흥을 거쳐 장진호 방향으로 올라오는 것을 주시하고 있었다. 길게 전선이 늘어져 분산되는 것을 지켜보며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 제1 해병사단이 장진호 주변 유담리 하갈우리 신흥리 등에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 있던 중공군 9병단 3개군 소속 10개 사단이 공격을 개시한 것도 알몬드가 진격 명령을 내린 27일이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전투가 시작됐다.


장진호 전투 중공군(9병단 10개 사단)의 배치와 임무

중공군
배치 지역
담당
27군 4개 사단
장진호 동서안
제1해병 사단, 7사단 31연대 공격
20군 4개 사단
유담리 하갈우리
주보급로 차단
26군 2개 사단
고토리
후방 봉쇄

 

● 사전 ‘경고’ 무시한 댓가

중공군이 11월 27일 대공세를 시작하기 한 달 전인 10월 28일 국군 26연대(혜산진 부대)는 장진호〜흥남 사이 수동에서의 소규모 전투에서 중공군 16명을 생포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124사단 박격포 부대 소속이라며 3개 사단이 북쪽에서 장진호를 향해 오고 있다고 털어놨다. 알몬드 10군단장은 즉각 도쿄 맥아더에게 보고했다. 사령부는 놀라지도 않고 관심도 갖지 않았다.(애플맨, 20쪽). 이미 대규모로 장진호 주변으로 들어와 있던 중공군의 정보에 어두웠던 아군의 힘겨운 장진호 전투의 시련은 이때 시작됐다.

27일 공세 하루 전에는 장진호 서쪽 유담리에서 중공군 3명이 민가에 숨어 있다가 7연대 정찰대에 투항했다. 이들은 “20군의 60사단, 58사단, 59사단이 유담리에 6일간 주둔해 있었으며 2개 해병 연대가 하갈우리와 유담리 사이 덕동고개를 통과한 뒤 해병항공대의 근접지원을 피해 어두워진 후에 공격할 것”이라고 매우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하지만 말단 병사가 대규모 작전계획을 알고 있을 리 없다, 허위 정보를 전할 임무를 띠고 민가에 남겨진 미끼일 수도 있다며 포로의 말을 믿지 않았다.(러스, 128쪽). 이 정보는 장진호 동쪽의 미 7사단 31연대에 전달되지 않아 아무런 대비를 하지 못해 ‘장진호 동쪽의 참극’으로 이어졌다.(애플먼, 73쪽)

26일 밤 7연대 3대대 쪽에서도 민간인 한 명이 붙잡혀 심문을 했는데 “남서 방면으로 중공군 길 안내를 해주고 가는데, 행군 종대의 길이가 3시간 걸리는 길이였다. 말이 끄는 대포도 있었다”고 했다.

중공군 포로의 진술을 믿지 않은 것은 첫 운산전투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포로는 전체 부대의 이동과 배치, 병력 수, 일부 작전 내용까지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었고 순순히 털어놨다. 백선엽 장군은 후에 국방부의 ‘전사(戰史)’를 보고 궁금증을 풀었다고 했다. 중공군 지도부가 싸움에 임하는 장병들에게 왜 싸워야 하는지 정신교육과 함께 전투 작전의 세세한 정보도 공유해 위아래 없이 동료의식을 갖게 한 것이라고 했다.(백선엽 1권, 246쪽). 때문에 포로의 진술은 매우 값진 정보였지만 맥아더와 사령부는 줄곧 소홀히 취급하거나 아예 무시했다


미 제1 해병사단 장진호 전투 일지

10월 26일 원산 상륙
하순 원산 인근 고저리, 북한군 잔당과 교전
11월 2〜3일 수동 연대봉, 중공군과 미 해병 첫 교전
11월 7일 스미스 사단장 알몬드에 부대 분산 배치 항의
11월 15일 7연대 하갈우리 집결
맥아더, 장진호 서쪽 진격 명령
11월 25일 7연대, 유담리 진입
11월 26일 5연대, 장진호 동쪽 미 7사단 31연대에 인계
11월 27일 중공군 포위 공격, 미 해병 1사단도 공격 개시
12월 1일 하갈우리 야전활주로 개통
12월 2일 덕동통로 확보
12월 7일 고토리 도착
12월 9일 수문교 건설, 황초령 통과
12월 11일 흥남 도착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의 장진호 안내 전시관 입구에 ‘빙설 장진호’라고 표기되어 있다. 장진호 전투가 혹한의 전투였음을 전시관만 봐도 알 수 있다.

 

● 덕동통로, ‘폭스 힐 중대의 기적’

유담리에서 27일부터 북한군 3개 사단의 공격을 받은 미 제1 해병사단 5연대와 7연대가 철수할 때 퇴로는 덕동통로 한 곳 뿐이었다. 이곳 돌파 임무를 맡은 7연대 F중대(폭스힐 중대)는 5일간 덕동통로에 고립되어 있으면서도 중공군 3개 대대를 섬멸하는 전과를 거두며 지켰다. 폭스 중대가 하갈우리에 도착했을 때 중대원 247명 중 생존자는 60명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중증 동상에 걸려있었다. 바버 힐 중대장도 덕동통로를 확보한 뒤 부대가 하갈우리로 이동할 때 부상을 입었지만 차에 타지 않고 도보로 이동하다 부대와 떨어진 뒤 실종됐다.

유담리의 주력 부대가 사단본부가 있는 하갈우리의 부대와 합류할 수 있는 지는 사단의 존망과도 직결된 것이었고, 이는 덕동통로라는 혈로를 지키느냐에 달려 있었다.(러스, 320쪽) 이런 상황에서 나온 ‘폭스힐 중대의 기적’같은 전과는 ①혹한 속에서도 진지 배치 직후 참호를 구축하는 기본 수칙을 지킨 점 ②하갈우리 포병 부대의 지원 사격 ③덕동통로를 우회해 중공군의 후방을 공격하는 작전 주효 ④C-47 수송기를 통한 탄약 등 공중 투하 ⑤무엇보다 고립된 부대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 따른 부대원의 사기 등이 요인으로 꼽힌다.

미 해병대는 유담리 하갈우리 고토리 등에서 밤에는 피리, 꽹과리 소리를 내며 끊임없이 몰려드는 유령같은 중공군과 전투를 벌였다. 하갈우리를 포위해 밀집 포위한 중공군의 숫자가 많아 ‘들판 전체가 일어나서 앞으로 걸어오는 것 같았다’고 했다.(러스, 296쪽)


후퇴하는 부대가 모두 하갈우리에서 흥남 방면으로 18km 가량 떨어진 고토리에 집결한 것이 12월 7일 밤이었다. 병력 1만 명과 차량 1천 대 이상이 18km를 이동하는데 40시간이 걸렸다.

 

 장진호에서 흥남으로 가는 중간에 있는 황초령의 수문교를 미군들이 복구하고 있다. 큰 사진 중간 협곡에 파괴된 부분이 보인다. 출처 영문 위키

 

● 황초령 수문교, 공중투하로 복구 후 계곡 통과

이튿날인 8일 황초령을 넘는 첫 관문은 450m 깊이의 계곡을 연결하는 수문교 중 중공군이 폭파한 약 7m 구간을 복구해 건너는 것이었다. 다리를 복구하지 못하면 차량과 전차 야포 등 장비를 버려야했다. 7일부터 극동 공군 전투공수사령부가 C-119 수송기 8대를 이용해 낙하산으로 임시 교량 경간목을 공중 투하했다. 1t이 넘는 경간목 4개 중 두 개는 중공군이 있는 곳으로 떨어지고 중공군의 간헐적인 공격이 계속되는 등 우여곡절 속에 9일 오후 사단 공병대대가 수문교 복구를 마쳤다. 대규모 교량 설비를 공중 투하해 계곡의 다리를 복구하기는 매우 이례적인 사례로 꼽힌다. 야간을 이용해 병력과 장비 뿐 아니라 다수의 피난민도 다리를 건너 11일 흥남에 도착했다. 유담리에서 11월 27일 중공군 공격을 받고 후퇴하기 시작한 뒤 128km를 사방에서 포위 공격하는 중공군과 사투를 벌인 뒤 약 2주 만이다. 미군은 후위 부대가 모두 수문교를 건넌 것을 확인한 뒤 다시 폭파해 중공군의 추격을 막았다.

 

 중국이 제작한 장진호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 ‘장진호 수문교’(2022)의 포스터.

 

 한 장교는 북진 명령을 받고 장진호 부근으로 전진해 가던 상황에 대해 “중공군은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우리를 노리고 있는데 그런 적의 진지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끝도 없이 밀려오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지칠 대로 지쳤다. 도쿄 본부에서 오는 명령은 하나같이 말도 안됐다. 우리를 죽이려고 혈안이 된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말했다.(핼버스탬, 666쪽)

  

 

● 살인적인 추위, ‘세계 2대 동계 전투’

‘땅이 35cm까지 얼어 참호를 팔 수 없어 전투가 심할 때는 동료의 언 시신을 쌓아 방벽으로 이용하는 일까지 있었다.’(‘1129일간의 전쟁’, 261쪽). 당시의 참혹한 전투 상황을 보여주는 한 사례다.


“북한군이나 중공군보다 더 위협적인 건 한반도의 험한 산악과 악천후였다. 살을 에는 겨울 날씨가 미군에게는 최대의 적이었다.”(핼버스탬, 12쪽). 장진호 전투는 2차 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맞먹는 세계 2대 동계전투로 불린다.

전투 당시의 기온은 영하 37도까지 내려갈 때도 있었다. 습도가 높고 강풍이 불어 체감 온도는 더욱 떨어졌다. 양측이 인명피해를 집계할 때 사망, 실종과 함께 ‘동사자’를 분류해 파악했다. 양측 모두 자다가 동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전투 중 죽은 척하고 있으면 생사 확인도 않고 옷을 벗겨가 얼어죽었다.

  

 장진호 전투에 참가한 미 해병대원들이 행군 중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눈을 녹여 식수로 쓰고, 총기나 대포의 철판에 맨손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깡통으로 지급되는 전투 식량이 얼어 옥수수나 콩을 떼어 입에 넣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한 군의관은 “수혈용 혈액과 진통제의 모르핀도 얼어, 위생병은 모르핀이 얼지 않도록 입 속에 넣고 부상자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고, 혈액은 얼어 수혈을 하지 못해 많은 전우가 눈앞에서 죽어가는 고통을 봐야 했다”고 증언했다. 히긴스는 “동상을 대수롭지 않게 무시해서는 안된다. 이곳에서 동상은 많은 해병의 손가락, 발가락, 발, 다리가 절단되는 것을 의미했다”고 했다.(히긴스, 251쪽)

자동화기들은 정상보다 매우 느리게 작동했고 수류탄은 잘 터지지도 않았다. 박격포탄이나 야포 포탄에 부착하는 장약의 추진력이 약해져 포탄의 비거리가 짧아져서 아군 병력을 위협하기도 했다. 연료가 얼어 고체 덩어리가 되고 폭약을 터뜨려 구멍을 뚫은 뒤에야 참호를 파기도 했다.(러스, 294쪽)

중공군 장교도 “영하 20도는 보통이고 3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이 계속됐는데 일부는 솜옷이나 털모자를 걸쳤으나 대부분 방한장비도 갖추지 못했다. 동상에 걸린 병사들이 속출해 전투력 손실이 엄청났다”고 털어놨다.(훙쉐즈, 173쪽).

 

‘상감령 전투’의 상감령이 어디야?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 야외 전시장에 설치된 ‘상감령 전역(전투)’ 안내 표지판. 단둥 = 홍진환 기자

 

중국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의 항미원조기념관은 중공군의 참전부터 1958년 북한에서 철수 할때까지의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그런데 두 전투에 대해서는 별도의 코너를 만들어 소개한다. 상감령 전투와 장진호 전투다.

2020년 기념관을 새로 단장하면서 기념관 외부에 중국이 전쟁 시기를 구분하는 ‘1차〜5차의 전역(戰役)’을 동판에 새겨 놓았다. 여기에는 ‘상감령 전역’만을 따로 소개했다. 이전 기념관에서는 내부에 전쟁 당시 철원의 지형까지 모형으로 만들어 놓고 상감령 전투 소개에만 하나의 전시실을 할애하다시피 했다. ‘상감령 전역 주요 전투 일람표’ ‘상감령 주요 전투 지역’ 지도 등도 있었다.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의 상감령 전투 소개 코너. 단둥 = 홍진환 기자

 

중국이 이처럼 강조하는 상감령(上甘岭) 전투는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5일까지 43일간 국군과 유엔군이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오성산(해발 1062m) 부근 삼각고지와 저격능선 부근에서 중공군 15군과 벌인 전투다. 중국은 가장 대표적인 승전이라고 선전하지만 한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598고지와 파이크스봉, 여배우의 이름을 딴 제인러셀 고지 등을 합쳐 삼각고지라 불렀다. 삼각고지 동쪽에 저격능선(538m)이 있다. 중국은 ‘삼각고지와 저격능선’을 합쳐 상감령이라고 부른다. 중국인들만 아는 명칭인 셈이다.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의 ‘혈전 상감령’ 안내문. 양측 모두 세계 전쟁 사상 유례없이 병력과 화력을 집중해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며 중공군은 땅굴 작전으로 43일 밤낮 이어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1952년 제임스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유엔군의 사기를 고취시키고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자 이른바 ‘쇼다운(Show Down)’ 작전을 벌인다. 유엔군의 작전목표는 오성산의 전초기지라 할 수 있는 삼각고지(미 제7사단)와 저격능선(국군 제2사단)이었다.

하루 최대 30만발의 포탄과 500여개 폭탄이 떨어져 두 고지의 높이가 1~2m 낮아질 정도로 치열했다는 전투에서 중공군은 대규모 땅굴인 ‘지하 만리장성’으로 버텼다. 중공군이 총길이 250km의 전선에 구축한 갱도 길이는 287km에 달했는데 상감령에도 견고한 땅굴이 구축되어 있었다. 훙쉐즈는 “상감령 전투는 땅굴을 중심으로 한 방어체계의 우수성을 실제로 확인했다는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훙쉐즈, 413쪽)

 

영화 ‘상감령’ 포스터

 

상감령 전투는 종군기자들에 의해 시시각각으로 중국 대륙에도 전해져 중국 위문단이 전선을 찾아가 공연을 하고 위문품과 위문편지도 보내는 등 ‘상감령 열풍’이 불었다. 중국에는 ‘레이펑(雷鋒) 정신’처럼 ‘상감령 정신’이라는 말이 널리 쓰인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조국과 인민의 승리를 위해 봉헌하는 불요불굴의 의지, 그리고 일치단결로 용감하고 완강하게 전투에 임해 끝까지 승리를 쟁취하겠다”는 정신이다.

상감령 전투에서 저격능선 전투에 참가한 2사단 등 국군 전사자는 4830명, 중공군 전사자는 1만4867명으로 중공군이 3배 이상이다. 하지만 고지는 중공군이 점령한 채로 전투가 끝났다. 중국에서 세계 최강 미국을 상대로 거둔 최대승리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중국에서 ‘상감령’은 영화로도 제작돼 많은 인기를 끌었다.

 

※참고문헌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
로이 E. 애플먼 지음, 허빈 옮김, 『장진호 동쪽-4일 낮 5일 밤의 비록』, 다트앤, 2013.
마거릿 히긴스 지음, 이현표 옮김, 『자유를 위한 희생』, 코러스, 2009.
마틴 러스 지음, 임상균 옮김, 『브레이크 아웃』, 나남, 2004.
임부택 지음, 『낙동강에서 초산까지』, 그루터기, 1996.
훙쉐즈(洪學智) 지음, 홍인표 옮김, 『중국이 본 한국전쟁』, 한국학술정보, 2008.

 

 

[13회] 혹한과 인해전술 이긴 장진호 철수작전(下) 

 

 ● 스미스 사단장의 ‘느림보 북진’

 ▲올리버 스미스 미 제1 해병사단장. 스미스의 신중하고 치밀한 작전 및 부대 운영이 ‘성공적인 장진호 후퇴 작전’을 만들어 냈다.

 

 

장진호 전투는 미군과 국군의 ‘북진 과속’이 유인 매복 포위 전술을 구사하는 대규모 중공군과 부딪혀 전열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서부전선에서 미 2군단이 군우리 전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것과는 크게 달랐다. 미 제1 해병사단 올리버 스미스 소장이 상부 명령을 거역하지 않으면서도 현장 지휘관으로서 발휘한 신중함과 치밀함이 ‘전략적 후퇴를 하면서도 패배가 아닌 전투’ ‘후방으로 진격하는 전투’로 만들 수 있었다.

스미스는 빨리 북진하라는 알몬드 10군단장의 명령에 자신의 재량권 안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산세도 험하고 지독하게 추운 장진호 동쪽에 엄청난 수의 중공군이 숨어 있을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알몬드 군단장의 비현실적 요구사항에 진격속도를 거의 명령불복종에 가까울 정도로 지연시켰다.(러스, 105쪽)

 

동부전선의 3개 부대 중 스미스 사단의 북진 속도가 가장 느렸다. 11월 10일부터 26일까지 하루 평균 1.5 km였다. 스미스가 중공군이 덫을 놓고 있다고 확신한 경험적 증거 중 하나는 미군에 밀려 북으로 쫓겨가던 중공군이 황초령에서 다리를 폭파하지 않은 것이다. 그 다리를 건너오라고 손짓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느꼈다.


동부전선 부대의 북진 정점에서 흥남까지 거리

부대
북진 장소
흥남 후퇴
국군 1군단
청진
480km
미 7사단
혜산진
320km
미 제1해병사단
장진호
240km

 

● 전진하며 후방 대비한 신중함

스미스는 진격 속도 조절과 함께 장진호 동쪽으로 보냈던 5연대를 다시 불러들여 부대 응집력이 떨어지는 것을 최대한 막았다. 스미스가 해병대가 아니라 육군이었다면 알몬드는 틀림없이 그를 해임했을 것이라고 했다.(핼버스탬, 653쪽)

 

스미스는 사단 병력을 한 방향으로 모아 전진하면서 부대간 간격을 유지해 적의 중간 침투를 막았다.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후방 주요 지점에는 작전과 보급을 위한 캠프를 설치했다. 특히 스미스는 해발 2천m의 고산지대 하갈우리에 쌍발수송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임시 활주로를 건설했다.

12월 1일 공사가 절반도 안 끝난 야전활주로에 C-47 수송기 1대가 시험 착륙에 성공해 이튿날부터 본격적인 항공 수송이 시작됐다. 관제탑은 무전기를 탑재한 지프가 대신했고 활주로가 짧아 엔진을 역회전시키면서 착륙했다. 12월 10일까지 하갈우리와 고토리의 임시 활주로에서 총 240회에 걸쳐 4689명의 부상자를 후송했다. 함흥 흥남 원산 등에 있던 해병대 행정부대원과 부상에서 회복한 병력 500여명도 기꺼이 지옥의 한복판으로 돌아와 사기를 높였다. 스미스의 신중함으로 미군은 중공군에 엄청난 출혈을 강요하면서 포위망을 탈출했다.(나무위키)

 

 ▲장진호 전투에 참가한 미군들이 눈덮인 상중턱에 엎드려 전투를 하고 있다. 

 

● ‘다른 방향으로의 진격’

스미스 사단장은 하갈우리에서 많은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는데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의 이동이 ‘후퇴하는 것이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한 영국 기자는 ‘후퇴 작전’이냐고 물었다.


“후방이 없으면 후퇴가 아니다. 포위당해 있을 때는 후퇴도 철수도 할 수 없다. 유일한 방법은 돌파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격해야 하는데 지금 우리가 하려는 것이다”


그의 이 말은 24시간도 안돼 미국 전역에서 발행되는 신문에서 “후퇴라니, 빌어먹을 우리는 다른 쪽으로 공격 중이라구!”이라는 말로 보도됐다.(러스, 502쪽). 5연대장 레이먼드 머레이 중령은 스미스 사단장의 이 말을 인용한 훈시에서 ‘후퇴가 아니다’는 의미를 더욱 분명히 했다. “우리가 향할 바다쪽 뒷길에 더 많은 중공군이 우리의 진로를 막고 있다.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후퇴란 없다”. ‘다른 방향으로의 진격’이란 말은 미 해군의 장진호 후퇴 작전을 상징하는 한 마디가 됐다.(히긴스, 249쪽)
 

 

 

● 장진호 전투의 ‘나비 효과’

미 제1 해병사단과 7사단 31연대는 장진호 전투에서 후퇴하면서도 2주 가량 북한 10개 사단에 막대한 타격을 입히면서 묶어뒀다. 이로써 더 멀리 북으로 올라갔던 동부전선의 국군 1군단과 미 10군단 잔여 부대가 후방으로 내려오는 시간을 벌어줬다. ‘전반적인 전략적인 패배속에서 이루어 낸 일련의 전술적 승리’라는 말이 장진호 전투의 성격을 잘 표현했다.(러스, 611쪽)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을 모르고 대비하지 못한데다 동서부 전선이 서로 보조를 맞추지도 않고 ‘무사안일’ 북진을 하다 퇴각하는 ‘전략적 패배’가 있었다. 그 와중에도 미 해병 1사단은 2주 가량에 걸쳐 흥남으로 철수하면서 포위한 중공군에게 큰 피해를 입혀 ‘전술적 승리’를 거둔 것이다.

중공군 9병단은 장진호 전투에서 입은 타격으로 병력 보충 등을 한 뒤 이듬해 3월에나 전선에 복귀했다. 3개월 이상 공백기가 생긴 것이다. 서부전선에서 유엔군이 파죽지세로 밀려 38선이 돌파되고 1월 4일 중공군이 서울을 재점령했지만 동부전선의 9병단 12개 사단은 12월 말부터 전개된 3차 대공세에 참여하지 못했다. 동부전선에서도 서부전선처럼 밀렸다면 이듬해 1월 중하순 중공군이 37도선에서 남진(南進)을 멈추지 않았을 수 있었다.(김철수, 200쪽)

장진호 전투 후 미 10군단은 해체됐다. 제1 해병사단은 8군 관할로 돌아간 뒤 1951년 2월 전선에 복귀했다. 그 만큼 양측 모두 혹한속 전투로 홍역을 치렀다.


중국은 장진호에서 미군을 밀어내리고 함흥 흥남 원산 등을 되찾았다는 이유로 장진호 전투를 6·25 전쟁에서 거둔 대표적인 승리로 꼽는다. 지원군사령부와 마오는 9병단에게 무공을 치하하는 축전을 보냈다.(훙쉐즈, 175쪽) 반면 미국은 후퇴하면서 중공군에게 몇 배의 인명 피해를 입혔다. 미군은 상대적으로 적은 피해만 입은 채 중공군 대부대를 3개월 가량 묶어둬 성공적인 ‘지연 작전’을 폈다고 평가한다. 서로가 ‘성공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 ‘혹한 속에 빛난 전우애’

장진호 전투는 전우애를 빛낸 많은 일화들을 남겼다. 현지 취재를 온 기자들이 많았고 후에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들을 통해 이런 사연들이 전해졌다.

미 제1 해병사단이 유담리에서 ‘죽음의 덕동고개’를 넘어올 때 9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는데 600여명의 환자를 들것에 실어 철수했다. 전우의 시체를 실을 차량이 부족하면 자주포 포신에 매달고 오기도 했다.(한 병사의 증언)

11월 30일 알몬드 군단장은 하갈우리에서 미 해병 1사단장과 7사단장에게 “하갈우리에 병력이 집결한 뒤 사단 내 모든 편제화기와 장비는 파괴하고 수송기를 이용해 함흥으로 후퇴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스미스 사단장은 이를 거부하였다. 수송기로 후퇴하면 수송기가 이륙한 후 활주로를 지켜야 하는 최후의 병력은 포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화 ‘디보션’ 포스터

 

 

12월 4일 미 해군 최초의 흑인 비행사 제스 브라운이 피격당해 하갈우리 인근에서 불시착했다. 브라운의 동료 비행사 톰 허드너는 그를 구하기 위해 중공군의 기총 사격을 받으면서 비상 착륙해 브라운을 구하려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부서진 기체에 몸이 끼어 꺼내지 못했고 남겨진 브라운은 동사했다. 이들의 동료애를 다룬 영화 ‘디보션’이 2022년 개봉됐다. 미국 최초로 흑인 이름을 딴 녹스급 호위구축함 D-1089함 ‘제스 브라운’ 호가 명명됐다.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전시된 장진호 전투 장면. 중공군 27군(군단)이 미 육군 7사단 31연대 ‘북극곰 부대’를 격멸하고 연대장을 죽이고 연대기를 빼앗았다는 설명을 자세히 달아놨다. 단둥 = 홍진환 기자 

 

● ‘장진호 동쪽’의 비극과 희생 

 

 제1 해병사단은 당초 장진호를 좌우에서 끼고 돌아 북진할 계획이었다. 사단 주력은 서쪽, 동쪽은 5연대가 배치됐다. 그런데 스미스 사단장이 사단 병력의 분산을 막기 위해 해병 사단은 모두 서쪽으로 가고 동쪽은 미 제7사단 31연대를 배치하기로 했다. 해병대는 사단이 뭉쳐 전진하고 일정 거리와 통신을 유지해 전진할 때나 후퇴할 때 피해를 줄였다.

