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 2022-08/ 동아일보
08-01(월) 일자리 풍년, 기이한 불황

“매달 40만 개 일자리가 창출되는 지금은 경기침체가 아니다.”(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
“물가를 잡으려면 5% 이상 실업률이 5년은 이어져야 한다.”(래리 서머스 전 미 재무장관)
최근 미국 전현직 재무장관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기침체(recession) 논쟁의 핵심 쟁점은 일자리다. 각각 조 바이든, 빌 클린턴의 민주당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맡은 둘은 같은 ‘신케인스 학파’로 경제를 보는 시각이 같은데도 이 부분에선 한 치 양보 없이 대립 중이다.
▷2분기 미국의 경제성장률이 1분기에 이어 마이너스로 나타나자 논란은 더 치열해졌다. 통상 ‘2개 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률’을 경기침체로 보지만 바이든 정부와 옐런 장관은 실업률을 근거로 부인하고 있다. 미국 실업률은 지난달까지 넉 달 연속 3.6%다. 시장경제 체제에서 4% 미만 실업률은 이직 준비자의 마찰적 실업만 존재하는 완전고용 수준으로 받아들여진다.
▷미국 경기침체를 공식 판정하는 전미경제연구소(NBER)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12차례 경기침체에서 매번 실업률은 6% 이상으로 오르고 근로자 임금은 하락했다. 반면 지금은 기업이 인력 부족을 호소하고 임금이 오르는데 침체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이 기이한 현상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고용이 충만한 경기하강(jobful downturn)’이라고 표현했다.
▷수수께끼를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코로나19 이후 풀린 유동성 때문에 저축, 자산가치가 늘어난 미국인이 일을 덜 한다는 설, 베이비부머들이 인생관을 바꿔 서둘러 퇴직해 근로자가 부족하다는 분석, 긴축 속도가 너무 빨라 실물경기와 시차가 생겼다는 설명 등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고용 없는 성장’의 정반대지만 ‘고용과 성장이 따로 논다’는 면에선 유사한 현상이란 해석도 있다.
▷한국도 사정이 비슷하다. 식당, 카페들은 종업원을 못 구해 영업시간을 줄이고, 알바 중개 플랫폼에는 ‘사람을 찾아 달라’는 주문만 쌓이고 있다. 중소기업 생산직, 알바 일자리는 MZ세대 눈높이에 맞지 않고, 원할 때 필요한 만큼 일할 수 있는 배달 일자리 등이 늘어난 게 원인으로 꼽힌다. 지난 정부가 만든 세금알바 등도 경기와 실업률의 괴리를 키웠다.
▷경기침체냐 아니냐, 침체 강도는 깊을까 얕을까 의견들이 분분하지만 대다수 전문가들이 동의하는 건 저성장과 일자리 호황은 동시에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점이다. 특히 자신들에게 유리한 통계를 골라 내놓으며 경제 현실을 호도해온 과거 정부들의 행태를 고려하면 일자리가 넘쳐나는 경기침체에 헛된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8-02 남남끼리 가족

결혼과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았더라도 함께 산다면 가족일까, 아닐까. 남남이지만 함께 주거를 하면서 경제 단위로 기능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 친족이 아닌 가족을 꾸린 인구가 지난해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100만 명을 넘어섰다. 이러한 새로운 가족의 형태가 늘어나면서 전통적인 가족의 정의가 도전받고 있다.
▷1인 가구는 지난해 전체 가구의 33%를 돌파해 20년 만에 두 배가 넘게 증가했다. 비(非)친족 가족은 1인 가구 증가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봐야 한다. 우리나라 1인 가구는 학업과 직장, 이혼과 사별 등 선택의 여지없이 혼자 살게 된 비율이 높다. ‘혼자 살고 싶어서’ 자발적으로 1인 가구를 택한 비율은 1인 가구가 된 전체 원인 중 16.2%에 불과하다(통계청, 2021 통계로 보는 1인 가구). 외로움도 덜 수 있고, 규모의 경제도 가능하니 1인 가구로서는 동거가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비혼 남녀나 동성 친구끼리 같이 살거나, 어르신끼리 서로 돌보며 노후를 보낸다. 공유주택같이 공간만 합쳐 사는 경우도 있다.
▷동거인이 결혼한 배우자보다 만족도가 높다는 실태조사 결과도 있다. 2020년 기준으로 동거인에게 만족한다는 비율은 63%였는데, 이는 배우자 만족도(57%)보다 6%포인트 높은 것이다. ‘남보다 못한 가족’이 현실이란 얘기다. 아무래도 가족 관계에서 오는 책임이나 의무에서 비켜나 있고, 남남이다 보니 개인을 보다 존중하게 돼 갈등이 덜하다고 한다.
▷우리 사회 인식도 빠르게 바뀌고 있는 것 같다. 국민 10명 중 7명은 ‘혼인이나 혈연관계가 아니어도 생계와 주거를 공유하면 가족’이라는 데 동의했다(여성가족부, 2020년 가족다양성에 대한 국민인식 조사). 그러나 법으로 정한 가족의 정의가 협소하다 보니 비친족 가족은 청년대출, 신혼부부청약, 아동수당 등 각종 제도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 1인 가구가 소득은 낮고 의료비 지출은 많은데도 소외돼 있는 것이다. 누구를 가족으로 볼 것인가를 합의하는 데 진통이 따르겠지만 언제까지 이들을 제도권 밖에 둘 수는 없다.
▷40대 들어 친구와 동거를 시작한 경험담을 쓴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의 작가 김하나, 황선우 씨.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보통의 가족과 별반 다르지 않다. 빨래 개기 같은 가사 분담으로 티격태격하고, 집값 대출을 갚기 위해 고민한다. 이들은 결혼은 아름다운 일이라는 전제 아래 ‘그렇지 않더라도 어떤 시절을 서로 보살피며 의지가 된다면 또한 충분히 따뜻한 일 아닌가’라고 묻는다. 그러고는 ‘개인이 서로에게 기꺼이 그런 복지가 되려 한다면 법과 제도가 거들어주어야 한다’고 했다. 결혼과 출산을 하고 싶어도 포기하는 청년들이 늘고 있는 세태를 생각하면 더욱 귀담아들을 말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8-03 김건희 논문, 국민대의 결론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국민대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박사과정 때인 2007년 한 학술지에 실은 논문의 제목은 ‘온라인 운세 콘텐츠 이용자들의 이용 만족과 불만족에 따른 회원 유지와 탈퇴에 관한 연구’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적당한 영어 번역으로 ‘A Study on user‘s retention or withdrawal of membership by satisfaction or dissatisfaction in online fortune contents’ 등이 제시돼 있다.
▷논문에 나온 영어 제목은 ‘Use satisfaction of users of online fortune and member Yuji by dissatisfaction and a study for withdrawal’이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게 돼 있다. 회원 유지의 유지는 고유명사처럼 Yuji로 번역됐다. 맨 앞에 나와야 하는 study는 중간에 들어가 있다. 유지와 탈퇴, 만족과 불만족은 상관어인데도 서로 관련 없는 말인 듯 떨어져 있다. 지도교수가 공저자로 참여한 논문인데도 이렇다.
▷김 여사가 같은 해 같은 학술지에 실은 또 다른 논문의 제목은 ‘온라인 쇼핑몰 소비자들의 구매시 e-satisfaction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에 대한 연구’다. 논문에서 영어 제목은 ‘The Analyze of the affecting factors…’로 시작한다. ‘연구’ 대신 ‘분석’이란 단어를 쓸 수는 있다. 그러나 명사 Analysis로 써야 할 곳에 동사 analyze를 명사형처럼 썼다.
▷국민대는 2008년 김 여사의 박사학위 논문 ‘아바타를 이용한 운세 콘텐츠 개발 연구’를 포함해 이 세 논문은 연구부정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그제 결론을 내렸다. 국민대는 당초 검증 시효가 지났다고 재심사를 거부하다가 문재인 정부 교육부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뒤늦게 재심사에 착수했다. 결론은 연구부정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할 때 드는 상투적 이유를 몇 가지 들기는 했으나 그것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보다는 검증 시효 5년이 지났다는 점에 초점을 맞췄다.
▷김 여사는 공직에 몸담은 사람이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그런 사람을 상대로 표절 여부를 정색하고 따지는 게 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의 학술지 논문들은 연구부정이냐 아니냐를 따지기 전에 연구자로서의 최소한의 성실성조차 갖추지 못했음을 액면으로도 보여준다. 지도교수가 공저자로 참여한 논문의 지도마저 엉터리로 한 대학이 학위논문 지도나 심사는 제대로 했겠는가. 국민대가 오점을 남기지 않으려다 지워지지 않을 오점을 남기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8-04 되살아난 주택연금 인기

