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토리10/ 세계의 분쟁史5/ 박현도의 이슬람 들여다 보기2/
2017. 01월 호
◆화합의 종파, 이바디
▲오만의 수도 무스카르에 있는 술탄 카부스 대모스크. 이바디파인 오만은 종파 종교간 화합에 힘쓰고 있다.
사진제공=주한오만대사관
중동이나 이슬람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이슬람에는 수니와 시아라는 양대 종파가 있다는 것, 사우디아라비아를 종주국으로 하는 수니가 다수(85~90%)이고 이란을 종주국으로 하는 시아가 소수(10~15%)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 밖에도 수니와 시아의 교리가 혼합된 소수 종파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이바디(Ibadi)라고 하는 종파다. 걸프협력기구(GCC) 소속 6개국 중 하나인 오만이 바로 이바디 무슬림들이 세운 나라다. GCC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이란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오만은 인구 399만명의 소국이지만, 국민소득이 2만500달러에 달하고, 확인된 천연자원 매장량만 해도 가스가 9310억m³, 원유가 53억600만 배럴에 이른다.
오만 국민의 약 60%가 이바디 무슬림이다. 이바디 무슬림은 오만 외에 탄자니아의 잔지바르, 튀니지, 알제리, 아랍에미리트 등에 흩어져 있다. 이바디 무슬림 인구는 전 세계 무슬림 인구 대비 1%에도 못 미친다.
이바디는 관용정신이 뛰어난 종파다. 이바디가 다수인 오만의 경우, 소수인 수니나 시아와 아무런 문제 없이 어울려 잘 산다. 종파 분쟁이 없다. 비록 서로 조금씩 다르지만, 이바디는 자신과 믿음이 다르다고 수니와 시아를 박해하거나 공격하지 않는다. 통혼(通婚)도 문제가 없다. 비무슬림들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다. 이슬람 종파 중에서 다른 신앙에 대해 가장 열린 자세를 취하고 있는 관용의 종파가 이바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소수로 살다 보니 시아처럼 자신이 이바디라는 것을 감추는 것도 허용한다. 그렇다면 이바디는 어떻게 시작된 종파일까? 역사의 시계를 7세기로 돌려 보자.
이슬람의 분열
▲이슬람교를 개창한 예언자 무함마드.
632년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죽은 후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는 없지만, 예언자가 남긴 공동체를 이끌 지도자는 필요하였다. 이러한 지도자를 칼리파라고 불렀는데, (예언자의) 계승자라는 의미다. 요즘 IS(이슬람국가)가 자신들이 세운 국가를 칼리파 국가라고 하는데, 칼리파라는 말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역사적으로 첫 번째 칼리파는 무함마드를 처음부터 옆에서 도왔으면서 자신의 어린 딸 아이샤를 무함마드의 아내로 내어준 장인 아부 바크르(재위 632~634년)였다. 두 번째는 역시 무함마드의 동료이자 장인인 우마르(재위 634~644년) 였다.
이슬람의 분파 문제는 세 번째 칼리파 우스만 때 똬리를 틀기 시작하였다. 우스만은 무함마드의 사위이자, 무함마드를 반대하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항복한 부족 출신이었다. 자신이 속한 부족과 달리 그는 일찍이 무함마드를 따랐고 무함마드는 그러한 우스만을 아꼈다. 그런데 우스만은 칼리파가 되자 자신의 부족 출신을 중용하였다. 사람들이 고운 눈으로 볼 리 만무하였다.
656년 우스만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메디나로 몰려왔다. 그들은 결국 우스만을 살해하였다. 당시 이들과 우스만 사이에서 중재를 하려고 했던 알리가 네 번째 칼리파가 되었다. 알리는 무함마드의 사촌 동생이자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와 결혼하였기에 사위였다. 그런데 우스만 친족들은 알리가 우스만을 죽인 자들을 처벌하지 않은 것을 보고 우스만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책임이 있다고 믿었다. 우스만의 친척이었던 당시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가 657년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현재 IS가 점령하고 있는 시리아의 라까(Raqqah) 인근 시핀(Siffin)에서 알리의 군대와 맞대결을 벌인다.
양쪽 공히 약 10만의 병력을 동원하였으나 전면적인 맞대결은 피하고 부분적인 전투만 이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부자, 같은 부족 사람들이 서로 다른 편에 있었으니 전투가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골육상쟁이었으니 말이다. 긴 대치전과 산발적인 전투가 이어지던 중, 우스만 쪽 군인들이 이슬람의 경전 코란을 창에 걸고 코란에 결정을 맡기자고 주창하였다. 이에 알리의 진영이 술렁거렸고, 결국 알리는 중재에 동의하고 말았다. 이것이 기나 긴 비극과 참화의 시작이었음을 어찌 알았으리.
칼리파 시대의 종언
알리의 진영에는 중재를 부당하다고 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알리가 코란 계시를 어겼다고 생각하였다. 코란은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만일 믿는 자들 중 두 파가 싸움에 이르면 해결책을 찾아라. 그러나 만일 한쪽이 다른 쪽에게 잘못을 범하면 잘못을 범한 쪽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때까지 싸워라.”(49장 9절).
“더 이상 분열이 없을 때까지 싸워서 믿음이 온전히 하나님께 이르도록 하라.”(8장 39절).
사실 세 번째 칼리파 우스만의 죽음에 알리의 책임은 없다. 그리고 우스만은 자신이 행한 잘못 때문에 죽었다. 알리는 정당한 칼리파다. 알리에게 우스만의 죽음을 책임지라고 거병을 한 무아위야는 반란군이다. 반란군은 코란 계시에서 가르친 대로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런데 잘못한 일이 없는 알리가 중재에 동의하였다. 코란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은 정의롭지 못한 행동이다. 이들이 보기에 알리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거부한 대죄(大罪)를 지었고, 따라서 더 이상 진정한 신앙인의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다. 중재를 거부한 이들의 구호는 명료하였다. “라 후크마 일라 릴라!” 하나님만이 판결을 내리신다!
인간평등을 주장한 카와리즈
▲시핀전투를 계기로 무슬림세계는 수니와 시아로 분열되고 이바디파가 생겨났다
그리고 이들은 알리를 떠났다. 알리 쪽에서 이들의 마음을 돌리려는 노력을 하였지만 별무소용이었다. ‘떠나간 자들’이라고 해서 아랍어로 이들은 ‘카와리즈(Khawarij, 단수 카리지 Khariji)’라고 불렸다. 알리는 이들을 응징하였다. 많은 이가 어제까지 전우였던 사람들 손에 죽었다. 그리고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븐 물잠 알-무라디가 661년 1월 금요일 이라크 쿠파 모스크에서 알리를 살해하였다. 죽은 자들을 위한 복수극이었다. 이로써 아부 바크르-우마르-우스만-알리로 이어진 정통 칼리파 시대가 저물고 알리에 맞섰던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가 창건한 우마이야 칼리파조가 이슬람사에서 부자(父子) 상속의 신왕조를 열었다.
카와리즈는 수니파나 시아파와 달리 누구나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인 칼리파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흑인노예라도 칼리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정통 칼리파처럼 예언자가 나온 꾸라이시 부족 출신일 필요도, 수니처럼 부자세습일 필요도 없고, 시아처럼 예언자의 피가 흐르는 집안 사람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또 이들은 한 번 죄를 지으면 무슬림 지격이 없다고 믿었고, 무슬림이 아니면 죽여도 좋다고 여겼다. 자신과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을 포용하지 않았다. 절대적인 인간평등을 주창한 점에서는 그 어떤 무슬림 공동체보다 현대적 평등사상을 견지하였지만, 정의사상이 지나치게 강하여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거부하고 배척한 점은 극단주의에 가까웠다.
우마이야 칼리파 시대에 이들은 오늘날 이라크 바스라를 중심으로 활약하였는데, 이들 초기 과격한 카와리즈파에서 온건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이룬 파가 이바디파다. 이바디라는 이름은 당시 지도자였던 압드 알라 이븐 이바드에서 나왔다. 이바디는 카와리즈와 달리 일단 이바디 교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적대시하지 않았다. 카와리즈는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은 무슬림을 우상숭배자로 부르고 엄히 다스렸다. 수니는 무슬림이 중죄(重罪)를 짓더라도 여전히 무슬림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바디는 그러한 사람들을 여전히 유일신론자로 여기되 하나님의 축복에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로 간주하였다.
불신자를 적대시 않는 이바디
이때 중요한 개념을 사용한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대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단어가 불신(不信)이다. 아랍어로 쿠프르(kufr)라고 한다. 원래의 의미는 ‘감사하지 않는다’인데 불신으로 통용된다. 불신자는 카피르(kafir)다. IS가 사람을 죽일 때 잘 쓰는 용어가 바로 불신(쿠프르), 불신자(카피르)다. 대단히 엄중한 용어다. 제대로 믿지 않는 사람은 모두 불신자다.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극형이다. 그런데 이바디는 이들 단어를 그런 식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이바디는 감사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이 내리시는 은총에 감사하지 않는 것(쿠프르 니으마)과 우상숭배의 불신(쿠프르 시르크)으로 나눈다. 전자(前者)는 이바디가 아닌 무슬림, 후자(後者)는 비무슬림의 상태를 각각 가리킨다. 이바디 무슬림이 아니더라도 무슬림은 여전히 무슬림으로 여긴다. 비무슬림은 말 그대로 유일신 신앙이 없는 사람이다. 이바디는 이 둘을 모두 멀리하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육체적이 아니라 마음으로 멀리하라는 말이다. 따라서 그러한 사람과 같이 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친하게 지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적대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믿음을 지니고 있기에 영국인들은 동아프리카를 지배한 오만의 이바디를 두고 이슬람의 모든 종파 중에서 이바디가 가장 온건한 사람들이라고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수니나 시아와 문제 없이 잘 어울렸고, 현재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생각이 다르다고 적대시하지 않았다. 이들이 적대시한 대상은 정의(正義)롭지 못한 통치자였다. 올바른 지도자에 대한 의식이 7세기 때부터 변함없이 내려온다. 이바디는 수세기 동안 정의로운 이맘이 없다고 생각하였기에 금요일 합동예배를 준행하지 않았다. 금요 합동예배는 정의가 실행되는 대도시에서만 열려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 일반적으로 무슬림 금요 예배 때는 예배 인도자인 이맘이 설교할 때 반드시 지역의 지배자 이름을 언급한다. 이는 오늘날과 같이 언론매체가 발달하지 않은 시기에 사람들에게 지역의 실질 지배자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역할을 하였다. 마치 지금도 천주교회에서 미사 시간에 교황, 해당 성당이 속한 교구의 주교 이름을 호명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바디는 지역의 통치자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판단하면 설교 시간에 통치자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강렬한 정의의식의 발로다.
이바디, ‘코란은 창조된 하나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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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바디는 전반적으로 수니와 가까운 편이지만 이바디 특유의 독특한 점이 꽤 많다. 하나님의 손, 분노와 같이 하나님을 인간적으로 설명한 코란 구절의 신인동형(神人同形)적 표현을 이바디는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경전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읽고 받아들이는 태도는 극단주의적 사유의 지름길이다. 이바디는 그리스의 이성적 철학 사조의 영향을 받아 코란의 신인동형적 표현을 상징적이고 은유적으로 읽었다.
그런데 코란을 있는 그대로 읽으면 어떻게 될까? 12세기 아부 아미르 알-꾸라시는 “맨 허벅지가 드러나는” 최후의 심판일이라는 코란 68장 42절의 표현을 두고 자신의 허벅지를 치면서 “바로 여기 이처럼 진짜 허벅지”라고 설명하였다. 또 14세기 한발리 법학파의 저명 인사 이븐 타이미야는 하나님이 내려오신다는 코란의 표현을 설명하면서 설교대에서 몇 발자국 내려오면서 “내가 지금 내려오는 것과 똑같이”라고 말하였다. 이해하기는 쉬울지 모르나 이처럼 경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우리 주변에서 극단주의는 결코 없앨 수 없다.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코란을 그렇게 읽는 IS가 2014년 6월부터 우리에게 잔인한 모습을 얼마나 보여주었는가! 극단주의자들은 문자주의에 기생해서 자란다. 이바디는 그러한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
이바디는 코란이 ‘창조되지 않은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수니의 입장과 달리 ‘코란은 창조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이바디는 이외에도 신(神)을 이 세상이나 저세상에서 직접 볼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하고, 예언자 무함마드가 대죄인을 위해 중재 역할을 한다는 수니 일반의 믿음을 거부한다. 지옥에 간 자들이 지옥 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고 믿는다. 3번째 칼리파 우스만, 4번째 칼리파 알리, 알리와 맞서 싸운 무아위야를 모두 비판한다.
화합 위해 노력하는 오만 정부
▲아랍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주한 오만대사관. 서울 신문로 한글회관 옆에 있다.
사진제공=주한오만대사관
오늘날 이바디의 나라 오만은 가급적 학교에서 이슬람 분파의 역사나 교리를 가르치는 것을 피하고, 이슬람 교육을 이바디, 수니, 시아가 모두 받아들이는 것을 중심으로 실시하고 있다. 차이를 부각하기보다는 서로 같은 점에 방점을 두어 종파 차이에 따른 불필요한 다툼을 방지하여 국민화합을 이루고자 하는 국가의 노력이 돋보인다.
오만에서 이슬람은 삶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여타 국가와는 달리 비정치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이바디의 견해를 드러내 놓지 않는다. 다만 이바디 관련 출판물을 후원하면서 이바디 전통을 이어 간다. 현재 오만의 최고 종교지도자인 셰이크 아흐마드 이븐 하마드 알-칼릴리는 “이바디와 다른 종파의 차이는 중요하지도 않을뿐더러 무슬림 사회의 통합을 결코 방해할 수 없다”는 의견을 이미 표명한 바 있다.
1979년 이란의 이슬람혁명이 성공한 후 거대한 시아국가의 위협에 맞서기 위하여 결성된 것이 GCC다. 2011년 이래 시리아 내전, 예멘 내전에서 이란을 제압하고자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걸프 아랍국가들이 전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오만은 그러한 대오에서 조용히 발을 빼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을 사이에 두고 지리적으로 이란과 가까이 마주하고 있는 오만은 외교적으로도 이란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아직 서로 종파로 형성되기 전인 657년 시핀 전투에서 시아, 수니, 이바디가 서로 다른 길로 갈라섰다고 볼 수 있다. 시아 이란, 수니 걸프 아랍국, 이바디 오만. 거기에 알카에다나 IS 같은 극단주의 세력이 등장하면서 ‘이슬람=극단주의 테러리스트’라는 등식이 성립했다. 오만과 이바디의 사례는 이슬람 세계가 분열을 씻어내고, 타 종파, 타 종교와 화합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시한다.
참고로, 국내 오만 대사관은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준다. 도심 속의 작은 궁전의 모습인데 외양에서 아랍풍이 물씬 풍긴다. 서울역사박물관 근처에 있다. 기하학적인 외부 문양이 마치 종파의 조화를 상징하는 듯한 느낌이라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2017.02월 호
◆무함마드의 여인들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계시를 받는 무함마드.
이슬람교의 예언자 무함마드는 이슬람교 신자들, 즉 무슬림들에게 신앙의 표본이다. 이슬람교의 경전 《코란》 33장 21절은 무함마드를 ‘하나님과 최후의 날을 소망하고, 하나님을 자주 기억하는 사람들이 따라야 할 훌륭한 모범’이라고 강조한다. 무슬림들은 무함마드를 신(神)이나 신적인 존재가 아닌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냥 인간이 아니라 완전한 인간, 삶의 모범으로 따라야 할 인간으로 받아들인다.
이슬람교 초창기부터 무슬림들을 가까이에서 접하여 이슬람교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은 무함마드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삼위일체(三位一體) 교리에 근거하여 신의 아들이자 신으로 믿는 예수는 평생 독신(獨身)으로 산 데 비해 무함마드는 많은 아내를 두었으니 위대한 예수와 달리 천박한 욕정에 휩싸인 인간으로 보았다. 중세(中世) 이후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무함마드에게 늘 따라다닌 별명이 호색한(好色漢)이었다. 대체 무함마드는 얼마나 많은 아내를 두었고, 왜 그렇게 여러 번 혼인을 해야 했을까?
《코란》은 아내를 4명으로 한정
무함마드의 아내 수는 정확히 셀 수 없으나 이슬람교의 전승(傳承)을 종합하면 약 13명으로 볼 수 있다. 이슬람교의 일부사처(一夫四妻), 즉, 최대 네 명의 아내를 동시에 둘 수 있다는 규칙을 알고 있는 독자는 다소 의아해할는지도 모른다. 《코란》 4장 3절은 이렇게 말한다. 〈고아가 된 소녀들을 공평하게 대할 자신이 없다면 네 맘에 드는 여인 둘, 셋, 또는 네 명과 혼인하라. 그러나 공평하게 대할 자신이 없다면 한 명이나, 또는 네가 소유하고 있는 여인들과 혼인하라. 그렇게 하는 것이 불공평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더 낫다.〉
소유하고 있는 여인들이란 몸종을 의미한다.
이처럼 《코란》은 아내의 수를 4명으로 규정하는데, 무함마드의 아내 수는 이를 훌쩍 뛰어넘었다. 전승에 따르면 632년 무함마드가 죽었을 때 모두 열 명의 아내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무함마드에게 아내를 네 명으로 제한한 《코란》 계시가 적용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무슬림들은 많은 수의 아내는 전통적으로 하나님이 예언자들에게 내린 특권으로 해석하고 있다. 일부 현대 무슬림 학자는 4명으로 아내를 제한한 《코란》 계시가 내리기 전에 무함마드가 아내를 많이 두었다고 이해한다. 반면 일부 서양학자들은 무함마드의 아내가 네 명이었을 때 《코란》 계시가 내렸기에 네 명으로 적혀 있다고 보기도 한다.
‘40’이라는 숫자의 의미
무함마드의 아내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코란》 33장 50절은 무함마드가 혼인할 수 있는 여성의 범위를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혼례금을 주고 혼인계약을 맺은 여인, 전쟁에서 얻은 여성포로, 메디나로 함께 이주해 온 친척이나 외척인 여인, 무함마드에게 혼인을 제안하고, 무함마드가 받아들인 신앙인 여성과 혼인의 연(緣)을 맺을 수 있다. 그런데 무함마드는 이러한 《코란》 계시가 내리기 이전, 즉 예언자 소명을 받기 전에 첫 번째 혼인을 하였다. 무함마드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했다고 한 카디자(Khadija)가 바로 첫 번째 아내다.
전승에 따르면 카디자는 두 번 혼인을 한 과부로 성공한 사업가였다. 무함마드는 카디자가 고용한 종업원이었다. 카디자는 무함마드의 성실함에 매료되어 혼인을 제안했고, 무함마드가 받아들여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때 무함마드의 나이가 25세, 카디자는 40세였다고 한다. 그런데 둘 사이에 아들이 셋, 딸이 넷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카디자의 생물학적 나이가 40살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중근동(中近東) 문화에서 40은 완성을 의미하는 숫자다.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하고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고, 예수가 40일 동안 광야에서 기도를 하고, 무함마드가 40살 때 예언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40의 상징성을 잘 보여준다. 중세 이슬람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온전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 되었을 때를 두고 “내 나이 40이었을 때”라고 말했다. 이처럼 숫자 40은 완전, 완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카디자와 아이샤
▲14세기 초 이란 화가가 그린 무함마드와 예수. 무함마드는 낙타, 예수는 당나귀를 탄 것으로 그렸다
카디자는 무함마드가 강렬한 종교체험을 하고 왔을 때 그를 믿어 준 최초의 무슬림으로 알려졌다. 61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녀는 무함마드를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든든하게 후원하였다. 카디자와 혼인하기 전까지 무함마드는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웠다. 《코란》 93장 8절에서 무함마드를 두고 “곤궁한 너를 보고 부유하게 해 주지 않았는가?”라고 한 말은 카디자와 부부가 되기 전 무함마드의 궁핍한 삶을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무슬림 전승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카디자, 카디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파티마(Fatima),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파라오의 아내 아시야(Asiya)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네 명의 여인으로 꼽았다고 한다.
또 카디자가 죽은 후 3번째 아내로 받아들인 어린 아이샤(Aisha)는 무함마드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카디자에게 강력한 질투심을 느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어느 날 무함마드가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돕고 있을 때 왜 그런 일을 하냐고 아이샤가 물었다고 한다. 이에 무함마드는 “카디자가 친절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런 사람들을 도우라고 말했지. 마지막 유언이었어”라고 답하자, 아이샤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카디자! 카디자! 당신에게는 이 세상에 카디자 외에 다른 여자는 없군요”라고 소리쳤다. 평소 참을성이 뛰어난 무함마드였지만 질투하는 아이샤의 모습을 보고는 이내 말을 건네지 않았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카디자가 살아 있을 때에는 다른 여인을 아내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카디자가 죽고 난 후 무함마드는 재혼 대상으로 과부 사우다(Sawda)와 여섯 살 된 아이샤를 추천받았는데, 둘 모두와 혼인하게 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두 번째 아내 사우다는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피해 부부가 함께 에티오피아로 이주했다가 남편이 죽은 후 메카로 돌아온 과부였다. 세 번째 아내 아이샤는, 무함마드가 예언자로 부름을 받을 때부터 흔들림 없이 늘 곁에서 도움을 주던 오랜 친구이자 무함마드 사후 제1대 칼리파가 되어 무슬림 공동체를 이끈 아부 바크르의 딸이었다.
무함마드와 정혼(定婚)할 때 아이샤의 나이는 6살이었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는데 아버지가 무함마드의 무릎에 앉혀 놓았다고 한다. 혼인이 성사되었을 때 무함마드는 약 53세, 아이샤는 약 아홉 살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나이 차다.
이 때문에 서구 그리스도교 학자들은 무함마드를 “소아성애자(Pedophile)”로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이러한 혼인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21세기 현대 서구(西歐)나 우리 사회의 입장에서 7세기 아라비아 사회의 관습을 마음대로 재단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마음을 흔드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무함마드가 천상여행을 하기 전에 천사 가브리엘이 여러 천사가 보는 가운데 무함마드의 가슴을 정결하게 닦아 주고 있다. 16세기 터키.
당시 사회에서 논란이 컸던 것은 자이납(Zaynab bint Jahsh)과 부부의 연을 맺은 일이다. 자이납은 무함마드의 외사촌인데, 무함마드가 노예에서 해방시킨 후 양자(養子)로 삼은 자이드(Zayd ibn Haritha)와 부부가 되었다. 무슬림 역사가 따바리(Tabari, 839-923)에 따르면, 어느 날 무함마드는 자이드 집에 갔다가, 제대로 옷을 입고 있지 않았던 자이납을 보고 눈길을 돌렸다. 이에 자이납은 얼른 옷을 챙겨 입고서 남편은 없지만, 무함마드는 자신의 부모와 같이 친근한 사람이기에 들어오라고 말했다. 무함마드는 거절하면서 거의 들리지 않는 낮은 소리로 “전능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마음을 흔드시는 하나님께 영광을!”이라며 속삭였다. 자이납은 남편 자이드가 돌아오자 이러한 이야기를 전했다. 자이드는 곧바로 무함마드에게 달려가 자신이 아내와 갈라설 터이니 자이납을 아내로 맞으라고 권하였다. 무함마드는 그러지 말라고 거절하였다. 자이드는 아내와 가까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한 채 무함마드에게 이혼하겠다고 거듭 말하더니 결국 그녀를 떠났다. 무함마드는 아이샤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자이납과 혼인을 하라는 계시를 받고 홀로 된 자이납과 부부가 되었다. 이때가 626년경으로 무함마드가 약 56세, 자이납이 38세 되던 해였다.
당시 아랍 사회에서 양자를 친자(親子)와 다를 바 없는 아들로 간주하였다. 결국 무함마드가 며느리와 혼인하여 근친상간(近親相姦)을 저지른 셈이다. 《코란》(33:37-38)은 자이드에게 아내 자이납을 버리지 말라고 하였지만, 실은 무함마드가 마음속에 감추는 것이 있었고 자이드가 이혼을 하자 하나님이 무함마드와 자이납의 혼인을 성사시켰다고 한다. 그렇게 한 이유는 당시 사회의 관습과 달리 믿는 자들이 양자가 이혼한 아내와 부부의 연을 맺을 때 어려움을 없애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면서 ‘하나님께서 예언자에게 명령하신 일을 할 때 예언자가 불편하지 않아야 한다(33:38)’고 명시한다. 이로써 이슬람 사회는 이전 아랍 사회와 달리 친자와 양자가 같지 않다고 규정하면서 가족을 새롭게 정의하였다.
무함마드와 자이납의 혼인은 당시뿐 아니라 오늘날 무슬림들에게도 불편한 일이다. 양자가 친자와 같은가 같지 않은가가 문제가 아니라 따바리가 남긴 기록의 신빙성이 관건이다. 예언자가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여성을 보고 마음을 빼앗겼다는 전승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슬림들은 먼저 이 이야기의 출처가 거짓말쟁이로 유명한 와끼디(Waqidi, 748-822)라고 비판한다. 또 미인으로 알려진 자이납은 무함마드의 외사촌으로 무함마드가 그녀의 미모를 진즉부터 알고 있었는데 새삼스럽게 그때서야 비로소 아름다움에 반했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자이납이 탁월한 미녀였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것 같다. 무함마드가 혼인을 결정했을 때 어린 아내 아이샤는 자이납이 예뻐서 걱정했다고 하니 말이다.
