危機의 韓半島 2022-11
11월 04일(금) 韓美 ‘전략자산 상시전개’ 합의, 북핵 억제 충분치 않다
미국 워싱턴에서 3일 열린 한·미 안보협의회의(SCM)는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 이어 7차 핵실험 준비까지 완료한 엄중한 상황에서 북핵 억제 관련 동맹의 의지를 재확인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양국 국방장관은 공동성명에서 “맞춤형 억제전략을 개정해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억제·대응하는 기본 틀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아울러 확장억제수단운용연습도 연례적으로 개최키로 했다. 한·미가 북핵 고도화에 대응해 핵우산을 한층 강화하고 핵대응훈련도 신설해 매년 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종섭 국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전략자산의 상시 배치에 준하는 효과가 있도록 운용키로 합의했다”고 밝혀 핵무기 탑재 폭격기와 핵 추진 잠수함 등이 필요에 따라 적시에 조율된 방식으로 강도 높게 배치될 것임을 예고했다. 전략자산이 사실상 한국에 배치된 것과 같은 효과가 나도록 하겠다는 합의인데, 북한의 ICBM 발사 후 ‘비질런트 스톰’ 훈련 연장 결정이 내려진 게 대표적이다.
공동성명에는 확장억제 강화와 관련해 ‘정보공유, 위기 시 협의, 공동기획, 공동실행’이 명시됐다. 미국이 나토와 핵 공유 때 협의하는 방식이다. ‘나토식(式) 핵 공유’를 원용해 ‘한국형 확장억제’를 구체화한 것으로, 한국에 나토 회원국처럼 전술핵을 직접 배치하지는 않지만 전략자산 적시 배치로 그런 효과를 내겠다는 뜻이다. ‘한국형 핵 공유’의 길이 열린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이것으로는 북핵대응이 충분치 않다.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SCM에서 “핵 등 모든 군사능력을 확장억제에 투입하겠다”면서 “핵 사용 시 김정은 정권은 종말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북핵 위협은 한층 가속화하고 있다.
김정은은 올해 전술핵운용부대를 조직하고 대남 핵 공격 협박을 하고 있다. 한·미 공중연합훈련 와중에 대담하게 ICBM 도발을 자행한 것은 미국까지 동시에 핵으로 위협할 수 있다는 경고다. 뉴욕에 대한 핵 공격을 위협하며 대남 공격을 시도할 때 미국이 전략자산 적시 전개를 결정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제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북핵은 몇 분 만에 대한민국을 초토화할 수 있다. 괌 배치 전략자산이 한국에 전개되려면 최소 2∼3시간이 필요해 즉각 대응이 어렵다. 북핵엔 핵으로 대응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는 전술핵 재배치, 나아가 한국 자체 핵 개발 필요성을 분명하게 천명하고 미 조야(朝野)를 설득해야 할 것이다.
문화일보 사설
11월 04일 SCM ‘김정은 정권 종말’ 첫 명시… 북한, 도발수위 더 높일 듯

▲국방위 참석한 장성들 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국방위원회 회의에서 합동참모본부와 각 군 관계자들이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김동훈 기자
■ SCM 공동성명… 북한 반응 전망
北 ICBM · 7차 핵실험 등 통해
핵보유국 인정 → 군축협상 유도
제재 완화 · 한국 예속화 노림수

한국과 미국이 3일(현지시간) 제54차 한·미 안보협의회의(SCM) 공동성명에 ‘김정은 정권 종말’이란 문구를 처음으로 담으면서 북한의 강한 반발이 예상된다. 북한은 ‘레드라인’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추가 발사와 7차 핵실험을 진행하는 공세적 행보로 한·미에 대한 위협 수위를 높일 가능성이 커졌다. 북한은 특히 7차 핵실험을 통해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아 군축협상으로 전환과 대북 제재 완화를 노리는 한편 남측을 예속화시키는 전략을 추진할 것으로 파악된다.
이날 한·미 SCM 공동성명은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미국이나 동맹국 및 우방국들에 대한 비전략핵(전술핵)을 포함한 어떠한 핵 공격도 용납할 수 없으며 이는 김정은 정권의 종말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명시했다. SCM 공동성명은 한·미 국방부 장관의 일치된 의견을 바탕으로 작성되며 사실상의 ‘외교문서’로 인식된다. 이 문서에 김정은 정권 종말 문구가 들어간 건 최근 잇단 도발을 감행 중인 북한에 강력한 경고를 보낸 것이다. 미 국방부는 지난달 27일(현지시간) 발표한 ‘2022 핵태세검토보고서(NPR)’에도 ‘핵 사용시 정권 종말’이라고 적시한 바 있다.
한·미가 북한의 핵 위협에 대해 ‘김정은 정권 종말’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면서 북한도 반발 수위를 높일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은 앞서 지난달 31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 지난 1일 북한군 서열 1위 박정천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담화를 통해 미국 NPR의 ‘정권 종말’ 표현을 비난하고 탄도미사일 도발에 나선 바 있다. 북한은 한·미를 상대로 ICBM 추가 발사와 7차 핵실험 등 고강도 무력시위를 전개하며 위협 수위를 높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북한은 소형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단거리탄도미사일(SRBM), 중거리탄도미사일(IRBM), 순항미사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등을 연달아 발사한 만큼 7차 핵실험은 핵탄두 소형화와 경량화에 초점을 맞춰 진행될 전망이다.
한편 북한은 한·미가 4일 종료될 예정이던 연합 공중훈련 ‘비질런트 스톰’을 하루 연장하기로 합의한 3일 밤 박 부위원장 명의 담화로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후 55분 만인 오후 9시 35분쯤부터 9시 49분쯤까지 황해북도 곡산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SRBM 3발을 발사했다. 오후 11시 28분쯤부터는 강원 금강군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포병 사격 80여 발을 가했다.
김유진 기자 klug@munhwa.com
11.05 ‘한반도 비핵화’ 아닌 ‘한반도 핵 억지’가 발등의 불
한미 국방장관은 4일 핵 보복 훈련의 공동 실시, 북한의 핵 공격과 관련한 정보 공유, 보복 공격을 위한 공동 협의·실행 절차 구체화 등을 합의했다. 정부 내에선 이번 한미 국방장관 회담을 통해 나토식 핵공유에 버금가는 핵우산 체제로 가는 길을 열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공동성명엔 선언적 수준의 말만 있을 뿐이다. 북핵을 머리에 이고 살아야 할 한국민으로선 안보 불안을 덜었다고 하기 힘들다.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이날 “북한이 핵을 쓰면 김정은 정권의 종말을 초래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북이 핵을 썼다는 것은 이미 우리 국민 수십만명이 사망했다는 의미다. 북이 핵을 쓸 수 없게 해야 한다. 그런데 앞으로 북이 미국 대도시를 핵 공격할 미사일 개발까지 성공한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미국의 어떤 강한 말도 ‘핵 있는 북한과 핵 없는 한국’의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현인택 전 통일부 장관은 이날 열린 국방안보포럼에서 “북한의 핵 개발이 임계점을 넘었고 이제 완전한 비핵화는 거의 실현 불가능한 목표가 됐다”며 “대화와 제재라는 기존 수단의 효용이 다한 만큼 완벽한 핵 억지가 최상의 목표”라고 했다. 이를 위해 미국의 핵 자산이든 독자적 수단이든 ‘의심할 바 없는 확실한 핵 억지력’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지금 미국은 한국이 핵에 조금이라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 앞으로 북핵 폐기가 불가능해지면 미국은 한국 핵을 막는 데 더 집중할 가능성이 있다. 한미 동맹의 위기가 찾아올 수도 있다. 지금부터라도 진지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최소한 한국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의 한반도 핵 의사 결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 전투기에 미국 핵이 탑재될 수 있어야 한다. 지난한 과정이 되겠지만 더 미룰 수 없다. 모든 핵 억지 수단과 모든 창의적 방안을 다 찾아야 한다.
조선일보 사설
월간조선 11월 호
정치철학자 이진우 교수가 말하는 ‘전쟁과 평화’
“국가는 전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 “윤석열, 젤렌스키에게서 강력한 이미지 만들고 영향력 극대화하는 능력 배워야”
⊙ “전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 “푸틴의 연설과 중국이 한국을 대하는 태도 보면 논리적 유사성 정말 많아”
⊙ “좌파 진영,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우크라이나 비난 놀라워”
⊙ “정치는 연출… 국민에게 보여주는 이미지 통해 국가의 가치 提高”
李鎭雨
1956년생. 연세대 독어독문학과 졸업, 독일 아우구스부르크대 대학원 철학박사 / 계명대 철학과 교수, 同총장, 한국니체학회장, 한국철학회장,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同 인문사회학부장, 인문기술융합연구소 초대 소장,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석좌교수 역임. 現 포스텍 명예교수 / 저서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착각》 《불공정사회》 《의심의 철학》 《인생에 한번은 차라투스트라》 《니체의 인생 강의》 《한나 아렌트의 정치 강의》 《지상으로 내려온 철학》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정치철학》 등

▲사진=장원재
지난 2월 발생한 우크라이나 전쟁이 다시 격화되고 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부터 수도 키이우 등을 지켜낸 우크라이나는 이제 반격에 나서 동부 히르키우와 도네츠크 등 실지(失地)를 착실하게 탈환하고 있다. 이에 맞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부분 동원령을 내리는 한편 핵무기 사용을 운운하면서 세계를 협박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이후 우크라이나의 역사나 이 전쟁이 갖는 지정학적(地政學的) 의미 등을 다룬 책들이 여러 권 나왔다. 이런 가운데 정치철학자의 시선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는 책이 있어 눈길을 끈다. 포항공과대학교(포스텍) 이진우(李鎭雨·66) 명예교수가 지난 7월 펴낸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착각》(휴머니스트 펴냄)이 그 책이다. 제목부터 무척 도발적이다. 부제(副題)는 ‘우크라이나 전쟁 그리고 평화가 당연하지 않은 미래’다. 서둘러 간곡하게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노(老) 교수의 결기가 느껴졌다. 경기도 용인의 서재로 찾아가 인터뷰한 배경이다.
‘역사의 분기점’

▲이진우 교수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착각》.
― 저한테는 이 책이 ‘긴급 출판’으로 보였습니다.
“그런 성격이 있어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사건, 역사적인 사건, 또는 핵심적인 시대정신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잖아요. 먼 훗날 21세기의 대표적인 사건이 무엇이었나를 돌이켜볼 때, 2020년 혹은 2022년을 역사의 분기점으로 꼽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서둘러 책을 쓴 이유입니다.”
― 어떤 면에서 그렇습니까.
“2020년에는 코로나19가 발생했죠. 인류가 지금 3년째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2022년 2월 24일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부당하게 침공했고요. 지정학적 질서가 혁명적으로 바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좀 더 자세하게 풀어주십시오.
“우선 전 세계를 휩쓴 전염병 때문에 세계화(世界化)가 이제까지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될 겁니다. 아니면 수정이 되거나.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죠. 예전에는 국가 간의 경계가 무의미할 정도로 교류가 활발하고 여행도 자유로웠잖아요? 그런 시절은 다시 오기 어려울 겁니다. 세상이 이렇게 바뀌는데, 이런 지정학적 변화의 근저(根底)에 미국과 중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이 충돌하는 상황이 또 겹쳐 있거든요. 탈동조화(脫同調化) 현상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이 흐름, 이러한 경향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훨씬 더 극적으로 강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유럽을 넘어 전 지구적 의미가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2022년 2월 24일에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 귀퉁이에 있는 어떤 나라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는 유라시아 대륙의 지정학적 질서를 바꾸고, 나아가 세계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바꿀 겁니다.”
― 역사적으로는 전쟁 이후에 전염병이 창궐하는데, 이번에는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이제까지는 전쟁으로 인해 환경이 아주 열악해지고, 또 수많은 사람이 죽어 자연스럽게 전염병이 창궐했죠. 이번에는 평화로운 시기에 전염병이 발병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고, 전염병이 도는 와중에 전쟁이 일어난 점도 특이해요. 그래서 이 전쟁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될 겁니다.”
“1945년 이래 첫 유럽 전쟁”

▲전쟁 발발 직후 국경을 넘어 폴란드로 피란한 우크라이나인 모자. 우크라이나 전쟁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대륙에서 처음으로 벌어진 전쟁이다. 사진=AP/뉴시스
― 하나하나 의미를 짚어주시죠.
“중요한 것은, 유럽의 관점에서 보면, 유럽의 한복판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유럽 대륙에서는 한동안 전쟁이 없었거든요. 물론 코소보 전쟁이 있었고, 그다음에 뭐 조지아 이런 데서 국지적(局地的) 무력(武力) 충돌이 있기는 했지만, 이런 정도의 전쟁은 없었죠. 1945년 이래 처음으로 유럽 대륙에서 전쟁이 일어난 겁니다.”
― 코소보 전쟁은 내전(內戰) 성격이 있고 이번 경우와는 완전히 얘기가 다릅니다.
“그렇죠. 다르죠. 이번 전쟁은 예전에 세계를 양분(兩分)했던 초(超)강대국이 직접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점에서 아주 심각한 위협입니다. 유럽 사람들은 ‘러시아를 가능한 한 서구 진영으로 끌어들여 전쟁 발발의 잠재적 가능성을 줄이겠다’고 노력했죠. 그래서 이것이 성공할 것이다, 이제까지는 비교적 잘 작동해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45년부터 2021년까지 76년을 전쟁 없이 지냈으니까요. 물론 한때는 냉전(冷戰) 시기도 있었지만, 열전(熱戰)이 일어난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정치학자가 됐건 군사 전략가가 됐건, 아니면 뭐 외교관이 됐건 모두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착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통해서 완전히 깨졌어요.”
― 미몽(迷夢)으로부터의 탈출이네요.
“어떻게 보면 러시아가 전 유럽 사람들을 미몽으로부터 탈출시켜준 거죠. 이런 의미에서 푸틴이 엄청난 영향을 미친 것이고요. 이번 전쟁이 우크라이나라는,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에 국한된 문제이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와닿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 왜 그렇습니까.
“극동(極東)의 지정학적 질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까요.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이 버티고 있는데, 이런 유라시아 중심주의의 군사적 표현이 우크라이나 전쟁이라고 한다면 중국도 예외일 수 없다, 이런 얘기죠. 동북아의 질서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심각하고 급격하게 변할 겁니다.”
“좌파 인사들, 푸틴 논리 지지하는 듯한 인상”
― 대한민국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말씀이시네요.
“저는 그렇게 봅니다. 그런데 제가 놀란 점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니까 좌파 진영 사람들,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러시아가 아니라 우크라이나를 비난해요. 러시아가 침공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예컨대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정치 초년생이라 문제를 키웠다’ ‘강대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불필요하게 자극했다’ 이런 얘기들이죠.”
― 우크라이나가 나토(NATO)에 가입하려 했고, 그래서 러시아의 안보가 심각하게 위협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푸틴의 논리입니다. ‘자위권(自衛權) 발동’이라는 강변(强辯)이죠.
“저는 우리나라 좌파 인사들이 푸틴의 논리를 지지하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받았어요.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이재명(李在明) 현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공식적으로 이런 얘기를 했잖아요. 그런데 이재명 의원만 이렇게 얘기한 것이 아닙니다. 러시아를 반대하고 우크라이나를 지지하지 않아요. 머뭇거리거나 오히려 러시아 편을 드는 듯한 언행(言行)이 많습니다. 저한테는 이것이 놀라웠습니다.”
국민과 정치권의 무관심

▲국내 정당 대표와 의원들은 지난 4월 11일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화상연설을 들었지만 결석자가 많았고 분위기도 산만했다. 사진=조선DB
― 두 번째로 놀란 점은 무엇인지요.
“우리 국민들에게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물론 직접적인 영향을 받기에는 전장(戰場)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역사적 친연성(親緣性)도 없으니까 실감이 안 나죠. 그거는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푸틴이 유라시아주의를 실현한다는 명분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거거든요. 대륙의 한끝에서 누군가가 뭔가를 잡아당기면 반대쪽에서는 반드시 거기에 상응하는 무슨 반응이 생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들을 너무 경시하는 것이 아닌가요?”
― 그래서 ‘이건 안 되겠다’ 싶으셨던 거네요.
“네. 우리가 이런 문제들을 정치인들이라든가 정치학자들에게만 맡겨놓을 것이 아니죠. 이 전쟁이 우리나라의 미래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분명하고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국민들의 무관심을 말씀하셨는데, 대한민국 국회의원들도 젤렌스키 대통령의 실시간 화상(畫像)연설 때 출석률이 아주 낮았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박수도 의례적으로 치고, 자리도 많이 비어 있었죠. 윤석열(尹錫悅) 정부는 자유민주주의 가치 동맹, 그러니까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국가 사이의 제휴나 연대를 강조하잖아요? 그런데 주요 정당은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국민의힘이 조금 더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민주당은 조금 유보적 태도를 취하는 것 같은데, 전체적으로 볼 때는 양당 모두 공감도가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지리적으로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이해는 가지만 우크라이나가 강대국의 침공을 받았다는 사실이 강 건너 불 보듯 할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죠. 이런 문제가 국제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공론화(公論化)하고, 의견을 표명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 되어야 우리 정치가 성숙하는 겁니다.”
― 우리나라가 세계 10대 경제 강국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위상에 걸맞은 국제적 행동을 보여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안타깝습니다.”
푸틴과 시진핑
― 전쟁과 관련해서 푸틴은 ‘우크라이나는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일부다’라고 연설했습니다. 주어를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바꾸어놓으면 모골(毛骨)이 송연(悚然)합니다.
“그렇죠. 혹시 1971년에 나온 존 레넌의 ‘이매진(Imagine)’이라는 곡 아십니까? ‘상상해봐 예컨대 폭력도 없고 전쟁도 없고 사유재산도 없는 이런 세상을 상상해봐 국가도 사라질 거야. 우리는 평화 속에서 살게 되고 세계는 하나로서 살아가게 될 거야’ 이런 가사가 나오는데, 제가 보기에 전 세계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전체주의(全體主義)거든요. 이 가사가 평화주의를 대변하는 것은 맞는데 이 평화주의를 너무 절대적으로 신봉하다 보면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현실 속에 있는 끊임없는 갈등과 폭력의 잠재성을 우리가 간과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런 의미에서 제가 보기에는 푸틴도 똑같은 말을 하고 있거든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하나다. 그래서 우크라이나와 하나였던 러시아가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해서 지금 전쟁을 벌인다’라고요.”
― 지금 중국도 동북공정(東北工程)이다 뭐다 역사 왜곡을 하고 있습니다. 고구려(高句麗)는 중국의 지방 정권이었다고 주장하고, 시진핑(習近平)이 트럼프를 만났을 때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라는 말을 대놓고 했습니다.
“요즘 상황과 오버랩되잖아요. 푸틴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시작하기 1년 전에 한 연설과 지금 중국이 한국을 대하는 태도, 또 국제사회에서 내뱉는 표현을 보면 유사점이 정말 많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히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꾸로 생각하는 것일까요?”
―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나라의 ‘진보적’인 사람들은 민족주의적 경향이 상당히 강합니다. 그러니까 남북한의 체제 차이를 인정하고 공존(共存)의 길을 모색하기보다는, 오히려 남북한이 체제에 상관없이 빨리 통일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죠. 정치적 낭만주의(政治的 浪漫主義)인데, 예를 들면 이런 거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성공적으로 실행해 부산에서 만주를 넘어 시베리아까지 기차를 타고 가자. 아주 낭만적인 이상을 이렇게 보여줍니다.”
“북한식 전체주의로 통일해도 상관없나?”
― 그건 남북 철도 연결 프로젝트 때 나왔던 슬로건 중 하나죠.
“그런데 저는 이 슬로건만 들으면 등골이 오싹해져요. 중국이라는 인구 14억의 강대국이 우리에게 미칠 수 있는 위협은 아예 보지 않는 것이니까요. 더 심각한 문제도 있죠. 체제의 차이라는 건 아무것도 아닙니까? 북한식 전체주의로 통일해도 상관없나요? 궁극적으로 우리는 어떤 가치를 실현하려고 하는 겁니까?”
―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가운데 어디를 지지하는지가 역사의 전개 방향을 정하는 기준점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죠. ‘당신은 어떠한 정치적 질서에서 살고 싶은 것인지 선택하라’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 일부 좌익 인사들은 전쟁 이야기만 나오면 ‘그럼 전쟁하자는 거냐?’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럼 굴종(屈從)해야 하나요? 전쟁하면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이 수없이 사라지는 건 맞아요. 하지만 평화를 이상적(理想的)으로 절대화하다 보면 현실을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현실에서는 ‘폭력적 상황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가’를 논해야죠. 우크라이나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진보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 평화지상주의(平和至上主義)라는 건, 말하자면 노예적 굴종도 평화로 착각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씀이죠?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은 지금 휴전(休戰)협정으로 인한 정전(停戰) 상태인데 실제로 대규모 무력 충돌이 없이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국민 모두의 감각이 좀 무뎌졌다고 할까요? 시오노 나나미가 《십자군 전쟁》 첫 문장에 이렇게 썼죠. ‘인간은 모든 문제가 너무 얽혀서 도저히 해결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때 단번에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전쟁을 선택한다.’ 이 문장의 주체가 김정은이라면요?”
“南北이 서로 다른 국가라는 것 인정해야”
― 저는 김정은이 전쟁을 선택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점입니다. 전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투키디데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쓰면서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전쟁은 폭력적이고 냉혹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위대한 스승이다.’ 말하자면 전쟁의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고려해야만 전쟁을 막고 평화 상태를 비교적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 남북한은 거의 80여 년 동안 분단된 상태로 있잖아요. 그동안 남한과 북한의 체제는 너무나 이질적(異質的)으로,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습니다.”
판이한 체제 속에서 오랜 세월을 살면, 사람들의 심성(心性) 구조도 달라진다. 물론 남북이 역사, 전통을 공유하고 같은 언어를 쓰는 같은 민족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런 측면에서, 서로 다른 민족 사이에서 갈등을 해결하는 것과는 다른 요소들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도 맞다. 그러나 통일이 과연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이룩해야 하는 민족사의 절대적 과업일까?
“그런데 우리가 통일이라는 것을 전면에 내세우면 협상력이 떨어집니다. 두 나라가 유엔에 동시 가입했으니까 국제법상으로는 독립된 별개의 국가입니다. 체제도 완전히 다르고요. 그렇다면 남북한이 현 체제를 유지하면서 서로 다른 국가라는 걸 인정해야죠. 그래야 국가 간의 충돌이 일어났을 때의 해결책으로 국제법을 적용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무시하고 민족우선주의(民族優先主義)로 나간다고 하면, 북한이 가끔 도발하는 적대적 행위에 대해서 우리가 올바로 대응할 수 없어요. 대한민국의 장기적 목표가 통일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중단기적으로 볼 때는 남북이 서로 다른 체제를 가지고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끼리’는 현실 부정하는 것”

