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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문가들의 생각1/ 강준의『중국은 다르다』1. 연재를 시작하며 - ⑨ 사장님과 운전기사/ 김명호 인터뷰

상림은내고향 2022. 10. 9. 11:10

중국 전문가들의 생각1/ 강준의『중국은 다르다』1. 연재를 시작하며 - ⑨ 사장님과 운전기사/ 김명호 인터뷰 

◆ 강준의 『중국은 다르다』

중앙일보  2017-01-09

1. 연재를 시작하며 

 

중국의 초원, 빠샹에서 말을 타고 달리면 영혼이 자유로와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중국은 매우 가깝고도 중요한 나라이다. 경제적 측면뿐만이 아니라, 통일을 위해서도 중국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중국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내 주위의 평범한 친지들을 기준으로 볼 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중국을 오해와 편견으로 바라보고 있다. 중국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직도 많다는 것이다.
 

 나는 중국에서 8년 동안 살면서 그들과 사업을 했다. 내가 이 나라 저 나라 다니면서 살아도 보고, 사업도 해 보았지만, 중국만큼 특이하고 재미있으면서 배울 점이 많은 나라는 흔치 않다는 것이 중국에서 8년 동안 살아본 나의 결론이다.
 

 나도 처음부터 중국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긍정적으로 바뀌게 된 계기는 아마도 그들이 편했기 때문일 것이다. 서양 – 심지어는 일본에서도 - 에서 살면서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미묘한 차별적 시선을 중국에서는 전혀 느낄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 입에서 김치냄새가 나더라도 심지어는 실수로 트림을 하더라도 중국인들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다. 그들은 ‘다름’에 대해 관대하고, ‘잘못’에 대해 너그럽다. 중국인들은 왜 관대하고 너그러울까?
 

나는 중국을 대륙과 역사라는 두 가지 Key words로 이해한다. 커다란 땅에서 다양한 민족이 같이 어우러져 살다 보니 ‘너와 나는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존의 원리를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흑백으로 세상을 나누고 상대편을 재단하지 않는다. 이러한 공존의 원리로 인해 중국인들은 전혀 어울릴 것 같이 않은 공산주의 정치체제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의 콜라보를 통해 G2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또한 중국은 근대문명의 주역이라 할 유럽보다 훨씬 장구하고 찬란한 상업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오랜 상업의 역사에서 만들어진 상인 DNA가 중국인들에게 뿌리 깊게 남아 있다는 것이다. 내가 만나 본 장사 잘하는 민족들 – 네덜란드, 일본, 이스라엘, 인도, 중국 – 중 최고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중국인이라고 대답한다. 중국인들은 태생적으로 전략적이고 이기적이다.
 

내가 중국에서 살면서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던 재미있을 만한 이야기들(에피소드)을 중심으로 연재를 할 생각이다. 어느 나라를 바라보는 시각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나는 중국을 따뜻한 시각으로 바라본다. 내 글을 통해 독자들이 만약 ‘중국이 정말 살만한 곳이로구나’ 혹은 ‘중국인들이 이런 면에서는 한국인과 많이 다르구나’라고 느끼셨다면 나로서는 성공이다.
 

앞으로 연재할 내용 중 일부는 내 책 ‘중국은 다르다’에서 임의로 발췌한 것임을 미리 밝힌다.

 

2. 더블침대에서 3명이 잔다

 

두 달 전 일이다. 나의 오랜 중국인 친구(여자)로부터 피부미용을 위해 한국방문을 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언제든 환영한다는 의례적인 소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그녀는 혼자 온다는 이야기와는 달리 어머니와 언니를 대동하고 밤 11시가 넘어서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나는 지하철을 타고 호텔까지 데려다 주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어쩔 수 없이 비싼 밴택시를 타고 강남에 있는 호텔까지 갔다.

 다음 날 그들을 데리고 이미 예약해 놓은 서울의 어느 병원으로 갔다. 줄기세포로 만든 주사 한대 가격이 일인당 이천만원이라고 했다. 간단한 피부미용을 하기 위해 온 그들은 의사의 설득때문인지 그 자리에서 그 주사를 세 명이 전부 맞겠다고 결정했다다음 날 아침에 주사를 맞기로 하고 그들은 남는 시간을 쪼개 쇼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피부과 병원을 찾아갔다.

강북 목동에 소재한 피부과 병원의 의사는 난생 처음 중국인 손님을 받아서 가격을 너무 많이 할인해 주었다며 투덜거렸다. 총 진료비는 약 천 만원정도 나왔다. 그들 3명은 피부 미용을 위해 7천만원을 쓴 것이다. 중국에서 커다란 화학공장 및 부동산개발사업을 하고 있는 준재벌다운 씀씀이였다.

저녁식사를 위해 유명한 한정식 집을 예약했으나 그들은 굳이 비싼 곳에서 먹기 싫다며 취소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병원 근처의 김밥전문 분식점에서 순두부찌게, 김밥 등을 시켜서 맛있게 먹었다. 유쾌하고 즐거운 저녁 만찬(?)이 끝나고 우리는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갔다. 호텔에서 그들은 나에게 스스럼 없이 방에 같이 올라가자고 했고나는 아무 생각없이 따라 갔다가 혼자 피식하고 웃었다.

조그만 3성급 호텔의 일반실 더블침대에서 모녀 세 명이 같이 자는 것이다.  우스운 것은 호텔 아침식사 값을 아끼기 위해 중국에서 가지고 온 땅콩으로 아침을 떼운다는 것이다. 호텔비는 남편이 가지고 있는 비행기 마일리지로 결제했다고 한다. 아마 남편의 마일리지가 아니었다면, 나보고 여인숙을 잡아달라고 떼를 썼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왜 피부미용을 위해서는 수천만원을 쓰면서, 얼마 되지 않는 숙식비는 아깝게 생각하는 것일까? 수준 높은 피부미용은 한국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므로 얼마를 쓰던 아깝지 않지만, 매일 자고 먹는 일상적인 것에는 굳이 돈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부자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3. 중국진출의 첨병, 조선족

 

우리들은 중국동포를 조선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듣기에 따라서는 중국동포를 비하하는 말로 들리기도 하지만, 조선족은 중국정부가 사용하는 행정용어일 뿐이다. 중국국적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고 다녀야 하는 공민증(주민등록증)에는 어느 민족인지가 적혀 있는데 거기에 ‘조선족’이라고 쓰여 있기 때문이다.

중국정부가 굳이 민족을 구분하여 공민증에 적는 이유는 55개의 소수민족(중국은 한족이 약 90%, 나머지 55개 소수민족이 10%를 차지한다)에 대한 우대정책을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수민족은 대학입학, 당원자격취득, 공무원시험, 자녀출산 등에서 혜택을 받는다.

우리나라가 중국시장에서 일본을 누르게 된 주요원인이 두 가지인데 첫째가 중국인들의 반일감정, 둘째가 일본족(?)의 부재이다. 조선족은 한국과 중국의 정서를 동시에 이해하며 한국말과 중국말에 유창하여 한국기업이 중국에서 일본을 누르고 제 1교역국으로 부상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조선족들은 중국 내 다른 소수민족과 달리 모국인 한국이 매우 잘 살기 때문에 그에 따른 자부심이 클 뿐만 아니라 상당한 재력을 모은 분들도 많다. 예전에는 한국에 와서 몇 년만 고생하면 고향에 가서 아파트 몇 채씩 사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제는 중국의 물가도 올랐고, 환율도 예전만 못하여 한국에 와서 큰 돈을 벌어 귀향하는 조선족들은 많지 않게 되었다.

한국의 중국과의 교역량은 이미 미국과 일본을 합한 것보다 많아진 지 오래다. 그만큼 중국은 한국에게 중요한 시장이다. 또한 중국은 한반도 통일에도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기에 국제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전략적 파트너이다. 그러므로 한국은 중국을 잘 활용하여 선진한국과 통일한국을 위한 지렛대로 삼을 줄 아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앞으로도 중국과의 교역에서 크게 공헌을 할 사람들이 바로 조선족이다. 조선족들은 한국인의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 중국인보다 정도 많고 머리도 비상하다. 중국사회에서 교수, 군인, 관료, 기업가 등으로 성공한 조선족들도 차츰 늘고 있는 추세다.

