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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 2022-10/ 10.01 흙탕물 밥 먹는 노숙인 보고 - 10월 31일 민주당 간부·MBC, 재난까지 反尹선동에 악용하나

상림은내고향 2022. 10. 30. 13:39

세상사 2022-10

10.01 흙탕물 밥 먹는 노숙인 보고, 그는 가난한 환자들의 ‘우산’이 됐다

[아무튼, 주말-이옥진 기자의 진심]
노숙인 등 貧者와 함께한 22년
성천상 받은 ‘길 위의 의사’ 최영아

 지난달 4일 서울에는 종일 장대비가 내렸다. 궂은 날씨에도 서울서북병원은 진료를 받으려는 환자들로 북적였다. 의사 최영아가 허락한 사진 촬영 시간은 채 10분도 되지 않았다. 환자들이 기다린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왕 의사가 된 것, 가장 가난한 사람 곁에 있는 의사가 되고자 했다”는 이 사람. 빈곤과 질병에 신음하는 이들에겐 세상에서 가장 크고 든든한 우산이 아닐까.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의사 최영아(52)의 운명은 1990년 비 오는 여름날 서울 청량리 청과시장에서 정해졌다. 당시 이화여대 의예과 2학년 학생이던 그는 선배들을 따라 행려병자들에게 밥을 나눠주는 자원봉사에 참여했다. 눈앞에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빗물과 흙탕물이 섞인 밥을 퍼먹는 사람들이 있었다. 충격과 고통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저분들도 인간인데 어떻게 이 도시 한복판에서, 단지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이런 방식으로 살 수 있을까?’ ‘저들은 얼마나 많은 육체적 질병과 인간적 고통들과 싸우며 살고 있을까?’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매주 토요일 노숙인들을 만나면서 질문은 쌓여갔다. ‘이들은 얼마나 질병이 많을까’ ‘어떻게 해야 치료될까’ ‘이들은 과연 노숙인이 되기 전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2001년 내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자마자, 본격적으로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곳, 노숙인들이 있는 곳을 향했다. 2002년 ‘밥퍼 목사’로 널리 알려진 최일도 목사와 함께 청량리 뒷골목에 ‘다일천사병원’을 세웠다. 이 병원의 유일한 상주 의사로 병원 사택에서 먹고 자며 밤낮없이 노숙인 환자들을 돌봤다. 하루 환자가 100명도 넘었다. 이후 영등포 쪽방촌에 있는 ‘요셉의원’, 서울역 ‘다시서기의원진료소’, 은평구 백련산 자락의 ‘도티기념병원’ 등에서 일했다. 2012년엔 여성노숙인쉼터 ‘마더하우스’를, 2016년엔 노숙인 재활을 돕는 비영리법인 ‘회복나눔네트워크’를 만들었다. 2017년 8월부터 현재까지 그가 적을 두고 있는 곳은 서울시립서북병원. 공공의료기관인 서북병원은 노숙인 거주 요양시설인 ‘은평의 마을’ 등과 연계해 의료 혜택 취약 계층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의사가 된 뒤 여러 병원에서 일했지만, 그는 항상 같은 곳에 있었다. 가난한 환자들 곁이다. 올해 ‘성천상’ 수상자로 선정된 이유다. 성천상은 중외학술복지재단이 JW중외제약 창업자인 고(故) 이기석 선생의 생명 존중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2년 제정했다.

 

지난달 서북병원에서 최영아를 만났다. 장대비가 쏟아진 이날, 30여 명의 환자가 1평 남짓한 그의 진료실을 찾았다. 노숙인 시설에서 온 사람이 많았다. 그는 이들의 사연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고, 한 명 한 명 살뜰히 챙겼다. 그는 기자에게 “내 이야기를 감동스럽게 꾸미는 것은 싫다”고 했다. 단호한 말투였다. “나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 건데, 사람들이 자꾸 상도 주고, 돈(상금)도 주고, 신문에 낸다고 그러니까 좀 민망해요. 저는 이 삶을 선택하면서 의사로서 더 많이 훈련받고, 성장했잖아요? 그런데 노숙인들의 삶은, 예전보단 좀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어요. 제가 만난 사람 중엔 죽은 분도, 여전히 노숙인으로 사는 분도 많아요. 그분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어요. ‘저 사람들이 다르게 살 수 있게 도울 수 있지 않았을까’란 마음도 들고…. 현실에선 굉장히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는데, 작위적으로 꾸며진 감동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

 

◇돈이 있든 없든, 환자는 일단 살리고 봐야

-청백리 대상, 아산상에 이어 성천상을 받았다.

“처음 기쁜 마음이 컸는데, 상을 몇 번 받고 나니 지금은 책임감이 무겁게 느껴진다. 상을 준 곳에서 내가 앞으로 훌륭한 삶을 살 거라는 기대가 있지 않겠나.”

 

-왜 당신에게 상을 준다고 생각하나.

“(상금을) 다른 데 안 꿍치고 잘 쓴다고 생각해서? 하하! 항상 상을 주는 분들에게 ‘상금을 어디에다 써야 되느냐’고 묻는데, 다들 나더러 알아서 쓰라고 하더라. 내가 해온 일을, 더 하라고 주는 것 아닐까.”

 

-왜 노숙인에게 관심을 갖게 됐나.

“대학 때 봉사를 다니며 시작됐다. 그땐 청량리역, 서울역에 노숙인이 그득했다. 가족이 통째로 나와서 박스 깔고 사는 경우도, 어린아이도 많았다. 교회 같은 데서 배식을 하면 식판 든 노숙인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하루는 비가 억수같이 내렸는데, 많은 노숙인이 빗물과 함께 밥을 마구 먹더라. 충격이었다. 외관상으로도 너무 더러웠고, 냄새도 났고, 말도 안 통했다. 진료를 보는데, 그때 할 수 있는 게 혈압·혈당 재는 것밖에 없었다. ‘저 사람 병이 이게 다가 아닐 것 같은데, 혈압약과 당뇨약만 줘도 되는 걸까’란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저렇게 살면 어떤 병들이 생기는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그래서 모교 교수직 제안도 거절하고 일평생을 바친 건가.

“일평생까진 아니고, 아직 반평생이다, 하하! 처음엔 많은 생각을 했다. 한땐 이게 전부 종교적 실천에서 비롯된 것인가 생각도 했고. 하지만 가장 주된 건, 죽게 생긴 환자를 일단 살려야 한다는 의사로서 책임감이었다.

 

내 환자들은 내게 몸을 맡긴 사람들 아닌가. 돈이 있든 없든, 나한테 치료를 해달라고 병을 보여주고 모든 것을 내맡긴 이들이다. 의사로서 그런 사람을 안 보면 안 되지 않나. 내가 노숙인을 특별히 더 사랑해서라기보다는, 환자를 보고도 치료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 스스로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의사는 ‘가장 병이 많은 곳’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노숙인의 곁을 택했다.”

 

최영아는 자신이 인생 멘토로 꼽은 요셉의원 설립자 고(故) 선우경식 원장과 닮았다. ‘쪽방촌 슈바이처’로 불린 선우 원장은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수도사처럼 살며 노숙인,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등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위해 헌신했다. 선우 원장은 “가난한 환자들은 하느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라는 말을 남겼다.

 

선우 원장은 신출내기 의사였던 최영아에게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최영아가 선우 원장과 요셉의원에서 일할 때 받은 월급은 90만원. 선우 원장은 최영아의 남편 김유진씨에게 ‘당신이 돈을 벌고 있으니, 아내는 여기서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고 한다. 외과의사인 김씨는 자원봉사 의사로 아내의 일을 돕다가, 2017년부터는 영등포 소재 노숙인 시설 ‘보현의 집’에서 일하고 있다.

 

-선우경식 원장과의 인연은.

“대학병원에서 인턴으로 있을 때였다. 당시 대학병원은 돈이 안 되니까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지 않았다. 대신 시립병원으로 보내는데, 전원(轉院)이 잘 안 될뿐더러 전원을 가더라도 치료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왜 이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는 걸까 고민하다, 영등포에 계시던 선우 원장님을 수소문해 찾아갔고 그때부터 인연이 시작됐다. 모든 것을 여쭤봤다. 한 환자가 술 먹고 피를 토하면서 다일천사병원에 온 적이 있다. 치료하고 돌려보내도 계속 똑같은 증세, 간경화와 식도정맥류 파열로 다시 오더라. 장장 열두 번을. 병원 직원들이 ‘저런 인간은 입원시키지 말자’고 했다. 선우 원장님에게 전화해서 상황을 설명했더니, ‘나는 한 환자를 예순 번도 넘게 입원시켜봤다’고 하시더라. 그 말씀을 듣고 바로 그 환자를 입원시켰다. 노숙인들에게 선우 원장님은 아버지였다. 그들과 함께 먹고 자면서, 진짜 가족이 돼주셨다. 그분을 보며 ‘저렇게 해야 한 사람을 살릴 수 있구나’란 깨달음을 얻었다.”

 

◇‘청송 15년’보다 중요한 건, 그의 병명

최영아는 진료를 보러 온 환자들에게 오랜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말을 건넸다. 하루에 소주를 20병씩 먹었다는 알코올중독 환자에게 “요즘 술 얼마나 마셔? 하루 한 병? 한 잔으로 줄이면 안 돼?”라고, 폐렴에 걸려 위중한 상황까지 갔던 환자에게 “저번에 중환자실에서 죽었다가 살아났잖아. 약 잘 먹고 있죠? 한 달 치 더 줄 테니까, 잘 먹고 한 달 뒤에 다시 와요”라고 했다. 이날 진료실을 찾은 39세 여성은 서울역에서 노숙 생활을 했었다. 10대 때 가출해 20년 가까이 한 남자에게 학대를 당했다고 했다. 최영아는 몸도 마음도 망가진 그녀를 병원에 입원시켜 돌봤고, 의료보호 1종 대상자가 될 수 있게 도왔다. 진료를 본 뒤 나서려는 그녀에게 최영아는 말했다. “약 살 돈은 괜찮아요? 잘 지내고 필요하면 연락해요.”

 

-노숙인을 상대하느라 험한 일도 많이 겪었을 것 같은데.

“노숙인들에게 멱살 잡히고 술집 작부 취급 받고 한 건 대부분 다일천사병원에 있을 때 일이다. 오래전이라 기억도 잘 안 난다. 그런 사람들을 하도 많이 보니까, 나중엔 별로 힘들지도 않더라. 그냥 ‘저 사람이 지금 제정신이 아닌가보다’ 생각했다. 일단 치료가 급선무라서,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섭진 않았나. 여성 의사라서 더 위험했을 수도 있겠다.

“전혀. 남성 의사라고 더 나을 것도 없었다. 우선 다 늙고 망가져서 알코올에 찌들어 내게 온 아저씨들이 불쌍하다는 마음이 컸다. 나를 함부로 대하고 공포스럽게만 구는 게 아니라, 약한 모습을 보이며 살려달라고 매달리기도 하고 그랬으니까…. ‘나 청송(교도소)에서 15년 살다 나왔다’고 겁주는 사람도 많았는데, 전혀 무섭지 않았다. ‘청송 15년’보다, 저 사람의 병명이 무엇인가가 내겐 더 중요했다, 하하!”

 

-’노숙인들을 통해 너무 귀한 깨달음을 많이 얻었다’고 했다.

“의사가 환자를 많이 봐야 좋은 의사가 되지 않겠나. 덕분에 돈을 내고도 못 배울 공부를 굉장히 많이 했다. 다양하고 복합적인 질병에 대해 엄청난 훈련을 받았다. 또 가난한 환자들 대부분이 (의사에게) 많은 인내를 요구하는 사람들이다. 성격 안 좋고, 말 안 통하고, 더럽고, 손대기 싫고, 관계 맺기 힘든 이들을 계속 보니까, 이런 환자를 보면 어떤 질병이 있겠다는 걸 한눈에 알아차리는 것이 너무 쉬워졌다. 환자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졌달까.”

 

-가장 기억에 남는 노숙인은.

“죽을 때 갖고 있던 전화번호가 내 번호밖에 없는 사람들…. 대부분 내가 방세를 내주면서 돌봤던 사람들이다. 무연고 사망자가 돼서 경찰이 신원과 사인을 확인하려고 하는데 이 사람들이 갖고 있는 번호가 하나, 내 전화번호밖에 없었던 거다. 그런 쓸쓸한 죽음들이 마음에 남아 있다.”

 

◇노숙인, 우리 사회 가장 아프고 약한 부분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을 일컫는 법적 용어는 ‘노숙인 등’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전국의 노숙인 수는 8956명(거리·시설 노숙인 합계). 거리 노숙인의 37.5%는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영아는 내과 의사를 ‘사람 몸에서 가장 아프고 약한 부위를 찾아내 치료하는 의사’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사회에서도 가장 아프고 약한 부분을 찾아내 치료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사회 전체가 건강해질 수 있다”고.

 

-노숙인이 생기는 원인이 뭐라고 보나.

“노숙인은 ‘집이 없는 사람’으로 인식되지만, 핵심은 가족(가정)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관계가 파괴된 이들이 노숙인이 된다. 이혼하거나, 가족에게 버림받거나, 가출한 사람들이 노숙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의사 출신 노숙인도 여럿 봤다. 경제적으로 잘살았던 사람일수록 자신이 망가지는 꼴을 더 못 받아들이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가족, 친구 등 의미 있는 인간관계가 있어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노숙인의 질병은 왜 심각한가.

“노숙인은 기본적으로 의식주가 불안하다. 제대로 못 먹고 못 자니 건강할 수가 없다. 나이가 들면 고혈압, 당뇨, 고지혈 같은 것들이 하나씩 오는데, 노숙인들은 이런 것이 한꺼번에 온다. 일상이 제대로 영위되지 않으니 질병을 관리할 수도 없고…. 내과적 병은 생활 습관, 심리 상태와도 밀접하기 때문에 생활이 바뀌지 않는 한 좋아지기가 어렵다.”

 

-노숙인 문제 해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타인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아닐까.”

 

-과거 노숙인과, 지금의 노숙인에 차이가 있나.

“요즘은 연령대가 좀 젊어졌다. 20~30대도 많고, 게임 중독에 빠진 사람들도 적지 않다. 모든 노숙인이 휴대폰을 갖고 있는 것도 예전과는 달라진 점이다.”

