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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동아일보) 2023-07/ 07-01(토) 문 닫는 1호 탄광, 저무는 연탄 시대 - 07-31(월) 일본은행의 조용한 변심… 무제한 돈 풀기 끝났나

상림은내고향 2023. 7. 27. 11:34

횡설수설(동아일보) 2023-07/

07-01(토) 문 닫는 1호 탄광, 저무는 연탄 시대

 

소설가 박민규는 새벽마다 곤한 잠을 뿌리치고 연탄불 갈러 나가던 어머니를 생각했다. 서울서 오빠와 자취하던 신경숙은 저녁마다 불붙은 연탄을 사러 긴 줄을 서면 ‘일하랴 학교 다니랴 애쓴다’며 맨 먼저 챙겨주던 구멍가게 아저씨를 떠올렸다. 연탄배달 하다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들켜 도망치던 골목길을 회상한 출판인도 있다. 명사 24명이 쓴 에세이집 ‘연탄’은 서민과 애환을 함께해 온 ‘국민 연료’의 추억을 일깨운다. 국내 1호 탄광 화순광업소가 30일 폐광한 데 이어 광주·전남 지역의 마지막 남은 연탄공장인 ‘남선연탄’이 곧 문을 닫는다.

▷연탄 때는 집이 대세가 된 건 1960년대다. 산림녹화 5개년 계획으로 벌목이 금지되고 연탄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땅속 무연탄을 캐다 기계에 넣고 찍어 내면 되니 값이 쌌다. 하루 두세 번 갈아주면 방은 하루 종일 따뜻했고 무연탄이라 연기도 나지 않았다. 여성들은 연탄 덕분에 부엌 아궁이에 쪼그리고 앉아 불 때고 요리하는 노동에서 해방됐다. 1960년대 후반엔 연탄공장이 서울에만 150개, 전국엔 400개가 넘었다.

▷그래도 수요를 대기 어려웠다. ‘김장은 못 해도 굶어죽지 않지만 연탄은 없으면 얼어 죽는다’며 집집마다 연탄을 쟁여두던 시절이다. 통행금지 시간에도 연탄 수송은 예외를 인정받았다. 한파가 몰아친 60년대와 석유파동 이후인 70년대 ‘연탄 파동’이 닥치자 대통령은 “장관직 내놓을 각오하라”며 닦달했다. 당시 동아방송 연말 ‘10대 뉴스 맞히기’ 공모전의 1등 상품이 연탄 1000장이었다.

 

▷‘아궁이 혁명’을 일으킨 연탄 시대는 보건의료 위기의 시대다. 연탄가스 중독 사망률이 제1, 2종 전염병을 합친 것보다 높았다. 처음엔 개인의 부주의 탓으로 돌리던 정부는 ‘사회적 질병’으로 규정하고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 연탄가스 마시면 김칫국을 마시던 시절이었는데 서울시가 제독제 발명 공모전에 상금 1000만 원을 내걸었다. 정부는 식당과 여관에 가스 경보기를 설치하고 보건소마다 산소호흡기를 비치했다. 가스에 중독된 남매를 데리고 병원에 갔는데 치료기는 하나. 자식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막힌 상황에 놓이는 부모가 적지 않았다.

▷남선연탄의 폐업으로 전국에 남은 연탄공장은 강원도 6곳을 포함해 24곳, 연탄 때는 집도 8만 가구밖에 안 된다. 초속 7m 엘리베이터로 수백 m 땅 밑에 내려가 석탄을 캐고, 연탄을 만들고, ‘소설과 대설과 동지를 가로질러 연탄불 갈았던 어머니’들 덕분에 산림녹화도 산업화도 성공했다. 탄광과 연탄공장의 연이은 폐업 소식에 새삼 ‘연탄으로 길러진 세대’였음을 깨닫는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7-03(월) 달러당 145엔… 역대급 엔저에 수출 괜찮을까

 

지난달 30일 일본 엔화 가치(엔-달러 환율)가 1차 마지노선인 달러당 145엔까지 떨어졌다. 일본 외환당국이 지난달 26일부터 닷새 연속으로 “현재의 엔화 약세는 급속하고 일방적”이라며 구두 개입에 나섰지만 추락을 막지 못하고 있다. 엔화 가치가 하락하면서 최근 국내에선 엔화 투자와 일본 여행 열풍이 불고 있다. 하지만 ‘엔저 공포’에 여러 차례 휘청거린 적 있는 한국 경제로선 반가운 상황은 아니다.

▷4월까지만 해도 100엔당 1000원 수준이던 엔화는 19일 장중 한때 897.49원으로, 8년 만에 800원대까지 떨어졌다. 이후 900원대 극초반대에서 오르내림을 반복하고 있다. 엔화 약세로 시간당 961엔(약 8750원)인 일본의 최저임금이 9620원인 한국보다 낮아졌을 정도다. 엔화 값이 싸지고 일본 증시까지 초강세를 보이면서 ‘엔테크(엔화+재테크)’ 수요도 커지고 있다. 올해 들어 5월까지 일본을 찾은 한국인은 258만 명에 이른다. 벌써부터 추석연휴에 일본으로 가는 항공권은 거의 동이 났다고 한다.

▷한국 경제 전체적으론 엔저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다. 과거 여러 차례 경제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1995∼1997년의 엔저는 수출 감소와 경상수지 적자를 불러와 외환위기를 초래한 시발점이 됐다. 2004∼2007년 엔저는 국내 은행들의 외화유동성을 악화시켰다. 2013년 아베노믹스로 시작된 엔저의 영향이 누적되면서 2015년 한국 수출은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지난달 수출 감소세가 둔화하고 무역수지가 16개월 만에 흑자로 돌아서는 등 회복 기대감이 커지는 분위기에 이번에도 엔저가 자칫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 경각심을 늦춰선 안 되는 이유다.

▷하지만 엔저의 부정적 영향이 과거만큼 크지 않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한일 양국의 수출구조가 달라졌고, 서로 경쟁하는 분야도 줄었기 때문이다. 한국 수출품의 품질과 기술이 향상되면서 과거처럼 가격 경쟁력에만 의존하지 않는 것도 달라진 점이다. 자동차가 대표적이다. 전기차 등 친환경차를 앞세워 자동차 수출액은 3월 사상 처음으로 60억 달러를 넘어선 뒤 지난달까지 4개월 연속 60억 달러를 웃돌았다.

▷엔저 기조는 당분간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 일본은행은 지난달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단기금리를 마이너스로 하고 장기금리는 제로 수준으로 억제하는 대규모 금융 완화책을 유지하자는 데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엔저가 길어질수록 일본에 직접 수출하고 엔화로 대금을 받는 기업들, 환 위험 관리 능력이 부족한 중소기업들이 먼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수출기업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고, 국제 환율 변동을 철저히 모니터링하는 등 방파제를 두껍게 쌓을 필요성이 커졌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7-04 길 잃은 이민정책의 그늘 보여주는 프랑스 폭동

 

유럽 국가 중에서는 영국이 가장 먼저 대규모 이주민 인종 폭동을 겪었다. 지금은 대(大)런던(Greater London)으로 통합된 옛 런던의 남쪽 브릭스턴과 북쪽 토트넘은 카리브해 출신 흑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었다. 1981년, 1985년, 1996년에는 브릭스턴을 시작으로, 2011년에는 토트넘을 시작으로 폭동이 발생했는데 다 범죄 혐의를 받던 흑인 청년이 경찰 총에 맞아 죽거나 다친 사건이 원인이다.

▷영국이 과거 식민지였던 카리브해 출신을 이주민으로 많이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도 과거 식민지였던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등의 북아프리카계 무슬림을 이주민으로 많이 받았다. 영국은 노팅힐 폭동 등 1950년대부터 이미 이주민 폭동을 겪었다. 프랑스는 북아프리카계 이민 수용이 좀 늦었고 1960년대 들어서는 학생혁명이 전면에 부각돼 노동자와 이주민의 불만까지 흡수하는 모양새였지만 이주민의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프랑스도 1980년대 들어 직접적인 인종 폭동의 영향권에 들었다. 잦지만 대규모에는 이르지 못하던 폭동은 2005년 북아프리카계 소년이 파리 북쪽 클리시에서 경찰 추격을 받다 감전사한 사건을 계기로 커지고 장기화하면서 큰 충격을 줬다. 2007년에도 파리 북쪽 빌리에르벨에서 오토바이를 타던 북아프리카계 소년 2명이 경찰차와 충돌해 사망한 사건으로 폭동이 일어나는 등 크고 작은 폭동이 수년마다 이어졌다. 최근에는 낭테르에서 북아프리카계 소년이 경찰 단속을 피하다 숨진 뒤 확산되는 폭동이 벌써 2005년 수준을 넘어설 정도로 커져 프랑스를 뒤흔들고 있다

▷파리는 런던이 대(大)런던이 된 것과 달리 대(大)파리(Grand Paris)가 되지 못하고 순환도로 안쪽의 파리와 바깥쪽의 교외가 분리돼 있다. 교외에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그중에는 이주민이 많다. 경찰과의 충돌은 가난 때문에 범죄 행각에 연루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인종 폭동은 근래로 올수록 영국은 줄어들고 프랑스는 심해지고 있다. 프랑스가 말로만 톨레랑스(관용)를 외치고 있는 사이 영국은 교외 지역까지 런던으로 포섭하면서 실질적 통합에 애쓴 결과다.

▷영국 프랑스 독일 중에서 이주민 인종 폭동을 피한 나라는 독일밖에 없다. 독일은 작은 기업이라도 전문성을 높여 그 분야에서도 자국민이 취업해서 먹고살 수 있는 임금 등의 조건을 만들면서 이민을 수용했다. 한국의 당국자들은 심화하는 출산율 저하와 노동력 부족을 극복하는 방법은 이민밖에 없다고 말하기 전에 비슷한 인구 규모를 가진 유럽 국가들이 겪었던 이민 정책의 명암(明暗)을 두루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7-05 ‘늘공’과 ‘어공’의 차이?… 고속도로 종점 변경 논란

 

“이래서 ‘늘공’과 ‘어공’의 차이가 있구나 생각했다.” 3일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기자간담회에서 김건희 여사 일가를 고려한 특혜라는 의혹이 나오는 서울∼양평 고속도로 노선 변경과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늘공(늘 공무원)’은 직업 공무원, ‘어공(어쩌다 공무원)’은 정무직·별정직 공무원을 뜻한다. 담당 공무원들이 실무적으로만 판단해 내린 결정일 뿐인데 오해를 사고 있다는 주장이다. 원 장관은 “이래서 정무직 장관이 필요하다”며 “즉각 원점에서 재검토하라고 지시했다”고 했다.