그런데 한국인들이 조선족들은 무시하고 싫어하는 경향이 많다. 부자 나라인 미국에서 온 교포는 존경의 눈빛으로 보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한 중국교포에 대해서는 차별의식이 강한 것이다.  이러한 한국인들의 차별때문에 조선족들은 커다란 상처를 받고 한국에 대해 강한 애증이 교차하기도 한다.

미국에는 친북좌파적인 반국가단체가 많은 반면에 중국 조선족 사회에는 그런 단체가 없다. 조선족들은 북한의 실상에 대해 너무나 적나라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애국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종북세력들은 조선족을 본받아야 한다.

전세계에 퍼져 있는 화교들의 막강한 재력과 상인정신이 지금 중국발전에 큰 기여를 했듯이, 머리 좋고 성실한 조선족들이 한국 기업들의 중국진출에 첨병역할을 하고 있기에 중국시장에서 한국기업의 미래는 여전히 밝다.

 

④ 졸지에 북한요원이 된 사연

 

어느 영국인이 있다고 해서 유명세를 대동강맥주는 북한 역사상 처음으로 TV광고를 하기도 했다북한에 병이 귀해서 인지는 몰라도 중국의 청도맥주 상호가 그대로 적혀 있는 대동강 맥주를 흔히 있다.

 

<참고로 아래의 글은 책 '중국은 다르다'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북경에서 사업을 하는 친구와 둘이 북한 식당에 들러서 북한이 자랑하는 대동강 맥주를 마시며 잡담을 하고 있는데, 입구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한국인 손님들 몇 명이 들어오는데 전작이 꽤 있었는지 자리에 앉아 마자 여종업원을 상대로 술주정을 한다‘야, 넌 김정은 돼지새끼가 그렇게도 좋으냐?

그 소리에 깜짝 놀란 내가 뒤를 돌아보니 종업원들이 사색이 되어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었다. 참고로 중국에 있는 북한 식당은 을의 신세다. 손님과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중국 공안(경찰)이 들이닥치고, 결국 피해 보는 건 북한 식당이기 때문이다.

취객들이 계속 떠들어 대는 소리가 귀에 거슬리기도 했지만, 그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식당 종업원을 보니 나는 괜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그쪽으로 걸어가서 아무 말 없이 그 취객들을 쳐다봤다.

조금 전까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취객은 나를 보자마자 거의 졸도하는 수준으로 놀란다. 나는 딱 한마디 했다. ‘조용히 좀 합시다.’ 그리곤 자리로 돌아와서 친구와 다시 맥주를 마셨다.

취객들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듯 나가 버렸다. 아마도 그들 눈에는 내가 북한에서 파견된 요원쯤으로 보였는지도 모른다.

잠시 후 종업원 조장이 내 자리에 와서 눈을 흘기며 ‘싸움도 못하는 주제에’ 하면서 배시시 웃는다. 북한 정권에 대한 비판도 좋지만,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하는 것이 문화인의 도리일 것이다.

  

5. 친구의 은밀한 고백

 

<아래의 글 일부는 책 '중국은 다르다'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A
사 고위간부의 아내는 나의 오랜 친구이자 사업 파트너다. 나와의 합작 프로젝트로 상당한 이익을 본 그녀는 나와 진짜 친구가 되었다. 중국에서 말하는 진짜 친구는 술 친구가 아니라 돈을 같이 벌어 본 사람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느 날 오후 40대 초반의 상당한 미모를 갖춘 그녀와 오랜만에 찻집에서 보이차를 마시며 잡담을 나눴다. 그녀는 나에게 매우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마 친구 사이가 아니라면 절대 들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첫 번째 고백은 그녀는 지금 남편과 재혼한 사이이며, 결혼한 지 10년 정도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각방을 쓴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남편과 같이 동침을 하기만 하면 응급실에 실려갈 만큼 심한 알레르기 증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처음엔 알레르기 원인이 남편인 줄은 상상도 못하고 여러 가지 테스트를 진행하다가 마지막에 남편을 통해 알레르기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해도 들어주지 않아 결국 별거 아닌 별거 부부로 그냥 살고 있다며 한숨을 쉰다. 


두 번째 고백은 자기 집에 현금 200억 원(중국 돈으로 약 1RMB)을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1RMB라면 100RMB짜리 지폐 100장 묶음(1RMB) 1만 다발이 있어야 한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꽤 큰 방이 현금 다발로 꽉 차 있다고 한다. 


은행에 예치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남편이 소위 공직(국영회사)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은행에 그만한 돈을 넣어 놓으면 바로 적발되고, 차명계좌를 쓰는 경우도 언제 추적될지 몰라 그냥 현금으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1RMB짜리 현금 다발 10묶음씩을 일일이 비닐로 싸서 차곡차곡 보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금에서 나는 악취(?) 때문에 - 중국 지폐에서는 독특한 악취가 난다 - 그 방에 들어가기가 싫다고 한다


현금을 200억 원씩(한국 돈 기준)이나 집에다 보관한다는 그녀의 이야기가 믿겨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에게 과장 혹은 과시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에 액면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재산을 은행에 보관도 하지 못하는 중국의 부자 공직자들, 그녀의 남편은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돈을 모았을까? 


그 후 나는 그녀의 남편, 그리고 남편의 친구들과도 소위 말하는 친구(朋友)가 되었고, 일주일에 최소한 한 번씩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를 받게 되었다. 항상 그 자리에 갈 수는 없었지만, 가끔 초대에 응하면서 중국 상류층의 꽌시의 실체를 체험하게 되었다. 


고급 식당에 모여 각자 가지고 있는 법인카드를 번갈아 사용하여 식사를 하면서, 돈벌이가 되는 정보를 교환하고 토론하는 매우 진지하고 유쾌한 모임이었다. 나는 한번도 저녁값을 내 본 적도 없었고 그들도 나에게 그런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마음 편히 식사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다. 매번 다른 돈벌이를 물고 와서 진지하게 토론하고 즉석에서 투자 여부를 결론 내리는 그들의 모임에서 문화적인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그들과는 너무 먼 세상에 있던 나로선 약간 지루한 토론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남편과의 은밀한 생활을 별 부끄러움도 없이 털어놓는 그녀의 소탈함을 통해 나는 중국인들의 색다른 기질을 경험하였다. 또한 엄청난 금액의 현금을 집에 은밀히 보관하고 있으면서도 친구들끼리 저녁 식사를 하며 어떻게 하면 그 현금을 더 늘릴 수 있는지 토론하는 그들의 모습은 나에겐 매우 색다른 체험이었다. 


중국인들은 비교적 개방적이다. 자신의 사생활을 별 부끄러움 없이 이야기하는 모습은 중국인들의 개방성과 진솔함을 상징한다. 더욱이 자신의 아내와 친구인 한국인 남자를 자신의 친목모임(Inner Circle)에 거리낌 없이 참여시키는 친구 남편의 모습도 한국인 사회에서는 보기 힘든 개방성과 포용력을 상징한다.

 

6. 최고급 룸싸롱이 철퇴를 맞은 이유는

 

중국 북경에는 ‘천상AA’이라는 유명한 룸싸롱이 있었다. 중국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곳 중 하나라고 알려진 그 곳은 신장 170cm의 모델급 접대부만 1,000명이 근무하는 곳으로 하룻밤 술값으로 수 백 만원은 예사로 쓰는 곳이다. 그런데 그 곳이 어느 날 하루아침에 폐점을 하게 되는데 그 사연이 매우 기괴하다.

어느 날 살인강도가 잡혔는데 왜 범죄를 저질렀냐고 물어보는 방송기자의 질문에 그는 ‘천상AA’에 꼭 한번 가고 싶어서 라고 고백을 했고, 이 장면이 TV 뉴스를 통해 전국민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붙잡힌 장소 또한 ‘천상AA’ 근처였다.

