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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161] 찬양의 시대는 가라 - [180] 2차 범죄를 부르는 법의 관대함

상림은내고향 2022. 9. 21. 17:16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조선일보

2022.05.11

[161] 찬양의 시대는 가라

로버트 휴 벤슨 ‘세상의 주인’

작가들의 표현을 빌리면, 필센버그 대통령은 온 세상에 바다 향기를 전해 주는 존재였다. 기쁨을 주고, 죄를 사해 주며, 가슴을 뜨겁게 하고, 온종일 들뜨게 했다. 봄날의 벚나무 수목원처럼 더없이 매력적이었다. 폭풍처럼 시선을 사로잡고 현악기의 울림처럼 마음을 흔들었다. 작가들은 대통령을 맑은 시냇물, 반짝이는 보석, 여인의 사랑에 비유했다. 비굴해 보일 만큼 극찬의 말을 쏟아냈다. - 로버트 휴 벤슨 ‘세상의 주인’ 중에서

 

‘다섯 번의 봄, 당신과 함께여서 행복했습니다’라는 문장과 ‘촛불 정부’를 이끈 부부의 밝은 웃음이 서울 중심가에 내걸렸다. 지지자들은 2018년 뉴욕 타임스퀘어, 2019년 서울역, 2020년 광주 지하철, 그리고 2021년에는 잡지에 생일 축하 광고를 냈다. 이번 대형 옥외 광고도 그들이 보낸 퇴임 선물이란다. 강남은 5월 12일까지, 광화문은 27일까지 게시된다.

 

‘이니 하고 싶은 거 다 해’부터 ‘대한민국은 문재인 보유국’까지, 돌아보면 지지자들을 앞세워 사랑받는 권력자 이미지를 홍보하는 데 유별나게 집착한 정부였다. 세금과 물가는 치솟았고, 방역을 명분 삼아 영업의 자유, 외식의 자유, 쇼핑의 자유, 여행의 자유, 가족 모임의 자유 등 보통 사람들의 거의 모든 일상생활에 재갈을 물린 정권의 자격지심이었을까?

 

조지 오웰의 ‘1984′보다 40년 이상 일찍 나온 디스토피아 소설의 원조, 암울한 전체주의 세계를 그린 ‘세상의 주인’에서 필센버그는 세상을 구원할 영웅의 이미지를 내세워 대통령이 된다. 그는 개혁이란 이름으로 기존의 법들을 폐기하고 새로운 규칙과 법을 만들어 대중의 자유를 억압한다. 신격화된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으면 절망과 죽음이 있을 뿐이다.

 

대통령도 장관도 국회의원도 찬미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개인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고, 나라를 더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약속을 하고 일정 기간 권력을 위임받은 사람들이다. 그 덕에 자신은 물론 처자식까지 세금으로 호의호식하며 면죄부도 누린다. 그러니 엄중히 감시하고 견제하고 비판해야 한다. 어리석은 찬양의 시대, 이제는 끝내야 한다.

 

[162] 성범죄에 관대한 법과 정치

▲피에르 르메트르 ‘오르부아르’

방에 들어온 레몽양은 상관이 그런 자세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역겨운 듯한, 그렇지만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 내밀었다. 왜냐하면 앞에 서자마자 재빠른 동작으로, 능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치마 속에 손을 쑥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엉덩이를 홱 돌렸지만, 라부르댕은 이 분야에는 거의 예지력에 가까운 직감이 있었다. 그녀가 어떻게 피하든 간에 그는 항상 목적을 달성했다. - 피에르 르메트르 ‘오르부아르’ 중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성 추문이 또 터졌다. 오죽하면 ‘더듬어 만진 당’이라 할까. 여성 보좌진이 피해를 신고했고 당이 사건을 조사한 뒤 박완주를 제명 처리했다. 그는 전 서울시장 박원순, 전 부산시장 오거돈, 전 충남지사 안희정 등의 성범죄와 관련, ‘참혹하고 부끄러운 심정’이라며 당을 대신해 사과한 적 있는 3선 의원이다.

 

대법원은 군대 내 합의된 동성 간 성관계 처벌은 잘못이라고 판결했다. 군의 동성애 허용으로 해석될 수 있는 판단인데 아랫사람이 자발적으로 합의했다는 증언을 어떻게 100% 믿을 수 있을까? 소설 속 문장을 빌리자면 ‘군인에게 진정한 위험은 적이 아니라 계급’이다. 상관이 허리띠를 풀라고 명령할 때 복종하지 않는 게 가능한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병사들의 쓸쓸한 귀환과 그 전쟁으로 이익을 취하는 세상의 부조리를 그린 소설 속 인물 중 하나인 라부르댕은 재력가의 후원으로 구청장에 당선된다. 그는 자기보다 큰 권력 앞에서는 납작 엎드려 이익을 취하고, 약한 사람을 이용해 욕망을 채우는 능력이 탁월한 남자다. 여성 인권이 바닥이던 시절, 그의 여비서는 고발도 퇴직도 하지 않지만 ‘뒈져라, 이 더러운 놈아!’ 속으로 욕하며 상관의 추행을 견딘다.

 

당대표의 성 상납 의혹에 대해 국민의힘은 개인의 사생활 문제를 거론하는 건 적절치 않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누구도 타인의 허리 아래 일까지 상관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군이든 국회든, 이성이든 동성이든 힘의 불균형이 존재하는 관계에서 성폭력은 반복된다. 사죄한다느니 합의했다느니 사생활이니 하는 말이 힘의 우위를 선점한 자들의 변명으로 들리는 이유다.

 

[163] 호국 보훈의 유월 정신

▲케이트 쇼팽 ‘데지레의 아기’

오래전에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였다. 그는 편지를 읽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했다. “무엇보다”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적었다. “언제나 저는 하늘에 감사하고 있어요. 사랑스러운 아르망이 자신의 생모에 대해 영원히 모른 채 우리와 함께 살아갈 수 있어서 말이죠. 노예의 낙인이 찍혀 있는 신분이지만 제 자식을 끔찍이 아끼는 여자였잖아요.” - 케이트 쇼팽 ‘데지레의 아기’ 중에서

 

대한민국 헌법에 조만간 ‘오월 정신’이 새겨질 모양이다. 새 정부는 출범한 지 열흘도 되지 않아 총동원령을 내리고 광주행 열차에 올랐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고 ‘오월 정신은 자유민주주의 헌법 정신 그 자체’이며 ‘대한민국 국민 모두는 광주 시민’이라고 선언했다.

