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2023-04/
04.01(토) 노조 간부들 임협 때마다 뒷돈 의혹, 이렇게 썩을 수 있다니

▲택시노조 위원장들 녹취록 주요 발언
한국노총 산하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 서울지역본부가 택시 회사들과 임금 협상을 할 때 관례적으로 뒷돈을 받아왔다는 의혹이 나왔다. 교섭할 때 노조 측 교섭위원들이 적게는 2000만원에서 많게는 5000만원까지 돈을 받았고 이 때문에 교섭이 택시 기사들에게 불리하게 체결됐다는 것이다. 서울택시 노사 양측이 부인하고 있지만 공개된 녹취록 내용이 “우리 때(2015년)도 2000(만원)” “○○는 5000 받았대” 등과 같이 구체적이어서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2013년부터 최근 10년 동안 교섭 때마다 뒷돈이 오가는 것이 관행이었다니 노조 간부들이 이 정도로 썩을 수 있는가.
노조 간부들이 뒷돈을 주고받는 의혹이 드러난 것은 이번만이 아니다. 3월 초에도 한국노총 간부들이 평일 인천의 한 골프장에서 3억원을 줄 테니 비리로 제명된 한 건설노조의 한노총 복귀를 도와달라고 설득하는 녹취록이 나와 경찰이 수사하고 있다. 금액이나 방법은 다소 차이가 있을지라도 ‘원만한 노사관계’를 핑계로 임금·단체 교섭을 할 때 금품을 주거나 평소에도 노조 판공비, 법인카드 등을 제공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사측이 노조 간부들을 해외 관광 보내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다. 정부가 회계 문서를 공개하라고 요청하고 응하지 않는 노조에 대해 과태료까지 부과해도 상당수 노조가 자료 제출을 거부하는 것도 이런 비리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노조원 이익을 대변해야 할 노조 간부들이 노사 협상에서 사용자 쪽 뒷돈을 받는 것은 노조원들에 대한 배신이자 명백한 범죄 행위다. 선진국 수준에 이른 나라 중에서 이런 도덕성을 가진 노조 간부들이 활동하는 나라가 우리나라 말고 또 있을지 궁금하다. 사법 당국이 전모를 밝혀 처벌해야 한다.
노조가 이미 낡은 권력이 된 한국에서 이런 고질이 쉽게 고쳐지지는 않을 것이다. 정부가 흔들리지 않고 이런 비리를 처벌해 나가야 하지만, MZ세대들이 낡은 세력들을 대체하고 새로운 노조 활동의 주역으로 떠올라야 한다.
조선일보 사설
04.01 ‘딸배’라 불리는 사나이
도로의 무법자 ‘딸배’ 확산
몰래 신고하는 ‘딸배헌터’도
시민 돕는 정의의 기사처럼
이제는 법 지키며 달립시다

▲한 오토바이 배달 기사가 헬맷 미착용 상태로 도로를 달리고 있다. 이 남성은 곧 경찰에 신고 당해 범칙금을 부과받게 된다. /유튜브 캡처
우리나라 국조(國鳥)는 무엇인가. 치킨이다. 우리의 소원은 무엇인가. 빨리빨리. 우리는 어떤 민족인가.
배달의민족을 도로에서 자주 마주치곤 한다. 적색등이 들어왔고, 여느 때처럼 나는 정차 중이었다. 오토바이 한 대가 앞에 끼어들었다. 이윽고 한 대, 또 한 대. 하나같이 뒤에 큼지막한 배달 가방이 달려 있었다. 도합 세 대의 오토바이는 잠시 좌우를 살피더니, 한날한시에 죽기를 맹세한 유비·관우·장비처럼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빨간불 따위가 어찌 장부의 앞길을 막겠는가. 자못 비장하기까지 한 장관이었다. 범칙금 신고 대신, 나는 그들의 안녕을 기원했다.
신호 위반은 애교 수준이고, 엽기에 가까운 곡예 운전도 빈번하게 벌어진다. ‘배달’을 뒤집은 속칭 ‘딸배’가 이들의 별명이 된 이유다. 얼마 전 대전에서는 오토바이 안장 위에 곧추서 서커스하듯 도로를 달린 50대 배달원이 검거됐다. 캄캄한 밤이었다. 21일 시민들이 촬영해 올린 영상을 봤더니, 마상 무예의 한 장면 같았다. 경찰 조사에서 이 남성은 “운전하다 몸이 피곤해 스트레칭하려고 그랬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달리는 말 위에서 먹고 잤다는 기마민족처럼, 과연 차원이 다른 노련함이다. 그러나 사고 안 난 게 다행이다. 다른 사람 인생을 나락으로 직송할 뻔했다.
그러자 ‘딸배 헌터’가 등장했다. 교통법규를 우습게 아는 전국의 불량 ‘딸배’를 참교육하는 유튜버인데, 헬멧도 번호판도 없이 인도 주행과 역주행까지 불사하는 배달 기사들을 신고해 금융 치료를 선사하며 유명해졌다. 영상 제목만 봐도 내용을 대략 유추할 수 있다. 미성년자 딸배의 최후, 경찰 따돌리는 딸배의 최후…. 지난 2월 부산에서는 범칙금 2억원어치인 약 5000건 신고라는 기염을 토했다. “당신이 진정한 애국자” 같은 댓글이 민심을 보여준다. “당장은 밉겠지만 결과적으로 딸배 목숨을 구하는 선행”이라는 반응도 많다. 약간의 정화 효과도 생겼다. 횡단보도에서 내려 오토바이를 끌고 걸어가는 배달 기사들이 속속 목격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폭주에도 사정은 있다. 더 뛰어야 더 버니까. 악천후에도 달려야 한다. 지난해 여름 80년 만의 폭우로 시간당 100㎜ 이상의 물 폭탄이 쏟아질 때에도, 침수된 도로 위를 그들은 달렸다. 월드컵과 올림픽과 온갖 환희 속에서 그들은 대한민국을 부르짖는 대신 길 위에서 콜(주문)을 접수한다. 그들의 직업 윤리에는 결코 ‘딸배’로 비하할 수 없는 숭고함이 있다. 신체적 위험도 위험이거니와, 인성 교육이 덜 된 일부 진상의 하대(下待)도 견뎌야 한다. “나가는 김에 쓰레기 좀 버려주세요” 같은. 2019년에는 국내 첫 배달 기사 노동조합(라이더 유니온)도 생겼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다.
그러나 쉽지가 않다. 경기 침체로 배달량은 현저히 줄었다. 배달비 폭등과 코로나 끝물의 여파로 배달 앱 이용자가 1년 전보다 600만명 넘게 감소했다고 한다. 이들의 안녕을 기원한다. 밤에 배달 나간 아파트 단지에서 시작된 불을 목격하곤 소화기로 진압한 뒤 유유히 사라진 배달 기사, 한강에 뛰어들어 익사 위기의 시민을 구해낸 정의의 기사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은 기사(騎士)로 불려야 마땅하다. 지난 3·1절, 한 만취 운전자가 중앙선을 넘어 화물차를 들이받고는 차에서 내려 달아났다. 당시 주문 대기 중이던 배달 기사 네 명이 합동 추격에 나섰고, 검거에 성공했다. 모두 저마다 달린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그래도 법은 지키며 달리자.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조선일보 정상혁 기자
04-06 윤 대통령 ‘마약과의 전면전’ 선포… 법무부에 검·경 합동단속 지시
강남학원가 충격적사건 관련
“공권력 총동원해 근절하라”

윤석열(얼굴) 대통령이 최근 서울 대치동 학원가에서 벌어진 ‘마약 음료 시음’ 사건과 관련해 법무부·경찰청의 강력한 합동단속을 지시했다. 최근 마약이 사회 구석구석 각계각층으로 침투하면서 공권력을 총동원한 ‘마약과의 전쟁’을 통해 범죄 뿌리를 뽑겠다는 계획이다.
6일 대통령실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이날 용산 대통령실에서 비공개 회의를 열고 “어린 학생들까지 위협하는 마약 생산·유통 판매 조직을 반드시 뿌리 뽑아야 한다”며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윤희근 경찰청장에게 강력한 합동 단속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 대통령은 고등학생들에게 마약이 섞인 음료를 마시게 한 일당 검거 소식을 접한 후 큰 우려를 나타냈다고 한다.
마약 특별 단속의 키는 법무부가 잡고 검찰과 경찰이 합동 단속에 나서는 방식을 취할 것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국정과제점검회의에서 “검찰은 (마약 수사에) 손을 놓고 경찰만 이 업무를 다 부담하다 보니 협업 효율이 떨어진 것”이라며 합동 수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에 대검찰청은 지난달 전국 4대 권역 검찰청(서울 중앙·인천·광주·부산)에 마약범죄 특별수사팀을 설치하고 대응에 나섰다.
법무부와 검찰, 경찰청은 마약 복용자들뿐만 아니라 마약 생산 및 유통 행위에 대한 집중 단속에도 나설 예정이다. 양귀비 개화기(4∼6월)와 대마 수확기(6∼7월) 이전에 생산 유통 조직을 뿌리 뽑아야 단속 효과를 높일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최근에는 단속을 피하기 위해 도심 주택에 각종 기구를 설치한 뒤 대마를 재배하고 유통하는 사례가 계속 적발되고 있다. 검찰은 해외에서 마약을 들여오는 밀수 사범들에 대해서도 집중 단속을 벌이고 있다.
김윤희 기자 worm@munhwa.com
04.06 “다리 밑서 수십명 운동하던 곳”…정자교 붕괴, 불안한 분당

