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조선일보) 2023-03/
03.01(수) ‘일본 여행 붐’ 유탄 맞은 제주

▲일본·동남아 등 근거리 국가를 중심으로 해외여행 수요가 증가하는 가운데 23일 오전 인천공항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승객들이 탑승수속을 하기 위해 줄 서 기다리고 있다. /뉴스1
1942년 문을 연 제주공항은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여객공항 중 하나다. 1시간당 항공기가 활주로를 뜨고 내리는 횟수인 슬롯(SLOT)이 35회에 달한다. 1분43초마다 한 대씩 이착륙하고 있다는 뜻이다. 고밀도 슬롯 운영 덕에 지난해 제주공항 이용객이 3000만명에 달했다. 코로나 사태 이전인 2019년보다 100만명 이상 많은 것이다. 제2 제주공항 건설론이 힘을 받을 만했다.
▶지난해 10월 일본이 외국인 관광객 입국을 허용하면서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연필과 볼펜, 쌀과 밀가루 등 서로 대신할 수 있는 상품을 대체재(代替財)라고 하는데, 관광 수요 면에서 제주와 일본은 대체재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제주행 관광객이 11월 -4%, 12월 -7%, 올 1월 -10% 등 매달 격감 추세인 반면 1월 중 일본을 찾은 국내 관광객은 57만명에 달했다. 방일 외국인 중 38%가 한국인이었다. ‘대한민국 도쿄시’라는 말도 나왔다. 역대급 엔저(円低)도 일본 여행 붐을 뒷받침하는 요소다.

▶그러자 저비용 항공사(LCC)들이 제주행 항공편을 일본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시장 선점을 위해 일본 중소도시 직항편을 늘리고, 왕복 9만9000원짜리 티켓을 앞세워 마케팅에 나섰다. 반면 1월 중 제주행 항공편 좌석은 1년 전에 비해 30만개나 줄었다. 좌석이 귀해지자 항공료가 급등했다. 주말 제주 편도 항공료가 15만~19만원 선까지 뛰었다. 코로나 절정기 때 커피값 티켓(편도 4000원)까지 등장했던 걸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제주 서귀포시가 지역구인 국회의원이 “제주행 항공료가 너무 뛰었다”며 정부에 대책을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제주 관광 산업도 먹구름이다. 제주신라 호텔 1박 숙박료가 70만~80만원에서 40만원대로 떨어지고, 숙박료를 10만원대로 내린 특급 호텔도 등장했다. 바가지 가격으로 원성이 높았던 렌터카 가격도 연일 폭락세다. 1년 전 하루 18만원이던 중형차 대여료가 11만원대로 떨어지고, 하루 3만원대 렌터카도 등장하고 있다.
▶반면 해외여행 열기는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베트남 다낭 경우 한국 여객기가 하루 90편씩 뜨고 내려 ‘경기도 다낭시’로 불릴 정도다. 3·1절에 목·금 휴가를 붙여 닷새 연휴를 일본에서 보내겠다는 관광객 때문에 일본행 항공편이 일찌감치 동났다. 2019년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금지로 전국을 뜨겁게 달궜던 일본 불매 운동은 어디 갔나 싶다. 여행 커뮤니티에선 “역사와 사생활은 별개” “그래도 3·1절인데..”라는 약간의 공방이 있다고 한다.
03.02 제자리 찾은 출생 성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새 학년만 되면 초등학교 교사들은 남녀 짝 정하는 문제로 골치를 섞였다. 교실마다 예외 없이 남학생이 더 많았다. 여자 짝이 없는 아이는 시무룩해졌다. “내 아들은 왜 여자 짝이 없느냐”고 항의 전화 하는 부모도 있었다. 오랜 남아 선호 사상의 후유증이었다. 딸만 있는 집에선 ‘여아는 그만 낳겠다’며 이름을 말희로 지었다. ‘다음엔 아들 낳겠다’며 후남이라 짓기도 했다.

▶자연 상태에선 원래 남아가 더 많이 태어난다. 여아 100명당 남아 103~107명이 정상 범위다. 남아를 만드는 Y 염색체 정자가 여아를 만드는 X염색체 정자보다 가볍고 빨라 수정에 유리하다고 한다. 남자가 더 활동적이고 자라면서 위험에도 더 많이 노출되니 나름 타당한 자연의 섭리이기도 하다. 그렇게 태어나도 차츰 성비 격차가 좁혀지다가 노년에 이르면 역전된다.
▶아시아는 유럽이나 아프리카보다 남아 선호가 유별나다. 그로 인해 여러 사회적 문제도 빚어졌다. 1979년부터 2016년까지 강력한 한 자녀 정책을 고수했던 중국은 1980년대 이후 출생한 남자 3000만명이 짝을 찾지 못한다고 한다. 외동아들로 태어나 응석받이로 자란 소황제(小皇帝), 둘째로 태어나 출생신고도 못 한 흑해자(黑孩子) 등 온갖 부작용이 속출했다. 탈레반이 재집권한 아프가니스탄에선 지금도 여성에 대한 명예살인, 학교 교육 금지 같은 인권유린이 자행되고 있다.
▶1990년 여성 100명당 남성 116.5명으로 정점을 찍었던 우리나라 출생 성비가 지난해 104.7명까지 낮아졌다. 출생 성비가 꾸준히 내려가다 마침내 2007년 106명대에 진입하며 정상 성비 범위에 들어갔다. 남아 선호가 빠르게 퇴조한 결과다. 주로 아들 낳을 욕심으로 가졌던 셋째의 성비 변화는 더 극적이다. 1993년 209.7명이나 되던 것이 1995년 200명 밑으로 내려왔고, 2014년 106명대에 진입했다. 사실상 남아 선호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이제는 성 감별 임신도 허용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둘째, 셋째를 낳겠다는 부부에게 이왕이면 아들과 딸 골고루 키우는 기쁨을 주자는 취지다. 아이를 더 낳게 함으로써 심각한 저출산 문제를 개선하자는 뜻도 있다. 출생 성비가 정상인 나라에서 할 수 있는 정책인데, 딸이 아들 못지않게 소중해진 우리도 이제 그런 나라가 됐다. 의학적으로도 뒷받침이 가능하다. 청춘남녀가 결혼만 해도 감지덕지할 판이다. 2세까지 낳으면 함께 기뻐하고 육아에 불편이 없도록 제도적 지원에도 나서야 한다.
03.03 귀 홀린 첫 경험… ‘성악을 타락시킨 죄’가 준 감동
세계 3대 테너로 꼽히는 플라시도 도밍고가 1981년 미국 팝 가수 존 덴버와 함께 ‘퍼햅스 러브’를 발표하자 많은 사람이 “팝송을 테너 목소리로 듣는 것은 처음”이라며 반색했다. 내로라하는 성악가들이 즐겨 부르는 명곡 ‘카루소’도 이탈리아 재즈 음악가 루치오 달라가 곡을 만들어 또 다른 3대 테너였던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찾아가 “함께 부르자”고 제안해 세상에 나왔다. 성악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이후 크게 일었다.
▶세계 음악의 최전선에서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경계는 갈수록 모호해지는 추세다. 유럽 축구 UEFA 챔피언스 리그는 헨델의 대관식 찬가 ‘제사장 사독(Zadok The Priest)’을 공식 응원곡으로 편곡해서 쓴다.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가 2009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맨유와 FC바로셀로나 결승전 때 관중 앞에서 불러 더욱 유명해졌다. 보첼리와 세라 브라이트먼이 함께 부른 ‘타임 투 세이 굿바이’도 클래식과 팝의 경계를 넘나드는 명곡으로 꼽힌다.

▶한국에선 서울대 음대 교수였던 테너 박인수와 가수 이동원이 함께 부른 ‘향수’가 성악과 다른 장르를 결합하는 ‘크로스 오버’ 물꼬를 텄다. 조선일보가 10여 년 전 ‘현대시 100년 애송시 100편’을 연재했을 때 ‘향수’가 가장 큰 호응을 얻은 것도 노래로 먼저 애송된 힘이 컸다. 성악가 김동규가 노르웨이 혼성 듀엣 ‘시크릿 가든’의 연주곡을 편곡해 부른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도 성악 대중화의 성공 사례다.
▶박인수 교수는 ‘향수’를 불렀다가 ‘성악을 타락시킨 죄’로 국립오페라단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도밍고와 파바로티도 처음엔 “대중 가수와 노래하느냐”며 동료에게 손가락질당했다. 17세기 바로크 음악도 비슷한 곤욕을 치렀다. 지금은 특유의 역동성과 화려함으로 클래식 저변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지만, 태동기엔 대중에 영합해 르네상스 음악의 조화를 깬 싸구려 취급을 당했다. 바로크라는 용어 자체가 ‘찌그러진 진주’라는 뜻의 포르투갈어에서 비롯된 이름이었다.
▶'국민 테너’로 오래 사랑받았던 박인수 교수가 1일 영면에 들었다. 박 교수가 떠난 자리엔 그가 생전에 뿌린 성악 대중화의 씨앗이 싹터 열매를 맺고 있다. 팝페라 붐이 인 것도, ‘찾아가는 음악회’ 등으로 오케스트라가 대중 앞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도 테너 박인수가 대중 사이에 뛰어들어 용기 있게 앞서간 이후다. 최근에는 성악가 김호중·길병민 등이 트로트와 성악을 접목해 대중 앞에 섰다. 덕분에 우리 음악이 더욱 풍성해졌다.
03.04(토) 미국이 ‘노조 대통령’ 부패 고리 끊은 방법
영화 ‘대부’에서 마피아 보스였던 알 파치노는 넷플릭스 영화 ‘아이리시 맨’에선 마피아와 결탁해 미국 노동계를 주무른 노조위원장 역을 맡았다. 1950년대 미국에서 ‘노동계 대통령’ 소리를 들었던 화물 트럭 노조 위원장 지미 호파(1913~1975)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조직 확장을 위해 마피아와 손잡고 전국에 유령 지부를 만들고, 기업인이 걸림돌이 되면 살인, 방화를 서슴지 않았다. 케네디 정부에 잡혀 감옥에 갔다 재기를 노리는 과정에서 행방불명된다. 노조 새 권력자가 복귀를 막기 위해 암살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거대 노조의 부패상에 놀란 미국 정부는 1959년 노조 회계 공개 등을 의무화한 ‘랜드럼-그리핀법’을 만들었다. 노조도 회계 감사를 받고 회계 보고서를 매년 노동부 장관에게 내도록 했다. 보고서에는 노조의 자산, 부채, 1만달러 이상을 지급한 임원 연봉 내역, 250달러 이상의 조합원 대부금 내용 등을 모두 공개하도록 했다. 이후 미국 거대 노조는 마피아와 연결된 고리가 끊기고, 세 확장에 제동이 걸렸다.
▶회계장부 제출도 거부하는 민주노총은 1997년 출범 직후부터 재정 비리로 얼룩졌다. 1980년대 현대중공업 노조위원장을 지낸 권용묵씨 등이 작성한 ‘민주노총 충격 보고서’에 따르면, 창립 1년 만에 대형 횡령 사고가 터진다. 민노총 재정위원회 간부들이 쟁의 용품 판매 등으로 모은 돈 5억여 원을 빼돌려 주식 투자 등으로 유용한 것이다. 당시 민노총 지도부는 일부 손해를 변상하는 선에서 쉬쉬했다.
▶채용 알선은 부패 노조의 ‘돈줄’ 중 하나다. 2005년 기아차 노조는 생산직 근로자 120명 채용을 알선하면서 뒷돈 24억원을 받아 챙긴 사실이 드러나 관련자 19명이 구속됐다. 당시 민주노총은 “자정”을 다짐했다. 하지만 그 사건으로 해고됐던 기아차 전 노조 간부가 2018년 취업 알선 명목으로 100여 명에게 37억원을 받아 챙겨 또 구속됐다. 그런데도 기아차 노조는 ‘고용 세습’ 조항 삭제를 거부하고 있다. 10년 만에 생산직을 뽑는 현대차에선 노조의 채용 알선 소문이 들끓자 노조가 ‘채용 청탁 사절’ 보도 자료를 내기에 이르렀다.
▶광주지검 재직 시절 기아차 채용 비리 사건을 수사한 윤석열 대통령은 “공직 부패, 기업 부패와 함께 노조 부패도 척결해야 할 3대 부패 중 하나”라고 말한다. 약자들이 모여 약자를 대변한다는 노조는 다른 조직보다 훨씬 더 투명해야 한다. 그런데 훨씬 더 부패했다. 회계 투명화로 부패 고리를 끊어야 한다.
03.06(월) 점점 뚱뚱해지는 지구인

