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 2022-02] 조선일보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05.07 ‘낮엔 진찰,밤엔 노래’테너 이인선의 이중생활
세브란스의전 나와 한국인 첫 밀라노 성악유학...해방후 첫 오페라 ‘椿姬’올린 선구자

▲테너 이인선은 한국인 성악가 최초로 밀라노 유학을 감행한 선구자였다.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의사이기도 한 이인선은 1948년 1월 우리 손으로 만든 첫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올려 한국 오페라의 선구자가 됐다. 이인선은 알프레도로 출연했고, 상대역 비올레타는 김자경이 불렀다.
‘(1935년)1월16일밤은 마스카니의 신가극 ‘네로네’(Nerone)를 라 스칼라에서 초연하는 날이었습니다. 오후9시에 시작됐는데 7시반에 벌써 6층으로 된 광대한 스칼라의 관람석은 가득 찼습니다. 광활한 스테이지, 대규모의 오케스트라, 웅대하고 화려한 스칼라를 처음으로 대할 때에 소리없이 감격하고 취했을 뿐이었습니다.’(‘음악의 본향인 밀라노를 찾아서:마스카니 음악’4, 조선일보 1935년6월9일)
90년 전 밀라노 유학생이 생생한 소식을 보내왔다. 1934년 오페라 유학을 떠난 테너 이인선이었다. 이인선은 ‘카발레리라 루스티카나’를 쓴 마스카니가 직접 지휘하는 신작 ‘네로네’초연(初演)을 라 스칼라(LA SCALA) 극장 6층 꼭대기 자리에서 봤다. 그 자리도 우리 돈 15원(50리라)을 내야했다. 설렁탕 150그릇(한 그릇 10전)값이었다.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마스카니 지휘의 오케스트라는 과연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100여명의 코러스의 웅장한 것도 잊지 못할 기억입니다. 최종막이 내려오자 주연 마스카니가 광적으로 박수를 받고 산회하였습니다.’
라 스칼라의 ‘카르멘’, 푸치니 극장의 ‘라 지오콘다’같은 오페라는 물론 독일의 전설적 피아니스트 빌헬름 박하우스(1884~1969)의 베토벤 리사이틀 소식도 전했다. 이인선의 ‘밀라노 리포트’는 네 차례 연속 게재됐다.

▲1948년 1월16일~20일 명동 시공관에서 국내 첫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가 공연됐다. 이인선(가운데 왼쪽)은 알프레도를, 김자경(오른쪽)은 비올레타를 불렀다. 한국 오페라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 무대였다.

▲1948년 1월 명동 시공관에서 열린 '춘희' 프로그램 표지.
◇스키파 스승 피콜리 사사
이인선(1906~1960)은 밀라노에 유학한 첫 한국 성악가였다. 평양 출신으로 연희전문 문과를 다니다 세브란스의전을 나온 그는 재학시절부터 선교사에게 피아노와 성악을 배워 음악회에 자주 출연했다. 의전 졸업 후 황해도 황주에 병원을 개업했지만 음악에 대한 꿈은 버릴 수 없었다. 당시 유망한 성악가였던 그는 오케레코드 이철 사장 주선으로 1934년 6월 이탈리아 유학에 도전했다. 테너 티토 스키파(Tito Schipa·1889~1965)가 활약한 라 스칼라 극장이 있는 밀라노에서 공부하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스키파는 1920~30년대 시카고 시립오페라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주역 가수로 노래하며 인기를 누렸다. 세련되고 우아한 목소리는 유성기 음반과 잘 어울려 당시 경성에서도 꽤 알려진 스타였다. 이인선은 스키파를 가르친 에밀리오 피콜리(Emilio Piccoli)와 테너 알프레도 체키(Alfredo Cecchi)를 사사했다.

▲이인선이 보내온 '음악의 고향인 밀라노를 찾아서' 기사. 조선일보 1935년6월9일자에 실렸다.
◇물가 비싼 밀라노의 가난한 유학생
유학 생활은 빠듯했다. 환율 차이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방만 얻고 음식은 밖에 나와서 따로 하기로 했는데 1달에 약 500리라의 식비가 들게 되었다’고 했다. 500리라면 조선 돈 150원이었다. 웬만한 샐러리맨 두 달치 월급이었다. 그는 ‘비아 칼비’ 5번지 아파트의 방 하나를 얻었다고 썼다. 스칼라 극장에서 2킬로 쯤 떨어진 곳으로 걸어서 25분 거리였다.
고국에선 어엿한 의사였지만 유학 생활은 고달팠다. ‘이곳서는 춤추는 것, 악보 사는 것, 배우는 것밖에 아무 재미를 모릅니다. 또 이것이 내 목적이니까 만족입니다만, 고향 생각이 나고 모든 것이 그리울 때는 눈물까지 나는 때가 있습니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성악을 배우는 틈틈이 밀라노 왕립의학원에서 1년간 의학도 공부했다.

▲이인선 귀국독창회를 소개한 조선일보 1937년5월17일자 신문. 이태리 본고장의 노래를 스키파의 창법으로 들을 수 있다고 썼다.
◇'동양의 스키파’로 명성
유학 3년 만인 1937년 4월 이인선은 금의환향했다. 조선일보 주최로 경성 부민관에서 귀국 독창회가 열렸다. 독창회는 대성공이었다. ‘이땅에서는 처음 듣는 듯한 놀라운 성량과 세련된 선율에 도취경에 빠진 이천 청중은 자리를 떠날 줄 모르며 박수갈채로 열광적 감탄을 마지 아니하였고…’(‘세련된 선율에 2000청중 황홀’,조선일보 1937년5월22일) 도쿄 히비야 공회당, 베이징, 칭다오에서도 독창회를 열면서 ‘동양의 스키파’로 알려졌다.
◇병원 개업과 성악가 병행
하지만 직업 성악가로 살아가긴 어려웠던 모양이다. 이인선은 귀국한 그해 말 충정로에 병원을 냈다. 병원을 취재한 기자가 이렇게 썼다. ‘진찰실 옆에 꽃무늬 놓은 포장을 쳐놨기에 살그머니 쳐들고 보니 커다란 피아노 한대가 엎드려 있고 그 위엔 악보가 펼쳐있다.’ 기자는 ‘낮이면 의사, 밤이면 가인, 그러나 그는 조금도 이 두개의 일에 피곤하지도 않고 어색하지도 않다’고 썼다.(’낮에는 의사, 밤에는 가수, 新版 ‘지킬박사와 하이드’, 조선일보 1938년4월15일)
◇해방 후 첫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알프레도 맡아
이인선의 활약은 해방 후 두드러졌다. 1946년 동생(테너 이유선)·제자들과 조선오페라협회(국제오페라사 전신)를 조직했다. 이듬해 벨칸토회(현 한국성악회)를 창립했다. 한국 오페라 개척자로서의 최대 업적은 우리 손으로 만든 첫 전막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올린 것이다. 1948년 1월16일~20일 서울 명동 시공관(市公館)에서 10회 연속으로 공연했다. 그는 알프레도로 나섰고 제자 김자경이 비올레타를 노래했다. 임원식 지휘, 서항석 연출이었다. 객석이 가득찰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음악평론가 한상우는 ‘이 땅에 오페라 시대의 문을 열어놓은 역사적 사건’이라고 썼다. 4월에 앙코르 공연까지 올렸다.
1950년 1월27일~2월2일 시공관에서 ‘카르멘’을 올렸다.(이유선의 ‘한국양악100년사’는 ‘카르멘’ 공연을 1949년 또는 1950년4월로 썼고, 한상우는 1951년1월로 썼으나 이는 잘못이다. 1950년1월22일자 연합신문 참조). 이인선은 총감독 및 주역 돈 호세(더블캐스팅 송진혁)를 맡았고, 메조 소프라노 김혜란이 카르멘을 불렀다. 6·25 전쟁 직전 너무나 짧았던 오페라 붐이었다.
◇'오페라의 아버지’ 느닷없는 이별
이인선은 1950년 4월 미국 내슈빌종합병원으로 연구차 가는 도중 도쿄와 하와이에서 독창회를 가졌다. 1951년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 오디션에 합격했지만 회비 1000달러 낼 돈이 없어 출연을 미뤘다.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하며 병원 개업 준비에 바빴던 그는 1960년 간암으로 미국에서 타계했다. 미국에서 병원으로 돈을 번 뒤 오페라 운동을 재개하겠다던 이인선의 꿈은 멈췄다.
이인선의 뒤는 아들 이여진(80)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이었다. 서울대음대 재학 도중 유학길에 올라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양대와 이화여대에서 작곡을 가르치다 정년퇴임했다.
◇참고자료
이유선, 한국양악백년사,음악춘추사, 1985
한상우, ‘한국 오페라 역사의 문을 연 테너 이인선’, ‘기억하고 싶은 선구자들’, 지식산업사, 2003
05.14 양정고보생 윤석중·동학 최시형 외손자 정순철, 국민동요 ‘짝짜꿍’만들다
해방 후 ‘졸업식 노래’도 합작


▲스물 여덟살 무렵의 윤석중. 작가라기보다는 깔끔한 '모던 보이'처럼 차려입었다. 윤석중은 10대 떄부터 천재소년예술가로 소문날 만큼, 뛰어난 동요작사가였다. 1939년 일본 유학 직전이다. 당시 조선일보에서 발행한 잡지 '소년'과 '소년조선일보'편집을 맡고 있었다.
열여덟 살 양정고보생 윤석중이 쓴 시가 1929년 신문에 실렸다. ‘들로 나아가 뚜루루/언니 일터로 뚜루루/언니 언니 왜 울우/일하다 말고 왜 울우’ 들에 일하러 나간 언니가 무슨 까닭인지 눈물 흘리는 장면을 묘사한 동요 ‘우리애기 행진곡’ 2연이다. 식민지의 힘겨운 일상을 우회적으로 담았다.
이 노래 첫째 연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안다. 엄마 품에 안겨 말을 배우면서부터 들은 노래이기 때문이다. ‘엄마 앞에서 짝짜꿍/아빠 앞에서 짝짜꿍’으로 시작하는 동요 ‘짝짜꿍’이다. 당시 제목은 ‘우리 애기 행진곡’이었다.

▲정순철은 천도교 2대 교주 최시형의 외손자였다. 1922년 일본 동경음악학교에 유학하면서 방정환과 색동회를 만들었고, 동요운동에 뛰어들었다. 1929년 윤석중 작시에 곡을 붙인 '우리 애기 행진곡'(짝짜꿍)은 경성방송국 라디오 전파를 타면서 유행곡으로 떠올랐다./미디어 창비
◇경성방송국서 계속 틀어 대인기
윤석중 노랫말에 곡을 붙인 이는 당시 동덕여학교 음악 선생이던 정순철이다. 윤석중의 회고다. ‘1929년에 동덕여학교 음악 선생이셨던 정순철 님이 1926년에 윤극영 동요곡집 ‘반달’이 나오자 나도 내겠다고, 그동안 작곡한 것을 모아 보았으나 아홉 편밖에 안 되었다.열 곡 채우려고 나에게 한 편 부탁해 지어드린 것이 ‘우리 애기 행진곡’이었다.’ ‘우리 애기 행진곡’은 정순철인 1929년 출간한 첫 동요집 ‘갈닙피리’에 실린 동요 10곡 중 맨 마지막 순서로 실렸다.
‘우리애기 행진곡’은 발표하자마자 히트를 쳤다. 1927년 개국한 경성방송국 라디오 방송이 이 노래를 내보내자 전국에서 작곡자가 누구냐는 문의 전화와 재방송 요청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유치원과 소학교 학예회·소풍에서 인기 레퍼토리로 떠올랐다.

▲조선일보 1929년 6월8일자에 실린 윤석중 작 '우리 애기 행진곡'. 정순철이 곡을 붙여 같은 해 12월 출간된 동요집 '갈닙노래'에 수록했다.
◇'천재소년예술가 윤석중’
윤석중(1911~2003)은 10대 중반부터 천재소년예술가로 유명했다. 1926년 물산장려운동을 기념하는 노래 현상공모에 당선됐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기사 제목은 ’명예의 우승자/尹군은 천재 소년’(조선일보 1925년9월12일)이었다. ‘물산 장려에 대한 인상을 조선 사람 일반의 머리에 깊이 뿌리박게하야 한시라도 각기 그 가슴속에 잊지 않게 하고자 물산 장려의 노래를 현상으로 모집까지 한 결과 시내 관철동 ‘기쁨’사 윤석중 군의 작가가 당선을 보게 되었다.’
물산장려운동은 3·1운동 이후 조선인이 일제의 경제 침탈에 맞서 우리가 만든 상품을 애용하자는 범민족 운동이다. 이 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한 현상 공모에 열다섯 살 까까머리 학생이 뽑힌 것이다.
윤석중은 열 세살이던 1924년 잡지 ‘신소년’에 동요 ‘봄’이 입선했고, 이듬해 아동극 ‘올빼미의 눈’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작가였다. 같은 해 동요 ‘오뚜기’가 잡지 ‘어린이’에 실리기도 했다. ‘짝짜꿍’은 윤석중의 초기 대표작이었다.

▲파인 김동환이 노랫말을 쓰고 정순철이 곡을 붙인 '자장가'. 조선일보 1928년 1월19일자에 실렸다.
◇낙원동 설렁탕집에서 탄생한 ‘졸업식노래’
윤석중은 평생 동시 1300편을 썼고, 이중 800편이 동요로 만들어졌다. 그의 노랫말로 동요를 만든 이는 홍난파, 윤극영, 박태준, 정순철 등 정순철은 당시 4대 동요작곡가이자 대표적 음악가였다. 정순철과는 해방 직후인 1946년 문교부가 초등학교 졸업가로 만든 ‘졸업식 노래’도 합작했다. 윤석중은 문교부 의뢰를 받고 ‘작곡할 사람을 나에게 맡겼으므로 즉시 정순철을 만났다’고 회고했다. 정순철이 곡을 완성하자 ‘다 된 곡을 들어볼 데가 없어서 낙원동 어느 설렁탕 집으로 들어가 정순철이 가는 소리로 불러 들려주었다’(윤석중 ‘어린이와 한평생’ 203쪽)는 것이다.
정순철(1901~?)은 동경음악학교를 다닌 음악가였다(정순철의 생애는 도종환, ‘어린이를 노래하다’를 참고했다). 외할아버지는 천도교 2대 교주 최시형이고, 어머니 최윤도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한 경주 월성군 용담성지에서 수도하며 포교한 천도교 간부였다. 1919년 보성고보를 나와 손병희 사위인 소파 방정환과 천도교 소년회 활동을 함께 했다.
정순철은 1922년 동경 음악학교 선과(選科)로 유학 가 이듬해 방정환과 함께 ‘색동회’를 만들었다. 색동회는 창립 직후 잡지 ‘어린이’를 만들고 어린이 계몽운동을 펼쳤다. 정순철은 동경에서 같이 자취하며 음악을 공부하던 윤극영을 소파에게 소개하면서 동요 작곡을 권했다. 윤극영과 정순철은 ‘어린이’를 터전 삼아 창작 동요를 만들어 발표하고 보급하는 데 힘쓰게 된다.
정순철은 조선일보 1928년 1월19일자에 ‘자장가’를 발표했고, 1932년 동요집 ‘참새의 노래’를 펴냈다. 정순철은 1927년 동덕여학교에 몸담은 이래,경성 보육학교, 중앙보육학교, 무학공립여중, 성신여중에서 음악교사로 활약했다.

▲두 번째 일본 유학 시절의 정순철. 1922년에 이어 1939년 다시 일본 유학을 감행했다. 성신여중 교사로 재직하다 6.25를 맞아 9.28 수복 당시 납북됐다. /미디어창비
◇내 나라 사랑 북돋은 동요
1924년 ‘어린이’에 발표된 윤극영의 ‘반달’은 누이의 죽음을 계기로 쓴 작품이다. 하지만 ‘누이의 죽음과 대낮의 반달과 나라 잃은 슬픔’이 어우러지면서 민족적 색채를 띤 동요가 됐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으로 시작하는 ‘반달’은 ‘돛대도 아니달고 삿대도 없이’ ‘샛별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로 마무리하며 희망을 노래했다.
동요는 ‘어린이들의 메마른 정서에 물을 주고 그들의 생각과 생활을 보다 맑고, 밝고 곱게 이끌어나가는’ 역할이 주목적이었다. 하지만 ‘일제때 소년운동의 가장 큰 수확은 동요로 전해진 내 나라 사랑이었으니 향토색 무르익은 말과 곡에서 모든 어린이들이 제 나라에 정을 붙이게 된 것’이란 평가도 나왔다.
◇6.25가 할퀸 동요작가 콤비
6·25는 윤석중·정순철 콤비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윤석중의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인민군이 퇴각한 뒤 좌익으로 몰려 처형당했다. 1955년 복간된 소년조선일보 고문을 맡아 15년간 일했고, ‘새싹회’를 조직해 어린이 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1300편이 넘는 동시를 썼고, 그중 800편 넘게 동요로 불리면서 ‘한국 동요의 아버지’가 됐다.
정순철은 6·25 당시 성신여중 교사로 학교를 지키다 9·28 수복 이후 인민군이 후퇴할 때 납북됐다. 언제 죽었는지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자연히 대중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최근 평전이 발간되면서 조금씩 재조명 받고 있다. 그가 납북되지 않았으면 ‘짝짜꿍’이나 ‘졸업식 노래’같은 명곡이 더 나왔을 것이고, 우리 동요의 밭도 훨씬 더 풍성해졌을 것이다.
◇참고자료
윤석중, ‘어린이와 한평생’, 범양사, 1985
윤석중, ‘노래가 없고 보면’, 웅진, 1989
이상금, ‘사랑의 선물: 소파 방정환의 생애’, 한림, 2005
도종환, ‘어린이를 노래하다: 한국동요의 선구자 정순철 평전’, 미디어창비, 202
05.21 논밭 팔아 테너 카루소 공연 본 음악狂 김영랑
日 성악 유학 꿈꾼 …판소리·거문고·북 연주실력도 수준급

▲강진의 영랑 사랑채 방 하나는 레코드로 가득차있었다. 베토벤, 슈베르트, 모차르트 음반과 판소리, 거문고, 가야금 음반이 쌓여있었다고 한다. 영랑은 1923년 귀국 후 해방 때까지 고향 강진에서 유성기로 음악을 들으며 소일했다. /일러스트 이철원
영랑(永郞) 김윤식(1903~1950)이 성악가가 됐으면 ‘모란이 피기까지는’같은 절창(絶唱)을 불렀을까. 1921년 여름 도쿄 아오야마(靑山)학원 중학부에 유학하던 영랑이 방학을 맞아 귀국했다. 아버지께 도쿄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성악가를 딴따라 취급하던 아버지는 결사반대했다.학비를 끊겠다고도 했다. 영랑은 하는 수 없이 성악가의 꿈을 접고 아오야마학원 영문과에 진학했다.
◇우에노 음악당 단골 손님
전남 강진의 지주 집안 맏아들로 태어난 영랑은 어려서 바이올린을 배웠고 음악을 좋아했다. 김학동이 정리한 영랑 연보에 따르면, 일본 유학 시절 자주 우에노 음악당 연주회를 다녔다. ‘1920년 10월 우에노 음악당 주최 슈베르트 바이올린 독주회를 감상하고 돌아오자 하숙집 주인이 영랑이 3·1운동 만세사건에 가담한 사실을 알고 나가라고 하여...’ ‘1921년 4월 새학기가 시작되어 영랑과 용아(박용철)는 학업에 열중하면서 틈틈이 음악회와 영화관에 함께 다니기도 했다.’ ‘1922년 어느 겨울날 밤, 영랑, 용아, 형식 등과 우에노 음악당 주최로 열린 베토벤 연주회 감상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정지용과 채동선을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313~314쪽)
우에노 음악당은 1890년 건립된 옛 도쿄음악학교 주악당(奏樂堂)으로 보인다. 우에노 공원 근처에 지금도 남아있을 뿐 아니라 가끔 콘서트도 열린다. 영랑의 유학은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귀국하면서 중단됐다.

