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세계사/ 조선일보 2016.
2016.01.07 엘니뇨 때문에 패배
이번 주 내내 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긴 하지만, 지난 12월은 월평균 기온이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래 42년간 가장 따뜻했다고 해요. 전 세계적으로도 겨울이 너무 따뜻해서 이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죠. 알프스 산맥의 스키장은 눈이 녹아 흙바닥을 드러냈고, 미국 워싱턴에선 때아닌 봄꽃이 피기도 했지요. 이런 극단적인 이상기후 현상은 엘니뇨 때문이에요. 엘니뇨는 적도 부근의 바다가 더워지면서 온도 상승이 지속되는 현상이지요. 올겨울 찾아온 역사상 둘째로 강한 수퍼 엘니뇨로 지구촌 곳곳에 가뭄, 이상고온 등 기상이변이 일어나고 있어요. 뿐만 아니라 엘니뇨는 혹한도 찾아오게 할 수 있답니다.
엘니뇨는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세계사 속 다양한 사건에도 영향을 주었어요. 그중에서 오늘은 나폴레옹이 엘니뇨가 원인이 된 강추위로 패배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1812년 6월, 60만명이나 되는 나폴레옹의 군대는 러시아 원정을 나섰어요. 영국을 유럽에서 따돌리려는 프랑스의 계획을 무시하고 러시아가 영국과 무역을 했거든요. 나폴레옹의 군대는 유럽 최강이었고, 러시아 정벌은 유럽 전체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는 기회였죠.
▲ 러시아를 침공한 나폴레옹은 엘니뇨로 인한 모스크바의 혹한으로 패배했어요. /위키피디아
프랑스와 러시아의 전투가 시작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쿠투조프 러시아군 총사령관이 이끄는 러시아 군대는 변변히 싸우지도 않고 후퇴만 했어요. 프랑스군은 정신없이 적을 뒤쫓던 중 어느새 보급로가 끊겼고, 식량과 물자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 이르렀지요. 게다가 여름철 무지막지한 더위와 굶주림에 병사들은 지쳐가고 있었어요. '모스크바까지 가면 결국 러시아가 항복할 거야. 많은 전리품을 챙겨서 고국에 돌아가야지.' 나폴레옹 군대의 희망사항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모스크바에 도착해보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온통 불바다였어요. 모두 불사르고 후퇴한 거죠. 폐허 속에서 한 달이 넘도록 항복을 기다렸지만, 러시아군은 넓은 영토를 발판 삼아 끝없이 후퇴할 것만 같았어요. 결국 나폴레옹은 10월 퇴각 명령을 내립니다.
돌아가는 길은 까마득했어요. 유난히 따뜻했던 날씨는 12월이 되자 영하 38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으로 변했어요. 대포는 얼어붙고, 설상가상으로 프랑스 병사들의 군복을 멋지게 빛내주던 은색 단추들이 하나씩 부서졌죠. 주석으로 만든 은빛 단추는 추위에 약해서 기온이 떨어지면 회색 가루가 되는 특성이 있거든요. 얇은 여름 군복에 단추까지 부서졌으니 러시아군의 습격을 받아도 손쓸 도리가 없었지요. 상상도 못할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병사들은 야수로 돌변해 약탈을 하거나 서로 죽이고, 부대에서 이탈했어요. 러시아 원정은 나폴레옹 일생에 가장 끔찍한 전투였고, 결국 나폴레옹이 몰락의 길을 걷게 만들었답니다.
한편, 러시아가 낳은 대문호·음악가를 비롯한 예술가들은 러시아의 승리를 소재로 많은 명작을 창작해냈어요. 차이콥스키는 러시아의 승리를 기념해서 '1812 서곡'이라는 곡을 완성했답니다. 종소리와 대포 소리가 일품인 이 곡은 장엄한 분위기가 압권이죠. 톨스토이가 쓴 명작 '전쟁과 평화' 역시 러시아 전쟁을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이랍니다. 나폴레옹의 패배가 러시아의 민족의식을 일깨운 셈이에요.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1812년의 기상이변은 엘니뇨 때문이었다고 해요. 만약 나폴레옹이 날씨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면 러시아 원정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까요? 1941년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할 때, 타국에 대한 근거 없는 우월감으로 똑같이 패한 것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엘니뇨라는 자연재해도 패배의 한 요인이지만, 결국 섣부른 판단과 욕심이 불러온 결과였으니까요.
기획·구성=김지연 기자 공미라·세계사 저술가 - 이하 공미라
01.21 아이슬란드와 영국, 대구 놓고 세 차례나 전쟁 벌였어요
국립해양조사원에 따르면 제주도 주변 바다의 수온이 지난 16년간 1.3도 높아졌다고 해요. 온난화와 엘니뇨의 영향 때문이지요. 최근 한반도 해역에서는 찬물에서 사는 대구·명태·꽁치·정어리보다는 따뜻한 물에 사는 오징어·해파리가 많이 잡히게 됐대요. 찬물에 사는 생선의 감소 현상은 전 세계적인 문제예요. 특히 유럽에서는 주요 식량인 대구가 줄어들어 고민이 많아요. 미국 메인만 연구소에서는 대구가 사라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어요. 한때 많이 잡혀 소중한 식량이 되던 대구는 다 어디로 간 걸까요?
10세기 무렵, 대구의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은 바이킹들이었어요. '토르발드'라는 바이킹은 사람을 죽이고 노르웨이에서 쫓겨나 아이슬란드를 개척했지요. 그의 아들 '붉은 머리 에이리크(Erik the Red)'도 살인죄로 쫓겨나 그린란드를 개척하지요. '붉은 머리 에이리크'의 아들인 '레이프 에이릭손'도 새 땅을 목격했다는 보고를 듣고 탐험을 떠났고, 북아메리카 대륙의 빈랜드에 도착했다고 해요.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자로 알려진 콜럼버스보다 먼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셈이지요. 바이킹의 모험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튼튼한 배와 말린 대구였어요. 대구는 단백질이 풍부하고 지방은 거의 없는 흰 살 생선으로 찬 바람에 말리면 무게가 5분의 1로 줄어들면서 널빤지처럼 딱딱해져요. 말리면 잘 썩지 않아 오래 보관이 가능하고, 항해를 하다 단백질을 보충할 수 있는 유용한 식량이죠. 찬물을 좋아하는 대구는 노르웨이·아이슬란드·그린란드·아메리카 대륙 근처 찬 바다에 떼 지어 살았어요. 바이킹의 항로가 대구 어장과 일치하는 건 우연이 아니겠죠?
▲ 16세기 벨기에의 생선 가게에서 대구를 파는 광경을 그린 그림이에요. 대구는 유럽 전역에서 널리 소비되는 생선이었답니다. /위키피디아
16세기엔 대구 어장을 찾아 뛰쳐나온 탐험가들로 바다가 북새통을 이뤘죠. 17세기 미국에서는 청교도들의 대구잡이가 활발해, 대구를 팔아 벼락부자가 된 '대구 귀족'까지 생겼지요. 18세기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증기로 움직이는 대구잡이 배가 등장했어요. 19세기에는 바다 밑바닥까지 훑으면서 싹쓸이하는 저인망 어선이 만들어졌고요. 20세기가 되면서 위치추적기를 단 냉동선도 만들어졌죠. 무분별한 대구 남획이 계속되었고, 기후변화로 바닷물마저 따뜻해지자 대구의 씨가 마르기 시작한 거예요.
아이슬란드와 영국은 3차례 대구 전쟁으로 잠시 국교를 단절하기도 했어요. 1944년 덴마크에서 독립한 아이슬란드는 자원이 거의 없어 어업이 국민의 생계 수단이었거든요. 당시에는 바다에 주인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아이슬란드 앞바다에서 어업 활동을 하던 외국 배들과 끊임없이 분쟁해야만 했지요. 포탄이 오가고 사상자가 나오는 지경에 이르자, 자기 나라 근처 200해리(약 370㎞)의 바다에서 다른 나라의 어업 활동을 막는 배타적 경제수역(Exclusive Economic Zone·EEZ) 제도가 생겼답니다.
최근 북대서양 인근 나라들은 대구잡이를 제한하고 치어(稚魚·알에서 깬 지 얼마 안 되는 어린 물고기)를 방류하고 있어요. 우리나라의 국민 생선 명태도 무분별한 고기잡이로 사라지고 있는데요. 식탁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해 봅니다.
03.10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당시, 日그린 '일본영역도'에 독도 없어
2016년 새 학기에 나눠준 일본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 8종과 일부 사회·지리 교과서에는 '독도는 일본 고유 영토이며, 한국이 불법으로 점령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고 합니다. 지난 2014년 일본 시마네현의 고등학교 입학시험에서는 "일본이 주장하는 일본과 한국의 배타적경제수역 경계선으로 적당한 것을 지도에서 고르면?"이라는 문제가 나오기도 했어요.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우리 국토임을 알고 있는 독도를, 왜 일본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걸까요? 오늘은 그 근거를 알아보며 조목조목 반박해보기로 해요.