 

아기 때 버려졌지만 양부모의 사랑 속에서 아름답게 자란 데지레는 대지주 아르망과 결혼했다. 흑인 노예에게 가혹하기로 소문난 그였지만 더없이 좋은 남편이었다. 그러나 데지레가 낳은 아기의 피부색이 순수 백인 것이 아니라며 둘을 냉정하게 내쫓는다. 친부모를 알지 못해 혈통을 증명할 수 없던 데지레는 아들을 안고 강에 투신한다. 아르망은 흑인 피를 가진 것은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인종차별 문제는 우리와 무관한 것 같다. 그러나 최고의 정치 이슈가 되었다는 점에서,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어 반론 여지를 주지 않는다는 면에서 우리 사회의 좌우 갈등은 흑백 갈등 못지않다. 더구나 새 정부는 ‘BLM(흑인의 생명은 중요하다)’처럼 ‘광주의 뜻이 가장 중요하다’고 선포한 셈이다. 동의하지 않는 국민은 용납할 수 없다는 뜻일까.

 

중요 문서를 너무 늦게 열면 아르망처럼 소중한 것들을 잃을 수 있다. 정권 교체의 기대를 안고 시작한 새 정부는 5·18 유공자 명단을 공개할까. 오는 현충일과 6·25전쟁 기념일, 호국 보훈의 유월 정신이야말로 ‘피로써 지킨 자유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 그 자체’라고 말해야 하는 게 아닐까. 현충원의 무명용사 묘비를 끌어안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정치인도 볼 수 있으려나.

 

[164] 손자 손녀가 없는 노년

단편소설 ‘어느새’가 담긴 ‘빛바랜 정원(faded garden)’.

“만약에 우리한테 아이가 있었다면 말이에요. 재롱을 피우고 우리를 사랑해주고, 어른이 되어 또 다른 아이의 부모가 되었을 자식이 있었다면 말이죠. 우리의 늘그막이 얼마나 빛났을까요. 예쁜 장난감과 사탕을 준비하고, 트리에 불을 밝히고, 신이 나서 춤을 추는 커다란 눈망울을 바라볼 때 ‘할아버지, 할머니’ 하고 부르는 달콤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한 크리스마스가 되었을까요.” - 힐데가르드 호손 ‘어느새’ 중에서

 

결혼하고 아이를 갖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태어날 아이에게 못 할 짓’이라며 낳지 않는 부부가 많다. 2021년 우리나라 출산율은 198국 중 2년 연속 꼴찌다. 2060년이면 65세 이상 노령 인구가 국민의 절반을 넘는다. 100년 후 전체 인구는 1500만명. 그리 멀지 않은 미래, 우리의 유전자를 나눠 가진 사람은 지구에서 사라질 것이다.

 

소설 속 노부부는 평생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왔다.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는 삶이었지만 자식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할 때 두 사람 모두 가슴이 시리다. 그러던 어느 날, 작고 예쁜 여자아이가 그들을 찾아온다. 젊은 시절 품어보지 못한 자식처럼, 늘그막에 안아보았으면 했던 손녀처럼 아이는 재롱을 떨고 소리 내 웃으며 집안을 환히 밝힌다.

 

노부부는 지금껏 누려보지 못한 행복에 감사한다. 새근새근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흰머리를 맞댄 그들도 영원한 잠에 빠져든다. 아이와의 시간은 그들 부부가 이생에서 함께한 마지막 꿈이었다. ‘주홍글씨’의 작가 너새니얼 호손의 손녀가 쓴 소설이다. 곧 사라질 말이겠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딸이 ‘대를 이어서’ 소설을 썼다.

 

마침 지방선거일이다. 대선, 총선, 재·보궐 등, 그 많은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은 더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겠다고 약속한다. 그런데 왜 점점 더 아이 낳아 키우기 싫은 세상이 되는 것일까. 정치인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지 않는 한, 한국인의 소멸은 막을 수 없다. 자식도 손자도 없던 노부부의 쓸쓸한 꿈이 젊은 세대의 마지막 꿈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조금 슬프다.

 

[165] 전과자 수두룩한 국회

▲필립 K. 딕 ‘마이너리티 리포트’

앤더튼이 말했다. “프리크라임은 법을 어긴 적 없는 개인을 잡아들이는 것이네. 폭력행위를 저지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잡아들이니까. 우리는 그들에게 혐의가 있다고 주장하지. 반면, 그들은 영원히 무죄를 주장할 걸세. 그리고 어떤 면에서 보면 그들은 실제로 무고한 셈이지. 우리 사회에는 이제 중범죄가 존재하지 않네. 대신 미래의 범죄자들로 가득한 격리 수용소가 생겼지.” - 필립 K. 딕 ‘마이너리티 리포트’ 중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강의하려면 ‘성범죄 경력조회 동의서’와 ‘아동학대 관련범죄 전력조회 동의서’를 제출해야 한다. 개인정보 보호법에 의해 사원을 채용할 때조차 신원조회를 할 수 없다지만, 언제부턴가 많은 곳에서 전과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당연해졌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세계는 살인 범죄 예방 시스템이 작동되는 미래 사회다. 경찰은 범죄 장소와 시간, 범인을 예측하고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출동, 혐의자를 체포한다. 실제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지만 용의자는 처벌받는다. 살인 없는 세상을 위해 살인하지 않은 사람을 사형이나 종신형에 처하는 것이다.

 

2020년 총선 당시, 국회의원 당선자 300명 중 전과자가 100명이라는 기사가 있었다. 그들이 저지른 범죄는 폭력과 음주운전, 공무집행 방해를 포함, 공직선거법과 정치자금법 위반, 집시법과 반공법 위반, 국가모독과 내란음모 등 국가보안법 위반도 다수였다. 지난 대선에서 여러 의혹을 안고 있던 전과 4범의 후보는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당선, 면책특권을 얻었다.

 

취지엔 동의하면서도 개인정보를 공개하고 범죄경력 조회서를 제출해본 사람들은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받는 기분을 부정하지 못한다. 만약 개심한 전과자라면 성실하게 살아갈 기회를 잃을 것이다. 죄 없는 시민을 무수히 잡아넣은 소설 속 앤더튼 국장도 정작 자신의 살인 예고에 대해서는 시스템 오류와 음모라며 체포를 피해 도망친다.

 

안전한 사회를 위해서라면 입법자들에게 먼저 적용해야 한다. 일반인과 달리 전과가 수두룩한데도 기회를 얻어 특권을 누린다면, 그들이 어떻게 평등하고 공정한 법을 만들 수 있겠는가.

