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횡설수설(동아일보) 2023-04/ 04-01(토) 1그램, 0.5그램짜리 선물 金반지 유행 - 04-29(토) 가톨릭, 여성에 첫 투표권… 2000년 만에 깨진 유리천장

상림은내고향 2023. 4. 29. 15:42

횡설수설(동아일보) 2023-04/

04-01(토) 1그램, 0.5그램짜리 선물 金반지 유행

 

전국 금은방에서 1g짜리 순금 돌반지를 팔기 시작한 건 2011년 6월부터다. 찾는 손님이 많아서라기보다 정부와 귀금속 업계의 필요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정부는 일제 잔재인 ‘돈’ 대신 국제 표준인 ‘그램(g)’을 정착시키고자 했고, 업계는 치솟는 금값 때문에 손님이 뚝 끊긴 돌반지 시장을 살리고 싶었다. 그해 동일본 대지진, 유럽 재정위기, 미국 국가신용등급 강등 같은 온갖 악재가 겹치면서 국제 금값은 역사적 고점을 찍었다. 국내에서도 순금 한 돈(3.75g)이 25만 원을 뚫었다.

▷정부가 당시 소비자물가지수 대상에서 금반지를 제외하자 물가 상승률이 0.2%포인트나 낮아질 정도였다. 물가를 마사지하기 위한 꼼수라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결국 금반지는 물가 산정 품목에서 빠졌다. 그렇게 1g 반지 제작용 금형이 전국에 보급됐고, 겉모습은 한 돈짜리와 똑같지만 두께는 얇은 6만 원대 돌반지가 등장했다. 그래도 1g 반지는 낯간지럽다며 현금 봉투를 준비하는 사람이 많았다.

▷정부와 업계의 노력에도 시큰둥했던 1g짜리 돌반지의 인기가 요즘 뜨겁다. 10만 원이 든 현금 봉투보다 1g 금반지가 훨씬 더 비싸졌기 때문이다. 10만 원 봉투는 부담되고 5만 원은 약소하다며 0.5g짜리 돌반지를 선물하는 젊은층도 많아졌다. 2011년의 고점 이후 오랜 세월 암흑기를 거쳤던 금값이 다시 천정부지로 뛰면서 나타난 변화다. 세공비를 더하면 요새 금반지 한 돈은 40만 원이 넘는다.

 

▷금은 ‘불안 심리’를 먹고 산다. 팬데믹 위기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거쳐 최근 미국, 유럽발(發) 은행 위기까지 불거지면서 금 가격은 사상 최고가를 새로 쓰고 있다. 글로벌 경기 침체에 지정학적, 경제적 불안이 일상화되자 그야말로 신(新)골드러시가 펼쳐진 모습이다. 이에 힘입어 세계 중앙은행들도 공격적으로 금 사재기에 나서고 있다. 국내 편의점에는 최대 열 돈짜리 골드바를 구입할 수 있는 ‘금 자판기’까지 등장했는데 인기가 많아 돌반지, 금 모양 카네이션 등 판매 상품을 늘린다고 한다.

▷고공비행하는 금값에 장롱에서 잠자던 금붙이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요즘 서울 종로3가 귀금속 거리에는 금을 사는 손님보다 파는 사람이 더 많고, 중고거래 플랫폼에는 하루 10건 안팎의 돌반지 판매 글이 올라온다. 금니를 팔기 위해 폐금업체를 찾는 사람도 늘었다. 한 돈 금반지를 팔면 당장 30만 원 정도를 손에 쥘 수 있으니 고물가, 고금리로 한 푼이 아쉬운 서민들에겐 적지 않은 돈이다. 불황이 불러온 역(逆)골드러시라 할 만하다. 치솟는 금값을 보는 마음이 마냥 편치만은 않은 이유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4-03(월) “가장 앞선 민주 국가들도”… 트럼프 기소로 소환된 韓·佛·伊

 

“이것은 국가에 대한 공격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형사 기소 결정이 나오자 소셜미디어와 성명을 통해 분노를 쏟아냈다. “극좌파 괴물과 폭력배들이 유력 대선 주자에게 사상 초유의 공격을 감행했다”며 미국이 정치적 박해를 일삼는 제3세계 권위주의 후진국처럼 됐다는 주장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기소 뉴스에 충격을 받았지만 곧이어 “싸울 준비가 됐다”며 방어 총력전에 들어간 상태라고 측근들은 전한다.

▷트럼프의 지지율은 계속 오르는 중이다. 폭스뉴스 조사에 따르면 그는 기소 직전 공화당원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2위와의 격차를 한 달 전의 두 배로 벌렸다. 그를 지지한다는 응답이 54%로,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주 주지사(24%)를 30%포인트 따돌렸다. 기소 당일에는 하루 만에 400만 달러(약 52억 원)의 후원금을 모금했다. “금액은 상관없으니 마녀사냥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2024년 백악관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트럼프 명의의 이메일이 뿌려진 뒤였다. 여전히 건재한 그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결과다.

▷트럼프 측에서는 기소 결정이 오히려 “정치적 황금”이라는 말도 나온다. 대선에 최대한 활용하자는 전략이 공공연하게 거론된다. 정치 탄압에 맞서는 ‘투사’이자 ‘순교자’ 이미지를 극대화해 지지층을 결집시키겠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머그샷(범인 식별용 사진)을 공개하지 않고, 수갑을 채우지 않기로 한 검찰의 결정은 상징적 장면을 연출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를 막겠다는 의도 또한 작용했을 것이다. 기소 국면을 내년 말까지 끌고 가기 위해 변호인단이 재판 지연 작전을 반복할 것이라는 관측도 파다하다.

 

▷트럼프 기소를 주도한 앨빈 브래그 맨해튼 지검장은 집중 공격의 타깃이 됐다. 살해 협박 편지와 백색가루 봉투가 배달됐다. 그가 진보 진영의 큰손 후원자인 조지 소로스로부터 검은돈을 받았다는 식의 음모론도 난무한다. 트럼프 본인이 브래그 검사장을 ‘타락한 사이코패스’로 부르며 “기소 시 죽음과 파멸이 뒤따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브래그 검사장은 “근거 없는 선동적 공격이자 부당한 수사 개입”이라고 맞서고 있다. 친(親)트럼프 대 반(反)트럼프의 충돌 가능성으로 미국 사회는 일촉즉발 분위기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형사 처벌을 자제해온 미국의 금기는 깨졌다. 정치적 보복의 악순환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기소 결정은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줬다. 뉴욕타임스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기소 사례를 프랑스, 이탈리아 등과 함께 소환하며 “가장 앞선 민주주의 국가들도 전직 대통령 기소를 피해 가지 않았다”고 했다. 첫 전직 대통령 기소가 야기할 혼란과 분열을 얼마나 빨리, 어떻게 극복할지가 미국 민주주의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4-04 의대 정시 ‘N수생’ 천하… 국가경쟁력 갉아먹는 인재 쏠림

 

46세 22학번인 지방대 의대생. 이 늦깎이 학생의 사연이 얼마 전 유튜브 등에서 화제가 됐다. 서울 명문대 97학번인 그는 17년간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3수 끝에 의대에 합격했다. 마흔 넘어 얻은 늦둥이 딸을 위해 ‘정년 없는 전문직’이 필요하다고 여겨 의대를 선택했다고 했다. 최근 의대엔 번듯한 직장을 포기한 ‘유턴족’을 비롯해 재수 이상의 N수생이 늘어나 고령화되고 있다.

▷교육정책연구단체인 ‘교육랩공공장’ 조사에 따르면 최근 4년간 전국 의대 정시 합격자 4명 중 3명은 N수생이었다. 전체 5000여 명 중 N수생이 77.5%나 됐다. 지난해 서울 소재 대학의 N수생 비율이 34.5%인 것과 비교하면 2배 넘게 차이 난다. 유독 의대에 N수생이 쏠리는 건 늦깎이 학생의 기대처럼 ‘정년 없고 연봉이 높다’는 것 때문이다. N수로 몇 년 늦게 출발해도 남는 장사라는 계산이다.

▷N수생은 주로 어디서 올까. 입시업계에선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의 이공계와 KAIST 등 4개 과학기술원 학생들이 N수생의 상당수를 차지한다고 본다. 수시를 위해 내신을 신경 써야 하는 고3과 달리 이들은 정시 과목에만 집중할 수 있어 수능 고득점에 유리하다. 여기에 지방 의대에서 서울 지역 의대로 갈아타려는 수요도 무시할 수 없다. 이들이 옮기고 간 빈자리로 인해 이공계 학과나 지방 의대들은 운영에 어려움을 겪거나 다시 편입생을 뽑는 번거로움을 겪어야 한다.

 

▷의대 N수생에 밀린 고3 재학생들은 원치 않은 이공계로 가거나 대학 간판을 따기 위해 문과 침공을 감행한다. 이들에게 밀린 문과 지망생들은 재수생이 되기 십상이다. 꼬리에 꼬리를 문 연쇄반응이 일어나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과학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영재고와 과학고의 우수 재학생들은 그동안 받았던 지원금까지 반납하면서 의대로 진로를 바꾼다. ‘공부 잘하면 의대’라는 사회적 인식 속에서 ‘의대를 정점으로 한 학력 줄 세우기’의 악순환이 벌어지는 것이다.