무슬림들은 이처럼 무함마드와 자이납의 혼인이 무함마드의 욕정과 관계없다고 강조한다. 그 이유는 서구 그리스도교 학자들이 이 사건을 무함마드가 얼마나 비윤리적이고 호색한인지 잘 보여주는 좋은 예로 들며 비난하고 나섰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언자가 어쩌면 그렇게 성적(性的)으로 타락할 수 있느냐며 조롱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는 것은 몹시도 불편한 일이었을 것이다.
필자는 무함마드가 윤리적이냐 아니냐라는 문제보다는 무슬림 역사가인 따바리가 예언자에게 유리하지 않은 이야기를 그대로 싣고 있는 것이 더 놀랍다.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자신에게 전해 오는 그대로 전하는 역사가의 자세는 실로 위대하다.
여종 마리야
▲생애 마지막 메카 순례에서 최후의 설교를 하고 있는 무함마드(맨 오른쪽). 11세기 페르시아 학자 알-비루니(al-Biruni)의 천문학 서적에 삽입된 그림.
여러 아내 중 특히 무함마드가 좋아했던 아내로 꼽을 수 있는 여인은 무까우끼스(Muqawqis)라는 직위명으로 불리는 이집트 통치자가 선물과 함께 보냈다고 하는 그리스도인 마리야(Mariya)다. 그녀는 이집트 그리스도교를 뜻하는 콥트(Copt)교인으로 불렸는데, 정식 혼인을 거친 아내가 아니라 여종으로 무함마드의 여인이 됐다. 첩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이슬람 사회에서 여자 주인은 남종과 성관계를 맺을 수 없지만, 남자 주인은 여종과 관계를 가질 수 있다.
627년경 메디나로 온 마리야는 미모가 출중했기 때문에 어린 아내 아이샤가 다음과 같이 시기하였다고 한다.
“나는 마리야만큼 질투심을 느껴본 여자가 없다. 그녀는 정말 예뻤고, 사도 무함마드는 마리야가 우리 동네에 처음 왔을 때 만나러 가서 밤낮을 그녀와 함께 보냈다. 그가 마리야에게 잘해 준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다.”
전승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아내들의 숙소를 순번을 정하여 돌아가면서 방문하였는데, 4번째 아내 하프사(Hafsa)와 보내기로 한 날 마리야와 함께 있다가 하프사에게 들켰다고 한다. 이에 무함마드는 마리야와 더 이상 관계를 가지지 않겠다고 하였고, 하프사는 비밀을 지키기로 했다. 그러나 하프사가 아이샤에게 일러바쳐 소동이 일었고, 이에 무함마드는 아내 모두와 이혼하고 더 경건한 여인을 아내로 받아들이겠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결국 무함마드는 마리야를 더 이상 보지 않겠다는 약속을 취소했다. 둘 사이에는 이브라힘이라는 아들이 생겼지만, 아기 때 죽었다. 이브라힘은 무함마드가 카디자 외에 여인에게 낳은 유일한 아이였다. 무함마드가 죽을 때까지 마리야는 여종의 신분을 유지했다.
유대인 아내도 있어
▲무함마드가 죽기 전 최후의 모습. 1595년 오스만 제국의 예술가 루프티 압둘라가 그린 예언자의 일생 그림 중 하나. 이스탄불 톱카프 궁전 소장.
마리야처럼 여종의 신분으로 무함마드의 여인은 된 자로는 아랍 여인 주와이리야(Juwayriyya)와 두 명의 유대인 사피야(Safiyya), 라야나(Rayana)가 있다. 주와이리야는 627년 20살 때 무슬림군에 포로로 잡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무함마드의 아내가 됐다. 일부 전승에 따르면 여종으로 있다가 무함마드가 죽기 직전 온전한 아내가 되었다고 한다. 사피야는 628년, 라야나는 627년에 각각 무슬림군에 포로로 잡혔다. 사피야는 여종이었다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 종의 신분을 벗고 정식 아내가 됐다. 라야나는 무함마드의 여인이 되었지만, 631년 죽을 때까지 여종의 신분으로 있었던 듯하다.
모두 13명의 여인 중 처녀의 몸으로 무함마드의 여인이 된 이는 아이샤가 유일하다. 나머지 12명은 모두 과부거나 이혼녀였다.
무함마드가 여러 아내를 둔 이유는 과부가 된 여인들을 복지 차원에서 돌보고, 다른 부족과 정치적으로 화평을 이루기 위한 정략적(政略的)인 목적 때문이었다. 두 번째 아내 사우다, 네 번째 아내 하프사, 다섯 번째 아내 움 살라마(Umm Salama), 여섯 번째 아내 자이납 빈트 쿠자이마(Zaynab bint Khuzayma)는 이슬람을 믿고 따르다가 과부가 된 여인들이었다. 열 번째 아내 움 하비바(Umm Habiba)와 열두 번째 아내 마이무나(Maymuna)는 두 여인이 속한 집안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 소위 정략적으로 한 혼인이었다.
인간적이고 자유로운 예언자 무함마드
▲낙원에서 미인들에게 둘러싸인 예언자 무함마드 18세기 오스만 투르크의 그림.
632년 세상을 떠날 때 무함마드는 여인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최후의 날을 아이샤의 숙소에 머물다 그녀의 품안에서 세상을 떠났다. 무함마드의 죽음을 끝까지 지킨 여인은 모두 열 명이다. 이 중 마리야만 여종의 신분이었으니, 정식 아내는 아홉 명이었다.
무슬림 공동체는 이들 아홉 명의 여인을 “신앙인의 어머니”로 부르며 존경했다. 《코란》에 따르면 무함마드 아내들은 보통 여인들과 다르고(33:32), 선한 일을 하면 보상을 두 배로 받으나, 나쁜 일을 하면 벌 또한 두 배로 받으며(33:30-31), 재혼을 할 수 없다(33:53).
무슬림 전승을 비교하면서 대체로 13명의 아내를 정리해 보았지만, 이견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부 시아파 전승에 다르면 21명까지 그 수가 늘어나기도 한다. 중국 무슬림들은 예언자에게 9명의 정식 아내와 여종으로 여인이 된 자, 즉 첩이 7명이 있었는데, 이는 구천칠지(九天七地)를 위대한 예언자가 포용하는 우주론적 의미를 지닌 것이지 육체적인 쾌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한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간에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는 참으로 인간적인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꾸 예수와 비교하여 쾌락의 유혹에 약했다고 무함마드를 폄하하지만, 지극히 인간적인 그의 모습에서 지난 1400여 년 동안 무슬림들이 하나님을 향하는 인간의 길을 찾은 것은 아닐까 한다.
“예언자께서는 세 가지를 좋아하셨다. 예배, 향수, 여자.
이븐 사으드(Ibn Sa‘d, 784-845)가 전하는 예언자 전승이다. 약점으로 보이는 것까지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초기 무슬림 전승자들의 모습에서 인간 무함마드의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과 함께 무슬림 전승의 탈(脫)현대적인 자유로움을 본다면 감상이 과한 것일까? 참으로 인간적이고 자유롭다.⊙
2017.03월 호
◆이슬람이 보는 예수는 위대한 예언자
▲무함마드(오른쪽)와 여러 예언자. 왼쪽에 선 사람 중에서 터번을 쓰지 않은 사람들이 아브라함, 모세, 예수라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세상에 유일신(唯一神)을 믿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미국 퓨(Pew)연구소의 2010년 세계종교인구조사에 따르면 유일신 종교인 유대교(0.2%), 그리스도교(31.5%), 이슬람교(23.2%)의 신도 수를 합칠 경우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인 54.9%가 유일신을 믿는다.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유일신을 믿는다는 큰 틀에서 보면 다를 바 없지만 예수에 관해서는 아주 다르다. 유대교에서는 예수에 대한 평가가 박하다. 기본적으로 신(神)을 모독한 범죄자로 보고 극소수 학자만이 ‘좋은 스승’이라고 생각한다. 엄밀히 말해 예수의 존재는 유대교에서 중요하지도 필요하지도 않다.
그리스도교의 예수는 유일신의 아들, 즉 성자(聖子)로 성부(聖父), 성령(聖靈)과 함께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이룬다. 예수는 온전한 신성(神性)을 지닌 신이자 온전한 인성(人性)을 지닌 인간이다.
이슬람교는 예수를 유일신이 보낸 위대한 예언자로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결코 신성을 지닐 수는 없는 인간으로 생각한다. 그리스도교의 예수관은 이슬람교의 입장에서 보면 신성모독으로 유일신 신앙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자고로 이슬람교가 발흥한 7세기 이래 그리스도교인과 무슬림이 유일신관을 두고 벌인 해묵은 싸움은 한마디로 하자면 “도대체 예수는 누구인가?”로 압축할 수 있다.
마리아, 《코란》에서 본명 드러낸 유일한 여성
▲야자수 옆에 선 마리아. 마리아는 《코란》에서 이름으로 불리는 유일한 여성이다.
무슬림의 예수관은 이슬람교의 경전 《코란》에 명백히 잘 드러난다. 《코란》 전체를 통틀어 예수가 신성을 지닌 존재로 표현된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명명백백하게 예수는 인간이다. 신의 아들일 수도 없다. 《코란》은 신이 “낳지도 않고 태어나지도 않으신다”고 하니 어찌 신에게 아들이 있을 수 있겠는가(《코란》 112장 3절).
그런데 흥미롭게도 《코란》의 예수는 무함마드가 행하지 못한 엄청난 기적을 행한다. 또 《코란》에서 질책하는 이는 예수가 아니라 예수를 신으로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예수를 싫어하거나 미워하거나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무함마드가 《코란》에 딱 4번 언급되는 것에 비해 예수는 무려 25번이나 나온다. 예수의 이름은 《코란》에서 이사(Isa)다. 이븐 마르얌(Isa ibn Maryam), 즉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호칭과 함께 16번 나온다. 그리스도교에서나 이슬람교에서나 예수의 부친 요셉은 열외다. 무슬림 사회에서는 아버지의 아들로 표기되는데 예수는 어머니의 아들로 나온다. 그리스도교의 《마르코(마가) 복음서》 6장 3절도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로 부른다. 마리아는 《코란》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다. 《코란》에서 유일하게 이름으로 불리는 여성이 마리아다. 마리아 외의 여성을 《코란》은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유부녀일 경우에는 누구의 아내로 지칭한다. 더군다나 코란 19장의 이름은 마리아다.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데 예수의 출생 얘기도 여기에 나온다.
그리스도교의 《신약성서》와 달리 《코란》에는 마리아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에 따르면 마리아는 이므란(Imran)의 딸로 나온다. 아이가 없었던 이므란 부부는 아이를 낳으면 신께 바치겠다고 맹서하였다. 딸을 낳자 마리아라고 이름을 짓고 약속대로 성전에 바쳤고 신은 어린 마리아를 보호해 주었다.
《코란》 속 마리아
서양 그리스도교 학자들은 《코란》에 나오는 마리아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성서》로는 채택되지 않은 《야고보 원복음서(Protevangelium Jacobi)》와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150년경 시리아 지방에서 쓰인 것으로 알려진 이 복음서는 마리아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동방교회의 유년 시절 예수관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진다.
마리아는 천사들로부터 메시아 예수 수태 고지를 받은 후, 가족을 떠나 홀로 동쪽 조용한 곳에 있을 때 신이 보낸 성인 모습의 영(靈)이 나타나 두려워하는 그녀에게 흠 없는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자 “저는 처녀로 아무도 저에게 손을 댄 일이 없는데 어떻게 제가 아들을 갖겠습니까?”라고 응대한다(《코란》 19장 20절).
《코란》은 다른 구절에서 마리아는 순결을 지켰고 신이 그녀에게 영을 불어넣었다고 표현한다(《코란》 66장 12절). 또한 신은 마리아를 선택하여 정결한 여인이 되게 하였고 모든 여인의 위에 두었으며(《코란》 3장 42절), 그녀가 낳을 아들 예수는 신의 사도요, 신이 마리아에게 주신 말씀이고 신으로부터 나온 영이라 말한다(《코란》 4장 171절).
아이를 밴 마리아는 먼 곳으로 떠나 지냈고 출산을 앞두고 진통이 너무 심하여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이라고 고통을 호소한다. 그러자 신이 함께하신다는 위로와 함께 대추야자 열매를 먹으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누구와도 말을 하지 말라는 음성을 듣는다(《코란》 19장 22~26절).
이에 편안한 마음으로 출산을 한 마리아가 갓난 예수를 안고 사람들 앞에 나타나자 모두 놀라며 비난을 퍼붓는다. 《코란》에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마리아가 속한 유대 사회에서는 간음녀를 돌로 쳐 죽이거나(신명기 22장 20~21절), 화형에 처한다(창세기 38장 24절).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마리아를 변호하고 나선 이는 바로 예수다. 비난에 직면한 마리아는 손으로 아기 예수를 가리킨다. 이에 사람들이 “갓난아이에게 무슨 말을 하라는 거냐?”며 어리둥절해 하자 예수가 자신이 신이 보낸 사도라고 말하며 태어난 날, 죽는 날, 부활하는 날 자신에게 평화가 있으리라고 선언한다(《코란》 19장 33절).
《코란》 속 예수, 진흙으로 새를 만들다
이야기 전개 과정이나 세부 내용에서 《코란》과 《신약성서》가 서로 다르긴 하지만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점에서 둘의 차이는 없다.
예수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고 세상에 나오자마자 말을 하는 기적을 보였다. 이 외에도 《코란》에는 그가 행한 기적이 여러 가지 나온다. 맹인과 나병 환자를 치료하고, 죽은 이를 살리고, 제자들이 요구하자 하늘에서 식탁이 내려오도록 한다. 《코란》은 이러한 예수의 기적이 모두 신의 허락이 있었기에 가능한 기적이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기적들 중에서 특히 진흙으로 새를 만들어 날린 것은 흥미롭다. 《코란》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를 위해 진흙으로 새의 모양을 만들어 숨을 불어 넣으니 신께서 허락하셔서 새가 되었다.”(《코란》 3장 49절, 5장 110절)
그리스도교 성서학자들은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신약성서》에 포함되지 않은 《토마스(도마)의 예수 유년기》에 있다고 지적한다. 정양모 신부는 이 책을 두고 “150년경에 시리아 지방의 어느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사랑하고 존경한 나머지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를 참고하고 거기에 상상의 날개를 펴서 예수 소년 시절을 소재로 해서 그리스어로 예수 공상 소설을 썼다고 보면 무난하겠다”고 평가한다. 이 책 2장에 진흙으로 만든 새를 날리는 기적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아기 예수가 다섯 살 때 있었던 일이다. 안식일에 아기 예수가 냇가 얕은 여울에서 진흙을 개어 참새 열두 마리를 만들며 놀았다. 어느 유대인이 지나가다가 이를 목격하고 곧장 예수의 아버지 요셉에게 가서, 아기 예수가 참새를 열두 마리나 만들었으니 안식일법을 어겼다고 고자질했다. 이에 요셉이 와서 보고 예수를 꾸짖으니 예수는 가타부타 일절 대꾸하지 않고 손뼉을 딱딱 쳤다. 그러자 진흙으로 빚은 열두 마리 참새가 모두 날개를 쫙 펴고 짹짹거리면서 훨훨 날았다.(정양모 역)
《코란》이 말하는 ‘예언자 예수’의 최후
▲마리아와 예수. 《코란》은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 예수’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의 허락하에 행했다고 강조하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기적을 행해보라고 사람들이 요구하였을 때 무함마드보다 《코란》에서 예수는 확실히 수적으로 훨씬 많은 기적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신이 예수를 세상에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코란》은 예수 이전에 신이 유대인들에게 내린 경전인 《토라》가 신의 말씀임을 증명하고 천지창조 때부터 신이 가르친 유일신 신앙을 사람들에게 다시 확인시켜 주고자 예수가 세상에 왔다고 가르친다. 새로운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유일신 신앙을 다시금 반복하면서 믿음을 굳게 하여 분열하지 말라고 가르치러 왔다는 것이다.
이슬람에 따르면 천지창조 때부터 신이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유일신 신앙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들이 신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바르게 살지 않았기에 그럴 때마다 신은 노아, 아브라함, 모세 등 예언자를 보내어 인간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하였다. 예수 역시 그러한 임무를 안고 온 예언자다. 예수는 자신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내 이전에 계시된 《토라》를 확증하고 너희에게 금지된 것을 일부 허락하기 위해 왔다. 나는 너희의 주님으로부터 징표를 받고 왔으니, 신을 두려워하고 내게 복종하라.(《코란》 3장 50절)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신이 마지막으로 다시 세상에 보낸 예언자가 이슬람의 무함마드라고 무슬림들은 믿는다. 그렇다면 예수의 삶은 실패한 것일까? 그의 최후는 어떠했을까?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코란》은 예수가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 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다고 주장하나 《코란》은 이는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이 하는 억측이라고 반박한다. 유대인들이 십자가형에 처한 것은 예수가 아니라 예수와 닮아 보이는 자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믿지 않는 자들이 세우는 간교한 계책을 미리 아시는 신께서 훌륭한 계획을 먼저 세우시고 예수를 당신께 끌어올리셨다고 한다(《코란》 3장 54절, 4장 156~157절).
예수·마리아를 신으로 숭배 마라
▲9세기 이슬람 달력에 그려진 예수(오른쪽)와 죽은 개.
예수가 십자가형에 처해 죽지 않다 보니 문제가 생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아기 예수가 요람에서 자기가 “죽는 날”이라는 표현을 했기 때문이다. 무슬림 전승(傳承)은 이를 두고 예수가 죽지 않은 상태로 신께 들어 올림을 받은 후 때가 차서 세상에 다시 와 적(敵)그리스도를 무찌르고 자신의 임무를 다한 뒤 자연사(自然死)하고 인류 최후의 심판일에 부활하여 자신과 마리아를 신적(神的)으로 숭배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다고 한다.
《코란》은 예수를 지극히 위대한 예언자로 묘사한다. 그러나 예수는 어디까지나 인간이지 결코 신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코란》 5장 116절은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라, 신께서 말씀하시리라. “마리아의 아들 예수여, 그대가 사람들에게 신과 함께 나와 나의 어머니를 신으로 숭배하라고 하였는가?” 그가 답할 것이다. “당신께 영광을 바치옵니다. 저는 그런 말을 할 수도 할 자격도 없습니다. 제가 그렇게 말하였다면 당신께서 아셨을 것입니다. 당신은 제가 무엇을 하려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저는 당신께서 무엇을 하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당신께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모두 아십니다.”
《코란》은 예수와 마리아가 음식을 먹고(5장 75절), 신께서 언제든지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존재(5장 17절)인데 어떻게 신성이 있을 수 있느냐며 유일신의 가르침을 훼손하면서 예수와 마리아를 존숭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비판한다. 예수는 《코란》 19장 30절에서 자신이 ‘신의 종’이라고 하고, 3장 51절에서는 “진정 신은 나의 주님이요 너희의 주님이니, 그분을 숭배하라. 그것이 바른길이다”라고 하면서 자신이 신이 아니라 신이 자신의 주님임을 밝힌다.
그런데 삼위일체를 잘 아는 독자라면 다소 의아할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인데, 《코란》에서 비판하는 삼위일체는 신, 예수, 마리아인가? 왜 마리아를 신으로 섬기지 말라고 이야기하는가? 정확한 답은 없다.
다만 이슬람 이전인 5세기 초 팔레스타인 태생 키프로스 대주교 에피파니우스(403년 사망)의 기록에 따르면 오늘날 요르단과 시나이 반도 동쪽 지역에는 마리아를 숭배하며 마리아상에 빵(kollyris)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고 비잔틴의 레오니투스(543~4년 사망) 또한 마리아를 존숭하는 사람들을 언급한 바 있다. 어쩌면 이러한 현상을 《코란》이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코란》에서 신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세상에 온 예수는 자신 뒤에 또 다른 아흐마드(Ahmad)란 인물이 올 것임을 예언한다.
오, 이스라엘 자녀들이여, 진정 나는 신의 사도로 너희에게 와서 내 이전에 내린 토라를 확증하고 내 뒤에 올 사도 아흐마드가 가져올 기쁜 소식을 전하노니.(《코란》 61장 6절)
아흐마드를 전통적으로 이슬람교에서는 무함마드라고 해석한다. 아흐마드나 무함마드나 사실 단어의 어근은 같다. 그리스도교 학자들은 이 코란 계시의 아흐마드를 《요한서》와 《요한 1서》에 나오는 ‘파라클레토스(Parakletos, 영어 Paraclete)’를 변용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협조자라는 의미를 지닌 파라클레토스는 우리말 《성서》에서 ‘보혜사(保惠師) 성령’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만일 아흐마드가 이 용어의 변용이라면, 《코란》이 성서를 참고했을 수도 있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물론 무슬림들이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 학설이다.
예수를 사랑하는 무슬림들
▲미나레트(이슬람교 사원의 첨탑) 위에서 천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는 예수.
《코란》의 예수 이야기는 그리스도교의 《신약성서》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가 많아 더욱 흥미롭다. 《코란》과 《신약성서》 둘이 보여주는 부정할 수 없는 차이는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점에 대해 무슬림의 입장은 확고하다. 예수의 가르침이 그대로 전해졌더라면 이슬람의 《코란》과 일점일획 다를 바 없었을 터인데 그리스도교인들이 《성서》의 내용을 왜곡하였기 때문에 두 경전 사이에 차이점이 생겼다고 믿는다. 하늘에 있는 경전을 그대로 받은 것이 《신약성서》와 《코란》인데 무슬림과 달리 그리스도인들은 성서에 손을 대 내용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내용이 어떻게 달라졌든 간에 한 가지 사실은 확실하다. 비록 그리스도인들과 달리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지는 않지만 무슬림은 예수를 위대한 예언자로 존경하고 사랑한다. “예수를 존경하지 않는 자는 무슬림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리스도인들로서는 불만스럽겠지만 그래도 예수를 저토록 깊이 사랑하니 신성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꼭 밉게 볼 일만은 아니라 생각한다. 예수가 신이냐 아니면 인간이냐 라고 얼굴을 붉히면서 다투기보다는 예수가 세상을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게 살았는지 보고 배우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진정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2017.04월 호
◆암살자(assassin)들의 원조 하시시
⊙ 시아의 일파인 니자리 이스마일리 시아(12이맘 시아) 이끌던 하사네 삽바,
이란 북서부 알마무트 요새에서 암살단 조직
⊙ 셀축튀르크의 재상 니잠 알물크, 십자군 악코 국왕 꼬르라도 등 암살
⊙ 마르코 폴로가 마약쟁이들을 암살자로 양성했다고 주장하면서 ‘어새신assassin’은
‘대마초hashish’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1092년 왼쪽 하얀 터번 쓴 니자리 이스마일리 시아 청년 부 타히르 아르라니가 셀축 재상 니잠 알물크를 죽이는 장면. 터키 이스탄불 톱카프 궁전 박물관 소장.
지난 2월 13일 오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북한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이 암살당하였다. 많은 사람으로 붐비는 공공장소에서 죽음을 당한 것도 놀라운데, 공공보건에 치명적인 화학무기 VX를 사용하여 목숨을 앗아 갔다고 하니 더욱 충격이 크다. 보나 마나 암살의 배후는 김정남의 이복동생 김정은일 터이니 말 그대로 패륜(悖倫)도 이런 패륜이 따로 없다. 고모부를 죽였지만 그래도 ‘백두혈통’은 죽이지 않는다고 하던데, 이제는 김정은 치하에서 안전한 목숨은 김정은 외에는 없는 셈이다. 저런 정권과 같은 하늘 아래서 같은 말을 쓴다는 것이 수치스럽다.
암살자를 영어로 ‘어새신(assassin)’이라고 하는데, 이 말의 어원(語源)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하시시(hashish)’ 또는 ‘하샤시(hashash)’다. 하시시는 아랍어에서 원래 마른 풀을 가리키는데,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인도산 대마(cannabis sativa)를 부르는 용어로 정착하였다. 대마를 피우는 사람을 하샤(hashshashun), 하시시윤(hashishiyyun), 하시시야(hashishiyya)로 불렀다. 그런데 문제는 시아파 중 하나인 니자리 이스마일리(Nizari Ismaili) 시아를 하시시야로 불렀다는 사실이다. 10~13세기에 이들은 정적(政敵)을 암살하는 테러를 감행하였는데, 십자군이 이들을 ‘아사신(assasin)’이라고 하였고, 이 말이 유럽 본토로 퍼져 니자리 이스마일리 시아는 불명예스럽게도 암살의 대명사가 되었다.
5이맘 시아, 7이맘 시아, 12이맘 시아
그렇다면 니자리 이스마일리 시아는 누구인가? 우선 다소 복잡한 시아파 계보를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시아파는 5이맘 시아, 7이맘 시아, 12이맘 시아, 이렇게 셋으로 크게 나뉜다. 5이맘 시아는 자이디(Zaydi) 시아라고 하는데, 오늘날 예멘의 후시(Huthi) 반군이 대표적인 자이디 시아다. 7이맘 시아는 이스마일리 시아라고 한다. 현대 세계에서 대표적으로 잘 알려진 이스마일리 시아 인물은 영국에서 활약 중인 아가 칸(Agha Khan)이다. 전 세계 시아 중 12이맘 시아 다음으로 큰 분파다. 12이맘 시아는 이란, 이라크, 레바논의 주류 시아로, 보통 시아라고 하면 이들 12이맘 시아를 가리킨다.