/일러스트=박상훈
중국 시안 근교 화칭츠(華淸池)에 있는 양귀비 석상은 양귀비를 풍만한 미인으로 묘사했다. 양귀비에 쓰인 표현은 자질풍염(資質豊艷)이었다. 풍만하고 농염하다는 뜻이다. 중국 학자들 고증에 따르면 양귀비는 키 158㎝, 몸무게 75㎏ 정도였다고 한다. 몸무게를 키의 제곱 값(㎡)으로 나눈 체질량지수(BMI)를 계산하면 30.04로 지금 기준으로는 비만이다. 오스트리아 다뉴브 강가에서 나온 구석기 시대 여인상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도 풍만한 가슴, 굵은 허리와 엉덩이를 강조했다.
▶요즘은 살이 찐 것에 대해 부정적 인식이 더 큰 편이다. 대한비만학회가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조사한 결과, 58%는 과체중이거나 비만인 사람은 ‘게을러 보인다’, 56%는 ‘의지력과 자제력이 부족해 보인다’고 답했다. 도올 김용옥이 유튜브에서 “배꼽이 젖꼭지보다 앞으로 나온 놈은 내 문하에 들어올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이런 인식을 보여주는 것 같다.
▶ 비만이면 건강에 빨간불이 켜지는 것이 사실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비만을 ‘21세기 신종 감염병’으로 규정했다. 비만이면 혈압이 오를 뿐 아니라 심근경색·당뇨·암 등 발생 가능성을 높이고 소아 비만의 경우 아이들 성장 속도를 늦추고 성조숙증 등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BMI가 25 이상이면 과체중, 30 이상이면 비만으로 간주한다. 물론 나이에 따라 적정 체중은 다르고 말랐다고 다 좋은 건 아니다. BMI가 23 정도일 때 사망 위험이 가장 낮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우리 중·고교생 비만율이 최근 10년 새 2.4배 증가했다고 한다. 중·고교생 비만율이 2011년 5.6%에서 2021년 13.5%로 뛰었다는 것이다. 성인 남성의 비만율도 같은 시기 35.1%에서 46.3%로 증가했다. 우리만 비만 인구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세계비만연맹은 2일 보고서에서 2020년 기준으로 세계 인구의 38%였던 과체중 또는 비만 인구 비율이 2035년에는 51%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놀라운 수치다.
▶보고서는 특히 어린이·청소년과 저소득 국가에서 비만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과체중·비만 인구가 절반 이상이면 기준을 바꿔야 하는 것 아니냐는 자조 섞인 말이 나올 정도다. 이스라엘 바이츠만 과학연구소는 인류 전체의 몸무게를 3억9000만t으로 추정했다. 지금처럼 인류 체중이 늘어나면 지구가 감당할 수 있을까. 신종 코로나 못지않은 글로벌한 대응이 필요할 것 같다.
03.07 이번엔 ‘반도체 깡패’ 되려는 미국
1차 대전 때 미국의 군사력은 별 볼일 없었다. 2차 대전부터 미국의 거대한 생산력이 폭발한다. 트럭 200만대, 항공기 30만대, 탱크 8만6000대, 선박 6만5000척, 대포 19만문을 생산했다. 포드 자동차 공장에선 한 달에 400대가 넘는 B-24 폭격기를 만들고, 캘리포니아 조선소에선 수송선을 나흘마다 한 척씩 찍어냈다. 스탈린은 미국을 ‘기계의 나라’라고 불렀다.
▶승전 후 미국은 생산력 최강국의 지위를 이용해 금융 최강국으로 올라섰다. 그 과정은 실로 폭력적이었다. 브레턴우즈로 44국 대표를 불러 모은 뒤, 영국 파운드화를 밀어내고 달러를 세계 기축통화로 만들었다. 미 재무부의 일개 차관보가 대경제학자인 영국 대표 케인스의 제안을 모조리 무시한 채 ‘금 1온스=35달러’ 교환 비율을 정했다. 케인스는 “미국이 대영 제국의 눈을 빼려 한다”면서 치를 떨다 실신했다.

▶1971년 미국은 만성적 무역 적자와 베트남 전쟁 비용 탓에 더 이상 달러를 금으로 바꿔줄 수 없었다. 달러 기축통화가 흔들리게 된 위기도 ‘폭력적’으로 해결했다. 중동의 원유 거래엔 오직 달러만 쓰도록 강제해 달러 패권을 지켰다. 이후 미국은 달러를 마음대로 찍어내 전 세계 물건을 소비하고, 중국·일본 같은 흑자국들은 미 국채를 사들여 미국의 국가 부도를 막아주는 “터무니없는 특권”(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스 대통령) 구도가 굳어졌다.
▶너그러운 이미지의 미국이지만 패권이 흔들리면 명분과 합리 다 집어던지고 칼을 휘두른다. 1980년대 일본의 도전이 거세지자 엔화 가치를 강제로 끌어올리는 ‘플라자 합의’(1985), 일본 반도체 산업을 죽이는 ‘미·일 반도체 협정’(1986년)을 동원해 일본을 주저앉혔다. 일본 반도체의 미국 시장 점유율을 절반으로 줄이도록 강제하는 ‘미·일 반도체 협정’은 반도체 생산 기지를 일본에서 한국, 대만으로 이동시켰다. 1990년대 한국 자동차의 대미 수출이 급증하자 미국은 ‘수퍼 301조’를 동원해 미국 차에 불리한 한국 자동차 세제를 고치게 했다.
▶한때 세계 GDP의 40%를 차지했던 미국이 중국 부상 탓에 GDP 비율이 절반 정도로 떨어졌다. 그러자 미국은 중국을 배제한 반도체 공급망과 핵심 광물 파트너십 등을 추진하고 있다. 무한정 찍어내는 달러를 이용해 막대한 보조금 투척도 불사한다. 그런데 그 보조금을 받으려면 미국에 기업 비밀까지 내놓으라고 한다. 동시에 중국에 반도체 수출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한다. 이번엔 ‘반도체 깡패’를 자처하는 미국이다.
03.08 AI 보이스 피싱
일본에서 ‘로봇의 아버지’라고 하는 모리 마사히로는 1970년 로봇에 대한 사람의 호감도를 실험했다. 로봇 외형과 행동을 사람과 비슷하게 만들수록 호감도가 높아지는데, 어느 정도가 지나면 강한 거부감으로 바뀐다. 이 거부감은 로봇이 사람과 완전히 구별할 수 없으면 다시 호감으로 바뀐다. 이 그래프 모양에서 ‘불쾌한 골짜기’ 이론이 나왔다. 애니메이션이나 기계음에서도 같은 거부감이 나타난다. 사람을 어설프게 닮은 존재에서 느끼는 괴리감과 어색함이 불쾌한 골짜기의 원인이다.
▶캐나다에서 잇따라 신종 보이스 피싱 사건이 발생했다. 유치장에 갇혀 있다며 다급하게 송금을 요구하는 아들과 손자의 전화에 거액을 보냈지만 사기였다. 완벽한 아들과 손자 목소리의 정체는 인공지능(AI)으로 만들어낸 기계음이었다. 글로 쓴 문장을 사람 목소리로 들려주는 기술은 수십 년 전부터 있었지만 발음과 억양이 완벽하지 않았다. 하지만 AI를 결합하자 불쾌한 골짜기를 훌쩍 뛰어넘은 것은 물론 가족까지 속이는 수준이 됐다.