 

최영아는 노숙인들의 가난과 질병에 사회의 책임이 있다고 했다. 6·25전쟁의 여파로 생겨난 전쟁 고아와 부랑자들이 노숙인이 된 것을 예로 들었다. 이렇게 사회·정치적 문제가 개인의 삶을 결정짓는데, 노숙인의 불행에 어떻게 개인의 책임만 있겠느냐는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누구든지 노숙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전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특별히 못난 사람만 노숙인이 되는 게 아니다. 평범하고 멀쩡한 이들이 하루아침에 노숙인이 되는 것을 너무 많이 봐왔다. 현대 사회에서 건강하게 삶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러면서 “많은 사람이 자신의 삶 속에서 타인을 배제하지 않고 더불어 살기를 바란다”고 했다. “우선 내 곁의 사람들을 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하다 보니 여기까지, 앞으로도 이렇게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난 최영아가 이 길을 걷는 데에는 부친의 영향이 컸다. 전쟁 때 이북에서 홀로 내려와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밥 굶는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와 먹이고 입혔다. “당시는 삼시 세끼 밥을 먹을 수 있으면 부잣집이란 얘길 듣던 시절이었다. 우리 아버지 말고도 많은 사람이 그렇게 나누면서 살았고, 그게 당연했다.” 최영아와 다일천사병원을 설립한 최일도 목사는 대학생 최영아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여느 여대생 같으면 눈을 가리고 피하고 말, 험한 노숙인들에게 허리를 굽히고 어루만지면서 따스한 말을 건네는 대학생 시절의 최영아 선생 모습이 잊히지 않는 아름다운 사진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노숙인들을 만난 뒤 삶이 바뀌었나.

“그 전에는 부잣집 딸로 우아하게 살고 싶었던 것 같다. 외국 유학을 가고 싶기도 했고. 이 삶을 선택하고 나서는, 보다시피 너무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우아한 삶은 물 건너간 것 같다, 하하!”

 

-대학 동창들과 삶이 좀 다른가.

“오랜만에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면 재산이 다르고, 관심사가 다르다. 자녀들(직업)이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나 하는 기준도 다르고. 페이스북에 비싼 호텔에 간 사진을 올리는 친구들도, 자기 병원이 어떻게 잘되고 있는지를 올리는 친구들도 있다. 나는 주로 ‘노숙인을 위한 임대주택이 필요하다’ 이런 걸 올린다, 하하!”

 

-혹시 그럴 때 당신이 택한 삶이 후회되진 않나.

“굳이 안정되고 풍족한 삶을 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 옆에 있겠다는 선택을 했고, 이 선택을 지키려 노력하다 보니 이렇게 살게 된 거다. 항상 환자를 어떻게 진단하고 치료해야 할지에만 몰두했다.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고, 남은 인생도 웬만하면 이 근처에서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다.”

 

-이 일을 하면서 가장 좋았던 순간은.

“긍정적으로 변하는 사람들을 볼 때. 노숙인이었던 사람, 알코올중독자였던 사람이 변한다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5년, 10년 꾸준히 노력하니까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이들이 있긴 하다. 자격증도 따고, 취직도 하는 걸 보면 마음이 좋다.”

 

-병원 밖에서 마더하우스, 회복나눔네트워크 등도 만들었던데. 가출 청소년을 보살피기도 한다고.

“노숙인들이 병원에서 (치료받고) 나가면 도로아미타불 되는 경우가 정말 많다. 다시 술 먹고 엉망진창이 돼서 병원에 오고, 입·퇴원을 반복한다. 이들이 사람답게 살려면 병원 치료뿐만 아니라, 집과 인간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뜻 맞는 친구들과 함께 주거와 자립을 돕는 이런저런 단체를 만든 거다.”

 

-엄마가 너무 바빠서 자녀들이 불평하진 않나.

“의사로 사는 데 열중하느라, 엄마로 사는 데 관심이 부족했던 때가 있었다. 도리어 가족 관계가 파괴된 노숙인 환자들을 보면서 엄마의 중요성을 새삼 느꼈다. 아들은 지금 대학생, 딸은 고등학생이다. 어릴 때부터 엄마가 하는 일을 잘 이해해줬다. 다일천사병원 노숙인들로부터 귀염을 받고 자란 아들은 지금 의료사회복지사를 준비 중이다.”

 

-꿈이 있나.

“우리나라는 사정이 많이 나아졌으니까. 북한, 혹은 다른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싶기도 하다.”

 

최영아가 지금껏 받은 상금을 합치면 수억원대에 달한다. 그의 상금은 가난한 누군가의 대학 등록금으로, 집 보증금과 월세로, 병원비로 쓰였다. 성천상 상금의 용처를 물었다.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답했다. “재작년에 ‘스마일박스’라는 배달음식 전문식당을 열었어요. 노숙인들에게 일자리를 주려고 만든 건데, 요즘 경기가 안 좋으니 임차료 내기도 힘든 상황이에요. 거기에 좀 보태고, 집세와 학비를 내줘야 하는 애들도 있고요.”

조선일보 이옥진 기자

 
 

10.03  文 정권 알박기 인사와 민노총 노조의 기묘한 공생 관계

 민노총 소속 대우조선해양 노동조합이 한화의 회사 인수와 관련해 ‘현 경영진의 임기 보장’을 조건으로 내걸었다고 한다. 박두선 현 사장은 문재인 전 대통령 동생의 대학 친구다. 지난 3월 대통령 선거 직후 그가 사장에 선임됐을 때 퇴임을 앞둔 대통령의 노골적인 정실 인사라는 비판이 있었다. 노조라면 당연히 반대했어야 할 인사인데도 “현장을 잘 아는 내부 인사”라며 찬성 성명을 냈다. 그러더니 매각을 앞두고는 ‘사장 수호대’로 나선 것이다.

 

박 사장을 포함한 대우조선 현 경영진은 지난 7월 하청 업체 노조의 작업장 점거 사태 때 “거취를 포함해 책임을 지겠다”는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당시 대우조선은 하청 노조의 불법 점거를 방치해 8165억원의 피해를 봤다. 국민에게 물러나겠다는 약속까지 한 무능한 경영진을 노조가 앞장서 계속 눌러앉히라고 새 주인에게 요구한 것을 정상이라고 할 수 있나.

 

산업은행의 관리를 받는 대우조선은 사실상의 국민 세금 12조원을 받고도 부채 비율이 676%에 달할 만큼 만성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누적 순손실이 7조7000억원에 이른다. 작년에도 1조7000억원의 적자를 냈다. 그럼에도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와 노조 반발로 구조 조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준공무원 조직이 된 지 오래다. 노조의 비정상적인 요구는 이런 지위를 보장받기 위한 것이다. 전 정권과 가까운 경영진을 통해 거대 야당의 지원을 받겠다는 계산이 깔려있을 수 있다. 경영진도 노조를 앞세워 연명하려 한다는 의심을 받을 만하다.

 

문재인 정권은 5년 동안 금융 공공 기관에 선임된 임원의 절반 이상을 친정권 이사로 채워 넣었다. 자격 논란을 피하고 무능을 감추려면 세금을 축내면서 노조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 공기업 순이익은 90% 이상 줄었는데도 임직원 수가 30% 가까이 늘어나는 기현상이 벌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권이 바뀌었어도 이들 대부분이 경제계 곳곳에서 고액 연봉을 받으면서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연명을 바라는 전 정권의 알박기 경영진이 민노총을 중심으로 한 노조와 기묘한 공생·협력 관계를 이루면서 변화에 저항하는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

 

10.05 “이게 뭡니까~” 나비 넥타이 매고 한평생 직언… 김동길 교수 별세

▲고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가 2009년 6월 서울 대신동 사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이태경 기자

 

김동길(94) 연세대 명예교수가 4일 오후 10시 50분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호흡기 질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자신의 시신을 의과대학에 기증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유족들은 전했다. 1928년 10월 2일 평남 맹산에서 태어난 김 교수는 미국 보스턴대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연세대 사학과 교수와 14대 국회의원, 신민당 공동대표, 조선일보 논설고문 등을 지냈다.

 

나비 넥타이와 콧수염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그는 수많은 강연과 기고, 방송, 유튜브 등을 통해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설파했고 숱한 독자와 시청자의 호응을 얻었다. 2017~2018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이 만년의 대표적 저술이었다. 유족은 여동생 김옥영·김수옥씨 등이 있다.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불의에 침묵은 용기 없는 것”... 김동길, 생전 논리·유머로 자유 민주주의 전도

▲2013년 3월 TV조선 ‘뉴스쇼 판’에 출연한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당시 김 교수가 출연하는 시간대만 방송 시청률이 정점을 찍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명원 기자

 

“내 기력이 있는 동안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주장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불의(不義)를 보고 말 안 하면 용기가 없는 거지요.”(2015년 조선일보 인터뷰) “이승만 아니었으면 대한민국 없습니다. 공화국을 세운 건 5000년 역사에 처음 아닌가.”(2020년 월간조선 인터뷰)

 

94년에 걸친 직언(直言)의 한평생이었다. 북한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자 주저 없이 고향을 떠났고, 유신 시절에는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으며, 세상이 지나치게 왼쪽으로 기울었다고 여겨졌을 때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다시 묵직하게 설파했다. 지면과 방송, 유튜브를 가리지 않았다.

 

4일 별세한 김동길 교수는 1928년 평남 맹산에서 태어났다. 면장이었던 부친 김병두씨는 광산업에 손을 댔다가 가세가 기울었고, 어머니가 가족을 돌보며 그와 그의 누나(김옥길 전 문교부 장관) 등 4남매를 공부시켰다고 한다. 광복 직전 잠시 국민학교 교사 생활을 했고, 1946년 월남했다.

 

연희대(현 연세대) 영문학과를 다녔고, 미국 유학을 떠나 인디애나주 에반스빌대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보스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을 때 주제는 링컨이었는데 “링컨은 정직한 사람도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귀국 후 연세대 사학과 교수를 지내며 잡지 ‘씨알의 소리’ 등에 박정희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쓰는 등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유신 정권 때인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기소돼 ‘학생운동권의 배후 조종자’로 몰려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이때 해직된 뒤 1979년 10·26 때 일시 복직했다가 1980년 신군부의 탄압으로 다시 해직됐으며, 1984년에야 복직할 수 있었다. 그는 훗날 박정희를 회고하며 “유신체제가 잘못된 것이 많지만 조국의 경제를 이만큼 만든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해직 기간 중 에세이, 신문 칼럼 집필과 강연으로 대중과 친숙해지며 ‘스타 학자’의 반열에 올랐다. 콧수염과 늘 매고 다니던 나비 넥타이는 트레이드 마크처럼 떠올랐고, 눈치 보지 않고 정면으로 일갈하는 “이게 뭡니까?”라는 그의 말이 유행어가 됐다. 1985년 야당이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직후 ‘3김씨는 이제 정치를 그만두고 낚시나 할 것이고 민주주의를 위해 40대가 기수 역할을 하라’는 신문 칼럼을 써서 역풍을 맞기도 했다.

 

1991년 강경대군 치사 사건 직후 “그를 열사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다가 논란을 빚자 사표를 내고 학교를 떠났다.

 

이후 정치에 입문해 새 정치를 주장하는 ‘태평양시대위원회’를 창립하고 한때 대권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1992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에 합류, 대통령 후보를 양보했다. 14대 총선에서 서울 강남 갑에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신민당과 자민련 등에서 정치 활동을 계속하다 1996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2011년 종합편성채널 개국 이후 그는 또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각종 시사 프로그램에 ‘최고령 출연자’로 나오면서도 정확한 언변, 정연한 논리와 유머로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TV조선 ‘뉴스쇼 판’에 출연했을 당시 그가 나오는 시간대만 되면 시청률 곡선이 정점을 찍을 정도였다.

 

당시 방송 관계자는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다. ‘직구’다. 그러나 반드시 논거가 붙는다. 중국 고전과 영국의 역사, 그리고 미국 헌법까지. 감성은 팔딱팔딱 스무 살 청춘이고, 도저(到底)한 지식은 이백 살 현자다. 직설에 통찰이 더해지니, 철학이 된다.’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던 그는 “백성을 이끌고 섶을 지고 불로 가는 사람들”이라며 종북(從北)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좌우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생존에 관한 문제”라고 했다.

 

2017년 11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조선일보 주말판 ‘WHY’와 ‘아무튼 주말’에 54회 연재한 칼럼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은 사실상 그가 글로 쓴 마지막 역작이었다. 첫 회 정주영부터 마지막 회 김일성까지 온갖 현대사의 주요 인물들을 거침없는 필치로 평한 이 글은 숱한 독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구순을 넘긴 2019년 그는 유튜브 채널 ‘김동길TV’를 개설해 유튜버로 나섰다. 채널 개설 1년도 안 돼 구독자가 30만 명을 넘어섰다. 올해 초 안철수 대통령 후보 후원회장을 맡았고 “포기할 줄 아는 아량을 가진 사람만이 다음 시대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며 야권 후보 단일화를 위한 결단을 요구했다.

 

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지만 “결혼하지 않았을 뿐 늘 사랑하고 살았고, 여성을 떠나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2일 생일을 맞아 이철 세브란스의료원장에게 서신을 보내 “내가 죽으면 장례식과 추모식을 생략하고 시신은 연세대 의료원에 기증해 의과대학생들의 교육에 쓰여지길 바란다. 누가 뭐래도 이 결심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이 뜻에 따라 시신은 기증되며, 빈소는 병원 대신 자택이었던 서대문구 대신동 김옥길기념관에 마련된다. 장례식 대신 치러질 영결예배는 7일 오전 11시로 예정됐다.

유석재 기자

 
 

10.06  시신은 연세대, 살던 집은 이대에... 김동길, 다 기증하고 떠났다

故 김동길 교수 1928~2022
유언 따라 병원 아닌 자택에 빈소… 정재계 인사 등 600여명 조문
“약자에겐 한없이 다정하고 강자의 잘못엔 물러서지 않던 분”
7일 발인 대신 가족 예배 예정

▲5일 서울 서대문구 김옥길기념관에서 공개된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의 유서.

 

“너무 일찍 가셨습니다. 항상 뵐 때마다, 아무리 본인이 힘드셔도 유머와 따뜻함으로 맞아주셨던 것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안철수 국민의힘 의원)

 

“대학 시절부터 마음속으로 깊이 존경하던 분인데…. 돌아가셨다니 정말 슬플 뿐입니다.”(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5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 김옥길기념관. 검은 옷을 입은 조문객들이 잇달아 건물 1층으로 들어섰다. 전날 밤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별세한 김동길(94) 연세대 명예교수의 빈소가 이곳에 마련됐기 때문이다. 한평생 직언(直言)으로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깊이 설파했던 김 교수의 영정 앞에서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며 넋을 위로했다.

 

김옥길기념관은 김동길 교수의 누나이자 이화여대 총장, 문교부 장관을 지낸 김옥길(1921~1990) 여사를 기념하기 위한 건물로, 1999년 김 교수의 집 마당 자리에 건립됐다. 자택 앞에 빈소를 마련한 이유는 ‘나를 위한 장례식을 병원에서 치르지 말라’고 밝힌 김 교수의 유지 때문이다. 장소가 협소해 화환은 윤석열 대통령이 보낸 것 말고는 모두 돌려보내야 했다.