7이맘 시아를 이스마일리 시아라고 하는 이유는 6번째 이맘의 후계자 문제로 12이맘 시아와 나누어졌기 때문이다. 6번째 이맘 자으파르 앗사디끄(Jafar al-Sadiq)는 큰아들 이스마일을 다음 이맘으로 지명하였는데, 불행히도 이스마일이 일찍 죽는 바람에 작은아들 무사(Musa)를 7번째 이맘으로 다시 지명하였다. 그러나 이스마일을 따르는 사람들은 새로운 이맘을 인정하지 않고 이스마일리 시아를 형성하였다.
이스마일리 시아는 10세기 무슬림 세계의 강국 파티마(Fatimah) 칼리파(Khalifah)조를 건립하였다. 909년 오늘날 튀니지 지방에서 시작하여 969년 이집트를 정복하였다. 오늘날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는 이들이 세운 도시다. 카이로의 아랍어명은 ‘까히라(Qahirah)’인데, ‘승리자’를 의미한다. 이집트를 차지한 파티마 칼리파조의 자부심이 돋보이는 도시명이다. 또한 이들은 자타가 인정하는 현대 순니 세계 최고 교육기관으로 불리는 알아즈하르(al-Azhar)를 세웠다. 아즈하르는 ‘가장 빛나는’이라는 뜻인데, 예언자 무함마드와 그의 딸 파티마를 가리키는 말이다. 파티마의 다른 이름이 자흐라(Zahrah)였다. 970년 모스크로 건설되었는데, 972년부터는 교육기관으로도 사용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모스크는 예배소 외에도 교육기관의 기능을 겸비하였으니 특별히 놀라운 일도 아니다. 이스마일리 시아가 세운 시아 교육기관이 오늘날 순니 최고 기관이 된 것은 흥미롭다고나 해야 할까 보다. !
하사네 삽바의 암살단
▲알라무트 성채.
그런데 무슬림 세계 서쪽을 장악하던 이스마일리 시아는 알무스탄시르(al-Mustansir, 1036~1094) 칼리파가 죽으면서 분열되었다. 알무스탄시르는 큰아들 니자르(Nizar, 1045-1097)를 후계자로 정하였지만, 궁내(宮內) 권력 다툼에서 작은아들 알무스타을리(al-Mustali)가 칼리파가 되었다. 니자르는 알렉산드리아로 피신하여 권력 회복을 꾀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어 카이로에서 처형당하였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니자리 이스마일리 시아(12이맘 시아) 분파를 형성하였다.
니자리 이스마일리 시아는 적의 손길이 닿기 어려운 이란과 시리아의 험난한 지역에 요새와 성채를 구축하며 살았다. 강력한 제국의 무력(武力)에 직면하여 조롱받는 소수(少數)로 살면서 안전을 도모하며 살기에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바로 이란 북서부에 위치한 알라무트(Alamut) 성채다. 종교지도자이자 뛰어난 전략가였던 하사네 삽바(Hasan-e Sabbah, 1124년 죽음)는 이곳에 니자리 이스마일리 시아 공동체를 건설하고 강력한 셀축튀르크 제국에 맞서 생존할 수 있도록 청년들을 전사로 키웠다.
무기나 전력 면에서 철저히 열세였던 하사네 삽바가 채택한 작전은 요인을 암살하여 적이 전의를 잃도록 하는 이른바 ‘비대칭(非對稱) 전력(戰力)’ 양성이었다. 하사네 삽바의 가르침을 받은 청년 용사들은 살해 대상에 접근하여 길게는 수년씩 기다렸다가 살해하고 난 후 도망치지 않고 장엄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먼 곳에서 활을 쏘거나 독살하지 않고 대상을 마주보고 바로 앞에서 과감하게 대검으로 찔러 죽였다. 사람이 많은 공공장소에서 과감하게 암살을 하되, 대상은 니자리 이스마일리 시아를 괴롭히거나 중상모략을 일삼던 적의 지도층 인사였다. 하사네 삽바 당시 이렇게 죽은 주요 인물의 수가 50명에 달한다. 이 중 역사 속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저명한 피해자는 셀축튀르크(Selçuk Türk)의 재상(宰相) 니잠 알물크(Nizam al-Mulk, 1018~1092)다.
셀축튀르크의 재상 암살
니잠 알물크는 이슬람 역사에서 사재(私財)를 털어 기숙대학을 만든 인물로 유명하다. 압바스제국의 수도 바그다드에 세운 니자미야(Nizamiyyah)는 여전히 이슬람 세계 최고 지성인 중 하나로 손꼽히는 알가잘리(al-Ghazali, 1058~1111)가 첫 교수로 임명되어 가르치던 곳이다.
그런데 그는 정국을 혼란스럽게 하는 니자리 이스마일리 시아를 소탕하겠다면서 “반란의 고름을 짜고 나태의 병균을 없애겠다”고 공언하였다. 이에 하사네 삽바는 니잠 알물크를 가장 위험한 인물로 지목하고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누가 사악한 니잠 알물크를 없애겠는가?”라는 하사네 삽바의 질문에 타히르 아르라니(Bu Tahir Arrani)라는 청년이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이 그러겠노라며 의지를 표명하였다.
1092년 10월 니잠 알물크가 술탄 말리크샤(Malikshah)와 함께 셀축튀르크의 수도 에스파한에서 압바스제국 칼리파의 바그다드 궁전으로 이동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당시 압바스제국의 칼리파는 명목상으로는 칼리파였고, 실질적 힘은 셀축튀르크의 술탄이 쥐고 있었다. 945년 12이맘 시아인 부예(Buyeh)조에 바그다드를 내어 준 압바스 칼리파(Khalifah)조를 1055년 셀축튀르크가 구원하였다. 압바스 칼리파조와 셀축튀르크는 순니파였다. 셀축튀르크는 스스로를 칼리파라고 선언하지 않고 술탄이라는 명칭을 쓰면서 압바스 칼리파조의 보호자로 자처하고 있었다.
1092년 10월 16일 저녁 니잠 알물크는 술탄 말리크 샤의 텐트에서 라마단 단식 종료를 기념하는 식사를 하고 난 후 가마를 타고 자신의 텐트로 가던 중 수피 영성가(靈性家) 복장을 한 젊은이 부 타히르가 청원할 것이 있다고 외쳤다. 이에 니잠 알물크는 청을 들어주고자 가마에서 청년 쪽으로 몸을 돌렸는데, 기회를 놓칠세라 이때 청년은 니잠 알물크의 가슴을 칼로 찔러 죽이고 자신도 경비병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암살 소식을 들은 하사네 삽바는 만족스러움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이 악마를 없애니 축복이 내려오기 시작한다.”
마르코 폴로의 기록
▲몽골군의 알라무트 성채 포위. 라시둣딘 하마다니의 책 《자미으 앗-타와리크(집사,集史)》 삽화.
알라무트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암살은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던 니자리 이스마일리 시아 공동체에 절대적인 존속 수단이었다. 수세에 몰리다가도 일단 암살에 성공하면 상대는 공세를 멈추었다. 1113년 알렙포에서 수백 명의 이스마일리를 죽인 지도자는 6년 후 암살자의 손에 두 아들과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1126년 이스마일리를 소탕하려던 한 셀축튀르크 재상은 마구간 일꾼으로 위장 취업한 두 명의 암살자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1129년 다마스쿠스에서 이스마일리 시아를 학살한 튀르크 장군은, 그의 경비병으로 들어가 2년 동안 기다리며 기회를 엿보던 암살자에게 역시 치명상을 입었다. 십자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1192년 3차 십자군 꼬르라도(Corrado del Monferrato)는 악코(Acre) 왕국의 왕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랍 그리스도교 수도사로 알고 신뢰하던 두 명의 암살자에게 목숨을 잃었다.
그렇다면 니자리 이스마일리 시아는 정말 마약을 먹고 암살을 하였을까? 마약 하시시와 암살과 니자리 이스마일리 시아를 연결시킨 사람은 마르코 폴로다.
그는 1256년 몽골군이 파괴한 알라무트의 이스마일리 성채를 1273년 방문하면서 남긴 기록에 알라무트에서 하시시를 먹이면서 암살자를 키웠다는 이야기를 전하였다. 종교지도자가 훗날 용감한 남자가 될 것으로 보이는 12살 소년들에게 하시시를 먹이며, 이들은 3일 동안 잠을 자는데, 깨어 보면 황홀한 것들에 둘러싸여 마치 천국에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처녀들이 시중을 들고 원하는 것은 모두 얻으며 지극히 만족스럽게 머무니 결코 자의로 떠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이때 지도자가 누군가를 죽이고 싶으면 “가서 이렇게 하여라. 너를 천국에 들여보내기 위해 이러는 것이다”라고 명령을 내리고, 천국의 맛을 본 암살자는 기꺼이 살인 명령을 따른다는 것이다.
마르코 폴로 때문에 니자리 이스마일리 시아는 마약을 먹고 사람을 죽이는 암살자의 대명사로 오늘날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지만, 사실 오늘날 학자들은 이들의 암살을 하시시와 무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슬람 교리상 하시시는 술과 같이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이기에 금지 품목이다. 하사네 삽바와 같이 교리를 철저히 지키던 사람이 마약을 복용하였을 리 만무하다. 또 그런 기록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하시시는 마시는 것이 아닌데, 마르코 폴로는 마신다고 했으니 더더욱 이상하다.
‘어새신’은 마약쟁이?
▲2008년 3월 26일 두바이 이스마일리 센터 개소식. 안나흐얀(왼쪽) 현 장관, 아가 칸(가운데), 알막툼(오른쪽) 아랍에미리트 항공 대표.
그렇다면 어새신의 어원은 무엇이었을까?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의미로 쓴 ‘하시시’가 ‘마약쟁이’로 곡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1122년 파티마조 알아미르 칼리파가 시리아 지역 니자리 이스마일리를 조롱하고 폄하하면서 ‘하시시’라고 했다고 하는데, 이는 ‘쓰레기 같은 놈들’, ‘어중이 떠중이들’이라는 의미다. 이 말이 와전되었을 수 있다. 또 니자리 이스마일리의 교의에서 신앙의 근간을 의미하는 ‘아사스(Asas)’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아사스를 지키는 사람 ‘아사시(Asasi)’가 마약을 먹는 ‘하시시’로 발음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어원이 어찌되었든 간에 확실한 것은 니자리 이스마일리 시아가 마약을 먹고 암살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반드시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한 적의 요인들만 죽였다. 무고한 민간인의 목숨을 빼앗아간 알카에다, IS와 같은 현대 폭력적인 이슬람주의자들과 극명하게 다른 점이다. 살인을 옹호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암살이라고 다 같은 암살은 아니라는 점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김정남의 죽음은 그 점에서 정치적 암살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니자리 이스마일리 시아의 비대칭 전략 암살 작전과는 달라도 참 많이 다르다. 상대 요인만을 제거한 니자리 이스마일리 시아와 달리 김정은은 자신의 권력 구축을 위해 고모부, 형 할 것 없이 아무나 가리지 않고 마구 죽이니 말이다. 하사네 삽바는 니잠 알물크의 죽음을 두고 축복의 시작이라고 했는데, 김정남의 죽음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저 사악한 북한 정권 붕괴의 시작이길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2017.05월 호
◆오스만 제국의 형제살해
내 형제를 죽이노라, 나의 권력을 위해!
⊙ 11년간의 내전 끝에 집권한 메흐멧 2세, 술탄에 즉위하면 형제들을 죽이도록 법제화
⊙ 메흐멧 3세, 즉위 후 19명의 형제를 살해
⊙ 형제살해 덕에 역동적이고 유능한 후계자 이어져 제국 발전에 기여했다는 주장도 있어
▲콘스탄티노플의 정복자인 메흐멧 2세는 형제살해를 법제화했다.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 없듯이, 최고 권력은 결코 나누어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정치적 동물인 인간들이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받들어 온 신조일는지 모른다. 오롯이 나 홀로 최고의 권력을 누리기 위해 정적(政敵)을 투옥하거나 죽여서 제거해 버리는 경우는 고금을 막론하고 비일비재하다.
과거를 돌아보면 권력의 정상에 오르기 위해 형제 간 다툼을 넘어 살해하는 경우도 적잖았고 아비가 자식을, 자식이 아비를 처치해 버리는 일도 있었으니 권력 앞에서 인간이란 참으로 잔인무도한 존재다. 물론 오늘날 권력쟁취를 위해 형제나 부모 살해를 자행하는 나라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김정은 같은 사악한 비인간(非人間)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과거 로마를 위시한 제국에서는 황제인 아버지가 죽을 경우 그의 아들들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다 서로를 죽였다는 기록이 역사에 남아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조선조 3대 왕 태종도 권좌에 오르기 위해 이복형제 방번과 방석을 죽이고 친형 방간과도 권력을 놓고 싸웠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왕위에 오르기 위한 골육상쟁(骨肉相爭)이었다. 왕위에 오른 후 왕권을 강화하고 형제들의 권력욕을 뿌리째 제거하기 위하여 이른바 형제살해를 합법화한 왕조가 있었다. 이는 바로 오스만튀르크 제국이었다.
바예지드 1세, 11년간 내전 끝에 즉위
1453년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하고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중동, 북아프리카, 동유럽을 장악한 오스만튀르크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기 전까지 안정적인 계승법이 없었기에 술탄 계승을 두고 내정(內政)의 혼란을 겪었다.
4번째 술탄 메흐멧 1세(재위 1413~1421)는 자신의 조상들이 경험을 바탕으로 불편함을 잘 대처했다고 하면서 한 나라에 “두 명의 술탄이 있을 수 없다”고 하였지만 정권의 안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술탄의 아들은 모두 차기 술탄이 될 자격을 지니고 있었다. 튀르크 전통에 따라 12살이 넘으면 이들 왕자는 각기 수도에서 똑같은 거리만큼 떨어진 행정구역에 보내져 일종의 차기 지도자 과정을 밟다가 술탄이 죽으면 가장 먼저 수도에 도착한 자가 차기 술탄이 되었다.
권력 다툼에 밀린 왕자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심지어 적국에 망명하여 술탄위(位) 찬탈의 기회를 노리기도 하였다. 메흐멧 1세의 술탄 즉위는 극심한 혼란의 좋은 예다. 1402년 그의 부친이자 술탄이었던 바예지드 1세가 티무르와 벌인 앙카라 전투에서 패하고 포로로 잡힌 뒤 죽자 술탄의 아들들은 차기 술탄 자리를 두고 무려 11년간이나 서로 싸움을 벌였다. 결국 가장 어린 아들이었던 메흐멧 1세가 제국을 나누어 가지자고 한 형 무사를 차무를루 전투에서 무찌르고 목 졸라 죽인 후 술탄이 되었다.
어렵게 술탄의 자리에 올라도 형제들이 살아 있는 한 권력은 항상 반란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술탄의 처우에 불만을 품은 군대가 있을 경우, 군대는 술탄의 형제 중 한 명을 지도자로 옹립하면서 술탄의 권위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야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형제가 있다면 제국의 정정(政情)은 혼란에 휩싸일 가능성이 상존하였다.
메흐멧 2세는 메흐멧 1세의 손자로 술탄의 자리에 올랐고,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실질적인 오스만 제국의 건설자로 칭송받는 명군(名君)이다. 메흐멧 2세는 술탄의 형제들이 빚어 내는 불협화음을 일소하고자 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형제살해법을 제정한다.
“나의 아들들 중 누구든 간에 술탄에 오르게 되면 반드시 세상의 질서를 위해 마땅히 형제들을 죽여야 한다. 법률가들이 승인하였으므로 이를 실행에 옮기도록 하라.”
아들을 죽인 술레이만 대제
▲술레이만 대제는 명군이었지만, 왕위 경쟁자인 아들을 죽였다.
이로써 합법적으로 술탄이 자신의 형제들을 양심의 가책 없이 죽일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바예지드 2세(재위 1481~1512)가 죽자마자 수도 이스탄불에 있던 그의 막내아들 셀림(재위 1512~1520)은 스스로를 술탄으로 선언하고 두 형 아흐멧과 코르쿳을 궁중 만찬에 초대하여 죽였다. 이 때문에 셀림은 ‘야부즈(Yavuz)’라는 별칭을 얻었는데, 이는 터키어로 ‘잔인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형제뿐 아니라 아들까지도 권력의 희생양이 되었다. 1553년 술레이만 대제(재위 1520~1566)는 자신의 큰아들이자 차기 강력한 술탄 후보자였던 무스타파(1515~1553)를 자신이 참가한 전장(戰場)으로 호출했다. 막사로 들어오면서 인사의 예를 표하는 무스타파에게 술레이만 대제는 “야, 이 개야, 내게 감히 인사를 해?”라고 하면서 부하들을 시켜 목 졸라 죽였다.
▲하렘의 술탄’ 록셀라나.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노예상에 붙잡혀 팔려 와서 술레이만 대제의 여인이 된 하렘의 술탄 록셀라나가 자신의 아들을 차기 술탄으로 만들려고 무스타파를 모함하여 일어난 비극이었다. 결국 그녀의 바람대로 아들 셀림 2세(재위 1566~1574)는 마지막 남은 이복형제 바예지드(1525~1561)와 그의 네 아들을 처형하고 대권 가도를 탄탄히 확보한 다음 5년 뒤 아버지가 죽자 술탄이 되었다.
이 법을 마지막으로 적용한 권력자는 13번째 술탄 메흐멧 3세(재위 1595~1603)였다. 1595년 술탄이 되자마자 바로 이복형제를 포함하여 모두 19명의 형제를 죽여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함께 묻었다. 말을 하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기에 술탄의 신임을 받는 농아(聾啞) 처형자들이 이들 왕자를 모두 비단 손수건으로 목 졸라 죽였다. 형 때문에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당한 왕자들 중에는 아직 젖도 떼지 못한 갓난아이들도 있었다.
새장
▲왕위계승전에서 탈락한 왕자들을 유폐했던 톱카프 궁전의 카페스.
이렇게 잔인하고도 야만적인 방법으로 형제들을 살해한 이유는 제국의 안정과 안녕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여도 죄 없는 이들의 목숨을 빼앗는 것을 신민(臣民)들이 곱게 보아 줄 리 만무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여론을 반영이라도 한 듯, 13살에 메흐멧 3세의 후계자가 된 아흐멧 1세(재위 1603~1617)는 한 살 어린 이복형제인 어린 무스타파를 죽이지 않고 옛 궁전에 살도록 보냈다. 왜 무스타파를 죽이지 않았는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아흐멧이 아직 아들이 없고 후계자가 동생뿐이어서 그랬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권력에 위협이 되지 않아서 그랬다, 동생을 좋아해서 그랬다 등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간에 이때부터 형제살해 전통은 막을 내렸고, 술탄직은 연장자(年長者)가 계승하였다. 형제를 살려주는 대신에 궁전 한 곳에 유폐 장소를 마련해서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형제들이나 아들들을 모조리 잡아넣고 무기한 감금하는 새로운 방식이 도입되었다. 유폐에 사용된 건물을 ‘카페스(Kafes)’라고 하였는데, 새장, 철창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유폐된 이들은 여성과 술 등 유흥거리를 즐길 수 있었지만, 정치, 행정, 경제, 군사 등을 배우고 익히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궁전에 갇히긴 했지만, 금치산자(禁治産者)처럼 대우 받은 것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정상적인 교육을 받았고, 이들 중에서 술탄이 나오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술탄으로 선택되지 못하면 여기서 평생을 보내야 했고, 한정된 공간에서 나오지 못하고 계속 지내야만 하였기에 정신병을 앓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었다. 갇힌 자들의 삶이 정상적이 아니었음은 익히 짐작할 수 있다.
연장자 승계로 바뀐 후 제국 쇠퇴 시작
형제살해가 제국의 안정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적자생존(適者生存)의 법칙이 작용하였기에 제국을 역동적으로 이끄는 순기능을 하였다고 하여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이들은 형제살해 제도가 폐지되면서 오스만 제국이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해석한다. 연장자 우선 계승 때문에 젊고 활력 넘치는 술탄 대신 연로한 술탄이 들어서는 바람에 역동적으로 제국을 운영하지 못하였고 술탄의 아들들이 주지사로 파견되어 행정경험을 쌓았던 과거와 달리 유폐되어 금치산자로 전락하여 제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집안 사람들을 꼭 죽여야만 제국이 지속적으로 발전하였을는지는 의문이다.
그렇다면 멀쩡한 사람을 단지 술탄의 권위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죽이는 것이 이슬람에서는 쉽게 용인되었던 것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오스만 2세(재위 1618~1622)의 경우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동생이 권력에 도전할 수 없도록 죽이고자 하였으나 이슬람 법학자인 에스아드 에펜디가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른 법학자로부터 살해해도 좋다는 법적 의견을 구해 동생의 목숨을 빼앗았다.
그러나 동생을 죽이고 권력을 강화할 수 있을 듯했던 오스만 2세는 친위부대였던 예니체리 세력을 약화시키려다가 반격을 받아 죽음을 당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고환을 으깨어 죽이는 방식으로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형제살해의 법적 근거
이슬람법은 같은 사안일지라도 법학자의 해석이 다를 수 있기에 술탄은 자신에게 유리한 견해를 얻어 낼 수 있었다.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대체로 이슬람 법학자들은 혼란이나 위험보다는 안정을 선호하여 형제살해를 묵인하였다. 이들은 다음 두 《꾸란》 구절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으로 받아들여 형제살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먼저 ‘살인보다 더 나쁜 것이 분열’이라는 2장 191절의 계시는 술탄직을 두고 제국이 분열되는 것보다는 형제살해가 더 낫다고 여기는 데 일조하였다. 또 18장에는 예언자 모세와 함께 있던 사람이 무고한 소년을 죽여 놀란 모세가 항의하자 그는 소년의 부모가 신앙인인데, 불신자인 소년이 반항하면서 부모를 괴롭힐 것이 걱정되어 죽였고, 신께서 더 나은 아이를 부모에게 주실 것을 기대한다고 한다(18장 80~81절).
즉, 분열보다는 안정, 악보다는 선을 위해 《꾸란》을 근거로 법학자들이 술탄의 형제살해를 용인한 것이다. 그런데 해당 《꾸란》 구절을 보면, 특히 2장 191절은 싸움을 거는 자가 있을 경우를 두고 한 말인데, 술탄 자리에 관심이 없어 싸움도 걸지 않은 왕자들을 모두 죽인 것이니 참으로 자의적인 해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형은 이슬람법에서 명백한 증거가 필요한데 증거도 없이 훗날 문제가 될 것이라는 가정과 추측만으로 갓난아이의 목숨까지 빼앗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라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달려야 산다!
▲셀림 1세는 총리를 7명이나 처형했다
터키는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나라이다. 특히 이스탄불의 톱카프 궁전은 마르마라해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곳으로 널리 정평이 나 사시사철 방문객으로 붐빈다. 그런데 기막히게 멋진 이 궁전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마음이 아플 뿐이다.
톱카프 궁전 정문 양쪽에는 최근에 처형당한 범죄자들의 목이 걸려 있었고 정문 안쪽으로 들어서면 궁의 내부로 향하는 곳에 사형집행관들이 참수나 교살 후 손을 씻는 곳이 있었다. 사형집행관을 ‘보스탄즈 파샤’라고 불렀는데, ‘정원사’라는 뜻이다. 목 졸라 죽이거나 머리를 잘랐으니 ‘죽음의 정원사’다. 왕족이나 고관대작은 피를 흘리면 안 되는 전통에 따라 목을 졸라 죽였고, 그 외에는 참수(斬首)하였다.
이곳은 셀림 1세(재위 1512~1520) 때 특별히 자주 사용되었다. 그의 재위 중에 7명의 총리가 목숨을 잃었고, 3만 건에 달하는 처형명령이 집행되었다. 오스만튀르크 시대에 “그대가 셀림 1세의 총리가 되길!”이라는 말은 저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셀림 1세는 총리를 자주 죽였다.
총리들은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유서를 옷 안에 넣고 다녔다고 한다. 중앙문에는 술탄의 심기를 거스른 관리들의 잘린 목이 대리석 기둥에 놓여 있었다. 장관이었으면 솜이, 하부 관리였으면 짚이 잘린 머리에 박혀 있었고 잘린 혀, 코, 귀도 함께 전시되기도 하였다. 일단 사형선고가 내려지면 바로 집행하였다.
그러나 사형선고를 받은 총리에게는 목숨을 살릴 기회가 있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총리는 중앙정문에서 약 270m를 빨리 달려 보스탄즈 파샤보다 먼저 사형 집행장인 수산시장 정문에 도착하면 사면되었다. 1822년 사형선고를 받은 하즈 살리흐 파샤 총리는 달리기 경주에서 이겨 목숨을 구했을 뿐 아니라 다마스쿠스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미친 자’ 이브라힘
톱카프 궁전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바다로는 사형선고를 받은 여성들을 보스탄즈 파샤가 무거운 자루에 묶어 던졌다. ‘미친 자’로 불린 이브라힘(재위 1640~1648) 술탄은 자신의 하렘에 살던 여성 280명 전원을 이러한 방식으로 죽였다고 한다.