/일러스트=박상훈
▶AI 목소리를 만드는 기술을 ‘오디오 딥페이크(deepfake)’라고 한다. 이미 있는 데이터로 AI를 훈련하는 딥러닝(심층 학습) 기술로 합성한 가짜 소리라는 뜻이다. 2년 전만 해도 한 사람의 AI 목소리를 만드는 데 두 시간 이상짜리 음성 파일과 며칠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는 그 사람 음성 몇 문장만 있으면 몇 초 만에 만들 수 있다. 소셜미디어에 있는 짧은 동영상이나 음성 메시지로도 가능하다. 비밀번호 없이도 모든 것을 빼앗길 수 있는 시대가 됐다.
▶딥페이크는 이미지와 동영상도 감쪽같이 만든다. 연예인 얼굴에 다른 사람 알몸을 합성하거나 다른 사람의 문제 발언을 유명 정치인이 한 것처럼 조작한 사건도 있었다. 챗GPT를 만든 오픈AI의 이미지 생성 AI ‘달리2′는 합성을 넘어 세상에 없는 이미지를 만든다. 미국에서는 AI가 곧 포르노 시장을 장악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장 완벽한 배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딥페이크는 광고에 20대 신인 배우 윤여정을, 드라마 카지노에 30대의 최민식을 등장시켰다. 전원일기의 고(故) 박윤배 배우를 동영상으로 부활시키기도 했다. 오디오 딥페이크도 직접 녹음하는 수고 없이 수많은 음성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유용한 수단이다. 하지만 AI에 사람들이 놀라고 신기해하는 사이 누군가는 AI를 악용하기 시작했다. 통제받지 않는 첨단 기술만큼 위협적인 것은 세상에 없다. AI도 마찬가지다.
박건형 논설위원
03.09 미혼여성 절반 “아이는 안 낳아” 그 이유
국내에서 34년 만에 태어난 다섯 쌍둥이의 부모 김진수·서혜정 육군 대위 부부는 지난 1년여 동안 그야말로 ‘육아 전투’를 치렀다. 부부가 동시에 육아 휴직을 하고 다섯 아기를 돌봤다. 밤 되면 불침번 서듯 번갈아가며 일어나 아기들을 돌봤다고 한다. 둘 다 육아 휴직 마치고 군에 복귀했는데 오전 6시부터 시작되는 출근 및 어린이집 등원 준비에만 꼬박 2시간이 걸린다. 아내와 공동 육아를 하는 김 대위는 “육아에는 강인한 정신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정말 ‘전투’다.
▶김 대위 같은 신세대 남성과 구세대 남성의 가장 큰 차이가 자녀 출산 및 양육에 대한 태도일 것이다. 둘째 아이를 임신한 한 개그맨 부부의 아내가 “산부인과 가면 다른 사람들은 부부가 함께 오는데 나는 늘 혼자다. 내가 다니는 산부인과 이름은 아느냐”고 물었다. 개그맨 남편이 “그걸 아는 사람이 어딨냐”고 대꾸하자 다른 출연자들이 야유를 보냈다. 10여 년 전만 해도 그런 남편이 허다했다. “아내가 출산 예정이라 병원에 가보겠다”고 하면 “여자가 애 낳지, 네가 애 낳느냐”고 타박 주면서 눌러앉히는 직장 상사도 부지기수였다.

▶청년 1만5000명에게 설문 조사를 했더니 여성 절반가량이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했다. 남성 79.8%, 여성 69.7%가 결혼 계획은 있다고 했는데 출산에 대해서는 남성 70.5%, 여성은 55.3%만 의향이 있다고 했다. 출산 및 육아가 여성들에게 큰 부담이기 때문일 것이다. 육아 책 ‘엄마이지만 나로 살기로 했습니다’의 저자 김화영씨는 “’독박 육아’가 사흘 이상 지속되면 욕이 절로 나온다”고 했다. 새벽부터 아이들 잠드는 밤까지 꼬박 14시간 넘게 육아에 지쳤는데 남편은 집에 안 오고 ‘회식 중’ 문자를 보내면 화가 솟구친다는 것이다.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받고 자라난 여성들이 가장 크게 좌절하는 것이 출산 및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이다. 여성의 육아 부담을 줄이고, 출산 후에도 불이익 받지 않고 복귀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야 출산율도 높아질 것이다. 모범 사례로 꼽히는 스웨덴의 경우, ‘육아휴직 남성 할당제’로 효과를 거뒀다. 총 480일의 육아휴직일 가운데 최소 90일은 무조건 남성이 사용해야만 한다.
▶우리나라도 육아 휴직자 4명 가운데 1명이 남성일 정도로 아빠 육아가 늘고 있다.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주로 대기업 직원들이다. 중소·영세기업에 다니는 아빠들한테는 ‘그림의 떡’인 제도다. 스웨덴처럼 남성 육아 휴직을 의무화해서라도 육아 문화를 바꿔나가야 한다.
03.10 태영호의 도전
로마 5현제 중 한 명인 트라야누스는 로마 본토가 아닌 히스파니아(스페인) 출신이다. 히스파니아는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로마를 유린했던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본거지였다. 적지에서 태어난 그가 속주 출신으론 처음 황제에 오른 것이다. 그는 다키아·파르티아 원정을 통해 로마의 영토를 최대로 늘렸다. 어느 황제보다 로마적 문화와 전통을 지키고 선정을 베풀어 ‘지고(至高)의 황제’란 칭호를 얻었다. 그 후 변방 속주 출신 황제가 연이어 등장했다.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는 동독 출신이다. 폴란드인인 할아버지는 동독 공산당원이었다. 하지만 메르켈은 물리학자로 정치와 거리를 뒀다. 공산당 가입과 국가보안부(슈타지)의 협력 요구도 거절했다. 통독 때 기민당에 들어가 헬무트 콜 내각에 발탁됐다. 동독 교육을 받았지만 실용주의 노선과 청렴성으로 16년간 총리 4연임을 했다.
▶리시 수낙 영국 총리는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계 이민 2세다. 첫 유색인종, 힌두교 신자 총리로 인도가 식민지 된 지 200년 만에 거꾸로 영국을 통치하게 된 것이다. 그는 “영국을 통합하고 영국을 위해 밤낮으로 뛰겠다”고 했다.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는 아버지가 케냐인이다. 태어난 곳도 미 본토가 아닌 하와이였다. 이름과 출신 때문에 무슬림이란 편견에 시달렸다. 하지만 미국적 가치를 굳게 신봉했다.

▲8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국민의힘 제3차 전당대회에서 태영호 최고위원이 당선 인사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태영호 의원이 국민의힘 최고위원에 당선됐다. 탈북자 출신이 정당 지도부가 된 것은 처음이다. 이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지지율은 미미했고 조직도 없었다. 모두 말렸다. 하지만 “이 사회에 기댈 데 없는 북한 출신에게도 한 표를 달라”고 열정적으로 호소했다. 청년 표심을 얻기 위해 최신 가요와 랩을 부르고 춤도 췄다. 제주 4·3 희생자에게 참배하며 “김일성이 배후”라고 했다가 지역 반발도 샀다. 하지만 연설회와 토론이 이어질수록 지지율은 올라갔고 결국 대역전극을 연출했다.
▶그는 북 출신으론 드물게 정치 감각과 쇼맨십이 있다. 말솜씨나 노래 실력도 좋다. 지난 대선 때 동료 의원들과 유세차 미국을 갔는데 교민들에게 스타로 떴다. 그와 사진 찍고 한 테이블에 앉기 위해 줄을 섰다고 한다. 태 의원은 탈모 시술을 통해 외모도 바꿨다. “남쪽에 온 후 가장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그는 “탈북자가 정치 지도자까지 될 수 있다는 것을 북 주민과 탈북민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자유민주주의를 전파하고 싶다”고도 했다. 그의 꿈은 국민 모두의 꿈일 것이다.
03.11(토) 한강과 템스강… ‘서울링’ vs ‘런던 아이’

▲클로드 모네가 런던 사보이 호텔에 묵으며 1903년 그린 템즈강 워털루 브리지 그림.
프랑스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1840~1926)는 런던 템스 강변 사보이 호텔에 묵으면서 워털루 다리 그림을 41점이나 남겼다. 호텔 발코니에서 워털루 다리가 그때그때 연출해내는 빛의 변화를 민감하게 포착했다. 1889년 문을 연 사보이 호텔은 세계 처음으로 전등과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던 호텔이다. 템스강이 보이는 객실을 38개 갖고 있다.
▶호텔 앞쪽으론 크루즈선(船) 운항사 ‘우즈실버플리트(Wood’s silver fleet)’가 있다. 홈페이지를 보면 금년 12월 31일 밤 요트를 타고 식사·와인을 즐기며 새해를 맞는 프로그램을 1인당 595파운드(약 94만원) 가격에 벌써 예매 중이다. 템스강을 누비며 풍광을 감상할 수 있는 12인승 수상 택시도 영업 중이다.
▶사보이 호텔 부근 템스강 강폭은 300m 정도다. 서울 한강의 3분의 1도 안 된다. 유수량(流水量)도 초당 평균 65.8㎥로 한강(613㎥)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다. 템스강 명물 런던브리지 지점의 수심은 1.5m밖에 안 된다고 한다. 그러나 템스강에선 매년 3월 마지막 토요일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대학의 조정 경기(The Boat Race)가 열린다. 이때 25만명이 템스강에 나와 경기를 관람하고, 영국인 900만명 등 세계 2억명이 TV로 시청한다.

▶한강에선 모네의 ‘워털루 다리’ 같은 작품이 나오기 힘들다. 한강을 조망하는 강변 호텔도, 레스토랑도 거의 없다. ‘강변’이란 이름의 리버사이드 호텔도 한강변에서 1㎞나 떨어져 있다. 강변 레스토랑으론 2014년 개장한 세빛섬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유람선도, 수상스포츠도, 강변 카페도 거의 없다. 무엇보다 강 양쪽이 자동차 전용도로로 막혀 강으로 접근 자체가 어렵다.
▶오세훈 시장이 ‘한강 르네상스 2.0 버전’으로 ‘그레이트 한강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제일 눈에 띄는 것이 바큇살 없는 고리 모양의 서울링이다. 높이 180m로, 템스강 런던 아이(135m)보다 높다. 90m 높이 난지도 하늘공원 위에 세우면 전망 높이로는 세계 최고가 된다. 서울시는 난지도 매립쓰레기를 걷어내고 그곳을 첨단 도시로 개발하자는 제안도 검토해봤지만, 매립지 상단을 냄새 차단용 플라스틱 시트로 덮어씌운 사실을 확인하곤 선택지에서 제외시켰다고 한다. 빗물이 안으로 스며들지 못해 쓰레기 분해가 도무지 진척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울링도 훌륭한 아이디어가 될 수 있다. 한강에도 세계적 랜드마크가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03.13(월) JMS 교주 정명석의 범죄 행각... 그 ‘배후’는
1차 세계 대전 때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남부 전선에서 공세를 펴면 승리할 수 있다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요승’ 라스푸틴의 말을 따랐다가 독일에 대패하고 우크라이나 곡창 지대를 내줬다. 많은 장군이 “말도 안 되는 작전”이라고 말렸지만 끝까지 라스푸틴을 믿었다. 라스푸틴에게 성폭행당한 귀족 여성들이 그의 비행을 고발하면 황제는 오히려 고발한 이들을 벌했다. 러시아 최고의 교양을 가진 황제가 맹신에 빠져든 계기는 라스푸틴이 벌인 의료 사기극이었다. 황제의 아들이 앓던 혈우병이 라스푸틴을 만난 뒤 우연히 호전되자 황후까지 그를 ‘신의 사람’이라며 의지했다. 심지어 러시아 혁명 이후 총살당할 때도 라스푸틴 사진을 부적처럼 몸에 지녔다고 한다.