 

▲5일 오후 보수진영 원로인사인 故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서대문구 김옥길기념관에서 조문객들이 헌화 후 묵념하고 있다. 2022.10.05 /남강호 기자

 

김 교수가 2011년 원고지에 직접 써서 이철 세브란스의료원장에게 보낸 서신은 이날 공개됐다. ‘내가 죽으면 장례식·추모식을 일체 생략하고 내 시신은 곧 연세대학교 의료원에 기증하여 의과대학생들의 교육에 쓰여지기를 바라며, 누가 뭐래도 이 결심은 흔들리지 않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고인의 뜻에 따라 시신은 연세대에 기증됐고, 김옥길기념관을 포함한 자택은 2020년 이화여대에 기증됐다. 한 지인은 “집을 제외하고 남은 재산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김대기 대통령 비서실장,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 국민의힘 정진석 비상대책위원장과 주호영 원내대표, 권성동·김석기·안철수·윤상현 의원,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장, 강창희 전 국회의장, 이종찬 전 국정원장, 유종호 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김장환 극동방송 이사장,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자녀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이사장,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과 간부 일동 등이 빈소를 찾았다. 일반인을 포함해 약 600명이 조문했다.

 

안철수 의원은 “(지난 대선) 단일화 국면에서 ‘대의(大義)를 위해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계속 기억할 것’이라는 말씀을 해 주셨는데 그것이 제게 힘이 됐다”며 “최근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드렸더니 ‘금방 퇴원할 테니 집에서 보자’고 하셨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고 말했다. 김동길 교수는 지난 대선에서 안철수 대통령 후보의 후원회장을 맡았었다.

 

유종호 회장은 “정말 재능과 기억력이 뛰어나고 사회적인 기여도 많이 하신 분인데 이렇게 가실 줄은 몰랐고 안타깝다”며 “노년이라고 하는 것이 내일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고인의 제자로 임종을 지켜본 김동건 전 KBS 아나운서는 “지난 2월 코로나19에 걸렸다 회복하셨지만, 3월에 입원하신 뒤 최근 평소와는 아주 다르게 쇠약해진 모습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고인에 대해서는 “평생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헌신해 오시며 귀감이 되셨고, 언제라도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칠 수 있다는 사랑과 진심, 의협심과 정의감을 보여 주신 분”이라며 “사람은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비굴해지기 마련인데, 박사님은 약자에게 다정했으며 강자의 잘못 앞에서 물러서는 일이 없었다”고 했다.

 

유족들은 고인의 발인을 대신한 가족 단위의 예배를 7일 오전 11시 김옥길기념관에서 거행할 예정이다.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10.07  “대동강변 기적이 왜 없는지 압니까?” 故 김동길 교수의 ‘돌직구 발언’들

▲2013년 3월 18일 TV조선 뉴스쇼‘판’에 출연한 김동길 박사가 최희준 TV조선 앵커, 박은주 조선일보 문화부장과 토론하고 있다./이명원 기자

 

분명 안철수와 정몽준의 눈시울은 붉게 젖어 있었습니다. 한때 정치인이었거나 한때 정치인이 아니었던 그 두 사람은 분명 지금까지 가식(假飾)의 표정을 보인 적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적어도 지금은 달랐습니다. 지난 5일 김동길(1928~2022) 연세대 명예교수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 김옥길기념관을 찾아 조문을 하고 떠나면서 이들은 애써 슬픔을 억누르고 있었습니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은 저를 포함한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무 일찍 가셨습니다! 항상 뵐 때마다, 아무리 본인이 힘드셔도 유머와 따뜻함으로 맞아주셨던 것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이 5일 서울 서대문구 김옥길 기념관에 마련된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의 빈소 조문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뉴스1
 

그 다음에 주목할 만한 말을 했습니다. “(지난 대선) 단일화 국면에서 ‘대의(大義)를 위해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계속 기억할 것’이란 말씀을 해 주셨는데 그것이 제게 힘이 됐습니다.” 어딘가 자기PR이 함유된 멘트임은 분명했지만,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고백이었습니다.

 

당시 안철수 후원회장을 맡고 있던 김동길 교수의 그 말이 단일화의 지렛대 중 하나가 됐다는, 다시 말해 윤석열 정부의 정권교체에 김동길 교수가 큰 역할을 했다는 의미였습니다.

 

일반인을 포함한 약 600명의 사람들이 이날 빈소를 찾았습니다. ‘나를 위해 병원에 장례식장을 만들지 말라’며 자신의 시신을 기증하기로 했던 김 교수의 유언에 따라, 자택 마당에 20여 년 전 건립했던 김옥길기념관의 비좁은 1층 로비에 마련한 시신 없는 빈소였습니다. 큰 소리로 “선생님!”을 외치며 자신이 그로부터 무엇을 배웠는지를 대화하듯 말하는 남성도 있었고, 실신에 가까운 자세로 옆 사람에게 매달리며 오열하는 여성도 있었습니다. 모두 일가친척이 아닌 일반인으로 보였습니다.

 

김옥길기념관을 포함한 자택은 김동길 교수의 누나로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옥길(1921~1990) 전 문교부 장관과의 인연에 따라 이미 이화여대에 기증됐습니다. 김동길 교수의 장서는 상당 부분 국회도서관에 기증됐고, 남은 장서도 기증 절차를 밟고 있다고 합니다. 그 밖에 남은 재산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고 한 지인이 전했습니다. 한마디로 모도 다 주고 떠난 것입니다.

 

김동길 교수가 제자 중에서 생전 가장 아낀 인물 중 한 사람이었던 김동건 전 KBS 아나운서는 이날 빈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박사님의 평생 사신 모습은 귀감(龜鑑)이라 할 만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헌신해 오신 일생이었죠. 누가 그분보다 더 민주주의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요? 언제라도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칠 수 있다는 진심이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엄혹한 유신 시절에도 감옥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러고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란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비굴해지기 마련이죠. 하지만 박사님은 늘 약자에게 다정했으며 강자의 잘못 앞에서 물러서는 일이 없었습니다.”

 

마치 ‘가요무대’를 진행하듯 차분하고 막힘 없는 톤이었습니다. 항상 그것을 생각하고 느끼며 살아온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핵심 멘트였습니다.

▲낭만논객’ 김동길 교수, 김동건 아나운서, 가수 조영남은 20대 관객 100명을 앞에 두고 고무된 듯 쉴새 없이 말을 주고받았다. 3시간 넘는 녹화 동안 세 사람은 한 번도 쉬지 않았다.

 

 

4일 밤 김동길 교수가 별세할 무렵 신문사로 들어온 제보 덕에 저는 그 별세 소식을 가장 먼저 쓸 수 있었습니다. 이른바 특종이었지만, 전혀 기쁘지 않은 특종이었습니다. 기사를 쓰면서도 의아했습니다. 아마도 그분은 영영 돌아가시지 않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거침없는 직언(直言)을 하실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평생 권력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게~ 뭡니까?”를 서슴없이 외쳤던 김동길 교수의 최근 ‘말’ 몇 가지를 뽑아 보겠습니다.

 

그와 그의 누나인 김옥길 전 문교부 장관을 키워낸 사람은 어머니 방신근씨였습니다.

 

“한글만 겨우 깨친 어머니였어요. 시골(평안남도 맹산) 면장을 하시던 아버지가 ‘노다지를 찾겠다’며 나갔어요. 집 팔고, 논 팔고, 밭 팔고, 늘 밖을 돌면서 돈을 벌어다 주지 못했어요. 어머니가 가족을 돌봤죠. 남의 집 빨래하고 삯바느질하고. 그러면서 누님을 공장에 보내지 않고 여학교에 보냈어요. ‘못살면서 계집애 공부시킨다’고 빈정거리는 사람이 왜 없었겠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절대 화를 안 내요. ‘뉘 집에선 돈을 쌓아놓고 공부시키나요?’ 이렇게 대꾸하셨지요. 그 딸이 이화여대를 나오고, 총장이 되고, 문교부 장관이 되고. 이런 꿈은 한 여성(어머니)의 가슴에서 나온 겁니다.”(2013년 3월 조선일보 인터뷰)

 

1974년 유신 정권에 항거하다 투옥된 것에 대해 일각에선 ‘박정희에 대든 것이 아니냐’며 그를 좋지 않게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의 공과(功過)에 분명한 선을 그었습니다.

▲윤보선·김대중·함석헌·지학순·이태영·김동길씨 등‘반(反)유신 인사’들의 복권을 보도한 1980년 3월 1일자 조선일보.

 

 

“박정희가 잘못한 거 많아요. 그렇지만 건강보험 만든 것도, 경제를 이만큼 만든 것도 박정희 정권이에요. 박정희 땜에 감옥에도 살았지만, 한 번도 욕하지 않아요. 다 끝나면 잘한 걸 생각해야지, 그때 이것도 잘못했고 저것도 잘못했고. 그때 말하면 될 거 아니에요? 그때 말 못 했으면 입 다물고 있으란 말이에요.”(2020년 5월 월간조선 인터뷰)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 지원 혐의로 법정에서 15년형을 선고 받아 수감됐으나 10개월 만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됐습니다. 출감한 지 얼마 안 돼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박정희 정권에 몹시 비판적인 프레이저 미 하원의원이 방한해 미 대사관에서 리셉션이 있었어요. 프레이저 의원이 ‘미국이 어떻게 하면 한국 민주화를 돕겠는가?’고 묻자, 야당 정치인들이 ‘스팽크 힘(spank him·박정희 엉덩이를 걷어차달라)’이라고 답했어요. 내 차례가 됐을 때 ‘미국이 한국 민주화에 도울 게 없다. 민주화는 우리가 한다. 매도 우리가 맞고 감옥에도 가고 해야 달성된다’고 답변했어요.”(2015년 10월 조선일보 인터뷰)

 

▲1975년 2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의 석방조치로 풀려난 김동길 교수가 안양교도소 앞에서 누님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가운데)과 함석헌(왼쪽), 계훈제씨 등에 둘러싸여 출감 소감을 말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1992년 대선에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창당한 국민당에 합류하고, 그에게 대통령 후보를 양보했을 때의 비화를 얘기한 적도 있었습니다.

 

“총선에서 국민당이 30석 이상 이기고 나니 주위에서 정 회장을 부추겼어요. ‘CNN이 조사했는데 회장님이 압도적으로 된다’는 식으로 말이죠. 어느 날 정 회장이 찾아와 ‘결혼해서 가정을 가져라. 내가 200억원을 대주겠다’고 하는 걸 ‘이 나이에 결혼 안 한다’고 답했어요. 며칠 뒤 ‘김 교수는 젊으니 나중에 기회가 있다. 이번에는 내가 나간다’고 하는 거예요. 이게 뭡니까. 그때 이런 내용을 공개했으면 나는 살지요.”(2013년 3월 조선일보 인터뷰)

 

▲1992년 12월 1일. 14대 대통령 선거기간 중 국민당의 김동길, 이주일 씨가 유세 현장에 모인 청중들 앞에서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초기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받을 위기에 처하자 이런 칼럼을 썼습니다.

 

“인류의 역사의 어느 때에나 인간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은 진실인데, 진실이 없으면 사람이 사람 구실 못 하게 마련입니다. 그런 자가 공직의 높은 자리에 앉으면 많은 백성이 고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무현씨는 정말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그가 5년 동안 저지른 일들은 다음의 정권들이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도덕적인 과오는 바로잡을 길이 없으니 국민에게 사과하는 의미에서 자살을 하거나 아니면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서 복역하는 수밖에는 없겠습니다.”(2009년 4월 칼럼 ‘먹었으면 먹었다고 말을 해야죠’)

 

그 다음 달에 노무현 전 대통령은 투신자살했고, 그는 5공 시절 3김에게 물러나라고 권한 이른바 ‘낛시론’ 이후 또 다시 온갖 비난의 표적이 됐습니다. 그런데 그 비난의 이유는 뭔가요? 그 비난이 타당하다면 노 전 대통령이 마지막 순간에 김동길 교수의 충언을 액면 그대로 해석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였다는 말일까요? 글쎄요. 저는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 국면에서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기개 또는 배짱을 생각하면 저로서는 여전히 가늠이 되지 않는 수준입니다.

 

▲김동길 교수가 2009년 6월 9일 서울 대신동 사무실에서 자신의 홈페이지에 쓴 글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이태경 기자

 

 

그는 얼마 뒤 그 글에 대해 ‘그렇다고 죽다니 말이 되느냐’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자살을 권장한 게 아닙니다. 의젓하게 구속되고 감옥에서 10년 살라면 10년 살고, 그런 인물이 되란 뜻이었어요. 그의 말 때문에 대우건설 남상국 사장이 자살했고 안상영 전 부산시장이 자살했잖아요. 우리가 대학입시에 실패해 아파트에서 자살하는 학생들 얼마나 야단쳐요. 그런데 어른 중의 어른인 대통령이 국민에게 보여준 게 뭡니까. 자살이라니요, 끝까지 살아야지요.”(2009년 6월 조선일보 인터뷰)

 

문재인 정부에서도 비판의 강도를 낮추는 일이 없었습니다.

 

“처음엔 그런 말도 했어요. ‘삼성을 해체해야 한다.’ 이 사람들이 뭐가 단단히 잘못된 사람들인가, 싶었어요. 자유민주주의 헌법하에서 대통령이 돼서 말이에요. 엉뚱한 정책을 만들어요. 삼성 해체는 이젠 어려우니까 안 하죠. ‘북과 남이 다 형제 아니냐?’ 그 말에 반대하는 거 아니에요. 나도 북에서 왔으니까. 그렇지만 말이에요.

 

북의 체제를 전혀 비판 못 하잖아요. 김정은은 문재인 대통령을 맹공격해도 이쪽에선 한마디도 못 해. 중국에 대해서도 말 못 해요. 그쪽에선 뭘 달래면 줘야 되고. 사대주의(事大主義)지 뭡니까. 끽소리도 못 하고 말이야.”(2020년 5월 월간조선 인터뷰)

 

북한 체제에 대해 여전히 호의적인 일부의 시각에 대해선 다소 과격한 표현을 써 가며 그 허구를 지적했습니다.

 

“북한에는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가 한 사람도 없다고요? 뭐 없을 수도 있죠. 나는 본래 북한 사람이니까 알아요. ‘야 저기에 환자 한 명 나오면 죽겠구나. 그냥 생기는 대로 없앨 거다. 환자가 없다고 해야 하니까…’ 그 생리도 모르고 말이죠. (중략)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입니다. 한강 변의 기적은 일어나는데 왜 대동강 변의 기적은 안 일어납니까? 자유가 없으니 그런 거 아니에요, 자유가.”(2020년 5월 월간조선 인터뷰)

 

우리 사회의 좌와 우를 ‘진보’와 ‘보수’로 구분하는 것에 대해 통렬한 쓴소리도 했습니다.