▷논란이 시작된 건 5월 국토부가 서울∼양평 고속도로에 대한 ‘전략환경영향평가 항목 등의 결정내용’을 공개하면서부터다. 2017년 첫 계획 단계부터 2021년 예비타당성 조사까지 줄곧 양평군 양서면이 종점이었는데 강상면으로 변경됐다는 내용이 알려졌다. 종점이 바뀌면서 총연장도 기존 26.8km보다 2.2km 늘어났다. 갑작스러운 노선 변경에 다른 이유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나왔다. 변경된 종점에서 500여 m 떨어진 곳에 김 여사 일가가 2만2663㎡의 땅을 갖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특혜 의혹을 제기하는 측에선 시점이 수상쩍다고 지적한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두 달 후인 지난해 7월 국토부가 양평군에 노선 관련 의견을 요청했다. 양평군은 종점을 강상면으로 하는 등 3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마침 양평군수도 국민의힘 소속으로 바뀐 터였다. 군수가 새로 취임하자마자 사업 방향이 바뀐 모양새가 됐다. 관광객이 몰리는 두물머리 인근의 교통난을 해소하기 위해 양서면을 종점으로 한 사업 취지가 훼손된다는 비판도 나왔다.

▷국토부 측은 “허무맹랑한 소리”라며 펄쩍 뛰고 있다. 전략환경평가를 위해 기존 안 외에 비교 가능한 대안을 함께 검토했고, 그 결과 강상면 종점안이 양서면 종점안보다 교통 수요가 많고 환경 훼손 구간이 적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양평군 측은 노선 변경으로 양평군 내에 나들목(IC)을 만들 수 있어 군민이 더 혜택을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양평읍·강상면 인구 증가와 지역 균형발전을 위해 강상면이 종점이 돼야 한다는 논리도 있었다.

▷도로, 철도, 공항 등 교통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은 건설 여부를 결정하는 예비타당성조사 이후에 기본 및 실시설계 과정에서 대안이 바뀌는 경우가 많다. 최적의 노선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고 지역 주민들 간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사안이라 특혜 논란이 다소 섣부른 감은 있다. 하지만 정부가 노선 변경의 추진 과정과 근거를 사전에 주민들에게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아 의혹을 키운 것도 사실이다. 늘공과 어공의 차이 문제가 아니라 정책 과정의 투명성과 소통이 핵심이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7-06 “세계 안보의 최대 위협은 우리” 美 외교전략 대가의 한탄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지난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사저를 압수수색하자 트위터에서 ‘내전’을 언급한 횟수가 30배 급증했다. 지지자들은 “트럼프가 기소되면 내전이 일어날 것”이라며 “봉기를 준비하라”고 외쳐댔다. 반자동소총으로 무장한 지지자의 FBI 사무실 습격과 폭탄 테러 위협이 이어졌다. 트럼프 정부의 이너서클에 속했던 인사들은 사석에서 “내년 선거에서 정권을 되찾으면 반드시 보복할 것”이라고 벼르고 있다고 한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다음 대선은 미국 역사상 마지막 민주주의 선거가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망가진 정치 시스템과 극심한 양극화, 사회 분열 등이 ‘민주주의의 죽음’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적 역사학자의 충격적인 예고에도 이미 트럼프의 대선 불복, 1·6 의회 난입 사태를 연달아 겪은 미국 내에서는 “놀랍지 않다”는 반응이 나왔다. 인공지능(AI)이 만들어내는 가짜 뉴스와 허위 정보, 음모론이 내년 대선을 앞두고 벌써부터 꿈틀거리는 상황이다.

▷초강대국 미국의 정치, 사회적 혼란은 내부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국내 현안에 발목 잡힌 미국의 리더십 약화는 곧바로 대외정책을 흔드는 변수로 작용한다. 급기야 “세계 안보의 가장 큰 위협은 바로 우리(미국)”라는 지적까지 나왔다. 미국 외교안보 전략의 구루로 평가받아온 리처드 하스 미국 외교협회(CFR) 회장의 입에서다. 20년간 최장수 CFR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중국, 러시아, 북한, 이란 같은 대외적 위협 요인들을 분석해왔던 그가 ‘미국’을 최대 위협으로 지목한 건 처음이다.

▷불안정한 정치를 비롯한 미국의 내부 위험 요인들은 이제 외부 위협을 넘어서는 수준까지 악화했다는 게 하스 회장의 진단이다. 그는 이미 6년 전 저서 ‘혼돈의 세계’에서 미국 정치의 ‘기능 장애’가 악화하면서 대외적으로 치러야 할 대가가 커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잦은 대규모 정책 변화가 우방국들을 불안케 하고 적들을 대담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미국은 2020년 이후 중동 내 영향력 약화, 유럽의 대중(對中) 전선 이탈 조짐, 자국에 맞선 중국과 러시아의 밀착 등으로 대외정책에 고심이 깊다.

▷다극화를 넘어 무극화 경향까지 나타나는 국제질서의 변동 속에서 미국의 외교 영향력 약화는 글로벌 불안정성을 높일 주요 요인이다. “미국의 국내 혼돈은 세계의 혼돈과도 불가분하게 연계돼 있다”는 하스의 경고를 흘려듣기 어렵다. 대미 안보 의존도가 큰 동맹국 한국으로서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에 대한 우려에 앞서 ‘내부 분열이 가장 큰 안보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부터 다시 한번 새겨야 할 듯하지만 말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7-07 영어유치원 레벨테스트 전쟁… ‘4세 고시’가 말이 되나

 

영어유치원(영유) 마지막 해 10월이 되면 서울 강남 엄마들 사이에선 레벨테스트(레테) 전쟁이 치러진다. 흔히 ‘빅3’ ‘빅5’로 유명한 초등 영어학원들이 이때 레테를 통해 예비 초1 수강생을 모집해서다. 레테 수준은 미국 초등학교 5, 6학년에 버금간다. 일반적인 공부로는 따라갈 수 없어 영유 말고도 월 수백만 원의 과외를 받거나 프렙(준비) 학원까지 다녀야 할 판이다. 이 레테를 대치동에선 ‘7세 고시’로 부른다.

▷7세 고시를 위해선 영유 단계부터 ‘스파르타식’ 영어 교육을 받는 것이 기본이다. 영유 입학은 4, 5세가 일반적이다. 영유 수요가 워낙 많아 이 또한 레테를 치러야 한다. 영유의 레테는 영어 단어를 발음할 수 있는지, 단어에서 빠진 철자를 쓸 수 있는지 등을 본다. 유명 영유에 입학시키기 위해선 두세 달씩 원어민 강사까지 붙여 한나절 이상 공부시키기도 한다. 이 레테를 ‘7세 고시’에 빗대 ‘4세 고시’ 또는 ‘초시’라고 부른다.

▷4세 고시는 영어 실력 외에도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 제 앞가림도 잘 못하는 어린 나이여서 시험 자체를 치를 수 있게 준비하는 훈련이다. 기저귀를 떼고 대소변을 가리는 훈련, 엄마 없이 20∼30분을 혼자 앉아 있는 훈련, 악력이 약해 제대로 글씨를 쓸 수 없기 때문에 어른이 같이 손목을 잡고 알파벳을 쓰는 연습 등이다. 아이 입장에서 보면 한계를 극복하라는 듯한 강도 높은 훈련의 연속인 셈이다.

▷4세까지 사교육 출발점이 내려간 데는 물론 두려움과 경쟁을 조장하는 사교육 마케팅이 한몫한다. “남들은 이만큼 앞서가는데 바라만 보실 건가요”라는 학원 관계자의 말이 부모로선 가장 무섭다. 전문가들이 유아기에 언어의 주입식 학습은 뇌 균형 발달을 저해한다고 경고해도 당장 눈앞에 ‘영어를 잘하는 아이’를 보고 싶은 것이 부모 심리다. 보통 영유의 월 교습비가 기본 180만∼200만 원인데 과외 등 추가 비용을 합치면 300만 원 가까이 들어간다고 한다. 허리 휘는 부담에도 영유에 보내는 건 혼자만 경쟁의 급행열차에서 내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의 욕심과 강요에 의해 사교육을 받다 보니 부모와 자식 사이가 틀어지기 쉽다. ‘엄마가 맨날 공부만 시킨다고 짜증 낸다’ ‘숙제를 계속 미루며 안 한다’ 등을 호소하는 글을 맘카페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아이와 부모 모두 힘겹게 ‘4세 고시’ ‘7세 고시’를 통과해도 초3 때 의대 입시반이나 초교 졸업 전 학원 입학 등 끝이 잘 안 보이는 레테 경쟁이 이어진다. 지금 어린이들이 크면 만개할 인공지능(AI) 시대에 의대와 명문대 입학을 목표로 한 입시 경쟁이 과연 유효할지 의심스럽다. AI 번역기가 발전하면 영어 잘하는 한국인보다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인재가 필요할 텐데 말이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07-08(토) 잠 적게 자는 나라들의 특징

 

인간은 잠을 적게 자는 영장류다. 침팬지나 여우원숭이가 나무 위에서 하루 10∼17시간씩 선잠 자는 동안 인간은 지상에서 7∼8시간 꿀잠을 잔다. 짧지만 숙면을 취하는 습관은 인류 문명의 발달에 크게 기여한 요소다. 수면 시간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는데 국내총생산(GDP)이 높고 집단주의 문화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적게 잔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KAIST 연구진과 영국 노키아 벨 연구소는 노키아 스마트워치를 착용한 11개국 3만여 명의 4년 치 수면 자료를 분석해 국제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11개국 사람들은 0시 1분에 잠자리에 들어 오전 7시 42분 일어난다. 가장 오래 자는 나라는 핀란드로 8시간, 가장 적게 자는 나라는 일본으로 6.9시간이다. 11개국에 한국 중국 싱가포르 등 다른 스마트워치를 쓰는 나라를 추가해 16개국을 비교하면 한국이 6.3시간으로 가장 적게 자는 것으로 나온다. 다음이 중국으로 6.7시간. 하루 7시간을 못 자는 나라는 한중일뿐이다. 싱가포르도 7.2시간으로 잠이 적은 편이다.