▷의대 지망생은 화수분처럼 늘지만 소아과 흉부외과 등 필수 진료 의사는 태부족이다. 한 서울대 의대 교수는 “의사는 모르는 것도 죄가 되는 직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만큼 사명감도 중요하다는 뜻이다. 단지 공부 잘한다는 이유로, ‘정년 없고 높은 연봉의 전문직’ 지위를 얻겠다는 목표만으로 너도나도 의대 문을 두드리는 현실이 씁쓸하다. 전국 대학 의대 정원은 약 3000명. 수능 응시생 중에서 상위 1% 내의 인재들이 간다. 이런 최고급 두뇌들을 병원 말고도 반도체, 인공지능, 로봇, 우주항공 등 첨단 분야 연구실에서도 골고루 볼 수 있었으면 한다. 그게 개인도, 국가도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길이기에….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04-05 OPEC+ 기습 감산에 油價 출렁… 美 골칫거리 된 사우디

 

“이건 하이틴 로맨스 같은 게 아니다.” 존 커비 미국 백악관 NSC 전략소통조정관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를 묻는 언론의 질문을 냉랭하게 받아쳤다. OPEC+가 지난해 10월 하루 200만 배럴의 원유 감산을 결정한 것을 놓고 이를 주도한 사우디와 미국의 갈등이 최고조로 치닫던 때였다. 미국 중간선거가 임박한 시점에 사우디가 조 바이든 행정부의 “면전에 일격을 가했다”는 평가가 쏟아졌다. 워싱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OPEC+가 그제 추가 감산 계획을 발표했다. 이번에도 사우디가 주도한 것으로, 하루 116만 배럴 규모다. 미국이 애써 시도해온 인플레이션 대응을 보란 듯이 무력화시키는 결정이다. 그새 러시아, 중국과 더 밀착한 사우디는 미국의 에너지 정책에 정면으로 맞설 태세다. 사우디는 가스프롬을 비롯한 러시아의 주요 국영기업들에 5억 달러를 투자했고, 중국과는 상하이협력기구(SCO) 준회원 가입과 ‘룽성 석유화학’ 투자 등을 통해 접점을 늘려가고 있다.

▷오랜 동맹인 미-사우디의 밀월관계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미국이 셰일오일, 셰일가스 개발로 대(對)중동 에너지 의존도를 줄이는 상황에서 이란과의 핵협상에 나선 것을 사우디는 ‘배신’으로 받아들였다.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피살 사건을 놓고 바이든 대통령이 “사우디는 ‘왕따(pariah)’가 될 것”이라고 공언하면서 양국은 인권 문제로도 충돌했다. 미국 의회가 사우디에 대한 군사지원 중단 논의에 나섰을 때는 ‘미국 국채 매각’ 카드로 맞섰다. 사우디가 국부펀드(PIF) 등을 통해 보유하고 있는 미국 국채는 1200억 달러가 넘는다.

 

▷사우디를 향해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며 발끈했던 미국은 현재까지 마땅한 대응 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OPEC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의 ‘오일 파워’를 무시할 수 없는 탓이다. 미국의 강경 대응이 사우디와 중국, 러시아와의 연대만 되레 강화해 줄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아프가니스탄 철군 이후 중동에서의 영향력이 약해진 미국으로서는 아랍의 맹주인 사우디와의 협력 또한 절실하다. 경제와 군사, 외교 변수들이 뒤엉켜 있는 국면이다.

▷미국과 사우디의 갈등으로 기름값은 다시 치솟기 시작했다. 환율 변동 폭이 커지고 인플레이션도 재차 심화할 조짐이다. 사우디가 원유 대금의 위안화 결제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외신 보도도 나온다. 원유 거래가 달러만으로 이뤄져 온 ‘페트로 달러’ 체제까지 흔들릴 수 있다는 의미다. 새 전선 짜기에 바쁜 사우디의 행보에 미국도 손대지 못하는 사이 글로벌 금융 시스템에 안보 지형까지 바뀌는 판이다. 고유가의 유탄을 맞는 비산유국들의 주름살도 늘어간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4-06 재개발에 베이고 잘리고… 가로수 사라지는 회색도시

 

30여 년간 시민들을 품어온 울창한 가로수길이 단 이틀 만에 사라졌다. 경부고속도로 판교 나들목에서 경기 성남시 분당구로 이어지는 500여 m는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무성한 일대의 명소였다. 하지만 지난해 3월 아름드리나무 70여 그루가 한꺼번에 베어지며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새로 짓는 호텔의 진출입로와 교통 흐름에 지장을 준다는 게 이유였다. ‘가로수 학살’이 도시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재개발·재건축, 도로 확장 등 각종 개발 사업에 수난을 당하는 것이다.

▷도심의 가로수는 도시인들이 가장 가까이 접하는 숲이다. 삭막한 도시가 그래도 철마다 색색의 옷을 갈아입는 것도 가로수 덕택이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으로 도시에선 점점 가로수가 사라지며 회색빛이 짙어지고 있다. 산림청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서울의 가로수는 29만5852그루로, 2021년보다 8087그루나 줄었다. 2019년 이후 계속 감소 추세다. 가뜩이나 서울은 숲이 부족한 도시여서 더 안타깝다. 가로수를 포함해 도로변 녹지, 근린공원 등 ‘생활권 도시숲’ 면적은 1인당 4.97㎡로, 세계보건기구(WHO) 권고 기준인 9㎡의 절반을 겨우 넘는다.

▷살아남았다고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수시로 난도질 수준의 가지치기를 당한다. 간판을 가린다, 열매 냄새가 난다 등 이유는 수십 가지다. 풍성한 나뭇잎과 가지를 모두 잃은 채 기둥만 앙상하게 남아 ‘닭발’ 가로수가 된다. 관리하기 편하다고 남발하는 가지치기는 가로수엔 치명적이다. 가지를 자른 절단면이 병해충에 노출돼 썩기 쉽고 수명도 단축된다. 무분별한 가지치기로 말라죽는 가로수가 매년 1만6000그루에 이른다고 한다. 미국·홍콩 등은 나뭇잎이 자라는 부위의 25% 이상은 제거하지 못하도록 규제한다.

 

▷이렇게 시달리는데도 가로수는 인간에게 아낌없이 퍼준다. 사람들이 배출한 탄소를 흡수하고 맑고 시원한 공기를 뿜어낸다. 미세먼지도 걸러낸다. 산림청에 따르면 도시에 조성된 숲은 나무 한 그루당 연간 미세먼지 35.7g을 흡수한다. 나무 47그루는 경유차 한 대가 1년간 배출하는 미세먼지를 흡수할 수 있다. 한여름엔 그늘막보다 열을 저감하는 효과가 25% 더 좋고, 도시 소음도 줄여준다.

▷식목일을 이틀 앞둔 3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선 ‘나무의 권리’를 선언하는 한 환경단체의 행사가 열렸다. 나무에겐 마음껏 뿌리 내리고, 햇볕을 쬐고, 함부로 뽑히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거다. 나무가 사라진 도시에선 인간도 살 수 없다. 나무를 심는 것만큼이나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식목일에 나무는 심지 못했더라도 ‘나무의 권리’는 한 번쯤 되새겨볼 만하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4-07 ‘거짓 지식’ ‘개인정보 침해’… AI 개발 잠시 멈춰야 하나

 

챗GPT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AI)의 문제로 가장 먼저 지적된 것은 사실인 듯 지어내는 글이다. 주로 업데이트된 정보를 학습하지 못했거나 체계적으로 왜곡된 정보를 학습할 때 일어난다. 그러나 꼭 그렇지 않더라도 엉뚱한 단어들의 조합을 던져주면 황당한 설명을 지어내는 일이 종종 있다. ‘생각하는 인간’은 최소한 자신이 뭘 알고 뭘 모르는지 안다. 모르는 걸 안다고 착각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는 그렇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이 참된 지식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챗GPT는 인간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갖고 있지만 이 최소한을 모른다.

▷챗GPT가 온갖 정보를 긁어모아 마구잡이로 학습하면서 법적으로 가장 크게 문제가 될 게 표절일 줄 알았는데 개인정보 침해가 먼저 문제로 떠올랐다. 이탈리아 데이터보호청은 챗GPT가 학습을 위해 개인정보를 대량 수집·저장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개인정보 침해가 발생하고 있다며 챗GPT가 개인정보 보호 기준을 충족할 때까지 접속을 차단하기로 했다. 이탈리아의 조치에 캐나다 영국 프랑스 아일랜드 등이 동조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컴퓨터가 인간보다 계산을 잘하게 된 지는 오래됐다. 체스나 바둑에서 보듯 경우의 수를 따져 예측하는 것도 인간보다 잘하게 됐다. 컴퓨터가 챗GPT를 통해 인간에게 도전장을 낸 분야는 작문이다. 다만 인간처럼 생각을 토대로 문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특정 단어 다음에 특정 단어가 나올 확률 분포를 따져서 문장을 만든다.

 

▷학교에서는 당장 봄 학기를 맞아 작문 지도가 불가능해졌다고 아우성이다. 챗GPT에 감상문이나 리포트를 쓰라고 지시했더니 AI가 작성했는지, 사람이 작성했는지 판별하기 어려운 글을 써내고 있다. 판별 자체가 어려우면 사용을 금지한다고 금지될 일이 아니다. 모든 과목이 실은 작문이다. 작문 지도를 할 수 없으면 사고력과 표현력을 키울 수 없고 창의적인 생각에 따른 창의적인 글도 쓸 수 없다. AI처럼 확률 분포에 따른 글만 쓸 수 있다. 그래서 AI의 글은 AI의 글임을 알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워터마크(디지털 표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미국 비영리단체 ‘삶의 미래 연구소(FLI)’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애플 공동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 등 유명 인사들의 서명을 받아 생성형 AI의 추가 개발을 6개월간 중단하고 사회에 미칠 영향에 대해 정밀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빌 게이츠 같은 이는 “개발 중단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며 “문제가 있는 부분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어느 쪽 견해가 타당하든 이제 찬사에만 취해 있지 말고 한계와 문제를 진지하게 따져볼 때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4-08“내 딸 두 번 죽였다”… 의뢰인 울리는 ‘노쇼’ 변호사들

 

“법을 잘 아는 변호사가 딸을 두 번 죽였습니다.” 2015년 학교폭력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한 박주원 양의 어머니 이기철 씨가 SNS에 올린 글이다. 당시 검경이 이 사건을 수사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가해자들은 기소되지 않았다. 유족에게 남은 방법은 민사소송을 통해 딸의 억울함을 알리는 것뿐이었다. 1심에서 일부 승소한 이 씨는 항소심이 가해자들의 책임을 더 엄중하게 물어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변호사가 재판에 잇따라 불출석하는 바람에 이 씨의 희망은 물거품이 됐다.