이브라힘은 왜 그랬을까? 현대 학자들은 그가 정신병을 앓았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카페스에 유폐되어 살면서 혼이 빠진 것은 아니었을까? 그의 아버지 아흐멧 1세는 형제살해를 폐지하였지만, 술탄이 된 그의 아들이자 이브라힘의 형인 오스만 2세와 무라드 4세(재위 1612~1640)는 이브라힘만 남겨 두고 형제들을 모두 죽였다. 죽기 직전 병석에서 무라드 4세는 미친 이브라힘이 제국을 이끄는 것보다 차라리 제국이 끝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여 사형명령을 내렸으나 어머니가 말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때 이브라힘은 카페스에 유폐되어 있었는데, 무라드 4세가 죽고 군중이 그를 새로운 술탄으로 추대하려고 몰려들자 자신의 형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보낸 사람들로 생각하여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술탄의 근위대가 오고 어머니가 나오라고 설득해서야 비로소 처소에서 나와 “백정이 죽었다!”라고 소리치며 춤추었다고 한다. 언제나 죽음의 공포에서 살았으니 미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유폐된 술탄의 형제, 아들들에게 하루하루가 공포 그 자체였을 것이다. 하필이면 술탄과 같은 집안에서 태어나 좁은 곳에서 일생을 보내야 하다니, 참으로 원망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술탄의 아들과 형제들은 총리들처럼 빨리 달려 살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었다.
오스만튀르크는 1876년 헌법에서 왕자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술탄이 된다고 규정하였다. 이때 제국은 유럽의 환자로 전락하여 병사(病死) 직전이었다. 그리고 1922년 11월 1일 36번째 술탄 메흐멧 6세가 폐위되면서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새로운 공화정의 영웅 무스타파 케말 파샤가 수많은 이의 목숨을 끊은 술탄직을 폐지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갓난아이를 죽이거나 유폐할 필요가 없는 공화정이 들어섰다.
말끝마다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고 이야기하면서 형제를 죽이는 동토(凍土)의 왕국은 오스만 제국 술탄의 피비린내 나는 비정한 역사를 재현하려고 하니, 참으로 딱하기 그지없다. 인간 백정이 사라지길 바랄 뿐이다.⊙
2017.06월 호
◆아랍 르네상스의 에라스뮈스’ 후나인 이븐 이스하끄
⊙ 후나인 이븐 이스하끄, 아바스조 칼리프 밑에서 일했던 네스토리우스교도 의사
⊙ 후나인,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론》,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서 등을 그리스어에서
아랍어로 번역
⊙ 후나인이 아랍어로 번역했던 고대 그리스 문헌들이 서구에 전해지면서 르네상스 시작
마다 과거 이슬람 문명이 서구보다 앞섰고, 무슬림들이 전해준 과학・철학・의학 지식이 없었다면 서구의 르네상스는 불가능했다고 한다. 이슬람 역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거의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단골메뉴처럼 읊조리는 얘기다. 이슬람 세계가 서구에 전한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그리스인들이 성취한 뛰어난 학문이었는데,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선진 그리스 의학・철학・과학을 아랍어로 옮긴 곳이 아바스 칼리프조(朝)의 칼리프 알마문(al-Ma’mun·재위 813~833)이 세운 ‘바이트 알히크마(Bayt al-Hikmah)’, 곧 ‘지혜의 집’이었다.
알마문은 ‘지혜의 집’ 또는 ‘지혜의 책 창고’로 불리던 아버지 하룬 알라시드(Harun al-Rashid·재위 786~809)의 도서관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늘려 일종의 국립번역소로 만들고 명저를 아랍어로 옮기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그리스 서적을 비롯하여 외국어로 된 학문서적이 제국의 공용어 아랍어로 번역되고, 이를 바탕으로 아랍 학자들이 지식을 전수하고 연마하여 새로운 사실을 밝혀 찬란한 이슬람 문명을 이루었다.
무슬림들의 지식은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중세 서구에 전해져 서구인들이 배우고 익히면서 더욱 발전시켜 더 뛰어난 과학문명을 이루었다. 서구인은 무슬림들을 통해 고대 그리스의 학문을 재발견하고 자극을 받아 그리스 원전을 직접 라틴어로 옮기면서 지식의 지평을 넓혀나갔다. 이처럼 무슬림들은 서구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럽이 잊고 지낸 그리스 학문을 전해줌으로써 서구의 자각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에 서구 이슬람학자들은 이슬람 문명을 중간자 문명(Intermediary civilization)이라고도 부른다.
네스토리우스교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구분하자고 주장한 네스토리우스.
사실이 이러하다 보니 우리 주변에는 이슬람 문명이 서구보다 앞섰었는데, 현대 서구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배은망덕하게 이슬람과 무슬림만 비난한다고 비분강개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슬람 문명이 없었다면 오늘날 서구가 감히 이렇게 앞선 문명을 지니고 존재할 수 있었겠냐는 훈계와 함께 말이다. 무슬림들이 만든 책이나 온라인 페이지는 서구보다 훨씬 앞섰던 이슬람 문명을 강조하면서 무슬림이 서구인의 스승이었다고 자부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한 가지 꼭 하고 싶은 말은 서구를 일깨운 스승이 된 이슬람 문명이 무슬림이 혼자 만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슬람 세계의 진보와 발전에 기틀이 된 그리스도교인과 유대인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선진 그리스 지식을 아랍어로 옮겼던 그리스도교인 후나인 이븐 이스하끄(Hunayn ibn Ishaq·808~873)를!
아바스 칼리프조의 쿠파에서 조금 떨어진 알히라(al-Hirah)에서 태어난 후나인 이븐 이스하끄는 이바드(Ibad)라는 아랍부족 출신이라서 알이바디(al-Ibadi)라고 불렸다. 이바드족은 그리스도교를 따르던 부족인데 이슬람이 성립된 후에도 개종하지 않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지하였다. 이들이 따른 그리스도교는 이른바 네스토리우스(Nestorius·386~450)파 그리스도교다.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였는데, 예수의 모친 마리아를 ‘신(神)의 어머니(Theotokos)’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tokos)’라고 불러야 한다고 하였다가 예수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한다고 하여 431년 에페소 공의회와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배격되었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회는 네스토리우스에 동정적인 사람들이나 교회를 네스토리우스파로 불러왔다.
중동에서 네스토리우스파는 예수의 모국어였던 아람어(Aramaic)의 시리아 지역 방언, 즉 시리아어(Syriac)를 전례용어로 사용해 왔는데, 로마의 박해를 피해 페르시아제국에서 건재하였다. 7세기 당나라에도 전파되어 한자문화권에서는 경교(景敎)라고 불렸다. 오늘날 서안비림박물관(西安碑林博物館)에 보존되어 있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教流行中國碑)가 중국 전래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론》 등 아랍어로 번역
▲후나인 이븐 이스하끄가 아랍어로 번역한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론》
서구에 요하니티우스(Johannitius)로 알려진 후나인 이븐 이스하끄는 시리아어와 아랍어를 모두 하는 이중 언어 구사자였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아랍어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리스어는 어떻게 배웠을까? 유수프 이븐 이브라힘에 따르면 후나인은 바그다드에서 역시 그리스도교인이자 유명한 궁정의사로 ‘지혜의 집’ 책임을 맡고 있던 유한나 이븐 마사와이흐 아래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후나인은 스승에게 그리스 의학에 대해 물었지만, 유한나는 불필요한 질문으로 간주하였을 뿐 아니라 잦은 질문에 화를 내면서 후나인을 쫓아낸다. 지식욕이 강한 후나인은 약 2년간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곳에서 머물렀다고 하는데,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른다. 비잔티움 제국 어디에선가 체류하였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어디에 있었든 간에 다시 바그다드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후나인은 호메로스의 작품을 암송할 정도로 그리스어에 능통한 상태였다. 스승이었던 유한나와도 화해하여 유한나는 후나인이 그리스어로 쓰인 작품을 번역하도록 장려하고 후원하였다. 무타와킬(Mutawakkil·재위 847~861) 칼리프 시대에 후나인은 궁정의사로 임명됐지만, 변덕스러운 칼리프의 성격과 그리스도교인인 동료의 시기로 궁정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일설에 따르면 후나인은 성화공경(聖畵恭敬)을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궁정에서 꾐에 빠져 성화에 침을 뱉는 바람에 네스토리우스 총대주교와 칼리프 무타와킬의 분노를 사 태형(笞刑)을 받고 투옥된 후 도서관을 비롯하여 전 재산을 몰수당하였다가 6개월 후 다시 복직되어 죽을 때까지 궁정에서 일했다고 한다.
번역가로서 후나인이 남긴 업적은 의학・철학・천문학・수학뿐 아니라 주술, 꿈 풀이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현란하다. 아들 이스하끄와 조카 후바이쉬를 포함한 제자들과 함께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의 의학서,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론》, 디오스코리데스의 《약물론(藥物論, De Materia Medica)》 등을 아랍어로 옮겼다. 《70인 역 히브리 성경(Septuagint)》을 아랍어로도 옮겼는데, 당시 최고의 성서 번역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갈레노스의 의학서 번역
▲그리스의 갈레노스가 쓴 눈병에 대한 의학서의 아랍어 번역본. 후나인 이스하끄가 번역했다.
후나인은 갈레노스의 책을 번역하면서 갈레노스가 쓰지 않았지만 필자로 전해오는 몇몇 작품이 갈레노스의 것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는 놀랍게도 오늘날 학자들의 판단과 다르지 않다.
후나인은 그의 저서에서 자신이 번역한 갈레노스의 책이 129권이라고 집계했는데, 이 중 100권은 그가 혼자 시리아어나 아랍어, 또는 두 언어로 모두 옮겼다. 후나인이 번역했던 갈레노스의 책들은 11세기 말 다시 라틴어로 번역되어 서구 학자들이 그리스 의학을 재발견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이후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관찰과 실험을 중시한 갈레노스의 정신을 본받아 그리스어 원문에서 직접 번역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깨달았는데, 이는 결국 현대 의학 발전에 든든한 기틀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후나인의 학문적 열정은 지치지 않고 그리스 필사본(筆寫本)을 찾으러 다닌 집념에서 잘 드러난다. 갈레노스의 《논증에 관하여(De Demonstratione)》를 찾아다니면서 그는 이렇게 심정을 토로하였다. “나는 그것을 간절히 찾길 원하면서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를 돌아다녔고 알렉산드리아까지 갔지만, 다마스쿠스에서 반만 찾은 것 외에는 소득이 없었다.”
이처럼 열정적이었던 후나인의 필사본 수집은 오늘날 그리스 원문(原文)을 확정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가 모아 번역한 필사본이 오늘날 존재하는 것보다 더 이른 시기의 작품인 데다가 현재 유실된 것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문은 이처럼 돈이나 명예는 생각하지 않고 가슴으로 지식을 찾고자 세상을 주유한 이들의 순수한 열망이 있기에 발전하고 계승되는 것이다. 후나인이 그리스 원전(原典)에 대한 탐구욕 없이 그냥 자신이 아는 언어에 만족하였더라면 중세 서구인들은 그리스 학문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플라톤의 저서 등 번역
후나인은 열심히 모은 필사본을 서로 대조하면서 번역 작업을 진행하였다. 번역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정확한 텍스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후나인의 작업은 오늘날 학자들이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후나인이 그리스도교인의 정체성(正體性)을 번역 작업에서 완전하게 배제하지 못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리스도교와 같은 유일신 신앙을 지닌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스 신화가 잘 보여주듯, 여러 신이 존재한다. 후나인은 이 점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교도 신들이 나오면 이를 그리스도교적인 용어로 대체하였다. 특히 신화적 요소가 강한 아르테미도로스(Artemidoros)의 《해몽서(解夢書)》에서 그런 모습을 보였다.
후나인은 선학(先學)들이 갈레노스의 책을 번역하면서 범했던 오류를 지적하고 비판하면서 교정하기도 하였다. 바이트 알히크마에서 번역 작업을 하였지만, 개인적으로 부탁받은 책 또한 다수 시리아어나 아랍어로 옮겼는데, 갈레노스의 작품의 경우 그가 그리스어에서 아랍어나 시리아어로 번역을 하면 조카인 후바이쉬와 제자 이사가 시리아어나 아랍어로 옮겼다.
후나인이 이끈 번역단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그리스 철학서도 번역하였다. 후나인은 플라톤의 《국가》 주석서를 썼다. 아쉽게도 현재 전해지지는 않지만, 선학 이븐 알비트리끄가 번역한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개역(改譯)하고 《법률》을 번역하였다. 또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해석론》을 시리아어로 번역하고, 아들 이스하끄가 이를 아랍어로 옮겼다. 이스하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나올 때까지 천문학을 지배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Almagest)》를 번역하기도 하였다.
아랍어로 새로운 용어 만들어내
▲번역 작업을 하는 후나인과 그의 제자들. 오스만제국 시대 세밀화.
번역의 중요성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지적 작업이 발전한다. 일본이 동아시아의 한계를 넘어 근대화에 성공한 것도 난생처음 보는 네덜란드 서적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잡고 투혼을 발휘하면서 번역한 학자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번역을 통해 난학(蘭學)을 배워, 새로운 어휘와 개념을 습득하고 사유(思惟)가 발전했다.
후나인은 9세기 이슬람 문명이 한 차원 더 높게 도약할 수 있는 튼튼한 기반을 제공하였다. 그래서 그를 서구 르네상스의 에라스뮈스(Erasmus)에 빗대어 ‘아랍 르네상스의 에라스뮈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특히 아직 학문적인 용어가 부족하였던 아랍어에 새로운 용어를 더한 것은 아랍어 사용자에게 준 위대한 선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후나인은 아랍어가 시리아어나 그리스어에 비해 어휘가 부족하다는 것을 통감하였다. 대체로 이러한 경우 번역자는 외래어를 음사하는데, 후나인은 아랍어로 된 용어를 만들고자 최선을 다하였다. 우리 말의 조어(造語)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탓하는 우리 학자들이 배워야 할 점이다. 일본 학자들은 한자로 개념을 만들고 있는데 말이다. 후나인은 9세기에 이를 극복했으니 몹시도 부끄러운 일이다.
이슬람 문명의 건설자는 무슬림들만이 아니다. 후나인 이븐 이스하끄와 같은 비무슬림 또한 있었기에 풍요로워진 아랍어로 학문을 할 수 있었다. 아랍 철학자들은 그리스어를 몰랐기에 모두 아랍어로 번역된 철학책을 읽고 철학을 하였다. 후나인이 아니었더라면 고대 그리스인들이 지닌 보석과 같은 사유를 이슬람 문명도, 서구 문명도 쉽게 공유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번역은 때때로 마술과 같이 우리의 학문을 지배한다. 플로티누스의 철학이 9세기에 아랍어로 번역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으로 잘못 알려졌다. 그 결과 플로티누스의 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위대한 철학자로 존경한 아랍 철학자들은 신(新)플라톤주의 철학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 믿은 것이다. 원전을 읽을 줄 알았더라면 이런 일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일 때문에 후나인은 그리스어를 배워 번역을 하려고 그리 노력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븐 이스하끄를 기억하라
▲아바스왕조의 칼리프 알마문이 만든 도서관이자 번역소였던 ‘지혜의 집’.
이제 서구 문명이 과거에 이슬람 문명으로부터 배운 것이 많았고, 그 결과 오늘날 선진 문화를 이룰 수 있었다고 설명할 기회가 있다면 꼭 후나인 이븐 이스하끄를 언급하면서 무슬림들만 이슬람 문명을 훌륭하게 만든 공헌자가 아님을 강조해 달라. 그리스어를 배우고 필사본을 구하여 번역하고자 온 힘을 다한 후나인이 아니었더라면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그리스 원전을 라틴어로 번역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을 것이고, 그렇다면 서구의 발전도, 보편적 인류문명의 진보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 아닐까? 지나친 비약이라고 비판해도 좋다. 그런데 솔직히 그렇게라도 후나인 이븐 이스하끄를 독자들의 머리에 각인시키고 싶다. 그의 순수한 학문적 열정과 집념에 존경을 표하면서 말이다.⊙
2017.07월 호
◆무슬림 제국의 수호자 노예 출신 군인, 맘룩(Mamluk)
⊙ 어릴 때 비(非)무슬림 소년 선발해 종교·군사교육… 주인에게만 의존하는 관계 바탕으로
충성심 확보
⊙ 맘룩군대, 몽골군 막아내고 이집트에서 왕조 개창
⊙ 오스만튀르크는 그리스도교 소년들로 예니체리라는 정예부대 편성… 정변 일으키기도
▲오스만튀르크의 정예부대인 예니체리는 정복전쟁의 선봉이었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발전한 나라를 제외하고, 정권의 안정을 위해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엇보다도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다. 충성도 높은 군인들에 둘러싸인 지도자보다 더 마음 든든한 위정자가 있을까? 사실 충심 어린 무장(武將)들을 갖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무력으로 누르기에 그냥 충성하는 시늉만 내는 것이겠지’라고 냉소적인 생각을 하면서 ‘지도자에게 몸과 마음을 오롯이 바쳐 충성하는 군인들이 존재하기는 하였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놀라지 마시라. 이슬람 세계에는 그런 군인들이 실제로 있었다. 서슬 퍼런 폭압에 어쩔 수 없이 충성맹세를 하는 표리부동의 군인들이 아니라 진심으로 모든 것을 바친 충장(忠將)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이름하여 ‘노예 출신 군인’이다.
노예 출신 군인을 아랍어로 굴람(Ghulam), 맘룩(Mamluk)이라고 불렀다. ‘굴람’은 ‘소년’이라는 뜻인데, 어렸을 적에 노예로 팔려왔기에 굴람이라고 하였다. 초기에는 굴람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으나, 11세기 이후부터는 맘룩이 더 많이 사용되었다. ‘맘룩’은 아랍어로 ‘소유된 자’라는 뜻이니, 노예라고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13세기부터는 맘룩이 굴람을 대체하였다. 굴람은 중요한 인물의 개인적 노예를 뜻하게 되었다. 맘룩의 개인적 노예를 굴람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굴람과 맘룩
▲11세기 그리스 역사가 요한네스 스퀼리트제스(Ioannes Scylitzes)의 세밀화.
무으타심(맨 오른쪽)을 알현하는 비잔티움 사신들.
무슬림 세계에서 맘룩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9세기 압바스 칼리파조의 무으타심(Mu’tasim) 때다. 833년부터 842년까지 칼리파로 통치한 그는 칼리파가 되기 전 최대 8000여 명에 달하는 튀르크계(系) 굴람들을 친위대로 거느렸다. 어머니가 튀르크 노예 출신이라 튀르크계를 고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튀르크인들이 스텝 지역에서 이미 용맹한 전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으므로, 튀르크계 전사를 선호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왜 노예 출신 군인인가? 답은 아주 단순하다. 노예로 팔려왔기 때문이다. 무슬림 위정자들은 기존 무슬림보다 더 믿을 만하고 충직한 군인을 원하였다. 무슬림을 이슬람법상 노예로 부릴 수 없다. 그래서 노예상들에게 부탁하여 뛰어난 소년들을 노예로 들여왔다. 무슬림을 노예로 들일 수 없기에 비(非)무슬림이 거래의 대상이 되었다. 소년은 장래 군인으로, 소녀는 위정자의 첩으로 팔려왔다. 피부색이 하얀 소년들만 선발하여 전사(戰士)로 양성하였다.
맘룩은 10살 안팎의 나이에 무슬림 세계의 북쪽 킵차크 스텝 지역에서 팔려 온다. 이들 어린 노예는 종교와 군사교육을 받는데, 18살 정도에 이르면 교육을 마치고 자신의 주인인 통치자 내지 상관이 이끄는 부대에 기마 궁수로 배치된다.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주인만을 바라보는 해바라기로 길러졌으니 충성심은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다. 주인과 맘룩은 마치 부자(父子)관계와 같았다. 또 같은 부대에 있는 맘룩들은 서로 강력한 형제애를 느꼈다. 군부대 전체가 마치 대가족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맘룩은 한 세대 이상을 초월하지는 못하였다. 맘룩의 아들은 맘룩이 될 수 없었다. 되었다고 한들 아버지만큼 강력한 충성심을 통치자나 상관에게 보여줄 수 없었을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튀르크 이름을 유지하였던 맘룩들과 달리 이들의 아들은 아랍어 이름을 가졌다. 비무슬림에서 무슬림이 된 아버지 세대와는 달리 무슬림으로 태어난 이들이 가난한 비무슬림 소년이라는 사회 바닥층에서 최고의 엘리트 군인으로 부(富)와 명예를 지니게 된 아버지들보다 통치자에 대한 충성심이 강할 수는 결코 없었다.
충성도가 최상급인 군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새로운 노예소년을 지속적으로 사와서 어렸을 때부터 끝없는 교육을 통해 연대(連帶)의식이 강력한 군을 만드는 것이었다. 가난한 비무슬림 소년에서 부유하고 힘 있는 무슬림 군인으로 변모한 이들 맘룩의 충성심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하였다. 이들을 구매하는 자금은 국고에서 지불하였다.
맘룩의 충성심
이슬람 초기에 비아랍인이 무슬림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랍인의 마울라(Mawla), 즉 예속민(client)이 되는 것뿐이었다. 무슬림으로 개종해서 아랍 부족의 일원이 되어야 하였다. 이슬람 세계가 확장되면서 마울라는 유명무실해졌지만 자유를 얻은 노예나 전쟁포로는 예속민이 되어 칼리파나 고관대작을 섬기고 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813년 이복형제 알마으문에 패한 알아민의 이란 남서부 아흐와즈(Ahwaz)주 총독은 전황이 가망이 없자 자신의 마울라들에게 도망가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마울라들은 “당신은 노예였던 저희를 해방시켜 미천한 신분을 올려주시고 빈한한 자에서 부유한 자로 만들어 주셨다”면서 총독을 위해 싸우겠다는 임전불퇴의 의지를 보였다. 물론 모두 다 전사하였다. 맘룩들도 마울라와 마찬가지였다. 노예에서 자유인, 빈자에서 부자, 비무슬림에서 무슬림으로 만들어 준 자신들의 주인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쳤다.
맘룩들이 튀르크 일색이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이들이 용맹한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9세기 바그다드 문필가 알자히즈(Al-Jahiz)는 튀르크인들이 “이슬람의 힘의 원천이요 거대한 군대가 되었고, 칼리파에게는 보호처와 뚫리지 않는 갑옷이요, 겉옷 안에 입는 가장 내밀한 옷이 되었다”고 튀르크인의 용맹함을 칭송하였다. 또 “튀르크인들에게는 앞에 둘, 뒤에 둘, 이렇게 눈이 네 개 있다. 앞을 보면서 활을 쏘는 것처럼 뒤를 보면서도 쏜다”면서 “일생 동안 땅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말을 탄 시간이 더 많다”고 평가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철저한 종교, 군사교육을 거쳐 전사가 된 이들은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특히 자신을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온 노예상과 가장 먼저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원적지를 떠난 순간부터 이들은 노예상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였기에 둘의 관계는 밀접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주인에게 양도된 후에도 노예상은 맘룩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맘룩은 자신의 주인에게 전적으로 충성하였다. 주인은 어느 시점에 다다르면 맘룩들을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시킨다. 원주인이 미처 해방을 시키지 못하고 죽었는데도 맘룩들이 전 주인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새로운 주인이 해방시켜 주는 것을 거절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물론 이 경우 이들은 향후 출세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노예에서 해방되면 누구나 다 똑같은 출발점에 선 군인이 되었다. 그런데 술탄이나 칼리파가 해방시켜 준 노예이거나 술탄 내지 칼리파 친위대에 속하였을 경우 고위직으로 승진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군인으로 변모한 노예들은 튼튼한 상호 연대의식과 상관에 대한 충성심으로 강군(强軍)을 이루었다.
이들을 더욱 강한 군인으로 만드는 법은 또 있었다. 15세기 이집트 역사학자 알 마끄리지(1364~1442)는 술탄들이 맘룩군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기 위하여 비교적 단순한 옷을 입히고, 봉급을 서서히 올려주며, 천천히 승진을 시켰다고 한다. 그래야만 맘룩이 고위직에 올랐을 때 자신이 누리는 지위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자신의 초라한 모습과 현재의 영화를 제대로 비교할 수 있으니 말이다.
10세기 지리학자 이븐 하우깔(Ibn Hawqal)은 “튀르크인들의 땅에서 온 노예들이 가장 소중하다. 튀르크 노예에 필적할 노예는 지구상에 없다”고 칭송한 바 있다. 이들이 구성한 맘룩 군대는 이슬람과 무슬림을 영광되게 하겠다는 의지가 가슴속에 온전히 스며들 때까지 새로운 종교와 군사교육을 받고 위대한 전사로 태어났다.