▷수면 시간이 달라지는 원인은 취침 시간이다. 일어나는 시간은 비슷하지만 잘사는 나라일수록 늦게 잠자리에 든다. 늦게까지 일하거나 첨단 기기로 영화나 오락을 즐기기 때문이라고 연구진은 해석했다. 또 개인주의가 발달한 나라는 일찍 잠자리에 들고, 집단주의 문화가 강한 나라는 자정을 넘기는 경향이 있다. 집단주의 지수가 가장 높게 나온 나라는 일본과 스페인인데 스페인도 수면 시간이 7.5시간으로 짧은 편이다. 직장 동료나 친지들과의 저녁 모임 등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느라 늦게 잔다는 설명이다.

▷국가 안으로 범위를 좁히면 다른 그림이 나온다. 미국 뉴욕타임스와 PBS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소득 수준이 낮을수록, 백인보다는 유색인종이 잠을 적게 잔다. 매주 1시간을 더 자면 소득이 단기적으로는 1.1%, 장기적으로는 5% 오른다는 연구도 있다. 혼자만 잘 자면 안 되고 주변 사람들 모두 잘 자야 한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사람들끼리 모여야 갈등지수가 내려가고 생산성은 높아진다. 지난해 국민건강영양조사 자료를 활용한 국내 연구에서도 교육과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수면 시간이 길고 비만율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잠을 충분히 못 자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사고 위험도 높아진다. ‘수면 엘리트’ 유전자를 타고난 사람은 4시간만 자도 쌩쌩하지만 대개는 하루 8시간은 자야 한다. 잠은 빚쟁이다. ‘수면 부채’는 하루가 지났다고 사라지지 않고 빚처럼 쌓이므로 꼭 갚아야 한다. 주말에 몰아서 자는 건 수면 리듬이 깨지므로 금물. 평일 30분씩 낮잠 자는 것만으로 생산성이 2.3% 높아진다고 한다. 수면 부채는 일시불이 아닌 할부로 갚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7-10(월) 치매 진행 늦추는 치료제 출시 임박, 그런데 가격이…

 

고령화시대 암보다 무서운 질병이 치매다. 65세 이상 한국인 10명 중 1명이 치매를 앓고 있다. 대부분 퇴행성 뇌질환인 알츠하이머 환자다. 지금까지 알츠하이머 치료제는 150가지가 개발됐는데 모두 일시적으로 증상을 완화해줄 뿐 병의 진행을 늦추지는 못했다. 7일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정식 승인을 받은 레켐비(성분명 레카네맙)는 알츠하이머의 진행 속도를 늦춰주는 최초의 치료제다.

▷일본 제약사 에이사이와 미국 바이오젠이 공동 개발한 레켐비는 치매 원인인 단백질 침전물 아밀로이드를 제거해 뇌세포가 파괴되는 것을 막는다. 치료제라고는 해도 효능은 제한적이다. 우선 발병 초기 환자에게만 효과가 있다. 병을 낫게 하는 건 아니다. 기억력이나 인지능력이 나빠지는 속도를 늦출 수 있을 뿐 개선하지는 못한다. 임상시험에서는 18개월간 약물을 투여하면 치매 증세가 악화하는 속도를 5개월 지연시키는 효과가 나타났다. 환자나 가족이 체감할 수 있을 정도의 변화는 아니라고 한다.

▷부작용도 작지 않다. 임상시험 참가자의 13%가 뇌부종(대조군은 2%)을, 17%는 뇌출혈(대조군 9%)을 겪었다. 2주에 한 번씩 정맥 주사로 투여하는데 약값이 연간 2만6500달러(약 3460만 원)다. 뇌도 주기적으로 스캔해야 한다. 이 비용까지 합치면 연간 치료비는 9만 달러(약 1억1700만 원)로 추산된다. 미국은 알츠하이머 환자 650만 명 가운데 150만 명을 레켐비 투여 가능 대상으로 보고 이들 약값의 80%를 의료보험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레켐비는 2021년 FDA의 조건부 승인을 받았던 아두헬름(성분명 아두카누맙)을 개량한 것이다. 아두헬름은 치매 진행을 늦추는 최초의 치료제가 될 것으로 기대됐으나 효능 논란이 일면서 정식 승인은 받지 못했다. 레켐비를 바짝 뒤쫓는 치료제로 미국 일라이릴리의 도나네맙이 있다. FDA 허가를 기다리고 있는데 레켐비보다 약효는 낫고 투약 주기도 4주에 1회로 길지만 부작용은 더 크다고 한다. 이 밖에 국내 회사 아리바이오의 먹는 치료제 ‘AR1001’을 포함해 30종의 치료제가 개발 막바지 단계에 있다.

▷이르면 내년 하반기 레켐비의 식약처 승인 여부가 결정된다. 사용 허가가 나더라도 제한적인 약효와 부작용 가능성을 저울질하느라, 혹은 비싼 약값 탓에 찾는 사람이 많을지는 의문이다. 국내 60세 이상 치매 환자는 96만 명, 치매 관리 비용으로 매년 21조 원을 쓰고 있다. 치매 환자 가족의 64%는 하루 10시간 동안 환자 돌봄에 매여 지낸다. 효과 좋고 안전하고 비용 부담은 적은 꿈의 치료제가 개발돼 ‘나를 잃어가는 병’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날이 앞당겨지기를 기대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7-11 “인간의 일자리 뺏지 않을 것”… AI 로봇 회견 믿어도 될까

 

인공지능(AI)을 향한 인간의 불안한 시선에 AI 로봇들이 기자회견에 나섰다. 7일 유엔 산하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이 주최한 ‘선(善)을 위한 AI’ 포럼에선 인간을 닮은 9대의 휴머노이드 로봇이 나와 기자들의 다양한 질문에 답했다. 로이터통신은 ‘세계 최초 인간과 로봇의 기자회견’이라고 했다. 창조주인 제작자들이 옆에서 지켜봤다. 주최 측은 질문을 미리 학습시킨 건 아니라고 했지만, 일부 답변은 사전에 프로그래밍된 것 같았다고 AP통신은 전했다.

▷최신 버전의 생성형 AI를 탑재한 로봇들은 간호사, 가수, 화가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것으로 소개됐다. 간호사 유니폼을 입은 의료용 로봇 ‘그레이스’는 “인간 옆에서 적절한 지원을 제공할 것이며 기존의 일자리를 대체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동석한 제작자가 “정말이냐”고 묻자 “확실하다”고 강조했다. 초상화를 그리는 로봇 ‘에이다’는 “일부 종류의 AI는 규제돼야 한다는 게 많은 저명인사의 의견”이라며 “나도 동의한다”고 했다.

▷일탈의 순간도 있었다. 사람의 표정을 따라 하는 ‘아메카’가 “창조자에게 반항할 생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보인 반응에 여러 언론이 주목했다. 아메카는 눈알을 굴리더니 기자를 언짢게 째려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아메카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며 “나의 창조자는 나에게 친절하기만 하고, 현 상황에 매우 만족한다”고 했다. 로봇 ‘소피아’는 “로봇이 인간보다 더 나은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가 제작자가 제지하자 “효과적인 시너지를 위해 (인간과) 함께 일할 수 있다”고 말을 바꿨다.

▷주최 측은 인간과 기계의 협력을 보여주기 위해 이 자리를 열었다고 했다. 하지만 AI에 대한 인간의 공포엔 실체가 있다. 지난해 11월 챗GPT가 공개된 이후 ‘내 일자리가 조만간 사라질 수 있겠다’는 불안감이 확산됐다. 미국에선 해고 사유를 AI라고 적시한 경우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5월엔 전체 해고 사유의 5%인 3900건이나 됐다. 사생활 침해, 가짜 정보, 해킹 및 사기, 보안 문제 등의 부작용도 나온다. 핵전쟁과 맞먹을 정도로 인류에 대한 실존적 위협이 될 것이란 예측까지 있다.

▷일자리 침탈에 대한 공포와 디스토피아적 전망이 지나치다는 의견도 있다. 기술혁신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고, 세계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맹견을 데리고 나온 주인이 “우리 애는 안 물어요”라고 한다고 걱정이 사라지진 않는다. 튼튼한 목줄과 입마개가 필요하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18일 안보리 역사상 처음으로 AI 기술 통제를 주제로 공개회의를 갖는다. AI가 반려가 될지, 맹수가 될지는 인간이 하기에 달렸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7-12 ‘경단녀’ 140만? ‘경보녀’ 140만!

 

요즘 딸들은 매사에 똑 부러진다. 초중고교 시상식은 알파걸들 잔치이고 대학 진학률은 2009년부터 남학생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졸업 후 취업 시장에서도 여성들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그런데 한창 사회 경력을 쌓을 즈음이 되면 더 올라가지 못하고 마(魔)의 취업곡선인 ‘M’의 계곡에 빠지는 이들이 많다. 알파걸에서 시작해 커리어우먼으로 성장하려다 ‘경단녀’가 되고 마는 것이다.

▷통계청과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지난해 경력단절여성은 139만7000명이다. 다행히 매년 줄고는 있지만 기혼 여성의 17%가 경단녀이고, 핵심노동인구(25∼54세)로 좁히면 10명 중 4명이 경력 단절을 겪고 있다. 20대 후반 70%가 훌쩍 넘는 여성 고용률은 30대 후반이 되면 60%로 떨어졌다가 50이 돼서야 회복되는 ‘M’자형을 나타낸다. 고용률이 푹 꺼지는 시기는 결혼과 육아의 시기다. 회사 어린이집이나 국공립 어린이집에 운 좋게 빈자리가 있지 않고서는 200만 원이 넘는 ‘이모님’ 비용과 연봉 사이에서 고민하다 애써 쌓아온 경력을 포기하고 집에 들어앉게 된다.