▲김영랑은 클래식과 국악을 사랑한 음악 마니아였다. 베토벤과 슈베르트를 좋아했고,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판소리와 북, 거문고 연주 실력도 수준급이었다.
◇미야 엘만·샬리아핀 공연보러 上京
유학에서 돌아온 영랑은 해방을 맞을 때까지 대부분 고향 강진에서 보냈다. 하지만 경성에서 볼 만한 음악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리면 만사 제쳐놓고 상경했다. 아들 김현철은 ‘경성에서 러시아의 세계적인 베이스 가수 표도르 샬리아핀, 바이올리니스트 미샤 엘만 등의 공연이 있을 때는 물론이고, 도쿄에 세계적인 교향악단이 오거나 20세기 최고의 테너 가수 엔리코 카루소가 왔을 때에도 영랑은 어김없이 논밭을 팔아서까지 배편으로 다녀오곤 했다’(‘아버지 그립고야’44쪽)고 회고했다. 영랑 친구들은 그가 경성에 나타나면 이번엔 무슨 음악회가 열리느냐고 물을 정도였다고 한다.
◇사랑채에 레코드 앨범이 산더미처럼 쌓여
영랑은 평생 음악속에서 살았다. 바이올린, 거문고, 가야금 연주를 즐겼고, 유성기로 음악 듣는 게 낙이었다. 영랑 생가 사랑채의 방엔 레코드 앨범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다시 아들 회고다. ‘영랑은 종종 어린 자식을 네 살 무렵부터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무릎 위에 앉히고 베토벤, 브람스 등 서양 고전음악을 비롯해, 거문고와 가야금 산조, 춘향전, 흥부전, 토끼전, 적벽가, 쑥대머리 등 국악을 함께 감상했다.’
당시 SP판은 한쪽면에 5분도 수록할 수없으니, 앞 뒤 다해도 최대 10분이었다. 1시간 넘는 베토벤 합창 교향곡 하나를 들으려면 7장짜리 음반 세트가 필요한 시대였다. 방 하나를 음반으로 가득 채워도 부족했을 것이다.
◇판소리와 거문고, 북 연주 실력도 전문가 뺨치는 수준
영랑이 부르는 남도 판소리는 당시 명창들도 놀랄 수준이었다고 한다. 당대 명창 임방울, 박초월, 이화중선, 임춘행, 김소희, 박귀희 등이 영랑 초청으로 강진 생가를 찾아 영랑의 북 장단에 맞춰 소리를 했다. 영랑의 북 실력을 믿고 고수를 데려오지 않았을 정도였다.
◇3·1운동으로 옥고치르고 도일
영랑은 강진 보통학교를 거쳐 1917년 휘문의숙에 진학했다. 홍사용, 박종화, 정지용, 이태준이 선후배로 다니고 있었고, 화가 이승만이 동기였다. 3·1운동 때 고향 강진에서 시위를 계획하다 붙잡혀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일본 유학은 1920년 휘문을 졸업하지 못한 채 떠난 것이다.
영랑의 문단 데뷔는 1930년 친구 박용철과 함께 만든 ‘시문학’을 통해서였다. 순수시 운동을 내걸고 정지용 변영로 정인보 이하윤 등이 참여한 동인지였다. 영랑은 ‘시문학’창간호에 ‘오ㅡ매 단풍 들것네’, 2호에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을 잇달아 실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1934년4월 박용철이 주재한 ‘문학’3호에 실렸다.
1935년 11월 첫 시집인 ‘영랑시집’을 냈다. 당시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였던 이원조가 리뷰를 썼다. 일본 호세이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이원조는 날카로운 문학비평으로 이름을 날린 문학평론가이기도 했다. ‘이 시집을 대하면 무슨 고혹적인 황홀감이나 침을 흘릴만한 식욕을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 작자의 보드라운 호흡과 어여쁜 손가락을 상상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영랑시집’, 조선일보 1936년5월14일자)
◇일제 말 절필, 창씨개명 거부
영랑은 첫 시집 출간 후 3년 여 침묵하다 1938년 9월 ‘조광’에 수필 ‘감나무에 단풍드는 전남의 9월’을 실었다. 조선일보에도 수필 ‘두견과 종다리’(1939년5월20일~21일) ‘남방춘신’1~4(1940년 2월23일~24일, 27일~28일)를 썼다. 시는 ‘조광’’여성’에 주로 발표했다. 1939년 ‘조광’ 신년호에 쓴 ‘거문고’ ‘가야금’을 비롯, 그해 12월호에 실은 ‘묘비명’ 등이 대표적이다.
영랑은 1940년 9월 시 ‘춘향’을 발표한 뒤, 1946년12월까지 절필했다. 신사참배도, 창씨개명도 거부했다. 그의 자존심과 의기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에서 친일 문장을 한 줄도 발견하지 못한 시인 중 한 사람이 김영량이라고 했을 정도다. 영랑에겐 불이익은 좀 감수하더라도 그 정도는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을 것이다. 오백석 지기 지주였던 영랑은 마당에서 모란을 가꾸고, 정구장을 만들고, 갯벌과 언덕을 산책하면서 보낼 만한 여유가 있었다.
◇詩仙 이백만큼 사랑한 베토벤, 모차르트
일제 말기, 고향에 칩거한 영랑에게 음악은 탈출구였다. 영랑의 수필 ‘남방춘신’2(南方春信·조선일보 1940년 2월24일)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몇세기에 한 사람 적선(謫仙·선계에서 쫓겨온 선인)이 난다 하더라도 사람에게 큰 자랑이 아닐까.‘뻬—도밴’ ‘모찰트’ ‘슈벨트’ ‘쇼팡’이 났다는 것은 사람의 큰 자랑일 밖에 없다.’ 적선은 보통 당나라 시인 이백을 가리킨다. 영랑은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 쇼팽을 시선(詩仙) 이백에 견줄 만큼, 사랑했다.
◇공보처 출판국장이 처음이자 마지막 직업
영랑은 해방 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강진군 선전부장과 청년단장을 맡았다. 1948년 5·10총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정부 수립 후 가족을 이끌고 고향을 떠나 서울에 올라왔다. 10월 여순 사건 현장 답사단에 참가해 시 ‘새벽의 처형장’을 썼다.
영랑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가진 직업은 1949년 8월 취임한 공보처 출판국장이었다. 그것도 이듬해 4월에 관뒀다. 6·25가 터지자 피난 가지 못한 채 서울에서 은신했다. 9·28 수복 공방전 와중에 날아온 포탄 파편에 복부를 맞아 9월29일 숨졌다.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사랑한 영랑은 모란이 뚝뚝 지듯, 별안간 우리 곁을 떠났다. 영랑은 3.1운동에 참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8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참고자료
김현철, 아버지 그립고야, 동아일보, 2010
이헌구, ‘김영랑평전:멋에 철한 시인’, 자유문학, 1956
김학동, ‘김영랑 전집·평전: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2012, 새문사
조영복, 김영랑과 강진, 어두운 시대의 빛과 꽃, 민음사, 2004
05.28 보성전문교수 김광진, 시인 노천명, 가수왕 왕수복의 삼각스캔들
스캔들 소재 삼은 유진오 소설 ‘이혼’발표에 모윤숙, 최정희 등 여성작가 항의방문

▲보성전문교수이자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였던 김광진은 시인 노천명과 결혼직전까지 간 연애 스캔들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는 본부인이 있었다. 김광진은 해방 이후 스타가수 출신 왕수복과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왼쪽은 노천명, 오른쪽은 왕수복.
‘김광진씨는 금년 삼십세의 독학자(篤學者)다. 키가 보통 키보다 조금 크고 몸이 후리후리한 것이 강하고 얼굴빛이 햇볕에 탄 것 같은 건강색을 띄고 있다.’(‘교수·강사타령’7 보성전문편 상과교수 김광진씨’, 조선일보 1933년5월11일)
정규 대학 교육을 받은 연구자들이 배출되기 시작한 1930년대, 보성전문(고려대전신) 교수들을 소개하는 연재기사가 신문에 났다. 메이지대 법학부 출신 최태영, 경성제대 법학부 출신 유진오 같은 신진 법학자들과 함께 나란히 소개된 이는 경제학자 김광진이었다. 1928년 도쿄상과대(히토쓰바시大) 상학부를 졸업한 김광진(1903~1981)은 같은해 경성제대 법문학부 부수(副手)를 거쳐 이듬해 조수(助手)로 임용된 엘리트였다. 경성제대 법문학부 전체에 조선인 조수가 6명 밖에 없었을 때였다. 정식 관등(官等6)까지 받은데다, 월급(60원)도 초년 신문기자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김광진은 인촌 김성수가 보성전문을 인수한 1932년 보성전문 전임강사로 채용됐다.
◇밤새도록 연구하는 篤學者
신문은 김광진에 대해 ‘조선에서 제일 남자답게 생긴 남자’ ‘호(好)신사’라는 인물평과 함께 ‘밤이 새도록 공부를 계속하는 독학자’로 소개했다. 학생들에게 인기도 높았다고 한다. ‘학생들이 氏를 방문하면 과자를 권하고 차를 권하고 선생이 학담(學談)에 취하면 술을 권하는 친절미’까지 있다고 썼다. ‘후배를 사랑하고 지도하여 주려는 인간미가 흐른다하니 선생의 순정으로 나오는 인간적 지도ㅡ이것은 빼빼 마른 조선에서는 마른 나무에 이슬’이라고 칭찬했다. 김광진은 상업사, 상품학, 보험론 등을 가르치는데, 금융론과 미두(米豆)·취인(取引)이 특기라고 했다.

▲도쿄상과대학을 졸업한 김광진은 1932년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영입됐다. 부지런한 학자였고, 학생들에게도 인기있는 교수로 소개됐다. 조선일보 1933년5월11일자
◇경제학자 겸 신문·잡지 필자로 활약
보전(普專)이 1934년 처음 낸 ‘보전학술논집’은 경성제대에 맞선 ‘사학파’(私學派)의 학술연구로 주목받았다. 김광진은 최태영 오천석과 함께 편집인으로 참여했고, ‘이조 말기에 있어서 조선의 화폐문제’(제1호) ‘고구려사회의 생산양식-국가의 형성과정을 중심으로’(제3호)를 투고해 호평을 받았다. 대중강연과 신문·잡지 기고를 통해서도 얼굴을 알렸다. ‘세계를 진감하는 금융공황의 양상: 그 원인과 발전을 논술함’1~3(1933년4월26일~28일), ‘자본주의 경제의 재건운동, 국제경제회의豫診’1~4(1933년6월9일~11일, 13일) ‘전쟁경제와 비상생활, 예상되는 장래전쟁 그 영향을 중심으로’1~2(1934년1월1일) ‘팽창일본경제의 정체’1~10(1934년10월4일~7일, 9일~14일) ‘블록경제의 동향, 자유무역주의 해체와 국민주의의 강화’상, 하(1935년1월1일~2일) ‘조선역사학연구의 전진을 위하여’(1937년1월3일·이상 조선일보) 등 깊이 있는 분석기사를 기고했다.
김광진은 대중강연에도 자주 나섰다. 평양상공협회 주최, 조선일보 평양지국 후원으로 열린 ‘경제문제대강연회’(1931년3월14일, 16일), 고려청년회 주최 ‘경제문제대강연회’(1933년3월18일), 보성전문학생회 주최, 조선일보 학예부 후원의 ‘初夏학술강연회’(1934년5월12일·종로중앙기독교청년회강당), 동아일보 주최 ‘하계순회강좌’(1935년7월29일~8월2일·원산, 함흥, 청진) 등에 나섰다.

▲1934년5월12일 오후7시 종로중앙기독교청년회강당에서 파시즘을 주제로 열린 강연회에서 '파시즘의 성립'을 주제로 강연한 김광진 보성전문학교 상과 교수. 함상훈, 신남철이 연사로 나섰다. 보성전문학생회가 주최하고 조선일보 학예부가 후원했다. 조선일보 1934년 5월12일자
◇체홉 ‘벚꽃동산’으로 만난 김광진과 노천명
이 근엄한 학자도 ‘연애의 시대’를 피해갈 수없었던 모양이다. 스물 셋 시인 겸 기자 노천명(1911~1956)과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이 만난 과정도 드라마틱하다. 일본 유학파들이 만든 신극단체 극예술연구회(이하 劇硏·극연)가 1934년 12월7일~8일 오후6시30분 경성공회당에서 올린 체호프 연극 ‘앵화원’(櫻花園·벚꽃동산)이 계기가 됐다. 극연 창립 3주년 겸 체호프 서거 30주년 기념공연이었다.
당시는 여배우들이 부족했는데 모윤숙, 노천명 같은 엘리트 신여성이 가세하면서 이 연극은 화제를 모았다. 조선중앙일보 기자였던 노천명은 라네프스카야의 딸 아냐로 무대에 섰다. 김광진이 ‘배우 노천명’을 보고 마음이 끌린 것이다. 서른 한살 김광진은 이미 결혼한 몸이었고, 스물셋 노천명은 미혼이었다. 둘은 사랑에 빠졌고, 결혼 약속까지 오갔다. 하지만 김광진이 본처와 이혼을 하려고 고향에 내려갔다가 결국 이혼을 결행하지 못한 채 유야무야됐다.
한 가지 바로잡을 것은 이어령을 비롯한 몇몇 문인들은 김광진과 노천명이 만난 ‘앵화원’ 공연을 1938년으로 썼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극연의 ‘벚꽃동산’ 공연은 1934년12월에 있었고, 이 단체는 1938년3월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당했다.(이어령, ‘한국작가전기연구 上’ 143쪽, 유민영, ‘한국근대연극사’ 823쪽 참조)
◇유진오 단편 ‘이혼’ 파문
이화여전 출신의 시인 노천명과 보성전문교수 김광진의 연애는 문화계의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스캔들이었다. 여기에 현민 유진오가 기름을 끼얹었다. ‘김강사와 T 교수’로 이미 유명 작가였고, 김광진과 같이 보성전문 교수였던 현민이 1939년 2월 ‘문장’창간호에 두 사람의 연애를 떠올리는 단편 ‘이혼’을 발표한 것이다.
‘윤희와의 관계도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그런 ‘오입’에 조금 털돋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든 것이 방귀가 잦으면 똥을 싼다는 격으로 이번에는 어찌어찌하다가 일이 커지고 만 것이다.’ 둘의 연애를 지저분한 관계로 묘사한 것도 모자라 ‘심각한 미움을 품은 하얀 눈을 재신에게 던졌다. 보기만해도 몸서리치는 무서운 눈이었다’처럼 노천명을 연상시키는 문장이 입길에 올랐다.
그러자 여성 문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모윤숙, 최정희, 이선희 셋이 유진오를 찾아가 항의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유진오는 소설속 주인공과 노천명은 전혀 상관없다고 부인했다. 황금찬 시인이 최정희에게 직접 들었다며 남긴 회고(‘돌아오지 않는 시간의 저편’)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효석 연인 왕수복과 결합
김광진은 1939년 보성전문을 사직하고, 고향인 평양에 돌아가 사업가로 변신했다. 1940년 1월 평안상사 전무, 같은 해10월 조선제정공업주식회사 감사에 취임했다. 못을 만드는 회사였다. 마침 ‘가수왕’ 왕수복(1917~2003)도 평양에 돌아와 있었다. 평양 기생 출신 가수 왕수복은 1935년 월간 ‘삼천리’ 가수 인기투표에서 1위를 차지할 만큼 유명한 스타였다. 왕수복은 1936년 도쿄음악학교에 건너가 성악을 배우면서 이탈리아 유학까지 꿈꿨다. 하지만 행동에 옮기진 못했다.
그러던 왕수복이 고향에 다니러왔다가 ‘메밀꽃 필 무렵’을 쓴 이효석을 만나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숭실전문·대동공전에서 가르치던 이효석은 1940년 아내와 사별하고 막내아들까지 잃으면서 방황하던 때였다. 이효석이 1942년 5월 숨을 거둘 때까지 왕수복은 그의 곁을 지켰다. 그런 왕수복이 열네살 연상인 김광진을 만나 가정을 꾸린 것이다.
◇김일성대학 창립 주역
해방 후 김광진은 김일성대종합대학 창설 주역으로 변신한다. 홍종욱 서울대교수에 따르면, 1945년8월17일 김광진은 조만식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 결성에 참여했다. 같은달 27일 소련군 지시로 건준은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와 합작, 평남 인민정치위원회로 재편됐다. 당시 민족계열과 공산계열이 16명씩 균형을 맞춰 구성했는데, 김광진은 민족계열로 참여해 상공위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김광진은 당시 조선공산당원이었다는 증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세력균형을 깨기 위한 공작에 참여한 것이다.
김광진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가르칠 교원을 유치하기 위해 1946년1월 서울에 내려와 도쿄상과대학 3년 선배인 백남운을 만나 지식인의 월북 공작을 의논했다고 한다. 이어 1947년 1월 김일성종합대학 법학부 부장을 맡았다. 김광진의 임명일은 1946년8월1일로 전 교원중 가장 빠른 것으로 보아 김일성대학설립에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음을 짐작할 수있다.

▲1965년 5월10일 판문점에 김광진 왕수복 부부가 나타났다. 왕수복은 가수 이난영의 동년배라고 소개하고 같은 시기 활동한 전옥 등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김광진도 평양고보 동기생인 홍종인과 보성전문 동료교수였던 유진오와 친구라고 소개했다. 조선일보 1965년5월11일자
◇애국열사릉에 합장된 김광진과 왕수복
이후 과학원 후보원사, 원사로 승진하면서 고대에서 식민지시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와 분야를 다룬 논문을 발표하면서 북한 역사학계의 핵심으로 활약했다. ‘다산 정약용의 사회·경제사상’같은 논문을 쓰면서 정약용 연구에도 가세했다. 정치적으로는 조국평화통일위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고 김일성 훈장까지 받았다. 1981년 세상을 뜨자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왕수복은 결혼 직후 주부로 살다가 가수로 복귀했다.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타쉬켄트 등으로 해외공연을 다니면서 공훈배우가 됐다. 여든이던 1997년에도 민요독창회를 열 정도로 정정했다. 2003년 세상을 뜬 왕수복은 이듬해 애국열사릉에 잠든 남편 김광진과 합장됐다.
◇참고자료
유진오, ‘이혼’, ‘문장’창간호,1939.2
홍종욱, ‘보성전문학교에서 김일성종합대학으로-식민지 지식인 김광진의 생애와 경제사연구’, 역사학보 2016,12
이어령, 한국작가전기연구 上, 동화출판공사, 1975
박봉우, ‘고독과 생활한 여류시인 노천명’, 여원 1959년,8
황금찬, 돌아오지 않는 시간의 저편, 신지성, 2000
유민영, 한국근대연극사, 단국대출판부, 1996
신현규, 평양기생 왕수복, 경덕출판사, 2006
06.04 모던 보이들이 가고 싶어한 ‘동양의 파리’, 하얼빈
이효석, 홍양명, 김관 등 잇따라 찾아, ’파리의 유행이 2주만에 날아오는’첨단 도시

▲이효석과 홍양명이 묵은 하얼빈 중심가 키타이스카야가의 모데른 호텔. 1939년 하얼빈을 여행한 이효석은 3층 객실 창가로 거리를 내려다보며 이국적 정취를 소설 '하얼빈'에 담았다. 지금도 호텔로 영업중이다.
‘호텔이 있는 기타이스카야 가(街)는 하얼빈의 국제도시로서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이 부근은 완전히 슬라브색(色)으로 된 순(純) 외인가(外人街)인 점에서 기왕 온 김에는 이국 정조를 몇날이나마 맛보는 것이 낫겠다는 ‘보헤미안’기질에서….’(조선일보 1936년4월3일 ‘만주기행-과도기의 도시 하얼빈 瞥見’)
조선일보 외보부장 겸 논설위원 홍양명(1906~?)이 1936년 하얼빈 기행문을 썼다. 제정 러시아 시절 유럽풍 도시로 건설한 하얼빈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을 피해 백계(白系) 러시아인들이 모여든 국제도시였다. 파리의 유행이 2주 뒤면 하얼빈에 날아온다는 말이 나돌 만큼,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곳이기도 했다.
홍양명이 묵은 모데른은 백계 러시아인이 경영하는 호텔이었다. 1932년 만주사변 진상 조사를 위해 국제연맹이 파견한 리튼 조사단이 이 호텔에서 3주일 동안 묵었다. 세계에서 기자들이 모여드는 뉴스의 현장이 됐다.

▲옛 유럽식 건물이 줄지어 서있는 하얼빈의 키타이스카야가. 이효석과 홍양명이 묵은 모데른 호텔도 이 거리에 있다./위키미디어
◇평양서 아침 기차 타면 다음날 새벽 하얼빈 도착
평양에서 아침에 특급 히카리 호를 타면 당일 밤 신경(장춘)을 거쳐 다음날 하얼빈에 도착했다. 기차를 타고 중국 대륙으로 여행가던 시절이었다. 소설가 이효석은 1939년 두 차례 만주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하얼빈 배경의 단편소설 ‘하얼빈’ ‘벽공무한’, 그리고 여행수필 ‘대륙의 껍질’ 등을 발표했다. 소설가 최명익이 1939년 발표한 ‘심문’도 하얼빈을 배경으로 한 단편소설이다. 음악평론가 김관은 하얼빈을 여섯번이나 다녀왔다.
하얼빈은 이렇듯 조선의 지식인, 작가,예술가들이 가고 싶어하는 이국적 취향의 여행지였다. 러시아와 일본계 백화점이 들어서고. 미국계 은행이 영업하는 국제도시였다. 50개 이상의 민족집단과 45종의 언어가 혼재하는 이곳은 진정한 다문화도시였다. 1930년대 동아시아에서 상하이와 함께 비아시아인 중심의 유명 오케스트라가 있었던 곳이 하얼빈이었다. 러시아 출신 단원들이 다수인 하얼빈 교향악단이 정기 연주회를 열고, 캬바레와 바가 즐비한 이 도시는 문화와 예술, 향락이 공존했다. 신문·잡지에 하얼빈 기행문이 자주 등장한 이유다.

▲1939년 평양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 시절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이효석. 이효석은 그해 하얼빈을 여행하고, 단편소설 '벽공무한' '하얼빈'을 썼다.
◇하얼빈 무대로 삼아 작품 쓴 이효석
이효석도 기타이스카야 중심가 모데른 호텔에 묵었던 모양이다. 3층 객실 창으로 내다보는 거리 풍경을 즐겼다. ‘나는 이 삼층의 전망을 즐겨 해서 방에 머무르고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창가 의자에서 지내기로 했다. 아침 비스듬히 해가 드는 거리에 사람들의 왕래가 차츰차츰 늘어가려 할 때와 저녁 후 등불 켜진 거리에 막 밤이 시작되려 할 때가 가장 아름다운 때이다. 조각돌을 깔아놓은 두툴두툴한 길 바닥을 지나는 마차와 자동차와 발소리의 뚜벅뚜벅 거치른 속에 신선한 기운이 넘쳐 들리고 여자들의 화장한 용모가 선명하게 눈을 끄는 것도 이런 때이다.’(‘하얼빈’,’문장’제19호, 1940.10 )
소설 주인공은 호텔을 나와 주택가, 영사관, 송화강가로 이어지는 산책을 즐긴다. 폴란드계 혼혈인 캬바레 댄서 유라와 함께다. ‘마당같이 넓은 행길에는 느릅나무의 열이 두 줄로 뻗쳐 있고, 양편의 주택은 대개가 보얀 계란빛으로 되어서 침착하고 고요한 뒷골목인 셈이다.’ 산보객은 2차대전에 휘말린 프랑스 영사관, 화란 영사관을 지나간다. 송화강변 요트 구락부 갑판에 앉아 뽀이의 서비스를 받으며 식사를 즐긴다. 차이콥스키 실내악 연주가 흘러나온다. 고국에 돌아갈 여비를 벌기 위해 팁을 모으는 늙은 뽀이와 댄서, 여급까지 모두 백계 러시아인이다.
◇음악평론가 김관의 하얼빈 기행
‘회색빛 하늘 느릅나무, 둥근 사원, 억센 건물, 광막한 우울…이것이 하르빈을 처음 봤을 때의 인상이었다.’(하르빈, ‘인문평론’ 2권2호, 1940.2)
음악평론가 김관은 하얼빈의 첫 인상을 이렇게 요약한다. 키다이스카야는 역시 서두에 등장한다. ‘석축으로 차근차근 깔아놓은 도로와 낡아빠지기는 했어도 두터운 흰 벽과 거무죽죽한 지붕, 모두가 구식으로, 고색창연한대로 잡연히 늘어서 있는 거리!...캬바레, 호텔, 다점, 땐스 홀, 매소부정숙, 스트리트 걸, 도박장, 극장 등등’. 김관은 ‘좁고 더럽기는 해도 서구의 도시가 슬라브에 이식된 균정된 도시를 북만뜰 가운데 다시 이식해놓은 거리로 오직 제정시대의 식민지에 불과했지만은 전통적인 러시아 문화의 잔재가 어느모로든 남겨져있는 것같다’고 썼다.
생활고는 물가 상승으로 심해졌지만, 음악과 무용, 미술 등 풍부한 문화예술 향유로 그럭저력 버텨나간다는 외지인의 관찰이었다.
◇클래식과 발레·댄스의 도시, 하얼빈
하얼빈은 음악의 도시였다. 당시 30년 역사가 넘은 하얼빈 교향악단은 월2회 정기연주회를 가졌다. 콘서트장은 백계 러시아인을 비롯, 미·영·독과 체코, 폴란드인 등 서구인이 절대다수를 차지해 유럽 공연장에 온 것같았다.
여름 시즌이면, 콘서트가 끝난 뒤 구락부 후정(後庭)에 있는 야외연주장에서 새벽 한두시까지 댄스 파티가 열렸다. 젊은 남녀는 이곳에서 만나고 달콤한 연애를 했다. 김관은 ‘아지아와 모데른 극장에선 매주 일요일 발레를 중심으로 한 러시아 오페레타가 상연되고 간혹 러시아 연극까지 공연된다’고 썼다.
◇세계적 베이스 샬리아핀 하얼빈 공연
홍양명이 1936년 3월 하얼빈을 방문했을 때, 마침 세계적 베이스 표트르 샬리아핀이 사흘간 리사이틀을 했다. 백계 러시아인들은 샬리아핀을 뜨겁게 환영했다. ‘일본에서 파기록적인 보수로 ‘스케줄’을 마치고 상해, 다롄을 거쳐 이곳에 온 것은 이곳에 사는 오육만 백계러인의 갈망에 보답키위한 것이라고 한다…사흘간의 입장권은 하룻밤 5원,3원의 고액임에 불구하고 그가 이곳에 오기전 일주일전에 벌써 매진되었다고, 호텔 모데른의 뽀이는 노인 특유의 ‘제스처’인 어깨를 한쪽으로 으쓱하면서 자랑스럽게 나에게 말하는 것이다.’(‘퇴폐를 말하는 하얼빈의 밤’, 조선일보 1936년 4월7일)
일본이 1932년 만주국을 세운 이후, 하얼빈은 일제가 대륙 침략을 위해 운영한 철로를 통해 일본,조선과 이어졌다. 세균전 실험이 이뤄진 곳도 이 철도 끝자락 하얼빈이었다. 조선 지식인의 하얼빈 기행은 어딘가 기이하면서도 쓸쓸한 자화상과 맞닥뜨리는 여행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참고자료
이효석, ‘하얼빈’, ‘문장’제19호, 1940.10
김관, ‘하르빈’, ‘인문평론’ 2권2호, 1940.2
이미림, ‘하얼빈’의 산보객 시선과 근대도시 풍경 고찰,우리문학연구 제61집, 2019.1
박종흥, ‘하얼빈’공간의 두 표상-심문과 합이빈의 두 대비를 통한’, 현대소설연구 제62호, 2016.6
06.08 100년 전 경성으로 떠난 시간여행, ‘모던 경성’ 1주년을 맞았습니다
조선일보 창간 100년 맞아 공개한 ‘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100′ 바탕...이상화, 백신애, 권기옥 등 현실에 도전한 선구자 다뤄