▲이진우 교수는 북한이 주장하는 ‘우리 민족끼리’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진=조선DB
― 평화적으로 공존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독립적인 국가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씀이네요.
“나아가 국가 간의 관계가 모두 그렇듯이 여기에는 철저한 팃-포-텟(tit for tat·상대의 반응을 그대로 돌려준다) 원리를 적용해야죠. 상대방이 하는 대로 똑같이 대응하는 것만큼 강력하고 합리적인 방식이 없어요. 예를 들자면, 상대방이 평화롭게 우리를 대하면 우리도 평화롭게 대하는 거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여기에 덧붙여서 우리가 북한보다는 조금 더 잘사는 국가니까 지원할 수 있는 건 지원해주고 이렇게 해야죠. 북한이 우리에게 적대 행위를 공개적으로 해도 같은 민족이니까, 아니면 협상의 여지를 남겨두기 위해서, 또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위해서 묵인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어떤 국가든, 우리에게 적대 행위를 하고 위해(危害) 행위를 가하면 그것을 두 번 다시 하지 못하도록 우리도 거기에 대해 강력제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 국가의 힘이 균등할 때는 당연히 그렇게 가야 합니다만, 지금은 북한이 비대칭(非對稱) 전략 무기인 핵을 가지고 있잖습니까.
“그래서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조율해나갈 것인가가 매우 중요한 문제죠. 남북한이 잘 지내야 한다는 점에는 진보 세력이나 보수 세력이나 차이가 없잖습니까. 그런데 과거 진보 세력이 정권을 잡았을 때는 이데올로기에 편중돼서 남북한의 평화적인 관계와 통일을 이상화하고 절대화한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나요? 실질적인 관계는 개선된 것이 거의 없잖아요.”
― 그렇습니다. 문제는 ‘우리 민족끼리’라는 북한의 구호에 깃든 허구성인데 북한이 말하는 민족이라는 것은 김일성 민족, 그러니까 우리가 정의하는 민족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 민족끼리’라는 것은 강대국의 영향을 받지 말고 우리끼리 협상을 잘 하자 이런 이야기인데 이건 우선 현실을 부정하는 거예요. 오늘날 전 세계에서 독자적으로 영토와 주권을 지킬 수 있는 나라는 몇 되지 않습니다. 실질적으로 유럽만 하더라도 러시아가 가스와 석유를 무기화해 압력을 가하고 있잖아요? 유럽이 연합해 강력한 동맹 수준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보가 심각하게 침해됩니다. 전 유럽 사람이 이번에 이 점을 뼈저리게 느낀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저는 ‘우리 민족끼리’라는 것은 상당히 허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다음이 또 중요합니다. 우리 민족끼리 평화를 구축하고 공존하기 위해서는 남북이 어떠한 규칙을 합의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죠. 저한테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이 정치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가치거든요. ‘우리 민족끼리’라고 그래서 대한민국이 북한에 흡수된다거나 우리 체제가 바뀐다든가 이것은 용납 불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위 말하는 민족지상주의(民族至上主義) 또는 민족우선주의는 현실 문제를 푸는 데 있어서는 오히려 상당한 방해 요소가 된다고 봅니다.”
‘전쟁의 도덕적 계기’
― 다시 우크라이나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우크라이나전은 일주일이면 끝난다는 예상이 압도적이었는데, 의외로 장기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반격도 상당히 강하죠.
“처음엔 거의 모든 군사 전문가와 정치인이 ‘전쟁은 일주일을 넘기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죠. 시나리오가 5~6개 나왔는데 최악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완전히 흡수하는 것, 그다음이 우크라이나가 주권을 유지하지만, 크리미아반도와 서부 일부를 포기하는 것, 이런 과정에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괴뢰 정권을 수립할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예측이었거든요. 그런데 변수가 하나 생긴 거예요. 젤렌스키 대통령이 엄청난 지도력을 발휘한 거죠.”
― 초보 대통령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국민 통합을 위해 메시지를 던지는 방식이 놀랍습니다.
“대단한 능력자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민이 원하는 것과 국민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를 정확하게 포착해 그것을 표현하니까요. 지금 유럽에서는 젤렌스키를 윈스턴 처칠과 비교합니다.”
― 전쟁이 8개월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젤렌스키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줬습니까.
“전쟁을 바라보는 철학적 관점은 두 가지죠. 칸트적 관점과 헤겔적 관점이 있습니다. 헤겔은 이렇게 봅니다. 전쟁은 어떻게 보면 나쁜 것이고 악한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전쟁은 오히려 도덕적 계기가 될 수 있다.”
― ‘전쟁의 도덕적 계기’요?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가 심각하게 훼손당할 때, 여기에 대해 스스로 방어하고 저항하지 않으면 나중에 지렁이처럼 구둣발에 밟힐 수도 있다, 이런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국가는 자기를 지킬 힘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주권(主權)을 지키기 위해서는 전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 전쟁할 수 있는 능력은 어떤 겁니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실질적인 부분, 전쟁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무기의 힘입니다. 즉 군사력이죠. 두 번째는 국민이 국가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주권을 지키기 위해 내 한 몸 희생할 수 있다는 정신력입니다. ‘군사력 + 정신력 = 전쟁 수행 능력’입니다. 예를 들면, 과거에 페르시아 제국에 맞서 출전할 때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가 명언을 남겼죠. ‘우리 그리스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여기서 희생할 용기가 있다.’
그런데 푸틴 대통령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전쟁이 흘러가지 않으니까 부분 동원령을 내렸어요. 그 결과가 반전(反戰) 시위와 국외 탈출 러시입니다.”
― 서유럽으로는 바로 탈출할 수 없으니까 인접 국가로 탈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다고 가정을 합시다. 아니면 중국이 중간 해역의 경계선을 확대해 우리나라의 해상주권을 침해한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자, 전쟁이 발발했어요. 그러면 남한에 있는 시민들이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입대하고 예비군도 자원해 전장에 나가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다수의 국민이 도망가면 그건 국가가 아닌 거죠. 그건 국가의 도덕적 체계와 기반이 무너졌다는 뜻이거든요.”
― 이런 말씀을 들으니, 전쟁이 국민 의식을 새롭게 만드는 면이 많네요.
“우크라이나 국민은 이번 전쟁 전에 크리미아 사태를 이미 겪었죠. 자발적 굴종을 통한 평화로운 삶도 생각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환상이라는 걸 깨달은 겁니다. 우크라이나는 도덕적 계기가 강화되었고, 러시아는 오히려 도덕적 기반이 약화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어떻게 귀결될까

▲9월 이후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이 점령해온 동부 지역을 차례로 탈환하고 있다. 사진=AP/뉴시스
― 지금은 양쪽 다 자국의 승리를 장담합니다.
“국가 간의 전쟁은 현실적인 이해관계에 따라서 조정이 됩니다. 지금 러시아가 자기들이 실질적으로 정복하고 있는 돈바스 지역에서 국민투표를 하지 않았습니까? 압박하는 거죠. 여기만 양보하면 휴전하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서구에서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압박이 있습니다. ‘전쟁이 길어지면 유럽에 있어 에너지 문제, 식량 문제가 심각해지니까 동부 일부를 양보하는 선에서 휴전하면 어떻겠는가’, 뭐 이런 겁니다. ‘휴전하면 영토를 공식적으로 양보하고 포기한 것은 아니니까 우크라이나의 국가적 체면도 사는 것이고, 러시아도 자기가 원래 원했던 건 이것이다’라는 명분으로 후퇴할 수도 있다는 말이죠.”
― 한반도의 상황과 비슷해지는 거네요.
“유라시아의 동쪽 끝에는 한반도가 있습니다. 북한은 러시아, 중국과 붙어 있죠. 대한민국은 자유주의 진영과 연대(連帶)하고 동맹(同盟)하지 않으면 존립이 불가능합니다. 선택이 아니라 필수예요. 그래서 우크라이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친(親)서방으로 기울 겁니다. 그러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또는 중국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유라시아 대륙과 서구 자유민주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유럽 지역을 가르는 경계선이 됩니다. 그런데 휴전 상태로 경계선이 된다는 거죠. 앞으로도 잠재적 갈등 요인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겁니다.”
“정치는 연출”