▲ /해외문화홍보원
1900년 10월 25일인 '독도의 날', 대한제국 칙령 41호에서 독도를 대한제국의 행정구역으로 포함했어요. 그 후 1905년 2월 22일, 일본은 '독도는 일본 영토이며 시마네현 아래로 편입한다'는 시마네현 고시를 발표했지요. 시마네현 고시는 과연 정당한 효력이 있을까요? 국제적으로 주인 없는 땅의 소유권은 해당 지역을 먼저 차지했거나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나라 것으로 인정해요. 하지만 시마네현 고시 이전 독도는 주인 없는 땅이 아니었어요. 이미 대한제국 영토였거든요. 게다가 일본이 시마네현 고시를 통해 독도가 주인 없는 땅이라고 주장했다는 것 자체가 그 전에는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었음을 인정하는 셈이죠.
이에 논리가 어긋난 일본은 '시마네현 고시는 영유권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며, 독도는 원래부터 고유한 일본의 영토였다'고 주장했어요. 1779년에 만든 나가쿠보 세키스이의 '개정 일본여지노정전도'에 일본 영토로 독도가 칠해져 있는 것이 그 증거라고 밝혔지요. 하지만 처음 만든 초판 지도에는 독도와 울릉도가 전혀 채색되지 않았지요. 즉 독도는 우리 영토가 맞고, 개정판은 일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개판한 지도라는 뜻이죠.
▲ 일본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과서에 ‘독도는 일본 영토이며 한국이 점거하고 있다’는 내용(사진)을 넣었다고 해요. 그러나 독도가 우리나라의 영토라는 사실은 삼국사기·세종실록·대한제국 칙령·샌프란시스코 조약 등이 뒷받침하고 있답니다. /연합뉴스
그뿐만 아니라 1145년 편찬된 '삼국사기'에는 신라 지증왕 때인 512년 우산국(울릉도)이 항복하고 해마다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남아있답니다. 일본이 증거로 내세우는 고지도보다도 오래된 기록이지요. 또 1454년 편찬한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우산(독도)과 무릉(울릉) 두 섬은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서로 잘 보인다'는 기록이 남아있어요. 이 밖에도 많은 우리 문헌과 고지도에서 독도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답니다.
한편 일부 일본인은 '17세기 무렵부터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확립했다'고 주장하기도 해요. 하지만 당시 일본인들이 울릉도나 독도에 갈 때는, 배를 타고 외국으로 나갈 때 받는 허가증인 '도해면허'를 받아야만 했어요. 만약에 독도가 일본 영토라면 허가를 받을 필요가 있었을까요?
1951년 연합국은 2차 대전의 패전국인 일본과 관계를 개선하기로 하면서 '일본은 한국을 독립시키고, 제주도·거제도·울릉도를 포함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자격, 영유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맺었어요. 일본은 "독도는 빠져 있으니 일본의 영토로 인정해주었다는 의미"라고 주장하는데요.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제주도·거제도·울릉도는 한반도의 대표적 섬을 나열한 것일 뿐, 독도가 언급되지 않았다고 일본 땅이라 우기는 것은 억지이죠. 게다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승인하면서 일본이 작성한 '일본영역도'에도 독도가 일본 영토로 표시되지 않았답니다. 이쯤 되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논리도 근거도 없는 말임을 알겠죠?
04.14 편견과 비웃음에 맞서 싸우며… 4번 만에 여성 선거권 얻다
13일은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일이었어요. 영토가 넓고 인구가 많은 현대 국가에서는 선거를 통해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대의정치를 하고 있지요. 이번에 선출된 국회의원들이 어떤 정책을 실현하는가에 따라 민주정치의 성공 여부가 달라질 수 있어요. 그래서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부른답니다.
그런데 선거에 참여하기 위한 권리인 '선거권'이 처음부터 누구에게나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특히 여성들에게 있어서 '보통선거의 원칙'은 그냥 얻어진 게 아니었답니다. 보통선거란 만 19세 이상의 연령에 달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거에 참여한다는 것으로, 평등선거·직접선거·비밀선거와 함께 선거의 4대 원칙이라고 불리지요. 우리나라에서는 1948년 치러진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 때부터 만 21세에 달하는 남녀 국민 모두에게 선거권이 부여되었지만, 전 세계적으로 볼 때 남자에게 먼저 선거권이 부여된 후 여성에게 선거권이 확대되는 과정을 거치거든요. 이러한 선거권 확대 과정은 곧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이라고 볼 수 있어요. 오늘은 여성 선거권이 인정되는 첫 선례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아보도록 해요.
▲ 뉴질랜드 남섬 최대 도시 크라이스트처치시에는 케이트 셰퍼드(왼쪽에서 셋째)와 여성 참정권 운동을 함께했던 동료들의 기념상이 세워져 있어요. 여성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는 편견에 맞선 케이트 셰퍼드 덕분에 현재는 성별에 관계없이 성인이라면 선거권을 가지게 되었죠. /크라이스트처치 공립도서관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영국, 신분제도가 철폐된 지 얼마 되지 않아 1832년 선거법이 1차로 개정되었을 때 선거권을 얻은 사람은 도시의 은행가와 돈 많은 사람들뿐이었죠. 영국의 평범한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정치에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차티스트' 운동 (chartist·권리를 적은 헌장을 뜻하는 'charter'를 주장한 사람들이라는 뜻)을 하며 21세 이상의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을 줄 것, 비밀투표를 할 것 등을 요구했어요. 결국 2차, 3차에 걸친 선거법 개정이 이루어지면서 1884년에는 농촌과 광산의 노동자들까지 교육 수준이나 재산에 따른 차별을 받지 않고 선거권을 갖게 되었죠. 단, 여자는 예외였어요. 당시까지만 해도 여자는 남자보다 무능하고, 직접 자신의 의견을 표명할 수 없으며, 가정을 지키는 것이 본분이라는 잘못된 통념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죠.
여기에 반기를 든 사람이 바로 영국 출신 뉴질랜드 이민자 케이트 셰퍼드였어요. 뉴질랜드에 정착한 케이트 셰퍼드는 1886년 '여성기독교인 금주모임'이라는 모임을 만들었어요. 이 모임은 원래 기독교 정신에 따라 술을 금지하고, 이혼이나 여성 차별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모임이었죠. 그러던 중 케이트 셰퍼드는 성차별 중 가장 큰 차별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차별이라고 판단하게 되고, 이 모임은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달라"고 세계 최초로 말하는 단체가 됩니다.
1888년 뉴질랜드 의회에 여성의 선거권을 정식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지만, 실패로 끝났어요. 남자들로 가득한 의회의 벽은 높았고, 과거 그녀의 금주 운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주류회사의 방해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죠. 케이트 셰퍼드는 '여자는 선거에 참여할 수 없다'는 편견과 비웃음에 맞서 싸우면서 총 세 번이나 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셰퍼드는 강하고,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1893년 케이트 셰퍼드는 뉴질랜드 성인 여성의 반수가 넘는 3만2000명의 서명을 받아 네 번째로 의회에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합니다. 뉴질랜드 의회는 20대18의 결과로 여성 선거권을 승인했고, 세계 최초로 여성들이 선거권을 갖게 된 나라는 뉴질랜드가 되었어요. 그날 이후 케이트 셰퍼드는 뉴질랜드의 딸로 영원히 남았고, 현재 우리 돈으로 약 7936원에 해당하는 '10뉴질랜드달러'의 화폐 인물로 기념되고 있어요.
04.28 천재지변을 조선인 책임으로 떠넘기며… 6600명 학살 돼
최근 일본 구마모토에서 지진이 나 41명이 숨지고 2만여 명이 대피했어요. 지난 16일에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태평양 가장자리에 속하는 남미 에콰도르 수도 키토 근처 해상에서 규모 7.8 지진이 발생해 최소 233명이 숨지고 수백만 인구가 이용하는 도시 시설이 파괴됐지요. 작년에는 국내에서도 전북 익산 지역에 규모 3.9의 내륙 지진이 발생한 적 있지요. 태평양을 둘러싼 지진이 계속되면서 '불의 고리 (Ring of Fire)' 가 살아나고 있다는 불안감을 안겨주고 있어요. 짧은 시간에 큰 피해를 남기는 지진은 예측하기 어려워 평소 대비책을 마련하고 훈련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오늘은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관동 대지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1923년 9월 관동 대학살 당시 누명을 쓰고 체포당한 조선인들이 갇혀 있는 모습이에요.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 낮 11시 58분, 집마다 점심 준비로 분주할 시간이었어요. 규모 7.9 강진이 시작돼 하늘이 무너질 듯한 소리가 나더니 땅이 꺼지기 시작했어요. 5분 간격으로 3번 땅이 격하게 흔들리더니 도로가 끊어지고, 전봇대가 쓰러지고, 집이 무너져 내렸어요. 때마침 음식을 만들던 화로 불길이 번지면서 목조 건물로 가득한 도시는 순식간에 지옥의 불구덩이로 변했지요. 활활 타오르는 불길 때문에 밤이 되어도 어둠이 찾아올 틈이 없었어요. 생사를 알 수 없는 사람은 자그마치 40만명이나 되었죠. 집 12만채가 무너지고, 45만 가구가 불에 탔어요. 도시는 울부짖는 소리와 비명으로 가득했어요.