▲1934년 일본의 한 바닷가에서 촬영된 최승희의 춤 사진. 최승희는 당대 대표적 '단발미인'이기도 했다. /광주시립미술관
국내 최고의 신문 뉴스 라이브러리인 ‘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100′(newslibrary.chosun.com)이 출범 2년을 넘겼습니다. 2020년 3월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을 맞아 공개한 ‘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100′은 1920년3월 창간부터 1999년까지 조선일보 지면 26만1589면, 기사 295만 건을 담은 한국 근현대사의 ‘보물 창고’입니다. 독자 누구나 조선닷컴에 접속하면, 클릭 한번에 100년 간 기사를 손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뉴스 라이브러리가 공개되면서 학계에선 “엄청난 자료 앞에서 신세계가 펼쳐진 것같다”며 반겼습니다. 민족운동가 민세 안재홍 연보를 정리중인 황우갑 박사는 “당초 1권 분량으로 예정했으나 기존 자료집에도 없는 방대한 분량의 기록이 쏟아져 나와 8권 분량으로 계획이 늘어났다”고 말했습니다. 조선왕조 실록이 CD롬으로 공개되면서 소설과 영화, TV드라마, 웹툰에서 다양한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면서 한류(韓流)의 원천이 됐습니다. 100년 전 뉴스를 요즘 신문 읽듯 볼 수 있는 ‘조선 뉴스라이브러리 100′은 ‘K 콘텐츠’의 산실(産室)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백신애는 열아홉살, 시베리아 방랑을 꿈꾸며 블라디보스톡으로 밀항을 시도할 만큼 당돌했다. 당시 시베리아 방랑은 청년들의 꿈이었다. 백신애는 1930년 5월 일본에 건너가 니혼대학 예술과에서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소설가가 됐다. /영천시 공식블로그
◇100년전 한국인의 도전과 성취
지난 5일 연재 1년을 맞은 조선닷컴 특별기획 ‘모던 경성’은 ‘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100′을 바탕으로 탄생한 기획입니다. 한국인 첫 밀라노 오페라 유학을 감행한 의사 출신 테너 이인선, 시베리아로 무작정 방랑을 떠난 열아홉살 백신애, 복싱 강국 미국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세계플라이급 6위까지 오른 복서 서정권...
100년 전 한국인들은 식민지 억압속에서도 세계를 향해 꿈을 펼치고 도전했습니다. 김기철 학술전문기자가 매주 토요일 쓰는 ‘모던 경성’이 지난 1년간 소개한 선각자들입니다. 아파트를 ‘탕남음녀의 마굴’로 손가락질하면서도 거기에 살기를 꿈꾸고, 주식 투자에 몰두하는 재테크 열풍은 요즘 우리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중국에서 비행사로 활약할 당시의 권기옥. 상해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에 참여하다 상해로 망명한 권귀옥은 1925년 운남육군항공학교를 졸업, 비행사의 길을 걸었다./조선일보DB
◇첫 여성 비행사 권기옥의 기개, 우리 말 식물 이름 찾은 ‘조선식물향명집’
100년 전 선배 세대는 해외에 망명해 독립운동에 뛰어들거나 국내에서 학교와 기업, 언론, 문화, 예술, 종교를 통해 문명과 개화, 독립과 해방의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한국 첫 여성비행사 권기옥(파란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기사를 읽을 수있습니다)은 ‘일본 폭격하려고 비행술 배웠다’고 했고, 시인 이상화는 ‘피압박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며 권투부 설립을 주도했습니다. 우리 말로 된 식물 이름을 찾겠다며 ‘조선식물향명집’을 낸 식물학자 정태현·도봉섭·이덕봉·이휘재도 잊을 수없습니다. 당시 신문은 ‘조선식물향명집’ 출간을 조선어학회의 한글 정리 사업에 비견할 만한 업적으로 평가했습니다. ‘불평등한 결혼제도와 여성차별을 비판한 ‘부인공개장’, 90여년 전 신문의 페미니즘 기획을 맡은 여기자 윤성상도 선각자였습니다.

▲휘문고보 동기인 안회남과 김유정은 학창시절 수업을 빼먹고 남산에 올라 신조사판 세계문학전집을 읽곤 했다. 1927년 출간되기 시작한 신조사 세계문학전집은 일본은 물론 조선의 지식청년들의 교양을 길러준 필독서였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펜 던지고 금캐러간 채만식, 주식 투자 몰두한 김기진
‘모던 경성’은 지난 1년간 서울(경성)을 중심으로 아파트와 문화주택을 꿈꾸고, 피아노와 축음기를 가정 필수품처럼 여기던 당시 사람들의 선망을 다뤘습니다. 펜 던지고 금 캐러간 채만식, 명동에 출퇴근하며 5년간 주식 투자에 몰입한 김기진처럼 한판 승부를 건 재테크 열풍은 요즘과 다름없는 일상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내일은 국민가수’와 ‘미스 트롯’, ‘미스터 트롯’처럼 1930년대에도 오디션 대회가 폭발적 인기를 누렸습니다. 지역 예선을 거친 전국의 노래꾼들이 본선을 치르며 실력을 겨뤘습니다. 1933년 10월 당시 굴지의 음반사였던 콜럼비아사가 주최하고 조선일보사가 후원한 ‘명가수 선발 음악대회’가 대표적입니다. 시인 김영랑은 경성에서 괜찮은 콘서트가 열리면 전남 강진 고향 집에서 불원천리 올라올 만큼, 서양 음악 마니아였습니다. 소설가 이효석도 커피를 즐기고, 음악 다방에서 차이콥스키 실내악을 듣던 음악광이었다고 합니다.
‘모던 경성’은 100년 전 사람들의 경험과 감각을 충실하게 따라가며 우리의 과거를 편견 없이 이해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앞머리를 일자로 자른 '갓빠머리' 박태원과 '갓빠머리' 유행을 선도한 일본 화가 후지타 쓰구하루. 후지타는 1920년대 파리에서 성공한 인기작가였다. 1913년 파리에 건너간 후지타는 '갓빠머리'에 둥근 안경 스타일을 평생 고수했다. 1930년대 귀국한 후지타는 이런 스타일로 긴자를 활보하며 유행을 선도했다. /조선일보 DB, 위키피디아
◇경성 거리 활보한 ‘갓빠머리’박태원과 단발랑
일본 유학생 현철은 연극 불모지 조선에 신극(新劇)을 소개하려고 배우학교를 만들고 작품을 만드는 데 일생을 투자했습니다. 연극이 민족과 민중을 계몽하는 데 가장 중요한 도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갓빠머리’에 둥근 로이드 안경테를 끼고 경성 거리를 활보한 박태원, 파격적인 누드 자화상을 찍은 사진가 정해창, 당시 기준으론 스캔들이었던 단발의 신여성들처럼 시대의 제약을 뛰어넘으려 애쓴 선구자들의 도전도 담았습니다. 조선닷컴에서 ‘김기철의 모던 경성’을 검색하시면 지난 1년간 연재된 기사(총 53회)를 한꺼번에 볼 수 있습니다.
06.10 ‘시베리아 방랑’ 백신애, ‘빙수광’ 방정환...‘모던 경성’ 시간여행, 1주년 맞았습니다

▲백신애는 열아홉살이던 1927년 무작정 집을 나와 시베리아 방랑에 나섰다. 방랑이 젊은이들의 꿈인 시절이었다. 그 후 1930년 5월 일본에 건너가 니혼대학 예술과에서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다. 딸의 유학을 반대한 아버지가 경제적 지원을 끊으면서 여급, 가정부, 세탁부일까지 했던 짧은 유학생활이었다. /영천시 공식블로
‘사랑하는 이의 보드라운 혀끝 같은 맛.’
소파 방정환(1899~1931)은 빙수(氷水)의 맛을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빙수와 에로티시즘을 연결지을 정도로 섬세하면서도 격렬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 (김동식 인하대 국문과 교수)이란 말을 들을 만큼, 소파는 세련된 빙수 마니아였습니다.
1920년대 경성의 여름은 빙수의 계절이었습니다. 바나나 빙수, 딸기 빙수, 오렌지 빙수 등 빙수가 더위에 지친 손님을 맞았습니다. 빙수 한 그릇에도 바나나맛, 오렌지맛, 딸기맛을 구분하던 ‘취향의 시대’였던 셈입니다.

▲소파 방정환은 빙수를 사랑한 애호가였다. 그는 빙수의 맛을 '사랑하는 이의 보드라운 혀끝같은 맛'에 비유할 만큼, 생생한 필치를 선보였다.
지난 5일 연재 1년을 맞은 조선닷컴 특별기획 ‘모던 경성’은 100년 전 갑작스레 근대와 맞닥뜨린 한국인의 경험과 대응을 소개해왔습니다. 2020년 3월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을 맞아 공개한 ‘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100′(newslibrary.chosun.com)을 바탕으로 탄생한 기획입니다. ‘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100′은 1920년3월 창간부터 1999년까지 조선일보 지면 26만1589면, 기사 295만 건을 담은 한국 근현대사의 ‘보물 창고’입니다. 독자 누구나 조선닷컴에 접속하면, 클릭 한번에 100년 간 기사를 손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김남천이 쓰고 정현웅이 삽화를 그린 조선일보 연재소설 '사랑의 수족관' 첫회. 1939년8월1일자에 실렸다.
◇순종 부부까지 빠진 경성 당구 열풍
100년 전 경성은 당구와 베이비 골프가 유행하고, 백화점 양식당서 ‘난찌’를 즐기려는 손님이 줄을 서는, 희한한 도시였습니다.
당구는 1920년대 경성에 유행병처럼 번진 스포츠이자 오락이었습니다. 당시 ‘옥돌’(玉突)이라고 불렀는데요, 당구대는 옥돌대, 당구장은 옥돌장이라고 했습니다. 순종 부부는 당구광이었다고 합니다.창덕궁 인정전 동행각에 당구대를 설치하고,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당구를 즐겼답니다. 순종 아내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도 당구를 즐긴 신여성이었습니다. 당시 신문기사에도 오후4시쯤 간단한 다과를 들고 목욕을 한 뒤 ‘옥돌장으로 가서 공을 치신다’는 기사가 날 정도였습니다. 부부가 같이 당구를 즐기는 시대는 아니었든지 순종과 시간차를 두고 당구장을 찾았다고 합니다. 당구로 소일하는 망국(亡國)의 군주라니, 어떻게 보이십니까.
‘빌리아드 걸’은 이 즈음에 등장한 신종 직업입니다. 손님과 함께 당구를 치거나 점수판을 들고 서서 점수를 세는 역할을 했던 여성들을 가리킵니다. 빌리아드 걸의 미모가 당구장 영업 실적을 좌우한다고 할 만큼, 이들의 역할이 컸다고 합니다.

▲순종과 순정효황후는 20살 차이가 났다. 두 사람은 창덕궁 인정전에 설치된 당구장에서 가끔 당구를 같이 한다고 보도되기도 했다.

▲석영 안석주가 1928년10월17일자에 그린 만문만화 . 경성의 부자들이 당구에 빠진 풍경을 풍자했다.
◇모던 보이들이 환호한 ‘오락의 총아’
모던 보이들은 ‘베이비 골프’에 빠졌습니다. 장편소설 ‘탁류’(濁流)의 채만식은 1933년 신문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베ㅡ비꼴프’장에 모여드는 사람들이 누구라구! 조선 서울서는 1933년식이라고 자랑하는 새로운 감으로 새로운 맵시로 지은 양복을 입고 얼골이 해맑고 어제 저녁에 ‘바ㅡ’XX에서 어찌어찌 했다든가쯤의 사교적 담화쯤은 척척 내어놓을만한 청년신사들이다.’(조선일보 1933년 10월8일 ‘베비ㅡ꼴프’)
경성에는 효창원(1921년), 청량리(1924년)에 이어 1930년 군자리(지금의 능동) 30만평에 조선 땅에서 18홀 정규코스를 갖춘 첫 골프장이 들어섰습니다. 영친왕이 하사하고, 골프장 건설자금과 운영비까지 보탰습니다. 하지만 너른 잔디밭에서 골프를 칠 수 있는 조선인은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대신 ‘손바닥만한 마당’에 오밀조밀, 아기자기하게 퍼팅 위주로 만든 게 ‘베이비 골프’장이었다고 합니다.

▲1927년 유럽 여행길에 영국 세인트 앤드류스 골프장에서 라운딩하는 영친왕. 2001년 발간한 '한국골프 100년'엔 군자리 골프장으로 나왔지만, 대한골프협회는 세인트앤드류스로 바로잡았다. 경성에 하나밖에 없는 골프장을 갈 여유가 없는 모던 보이, 모던 걸은 '베이비골프'로 오락을 즐겼다. /대한골프협회
◇기생 춘심이 선망한 미쓰코시 백화점 ‘난찌’
기생 춘심이는 윤직원 영감과 데이트하면서 미쓰코시 백화점 ‘난찌’를 먹자고 조릅니다. 채만식(1902~1950) 소설 ‘태평천하’(원제 天下太平春)의 한 대목입니다. ‘난찌’는 점심 식사를 뜻하는 ‘런치’(Lunch)의 일본식 발음입니다.
1920년대부터 경성에 본격적으로 들어선 백화점은 근대 상품을 전시하는 쇼윈도우이자 최신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중심지였습니다. 미쓰코시, 조지야, 미나카이, 히라타 같은 일본계 백화점은 물론 종로 화신백화점은 대부분 옥상에 식당을 설치했습니다. 백화점 식당은 깨끗하고 음식 값도 상대적으로 싸서 고객이 많았다. 미쓰코시 백화점의 1원50전짜리 양식 세트와 원두 커피 메뉴는 대인기였습니다. 화신백화점은 양식도 팔았지만 70전짜리 한식 정식세트 인기가 높았습니다. 주머니 가벼운 월급쟁이 가장도 가족을 위해 백화점 ‘난찌’를 찾는 호기를 부렸습니다.

▲1930년 10월 들어선 미쓰코시 백화점은 근대 고급 상품을 진열한 창구 역할을 했다. 4층 식당에서 내놓는 '난찌'는 모던 걸이 선망하는 코스였다. /서울역사박물관
◇방랑은 1930년대의 키워드
‘언젠가 꼭 레나 강에 조각배를 띄우고 강변에는 자작나무로 된 통나무집을 짓고 눈이 하얗게 덮인 설원을 걸으며 아름다운 오로라를 바라볼거야! 그리고 초라한 방랑시인이 되어 우랄 산을 넘을 땐 새빨간 보석 루비를 찾아 볼가의 뱃노래를 멀리서 들을거야.’
세계지도를 쳐다보며 시베리아 방랑을 꿈꾸던 소녀는 열아홉살되던 가을 밤, 작은 손가방 하나를 들고 고향 집을 빠져나왔습니다. 원산에서 웅기까지 배를 타고 가는 동안 단발머리를 틀어올려 시골 여자애로 변장했습니다. 웅기 도착후 다시 출항할 때까지 화장실에 숨어 5시간을 버텼습니다. 선원에게 발각됐지만 다행히 짐칸으로 옮겨 블라디보스톡항에 도착했습니다.
갑판에서 몰래 뛰어내린 그를 맞은 소련 헌병의 총검이었습니다. 한달여 유치장에 갇혔다 소만국경으로 추방됐다. 조선인 농가에 한달여 머물면서 도움을 받아 ‘쿠세레야 김’이란 이름의 여권을 만들어 블라디보스톡 입성에 성공합니다. 첩보영화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소설가 백신애(1908~1939)입니다.
‘방랑은 실제로 1930년대의 키워드였다.’ 러시아 문학 전공자 김진영 연세대 교수는 2017년 낸 책 ‘시베리아의 향수’에 이렇게 썼습니다. 자작나무가 끝없이 펼쳐진 설원(雪原), 오로라, 통나무집.... 10대 백순애를 포함, 조선 청년을 사로잡은 낭만의 상징이었습니다. 미국과 유럽, 일본, 중국 여행은 유학이나 사업, 개척을 위한 구체적 목표를 가졌지만, 시베리아는 유독 정처없이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는 ‘방랑’의 공간이었습니다. 김진영 교수는 ‘집단적 방랑의식의 발단은 한일합방이었다’고 봅니다. 영화 ‘아리랑’주연 나운규의 ‘나의 로서아 방랑기’(1927)부터 홍양명(1931), 김동진(1932), 한용운(1933), 이규갑(1934), 현경준(1935), 김서삼(1936), 이극로(1936), 여운형(1936), 이광수(1936)까지 시베리아 방랑 체험을 소재로 한 여행기를 신문, 잡지에 남겼습니다.
◇오늘 신문 읽듯 100년간 신문을 편안하게 볼 수 있습니다.
‘모던 경성’은 이렇듯 100년 전 사람들의 경험과 감각을 충실하게 따라가며 과거를 편견 없이 들여다보는 시도입니다. 조선닷컴에서 ‘김기철의 모던 경성’을 검색하시면 지난 1년간 연재된 기사(총 53회)를 한꺼번에 볼 수 있습니다. ‘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100′의 강점은 이미 역사가 된 과거를 오늘 신문 읽듯 편안하게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한자가 많은 옛날 기사 원문과 함께 요즘 말로 옮긴 현대문을 함께 서비스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100년간의 사건과 인물이 궁금하시면,‘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100′을 클릭하십시오.
06.11 ‘교향악단 없는 경성은 시민의 치욕’
1939년 하얼빈 교향악단, 최초의 본격적 교향악단 공연

▲조선 최초의 본격적 교향악단 연주는 1939년 3월 26일 저녁 경성 부민관에서 열린 하얼빈 교향악단 공연이었다. 베토벤 교향곡 '운명'과 무소륵스키 '민둥산의 하룻밤' 등이 레퍼토리였다. 이날 공연을 본 바이올리니스트 홍난파는 '교향악단 없는 경성은 시민의 치욕'이라고 했다./ⓒ세광음악출판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39년 3월26일 저녁 7시, 경성 태평로의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건물)에 인파가 몰렸다. 이 땅에서 처음으로 본격적 교향악단 공연이 열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하얼빈 교향악단이 주인공이었다. 일본 순회공연을 마치고 귀로에 경성에 들러 연주회를 가진 것이다. 티켓 값은 4원,3원,2원으로 도쿄 히비야 공회당 공연과 같은 수준으로 비쌌다. 설렁탕 한그릇에 15전 안팎이던 시절이었다.
러시아 지휘자 세르게이 슈와이코브스키가 이끈 하얼빈 교향악단은 이날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과 교향곡 5번, 무소륵스키의 ‘민둥산의 하룻밤’,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스페인 기상곡’을 연주했다.
◇연습 부족으로 혹평
하얼빈 교향악단 경성 연주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일본 순회연주 때부터 현지 평론가들은 조잡한 연주라는 혹평을 쏟아냈다. 제정 러시아 당시 최대 150명의 단원을 자랑하고, 세계적 연주자들이 몸담고 있을 때와는 다른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하얼빈 교향악단 첼리스트 김인수는 훗날 ‘재정난에 따른 연습 부족’(‘하르빈 음악야화’, ‘조광’1940, 6)을 이유로 들었다. 독일식 오케스트라에 익숙한 일본 음악계 시각으로 보면, 자유스럽지만 산만하게 느껴지는 하얼빈 고향악단 연주가 수준 이하로 보였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하얼빈 교향악단 연주를 본 홍난파는 1부 베토벤 연주에 대해 ‘평소부터 우리가 세계일류급의 지휘자와 교향악단의 연주를 레코드로나마 너무 많이 들었던 만큼, 이날 밤 우리의 실망도 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동아일보 1939년3월30일)고 썼다. 하지만 2부 러시아 작곡가 프로그램에 대해선 ‘동양에 있어선 다시 얻기 어려운 명연(名演)이라고 생각한다”고 호평했다.(경성일보는 2부 첫번째 프로그램으로 글린카의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예고했지만, 홍난파는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가 연주됐다고 썼다) 음악팬들의 갈증을 해소시켜줄 만한 수준의 공연이었던 모양이다.
◇경성일보 주최, 조선방공협회 후원
이날 첫 교향악단 연주라는 기록 뒤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주최자인 경성일보사는 총독부의 기관지였다. 후원으로 나선 조선방공협회도 중일전쟁 발발 후 전시총동원체제의 일환으로 설립된 단체였다. 총독부 경무국 지도하에 있던 조선방공협회는 강연과 좌담, 영화와 연극, 공연을 통해 조선인을 전쟁에 우호적 분위기로 이끄는 게 목적이었다. 하얼빈 교향악단 자체가 일본이 1932년 세운 만주국 지원을 받는 악단이었다. 경성일보는 ‘만주국과 관동군의 알선’으로 하얼빈 교향악단 공연이 성사됐다고 밝혔다.
음악학자 이경분은 ‘1939년 일본과 만주국 및 식민지에서는 민심 동요가 우려되고 있었다’면서 ‘일본 군부의 주선으로 하얼빈 교향악단이 日滿방공예술사절단으로 일본에 보내졌다’고 설명한다. 경성연주회도 전쟁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한 일제의 정치적 의도아래 이뤄졌다는 주장이다.