▲5일 오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교의 한쪽 보행로가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해 출동한 소방대원들이 현장을 수습하고 있다. 이 다리는 1993년 6월 사용 승인을 받은 30년 된 다리다. [뉴시스]
“아침 저녁으로 수십명 모여 에어로빅 하던 곳이 순식간에 무너지다니….”
성남 분당신도시 중심부에 있는 정자교가 무너졌다. 주민들은 조성한 지 30년이 넘은 ‘노후 신도시’ 분당 지역의 도시 시설물들의 안전을 염려하며 사고 현장 주변을 쉽사리 떠나지 못했다. 사고가 난 성남시 분당구 정자교는 1993년 6월 20일 사용 승인을 받은 30년 된 다리다. 5일 오전 9시 45분쯤 길이 108m 다리 중 정자2동에서 정자1동 방향 보행로 약 50m가 무너졌다. 이 사고로 다리를 건너던 A(40)씨가 숨지고 B(27)씨가 크게 다쳤다.
정자교는 공동주택 7000여 세대가 모여 있는 느티마을과 상록마을, 한솔마을 주민들이 신분당선·수인분당선 정자역을 이용하거나 서울, 수원, 용인, 광주 등 인접 도시로 가는 광역 시외버스를 이용하려면 건너야 하는 다리다. 탄천변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돼 있어 다리 밑을 지나는 시민들도 많은 편이다. 사고 당시 다리 밑을 지나던 한 남성은 2~3m 차이로 화를 면했다고 한다.
정자 카페거리 커피전문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 유지호(23)씨는 “오늘은 휴강이라 운동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처참하게 무너진 다리를 보고 너무 떨리고 무서웠다”며 “학교에 갈 때나 아르바이트 갈 때 하루에도 몇 번을 지나가는 곳이었다”고 말했다. 백현동 주민 정모(67)씨는 “정자교와 방아교 밑은 아침저녁으로 에어로빅 강습을 하는 곳이라 우리 또래 여성 수십명이 모이기도 했던 곳인데, 멀쩡하던 다리가 무너지다니 무서워서 위아래로 지나다닐 수 있겠나”라고 했다. 다리 붕괴 당시 인접 초등학교와 상가 건물 등 일대가 10분가량 정전되기도 했다.
성남시 탄천 일대엔 총 24개 교량이 있다. 시는 지난해 8월 29일부터 11월 26일까지 총 900여만원을 들여 정자교에 대한 정기안전점검을 했다. 중앙일보가 입수한 실시결과 문건에 따르면 안전등급은 ‘양호’, ‘중대결함 없음’이었지만 요약표엔 ▶교면포장 균열, 접속부 망상균열 및 파손 ▶배수구 막힘 및 배수관 유실 ▶난간 및 연석 균열 등 조치가 필요하다는 내용이 지적돼 있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경찰은 정자교 안에 묻혀 있던 상수도관이 파열되면서 다리 상부 보행로 부분이 무너진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고 원인을 조사 중이다. 경기남부경찰청은 강력범죄수사대장을 팀장으로 분당경찰서 형사 등 수사전담팀 38명을 편성해 수사에 돌입했다. 전담팀은 중대재해처벌법상 중대시민재해를 적용할 수 있는지도 검토하고 있다.
이날 정자교 붕괴 사고 이후 이 교량 상류 쪽 900m 떨어진 곳에 있는 불정교(총연장 100여m, 왕복 4차로)에서도 보행로 일부 구간에서 침하 현상이 확인됐다는 주민 신고가 여러 건 접수됐다. 이에 따라 성남시는 이날 정오부터 불정교의 양방향 통행을 통제하고 긴급 안전점검에 나섰다. 불정교 보행로는 교량 양측에 폭 2~2.5m 규모로 설치돼 있다.
성남시 관계자는 “불정교도 정자교처럼 분당신도시가 조성되면서 건설됐다”며 “주민 민원이 접수된 만큼 정밀 안전 점검을 진행한 뒤 이상이 없으면 다시 개통할 것”이라고 말했다. 성남시는 탄천 일대 24개 교량에 이어 시 전체 211개 교량에 대해서도 전면적인 안전점검을 할 방침이다.
손성배·최모란 기자, 신윤정 인턴 son.sungbae@joongang.co.kr
04.07 온 사회에 전방위로 파고드는 마약, 마약수사청 검토할 때다
서울 대치동 학원가에서 학생들에게 필로폰 등이 섞인 음료를 집중력 강화에 좋다고 속여 시음하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협박을 위한 범죄였지만 그만큼 마약이 흔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참으로 심각한 상황이다. 기업인, 연예인의 마약 사건은 끊임없고, 지난달엔 14세 여중생이 필로폰을 투약한 뒤 실신한 사건도 있었다.
검경 단속을 비웃듯 지금도 텔레그램 등 소셜미디어에는 마약 판매 광고가 버젓이 올라 있다. 마약 인증샷을 올리는 구매자들도 있다. 수사 기관이 압수한 마약도 2021년 1295.7㎏으로 5년 만에 8배 급증했다. 스마트폰에 익숙한 20·30대는 물론 10대 청소년 마약 사범이 급격히 늘고 있다. 지난해 경찰에 적발된 10대 마약사범은 294명으로 4년 전보다 3배가량 늘었다. 국가적 비상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사 역량은 마약 온라인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현재 마약 밀수와 대규모 유통 범죄는 검찰이, 투약 사범과 소규모 유통 범죄는 경찰이, 국내로 밀반입되는 마약은 관세청이, 해상 마약사범 단속은 해경이 수사한다. 컨트롤타워가 없다 보니 정보 공유는 물론이고 신종 마약 범죄에 기민하게 대응하기도 어렵다.
이제는 마약 수사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수 있는 ‘마약수사청’ 설립을 검토할 때가 됐다. 미국 마약청(DEA)이 모델이 될 수 있다. 미 DEA는 법무부 직할로 마약 범죄 단속의 모범으로 꼽히고 있다. 이 방안은 문재인 정권 때도 제안됐지만 검찰 수사권 분산에 밀려 무산됐다. 인사·예산을 독립시키면 검찰의 수사권 집중 문제도 없다. 정파를 따질 일도 아니다. 정부와 국회 모두 마약수사청 설립을 적극 검토했으면 한다.
조선일보 사설\
04.07 대치동서 ‘마약 시음회’라니
지난 3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에서 미성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마약을 섞은 음료를 마시게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아이들이 자주 다니는 대치동 은마아파트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열린 ‘시음회’다. 중간고사 대비 기간이라 학원을 오가는 아이들이 더 많은 때였다. “기억력과 집중력을 올려주는 음료”라며 플라스틱 병을 하나씩 건넸다고 한다.

▲3일 오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에서 여성 2명이 마약이 든 음료수를 들고 걸어가고 있다./독자 제공
의심 없이 음료를 받아든 아이들에게 시음회 일당은 “보는 앞에서 음료를 다 마시고 가라”고 했다. 아이들은 맛이 어떤지 등 설문조사에도 답했다. 부모님 전화번호를 묻고, 시음 이후 추가로 음료를 마실 의사가 있는지도 확인했다고 한다.
시음회를 한 일당은 곧 아이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 아이가 마약을 한 것을 신고하겠다”고 협박했다. 다음 날 아침 협박 문자도 돌렸다고 한다. 이들은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 조건을 걸며 부모에게 금품을 요구했다.
한 중학생 학부모는 “아이 친구가 당할 뻔했는데 다행히 뚜껑에 따라 한 모금만 마시고 버렸다고 하더라”며 “음료를 다 마셨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 모를 일”이라고 했다. 이 사건으로 자신도 모르게 마약을 복용한 아이가 최소 6명이다. 경찰은 시음회를 한 일당과 이들 배후에 있는 인물을 추적하고 있다. 묻지 마 마약 범죄의 표적이 된 아이들은 어지럼증과 두통 등을 호소하고 있다고 한다. 전문가에 따르면 음료 속 필로폰 등이 소량이고, 혈관에 직접 투여한 것이 아니라 다행히 몸에 큰 이상이 생기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모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 여덟 살 아들을 키우는 한 대치동 주민은 “아이에게 밖에서 아무것도 받지 말라고 여러번 당부했다”고 말했다. 초등학생 딸을 둔 어머니는 “한 가족의 인생을 모두 앗아가려고 한 범죄”라며 “마약 범죄 처벌이 약하니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근처 학교와 학원에도 비상이 걸렸다. 한 중학교 교사는 “요즘 중간고사 준비 기간이라 아이들이 안 그래도 긴장해 있는데 범죄자들이 이를 노린 것 같다”며 “학교 차원에서도 음료를 마신 학생들이 있는지 조사했다”고 했다. 근처 학원들도 학부모들에게 ‘안전에 주의해달라’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
대치동은 우리나라 ‘사교육 1번지’로 불리는 곳이다. 사건이 일어난 사거리부터 아파트 상가, 골목 구석까지 학원들이 빽빽하게 있다. 수많은 학생이 무거운 가방을 메고 학교와 학원을 밤늦게까지 오가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아이들을 표적으로 마약을 먹이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에서 공분이 일고 있다. 대치동 학원이 끝나는 밤에 고등학생 딸을 데리러 나온다는 한 아버지는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키지 못하는 나라에 미래가 있겠느냐”고 했다. 가슴에 와닿는 아픈 말이었다.
조선일보 김수경 기자
04-11 건폭과 전쟁 100일…불퇴전 각오로 노동개혁 성공시켜야
건설업체들을 압박해 불법 월례비를 받은 타워크레인 기사들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한다. 타워크레인조합(임대사업자 단체)이 10일 월례비를 받은 기사 60명을 특정해 경찰에 수사를 의뢰한 것이다. 연간 7000만 원 이상을 받은 부산·울산·경남지역 기사들이다. 1억 원 이상을 받은 기사가 23명이고, 심지어 2억5000만 원 가까운 거액을 받은 사례도 있다고 한다. 조합 측은 “전국적으로 3500여 명이 1700억 원 가량의 직·간접적 피해를 일으킨 것으로 추정된다”며 “자료가 명확하고 액수가 큰 사례를 중심으로 1차 수사 의뢰했다”며 추가 고발을 예고했다. 조합은 월례비를 직접 줬던 철근·콘크리트 전문업체들을 통해 사례를 취합했다고 한다. 그동안 ‘노조 떼법’ 위세에 끌려다니던 사업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정부의 지원과 범사회적 응원이 절실하다.
윤석열 정부가 건설 현장 불법행위 일제 조사에 착수한 지 지난 8일로 100일이 넘으면서 변화 조짐이 보인다. 월례비 거래가 줄고 대형 건설사들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추가 근무가 필요한 때 비노조 타워크레인 대체 기사들을 투입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은 지난 9일 정부의 노조 불법행위와 태업 단속으로 전국 574개 점검 현장 중 85.7%가 정상화됐다고 발표했다. 그렇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아직도 각종 불법이 여전히 판치는 곳이 많다. 급행료 명분의 월례비는 엄연히 불법이다. 상납 등의 조직적 비리 개연성도 크다. 생생한 피해 사례·증거를 토대로 신속하고 철저한 수사를 통해 위법 확인 땐 기사의 면허정지 등 엄단해야 한다. 사업주들이 조사 방해와 보복 피해를 받지 않도록 공권력의 각별한 보호도 필요하다.
윤 대통령이 지난 2월 21일 조직폭력과 유사하다는 의미로 ‘건폭’이라는 표현까지 동원해 건설 현장 폭력 특별 단속을 지시했다. 노조의 월례비 징수나 업무 방해는 일단 줄어들었다. 노조의 ‘깜깜이 회계’ 척결을 위한 회계장부 제출 요구와 이를 거부한 노조에 대한 과태료 부과 등 원칙 대응이 이어지고, 노동 현장에선 MZ노조 부상 등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윤 정부 1년의 가장 두드러진 성과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아직은 미풍이다. 노동개혁 성공을 위한 불퇴전의 각오를 정부는 물론 국민도 다져야 한다.
문화일보 사설
04.12 4월의 악몽 ‘火風’… 이번엔 강릉 덮쳤다
‘초속 30m’ 태풍급 강풍 타고, 순식간에 축구장 541개 면적 태워

▲잿더미가 된 펜션마을 - 11일 오전 강원 강릉시 야산에서 발생한 산불이 휩쓸고 간 강릉시 저동의 펜션마을. 마을 내 주택과 펜션들이 잿더미로 변해 있고, 곳곳에서 희뿌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소방관들은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잔불 정리 중이다. 이날 불은 강풍을 타고 1시간 40여 분 만에 2.8km가량 떨어져 있는 해변까지 번졌고, 오후 4시 30분쯤 큰 불길이 잡혔다. /뉴스1
11일 오전 강원 강릉시 난곡동 일원에서 발생한 산불이 ‘태풍급’ 강풍을 타고 삽시간에 경포호와 해안가까지 번져 막대한 피해를 낳았다. 2005년 4월 양양 낙산사를 태운 동해안 화재의 악몽이 재현됐다.
이날 한때 초속 30m 강풍(순간 최대 풍속)이 불면서 불은 1시간 40여 분 만에 난곡동과 저동, 안현동 등 3개 동을 휩쓸고 지나가 사근진 해변까지 확산됐다. 다행히 오후 3시 18분쯤부터 오락가락했던 ‘단비’가 화마(火魔)의 기세를 누그러뜨렸고 바람도 잦아들면서 8시간 만인 오후 4시 30분쯤 큰 불길이 잡혔다.
그러나 이번 산불은 그때까지 축구장 541개 면적에 해당하는 임야 등 379ha를 태웠다. 또 주택 59채와 펜션 34동, 소규모 호텔 3동 등 100여 채가 불탔다. 강릉시 안현동 한 주택에서는 미처 대피하지 못한 주민 전모(88)씨가 숨진 채 발견되는 등 인명 피해도 있었다. 주민 1명, 소방대원 2명 등 3명이 화상을 입었고, 12명이 연기에 질식했다.