서울 30평대 아파트에 사는 A 씨는 5년 전만 해도 주택연금에 들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가 당시 6억 원짜리 집을 맡긴 뒤 죽을 때까지 매달 받을 수 있는 연금은 185만 원 정도였다. 집을 물려받을 자녀들의 눈치를 보면서까지 가입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올 들어 주택연금에 가입했다. 5년 만에 집값이 2배가 되면서 연금 지급액이 297만 원으로 뛰었기 때문이다. ‘자녀 눈치’ 걱정을 접어둘 만한 액수였다.
▷주택연금은 최초 가입 때 평가한 주택 시세에 따라 평생 받을 연금액이 확정되는 구조다. 집값이 최고점일 때 가입하는 게 유리하다. 고령층 주택 보유자 가운데 A 씨처럼 집값이 오를 만큼 올라 이제는 하락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사람이 늘면서 주택연금 가입 바람이 불고 있다. 그 결과 올 상반기 주택연금 가입건수는 6900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6% 이상 늘었다. 5월 말 기준 누적 가입자 수는 9만7600명으로 5년 전의 2배 수준이다.
▷보통 주택연금 가입자 추이는 집값 흐름과 거꾸로 간다. 지금처럼 집값이 정점을 찍었다고 보는 사람이 많을 때는 가격이 떨어지기 전 ‘연금 막차’를 타려는 수요가 몰린다. 반면 집값이 계속 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일 때는 되레 중도해지하려는 사람이 많아진다.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던 2020년과 지난해에는 각각 2931명과 4121명의 가입자가 중도 해지했다. 해지 비용이 만만치 않지만 그때만 해도 많은 사람이 집을 팔아 차익을 남기는 게 낫다고 봤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집값만 보고 가입을 결정하는 건 아니다. 한 주택연금 실태조사에서 가입자들은 주거 문제를 걱정하지 않으면서 노후 생활비를 조달하고 싶다는 점을 가입 이유로 들었다. 자녀에게 손 벌리지 않으면서 삶의 질을 높이고 싶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택연금에 가입한 사람들은 ‘장롱예금’에 돈을 쌓아두는 통상의 고령층과 달리 씀씀이가 큰 편이다. 다만 소비성향이 강한 주택연금 가입자들이 원하는 수급액은 월 200만 원대인 반면 전국 가입자의 평균 수급액은 월 112만 원으로 괴리가 있다.
▷수명이 길어지면서 ‘노후 리스크’가 부모만이 아니라 자녀의 문제가 된 지 오래다. 주택연금에 들면서 자녀 눈치 볼 일은 예전보다 줄었다. 하지만 연금에 가입하려는 사람은 경기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집값 추이를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데다 고금리 시기 월 지급액이 줄어들 가능성까지 고려해야 한다. 연금을 받으려고 자신의 집을 담보로 맡기는 결정은 개인적으로 여전히 어려운 문제다. 그마저도 집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고민이다.
홍수용 논설위원 legman@donga.com
08-05 광화문광장 재개장

도로 한가운데 텅 빈 섬 같았던 광화문광장이 나무가 늘어선 공원으로 단장하고 내일 재개장한다.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광장을 옮기는 대신 면적이 두 배(4만300m²)로 늘어났다. 212m 길이 역사물길과 분수를 만들고 그 주변에 시민들이 쉴 수 있는 자리를 배치했다. 역사성을 되살리는 데도 공을 들였다. 조선시대 사헌부 터와 배수로 등 발굴된 유구, 궁궐 앞 넓은 단을 뜻하는 월대를 원형대로 복원한다.
▷광화문 앞길은 조선시대에 육조(六曹)가 도열해 있던 거리였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붉은 악마들이 광화문으로 뛰쳐나와 거리를 가득 메우기 전까지는 광화문의 주인은 시민이라 할 수 없었다. 월드컵 응원을 계기로 시민들은 광화문에 모여 응집된 에너지를 분출하기 시작했다. 2008년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까지 광화문에서는 크고 작은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이때 광장민주주의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2009년 서울시는 세종로 차선을 줄여 광화문광장을 조성했다. 시민들의 공간으로 돌려주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광화문광장은 시민들이 평온하게 일상을 누리는 곳이 아니었다.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집회의 장소였고, 광화문 일대는 1인 시위부터 트럭, 천막시위까지 잦은 시위로 몸살을 앓았다. 서울시는 이번에 광화문광장을 재개장하면서 소음이 발생하거나 통행을 방해할 수 있는 집회·시위는 허용하지 않겠다고 한다. 앞으로 광장 북측 육조마당과 세종대왕 앞 놀이마당 등 2곳 광장의 사용 신청을 받게 되는데 엄격한 심사로 집회나 시위로 변질될 행사는 애초부터 걸러낸다는 것이다.
▷경쟁력 있는 도시일수록 자연을 불러와 시민들이 쉴 공간을 만든다. 프랑스 파리시는 2024년까지 드골광장에서 시작되는 샹젤리제 거리를 광화문광장처럼 나무가 울창한 산책로로 재조성하고 있다. 걷기 쉽게 거리도 다시 포장하고 횡단보도도 재배치한다. 명품 브랜드 상점이 즐비한 상업화된 공간이 되자 시민들의 접근성을 높이겠다는 취지다. 마찬가지로 경복궁∼광화문광장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역사적·지리적 중심 거리도 시민들이 접근하기 쉽도록 개선돼야 한다.
▷한국 근현대사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광화문이 등장하곤 한다. 그러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순간만이 광화문의 의미는 아니다. 매일 출퇴근하는 시민, 손을 잡고 거닐던 연인, 아이와 나들이로 즐거웠던 부모…. 서울시민 중 광화문과 연결된 이런 추억 하나쯤 갖지 않은 이는 드물 것이다. 광화문이 정말 시민의 공간이라면 소리치고 투쟁하는 공간으로만 머물 것이 아니라 이런 소소한 일상을 누릴 수 있는 모두의 공간이어야 한다. 광화문광장이 공원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이 그래서 반갑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8-06(토) 징용 피해자 모독한 99엔

‘내 목숨 값 99엔.’ 일본 강제징용 피해자인 정신영 할머니(92)가 이 한 줄이 쓰인 피켓을 들고 카메라 앞에 섰다. 할머니의 통장에는 일본 돈 99엔, 한국 돈으로 931원의 입금 내역이 찍혀 있었다. 과거 일본에서 강제노동을 할 당시 받아야 했던 후생연금을 일본 측이 77년 만에 액면가 그대로 보낸 것. 할머니는 “애들 과자값도 아니고… 이걸로 일본 사람들 똥이나 닦으라고 해라”며 분개했다.
▷정 할머니는 1944년 만 14세 나이에 일본 나고야의 미쓰비시중공업 항공기 제작사로 끌려갔던 강제징용 피해자다. 배가 고파 쓰레기통에서 밥을 주워 먹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1년 넘게 노역에 시달렸지만 월급 한 푼 받지 못했다. 노역 기간에 가입했던 후생연금(근로자 연금)의 탈퇴 수당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은 수십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됐다. 자료가 불에 탔다며 확인조차 거부하던 일본 후생성은 정 할머니가 내민 연금번호를 받고 나서야 마지못해 가입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보낸 연금탈퇴 수당이 단 99엔이었다.
▷일본의 개정 후생연금보험법에는 연금탈퇴 수당을 지급할 때 화폐가치 변동에 따른 차액을 보전해 주는 규정이 있다. 일본인들에게는 모두 적용되는 이 규정이 유독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는 예외다. 처음도 아니다. 일본은 앞서 2009년에도 양금덕 할머니 등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에게 99엔, 2014년에는 ‘연금 가입 기간이 좀 더 길다’며 4명에게 199엔을 보냈다. 그나마 당시 환율로 1000원대를 넘었던 99엔은 이젠 정말 껌 값도 안 된다. 피해자들에 대한 모욕이자 우롱이나 다름없다.
▷성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일본의 기계적인 대응은 피해자들을 할퀸 또 다른 상처였다. 이들은 주한 일본대사관에 동전을 던지며 항의했고, 재심사 청구를 비롯한 법정 싸움에도 나섰다. 오랜 소송 끝에 대법원에서 승소한 피해자와 시민단체들은 이제 전범기업들의 실질적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20만 명으로 추산되는 강제징용 피해자 중 현재 소송을 진행 중인 이들은 유족을 포함해 1000여 명. 고령의 피해자들에게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일본의 강제징용 피해 배상은 최악 수준으로 떨어진 한일 관계의 핵심 뇌관이다. 정부는 해법을 찾기 위해 ‘대일 저자세 외교’ 비난을 감수하면서 일본과의 외교적 협의를 시도하고 있다. 반발하는 피해자들을 설득하느라 쩔쩔매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런데 막상 책임을 져야 할 일본은 해결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99엔 송금’을 반복하며 공분과 반발만 부추기고 있다. 이래서야 ‘미래로 함께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어떻게 일본에 보낼 수가 있겠는가. 8·15 광복절이 다가온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8-08(월) 뇌 수술醫 없는 병원

서울아산병원은 미 뉴스위크의 ‘2022 세계 최고 병원’ 평가에서 30위를 기록한 세계 의료 선도 병원이다. 국내에선 4년 연속 1위다. 그런 병원에서 일하던 간호사가 뇌출혈로 쓰러졌으나 수술할 의사가 없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뇌를 진료하는 ‘신경’ 분야에서 세계 8위라는 평가를 받는 병원에서 발생한 일이다. 정부는 병원의 대처 과정을 조사한 후 근본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서울아산병원 의사 1659명 중 신경외과 의사는 25명인데 이 중 머리를 여는 개두(開頭) 수술이 가능한 의사는 2명이다. 간호사 A 씨가 일요일인 지난달 24일 오전 출근 직후 심한 두통으로 쓰러졌을 때 2명 중 한 명은 해외 학회에, 다른 한 명은 지방에 갔다고 한다. 골든타임 내 조치가 결정적인 분야 의사가 동시에 자리를 비워야 했을까. A 씨는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진 후 지난달 30일 사망했다.
▷A 씨가 특별히 운이 나빴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뇌졸중 응급의료 체계는 허술하다. 고령 인구 급증으로 개두 수술 환자는 증가하고 있지만 뇌혈관 외과의는 146명에 불과해 지방 대학병원의 경우 아예 없는 곳도 많다. 정부의 뇌졸중 적정성 평가에서 최고등급을 받은 서울아산병원에도 의사 2명이 1년 365일 ‘퐁당퐁당’ 당직을 설 정도다. 머리를 여는 어렵고 위험한 수술임에도 의료수가가 가산료까지 합쳐 400만 원도 안 된다. 성형수술 비용 수준이다. 병원에선 장사가 되지 않으니 적정 인력을 두지 않고, 이 분야 지원자도 줄고 있어 젊고 유능한 뇌혈관 외과의는 멸종 위기라고 한다.
▷왜곡된 의료수가 체계로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등 생명과 직결되는 ‘바이털(필수의료)’ 분야는 붕괴 직전이다. 메스를 잡아야 할 외과의는 요양병원으로, 신경외과 의사는 MRI 찍는 척추통증 클리닉으로, 흉부외과 의사는 하지정맥 클리닉으로 간다. 산부인과 전공의 10명 중 6명은 전문의 수료 후 분만을 포기하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출생아 10만 명당 모성 사망자 수는 2017년 7.8명에서 2020년 11.8명으로 증가했다.
▷의사 수를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국내 의사 수는 인구 1000명당 2.5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3.7명보다 적다. 의대 정원은 17년째 동결이다. 그 빈자리를 약 1만 명의 간호사가 ‘PA(Physician Assistant)’라는 직함으로 의사 업무를 대행하며 불법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저출산 고령화 추세를 반영해 적정 의료 인력을 다시 계산하고, 수가 체계를 바로잡아 어렵게 생명을 살리는 일에 보람을 느끼는 의사들이 많아져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8-09 대한제국공사관