▷민사소송법에서는 재판에 2차례 불출석한 당사자가 한 달 안에 변론기일 지정을 신청하지 않거나, 기일 지정 이후 재판에 또 불출석하면 소를 취하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 씨 측 변호인 권경애 변호사는 지난해 항소심 3차례 재판에 모두 불출석했다. 그 결과 1심에서 이 씨 측이 패소했던 부분은 원심대로 확정됐고, 이 씨 측이 승소했던 1명마저 패소로 판결이 뒤바뀌었다. 이 씨는 힘겹게 8년간 이어온 재판을 허무하게 끝내야 했다. 권 변호사는 ‘조국 흑서’의 공동 저자로 대중적으로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권 변호사는 ‘날짜를 착각했다’는 취지로 변명했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법조인들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민사소송은 법원에서 변론기일 통지서를 보내고 메일이나 문자메시지로도 날짜를 알려준다”며 “여간해선 기일을 놓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재판에 가지 않은 진짜 이유가 궁금하다는 이들이 많지만 권 변호사는 ‘유족에게 9000만 원을 갚겠다’는 각서만 써놓은 채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고 있다.

 

▷이 사건 이전에도 변호인의 재판 ‘노쇼’로 의뢰인이 소송에서 지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2015년에 의료 소송에서 변호사가 3차례 재판에 불출석하는 바람에 원고가 패소한 사건이 있었다. 원고는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법원은 300만 원을 물어주라고 판결했다. 2012년에도 재판에 불출석해 패소한 변호사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법원이 1000만 원의 손해배상을 인정한 적이 있다. 변호사가 정해진 기간 내에 항소나 상고를 하지 않아 소송이 끝나버린 사례들도 있다. 의뢰인들은 어이없는 이유로 소중한 법적 권리를 잃은 것이다.

▷대법원 판례는 변호사에게 “전문적인 법률 지식과 경험에 기초해 성실하게 의뢰인의 권리를 옹호할 의무”를 요구한다. 대한변협은 권 변호사에 대해 징계를 추진 중이다. 법적 책임이나 징계의 관점에서만 따질 일은 아니다. 이는 법조인으로서 기본 자질의 문제다. 패소 소식을 듣고선 “가슴을 바위로 내려친 것 같았다”던 이 씨의 말을 권 변호사가 마음에 새기길 바란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4-10(월) “자극적 장면에 은밀한 사생활, 고객 영상 돌려본 테슬라”

 

테슬라 전기차는 ‘바퀴 달린 컴퓨터’로 불린다. 전 세계에서 운행 중인 테슬라 차량을 통해 도로, 교통, 지리 정보를 모으고 축적하는 시스템의 경쟁력은 특히 압도적이다. 1시간에 최대 25GB(기가바이트)의 정보를 수집하는 카메라와 센서, 인공지능(AI) 반도체와 첨단 소프트웨어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테슬라는 무선으로 상시 업데이트되는 이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자율주행 체계인 ‘오토파일럿’을 완성하겠다고 큰소리치고 있다.

▷테슬라 모델X의 경우 모니터링을 위해 중앙과 뒤, 양옆에 모두 8대의 소형 카메라가 장착돼 있다. 주행정보 수집 외에 사고 시 증거자료 확보, 차량 절도 방지 등에 다목적으로 활용된다. 유용하지만 함정이 있다. 촬영된 영상의 유출이나 무단 공유, 이로 인한 프라이버시 침해 가능성이다. 이 위험성이 현실화한 것으로 우려되는 외신 보도가 나왔다. 테슬라 직원들이 2019∼2022년 고객 차량의 카메라에 찍힌 영상들을 내부 메신저로 함께 돌려 봤다는 것이다.

▷로이터통신이 전한 전직 테슬라 직원 9명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이 채팅방에서 공유한 영상에는 알몸으로 차량에 접근하는 남성, 자전거를 타던 어린이가 테슬라 차량에 치여 튕겨져 나가는 영상 등이 포함돼 있다. 은밀한 사생활이나 자극적인 장면을 담은 영상들이다. 심지어 시동을 끈 상태에서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영상들도 있다고 한다. 이를 본 직원들끼리 “나라면 테슬라를 안 사겠다”는 농담을 주고받았다니 노출된 개인정보 수위가 상당히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미국 언론은 보도가 사실이라면 ‘스파이 행위’라고 지적한다. 테슬라는 “고객의 동의를 받아 데이터를 공유받으며, 이 데이터들은 개인 계정이나 차량번호와 연결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영상을 보면 대략적인 위치나 장소를 파악할 수 있는 경우가 적잖다. 테슬라의 영상 수집은 중국과 독일, 네덜란드 등에서도 문제가 됐다. 지나가는 행인까지 상시 촬영하는 기능을 놓고 “사생활 침해”라며 시민단체들이 소송을 냈다. 중국에서 논란이 됐을 때는 일론 머스크 CEO가 “테슬라가 스파이 활동에 이용된다면 우리는 문을 닫겠다”는 약속까지 내놔야 했다.

▷테크기업들의 영상과 이미지 공유, 활용 과정에서 제기되는 프라이버시 문제는 앞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테슬라뿐일까. 아마존의 AI 음성인식 서비스인 ‘알렉사’는 성능 향상을 위해 제품 주변의 소리를 녹음해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상 곳곳에 포진한 카메라와 센서, 음향 장치들이 언제라도 감시 장비로 악용될 여지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해킹 위험도 상존한다. 안전을 위해 설치한 장비들이 사생활을 위협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니…. 첨단 IT 시대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4-11 美 기업들 “근무태도 좋은 시니어가 젊은이보다 낫다”

 

‘70대 남성이 1순위 후보.’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20여 년간 물류센터를 운영해온 사장은 그동안 고교생과 대학생을 쓰던 파트타임 자리에 70대 노인을 쓰기로 했다. 젊은이보다 일 배우는 속도가 느려도 근무시간을 잘 지키고 성실하다는 이유였다. 월스트리트저널 기사에 나온 이 사례처럼 요즘 미국에선 50대 중반 이상의 시니어 직원을 보는 시각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고 한다.

▷미국 통계에 따르면 경제활동을 하는 65∼74세 연령군은 코로나 이전에 비해 각 주별로 5∼10%씩 증가했다. 다른 연령군이 감소하거나 정체인 것과 비교된다. 젊은이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패스트푸드점은 물론 법률, 회계 등 전문직까지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 고용주들의 시니어 고용에 대한 인식 변화는 일자리에 대한 젊은층의 가치관 변화와 맞물려 있다는 해석이다.

▷대표적인 가치관 변화가 ‘조용한 사직’ 현상이다. 코로나를 거치는 동안 “돈 받은 만큼만 일한다” “내 인생은 일의 결과물로 정의되지 않는다” 등의 가치관이 젊은이들 사이에 확산됐다. 이는 지나치게 일에만 몰두하는 게 아니라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춘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종종 일에 대한 의욕마저 상실케 하는 부작용도 있다는 것이다. 지각, 조기퇴근이 잦고 몇 달 못 가 힘들다며 그만두거나 단돈 몇 달러에도 이직하는 경우가 생기면 고용주 입장에선 인력 운용이 쉽지 않다.

 

▷미국 고용주들이 시니어들을 눈여겨보는 것은 바로 근무 태도 때문이다. 출근시간 전 회사에 나오고 맡은 일을 끝내야 마음 편히 퇴근하는 시니어 세대의 직업윤리를 반긴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 중요하냐는 미국 여론조사에서 65세 이상은 75%가 그렇다고 답했으나 18∼29세는 61%에 그쳤다. 연륜에서 묻어나는 노련함과 책임감으로 더 친절하고 끈기 있게 고객을 대응한다고 한다. 시니어를 고용함으로써 ‘나이 차별(ageism)’을 하지 않는다는 좋은 이미지도 만들 수 있다.

▷일에 대한 가치관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어느 세대의 것이 더 낫다고 할 순 없다. 하지만 연령만으로 일할 수 있는지를 따지는 시대는 지났다. 각 세대의 장점을 어떻게 취할지는 고용주의 몫이다. 국내에서도 베이비붐 세대 은퇴가 시작되면서 고학력에 일할 체력과 의욕 등 3박자를 갖춘 ‘파워 시니어’가 등장하고 있다. 시니어 일자리는 정년 이후 부족한 수입을 보충하는 것이면서 ‘사회가 여전히 나를 필요로 한다’는 자존감을 높이는 수단이다. 시니어들의 경험과 연륜을 일자리로 풀어낼 수 있다면 연금과 복지 재원 고갈 같은 고령화의 그늘을 없애기도 쉬워진다. 일에 대한 시니어들의 의욕을 잘 활용하면 사회의 생산성을 올리는 길이 될 수 있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04-12 “차라리 코로나때 결혼할걸”… 치솟는 웨딩물가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들은 가벼운 우울감인 ‘메리지 블루’를 겪기 마련이다. 익숙했던 일상을 떠나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역할을 맡아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 위기를 이겨내고 결혼 성수기를 맞은 요즘 커플들의 우울감은 더하다고 한다. 예식장부터 ‘스드메’(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 비용까지 왕창 오른 ‘웨딩플레이션’ 탓이다. “차라리 코로나 때 결혼할걸” 하고 후회하는 이들도 있다.

▷요즘 신랑 예복을 포함한 스드메 가격은 500만∼600만 원으로 코로나 전보다 2배로 뛰었다. 서울 강남권 호텔에서 하객 300명을 초대해 결혼할 경우 5600만 원이 넘게 든다. 1년도 되지 않아 30%가 오른 것이다. 하루 이틀 망설이는 사이에도 값이 올라 “오늘이 가장 싸다”는 말까지 나온다. 결혼정보회사 듀오가 매년 신혼부부 1000명을 설문조사해 발표하는 ‘결혼비용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결혼한 커플이 신혼집, 혼수, 예식, 신혼여행 등 결혼에 쓴 총비용은 평균 3억3050만 원으로 1년 전보다 15% 증가했다.