▲경성제대 관현악단 정기연주회. 1928년 창단한 경성제대 관현악단은 1944년까지 정기연주회 20회를 기록했다. 학생과 교수들로 이뤄진 아마추어 관현악단이었다. 훗날 서울대 음대학장을 지낸 이혜구도 비올라 주자로 참여하는 등 조선인 학생도 여럿 있었다. /이충우, 최종고, '다시 보는 경성제국대학'
◇홍난파 ‘문화도시 경성의 수치’
하얼빈 교향악단 경성 연주는 음악인들에게 또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귀로 듣고 입으로 이야기만 하던 교향악 연주를 처음으로 목격하게 된 것은 경성 시민의 한없는 기쁨이지만, 이것을 계기로 하여 경성에서도 하루바삐 교향악단 창설운동이 일어나고 또 위정당국자의 심오한 이해와 원조 아래에서 이것이 속히 실현되어서 문화도시인 경성 시민의 치욕을 일소할 때가 오기를...’ 홍난파는 하얼빈 교향악단 연주 리뷰에서 교향악단이 없는 것은 ‘경성 시민의 치욕’이라고 까지 말했다. 당시 조선엔 경성제대와 연희전문 학생들로 구성된 아마추어 관현악단과 실내악단에 가까운 경성관현악단 정도가 있었고, 정규 편성의 전문 교향악단은 없었다. 이때문에 전문 교향악단의 출범을 고대하는 지식층들이 많았다.
◇미완의 교향악단 待望論
조선일보 기자이자 음악평론가였던 홍종인은 일찍부터 교향악단 창립의 필요성을 촉구했다. ‘연주상 기술적 발전의 당연한 단계로 ‘솔로(연주)’의 다음으로는 표현 양식의 종합적 형태를 갖춘 합주, 합창의 고도의 성장된 형태를 논하지 않을 수 없으며 사회적 요구도 여기에 있다. 규모를 갖춘 합창단,관현악단의 필요이다.’(‘轉期에 선 악단은 어디로’, 조선일보 1935년 1월2일)
음악평론가 김관도 1937년 초 ‘교향악단 대망론’을 제목으로 내걸고 세차례에 걸쳐 신문에 기고했다.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적어도 현대음악의 최고도의 곡을 연주하는 오르간(기관)이고 또는 그 나라의 그 도시의 문화의 정도가 고도하고 아닌가를 측정케 하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조선일보 1937년1월4일) 하지만 같은 기고에서 ‘수년래로 우리는 심포니 오케스트라(교향악단) 설립을 위하여 노력한 일이 있었으나 오늘까지 하등의 결정체를 가져보지 못한 것은…'이라고 쓴 것처럼, 성과가 없었다. 지휘자와 연주자 부족과 재정난이 이유였다. 무엇보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전시총동원체제로 접어든 총독부는 조선에 교향악단을 만들 생각이 없었다.
◇해방되자마자 고려교향악단 창단
교향악단의 꿈은 결국 해방과 함께 이뤄졌다. 1945년 9월 15일 현제명, 계정식을 중심으로 고려교향악단이 출범했고, 그해 10월 창단 연주회를 열었다. 교향악단에 대한 음악계의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고려교향악단은 광복 기념행사와 UN사절단 환영행사 등에서 연주하면서 성장했으나 재정난에 시달렸다. 1948년 10월 제26회 정기연주회를 마지막으로 해산했고, 단원들은 같은 해 출범한 서울교향악단에 대부분 흡수됐다. 1957년 발족한 서울시립교향악단은 이 서울교향악단을 계승한 것이다
◇참고자료
이경분, ‘중일전쟁 시기 동아시아 교향악단 교류: 하얼빈 교향악단의 일본 연주 여행과 경성 연주회(1939)를 중심으로’, ‘아시아리뷰’ 제7권제2호,2018,2.
조윤영, ‘왜 식민지조선 음악가들은 관현악단을 만들고자 했는가: 경성방송 관현악단의 출현과 그 의의’, ‘이화음악논집’21-2, 2017
김인수, ‘하르빈 음악야화’, ‘조광’ 1940,6
김관, ‘하르빈’, ‘인문평론’ 2권2호, 1940,2
06.15 여성사진사 이홍경, 첫 여성비행사 권기옥…‘모던 경성’과 함께 떠난 시간여행

▲갸름한 얼굴에 활짝 미소를 띤 여성의 초상사진이다. 1920년대 이홍경이 찍었다. 인사동 경성사진관 도장과 남편인 채상묵이 감수했다는 인장이 찍혀있다./ 한미사진미술관 소장
1921년 5월25일자 조선일보 1면 하단에 사진관 개업광고가 실렸습니다. ‘신문화를 건설하며 새 사업을 이루려는 우리 사회에 오직 그 요소인 예술적 관념이 결핍하옴은 우리의 항상 감탄하는 바인 줄로 생각해와 본인이 이에 다년간 연구해온 결과….’
종로구 관철동 75번지 우미관 앞이란 주소와 함께 ‘朝鮮婦人寫眞館 主 李弘敬’이라고 이름을 내걸었습니다. 이홍경은 당시 조선에 거의 유일한 여성 사진사였습니다. ‘모던 경성’은 이홍경을 비롯, 첫 여성 비행사 권기옥, ‘부인공개장’ 기획한 기자 윤성상 등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한 여성들의 도전을 소개해왔습니다.
◇창간 이후 기사 295만건 ‘한국 근현대사 보물창고’
조선닷컴 특별기획 ‘모던 경성’은 2020년 3월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을 맞아 공개한 ‘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100′(newslibrary.chosun.com)를 바탕으로 탄생한 기획입니다. ‘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100′은 1920년3월 창간부터 1999년까지 조선일보 지면 26만1589면, 기사 295만 건을 담은 한국 근현대사의 ‘보물 창고’입니다. 독자 누구나 조선닷컴에 접속하면, 클릭 한번에 100년 간 기사를 손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여성사진사 이홍경
여성 사진사 이홍경(파란 글자를 누르면 해당 기사에 연결됩니다) 의 스승은 궁중화가 채용신의 셋째 아들이자 초상화가였던 남편 채상묵이었습니다. 이홍경의 광고마케팅은 성공적이었던 모양입니다. 남녀 내외가 심해 남자가 여성을 촬영하는 게 어려웠던 당시 여건상, 여성 사진사는 여성 고객을 끌어들이는데 최고의 카드였습니다. 덕분에 부인사진관은 개업 10개월만에 건물을 2층으로 확장하고 설비를 대거 들일 만큼 성황을 이뤘습니다. 1924년을 전후해 남편까지 그림에서 사진으로 전업하면서 사진관 이름을 ‘경성사진관’으로 바꿨고, 이듬해 종로1가에 분점을 낼 만큼, 인기가 있었습니다. 1926년 쯤엔 이 사진관을 넘기고 인사동으로 자리를 옮겨 ‘경성사진관’을 개업했습니다.
◇첫 여성사진사는 1907년 ‘향원당’
1926년 신문에 ‘아직 조선에서 오직 하나인 여자사진사’ 이홍경을 소개하는 기사가 났습니다. ‘8년전부터 남편과 함께 사진술을 공부하여 현재 인사동에 경성사진관을 열었고, 한편으로 근화여학교 사진부 생도들을 가르치나니 조선에 첫 시험인 그에게 사진사로서의 설움과 기쁨’(조선일보 1926년 5월18일 ‘조선여성이 가진 여러 직업 8-사진사’)을 인터뷰한 기사였습니다.
이홍경은 조선의 두번째 여성 사진사였습니다. 첫번째 기록은 고종의 시종인 김규진(1868~1933)이 1907년 경성 석정동에 개설한 천연당사진관에서 활동한 향원당(香園堂)이라고 합니다. 천연당사진관은 개업초부터 여성 사진은 여성이 촬영한다는 광고를 신문에 냈습니다. 1907년10월25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부인사진사 향원당’명의 광고입니다. 향원당은 김규진 아내 김진애라는 주장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습니다.

▲중국에서 비행사로 활약할 당시의 권기옥. 상해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에 참여하다 상해로 망명한 권귀옥은 1925년 운남육군항공학교를 졸업, 비행사의 길을 걸었다./조선일보DB
◇ ‘日帝 폭격하려고 비행사 됐다’
‘조선에 처음인 여류비행가 권기옥 양은 금년에 중국 운남(雲南)육군항공학교를 졸업하고 방금 그 학교에서 비행기를 연습하는 중이다.’(‘외국에 노는 신여성’ 권기옥양, 조선일보 1925년 5월21일)
조선의 첫 여성 비행사의 탄생을 알리는 기사가 신문에 났습니다. 스물네 살 권기옥이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는 1923년12월 동포 청년 3명과 함께 운남 육군항공학교 1기생으로 입교했다. 항공대 창설을 구상하던 상해 임시정부의가 주선했습니다. 1925년 2월 항공학교를 졸업한 권기옥은 조선 여성 최초의 비행사가 됐습니다.
평양 출신인 권기옥은 숭의여학교 졸업반 때 3.1만세시위를 하다 체포당하고, 임시정부 연락원과 접촉하면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가 6개월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1920년 10월 그의 뒤를 밟던 형사의 추적을 피해 목선을 타고 상해로 탈출했습니다. 여학교 시절인 1917년 경성 여의도를 방문해 곡예비행을 선보인 미국인 스미스 뉴스를 접하면서 키운 비행사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운남육군항공학교에 들어간 겁니다. 권기옥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터무니없는 이유로 비행술을 배우려 했다. 비행기에 폭탄을 가득 싣고 일본까지 가서 폭격을 할 생각이었다’(‘공군의 날에 붙이는 공군의 할머니’, 조선일보 1965년10월3일)
◇이상화 형인 독립운동가 이상정과 결혼
권기옥은 1926년 초 독립운동가 이상정과 결혼했습니다. 이상정은 저항시인 이상화의 맏형으로 오산학교 교사를 지내다 망명했습니다. 장개석 국민군에 가담한 풍옥상(馮玉祥) 부대에서 준장급 참모로 있었습니다. 권기옥은 이듬해 상해로 가서 장개석의 국민혁명군 소속 비행사로 활약했습니다. 조선의 첫 비행사 안창남, 서왈보, 최용덕, 민성기 등이 중국군에 들어가 창공을 누비고 있었을 땝니다. ‘중국혁명전선의 조선인 비행가’(중외일보 1927년8월28일)기사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권기옥은 남편 이상정과 함께 1936년 하반기 일본 밀정이라는 모함을 받아 8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풀려났습니다.그는 항일전쟁 기간 중 육군참모학교 교관으로 활동하면서 1943년 한국애국부인회를 재건했고, 중국 공군에 몸담고 있던 최용덕(1898~1969·공군참모총장·국방장관)과 광복군 비행대 편성을 계획하기도 했습니다.
1949년 귀국한 권기옥은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을 지냈습니다. 한참 뒤인 일흔 여섯 권기옥이 다시 신문에 났습니다. 1975년부터 장학기금 1000만원을 만들어 고교, 대학생에게 장학금을 몰래 주고 있다는 보도였다.(’남몰래 준 ‘할머니 장학금’, 조선일보 1977년 2월11일) 권기옥은 당시 인터뷰에서 “‘나 대신 조국에 유익한 일을 해달라’는 남편의 간곡한 당부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1947년 10월 모친상으로 먼저 귀국한 이상정은 한달만에 뇌일혈로 급사했습니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불평등과 차별 공개 비판한 ‘부인공개장’
‘가면을 쓴 남성들에게 보냅니다.’
100년전 도발적인 제목의 글이 신문에 실렸습니다.’경성 李0淑'이라고 밝힌 필자는 인텔리 남성들을 향해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 조선 여자가 해방을 얻자면, 먼저 조선이란 조건밑에서 신음하는 남자들과 약속하지 않으면 아니되겠다 하여 남자들과 한 자리에 나아가려 하면 당신들은 한 동지로서의 교훈이나 지도를 주지 않고 의례히 첫 교제수단으로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모ㅡ든 수단을 써가며 아직 사회적 훈련이 적은 우리 여성에게 호기심이나 사게하고 성적(性的)XX을 얻기 위하여 감언이설로 교제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다 여성들이 고분고분 따르지 않으면 ‘모성을 무시하느니, 처녀미를 존중치 않느니, 사회에 풍기를 문란케 하느니 하는 역선전을 하지 않습니까’(이상 1929년 10월30일자 조선일보 ‘가정부인’면). 진보적 남성의 위선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1928년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한 윤성상.스물한살때였다. 가정면을 전담한 윤성상은 성 차별에 반대하고 여성 계몽을 위해 노력한 선구자였다.
◇'갑갑한 하소연, 속상하는 사정 적어보내시오’
이 글은 조선일보가 1929년 9월부터 연말까지 진행한 ‘부인공개장’기획의 일부였습니다. 구시대적 차별과 억압 아래 있는 여성에게 터놓고 이야기할 기회를 마련하자는 취지였습니다. 하루에 수십통씩 투고가 쏟아졌습니다. 첫회인 9월3일자엔 전남 고흥읍에 사는 김봉자란 여성의 글 ‘아버님! 반성해주십시오’가 실렸습니다. 부모로부터 원치않는 결혼을 강요받는 미혼 여성의 고민을 담았습니다.
‘저주하라! 조선의 가정제도를’(9월10일), ‘이러한 남자들은 하루바삐 각성하라’(10월12일). 연일 과감한 제목의 기고가 석달간 계속됐습니다. 그러자 남자들의 의견도 반영하겠다며 ‘여성에게 보내는 말’ 공개투고도 모집했습니다. ‘여성운동보다 먼저 사람이 돼라’(11월26일) ‘배웠다는 여성들 정조를 지킵시다’(12월6일)같은 글이 실렸습니다. 요즘과 다름 없는 날 선 공방이 오갔습니다.
이 기획 책임자는 학예부에 근무하던 여기자 윤성상(1907~1978)이었습니다. 동경여자고등사범학교를 중퇴한 그는 1928년 주필이던 민세 안재홍 추천으로 입사했습니다. 그는 ‘내가 담당하고 있는 가정란의 초점을 아직도 봉건의 깊은 안방속에 잠자고 있는 우리 여성들을 위한 계몽에 두어야 한다고 믿었다’고 훗날 회고했습니다. 앞서간 사람의 분투가 있었기에 오늘이 가능했습니다.
06.18 95년전 세계 일주여행 나선 조선의 첫 여성
나혜석, ‘단테의 도시’ 피렌체, 과학 냄새나는 베를린 등 예술도시 순례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1927년 6월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거쳐 유럽에 도착한 나혜석은 1년8개월간 파리, 런던, 밀라노, 피렌체, 베니스, 베를린, 뉴욕, 워싱턴, 시카고 등 세계 문화예술 도시를 순례했다. 남편 김우영의 구미 시찰을 기회삼아 둘러본 여행이었다.
‘여류 화가 나혜석(32)씨는 예술의 왕국 불란서를 중심으로 동서양 각국의 그림을 시찰코자 오는 22일 밤 10시50분차로 경성 역을 떠나 1년반 동안 세계를 일주할 예정으로 금일 오전 7시45분 경부선 열차로 동래 자택에서 입경하야 방금 조선호텔에 체제중인 바….’(조선일보 1927년6월21일 ‘나혜석여사 世界漫遊’)
95년 전,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난 여성이 있었다. 서양화가 나혜석, 남편 김우영 변호사와 함께 떠난 길이었다. 김우영은 중국 안동현(縣) 부영사로 근무한 공로로 구미 시찰 기회를 얻었다.
나혜석은 호텔을 방문한 기자에게 ‘일년반이라는 짧은 세월에 무슨 공부가 되겠습니까만 남편이 구미 시찰을 떠나는 길인고로 이 좋은 기회를 이용하여 잠깐잠깐 각국의 예술품을 구경만 하는 것이라도 적지 않은 소득이 있을 줄 믿고 가는 것이올시다’라고 했다. 2년 가까운 세계여행이지만 성에 차지 않은 듯했다. ‘이왕 먼길을 가는 길에 여러해 동안 있어 착실한 공부를 하여가지고 돌아오고 싶지만 어린 아이를 셋씩이나 두고 가는 터임으로 모든 것이 뜻과 같이 되지 못합니다.’
◇'나는 지금 바이칼을 통과하는 중이다’
나혜석은 지구를 한바퀴 도는 일정을 짰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로 ‘적색 로서아’를 거쳐, 영길리(英吉利·영국), 독일, 불란서, 백이의(白耳義·벨기에), 오지리(오스트리아), 화란, 서반아, 서서(瑞西·스위스), 서전(瑞典·스웨덴), 정말(丁抹·덴마크), 낙위(諾威·노르웨이), 토이기(土耳其·터키) 파사(波斯·페르시아) 첵크(체코) 섬라(暹羅·태국), 희랍, 미국 등을 방문하는 계획이었다.
나혜석은 여행 중 지인들에게 편지를 자주 보냈다.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던 후배 최은희에게도 엽서를 보냈다. ‘나는 지금 유명한 ‘빠루가이’(바이칼)호반을 통과하는 중이다. 듣던 바 이상의 절승지(絕勝地)다. 이곳은 경성 9,10월의 기후다. 오전 2시에 일출(日出)하고, 오후10시에 일모(日暮)한다. 낮에 잠을 자는 것같아서 좀 이상한 감이 있다. 지평선이 창천과 합한 듯한 황무지에는 영란(鈴蘭)꽃이 반짝이고 양떼와 소떼가 한가히 거닐고 있다.’(‘나혜석씨 旅中소식’, 조선일보 1927년7월28일)
◇제네바에서 만난 영친왕, 그림 부탁
나혜석 부부는 1927년 7월19일 오전 파리 북역에 도착했다. 며칠 머물다 스위스로 넘어갔다. 마침 제네바를 방문한 영친왕과 이틀 연속 만찬을 함께 했다. ‘식후 사담을 나누는 중에 전하께서 나에게 특별히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셔서 매우 황송스러웠다.’ 인터라켄에 들러 융프라우를 올랐다. 요즘 여행자들처럼, 등산열차를 타고 터널을 통과에 눈덮인 봉우리를 만났다. 융프라우를 본 나혜석은 ‘강원도 일대를 세계적 피서지로 만들 필요가 절실히 있다’며 조선을 떠올린다.

▲조선의 첫 여성화가이자 첫 세게일주 여행에 나선 나혜석
◇‘파리는 화가를 부른다’
나혜석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역시 예술의 도시 파리였다. ‘시내에 있는 무수한 극장, 활동 사진관은 화려하고 노골적이요, 배경, 색채, 인물, 의상 모두 예술적으로 세계에 자랑하는 바이다. 저명한 극장은 오페라, 오페라 코믹(희극장), 콤메 드 프랑세즈, 오데옹, 카지노 드 파리, 물랭루즈요, 활동사진관으로는 고몽파르나스가 제일 크다.’
루브르 박물관에 대한 묘사는 요즘 여행에세이를 읽듯 생생하다. ‘거울과 같이 비치는 대리석 바닥 위를 걸어가노라니 좌우에 조각을 나열해 놓았다. 그 중 저명한 것은 ‘밀로의 비너스’ ‘옥타비아누스 흉상’ ‘칼리굴라 황제 흉상’이 있다. 계단 위 정면에서 첫 인사를 받는 동체(胴體) 모습의 그리스 여신은 미적 자태의 절정을 보여준다.’
‘따뜻한 봄날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때, 루브르 궁전 정원 주위의 화단을 돌아 여신상 분수에 발을 멈추고, 역대 인물 조각을 쳐다보며 좌우 우거진 삼림 사이를 거닐면, 이야말로 인간 세계가 아닌 별천지다.’
노틀담 성당, 뤽상부르 미술관, 개선문, 콩코르드 광장, 팡테옹, 에펠탑... 파리의 명소들을 하나하나 소개한다. 여행기를 읽으면서 낯선 이국 풍경을 떠올렸을 독자들에게 나혜석은 선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방대한 예술 작품을 단기간에 맞닥뜨린 나혜석도 기가 눌렸던 것같다. ‘처음 파리에 와서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가 그림을 보고 나면, 너무 엄청나고 자기라는 존재는 너무 보잘 것 없어서 일시적으로는 낙망하게 된다.’ 하지만 ‘미술계의 사정과 흐름을 깨달아 연구에 매진하려면 여간 방황하고 고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각오를 다졌다. ‘연극, 오페라, 활동사진을 가보면 어느 하나라도 그림의 소재 아닌 것이 없다. 화가가 있어야만 할 파리요, 파리는 화가를 불러온다.’
◇ ‘베를린에선 과학 냄새가 난다’
그 해 12월21일 남편이 세 달 먼저 가있던 베를린 역에 도착했다. 베를린은 과학과 음악, 문학과 예술의 도시였다.‘과학과 음악뿐만 아니라 문학도 프랑스와 앞을 다투며, 독일 사람들은 검소하고 참을성이 많다고 한다. 베를린은 전차, 버스, 택시, 지하철이 쉼 없이 왕래해 대도시의 기운이 농후했다.’ 나혜석은 ‘매우 합리적이고 바라보기에도 경쾌하였다. 모든 것이 과학 냄새가 난다’고 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베를린은 자유와 낭만이 넘치는 도시였다. 히틀러 집권 직전, 마지막 만찬을 즐기는 중이라고나 할까.
나혜석은 교향악 콘서트에도 갔다. ‘독일에서 유명한 음악회를 구경 갔다. 베토벤과 바그너의 곡 연주회인데, 수백명의 단원이 나와 관현악을 합주하니 관객의 마음은 서늘해지고 몸은 중천으로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라 스칼라 극장, 음악, 연기, 무대 빈틈 없어
‘이탈리아는 미술의 나라다. 그 미술은 고대 로마시대로부터 17세기에 이르도록 세계적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1928년 3월23일 이탈리아로 향했다. 밀라노에서는 두오모 성당,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의 다빈치의 벽화 ‘최후의 만찬’을 감상했다. ‘과분한 기대와 긴장에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과연 그림을 대할 때 나도 모르게 머리가 숙여졌다.’ 나혜석은 ‘실내에 꽉찬 각국 관광객들은 작품의 참맛을 알려고 망원경으로 혹은 종이를 말아대고 보느라고 야단들이다’고 썼다. 밀라노 명물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 공연도 봤다. ‘외관은 평범하지만 무대 배경이며 출연하는 수백명 배우의 의상, 연기, 노래, 음악이 빈틈이 없었다. 나로서는 파리에서나 베를린에서 보지 못하던 것을 보았다. 거기 앉아 관람하는 나는 무한히 행복스러웠다.’