 

“우리가 쓰는 말 중에 제일 웃긴 게 보수, 진보라는 구분법입니다. 보수는 뭘 지켜서 보숩니까? 대학교수 중에 미국 유학 다녀와서 진보니 개혁이니 하는 사람들이 ‘6·25 때 유엔군이 참전하지 않고 맥아더 장군이 없었으면 통일이 됐을 것’이라고 해요. 그럼 어떻게 됐을까요. 그런 교수들 보고 저는 ‘그때 통일됐으면 당신 같은 사람들은 유학은 고사하고 진보니 개혁이니 하는 용어도 사용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해줘요.”(2009년 6월 조선일보 인터뷰)

 

광우병 사태의 촛불 시위 당시 ‘저 뒤에 분명 또 다른 정부가 있을 것이다’고 생각했다는 그는 세월호 사태의 정치화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건 정말 ‘강철 멘탈’이라 할 만한 수위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 계획하고 있었던 거예요. 내가 볼 때 순진한 젊은 사람들 머리에서 그런 생각이 안 나오거든. 어디에 지휘 본부가 있는 거지요. 세월호도 그래요. 일반 사람들이 그 참사를 그렇게 활용할 수 있습니까? 이순신 장군은 12척의 배로 승리를 거뒀는데 이 정권은 배 한 척으로 승리를 거뒀다는 말이 나올 만큼이었지요.

 

그게 문재인 대통령 머리에서 나왔다고요? 그럴 리가요. 보라우, 문 대통령은 자기가 대통령 될 길이 열리자 곧 팽목항으로 갔어요. 방명록에 뭐라고 썼어요? ‘얘들아 고맙다.’ 고맙긴 죽은 게 뭐가 고마워요? 물속에서 죽은 어린 아이들한테 할 말입니까. 문제가 있는 거예요.”(2020년 5월 월간조선 인터뷰)

 

▲김동길 연세대학교 명예교수가 2014년 1월 10일 오후 서울 송파구 지역사회교육회관에서 열린 홈빌더 운동 선포식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뉴스1

 

 

그래도 결국은 끌어안는 포용이 중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6·25 때) 이 근처 무허가 집에 살던 화가가 있었어요. 이북에서 온 사람들인데, 미처 피란을 못 갔어요. 살기 위해서, 밥 먹기 위해서 인민군을 도왔다고 해요. 그럼 돌아온 사람들이 ‘우리끼리 피란 가서 미안하다’ 하고 껴안아줘야지. 부역을 했다고 쏴죽였어요. 할 수 없이 그렇게 한 건데. 대통령이 ‘서울 포기 안 하니까 안심하고 계십시오’ 해놓고. 그걸 믿고 피란 못 갔다가 고생했으면 돌아와 ‘미안하다’고 해야지. 그걸 부역자라고… 민족이 이래선 안 되지요. 링컨이 왜 위대해요. 남부 반란 때문에 지독히 고생하고도 ‘악의를 품지 말고,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라고 말했잖아요. 이게 뭔가 있는 문명 아닌가요.”(2013년 3월 조선일보 인터뷰)

 

이 부분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은데, 김동길 교수의 전공은 철학이나 문학이 아니라 역사학이었고, 재직한 학과는 연세대 사학과였으며,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링컨이었습니다.

 

청중을 사로잡는 강연의 비결에 대해선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물론 도저히 쉽게 따라갈 수 있는 경지는 아닙니다.

 

“자기 얘기를 하는 게 좋은 말이 아니에요. 좋은 말은 상대방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상대의 마음을 읽느냐’고 묻자) 청중을 보면 얼굴에 나타나 있어요. 청중들 얼굴에 내 원고가 있는 거예요. 나는 따로 원고를 준비하는 대신 청중의 얼굴에 쓰인 원고를 읽어요. 그런 센스가 없어지면요? 나와서 얘기하는 거 그만둬야지요.”(2013년 3월 조선일보 인터뷰)

 

오랜 세월 동안 그에게 정서적인 안정감을 주는 요소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정신적인 안정감을 주는 요소가 다르겠지만, 제 경우는 꾸준함과 익숙함입니다. 꾸준한 습관과 생활환경이 마음의 평화를 주는 것 같습니다. 한 집에 오래 사는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1947년부터 살던 집에 아직도 살고 있으니 벌써 68년째네요. 멀리 여행을 가거나 힘든 일이 있어도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나만의 안식처가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심됩니다.”(2015년 10월 헬스조선 인터뷰)

 

▲2020년 5월 월간조선 인터뷰 당시의 김동길 교수. /월간조선

 

 

평생 독신으로 산 것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도 사랑하지 않고 살아본 적은 없어요. 여성을 떠나본 적은 없어요. 이렇게 사는 사람은 늘 동경 속에 살잖아요. 동경도 있고, 젊었을 때는 뭔가 많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렇지만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노력으로 살았어요. ‘남들이 만들어 놓은 것에 훼방을 놓는 일은 안 한다’는. 그런데 일흔이 넘으니 문제가 되지 않아. 공자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칠십이 되니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를 어기지 않았다).’ 형이상학적인 면에서 사랑은 언제나 있을 수 있는 거예요. 예전에 사랑하던 사람들도 많이 가고. 이들이 내 가슴속에 살아 있는 거지.”(2013년 3월 조선일보 인터뷰)

 

죽음을 미리 준비해야 더 깊이 있는 삶이 될 것이란 말도 했습니다.

 

“죽음에 대해 미리 생각해두라는 말도 하고 싶네요. 준비 안 된 상태에서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것만큼 인생을 허무하게 보내는 일도 없을 겁니다.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지, 어떻게 죽음을 준비하고 싶은지 미리 생각해보세요. 살아 있는 시간이란 아름다운 인생의 마침표를 위해 준비하는 행복한 기간이라고 여기면 인생이 좀더 의미 깊어질 겁니다.”(2015년 10월 헬스조선 인터뷰)

 

5일 서울 서대문구 김옥길기념관에서 공개된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의 유서.

 

 

김동길 박사가 TV조선 ‘뉴스쇼 판’에 출연해 시청률을 견인할 때 프로그램 앵커인 박은주 기자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다. ‘직구’다. 그러나 반드시 논거가 붙는다. 중국 고전과 영국의 역사, 그리고 미국 헌법까지. 감성은 팔딱팔딱 스무 살 청춘이고, 도저(到底)한 지식은 이백 살 현자다. 직설에 통찰이 더해지니, 철학이 된다. ‘너무 연로한 것은 아닌가, 준비는 착착 해오시려나, 한번 말씀을 시작하면 도저히 끊을 수가 없는데….’ 방송 한두 번 만에 앞의 두 걱정은 기우로 판명났다. 셋째는 여전한 숙제다. 혀끝의 말로써 지혜의 말에 대적할 수 없으니, 어쩔 것인가.”

 

▲TV조선 뉴스쇼 ‘판’에 출연한 김동길 박사가 최희준 TV조선 앵커, 박은주 조선일보 문화부장과 토론하고 있다.

 

 

개그맨 최병서가 TV에서 콧수염을 달고 나비넥타이를 맨 채 ‘최동길’로 분장해 그를 흉내낸 것은 1991년의 일이었습니다. “이게~ 뭡니까?” “이래서야~ 되겠습니까?”라는 말이 국민적 유행어가 됐습니다. 그건 MBC ‘일요일 일요일밤에’였죠. 다른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냥 넘어갔을텐데 김동길 교수는 그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사실 내가 꼭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고 ‘이건~~’ 정도에서 그치는데 많이 희화하했더라”며 껄껄 웃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그는 정말로 강연과 연설에서 “이게~ 뭡니까?”라는 말을 실제로 쓰게 됐습니다. 주로 권력자를 당당히 질타할 때였죠. 아예 1996년에는 SBS에서 최병서와 함께 출연하는 ‘동길 대 동길’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김동길’과 ‘최동길’의 대담이었죠.

 

이제 마지막 멘트 하나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김동길 교수의 빈소가 차려졌던 지난 5일, 근처 식당 테라스에서 기사를 송고하고 있었는데 교수풍의 백발 신사 한 명이 빈소에서 나와 골목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마스크를 쓰긴 했지만 누군지 곧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을 지낸 문학평론가 유종호 전 이화여대 교수였습니다. 학자가 별세했는데 정작 다른 학자의 목소리를 좀처럼 못 담지 않았나? 얼른 뛰어가 말씀 한 마디를 청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 가지 비판을 받으면서도 사회적인 기여 역시 많이 하신 분입니다. 재능이 아주 많고 기억력도 뛰어나신 분이었죠. 추종자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그렇게 기운이 좋으신 분이 코로나19 후유증(으로 추정되는 질병)으로 가실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고선 쓸쓸한 표정으로 이 한마디를 잠언처럼 덧붙였습니다.

 

“노년이라고 하는 것이... 내일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됐습니다.”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저는, 특히 김동길 교수가 현실 정치에 깊이 개입하던 1990년대에, 그가 진정한 의미의 학자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한 적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떠난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이제 어느 누가 그토록 중(重)한 자리에서, 올곧게,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좌파 세력이 교과서에서 빼려고 획책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한 가치를 묵직하고 유머러스하고 설득력 있게 설파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당대의 그 어느 역사학자도 하지 못했던 일을 역사학자인 그는 한평생 해왔습니다.

 

94년에 걸친 그의 한평생이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였습니다. 그의 빈자리가 너무나 커 보입니다.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10.08  혹독한 겨울이 닥쳐오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전쟁의 장기화와 달러환율 강세로 인해 전 세계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습니다. 장바구니 물가가 폭등한 스코틀랜드에서는 한 번 요리를 해서 나흘을 버티는 가족들이 있고,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겨울 전력공급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해 땔감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라니냐 현상으로 인해 유럽에는 예년보다 일찍 추위가 찾아왔고, 우크라이나전쟁으로 인한 에너지난으로 어느 때보다도 혹독하고 두려운 겨울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무려 20만 명이 넘는 러시아 남성들이 동원령을 피해 해외로 탈출했고, 그 대열에 끼지 못한 채 생활고를 겪는 취약계층들은 ‘냉동생선 5㎏가량의 인센티브’를 받고 병사로 입대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줄여서는 안 될 것들이 줄어들고
늘려서는 안 될 것들이 늘어나
서로를 향한 돌봄과 보살핌만이
가혹한 겨울 막아 낼 유일한 무기

▲선데이 칼럼

 

국제사회뿐 아니라 한국사회도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결코 줄여서는 안 될 예산, 노인과 장애인과 어린이를 비롯한 취약계층을 보호하는 정부예산이 줄어들고 있는 것입니다. 정부는 노인 일자리 예산을 대폭 삭감했고, 경로당 예산마저 삭감하여 노인들의 복지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으며, 병영생활관 예산을 대폭 삭감하여 나라를 지키는 병사들의 복지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여전히 턱없이 부족했던 장애인 권리예산이 삭감되어 장애인들의 복지에 빨간불이 켜졌으며, 임산부와 초등학생을 위한 농산물 지원예산까지 삭감되면서 예비 엄마들과 아이들의 먹거리마저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취약계층을 위한 돌봄 예산, 자라나는 꿈나무들과 병사들의 먹거리 예산조차 삭감됨으로써 다가오는 겨울은 더욱 춥고 험난해질 것 같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돕고 보살피는 돌봄 예산이 줄어들면 그 피해는 사회 전체로 퍼져갈 것입니다.

 

세상살이가 험난해지는 또 하나의 뚜렷한 징후, 그것은 결코 늘어서는 안 될 것이 자꾸만 늘어가는 것입니다. 지방 의료원에서는 의사를 구하지 못해 전국 35개 지방의료원 결원율이 14.5%로 치솟았습니다. 1분 1초가 급한 응급환자가 진료 자체를 받을 수 없는 기막힌 상황이 늘어납니다. 폐지를 주워 생계를 간신히 꾸려 가는 노인들이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노인들이 쇠약해진 몸으로 매일 11시간이 넘게 노동해도 손에 쥐는 것은 평균 시급 948원입니다. 더구나 쌀값이 폭락하면서 한숨짓는 농민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문체부는 ‘윤석열차’라는 카툰을 그린 고등학생의 작품을 전시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엄중히 경고하며 “전국학생만화공모전에서 행사 취지에 어긋난 작품을 선정해 전시한” 책임을 물었습니다. 이것은 예술과 창작의 자유를 침해하는 간접적인 검열이 늘어나는 결정적인 징후입니다. 작가에게 반드시 필요한 표현의 자유가 사라진다면, 작가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자마자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검열해야 한다면, 우리는 어디에 가서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를 찾아야 할까요.

 

결코 줄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들이 줄어들고, 결코 늘어나서는 안 될 사회적 고통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고정희 시인의 피맺힌 시, ‘야훼전상서’가 떠오릅니다. “신도보다 잘사는 목회자를 용서하시고, 사회보다 잘사는 교회를 용서하시고, 제자보다 잘사는 학자를 용서하시고, 독자보다 배부른 시인을 용서하시고, 백성보다 살쪄 있는 지배자를 용서하소서!” 우리는 신도보다 잘사는 목회자가 아니라, 백성보다 배부른 지배자가 아니라, 만백성의 아픔을 치유하는 성실한 일꾼으로서의 리더를 원합니다. 끔찍한 스토킹을 당하고 불안에 떨며 잠조차 이루지 못하는 여성들의 안전을 든든히 지켜 주는 리더, 고통받는 모든 존재의 커다란 피난처가 되어 주는 리더, 젊은이들이 마음껏 꿈의 날개를 펼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는 리더를 원합니다. 우리는 아이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어른, 젊은이들의 꿈을 힘차게 응원해 주는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번 겨울은 단순한 계절의 순환이 아니라, 우리 인류 전체에게 닥칠 엄혹한 겨울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서로를 향한 돌봄과 보살핌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만은 결코 줄여서는 안 되는 것, 그것은 바로 타인의 고통이 바로 내 고통이 될 수 있다는 통렬한 깨달음입니다. 가정불화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은 아버지를 생각하면 무력감이 연상되고, 어머니를 생각하면 의심이 연상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어른들을 생각하면 ‘무기력’이 떠오르고, 미래를 생각하면 ‘의심’부터 떠오른다고 말할까 봐 두렵습니다. 결코 이것만은 줄이지 말아야 할 것, 그것은 뭔가 잘못된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질 용기입니다. 우리가 더 나은 오늘을 향해 질문을 던질 용기만은 잃지 않기를. 당신이 세상을 더 나은 쪽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만은 잃지 않기를. 이제 우리 사회의 최대 과제는 서로를 향한 ‘돌봄’이 되어야 합니다. 매서운 추위를 몰고 오는 전 인류의 겨울이 닥쳐오고 있습니다. 서로를 향한 따스한 돌봄만이 인류의 이 가혹한 겨울을 막아 낼 유일한 무기일 것입니다. 돌봄을 향한 돌봄, 사랑을 향한 사랑, 서로를 향한 보살핌과 배려의 몸짓만은 줄이지 말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당신의 겨울이 부디 춥고 외롭지 않기를, 우리가 부디 서로의 쓸쓸한 어깨에 따스한 목도리를 둘러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찾기를 바랍니다.