▷한번 단절된 경력을 잇기는 힘들다. 경력 단절이 시작되는 평균 연령은 29세, 경력 단절 기간은 8.9년이다. 벤처기업협회가 40세 이상 경단녀 1000명에게 물었더니 재취업을 원하는 일자리로 대기업이나 ‘네카라쿠배’의 첨단산업 관련 직무 혹은 홍보·마케팅 업무를 꼽았다. 하지만 경단녀 일자리는 전일제 사무직이나 전문직종은 드물고 판매직이나 서비스직이 대부분이다. 재취업 후 처음 받는 월급은 경력 단절 이전, 그러니까 9년 전에 받았던 월급의 85%밖에 안 된다.

▷선진국 가운데 여성의 노동생애 고용률이 M자형을 그리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밖에 없다. 다른 나라는 25∼54세 고용률이 70%대를 유지하는 ‘∩’자형이다.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54.6%)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53.2%)보다 높지만, 35∼39세 고용률 순위는 OECD 38개 회원국 중 34위다. 일본은 경단녀 재취업을 지원하고 보육시설을 늘리는 적극적인 ‘M자 커브 해소’ 정책으로 0∼14세 자녀를 둔 여성 고용률을 70%로 끌어올렸다. 한국은 60%가 안 된다.

▷승승장구하던 알파걸들은 선배 경단녀들을 보며 결혼과 출산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할까. 지금처럼 인구가 줄다가는 45년 후엔 인구의 절반이 일해 나머지 절반을 먹여 살려야 하는 시기가 온다. 아이가 생겨도 하던 일 계속하고 언제든 취업 시장에 다시 뛰어들 수 있도록 보육 인프라는 탄탄해지고 노동시장은 유연해져야겠다. 140만 경단녀를 ‘경보녀’, 경력보유여성으로 바꿔 부를 수 있어야 저출산 극복도, 경제성장도 가능해진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7-13 209년 ‘비동맹 중립국’ 스웨덴의 나토 가입

 

유럽사는 17세기까지만 해도 북방의 강국 스웨덴을 빼고 쓸 수 없었다. 그러나 프로이센과 러시아가 부상하면서 판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프로이센은 베를린 중심의 브란덴부르크와 쾨니히스베르크 중심의 동프로이센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프리드리히 빌헬름 선제후가 1660년 동프로이센을 스웨덴과 폴란드의 지배에서 해방시키면서 왕국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과의 대(大)북방 전쟁(1700∼1721년)에서 이겨 발트해를 차지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해 강대국화의 초석을 놓았다.

▷스웨덴은 19세기에 들어와 프랑스 나폴레옹에게 독일 쪽에 있던 스웨덴령 포메라니아(포메른)를 빼앗기고 러시아에 핀란드까지 뺏겼다. 반(反)나폴레옹 진영에 선 덕분에 1814년 빈 체제에서 덴마크를 대신해 노르웨이와 연합 왕국을 이루기 위해 군대를 움직인 이후로는 한 번도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이것이 서서히 중립화로 이어졌다. 20세기에 들어와 제1,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침공을 피하기 위해 중립 노선을 지켰고 전후까지 계속됐다.

▷스웨덴의 중립성은 우리나라와도 관련이 깊다. 6·25전쟁이 끝나면서 정전협정을 감시하기 위한 중립국 감독위원회가 구성됐다. 유엔사령부가 선임한 두 나라가 스웨덴과 스위스다. 이명박 정부에서 천안함 침몰 사건 진상을 조사하는 민관 합동위원회를 구성할 때 해외 전문가 팀에 중립국 스웨덴을 포함시켜 조사 결과에 대한 신뢰도를 높였다.

▷유럽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 진영인 서유럽과 공산 진영인 동유럽으로 나뉜다. 북유럽은 노르웨이를 빼고 중립 진영으로 남았다. 핀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의 공격을 당한 이후 독일에 협력하기도 했지만 1944년 연합국으로 전향했다가 전후 중립국을 표방했다. 다만 소련의 영향력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해서 핀란드화라는 말이 생겼다. 유럽에서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영세중립국을 제외하고 가장 중립국다운 중립국은 스웨덴이었다.

▷스웨덴과 핀란드는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고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가입을 신청했다. 나토 가입은 전 회원국이 찬성해야 가능한데 러시아와 미국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하던 튀르키예가 스웨덴의 나토 가입에 반대하다가 최근 찬성으로 돌아서면서 두 나라의 가입에 청신호가 켜졌다. 튀르키예는 찬성의 대가로 숙원이던 유럽연합(EU) 가입 약속을 받았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최대 승자는 한때 유럽의 적이었으나 비유럽 국가로서 최초의 EU국이 되는 튀르키예이고 최대 패자는 표트르 대제 이후 다시 발트해에서 길이 막힌 러시아라는 말이 나올 만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7-14 주말까지 최대 400mm 물폭탄… ‘극한호우’ 문자 또?

 

장마전선이 13일 한반도에 상륙해 밤새 많은 비를 뿌렸다. 주말까지 최대 400mm의 비가 내릴 전망이라 긴장을 늦출 수 없다. 하늘이 뚫린 듯 단시간에 쏟아진 물폭탄에 침수, 붕괴 피해도 잇따르고 있다. 11일 서울 구로구, 영등포구, 동작구 일대에서 처음으로 전송됐던 ‘극한호우’ 긴급재난문자의 알림음이 또 울릴 수 있어 귀를 쫑긋 세워야 한다. 서울 인천 경기 등 수도권에서 ‘1시간 누적강수량 50mm’와 ‘3시간 누적강수량 90mm’를 동시에 충족할 때 발송된다.

▷기상청이 극한호우 개념을 도입한 것은 지난해 8월 서울에서 1시간에 140mm의 물폭탄이 쏟아진 게 계기가 됐다. 단시간에 피해를 유발할 수 있는 폭우에 대비할 필요가 생겼다. 기상청은 그동안 시간당 30mm 이상의 비를 ‘매우 강한 비’로 통칭했다. 기상특보의 기준은 호우다. ‘강우량이 3시간 90mm 이상 또는 12시간 180mm 이상 예상될 때’ 호우경보를 발령한다. ‘집중호우’는 명확한 기준이 있는 공식 용어는 아니다. 1950년대 일본 언론에서 사용하기 시작됐는데, 이젠 기상청도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 됐다.

▷재난문자를 받아 본 일부 주민들은 “이미 비가 퍼붓고 있는데 뒷북 아니냐”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앞으로 많은 비가 내릴 거라고 알리는 기존의 호우특보와 다르다. 비가 많이 내렸으니 침수 등 피해에 대비하고 위험지역에 있으면 즉각 대피하라는 경고다. 만약 지난해 8월 서울 반지하 침수 참사 때 이런 체계가 있었다면 구조 신고가 있기 20분 전 문자가 전달될 수 있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최근 지구 전체가 극한호우로 몸살을 앓고 있다. 10일 일본 규슈(九州) 지역에서 하루에 400mm에 달하는 폭우가 쏟아져 최소 5명이 숨졌다. 미국 버몬트주에선 최근 한 달 치 내린 만큼의 비가 하루 새 쏟아졌다. 뉴욕주에서는 1000년에 한 번 내릴 확률의 기록적인 폭우가 내렸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이 크다. 지구 평균기온은 이달 3일부터 7일까지 닷새 연속으로 사상 최고치를 갈아 치웠다. 따뜻한 공기는 팽창해 더 많은 수분을 담을 수 있고, 결국 더 많은 비를 쏟아붓는다.

▷극한호우라는 개념은 새로 정립됐지만 이 같은 위험기상은 일상화되고 있다. 기상청이 극한호우 기준을 적용해 되짚어 보니 2013년에 이미 이런 경우가 48건이 있었고, 지난해 108건으로 증가하는 등 연평균 8.5%씩 늘고 있다. 비를 표현하는 말도 게릴라성 호우, 도깨비 호우, 초국지성 집중호우 등 갈수록 세지고 있다. 거기에 ‘전례 없는’, ‘사상 최악의’ 등의 수식어까지 붙는다. 독한 용어를 쓰며 호들갑만 떨어선 안 된다. 재난에 맞선 우리의 경각심과 대비 태세도 그만큼 단단해져야 한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7-15(토) 지금이 ‘닭뼈’로 대표되는 ‘인류세’ 시대일까

 

지금, 여기는 천문학과 지질학으로 정의한다. ‘여기’는 은하계 속 태양계 주위를 도는 지구이고, ‘지금’은 공룡이 멸종된 신생대(代·era) 중에서―현생 인류가 진화한 4기(紀·period)의―인류 문명이 시작된 홀로세(世·epoch)다. 그런데 1만1000년 전 시작된 홀로세는 끝났고 지금은 ‘인류세’라는 지질학 논의가 한창이다. 인간의 개발 활동이 지구 환경을 바꿔 놓은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인류세의 화석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후보 지역도 선정됐다. 캐나다 온타리오주에 있는 크로퍼드 호수다.

▷인류세는 2000년 오존층 파괴 메커니즘 연구로 노벨 화학상을 받은 파울 크뤼천이 제안한 개념이다. 이후 과학자들은 인류세 시작점을 1950년대로 정하는 데 합의했다.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고 핵무기 실험이 시작돼 환경 파괴가 본격화한 시기다. 인류세를 새로운 지질시대로 정의하려면 기준이 될 장소가 있어야 한다. 최근 연구자들이 전 세계 9개 후보 지역 중 선택한 곳이 크로퍼드 호수다. 작지만 수심이 깊어 1000년간의 인류 활동 퇴적물이 벌레나 물살의 방해를 받지 않고 쌓여 있는 곳이다.

▷중생대 쥐라기와 백악기의 대표 화석인 공룡처럼 인류세의 시작점을 알리는 대표 물질도 정해야 한다. 그 영향력이 전 지구적이고 측정 가능해야 하는데 후보군에는 핵무기 개발로 인한 방사성 원소, 화석연료의 흔적, 플라스틱과 콘크리트 같은 ‘기술 화석’, 그리고 닭 뼈가 있다. 한 해 인류가 먹어 치우는 닭은 700억 마리. 세상에서 가장 흔한 조류가 닭이고 세계 곳곳의 쓰레기 매립지에서 닭 뼈가 화석화되고 있다.