▲1927년 6월 세계일주에 나선 나혜석, 김우영 부부
◇'단테가 밟은 땅 피렌체에 오니 이상한 환희’
베네치아에선 틴토레토와 티치아노, 베로네제의 그림이 걸린 두칼레 궁, 산 마르코 성당, 베네치아 화가들의 작품을 대거 소장한 아카데미아 미술관이 소개된다. 단테, 미켈란젤로, 보티첼리같은 천재들을 만난 피렌체는 나혜석 최고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피롄체는 예술의 도시라서 시가지를 걷는 것이 마치 미술관을 걷는 것같다. 어느 건물, 어느 사원, 어느 문, 어느 창, 어느 조각이 예술품 아닌 것이 없다. 물론 우리는 이 맛을 보러 왔겠지만, 저 아르노 강물이 키워낸 단테, 미켈란젤로,조토,마사치오, 보티첼리, 도나텔로 등 천재들의 자취를 보러 온 것이다. 그들이 지금 내가 밟고 있는 땅을 밟았겠지 하는 생각이 드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상한 환희를 느끼게 되었다.’
◇‘반갑고도 슬픈 워싱턴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파리를 떠나 미국 뉴욕에서는 김마리아, 서재필 등을 만났고, 워싱턴에서는 주미공사관, 스미스소니언 미술관, 백악관 등도 둘러보았다. 나혜석은 워싱턴의 대한제국 주미 공사관을 지나치며 이렇게 썼다. ‘조그마한 양옥 정문 위에는 태극 국표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이상히 반갑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
미국 대륙을 횡단해 나이아가라 폭포, 시카고, 그랜드캐니언, 로스앤젤레스, 요세미티 공원을 여행했다. 1927년 6월19일 부산을 출발한 나혜석의 세계 일주는 1929년 3월12일 부산 도착으로 마무리됐다.
◇상처 남긴 세계여행
나혜석의 세계일주는 그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지만, 그가 당시 신문, 잡지에 남긴 여행기는 지금 읽어도 전혀 낯설지 않다. 생동감 있는 묘사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세계여행은 나혜석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파리에 체류하던 당시 3.1운동 33인 대표중 하나이자 천도교 지도자인 최린과 염문에 빠진 것이다. 귀국 후 결혼 생활도 엉망이 됐다. 나혜석은 1930년 11월 김우영과 이혼하고 네 아이를 남겨둔 채 쫓겨나다시피 나왔다. 김우영은 곧 재혼했다. 나혜석은 얼마후 ‘이혼공개장’(‘삼천리’, 1934년8월호)을 발표하면서 1930년대 최고의 스캔들 주인공이 됐다.
나혜석은 세계 일주 후 불안한 미래를 어느 정도 예감했을 지도 모르겠다. 여행기는 이런 문장으로 끝난다. ‘아, 아, 동경하던 구미 만유도 지나간 과거가 되고, 그리워하던 고향에도 돌아왔다. 이로부터 우리의 앞길은 어떻게 전개되려는고.’
◇참고자료
나혜석, 조선 여성 첫 세계일주기, 가갸날, 2017
조용만, 30년대의 문화예술인들, 범양사, 1988
이철, 경성을 뒤흔흔 11가지 연애사건, 다산초당, 2008
06.25 철거 앞둔 충정아파트, 그 아스라한 추억
1937년 죽첨정(현 충정로) 3정목에 건립…마포와 도심 연결한 도시화 증인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건립 85년만에 철거 결정이 내려진 서울 지하철 2호선, 5호선 충정로역 앞 충정아파트. 건립 당시엔 경성의 첨단 주거시설이었다.
1930년에 세워진 충정아파트가 헐린다고 한다.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에서 지난 6월15일 지하철 2·5호선 충정로역 일대를 재정비하는 계획안을 통과시키면서 아파트 철거 결정을 내렸다. 건립 85년이 지난 건물이기 때문에 안전문제도 심각하고, 재건축을 원하는 주민 의견도 많았다고 한다, 경성의 첨단 주거지로 각광받던 영화를 뒤로 하고 사라지는 것이다.
◇경성의 첫 아파트는 사실과 달라
충정아파트는 한때 1930년 건립된 경성 최초의 아파트로 알려졌다. 하지만 건축물대장을 확인한 결과 1937년8월29일 신축된 것으로 드러났다.(이연경 등, ‘근대도시주거로서 충정아파트의 특징 및 가치’ 23쪽) 처음엔 건축주 이름을 따 도요타(豊田) 아파트로 불렸다. 당시 드문 철근 콘크리트 4층 건물이었다. 경성 첫 아파트는 1930년 남산 회현동에 들어선 미쿠니 아파트다. 미쿠니(三國) 상사 합숙소로 건축된 이 아파트는 92년이 넘은 지금도 주거 시설로 사용중이다.
도요타 아파트는 마포와 도심을 연결하는 대로변에 자리잡았다.아파트 남서쪽엔 죽첨정 삼정목(竹添町 三丁目)(현 충정로 3가)전차 정류장이 있어 교통이 편리했다. 그래서인지 교통사고 기사에 이 아파트가 등장한다. ‘만원 전차에 뛰어올라타다가 떨어져 뼈가 부러졌다. 부내 죽첨정(竹添町)삼정목 이백칠십팔번지 인쇄직공 이풍재(李豊在·23)라는 사람은 7일 오후7시에 서대문에서 마포로 가는 전차에 뛰어올라 매달려가다가 죽첨정 삼정목 풍전(豊田)아파트 앞에서 떨어져 왼편 쇄골(鎻骨)이 부러졌다. 약 한달동안 치료받을 중상이다. 그는 문을 닫고 진행하던 만원전차에 뛰어탔다가 그런 변을 당한것이다.’( ‘만원전차에 매달렸다 낙상’, 조선일보 1939년10월9일)
죽첨정이란 이름은 1884년 갑신정변 당시 일본 공사였던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의 성을 따서 1914년부터 쓰였다고 한다.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 이름으로 바꾸면서 충정로가 됐다.
◇황산덕과 김환기, 도요타 아파트 주민
도요타 아파트에 살았던 유명인으론 황산덕과 김환기가 거론된다. 평양고보를 졸업한 열여덟살 황산덕(1917~1989)은 1935년 경성제대 예과(豫科)에 입학했다. 당시 예과는 청량리에 있었다.
‘대학 예과를 수료할 무렵에 그보다 1년 선배로 먼저 본과 법학과에 다니고 있는 홍진기의 집에서 하숙하고 있었는데, 법학과 본과가 동숭동에 있었으므로 본과 시험 합격 후 도요타 아파트에 방을 얻어 살며 매일 명동에서 방황하며 한 학기를 보냈다.’ ‘황산덕 회고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당시 경성제대 예과는 2년에서 3년 과정으로 바뀐 뒤였으므로, 황산덕은 1938년 도요타 아파트 319호에 세들어 살았다. 그해 가을 몇 번의 데이트를 한 여성과 살림을 시작했고. 법학과 2학년을 마친 뒤 도쿄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머물렀다고 한다. 도요타 아파트는 1937년 들어섰으니, 준공 1년도 안된 새 아파트에 입주한 것이다.
황산덕은 해방 후 서울대법대 교수를 거쳐 성균관대 총장, 법무·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서울대법대 교수시절인 1954년 정비석의 신문 연재소설 ‘자유부인’의 선정성을 비판하는 논쟁을 벌인 주역으로도 유명하다.
황산덕이 이 아파트를 떠날 무렵, 훗날 스타로 떠오른 화가가 입주했다. 김환기다. 그는 일본미술협회가 1940년 5월 도쿄 우에노공원에서 개최한 ‘자유미술전’에 출품했다. 당시 전시회 목록에 김환기 주소가 ‘경성부 죽첨정 도요타 아파트’로 나온다. 아파트는 단기 체류자도 받는 숙박시설이었다. 유족한 집안 출신인 두 사람이 도요타 아파트에 거주했다는 사실은 이 아파트가 당시 첨단 주거지로 꽤 인기를 끌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1937년 준공된 서울 충정로2가 충정아파트. 준공당시엔 도요타아파트로 불렸다. 곧 철거될 운명이다.
◇생선가게 하던 도요타가 건축
도요타 아파트 주인은 일본인 도요타 타네마쓰(豊田種松)였다. 1923년 ‘경성상공명록’에 따르면, 도요타는 한강로 주변에서 생선가게를 했다. 한때 세급을 못낼 만큼 어려웠던 모양이다. 1929년4월26일자 조선일보엔 세금 체납으로 가옥 40호가 경매에 넘어간다는 기사가 실렸는데, 여기에 도요타가 나온다. 세금 74엔48전을 못 내 집까지 경매에 넘어갈 지경이던 도요타가 무슨 돈으로 경성의 최신식 아파트를 지었는지 알 수 없다.
1939년 경성상공명록에 따르면, 도요타는 죽첨정 3정목 250번지, 즉 도요타 아파트 1층에서 생선가게(魚店)를 하면서 식당을 겸업했다. 1940년 그는 아파트에서 호텔로 업종 변경을 한다.
‘관광씨—즌을 앞두고 요사이 경성을 비롯하여 각 도시의 아파—트 경영자가운데는 호텔이나 여관으로 방향전환을 하여 톡톡이 이익을보려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경성에서는 크기로 유수한 죽첨정(竹添町)삼정목 풍전(豊田)아파—트도 얼마 전 소관 서대문서로부터 현재 들어있는 사람을 새로 집을 짓고 이사를 시킬 것을 조건으로 호텔 허가를 마덧는데 주택난 해결에 골치앓고 있는 총독부 사회과에서는 이와 같은 전향자가 속출하면 도시의 주택난을 일층 심하게 한다고 수일전 각 도에 엄중한 통첩을 하여 금후로는 이와 같은 전업을 절대로 허가하지 않기로 되었다.’(‘아파—트 여관전업, 금후는 절대 불허방침’, 조선일보 1940년6월1일)
호텔 영업허가를 막차로 따낼 만큼 수완은 좋았지만, 사업은 순조롭게 풀리지 않았다. 전쟁 탓이 컸을 것이다. 호텔에서 오뎅술집으로 다시 업종을 바꿨다.

▲5.16 직후인 1962년 '반공의 아버지' 행세를 하며 '충정아파트'를 분양받아 호텔문을 연 김병조. 10여 년이 지난 후에도 광복 30주년 특집에서까지 다룰 만큼, 대단한 사기극의 주역이었다. 조선일보 1975년3월22일자.
◇'혁명’을 속인 사기꾼 김병조
해방 이후 도요타 아파트는 귀국 동포들이 점거했다. 6.25 와중에 미군이 인수해 트레머 호텔로 이름을 바꿨다. 미군 숙소와 사무실용이었다. 그러다 5·16 이후 사기극에 휘말린다. 1962년3월1일 아들 여섯이 6·25전쟁에서 전사했다는 김병조라는 인물이 ‘반공의 아버지’로 불리며 건국공로훈장을 받고 호텔까지 불하받아 코리아호텔을 연 것이다. 하지만 다섯달 만에 허위날조라는 사실이 밝혀져 김병조는 구속됐다. 호텔은 1962년 11월23일 문을 닫았다.
이 사기극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던지 “‘혁명’을 속인 사기꾼”(조선일보 1962년8월21일), “공소사실 부인 가짜 ‘반공의 아버지’”(1962년10월12일) ‘문 닫혀버린 코리아호텔’(1962년 11월24일) 등 연일 신문에 보도됐다. 광복 30년 기념 세태 기획에 ‘가짜 인물’(1975년3월22일)의 대표 사례로 가짜 이강석(이기붕 아들이자 이승만 양자)과 나란히 실릴 만큼 세인들의 기억에 뚜렷히 남았다. 호텔은 그 뒤 몇 사람 손을 거쳤으나 1967년까지 철조망을 둘러친 신세로 방치됐다.

▲1979년 도로확장공사로 충정아파트 일부가 헐린다는 뉴스를 전한 조선일보 1979년2월3일자 기사
◇1979년 도로 확장 공사로 일부 헐려
호텔은 그후 주거시설로 쓰였다. 1970년대엔 유림아파트로 불린 모양이다. 아파트는 1979년 도로확장공사로 일부가 헐렸다. 건물의 기구한 운명이 ‘한국 첫 아파트가 헐린다’(1979년2월3일)는 기사로 다시 회자됐다. 그후로도 40년 이상을 버텼다. 하지만 초록빛 충정아파트의 모습을 볼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같다.
◇참고자료
박철수, 권이철, 오오세 루미코, 황세원 지음, 경성의 아파트,집,2021
이연경, 박진희, 남용협, ‘근대도시주거로서 충정아파트의 특징 및 가치’, ‘도시연구:역사·사회·문화’ 20호, 2018.10
박상현, ‘충정아파트의 일본인 건물주 성명 고찰’, ‘일본문화연구’ 제 80집, 2021
07.02 ‘신기막측한’ 라디오, 조선을 울리다
경성방송국 1927년2월16일 개국…'민족의 성쇠는 과학에 달렸다’

▲경성방송국은 1927년2월16일 정규방송을 시작했다. 하지만 한국인에 의한 민간 첫 시험방송은 조선일보가 1924년 12월17일~19일 우미관과 경성공회당에서 실시한 라디오 방송이었다. 사흘간 7000명의 청중이 몰렸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근세 과학의 일대 경이(驚異). 몇백 몇 천리를 격한 곳에 흔적 없이 전파되는 방송무선전화의 신기막측한 비밀을 보라.’(‘근세과학의 일대 경이’,조선일보 1924년12월17일)
한국인이 주관한 이 땅의 첫 라디오 방송이 전파를 탔다. 조선일보는 1924년12월17일부터 19일까지 사흘간 라디오 시험방송을 내보냈다. 경성방송국이 정규 라디오 방송을 시작한 1927년2월16일보다 2년 3개월 앞섰다.
방송은 수표동 신문사 사옥 이상재 사장실에서 진행됐다. 경성 도심의 우미관 극장에 대형 확성기를 설치했다. 극장 안팎 인파가 몰렸다. 조선일보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가 사회를 봤고, 이상재 사장이 개회 연설을 했다. 이어 이동백 명창의 판소리가 울려퍼지자 박수가 쏟아졌다. 청중들은 수표교 조선일보사에서 관철동 우미관까지 소리가 들린다고 신기하게 여겼다. 18일~19일 시연회는 경성공회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흘간 7차례 열린 라디오 시험방송에 7000명이 몰렸다.
◇신문이 라디오 소개 앞장서
라디오 방송은 신기한 오락, 그 이상이었다. ‘현대인의 세계 문명은 구주인의 문명이오 또는 과학문명이다’(‘생활의 현대화와 조선인’, 조선일보 1924년 12월17일)로 시작하는 이 날짜 사설은 의미심장하다. ‘금일의 일국가 일민족의 성쇠는 어느 의미로는 그의 과학과 기계문명에 대한 조예의 심천(深淺)으로써 측도(測度)하는 것이다’라고 한 뒤, ‘조선인은 유래로 물질에 담박하였고 따라서 기계와 기술에도 등한한 바 많았었다. 즉 과학에 등한하였다고 할 것이다. 그 결과는 산업적 부진 및 쇠퇴를 오게 하였다 할 것이다’고 진단했다. 과학에 등한했던 과거를 반성하고 민중을 계몽하기 위해 근대 문명의 첨단 기기인 라디오 방송을 선보인 것이다.
언론학자 김영희는 ‘새로운 매체인 라디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 기능을 이해시키는 데에 기존 매체인 신문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점이 주목된다’고 썼다. 당시 신문은 라디오를 경쟁 매체로 보지 않고, 민중을 계몽하는 협력자로 간주했다.

▲조선일보 1927년12월17일자에 실린 라디오 수신기 광고. 일본의 일화무선전화전신기계제조소가 제품 이름과 가격을 설명하고 사진으로 모양을 소개했다. 국내 최초의 라디오광고였다.
◇일본인이 주도한 경성방송국 개국
1927년 2월16일 경성방송국이 JODK라는 호출부호로 정규방송을 시작하면서 본격적 라디오 방송시대가 열렸다. 일본인이 주도하는 방송이었다. 채널 하나로 일본어와 한국어 방송을 내보냈다. 언론학자 정진석 교수에 따르면, 대략 3대1로 일본어 방송이 압도적이었다. 개국 직전인 1927년2월3일자 조선일보는 경성 방송국 청취계약자는 1115명이라고 보도했다. 일본인이 895명인데 비해, 조선인은 212명뿐이었다.
◇라디오 한대가 샐러리맨 연봉
초창기 라디오는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 요즘 수신료격인 청취료만 월 2원이었고, 라디오 가격도 비쌌다. 진공관식으로 확성기를 이용해 듣는 라디오 세트는 40원~100원이었고, 전지식 진공관 수신기는 100원~500원이나 했다. 경성방송국 기술직 신입사원 월급이 21원이었다고 하니, 라디오 한 대 값이 연봉에 맞먹을 정도였다. 요즘으로 치면, 고급 승용차 한 대 값이었던 셈이다. 그나마 귀에 대고 듣는 광석식 수신기는 안테나 포함 10~15원 정도였다.
◇'문명이 운다, 라디오가 운다’
그러다 보니 1926년 12월 한 잡지에 이런 글이 실렸다. ‘그러나 돈 없는 동무여!당신네들은 80~90전을 내고 신문을 보듯이 그만한 돈을 내고 그 대신 라디오를 들을 수가 있을까요?낮에는 신문이고 밤에는 유성기인 라디오를 들을 수가 있을까요?’(승일, ‘라듸오, 스폿트, 키네마’, ‘별건곤’2, 1926,12) 필자는 ‘문명이 운다, 서러워한다, 라디오가 운다, 우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하소연했다. 그리곤 ‘조선의 라디오!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세계의 라디오-문명-그것은 정복자의 전유물이다있는 사람의 장난거리가 되고 말아버린 문명의 산물! 참으로 우리는 과학에 대해서 면목이 없다’고 썼다.

▲1924년12월17일~19일 조선일보 라디오 시험방송을 알리는 社告. 윗 사진은 청중들이 모인 관철동 우미관 극장. 사흘간 7000명의 청중이 몰렸다. 조선일보 1924년12월17일자
◇1940년 청취자 20만, 조선·일본인 청취자 비슷
개국 첫해 청취자가 좀처럼 늘지 않자, 그해 11월 청취료를 1원으로 낮췄다. 청취자는 1930년 10월 말 1만명을 넘어섰다. 1933년 4월26일 한국어방송이 제2방송으로 분리되면서 조선인 청취자가 늘었다. 1933년 7월 말, 청취자는 2만4126명(조선인 3812명, 일본인 2만197명, 외국인 117명)이었다. 그래도 조선인은 여전히 일본인의 19%밖에 안됐다.
라디오 방송에 날개를 달아준 건 전쟁이었다. 시작은 1931년 만주사변이었다. 중일전쟁 직후인 1937년 10월, 청취자 10만을 돌파했다. 이듬해 4월 청취료도 75전으로 인하했다. 1940년 8월엔 청취자가 20만에 육박했다. 무엇보다 조선인 청취자가 9만5153명으로 일본인 9만6027명과 비슷해졌다.
◇이발소, 상점서 라디오로 호객
뉴미디어인 라디오를 틀어주면서 손님을 끄는 상점들도 나타났다. 경성 중심가 상점들이 먼저 나섰다.
‘박덕유(朴德裕) 양화점에서 일백십여원짜리, 조선축음기상회에서 백여원짜리 확성기를 점두에 놓고 손님에게 들려주기 시작하니까 남대문통의 백(白)상회에서도 사백여원짜리 라디오를 놓았다. 다 상당한 생각이라 할것이거니와 이발소, 목욕탕, 식당 같은 데에서 사오십원짜리로도 훌륭하니 라디오를 손님에게 들려준다면 정해놓고 손이 많이 꼬일 것이요,더욱 술파는 집에서 그렇게 하면 술이 더 팔릴 것이다.’(경성탐보군, ‘商界閑話’, ‘별건곤’5호, 1927, 3)
◇라디오 편성표 매일 실어
당시 신문에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매일 실렸다. 요즘 TV프로그램 편성표가 실리는 것과 비슷했다. 초창기엔 뉴스와 기악연주, 만담, 강연, 소설 낭독, 외국어 강좌, 라디오 연극, 국악 등으로 꾸몄다. 연예 분야는 전통 음악이 자주 연주됐는데, 기생들이 주로 출연하면서 스타로 떠올랐다. 스포츠 중계 방송도 인기를 누렸다. 야구 중계가 많았고, 축구, 육상, 럭비, 농구 경기도 중계했다.
한국어 제2방송이 생기면서 방송시간도 하루 8시간45분에서 15시간5분으로 늘어났다. 교양 프로그램이 다채로워졌다. 1935년 11월21일자 라디오 프로그램을 보면, ‘톨스토이 25주년 기념제’로 오후6시25분 ‘톨스토이의 생애’(전영택), 오후7시30분 ‘톨스토이의 사상과 예술’(이광수) 강의가 방송됐다. 이어 오후8시엔 톨스토이 ‘부활’을 라디오 연속드라마로 만들어 내보냈다.
◇'너저분한 기생들의 소리는 그만두시오’
방송 프로그램 수준을 문제삼는 비평도 있었던 모양이다. ‘소리라든지 강연 같은 것을 좀 들을 만한 것을 방송하였으면 감사한 중에 더 감사하겠어. 강연사도 말마디나 하는 양반을 초빙하고 기생도 소리마디나 할 줄 아는 것을 초빙하여야지 개짓는 소리라도 기생이라면 모두 불러다가 시키니…지금부터는 너저분한 기생들의 꿈꾸는 소리라든지 18세기의 소학교 수신교과서 같은 것은 제발 고만두시오.’( ‘휘파람’, 조선일보 1927년 7월28일)
◇戰時 군국주의 선전 매체로 전락
하지만 농촌에서 라디오 구경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총독부는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에 돌입하면서 농촌에 라디오 무료보급 사업을 폈지만, 성과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1941년12월 태평양전쟁으로 전선이 확대되면서 군국주의를 고취하고, 황국신민화 교육을 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1942년12월 단파수신사건이 적발되면서 라디오의 운명은 더 위태로워졌다. 이듬해 6월 한국어채널인 제2방송부가 폐지되고, 일본어로 방송하는 제1방송만 운영됐다.
◇참고자료
승일, ‘라디오, 스폿트, 키네마’, 별건곤 1권2호, 1926,12
경성탐보군, ‘商界閑話’, ‘별건곤’5호, 1927, 3
한국방송사료보존회, 사진으로 보는 한국방송사 권1 1924~1957, 1993
정진석, 일제하의 라디오 보급과 청취자, 신문과 방송 통권 262호, 1992, 10
김영희, 일제시기 라디오의 출현과 청취자, 한국언론학보 제46-2호, 2002 봄
김태수, 꼿가치 피어 매혹케 하라,황소자리, 2005
07.09 영친왕의 유럽 호화여행,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
1927년 5월부터 11개월간 유럽 13개국 방문...탐험가 아문센 만나고, 레종 도뇌르 훈장 받기도

▲1927년5월 유럽 여행을 떠난 영친왕 부부와 수행원들.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세 번째가 영친왕 부부, 첫 번째는 이왕직 차관 시노다 지사쿠. 훗날 경성제대 총장을 지냈다./篠田治策, 歐洲御遊隨行日記
20세기 전반 한국인 중 가장 호화로운 세계여행을 한 인물은 영친왕일 것이다.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이자 순종 동생인 이은(1897~1970)이다. 영친왕은 1926년5월23일 요코하마에서 수행원들과 함께 기선에 올랐다. 영친왕 부부와 시종무관 김응선 대좌를 제외한 수행원 6명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이왕직 차관 시노다 지사쿠(篠田治策·훗날 경성제대 총장)와 무관 사토(佐藤)중좌, 전담 의사와 시녀까지 거느렸다.
◇군사 시찰 명목 비공식 방문
명목은 군사시찰이었다. 영친왕은 만 열 살에 이토 히로부미 손에 이끌려 일본에 유학했다.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1923년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사실상 일본에 붙잡힌 볼모 신세인데다 고종과 순종이 잇달아 세상을 뜨면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참이었다. 한창 나이의 그로서는 해외 여행으로나마 숨통을 틔우고 싶었을 것이다.
‘창덕궁 전하께서 양행(洋行)을 하신다 함은 여러 번 보도하였거니와 전하께서는 오는 4월5일에 환궁하시어 24일에 거행되시는 고 순종 전하의 소상(小祥)에 참여하시고 대비 전하께 하직하신 후 21일 경에 다시 동경으로 가시었다가 만반의 준비를 정돈하신 후 5월10일 전후에는 어(御) 발정(發程·출발)하실 예정인데, 약 1개년 동안의 예정으로 먼저 불란서를 순유하시고 구주 각지를 만유하시리라는 바, 왕 전하께서는 육군제도 연구와 비(妃) 전하께서는 부인문제 연구차로 이번 양행을 하시는 것이라고 승문(承文)되더라.’(‘昌德宮兩殿下 四月五日還御’, 조선일보 1927년3월12일)

▲1927년 6월 수에즈운하를 통과해 이집트에 상륙한 영친왕 일행은 카이로 근처 기자 피라미드를 구경했다. 사진 뒷열 오른쪽에서 6번째와 7번째가 영친왕 부부다. 낙타를 타고 기념촬영했다.
◇기자 피라미드에서 낙타 타고 기념촬영
영친왕의 유럽 순방은 1년 가까운 장기 여행이었다. 기선(氣船)으로 오가는 데만 3달 정도 걸렸고, 유럽엔 8개월 머물렀다. 유럽까지 여정을 구체적으로 보면, 상해->싱가포르->페낭->콜롬보->수에즈 운하를 지나 카이로->나폴리를 거쳐 7월4일 마르세유에 상륙했다. 요코하마 출항이래 선상(船上) 생활만 43일이 걸렸다. 유럽에선 프랑스, 스위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등 13개국을 여행했다.
일정을 좀 더 세밀하게 소개하면, 먼저 마르세유를 거쳐 리옹, 파리에 입성했고 이어 루체른, 융프라우, 제네바를 거쳐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8월 초엔 도버해협을 건넜다. 런던, 뉴캐슬, 에든버러, 글래스고, 맨체스터, 리버풀을 돌았다. 영국에만 두 달가까이 할애했다. 10월1일 파리로 귀환한 뒤 브뤼셀, 헤이그, 암스테르담, 로테르담, 베를린, 코펜하겐, 오슬로, 스톡홀름, 베를린, 칼리닌그라드, 바르샤바, 베를린,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빈, 프라하, 빈, 베니스를 거쳐 로마에서 새해를 맞았다. 나폴리, 폼페이, 피렌체, 밀라노, 니스, 몬테카를로, 칸을 거쳤다. 유럽의 볼 만한 도시는 빠뜨리지 않고 거의 다 들른 셈이다.
1928년 3월3일 마르세유에서 기선에 오른 일행은 나폴리, 수에즈 운하, 콜롬보, 싱가포르, 상해 등 올 때와의 역순으로 귀국 길에 나서 4월9일 고베에 도착했다. 영친왕의 유럽 여행은 간간이 신문에 보도됐다. ‘아라비아만 아덴에 도착했다’, ‘제네바에 도착했다’, ‘영국에서 훈장을 받았다’(‘창덕궁전하께, 대영제국훈장’,조선일보 1927년10월3일) ‘마르세유에서 귀국배에 올랐다’(‘歐洲御巡遊中 王殿下歸程’, 조선일보 1928년3월5일). 대부분 간략한 단신이었다.