이튿날 재해 수습에 나선 일본의 야마모토 곤베 내각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했어요. 하지만 일본인들의 혼란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죠. 이날 일본 내무성에서 각 경찰서에 보낸 치안 유지 명령에는 '조선인의 폭동에 대비하라'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일본인들을 죽이고 있다'는 의도적 유언비어 유포까지 포함되어 있었어요. 불만에 가득 찬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잔인하고 야비한 방법을 동원한 거예요. 당시 일본인들은 억울한 조선인을 6600명가량 대량 학살했다고 해요. 일본 경찰과 군인들은 치안 유지를 이유로 학살을 방관하다 사태가 점차 심각해지자 뒤늦게 법적 조처를 했어요. 천재지변을 조선인 책임으로 떠넘긴 '관동 대학살' 사건은 그해 10월 20일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보도되었죠
하지만 조선인 학살을 일부 극렬한 일본 주민의 책임으로 떠넘긴 데다 그나마도 나중엔 그들을 모두 풀어줬어요. 이때 억울함에 울분을 토하며 의열단의 김지섭 의사가 일본 왕궁 근처 '이중교' 라는 다리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했지요. 습기를 많이 먹은 폭약이 불발에 그쳐 실패했지만, 민족의 독립 의지를 보여준 사건이었어요.
지금도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들은 관동 대학살 사건에 대해 자세히 다루지 않아요. 명성사(明成社)에서 나온 교과서는 "한편으로는 조선인을 보호한 민간인과 경찰관도 있었다"고 기록해 일본인의 노력으로 대학살로 번지지 않은 것처럼 책임을 은폐하고 있지요.
일본 구마모토의 지진 소식은 인류애 차원에서 안타까운 소식이에요. 사상자의 아픔을 함께하면서 복구 작업이 빨리 이루어지길 한마음으로 바라요. 하지만 관동 대학살을 모호하게 기록하는 역사 왜곡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어요.
05.12 영국인의 '국민 음료' 홍차… 18세기 중국에서 들여왔어요
카공족'이라는 신조어를 들어본 적 있나요? 듣기에도 생소한 이 말은 '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의 줄임말이래요. 주로 대학가 근처 카페에서 노트북과 책을 펼쳐 놓고 공부하는 학생이 많아지면서 생긴 말이지요. 이처럼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기면서 정보를 나누고, 토론의 장을 펼치는 문화의 원조는 17세기 영국에서 커피를 전문으로 판매하던 '커피하우스'라고 할 수 있어요.
커피하우스는 입장료 1페니(penny)를 내면 커피를 무제한으로 즐기면서 사회 문제를 토론하고, 무역 정보를 교환하고, 문학과 과학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던 곳이었어요. 그래서 페니 대학(Penny University)이라는 별칭까지 갖고 있었죠. 하지만 뜻밖에도 커피하우스는 남녀차별의 공간이었어요. 남자들에게만 공개된 사교의 장이었지요. 당시 여자들은 집 안에서 커피를 마실 수밖에 없었어요.
▲ 17세기 영국 런던의 커피하우스에서 남자들이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왼쪽). 19세기 영국 중산층 계급의 집 안에서 부모님과 어린이가 함께 홍차를 마시고 있어요. /위키피디아·Getty Images 이매진스
유럽의 물은 석회석 성분이 많이 녹아 있어 맛도 좋지 않고 오래 마시면 몸에 담석이 생길 수 있어요. 그래서 중세 시대에는 맥주나 와인을 마시는 문화가 발달했답니다. 하지만 대낮부터 사람들이 술에 취해 돌아다니는 사회는 안전하지 않겠죠? 그래서 근대 유럽에서는 커피나 차를 마시는 문화가 발달한 거예요.
아시아에서 영국으로 차가 최초로 수입된 것은 17세기 초로 추정돼요. 1662년 영국 왕 찰스 2세와 결혼한 포르투갈의 캐서린 공주가 영국 사교계에 티타임을 즐기는 문화를 유행시키면서, 영국 전역에 본격적으로 차 문화가 퍼지기 시작했어요. '악마의 유혹'이라는 별명을 가진 커피도 훌륭했지만, 영국인들은 순식간에 중국 차의 깊은 향에 빠져들었어요. 늘 흐리고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영국 날씨에 따뜻한 차는 딱이었거든요. 영국 사람들은 차를 마시며 심신을 달랬죠. 차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찻잎 500g의 가격이 남자 하인의 1년치 급여에 버금갔을 정도였다고 해요.
18세기 영국은 찻잎을 발효·건조한 홍차를 들여왔어요. 산업혁명으로 중산층이 등장하면서 차의 수입량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어요. 옛날에는 부자들이나 구할 수 있었던 설탕을 듬뿍 넣고, 뽀얀 우유를 첨가한 밀크티(milk tea)가 대중적인 음료가 됐죠.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대부분의 영국인은 홍차를 즐기게 되었어요. 아이들도 하인들도 찻잔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눴고, 명실상부한 국민 음료로 자리를 잡았답니다.
그러나 영국인의 홍차 사랑이 커질수록 영국과 중국의 무역 불균형 문제는 심화됐어요. 중국은 영국 물건에 도통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중국에서 차를 수입할 때 거래는 은으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영국의 은이 대량으로 중국에 유입됐어요. 중국과의 무역에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뛰어들면서 차 수입은 더욱 늘었어요. 영국 입장에서는 대규모 무역 적자가 불만일 수밖에 없었죠.
그러자 영국 정부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돼요. 당시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마약인 아편을 생산해 중국 정부 몰래 중국인들에게 판매한 거죠. 이는 1839년부터 시작된 아편전쟁의 원인이 되었어요. 이처럼 홍차는 근대사의 커다란 사건 이면에 자리 잡아 있답니다.
05.26 자유 외친 '도망 노예'… 흑인이자 여성 최초로 美 지폐 속 인물 되다
지난달 미국 재무부는 20달러 지폐 인물을 기존의 제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에서 흑인 여성 인권 운동가 해리엇 터브먼(1822-1913)으로 교체하겠다고 밝혔어요. 양성평등의 가치가 널리 인정받고 있는 미국 사회에서 정작 지폐 인물에는 여성이 없다는 비판 때문이었죠. 이르면 2020년 해리엇 터브먼의 초상화가 그려진 새 20달러 지폐가 등장할 예정이에요. 해리엇 터브먼은 미국 지폐 인물 가운데 사상 첫 흑인이기도 하답니다. 과연 그녀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해리엇 터브먼은 흑인 노예 수백 명의 탈출을 도왔던 용감한 여성이랍니다. 해리엇 터브먼이 활약했던 1800년대 중반 미국, 남부 사람들과 북부 사람들은 흑인 노예 문제를 두고 서로 갈등을 겪고 있었어요. 넓은 농장이 발달한 남부의 백인 지주들은 흑인 노예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죠. 물론 흑인들의 노동력을 공짜로 부려 먹기 위해서였지요. 반면 이제 막 산업혁명을 시작한 북부의 공장에서는 임금이 싼 노동자들을 필요로 했어요. 북부 사람들은 남부의 흑인 노예들이 해방되면 북부에 있는 공장에 취직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북부는 흑인 노예 제도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남부와 북부의 경제구조 차이 때문에 노예제를 둘러싸고 날카로운 대립이 벌어졌던 거예요.
▲ 1887년 여성 흑인 인권운동가 해리엇 터브먼(왼쪽 끝)이 자신의 집 앞에서 가족과 찍은 사진이에요. 아래 사진은 앞으로 새 20달러 지폐에 담길 해리엇 터브먼의 초상화를 형상화한 이미지랍니다. /뉴욕타임스 사진 아카이브·AFP/연합뉴스
해리엇 터브먼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끌려온 노예였어요. 그 결과 해리엇도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어요. 어린 시절 해리엇은 주인에게 맞아 머리를 크게 다쳤고, 그 후유증으로 어른이 되어서도 수면 장애와 두통에 시달리며 살았어요. 해리엇은 왜 노예들은 주인에게 학대받아야 하는 걸까 생각하며 분노했어요.
해리엇은 남부 흑인 노예를 북부로 도망시켜주는 비밀 조직 '지하철로(Under grou nd Railroad)'의 도움을 받아 탈출했어요. 이 조직은 실제로 철도를 이용하진 않았지만, 남부 농장에서 북부 공장까지 장거리를 은밀히 다니느라 지하철로라는 별명으로 불리었어요. 이들은 도망 중인 흑인 노예를 '승객'이라고 부르며 안전한 숙소와 음식을 제공하고 일자리와 자유가 있는 북부로 이동시켰어요. 도망 노예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사람은 '차장'이라고 불렀죠.
1850년부터 해리엇도 지하철로의 차장이 되어 동료 흑인 노예들의 탈출을 돕기 시작했어요. 해리엇의 도움으로 1860년까지 19차례에 걸쳐 300명 이상의 노예가 자유를 찾았어요. 그녀의 인생은 순탄치 않았어요. 해리엇은 혹시나 주인들이 사냥개를 풀어 쫓아오지 않을까 싶어 냄새가 강한 후추를 뿌리며 도망쳤대요. 당시 흑인은 글을 배울 수 없었기 때문에 문맹이었던 해리엇은 지도를 읽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바느질로 글자가 없는 암호 지도를 만들어 가지고 다녔어요. 그리고 밤하늘에 빛나는 북극성, 강물의 흐름을 더듬어가며 북쪽으로 향했지요.
겨울철에는 아이들이 추위와 겁에 질려 운다는 문제가 생겼어요. 해리엇은 우는 아이들에게 진통제를 먹여서 재웠어요. 가끔 어른들도 용기를 잃어 중도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해리엇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총부리를 들이대서 위협해서라도 끝까지 탈출하게 도왔어요. 나중에는 그들도 해리엇에게 '용기를 줘서 고맙다'고 말했대요.