미국 워싱턴 로건서클, 백악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곳에 태극기가 펄럭이는 붉은색 건물이 있다. 옛 주미 대한제국공사관이다. 이 건물에는 우리 근현대사의 굴곡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조선에서 열강들의 각축전이 벌어지던 1891년. 고종은 특명을 내려 미 국무부 차관의 소유였던 이 건물을 2만5000달러를 들여 매입했다. 1910년 강제병합 직후 일제는 이 건물을 5달러에 빼앗았다. 되찾아오기까지는 102년이 걸렸다. 2012년에야 민관이 힘을 합쳐 이 건물을 다시 사들였고, 6년 뒤 원형대로 복원해서 개관했다.
▷1888년 1월 박정양 주미 공사는 백악관서 클리블랜드 대통령을 만나 고종의 국서를 전달했다. 이때 박 공사는 청나라가 요구했던 영약삼단((령,영)約三端·세 가지 별도 약정이라는 뜻)을 어기고 청나라 공사를 배석시키지 않았다. 자주독립 국가로서 당당히 외교권을 행사한 것이다. 박 공사는 미행일기(美行日記)에서 “미국은 민주국으로 예절이 퍽 간편하다”며 세 번의 절 대신 악수로 인사를 나눴던 미 대통령과의 만남을 기록했다.
▷자주외교의 길을 모색하는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대한제국공사관 6곳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함께 일제히 폐쇄됐다. 주미 공사관을 제외하고 영국 러시아 프랑스 중국(청) 일본 등 해외에 설치됐던 공사관들은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905년 5월 런던의 주영 공사관에서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외교관이었던 이한응 열사가 일제의 주권 침탈에 항거하며 31세 나이로 자결했다. 이 사실이 고국에 보도돼 항일운동에 불을 댕겼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자리에는 임대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1905년 12월 주청 공사관의 마지막 보고는 “한국의 일체 외교 교섭 사무는 일본 외무성이 담당한다고 한다”며 이에 어떻게 대응할지 훈시를 내려달라는 내용이었다. 베이징 톈안먼 동쪽 둥자오민샹(東交民巷)에 있던 주청 공사관 건물은 1915년 철거됐다. 설치 기간이 가장 오랜 주일 공사관 터는 옛 주소와 과거 사진이 남아 있지만 그 위치를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현재 우리나라 재외공관은 대사관 116곳을 포함해 모두 167곳이다. 청나라 허락을 받아 공사를 파견하고 일제에 의해 재외공관이 한순간에 폐쇄됐던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다. 이번에 처음으로 대한제국공사관의 실태를 조사한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조선이 자주국가임을 널리 알리고 근대화를 모색하는 한편으로 외교활동의 거점이 됐던 곳”이라며 “기초 고증연구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망국의 위기에도 주권을 지키고자 고군분투했던 역사를 기억 속에 남겨야 한다는 제안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8-10 경찰국장의 ‘밀고’ 논란

“행정안전부와 협의를 해보겠다.” 윤희근 경찰청장 후보자는 8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김순호 행안부 초대 경찰국장의 파견을 취소할 계획은 없느냐’는 야당 의원의 질의에 이같이 답했다. 야당은 김 국장이 대학 시절 노동운동단체인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인노회)에서 활동하다가 동료들을 밀고한 대가로 경찰에 특별 채용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윤 후보자는 “그런 부분까지 알고 추천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경찰청의 전신 내무부 치안본부가 인노회를 본격 수사한 건 1989년 2월이었다. 노태우 정부 출범 후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구성 혐의를 적용한 첫 사건이었다. 당시 관련자 15명이 구속됐다. 같은 해 4월 구속된 김 국장의 대학 1년 선배는 이듬해 출소 뒤 극단적 선택을 했고, 유족은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다”고 주장했다. “인노회가 이적단체라는 소명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경찰의 영장이 한 번 기각된 적이 있는데, 2년 전 대법원은 재심 사건에서 인노회가 이적단체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경찰 수사 1년 전 김 국장은 인노회에 가입했지만 이듬해 갑자기 동료들과 연락이 끊겼다. 동료들이 수사와 재판을 받던 같은 해 8월 김 국장은 경찰에 특채됐다. 이후 대공 분실에 근무하면서 여러 차례 검거 표창을 받아 4년 8개월 만에 경장에서 경위로 초고속 승진했다. 김 국장은 동료 밀고 의혹에 대해 “소설 같은 얘기”라며 부인했다. 반면 옛 동료들은 김 국장이 신군부를 위해 운동권의 정보 수집 업무를 한 프락치였다는 의혹까지 제기했다.
▷김 국장이 특채 전 만난 인노회 사건의 수사 책임자 이력과 시점도 논란이 되고 있다. 당시 대공3부장이던 홍모 전 경감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때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보고서의 최초 작성자로 알려져 있다. 홍 전 경감은 4일 TV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인노회 사건에서 (김 국장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내가 책임지겠다’고 하고 특채로 받았다”고 말했다. 김 국장은 홍 전 경감이 특채했다는 주장에 “확인이 어렵다”고 했다. 김 국장은 1989년 7월경 경찰을 찾아갔다고 했지만 홍 전 경감은 수사 전인 “그해 초”라고 했다.
▷인노회 수사를 전후해 경찰은 완전히 바뀌었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야당은 박종철 고문치사 및 은폐 축소 사건의 재발을 막자며 경찰 중립 법안을 제출했다. 당시 여당이 야당의 요구를 일부 수용한 것이 치안본부 폐지와 경찰청 분리였다. 31년 만에 부활한 경찰국의 상징인 경찰국장이 고문 수사와 프락치 의혹이라는 경찰의 흑역사를 떠올리게 하고 있다. 진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김 국장이 사실 관계를 상세히 밝히고, 의혹을 해소해야 한다.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08-11 압수수색당한 트럼프

허리케인 ‘도리안’이 미국에 접근하던 2019년 9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플로리다, 조지아, 앨라배마주 등이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트위터에 적었다. 반면 앨라배마주 기상당국이 ‘우리는 피해 예상 지역이 아니다’고 발표했다. 이에 트럼프는 도리안의 예상 경로에 앨라배마주가 포함된 미 국립해양대기청의 지도를 언론에 공개했다. 알고 보니 앨라배마주 부분은 트럼프가 펜으로 그려 넣은 것이었다. 언론에선 ‘샤피(트럼프가 즐겨 쓰던 펜 브랜드) 게이트’라고 조롱했다. 그런데 트럼프가 퇴임 뒤 남긴 자료에는 이 지도가 없었다.
▷트럼프는 재임 당시 메모나 문서를 종종 찢어버리곤 했다. 이 중 일부는 참모들이 테이프로 다시 붙여서 보관했지만, 트럼프가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려버린 문서들은 영원히 사라졌다. 트럼프가 집무실에 있는 각종 자료들을 골판지 상자에 넣어서 가지고 나간 경우도 많았다. 이렇다 보니 허리케인 관련 지도뿐 아니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주고받은 편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보낸 서한 등이 트럼프 퇴임 후에 행방이 묘연하다.
▷미 대통령기록물법에는 대통령 공무와 관련된 문서, 사진, 지도, 음성 등은 퇴임 후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하도록 규정돼 있다. 이를 어기면 최고 징역 3년의 처벌을 받는다. 트럼프 측은 올해 1월 일부 자료를 정부에 반환했는데, 이 가운데에는 기밀로 분류된 국가안보 관련 문서들이 포함돼 있었다. 또 민감한 자료들을 모두 반환하지도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결국 미 연방수사국(FBI)은 8일 트럼프의 별장인 마러라고 리조트를 압수수색하며 본격적인 사법 절차에 착수했다.
▷미국 전직 대통령 45명 가운데 지금까지 기소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워터게이트’의 주역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도 기소 직전에 사면을 받았다. 하지만 트럼프는 기록물 반출 외에 지지자들의 의회 난입을 선동한 혐의, 대선 결과를 뒤집도록 조지아주 법무장관 등에게 압력을 가한 혐의 등으로도 수사를 받고 있다. 조만간 ‘전직 대통령 기소 1호’라는 불명예를 안게 될 가능성이 있다.
▷미 공화당에서는 트럼프에 대한 수사가 지지층을 오히려 결집시켜 11월 중간선거와 2024년 대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미 헌법에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의 대선 출마를 금지한다는 조항은 없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트럼프의 대선 도전을 막기 어렵다. 트럼프도 “마녀사냥”이라고 정부를 비판하며 출마 의지를 밝혔다. 하지만 트럼프가 법치를 무시하고 국민을 분열시키는 정치를 해왔다는 것을 미국 유권자들은 기억한다. 이제 와서 ‘탄압받는 피해자’라는 이미지로 덮어버리기에는 너무 무거운 업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8-12 맨홀 참사