▲영친왕은 1927년 6월부터 이듬해 3월초까지 유럽 13개국을 돌아다녔다. 시노다가 1928년 출간한 '歐洲御遊隨行日記'(大阪屋號書店) 에 수록된 지도.
◇유럽 군주 환대받은 영친왕, 일본 위세(?) 덕분
영친왕의 유럽 시찰은 비공식 방문이었다. 역사 유적지는 물론 박물관, 미술관, 콘서트홀과 대학, 병원 등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공식 방문 못잖은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가는 곳마다 일본 대사를 비롯한 외교관이 나와 영접하고 안내했다. 제네바를 방문했을 때는 군축회의 대표로 파견된 사이토 마코토(齋藤 實)조선 총독이 영친왕을 맞았다.
유럽 군주들도 영친왕을 깍듯이 예우했다. 1차 대전 전승국인 일본이 서구 열강과 맞먹는 대접을 받을 때였다. 영국 왕, 벨기에 황제, 네덜란드 여왕, 덴마크 황제, 노르웨이 황제와 만나 그 나라 최고훈장을 받기도 했다.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는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영친왕은 메이지 일왕 조카인 나시모토(梨本宮)의 장녀와 결혼한 일본 왕족이기도 했다.

▲1927년 11월 오슬로를 방문한 영친왕은 아문센을 초대해 극지 탐험 모험담을 들었다. 아문센은 이로부터 7개월 뒤 북극에서 실종됐다.
◇남극 정복한 아문센과 면담
그해 11월 오슬로에선 남극을 정복한 탐험가 로알 아문센을 만났다. 1911년 최초로 남극점을 다녀온 아문센은 노르웨이의 국민 영웅이었다. 아문센은 영친왕을 만나기 직전인 1926년 5월 비행선으로 북극을 횡단했다. 아문센을 초대한 영친왕은 그가 북극탐험 때 가지고 온 에스키모의 가구와 어구, 의복을 구경했다. 아문센은 영친왕을 만난 이듬해 6월 북극점을 탐험하러 간 이탈리아 원정대를 구하러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헤이그서 네덜란드 여왕 훈장 받아
영친왕은 1927년 10월 25일 헤이그를 방문해 1주일간 머물렀다. 일본이 외교권을 빼앗아간 을사보호조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기 위해 이준 열사 일행이 방문한 지 꼭 20년 만이었다. 밀사 일행과 달리, 영친왕 부부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빌헬미나 여왕이 궁중 만찬에 초대해 최고 훈장을 주면서 환영했다. 시노다는 ‘수행일기’에 이렇게 썼다. ‘화란 황실이 우리 황실에 대한 친밀한 감정도 엿볼 수 있어 대단히 감사하다.’
영친왕 일행은 ‘진주귀걸이 소녀’로 유명한 마우리츠호이스 미술관를 둘러보고 스헤베닝엔 해변을 산책했다. 1907년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평화궁(Peace Palace)도 참관했다. 이준 열사가 그토록 들어가고 싶었던 곳이었다. 영친왕의 감회는 어땠을까.

▲영친왕은 1927년 10월25일부터 1주일간 머물면서 헤이그 평화궁을 찾았다. 20년 전 고종의 지시를 받은 밀사들이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했다가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쫓겨났다. 영친왕은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건백서 들고 헤이그 찾아온 조선인
헤이그 체류 마지막 날 영친왕이 묵은 호텔에 어떤 조선인이 찾아와 면회를 요청했다고 한다. 이방자 여사가 훗날 ‘세월이여 왕조여’(정음사, 1985)에 남긴 회고다. 시노다 차관은 이 사람과 옥신각신 하다가 돌려보냈다. 영친왕이 불러서 경위를 물었더니 폴란드에서 한약방을 하는 황씨라는 조선인이 인삼이 든 약상자를 드리러왔다고 해 상자만 받았다는 것이다. 시노다는 한약이 든 약상자만 보여줬는데, 실은 한약 말고도 흰 종이에 쓴 건백서가 있었다고 했다.
‘전하여! 전하께서 구라파를 순유하시면서 각국 원수들과 친교를 맺으심은 경하할 일이오나, 한국 왕실이나 한국의 실재를 표시하지 않는 것은 심히 유감된 바입니다. 전하가 만일 고종 황제께서 한일보호조약을 무효로 만들고자 밀사를 일부러 헤이그에 보내셨던 사실을 잊지 않으셨다면.’
따끔한 쓴소리로 시작한 이 건백서는 영친왕에게 ‘나는 일본 황족이 아니고 한국의 황태자라는 것을 명확하게 선언하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일본 황족이 아니라 한국의 황태자라고 선언하라’
영친왕 부부는 시노다가 건백서를 감춰버려 그런 사실을 몰랐다. 이방자는 시노다 일기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고 했는데, 시노다가 1928년 출간한 ‘구주어유수행일기(歐洲御遊隨行日記)’를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시노다는 동경제대를 나온 변호사 출신으로 통감부 시절부터 조선에 건너와 활약했던 전문가였다. 이왕직 차관에 이어 이왕직 장관과 경성제대 총장까지 지냈다. 그런 그가 일제 시대 이런 민감한 내용을 공개했을 리는 없다.
하지만 개인 메모에 이런 기록을 남겼을 가능성은 있다. 이방자 여사 회고를 보면, 자료 없이 기억으로만 만들어내기 어려울 만큼 구체적이다.
영친왕의 유럽 여행은 그보다 한 달 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떠난 나혜석 부부의 여행과도 여러모로 비교된다. 나혜석, 김우영 부부는 그해 8월 군축회담이 진행중이던 제네바에서 영친왕이 참석한 만찬에 연 이틀 초대 받아 자리를 함께 했다. 나혜석 부부도 귀국 길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태평양을 건너는 기선 1등실을 탔다. 하지만 영친왕의 유럽 여행은 이것과는 격이 다른, 호화여행이었다.
영친왕의 유럽 여행을 주목한 연구는 거의 없다. 일본 외교관들의 극진한 안내와 유럽 군주들의 환대를 받으면서 여행을 즐긴 영친왕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일본은 왜 외교 자원을 낭비해가며 영친왕의 유럽 여행을 지원했을까.
여행 직후인 1928년 이왕직과 시노다는 약속이나 한 듯 공적, 사적 ‘순유’기록을 출판했다.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서 PDF로 열람할 수 있는 이 기록물을 찬찬히 뜯어보면 해답의 실마리가 나올 지도 모른다. 영친왕은 1년 가까운 유럽 여행에서 도대체 무엇을 얻었을까.
◇참고자료
송우혜, 평민이 된 이은의 천하, 푸른역사, 2012
김을한, 인간 영친왕, 탐구당, 1981
이방자, 세월이여 왕조여,정음사,1985
篠田治策, 歐洲御遊隨行日記, 大阪屋號書店, 1928
이왕직, 李王同妃兩殿下 御渡歐日誌, 1928
07.16 ‘골프 聖地'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라운딩 레슨,영친왕의 각별한 골프사랑
1927년 유럽 여행 때 라운딩만 최소 17번, 1930년 군자리 골프장 건립 이어져

▲영친왕은 1927년8월 29일, 30일 스코틀랜드 명문 골프클럽인 세인트앤드루스를 찾아 라운딩을 했다. 이번 주 제150회 디오픈이 열리고 있는 골프장이다. 이 사진은 당시 촬영한 영친왕의 티샷 준비 장면으로 알려져있다. 대한골프협회가 2001년 펴낸 '한국골프 100년'엔 촬영장소를 군자리골프장으로 썼으나, 이후 세인트 앤드루스 골프클럽으로 바로 잡았다./'한국골프 100년:1900~2000)
영친왕 이은(1897~1970)은 한국 골프의 기틀을 닦은 인물로 기억된다. 일제 시기 조선의 유일한 18홀 정규 골프장인 군자리 골프장(1930년 개장)의 설립 주역이기 때문이다. 영친왕은 순종 비인 순명황후묘가 있던 유릉(裕陵)터 30만 평을 무상으로 임대하고, 건설비 2만엔과 3년간 운영비 1만5000엔을 내놓아 골프장 건립을 성사시켰다. 군자리 골프장은 일제시대 조선 골프의 본산이자, 해방 후에도 한국 골프의 주요 무대였다.
군자리 이전 경성 골프장은 효창원 골프장(1921), 청량리골프장(1924)이 있었는데, 모두 이왕직(李王職)이 관리하던 왕실 능원자리였다. 일제시기 조선 왕실 사무를 맡은 이왕직이 초창기 한국 골프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얘기다. 물론, 군자리 골프장 이용객은 총독부 고위 관료(거의 일본인)나 실업가, 조선인 귀족과 일부 상류층, 외국인 사업가 등 상류사회 인사들이었다.
이 때문에 골프장에 대한 대중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골프라 하는 그 놀음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불과 수십명의 작난치기를 위하여 부근 주민의 생활을 불안케 하고 관공청의 ‘깨소린’을 소비하여 가며 구태여 이따위 짓을 할 것은 무엇인가. 저희들은 소위 ‘문화생활’이니 ‘모기생활’이니 되지 못한 수작을 하겠지만은 이와 같이 할 일이 없거든 차라리 ‘골프’터 만드는 송림 속에 백옥두나 지어놓고 한평생 놀아보자.’(자명종, 조선일보 1924년10월8일) 청량리 골프장을 겨냥했지만, 군자리 골프장에도 해당되는 얘기다.

▲1927년9월7일 리버풀 근교 홈스비(?) 골프클럽을 방문한 영친왕 일행이 코스를 둘러보고 있다. /'歐洲御遊隨行日記'
◇버밍엄 골프공 공장까지 방문
군자리 골프장 건립은 시노다 지사쿠(篠田治策·훗날 경성제대 총장)이왕직 차관이 영친왕을 설득해 성사시킨 것으로 알려져있다. 평안남도 지사를 거쳐 1923년부터 이왕직차관을 지낸 시노다는 이듬해 경성골프구락부 감사를 지낼 만큼, 골프 마니아였다. 영친왕은 왜 모후의 능이 있던 자리까지 선뜻 골프장 건설에 내줬을까. 군자리 골프장 설립을 이해하려면 영친왕의 유럽여행을 들여다봐야 한다.
영친왕 부부는 시노다를 비롯한 수행원 7명과 함께 1927년5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유럽 13개국을 여행했다. 일본 외교관들이 여행 가는 곳마다 일정을 안내하고, 유럽 각국 군주들이 면담과 만찬을 베풀고 최고 훈장까지 수여하는 등 극진하게 대접했다. 영친왕의 유럽 여행은 특별한 점이 있다. 골프 관련 일정이 자주 등장한다. 그는 수시로 골프장을 찾아 라운딩하거나 레슨을 받았고, 여의치 않으면 그냥 골프 코스를 둘러봤다. 골프공 공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시노다 차관 수행일기에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1927년 5월 유럽행 기선에 오른 영친왕 일행은 배위에서도 가끔 덱(갑판) 골프를 즐겼다. 갑판 위에 원을 그리고 그 안에 아이스하키나 하키 퍽같은 것을 집어넣는 놀이다. 이방자가 덱 골프를 즐기는 모습. 영친왕 부부는 유럽 여행중 세인트 앤드루스를 비롯한 몇몇 골프장에서 함께 골프를 즐겼다. /
'歐洲御遊隨行日記'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라운딩 레슨
1927년 8월 말 스코틀랜드를 방문한 보름간 7번 골프를 쳤다. 골프 코스를 둘러본 것만 2번이었다. 특히 8월29일 명문 골프코스인 세인트 앤드루스를 찾아 프로 골퍼와 라운딩을 하면서 레슨을 받았다. 이번 주 세계 PGA 4대 메이저대회인 디오픈이 열리고 있는 바로 그 골프장이다. 골프 마니아 시노다도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시종무관 김응선 대좌, 사토 중좌와 라운딩을 했다. 타수까지 정확하게 남겼다. 자신은 116타, 김응선은 118타, 사토는 118타 이상을 쳤다고 썼다. 영친왕이 몇타를 쳤는지는 기록하지 않았다.
이튿날인 30일 오전에도 영친왕은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골프를 쳤다. 부부가 함께 돌았는데, 출발 예정 시간이 임박해 플레이를 마치지 못했다. 시노다는 일기에 썼다. ‘도중에 중단한 것은 유감이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이 호텔에 며칠간 묵으면서 이 코스에서 골프를 하면 전하 부부도 만족하실텐데.여행 계획을 짤 때 누구도 이 곳을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게 유감이다.’
31일 글래스고 근처 로열 트룬(Troon)골프클럽에선 영친왕 일행 4명이 라운딩을 했다. 1878년 설립된 로열 트룬은 2024년 디오픈이 열리는 명문 골프장이다. 시노다는 이날 영친왕이 121타를 쳤다고 기록했다. 자신은 107타, 김응선은 124타, 사토는 137타였다.

▲1930년6월 개장한 군자리 골프장을 찾은 영친왕.(가운데). 1930년대 촬영한 것으로 알려져있다./한국골프 100년
◇유럽 여행 중 골프라운딩만 17번
파리에선 부부가 함께 라운딩했고, 로마와 니스에서도 골프를 쳤다. 니스에선 2월24일과 26일, 27일 사흘간 골프를 쳤다. 그 다음주인 3월3일 마르세유에서 귀국행 배에 올랐으니, 유럽 여행 마지막 라운딩이었던 셈이다.
영친왕의 골프 여행은 사전에 준비된 것같다. 1927년 6월5일자 시노다 일기에 따르면, 홍콩에서 승선한 영국인 골프선수 로저스에게 영친왕 부부가 레슨을 받기로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6월9일 싱가포르에 잠깐 상륙한 영친왕 부부는 오후3시 교외 골프장에서 골프를 쳤다. 시노다는 ‘일본인은 거절해왔는데, 이날 특별히 양(兩) 전하를 위해 일본인의 플레이를 허락했다’고 썼다. 영친왕은 배 위에서도 틈틈이 연습했다고 한다.
한국 골프사 연구자 조상우 호서대 교수가 시노다 일기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영친왕의 유럽 여행 중 골프 라운딩은 최소 17번, 골프장 방문은 9번이다.특히 스코틀랜드 여행 출발전인 8월23일 런던에서 골프 아카데미를 찾은 것도 눈에 띈다. 세인트앤드루스 골프장 등 잇따른 라운딩을 앞두고 대비한 듯하다. 버밍엄에선 던롭 골프공 공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영친왕,일본서 골프 입문
조상우 교수에 따르면, 영친왕은 일본 왕실을 통해 골프에 접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 다이쇼 천왕은 1922년 왕실 전용 골프장을 만들어 왕족들에게 골프를 권했고, 영친왕도 1920년 이방자와 결혼하면서 일본 왕족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한 1923년 이후 골프에 입문한 것으로 추정한다. 1925년4월 일본에서 제2회 동궁(東宮)컵 골프대회에 참가한다는 보도가 나오기 때문이다.
‘동경으로부터 수일전에 경성에 도착한 이왕직 고 사무관의 말을 들으면 이왕세자전하는 최근에 ‘골프’와 정구, 승마 등에 많은 취미를 가지시고 매일 맹렬한 연습을 하고 계신데 그 중에서도 ‘골프’에는 대단히 숙달되시어 사월초순경에 동경에서 거행되는 제2회 동궁컵 쟁패의 ‘골프’경기에 참가하실 예정이라는데….’(매일신보 1925년3월23일)
◇군자리 골프장 설립 나서
영친왕의 골프에 대한 관심은 1927년~1928년 골프 발상지인 스코틀랜드의 명문 클럽을 비롯, 유럽 곳곳의 골프 코스를 경험하면서 더 깊어졌을 것이다. 그런 관심이 군자리 골프장 설립으로 이어졌다. 영친왕은 군자리 골프장을 운영한 경성골프구락부 명예회장이었다. 1930년 6월22일 군자리 골프장 개장 다음달인 7월13일 조선을 방문한 영친왕이 골프장을 시찰한다는 예고 기사(‘御歸京중의 일정’,조선일보 1930년7월 9일)가 실렸다. 그는 주로 일본에 머물렀기에 이곳을 자주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왕실 능묘를 참배하러 귀국한 1938년 4월21일 군자리 골프장에서 골프를 쳤다는 기사 정도가 있을 뿐이다.
100년 전 조선에서 골프를 즐길 수 있는 계층은 극히 일부였다. 1930년대 경성의 골프장은 군자리 한 곳밖에 없었고, 비용도 당연히 비쌌다. 경성골프구락부 자료에 따르면, 1938년 그린피는 평일 3엔, 주말 5엔이었다. 한 해전 경성 부민관에서 열린 오페라 ‘나비부인’ 최고가 특등석 티켓이 5원, 일등석은 3원이었고, 설렁탕·냉면 한그릇에 20전 안팎이던 시절이었다.
망한 나라의 왕족이 수행원을 거느리고 1년 가까이 특급 호텔에 묵으며 호화판 유럽 여행을 다닌 게 불편한 건 사실이다. 6.10만세운동 이듬해의 일이라 더 그렇다. 지금도 가기 어려운 스코틀랜드 명문 골프클럽에서 라운딩을 즐기고, 골프공 공장까지 방문한 것도 곱게 보이지 않는다. 그런 영친왕의 골프 여행이 군자리 골프장 건설로 이어지고, 오늘날 세계를 휩쓰는 한국 골프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다.
◇참고자료
송우혜, 평민이 된 이은의 천하, 푸른역사, 2012
김을한, 인간 영친왕, 탐구당, 1981
이방자, 세월이여 왕조여,정음사,1985
篠田治策, 歐洲御遊隨行日記, 大阪屋號書店, 1928
이왕직, 李王同妃兩殿下 御渡歐日誌, 1928
조상우, ‘영친왕의 골프활동에 관한 연구’, 한국응용과학기술학회지 37-4, 2020,8
조상우, 일제강점기 골프구락부의 설립과 조선골프연맹의 창립 및 활동, 한국골프학회지 9-3, 2015
대한골프협회, 한국골프 100년: 1900~2000, 2001
07.23 100년 전 개성 청년이 본 미국,‘구두닦이도 백만장자만큼 자유누린다’
1916년 유학생 김동성이 낸 영문 ‘동양인의 미국 인상기’, ‘대통령은 민중의 하인…너무나 진실같아 믿기 어렵다’

▲1910년 미국 아칸소 주 핸드릭스 대학 중등과정에 다니던 시절의 김동성. 핸드릭스 대학 학생회 잡지에 실린 사진이다./현실문화연구

▲1910년 핸드릭스 대학 학생회지에 실린 김동성. 이 대학 중등과정에 다녔다./현실문화연구
‘뉴욕의 마천루들이 우리의 맨눈에는 길게 늘어선 산맥처럼 보였다.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고국에서 우리의 신들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유의 여신상을 향해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했다.’(‘미주의 인상’56쪽)
1909년 11월 20일 열아홉살 개성 부잣집 3대독자 김동성이 뉴욕 항에 내렸다. 영국 남부 사우샘프턴에서 출항한 미국 기선 필라델피아호(號) 2등실 승객이었다. 자유의 여신상을 마주한 김동성은 앨리스 섬에 상륙했다. 여권도 제대로 없었기에 사실상 밀입국자 신세였다. 그는 용의주도했다. 출입국 관리소의 서류 심사를 통과하기 위해 일부러 비싼 2등실을 끊었다. 상해에서 사우샘프턴까지는 3등실을 탔던 그였다. 이민국 관리에겐 쑤저우 유학 때 준비한 한문 여행증명서를 내고 입국했다.
◇신시내티 미술학교서 만화, 만평 공부
그는 1908년 쑤저우(蘇州) 동오(東吳)대학에 적을 두고 공부했다. 미국 유학을 위해 잠시 귀국해 어머니 허락을 받은 그는 상해에서 독일 상선 ‘프레드릭 친왕’호를 타고 영국으로 향했다. 홍콩, 싱가포르와 인도양, 수에즈운하를 거쳐 이탈리아, 알제리를 경유해 영국 사우샘프턴에 도착했다. 런던에서 나흘 머문 뒤 배를 타고 1주일만에 뉴욕에 도착한 것이다. 김동성의 1차 목적지는 아칸소 주 콘웨이였다. 그가 다녔던 개성의 한영서원 영어교사였던 왓슨(Alfred Washington Wasson) 소개로 왓슨 고향인 이곳의 핸드릭스 대학에서 1912년까지 중등과정을 마쳤다.
이어 콜럼버스에 있는 오하이오주립대 교육대학에 입학(1912년9월17일)한 뒤 1년만에 자퇴하고, 다시 농학으로 전공을 바꿔 1915년 12월8일까지 다녔다. 또 1915년 신시내티 미술학교에 입학, 만화·만평을 공부했다. 김동성은 귀국 후 1918년부터 매일신보와 동아일보에 만화, 만평을 게재하면서 한국 신문만화의 개척자로 평가받았다.

▲1916년 출간된 '동양인의 미국인상기'에 실린 김동성의 삽화/'Oriental Impressions in America'
◇'동양 정신의 다재다능을 드러내는 기발한 유머’
10년 가까운 김동성의 미국 유학생활에서 눈길을 끄는 사건이 있다. 1916년 미국에 대한 관찰과 비평을 담은 영문기행서 ‘Oriental Impressions In America’(동양인의 미국 인상기)를 출간한 것이다. 신시내티시(市) 아빙돈 출판사(Abingdon Press)에서 나온 36쪽짜리 책은 출간과 함께 주목을 받았다. ‘보스턴 저널’ ‘캔사스시티 스타’ ‘아이다호 스테이츠먼’같은 현지 일간지가 앞다퉈 소개한 것이다. 1912년 나온 이승만의 프린스턴대 박사논문을 제외하면, 미국에서 출간된 한국인의 첫 영문 대중서였다.
책 서문을 쓴 이도 현지 유력 신문사 신시내티 인콰이어러 편집장 W.F 윌리였다. ‘ ‘동양인의 미국 인상기’는 서구 문명의 사유와 활동과 약점을 포착하고, 이해하고, 그에 적응하는 동양 정신의 다재다능함과 민첩함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저자의 천재성은 본문과 삽화 모두에서 보이는 기발하고 건전한 유머를 통해 한층 더 강조된다.’ 김동성은 이 책에 실린 삽화를 직접 그렸다. 미술학교에서 배운 그림 실력을 발휘한 것이다.