1861년 결국 남북전쟁이 터졌어요. 해리엇은 북군의 편에 서서 스파이 역할을 하며 '터브먼 장군'이라는 별명을 얻게 돼요. 결국 전쟁은 북부의 승리로 끝났고, 링컨 대통령이 흑인 노예를 해방했어요. 해리엇은 그 후에도 평생 여성참정권과 흑인 인권을 위해 사회 운동에 헌신했답니다.
06.09 이슬람교도들이 술 대신 마시던 음료… 맛으로 교황에게 인정받다
올해 관세청에서 우리나라 성인 1인당 커피 소비량이 1년 기준 338잔이나 된다는 통계를 발표했어요. 어른들은 하루에 한 잔꼴로 커피를 마신다는 거지요. 커피는 피곤함을 덜어주는 효과가 있는 데다 향이 좋아 인기가 매우 많은 음료예요.
우리나라는 커피를 재배하기 어려운 자연환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커피콩을 다양한 나라에서 수입해요. 커피콩은 주로 적도 지방에 해당하는 남아메리카,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지방에서 잘 자라지요. 그렇다면 커피를 가장 먼저 마시기 시작한 나라는 어디일까요?
▲ 19세기 터키 이스탄불의 커피하우스 모습이에요.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장소지요. 최초의 커피하우스는 1500년대 이스탄불에서 문을 열었대요. /위키피디아
6세기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서 목동들이 커피를 맨 처음 발견해 마시기 시작했대요. 그 후 9세기쯤 중동 아라비아 반도로 전래된 커피는 이슬람교도들에게 술 대신 마시는 음료로 사랑받았어요.
커피는 12세기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유럽에 알려졌어요. 십자군 전쟁은 가톨릭을 믿었던 유럽 국가들과 이슬람교를 믿었던 중동 국가들이 맞붙었던 전쟁이에요. 이 전쟁을 통해 동서양 문물이 섞이게 되었답니다.
이슬람 문화였던 커피를 '이슬람교도의 와인'이라고 부르며 반대했던 유럽인들도 있었어요. 16세기 말 로마의 몇몇 사제는 교황 클레멘스 8세에게 커피 금지령을 내려 달라고 요청했어요. "이슬람교도들이 마시는 커피가 퍼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고 사탄에게 영혼을 잃기 전에 커피 금지령을 내려 주십시오." 하지만 뛰어난 미식가였던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커피를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사제들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어요. "이렇게 매혹적인 음료가 사탄의 음료일 리가 없소!" 클레멘스 8세는 커피를'기독교의 음료'라고 공인했어요. 교황의 공인을 받은 커피는 유럽 전역으로 널리 퍼질 수 있었죠.
커피는 18세기 프로이센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어요. 프로이센은 나중에 여러 나라와 합쳐져 독일이 된 나라랍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커피 취향이 상당히 엉뚱했어요. 그는 커피에 샴페인을 넣고 끓인 다음 후춧가루를 뿌려서 마셨대요.
프리드리히 대왕은 백성들의 커피 소비량이 늘어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어요. 프로이센은 네덜란드로부터 커피를 수입했는데, 프리드리히 대왕은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을 억압하는 정책을 추진했거든요. 프리드리히 대왕은 커피 소비를 막기 위해 의사들을 시켜 커피에 독이 들어 있다는 소문을 내기도 했어요. 물론 좋은 방법은 아니었죠. 커피를 마시기 어려워지자 프로이센 사람들은 씁쓸한 치커리로 치커리 커피를 만들어 마시기도 했어요. 치커리 커피는 특허까지 받았어요.
보리, 무화과, 사탕수수, 호밀, 땅콩, 도토리, 심지어 해초까지도 끓여서 갈색을 내는 것이면 뭐든지 대용 커피 재료로 이용되었어요. 그래도 진짜 커피가 먹고 싶은 사람들은 몰래 구해 묽게 타서 먹었대요. 대용 커피가 어찌나 유명해졌던지 한동안 '독일 커피' 하면 '대용 커피'라는 인식이 생겨날 정도였지요. 프리드리히 대왕의 커피 억압 정책도 백성들의 커피 사랑을 막을 순 없었던 것이랍니다.
06.23 영국군에 패배하자 대륙과 영국의 무역 통제하다
영국인들이 아주 중요한 국민투표를 앞두고 있어요.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찬반 투표가 23일(현지 시각) 치러지거든요. 지난 2012년 유럽연합 재정 위기가 닥친 이후 영국에서는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여론이 높아졌다고 해요. 최근에는 유럽에 난민이 유입돼 생기는 문제도 늘어나고 있죠.
▲ 19세기 프랑스 제국이 내린‘대륙봉쇄령’으로 영국과 유럽 대륙이 대립하고 있음을 풍자하는 그림이에요. /파이브 칼리지 콘소시엄
영국은 유럽 대륙에서 따돌림을 당해온 역사가 있답니다. 섬나라 영국과 대륙의 강대국 프랑스는 아주 오래전부터 사이가 좋지 못했어요. 이 두 나라는 116년에 달하는 백년전쟁(1337~1453년)을 치른 역사도 있지요. 19세기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도 영국을 누르고 유럽 전역을 프랑스 세력권에 두겠다는 야심에 가득 차 있었죠. 1805년 프랑스는 스페인과 연합해 영국을 공격했어요. 그러나 영국 해군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바다 세상을 주름잡고 있던 터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어요. 영국의 넬슨 제독이 나폴레옹의 군대를 완전히 무찔러 버렸어요. 이 전쟁이 바로 유명한 '트라팔가르 해전'이지요.
이듬해인 1806년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을 내렸어요. 영국을 유럽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단절시키려는 작전이지요. 당시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가 프랑스 세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대륙봉쇄령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대륙봉쇄령은 역효과를 불러왔어요. 영국은 거꾸로 프랑스의 해상 무역을 막는 '해상봉쇄령'으로 맞받아쳤어요. 섬나라 영국이 대륙을 역으로 따돌리는 방법이었죠. 게다가 영국은 해군이 강해서 식민지가 많았기 때문에 큰 타격을 입지 않았어요. 오히려 영국과 무역을 하던 다른 유럽 국가들이 대륙봉쇄령으로 큰 고통을 겪게 되었죠. 특히 러시아는 나폴레옹의 눈치를 보며 대륙봉쇄령에 참여했다가 큰 타격을 입었어요. 당시 러시아는 농업 위주의 국가라서 공산품을 영국에서 수입해 썼거든요. 곤란해진 유럽 국가들은 영국과 몰래 무역을 하며 필요한 물건을 얻었어요. 그 결과 대륙봉쇄령이 유효했던 1811년쯤 영국의 무역량은 오히려 역대 최고치에 달했다고 해요.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주장했던 나폴레옹에게도 불가능이 있었으니, 대륙 봉쇄를 통한 영국 고립 작전은 대실패했다고 봐야겠죠?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영국에 이기지 못하자 나폴레옹의 분노는 극에 달했어요. "교역하지 말라 했더니 몰래 무역을 하고 있었다 이거지?" 그는 유럽의 여러 나라와 전쟁을 하게 됩니다. 1812년에는 러시아 모스크바 원정을 단행했지만 실패했지요. 그리고 이어진 워털루 전투(1815)에서 나폴레옹은 영국을 중심으로 네덜란드·프로이센 등이 뭉친 연합군에 돌이킬 수 없는 패배를 당했어요. 결국 프랑스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 유배를 갔지요.
강대했던 프랑스 제국의 대륙봉쇄령도 먹히지 않을 만큼 당시 영국은 무역에 관해선 유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답니다. 현재의 영국도 유럽연합 안에서 중요한 존재라고 해요.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할지 남을지 여부에 국제적 이목이 쏠리고 있거든요. 영국 국민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또 앞으로 유럽연합은 어떤 방향으로 더불어 살아갈지 지켜보도록 합시다.
07.07 대표적 입헌군주제 영국… 11년간 왕 없었던 적 있었죠
최근 영국에서는 '다음번 총리가 누가 되느냐'가 초미의 관심사예요. 지난달 실시된 국민투표 결과 영국이 EU를 탈퇴하는 것으로(브렉시트, Brexit) 결정 나자, 데이비드 캐머런 현 총리가 오는 10월 총리직을 사퇴하기로 했기 때문이에요. 지난 5일(현지 시각) 집권당인 영국 보수당이 다음 총리를 뽑기 위해 1차 경선을 벌인 결과 테리사 메이 내무장관이 1위를 차지했어요. 만약 메이 장관이 차기 총리에 오르게 된다면 영국은 '철의 여인'으로 불렸던 마거릿 대처(1925~2 013)에 이어 두 번째 여성 총리를 맞게 된답니다.
영국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왕이 있고, 의회의 집권당 대표인 총리가 국정을 이끌어 나가는 대표적인 '입헌군주제' 국가예요. 871년 앨프리드 대왕 이후 영국은 1100여년간 엄연히 '왕국'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과거 영국의 왕들은 나라를 다스리는 역할을 했지만, 1688년 명예혁명 이후로는 의회가 통치권을 갖게 되면서 왕은 나라의 상징적인 존재일 따름이에요. 유럽의 스웨덴, 덴마크, 모나코, 네덜란드나 아시아의 말레이시아, 부탄, 일본도 영국과 같은 입헌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답니다.