▲11일 강원 강릉에서 발생한 산불로 주택이 불에 타자 한 주민이 망연자실해 하고 있다. /연합뉴스
소방 당국과 산림청에 따르면, 이날 불은 오전 8시 30분쯤 강릉 난곡동의 골프장 인근 야산에서 시작됐다. 소방서 관계자는 “초속 29m 강풍에 소나무가 부러지면서 전깃줄을 건드려 고압 전선이 끊어졌고, 그때 튄 불꽃이 낙엽에 옮아붙어 산불로 번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이 강풍으로 불이 순식간에 번지자 강릉시 주민, 펜션과 호텔 투숙객 등 550여 명이 인근 주민센터와 빙상 경기장인 강릉 아이스아레나 등으로 대피했다. 경포초등학교와 사천중학교 등 강릉·속초 지역 15개 학교가 휴업 또는 단축 수업을 했다.
화재 진압 과정에서 ‘문화재 지키기’에 비상이 걸렸다. 불길이 보물인 ‘경포대’, 국가 민속문화재인 ‘선교장’ 등 강원 지역 문화재의 코앞까지 번졌기 때문이다. 당국은 경포대 현판 7개를 다른 곳으로 미리 옮기고, 선교장에 물을 뿌리는 등의 대비를 했다. 다만 강원도 유형문화재인 ‘방해정’은 일부가 소실됐다.
이날 화재 현장에는 장비 391대와 인력 2360여 명이 투입됐다. 헬기 12대도 대기했지만, 오전 내내 강풍으로 이륙을 못 하다가 오후 바람이 잦아들면서 4대가 진화 작업에 투입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강릉 산불과 관련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장비와 인력을 신속히 투입해 조기 진화에 총력을 기울여 달라”고 지시했다.
04.12 “몸만 간신히 빠져나와, 어떻게 살라고”... 거리엔 야속하게 재만 날렸다
[강릉 산불] 불타버린 삶의 터전… 이재민들 망연자실

▲잿더미가 된 펜션마을 - 11일 오전 강원 강릉시 야산에서 발생한 산불이 휩쓸고 간 강릉시 저동의 펜션마을. 마을 내 주택과 펜션들이 잿더미로 변해 있고, 곳곳에서 희뿌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소방관들은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잔불 정리 중이다. 이날 불은 강풍을 타고 1시간 40여 분 만에 2.8km가량 떨어져 있는 해변까지 번졌고, 오후 4시 30분쯤 큰 불길이 잡혔다. /뉴스1
강원도 강릉 지역에서 일어난 11일 산불은 오후 3시 30분쯤 비가 내리면서 잦아들었다. 큰 피해를 본 안현동 펜션마을에서는 잔불이 꺼지는 모습이 보였다. 한 주민은 “집이 다 타버린 뒤에 오는 비가 야속하지만, 그럼에도 너무 감사한 비”라며 “계속 비 소식이 있다는데, 한시라도 빠르게 잔불이 꺼지기를 바랄 따름”이라고 했다. 산불 피해 주민들이 모여 있던 강원 아이스아레나에서는 자원봉사자들과 일부 이재민이 비가 내리자 “너무 다행이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등 탄성을 내지르기도 했다.

▲11일 오전 강원 강릉시 난곡동에서 발생한 산불로 뼈대만 남은 채 불타고 있는 한 건물(왼쪽 사진)에서 소방관이 불을 끄고 있다. 이날 불은 초속 30m의 강풍을 타고 경포대해수욕장, 사근진해변까지 순식간에 뻗어나갔다./소방청 제공/뉴스1
하지만 화마의 흔적은 강렬했다. 이날 오후 3시 강릉시 안현동 펜션마을에는 주택·펜션 수십 채가 불에 타 잔해만 남아 있었다. 산불은 이날 오전 마을을 덮쳤다. 마을 곳곳에서는 꺼지지 않은 불길이 눈에 띄었고, 메케한 연기도 피어올랐다. 성인 남성도 몸을 가누기 어려운 강한 바람에 재가 흩날렸고, 길 곳곳 깨진 유리창 파편들로 걷기가 어려웠다.
산불로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들은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곳에서 20년 가까이 펜션을 운영했다는 김영삼(52)씨는 본인 소유의 자택과 펜션 2채가 모두 타버렸다고 했다. 김씨는 “키우던 고양이도 불로 잃고, 자녀들과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도 모두 타버렸다”며 “겨우 몸만 대피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너무나 막막하다”고 했다.

▲이 발생한 강릉시 저동 야산 인근에서 주민 이세기(64) 씨와 그의 가족이 집이 전소된 뒤 살아남은 자신이 키우던 소 두 마리를 가족과 함께 구출하고 있다. 이씨는 이곳 저동 야산 아래 42년째 거주 중이었으나 이번 산불로 삶의 터전을 잃었다. 키우던 소 세 마리 중 한 마리는 화마에 도망갔고 두 마리는 구출됐다./연합뉴스
이곳에서 10여 년간 펜션을 운영한 신동윤(76)씨는 “3층짜리 펜션을 6개월째 3억원을 들여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있었다”며 “타는 냄새가 나자마자 펜션을 뛰쳐나갔는데 불이 순식간에 번져버렸다”고 했다. 그는 “다행히 손님은 아무도 없었지만, 짐은 하나도 들고 오지 못했다”고 했다. 주민 이건모(70)씨는 “이웃 주민들의 집이 다 타버려서 망연자실했다”며 “이쪽에 나무가 많고 바람이 심해서 산불이 크게 번진 것 같다”고 했다.

▲11일 강원 강릉 난곡동 야산에서 발생한 산불로 바람에 옮겨 붙어 전소된 안현동의 한 민가와 펜션을 찾은 주민이 슬픔에 잠겨 있다. /뉴시스
강릉시 저동 주민 전진하(69)씨는 “공무원들이 불났다고 전화를 해서 급하게 대피하느라 장화 하나만 신고 나왔는데, 휴대전화 말고는 아무 짐도 챙기지 못했다”며 “5년 정도 양봉업을 해왔는데, 벌도 다 타 죽어버렸다”고 했다. 전씨는 “나이도 많은데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막막하다”고 했다.
일부 주민은 119 신고를 했지만, 대응이 늦어져 집을 잃었다고 했다. 안현동에 사는 조인숙(62)씨는 “산에서 연기가 나고 집 지붕에 불이 붙어 119 신고를 했는데, 1시간 넘게 소방차도 오지 않았다”며 “혼자 지붕에 물을 30분 넘게 퍼부었는데 결국은 다 타버렸다”고 했다. 그는 “소방차들이 산으로만 가고 집이 밀집된 곳으로는 안 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했다.
인근 주민들은 강릉 아이스아레나, 사천중학교 등으로 대피했다. 저동 아파트에 사는 김애선(67)씨는 “아파트 텃밭도 다 타버려서 놀란 상태였는데, 아파트 밖으로 나가라는 방송이 나와서 가까스로 도망쳤다”며 “연기가 너무 자욱해 숨을 못 쉬어서 죽는 줄 알았다”고 했다. 사천중으로 대피한 조규남(91)씨는 “집이 탔는지 안 탔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급하게 약 보따리만 챙겨서 나왔다”며 “농장도 없고 남은 것은 집뿐인데 불에 탔을까 걱정”이라고 했다.
이번 산불과 강풍의 영향으로 강원 지역 학교 23곳이 휴업·단축 수업을 했다. 김진태 강원지사는 “마지막까지 불을 다 진압하고, 재산 피해를 더 확실하게 조사해서 특별재난지역에 포함되도록 중앙 정부에 건의할 예정”이라고 했다.
04.13 전국 초교 4분의 1이 신입생 10명 미만, 대책 없이 맞는 저출생 후폭풍

▲2일 오전 강원 홍천군 구송초등학교에서 박지환(7)군이 2023학년도 입학식을 마치고 교실에서 첫 수업을 준비하고 있다. 이 학교는 올해 입학생이 1명으로 1학년과 2학년이 한 반에서 함께 수업을 듣는다. /연합뉴스
올해 신입생을 단 한 명도 받지 못해 입학식을 치르지 못한 초등학교가 전국 145곳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입생이 10명 미만에 머문 초등학교도 전국 초등학교 6163곳 가운데 1587개로 4분의 1에 달했다. 짐작은 했지만 그 수치가 충격적이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동들은 2016년생들로 그해 출생아 수는 40만6000명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출생아 수는 24만9000명이다. 앞으로 이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갈 나이가 되면 전국 초교의 절반이 신입생 10명 미만일 것이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도 마찬가지 과정을 겪는 것은 ‘예정된 미래’다. 학교가 없어지면 지역사회가 쇠락하다 소멸한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속수무책으로 저출생 현실을 맞이했듯 학교 소멸이라는 현실도 사실상 무대책으로 맞고 있다. 초등 교사를 배출하는 교대 정원은 10년 넘게 그대로다. 한 해 출생아 수 50만명대일 때 정해 놓은 교대 정원을 출생아 수가 반 토막 날 때까지 방치하는 것이다. 중·고교 교사를 배출하는 사범대 구조 조정도 시급하지만 교육부는 미적대고 있다. 전국적으로 늘어가는 폐교를 어떻게 활용할지 대책도 없다. 잡초만 무성한 학교도 수백곳에 이른다.
갈수록 줄어드는 인구에 적응 또는 연착륙할 대책이 시급하다. 교육은 물론 복지·국방·주택·의료 등 영역별로 인구 변화에 따라 파급효과와 시기를 예측해 대비할 분야가 한둘이 아니다. 저출생 파고가 이미 덮치고 있는데 언제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건가.
조선일보 사설
04.13 애니콜 생산직원 4000명의 ‘대단한 노동’
삼성전자 적자 면하게 한 주력
생산라인 곳곳에 촘촘히 박힌
수백개의 혁신을 기록한 간판들
여기서 세계 1위가 시작됐다
경북 구미시 1공단로 244번지. 대한민국 최초의 ‘진짜 세계 1위’의 탄생지다. 지금은 갤럭시, 이전엔 애니콜로 불리던 삼성전자의 휴대폰은 여기서 시작됐다. 텅스텐도 팔고, 가발도 팔았던 나라지만, 우리 손으로 글로벌 최고급 소비자들조차 갖고 싶어 안달하는 공산품을 만든 것은 애니콜이 처음일 것이다. 이후 옆에 있는 3공단 3로 302번지 2공장으로 옮겨 생산을 이어가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2020년 3월 3일 경상북도 구미시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을 방문, 생산 현장을 점검하고 있다./삼성전자
1988년 첫 번째 모델인 SH-100A를 생산한 이후 지금까지 9억대 정도 1, 2공장에서 만들었다. 이제는 베트남, 인도, 브라질 등 해외 공장에서도 만들어 연산 1600만대 정도지만 여전히 최고의 생산 기술을 전파해주는 ‘기술 사관학교’ 역할을 한다.
이름도 ‘글로벌 스마트폰 마더(mother) 공장’.
이곳을 19년 전인 2004년 11월 생산 라인 내부까지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외부인으로는 고 노무현 대통령만 보고 갔다고 할 정도로 보안 구역이었다. 160개 라인이 있었는데, 생산직 직원을 ‘프로’라고 부르고 있었다.
기자가 가장 큰 감동을 받은 것은 라인 내부의 로봇 사이로 곳곳에 서 있는 수많은 아주 작은 간판이었다. 현장 직원들의 아이디어로 이뤄낸 혁신 성과를 보여주는 기록이었다.
“이 라인의 기울기를 5도에서 5.5도로 하면 휠씬 더 움직이기 편하다” “여기 길이는 5㎝만 줄이면 생산을 더 많이 할 수 있다” 등 현장에서 일해보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였다.
공장 관계자는 “4000여 직원이 삼삼오오 모여 만든 분임조 활동이 있는데, 여기서 나와 현장에 접목된 혁신만도 1000개가 넘고, 이것들이 세계 1등 공장을 만든 비결”이라고 말했다. 당시 구미공장에는 450개 분임조 활동이 있었다. 그 결과는 불량률 0.3%. 당시로선 단연 세계 최고의 공장이었다.
취재수첩에 적힌 현장에서 만난 프로들의 인터뷰 내용은 이랬다.
“이형 장비를 돌리다 보면 하루 24시간 중 52분 정도가 정지했다. 분임조 활동을 통해 이를 47분 줄여 딱 5분만 정지하게 했다”(이ΟΟ, 당시 25세)
“지난해에만 4건을 개선했다. 내가 이 회사를 떠날 때 정말 열심히 하다 갔다는 소리를 듣고 싶다.(한ΟΟ, 당시 28세)
어느 ‘프로’에게 “그렇다고 더 많은 월급을 주는 것도 아닌데 왜 근무시간 마치고까지 하는가?”라고 물었더니 “스스로 자부심 때문이고, 일할 때 스스로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19년 전 취재수첩을 소환한 것은 “노동이란 착취의 대상만이 아니라 자신의 꿈을 실현해 보람을 느끼게 하는 방법”이라는 교과서적인 말을 이렇게 절절히 체험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구미공장 취재 당시 대학 진학률은 81%였다. 대부분 ‘프로’들은 고졸 사원들이었다. 그들이 우리의 어떤 엘리트들도 못 해내고 있던 세계 1위의 꿈을 실현해냈다. 애니콜 신화에는 이건희, 이기태, 김종호 등 빼어난 리더들과 수많은 디자이너, 기술자들이 배경에 있다. 동시에 4000여명 생산직 직원들의 ‘노동’ 역시 잊어선 안된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부문이 분기에 4조원에 이르는 적자를 내고 25년 만에 감산을 하는데도 그마나 전체 적자를 면한 데는 스마트폰 사업부가 톡톡히 역할을 했다고 한다.
꿈은 좋은 머리로 꿀 수 있지만 그 꿈을 실현하는 것은 노동이라고 한다. 누군가는 착취당하지 않겠다고 난리치는 시대에, 또 누군가는 ‘노동이 더이상 필요 없다’는 또다른 시대로 가는 길목에서, ‘대단한 노동’을 반추해본다.
조선일보 이인열 산업부장
04.13 ‘특허 갑질’ 퀄컴, 과징금 1조원 확정... 사상 최대 금액
대법원 “공정위 부과 정당” 판결
다국적 통신업체 퀄컴이 휴대전화 제조업체 등에 부당한 계약을 강요했다는 이유로 공정거래위원회가 부과한 1조원대 과징금은 정당하다고 대법원이 판결했다.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대법관)는 13일 퀄컴 본사 등이 공정위를 상대로 낸 시정명령 취소 소송에서 퀄컴의 상고를 기각하고 사실상 공정위 손을 들어 준 2심 판결을 확정했다.
퀄컴은 특허이용을 원하는 사업자에게 휴대전화 생산에 필수적인 이동통신 표준필수특허(SEP)를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차별 없이 제공하겠다’는 내용의 국제표준화기구 확약(FRAND)을 선언하고 이동통신 분야에서 SEP독점적 보유자 지위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공정위는 2016년 공정위 사상 최대인 1조300억원의 과징금을 퀄컴에 부과했다. 휴대전화 생산에 필수적인 이동통신 표준필수특허를 보유한 퀄컴이 경쟁사인 칩셋 제조사들에게는 라이선스 계약 체결을 거절하고, 휴대전화 제조사들에게는 특허권 계약을 일방적인 조건으로 체결하는 등 사실상 ‘갑질’을 하며 공정거래법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서울고법은 퀄컴이 시장 지배적 지위를 남용하고 불공정 거래 행위를 한 점이 상당 부분 인정된다고 보고 사실상 공정위 손을 들줬다. 재판부는 공정위가 부과한 시정명령 일부를 취소했을 뿐 1조원대 과징금은 그대로 유지했다.
대법원은 13일 퀄컴의 행위가 시장 지배적 지위를 남용한 것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시정명령 일부를 취소한 판단도 그대로 유지했다.
대법원은 “퀄컴은 시장지배적 지위를 이용해 경쟁사인 칩셋 제조사에 라이센스 계약을 거절했고, 휴대폰 제조사에는 라이센스 계약의 체결을 강제했다”며 “이런 행위는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행위에 해당한다”고 했다.
조선일보 양은경 기자
04-13 건폭 엄단 성패는 노동개혁의 시금석