▲동양인의 미국인상기'에 실린 김동성의 삽화. /'Oriental Impressions in America'
◇직접 그린 삽화 15점, ‘미국 인상기’에 수록
김동성의 ‘동양인의 미국인상기’는 24편의 에피소드와 삽화 15점으로 편집됐다. 이 중 5편(도미, 시가지, 도서관, 의복, 음식)을 추려 ‘매일신보’에 ‘미주의 인상’(1918년 2월23일, 26일~28일)이란 제목으로 연재했다.
청년 김동성은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미국의 대통령제를 예찬한다. ‘미국이 공화국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나라의 최고 책임자를 4년마다 선출하는 일이 가능하다고는 믿을 수없었다.’ 그는 ‘완전히 사심 없는 동기를 지닌 국민의 심부름꾼’에 불과한 대통령, 특히 ‘동등한 능력을 가진 다른 이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떠나’는 제도에 대해 감탄했다. ‘너무나 진실 같아서 믿기가 어려웠다.’
◇'구두닦이도 백만장자만큼 자유 누린다’
전제 군주 국가에서 태어나 식민지 청년 신세였던 김동성에게 미국은 ‘천상의 공화국’으로 느낄 만큼 선망의 대상이었다. ‘자유의 나라’ 미국에 대해서도 에피소드 한편을 할애했다. ‘구두닦이에게도 상류층 사람이나 백만장자만큼의 자유가 있다.’ 난민, 망명자에 관대한 미국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감탄한다. ‘폴란드인 ‚아르메니아인, 힌두교도, 그리고 우리 동포들까지, 성조기 아래서 개인적 권리를 존중받는다.’
◇'사랑의 자유 누리는 청년들…미인은 부자를 선택한다’
자격을 갖춘 여성들의 참정권 부여도 주장했다.‘몇몇 여성은 소위 자격이 충분한 정치가들보다 공직에 더 적합하다.’ 김동성은 ‘왜 남성들이 투표권처럼 사소한 것을 여성들에게 내주기를 주저하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고 썼다. 개인 의지와 상관없이, 집안 어른의 뜻에 따라 혼인이 이뤄지던 조선과 달리, 자유 연애가 보편화된 미국 사회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우리 고국에서는 부모가 젊은이들의 배우자감을 골라주므로 젊은이들은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미국은 정반대의 상황이다. 젊은이들은 대단한 자유를 누리고 있어서, 그러고 싶다면 스스로가 선택한 이와 사랑의 도피를 할 정도다.’
◇무조건적 숭미론자는 아냐
김동성은 무조건 미국을 숭앙하진 않는다. 자유 연애에 호의적이지만, 돈에 물든 미국식 사랑을 이렇게 비꼬았다. ‘이웃보다 조금 더 재산이 많은 이가 있다면, 동네에서 제일가는 미녀가 그를 먼저 선택한다.’
‘중국인은 쥐를 먹는다’는 편견과 인종차별을 고발하고, 개구리 다리(요리)도 마찬가지 아니냐는 반론도 제기한다. 김동성의 미국 사회 분석은 ‘기발하고도 건전’하며 ‘정확한 판단과 안목’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았다.
◇'신문학’ ‘라디오’ 출간…국내 언론학 선구자
김동성은 1920년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면서 첫 해외 특파원으로 북경에 나가는가 하면, 1924년 10월엔 조선일보로 옮겨와 발행인·편집인을 맡았다. 1931년 조선중앙일보로 옮겨 1936년 문 닫을 때까지 편집국장을 지냈다. 광복 후 김동성은 국내 첫 통신사인 합동 통신을 설립하고, 초대 사장을 맡았다. 1948년 정부 수립 후엔 초대 공보처장, 제2대 의원을 지냈다.
김동성은 최초 기록을 많이 갖고 있다. 한국인이 쓴 첫 언론학 저서인 ‘신문학(新聞學)’(1924)을 썼다. 경성방송국 정식 방송(1927년2월16일)을 앞두고 조선일보에 연재한 ‘라디오’(1926년12월6일~27일, 총14회)를 이듬해 책으로 냈다. 당시 뉴미디어였던 라디오를 소개한 국내 첫 연구였다. 이 때문에 학계에선 김동성을 신문학과 신문만화, 방송학의 선구자로 평가한다. 한국인이 쓴 첫 한영사전인 ‘최신선영(鮮英)사전’(1928)을 냈고, 채소 재배 기술을 정리한 ‘실제소채원예’를 연재(조선일보 1929년10월31일~1930년2월15일, 총63회)한 뒤, 1930년 같은 이름의 책으로도 출간했다. 문과, 이과 지식과 예술을 한 몸에 체현한 전방위 지식인이었던 셈이다.
◇참고자료
황호덕, ‘문화번역가 천리구 김동성, 그 동서 편력의 첫 화첩’, “미주의 인상-조선 청년, 100년 전 뉴욕을 거닐다”, 현실문화연구, 2015
박진영, ‘천리구 김동성과 셜록 홈스 번역의 역사-동아일보 연재소설 ‘붉은 실’’, 상허학보 27, 2009
Dong Sung Kim, Oriental Impressions in America, Cincinnati: The Abingdon Press,1916
김동성 글, 그림, 김희진, 황호덕 옮김, 미주의 인상-조선 청년, 100년 전 뉴욕을 거닐다, 현실문화연구, 2015
김을한, 천리구 김동성,을유문화사, 1975
김동성, ‘나의 회상기’, 사상계 120~129, 1963.4~12
차배근 등 , 한국 언론학 선구자: 김동성과 김현준, 서울대출판문화원, 2019
07.30 피카소, 마티스도 사로잡은 최승희의 월드 투어
1938년부터 3년간 뉴욕, 파리, 브뤼셀, 중남미서 150회 공연…채플린, 스토코프스키도 만나

▲1939년 파리 공연 당시의 스물 여덟살 최승희. 한국무용사 연구자 이영란 박사가 2014년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았다. 당시 유행하던 베레모를 쓰고 환하게 웃는 사진이다. 이 박사는 "평상복을 입은 이렇게 자연스러운 표정의 최승희 사진은 아주 드물다"고 했다.
‘만리 이역 양인(洋人)사이에 앉아 축음기로나마 우리 명창의 소리와 장고에 맞춰 최씨의 ‘기생춤’을 보고, 무용화한 ‘춘향전’(옥에서 신음하는 대목)을 보는 취미란 형언할 수 없는 바이다. 검무(劒舞)도 좋고, ‘서울의 무녀’도 흥미있었으나 이날 그중에서 제일 갈채받은 것은 ‘보살의 춤’과 ‘초립동이춤’이라 할까.’(‘구주에서의 최승희, 백이의(白耳義·벨기에)공연의 성공을 보고’, 조선일보 1939년3월14일)
1939년 2월6일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최승희의 무용 리사이틀이 열렸다. 엿새 전 파리에 이은 유럽 두번째 공연이었다. 공연장은 브뤼셀의 대표적 복합문화공간 ‘팔레 데 보자르’(1928년 개관)의 앙리 르 뵈프 홀(The Henry Le Boeuf Hall). 2000석 넘는 무대였다. 이날 객석엔 훗날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김재원이 있었다. 그는 독일 뮌헨대학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인 1934년9월 벨기에의 국립 헨트(Ghent)대학 칼 헨츠(Hentze)교수 조수로서 중국 고고학과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었다.

▲최승희의 보살춤. 1938년 해외공연에 나선 최승희의 주요 작품 중 하나다. 에로틱한 의상과 관능적 몸짓으로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1939년 2월 최승희의 브뤼셀 공연을 관람한 고고학자 김재원 박사도 보살춤이 현지 관객에게 갈채를 받았다고 소개했다.
◇'과연 유럽에서 통할까, 의심했지만…'
김재원은 1937년 2월 독일서 잠시 귀국한 당일, 경성 부민관에서 열린 최승희의 공연을 봤다. 친척과 지인들이 최승희 공연장으로 이끌었다. 그는 ‘솔직히 고백하면 과연 이것으로 구미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브뤼셀 공연 전부터 파리와 브뤼셀 신문에선 ‘동양 제일의 여무용가’ ‘조선 제일의 여인’ 등의 제목 아래 최승희 인터뷰와 이력, 공연 리뷰 등이 실렸다. ‘동양사람으로선 공전(空前)의 인기를 집중’했던 것이다.
김재원은 ‘조선 민속 무용을 이곳 구주인에게 이해시키도록 연출하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이에 성공한 최씨의 천분(天分)이란 비상한 것이다’라고 썼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반주자나 보조 출연자 없이 최승희 혼자 축음기 연주에 맞춰 모든 프로그램을 꾸려 단조로울 수밖에 없었다. 경비 문제로 악사나 제자들을 데리고 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샤요 공연의 성공을 보도한 조선일보 1939년 7월28일자 '구주의 인기를 독점한 파리의 최승희씨' 기사. 피카소, 마티스도 관람했다고 전했다.
◇한국 예술가 첫 세계 투어
최승희(崔承喜·1911~1969)는 1937년부터 1940년까지 3년간 미국과 유럽, 중남미를 순회하며 주요 극장에서 무용 리사이틀을 연 원조(元祖) 한류스타였다. 유럽에서만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를 다녔고, 미국과 멕시코, 브라질, 콜롬비아, 페루, 우루과이 등을 돌았다. 월간지 ‘삼천리’ 1941년 4월호에 실린 ‘최승희 귀향감상록’에 따르면, 공연횟수만 150회가 넘고, 투어 여정은 10만 마일이 넘는 긴 여행이었다. 조선 춤을 바탕으로 서양 댄스를 접목, 한국 무용의 존재감을 세계에 알렸다. 한국 예술가의 첫 구미 순회공연이었다. ‘월드 투어’란 말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현지 언론과 평단 반응도 뜨거웠다.
◇살 플레옐 공연 성공이 디딤돌
월드 투어 성공의 기폭제가 된 것은 유럽 첫 무대였던 1939년 1월31일 파리 살 플레옐(Salle Pleyel) 극장 공연이었다. 1927년 10월 개관한 이 극장은 2000석 규모로 당시 파리의 대표적 콘서트홀이었다. 2악장의 몽환적 선율이 인상적인 라벨 피아노 협주곡 G 장조가 초연(1931)된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파리의 주요 공연장으로 쓰이는 이 유서 깊은 극장에서 데뷔한 것이다. ‘한량무’ ‘천하대장군’ ‘검무’ ‘감옥에 갇힌 춘향’ 등을 올린 이 공연은 매진될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여세를 몰아 브뤼셀, 칸, 마르세유, 밀라노, 피렌체, 로마, 헤이그를 거쳐 다시 샤요 극장에서 두번째 파리 공연을 올렸다.
◇피카소, 마티스가 관람한 샤이요 공연
샤요 극장 공연(1939년6월15일)은 피카소와 마티스 등 파리의 쟁쟁한 예술가도 관람할 만큼, 주목을 받았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국내 신문에도 보도될 정도였다. ‘삼천명이나 들어가는 극장의 객석을 전부 만원시켰을 뿐 아니라 불란서의 극단, 영화계, 화단의 명사들을 일당에 모아놓고 최 여사 독특의 세련된 예술로써 끝까지 미혹시켜 이 불란서예원에 대화제를 제공하고 있다 한다. 그날 밤에 모인 명사들 중에는 피카소, 마티스, 로당상을 필두로 미셸 시몽(영화배우) 등이 있었다 한다. ‘( ‘구주의 인기를 독점한 파리의 최승희씨’, 조선일보 1939년7월28일)
최승희의 샤요 극장 공연은 몇 년 전 당시 팸플릿이 공개되면서 공연 전모를 알 수있게 됐다. 창작 한국춤 13편을 3부에 걸쳐 올렸다. 승무, 천하대장군, 옥적곡, 장고춤, 신로심불로(身老心不老), 보살춤, 한량무, 낙랑의 벽화, 유랑예인, 초립동, 옥중 춘향의 고통(춘향전), 검무, 서울의 무녀 등이다.

▲1939년7월1일자로 쓴 최승희의 육필 '무용통신'. 아사히 신문에 보낸 편지이지만, 실리지는 않았다. 최승희는 안나 파블로바가 선 헤이그 무대에서 공연하게 돼 감개무량하다고 썼다.
◇안나 파블로바가 공연한 헤이그 무대 올라
‘이번 헤이그 공연은 초만원의 성황을 이뤄 만족스럽게 생각합니다. (안나)파블로바(1881~1931)와 (라)아르헨티나(1890~1936)가 자주 춤을 췄던 같은 무대에서 춤춘 나로서는 돌아가신 대선배들의 모습이 생각나 감개무량했습니다.’
최승희가 1939년 7월1일자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아사히 신문에 보낸 기고 ‘무용통신’(신문에 실리진 않았다)이 2016년 조선일보에 공개됐다. 파블로바는 디아길레프가 창단한 발레 뤼스의 여제(女帝)로 전설적인 발레리나였다. 라 아르헨티나는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스페인 현대무용의 개척자로 꼽히는 스타다. 최승희는 샤요 공연을 마치고 헤이그로 건너와 스헤베닝언 쿠르하우스(Kurhaus) 극장 무대에 올랐다.
그해 6~8월 세계음악무용축제가 열린 이 극장에선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바이올리니스트 프리츠 크라이슬러 등의 연주가 이어졌다. 무용은 이본 게오르기, 하랄트 크로이츠베르크 등 세계적 무용가 다섯 명의 공연이 펼쳐졌는데, 최승희가 여기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최승희는 그해 4월17~20일 헤이그에서 나흘간 공연한 적 있다. 그런데 다시 초대돼 이틀간(6월말~7월1일) 무대에 섰다.
◇1939년 12월 2차대전 피해 도미
최승희의 주가는 올라갔다. 1939년 4월 말 브뤼셀에서 열린 제2회 국제무용대회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것이다. 무용가로서의 실력과 명성을 인정받은 셈이다. ‘삼천리’(1941년4월호) 인터뷰에 따르면, 1939년 가을 시즌엔 ‘발칸 제국과 이태리, 영국 등 여러 나라와의 60회 공연과 또 북 독일에서 40회의 공연을 하기로 계약까지 했었으나’ 그해 9월 전쟁이 터졌다. 세계2차대전이었다. 최승희는 ‘동란의 파리를 탈출해서 서너달 동안 피난민속에 끼어 쫓겨 다니다가 소화 14년12월에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서…’ 공연을 계속했다.
이미 유럽에서 성공을 거둔 뒤라서 그랬는지, 두 번째 도미(渡美) 공연은 전보다 더 수월했던 모양이다. 3개월간의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최승희는 1940년 5월부터 ‘중미의 멕시코와 남미의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페루, 코스타리카, 콜롬비아, 에콰도르 등 제국에서 공연해서 분에 넘치는 격찬을 받았습니다’라고 답했다. 최승희는 멕시코를 마지막으로 중남미 순회 공연을 마치고, 1940년 10월5일 동경으로 돌아왔다. 3년 6개월만의 귀환이었다.

▲최승희는 170센티미터로 알려진 늘씬한 키에 서구적 체형으로 에로틱하면서도 우아한 매력을 발산했다. 당대 조선의 대표적 신여성이자 한국 무용을 세계화한 예술가였다.
◇’에로틱하면서도 우아한 매력 발산’
최승희가 해외에서 환영받은 이유는 뭘까. 2009년 ‘최승희 무용활동에 관한 역사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윤혜미씨는 최승희의 인기비결을 이렇게 해석했다. ‘대체로 기교면에서 뛰어나지는 않지만 독특한 매력과 흡입력으로 인해 작품에 몰입하도록 하는 카리스마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면이 최승희의 인기의 비결이기도 하였다. 즉 에로틱한 매력과 동시에 우아한 매력을 무대에 발산하여 많은 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최승희는 키가 170㎝로 알려졌는데, 커트 머리의 서구적 체형은 동아시아는 물론 서양 관객이 보기에도 매력적이었던 모양이다. 윤혜미씨는 ‘최승희의 춤은 테크닉적인 면에서도 현대무용기법과 한국무용기법을 적절히 사용하였으며, 그녀의 큰 키를 살리는 긴 선과 아름다운 곡선을 강조하여 저돌적이면서 도전적인 현대적 여성미를 표현하면서 또한 에로틱한 환상을 부여한 것이 특징’이라고 했다.
◇도중하차한 미국 순회 공연의 곡절은...
최승희의 월드투어는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해외공연 첫 목적지였던 미국에선 예기치 못한 사건도 있었다. 중일전쟁으로 첨예해진 미국 사회의 친일(親日)과 배일(排日)의 전선(戰線)에 휘말린 것이다. 미국 공연을 책임진 현지 기획사가 계약을 파기해 1년 약정한 투어를 도중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귀국까지 고민했을 정도였다. 최승희의 미국투어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간 사연은 뭘까.
◇참고자료
김호연, ‘글로컬리즘의 시각에서 바라본 최승희’, 무용역사기록학 제44호, 2017.3.
최성옥, ‘해외공연이 최승희의 예술세계에 미친 영향’, 한국무용기록학 제20호, 2010
윤혜미, ‘최승희 무용활동에 관한 역사적 연구’, 중앙대 박사학위논문, 2009.8
성현경 엮음, 경성 에리뜨의 만국유람기, 현실문화, 2015
김재원,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2013
08.06 親日·反日 논란 휘말린 최승희의 미국 투어
1938년 2월 LA 공연장엔 배일 시위, 뉴욕에선 경찰이 신변보호

▲1930년대 최승희는 최고 인기를 누린 스타였다. 최승희는 1938년~1940년 미국과 유럽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세계적 무용가로 떠올랐다.
조선 춤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린 최승희의 월드 투어는 초반부터 시련을 겪었다. 1938년 초 첫 목적지인 미국에서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났기 때문이다.
1937년 12월19일 요코하마를 출발한 최승희는 1938년 1월 샌프란시스코 도착, 1월22일 샌프란시스코 카란(Curran Theater) 극장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최승희가 오빠 최승일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폭발적 인기속에 대갈채를 받아 조선 정취를 섞은 꽃다운 예술로 저네들을 완전히 도취시키고 말았다고 한다. 이같이 상항(桑港·샌프란시스코)의 첫 공연에 대 성공을 본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직컴퍼니에서는 즉시로 전 미국을 통하야 6개월동안 공연을 하기로 계약을 체결하였다고 한다.’( ‘최승희 여사 첫공연 상항서 폭발적 대환영’, 조선일보 1938년2월6일)
◇뉴욕 공연장 앞에서 ‘최승희 배격’ 삐라
메트로폴리탄 뮤직컴퍼니는 미국의 대표적 공연기획사였다. 최승희는 2월2일 로스앤젤레스 이벨극장 공연에 이어 2월20일 뉴욕 길드극장 무대에 섰다. 공연 리뷰는 대부분 호의적이었지만, 친일 논란에 휩싸였다. 최승희가 일본 문화를 선전하러 왔다고 오해한 일부 교포들과 중국인의 반감을 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뉴욕 공연 때는 경찰관이 신변보호까지 할 정도였다.
‘뉴욕 공연시에는 그들로 하여금 ‘최승희 배격’의 삐라를 입구와 길바닥에 뿌린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최승희가 일본 문화 선전하러 왔다는 이유에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가지 사정이 위험하게 됨으로 뉴욕 영사관에서는 여러 가지로 염려하여 특히 아메리카 경찰에 나의 보호를 청하여 주시어서 공연할 때 경관이 화장실을 경계하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최승희는 월간지 ‘삼천리’(제10권10호, 1938년10월호)에 이렇게 밝혔다.

▲최승희는 사진가들이 즐겨 찍는 대상이었다. 1930년대 힘차게 도약하는 최승희의 모습은 날렵하고 세련된 근대를 상징하는 듯하다.
◇파리 공연 때 日대사관서 티켓 400장 구입
해외공연에 나선 최승희는 ‘사이 쇼키’(Sai Shoki)라는 이름을 썼다. 최승희의 일본식 발음이었다. 미국은 물론 유럽 공연 팸플릿이나 관련 기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26년 도쿄의 이시이 바쿠(石井 漠·1887~1962) 무용연구소에 들어가 무용에 입문하면서부터 썼던 이름이었다. 일본 무용계에 데뷔한 최승희로서는 자연스러운 선택일 수있다. 하지만 미국에 건너온 교포들 입장에선 조선인이 일본 이름으로 소개되는 걸 곱게 보지 않았을 것이다.
최승희의 해외 공연이 일본 정부와 일본인 교민들의 지원 아래 이뤄졌다는 사실도 빠뜨릴 수없다. 최승희가 인터뷰에서 언급한 뉴욕 영사관은 당연히 일본 외무성 산하였다. 1939년 2월6일 최승희의 브뤼셀 공연을 본 후 조선일보에 기고했던 고고학자 김재원(1909~1990)은 회고록에서 흥미로운 증언을 남겼다. ‘그녀의 해외 공연은 일본 외무성이 특별한 호의를 가지고 지원해 주었다. 예를 들어 파리 공연 때는 일본 대사관에서 400개의 좌석을 사서 친일적인 프랑스 사람에게 주었으며 마르세이유 공연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내가 안막(최승희 남편)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이니 틀림없을 것이다.’ (‘박물관과 한평생’ 67쪽)

▲1937년2월 경성 부민관에서 열린 최승희 고별공연 겸 신작발표회. 조선일보 후원으로 열렸다.
◇일본 대사관, 영사관이 리셉션 열어줘
김재원은 최승희의 첫번째 미국 공연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도 적었다. ‘소문에 의하면 최승희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크게 망신을 당했다 한다. 공연 도중 우리 교포가 윗층에서 꽹가리를 두들겨대는 통에 공연장은 수라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일본을 떠날 때 ‘사이쇼기’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갔고, 미국에서도 완전히 일본 앞잡이로 행동하여 그것이 우리 교포들의 비위에 거슬렸던 것이다. '
최승희 스스로도 일본 정부가 해외 공연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삼천리’(1941년4월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계 각국을 순연(巡演)하면서 각 처의 일본대사관 혹은 일본공사관에서 대단한 호의로 ‘레세푸숀’(리셉션)을 해서 즉 소개 겸 환영회를 개최해주었는데 그때마다 그곳 유명인사와 관계의 고관, 또는 예술가들이 청하여서 소개해주므로 환담할 기회를 얻을 수있었습니다. 대개 각 대신을 비롯하여 ‘엔 몰간’이라든가 ‘헤렌 파카사티’라든가 ‘마루피나 호포리나’ 등 제씨(諸氏)들과 상면했었습니다.’
일본 대사관·영사관에서 최승희 공연을 선전하고 지원하기 위해 현지 유력층을 초대하는 리셉션을 개최하는 등 음으로 양으로 지원했다는 얘기다. 일본 입장에선 자국에서 활동하는 조선인 유명 무용가를 내세워 식민 통치의 정당성을 과시하는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최승희는 유럽에선 조선인 무용가라는 사실을 내세웠지만, ‘사이 쇼키’란 이름을 썼기 때문에 일본인으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도 있다. 아시아·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갖고 있던 유럽 관객입장에선 조선 출신 일본 무용가에 대해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을 것이다.