하지만 급하게 동쪽을 맡게 된 31연대는 많은 착오와 작전 실패 등으로 피해 규모는 호수 서쪽의 사단 병력에 버금갈 정도로 컸다. 특히 31연대에 ‘뻐꾸기 대대’처럼 배속된 32연대 1대대인 ‘페이스 특수임무부대’는 대대장인 페이스 중령이 사망하는 등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중공군의 공격으로 31연대가 철수할 때 ‘페이스 대대’에 통보도 없이 홀로 남겨두고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의 장진호 전투 소개 코너는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혹설속 전투 상황을 재연해 놓았다. 단둥 = 홍진환 기자

 

● 잇단 실책이 부른 비극

첫 실패는 제1 해병사단 5연대가 빠져나간 자리를 메운다며 서둘러 ‘페이스 임무부대’를 배치한 것이다. 연대 병력이 지키던 곳을 한 개 대대가 맡다보니 측후방 진지를 미처 다 점령하지 못해 구멍이 뚫렸다. 27일 밤 중공군이 호수 동서쪽에서 동시에 공격해 왔는데 U자형으로 침투해 공격했다. 한 개인호에서는 카투사 한 명이 머리가 없어진 채 앉아있었다. 27일 하루 밤에 전방 한 개 중대에서만 8명이 전사하고 20명이 부상했다.

이런 상황인데도 28일 알몬드 군단장이 페이스 임무부대 방어진지를 찾아 페이스 대대장에게 “중공군은 북쪽으로 도망치는 낙오병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애플먼, 140쪽). 중공군 80사단이 포위 공격하고 있는 상황을 알지 못했다. 알몬드는 페이스 중령 등 3명에게 은성훈장을 주고 떠났다. 페이스 대대장은 그가 떠나자 훈장을 눈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31연대가 각 부대를 장진호 동쪽 길이 약 16km의 도로를 따라 7개의 각기 다른 장소에 분산 배치한 것도 큰 실책이었다. 적의 측후방 침투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29일 31연대장 매클린 대령이 ‘어이없이’ 실종된 것도 적이 후방으로 침투한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매클린은 부대 남쪽 후방에서 접근하는 부대를 예하 2대대로 잘못 알았다. 상호 사격을 하다 홀로 사격중지를 요청하기 위해 접근하다 중공군에 붙잡혔다.

31연대는 철수하면서 원형 방어가 아닌 도로를 따라 길게 병력과 장비가 이동해 적의 분리 타격에 쉽게 노출됐다. 미 10군단은 사용할 수 있는 항공 자원의 절반 가량을 투입했지만 지상에서 저지르는 실수 때문에 피해를 줄일 수 없었다.

알몬드는 29일 31연대를 하갈우리로 후퇴하라고 지시한다. 그런데 최북단에 있던 페이스 임무 대대에는 철수 명령이 전달되지 않았다. 고립된 페이스 부대는 80시간 동안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학살’을 당했다. 땅이 얼어 묻지 못한 얼어서 뻣뻣해진 시체는 제방 아래에 4단으로 열을 맞춰 눕혔다.(애플먼, 253쪽) 12월 1일 장진호 얼음판 위로 페이스 부대원 200여명이 탈출했는데 페이스 중령은 심장 위에 부상을 입고 남겨졌다가 적의 확인 사살로 숨졌다. 장진호 전투 현장에 묻혔던 페이스 중령의 유해는 2004년 북한이 찾아 8년간의 감식 끝에 신원을 확인했다.

 

● ‘장진호 동쪽’의 희생과 기여

장진호 동쪽 31연대는 장교만도 맥클린 연대장, 페이스 대대장 등 40여명이 희생됐다. 4,5일간 중공군 80사단의 공세를 받아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80사단이 미 제1 해병사단의 본부가 있는 하갈우리를 공격하는데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 이들이 희생되면서 버티는 몇 일 동안 하갈우리를 방어하고 야전 활주로를 건설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장진호 전투에서 하갈우리 방어가 핵심이었다. 사단 지휘부가 있는데다 이곳이 넘어가면 유담리의 주력부대 후방이 차단되고, 각 부대의 연계도 끊기는 요충지였다. 중공군 80사단이 장진호 동안에서 맥클린 특수임무부대를 공격하느라 하갈우리 포위 작전에 참가할 수 없어 하갈우리 방어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역사가 애플먼은 “육군 병력(31연대)은 어쩔 수 없이 희생양 노릇을 해야만 했고 그 희생양이 도살된 꼴이 되었다”고 했다.(러스, 475쪽)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동료들의 시신 앞에서 한 미군 병사가 기도하고 있다. 

 

● ‘초신 퓨(Chosin Few)’

장진호 전투에서 미 제1 해병사단의 인명피해는 전사 600여명, 부상 및 실종 3천여명, 동상환자 3700여명이었다. 여기에 ‘장진호 동쪽’의 31연대가 3000여명 병력 중 1900명 가량이 부상으로 후송됐고, 385명이 살아남았다. 나머지는 사망 실종 포로 등이었다. 미군은 생전 처음 겪어보는 인해전술에다가 밤에 피리를 불고 꽹과리를 치며 심리전을 벌이는 중공군에 전멸이 우려될 정도였다.

중공군은 사망 2만5천명, 부상 및 실종 1만2500여명, 동상환자 1만여명 등이었다. 중국 지원군사령관 펑더화이는 12월 8일 마오에게 보낸 전문에서 6만 명의 병력 보충을 요구했다. (‘1129일간의 전쟁’, 273쪽 , ‘나무위키’ 등).

미군은 중공군에 비해 인명 피해가 월등히 적지만 단일 전투에서 입은 피해로는 막대했다. 그래서 ‘초신 퓨’라는 말까지 생겼다. 초신은 ‘장진(長津)’의 일본어 발음이다. 미군이 사용한 지도가 일본어판이어서 이렇게 불렀다. ‘퓨’는 생존자가 적었다는 뜻이다. ‘초신퓨’는 ‘장진호 전투 생존자 전우회’라는 참전용사 모임의 이름이기도 하다. 기념공원은 장진호와 비슷한 분위기의 알래스카에 조성됐다.


장진호 전투의 미군과 중공군 병력과 피해



미군
중공군
부대
제 1해병 사단
9병단(3개 군단, 10개 사단)
제 7사단 31연대
영국 해병 41 코만도대대
병력수
약 3만명
12만명(중국측 계산)
인명 피해(사망)
1300여명
2만5천여명

▲‘1129일간의 전쟁’ ‘나무위키’. 인명 피해는 양측 주장에 차이가 있음

 

휴먼 드라마 흥남 철수

미 제1 해병사단이 장진호에서 중공군 3개 군단 대병력을 2주 가량 저지하는 동안 북쪽까지 진격했던 국군 1군단(수도사단과 3사단)과 미 7사단은 비교적 안전하게 흥남 항구까지 철수했다. 미군은 항구 외곽에 3겹의 저항선을 구축해 해상 탈출 준비를 했다. 저항선 외부에서 접근하는 중공군은 해상에 포진한 항모 7척 등 함포와 공중포격으로 접근을 막았다. 중공군 9병단 5개 사단이 1차 반경 10km, 2,3차 방어선 외곽 2~3km의 3겹 저항선을 공격했으나 산악지대가 아닌 이곳에서는 미군의 막강한 화력이 위력을 발휘했다.

12월 14일부터 24일까지 거제도와 제주도로의 ‘흥남 철수 작전’은 많은 병력과 장비 그리고 피난민을 안전하게 후송했다. 흥남철수 작전은 군부대가 빠져나오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작전이 진행된 10일간 적의 대부대를 항구 주위에 묶어두고 상당한 피해를 입힌 ‘철수 전투’이기도 했다. 중공군 9병단은 아군 철수 후에도 15일 가량 흥남에서 지체했다. 장진호 전투에서의 피해와 흥남에서 입은 타격으로 중공군 9병단은 서부전선에서 13병단이 유엔군을 38선 아래로 밀어내며 남진해 내려올 때 합류하지 못했다.(백선엽 3권, 135쪽)

 

 ▲경남 거제의 흥남철수 기념공원의 기념비 앞에 피란민들이 매러디스 빅토리호에 오르는 장면을 재연해 놓았다. 거제 = 구자룡 기자 

 

● ‘덩케르크’와는 달랐던 흥남 철수

흥남 항구 외곽 방어선과 화력 지원 속에 미군은 장진호 전투로 큰 인명손실이 난 미 제1 해병사단을 제일 먼저 후방으로 뺐다. 이어 국군 1군단, 미 7사단 순으로 철수했다. 흥남 부두에는 소형 선박부터 미주리 전함, 세인트 폴 순양함 등 총 109척의 선박이 193회의 수송작전을 펼쳤다. 10만 5천명의 미군과 한국군, 1만 7천500대의 차량, 35만t에 달하는 보급품과 장비가 운반됐다.

흥남 부두에는 10만 명 이상의 피난민도 몰렸다. 미군은 당초 2만5천명 가량의 피난민을 수송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김백일 국군 1군단장의 강력한 요구를 미군이 받아들여 약 10만명이 배에 올랐다. 미 10군단 참모장 에드워드 포니 대령은 LST(상륙용 주정) 2척, 상선 3척을 보내 피난민 5만 여명을 배에 태웠다. 특히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약 1만4천명을 태웠다.

원산에서 올라온 미 3사단이 마지막으로 배에 오른 뒤 해군 UDT 대원이 흥남 부두의 방파제를 포함한 주요 시설에 설치한 400t의 다이나마이트, 50만 파운드의 폭탄을 터뜨려 흥남 철수 작전은 종료됐다.

흥남 철수에서 미군이 많은 수의 피난민을 태울 수 있었던 것은 인도적인 고려도 있었지만 미국의 막대한 전쟁물자 조달 능력도 배경으로 꼽힌다. 당시 미국은 전세계 생산의 50% 가량을 차지했다. 함흥에서 피난민을 배에 태우기 위해 버리고 파괴한 장비와 물자를 보충할 수 있는 능력과 여유가 있었다.

 

 ▲경남 거제 흥남철수 기념공원에 세워진 기념비에는 보다 많은 피란민들을 배에 태우는데 기여한 6명의 사진과 이름을 새겨놓았다. 맥아더 장군, 알몬드 10군단장, 포니 대령, 현봉학 박사, 김백일 1군단장 장군, 박시창 대령. 거제 = 구자룡 기자 

 

● 현봉학 박사의 “피난민은 개종한 기독교인” 기지

현봉학 박사

 

 

피난민은 많은데 할당된 선박이 제한되어 있는데다 피난민 속에는 농민 복장, 두루마기 차림의 첩자도 숨어 있었다. 의사 출신으로 알몬드 10군단장의 통역 겸 고문으로 일했던 현봉학 박사는 포니 대령에게 “대부분의 피난민은 신앙심이 투철한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로 개종된 독실한 신자”라고 설명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던 때였다. 공산주의를 피해 떠나려는 기독교인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는 점을 부각했다. 선박 몇 척이 더 피난민 철수용으로 전환하도록 맥아더 사령관의 승인을 얻었다.(웨인트라웁, 295쪽)

흥남에서 피난민 수송에 할당된 선박은 12척이었는데 마지막 수송선이 매러디스 빅토리호였다. 항공유 운반선인 빅토리호는 정원 60명으로 이미 선원 47명이 타고 있었다. 규정대로라면 13명밖에 더 탈수 없었다. 선장 레너드 라우는 포니 대령과 협의해 25만t의 군수물자를 내리고 피란민 1만 4천명을 태웠다. 24일 마지막으로 출항한 빅토리호는 25일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거제 장승포항에 입항했다.

운항 중 4명의 산모에게서 5명의 아이가 태어나 ‘크리스마스 기적의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최상진, 123쪽). 미국인 선원들은 5명 아이에게 태어난 순서대로 ‘김치 1~5호’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2023년 73세가 된 ‘김치 1호’ 손양영 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모친은 평생 피란길에 북에 두고 온 형과 누나 등을 위해 기도했다”고 말했다.(연합뉴스 2023년 6월 27일)

 

 ▲경남 거제 흥남철수 작전 기념공원의 기념비 뒷벽에 새겨진 피란민이 선박에 오르는 장면 부조 벽화. 거제 = 구자룡 기자

 

 

[14회] 지평리에서 현리까지 물망(勿忘)의 전투들

 

 중공군이 보름달 뜨는 날까지 계산해 1950년의 마지막 날 3차 대공세(1950년 12월 31일〜1951년 1월 10일)에 나선 이후 4일만인 1월 4일 서울을 다시 점령했다. 1월 중순에는 평택〜원주〜삼척을 잇는 37도 선까지 밀고 내려왔다. 미군은 금강 방어선까지 밀리면 다시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거나 한반도에서 철수할 구상까지 했다.

하지만 38선을 넘어온 후 중공군은 약점이 부각되는 반면 유엔군은 장점이 커졌다. 중공군이 북한 산악지대에서 수적 우세를 앞세워 유인 매복하던 수법은 한계가 있었다. 아군은 이제 포위돼도 고슴도치처럼 웅크린 ‘고립 방어’로 버티며 막강한 화력으로 제압했다. 아군은 중공군 개입 이후 38선 이북에서 잇따라 패배한 뒤 위축된 자신감을 되찾고 공세로 돌아섰다. 불의의 사고로 워커 장군이 사망한 뒤 후임으로 부임한 매슈 리지웨이의 ‘위력 수색’을 앞세운 반격이 주효했다.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과 초고속 후퇴

1950년 9월 28일 유엔군 서울 수복
10월 1일 국군 38선 돌파
10월 19일 유엔군 평양 탈환(같은 날 중공군은 압록강 도강 시작)
10월 26일 국군 초산 압록강 도달
↓(전세 역전)
12월 5일 중공군 평양 점령
12월 26일 중공군 38선 돌파
1951년 1월 4일 중공군 서울 점령
1월 10일 유엔군 37도선(평택~삼척) 후퇴

 

<북진과 후퇴 소요 기간 >

유엔군
중공군

  • 38선 → 평양 : 19일
  • 38선 → 압록강 : 26일
  • 압록강 → 38선 : 67일
  • 38선 → 서울 :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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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전시된 ‘3차 전역(공세)’ 지도. 서울 방면으로 주공을 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월 8일 수원 원주까지 진격한 것으로 표시됐다. 단둥=홍진환 기자

 

● ‘서울 후퇴’ 공성전(空城戰)과 원주 전투

1951년 ‘1·4 후퇴’는 다시 수도를 뺏기는 것이었지만 워커 사망 후 부임한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의 공성전략이기도 했다. 중공군은 12월 26일 38선을 돌파한 뒤 주공(主攻) 방향을 서울로 두고 철원 연천 쪽에서 4개군을 앞세워 압박해왔다. 리지웨이는 서울이 포격권에 들어 많은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막으면서 보다 방어가 유리한 곳에서 반격을 하기 위해 서울 남쪽 60km 지점의 오산〜삼척선까지 작전상 후퇴를 했다.

처음 한강 다리를 먼저 끊어 많은 납북자 피해를 낳았던 것과 달리 서울 시민에게는 1950년 12월 하순 피난령이 내려졌다. 후에 북한도 유엔군의 반격으로 밀려 올라갈 때 서울 사수나 방어 의지를 보이지 않고 3월 5일 군대를 철수시켰다. 서울은 공격과 방어 양측 모두 점령하고 있는 것이 이점도 되지만 부담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공군이 서울을 거쳐 남진하는 동안 중동부 전선의 원주가 중공군과 북한군에 의해 한때 점령당했다. 미 10군단 2사단이 원주를 탈환하고 지킨 ‘원주 전투(1월 5~13일)’ 승리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공산군이 37도선 이하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남도현, 283쪽). 군우리 전투에서 한 개 연대 규모가 섬멸되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던 미 2사단으로서는 38선 남쪽에서 설욕하는 전투의 서막이었다. 2월 지평리와 5월 벙커 고지, 9월 단장의 능선전투 등에서 미 2사단은 연승을 기록했다. 무엇보다 원주전투 이후 피아간 접전은 37도선 이하로 내려가지 않았다.

 

 경기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지구 전투전적비. 중공군에게 포위당한 채 혈투를 벌였던 전투 현장의 한가운데에 전적비와 미군과 프랑스군 충혼비가 세워졌다. 양평=구자룡 기자 

 

● 지평리 전투, 전략 전술 리더십의 승리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1월 8일 ‘남진 잠정 중단’ 명령을 내리고 원주 전투에서 제동이 걸린 이후 주춤했던 중공군이 2월 중순 경기 양평군 지평리에서 제39군 예하 3~5개 사단으로 공격해 왔다.

2개 군단이 만나는 이른바 전투지경선(戰鬪地境線)인 이곳에는 미 2사단의 23연대만이 주둔하고 있었다. 병력에서 10배가 넘는 중과부적의 상황. 23연대는 둘레 약 12km의 원형으로 진을 치고 부대 간 빈틈을 없애 방어에 나섰다가 중공군이 점차 포위망을 좁혀오자 방어망 둘레를 6km로 축소했다. 이곳은 사단 본진과 30km가량 떨어져 즉각적인 지원도 어려웠다.

 

경기 양평군 지평리 전투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중공군의 나팔. 양평=구자룡 기자

 

 지평리 전투에 참가한 프랑스 대대는 수동식 사이렌으로 중공군의 나팔 소리에 맞불을 놓아 혼란에 빠뜨린 뒤 돌격해 백병전을 펼쳤다. 지평리 전투기념관에 게시된 수동식 나팔을 돌리는 상황도. 양평 = 구자룡 기자

 

 지평리 전투에서 프랑스 대대가 사용했던 수동식 사이렌

 

 

 전투 70여년이 지난 뒤 찾아간 지평리는 주변이 얕은 산으로 둘러싸여 평온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전쟁 당시에는 원형으로 둘러싼 산 능선을 따라 촘촘히 방어망을 구축한 채 밤만 되면 물밀듯이 파고드는 중공군과 때로는 백병전까지 벌였던 곳이다. 방어진지 중심부쯤에 세워진 기념관에는 중공군이 불었던 나팔 실물과 프랑스 대대가 사용한 수동 사이렌 사진이 전시되어 있어 야간에 벌인 소음 전쟁이 생각나게 했다.

 

 경기 양평군 지평리전투 기념관은 지평리가 을미의병의 발원지이기도 해서 의병과 전투 기념관이 함께 조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양평=구자룡 기자 

 

 

1951년 2월 13일 어둠이 짙게 깔리자 사방에서 횃불을 들고 징과 꽹과리를 치는 중공군이 밀려들었다. 원형진지 안으로 포탄도 쏟아부어 연대 참모가 전사하고 연대장 폴 프리먼은 부상을 입었으나 후송을 거부하고 진지를 지켰다. 이튿날 날이 밝자 미 공군의 공중 폭격으로 공세는 주춤했으나 다시 밤이 되자 사전 정찰에서 철조망이 없었던 남쪽으로 중공군이 돌파를 시도해 산발적으로 백병전이 벌어졌다.

이틀 밤이 지난 뒤 원형 방어 진지 밖에 대한 미 공군의 맹폭 지원 속에 미 제5 기병 연대가 포위망을 뚫었다. 일본에서 발진한 C-119S 수송기 24대는 14일 3시간가량 보급품을 공중 투하했다. 2박 3일간의 전투에서 중공군은 5400여명이 전사한 반면 23연대는 전사 52명, 실종 42명이었다.

 

 지평리 전투가 끝난 뒤 우그러진 철모와 옷가지 등이 널려 있다. 지평리 전투기념관 전시. 양평=구자룡 기자

 

 

● ‘인해전술’ 극복한 반격의 전환점

 랄프 몽클라르 중장. 대대 병력을 지휘하기 위해 스스로 중령으로 계급을 낮춰 참전했다.

 

 

지평리 전투에는 프랑스가 파병한 1개 대대가 참가했다. 대대장은 1차 대전에도 참전했다 전역한 랄프 몽클라르 중장(이는 레지스탕스 활동 당시 가명이고, 본명은 마그랭 베르느네)이다. 대대급 병력 파견으로 대대장을 맡기 위해 스스로 중령으로 계급을 낮췄다. 프랑스 대대는 중공군의 심리전 무기였던 나팔 소리에 대응해 휴대용 수동식 사이렌 소리를 내면서 중공군 나팔 소리를 삼켜버렸다. 병력 운용의 신호로도 사용했던 나팔 소리가 사이렌 소리 때문에 안 들리자 중공군이 우왕좌왕했다. 이때 프랑스 대대 병사들이 화력을 집중해 공격하고 진지를 박차고 나가 육박전을 벌여 성과를 거뒀다. 프랑스 대대에는 카투사 한국인 병사 101명도 포함됐다. (‘1129일간의 전쟁’, 312쪽)

 

 지평리 전투기념관 전시된 105mm 포탄 탄피와 권총, 칼 등 무기와 장비. 양평=구자룡 기자

 

 

중공군 부사령관 훙쉐즈는 지평리 전투에 대해 “제공권이 없어 고전했다. 미군 전투기가 벌떼처럼 달려들어 맹폭을 가하니 밤에만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지원 병력도 물밀듯이 몰려왔다. 미군은 이 전투 후 전술상 하나의 지점을 고수하면서 인근 부대의 지원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작전에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평가했다.(훙쉐즈, 236쪽)

지평리 전투는 유엔군이 다시 반격의 터닝포인트를 이루게 하는 분기점이자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주눅 들지 않고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 전투였다. 중공군이 수적 우세를 앞세워 매복과 기습, 포위 전술로 북부 산악지대에서 유엔군을 몰아내던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서로 확인한 전투였다. 비록 적에게 포위돼도 방어 전면을 좁혀 방어하면서 진지 밖 적에 대해 화력을 퍼부은 것이다.

 

 경기 양평군 지평리 전투 기념관을 찾은 방문객들이 남긴 메시지. ‘전쟁은 반복되어서는 안 됩니다’는 문구가 보인다. 양평=구자룡 기자

 

 지평리 전투가 끝난 뒤 훈장을 받기 위해 서 있는 프랑스대대 부대원들. 지평리 전투기념관 전시. 양평=구자룡 기자 

 

● 사창리 전투, 국군의 공중증(恐中症)과 가평의 영연방 여단

지평리 전투의 타격으로 움츠렸던 중공군이 2개월여간 재정비 끝에 무려 70여만 명의 대부대를 이끌고 5차 대공세를 벌였다.

국군 6사단(사단장 장도영)이 강원도 화천의 화악산과 사창리 일대에서 중공군 4개 사단에 포위된 상황은 지평리의 미 2사단 23연대와 비슷했으나 결과는 천지 차이였다. 험준한 산악지형에서 분산되어 있는 예하 연대가 서로 연결되지 못해 틈을 파고든 중공군에게 분리 포위되어 공격을 받았다. 꽹과리 피리 나팔 소리에 ‘초산의 악몽’이 다시 살아났다. ‘고립 방어’를 통해 화력 지원을 받기보다 포위당하는 두려움에 무질서한 후퇴와 도주에 나섰다. 화력 지원에 나섰던 미 포병대대도 포위 타격을 당했다. 사창리 전투(4월 22〜24일) 사흘간 6사단 1만3천여명 병력 중 가평으로 철수해서 남은 병력은 6300여명에 불과했다. 6·25 전쟁 기간 국군에 줄곧 나타났던 ‘공중증(恐中症·중공군을 두려워하는 심리)’이 그대로 드러났다.

 

 경기도 가평읍에 1967년 세워진 영연방 참전 기념비.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4개국의 국기가 태극기, 유엔기와 함께 게양되어 있다. 가평=구자룡 기자

 

 

사창리에서 장비도 내팽개치고 도망친 국군 6사단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긴급히 투입된 부대가 영연방 제27여단이었다. 27여단은 영국 미들섹스연대 1대대, 호주 왕립연대 3대대, 캐나다 프린세스 페트리샤 경보병 2대대, 뉴질랜드 왕립 제16 포병연대 등 4개국 연합부대였다. 국군 6사단 패잔병들이 무질서하게 내려오는 것을 보면서 북으로 향하던 영연방 여단은 23일 가평에서 중공군 제20군과 만났다.

영연방 여단은 3일 동안의 가평 전투(4월 23〜25일)에서 부대원의 40% 이상이 사상당하는 피해를 입으면서도 경춘가도를 지켰다. 이를 통해 후퇴하는 국군과 유엔군의 퇴로를 확보하고 수도권 방어를 위한 시간을 벌어줬다. 가평 전투는 수적으로 크게 밀리는 상황에서 ‘버티기 승리’를 통해 중공군의 5차 대공세라는 또 하나의 고비를 넘는 데 기여했다.