방송이 나가고 얼마 후 그곳은 느닷없는 경찰의 급습에 의해 졸지에 폐점을 하게 된다. 룸싸롱의 폐업으로 인근의 옷 가게, 미장원 등 유관업체들도 연쇄부도(?)를 맞으면서 지역상권마저 크게 위축되었다. 어느 한심한 살인강도범의 고해성사 한마디로 인해 중국 최고의 룸싸롱이 철퇴를 맞게 된 것이다.


위의 어느 불운한 룸싸롱의 기괴한 이야기는 오늘날 중국 공산당의 처지와도 매우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시진핑이 부패와의 전쟁을 시작하면서 중국 고급식당의 매상이 뚝 떨어지고, 마오타이술 등 고급술을 제조하는 회사의 주가가 폭락했다. 중국 공산당의 최고지도자 그룹인 상무위원 멤버였던 자오용캉이 구속되기도 했다. 그의 재산규모가 14조라고 하니 그 규모 또한 매우 중국적이다. 시진핑의 전쟁은 아마도 기득권 층의 부정부패를 방관하는 경우 공산당의 존립마저 위험해 질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느낀 공산당의 자가치료일 것이다.

중국은 부정부패와 반민주의 상징이라 할 일당독재 정치체제의 모순을 공산당 스스로 극복하고 자기개혁을 하면서 서서히 선진적 민주주의 국가로 진화할 것인가? 아니면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경제적 발전으로 인한 사회적 압력에 의해 결국 공산당 정치체제가 붕괴하고 새로운 정치패러다임이 탄생하는 혁명적 시대가 올 것인가? 나도 매우 궁금하다.

첨언으로 중국 접대문화를 조금 덧붙이자면, 중국은 본래 2차 문화가 성행하는 곳은 아니다. 진짜 고급접대는 식당에서 시작해서 식당에서 끝난다. 진귀한 음식, 수 십 년 된 고급 술, 가수나 아나운서 등이 동석하여 말동무(?)가 되어주는 접대방식이 기업인과 고급관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진짜 고급접대이다. 이런 은밀하고 사치스런 접대문화가 바로 중국의 부정부패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2016.01.04   

⑦ 성 접대에 취한 J상무

 

2016년 새해부터는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의 성공/실패사례에 대한 글을 가끔 쓸 생각이다.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한국 중소기업 CEO들이 사례분석(혹은 간접경험)을 통해 중국에서 조금이라도 덜 고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아는 만큼 덜 고생한다.

많은 한국기업들이 중국의 시장규모 혹은 꽌시 만을 믿고 무작정 진출했다가, 결국 비싼 수업료만 내고 퇴출(Exit) 당하기도 한다.  어떤 기업은 중국 가면 다 털리고 나온다는 괴기스런 소문에 질려서 감히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하거나 중간상(Broker)를 통한 간접무역 만을 고수하다가 결국 황금기회를 놓치기도 한다. 반면에 어떤 기업은 철저한 준비와 적절한 현지화 전략으로 중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중국에서 성공하는 기업과 실패하는 기업의 차이는 과연 무엇인가? 사실 중국에서 성공(실패)하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경영의 기본에 충실했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중국에서 덜 노력하고, 더 큰 돈을 벌 수 있는 마법(Secrets)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중국과 중국인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시행착오를 훨씬 줄일 수 있고 성공확률도 많이 높일 수 있다. 중국사업을 하는 CEO는 무엇보다 먼저 중국환경에 맞는 사업계획을 수립해서 실행하고 있는지 되돌아보시기 바란다.

오늘 소개하는 이야기는 중국현지에 파견된 사업책임자의 도덕성이 사업성패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A
기업의 J상무는 무능하고 욕심이 많아 연말에 퇴직 대상으로 분류되었다. 그런데 그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다. 어느 중국 기업이 합작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산동성 청도시에 소재한 중국 회사의 CEO는 일자무식의 운전사 출신이다. 그는 자신이 모셨던 청도시 공무원의 도움을 받아 정부의 발주공사를 따내서 큰 돈을 번다. (사실 이와 같은 신데렐라 스토리는 중국에서 흔하다) 관변사업이란 것이 이권사업이고, 이권사업은 길게 하면 감옥에 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간파한 그는 사업을 과감히 접고 그 동안 쌓아 온 정부 인맥을 활용하여 새로운 이권사업인 환경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변변한 브랜드 가치(Brand Value), 기술력도 없는 그는 고민 끝에 묘안을 짜낸다. 글로벌 해외기업과 합작을 통해 청도시 공무원들의 환심도 사고, 이를 지렛대 삼아 이권을 챙길 계획을 짜낸 것이다. 


그런데 무능한 J상무와 탐욕스런 중국인 CEO의 만남은 처음부터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중국 측이 제안한 프로젝트가 가짜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보통은 사업을 접는 것이 상식인데, J상무는 오히려 가짜임을 밝혀낸 담당직원을 업무에서 빼 버리고 더 적극적으로 그 프로젝트에 매달려 중국회사와 협상을 통해 사업모델을 적절히 수정하게 된다


J
상무는 과장된 사업보고서를 가지고 경영층을 설득하여 투자승인을 얻는데 결국 성공한다. 프로젝트의 투자규모가 작았기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CEO는 공부하는 셈 친다는 말로 투자승인을 했다. 사업은 공부가 아닌데도 말이다.

이렇게 설립된 합작회사는 설립 후 2년 만에 문을 닫게 되고 A사는 결국 사업에서 철수하게 된다. 사업보다는 성 접대에만 관심을 가진 J상무의 무능과 부도덕으로 인해 결국 사업이 큰 위기를 맞게 되었고, 내부 감사에 의해 그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J상무에게는 중징계와 함께 연말에 퇴직조치가 내려졌다.

만약 사업의 실패를 통해 얻는 교훈보다 실패로 인해 잃는 기회비용이 훨씬 크다는 경영상식을 CEO가 제대로 인식했더라면 애초부터 이런 프로젝트는 승인을 받지도 못 했을 것이다

중국 사업의 최전방에 있는 책임자는 무엇보다 도덕적으로 투명해야 한다. 도덕적 투명성은 비단 성 접대 등 비리에 대한 투명성 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경영상황을 있는 그대로 경영층에 보고하지 않고 개인의 영달에 맞춰 허위보고를 하는 것은 더 심각한 도덕적 해이(Moral Hazard)에 해당된다. 중국에 진출하는 중소기업 CEO들은 지사장 선임 시 업무 역량 뿐만 아니라 도덕성에 대해서도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중국은 통제가 느슨하여 도덕적으로 해이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⑧ 사드 배치와 중국

 

어제 한중 외교장관 회담에서 예상했던 대로 왕이부장은 사드배치에 강력한 반대와 함께 철회를 요청했다고 한다. 안철수 등 대부분의 야당 정치인들도 중국의 경제보복과 대북공조체제의 와해 등을 이유로 국민투표까지 거론하면서 사드배치를 반대하고 있다. 중국정부의 으름장 때문에 한국 정치인들이 혼비백산한 국면이다.

중국은 어떤 나라인가? 중국은 가난하던 시절 십시일반으로 어렵게 모은 종잣돈(정부예산)을 허투루 쓰지 않고 잘난 자식(도시)에게 집중 투자해서 고시합격(경제발전)을 하게 되었다. 이제 그 덕을 다른 가족(지역)들이 골고루 볼 수 있도록 엄마(정치지도자)가 절치부침하고 있는 형국이라고 본다.

중국과 관련한 나의 일관된 주장은 첫째, ‘중국을 과대평가하거나 무서워하지 말자’, 둘째, ‘중국을 얕보거나 혐오하지 말자’, 셋째 ‘중국을 깊이 이해하고 활용하자’이다.

역사적으로 어느 나라나 인접국들과 갈등한다. 한국도 일본/중국과 그런 관계이다.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꾸짖고 비판을 하되 그들을 감정적으로 모욕하거나 외교적 결례를 범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듯이, 중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정부의 사드배치에 대한 과민반응에 대해 차분히 대응하면 되지, 어느 전직 국회의원과 같이 중국인을 모욕하는 발언을 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국격만 훼손하는 것이다.