맘룩왕조
그러나 이들 노예 출신 군인들이 항상 정국을 안정시킨 것만은 아니다. 때때로 자신들의 이익을 좇아 정변(政變)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구람이라고 부른 노예 출신 군인제도를 최초로 도입한 무으타심은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을 잠재우기 위하여 836년 새로운 수도 사마르라(Samarra)를 건설하여 자신의 친위대를 주둔시켰다. 바그다드의 기득권층이 새로운 군사 엘리트들의 부상을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마르라 역시 평온하지 않았다. 칼리파 알 무타와킬(Al-Mutawakkil, 재위 847~861)은 자신의 큰아들 알 문타시르(Al-Muntasir, 재위 861~862)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가 철회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튀르크 군인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알 문타시르가 병사한 후에는 그를 지지하였던 튀르크 군대가 주도하여 새로운 칼리파를 옹립하였다. 알 무타와킬이 살해된 861년부터 알 무으타미드가 칼리파 자리에 오른 870년까지 9년간 칼리파직을 두고 튀르크 군대가 벌인 암투로 정국은 실로 무정부 상태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혼미하였다. 노예 출신 군인들이 칼리파를 제치고 정권을 잡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슬람 역사상 실제로 노예 출신 군인이 정권을 휘어잡은 왕조가 있었다. 1250년부터 1517년까지 이집트를, 1260년에서 1516년까지 시리아를 통치한 맘룩 술탄조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맘룩 술탄조는 아윱조(Ayyub, 1169~1250) 술탄 친위대였던 킵차크 튀르크 맘룩 출신으로 구성된 바흐리(Bahri) 부대다. 십자군 전쟁 당시 무슬림의 영웅 살라훗딘이 세운 아윱조의 술탄 살리흐가 죽자 바흐리 부대원들이 후계자 투란샤를 살해하고 정권을 잡았다. 권력자의 충직한 친위대 역할을 하던 이들이 직접 정권을 잡아 왕조를 이룬 것이다.
몽골군을 저지한 맘룩군대
▲맘룩군은 1299년 홈스전투 등에서 몽골군을 격퇴해 이슬람세계를 수호했다.
맘룩군은 무슬림을 침략자 십자군과 몽골군으로부터 보호하고 이슬람 세계의 영토를 보전하였다. 맘룩조의 주역인 바흐리 부대는 맘룩조가 건립 전인 1250년 루이 9세가 이끄는 십자군을 만수라에서 격파하였다. 이를 두고 이집트 역사가 이븐 알 푸라트는 이렇게 칭송한다. “이는 다신교 개들이 튀르크 사자들에게 패한 첫 번째 전투다.” ‘다신교 개들(킬라브 알 시르크)’과 ‘튀르크 사자들(유수드 알 튀르크)’에서 ‘시르크와 튀르크’의 운율이 멋지게 맞아떨어진다. 이븐 칼둔(Ibn Khaldun 1332~1406)은 《역사서설》에서 이러한 맘룩조를 타락한 압바스 칼리파조가 몽골군의 손에 붕괴된 후 신께서 무슬림을 살리고자 보여준 자비로 표현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1258년 압바스 칼리파조의 수도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여세를 몰아 무슬림 세계 서쪽으로 치고 들어오던 이교도 몽골군을 맘룩군대가 1260년 오늘날 팔레스타인 ‘골리앗의 샘(아인 잘루트)’에서 저지하였기 때문이다.
“꺼져 가던 숨을 되살리고 이집트 무슬림들이 뭉치도록 하여 신앙을 살리고, 이슬람의 질서를 보존하며 이슬람의 변경을 지킨 것은 바로 신의 자비 덕분에 가능하였다. 신께서는 튀르크에서 수많은 부족들 중에 무슬림을 지켜 줄 통치자와 충직한 조력자를 무슬림들에게 보내셨다. 이들은 노예제를 통해 전쟁의 세계에서 이슬람의 세계로 왔는데, 신의 은총을 깊이 감춘 채 들어왔다.”
무슬림들은 비무슬림 소년들을 노예로 데려와 충직한 전사로 만들었고, 이슬람의 전사가 된 이들이 자신들을 데려온 무슬림을 보호하고 지켰다. 이븐 칼둔은 이렇게 말했다.
“이슬람은 이들로부터 받은 혜택에 기뻐하고 왕국은 파릇파릇한 젊은이들로 넘쳐났다.”
예니체리
▲오스만튀르크는 발칸지역 그리스도교 집안 소년들을 징발해 예니체리로 키웠다.
맘룩조보다 노예 출신 전사들이 더 강력한 전투력을 보여준 시대는 바로 오스만튀르크 제국인데, 주역이 바로 ‘새로운 부대’라는 뜻의 예니체리(Yeniçeri, Janissary)다. 오스만튀르크의 영광은 모두 예니체리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소속 부대원들의 용맹함과 충직함은 전사의 표본이었다.
14세기 후반 발칸 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한 오스만튀르크는 15세기 들어 ‘데브시르메(devshirme)’, 즉 소년 징발이라는 제도 아래 그리스도교 집안 소년을 징발하여 술탄의 새로운 부대 전사로 길러 냈다. 정부 관리가 정복한 그리스도교 지역을 방문하여 가장 똑똑하고 뛰어난 그리스도 집안 소년들을 뽑는다. 수도 이스탄불로 들어온 이들은 할례를 받고 훈련소나 농장으로 보내져 노동을 하고 나이가 차면 군사훈련을 받는다. 종교적·군사적으로 정신과 육체가 잘 무장된 이들은 특급전사가 되어 술탄과 제국의 안위를 돌본다. 상비군으로서 전문적인 전사였던 이들이 참가한 전투는 늘 오스만튀르크의 승리로 끝맺었다.
▲1522년 병원기사단이 지키고 있는 로도스섬을 공격하는 예니체리부대.
예니체리는 기본적으로 독신이었다. 그런데 독신제가 무너져 혼인이 허락되고, 아들마저 군인으로 등록되어 일정한 급료를 받으면서 예니체리의 강건함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는 결국 오스만 제국의 쇠퇴로 이어졌다. 세속적 이익을 탐하고 가족의 안위를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는 군인이 잘 싸울 수는 없다.
데브시르메의 엄격한 기준이 사라지면서 입대 조건의 엄격함도 군사훈련의 엄밀함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592년 경 예니체리는 느슨한 조건에서 입대한 이들이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그야말로 아무나 봉급수령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오스만튀르크 제국은 이렇게 조금씩 안에서 무너져 갔다.
세금만 축내는 무능한 예니체리를 개혁하고자 셀림 3세(재위 1789~1807)는 프랑스 교관을 채용하여 근대 유럽식 군대를 모방한 새로운 군대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기득권을 빼앗길 것을 우려한 예니체리가 1807년 반란을 일으켜 셀림 3세를 권좌에서 축출하고 독살하였다. 1826년 마흐무드 2세는 굳은 결의로 다시 한번 유럽식 군대 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다. 예니체리는 예상대로 술탄에 무력으로 대항했다. 마흐무드는 예니체리 막사에 포격을 가해 늙고 병든 예니체리 군인 4000명을 폭사시켰다. 살아남은 자는 잡혀서 참수되었다. 이로써 약 4세기 동안 유지된 예니체리의 전통은 막을 내렸다.⊙
08월 호
◆마흐디(Mahdi) - 순니와 시아가 다른 이유
⊙ 마흐디는 기독교의 메시아, 불교의 미륵과 유사한 존재 … 순니에서는 중시하지 않지만
시아에서는 숭배
⊙ 시아파 무슬림들에게 이슬람법 전문가들은 이맘 마흐디를 대신하여 무슬림들에게
올바르게 사는 법을 찾아 해석하고 알려주는 존재
⊙ 이란이슬람공화국은 마흐디를 대신한 이슬람법 전문가들이 통치하는 나라
▲예배를 인도하는 이란이슬람공화국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 바로 뒤 흰색 양복에 검은 셔츠를 받쳐 입은 사람이 아흐마디네자드 전 대통령. 시아파는 예배인도자가 움푹 파인 낮은 곳에서 예배를 이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은 부(副)왕세자 시절인 5월 1일 자국 알아라비야 텔레비전과 인터뷰에서 “이란과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이해관계를 따지면서 대화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이란은 헌법과 호메이니의 가르침에 기반한 극단주의 사상으로 만들어진 국가로, 이슬람 세계의 무슬림을 장악하여 12이맘 시아파 신앙을 널리 퍼뜨리고 이맘 마흐디(Imam Mahdi)의 재림을 기다리는 나라다. 이란은 “이맘 마흐디가 올 것이라고 믿고, 마흐디의 재림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며 무슬림 세계를 통제해야 한다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란과 상호 이해관계를 두고 대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이란 정부가 “이맘 마흐디와 관련된 목표를 이루길 원하기 때문에 이란인들의 삶은 열악하다”면서 “이란 정권은 하룻밤 사이에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바꿀 경우 정권의 정통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라며 마흐디를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이란을 강력히 비난하였다. 도대체 마흐디가 누구이기에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는 이토록 이란을 향해 도발적인 언사를 마다하지 않는 것일까?
마흐디는 아랍어 동사 ‘하다(hada)’, 즉 ‘인도(引導)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하나님이 바르게 인도한 사람’을 뜻한다. ‘인도하다’는 코란의 핵심어 중 핵심어다. 코란 첫 장을 펴면 하나님에게 “저희를 바른 길로 인도해 주소서!(1장 6절)”라고 간절히 바라는 기원문이 나온다. 서방 그리스도교가 원죄, 세례, 구원을 이야기할 때, 이슬람은 시종일관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인도를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코란에서 말하는 인도의 주체는 하나님이니, 마흐디는 하나님이 이끄는 자다.
정작 코란에는 마흐디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초기 이슬람 시대에 이 말은 존칭어로 쓰였던 것 같다. 7세기 초 무함마드와 같은 시대를 산 시인 하산 이븐 사비트(Hasan ibn Thabit)는 무함마드를 마흐디로 불렀다. 또 7세기 후반에는 이슬람을 원래대로 완전한 모습으로 재현할 공동체의 지도자를 마흐디로 부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후대로 갈수록 마흐디는 종말론적 인물을 뜻하게 된다. 무슬림들은 마흐디를 세상이 종말에 다달아 불의로 가득 차 있을 때 정의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세상에 보낸 메시아와 같은 존재로 받아들인 것이다. 초기 이슬람 시대에 무함마드를 마흐디로 부를 때는 이러한 종말론적 의미가 없었다.
순니파 무슬림들은 마흐디의 존재에 대하여 서로 의견을 달리하였다. 마흐디라는 종말론적 인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바로 마흐디라고 하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예수 재림 때 마흐디가 무슬림 공동체를 이끈다는 견해도 있었다. 코란에 따르면 십자가형에 처해지지 않고 하나님이 들어올렸기에 예수는 종말의 시각에 다시 강림하는데, 마흐디와 예수의 관계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던 것이다. ‘예수 외의 마흐디는 없다’는 전승과 ‘마흐디와 예수가 둘 다 세상 종말 때 온다’는 전승이 혼재한다.
이슬람 세계의 미륵
▲시아파 무슬림들이 기다리는 12번째 이맘 마흐디. 얼굴을 표현하지 않고 뒷모습만 보인다.
순니 세계의 대표적인 석학 알가잘리(1058~1111)를 위시하여 여러 저명한 순니파 무슬림 학자들은 애써 마흐디에 관해 언급하는 것을 회피하였다. 마흐디라는 존재가 불확실하다고 의심했을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아마도 종말론적 존재 마흐디가 내포한 정치적 변혁, 사회변동을 우려하는 마음이 더 컸을 가능성이 크다. 마흐디는 기존 정치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에 마흐디 신앙이 커질수록 현존 무슬림 사회의 붕괴나 분열이 촉발될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와 비교하면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미륵불의 화신(化身)으로 자처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여는 미륵불을 정변(政變)의 동력으로 삼았던 것처럼 마흐디도 기존 정치질서를 허물면서 무슬림 사회의 격변을 촉발할 수 있다. 1881년 수단의 무함마드 아흐마드 빈 압드 알라가 스스로를 마흐디로 선포하고 튀르크-이집트 통치자의 지배에 항거하고 나선 것이 좋은 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니 세계 무슬림 대중은 마흐디 도래를 믿으며 기다렸다. 마흐디에 관한 전승 대다수를 신뢰할 수 없다고 반박한 이븐 칼둔(1332~1406)은 그의 역작 《무깟디마(Muqaddima, 서설·序說)》에서 사람들이 마흐디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람들은 종말의 시각이 오면 예언자 무함마드 집안 출신 인물이 이슬람 신앙을 굳건히 하고 정의를 확립할 것이라고 믿는다. 무슬림들이 그를 따를 것이다. 그는 무슬림들을 다스리고, 마흐디로 불린다. 그의 뒤를 이어 적(敵)그리스도가 등장한다. 이때 전승에 기록된 대로 종말의 징후가 나타난다. 그런 후 예수가 강림하여 적그리스도를 죽인다. 또는 마흐디와 함께 예수가 강림하여 마흐디를 도와 적그리스도를 죽이고, 예배 때 마흐디 뒤에 선다.〉
그러나 순니파 이슬람에서는 마흐디가 종말에 이슬람의 정의를 굳건히 세울 것이라는 믿음이 신조로 확립되지는 못하였다. 순니파의 신앙을 대변하는 5가지 기둥(신앙증언, 예배, 희사, 단식, 순례), 6가지 믿음(유일신, 경전, 예언자, 천사, 최후의 심판, 정명) 어디에도 마흐디의 도래가 명문화되지 않았다.
12이맘
▲632년 최후의 순례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가디르쿰에서 알리를 후계자로 선언하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모습. 뒤에 서 있는 사람이 알리.
시아파, 더 상세히 구분하여 말하자면 시아파의 주류인 12이맘 시아파의 마흐디관(觀)은 순니파와 많이 다르다. 시아파는 마흐디가 종말 시대의 구원자일 뿐만 아니라 죄 없이 순결하다고 믿는다. 더 나아가 874년 5살 때 사라져 하나님의 뜻대로 지금 세상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는 12번째 이맘 무함마드 이븐 알하산 알아스카리(Muhammad ibn al-Hasan al-Askari)가 바로 마흐디라고 믿는다. 무함마드 이븐 알하산 알아스카리는 ‘알마흐디 문타자르(al-Mahdi al-Muntazar)’라고도 하는데, ‘오시길 기다리는 마흐디’ 라는 의미다.
12이맘 시아파는 최후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632년 마지막 메카순례를 마치고 일행과 헤어지는 갈림길인 가디르쿰(Ghadir Khumm)에서 무슬림력으로 두 알핫즈(Dhu al-Hajj)월 18일에 자신의 사촌동생이자 사위인 알리(Ali)를 무슬림 공동체의 지도자로 지명하였다고 믿는다. 시아파 무슬림들은 해마다 이날을 기념하고 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무함마드 사후 무슬림 공동체 통수권은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을 거쳐 656년에야 비로소 알리에게 전해졌다. 그래서 시아파는 가디르쿰에서 한 예언자의 말이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고 여긴다.
공동체의 지도자를 칼리파, 즉 예언자의 ‘대리자’라고 부르는 순니파와 달리 시아파는 ‘이맘’이라고 한다. 이맘은 지도자, 인도자, 안내자라는 뜻인데, 학자, 원로, 예배 인도자 등을 가리킬 때 두루 쓰이는 말이다.
그러나 시아에서 말하는 이맘은 이러한 일반적인 뜻과는 달리 전 세계 무슬림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를 가리킨다. 순니 칼리파와 달리 이들에게는 예언자의 피가 흐르고 있기에 코란의 행간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1대 이맘 알리는 예언자의 딸 파티마와 혼인하여 2번째 이맘인 큰아들 하산과 3번째 이맘인 둘째 아들 후세인을 낳았다. 4번째부터 12번째 이맘은 모두 후세인의 직계 후손이다. 그러니까 12명 이맘 모두 예언자와 같은 피를 나눈 사람들이다.
시아는 더 나아가 예언자, 예언자의 딸 파티마, 12이맘을 합쳐 모두 14명이 오류를 범하지 않고 죄를 짓지 않는 순결한 존재라고 믿는다. 인간이기에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이 늘 열려 있지만 항상 올바른 선택을 하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흐디로 오는 12번째 이맘도 그래서 순결한 존재라고 하는 것이다.
이맘의 후계자 이슬람법 전문가
▲시아파 첫 번째 이맘 알리. 좌측 녹색 옷을 입은 소년이 두 번째 이맘 하산, 오른쪽 붉은색 옷 소년은 세 번째 이맘 후세인.
그렇다면 874년 사라졌다는 12번째 이맘 마흐디가 어떻게 지금까지도 살아 있다는 말인가? 사실 이 부분은 이맘들이 죄 없이 순결하다는 것과 함께 오늘날 순니파 무슬림들이 손사레를 치며 거부할 뿐 아니라 말도 안 된다고 비아냥거리는 대상이다. 시아파 전승에 따르면 11번째 이맘 하산 알아스카리가 죽자 장례를 이끈 12번째 이맘 마흐디는 목숨을 노리던 순니 압바스 칼리파조의 칼날을 피해 오늘날 이라크 사마르라의 10번째, 11번째 이맘 무덤 옆 모스크 아래 동굴 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사람들의 눈앞에서 사라졌지만, 12번째 이맘은 4명의 충직한 대리인을 매개로 세상과 소통하였다. 그런데 941년 이맘 마흐디는 4번째 대리인 아부 알-하산에게 6일 후 죽을 터이니 준비를 잘하고 다음 대리인은 지명하지 말라는 내용의 서한을 직접 서명하여 보냈다. 죽기 직전 4번째 대리인은 누가 다음 대리인이 될 것이냐는 주변의 질문에 “이 순간부터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그분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시아파는 4번째 대리인의 죽음을 기점으로 874~941년을 12번째 이맘의 소은폐기, 이후를 대은폐기로 나눈다. 더 이상 대리인이 없기에 세상은 12번째 이맘과 소통할 통로가 없다. 그래서 이맘의 대은폐기다. 이맘 마흐디는 대리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상 종말의 날이 올 때까지 하나님의 허락이 없는 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다고 하였으니, 이제 그를 만날 수 있는 때는 오로지 사람들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 버리고 세상이 폭력과 불의로 가득 찬 종말의 시대뿐이다.
그러나 이맘 마흐디가 세상과 완전히 소통을 끊은 것은 아니다. 시아파는 이맘의 가르침을 이슬람법 전문가들을 통해 따른다. 이들은 이맘 마흐디를 대신하여 무슬림들에게 올바르게 사는 법을 찾아 해석하고 알려준다. 지금 어디엔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가 종말의 날 정의를 세우기 위해 재림하는 이맘 마흐디를 위해 이슬람법 전문가들이 세상을 이끄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란혁명의 지도자 호메이니가 완성한 ‘이슬람법 전문가의 통치’로, 이란이슬람공화국의 정치체제다.
숙적 이란과 사우디
▲예배를 인도하는 이란이슬람공화국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 왼쪽 뒤 첫 번째가 루하니 대통령. 왼쪽에서 5번째가 알리 라리자니 국회의장, 7번째 갈색 옷이 호메이니의 손자 하산 호메이니.
이란 헌법 5조는 이맘 마흐디를 ‘시대의 주(主)’로 칭하면서 이맘 마흐디를 대신하여 이슬람법 전문가들이 이란을 이끈다고 선언한다.
〈시대의 주 ─ ‘지고하신 신이시여, 그의 출현을 서둘러주시옵소서!’ ─ 부재(不在) 시, 헌법 107조에 따라 이란이슬람공화국에서 이맘의 권위와 인도의 책임은 정의롭고, 경건하고, 시대를 잘 알고, 용감하며, 행정가인 이슬람법 전문가가 진다.〉
이란을 신정(神政)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이슬람법 전문가정(專門家政)이다. 이슬람법 전문가들이 이맘 마흐디가 재림할 때까지 이맘으로부터 권위와 인도의 능력을 위임받아 시아파 국가를 이끄는 것이다.
이맘 마흐디에 믿음이 신조로 자리 잡지도 않고, 역사적으로 대학자들이 믿을 만한 것으로 지지하지도 않았으며, 마흐디가 누구인지 구체적인 생각도 없는 순니파 무슬림들의 눈으로 보면 시아파의 마흐디 사상은 놀랍도록 구체적이고 상세하며 굳건한 믿음이다. 중동 헤게모니를 두고 이란과 다투고 있는 순니파 사우디아라비아의 입장에서 보면, 시대의 주 이맘 마흐디가 올 때까지 이슬람법 전문가들이 국가를 다스리는 이란은 사실상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우디아라비아의 새로운 왕세자는 이란의 헌법과 호메이니의 가르침은 극단적인 사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고 믿는다.
더 나아가 1979년 혁명 이래 이란은 팽창정책을 펴면서 불안을 조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란이 사우디아라비아를 노린다고 하면서 왕세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란 정권의 주목표가 우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무슬림의 예배방향에 도달하는 것이 이란 정권의 주목표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전투가 벌어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전투가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니라 저기 이란에서 벌어지도록 애쓸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두고 이란이 공격을 가하겠다느니 점령하겠다느니 하면서 험하고 거친 말을 쏟아 부은 적은 없다. 사실 근대 시아파에 대한 공격은 와하비 근본주의로 무장한 사우드 가문이 먼저 시작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의 선조 셰이크 사우드가 이끄는 1만2000여 명의 와하비 전사들이 1801년 4월 시아파 주민들이 나자프로 순례를 간 사이를 틈타 카르발라를 침입하여 3000명에 달하는 주민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하고 재물을 강탈하고 3번째 이맘 후세인이 묻힌 사원을 파괴한 것은 시아파 무슬림의 역사적 기억에 깊은 상처와 회한으로 남아 있다.
마흐디는 메카에 재림한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시아파의 마흐디 사상을 두고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이맘 마흐디가 재림할 장소가 메카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시아파 전승에 따르면, 이맘 마흐디는 부정한 지도자 우마이야조의 칼리파 야지드 손에 카르발라에서 비참하게 죽어 간 3번째 이맘 후세인의 기일(忌日)인 아슈라(무슬림력 1월 10일)에 메카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고 624년 바드르(Badr) 전투에서 전사한 313명의 신자들과 만날 것이다. 이어 이맘 마흐디는 첫 번째 이맘 알리가 순교하여 묻힌 오늘날 이라크의 쿠파(Kufah)를 중심지로 삼아 거주할 것이라고 한다.
바드르 전투는 무함마드가 박해를 받고 메카에서 메디나로 622년 이주한 후 자신을 괴롭히던 고향 메카 사람들과 처음으로 벌인 전투다. 이때 무함마드의 무슬림 공동체는 전력이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만일 패배했더라면 이슬람 신앙운동은 신기루처럼 사라져 필자가 이슬람 관련 글을 쓸 일이 없을 것이다.
이맘 마흐디가 제일 먼저 재림할 것이라는 믿음은 순니,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반가운 일이 아님에 틀림없다.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치열한 경쟁구도가 펼쳐지고 있는 오늘날 중동 정세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874년에 사라진 사람이 어떻게 지금껏 살아 있을 수 있냐고 순니는 시아의 이맘 마흐디를 비난하고 비웃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시아는 하나님이 전능하니 가능하고도 남을 일이라고 반박할 뿐 아니라 재림의 장소가 메카라고 하니 현 정세에서는 긴장감이 도는 믿음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시대의 주!
▲12번째 이맘이 이란의 잠카란에 출현했다는 전승에 따라 세운 잠카란 모스크.
더욱이 이맘 마흐디 사상의 핵심이 불의를 타도하고 정의를 세우는 것으로 이란혁명의 근간이 되었음을 상기하면, 이맘 마흐디는 단순한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 현실 사회를 변혁하는 강력한 정치적·사회적 동력을 제공한다. 1979년 이란혁명 때 호메이니에게 “당신이 우리가 기다리던 이맘 마흐디입니까?”라고 시아 무슬림이 물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마흐디 사상을 단순히 막연한 종말 사상이라고 얕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란혁명의 시작은 3번째 이맘 후세인의 기일이자 이맘 마흐디가 재림할 것이라고 믿는 아슈라였다. 사우디아라비아를 위시한 순니 왕정국이 시아의 마흐디 사상을 대할 때 느낄 수밖에 없는 두려움을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하다.
이들 순니 왕정 산유국에서 시아파들은 석유가 매장, 생산, 유통되는 지역에 주로 자리 잡고 있다. 바레인은 시아파 주민이 다수다. 순니 왕정국의 시아파 주민은 왕국으로부터 차별대우를 받아 왔다고 불만이 가득하고, 왕국은 자국 내 시아파 주민이 같은 신앙을 지닌 시아파 이란의 사주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이 태산 같다.
그러나 사실 마흐디의 파괴력은 시아파에만 국한되지 않고 순니파에도 미친다. 이란 혁명이 성공한 지 몇 개월 후인 이슬람력 1400년 1월 1일(1979년 11월 20일)에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신앙적으로 타락했다고 반기를 든 알우타이비가 알까흐타니를 마흐디로 선포한 후 400~500명의 추종자와 함께 약 2주간 성지 중의 성지인 메카 대모스크를 점거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종교와 정치가 하나 되어 믿음이 현실 정치에 반영되는 중동 이슬람 문화권에서 마흐디는 단순히 종교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고리타분한 단어가 아니다. 984년 이맘 마흐디가 출현하였다고 전해지는 이란의 잠카란(Jamkaran)에는 이를 기념하는 모스크가 세워져 참배객들의 발길이 오늘도 끊이지 않는다. 테헤란 대학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대 이슬람 영성(靈性)의 수도” 테헤란에는 중동에서 가장 긴 거리가 있다. 남북으로 19.3km에 달하는 이 길의 이름은 ‘발리예 아스르(Vali-ye Asr)’다. 시대의 주! 마흐디는 지금 이 순간 믿는 이들의 마음과 삶속에 생생히 살아 있다.⊙
09월 호
◆오, 예루살렘! - 무슬림의 성지 알하람 알샤리프(al-Haram al-Sharif)
⊙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성전산에 보안검색기 설치하자 무슬림 분노, 제3차 인티파다 우려
⊙ 유대인에게 성전산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던 성지
⊙ 무슬림들은 성전산을 무함마드가 천상(天上) 여행을 한 곳으로 여겨 … 이슬람 3대 성지 중 하나
▲유대인과 무슬림간의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산.