19세기에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도시는 프랑스 파리였다. 나폴레옹 3세는 복잡하게 뒤엉켜 있고 비가 오면 진흙탕이 되는 골목길을 대대적으로 정비해 개선문을 중심으로 12개 방향으로 뻗어가는 방사형 도로를 만들었다. 하지만 지상만 봐서는 그가 한 파리 현대화 작업의 절반을 본 것일 뿐이다. 그의 시대에 만들어져 파리의 독특한 관광명소가 된 곳이 하수구다. 현대화된 파리를 떠받치는 시설의 절반은 지하에 있다.
▷맨홀은 농촌에는 없다. 맨홀은 도시에서 지상과 지하를 연결하는 통로다. 사람(man)이 들어가는 구멍(hole)이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프랑스어로도 같은 뜻의 트루 돔(trou d‘homme)이다. 하수도로 통하는 맨홀이 있고 상수도로 통하는 맨홀이 있고 전기통신선이 모여 있는 곳으로 통하는 맨홀이 있다. 맨홀을 통해 사람이 들어가서 이런 것을 점검하고 정비하지 않으면 도시는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무심코 지나가는 행인이 열려 있는 맨홀에 빠지는 사고가 세계적으로 보면 심심찮게 발생한다. 그래서 맨홀에 들어가 작업할 때는 안내판을 주변에 설치해야 한다. 맨홀 뚜껑은 아무나 쉽게 열 수 없도록 두꺼운 쇳덩어리로 만들어진다. 두꺼운 쇳덩어리다 보니 팔면 돈이 꽤 돼 도난사고도 간혹 일어난다. 그 경우 도난은 둘째 치고 뚜껑이 없어져 맨홀이 열려있는 상태 자체가 아주 위험하다. 그래서 맨홀 뚜껑에 잠금 장치를 해두기도 한다.
▷최근 집중호우로 서울 강남에서 하천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하수도 물이 역류해 엄청난 수압에 의해 무거운 맨홀 뚜껑이 열리고 지하로부터 물이 솟구쳐 오르는 모습이 이곳저곳에서 눈에 띄었다. 물이 솟구쳐 오를 때도 위험하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 순간은 하수도의 수압이 다시 낮아져 지상의 물이 빠져나갈 때다. 마침 그럴 때 한 성인 남매가 맨홀 근처를 지나다가 먼저 누나가 맨홀에 빨려 들어갔고 누나를 구하려던 남동생마저 빠져 들어가는 참사를 당했다. 맨홀에 빠지면 구조가 난망이다. 지하관로로 휩쓸려 가버려 위치 파악 자체가 어렵다. 로봇을 이용한 수색 끝에 남동생의 시신은 다른 맨홀에서 찾았지만 그 누이를 찾는 작업은 계속되고 있다.
▷침수 지역의 한 시민은 열린 맨홀을 쓰레기통으로 막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했다. 그것도 맨홀이 보일 때의 얘기다. 물이 깊고 탁해 열렸는지 닫혔는지 알 수 없는 맨홀이 도처에 있을 수 있다. 서울시에 보도에만 11만 개가 넘는 맨홀이 있다. 이 중 하수도 맨홀은 4만여 개다. 침수 순간 4만여 개의 맨홀이 죽음의 구멍으로 돌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아찔할 뿐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8-13(토) 임금피크제 소송 봇물

“이런 식으로 운영되는 임금피크제는 무효다.” KB국민은행 직원 41명이 최근 회사를 상대로 임금피크제에 따른 임금 삭감분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냈다. 르노코리아자동차는 전현직 노조원 50여 명이 법률대리인을 선임했다. 포스코는 임금피크제 소송 참여자를 모집하는 공고를 냈고, 현대차와 삼성전자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노조도 소송을 검토 중이다.
▷이 같은 줄소송 움직임은 5월 대법원 판결이 나왔을 때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자기술연구원 퇴직자인 A 씨가 “정년이 그대로 유지되는데도 임금피크제로 임금을 깎은 것은 부당하다”고 낸 소송에서 그의 손을 들어준 판결이다. 대법원은 합리적인 이유 없이 나이만을 기준으로 임금을 삭감하는 것은 연령 차별이라고 봤다. ‘합리성’ 여부는 임금피크제 도입 목적, 근로자가 받는 불이익의 정도, 이들에 대한 조치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야 한다고 판시했다. 각 회사가 개별적으로 법원의 판단을 구할 여지를 열어 놓은 것이다.
▷소송을 냈거나 낼 예정인 노조들은 회사가 임금피크제 대상 직원들의 업무량이나 강도를 줄여주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임금 삭감 폭도 과도하다고 본다. 고령의 근로자를 퇴출시키려고 임금피크제를 악용한다는 의구심도 거두지 않고 있다. 경영계는 “노조도 합의했던 내용들”이라고 반박한다. 인력 관리의 어려움도 호소한다. 2003년 처음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던 신용보증기금은 최근 시행 대상자가 300명을 넘어서면서 고령 인력의 적체 문제에 직면했다.
▷임금피크제는 2016년 근로자의 정년을 60세로 연장하면서 시행 부담을 줄이기 위해 도입된 제도다. 임금은 줄어들지만 일하는 기간이 늘어나는 만큼 해볼 만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었다. 삭감되는 고령층 근로자의 임금으로 청년층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적잖았다. 이 제도를 도입한 기업(300인 이상)은 54%로 절반을 넘는다. 시행 방식과 내용은 천차만별이다. 애초에 고용노동부의 권고에 따라 각 회사의 자율적 선택에 맡겨졌을 뿐 명확한 규정이 없었다.
▷고용과 임금 체계는 고령화 흐름과 맞물려 있다. 100세 시대에 정년은 앞으로 더 연장될 수 있다. 일본은 65세 정년을 의무화하면서 70세까지 연장을 권고하고 있고, 미국이나 영국은 아예 정년이 없다. 성과에 따른 연봉제가 대부분이어서 굳이 임금피크제를 운영하지 않는다. 해고가 어려운 호봉제 위주의 한국에 맞는 해법은 다를 것이다. 임금피크제가 차선책이 될 수 있다면 그 기준과 이행 규정들을 보다 명확히 규정하는 게 첫걸음일 수 있다. 노사정 협의도 필요하다. 노사가 함께 윈윈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8-15(월) 500년 만의 유럽 가뭄

프랑스 중부 오베르뉴의 고지대에서 만들어지는 살레(Salers) 치즈는 2000년의 역사와 엄격한 품질 관리로 정평이 나 있다. 치즈의 원료가 되는 우유를 생산하는 젖소들이 영양분의 4분의 3 이상을 이 지역의 풀을 먹어서 섭취했다는 점을 증명해야 정품으로 인정된다. 그런데 살레 치즈 제조업자들이 최근 생산을 중단했다. 비가 오지 않아 소들에게 먹일 풀이 자라지 않아서다.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전역이 500년 만에 찾아온 최악의 가뭄에 신음하고 있다.
▷“사과가 가지에 매달린 채 구워지고 있다.” CNN이 전한 영국 과수 농가의 모습이다. 유럽가뭄관측소가 홈페이지에 올린 가뭄지도를 보면 독일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에 빨간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많다. 농작물이 스트레스를 받아 작황이 우려되는 ‘비상’ 상황이라는 의미다. 땅에 수분이 부족한 수준을 뜻하는 주황색 지역까지 합치면 유럽 전체의 64%에 해당한다. 올해 유럽의 곡물 생산량은 최근 5년 평균에 비해 8∼9% 줄 것으로 전망된다.
▷‘서유럽 내륙 운송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독일의 라인강은 바지선 운항이 어려운 수준으로 수위가 내려갔다. 프랑스의 루아르강, 이탈리아의 포강 등 유럽의 주요 하천들도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영국 남부에는 거의 5개월간 비가 내리지 않았고, 스페인의 저수량은 평년의 40% 수준이다. 영국 당국은 머리를 매일 감지 말자고 시민들에게 권고했고, 네덜란드 정부도 샤워 시간을 5분 이내로 줄여달라고 호소하는 지경이 됐다.
▷가뭄은 유럽의 에너지난을 가중시키고 있다. 유럽에서 생산되는 수력발전 에너지는 올해 1월에 비해 7월에는 20% 줄어들었다. 또 원자로를 식힐 냉각수가 충분하지 않아 원전 발전량도 12% 감소했다. 러시아가 천연가스 공급을 제한하면서 타격을 받고 있는 유럽으로선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 스페인에서 공공기관 등의 에어컨 설정 온도를 27도로 제한하는 법안이 통과되는 등 유럽 각국은 허리띠를 졸라 매고 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최대한 에너지를 비축해 두려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6월부터 40도를 넘나드는 폭염으로 피해가 속출했다. 영국 가디언은 “기후변화로 인해 2, 3년마다 서유럽에 극심한 더위가 찾아올 것”이라며 이런 기후가 ‘뉴노멀(새로운 표준)’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유럽 외에도 지구촌 곳곳에서 가뭄, 홍수 등 기상이변이 벌어지면서 올 상반기 자연재해로 인한 사망자가 약 4300명에 달했다. “우리는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해 집단행동을 할지, 아니면 집단자살을 할지 선택해야 한다”는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의 섬뜩한 경고가 수사(修辭)로만 들리지 않는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8-16 ‘조선의 짠타크’ 김명시

항일 무장투쟁사엔 여성의 자리도 있다.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만주에서 암살단원으로 활약한 남자현, 장제스가 ‘중국 장병 1000명보다 낫다’고 극찬한 여성 광복군 1호 신정숙 지사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항일 무장투쟁의 최전선에 섰던 ‘조선의 짠타크(잔다르크)’ 김명시(金命時·1907∼1949) 장군이 있다.
▷경남 마산에서 태어난 그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다. 1925년 배화여고 중퇴 후 고려공산청년회 유학생으로 선발돼 러시아 유학을 떠났다. 본격적인 무장투쟁에 뛰어든 건 20세부터다. 중국 상하이에 파견돼 일본 영사관 경찰서 기차역 공격을 주도했다. 1932년 국내로 잠입해 활동하다 조봉암 등과 ‘조선공산당 재건 사건’ 주모자로 붙잡혀 7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엔 중국으로 망명해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여성부대를 지휘하며 무장투쟁을 이어갔다. 한 손에는 총, 다른 손에는 확성기를 들고 싸우는 그를 사람들은 ‘백마 탄 여장군’이라고 불렀다.
▷광복 후 그는 개선장군이 돼 돌아왔다. 1945년 12월 23일자 동아일보는 여장군의 귀국 소식을 1면에 전하고 있다. “부하 2000명을 가지고 항일전에 활동하여 무훈을 세운 우리 조선의 ‘짠타크’ 여장군 김명시 여사.” 독립신보는 기획 ‘여류 혁명가를 찾아서’에서 김 장군을 이렇게 묘사했다. “크지 않은 키, 검은 얼굴, 야무지고 끝을 매섭게 맺는 말씨, 항시 무엇을 주시하는 눈매, 온몸이 혁명에 젖었고 혁명 그것인 듯이 대담해 보였다.”
▷하지만 좌우 대립이 극렬했던 해방 정국에서 그는 신탁통치 반대 활동을 하다 체포돼 부평경찰서 유치장에서 입고 있던 치마를 뜯어 혁명가의 삶을 제 손으로 마감했다. 향년 42세였다. 그의 부고 기사에는 ‘북로당 정치위원 김명시’로 나온다. 한 시민단체가 2019년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을 두 차례 했지만 ‘북로당 정치위원’ 이력이 발목을 잡았다. 결국 북로당에 ‘정치위원’ 직책이 없고, 고인이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한 기록이 없다는 사실이 인정돼 올해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사후 73년 만이다.
▷잊혀진 여성 항일 운동가를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유관순 열사와 함께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에서 옥고를 치른 6인의 생애가 영화로 제작됐고, 여성 운동가 200명의 삶을 다룬 책도 나왔다. 지금까지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1만7285명 가운데 여성은 3.28%. 서대문형무소 수형 기록에 나오는 4837명 가운데 여성이 180명(3.72%)임을 감안하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불꽃처럼 살다 간 여성들을 발굴하는 정부의 노력이 더 필요할 것 같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8-17 한글 잃어가는 조선족