▲전쟁 발발 이후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녹색 군용 셔츠를 입고 수도 키이우에 남아 항전을 이끌고 있다. 사진=우크라이나 대통령실 유튜브 캡처
― 젤렌스키 대통령이 국방색 전투복을 입고 나와서 연설도 했고 미국이 망명을 권유했을 때 ‘나에겐 차량이나 비행기가 아니라 무기가 필요하다’라고 하는 등, 명연설을 여러 차례 하면서 독전(督戰)에 성공했습니다. 러시아가 내전으로 규정한 이 전쟁을 국제전으로 변모시킨 것도 젤렌스키죠.
“젤렌스키는 탁월한 연출력을 가지고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유명한 여성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정치적 행위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 자기의 의견, 가치, 이념을 보여주는 공적(公的)인 연출 행위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정치는 연출입니다. 왜냐하면 국민에게 보여주는 이미지를 통해서 국가의 가치가 제고(提高)되거나 더 강화될 수도 있기 때문이죠. 이것을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이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처칠이었고 지금은 젤렌스키라는 겁니다.”
― 어떤 점이 특히 탁월한 연출이었습니까.
“국방색 옷을 입고 나왔잖아요. 거기엔 아무런 장식도 없습니다. 아마 그냥 섞어놓으면 일반 시민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을 거예요. 그런 복장을 입고 아주 분명한 말로 표현하거든요. 이것이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두 가지 결과를 가져왔잖아요. 하나는 국제사회를 끌어들인 거죠. 러시아가 조지아와 영토 분쟁을 벌였을 때, 크리미아반도를 침공했을 때 NATO와 유럽 공동체는 의미 있는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러시아가 침략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러시아와 잘 지내야 한다. 뭐 이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거든요.”
― 이번엔 유럽 공동체의 대응이 달랐습니다.
“푸틴은 이번에도 우크라이나 침공을 일련의 내전처럼 포장했죠. 젤렌스키는 이 전쟁을 러시아, 중국 등 권위주의 세력과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 세력의 대결로 부상시켰습니다. ‘국제전’으로 전쟁의 성격을 규정했고, 이런 인식을 세계에 퍼뜨려서 강력한 외부의 군사적 지원이 일어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건 누가 봐도 젤렌스키의 공이죠.
다음으로는 홍보 효과가 뭔지를 알아요. 대통령궁에 앉아 방송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 나가 이야기하죠. 대외적으로 우크라이나가 독립적인 주권국가라는 것을 알리고, 대내적으로 국민을 통합했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수행하는 힘의 구심점(求心點)이 됐다는 점에서 젤렌스키를 빼놓고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이야기할 수 없어요.”
“할 말은 할 줄 알아야”
― 냉전 시절 소련의 브레즈네프가 제한주권론(制限主權論)을 주창(主唱)했죠. 각 위성국의 민족적 아이덴티티는 인정을 해주겠지만, 정치적 독립성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이데올로기를 내놨습니다. 중국도 대한민국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건 혹시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또 생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많은 분이 구한말(舊韓末)의 정치적 상황과 현재 상황을 비교하죠. 그때나 지금이나 강대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조건은 변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다릅니다. 대한제국은 국가로서 존립할 수 없는 상태였고 2022년의 대한민국은 세계 10대 강국입니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점이죠.”
― 어떤 겁니까.
“세계 10위권의 경제력·군사력을 가지고 있으면 국제무대에서 그 위상에 맞는 정치적 행위를 할 줄 알아야죠. 그런데 그걸 못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합니다. 군사력도 선진국이고 경제력도 선진국인데 정치력은 아직 후진국이에요. 우리에겐 국제사회에 어필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적·역사적 무기가 있습니다. 동북아 3국 중에서 자력으로 민주화를 이룩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합니다. 이런 강점을 발전시켜야죠.”
― 구체적 방안을 말씀해주십시오.
“예를 들자면, 중국에 대해서 할 말은 할 줄 알아야 해요. 문재인 전 대통령이 중국에 가서 10끼 중 8끼를 혼자 들었습니다. 저는 불쾌하고 불편했어요. 경제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데, 중국과 경제적으로 밀접한 나라가 우리나라만이 아닙니다. 독일은 신장(新疆)위구르 사태에 대해 할 말은 하거든요. 할 말은 하면서도 자기의 경제적 이익을 취할 것은 취하고 협상할 거 협상하고 타협할 건 타협하는데 우리나라는 침묵하는 경향이 있어요. 무조건 중국과 잘 지내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듯합니다.”
― 그런 생각이 오히려 갈등을 키우고, 궁극적으로는 굴종 상황, 나아가 전쟁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주권국가라면, 어느 정도 선에서는 할 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만약의 경우, 전쟁이 벌어졌을 때도 할 말은 하게 되는 겁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신경을 건드렸기 때문에 전쟁이 났다’면서, 우리도 중국의 심기를 건드리거나 자극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분들이 있어요. 재미있는 것은, 뒤에 꼭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를 붙인다는 거죠. ‘자국의 이익을 위한다’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료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에 대해 입장 분명히 해야”
― ‘자국의 이익’은 뭡니까? 근본적인 질문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추상적으로 따지면, 주권을 안정시키는 게 자국의 최대 이익이겠죠. 주권을 지킨다는 건 정치력과 외교력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질주의적인 관점에서 보면 경제력입니다. 경제라는 것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거든요. 우리와 중국은 서로 의존합니다. 일방통행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의 국익(國益)을 극대화하는 방안은 중국이 우리에게 더욱더 의존하도록 만드는 겁니다. 중국이 거대한 시장인 건 맞아요. 그 시장이 자유롭게 교류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드는 것은 그래서 경제인들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인들의 책무입니다. 정치력과 외교력과 협상력의 문제인 거예요.”
― 중국은 경제 문제와 정치 현안을 연동합니다. 사드(THAAD) 배치를 두고 경제 보복을 했죠.
“엄청난 보복에 대해서 우리가 이제까지 제대로 항의한 적이 있나요? 중국에 대해서는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국민의힘이나 윤석열 대통령이 지지자들이 기대한 것만큼 잘하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과거 정권이 잘못했던 방향을 수정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 하원 의장 패싱은 문제가 많습니다.”
― 왜 그렇습니까.
“대통령실에서 뭐라고 하든, 국민은 ‘중국 눈치 봤네’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동안 중국 눈치 봐서 우리에게 떨어진 이익이 도대체 뭐가 있습니까? ‘이런 것들을 좀 총체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동북아 균형자론은 불가능한 수사”
― 윤석열 정부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좀 더 조언해주신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첫 번째는 지지자들이 왜 윤석열 대통령을 뽑았는지를 생각하라는 겁니다. 전 정부가 설정한 방향이 그르다, 그러니까 방향 수정에 대한 국민적 요청이 있었다고 저는 봅니다. 그러면 두 번째, 이 방향 수정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전 정부는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우리가 적절한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는 비현실적인 망상을 가졌었어요.”
― 노무현 대통령 때 이른바 ‘동북아 균형자론(東北亞 均衡者論)’이 시초입니다.
“그건 불가능한 수사(修辭)입니다. 우리에겐 그런 독자적인 능력이 없어요. 윤석열 지지자의 바람은, 우리가 미국과 동맹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중국과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달라는 것 아닐까요? 중심점을 미국에 두고, 자유민주주의 세력과 연대하라는 거죠.”
― 그렇다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을 통해 윤 대통령이 어떤 교훈을 얻기를 바랍니까.
“첫 번째는 본인이 지향하는 정치적 목표를 분명하고 명료하게 제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정치적 목표’가 구체적인 정책 단계까지 진행하면, 가시적으로 성과가 납니다. 그럼 설득력도 생기죠. 지금은 임기 초반이니까 그 단계까지는 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방향은 보여야죠. ‘나는 이쪽으로 가고 있다’라는 방향 제시가 좀 더 명료하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는 능력과 추진력의 관계입니다. ‘추구하는 방향은 옳은 것 같은데, 저 사람이 저걸 과연 해낼 수 있을까?’ 국민들이 이렇게 의구심을 품잖아요. 그러니까 ‘이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 나는 이런 준비를 하고 있다’라는 힘과 의지, 능력을 분명히 보여줘야 합니다.”
“젤렌스키, 쓸데없는 말 하지 않아”
― 그런데 힘과 능력을 모든 분야에서 보여줄 수는 없잖습니까.
“그러니 ‘선택과 집중’을 해야죠. 힘이 분산되면 명료함이 사라집니다. 정치·외교·군사·경제·교육, 그러니까 국정(國政)의 수많은 분야가 있잖아요. 모든 부분을 내가 다 수정하거나 더 낫게 할 수는 없지만, 몇 가지는 내가 분명하게 바꿔놓겠다. 이런 구체적인 능력과 비전을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세 번째는 ‘젤렌스키에게 배워라’입니다. 강력한 이미지를 만들고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능력입니다. 지금 윤석열 대통령은 거꾸로 가고 있어요. 부정적인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프레임에 걸리면, 그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상당한 에너지를 소비해야 합니다.”
― 정치력의 낭비랄까요, 정치적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말씀이네요.
“그렇죠. 최근 사건이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엘리자베스 여왕 장례식에 다녀오고 유엔 연설하고 몇몇 국가 정상과 정상회담을 하고 돌아왔잖아요? 그러면 그것이 내가 지향하는 정치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설득력 있고 강하게 제시해야죠. 그렇게 해도 시원찮은 마당에 지금 구체적인 내용은 완전히 묻혀버리고 표면에 있는 이미지만 떠돌아다닙니다. 그것도 부정적으로요. 이런 일이 거듭되면 트라우마가 생겨요. ‘외교 순방할 때마다 이거 또 뭐가 터지는 것 아니야? 사고 치는 것 아니야?’ 지지자조차 이렇게 우려하기 시작하면, 이러한 굴레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는 거죠.”
― 젤렌스키의 성공 요인은 무엇입니까.
“정치적 연출력이라는 것은, 연기와 이미지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가 엄청나게 중요한 겁니다. 그 메시지와 이미지가 결합할 때 엄청난 힘을 발휘하거든요.
젤렌스키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역사적인 명연설을 했죠. ‘너희가 우리에게 가스를 끊겠다고 했느냐? 가스 없이 겨울을 보내라고 했느냐? 우린 춥게 지낼 수 있다. 너희 가스 없이 견딜 수 있다.’ 메시지가 간단명료하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이 분명합니다. 이런 표현력이 윤 대통령에게 있어야 하는데, 지금 그게 없다는 겁니다. 이미지가 여기서 더 훼손되면 심각한 비용을 치러야 회복이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전쟁 대비해야 전쟁 막을 수 있다”
― 윤 대통령의 메시지가 명료하지 않은가요?
“지금 조각(組閣)도 완성하지 않았잖아요? 장관 중에 비어 있는 자리가 있죠. 그러니까 정책이 무엇인지가 아직 국민에게 와닿지를 않아요. 이건 조금 늦어진다고 합시다. 그래도 자기의 의지를 구체적인 정책으로 제시하기 전에 방향은 명료하게 보여줘야죠. 그리고 그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줘야 합니다. 국민을 통합할 수 있을 정도의 메시지를 대내외에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장치와 문화를 만들지 않으면 윤 대통령이 상당히 힘들어질 것 같아 걱정입니다.”
― 알겠습니다.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건 착각이군요.
“한반도의 경우 6·25전쟁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남북은 한민족이니까 더 이상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죠.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당위(當爲)가 당연한 현실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향도 있고요. 하지만 인간 사회에서 갈등이 당연한 것처럼 국제 관계에서도 전쟁은 언제나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각오를 다져야 전쟁을 막고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를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어요. 전쟁에 대비해야 전쟁을 막을 수 있습니다. 착각에서 벗어나야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고 현실을 제대로 봐야 해결책이 떠오릅니다.”⊙
11.06 빠르면 5년 내 美·中 전쟁 결판난다… 바이든·시진핑의 전략 보고서 보니
바이든의 美 국가안보전략(NSS) vs 시진핑의 中공산당 업무 보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자국의 국가 전략과 국정(國政) 운영 방침을 밝혔습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AP연합뉴스AP뉴시스
2022년 10월 12일 미국 백악관이 공개한 국가안보전략보고서(National Security Strategy 2022·이하 NSS)와 같은달 16일 중국공산당(중공·中共) 제20차 당대회에서 발표된 시진핑 총서기의 업무보고 문건입니다.
미국 행정부가 출범 때마다 내놓는 최상위 전략문서인 NSS는 군사·외교·경제 등 전 분야의 국가전략을 포괄합니다. 당초 올해 초 발간 예정이었으나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반년 넘게 늦어졌습니다.
▲미국 백악관이 2022년 10월 12일 발표한 '국가안보전략 2022'/백악관 홈페이지
이 보고서는 바이든 행정부 출범 직후인 2021년 3월 나온 A4용지 24쪽 분량의 ‘NSS 중간 지침서(Interim National Security Strategic Guidance)’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습니다. 분량이 48쪽으로 늘어난 게 다릅니다.
시진핑이 1시간44분(104분) 동안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직접 발표한 보고 문건의 제목은 ‘중국 특색사회주의의 위대한 깃발을 높이 들고 전면적인 사회주의 현대화국가 건설을 위해 단결·분투하자’(高擧中國特色社会主義偉大旗幟爲全面建設社会主義现代化国家團結奮鬪)입니다. 전문(全文)만 72쪽으로 5년 전 제19차 당대회 보고문 보다 네쪽 더 늘었습니다.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2022년 10월 16일 오전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 개막식에서 업무보고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시진핑 총서기의 20차 중국공산당 대회 업무 보고 제목과 첫 페이지
◇4일 간격...‘미·중 전쟁’ 선포
나흘 간격으로 거의 동시에 나온 NSS와 중공 당대회 업무 보고문은 미·중(美中) 전쟁이 불붙는 시점에서 세계적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두 문서에 두 나라 최고 지도부와 엘리트들의 심중(心中)과 세계관, 국가 전략이 생생하게 담겨 있어서입니다. 미중 전쟁의 최전선(最前線)에 있는 한국도 주목하며 철저하게 해부해야 할 문건이 분명합니다.
바이든은 NSS 앞부분에서 “탈냉전 시대는 확실히 끝났다. 지금 우리는 변곡점(an inflection point)에 서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현재의 국제 체제와 미국에 도전하는 유일한 국가로 ‘중공’(People’s Republic of China·PRC)을 지목했습니다.
“중공은 국제 질서를 재편하려는 의도와 그것을 할 수 있는 경제적, 외교적, 군사적, 기술적 힘을 모두 가진 유일한 경쟁자(The PRC is the only competitor with both the intent to reshape the international order and, increasingly, the economic, diplomatic, military and technological power to do it)이다”(8쪽)라고 단언한 것입니다.
▲<국가안보전략(NSS) 2022>는 총48쪽 가운데 앞부분인 8쪽에서 "미국의 비전을 가장 긴박하게 위협하는 도전은 중국, 러시아 등 권위주의적 독재 국가들에서 나온다"며 가장 강력한 도전자로 중국을 꼽았다./NSS
NSS는 우크라이나 침공국인 러시아를 ‘쇠퇴하는 호전국가’로 평가하고, 미국의 궁극의 적수(敵手)는 ‘인도태평양을 넘어 세계로 세력권 확장 야심’을 가진 중국이라며, “중국은 미국의 가장 중대한 지정학적 도전(America’s most consequential geopolitical challenge)”이라는 표현(11, 12쪽)을 두 차례 이상 썼습니다.
◇“향후 5년이 관건”... 1차 승패 판가름
시진핑은 당대회 보고문에서 최근 5년의 업무 성과를 밝힌 뒤 향후 5년 중공의 목표를 이렇게 천명했습니다.
“중국공산당의 중심 임무는 중국 인민을 단결하고 인도해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强國)을 전면건설해 두 번째 100년(第二個百年) 목표를 실현하는 것이다. 중국식 현대화로써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전면추진해야 한다.”(25쪽)
여기서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이란 미국보다 강한 세계 1위 국가를 뜻합니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은 시진핑의 10년 연속 국정 슬로건인 중국몽(中國夢)의 지향점입니다. 시진핑은 이어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 전략을 두 개 시간대로 나누어 달려 나가자(安排是分兩步走)”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일인 2021년 7월1일 베이징의 톈안먼(天安門) 광장 상공이 오색 풍선으로 가득하다./로이터연합뉴스
“2020년부터 2035년까지 사회주의 현대화를 기본적으로 실현한다. 2035년부터 21세기 중엽까지 중국을 부강한 민주문명과 아름답고 조화로운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으로 건설한다.”(24~25쪽)
시진핑은 이렇게 밝혔습니다.
“2035년까지 우리의 경제 실력, 과학 실력, 종합적인 국력을 대폭 향상하고 1인당 국내총생산(GDP)를 큰 폭으로 늘려 새로운 단계로 진입해 중진국 수준에 도달하고, 첨단 과학기술 자립자강 실현으로 혁신형 국가의 선두 반열에 진입하겠다. (중략) 사회주의 현대화를 실현한 토대 위에서 우리들은 계속 분투해 21세기 중엽까지 우리나라를 종합 국력과 국제 영향력에서 세계 각국을 선도하는(領先的)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으로 만들어야 한다.”(25~26쪽)
▲시진핑은 20차 당대회 보고문건 25쪽에서 "중국은 21세기 중엽까지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이는 신중국 건설 100주년이 되는 2049년까지 중국이 미국을 능가하는 세계 1위 패권 국가가 되도록 하겠다는 야심이다./송의달 기자
2012년 중국공산당 총서기에 처음 선출된 시진핑은 ‘두 개의 100년(兩個百年) 목표를 세웠습니다. 하나는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는 2021년까지 ‘전면적인 샤오캉(小康·모두가 편안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림) 사회’를 달성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공산당의 중국 통치[신중국] 100주년인 2049년까지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을 완성한다는 것이었죠.
▲미국 워싱턴DC 소재 싱크탱크인 허드스연구소의 마이클 필스버리 '중국 전략 센터(Center on Chinese Strategy)' 소장이 2016년에 쓴 <100년의 마라톤>. 그는 이 책에서 "1949년 건국한 중공이 2049년 미국을 대체할 슈퍼파워로 성장하기 위해 긴 여정을 달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시진핑이 미국을 능가하는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 실현을 다짐한 2049년이다./Amazon.com
◇2035년 거쳐 최종 승패는 2049년
중국은 공산당 창당 100주년인 지난해 ‘샤오캉’을 달성했습니다.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GDP)은 지난해 1만2500달러로 최근 5년 사이에 러시아·브라질·터키·멕시코·아르헨티나를 제쳤습니다. 14억 인구를 가진 나라로서는 기적(奇蹟)에 가까운 성과입니다.
시진핑은 보고문건에서 “이제는 두 번째 백년 목표인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 건설을 향해 분투하며 진군(進軍)할 시점”이라며 “지금부터 5년이 사회주의 현대화 국가 전면 건설을 시작하는데 가장 중요한 관건(關鍵) 시기”(26쪽)라고 했습니다.
미국과의 대결 최종 승리 시점을 2049년으로 잡고 있는 중국 수뇌부가 ▲2035년까지 승리를 위한 토대를 닦고, ▲향후 5년을 첫 번째 결정적 시기로 보는 ‘전략 시간표’를 짜놓았음을 대내외에 알린 것입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NSS에서 향후 10년의 중요성을 수 차례 밝혔습니다. “우리는 지금 미국에게 결정적 시기의 초입에 있다. 앞으로 10년은 결정적 시기가 될 것(the next ten years will be the decisive decade)”이라는 표현을 그는 네 차례(6, 12, 24, 48쪽) 이상 썼습니다.
▲2022년 10월 26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로이트 오스틴 장관 등 미국 국방 수뇌부와 회의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바이든은 지난달 26일 미국 국방 수뇌부와의 면담에서도 “미국이 중국과의 대결에서 ‘결정적인 10년’을 앞두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가 ‘결정적 시기’라고 밝힌 ‘10년’은, 시진핑의 ‘지금부터 2035년까지의 12년’과 거의 일치합니다.
중국과의 경쟁이 10년 이상 가는 구조적이고 전면적인 것이라고 미국이 명시한데 대해, 중국은 사회주의 현대화국가 달성을 ‘새로운 정복 과정(新征程)’이라고 표현(1, 22쪽 등)하며 불퇴(不退) 의지를 밝혔습니다.
2018년 7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고율(高率) 관세 부과로 시작된 미·중 대결은 2050년 무렵까지 진행될 ‘30년 전쟁’입니다. 지난달 두 문건을 통해 볼 때, ‘30년 전쟁’의 승패 판정이 빠르면5년 이내에, 조금 길게는 10년 이내에 이뤄질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중국 전문가인 할 브랜드와 마이클 벡클리는 2022년 8월에 낸 저서 <Danger Zone: The Coming Conflict with China>에서 "미·중 전쟁은 마라톤이 아닌 단거리 경주이며, 그렇기 때문에 2020년대에 최대 위험이 닥칠 수 있다"고 했다./인터넷 캡처
두 나라는 ‘시간과의 싸움’을 하고 있으며, 이 시간 싸움에서 게으르거나 기회를 허송한 국가는 상대방과의 전쟁에서도 패배하게 될 것입니다. 바이든은 이런 맥락에서 NSS의 마지막 문장을 “이제 낭비할 시간이 없다(There is no time to waste)”라고 했습니다.
총체적인 국운(國運)을 건 외나무다리 승부에 양국 수뇌부는 경각심을 갖고 긴장하는 모습입니다. 5년 전 19차 중공 당대회 보고에서 54회 등장했던 ‘안전’이라는 단어가 올해는 91회로, ‘도전’은 7회에서 11회로, ‘위험’은 8회에서 16회로 각각 늘어난 게 증거입니다.
올해 10월 12일 백악관에서 1시간 넘게 NSS를 직접 브리핑한 제이크 설리번 보좌관은 다음날인 10월 13일 워싱턴DC 소재 조지타운대에서 ‘설리번 보좌관의 대화’ 행사에 참석, 전문가들에게 NSS 관련 설명을 또 다시 했습니다. 미국 국가 엘리트들도 절박한 자세로 이 문제에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2022년 10월13일 워싱턴DV 소재 조지타운대 국제관계대학원(Georgetown University School of Foreign Service)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해 '국가안보전략(NSS) 2022'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조지타운대 홈페이지
◇자유의 미국 vs 1인 독재의 중공
두 나라 문건에는 상반되는 것과 비슷한 내용이 섞여 있습니다. 72쪽 분량의 중공 보고문건 어느 곳에서도 ‘자유’ ‘인권’ ‘개인’이라는 표현은 없습니다. 미국이 NSS에서 “우리의 국가 전략 목표는 자유롭고, 개방되고, 번영하고 안전한(a free, open, prosperous and secure) 국제 질서 유지”라고 못박은 것(7,8,10쪽)과 대비됩니다.
▲미국의 최우선 가치는 '자유'이다. 사진은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
그 대신 중공은 ‘단결’, ‘공산당 영도(領導)’, ‘분투(奮鬪)’를 입이 아플 정도로 많이 외쳤습니다.
“중앙권위와 당의 집중통일영도를 견고하게 수호한다. 공산당은 전체 인민이 의지할 수 있는 최고의 뼈대(主心骨)이다. 단결분투의 강대한 정치응집력을 확보해야 한다. 단결만이 힘이고 단결만이 승리를 낳을 수 있다.”(27, 65,71쪽)
여기서 ‘당 중앙집중통일영도’는 시진핑 총서기의 당내 핵심 지위와 시진핑 1인 권력 집중을 의미합니다. 이는 20차 당대회 당장(黨章)에 ‘두 개의 수호(兩個維護)’가 반영된 결과인데, ‘인민의 영수(領袖)’로서 시진핑 총서기의 절대적 지위를 명문화한 것입니다.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자신의 측근 인사 4명을 최고 지도부에 새롭게 진출시키며 집권 3기를 공식 출범시켰다. 2022년 10월 23일 발표된 7인의 중국 최고 지도부(중앙 정치국 상무위원회)에는 시 주석과 함께 리창·차이치·딩쉐샹·리시 등 시 주석의 측근 그룹인 '시자쥔(習家軍)' 인사들로 모두 채워졌다./연합뉴스
이번 당 대회부터 중국 최고 지도자 1명과 다른 구성원 사이의 관계는 마오쩌둥, 덩샤오핑 시대와 같은 ‘군신(君臣·임금과 신하) 관계’로 바뀌었습니다. ‘집단지도체제’의 다양성·유연성을 폐기한 중공이 단일대오 아래 종신집권까지 가능한 1인 독재 통치 노선을 확정한 것입니다. 이로써 독재와 전체주의 확산 방지를 소명(召命)으로 삼는 미국과의 격렬하고 전면적인 대결은 더욱 피할 수 없게 됐습니다.
◇제3국 존중하는 미국 vs 포용않는 중국
제3국에 대한 두 나라의 태도도 상반(相反)됩니다. 중공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수십 차례 적시했지만 다른 민족이나 나라에 대한 포용적 배려는 일언반구(一言半句)도 하지 않았습니다.
▲시진핑 총서기의 제20차 중공 당 대회 업무 보고 소식을 전한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인터넷 캡처
72쪽 보고문 전체가 ‘중화민족 제일주의’를 선전선동(宣傳煽動)하는 문구로 가득차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미국은 이와 달리 다른 나라의 자율성(autonomy)과 선택의 자유를 인정한다고 강조했습니다. NSS 보고서의 대목입니다.
“우리(미국)는 모든 나라가, 인구 규모와 국토 면적, 국력의 크기와 상관없이, 자국의 국익을 충족시킬 수 있는 선택을 하는 자유를 행사하는 걸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이것은 강대국이 아닌 나라들에게도 자율성과 권리를 인정하고 보존해주는 미국과 이를 인정하지 않는 우리의 경쟁자들(중국과 러시아를 뜻함)과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9쪽)
NSS는 “설사 모든 이슈에서 미국과 동의하지 않거나 민주적 제도를 수용하지 않더라도 법에 기반한 국제체제를 지지하고 거기에 의존하는 국가들은 미국과 비전을 공유한다고 보며, 그들과도 함께 연합을 구축할 것이다. 우리는 다른 나라 정부와 사회가 미국이 안전해지기 위해 미국의 이미지대로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고 믿지 않는다(We do not believe that governments and societies everywhere must be remade in America’s image for us to be secure·8쪽)”고 했습니다.
▲미군이 중국과 인도 국경 분쟁 지역에서 벌어지는 합동 군사 훈련에 참가한다는 소식을 전한 미국 CNN방송의 2022년 8월6일 보도/CNN
미국은 “미중 대결에 따른 여러 나라의 불안을 의식하고 있다”며 이렇게 밝혔습니다.
“일부 국가들은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큰 독재국가들과의 경쟁을 벌이는데 대해 불안해 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염려를 이해한다. 우리 역시 이들과의 경쟁이 격화돼 경직된 블록(rigid bloc)으로 세계가 나눠지는 상황을 피하고 싶다.(중략) 우리는 전략적 경쟁의 프리즘만으로 세계를 보고자 하는 유혹을 물리치고자 한다. 우리는 세계 각국과 그들이 원하고 바라는 조건에서 대화하고 협력하길 원한다.” (9, 12쪽)
◇민주주의 저력과 회복력
미국 지도자들이 ‘민주주의’의 저력(底力)과 강한 복원력(復原力·resilience)을 확신하는 부분도 주목됩니다. NSS는 이렇게 밝혔습니다.
“이들 경쟁자들(중국과 러시아 같은 독재 국가)은 민주주의가 독재정치보다 약하다고 잘못 믿고 있다. 한 나라의 힘은 그 나라의 국민들에게서 샘솟는다는 것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미국인들은 창조적이며 자기회복력이 강하다. 미국 군사력은 압도적이며 우리는 그것을 유지할 것이다. 미국을 끊임없이 재상상토록 만들고 미국의 국력을 새롭게 하는 것은 우리의 민주주의이다.(It is our democracy that enables us to continually reimagine ourselves and renew our strength)” (5쪽)
▲1989년 4월 22일, 톈안먼 광장, “베이징의 봄.” 후야오방 전 공산당 총서기의 서거를 애도하는 군중이 정치 자유화와 부패 척결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사진=Catherine Henriette/AFR
바이든을 포함한 미국 행정부의 파워 엘리트들은 “우리가 직면한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미국은 더욱 강력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될 것”임을 거듭 천명했습니다.
“미국은 국내와 해외에서의 많은 도전들을 국내 개혁과 부흥을 촉진하는 기회로 바꾸는 전통을 가져왔다. 이것이 과거에 제기된 수많은 미국 쇠퇴 예언이 번번이 잘못되고, 미국의 패배에 베팅하는 게 항상 틀린 선택이 된 이유이다. 우리가 세계 공통의 도전을 해결하기 위해 능동적인 비전을 품고, 우리 민주주의의 역동성과 경쟁국들을 물리치려는 결연함으로 무장할 때, 우리는 항상 성공해 왔다.(We have always succeeded when we embrace an affirmative vision for the world that addresses shared challenges and combine it with the dynamism of our democracy and the determination to out-compete our rivals)” (8쪽)
미·중 두 나라는 지금 정면 충돌을 향해 서로 달려오는 기관차와 같습니다. 그런데 두 나라의 판이(判異)한 정체성과 가치관은 한국이 어느 나라와 더 가깝게 지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시금석(試金石)입니다.
◇‘닮은꼴’ 美·中 경쟁력 전략
우리의 생존에 피부로 더 와닿는 것은 미·중이 자국 경쟁력 유지 및 강화 방법으로 제시한 전략 부분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두 나라의 목표 달성 방법은 ‘닮은꼴’입니다. 더 이상 민간에만 맡기지 않고 정부가 앞장 서서 강력한 국가 지원 체제를 만들어 경쟁력을 높아겠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NSS에서 중국을 제압하는 방법으로 ▶국내 경쟁력(혁신, 민주주의, 회복력 등 포함) 기반에 투자(invest) ▶동맹·우방, 파트너 국가들과의 연대(align) ▶중국과의 직접 경쟁(compete) 등 세 가지를 꼽았는데(24쪽), 이 가운데 핵심은 투자입니다. 바이든의 말입니다.
“민간 부문과 개방된 시장은 우리들의 국력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 맡겨만 놓아서는 급속한 기술변화 속도와 공급망 붕괴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 중국과 다른 국가들의 비(非)시장적 방법 남용(濫用) 등을 감안할 때, 정부 주도의 전략적 공공투자(strategic public investment)가 21세기 글로벌 경제에서 강력한 산업 혁신의 뼈대가 된다.” (14쪽)
미국이 100여년 만에 처음 전역에 초대형 인프라 투자를 결정하고 2800억달러 규모의 ‘반도체 및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 2022)’과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을 통과시킨 것부터 이런 국가전략적 고려에서 이뤄졌다고 NSS는 밝혔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2022년 8월9일 '반도체 및 과학법(the CHIPS and Science Act of 2022)에 서명한 뒤 카말라 해리스 부통령과 낸시 펠로시 연방하원의장 등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조선일보DB
“가장 효과높은 공공투자(the most impactful public investments)는 국민들에게 하는 투자이다. (중략) 고급 대학교육, 특히 과학·기술·공학·수학 등 4개 분야(STEM)에서 고급 교육을 실시하겠다. 강력한 노동력이 미국 국력과 부흥을 지탱하고 우리의 강점을 더 늘릴 것이다. (중략) 우리는 미국 국민들이 더욱 번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한편, 미국이 전 세계의 유능한 인재들이 몰려오는 곳으로 계속 만들 것이다.” (15~16쪽)
미국은 정부가 주도하는 산업 정책과 인재 육성 및 혁신 전략을 국가안보 전략의 골간으로 내걸었는데, 중공도 당대회 보고문건에서 놀라울 정도로 똑같은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 달성 방법을 내놓았습니다. 양국이 서로 짠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2020년부터 2022년 10월말까지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분야 대결
시진핑 총서기는 총15개 큰 단락으로 구성된 보고 문건에서 3번째 단락에서 ‘중국식 현대화(中國式 現代化)’와 ‘중국식 현대화 강국’이라는 국가 비전을 제시했고, 바로 다음인 4~5번째 단락에서 곧장 경제 성장, 기업 경쟁력, 연구개발, 인재 육성 등을 언급합니다.
“고품질 발전(高質量發展)은 사회주의 현대화국가 건설의 으뜸가는 임무이다. 발전은 중국공산당의 집정 및 흥국(興國)의 최우선 순위에 있다. 물질과 기술 기초가 견실하지 못하면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 건설은 불가능하다.” (29쪽)
시진핑은 이어 “현대 산업체계를 건설해야 한다”면서 “제조 강국, 품질 강국, 우주 강국, 인터넷 강국, 디지털 중국을 만들어야 한다. 국제경쟁력 있는 디지털 기업 집단을 갖추고 탁월한 우위를 유지해야 한다”(31쪽)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21세기형 첨단 산업과 대기업들의 육성에 사활적 노력을 쏟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는 “중국식 현대화 건설이 고급 기술 인재 확보·지탱에 달려있다. 국가를 위한 인재 육성, 인재의 자주배양 능력 전면 제고(爲國育才, 全面提高人才自主培養質量)가 필요하다. 첨단분야의 창조적 인재를 양성하고 천하의 영재를 모아 그들을 활용해야 한다(着力造就撥尖創新人才, 聚天下英才而用之)”고도 했습니다.(33~34쪽)
▲중국 정부로부터 불법 연구비를 받은 사실을 숨기다 2020년 1월말 미국 연방수사국(FBI)에 전격 체포된 찰스 리버(Charles Lieber) 미국 하버드대 화학-생물화학과 학과장. 그는 중국의 해외 인재 흡인 및 고급 기술 절취 공작에 희생된 석학급 과학자이다./조선일보 DB
◇핵심은 산업·기업·기술·인재 경쟁
시진핑의 이어지는 말입니다.
“세계 수준의 기술 및 과학자, 전략 과학자, 일류 과학기술 엘리트를 끌어모아야 한다. 우리는 진심으로 인재를 사랑하고, 온 마음을 다해 인재를 키우고, 인재를 이끌어 들이고, 정성을 다해 인재를 쓰고 목마른 사람처럼 현자를 구하고, 격식에 매이지 말고 각방면의 우수한 인재를 모아 당과 인민의 사업에 써야 한다(眞心愛才, 悉心育才, 傾心引才 精心用才, 求賢若渴, 不拘一格, 把各方面優秀人才集聚到黨和人民事業中來).” (37~38쪽)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독재 지도자 시진핑의 고급 인재의 중요성에 대한 언급 횟수와 거듭된 강조는 놀라울 정도입니다. 이는 반도체·양자컴퓨터·바이오 등 첨단 과학기술 분야에서 미국이 중국을 상대로 핵심 기술 및 장비 봉쇄와 고급 인력 교류를 막으며 중국의 목줄을 죄는 마당에, 핵심 인재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중공 지도부의 판단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중국 공산당은 미국 추월을 목표로 국내는 물론 해외 인재 흡수에 총력을 쏟고 있다. 2008년부터는 산업 발전에 필요한 첨단 기술과 지식을 흡수하기 위해 세계적 학자 1000명을 매년 지원하는 '천인 계획'을 실시하고 있다. 학자 1인당 연간 1억~5억원까지 지원한다./Wikipedia
심지어 중공 20차 당대회에서 새로 구성된 205명의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가운데 절반 (49.5%)은 우주항공·방위산업 같은 첨단 분야를 포함한 기술관료 출신으로 분석(조영남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됩니다. 이는 미·중 패권 전쟁이 ‘누가 첨단 기술 경쟁에서 이기느냐’는 싸움이라는 방증입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2021년 11월8일자가 미국과 중국의 세계 패권 전쟁을 묘사한 그림. 독수리(미국)와 용(중국)의 대결로 그렸다./economist.com
◇한국은 美, 中 보다 2~3배 더 노력해야
이제 결론입니다. 미·중 30년 전쟁의 가장 중대한 승부처는 바로 산업과 기업, 인재와 기술 경쟁으로 보입니다. 두 나라는 거의 똑같은 이유와 목적에서 네 부문의 경쟁력을 강화하겠다고 정면 충돌하듯 선언했습니다. 이 4개 경쟁의 우열(優劣)과 성패(成敗)에서 군사력과 외교력은 물론 국가의 위상 격차까지 생길 것입니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양자(量子)컴퓨터 같은 파급력이 큰 산업에서 미·중 어느 나라가 확실한 우위를 갖고 있느냐? 세계적 대기업과 최첨단 초격차 기술을 누가 더 많이 갖고 있는가? 세계적 고급 기초과학 및 기술 인재를 어느 나라가 더 많이 확보하느냐에 따라 미·중 전쟁의 최종 승리자가 확정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미·중 밀월(蜜月) 시대에 대한민국은 ‘안미경중(安美經中·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으로 많은 혜택을 누렸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때와 180도 다른 미·중 전쟁이란 격랑(激浪)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미·중 전쟁이 새로운 도약의 발판일지, 아니면 쇠락을 앞당기는 방아쇠가 될지는 우리의 머리와 손, 발에 달려 있습니다.
두 나라의 전략 문건을 보면 해법은 자명합니다. 미·중 격변이 ‘기회’가 되도록, 우리는 두 나라 보다 2배, 3 배 더 노력해 우리의 산업과 기업, 기술, 인재의 힘과 가치를 지금보다 훨씬 크게 키워야 합니다. 막히거나 부족한 부분은 뚫고 보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온 국민이 정파(政派)를 떠나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하겠습니다.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2022년 10월 16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한 제20차 당대회 업무 보고문건의 맨 마지막 72쪽. 이 보고문은 시작부터 끝까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전면추진과 단결분투(全面推进中华民族伟大复兴而团结奋斗)'를 역설하고 있다./인터넷 캡처
조선일보 송의달 에디터
11.08 미국 안보 공약이 못 미더운 까닭
지난달 18일 관훈토론회에서는 범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필립 골드버그 미국대사가 여권과 대통령실 일각에서 나오는 전술핵 재배치론을 겨냥, "무책임하고 위험한 일로 긴장을 늦추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일축한 것이다.
최근 북한이 불꽃놀이처럼 미사일을 쏴대자 많은 여권 중진이 전술핵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국민의힘 정진석 비상대책위원장을 비롯한 홍준표 대구시장과 유승민·조경태 등 전·현직 의원이 그들이다. 대통령실 안보라인에서도 전술핵 재배치와 핵공유 카드가 검토되는 분위기다. 윤석열 대통령마저 전술핵 필요성에 대한 질문에 "한국과 미국 조야의 여러 의견을 경청하고 따져보고 있다"며 재배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이렇듯 세계 10위권 경제 강국의 권부와 중진 정치인들이 진지하게 거론하는 방안을 동맹국 대사가 '무책임' '위험' 운운하며 깔아뭉갰다. 여간한 결례가 아니다. 미 국무부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고위 당국자가 나서 "맥락과 다르게 전달됐다"고 진화에 나섰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렇다면 전술핵 재배치는 미국 주장처럼 무책임한 일인가. 이 논란은 미국의 확장억제를 믿을 수 있느냐는 물음과 직결돼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핵무기 선제 사용과 핵확산을 극도로 기피한다. 지난해 11월에는 '적이 먼저 쓰지 않는 한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선제 불사용(No First Use)' 원칙을 채택하려다 동맹국 반발로 포기한 적이 있다. 또 지난달 말 나온 '핵태세검토보고서(NPR)'는 핵확산 위협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큰 그림 속에선 한반도 내 전술핵 재배치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누구든 공격해 오면 필요시 핵무기까지 동원해 미국이 응징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누누이 강조한다.