  

 가평지구 전투기념비. 출처 국가보훈부

 

 경기도 가평의 영연방 참전비 옆에 영국 미들섹스 연대 장병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가평=구자룡 기자 

 

● ‘고립 방어’의 성공 사례 설마리 전투

경기 파주군 적성면 설마리 감악산 일대에서 영국군 제29여단을 중공군 제63군 3개 사단이 포위했다. 지평리나 가평 전투와 마찬가지로 ‘고립 방어’ 의지만 있으면 더 이상 문제 되지 않았다. 방어선을 최대한 줄이고 밤을 버틴 뒤 낮에는 막강한 화력 지원으로 방어선 외곽의 중공군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온창일 등, 210쪽)

  

경기 파주군 적성면의 설마리 전투 기념공원에 영국 글로스터 대대원들 동상이 세워져 있다. 파주=구자룡 기자

 

 

영국 제29여단은 병력에 비해 넓은 정면을 담당한 데다 각 대대 및 중대가 서로 떨어져 상호 지원할 수 없는 약점을 가진 상황에서 1951년 4월 22일 밤 중공군 제63군 3개 사단이 일제히 임진강을 건너와 공격했다. 글로스터 대대원 652명의 10배도 넘는 규모였다. 235 고지로 철수한 좌측 담당의 글로스터 대대는 후방으로 침투한 중공군에 포위 고립됐다. 이 전투에서 탈출한 영국군은 67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59명 전사, 장교 21명을 포함한 526명은 포로가 됐다. 사흘간 피로 버틴 설마리 전투는 중공군의 서울 진입을 결정적으로 지연시켰다.

 

강원도 인제의 오미재 고개 정상에 해발 500m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주변이 모두 깊은 산속이어서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인 것을 느끼게 한다. 인제=구자룡 기자 

 

● 국군과 미군의 관할권 다툼으로 생긴 구멍, 오마치(오미재) 고개

1951년 5월 태백산맥 서쪽 산악지대는 6·25 전쟁이 터진 후 새로 창설된 9사단과 11사단을 중심으로 한 국군 제3군단이 맡았다. 미군 주축의 유엔군이 주로 담당한 서부전선에 비해 열세였다. 조중(朝中) 연합군사령관 펑더화이는 막강한 화력의 미군이 주력인 서부보다 이곳이 약한 곳으로 보고 돌파하기로 했다. 당시 중동부 전선의 국군은 6개 사단인 반면 중공군은 18개 사단을 투입했다.

현리 전투의 참패는 이런 수적 열세 때문만은 아니었다. 발단은 국군과 미군 간 관할권 공백과 다툼이었다. 자연 지형에 대한 고려 없이 관할지역을 구분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인제군 31번 국도의 오마치고개는 미 10군단 관할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마치 고개의 위아래 보급로는 국군 3군단에 속했다. 상체와 하체는 국군이 맡고 허리는 미군에 속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주요 지형지물은 분할하지 않는다’는 전술 교리에 맞지 않았다. 더욱이 이곳은 ‘차단되면 끝이다’고 생각될 만큼 요충지였다.

3군단은 미군 관할 지역에 29연대를 배치했다. 이게 화근이 됐다. 미10군단이 왜 남의 관할 지역에 병력을 배치하느냐며 철수하라고 했다. 결국 29연대를 빼면서 1개 대대만 남겨놓았는데 이번에는 더 상위인 미 8군에서 철수를 요구했다. 4월 11일 오마치에서 대대 병력마저 철수시켰다. 문제는 국군이 병력을 모두 빼낸 뒤 미군이 즉각 배치되지 않은 것이다. 인제 홍천 횡성 정선을 이어주는 교통과 전략의 요충지를 비워둔 것이다
 

 

 강원도 인제 오미재 고개에 세워진 현리지구전투 전적비. 인제=구자룡 기자

 

● 방어, 초기 대응, 후퇴 총체적 실패

중공군 선발대 1개 중대가 17일 오전 7시30분경 오마치 고개를 장악했다. 그들은 30km가량 떨어진 곳에서 출발해 야간 12시간 동안 산악지대를 시간당 평균 2.5km씩 행군했다. 선발대 도착에 이어 곧 제60사단 전체가 밀물처럼 쏟아져 올라왔다.

오마치 고개가 적에게 넘어가자 퇴로가 차단돼 포위당할 것을 우려한 3사단의 김종오 사단장이 진지 사수를 포기하고 철수를 명령한 것이 대 실책이었다. 미군이 우세한 화력과 공군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포위당하는 것이 곧 전멸은 아니었다. 지평리 전투나 바로 옆 벙커고지 전투가 이를 증명했다.

그런데 3사단은 철수를 위해 현리에 집결한 뒤 적이 장악하고 있는 오마치 고개 돌파를 시도했다. 고개를 점령하고 있는 부대 규모를 오판했을 수도 있다.

고개를 장악한 중공군의 공격을 받자 부대원들은 무거운 공용화기는 물론 개인화기까지 버리고 무질서하게 주위 방대산 등을 타고 도주했다. 일부 간부는 계급장도 떼고 철수했다고 한다. 퇴로가 차단됐다는 이유만으로 전투를 포기하고 사단장부터 말단 사병까지 줄행랑을 쳤다. 70km가량 남으로 내려왔을 때 3사단은 34%, 9사단은 40%가량만이 수습됐다.(남도현 324쪽)

 

 강원도 인제의 현리전투 위령비. 3군단은 ‘전투에서 희생된 선배 장병들의 시신을 화장했던 곳에 위령비를 세운다’며 ‘부끄러웠던 현리전투를 숨기려 하기보다 와신상담의 계기로 삼겠다’는 다짐을 담은 위령비 건립 취지문을 새겨놓았다. 인제=구자룡 기자

 

 

유재흥 당시 3군단장은 “솔직히 하룻밤 사이에 아군 전선을 뚫고 산악지대를 30km나 주파하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관할권이 겹쳐 오마치에서 부대를 철수하더라도 고개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소규모라도 부대를 배치하지 않은 것이 천려일실이었다고 했다. 부대가 후퇴하면서 전혀 보조를 맞추지 못해 미 10군단과의 사이에 30km에 달하는 틈이 발생했다. 적은 무인지경인 상태에서 침투할 수 있었다. 현리전투 인근 희생된 많은 장병을 화장한 곳에 ‘위령비’가 세워졌다. (유재흥, 270쪽)

현리전투(5월 16〜22일) 패배로 3군단은 해체되고 유재흥 군단장은 보직을 잃었다. 그는 개전 초기 가장 먼저 붕괴된 전방의 7사단장으로 7사단이 해체됐다. 이어 1·4 후퇴 후 그가 군단장이던 2군단도 대전에서 해체된 바 있다.

 

 경기 양평군의 ‘용문산지구 전적비’. 누워있는 동상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굳건히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와 영령들의 안식처임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양평=구자룡 기자 

 

● '벙커고지와 용문산의 설욕

군우리 전투 참패 후 지평리 전투에서 되갚았던 미 2사단은 중공군의 6차 대공세(5월 16일~20일)에서도 선전했다. 벙커고지 전투(5월 17∼19일)에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고지를 사수해 중공군의 홍천 진격을 막았다. 지평리 전투의 주역이 23연대였다면 벙커고지 전투는 38연대였다. 국군 3군단이 현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있던 때 38연대도 홍천 북방 778고지 일대에서 포위됐다. 38연대는 적과 근접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전 병력이 참호를 깊이 파고 벙커에 엄폐한 뒤 피아가 섞인 진지 내에 포화를 퍼붓도록 하는 위험한 작전을 벌이면서까지 진지를 지켰다.

용문산 전투(5월 18~20일)도 현리, 벙커고지 전투와 같은 시기에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전투 중 하나였다. 국군이 사창리와 현리 전투에서 잇따라 패퇴해 국군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상황에서 이를 만회한 쾌거였다. 당시 사단장은 사창리 패전 때와 같은 28세 약관의 장도영 소장으로 그의 설욕전이기도 했다. 6사단 2연대 장병들은 철모에 ‘결사(決死)’를 새기고 전투에 임했다.

 

 파로호 전적비

 

용문산 일대에서 쫓긴 중공군은 화천호까지 밀려가 배수의 진을 치고 저항하다 저수지에 뛰어들거나 아군의 포화에 목숨을 잃었다. 사살된 적군이 1만7100여명, 살아서 돌아간 병사는 1000여명에 불과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화천호에 오랑캐를 섬멸한 곳이란 뜻으로 파로호(破虜湖)라는 전적비를 세웠다.

 

중공군의 ‘지하 만리장성’ 땅굴

따발총을 든 중공군이 땅굴에서 나오고 있다.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 전시. 단둥=홍진환 기자

 

 

중공군의 땅굴은 미군의 전투기 공습을 견디며 지구전을 벌이기 위해서 등장했다. 중공군은 1951년 가을 산기슭에 소규모로 팠던 땅굴을 서로 이어 붙이면서 말발굽 모양의 땅굴로 발전했다. 그해 10월 중공군사령부 차원에서 전군에 땅굴 공사를 지시했다. 땅굴은 단순히 상대의 화력으로부터 지키는 방어 목적뿐 아니라 기습공격에도 활용될 수 있도록 했다. 사령부는 땅굴 공사의 규격 기준을 만들어 전군에 내려보냈다. 7가지 방어는 기본적인 조건이었다. 즉 공습(防空) 포격(防砲) 독가스(防毒) 비(防雨) 습기(防濕) 불(防火) 추위(防寒)다. 땅굴 파기 지침이 내려간 뒤 전선에는 땅굴 파기 열풍이 불어닥쳤다.

 

\▲중공군 땅굴 속의 작전 회의실. ‘영웅적이고 용감하게 적을 죽이자’는 섬뜩한 문구가 안에 걸려 있다.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땅굴을 재현해 놓았다. 단둥=홍진환 기자

 

 

중공군 제12군은 8개월간 40여곳에 대장간을 만들어 1만6천여 점 땅굴 도구를 만들었다. 땅굴 파기 확대로 수요가 늘면서 후방 랴오닝(遼寧)성 선양(沈陽)에 ‘기재처’를 만들어 땅굴 파기 기자재의 구입 생산 분배를 맡겼다. 평양 삼등 양덕에도 땅굴 기재 공급기지를 세웠다.

1952년 5월 말까지 제1선 방어진지 땅굴 공사가 기본적으로 완성됐다. 8월 말에는 동, 서해안에서도 집중적으로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6개 군단이 땅굴 약 2백km, 참호와 교통호 약 6백50km, 각종 화기엄폐물 1만여 개를 건설했다.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250km 길이의 모든 전선에 구축된 폭 20~30km의 방어선에 땅굴을 핵심으로 한 거점식 진지 방어체계를 구축했다. 난공불락의 ‘지하 만리장성’을 형성했다.(훙쉐즈, 390쪽).

중국이 한국 전쟁 참전 후 가장 큰 승리로 꼽는 상감령 전투도 바로 이 ‘지하 만리장성’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중공군이 총길이 250km의 전선에 구축한 갱도 길이는 287km에 달했다고 한다.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재현해 놓은 땅굴 속 도서관. 단둥=홍진환 기자

 

 

‘지하 창고형 땅굴’은 물자 보존 창구 역할도 했다. 1952년 5~6월 중공군 후근사령부는 차량 1200대 분량의 물자를 저장할 창고를 구축했다.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은 1952년 8월 “어떤 사단도 3개월의 식량을 보관할 지하창고가 있었으며, 강당도 있어 생활은 대단히 좋았다”면서 “2층으로 굴을 파면 상대가 공격해올 경우 우린 지하 2층으로 들어간다. 상대가 위층을 점령해도 아래층은 우리에게 속해있다”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단점도 적지 않았다. 땅굴 생활을 하려다 보니 콩기름이든 등유든 기름이 많이 소모됐다. 병사들은 산소가 부족해 기관지염에 걸리고 식수가 부족해 혀가 갈라지는 일도 잦았다고 한다.

 

[15회] “영천이 무너지면, 인천상륙도 없다” 철수만 3차례 고민한 미군

경북 ‘영천전투 호국기념관’. 낙동강 방어선 최후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영천 대첩’의 의미와 경과 등을 상세히 소개했다. 기념관 외부에는 전투 체험시설도 마련됐다. 영천 = 구자룡 기자

 

영천전투 호국기념관의 ‘영천의 위기’ 안내문. 왼쪽에 태평양의 사모아섬이 표시되어 있다. 전투에서 패배하면 한국 정부가 이곳으로 옮길 수 있다는 설명이 붙어있다. 영천 = 구자룡 기자 

 

경북 영천의 ‘영천전투 호국기념관’ 2층 전시실.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영천의 위기’를 설명하면서 태평양의 미국령 사모아섬 위치를 커다란 세계 지도 위에 표기해 놓은 것이다.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져 부산까지 함락되면 한국군과 정부 인사 및 민간인 62만 명가량을 이곳으로 이주시키는 ‘신한국 창설 계획’을 미 합참이 영천 전투(9월 5〜13일) 전에 세웠다는 설명이 붙어있다. ‘사모아 프로젝트’는 아군이 영천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비밀 계획으로만 그치고 실행되지 않았다. 영천 전투 이틀 후 인천상륙작전도 취소되지 않고 계획대로 실행될 수 있었다.

6·25 전쟁 개전 이후 낙동강까지 밀렸다가 압록강까지 치고 올라가고 다시 중공군이 38선을 넘어 밀고 내려온 뒤 ‘고지전’ 국면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약 1년 동안 미군은 최소 3차례 한반도에서 철수할 계획을 세웠다.

 

영천 전투 호국기념관’ 앞의 ‘호국의 불꽃’ 조형물. 영천 = 구자룡 기자 

 

● “영천 무너지면, 인천상륙도 포기한다”

1950년 9월 8일. 낙동강 방어선 ‘최후의 결전’이라고도 불리는 영천 전투가 한창인 때였다. 대구 육군본부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사무실로 워커 미 8군 사령관이 찾아왔다.

“한국군 중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2개 사단과 각계각층의 민간인 10만 명을 극비리에 선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맥아더 장군의 극비 지시 사항이라며 영천을 적에게 넘겨주는 경우를 상정한 것으로 이승만 대통령에게도 보고하지 말라고 했다. 철수 장소는 ‘아메리칸 군도’라고만 했다.


정 총장이 크로마이트 작전(인천상륙작전 작전명)도 세워져 있는데 영천이 떨어지면 이 작전도 취소되는 것이냐고 물었다. 워커는 “불가피한 일이죠”라고 대답했다. 당시 낙동강 전투 상황에 따라 인천상륙작전도 취소하고 미군은 철수할 계획까지 세웠던 것이다.(정일권, 85〜86쪽)

 

 월튼 해리스 워커 미 8군 사령관. 낙동강 최후 방어선 ‘워커 라인’을 지켜내 6·25 전쟁에서 반격의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50년 12월 23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전사했다.

 

 

정 총장은 사안의 중대성에 비춰 이튿날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은 “가려면 가라고 하시오. 영천이 무너져 적군이 부산에 오면 내가 먼저 싸울 것이요”라고 반발했다. 9월 4일부터 13일까지 영천 전투에서 두 번 뺏기고 두 번 빼앗는 전투 끝에 아군은 영천을 지켜냈다. 물론 미군 철수는 이뤄지지 않았다. 워커는 “우리끼리 했던 얘기로 없던 걸로 합시다”고 말했다. 육군군사연구소는 “신한국 계획은 미국이 6·25 전쟁을 포기하겠다는 결심을 나타낸 것”이라고 했다.(‘1129일간의 전쟁’, 116쪽)

 

 영천전투 호국기념관 외부에 조성된 ‘염원의 마당’. 이름없는 참전용사들을 추모하며 경례하는 병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묘명용사의 묘비에는 반지, 안경 혹은 신발 한 짝 유품만이 새겨져 있어 전사자 시신도 찾지 못한 안타까움을 더한다. 영천 = 구자룡 기자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져 대구가 함락될 경우에 대비해 미군이 설정해 놓고 있던 ‘밀양 방어선’도 한반도 엑시트 전략의 중간 단계 격이었다. 밀양은 대구와 부산의 중간 길목.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을 뚫고 대구를 점령하면 철수를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밀양 방어선은 그런 시간을 벌기 위해 미군이 마지막으로 북한군을 잠시 묶어두기 위해 설정한 ‘철수용 방어선’이었다. 상부 지시로 방어선을 설계한 미 8군 공병참모 이름을 따서 ‘데이비드슨 라인’이라고 불렸다. 이 방어선에서 북한군을 저지하고 있는 동안 대한민국의 임시 정부는 제주도로, 한반도에 전개했던 미군은 일본 등으로 철수시킨다는 계획이었다.(백선엽 2권, 234쪽)

 

 영천전투 호국기념관 옆에 건립된 영천 대첩비. 국군 8사단 이성가 사단장 지휘하에 영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인천상륙작전을 가능케 하고 북진 반격의 첫발을 내딛게 했다는 설명이 붙어있다. 영천 = 구자룡 기자 

 

 

프란체스카 여사의 일기를 보면 1950년 8월 초 낙동강 방어선이 구축된 후 전선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면서 미군 철수 우려가 나오고 있었다.

“미국은 그들의 군사전략이나 국익의 득실, 또는 트루먼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정치가들의 정략이라는 저울대 위에 남한 땅을 올려놓고 있다. 남한 땅을 포기하는 것이 자국의 복합적인 이익에 부합된다는 쪽으로 저울 바늘이 기울 때, 그들은 냉큼 부산까지 내려가 훌쩍 떠날 수도 있다.”(8월 1일 자)

8월 9일 이승만은 전시내각을 소집했는데 최악의 경우 정부는 제주도로 옮겨야겠지만 자신은 대구를 사수하겠다고 했다. 8월 14일에도 무초 주한 미 대사가 대구가 적의 공격권에 들어간 뒤 정부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건의하자 이승만이 발끈했다.

무초 대사는 “남한 전체가 점령되면 망명정부를 (세워 대한민국을) 지속시켜 나가자”고 말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허리에 차고 있던 모젤 권총을 꺼내 위아래로 흔들며 “이 총으로 공산당이 내 앞까지 왔을 때 내 처를 쏘고, 적을 죽이고, 나머지 한 알로 나를 쏠 것이요”라고 말했다.

8월 16일 밀양에 있던 영국군 장교는 “낙동강 전역에 걸쳐 사단급 병력의 적이 밀려오고 있다. 오늘 밤에는 더 많은 적이 도하할 것으로 예상된다. 만약 밀양을 상실한다면 우리는 한국에서 철수해야 할 것이다”는 전문을 보냈다.(페렌바크, 221쪽)

 

 경기 양평군 지평리 전투기념관에 전시된 리지웨이 사령관 사진. 양평 = 구자룡 기자

 

● “중공군 강압에 의한 철군”

두 번째 미군 철수 위기는 중공군이 참전해 유엔군이 북한에서 후퇴한 뒤 어디까지 밀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일 때였다. 중공군이 38선을 넘어 내려오기 4일 전인 12월 22일 미 합동참모본부는 “중공군이 전략을 보강해 유엔군을 한국에서 축출하려는 의도가 명확하다면 유엔군 철수 결정을 정부 차원에서 빨리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합참은 이를 ‘강압에 의한 철군 결정’이라고 규정하고 트루먼의 재가를 받아 맥아더에 전달했다. 표현만 달리했지 ‘중공군 강압으로 철군한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미 2사단이 평양 북쪽 군우리에서 한 개 연대 이상이 괴멸되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는 등 서부전선에서 미 8군이 밀물처럼 올라갔다가 썰물처럼 후퇴한 뒤였다. ‘성공적인 후퇴’라고는 하지만 동부전선의 제10군단과 국군 1군단은 퇴로가 봉쇄돼 흥남에서 해상탈출을 하고 있던 때였다. 흥남항구에서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마지막으로 항구를 떠난 것이 12월 24일이었다. 2차례 공세를 펼친 중공군이 언제 다시 공격해올지 몰라 ‘중공군 포비아’가 커지던 때였다.

 

 

● 맥아더 ‘대중(對中) 강공’ 제안

맥아더는 ‘강압에 의한 철군 결정’이라는 워싱턴의 패퇴 전략에 대해 ‘4개항 대중 강경 방안’으로 응수했다. 맥아더는 △중국 해안 봉쇄 △중국 내륙 공업시설을 해공군 폭격으로 파괴해 전쟁 수행 능력 해체 △대만 국민당 군대의 유엔군 지원 △대만군에게 중국 본토 견제공격 허용 등이다. 맥아더는 전략적 차원에서 유럽 안보에 우선을 두는 것은 이해하지만 아시아에서 패배하면 결국 유럽의 패배로 이어질 것이라며 극동에 대한 우선적 지원을 강조했다.

합참은 도쿄에서 맥아더와 만나 ‘인력과 물자의 심대한 손실을 피하기 위해 불가피한 경우 일본으로 철수하라’는 지침을 재확인했다. 합참은 중국 본토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 조치로 인해 일본이나 서유럽이 대규모 적대행위에 말려드는 것은 미국의 국가이익에 결코 이롭지 못하다는 트루먼의 경고도 전달했다. 다만 유엔군이 한국으로부터 철수하는 것은 군사적 필요에 의해 불가피한 것이어야 한다고 전제하면서도 최악의 경우 한국의 망명정부를 제주도 등으로 옮기기로 했다.(김철수, 211쪽)

워싱턴의 수세적인 방침과 달리 맥아더는 중국 폭격 등 확전론을 폈다. 워싱턴이 소련까지 개입할 수 있다며 우려를 제기한 것에 대해서는 “소련이 세계 전쟁도 불사할지는 동서 양 진영의 전투력과 능력을 소련이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달려있다”라며 “감히 그런 경솔한 짓은 하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했다.(맥아더, 240쪽) 소련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해도 군사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했다. 소련의 보급로는 시베리아 철도 하나뿐인데 공중에서 얼마든지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맥아더, “소련 참전하면 미 8군 일본으로 철수”

12월 23일 교통사고로 워커 8군 사령관이 사망했다. 맥아더가 26일 워커 후임으로 부임한 리지웨이를 도쿄에서 처음 만났을 때 리지웨이는 소련군이 참전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다. 맥아더는 “그런 일이 발생하면 몇 개월이 걸려서라도 8군을 일본으로 철수시킬 것”이라고 대답했다. 소련 참전 가능성은 낮게 보지만 소련이 참전하면 3차 대전으로의 확전은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리지웨이는 자신이 부임했을 때 ‘철수’가 현안이어서 이승만 대통령과 처음 만났을 때도 해명해야 했다. 그는 “고령의 전사에게 내가 미 8군을 일본으로 철수시키기 위해 오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일이 가장 첫 번째 과제였다”고 했다. 그래서 이승만을 만나 건넨 인사말이 “여기에 머물기 위해 왔습니다”였다고 소개했다.(리지웨이, 141쪽)>

리지웨이는 부임 후 중공군 기세에 눌리지 않고 ‘위력 수색’을 벌이며 반격 작전을 폈다. 당시에 널리 퍼진 한반도에서의 철수까지 고려하는 패배적인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것이었다.

 

 1·4 후퇴 피란민 행렬. 개전 직후와는 달리 사전에 피란을 예고해 서울에서 납북 피해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 “12월 초에 이미 철수 피난 준비”

프란체스카 여사의 12월 일기에도 철수에 대한 우려가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오후에 챔프니 대령이 극비명령서를 받았다며 대통령 뵙기를 원했다. 미 8군사령부로부터 교사, 기술자, 의사 등 저명한 민간인과 가족의 명단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8군은 이미 8천5백 명의 가족을 선박으로 제주도에 피난시킬 준비를 갖추었다는 것이다.”(12월 13일)

트루먼 대통령은 당시 군과 국무부가 한국 철수에 대해 약간 견해를 달리했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전황이 나빠지면 일본으로 미군을 빼는 것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군 수뇌들은 일본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미군이 한국으로부터 명예롭게 철수하는 길을 고려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반면 국무부는 ‘강제로 물러나지 않는 한’ 한국으로부터 후퇴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트루먼, 408쪽). 군이나 국무부 모두 한반도에서 철수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는 점에는 차이가 없었다.

 

 

● “금강 넘으면 100만 명 철수”

많은 6·25 전쟁 연구자들이 전쟁 중 한국이 가장 위험했던 순간, 즉 미군이 철수해 전쟁을 포기할 수도 있었던 때로 보는 것은 1·4 후퇴 이후다. 더 정확히는 1월 중순 중공군이 북위 37도선, 평택∼원주∼삼척까지 내려왔을 즈음이다.

미 정부의 1월 12일 ‘유엔군의 전쟁지도 지침’에는 ‘100만 명 제주도 철수 이동 계획’이 포함됐다. 유엔군은 일본으로 철수하고 한국 정부와 군경을 제주도로 이전시켜 저항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장면 주미대사가 유엔군 철수 검토를 항의하자, 러스크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는 “미국은 군사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경우가 아닌 한 철군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최악의 경우 한국 망명정부 수립 가능성에 대해 의견을 알고 싶다”고 했다.