‘옌볜(延邊)에서는 중국어를 못해도 괜찮다.’ 중국 옌볜 조선족자치주에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던 말이다. 거리에는 포차, 노래방, 숯불구이 등 한글로 된 대형 간판이 즐비하고 ‘가리봉’, ‘미아리’ 같은 한국 지명을 딴 식당 이름들도 눈에 들어온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조선족들은 중국 내 거주지역에 따라 미묘하게 다른 사투리까지 구별한다. 170만 명의 조선족이 거주하는 이곳은 한국 내 차이나타운보다 더 한국 같다.
▷앞으로는 조선족 자치주에서 한글 간판이나 광고를 찾아보기 어려워질 것으로 전망된다. 주정부가 한자와 한글을 병기하되 한자를 우선 표기하는 규정을 만들어 시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규정에 맞지 않는 현판이나 표지판은 모두 교체해야 한다. 간판뿐 아니다. 조선족 학교에서 교과서는 이미 2020년부터 한글로 된 교과서 대신 중국어 국정 교과서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내년부터는 대학 입시에서 소수민족 가산점이 없어지고 역사, 정치, 어문 과목 시험은 중국어로 치러야 한다.
▷북간도로 불리는 백두산 이북 지역에 터 잡은 조선족은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중에서 13번째로 수가 많다. 중국 국적이지만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민족 정체성을 갖고 한국 문화와 전통을 살려온 사람들이다. 문화대혁명 당시 한글로 된 책들이 불태워지고 한국말을 가르치던 조선족 교사들이 홍위병들에게 탄압받은 아픈 기억도 갖고 있다. 그래도 소수민족 중에서는 최초로 민족대학을 설립하는 단결력도 보였다. 그런 조선족도 ‘중화민족 공동체론’을 앞세우는 중국 정부의 강력한 한화(漢化) 정책은 피할 수 없게 된 모양이다.
▷“문화 말살 정책”이라는 비판에도 중국 정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소수민족의 정체성을 약화시키고 이들을 한족 문화에 동화시키려는 정책은 오히려 강화되는 추세다. 2017년 신장위구르 자치구, 2018년 티베트 자치구, 2020년에는 네이멍구 몽골족 자치구에서 중국어 교과서 사용 의무화 등을 밀어붙였다. 항의 시위에 나선 주민들은 분열선동 혐의로 검거하고, 거리에는 탱크를 내보냈다. 특히 독립 움직임을 보이는 자치구에는 가차 없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해 7년 만에 열린 소수민족 정책 회의에서 “사상적 만리장성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민족 분열의 독소’를 숙청해야 한다고도 했다. 소수민족의 문화적 다양성을 발전의 동력이 아닌 분열의 뿌리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각 민족의 말과 글, 그것이 지켜내는 정체성은 억지로 빼앗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인위적으로 약화시킨다고 해서 ‘사상의 만리장성’이 세워지는 것도 아니다. 되레 문화적 역풍만 불 가능성이 높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8-18 美의 틱톡 경계령

“중국에서는 모든 게 들여다보입니다.” 동영상 공유 플랫폼 틱톡의 미국 직원들이 2021년 9월 내부 회의에서 내놓은 발언이다. 한 회의 참석자는 베이징에서 활동하는 중국인 엔지니어를 “모든 접근권을 가진 마스터 관리자”라고 불렀다. 틱톡의 모(母)기업인 중국 바이트댄스에서 미국 서버에 담긴 정보에 접근할 수 있음을 사실상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미국 인터넷 매체 버즈피드는 최근 이런 내용이 담긴 14개의 틱톡 내부회의 녹음파일을 입수, 공개했다.
▷중국의 30대 인터넷 사업가 장이밍이 개발한 틱톡은 15초∼1분가량의 동영상을 공유하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이다. 댄스, 음악, 패션 등을 동영상으로 쉽게 편집해 올릴 수 있어 젊은층에 큰 인기다. 전 세계 사용자 수는 10억 명, 1인당 월평균 사용시간은 23.6시간으로 유튜브를 추월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해외 사용자들의 개인정보를 빼내 악용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보안에 경고등이 켜졌다. 미국 정치권의 틱톡 규제 요구도 높아지고 있다. 상원의원들은 연방거래위원회(FTC)에 틱톡에 대한 조사를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워싱턴의 대중 강경파들은 틱톡을 ‘트로이의 목마’라고 부른다. 중국공산당이 틱톡 앱에 ‘백도어’를 심어 사용자들의 전화번호와 생년월일은 물론 지문, 홍채 같은 생체정보에 접근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정보가 유출된다고 국가안보 위협까지 될까 싶지만 타깃이 연방정부 직원이나 고위 관료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들의 정보를 해킹에 이용하면 주요 부처나 정보기관의 서버 침투까지 이론상 가능해진다. 틱톡을 사용하는 주요 인사들의 휴대전화가 도청 장치로 이용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2020년 미국 내 틱톡과 중국 메신저 애플리케이션 ‘위챗’ 사용을 중지시키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법원이 제동을 걸면서 없었던 일이 됐지만, 안보위협을 둘러싼 논쟁은 오히려 가열되는 분위기다. 미국뿐 아니다. 영국과 뉴질랜드 의회는 틱톡 계정을 닫거나 사용 중단을 권고했고, 인도는 틱톡을 포함한 59개 중국 앱 사용을 금지시켰다. 호주에서는 틱톡, 위챗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보안업체의 보고서가 나왔다.
▷틱톡 이슈는 결국 SNS를 이용한 중국과 미국 간의 정보보안, 이를 넘어 국가안보와 연관된 기술전쟁으로 봐야 할 것이다. 틱톡이 사용자 정보를 미국과 싱가포르 서버에 저장하고, 미국 업체 오러클에 보안을 맡기겠다지만 개별 업체의 몸부림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첨단기술이 가능케 한 침투력은 틱톡이 아닌 다른 앱을 통해서도 또다시 문제가 될 수 있다. 동영상 속 댄스와 노래, 코미디를 마냥 즐기기만 할 수 없는 세상이 됐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8-19 주목받는 ‘애그테크’ 일자리

여름꽃 달리아. 꽃도 화려하고, 꽃말도 예뻐 관상용으로 인기가 있다. 그런데 질병에 취약해 키우기가 쉽지 않다. 경기 고양시 ‘단비농장’ 송준호 대표(42)는 1년 반 넘게 해외논문을 참고로 실험을 반복해 무균주 달리아를 개발했다. 올해는 4000m²까지 농장 규모를 확대해 대량으로 생산할 계획이다. 송 대표는 원래 미술학도였다. 석·박사까지 미술을 전공했지만 교수 임용이 어렵다고 판단되자 과감히 애그테크(AgTech)로 길을 틀었다.
▷애그테크는 농업(agriculture)과 기술(technology)의 합성어로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등 첨단기술을 활용해 농산물을 재배하는 것을 일컫는다.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이 햇빛을, 영양분이 가득한 물이 흙을 대체한다. 더 이상 땅을 일군 자리에 씨를 뿌리지 않는다. ‘농사짓다’의 정의도 바꾼 셈이다. 4차산업을 만난 농업이 농촌이라는 지리적 한계를 벗어난 혁신과 성장의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온·습도를 자동 조절해 된장, 고추장을 담그는 스마트 장독을 설계한 충북 충주시 ‘금봉산농원’ 조연순 대표(39). 그도 전통 장 사업을 애그테크로 확대하고 있다. 자연 바람과 할머니의 손맛에 기대던 발효 과정을 첨단기술로 구현한 것이다. 전북 익산시에서 농업회사법인 ‘별곡’을 운영 중인 한정민 대표(27)는 연구소에서나 볼 법한 원심분리기를 가동해 쌀겨(미강)에서 단백질을 추출한다. 이를 단백질 보충제나 화장품 원료로 판매한다. 애그테크라는 새로운 기회에 올라탄 청년들이 만들어가는 성공 스토리다.
▷첨단산업으로서의 농업의 가치도 재평가되고 있다. 2020년 귀농·귀촌 실태조사에 따르면 30대 이하 귀농 이유의 첫 번째는 농업의 비전·발전 가능성(39.1%)이었다. 무엇보다도 애그테크 일자리는 MZ세대의 가치관에 부합한다. 제주 서귀포시 귤 농장 ‘귤메달’ 양제현 대표(29)는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던 직장인이었다. 아버지의 병환 이후 일을 돕다가 ‘뿌린 대로 거두는’ 이 일을 평생 직업으로 삼기로 했다. 그는 생산부터 판매까지 책임지는 1인 기업으로 자율성을 갖고 일한다는 점, 직장에 매인 것보다 ‘워라밸’이 가능하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았다.
▷세계 최대 IT 전시회인 CES의 내년 기조연설은 그 역사상 처음으로 농기계 제조사 대표인 존 메이 디어&컴퍼니 최고경영자(CEO)가 맡았다. 미래산업으로 떠오른 애그테크의 성장성을 가늠할 수 있다. 특히 식량안보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애그테크를 육성하려는 각국의 의지도 강하다. 애그테크에 승부를 거는 청년들이 많아질수록 그 미래도 밝을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8-20(토) 재고 급증, 커지는 ‘R의 공포’