▲무기고에 보관 중인 전술핵 B61-12 중력탄의 모습. 현재 유럽의 5개 나토 회원국에 100여발이 분산배치돼 있다. 이밖에 미국 내에도 500여발이 존재하며 현재 개량 사업이 진행 중이다. 중앙일보 사진 자료
그럼에도 많은 한국 전문가가 불안해한다. 확장억제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확장억제를 할 '능력'과 '의지'가 있어야 하고 관련국들이 이를 '신뢰'해야 한다.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인 미국의 확장억제 능력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의지는 왠지 미덥지 않다. 그간 미국 측이 무성의한 것처럼 처신해 온 탓이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한·미 고위급 확장억제전략협의체(EDSCG)가 만들어진 건 2016년. 하지만 지난 6년간 이 회의가 열린 건 지난달 모임을 포함해 딱 세 번뿐이다. 2년에 한 번꼴로 열린 셈이다. 그나마 한 참석자는 이렇게 토로했다. "어떻게 한국을 지킬 것인가 물으면 '군사기밀이니 자세히 설명할 순 없지만 걱정 말고 믿으라'고만 한다"고. 그러니 확장억제의 실체도 모르는데 어떻게 신뢰하라는 얘기인가.
더 큰 걱정은 그나마 바이든 행정부는 확장억제에 진정성이 느껴지나 2년 후 정권이 바뀌면 제대로 작동할지 불안하다는 거다. 현재 미국에선 민주당 인기가 공화당에 뒤지는 형국이다. 8일 중간선거를 앞두고 지난 3일 발표된 CNN 조사에서 '어느 당 후보를 찍겠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47%가 민주당, 51%는 공화당이라 답했다. 게다가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심각한 경기 침체가 예상되는 터라 2024년 대선에선 공화당 후보가 유리할 듯하다.
한데 현재 가장 앞선 공화당 주자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으로 50% 이상의 지지율을 기록한다. 한반도에 폭격기와 같은 전략자산을 전개할 경우 그 비용을 한국 측에서 내라고 요구했던 인물이다. 2위는 30% 안팎의 지지율을 얻는 론 드산티스 플로리다 주지사. 그의 한반도 정책이 알려진 건 없지만 '트럼프 2.0'이란 별명에 걸맞게 미국 우선주의를 펼 공산이 크다. 확장억제에 소극적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러니 윤석열 정부와 여권에서 전술핵 재배치, 핵공유 소리가 나오는 것 아닌가. 한국에서 핵 얘기가 안 나오게 하려면 확장억제의 실체와 유용성을 주지시켜야 함을 바이든 행정부는 깨달아야 한다.
중앙일보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11.08 북·중·러 3중 파고 가속…국익 지킬 통합형 전략 짜야
일촉즉발의 세계 정세
한반도는 물론 인도·태평양 지역을 포함한 세계정세가 시계 제로다. 리처드 하스 미국 외교협회(CFR) 회장은 최근 외교지 기고에서 지금이 2차 세계대전 이래 가장 위험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러시아의 전술핵 사용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고, 북한은 핵 사용 법제화 이후 전술핵무기 운용 훈련을 포함해 사상 유례없는 미사일 도발을 감행하고 있다. 지난달 3연임으로 마오쩌둥 반열에 오른 시진핑 주석은 재임 중 무력에 의한 조국 통일 실현 의지를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상이한 역사적 배경 아래 전개되어 온 사안들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상상하고 싶지 않던 일들이 현실의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
동시다발 위협과 미국의 억제 전략
지난달 발표된 바이든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보고서(NSS)와 국방전략보고서(NDS)가 ‘통합’과 ‘억제’를 합친 ‘통합적 억제’(Integrated Deterrence) 전략을 새로이 천명한 것은 이러한 복합적 위기 상황에 대한 대응책이다. NSS는 “인·태 지역과 유럽 내 동맹 우방국들의 운명이 기술·무역·안보에 있어 상호 연계되어 있다”고 밝혔다. NDS는 (중·북·러 등의) 위협이 “복잡하고 상호 연결된 도전”이므로 “동맹국 및 파트너와 다방면의 협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며 연계성과 통합 대응을 강조했다.
미국 국방전략보고서 “우크라 전쟁, 북핵 등은 상호 연결된 도전”
북한은 중·러와 협력 관계 되살리며 핵실험 등 공세 전략 펴는 중
3연임 굳힌 시진핑은 대만 공격 가시화, 주한미군 역할 갈등 일듯
향후 10년이 고비…북핵에 집중하면서 다른 위기에도 대비해

제이크 설리번 미 국가안보보좌관이 NSS 발표 때 동시 다발 위협을 강조하며 러시아에 “미국이 동맹·파트너와 함께 과감하게 대응할 것이란 점을 단호히 경고했다”고 밝힌 것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략을 통한 현상 변경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자 우방국들의 역할에 대한 미국의 인식을 보여 준다. 대만 문제에도 같은 논리를 전개한다. 폴 라카메라 주한미군 사령관도 지난 9월 세미나에서 “한·미 동맹이 북한 억제를 넘어서 중국과 러시아를 주시하는 쪽으로도 확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달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 러시아 전문가 모임 ‘발다이 클럽’에서 대만 문제에 대한 중국 지지를 재천명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한국의 지원 여부를 북·러 군사 협력 재개와 연계할 가능성을 시사한 데 이어, 북한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돕기 위해 무기를 지원하고 있다고 미국이 발표한 것은 상호 연계성이 고차방정식화되고 있음을 상징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CNN 인터뷰에서 “만약 중국이 대만을 공격한다면 북한 역시 도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밝힌 것도 이러한 상황을 정확히 본 것이다.
북·중·러 연대로 북핵 위협 가중
북한의 핵 선제 사용 현실화를 억제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우리로서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대만 위기가 격화될 경우 외교안보 경제적 딜레마가 눈덩이처럼 커질 수밖에 없다. 2017년 한반도 위기보다 현 상황이 더 엄중한 이유다.
반면 북한 입장에서는 북·중, 북·러 및 북·중·러 전략적 협력 관계가 부활한 데다 사실상 핵보유국으로서 과거 어느 때보다 높은 전략적 가치를 인정받게 됨으로써 든든한 뒷배를 확보해 놓고 한·미 및 한·미·일 공조에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7차 핵실험 등 공세적 전략을 대담하게 펼칠 수 있게 된 것이다.
미·중 전략 경쟁과 우크라이나 전쟁이 심화할수록, 북한은 핵 사용을 위협하면서 고강도의 계산된 도발 유혹을 느낄 것이다. 미국의 역량이 분산되고 유엔의 추가 제재가 중·러 거부권으로 계속 무력화될 것을 믿기 때문이다. 푸틴의 전술핵 사용이나 대만 무력통일 불사는 북한에 핵 도발 허가장을 주는 셈이다.
냉전시대 이후 핵위기 최고점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난 수년간 지금이 냉전 이후 핵무기 사용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점이라고 경고해 왔다. 그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미국과 나토, 일본의 태도도 확연히 바뀌고 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처음으로 핵 아마겟돈 위험에 처해 있다”고 속내를 토로했다.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도 우크라이나에서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파국적 결과를 맞게 될 것을 러시아 측에 경고했음을 밝혔다.
지난달 나토의 ‘스테드패스트 눈’ 연례 핵무기 운용 훈련은 이러한 의지의 표현이다. 최근 기시다 총리가 의회에서 핵 방공호 시설을 현실적인 대책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한 것도 주목된다.
특히 올해 미국 핵태세 보고서와 국방전략보고서는 과거보다 진전된 요소를 담고 있다. 핵 선제 불사용 원칙 불채택, 보다 강력한 확장억제 제공, 이중 용도 전투기와 핵무기의 전진 배치, 핵 사용 시 김정은 정권의 종말 경고, 한·일·호주 등과의 확장억제 협의체 및 여타 기구를 통한 협의 강화, 한·미·일 3자 또는 호주 포함 4자 간 정보 공유 모색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추세에 맞춰 윤석열 정부 출범 후 한·미 고위급 채널이 전면 가동되고 5년 만에 재개된 확장억제 전략협의체와 지난주 연례안보협의회의(SCM)에서 진전된 다양한 확장억제 방안을 합의한 것은 의미가 크다.
대만해협 위기에 철저히 대비해야
시 주석 3연임을 계기로 대만 문제가 일촉즉발의 위기로 바뀔 위험도 커졌다. 윌리엄 번스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과 필립 데이비슨 전 미 인도태평양 사령관은 시 주석의 4연임이 확정되는 2027년까지 대만 침공 가능성이 있음을 피력했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 전·현직 미군 고위 당국자들은 대만해협 위기 시 주한미군의 역할을 당연시하고, 동맹인 한국의 역할도 기대하는 분위기다. 특히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 전체가 한목소리로 치밀하게 움직이고 있다. 8월 말 미 의회 조사국의 역내 미군 역할 확대 검토 보고서는 공론화의 신호탄이다.
2006년 초 한·미 외교장관 공동성명을 통해 발표된, 전략적 유연성을 존중하되 동북아 분쟁 불개입 입장도 존중한다는 상호 타협 문안은 별로 개의치 않는 인상이다. 양국 모두 대만 위기가 시한폭탄이 되기 전에 해석 문제로 이견을 보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주한미군의 역할과 우리에 대한 기대에 사전 대비하지 않으면 심각한 갈등이 올 수 있다.
지난해 5월 한·미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나온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대만 문제 질문과 특히 지난 9월 윤 대통령의 CNN 인터뷰 당시 대만 지원 가능성 질문은 엄청난 후폭풍이 예상될 수 있는 함정이 깔린 질문이었다. 다행히 윤 대통령이 후속 질문까지도 슬기롭게 대응했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가 분명히 밝힐 수 있을 정도의 준비가 돼 있지 않을 것이다. 좁게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기준부터, 넓게는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규정된 태평양에서의 공동 위협 해석 문제, 참여정부 당시 합의와 해석을 현 정부가 계승할지 등에 대한 고민이 클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남겨야 할 유산
3개 복합 위기가 언제 어떤 강도로 올지 예단하긴 어렵지만, 실존적 위협인 북핵 문제에 최우선 순위를 두면서 여타 위기와 연계해서 올 경우에도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북한의 핵 위협에 대한 우리의 선택지에 대해서는 나올 수 있는 제안은 거의 다 나왔다. 장단점도 명확하다. 우선 필요하고 실행력 있는 확장억제 역량을 최대한 시급히 확충하되 여타 선택지도 배제하지 말고 신뢰 속에 계속 협의해 나가야 한다. 확장억제 틀 안에서도 여타 선택지와 큰 차이가 없는 세부 옵션이 꽤 있다. 위의 NPR과 NDS에 제시된 광의의 실질적 핵 공유 개념들을 우리 실정에 맞춰 적용하는 것이다.
지난주 한·미 안보협의회의에서 어느 정도 이를 얻어 냈다. 향후 상황 전개에 따라서는 역내 양자 동맹들을 연계 조정하고 정상급까지 핵 기획·공유 과정에 참여시키면 중층적 안전장치가 마련될 것이다. 미국의 호주에 대한 핵 추진 잠수함 기술 제공, 필요하면 단기간에 핵 국가로 전환될 수 있는 일본의 사례를 염두에 두고 정권 변화를 초월해 일관된 핵 정책을 유지해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중차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태 지역과 유라시아 시나리오도 마련해 둬야 한다. 갈라파고스 섬이 아니라 지정학적 대척점 한가운데 선 우리로서는 진화하는 동맹에 충실하면서도 국익에 입각한 한국형 통합 대응 전략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2021년과 2022년 한·미 정상 공동성명의 해당 부분은 유용한 출발점이다.
미·중·러 지도자들은 모두 향후 10년이 결정적 시기라고 한다. 역대 여러 한국 정부는 위기의 시대에 평화안보를 위한 나름의 유산을 남겼다. 위기의 시대 10년의 반을 책임질 윤석열 정부도 역사에 남을 유산을 남기리라 믿는다.
중앙일보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
11.10 외국 대사 발언까지 왜곡한 김의겸 대변인
주한 외국 대사가 자신의 발언을 민주당이 왜곡했다며 외교부에 하소연하는 일이 벌어졌다. 마리아 카스티요 페르난데스 주한 EU 대사는 지난 8일 외교부 고위 당국자에게 메시지를 보내 “내 발언이 야당에 의해 악용되고 왜곡된(mis-used and twisted) 채 언론에 제공돼 유감스럽다. 잘 알다시피 그런 의미가 아니고 그런 의도도 아니다”고 말했다. 외국 대사가 주재국 정부에 이런 해명을 하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다. 그만큼 왜곡의 정도가 심각했다는 얘기다.
문제의 발언은 민주당 김의겸 대변인이 언론에 브리핑한 것으로, 이재명 대표와 페르난데스 대사의 비공개 면담 내용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페르난데스 대사가 “북한이 도발 수위를 높여가고 있는데 현재 윤석열 정부에는 대화 채널이 없어서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는 것 같다”며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때는 긴장이 고조돼도 대화 채널이 있었기에 교류를 통해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페르난데스 대사는 민주당 측에 ‘왜 하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느냐’는 취지로 항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상식적으로 외국 대사가 야당 대표를 만나 주재국 정부 비판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베테랑 외교관이 이를 모를 리 없다. 외교 문제로 비화할 조짐을 보이자 김 대변인은 9일 입장문을 내고 “말씀하신 내용과 다르게 인용을 했다”며 “EU 대사님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김 대변인은 기자 출신이지만 ‘사실’을 크게 중시하지 않는다. 최근에도 왜곡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대통령과 법무장관이 로펌 변호사 30명과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는 상식 밖의 주장을 제대로 된 검증도 없이 했다. 지금도 제대로 사과하지 않고 있다. 이번에도 외국 대사가 아니었으면 우기면서 도리어 역공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정쟁에 빠져서 기본을 잃어버린 것 같다.
조선일보 사설
11월 10일 EU대사 발언까지 날조한 김의겸, 국회서 퇴출하라
의정 활동을 빙자해 여러 차례 왜곡·거짓 주장을 했다는 비판을 받아온 김의겸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이 급기야 외국 대사 발언까지 날조해 발표하는 일이 벌어졌다. 김 대변인은 지난 8일 이재명 대표를 면담한 마리아 카스티요 페르난데스 주한 EU 대사가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때는 남북 긴장이 고조돼도 대화 채널이 있어 해결책을 찾았는데 윤석열 정부는 대응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페르난데스 대사는 민주당에 “왜 하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느냐”고 항의하고, 외교부에는 “내 말이 잘못 인용되고 왜곡돼 유감”이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이런 경우엔 면담 사실만 밝히거나, 대화 주제 정도만 소개하는 게 일반적이다. 결국 EU 대사의 ‘입’을 빌려 현 정부를 비판하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파문이 커진 9일 오후에야 김 대변인은 민주당 홈페이지에 ‘과거 정부와 현 정부 대응을 비교하는 대화는 없었다’면서 ‘대사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는 글을 올렸다. 국격과 정부 신뢰도 훼손한 만큼, 대사뿐 아니라 국민과 윤 정부에도 사과해야 한다. 이 대표의 입장 표명도 필요하다.
그는 ‘한동훈 법무장관이 야당 의원을 따라가 악수를 청한 뒤 영상을 찍어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하거나, 윤 대통령과 한 장관이 변호사 30여 명과 새벽까지 술자리를 했다는 취지의 주장 등을 반복해 왔다. 거짓으로 밝혀지거나, 당사자들 부인에도 어물쩍 넘어갔다. 고위 공직자 문제점 제기가 아니라 악의적 가짜뉴스 유포로 봐야 할 지경이다. 공당의 대변인은 물론 의원 자격도 없다. 국회 퇴출 절차를 밟아야 한다. 그게 민주당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문화일보 사설
11월 14일 한미일 첫 인태 성명…전기차 · 과거사 해결도 속도 내야
한·미·일 정상이 13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발표한 공동성명은, 동북아 안보와 북핵 대처에 치중하던 과거의 성명과는 차원이 다르다. ‘인도·태평양 한미일 3국 파트너십에 대한 프놈펜 성명’이라는 명칭이 말해주듯, 그 내용은 주요7개국(G7) 공동성명을 연상시킬 정도로 글로벌 현안에 대한 포괄적 협력을 명시했다. 경제규모 세계 10위인 대한민국이 세계 1·3위인 미·일과 함께 규범에 기반한 국제 질서를 수호하며 안보·경제 공조를 강화해나가겠다는 의지를 밝힌 선언이다. 뿌듯한 일이지만, 글로벌 플레이어로서 책임도 커진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공동성명에는 미국의 확장억제 강화 방침과 더불어 3국 간 북한 미사일 경보 정보 실시간 공유가 명시됐다. 미국의 핵우산 강화 조치는 북핵 위협이 높아지며 한일 양국에서 전술핵 배치론이 비등해진 것을 감안한 결정으로 보인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북한 도발 지속 시 미국이 군사 안보적 존재감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주한·주일 미군 증원이나 전술핵 배치를 시사한 것이다. 특히, 한미일 경제안보 대화 신설 결정은 시의적절하다. 탈세계화 시대 경제적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첨단 기술 및 핵심 인프라 보호, 공급망 보장 등은 한국경제에 사활이 걸린 문제다. 경제안보 대화의 실효성을 높이는 일이 중요하다.
3국 협력이 원활하게 이뤄지기 위해선 양자 간에 선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미국과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의 한국산 전기차 보조금 차별 문제를 신속히 해결해야 한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13일 윤석열 대통령과 양자 회담 때 “한국기업들의 미국 경제에 대한 기여를 고려할 것”이라고 했다. 미 중간선거도 ‘바이든의 정치적 승리’로 평가되는 만큼, 과감한 해법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날 한일정상회담 후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윤 대통령과 전시 징용 문제 해결 중요성을 확인했다”고 했다. 한국 측에 ‘선(先) 해결’을 요구하던 것에서 변화가 감지된다. 양국이 협력해 징용 배상 판결 문제를 빨리 매듭지어야 한다. 이미 ‘문희상 안’ 등 현실성 있는 대안도 제시돼 있다.
문화일보 사설
11.15 북 미사일 한미일 정보공유가 ‘국익 침해’라는 궤변

