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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이야기5/ 주나라 려왕 - 원(元) 나라 쿠빌라이 칸 - 명(明)나라 朱元璋 - 청나라末 미녀 공주의 비밀을 벗겨라

상림은내고향 2022. 9. 25. 10:51

중국 이야기5/ 주나라 려왕 - 원(元) 나라 쿠빌라이 칸 - 명(明)나라 朱元璋  -  청나라末 미녀 공주의 비밀을 벗겨라

■ 2016-12-12  3000년 전 탄핵당한 주나라 려왕

서주(西周) 10대 왕이었던 려왕(厲王·재위 기원전 877~841 / 생몰 기원전 ?~828)은 부패하고 사치를 일삼는 왕이었다. 그의 성은 희()였고, 이름은 호()였으며, 아버지인 이왕(夷王)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가 왕위에 오르기 약 170년 전 건국된 주나라는 초기의 무왕과 성왕의 강력하고도 건전한 통치로 중국 대륙의 제후국들을 거느리면서 천하의 중심이 된 나라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전제왕정이 계속되다 보니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 진 상태였다.


◆ 주나라 10대 려왕, 일하기 싫어하고 주색잡기에만 골몰

려왕의 아버지였던 이왕만 하더라도 제()나라의 애공(哀公)이 그에게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제후를 끓는 솥에 넣어 삶아 죽여 버릴 만큼 포악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려왕은 이런 포악성은 없었지만 일하기를 싫어하는 군주였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따르면 그는 국인(國人·주나라의 제후)에게 나눠주어야 할 토지와 산림, 소택지 등의 관리권을 빼앗아 그 이익을 독점하여 자신의 사치생활에 탕진했다. 또한 그는 일체의 언로(言路)를 막고 전제정치를 일삼았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못해 말도 함부로 하지 못하고 길에서도 눈짓만으로 생각을 나눌 만큼 숨 막히는 사회가 됐다. 누구라도 자기가 듣기 싫은 말을 하면 극형에 처했기에 제후들도 왕을 알현(謁見)하러 오지 않아 려왕은 점점 궁궐 속에서 혼자 지내며 술과 여색만을 가까이 했다. 뿐만 아니라 위()나라의 무당을 궁중에까지 끌어들여 백성들을 감시하고 반대세력은 모두 잡아 죽이기까지 했다.

보다 못한 소목공(召穆公)이 직언을 했지만 려왕은 이를 가벼이 흘려들었다. 소목공은 “백성의 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강물을 막는 것만큼이나 위험합니다. 물을 다스리려면 필히 소통하는 물길이 있어야 물이 바다로 흘러갑니다. 국가를 통치하는 것도 이와 같아 백성들이 마음껏 말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라고 간언했지만 려왕은 귀담아 듣기는커녕 오히려 소목공을 축출해 버렸다
.


◆ 민심 폭발, 폭동에 왕위에서 쫓겨나 평생 숨어 살아

민심은 부글부글 끓었고 마침내 폭동이 일어나서 려왕은 쫓겨나 도읍인 호경(鎬京·지금의 산시(陝西) 성 시안(西安) 부근)에서 도망쳐 체(彘·지금의 산시(山西) 성 곽주(霍州) 부근)에 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실상 여왕은 자신이 직접 폭정을 휘둘렀다기보다는 영()나라의 이공 (夷公)을 측근에 두어 경사(卿士) 벼슬을 주고 그에게 국정의 전반을 맡겨 버리고 자기는 그저 주색잡기에만 열중한 것이었다.


◆ 주 왕실 후손, 제상 협치, 꽃 피운 14년 공화정치

려왕이 도망친 직후 사람들이 왕궁에 갔지만 국왕을 찾을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사람들이 후환을 없애려 왕자를 찾고 있을 때 소목공이 나타나서 대신들과 상의한 후 잠정적으로 천자를 대신할 권한을 직권을 손에 쥐게 되었다. 이 때가 기원전 841년이었는데 소목공은 왕이 없는 상태에서 주()나라의 정공(定公) 및 여러 재상들과 공동으로 화합해서 국가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중국 역사는 이 시기를 공화(共和) 또는 주소공화(周召共和)라 부른다. 핵심이 되었던 두 사람 중 정공은 주나라 왕실의 일원으로 상징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소목공은 개혁세력의 대표로 인식되었다. 두 사람의 정치적 입장이 다를 수 있었지만 혼란에 빠진 국가의 안정과 사태수습을 위해 언제나 협의하면서 정사를 이끌어 나갔다.

사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지만 죽서기년(竹書紀年·하은주부터 위나라 양왕까지의 편년체 중국 역사서)과 여씨춘추(呂氏春秋·진나라 재상 여불위가 편찬한 역사서)에는 이 내용이 약간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공()나라의 제후였던 화()가 천자를 대신해서 정치를 하였으므로 공화라는 말이 생겼다’라고 하고 있기도 하다
.


◆ 최고 권력자 없었지만 협치로 정국 수습

아무튼 이 시기 원톱 시스템으로서의 천자는 사라지고 여러 세력들이 힘을 합하여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서로 견제하면서 국가를 함께 경영해 나갔다. 이 시기는 기원전 841년부터 기원전 828년까지 14년 동안 지속되다가 려왕이 유폐지에서 죽자 려왕의 아들인 정()이 선왕(宣王)으로 즉위하면서 막을 내리고 주나라의 왕실은 겨우 회복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주나라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 후였고, 그 이후 주나라의 국세는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서양에서 공화제(republic)가 도입된 뒤 일본의 란가쿠(蘭學)시대에 이 단어의 번역에 골몰하던 일본학자들은 중국고전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아내어 이를 ‘공화제’라고 번역해서 지금까지 일본은 물론 동아시아 전역에서 쓰는 단어가 됐다. ,republic은 개인적인 것에 대비해 공공의 사물이라는 res publica에서 나온 말이다.

 

◆ 왕의 무능, 측근의 국정농간 3000년 전의 역사 데자뷰

역사가 되풀이된다는 말은 자주 하고 있지만 지금부터 무려 3000년 전 중국에서 있었던 일과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일은 단순히 데자뷰(deja vu)라는 말로만 설명하기에는 너무 유사한 점이 많다. 왕의 정치적 무능과 외부로부터 굴러들어온 1인에 의한 국정농간, 그리고 소통의 부재와 직언을 할 수 있는 신하의 부재 등이 그렇다. 데자뷰란 최초의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본 적이 있거나 경험한 적이 있다는 이상한 느낌이나 환상을 뜻하는 프랑스어로 ‘이미 보았다’는 의미다. 영어로는 ‘already seen’에 해당한다.

국회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고 이제 공은 헌법재판소로 넘어갔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어떤 식으로 결정될지는 결론이 나야 알 수 있다. 하지만 당분간 우리는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된 상황을 맞이해야 한다
.


◆ 협치, 공화 잘 하면 ‘최고지도자 부재 시기’ 더 평가할 수도

이럴 때일수록 기원전 9세기 주나라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하면서, 서로가 힘을 합쳐() 어우러지는() 결론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뒤 후손들이 오늘의 우리를 얘기하면서 공화(共和)의 의미를 다시 되새길 수 있길 기대한다.


당장 눈앞에 있는 이익보다 역사는 협치를 더 가치 있게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치권이 깨닫기 바란다.

유일(劉一) 여의주식회사 상임고문

 

■ 원() 나라

◆쿠빌라이 칸 1215 - 1294

 

중국을 정복하여 원조를 창립하고 초대 황제가 되었다. 쿠빌라이의 업적은 당대 이래 분열되어 있던 중국을 통일했다는 것이다


쿠빌라이 칸은 중국어를 읽거나 쓸 줄은 몰랐지만 중국 사상의 우수함을 일찍 깨닫고 자신의 주변에 믿을 만한 유교학자들을 불러모았다. 쿠빌라이는 통치를 위해서는 피지배층과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는 인종정책을 써서 중국의 인구를 네 부류로 나누었다. 하급직에는 한족 출신의 관리들을 썼지만 중요한 자리는 외국인들에게 배당했는데 그 좋은 예가 바로 마르코 폴로이다. 쿠빌라이 칸의 이러한 통치술은 그의 사후 이어지지 못했다.

 

▲쿠빌라이 칸

 

칭기즈 칸의 손자이다.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성덕신공문무황제(聖德神功文武皇帝). 중국을 정복하여 원조(元朝)를 창립하고 초대 황제가 되었다. 당시 몽골족은 러시아 남부 지역의 킵차크 한국, 페르시아의 일한국, 몽골의 족장들이 전통적인 유목민 생활을 영위해 나가고 있던 스텝 지역을 모두 다스리고 있었다몽골족 출신의 쿠빌라이가 정치·문화에 있어서 독창적이고 유구한 역사를 가진 중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특별한 통치술이 요구되었다.

 

역사적 배경

몽골족은 갑자기 강성해진 유목민 세력이었다.

 

칭기즈 칸 이전의 시대에 그들은 반야만적인 부족집단에 불과했고 역사적으로도 별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들은 원시적 문화유산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조직적인 수렵행위와 가축무리의 관리를 빼놓고는 특별한 경제활동 경험이 없었다. 쿠빌라이가 태어나기 몇 해 전만 해도 그들은 문맹이었고 통치술에 대해서는 극히 기본적인 지식밖에 없었다. 이같은 통치 미숙 때문에 몽골족의 제국은 급속히 붕괴하게 되었다. 쿠빌라이와 같은 몇몇 특출한 예를 제외하고 (이때문에 몽골족은 쿠빌라이를 현명한 군주[Setsen Khan]라고 했음) 몽골족 출신의 군주들은 권력을 개인 또는 가문의 소유물로 여겨, 그 권력으로부터 즉시 이득을 얻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때문에 몽골족은 확고한 정치적 전통이 확립되어 있던 중국과 같은 지역을 제외하고는 늘 지속적인 국가형태를 조직하는 데 실패했다. 중국에서조차도 몽골족은 통치자의 의지와 능력에 따라 모든 것을 결정하곤 했다.

 

몽골족은 순전히 무력으로 중국을 장악했다. 이같은 무력과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그리고 그 전대인 ()이 발전시킨 빛나는 문화적 기반에 힘입어 쿠빌라이는 잠시 동안이나마 몽골족의 통치권이 확립되었다는 환상을 가질 수 있었다.

 

실제로 동시대인의 눈에는 그의 치세가 내실 있는 영토확장과 지속적인 업적의 시대로 보였음에 틀림없다. 이때문에 베네치아 출신의 상인인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의 신하가 되었고 그가 쓴 책 〈동방견문록〉은 르네상스 시대에 동양에 대한 1차적 정보원이 되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치세 초기부터 해결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했다.