▷결혼 시장은 원래 반복 구매가 없어 공급자 우위 시장이다. 여기에 코로나로 미뤄둔 결혼 수요는 급증한 반면 코로나 불황을 못 견디고 상당수 업체가 폐업하는 바람에 공급 자체가 줄면서 부르는 게 값인 상황이 돼 버렸다. 수천만 원짜리 ‘마통’으로도 감당이 어려운 예비부부들은 다른 커플들과 같은 날 웨딩 촬영을 해 할인받거나, 관련 업체 후기를 소셜미디어에 부지런히 써 올려 적립한 마일리지를 현금화하고 있다. 하객들의 부담도 커져 축의금만 내면 5만∼10만 원, 식사를 할 경우 10만∼20만 원을 내는 것이 보통이다.

 

▷미국도 웨딩플레이션이 덮쳤다. CNBC 보도에 따르면 올해 결혼식 평균 비용은 2만9000달러(약 3800만 원)로 코로나 이전보다 17% 올랐다. 다들 예식 규모를 줄이느라 평균 하객 수가 2019년 131명에서 2021년엔 105명으로 줄었다. 청첩장을 돌렸다가 취소하고 줌으로 결혼식을 중계하거나, 값이 싸고 하객 수도 줄일 수 있는 주중이나 일요일 아침에 식을 올리고, 생화 대신 조화를 쓰며, 중고 마켓에서 결혼용품을 고르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한다.

▷국내외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결혼비용 절감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여름과 겨울 같은 비수기를 노린다. 웨딩플래너 대신 스스로 손품 발품을 팔아 계획을 짠다. 하객 수 오차를 최소화한다. 웨딩 촬영이나 신혼여행 등 양보할 수 없는 한 가지에 집중하되 나머지는 과감히 줄인다. 마지막으로 결혼을 미루지 않는다. 내년이면 웨딩플레이션이 더 심해져 “차라리 작년에 할걸” 하고 후회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4-13 “욕심과 분노는 아지랑이…” 직지 50년만의 외출

 

번뇌가 곧 깨달음이요/무심(無心)하면 곧 경계가 없다/생사와 열반이 다르지 않고/욕심과 분노는 아지랑이나 그림자 같다.’ 12일부터 프랑스국립도서관이 ‘직지(直指)’를 공개하면서 펼쳐놓은 페이지에 담긴 내용이다. 직지의 편찬자인 백운 스님이 전하고 싶었던 선불교의 정수, 즉 선과 악이나 삶과 죽음 등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불이(不二)’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50년 만의 외출, 글이 살아 숨쉬는 듯하다.

▷직지는 고려 말인 1377년 간행됐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이다. 독일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본 성경이 1455년에 처음 인쇄된 것에 비하면 78년 앞선다. 무신정권 시대인 1234년 상정고금예문이 금속활자로 만들어졌다는 기록도 있으니 서양보다 200년 이상 앞섰을 수도 있다. 조선에서도 태종이 금속활자를 만드는 주자소를 세웠고, 세종 때인 1434년에는 활자의 백미로 꼽히는 갑인자를 20만 개나 만들 정도였다.

▷고려∼조선이 화려한 인쇄 기술을 가졌지만 사회의 혁명적 변화를 이끌어내진 못했다는 일부 시각이 있다. 유럽에서 구텐베르크를 높이 평가하는 건 중세의 질곡에서 벗어나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등 근대로 가는 지식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이란 얘기다. 1997년 당시 미국의 부통령이었던 앨 고어는 독일 베를린의 주요 7개국(G7) 회담에서 “금속활자는 한국이 세계 최초로 발명하고 사용했지만, 인류 문화사에 영향을 미친 것은 독일의 금속활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럽과 지리적 역사적 여건이 달랐던 만큼 이런 식의 비교 평가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동국대 황태연 명예교수는 ‘책의 나라, 조선의 출판혁명’이란 책에서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출판된 금속활자 책이 총 1만4117종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이 책들의 90%가 농업, 양잠, 어업, 의학 등 실용서였다고 한다. 조선 후기엔 왕실부터 서당까지 매년 400만 권의 책이 필요했는데 조선의 뛰어난 출판 역량이 감당했다는 것이 황 교수의 주장이다. 이런 인쇄 문화가 ‘배워야 산다’는 ‘집단 DNA’를 심어 현재의 산업화, 민주화, K문화의 모태가 됐다는 것이다.

▷일부 해외 학자들은 한반도의 인쇄기술이 구텐베르크에게도 영향을 미쳤다는 연구를 내놓고 있다. 아직 공인된 내용은 아니지만 분명한 건 우리 민족의 인쇄 문화는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될 수준이라는 점이다. 정작 부끄러운 건 지금이다. 성인의 절반은 책을 1년에 한 권도 읽지 않는다. 2021년 1인당 평균 독서량은 4.5권에 불과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 수준이다. 50년 만에 세상에 나온 직지 소식을 접하며 책 안 읽는 대한민국의 세태를 떠올리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04-14 “숨이 막혀요”… 질식 공포 싣고 달리는 김포골드라인

 

“밀지 마세요.” “숨을 못 쉬겠어요.” 지난해 10월 이태원 핼러윈 참사의 아비규환이 아직 생생한데, 날마다 질식의 공포에 시달리는 곳이 있다. 김포한강신도시에서 김포공항역까지 23.67km 구간을 지나는 김포도시철도(김포골드라인)다. 11일 오전 김포공항역에서 10대 여고생과 30대 여성이 호흡 곤란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폭설이 내린 작년 12월에도 한 여성이 호흡 곤란으로 인근 병원에 옮겨졌다. ‘지옥철’이란 표현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김포골드라인은 2019년 9월 개통됐다. 차량 바탕색이자 노선의 이름인 골드는 김포의 황금 들녘을 달린다는 의미로 붙여졌다. 하지만 개통 초기부터 극심한 혼잡으로 오히려 승객들의 얼굴이 누렇게 뜰 지경이 됐다. 일평균 7만8000명이 이용하는데 3분의 1이 출퇴근 시간대에 몰린다. 전동차에 오르면 옴짝달싹할 수 없어 차렷 자세를 취해야 한다. 겨우 빠져나온 뒤엔 어지러워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지하철이 붐비는 정도는 보통 혼잡도로 표시한다. 정원에서 좌석을 빼고 입석 인원이 붐비는 정도를 계산한다. 정원대로 타면 100%다. 혼잡도가 150%로 증가하면 서 있기만 해도 서로 어깨를 부딪칠 정도다. 170%면 팔을 들 수 없고, 200%가 되면 몸과 얼굴이 밀착돼 숨이 막히는 수준이다. 출근 시간대 김포골드라인의 최근 3년간 평균 혼잡도는 200%가 넘는다. 최대 285%에 달하기도 했다. 정원 172명 열차에 387명까지 탔다는 얘기다. A4용지 반쪽 위에 사람이 서 있는 정도다.

 

▷애초에 노선 계획부터 잘못됐다. 신도시 조성에 따른 급격한 인구 증가와 서울 통근 수요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비용 절감을 위해 2량짜리 꼬마열차를 기준으로 설계하는 바람에 열차 추가 연결도, 역사 확장도 불가능하다. 분통이 터진 시민들은 2021년 2월 정치인들에게 ‘너도 함 타봐라’ 챌린지를 제안했다. 열차를 타본 당시 김포시장은 “교통이 아니라 고통 그 자체였다”고 했다. 선거를 앞두고 방문한 정치인들은 “(이대로 방치하는 건) 정의롭지 못하다”며 개선을 약속했지만 그때뿐이었다.

▷김포도시철도 측은 혼잡 해소를 위해 내년 9월 열차 5대를 추가 투입할 계획이다. 숨통이 조금 트일 정도일 뿐이다. 근본적으론 지하철 노선 연장과 확대 등이 필요하겠지만 버스전용차로 확대 등 당장 수요를 분산할 수 있는 단기 대책도 시급히 고민해야 한다. 사고 전날 아찔한 상황이 있었는데도 비극에 대비하지 못했던 지난해 이태원 참사의 기억이 뼈아프다. 오늘 넘겼다고 내일 무사하란 법은 없다. 이어지는 실신 사고가 대형 참사에 대한 긴박한 경고라는 생각으로 대책을 서둘러야 한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4-15(토) 스물한 살 미군 사병에 국가기밀 줄줄이 샜다

 

존 워커는 미군 역사상 최악의 스파이 중 하나로 꼽힌다. 그가 1966년 미국 핵잠수함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보고받는 노퍽 해군기지에서 통신병과 준위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그는 암호생성기 KL-47의 암호코드를 복사한 뒤 워싱턴에 있는 소련대사관을 찾아갔다. 이듬해에는 더 최신인 KW-7의 암호코드까지 빼돌렸다. 다시 이듬해 북한의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이 일어났다. 소련은 워커가 전해준 암호코드를 확인하기 위해 국가보안위원회(KGB) 팀을 북한으로 보내 푸에블로호의 암호기를 뜯어봤다.

▷미 공군 매사추세츠주 방위군 정보단 소속 일병 잭 테세이라가 한국과도 관련된 미국 정부의 기밀문건 유출 사건으로 13일 체포됐다. 이날 연방수사국(FBI) 요원들은 자동 소총으로 무장하고 장갑차까지 동원해 매사추세츠주 노스다이턴에 있는 테세이라의 자택을 급습해 그를 체포했다. FBI는 테세이라가 기밀문건 사진을 찍어 올릴 때 사진 속 배경에 반복적으로 찍힌 그의 자택 모습을 통해 신원을 포착했다.