사드배치와 관련하여 중국의 향후 반응에 대해 감히 예측을 해보자면, 중국은 한국에 대해 별다른 액션 없이 흐지부지 될 공산이 크다.

 

 이유는 첫째, 이기적이고 전략적인 중국 지도부는 중국에 직접적인 손해가 없는 사드배치에 대해 일단 과민반응을 보인 것일 뿐 경제적, 정치적 대립각을 오랫동안 세울 만큼 우둔하지 않다. 둘째, 그들은 한국과 북한에 일정 수준의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한국과 냉각관계를 오래 지속시킬 이유가 없다. 셋째, 한국과의 갈등으로 중국이 받게 될 데미지가 상당히 크다. 왜냐면 대한민국은 중국경제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이며, 중국인들이 사랑하는 K-문화 국가이고, 중국 정치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롤모델인 박정희의 딸이 현직 대통령으로 있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치 지도자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Virtue)는 현실에 대한 통찰력이다. 중국에 대한 통찰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정치인은 한마디로 자격미달이다. 사드 반대를 외치고 있는 일부 정치인들은 중국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인가? 정치 지도자들의 경제에 대한 오판은 국민 주머니를 얇게 하는데 그치지만, 안보에 대한 오판은 국민의 생존권에 결정타를 준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  

 

⑨ 사장님과 운전기사

 

지금부터 10년도 넘은 오래된 이야기이다. 중국 남부에는 경제특구이자 밀수도시로 유명한 산토우라는 도시가 있다. 좋은 기업이 매물로 나왔다고 하여 그 도시로 출장을 갔다. 인수협의를 끝내고 중국 측과 저녁식사를 했는데, 10여명이 원탁에 둘러앉아 독한 백주로 여러 차례 건배도 했다.

중국어를 한마디도 못했던 나는 옆에 있는 통역직원에게 의존하였다. 그런데 어느 중국인이 연신 큰 소리로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 분 말은 도통 통역을 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왜 통역을 안 해주냐고 물어보니, ‘사장 운전기사에요’ 란다. 외국손님 일행과 회사 사장단과의 만찬자리에 동석하여 목소리를 높이는 그 운전기사를 보면서 나는 매우 신선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중국인들은 한마디로 참 소탈하다. 남녀노소, 빈부격차에 따라 별로 사람차별을 하지 않는다. 이런 중국인 특유의 소탈함이 바로 경제발전의 보이지 않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모 그룹의 3세 후계자이자 사장님께서 운전기사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폭행을 휘두르다가 결국 검찰에 기소되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3년 동안 60여명의 운전기사를 갈아치운 갑질 매뉴얼로 이미 언론의 유명세를 치뤘던 분이기도 하다. 새벽에 골프운동을 가는데 양말을 안 챙겼다고 구타를 했다니 운전기사의 역할이 참 광범위하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경제규모나 민주화 수준으로만 볼 때는 세계 일류수준의 국가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여타 선진국과 확연히 구분되는 문제점 중의 하나가 사회적 갈등에 대한 자가치유 역량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나는 그 이유 중의 하나를 특권층의 탐욕과 반칙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과 증오심이라고 생각한다.

입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서 평생 갑질만 하고 살았을 사장님. 아침에 10분만 먼저 일어나서 자기 양말을 손수 챙기는 수고를 해야 본인의 삶이 더 편해진다는 단순한 이치를 이번 기회에 깨닫기를 바랍니다.

 

2016.11.04  모택동과 등소평을 통해 배우는 포용의 지혜

▲광우병 사태 시청광장을 가득 메운 촛불 시위대의 모습

 

요즘 매일 계속 되는 박근혜 대통령 관련 뉴스 때문에 나라가 어수선하다. 대통령의 측근관리 실패로 인해 비롯된 사건이지만, 연일 계속되는 대통령에 대한 언론의 비난과 하야/탄핵 요구에 짜증이 날 지경이다. 왜 한국인들은 진중하게 참고 기다리지 못 하고 양은냄비와 같이 쉽게 끓는 것일까?

북한의 김정은, 독일의 히틀러, 미국의 연쇄살인범과 같이 명명백백한 공공의 적에 대해서야 칼로 무 자르듯 단칼에 결단을 내리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다원화 되고 민주화 된 나라인 대한민국의 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을 마치 인민재판이나 마녀사냥 하듯 여론몰이를 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느낀다. 왜냐면 대통령이란 자리는 어느 개인의 명예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 국가의 품격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을 창업했던 모택동과 중국 경제 발전의 공로자 등소평을 통해 포용의 지혜에 대해 알아 본다.

모택동의 초상화는 지금도 북경 천안문에 걸려 있다. 모택동이 죽고 등소평이 실권을 장악하자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저 초상화는 계속 걸어 놓으실 건가요?' 모택동에 의해 세번씩이나 실각을 당했고, 아들은 반신불수가 되었던 등소평은 단호하게 말했다 '저 초상화는 영원히 저기에 걸려 있을 것이다'

공산당은 최소한 10배 이상이나 강했던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를 물리치고 중국을 통일했다. 이를 가능케 했던 것은 공산당 홍군의 높은 '도덕성' 때문이다. 공산당 홍군은 어디를 가든 국민의 재산을 빼앗지 않고 엄격하게 규율을 지켰던 반면에 국민당 군대는 여성 겁탈과 재산 수탈을 일삼았기에 민심을 잃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개석을 물리치고 통일중국을 실현했던 모택동은 중국 역사에 씻기 어려운 커다란 상처를 두 번이나 남긴다. 첫째는 대약진운동이다. 무리한 사회주의식 경제발전을 감행하다가 결국 실패를 하고 1500만명이나 되는 국민들이 굶어 죽는다. 두 번째는 문화대혁명이다. 모택동은 홍위병을 앞장 세워서 중국을 암흑과 야만의 세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문혁 기간 10년 동안 수 백만 명의 중국인들이 살해 당했고, 수 천만 명의 지식인들이 귀향살이를 했다.

모택동이 죽고 나서 권력을 잡은 등소평은 모택동의 5번째 부인인 장청을 비롯한 4인방을 모조리 숙청하고 개혁 개방 정책으로 폐쇄된 중국의 문호를 세계에 개방하여 경제발전을 이루게 된다. 등소평은 실권을 잡고 모택동 격하운동을 통해 쉽게 권력을 공고화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는다. 그는 공식 석상에서 모택동을 '공이 7할이고 과가 3할이다'라고 옹호하였고 그의 초상화를 여전히 천안문 광장에 걸어 놓은 것이다.

이번에는 등소평에 대해 알아 보자. 폐쇄되고 낙후된 죽의 장막, 중국을 지금과 같은 경제대국으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등소평이다. 그는 유명한 '흑묘백묘론 (아무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과 선부론(능력있는 자가 먼저 부자가 되어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을 통해 개혁 개방에 반대하는 수많은 공산당 지도자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경제개발에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등소평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있다. 중국 민주화 운동인 천안문 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하여 수 많은 인명을 살상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아무런 무장도 하지 못 했던 시민들은 탱크를 앞세워 밀고 들어온 군인들의 발포로 인해 수천명이 사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무력진압의 장본인이 바로 등소평이다.

모택동과 등소평은 중국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이다치명적 과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을 존경하는 것은 중국인들 특유의 실용주의적인 사상과 느긋한 포용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등소평은 정계에서 은퇴하고 4세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과 함께 행복한 노년을 보낼 때 뉴욕 타임즈와 인터뷰에서 '중국인민들은 나를 너무 존경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중국 공산당은 역사적으로 많은 잘못을 했고 나도 그 잘못을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결함이 있기 마련 아닌가?' 라고 고백했다. 인터뷰 당시 등소평은 이미 전 중국인민들에게 숭배를 받는 절대적인 지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런 고해성사를 했다.