 

이 점은 한족(漢族) 출신의 한 신하가 그에게 제출한 보고서에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이 듣기로 마상(馬上)에서 제국을 정복할 수는 있어도 통치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경험이 없는 몽골족이 중국을 통치하려면 중국의 방식대로 운영하면서 중국적 문화양식에까지도 적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중국의 방식을 수용하면 할수록 그들은 점점 더 중국의 문화에 동화되어 몽골족의 정체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반면 몽골족이 중국 및 기타의 문화적 요인들을 억압해 나간다면 그들은 백성들로부터 소외당하게 되고 결국은 배척받게 될 것이었다. 어떤 경우이든 몽골족은 문화적으로나 수적으로나 열세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능력 있는 특권계급으로서 오랫동안 중국을 다스릴 수는 없게 되어 있었다. 단지 쿠빌라이 개인이 이룩한 빛나는 업적 때문에 이같은 사실이 감추어졌을 뿐이었다.

 

권력에의 부상

쿠빌라이 칸은 칭기즈 칸이 총애한 아내에게서 출생한 4명의 아들 중 막내인 톨루이의 4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30대 중반이던 1251년부터 몽골 제국의 영토확장과 기반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형인 몽케 칸은 칭기즈 칸의 셋째 아들인 오고타이가 계획했던 송의 정복과 페르시아 정벌을 결심하고, 페르시아 정벌은 쿠빌라이의 또다른 형인 훌라구에게 맡겼다. 쿠빌라이에게는 중국정벌에 대한 군사·행정의 전권이 주어졌다.

 

그는 중국어를 읽거나 쓸 줄은 몰랐지만 중국 사상의 우수함을 일찍 깨닫고 자신의 주변에 믿을 만한 유교학자들을 불러모았다. 그의 통치술은 주위 한족 학자들의 영향 아래 형성된 것이다. 그는 이같은 영향 때문에 통치자와 피지배자는 상호의존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고 타고난 도량과 인자함의 폭을 넓혀나갔다.

 

또 자신의 사령(私領)인 경조(京兆 : 지금의 산시 성[陝西省] 시안[西安])에 탁월한 행정체제와 보급기지를 갖추었다. 야전(野戰)에서 그는 휘하의 부장(部將)들에게 측근 학자들이 가르쳐 준 교훈, 즉 피정복민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중요하고 또 효과적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것은 칭기즈 칸의 방법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고, 중앙 아시아로 진격한 쿠빌라이의 동료들과 비교해 볼 때 엄청나게 진보한 문화적인 태도였다.

 

사실 중앙 아시아로 진출한 몽골족 지도자들은 한 도시를 함락시키면 대규모 학살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쿠빌라이는 윈난 성[雲南省]의 대리국(大理國)을 먼저 침공하여 송의 측면을 돌파하는 작전을 썼다. 그의 군대는 1253년 가을 윈난 지방으로 들어와 겨울에 대리성(大理城)을 정복했다. 1254년 그가 북상하게 되자 부장인 우리양카다이가 이 지역의 위수(衛戍)를 맡게 되었다.

 

1257년 몽케의 지휘 아래 남송에 대한 전면작전이 개시되었으나 1259년 몽케가 중도에 죽었다. 한편 쿠빌라이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한 도시를 포위공격하던 중, 형제 중 막내이기 때문에 고국의 방비를 맡았던 아리보거가 스스로를 칸으로 옹립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교전 중이던 남송과 휴전을 협정했다. 1260 4월 그는 몽골 남동부 상도(上都 : 지금의 카이[開平])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의 지지세력들은 쿠릴타이(Kuriltai : 大會議)를 열어 5 5일 몽케의 뒤를 이어 만장일치로 쿠빌라이를 칸으로 선출했다.

 

10일 후 그는 한문으로 작성된 포고문을 통해 자신이 제위를 계승했음을 선포했다. 그 당시 장자계승이 후사의 원칙으로 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막내인 아리보거도 몇몇 강성한 지지세력의 도움으로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자신을 칸으로 선출되게 함으로써 쿠빌라이에게 정면으로 대응하고 나섰다. 쿠빌라이가 가계상 적자이고 합법적인 군주라는 마르코 폴로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통성에는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임종 직전의 칭기즈 칸이 당시 어린 아이였던 쿠빌라이를 장래의 칸으로 지목했다는 전설이 몽골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지만 이것은 제위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된 것으로 보인다.

 

1264년 쿠빌라이는 아리보거와의 전투에서 그를 패배시키고 항복할 것을 강요했다. 아리보거는 2년 뒤에 죽었다. 아리보거와의 전쟁은 한 예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쿠빌라이 가문의 불화는 계속되었다. 그에게 반기를 든 세력은 쿠빌라이가 스텝 지역의 유목민 생활을 버리고 낯선 중국문화를 수용했다는 사실에 분개하는 사람들이었다.

 

반대파의 지도자로 카이두가 추대되자 가문 내의 불화는 더욱 깊어졌다. 일찍이 칭기즈 칸은 친히 오고타이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한 바 있었는데 이 오고타이의 손자인 카이두는 당연히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제위는 1250년 쿠데타의 결과로 오고타이 가문에서 톨루이 가문으로 넘어간 것이었다. 카이두는 쿠빌라이에 대한 적개심을 버리지 않았고 몽골 본국과 투르키스탄의 군주로 이 지역을 통치하다가 1301년에 죽었다.

 

카이두와 쿠빌라이의 싸움을 통해 쿠빌라이가 결정적으로 중국세계를 수용하고 유목민의 생활에 등을 돌렸음을 알 수 있다. 칭기즈 칸은 강인하고 무자비하여 언제나 불화하는 경향이 있는 몽골족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세력이 강했어도 스텝 지역의 귀족정치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없었다.

 

중국의 통일

쿠빌라이의 업적은 당대(唐代) 이래 분열되어 있던 중국을 통일했다는 것이다.

 

이 업적은 그가 야만족·유목민 출신의 정복자라는 점 때문에 더욱 가치 있는 것이다. 중국의 공식 사서(史書)에서조차도 쿠빌라이는 존대를 받고 있다. 그는 1260년부터 연호를 쓰기 시작했고 남송이 붕괴하기 7년 전인 1271년부터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제정·선포했다. 그는 몽골 북부에 오고타이가 세운 단명한 수도 카라코룸에서는 거처한 적이 없었고 그 당시 대도(大都)라고 알려진 지금의 베이징[北京]에 자신의 수도를 세웠다.

남송을 완전히 정복하는 데는 몇 년이 더 걸렸다.

 

쿠빌라이는 중국의 북부지역만을 다스리고 남부지역은 남송이 명목적으로 관리하는 체제를 유지해나갈 생각이었으나, 그가 남송에 보낸 사절들이 소홀한 대접을 받고 억류당하자 남송을 정벌하기로 결심했다. 1267년에 이를 개시했다. 남송의 황제는 대신들이 잘 보필하지 않아 사태의 진정한 추이를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남송의 장수들이 자발적으로 몽골족에 항복하는 형편이었는데도 남송의 대신들은 이를 제대로 황제에게 보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1276년 쿠빌라이의 부장인 바얀이 남송의 어린 황제를 사로잡았다. 남송 지역의 남송 지지세력은 1279년까지 항쟁을 계속했으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중국 전지역이 몽골족의 손안에 들어오게 되자 중국 남부와 동부에서의 몽골 원정은 실제로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중국의 위신을 회복하려는 목적으로, 아무런 소득도 없는 전쟁을 여러 번 벌였다. 또한 여러 차례에 걸쳐 주변 왕국들에게 턱없이 많은 조공을 요구했다.

 

미얀마, 인도차이나의 안남·참파, 자바, 일본 등이 조공을 바치도록 요구받은 나라들이었다. 몽골군은 또 원정에서 참패를 당한 적도 있었다. 1274, 1281 2차례에 걸쳐 일본정벌 선단이 파견되었으나 모두 격파되었다. 선단이 대파된 것은 태풍의 탓도 있었고 일본의 결사항전 탓도 있었다.

 

쿠빌라이는 이같은 식민전쟁의 나쁜 결과나 그 전쟁을 치르기 위해 염출된 비용 따위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이 식민전쟁은 그의 후계자 대에 가서 종식되었다.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가 일본에 금은 보화가 많다는 보고 때문에 일본을 합병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벌인 식민전쟁은 주로 정치적인 목적, 즉 중국을 다시 한 번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겠다는 계획 아래 진행된 것이었다.

 

사회적·행정적 정책

몽골족은 그들만의 힘으로는 중국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하급직에는 한족 출신의 관리들을 썼지만 중요한 자리는 외국인들에게 배당했는데 그 좋은 예가 바로 마르코 폴로이다. 쿠빌라이는 인종정책을 써서 중국의 인구를 네 부류로 나누었다(계급). 최상위 부류는 몽골족으로 수십만 명 정도의 특권 무사계급을 말한다. 그들은 면세 혜택을 받았고 몽골족의 가용으로 배당된 광대한 영지를 경작했으며 중국농민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 몽골족에 출사(出仕)한 외국용병들이 2번째 계급을 형성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중앙 아시아 출신으로 색목인(色目人)이라고 했다.

 

이 계급에서 고위관리가 배출되었고, 전세계적인 접촉망과 특권지위를 가진 이들은 새로운 유형의 상인과 투기꾼을 배출시켰다. 몽골족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면세혜택을 누렸고 공공 역참(驛站)과 복리시설을 선별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한인(漢人)과 남인(南人)이 제3·4계급을 형성했는데, 한인은 중국 북부에 사는 중국인을 가리키고 남인은 멸망한 남송 지역에 살았던 중국인들을 말한다.

 

국가의 재정과 특권계급의 사치는 이 두 계급이 대부분 감당해야만 했다. 쿠빌라이의 계속되는 전역(戰役)뿐 아니라 대도에서의 대규모 토목공사 또한 큰 부담이 되었다. 농민들은 농경지를 버려둔 채 노무자로 동원되었다. 이같은 신규 노동력과 생산을 하지 않는 몽골족을 모두 먹일 수 있는 식량이 북부에는 없었기 때문에 상당량의 곡식이 해로를 통해 운반되어야 했고, 해로가 안전하지 못할 때는 대운하가 이용되었다.

 

또 이 운하를 개수하고 확장하는 데도 상당한 노동력을 투입해야만 했다.