▲최승희는 1939년 유럽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미국으로 건너와 다시 도전했다. 이번엔 대성공이었다. 최승희의 미국 공연 소식을 전한 조선일보 1940년 4월2일자 기사
◇排日운동 한다는 소문에 시달려
김재원이 밝힌 것처럼, 1938년 2월 LA 공연 때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재미 교포들이 시위까지 벌였던 것같다. 최승희는 1938년 8월 ‘삼천리’에 보낸 글에서 ‘로스앤젤레스에서 공연할 때 극장 입구 부근에서 조선 동포 몇 사람이 배일 마크를 팔았다고 하는데. 그것을 내가 시켰느니, 또는 알고도 묵인했다느니 하는 오해’라고 썼다.
뉴욕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들은 나더러 라디오 방송으로 배일연설을 하라고 전화로 협박을 하기도 하고 공연회가 있을 때마다 회장앞에서 일화(日貨)배척의 ‘마크’를 파는 등…드디어 ‘메트로폴리탄’에서는 정치적 이유에 의하야 부득이 귀하와의 계약을 파기한다는 통지가 왔다.’(‘무용15년’, 조광 제6권1호, 1940.1)
그런데 최승희는 미국에서 반일적인 행동을 했다는 소문에도 시달렸던 모양이다. 최승희는 ‘삼천리’(1938년10월호)에 이런 소문을 해명하는 글을 썼다. ‘동경 있는 내 연구소로부터 온 편지에 의하면 내가 아메리카에서 배일운동을 한다는 소문이 떠들고 또 여러 잡지에도 꼬싶이 났다는 것을 듣고 사실무근인 그런 소문에 놀라고 있습니다. 가령 그 소문이 허튼 거짓말이라 치드래도 그 소문의 성질이 나에게는 중대한 것이고 또 소문만이라도 그렇게 났다면 나를 길러준 동경 여러분께 미안하여 그냥 가만있을 수가 없어서 여기 대사관과 로산젤쓰의 영사관으로부터 사실무근인 것을 외무성에 보고하였습니다.’
◇광복 전 일본군 위문공연에 동원
최승희는 친일(親日)과 반일(反日)의 첨예한 틈바구니에 끼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신세였다. 조선 춤을 세계에 알린 공로를 인정받기는커녕 친일, 또는 반일 인사로 몰릴까봐 전전긍긍했다. 일본 외무성과 재미 일본인 사회의 지원을 받은 데다 어린 딸과 연구소를 도쿄에 두고 온 최승희는 반일 캠페인에 동조할 처지도 아니었을 것이다. 배일(排日) 정서에 놀란 메트로폴리탄 뮤직 컴퍼니는 계약을 파기했고, 최승희는 또 다른 미국의 유수 기획사인 NRC 아티스트 서비스와 추계 공연을 계약했으나 이마저 제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최승희는 일류호텔에서 삼류호텔로, 다시 흑인들이 사는 아파트로 옮겨다녔고, 미술가들의 모델 노릇으로 돈을 벌어야할 만큼 궁지에 몰렸다. 유럽 투어 성공은 사면초가에 몰린 최승희의 역전타였다. 이 성공에 힘입어 두번째 미국 공연은 별다른 시비 없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아메리카의 봄 무대에, 현란 춤추는 朝鮮’(1940년1월27일) ‘白衣의 발레리나, 양키팬을 풍미’(1940년4월2일, 이상 조선일보). 미국 공연의 성공을 알린 기사들이 이어졌다. 최승희는 중남미 공연까지 마친 뒤 1940년 12월 도쿄로 돌아왔다.
해외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최승희를 맞은 건 전쟁이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치달은 일본이 해외에서 인정받고 돌아온 최승희를 그냥 둘 리 없었다. 최승희는 일본군 위문 공연에 불려다녔고, 광복후 예술계 친일인사로 몰렸다. 1946년7월 월북한 최승희는 한때 북한을 대표하는 무용가로 대접받았으나 1967년 숙청당해 1969년 8월8일 사망했다. ‘중국으로 도망가려다 피살됐다’ ‘국제 스파이로 몰려 처형됐다’ ‘수용소에서 자살했다’…최승희의 죽음에 대해 이런 저런 증언이 쏟아졌으나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다. 비참한 종말이었다.
◇참고자료
최승희, ‘미국통신’, 삼천리 제10권10호, 1938.10.
최승희, ‘무용15년’, 조광 제6권1호.1940.1
박노경, ‘춤의 구미순례 마치고 도라온 최승희의 회견기’, 조광 제7권1호, 1941. 1
‘최승희, 귀향감상록’, 삼천리 제13권제4호, 1941.4
김재원,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2013
윤혜미, ‘최승희 무용활동에 관한 역사적 연구’, 중앙대 박사학위논문, 2009.8
정병호, 춤추는 최승희-세계를 휘어잡은 조선 여자, 뿌리깊은 나무, 1994
08.13 권력층 개입한 신당리 15만평 특혜 분양, 경성을 뒤흔들다
日 시마 도쿠조, 경성부 소유지 헐값에 분양받아…총독부 2인자 배후 說

▲시마 도쿠조 특혜 분양 스캔들/조선디자인랩 이연주
‘경성부가 근대 도시로 발전되어 감을 따라 부익부 빈익빈한 현상이 얼마나 날로 심하여지는지 이삼년전까지 수천에 불과하던 극빈민이 지금 와서는 동대문서 관내에 있는 빈민만 하여도 거의 일만이천으로 헤아리게 된 것만 보아도 짐작할 것이다.’
1929년 3월18일자 조선일보 사설 ‘경성부 빈민굴’은 급속한 도시화로 시내에서 밀려난 빈민(貧民)을 겨냥했다. 당시 이들을 토막민(土幕民)이라고도 했는데, 하늘만 겨우 가린 토막집에 산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었다.
사설은 경성부(京城府·현 서울시)가 주관하는 부영(府營) 주택과 직업 소개소는 물론 빈민을 대상으로 한 의료 시설을 마련하자는 제안을 한 뒤, ‘일 개인 도덕장(島德藏)의 토지를 위하여 10만원을 제공하는 경성부’가 이런 의료시설을 마련치 못할 이유가 있느냐고 따졌다. 당시 총독부 고위층이 연루된 권력형 비리인 신당리(新堂里·현 신당동) 토지분양 사건 주역을 겨냥한 것이다.

▲1928년 신당리 토지 15만평을 헐값에 분양받은 일본인 시마 도쿠조. 오사카 주식취인소 이사장을 지낸 실업계 거물이었다.
◇도로 개설까지 약속하고 신당리 15만평 헐값 분양
이 사설에 나오는 ‘도덕장’은 오사카 부호 시마 도쿠조(1875~1938)를 가리킨다. 100년 전 경성을 떠들썩하게 한 신당리 토지 분양 사건의 장본인이다. 시마는 1928년 신당리 토지 15만 평을 헐값(평당 3원20전)에 분양받았다. 총 대금 46만6000원이었다. 신당리는 서소문과 함께 조선 시대 상여가 나가는 광희문 밖에 자리잡았다. 공동묘지와 일본인 화장장이 있고, 무당들이 많이 모여살던 곳이기도 했다. 경성이 과밀화되면서 신당리는 1920년대 주택지 후보로 떠올랐다. 이 노른자위 땅을 일본인 사업가 시마 도쿠조가 차지한 것이다.
◇'40만 부민(府民)보다 일개 도덕(島德)이 무서운 모양’
경성부는 시마에게 땅을 분양해주면서 장충동에서 신당리로 가는 동서도로(현 동호로)와 신당리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도로(현 다산로)를 1929년 5월25일까지 개설해주기로 약속했다. 땅을 특혜 분양해주는 것도 모자라 경성부 예산으로 도로 개설까지 보장한 것이다. 이 도로 개설 예산 9만9440원이 1929년 예산안에 포함돼 부(府) 협의회에 올라온 게 앞의 사설이 나간 1929년 3월이었다. 부민들이 낸 세금으로 시마가 사들인 땅에 도로를 개설해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여론이 들끓었다.
신석우 사장·안재홍 주필이 이끌던 조선일보는 연일 ‘신당리 토지문제’(4월2일자) ‘자승자박의 신당리 토지문제’(4월21일자)같은 사설로 권력형 특혜분양 의혹을 쏟아냈다. ‘사십만 부민(府民)보다는 일개 도덕(島德)이 무서운 모양’이라며 경성부를 드러내놓고 조롱하는 ‘팔면봉’ (3월16일자)까지 실렸다. 조선일보 뿐 아니라 동아일보는 물론 일본어 신문 ‘조선신문’까지 들고 일어나 연일 경성부, 그리고 배후의 총독부를 향해 집중 포화를 날렸다. 조선인 빈민들은 열악한 토막에서 굶주리는데, 식민지 조선의 공적 자금까지 쌈짓돈처럼 마음대로 끌어쓰는 악덕 실업인과 그를 비호한 권력에 대한 반감이 폭발했다.
◇도둑 연상시키는 ‘도덕 도로’로 불려
부 협의회가 반발하고 여론이 들끓는 바람에 계약 당시 경성부윤이던 마노(馬野)가 공개 사죄까지 하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도로 개설은 예정대로 착공됐다. 시중에선 이 도로를 ‘도둑’을 떠올리는 ‘도덕 도로’라고 불렀다고 한다. 시마는 닳을 대로 닳은 사업가였다. 도로가 거의 완성되어 가는데도 선금 13만원만 치르고, 잔금(?) 23만원(10만원은 어떻게 지불됐는지 불명확하다)을 내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경성 부윤이 오사카까지 시마를 찾아가 담판을 지었으나 성과가 없었다. 시마는 1930년 11월, 신당리 토지를 조선은행에 담보로 잡히고 돈을 빌려 대금을 치렀다. 그런데 그는 대금 지불은 물론 등기도 하지 않은 신당리 땅을 주택용지로 분할, 평당 15원~30원을 받고 팔아넘겨 거액을 챙겼다고 한다. 일본판 봉이 김선달이었다.
결국 이 땅을 동척이 1931년 조선도시경영주식회사를 계열사로 설립, 시마가 샀던 토지를 매입해 주택지 개발사업을 본격화했다. 신당리엔 당시 최고 인기였던 문화주택 단지가 대거 들어섰다.
◇'시마는 정무총감 정치 자금줄’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기자였던 김을한(1906~1992)은 회고록 ‘인생잡기’(일조각,1956)에서 신당동 토지불하 사건의 내막을 이렇게 소개했다. 야마나시 한조(山梨 半造) 총독이 1927년 12월 부임하면서 2인자 정무총감에 이케가미 시로(池上四郎)를 발탁했다. 이케가미는 순사 출신으로 오사카 시장까지 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 때 소문으로는 이케가미 총감이 오사카 시장으로 있을 때 시마 도쿠조라는 유명한 고리대급업자로부터 정치자금을 많이 얻어 쓴 일이 있었는데 시마는 이케가미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되자 오랫동안 대어 준 정치자금을 받아 낼 때는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하여 정무총감의 뒤를 쫓아서 서울에 왔으며 이케가미는 그의 나름대로 지금까지 신세진 것을 갚으려고 비밀히 경성부윤 마노(馬野精一)에게 부탁해서 장충단 일대의 광대한 부유지를 시마에게 거저 주다시피 한 것이다.’
경성부가 시마에게 도로 개설을 약속하거나 경성 부윤이 독촉하는데도 대금을 납부하지 않고 버틴 데는 그만한 연줄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시마 도쿠조는 주식 브로커 출신으로 오사카 주식취인소 이사장(1916), 한신전철 사장(1927), 일본휘발유회장, 상해 취인소 소장, 천진·한구 취인소 이사장 등을 지낸 인물이다. 1937년 배임 횡령 사건으로 징역 5년형을 받고 항소하던 중 병사했다고 한다. 권력형 부패 스캔들 장본인다운 최후였다.
◇참고자료
김을한, 인생잡기,일조각,1956
최병택, 예지숙, 경성리포트, 시공사, 2009
이경아, 경성의 주택지, 도서출판 집, 2019
08.27 최멍텅과 윤바람의 허튼 수작…최초의 신문 네컷 연재만화
‘멍텅구리’그린 노수현, 근대 산수화 거장으로 성장

▲나쁜 마음만 먹어도 징역 10년'이라며 치안유지법을 비판하는 1925년5월17일자 '멍텅구리'. 일본은 1925년5월12일 관동대지진 이후 불안한 시국을 수습한다며 공산주의를 탄압하는 치안유지법을 시행했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수단으로악용됐다.
“일전부터 새로 법이 났는데 나쁜 마음만 먹어도 10년 징역이야,쉬-.”
키다리 최멍텅이 사기로 목돈 버는 꿈 얘기를 하자, 땅딸보 친구 윤바람이 손사래친다. 해설엔 ‘치안유지법’이 나온다. ‘꿈에 사기 자랑을 하던 멍텅이는 새로 생긴 치안유지법에나 걸리지 아니할까 눈이 둥그래…’ 조선일보 1925년 5월17일자에 실린 네컷 연재만화 ‘멍텅구리-연애생활’이다.
점심 먹으러 나갔던 최멍텅과 윤바람이 ‘나쁜 마음만 먹어도 10년 징역’이라며 치안유지법을 대놓고 비판하는 만화다. 치안유지법은 일본이 관동대지진 이후의 혼란을 막는다며 1925년5월12일 시행했다. 공산주의 단속을 내세웠지만 독립운동 탄압에 이용된 악법이었다.
신문 만화의 역사는 구한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애국계몽단체 대한협회가 1909년 기관지로 발행한 ‘대한민보’에 관재(貫齋) 서화가 이도영(1884~1933)이 말풍선이 포함된 만화를 그린 게 효시로 꼽힌다.

▲심산 노수현은 심전 안중식의 직계 제자로 산수화에 뛰어난 정통 화단 엘리트였다. 고희동 소개로 1921년 동아일보에 입사한 심산은 1924년 조선일보에 옮겨와 '멍텅구리'를 그렸다. 1930년대 언론계를 떠난 심산의 서른여덟살 때 모습./ '심산 노수현 화집'
◇네컷 만화 시작한 천리구 김동성
1920년대는 네컷 만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대였다. 조선·동아일보가 창간되면서 요즘 같은 네컷 만화시대가 열렸다. 미국 신시내티 미술학교에서 만화·만평을 공부한 천리구(千里駒) 김동성(1890~1969)이 깃발을 들었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에 합류한 김동성은 창간 첫달인 4월11일 네컷 만화 ‘이야기 그림이라’를 실었다. 하지만 간헐적으로 게재했던 모양이다.
독립운동가 신석우는 1924년 9월 조선일보를 인수해 이상재 사장을 추대하고 ‘혁신 조선일보’를 내걸었다. 발행인으로 옮겨온 김동성은 이상협 편집고문과 함께 네컷 연재만화를 기획했다. 1924년10월13일 연재를 시작한 ‘멍텅구리’다. 국내 첫 신문 네컷 연재만화로 폭발적 인기를 누린 기획이다. 얼마나 인기였든지 1926년 만화 작품으론 처음 반도키네마에서 영화화해 개봉했다.
멍텅구리가 인기를 끌자 각 신문에 ‘허풍선이’(1925년1월) ‘엉터리’(1925년8월, 이상 동아일보),’구리귀신’(1925년6월) ‘마리아의 반생’(1925년10월, 이상 시대일보) 등 연재만화가 잇달아 등장했다. 미술사·만화사 분야에선 ‘멍텅구리’에 대해 연구논문을 쏟아낼 만큼 주목한다. ‘한국 만화사의 기념비적 작품’(정희정, ‘만화 멍텅구리로 본 근대 도시, 경성의 이미지’, ‘미술사논단’ 통권43호,2016)’첫 네칸 만화일뿐 아니라 대중적 인기를 얻은 최초의 만화’(장하경, ‘멍텅구리의 이야기 기법’, ‘한국학보’119, 2005)로 평가한다.

▲노수현(앞줄 가운데)이 1926년 중외일보로 옮기자 청전 이상범(앞줄 왼쪽)이 '멍텅구리'를 이어받아 그렸다. 오른쪽은 화가 이승만. 뒷줄 왼쪽은 안석주 학예부장, 오른쪽은 파인 김동환.
◇2년 10개월간 장기 연재한 ‘멍텅구리’
‘멍텅구리’는 충청도 부농 아들이자 멍청한 키다리 최멍텅과 그의 친구인 땅딸보 윤바람이 평양 출신 기생 신옥매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에피소드가 중심이다. 헛물켜기, 연애생활, 자급자족, 가정생활, 세계일주, 꺼떡대기, 가난사리(살이), 사회사업, 학창생활, 또나왔소 등 1927년 8월20일까지 약 2년10개월간10편의 이야기로 700여회에 걸쳐 연재됐다. 중단 6년 뒤인 1933년 봄 재개될 만큼 잊을 만하면 찾는 인기 코너였다. 2월26일 다시 등장한 ‘멍텅구리’는 김인화가 그렸는데, 몇 달 연재되다가 7월쯤 지면에서 사라졌다.
◇오락만화 넘어 총독부 비판
‘멍텅구리’는 당초 ‘코믹만화’ ‘오락만화’로만 알려졌다. 하지만 정희정의 연구는 ‘멍텅구리’가 총독부 정책을 직간접적으로 강하게 비판했다고 지적한다. 앞의 치안유지법 비판이 대표적이다. 1925년 을축대홍수 때 실은 만화도 주의깊게 봐야한다. 최멍텅과 윤바람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순사가 된다. 마침 수해가 난 뚝섬에 나가 구조활동을 했다. 최멍텅은 경찰부에 지원을 청했으나 사람이 없다는 말에 화가 나서 모자를 내던지며 순사를 그만두겠다고 한다. 당시 일본 공병대 50여 명이 뚝섬 주민을 구호하려다 신용산 둑이 터져 일본인 거주 지역으로 물이 넘친다는 소식에 방향을 틀었다는 소식을 빗댄 것이다.(조선일보 1925년 7월25일)
‘멍텅구리’에는 주인공외에도 순사가 자주 등장한다.주인공을 때리거나 부랑자로 파출소에 가두고, 군중과 만세 소리에 놀라 해산을 명령하거나 부당한 공권력을 행사한다. 이 때문에 순사는 식민지 정부의 폭력 자체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정희정은 이런 현실 비판 때문에 1927년 ‘멍텅구리’를 비롯, 대다수 일간지의 네칸 만화 연재가 중단됐는데 여기엔 총독부의 언론 탄압이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

▲멍텅구리'는 1925년7월25일자에 을축대홍수를 다뤘다. 경찰부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해 순사를 때려치우겠다며 모자를 내동댕이치는 장면이다. 당시 일본 공병대 50여명이 뚝섬 주민을 구호하려다 신용산 둑이 터져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강물이 넘친다는 소식에 방향을 돌린 사실이 알려져 조선인의 분노를 촉발했다.
◇정통 산수화가 노수현, 네컷 연재만화 주역
‘멍텅구리’를 그린 사람이 전통 산수화 대가인 심전(心田) 안중식(1861~1919) 제자인 심산(心汕) 노수현(1899~1978)이란 사실도 흥미롭다. 노수현은 스승 안중식의 아호 앞글자를 물려받을 만큼, 일찌감치 정통 화단의 주역으로 떠오른 인물이다. 최초의 서양화가로 알려진 춘곡 고희동이 그를 추천해 동아일보에 들어갔다가 1924년 이상협이 본사로 올 때, 함께 옮겼다. 심산은 해방 후 서울대 미대 교수를 지낸 근대 화단의 거목이다.
◇'편집국 현상 모집하듯 만화 아이디어 모아’
언론인 조용만은 ‘멍텅구리’ 제작 과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이상협이 아이디어를 내고 심산이 그림을 그렸는데 처음에 이상협은 심산이 동양화 출신이라 양복장이 서양 풍속의 그림을 잘 그릴까 하고 염려했었는데, 양복 입은 키 큰 ‘멍텅구리’와 키가 작고 보 타이를 맨 ‘윤바람’을 썩 잘 그려 이 만화 때문에 멍텅구리란 말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30년대 문화예술인들’232쪽)
1920년대 후반 조선일보 기자를 지낸 김을한은 이상협이 중외일보로 옮겨간 뒤엔 민세 안재홍이 아이디어를 맡아서 냈다는 회고를 남기기도 했다. 노수현은 훗날 “편집국 직원간에 현상 모집하듯 해서 채택된 안을 내가 그렸을 뿐”(‘멍텅구리에서 두꺼비까지 만화 50년’, 조선일보 1970년3월5일)이라고 회고했다. 그래서 만화계에선 멍텅구리를 공동 창작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노수현의 솜씨가 아니었다면 ‘멍텅구리’가 그만한 인기를 누리진 못했을 것이다.
노수현이 1926년 퇴직하자 심전 문하의 동료 청전(靑田) 이상범(1897~1972)이 뒤를 이어 ‘멍텅구리’를 그렸다. ‘한국화 6대가’에 드는 근대 화단 거장들이 신문 네컷 만화를 번갈아 맡은 것이다.

▲멍텅구리는 중단 6년만인 1933년 2월 다시 조선일보에 등장할 만큼 인기 코너였다. 조선일보 1933년 2월 23일자 사고
◇위스키 한 병 단숨에 들이킨 호주가
노수현은 말술을 마시는 호주가로도 이름났다. 매일신보 기자 조용만이 ‘심산의 주량은 대단해 두꺼비 파리 잡아먹듯 아무 말없이 잔을 넙죽넙죽 받아 마시는 데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고 회고할 정도다. 한 번은 간송 전형필 생일에 그 집에서 식사를 하는데, 조니 워커 새 병을 따더니 줄줄줄 한 숨에 들이켰다고 한다.
화단 후배인 월전 장우성도 심산을 이렇게 기억한다. ‘다정하고 소박하고 스스럼 없는 성격으로 동료, 후배선배들과도 잘 어울렸다. 그의 주우(酒友)로는 노산(이은상), 횡보(염상섭), 석송(김형원) 등이 주축이었으며 당주동 목천집이 단골이었다…특히 호주가로 알려진 심산은 한번에 적어도 3되는 마셔야 비로소 기운이 나곤 했다. 자리를 함께 했던 주우들은 겁에 질려 도주하는 것이 예사였다고 한다.’
노수현은 1926년 중외일보에 옮겨가 ‘연애경쟁’이라는 만화를 연재했으나 3년 만에 언론계를 떠나면서 더 이상 만화를 그리지 않았다. 1929년 서화협회 감사로 취임한 뒤 명산을 순례하며 산수화를 그리는 데 전념했다. 심산은 청전과 함께 당대를 대표하는 산수화 거장으로 불릴 만큼 성공했고, 서울대 교수에 예술원 회원까지 지냈다. 하지만 만년에 술벗들을 만나면 “뭐니뭐니해도 신문 기자 때가 좋았어”하며 웃었다고 한다.

▲시사만화가 안의섭이 대선배 노수현을 찾아갔다. 조선일보 1970년 3월5일자
◇참고자료
정희정, ‘만화 멍텅구리로 본 근대 도시, 경성의 이미지’, ‘미술사논단’ 통권43호,2016
서은영, ‘코믹스의 기획과 대중화: 신문연재만화 ‘멍텅구리’를 중심으로’, ‘서강인문논총’31, 2011
장하경, ‘멍텅구리의 이야기 기법’, ‘한국학보’119, 2005
대한언론인회, 한국언론인물사화 8·15전편 下, 1992
손상익, 한국만화통사 상, 시공사, 1999
윤영옥, 한국신문만화사:1909-1995. 열화당, 1995
최열, 한국 만화의 역사, 우리 만화의 발자취 일천년, 열화당, 1995
김을한, 인생잡기,일조각,1989
조용만, 30년대의 문화예술인들, 범양사,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