황금돔 바위성원과 알아끄사 모스크(앞쪽 검은 지붕)은 무슬림들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성소다.
성전산(聖殿山·Temple Mount), 예루살렘 구도시 모리아(Moriah)산 언덕에 있는 솔로몬 성전터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각형의 땅으로, 북쪽의 길이가 310m, 남쪽은 281m, 서쪽은 491m, 동쪽은 462m다. 이곳에서 7월 14일 아랍계 남성 3명이 이스라엘 경찰 2명을 살해했다.
이스라엘 당국은 출입금지 조치와 함께 16일 알아끄사(Al-Aqsa) 모스크로 들어가는 성전산 입구에 금속탐지기를 설치했다. 이에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분노가 폭발해 거센 시위가 일어났다.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금속탐지기 대신 감시카메라를 설치했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2000년 9월 28일 당시 이스라엘 야당 리쿠드(Likud)당 당수였던 아리엘 샤론(Ariel Sharon)이 성전산을 방문한 후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봉기한 제2차 인티파다(Intifada)가 일어났듯, 이번에도 대규모 유혈사태를 동반한 제3차 인티파다가 발생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아리엘 샤론 때나 지금이나 성전산이 누구의 것이냐는 문제가 첨예한 현안이다. 이 질문의 답은 늘 두 개다. 이스라엘은 성전산을 유대인의 영원한 지성소(至聖所)라며 소유권을 주장한다. 단순히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영토가 아니라 전 세계 유대인의 성지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해 팔레스타인, 더 나아가 전 세계 무슬림은 ‘고귀한 성소’라는 뜻의 아랍어 ‘알하람 알샤리프(al-Haram al-Sharif)’라고 부르는 성전산을 팔레스타인의 땅이요, 더 나아가 무슬림의 성지라고 확언하며 단 한 치의 양보도 할 마음이 없다.
유대인과 이슬람교도의 성지
유대인의 히브리 성서, 즉 그리스도인의 구약성서의 이사야서 45장은 기원전 538년 유대인을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시켜 준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를 ‘메시아’라고 부르며 칭찬한다.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서 울던’ 유대인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었으니 고레스야말로 진정 유대인에게는 은인 중의 은인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유대인은 모리아산 솔로몬 성전터에 페르시아 제국의 도움을 받아 제2의 성전을 세웠다. 솔로몬 성전은 586년 바빌론 제국이 남유대 왕국을 멸하면서 파괴했다. 성전은 무너지고 유대인은 노예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것이다.
기원전 20년에 로마 치하 유대왕국 헤로데 대왕이 성전 확장 공사를 벌였다. 그러나 식민지배자 로마에 저항하여 벌인 제1차 독립전쟁(66~70년)에서 성전은 다시 속절없이 무너졌다. 70년에 로마군은 서쪽 벽, 이른바 ‘통곡의 벽’만 남겨두고 성전을 파괴했다. 유대인은 ‘통곡의 벽’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냥 서쪽 벽이다. 서쪽 벽은 성전의 일부가 아니라 외벽이었기에 로마군이 굳이 부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70년 독립전쟁에서 로마에 패해 쫓겨난 이래 성전산은 로마제국, 비잔티움제국, 무슬림 손을 거쳐 1967년 6일전쟁 때 이스라엘이 재점령했다. 이스라엘은 성전산이 자기 땅이기에 유대인이 방문하는 것이나 보안장치 설치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본다. “이스라엘 유대인은 성전산을 방문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성전산은 여전히 우리 손안에 있다”고 한 17년 샤론의 발언은 지금도 유대인의 가슴에 자리 잡았다.
반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이스라엘의 움직임에 꿈쩍도 하지 않는다. 중세기 십자군 전쟁으로 부침이 있긴 했지만 638년 아랍 무슬림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이래 6일전쟁 때까지 아랍 무슬림들이 이곳을 차지했다.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요르단으로부터 뺏고 점령했지만 관리는 무슬림들에게 맡겼다.
17년 전 샤론의 도발에 대해 당시 팔레스타인 고위 관리 파이살 후세이니(Faisal Husseini)는 이스라엘이 군사력과 강권력은 가지고 있어도 성전산에 대해서는 주권이 없다고 했다. 이런 믿음의 연장선상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아무 권리 없는 이스라엘이 보안장치를 설치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정부가 금속탐지기를 설치하자 팔레스타인 무슬림은 성전산 출입을 거부했다. 탐지기를 통과하면 이스라엘이 성전산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던 곳
▲알 아끄사 모스크의 내부. 우마이야조의 칼리파 압둘말리크의 역작이다.
성전산이 유대인의 성소인 것은 이름에서부터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히브리 성서에서 유일신의 명령에 따라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니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왜 이곳이 무슬림의 성소인지는 설명이 필요하다. 도대체 왜일까?
일단 무슬림은 예루살렘을 꾸드스(Quds)라고 부른다. ‘성스러운 곳’이라는 뜻이다. 예루살렘은 카바 성전이 있는 메카, 예언자 무함마드의 묘가 있는 메디나에 이어 이슬람 신앙전통에서 3번째로 중요한 성소다. 알아끄사 모스크와 황금돔 바위성원(Dome of the Rock)이 있기 때문이다. 논란이 있긴 하지만 일부 이슬람학자들은 최초의 예배 방향도 예루살렘이었다가 메카로 변경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638년 아랍 무슬림군이 비잔티움제국으로부터 예루살렘을 빼앗았을 때 성전산은 쓰레기더미였다. 로마나 비잔티움은 그리스도교인의 제국이었기에 유대인의 성소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말 그대로 폐허로 방치했다. 새로운 주인이 된 두 번째 칼리파 우마르(재위 634~644년)가 폐허더미를 청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무슬림들이 세운 두 개의 건축물이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을 압도하고 있다. 알아끄사 모스크와 황금돔 바위성원이다.
시기적으로 보면 두 건축물 모두 우마이야조 칼리파 압둘 말리크(재위 685~705년)의 역작이다. 7세기 후반 우마이야조 칼리파 무아위야 1세(재위 661~680년) 때 이곳을 방문한 그리스도교 주교 또는 수도사 아르퀼프(Arculf)에 따르면 허름한 폐허 동쪽에 허름한 예배당이 있었다고 한다.
이 예배당이 우마르 시대에 만든 것인지, 아니면 무아위야 1세 때 건축한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오늘날 성전산 남서쪽에 자리 잡은 알아끄사 모스크와 얼마나 관련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동안 학자들의 연구를 종합하면 황금돔 바위성원을 지은 압둘 말리크가 건축했다고 보는 것이 맞는 듯하다. 건축 후에도 오랜 기간 수차의 개·증축 과정을 거쳤다.
황금돔 바위성원은 바위를 안에 감싸고 지은 성원이다. 유대인의 믿음에 따르면 이 바위에서 아브라함이 신의 명령에 따라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다고 한다. 무슬림들도 아브라함의 번제(燔祭)에 동의하나 이들과 장소가 다르다.
무슬림 전승에 따르면 아브라함(이브라힘)은 이삭(이스하끄)이 아니라 이스마엘(이스마일)을, 예루살렘 모리아산이 아니라 메카 인근 아라파트(Arafat)산에서 번제물로 바치려 했다고 믿는다. 지금도 해마다 무슬림들은 메카 순례 때 이스마엘을 바치려 한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아 순례 말미에 소나 양 등 동물을 바치는 이드 알아드하(Id al-Adha) 의례를 행한다.
‘가장 멀리 있는 모스크’?
▲이슬람교도들은 무함마드가 신이 내려준 영험한 동물 부락을 타고 예루살렘으로 와서 천상여행을 했다고 믿는다.
알아끄사 모스크와 황금돔 바위성원은 이슬람 신앙전통에서 예언자 무함마드의 천상(天上)여행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코란》 17장 1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분의 종을 밤새 알마스지드 알하람에서 알마스지드 알아끄사로 데려가신 그분께 영광! 그 일대를 우리가 축복했다. 우리의 징표를 그에게 보여주었으니. 실로 그분은 들으시고 보시노라!”
알마스지드 알하람(al-Masjid al-Haram)은 메카성지 카바(Ka‘bah)성원을 가리키지만, 알마스지드 알아끄사(al-Masjid al-Aqsa)는 해석이 상당히 어려운 용어다. 말 그대로 하면 알아끄사 모스크다. 그렇다면 이 글 바로 윗부분에서 말하는 예루살렘의 알아끄사 모스크라고 혼동할 수도 있다.
알아끄사라는 말을 고유명사로 보지 않고 뜻 그대로 해석하면, ‘가장 멀리 있는’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알마스지드 알아끄사는 ‘가장 멀리 있는 모스크’라고 풀이할 수 있다. 《코란》에 따르면 신은 무함마드를 하룻밤 사이에 카바에서 가장 멀리 있는 모스크까지 여행을 시켜 주었다.
그런데 가장 멀리 있는 모스크는 어디였을까? 세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카바 주변에서 가장 먼 모스크다. 둘째, 지상의 카바의 원형이 하늘에 있다는 믿음에 따라 천상의 카바가 바로 가장 먼 모스크다. 셋째, 예루살렘 성전산이다.
첫째와 셋째는 카바에서 횡적으로, 둘째는 종적으로 가능한 여행이다. 《코란》이 말한 여행을 물리적인 여행이 아니라 영적(靈的)인 여행으로 풀이하는 무슬림 학자와 영성가가 적지 않지만, 대중적인 믿음은 그렇지 않았다. 물리적인 여행으로 본다. 무함마드 당시에는 성전산에 알아끄사 모스크가 존재하지 않았다. 무함마드가 예언자 되기 전에 예루살렘에 가 보았다는 기록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란》 구절을 근거로 무함마드의 천상여행에 대한 믿음의 전통이 형성되었다. 하룻밤 사이에 신이 내려준 부락(Buraq)이라는 영험한 동물을 타고 메카의 카바에서 예루살렘 성전산으로 가서 황금돔 바위 사원 안에 있는 바위를 밟고 하늘로 올라 천상여행을 한다. 횡적인 여행과 종적인 여행이 합쳐져 완벽한 천상여행 일정을 만든 것이다.
이제 성전산의 알아끄사 모스크는 바로 《코란》에서 말하는 바 알마스지드 알아끄사, 즉 가장 멀리 있는 모스크이고, 황금돔 바위 사원 안의 바위에는 무함마드가 천상여행을 할 때 남긴 발자국이 선명하게 지금도 남아 있다고 무슬림들은 믿는다.
무함마드의 천상여행
그렇다면 무함마드는 하늘에 올라가서 어떤 일을 경험했을까? 무함마드의 언행을 기록한 무슬림 전승을 《하디스》라고 하는데, 무슬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인기 있는 부카리(810~870년)의 《하디스》 모음집에 천상여행 일정이 자세히 나와 있다.
천사 가브리엘(지브릴)과 하늘에 오른 무함마드는 첫 번째 하늘에서 아담, 두 번째 하늘에서 세례자 요한(야흐야)과 예수(이사), 세 번째 하늘에서 히브리 성서의 요셉(유수프), 네 번째 하늘에서 이드리스(Idris)를, 다섯 번째 하늘에서 아론(하룬)을 만난다. 이드리스는 《코란》에 나오는 예언자인데, 무슬림 전승에 따르면 아담과 셋에 이은 인류 세 번째 예언자라고 한다. 또 히브리 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에녹(Enoch)과 같은 인물이라고도 한다.
여섯 번째 하늘에서 만난 모세(무사)는 무함마드가 일곱 번째 하늘로 떠나자 울었는데, “나 다음에 젊은 예언자가 나왔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나를 따르는 사람들보다 더 많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운다”고 말한다. 물론 여기서 젊은 예언자는 무함마드를 가리킨다. 이슬람이 성공한 종교가 될 것이라고 모세가 예언한 것이다.
일곱 번째 하늘에서 무함마드는 아브라함을 만난 후 하늘을 한 층 더 올라가서 ‘시드라트 알-문타하(Sidrat al-Muntaha)’라는 무변광대(無邊廣大)한 생명의 나무를 보고 코끼리 귀와 같이 큰 잎과 거대한 열매에 압도당한다. 천사 가브리엘은 무함마드에게 4개의 강이 있다고 설명을 하면서, 강 2개는 숨겨져 있는 천국의 강이고, 나머지 2개는 나일강과 유프라테스강이라고 한다.
이어서 성스러운 곳을 본 후 술, 우유, 꿀이 각각 가득 담긴 용기가 나오자 무함마드는 우유를 선택했다. 그러자 천사 가브리엘은 무함마드에게 “그것이 바로 당신과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선택한 이슬람이요”라고 말했다. 이어서 무함마드에게 하루에 예배를 50번 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길에 무함마드는 모세를 다시 만났다. 모세는 무함마드에게 어떤 명령을 받았느냐고 물었고, 이에 무함마드가 예배 50번이라고 답하자 모세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시도해 보니 어림도 없었다고 하면서 다시 올라가 주님께 예배 횟수를 좀 줄여 달라고 부탁드리라고 충고한다.
모세의 말을 따른 무함마드는 10번이 깎인 40번을 가지고 왔지만, 다시 모세가 그것도 어렵다고 하여 다시 올라갔다 내려오는 과정을 반복했다. 30번으로 깎이고 10번으로 줄더니 최후에는 5번 예배라는 조정명령을 받았다.
모세는 자신의 경험상 5번도 어렵다고 하면서 더 줄여 달라고 요청하라고 했는데 이에 무함마드는 더 이상은 부끄러워서 못하겠다고 하면서 5번으로 만족한다고 답했다. 그러자 신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명을 내렸고, 나를 경배하는 자들의 짐을 덜어 주었노라.”
무슬림들이 하루에 5번 예배 의무가 이처럼 천상여행에서 결정됐다. 모세의 진심 어린 충고가 아니었더라면 50번이 될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예언자의 천상여행에 포함된 알아끄사 모스크와 황금돔 바위성원이 무슬림에게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는 이제 굳이 부연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다. 알아끄사 모스크는 지금도 무슬림들이 예배를 하는 곳이다.
황금돔 바위성원을 지은 이유
▲황금돔 성원 외부에 적힌 《코란》 구절은 유일신 신앙을 강조하고 있다.
황금돔 바위성원은 그 용도가 알아끄사 모스크와 달리 독특하다. 일단 모스크 용도로 만든 건축물이 아니다. 오늘날 예루살렘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축물인데 모스크가 아니라면 왜 성전산에 지었을까?
알아끄사 모스크와 황금돔 바위성원 건축의 주역은 전술한 바와 같이 압둘 말리크다. 632년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죽은 이후 무슬림들은 아라비아를 넘어 중동을 장악했지만, 이슬람이라는 종교, 아랍어라는 언어를 피지배민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비잔티움 지역에서는 비잔티움 행정으로 페르시아 사산제국 지역에서는 페르시아 전통에 따라 제국을 운영했다. 동전을 예로 들자면, 비잔티움 동전이나 사산제국 동전을 그대로 쓰면서 조금씩 아랍어로 종교적 문구를 넣는 수준에서 그쳤다. 그러나 압둘 말리크 시대에 이르면 제국 운영에 자신감이 붙어 제국의 공용어로 아랍어를 쓰고, 동전도 이슬람 예술 양식에 맞춰 주조하기 시작한다.
황금돔 바위성원의 건축도 이러한 시대적 상황의 산물일 것이다. 그러나 692년 완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이 건물을 왜 지었는지 이슬람 학자들은 아직까지 정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대개 두 가지 가능성을 들 수 있다.
첫째, 정치종교적 이유다. 압둘 말리크의 우마이야 칼리파 제국의 수도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였다. 그런데 당시 메카 지역은 이븐 알주바이르(Iban al-Zubayr, 624~692)가 스스로를 칼리파라고 선언하고 우마이야 칼리파조와 대치하면서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메카의 카바성원 대신 새로운 순례지로 황금돔 바위성원을 지은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런데 성원 안팎을 둘러싼 아랍어 문구 어디에도 이러한 무슬림 간 정치종교적 패권 다툼을 반영하는 증거가 없는 것이 문제다.
둘째, 주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지배자가 무슬림임을 보여주기 위해 바위성원을 세웠을 가능성이 있다. 성원 안팎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랍어 문구는 유일신 신앙을 강조하고 그리스도교의 예수 신성론을 비판하고 있다. 외벽에 적힌 아름다운 서체의 《코란》 112장은 유일신 신앙을 강조한다.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라, 그분은 하나님, 유일하신 분. 하나님, 영원하신 분. 낳으시지도 태어나시지도 않으신다. 그분과 같은 이 없도다.〉
또 내부에는 특별히 예수를 하나님으로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는 단지 예언자일 뿐이라고 하면서 오로지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충고하는 《코란》 구절(19:30-33)이 적혀 있다. 무슬림이 지배하던 지역 주민 다수가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고 이러한 문구를 보면 바위성원은 새로운 지배자가 무슬림이라고 선포하면서 비잔티움 건축양식으로 지배자의 종교를 각인시키기 위해 만들었을 것 같다. 특히 높은 곳에 위치하여 예수성묘성당을 내려다보는 압도적인 모습은 나름 상징적인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구한말 경복궁을 내려다보도록 명동성당을 지은 것처럼 말이다.
전 세계 유대인과 무슬림의 성지전쟁터
그렇다면 혹시 반유대적인 뜻은 없었을까? 성원 어디에도 유대교나 유대인을 언급하는 문구는 없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쳤던 바위를 감싸고 지었다는 점, 그리고 성전산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브라함은 이슬람에서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다. 신앙의 선조로, 아브라함의 신앙이 곧 이슬람 신앙이라고 한다. 아브라함을 이슬람화하여 이슬람과 유대교가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였을까? 아니면 아브라함을 두고 유대교와 경쟁하려고 한 것이었을까?
안타깝게도 오늘날 정치 현실은 후자(後者)다. 알아끄사와 황금돔 바위성원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화약고를 넘어, 전 세계 유대인과 무슬림인의 성지전쟁터가 되었다.
보수적인 유대 율법학자들은 성전산이 지극히 성스러운 곳이기에 유대인들이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유대인의 영원한 성지를 되찾고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으려는 사람들은 아리엘 샤론처럼 좀 더 당당하게 성전산이 유대인의 것임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 역시 성전산이 있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려고 한다.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무슬림이 관리하는 성전산. 유대인과 무슬림이 믿는 유일신이 해결해 줄 수 있을까? 1916년 영국과 프랑스가 사이크스-피코 협약(Sykes-Picot Agreement)을 체결하면서 양국이 예루살렘을 공동관리 구역으로 놓은 이유를 다시금 떠올린다. 앞으로 누가 어떻게 잠재적 대량 유혈의 장(場)인 성전산 문제를 현명하게 해결할 수 있을까? 무슬림들 표현마냥 “오로지 하나님만이 아시리!” 알라후 아을람!⊙
10월 호
◆핫즈(Hajj), 메카 대순례
⊙ 무슬림들, 메카의 카으바 성전을 아담이 세운 인류 최초의 유일신 성전이라고 믿어
⊙ 사우디아라비아, 이슬람 국가 인구 비례해서 순례 비자 발급, 인도네시아는 평균 대기 기간 37년
⊙ 대순례는 아브라함의 유일신 신앙을 완벽하게 이슬람적으로 표현하는 의례
⊙ 올해는 35만2122명이 대순례 참가
▲무슬림들의 가장 큰 성지 메카의 카으바 성전. 아담이 세운 최초의 유일신 신전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9월 4일 라마단 단식과 함께 이슬람 의례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메카(Mecca) 성지(聖地) 대순례가 끝났다. 핫즈(Hajj)라고 부르는 대순례는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죽기 전에 행한 순례를 본받아 행한다. 이슬람력으로 12번째 달인 둘힛자(Dhu'l-Hijjah)월 8일에 시작하여 12일이나 13일에 끝나는데, 이슬람력으로 1438년인 올해 2017년엔 8월 30일에 시작하여 9월 4일에 마무리됐다.
순례의 장소는 무슬림들이 인류 최초의 유일신 성전으로 여기는 카으바(Ka‘bah)가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다. 메디나와 함께 무슬림만 출입할 수 있다. 무슬림들은 예배할 때는 메카를 향한다. 이슬람에서 천문학이 발전한 것도 자신이 어디에 있든 예배 때 메카 쪽을 바라봐야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도축(屠畜)할 때에도 동물을 예배 방향인 메카 쪽으로 향하게 한다.
‘인류 최초의 유일신 성전
▲무함마드는 ‘검은 돌’을 다투지 않고 카으바 성전에 안치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메카는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태어난 곳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지로 여겨 순례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 최초의 유일신 성전인 카으바가 있기 때문에 성스러운 곳이다. 무슬림들은 인류의 시조 아담이 세운 이 유일신 성전을 하나님이 노아의 홍수로 인간을 벌할 때에도 흔적을 남겨 둬 아브라함이 재건했다고 한다. 카으바는 아랍어로 큐브(cube), 즉 육면체라는 뜻으로 육면체 구조물이다.
한자로는 천방 (天房), 곧 하늘의 집이라고 부르는 이 성소는 아브라함이 재건한 이후 다신(多神)숭배에 빠진 인간들로 인해 더럽혀졌다가 무함마드가 메카를 정복한 후 다시 정화했다고 무슬림들은 믿는다. 13m 높이인 카으바는 하늘에 있는 ‘세상의 집(알바이트 알마으무르)’의 복사판이라고 한다. 무슬림들에게 이곳은 ‘바이트 알라’ 곧 ‘하나님의 집’이고, 인류 최초의 유일신 신앙이 자리 잡은 세계의 중심지다. 그래서 카으바가 있는 메카를 ‘세상의 배꼽’이라고 불렀다.
카으바 동쪽 모서리에는 검은 돌이 있다. 무슬림 전승(傳乘)에 따르면 아담 시대의 돌이라고 한다. 직경이 약 30cm인 것으로 알려진 이 돌을 일각에서는 운석(隕石)이라고 하지만 정확하진않다. 전승에 따르면 무함마드가 예언자 소명을 받기 전, 메카 사람들이 카으바를 수리한 후 검은 돌을 제 자리에 서로 먼저 갖다 놓는 영광을 갖고자 싸우다가 성전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사람에게 방법을 묻기로 했다. 그때 무함마드가 들어왔고, 사람들이 의견을 묻자 무함마드는 천 위에 돌을 올린 후 다투던 사람들이 천을 한쪽씩 잡게 하는 방법으로 공평하게 돌을 운반해 지금의 자리에 안치했다고 한다.
이슬람 역사를 돌이켜보면 683년 메카 공방전에서 투석기에서 날아온 돌에 맞아 검은 돌이 일부 손상되었으나 파편을 다시 붙였다고 한다. 930년에는 돌을 가져가면 종말이 올 것이라고 믿은 까라미따(Qaramitah)파들이 검은 돌을 탈취하여 보관하고 있다가 돌려주기도 했다. 무슬림들은 순례 시 이 돌에 입을 맞추거나 만지고, 사람들이 너무 많을 경우에는 멀리에서 손을 들어 경의를 표한다.
사우디, 순례 비자 발급
이슬람교에서 순례는 소순례와 대순례로 나뉜다. 둘의 차이는 기간과 규정 의례의 차이다. 우므라(Umra)라고 하는 소순례는 연중 어느 때건 할 수 있다. 대순례는 정해진 기간에 한다.
또 소순례에 비해 대순례는 순례자가 행해야 할 의례가 더 많다. 대순례는 신체가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여행할 능력이 있는 성인 신자라면 평생 한 번은 해야 하는 의무다. 순례를 위해 대출을 하거나 집을 비우는 동안 가족들이 평소와 같은 안정된 삶을 유지할 수 없는 경우에는 순례를 해도 무효다.
교통이 발달하기 전인 과거에는 집을 떠나 메카에 도달하는 데 1년 이상 걸리기도 하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세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1325년 6월 13일에 고향 모로코의 딴자를 출발하여 북아프리카를 가로질러 이집트, 시리아, 다마스쿠스, 메디나를 거쳐 무려 1년 3개월 만인 1326년 9월에야 비로소 메카에 도착했다. 병에 걸려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만일 신께서 나의 죽음을 예정하셨다면, 얼굴을 메카로 향한 채 길 위에서 죽음을 맞으리라”는 굳은 집념으로 대순례 강행의지를 꺾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럴 정도로 메카 여정은 쉽지 않았다. 순례를 마친 사람은 핫지(Hajji), 즉 ‘대순례를 마친 사람’이라는 문패를 달 정도로 자부심을 가졌고, 주변 사람들 역시 핫지를 존경했다.
오늘날이라면 항공편으로 14시간이면 딴자에서 메카까지 갈 수 있다. 이븐 바투타처럼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된다.
문명의 이기 덕에 여정이 편해진 만큼 순례를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과거와 달리 이제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순례 비자를 내주어야만 꿈을 이룰 수 있다. 한정된 공간에 너무나도 많은 순례자가 몰리기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는 무슬림 인구 1000명당 1장 꼴로 해마다 국가별 비자 수를 정하여 발표한다. 여성의 경우 45세 이상이면 배우자의 동의하에 혼자 순례가 가능하다. 45세 이하 여성은 반드시 배우자와 함께 순례를 해야 한다. 비자 발급비는 없지만, 텐트 사용비, 성지 이동 시 교통비 등 순례 부대비용을 내야 한다.