 

쿠빌라이는 다른 몽골족 통치자들과 마찬가지로 종교에 몰두했다. 그의 치세시에는 이교(異敎)도 허용되었고 정부의 비호를 받던 종교는 경제적 특권을 누렸다. 교역자(敎役者)와 종교단체는 면세혜택을 받았고 특히 불사(佛寺)들은 대규모의 토지와 그 토지를 경작할 농민들을 하사받았다. 중국 내에서 특별지위를 누렸던 많은 티베트 불교 승려들의 오만함은 특히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이같은 차별적인 사회정책은 마침내 강한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더욱이 쿠빌라이 치세시에 상업이 흥하여 중국이 경제적 강대국인 것처럼 보인 것도 표면적인 현상일 뿐이었다. 무역도 사회전체의 이익을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로 특권층인 외국인 상인계급만을 위한 것이었다. 중국의 민중은 점점 더 가난하게 되었다. 유교철학을 상당 정도 이해하는 사람만을 관리로 등용하던 옛 과거제도는 점점 문란해졌고, 권위적이고 자의적인 행정을 견제했던 통상적인 기관인 사간원(司諫院 : 관리들의 비행을 조사하는 기관)과 전문직 관리들도 근무태도가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중국의 지식인 계급은 공직과 책임 있는 자리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그 결과 기회주의자들이 고관직을 얻게 되었고 쿠빌라이와 같이 총명한 황제도 수년 동안 계속하여 외국인 출신 재정담당관의 부정부패를 모르고 지냈다. 쿠빌라이가 시행한 사치스러운 정책과 후대의 원대 황제들이 방치하여 벌어진 재정의 문란상태 때문에, 원은 14세기에 들어와 경제문제로 일어난 민중봉기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몰락했다.

 

쿠빌라이는 주로 마르코 폴로의 덕분이긴 하지만 지전(紙錢)을 사용한 황제로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지전은 송대에도 사용되었으나 쿠빌라이 때 와서 유일한 교환수단으로 정착되었다(지폐).이 시기에는 지전의 사용이 필수적이었는데, 무역이 팽창하던 시기에 구리의 공급이 너무 적어 충분한 주화를 제조할 수 없었고 또 그중 상당량이 불사로 흘러들어가 불상이나 다른 숭배물을 만드는 데 이용되었다. 그러나 원대 말기에는 재정적으로 궁지에 몰린 원조가 지전을 너무 많이 발행하여 인플레이션을 촉발했다.

 

평가

쿠빌라이는 중국 황제로 이름이 더 높지만 몽골족이 정치전통을 형성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쿠빌라이와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이며 그의 자문이었던  ('Phags-pa) '이원 원칙'이라고 알려진 정치이론을 발달시켰다. 즉 정치에는 국가의 권위와 교회의 위엄이 2원적으로 작용한다는 이론이다. 이 정치이론은 몽골의 역사 속에서 몇 차례 실제로 적용되었다.

 

1911년 몽골이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회복하여 제정한 신정군주제(神政君主制) 헌법은 이 정치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쿠빌라이의 성격을 평가하기는 어렵다. 마르코 폴로는 유일하게 그의 신상에 관해 기술했는데, 이는 칭송의 경향이 강하다.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를 세계적인 군주의 전형으로 묘사하면서, 한편으로 그의 인간적인 약점도 지적하고 있다. 쿠빌라이는 연회와 수렵에 탐닉했고, 문란한 성생활, 적시에 부하들을 감독하는 세심한 배려의 부족, 가끔씩 나타나는 잔인한 행동 등이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쿠빌라이의 일생은 무엇보다도 이중적 역할을 해낸 과정, 그리고 결국은 그 역할을 조화시키지 못한 점 때문에 흥미롭다. 그는 전통적인 중국 황제의 역할을 완수했으나, 중국 문제에 관심을 쏟다보니 고국 몽골의 일은 소홀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년 동안 스텝 지역의 몽골 통치자들과 내전을 치러야 했다. 그의 치세시에 중국과 특권계급인 몽골족은 번영의 한때를 누렸다. 그러나 그의 정치체제는 후대 황제들이 잘 관리해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 내의 몽골족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원이 붕괴되자 몽골족은 스텝 지역으로 다시 퇴각했고 그때 이래로 변방민족 이상의 역할은 하지 못했다.

 

◇쿠빌라이 Kublai Khan

몽골의 장군이자 정치가로, 원나라를 세운 초대 황제.

 

몽골 제국 칭기즈 칸의 손자로, 1251년부터 몽골 제국의 영토 확장과 기반 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쿠빌라이는 중국 사상의 우수함을 일찍 깨닫고 자신의 주변에 믿을 만한 한족 유교학자들을 모았다. 이 같은 영향 때문에 그는 통치자와 피지배자는 상호 의존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고, 타고난 도량과 인자함의 폭을 넓혀 나갔다. 이는 한 도시를 함락시키면 대규모 학살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기존의 몽골 족 지도자들과는 매우 다른 방법이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쿠빌라이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당대(唐代) 이래 분열되어 있던 중국을 통일했다는 것이다. 특히 그가 유목민 출신의 정복자이기 때문에 더욱 높이 평가받는다. 1260년부터 연호를 쓰기 시작했고, 1271년부터 국호를 대원(大元)제정·선포했다. 당시 대도(大都)라고 알려진 지금의 베이징[北京]에 원나라의 수도를 세웠다.

Daum 백과사전

 

■ 명()나라

◆모순의 영웅 朱元璋 1328 10 21  - 1398 06 24

 

명나라의 창업자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 전 세계의 역사에서 '입지전적 인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주원장을 뺀다면 큰 의미가 없다. 5,000년 중국 역사 속에서 수많은 황제들이 명멸했지만 그들 중에서 진정한 '민중의 아들'은 주원장 단 한 사람뿐이다.

 

()나라의 건국자인 한 고조 유방 역시 지체 높은 귀족이 아닌 비천한 농민 출신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유방은 상당한 재산을 가진 부농이었으며 그 재산의 일부를 가지고 마을의 촌장 벼슬을 살 수 있을 정도로 여유 있는 집안 출신이었다.

 

유방과 달리 주원장은 하루하루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극도로 궁핍한 소작농 출신이었다. 그것도 6남매 중의 막내로 일찍이 부모를 잃고 형제가 뿔뿔이 흩어져 호구지책으로 절에 들어가 탁발승 노릇을 하기까지 했으며 사회적 여건상 그것도 여의치 않자 절망적인 심정으로 홍건적(紅巾賊)에 가담했다.

 

그는 작은 무리를 이끄는 소두령으로 출세하기 시작해서 홍건적 부대의 최고 지휘관으로 성공을 거두며 스스로 권력 기반을 닦았으며, 이를 배경으로 천하 패권을 노리는 각축장에 합류해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최종적으로 천하의 주인이 된 사람이다.

 

주원장은 당시 중국의 시대상황이 낳은 인물이었다.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에 의해 중국식 왕조로 창건된 원()나라는 채 90년을 존속하지 못했다. 원 왕조의 황제들이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한 기간도 고작 한 세대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이는 승계 순서가 아니라 실력으로 칸의 자리를 차지했던 쿠빌라이의 원죄라고 할 수도 있다.

 

▲주원장

 

원 왕조는 승계 원칙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대 황제들은 형제나 일족 들을 실력으로 제압하여 통치권을 확보해야 했다. 이 때문에 왕조 말기에는 13년 동안 7명의 황제가 교체되었으며 그들 중 대부분이 쿠데타나 암살로 생을 마감했다. 때문에 원나라의 황제가 가지고 있던 권위는 왕조의 후반부에 이르면서 거의 소멸되었으며, 황위 승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던 강력한 군벌 세력이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원나라의 11대 황제인 순제(順帝)[2] 는 중국의 역사가들에 의해서 대단히 무능한 통치자로 매도되고 있지만 사실 이는 상당히 억울한 평가이다. 그는 명석한 인물이었으며 땅에 떨어진 황제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다양한 시도를 해서 어느 정도 성공도 거두었다.

 

그렇지만 한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로서는 지나치게 변덕스럽고 의심이 많으며 심성이 나약했다는 점이 결정적인 문제였다. 순제는 당시의 실권자인 바얀(Bayan)[3] 엘 티무르(El Temur)의 격렬한 반대로 일곱 달 이상 즉위를 하지 못하다 바얀이 조카에게 살해당하면서 간신히 황제로 즉위할 수 있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열세 살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으니 비정상적인 성격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순제가 즉위한 직후, 황실에서는 권력 투쟁으로 바람 잘 날이 없는 가운데 천재지변이 연이어 덮치면서 대혼란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유럽의 인구를 격감시킨 페스트가 유입된 것을 시작으로 대기근과 홍수가 연달아 발생하고 메뚜기 떼가 습격하면서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전국적으로 수백만의 유민이 발생했으며 이는 산발적인 반란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농민 반란은 점차 조직적인 봉기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는데, 배후에는 종교 단체들이 있었다. 그러한 종파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것이 백련교(白蓮敎)였다. 이들은 13세기 중반 남송(南宋)에서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아 정통 불교 종파로부터 파생된 종파로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미륵불이 내려와 세상을 구한다(天下大亂 彌勒佛下生)'라는 미륵신앙을 기반으로 했다.

 

순제는 백련교의 교주였던 한산동(韓山童)을 체포해서 처형함으로써 화를 자초했다. 한산동의 처형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산발적인 농민 반란이 조직화되면서 '홍건적(紅巾賊)의 난'으로 커져 버린 것이다.

 

홍건적의 난

주원장은 1328 10, 중국의 남동부 남경(南京) 인근에 위치한 호주(濠州)에서 태어났다. 호주는 현재의 안휘성(安徽省) 봉양현(鳳陽縣)이다. 집안은 가난을 대물림한 떠돌이 소작농 집안으로, 그의 위로는 3명의 형과 2명의 누나가 있었다. 1341년 이 지역에 심한 가뭄이 든 상태에서 메뚜기 떼가 습격하고, 연이어 전염병이 창궐했다. 주원장 일가도 이러한 재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와 큰형을 잃었으며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작은 형만 본가에 남고 바로 위의 형은 형편이 조금 나은 집에 양자로 들어갔다. 두 누나는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갔다.

 

열일곱 살이었던 막내 주원장은 황각사(皇覺寺)로 출가해서 중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재앙이 덮친 상황에서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절에 머물지 못하고 3년간이나 안휘성과 인근의 하북성(河北省) 일대를 떠돌면서 탁발로 생계를 유지했다.

 

사회적인 상황이 조금 진정되자 주원장은 황각사로 돌아와서 공부에 매진했다. 문자 그대로 주경야독(晝耕夜讀)이었다. 낮에는 절 주변에 있는 밭을 갈고 저녁에는 불경뿐 아니라 유가(儒家)나 법가(法家) 등 구할 수 있는 모든 분야의 책을 구해서 독서에 몰두했다. 후일 황제가 된 다음의 행적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주원장은 지적인 호기심이 유별난 사람이었다.