▲ 1886년 영국 화가 앤드루 캐릭 고우가 그린‘던바 전투에서의 크롬웰’이에요. 1650년에 벌어진 던바 전투에서 크롬웰이 이끄는 철기군은 남아 있는 왕당파 세력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답니다. /테이트 브리튼 갤러리
그런데 17세기, 영국에서는 왕이 없었던 시절이 있었어요. 영국은 어떤 이유로 왕을 없앴다가 다시 왕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일까요?
◇왕당파 vs 의회파… '잉글랜드 내전'
영국에 왕이 없었던 시기는 1649년부터 1660년까지 11년간이에요. 당시 영국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통일되기 이전이었어요.
1603년 잉글랜드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가 자식을 낳지 않고 서거하면서 잉글랜드 왕위는 엘리자베스 1세의 친척인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1세로 넘어가게 되었어요. 제임스 1세가 스코틀랜드 왕과 잉글랜드 왕을 겸하게 된 것이죠.
잉글랜드 왕이 된 제임스 1세는 이후 잉글랜드 의회와 번번이 대립했어요. 의회파 사람들은 시민이 뽑은 의회가 국정을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 '왕은 신이 내려주는 것'이라는 왕권신수설을 따르는 제임스 1세가 의회를 번번이 무시했기 때문이에요.
▲ 올리버 크롬웰(왼쪽), 찰스 1세.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찰스 1세도 아버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답니다. 가톨릭을 옹호했던 찰스 1세는 영국에서 점점 늘어나고 있던 청교도들을 탄압하는 한편,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잉글랜드 의회를 아예 해산시켜 버리기도 했어요.
결국 참다못한 잉글랜드 의회는 1628년 찰스 1세에게 '권리 청원'을 승인하라고 요구했어요. 권리 청원은 왕이 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걷거나 사람을 체포할 수 없도록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어요. 의회가 세금을 배정해주지 않으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할 수 없었던 찰스 1세는 마지못해 권리 청원을 승인했지만, 대신 스코틀랜드 내 청교도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면서 민심을 잃게 되었답니다.
결국 청교도를 중심으로 한 의회파가 1642년 찰스 1세를 지지하는 왕당파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면서 잉글랜드 내전이 시작됐어요. 의회파의 중심엔 올리버 크롬웰(1599~1658)이 있었어요. 뛰어난 전략가였던 크롬웰은 철기군(Ironsides)으로 불리던 기병대를 중심으로 왕당파와의 전투에서 연승을 거두었고, 마침내 1645년 왕당파를 잉글랜드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어요.
스코틀랜드로 도망쳤던 찰스 1세는 민심을 잃은 탓에 잉글랜드로 다시 추방되었고, 잉글랜드 의회는 1949년 1월 30일 찰스 1세를 대역죄로 사형에 처했어요. 유럽 국가 중에서는 처음으로 재판을 거쳐 왕을 사형에 처한 일이었기에 유럽 전역은 당시 큰 충격에 빠졌답니다.
◇지나친 금욕주의 반발… 왕 다시 데려오다
찰스 1세가 죽은 뒤 많은 사람이 "크롬웰이 잉글랜드 왕이 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크롬웰은 거절했어요
대신 크롬웰은 1649년 왕이 없는 공화국인 '잉글랜드공화국'을 수립했어요. 크롬웰은 '호국경'이라는 우리나라로 치면 대통령에 해당하는 자리에 올라 10여년간 영국을 근대 해양 강국으로 발돋움하게 했답니다. 중상주의 정책을 통해 영국의 상업을 번성시키는 데에도 기여했어요.
하지만 크롬웰은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하고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잔혹한 통치를 이어가면서 점차 민심을 잃었어요. 1649년 아일랜드의 드로이다를 점령한 뒤 이곳 주민 2000여 명을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지르는 끔찍한 학살도 서슴지 않았어요. 또 지나친 금욕 생활을 요구한 것도 사람들이 등을 돌리게 하였어요. 크롬웰은 형형색색으로 빛나던 스테인드글라스는 검은 유리로 바꾸도록 하고 찬송가를 제외한 모든 노래를 부를 수 없게 했어요. 어떤 운동 경기도 열릴 수 없게 되었고 남·여 모두 검은 옷만 입도록 강요했답니다.
1658년 크롬웰이 말라리아로 죽자 폭정에 시달렸던 영국 시민들은 다시 영국을 왕국으로 돌리기로 결심했어요. 1660년 영국 시민들은 크롬웰을 피해 프랑스로 도망가 있던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를 데려와 왕으로 즉위시키면서 영국은 11년 만에 왕국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답니다.
07.14 '1월의 강'이라 불리며… 한때 포르투갈 수도였대요
다음 달이면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제31회 하계 올림픽이 열려요. 남미에서 올림픽이 열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랍니다. 리우데자네이루는 브라질을 대표하는 도시로 아름다운 코파카바나 해변과 코르코바도산 정상에 있는 높이 38m의 거대한 예수상으로도 유명해요. 아름다운 경관 덕분에 리우데자네이루는 호주의 시드니, 이탈리아의 나폴리와 함께 세계 3대 미항(美港)으로 꼽힌답니다.
◇리우데자네이루는 '1월의 강(江)'
리우데자네이루는 포르투갈어로 '1월의 강(Rio de Janeiro)'이라는 뜻이에요. 'Rio'는 포르투갈어로 '강'이고, 'Janeiro'는 '1월'을 뜻하죠. 포르투갈어로 이름이 지어진 이유는 포르투갈 탐험대가 처음 이곳을 발견했기 때문이에요. 대서양을 따라 길게 이어진 브라질 해안을 따라가던 포르투갈 탐험대는 큰 강의 하구와 바다가 만나는 리우데자네이루를 발견했어요. 때마침 그날이 1502년 1월 1일이었고, 탐험대는 "1월에 강을 발견했다"는 뜻으로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이에요.
▲ 리우데자네이루 코르코바도산 정상에 세워진 거대한 예수상이 리우데자네이루를 내려다보고 있어요. 이 예수상은 높이는 38m, 무게는 무려 1145t이나 된다고 해요. /토픽이미지
그런데 사실 포르투갈 탐험대가 발견한 것은 강이 아니라 바다랍니다. 리우데자네이루는 바다가 육지로 움푹 들어간 모양의 구아나바라 만(灣) 서쪽에 있어요. 그런데 구아나바라 만과 대서양이 만나는 길목이 아주 좁다 보니 탐험대는 이것을 보고 큰 강의 하구와 바다가 만나는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랍니다.
◇브라질이 포르투갈어를 쓰는 이유
남미에 있는 대부분의 나라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것과 달리 브라질은 남미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나라예요. 그 이유를 알려면 1494년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맺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알아야 한답니다.
15세기 이베리아 반도에 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지중해를 거치지 않고 배를 타고 인도로 갈 수 있는 항로를 찾고 있었어요. 그 유명한 '대항해시대'예요. 포르투갈은 '해양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엔리케 왕자를 중심으로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고 있었답니다.
반대로 스페인의 여왕 이사벨라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는 아예 대서양을 가로질러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아 나섰어요. 대서양을 가로지른 콜럼버스는 1492년 인도가 아닌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답니다. 아메리카 대륙을 먼저 발견한 스페인은 1493년 교황으로부터 "대서양 가운데를 기준으로 서쪽에서 발견된 땅은 스페인이 갖도록 하라"는 약속을 받아냈어요.
하지만 이 약속이 스페인에만 유리하다고 생각한 엔리케 왕자는 "대서양 가운데가 아닌 새로운 기준선을 정하자"고 요구해요.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엔리케 왕자의 협박에 전쟁을 원하지 않은 스페인은 새로운 기준을 정하기로 했어요. 그리하여 1494년 6월 두 나라의 대표는 스페인의 작은 마을 토르데시야스에서 다음과 같은 조약을 맺어요. "아프리카 카보베르데 군도에서 서쪽으로 1770㎞ 떨어진 곳에 남북으로 길게 경계선을 긋는다. 이날 이후 경계선 서쪽에서 발견된 땅은 스페인이 갖고, 경계선 동쪽에서 발견된 땅은 포르투갈이 갖는다."
이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대서양 가운데를 지나던 경계선은 남미 대륙 가운데를 지나게 되었어요. 그 결과 경계선 동쪽에 있는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고, 경계선 서쪽에 놓인 대부분의 남미 국가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답니다. 이후 두 나라의 식민 지배가 수백 년간 이어지면서 브라질은 포르투갈어를, 나머지 남미 국가들은 스페인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에요.
◇리우데자네이루가 한때 포르투갈의 수도가 된 사연
1763년 식민지 브라질의 수도가 된 리우데자네이루는 이후 약 200여 년간 브라질의 수도였어요. 그런데 이 리우데자네이루가 약 13년간 포르투갈의 수도가 되었던 적이 있답니다.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요?
그 발단은 1807년 나폴레옹이 발표한 '대륙 봉쇄령'이었어요. 당시 유럽 대륙을 정복한 나폴레옹은 유일하게 자신과 맞서던 영국을 굴복시키려 했지만,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의 넬슨 제독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어요. 화가 난 나폴레옹은 유럽 대륙에 있는 모든 국가와 영국 간의 해상 교역을 금지시켰는데, 이게 바로 대륙 봉쇄령이에요.