▲13일(현지시간) 캄보디아 프놈펜 한 호텔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윤석열 대통령(왼쪽부터),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미·일 정상은 지난 13일 북한 미사일에 대한 탐지·분석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북 미사일 경보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기로 했다. 이에 대해 더불어민주당은 “국익을 해치고 국민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며 “퍼주기 굴욕 외교”라고 비난했다. 또 “한일 군사 정보 보호 협정(지소미아)을 사실상 부활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한일정보협정은 종료되지 않고 그대로 있는데 무슨 부활인가. 주장의 편향성을 떠나 이 문제에 대한 기본 상식을 의심케 하는 인식이다.
북한은 올 들어 각종 미사일을 수십 차례 발사하며 한·미·일을 위협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3국이 북 미사일 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필수적인 조치다. 자체 핵이 없고 북핵 탐지·방어 능력도 부족한 한국이 북 위협에 맞서려면 한·미·일 공조는 필수적이다. 레이더의 원리상 북한 미사일 종말 단계 추적은 일본 탐지 자산에 의존해야 한다. 북 잠수함 탐지 초계기도 미국 다음으로 많다. 한반도 유사시 우리를 지원하는 미군의 핵심 기지가 일본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일 미사일 정보 공유가 왜 국익을 해치는 일인가. 민주당은 북한이 잇따라 미사일 도발을 해도 의도적으로 외면하곤 했다. 반대로 북 미사일에 대응한 한·미·일 연합 훈련은 강하게 비판했다. 이재명 대표는 “극단적 친일 행위” “일본군의 한반도 진주라는 일이 실제 생길 수 있다”는 황당한 말도 했다. 북의 위협엔 관심이 없고 반일 감정을 부추기는 데만 열을 올린다.
북 미사일에 대한 한·미·일 정보 공유로 가장 득을 볼 나라는 두말할 것도 없이 한국이다. 북 미사일은 사실상 한국만을 겨냥하고 위협하려는 목적이다. 미국 일본에 대한 위협은 부수적인 것일 뿐이다. 그런 한국의 입장에서 북 미사일 위협을 막기 위해 모든 방안을 다 강구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국회 다수당인 민주당이 이를 ‘국익 저해’라고 하니 그 무책임한 인식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일보 사설
11월 15일 尹-시진핑 첫 회담 확정… 中에 ‘북핵 불용’ 명확히 전해야
우여곡절 끝에 윤석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첫 대면 회담이 15일 오후 6시(한국 시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리게 됐다. 두 정상은, 윤 대통령이 당선인이던 지난 3월 25일 전화 통화를 했고, 윤 대통령은 지난달 시 주석의 3연임 확정 직후 축전을 보냈다. 앞서 문재인 전 대통령이 2019년 12월 23일 한·중·일 정상회의를 계기로 시 주석과 회담한 이후 시 주석의 방한은 양국 관심사였는데, 일단 제3국에서 정상회담이 열리게 된 것이다.
수교 30년을 넘긴 한·중 사이에는 안보·경제 등 여러 분야에 걸쳐 현안이 산적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핵 문제의 해결이다. 2014년 7월 3일 청와대에서 있었던 박근혜-시진핑 정상회담을 계기로 채택된 공동성명의 제6항은 ‘양측은 한반도에서의 핵무기 개발에 확고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한다’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 뒤에도 북한은 핵무기 개발과 미사일 도발을 계속했다. 문제는 중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결의안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는 등 사실상 면죄부를 주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 등 명확한 안보리 결의 위반에도 거부권을 행사하며 추가 제재를 반대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북한의 핵 위협을 결코 용인하지 않는다는 대한민국의 명확한 입장을 시 주석에게 전해야 한다. 다만, 반도체·배터리 등 투자·기술 문제 등에 있어서는 상호 불이익이 없도록 공동 노력할 것임을 천명할 필요가 있다. 마침 하루 전에 열린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 시 주석의 정상회담에서 미·중 양국은 경쟁을 하면서도 충돌은 피한다는 원칙에 공감대를 이루고, 후속 협의를 이어나가기로 했다. 그러나 중국 발표에는 북핵, 한반도 등의 표현조차 등장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은, 중국이 북핵 폐기와 대북 제재에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면 제2, 제3의 사드 배치는 물론 대응력의 획기적 증강도 불가피함을 역설해야 한다.
문화일보 사설
11.15 외교 고질병 ‘공중증’ 고칠 수 없나
中의 위구르 인권 탄압 규탄에
자유진영 50국 중 한국은 빠져
“힘으로 현상 변경 안돼” 비판
말 한마디로 恐中症 나아질까
축구에 공한증(恐韓症)이란 말이 있었다. 유독 한국 축구에 맥을 못 추던 중국이 짜증 반, 시샘 반으로 쓰던 표현이다. 한중 간의 첫 국가대표 A매치는 1978년이었고 이후 32년간 한국과 27차례 붙어 11무 16패를 기록했다. 중국의 첫 승리는 2010년 동아시안컵에서 나왔다.
그 시절 중국은 축구뿐 아니라 많은 분야에서 한국에 공한증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수백 년간 조공을 바치던 후진 농업국이었고, 20세기 절반은 식민 수탈과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한국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올림픽까지 유치하자 충격과 동시에 부러움을 느꼈다. 그래서 박정희의 산업화 공식을 그대로 따라 했다. 덩샤오핑(鄧小平)은 “박태준을 수입하라”고도 했다.
그런 기조가 장쩌민(江澤民)·후진타오(胡錦濤)를 거치며 대략 30년 이어졌다. 한중 간 물적, 인적 교류는 매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한때 베이징의 현대차 공장, 광둥성의 LG전자 공장은 중국 젊은이들이 가장 선망하는 일자리였다. 이 30년이 5000년 한민족 역사를 통틀어 중국에 기죽지 않고 당당할 수 있던 유일한 시기였을 것이다.
2010년 무렵은 그런 분위기의 절정이었다. 그해 3월 싱하이밍(邢海明) 당시 주한 중국공사참사관은 조선일보에 ‘중국의 발전은 한국에 기회다’란 제목의 기고문을 보내왔다. 모든 문장이 ‘~니다’로 끝나는 1200여 자 분량의 완벽한 경어체 원고였다. 그는 “우리는 양국 관계를 소중히 다루어야 합니다”라고 공손하게 말했다.
한중 관계는 그 무렵부터 삐걱거렸다. 중국은 북한의 천안함 도발을 감싸고 돌았다. 연평도 포격 때도 마찬가지였다. 후계 수업 중이던 김정은이 주도한 도발이었다. 김정일에게 담대성을 인정받은 김정은은 그해 9월 후계자로 공식 등장했다.
당시 중국의 차기 지도자는 시진핑 부주석이었다. 시진핑은 6·25 참전 노병들을 만나 “위대한 항미 원조 전쟁(6·25의 중국식 표현)은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했다. 국제 상식과 동떨어졌을 뿐 아니라 한국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망언이다. 하지만 중국의 속마음이었다. 휘황한 교역 성과에 들떠 애써 외면하던 불편한 진실이었다.
그렇게 등장한 시진핑은 중국몽을 외치며 중국을 마오 시대로 되돌렸다. 집단 지도 체제가 무너지고 개혁·개방은 퇴조했다. 도광양회(韜光養晦)가 저물고 전랑(戰狼) 외교가 본격화했다. 베이징에선 왕이 외교부장, 서울에선 싱하이밍 대사의 언행이 나날이 거칠어졌다. 미국과 서방은 견제 노선으로 돌아섰지만 한국은 머뭇댔다. 자칫 최대 시장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 북한 비핵화와 통일에 협조를 얻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떨치지 못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그래서 미국 눈총을 받아가며 톈안먼 망루에 올라 중국 전승절 열병식을 지켜봤을 것이다. 시진핑의 화답은 무자비한 사드 보복이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방중 기간 10끼 중 8끼를 혼밥했다. 치욕을 당하고도 “중국은 높은 산봉우리, 한국은 작은 나라”라고 했다. 사정은 달랐지만 두 대통령 모두 중국에 대한 미망을 버리지 못했다. 외교관들 사이에 공중증(恐中症)이 전염병처럼 번졌다.
지난달 중국공산당 20차 당대회는 시진핑의 종신 집권 자축 잔치였다. 더 노골적으로 반(反)민주와 반(反)시장으로 퇴행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엊그제 “힘에 의한 현상 변경은 안 된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은 그런 중국에 대한 경고처럼 들렸다. 하지만 불과 보름 전 한국은 자유민주 진영 50국이 유엔에서 중국의 위구르 인권 탄압을 규탄하는 성명에 함께할 때 혼자 발을 뺐다. 공중증이 고질병이 됐다는 뜻이다. 대통령 말 한마디로 고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조선일보 이용수 논설위원
11.16 시진핑 주석, 북핵을 자국 위한 게임용으로 이용 말라

▲윤석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5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은 15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취임 후 첫 정상회담을 가졌다. 한중 정상회담은 2019년 12월 청두에서 열린 후 3년 만이었다. 하지만 회담은 25분 만에 끝났다. 북핵을 비롯해 지난 3년간 쌓인 주요 현안을 제대로 논의하기엔 부족한 시간이었다.
윤 대통령은 북핵 문제를 비중있게 거론했다. 시 주석에게 “최근 북한이 전례 없는 빈도로 도발을 지속하며 핵·미사일 위협을 고조시키고 있다”며 “안보리 상임이사국이자 인접국으로서 중국이 더욱 건설적인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올해에만 탄도미사일 61발을 발사한 북을 노골적으로 감싸며 안보리 추가 제재를 막고 있는 중국의 태도 변화를 촉구한 것이다.
하지만 시 주석은 “한국이 남북 관계를 적극 개선하기를 희망한다”고만 했다. 북한의 도발엔 눈 감은 채 한국의 대북 정책에만 아쉬움을 나타냈다. 중국 외교부 발표문엔 북핵 같은 단어조차 등장하지 않았다. 전날 미·중 정상회담에서도 시 주석은 바이든 대통령이 “(중국은) 북한이 핵실험을 하면 안 된다고 촉구할 의무가 있다”고 하자 “북한의 합리적 우려를 풀어줘야 한다”고 했다.
회담을 앞두고 우리 정부는 미국 주도의 첨단기술 공급망 재편 움직임에 동참하고 한·미·일 경제안보대화체 신설에 합의하는 등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본격 합류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대해 시 주석은 “글로벌 공급망을 보장하고 경제협력을 정치화·안보화하는 것엔 반대해야 한다”고 우리 정부를 노골적으로 압박했다.
시 주석은 북핵을 자국의 안보 이익을 위한 꽃놀이패로 이용하려 하는 듯하다. 북핵은 한국의 존망과 직결된다. 동북아를 넘어 전 세계의 평화도 위협한다. 올해에만 안보리 제재를 수십 차례 위반한 북이 7차 핵실험 카드까지 만지는 것은 이번에도 중국이 두둔할 것으로 확신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북한의 최대 후원국으로서 북핵 고도화를 방조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정부는 북핵을 용납할 수 없다는 대원칙 아래 한·미·일 안보 협력을 강화해 중국에 보다 책임 있는 자세를 요구해야 한다. 중국이 보복할 수 있지만 이를 두려워해선 나라와 국민을 지킬 수 없다.
조선일보 사설
11.16 ‘김일성 거리’서 규탄받는 北
2002년 여름 탈북해 한국으로 가기 위해 캄보디아에 도착한 기자는 수도 프놈펜에서 ‘김일성 대원수 거리’ 표지판을 보고 깜짝 놀랐다. ‘김일성 거리’가 있는 프놈펜에서 과연 한국으로 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김일성 거리 집들에 숨어 탈북민 수백 명이 한국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일성 거리는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자 캄보디아 시하누크 전 국왕이 붙인 거리 이름이다. 시하누크가 1970년대 초 론놀 장군의 쿠테타로 쫓겨나 오갈 데 없던 시절 김일성이 평양에 망명처를 제공하고 극진히 대우하면서 캄보디아 왕실과 김일성 왕조의 밀착 관계가 시작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13일(현지시간) 프놈펜 한 호텔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한미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2022.11.13. /뉴시스
김일성은 영화광으로 소문난 시하누크를 위해 전용 극장을 만들고, 조선중앙TV 등 관영 매체를 통해 홍보전을 펼쳐 시하누크를 모르는 북한 주민이 없을 정도다. 북한에는 아직도 시하누크의 호화 별장과 인공 호수가 남아 있다. 김정일이 시하누크를 삼촌이라고 부를 정도로 두 ‘왕가’는 가족처럼 지냈다. 김일성은 시하누크가 오랜 망명 생활 후 1990년대 초 귀국할 때 잘 훈련된 40여 명 특수부대원을 경호 병력으로 붙여주기도 했다.
친북 정책을 펼치던 시하누크 왕가는 1997년 현재 총리로 있는 훈센이 이끄는 인민당과 내전에서 패하면서 몰락했고, 캄보디아의 친북 정책은 폐기됐다. 훈센 총리는 한국의 새마을운동과 경제 부흥에 호감을 갖고 박정희 대통령을 ‘롤 모델’로 여기는 인물이다. 캄보디아는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 당시 동남아 국가 중 유일하게 북한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 핵을 가진 왕조 북한을 버리고 자유롭고 풍요로운 한국을 선택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3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한·미·일 정상회담을 갖고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한 ‘확장 억제 강화’를 강조하는 공동 성명을 채택했다. 3국 정상은 ‘프놈펜 성명’에서 북한의 도발을 한목소리로 강력히 규탄했다. 윤 대통령은 동포간담회에서12월 발효되는 한·캄보디아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양국 간 경제 협력이 더 심화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여느 동남아 국가와 마찬가지로 캄보디아에서도 ‘K팝’ ‘K푸드’ ‘K컬처’ 등 K자가 들어가면 인기가 높다. 이 모든 일이 ‘김일성 거리’가 있는 프놈펜에서 일어나고 있다.
과거 아세안에서 대표적 친북 국가이던 캄보디아가 친한 정책을 추진하는 가운데 핵 개발 폭주를 이어가는 김정은의 입지는 동남아에서 점점 좁아지고 있다. 북한의 동남아 거점이던 말레이시아는 2017년 김정남 독살 사건 이후 북한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북한을 환영하는 나라는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김정은이 계속 핵을 안고 고립의 길을 간다면 프놈펜의 ‘김일성 거리’마저 사라지는 날이 멀지 않을 것이다.
조선일보 김명성 기자
11.18 사우디發 제2의 중동 붐에 대한 기대

▲윤석열 대통령이 17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서 열린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겸 총리와의 회담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사우디아라비아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방한에 맞춰 17일 한국 기업들과 사우디 정부·기관·기업들이 총 26건 계약·양해각서를 체결했다. 합치면 300억달러에 달한다고 사우디 투자부 장관이 밝혔다. 빈 살만 왕세자의 3년 전 방한 때 결정된 투자액의 4배다. 이날 성사된 계약은 상당 부분 사우디 북서부에 서울의 44배 크기로 짓는 네옴시티와 관련한 것이다. 총사업비가 5000억달러가 넘는다고 한다. ‘제2의 중동 특수’란 말이 실감 난다.
특히 빈 살만 왕세자는 이날 윤석열 대통령과 만나 “에너지, 방위산업, 인프라·건설의 세 분야에서 한국과 협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하고 싶다”며 구체적 협력 분야로 수소 에너지와 소형 원자로 개발, 방산 하드웨어·소프트웨어 협력 등을 거론했다. 사우디는 석유 중심 경제 구조를 탈피하기 위한 국가 개조 구상을 갖고 있다. 네옴시티 외에도 각종 메가 프로젝트가 잇따를 전망이다. 수소, 원전, 방산은 우리 기업들이 경쟁력을 갖춘 분야란 점에서 이날 빈 살만 왕세자의 언급은 고무적이다.
지금 한국 경제는 고환율·고금리·고물가 3중고에다 수출 부진과 무역 적자로 고전하고 있다. 특히 고공 행진 중인 유가가 물가 상승과 적자 폭 확대를 부채질한다는 점에서 1970년대 오일 쇼크 때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당시 위기를 공격적 중동 진출로 극복한 것처럼 이번에도 사우디발(發) 특수가 기회가 될 수 있다.
중동은 지정학적 위험이 큰 지역이다. 사우디와 밀착하면 숙적 이란의 반발을 살 수 있다. 최근 사우디가 석유 감산 문제로 미국 바이든 정부과 얼굴을 붉힌 것도 한국에 부담이 되는 대목이다. 이런 지정학적 위험 요인과 민감한 외교적 변수를 잘 따져 우리 기업들에 안정적 비즈니스 환경을 보장해 주는 것이 정부 역할이다. 제2의 중동 붐을 기대한다.
조선일보 사설
월간조선 11월 호
무능 외교? 미국·영국·캐나다 파격 의전으로 윤석열 대통령 내외 예우
바이든, 美 대통령과 외국 정상이 같은 숙소 머물 경우, 타국경호원은 총기 소지 못 하게 하는 원칙 바꾸면서까지 尹 배려
⊙ 英, 윤석열 대통령 방문 시 자국 경호팀조차 놀랄 만큼 예우
⊙ 바이든, 윤 대통령 이용하는 도로 냉동 상태로 만들어줘
⊙ MBC 자막 논란 대통령 사담 이후에도 열린 마음으로 IRA 협의하겠단 美
⊙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윤 대통령 내외 떠날 때 두 손 모으고 배웅

#사례 1
2001년 3월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에서 만났다. 당시 북한 김정일을 상대 못 할 독재자로 생각하는 부시 대통령에게 김대중 대통령은 왜 그와 대화하고 거래하는 것이 필요한가를 설명했다. 이 상황은 두 사람의 사이를 곤란하게 했다.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콘돌리자 라이스는 당시 정상회담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부시 대통령은 김정일의 폭정(暴政)에 화가 나 있었는데, 왜 한국 정부는 이런 데 반응이 없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김대중 방미(訪美)는, 미국과 아시아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이 균열하는 식으로 끝났다.”
부시 대통령은 햇볕정책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며 자신을 설득시키려 한 김대중 대통령을 ‘이 사람(this man)’이라 지칭하기도 했다.
#사례 2
2003년 11월 BDA(방코 델타 아시아)를 북한의 돈세탁 창구로 인식한 미국이 제재를 가했는데, 이때는 북한이 핵확산 금지조약(NPT) 복귀 의사를 밝히는 등 6자 회담이 일부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 시기였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BDA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부시 대통령을 설득했는데, 꿈쩍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남북한 관계나 한미 관계에서 너무나 시각의 차이가 컸다.
세계 외교 무대에서 정상(頂上) 간 개인적 친분과 신뢰는 두 나라 모두에 국가적 자산이 된다.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소위 좌파 정권의 대통령들과는 반대로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대통령은 좋은 관계를 유지 중이다. 지난 5월 정상회담에서 순조로운 관계의 첫발을 뗐기 때문이다. 북한 비핵화,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한·미·일 삼각 협력, 공급망 안보, 글로벌 보건, 청정 5G 네트워크, 반도체 칩4 동맹, 개발 원조 등 여러 이슈에서 광범위한 협력이 있었다. 지난 9월 미국 순방 때도 분위기가 좋았다. 대통령 사담(私談)이 MBC 방송 카메라에 잡혀 논란을 빚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자막에 자기들 해석 담은 MBC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가 2022년 9월 19일(현지시각)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치러지는 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 국장에 참석하기 위해 호텔을 나서고 있다. 사진=뉴시스
윤 대통령의 미국 뉴욕 발언 내용을 MBC가 논란의 자막을 달아 처음 보도하기 30분 전 온라인 커뮤니티에 자막과 같은 내용의 글을 올렸던 사람은 민주당 의원 보좌진이었다. 그는 과거 좌파 성향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에서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MBC는 자막에 자기들 ‘해석’을 담았다. 자막 중 ‘쪽팔려서’의 음성은 비교적 선명하게 들리지만, ‘이 ××’나 ‘바이든’이나 ‘(미국) 국회’ 부분은 잘 들리지도 않는다. 소리가 불분명할 때 자막을 붙이면 선명하게 들리는 효과가 있다. 정확하지 않은 보도에도 불구하고 더불어민주당은 ‘외교 참사’로 규정했다. 외교장관 해임건의안을 일방 처리하기도 했다. 과연 이들의 주장처럼 윤 대통령의 영국·미국·캐나다 순방은 ‘외교 참사’였을까.
《월간조선》 취재 결과 취임 5개월밖에 되지 않은 윤 대통령은 단 두 번의 해외 순방에도 여러 정상과 친분을 쌓은 것으로 나타났다. 윤 대통령 내외가 영국·미국·캐나다를 방문했을 당시 해당국 지도자들이 보여준 태도와 경호 규모 등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총리가 타던 방탄차 尹에게 제공한 英