▷워커는 부업으로 술집을 하다가 망해 돈이 궁해서 정보를 소련에 팔았다. 스파이들은 대개 돈이 궁하거나 이념에 경도돼 정보를 판다. 테세이라는 정보를 어디에 판 게 아니다. 성향도 총기를 애호하는 등 극우에 가깝다. FBI가 더 수사해봐야 정확한 동기가 나오겠지만 일단은 그가 온라인 채팅방에서 ‘OG’라고 불리는 방장 역할을 하면서 “하루 중 일부를 정부 컴퓨터 네트워크에 보관된 기밀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보안시설에서 보낸다”며 과시용으로 올린 문건이 채팅방의 구성원을 통해 흘러 나간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서는 일병에 불과한 21세 젊은이가 어떻게 전쟁을 유발할 수도 있는 1급 기밀을 다룰 수 있었는지 한탄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대부분의 국가가 그렇지만 특정 계급 이하는 최고 등급 기밀에 대한 접근이 제한돼 있다. 미 국방부의 한 전직 직원은 CNN에서 “장군과 대령은 서류를 좋아한다. 돋보기를 끼고 더 자세히 보고 싶어 하기 때문에 프린트하게 한다”고 말했다. 프린트하는 과정에서 사병들에 의해 기밀문건이 샜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미국이 악의적이라고 해석될 수 있는 행동은 안 한 것 같다”고 말했다가 구설에 올랐다. 한국의 고위 당국자는 도청은 없었다고 부인하지만 순순히 믿기 어렵다. 첩보 활동은 동기에 따라 좋고 나쁜 게 아니라 들키는 것 자체가 나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악이다. 한국에서 생산된 포탄이 미국에 수출됐다가 우크라이나에 지원되는 사안으로 한국이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미국에 엄중히 항의해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4-17(월) “돈 좀 그만 써”… ‘거지방’에 몰리는 젊은이들

 

카카오톡 오픈채팅의 재미있는 대화 내용을 캡처한 ‘짤’ 중에서 최근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아껴 쓰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거지방’의 짤이다. 대표적인 것이 스타벅스의 5300원짜리 자몽허니블랙티를 사서 마셨다는 글. 이에 대해 ‘스타벅스, 배가 불렀군요’ ‘물을 마시세요. ○○○ 1100원’ ‘○○ 미네랄워터는 600원입니다’ 등 꾸중의 답글이 속출했다. 마지막 결정타는 ‘물을 왜 돈 주고 사 먹죠? 그냥 회사 가서 마시세요’라는 글이었다. 동의한다는 글이 줄을 이었다.

▷‘거지방’은 극도의 절약으로 거지처럼 산다는 의미로 붙은 이름이다. 현재 오픈채팅에서 수백 개가 운영되고 있다. 방마다 조금 차이가 있지만 주로 참여자끼리 소비 지출 내역을 공개하고 이를 평가한다. 일부 방에선 아예 한 달 목표 생활비를 정하고, 실제 지출액을 공유한 뒤 가장 많이 쓴 사람에게 벌칙을 내리기도 한다. 또 새로 멤버가 들어오면 “돈 좀 그만 써 ○○○야,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야” 등의 자극적인 글을 자동으로 올리는 방도 있다.

▷주로 불필요하거나 과다한 지출을 꾸짖거나 뜯어말리는 채찍성 글이 주를 이루지만 아낀 내역을 보여주며 칭찬을 유도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차 얻어 타서 택시비 아낌 +6000’ ‘학식 6900원인데 아빠 카드 씀’ 등이다. 또 돈 주고 사는 것을 대신할 수 있는 절약 방법을 공유한다. 휴대전화 그립톡을 사고 싶다고 하면 종이로 대체 거치대 만드는 유튜브 링크를 보내주는 식이다. 카드나 통신사 포인트 활용법, 무료로 즐길 수 있는 이벤트 등도 단골로 올라온다.

 

▷기성세대는 ‘내 돈 쓰는데 남들에게 알리는 것도 모자라 꾸중까지 듣는 건 무슨 경우냐’라고 의아해할 수 있겠다. 하지만 ‘거지방’은 경기침체와 고물가로 지갑이 얇디얇아진 젊은이들에게 놀이방이자 쉼터 역할을 한다. 지난해 한창 재테크 열풍이 불 때는 ‘있는 돈을 최대한 아껴 나중에 투자할 목돈을 만들자’는 ‘짠테크’가 유행했지만 지금은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아낀다는 분위기가 강하다. 경기침체로 인한 경기고통지수의 경우 15∼29세 연령층이 다른 연령대에 비해 가장 높다는 통계를 보면 ‘거지방’이 뜬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젊은이들은 ‘거지방’을 통해 “나만 주머니 사정이 어려운 건 아니지”라는 공감대를 갖는다. 젊은이들은 혼자 아끼려고 하면 힘들지만 같이 하면 서로 의지가 될 것 같은 느낌이라고 토로한다. 여기에 ‘나도 잘하고 있다’는 안도, ‘앞으로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 대화가 오가면서 나오는 깨알 재미 등을 함께 찾는 것이다. 소비를 과시하던 ‘플렉스’와 정반대인 ‘거지방’의 인기는 요즘 경제 상황을 보면 꽤 오래갈 것 같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04-18 “미안해요 엄마, 2만 원만 보내주세요”

 

인천 미추홀구 구도심의 나홀로 아파트와 신축 빌라에는 2030세대가 많이 산다. 인근 대규모 산업단지에서 일하는 가난한 젊은이들이 1억 원 미만의 전세보증금으로 새집 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은 여기 말고는 없다. 그런데 최근 이곳에서 20, 30대 젊은이 3명이 줄줄이 숨진 채 발견됐다. 수도권 일대에 주택 2700채를 갖고 전세사기를 벌이다 구속된 ‘미추홀구 빌라왕’ 남모 씨(61) 피해자들이다.

▷17일 새벽 31세 여성 박모 씨가 집 안에서 유서를 남기고 쓰러진 채 남자친구에게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졌다. 박 씨는 전세보증금 7200만 원에 사기범의 아파트로 입주했고, 2021년 9000만 원으로 올려줬는데 아파트가 통째 경매에 넘어가면서 보증금을 날리게 됐다. 박 씨가 숨지기 50일 전인 2월 28일에는 전세금 7000만 원을 떼인 38세 남성이 대출 상환일이 다가오자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은행 대출로 마련한 빌라가 경매로 넘어간 것이다. 그는 유서에 “더는 못 버티겠다”고 썼다.

▷14일 숨진 채 발견된 임모 씨는 고작 스물여섯이다. 고교 졸업 후 인천 남동공단에 다니며 6800만 원짜리 빌라 전셋집을 마련했다. 2021년에는 전세금을 9000만 원으로 올렸으나 경매에 넘어가 5600만 원을 날렸다. 매매가 2억 원도 안 되는 집에 1억8120만 원의 근저당권이 설정돼 있었다고 한다. 신용불량자가 될까 무서워 7년간 일한 직장을 그만두고 퇴직금을 받았지만 대출금을 갚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숨지기 닷새 전 어머니에게 전화로 차마 떨어지지 않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미안해요 엄마, 2만 원만 보내주세요.”

 

▷‘깡통 전세’나 갭 투기로 인한 전세사기가 늘면서 지난해 전세보증 사고액은 약 1조2000억 원으로 전년도의 2배로 급증했다. 피해자 10명 중 7명이 2030세대다. 전세사기 매물들이 사회초년생이나 신혼부부들이 겨우 감당할 수 있는 금액대인 탓이다. 피해자 커뮤니티에는 “대출금 못 갚아 신용카드 거래가 정지됐다” “아이가 곧 태어날 텐데 한 푼도 못 건지고 거리로 나앉게 생겼다”는 피 말리는 사연들이 가득하다.

▷‘너희는 재산증식 우리는 보금자리’ ‘당신들은 기회겠지만 우리들은 삶의 꿈!!’. 어제 숨진 박 씨 아파트 현관문에 붙어 있는 전세사기 피해 호소문들이다. 숨지기 전날까지 피해 구제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같은 피해자들에겐 “버텨보자”며 웃어 보였다고 한다. 임 씨도 어떻게든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고 피해를 만회하려 보험회사에 재취업도 했지만 수도요금조차 못 낼 처지가 됐다. 탐욕스러운 사기꾼들에게 벼랑 끝으로 내몰리면서도 애써 당차고 의젓했던 청춘들이라 더 마음이 아프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4-19 챗GPT 탑재한 MS 빙, 삼성-구글 13년 밀월 깨나

 

삼성전자가 국내에서 첫선을 보인 스마트폰은 2010년 4월 나온 갤럭시A다. 구글의 안드로이드(Android) 운영체제를 기반으로 한다고 해서 A가 붙었다. 이때부터 갤럭시 스마트폰엔 구글의 검색엔진이 기본으로 장착됐다. 독자적 운영 생태계를 구축한 애플에 맞서 두 회사의 동맹이 시작된 것이다. 그동안 삼성전자는 안드로이드를 위해, 구글은 갤럭시를 위해 각각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최적화하며 손을 잡아 왔다.

▷그런데 13년간 이어져 온 두 회사의 밀월 관계에 이상 신호가 감지되고 있다. 삼성전자가 기본 검색엔진을 구글 대신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빙’으로 교체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보도한 것이다. 삼성 측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있다. NYT도 “교체가 확정되지는 않았다”고 했지만, 생성형 인공지능(AI)을 등에 업고 구글의 독주를 위협하고 있는 MS의 존재는 확인된 셈이다.