 

1351년 정권 교체를 목표로 하는 민중 봉기라기보다는 절망에 빠진 민중들이 정신적으로 위안을 찾던 정도의 백련교를 순제가 성급하게 탄압하고 교주 한산동을 처형하면서 중국 전체를 뒤흔드는 대변혁의 방아쇠가 당겨졌다. 한산동의 처 양()씨는 어린 아들 한림아를 데리고 남쪽 지역으로 도망쳐 반원 투쟁의 기치를 높이 들었으며, 여기에 전국에서 숱한 인물들이 호응했다.

 

백련교도를 주축으로 한 이들은 동일한 이념을 추구하는 동지라는 개념으로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둘러 '홍건적'이라고 불리게 되었다.[5] 안휘성에서는 유복통(劉福通)이 가장 유력한 인물로 10만의 병력을 모았으며 대지주인 곽자흥(郭子興)도 별도로 군대를 일으켜 호주를 점령했다.

 

이들을 도적떼로 볼 수도 있고 반정부 혁명 세력으로 볼 수도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굶주린 농민이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상인이나 지주, 사찰과 같이 '가진 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약탈에 시달렸다. 주원장이 있던 황각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절이 습격당해 폐허로 변하자 주원장은 앞날이 막막해졌다.

 

그는 이때 절에 계속 머물 것인지 아니면 이 참에 아예 홍건적에 가담할 것인지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주원장에게는 약간 엉뚱한 면이 있었다. 그는 황각사에서 공부하던 와중에 얻은 어설픈 주역 지식을 가지고 스스로 점을 쳤는데 당장 떠나라는 점괘가 나왔다. 그는 그 길로 호주를 장악하고 있던 홍건적의 수령 곽자흥을 찾아갔다.

 

곽자흥은 주원장의 인물 됨됨이가 맘에 들었다. 그는 파격적으로 주원장을 친위대 소속의 경호대장 격인 구천장(九天長)에 임명했다. 주원장은 험상궂게 생긴 추남이었으나 성격은 호방하고, 담력과 배짱이 있어 전투에서는 용맹했으며, 재물에 욕심이 없어 전리품을 모두 윗사람에게 바치거나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때문에 그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곽자흥 또한 그를 중용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양녀를 시집보내기까지 했다. 그녀는 곽자흥의 절친한 친구인 마공(馬公)의 딸로 어릴 적에 고아가 되어 양녀가 되었다. 후일 황후가 되는 마씨 부인으로, 대단히 현명한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마황후

 

사실 홍건적이 봉기했던 초기, 원나라 조정에는 이를 제압할 만한 군사력이 충분치 않았다. 몽골 군의 막강한 전투력은 그 시기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백부를 살해하고 그의 자리를 차지한 젊은 바얀 토구타는 상당히 유능한 군사 지휘관이었다.

 

그는 서주(徐州)에서 압도적인 병력의 홍건적을 격파했다. 그러자 결정적인 순간에 황제의 고질적인 의심병이 도졌다. 토구타를 경계하고 시기해서 그를 진압군 사령관직에서 해임해 버린 것이다.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군 사령관이 교체되었으니 지휘 체계가 제대로 가동될 리 없었다.

 

서주의 홍건적들은 기사회생해서 곽자흥이 버티고 있는 호주로 몰려들었다. 당시 홍건적들 사이에서도 주도권 다툼이 치열했다. 서주에서 패퇴한 무리들에 의해서 곽자흥이 실권을 잃자 크게 실망한 주원장은 고향 마을로 돌아갔다. 그는 그곳에서 대략 700명의 병사들을 모아 자신의 부대를 조직했다.

 

그중에는 후일 개국공신으로 명성을 날리게 될 화운(花雲), 당승종(唐勝宗), 곽흥(郭興), 서달(徐達), 탕화(湯和)와 같은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 서달과 탕화는 황각사 시절에 사귄 친구들이었다. 후일에는 이들이 이름 높은 장군과 신료가 되겠지만 처음 모였던 이 무렵에는 무기라고는 처음 손에 잡아 보는 오합지졸들이었다.

 

이 초보 홍건적들은 과감하게 인근의 저주성(州城)을 공격해 성을 함락했다. 주원장은 곽자흥을 지휘관으로 모셔 왔다. 주원장이 저주성을 확보하자 등유(鄧愈), 이선장(李善長)과 같은 후일의 명장들이 가세했으며, 조카인 주문정(朱文正)과 이문충(李文忠)도 그의 휘하에 합류했다. 이들 역시 후일 불굴의 용사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저주성을 확보하고 병력이 늘어나자 주원장은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화주(和州)를 공격해서 식량을 확보하고자 했다. 일단 점령하는 데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무려 10만 명의 몽골 군이 화주를 포위한 것이다. 처절한 방어전이 벌어졌고, 초보 홍건적들은 다시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수십 배나 되는 몽골 군의 맹공을 견뎌 낸 것이다. 몽골 군은 상당한 병력 손실을 입은 채 철수했다. 이 화주 공방전은 주원장의 이름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가 1355 3, 그가 홍건적에 가담한 지 3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이때는 홍건적의 봉기가 정점을 향해 가파르게 올라가던 시기에 해당한다. 홍건적의 최고 실력자 유복통은 처형된 백련교주 한산동의 어린 아들 한림아를 소명왕(小明王)으로 맞아들여 새로운 나라 대송(大宋)의 건립을 선포하고 스스로 승상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곧바로 개봉(開封)을 공격해 점령하고 새로운 거점으로 삼았다.

 

그렇지만 혁명은 변질되기 마련이다. 초반의 순수한 열기가 가라앉으면 천하 제패를 노리는 숱한 야심가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 야심가들의 목표는 혁명이 아니라 권력이다. 이러한 야심가들이 갖가지 방법으로 재주를 겨루어 마지막에 단 한 사람의 승자가 남게 되며 그 승자가 모든 것을 갖는 흥미진진한 게임으로 역사가 바뀌곤 하는데, 원나라 말기의 상황이 바로 그러했다.

 

홍건적이 봉기하면서 유복통이 동쪽을 장악했다면 서쪽의 실력자는 호북과 호남을 장악한 서수휘(徐壽輝)였다. 그는 스스로 황제에 오르면서 국호를 천완(天完)이라고 했다. 서수휘의 휘하에는 호시탐탐 독립을 노리는 진우량(陳友諒), 명옥진(明玉珍)과 같은 야심가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홍건적과는 상관없이 봉기한 태주(泰州) 출신의 장사성(張士誠)도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는 원래 소금 밀매상[6] 이었는데 순식간에 중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지역인 양자강 하구의 소주(蘇州)를 장악했다.

 

주원장의 대두

우리의 영웅 주원장은 이때까지도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르지 않고 있었다. 그는 명목상으로 소명왕 한림아 휘하의 장군 곽자흥의 부장이었다. 그런데 1355년에 곽자흥이 병에 걸려 급사하면서 주원장은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소명왕은 곽자흥의 큰아들 곽천서(郭天徐)를 아버지의 후임으로 임명하고 주원장을 부원수에 임명했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독자적인 지휘권을 갖게 된 주원장은 과감한 군사행동을 감행했다. 그는 양자강을 넘어 강남으로 내려가 물류의 중심지인 태평성(太平城)을 기습 점령했다. 성을 탈환하기 위해 몽골 인들은 급히 병력을 파견했지만 주원장은 이들을 격파하고 태평성에 별도의 독립군단인 익원수부(翼元帥府)를 설치하여 스스로 원수가 되었다.

 

그다음 해인 1356년은 주원장에게 상당히 의미 있는 해였다. 중국 남동부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남경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는 남경을 응천부(應天府)로 개명하고 활동의 중심지로 삼았다.

 

주원장이 막 무대에 등장한 이 시기는 유복통을 중심으로 하는 주류 홍건적이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낙관적인 상황 판단과 성급한 결정이 화를 불렀다. 홍건적 지휘부는 원나라 황실 타도를 목표로 북벌을 시도했다.

 

당시 정세를 보자면 홍건적과 다른 세력들이 동시에 봉기한 남부는 군웅이 할거하던 혼란한 지역이었지만 북부는 엄연히 원나라 황실의 지배력이 미치던 지역이었다. 유복통은 1357년에 개봉에 대병력을 집결시킨 후 세 방향으로 나누어 기세 좋게 북진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몽골의 바얀들은 부패하기는 했어도 무능한 지휘관들은 아니었다. 좀처럼 기세가 꺾일 것 같지 않던 홍건적들은 몽골의 정예군을 상대한 전투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질질 끌다 결국 북벌군의 반 정도는 전사하고 나머지는 항복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자 전황이 극적으로 역전되면서 거꾸로 대송의 수도 개봉이 원나라의 대군에 포위되었다.

 

유복통은 100일 가까이 몽골 군의 맹공을 견디면서 분전하다 식량이 떨어지자 한림아와 함께 가까스로 탈출해 멀찌감치 남쪽 저주의 안풍(安豊)으로 도피했다. 이 사태는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냈다. 홍건적의 지휘부가 몰락하자 야심을 감추고 있던 혁명가들이 천하 패권을 노리며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때의 세력 분포를 주원장을 중심으로 보면 선두주자는 서쪽에 둥지를 튼 진우량과 동쪽에 이웃한 장사성이었다. 진우량은 서수휘의 휘하에서 독립한 인물로 1360년에 서수휘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이라고 했다. 장사성은 홍건적이 개봉을 잃은 시기에 남송 시대부터 가장 번화하고 풍요로운 평강(平江) 일대를 점령한 다음 소주를 중심으로 호주, 상주(尙州), 항주(杭州) 등 풍요로운 지역을 넓게 장악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언제부터 천하의 대권을 의식했는지 지금으로서는 명확하게 알 도리가 없다. 그는 남경을 근거지로 삼아 궁지에 몰린 소명왕 한림아를 지원했으나 곽자흥이 남긴 모든 것을 가로챘다. 곽자흥의 장남인 곽천서는 주원장보다 앞서 남경을 공격하다 전사했고, 차남인 곽천작(郭天爵)은 없는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으며, 남아 있는 상속자들인 딸과 조카는 주원장의 첩이 되었다.

 

주원장이 남경에 입성한 이후부터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먼저 그의 주변에 유학자들이 몰려들었다. 유기(劉基), 송렴(宋濂), 도안(陶安)와 같이 실력과 명성을 겸비한 사람들이었다. 주원장은 유학자들과 어울리면서 홍건적과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백련교는 불교의 만민평등 사상에다 신비주의를 뒤섞은 서민들의 종교인 반면 유교는 원래부터 통치자들의 논리 였다.