중앙일보  정여울 작가

 

10월 12일  연봉 1억에 ‘평생 車값 할인’ 파업, 이게 기득권 노조 본색

기아자동차 노조가 13일부터 파업에 들어간다고 한다. 기아는 25년 이상 근무하고 퇴직한 직원에게 2년에 한 번씩, 기아차 구입 때마다 평생 30%를 깎아주는 혜택을 베풀어왔다. 그런데 올 노사 협상에서 75세 상한선에 3년에 한 번씩, 할인율은 25%로 하는 합의가 이뤄졌다. 대신 대폭 임금 인상이 제시됐다. 기본급 월 9만8000원 인상, 경영성과금 200%+500만 원, 목표 달성 격려금 100%, 품질 향상 격려금 150만 원 등이다. 하지만 ‘평생 혜택’을 후퇴시킬 수 없다며 대책위가 합의안을 부결시켰다.

과거 경제가 급성장하고 우수한 인력이 부족했던 시절의 유산이지만, 완전히 달라진 환경에서도 기득권에 집착하면서 기업의 미래는 물론 국가 경제도 좀먹는 일부 대기업 노조의 본색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태다. 기아차의 경우 평균 연봉이 1억100만 원으로, 세계 1위인 토요타 자동차보다 20% 가까이 높다. 토요타에는 퇴직자 할인도 없다. 종업원 1인당 생산 자동차 수는 토요타의 절반가량인 생산성으로 그런 고임금이 가능한 비밀은 무엇일까. 대기업 노조원들이 하청 관계의 먹이사슬을 이용해 중소기업 근로자 임금의 일부를 이전받고 있기 때문이다. 착취 구조의 상층부에 똬리를 틀고 있는 셈이다. 그런 혜택은 차량 가격에 반영돼 기아차 고객에게도 전가된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 크라이슬러, 포드 등 자동차 빅3는 과거 퇴직자 의료보험·기업연금 비용이 과도해 부도 상황까지 몰린 뒤에야 해당 조항을 폐지했다. 기아차의 퇴직자 평생 차 값 할인과 이름만 다를 뿐 구조는 흡사하다. 이런 기득권 노조의 횡포를 근절할 대책이 시급하다.

문화일보  사설

 

10.17 대한민국의 일상 멈춰 세운 카카오 먹통 사태

국민 대부분이 사용하는 메신저 카카오톡이 10시간 넘게 불통되면서 택시 호출, 지도, 결제, 가상화폐 거래, 본인 인증  카카오를 기반으로 하는 각종 서비스가 멈춰서는 사태가 벌어졌다. 경기도 성남시 판교에 있는 SK C&C 데이터센터의 지하 전기실 화재로  데이터센터에 입주한 카카오의 서버 32000 등이 가동 중단됐기 때문이다. 카카오가 자체 운영하는 서비스는 물론이고, 카카오톡을 활용한 개인 인증 기능, 연동된 정부 민원 서비스까지 몽땅 불통이었다. “대한민국 일상이 멈췄다 말이 나올 지경이었다. 급기야 윤석열 대통령이 상황실을 장관 주재로 격상하라고 지시했고 과기정통부 장관이 서비스 장애로 국민이 불편을 겪게   막중한 책임을 느낀다 사과까지 했다.

▲15 오후 카카오 데이터센터 입주한 경기 성남시 분당구 삼평동 SK판교캠퍼스에 화재가 발생했다. 화재는 진압이 됐지만 다음, 카카오톡, 카카오택시  일부서비스에 장애가 빚어지고 있다. 사진은 PC 카카오톡의 오류 안내문. 2022.10.15/뉴스1

 

이번 사태는 ‘ICT(정보통신기술) 강국 대한민국이 한순간에 얼마나 취약한 사회로 전락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독점 메신저 기업 카카오에 의존한 초연결 사회가 작은 화재 하나로 초먹통 사회가 됐다. 카카오는 무료 카카오톡으로 이용자 수를 급격히 늘린  전방위로 비즈니스를 확장해 계열사를 136개나 거느리게  시가총액 22조원의 공룡 플랫폼 기업이다. 택시 호출 서비스의 90% 장악했고 쇼핑, 결제, 콘텐츠 산업, 금융업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회사 키우고 시장 장악하는 데만 급급했을  ICT기업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서버의 안전한 관리와 재난 복구 대응에서는 허술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드러냈다. 네이버  다른 입주 기업과 달리, 카카오는 화재 발생 하루가 넘도록 서버 32000 가운데 절반도 복구가   상태다. 완전 복구는 언제가 될지   없는 상황이다.

 

4 산업혁명 시대에 데이터센터는 국가 기간 시설 못지않게 중요한 보안 시설이다. 화재, 천재지변, 테러  어떤 사태에도 데이터센터가 안전하게 가동되어야 한다. 공간을 빌려준 SK C&C 지하 3 전기실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3  전원을 차단해 모든 서버 가동을 중단했다. 국민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데 사태에 책임 있는  대기업은 서로 남탓을 하며 책임을 떠넘기기 바빴다. 위기 대응에 취약한 민낯을 드러낸 이번 사태를 계기로 ICT 시스템 장애와 이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한 방안을 민관이 합동으로 전면 재점검해야 한다. 이중 삼중 안전 장치를 마련하고 재난 대응 매뉴얼을 최신화하도록 제도 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

조선일보 사설

 

10.17 카카오 대란 사흘째인데…“서비스 13  4개만 완전 정상화

과기정통부 오전 6 기준 파악…”나머지 9개는 일부 기능 복구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17 오전 과기정통부 재난안전상황실에서 열린 '방송통신재난대책본부 점검회의'에서 카카오  서비스 장애  복구 현황을 점검하고 신속한 복구를 독려하고 있다. /뉴스1

 

정부는 17 오전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주재로 방송통신재난대책본부 회의를 갖고 이틀  SK C&C 데이터센터 화재에 따른 카카오·네이버 서비스 장애 문제를 점검했다.

 

과기정통부에 따르면, 이날 오전 6 기준으로 데이터센터는  95% 수준으로 복구가 진행됐다고 한다. 다만 아직 데이터센터를 이용하는 IT(정보기술) 기업들의 서비스는 완전히 복구되지 못한 상태다.

 

과기정통부는 오전 6 기준, 카카오는 주요 13 서비스  4개는 정상화가 이뤄졌고, 기타 9 서비스는 일부 기능을 복구 이라고 밝혔다. 정상화된 서비스 4개는 카카오페이, 카카오게임즈, 카카오웹툰, 지그재그이고, 아직 완전히 복구가 안된 서비스 9개는 카카오톡, 다음, 카카오맵, 카카오T, 멜론, 카카오TV, 카카오스토리, 카카오픽코마, 티스토리 등이다. 가령, 카카오톡의 경우 복구가 됐지만 아직 이미지·동영상·파일 전송 기능에서 일부 속도저하가 있다고 한다.

 

 과기정통부에 따르면, 네이버의 경우 주요 4 서비스(포털, 쇼핑, 시리즈온, 파파고)  포털 검색 기능을 제외한 3 서비스가 완전 복구됐다. 검색은 일상 이용에  지장은 없으나 일부 기능 복구중인 상태로, 완전한 정상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조선일보 김봉기 기자

 

10.17 , 카카오 대란에 독점으로 시장 왜곡됐다면 국가가 대응해야

윤석열 대통령이 17 카카오톡 먹통 대란과 관련해 만약 독점이나 심한 과점 상태에서 시장이 왜곡되거나 더구나 이것이 국가 기반 인프라와 같은 정도를 이루고 있을 때는 국민의 이익을 위해 당연히 제도적으로 국가가 필요한 대응을 해야 한다 말했다.

 대통령은 이날 용산 대통령실 청사 출근길에 카카오 시장 점유율이 상당해서 (이번 사태 원인으로) 독점 얘기도 나오는데 구조와 관련해 정부가 개입이나 개선을 고민하고 있나라는 질문을 받고 그렇다 이같이 말했다.

 

이어 그런 문제는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지금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했다.

 

 대통령은 저는 기업의 자율과 창의를 존중하는 자율 시장경제 사고를 갖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시장 자체가 공정한 경쟁 시스템에 의해서 자원과 소득이 합리적 배분이 된다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이라고 했다.

 대통령은 이번 주말은 카카오 쓰시는 대부분 국민들께서 카카오 통신망 중단, 서비스 중단으로 많이 힘드셨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게 민간기업에서 운영하는 망이지만 사실상 국민 입장에서 보면 국가기간 통신망과 다름 없다 했다.

 

 지금 국회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여기에 필요한 제도를  정비해서 이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국회와  논의해서 국민들 향후 불편 없도록 하겠다 했다.

 

 대통령은 사고가 발생했을  즉각적인 보고 체계와 국민들에 대해서 알게 하는 , 신속한 복구가 이뤄질  있도록 일단은 제가 주말에 과기부 장관에게 직접 상황을 챙기고 정부가 예방과 사고  조치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하는지 검토를 시켰다 했다.

조선일보 김동하 기자

 

10.17 공룡 카카오의 예정된 재앙’, 근본 대책 세워야

▲카카오톡 멈춤 사태는 독점 온라인 플랫폼의 위험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플랫폼 독점은 일상생활과 경제는 물론 국가 안전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미국과 유럽처럼 독점 방지 대책을 서둘러야 한다.

 

거대 플랫폼의 위험성 드러낸 불통 대혼란

미국·유럽처럼 독과점 문제 서둘러 풀어야

 어제와 그제 한국 사회는 카카오 먹통으로 거대한 혼란에 빠졌다. 이번 사태는 지난 15일 오후 330분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삼평동에 위치한 SK C&C 지하 3층 전기실에서 발생한 화재가 도화선이 됐다. 이 과정에서 서버 작동에 필요한 전원 공급이 끊겨 카카오의 서비스가 갑자기 멈춰섰다. SK가 긴급 복구에 나섰지만 정상화에는 더 오랜 시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카카오의 독과점 리스크를 단적으로 드러낸 사태다.

 

 시민 대다수는 당장 초연결사회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카톡을 보내도 연락이 안 되고 택시 호출이 되지 않았다. 카톡으로 송금하거나 만기가 돌아온 결제도 불가능했다. 법적 분쟁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됐다. 평일이었다면 피해는 더 심각해질 뻔했다.

 

문제는 이번 사고가 ‘예정된 재앙’이라는 점이다. 공룡 온라인 플랫폼의 독점 폐해는 진작에 예고돼 대비책이 필요했던 일이다. 미국과 유럽연합(EU) 4~5년 전부터 독과점 폐해 예방에 나섰다. 미 의회가 초당적으로 협력해 무려 5개의 개별 법안으로 구성된 패키지 법안을 지난해 6월 통과시켰다. 특히 5대 법안 중 ‘플랫폼 독점 종식법’에는 온라인 플랫폼이 해당 플랫폼을 이용해 재화와 서비스를 판매·공급하는 경우 이해충돌로 규정하고 경쟁 당국이 강제 매각을 결정할 수 있는 내용을 담았다. 이에 앞서 유럽연합은 ‘온라인 플랫폼 시장의 공정성 및 투명성 규칙’을 2020 7월부터 시행하고 있다.

 

이런 변화에도 한국 정부와 국회는 팔짱을 끼고 있다. 공정한 경쟁을 다루는 공정거래위원회가 ‘온라인 플랫폼 공정화법’(온플법)을 만들어 2020 9월 입법예고까지 했으나 유야무야되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 등 관련 정부 부처와의 영역 다툼, 거대 플랫폼 업자들의 반발, 국회의 무관심이 합쳐진 결과다. 결국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에는 민간협의기구를 통해 자율규제하는 방식으로 가닥이 잡히고 있다. 선수가 심판도 보는 구조다. 국회에서도 카카오·네이버 경영자를 불러 문제점을 따지기도 했지만 정교한 대비책은 나오지 않고 있다.

 

문제가 심각한 것은 국내 거대 온라인 플랫폼은 디지털 세계의 포식자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소상인·자영업자·플랫폼 노동자들은 관련법 미비, 정책 부재로 거대 플랫폼의 을()로 전락해 극심한 피해를 보고 있다. 카카오의 경우 문어발식 투자와 인수합병(M&A)으로 경쟁이 될 만한 군소 온라인 서비스 업체를 닥치는 대로 빨아들이고 있다. 소상공인·자영업자는 온라인 플랫폼을 거치지 않고서는 장사를 할 수 없게 됐다. 더구나 국회가 타다 같은 혁신 모빌리티를 금지하면서 택시 시장을 장악한 카카오택시는 택시 부족과 가격 폭등에 기름을 붓고 있다.

 

카카오는 유사시 백업 계획도 허술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윤석열 대통령이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직접 복구를 지휘하라”고 했으나 복구해도 독과점 폐해라는 근본적 문제는 바뀌지 않는다. 미국의 번영은 독점 금지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우리도 온라인 플랫폼의 독과점 폐해를 근본적으로 수술해야 한다. 우리 일상을 마비시키는 사회적 재앙까지 초래한다면 이대로 둘 수는 없다.

중앙일보 사설 

 

10.17  툭하면 오류, 광고 덕지덕지…카카오 배짱장사가 부른 참사

▲16일 오전 카카오 데이터센터 화재 현장에 간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왼쪽은 카카오톡 서비스 중단을 알리는 문구. 그래픽=차준홍 기자  

 

지난 15일 오후부터 이어진 카카오 계열 서비스 중단의 후폭풍이 아직 이어지고 있다. 실질적인 국민 메신저인 카카오톡은 물론이고 카카오가 운용하는 포털사이트 다음, 카카오맵, 카카오택시, 카카오페이, 카카오뱅크 등에 이르기까지 카카오 계열사가 서비스하는 모든 앱이 판교 데이터센터 한 곳의 화재 한방으로 먹통이 됐다. 지난 2020년 개정 시행된 전기통신사업법상 카카오를 비롯해 국내 전체 트래픽의 1% 이상을 차지하는 콘텐트제공사업자(CP)는 서비스 안정성을 확보하는 조치를 의무적으로 수행해야 하는데, 카카오는 결과적으로 해당 법적 책임을 제대로 준수하지 못한 셈이 됐다. 해당 법상 안정성 기준이나 처벌 조항이 모호해 카카오 경영진에게 무슨 법적 처벌을 가할 수 있는지는 더 따져봐야겠지만 이와 무관하게 이번 서비스 먹통으로 사실상 전 국민이 크고 작은 피해를 보았다. 한마디로 우리가 자랑해온 초연결사회가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놓여있었는지 실감한 주말이었다.

 

하도 황당한 인재(人災)다 보니 고의 화재설같은 음모론까지 불거져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화재 사고 같은 돌발 상황 발생을 대비하기 위해 통상 IT기업들은 서버 이중화를 비롯한 기본적인 재해복구(Disaster Recovery) 시스템을 사전에 갖춰 놓는다. 데이터센터 한 곳에 불이 났다고 모든 서비스가 10여 시간 이상 멈추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복잡한 초현대적 IT 개념 같지만, 실은 디지털과 무관한 조선 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은 이미 해왔던 일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몇 번의 큰 전란을 겪으면서도 그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이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도 이같은 백업 시스템 덕분에 가능했다. 규장각 지하 서고는 물론 오대산이나 적상산 등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네 곳의 사고(史庫)에 똑같은 실록 네 부를 복제해 보관하는 방식 말이다.