▲대통령실은 2022년 9월 19일(현지시각) ‘정부 대표 2명, 왕실 대표 1명이 (공항에서) 윤석열 대통령 내외를 영접했고, 차량도 자체 준비라는 원칙과 달리 윤 대통령 내외에게는 왕실 차원에서 총리가 이용하는 차량을 제공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윤 대통령에게 제공된 차량. 사진=대통령실
이번 9월 윤 대통령의 해외 순방 기간 국내에선 ‘가짜 뉴스(Fake News)’가 끊이지 않았다. 윤 대통령 내외의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조문 일정이 조정되고 일각에서 제기된 ‘홀대’ 의혹이 대표적이다. 각종 소셜미디어에 ‘윤 대통령이 초청도 받지 않았으면서 막무가내식으로 영국을 방문해 영국 측에 조문 의전을 요구하다가 망신을 샀다’는 내용이 퍼졌다. 영국이 대한민국 대통령 윤석열을 우습게 보면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가짜 뉴스’였다. 대통령실 관계자에 의하면, 영국은 윤석열 대통령 내외에게 자국의 경호팀조차 놀랄 만큼 특별히 예우했다고 한다.
영국 왕실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방탄차 및 전문기동요원, 경호차를 제공했다. 요원들은 대테러, 경호 등의 경력이 20년이 넘는 베테랑들이었다. 또 방탄차는 영국 총리가 직접 타는 차량이었다. 반면 다른 나라 대부분의 지도자는 임대 차량을 이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경호 수준은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지난 2021년 G7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영국을 방문했을 때보다 한 차원 높은 단계였다고 한다. 최소한 경호 규모 등을 봤을 때는 영국이 문재인 전 대통령보다 윤석열 대통령을 더 예우한 셈이다.
“이 정도 경호 조치는 이례적”(영국 경호 관계자)
사실 이번 윤 대통령의 영국 방문은 갑작스러웠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서거 자체가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 이미 예정됐던 작년 G7 때보다 경호에 예우를 갖췄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는 분석이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공항에서 국왕리셉션(버킹엄궁) 행사장까지 에스코트 제공, 2시간 이상 소요되는 체증 구간을 1시간20분 만에 주파했다”며 “영국은 이 같은 예우를 미국 등 소수 국가에만 갖췄다”고 했다.
영국의 경호팀은 순방 중인 대통령실 관계자에게 “100여 개국 정상이 동시에 집결한 세기의 이벤트에 한국이 이 정도의 경호 조치를 받은 것은 놀랄 만큼 이례적”이라고 했다.
콜린 크룩스 주한 영국대사는 윤석열 대통령 부부의 고(故)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장례식 참석에 대해 “왕실과 영국 국민은 대통령 부부에게 크게 감동했다”고 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문재인 정부 탁현민 전 의전비서관은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조문 일정이 조정된 것과 관련 “조문은 일종의 패키지인데 육개장 먹고 발인 보고 왔다는 것”이라며 “외교부 장관이 대통령을 수행하지 않고, 영국 대사가 공석이어서 현장 컨트롤타워가 없는 상황에서 외교 경험이 미숙한 대통령을 던져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영국이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재임 시 방문했던 때보다 윤석열 대통령 방문했을 때 경호 등에 신경을 더 써줬다”며 “탁현민 전 비서관은 영국 순방에 대해 지적할 자격 자체가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2021년 6월 문재인 당시 대통령은 G7(주요 7국) 정상회의를 위해 영국을 방문했다. 문재인 청와대와 민주당은 정상회의 기념사진 촬영 당시 문 대통령이 맨 앞줄에 선 것을 두고 “대한민국의 위상을 보여줬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당시 문 전 대통령의 위치는 한국의 대외적 위상과는 무관하게 이미 정해진 자리였다.
영국의 G7 준비팀 관계자는 정상들의 도열 기준을 묻는 한국 언론의 질의에 “전통적으로 영국은 국가원수에 대해 예우를 해왔다”며 “대통령을 총리보다 앞줄에 있도록 했다”고 답했다. 국가의 위상이나 국력이 아니라, 의전 원칙·관례에 따라 제1열에 대통령, 제2열에 총리, 제3열에 국제기구 수장들을 배치했다는 것이다.
尹 방문 시 가장 적극적 교통통제 한 美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2년 9월 21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한 빌딩에서 열린 글로벌펀드 제7차 재정공약회의를 마친 뒤 대화를 나누고 있다. 뉴욕 방문 당시 바이든 대통령은 뉴욕의 교통 혼잡 상황을 피할 수 있도록 순찰차를 이용한 교통통제 등 이례적인 조치를 해주며 한미 관계의 굳건함을 보여줬다. 사진=조선DB
뉴욕 방문 당시 바이든 대통령은 뉴욕의 교통 혼잡 상황을 피할 수 있도록 순찰차를 이용한 교통통제 등 이례적인 조치를 해주며 한미 관계의 굳건함을 보여줬다.
미국 뉴욕시경(NYPD)은 윤석열 대통령의 뉴욕 방문 당시 경호대형 앞뒤로 순찰차를 배치, 대형을 감싸고 에스코트했다. 뉴욕시경 관계자는 “순찰차를 이용한 교통통제는 이례적인 조치로 올해 가장 적극적으로 조처를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미국 비밀경호국(SS)은 윤 대통령을 경호하는 우리 경호 요원의 총기 소지를 허용하기도 했다. 윤 대통령은 미국 바이든 대통령과 같은 숙소에 투숙했다. 이런 경우 미국은 절대 다른 나라 경호원의 총기 소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바이든 대통령이 윤 대통령과 동일 숙소를 사용하면서 숙소 주변 도로가 완전히 통제됐다”며 “그러나 불편함을 우려한 미국이 우리 측 전용 주차장을 확보해줘 어려움이 없었다”고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프리즈(freeze)’ 조치에 대해서도 배려를 해줬다. ‘프리즈’ 조치란 대통령이 이용하는 도로를 강력통제, 냉동상태로 만드는 것을 뜻한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미 경호 당국의 전폭적인 협조로 복잡한 뉴욕 시내에서 6~7건의 일정을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었다”며 “대한민국 국격이 확인된 것 같아 뿌듯했다”고 했다.
트럼프, “문재인 상대하는 것 정말 싫다”
바이든 대통령이 윤 대통령에게 보여준 예우는 매우 각별했다는 평가다. 전직 미국 대통령이 문재인 전 대통령을 대놓고 싫다고 표현한 것을 봤을 때 더욱 그렇다.
2020년 2월 미국 대통령이었던 도널드 트럼프는 비공개 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상대하는 것이 정말 싫다”며 한국인을 “끔찍한 사람들(terrible people)”이라고 했던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발언은 래리 호건 메릴랜드주 지사를 통해 알려졌다.
민주당은 ‘바이든 발언’ 논란으로 ‘외교 참사’가 벌어졌다고 했지만, 정작 바이든 대통령은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10월 4일 윤석열 대통령에게 미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따른 한국의 우려 해소를 위해 협의를 지속해나가겠다는 내용을 담은 친서를 보내왔다.
바이든 대통령은 친서에서 “IRA와 관련해 열린 마음으로 한국과 협의하겠다”는 내용과 함께 “한미 동맹 강화란 공동 목표 달성”을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 기업을 배려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라고 했다. IRA는 미국 내에서 생산된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지급하고, 한국산 전기차 등은 지급 대상에서 제외하는 법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이날 윤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IRA 시행에 따른 한국 기업의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협의를 해나가겠다는 뜻을 거듭 밝힌 이유는 이 문제가 한미 동맹 균열 요소로 비화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란 해석이 나온다. 한미 양국은 윤석열 정부 출범 후 한미 동맹을 군사동맹 수준을 넘어 공급망 구축 등 경제안보 동맹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미에서 제조된 전기차에만 세액공제 혜택을 주는 IRA 원안대로라면 동맹에 균열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을 미 행정부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최고 등급인 5등급 경호 제공한 캐나다

▲윤석열 대통령과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가 2022년 9월 23일(현지시각) 오타와 존 알렉산더 맥도널드 경 빌딩에서 열린 한-캐나다 정상 공동 기자회견을 위해 입장하고 있다. 쥐스탱 트뤼도 총리는 윤 대통령이 떠날 때 두 손을 모으고 배웅할 만큼 애정, 존경을 표시했다. 사진=뉴시스
윤석열 대통령 내외는 캐나다 오타와를 방문했을 때 캐나다 국가가 울리자 가슴에 손을 올렸다. 박진 외교부 장관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일부 네티즌은 “캐나다 국가에 가슴에 손 올리는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며 “캐나다 총리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는 식의 비판을 했다. 우리 국기 관련 법령과 시행령에도 타 국기에 대한 의례 때 가슴에 손을 올리지 말라는 규정은 없다. ‘대한민국 국기법’과 정부 의전편람을 보더라도 상대방 국가 연주 시 예를 표하는 데 대한 어떠한 제한 규정도 없었다.
게다가 캐나다는 6·25전쟁 때 유엔군 소속으로 한국에 전투병을 파병한 3대 파병국 중 하나다. 캐나다 총리는 일면식도 없는 한국 국민을 위해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와 헌신한 참전용사들에 대한 감사와 존중의 의미로 캐나다 국가 연주 시 가슴에 손을 올린 윤석열 대통령을 특히 존경한다고 한다.
윤 대통령이 캐나다 순방 당시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가 보인 예우, 배려를 보면 잘 알 수 있다는 분석이다. 캐나다 정부는 윤 대통령 내외 방문 당시 다른 어떤 나라 정상이 왔을 때보다 많은 경호요원과 차량을 배치했다. 20여 대의 모터사이클을 동원, 교통통제를 했는데 아주 이례적이란 평가다.
대통령 내외에 방탄차량을 제공한 것은 물론, ‘모터케이드’(의전·경호 목적 차량 행렬)를 위한 차량에 한국의료팀을 포함시켜주기도 했다. 이로 인해 우리 경호팀은 국내에서 동일한 수준의 모터케이드를 운용할 수 있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캐나다 정부는 ‘모터케이드’ 차량에 자국 대테러 팀까지 포함시켜줬다”고 전했다.
경호요원과 관련해서도 30여 명 이상의 연방경찰(RCMP)이 동원됐다. 윤 대통령의 외부 행사 시 스나이퍼(저격팀)가 배치됐는데 이는 캐나다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경호 예우라고 한다. 또 외국 경호요원들의 활동이 제한된 지역에서도 우리 경호원들의 경호 활동을 보장했다. 미국이 자국 대통령과 타국 대통령이 같은 숙소를 사용할 경우 다른 나라 경호원들의 무기 소지를 허락하지 않는데, 이번에 특별히 예외적으로 윤 대통령 경호팀에 무기 소지를 하게 해준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김건희 여사, 참전용사 만나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2022년 9월 23일(현지시각) 캐나다 오타와 보훈요양병원을 방문, 6·25 전쟁에 참전한 제시 셰네버트 간호장교를 만나고 있다. 사진=조선DB
캐나다 정부 관계자는 “윤 대통령 내외에 제공한 경호는 최고 등급인 5등급”이라며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가 특별히 신경 썼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취임 후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를 세 번 만났다. 지난 6월 말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나토 고위급 회담에 참석한 자리에서 처음 만난 두 정상은, 이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 방문한 영국에서 두 번째 만났다.
이후 캐나다 수도 오타와에서 세 번째 양자 회담을 가졌다. 당시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한국과 캐나다 기업 간 핵심 광물 양해각서(MOU) 등을 체결했다.
쥐스탱 트뤼도 총리는 윤 대통령이 떠날 때 두 손을 모으며 배웅할 만큼 애정, 존경을 표시했다. 윤 대통령 내외도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쟁기념비를 참배하는 등 각별한 예우에 화답했다.
김건희 여사는 캐나다 참전용사 보훈요양병원을 방문해 6·25전쟁에 참전했던 간호장교 제시 셰네버트 씨를 만나기도 했다.
김 여사는 “꼭 건강하게 오래 사셔서 반드시 다시 한국을 방문해 당신께서 지켜낸 대한민국이 얼마나 변했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보셨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셰네버트 씨는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줘 오히려 내가 더 고맙다”고 말하며 김 여사와 포옹했다.
앞서 김 여사는 미국을 방문했을 때도 뉴저지주에 있는 ‘참전용사의 집’을 방문했다.
김 여사는 노병들을 만나 “저의 할아버지도 여러분과 같은 6·25전쟁 참전 군인이었다”며 “여러분이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한국은 많이 발전했다. 모든 것이 여러분의 헌신과 용기 덕분”이라고 말했다. 참전 군인과 가족을 위한 요양시설인 참전용사의 집에는 6·25전쟁 참전 군인 등 40여 명이 생활하고 있다. 일정에는 필 머피 뉴저지 주지사의 부인 태미 머피 여사도 동행했다.⊙
글 :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woosuk@chosun.com
월간조선 11월 호
美中 ‘10년 전쟁’ 시작과 한국의 선택
美中전쟁 속에서 ‘응석 외교’ 안 통해
⊙ 美의 전선이 인도-태평양으로 확대되면서 인도·호주·필리핀의 전략적 가치는 상승한 반면, 한국의 가치는 하락
⊙ 美의 對中 제재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거래할 경우, 국제적 고립은 물론 법적 제재 직면
⊙ 美, ‘중국이 대만 침공할 경우 한국군은 미군을 도와 참전할 것인가’ 묻고 있어
⊙ 미국, 경쟁국이 자국 GDP의 60%를 넘어서면 전방위 압박해 무너뜨려… 중국은 2022년 현재 미국 GDP의 80%에 달해
劉敏鎬
1962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일본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 졸업(15기) / 딕 모리스 선거컨설팅 아시아 담당, 《조선일보》 《주간조선》 등에 기고 / 現 워싱턴 에너지컨설팅 퍼시픽21 디렉터 / 저서 《일본직설》(1·2), 《백악관의 달인들》(일본어), 《미슐랭 순례기》(중국어) 등

▲미국과 필리핀 해병대가 10월 초 실시한 ‘바다의 전사 연대’ 훈련 개막식 행사에서 필리핀, 일본, 한국, 미국 해병대원들이 국기를 들고 의장행렬을 하고 있다. 사진=AP/뉴시스
‘60% 현상.’
5년 전 워싱턴의 한 싱크탱크의 중국 관련 세미나에서 처음 알게 된 말이다. 미국에 들른 베이징(北京)대학 교수의 발언으로, 중국 지식인 대부분이 믿는 상식이라고 했다. 특정 국가가 미국 국내총생산(GDP) 60%를 넘어서는 순간 미국의 적이 된다는 의미다.
당시에는 중국발(發) 국제정치 이론 아니 음모론으로 들렸다. 미국 GDP의 60%까지는 경제·외교 파트너가 될 수 있지만, 그 이상으로 올라갈 경우에는 미국의 전방위적 공격이 시작된다는 논리였다. 그 중국 교수가 근거로 제시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소련, 1980년대의 일본이었다. 이들 나라의 GDP가 미국 GDP의 60%를 넘어서려는 순간, 미국은 경제·군사·외교 차원의 전방위 강압 정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1995년 일본의 GDP는 5조4490억 달러에 달했다. 당시 미국의 7조6400억 달러의 71% 정도로, 세계 경제대국 미국을 추월할 듯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3년 뒤인 1998년 일본의 GDP는 4조330억 달러로 추락했다. 반면 미국은 9조630억 달러로 수직 상승했다. 일본의 GDP는 미국의 44%로 추락했다. 미국이 주도한 경제압력과 버블경제 종식이 그 이유다. 2021년 기준으로 일본의 GDP는 4조9374억 달러다. 미국은 23조 달러다. 한때 미국 GDP의 71%까지 따라갔던 일본이지만, 2021년에는 미국의 21%에 불과하다.
흥미롭게도 ‘60% 현상’ 얘기를 들었던 2017년 당시, 중국 GDP는 미국의 62.9% 정도였다. 미국이 19.54조 달러, 중국이 12.31조 달러로, 중국의 미국 추월이 2030년 이전에 가능할 것이란 전망이 일상적이던 시기이기도 했다.
중국, 미국 GDP의 80%에 달해
4년 전인 2018년 10월 4일, 워싱턴발 뉴스 하나가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펜스 미국 부통령이 중국을 ‘도둑질 주범’이라고 비난하면서 무역 갈등, 미국 중간선거 개입, 남중국해 문제에 관해 반중(反中) 입장을 노골적으로 표시했다. 이른바 ‘신냉전(新冷戰)의 출발점’으로 해석된 싱크탱크 허드슨연구소에서의 발언이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중국과의 무역전쟁을 8개월째 주도하고 있었다. 중국 상품에 대한 무역 관세가 대중 보복의 핵심이었다. 우연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중국 교수가 말한 ‘60% 현상’은 2018년을 기점으로 본격화됐다.
‘60% 현상’을 염두에 두면서 2022년, 양국의 GDP를 비교해보자. 2022년 GDP는, 미국이 24.85조 달러, 중국은 19.91조 달러에 이를 것이라 전망된다. 중국의 경제 규모가 마침내 미국 GDP의 80%에 도달했다는 의미다. 불과 5년 만에 20%나 상승했다. 1995년 미국 GDP의 71%에 달했던 일본 경제력보다 훨씬 더 강하다.
2022년 가을, 전 세계는 달러 강세에 따른 금융자본 변화를 목격하고 있다. 초읽기에 들어섰지만, 금융·통화 위기가 지구촌 어딘가에서 터질 전망이다. 러시아의 핵(核)무기 사용 가능성도 높아지면서 경기(景氣)는 물론, 장기적 차원의 경제전망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경제학자 대부분은, ‘미중(美中) 직접 충돌이 없는 한’ 10년 내에 중국이 미국 GDP를 넘어설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은 이념이나 종교가 아니라 돈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자본주의 대국이다. 이념이나 종교의 자유도, 궁극적으로 보면 자본 대국이기에 강조할 수 있다. 세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일이지만, 자본이 없다면 이념과 종교의 자유를 누리기 힘들다. 중국 GDP가 미국을 넘어선다는 것은, 마치 이슬람이 기독교를 압도하는 상황에 비견할 수 있다. 육신만이 아니라, 정신적·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기본인 ‘돈’에서 밀릴 경우, 미국이 갖고 있던 ‘자유와 풍요라는 이름의 권위’ 그 자체가 붕괴할 것이다.
이에 따라 모든 국제질서도 중국 중심으로 빠르게 개편될 것이다. 이미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된 것처럼, 마치 꿀 냄새를 맡은 벌처럼 세계 모든 나라가 미국을 누른 중국으로 몰려갈 것이다. 그 같은 상황이 눈앞에 나타날지 여부를 가늠할 시간은 앞으로 10년 정도 남아 있다. 미중 디커플링(Decoupling)은 미국을 누를지도 모를 중국을 타도하기 위한, 워싱턴발 10년 공격의 신호탄이다. 냉전이 될지 열전(熱戰)으로 변할지 알 수 없지만, 진짜 싸움은 앞으로 10년 내내 지속될 것이다. 물론 10년 전쟁의 강도도 매년 수위를 더해갈 것이다.
미국이 보는 韓日의 비중

▲일본 육상자위대와 미 해병대는 10월 초 ‘레솔루트 드래곤22’ 훈련을 실시했다. 사진=일본 육상자위대
얘기를 최근 한일(韓日) 양국을 방문한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에 맞춰보자. 한국 신문에도 보도됐지만, 해리스는 9월 25일 아베 신조(安倍晉三) 전 일본 총리의 국장(國葬)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를 방문했다. 그는 4박 5일간 일본에 머문 뒤, 9월 29일 한국에 들렀다.
해리스 부통령의 방문에 즈음해 필자가 주목한 부분은 미중 격돌에 대응하는 한일 두 나라의 온도 차다. 부연하자면, 반중(反中) 노선의 미국을 대하는 한일 양국의 자세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일본의 자세는 미국과 120% 일치한다. 한국은 어떨까? 한국과 전혀 무관한 남의 일로 대할 뿐이다.
그런 상황의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해리스가 일본에는 4박 5일, 한국에는 무박 1일 머물렀다는 점에 주목하길 바란다. 해리스는 한국보다 3배 정도 많은 일정을 일본에서 소화했다. 필자가 보기에 미국이 보는 한일 두 나라에 대한 비중은 대략 ‘1대 2’ 수준이다. 군사력만이 아닌, 정치·경제 등 여러 측면에서 본 미국의 한일관(韓日觀)이 1대 2 정도라는 말이다.
일단 미군의 방어력이나 전쟁 무기를 둘러싼 미국의 군사전략을 보자. 실제 전쟁이 터질 경우 미군이 두 나라를 오가며 작전을 벌이겠지만, 평시의 준비태세를 보면 1대 2 정도가 유지되고 있다.
가장 중요한 미군의 병력 수를 보자. 주일미군은 5만1000명, 주한미군은 2만8000명이다. 주한미군 가운데 1개 여단은 글로벌 순환 병력이기 때문에 실제 상시 주둔 미군은 2만3000명 선이다. 순환 병력을 제외할 경우, 한일 비율은 정확히 1대 2 정도다.
미군이 가진 전투력이란 점에서 보면 미군의 한일 비중은 1대 3, 1대 4 정도로 벌어진다. 주한미군의 경우, 육군 병력이 2만 명, 공군은 8000명, 해군과 해병대는 불과 500여 명이다. 육군이 주한미군의 7할 정도다.
주일미군은 어떨까? 해병대가 2만 명, 공군이 1만2000명, 육군이 2500명, 항공모함 로널드레이건호를 주축으로 한 제7함대 포함 해군이 1만5000명이다. 주일미군은 해군, 공군, 해병대를 중심으로 한 신속기동군으로 구성돼 있다. 육군 중심 주한미군의 전투력이 공군·해군 중심인 주일미군에 비해 절대 열세라는 것은 이러한 수치만으로도 알 수 있다.
전투기를 보면, 주일미군 전투기는 제7함대 소속 전투기 50기를 포함해 전부 200기가 주둔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약 80기로 일본의 40% 정도 수준이다. 한일 1대 2 정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전투기의 수준을 보면 또 얘기가 달라진다. 주일미군 전투기가 21세기 최첨단인 데 비해, 한국은 20세기 최첨단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한일 주둔 미군을 양적으로 보면 1대 2 정도지만, 질적 수준으로 보면 1대 3, 1대 4까지 차이가 난다. 과거 미국 대통령의 한일 방문 일정을 봐도 ‘1대 2’ 비중이다.
금융·통화 위기 때 도움 줄 나라는 미국
군사 문제와 관련해, 한일 양국에 대한 미국의 생각이 1대 2이든, 1대 3이든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미군 철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주한미군을 크게 줄이고 한국 스스로의 전투력을 강화하자는 주장도 있을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미군의 존재가 희미해질 경우 그만큼 미국에서 멀어진다는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미군 병력이 많을수록, 미제 최첨단 전투기가 많을수록 미국이 갖는 경제적·정치적·문화적 자산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의미다.
반미(反美)·반외세를 부르짖으면서, 미군 나아가 미국과 무관하게 주체적으로 우리끼리 살아가자는 말을 할지 모르겠다. 북한·벨라루스·쿠바 같은 나라로 가자는 의미로 들릴 뿐이다. 시가를 입에 문 피델 카스트로가 주체적이고 폼 나게 보일 수 있지만, 쿠바인들이 어떻게 하루하루를 연명해가는지 안다면 부끄러워서라도 입을 다물어야 한다. 자유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살아온 사람이라면, 북한에서는 단 하루도 지내기 어렵다.
또다시 금융·통화 위기가 닥치면 한국에 도움을 줄 나라는 미국이 유일하다. 친중(親中) 사대주의자들이 아무리 중국을 떠받든다고 해도, 중국은 한국의 금융·통화 위기를 도와줄 능력이 없다. 2022년 전 세계 외환(外換)보유고로 통용되는 통화의 60% 정도는 미국 달러다. 중국 위안은 어느 정도일까? 3%에도 못 미친다(IMF 발표. 2022년 6월 기준). 각 나라가 만약을 대비해 준비하는 외환의 60%가 달러, 3% 정도가 중국 위안이란 의미다. 미국 달러는 언제 어디서든 통용된다. 위안은 시장에서 통하지도 않고 미래도 불투명하다.
해리스의 한일 외교 행보