▶중국 청나라 말기 폭력적인 외세 배척에 나섰던 의화단의 모태는 ‘현세 부정’ 교리를 가진 백련교였다. 서양 귀신 배척이라는 맹목적 믿음에 포박돼 서양인만 보면 끔찍한 살인극을 자행했다. 열강 군대가 진압에 나서자 “신령이 지켜주기 때문에 총알도 몸을 뚫지 못한다”는 미신에 기대어 맨주먹으로 맞섰다. 이런 광신의 배후엔 이들을 이용해 외세를 몰아내려 했던 청나라 황실이 있었다.
▶역사적으로 정치·사회 엘리트와 종교는 자주 손을 잡았다.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 일본 최대 불교 종파 창가학회가 만든 게 공명당이다. 한국에서는 경전인 ‘나무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로 유명하다. 이들의 영향을 받는 정재계 실력자가 수두룩하지만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다. 종교가 지켜야 할 기본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일 관계가 악화되면 당수가 팔 벗고 가교로도 나선다.
▶일본이 통일교에 관대했던 것도 이런 전통에서 비롯됐다. 총리가 드러내고 통일교 조력자로 나선 사례도 있다. 그런데 아베 신조 전 총리 암살범이 일본 내 통일교 신도의 아들인 것으로 드러나면서 ‘통일교 배후 정치인’ 색출 파동으로 일본 사회가 들썩이고 있다. 통일교 단체에 회비를 냈다는 이유로 장관이 쫓겨났고, 정권 지지율이 20%대로 곤두박질쳤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가 고발한 JMS 교주 정명석씨의 범죄 행각이 사회적 공분을 사고 있다. 법조인과 장교, 공직자, 언론인, 수의사 등 사회 엘리트가 배후에서 정씨를 도왔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사실이라면 심각한 일이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는 일찍이 “새로운 종교는 자아에 대한 시험을 요구한다”고 했다. 귀를 사로잡는 메시지를 접했을 때, 특히 사회 지도층이라면 자신이 맹목적으로 끌려들어가지는 않는지 돌아볼 책무가 있다.
03-14 양자경 네 번째 전성기는 한국 영화로
말레이시아 화교 출신인 양자경(楊紫瓊·양쯔충)의 첫 꿈은 발레리나였다. 십대 중반에 영국 왕립 무용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삶은 순탄했다. 척추 부상으로 첫 꿈을 접었지만 딛고 일어나 연기로 진로를 바꿨다. 1983년 미인 대회에 출전해 미스 말레이시아가 된 것을 계기로 홍콩으로 옮겨 영화에 뛰어들었다. 훗날을 대비해 무술도 익혔다. 2년 뒤 기회가 왔다. ‘예스 마담’ 주연을 맡아 단숨에 아시아 최고 여성 배우로 발돋움했다. 첫 전성기였다.

▶1987년, 사업가와 결혼하며 은막을 떠났다가 5년 만에 갈라서고 돌아왔다.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간 줄 알았는데 경쟁하던 배우들이 그 사이 사라진 덕에 다시 일어섰다. ‘중경삼림’의 임청하도 ‘천녀유혼’의 왕조현도 1990년대 초 영화계를 떠났다. 다른 배우들도 해마다 10여 편씩 출연하는 다작을 남발한 끝에 대부분 이른 은퇴를 맞았다.
▶그렇다고 안주하지는 않았다. ‘동양의 할리우드’였던 홍콩이 쇠퇴 기미를 보이자 ‘진짜 할리우드’행을 택했다. 007 시리즈 ‘네버 다이’에 본드걸로 출연했다. 이전 본드걸은 악당에게 붙잡혔다가 본드에게 구출되는 수동적 미인들이었다. ‘본드걸 양자경’은 달랐다. 본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대역 없이 격투신을 소화했다. “본드걸의 새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할리우드에 안착했다. 두 번째 전성기였다.
▶양자경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올해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았다. 앞서 윤여정이 조연상을 받았지만 아시아 출신 주연상은 남녀 통틀어 처음이다. 허리 부상, 결혼 실패, 홍콩 영화의 몰락 등으로 쓰러질 때마다 오뚝이처럼 일어나 도전을 거듭한 끝에 오른 고지다. 영화계는 “환갑에 세 번째 전성기를 맞았다”고 했지만 아카데미 단상에 선 그녀는 “황금기가 지났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
▶양자경은 쿵후 스타로 알려졌지만 호쾌한 발차기는 태권도에서 배웠다. 한국 배우들과도 가깝게 지낸다. 지난 2월 골든글로브 여우 주연상을 받았을 땐 “나처럼 생겼고 나보다 먼저 이 자리에 선 분께 감사한다”는 소감과 함께 ‘미나리’로 같은 시상대에 먼저 섰던 윤여정 사진을 자기 SNS올리기도 했다. ‘미나리’와 ‘에브리씽’에서 두 사람이 맡은 배역도 비슷해서 이민자 가정을 지키는 든든한 울타리 여성이다. 적지 않은 나이에 도전을 거듭해 최고 권위 영화상을 받은 인생 역정도 닮았다. 양자경의 다음 목표 중 하나가 한국의 봉준호 감독 작품 출연이라고 한다. 그녀의 네 번째 전성기는 한국 작품과 함께 맞았으면 한다.
03.15 한일 정상의 ‘경양식 만찬’
토마토 소스가 아닌 케첩을 위주로 맛을 낸 스파게티를 ‘나폴리탄’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탈리아가 아니라 일본 요코하마에서 탄생했다. 일본인이 나폴리 파스타를 변형한 일본식 파스타다. 오므라이스, 카레라이스, 하야시라이스, 돈카츠, 멘치카츠, 함바그 등 국적이 애매한 음식이 일본에 많다. 한국에선 “경양식”이라고 하는데, 일본에선 그냥 “요쇼쿠(洋食)”라고 한다. 진짜 서양식은 “프랑스식” 등 나라 이름을 붙인다.

▶일본인은 개항 전까지 생선 외엔 육식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런 식문화를 바꾼 대표적 음식이 돈가스(’돈카츠’의 한국 표준어)다. 개항 직후 들어온 비프 커틀릿을 일본 사정에 맞춰 변형했다. 쇠고기 대신 돼지고기, 익힌 채소 대신 생양배추, 수프 대신 된장국, 포크와 나이프 대신 젓가락을 사용했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비프 커틀릿보다 돈가스를 훨씬 많이 먹는다. 경양식은 서양 문명을 발전적으로 변형해 성장한 일본 근대의 상징 중 하나라고 한다.
▶경양식 ‘원조집’이 있다. 도쿄 중심가 긴자의 경양식 노포 ‘렌가테이(煉瓦亭)’다. ‘벽돌집’이란 뜻이다. 창업자 집안이 4대째 128년 동안 운영하고 있다. 이 집에서 1905년 돈가스의 원형이 탄생했다고 한다. 오믈렛에 볶음밥을 넣은 오므라이스의 원조로도 꼽힌다. 일본 양식의 발상지 소리를 듣는다. 이 식당이 또 다른 역사를 기록하는 듯하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가 16일 여기서 만찬을 갖는다고 한다.
▶도쿄엔 세계 최고급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미슐랭에 이름을 올린 최고급 한식집도 도쿄에 있다. 일본에서 경양식은 비싸야 3000엔 수준이다. 게다가 렌가테이는 비좁기까지 하다. 도쿄 특파원 시절 한국 친구들을 데리고 몇 번 방문했는데 음식 맛이 역사를 따라가지 못한다고들 했다. 일본에서 손님 대접을 ‘오모테나시’라고 한다. 그 기준에서 보면 이곳은 국가 정상의 만찬 장소라고 할 수 없다.
▶한국 대통령의 방일은 12년 만이다. 윤 대통령이 징용 문제 해법을 어렵게 결단했기 때문에 한일 관계가 겨우 정상화의 길에 진입한 것이다. 한국 정부는 반대 여론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성대한 만찬이 박수 받을 때까지는 한국과 일본의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지 모른다. 윤 대통령은 소주와 맥주를 좋아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소박한 곳에서 소탈하게 마음을 열고 이야기 나누기를 좋아한다고도 한다. 도쿄의 싸고 비좁은 벽돌집 식당은 그러기에 어울리는 곳이다. 그래도 성과는 크기를 바란다.
03.16 ‘동물의 세계’ 코드로 본 SVB 파산