 

이른바 데이터 분산이다. 대형 IT 기업도 이와 비슷하게 물리적으로 떨어진 여러 장소에 서버를 백업해두고, 재난 시 이를 이용해 서비스를 재개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카카오에선 이런 재해 복구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사고 직후 카카오는 서버분산 등 필요한 조처를 다 했다고 해명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결국 조처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걸 부정하기 힘들다. 화재 자체는 카카오의 책임이 아니지만, 전 국민이 생활 전반에 걸쳐 하루종일 사용하는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랫폼 기업의 대응이라기엔 놀랄 만큼 허술했다.

 

공공이 허술한 민간 플랫폼에 의존

카카오라는 한 민간 기업의 부실한 위기 대응능력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지금 한국 사회는 비단 민간뿐 아니라 공공영역조차 카카오 의존도가 비상식적으로 높다는 점이다. 이미 몇 년 전부터 공공기관과 공기업은 문자 발송 비용을 아끼는 등 여러 편의성을 이유로 국가기간통신사업자도 아닌 카카오톡 메시지를 통해 민원 처리 결과를 보내고 있다. 주요 민원 처리에 대한 알림 정도가 아니라 개인 인증을 위한 인증번호도 카카오톡 메시지로 보낸다. 민원인 측의 아무런 사전 동의도 없이 말이다.

 

 

가령 대학생들이 국가장학금이나 학자금 대출 등을 신청하기 위해 꼭 이용해야만 하는 한국장학재단은 당사자에게 아무 동의도 받지 않고 학자금 대출 등 처리 결과를 카카오톡 메시지로 발송한다. 카카오톡이 아닌 문자 수신을 원한다면 ‘알림 톡 차단’을 하라며 조그맣게 안내를 하긴 한다. 하지만 미리 선택권을 주지 않고 기관 편의를 위해 일방적으로 카카오톡으로 보내는 건 분명 문제다. 지극히 행정 편의적 방식이라는 것도 문제고, 이번 사고에서 봤듯이 불안정한 민간 플랫폼에 의존하는 것 역시 무책임하다.

 

 

카카오톡에 대한 공공의 인식 수준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가 있다. 영업일을 가리지 않고 작동해야 할 ‘안전 신문고’ 같은 공공 서비스도 카카오에 의존하다 보니 이번 화재로 인한 서비스 장애의 직격탄을 맞았다. 그저 민간 플랫폼 기업 한 곳의 서비스가 마비됐을 뿐인데도 국가 기간망 마비와 같은 혼란이 빚어진 데는 이런 과도한 독점이 있다. 보안이나 시간 엄수가 중요한 군부대에서도 업무 지시 등이 카카오톡 단톡방으로 이뤄지는 현실을 고려하면 이번 화재사고를 계기로 최소한 공공 영역에서만이라도 카카오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 위기관리 실력을 키우지 않은 채 돈만 좇는 민간 플랫폼 기업도 문제지만,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민간 플랫폼에 과도하게 의존해온 공공의 책임도 따져 물어야만 하는 이유다.

 

카카오의 배짱 장사

공공만큼은 아니더라도 민간 역시 카카오 의존도를 낮춰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이번 사고 발생이 주말이었기에 망정이지 주중이었으면 그 여파가 어디까지 미쳤을지 상상하기도 끔찍하다. 사용자 인증, 즉 ‘간편 로그인’ 시스템을 카카오 계정에만 오롯이 의존하고 있는 서비스가 많은 탓이다. 예컨대 사무실 출입통제 전자 시스템을 운영하는 기업 중에 카카오와 협력하는 곳이 적지 않은데, 출퇴근 때 이런 사고가 발생했다면 어떨까? 사실 이번 사고만으로도 개개인마다 각종 크고 작은 손실이 모두 다른데 이에 따른 손실 산정이나 배상 등 앞으로의 과정이 매우 험난할 게 분명하다.

 

▲김범수 카카오 대주주와 카카오의 대표 캐릭터 라이언. 사진 카카오 나우

 

‘카카오톡 선물하기’ 기능 때문에 유통산업 전반이 직간접적으로 카카오톡과 연결돼있다. 택시 산업은 물론 모바일 결제시장도 카카오 영향권 아래 놓여있다. 국민 생활과 밀접한 모든 기능을 거대 플랫폼 기업 딱 한 곳에만 전부 몰아준 상황인데도 카카오톡은 전화 상담조차 제공하지 않는다. 이번 사고 후에야 처음으로 열었다. 경영진과 임직원 돈 불리기를 위한 기업 쪼개기 상장을 무리하게 하는데 들이는 노력의 아주 일부만 들였어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카카오는 그런 기본적인 고객 서비스도 제공하지 않아 대다수 국민은 카카오 서버 먹통 사태를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언론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접해야 했다. 상황을 따져 물을 챗봇 상담은 있지 않느냐고? 그것도 다른 서비스와 함께 다 죽어버렸다.

 

한마디로 거대 플랫폼 기업 카카오의 배짱 장사다. 아무리 서버 오류가 자주 발생해도, 카카오톡에 각종 광고가 덕지덕지 붙여도, 사람들이 절대로 카카오톡을 떠나지 못한다고 여기니 나오는 배짱이다. 카카오가 시장을 개척했던 초기와 달리 현재는 성능 좋은 모바일 메신저가 대폭 늘어났다. 이미 익숙해진 개인 간 연락 목적은 어렵더라도 최소한 업무 메신저만큼이라도 이젠 카카오와 ‘헤어질 결심’이 필요하다고 본다. 독점 기업의 배짱 장사를 일순 무너뜨리긴 힘들겠지만, 최소한 위기감이라도 느끼게 해야 달라질 수 있다.

중앙일보  박한슬 작가

 
 

10.17 김신영표 전국노래자랑 첫방... 시청률 얼마 나왔을까

개그우먼 김신영이  진행을 맡은 KBS1 ‘전국노래자랑 시청률이 껑충 뛰어올랐다.

 

16 방송된 전국노래자랑 전국 기준 9.2% 시청률(닐슨코리아) 기록했다. 작곡가 이호섭, 임수민 아나운서가 진행했던 전주 방송분(7.3%)보다 1.9%포인트 높은 수치다. 동시간대 1위다. 전국노래자랑의 평균 시청률은 6~7%대다.

 

다른 시청률 조사기관 TNMS에서는 10.5% 기록했다. 515 () 송해의 마지막 방송(4.6%) 비해 2 이상 상승했고, 시청자수는 175만명 증가했다.

 

▲'전국노래자랑' 김신영/KBS

 

이날 전국노래자랑 하남시편은 김신영의 MC 데뷔 방송으로, 방영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검은색 슈트를 입고 등장한 김신영은 관객들을 향해 큰절을   앞으로 전국 팔도 방방곡곡 여러분을 만날 일요일의 막내딸이라며 김신영표 전국노래자랑 시작을 알렸다.

 

김신영은 이날 방송에서 만능 재주꾼 면모를 맘껏 발휘했다. 그는 재치 있는 입담과 능숙한 진행 실력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서 춤을 추며 모든 연령대의 참가자들과 소통했다.

 

이날 김신영과 가까운 연예인들이 총출동해 지원사격에 나섰다. 가수 양희은을 비롯해 김신영 소속사 대표이자 선배 개그맨 송은이, 배우 이계인, 가수 박서진, 나비, 에일리, 박현빈, 그룹 브레이브걸스 무대를 빛냈다.

 

양희은은 “(김신영을) 어린 싹이라고 생각하고 보듬어 주시라 신영이도 욕심 내려놓고, 너무 잘하고자 생각하지 말고 그저 편하게 (하라)”라며 그를 응원했고, 송은이는  떨어지지 말라 김신영 목에 사탕 목걸이를 걸어줬다.

조선일보 김소정 기자

 

10 18 原電에 준해야 할 데이터센터 안전

이경호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

카카오가 멈췄다. 시민의 일상도 멈췄다. 택시를 잡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식당에서 결제를 하지 못 해 발을 동동 구르는가 하면 장례식에 조위금을 전달하지 못해 낭패를 겼기도 했다.

1994
년 인터넷이 일반 국민에게 보급되고 2007년 스마트폰이 사용되면서 정보통신기술(ICT)을 기반으로 한 사이버 공간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터전이 됐다. 하지만 인터넷 대란, DDoS 공격, 전산 대란, 통신사 네트워크 사고 등 국가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사고가 계속 발생했다.


이번 사고에 2가지 의구심이 있다.

먼저, 데이터센터는 정보통신 시설 중 최고 등급의 보안시설인 만큼 재난대응 체계도 원전(原電)에 준해 가동돼야 한다. 그런데 배터리 한 세트의 화재에도 이산화탄소 등 가스를 이용한 내부의 자동 소화 체계는 효과가 없었고, 소방대원들이 출동해 전원을 차단하고 물을 사용해 진화했다. 전 세계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대응 사례였다.

또 하나, 온 국민이 사용하는 서비스에 장애가 발생했는데 다른 데이터센터로 실시간 서비스 이전이 이뤄지지 않았다. 수천 개의 서비스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기에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할 때마다 사업 영향력을 평가하고 그에 따라 이중화·삼중화 및 원거리 백업 데이터 소산(疏散·dispersion)을 하는 등 국제 표준에 따라 정교하게 설계·구축하고 서비스 운영했어야 했다. 결국, 재난 대응 체계와 복원 시스템은 문서로만 있고 전원을 차단하면서 진행하는 실제 훈련은 부분적으로 했거나 없었던 셈이다.

2000
년대 이후 사회·경제 활동의 사이버 의존도가 급속히 확장되면서 사물인터넷(IoT), 클라우드 서비스, 빅데이터, 모바일로 대표되는 혁신적인 기술을 전 국민이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사이버 공간에서 엄청난 부와 경제성장을 이뤘지만 이면의 역기능으로 인해 한순간에 몰락과 파산을 경험하고 있다. 선진 각국, 특히 미국 등 글로벌 정보기술(IT) 시장 주도국은, 국가 전략으로 근본적인 전환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민간과 협업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8, 미국 백악관이 주관하고 구글·아마존·애플·마이크로소프트(MS) 등의 최고경영자가 참여한 인프라 탄력성 및 사이버 보안회의가 열렸다. 각 기업은 사이버 복원력을 개선하기 위해 최소 300억 달러의 투자를 약속하고 전문가를 양성하며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하는 등의 약속을 했다. 이러한 대응 기조와 전략적 의미는 분명하다. 위험을 100% 제거하는 목표와 이행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피해를 최소한으로 감수하고 빠르게 복원하는 목표다. 바로 사이버 복원력이다.

2012
년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에서 처음 사용된 이 용어는 2015년 이후엔 국제 표준이 되고 있다. 이제는 복원력의 시대다. 광대한 통신망에 연결된 수많은 단말기는 그 시초와 정체성도 파악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이 복잡성으로 인한 위험이 우리에겐 발생하지 않고 멀쩡하게 운영될 것이라는 기대는 순진하다. 날마다 사고가 발생하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이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를 핵심 논제로 삼아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가 후원하고 업계가 자율적으로 활동하는 ‘국가 정보통신 인프라 복원력 대운동’이 당장 필요한 것이다.

문화일보

 

10.18  20대 사망원인 57%는 극단선택, 고독사는 9년새 3.4배 늘어

청년이 세상 등지는 사회

죽음엔 그림자가 남는다. 어둠 속에 덩그러니 놓인 유품엔 망자의 마지막 모습이 담겨 있다. 거실에 나뒹구는 술병은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던 외로움을, 주방의 오래된 음식은 삶의 의지가 천천히 꺼져갔음을 나타낸다. 반대로 일상의 삶이 그대로 배어 있는 유품은 전혀 준비되지 못한, 갑작스런 이별을 뜻한다.

 

유품에 담긴 죽음의 의미

 박수경(가명·33)씨의 마지막이 그랬다. 안방 화장대는 물티슈와 화장품처럼 평소 쓰던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돈된 상태였다. 건넌방 빨래 건조대엔 미처 개지 못한 빳빳한 수건과 옷가지들이 널려 있었다. 지난달 16일 그의 유품 정리를 맡았던 김석중 키퍼스코리아 대표는 “고인이 끝까지 살아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고 했다. 

20년째 OECD 국가 중 자살률 1
예방 예산은 일본의 4.6%에 불과
핀란드 6년간 5만명 투입 심리부검
영국은 극단선택 예방 장관 임명도
 

 지난달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박수경(가명·33)씨가 집에 남긴 유품들.

 

박씨는 왜 극단 선택을 했을까.

“처음 집에 들어섰을 때 은행 서류가 많이 보였다. 연봉 2000만원에 대출금만 1억 원이 넘었다. 그 옆에는 임대차 계약서가 있었다. 알고 보니 전세 사기를 당한 거였다. 집안 곳곳에 열심히 살려 했던 흔적이 보였지만, 갑작스러운 큰 충격이 그를 무너뜨린 것 같다. 

 

열심히 살려 했던 흔적이란.

“꾸준히 정신과 진료를 받았다. 의무기록이 있었는데, 부친이 극단 선택을 하고 혼자 남겨진 뒤 충격이 컸다고 한다. 고인도 비슷한 시도를 한 적 있고, 병원 검사서에는 ‘자아가 불안정해 자극에 크게 동요된다’고 기록돼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일하고 꾸준히 병원에 다니며 버텨왔던 것 같다.

 

 ▲평소 쓰던 물건이 가지런히 정돈 된 안방 화장대 위엔 은행 대출서류와 전세계약서가 놓여 있었다. 거실 TV대와 장식장 위의 화초들은 메마른 모습이었다. [사진 키퍼스코리아]

 

 김 대표는 일본에서 유품 정리 일을 시작한 2006년부터 망자들의 여행 가방을 대신 싸주고 있다. 그중 지난 5월 숨진 김지연(가명·34)씨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죽기 전 모든 유품을 미리 정리해 놨더군요. 꼼꼼히 포장하고 누구에게 줄지 자세한 설명까지 붙여놨죠. 죽기 전까지 그는 계속 혼자였습니다.

 

이혼 후 홀로 생계를 꾸렸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을 망설였다. “쓰레기봉투에 썼다 구겨 버린 유서들이 있었어요. 죽음 앞에서 고민했다는 이야기죠.” 김 대표는 유품 사이에서 따로 사는 딸에게 남긴 책과 편지를 발견했다. “외로울 때는 시를 읽으라는 제목이었는데, 아마 본인에게 하고 싶던 말 같습니다.

 

또 다른 유품정리사인 김현섭 에버그린 대표는 지난 6 30대 초반 남성의 유품을 정리하며 눈물이 울컥했다. 방 한쪽엔 피규어들이 가득했는데, 동생뻘의 고인이 평범하게 살고 있는 그 나이 또래들과 다를 바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각종 고지서와 채무 서류가 많았고 빈 소주병이 10병정도 어질러져 있었다”며 “주식 책도 있었는데 금전적 문제가 원인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노인들은 병사가 많고 젊은 사람들은 극단 선택을 주로 하는데, 대부분 경제적 문제 때문”이라고 말했다. 