 

주원장 주변에 몰려든 유학자들은 대부분 현실정치에는 참여한 적이 없고 재야에서 글을 쓰거나 학생들을 가르치던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현실적인 정치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이상과 원칙에 충실한 성향을 보이게 마련이다. 결국 주원장의 새로운 참모들과 홍건적이 사상적 기반으로 하는 백련교의 교리와는 타협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주원장은 모순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그가 남경에 입성하면서 공포한 격문은 유교적인 이념에 바탕을 두어 기존의 사회 체제를 견고하게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며 이른바 백련교의 개벽론이라든지 새로운 세상과 같은 개념은 전적으로 배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소명왕 한림아의 장수로 남아 있었으며 1362년에는 소명왕에 의해서 오왕(吳王)에 봉해졌다.

 

천하는 사파전의 양상이 되었다. 원나라의 세력이 남아 있는 가운데 주원장, 진우량, 장사성이 서로 각축을 벌였다. 서로 물고 물리는 이들의 관계에서 가장 먼저 균형이 깨진 것은 주원장과 진우량의 관계였다. 한왕을 자처하던 진우량의 장점은 막강한 선단을 바탕으로 양자강의 수로를 지배한다는 것이었다.

 

주원장은 수전으로 진우량과 승부를 벌여야 했다. 선공은 진우량이 했다. 그는 60만의 병력과 100척이 넘는 전함을 동원했다. 주원장은 이때에 소명왕이 있는 안풍을 공격한 장사성의 군대와 접전을 벌이던 중이었다. 양쪽에서 협공을 당한 꼴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장사성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주원장에게 기회가 생겼다.

 

주원장은 장사성과 휴전은 했지만, 갑자기 대규모의 함대가 생길 리는 없었다. 그는 수백 척의 고깃배를 동원해서 응전했다. 이것이 이 시대 최대의 명승부 중 하나인 파양호(鄱陽湖) 전투이다. 파양호는 양자강 남쪽 강서성(江西省)에 위치해 있으며 여러 개의 지류가 모이는 곳이었다.

 

1363년 주원장과 진우량은 이곳에서 사흘 밤낮 동안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양측에서 엄청난 전사자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주원장 자신이 자칫하면 사로잡힐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행운은 주원장의 편이었다. 마지막 날 진우량이 화살에 맞아 전사함으로써 주원장은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다.

 

파양호 전투를 계기로 팽팽하던 주원장과 장사성의 균형도 무너졌다. 진우량이 지배하던 서부의 광대한 세력권이 모두 주원장에게 편입되었을 때야 장사성은 두 사람이 파양호에서 혈전을 벌이던 시기에 협공을 가해서 이득을 취하지 않았던 자신을 책망했을 것이다.

 

장사성은 개인적인 기질이 주원장과는 많이 달랐다. 그는 홍건적과는 무관한 사람이고 그들에게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장사성은 주원장이 홍건적에 합류한 다음 해인 1353년에 불법으로 운영하던 자신의 염전에서 일하던 청년들을 모아서 봉기를 일으켰다. 그는 소주가 속해 있는 현재의 강소성(江蘇省) 출신이었다.

 

소주는 남송 시대부터 상공업이 발달해 중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도시였다. 소주는 이러한 풍요로움에 걸맞는 화려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곳으로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분위기의 도시였다. 장사성은 그곳에 가장 잘 어울리는 지도자였다. 그는 문학과 예술의 후원자였다. 성격이 호방하고 매일 연회를 즐기면서 씀씀이가 커서 주변에는 내로라하는 당대의 문인과 예술가 들이 모여들었다. 장사성은 천하 제패에 전력을 다하기보다는 이러한 생활 자체를 즐기는 편이었다.

 

장사성은 1357년에 주원장에게 한 번 패배를 당하고 나서 원나라와 손을 잡아 관직을 제수받으면서 매년 양곡 10만 석 이상을 공급하였다. 원나라와 동맹을 맺은 상황이니 주원장은 소주 방면으로는 감히 넘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1362년 장사성은 홍건적의 상징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유복통을 격파하고 죽임으로써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성과에 오만해진 장사성은 원나라와 관계를 끊고 독립을 선언하면서 스스로 오왕(吳王)이라 칭했다. 이것은 헛된 명성만 얻을 뿐 아무런 실익이 없는 자충수였다. 진우량이 무너진 이후 장사성은 갑자기 자신보다 덩치가 3배로 커진 주원장을 상대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 장사성은 1367년에 소주가 함락되면서 몰락했다.

 

걸출한 인물들이 몰락하는 계기는 지나친 자부심이 화근이 되는 경우가 많다. 진우량의 경우는 막강한 전투선단이 그랬고 장사성의 경우는 한없는 풍요로움이 그랬다. 반면에 주원장은 태생적으로 내세울 것이 별로 없는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으며 이것은 경쟁자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장사성이 자살하면서 남쪽을 모두 장악한 주원장은 북경을 향해 대망의 북진을 시작했다. 그는 바로 다음 해인 1368 1 4일 산동성을 평정한 후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국호는 명(), 수도는 응천부인 남경, 연호는 홍무(洪武)였다. 이때 주원장의 나이는 마흔이었다.

 

원나라의 수도이자 당시에는 대도(大都)라고 불리던 북경은 바로 그해에 함락되었다. 순제는 수도를 북방의 상도(上都)[10] 로 옮기고 계속 명나라와 대립했다. 이때부터 이 왕조는 대제국 원()과 구분해서 북원(北元)이라고 한다. 명나라가 북원까지 제압하고 완전히 천하를 평정하는 데는 그로부터도 한 세대 이상이 걸리지만, 한족(漢族)의 왕조가 한 세기 만에 부활된 것이다.

 

콤플렉스가 부른 참극

주원장은 중국 역사상 기층민 출신으로 천하의 대권을 잡은 유일한 인물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민중의 영웅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민중의 바람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그는 성공과 함께 민중을 배신하고 포악한 권력자의 길을 선택했다. 그의 잔인함은 중국 역사에서도 최상위에 꼽힐 정도이며 명 왕조 전체를 가혹한 폭정이 지배하게 되는 단서를 제공했다.

 

주원장은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에 대해 주도권을 잡게 되었을 때부터 홍건적과의 결별을 가시화했다. 이는 민중의 종교인 백련교를 버리고 귀족의 전통적인 윤리인 유교로 회귀한다는 의미였다. 그는 이 무렵 백련교와 미륵교(彌勒敎)를 사람들을 현혹하는 요술(妖術)로 규정했다. 이와 관련한 상징적인 사건이 소명왕 한림아의 살해였다.

 

1366년 장사성을 포위한 상태에서 주원장은 부하 장수인 요영충(寥永忠)에게 저주에 머물고 있던 소명왕을 응천부로 모셔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그가 탄 배가 양자강에서 풍랑을 만나 뒤집어지며 소명왕이 익사했다. 요영충이 배 밑바닥에 구멍을 뚫은 것이었다. 주원장은 얼마 후 요영충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사형에 처했다.

 

장사성을 격파한 후 자신에게 끝까지 저항했던 소주 지역에 대한 복수도 지나치게 치졸했다. 그는 장사성의 참모들을 참수하고 그 시체는 거리에 버렸다. 또한 그곳의 관리, 군인, 재산가 들과 그 가족 30만 이상을 추방해서 강제 이주를 시켰으며 그들의 토지와 재산을 모두 몰수했다. 마지막으로 소주 자체에 대해서도 높은 세율을 책정해 이곳을 완전히 황폐하게 만들었다.

 

장사성에게 극진하게 대우받던 당대의 문인과 지성인 들 역시 화를 면하지 못했다.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던 천재 시인 고계(高啓)는 일단 호부시랑(戶部侍郞)에 중용되어 《원사(元史)》까지 편찬하지만 끝내 허리를 잘라 죽이는 형에 처해졌고, 이름난 학자 양기(楊基)는 감옥에서 옥사했으며, 장우(張羽)는 호송 도중에 자살했다.

 

이들 이외에도 문화의 도시 소주를 빛내던 많은 지성인들이 살해되었다. 이제 주원장은 탄압받던 농민을 위해 궐기한 의병의 지도자가 아니었으며 남경 시절에 보여주던 온화한 통치자의 모습도 옅어져 갔다. 그는 점차 난폭한 정복자가 되어 갔다.

 

황제에 오른 후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어떤 정권에서든 권력을 창출한 이후에는 대대적인 숙청이 불가피하다. 최종 승자가 과거의 동지나 공신 들을 정리하는 행위를 비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그 방법론은 항상 문제가 될 수 있다.

 

송 태조 조광윤(趙匡胤)은 그러한 정리 작업 자체가 싫어서 자신을 황제로 세웠던 동료 장수들과 말술을 마시고 나서 모든 병권을 인수받아 후대의 칭송을 받았다. 조광윤과는 정반대로 주원장은 사상 유래가 없는 공포정치를 시행했다. 주원장의 폭정은 '호람의 옥(湖藍之獄)'으로 대표된다.

 

주원장의 모사 호유용(胡惟庸)은 크게 신임을 얻어 승상직에 올라 인사권을 장악하고 전횡을 부렸다. 그러자 당연한 반발로 밀고가 들어왔으며 주원장은 이 사건을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철저하게 이용했다. 호유용 자신이야 죽어도 크게 아쉬울 것이 없는 인물이었지만 관련자들이 문제였다.

 

호유용의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사형당한 사람의 수는 그 당시에만 1 5,000명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관련자들이 계속 추가되어 최종적으로 무려 3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주원장의 의도는 명확했다.

 

그는 호유용이 죽은 지 10년이 지난 후에 혁명 동지이자 친구였던 전 승상 이선장까지 이 음모에 관련된 혐의를 씌워 사형에 처했다. 이것이 '호유용의 옥(胡惟庸之獄)'이다.

 

남옥(藍玉)은 호유용과 달리 억울한 인물이다. 그는 주원장 치세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명장이었다. 명나라는 힘을 회복한 북원에 연패하면서 한 전투에서만 무려 40만의 전사자를 기록하는 등 고전을 계속했다. 남옥은 명나라 군대의 연패 행진을 끊은 명장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얻은 명성이 주원장의 시기심을 자극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이번에는 남옥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밀고가 들어왔다. 이어 2만 명이 이에 연루되어 사형당했다. 이것이 '남옥의 옥(藍玉之獄)'으로, 호유용과 남옥의 사건을 묶어서 '호람의 옥'이라고 한다. 이 두 번의 옥사뿐 아니라 거의 모든 공신들이 갖가지 죄를 뒤집어쓰고 죽어 갔다. 그는 친구건 친족이건 일단 제거 대상으로 결정하면 인정을 두지 않았다.