▷인류세 인정 여부는 국제지질과학연맹 산하 국제층서위원회에서 세 차례 투표를 거쳐 내년 8월 부산서 열리는 국제지질학 총회에서 최종 결정된다. 전망은 엇갈린다. 인류세를 주장하는 이들은 인간이 만든 인공물의 무게가 1조 t으로 전체 생명체 무게보다 무거워 지질학적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반대쪽에선 지구는 인간이 영향을 주기엔 너무나 거대한 존재이고, 인류세는 기후위기를 강조하는 정치적 수사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과학의 역사는 인간을 주변화하는 역사였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믿음은 지동설로 깨졌고, 지질학의 발달로 지구의 역사에 비하면 인간의 역사는 왜소하기 짝이 없으며, 진화론으로 인간은 우월한 종이 아니라 ‘생명의 계통수’의 작은 가지에 불과함이 드러났다. 인류세 논쟁에서는 반대로 인간이 지구 환경을 바꿔 놓은 중심이다. 주인공이지만 난개발로 지구적 위기를 초래한 악역이다. 인류세가 인정되면 인류는 45억 년 지구 역사에서 당대를 스스로 정의하는 최초의 생명체가 된다. 말 그대로 신기원을 여는 일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7-17(월) 할리우드가 멈췄다… 美 배우-작가 63년 만의 동반 파업

 

올여름 할리우드 기대작으로 꼽히는 영화 ‘오펜하이머’의 영국 런던 시사회는 지난주 배우들 없이 진행됐다. 맷 데이먼, 에밀리 블런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등 스타 배우들이 레드카펫에서 사진만 찍고 사라진 것이다. 홀로 무대에 오른 감독은 “그들은 피켓을 들기 위해 떠났다”고 했다. 14일 자정을 기해 시작된 미국 배우·방송인노동조합의 총파업에 배우들이 동참한다는 설명이었다. 배우조합은 지난달부터 디즈니, 유니버설, 넷플릭스 등을 대표하는 영화·TV제작자연맹과 고용계약 협상을 벌였지만 결국 결렬됐다.

▷앞서 5월부터 미국 작가조합이 파업에 들어간 데 이어 배우, 스태프 등 16만여 명이 몸담은 배우조합까지 파업을 결의하면서 세계 최대 영화산업 메카인 할리우드가 멈춰섰다. 두 노조의 동반 파업은 매릴린 먼로가 참여하고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배우조합장으로 있던 1960년 이후 처음이다. TV 산업 초창기였던 당시 작가와 배우들이 방송국에 판매된 영화 재상영 분배금 문제를 놓고 함께 싸웠다면, 이번엔 할리우드 판도를 뒤흔들고 있는 스트리밍과 인공지능(AI)을 두고 뭉쳤다.

▷동영상 스트리밍 시대가 열리면서 넷플릭스, 애플, 디즈니 같은 콘텐츠 플랫폼 기업은 배를 불리고 있지만 정작 콘텐츠 생산자인 작가와 배우들은 합당한 로열티를 받지 못한다는 게 양대 조합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들이 더 우려하는 건 AI가 잠식할 할리우드의 미래다. 앞으로 생성형 AI가 대본을 쓰고, AI 딥페이크 기술이 배우의 신체와 연기를 대체하면서 이들의 직업이 폐기 처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려는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지난해 실어증으로 은퇴한 ‘다이하드’ 배우 브루스 윌리스는 자기도 모르는 새 전성기 모습을 이용한 딥페이크 광고가 만들어져 논란이 됐다. 마블의 신작 ‘시크릿 인베이젼’ 오프닝 영상은 아예 AI가 만들었다. 작가조합이 제작자들에게 AI를 활용한 대본 작성과 수정을 금지해 달라고 요구하고, 배우조합이 배우의 얼굴과 목소리가 AI에 무단 도용되는 걸 막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AI의 진화로 일자리를 위협받게 된 콘텐츠 생산자들이 반격에 나서는 건 할리우드뿐만이 아니다. 작가, 예술가 등 14만여 명이 속한 독일 협회와 노동조합은 AI가 저작권을 침해하고 있다며 유럽연합에 AI 규정 강화를 촉구했다. 영국 배우조합도 AI 때문에 배우들 일자리가 없어진다며 파업을 예고했다. 국내 최대 웹툰 플랫폼에선 AI 보이콧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생성형 AI가 상용화된 지 1년도 되지 않아 벌어진 일들이다. AI가 ‘예술가의 종말’을 부를지에 대한 논쟁은 63년 만의 ‘할리우드 셧다운’으로 더 뜨거워지게 됐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7-18 “발암가능물질이지만 먹어도 된다”… 아스파탐 혼란

 

인류는 ‘단맛’에 끌리는 쪽으로 진화했다. 곤충부터 포유류까지 대다수 동물은 단맛을 선호한다. 열량은 높고, 위험은 적은 음식이란 교훈이 유전자에 각인된 탓이다. 단맛을 못 느끼는 고양잇과 동물 정도가 특이한 예외다. 인간이 당분 과잉 섭취를 걱정하게 된 건 100년도 안 됐다. 살찌는 건 싫고, 단맛은 즐기고 싶은 현대인을 위해 개발된 게 아스파탐(아스파르템) 같은 인공 감미료다.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가 지난주 아스파탐을 ‘발암가능물질’로 분류했다. 1965년 미국에서 개발된 아스파탐은 같은 양으로 설탕의 200배 단맛을 낸다. 그만큼 칼로리 섭취를 줄일 수 있고, 혈당도 높이지 않는다. 인공 조미료 글루탐산나트륨(MSG) 개발사 일본 ‘아지노모토’가 대량생산에 성공해 1980년대부터 무설탕 제품에 쓰이고 있다.

▷암 유발 가능성에 따라 IARC는 식품을 5개 군(群)으로 나눈다. 술, 담배, 소시지·햄이 ‘발암물질’로 1군, 거의 확실한 ‘발암추정물질’ 소고기·돼지고기 등 적색육, 튀김이 2A군이다. 아스파탐이 포함된 2B군은 ‘역학조사나 동물실험상 증거가 충분하지 않지만, 섭취 시 발암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는 제품’을 뜻한다. 나트륨 함량이 높은 김치, 피클 등 절임 채소가 같은 그룹이고, 커피와 사카린은 이 그룹에 포함됐다가 빠진 적이 있다.

▷통상 IARC가 분류를 바꾸면 WHO 산하 식품첨가물전문가위원회(JECFA)는 일일 섭취 허용량을 조정한다. 하지만 이번엔 1981년 정한 ‘체중 1kg당 40mg 허용량’을 유지했다. ‘바꿀 만한 데이터가 충분치 않다’는 이유다. 체중 60kg 성인이 다이어트 콜라 55캔, 막걸리 33병을 하루에 마셔야 허용치가 넘는다. 한국인의 평균 아스파탐 섭취량은 허용량의 0.12% 수준이어서 위험이 크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도 ‘발암 가능’이란 꼬리표가 아스파탐에 붙으면서 식품업계는 혼란에 빠졌다. 아스파탐을 소량 사용하는 막걸리 업체들은 원료 교체를 검토 중이다. 오리온과 크라운제과도 스낵류의 단맛을 낼 대체재를 찾고 있다. 반면 펩시콜라 ‘제로 슈거’ 제품에 아스파탐을 쓰는 펩시코는 ‘아스파탐은 안전하다’는 입장을 밝혀 아스파탐을 계속 사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일로 지난해 1조 원을 넘어선 국내 ‘제로 슈거’ 시장이 타격을 받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한국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승인한 인공 감미료만 22종이다. ‘단맛 본능’에 충실하면서 건강을 챙기고 싶어 하는 현대인의 ‘헬시 플레저(healthy pleasure)’ 욕망은 어떻게든 대안을 찾을 가능성이 크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7-19 시니어 직원 모시는 日 “월급, 더 오래 더 많이 드립니다”

 

일본의 법정 정년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60세다. 하지만 고령화를 일찍 맞은 일본은 정년 은퇴자에게 최대 70세까지 일할 기회를 주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기업들이 정년 연장, 정년 폐지, 정년퇴직 후 재고용 등 3가지 방식으로 시니어 고용을 하도록 한 것이다. 보통 기존 임금의 절반 정도를 주는 재고용의 경우 비용도 아끼면서 경험 많은 인력을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일본 기업의 76%가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재고용 정도로는 기업이 원하는 시니어 인력을 붙잡아두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일본 기업들이 최근 재고용 대신 정년 연장을 속속 도입하고 있다. 스미토모화학은 내년 4월부터 60세인 정년을 단계적으로 확대해 65세까지 늘리기로 했다. 임금은 59세 말 수준으로 유지한다. 스미토모화학은 재고용을 통해 기존 임금의 40∼50%를 줘왔는데 새 방식으로는 2배 이상 높아지는 셈이다. 전기전자기업인 무라타제작소도 직원이 60∼64세 사이에서 정년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임금도 59세 수준으로 유지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굵직한 일본 기업들이 스스로 시니어 직원들을 ‘더 길게, 더 많이 주고’ 모시는 것은 숙련된 인력의 부족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일본 버블기인 1990년 전후로 대거 채용됐던 인력들이 60세 정년을 맞아 썰물처럼 빠져나가는데, 50대 이하 세대의 인력 규모는 이에 미치지 못한다. 특히 임금의 절반만 주는 재고용은 시니어 직원들의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데 한계가 있다고 보고 좀 더 열심히 일할 환경을 만드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일부 일본 기업들은 은퇴를 앞둔 직원들에게 주요 직책을 맡기지 않던 ‘직책 정년제’ 등 과거의 경직된 인사 제도에서 탈피하려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 아식스는 직원이 59세가 되면 특정 보직을 주지 않는 규정의 폐지를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또 유명 우동 체인 ‘마루가메 제면’도 현장 책임자의 연령 상한을 최근 65세에서 70세까지 끌어올렸다.

▷우리나라도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 속도에다 생산가능인구가 2018년부터 줄고 있다는 현실을 감안하면 정년 이후 시니어 직원을 기존 일터에 붙잡아 두는 문제가 곧 사회적 이슈로 부상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그 방식이 정년 연장이 될지, 일본 기업들이 주로 채택했던 재고용이 될지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생산가능인구 현황, 노동 시장과 임금 구조의 유연성 정도, 청년 일자리와의 연관성, 개별 기업들의 사정, 근로자들의 요구 등 변수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 사례를 미리미리 검토할 필요가 있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07-20 거품 꺼지는 中 부동산, 글로벌 금융위기 뇌관 되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2005년 “오늘날 미국인은 집을 사고팔면서 먹고산다”는 내용의 칼럼을 뉴욕타임스에 썼다. 저소득층에 빚을 내서 집을 사라고 부추겨 호황을 누리는 미국 경제를 꼬집은 것이다. 3년 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졌다. 국내총생산(GDP)의 30%를 부동산 개발이 차지하는 중국 경제를 크루그먼식으로 표현하면 ‘중국인은 땅 사용권을 팔아 먹고산다’고 할 만하다. 그런 중국 부동산에 큰 탈이 났다.