미국 정부가 극비리에 추진한 이 계획에 따르면 “대한민국이 법적 정통성을 유지하고 전쟁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한국의 정부 관리 이외에도 군과 경찰을 제주도로 이전한다”고 되어 있다. 대략적인 인원은 행정부 관리와 그 가족 3만 6천명, 한국 육군 26만 명, 경찰 6만 명, 공무원, 군인 및 경찰 가족 40만 명 등 100만 명 가량이다.(김철수, 212쪽)

제주도가 용이하지 않으면 한국군을 일본으로 후송시키는 것은 한일 간 민족 문제로 비화될 수 있어 일본 본토가 아닌 오키나와 기지에 주둔시키는 방안을 검토했다. 무초 대사도 제주도 지역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줄 것을 요청했다.(이상호, 321쪽)

이 계획은 한국군의 사기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극비로 하되 유엔군 방어선이 금강선까지 내려가지 않으면 구체화하지 않기로 했다. 당시 전선에서 금강까지는 50km가량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중공군은 펑더화이(彭德懷)가 1월 8일 남진 전면 중단을 선언한 뒤 속도 조절을 했다. 리지웨이의 ‘위력 수색’을 앞세운 반격도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극복해 가고 있었다. 다행히 전선은 더 이상 내려가지 않아 철수 계획도 이행되지 않았다.

 

 

 ● 트루먼과 맥아더의 ‘철수’ 공방

전쟁 중 주요 현안을 두고 이견을 보이거나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기도 했던 트루먼과 맥아더는 미군 철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트루먼은 “부산교두보로 물러설 때까지 점차 전선을 축소하고 그다음에는 철수하는 것뿐이다는 것이 맥아더의 견해”라고 했다.(트루먼, 409쪽)

트루먼은 맥아더가 ‘유엔군이 오랜 싸움으로 지치고, 부당한 비판에 분격해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다면서 반대이유가 없으면 전술적으로 가능한 최대한의 속도로 한반도에서 철수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고 했다.(트루먼, 409쪽). 하지만 맥아더가 1월 10일 최대한 신속히 한반도로부터 철수하자고 제안한 것은 자신의 ‘4개항 대중 강경 방안’이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에 따른 것이었다. 대규모 중공군 개입에 대해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한국에서 철수하고 자신의 원래 기본적 임무인 일본 방위에 전념하겠다는 것이다.(이상호, 322쪽)

미 합참이 “중공군에 금강까지 밀리면 일본으로 철수하는 명령을 내릴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철수 실행 여부는 자신에 맡긴 것을 두고 맥아더는 강하게 반발했다. 맥아더는 합참의 메시지는 전쟁에서 이기겠다는 의사는 없는 패배주의라고 비판했다. 워싱턴의 구상은 반격이 아니라 무난하게 도망하는 것, 대만의 병력을 동원해서라도 전세를 만회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쟁 회피를 택하려는 것이라고 했다.(맥아더, 245쪽)

 

 

 ● 극약을 지니고 있던 대통령 부부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는 중공군 참전 이후 밀리는 상황에서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총과 극약’을 소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대통령과 나는 죽고 사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있으면서도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대통령의 권총과 함께, 보다 확실한 천국행 티킷을 각자 하나씩 지니고 있었다. 고통이 적은 방법으로 원할 때 죽을 수 있는 무엇(극약)을 몸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 무자비한 대량의 적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는 어떤 위안이 되었는지도 모른다.”(프란체스카 일기, 1951년 1월 1일)

 

참고 문헌

김철수 지음, 『그 때는 전쟁, 지금은 휴전 6·25』, 플래닛 미디어, 2017.
더글러스 맥아더 지음, 『맥아더 회고록』, 1, 2권, 일신서적, 1993.
매슈 B. 리지웨이 지음, 박권영 옮김,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플래닛미디어, 2023.
백선엽 지음, 유광종 정리, 『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 2권, 2020.
시어도어 리드 페렌바크 지음, 최필영 윤상용 옮김, 『이런 전쟁』, 플래닛미디어, 2019.
이상호 지음, 『맥아더와 한국전쟁』, 푸른역사, 2012.
이승만 구술, 프란체스카 지음, 조혜자 옮김.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기파랑, 2010.
정일권 지음, 『전쟁과 휴전- 6·25 비록 정일권 회고록』, 동아일보사, 1986.
해리 S. 트루먼 지음, 손세일 옮김, 『시련과 희망의 세월-트루먼 회고록』 하, 1968.
『1129일간의 전쟁 6·25』,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 2014.

 

[16회] 군번 계급없는 영웅! 학도의용병

경북 영덕 장사해수욕장 앞바다에 있는 ‘선박 전승기념관’ 문산호. 영덕 = 구자룡 기자 

 

포항에서 7번 국도를 따라 20여km를 올라가면 영덕군 남정면 장사해수욕장 앞바다에 커다란 배 한 척이 정박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대형 태극기가 갑판에 걸려있고 배의 옆면에 ‘작전명 174호…잊혀진 영웅들!’이란 커다란 구호와 함께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이 흰색으로 쓰여있다. 인천상륙작전 전날 양동작전을 위해 장사상륙작전에 동원됐다 좌초했던 ‘LST 문산호’다. 1997년 3월 6일 해안을 수색하던 해병대 1사단 대원들이 바닷속 갯벌에서 발견했다.

 

경북 영덕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의 학생 모자 조형물. 영덕 = 구자룡 기 

 

문산호에 오르기 전 해변에 조성된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에는 ‘장사상륙작전 전몰용사 위령비’, 상륙작전 하는 병사들 조형물 등이 있다. 공원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커다란 고등학생 모자 조형물. 모자 앞에 ‘高’자가 선명하다. 상륙작전에 참여한 부대원 대부분이 학생들이었음을 상징한다.

 

경북 영덕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에 조성된 상륙작전을 펴는 학도의용병 동상. 뒤로 문산호가 보인다. 영덕 = 구자룡 기자

 

● 학도병으로 구성된 ‘독립 제1 유격 대대’, ‘명부대’

낙동강 방어선 전투가 한창이던 1950년 8월 27일 대구와 밀양에서 모집한 772명으로 육군본부 직할의 ‘독립 제1 유격 대대’가 편성됐는데 대부분 학생들이었다. ‘독립 제1 유격 대대’는 이명흠 대위가 직접 대구역 광장 등에서 모병해 ‘명부대’란 별명이 생겼다. 명부대에 내려진 ‘174호 작전’ 명령은 ‘장사해안에 상륙해 김무정 중장 휘하 북한군 제2군단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아울러 적의 후방을 교란하라’는 것이었다.

  

 경북 영덕 장사해수욕장 앞바다에 있는 전승기념관 문산호의 입구. 영덕 = 구자룡 기자

 

 

문산호 기념관 내부에는 학도병으로 참가하게 된 다양한 증언들이 소개됐다. 나라 없는 학교가 무슨 소용인가, 의무감과 사명감으로 왔다. 자원입대하려고 모병소에 갔더니 나이가 어려 학교장 추천서를 받아오라고 해서 추천서를 받아서 왔다 등 자원입대 진술이 있다. 반면 밀양교를 건너 부산으로 가고 있는데 군인이 오라 하더니 다른 군인에게 인계했다. ‘아저씨 저 17살이에요’ 했지만 ‘잔소리 말고 따라와’ 해서 교복을 입은 채로 미군 트럭에 실려 창녕군의 낙동강으로 갔다는 사연도 있다. 당시 모병 상황을 가감 없이 보여주어 긴박함과 함께 안타까움이 더했다.

 

장사전승기념관에 전시된 장사 해변에 좌초되어 있는 상륙정 문산호의 실제 사진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학도병은 밧줄을 이용해 상륙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어 많은 희생이 따랐다. 장사전승기념관에 당시 상황을 재현해 놓았다. 영덕 = 구자룡 기자 

 

● 태풍 좌초에도 ‘밧줄’ 상륙과 작전 수행

‘174호 작전’은 적을 속이기 위해 대대급임에도 불구하고 ‘사단’으로 위장했다. 중대를 연대로 부르고, 지휘관들도 그에 맞는 임시 계급을 부여했다. 북한 방송이 ‘2개 연대가 상륙했다’고 한 것은 이런 기만책이 효과를 본 것이었다. 부대는 출항하기 전 명부대원과 미군이 번갈아가며 승선과 하선을 수차례 반복해 마치 미군도 상륙작전에 참여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나무위키’)

‘명부대’ 대원 772명을 실은 문산호가 하루 전 부산항을 출발한 뒤 9월 15일 오후 2시경 장사해안에 도착했을 때 한반도로 접근하던 태풍 케지아는 동해로 올라오고 있었다. 태풍으로 출항 및 해안 도착이 계획보다 하루 늦어졌다. 서해에서 인천상륙을 준비하던 맥아더는 태풍이 동해로 비껴가 한숨을 돌렸으나 명작전 주함이었던 2700t급 문산호는 좌초됐다.

 

태풍으로 상륙지점을 찾지 못해 표류하던 문산호가 상륙지점 해안에서 300m 떨어진 해역에서 좌초되자 특공대는 문산호와 해안에 밧줄을 연결해 상륙을 시도했다. ‘밧줄 상륙’ 과정에서 학도병들은 적의 총격에 일개 중대가 거의 몰살됐다고 한다.(최상진, 60쪽) ‘72시간 임무 수행 후 전원 철수’라는 상륙작전은 문산호 좌초와 함께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장사전승기념관에는 경북 영덕에 상륙한 대원들이 외부와 연락이 단절된 채 고군분투하는 장면을 재연해 놓았다. 영덕 = 구자룡 기자

 

 

그럼에도 적의 포화 속에 물로 뛰어들어 상륙한 대원들은 해안의 200고지를 점령하고 5일간 북한군의 후방을 교란하며 전투를 벌이다 구조선 LST 조치원호로 귀환했다. 철수할 때도 해안에서 200m가량 떨어진 해상에 조치원호가 정박해 ‘밧줄 철수’를 했다. 양측이 전투를 벌이면서 긴박하게 철수하면서 39명의 대원은 미처 승선하지 못했다. 이들은 최후의 1인까지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포항전투사’, 31쪽)

이명흠 대위를 포함해 ‘명작전’에 참가한 누구도 이 작전이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연막작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당초 사흘에서 1주일로 길어진 작전을 마치고 돌아온 부산 부두에서 신문 호외를 보고 자신들이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양동작전에 동원됐음을 알게 됐다.(‘학도의용군 연구’, 163쪽)


장사상륙작전 일지
출처 :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 8월 27일 ‘독립 제1 유격 대대’ 편성(772명)
  • 9월 12일 ‘작전 명령 174호’ 전달
  • 9월 14일 LST 문산호 승선, 부산항 출발
  • 9월 15일 장사 앞바다 도착, 태풍으로 좌초
  • 9월 15일 ‘밧줄’ 상륙, 200고지 점령
  • 9월 16〜8일 북한군과 교전. 적 2군단 후방 보급로 차단 작전
  • 9월 19일 구조선 LST 조치원호로 ‘밧줄’ 귀환
  • 아군 피해 : 139명 전사, 92명 부상, 39명 미승선 포로
  • 북한군 피해 : 270명 사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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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포항 현 포항여고 앞의 ‘학도의용군 전적비’ 포항 = 구자룡 기자

 

● ‘옥쇄한 학도의용군’

현 포항여고 앞에는 ‘학도의용군 6·25 전적비’가 있다. 전사자는 48명인데 전적비 뒷벽에 새겨진 전사자 이름은 14명이다. 전투가 끝난 뒤 보름가량이 지나서야 시신을 수습할 수 있게 돼 상당수는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50년 8월 11일 학도의용군 71명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던 국군 3사단 지휘소로 사용되던 포항여중(현 포항여고)에서 적에게 포위된 채 전투를 벌였다. 나이는 16〜21세로 서울 등 전국 각지에서 피란 왔다 참가한 고등학생과 일부 대학생들이었다. 북한군 5사단과 766 유격부대는 이날 새벽 3시 반부터 4차례에 걸쳐 파상적인 공격을 해왔다. 학도병들은 M1 소총과 각자 250여발의 실탄, 수류탄이 가진 무기의 전부였으나 북한군은 장갑차까지 동원됐다. 실탄이 떨어진 뒤에는 육박전까지 벌이는 혈투로 11시간 반을 버티다 48명이 전사하고 13명은 포로가 됐다. 부상자 6명은 초반에 후송되고 4명은 행방불명이었다.

이들이 피로 버티며 적의 진격을 지연시켜 많은 시민들이 피난 갈 수 있었고 사단 지휘소의 주요 서류와 물자도 후방으로 운반할 수 있었다.(‘1129일간의 전쟁 6·25’, 602〜7쪽)

 

 이우근 학생의 편지. 포항 = 구자룡 기자

 

 

전적비 옆에는 이곳 전투에서 전사한 서울 동성중 3학년 이우근 학생이 ‘결전’ 하루 전날 메모지에 쓴 피 묻은 편지가 소개되어 있다. 편지는 시신을 수습할 때 주머니에서 발견됐다.

‘지금 옆에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엎드려 있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인데 적병은 너무 많습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아니 안녕이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는 다시 편지를 쓰지 못했다.

 

 낙동강 방어선의 동쪽 끝인 형산강 강가에 최후의 방어선 ‘워커 라인’ 표지적이 세워져 있다. 포항 = 구자룡 기자

  

 학도의용군의 활약을 기리는 기념탑은 여러 곳에 있지만 전승기념관은 포항이 유일하다. 포항 = 구자룡 기자 

 

● 최후의 방어선(워커 라인)이자 학도병 성지, 포항

포항 형산강은 6·25 전쟁 최후의 방어선으로 ‘워커 라인’ 표지석까지 세워져 있다. 특히 학도병의 활동이 활발해 국내에는 유일하게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이 있다.

포항여고 앞의 ‘학도의용군 6·25 전적비’를 출발해 포항시 충혼탑〜전몰학도 충혼탑〜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전몰학도 기계 안강지구 전투전적비〜기계 안강지구 전투격전지 조망대로 이어지는 ‘호국 문화의 길’은 학도병의 전투를 기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 건물 앞의 학도병과 어머니 동상. 포항 = 구자룡 기자

 

 

전승기념관 앞 돌 비석에 새겨넣은 학도의용병 사진은 교과서에서도 봤던 널리 알려진 사진. 그런데 그 앞에 한 어머니가 두 손을 뻗어 마치 죽은 아들을 부르듯 안타깝게 무릎을 꿇고 있는 조각이 설치됐다. 병사나 학도병, 소년병 할 것 없이 생떼같이 귀한 자녀를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른 전쟁터에 보내는 안타까운 모정(母情)을 보여준다.

 

 낙동강 방어선의 포항 형산강 전투 등을 기념하는 경북 포항의 포항지구전적비. 포항 = 구자룡 기자 

 

● 개전 4일 만에 나선 학도병

‘학도병은 1950년 6월 29일 이후 ‘학도의용군(재일동포 학도의용군 포함)’으로 육·해·공군 또는 유엔군에 배속돼 1951년 2월 28일 해산할 때까지 근무한 자로서, 전투에 참가하고 그 증명이 있는 자를 말한다. 전상(戰傷)으로 중간에 나온 자도 포함한다.’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에 전시된 학도의용군 신분증.

 

 

학도병은 6월 29일 수원에서 자발적으로 조직한 ‘구국 비상학도대’가 시작이다. 6월 28일 한강 인도교가 폭파된 상황에서도 결사적으로 한강을 도하해 수원에 모인 학생 2백여명이 국방부 정훈국의 후원으로 ‘비상학도대’를 발족했다. 그 후 다양한 학도병 조직이 나타났는데 정훈군은 신분증도 발급했다. 다른 학도병 단체의 모체가 된 수원 비상학도대는 한강 방어선의 노량진 전투에 투입돼 상당수가 희생됐다.

‘의용군’이라는 용어는 북한 인민군이 남침 후 양민을 동원하면서 사용해 용어의 혼란을 피해 ‘학도의용병’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학도병은 학생으로 군번을 부여받지 않은 사람만 해당된다. 군번이 있으면 정규군으로 신분이 바뀐다. 자발적으로 지원한 학생 중 군번을 받지 않았으면 복귀령 이후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으나 군번을 받은 경우 현역으로 복무해야 했다.

 

 경북 포항 형산강 도하작전의 호국 영웅 연제근 상사 특공결사대상. 낙동강 최후의 방어선의 한 축인 형산강에서 1950년 8월 11일부터 9월 22일까지의 형산강 전투에서 형산강을 지켜내는데 특공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포항 = 구자룡 기자 

 

● 다양한 전투에 투입된 학도병

낙동강 방어선 전투 당시 다부동 기계·안강, 영천, 포항 등에 총 30여만명이 참가했다. 그중 5만여 명은 직접 전투에 참가하고 그 외 인원은 후방 선무, 공작 활동 등을 맡았다. 7천여명이 군번도 계급도 없이 싸우다 전사했다. (‘1129일간의 전쟁 6·25’, 597쪽)

6·25 전쟁은 개전 초부터 많은 전사자가 발생해 병력 보충이 시급한 과제였다. 따라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낙동강 방어선뿐 아니라 다양한 전투에서 소년병과 함께 긴급 투입됐다.

인천상륙작전에서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된 국군 해병 1연대에도 제주도에서 급히 모집해 배에서 소총 작동법만 배우고 투입된 학도의용병이 포함됐다.

정부는 병력 충원이 원활히 이뤄지면서 1951년 3월 학도병은 학교로 돌아가도록 했다. 정부의 학교 복귀 지시나 대통령의 담화가 제대로 전파되지 않았던 곳에서는 학도병 활동이 중단되지 않고 휴전 때까지 계속된 곳도 있었다.(‘학도의용군 연구’, 73쪽)

 

● 관심 연구 지원 부족한 학도병

학도병의 활약과 희생을 주제로 한 영화가 ‘학도의용군’(1977), ‘포화속으로’(2010), ‘장사리, 잊힌 영웅들’(2019) 등 여러 편 나왔다. 학도병은 국군이나 미군에 배속되어 활동하거나, 적지에서 유격대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공식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연구 평가 지원 등이 다른 참전 용사들에 비해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대부분의 참전자들이 사망하거나 이제는 고령으로 직접적인 증언을 듣기도 어려워지고 있다.(‘학도병 연구’, 2쪽)

 

 재일학도의용군들이 태극기에 참전 결의를 가득 적었다. 일본에선 태극기를 구할 수 없었던 탓에 6·25 당시 일본 동경에 거주하던 한인 학생들이 일장기에 파란 물감을 덧칠하고 4괘를 그려 만들었다.

 

● 재일학도의용군

6·25 개전 직후부터 일본의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청년 및 학도 지원병을 전선에 파견하기로 했다. 재일 한인 청년들은 미군 극동사령부의 심사를 거쳐 동경 아사카 캠프에서 유엔군과 함께 2주간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일본에 머물던 거류민단 소속 부녀회가 제작해 준 의용군 휘장을 미군 군복 상의나 군모에 달고 6·25 전쟁에 참전했다.

제1진 69명은 1950년 9월 11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출발한 유엔군과 함께 배를 타고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다. 인천상륙작전에 3차례, 원산과 부산에 각각 한 차례씩 5차례에 걸쳐 653명이 참전했다.(‘1129일간의 전쟁’, 608쪽)

 

 경기 연천 최전방 태풍전망대에 ‘소년전차병’ 기념비가 있다. 중학생 120여명이 소년전차하사관으로 M36 전차를 운용하는 57전차중대에 편입돼 폭풍전망대 인근 전투 등에 투입됐다는 설명이다. 연천 = 구자룡 기자

 

● 소년병

전쟁에서 전사 부상으로 병력 소모가 늘어나면서 병력 보충이 시급해지자 학도병은 물론 소년병도 자원이나 모집을 통해 전선으로 보내졌다. 전국에서 모인 소년병 부대는 1950년 8월 초 기계 안강전투에서 국군 25연대에 배속돼 북한군을 격퇴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당시 전투는 소년병이 도착해도 명단을 작성할 겨를도 없이 전선에 배치돼 누가 전사하고 후송됐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급박했다고 한다.(‘1129일간의 전쟁’, 609〜617쪽)

‘소년병’은 징집 연령인 18세 미만으로 주로 12~17세 청소년들인데 이들에게는 군번이 부여됐다. 군번이 부여되지 않은 학도병은 정부의 학교 복귀령에 따라 돌아갔다. 그런데 더 어린 소년병은 군번이 부여돼 정식 군인 신분으로 편입됐기 때문에 군 생활을 계속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된 뒤에도 전역하지 못해 5~7년간 더 군 생활을 하기도 했다. 전쟁 기간 소년병은 2만7천여명이 참전해 2570여명이 사망했다. 이들은 국가유공자로서 보상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많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의 ‘형제의 상’ 전투에서 국군과 북한군으로 만난 형제를 형상화했다. 구자룡 기자

 

 

길거리에서 징병관에 의해 모집되기도 한 소년병은 기차를 타고 가면서 6시간가량 훈련을 받은 후 바로 전투에 투입되기도 했다. 길거리에서 징병되어 가면서 가족에게 알리지도 못한 경우도 있다. 소년병 중에는 여성들도 있었다. 낙동강 전투시 주변 학교 여학생들이 행정병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북한군에 의용군으로 붙잡혀 가면서 전투에서 형제가 국군과 북한군으로 나뉘어 전투를 벌이는 그야말로 동족상잔이 벌어졌다

 

카투사(KATUSA)

국군은 1950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의 합의에 따라 미 지상군의 병력보충을 위해 카투사(KATUSA·Korea Augmentation to the US Army) 제도를 시행했다. 당시 일본 주둔 미군은 감소 편성되어 있는데다 전선에 투입된 이후 많은 전투력 손실이 발생했다. 육군본부는 8월 16~24일 8600여 명 카투사를 1차로 선발해 도쿄의 미 극동군사령부에 보냈다. 8월 20일부터는 한국에서 전투 중인 각 사단에도 각각 250명을 보냈다. 카투사는 경계, 정찰, 진지구축, 방어진지 위장 등의 보조임무를 수행했다.(김철수, 130쪽)

 

 훈련 중인 카투사 부대원들. 출처 영문위키

 

● 인천상륙작전, 장진호 전투에 투입

1950년 8월 16일 최초의 카투사 313명이 부산항에서 요코하마로 떠났다. 8월 24일까지 8623명의 카투사가 당시 일본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준비 중이던 미 육군 제 7사단에 급하게 보충되었다. 그들은 겨우 기초훈련만 받고 전선에 투입되었다.

초기에는 피난민들이 몰려있던 대구와 부산 등에서 불심검문을 통한 강제징집이 실시되었다. 피난민 숙소를 급습해 자고 있던 장정들을 골라내는 이른바 ‘토끼몰이’ 방식도 있었다. 미리 준비한 M1 개런드 소총을 어깨에 메고 섰을 때 소총 개머리판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의 키만 되면 징집대상으로 분류되었다고 한다.

일본으로 처음 출발한 카투사 313명 중에는 부인을 위해 약을 구하러 나섰다 끌려온 유부남부터 책가방을 든 15세 중학생도 있었다. 이들은 배 위에서 입영명령서를 스스로 작성했다. 일본 요코하마항에 도착해 후지산 기슭 미 7사단 훈련소로 갔다.(문관현, 182쪽)

한국전쟁 기간 전체 카투사 4만3660명 중 6415명이 전사해 전사율 14.7%로 미군의 전사율 2.2%보다 7배 가까이 높았다. 북한군은 카투사를 붙잡으면 ‘미제의 앞잡이’라며 더 가혹한 대우를 서슴지 않았다. 2012년 62년 만에 북한에서 돌아온 용사들의 유해 12구는 미 제7사단 제31연대 전투단에 배속돼 장진호 전투에서 싸웠던 약 800명의 카투사 중 일부였다.(애플먼, 역자 서문)

‘장진호 동쪽’에 투입된 미 7사단 31연대에 ‘뻐꾸기 대대’로 편입된 32연대 1대대는 캠프 맥네르에서 500명의 카투사를 받았다. 대대가 장진호에 도착했을 때는 약 300명으로 줄어 있었다. 카투사는 3개 소총 중대에 각각 45명에서 50명이 할당되었다. 이들은 중대병력 숫자의 약 4분의 1을 구성했다. 그런데 미군 분대장들이 한국군 분대원과 만족스럽게 소통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장진호 동쪽 전투 시 이같은 소통부족은 큰 장애가 되었다.(애플먼, 84쪽)

 

● 정전 협정 이후에도 지속

카투사 제도가 도입된 것은 낙동강 방어선이 북한군에게 거의 돌파되려는 그야말로 벼랑 끝에 서있던 시기였다.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7사단은 한국에서 전투 중인 미군 3개 사단에 초급 보병장교와 하사관, 경험있는 소총수들을 채워주는 보충부대 역할을 수행했다.

무초 주한 미 대사는 일찍이 한국군 정규 병력을 미군 부대에 배속할 것을 제의하였다. 한국군을 주일미군 기지에서 훈련시킨뒤 미군과 한국군 1명씩 짝을 지어 작전을 수행하는 이른바 ‘버디 시스템’(Buddy System)까지 구체적으로 제안하였다. 1950년 6월 27일 맥아더 사령관이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미군부대 한국군 배속 방안을 건의한 것이었다. 그러다 ‘카투사 제도’로 공식화되었다. 카투사 제도는 정전협정 이후에도 부족한 미군 병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존속하고 있다.

 

 워리어 베이스의 임진스카웃 대원들. 출처 영문 위키 

 

● ‘임진스카웃’ 활동

1960년대와 70년대 북한의 도발이 최고조로 올랐을 당시 카투사들은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2사단의 특수부대인 ‘임진스카웃’ 정찰대에 편성되어 북한군과 근접 전투를 수행했다. 카투사와 한국군 장교로만 이루어진 ‘임진스카웃’은 미군 2사단에 배속된 대간첩중대(CAC)였다.