 

청년 고독사 다수가 극단 선택

 고독사는 ‘사회로부터 고립된 채 홀로 죽음에 이르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명확한 집계 기준이 없어 정확한 통계는 따로 없다. 그래서 보통은 무연고 사망자를 고독사로 본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보건복지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무연고 사망자는 2012 1025명에서 2021 3488명으로 급증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고독사의 원인을 살펴보면 질병의 비율이 가장 높지만, 청년층으로 국한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가 많다. 실제로 지난달 통계청이 발표한 2021년 전체 사망원인 통계 자료에 따르면 20대(56.8%)와 30대(40.6%)의 사망 원인 1위는 극단선택이 압도적이었다.

 

완만한 감소세에 있는 다른 연령대와 달리 20대 자살률은 급증하고 있다. 10만 명당 20대 자살자는 2017년(16.5명)까지는 줄었지만, 2018년부터 늘기 시작해 2021년 23.5명이나 됐다. 4년 새 42.4%나 증가한 것이다. 불황과 취업난, 코로나19까지 겹치면서 청년들이 벼랑 끝까지 몰렸다.

 

지난해 한국경제연구원이 발표한 경제고통지수는 청년층(15~29세)이 27.2로 전 연령대 중 가장 높았다. 이는 2015년(22.2) 집계 이후 제일 높은 수치다. 반면 60대(18.8)와 50대(14), 40대(11.5)는 청년층보다는 안정돼 있었다. 젊은 세대가 겪는 고통의 크기가 중장년층보다 훨씬 크다는 의미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20대 자살자의 직업을 분석한 경찰청 통계(2020년)에 따르면 무직자가 55.3명(10만 명당)으로 가장 많다. 학생(17.5명), 유흥업 등 기타피고용자(10.5명), 일용노동자(7.1명), 전문직(5.2명) 등 순으로 적게 나타났다. 직업과 일정한 소득이 없을수록 자살률이 높다.

 

이는 청년 자살이 단지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자살을 개인의 일탈이 아닌 사회적 문제로 봐야 한다는 뜻이다. 이 같은 주장을 처음 한 사람은 19세기 이탈리아의 정신의학자 헨리 모르셸이다. 그는 1879년 쓴 『자살의 연구』에서 “자살은 결코 개별적인 것이 아니며 사회적 현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했다.

 

이후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1897년 발간한 『자살론』에서 다양한 통계자료와 실증연구로 자살의 원인을 분석했다. 그는 자살 유형을 크게 이기적 자살과 이타적 자살, 아노미적 자살로 구분하고 공동체의 통합과 결속력을 강조했다. 경쟁이 치열하고 타인에 무관심한 사회 환경이 자살률을 높인다는 뜻이다.

 

극단 선택의 원인은 사회구조 탓

실제로 자살은 사회 변화와 관련이 깊다. 경찰통계연보에 따르면 처음 집계를 시작한 1953년부터 1975년까지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6.2명에서 31.9명으로 급증했다. 이에대해 김중백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전쟁 이후 혼란이 크고 빠른 산업화로 빈부격차도 심했던 시기”라며 “공동체의 결속력도 약화돼 벼랑 끝에 선 이들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자살률은 크게 줄어 1991년(15.2명) 최저를 기록했다. 김 교수는 “민주화 이후 시민의 권리가 향상됐고 높은 성장과 함께 노동과 자본의 소득분배도 꾸준히 개선됐다”며 “사회가 발전하고 여럿이 과실을 나눠 갖게 되면서 자살률도 떨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자살률은 다시 늘었다. 심지어 20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다. 이는 우리 사회에 그늘진 곳이 많고 미래 또한 암울해지고 있음을 뜻한다. 한국은 개인의 사회적 고립도(24.1)가 OECD 최상위권이다. 영국(6.8)·독일(8) 등 주요 선진국과 큰 차이가 나고, 평균(11.4)보다 2배 이상 높다.

 

반면 ‘자살대국’이라고 불렸던 일본은 2009년 24.4명이었던 자살률이 2019년 15.7명으로 급감했다. 일본은 2006년 자살대책기본법을 제정하고 적극 대응했다. 후생노동성과 경찰청이 매월 통계를 발표하고, 지자체는 자살 원인과 성별·연령·직업·거주지 등을 밀도 있게 조사했다. 정교한 분석과 빠른 대응은 위험군 관리에 용이했다.

 

아울러 1인 가구의 급증으로 더욱 심각해진 고독사 문제를 자살과 함께 정책 우선순위로 삼았다. 특히 정부가 나서 ‘고독’이라는 개인의 감정적 표현 대신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상황을 나타내는 ‘고립사’라는 표현을 써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1960~1980년대 자살률이 3배 넘게 폭증했던 핀란드는 1986년 국가 주도의 자살예방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6년간 5만명의 인력을 투입해 자살자의 생전 행동을 분석하고 주변 인물을 인터뷰했다. 이는 그물처럼 얽혀 있는 자살의 사회·경제·개인적 원인을 밝혀내는 사회·심리적 부검의 원조가 됐다.

 

2018년 영국은 세계 최초로 사회체육부 장관을 외로움부 장관(Minister for Loneliness)으로, 보건부 장관을 자살예방 장관으로 겸직 발령했다. 만성적 외로움은 하루 15개비의 담배를 피운 것처럼 건강에 해롭고, 자살 등의 증가로 국가 경제에 320억 파운드의 손실을 끼칠 수 있다는 연구 결과에 따라서다.

 

김중백 교수는 “일본도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법령을 제정했지만 관심과 노력의 크기가 달랐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해 한국의 자살예방 예산(368억 원)은 일본(7937억 원)의 4.6%에 불과했다. 김 교수는 “지역사회의 유대를 높여 사회적 고립을 막고 실패해도 재기할 수 있는 사회구조를 만드는 게 본질적 해법”이라고 했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으면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청소년 모바일 상담 ‘다 들어줄 개’ 어플, 카카오톡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윤석만 논설위원

 
 

10.30  이태원 참사, 세월호 이후 최다 인명피해 

▲29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일대에 핼러윈을 맞아 인파가 몰려 대규모 인명사고가 발생했다. 소방대원들이 사고 현장에서 구급활동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핼러윈 파티가 열린 29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서 발생한 압사 사고는 단일 사고 인명피해로는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최대 규모로 기록되게 됐다.

 

30일 소방당국은 이날 오전 5시 기준 이 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149명이며 부상자는 76명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부상자 중 중상은 19명, 경상 57명이다.

 

소방당국에 따르면 이날 오전 4시까지 발생한 사망자는 총 146명이며 부상자는 150명이었다.

 

최성범 용산소방서장은 현장 브리핑에서 부상자 숫자가 줄어든 이유에 대해 “경상자 중에 귀가자가 있어서 부상자 숫자가 줄었다”고 밝혔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이 같은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은 1995년 6월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사망 502명‧부상 937명) 이후 처음이다.

 

가장 최근에 발생한 대형참사는 2014년 4월 발생한 세월호 참사다. 당시 제주도 수학여행을 위해 배에 탑승한 안산 단원고 학생 등 304명이 사망하고 142명이 부상했다.

 

이외에 2003년 대구 지하철 방화 사건으로 사망자 192명, 부상자 151명 등 343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1993년 10월에는 전북 부안 인근 해역에서 서해 훼리호 침몰 참사로 승객 292명이 사망했다.

 

한편 소방에 따르면 29일 사람이 깔렸다는 내용의 신고가 최초 접수된 시각은 오후 10시 24분이다. 10분도 안 돼서 용산소방서, 중부소방서 등 용산 관내 구급차량들이 총 출동했다. 용산소방서에서 사고 현장까지는 4차로 하나만 건너면 되는 정도의 거리이지만 이날 현장에는 10만명 이상의 인파가 모인 탓에 구급차가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고 현장이 골목인 만큼 근처에 도착한 뒤에도 구급대원들은 인파를 뚫은 뒤에야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한 시각은 신고 시각보다 약 1시간 뒤였다. 이 때문에 피해가 커진 것으로 추정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30일 ‘이태원 핼러윈 압사 참사’와 관련, 긴급 상황점검회의를 잇달아 주재하고 사고 수습본부 즉각 가동과 사고 원인 정밀 조사 등을 지시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오전 2시 30분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가 가동 중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상황실에서 한덕수 국무총리,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등과 긴급 상황점검회의를 했다.

 

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한 총리를 본부장으로 하는 사고수습 본부를 즉각 가동할 것과, 이 장관에게는 사망자 파악과 더불어 사고 원인에 대한 정밀조사 등 수습 준비에 착수할 것을 주문했다고 김은혜 홍보수석이 서면브리핑에서 전했다.

​조선일보  김명일 기자

 

10.30  美 CNN‧NYT도 톱뉴스로… WP는 “시신 근처 술집 여전히 꽉차”

이태원 압사 참사 관련 기사를 최상단에 배치한 CNN 홈페이지./뉴욕타임스

 

 

29일 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해밀턴 호텔 인근에서 발생한 압사사고로 149명이 숨지고 150명이 부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해외 주요 매체들도 온라인 페이지 메인 톱에 관련 기사를 게재하며 일제히 보도했다.

 

미국 CNN은 29일(현지시각) 이태원 참사와 관련 ‘서울 핼러윈 축제에 인파가 몰려 최소 146명 사망’이라는 제목의 속보 페이지를 마련하고 이를 메인화면 왼쪽 상단에 배치했다. 그 아래로는 ‘시신을 옮기기 위한 들것이 서울 거리에 늘어서 있다’, ‘관계자들은 최소 81명으로부터 호흡곤란을 보고받았다’, ‘CNN 기자가 치명적 사건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한다’ 등 관련 기사들을 배치했다.

 

▲이태원 압사 참사 다룬 뉴욕타임스 홈페이지./뉴욕타임스

 

 

뉴욕타임스(NYT)도 홈페이지 최상단에 속보페이지를 만들어 관련 뉴스를 실시간으로 전하는 등 이태원 참사를 주요하게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WP)와 월스트리트저널(WSJ) 등도 마찬가지로 이번 압사사고를 온라인 페이지 1면 톱기사로 다루고 있다.

 

WP는 “이태원 참사는 2014년 304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세월호 참사 이후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낸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WP 서울지부 기자인 켈리 카술리스 조는 “이날 밤의 파티는 거의 끝났다. 하지만 나는 응급구조대가 몇 시간 동안 시신을 옮기고 있는 데에서 도보로 10분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사람들로 가득한 바 두 군데를 지나쳤다”며 “이곳은 새벽 5시였고, 일부는 비극이 바로 모퉁이 옆에 닥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휴일을 축하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김가연 기자

 

10.30  尹대통령 “총리 주관 사고본부 즉각 가동…원인 정밀 조사하라”

정부청사서 ‘이태원 압사 참사’ 상황점검회의…”신속한 신원확인 진행”

▲윤석열 대통령이 30일 새벽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국가위기관리센터에서 열린 이태원 핼러윈 인명사고 긴급상황점검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은 30일 ‘이태원 핼러윈 압사 참사’와 관련, 긴급 상황점검회의를 잇달아 주재하고 사고 수습본부 즉각 가동과 사고 원인 정밀 조사 등을 지시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오전 2시 30분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가 가동 중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상황실에서 한덕수 국무총리,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등과 긴급 상황점검회의를 했다.

 

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한 총리를 본부장으로 하는 사고수습 본부를 즉각 가동할 것과, 이 장관에게는 사망자 파악과 더불어 사고 원인에 대한 정밀조사 등 수습 준비에 착수할 것을 주문했다고 김은혜 홍보수석이 서면브리핑에서 전했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에게는 병원에 이송된 환자의 치료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당부했다.

 

또 “이 시각까지도 연락이 되지 않아 애태우고 있을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신속한 신원확인 작업을 진행하라”고 관계 부처에 지시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중 종합적인 피해 상황이 나오는 대로 사고수습본부 회의를 주재할 예정이라고 김 수석은 밝혔다.

 

윤 대통령은 앞서 오전 1시 용산 대통령실 청사 위기관리센터에서 긴급 상황점검회의를 주재하고 관계 부처 등에 이송·구호를 위한 교통 통제 등을 지시했다.

 

윤 대통령은 “지금 최우선 사안은 환자 후송 및 구호이며 피해 국민의 신속한 의료기관 이송 및 치료”라며 “앰뷸런스 이동로를 확보하고 이를 위한 교통 통제 등 필요한 조치를 바로 이행하라”고 했다.

 

또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에게도 전화해 응급 구조 활동요원이나 통제관을 제외한 인원은 사고 현장에 접근하지 못하게 소개하도록 지시했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30일 오전 1시 30분 이태원 사고 현장에 마련된 응급의료소를 찾았다. /보건복지부

 

 

대통령실 관계자는 언론 통화에서 “윤 대통령이 회의에서 현장 CCTV 영상과 사진 등을 실시간으로 체크하고 관련 보고를 받으면서 환자 이송과 구호 조치에 저해되는 요인을 빨리 제거하라고 지시했다”고 설명했다. 대통령실은 이날 0시 58분께 출입 기자들에게 보낸 공지 문자에서 “윤 대통령은 조금 전 용산 대통령실 위기관리센터로 나와 서울 이태원 핼러윈 사고 관련 긴급 상황점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라고 알렸다.

 

윤 대통령은 전날 밤에는 ‘이태원 사고’ 보고를 받은 뒤 관계부처에 두 차례 긴급지시를 내렸다.

 

오후 11시36분 언론에 공지된 1차 지시에서 윤 대통령은 “신속한 구급 및 치료가 이뤄질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하라”고 당부했고, 40분 뒤 2차 지시에서도 “보건복지부는 응급의료체계를 신속하게 가동해 응급의료팀(DMAT) 파견, 인급 병원의 응급병상 확보 등을 속히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전날 밤 용산구 이태원동 일대에서는 핼러윈을 앞두고 인파가 최소 수만 명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대형 압사 참사가 났다.

 

오전 4시 현재 소방당국은 146명이 사망하고 150여 명이 부상했다고 집계했다.

 

소방당국은 전날 오후 10시 20분쯤부터 이태원에서 호흡곤란 환자가 발생했다는 신고를 접수했다.

노석조 기자

 

10.30 "이유도 모른채 끼여있다 참사" 축제는 한순간 재난이 됐다

“야, 나 겨우 살아나왔어!”

 핼러윈데이를 앞둔 29일 밤 10시 25분쯤 서울 이태원역 1번 출구 쪽 길가에 한 여성이 주저앉으며 이렇게 외쳤다. 뒤이어 “119에 전화 좀 걸어주세요”라고 울먹이며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각종 분장을 하고 거리를 활보하던 사람들은 이 목소리를 핼러윈데이의 단순 해프닝으로 치부했다.

 

인파로 뒤덮인 이태원역 1번 출구 일대가 아수라장으로 변한 건 순식간이었다. 여기저기서 "사람이 깔린 것 같아요" "저기 사고가 났다"와 같은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면서였다.