강력한 해군을 가진 영국은 이에 맞서 대륙 봉쇄령에 동참하는 나라의 배는 대서양을 지나지 못하도록 하는 '해상 봉쇄령'을 내리게 됩니다. 식민지인 브라질과의 교역을 계속하기 위해서 대서양을 반드시 지나야 하는 포르투갈은 나폴레옹이 무서웠지만 대륙 봉쇄령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이에 분노한 나폴레옹은 군대를 보내어 포르투갈을 점령해버렸어요. 졸지에 영토를 잃은 포르투갈 국왕 주앙 6세는 영국의 보호를 받으며 식민지인 브라질로 망명을 떠났어요. 1808년 브라질에 도착한 주앙 6세는 "이제부터 리우데자네이루가 리스본을 대신한 포르투갈 왕국의 새로운 수도"라고 선포했어요. 이때부터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주앙 6세가 포르투갈 본국으로 돌아간 1821년까지 13년간 리우데자네이루는 포르투갈의 수도였답니다.
1822년 브라질이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면서 리우데자네이루는 1960년까지 브라질의 수도로 자리매김하였어요. 브라질 정부가 브라질리아로 수도를 옮기면서 리우데자네이루는 수도로서의 역할을 내려놓았지만, 여전히 남미에서 가장 근대적이고 아름다운 도시로 불리고 있답니다.
07.21 터키 민족의 아버지 케말 파샤, '라이시테'를 외치다
정교일치' 오스만 제국 쇠퇴하자 정치·종교 분리된 나라 꿈꿔… 1923년 지금의 터키 공화국 수립
최근 쿠데타 일으킨 터키 군부 "세속주의 지키자" 주장했대요
지난 15일 터키에서는 에르도안 대통령을 몰아내려는 쿠데타가 일어났어요. 터키 군부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터키의 세속주의를 무너뜨리고 있다"며 군대를 일으켰지만 6시간 만에 시민과 정부군에게 진압당했다고 해요. 세속주의는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종교가 정치나 사회, 교육 등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주의예요. 프랑스어로는 '라이시테'라고도 하죠.
에르도안 대통령은 세속주의와 반대되는 이슬람주의자로 알려졌어요.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슬람 학교를 늘리고 중학교에서도 이슬람 교육을 강화하자 터키에서는 "세속주의가 무너진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답니다. 오늘은 세속주의를 바탕으로 터키 공화국을 세운 '터키 공화국의 아버지' 케말 파샤(Kemal Pasha·1881~1938)에 대해 알아보아요.
◇술탄이 통치한 오스만 제국의 쇠락
터키 공화국의 전신은 오스만튀르크족이 1300년경에 세운 오스만 제국(오스만튀르크)이에요. 오스만 제국은 아랍어로 권력을 뜻하는 '술탄'이 통치했다고 해요.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는 종교적 지도자와 정치 지도자가 나뉘어 있지요? 하지만 술탄은 오스만 제국의 왕과 이슬람교의 최고 지도자를 겸하고 있었어요. 이렇게 정치권력과 종교 권력이 합쳐진 것을 '정교일치'라고 해요. '정교일치'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고위 관료는 모두 이슬람 성직자로 임명됐고, 나라의 법도 모두 이슬람 교리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해요.
▲ 1926년 케말 파샤가 이스탄불에 있는 학교를 방문하고 있어요. 케말 파샤는 이슬람교와 정치를 분리하는 세속주의로 터키를 개혁한 지도자예요. /Getty Images 이매진스
오스만 제국은 16세기 북아프리카와 유럽 일부, 서남아시아를 거느리는 대제국을 이루기도 했어요. 하지만 자만심에 빠지면서 17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답니다.
반면 서유럽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과학혁명을 거치면서 힘을 키워 17세기 후반부터 오스만 제국을 침공하기 시작했어요. 서유럽과의 전쟁에서 연이어 패하자 오스만 제국 안에서도 "서유럽의 힘을 따라잡으려면 정치권력과 종교 권력을 분립하고 군대도 서유럽식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개혁파가 등장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술탄과 성직자들은 이슬람교와 맞지 않는 서유럽식 개혁을 꺼리면서 오스만 제국의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됐답니다.
◇애국심으로 개혁 운동에 나선 케말 파샤
케말 파샤는 이렇게 개혁을 반대하는 술탄과 개혁파의 갈등이 한창이던 1881년에 태어났어요. 사관학교에 입학해 서유럽의 문물을 공부한 케말 파샤는 '오스만 제국이 강해지려면 정치와 종교를 나누는 세속주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그래서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개혁파 군인들과 함께 비밀 조직인 '청년 튀르크당'에 들어가 개혁 운동에 나서게 되었답니다.
당시 술탄인 압둘 하미드 2세는 청년 튀르크당을 가혹하게 탄압했지만, 케말 파샤와 청년 튀르크당은 굴하지 않고 개혁 운동을 펼치며 국민의 지지를 조금씩 얻어 나갔어요. 1908년 케말 파샤와 청년 튀르크당은 마침내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을 점령하고 압둘 하미드 2세를 술탄에서 퇴위시켰어요. 대신 그의 동생 메흐메트 5세를 술탄으로 앉혔답니다. 명성을 쌓은 케말 파샤는 1차 세계 대전 도중인 1915년 갈리폴리 반도를 공격한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물리치면서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었답니다.
◇'터키의 아버지', 세속주의를 선언하다
하지만 이런 케말 파샤의 활약도 오스만 제국의 쇠락을 막을 수 없었어요. 갈리폴리 전투에서의 승리도 1차 세계 대전의 흐름을 바꾸지 못했고, 오스만 제국은 1918년 연합국에 항복을 선언했어요. 이어 1919년에는 그리스와 아르메니아가 침공하면서 오스만 제국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답니다.
결국 케말 파샤는 "세속주의를 바탕으로 터키 공화국을 세워야 지금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고 선언해요. 술탄이 이끄는 오스만 제국을 없애고 터키 공화국을 세우겠다고 선언한 것이죠. 술탄은 분노했지만, 국민적 영웅이 된 케말 파샤는 거리낌 없이 지지자들과 함께 터키 공화국을 수립했어요. 케말 파샤가 공화국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와 아르메니아의 공격을 막아내자 터키 국민은 모두 케말 파샤를 지지하게 되었답니다.
의회로부터 '터키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Ataturk) 칭호를 받은 케말 파샤는 1921년 세속주의 원칙을 담은 공화국 헌법을 제정해 선포하고 1922년 술탄제를 폐지한다는 개혁안을 통과시켜요.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고, 종교가 정치와 사회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세속주의가 터키 공화국의 대원칙으로 자리 잡은 것이죠. 국민 대다수가 무슬림인 터키는 이 원칙에 따라 이슬람교를 국교로 삼지 않고 있어요. 다른 이슬람주의 국가와 달리 여성에게도 남성과 똑같은 권리와 의무를 인정하고 교육을 받도록 하고 있답니다.
1923년 케말 파샤는 터키 공화국 수립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고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어요. 대통령이 된 케말 파샤는 이후 세속주의를 부정하는 고위 성직자나 정치 지도자들을 잔인하게 숙청하고, 정부에 반대하는 언론을 폐간해버리는 독재자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어요. 그럼에도 케말 파샤는 세속주의 공화국을 세운 업적으로 오늘날에도 '터키 공화국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며 터키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답니다.
07.28 독일, 110년 만에 사과… 헤레로족의 눈물 닦을 수 있을까
식민지 나미비아에서 '대학살'
헤레로족 6만5000명 목숨 잃고 생존자는 고문·강제 노역 당해
열강의 전쟁터 된 아프리카 대륙… 영국·프랑스, 파쇼다에서 충돌
지난 13일(현지 시각) 독일 현지 언론들은 "독일 정부가 1900년대 초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저지른 집단 학살에 대해 나미비아 정부에 공식 사죄를 준비하고 있다"고 보도했어요. 20세기 최초의 대학살이라고도 부르는 나미비아 학살에 대해 독일 정부가 뒤늦게 잘못을 인정한 것이죠. 아프리카 곳곳에는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에 온갖 시달림을 당해온 수난의 역사가 숨겨져 있어요. 나미비아 학살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어요.
◇아름다운 사막의 나라 나미비아의 비극
유럽 대륙에 살던 사람들이 지중해 건너 아프리카를 알기 전까지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평온하게 살고 있었어요. 유럽 사람들은 리빙스턴, 스탠리 같은 탐험가들이 본격적으로 아프리카 내륙을 탐험하면서 사하라사막 남쪽의 아프리카에 대해 알게 되었어요. 영토를 넓히는 데 혈안이 되어 있던 유럽의 제국주의 나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기 위한 경쟁을 시작했답니다. 탐험가가 미지의 땅을 발견하면 총으로 무장한 군대가 뒤따라 들어와 자기네 땅으로 삼아버렸어요. 평온했던 아프리카 대륙은 유럽의 군인들과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피를 흘리는 전쟁터로 변했어요.