 

이문충(李文忠)은 주원장의 작은 누나의 아들로, 주원장이 곽자흥을 떠나 스스로 부대를 조직했을 때 소년의 몸으로 휘하에 가담해 줄곧 충실하게 따르며 험난한 전투에서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워서 조국공(曹國公)에 봉해졌다. 이문충은 강직한 인물이었다. 그는 주원장이 혁명 동지들을 몰살하는 것을 보다 못해 이를 말리는 상소를 올렸으며 주원장은 조용히 그를 독살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주원장의 처형 방식도 문제였다. 반역죄에 대한 처벌은 무조건 족주형(族誅形)으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일가족 모두를 죽였다. 죽이는 방법도 다양해서 사지를 절단하는 능지(凌遲)나 허리를 자르는 요참(腰斬)은 점잖은 편에 속했다. 머리가죽을 벗겨 죽이는 박피형(剝皮形)도 있었다. 죽은 자들의 시체는 길거리에 버려지거나 사람이 많이 다니는 장소에 전시되었다.

 

주원장의 형벌 중에서 압권은 '정장(廷杖)'이라는 것이다. 형벌 자체는 단순해서 관료에게 과실이 있으면 그를 궁정 마당에 무릎 꿇게 한 다음 몽둥이로 내리쳤다. 이 정장형은 법률에 정해진 바도 없고 집행 규정도 없었다. 순전히 황제의 기분에 의해서 매질의 강도와 횟수가 결정되었다. 수많은 신하들이 하필이면 주원장이 저기압일 때 걸려서 몽둥이찜질을 당하고 죽어 나갔다.

 

세상에는 비천한 상황을 극복하고 성공한 예가 숱하게 많다.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이 과거의 부끄러운 시절에 대해 보이는 태도는 두 가지이다. 스스로를 극복하는 과정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든가 과거에 대해서 열등감을 가지든가. 주원장은 아쉽게도 후자에 속했다. 그는 천한 출신에 많이 배우지 못한 자신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했다. 이러한 열등감이 '문자의 옥(文字之獄)'이라는 역사상 유래 없는 황당한 참극을 만들어 냈다.

 

주원장의 과거를 연상시킬 수 있는 모든 글자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중 승(), 대머리 독(禿), 빛 광()은 그의 황각사 시절과 관련이 있었고, 도둑 도(), 도둑 적()은 황건적 시절과 연관이 있었다. 여기에 승()과 음이 같은 날 생()을 비롯해 적()과 모양이 닮은 곧 칙()이 추가되었다. 이 규정을 어겨 숱한 신하들이 처형되었으며 길 도(), 다를 수()와 문자와 제비(帝扉)와 같은 단어들이 추가되면서 금지어의 수는 계속 늘어났다.

 

재주가 있는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도 표면으로 드러났다. 유학자 유기(劉基)는 명 왕조의 사상적 기반을 만든 사람이었다. 그는 점차 변모해 가는 주원장을 두려워해 고향으로 은퇴했는데, 그가 병에 걸리자 주원장은 위로한다며 궁중의 의사를 보내 독살했다. 개국 일등공신으로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던 서달(徐達) 역시 병에 걸려 요양하던 중에 황제가 보낸 거위 요리를 먹고 사망했다.

 

유교적 이상국가의 건립

그러나 여러 가지 문제에도 주원장은 단순히 잔인무도한 폭군이나 시기심에 불타는 소인배로만 매도할 수는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철저하게 유교적인 가치관을 가진 군주였다. 백성들의 가난을 자신의 탓으로 돌려 자책했으며 농촌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대대적인 치수공사를 벌이고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정착시켜 농민으로 끌어들인 결과 그의 30년 통치 기간 중에 중국의 농업 생산량은 수요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으로 향상되어 고질적인 식량 부족 문제가 해결되었다.

 

또한 주원장은 젊은이들을 좋아했다. 그는 특히 아직 권력의 맛을 알지 못하는 젊은 선비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것을 즐겼다. 반지성주의적인 성향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국립대학인 국자감(國子監)에 나가 학생들에게 직접 강의를 했으며 강의가 끝나면 오랫동안 학생들과 논쟁을 벌였다. 그는 자신과 논쟁을 벌이던 학생 중에서 눈에 띄는 인재가 있으면 곧바로 고위직에 채용했다.

 

주원장은 정서적으로도 대단히 놀라운 사람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각료를 맨바닥에 꿇어앉혀 놓고 몽둥이찜질을 가해 초죽음으로 만들어 놓은 다음에 그 길로 국자감에 나가 젊은 학생들과 나라의 장래를 위해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면서 기분을 전환하곤 했다. 이렇듯 변화무쌍한 그의 성격을 두려워해 자살하는 관료들까지 있었다.

 

또한 그는 위험할 정도로 감성이 예민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평소에 색을 밝혀서 수많은 비빈을 거느리고 모두 26명의 왕자와 16명의 공주를 생산할 정도였지만 평생 반려자로 생각한 사람은 일찌감치 결혼했던 마황후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마황후가 먼저 세상을 떴을 때 며칠간이나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하기도 했다.

 

정서적으로 극과 극을 오갔던 사실에서 주원장은 심각한 조울증 환자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는 조울증 환자들의 전형적인 증상을 모두 보이고 있으며, 상당수의 조울증 환자들이 그러하듯이 개인적인 성정이 음울하면서 동시에 호방했다. 이렇게 부조화스러운 다중인격이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명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며 권위주의적인 정권을 만들어 냈다. 고위 관료들도 황제 앞에서는 노예나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들지 않아야 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열등감에 가득 찼던 조울증 환자 주원장이 처음 고안한 예법이며, 그대로 중국의 권위주의적인 전통으로 굳어졌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주원장이 아무리 폭군이었다고 해도 그는 본질적으로 혁명가였으며, 유교적인 이상국가의 건립이라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아들 영락제(榮樂帝) 성조(成祖)로부터 시작해 점차 혁명 정권이라는 본질 자체가 유명무실화되었으며, 오직 주원장이 창안한 혹독한 통치 방법만이 계승되었다.

 

그러자 관료들은 황제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민중들은 권력에 순응하는 방법만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권위주의는 200년 동안 중국인들의 개성을 규정해 버렸다. 이것이 명 왕조의 역사를 폭군 아니면 무능력자인 황제, 환관과 측근 들의 전횡, 계속되는 폭정과 권위주의적인 전제정치, 진취성을 잃어버린 민중, 황실을 조롱하는 지성인들과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반지성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황실 등의 특성을 가지게 한 것이다. - 다음백과

 

◆호람의 옥 - 명나라 개국 공신을 향한 칼바람

명나라 홍무제는 황제에게 위협이 될 만한 개국 공신들을 대거 숙청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호유용과 남옥을 숙청한 '호람의 옥'이다. 홍무제는 황제 권력과 맞먹을 정도로 성장한 호유용이 모반 계획을 세우자 이에 연루된 사람 1 5천여 명을 처형했으며, 남옥 또한 역모죄로 참수시키고 더불어 그의 가족까지 모두 1 5천여 명을 숙청했다. 이러한 처참한 숙청을 통해 홍무제는 승상 제도를 폐지하고 황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1368, 원의 순제를 몽골 본토로 몰아내고 명실상부한 왕조를 건국한 명나라 홍무제(洪武帝)는 황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대대적인 개국 공신 숙청을 감행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좌승상 호유용(胡惟庸)과 개국 공신 남옥(藍玉)을 숙청한 '호람의 옥'이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죽은 자는 각각 3만여 명과 2만여 명이었다. 이로써 홍무제는 승상 제도를 폐지하고 황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명나라를 개창한 홍무제

 

명나라 개국과 함께 이루어진 논공행상에서 이선장(李善長), 등유, 상무, 탕화, 유기, 왕광양 등이 공후장상에 책봉되었다. 또한 원나라의 행정 제도를 그대로 따라 중앙에 좌우승상이 수장인 중서성을 두고 황제 보좌와 관료 통솔을 맡게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국내외 정세가 안정을 되찾자 홍무제는 개국 공신의 권력에 부담을 느꼈으며, 승상에게 집중된 권한 역시 문제가 되었다. 여기에 홍무제의 공신들에 대한 의심이 날로 증폭되면서 숙청의 칼날이 공신들을 향했다.

 

명나라 초대 승상은 이선장이었으며, 이후 왕광양이 그 뒤를 이었다. 왕광양이 주살된 후에는 호유용이 좌승상이 되었다. 호유용은 안휘성 정원 출신으로 1355년에 주원장의 군대에 가담해 주부, 지현, 통판 등의 관직에 올랐으며, 1370년에는 중서성 참지정사가 된 인물이다. 1373, 우승상을 거쳐 좌승상이 된 그는 홍무제의 총애를 믿고 전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는 관리들의 생사 여탈권을 손에 쥐고 관직의 승격과 좌천을 임의대로 결정했다. 심지어 각 주현에서 올라오는 상소문 중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이 있을 경우에는 절대 홍무제에게 상주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의 주변에 관직을 얻으려는 자들이 모이면서 자연스레 당파가 형성되었다. 게다가 민간 상인들마저 호유용과 밀접한 관계를 맺자 호유용의 세력은 황제의 권력과 맞먹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서달과 유기

 

홍무제를 도와 명나라를 건국한 개국 공신들

따라서 홍무제는 호유용 세력의 성장을 좌시하지 않았다. 초기에 홍무제는 호유용을 신임하여 중용했으나, 서달과 유기 등의 대신들이 호유용의 전횡을 고하자 호유용을 벌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런데 마침 호유용의 아들이 마차 사고로 목숨을 잃고, 호유용이 잘못이 없는 마부를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홍무제가 호유용의 잘못을 따져 묻자 호유용은 금전으로 죄를 면하고자 했다. 홍무제는 크게 화를 내며 그에게 목숨으로 죗값을 치를 것을 요구했다. 이쯤 되자 홍무제의 신임을 잃고 목숨마저 위태롭다고 생각한 호유용은 결국 어사대부 진녕(陳寧), 어사중승 도절(塗節) 등의 측근들과 모반 계획을 짜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호유용의 역모는 도절의 고발로 성사되지 못했다. 1380, 홍무제는 호유용에게 모반죄를 적용해 체포하여 직접 심문했다. 이를 통해 그간 호유용이 전횡은 물론이고, 북원과 일본에까지 사신을 보내 역모에 지원을 요청했음을 알아냈다. 홍무제는 호유용과 진녕, 도절 등 역모 가담자는 물론, 그 가족들까지 모두 1 5천여 명을 참했다.