임진스카웃은 1965년 9월 경기 파주에서 처음 결성됐다.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군 침투 등 충돌이 많을 때는 미 2사단의 첨병으로 활동한 ‘전투 보병의 꽃’이었다고 한다. 임진스카웃과 북한군 특수8군단은 창과 방패처럼 맞대결 구도를 형성했다.

임진스카웃은 1991년 10월 한국군 1사단에 비무장지대 서부전선 경계 임무를 넘겨주고 26년만에 사라진 뒤 잊혀진 존재가 됐다. 그러다 2002년 6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경비대대가 임진스카웃 배지 착용과 인증서 수여 등 일부 임진스카웃 제도를 부활시켰다.(문관현, 11쪽)

 

※<참고 문헌>

김철수 지음, 『그 때는 전쟁, 지금은 휴전 6·25』, 플래닛 미디어, 2017.
문관현 지음, 『임진스카웃』, 정음서원, 2022.
로이 E. 애플먼 지음, 허빈 옮김, 『장진호 동쪽-4일 낮 5일 밤의 비록』, 다트앤, 2013.
『6·25전쟁 학도의용군 연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2.
『1129일간의 전쟁 6·25』,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 2014.
『포항전투사 – 끝나지 않은 전쟁 6·25』, 학도의용군 포항지회.

 

[17회] 맥아더는 왜 전쟁 중 해임됐나

 미국 뉴욕주의 육군사관학교 ‘웨스트 포인트’ 교정의 맥아더 장군 동상. 출처 영문위키

 

중국 신화통신이 맥아더 사령관 해임 소식을 해임 이틀 후 전하고 있다. 중국 랴오닝성 단둥 항미원조기념관 전시. 단둥 = 홍진환 기자

 

●‘5성 장군 육군원수, 라디오로 해임 전해듣다’

1951년 4월 11일 오전 1시(미국 현지시간). 백악관 공보비서가 백악관에서 특별기자 회견을 갖고 맥아더 유엔군총사령관의 해임을 발표했다. 시차가 있어 11일 오후가 된 도쿄의 라디오 방송은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맥아더 해임 소식을 긴급 뉴스로 전했다. 맥아더는 일본 점령군사령관이어서 일본에서도 큰 관심이었다. 방송을 들은 맥아더의 부관 시드니 허프 대령은 맥아더의 아내 진 맥아더에게 전화해 해임 사실을 전했다. 맥아더는 아내로부터 자신의 해임 보도를 전해 들었다. 모스크바와 베이징(北京)에서는 기쁨과 환희로 종이 울리고 축제 기분에 들떴다.(맥아더, 267쪽)

 

맥아더는 회고록에서 해임을 전해 듣게 된 경위를 자세히 소개했다. 얼마나 갑작스럽고 어이없게 자신의 해임이 이뤄졌는지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상관 명령 불복종으로 군인이 해임되는 것은 큰 불명예임에도 한 번의 해명 기회도 주지 않고 자신을 해임한 것에 대해 후에 격렬히 비판했다.

트루먼은 당초 애치슨 국무장관이 무초 주한대사에게 명령서를 전문으로 보낸 뒤 마침 방한 중인 페이스 육군장관이 도쿄로 가서 직접 전달해 예우를 갖출 계획이었다. 그런데 시카코의 한 언론이 11일 조간으로 보도할 것으로 알려져 부득이 긴급 발표하게 됐다고 트루먼은 회고록에서 설명했다.(트루먼, 424쪽)

 

● “트루먼 탄핵하라”, 여론의 분노

많은 미국인들은 맥아더의 해임 소식에 항의해 전국에서 트루먼의 허수아비를 불태웠다. 국제부두 노조는 항의로 조업을 중단했다. 맥아더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했을 때 50만 인파가 공항에서 도심까지 늘어서 환영했다. 뉴욕에서는 70만 시민이 종이 꽃가루를 뿌리며 영웅을 맞았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한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아이젠하워 장군 귀국 환영 인파보다 2배는 많았다.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66%가 맥아더의 해임에 반대했다.

시사주간 타임은 “인기가 많은 사람이 그보다 훨씬 인기가 없는 사람에 파면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트루먼은 전형적인 소인배”라는 논평을 냈다. 아이젠하워 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낸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은 “즉시 맥아더를 복귀시키라”고 주장했다.(핼버스탬, 938쪽). 맥아더에게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퇴임 연설을 하고 해임 경위를 따지는 의회 청문회도 열기로 했다.(‘미래한국’, 2015년 4월 10일)

맥아더가 해임되자 일본은 천황이 직접 방문해 작별 인사를 했다. 일본과 한국 국회는 감사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을 위해 했던 일과 우정을 베풀어준 것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며 “시간이 지나면 세계 역사상 탁월한 지도자 및 정치가로 더욱 빛날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맥아더가 일본을 떠난 4월 16일 2백만 명의 시민이 미 대사관에서 아츠키 비행장까지 길에 늘어섰다. 맥아더를 태운 비행기는 후지산을 한 바퀴 돈 뒤 미국으로 향했다.(맥아더, 269쪽)

 

 ▲트루먼 대통령 

 

● ‘맥아더 해임은 문민우위 헌법 수호 차원’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맥아더 육군원수가 공적인 직무와 관련된 문제에서 미국 및 UN의 정책을 성심껏 지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군 사령관이 법과 헌법에 의한 정책 및 명령에 의해 통할되는 것은 기본 원칙이다. 그가 나라에 바친 탁월하고도 유례없는 공헌에 깊은 감사의 뜻을 가지고 있어 해임 조치를 다시 한번 유감으로 생각한다.”

트루먼은 그가 명령에 따르지 않아 해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당시는 중공군의 4차 대공세 이후 약 2개월간의 ‘휴지기’였다. 하지만 곧 중공군이 70만 명을 동원한 ‘1차 춘계 대공세’를 벌이기 직전으로 6·25 전쟁은 급류속이었다. 그런데 16개국 UN군 수장이기도 한 장수를 전격 경질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해임 발표가 나오기 나흘 전인 4월 7일 국무부 국방부 합동참모본부의 간부 등이 모인 회의에서 맥아더 해임에 만장일치로 의견을 모았다. 심지어 이미 2년 전 극동군사령관 등에서 해임되어야 했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트루먼에게 보고했다.

‘맥아더 해임’은 한국전쟁 수행 방식의 이견 때문만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수면 아래에서 잠재되어 있었다. 6·25 전쟁의 작전 범위를 둘러싼 이른바 ‘확전론’과 ‘제한론’의 갈등에서 임계치를 넘어 폭발했던 것이다.

 

 ▲1951년 2월 지평리 전투 미국군 전승 충혼비. 지평리 전투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이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유엔군이 반격하는 전환점이 됐다. 그해 7월 휴전회담이 시작됐다. 양평 = 구자룡 기자

 

● 트루먼의 휴전 의지 정면 거부한 맥아더

트루먼 행정부에서 맥아더 해임은 휴화산이었지만 해임 결단 이전 보름 남짓 기간에 벌어진 두 사건이 트루먼의 표현대로 ‘선을 넘은’ 계기가 됐다. 해임을 불러온 마지막 두 개의 폭탄이었다.

첫째는 맥아더가 트루먼의 휴전협상 의지를 정면으로 거스른 3월 24일의 성명. 트루먼은 3월 중공군에 대한 반격작전인 ‘리퍼 작전’ 성공으로 기세를 잡았다고 보았다. 공산군측이 군사적으로 승리할 수 없게 느끼는 이 때가 휴전협상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전쟁은 외교보다 군사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맥아더의 성명은 이랬다. “적의 인해전술은 우리 군대가 익숙해져 쓸모없게 되었다. 중국의 생산기반과 원료로는 중등 정도의 공군과 해군을 편성 유지하는 것도 부족하다. 대량파괴수단의 발전으로 단순한 병력수만으로는 약점이 만회되지 않는다. 군사작전을 중공 연안과 내륙기지까지 확대하면 중공은 군사적인 붕괴 위험을 면치 못할 것이다.”(트루먼, 416쪽)

밀리는 적을 확실히 밀어붙이고 중국 대륙까지 확전하자는 것이었다.

트루먼은 공산군이 38선 이북으로 후퇴한 뒤 평화적인 해결방법을 모색하는 선언 초안을 준비해 참전국과 맥아더에게도 보냈었다. 맥아더의 성명은 휴전을 거부하는 확전 위협으로 간주됐다. 국무부는 우방국에 맥아더의 회견은 워싱턴의 승인을 받지 않은 독단적인 것이었다고 해명해야 했다.(김계동, 281쪽)


트루먼은 회고록에서 분개했다.

“외교정책에 관한 어떤 발언도 삼가하라는 대통령의 지시를 전적으로 무시한 행동이었다. 대통령이며 최고사령관인 나의 명령에 공개적으로 불복하는 것이었다. 이는 헌법에 따른 대통령의 권한에 대한 도전이자 UN의 정책을 우롱하는 것이었다. 맥아더는 나에게 선택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았다. 나는 그의 불복에 더 이상 관용을 베풀수가 없었다.”(트루먼, 417쪽)


그는 맥아더의 성명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말밖에 표현할 길이 없으며 미국의 전통적인 문민우위에 도전하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 내려고 애써 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맥아더를 용인하면 문민우위의 헌법을 수호하겠다고 한 서약을 위배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트루먼에게 맥아더 해임은 헌법을 수호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1944년 10월 20일 필리핀 레이테섬 팔로 해변에 상륙하는 맥아더. 태평양 전쟁과 일본 점령군사령관, 한국 전쟁의 유엔군 사령관 등을 거쳐 해임이후 미국으로 돌아간 것은 14년 만이었다.

 

● “일개 장교가 극동의 황제가 되려는 것 용납할 수 없다”

휴전 노력에 반대하는 맥아더의 불복 사태 처리에 고심하던 트루먼에게 ‘마틴 편지 사건’이 터져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4월 5일 야당인 공화당 하원 원내총무 조지프 마틴은 하원에서 맥아더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라며 공개 낭독했다. 대만 장제스(蔣介石) 정부를 지지하는 마틴이 2월 12일 하원에서 했던 “장제스 군대가 한국전에 사용되지 않은 것은 바보스러운 결정”이라는 발언에 대한 맥아더의 코멘트였다. 맥아더가 3월 20일 마틴에게 보냈 것이었다.

“귀하의 견해는 논리적으로 모순되지도 않고 전통에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유럽에서는 외교관들이 입으로 싸우지만 여기서는 무기로 싸우고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에 패하면 유럽도 몰락이 불가피하다는 것, 여기서 이기면 유럽의 자유를 보존하게 되리라는 것 등을 깨닫기가 어려운 것 같이 보입니다. 승리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맥아더, 253쪽)

트루먼은 승리도 올바른 승리와 그릇된 승리가 있는데 맥아더가 마음에 두는 중국 폭격에 의한 승리는 그릇된 승리라고 했다. 그는 나폴레옹이 모스크바 침공 기간 중 “나는 싸움마다 모두 격파했으나 어느 한 곳도 얻지 못했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하나의 전장에서의 승리는 그 자체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트루먼, 422쪽)”

맥아더의 편지가 공개된 날 트루먼은 일기에 “맥아더가 또다시 정치적인 폭탄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이번이 마지막 일격이 될 것 같다. 누가 봐도 확실한 불복종에 해당한다. 극동지역 고집불통 장군을 본국으로 불러들여야 할 것 같다는 결론이 나온다.”고 적었다.(핼버스탬, 929쪽)

트루먼은 후에 사적인 자리에서는 더욱 격렬한 어조로 맥아더를 비난했다. “문제는 그가 식민지 총독, 즉 극동지역의 황제가 되고 싶어했다는 거야. 자기가 일개 육군 장교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상관은 바로 미국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게 잘못이지.”(핼버스탬, 935쪽)


4월 9일 미 합참은 맥아더 해임을 건의하고 트루먼은 4월 11일 민간 및 군부참모들의 만장일치 지지로 해임 결정을 내렸다.

 

▲미국 버지니아주 노퍽 맥아더기념관 앞의 동상. 웨스트포인트의 것을 그대로 본떠 제작됐다. 기념관에는 맥아더 자료를 담은 타임캡슐도 있다. 출처 맥아더기념관 홈페이지

 

● 트루먼과 맥아더의 오랜 신경전

지휘 계통으로만 보면 군통수권자인 트루먼 대통령은 수차례 맥아더를 해임 혹은 경질할 수도 있었다. 태평양 전쟁의 영웅이자 높은 여론 지지를 받는 맥아더는 ‘전쟁에서는 내가 옳다’며 독자적인 행동을 하면서 갈등이 누적됐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같은 전과(戰果)가 맥아더를 ‘언터처블’의 지위를 갖게 했다.

#1. 6·25 전쟁에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를 참여시키는 문제를 두고 이견을 보인 가운데 1950년 7월 31일 맥아더가 대만을 방문해 장제스를 만났다. 장제스의 중국 본토 공격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자 “미국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대만에 대한 군사적 폭력 행위를 방지하는 문제로 대화가 국한됐다”는 특별성명을 발표하며 무마해야 했다.(맥아더, 180쪽)

그는 회고록에서 이 방문 여파로 자신이 해임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적었다. 그는 “일본과 싸울 때는 장제스와 손을 잡으면서 공산당과 싸울 때는 왜 손을 잡지 않냐”고 불만을 나타내고 “내가 공직에서 추방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은 분명했다”고 적었다.(맥아더, 185쪽)

#2. 맥아더가 1950년 8월 24일 미 해외참전군인회(VFW)에 보낸 메시지도 대만 문제로 트루먼과 갈등을 빚은 대표적인 사례다. 맥아더는 “대만은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으로 서태평양에서 미국의 전진 교두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대만 방어를 반대하는 자들은 ‘패배주의자’‘유화주의자’라고 비판했다. 트루먼은 당시 맥아더를 해임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애치슨도 당시 맥아더의 메시지는 “‘이 나라의 대통령은 누구냐’하는 것에 대한 문제”라며 대통령에 대한 항명이었다고 했다.(애치슨, 550쪽)

 

▲미국 버지니아주 노퍽 맥아더 기념관의 맥아더와 부인 진의 무덤. 출처 맥아더기념관 홈페이지

 

● 트루먼의 ‘언론 금족령’도 무시

트루먼은 1950년 12월 5일, 해외 주재 외교관들에게 군사문제나 외교정책에 관해 미국의 언론기관과 직접 접촉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특정인을 지목한 것은 아니지만 맥아더를 겨냥한 것이었다.

앞서 12월 1일 맥아더는 ‘US 뉴스 앤드 월드리포트’와 인터뷰에서 만주 국경지대의 공산군을 폭격할 수 없어 UN군은 군의 역사상 전례가 없이 엄청난 핸디캡을 받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는 사실상 트루먼 대통령에 대한 직격이었다. 이 때도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했어야 했다고 회고록에서 술회했다.

맥아더의 ‘언론 플레이’가 계속되자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트루먼이 선택한 카드가 ‘언론 금족령’이었으나 맥아더는 개의치 않았다.

1951년 1월 29일 영국 ‘텔레크라프’와의 인터뷰에서 “아시아의 자유를 위한 전투는 계속될 것”이라고 발언해 당시 휴전을 모색하고 있던 트루먼 정부를 당혹스럽게 했다.

 

▲1950년 10월 15일 태평양의 웨이크섬에서 만난 트루먼과 맥아더

 

● 트루먼과 맥아더, 웨이크섬 신경전

중공군이 참전하기 직전인 1950년 10월 15일 태평양의 웨이크섬에서 열린 트루먼과 맥아더의 회담은 ‘맥아더의 중공군 불참 오판 발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중공군이 참전할 가능성이 적고 참전해도 소수에 그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회담은 ‘맥아더가 늦게 도착해 트루먼 대통령을 기다리게 했다’는 가짜뉴스까지 나올 정도로 두 사람의 기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먼저 회담 장소. 당초 호놀룰루가 지목됐으나 맥아더가 ‘전쟁 중 오래 도쿄 본부를 비우는 것이 곤란하다’고 주장해 워싱턴에서는 1만2000km, 도쿄에서는 4800km 떨어진 웨이크섬으로 결정됐다. 백악관 실무자들이 ‘국왕이 왕자를 만나러 가는 법이 어디있냐’고 반대하기도 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외국의 군주처럼 행세하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며 불참했다.(핼버스탬, 555쪽)

그럼에도 트루먼이 맥아더를 만나러 간 이유는 뭘까. “(재선까지 대통령 임기 6년째인데) 한 번도 직접 만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잠깐 (워싱턴에) 다녀가라 해도 오지 않아 유감이었다.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 위협에 대한 소식도 궁금했다.”(트루먼, 339쪽)

사령관에게 전쟁 현황을 들으려는 것도 있지만 트루먼이 한 달도 한 남은 중간선거에 ‘전쟁 영웅 맥아더’의 후광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맥아더도 “회담이 무슨 목적으로 열렸는지 나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중간선거가 다가오고 있어 대통령은 회담 목적이 자기 정당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결부시키는 데 있었던 것 같다”며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고 보았다.(맥아더, 216쪽)

트루먼은 중공군에 대한 맥아더의 견해를 듣는 것이 회담의 주요 관심사였다고 강조했지만 맥아더는 회담이 끝날 때쯤 잠깐 언급했다고 했다. 트루먼은 맥아더가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을 예견하지 못했음을 부각하려 한 반면 맥아더는 주요 화두가 아니었음을 강조한 회고록에서도 신경전을 이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 대통령에 경례하지 않은 맥아더

맥아더가 자신이 탄 비행기를 연착시켜 대통령이 기다리게 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하와이를 거쳐온 트루먼의 전용기 인디펜던스호는 오는 도중 예정보다 빨리 도착하지 않기 위해 조종사가 일부러 비행속도를 늦추었다.(트루먼, 340쪽)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과 만나면서 경례를 하지 않은 것이 모두의 눈에 띄었다. 덜레스 국무부 고문이 회담 후 무례함을 들어 교체를 건의했지만 트루먼은 “맥아더를 영웅으로 만든 미국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오지 않고는 해임할 수 없다”고 했다.

트루먼은 오전에 회담을 마치고 점심을 같이 하고 싶어했지만 맥아더가 도쿄로 빨리 돌아가고 싶어했다. 맥아더는 시차 때문에 점심을 하고 가면 한밤중에나 도쿄에 돌아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트루먼은 퇴임 수년 후 고향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에서 버넌 월터스로부터 웨이크섬에서 맥아더가 경례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마음이 불편했다. 결국 그를 해임했는데 실은 훨씬 전에 해야 했다. 그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이해하질 못했다”고 털어놨다.

회담에 워싱턴에서는 35명의 기자와 카메라맨이 3대의 비행기에 나눠타고 와서 트루먼을 동행 취재했다. 반면 도쿄 사령부를 출입하는 ‘근위대’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기자들은 가지 못했다. 맥아더는 전용기에 여유가 있었지만 국방부가 허락하지 않아 기자단 동행없이 섬으로 왔다.

웨이크섬 회담은 메모없이 구두로만 진행됐다. 그런데 회담에서 필립 제섭 대사의 여비서가 누가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옆방에서 회담 내용을 속기한 것이 맥아더 청문회 과정에서 불거졌다. 맥아더가 중공군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을 증명하는 자료여서 맥아더가 항의하는 등 논란거리가 됐다.

 

● 트루먼과 맥아더, 상호불신과 불화

트루먼은 맥아더를 군인으로서 존중 존경하지만 “프리마돈나처럼 구는 5성 장군과 도대체 뭘 하란 말인지”라고 자신의 일기에 적은 것처럼 본능적으로 꺼리고 불신했다.

공화당 대선 예비선거에도 출마했던 맥아더는 민주당 소속으로 자신이 싫어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뒤를 이은 트루먼을 좋아하지 않았다. 루즈벨트는 뉴딜정책에 반대하는 등의 이유로 맥아더를 육군참모총장에서 내쫓고 대장에서 소장으로 강등시켰다.

맥아더는 5성의 육군 원수로서 ‘주방위군 대위 출신에 업적도 정치적 능력도 보잘 것 없는 인물이 어떻게 내 위에 있을 수 있나’라며 대통령과 자신을 지휘 계통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고 한다.(핼버스탬, 191쪽)

웨이크섬 회담에서 만난 트루먼에 대해서는 “겉핧기 지식은 있으나 사실의 배후에 깔려있는 논리나 정확한 원인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극동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고 폄하했다.(맥아더, 213쪽)

 

● 맥아더 청문회

맥아더 해임은 큰 파장을 일으켜 공화당은 트루먼과 애치슨 탄핵까지 거론하며 청문회를 요구했다. 상원 군사위원회와 외교위원회 합동청문회가 5월 3일부터 6월 말 42일간 진행됐다.

맥아더 본인을 불러 공방을 벌인 청문회는 3일간 진행됐다. 맥아더는 대만 국민당군 이용이나 만주 폭격 등이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자신의 구상은 한국 전쟁에서의 승리가 목적일 뿐 중국과의 전면전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브래들리 합동참모본부 의장은 청문회에서 맥아더의 대중국 태도는 세계대전으로 확산될 위험을 수반하고 있다며 맥아더의 전략은 ‘미국을 잘못된 전쟁에서 잘못된 시간과 장소에서 잘못된 적에게 몰아넣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트루먼 정부는 청문회를 크나큰 승리의 순간으로 기록했다. 오랜 숙적의 발톱을 뽑아버린 것으로 여겼다.(핼버스탬, 954쪽)

하지만 민주당 정권에서 장제스가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에게 내전에 패해 대륙에서 물러났고, 중공군이 개입한 한국전쟁이 3년을 지속하면서 1952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아이젠하워가 당선됐다. 1932년 루즈벨트 집권 이래 20년 만에 정권이 교체됐다.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

맥아더는 미국 1951년 4월 19일 미 상하원 합동회의 고별연설에서 자신의 아시아 중심주의에 대한 철학, 자신이 10개월 가량 지휘했고 아직 진행중이던 6·25 전쟁에 대한 소신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전했다. 그의 중국에 대한 진단은 ‘전랑(戰狼)외교’라는 말까지 듣는 현재의 중국에도 해당될 듯한 내용이 적지 않다. 다음은 연설요지

 

● 아시아

흔히 아시아는 유럽으로 향하는 입구라고 말하지만 유럽이 아시아로 향하는 입구라는 것도 사실이다. 아시아나 유럽이나 어느 한쪽이 가지는 방대한 영향은 반드시 상대방에게도 끼치게 마련이다.


미국의 힘이 아시아와 유럽을 동시에 보호하기에 불충분해 우리의 노력을 분산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보다 더 심한 패배주의를 생각할 수 없다. 우리의 적이 힘을 쪼개 아시아와 유럽을 동시에 공격하면 우리도 동시에 적에 반격하는 도리밖에 없다.

 

● 대만의 중요성

태평양 전쟁을 겪으면서 태평양의 전략적 중요성을 알게 됐다. 어떤 환경에서도 대만이 공산주의자의 수중에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도 그 이유다. 대만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 당장 필리핀의 자유와 일본의 상실을 가져온다. 우리의 서쪽 경계선이 캘리포니아주, 오리건주 워싱턴주 해안까지 후퇴하게 될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 공산 중국에 대한 인식

공산 정권 아래 통일된 중국의 민족주의는 점차 침략적인 경향을 증대시키고 있다. 지난 50년 동안 중국인들은 자신의 이상과 개념에 입각한 군국주의를 발전시켜왔다. 중공은 아시아의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했다. 소련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으나 그 방법과 개념에서는 점차 침략적인 제국주의 경향을 띠고 있다. 제국주의의 본질인 영토 및 세력 확장을 위한 야욕을 지니게 되었다. 중공 정권에 이데올로기적 요소는 적은 것 같다.

 

● 6·25 제한전에 대한 불만

나는 증원부대를 요청했으나 보낼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압록강 북쪽 적의 보급 기지를 파괴하도록 허가하지 않는다면 대만의 약 60만 명 병력을 한국전에 투입하자고 했다. 그것이 곤란하면 중국 해안을 봉쇄하여 외부로부터 원조를 받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문제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승리를 거두기 어렵다는 것이 사령관으로서의 나의 견해임을 밝혔다. 결과는 나의 입장을 왜곡하고 나를 전쟁 도발자라고 비난했다. 이는 진실과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지휘함 마운트 매킨리 함에서 작전을 지휘하고 있다.

 

● 한국인의 용기와 신념

한국의 비극은 군사행동이 제한되어 있어 더욱 비참해지고 있다. 세계 모든 나라 중 사력을 다해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한국민의 용기와 확고부동한 신념은 말로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들은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 전한 최후의 말은 태평양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의 맥아더 장군 흉상. 인천 = 구자룡 기자

 

● ‘노병은 죽지 않는다’

이제 52년 군인 생활을 마치려 한다. 내가 입대한 것은 20세기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내가 웨스트포인트 광장에서 선서를 마친 이래 세계에는 많은 변동이 일어났다. 나의 희망과 꿈도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나는 초년 장교시절 군대에서 유행하던 노래의 후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이 노래의 노병처럼 이제 군대 생활을 끝내고 하느님의 계시에 따라 자기의 임무를 완수하려고 노력하여 온 한 사람의 노병으로서 사라져간다.