미국 실리콘밸리뱅크(SVB)가 빛의 속도로 파산하자, 전 세계 투자자들은 사건 유형 파악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사건 유형이 회색 코뿔소(grey rhino), 검은 백조(black swan) 둘 중 어느 쪽이냐는 것이다. 검은 백조는 도저히 일어나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9·11테러, 소련 해체, 1차 세계대전, 2008년 리먼 사태가 이런 유형에 속한다. SVB 사태가 검은 백조형이라면 보통 일이 아니란 뜻이다.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이 글로벌 금융시장에 북풍 한파를 몰고 왔다. /연합뉴스
▶안개가 조금 걷히고 보니 SVB 사태는 회색 코뿔소 범주라는 데 의견이 모이고 있다. 회색 코뿔소는 검은 백조와는 반대로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사전 대처를 소홀히 하다 당하는 위기를 의미한다. SVB는 예금이 들어오는 족족 미 국채에 투자했다. 미 연준의 금리 인상으로 채권 값이 폭락하자 유동성에 문제가 생겼다. 미리 현금 비중을 늘리거나 금리 헤지형 상품으로 자산 포트폴리오를 재구성해야 했는데, 손을 놓고 있다가 위기를 자초했다. 회색 코뿔소형이라면 수습 가능하다.
▶회색 코뿔소, 검은 백조처럼 경제·금융 용어 중엔 동물이 등장하는 사례가 많다. ‘흰 코끼리’(white elephant)는 귀중한 존재이지만 쓸모가 없어 처치곤란한 물건을 의미한다. 냄비 속 개구리(boiled frog)처럼 위험을 인지하지 못한 채 위기를 맞은 SVB에 미 국채는 흰 코끼리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증시 약세장을 뜻하는 ‘베어 마켓’(bear market)은 우뚝 선 채 발톱을 위에서 아래로 할퀴는 곰의 습성에서 따온 말이다. 반대로 황소(bull)가 뿔을 위로 치받는 모습을 본 따 강세장을 불 마켓이라고 부른다. 약세장에서 주가가 반등해 튀어오르는 국면을 ‘데드 캣 바운스’(dead cat bounce·높은 데서 떨어뜨리면 죽은 고양이도 튀어오른다는 의미)라고 부르기도 한다. 새해 글로벌 증시 상승세를 두고 불 마켓 전환이냐, 데드 캣 바운스냐는 논쟁도 벌어진다.
▶미국 지방은행의 파산이 글로벌 증시에 북풍 한파를 몰고 왔다. 세계 금융주 시가총액이 하루 새 600조원 이상 증발했다. 나비 날갯짓이 폭풍우를 몰고온다는 나비효과(butterfly effect), 꼬리가 개의 몸통을 흔드는 ‘왜그 더 도그’(wag the dog) 현상이라 할 만하다. ‘매(hawk)’로 돌변해 금리 인상 칼을 휘둘러온 미 연준 파월 의장이 위기 확산을 막기 위해 다시 ‘비둘기(dove)’로 돌아서 3월엔 금리를 동결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03.17 나치 침공도 막았던 스위스 은행의 굴욕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이후 크레디스위스 은행이 파산설에 시달리고 있다. 사진은 스위스 베른시에 있는 크레디스위스 지점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2차 세계대전 때 스위스는 독일의 침공을 피할 수 있었다. 40만 스위스 민병대의 결사 항전 의지도 한몫했지만 더 결정적인 전쟁 억제력은 스위스 돈 ‘프랑’과 스위스 은행이었다. 무역 결제에서 마르크, 달러를 쓸 수 없었던 독일은 석유 등 전쟁 물자를 구입하려면 스위스 프랑이 꼭 필요했다. 스위스 프랑 결제는 UBS, 크레디스위스(CS) 같은 스위스 은행의 국제 결제망이 있기에 가능했다.
▶스위스가 은행 강국이 된 비결은 신용과 비밀주의에 있다. 프랑스혁명 당시 스위스 용병 786명은 루이 16세를 지키다 전원 전사했다. ‘스위스 용병은 계약을 죽어도 지킨다’는 신뢰가 있었다. 그래서 교황도 스위스 용병을 경호원으로 썼다. 이런 신뢰가 자본이 돼 스위스 은행업을 키웠다. 비밀주의란 누구든 돈만 갖고 오면 출처도 이름도 묻지 않고 계좌를 열어주는 것이다. 한 스위스 은행가는 “고객이 ‘내 이름은 헤네시(술 이름)입니다.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군요. 여기 30만달러가 있습니다’라고 하면 이름 없는 계좌를 열어준다”고 했다. 스와치 시계 창업자는 “스위스의 위대한 가치는 난민에게 ‘돈의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했다. 2차 대전 중 유럽 유대인 부자들이 스위스 은행에 재산을 맡겼다. 나치 간부들도 비자금을 스위스 은행에 맡겼다.

▶1998년 홀로코스트 희생자 유족들이 UBS, CS를 상대로 예금 반환 소송을 걸어 12억5000만달러를 돌려받았다. 철옹성 같던 비밀주의에 구멍이 뚫린 것이다. 2008년엔 미국 국세청의 압박에 굴복해 UBS가 미국인 고객 명단을 넘겨주고 벌금 7억8000만달러를 자진 납부했다.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이 똘똘 뭉쳐 압박하자, 스위스 정부가 무릎을 꿇었다. 스위스 은행이 EU 고객에게 지급하는 이자에 대해 35%의 세금을 원천징수하고, 이 세금의 75%를 해당국 정부에 송금해 주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는 스위스 은행의 불패 신화를 깼다. 1위 은행 UBS가 부도 위기에 몰린 것이다. 정부의 구제금융 덕에 겨우 회생했다. 이번엔 미국 SVB 파산 사태가 5700억달러 자산을 가진 스위스 2위 은행 CS를 궁지로 몰고 있다.
▶CS는 2019년 미국 헤지펀드에 투자했다가 70억달러를 날린 이후 유동성 위기에 시달려 왔다. 작년 4분기 이후 예금이 150조원이나 빠져나갔다. 예금 인출 사태와 주가 폭락이 이어지자 스위스 정부가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망하게 두기에도, 살리기에도 너무 크다”(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게 걸림돌이라고 한다.
03.18(토) ‘미스터트롯’ 인생의 패자부활전

▲'미스터트롯' 인생의 패자부활전/ 일러스트=김하경
팝송 ‘세상의 끝’(The End of the World)은 큰 상실을 겪고 절망에 빠진 사람의 내면을 토로한 곡이다. ‘태양은 어째서 계속 빛나고/ 파도는 왜 밀려오나요/(중략)/ 사람들은 세상이 끝난 걸 모르나 봐요.’ 3년 전, 가수 안성훈이 ‘미스터트롯’ 시즌 1에서 탈락했을 때 심정도 그랬다. 이찬원과의 1대1 대결에서 이미자의 ‘아씨’를 불렀다가 10대1로 패했다. 그는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돌아보니 “나만 무너져 있었다”고 했다. ‘미스터트롯1′에서 그의 열창을 지켜본 시청자들이 “일어나 다시 무대에 서라”고 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노래 잘하는 아드님 여기 있느냐”며 부모님 가게까지 사람들이 찾아왔다. 부모님 얼굴에 행복한 웃음이 가득한 걸 보고 ‘미스터트롯2′ 재도전을 결심했다. 돌아온 그는 더 단단해져 있었다. 자신에게 고배를 안겼던 1대1 데스매치에선 강자를 대결 상대로 연속 지목해 ‘쌈닭’이란 별명을 얻었다. 최고 퍼포먼스를 펼치기 위한 배수진이었다.
▶서바이벌 오디션에서 패자는 무대 뒤로 사라진다. TV조선의 트로트 오디션은 다른 길을 걸어왔다. 승패가 결정 나면 함께 무대에 선다. 다른 오디션 우승자들까지 ‘미스터트롯’과 ‘미스트롯’ 문을 두드리는 이유다. 아나운서 출신 김용필이 그 사실을 새삼 입증했다. 그제 톱7이 겨루는 결승 무대에서 그는 자신보다 높이 오른 이들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축하곡 ‘낭만에 대하여’를 불렀다.
▶김용필과 듀엣으로 무대에 선 가수 최백호는 “레이스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로 패자를 위로했다. “이제 시작이다. 겨우 한 번 넘어졌을 뿐”이라며 일으켜 세웠다. 실패하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도 안성훈과 김용필이 되어 객석과 TV 앞에서 함께 노래하고 위로도 받았다. 1923년 ‘희망가’ 이후 지난 100년, 이 땅의 트로트가 해 온 일이기도 하다. 망국, 전란, 가난과 싸울 때 트로트는 위로였고 응원가였다. 코로나로 온 국민이 시름에 잠겼을 때, ‘미스터트롯’과 ‘미스트롯’이 그 전통을 되살렸다.
▶'미스터트롯2′가 최고 시청률 25.1%를 기록하며 막을 내렸다. 1위를 한 안성훈 등 톱7을 뽑는 온라인 응원 투표는 누적 2030만 표를 넘었다. 결승전 국민투표엔 252만명이 참여했다. 코로나가 잦아들고 일상을 회복해 가는 시점임을 고려하면 놀라운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연말에 ‘미스트롯’ 시즌 3이 예정돼 있다. 곡진한 사연과 노래가 다시 우리 곁을 찾을 것이다. 벌써 기다려진다.
03.20(월) 마크롱은 모든 걸 걸었다
서울에선 한강을 기준 삼아 강남·강북이라 하지만, 파리는 센강 동쪽에서 서쪽을 보고 서서 ‘강 왼편(리브 고슈), 강 오른편’으로 나눈다. ‘리브 고슈’에 주불 한국 대사관이 있다. 이곳에서 로댕 미술관과 총리 공관을 등지고 북쪽으로 눈길을 두면 하원(下院), 콩코르드 광장, 엘리제궁이 차례로 펼쳐진다. 모두 걸어서 10분 이내다. 이 도심이 주말 시위로 불길에 휩싸였다. 마크롱 정부가 연금 개혁을 밀어붙이자 벌어진 일이다.
▶전날 프랑스 의회는 연금 받는 나이를 지금의 62세에서 2030년까지 64세로 늦추는 법안 표결을 하게 돼 있었다. 앞서 상·하원 합동위원회가 8시간 마라톤 회의까지 거쳤다. 오전에 상원을 통과했고, 오후에 하원만 남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점심 무렵 ‘하원 부결 가능성’ 낌새를 눈치 챈 마크롱이 긴급 각료회의를 소집했다. 엘리제궁에 엘리자베트 총리와 장관들이 속속 모여들자 마크롱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며 특단의 조치를 발동했다.

/일러스트=김성규
▶프랑스 헌법 49조3항은 ‘정부 단독 입법’이란 출구를 열어놓고 있다. 의회가 기능 마비에 빠지면 총리가 대신 나설 수 있다. 정부의 법안 상정을 앞둔 총리가 먼저 의회에게 ‘내각 불신임 여부’를 묻는다. 이게 부결되면 법안 통과로 간주하고, 대신 가결되면 법안 폐기는 물론 내각까지 총사퇴한다. 다소 복잡하고 우악스러워 보이는 절차다. 의회가 정부를 믿는다면 법안 통과, 못 믿겠다면 다 관두자는 것이다.
▶총리는 원래 사회당 출신이었는데 중도 자유파인 마크롱의 르네상스당으로 옮겼다. 그는 의회 연단에서 “불확실한 몇 표 때문에 175시간에 걸친 의회 토론의 결과가 무너지면 안 된다” “연금제도의 미래를 걸고 도박을 할 순 없다”고 했다. 야당 의원들이 야유를 퍼붓고 피켓을 흔들며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다 퇴장하기도 했다. 광장 시위 군중은 대통령을 ‘폭군’ ‘독재자’라고 부르며 마크롱 인형을 불길 속에 던졌다.
▶1968년 학생혁명 때 슬로건은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것이다. 프랑스 희극배우 잔 얀(Yanne)이 처음 말해서 널리 퍼졌다. 그만큼 모든 자유를 중시한다는 이 나라의 경찰이 엊그제 콩코르드·샹젤리제 주변에 집회를 일절 금지한다고 밝혔다. 절체절명의 시기를 맞은 연금개혁이 화염병과 폭죽으로 멈출 순 없기 때문이다. 마크롱-엘리자베트 정권은 정치생명을 걸었다. 사실상 5년 임기는 선택과 결단의 연속인데 아차 하면 벼랑이다. 그러나 버리는 게 없다면 선택도 아닐 것이다./
03.21 ‘감시’ 변호사