▷요즘 챗GPT로 대표되는 생성형 AI 시장을 주도하는 건 한때 혁신과 멀어 보였던 MS다. MS는 챗GPT 개발사 ‘오픈AI’에 120억 달러(약 16조 원)를 투자해 사실상 경영권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오픈AI와 손잡고 사나흘에 한 번꼴로 신규 AI 서비스를 선보일 정도다. 최근엔 자사 검색엔진 빙에 챗GPT를 탑재한 AI 검색 서비스를 내놨다. 새로운 빙은 1시간 전에 올라온 소식까지 분석해 최신 정보를 제공하도록 설계됐다. ‘뉴 빙’을 공개한 날 MS 최고경영자는 “검색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열린 날”이라고 자평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곳은 혁신의 아이콘 구글이다. 구글은 토종 포털이 장악한 한국 중국 등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 대부분 국가의 검색시장을 지배하며 20년 넘게 1위 자리를 지켜 왔다. 하지만 MS의 추격에 견고했던 검색엔진 시장에도 균열이 생길 조짐이다. 한 달 새 빙 방문자는 15% 이상 늘어난 반면 구글 검색 방문자는 1%가량 줄었다고 한다. 매출 상당수를 검색 광고에 의존하는 구글에 위협적인 일이다. 구글은 새 빙에 맞설 카드로 대화형 AI ‘바드’를 내놨다가 시연회에서 오류를 드러내며 망신을 샀다.

▷이런 상황에서 스마트폰 검색엔진마저 빙으로 교체될 경우 검색시장의 절대강자가 뒤바뀌는 건 시간문제다. 구글이 포털의 대명사였던 야후를 대체하고 애플 아이폰의 등장으로 노키아, 모토로라가 몰락한 것처럼 AI 주도권 경쟁에서 밀려나는 기업은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도 있다. 삼성전자가 검색엔진 사용료로 구글에 매년 지불하는 돈이 30억 달러(약 4조 원)라고 한다. 생성형 AI가 글로벌 빅테크의 판도를 뒤흔들면서 이를 둘러싼 ‘쩐의 전쟁’도 시작됐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4-20 “특검은 공무원 아니다”는 박영수의 ‘공무원 농단’

 

“특별검사는 공무원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건’을 이끈 박영수 전 특검의 변호인들은 18일 박 전 특검의 청탁금지법 위반 혐의의 첫 재판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박 전 특검은 2020년 수산업자를 사칭한 김모 씨에게 포르셰 렌터카와 수산물 선물 등 336만 원의 금품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공무원이 아니기 때문에 청탁금지법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검은 변호사 중에서 임명되지만 특검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특검법)은 특검의 보수와 대우는 고등검사장에 준한다고 했다. 또 특검은 탄핵 또는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지 아니하고는 파면되지 않는다고 했다. 특검보와 특별수사관도 각각 검사장, 3∼5급 상당의 별정직 국가공무원에 준하는 보수와 대우를 받도록 돼 있다. 2022년 특검법이 시행되기 전 특검을 요하는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제정된 개별 특검법에서도 같은 규정을 뒀다. 특검은 공무원도 보통 공무원이 아니라 고위직 공무원이다.

▷박 전 특검 측은 지난해 기소 당시 특검이 ‘공무수행 사인(私人)’이란 주장을 한 적도 있다. 법률에 따라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민간인, 예를 들어 오지에 근무하는 별정직 우체국장이나 운행 중인 선박의 선장 같은 수준의 지위에 그친다는 것이다. 청탁금지법에선 공무원이 아닌데도 공적 역할이 막중하다는 이유로 사립학교 교원과 언론인이 처벌 대상이다. 특검이 설혹 공무원이 아니라 공무원에 준할 뿐이라고 하더라도 특검까지 지낸 사람이 청탁금지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으면서 어떻게 공무원이 아니라는 항변을 할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놀라울 뿐이다.

 

▷박 전 특검은 청탁금지법 말고도 대장동 사건과 관련해 여러 의혹에 연루돼 있다. 대장동 일당이 언급한 ‘50억 클럽’에 이름이 등장한다. 박 전 특검의 딸은 대장동 아파트를 분양받아 수억 원대의 차익을 남겼고, 대여금 명목으로 11억 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박 전 특검 인척이 운영하는 분양대행업체와 김만배의 수상한 거래도 있다.

▷우리나라의 특검은 미국의 특검을 본떠 만들어졌다. 미국에서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 때 특검의 워터게이트 사건 수사를 계기로 1978년 정부윤리법(Ethic in Government Act)이 제정됐다. 특검은 최고위직 공무원의 윤리 준수를 관철하기 위한 상징과도 같은 존재로 그 자신이 누구보다도 윤리적일 것이 요구된다. 특검 시절의 박 씨는 공무원이 아니었던 게 아니라 공무 의식이 없는 공무원이었을 뿐이다. 이제 보니 특검으로서의 공무 의식은 고사하고 공무 수행 사인의 윤리 의식에도 미치지 못한 듯하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04-21 “역사적 책임에는 끝이 없다”며 또 용서 구한 獨 대통령

 

19일 폴란드 바르샤바의 게토 영웅 기념비 앞.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이 폴란드 대통령, 이스라엘 대통령과 나란히 헌화한 뒤 머리를 숙였다. 이곳은 1943년 바르샤바의 유대인들이 나치의 강제수용소 이송에 저항하다 1만3000여 명이 사망한 것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1970년 당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무릎을 꿇고 나치의 만행에 사죄하면서 전 세계에 신선한 충격을 준 장소이기도 하다.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연설에서 “여러분 앞에 서서 용서를 구한다”고 사과했다. 이어 “독일인의 역사적 책임에는 끝이 없다”며 과거사를 계속 반성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앞서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는 이스라엘 러시아 폴란드 등 제2차 세계대전 피해국들을 방문해 “야만적인 범죄에 깊이 부끄럽다”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수차례 사죄했다. 1985년 “과거에 대해 눈을 감은 자는 현재도 보지 못한다”고 한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전 대통령 등 독일 정부의 사과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독일 내에서도 과거사는 그만 이야기하자는 여론이 적지 않다. 2020년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3%가 ‘이제 나치 시대와 단절해야 할 때’라고 했다. 극우세력이 늘면서 신(新)나치주의를 표방하는 정당도 생겨났다. 그럼에도 독일 정치의 주류인 기민당과 사민당의 지도자들은 과거사에 대해 한결같은 태도를 보여왔고, 이는 유럽 통합의 기틀이 됐다. 이제 나치의 최대 피해국 이스라엘도 “독일은 유럽의 도덕적 나침반”이라고 평가한다.

 

▷일본도 과거사에 대해 여러 차례 사과를 했다고 주장한다. 일본군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을 인정하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전한다”고 했던 1993년 고노 담화,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한다”고 밝혔던 1995년 무라야마 담화가 있다. 하지만 독일처럼 일본이 진정으로 반성했다고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과의 필수 요건인 일관성과 진정성이 없어서다.

▷2015년 위안부 합의 당시 아베 신조 총리는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언급하더니 한 달도 안 지나 “위안부를 강제연행한 증거가 없다”고 말을 바꿨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한일 정상회담에서 강제징용에 대해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계승한다”는 애매한 표현을 쓰더니 며칠 만에 과거사를 더 왜곡하는 초등학교 교과서를 내놨다. 메르켈 총리는 2015년 일본 방문 당시 “독일이 여러 나라와 화해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와 정면으로 마주했기 때문”이라고 일본에 일침을 놨다. 사과하는 시늉만 내면서 과거사 문제의 본질을 교묘하게 회피하는 행태는 일본의 국격만 떨어뜨릴 뿐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4-22(토) “도쿄 근처 전통가옥을 3천만 원에 샀어요”… 빈집 느는 日

 

“도쿄 주변 삼나무 전통가옥을 2만3000달러에 사서 살고 있는데 만족스럽다.” 일본인 부인과 몇 년 전 도쿄 북동쪽 이바라키현의 단독주택으로 이주한 호주 출신 40대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사연이 최근 뉴욕타임스에 소개됐다. 집주인 사망 후 지방자치단체가 보유하던 ‘아키야(空き家)’를 경매에서 낙찰받았다고 한다. 열차로 도쿄까지 45분 거리에 건평 250㎡, 대지 330㎡짜리 집을 불과 3000만 원에 샀다니 한국인들에게도 솔깃할 일이다.

▷버블경제의 거품이 걷히고,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버려진 빈집이 아키야다. 노무라증권에 따르면 2018년 850만 채였던 아키야는 2033년에는 2000만 채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집값이 싸다 보니 일본 이주를 원하는 외국인들의 관심이 높다. 최근에는 이들을 상대로 빈집을 수리해 판매하는 업체도 여럿 생겼다. 부동산 세수가 줄어 고민하는 일본의 지자체들로서도 반길 만한 일이다.

▷고령자 비율이 높은 지역에 더 많지만 수도인 도쿄에서도 주택의 10% 정도가 빈집으로 방치돼 있다. 낡은 집을 수리하는 데 큰돈이 들고, 상속세율까지 높아 고령 거주자 사망 후 물려받으려는 자손이 많지 않다. 빈집이 늘면 도시가 슬럼화하고, 범죄 위험도 커진다. 일본의 지자체 가운데 처음으로 교토가 2026년부터 빈집, 사용하지 않는 별장 등 1만5000여 채 소유주에게 ‘빈집세(稅)’를 물리기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도 ‘빈집 위험국’이다. 지방 도시에서 황폐화한 폐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문제는 집계 방식마저 통일이 안 돼 있다는 점이다. 5년마다 방문조사 때 당일 비어 있는 집을 집계한 통계청 조사에서 재작년 전국의 빈집은 139만 채로 전체 주택의 7.4%였다. 전기·상수도 사용 여부를 기준으로 하는 국토교통부의 작년 통계는 10만8000채로 이보다 훨씬 적다. 정부는 지난해에야 여러 부처에 흩어져 있는 빈집 관리 업무를 통합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빈집과 달리 도쿄, 교토 도심의 새집 값은 급등세다. 버블 붕괴 후 집을 사려는 이가 줄자 새 주택을 많이 짓지 않아서다. 달러화에 비해 엔화의 가치가 크게 떨어진 ‘킹 달러’ 현상 때문에 한국의 아파트와 비슷한 맨션에 투자하는 외국인이 늘어난 영향도 크다고 한다. 작년 일본 수도권에서 팔린 신축 맨션 중 8.4%는 가격이 1억 엔(약 9억8500만 원)을 넘어서 1980년대 중후반 버블 시기의 집값을 되찾았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에겐 비싸게 느껴지지 않는다. 서울의 아파트 중간가격은 올해 2월에야 겨우 10억 원 밑으로 떨어졌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4-24(월) ‘전 세계 온라인 방문자 1위’ 버즈피드의 뉴스 부문 폐업

 

 

미국 온라인 매체 버즈피드(Buzzfeed)의 뉴스 사이트에는 20일 마지막 올려진 기사들이 남아 있다. ‘당신이 오늘 아침 읽을 필요가 있는 뉴스 모음’에는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 ‘성난 사람들(BEEF)’에 출연 중인 한국계 미국 배우 데이비드 최가 ‘나는 성공한 성폭행범’이라고 말했다는 자극적인 뉴스 등이 떠 있다.