 

[166] 민들레와 만들래

▲로알드 달 ‘빅스비 부인과 대령의 외투’

그녀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나이가 들어 깃털이 반만 남은 공작이 점잔 빼며 잔디밭을 걸어 다니는 모습을 떠올렸다. 또는 그 얼빠진 자가수분 꽃, 민들레 같은 것을 떠올렸다. 민들레는 씨를 만드는 데 수분이 필요 없었다. 그 화려한 노란 꽃잎은 그저 시간 낭비, 허세, 가장일 뿐이었다. 생물학자들이 쓰는 용어가 뭐였더라. 무성생식. 민들레는 무성생식이었다. - 로알드 달 ‘빅스비 부인과 대령의 외투’ 중에서

 

일부 여당 의원들이 ‘민들레’라는 모임을 조직했다. ‘민심을 들어 볼래’의 뜻이라고 한다. 순수 공부모임이라고도 하고 친윤(親尹) 세력의 결집이라는 말도 있다. 산적한 나랏일이 한둘이 아닐 텐데 따로 모임을 만들어 모일 필요는 무엇일까. 그 모임이 아니면 민심을 들을 수 없고, 최고 권력자에게 민심을 전달할 길이 없을까.

 

바람을 피우고 있던 소설 속 빅스비 부인의 눈에 남편은 민들레다. 그녀에게 남편은 매력이 하나도 없는 남자다. 허세를 부려봐야 깃털 빠진 늙은 공작새, 자가수분하는 민들레에 불과했다. 그와 비교해서 대령은 얼마나 멋진 남자인지. 물론 그녀의 착각이다. 민들레는 무성생식하는 식물이 아니고 남편에게도 근사한 애인이 있었다.

 

정권마다 최고 권력자를 중심으로 세를 과시하려는 시도는 늘 있었다. 전 정권의 ‘부엉이 모임’은 밤을 새워 권력자를 지키자는 뜻이었다. 민들레는 짓밟혀도 죽지 않는 끈질김을 상징한다. 꽃말은 ‘내 사랑 그대에게 드려요’다. ‘일편단심 민들레’도 떠오를 것이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지못미(지켜주지 못해서 미안)처럼 줄인 말 은어 방식과도 맞지 않는 꿰맞추기식 작명이다. ‘민심을 들어 볼래’가 한 글자 차이를 무시하고 ‘민들레’가 될 수 있다면 (민심을) ‘만들래’인들 되지 못할까.

 

이익집단이 자기들 중심으로 세상을 보면 오류에 빠지기 쉽다. 틀려도 틀린 줄 모른다. 바로잡아주어도 자기 생각만 옳다고 우기며 잘했다고 으스대니 세상은 웃을 수밖에. 민들레든 만들래든, 참을 수 없는 가벼움만큼은 바람 따라 이리저리 흩날리는 민들레 씨를 똑 닮았다.

 

[167] 바보상자 TV와 똑똑이 스마트폰

▲닐 포스트먼 ‘죽도록 즐기기’

오웰은 누군가 서적을 금지시킬까 두려워했다. 헉슬리는 서적을 금지할 이유가 사라지고 사고를 무력화하는 테크놀로지를 떠받들 것을 두려워했다. ‘1984′에서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해 통제한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즐길 거리를 쏟아부어 사람들을 통제한다. 오웰은 우리가 증오하는 것이 우리를 파멸시킬까 봐 두려워했다. 헉슬리는 우리가 좋아서 집착하는 것이 우리를 파멸시킬까 봐 두려워했다. - 닐 포스트먼 ‘죽도록 즐기기’ 중에서

 

병사들이 24시간 휴대전화를 소지하는 방안을 국방부가 모색 중이다. 현재 군 복무 중이거나 곧 하게 될 당사자는 물론, 입대할 자식을 둔 부모라면 수시로 안전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을 바라지 않을 리 없다. 똑똑한 젊은이들이 휴대폰 사용으로 훈련에 지장을 줄 거라고도 믿고 싶지 않다.

 

교육자이자 커뮤니케이션 이론가였던 닐 포스트먼은 1985년에 출간된 이 책에서 미디어를 통한 정보의 포화를 걱정했다. 그는 TV와 개인용 컴퓨터가 우리 삶에 미치는 폐해를 피력하며 미래 사회는 빅 브러더가 공포로 통제하는 조지 오웰의 ‘1984′보다 재미에 빠져들게 하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가까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휴대전화라고 하지만 TV를 포함한 오락 거리가 무한한 스마트폰이다. TV는 바보상자라고 불렸지만 스마트폰은 이름부터 ‘똑똑이’다. 기기를 손에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첨단 정보의 소유자라는 안도감과 사회적 네트워크 안에 있는 것 같은 소속감을 느낀다. 잠시라도 눈을 떼면 불안해진다.

 

쉽고 편하고 즐거운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자제와 절제도 배워야 할 인생의 지혜다. 하지만 세상은 싱싱한 사과부터 먹지 않으면 평생 썩은 것만 먹게 된다며 눈앞의 즐거움을 누리라고 달콤하게 속삭인다.

 

‘새로운 주류 매체가 사람들의 지적 능력을 편중시키고 특정한 정의를 선호하도록 조장하여 공공 담론을 변화시킬 것’이라며 TV를 멀리했던 저자가 스마트폰 시대를 살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알게 모르게 우리는 스마트폰에 중독되어 있다. 이 상태를 유지하고 더 넓게 확대하는 것이 정말 우리들 자신을 위한 일일까, 고민해야 한다.

 

[168] 월북인지 아닌지 왜 중요하냐고? 개인의 진실 짓밟은 거짓 대의

▲외된 폰 호르바트 ‘우리 시대의 아이’

우리 지도자들은 모두 항상 평화에 대해 열광적으로 떠들어대지만 나와 내 동료들은 그저 서로 눈짓을 할 뿐이다. 우리 지도자들은 교활하고 영리해서 남들을 능히 속일 것이다. 그들처럼 거짓말 기술에 통달해 있는 사람도 없으니까. 거짓이 없으면 삶도 없다. 우리는 항상 그저 대비할 뿐이다. 우리는 매일 정렬하고 정문을 향해 나아간다. 보조를 맞춰서. - 외된 폰 호르바트 ‘우리 시대의 아이’ 중에서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한 6·25전쟁일, 더불어민주당이 ‘평화는 최고의 안보, 대화의 물꼬를 다시 틔우자’는 이상한 글을 소셜 미디어에 올렸다. 부국강병이 최고의 안보이고 그 결과 평화가 있는 것 아닌가? 언제나 북한을 평화 제공자로 생각하는 사람들, 개성 사무소를 폭파해도, 미사일을 쏘아대도, 심지어 자국민을 처형해도 분노할 줄 모르는 당이었다.