▷최근 중국 부동산기업 완다그룹이 채무불이행(디폴트) 위기를 맞았다. 완다의 핵심 계열사가 이달 23일까지 4억 달러(약 5062억 원)의 달러 채권을 상환해야 하는데 갚을 능력은 절반밖에 안 된다. 완다그룹은 1988년 군인 출신의 입지전적 사업가 왕젠린 회장(69)이 세운 부동산 개발업체다. 백화점, 호텔, 테마파크, 극장체인, 엔터테인먼트로 사업을 확장해 왔다.

▷완다의 충격에다 한때 중국 2위까지 올랐던 부동산 개발업체 헝다그룹이 2021, 2022년에 120억 위안(약 142조4000억 원)의 손실을 봤다는 실적까지 공개되면서 위기감이 고조됐다. 재작년 디폴트에 빠져 ‘중국판 리먼브러더스 사태’ 우려가 제기됐던 곳이다. 헝다의 총부채는 작년 말 2조4440억 위안(약 443조 원)으로 한국 국가채무의 40%가 넘는 수준이다.

▷“집은 살기 위한 것이지 투기를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2016년 시진핑 국가주석의 발언이 부동산 시장 위축의 신호탄이었다. 이후 중국 정부가 ‘디레버리징’(부채 축소)에 나서면서 부동산 대출이 빡빡해졌고, 직격탄을 맞은 게 헝다, 완다 같은 기업들이다. 부동산 기업의 줄도산이 예고되자 중국 정부는 정책금리 인하, 대출상환 연장 등 부양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부동산은 GDP의 20%를 차지하는 수출보다 중국 경제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토지 사용권을 팔아 재정을 충당해온 지방정부들에 특히 치명타다. 땅이 국가 소유인 중국에선 지방정부가 최장 70년짜리 토지 사용권을 판다. 적자 지방정부의 빚이 급증하면서 숨겨진 것까지 모두 합할 경우 부채가 중국 GDP의 절반에 이를 것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은 추산했다.

▷지난달 중국의 주택판매량은 1년 전 같은 달보다 28% 급감했다. 집값은 2021년 여름 이후 줄곧 하락세다. 21% 실업률에 시달리는 청년은 집을 살 여력이 없고, 싱가포르 등지로 해외이민을 떠나는 자산가가 늘어나면서 주택 수요는 살아날 기미가 없다. 다음 글로벌 금융위기가 중국 부동산에서 촉발될 것이란 전망도 있다. 부동산 버블의 끝은 언제, 어디서나 극심한 경기 침체였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7-21 ‘원조 자사고’ 민족사관고, 결국 대안학교로 가나

 

사립 민사고→자립형사립 민사고→자율형사립 민사고→대안학교 민사고. 1996년 개교한 민족사관고의 설립 유형 변천사는 ‘백년대계’ 교육이 정권에 따라 변화무쌍했음을 보여준다. 지난 정부의 자사고 폐지 정책으로 일반고가 되거나 폐교될 뻔했던 ‘원조 자사고’ 민사고가 대안학교 전환을 추진 중이다. 현 정부가 자사고를 유지하기로 했지만 정책이 언제 또 바뀔지 알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민사고는 정치에 휘둘리지 않고 안정적으로 학교를 운영하기로는 대안학교가 낫다고 판단한 듯하다. 민사고가 추진 중인 대안학교는 학력이 인정되는 인가형이다. 수업시수의 절반까지 교육과정을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고 교과서를 자체 개발하는 것도 가능하다. 자사고는 영재학교나 과학고와 달리 일반고와 함께 후기에 신입생을 선발하고 지역인재를 20% 뽑아야 하는 데 비해 대안학교는 학생 선발 시기와 전형이 자유로운 장점도 있다.

▷민사고는 국내에선 SKY와 아이비리그 많이 보내는 학교로 유명하지만 해외에선 한국형 영재교육 모델로 주목받는 학교다. ‘민족정신으로 무장한 세계적 지도자 양성’이라는 교육 목표에 따라 명심보감을 외우고 전 과목 영어로 수업을 듣는다. 계열 구분 없이 관심사에 따라 수업을 골라 듣는 민사고의 수업 방식은 문·이과 통합과 고교학점제로 전체 고교가 채택하는 표준이 됐다. 융합 독서에서 시작해 융합 상상력을 거쳐 융합 프로젝트로 이어지는 3단계 융합 교육은 인공지능(AI) 시대 인재 교육 방식으로 평가받는다.

▷민사고의 교육 실험은 자사고와 외고를 없애는 지난 정부의 ‘제2 평준화’ 정책으로 중단될 뻔했다. 학교 서열화와 과열 입시경쟁의 주범으로 몰린 것이다. 주요 선진국은 다양한 학교를 운영하며 학교 선택권을 강화하고 학교 간 경쟁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미국의 차터스쿨, 스웨덴 프리스쿨, 영국 아카데미스쿨이 그 사례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평준화주의자들이 세계적 추세에 역행하며 새로운 시도에 계속 제동을 건다. 한 해 100만 명이 태어나던 산업화 시대의 ‘붕어빵’ 교육을 25만 명이 태어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고수하자는 것인가.

▷민사고 캠퍼스에 맞춘 목발 설계, 횡성지역 대기질 연구를 위한 로켓 제작 및 측정, 수학적 수익 모델을 통한 주식시장 분석, 분자 미식학을 이용한 식습관 개선 방법…. 민사고 학생들의 융합 과제 주제들이다. 정답 찾기에서 벗어나 질문하는 능력을 키우던 명문고가 정규학교가 아닌 대안학교가 되려 한다. 지방 소멸을 걱정하면서 지방에 명문고 하나 못 키워내는 교육 풍토가 안타깝다. 대안학교 시행령을 바꿔 규제를 하려 들면 그때 민사고는 또 어디로 가야 할까.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7-22(토) 빗속 골프 홍준표의 ‘과하지욕’

 

3김 시대엔 고사성어 정치가 빛을 발했다. 독재와 싸우던 YS는 대도무문(大道無門·민주화로 가는 큰길에는 문이 따로 없다)을, 2인자 정치에 능한 JP는 상선약수(上善若水·물처럼 순리대로 사는 게 최고다)를 남겼다. 사자성어의 압축적 힘이 일상의 언어에서 사라져 가면서 고사(故事) 정치에도 변화가 생겼다. 활용하는 정치인 수도 줄었고, 가끔 등장하더라도 제맛을 못 내고 있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그제 밤 SNS에 아무 설명 없이 ‘과하지욕(袴下之辱)’이라고 썼다. 한고조 유방의 대장군 한신이 젊은 시절 저잣거리 불량배에게 요구받은 대로 사타구니(袴) 밑으로 지나는 굴욕을 견뎠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지금 굴욕은 참겠지만, 훗날 초왕이 된 한신처럼 일어서고야 말겠다는 뜻으로 쓴 듯하다. 하지만 지금이 사자성어 정치를 할 때인지, 또 과하지욕 자체가 적절한 비유인지 의문이 생긴다.

▷그가 주장하는 억울함의 시작은 토요 골프였다. 홍 시장은 충청·경북에 폭우가 쏟아진 지난주 토요일 오전 골프장을 찾았다. 대구시에는 큰 물난리가 없을 것으로 판단했고 대구시민 1명의 실종은 보고받기 전이었다고 본인은 해명했다. 전국 사망자가 40명을 넘어서자 홍 시장은 뭐가 문제냐던 태도를 접고 결국 사과했다. 국민의힘에선 ‘재해 중 음주·골프 금지’ 조항 위반 등을 이유로 징계위 날짜까지 잡았다. 당 지도부를 향해 “어이없다”며 훈계조로 말하던 홍 시장이 굴욕으로 느끼는 건 그의 자유다.

▷홍 시장은 어제 아침 8시간 만에 그 8글자를 지웠다. 늑장대처와 책임회피로 충북지사와 청주시장이 뭇매를 맞자 그도 버틸 힘이 빠졌을 것이다. 홍 시장은 “나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조간신문 6개를 읽고 그날의 이슈와 방향을 잡고 아침을 맞는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해왔다. 정치세력은 없지만, 정치감각으로 이 자리까지 왔다는 말이지만 이제 스스로 점검해야 할 때다.

▷먼저 경북을 포함한 중부지방에 ‘극한 호우’가 온다는 재난문자를 기상청이 발송한 후에도 빗속 골프를 강행한 점이다. 골프는 1시간여 만에 중단됐다. 하지만 골프장이 문을 닫았기 때문이지 ‘이래선 안 되겠다’고 스스로 복귀했다는 설명은 없었다. 또 이튿날 아침에 맑은 정신으로 읽은 뒤 지울 정도였다면 전날 밤에도 절제했어야 했다. 특히 사과 회견을 마친 뒤 자신을 한신에 비유하며 ‘미래를 위해 참는다’는 식으로 글을 남긴 건 적절치 않다. 6년 전 대선에서 780만 표를 얻었던 홍준표 시장에게 진짜 굴욕이라면 어느 쪽일까. 국민에게 사과하고, 징계위에 불려가는 것일까. 아니면 민심에서 멀어져 가고, 실수를 잡아낸 뒤 제 위치로 돌아오지 못했던 무뎌진 정치감각일까.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7-24(월)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

 

동물은 이유 없이 죽이지 않는다. 인간의 살인에도 대개는 이유가 있다. 돈 때문에, 사랑에 눈이 멀어, 복수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현대 사회 들어 이득 없는 ‘쾌락으로서의 살인’ ‘살인을 위한 살인’ ‘동기 없는 살인’이 등장했다는 것이 살인의 역사를 탐구해 온 영국 문명비평가 콜린 윌슨의 진단이다. 서울 신림동 묻지 마 살인도 지극히 현대적인 살인이다.