양준모 연세대 교수·경제학
지난 11일 전국 1만9000여 개 원도급사 대표가 모여 건설 현장의 정상화를 호소했다. 절박한 호소는 건설노조의 불법행위로 멍들어가는 현장 고발이기도 했다. 건설노조는 그동안 자기 조합원 채용 강요, 노조 전임비 및 월례비 요구, 하도급 업체 선정 개입 등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불법을 저질렀다. 정치권력의 명시적 비호와 암묵적 동조로 건설업체들은 속앓이를 해왔다. 노사관계가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왜곡되기 시작한 지 오래지만, 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없었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 초기부터 합리적·상생적 노사관계를 위해 불법행위 근절에 나섰다. 윤 정부가 불법행위 일제 조사에 착수한 지 100일이 지나면서 성과가 나기 시작했다.
전임 문재인 정부도 건설 현장 불법행위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건설 현장 불법행위 근절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었다. 그러나 성과는 미미했다. 문 정부는 ‘채용 강요 등 행위’를 구체화하는 지침을 마련하고, 불과 4곳을 대상으로 과태료를 물리는 등의 미온적 조치만 했다. 문 정부의 TF는 불법행위 개선의 어려움만 호소하면서 흐지부지됐다. 절박한 현장은 외면됐고, 한바탕 쇼로는 불법행위가 근절되지 않았다.
노동개혁을 국정 과제로 들고나온 윤 정부는 달랐다. 윤 대통령은 지난 2월 21일 ‘건폭’(건설 현장 폭력)이란 표현으로 불법행위를 근절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노조의 반발로 건설 현장이 파행으로 흐를 것이란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9일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의 보고서를 보면 건설노조 타워크레인 85.7%가 100% 정상화됐다고 한다.
지난 1월 전국 1494개 건설 현장에서 2070건의 불법행위를 접수하고, 총 12개 유형별 피해 사례를 조사했다. 그 결과, 피해액 규모가 최근 3년간만 1686억 원 상당으로 밝혀졌다. 타워크레인조합은 지난 10일 7000만 원 이상의 고액 월례비를 받은 기사 60명을 경찰에 수사 의뢰함으로써 추가로 불법 사례를 찾아 고발할 것임을 예고했다.
국토교통부는 타워크레인 작업에서 태업한 21명의 면허를 정지하는 절차에 착수했고, 근본적인 대책도 함께 제시했다. 국토부는 건설 플랫폼을 운영해 건설기계 임대차 정보와 조종사 구인·구직 정보를 제공하고, 건설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근로자들도 건설 현장에서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제야 정부가 노동개혁의 실마리를 잡은 듯하지만, 절박한 노동개혁의 여정은 아직 남아 있다.
시급한 과제는, 노조를 일부 정치꾼의 전유물에서 근로자를 위한 조직으로 바꾸는 일이다. 첫째, 회계의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 노조 간부들의 화려한 옷매무새에 감춰진 회계장부들은 오리무중이다. 자금이 근로자를 위해 사용됐는지 확인돼야 한다. 둘째, 공정한 법 집행이다. 노조가 정치투쟁에 나서는 것도 불법이지만, 정치권이 노조를 이용해서도 안 된다. 공정으로 상생의 노사관계를 만드는 건 정부의 책무다. 셋째, 자율을 바탕으로 한 노사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불합리한 법들을 개정해야 한다.
윤 정부의 개혁 의지로 노동 현장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노동개혁을 위한 과제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만, 불법행위 척결은 시작이다. 이제 온 국민이 노동개혁에 동참할 때다.
문화일보
04.14 핼러윈 참사 겪고도 달라진 게 없는 출퇴근길 ‘지옥철’

▲발 디딜 틈 없는 승강장 - 지난해 김포도시철도 ‘김포골드라인’ 김포공항역 플랫폼에 퇴근길 시민 수백명이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히 들어차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 퇴근 시간인 오후 5시부터는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계단 위까지 줄을 서야 할 만큼 승객들로 붐빈다고 한다. 이 노선을 이용하는 출퇴근길 승객은 하루 평균 280명으로, 최다 수송 인원의 2배 이상이다. /김주영 민주당 의원실
4년 전 개통 후 ‘지옥철’로 불렸던 김포도시철도(김포골드라인) 상황이 악화 일로다. 지난 11일엔 10대 여고생과 30대 여성이 호흡곤란으로 쓰러져 119구급대의 응급처치를 받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드문 일도 아니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벌어진다고 한다. 대형 사고 위험이 상존하는 것이다. 승객들은 “당장이라도 압사 사고가 터질 것 같다”고 하소연한다. 6개월 전 ‘핼러윈 참사’를 겪고도 크게 달라진 게 없다.
김포 한강 신도시와 서울을 잇는 김포도시철도가 이처럼 심각한 혼잡을 보이는 것은 애초 출퇴근 시간대 수요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탓이다. 3량 열차용 승강장을 설치하려 했으나 예산 등의 문제로 2량 승강장이 됐다. 그런 2량짜리 경전철에 출퇴근길 승객들이 대거 몰리면서 열차가 콩나물시루처럼 되는 것이다. 열차 한 칸의 최다 수송 인원은 115명인데 실제 출퇴근길 평균 이용자는 280명이라고 한다. 배 이상이 타고 있는 것이다. 핼러윈 참사 당시 군중 밀집도는 1㎡당 9~10명이었는데 김포도시철도는 7~8명 수준이라고 한다. 언제 사고가 터질지 모른다.
이곳뿐만이 아니다. 서울 지하철 1호선 시청역, 2호선 강남역 등도 퇴근길 북새통이 일상이다. 열차와 승강장이 사람들로 꽉 들어차 몸을 가누기조차 어려울 때가 많다. 안전 전문가들은 1㎡당 6명 이상이면 ‘위험 단계’로 본다. 그런 위험이 현재 지하철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일단 출퇴근 시간만이라도 안전 요원 배치를 늘려 사고 위험을 줄여야 한다. 근본적으로는 인프라 투자가 불가피하다. 김포도시철도 측은 내년 9월 열차를 추가 도입해 배차 간격을 줄이겠다고 하지만 결국은 김포에서 서울을 잇는 GTX 건설이나 지하철 5호선 연장 같은 근본 대책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이런 문제에는 손을 놓고 있다. 야당은 이미 다 나와 있는 핼러윈 참사 진상을 또 규명하겠다며 특별법을 추진하고 있다. 세월호 사고 이후 해난 사고가 더 늘어난 것은 사고에서 교훈을 얻기보다 정치에 이용하고 끝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사설
04.15 탕수육 14만원, 돈가스 10만원, 만두 6만원… 상상초월 ‘그늘집’ 물가
말도 안되는 음식값… 그래도 팔리는 나라