 

최근 국방부와 해경은 북한에 피살된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대준씨의 월북 의혹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당시 청와대는 ‘월북에 방점을 두고 수사하라. 지시를 무시하고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압력을 넣고는 월북이 해경의 단독 판단이라고 발표했다. 남북 간 군사 통신선이 막혀 있어 어떤 구조 노력도 할 수 없었다고 했지만 그 역시 거짓으로 드러났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 굶주림을 벗어날 길 없던 청년은 자원입대한다. 하지만 전쟁에서 크게 다치고 보상도 받지 못한 채 다시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는 가슴에 품었던 애국심을 회의(懷疑)한다. 지도자들은 국민을 위해 일할까? 개인을 이용하고 쉽게 버리는 국가라면 충성심이 무슨 소용일까? 그는 ‘개인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자는 누구든 꺼져버려야’ 한다며 환멸한다.

 

거짓 명분을 앞세우면 개인은 얼마든지 하찮아질 수 있다. 주적의 비위를 맞추려고 희생된 국민을 조국의 배신자로 매도하고 월북자의 가족이란 오명을 씌우기도 한다. 사실이 드러나니 ‘월북인지 아닌지 왜 중요하냐’고 따진다. 북한에는 한없이 너그러운 사람들, 국민 개인의 진실과 원통함은 왜 그토록 쉽게 외면하는가.

 

[169] 영화와 드라마, 욕설은 이제 그만

▲로이스 로리 ‘기억 전달자’

조너스는 경험한 것을 친구들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언덕과 눈을 보여주지 않고 어떻게 썰매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높이, 바람 그리고 깃털 같고 마술 같은 차가움을 느껴 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어떻게 언덕과 눈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지난 십여 년 동안 여기 아이들 모두가 언어의 정확한 사용법을 훈련받았지만 어제 조너스가 경험한 햇볕의 따스함을 전달하기 위해 어떤 단어를 사용할 수 있겠는가. - 로이스 로리 ‘기억 전달자’ 중에서

 

공중파나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내보내는 드라마와 영화 속 담배는 모자이크 처리 된다. 술이나 마약, 총기는 보여주지만 혈흔이나 문신, 살인 도구가 되는 칼도 뿌옇게 가려놓는다. 하지만 담배와 칼을 본다고 모든 시청자가 모방 욕구를 느끼지는 않는다. 정작 대중을 위해 가려야 할 건 따로 있다.

 

우리나라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게 꺼려진다. 지나친 욕설 때문이다. 인물의 성격을 강조하려면 욕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런데 주인공과 조연, 남녀노소 구분 없이 욕을 내뱉는다. 극중 욕설은 무차별적으로 시청자의 귀에 박힌다. 처음엔 눈을 찌푸리지만 멋진 연기자의 욕설이 폼나 보이기 시작한다. 어느덧 거부감은 사라지고 아기가 말을 배우듯 따라 한다.

 

소설 속 조너스는 모든 것이 인공적으로 제어되고 통제되는 디스토피아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는 인류 문명의 기억 전달자로 선택받고 세상에 있는 줄도 몰랐던 자연과 역사와 문화를 배운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경험하고 느껴야 할 감정과 그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와 문장이 있다는 걸 알고 충격을 받는다. 사랑이란 말을 없애자 사랑의 의미는 왜곡되고 감정마저 사라졌다는 것도 알게 된다.

 

카페와 학교와 직장, 거리와 지하철, 인터넷 공간까지 욕설이 들리지 않는 곳이 없다. 생각과 감정을 직설적인 욕으로 대신하면 머잖은 미래, 많은 단어와 문장이 사라지고 사고 능력도 저하될 것이다. 언어는 생각의 도구이자 외투지만 욕설은 감정의 배설물이다. 문명인은 자기 배설물을 내보이는 걸 수치스러워한다. 그런데 대중매체는 쉼 없이 배설물을 흘려보내고 대중은 보고 듣고 따라 말하며 그 속에 빠져 산다.

 

07.13

[170] 필로폰 靑 행정관

▲미하일 불가코프 ‘모르핀’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이 모르핀 중독자에게 찾아온다. 단지 한 시간 혹은 두 시간만 모르핀을 끊어 봐라. 공기가 희박하고 숨 쉬는 게 불가능하다. 몸 안에 굶주리지 않은 세포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이것을 설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한마디로 인간이 아니다. 시체가 움직이고 우울해하고 고통에 신음한다. 그는 모르핀 이외에 어떤 것도 원치 않고 상상하지도 않는다. - 미하일 불가코프 ‘모르핀’ 중에서.

 

오래전 팔이 부러져 수술한 적 있다. 죽을 듯 아프다가도 진통제를 맞으면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졌다. 맨정신으로는 상상해본 적 없는 쾌감을 잠깐 경험했던 것도 같다. 내게는 낯설어서 두려운 것이었지만, 그런 기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어떤 사람들은 약물에 의존하는구나, 생각했다.

 

의사이기도 했던 작가는 기관절개술을 받은 후 모르핀에 중독된 적 있고 그때의 경험을 소설로 썼다. 결심만 하면 언제든 멈출 수 있다는 자만심에서 중독이 시작된다. 꼭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하면서 빠져든다. 작가는 모진 노력으로 중독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 괴로움과 위험을 절절히 체험한 작가의 소설 속 젊은 의사는 고통과 환멸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인생을 끝낸다.

 

전 청와대 행정관이 필로폰 투약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 4월 19일 체포, 혐의를 인정했지만 그에 대한 징계는 없었다. 수사 중인 공무원의 퇴직은 불가하다는 원칙을 무시하고 전 정권은 5월 9일, 자신들의 임기가 끝나는 날이 되어서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사표를 수리했다.

 

버닝썬 사건으로 알려진 것처럼 우리 사회는 마약에서 안전하지 않다. 청와대 직원이나 국회의원 가족, 국정원장 사위처럼 특정 계층과 연결되면 징계받지 않고 구속되지 않고 집행유예 같은 가벼운 처벌로 끝난다.