누구에게나 음과 양이 공존한다.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마찬가지다. 지금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있으니 차분히 결과를 지켜 보자. 대통령 스스로 특검도 수용하고 수사도 받겠다고 했으니 말이다우리 국민들도 참고 기다리는 포용력과 인내심이 있었으면 한다

중국이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과 같은 아픈 과거를 딛고 일어서 경제 발전을 이루었듯이 한국도 군부독재와 유신의 아픔을 딛고 경제 발전을 이루었고, 광주민주화운동과 같은 비극적 희생을 통해 값진 민주주의를 달성했다. 그런데 국민들은 여전히 너무 성급하고 극단적이다. 조금 더 여유롭게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 봤으면 한다대한민국을 지키는 것은 대통령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인 것이다.  

 

2016.12.04  내가 촛불시위에 반대하는 3가지 이유

요즘 대한민국이 집단 우울증에 걸린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에 의해 벌어진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인해서 말이다. 좌파정권의 부조리한 종북정책과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비리에 진저리를 낸 국민들은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투철한 안보관' '청렴한 이미지'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대통령은 국민을 배신했고 국민은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그 결과 박 대통령은 4%지지율이라는 역대 최저치를 기록하며 식물대통령 상태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주 토요일 어김없이 최고치를 갱신하고 있는 촛불시위에 강력히 반대한다. 그 이유를 3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첫째지금은 국민의 힘을 통해 독재정권을 굴복시키는 혁명의 시대가 아니다우파건 좌파건 과거의 모든 대통령은 측근과 친인척에 의해 국정을 농단했다. 이명박 때는 국회부의장을 역임한 형과 대학동창들로 구성된 측근들에 의한 국정농단으로 초우량회사인 포스코가 거덜이 났다. 노무현 때는 비리 세무공무원 출신인 형과 박연차 그리고 가족들에 의한 국정농단으로 결국 노무현이 자살했다. 김대중, 김영삼, 노태우, 전두환 등 모두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덜하지 않다


이같이 뿌리깊은 역사를 지닌 국정농단은 박근혜라는 자연인 하나를 희생양으로 삼아 촛불시위를 한다고 해서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 문제는 진짜와 가짜 정치인을 구분하지 못 하고 이미지만을 쫓아 투표를 했던 수준 낮은 민심과 이를 악용하는 추악하고 나태한 정치세력의 콜라보에 의해 벌어진 구조적인 문제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정치가 이 지경이 되도록 수수방관하고 오히려 조장했던 국민들이 바로 주범이란 뜻이다. 국민들은 이제 조용히 반성하고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성찰해야 한다.

그리고 폭력행위가 없었고 질서정연 했다면서 촛불시위를 찬양하는 언론 보도에 국민들은 혹시 나르시시즘에 빠진 것은 아닌지매주 광화문에 모여 교통혼잡을 초래하고 있는 집단시위는 결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다. 제발 착각하지 말기 바란다.   


둘째, 대통령의 잘못에 대한 명백한 팩트 확인이 아직 덜 됐다박대통령이 아무리 잘못했다고 해도 사실 확인 후 적법한 절차에 따라 처벌하는 것이 법치국가의 도리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들에게 나오기 때문에 국민의 힘은 매우 강력하다. 그런데 그 힘이 지나칠 때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한다국민들은 과거 광우병사태 때의 광화문 시위를 돌이켜 보고 자중해야 한다광우병사태 때의 주도세력이 주장했던 미군철수, FTA 중단, 미국과 단교가 정말 실행되었다면 지금 나라 꼴이 어떻게 되었을까지금까지 광우병사태에 대해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을 나는 단 한명도 보지 못했다. 혹시 본 사람 있다면 나에게 알려 주시기 바란다.


조횟수 증가에만 혈안이 되어 선정성 경쟁의 광대춤을 추는 부도덕한 언론과 권력찬탈에만 혈안이 되어 악취만 풍기는 야당 그리고 이 기회를 통해 세력 확장에 여념이 없는 반국가단체들은 더더욱 자중해야 한다. 국민들의 촛불이 언젠가 당신들의 등어리를 지질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셋째, 무질서한 여론재판식 하야몰이 보다는 질서있는 퇴진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훨씬 더 바람직하다. 현대 사회의 가장 큰 위협요인은 '불확실성(Unpredictability)'이다. 이미 박대통령은 식물대통령이 되었고,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포스트 박에 대한 책임감있는 계획수립과 실행이다.

그런데 추미애, 문재인, 박지원이 주도하는 야당과 비박 세력이 중심이 된 여당은 진영의 이익과 차기 대통령 차지하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대한민국이 지금 겪고 있는 미래의 불확실성 문제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다. 야당이 정말 집권세력의 역량을 갖추었음을 국민들에게 증명시키려면 즉시 국가의 안정을 찾기 위한 로드맵을 수립하고 이에 따라 질서있는 퇴진과 정상회복을 위한 여야간 대화에 즉시 나서야 한다.


나는 선한데 너는 악하다는 선악론에 기초한 정치신념을 가진 집단이 창궐할 때 그 나라는 망한다중세의 종교전쟁, 모택동의 문화대혁명, IS의 무자비한 테러 등과 같은 야만의 시대의 공통점은 나만이 옳고 너는 악하다는 유아독존적 세계관이 그 사회를 지배했다는 점이다
 

 

얼마 전 추미애가 충혈된 눈으로 '선한 우리들이 악한 박근혜를 몰아내야 한다'고 외치는 모습에서 나는 섬찟한 광기를 보았다. 추미애, 박지원, 문재인으로 대표되는 야당세력은 정말 선한 사마리아인이 맞는가? 박근혜가 하야하고 그들이 집권하면 이 나라는 정말로 정의로운 나라로 환골탈태라도 한다는 말인가소가 웃을 노릇이다. 야당은 노무현의 자살 사건을 돌이켜 보고 스스로 반성하기 바란다.     


모택동에 의해 벌어진 야만의 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G2의 강대국으로 이끈 장본인이 바로 '흑묘백묘론'으로 유명한 등소평이다. 대가족들의 보살핌 속에서 평안한 노년을 만끽하던 때 뉴욕타임즈와 인터뷰를 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중국인들은 나를 너무 존경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나 중국 공산당이나 잘한 일도 있지만 잘못한 일도 많기 때문이다. 누구나 완벽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정치란 기본적으로 겸손과 포용의 원리에 입각한 상생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서로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끼리 모여 완벽한 사회를 지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정치 아닐까?◎

 

◆中 전문가 김명호 인터뷰, 

" 남북 분단 상황에서 중국은 절대 한국의 우방이 될 수 없다" 

월간조선 1월호 2017-01-21

중국 청()나라 말기 절대권력자 서태후, 인재등용에 편협하지 않았던 서태후도 결국 실패했다

 

⊙ 장제스(蔣介石)의 실패는 지식인(교수) 중용이 한 원인
⊙ 마오쩌둥(毛澤東)은 지식은 존중했으나 지식인은 존중하지 않았다
⊙ 마오쩌둥은 덩샤오핑(鄧小平)을 일찍 후계자로 삼아 보호하기도 했다
⊙ 전문가도 읽기 어려운 중국 철학자 핑유란(馮友蘭)의 책을 읽고 박근혜 대통령이 감명을 받았다고?
⊙ 홍위병들에 의해 수정주의자로 비난받은 김일성은 평양에 있는 마오쩌둥 아들 묘를 폭파
⊙ 남북 분단 상황에서 중국은 절대 한국의 우방이 될 수 없다
⊙ 중국인들이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세련된 사람으로 보는 이유

김명호
1950
년 출생 / 경남대·건국대 교수, 중국 싼롄(三聯)서점 서울점 대표 역임.
현 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 부영그룹 고문 / 《중국인 이야기》 등 저술

 

그는 한사코 자신에게 따라다니는 ‘중국 전문가’라는 말을 거부한다. 자신은 중국을 연구한 게 아니라 중국에 대해 궁금한 것을 알아 가는 놀이를 즐겨 왔을 뿐이라고 말한다. 놀이 삼아 중국을 알아 왔다고는 하지만 그는 중국, 특히 중국의 근·현대 인물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로 평가받고 있다. 