“최대 65% 세일, 엄청난 딜입니다!” 미국 유통업체 월마트와 베스트바이 같은 업체들은 요즘 세일이 한창이다. 물가가 치솟는 상황에서도 가격을 확 낮춘 상품들이 나온다. 늘어난 재고 물량을 처리하기 위한 땡처리가 시작된 것. 월마트는 지난달 재고품 규모가 600억 달러(약 79조 원)까지 늘어나 있다. 이들 기업을 포함한 전 세계 2300여 개 제조업체들의 재고 총액은 현재 1조8700억 달러로, 10년 만에 최대치까지 치솟았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삼성전자의 올해 상반기 재고자산 총액은 처음으로 50조 원을 넘어섰다. 재고가 팔리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 역시 역대 최고치인 평균 94일까지 늘어났다. LG디스플레이를 비롯한 다른 주요 기업들의 상반기 재고자산도 대체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재고가 늘어나는 만큼 냉장고와 세탁기, 휴대전화 같은 제품의 생산량은 줄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위기, 코로나19 특수 대응 차원에서 공급을 늘리다 보니 수요를 초과하게 된 측면이 있다지만 그 흐름이 심상치 않다.
▷창고에 들어찬 재고 상품들은 경기침체의 전조로 여겨진다. 세계경제가 현재 경기침체에 진입했는지를 놓고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재고 수치는 기업들이 가장 민감하게 느끼는 선행지표 중 하나다. 재고 증가는 기업들의 수익성 악화, 생산 감소, 투자 감소로 이어지게 된다. LG전자의 경우 TV 생산라인 가동률이 72%대까지 내려와 있다. 경기침체(Recession), 즉 ‘R의 공포’가 현실화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물건은 안 팔리는데 원자재 가격과 운송비용은 오르니 기업들의 한숨도 커져 간다.
▷미국 CNBC는 주요 기업들의 재고가 쌓여가는 상황을 놓고 ‘재고가 이끄는 경기침체’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재고 부담이 기업 활동을 얼마나 위축시키는지를 보여주는 평가다.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경기침체 요인들은 당장 해법을 찾기도 쉽지 않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가져온 에너지와 식량 위기, 인플레이션 및 급속한 금리 인상의 여파가 얽혀 있다. 중국 경제도 글로벌 경제를 흔들 변수다. 2분기 0%대 성장, 20%대 청년실업률이라는 충격적인 성적표를 받아든 중국은 올해 경제성장률 5%를 낙관하기 어렵다.
▷재고떨이와 폭탄 세일이 당장은 반가운 뉴스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기업들의 생산 위축이 수익성 악화, 인력 구조조정과 대규모 실직 사태로 이어지면 그 여파는 걷잡을 수 없다. 가뜩이나 장바구니 물가 부담이 커지는 상황에서 지갑을 닫는 실업자들이 늘어날수록 더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게 될 것이다. 960조 원대 자영업자 빚폭탄마저 째깍거린다. ‘R의 공포’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8-22(월) 가뭄이 드러낸 수천 년 유적

올 6월 이라크 북부 쿠르드 자치구에서는 모술댐이 가뭄으로 수위가 낮아지면서 3400년 전 ‘자키쿠(Zakhiku)’로 추정되는 고대 도시의 유적지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자키쿠는 기원전 1550년부터 기원전 1350년까지 약 200년간 지금의 이라크 북부 지역과 시리아 대부분을 지배했던 미탄니 왕국의 중심지다. 19세기에 독일인 슐리만은 고대 그리스 문화권의 트로이와 미케네 유적을 발굴했고 영국인 레이어드는 고대 아수르(아시리아)의 니나와(니네베) 유적을 발굴했다. 바로 이 니나와가 한때 미탄니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8월 들어 중국도 유례없는 가뭄을 겪고 있는 가운데 양쯔강이 말라 바닥이 드러나면서 약 600년 전인 명나라나 청나라 때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 3개가 발견됐다. 양쯔강은 강이라기보다는 바다라고 할 만큼 크다. 양쯔강은 해구(海丘)처럼 바닥에서 7m 높이로 솟아 있는 바위 언덕을 품고 있었다. 이번에 발견된 불상은 그 바위 언덕 맨 위쪽의 솟은 부분을 깎아 석굴과 함께 만든 것이다. 강을 지나는 배들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 최악의 가뭄으로 스페인에서는 ‘과달페랄의 고인돌’로 불리는 5000년 전 거석 수백 개가 서부 카세레스주의 발데카냐스 저수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고대 켈트족은 유럽의 대서양 연안을 따라 아일랜드로부터 영국 콘월, 프랑스 브르타뉴,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에까지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그런 흔적 중 하나가 거석(巨石) 문화다. 영국에는 스톤헨지, 프랑스에는 카르나크 열석이 있다. 과달페랄의 고인돌은 스페인의 스톤헨지라고 불릴 만큼 신비스러운 모습을 지녔지만 1963년 프랑코 독재 치하에서 인공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안타깝게 물에 잠겼다.
▷이탈리아에서는 포강의 수위가 70년 만의 최저치를 기록하면서 피에몬테에서 고대 마을의 유적이 나타났다. 롬바르디아 올리오강에서는 청동기 시대 목재 건축물 토대가 나왔다. 로마 티베르강에서는 네로 황제가 건설한 것으로 추정되는 다리 유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르웨이에서는 빙하가 녹으면서 철기 시대 양털 옷과 로마 시대 샌들이 발견됐다. 고고학자들이 바빠졌다.
▷강이 마를 때 강바닥 돌에 사람들이 연도와 이름을 새겨넣은 기근석(饑饉石)이란 게 있다. 엘베강과 다뉴브강 곳곳에서 기근석이 보일 정도이다 보니 수천 년 전 수백 년 전 문화 유적도, 인공저수지에 묻은 유적도, 심지어 제2차 세계대전 때 침몰한 군함과 누군가 몰래 유기한 시신의 유골까지 오만 것이 다 드러난다. 한 길 물속에 비밀이 참 많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8-23 수원 세 모녀의 비극

21일 오후 경기 수원시의 다세대주택 1층에서 60대 여성 A 씨와 40대 두 딸이 숨진 지 한참 뒤에 발견됐다. A 씨는 암 투병 중이었고, 두 딸은 희귀 난치병을 앓고 있었다. 남편은 지병으로 이미 사망했고, 손을 내밀 친인척도 없었다. 병원비 부담으로 보험금마저 채권자에게 넘어갔다. 경찰은 세 모녀가 생활고에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A 씨가 다세대주택으로 이사 온 것은 2년 전이었지만 전입신고를 하지 않았다. 주소지를 둔 경기 화성시는 복지사각지대 발굴시스템을 통해 A 씨가 기초생활수급 대상이라는 점을 확인했다고 한다. 하지만 “연락이 끊긴 지 한참 됐다”는 A 씨 지인 말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다. A 씨가 복지서비스를 신청하거나 상담한 적도 없어 수원시와 화성시 모두 세 모녀가 숨진 뒤 이 같은 사실을 파악했다고 한다. 같은 광역단체라도 기초단체만 다르면 사각지대 발굴시스템이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난 셈이다.
▷가장을 잃은 다세대주택 거주자인 수원 세 모녀의 비극적인 사연은 8년이라는 시차가 믿기지 않을 만큼 송파 세 모녀 사건과 놀랄 만큼 닮았다. 다세대주택 지하 1층에 거주하던 60대 여성 B 씨는 2014년 2월 두 딸과 함께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남편과 사별한 후 식당일로 생계를 유지하던 그는 한 달 전 몸을 다치면서 갑자기 수입이 끊겼다. 건강이 좋지 못했던 두 딸이 있었지만 이들이 근로능력이 있는 30대라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 대상에서 제외됐다. A 씨처럼 B 씨도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극한 상황에 몰려서도 월세에 마음을 쓰던 모습도 비슷하다. A 씨는 집주인에게 “이번 달 월세(42만 원)를 내기 어렵다”는 휴대전화 문자를 보냈다고 한다. ‘지병과 빚으로 더 이상 살기 힘들다’는 취지의 유서도 남겼다. 월세를 한 번도 미루지 않았던 B 씨는 현금 70만 원이 든 봉투 위에 ‘주인아주머니께…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복지 혜택의 문턱이 송파 세 모녀 사건 이후 조금 낮아졌다. 기초생활지원 대상자의 급여 기준을 최저생계비가 아닌 상대적 빈곤 개념의 중위 소득으로 높였다. 연체와 단수 등 각종 지표를 활용해 위기 가구를 찾아내는 시각지대 발굴시스템도 도입됐다. 하지만 대상자가 먼저 신청하지 않으면 사각지대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인 데다 빈곤 비율(16%)에 비해 인구 대비 기초생활수급자의 비율(4%)이 너무 낮은 것에 대한 허점이 여전히 메워지지 않고 있다.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08-24 의원 징계