 

마약은 북한의 주요 외화벌이 수단이다. 국내에서 유통되는 상당량이 북한산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소설에서는 코카인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마약 범죄의 묵인이야말로 ‘가장 추잡하고 간교한 독’을 세상에 퍼뜨리는 일이다.

 

[171] 헌법 수호 의무 저버린 배신

▲에우리피데스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절 죽이지 마세요. 저는 빛을 보는 게 좋아요. 땅 밑을 보라고 강요하지 마세요. 부디 제 목숨을 거두지 말아주세요. 저를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푸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인간으로 태어나 햇빛을 보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요? 저승엔 아무것도 없어요. 죽기를 바란다면 제정신이 아니지요. 그 어떤 고상한 죽음보다 비참한 삶이 더 나으니까요. - 에우리피데스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중에서

 

강제 송환을 거부하며 몸부림치는 탈북 청년들의 사진을 보는데 가슴이 졸아든다.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짓밟히고 사지로 내동댕이쳐진 순간, 얼마나 무서웠을까. 북한 김정은의 답방을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인신공양을 한 셈이다. 선상 살인을 저지른 조선족도 ‘동포로서 따뜻하게 품어줘야 한다’던 인권 변호사가 이끈 정부의 또 다른 얼굴이다.

 

트로이 정복에 나서려던 아가멤논은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쳐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신탁을 받는다. 좋은 상대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주겠다는 아버지의 거짓말에 속아 달려온 딸은 사실을 알고 살려달라고 울며 애원한다. 그러나 왕은 냉정히 죽음의 제단을 향해 딸의 등을 떠민다. 그가 원한 건 오직 전쟁 승리와 그것이 가져다줄 더 큰 권력이었다.

 

대통령은 영토와 국민을 지켜야 할 의무를 진다. 헌법에 따르면 북한이 포함된 지역도 대한민국 땅이고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도 이 나라 국민이다. 따라서 해수부 공무원이 피살 위기에 처한 걸 알고도 방치한 뒤 월북 누명을 씌운 일도, 자유를 원해 귀순한 청년들을 묶어 강제 북송하고 살인자로 단정한 일도 정부가 국민을 지키지 않은 동일한 성격의 사건이다.

 

돌려보내라는 요구를 고분고분 따른 것이든, 요청도 없었는데 알아서 보낸 것이든 북한의 입맛을 먼저 배려한 결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017년 헌법재판소는 국민의 믿음을 버리고 헌법 수호 의지를 포기했다며 현직 대통령을 파면했다. 적을 이롭게 하고 정치적 이익을 위해 국민의 생명을 거듭 빼앗았다면, 그야말로 헌법 수호 의무를 저버린 배신이 아니고 무엇일까.

 

[172] 거짓말 새긴 묘비명

▲기 드 모파상 ‘죽은 여자’

 

밖으로 나온 시체들이 자신들의 무덤 위에 쓰인 거짓말을 지우고 진실을 적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이 모두 악인, 위선자, 거짓말쟁이, 파렴치한이었고 시기심이 많았으며 도둑질을 했고 사기를 쳤고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모든 선량한 아버지들, 정숙한 아내들, 신실한 아들들, 순결한 딸들, 정직한 상인들, 흠잡을 데 없는 남자와 여자들이 말이다. - 기 드 모파상 ‘죽은 여자’ 중에서

 

어린이를 다치게 한 개의 안락사가 보류되었다. 피해 아동과 그 가족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법 절차상 개를 죽이려면 사람을 다치게 한 전과가 있어야 하는데 초범인 모양이다. 동물 단체도 안락사가 답은 아니라며 인수 의사를 밝혔다.

 

하물며 사람이다. 법적으로 우리 국민이다. 한국에서 살고 싶어 자유의지로 넘어왔다고, 대한민국 정부의 보호를 요청한다고 탈북 청년들이 직접 글로 쓰고 입으로 말했다. 하지만 정부는 그들이 16명을 죽인 흉악범이며 귀순 의사에 진정성이 없다고 거짓말했다.

 

법에도 관용이 있다. 정상참작도 있고 특별사면도 있다. 개 한 마리를 죽이고 살리는 데에도 법에 따라 자료를 모으고 증거를 확인하고 또 고민한다. 그런데 스물한 살, 스물세 살, 두 청년을 즉결 처형장으로 보내버리는 데 그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소설 속 남자는 갑자기 잃은 연인을 그리워하며 묘지를 서성인다. 그런데 어둠이 내리자 망자들이 깨어난다. 저마다 자신의 묘비명을 고쳐 쓴다. ‘자상한 가장, 성실한 남자, 여기 잠들다’ 대신 ‘아내와 자식을 학대하고 이웃에게 사기 치다 비참히 죽었다’라고 고쳐 쓴다. 산 사람이 미화해놓은 삶의 행적을 박박 지우고 양심껏 적는다. 그의 연인도 무덤에서 나와 아름다운 비문을 수정한다. ‘비 오는 날 애인 몰래 바람피우러 나갔다가 감기에 걸려 죽다.’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다만 소설처럼 생전의 거짓말을 사후에는 다 토해내야 할지 모른다. 거짓말이 출세와 권력의 지름길인 걸 알아 우리 장례 문화는 망자의 수고를 덜어주려고 관직과 성명만 무덤에 새겼던 것일까.

 

[173] 모래 무덤 같은 가상 세계

▲아베 고보 ‘모래의 여자’

 

모래는 절대 쉬지 않는다.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지표를 덮고 멸망시킨다. 유동하는 모래의 이미지는 그에게 뭐라 말할 수 없는 충격과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모래의 불모성은 흔히 말하듯 건조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끊임없는 흐름으로 인해 어떤 생물도 일절 받아들이지 못하는 점에 있는 것 같았다. 일 년 내내 매달려 있기만을 강요하는 현실의 답답함에 비하면 이 얼마나 신선한가. - 아베 고보 ‘모래의 여자’ 중에서

 

소셜미디어에 중독되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뜨면 밤새 공감 하트가 몇 개나 늘었을까, 어떤 답글이 달렸을까 궁금했다. 누군가는 내 글을 기다릴 것 같았고, 나도 그들의 글과 사진에 ‘좋아요’를 눌러야 할 것 같았다. 평소엔 관심도 없던 뉴스, 어제 검색한 것과 비슷한 상품 광고에 몇 시간씩 눈을 빼앗겼다. 그곳이 진짜 세상 같았다.