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김명호(金明壕) 교수 이야기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완간한 한길사가 그에 버금가는 중국인에 관한 이야기를 쓸 필자로 김 교수를 선택한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한길사 김언호(金彦鎬) 대표는 동아시아출판인회의 때 만난 중국 출판인의 소개로 김 교수를 처음 알게 됐는데, 그 중국 출판인이 “중국인보다 중국을 더 많이 아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는 일화를 전하기도 한다.
 


한길사가 발간하고 김 교수가 쓴 《중국인 이야기》는 그렇게 2012년에 시리즈 중 1권이 나왔다. 현재 5권까지 나와 있다. 베스트셀러가 됐음은 물론이다.
 


김 교수는 1991 3 1일부터 도서전문 출판과 서점으로 유명한 중국 싼롄(三聯)서점 서울점 대표를 맡아 1999년까지 일했다. 싼롄은 80주년 기념행사에 시진핑 국가주석과 리커창 총리가 참석할 정도로 중국에서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인문학 출판사이기도 하다. 경상대와 건국대에서 10년 동안 해 오던 교수직을 버리고 선택한 길이었다.
 


1970
년대부터 중국에 관심을 가진 그의 발자취를 감안하면 그는 줄잡아 40년 이상을 중국을 들여다본 셈이다. 주말이면 타이베이와 홍콩과 베이징을 드나들며 자료를 모았다. 그 대상은 책을 비롯해 잡지, 일기 등 광범위했다. 심지어는 골동품 가게를 드나들며 사진과 고문헌들을 입수했다. 베이징 뒷골목의 맛집도 그가 자주 들르던 곳이다. 베이징에 나가 있는 한국 언론사 특파원들이 한국에서 ‘귀한 손님’들이 왔을 때 서울에 있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베이징 뒷골목 어디에 맛집이 있는지를 물을 정도다. 중국을 연구한 것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큰 놀이터에서 놀이를 즐긴 것이라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방증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과정을 통해 김 교수는 중국에 관해 가장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고, 가장 해석을 잘하고, 가장 잘 아는 중국 전문가가 됐다. 물론 본인은 ‘전문가’라는 말을 부인하지만 말이다. 김 교수를 만났다.


중국이 장징궈(蔣經國) 총통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

중국 톈안먼 광장에 걸려 있는 마오쩌둥 초상화. 한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환영하는 초상화가 걸려 있지만 김 교수는중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중국이 우리의 우방이 아니라는 걸 늘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 중국에 관한 관심은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갖게 된 겁니까.
“중국에 대한 관심은 어떤 때는 있었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다시 생기기도 하고 그러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어요. 관심을 가졌다가도 그 방대함에 질려 버리곤 했던 거죠.

 

 — 언제부터 중국을 본격적으로 드나들었습니까.
“제가 건국대 교수 시절이었던 1988 1월에 대만 타이베이를 6개월 체류 일정으로 간 일이 있어요. 제가 도착한 날 대만 총통인 장징궈(蔣經國)가 사망한 거예요. 그때 제가 묵은 곳이 장징궈 총통의 유해가 안치된 바로 건너편이었어요. 그 장례식을 지켜보면서 문득 ‘중국이라는 나라가 재미있는 나라구나’ 하는 생각이 또 들었어요.

 

 — 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까.
“장제스(蔣介石)의 아들 장징궈를 추모하는 중국인들의 속내를 보게 된 거죠. 장징궈는 중국 대륙에서도 높이 평가를 받는 인물이었어요. 지금도 중국 대륙의 지식인들은 시진핑에게 대만의 장징궈와 같은 역할을 기대한다고 할 정도로 그를 높이 평가합니다. 그가 대륙에 있었다면 총서기가 됐을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체제와 상관없이 한 인물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하는 모습이 놀랍지 않습니까. 장징궈는 젊었을 때의 진보적인 신념을 죽을 때까지 유지했던 사람입니다.

장징궈 대만 총통의 장례식을 계기로 다시 발동된 중국에 대한 관심은 홍콩으로, 홍콩에서 중국 대륙으로 점점 더 영역을 넓혀 갔다. 주말마다 홍콩행 비행기를 탔을 정도다.

 

1975년 장제스가 사망한 후 대만 총통을 역임한 장징궈. 1988 1월 사망한 그를 이념이 다른 중국 대륙 사람들도 존경했다고 한다.  

 

— 홍콩에서는 누구를 만났습니까.
“당시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 니 홍콩에서 제가 만난 사람들이 거의 대륙에서 나와 있던 사람들이더군요. 문화혁명이 끝나고 나서 홍콩에 나와 있던 문화 관련 기구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 그때부터 중국 대륙의 인사들과의 교류와 함께 자료들을 본격적으로 수집했습니까.
“자료야 그 전에도 틈틈이 수집하곤 했지요. 그런데 홍콩에서 좋은 전시회들을 많이 했어요. 중국 인사들의 개인전도 많이 열렸는데 구경이나 한 번 해 보자 하는 마음으로 갔었습니다. 재미난 영화가 개봉됐다고 하면 달려가서 관람하기도 했고요. 그런 걸 가지고 글을 쓰겠다는 생각은 아예 없었기 때문에 정말 즐겁게 감상했어요. 책과 관련해서도 상하이 도서전시회, 둥베이 지방 도서 전시회 등이 열렸는데 가서 보고 눈에 띄는 서적이 있으면 구입해서 보곤 했지요.

 

 — 그러다가 싼롄 서점과 인연을 맺게 된 건가요.
“싼롄에서 저한테 외국인 중에서 가장 책을 많이 사 간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하도 책만 사 가니까 도서관 직원인 줄 알았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싼롄은 중국 베이징을 비롯해 76곳에 있었는데 홍콩싼롄도 유명했어요. 제가 그쪽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중국 도서전시회를 한 번 하자고 제안을 했어요. 중국은 책의 나라예요. 중국 도서전시회를 연 후 90년에 홍콩싼롄 측으로부터 서울에도 싼롄 서점을 하나 내자는 제안을 받게 된 거죠. 책도 자기네들이 다 보내 준다고 했고요. 그렇게 해서 대학 교수도 때려치우고 싼롄 서울지점 대표를 하게 된 거였습니다.

 

 — 싼롄서울점을 준비하고 경영하는 과정에서 중국 측 저명 인사들을 많이 만났습니까.
“네, 많이 만나게 됐죠. 너무나 오래 칩거를 해서 문화혁명 때 죽은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던 첸중수(錢鍾書), 20세기 중국 문단의 거목으로 불리는 샤옌(夏衍), 서예가 황마오쯔, 세계적인 화가 황융위, 시사만화가 딩충 등이 대표적 문화계 인물들이었죠. 첸중수는 루쉰(魯迅) 이후 최고의 대가로 꼽히는 사람이고 샤옌은 문혁 때 숙청됐던 문화계 거물이죠. 이외에도 중국 사회과학원 우너장, 중국 군사위원회 이론조 조장 등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분들은 제가 중국을 이해하고 제대로 알게 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인물들입니다.


정치의 곡예사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광둥(廣東)성 선전(深시내에서 시민들이 덩샤오핑(鄧小平)과 선전의 전경이 그려진 간판 앞을 지나가고 있다. 마오쩌둥은 일찍부터 그를 후계자로 생각했다고 한다.

 

— 중국 근·현대사를 통틀어 최고의 걸물은 누구입니까.
“그런 사람은 너무 많죠. 지금 우리나라도 흔히들 신문에서 잠룡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과연 국민들도 그 사람들을 잠룡이라고 생각들 할까요? DJ YS라면 잠룡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하다고 봐요. 지금은 잡룡(雜龍)들만 있는 것 아닌가요?


— 마오쩌둥 혹은 덩샤오핑(鄧小平) 같은 인물 아닙니까.
“대표적인 걸물이 누구냐 하는 거는 제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은 린뱌오(林彪)가 아닌가 생각하는데요.
“아, 그건 저도 동감이에요. 린뱌오는 비장미가 있어요.