국민의힘 윤리위원회가 또 주목 대상이 됐다. 현직 당 대표에 대한 초유의 6개월 당원권 정지 징계를 의결했던 윤리위는 최근 소속 의원 3명에 대한 징계 절차를 개시했다. 수해 복구 현장에서 “솔직히 비 좀 왔으면 좋겠다. 사진 잘 나오게” 등의 발언으로 논란을 빚은 의원, 이른바 ‘쪼개기 후원’ 의혹으로 불구속 기소된 의원은 징계 절차 개시에 숨죽인 듯한 모습이다. 문제는 국민의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있다가 국민의힘과의 합당으로 여당 소속이 된 권은희 의원이다.
▷권 의원은 국민의힘 내에선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내부 총질 당 대표’ 문자메시지가 공개되자 “장소적으로는 용산 시대인데 실질적으로는 경복궁 시대로 됐다”고 비판했다. 새 정부가 강력히 추진하는 행정안전부 내 경찰국 신설을 대놓고 반대했다. 경찰국 신설에 반발해 열린 전국 경찰서장 회의를 두고 ‘쿠데타’를 언급했던 이상민 행안부 장관에 대해 “딱 기다리시라”며 국회 탄핵소추 논의를 시사하기도 했다. 여권 핵심부에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음은 물론이다.
▷권 의원은 지난 대선 때 더불어민주당 쪽과의 단일화를 모색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국민의힘과의 합당에 반대했다. 비례대표 의원은 탈당하면 의원직을 상실한다. 합당 전 제명시켜 달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체성이 맞지 않지만 어쩌다 여당 소속이 된 처지다. 당내에선 “의원직 유지를 위해 탈당하지 않고 들어왔으면 조용히 있어야지 왜 분탕질이냐” “입만 열만 자유를 부르짖는 정당에서 국회의원 발언을 놓고 징계를 하는 게 말이 되느냐” 등 엇갈린 반응이 나온다.
▷권 의원 문제를 이준석 전 대표와 연결 짓는 시각도 있다. 권 의원에게 적용된 윤리위 규정 제20조는 “당에 극히 유해한 행위를 했을 때” “정당한 이유 없이 당명에 불복하고…” 등 징계 사유를 명시하고 있다. 윤리규칙 제4조는 “당의 명예를 실추시키거나…” 등 품위 유지 조항으로 구성된다. 이 전 대표가 당 대표직을 박탈당한 뒤 쏟아낸 발언들은 권 의원에 비할 바가 아니다. 권 의원 징계가 궁극적으론 이 전 대표를 겨냥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권 의원 사례는 한국 정치의 우스운 한 장면이다. 당은 “국민의힘이 싫으면 탈당하라”며 제명을 안 해 준다. 해당 의원은 “마음대로 하라”며 나 홀로 행보를 보이고 급기야 괘씸죄에 걸려 징계 대상에 올랐다. 빌미를 준 쪽이나 징계를 하려는 쪽이나 다를 게 없다. 다만 국회의원은 헌법 기관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정치적 견해에 대해 징계를 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갈수록 정치의 담대함은 사라지고 누가 더 옹졸한지 경쟁이라도 하는 것 같아 답답하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08-25 문해력과 리터러시

‘금일 심심한 사과를 드리면서 사흘간 무운을 빈다.’ 인터넷상에선 최근 문해력 논란을 불러일으킨 단어를 조합한 글짓기 놀이가 한창이다. 금일(今日)은 이 단어가 오늘이 아닌 금요일을 뜻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과제를 늦게 제출한 대학생의 사연에서 따온 것이다. 최근에는 ‘마음이 깊고 간절한’을 뜻하는 ‘심심(甚深)한’ 사과가 화제가 됐다. 한 웹툰 작가 사인회 예약 사이트서 오류가 발생하자 이에 대해 주최 측이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고 했다. ‘심심’을 맛이 밋밋하다거나 지루하다는 뜻으로 오독해 다시 항의가 빗발쳤다.
▷지난 광복절 ‘사흘 연휴’를 다룬 기사에는 일부 독자가 기사의 사실이 틀렸다며 비난하는 댓글을 줄줄이 달았다. 3일을 뜻하는 우리말 ‘사흘’을 4일로 이해한 것이다. ‘무운을 빈다’는 지난해 11월 이준석 당시 국민의힘 대표에 의해 소환된 단어다. 안철수 당시 국민의당 대표의 대선 출마선언을 두고 이 전 대표가 ‘무운을 빈다’고 했더니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운수인 ‘무운(武運)’을 운이 없다는 ‘무운(無運)’으로 해석한 기사가 보도됐다.
▷표음문자인 한글은 한자를 모르면 그 뜻을 파악하기 어렵다. 더욱이 요즘은 책을 읽지 않으니 문맥상으로 의미를 추론해 익히지도 못한다. 실제 교사들이 문해력이 낮은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애를 먹고 있다고 한다. 수학 문제가 길어지면 이해하지 못하고, 영어를 한글로 바꿔 줘도 뜻을 모른다. 비단 청소년만의 문제일까. 성인 880여 명을 대상으로 복약지도서 임대차계약서 등을 제시한 문해력 테스트를 했더니 평균 점수가 54점이었다는 조사도 있다.
▷청소년은 한자어가, 어르신들은 외국어가 낯설다. 남발되는 외국어는 문해력 저하의 주요 원인이다. 최근 ‘Pick up’(가져가는 곳) ‘Counter’(계산대) 등 한글 안내 없이 온통 영어만 쓰인 햄버거 매장이 ‘노(NO) 노인존’이라며 논란이 됐다. 번역 없이 영어를 그대로 옮긴 신기술 용어와 ‘최애템’(최고로 아끼는 아이템) ‘킹받네’(열받네)같이 영어와 한글을 섞은 신조어가 많이 쓰이는 것도 어르신들의 문해력을 떨어뜨린다.
▷젊은 세대는 말 그대로 문해력이, 노인 세대는 ‘디지털 리터러시(Literacy)’ 같은 이른바 새로운 디지털 기술에 접근하고 이용하는 문해력이 문제다. 고도의 압축 성장에 따른 세대 간 단절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국제성인역량조사(PIAAC)에 따르면, 문해력 수준이 높을수록 양질의 일자리를 얻을 뿐 아니라 건강 상태가 좋고, 지역사회 활동에 활발히 참여한다. 문해력은 단순히 읽고 쓰는 능력이 아니라 삶을 풍요롭게 향유할 수 있는 자산인 셈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8-26 美 학자금 빚 탕감 논란

미국 베스트셀러 작가인 존 그리셤의 소설 ‘루스터 바’에는 억대 학자금 대출에 시달리는 로스쿨 학생 3명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빚에 짓눌려 있던 이들은 가짜 변호사 행세를 하며 돈을 긁어모을 사기 행각을 시작한다. 빚더미에 올라앉은 대학생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주목받은 작품이다. 그리셤은 2017년 출간 당시 “학생들이 도저히 갚을 길 없는 대출금 위기가 언젠가는 터질 것”이라고 했다.
▷미국 대학생의 55%는 학자금 대출을 받고, 평균 2만8400달러의 빚을 진 상태에서 졸업한다. 학자금 대출이 있는 미국인은 현재 4300만 명. 대출 총액은 1조7500만 달러(약 2330조 원)에 이른다. 연간 최대 7만 달러가 넘는 미국의 대학 등록금을 대출금 한 푼 없이 납부할 수 있는 청년들은 많지 않다. 이자는 불어나는데 임금이 줄고 물가는 오르니 부담은 커진다. 대출자 5명 중 1명은 50세 이상 장년층이다. 수십 년을 갚아 나가고도 아직 원금을 못 털어낸 사람들이 있다는 의미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발표한 대대적인 학자금 대출 탕감 계획을 놓고 찬반 논란이 뜨겁다. 빚의 사슬을 끊어 중산층의 안정적 생활을 돕겠다는 취지라지만, 결국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포퓰리즘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치솟는 물가를 잡겠다고 연달아 금리를 인상하면서 한쪽에서는 돈을 뿌리는 무책임한 정책이라는 것이다. 찬성 쪽에서도 의견은 갈린다. 민주당 강성 의원들은 1인당 최대 2만 달러의 탕감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며 되레 5만 달러까지 증액을 요구하고 있다.
▷학자금 대출 탕감이 불붙인 미국 내 공정성 논란은 특히 거세다. 대학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이들, 각종 대출금을 묵묵하고 성실하게 갚아온 이들과의 형평성을 해친다는 것이다. 고소득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엘리트까지 정부가 세금으로 도와줘야 하느냐는 반발이 나온다. 한국 돈으로 1인당 연간 소득이 약 1억6000만 원, 부부 합산으로는 3억 원인 경우까지 탕감 대상에 들어간다니 이런 비판을 피해 가긴 어려워 보인다.
▷공부 때문에 청춘 시절부터 떠안게 된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는 것은 의미 있는 시도다. 그러나 빚 탕감은 숫자 계산을 넘어 사회적, 도덕적, 정치적 고려 요인들이 복잡하게 얽히는 민감한 선택이다. 역차별과 도덕적 해이 논란, 그것이 불러올 부정적 파급 효과까지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최근 한국에서 청년 채무자의 대출이자 감면을 놓고 논란이 불거진 것도 결국 같은 이유였다. 공정성과 경제성 사이의 미묘한 구도 속에서 국민적 합의를 끌어낼 최적의 해법을 찾아내는 일은 한국에도 미국에도 지난한 과제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8-27(토) ‘메이저리그’ 진입한 K방산

한국산 무기 수출에 순풍이 불고 있다. 어제 폴란드 정부와 K2 전차, K9 자주포 수출 1차 계약을 한 규모만 8조 원에 육박한다. 총 사업 규모는 25조 원이 넘고, 탄약운반 장갑차, 탄약 등을 포함하면 40조 원을 웃돈다고 한다. 우리나라 무기 수출 사상 최대 규모다. 올 상반기엔 아랍에미리트(UAE), 이집트와 6조 원대 무기 수출 계약도 했다. 호주, 노르웨이, 사우디아라비아 등과도 수출 협상이 진행 중이다.
▷지난해 무기 수출액은 70억 달러로 역대 최대 규모였다. 매년 무기 수입액은 50억 달러 정도였는데 처음으로 수출액이 수입액을 역전했다. 현재 한국은 세계 무기 수출 시장에서 8위다.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간 수출 증가율도 직전 5년(2012∼2016년) 대비 177%로 가파르게 늘어나 세계 1위가 됐다. 이런 추세라면 올해 수출액 100억 달러 달성도, 세계 5위권 진입도 무난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미국 CNN은 “폴란드 등과의 무기 계약으로 한국이 ‘방위산업 메이저리그’에 진입했다”고 보도했다.
▷한국산 무기가 잘 팔리는 비결로 우수한 ‘가성비’를 많이 꼽는다. 미국과 유럽 선진국 무기와 성능이 비슷한데도 비용은 상당히 저렴한 것이 강점이다. 대전차 미사일 현궁은 한 발당 3억 원 정도인 미국산 재블린과 성능 차이가 없는데도 가격은 3분의 1 수준이다. 주요 무기 수출국인 러시아와 중국이 안고 있는 무역제재 위험이 없다는 점도 강점이었을 것이다.
▷각국에서 무기 수요가 늘어난 것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영향이 크다. 외교적 협력도 중요하지만 국토방위에 필요한 적절한 군사력이 없으면 언제든지 공격당할 수 있다는 냉엄한 현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인접한 러시아와 독일의 침략을 받았던 폴란드가 무기 수입에 더 적극적으로 나선 배경 아닐까. 경제는 먹고사는 문제이지만, 안보는 죽고 사는 문제라는 지적을 절감한 것 같다.
▷전 세계 무기 수출 비중에서 압도적 1위는 항공기다. 2017∼2021년 47%를 차지했다. 직전 5년에 비해 항공기 수출 비중은 6%포인트나 늘었다. 미국과 러시아, 프랑스가 항공기 수출을 주도하고 있다. 공중전이 전쟁의 승부를 가르는 핵심인 만큼 항공기 수요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반면 한국의 항공기 수출 비중은 0.7% 수준이다.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한 항공 분야를 포함해 함정, 광학 분야의 해외 기술 의존도는 여전히 높은 편이다. 막대한 비용이 투입되는 무기 개발의 각종 리스크도 복병이다. K방산은 외형적으로 크게 성장하고 있지만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선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08-29(월) “세입자 구합니다”