 

사막 곤충을 찾아 여행을 떠난 남자는 모래 구덩이에 갇힌다. 마을 사람들은 모래가 빗물처럼 쏟아지는 오두막에서 여자와 살아야 한다며 음식과 물을 내려줄 뿐, 꺼내주지 않는다. 남자는 도망치려 발버둥 치지만 헛수고다. 결국 낯선 환경에 적응해간다. 여자는 아이를 갖고 남자는 물을 얻을 수 있는 장치를 만든다. 그곳에도 행복과 보람이 있었다. 남자는 사다리가 있어도 떠나지 않는다. 모래가 그의 현실이자 미래가 되었다.

 

인생은 역경과 절망, 유혹과 실패를 모래처럼 쏟아낸다. 인간은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모래성을 쌓고 부수고 새로 쌓으며 희망을 찾으려 애쓴다. 인터넷 공간도 고통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은 인간의 발명품 중 하나다. 그러나 새롭고 신기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동안 몰라도 좋을 무익한 정보와 스쳐 가는 찰나의 인연들이 사막의 신기루처럼 우리를 가둔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이 개인 정보 관련 강제 약관을 철회했다. 반발했던 이용자가 이긴 것 같지만 기업이 진 것은 아니다. 그들이 만들어갈 가상현실행 고속버스에서 내리지 못하게 했을 뿐.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가상 세계라는 이름의 모래 무덤 속으로 쉼 없이 달려가고 있다.

 

[174] 만 5세 입학안의 책임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밑에서’

 

- 국가로부터 위임받은 교사의 의무이자 본분은 아이들의 거친 본성을 뿌리 뽑고 욕망을 제어한 뒤 그 자리에 국가가 원하는 차분하고 절제된 이상을 심어 주는 것이다. 교사는 우선 소년의 내면에 들어 있는 거칠고 무질서하고 야만적인 요소들을 부숴 버려야 한다. 그런 다음 그것이 위험한 불꽃으로 타오르지 않도록 불씨까지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 -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밑에서’ 중에서

 

만 5세 입학안 논란을 장관 교체로 잠재울 모양이다. 새 정부가 출범한 지 석 달, 새로운 교육부 장관이 취임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내놓은 정책이다. 선거 공약 사안이 아니었다. 사회부총리를 겸하는 자리라고는 해도 아동 교육과 무관하게 살아온 장관의 소신으로 보기도 어렵다. 다만 과거 여러 정권에서 학제 개편안을 내놓았다가 철회한 적 있다.

 

어린 시절의 경험과 기억은 평생을 좌우한다. 아이의 일 년은 어른의 일 년과 다르다. 공교육의 제도권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사회생활에 적합한 구성원을 길러내도록 훈련받은 사람들 손에 아이를 맡기는 일이다. 그런데 학교 교육을 믿지 못해 초등학생부터 학원이 필수인 시대가 아닌가.

 

한스는 가족과 이웃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뛰어난 성적으로 입학한다. 그러나 엄격한 규율과 학업 성취만 중시하는 교육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다. 교우 관계도 원만하지 못한 데다 유일하게 마음을 준 친구가 교칙 위반으로 퇴학당하자 더는 버티지 못한다. 학교를 그만둔 한스를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실패자로 낙인찍히고 스스로도 자존감을 회복할 수 없던 그는 너무 빨리 인생의 마침표를 찍고 만다.

 

선생님 말을 잘 듣는 꼬마들이다. 입시와 취업을 위해 마련된 틀 안에, 특정 이념에 빠진 교사들이 목청을 높이는 교육 현장 속으로 그들을 더 일찍 밀어 넣어도 될까, 신중하게 검토할 일이다. 그런데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을 떠나 먼저 결정하고 섣불리 발표하고 뒤늦게 의견을 수렴한 뒤 번복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정치를 위한 정책일 뿐, 백년대계를 고민하지 않았다고 정부 스스로 증명한 셈이다.

 

[175] 인기와 바꾼 서울 침수

 

 파리 지하의 하수도 전체에 대한 조사는 1805년부터 1812년까지 7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리저리 구부러지고 금이 가고, 포석이 떨어지고 깨지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사람을 소름 끼치게 하는 상태가 파리의 옛 하수도였다. 현재 하수도는 깨끗하고 시원하고 똑바르게 정리되었다. 과거 하수도와 오늘날의 하수도 사이에 혁명이 존재한다. 그 혁명을 일으킨 건 세상이 잊어버린 사람, 바로 브륀조다. - 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 중에서

 

100년 만의 폭우였다고 한다. 하늘에서 쏟아진 폭탄처럼, 눈물겨운 삶의 터전들을 파괴했다. 소중한 목숨도 앗아갔다. 자연은 매정하고 광폭한 힘이다. 일부 단체가 환경 보호를 이유로 개발을 반대하지만 오만한 외침이다. 거친 자연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싸워온 것이 인간의 문명이다.

 

장발장은 양녀 코제트가 사랑하는 마리우스를 구하려고 1832년 프랑스 파리, 6월 봉기의 한복판으로 들어간다. 그는 총을 맞고 사경을 헤매던 마리우스를 둘러업고 하수도로 피신한다. 작가는 파리 밑의 또 다른 파리를 건설한 하수도의 혁명가, 브륀조야말로 프랑스의 위대한 영웅이라고 칭송한다.

 

파리의 하수도는 한때 쓰레기와 오물, 시체와 벌레와 쥐가 우글대며 악취와 침수, 역병을 내뿜는 지옥의 아가리였다. 보이지 않는 곳을 개혁한 것은 한 개인의 용기와 지혜, 당장은 눈에 띄는 업적이 아니지만 그 필요성을 이해하고 후원한 통치자의 안목이었다. 물론 세계적 시설을 가졌다고 천재지변 때 안전한 건 아니다. 그러나 치산치수는 통치의 기본이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상습 침수 지역에 건설하려던 빗물 터널과 지하 저수조 계획을 대부분 무산시켰다. 그 결정이 이번 비 피해의 희비와 생사를 갈랐다. 대신 그는 3선 당선의 기반이던 시민 단체에 1조원을 쏟아부었다. 얼마나 큰 돈인지 실감이 나는가. 이번 물난리를 겪은 정부와 서울시가 향후 10년 동안 빗물 배수 시설에 들일 예산액이 1조5000억원이다.

 

전 서울시장을 미화한 것 아니냐, 의심을 사는 드라마가 요즘 인기라고 한다. 세상은 보이는 것에 열광하고 재해는 보이지 않는 데서 찾아온다.