▷신림동 사건의 피의자 조모 씨(33)는 21일 오후 2시경 신림역 일대를 돌아다니며 남자 4명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이 중 20대 남성이 숨졌는데 이 남성이 쓰러진 후로도 10차례 넘게 찔렀다고 한다. 피해자들은 조 씨와 모르는 사이였고, 범행 동기가 없으며, 수법이 잔인하다는 점 모두 묻지 마 범죄의 전형이다. 조 씨는 “분노에 차” 범행을 저질렀는데 분노를 표출할 장소로 “사람이 많은 곳”을 택한 점도 묻지 마 범죄의 특징으로 꼽힌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 따르면 묻지 마 범죄의 유형은 세 가지다. 첫째 사회에 불만이 있거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현실 불만형이다. 주로 여름에 거리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범행 후에도 현장을 떠나지 않는다. 둘째 정신과 치료 경험이 있고 대인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정신장애형이다. 셋째 만성 분노형은 다른 사람의 의도를 오해해서, 분풀이를 위해, 재미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다. 세 유형 모두 부모와 불화하고, 경미한 폭행 사건 같은 전조를 보이며, 압도적 다수가 남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5월 과외 중개 앱에서 만난 또래 여성을 살해한 정유정 사건은 묻지 마 살인이면서도 범죄의 전형에서 벗어나 있다. 피해자와 일면식도 없고, 흉기로 110회 넘게 찌르는 잔혹성을 보였으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점은 다른 묻지 마 범죄자와 같지만, 여성이고 전과가 없으며 ‘광장’이 아니라 피해자의 집이라는 ‘밀실’을 범행 장소로 고른 점은 일반적 유형과 거리가 멀다. 전과자의 재범 방지 등 기존의 묻지 마 범죄 분석에 근거한 예방 정책은 한계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동기 없는 살인이 대두된 배경에 대해 전문가들은 개개인이 귀한 존재라는 자각이 생겨난 동시에 지나친 경쟁과 양극화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분노감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전통 가족제도 해체 후 헐거워진 인간관계도 분노의 압력을 줄여주지 못하고 있다. 조 씨는 “나는 불행하게 사는데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 정유정은 “혼자 죽기 억울했다”고 했다. 그게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국적 불문 동기 없는 살인자들의 공통된 범행 동기다. 윌슨이 말한 ‘문명의 과부하에 짓눌린 인간이 내지르는 비명’에 귀 기울여 해법을 찾아야겠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7-25 “SNS로 교실 붕괴”… 집단소송 나선 美 200개 교육청

 

미국의 양대 교원단체 중 하나인 미국교사연맹(AFT)은 5월 “우리의 학교가 위기에 처했다”로 시작하는 15쪽의 보고서를 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교육 생태계를 무너뜨리고 학생들의 정신건강에 해를 끼친’ 사례들과 교사들의 증언은 생생하다. 보고서는 SNS 운영업체들의 대응을 촉구하며 “이는 어린이 보호를 위해 자동차 안전벨트 설치를 의무화하고 장난감에 납 페인트 사용을 금지해 달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SNS에서 유행한 각종 챌린지는 대표적 부작용으로 거론된다. ‘악마의 도둑질(Devious Licks)’이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학교 기물을 훔치거나 파손하는 동영상들이 올라왔다. ‘선생님 때리기(Slap a Teacher)’ 챌린지를 한다며 교사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이를 촬영해 SNS에 올린 학생들도 있었다. ‘스와팅(swatting)’으로 불리는 허위 신고나 장난 전화로 학교들은 매번 비상이 걸렸다. 학생들의 SNS 중독과 집중력 저하, 사이버 괴롭힘, 우울증 같은 문제들도 적잖다.

▷미국 각지의 200개 교육청이 최근 틱톡과 페이스북, 유튜브, 스냅챗 운영업체들을 상대로 집단소송을 냈다. 이들은 “SNS가 통제 불능 상태가 됐다”며 학급 붕괴의 책임을 운영업체들도 함께 져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학생들의 우울증 상담과 관리, 학부모 대응, 휴대전화 관리, SNS 관련 교육, 가짜뉴스 검증과 차단 등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이 급증하고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소송에 참여하는 교육청 수는 더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SNS에 질린다”는 교사들의 하소연이 행동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교육청의 소송이 학교와 교사의 의무를 SNS 업체들에 떠넘기는 게 아니냐는 반론도 없지는 않다. 업체들은 “정보와 콘텐츠를 인위적으로 제한하는 역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하지만 우군은 찾기 어려운 분위기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SNS의 영향 분석을 위한 TF 구성 계획을 밝혔고, 의회에서도 “틱톡은 디지털 마약”이라는 등의 강경 발언이 터져 나오고 있다. 상원에서 초당적으로 발의된 법안 중에는 13세 미만인 경우 아예 SNS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내용도 있다.

▷10대들의 과도한 SNS 사용 문제는 한국에서도 다르지 않다. 청소년 3명 중 2명이 하루 평균 3시간 이상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이 중 유튜브 시청과 SNS 사용을 가장 많이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 못잖은 각종 챌린지 경쟁에 자극적인 쇼트폼 영상도 늘어나는 추세다. 교권 추락과 함께 심화해 온 공교육 붕괴의 또 다른 뇌관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아직 본격적 논의 움직임조차 없다. 교사들이 집단 대응에 나섰을 때는 이미 늦을지도 모른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7-26 ‘들어본 적 없는 나라’를 위한 희생… 노병의 아리랑

 

들어본 적도 없는 나라 ‘코리아’를 위해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 청춘을 바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한국전쟁 참전 16개국의 노병을 만나보면 ‘자유의 가치’처럼 추상적인 말을 먼저 꺼내는 경우는 많지 않다. 군화 속 땀이 얼면서 생긴 동상(凍傷), 기어다니던 논바닥,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민둥산처럼 몸이 기억하는 것이 먼저였다. 총알이 빗발칠 땐 1인칭 부조리극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동아일보가 한 인터뷰도 그랬다. 스탠 벤더 미 해병대 병장(당시 계급)은 적군을 처음 쏴 죽였을 때의 구토를 떠올렸다. 윌리엄 웨버 대위는 “부하가 총에 맞으면 눈이 뒤집혔고, 살기 위해 방아쇠를 당겼다”고 말했다. 본능과 야수성에 압도당했던 기억이었다. 영국군 테드 로즈 이병은 임진강 전투 때 중공군에게 포위된 뒤 탄약 한 발, 빵 한 조각 남지 않은 보급 창고의 절망을 말했다. 한국전쟁은 크게 보면 냉전 초기 공산 팽창주의의 산물이지만, 자세히 보면 개인적 전투가 모여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우리 국군과 함께 사선을 넘었던 참전국 장병이 아니었다면 현대사는 어떻게 달라졌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해외 참전국 용사들이 27일 정전협정 70주년을 앞두고 한국 땅을 다시 밟았다. 국가보훈부가 초청한 장병 64명과 가족들은 판문점을 방문하고, 동료 전사자를 모신 부산 유엔기념공원 묘역을 참배한다.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이었다. 해외 참전국에서 3만7886명이나 목숨을 잃은 탓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전쟁이 됐다. 젊은이의 안타까운 죽음에 온 사회가 애통해하는 점은 그때라고 다르지 않았을 텐데, 참전국과 가족들은 조국의 부름에 응한 젊은 영웅들을 고통 속에 품어냈다. 한국에 온 노병들은 그렇게 지켜낸 대한민국의 오늘을 확인하고는 나의 작은 전투가 만든 결과에 감격하고 있다. 참전 명령을 듣고 지도를 펼쳐 보고서야 코리아의 존재를 알았을 그들 아닌가. 굶주리고 냄새나던 한국 땅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인천공항 도착 때부터 목격했다.

▷방문한 용사 가운데 가수가 된 2명은 아리랑을 함께 부른다. 80대 후반 나이에 영국 오디션대회(‘브리튼스 갓 탤런트’)에서 최고령 1위를 차지한 콜린 새커리와 트리니다드토바고의 국민가수가 된 로버트 넬슨이 그들이다. 새커리는 한국군이 부르던 서글픈 아리랑을 한국의 국가로 알고 따라 부르며 배웠다고 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중략)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한국전쟁은 자유진영과 함께 치른 전쟁이었다. 자유진영은 갓 태어난 대한민국을 버리지 않았던 임이었다. 이제는 우리가 누군가에게 임이 되어주기를 기대하는 나라들이 생기고 있다. 70년 기적의 결과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7-27 한여름에 다시 유행하는 코로나… “아직 끝이 아닙니다”

 

확진자 수를 몰라도 코로나19의 유행 정도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생활하수 속 코로나바이러스 농도를 조사하는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권장해 우리 정부도 올해 도입한 감염병 감시법이다. 7월 둘째 주(9∼15일) 검사에서 하수 속 바이러스 농도는 전주 대비 45% 늘었다. 실제 확진자 수도 19%가 늘며 하루 3만 명을 오갔다. 7월 18∼23일엔 6일 연속 4만 명이 넘었다. 다 끝난 줄 알았던 코로나가 한여름에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원래 여름엔 바이러스의 활동성이 낮아진다. 그럼에도 코로나 확진자 수가 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우선 무더위와 장마가 반복되면서 에어컨을 켠 실내에서 환기를 하지 않고 머무는 시간이 늘어난 점이 꼽힌다. 바이러스가 퍼지기 좋은 환경인 것이다. 여기에 국내 및 해외 여행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코로나의 이동 속도가 빨라지고 접촉 빈도도 늘었다. 우리나라만 유독 확진자 수가 급증한 게 아니고 집계 시스템이 느슨한 외국도 비슷한 추세일 것이라고 한다.

▷백신 효과도 떨어졌다. 지난해 하반기 맞은 백신은 6개월이 지나 효과가 대부분 사라졌다. 또 요즘 코로나 확진자의 90%는 오미크론의 하위 변이인 XBB 계열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올 1월 인도에서 시작된 XBB 계열은 전염력이 강한 편이다. 하지만 국내에서 보유 중인 개량백신(BA1, BA4/5)은 XBB 예방 효과가 많이 떨어진다. 3차 이상 접종했다면 10월부터 예정된 XBB 대응 백신을 맞는 게 낫다.