‘에어컨 무료 설치’ ‘도배 새로 해드림’. 전세 만기가 임박해도 세입자를 찾지 못하는 요즘, 마음을 졸이던 집주인들이 이런 혜택을 내걸고 세입자 모시기에 나섰다. 갱신 계약 시 보증금 인상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등장했다. 금리 상승으로 대출 이자를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목돈이 필요한 전세 수요가 급감한 탓이다. 보통 이사는 아이 학교를 옮기거나, 평수를 늘리거나, 교통이 편리한 곳처럼 지금보다 나은 주거 환경을 누리기 위해 한다. 이에 맞춰 전세금을 올려줘야 하기 마련인데 대출 이자가 부담스러워 살고 있는 집에 눌러앉는 현상이 나타났다.
▷신학기면 학군 수요로 북적이는 서울 대치동 은마아파트도 방학 내내 이사하는 집이 뜸했다. 이 단지는 인근 학교와 학원가 프리미엄을 누리려는 세입자가 많다. 그래서 전·월세가 전체 가구의 60%가 넘는데 최근 전·월세 거래가 감소했다. 특히 전세는 6월에 42건이 거래된 후 7월(27건), 8월(15건)뿐이었다. 1억∼2억 원 가격을 낮춘 전세 매물들이 나오고 있고 최근 전용 84m² 전세를 계약하려던 세입자가 계약금 1000만 원을 포기한 사례도 있었다.
▷부동산 빅데이터 업체 아실에 따르면 8월 기준 서울 아파트 전세 물건은 모두 3만4496건으로 2년 전(1만5828건)에 비해 118%나 증가했다. 계약갱신요구권, 전월세 상한제 등 임대차법 시행 2년이 되는 이달이면 전셋값 폭등 대란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됐으나 완전히 빗나갔다. 오히려 ‘깡통전세’ ‘역(逆)전세난’ 걱정이 커지고 있다. 전세 거래가 이뤄지지 않으면 기존 세입자들이 이사를 하고 싶어도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따르면 지난달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은 건수가 421건, 그 액수가 872억 원으로 역대 최고인 것으로 집계됐다.
▷월세가 전세대출 금리보다 유리해지고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커지면서 전세가 빠르게 반전세·월세로 전환되고 있다. 올해 상반기 전국 주택 전·월세 거래 중 월세 거래 비중이 51.6%를 차지했다. 월세 거래가 전세 거래를 앞지른 것이다. 두 달 넘게 전세금은 하락하는데 월셋값은 상승하는 전·월세 시장의 디커플링도 계속되고 있다.
▷세입자 품귀 현상은 주택 매매 가격이 하락한 데 따른 당연한 귀결로 전셋값이 정상화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동안 전세금이 올라도 너무 오른 것이 사실이다. 올해 5월 서울 아파트 전세 평균 가격이 6억3339만 원으로 약 4년 동안 무려 46%나 상승했다. 알뜰살뜰 월급 모으고, 살림한다고 모을 수 있는 돈이 아니다. 세입자로선 전셋값이 오르면 올라서, 전셋값이 내리면 내려서 집 구하기가 어려우니 그게 문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8-30 21년 만에 잡은 살인강도

2001년 12월 대낮에 대전의 은행 지하주차장에서 현금 수송차가 습격당했다. 복면강도 2명은 3억 원이 든 현금 가방을 빼앗고, 저항하던 은행 직원에게 실탄까지 쐈다. 3중 선팅 된 검은색 차로 폐쇄회로(CC)TV가 없던 인근 지하주차장으로 이동한 이들은 하얀색 차로 갈아탄 뒤 사라졌다. 버려진 차에는 지문까지 닦여 있었다. 경찰은 은행 강도 영화를 빌려 본 사람들까지 1만 명 넘게 조사했지만 좀처럼 증거를 찾지 못했다.
▷16년 뒤 경찰은 압수물 창고에 오랫동안 보관하고 있던 차량 속 손수건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냈다. 기존 수사 때는 범인의 신원을 추정할 수 있는 혈액형과 지문 정보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국과수가 얼마 뒤 손수건에서 유전자(DNA) 정보를 찾아냈다. 범행 당시 얼굴을 가리던 용도로 쓰인 손수건에 땀이나 침이 묻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사기관이 보관 중이던 수십만 명의 범죄자 DNA 정보와는 일치하지 않았다.
▷수사팀은 손수건 속 DNA의 주인공을 찾기 위해 재수사에 나섰다. “최소 5년은 잡고 가자. 우리가 못하면 우리 자식을 경찰 시켜서라도 하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수개월 전 경찰은 50대 초반의 용의자 A 씨가 범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A 씨가 버린 담배꽁초를 입수했다. 담배꽁초와 손수건의 DNA 정보는 똑같았다. 경찰은 범행 21년 만인 27일 A 씨와 공범 B 씨를 동시에 구속 수감했다.
▷살인 사건의 공소시효가 연장되지 않았다면 강도 살인 사건의 진범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이 사건의 공소시효는 당초 범행 15년 뒤인 2016년 12월까지였다. 2007년 살인 사건의 공소시효가 25년으로 늘어났지만 법 시행 이전에 발생한 은행 강도 살인 사건은 소급 적용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2015년 7월 살인죄의 공소시효를 없애는 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법 시행 시점을 기준으로 공소시효가 남아 있던 2000년 8월 1일 이후 살인 사건의 공소시효가 무기한으로 늘어났다. 이때부터 살인 미제 사건 수사가 속도를 냈다.
▷3년 전 ‘화성 연쇄 살인사건’의 진범 이춘재가 33년 만에 붙잡혔던 것은 피해자 속옷의 미세한 땀방울까지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DNA 분석 기법이 정교해졌기 때문이다. 살인 사건의 공소시효를 없앤 것은 피해자 유족의 응어리를 조금이라도 풀어주기 위한 것이다. 은행 강도 살인 사건처럼 경찰이 추적 중인 미제 사건이 아직 279건이 더 있다고 한다. 경찰은 ‘완전 범죄는 없다’는 집념을 갖고, 조그마한 단서라도 끝까지 추적해야 한다.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08-31(수) 홍수에 잠긴 파키스탄

“구조 활동을 위해 내륙에 처음으로 해군을 출동시켰습니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땅이 작은 바다처럼 돼 버렸기 때문입니다.” 셰리 레만 파키스탄 기후변화부 장관이 외신 인터뷰에서 홍수의 심각성을 표현한 말이다. 파키스탄 국토의 3분의 1가량이 물에 잠겼고, 3300만 명이 수해를 입었다. 이에 주민들 사이에서는 “하늘에서 지옥문이 열렸다”는 절규마저 나오고 있다.
▷파키스탄에서는 올봄 최고 50도가 넘는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더위가 끝나자 ‘괴물 몬순(장마)’이 찾아왔다. 강한 빗줄기가 이어졌고 피해가 집중된 신드주에서는 8월에 평년보다 8배 많은 비가 쏟아졌다. 전국적으로 1100명이 넘는 주민이 목숨을 잃었고 100만 채의 집이 부서졌다. 경제적 피해는 100억 달러로 추산된다. 파키스탄 국내총생산(GDP)의 4%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다. 이미 물가 급등과 식량난으로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2억3000만 파키스탄 주민들의 주름이 더욱 깊어지게 됐다.
▷파키스탄은 1인당 GDP가 1500달러 정도에 불과한 빈국이어서 자연재해에 대한 대비가 충분하지 못하다. 부실하게 지어진 일부 댐과 제방들은 이번 홍수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져버렸다. 파키스탄의 산들은 대부분 가파르고 나무도 적어서 빗물을 충분히 흡수하지 못한다. 이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홍수 피해가 커졌다고 영국 가디언은 진단했다. 파키스탄 적신월사(적십자사)는 “아직 최악의 상황이 아니다”라며 앞으로 수인성 질병이 창궐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파키스탄은 2010년에도 큰 홍수로 2000만 명의 수재민이 발생했다. 일부 학자들은 2010년과 올해 모두 라니냐(태평양 해수온 이상 현상)가 발생했다는 점에서 라니냐와 홍수의 연관성에 주목한다. 하지만 지구온난화가 더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기온이 높아질수록 수증기가 많이 발생해 폭우가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지구의 기온이 1도 올라가면 남아시아 지역에서 우기에 내리는 비의 양이 5% 늘어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1959년 이후 전 세계에서 배출된 이산화탄소 가운데 파키스탄이 차지하는 몫은 0.4%에 불과하다. 미국(21.5%)이나 중국(16.4%) 등에 비하면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독일 기후연구기관 저먼워치가 평가한 기후위험지수에서도 푸에르토리코, 미얀마, 아이티 등 가난한 국가들이 1∼3위를 차지했다. ‘선진국들이 내뿜은 온실가스에 정작 심각한 피해를 입는 것은 빈국들’이라는 지적이 나올 만하다. 공업화의 혜택을 누려온 선진국들이 기후변화에 따른 개발도상국들의 고통을 마냥 외면해서는 안 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