 

[176] 양심이 없는 지성의 전당

 

젊은이들은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아 배움은 사양길에 들었다. 그뿐인가? 세상이 거꾸로 걷는다.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여 시궁창에 처넣고, 새들은 날지 못하는 주제에 둥지를 떠난다. 다행히도 나는 그 시절에 윌리엄 수도사 같은 분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배움에의 욕구를 채우고 사물을 바로 보는 감각을 익혔으니, 내가 험로를 헤맬 때도 스승의 교훈이 나를 인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중에서

 

서울대 감사 결과, 교직원 666명의 크고 작은 비리가 적발되었다. 근무지 이탈은 기본, 연구비, 자문비 등을 부당하게 청구했고 허위 거래 내역서를 남발하여 사익을 취했다. 성범죄나 음주 운전 같은 임용 결격 사유를 숨긴 경우도 있다. 4건만 징계, 나머지는 경고, 주의로 끝났다. 그런데도 교수협의회는 지나친 통제라며 반발했다. 올해 국민 세금으로 나가는 서울대 정부 지원금은 5379억원이다.

 

젊은 수사 아드소가 스승 윌리엄과 머물게 된 수도원에서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사람들은 악마의 짓이라며 공포에 빼져들고 권력을 저울질하는 종교재판관은 고문과 협박으로 얻어낸 거짓 자백으로 수사를 종결하려 한다. 하지만 스승은 타협하지 않고 사건의 진실을 밝힌다. 모든 게 인간의 욕망 때문이었다. 육욕과 권력욕, 그리고 자기 뜻대로 세상을 움직이려는 독점욕이 살인의 가장 큰 동기였다.

 

언제부턴가 양심의 부재가 성공 조건이 되었다. 범법 사실이 드러나도, 권력과 명망이 있다면 기억나지 않는다고 내빼거나 말로만 사과하면 끝난다. 수사도 받지 않고 증거는 인멸된다. ‘너만 그런 것도 아닌데 재수 없었네’ 하듯 사회 지도층에 포진한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는 서로 위로하고 밀어주고 가려주고 끌어준다. 좋은 학벌이란 어떤 죄라도 덮어줄 든든한 뒷배가 생긴다는 뜻인가.

 

아드소는 스승의 가르침을 등불 삼아 평생을 살았고 노년엔 그가 선물한 안경을 쓰고 회고록을 적었다. 제자가 스승에게 배우는 것은 지식이 아니다. 가르치지 않아도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평생을 걸어온 발자취, 그 사람의 인생 전부다.

 

[177] ‘심심한 사과’

 

 평범한 단어들도 헨리의 머릿속에서는 혼돈을 일으켰다. 사람들이 어떤 단어를 말하면 헨리는 그것을 소리 나는 대로 이해하곤 했다. 그래서 그 단어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가 오랫동안 마음에 걸렸다. 한번은 무일푼 건달에게 시집간 딸 때문에 ‘가슴이 찢어졌다’는 어떤 불쌍한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헨리는 여러 날 동안 가슴이 진짜로 찢어진 불쌍한 여자에게 쫓기는 악몽을 밤마다 꾸었다. - 로자문드 필처 ‘9월’ 중에서

 

마음 깊이 미안하게 생각하여 정중하게 양해를 구한 업체에 더 큰 비난이 쏟아졌다. ‘심심한 사과를 드린’ 탓이다. 뜻밖에도 많은 사람이 심심(甚深)을 지루함으로 잘못 이해했다. 한자 교육의 부재가 문제다, 문해력이 낮다, 무식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며 사회 일각의 한숨이 깊다. 반면, 말이란 시대에 따라 변한다, 어려운 말은 불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작지 않다.

 

오래전 출판된 책들을 꺼내 보면 먼지와 함께 낯선 한자어가 잔뜩 쏟아져 나온다. 앙연(怏然), 설시(說示), 지실(知悉), 작량(酌量), 예모(豫謀)는 어느 외국 작가의 단편소설을 읽다가 뜻을 몰라 사전을 찾아본 낱말들이다. 왜 이렇게 어려운 말로 옮겼을까 싶지만, 1920년대 출생한 번역자의 세대에서는 당연하게 통용되던 말이었을 것이다.

 

소설 속 여덟 살 꼬마 헨리는 동음이의어나 처음 보는 단어, 문장의 속뜻을 이해하지 못해 종종 어려움을 겪는다. 그때마다 부모와 주변 어른들은 이건 이 뜻이고 저건 저 뜻이라고 찬찬히 가르쳐준다. 아이는 그렇게 무지의 단계에서 자연스럽게 배움을 경험하고 지적 능력을 확장시키며 성장해간다.

 

진화는 단순에서 복합으로 가는 일방통행로가 아니다. 언어의 발달은 인간의 지능을 폭발시켰지만 그 결과 탄생한 첨단 기기는 복잡한 말을 거부한다. 리모컨과 이모티콘, 단순 명령어와 간단히 줄인 말이면 충분하다.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의 유대는 단절되고 진화의 모래시계도 방향을 바꾸는 시대, 쉽고 단순한 것이 대세다. 좋든 싫든 언어도 예외는 아니다. 머잖아 다시 원시적 감정 표현만 남겨질지 모른다. “우가우가 우가차카!”

 

[178] 도둑의 궤변

 

 정실 자식인 에드거 형. 너의 영지는 미안하지만 내가 차지해야겠다. 아버지의 애정은 적자인 너와 첩의 자식인 이 에드먼드에게 차별이 없어야 하니까. 적자라, 참 좋은 말이군. 흥! 하지만 적자여. 이 편지가 효력을 발휘하여 내 계략이 성공하는 날엔 첩의 자식인 내가 적자인 너를 앞지를 거다. 쭉쭉 뻗어나갈 테다. 출세도 할 거다. 자, 신이여. 불운한 첩의 자식 편을 들어주소서! - 셰익스피어 ‘리어왕’ 중에서

 

도둑의 대명사 조세형은 84세에 또 2년형을 선고받았다. 부잣집만 털고 훔친 돈 일부는 가난한 이웃을 위해 쓴다며 의적 흉내를 냈지만, 그는 평생 20회 가까이 범행을 저지른 상습 절도범이다. 15년 이상 수감 생활을 하고서도 도둑질이 인류애의 한 방편이라고 믿는 듯, 이번에도 형편이 어려운 도둑 후배를 돕기 위해 훔쳤노라, 궤변을 늘어놓았다.