▲윤석열 대통령은 해리스 미 부통령과 만나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과 관련된 한국의 우려를 전달했다. 사진=뉴시스
해리스 얘기로 돌아가자. 해리스가 일본과 한국에 머무는 동안 북한은 3차례의 무력시위를 벌였다. 해리스가 일본에 도착한 9월 25일을 시작으로, 28일과 29일 3차례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북한의 ‘미사일 축포’가 이어지는 동안 해리스는 어떤 일을 하고 있었을까? 9월 28일 오전 해리스는 도쿄 근처 요코스카 미 해군기지를 방문했다. 주일미군 앞에서 행한 연설의 키워드는 중국이었다. 해리스는 중국의 대만에 대한 무력시위와 남중국해에서의 중국 군사력 확장을 맹비난했다. 북한의 핵 개발과 미사일 무력도발도 거론했지만, 핵심은 역시 중국이었다. 해리스는 9월 26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와의 회담에서도 반중 기조를 이어갔다. 명목은 아베 국장 참석이었지만, 중국의 무력도발에 맞서 미일 동맹이 견고하다는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해리스 방일(訪日)의 진짜 목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방문 후 서울을 찾은 해리스는 윤석열(尹錫悅) 대통령도 만나고, 성(性)평등 관련 여성 모임에 참석하는가 하면, 판문점을 방문하는 등 하루 종일 바쁘게 돌아다녔다.
85분간 행해진 윤석열 대통령과 해리스 부통령의 만남을 보자. 북한 핵에 대한 우려와 함께 한미 동맹을 공고히 하자는 얘기가 기본으로 나왔다.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관련한 한국 측 우려를 전달했고, 필요시 금융안정을 위한 유동성 공급장치를 실행키 위한 협력이 논의됐다고 한다. 한미 요인들이 만났을 때 기본적으로 나오는 북한 핵 문제, 한미 동맹에 대한 다짐을 논외로 할 경우, 최대 7500달러에 달하는 전기자동차 보조금 문제와 한국 금융·외환 위기 공동대처가 핵심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나흘간의 일본 방문 기간 중 해리스의 관심은 중국에 집중됐다. 한국 방문과 동시에 ‘중국’이란 단어는 종적을 감추었다. 대통령실 발표를 봐도 ‘중국’이란 말은 하나도 없다. 갑자기 해리스가 중국을 잊어버린 것일까?
추측건대, 해리스는 윤석열 대통령과의 만남에서도 중국 문제에 대해 논하기를 희망했지만 한국의 요청에 따라 ‘차이나 제로’로 간 듯하다. 이에 대해 중국과 관련해 책임질 일도 없어졌고, 아주 잘한 외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일본은 책임지는 것을 좋아해서 미국과 함께 반중 목소리를 높였을까? 일본은 동맹이기 때문에 미국이 우려하는 부분에 대해 맞장구를 치고 적극 대응에 나선 것이다. 한미 동맹은 그런 동맹의 기본정신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북한 핵을 비롯해, 한반도 내에서의 미군의 방어공약만이 전부일 뿐, 동맹국인 미국의 걱정은 ‘강 건너 불’에 불과하다. 그러면서 한국에 닥친 전기자동차 보조금 제외 문제, 닥칠지도 모를 금융·외환 위기에 대한 미국의 협력에 매달리고 있다.
‘아마에’
아마에(甘え)라는 일본어가 있다. 직역하자면, ‘응석·아양·엄살’ 정도로 풀이될 수 있다. ‘아마에’는 도이 다케오(土居健) 도쿄대 명예교수가 1971년 펴낸, 《아마에의 구조(甘えの構造)》라는 책을 통해 일본인의 정서를 특징짓는 키워드로 등장했다. 이 책은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1946년 펴낸 《국화와 칼(菊と刀)》, 1900년 일본 농학자 니토베 이나조(新渡造)가 영어로 출간한 《부시도: 일본의 혼(Bushido:The Soul of Japan)》과 함께 영미권에서 일본을 연구하는 사람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아마에’는 가까운 사이라는 전제하에, 서로가 기대면서 엄살이나 아양을 떨고, 그 같은 상황을 받아들이는 인간관계를 지칭한다. 상대의 호의에 맞춰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행동하는 식이다. 미국을 대하는 한국 외교를 보면 이 ‘아마에’가 떠오른다. 동맹으로서의 상호존중과 의무, 나아가 자세가 있지만, 한국에는 ‘세계 최강 미국이니까 한국에 좀 양보나 특혜를…’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주의할 점은 한일 ‘아마에’의 차이점이다. 응석·아양·엄살이라는 점에서는 기본적으로 같지만, 다른 점도 있다. 주로 한국의 좌향좌(左向左) 정치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억지 주장이나 ‘벼랑 끝 작전’을 통한 공포 분위기 조장이 그것이다. 기본은 ‘아마에’이지만, 반미를 주장하면서 미국의 관심을 끄는 식이다. 반미를 외치지만, 자식들은 1년에 수억원이 드는 미국 유학을 보내는 심리라고나 할까? ‘설마 나를 무시하거나 버리지 않겠지’라는 기묘한 아마에 심리가 깔려 있다고 보면 된다.
‘아마에’ 심리가 미국에 통하는 것은 미국 스스로가 자신에 차 있고 큰 문제도 없을 때다. 2022년은 다르다. 중국은 이미 미국 GDP의 80%에 도달했다. 10월 말 시진핑(習近平) 장기 독재체제가 굳어지는 순간, 대만은 물론 미국과 세계에 대한 중국의 도발과 협박이 일상화될 것이다. 미국 스스로가 위기에 직면한 상태다.
일본은 그동안 안보를 돈과 아마에로 대신해왔다. 그러나 미국이 위기로 접어들면서 일본도 급변하고 있다. 중국에 대한 대응은 미국의 문제인 동시에 일본 스스로의 문제라고 보면서 미일 안보 일체화(一體化)로 나아가고 있다. 간헐적으로 뉴스로 나오고 있지만, 중국 해군의 태평양 진출을 막기 위해 오키나와 아래의 작은 섬들의 무장화(武裝化)가 급속히 추진되고 있다. 미사일 기지 건설, 비상용 탄약 저장, 유사시 현지 주민 철수 훈련도 시작됐다. 미중 디커플링은 경제가 아니라, 태평양 입구에 들어선 작은 섬들에서부터 본격화되고 있다.
반면에 한국은 ‘중국’이란 단어 자체를 기피하면서, 애매한 동맹으로 미국을 대하고 있다. 경제 분야의 경우 반도체만이 아니라, 전기자동차와 의료, 나아가 바이오산업과 우주자원 탐사까지 미중 디커플링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국은 설마 설마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중국 문제에 관한 한 미국으로부터 ‘특별’ ‘예외’를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한층 구체화되고 있는 미중 디커플링 속에서 한국의 ‘아마에 외교’가 더 이상 통할 수 없다는 의미다. 반도체나 전기자동차 수준을 뛰어넘는, 3개의 큰 파도가 한국에 곧 밀려들 것이다. 한국전쟁 후 처음 직면하는, 한국의 운명 자체를 가름할 시련이다. ▲미국의 대중(對中) 경제제재 확대와 제3자 페널티 ▲대만 유사시 한국의 입장 ▲필리핀의 등장과 한반도 지정학적(地政學的) 가치의 급락이 그것이다.
대만, 對中 경제제재 앞장
첫째는 미국의 대중 경제제재 확대와 제3자 페널티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미국이 광범위한 대중 경제제재에 착수했다는 소식이 워싱턴발 급보로 전해지고 있다. 이 조치는 중국 정보통신기업 화웨이에 적용됐던 수출 통제보다 한층 더 가혹한 내용과 범위로 확대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60% 현상’에 기초한 미중 10년 전쟁을 이해한다면, 누구나 예상했던 너무도 당연한 뉴스다.
9월 13일 로이터 통신도 보도했지만, 대중 경제제재는 바이든 대통령 주도하에 이뤄지고 있다. 사실 대중 경제제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직후부터 언급되어왔던 사안이지만, 러시아 경제제재를 먼저 실행하는 과정에서 뒤로 밀렸을 뿐이다.
그러던 것이 9월 들어 분위기가 급변했다. 그 중심에는 주미대만경제문화대표부가 있다. 대만이 미국을 포함해 전 세계 민주 진영 지도자들에게 대중 경제제재를 적극 주문했기 때문이다. 펠로시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 전후 중국이 보여준 도발적 행위가 대중 경제제재 목소리를 높이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다. 대만 경제문화대표부는 9월 13일 워싱턴에서 전 세계 민주 진영 국회의원 60명을 초대해, 대중 경제제재의 내용과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에 들어갔다. 이는 대만 단독 행동이 아니라 미국과의 교감하에 이뤄진 행동이라 볼 수 있다.
‘제3자 페널티’
미국이 시행할 대중 경제제재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베일에 싸여 있다(9월 5일 기준). 그러나 러시아 경우를 보면, 대중 경제제재에 들어갈 경우 기업들의 중국과의 관계 단절은 필연적이다. 모른 척하고 제재 대상 중국 기업과 거래를 할 경우 자유 진영으로부터 배척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거래 자체에 대한 제재만이 아니라, 위반 기업의 글로벌 금융거래 자체가 중단될 수 있다. 물론 관계자 개개인에 대한 인적 제재도 뒤따른다.
한국 반도체 회사가 제재에 들어간 중국 기업과 거래를 할 경우, 한국 반도체의 미국 수출도 중단되고 유럽의 미국 동맹국들에도 배척된다. 물론 반도체 회사 지도부도 기피인물로 찍히면서 반중 경제제재 동참국으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다. 현재 어정쩡하게 양다리 작전을 펴고 있는 한국 기업에는 치명타가 될 것이다. 정경분리(政經分離)는 불가능하다.
경제제재 문제는 보통 미국 상무부와 재무부가 주관한다. 미국이 정한 관련 규정에 어긋날 경우, 자동 처리되는 식이다. 일단 위반 사항이 적발될 경우, 백악관이나 국무부를 통한 ‘아마에 외교’가 통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함께 주목할 부분은 제3자 페널티 문제다. 경제제재 기업과 거래를 한 기업이나 개인에게, 기피 차원이 아닌 법적 책임까지 묻는 것이 제3자 페널티다. 러시아의 경우에서 보듯, 제3자 페널티가 곧바로 시행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격화될 미중 10년 전쟁을 조망하면, 언젠가 직면하게 될 사안이다. 주목할 부분은, 제3자 페널티가 기업이나 개인 제재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인들이 집단소송을 걸 수 있는 명분이자 근거가 제3자 페널티이다. 한국 특정 기업이 중국과의 불법거래로 제3자 페널티를 받을 경우, 미국 시민들이 한국 기업에 대한 민사·형사 소송에 나설 수 있다. 개인이 아닌 집단 차원의 소송이다. 미국 시민들의 소송 근거는 인권탄압이나 소수민족 박해를 도운 혐의와 같은 식이 될 것이다.
중국의 대만 침공 시 한국은?
둘째는 대만 유사시 한국의 입장이다. 이미 워싱턴에서는 중국이 대만을 무력 침략할 경우 한국의 입장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미국 국방부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는 소식들에 의하면 대만 유사시 주한미군이 직접 개입할 것으로 전망된다. 바이든 대통령은 대만해협 유사시 미군 개입을 이미 4번이나 공언했다. 주한미군이 대만해협 사태에 참전할 경우 동맹 관계에 있는 한국은 과연 어떤 정책으로 나아갈 것인가? CNN은 유엔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과의 인터뷰에서 이에 대해 직접적으로 물었다.
CNN: 중국이 대만을 공격할 경우, 미국의 요청 시 대만 방어를 지원할 것인가?
윤 대통령: 만약 중국이 대만을 공격한다면 북한 역시 도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 경우 대한민국에서는 강력한 한미 동맹을 바탕으로 북한의 도발에 대응하는 것이 가장 최우선 과제가 될 것이다.
CNN: 미국이 대만 분쟁에 대응하기 전에 한반도 방위 공약을 먼저 이행해야만 한다는 것인가?
윤 대통령: 미국의 우선순위에 대해 답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한반도와 대만 모두 미국에 중요하다.
좋게 말하면 외교적 센스가 돋보이는 답안이고, 나쁘게 말하면 동문서답(東問西答)이다. 중국 문제를 묻는데 북한이 튀어나왔다. 대만 유사시 한국 입장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 사실 이 경우 한국의 입장은, 해리스 방문 당시 논의했어야만 하는 한미 핵심 현안이다. 그 핵심은 대만 유사시 ‘한국군 참전 여부’로 모인다. 한국이 미군을 필요로 하듯, 미국도 한국군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다. 대만 유사시, 중국의 주한미군 공격도 상상할 수 있다. 주한미군 나아가 미군 기지가 미사일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런 상황하에서도 한국은 ‘북한 도발에 따른 미군의 대응’만 요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대만에서의 유사 사태는 한국에 수입되는 에너지와 식량 운송 ‘시 레인(Sea Lane)’과도 연결돼 있다. 대만해협과 그 주변 어딘가에서 한국 관여가 필연적이다. 늦으면 늦을수록 더 큰 비용만 지불하게 될 것이다.
미군의 필리핀 복귀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은 9월 22일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사진=AP/뉴시스
10월 1~14일 필리핀군과 미군의 해상 합동군사훈련이 진행됐다. ‘바다 전사의 연대(Cooperation of the Warriors of the Sea)’란 이름의 훈련으로 3800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필리핀은 원래 미군과 정례적으로 군사훈련을 했었지만 두테르테 전 대통령이 집권한 후에는 양국 합동훈련을 대폭 축소하면서 소원한 관계가 지속됐다. 두테르테는 대통령 재임기간 중 한 번도 미국 땅을 밟은 적이 없을 정도로 사실상 반미·친중(親中) 노선을 걸었던 포퓰리스트 정치인이다. 대체로 문재인 정권과 흡사한 외교 행보를 보였다.
지난 6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2세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필리핀의 대외(對外) 정책이 급변하고 있다. 마르코스는 9월 22일, 유엔 방문기간 중 바이든과 개별 정상회담을 가졌다.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대우와 기대가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준 것인데 필리핀에서는 ‘홈런급 쾌거’라고 흥분하고 있다. 9월 29일에는 필리핀 국방장관이 미국을 방문해 양국 간 군사협력 강화에 합의했다. 당장 내년부터 양국 간 군사훈련 규모를 2배로 늘릴 예정이다. 과거 미군이 사용했던 필리핀 내 해군시설에 대한 논의도 진행 중이다. 가까운 시일 내 미국 항공모함의 필리핀 입항(入港)이 실현될 전망이다.
지도상으로 보면 대만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가 필리핀이다. 과거 미군이 사용하던 필리핀 내 해·공군 시설을 재활용할 경우 미국은 대만사태 대응은 물론 중국 해군의 태평양 진출을 원천 봉쇄할 수 있다. 중국 해군은 코앞에 들어선 미군을 감시·방어해야 하기 때문에 태평양까지 나갈 여력이 없어진다.
美에 北核은 4차 이슈
마르코스는 겉으로는 미국 일방외교가 아니라 중국과의 균형외교를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필리핀의 국민 정서는 반중으로 흐르고 있다. 중국이 필리핀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섬들을 무력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리핀은 1992년 미군 철수를 요구해 관철했지만, 30년이 지난 2022년에는 미국의 복귀를 반기는 분위기다. 필리핀의 친미(親美) 정책은 한층 가속화될 것이다.
일본은 필리핀의 전략적·지정학적 가치를 진작부터 파악했다. 유엔 총회 때 기시다 총리는 앞장서서 마르코스와 만났다. 마르코스의 일본 국빈 방문도 조만간 실현될 전망이다. 미국과 일본은 앞다투어 필리핀을 친구로 환영하고 있다.
필리핀의 등장은 한국에 어떤 의미를 가질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결코 강 건너 불이 아니다. 불과 1년 만에 미국의 전선은 태평양에서 인도-태평양으로 확장되었다. 미국의 전선이 태평양일 경우 한국이 1차 방어선, 일본이 2차 방어선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인도-태평양으로 전선이 확대되면 기존의 지정학적 가치와 의미도 달라진다. 일본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한국은 동남아나 인도양 주변 나라와 비슷하거나 낮은 위치로 전락하기 쉽다.
현재 워싱턴에서 북핵은 중간 단계급 이슈로 처리되고 있다. 중국이 1차, 러시아가 2차, 이란 핵문제가 3차이며, 북핵은 그 아래 4차 이슈로 처리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한국보다 필리핀·인도·호주의 전략적 가치가 올라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필리핀은 과거의 미군기지도 그대로 남아 있고, 친미 감정도 강하며 영어권 나라이기도 하다.
돈이 아니라, 나라의 목숨이 걸린 문제
‘60% 현상’, 아니 ‘80% 현상’으로 치달으면서 미중 10년 전쟁은 한층 더 격화될 것이다. 한국은 아직 애매한 입장이다. 나름 이유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 내에서만 통하는 논리다. 나쁘게 말하면 쇄국(鎖國)의 논리라 볼 수 있다. 전기자동차 보조금 특별 혜택에 매달리면서 ‘한국 특별’을 요구하는 ‘아마에 외교’가 펼쳐지고 있다. 듣기에도 좋고, 국민 지지율도 올라갈 수 있지만, 글로벌 판세로 보면 소탐대실(小貪大失)에 불과하다.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권과 같은 반미 정책은 배격하고 있다지만, 미중 갈등 상황 속에서 중국에 대한 명확한 입장이 없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한국이 왜 미중 디커플링에 끼여 고생해야 하는가”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근본적인 이유는 한국이 강대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맹은 약소국의 약점을 보완하는 최고의 수단이다. 미국과 동맹인 이상, 동맹 파트너에 대한 신의와 약속을 지켜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고생도 같이할 수밖에 없다.
동맹은 주고받는 것이다. 일방적 수혜(受惠)는 동맹 관계가 아니라 종속 관계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양국간·다자간 무역협정 수십 개가 있어도 평화와 안보를 보장하는 군사 동맹 하나만 못 하다. 돈이 아니라, 나라의 목숨이 걸린 문제다. 양다리 걸치기식 ‘박쥐외교’를 국익(國益)을 지키는 현명한 방법이라고 믿던 시대는 이미 끝났다.⊙
11월 21일 중국의 ‘北 뒷배’ 역할 좌시할 수 없다
이미숙 논설위원
민주주의 힘 보여준 우크라戰
美중간선거서도 트럼프 퇴조
시진핑 3기 中체제 낙관 실종
G20 ‘푸틴.김정은 核’ 경고에도
中은 ‘우려 해소’ 앞세워 北 두둔
동맹 공조만이 북핵 해결 열쇠
2022년은 글로벌 민주주의가 쇠퇴 국면에서 회복되는 전기를 마련한 해로 기록될 것 같다. 연초만 해도 세계 각국의 민주주의 국가들이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처지에 빠졌다는 비관론이 팽배했지만,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민주주의 파워를 재확인하게 된다. 만성적인 정국 불안에 빠져드는 민주주의 체제보다 거시적 국가 정책을 세울 수 있는 권위주의 체제가 낫다는 중국 체제 우월론자들의 주장도 힘이 빠지는 기류다.
우선, 러시아 독재자 블라디미르 푸틴의 침략전쟁에 맞서 싸우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민주주의의 저력을 확인시켜준다. 지난 2월 24일 러시아 침공 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우크라이나인들의 대러 항전은 자유민주주의 회생의 희망이 됐다. 냉전체제 붕괴 후 ‘자유민주주의의 최종 승리’를 선언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푸틴의 침공 후 “우크라이나가 ‘1989년 정신’(자유주의 승리)을 재생시켜 줄 것”이라고 했다. 최근 전황을 보면, 그의 예측대로 될 가능성이 커졌다.
미국 중간선거에서도 민주주의의 힘이 확인됐다. 4월 헝가리 총선에서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 승리했을 때만 해도 “선거가 비자유적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로 가는 수단이 됐다”는 탄식이 나왔다.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2024년 대선을 통해 오르반처럼 ‘선출된 독재자’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고, “헝가리의 오늘이 미국의 내일이 될 것”이라는 비관론도 팽배했다. 그런데 중간선거에서 트럼프가 밀었던 상원의원 후보들이 낙선하면서 트럼프 열풍은 사그라드는 기류다. “민주주의를 위해 투표하라”는 조 바이든 대통령의 호소에 유권자들이 화답하며 바이든의 리더십도 힘을 받고 있다.
반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10월 공산당 20차 전당대회에서 3연임에 들어섰지만, 중국이 미국을 넘어서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론이 확산되고 있다. 시 주석의 제로 코로나 집착에 대한 국내적 반발이 심상치 않은 데다 경제 성장세마저 꺾인 상태다. 시진핑식 전체주의가 강화될 것이라는 관측 속에 중국의 부상에 대한 낙관론은 자취를 감추고 있다.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개최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는 미·중의 파워 변화를 확인시켜준 무대다. G20 정상들은 공동성명에서 “대부분의 회원국은 가장 강력한 표현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강력히 규탄한다”고 밝혔다. 중국이 러시아 편에 서서 반대했지만,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이 상황에 대해 다른 견해와 다른 평가도 있다”고만 명시했을 뿐이다. 나아가 “핵무기 사용이나 위협은 용납할 수 없다”는 문구까지 넣어 푸틴과 김정은의 핵 도박 가능성에 고강도의 경고를 보냈다.
시 주석은 G20 공동성명에도 불구하고 한·중, 미·중 양자회담 때 대놓고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을 두둔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서 역할해 달라”고 하자 “남북관계 개선이 필요하다”며 동문서답식 답변을 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북한의 7차 핵실험 저지 공조를 얘기하자 “북한의 합리적 우려 해소가 필요하다”며 김정은 대변인 같은 말까지 했다. 합리적 우려란 곧 대북 적대시 정책 철폐, 즉 한미동맹 해체를 의미한다.
2014년 방한 때 “한반도 비핵화”를 말했던 시 주석이 “북한의 우려 해소”를 요구한 것은 한·미 양국과의 북핵 해결 공조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1기 집권 때에는 북핵 해결 협력을 내세웠지만, 3기에 접어들며 북한식 전체주의로 퇴행하면서 북핵을 중국의 대미(對美) 협상용 수단으로 쓰겠다는 신호다. 돌이켜보면 1992년 한·중 수교 후 중국은 늘 한미동맹을 “냉전의 유물”이라고 비난했다. 청산 대상임을 분명히 한 것인데, 역대 정부는 그런 중국의 본색을 외면했다. 진보·보수 정권 모두 “북핵 해결을 위한 협력국”으로 추켜세우기 바빴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도발에도 중국은 “대화를 통한 우려 해결”을 내세우며 김정은을 두둔했다. 윤 정부는 그런 중국의 실체를 제대로 봐야 한다. 중국 위압에 겁먹지 말고 망상에 기초한 대중 정책을 청산한 뒤 동맹·자유진영과 북핵 문제 근본 해결을 위한 전략 공조에 나서야 한다.
문화일보
11.21 미·중 사이 한국, 선택의 시간은 지났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면서 러시아가 핵 사용을 위협한 데 이어 북한도 선제 핵사용을 법제화했다. 인류 생존이 걸린 전 지구적 위협, 즉 글로벌 생존적 위협(Existential Global Threats)이 화두가 된 상황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승자가 누가 될지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전쟁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가 중요하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이 지역 내 러시아어 사용 주민들을 위한 해방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대 러시아제국의 마지막 식민지에 대한 침공에 불과하다는 비판적 시각이 맞서 있다. 비교경제학의 대가인 미 버클리대의 제라르드 롤랑 교수의 견해가 대표적이다.
롤랑 교수는 지금의 복잡한 국제정세를 분석하기 위해 제국(Empire), 국민국가(Nation State), 민주주의라는 세 가지 개념 틀을 제시했다. 그는 국제법을 무시하고 힘에 의한 현상변경을 추진하는 중국과 러시아를 21세기의 제국으로 규정하고 중장기적으로 제국은 쇠퇴할 것으로 봤다. 그 대신 초국가적 기구를 만들어 제국에 대항하는 중소 규모의 민주주의 국가들의 다자간 연대가 힘을 얻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힘에 의한 현상변경 추구 중·러
민주주의 국가 다자연대와 대립
한국, 민주블록 기술우등국 돼야
기술발전의 국가 거버넌스 시급
이 분석 틀로만 보면 중국은 종교나 이념 대신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팽창주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과거 다른 제국과 구분된다. 중국 같은 대국이 대만 통일을 주장하고 민족주의적인 국민국가처럼 행동할 경우 과거 나치 제국처럼 주변국이나 전 세계에 매우 위험한 존재가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은 미·중 간 전략 경쟁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하지만 미·중 경쟁의 승자를 알기 위해서는 경쟁의 핵심인 4차산업 기술 혁명에서 누가 이길지 먼저 분석해야 한다.
18세기에서 19세기 중반까지 진행된 1차 산업혁명처럼 4차 산업혁명도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를 양산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를 초래하는 혁명이되고 있다. 20세기에 진행된 세계화는 주로 하층 노동자들의 소득을 낮추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21세기에 등장한 플랫폼 기업과 인공지능(AI)은 중간 및 고학력층의 소득까지 낮추는 결과를 가져왔다. 불평등과 양극화를 가속한 것이다. 미국에서 포퓰리즘이 득세한 근저에는 이런 양극화가 자리 잡고 있다.
중국 시진핑 체제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 형성된 자본가층 세력을 약화하기 위해 양극화 및 불평등 해소를 명분으로 공동부유를 내세우고 있다. 최근 시진핑의 3연임 성공과 장기집권체제 구축으로 중국은 정권의 우선순위를 미국과의 체제 경쟁보다는 공산당 및 일인 지배체제의 공고화에 두고 있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미·중 경쟁의 관건은 누가 4차 산업혁명에 따른 불평등과 양극화를 해소하면서 경제 성장을 지속하느냐에 있다. 중국이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강화함으로써 불평등 해소에는 어느 정도 성공할지 몰라도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중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와의 협력관계를 강화하고 있지만, 러시아로부터의 가스·원유 등 기존 화석연료를 값싸게 공급받는 구조에 안주할 경우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에너지 혁명에서 미국에 뒤처지게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글로벌 공급망 구조는 민주주의와 권위주의라는 가치체계에 따라 재편되고 있다. 미국·유럽을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 블록과 중국·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권위주의 블록, 그리고 인도·남미·아프리카 등 제3의 블록으로 나뉠 것으로 보인다. 겉으로는 민주주의와 권위주의라는 포괄적 가치체계에 따라 나뉘지만, 실은 기술 및 공급망 구조에 따른 경제적 실리에 따라 재편되고 있다. 제3세력의 향방도 결국 어느 쪽이 경제면에서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느냐에 있을 것이다.
한국의 선택은 어디인가. 우선 정치·안보 면에서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한 미국과의 협력은 이미 선택의 문제를 넘어섰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북한이 중국·러시아로 확연히 기울고 있는 마당에 과거처럼 중국과 미국 사이의 줄타기란 불가능하다. 기술·경제 면에서 본다면 한국은 민주주의 블록 내 4차 산업혁명의 우등생이 돼야만 한다.
반도체·배터리뿐만 아니라 에너지 혁명에서도 승기를 잡아야 한다. 특히 수소 경제 생태계 조성에 국가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글로벌 에너지 정책의 대가인 미 컬럼비아대의 줄리오 프리드만 교수의 주장처럼 수소 경제는 향후 저렴한 에너지 비용으로 4차 산업혁명이 불러올 국가 간 혹은 국가 내 양극화 심화를 해소하는 핵심 방안이 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은 생산력 즉 기술 또는 경제가 생산관계 즉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봤다. 그러나 간과해서 안 될 것은 기술개발에 앞선다고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기술 발전을 뒷받침할 국가의 거버넌스 구조를 어떻게 빨리 만들어 내느냐다. 친환경적이면서 불평등 완화적인 기술 개발을 촉진하면서, 양극화 같은 부정적 요소를 최소화할 수 있는 정치·사회 거버넌스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만이 선도국가 한국의 과제다.
중앙일보 박제훈 인천대 교수·아시아경제공동체재단 이사장
11.21 尹과 회담서도 공들였다…日 기시다 '인도태평양 전략'에 올인
"한국 윤석열 대통령과 '자유롭고 열린 인도 태평양(Free and Open Indo-Pacific·FOIP)' 실현을 향한 연계를 확인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는 지난 13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 후 이번 회담의 가장 큰 성과로 "인도태평양(인태) 전략에 있어 한국과의 연계"를 들었다. 일본이 제창하고 미국이 찬동하고 있는 인태 전략인 FOIP에 한국이 협력 의사를 밝힌 데 대해 환영의 뜻을 표한 것이다.
중국의 부상을 겨냥해 탄생한 일본의 인태 전략인 FOIP는 최근 그 영역을 아시아·아프리카는 물론 유럽 지역까지 넓히며 몸집을 불려가는 모양새다. 국제정치 전문가들은 "미·중 경쟁의 심화와 우크라이나 사태 등으로 FOIP의 전략적 지향점은 명확해지고, 협력의 범위는 확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달 22일 호주 퍼스를 방문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오른쪽)가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와 코알라를 안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인도양-태평양은 연결된 공간"
FOIP는 2016년 8월 27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당시 일본 총리가 제6회 아프리카개발회의 (TICAD) 기조연설에서 대외적으로 공표한 일본의 전략이다. 이 개념은 태평양과 인도양을 전략적으로 연결된 공간으로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특히 인도의 전략적 가치를 중시하면서 '다자주의를 통한 지역질서 구축'을 목표로 내걸었다.
2018년 고노 다로(河野太郎) 당시 외상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FOIP의 비전으로 ▶항행의 자유, 법의 지배 등 기본적 가치의 보급과 정착 ▶자유무역협정(FTA)·경제동반자협정(EPA) 등으로 연결성을 강화해 경제적 번영을 추구 ▶해양법 집행능력 향상 및 방재 지원 등 평화와 안정을 위한 협력 추구 등을 들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당시만 해도 고노 외상은 이 구상이 "일정한 나라를 겨냥한 것은 아니다"라며 중국의 일대일로(一带一路)에 대응하는 전략으로 해석되는 것을 경계했다. 일본외교 전문가인 소에야 요시히데(添谷芳秀) 게이오대 명예교수는 "중국과의 대립을 바라지 않는 인도를 적극 끌어들인 데서도 알 수 있듯, FOIP는 중국을 봉쇄하기 위한 전략이라기보다는 중국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중국 중심의 질서'와 다른 지역 질서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문제 의식에서 출발했다"고 해석했다.
미·일 인태전략의 '일체화'
그러나 이후 미·중 대립이 격화하는 가운데 미국이 일본의 인태 구상을 적극 받아들이면서 FOIP에 담긴 '중국 견제'라는 함의는 점차 선명해진다.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정부 시기인 2017년부터 한국·일본 등 동북아시아와 호주·인도에 이르는 지역을 통칭하던 '아시아태평양'이라는 용어 대신 '인도태평양'이란 단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지난 5월 24일 일본 도쿄 총리관저에서 열린 쿼드 정상회의에 참석한 정상들. 왼쪽부터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AFP=연합뉴스
조 바이든 행정부도 지난 2월 새로운 인태 전략을 발표하면서 한·미·일 협력 등 동맹·우방국과 공조를 강화해 중국의 영향력 확대 및 현상 변경 시도를 억제하겠다고 발표했다.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등 동중국해 등지에서 벌어지는 중국의 군사적 도발 등으로 중국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지면서 일본의 인태 전략 역시 미국과 일체화하는 쪽으로 변화하는 추세다.
FOIP의 중심에는 인도·태평양 전략의 당사자인 미국·인도·호주·일본이 참여하는 다자간 안보협의체 '쿼드(Quad)'가 있다. 2007년 아베 전 총리의 제안으로 처음 만들어진 쿼드는 한동안 중단됐다가 2017년 FOIP 구상과 함께 부활했다. 특히 2020년 8월 열린 '미국·인도 전략적 파트너십 포럼'에서 스티븐 비건 당시 미 국무장관이 '쿼드'를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같은 다자 안보 동맹으로 공식기구화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존재감이 커졌다.
"유럽 등 폭넓은 파트너와 협력"
일본의 인태 전략은 이렇게 미·일동맹과 쿼드를 기반으로 하면서 기존 파트너국과 전략적 관계를 심화하고 인도태평양 국가가 아닌 유럽 등과도 협력하는 방향으로 확장 중이다.
일본은 10월 호주와 새로운 안보선언을 발표하면서 대만유사(有事) 등 긴급사태가 발생하면 공동으로 대응한다고 명기하는 등 두 나라의 관계를 사실상 동맹 수준으로 강화했다.