 

곧바로 신고를 받은 경찰과 소방 인력이 도착했지만 수많은 인파에 소란스러운 음악 소리가 뒤섞이면서 이들의 현장 진입을 어렵게 했다. 소방관이 연신 "나와달라"고 외쳤지만 좁은 골목 입구를 채운 사람들은 외침을 듣지 못하거나 길을 터주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밤 11시쯤 이 일대 통행이 통제되면서 참혹한 현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방인력들이 사상자들을 등에 메거나 이동 병상을 이용해 옮겼지만 역부족이었다. 현장을 지켜보던 시민들이 나서 사상자 이송을 도왔다. 구조 인력은 사고 현장에서 옮겨진 사상자들의 심폐소생술(CPR)을 진행했지만, 사상자가 급격히 늘면서 "심폐소생술 가능하신 분 나와주세요!" "의사 있으면 나와주세요!"란 요청이 빗발쳤다.

 

핼러윈 인파가 몰린 이태원서 압사 사고가 발생했다. 김남영 기자

 

“친구가 병원에 갔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애탄 호소도

사고가 일어난 현장 주위에선 생존자들과 그 지인들의 “도와달라”는 호소가 자정을 지나도록 계속됐다. 사고 현장에 있었던 강모씨는 “심폐소생술을 받던 친구가 병원으로 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며 “제발 찾아달라”고 말했다.

 

상황을 알 수 없었던 외국인들은 “내 친구가 병원으로 간 거 같은데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주변에 계속 물었다. 지인이 구급차에 태워진 채로 병원에 갔다는 한 남성은 길가에 앉아 눈물만 흘리다가 자리를 떴다.

 

생존자 “움직일 수도 없이 ‘살려달라’만 외쳐”

생존자들은 살았다는 안도감보다는 참혹한 현장의 기억 때문인지 이동 병상 위에서 몸을 떨고 있었다. 불안한 모습으로 구조현장을 지켜보던 던 김모씨는 “현장에 유명 인플루언서가 나타나면서 사람들이 몰리고, 이로 인해 사람들의 무게중심이 무너지면서 깔린 것 같다”며 “’살려달라’고 외쳤지만, 누구도 움직일 수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생존자는 “사고가 발생한 골목 안에 있었는데 벽에 붙으면서 겨우 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

 

3년 만에 ‘노마스크’로 열린 축제의 장이 재난의 현장이 된 것은 좁은 공간에 지나치게 많이 모인 인파 때문으로 추정된다. 현장 생존자들과 목격자들은 “이유도 모른 채 사람들 사이에 끼어있다가 인파가 무너지면서 참사가 발생했다”고 입을 모았다.

 

한 목격자는 “좁은 골목 위에 있던 다른 골목을 통해 사람이 계속 들어가고, 골목 아래에선 사람들이 빠져나가지 못하면서 피해를 더 키운 것 같다”며 “사고가 난 골목에 있는 상점에 행사가 있다고 하면서 인파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소방당국에 따르면 30일 오전 2시 40분 기준 사상자는 220명으로 집계됐다. 120명의 사망자 중 병원으로 이송돼 사망 판정을 받은 인원은 74명이었고, 46명은 현장에서 안치됐다. 소방당국은 29일 밤 10시 22분쯤부터 이태원에서 호흡곤란 환자가 발생했다는 신고를 접수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김남영·나운채·이병준 기자 kim.namyoung3@joongang.co.kr

 

10.31  비극적인 참사마저 정쟁 도구로 활용하겠다는 건가

남영희 민주연구원 부원장이 29일 “이태원 참사는 청와대 이전 때문에 일어난 인재”라며 윤석열 대통령과 오세훈 서울시장 등의 사퇴를 요구했다. 민주연구원은 민주당의 싱크탱크다. 용산 대통령실 경호 탓에 엄청난 인파를 예상하고도 제대로 안전요원을 배치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본인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곧 해당 글을 삭제했다. MBC PD수첩 제작진은 30일 소셜미디어에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정부 대응을 고발할 ‘제보’를 기다린다는 공지를 냈다. 기다렸다는 듯 정부 공격의 소재로 삼으려는 태도라는 비판이 일자 해당 내용을 삭제했다. 이런 사례 말고도 벌써부터 유언비어에 가까운 주장이나 젠더 갈등을 부추기는 무리한 주장도 등장하고 있다.

 

2014년 세월호 사건 등 대형 참사가 있을 때면 괴담 등 혹세무민을 통해 정파 이익을 얻으려는 시도가 적지 않았다. 그 때문에 우리 사회가 치른 비용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비극적인 참사마저 정쟁의 도구로 삼는 이런 행태는 공동체 일원으로서 용납될 수 없다. 소중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은 희생자들의 명복과 그 가족들에 대한 위로에 온 국민이 마음을 모을 때다.

조선일보  사설

 

10.31  지금은 함께 눈물 흘리고 기도할 때입니다

▲30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참사현장 근처에 마련된 추모공간에서 한 여성이 희생자들을 위해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다./로이터 뉴스1

 

이태원 사고 소식을 듣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에게는 그런 청천벽력이 없습니다. 참척(慘慽)의 고통이라고 하잖아요. 겪어보진 않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슬픔일 겁니다.

 

지금은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라디오 ‘여성시대’를 오래 진행하면서 자식 잃은 부모의 사연을 여럿 접해보았습니다. 세월호 사고를 겪고 비통해 하는 어머니들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당장은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 슬픔을 바라봐주고 들어주고 손잡아주고 함께 기도해주는 것밖에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번뿐이지만 배우는 무대에서 수없이 많은 삶과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는 며칠 전 국립극장에서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라는 모노드라마(1인극)를 올렸어요. 박완서 선생님이 1988년 아들을 잃고 나서 쓴 단편소설을 무대로 옮긴 것입니다. 그 공연을 준비하면서, 또 이태원 사고 소식을 접하고 그 어머니를 다시 떠올렸습니다. 참척이 어떤 것인지 제 간접 경험을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1988년 그해에 박완서 선생님은 남편을 암으로 잃고 석 달 만에 아들을 또 떠나 보냈어요. 다섯 자녀 중에 유일한 아들인 막내가 갑자기 그렇게 된 겁니다. 선생님은 몇 년을 방황하셨대요. 수도원에 가 계시고 이해인 수녀를 만나고 한동안 신을 원망했다고도 합니다. “너희는 왜 이렇게 멀쩡하냐”고 딸들을 미워할 정도였어요. 글을 쓸 수도 없었고 온 세상이 다 꼴보기 싫었을 거예요. 감정이입을 해야 하는 배우로서 저도 너무 아팠습니다.

 

88 서울 올림픽 직전이었어요. 박완서 선생님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아들이 죽었는데 기차는 달리고 계절이 바뀌었다고. 아들이 죽었는데 88 올림픽이 예정대로 열린다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고. 생때 같은 내 자식이 죽었는데 성화가 도착했다며 잔치를 벌이고 춤을 추는 걸 견딜 수 없었다고. 내가 만일 독재자라면 1년 내내 아무도 웃지도 못하게 하련만, 그런 미친년 같은 생각을 열정적으로 하게 되더라는 겁니다.

 

이태원 참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 심정은 지금 이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귀한 아들딸이 하루아침에 주검으로 돌아왔는데 오늘도 어제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해가 뜨는 것부터 납득할 수 없을 겁니다. 당장은 어떤 말도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함께 눈과 귀를 열어 그들의 슬픔을 목격하고 들어주는 것밖에 없어요. 대책 없이 무력한 말이지만 결국은 시간이 약입니다. 위로의 말은 그제야 들릴 겁니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을 공연할 때 저는 반신불수로라도 살아 있는 자식을 둔 엄마를 보고 무너집니다. 자식이 그렇게라도 살아 있다는 것, 눈으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먹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부러운지. 박완서 선생님도 참척의 고통을 당하고 세월이 몇 년 지나고 나서야 그 경험을 소설로, 문학으로 옮길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을 거예요.

 

정부는 1주일간 국가적 애도 기간을 정했습니다. 지금은 국민들이 묵묵히 들어주고 봐주고 가능하면 손잡아주고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제가 오랫동안 공연한 연극 ‘어머니’에서 주인공인 어머니는 6·25 때 아들이 굶어 죽었어요. 그래도 어쩝니까. 산 사람은 살아야지요. 산 사람은 살아야 돼요. 살 수밖에 없고 그렇게 살다 보면 슬픔이 달라져요. 엷어지고 진정됩니다. 그렇다고 그 슬픔이 어디로 사라지진 않겠지만요.

 

우리 이웃과 사회에 요청합니다. 자식 잃은 부모의 손을 잡아주세요. 묵묵히 바라봐주고 들어주세요. 그들이 울면 같이 울어주세요. 참척의 고통을 겪은 사람들을 만나 보니 그나마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애도였습니다. 좀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말로도 위로가 되겠지만 지금은 그것밖에 방법이 없어요. 묵묵히 함께해주는 것, 우리도 아프다고 공감해주는 것 말입니다. 부상자들이 빨리 회복되길 빕니다. 더 이상 고통이 없기를 바랍니다. 종교가 있든 없든,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조선일보 연극배우 손숙

 

10.31  이태원 사망자 154명... 중국·이란 등 외국인 26명

29일 밤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일대에서 발생한 압사 참사로 인한 사망자가 30일 154명으로 늘어났다.

 

서울경찰청과 행정안전부 등에 따르면, 이날 오후 11시 기준 이태원 핼러윈 참사로 인한 사망자가 154명으로 집계됐다. 앞서 행정안전부와 소방청이 이날 오후 6시 기준 발표한 숫자(153명)보다 사망자가 1명이 더 늘었다. 중상자로 분류됐던 여성 1명이 사망한 것이 확인되면서다. 부상자는 중상 36명, 경상 96명 등으로 총 132명이다.

 

외국인 사망자는 26명으로 집계됐다. 외국인 사망자의 구체적인 국적으로는 중국과 이란, 우즈베키스탄과 러시아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일보  김승현 기자

 

10월 31일  어이없는 이태원 참사… ‘군중 밀집’ 관리 매뉴얼 급하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도심에서 결코 일어나선 안 될 어이없는 참사가 발생했다. 29일 밤 서울 이태원 중심가에 핼러윈 축제를 즐기려는 10∼20대들이 몰려 154명이 압사하고 149명이 부상했다. 역대 최다였던 1959년 부산공설운동장 사고 압사자 67명의 2배 이상이다. 지난 1일 발생한 인도네시아 축구장 압사자 132명보다도 많다.

 

3년 만에 사회적 거리 두기 없는 핼러윈을 맞아 이날 이태원역 이용만 13만 명이 넘을 정도로 엄청난 인파가 한꺼번에 몰리면서 통제가 쉽지 않는 불가항력적인 측면도 있다. 그러나 사고 전날에도 10만 명에 가까운 인파가 몰려 시민이 넘어지는 등 사고 조짐이 있었다. 경찰과 서울시청·용산구청이 치안과 방역에만 신경 썼을 뿐 군중 밀집에 대비한 대책에 소홀했던 책임이 크다. 사고는 이태원 중심가에 있는 해밀톤호텔 뒤편의 세계음식거리에서 지하철 이태원역 1번 출구가 있는 대로로 내려오는 폭 3.2m, 거리 40m 골목에 엄청난 인파가 한꺼번에 몰려 발생했다. 내리막 경사가 있는 좁은 골목 위쪽에서 내려가던 인파와 지하철 출구를 나와 위로 올라오던 사람들이 뒤엉킨 가운데, 양쪽의 미는 힘의 가운데에 끼인 누군가가 넘어지면서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무너졌다. 사고 이후에도 인파에 막혀 구급대원들이 현장에 제때 도착하지 못해 심정지 환자를 구할 수 있는 골든 타임 4분을 넘겨 피해가 컸다.

피해자와 유가족 지원, 부상자 치료 등 사고 수습이 최우선이다. 이와 함께 사고 원인 분석과 재발 방지책 마련도 시급하다. 이번처럼 행사 주최자가 없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이는 축제나 행사는 정부 안전 대책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행정안전부는 2020년 재난안전법 시행령을 개정, 참가자가 1000명 이상인 행사에는 반드시 안전 관리 계획을 제출하도록 의무화했지만, 이번 이태원 축제처럼 주최자가 없으면 전담 안전 요원 배치 등 행사 안전 관리를 할 주최가 없는 것이다.

주최자가 없는 행사는 지자체와 경찰이 더 적극적으로 수용 적정 인원 분석 및 초과 인원 입장 통제, 통행로 확보, 도로통제(차 없는 거리) 등을 할 수 있는 군중 밀집 시 ‘안전 관리 매뉴얼’을 만들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정부는 5일까지 국가 애도 기간으로 정하고 한덕수 국무총리를 본부장으로 한 사고수습본부를 가동하고 있다. 희생자와 유족을 애도하고 삼풍백화점·성수대교 붕괴, 세월호 침몰 같은 대형사고가 더는 일어나지 않도록 국가의 모든 역량을 한 곳으로 모아야 할 때다.

문화일보 사설

 
 

10월 31일  민주당 간부·MBC, 재난까지 反尹선동에 악용하나

이태원 참사를 하루빨리 극복하려면 정치권이 먼저 사고 수습·유족 위로에 집중하고 사고 원인 및 재발 방지 대책도 차분히 논의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사고 직후부터 4차례 직접 회의를 주재하고 7차례 수습 방향을 지시한 데 이어 11월 5일까지의 국가 애도 기간도 선포했다. 여당인 국민의힘도 30일 긴급 비상대책위원회를 열어 “후속 대책에 당정이 만전을 기할 것”이라고 했고,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도 긴급 최고위원회를 열어 “정부의 사고 수습과 치유 노력에 초당적으로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야권 일각에서는 벌써 이태원 참사를 윤 정부를 공격하는 정략적 도구로 이용하는 조짐이 나타난다. 이재명 대선후보 캠프 대변인 출신인 남영희 민주연구원 부원장은 이날 SNS에 ‘이태원 참사는 청와대 이전 때문에 일어난 인재’라고 올렸다. 용산경찰서 소속 경찰 수백 명이 윤 대통령 출·퇴근에 투입돼 안전요원 배치가 불가능했다는 주장도 했는데, 사실관계 자체가 틀렸다. 또, MBC PD수첩 제작진은 ‘이태원 현장 목격자, 실종자 가족, 당국의 사전 대응 관련 문제점 제보를 기다린다’고 공지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재난을 반(反) 윤 정부 선동에 이용한다는 비판이 커지자 남 부위원장은 글을 내렸고, PD수첩 측은 당국 문제점 부분을 삭제했다. 애도 기간 선포로 자치단체들은 예정된 축제를 취소하고 기업·문화계도 핼러윈 행사를 접기로 했다. 세월호 침몰 등 대형 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유언비어가 난무했고, 이를 정략적으로 악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세월호 희생 학생들 방명록에 ‘고맙다’는 말까지 썼다. 민주당 권리당원 게시판에도 ‘참사를 두고 헛소리하는 당원은 제명해야 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국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문화일보 사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