▲ 나미비아 헤레로족 대표 베쿠이 루코로가 독일 시민들과 함께 나미비아 학살 희생자의 묘를 찾아 참배하고 있어요. /DPA·AFP
남아프리카를 두고 영국과 대립하던 독일은 베를린회의를 통해 서남아프리카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어요. 아름다운 사막으로 유명한 나미비아가 있는 지역이지요. 나미비아에는 오래전부터 헤레로족이라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고요. 독일은 1884년부터 1915년까지 이곳을 식민지로 지배하면서 약탈을 일삼았답니다. 독일인들은 헤레로족을 '이상하고 부정적인 사람들'이라는 뜻의 '호텐토트'라고 부르며 무시했어요. 독일인들은 헤레로족을 노예처럼 부리고, 그들의 재산도 자신의 것인 양 뺏어갔어요.
나아가 독일인들은 1904년 헤레로족을 무참하게 학살했어요. 1889년 나미비아에 가축 전염병이 돌자 목축을 하며 살던 헤레로족은 당장 생계를 이어갈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됐어요. 독일인들은 이런 헤레로족을 도와주기는커녕 그들의 곤경을 이용했어요. 생계가 곤란한 헤레로족이 갖고 있던 가축과 목초지를 헐값에 사들였어요. 헤레로족은 가축과 목초지를 판 돈으로 당장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가축도 땅도 없는 탓에 전보다 더 가난해졌답니다.
결국 참다못해 분노가 폭발한 헤레로족이 독일인 농장을 공격해 100여 명을 살해한 사건이 벌어져요. 이 소식을 들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로타르 폰 트로타 장군에게 1만4000여 명의 군사를 주어 나미비아로 보내요. 트로타 장군은 워터버그 전투에서 헤레로족 전사 3000명을 죽이는 것에 그치지 않았어요. 병사들을 시켜 살아남은 헤레로족 사람들을 모두 사막으로 내몰았어요. 항복은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이렇게 6만5000명의 헤레로족 사람들이 황량한 사막에서 죽임을 당했어요. 살아남은 1만5000여 명의 사람들도 무사하지 못했어요. 이들은 독일군이 만든 강제 수용소에 갇혀 고문을 당하거나 영양실조에 걸린 상태로 강제 노동을 당했어요.
독일 정부는 최근까지도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저질렀던 전쟁범죄에 대해 거듭 사과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제는 110년 전 나미비아에서 저지른 식민지 범죄에 대해서도 사과를 하기로 했어요. 사과한다고 해서,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상처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랍니다. 하지만 잘못에 대해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한 것에서부터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시작될 수 있어요.
◇제국주의 국가 간의 충돌, 파쇼다 사건
독일 외에도 여러 제국주의 나라들은 아프리카를 두고 치열한 '땅따먹기 싸움'을 벌였어요.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파쇼다 사건'이에요. 1830년 서아프리카 알제리를 점령한 프랑스는 아프리카 동남쪽에 있는 마다가스카르 섬을 차지한 뒤 아프리카를 가로지르며 땅을 차지할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반대로 북아프리카 이집트를 차지한 영국은 남쪽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식민지로 삼은 뒤 아프리카를 세로로 잇는 철도를 놓으며 땅을 차지하려고 했답니다.
아프리카 땅을 가로지르던 프랑스와 세로로 지르던 영국은 1898년 아프리카 수단의 파쇼다라는 곳에서 마주치게 됩니다. 파쇼다는 이미 영국이 차지한 땅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프랑스 군대가 이 지역을 점령하자 영국이 반발하고 나섰어요. 전쟁 직전까지 갔던 두 나라는 프랑스가 파쇼다를 영국에 양보하는 것으로 합의했어요. 대신 영국은 프랑스가 독일을 대신해 모로코 땅을 차지할 수 있게 도와주기로 했고요. 제멋대로 선을 긋고 땅을 차지했던 유럽 제국주의의 면모를 알 수 있는 사건이었죠. 아프리카의 지도를 보면 마치 자로 그은 듯 평평한 국경선을 볼 수 있어요. 제국주의 국가들이 아프리카 지도에 자를 대고 국경선을 그어 땅을 나누어 가졌기 때문이에요. 아프리카 나라들의 국경선에 제국주의 국가들의 잔혹한 식민지 지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죠.
08.11 샌드위치 가게에서 당긴 방아쇠, 세계를 전쟁터로…
19세기 제국주의에 빠진 강대국들… 식민지 확대하려 동맹 맺으며 대립
오스트리아 프란츠 황태자 부부, 세르비아계 프린체프에게 살해당해
4000만명 피해 본 전쟁 시작됐죠
최근 유럽에서는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를 추종하는 세력의 연이은 테러가 벌어졌어요. 지난달 프랑스 휴양지 니스에서는 테러범이 트럭을 몰고 해변가에 있던 관광객과 시민을 덮쳐 84명이 사망하는 끔찍한 일이 있었어요. 지난해 11월에는 파리에서도 대규모 테러로 130여 명이 사망하기도 했고요. 프랑스 외에도 벨기에나 터키 등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테러가 이어지고 있어요.
폭력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을 해치고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테러는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돼요. 역사를 돌이켜보면 테러는 심지어 나라와 나라 간의 전쟁을 낳기도 합니다. 약 4000만명의 인명 피해를 남겨 인류 역사의 비극으로 꼽히는 제1차 세계대전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벌어진 테러로 시작되었어요.
◇발칸반도는 '유럽의 화약고'
19세기 말 독일의 재상 비스마르크는 당시 유럽과 발칸반도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어요.
"지금의 유럽은 지도자들이 화약 창고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과 같다. 단 하나의 불씨가 우리 모두를 태워버릴 만한 폭발을 일으킬 것이다. 폭발은 발칸반도에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면서 시작될 것이다."
당시 발칸반도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간의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어요.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 발칸반도 국가들은 이런 강대국들의 갈등 속에서 독립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고요. 강대국과 발칸반도 국가들의 갈등이 뒤섞인 상황을 비스마르크는 아주 위험하다고 본 것이죠.
발칸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갈등은 점점 커져갔지만, 진정한 평화와 번영을 모색하는 움직임은 찾아보기 어려웠어요. 제국주의에 빠진 강대국들은 그저 발칸반도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넓히는 데에만 골몰했기 때문이었죠.
러시아와 대립하던 오스트리아는 1908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해요.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게르만족의 나라인 오스트리아가 슬라브족이 사는 자신들의 나라를 빼앗은 데 깊은 분노를 느꼈어요. 이 중 과격한 젊은이들은 '젊은 보스니아' '검은 손'과 같은 비밀단체를 만들어 오스트리아에 맞서기로 했어요.
◇사라예보, 그날의 이야기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아내 조피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중심지인 사라예보를 방문했어요. 황태자 부부라지만 이들은 역경과 고통을 많이 겪었답니다.
페르디난트는 원래 황태자가 아니었어요.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조카였죠. 그런데 요제프 1세의 유일한 아들 루돌프 황태자가 사랑하던 연인과 함께 자살하면서 페르디난트가 황태자 자리를 물려받게 되었어요. 페르디난트는 당시 시녀 출신인 조피와 사랑에 빠져 있었는데, 페르디난트가 황태자가 되면서 둘의 사랑에도 문제가 생겼어요. 오스트리아 황실에는 황태자가 시녀와 결혼할 수 없다는 금기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결혼을 반대하는 압박과 멸시 속에서 두 사람은 '조피가 낳은 자녀가 황위를 계승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간신히 결혼할 수 있었어요.
▲ 1914년 비밀단체 ‘검은 손’의 단원 프린체프가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를 살해한 사라예보 사건 당시의 모습이에요. /위키피디아
불행히도 사라예보에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검은 손' 단원들이 황태자 부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자동차를 타고 거리 퍼레이드를 하는 황태자 부부를 향해 샌드위치 가게에 숨어 있던 검은 손 단원 가브릴로 프린체프가 뛰어나와 총격을 가했어요. 프린체프가 쏜 두 발의 총알은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목과 아내 조피의 배에 맞았고, 축복받지 못했던 부부는 그렇게 목숨을 잃었어요. 당시 19세의 나이로 황태자 부부를 살해한 프린체프는 경찰에 체포된 뒤 징역 20년 형을 받고 감옥에 갇혔고, 4년 뒤 폐결핵에 걸려 감옥에서 목숨을 잃었어요.
◇제1차 세계대전의 교훈은…
사라예보 사건은 비스마르크의 예언대로 발칸반도에 묻혀 있던 강대국 간의 갈등에 불을 질렀어요. 먼저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 정부가 '검은 손'의 테러를 지원했다"고 주장하며 세르비아를 상대로 전쟁을 선언했어요. 그러자 세르비아와 가까운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돕겠다고 나섰고요. 이것을 본 오스트리아의 동맹국 독일은 러시아와 러시아의 동맹국 프랑스에 전쟁을 선언합니다. 영토를 넓히기 위해 여러 동맹 관계로 얽혀 있던 유럽 강대국들은 이런 식으로 순식간에 전쟁 속으로 휘말렸어요. 제1차 세계대전의 막이 오른 것이죠.
전쟁은 크게 오스트리아-독일-이탈리아의 삼국동맹과 영국-프랑스-러시아로 이루어진 삼국협상 간의 대결로 이뤄졌어요. 이 나라들의 식민지와 동맹국 간에도 전쟁이 벌어지면서 전 세계는 전쟁터로 변했어요. 산업혁명 이후 만들어진 독가스, 탱크, 폭격기, 기관총 등 대량 살상 무기들이 모두 투입되었고요.