▲16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 참석한 각국 정상들. AFP=연합뉴스
유럽과의 밀착도 눈에 띈다. '준동맹' 관계에 있는 영국과는 다음 달 양국 군대가 연합훈련 등의 목적으로 상대국을 방문할 때 무기 반입 절차 등을 간소화하는 '원활화 협정'(RAA)을 맺을 예정이다. 독일과는 지난 4일 외교·국방 장관이 참여하는 '2+2' 회의를 열었고, 16일에는 기시다 총리와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회담을 열어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 일어나는 중국의 힘에 의한 일방적 현상 변경 시도에 반대한다"는 인식을 공유했다.
국제정치학자인 시라토리 준이치로(白鳥潤一郎) 일본 방송대 교수는 "다국간 협력을 지향하는 FOIP가 유럽까지 범위를 넓혀 관계 강화를 구체화하고 있는 것은 최근 일본 인태 전략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마쓰노 히로카즈(松野博一) 일본 관방장관도 지난 14일 기자회견에서 내년 봄 기시다 총리가 새로운 FOIP 구상을 발표할 예정이라며 "국제사회에서 법의 지배에 기반한 자유롭고 열린 국제 질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움직임이 늘고 있는 가운데, 지금까지 이상으로 폭넓은 국제사회 파트너들과 협력하겠다는 내용이 담길 것"이라고 발표했다.
쿼드에 한국·베트남·뉴질랜드 3개국을 더한 '쿼드 플러스' 구상 등도 이런 확대 전략의 일환이다. 소에야 교수는 "한국이 FOIP 구상에 참여한다면 어떤 형식이든 쿼드를 통한 협력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도쿄=이영희 특파원 misquick@joongang.co.kr
11.23 한국 사활 걸린 해상수송로, 동남아 국가와 협력 강화할 때
동남아시아가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중국과 태평양·인도양 사이에 위치한 해양학적·지정학적 가치가 새롭게 부각되면서 국제적 위상이 괄목할 정도로 높아지고 있다.
동남아는 2022년 11월 글로벌 외교무대로 변신하면서 달라진 위상을 보여줬다. 지난 10~13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동남아 10개국으로 이뤄진 아세안(ASEAN) 정상회의와 함께 한국·일본·중국이 동참한 아세안+3 정상회의가 열렸다.
미·중 대립 속 동남아 위상 급상승
관광·경제서 안보·외교로 축 이동
중동~한국 잇는 ‘바닷길’ 지나가
한국 수송로 보호 중간기지 필요
15~16일엔 인도네시아 발리의 누사두아에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열렸다. G20에선 지난해 1월 취임하고, 11월 8일 중간선거를 치른 미국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지난달 16~22일 중국공산당 20차 당 대회에서 3연임을 확정한 시진핑(習近平) 총서기가 처음으로 대면으로 만났다. 세계정치의 중심 무대가 동남아로 옮긴 듯했다. 시 주석과 서방 중심의 주요 7개국(G7) 회원국인 캐나다의 쥐스탱 트뤼도 총리의 설전도 이곳에서 벌어졌다. 미·중 각축,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국가 간 경쟁의 가장 적나라한 장면이 발리에서 표출됐다.
G20 회의, APEC회의 잇따라 열려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10~13일 개최된 아세안(ASEAN) 정상회의의 일부로 13일 동아시아 정상회의가 열리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 16~19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주목받는 손님을 맞이했다. 17일 한국을 방문했던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왕세자가 APEC 정상회의에 초청받아 참석했다. 빈 살만 왕세자는 일본 방문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와의 회담은 취소했지만, APEC에는 기꺼이 참석한 뒤 2022 FIFA 월드컵이 열리는 카타르로 떠났다.
그뿐만 아니라 프놈펜에선 22~24일 제9차 아세안 확대 국방장관 회의(ADMM Plus)가 열렸다. 아세안 10개 회원국과 한국·미국·중국을 비롯한 아태지역 주요 8개국 국방장관이 참가하는 역내의 대표적인 다자안보협의체다. 아세안을 매개로 미국과 중국의 국방 수장이 머리를 맞대고 충돌 회피와 긴장 완화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다. 한국은 이와 별도로 이미 지난해 11월 10일 한·아세안 국방장관 회의를 출범해 군사안보 협력의 틀을 만들었다.
이러한 일련의 회담에는 두 가지 함의가 있다. 하나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전개와 미·중 경쟁의 가열에 따라 지리적 중간지대인 동남아가 글로벌 외교 중심지로 새롭게 자리를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다. 또 다른 것은 과거 경제·관광 등의 영역에 국한됐던 아세안과 외부의 협력이 국방·안보 분야로 새롭게 무게 중심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과 군사기지화, 그리고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 등으로 아세안 국가들이 안보위협을 느끼면서 외부와의 협력의 장을 확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동안 조용한 ‘중간국 외교’ 펼쳐왔던 동남아가 이젠 새로운 안보질서 정립을 위한 대외 협력의 시대를 열고 있는 셈이다.
그동안 경제와 인적교류에 무게를 실었던 한국의 동남아 전략도 대대적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군사·안보 분야를 포함한 여러 방면에서 동남아와의 관계를 강화해 상생의 전략적 파트너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핵심은 한국 외교·국방의 지정학적 범위를 한반도와 주변 해역에서 동남아를 포함한 해상수송로(SLOC) 전반으로 넓히는 것이다.
동남아는 에너지를 수입해오는 인도네시아가 위치한 지역인 것은 물론, 중동에서 한국으로 이어지는 SLOC가 지나는 혈맥이다. 아라비아 반도의 서남쪽 바브엘만데브 해협과 동북쪽 호르무즈 해협을 거쳐 아라비아 해와 인도양, 벵골만을 지나 동남아를 관통하는 이 SLOC는 한국의 사활이 걸린 수로다. 해군과 해양경찰 등이 앞장서서 아세안과 군사·안보·해양 교류를 확대해야 하는 이유다.
특히 과거 베트남전 당시 군항이던 깜라인 만을 외국에 개방한 베트남과 협의에 나설 필요가 있다. 해군이나 해경이 기나긴 SLOC을 항해하는 한국 화물선을 효과적으로, 지속 가능하게 보호하려면 보급과 휴식을 위한 중간기지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과거 미 해군기지가 있던 수비크만의 개발사업을 펼치는 필리핀과도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국제 위상에 걸맞은 외교 전략 필요
국토가 좁아 공군 비행단 일부를 미국·프랑스·호주 등 해외에서 훈련하고, 육군 훈련을 이웃 브루나이나 대만에서 해온 싱가포르와도 군사교류를 확대할 여지가 있다. 동남아와 한국이 서로 윈윈하는 상생 협력이 될 수 있다. 한국은 냉전 이후에도 각종 무기체계와 군수물자를 효율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제조업을 확보한 드문 국가이기 때문이다.
동남아와 군사·안보 협력을 강화하면서 방위산업·기술교육·개발원조(ODA)·경제 등의 협력도 계속 확대하는 독자적인 지역 외교·국방 전략을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다. 이는 한국이 주요 국제 문제에 침묵·방관하는 대신 경제력과 군사력, 그리고 국제 위상에 걸맞은 중견국 외교를 본격적으로 펼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한국에서 일하는 아세안 출신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인도적·합리적 대우 체계도 마련해야 한다. ‘강한 힘을 가진 인도주의 국가 한국’의 이미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공세적이고 장기적인 아세안 전략이 필요한 이유다. 지난 11일 프놈펜의 한·아세안 정상회의에서 “이제 한국은 아세안을 단순한 경제파트너가 아니라 전략적 파트너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고 했던 윤석열 대통령에게 부과된 과제다.
중앙일보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11.25 ‘對中 매파’ 펠로시의 30년 뚝심
청치 초년 때 ‘천안문 추모’ 계기
中 반인권 비판 30여 년 이어가
우리 국회엔 보스 추종자들만
北 인권 위해 무슨 노력 하나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 지난 11월 17일 미 하원 연설에서 내년 1월 개원하는 다음 의회에서 당 지도부 선거에 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했다./AFP 연합뉴스
이달 초 중간선거에서 당선돼 19선(選)에 성공한 낸시 펠로시 미 연방 하원의장은 20년간 지켜온 의장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최근 밝혔다. 의회 내 대표적인 ‘대중(對中) 매파’인 그는 지난 8월 대만 방문을 강행하며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켰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훼손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며 중국이 대놓고 으름장을 놨지만, 펠로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칫 무력 충돌까지 우려되던 당시, 56초짜리 동영상 하나가 주목을 받았다. 천안문 사태 2년 뒤인 1991년 펠로시가 베이징 천안문 광장을 예고 없이 찾아 민주화 시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성명을 낭독하는 장면을 담은 것이다. 펠로시는 며칠 전 팔순을 맞은 조 바이든 대통령보다 두 살 많은 역전의 노장이지만, 동영상에선 바짝 긴장한 50대 초반 정치 초년병 모습을 볼 수 있다. 중국의 서슬 퍼런 감시를 뚫고 동료 의원 두 명과 ‘민주화 성지’를 찾은 그는 흰색 꽃 한 송이를 들고 ‘중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라는 글귀가 적힌 검은색 플래카드를 펼쳤다. 이들을 제지하는 공안의 당황한 표정이 인상적이다.

▲낸시 펠로시(가운데) 미국 하원의원이 1991년 동료 의원 두 명과 함께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중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꺼내들었다. /미국 하원의장
펠로시는 정치 인생을 관통한 반중(反中) 신념이 자리 잡은 계기를 자서전 ‘자신의 숨겨진 힘을 깨달아라(Know Your Power)’에서 설명했다. ‘미국의 딸들에게 주는 메시지’라는 부제를 달고, 사상 첫 여성 하원의장에 오르며 ‘유리천장’보다 더 견고한 ‘대리석 천장(marble ceiling)’을 깨뜨린 선배의 경험과 고언(苦言)을 전한 책이다.
미국 동부 볼티모어 출신이지만 결혼 후 서부로 이주해 47세에 샌프란시스코 하원의원에 당선된 펠로시는 지역구 차이나타운에서 벌어지던 중국인들의 민주화 시위에 주목했다. 그는 학생 비자를 받아 미국으로 탈출한 천안문 시위 참가자를 보호하겠다는 책임감을 강하게 느꼈다고 회고했다. 이들이 안전하게 귀향할 수 있을 때까지 미국 체류를 허용하는 법안을 우여곡절 끝에 통과시키며, 비로소 의원이 된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천안문 추모’ 이후 펠로시는 티베트 독립운동가 달라이 라마를 만났고, 베이징올림픽 유치에 반대하며 중국의 반인권 행태에 대립각을 세웠다. 홍콩 민주화 시위 지도부를 직접 찾아갔고, 신장 위구르족 인권 문제도 끈질기게 지적하고 있다. 그 어느 곳보다 당파성이 강한 미 의회이지만, 중국을 견제하는행보에서만큼은 좌우를 따지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펠로시는 책상에 액자 두 개를 두었다고 했다. 천안문 광장에서 플래카드를 펼치는 장면과 ‘신은 우리에게 성공을 요구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노력하기를 바라실 뿐’이라는 테레사 수녀의 말씀을 담은 것이다.
공세적이고 비타협적인 그의 대중 행보에 대해선 비판이 적지 않다. “정치적 몸집을 키우려 인권을 활용한다” “쇼맨십에 불과하다”는 원색적인 비난부터 “우크라이나전 등으로 가뜩이나 국제 정세가 불안정한데 무책임한 돌출 행동으로 중국을 자극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하지만 30년 넘게 한결같은 뚝심만큼은 인정할 만하다.
펠로시가 몸담은 곳과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여의도 어느 정당에도 정치 초년병들이 많이 있다. 그 당의 강령에는 ‘북한 주민의 인권 증진과 삶의 질 개선을 위해 적극 노력한다’는 대목이 있다. 과문한 탓인지 긴 안목으로 이를 치열하게 실천하는 이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보스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으로 떼 지어 다니는 군상(群像)만 눈에 띈다. 시시각각 변하는 정치 풍향계를 바삐 쳐다보기에 앞서 ‘절대 신념을 잃지 마라(Never Lose Faith)’는 펠로시의 자서전 첫 장 제목을 곱씹어 볼 때다.◎
조선일보 채성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