/일러스트=박상훈
2019년 2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에서 김정은과 만나는 동안 미국은 트럼프 변호사였던 마이클 코언의 폭로로 발칵 뒤집혔다. 트럼프의 ‘충견’이자 ‘집사 변호사’로 불렸던 그는 하원 청문회에 나와 “트럼프는 사기꾼”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러고는 트럼프 지시에 따라 과거 그와의 성관계를 폭로하려던 포르노 배우 등에게 입막음용으로 돈을 건넸다고 폭로했다. 코언은 이 일과 위증 혐의로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당시 트럼프는 “가짜 뉴스”라고 했지만 이 일로 조만간 기소될 수 있다고 한다. 트럼프도 그렇지만 집사 변호사의 타락을 보여준 코언의 행태도 비난받아 마땅하다.
▶우리라고 다를 게 없다. 2조원대 다단계 사기로 2007년 징역 12년이 확정된 제이유그룹 주수도 전 회장은 3년 8개월간 구치소에서 총 5050번의 변호인 접견을 했다고 한다. 휴일 빼고 하루 평균 다섯 번가량 접견한 셈이다. 교도소를 응접실처럼 쓴 것이다. 접견을 전담하는 집사 변호사들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주가 조작 등의 혐의로 구속됐던 이용호씨는 2003년 ‘옥중 경영’을 하다 적발됐다. 구치소에서 변호사가 건네주는 휴대전화와 증권거래 단말기를 이용해 주식거래와 기업 인수합병까지 했다. 이 집사 변호사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잘 드러나진 않지만 법조 브로커가 변호사를 고용해 ‘바지 사장’으로 앉혀 놓고 머슴처럼 부리는 일도 있다고 한다.
▶최근엔 ‘감시’ 변호사 의혹까지 등장했다. 대장동 사건 핵심 인물인 유동규 전 성남도개공 기획본부장이 법정에서 “(민주당에서) 보내준 변호사들이 저를 위하지 않고 다른 행동을 했다”고 증언하면서 불거진 의혹이다. 이들 변호사가 작년 국정감사 때 김의겸 민주당 의원과 통화한 것이 알려지자 유씨는 “가짜 변호사들이 나를 정치에 이용했다”고 했다. 극단 선택을 한 김문기 전 성남도개공 개발1처장 유족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고 한다. 검찰도 이들이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위해 유씨 등이 진술을 하지 못하게 감시하거나 진술 내용을 이 대표 측에 전달한 것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사실이면 업무상 비밀 누설죄다. 범죄 여부를 떠나 변호사법이 규정한 변호사의 사명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이다. 변호사법 제1조가 ‘사회정의의 실현’이다. 다른 전문직과 달리 이를 첫머리에 내건 것은 법 기능공이 되지 말라는 취지다. 감시 변호사는 정당에 잘 보여 나중에 공천이라도 받아보려는 목적도 있을 것이다. 의뢰인을 돕지 않고 감시하는 변호사라니 정말 한국엔 없는 게 없다.
03.22 푸틴 체포 영장
21세기 들어 최악의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다르푸르 학살’이 꼽힌다. 아프리카 수단 서부 지역에서 아랍계 유목민과 아프리카계 토착민 사이에 충돌이 벌어지자 당시 수단 대통령 오마르 알 바시르는 아랍계 민병대로 하여금 반군을 진압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토착민에 대한 무차별 학살이 벌어졌다. 2003년 시작된 내전이 7년간 이어지면서 30여 만명이 숨지자 국제형사재판소(ICC)가 알 바시르를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기소하고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ICC가 현직 국가원수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한 첫 사례다.

/일러스트=박상훈
▶알 바시르는 영장 발부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집트, 리비아, 카타르 등을 방문했다. 리비아 독재자 카다피는 “ICC 영장은 서방의 테러”라며 그를 감쌌다. 하지만 카다피도 2년 후 자신의 아들과 함께 반정부 시위를 무자비하게 유혈 진압한 혐의로 ICC 체포 대상에 올랐다. 알 바시르는 2019년 군부 쿠데타로 실각한 뒤 수감됐고, 카다피는 결국 권좌에서 축출돼 자국민에게 피살됐다.
▶ICC는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 등을 다루는 국제 재판정이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재판소와 수감시설이 있다. 국가 수반급으로는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 전 대통령이 내전 중 8400여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2006년 헤이그 감옥에서 사망했다. 라이베리아의 찰스 테일러 전 대통령도 어린이를 병사로 동원한 시에라리온 내전 개입 혐의로 기소돼 50년형을 선고받고 한동안 헤이그 감옥에서 복역했다.
▶ICC가 현직 국가 지도자로는 세 번째로 러시아 푸틴 대통령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전쟁 중에 우크라이나 어린이를 러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반인도적 범죄 혐의다. 러시아 정부는 ICC가 러시아 시민을 기소하는 것은 불법이라며 체포영장을 발부한 ICC 판사·검사에 대해 자국 내 형사소송에 착수했다. 러시아는 2016년 ICC에서 탈퇴했다.
▶한국도 ICC와 인연이 깊다. 매년 90억원의 분담금을 납부해 재정 기여도가 회원 123국 중 7위이고, 송상현 전 서울대 교수가 6년간 재판소장을 지냈다. ICC 회계 외부감사는 영국·프랑스에 이어 현재 한국 감사원이 맡고 있다. 피오트르 호프만스키 ICC 소장은 “ICC 회원국은 체포영장을 집행할 의무가 있다. 전 세계 3분의 2에 달하는 지역에서 푸틴은 체포를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론적으론 푸틴이 한국을 포함한 회원 123국을 방문하면 그를 체포해 ICC에 넘겨야 한다. ICC 영장은 소멸시효도 없다고 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푸틴이 체포될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혹시 그가 권력을 잃는다면 모를까.
03.23 ‘디지털 마약’ 틱톡 챌린지
이탈리아 공정거래위원회가 유해 콘텐츠를 고의로 방치했다며 동영상 공유 플랫폼 ‘틱톡’ 조사에 나섰다. 이탈리아 10대들 사이에 자신이나 상대방 얼굴에 흉터를 낸 뒤 이 모습을 촬영해서 틱톡에 올리는 ‘자해 챌린지’가 유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러스트=김성규
▶중국의 IT 기업 바이트댄스가 만든 틱톡은 중독성 강한 빠른 음악에 맞춰 짧은 동영상을 촬영해 공유하는 플랫폼이다. 2017년 세계 시장에 출시돼 2020년부터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다운로드된 앱 1위가 됐다. 유튜브가 동영상 시대를 열었다면 틱톡은 ‘숏폼(short form)’ 붐을 일으켰다. 숏폼은 15~60초짜리 짧은 동영상을 말한다. 누구나 쉽게 만들고 ‘틱톡 챌린지’로 참여를 끌어낸 덕에 틱톡이 세계 10대들의 놀이터가 됐다. 하지만 종종 위험천만한 놀이터다.
▶올 1월 아르헨티나의 12세 소녀가 틱톡 라이브 영상을 켜놓고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 참기에 도전하는 ‘기절 챌린지’를 하다 사망했다. 과거에도 미국 청소년들 사이에 이런 놀이가 유행했는데 최근엔 틱톡을 타고 세계로 번졌다. 2021년 1월에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에서 10세 아이가 기절 챌린지로 숨졌다. 지난 18개월간 12세 이하 어린이 15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통계도 있다. 현대·기아차도 틱톡 챌린지 때문에 곤욕을 치르는 중이다. 지난해 여름부터 미국에서 도난 방지 장치가 없는 현대·기아차의 과거 모델을 훔치는 10대들의 ‘틱톡 챌린지’가 유행했다. 뉴욕주에서는 기아차를 훔쳐 달아나던 10대들이 교통사고를 내 4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했다.
▶틱톡은 기업 가치가 1000억달러(130조원) 넘는 스타트업을 일컫는 ‘헥토콘’에 세계 최초로 등극했다. 구글보다 방문자 수가 많고 유튜브보다 오래 보는 플랫폼으로 대성공을 거뒀다. 4~18세의 틱톡 시청 시간이 하루 평균 91분으로 유튜브(56분)의 1.6배라는 통계도 있다. 청소년에 대한 중독성과 유해성 때문에 미국과 EU는 연일 틱톡에 견제구를 날린다. EU 집행위원은 “겉보기에는 재밌지만 그 뒤에 위험을 숨겨뒀다”며 양의 탈을 쓴 늑대로 비유했다. 미 하원 중국특위 위원장은 “중국이 미국인들에게 배포한 ‘디지털 마약’”이라고 했다.
▶틱톡은 ‘스파이 앱’이라는 의혹도 받는다. 개인 정보를 중국 공산당에 유출한다는 우려다. 미국 정부기관과 의회, 주 정부, EU 집행위가 업무용 기기에 틱톡 사용을 금지했다. 미국의 틱톡 견제가 세계 10대들의 틱톡 사랑을 잠재울 수 있을지 궁금하다.
03.24 15세 오타니가 본 인생의 운