“트루먼 씨, 나의 해임은 부당하다”

한국 정부 부처인 문화공보부가 발행하는 잡지 ‘정보’ 8호(1956년 8월)는 맥아더 장군이 자신의 해임에 대해 트루먼에게 조목조목 반격하는 내용의 글을 실었다. 잡지는 원문의 출처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다. 미국 정치의 ‘문민 우위’의 원칙에 따라 대통령이 군 사령관을 해임한 것을 받아들여야 했지만 퇴임 후 글로써 격렬히 반박했다. 자신의 해임 배경에 대해 트루먼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설명한 것을 두고 ‘성실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반박했다. 호칭은 ‘트루먼 씨’였다.

 

● 반박 글을 쓰게 된 동기

트루먼 씨의 사실 왜곡이 너무나 지나쳐 진실한 수정보고를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도리어 국가에 대하여 충성스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국민에 대하여서도 해를 끼치는 결과를 초래하리라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황달증에 걸린 환자의 눈에는 모든 것이 황색으로 보인다는 옛말은 트루먼 씨의 과오의 원인을 설명하는 좋은 말이다. 이 어구는 특히 악의 또는 원한과 복수심에서 나오는 비천한 본능작용을 초월하지 못하고 빈번히 과격화하고 저속한 대중 언쟁을 일삼아 오던 트루먼 씨의 경우에 적합한 말이라고 하겠다

 

● 트루먼의 ‘제한전’ 비판

트루먼 씨의 정책 변경은 약속된 범위 이상으로 전쟁을 확대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오랜 휴전회담 기간 받은 아군의 손상보다 훨씬 적은 손해로 완전한 승리를 획득할 수 있었던 아군의 행동을 고의적으로 묶었다. 국제연합군 사상자의 약 5분의 3은 내가 해임된 뒤 발생했다.


트루먼 씨의 작전은 수비 위주이다. 이는 전쟁에서 수비보다 공격을 위주로 해야 한다는 미국의 한세기 반 이래의 군사적 교의에 역행하는 기괴한 작전이다. 전쟁은 이기지 못해도 승리한 것과 마찬가지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기이한 이론도 폈다.

 

● 해임 절차상의 문제

트루먼 씨는 나를 해임하는데 수년간 있었던 일을 열거하고 있다. 내가 그에게 불복종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상관 명령 불복종은 군인으로서는 가장 중대한 범죄다. 그러한 불명예스러운 비난을 받는 군인은 예외없이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고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법에도 설명과 청문을 요구할 권리가 규정되어 있다. 나에게는 전혀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하등의 법적 호소를 제기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대통령직을 떠나고 나도 일개 시민 시민이 되었을 때 회고록을 통해 나의 해임사유가 명령 불복종에 의한 것이라고 뒤늦게 말했다.

 

● 부당한 해임 사유

트루먼 씨는 나의 해임 이유를 조사한 상원합동조사위원회에 참석한 합동참모본부 간부들이 맹세코 나의 해임이유가 명령불복종이 아니라고 한 점을 은폐하려고 한다. 자신에 대한 비난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다. 트루먼 씨는 브래틀리 합참의장이 명령불복종의 죄를 비난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브래틀리는 세 명 의원의 질문에 세 번 거듭해 ‘맥아더가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한 일은 전혀없다’고 대답했다.

 

● 맥아더 회고록에서 반격

트루먼은 자신이 무언가 비열한 방법으로 공화당과 공모하고 있었다고 믿었던 모양으로 자신의 해임은 극히 정략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대통령의 뜻과 맞지 않은 사례로 링컨과 그랜트 장군의 사례를 들며 “링컨의 침착한 위엄과 자제력을 갖춘 태도와는 얼마나 차이가 클까”라고 꼬집었다.(맥아더, 260쪽)


그는 자신이 해임 몇 년 후 상관에 복종하지 않았다며 비난을 받은 것에 대해서는 “나만큼 철저하게 복종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무엇보다 문관우위는 미국 정치의 기본 요소지만 자신처럼 갑작스런 방법으로 해임된 예는 없다고 주장했다. “나는 해임에 앞서 청문회도, 변명할 기회도 부여되지 않았으며 과거의 경력에 대한 것도 고려되지 않았다”. 그는 지휘권 이양에 따른 예의를 지키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며 “사무실의 사환, 청소부, 하급직원도 이처럼 해고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맥아더, 265쪽)

 

<참고문헌>

김계동 지음, 『한국전쟁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명인문화사, 2014.
더글러스 맥아더 지음, 『맥아더 회고록』, 2권, 일신서적, 1993.
딘 애치슨, 『Present at the Creation』, Norton & Company Inc., 1969.
해리 S. 트루먼 지음, 손세일 옮김, 『시련과 희망의 세월-트루먼 회고록』 하, 1968.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

 

[18회] 휴전협상, 또 하나의 전쟁

 
 
 

‘회담은 아마 한두 달이면 끝날 것 같아’
‘가을에 사과가 빨갛게 익을 때까지 끌 것 같네!’
‘크리스마스 전에 끝나 집으로 가게 되기를 희망해’

1951년 7월 10일 시작된 6·25 전쟁 휴전회담에 유엔군 측 5명의 대표 중 아레이 버크 극동해군 부참모장(준장)은 아내에게 편지를 보낼 때마다 회담 타결 전망에 비관적이 되어갔다.

협상은 버크의 우려보다 훨씬 길어져 2년도 넘긴 759일간 계속됐다. 협상 시작 후 양측 사망자는 개전 이후 1년과 비교해 3배가량 많았다. 희생을 줄이자는 휴전 협상이 더욱 피를 부르는 역설을 낳았다. (이용호, 107쪽)

 
 
 

▲중국 랴오닝성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의 휴전 회담 설명. 전쟁이 휴전회담 개시 후 싸우면서 협상하는 국면이 됐다며 공산당과 마오쩌둥 주석은 지구전을 통해 평화를 얻고 전쟁을 끝마치는 방침을 정했다고 밝히고 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 ‘싸워서 승패 가릴 수 없다’

 미국은 인천상륙작전 성공 뒤 북진하며 압록강에 도달할 때까지는 휴전이나 협상을 생각지 않았다. 중공군도 3차 대공세(1950년 12월 31일~1951년 1월 10일)로 서울을 다시 점령할 때까지 남진(南進)에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1951년 4, 5월 이후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1·4 후퇴로 서울을 다시 점령한 뒤 37도 선까지 내려왔으나 유엔군의 반격으로 다시 밀려 올라갔다. 4월 이후 두 차례 춘계 공세를 퍼부으면서 70만 명 이상의 대병력을 동원했음에도 중동부 전선은 점점 북으로 밀려 올라갔다.

 

유엔군은 중동부 전선에서 막강한 화력으로 다시 38선을 치고 올라갔지만 중공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4월 11일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 해임은 확전론을 더 이상 수용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나왔다. 만주 폭격이나 핵무기 사용 등 ‘확전’은 소련 참전을 불러올 수 있고 3차 대전으로 비화할 우려가 크다고 워싱턴은 판단했다. 유럽 방위에 대한 부담, 38선 돌파 북진 시 20만 명 이상의 추가적인 미군의 인명 손실 우려, 전쟁 장기화에 따른 여론의 피로감 등도 휴전으로 방향을 틀게 했다. 1951년 2월 이후 양측 모두 군사적 승리보다 유리한 고지에서 협상하려는 목적으로 전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분석이 나왔다.(김계동, 272쪽)

1952년 5월 리지웨이에 이어 유엔군사령관에 부임한 마크 클라크는 “공산 측은 최후 공세가 봉쇄되자 재빨리 휴전 회담을 제의해 유엔군의 역공세를 효과적으로 견제하기 위해 휴전 회담에 응했다”고 분석했다.(클라크, 163쪽)

  

 ▲첫 휴전협상 장소로 사용된 개성의 99칸 한옥 ‘내봉장’.

 

● 순조롭지 않은 협상 첫 출발

 “소련 인민은 한반도의 무력 충돌 문제 해결을 위한 첫 단계 토의가 교전국 간에 시작되어 38선에서 군대가 서로 철수할 수 있도록 휴전과 정전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야콥 말리크 소련 유엔대표부 대사가 1951년 6월 23일 저녁 유엔의 라디오방송 시리즈 기획 ‘평화의 대가’에서 던진 한마디는 공산권의 첫 공식 휴전 의사 표명이었다.

1주일 후 매슈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 역시 라디오 방송을 통해 휴전회담을 제의했다. 공산 측은 하루 만에 “개성에서 7월 10~15일 회담하자”고 응답했다. 7월 10일 개성의 99칸 한옥 집 내봉장(來鳳莊)에서 회담이 시작됐다. 그런데 공산 측은 시작부터 기싸움과 선전전에 몰두했다.

유엔군 측 수석대표 터너 조이 제독 일행이 헬기에서 내리자 미군에게서 노획한 지프차와 군용트럭에 백색기를 달아 일행을 태운 뒤 회담 장소로 갔다. 회담 장소도 유엔 측이 제시한 덴마크 병원선 유틀란디아호를 거부하고 중공 측이 통제하는 개성으로 오게 한 것처럼 유엔군이 정전 협정이 필요해 항복하듯 찾아오는 듯한 장면을 연출했다. 회담장 주변에 배치된 공산 측 병사들은 유엔 측 일행을 포위하고 자동소총을 위협적으로 흔들어대기도 했다. 협상 테이블 위의 공산 측 깃발을 유엔 측보다 더 큰 것으로 가져다 놓는가 하면 동양 문화에서 ‘승자가 남쪽을 향해 앉는다’며 북쪽 편에 공산 측 자리를 배치했다.(이용호, 108쪽)

회담장에 들어가 의자에 앉은 조이 제독은 깜짝 놀랐다. 의자 다리가 짧아 마주 앉은 상대측 대표 남일 앞에서 마치 ‘어뢰를 맞고 침몰하는 해군 제독의 모습’이었다고 했다. 의자를 바꿔 앉기 전 공산 측 사진기자들의 촬영은 이미 끝난 뒤였다. 공산 측은 회담 사흘째 유엔 측 기자단 출입을 막으려다 리지웨이 사령관이 “유엔 대표단도 회담장으로 가지 말라”며 강경 대응해 공산 측은 물러섰다.(조이, 11쪽)


휴전회담 각 5인 회담 대표

유엔군 측
공산군 측
수석대표 터너 조이 극동해군사령관
수석대표 북한 인민군 참모총장 남일
미 8군 부참모장 헨리 하지스 소장
중공군 제1부사령관 덩화(鄧華)
극동공군 부사령관 로렌스 크레이그 소장
중공군참모장 셰팡(謝方)
극동해군 부참모장 아레이 버크 준장
북한 인민군정찰국장 이상조
백선엽 1군단장
북한 인민군 제1군단 참모장 장평산

 

 ▲1950년 7월 10일 휴전 협상 유엔군 측 대표. 왼쪽부터 버크 제독, 크레이기 공군 소장, 백선엽 소장, 조이 해군 중장,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 호디스 육군 소장 

 

● ‘외국군 철수’ 주장, 미 반대로 철회

 워싱턴의 휴전 협상 지침은 ‘회담은 군사행동 중지를 위한 정전회담으로 국한해 중공의 유엔 및 안보리 가입이나 지위 문제, 대만 문제, 38선 문제, 군대 철수 등은 배제하라’는 것이었다.

앞서 중공이 2차 대공세(11월 25일∼12월 10일)로 기세를 올리던 1950년 12월 7일 저우언라인(周恩來) 총리가 휴전 조건 5개 항을 제시하는 것 같은 상황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저우 총리는 외국 군대 한반도 철수, 미군 대만해협과 대만 철수, 중공의 유엔 진입과 장제스(蔣介石) 축출 등을 내세웠다. 마치 승전국이 내미는 카드와 비슷했다.(선즈화, 618쪽)

예상대로 공산 측은 휴전회담 첫 회의에서 즉각적인 정전, 38선 중심으로 20km 비무장지대 설치, 모든 포로 교환과 함께 한반도에서 외국군 철수를 포함했다. 중소는 국경만 넘으면 군대를 다시 투입할 수 있지만 (태평양을 건너간) 미군은 돌아오기 어렵다. 미국은 외국 군대 철수는 공산 측에 침략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미국의 강한 반발로 ‘외국 군대 철수’는 안건에 포함되지 않았다.

회담 시작 16일 만에 합의된 의제는 ① 비무장지대 설치 및 군사분계선 설정 ②정전 감시기관 설치 등 정전 휴전 실천 위한 조치 ③포로에 관한 조치 등이었다.

 

 ▲휴전 협상에 참여한 영관급 장교들은 지도를 놓고 군사분계선 경계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협상장에서 전선으로 전화를 걸어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지점을 묻기도 했다.

 

● 군사분계선 기준 실랑이, 접촉선 v. 38선

 공산 측은 군사분계선을 전쟁 전의 38선으로 하고 20km의 비무장지대를 둘 것을 제의했다. 옹진반도 등 서부 전선 일부를 제외하고는 38선 이북으로 진출한 아군을 철수시키고 방어할 수 없는 선에 배치하는 것은 사실상 항복에 다름없다고 여겼다. 조이 대표는 “전쟁에서 잃은 것을 회담에서 되찾으려 하지 말라”고 일축했다. 미군은 현 전선에서 북쪽으로 20마일(32km) 넓이를 비무장지대로 하자며 평양 원산선 근처까지 표시된 지도를 들이밀며 맞섰다.(리지웨이, 281쪽)

이견이 좁혀지지 않는 가운데 회담장 주변 중공군 무장병력이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다 항의하면서 며칠을 허비했다. 공산 측은 미 공군기가 회담장 인근 지역을 폭격했다고 주장하며 2개월가량 회담을 중단됐다가 10월 31일 재개됐다.

회담이 멈춘 사이 미군은 7월 30일과 8월 14일 평양에 대규모 폭격을 가하면서 전선을 16km가량 북진시켰다. 그러자 공산 측은 ‘38선 분계선’ 주장을 철회했다. 11월 27일 양측은 지상군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정하고 4km 폭의 비무장지대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로 38선 이남의 개성과 옹진반도는 북측에 넘겨주고 말았다.

 

 ▲경남 거제의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에 수용소 시설 모형과 체험관을 설치해 놓았다. 거제 = 구자룡 기 

 

● 최대 난제 포로교환, 자유 송환 v 강제 송환

 짧으면 한두 달 내로 끝날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가졌던 6·25 전쟁의 휴전 협상이 2년을 끌게 된 가장 큰 변수는 ‘반공(反共) 포로’의 처리 또는 송환 문제 때문이었다. 협상 초기 2만 명의 중공 포로 중 1만5천명이 송환을 거부하는 등 공산 측 포로 중에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아가면 처벌받을 것을 우려하거나 이전 장제스(蔣介石) 부대 소속으로 북한에 연고가 없어 돌아가지 않으려 하는 등 이유는 다양했다.

유엔 측은 인도적 차원에서 포로의 자유의사를 존중한 자발적 송환이 되어야 한다고 한 반면 공산 측은 모든 포로를 자동으로 강제 송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반공포로의 귀환 거부는 냉전체제가 가속화하는 상황에서 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환영할 일이었다.

공산 측이 강제 송환을 고집한 것은 포로 미귀환으로 체제의 약점이 드러나는 것을 막는 것과 함께 아직 전투가 진행 중인 전선에서 투항자를 막으려는 계산도 있었다. 공산 측이 완고하게 버티자 유엔 측은 1952년 10월 회담을 중단해 6개월 후인 이듬해 4월에야 재개됐다.

 

 ▲경남 거제 포로수용소유적박물관. 전쟁 당시 운영됐던 수용소 실태와 포로들의 생활, 특히 포로들의 무장 폭동 등을 설명해 놓았다. 거제 = 구자룡 기 

 

● ‘협상 유도용 무력행사’

 클라크 사령관은 ‘회담은 협상이 아니라 총포에 의해 타결되었다’고 믿었던 것처럼 공산 측과 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이를 돌파하는 것은 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클라크는 자신이 ‘동양 최대의 심장’이라고 표현한 수풍댐 등 압록강의 5개 발전소에 대해 1952년 6월 23일부터 27일까지 맹폭을 가해 북한이 2주간 정전됐다. 트루먼은 “휴전 협상에서 협력적인 태도를 갖도록 유도하기 위한 목적의 공격”이라고 했다.


7월 11일에는 작전명 ‘프레셔 펌프’로 평양을 향해 1254회 출격해 1500개의 건물을 파괴했다. 8월 4일과 29일에도 평양의 군사 목표물에 대규모 폭격이 진행됐는데 29일 하루에만 1403회 출격해 700t의 폭탄이 투하됐다.(김계동, 333쪽)


전선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이어지는 가운데 지루한 공방을 벌이던 포로 협상은 공산 측이 자유 송환과 5개국 중립국 위원회를 통한 심사 및 귀환을 받아들이면서 타결됐다. 클라크의 표현처럼 ‘총포’가 큰 작용을 했다. 초반 협상을 맡았던 리지웨이는 “공산주의자들의 협상 전술은 가혹한 세금처럼 인내심을 시험해 성서 속 인물인 욥이라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다.(리지웨이, 86쪽)


유엔 측과 공산 측 포로 교환

유엔군 포로
공산군 포로
 
휴전시 송환
1만 3444명
휴전시 송환
8만 2493명(부상병 포함)
 
송환 거부
2만 2604명
 
반공포로 석방
2만 7000명
송환거부
359명 (한국군 325명, 미군 21명, 영국군 1명 등)
민간인 귀환자
3만 7000명
1만 3803명
16만 9097명
 
 

▲경남 거제포로소 유적박물관에 공산 포로들이 포로수용소장을 감금하는 등 무장 폭동을 일으킨 장면을 재현해 놓았다. 거제 = 구자룡 기자

 

▲거제포로수용소의 64야전 병원 VIP 하우스의 벽난로 굴뚝만 남아있다. 거제 = 구자룡 기자


▲거제포로수용소의 64야전 병원 VIP 하우스의 모습. 

 

● ‘포로에게 포로가 되다’

 6·25 전쟁 포로 문제는 ‘반공 포로’의 송환을 두고 휴전 협상에서 큰 걸림돌이 됐을 뿐만 아니라 수용소 관리에서도 역사적으로 유례를 보기 드문 많은 사건 사고를 일으켰다.


공산 측은 공작대원들을 포로로 가장해 수용소 내로 잠입시키거나 친공 포로들을 전투요원으로 이용하는 ‘제6열 작전’을 전개했다. 이들은 공산 측의 지령에 따라 판문점 휴전 협상과 연계한 활동을 벌였다. 포로들을 분산 수용하려고 하자 거제 76수용소에서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지하도를 파고 무기를 확보하는 등 전투 계획서까지 발견됐다. 수용소 측은 공산 공작대원과 포로들 간의 간첩 연락 아지트로 사용되고 있던 수용소 주변의 민간인 부락을 철거시키기도 했다.

 

▲경남 거제의 포로수용소유적공원 입구. 거제 = 구자룡 기자

 

1951년 중반 거제수용소의 북한군 포로가 2만 명에 육박했는데 수용소 내 친공 포로들은 정치 보위부, 조직 및 기획 전담, 경비대, 선전 선동 부서를 두어 마치 ‘포로 공화국’을 방불케 했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재판을 하고 사형까지 집행하는 집행대가 있을 정도였다. 수용소에 반미 구호가 적힌 현수막, 심지어 인공기도 내걸었다. 1952년 12월 거제 봉암도(추봉도) 포로수용소에서는 포로들이 집단 시위를 벌여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쌍방간 교전으로 포로 85명이 사살되고 113명이 부상했다. 포로수용소도 후방의 전선이었다.(클라크, 113쪽)

1952년 5월 거제 포로수용소장 납치 사건도 이런 분위기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포로에게 포로가 되는 난센스가 벌어진 것이다.(클라크, 87쪽) 포로들은 프란시스 도드 포로수용소장(준장)을 납치해 인질극을 벌이다 3일 후 풀어주었다. 이들은 석방 조건으로 수용소 자치화, 자유 결사 허용, 수용소 막사 간 연락 전화 가설 등을 요구하고 반공포로 심사 중단을 요구했다. 포로수용소장 납치 사건을 계기로 수용소 내에서 친공 포로와 반공 포로 간에 내란에 버금가는 8개월간에 걸친 피 묻은 투쟁사가 드러나기도 했다. 수용소 내 시위 폭동 반란 탈옥 반공포로 탄압 등이 적절히 관리되지 못한 데는 수용 인원을 초과한 데다 관리를 위해 배치한 인력이 필요한 자질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리지웨이는 진단했다.(리지웨이, 286쪽)

 

▲경남 거제의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유엔군 참전국 국기와 철모 조형물. 국군과 북한군이 철조망을 함께 걷어내 화합과 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는 설명이 붙어있다. 거제 = 구자룡 기자 

 

정전협상 중 더욱 치열했던 혈전들


 
 

▲강원도 고성의 화진포 옆 ‘김일성 별장’. 6·25 전쟁 이전 38선 이북에 있었던 이곳을 김일성 일가가 별장으로 사용했다. 고성 = 구자룡 기자

 

▲강원도 고성 ‘김일성 별장’ 기념관에 김정일이 여섯 살에 와서 찍은 사진을 전시해 놓았다. 고성 = 구자룡 기자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 협상이 시작된 후에는 38선 인근에서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고지전이 벌어졌다. 미군의 막강한 공군 및 화력을 실감한 중공군은 1953년 정전 협상 타결이 임박한 시기 최후의 공세까지 2년여간 대규모 공세는 중단했다. 대신 거대한 규모의 땅굴을 파고 버티며 기회를 노렸다.

  


▲피의 능선이 전투 후 나무마져 앙상하게 남아있다. 전쟁기념관 전시.

 

▲정전 협상 중 양구에서는 도솔산, 펀치볼, 단장의 능선 전투 등 규모가 큰 것만도 9개의 전투가 벌어져 9개의 전적비 기념비가 숲처럼 세워져 있다. 출처 양구군청 홈페이지

 

● 피로 물들인 단장(斷腸)의 능선 전투들

 강원도 양구 방산면에서 국군 5사단이 북한군 12사단과 벌인 ‘피의 능선 전투’(1951년 8월 16일~22일)는 미군 부대가 실패한 작전을 넘겨받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고지쟁탈전이었다. 공격 목표로 삼은 T,U,V 등의 주요 고지를 연결한 능선이 피로 물들었다.

그해 ‘단장의 능선전투’(9월 13일~10월 15일)는 양구 방산면과 동면 일대에서 미 제2사단이 중공군과 북한군이 벌인 접전으로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은 종군기자들이 붙여준 표현이다. 아군은 한 달여 전투 끝에 능선을 추가 점령해 전선을 북쪽으로 올렸다. 아군은 3700여명이 전사한 반면 공산군 피해는 2만1000여명에 달했다.(온창일, 257쪽)

양구전쟁기념관에는 1951년 6월부터 12월까지 벌어졌던 도솔산, 피의 능선, 펀치볼, 단장의 능선 등 9개 전투가 9개 기둥에 새겨져 있다. 전적비의 숲이 고지전의 치열함을 보여준다.

 


▲전북 남원의 지리산 공비토벌 기념관. 출처 국가보훈부 

 

● ‘작전명 쥐잡이’ 지리산 공비토벌

 1951년 7월 판문점에서 휴전 회담이 시작된 뒤 38선 주변에서 대치와 고지전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후방인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무장공비도 골칫거리였다. 군은 당시 이상현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남부군단 약 3800명이 지리산 일대에 출몰하는 것으로 파악했다.(백선엽, 2009, 264쪽) 주력은 인천상륙작전으로 낙동강 방어선에서 유엔군이 반격 작전을 개시한 뒤 북으로 가는 퇴로가 막힌 북한군 정규군이었다. 여기에 각 지역의 남로당 조직과 여순 사건에 가담한 좌익 무장 세력 등이었다.

공비토벌은 휴전협상 초기 협상 대표로 참여했다가 전방 1군단장으로 옮긴 백선엽 소장이 ‘백(白) 야전전투사령부’라는 특수 임무를 띤 부대를 조직해 맡게 됐다. 수도사단과 8사단 등이 투입된 백사령부는 그해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3차례에 걸쳐 지리산을 포위해 좁혀가는 ‘토끼몰이’ 방식으로 소탕했다. 육군본부 자료에는 사살 5800여명, 포로 5700여명이었다. 일부 잔당은 휴전 후까지 출몰했으나 공비토벌은 일단락됐다.

 

▲서울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에 세워져 있는 ‘백마고지 삼용사의 상’. 구자룡 기자

 

▲백마고지 쟁탈전에서 소모된 포탄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전쟁기념관 전시.