▷2006년 ‘∼하는 몇 가지 방법’ 식의 콘텐츠 재가공으로 출발한 버즈피드는 2011년부터 전통 언론사인 ‘폴리티코’ 출신 편집장을 영입하면서 뉴스 서비스도 시작해 사이트 방문자 기준으로 그 수가 뉴욕타임스(NYT)를 넘어서기도 했다. NYT는 2014년 가장 강력한 경쟁 상대로 버즈피드를 언급했다. 한때 전 세계 온라인 방문자 수 1위였던 버즈피드가 20일로 뉴스 부문을 폐지했다.

▷버즈피드는 시작이 엔터테인먼트 콘텐츠 매체로 그 사업은 계속 이어진다. 또 버즈피드가 2020년 인수한 인터넷 뉴스 매체 ‘허핑턴 포스트’를 통한 뉴스 제공은 계속된다. 그럼에도 한때 NYT 등 대다수 전통 언론사들이 인터넷 시대의 롤모델로 삼았던 버즈피드가 뉴스 부문을 접었다는 소식은 버즈피드 식의 뉴스 생산과 유통이 10여 년 만에 효력을 다했음을 의미한다.

 

▷버즈피드에는 대개 인터넷 뉴스 매체가 그렇듯이 제목에 끌려 클릭을 해보면 제목에 미치지 못하는 내용의 뉴스가 많다. 이런 ‘낚시성 제목’을 다는 이유는 뻔하다. 더 많은 조회 수를 통해 더 많은 광고를 유치하기 위함이다. 독자들은 처음에는 낚시를 당하지만 반복되면 결국 외면하고 만다. 버즈피드만이 아니라 복스(Vox), 인사이더(Insider), 바이스 월드 뉴스(VICE World News)도 위기에 처했다. 인터넷 뉴스의 한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

▷전통 언론사에는 한 분야에서 오랜 취재 경험을 가진 기자들과 공정성을 재정적 안정성과 함께 지속가능한 조건으로 여기는 경영진이 있다. 인터넷 뉴스 매체에도 몇몇 경험 많은 기자들이 옮겨가서 일할 수 있고 실제 그렇게 한다. 그러나 버즈피드의 실패가 보여주듯 그런 매체들은 단기적 수익을 극대화하는 경영 환경 속에서 태어났고 그런 환경을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계몽의 시대에 문을 연 것은 아카데미즘이지만 19∼20세기에 민주주의와 인권을 진전시킨 것은 저널리즘이다. 전통적 언론도 점점 더 온라인으로 뉴스를 전달하는 21세기에 저널리즘이 세상에 유익한 방식으로 계속 존재하느냐 마느냐는 독자들에게 달렸다. 어린 시절부터 인터넷에 노출된 젊은이들이 꼼수 뉴스와 편집으로부터 가치 있는 보도를 구별해 낼 수 있는 미디어 해독력을 갖도록 사회와 학교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4-25 무료체험이라더니 슬쩍 유료전환… ‘다크 패턴’의 덫

 

“경차 좋지요, 좋은데 데이트할 때는 좀….” “가족여행 다니려면 안전한 게 제일인데, 역시 큰 차가….” 자동차 딜러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다가 당초 예산보다 훨씬 비싸고, 옵션이 잔뜩 붙은 차를 사는 일이 적지 않다. ‘경차 사러 갔다가 벤츠 계약하고 왔다’는 농담이 나오는 이유다. 요즘은 온라인쇼핑몰,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의 마케팅 수법이 오프라인보다 더 교묘해졌다. 그중에도 소비자의 눈과 판단을 흐리는 사기적 상술을 ‘다크 패턴(dark pattern)’이라고 한다.

▷다크패턴은 쇼핑몰, 앱의 안내에 따라 클릭, 터치를 계속하다 보면 속아서 피해를 보거나, 비합리적 지출을 하게 만들어진 사용자인터페이스(UI)다. 영국의 UI 디자이너 해리 브링널이 원치 않는 행동을 하도록 소비자를 유도하는 온라인 마케팅 방식을 통칭해 2011년 다크 패턴이라고 이름 붙였다. 재작년 한국소비자원 조사에서는 국내 100개 전자상거래 모바일앱 가운데 97%에서 다크 패턴이 발견됐다.

▷원하는 상품을 다른 곳보다 훨씬 싸게 파는 온라인 쇼핑몰을 발견하면 소비자는 혹하게 마련이다. 문제는 마음을 정하고 결제 정보를 입력하는 단계가 돼서야 ‘배송료, 세금, 봉사료 별도’ ‘특정 신용카드로 결제하면 가격 할인’ 같은 중요한 정보가 나온다는 점이다. 그것도 화면 하단에 눈에 띄지 않는 작고 흐릿한 글씨로. ‘또 낚였다’는 생각이 나도 들인 손품이 아까워 그냥 결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공정거래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비슷한 경험을 한 온라인 소비자의 비율이 71.4%다.

 

▷‘1개월 무료 체험’ 같은 조건으로 유혹해 앱을 깔게 하고, 이 기간이 지나면 소비자에게 알리지 않고 유료로 전환해 자동 결제하게 만드는 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등 구독 서비스에 많은 수법이다. 통장 지출 내역을 꼼꼼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쓰지 않는 서비스 이용료가 매달 빠져나가는 것도 모르고 지나간다. 물건을 사거나 회원에 가입하는 절차는 간편한데, 구매를 취소하거나 탈퇴하는 방법은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미궁 같은 앱도 많다.

▷공정위는 현행법으로 제재할 수 없는 6가지 다크 패턴 유형을 규제하기 위해 전자상거래법을 고치기로 했다. 다크 패턴은 일상에 바쁜 소비자들이 온라인으로 상품, 앱을 구매할 때 세세한 데까지 신경 쓰는 걸 귀찮아하는 심리적 허점을 노린다. 속았는데 속은 줄도 모르는 ‘호갱 소비자’가 주요 타깃이다. 결제 버튼을 누르기 전에 한 번 더 따져보는 깐깐한 소비자가 많아지지 않으면 어둠 속에서 지갑을 노리는 다크 패턴을 뿌리 뽑을 수 없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4-26 2분에 1대꼴로 적발된 우회전 車, 단속만으로 될까

 

“보행자 없으면 그냥 우회전해도 되는 거 아닌가요?” “그건 작년 얘기고, 올해 또 바뀌었잖아요.” ‘적색 신호 시 우회전 일시 정지’ 계도기간이 끝나고 단속이 시작된 22일부터 전국 도로 곳곳에서는 이 같은 실랑이가 이어진다. 24일 오후 서울 은평구의 한 사거리에서는 40분가량 이어진 경찰의 집중단속에 차량 20대가 적발됐다. 2분에 1대꼴로 걸린 것이다. 단속에 걸린 차량 때문에 교통마비 현상을 빚기도 했다. 위반하면 승용차 기준 범칙금 6만 원과 벌점 15점이 부과된다.

▷올해 1월부터 개정된 도로교통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교차로에서 우회전하려는 운전자는 전방 차량 신호가 빨간불일 때 반드시 횡단보도 앞에서 일시 정지해야 한다. 이후 횡단보도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한 뒤 우회전해야 한다. 일시 정지는 차량 속도가 0이고, 바퀴가 완전히 지면에 멈춘 상태다. 몇 초를 머물러야 한다는 기준은 없고 경찰이 육안으로 판단한다. ‘잠깐이지만 멈췄다’ ‘아니, 바퀴가 굴렀다’는 다툼이 이어진다. 앞차가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출발했더라도 뒤따라가면 안 된다. 무조건 한 번은 멈춰야 단속을 피할 수 있다.

▷횡단보도 앞에서 일시 정지했다가 출발할 때, 우회전해서 다시 횡단보도를 만날 때에도 운전자들은 고민에 빠진다. 건너는 중이거나 건너려는 보행자가 있으면 멈추고 없으면 지나가도 된다는데, 건너려고 하는지는 어떻게 아느냐가 문제다. 횡단보도에 바짝 붙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은 건널 마음이 있는 걸까.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는 저 사람은 건너려는 건가, 아니면 택시를 잡으려는 건가. 독심술이 필요하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혼란을 키운 건 지난해 7월과 올해 1월 법이 연거푸 바뀌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엔 보행자 보호 의무를 강화한 도로교통법 개정안이 시행돼 10월부터 단속에 들어갔다. ‘보행자가 보이면 우회전을 멈추세요’라는 주문에 그나마 익숙해질 만하니 올해 들어 도로교통법 시행규칙이 바뀌었다. ‘전방 적색 신호엔 무조건 멈추라’는 새로운 주문이 추가됐다. 신호등과 보행자 상황에 따라 다양한 경우의 수를 따지다 보면 머리가 하얘진다는 운전자들이 많다. “헷갈리면 일단 멈춰라”가 그나마 답이다.