 

두 딸의 거짓말에 속아 왕국을 빼앗기고 황야로 내쫓겨 비참한 죽음을 맞은 리어왕 이야기에는 아버지를 속인 아들도 나온다. 에드먼드는 형을 모함하여 추방하고 아버지는 반역자로 고발한다. 서자라고 멸시한 세상과 아들을 차별한 아버지에 대한 복수라며 그는 당당하게 악행을 저지른다. 역적으로 몰려 두 눈이 뽑힌 아버지는 진실을 알고 심장이 터져 죽는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지만 죄에 대한 변명도 가지각색이다. 술을 사지 못해 화가 난 중학생은 ‘나는 촉법 소년’이라며 편의점 주인을 폭행했다. 섹시하다고 여중생을 희롱한 남자 교사는 수업을 잘하는 선생이라며 교장이 역성들었다. 각종 비리로 불구속 기소된 조국 서울대 로스쿨 교수는 학교 폭력 피해자였던 아들을 위해 대리 시험이 필요했다며 위법을 정당화했다.

 

범죄는 자기 연민에 능하다. 동정을 사고 인권을 외치며 관용을 요구한다. 포용하지 않으면 속 좁은 사람, 옹졸한 법이라고 매도한다. 갱생 기회는 필요하다. 그러나 핑계와 변명에 너그러워지면 범죄를 장려하는 결과를 낳아 세상은 어지러워진다. 악인이 빼앗는 것은 돈만이 아니다. 그들이 진짜로 훔쳐 가는 것은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회와 삶이다.

 

[179] 왕이 없는 왕좌의 게임

 

 철왕좌를 본 적이 있나? 등을 따라 가시가 돋아 있고, 비틀린 강철 리본에, 들쭉날쭉한 장검과 단검 끝이 뒤엉켜 녹아 있는 그 의자를? 그건 편안한 의자가 아니라네. 아에리스는 어찌나 자주 베이는지 사람들이 피딱지 왕이라고 부를 정도였고, 잔혹 왕 마에고르는 그 의자에서 살해당했지. 그건 사람이 편하게 쉴 수 있는 의자가 아니야. 왜 내 형제들이 그 의자를 그토록 간절히 원했을까 의아할 때도 많지. - 조지 R.R. 마틴 ‘얼음과 불의 노래’ 중에서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서거했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왕이었지만 그는 지난 70년간 캐나다와 호주, 뉴질랜드를 포함한 넓은 영연방 왕국의 군주였다. 왕실 존폐 논란과 왕가의 다양한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세간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왕이기도 했다. 그의 사후 왕관은 장남인 찰스 3세에게 승계되었다.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원작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는 왕권을 둘러싼 인간의 욕망을 그린다. 사람은 갖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해,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싸운다. 원하는 것을 쉽게 얻고, 가진 것을 굳건히 지킬 수 있는 힘이 권력이다. 그 힘이 클수록 승계 다툼에 따르는 음모와 배신, 왕위 쟁탈을 향한 합종연횡, 권력 찬탈에서 일어나는 피바람은 한시도 멈추지 않는다.

 

평등과 민주가 가장 강력한 이념이 된 지금, 권력을 행사하는 왕은 대부분 사라졌다. 기업의 승계, 일반인의 재산 상속조차 어려운 세상이다. 선거로 4년, 5년마다 정치권력의 중심이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매일 쏟아지는 정치 뉴스는 내 죄가 크냐, 네 죄가 크냐, 말싸움만으로 시끄럽다. 옳고 그름, 죄와 벌은 애초에 논쟁 대상이 아니다. 소란이 지나고 보면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앞에서 뒤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빙글빙글 돌려 앉았을 뿐, 자리를 잃은 사람은 거의 없다.

 

현대의 권력은 단 하나의 철왕좌를 고집하지 않는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노조와 시민 단체, 민주화 유공자 등 다양한 이름의 왕들이 저마다 군림하고 통치하고 세습한다. 시민이 받들어야 할 왕의 수만 늘고 있다.

 

[180] 2차 범죄를 부르는 법의 관대함

 

“전기 충격을 몇 번 더 주면 토끼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굶어 죽습니다. 이것을 혐오 훈련이라고 합니다.” 금연 치료는 아주 간단했다. 한 번 담배를 피우면 아내가 그 ‘토끼의 방’에 들어간다. 두 번 피우면 모리슨 자신이 그 방에 들어간다. 세 번 피우면 둘이 함께 그 방에 들어간다. 네 번까지 피운다면, 그것은 상호 협조 관계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간주하여, 좀 더 단호한 방법이 취해진다. - 스티븐 킹 ‘금연주식회사’ 중에서

 

신당역 역무원 살해범은 몇 년간 피해자를 괴롭혀온 스토커였다. 그러나 ‘주거가 일정하고 증거인멸 및 도주 우려가 없다’며 법원은 구속에 반대했다. 피해자에게 보복할 우려는 하지 않았다. 9년 징역을 구형받고도 스토커는 자유롭게 활보했고 자유롭게 협박했고 자유롭게 살인했다. 피해자가 죽고서야 법원은 ‘증거인멸과 도망 우려가 있다’며 구속을 허락했다.

 

모리슨은 담배를 확실히 끊게 해준다는 회사를 찾아간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결국 담배라면 진저리를 치게 된다. 금연 회사는 모리슨을 감시한다. 흡연하다 발각되면 그는 물론 가족까지 전기 고문한다. 그래도 끊지 못하면 목숨을 빼앗는다. 흡연이 불러올 끔찍한 결과에 대한 공포가 금연 치료법인 걸 알고 경악하지만 계약서에 서명한 이상 되돌릴 수 없다.

 

소설 속 이야기지만 자발적 금연에도 외부의 무서운 제재가 필요했다. 하물며 범죄일까. 엄한 처벌은 죄를 혐오하게 만든다. 범행 직후 구속이라는 제재조차 경험하지 않는다면 2차 가해가 쉬워진다. 고발에 대한 앙심은 범죄의 또 다른 동기다. 보복이 두려운 피해자는 신고조차 할 수 없다.

 

엘리베이터에서 여중생을 칼로 위협하고 옥상으로 끌고 가려던 피의자에 대한 구속영장도 기각됐다. 같은 아파트 주민인 피해자의 안전은 고려했을까. 자유와 인권은 타인의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는 사람이 누려야 할 권리다. 너무 관대한 법은 ‘범죄라도 하고 싶은 거 다 해’ 하고 부추긴다.

 

법의 고민도 깊을 것이다. 그러나 처벌을 방해하고 죄를 방조하면 공무 집행 방해나 직무 유기, 죄를 묵인하고 범인을 보호하면 공범이라 한다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