인도네시아, 대기자 320만명
할당된 비자 수는 전 세계 국가별 무슬림 인구 수에 비례한다. 역시 1위는 무슬림 인구 세계 1위를 자랑하는 인도네시아로, 22만1000명이 할당됐다. 2위는 파키스탄, 3위는 인도 순이다.
배정된 인원에 따라 각 국가는 순례자를 선발한다. 가려는 사람은 많고 자리는 한정되어 있다 보니 추첨을 해서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당첨되기가 로또보다 더 어렵다고 한다.
올해 최고령(最高齡) 순례자였던 104세의 인도네시아 여성 이부 마리아(Ibu Mariah)는 90세에 소순례를 했지만, 대순례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320만명이 대순례 신청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데 평균 대기 기간이 무려 37년이다.
이처럼 순례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니라 전 세계 무슬림을 대표하는 기관에서 순례를 관장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물론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런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나름대로 더 많은 순례자를 수용하기 위해 성지 시설 확장 공사도 했고, 그 결과 올해 순례에는 더 많은 사람에게 문호를 개방할 수 있었다. 특히 외교적으로 마찰을 빚고 있는 카타르에도 순례비자를 할당하였을 뿐 아니라 국적기 항공사를 보내어 카타르 순례자들에게 입국의 편의를 제공하고자 노력했다고 강조했다.
순례비용, 방글라데시 평균 3년치 연봉
대순례 비용도 만만찮다. 1인당 평균 294만원에서 486만원이 든다. 말레이시아의 경우 평균 6개월 월급, 방글라데시에서는 평균 3년치 연봉에 달하는 금액이다. 경제적으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영국의 경우 대순례를 하려면 2010년에는 평균 3000파운드(약 450만원)가 필요하였는데, 작년에는 무려 3배가 뛴 평균 9000파운드(약 1344만원)가 들었다는 보도도 나왔다.
순례가 시작하기 4일 전에는 반드시 사우디아라비아에 입국해야만 하기 때문에 보통 순례기간은 최소 9일이 걸린다. 그만큼 경비가 더 들 수밖에 없다. 성지 주변에는 고급 호텔들이 들어서 있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순례자들은 성지에서 5km 이상 떨어진 곳에 가야만 비교적 싼 숙박시설을 찾을 수 있는 실정이다.
사우디아라비아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순례자는 작년에 비해 50만명이 늘어난 235만2122명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이동이다.
이 중 해외 순례자는 175만2014명이다. 항공편으로 164만8332명, 육로로 8만8855명, 선박으로 1만4827명이 사우디아라비아로 입국하였다. 약 5만7500대의 버스가 순례자들을 성지로 실어 날랐다.
순례자들의 편의와 안전을 위해 30만명에 달하는 시민과 군경이 순례 지원 활동에 나섰고, 순례자들의 건강을 위해 3만명에 달하는 의료진, 성지와 주변 청결을 위해 2만3000명의 환경미화원을 동원했다. 또 통신서비스 요원 3700명, 운송요원 3만6000명을 투입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자국 내 순례자는 60만108명인데, 이 중 외국 국적자는 9만9009명이다. 자국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허가를 받아야만 순례를 할 수 있다. 성지에 이르는 길목마다 경찰이 검문검색을 실시하여 인가 받지 않고 성지로 들어오려던 약 22만 대의 차량과 약 49만명의 순례자들을 적발하여 되돌려 보냈다. 불법 순례여행사 101개를 폐쇄했다.
‘아브라함의 종교’ 이슬람
▲이슬람 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희생물로 바치려 했던 아들은 이스마엘이었다.
무슬림들은 대순례에서 무엇을 하는 것일까? 대순례는 라마단월 단식과 함께 무슬림들이 삶을 돌아보고 신앙의 뜻을 헤아리며 자기 성찰을 하는 시간이다. 대순례의 핵심 인물은 아랍어로 이브라힘(Ibrahim)이라고 부르는 아브라함이다. 대순례는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의 아브라함의 유일신 신앙이 완벽하게 이슬람적으로 표현되는 의례다.
무슬림들은 아브라함을 유일신 신앙의 선조로 칭송한다. 코란 3장 6절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유대인도 그리스도인도 아니라 진정 유일신을 믿은 사람이다. 다신숭배자가 아니다”라고 한다. 아브라함을 유일신 신앙의 선조로 따르는 이슬람은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유일신 신앙을 온전하게 계승한 신앙’으로, 이른바 ‘오래된 새길’이다. 코란은 이슬람이 ‘아브라함의 종교(Millat Ibrahim・밀라트 이브라힘)’라고 선언한다.
이슬람교의 전통적 입장에서 따지자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순수한 아브라함의 유일신 신앙을 바르게 계승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두 종교전통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신앙의 지표로 삼기 때문에 무슬림 학자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 무슬림을 ‘아브라함의 자녀(Children of Abraham)’라고 부른다.
코란은 4장 125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친구’로 삼았다고 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별칭은 ‘하나님의 친구’다. 이처럼 이슬람에서 아브라함은 유일신 신앙의 선조로 극찬의 대상이다. 아브라함을 본받아 하나님을 올곧게 믿으려는 무슬림들의 진지한 자세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종교의례가 메카 대순례다.
이슬람의 아브라함 이야기는 유대-그리스도교와 다소 다르다. 무슬림 전승에서 아브라함은 이사악(이스하끄)이 아니라 이스마엘(이스마일)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번제물(燔祭物)로 바친다.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이사악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신을 희생물로 바친다는 사실을 사전에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슬람 전통에서 이스마엘은 자신이 번제물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 뿐 아니라, 이에 기꺼이 응한다. 대순례에서 무슬림들은 자신의 아들을 내어놓는 아브라함과 스스로를 기꺼이 바치는 이스마엘의 굳은 신앙심을 칭송하고 본받는다.
또 어린 아들 이스마엘을 위해 물을 찾아 나선 아브라함의 아내 하갈(하자르)의 모성을 기억하고 그 애타는 마음을 체현한다.
소순례
▲무슬림들이 순례 때 입는 옷 이흐람.
무슬림들은 순례를 하기 위해 먼저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한 뒤 순례자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순례 기간 동안 무슬림 남성은 국적, 인종, 직업, 지위에 관계없이 모두 똑같이 재봉선 없이 통천으로 된 두 쪽의 하얀 옷을 입는데, 이를 이흐람(Ihram)이라고 한다. 여성은 각기 정숙한 옷을 입는다. 남성의 옷은 이슬람의 통일성을, 여성의 복장은 이슬람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성과 속의 경계선을 넘으면서 신에게 자신이 성소에 들어왔음을 고하고, 먼저 카으바 주위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일곱 번 돈다. 이때 검은 돌에 경의를 표한다.
그런 후 사파(Safa)와 마르와(Mar-wah)라는 두 언덕을 모두 7번 왕복한다. 사파에서 시작하여 마르와에서 끝난다. 이는 아브라함의 아내 하갈이 갓난아이 이스마엘에게 먹일 물을 찾기 위해 애타는 마음으로 헤맨 심정을 체험하고 기억하기 위해서다.
전승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아내 하갈과 아들 이스마엘을 메카에 두고 떠났고, 하갈은 이스마엘의 목을 축이기 위해 아이를 놓고 물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아이를 잃어버릴까 보아 언덕으로 뛰어올라 아이에게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두 언덕을 번갈아 오르는 의식을 행하는 것이다. 하갈은 천사의 도움으로 물을 얻었다. 천사의 날개가 닿은 곳에서 샘물이 솟아올랐는데, 이곳을 잠잠(Zamzam) 샘물이라고 한다. 지금도 이 샘물이 나온다고 믿는다. 그래서 순례자들은 성원 내에서 이 샘물을 마시고 물병에 담는다.
아라파트 산에서
▲대순례를 앞두고 미나 평원에는 엄청난 크기의 텐트촌이 만들어진다.
여기까지가 소순례다. 소순례를 마치면 일상으로 돌아왔다가 대순례 시작일인 8일에 다시 의례적으로 정결한 상태로 들어가 이흐람 복장을 하고 바로 미나(Mina) 평원으로 가서 텐트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평원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에어컨을 갖춘 약 5만개의 텐트를 마련해 놓았다.
순례 이틀째인 9일 아침 일찍 순례자들은 아라파트(Arafat) 산으로 이동하여 일몰 때까지 머무른다. 아라파트 산은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한 곳이자, 무함마드가 인류평등, 무슬림 형제애, 신앙행위 준수 등의 내용을 담은 마지막 설교를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순례자들은 여기에서 약 한 시간 동안 홀로 명상과 기도를 갖는다. 자신이 살아온 날들과 지은 죄를 돌이켜보며 반성하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를 행하지 않으면 순례 자체가 무효다.
해가 지면 아라파트를 떠나 무즈달리파(Muzdalifah) 평원으로 이동한다. 무슬림들은 이곳에서 최소 49개의 작은 돌을 수집하고 하늘을 보며 노숙을 한다. 그리고 다음 날 동트기 전에 미나로 이동한다. 미나에서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번제물로 바치지 못하게 유혹한 사탄을 돌을 던져 쫓아버렸다. 무슬림들은 이를 기념하여 사탄을 상징하는 돌기둥 3개 중 가장 큰 것을 향해 무즈달리파에서 가져온 돌 일곱 개를 던진다.
정결의식
▲이드 알아드하 예배를 보는 터키 군인들. 무슬림들에게 가장 중요한 의식 중 하나다.
그러고 나서 아들을 기꺼이 희생하려 했던 신앙의 선조 아브라함을 본받아 양이나 염소나 소나 낙타를 번제물로 삼는 희생제를 지낸다. 이드 알아드하(Id al-Adha)라고 하는 이 행사는 라마단 단식월을 마치고 갖는 파단식제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이슬람 종교의례다. 순례에 참가하지 못한 사람들도 세계 곳곳에서 희생제를 지내며 이웃과 음식을 나누며 공동체 의식을 함양한다.
이제 남성은 머리를 밀고, 여성은 머리카락 일부를 자른다. 순례를 마쳤다는 것을 뜻한다. 흥미로운 것은 과거에는 남성의 경우 머리카락을 면도기로 완전히 밀었는데, 면도날이 B, C형 간염 등 병균을 전염시키는 경우가 있어서 요즈음에는 완전히 밀기보다는 전기면도기로 아주 짧게 깎는 것을 더 권장한다.
조금이라도 싸게 깎기 위하여 정부에서 공인받지 않은 이발사를 찾는 경우가 있다. 비공인 이발사는 10사우디리얄(약 3000원), 공인 이발사는 20사우디리얄(약 6000원)을 받는다. 가격차이가 딱 두 배다. 그러나 싼 게 비지떡이라고, 비공인 이발사들은 면도날을 청결하게 관리하지 못하여 병균을 옮긴다. 사우디아라비아 당국은 비공인 이발사를 강력히 규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공인 이발사가 근절되지 않는 것은 수입이 좋기 때문이다. 2014년의 경우 150명의 공인 이발사가 4일 동안 벌어들인 수입이 1인당 5000사우디리얄(약 150만원)에 달했다.
머리를 깎으면 이제 의례적 정결상태에서 벗어나 성(性)행위만 제외하고 일상의 삶이 가능하다. 이발 후 다시 카으바 주위를 일곱 번 시계 반대방향으로 돈 후 사파와 마르와 언덕을 일곱 개 왕복함으로써 모든 의례적 제약에서 벗어난다. 이제 남은 2~3일 동안 다시 미나 평원에서 머물며 사탄을 상징하는 돌기둥 세 개를 향해 나머지 돌을 모두 던진다.
올해는 인명사고 없이 무사히 지나갔지만, 순례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것은 사탄에게 돌을 던질 때다.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리거나 일정한 방향으로 질서 있게 움직이지 않아서 치명적인 압사(壓死)사고가 자주 일어난다. 2006년에는 350명이 깔려 죽었다. 2015년에는 2000명이 넘는 순례자들이 돌기둥에 접근하려다 목숨을 잃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이때 460여 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한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안전 불감증을 비판하고 나섰다. 이 때문에 가뜩이나 정치적으로 불편한 양국 간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사탄에게 돌팔매질을 한 후 다시 카으바 주위를 일곱 번 돈 후 대순례를 마치고 귀향길에 오른다. 순례기간 동안 매시간당 평균 10만7000명이 카으바 주위를 돈 것으로 집계됐다.
내적 변화의 체험
▲미국의 과격파 흑인 무슬림 지도자였던 맬컴 엑스는 메카 순례를 다녀온 후 입장을 바꾸었다.
무슬림들은 대순례 후 내적으로 깊은 변화를 체험하고, 긍정적으로 자신과 주변을 바꾼 사람들이 적잖다. 흑인우월주의를 주창하는 미국의 종교단체 ‘네이션 오브 이슬람(Nation of Islam 이슬람민족)’의 지도적 인물이었던 맬컴 엑스가 그러한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다. 그는 메카 순례 후 이슬람이 특정 인종의 우열이 아니라 만민평등을 가르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생의 행로를 바꿨다.⊙
11월 호
◆무슬림도 잘 모르는 이슬람달력
⊙ 이슬람, 윤일(閏日) 인정 않는 순(純)태음력 사용, 1년은 354일
⊙ 초승달을 육안으로 보아야만 새달이 시작, 이슬람 국가 간에도 새달, 새해의 시작이 달라
⊙ 이란에서는 이슬람양력, 이슬람음력, 서양력 사용…. 2017년 9월 22일은 이슬람음력으로는 1439년 1월 1일, 이슬람양력으로는 1396년 6월 31일
▲서울 이태원에서 라마단 단식을 마치고 나오는 무슬림들. 이슬람력은 라마단 등 각종 종교행사를 하는 기준이 된다. 사진=조선일보DB
달력은 해를 기준으로 하면 태양력(太陽曆), 달의 움직임을 우선하면 태음력(太陰曆)으로 나뉜다. 태양력은 일 년이 365일이고 해마다 계절의 변화가 제때에 오는 데 비해 태음력은 한 해가 태양력보다 11일 적은 354일이라서 계절이 바뀌는 것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보통 8년에 3일, 11년에 4일, 19년에 7일, 30년에 11일의 윤일(閏日)을 넣어 태양력과 맞추는데, 이를 태음태양력(太陰太陽歷)이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음력이라고 부르는 역법도, 유대인들의 음력도 모두 태음태양력이다. 농경사회에서는 태양의 움직임을 모르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 24절기를 달이 아니라 해의 동선을 따라 고안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태음태양력과 달리 무슬림들이 쓰는 이슬람력은 윤일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태음력이기 때문에 순태음력(純太陰曆)이라고 한다. 코란에 따르면 일 년은 12개월로 고정되어 있고, 윤일을 써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는 달의 수가 천지를 창조하신 날 기록한 대로 12달이나니. 이들 중 4달은 성스럽다.”(코란 9장 36절)
“(성스러운 달을) 미루면 불신이 늘어나 믿지 않는 이들이 미혹되리라. 그들은 한 해는 하고 다른 해는 그르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달의 수에 맞추기 위하여 한 해는 허하고, 다른 해는 금하며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허한다. 그들의 사악한 행동은 그들에게만 즐거운 일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을 인도하시지 않는다.”(코란 9장 37절)
위 코란 구절은 역사적 상황이 명확하지 않기에 해석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아마도 하나님이 정해놓은 역법을 어기면서 윤일을 사용하여 순례의 달을 고정하지 않고 후일로 미루거나 성스러운 달을 미루어 성스럽지 않은 달로 연기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통 이해한다. 즉 코란은 윤일 사용을 금지한다.
히즈라력(曆)
▲서력 2016년은 이슬람력으로 1437~1438년, 2017년은 1438~1439년에 걸쳐 있다.
이처럼 코란 말씀에 따라 무슬림은 한 해가 12달이고 윤일이 없는 이슬람력을 사용한다. 632년 예언자 무함마드가 죽은 지 6년째 되는 해인 638년 당시 무슬림 공동체 지도자였던 우마르가 이슬람력의 기원 1년을 622년으로 정하였다. 무함마드는 고향 메카에서 유일신 신앙을 알리려고 했지만 반대파의 공세에 시달리다가 이해에 위험을 무릅쓰고 무슬림 공동체를 북쪽 오아시스 도시 야스립으로 옮겼다. 이를 히즈라(hijrah)라고 하는데, 우리 말로 ‘이주(移住)’라는 뜻이다. 야스립은 무함마드가 온 이후 예언자의 도시라는 뜻인 ‘마디나트 안 나비(Madinat an-Nabi)’로 불렸고, 이를 줄여 아랍어로 ‘메디나(Medinah)’로 부른다. 우리말로는 ‘도시(都市)’다. 메카와 메디나는 339km 떨어져 있다.
최초의 무함마드 전기 작가인 이븐 이스하크(Ibn Ishaq)에 따르면 무함마드가 메디나 남쪽 쿠바(Quba’)에 도착한 때가 무슬림력으로 라비 알아왈(Rabi‘ al-Awwal)월 12일이었다고 한다. 이를 서력으로 환산하면 대략 622년 9월 24일이다. 그런데 무슬림력에서 이달은 3번째 달이다. 따라서 역산하여 첫 번째 달 첫날인 무하람(Muharram)월 1일을 이슬람력의 기원으로 삼았다. 서력으로는 7월 15일(목)과 16일(금) 사이인데, 7월 16일을 시작점으로 삼는다.
이슬람력은 히즈라를 기준으로 하였기에 히즈라력이라고 한다. 히즈라의 형용사형인 히즈리(Hijri)를 써서 영어로는 히즈리 캘린더(Hijri Calendar)라고 부른다. 서구 문헌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쓰는 예수 탄생을 기점으로 삼아 서기를 표현할 때 A.D.라고 하는데, 이는 라틴어로 ‘안노 도미니(Anno Domini)’의 약자로 ‘주님의 해’라는 뜻이다. 이슬람력은 히즈리 해(Anno Hijri)라고 하여 A.H.라는 약어를 쓴다. 물론 요즘 영어권에서는 A.D.가 지나치게 그리스도교적 색채가 강하다고 하여 공원(公元, Common Era)의 약자인 C.E.로 표기한다.
순태음력인 이슬람력은 태양력인 그레고리우스 서력보다 해마다 11일이 짧고, 33년이면 둘 사이에 1년의 차이가 생긴다. 이슬람력이 622년에 시작하였기에 서력보다 연도 수가 적다. 2017년인 올해는 이슬람력으로 1438년과 1439년이 다 들어 있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연도만큼 중요한 것이 없는데, 이슬람력을 서력으로 환산하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다. 두 역법을 환산하는 데에 다음 두 가지 공식을 쓴다.
1. 이슬람력을 서력으로 바꿀 때
방법 1. 서력 연도 = [(32 x 이슬람력 연도) ÷ 33] + 622
방법 2. 서력 연도 = 이슬람력 연도 + 622 - (이슬람력 연도 / 33)
2. 서력을 이슬람력으로 바꿀 때
방법 1. 이슬람력 연도 = 서력 연도 - 622 + (서력 연도 - 622 / 33)
방법 2. 이슬람력 연도 = [(서력 연도 - 622) x 33] ÷ 32
전문 서적인 경우 두 연도가 모두 등장할 때가 적잖은데, 그럴 때에는 흔히 빗금(/)을 써서 표기한다. 예를 들자면, 이슬람력을 히즈라를 기준으로 만든 우마르의 재위 연도는 이슬람력으로 13년에서 23년이고, 서력으로는 634년에서 644년이다. 그래서 이를 ‘재위 13~23/634~644’라고 적는다.
그런데 이슬람력의 연도가 최소한 달과 함께 표기되지 않는다면 서력으로 연도를 정확하게 환산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슬람력은 종종 서력으로 2년에 걸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올해를 예로 들자면 지난 9월 21일 또는 22일에 이슬람력으로 1439년이 시작되었는데, 이해는 서력으로 올 9월부터 내년 9월까지 이어진다. 즉 1439년은 서력으로 2017~2018년이다. 따라서 적어도 최소한 무슨 달인지 모르면 2017년인지, 2018년인지 1년이라는 차이가 난다. 역사학에서 1년의 오차는 어마어마하다.
이슬람 국가마다 새해 시작 달라
▲아랍에미리트에서는 통일된 1439년 달력을 제정, 공포했다.
사실 이보다 더 복잡한 문제는 전통적으로 이슬람력에서 새로운 달이 아랍어로 힐랄(Hilal)이라고 부르는 초승달을 육안으로 보아야만 시작한다는 점이다. 초승달을 보지 못하면 현재의 달이 하루 더 이어진다. 달이 차고 기우는 주기가 29.5일이니 한 달이 29일이나 30일이 되는데, 초승달을 맨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면 해당 월이 31일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법칙을 적용하지 않는 유일한 달은 한 달 내내 해가 떠 있는 동안 단식하는 9번째 라마단(Ramadan)월뿐이다. 라마단월 29일에 초승달이 보이지 않으면 30일까지 단식을 이어가고, 30일째 되는 날에 초승달이 안 보이더라도 단식을 30일에 마친다. 단식월은 30일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예언자의 전승을 준수하는 것이다.
육안으로 초승달을 확인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과학적으로는 분명 초승달이 떠 있는 시기라 해도 천체 환경에 따라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또 어느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아도 다른 곳에서는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무슬림 세계에서는 초승달 확인 원칙을 고수해 왔다. 무슬림 중에서 이스마일 시아파만 천문학적으로 계산하여 달력을 만들어왔다.
그런데 전통적인 방식을 고집하다 보니 전 세계 모든 무슬림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표준 이슬람력이 없다. 지난 9월 21일, 또는 22일에 시작한 이슬람력의 새해도 초승달 관측 때문에 나라마다 차이가 생겼다. 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등 아랍 걸프 왕정은 9월 20일 수요일 저녁에 초승달이 뜬 것을 확인하였기에 9월 21일을 이슬람력으로 첫 번째 달인 무하람월 첫날, 즉 새해가 시작되었다고 선포하였다.
국가마다 개별적으로 발표하는데, 사우디아라비아는 대법원 명의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역법계산법에 따라 이슬람력 1438년 12월 29일(서력 2017년 9월 20일 수요일)에 1439년 무하람월을 알리는 초승달을 관측하였기에 2017년 9월 21일 목요일을 이슬람력 1439년 무하람월 1일로 공표하였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걸프 지역에 위치한 오만에서는 수요일 저녁에 초승달이 보이지 않아 목요일을 1438년 마지막 날로 선언하고 사우디아라비아보다 하루 늦은 22일 금요일을 새해 첫날로 선포하였다. 인도와 파키스탄에서는 9월 21일 목요일 저녁에 초승달이 떴기에 9월 22일부터 새해가 시작되었다.
UAE, 통일 이슬람력 제정
이처럼 초승달이 보여야만 새로운 달이 시작되기에 일상생활에 혼란이 인다. 초승달 관측 여부에 따라 새해 결정이 늦어지면서 휴일이 유동적이 되는 바람에 학교 시험이나 여행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것이다. 매달 첫날이 이처럼 초승달에 달려 있다 보니 사전 계획을 세워도 변동이 있을 수밖에 없다.
초승달 육안 관측이 지닌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사우디아라비아는 나름의 방법으로 이슬람력을 만들고 있다. 초승달을 직접 보지 않더라도 천문학적인 지식을 이용하여 새로운 달의 시작을 정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메카를 기준으로 만일 순태음력 29일에 일몰 전에 지구에서 보았을 때 새로운 달이 태양과 같은 방향에 있고, 달이 일몰 후에 진다면 다음날을 새로운 달의 첫날로 정한다. 이러한 두 가지 조건에 부합하지 않으면 그달은 30일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간주한다.
천문관측가들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방식이 초승달 육안 관측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말인즉 곧 사우디아라비아가 직접 눈으로 초승달을 보지 않고도 새로운 달의 첫날을 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다른 여러 무슬림 국가에서는 육안으로 직접 초승달을 보아야만 새로운 달의 첫날이 시작된다.
따라서 이슬람력을 둘러싼 논란은 불가피하다. 모든 무슬림이 보편적으로 따를 수 있는 이슬람력 제정 요구가 있지만, 전통을 뒤엎기에는 아직 목소리가 약하다. 물론 사우디아라비아처럼 국가 차원에서 국내 이슬람력의 통일을 시도하는 움직임은 있다. 아랍에미리트(UAE)의 경우 올해 처음으로 이슬람법과 과학적 원칙에 따라 국내 어느 곳에서나 적용될 수 있는 통일된 이슬람력 1439년 달력을 제정하여 아부다비, 두바이, 샤르자 등 7개의 연방 소속 아미르국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달력과 예배시간표를 제공하였다.
라마단 날짜도 나라마다 달라
이슬람 또한 우리가 음력에 맞추어 설날, 부처님 오신 날, 추석을 공휴일로 보내듯, 이슬람 종교와 관련된 여러 의례, 행사, 축일을 이슬람력에 따라 지낸다. 라마단 단식과 단식 마치고 지내는 단식종료제인 이드 알피트르, 메카 대순례인 핫즈, 핫즈 때 행하는 희생제 이드 알아드하 등 굵직굵직한 종교축일을 이슬람력에 따라 지낸다.
앞서 말했듯 초승달 관측 여부 때문에 이러한 기념일이 지역마다 차이가 나서 무슬림들이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특별히 라마단 단식 시작과 종료, 그리고 종료 후 행하는 단식종료제 이드 알피트르가 그러한데, 준수 일이 하루 정도씩 차이가 나서 전 세계 모든 무슬림이 같은 이슬람력을 써도 같은 날 형제애를 느끼며 동시에 단식을 시작하거나 마치기가 어렵다.