▷교차로 우회전 일시정지는 필요한 규제다. 전체 교통사고 보행 사상자 중 우회전 교통사고의 비율은 10.9%(2021년)로 높다. 그렇다곤 해도 이해하기도 지키기도 힘든 규정을 만들고, 단속으로 윽박지르는 것은 능사가 아니다. 운전자의 의무만 강조할 게 아니라 메시지를 단순화하는 방법도 고민해봐야 한다. 2분에 1명씩 법규 위반자가 나오는 상황이라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4-27 “막말은 이제 그만”… 폭스도, CNN도 간판 앵커 내쳤다

 

“대법원을 모욕하고 격하시키는 인사다. 미국을 르완다처럼 만들려는 것인가.” 폭스뉴스의 간판 앵커인 터커 칼슨이 지난해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여성 대법관 임명을 두고 내놓은 논평이다. 성 차별주의자, 인종주의자라는 비판에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첫 무슬림 여성 하원의원이 탄생했을 때는 “(민주당) 이민 정책이 국가에 위험이 된다는 증거”라고 했고, 불법 이민자들에 대해서는 “미국을 불결하게 오염시키는 이들”이라고 했다.

▷케이블 뉴스 채널의 후발주자였던 폭스뉴스의 시청률을 끌어올린 것은 보수층을 집중 공략하는 극단적 편향성이었다. 거친 입담의 앵커들이 선봉에 섰다. ‘터커 칼슨 투나이트’는 매일 평균 320만 명이 시청하는 간판 프로그램이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7년간 승승장구했던 그를 무너뜨린 것도 본인의 입이었다. 폭스뉴스는 24일 그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2020년 대선 결과가 조작됐다는 가짜뉴스를 퍼뜨렸다가 1조 원대 배상금을 물어주기로 합의한 지 6일 만이다.

▷같은 날 폭스뉴스와 정반대 진영인 CNN의 간판 앵커 돈 레몬도 해고 통보를 받았다. “여성은 잘해야 40대까지가 전성기”라는 최근 발언이 문제가 됐지만 그는 이전에도 남녀 스포츠 선수의 연봉 격차를 당연하게 해석하는 등 수차례 여성 비하 발언으로 구설에 오른 전력이 있다. 흑인 성소수자 앵커로 민주당 정부의 진보 정책을 노골적으로 옹호해 온 그는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는 순간 생방송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런 그의 프로그램을 거부하는 인사들이 늘면서 CNN은 출연자 섭외에 어려움을 겪어 왔다고 한다.

 

▷보수, 진보를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막말이 사회 분열을 부추기고, 이는 다시 미디어를 양극단으로 몰아가는 악순환이 되풀이돼 온 게 미국의 현실이다. 인종과 여성, 낙태, 총기 규제 등 양쪽 진영의 지지층을 각각 결집할 첨예한 사회 이슈들도 늘었다. 인종차별 항의 시위를 촉발한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에 레몬이 격분하는 사이 칼슨은 “플로이드는 경찰의 과잉 진압 때문에 사망한 게 아니다”는 허위 주장을 버젓이 반복했다. 트럼프 열성 지지자들의 난입으로 의회가 쑥대밭이 돼 있을 때는 “온순하고 정돈된 의회 관광객들”이라고 옹호했다.

▷‘폭스 효과(Fox effect)’란 표현은 매체의 편향성이 언론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뜻하는 부정적 표현이다. 자극적 주장에는 가짜뉴스나 음모론이 따라붙는다. 막말이 판치는 환경은 팩트를 지루하고 유약한 것으로 왜곡시켜 버리기 십상이다. 정치권 인사부터 1인 미디어 유튜버까지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은 이들이 국내에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 대가를 결국 어떻게 치르게 되는지를 추락한 간판 앵커들이 보여주고 있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4-28 “서울 강남 성형외과 절반은 전문의 없는 의원”

 

한국은 인구 대비 성형 건수가 가장 많은 나라다. 성인 남녀 10명 중 1명, 30대 여성은 10명 중 3명이 성형수술 유경험자다. 눈 코 입을 포함한 15개 신체 부위에 134개 시술이 이뤄지고 있다. 부위별 시술법과 보형물의 종류에 따라 세분하면 시술 방법은 940가지가 넘는다. 그런데 자기 몸을 맡기면서 의사가 성형외과 전문의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최근 성형수술 부작용으로 의사를 고소한 최모 씨(44)도 그런 사례다.

▷최 씨는 올해 초 서울 강남 A병원에서 성형수술을 받은 후 안면마비 증세가 나타났다. 원래 코 수술을 하러 갔는데 눈과 팔자주름 수술까지 같이 하면 효과가 좋다는 말에 그리했다가 부작용이 생겼다. 알고 보니 성형외과 전문의가 아니었다. 병원 내부에 ‘○○○ 성형외과’로 돼 있어 전문의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의료법에 따라 병·의원 외부 간판은 성형외과 전문의가 있으면 ‘홍길동 성형외과 의원’, 없으면 ‘홍길동의원 진료과목 성형외과’로 표시해야 한다. 그런데 병원 내부 표기에 대해선 따로 규정이 없다.

▷성형외과 전문의가 있는 의원은 약 1100곳, 없는 의원은 이보다 훨씬 많다. 우선 산부인과 비뇨기과 등 다른 분야 전문의를 따고도 전공과목 간판을 포기하고 일반의처럼 ‘홍길동의원’으로 피부과나 성형외과 등 다른 과 진료를 보는 의원이 6000곳이다. 이 중 절반만 잡아도 성형외과 전문의 없는 의원이 3000곳이 된다. 여기에 일반의 신분으로 성형외과 진료를 하는 의원들까지 더하면 숫자는 더 늘어난다. 의료계에선 서울 강남 성형외과 중 절반은 전문의 없는 의원으로 본다.

 

▷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 따르면 성형외과는 25개 진료과목 중 분쟁조정 신청이 5번째로 많다. 흉터, 염증, 신경 손상, 비대칭 등을 호소하는 내용들이다. 성형외과 전문의들은 전문의가 아닌 경우 부작용 가능성이 크다고 하지만 정확한 통계는 없다. 1년에 70명 남짓 배출되는 성형외과 전문의라야 얼굴 구조와 해부학에 익숙해 믿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고, 꼭 성형외과 전문의가 아니어도 손기술이 좋은 의사가 많다는 반론도 있다.

▷국내 의사 10명 중 8명은 전문의이다. 그런데 요즘 젊은 의사들은 4, 5년 고생해서 전문의 자격을 따는 대신 미용 성형 분야에 일찌감치 뛰어드는 경우가 많다. 올해 전문의 합격자는 2807명으로 10년 전보다 500명이나 줄었다. 성형외과 전문의 아닌 성형하는 의사를 만날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의원 외부 간판만 잘 봐도 전문의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다. 명찰로 확인해도 된다. 의료법에 따라 의사는 명찰을 달아야 하는데 ‘성형외과 의사 홍길동’은 성형외과 전문의만 달 수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4-29(토) 가톨릭, 여성에 첫 투표권… 2000년 만에 깨진 유리천장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달 재위 10주년을 맞았다. 10년 전 제266대 교황을 뽑기 위한 콘클라베(추기경단 선거회의)가 진행되던 중 성 베드로 광장에는 난데없이 분홍색 연기가 치솟았다. 원래 교황 선출에 실패하면 검은 연기, 성공하면 흰 연기를 굴뚝으로 내보낸다. 이것을 본떠 분홍색 연기를 피운 것은 여성 사제 임명 등을 요구하는 가톨릭 여성단체 회원들이었다. 여성의 상징 색깔을 활용해 곧 선출될 교황에게 가톨릭 내 여성 지위를 향상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시위였다.

▷로마 교황청은 26일(현지 시간) 프란치스코 교황의 승인을 얻어 깜짝 놀랄 만한 발표를 했다. 10월 열리는 시노드(주교회의)에서 여성과 평신도에게 최초로 투표권을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300여 명이 참여하는 시노드에서 수도회 대표 10명 중 5명을 수녀 몫으로 할당했다. 또 주교는 아니지만 투표권을 갖는 위원 70명 중 절반(35명)을 여성으로 채우기로 했다. 전체의 10% 이상이 여성인 셈이다. 가톨릭 여성단체들은 “2000년 교회사의 역사적 순간” “스테인드글라스 천장에 균열이 생겼다”는 표현으로 환영의 뜻을 표했다.

▷시노드는 ‘함께 모이다’라는 그리스어로 1965년 가톨릭 개혁을 이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2년 동안 전 세계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교회에 바라는 바를 모은다. 이 내용 가운데 시노드에서 토론과 투표로 최종안을 정해 교황에게 제출한다. 자문기구여서 교황이 수용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신자들의 여론을 보여주는 바로미터가 된다. 이번 시노드를 위한 대륙별 준비 회의에선 교회 내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았다고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동안 가톨릭 내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조치를 부단히 취해 왔다. 지난해 7월 전 세계 주교 선출을 심사하는 교황청 주교부 위원에 여성 3명을 포함시켰다. 이때도 “교황이 바티칸의 ‘올드 보이 네트워크’를 깨고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또 2021년에는 가톨릭 평신도라도 성별과 관계없이 교황청 행정조직을 이끄는 수장(장관)이 될 수 있다는 교회 헌법을 발표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6년 사제를 보좌하는 부제(副祭)를 여성에게 허용할지를 연구하는 위원회도 만들었다. 만약 부제가 허용된다면 여성이 교회 내에서 할 수 없는 것은 ‘사제’밖에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사제만큼은 여성에게 허용할 수 없다는 교리를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가톨릭 내 분위기를 보면 장담할 수는 없다. 교황청 내 추기경위원회의 장클로드 올러리슈 추기경은 지난달 “미래의 교황이 (사제를) 여성에게 허용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여성 사제라는 마지막 유리천장이 깨진다면 언젠가 여성 교황 목소리가 불거질지도 모른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