▲14일 서울 중구의 한 평양냉면 집에 걸린 가격표. 이 식당은 올해 주요 메뉴 가격을 인상하면서 냉면은 1만4000원, 제육 한 접시는 3만원이 됐다. /장련성 기자
한국에는 ‘골프장 그늘집 물가’라는 게 있다. 골프장 18홀을 돌다가 중간에 출출하거나 식사 때를 맞추지 못하면 간단히 요기를 하는 장소를 흔히들 그늘집이라 부른다. 그늘집에서 파는 음식 가격은 상상을 초월한다. 경기도의 한 골프장에선 탕수육 한 접시에 14만원을 받는다. 이곳만 그런 게 아니다. 경기도 기흥 한 골프장 그늘집에선 돈가스 한 접시가 10만원이다. 여주 골프장에선 만두 한 접시에 6만1000원, 이천 골프장에선 떡볶이 한 접시에 6만원을 받고 있다. 한국골프소비자모임의 한 관계자는 “그늘집의 식음료 가격은 코로나 이후 골프 인구가 급증하면서 왜곡이 더 심각해졌다”면서 “대대적인 조사와 정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늘집 바가지는 물론 일반인이 쉽게 체감하기 힘든 대단히 극단적 사례다. 문제는 이 가격이 통용되면서 우리 사회 특유의 접대 문화, 법카 문화와 접목해 실생활 물가에서까지 ‘새로운 잣대’ 역할을 하며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서울 압구정동에 있는 한 일식당. 요리사가 그날 재료에 따라 음식을 만들어주는 소위 ‘오마카세(맡김차림)’ 가게다. 1인분 가격이 42만원. 작년 말 이곳을 어렵게 예약해 음식을 먹고 갔다는 일본 관광객 A씨는 “도쿄에서 즐겨 다니던 식당보다 퀄리티에 비해 가격이 너무 비싸 당황했다”면서 “다시 오진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일본 도쿄 신니혼바시역 근처에 있는 한 고급 일식당의 저녁 오마카세 1인 코스는 1만5000엔(약 14만7000원)이다. 지난달 말 회원 100만명 넘는 국내 최대 여행 후기 카페에는 이 식당이 ‘저렴하다’고 평가하는 글들이 잇따라 올라왔다. 워낙 비싼 서울 물가와 비교된 셈이다.
오마카세는 음식 자체를 식당 요리사에게 맡긴다는 뜻. 우리나라에서는 요즘 일종의 ‘사치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최근 일본 언론은 “(한국에선 오마카세를 먹고) SNS에 사진과 영상을 업로드해 타인에게 자랑하는 것까지 세트”라며 “한국 젊은이에게 사치의 상징”이라고 비판했다.
우리나라 식당 물가는 지난 1~2년 사이 천장(天障)을 뚫었다. 서울 압구정과 한남동, 성수동 일대의 일부 식당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음식 가격의 상식을 뛰어넘었다. 서울 사대문 안에 있는 특급 호텔 뷔페는 심할 경우엔 지난 1년 동안 40% 넘게 치솟았다.
◇천장 뚫린 외식 가격
지난 5일 서울 이태원의 소고기 전문점. 점심 8만원짜리 소고기 코스 요리 한 가지만 파는 곳이다. 가게 입구에서 번호표를 뽑자 스마트폰으로 ‘예약 대기 34번’이라는 알림이 왔다. 비싼 가격에도 대기 신청을 하고 1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한다. 식당 입장에선 비싼 가격에도 일부의 과시욕이나 허영심 등으로 수요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소위 ‘베블런 효과(Veblen effect)’를 노린 것이다.
서울 특급 호텔은 지난 1년 사이 뷔페 가격을 일제히 올렸다. 서울 신라호텔(더 파크뷰)은 지난 3일부터 평일 점심(16만8000원)과 평일 저녁·주말(18만5000원)을 올렸다. 작년 1월과 비교하면 40% 넘게 올랐다. 웨스틴조선 서울(아리아)도 지난달 뷔페 가격을 20% 올려 평일·주말 저녁 가격이 각각 16만원·16만5000원이다. 한 특급 호텔 관계자는 “호텔 뷔페 식당 가격이 올라도 손님은 늘고 예약은 더 치열해지는 기현상이 최근 빚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호텔 빙수 8만3000원, 14만원짜리 케이크
매년 여름철 빙수는 가격이 가장 심하게 오르는 품목 중 하나로 꼽힌다. 2020년 5만4000원이었던 서울 신라호텔의 망고 빙수는 작년 8만3000원으로 2년 사이 53%가 뛰어올랐다. 케이크 가격도 매년 끝없이 오르고 있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는 웨스틴 조선 호텔에서는 14만원짜리 케이크까지 등장했다. 연말 대목이 아니더라도 최근 서울의 대중적인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파는 케이크도 3만원 미만을 찾기 어렵다.
조선일보 송혜진 기자
04.15 K-외식 리뷰… 비싸다, 뜯겼다, 속았다
[비싸도 너무 비싼 코리아]
세계적 여행 사이트 리뷰마다
“가격도 양도 모두 불만족” 속출

▲다시 나갈까 - 지난 12일 점심시간 서울 광화문 한 한식집을 찾은 스웨덴인 마그다 예이네발씨가 메뉴판을 보며 놀라는 모습. 그는 “요즘 한국 외식 물가가 너무 비싸 좋아하는 갈비는 꿈도 못 꾸고, 집밥을 해 먹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했다. /고운호 기자
“아…, 딱 요만큼 나오네요.”
지난 12일 서울 광화문 한 한식집에서 만난 마그다 예이네발(26·스웨덴)씨가 이날 점심식사로 주문한 3만3000원짜리 갈비구이 반상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엄지손톱만 한 갈비구이 몇 조각이 접시에 담겨 있었다.
예이네발씨는 “요즘 한국 외식 물가가 정말 너무 비싸다”면서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음식이 갈비지만, 제대로 못 먹고 지낸 지 벌써 1년이 넘었다”고 말했다. 그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두어 달에 한 번씩은 사먹곤 했지만 요즘엔 그마저도 정말 쉽지 않다”고도 했다.
‘비싸다’(pricy)’ ‘과하다(Overpriced)’ ‘말도 안 되게 비싸다(Steep)’ ‘사기다(Scam)’….
한국 외식 물가가 계속 솟구치면서 트립어드바이저, 론리플래닛, 레딧과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같은 각종 소셜미디어와 식당 리뷰 커뮤니티에는 최근 한국 식당을 방문하고 가격이나 양에 불만을 느낀 외국인 리뷰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말레이시아인 쿠샤이리씨는 지난 3월 말 자신의 페이스북에 한국 여행에 대해 “한국 여행은 저렴하지 않다”는 제목의 글을 썼다. 그는 “성인이 한국에서 한 끼 밥을 먹으려면 기본 1만4000원 이상이 든다”고 썼다.
한 일본인 관광객은 이달 초 유명 소셜미디어 플랫폼에 우리나라 한 삼겹살 식당을 다녀온 후기를 남기면서 “이렇게까지 비쌌나?”라고 썼다. 그는 “예전보다 최소 1.5배는 더 비싸진 느낌”이라고 했다.
여행 정보 플랫폼 트립어드바이저에는 한 러시아 출신의 외국인이 서울 종로 한식집을 다녀와서 “뜯겼다(Ripped off)”는 리뷰를 남겼다. 그는 “2인분에 420달러(54만원)짜리 한정식을 먹고 나니 속은 기분”이라고 썼다.
미국인들이 즐겨 쓰는 소셜미디어 커뮤니티 레딧에는 “한국은 다른 동아시아 국가보다 더 비싸다”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비싸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라고 썼다. 그는 “한국 식당 물가는 물론이고, 과일 같은 식료품도 깜짝 놀랄 수준으로 비싸다”고도 썼다.

글로벌 물가조사 사이트 ‘넘베오’에 따르면 올해 한국의 식료품 물가는 전 세계에서 넷째로 높았다. 버뮤다, 스위스, 케이맨제도 다음이었다. 북유럽의 대표적인 고물가 국가인 노르웨이가 우리나라 뒤를 이었다.
최근 한국 물가가 계속 올라가다 보니 일부 외국인들은 한국과 외국 물가를 비교하는 영상을 만들어 유튜브에 올리기도 한다. 일본으로 이주한 한 한국인 유튜버는 지난 1월 서울역 대형마트에서 장 보는 영상을 올렸다.
각종 생선이며 김 같은 제품의 가격도 알려주는 영상이다. 이달 초 기준으로 조회수가 22만회를 넘겼다. 영상엔 “이번에 한국에 갔더니 정말 가격이 너무 비싸서 놀랐다” “여기는 한국의 고급 수퍼마켓인 건가?” 같은 일본 네티즌들의 댓글이 수십개가 달렸다.
지난달 중순 한 ‘쌔시인코리아’라는 블로거가 올린 ‘쇼핑 인 코리아-슈퍼마켓 푸드는 비쌀까 쌀까’란 영상에도 외국인들 댓글이 130여 개 달렸다. 한 외국인은 “여긴 프랑스인데 대부분의 물건이 프랑스보다 비싼 것 같다”는 댓글을 달았다.
지난달 말 한 이탈리아 출신 유튜버는 ‘한국에서의 생활비’란 제목의 영상물을 유튜브에 올렸다. 그는 영상에서 “한국에서 식당 물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면서 “혼자 나가서 먹어도 돈이 상당히 많이 들기 때문에 마트에서 사는 저렴한 스낵으로 때우는 게 돈을 아끼는 방법”이라고도 했다.
04.15 박정희의 매운맛, 임춘애의 헝그리 정신… 라면 60년이 대한민국 현대사
[아무튼, 주말]
1963년 국내 첫 탄생 라면
전국민과 함께하는 ‘환갑연’

▲‘오무라이스 잼잼’ 등의 음식 만화로 일가를 이룬 인기 만화가 조경규(49)씨가 한국 라면 60년의 굵직한 순간을 그림으로 맛깔나게 구현했다. 라면의 역사는 곧 대한민국 현대사였다. /일러스트=조경규
“라면 먹고 갈래?”
이 말에 담긴 구애(求愛)의 속뜻을 모르면, 한국인을 이해한다고 할 수 없다. “넷플릭스 보고 갈래?”(미국)보다 정겹고 “가려운데 좀 긁어줄래?”(홍콩)보다 간접적이며 “새벽에 같이 커피 마실래?”(일본)보다 푸근한 사랑의 대사. 양은 냄비에서 목구멍을 지나 비로소 한국인의 몸과 마음의 일부가 된 라면. 라면만큼 우리를 살 찌운 소울 푸드가 있으랴. 라면을 부숴서 과자로도 먹는 유일한 민족 아니던가.
라면의 생애 주기가 올해로 60갑자 한 바퀴를 돌았다. 라면 전문 사이트 ‘라면 완전 정복’에 따르면, 현재 국내 시판 중인 라면 종류만 555개. 이젠 한국을 넘어 세계까지 살 찌운다. 즉석 면류 수출액은 지난해 처음 1조원(1조1400억원)을 돌파했다. 작년에 해외로 뻗어나간 라면은 26만톤, 면발 길이만 약 1억㎞다. 지구를 2670바퀴나 감을 수 있다. 배고파서, 심심해서, 즐거워서, 먹고살기 위해서, 오늘도 라면을 끓인다. 먹는다. 다음 60갑자를 향하여.
◇라멘 아니고 ‘라면’입니다

▲1963년 출시된 국내 최초의 라면 '삼양라면'. /삼양식품
국민소득 104달러 시절, 63년생 토끼띠 ‘삼양라면’이 태어났다. 서울 남대문시장에 5원짜리 꿀꿀이죽을 사 먹으려고 사람들이 긴 줄을 늘어서던 때였다. 그 가난의 행렬에서 삼양식품 전종윤 회장은 일본 출장길에 먹어본 인스턴트 라멘(Ramen)을 떠올렸다. 만들기 쉽고, 국물까지 있다! 가난한 나라의 기업인은 일본 묘조식품을 찾아가 매달리다시피 라면 기술을 배웠다. 정부를 설득해 5만 달러를 지원받아 1961년 묘조식품에서 라면 기계 두 대를 들여왔다. 1963년 9월 15일, 라면 생산이 시작됐다. 중량 100g, 가격은 10원이었다.
시대가 라면을 원했다. 흉작이 이어지며 해마다 쌀 300만~600만석이 부족해지자, 정부는 혼식·분식 장려를 추진했다. 1969년 서울에 ‘종합분식센터’가 들어섰고, 각 도마다 라면과 빵 공장을 1개씩 세우도록 했다. 생산이 늘자 소비도 늘었다. 그해 3월 16일 자 조선일보에서 확인되듯, 신문에서 ‘라면 판매 급증’이라는 구절이 나오기 시작한 게 이 무렵이다.
◇청와대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맨 오른쪽)이 삼양식품을 방문했을 당시의 모습. 옆에는 훗날 부친의 뒤를 이어 청와대에 입성한 박근혜 전 대통령도 보인다. /삼양식품
속을 확 풀어주는 한국인의 매운 맛, 라면의 기본 소양이다. 본지가 SM C&C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 프로’에 의뢰해 20~60대 성인 5025명을 조사한 결과, 라면이 생각날 때는 ‘출출할 때’(54.87%) ‘술 먹고 나서’(20.44%) ‘스트레스 쌓일 때’(14.03%) 순이었다. 후루룩, 시뻘건 국물이 땀을 쫙 빼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라면은 일본 라멘처럼 닭 육수 기반의 흰 국물이었다. 라면의 진화를 불러온 결정적 순간은 삼양식품 관철동 사장실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서 비롯된다. 1966년 가을이었다.
“대통령이 찾으십니다.” 청와대였다. 곧 박정희 대통령이 전화를 이어받았다. 정부의 분식 장려 정책에 공헌하는 삼양라면을 치하한 뒤, 예상 밖의 제안을 내놓는다. “한국 사람들은 얼큰한 국물을 좋아하니 라면에 고춧가루를 좀 넣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해장을 라면으로 하곤 하던 박 대통령의 아이디어였다. 이 일화는 삼양식품 사사(社史)에 기록돼 있다. 국가가 나서 라면의 본색을 찾은 것이다.
◇라면 먹고 금메달 땄다