 
 

● ‘삼용사’가 실마리 푼 백마고지 전투 

중공군 3개 사단으로 구성된 38군은 1952년 10월 6일 강원도 철원의 ‘395고지’ 공격을 시작한다. 국군 부대는 전쟁 기간 승패와 영욕을 겪은 김종오 사단장의 9사단. 15일까지 육탄전을 벌이며 24회나 뺏고 뺏기는 대혈전이었다. 중공군은 병력의 절반에 가까운 1만5천명이 사망했고 국군도 3천400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전투의 실마리는 ‘백마고지 3용사’가 풀었다. 전투 시작 1주일째인 10월 12일 제30연대 제1대대는 백마고지 9부 능선에 설치된 적 기관총 화력에 피해만 입고 공격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포병이나 공군 화력으로도 제압되지 않았다. 이때 3중대 1소대장 강봉우 소위는 오귀봉, 안영권 하사와 함께 수류탄을 들고 적진지에 뛰어들어 기관총 진지를 폭파하고 자신들도 장렬하게 전사했다. 백마고지는 이후 다시는 적에게 내주지 않았다. 서울 능동어린이공원에 ‘백마고지 삼용사의 상’이 있다.

무명의 봉우리 ‘395고지’가 백마고지로 불린 유래는 명확지 않다. 작전 기간 중 포격에 의하여 산 정상의 수림이 다 쓰러져 버리고 난 뒤 나타난 산의 형태가 마치 누워 있는 백마처럼 보였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종군기자들이 수많은 조명탄 아래로 하얀 낙하산 천에 뒤덮인 산의 지세를 보고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온창일, 279쪽)

  

▲중국 랴오닝성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의 상감령전투 안내문. 중국이 대표적인 승리라고 주장하는 상감령 전투에 대해서는 별도의 코너가 마련되어 있다. 단둥 = 홍진환 기 

 

● 상감령과 저격능선, 삼각고지

 저격능선은 철의 삼각지대 중심부에 자리 잡은 오성산과 인접한 남대천 부근에 솟아오른 해발 580m의 무명능선이다. 저격능선(Sniper Ridge)이라는 명칭은 1951년 10월 중공군 제26군이 이 능선에서 미 제25사단을 저격하였다고 주장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중공군에게는 오성산을 방어하기 위한 중요 관문이었고, 국군 제2사단에는 사단 주저항선을 감시하는 위협요소를 없애고 오성산 공격의 발판이 되는 고지였다.

양측이 방어 전면 약 800m를 두고 6주가량 전투를 벌였다. 미 7사단은 인근의 삼각고지, 국군 2사단은 저격능선을 공격하는 것으로 역할을 분담했다. 중국은 삼각고지와 저격능선을 합쳐 ‘상감령’으로 부른다.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5일까지 한 달 이상 전투 결과 중공군 전사자가 3배 이상이지만 고지는 중공군이 점령한 채로 전투가 끝났다. 중국에서 세계 최강 미국을 상대로 거둔 최대승리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경기 연천의 최전방 포스트인 태풍전망대. 철책 너머 임진강 건너편에 베티고지가 있다. 연천 = 구자룡 기자

 


▲경기도 파주 통일공원의 김만술 소위 흉상. 파주 = 구자룡 기자 

 

● 최후의 혈전, 금성고지와 베티고지 전투

 강원도 화천 북방에서의 금성샛별고지 전투(1953년 7월 13~19일)는 정전 협정 1주일 전에 끝났다. 국군 제2군단이 초기에 금성 돌출부를 상실했지만, 중공군 5개군 15개 사단의 공세를 저지하고 이후 대대적인 반격 작전을 펼쳐 금성을 회복하고 마지막 전투를 승리로 끝냈다. 1주일가량의 전투에서 국군은 1만 4373명(전사 부상 실종 포함), 중공군은 6만 6000여 명의 병력손실을 입었다. 이 전투에서 4km가량 전선을 밀어 올리는 대가치고는 엄청나게 큰 대가를 치렀다.

정전협정 직전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이틀간 벌인 베티고지 전투(7월 15〜16일)는 국군 제1사단의 1개 소대가 중공군 3개 대대 병력과 싸워 고지를 끝까지 사수한 기적 같은 전투였다. 이틀간의 전투에서 적은 314명이 사살된 반면 아군 전사자는 6명에 그쳤다. 소대장 김만술 소위는 한국과 미국에서 최고무공훈장을 받았다.

경기도 연천군 베티고지는 임진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어서 이곳을 뺏기면 휴전선이 10km 이상 남쪽으로 밀려 임진강 남쪽으로 그어질 수도 있었다. 중공군은 15일 오후 5시부터 이튿날 오전 7시 반까지 19차례에 걸쳐 아군 교통호까지 밀고 들어와 총검과 육박전을 벌였다. 베티고지 전투는 영화 ‘격퇴’(1956)와 ‘베티고지의 영웅들’(1980)의 소재가 됐다. 비무장지대 내에 있는 베티고지가 임진강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태풍전망대에서는 매년 호국영령 추도식이 열린다.

 

▲경기도 연천 태풍전망대의 베티고지 참전용사 충용탑. 탑의 3명의 용사는 전투에서 생존한 장병들이다. 연천 = 구자룡 기자

 

참고 문헌

김계동 지음, 『한국전쟁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명인문화사, 2014.
마크 W. 클라크 지음, 김형섭 옮김,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 국제문화출판공사, 1981.
매슈 B. 리지웨이 지음, 박권영 옮김,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플래닛미디어, 2023.
백선엽 지음, 『군과 나』, 서울: 시대정신, 2009.
선즈화(沈志華) 지음, 김동길 옮김, 『조선 전쟁의 재탐구』, 도서출판 선인, 2014.
알렉산더 판초프 지음, 심규호 옮김, 『마오쩌둥 평전』, 민음사, 2017.
온창일 등 지음, 『6·25 전쟁 60대 전투』, 황금알, 2010.
정일화 지음, 『휴전회담과 이승만』, 선한약속, 2014.
터너 조이 지음, 김홍열 옮김, 『공산주의자는 어떻게 협상하는가』, 한국해양전략연구소, 2003.
『정경문화』 이용호, 1983년 7월호

 

[19회] “안전 보장 없는 휴전 없다”

 

중국 랴오닝성 단둥의 항미원조기념관에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의 자서전 ‘댜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 표지가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다. “역사상 처음으로 승리하지 못한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미국 사령관이 됐다”는 구절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전쟁과 파괴적 행동으로 공산측이 더욱 전진해 오는 서곡이 되리라고 확신해 정전 조인을 반대했다’(이승만)

 

‘자유세계와 공산세계의 대결이 끝나지 않는 한 한국의 평화적 재통일은 어렵지 않나하는 염려가 있다’(아이젠하워)

‘사상 처음으로 승리없는 전쟁의 휴전협정에 조인한 미군사령관이 됐다. 패배감을 느꼈다. 조인 후 형언할 수 없는 좌절감에 소리없는 눈물마저 흘렸다’(클라크)

정전협정에 서명하면서 전투가 끝난 안도와 평화에 대한 희망보다는 비감함이 서려있듯 누구도 만족하지 않았지만 협정은 맺어지고 전쟁은 일단 끝났다. 하야를 무릎 쓴 이승만 대통령의 휴전반대 분투와 저항은 ‘한미동맹조약’으로만 멈추게 할 수 있었다.

 

 정전 협상을 벌이고 있는 유엔군측과 공산측. 협상 초기 대표로 참석한 백선엽 장군은 중공군측에 비해 북한측 대표의 표정이 굳어 있었으며 북한 이상조는 한국에 대해 ‘미 제국주의를 추종해 상가집 x보다 못하다’는 욕설이나 끄적이고 있었다고 했다. 

 

● 스탈린 사망으로 고비 넘다

 포로 교환 기준 등을 두고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해 협상에 새로운 전기가 됐다. 3월 15일 소비에트 최고회의는 “현재 분쟁 중이거나 아직 해결되지 않은 모든 문제는 협상 원칙하에서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밝혔다. 말렌코프 정부는 6·25 전쟁 휴전협상의 최대 걸림돌이 되어 온 포로의 무조건 송환 원칙을 고집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포로 문제 등을 빌미로 미군을 한반도에 묶어 유럽에서 외교적 이득을 보려했으나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말렌코프 정부의 정전 선회는 미국이 취할 조치 중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는 분석도 있다. 핵무기 사용 가능성까지 포함한 전쟁에서 승산이 없는 소모적인 상황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현실적인 판단이 작용했다는 것이다.(선즈화, 581쪽) 공산주의자들은 아이젠하워가 원자탄두를 오키나와에 배치하고 이의 사용을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고, 아이젠하워가 국내외로부터 전쟁을 확대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김계동, 373쪽) 일본의 대표적인 한국전쟁 전문가인 와다 하루키는 통설과는 다르게 ‘스탈린인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아 그의 죽음으로 정전협상에 변화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통설은 잘못된 것이다”고 주장했다.(하루키, 537쪽)

 

 중공군 병사들이 정전협정 체결 소식을 들은 뒤 환호하고 있다. 중국 랴오닝성 단둥의 항미원조기념관 전시. 단둥 = 홍진환 기자

   

● 전황 따라 오락가락한 마오쩌둥과 김일성

 마오쩌둥(毛澤東)은 ‘항미원조’를 명분으로 참전한 뒤 38선을 넘고 내려와 서울을 점령할 때는 “미군은 한반도와 대만 해협에서 철수하라”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두 차례의 춘계 대공세(4월 22~30일, 5월 16∼20일)마저 실패로 돌아간 뒤 “싸우면서 담판하고, 담판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장기전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휴전에 소극적이었던 스탈린이 사망하자 마오는 소모전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는 분석이 있다. 3월 11일 스탈린의 장례식 참석차 모스크바에 온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소련 지도부에 정전 협정을 서둘러 달라는 요청을 했고, 소련측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판초프, 551쪽)

김일성은 1951년 5월 마오쩌둥이 6차 대공세 이후 정전으로 선회한 후에도 신속한 승리를 주장하며 6월말에서 7월 중순까지 중조 연합군이 총공격을 개시할 것을 요구했다. 마오가 전쟁 접촉선을 휴전선으로 하는 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자 “차라리 중국인 도움없이 전쟁을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선즈화, 563쪽)

그러던 김일성은 미군기에 의해 북한 주요 도시가 잿더미로 변해가는 상황에서 1952년 이후 마오에게 휴전을 호소했으나 이번에는 마오가 듣지 않았다.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해 제압하겠다고 했다. 중공이 버틸수록 북한은 더욱 황폐화됐다.(정일화, 552쪽)

 

 아이젠하워가 공약대로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해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만났다. 왼쪽부터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이승만 대통령 ,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 그의 아들 존 아이젠하워 소령   

 

● 아이젠하워의 강온 양면 휴전 전략

 1952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명예로운 휴전’을 공약으로 제시한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으로 당선돼 정권이 교체된 것도 협상 진전의 요인으로 꼽힌다. 아이젠하워는 협상에 적극적이면서도 휴전을 위해 세 가지 조치를 취했다. 한국군 증강, 미 제7함대의 대만중립화 해제로 중공에 대한 심리적 압력 가중, 그리고 덜레스 국무장관을 시켜 한국의 교착상태가 지속된다면 핵사용도 불사한다는 위협을 중소 관리 귀에 들어가도록 했다. 힘을 바탕으로 한 강온양면 전술을 구사한 것이다.(이용호, 116쪽)

클라크 사령관은 공산측이 아이젠하워 당선 이후 휴전 협상에 적극 나선데는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 아이젠하워가 미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한국 전쟁에 전력투구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도 갖고 있었다고 보았다.(클라크, 19쪽)

 

 판문점에서 유엔군과 공산측 대표가 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서명 전후 아무런 인사말이나 악수도 없이 각자 서명만 하고 나갔다. 

 

● ‘12분만에 끝난 정전 협정 서명’

 1953년 7월 27일 10시 유엔군 측 수석대표 해리슨과 공산군 측 수석대표 남일은 각자 다른 테이블에 앉아 정전협정에 각각 서명했다. 휴전회담이 시작된 지 159회 만이었다. 한글 영어 중국어로 된 정전협정문 각 6부, 모두 18부에 양측은 각각 12분씩 서명을 마친 후 단 한마디의 인사말 없이 회담장을 떠났다.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오후 1시 문산 극장, 김일성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펑더화이(彭德懷) 중공군사령관은 평양과 개성에서 각각 서명했다. 한국 대표는 협정 서명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협정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이날 밤 10시 모든 전선의 포성이 멎었고 1129일간의 전쟁은 중지되었다.

7월 31일 김일성은 평양에서 중공군 지도부도 초청한 축하 만찬을 열고 훈장도 수여했다. 8월 3일 회창 중공군 사령부에서도 전승축하연이 열렸다. 훙쉐즈 부사령관은 참전명분인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지원하고 가정과 국가를 지켰기 때문’이라고 했다.(훙쉐즈, 439쪽) 침략으로 3년간 한반도가 황폐화되고 한민족에게 큰 상처를 남겼으면서도 미국 등 유엔군이 확전을 자제해 정권을 유지하고 응징당하지 않은 것을 승리로 여기는 그들만의 셈법이었다.


<표> 휴전협정 시기 양측 병력

유엔군 공산군
국군 60만명 북한군 47만명
미군 등 34만명 중공군 135만명
94만명 182만

출처 : 김철수, 274쪽

 

 북한은 정전 협정에 서명한 장소를 ‘평화 박물관’으로 바꿔 보존하고 있다. 협정 서명 당시에는 지웠던 ‘피카소의 비둘기’가 지붕의 삼각형 부분에 새겨져 있다. 출처 영문위키.

 

피카소의 비둘기. 1949년 작품. 출처 영문위키 

 

● 판문점에 웬 피카소의 ‘비둘기’?

 회담 당시 판문점은 초가 서너채만 있는 농촌이었다. 3천평의 터를 닦고 천막을 지어 회의장으로 사용했다. 공산측이 천막을 제공하고 유엔은 전기와 난방시설 공사를 맡았다. 지금의 판문점보다 약 1km 가량 떨어진 곳이다.

협정 조인을 위해 공산측은 회담 장소 북쪽에 강당같은 목조단층 건물을 지었다. 기와지붕 처마밑 삼각형 부분에 피카소의 ‘비둘기’(1949년 작)를 본뜬 두 마리의 비둘기 그림을 그려 넣었다가 유엔군측 항의로 지웠다. 공산주의자를 자처한 피카소의 비둘기로 평화를 애호하는 것처럼 선전하려는 것이었다.

북한은 협정을 조인했던 건물을 ‘평화박물관’으로 바꿔 보존하고 있는데 ‘비둘기’가 있다. 더우기 1976년 도끼 만행 사건 때 사용된 무기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영문 위키)

 

 개성에서 옮겨와 정전 협상 회담을 이어간 판문점 주위가 모두 논밭이다. 전쟁기념관 전시. 

 

● 이승만, ‘미군 철수하면 공산측 다시 쳐들어온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반도가 애치슨 라인 선언으로 미국의 방어선 밖으로 밀려나고 해방후 주둔했던 미 24군단 3개 사단이 전차 한 대 안 남기고 떠나 북한의 남침을 불러왔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1951년 6월 휴전 협상 분위기가 높아지자 북한군의 무장해제와 중국군의 철수 등 조건을 제시하며 휴전 반대 움직임을 본격화했다.

이승만이 휴전을 반대한 것은 휴전 이후 외국 군대의 철수 때문이었다. 중국과 소련은 철수해도 강 하나만 건너면 다시 올 수 있지만 미국은 태평양을 건너가면 전쟁이 발생했을때 다시 군대를 추슬러 올 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큰 피해를 입었는데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전쟁을 중단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승만은 1953년 4월 9일 아이젠하워에 보낸 서신에서 ‘중국군이 한반도에 주둔한 상태로 휴전되면 한국 정부는 압록강까지 진격하지 않는 동맹국 군대의 철수를 요구할 것이라며 미군도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며칠 후에는 “중국군의 주둔을 허용하는 협정을 맺으면 한국군을 유엔지휘권에서 철수시켜 단독으로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했다.

클라크가 한국군의 작전권 이양 약속을 어기고 단독 행동을 하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설득했으나 ‘자살을 의미한다고 해도 국군을 싸움을 계속하고 자신이 직접 지휘하겠다’고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클라크, 460쪽)

 

 판문점의 황량한 들판에 정전 협상을 위해 설치된 천막과 양측의 경비병들.

 

 현재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정전 협정 당시의 협상 장소는 현 위치에서 1km 가량 떨어진 곳이다. 뒤로 보이는 건물은 북한의 판문각.

 

● 이승만 하야 작전 ‘에버레디 계획’

 스탈린 사후 휴전회담은 1953년 6월 8일 ‘포로의 자발적 송환에 입각한 중립국 송환위원단 관련 협정’ 체결까지 순조롭게 진행됐다. 이에 함께 이승만의 휴전 반대도 더욱 거세졌다. 국군이 독자 행동을 하겠다는 것에서 나아가 포로수용소의 공산포로 석방 엄포까지 점차 수위가 높아졌다. 이승만의 강경 자세를 꺽고 설득하기 어렵다고 본 미국은 유엔사령부에 의해 주도되는 ‘에버레디 계획(Plan EverReady)’을 세웠다.

이는 이승만의 반대 속에 정전협정이 타결됐을 때 ① 한국군이 유엔군의 지시를 듣지 않거나 ② 독자 행동을 하거나 ③ 유엔군에 공공연하게 적대적이 되는 경우에 대비한 유엔군의 행동 계획이다. 유엔의 이름으로 계엄을 선포하고, 불복종하는 한국의 군부 및 민간 지도자를 감금한 뒤 유엔군 군정을 실시한다는 것이 골자다. 체포 대상 민간 지도자에는 이승만 대통령도 포함된다. 유엔사령부 이름으로 계엄을 선포하고 군부 또는 민간 지도자 중 명령 불복하는 자들을 감금하며, 유엔사에 의한 군사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남시욱, 66쪽)

이는 1952년 7월 부산정치파동 당시 클라크 사령관이 입안했다가 여야 타협으로 발췌개헌안이 통과돼 실행하지 못한 ‘이승만 정부 전복 계획’을 보완한 것이다.

미 국무부는 “우리 자신을 침략자의 위치로 전락시키는 것”이라며 대신 방위조약을 체결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냈다. 결국 아이젠하워는 5월 30일 미국·필리핀 방위조약이나 호주 뉴질랜드와 맺은 엔저스(ANZUS) 조약과 유사한 조약을 맺는 것으로 이승만 달래기에 나서면서 이승만 하야 계획에서는 물러섰다.

 

부산 서구 임시수도기념로의 ‘임시수도 대통령관저’.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발발 2개월 가량 후인 8월 18일부터 정전 협정으로 서울로 돌아가기 전까지 이곳에서 집무를 보았다. 이곳은 1920년대 일제하에서 경남지사의 관저로 지어진 건물이다. 부산 = 구자룡 기자 

 

● 이승만의 초강수, 반공포로 석방

 휴전협정 체결이 진전되면서 한국내 휴전 반대 분위기도 높아졌다.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국회는 129대 0으로 반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급기야 이승만은 6월 18일 반공포로를 예고없이 석방했다. 부산 거제 등 전국 수용소에서 그야말로 한 밤중에 대탈주가 벌어졌다. 3만 5천여명의 반공포로 중 2만7388명이 4일에 걸쳐 석방됐다. 연초부터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을 시켜 은밀히 포로석방계획을 준비하다 결행한 것이다. 반공포로 석방 과정에서 포로 56명이 사망하고 81명이 부상했다. 아이젠하워는 유엔사령부의 권위에 도전하는 공개된 무력행사라고 비판하면서 군대를 한국에서 철수할 상황이 올 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클라크는 휴전 협정 체결이 막바지에 이른 상황에서 나온 반공포로 석방에 당혹해 하면서도 한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고 자세히 기록했다. 국민들이 탈출한 포로들을 모두 숨겨주고 음식과 술 담배를 제공하는가 하면 한국 경찰들은 탈출한 포로를 검거하려는 미국 병사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경계를 했다는 것이다.(클라크, 467쪽)

반공포로 석방은 공산측이 유엔군 포로를 석방하지 않고 맞대응하면 협상을 파탄낼 수도 있는 빌미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협상은 더 이상 궤도에서 이탈하지는 않았다. 반공포로 석방을 유엔군사령부와 한국이 공모했다고 공격하고 유엔군이 한국군을 통제할 수 있는지 문제 삼았지만 협상 열차를 멈추게는 하지 않았다.

 

 부산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의 집무실의 이승만 대통령. 문뜩 방문을 지나다 보면 실제로 앉아있는 느낌을 줄 정도로 생생하고 자연스런 모습이다. 부산 = 구자룡 기자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왼쪽에서 두 번째). 출처 영문위키. 

 

● 클라크의 이승만 존경

 거제포로수용소에서 공산 포로들이 도드 포로수용소장을 억류한 날인 1952년 7월 5일 유엔군사령관으로 도쿄에 부임한 클라크 사령관의 가장 큰 임무는 휴전 협상의 마무리였다. 협상은 공산측의 갖은 잔꾀와 선전술, 터무니없는 지연작전 등으로 진행이 더뎠지만 넘어야 할 또 하나의 큰 관문은 ‘이승만과 한국 국민의 반대’였다.

미군 사령관으로서 워싱턴의 지시와 훈령을 받아 협상을 진행시켜야 할 임무를 띤 클라크였지만 이승만과 한국민의 휴전 반대 심정과 논리를 누구보다 이해하고 마음으로는 동조했다. 그의 자서전에는 이승만을 존경하는 마음이 곳곳에 묻어있다.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불신, 압록강 북쪽에 중공군의 병참기지를 손보지 않고는 승리할 수 없다는 맥아더의 확전론을 확고히 지지하는 것도 이승만과 결이 같았다.

클라크는 ‘이승만은 한국의 조지 워싱턴’이라며 아시아 모든 비공산 국가들의 뿌리깊은 안전 보장에 대한 열망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지도자라고 했다. 이승만은 한국 전쟁을 통해 장제스(蔣介石) 총통과 인도 네루 수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대한 지도자로 부상한 ‘아시아의 별’이라고도 했다(클라크, 272쪽) 클라크는 “역사는 앞으로 이승만이 한국 전쟁에서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것이 휴전을 앞세운 미국의 주장보다 더 정당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다.(클라크, 19쪽)

 

 월터 로버트슨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왼쪽)가 정전 협정 서명 한 달여를 앞둔 6월 25일 서울에 도착해 이승만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 10대 강국의 초석 ‘한미동맹조약’

 미국은 이승만이 가장 우려하는 휴전 후의 안보우려를 해소하기 위한 ‘동맹 협상’, 이른바 ‘소 휴전회담’을 통해 이승만의 반대가 장애가 되지 않고 휴전회담이 무사히 마무리되도록 했다. 휴전 협정 서명 한달여 전인 6월 25일 서울에 도착한 로버트슨 국무부 차관보는 7월 12일 출국하기 전까지 한국에 머물며 12차례에 걸쳐 주로 이승만 대통령과의 담판을 통해 협상을 벌였다.

이승만이 휴전에 동의하면서 얻어낸 합의사항은 △상호방위조약 체결 △2억 달러 제공 및 장기 경제원조 △한국군 40개 사단 증강 등이었다.

클라크는 공산측의 침략이 있을 경우 미국이 다시 오는 내용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미군 배치 및 전략에 관한 계획(JOEWP)’에 맞지 않는다며 반대했었다. 트루먼 후임으로 당선된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한미간 상호방위조약은 유엔이 비효율적인 기구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며 조약 체결에 부정적이었다. 한미간에 조약이 체결되면 일부 참전국이 군사 개입을 축소하려 할 것이라는 등의 이유를 들기도 했다. 베트남은 휴전협정을 맺고 2년 뒤 공산화됐다. 이승만은 ‘협정’이 종이조각에 그치지 않는 안보 방패막이로 만들면서 비로소 휴전 반대를 접었다.