/일러스트=박상훈
고대 로마 집정관이었던 루키우스 술라는 힘든 청소년기를 보냈다. 집안 어른이 뇌물죄로 원로원에서 쫓겨난 뒤 가난 속에 살았다. 온 가족이 불운을 탓했지만 술라만은 돈을 빌려가며 귀족 가문이 받는 값비싼 수업을 들었다. 훗날 전쟁터에서 연전연승하고 권력까지 거머쥐자 로마인들은 ‘행운의 여신이 사랑한 자’라며 ‘펠릭스(Felix·행운) 술라’라는 존칭으로 불렀다. 로마인들은 술라의 행운만 봤지, 그가 불운에서 벗어나기 위해 흘린 땀은 못 봤다.
▶메이저리그 2004 시즌 264안타를 때려냈던 일본의 야구 영웅 스즈키 이치로는 경기 전 아내가 만든 규동만 먹었다. 야구에 집중해야 할 뇌가 맛 따위를 느끼는 데 쓰일까 봐 우려했다고 한다. 올해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일본팀 우승을 이끈 오타니 쇼헤이도 야구에만 집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에 이치로에겐 없는 게 하나 더 있다. 15세 때 작성했다는 ‘만다라트 자기 계발법’이다.
▶일본의 한 경영연구소가 불교 회화인 ‘만다라’ 이름을 따서 만든 이 표는 가로세로 9개씩, 총 81개 정사각형으로 돼 있다. 중심의 빈칸에 핵심 목표를 적고, 핵심 목표를 둘러싼 8개 사각형에 세부 목표를 써넣은 뒤, 이 8개 세부 목표를 이룰 실행 계획 64개로 나머지 칸을 채우는 방식이다.
▶오타니는 표 중앙 핵심 목표에 ‘8구단 드래프트 1순위’라고 썼다. 세부 목표로 ‘몸 만들기’ ‘제구’ ‘스피드 160㎞/h’ 등 8개를 정했다. 특이하게도 그중 하나가 ‘운(運)’이다. 놀랍게도 오타니가 본 인생의 운은 ‘우연히 찾아드는’ 게 아니라 ‘노력해서 획득하는’ 운이다. 그는 운을 얻기 위해 ‘인사하기’ ‘플러스 사고’ ‘책 읽기’ ‘심판 분을 대하는 태도’ ‘응원받는 사람 되기’ 등 8개를 적었다. 운동장 쓰레기를 주우며 ‘‘다른 사람이 버린 행운을 줍는 것”이라고도 했다. 15세 소년이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게 놀랍다. 어떤 어른이 조언한 것이라고 해도 이를 지키려 노력한 어린 소년이 참으로 기특하다.
▶오타니는 이번 WBC 대회 결승을 앞두고 “우리가 우승해야 아시아 다른 나라 야구도 자신감을 갖는다”는 말로 완패한 다른 팀을 배려했고, 우승을 갈망한다면서도 미국팀엔 “오늘 하루만 그들을 향한 존경을 버리자”고 했다. 많은 한국인이 오타니에게 아낌없는 축하 박수를 보내는 이유일 것이다. ‘행운은 시력이 좋다’는 말이 있다.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을 찾아간다는 뜻이다. 정말 만화 같은 야구를 펼치는 오타니가 앞으로 더욱 대성하기를 바란다.
03.25(토) 흔들리는 사관학교... 입학경쟁률 반토막에 자퇴 갈수록 늘어
군 장교를 양성하는 사관학교는 1701년 덴마크에서 처음 생겼다. 영국은 1720년, 프랑스는 1748년에 설립됐다. 프랑스 사관학교 출신들이 나폴레옹 전쟁 때 크게 활약하면서 전 세계로 퍼졌다. 16세에 사관학교를 졸업한 나폴레옹은 오합지졸 군대를 단기간에 최정예 부대로 탈바꿈시키고 뛰어난 전략으로 유럽 각국 군대를 격파했다. 영국 왕실의 왕자 다수도 사관학교를 나왔다.

▲지난 2월 22일 오전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 화랑연병장에서 열린 제83기 사관생도 입학 및 재교생도 진학식에서 사관생도들이 경례하고 있다./육군사관학교
▶미국 육군 사관학교는 1802년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세웠다. ‘웨스트 포인트’는 독립전쟁 때 뉴욕을 지키던 허드슨강가 요새 이름에서 땄다. 단순한 장교 양성이 아니라 미국을 이끌 지도자를 배출한다고 표방했다. 전국 고교에서 전교 5등 안에 드는 엘리트들이 연방 상원 의원의 추천서를 받아야 입학했다. 아이비리그 대학보다 어렵다고 한다. 아이젠하워·카터 대통령을 비롯해 정·관계와 기업 리더를 무수히 배출했다. 사관학교 졸업생이 5년 의무 복무를 마치고 일반 기업에 가면 연봉이 대졸자보다 3~4배 높았다.
▶한국에선 1946년 5월 태릉에서 육군 사관학교가 문을 열었다. ‘애국심에 찬 청년들에게 군사 지식을 보급하여 국가의 간성이 되게 하겠다’는 게 개교 취지였다. 많은 인재가 몰렸다. 교육과 규율은 엄격했다. 술·담배·결혼을 금지하는 3금(禁)도 있었다.
▶영화 ‘사관과 신사’에서 주인공은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 교관은 수시로 “못 할 거면 자퇴하라”고 몰아세운다. 이를 못 이기고 중도 포기하는 생도가 나온다. 하지만 소수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육사 자퇴생이 점점 늘어 작년엔 2018년(9명)의 7배(63명)가 됐다. 1학년은 10명 중 1명이 자퇴했다. 공군·해군 사관학교도 자퇴가 2배 가까이 늘었다. 교육·훈련을 못 따라가서가 아니라 ‘진로 변경 고민’(58명) 때문이라고 한다. 장교 처우도 불만족스럽고 미래도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사관학교 입학 경쟁률도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자퇴생들은 “몇 년 후 임관하면 월급이 병장보다 적어지는데 이런 대우 받고 군 생활을 해야 하느냐”고 말한다고 한다. 지방·전방 근무가 많고 연애·결혼·자녀 교육 여건도 어렵다. 계급 정년이 있어서 진급에 탈락하면 40대 초반에 밀려날 수 있다. 문재인 정부 이후 군에 대한 예우도 사라졌다고 한다. 자퇴생들은 대입 재수를 하거나 다른 대학에 편입한다. 기본 군사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3~4개월 군 복무 단축 혜택도 받을 수 있으니 자퇴 이점도 있다. 사관학교의 위기는 안보의 위기다.
03.27(월) 스탈린·카다피·김정은...독재자의 불면증
소련 독재자 스탈린의 업무 스타일이 서방에 알려진 것은 2차대전 전후 처리를 위해 크림반도 휴양지 얄타에서 미·영·소의 세 거두가 만났을 때였다. 스탈린은 밤 9시에 회의하고 자정에 저녁을 먹었으며 새벽 5시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식사 자리에 호출당한 부하들은 낮잠을 미리 자 두었다. 스탈린 앞에서 졸았다가 끝이 좋지 않았던 동료를 여럿 보았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억지로 술을 먹여 실수를 유도하는 것으로 부하들 약점도 잡았다. 훗날 소련 서기장이 되는 흐루쇼프는 “스탈린과의 저녁 식사가 두려웠다”고 했다.

/일러스트=박상훈
▶많은 독재자가 밤에 일하고 새벽까지 술을 마신 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잔다. 자기 멋대로 일할 수 있어서만은 아니다. 권력을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일상이 무너진다. 나폴레옹은 하루 평균 4시간밖에 못 잔 불면증 환자였다. 히틀러는 하루 두 번 신경안정제를 먹어야 간신히 잠들었고, 20대에 쿠데타로 집권한 리비아 독재자 카다피도 40대 초반부터 과량의 수면제를 복용했다.
▶북한 김씨 왕조 권력자들도 불안을 술에 의지해 달랜다. 김정일은 생전에 지방 간부들에게 새벽 전화를 걸곤 했다. 북한 선전 매체들은 이를 주벽(酒癖)이 아닌 애민 정신으로 호도했다. 전화받은 간부가 “새벽 4시가 넘었습니다”라 하면 김정일이 “내게는 지금이 한창 일할 시간”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실상은 밤샘 폭음했다는 증언이 여럿이다.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은 수기 ‘대동강 로열패밀리’에서 저녁에 시작된 비밀 연회가 새벽까지 계속됐고 김정일이 취해야 끝났다고 했다.
▶노동신문이 25일 ‘위대한 어버이의 하루’라는 기사에서 김정은이 새벽 5시까지 일한다고 보도했다. 서방 언론 분석은 다르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올 초 “김정은이 폭음한 뒤에 운다”며 “외로움, 건강 염려증, 체제 유지에 대한 압박”을 이유로 꼽았다. 우리 국정원도 김정은이 매주 3~4회 밤샘 술 파티를 하고 과음한다고 국회에서 보고한 적이 있다. 술에서 깨려고 가정용 사우나 설비를 유럽에서 수입했다는 증언도 있다.
▶권력에 집착했고 암살 걱정에도 시달렸던 스탈린의 최후는 허무했다. 1953년 2월 28일, 평소처럼 심야 연회를 하고 새벽 4시에 잠자리에 들며 “내가 일어날 때까지 깨우지 마라”고 했다. 다음 날 일어나지 않는 독재자의 방문을 측근들은 감히 열지 못했다. 밤 10시 넘어 중요한 소포가 배달되자 그 핑계로 문을 열었지만 이미 스탈린은 뇌졸중으로 회생 불능 상태였다. 독재의 대가가 이처럼 값비싸다는 사실을 김정은은 깨닫게 될까.
03.28 세계에 없을 K-정치 ‘위장 탈당’
영국 처칠 총리는 당적을 수차례 옮겼다. 보수당의 보호관세 정책에 반대해 탈당한 뒤 자유당으로 갔다. 보수당의 비판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과격한 노동운동으로 국가 위기가 고조되자 보수당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철새라는 비판은 듣지 않았다. 공천이나 자기 이익이 아닌 정책과 노선 문제였기 때문이다.
▶김대중·김종필 공동 정권 때 ‘의원 꿔주기’라는 신종 탈당이 등장했다. 자민련이 총선에서 17석밖에 못 얻자 원내 교섭단체를 만들어 주느라 민주당은 의원 4명을 탈당시켜 자민련으로 보냈다. 유럽식 연정을 표방했지만 세계 어디에도 없던 편법이었다. 이 의원들은 ‘연어처럼 돌아오겠다’는 유행어도 만들었다.
▶2012년 통합진보당 탈당파는 비례대표 의원들을 데리고 나가려고 ‘셀프 제명’을 했다. 제명하면 비례대표도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바른미래당 분당 때도 탈당파가 비례대표 9명을 셀프 제명했다. 2020년 총선 때 민주당이 강제 도입한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한국에선 ‘비례 위성 정당’을 만들었다. 여야는 자기들 위성 정당이 앞 순위 기호를 받도록 하려고 의원 꿔주기와 셀프 제명을 했다. 귤이 강을 건너면 탱자가 되듯 독일식 선거제가 한국 정치에 오자 편법이 난무하는 엉망진창이 됐다.
▶민주당은 ‘검수완박’ 법안을 처리하려고 자기 당 의원을 위장 탈당시켜 무소속으로 만들었다. 무소속 의원을 안건조정위에 넣으면 논의 기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다. 한국 정치 아니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꼼수였다. 민주당은 그 후 각종 투기·비리 혐의로 제명되거나 위장 탈당한 의원들을 아예 입법 폭주 도우미로 활용하고 있다. 위장 탈당한 의원은 그 행위를 마치 자랑처럼 여기고 있다. 공수처법을 밀어붙일 때는 반대하는 의원을 상임위에서 일방적으로 빼고 다른 의원을 집어넣기도 했다. ‘사·보임’ 꼼수였다.
▶과거 과테말라 대통령이 아내를 대선에 출마시키려고 위장 이혼한 적이 있다. 직계가족은 출마를 금지한 헌법 규정을 피하려 한 것이다. 러시아 메드베데프는 푸틴을 위해 대통령 자리를 잠시 맡아두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나라는 대부분 민주국가가 아니다. 민주국가에서 한국처럼 민주주의를 비웃는 각종 편법 아이디어가 난무하는 곳은 없다. 세상의 모든 좋은 제도는 한국에 오면 변질하고는 한다. 그 나라에서 그 제도를 만들 때 이런 짓을 하리라고는 도저히 예상하지 못했던 허점을 한국 정치가 찌르기 때문이다. 가히 ‘K정치’라 할 만하다.
03.29 벙커 부장, 벙키 판사
20여 년 전만 해도 법원 출입기자들은 법원장 부속실에서 판결문 초고(草稿)를 봤다. 배석판사가 쓴 초고가 온전하게 남은 게 거의 없었다. 부장판사가 손을 대 고치기 때문인데 새로 쓰다시피 한 경우가 적잖았다. 대부분 연필로 고치지만 빨간 펜을 쓰는 부장판사도 있었다. 그러면 판결문이 벌겋게 변한다. 이렇게 깐깐한 ‘빨간 펜 선생님’ 부장판사를 배석판사들은 ‘벙커(bunker)’라고 불렀다. 탈출이 어려운 골프장 모래 구덩이에 빗댄 것이다.