그 시절 인생 역전 스토리에는 늘 라면이 함께했다. 한국 축구 레전드 차범근은 “대학 다닐 때만해도 라면 먹고 볼을 찼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국 야구 레전드 박찬호는 라면 때문에 야구를 시작했다. “야구부는 운동장에서 큰 솥에 라면을 끓여 먹었는데 그게 너무 부러웠다”는 것이다. 배 곯던 체육인에게 라면은 은혜와 같은 에너지원이었다.
163㎝에 43㎏의 깡마른 17세 소녀, 1986년 한국 육상 사상 최초로 서울아시안게임 3관왕에 오른 임춘애 선수는 라면의 상징이다. 부친은 간경화로 일찍 세상을 떴고, 모친은 성남 달동네에서 월 15만원으로 노모와 2남2녀를 건사했다. 임춘애는 달렸다. 이를 악물고 가장 먼저 골인했다. 우승 직후 “라면을 즐겨 먹는다”고 임춘애는 말했다. 이것이 ‘인생 드라마’에 과몰입한 어느 기자의 욕심으로 “라면만 먹고 운동했다”로 와전됐다. 그러거나 말거나, 임춘애는 은퇴 후 용인에서 칼국수집을 운영해 또 한 번 화제를 모았다.
◇판매 1위, 딱 세 번 바뀌다

▲1989년 대한민국 라면 업계를 뒤흔든 '우지 파동'을 1면에 다룬 조선일보 기사. /조선일보DB
20년 넘게 부동의 1위를 달리던 삼양라면이지만, 1989년 ‘우지(牛脂) 파동’이 운명을 바꿨다. 공업용 소기름을 라면에 썼다는 이유로 관계자가 검찰에 구속된 것이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까지 철저한 수사를 촉구할 정도의 대형 스캔들이었다. 삼양은 당시 유통 중이던 100억원어치의 라면을 수거·폐기해야 했다. 그러나 사건 발생 13일 후, 식품위생검사 소위원회 결론은 “이상 없음”이었다. 인체에 무해하다는 것이었다. 1997년 대법원 판결도 무죄였으나, 삼양의 시장 점유율은 곤두박질친 뒤였다.
농심이 기회를 잡았다. ‘안성탕면’으로 1987년 판매 1위에 올라 1990년까지 왕좌를 지켰다. 한국인의 혀는 더 뜨거운 것을 원했으니, 그 결과가 1991년부터 1위를 놓치지 않은 ‘신(辛)라면’이다. 우주선에서 먹는 ‘우주 신라면’ 등 별별 파생 상품이 쏟아졌다. ‘신라면’은 농심 신춘호 사장이 지은 이름이다. 단순하고 명료하지만, 표지에 넣을 큼지막한 글자 ‘辛’이 골치였다. 당시 식품위생법은 “식품 상품명 표시는 한글로 해야 하고 외국어를 병기할 때에는 한글보다 크게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 농심은 비합리적인 규정이라며 반론을 제기했다. 결국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가 건의를 받아들여 1988년 법 조항을 개정했다. 라면이 법을 이긴 것이다.
◇라면이 쌀을 위협하다

▲“라면 먹을래요?”는 이 여자로 인해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 영화 ‘봄날은 간다’ 속 이영애가 라면을 끓이고 있다. /시네마 서비스
대한민국 주식(主食)도 변화를 맞이했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 이후 라면 소비가 쌀 소비를 위협한 것이다. 1998년 우리나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99.8㎏을 기록, 처음 100㎏ 이하로 떨어졌다. 반면 그해 국내 라면 매출 실적은 1조966억원으로 전년 대비 16.5% 늘었다. 라면 가격은 변동이 없었으므로, 1인당 라면 소비도 16.5% 증가했다는 게 업계의 추정이다.
이 추세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우리나라 1인당 쌀 소비량은 56.7㎏이었다. 2030년(45.4㎏)에는 이보다 10㎏ 넘게 줄어들 것으로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전망했다. 세계라면협회에 따르면 한국 1인당 라면 소비량은 73개, 전 세계 2위 규모다.
◇편의점에서 융프라우까지

▲스위스 융프라우 전망대에서 1999년부터 판매 중인 '신라면' 컵라면. /농심 페이스북
용기(容器)가 생겼다. 1972년 국내 최초 컵라면 ‘삼양 컵라면’이 출시된 것이다. 봉지면보다 비싸 초기에는 인기를 못 끌었다. 삼양은 홍보를 위해 1976년 ‘자동판매기’까지 설치할 정도였다. 후발 주자 농심이 1981년 ‘사발면’을 출시했고, 이듬해 내놓은 ‘육개장 사발면’은 지금도 업계 1위를 지키고 있다. 컵라면은 1990년대 편의점 열풍을 타고 훨훨 날았다. 전체 라면 판매 비중의 40% 수준까지 올라선 컵라면의 기세는 여전히 뜨겁다. 올해 인기 요리사 백종원이 자기 이름으로 승부를 건 ‘백종원 고기 짬뽕 컵라면’은 편의점 CU에서만 한 달 만에 판매량 100만개를 돌파했다. 역대 가장 빠른 속도다.
스위스 알프스 산맥의 융프라우 전망대에서는 1999년부터 신라면 컵라면을 판매하고 있다. 세계 최정상급 고지에 깃발을 꽂은 ‘K푸드’ 성공 신화로 곧잘 소개되곤 한다. 스위스 마터호른 전망대는 2016년부터 오뚜기 ‘진라면’을 판매하고 있다. 간편하지만, 맘 편치 않은 구설의 음식이기도 하다. 2014년 세월호 사고 당시 현장을 찾은 서남수 교육부 장관이 의전용 의자에 앉아 컵라면을 먹다가 ‘황제 라면’ 논란으로 면직된 것이 대표적 예다. 2016년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열차에 치여 숨진 19세 청년의 가방에는 채 뜯지 못한 컵라면이 들어 있었다. 지난해 5월 추모 현장에는 컵라면이 놓였고 “천천히 먹어”라고 쓴 쪽지가 붙어 있었다.
◇구봉서, 강부자, 소녀시대, BTS

▲'진라면' 광고 모델로 지난해부터 투입된 방탄소년단 멤버 진. /오뚜기
라면 광고는 당대의 스타만 거머쥘 수 있는 영예다. “아우 먼저~ 형님 먼저~”로 유명한 농심 라면 광고는 1975년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코미디언 구봉서·곽규석 콤비를 섭외해 대박을 터뜨렸다. 국민 음식인 만큼, 정겹고 푸짐한 이미지가 중요했다. 농심의 얼굴은 그 후로 오랫동안 강부자였다. 1981년부터 13년간 내리 활약한 역대 최장수 모델이었다. 1993년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불가피하게 광고에서 하차했지만 “농심 라면 외에는 사본 적이 없다”는 절개는 변치 않았다.
점차 젊은 이미지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2009년 삼양라면의 얼굴은 걸그룹 ‘소녀시대’였다. “10~20대 젊은 층에게 더욱 친근한 친구처럼 다가가기 위해서”였다. 2019년 신라면은 스페인 화가 에바 알머슨과 손잡고 가족애를 자극하는 애니메이션 CF를 제작했는데, 이 때 캐치프레이즈는 “오빠 먼저~ 동생 먼저~”로 바뀌었다. 지난해 오뚜기는 주력 상품인 ‘진라면’ 모델로 방탄소년단 멤버 진, 팔도는 ‘틈새라면’ 모델로 국내 최초 가상인간 모델 ‘로지’를 발탁해 어린 입맛을 공략했다.
◇전국 제패 신라면… 경남만 놓쳤다

전국 최강 ‘신라면’이 제패하지 못한 지역이 딱 한 곳 있으니, 바로 경상남도다. 지난해 닐슨IQ코리아 발표 자료에 따르면 신라면이 1위를 놓친 곳은 경남뿐이었고, 이곳 판매 1위는 ‘안성탕면’(9%)이었다. 경남 출신 천하장사 강호동이 가장 애정한다는 안성탕면. 부산에서도 신라면(8.2%)과 안성탕면(7.8%)은 치열한 1·2위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식품업계에서는 된장맛을 좋아하는 이 지역 소비자들이 된장을 기반으로 개발한 안성탕면 특유의 구수한 국물을 즐겨 찾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최전방 강원도에는 유일하게 컵라면이 3위권에 포진했다. ‘육개장 사발면’(3위)이다. 군인 정신으로 언제 어디서나 흡입할 수 있는 전투식량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국물 없이 세계를 호령하다

▲2009년 개봉한 영화 ‘김씨표류기’에서 서울 밤섬에 표류한 주인공이 강물에 떠내려온 ‘짜파게티’ 봉지를 아련히 바라보고 있다. 입맛은 너무도 강력한 것이어서, 주인공은 손수 농작물을 심고 수확해 면발을 뽑아 야생의 짜파게티를 끓여먹는다. /시네마 서비스
라면 국물에 밥까지 말아먹는 게 한국인이라지만, 서서히 판도가 바뀌고 있다. 1984년 등장한 ‘팔도 비빔면’과 ‘농심 짜파게티’의 무서운 기세 때문이다. 특히 짜파게티는 영화 ‘기생충’으로 세계적 인지도를 획득했는데, 극중에서 짜파게티·너구리를 섞어 끓이는 ‘짜파구리’ 덕분이다. 이 영화가 2020년 미국 아카데미상 4관왕을 휩쓸면서 이제는 짜파게티보다 짜파구리가 더 유명해졌다. 게다가 짜파구리를 끓이려면 최소한 라면 두 봉지를 사야 하는 일타쌍피 효과까지. 기세를 놓칠세라 농심은 유튜브에 짜파구리 조리법을 11개 언어로 소개하는 영상을 올려놨다.
불을 토하는 극도의 매운맛, 2012년 출시된 ‘불닭볶음면’은 괴식(怪食)이다. 동시에 삼양을 일으켜 세운 주인공이기도 하다. 지난해 삼양의 해외 매출은 처음 6000억원을 넘어섰는데, 이 중 80%가 ‘불닭볶음면’에서 나왔다. 동남아시아 시장의 열기를 중심으로 최근 중동과 아프리카까지 진출했다. “K컬처 확산으로 라면의 인기도 핫해지고 있다”고 했다. 인스턴트 라면의 원조 일본도 홀딱 넘어갔다. 닛신식품이 최근 ‘불닭볶음면’을 그대로 베낀 컵라면을 내놓은 것이다. 바야흐로 라면 강국 한국, 올해 1분기 라면 수출액(2억800만달러)은 사상 최대치였다.
◇'먹방’이 불지른 라면의 진화