 

호유용의 사건을 계기로 홍무제는 행정 제도를 개혁했다. 1376년에 이미 행중서성을 폐지하고 정사사, 제형안찰사사, 도지휘사사 등을 설치해 지방의 민, , 병권을 나누었던 홍무제는 이번에는 아예 중앙의 중서성을 폐지하고, 그 휘하의 육부(, , , , 형 공)를 황제에게 직속시켰다. 또한 군사 제도를 개편해 원나라 때의 대도독부를 폐지하고 5군 도독부를 두고 통수권 역시 황제에 직속시켰다. 이로써 진한 시대 이래 약 1,600여 년간 시행되어 온 승상 제도가 폐지되었으며, 개인의 사사로운 군대 양성은 꿈도 꿀 수 없게 되었다. 그야말로 절대 권력의 황제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호유용 사건이 있은 지 10년 뒤인 1390년에 홍무제는 다시 한 번 옥사를 일으켰다. 홍무제는 호유용의 역모에 이선장이 관련 있다는 밀고를 바탕으로 이선장에게 사약을 내렸다. 이선장은 명나라의 초대 승상이었던 인물로, 호유용을 천거한 장본인이자 호유용이 형의 딸을 그의 조카에게 시집보냄으로써 호유용과 인척관계를 맺은 사이이기도 했다. 이선장은 호유용의 역모 계획을 알고 있었으나 가담하지 않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뒤 이것이 빌미가 되어 본인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까지 모두 죽임당한 것이다. 여기에 육중형(陸仲亨), 비취(費聚), 당승종(唐勝宗), 조용(趙庸) 등도 연좌되어 참형을 당했으며, 모두 3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홍무제가 호유용 사건으로 황제에게 위협이 될 만한 개국 공신들을 대거 숙청한 것은 태자 주표(朱標)에게 안정된 정권을 물려주는 의도가 포함된 것으로 해석된다. 더욱이 태자 주표가 1392년에 세상을 뜨고, 어린 황태손 주윤문(朱允炆)이 황위를 잇는 상황이 되자 공신들에 대한 홍무제의 불안은 더욱 커졌다.

 

1393, 홍무제는 어린 황태손의 장래에 위협 세력이 될 가능성이 있는 남옥을 제거 대상으로 삼았다. 남옥 역시 안휘 정원 출신으로, 명장 상우춘(常遇春)의 처남이었다. 그는 명나라 건국의 일등 공신 서달을 따라 북정에 나서 수차례 큰 공을 세웠으며, 1378년에 영창후가 되었고, 1387년에는 북원 평정에 나서 공을 세움으로써 대장군에 임명되었다. 이후 남옥은 북원과의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두고 양국공(凉國公)에 봉해졌다. 그런데 남옥은 장군으로서는 용맹하고 담력이 뛰어났으나, 성질이 조급하고 난폭한 면이 있어 자신의 공을 자화자찬하는 것이 심했고 불법 행위를 종종 일삼았다. 이에 홍무제는 남옥의 행실을 크게 꾸짖었지만, 남옥은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연왕 주체(朱棣)가 남옥을 겨냥해 방자함이 극에 달한 공후들을 제거할 필요성을 주장하자, 홍무제의 남옥에 대한 숙청 의지는 더욱 커졌다.

 

1393, 금의위(錦衣衛) 지휘자 장얼(蔣讞)이 남옥의 역모를 고발했다. 홍무제는 즉시 남옥의 체포와 조사를 명했다. 남옥의 죄는 경천후 조진(曹震), 학경후 장익(張翼), 축로후 주수(朱壽), 첨휘(詹徽) 등과 역모를 꾀했다는 것이었으나 모반의 증거는 불충분했다. 그러나 홍무제는 남옥을 참수하고 삼족을 멸했다. 더불어 남옥과 관련된 자들과 그 가족까지 모두 1 5천여 명을 숙청했다.

 

호유용과 남옥 사건 이후에도 홍무제의 공신 숙청은 계속되었는데, 주덕흥, 부우덕, 요영충, 주량조 등의 공신 역시 사약을 받거나 참수당했다. 이로써 명나라의 개국 공신 중 살아남은 자는 탕화와 경중문 등 손에 꼽을 정도였다. 탕화는 홍무제와 동향 출신으로 홍무제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또한 명나라 건국 후에는 일찌감치 권력을 내려놓고 귀향하여 공신 숙청의 칼을 피할 수 있었다.

 

명나라의 개국 공신에는 남은 자가 없다'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숙청의 바람이 거세고, 남아 있는 조정 관료들 역시 숙청 대상이 될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조정의 평화가 손상될 것을 걱정한 황태손 주윤문이 우려를 표명하자, 홍무제는 다음 날 황태손에게 가시가 돋친 나무를 주며 한손으로 쥐어 볼 것을 명했다. 이때 황태손이 즉각 잡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홍무제는 "내 손으로 가시를 다 뽑아 주면 너는 쉽게 잡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로 공신 숙청의 이유를 설명했다.

 

홍무제의 개국 공신 숙청 작업은 황태손이 황위를 이었을 때를 대비해 잠재적인 위협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함도 있겠으나, 이보다 더 큰 의의는 황권을 강화하는 제도의 마련, 즉 승상 제도의 폐지에 있다.

 

1373 : 좌승상 자리에 오른 호유용이 전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기 시작하다.
1390 : 홍무제가 호유용 역모에 관련 있는 이선장에게 사약을 내리다.
1392 : 태자 주표가 세상을 뜨자 공신들에 대한 홍무제의 불안이 더욱 커지다.

청아출판사

 

◆2016.04.22  북족이 멸족까지 당하면서 황실공차를 멈춘 이유

황실공차를 거부한 민족 멸족시킨 명나라 신종(神宗)

명태조(明太祖) 홍무제(洪武帝) 때부터 황실공차(皇室貢茶)로 진상하기 시작한 녹명차(鹿鳴茶)는 중국 소수민족 북(僰)족이 사천성 공현(四川省 珙縣)의 고산지대에서 만드는 명품 녹차다. 황실공차로 지정되는 영예(榮譽)는 명예 이전에 멍에가 되기도 했다. 나라에서 차밭을 엄격히 관리 감독해 최상급의 차를 황실에 바치고 나면 그때부터 그 지역의 차는 지방 토후세력이 자행하는 가렴주구의 대상이 돼 상납에 시달렸다. 농민들은 황실공차로 생기는 득보다 부담이 훨씬 컸다. 일부 농민들은 차밭을 불태워 이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녹명차잎을 따고 있는 북족. /이코노미조선

 

정사 도외시한 ‘사보타주’ 주인공

 명나라 전성기에 황제가 된 제13대 신종(神宗, 1563~1620) 1572 7월 융경제(隆慶帝)의 뒤를 이어 10살에 즉위해 1620년까지 48년 동안 황위(皇位)에 있었다. 신종이 사용한 연호를 따라 만력제(萬曆帝)로도 불리며 본명은 주익균(朱翊鈞)이다. 선제(先帝)의 유지에 따라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 장거정(張居正)이 나이 어린 신종을 대신해 10년 동안 정무(政務)를 맡아 정치적 안정과 문화발전을 이뤘다.

 

장거정이 죽고 신종이 친정(親政)을 하자 환관(宦官)이 득세해 내각과 갈등이 심화됐다. 신종은 환관을 지방에 파견해 세금을 직접 거둬 국가재정에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무덤으로 사용할 지하궁전 건축과 매일 벌어지는 연회 비용으로 탕진했다. 나라의 정사를 도외시했던 신종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조선을 돕기 위해 명나라 군대를 출병시켰다. 신종은 ‘조선의 황제’라는 비난어린 평가와 조롱을 받았다. 후대 중국의 사학자들도 자국 영토가 위협을 받은 것도 아닌 전쟁에 대군을 출병시켜 나라의 재정을 어렵게 만든 신종을 폄하해 명나라 멸망의 단초를 제공한 군주로 기록했다.

 

▲임진왜란 당시 도움을 준 명나라 신종을 모신 충북 괴산 만동묘. 계단이 너무 가파르고 좁아 자연히 몸을 옆으로 돌려 조심스럽게 오르내리게 만든다. /조선일보 DB

 

재상 장거정의 내각에
환관세력을 키워 대립

후금(後金)의 누르하치(努爾哈赤)가 요동(遼東)을 공격해오는 위기상황에서 누르하치의 침략을 막기 위해 병부상서(兵部尙書)가 군비를 요청해도 군비부담을 거절한 신종이 임진왜란에 이어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사비까지 털어 조선에 두 번이나 대규모 지원군을 파병했던 역사적 사실을 중국 역사가들은 지금도 불가사의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신종은 황태자 책봉 제로 내각과 대립하며 환관세력을 키웠다. 엄격한 스승이자 재상이었던 장거정이 추진했던 내정개혁을 후퇴시킨 것도 모자라 장거정의 묘를 파헤쳐 부관참시의 모욕을 준 신종은 1589년부터 죽을때까지 조정(朝廷)을 무시하고 정무를 돌보지 않았다. 이정기라는 재상이 사직을 청했지만 신종은 반응이 없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신종의 재가 없이 고향에 내려온 이정기는 가족을 피신시키고 절에서 기거하며 5년 동안 152번이나 사직서를 올렸지만 신종은 답이 없었다. 사약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다가 제풀에 지친 이정기는 결국 일찍 죽고 만다. 그제서야 신종은 죽은 이정기에게 시호(諡號)를 내리고 두둑한 퇴직금도 하사했다 한다. 명나라 최장기 재위기간을 지낸 신종은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황제의 사보타주’ 주인공이었다.

 

▲북족을 멸족시킨 명나라 신종. /이코노미조선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북족 멸족 사건

중국 역사를 넘어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 신종 때 벌어진 북족 멸족사건이다. 중국 서남부에서 가장 강력한 소수민족이었던 북족은 절벽에 조상의 관을 매다는 현관(懸棺)풍속을 중국 최초로 시작한 민족이다. 북후국(侯國)이란 나라를 세워 진()나라와 대치하기도 했던 북족은 독립의지가 강해 수세기에 걸쳐 여러 차례 전쟁을 겪었다.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시행하는 명나라 황실에 녹명차를 공물로 진상하며 한동안 평화를 유지하던 북족은 나날이 심해지는 지방 봉건군주의 폭정에 저항해 농민의용군을 결성했다.

 

10살의 어린 나이로 신종이 황제로 즉위할 무렵 북족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황실공차로 바치던 녹명차를 황실에 보내는 것을 막았다. 황제의 권위에 도전한 북족을 진압하기 위해 14만 대군이 투입됐다. 산악전투에 익숙하지 않아 초기진압에 실패한 명나라 진압군은 저항군과 민간인 구별 없이 북족을 학살했다. 1572 7월부터 명나라 진압군은 초토화 작전에 나서 야습을 감행해 60여개의 촌락을 불태우며 인종청소를 벌였다.