덜레스 국무장관은 휴전협정 체결 후인 8월 방한해 “조약은 한국이 공격을 받으면 홀로 있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록할 것이며 적에게 미국이 할 일을 할 것이라는 명백한 통고를 하는 것”이라고 10월 1일 체결될 조약의 취지를 설명했다. 이는 조약에서 “외부의 무력 공격에 대한 공동의 방위 결의를 공개적이고 정식으로 선언해 어떤 잠재적 침략자도 당사국 중 어느 한 국가가 고립하여 있다는 환각을 갖지 못하게 한다”고 조항으로 명문화됐다. 조약은 이듬해 11월 비준서 교환으로 발효됐다. 6·25 전쟁 이후 한강의 기적과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발돋움 한데는 한미동맹이라는 안보 울타리가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조이 제독이 지적한 공산주의자들의 협상 전술과 협상 요령

 터너 조이 제독. 출처 영문위키

 

● 공산주의자들의 협상 전술

 ➀회담에 유리한 장소 선정과 분위기 조성
➁장기 담판에 대비 계급보다 능력위주의 회담 대표단 구성
➂원하는 결론으로 가도록 속임수가 있는 의제 설정
➃협상에 유리한 사건을 중간에 모의하고 촉발시킴
➄지연전술로 상대의 조급증 유도, 서방의 인도주의 악용
➅약속 후 검증을 거부하는 방법 모색
➆협정 실행 중 ‘거부권’ 확보해 필요시 이행 회피
➇‘가짜 쟁점’ 끼워 넣어 다른 목적 확보용으로 거래
➈부력(浮力)있는 진실은 부인보다 왜곡 선호
➉상대가 양보하면 약점으로 알고 더욱 강한 요구
⑪불리한 합의는 자의적 해석으로 부인 회피
⑫같은 요구 되풀이해 피로하게 함
 

 

● 공산주의자와의 협상 요령

 ①정전을 요청해도 압력을 낮추지 마라
②회담 시한을 설정해 지연전술에 끌려가지 말아야 한다
③회담 장소를 결정하게 하면 오만해진다
④회담 제안에 서둘러 응하지 마라
⑤최고의 협상팀을 구성하라
⑥일방적 양보 아닌 댓가를 받아내라
⑦서두르지 마라
⑧의제에 함정이 있는지 살펴라
⑨말을 많이하면 표적만 제공한다
⑩목적을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정해놓고 회담해야 한다
⑪전쟁 피하려면 전쟁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⑫협상할 때는 힘을 배경으로 하지말고 사용해야 한다

출처 : ‘공산주의자는 어떻게 협상하는가’

 

<참고 문헌>

김철수 지음, 『그 때는 전쟁, 지금은 휴전 6·25』, 플래닛 미디어, 2017.
김계동 지음, 『한국전쟁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명인문화사, 2014.
남시욱 지음, 『한미동맹의 탄생 비화』, 청미디어, 2020.
마크 W. 클라크 지음, 김형섭 옮김,『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국제문화출판공사, 1981.
선즈화(沈志華) 지음, 김동길 옮김,『조선 전쟁의 재탐구』, 도서출판 선인, 2014.
알렉산더 판초프 지음, 심규호 옮김,『마오쩌둥 평전』, 민음사, 2017.
와다 하루키 지음, 남상구 조윤수 옮김, 『한국전쟁 전사』, 청아출판사, 2023.
정일화 지음, 『휴전회담과 이승만』, 선한약속, 2014.
훙쉐즈(洪學智) 지음, 홍인표 옮김, 『중국이 본 한국전쟁』, 한국학술정보, 2008.
『정경문화』 이용호, 1983년 7월호

 

2023-08-16

[20회]상처투성이 정전협정 70년

▲강화도를 지나 교동도의 대룡시장 교동이발관. 바다 건너 황해도 연백군에서 건너온 6·25 전쟁 피란민 1세대 지모 씨가 60여년 자리를 지켰던 곳이다. 자손들이 술빵 등 다양한 음식을 팔지만 이발관 간판은 그대로 두고 있다. 교동도 = 구자룡 기자

 

▲교동도 대룡시장에는 황해도 연백군에서 온 피란민들이 하는 가게들이 있어 간판이나 메뉴에 ‘연백’이 들어간 곳이 종종 눈에 띈다. 교동도 = 구자룡 기자

 

● 교동도의 분단과 휴전의 상처

강화도에서 교동대교를 건너면 나타나는 교동도(喬桐島)의 대룡시장. 과거가 마치 영화세트장처럼 남아 분단과 휴전의 흔적을 보여주는 곳이다. 38선으로 남북이 분단될 때 황해도 연백군(현재는 연안군과 배천군)의 남쪽은 경기도에 편입됐지만 1953년 7월 휴전 이후 북한 땅으로 남았다. 피란 온 3만여 명의 연백군 주민들은 돌아가지 못하고 고향 연백시장을 본떠 전통시장 거리를 조성했다.

단층 가게와 좁고 굽은 골목, 이발관 다방 과잣집 등의 예스러운 간판 중에 ‘황해도 연백차떡’ ‘연백 강아지떡’처럼 고향인 연백을 넣은 것도 종종 눈에 띈다. ‘교동 이발관’은 피란민 1세대인 지모 씨가 1950년 전쟁 발발 직후 내려와 60여년 같은 장소에서 일했던 곳으로 지금은 자손들이 간판은 그대로 두고 술빵과 국수 등을 팔고 있다.

 

▲교동도의 유격군 충혼 전적비. 교동도 = 구자룡 기자

 

교동도 인사리의 북진나루에서 북한 황해남도 호동면까지는 불과 2.6km. 북쪽 해안에서 육안으로도 북한 땅이 보인다. 보이지 않는 바다의 경계선이 교동도를 남한 속의 북한 땅으로 만들었다. 북한 해안을 마주 보는 고구리 해안에는 ‘UN8240 을지 타이거 여단 충혼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충혼탑에는 ‘군번도 계급도 없는 육군 을지 제2병단과 유격군 8240부대 타이거 여단 이름의 방공 유격대 용사들의 넋이 잠들어 있다’고 씌어 있다. 섬 곳곳에는 방공 대피소가 있다. 1990년대 후반에는 북한에서 군인이나 주민이 바다를 헤엄쳐 넘어와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 철조망도 쳐 있다. 서해에서 전쟁의 상처를 간직한 분단의 최전선이다.

 

▲교동도 북쪽에서 바라본 북한. 바다건너 과거 연백군은 가까운 곳은 불과 2.6km에 불과해 날이 맑으면 훤히 바라보인다. 철조망은 북한 주민이 헤엄쳐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교동도 = 구자룡 기자

 

 

● 교동도의 분단과 휴전의 상처

교동도 북쪽 해안을 지나는 NLL은 휴전협정 서명 한 달가량 지난 8월 30일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해상에서의 정전협정 관리를 위해 설정한 것이다. 휴전협정 당시 육상 군사분계선은 설정됐지만 해상경계선은 별도의 협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엔군사령부는 구체적인 내용을 즉시 북측에 통보했다.(남도현, 374쪽)

NLL은 우리 군의 해양 작전 북방한계선을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의 서해 5개 섬과 북측 관할 옹진반도의 중간지점으로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1972년까지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 11조는 ‘남과 북의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은 1953년 7월 27일 자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해 온 구역으로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는 서해의 말도를 시작으로 12개의 좌표를 표시해 놓고 오랜 기간 관리해왔다.

육상 군사분계선 설정 원칙은 협상 체결 당시의 전투경계선이었다. 해양에서도 NLL 설정 당시 아군이 장악하고 있던 도서와 바다를 연결해 분계선을 긋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다 북한은 육상 전력에 비해 해군력은 약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NLL은 남한 해군이 이 선을 넘어 북쪽으로 가지 않겠다는 통보였다. NLL 설정 당시 NLL 북쪽의 서해와 동해에는 국군이 상당수 섬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엔군사령관이 한국군에 제시한 제한이었다.

NLL 설정으로 해병대가 피와 땀으로 차지했던 옹진반도 북서쪽의 초도와 석도, 원산 앞바다의 여도 명도 등 전략적 요충의 섬들이 NLL 북쪽에 있다는 이유로 북한에 내주게 됐다. 그럼에도 북한이 뒤늦게 시비를 걸고 나온 데는 휴전협상에서 합의 문서로 해양한계선을 명확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전 70년이 되었으나 분쟁과 갈등의 ‘휴화산’처럼 남아있다.(남도현, 391쪽)

 

▲경기도 파주 임진각의 제3 땅굴 조형물. 파주 = 구자룡 기자

 

▲경기도 파주 임진각 제3 땅굴 도보관람로. 북한이 파내려 오다 중단한 곳까지 358m 경사로를 안전모를 쓰고 걸어들어간다. 유료 모노레일을 타고 들어갈 수도 있다. 파주 = 구자룡 기자

 

▲강원도 양구의 제4땅굴 앞에 관람객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다.

 

● 중공군에 배운 땅굴, 휴전선 침투 ‘두더지 작전’

“여러분은 북한이 정전협정을 위반한 명백한 증거를 보게 될 것입니다.” 임진각을 찾는 관광객들이 도라전망대와 함께 찾는 3호 땅굴을 안내하는 가이드가 외국인들에게 설명하는 말이다. 6월 찾아가 본 3호 땅굴 전시관의 설명 자료에는 높이가 2m지만 일반에 개방된 ‘도보 관람로’의 땅굴은 높이가 1m 남짓에 불과했다. 천장이 모두 바위여서 성인은 허리를 구부리고 걸어야 하고 안전모를 착용하지 않으면 큰 부상을 입을 수 있다. 중공군은 유엔군의 포격과 공중 폭격 등 화력을 피하기 위해 땅굴을 팠으나 북한군은 휴전선을 지하로 침투하기 위해 두더지 작전을 펴다 발각된 것이다.

 

4개 북한 땅굴 비교

  1호 2호 3호 4호
발견시기 1974년 11월15일 1975년 3월19일 1978년 10월17일 1990년 3월3일
위치 경기 연천 고랑포 동북방 8km 강원 철원 북방 13km 경기 파주 판문점 남방 4km, 서울에서 52km 경기도 양구 동북방 26km 비무장지대
제원 지하 25~45m, 폭 0.9m, 높이 1.2m 지하 50m, 폭 2.2m, 높이 2m, 길이 3500m 지하 73m, 폭 2m, 높이 2m, 길이 1,635m 지하 145m, 폭과 높이 1.7m, 길이 2,052m
특이점 레일 3.5km와 궤도차 설치 ·지하 폭음소리로 지하수 개발용 시추장비 투입해 발견 ·탐사 중 지하수 분출로 발견 북한 남한 굴착 억지. 폭약 장치 방향, 남고북저의 배수로 경사 등으로 북측 굴착 확인
·남측 출구 3방향, 시간당 3만 명 병력과 야포 차량 이동 가능 ·남쪽에 3갈래 출구, 시간당 3만 명 이동 가능

▲출처 : 파주 DMZ 전시관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당시의 모습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당시 미군 장교 2명이 희생된 미루나무가 있던 곳에 세워진 표지석.

 

● 협정이 무색한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1976년 8월 18일 오전 11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의 남쪽 초소를 가리는 미루나무의 가지치기를 지휘하던 유엔군 소속 미군 아서 조지 보나파스 대위와 마크 토머스 배럿 중위가 갑자기 달려든 북한 병사들에게 도끼로 머리를 맞아 후송 중 사망했다. 북한 병사 30여명의 무차별 공격으로 한국과 미국 장병 9명이 부상했다.

미군은 미루나무를 밑동에서부터 잘라버리는 ‘폴 버니언’ 작전을 벌였다. 북한의 반발에 대비해 미국은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F-111 전투기 20대, B-52 전폭기 3대, F-4 팬텀 전투기 24대가 출동했고, 제7함대 항공모함 미드웨이를 동해로 보냈다. 한국 특전사는 북한 초소 4곳을 초토화했다. 유엔 측 경비대대 캠프 이름도 ‘캠프 보나파스’로 바꿨다. 사건 후 충돌을 막기 위해 공동경비구역(JSA) 내부에 남북 경계선이 그어졌다.

 

▲긴장과 정적이 흐르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정전 협정으로 군사분계선을 따라 이런 표지주가 약 200m 간격으로 1292개가 설치됐다.

 

● 누더기가 된 정전협정

2022년 12월 북한 무인기 5대가 사흘간 서울과 경기 인천 상공을 휘젓고 돌아갔다. 국군은 자위권 차원에서 무인기 ‘송골매’ 2대를 군사분계선 북쪽 5km 상공까지 올려보냈다고 밝혔다. 유엔사령부는 “남북 무인기 모두 정전협정 위반”이라고 했다. 정전협정은 체결 70년을 맞은 오늘도 끊임없이 위반 논란을 빚고 있다.

정전협정에 따라 양측은 1953년 7월 30일 임진강 하구에서 동해안의 감호에 이르는 155마일(약 248km) 휴전선을 경계로 남북방 약 2km 폭의 비무장지대(DMZ)에서 군사력 철수를 마쳤다. 8월 2일에는 서해 5도 이외 동해안과 서해안의 DMZ 이북 도서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모두 돌아왔다.

군사분계선을 따라 남북 경계를 나타내는 표지주가 약 200m 간격으로 1292개가 설치됐다. DMZ 내에서는 어떠한 적대행위도 허용되지 않으며 군사정전위 허가 없는 인원 출입도 금지됐다.

전쟁 3년, 협상 2년이 걸려 가까스로 맺어진 정전협정. 군사분계선과 DMZ를 두고 정화(停火·총격을 멈춤)를 보장하며 정전을 유지 관리하기 위한 군사정전위, 중립국감독위를 설치 운영하기로 했다. 하지만 크고 작은 총격 포격 폭침 항공기 테러 등 무력도발이 계속됐다. 군사정전위가 관할하는 ‘남북한에 새로운 무기를 들여와서는 안 되며 기존 무기 교체도 1:1로 해야 한다’(협정 2조 13항) 등 많은 조항은 사문화됐다.

중립국감독위 4개국 중 2개국은 북한 쪽이 폴란드와 체코를 지명했다. 탈냉전 후 북한이 지명한 공산국가들이 자유진영으로 돌아오자 북한은 두 국가 대표를 추방해 중감위 활동이 무력화됐다. 심지어 북한은 2013년 3월 한미연합훈련을 빌미로 협정의 전면 백지화를 선언했다. 일방의 선언만으로 폐지되지는 않지만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 고도화 시기에 재래식 무기의 증강과 충돌을 막기 위한 협정은 수명을 다했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휴전선과 DMZ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유엔사가 관리하는 협정을 통해 한반도에서 무력 충돌이 빚어지지 않고 평화가 유지되어 왔다는 평가가 많다.(‘2023년 정전협정 및 한미동맹 70주년 학술회의’ 자료집, 42쪽)

국방부에 따르면 정전협정 체결 이후 70년 동안 한국군 4268명, 미군 92명 등 모두 4360명이 무장 충돌 등으로 전사했다. 연평도 포격이나 천안함 폭침 등도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대규모 무력 충돌은 없었고 전쟁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피와 희생으로 정전이 유지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경기 파주군 적성면의 북한군 중국군 묘지. 초기의 봉분은 평면 표지석으로 바뀌었다. 파주 = 구자룡 기자

 

▲신원이 확인된 중국군 유해는 모두 중국으로 송환됐다. 신원이 확인 안 된 중국군 일부가 ‘무명인’으로 남아있다. 파주 = 구자룡 기자

 

▲경기 파주군 북한군 중국군 묘지 안내판. 관리가 안 돼 간판이 깨지고 너덜너덜해졌다. 파주 = 구자룡 기자

 

● ‘적군 묘지’와 유해 송환

정전 70년을 하루 앞둔 7월 26일 6·25 전쟁 국군 전사자 유해 7위가 73년 만에 하와이에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유일하게 신원이 확인된 고 최임락 일병은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했다. 북한이 수습해 1995년 미국으로 송환했다.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미 해군 최초의 흑인 비행사 제스 브라운의 동료 비행사 톰 허드너는 북한 당국의 안내로 장진호에서 브라운의 유해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남방한계선 남쪽 5km 경기 파주 적성면의 ‘북한군과 중국군 묘지(적군 묘지)’에는 6·25 전쟁 사망하거나 그 후 무장공비 등 109구의 북한군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묘지 방향이 임진강 건너 북녘땅을 바라보게 배치되어 있다. 돌아가지 못한 고향 땅을 죽어서라도 바라볼 수 있게 배려한 것이라고 한다.(문관현, 362쪽)

제2 묘역에 안장됐던 중공군 유해 541구는 2014~6년 3차례에 걸쳐 본국으로 송환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6월 중국 방문 중 중공군 유해 송환 의사를 밝혀 이듬해부터 중국으로 보내졌다. 중국은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에 ‘항미원조 열사능원’을 조성해 안장했다.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송환됐으나 횡성지구 전투 등에서 수습된 ‘무명인’ 유해는 몇 구가 그대로 남아있다. 북한군과 중국군 모두 초기에 조성했던 봉분은 모두 없어지고 평면 대리석 표지석으로 바뀌었다. 적군묘지 조성은 적군이라도 사망했을 경우 매장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제네바 협정 추가의정서 34조에 따른 조치다. 정전 70년의 세월 속에 전사자에 대한 상호간 예우는 지켜지고 있는 모습이다.

 

경북 칠곡 다부동 전적기념관의 ‘끝나지 않은 전쟁’ 안내문. 정전 협정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협정을 위반해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칠곡 = 구자룡 기자

 

▲북한은 정전 70년을 맞은 2023년 6월 25일 심야에서 ‘전승절’ 대규모 야간 열병식을 개최했다.

 

● ‘끝나지 않은 전쟁’

다부동 전적기념관 내부 전시의 마지막 항목이 나가려는 발길을 잡았다. ‘끝나지 않은 전쟁’이었다. 4차례 땅굴 굴착, 울진 삼척과 강을 잠수함 무장공비, KAL 858 폭파 등 테러가 있었다. 연평해전과 천안함 폭침 그리고 연평도 포격 등은 ‘전쟁 도발’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6차례의 핵실험이다.

북한은 정전 70년을 맞은 6월 27일 밤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괴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불리는 화성-17호와 화성-18호 등을 과시하는 대규모 야간 열병식을 가졌다. 여기에는 중국 리훙중(李鴻忠)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 부위원장과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도 참석했다.

이날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유엔군 참전의 날·정전협정 70주년 기념식’이 열린 부산 ‘영화의 전당’은 6·25 전쟁에 처음 파병된 미 지상군 24사단 스미스 특수임무대대가 처음 도착한 곳이다. 한반도의 안보 시계는 마치 70년 전으로 시계를 되돌린 듯해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곧 끝날 것 같지도 않은 것이 엄중한 현실이다.

 

한·미·중, 영화 속의 6·25

▲영화 상감령 포스터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이 미국을 방문한 2011년 1월 19일 백악관에서 국빈만찬이 열렸을 때 중국의 피아니스트 랑랑(郞朗)이 ‘나의 조국’이라는 곡을 연주했다. 이 노래는 중국이 1956년 마오쩌둥(毛澤東)의 지시로 제작한 영화 ‘상감령’의 주제곡. 중국에서는 국가와 비슷하게 여기는 곡이다. 2008년 ‘중화부흥’을 주제로 한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가장 먼저 울려 퍼진 곡이다.

1952년 10월 강원도 철원의 삼각고지와 저격능선 부근에서 있었던 상감령 전투는 중공군이 6·25 전쟁에서 세계 최강 미군을 상대로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전투다. 가사는 어떤가. ‘승냥이와 이리가 침략해오면(若是那豺狼來了), 엽총으로 맞이할 것이네(迎接的有獵槍)’ ‘승냥이와 이리’는 물론 미군이다. 많은 미국인들은 가사의 의미를 모르고 곡조만 들었을 것이다. 요즘 같은 미중 갈등 시대라면 백악관에서 연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천상륙작전

 

● 한국, 영화로 되살아나는 6·25

‘인천상륙작전’(2016)은 해군 첩보부대와 켈로부대(KLO)가 상륙작전 직전 인천에서 기뢰 부설 등을 포함한 북한의 정보를 수집해 유엔군에 전달하고 인천상륙작전 당시에는 팔미도의 등대를 밝히는 과정에서 다수의 대원들이 희생되는 내용이다. ‘국제시장’(2014)은 흥남철수부터 베트남 전쟁 파병까지 한국군이 치렀던 두 개의 전투가 모두 배경으로 등장한다.


영화 ‘고지전’(2011)은 정전협정 발효 순간까지 최후의 전투를 벌였던 상황을 가상의 애륵고지 쟁탈전을 통해 보여준다. 정전협상이 타결됐다는 소식에 기뻐하면서도 발효까지 아직 12시간 이상 최후의 전투를 벌여야 하는 현실에 절망하는 장면들이 긴 잔영을 남긴다.

 

▲포화속으로

 

‘포화속으로’(2010)는 1950년 8월 11일 학도병 71명이 포항여중(현 포항여고)에서 북한군과 싸우다 옥쇄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 ‘장사리-잊혀진 영웅들’(2019)도 인천상륙작전이 있던 날 양동 작전을 위해 영덕 장사리 해안으로 상륙작전을 펴다 많은 인명피해를 입었던 학도병 부대인 ‘명부대’의 활약과 희생을 소재로 했다. 1977년에도 ‘학도의용군’이 개봉됐다.

 

▲태극기 휘날리며

 

‘태극기 휘날리며’(2005)는 전쟁 발발부터 휴전까지 3년의 전쟁 기간을 한 형제의 궤적을 중심으로 전개한다. 낙동강방어선을 포함한 주요 전투들이 두루 나오고 길거리에서 모병관에 의해 학도병이 충원되고, 형제가 북한과 남한 군대로 갈라서게 되는 등 전쟁의 여러 측면을 담아 ‘6·25 전쟁 종합판’이다.

 

▲웰컴투 동막골

 

‘웰컴투 동막골’(2005)는 산간 오지 동막골에 불시착한 미군 조종사와 우연히 이곳을 지나게 된 3명의 인민군, 2명의 국군이 벌이는 에피소드를 다룬다. 정전 협정 체결 직전 마지막 전투였던 베티고지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로는 ‘베티 고지의 영웅들’(1980), ‘격퇴’(1956)가 있다.

 

▲전장과 여교사

 

‘전장과 여교사’(1966)는 개전 직후인 7월 초 6사단 7연대가 북한군 15사단을 격파한 ‘동락리 전투’를 소재로 했다. 당시 동락초 김재옥 교사가 국군에게 북한군의 동향을 알려 전투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빨간 마후라’(1964)는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배우의 전성기에 만들어진 영화로 공군을 소재로 했다. 1952년 경남 사천기지에서 강으로 이동한 제10전투비행단 소속 조종사 9명의 활약을 담았다. 주인공인 편대장 나관중 소령은 6·25 전쟁 중 203회 출격 기록을 세운 공군 조종사 유치곤 장군을 모델로 했다.(김용호, 162쪽)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을 탈환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시가전 등을 담았다.

‘5인의 해병’(1961)은 귀신 잡는 해병의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전쟁영화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고 한다. 통영과 인천상륙작전 등과 함께 해병대의 ‘5대 대첩’으로 불리는 강원도 양구의 도솔산지구 전투(1951년 6월)와 김일성고지 전투(1951년 8월) 등이 배경이 됐을 것이라는 관측이다.(김용호, 147쪽)

백선엽장군기념사업회 등은 백선엽 장군의 다부동 전투 등을 다룬 영화 ‘나를 쏴라’(가칭) 제작을 추진 중이다.

 

▲디보션

 

● 미국, 장진호 영화만 몇 편

미국에서 오랫동안 한국전쟁은 인기도 없고 잊힌 전쟁이었다. 그런 탓에 할리우드 제국을 거느린 미국에서 6·25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도 거의 없다. ‘도라 도라 도라’(1970),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 ‘미드웨이’(2019) 등 2차 대전을 소재로 한 대작들이 잇따라 나오는 것과 대비된다. 다만 혹한과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성공적인 철수를 했다고 자부하는 장진호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가 눈에 띈다.

‘디보션’(2022)은 장진호 전투에 공중 지원에 나섰다가 비상 착륙한 뒤 사망한 해군 첫 흑인 조종사 제시 브라운을 소재로 했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 나온 ‘장진호 전투’(1952년)의 원제는 ‘후퇴는 무슨!(Retreat hell!)’이다. 장진호 전투에서 흥남으로 철수한 미 해병대 장교가 자신들은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후방으로 전진하는 작전을 펴고 있다며 한 말에서 따왔다. ‘싸우는 젊은이들’(1961)도 장진호 전투에서 벌어진 해병대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평생 들어보지 못했고 처음 와보는 곳에서 치러야만 했던 미군들의 희생을 그리고 있다.(김용호, 126쪽)

1962년 제작된 ‘맨츄리안 캔디데이트’는 미군 포로가 중공군 포로수용소에서 미국 대통령 후보를 암살하도록 세뇌를 당해 공산주의자의 조종을 받는 암살 기계가 된다는 내용이다. 1959년 리처드 콘든의 소설 ‘만주가 만든 대통령 후보’를 원작으로 한 것이다.

 

▲장진수문교

 

● 중국, 애국심 고취 영화 제작 잇따라

중국에서는 미중 갈등 속에 애국심을 높이기 위해 미국과 적이 되어 싸웠던 ‘항미원조’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 제작이 잇따르고 있다.

‘장진호’(2021년)는 미중 갈등 속에서 애국심에 편승해 많은 중국인들이 관람했다. 중국은 병사들의 희생과 영웅 정신을 그린 것으로 혹한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국을 퇴각시켰다고 선전한다. ‘장진호 수문교’(2022)도 장진호에서 흥남으로 철수할 때 지나야 하는 황초령의 수문교 쟁탈전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1953 금성대전투’(2020년·원제 금강천)는 정전협정 체결을 앞둔 1953년 7월 강원도 화천 북쪽에서 벌어진 금성전투를 배경으로 한다. 미군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등 중공군의 참전을 정당화하는 전형적인 선전물 영화다. 영상물등급심의위원회에서 ‘15세 이상 관람가’ 판정을 받아 국내 수입이 추진되자 여론이 악화돼 수입사가 상영을 철회했다.

중국 관영 중앙(CC)TV가 40부작 드라마로 방영했던 중공군의 참전 과정을 영화 ‘압록강을 건너다’도 같은 이름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참고문헌>

남도현 지음, 『6·25, 끝나지 않은 전쟁』, 플래닛미디어, 2010.
문관현 지음, 『임진스카웃』, 정음서원,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