▲한 먹방 유튜버가 '불닭볶음면'을 대량으로 흡입하고 있다. 눈물 콧물 뽑아내며 매운맛을 견디는 '파이어 누들 챌린지'는 이미 전세계적 현상이다. /유튜브 캡처
한국산 유튜브 트렌드 ‘먹방’(Mukbang)은 라면의 진화를 주도하고 있다. 이를테면 라면 15봉지를 한끼에 해치우는 유튜버 쯔양처럼, 대식가들이 매일같이 라면 먹방 영상을 올리고, 라면에 우유를 섞는 ‘우유 라면’에 이어 우유에 콜라까지 섞는 ‘우유 콜라 라면’에 이르기까지 온갖 변종 레시피가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매운 라면을 겁없이 먹어치우는 대회 ‘파이어 누들 챌린지’는 라면을 놀이의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다. 한 입에 라면, 한 입에 용암…. 고통과 환희가 공존하는 이율배반의 눈물을 흘리며 군침을 자극하는 영상은 지금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미국 라면 평가 블로거 ‘라멘레이터’에 따르면, 올해 전 세계 매운 라면 1위는 ‘핵 불닭볶음면 3배 매운맛’이었다. 라멘레이터 측은 “매년 불닭은 더 뜨거워지는 것 같다”며 “맛도 좋고 아주 아주 뜨겁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물론 매일 먹다간 위벽이 다 헐어버릴 것이다. 라면에 대한 일반적 인식도 건강에 안 좋다는 것. 그러나 의외로 라면 마니아 중에는 장수한 사례가 많다. 젊은 시절 장 질환을 앓은 뒤 30년 넘게 세끼 ‘안성탕면’만 먹어 TV에도 나왔던 고(故) 박병구 할아버지는 92세까지 사셨고, 일본 닛신식품 창업자 안도 모모후쿠는 컵라면을 발명한 1971년부터 2007년 세상을 뜰 때까지 매일 라면을 먹었다. 마지막 눈을 감을 당시 그의 나이는 97세였다.
조선일보 정상혁 기자
04.19 “엄마 2만원만…” 피눈물 전세사기 피해자들, 나라는 어디에
인천에서 전세 사기 피해자 3명이 잇달아 극단적 선택을 하자 정부가 뒤늦게 경매 중지 등 긴급 대책을 내놨다. 이들은 인천 일대에서 세입자들의 전세 보증금을 가로챈 이른바 ‘건축왕 남씨 사건’의 피해자들이다. 남씨 일당은 금융권에서 빚을 내 빌라·아파트 2700여 채를 매입한 뒤 공인중개사와 공모해 집값을 부풀리고 근저당권이 설정된 전셋집을 비싸게 임대하는 수법으로 125억원을 챙겼다.
집값 급락 여파로 남씨가 빚을 갚지 못하면서 현재 690여 채가 경매에 넘어가 있다. 경매로 집이 팔려 금융회사 선순위 채권을 갚으면 남는 돈이 거의 없어 세입자들은 보증금도 챙기지 못하고 빈털터리가 돼 집에서 쫓겨난다. 지난 17일 세상을 등진 30대 피해자의 경우 거주 아파트 한 동 전체 60채가 전세 사기에 걸려 경매에 넘어갔고, 이 중 20채는 이미 낙찰돼 세입자들이 쫓겨났다. 이 피해자는 숨지기 전 어머니에게 2만원만 보내 달라고 할 정도로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앞으로 경매에 넘어갈 피해 주택도 2000채를 웃돌 것으로 추산된다. 비극이 또 터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가 또 극단적 선택을 했다. 17일 피해 사망자가 거주한 아파트 현관문에 전세사기 피해 수사 대상 주택임을 알리는 안내문이 부착돼 있다. 문 앞에는 '당신들은 기회겠지만 우리들은 삶의 꿈', '너의 재산증식, 우리는 보금자리' 등의 문구가 적힌 종이가 붙어 있다. /뉴스1
정부는 그동안 경매 때 임차인 최우선 변제액 상향, 전세 대환 대출, 긴급 거처 지원 등의 전세 사기 대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근저당권이 설정된 주택이 경매에 넘어가는 문제에 대한 대책은 빠져 있었다. 피해자들은 일단 경매를 중지한 뒤 경매할 경우 피해자에게 우선 매수권을 주고, 경매 자금 대출도 해 달라고 요구해 왔다. 피해자 본인이 집을 낙찰받는 것이 그나마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는 채권자의 합법적 근저당권 행사를 막기 어렵다는 이유로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다.
잇단 비극에 놀란 정부가 뒤늦게 경매 중지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진작 나왔어야 할 대응이다. 나아가 정부, 지자체, 피해자 협의체를 구성해 범정부 차원의 구제 대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필요하면 전세 사기 피해자 구제를 위한 특별법 제정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전세 사기 재발 방지 대책도 필요하다. 공인중개사, 감정평가사가 공모해 집값을 부풀려 전세 사기를 용이하게 만드는 이른바 ‘업(UP) 감정’을 막을 대책, 전세 보증 보험 가입을 확대하기 위한 보증 기관의 보증 여력 확대 등도 하루빨리 추진해야 한다.
전세 사기 피해자들은 부동산 투기로 돈을 벌려던 사람들이 아니다. 가족과 살 집 한 칸이 필요했던 사람들이다. 잘못한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려야 하고, 이를 사회가 미리 막거나 구제하지 못한다면 나라와 정부는 존재 이유가 없다.
조선일보 사설
04-21 전세 사기꾼과 野 고위인사 연루 의혹, 철저히 수사해야
2700억 원대 전세보증금 사기로 피해자 3명을 극단적 선택으로 내 몬 인천 미추홀 ‘건축왕’이 지방 광역단체의 개발사업권을 따내는 과정에 야당 고위 인사들이 연루됐다는 제보가 접수돼, 경찰의 특별수사가 진행 중이다. 인천 미추홀구에서 2011년부터 전세 사기 행각을 벌여온 남 모 씨는 2017년 ‘동해이씨티’라는 특수목적 법인을 세웠다. 이후 동해시 일대 땅 178만㎡를 143억 원에 낙찰받았고, 2018년 당시 최문순 강원지사는 남 씨를 6674억 원 규모의 망상1지구 개발 사업자로 선정했다.
특수목적 법인을 세우고 토지를 낙찰받아 개발 사업자로 선정된 과정이 대장동 특혜를 연상시킨다. 더구나 남 씨는 자금 조달 방안으로 ‘임대 보증금과 임대료 수입’이라고 명시했다. 그러나 강원도 의회에서 ‘사업자가 부동산 수익에만 몰두한다’는 등의 지적이 제기되면서 2022년 9월 김진태 현 지사가 사업 전면 재검토에 들어갔다. 남 씨는 ‘최문순 전임 지사의 의견을 들어보라’며 반발했지만 2개월 뒤 사업자 선정 관련 서류 조작 혐의로 불구속 기소까지 됐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지난 20일 국회에서 “남 씨가 다른 지역에 가서 투자 사업을 벌였는데, 고위 정치인들이 청탁과 압력을 가했다는 제보가 있어 특별수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원 장관은 “남 씨 변호인은 촛불인권연대 변호사이면서, 계획적 사기가 아니라고 가해자를 적극 두둔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앞서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도 “인천의 유력 정치인 개입 의혹이 있는 남 씨가 호화 변호인단을 선임한 배경을 포함해 경찰청에 특별수사를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의혹이 사실이면 해당 정치인은 서민 전세자금을 갈취해 벌이려던 또 다른 대형 사기극의 공범으로 엄단해야 한다. 정치권 영구 퇴출은 기본이다. 사기로 번 돈이 정치자금이나 변호사 수임료로 흘러 들어갔는지 밝히고 은닉 자금은 회수해야 한다. 금융기관과 공인중개사, 감정평가사의 연루도 가려내 재발 방지책 마련에 반영해야 한다.
문화일보 사설
04.21 “망치질도 못하는데 팀장? 시위만 다니더라” 그 노동자가 화난 이유
“어떤 X새끼가 그런 X소리를 해? 능력 있으면 바로 팀장 하는 거지.”
‘남들은 10년 넘게 일해야 따낼 수 있는 노가다판 팀장 자리를, 어떻게 운동권 출신, 통진당 출신들은 2년 만에 척척 따내냐’고 전화로 물었을 때, 다짜고짜 반발로 돌아온 대답이 이랬다. 통화 상대는 민노총 건설노조 경기도건설지부장 양모씨. 그는 내란 선동으로 해산당한 통진당 출신이자, 경기동부연합 출신이다.
그의 말은 사실일까. 한달쯤 전 어느 저녁, 경기도 한 식당에서 건설 노동자 A와 저녁을 먹었다.
“망치질도 못 하는 먹물들이 뭔 팀장? 걔들 와서 팀장이라고 하는 게 시위나 나가는 거야.”
인근 공사장에서 막 일을 마치고 와 시멘트똥이 덕지덕지 묻은 회색 점퍼를 입은 채 막걸리만 연거푸 들이켜던 A가 이렇게 말했다. A 역시 건설노조 소속이다. 지도부 얘기가 나오자 A는 눈앞에서 점점 새카맣게 타가는 차돌박이를 내버려둔 채 계속 말했다.

▲2020년 7월 수도권 한 건설 현장에서 ‘이석기 석방 대회’를 앞둔 민노총 건설노조원들이 노조 간부 지시에 따라 이석기 전 통진당 의원 관련 영상 시청법을 공유하고 있다. /이석기 구명위 백서
“최 기자, 노가다판 팀장이 어떤 자린지 알아? 일반 회사에선 임원을 ‘별’이라 부르지? 여기선 팀장이 별이야. 열심히 일해서 올라갈 수 있는 끝 자리, 애들 10~20명을 이끌고 현장을 돌아다니며 일사불란하게 지휘하는 게 바로 팀장이라고.”
실제로 팀장 자리는 대부분 10년 이상 경력자에게 주어진다. 일급은 잡부에 비해 거의 2배다.
A는 이야기를 이어갔고, 목소리는 커졌다.
“예전 건설노조는 이렇지 않았어. 임금체불 해결해 달라고 싸웠고 조금만 안전하게 하자고 싸웠어. 그런데 지금은 뭐야. 산업재해를 보고도 돈 주면 덮어버리고, 돈 안 주면 공사장에서 트럭 나갈 때 고작 바퀴 한 짝 안 씻고 나갔다고 신고해. 돈 받으면 취하하지.”
A는 건설노조가 이상해진 게 10년 전쯤부터라고 했다. 통진당이 내란 선동 사건으로 해산되자, 통진당을 움직이던 경기동부연합이 건설노조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조직적인 파업과 민원 투서로 건축주와 건설사를 겁박해 일자리를 강탈한 것도 그때부터라 한다.
“그런 건 참을 수 있어. 정말 참을 수 없는 게 뭔지 알아? 바로 먹물 팀장. 출근 도장만 찍고 시위를 나가거나 근무 시간 틈틈이 휴대폰 켜서 사상교육을 한다”.
실제로 경기동부는 건설노조를 장악한 뒤 공사판에서 볼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대거 팀장 자리를 줬다고 한다. 실제로 소위 ‘활동가‘, 선거 단골 출마자, 내란선동 공범 등이 민노총이 장악한 현장에선 ‘팀장’으로 불렸다.
건설노조를 비판한 본지 기사가 나간 19일 밤, 양씨는 건설노조 단톡방에 “내일 우호적인 기자들과 간담회 예정, 조선에 대해 정정보도, 명예훼손 등 법적 검토 중”이라고 썼다.
이튿날 내겐 간담회 초청장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건설 노동자들은 안다. 막걸리 잔 나누며 현장 노동자 이야기를 확인해 쓴 기자와 경기동부의 이야기를 줄줄 받아 적는 기자 중 누가 ‘우호적인 기자’인지.
조선일보 최훈민 기자
04-23 “북한 말로 문건 정리, 노동 고민은 없어… 민노총은 괴물이다”
[아무튼, 주말] 민노총 前 간부 이수봉의 내부 고발
21세기에 간첩이 있겠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윤석열 대통령도 참모진에게 “간첩이 이렇게나 많나”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그런데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
올해 초 민노총 전·현직 간부 4명이 북한 공작원을 접촉해 지령을 받은 사건이 터졌다. 구속영장을 보면 굉장히 구체적이고 치밀하다. 수년간 100여 차례 대북 보고문, 대남 지령문 등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북한 공작원은 작년 10월 핼러윈 참사 이후 ‘퇴진이 추모다’를 포함한 반정부 시위 구호도 직접 적어줬다. 북한 지침이 일상 가까운 곳까지 파고든 것이다. 하지만 민노총은 ‘윤석열 정부의 종북 몰이’라고 한다. 사과나 반성은 한마디도 없다. 오히려 정부를 겁박하며 ‘총파업’을 예고하고 있다. 야당도 “공안 정국의 부활”이라며 민노총 편을 들었다. 그러는 사이 민노총 간첩단 연루 사건은 서서히 잊히고 있다.