 

살던 마을을 떠나 산 위로 쫓기던 북족은 조상의 관을 모신 높은 절벽 위에서 치른 전투를 마지막으로 역사에서 자취를 감췄다. 북족의 농민저항은 멸족으로 끝났다. 녹명차도 북족과 함께 사라졌다. 북족의 전설에 의하면 옥황상제를 위해 불로장생차를 만들던 ‘녹명’이라는 신선이 딸과 함께 인간 세상에 내려와 차나무를 심어 북족에게 재배기술을 가르쳤다. 녹명의 딸은 북족 청년과 결혼해 차 만드는 기술을 전수했다. 북족은 고마운 신선의 이름을 차에 붙여 ‘녹명차’라고 지었다 한다.

 

▲녹명차. /이코노미조선

 

50년대 '북족의 후예' 나타나
중국 정부 인정해

멸족된 북족 재등장

 

북족을 멸족시킨 신종은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자신을 위해 만든 지하 능에서 주야장천(晝夜長川) 연회로 소일하다가 죽었다. 신종이 묻힌 정릉(定陵) 1956년 베이징 부시장 우한()이 주도해 연구 목적으로 발굴되지만 홍위병에 의해 농민의용군을 학살한 봉건군주라는 죄명으로 신종의 유골은 부관참시를 당한후 불태워졌다. 1956년 중국에서 실시한 민족 분류작업과정에서 북족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좀 더 철저한 고증을 거쳐야겠지만 중국 정부는 이들을 일단 북족으로 인정했다. 차로 말미암아 멸족된 북족의 재등장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매력적인 존재였다. 북족이 마지막으로 사라진 절벽 아래에 조성된 북족문화 유적지에서 민속공연을 하는 북족을 볼 수 있었다. 북족과 함께 사라진 녹명차도 다시 세상에 나왔다.

조선일보  < 기사는 이코노미조선 144에서 발췌했습니다.>

서영수 차() 칼럼니스트편집=최원철

 

◆2016-05-20  환관 정화는 왜 대규모 해상 원정에 나섰을까

시대가 변하면 자연스럽게 역사 해석도 달라진다. 중국의 해양사(海洋史)를 새롭게 주목하는 이유다. 우리의 사고에는 일종의 관성이 작용하여 중국은 곧 대륙 문명이고 중국사는 대륙 제국의 역사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중국의 해상력은 우리가 통상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이를 예시하는 것이 정화(鄭和)의 남해원정이다.

명대 초인 1405, 무슬림 가문 출신의 환관 정화는 황제의 명령을 받아 대규모 선단을 꾸려 일곱 차례에 걸쳐 인도양 세계를 탐사했다. 그는 길이 125m에 달하는 대형 범선 60여 척에 적어도 100척 이상의 소선에다가 2만∼3만 명의 인원을 통솔하여 인도양 지역 내 30여 개국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 해상 사업이었다. 

명 제국이 이와 같은 초대형 원정 사업을 추진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실로 핵심적인 질문이지만 이런 중요한 문제에 대해 답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한 형편이다. 1433년 마지막 원정 이후 명의 국가 정책이 극적으로 바뀌어 바다로 나가는 것을 철저히 금지하는 해금(海禁) 정책을 폈다. 이후 중국 역사는 내향적으로 되었고, 제국의 무게중심이 북쪽 내륙 지방으로 옮겨갔다. 이 과정에서 남해원정 관련 문서들이 대부분 폐기되어 이 세계사적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힘들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언급하는 원정 목적은 쿠데타 과정에서 제거된 전 황제 건문제가 아직 해외에 살아 있다는 유언비어가 퍼져서 그의 행방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 일반적으로 제시하는 사업 목적은 중국 황제의 위엄을 만방에 떨치고 해상교역을 장려하며 각지의 진기한 동식물을 수집하여 황제에게 헌상한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일들을 하기 위해 초국가적 대사업을 벌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주목해 볼 점은 중국 역사학자들의 해석이다. 이들은 중국의 해외 팽창이 평화적이었다고 극구 주장한다. 사실 유럽인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혹은 아메리카에 들어갔을 때 지극히 폭력적인 행태를 보인 것은 분명하다. 이와 달리 정화의 사업은 살인·폭력·약탈 혹은 종교의 강제 전도 같은 일이 없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정화 선단은 약탈을 하지 않고 중국의 발전된 문물을 전해 주었을 뿐이며, 결과적으로 인도양 세계에 평화로운 질서를 부과했다고 서술한다.

 

이런 해석은 현재 중국의 세계 진출과 관련이 없지 않아 보인다. 우리는 베이징 올림픽 입장식에서 정화 항해를 상징적으로 재현하면서 중국 문명의 발전된 문물을 전달하는 것처럼 묘사했던 것을 기억한다. 과연 그럴까? 중국은 주변 각국에 도자기를 전해 주고 아프리카의 기린이나 타조 같은 동물을 가져오기 위해 그 엄청난 자원을 투입했단 말인가?


정화 원정의 실상은 그런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다. 예컨대 3차 원정에서는 실론과 전투를 벌여 국왕과 조신들을 체포해서 중국으로 압송해 왔다. 2000명의 무장군인들이 왕궁을 공격해 들어가는 장면을 보면 정화가 평화의 사절이라고 순진하게 해석하기는 힘들다. 이 시대 중국의 해상 팽창이 ‘해양제국주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반대편 주장도 동시에 귀담아들으며 공정한 평가를 해야 마땅하다.

중국 역사학자들은 철저히 자국 중심의 해석만 제시한다. 중국 학자들의 주장이 천편일률적으로 다 같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으나, 우리가 접하는 다수 학자들의 글은 맘 편하게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심지어 동남아시아 지역 주민들이 황제의 덕을 흠모하여 중국에 도움을 청한 결과 정화 선단이 찾아가 평화를 이루었노라는, 그야말로 구시대적인 주장을 버젓이 펼친다. 비유하자면, 조선이 일본 조정에 도움을 요청하여 그 은덕으로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든지, 인도가 영국 국왕을 흠모하여 군사 파병을 요청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면 누가 수긍하겠는가. 

역사 해석은 자칫 현실정치에 종속될 우려가 있다. 중국 정치 지도자들이 비단길과 정화 원정에 대해 부쩍 많이 언급하는 것이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세계 전략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역사학은 당연히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지만, 그것이 곧 정치가들을 위해 복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관제(官製) 역사학의 맹점이 그것이다. 남 이야기만이 아니다. 밀실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우리 역사 교과서 또한 불안하기 짝이 없다

조선일보  주경철 객원논설위원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명나라 마지막 만리장성의 꽃, 모전욕

 명나라 장성 중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 모전욕장성

 

중국을 대표하는 만리장성은 세계적인 문화유산이자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다. 만리장성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서로 국경을 보호하기 위해 장성을 쌓았으며, 중국 진()나라 시황제(始皇帝)가 북방 유목민의 침입을 막기 위해 현재의 장성을 만들었다.

 

길이만 1만여 리에 달하는 만리장성 중 세계문화유산이자 중국 5A급 관광지인 모전욕장성(慕田峪) 1570~1615년 주원장(朱元璋) 수하 서달(达)과 척계광()이 완성한 명나라의 마지막 만리장성이다. 특히 이곳은 명나라 장성 중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 구간 중 하나로 약 600년 전 만리장성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모전욕계곡을 따라 축조한 장성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지니고 있어 여성적인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2km 정도 길이로 뻗어 있는 이곳은 만리장성 구간 중 자연과 하나되는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 하여 '장성의 꽃’이라 불린다.

 

모전욕장성은 신베이징(新北京) 16경관에 꼽힐 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다양한 생태 숲이 보전되어있는 이곳은 사계절 내내 각양각색의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단풍잎으로 물든 가을의 장성과 눈으로 새하얗게 덮인 장성의 겨울 설경은 이곳의 자랑거리다. 북경 시내에서 약 80km 떨어져 비교적 교통이 불편함에도 그 풍경을 보려는 관광객들이 사시사철 찾아오고 있다.

 

모전욕장성은 케이블카를 이용해 편리하게 올라갔다가 슬라이드를 타고 내려올 수 있다. 슬라이드를 타고 내려오는 재미가 쏠쏠하므로 방문한다면 반드시 이용해보자.

 

 모전욕장성의 겨울()과 가을풍경()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로 불리는 만리장성은 성벽의 높이, 이중으로 축성된 성벽 등 지역마다 각기 다른 구조와 재료로 만들어졌다. 앞서 말한 모전욕장성 외에도 팔달령장성(达岭长), 사마대장정(马台长), 거용관장성(居庸关长) 등은 독특한 모양과 구조로 여행자들이 주로 찾고 있다.

 

만리장성 구간 중 가장 유명한 팔달령장성은 해발 1,015m에 이르는 험준한 산세를 따라 뻗어있는 웅장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곳 또한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지만, 주변 경관을 감상하면서 걸어 올라가는 것도 좋을 듯하다.

 

 팔달령장성은 비교적 가파른 굴곡을 지녔다.

 

시내 중심에서 북동쪽으로 약 140km 떨어져 있는 사마대장성은 해발 986m의 험준한 곳에 위치해있다. 특히 이곳은 명나라 시절 건설된 이후 보수 없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중국 특유의 농촌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사마대장성을 오른다면 최신식으로 지어진 케이블카를 탈 것. 케이블카에서 바라보는 사마대장성의 주변 경치가 일품이기 때문이다. 또한 장성 망루에서 보이는 고북수진은 그림 같은 풍경을 자랑한다. 이외에도 사마대장성은 해가 지면 산등성이를 따라 조명이 켜져 만리장성의 야경을 볼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거용관장성은 베이징 시내에서 가장 가까운 만리장성 구간으로 차로 약 30분 정도 달리면 도착할 수 있다. 그래서 시간이 빠듯한 여행자들에게 추천한다

 

 유일하게 만리장성의 아경을 볼 수 있는 사마대장성()과 고북수진()

 

■청나라末 미녀 공주의 비밀을 벗겨라

[인민망 한국어판 3 31] 애신각라•부후(愛新覺羅•溥煦, 1828-1907)는 청나라 황가(皇家) 종실이다. 그의 차남 애신각라•육랑(愛新覺羅•毓朗)은 중국 근대 경찰업무시스템 창립자이다. 애신각라•육랑의 장녀 애신각라•항혜(愛新覺羅•恒慧)는 딸을 두 명 두었으며 장녀는 완안립동기(立童), 차녀는 완안벽림(碧琳)이다. (번역: 이인숙)

원문 출처: 중국청년망(中國靑年網)

 

▲완안립동기

 

▲서 있는 완안립동기와 맹소동(孟小冬)

 

 

 

▲애신각라육랑

 

▲완안립동기의 모친

 

▲애신각라항형(愛新覺羅 恒馨), 그녀의 딸 완용(婉容)은 청나라 마지막 황후이다

 

▲애신각라항혜

 

패륵부 5공주 애신각라항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