/일러스트=박상훈
▶우리 법원은 부장판사가 갓 임용된 배석판사 둘과 재판부를 구성해 이들을 도제식으로 길러낸다. 최근 법관 임용 방식이 다양화됐지만 이 시스템은 아직도 사법부를 유지하는 큰 틀이다. 후배들 잘 가르치는 ‘좋은 벙커’가 아직 필요한 이유다. 실제 유명 법관 중에 벙커로 불린 이들이 많았다. 이강국 전 헌법재판소장, 이용훈 전 대법원장, 권성 전 헌법재판관 등이다. 전직 고위 법관은 회식 자리에서 “내가 원조 벙커다. 실력 있으면 탈출 가능하다”고 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게 과해서 법원 분위기를 경직시킨 측면도 있다. 과거엔 합의부 판사 셋이 밥 먹으러 갈 때 부장판사가 가운데 서고 배석판사 둘이 좌우에서 걸어다녔다. 속칭 ‘삼각 편대비행’이다. 일과 무관하게 후배들을 괴롭히는 ‘나쁜 벙커’도 있었다. 식사는 물론 취미생활까지 같이할 것을 은근히 강요하는 ‘갑질 벙커’였다.
▶이젠 벙커도 옛말이다. 실연당했다고, 이혼했다고 몇 달간 판결 선고 못 하겠다는 배석판사들이 나타나고 있다. 급기야 최근엔 부장판사가 일 많이 시킨다는 이유로 배석판사가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냈다고 한다. 몇 년 전 1심 배석판사들이 ‘주 3회 선고’에 암묵적으로 합의했는데 부장판사가 이를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판사들 때문에 ‘벙키’라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벙커와 신인을 뜻하는 루키(rookie)의 합성어로, 일을 맡겨도 제대로 하지 않는 젊은 판사를 뜻한다.
▶이런 변화의 배경엔 워라밸을 중시하는 젊은 판사들의 문화도 있지만,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후 고법 부장판사 승진제 폐지, 법원장 후보 추천제 도입 등으로 판사들이 열심히 일해야 할 이유가 사라진 탓도 크다고 한다. 문제는 이게 재판 지연으로 연결돼 국민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것이다. 최근 5년간 법원에서 2년 내에 1심 판결이 나오지 않은 장기 미제 사건이 민사 소송은 3배로, 형사소송은 2배로 늘었다. 그런데도 김명수 사법부는 이를 방관해왔다. 그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다.
03.30 블랙핑크 파워...대통령실 관계자들도 잇단 경질
브리지트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부인이 올 초 파리에서 연 자선 파티에 세계 테니스 영웅 로저 페더러가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페더러가 K팝 걸그룹 블랙핑크와 사진을 찍었는데, 페더러의 10대 딸들이 난리가 났다. “아빠, 이건 꼭 SNS에 올려야 해요!” 사진을 올리자 페더러의 팬들도 “당신도 블링크(blink·블랙핑크 팬덤)였냐”며 반색했다. 블랙핑크가 누리는 전 세계적 인기의 한 사례일 뿐이다. 테일러 스위프트, 해리 스타일스 등 유명 가수는 물론이고, 앤 해서웨이 같은 할리우드 스타들도 블랙핑크를 보면 “셀카 찍자”며 스마트폰을 꺼내든다.

▶블랙핑크는 지난해 10월 빌보드 메인 앨범 차트인 ‘빌보드 200′ 정상에 오른 최고 팝스타다. 타임은 블랙핑크를 ‘2022년 올해의 엔터테이너’로 선정하며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세계 최고 여성 밴드”라고 선언했다. 노래와 춤만 뛰어나 얻은 명성이 아니다. ‘얼굴 천재’로 불리는 미모, 세련된 무대 매너, 노래 ‘How You Like That’ 등에 담은 사회적 메시지가 젊은 팬들을 사로잡는다.
▶소셜 미디어에선 국가원수 못지않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인스타그램 팔로어가 리사 8300만, 제니 7100만, 지수 6500만, 로제 6400만명이다. 디올·까르띠에·생로랑·티파니앤코 등 럭셔리 패션·보석 브랜드가 부유한 젊은 여성을 타깃으로 마케팅할 때 블랙핑크와 협업한다. 제니는 ‘인간 샤넬’ ‘인간 구찌’로 불린다. 디올이 브랜드 파트너인 지수를 파리 패션위크에 등장시키자 매출이 단숨에 4500만달러 넘게 뛰었다.
▶대중 예술인은 정치인들에게도 매력적인 협업 대상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재작년 유엔총회에 동행한 BTS 덕을 톡톡히 봤다. 김정숙 여사는 당시 각종 행사에서 “두 유 노 BTS?”를 연발했다. 예술인을 통해 정치 사회적 메시지를 발신하는 경우도 많다. 지난해 12월 마크롱 대통령 내외가 미국을 국빈 방문했을 때, 바이든 대통령은 뉴올리언스 출신의 재즈 뮤지션 존 바티스트를 환영 행사에 불렀다. 뉴올리언스가 과거 프랑스 땅이었던 점을 고려했다고 한다.
▶다음 달 미국을 국빈 방문하는 윤석열 대통령 내외 환영 만찬에 미국 측이 한·미 동맹 70주년을 주제로 블랙핑크와 미국 팝 스타 레이디 가가 공연을 추진했다고 한다. 질 바이든 여사가 이 아이디어를 냈다는 전언이다. 그런데 이 준비를 소홀히 했다가 대통령실 관련자들이 경질됐다. 외교 문제를 떠나 블랙핑크의 위상을 실감한다.
03.31(금) 감염병의 ‘끝’이라고?... ‘엔데믹’에 대한 오해

▲진해군항제'가 열리고 있는 30일 오후 경남 창원시 진해구 경화역 공원에서 관광객들이 봄기운을 만끽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제 방역 당국이 ‘5월부터 확진자 격리 5일로 단축, 7월 병원 마스크 의무 해제, 내년 상반기 엔데믹(endemic) 전환으로 모든 방역 해제’라는 코로나 로드맵을 발표했다. 지난 20일부터는 이미 버스·지하철도 마스크 없이 탈 수 있다.
▶그런데 엔데믹에 대한 오해가 많은 것 같다. ‘팬데믹’은 심각한 위해를 끼치는 감염병이 번져나갈 때 세계보건기구(WHO)가 발령한다. 여기에 조건이 하나 달린다. 전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양상을 갖고 있어야 한다. 새롭지 않으면 아무리 확산되고 증세가 심해도 팬데믹은 아니다. 말라리아는 2021년 전 세계에서 2억4700만명이 감염돼 61만9000명이 사망했다. 끔찍한 감염병이지만 팬데믹이 아니라 엔데믹으로 분류된다. 엔데믹은 감염병의 ‘끝’이 아니라 풍토 감염병이 됐다는 뜻이다. 늘 있는 병이고 예측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감기, 독감도 엔데믹이다.
▶그렇지만 미국 감염병 전문가 오스터홀름은 “코로나엔 ‘뭘 모르는지도 알 수 없는 불확실성(unknown unknowns)’이 있다”고 했다. 코로나에 대해선 아직도 모르는 게 많다. 백신 개발 직후엔 아프리카가 코로나 지옥이 될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다. 백신 살 돈이 없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100만명당 누적 사망자 수가 미국 3300명, EU 2700명, 한국 660명인데 아프리카는 180명밖에 안 된다. 그래서 엔데믹으로 안정화되더라도 언제 다시 끔찍한 팬데믹으로 돌아설지 알 수 없다는 경고가 꽤 있다.
▶어제 점심 서울 덕수궁 주변을 산책했다. ‘…무엇이 우스운지 세 사람은 / 다시 또 껄껄 웃는다 / 웃음소리에 놀라서인지 / 십 리 안팎의 진달래와 / 철쭉과 산동백이 / 다투어 피고 봄이 폭죽처럼 / 터져 오른다 / 밖으로 열린 유리창에서도 / 캘린더 넘기는 소리 요란하다 (봄날이 온다/최하림)’. 햇볕 쬐러 나온 시민들이 돌담 길에 가득했는데 마스크 쓴 이는 채 20%도 안 됐다. 드디어 코로나가 꽁무니 빼고 있고 시민들 표정은 환해졌다. 이번 주말 산과 들은 인파로 메워질 것이다.
▶3년 전 봄엔 벚꽃 구경도 할 수 없었다. 올해는 봄꽃 소식이 일찍 왔다. 집 마당에 꽃잎을 열기 시작한 명자나무 분홍색은 전보다 더 밝아졌다. 엔데믹이 ‘끝’은 아니지만 그래도 빨리 팬데믹 세상 떨쳐 버리고 싶다. 마스크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고, 사회적 거리 두기니 선별진료소니 하는 얘기들은 없는 세상이 빨리 와야 한다.
한삼희 선임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