▲이수봉 동서미래포럼 전략연구원 부원장은 민노총에서 대변인, 사무부총장 등을 지내며 10년 넘게 상근 간부로 일했다. 노동자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다는 한계를 느끼고 2012년 정치권에 발을 들였다. 최근 민노총이 연루된 간첩단 사건이 터지자 그는 “북한을 우습게 보면 안 된다”며 오래 담아둔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13일 서울 여의도 한 사무실에서 만난 민노총 출신 이수봉 동서미래포럼 전략연구원 부원장은 “이 사건을 우습게 보면 안 된다”고 했다. 또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성공했다고 해서 북한을 이겼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라며 “사상적 측면에서는 현시점에서 우리가 완패다. 북한이 민노총 등을 이용해 수십 년 동안 대남 의식화 사업을 해온 결과가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1995년부터 민노총에서 대변인, 정책연구원 원장, 사무부총장 등 상근 간부를 지내며 내부 활동에 깊숙이 관여해왔다. 그러다 민노총이 노동운동의 근본적 개혁을 이뤄내지 못하고, 민주당 또한 여기에 동조하는 현실에 환멸을 느껴 2012년 말 민노총과 결별했다. 당시 대선을 앞두고 민노총 소속 5000명과 함께 안철수 무소속 후보 캠프에 합류하며 정치에 발을 들였고, 이후 국민의당, 민생당에서 인천 지역 국회의원, 서울시장 선거 등에 출마했다. 이번 인터뷰는 간첩단 사건을 계기로 민노총을 떠난 지 10년여 만에 꺼내놓은 내부 고발이다.
-민노총은 공안 탄압이라고 주장한다.
“간첩단 사건은 팩트다. 북한의 구체적 지침을 받았다. 지도부는 사과해야 한다. 간첩을 색출하겠다고 약속하고 재발 방지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민노총은 윤석열 정권 퇴진과 총파업을 노선으로 정했다.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국민이 민노총을 북한의 지침을 받아서 움직이는 조직으로 인식하고 있는데도 자정 노력이 없다. 그 사람들을 보호하면 결국 이적단체로 찍힌다.”
-민노총 조합원이 120만명이다.
”조합원도 손을 놓고 있을 일이 아니다. 개혁을 요구해야 한다. 안 되면 탈퇴하는 쪽으로라도 지도부를 압박해야 한다. 그러나 무감각하다. 심각성을 모른다. 보수 정권의 ‘공안 몰이’라는 프레임이 먹히는 것이다. 묻고 싶다. 윤석열 정부가 고문을 했나? 이건 팩트다.”
-간첩 활동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민노총은 지금도 주사파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인천, 경기동부, 울산, 광주·전남 등 4대 연합 조직은 이런 정파적 규율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것을 기초로 하고 성실하고 착한 헌신적인 활동가가 움직인다. 이렇게 조직이 현장에서 서서히 민노총 밑바닥을 장악해간 것이다.”
-민노총 간부가 미군기지를 촬영해 북에 넘겼다고도 한다.
“민노총 중앙 간부면 현장 곳곳을 다 들여다볼 수 있다. 조합원들이 정부 기관, 기업에 다 포진해 있는데, 뭘 못 하겠나. 북한 손아귀에 다 노출돼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사건은 문재인 정권에서 일어났다.
“민노총 세력이 커진 건 정권의 영향이 컸다. 민노총 주사파들은 김대중 정부의 햇볕 정책을 타고 굉장히 좋은 조건에서 활동했다. 급속도로 세가 확장된 시기다. 민주당과 결탁했다. 서로 적당히 눈감아 주면서 이해를 채웠다. 민주당 입장에서는 민노총이 표이자 돈이다. 10만원씩 후원금을 만들어주는 건 일도 아니다. 민주화 운동권 세력 중 민노총의 현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겠느냐. 그냥 타협한 것이다.”
-내부에서 문제의식은 없었을까.
“사무부총장을 지낼 때 일이다. 정책기획실에 사업계획을 가져오라고 하면 북한 쪽 얘기를 그대로 써왔다. 노동 현실에 대한 고민이나 시장 개혁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한·미·일 동맹 반대, 민족 자주 투쟁이 기본 관심이었다. 또 내부 보고서에 북한 방송의 지침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립시켜 타격, 섬멸해야 한다’는 표현들을 써서 문건을 정리해왔다. 단어도 그렇지만 이 내용을 조합원들이 알까 무서웠다.”
-노동 문제가 담기지 않았다는 건 좀 충격이다.
“북한은 민노총의 노동운동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또 이해할 필요도 없다. 그 논리를 따라가다 보니 민노총이 주한미군 철수, 남북 평화 통일, 민족교류 같은 것만 더 외치게 된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나.
“상층부가 진행하는 대의원 대회에서조차 어떤 문제 제기도 없었다. 어차피 강경한 파업 노선을 바꾸기는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현장 조합원 정서와 점점 동떨어져 갔다. 이게 지금 민노총의 현실이다.”
-간첩 활동이 위협적이지 않게 느껴진다.
“큰 문제다. 적어도 몇 십년 동안 북한의 대남 의식화 사업이 먹힌 것이다. 일례로 이승만을 독재자라고만 믿는 것이다. 공산주의에 맞서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만든 대통령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박정희도 군부 독재자라고만 생각한다. 그 시절 공산주의와 맞서 싸운 게 어떤 의미인지는 전혀 모른다. 북한, 좌파 논리에 설득당했다.”
-또 어떤 게 있나.
“영화에서도 미국, 일본은 악마로 표현한다. ‘괴물’에서는 미군이 독성물질을 한강으로 흘려보내면서 괴물이 등장하고, ‘리멤버’에서는 백선엽 장군을 모티브로 한 주인공을 총살한다. 역시 북한의 논리를 그대로 투영한 것이다. 북한은 민노총 등을 이용해 계속해서 이런 의식화 작업을 하고 있다. 수십 년이 누적되면 역사의 진실도 바뀐다.”
-윤석열 정부가 민노총 개혁에 칼을 빼들었다.
“민노총은 오히려 정부를 공격하고 있다. 이유는 하나다. 국민을 설득할 자신이 있는 것이다. 북한을 절대로 우습게 보면 안된다. 많은 이들이 망한 나라로 생각한다. 우리가 경제적으로 이겼다고 한다. 간첩을 보내봤자 무슨 힘을 발휘하겠냐고 한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미 북한에 사상적인 측면에서 밀리고 있다. 그래서 민노총도 사과하지 않는 것이다. 보수가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국민을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번에도 총파업을 예고하고 있다.
“민노총은 창조할 힘은 잃었지만 나라를 망하게 할 힘은 있다. 총파업만 들이밀면 자본가 쪽에선 뭔가 내놓는다. 그걸 아니까 총파업이라는 무기를 쓰는 거다. 그렇게 철밥통 기득권이 돼 간 거다.”
-수십 년째 같은 방식으로 정부를 압박한다.
“북한의 핵무기와 똑같다. 핵무기로 위협하면 미국도, 우리도 북한에 뭘 주면서 달래왔다. 그렇게 막대한 비자금이 북한으로 흘러 들어갔다. 북한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핵무기를 포기할 이유가 없다. 민노총도 총파업이란 무기를 해마다 사용한다. 그러나 결국 임금 극대화 노선에 이용하는 결과로 될 뿐이다.”
-민노총에 부정적인 시각도 많다.
“민노총이 괴물이 돼 버렸다. 민노총 노래 1절 가사가 ‘노동자가 주인 되는 날까지’다. 노동자가 주인이면 기업주는 노예가 된다. 안 맞는 거다.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근거한 노동운동은 이미 소련 붕괴로 인해 힘을 잃었다. 그런데도 민노총은 어떤 노동 이론도 정립하지 못하고 관념적으로 과격해져만 갔다. 현장에선 월급만 올려달라고 한다.”
-방법이 있을까.
“1990년대까지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대로면 기업도, 나라도 망한다.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국민도 안다. 2009년에도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처음으로 기본소득을 주장한 책을 강남훈 한신대 교수 등과 함께 냈다. 2021년에는 4차산업에 따른 ‘제3정치 경제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기본소득도 이재명 대표와 정치권으로 넘어가면서 변질, 선거용이 돼 버렸다. 사기를 치는 것이다. 그래도 노동구조 변화에 따른 노력이 계속돼야 한다.”
그는 현 정부에서 민노총의 위법 행위가 엄격하게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간첩단 사건뿐 아니라 건설노조의 조폭적 행태도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설픈 타협은 잘못된 시그널이 될 수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민노총과 대화는 쉽지 않을 거다. 대화가 잘돼서 우리나라 경제가 좋아지면 북한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탄으로 끌고 갈 가능성이 높지만 그렇더라도 논의 테이블은 마련해야 한다.”
조선일보 김아진 기자
04.28 택배노조와 진보당 관계
26일 진보당에서 전화가 왔다. 민주노총 소속 택배노조 간부 원모씨가 경기도 용인에서 쿠팡 자회사 직원들을 폭행했다는 기사를 보도한 이튿날이었다. 원씨는 폭행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고, 폭행당한 직원들 중에는 병원에 실려간 사람도 있다. 진보당은 원씨가 진보당 당원이라는 기사 속 문구를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번 사건과 진보당이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이유였다. 정말 이번 사건과 진보당은 연관이 없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택배노조가 지금처럼 불법도 개의치 않고 무소불위의 존재가 된 데에는 진보당도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원씨는 진보당원이다. 그리고 택배노조와 진보당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폭행 사건을 저지른 원씨만 하더라도 진보당 깃발을 바닥에 펼쳐놓고 다른 택배노조원들을 모아 일장 연설을 하는 듯한 사진이 보도된 적이 있다. 그는 2021년 진보당 기관지 인터뷰에서 “(진보당은) 어머니와 같은 당”이라며 “당원이 5만, 10만명 될 때까지 입당 운동으로 당에 힘이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택배노조에서도 부위원장을 지냈을 정도로 핵심이었는데, 진보당 안에서도 기관지가 따로 인터뷰를 할 정도의 인사였던 셈이다.
원씨 개인만 연결된 것이 아니다. 진보당은 택배노조와 거의 한 몸처럼 움직였다. 택배노조는 터미널에 노조 깃발과 함께 진보당 깃발을 내걸었다. 택배노조 집회와 기자회견에는 진보당 인사가 단골로 등장했다. 상징적인 장면들도 있다. 작년 2월 진보당 대선 후보였던 김재연 전 의원은 대선 출정식을 국회나 당사가 아닌 서울 중구 CJ대한통운 본사 앞에서 했다. 당시 택배노조는 CJ대한통운 본사 불법 점거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집회에 참석한 조합원 목에는 선거관리위원회가 발급한 선거사무원 증명서가 걸려 있었다. 이로부터 일주일 뒤 택배노조가 2000명이 모인 대규모 집회를 열었었는데, 코로나로 인한 집회 인원 제한(백신 접종자 299명)을 받지 않았다. 김 전 의원이 유세 차량을 집회 현장으로 보내줘 대선 후보 선거 유세 현장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택배노조 조합원들이 과거 과거 진보당 깃발을 펼쳐놓고 이야기를 하는 모습. 왼쪽 사진에서 왼쪽 세 번째 인물이 폭행 사건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간부 원모씨다. 택배노조는 택배터미널에도 진보당 깃발을 걸기도 했다.(오른쪽 사진)/독자 제공
김 전 의원은 2021년 10월에도 CJ대한통운 앞을 찾았다. 그해 8월 김포의 택배 대리점주는 택배노조원들의 괴롭힘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가해자로 지목된 노조원들은 적반하장으로 ‘억울하다’며 단식 농성을 벌였다. 김 전 의원은 이들을 지지 방문한 것인데, 택배노조의 행패에 제도권 정당이 든든한 버팀목이 돼 준 셈이다.
택배노조 핵심 간부들은 1980년대 주사파에서 출발한 NL(민족 해방) 계열이 많다. 진보당과 상당 부분이 겹친다. 운동권 인사들은 NL 세력이 통합진보당 해체로 정치적으로 고립되자 택배노조 등에서 활로를 찾은 것으로 보고 있다. 사정이 이런데 ‘택배노조 불법과 진보당은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다. 택배노조의 이런 행태를 진보당이 부추기거나, 최소한 묵인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조선일보 곽래건 기자
04-28 간호법 통과에 ‘반발’ 13개단체 “연대 총파업…다음주부터”
간호법과 의사면허취소법이 27일 야당 주도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가운데, 두 법안을 반대하는 보건의료단체들이 연대 총파업에 돌입키로 결정했다.
보건복지의료연대 소속 13개 보건의료단체들은 이날 저녁 연석회의 결과 "간호법과 의사면허취소법 강행처리를 규탄하며 연대 총파업에 돌입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다음주부터 부분파업을 시작하기로 했다"며 "의협 비대위와 보건복지의료연대는 총파업의 적절한 시기를 신속하게 확정해 발표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어 "보건복지의료연대는 더욱 연대를 강화해 22대 총선 보건복지의료연대 총선기획단 구성에 즉각 돌입하기로 결정했다"고 덧붙였다.
문화일보 곽선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