초승달이 보여야 새로운 달의 첫날이 시작한다는 말은 하루의 시작이 아침이 아니라 밤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올해 1439년 무하람월 5일이라면 사우디아라비아 방식을 따르면 9월 25일이고 오만 방식을 따르면 9월 26일이 되는데, 전통적으로 밤에 새날이 시작하기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 방식이라면 9월 24일 일몰부터 9월 25일 일몰 전, 오만 방식이라면 9월 25일 일몰부터 9월 26일 일몰 전까지다.
물론 이는 전통방식에 따른 이론적인 산술법으로, 오늘날에는 지키지 않는다. 사실 과거에도 실질적으로는 하루가 일출과 함께 시작한다고 간주하였다. 그래서 일출 후 첫 예배인 정오 예배가 종교의례를 다룬 책에서 첫머리를 장식하였다.
이란이 국제상거래 할 수 있는 날은 일주일에 3일뿐
그렇다면 요일은 어떨까? 널리 알려졌다시피 무슬림들은 금요일 정오 예배를 합동으로 한다. 유대인들은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 직전까지가 안식일이지만, 무슬림들은 금요일 합동 예배일이 휴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일요일에 미사나 예배를 한다.
유대계 미국인 학자인 고이타인(Shelomo Dov Goitein·1900~1985)은 초기 이슬람 시대에 무함마드가 유대인들을 이슬람 신앙으로 초대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이 많이 모이는 장에 가서 예배를 한 것이 금요일 합동예배의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안식일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유대인들은 금요일 일몰 직전에 미리 장을 보며 안식일 준비를 했는데, 이때 무함마드가 예배를 하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무슬림 국가는 터키, 인도네시아 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금요일을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그런데 국제사회와 무역거래에 지장을 덜 주기 위하여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오만, 이라크 등은 금요일과 토요일에 쉬는 반면 이란은 목요일 오후부터 금요일까지 쉬기에 사실상 국제사회와 상거래를 할 수 있는 요일이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3일뿐이다.
아랍국가의 요일 이름을 보면, 금요일은 예배를 위해 모이기에 모임의 날이고, 토요일은 안식일, 일요일은 제1일, 화요일은 제2일, 수요일은 제3일, 목요일은 제4일이라고 부른다. 이란의 요일은 아랍어와 같이 금요일은 예배를 위한 모임의 날, 토요일은 안식일이라는 뜻을 지니지만, 일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1, 2, 3, 4, 5 토요일이라고 부른다.
이란에서는 3개의 달력 사용
▲이란에서 사용하는 이슬람양력에 따르면 올해는 1396년이고, 서력 2017년 3월 21일 새해가 시작되었다.
오늘날 무슬림 세계는 이슬람력과 함께 서양력을 사용한다. 이란은 이란 고유의 태양력을 쓴다. 이를 이슬람태양력이라고 부르고, 이슬람력을 이슬람음력이라고 한다. 이란의 태양력은 일 년이 365일이다. 첫 6달은 31일이고, 이후 5달은 30일, 마지막 달은 29일이다. 4년마다 마지막 달에 하루를 더해 30일을 만든다. 한 해의 시작은 3월 21일 춘분이다. 이란의 달력은 12 별자리와 기간이 같다. 이를테면 첫 번째 달인 파르바딘(Farvardin)은 3월 21일에 시작하여 4월 20일에 끝나는데, 양자리(Aries)다.
이란에서는 이슬람양력, 이슬람음력, 서양력을 다 쓰는데, 거의 모든 신문이나 공공매체에 이 셋이 모두 표기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공식적으로 이슬람양력과 이슬람음력을 모두 인정하나 정부기관은 이슬람양력을 따른다.
▲이란의 설날인 노루즈(3월 21일)날의 상차림. 이날은 춘분(春分)으로 원래 조로아스터교의 축일이었다
이슬람음력은 이슬람과 관련한 종교행사나 의례를 준수하는 데 쓰이고 이슬람양력은 이슬람 종교 외 경축일을 기념하는 데 사용한다. 예를 들어 이란의 설날은 노루즈(새로운 날)인데, 춘분일인 3월 21일이다. 전통적으로 기념해 온 조로아스터교 관련 의례를 다른 이름으로 바꾼 경우도 있다. 새해 13번째 되는 날, 올해의 경우 4월 2일은 불운을 막기 위해 모두가 집 밖으로 나가는 날인데, 시즈다 베다르(Sizdah bedar)라는 전통적인 이름 대신 자연의 날로 개명하였다.
이슬람양력은 이슬람음력과 마찬가지로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622년을 기점으로 한다. 파흘라비 왕정시대에 레자 샤(Reza Shah)는 키루스(Cyrus) 대왕이 즉위한 기원전 559년을 양력의 기원으로 삼아 해를 세었으나,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양력의 시작점이 현재처럼 바뀌었다. 그래서 2017년 올해는 이슬람양력으로 1396년이다. 1396년은 올해 3월 21일에 시작하였고, 내년 2018년 3월 20일에 끝난다. 이란에서 이슬람력 1439년의 첫날은 오만과 같이 9월 22일이었다. 즉 이란에서 2017년 9월 22일은 이슬람음력 1439년 1월 1일(무하람월 1일)이었고, 이란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이슬람양력에 따르면 1396년 6월 31일(샤리바르월 31일)이었다.
우리 모두는 똑같은 시간을 쓰지만, 시간을 운영하는 방법은 이처럼 무슬림과 비무슬림이 서로 다르고, 무슬림끼리도 다르다. 초승달에 의존하는 이슬람력이 혼란스럽게 보이긴 하지만 적어도 단식을 하는 무슬림들에게는 참으로 공평한 달력일 것이다. 계절과 궤를 같이하지 않기 때문에 해가 있는 동안 한 달 내내 단식을 하는 라마단월은 해가 긴 한여름에도 해가 짧은 한겨울에도 공평하게 오니 말이다. 그러니 비무슬림의 눈으로 무질서하다고 이슬람력을 함부로 재단할 일은 아니다. 무슬림의 시간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
12월 호
◆알 아프가니 등, 19세기 후반에 ‘기독교의 루터’처럼 이슬람 종교개혁 주장
⊙ 사이드 아마드 칸, 알아프가니, 무함마드 압두 등, 루터를 모델로 한 근대적 종교개혁 주장
⊙ 자룰라 비기, “무슬림 세계는 이성을 포로로 잡아놓는 바람에 퇴보”
⊙ 이슬람교, 정치권력이 종교를 통해 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려 했던 과거의 유산 버리지 못하고 있어
⊙ 사우디아라비아의 최근 정변은 1979년 이후 지속된 극단주의·이슬람 원리주의 경쟁에서 탈피하겠다는 것
▲19세기 중·후반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을 주장했던 이슬람 사상가 자말룻딘 알아프가니.
올해로 마르틴 루터가 개혁의 목소리를 낸 지 딱 500년이 되었다. 종교개혁으로 번역하고 있는 루터의 개혁운동은 엄밀히 따지자면 그리스도교 개혁인데, 낡고 부정한 일을 혁파하여 시대정신을 이끌었기에 종교를 초월하여 보편적 정의의 외침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는 대사(大赦・Indulgentia)라는 것이 있다. 가톨릭 신자들은 죄를 지으면 고백성사를 하여 용서받는다. 고백성사 때 사제는 보속(補贖)으로 기도나 선행(善行)을 하라고 한다. 예를 들어 일주일 동안 매일 미사에 참석하거나 주기도문을 하루에 열 번씩 며칠 동안 외라는 등 죄를 씻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현세에서 이러한 죄의 대가를 다 치르지 못하여 남는 벌은 사후(死後)에 연옥(煉獄)에서 해소하여야 한다. 이렇게 남은 벌, 즉 잠벌(暫罰)은 대사로 면한다.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써서 가톨릭 교회의 부정을 비판하고 나선 결정적 이유가 된 면죄부(免罪符)는 사실 오역이다. 대사부(大赦符)라고 하는 것이 맞다. 죄가 아니라 벌을 면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터가 비텐베르크(Wittenberg) 성당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아마도 게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더 우세하다. 게시 여부와 관계없이 루터의 개혁정신은 가톨릭 교회가 우주의 질서를 반영하는 세계 질서의 정점(頂點)에 있다는 서양 중세의 낡은 믿음을 혁파하는 선봉이 되었다.
루터 이후 서양 그리스도교의 쇄신과 계몽주의 발흥, 인문과 과학의 발전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다. 서양뿐 아니라 오늘날 눈부시게 진보한 세계는 바로 고리타분한 전통의 억압에 침묵하지 않고 과감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항의하고 나선 루터의 용감한 행동에 빚진 바 크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슬라흐와 타즈디드
이슬람을 조금이라도 관심 있게 지켜본 사람들은 루터를 보면서 무슬림들은 왜 루터와 같은 사람이 나와서 전통의 인습(因習)을 깨뜨리지 못하느냐고 묻는다. 사실 이러한 질문을 루터의 개혁 500주년이 되는 올해뿐 아니라 근세기 들어 끊이지 않고 줄기차게 제기하였다.
무슬림들은 루터와 같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슬람에는 루터와 같은 개혁이 필요 없다고 믿는 것일까? 테러, 폭력, 완고, 과격과 같은 단어로 이슬람을 연상하는 사람들의 부정적인 태도와는 달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루터의 개혁정신에 영감을 얻고 스스로를 반성하며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던 무슬림들이 있었다. 지금도 그러한 인물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슬람은 이슬라흐(Islah)와 타즈디드(Tajdid)라는 말로 개혁을 이야기한다. ‘이슬라흐’는 코란에 나오는 말인데, ‘개혁’으로 번역한다.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이 잘못된 길을 갈 때마다 신(神)은 예언자를 보내어 인류를 바른길로 인도하면서 잘못된 믿음과 관습을 개혁한다. 즉 신의 부르심을 받은 예언자들이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살 것을 요구한다.
타즈디드는 ‘새롭게 한다’는 동사에서 파생한 동명사로 ‘쇄신(刷新)’으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어울리는 단어다. 예언자 무함마드 언행록(言行錄)을 보면 무함마드는 세기마다 신이 무잣디드(Mujaddid), 즉 무슬림 공동체에 ‘쇄신자’를 보내어 무슬림들의 믿음을 새롭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쇄신자는 예언자가 아니다. 이슬람에서는 마지막 예언자 무함마드 이후 더 이상 신이 예언자를 보내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쇄신자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메디나에 세운 공동체를 모범으로 삼아 그동안 잘못된 신앙과 신행(信行)을 비판하고 비(非)이슬람적인 요소를 제거하여 코란과 예언자의 언행에 맞는 삶을 제시한다.
무슬림들은 지난 1400여 년 이슬람의 역사 속에서 100년마다 쇄신자가 등장하여 무슬림들을 바른길로 인도하였다고 하면서 각기 나름대로 주요한 인물을 쇄신자로 열거한다. 그러나 누가 쇄신자인지는 종파마다 생각이 다르다. 게다가 이슬람에는 전 세계 신도들을 통솔하는 중앙기관이 없다. 때문에 로마교황청이 성인(聖人)을 인증하는 것과는 달리, 이슬람에서는 누가 쇄신자인지 아닌지 공식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신앙인들 중에서 우마이야조 칼리파였던 1세기의 우마르 2세(이슬람력 63~101/서기 682~720), 법학자이면서 신비주의자로 《종교학의 부흥》이라는 책을 써서 신앙의 의미를 밝히고, 그리스철학에 경도되어 코란의 가르침을 저버렸다고 철학자들을 비판하였던 5세기의 알가잘리(이슬람력 450~505/서력 1058~1111)를 많은 무슬림이 쇄신자로 꼽는다.
이슬람의 자정(自淨)운동
▲알아프가니에게 영향을 준 사이드 아마드 칸
여느 종교공동체와 마찬가지로 무슬림 역시 자신들의 신앙을 점검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면서 종교의 의미를 물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에 맞춰 진정한 전통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무슬림들의 자정(自淨)운동은 거시적으로 보면 19세기를 기점으로 큰 차이를 보인다. 19세기 이전까지는 무슬림들의 도덕적・영적 타락을 질타하면서 내부정화운동의 양상을 보였다. 19세기 이후로는 유럽 식민주의와 같은 무슬림 사회 외부에서 불어오는 영향에 따른 반응으로 ‘근대화와 이슬람’을 화두로 이슬람 전통을 바라보는 흐름이 생겼다. 외부로부터 충격을 받으면서 타자(他者)에 비추어 나를 보면서 내가 어디쯤 있는가를 진정 심각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근대적 삶에 맞는 이슬람을 선도하며 이슬람의 기치 아래 모든 무슬림을 결집시키고자 노력한 이슬람 근대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은 자말룻딘 알아프가니(Jamalidin Al-Afghani・1838~1897)였다. 이란 아사다바드에서 태어난 그는 아랍 순니 세계에 더 폭넓은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아프간 출신이라는 뜻의 아프가니를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알아프가니에게 영향을 준 인물로 영국령 인도의 사이드 아마드 칸(Sayyid Ahmad Khan·1817~1898)을 들 수 있다. 칸은 인도에는 스틸(Steele)이나 애디슨(Addison) 같은 사람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루터와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슬람의 루터’ 지향한 알아프가니
이슬람을 종교를 넘어 포괄적인 문명으로 간주한 알아프가니는 루터를 유럽을 야만에서 문명으로 변화시킨 인물로 존경하였다. 그는 루터를 다음과 같이 극찬한다.
“유럽이 야만의 상태에서 문명국으로 변한 이유를 살펴보면 루터가 시작하여 퍼뜨린 종교운동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위대한 인물은 유럽인들이 명백한 이성을 따르지 않고 교회 수장(首長)과 맹목적으로 종교에 복종하는 것을 보고 종교운동을 시작하였다.”
알아프가니는 이슬람에도 루터와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이슬람의 근간인 코란을 중시하고, 새로운 해석을 통해 퇴보와 무지로부터 무슬림 사회를 구하여 발전해야 한다는 두 가지 원칙을 바탕으로 ‘이슬람의 루터’가 되어 무슬림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이슬람 사회에서 종교가 과학과 진보를 막고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슬람보다 몇 세기 앞서 성립한 그리스도교도 이슬람처럼 종교가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지만 일단 장애를 제거하자 급속히 발전하였듯,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나면 무슬림 사회도 서양 사회처럼 문명의 길을 걸으리라는 기대를 품었다.
과학적인 사고의 틀을 만들지 못한, 아니 있었지만 잃어버린 무슬림 사회를 향하여 그는 서양의 과학문명은 서양의 것이 아니라 무슬림이 과거에 전해준 것이므로 겁내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촉구하였다. 이슬람은 이성(理性)과 과학의 종교인데 무슬림 사회가 숙명론과 저세상만을 지향하면서 현세의 성공을 등한시하였다고 질타한다. 그러면서 진정한 무슬림은 이승과 저승, 양계(兩界)에서 성공을 추구하고, 이슬람은 총체적 삶의 방식으로 종교의례뿐 아니라 법과 정부와 사회 전부를 포괄한다고 주장하였다.
코란을 창의적으로 해석한 무함마드 압두
▲아랍인들에게 큰 영향을 준 무함마드 압두.
알아프가니와 함께 무슬림 계몽활동에 나서서 아랍 세계에 더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무함마드 압두(Muhammad Abduh·1849~1905)였다. 알아프가니가 ‘이슬람 근대주의의 아버지’라면, 압두는 ‘아랍세계 이슬람 근대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다.
이슬람법학자로 알아즈하르대학교 학장을 지낸 압두는 성인숭배, 기적과 같은 비이슬람적인 대중적 믿음과 수동적이고 숙명론적인 수피들의 종교생활, 새로운 해석을 금지한 전통적 법학자들 때문에 무슬림 사회가 창조성과 역동성을 발휘하지 못하였기에 서구에 비해 무슬림 세계가 쇠퇴하였다고 진단하였다.
그렇다면 새로운 해석이란 어떤 것일까? 코란 4장 3절은 4명의 아내까지 얻을 수 있으나 공정할 자신이 없다면 한 명과만 혼인의 연(緣)을 맺으라고 한다. 압두는 이러한 코란 말씀은 예언자 무함마드 시절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일부다처제가 허락된 것일 뿐 신이 명령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게다가 같은 장 129절은 “너희가 제아무리 애를 쓴다고 하더라도 아내들 사이에서 결코 공정할 수 없으리라”고 이르고 있다. 공정한 자세를 취한다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코란이 가리키는 혼인은 일부다처가 아니라 일부일처라고 압두는 해석한다.
이렇듯 창의적인 해석을 내어놓은 압두는 루터와 같은 개혁가들이 사상의 자유와 폭넓은 지식으로 신앙을 고양하였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그는 “개혁가들의 그리스도교는 무함마드가 예언자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것만 제외하면 이슬람과 하등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였다. 즉 예배방식만 다를 뿐 이슬람과 개신교는 같다는 것이다. 그럼 그리스도교는 개혁을 통해서 이슬람과 다를 바 없이 되었는데, 원래 훌륭한 위치를 점하고 있던 이슬람 세계는 왜 개혁을 하지 못했고 그리스도교와 같은 진보한 과학문명을 이루지 못한 것일까?
“종교학자들 때문에 이슬람 쇠락”
▲이슬람의 통렬한 반성을 촉구한 무사 자룰라 비기
이에 대한 가장 솔직한 답은 압두보다 한 세대 뒤 러시아 타타르 지역에서 개혁의 꿈을 꾼 무사 자룰라 비기(Musa Jarullah Bigi·1875~1949)의 생각에서 찾을 수 있다. 비기는 1912년 자신의 책 《숙고해야 할 몇 가지 문제》에서 무슬림의 잘못을 다음과 같이 통렬하게 반성한다.
〈문명세계는 교회의 권위로부터 이성을 지켜 발전하였다. 같은 시각에 무슬림 교육기관은 중세 신학 주석(註釋)을 공부하느라 바빴다. 무슬림 저자들은 그러한 책의 해설서를 쓰는 데 푹 빠졌고, 그런 일을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때 무슬림들의 마음은 창의적이지 못한 법학자와 철학자의 손에 사로잡혀 있었다. 무슬림 세계가 생명력을 잃고 동력을 상실하여 쇠락한 것은 바로 틀림없이 이와 같은 뇌 활동 정지가 널리 퍼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위대한 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산 시절은 오스만 제국에서 가장 위대한 술탄이었던 쉴레이만 대제(Süleiman·1494~1566) 시기와 겹친다. 당시 그리스도교 국가들은 이슬람국가보다 약하였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와 같은 개혁가들 덕분에 그리스도교 세계는 진보의 길로 들어섰다. 반면 무슬림 세계는 이븐 케말(Ibn Kemal·약 1468~1534), 에붓수우드(Ebussu‘ud·1491~1574)와 같은 종교학자와 지도자들 때문에 퇴락하였다.
즉 문명세계가 이성의 자유 덕에 진보한 반면, 무슬림 세계는 이성을 포로로 잡아놓는 바람에 퇴보하였다. 마치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예언이라도 하듯 맹인 무슬림 철학자인 아부 알알라으(Abu al-‘Ala’·아랍시인·973~1057)는 그의 시집 《루주미야트(Luzumiyyat)》에서 이렇게 읊었다.
“그들은 앞서 나아갔지만 우리는 잠들러 갔네. 우리가 쇠락한 덕에 그들이 올라갔다네.”〉
19세기 이후 알아프가니, 압두, 비기 등 무슬림 학자들은 이성의 창조적인 활동을 막은 전통의 폐습이 무슬림 세계를 퇴락의 길로 들어서게 한 원흉이었다고 입 모아 지적하였다. 이들은 마르틴 루터에게서 결코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무슬림 세계보다 낙후하였던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가 비약적인 발전을 한 이유는 이성을 가로막은 중세 로마 가톨릭 세계관을 무너뜨린 루터의 개혁정신에 있다고 간파하고 있었다. 특히 비기는 위 인용문에서 보여주듯 루터를 위시한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였기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이슬람의 루터가 되려는 야심을 가진 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루터식 종교개혁에 대한 경계
▲종교개혁의 부정적 측면을 경계했던 무함마드 이크발
그러나 이른바 이슬람 근대주의자들은 루터의 개혁정신을 긍정적으로 보면서도 종교개혁이 불러온 부정적인 측면 또한 우려하였다. 근대 가장 영향력 있는 무슬림 철학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영국령 인도 출생 무함마드 이크발(Muhammad Iqbal·1877~1938)은 자유주의가 분열을 조장하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자유로운 사상을 좇다가 한계를 넘는 우(愚)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한다.
〈오늘날 우리는 유럽의 개신교 혁명과 유사한 시기를 겪고 있다. 루터 운동의 시작과 결과가 가르치는 교훈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역사를 찬찬히 돌이켜보면 종교개혁은 본질적으로 정치적 운동이고, 그 결과 유럽에서 국가윤리체제가 그리스도교의 보편적 윤리를 점진적으로 대체하였다.〉
이크발은 종교개혁의 결과 공통의 종교 윤리보다 국가 윤리가 우선시되고, 유럽이 겪은 전쟁에서 볼 수 있듯이 양자가 대립하면서 혼란을 야기한다고 지적한다. 개혁은 필요하되 분열은 피해야 한다는 말이다. 국가와 종교라는 두 가지 다른 가치가 융합하지 못하고 충돌하는 것을 우려한 것이다.
알아프가니부터 19세기 이후 무슬림 사회의 신심 깊은 근대주의자들은 이슬람에 변화를 주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성을 되살려 새로운 해석으로 전통을 재해석하고 과학문명을 되살리려 한 이들의 시도는 안타깝게도 200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에도 여전히 미결(未決) 과제로 남아 있다.
1930년 이크발은 다른 무슬림 국가들이 과거의 유산을 붙잡고 있을 때 터키만이 깊은 잠에서 깨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며 새로운 길을 가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터키마저 지금은 다시 과거의 유산으로 되돌아가고자 하고 있다. 이크발이 살아 있다면 자신의 평가를 부끄러워할 처지다.
정교분리 실패한 이슬람
▲터키의 서구화를 추진했던 아타튀르크.
그렇다면 터키는 차치하고라도 오늘날 무슬림 세계는 사이드 아마드 칸, 알아프가니, 압두, 비기, 이크발이 기대하였던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안타깝지만 답은 부정적이다. 루터에게서 영감을 얻어 새로운 길을 열어보려고 했던 무슬림 근대주의자들이 하나같이 이성에 바탕을 둔 새로운 해석을 말했지만, 무슬림 세계는 과학문명에 바탕을 둔 진보적인 사회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처럼 중앙집권적인 교황청이 없기에 이슬람은 루터의 정신을 이은 개별교회 중심의 개신교와 같은 조직이다. 개개의 교회가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듯, 이슬람 또한 그러하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지야 괴칼프(Ziya G・kalp·1876~1924)가 자랑스럽게 말했듯, 루터의 종교개혁은 곧 ‘이슬람화한 그리스도교’를 만든 것이다. 이슬람처럼 교황도, 공의회도, 종교재판도 없는 교회 말이다. 그런데 왜 개신교 유럽 사회는 발전하였는데, 개신교보다 1000년이나 먼저 존재해 온 이슬람문화권은 그처럼 발전하지 못하였을까? 왜 루터가 필요하다고 근대주의자들은 생각한 것이었을까?
이 점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개신교와 달리 이슬람교는 정치권력이 여전히 종교를 통해 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려 했던 과거의 유산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슬람 역사를 돌이켜보면 정권은 무력을 쥔 이들이 장악하였고, 대체로 이들은 자신들과 언어가 다른 사람들을 통치하였다. 이들에게서 인정을 받기 위해서 민중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슬람법학자들을 우대하고 후원하여 민심의 지지를 받았다. 이슬람법학자들은 민중과 통치자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면서 독립된 공간에서 이슬람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권력을 누렸다.
근대국가가 들어섰지만, 민의가 아니라 힘으로 정권을 쥔 통치자들은 과거와 다를 바 없이 이슬람을 매개로 이슬람법 전문가들을 이용하여 권력을 누린다. 이러한 국가와 종교의 관계를 정리하여 서구와 같은 근대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던 인물이 바로 터키의 아타튀르크 케말파샤였다. 중동의 공화정(共和政) 국가들은 이러한 터키의 실험을 따랐지만, 모든 국가가 하나같이 여전히 종교를 바탕으로 한 정치세력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사우디 정변의 의미
특히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누가 진정한 이슬람 정통국가인가를 두고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각축전이 전개되면서 근대주의자들이 꿈꿨던 이슬람법의 새로운 해석 대신 보다 더 보수적인 이슬람법 적용이 일상화되었다.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이 극단주의를 일소하겠다면서 보수적인 종교색을 빼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가 ‘온건한 이슬람국가’를 표방하면서 “1979년 이전의 자유로운 사우디아라비아로 되돌아가겠다”고 선언한 것도 1979년 이후 지속된 극단주의, 이슬람 원리주의 경쟁에서 탈피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제 사우디아라비아를 시작으로 종교와 국가가 일체화한 과거의 유산을 깨고 무슬림 근대 사상가들이 꿈꾼 새로운 해석에 바탕을 둔 무슬림 문화가 중동에 자리 잡을 수 있을까? 몹시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