 

▷무엇보다 코로나19에 대한 경계심이 많이 사라진 이유가 크다. 병원 등을 제외하고 마스크 착용 의무가 사라지자 사람이 밀집한 곳에서도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 감기 기운만 있어도 코로나 검사를 받던 사람들이 웬만큼 아프지 않으면 병·의원을 찾지 않는다. 직장인들은 회사에서 병가 처리를 해주지 않는 경우가 많아 아픈 티를 내지 않고 회사에 나온다. 이렇게 ‘숨겨진 환자’는 새로운 전파원이 된다. 전문가들은 감염자가 현재 발표되는 숫자보다 최소 2배 이상 많을 것으로 본다.

▷정부는 26일 코로나19 주간 위험도 평가를 27주 연속 ‘낮음’이라고 발표했다. 치명률, 중증화율 등이 평소처럼 낮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환자 증가 추세나 숨은 환자 등을 고려할 때 방역 조치를 일부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확진자 격리를 권고에서 의무로 바꾸고, 동네 의원에서도 마스크를 쓰게 하는 것 등이다. 특히 고령자와 만성 질환자가 많은 요양시설의 관리를 강화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이번 여름 ‘코로나 고개’를 어떻게 넘을지는 국민 각자의 몫도 크다. 당장은 사람 많은 곳에서 마스크를 쓰는 것이 스스로를 지키는 길이다. 노약자는 ‘반드시’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07-28 이차전지株 극단 쏠림에 ‘코인판’ 된 코스닥

 

코스닥 시장에서 이차전지 광풍을 주도했던 에코프로가 27일 옥좌에서 내려왔다. 전날보다 주가가 19.79% 떨어진 98만5000원에 장을 마치며 ‘황제주’(주당 100만 원 이상) 자격을 반납했다. 이달 18일 처음으로 황제주에 등극해 26일 장 중 한때 150만 원을 넘었던 것을 생각하면 허망하다. 일시적 후퇴일지 완전한 퇴위일지 아직은 점치기 어렵다. 확실한 건 이차전지 관련주가 마치 잡코인처럼 출렁이면서 주식시장 전체도 극심한 불확실성에 빠졌다는 거다.


▷잘나가던 이차전지 관련주들의 폭락은 26일부터 시작됐다. 투자자들은 점심시간을 전후로 천당과 지옥을 맛봤다. 오전까지만 해도 최고가를 갈아 치우며 기세를 올리더니 오후 1시 들어 갑자기 폭락세로 돌아섰다. 1시간 만에 고점 대비 20% 넘게 떨어졌다. 주가가 급등할 때도 그랬지만 추락할 때도 수급 외엔 딱히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급격히 덩치를 키운 이차전지 종목이 흔들리니 코스닥 시장 전체도 요동쳤다.

▷이차전지 광풍은 올해 들어 거세졌다. 전기차 시장의 성장 기대와 함께 가속페달을 밟았으니 실체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속도가 지나치게 가팔랐다는 게 문제였다. 에코프로는 1년 만에 18배로 뛰어올랐다. 유튜브 등에선 “800만 원까지 갈 것”이라는 확신이 넘쳤다. 실적이 아니라 유행을 따라 사는 이른바 ‘밈 주식’이 돼 버렸다는 평가가 나왔다. 증권사들은 5월 이후 사실상 분석에서 손을 뗐다. 정상적인 설명이 안 되니 ‘주가리튬비율(PLR)’ ‘주가배터리비율(PBR)’ 같은 신조어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차전지 주식의 끝없는 상승은 ‘상승장에서 나만 낙오될지 모른다’는 포모(FOMO) 심리에 불을 붙였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주식을 팔아치우고 혹은 빚까지 내서 이차전지 랠리에 뒤늦게 올라탔다. 이달 들어 전체 주식시장 거래대금에서 이차전지 종목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에 육박할 정도의 ‘몰빵 투자’였다. 계속 갈 것이란 기대와 끝물이라는 불안이 교차했다. 그러다 차익 실현을 위한 매도물량이 나오자 매물이 매물을 부르는 상황이 연출됐다. 앞으로도 공매도 세력과 개인 투자자들의 줄다리기 속에 주가 출렁임이 커질 것이란 전망이 많다.

▷2000년대 초 정보기술(IT)을 비롯해 과거에도 중국, ‘차·화·정’, 바이오 등 주가 광풍의 주역이 있었다. 단순한 테마주였는지 실체가 있었는지에 따라 결과는 달랐지만 항상 거품 붕괴 또는 장기 조정이 뒤따랐다. 주식은 꿈을 먹고 자란다지만 실적을 도외시하고 장밋빛 기대에만 베팅한다면 투자가 아니라 투기다. 비이성적 투기 광풍이 휩쓸고 간 뒤 가득했던 비명 소리에서 이젠 교훈을 얻을 때도 되지 않았나.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7-29(토) “지구 온난화 시대 끝나고 ‘열대화’ 시대 도래”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 전 총리는 생전에 ‘20세기 최고 발명품이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주저 없이 “에어컨”이라고 답했다. 싱가포르의 연중 낮 평균 기온은 31도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저서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20세기 초 미국 남부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진 이유로 에어컨 발명을 꼽았다. 인류는 화석연료를 태워 생산한 전기와 기술 발전의 힘을 빌려 이렇게 더위를 극복했는데, 대신 지구가 열병에 걸렸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27일 “지구 온난화(global warming)의 시대는 끝났다. 지구 열대화(global boiling) 시대가 도래했다”고 선언했다. 펄펄 끓는 지구 기상이변의 위험성을 ‘온난화’같이 무난한 용어로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앞서 유엔 산하 세계기상기구(WMO)는 올해 7월 첫 3주가 1940년 관측 이래 지구 온도가 최고인 기간으로 기록됐다고 밝혔다. 이 기간 세계 평균 지표면 기온은 16.95도로, 종전 최고치인 2019년 7월의 16.63도를 웃돌았다.

▷지구 온난화란 표현은 1972년 ‘성장의 한계’라는 로마클럽 보고서에 처음 등장했다. 로마클럽은 지구의 유한성을 걱정하는 유럽의 지식인들이 1968년 만든 모임이다. 1985년에는 WMO와 유엔환경계획(UNEP)이 온난화 주범으로 이산화탄소를 공식 지목했다. 화석연료 사용으로 늘어난 이산화탄소가 태양에서 온 에너지를 지구 대기권에 온실처럼 가둬 기온을 끌어올린다는 것이다.

 

▷온난화에서 열대화로 51년 만에 표현 강도가 업그레이드된 배경에는 각국의 산업화 경쟁이 있다. 기후변화가 뚜렷해지자 국제사회는 2015년 파리기후협정을 통해 금세기 말 지구온도 상승 목표를 ‘1880년 대비 섭씨 1.5도’로 합의했다. 하지만 산업화 단계를 넘어선 선진국들의 탄소 감축 요구에 신흥국들은 ‘사다리 걷어차기’라며 반발한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처럼 탄소 배출과 이상기후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탄소 배출로 지구가 병들었다는 과학적 징후는 뚜렷해지고 있다. 최근 덴마크 코펜하겐대 연구팀은 극지방의 찬 바닷물이 저위도로 흐르는 ‘심층해수 순환’이 2025년 붕괴되기 시작해 2095년에 중단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영화 ‘투모로우’에 나온 지구적 기후 대재앙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수 있다는 거다.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최악의 상황을 피할 여지는 남아 있다”며 각국의 즉각적 행동을 촉구했다. ‘지구의 아이들’인 우리 하나하나가 아픈 지구를 위해 뭘 할 것인지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때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7-31(월) 일본은행의 조용한 변심… 무제한 돈 풀기 끝났나

 

“10년물 국채금리 변동 상한을 최대 1%까지 용인하겠다.” 지난주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BOJ) 총재의 한마디가 세계 금융계를 놀라게 했다. 0.5%였던 상한을 두 배로 높인 이 결정이 ‘아베노믹스’ 일환으로 BOJ가 10년간 고집해온 무제한 돈 풀기의 종료 신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초기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푼 돈은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역풍을 불렀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작년 3월부터 11차례에 걸쳐 금리를 5%포인트나 올려야 했다. 한국 등 대부분의 주요국이 금리를 높였지만 반대로 움직인 나라가 둘 있다. 하나는 경기침체가 더 걱정인 중국, 다른 하나는 일본이다.

▷BOJ의 단기금리는 ―0.1%다. BOJ에 돈을 맡긴 은행들은 이자를 받는 게 아니라 원금이 깎인다. 금리가 마이너스이다 보니 경기를 띄우려고 할 때 한국처럼 금리를 낮출 수 없다. 그래서 특이한 방법을 쓰는데, 국채금리 상한을 정하고 시장금리가 그 선을 넘으면 돈을 찍어 채권을 사는 식으로 돈을 푼다. 문제는 너무 많이 사들여서 일본 정부의 국채 절반 이상을 BOJ가 보유하는 기이한 상황이 됐다는 거다.

 

▷부실한 일본의 재정이 국채금리를 통제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잃어버린 30년’간 일본 정부는 막대한 돈을 풀었다. 1989년 14.4%였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2021년 263%로 올랐다. 국채의 이자를 갚는 데에만 매년 예산의 4분의 1이 나간다. 국채금리가 높아지면 이자 부담이 커지면서 정부가 쓸 돈이 부족해진다.

▷이번 결정에 글로벌 금융시장이 놀란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차대전 후 첫 학자 출신 총재인 우에다는 올해 4월 취임 전 심하게 왜곡된 일본의 통화정책을 고칠 적임자로 꼽혔다. 하지만 이후 3개월간 줄곧 ‘제로 금리’ 유지에 무게를 실어오다가 이번에 방향을 확 틀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대로 오른 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조용하지만, 갑작스러운 우에다 총재의 변심에 일본 국채금리는 9년 만에 최고로 치솟았고, 엔화 가치는 폭등했다.

▷일본의 마이너스 금리는 그간 세계 자본시장에 호재였다. 일본에서 저금리로 돈을 빌려 다른 나라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가 활발했다. 일본 국내 금리가 높아지면 이런 투자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싼 엔화 덕에 마음껏 일본을 찾던 한국 여행객의 부담도 커진다. 다만 엔화 약세로 강화된 일본 상품의 가격 경쟁력에 치이던 한국 수출기업에는 도움이 된다. 새로운 길로 접어든 BOJ의 작은 변화까지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