 

  2인자로서 마오쩌둥 암살을 시도할 만큼 욕심이 있었던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데요.
“린뱌오는 원수 계급장을 받는 날에 안 나간 사람이에요. 50년대 말에 국방부 장관은 본인이 수락을 했어요. 그 사람은 어떻게 보면 마오쩌둥의 비밀병기나 마찬가지예요. 마오쩌둥이 궁지에 처했을 적에 그때는 꼭 나와서 그를 지원했죠.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전쟁이라는 것에 대해 넌덜머리를 냈고요. 생활 자체도 아주 청교도적인 생활을 한 사람이에요.

 

 — 마오쩌둥 암살에 실패해 공군기로 탈출하다가 몽골에서 추락사했다는 게 72년 당시 중국 당국의 발표였는데요.
“그게, 생각을 해 보세요. 비행기가 떴는데 전국의 비행장을 봉쇄시켰단 말이에요. 비행기가 내릴 수 없잖아요. 그러면 추락할 수밖에 없는 거죠. 린뱌오는 ‘조용한 시골에 내려가 현장(縣長)이나 하고 싶다’고 할 정도로 권력욕이 없던 사람이었어요.

 

 — ‘중국의 영원한 총리’라는 소리도 듣는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정치의 곡예사라고도 할 수 있고 가장 간악한 인물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저우언라이 때문에 문혁도 더 오래 갔고 저우언라이 때문에 문혁에서 살아난 사람도 많았지만 죽지 않아도 될 사람도 많이 죽었다고들 이야기하죠. 저우언라이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자기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될지를 잘 알았던 것 같아요. 자기의 무덤도 만들지 말고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말라고 했으니까요. 실제 무덤도 없어요. 그 부인도 그렇고요. 그냥 화장해서 뿌렸죠.

 

 — 덩샤오핑은 저우언라이 때문에 피해를 본 거죠?
“덩샤오핑이 3번 숙청을 당하지만 마오쩌둥이나 저우언라이는 덩샤오핑을 완전히 제거할 생각을 갖지 않았어요. 마오쩌둥은 50년대 말에 이미 덩샤오핑을 후계자로 생각했고요. 그 당시 50년대 말에 덩샤오핑은 이미 중앙위원회 총서기였으니까요.

 

 — 그럼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을 일부러 숙청하여 단련을 시킨 건가요.
“그거는 덩샤오핑이 제출한 자아비판서에도 나와 있어요. 대략 ‘주석께서 저한테 그러셨습니다. 예전에는 모든 게 행동도 민첩하고 사고도 정확하고 했는데 나이를 먹어 갈수록 왜 이렇게 엉망이냐고 야단맞았다’고요. 마오쩌둥은 나름대로 덩샤오핑이 안일에 빠졌을 때는 재교육을 시켰다고 볼 수 있어요. 저우언라이가 76년에 죽고 (덩샤오핑이) 두 번째 실각했을 때도 지방으로 안 보내고 베이징에다가 안치시켜 놓고서 자기 경호원들을 보내서 보호를 했으니까요.

 

 — 감시가 아니라 보호를 한 거다?
“그거는 보호라고 봐야죠.

 

 —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문혁이 끝나고 나서 한동안 마오쩌둥 격하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덩샤오핑이 나선 거죠.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은 잘한 게 70%고 못한 게 30%.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마오쩌둥을 계승하자는 것은 마오쩌둥의 모든 것을 계승하자는 것이 아니라 잘한 점을 계승하자는 것이다. 이게 진정한 계승이다. 우리 중공당의 표상은 마오쩌둥 외에 없다’며 격하운동을 막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오쩌둥이 잘못한 정책이라고 평가받은 대학입시를 부활하는 조치를 취했죠. 한마디로 실사구시의 정치인이었던 겁니다.


정치에 일찍 눈을 뜬 서태후(西太后)

— 장제스가 마오쩌둥에게 패한 이유는 뭡니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일단은 선전에 실패했고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장제스 정부가 한동안 ‘수재 내각’이라고 대학 교수들을 전부 입각시킨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도 하나의 실패 원인이라고 봐요.

 

 — 인재 등용에서 실패했다는 뜻인데 교수를 등용하는 자체가 문제는 아니잖아요.
“마오쩌둥 같은 경우는 장제스와 달랐어요. 마오쩌둥은 지식은 굉장히 존중했지만 지식인은 존중하지 않았어요. 지식인을 아주 무책임한 사람들이라고 봤거든요.

우리의 이야기는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의 탄핵과 관련 중국 여성 지도자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갔다. () 말기 동치제와 광서제 두 황제를 섭정하면서 최고의 권력자였던 여인 서태후(西太后)와 관련한 이야기였다.

 

 — 서태후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우리나라도 처음으로 여성 대통령을 배출하다 보니까 서태후에 대해 질문을 한 것 같은데 서태후에 대해서는 평가가 상당히 엇갈려요. 서태후는 견문이 그렇게 넓은 사람이 아니었어요. 베이징을 떠나 본 게 시안(西安)에 피란을 가서 잠시 있었던 것하고 톈진에 한 번 가 본 거 외에는 대궐 밖을 나와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어렸을 적부터 대궐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 당시 황제를 중심으로 한 세력들의 권력구조에 대해서는 어떻게 요리를 해야 하는지 잘 알았던 여자예요.

 

 — 정치에 일찍 눈을 뜬 거네요.
“그렇죠.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서태후가 죽기 직전에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지죠. ‘여자는 절대로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고요. 그 이유도 설명했어요. ‘너무 감정에 치우친다’는 거였죠.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를 몇 명씩 갈아치우면서 절대권력을 누렸던 여자인 서태후의 말이라는 게 재미있는 거죠. 저는 자기반성이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그 시절의 모든 잘못된 걸 갖다가 서태후한테 뒤집어씌우는 것은 서태후로서는 좀 억울할 것 같아요. 요즘 서태후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도 가끔 나오고 있죠.

 

 — 긍정적인 평가라면 어떤 부분이?
“그 당시에 나름대로 개혁을 추진했고 나중에는 한족 관료들을 많이 등용했어요. 만주에서 데려온 개들도 저들끼리만 어울리게 할 정도로 만주의 정통성을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인데도 말이죠. 나중에 보면 한족 관료들을 많이 등용을 했어요.

 

 — 인재 등용에 있어서 박 대통령과 대조가 되는 것 같네요.
“그렇죠. 서태후는 사람 등용에는 그렇게 편협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났었고요. 그 다음의 장점이 아는 것도 모르는 척하는 일이었죠. 일국의 제후나 통치자들은 아는 것도 모르는 척할 필요가 있어요. 상대방을 배려하는 미덕이 되기도 하거든요. 그 대신에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면 안 되죠. 그런데 박 대통령은 제가 알기로는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기도 했던 것 같아요.

 

▲중국의 소설가 왕멍(왼쪽)과 함께 경복궁 근정전을 찾은 김 교수. 왕멍은 1989년 톈안먼사건 직전까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 국무원 문화부 장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2000년 이후 거듭해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 예를 들면요?
“한 예가 박 대통령이 초기에 중국을 방문해 어느 대학에서 강연을 하면서 중국의 유명한 철학자인 핑유란(馮友蘭)의 《중국 철학사》가 ‘마치 자신의 마음의 평정을 찾게 해 주는 등대와 같았다’고 한 겁니다. 저로서는 도대체 이해가 안 가는 말이었어요.

 

 — 책을 읽고 느끼는 소감이야 다 다른 것 아닙니까.
“핑유란의 철학책은 중국인들이 봐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는 그런 내용들이에요. 저 역시 그렇고요. 그 책이 저도 인연이 있는 베이징 싼롄에서 나왔는데 박 대통령이 그 이야기를 한 덕에 중국에서 책은 많이 팔렸다고 해요. 단언컨대, 그 책이 외로운 사람에게 위로를 주는 책은 아닙니다. 또 하나는 …”

 

 — 또 있습니까.
2015 9월에 중국에서 열린 전승절 행사에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했잖아요. 저는 박 대통령이 거기엘 왜 갔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돼요.

 

 — 축하는 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아니죠. 중국 공산당의 승전 행사를 우리가 굳이 중국까지 가서 축하해 줄 필요가 있나요? 우리나라 대통령이 직접 낄 자리는 아니었다고 봐요. 또 당시 중국에 가기 전부터 국내 언론에는 시진핑 옆에 박 대통령이 서느냐, 푸틴이 서느냐 가지고 예측 보도가 난무했는데 그건 아무 의미 없는 보도였어요. 중국인들이 우리 언론의 그런 보도를 보고 웃더군요. 소련은 중국과 같은 승전국인데 푸틴이 시진핑과 나란히 서 있는 게 당연하다는 거였죠.

 

 — 박 대통령과 서태후는 비슷한 면이 없나요.
“그런 질문은 서태후한테 결례죠. 둘을 비교한다면 제가 보기에 박 대통령은 그냥 평범한 아줌마예요.

 

 — 중국의 수많은 인물들을 들여다보면서 연구했는데 그 사람들이라면 지금 한국에서 어떤 정책을 우선 펼쳤을 것 같습니까.
“유아와 관련한 정책이 아닐까 합니다. 부모들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게 아이들을 맡길 수 있는 시설을 만들고 아이를 더 낳고 싶게 만드는 정책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중국의 국력 중 인구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인구 문제는 국가 정책에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유아 정책과 관련해서는 제대로 된 정책을 내놓은 게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북한과 중국 친밀감 깨지지 않을 것

중국의 유명 서예가 황먀오쯔(오른쪽) 2008년 베이징에서 자리를 함께한 김 교수(가운데).

 

— 중국인들은 당연히 남한보다는 북한에 더욱 친밀감을 가지고 있겠죠?
“중국인들이 북한에 더 친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한국에서 공부하고 간 젊은 친구들의 발언도 보면 북한에 더 우호적이에요. 서울은 놀기 좋고 사고 싶은 물건도 많고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북한에 더 친밀감을 느낀다는 건데 제가 보기에는 한국에 와서 살면서 쌓인 한국에 대한 불만이 도리어 북한에 대한 친밀감으로 나타난 거는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 그런 친밀감이 깨질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중국 둥베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특히 그런데 사돈의 팔촌까지 치면 북한과 인연 없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6·25전쟁 때 중공군만 참전한 게 아니라 민간인들도 많이 왔다 갔다 했어요. 그러다가 인척이 만들어지기도 하면서 북한과 인연이 있는 집안들이 많아요.

 

 — 그런데 왜 김정은은 방중(訪中)을 못하는 겁니까.
“안 가는 거겠죠. 그러다가 만약에 김정은이 중국을 방문한다면 그 다음에는 북·중 관계가 다시 좋아지는 거죠. 북·중 관계는 그동안 단절된 적이 많았습니다. 특히 문화대혁명 때와 그 이전에도 북한대사관에 나가 있던 대사들이 들어왔다가 다시 안 나가고 그런 적이 많았어요.

 

 — 문화혁명 때는 왜 그랬죠.
“홍위병들이 북한 김일성에 대한 비난을 했죠. 김일성은 수정주의자니까 가서 붙잡아다가 요절을 내야 한다는 내용까지 대자보로 붙이고 그랬죠. 김일성은 홍위병들의 그런 행태는 모두 마오쩌둥이 시킨 것이라고 생각했죠. 친위대니까. 김일성이 화가 나서 6·25 때 참전했다가 한국에서 전사한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의 묘가 평양에 있었는데 폭파시켜 버렸죠. 그러다가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와서는 무덤을 다시 더 성대하게 만들어 주었죠. 중국과 북한 관계가 그래요. 마오쩌둥이 한 유명한 말이 있어요. ‘계속 싸워야 한다. 싸우다가 지치면 그때 친구가 된다’는 말이죠.

 

 — 그렇다면 북·중 관계는 김정은이 방중할 경우 더 견고해질 수 있겠네요.
“그렇죠. 그러면서 그 우호적인 기간이 또 얼마 동안 지속이 되겠죠.

 

 — 북한 핵을 보는 중국인들의 속내는 뭡니까.
“일단 북한 핵에 별 관심들이 없는 것 같고요. 중국 사람들은 마오쩌둥이 핵에 대해 한 말을 진리에 가깝게 생각합니다. ‘핵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렇지만 핵이 없으면 국제사회에서 대접 못 받는다’는 말이죠. 물론 지도층들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지만 일반 중국민들은 북한 핵에 별 관심이 없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 중국의 적극적인 대북 제재 동참을 기대한다는 것은 난망한 일이네요.
“저는 그렇다고 봅니다.

 

 — 시진핑은 실용적인 지도자입니까, 권위적인 지도자입니까.
“둘 다죠. 시진핑은 혼자서 특출한 지도자가 아니라 여러 세력을 대표하는 지도자로 봐야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혁명세대 자녀 세력을 대표하는 사람이죠.

 

 — 세력을 대표하는 지도자라면 제왕적 권력을 갖기는 어렵겠네요.
“그 세력이 시진핑에게 제왕적 권력을 부여해 준 걸로 봐야죠.

 

 — 시진핑에게 상당한 권력이 쏠리고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거부감은 없겠네요.
“없는 걸로 봐야죠. 저 사람들은 원래 먹는 거만 해결되면 군말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 언제든 권좌에서 끌어내릴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인가요.
“그게 아니고 언젠가는 그만둘 사람이니까요.


국제사회에서 중국 지지를 기대하는 것은 착각

1997년 자신의 사진집 《세기의 가교》 출판에 맞춰 베이징을 방문한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함께한 김 교수(맨 오른쪽).
 

— 중국인들은 한국인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잘 아시다시피 한때는 한국을 부러워한 적이 있었죠. 그래서 우리한테 물건 100원짜리를 300원에 팔아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너희 나라는 부자’라는 것이었죠. 그런데 요새 와서는 ‘한국이 우리에게 필요한 게 있지 우리가 한국에 필요한 게 뭐가 있나’라고 하죠. 그렇게 바뀌었어요.

 

 — 지금 중국에 필요한 것을 한국이 줄 수 있는 게 있다고 보시는지요.
“적절한 답이 될지 모르겠는데 제가 90년대에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님의 책을 중국에서 냈어요. 당시 중국 공부를 하다 보니 우리한테는 있고 중국에는 없는 게 뭘까를 생각하게 됐죠. 기업인 이야기였습니다. 싼롄서점에 제안해서 3년을 준비해 책을 냈습니다. 땅이 커서인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이 팔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중국에는 그런 책이 필요 없습니다. 이미 중국은 그런 기업인들을 수없이 가지고 있으니까요. 불과 20여 년 전의 일입니다.

 

김 교수는 카메라와 수첩을 들고 직접 중국, 홍콩, 타이베이 등지를 찾아다니며 중국과 관련한 자료들을 수집했다.

 

— 사드 배치는 중국이 왜 그렇게 반대하는 겁니까.
“제가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다른 거는 잘 모르겠는데 우리나라 대통령이 사드 배치를 결정한 것에 대해서는 이런 이야기들을 하죠. ‘국가원수 간에는 서로 만나면 웃고 그러는 거지. 그렇게 만날 때 웃는다고 굉장히 대단하게 가까운 사이로 여기다가 북한이 미사일 쏘고 핵실험을 했는데 시진핑이 전화도 안 받으니까 삐쳐서 사드 배치를 발표한 것 아니냐. 한국과 미국 관계에서 한국은 미군이 무슨 무기를 배치하든 간에 브레이크를 걸 권한이 없는 나라다. 배치하고 싶어하는 미국이 그러면 몰라도 왜 한국 대통령이 먼저 그러느냐’라고 말들을 하죠.

 

 — 한국이 중국을 상대할 때 가장 명심해야 할 점은 뭡니까.
“중국이 우리의 우방국은 아니라는 점이죠. 중국은 절대 우리를 우방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다른 나라를 도와주거나 다른 나라에 시비를 걸거나 그런 나라가 아니에요.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지원이나 지지를 기대하는 것만큼 엄청난 착각도 없다고 생각해요.

 

 — 중국인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요.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죠. 겉과 속이 틀려야 가장 세련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게 중국 사람들이에요.

 

 — 왜요.
“겉과 속이 똑같으면 그건 동물이죠. 겉과 속이 똑같으면 매너라는 게 나옵니까.”⊙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