1918년 독일이 항복하면서 4년 만에 끝난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군인만 900만명, 민간인은 110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돼요. 황태자 부부를 암살했던 프린체프도 자신의 테러가 이런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렇다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책임을 모두 프린체프에게 물을 수는 없어요. 제1차 세계대전의 근본적인 원인은 강대국들이 평화와 번영이 아닌 이익과 영향력만을 좇아 서로 충돌했기 때문이에요. 최근 유럽에서 벌어지는 IS의 테러도 중동의 불안한 정세와 쏟아지는 난민이 근본적인 원인이에요. 무고한 사람이 희생되는 테러를 막기 위해선 사라예보 사건과 제1차 세계대전을 교훈으로 삼아 근본적인 해법을 찾아야 합니다.
08.18 중국 유일의 여황제, 정말로 냉혹한 악녀였을까
두 아들 내쫓고 스스로 황제 등극
반대파 귀족 세력에 공포정치 펼쳐 능력 갖춘 사람만 관직 오르게 해
홍수로 고통받던 백성에겐 따뜻… 민심 얻어 50여 년간 권력 장악
오는 11월에 열릴 미국 대통령 선거에 전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어요. 미국이 세계적으로 미치는 영향력이 대단한 데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인 힐러리 클린턴이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출마한 것이 화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죠. 만약 힐러리가 당선된다면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대통령이 탄생하는 동시에 부부가 나란히 대통령이 되는 진기록이 세워지는 것이죠. 힐러리로서는 최고 권력자의 아내에서 스스로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것이고요.
그런데 지금부터 1300여 년 전 중국 당나라에 이미 최고 권력자의 아내에서 스스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 있었어요. 바로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인 측천무후예요. 황제였던 자신의 아들들을 몰아내고 스스로 '성신황제'가 됐던 측천무후는 냉혹한 악녀이자 폭군으로 알려져 있어요. 하지만 측천무후가 냉혹한 사람이었던 동시에 뛰어난 정치가였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공포정치로 황제가 된 측천무후
측천무후의 원래 이름은 무조예요. 무조는 당나라 2대 황제인 태종의 후궁으로 황궁에 들어갔지만 황제의 관심을 받지는 못했다고 해요. 태종이 죽고 고종이 왕이 되자 무조는 고종의 후궁이 되었어요. 아버지가 죽고 나면 자신을 낳은 생모를 제외한 아버지의 아내들을 자신의 아내로 맞는 것이 북방 유목민의 풍습이에요. 무조가 고종의 후궁이 된 것도 당시 당나라 지배층이 가혹한 환경에 살아남기 위한 북방 유목민 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추정돼요. 고종의 후궁이 된 무조는 음모를 꾸며 황후를 몰아내고 자신이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마침내 측천무후가 된 것이죠.
▲ 18세기 중국의 한 화가가 그린 측천무후의 초상화예요. 측천무후는 두 아들을 황제 자리에서 내쫓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예요. /위키피디아
이후 측천무후는 자신의 반대파를 가차 없이 제거하는 냉혹한 공포정치를 펼쳤어요. 자신이 황후가 된 것을 반대하거나 자신에게 맞서는 신하들은 어떤 음모를 꾸며서라도 제거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나자 당나라 황실에는 측천무후를 가로막을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고, 모두가 측천무후를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해요.
당나라 황실의 권력을 장악한 측천무후는 고종이 죽고 난 뒤 자신의 셋째·넷째 아들을 황제로 앉혔어요. 하지만 이마저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아들들을 모두 황제 자리에서 내쫓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성신황제'가 된 측천무후는 나라 이름을 주나라로 바꾸고, 장안(지금의 시안)에서 낙양(뤄양)으로 수도를 옮겼어요.
◇능력을 중시하고 백성을 아끼다
하지만 측천무후는 황제로서 뛰어난 정치를 했다는 평도 받고 있어요. 비록 많은 관료를 죽이고 내쫓았지만, 그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재를 몹시 아끼고 중용해 백성을 위한 정치를 했다고 합니다. 측천무후는 관리를 뽑는 과거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해 무능한 귀족은 조정에서 내쫓고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관직을 얻을 수 있도록 했어요. 중국 명나라 때 대사상가인 이탁오도 측천무후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어요. "사람 알기를 무씨(측천무후)와 같이 한 사람이 있을까? 오로지 인재를 사랑하고 기르는 마음을 가졌고, 백성을 편안하게 해 주고자 하기를 무씨같이 한 자가 있을까?" 중국의 역사서 '자치통감'에도 측천무후는 무능한 관리는 가차 없이 내쫓거나 엄벌을 줬지만, 동시에 뛰어난 관리는 더 높은 관직을 주고 상도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능력과 재능에 따라 관리를 뽑아 쓰게 되니 당나라 건국을 주도했던 귀족 세력은 힘이 약해졌지만, 뛰어난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하게 되면서 백성들의 삶은 한층 안정되었다고 해요. 측천무후 덕분에 능력을 인정받아 관리가 된 신하들은 그 보답으로 측천무후를 잘 섬겼다고 합니다. 훗날 현종이 황제가 되었을 때 당나라가 전성기를 맞을 수 있었던 것도 측천무후 때 선발된 뛰어난 인재들이 현종 때에도 그 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라고 해요.
이렇게 보면 측천무후는 귀족 세력에겐 냉혹한 폭군이었지만, 백성들에게는 누구보다 훌륭한 임금이었다고 볼 수도 있어요. 실제로 측천무후가 권력을 장악했던 50여 년간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킨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해요. 종종 일어났던 반란도 측천무후가 내쫓은 귀족 세력이 일으켰던 것이고요. 또 홍수나 가뭄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마다 측천무후는 적절한 구제책을 내놓아 피해를 입은 백성들을 잘 돌보았다고 합니다. 여성으로서 50여 년간 권력을 장악하고 황제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이처럼 뛰어난 정치가였기 때문이에요.
◇측천무후가 힐러리에게 던지는 질문들
황제의 아내이자 어머니, 그리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천하를 호령했던 측천무후이지만, 죽기 직전에는 결국 신하들의 반란으로 권력을 빼앗기게 됩니다. 주나라는 다시 당나라로 돌아갔지요. 측천무후는 죽기 전 자신의 무덤에 세우는 비석에는 글자를 새기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어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는 자신이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것일까요? 아무튼 이 비석을 '글자가 없는 비'라는 뜻의 무자비(無字碑)라고 부르는데, 당나라가 멸망한 후 후대인들이 이 비석에 많은 글자를 새겼다고 합니다. 애석하게도 비석이 닳은 탓에 지금은 알아보기 어렵다고 해요.
역사를 보면 냉혹하지만 유능했다는 평가를 받은 황제는 꽤 많아요. 그런데 왜 측천무후는 유독 냉혹한 면만 강조되었던 걸까요? 혹시 측천무후가 여성이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역대 중국 역사가들은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자 황제였던 측천무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요? 1300여 년이 지난 지금 전직 대통령의 아내이자 전 국무부 장관으로서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 도전하는 힐러리는 또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요?
윤형덕 하늘고 역사 담당 교사 |
08.25 고대올림픽 그림 속 선수들은 왜 알몸일까?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제31회 하계올림픽이 지난 22일 폐막했어요. 17일간 이어진 이번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올림픽 대표팀은 금메달 9개, 은메달 3개, 동메달 9개를 따내 종합 순위 8위를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제1회 하계올림픽에서는 1등에게 금메달을 주지 않았다고 해요. 대신 1등에게는 은메달과 올리브 화환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지금처럼 1·2·3등에게 금·은·동메달을 주는 방식은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제3회 하계올림픽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요.
근대 올림픽의 기원이 되는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에서는 1등에게 올리브 잎을 엮어 만든 관을 머리에 씌워 주었어요. 지금부터 약 2700여 년 전 고대 그리스에서 펼쳐진 올림픽은 오늘날의 올림픽과 어떤 점이 달랐을까요?
◇고대올림픽의 인기 종목은 '전차 경주'
고대 그리스는 '폴리스'라는 여러 개의 도시국가로 이루어져 있었어요. 각 폴리스에서는 자신의 도시를 수호하는 신을 위한 제사를 치르면서 동시에 신을 경배하기 위한 여러 운동경기를 하였어요. 이런 경기들을 델피에서는 '피티아', 아르골리스에서는 '네메아', 코린트에서는 '이스토미아'라고 불렀답니다.
올림픽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반도에 있는 도시국가 올림피아에서 열린 경기를 가리키는 말이었어요. 여러 도시국가의 경기 중 올림픽이 가장 유명했던 건 그리스 각지의 젊은 남성들이 참가하는 규모가 가장 큰 경기였기 때문이에요. 4년에 한 번 올림픽이 열리면 전쟁을 벌이던 도시국가들은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올림픽에 참가했다고 합니다. 한 번은 도시국가 스파르타가 올림픽 도중에 전쟁을 벌여 다른 도시국가들에 벌금을 내기도 했어요.
▲ 고대올림픽에서 1등을 한 선수가 올리브 잎으로 만든 관과 머리띠를 받는 모습을 나타낸 그림이에요. /AFP
고대올림픽에서는 지금처럼 특별히 경기장을 짓지 않았어요. 선수들은 경기장 대신 신전 근처에서 시합을 펼쳤답니다. 경기장도 없으니 선수촌 같은 것도 당연히 없었겠죠? 당시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은 벌판에 각자 텐트를 치고 생활했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상인들도 모여들어 술이나 음식, 말 등을 팔기도 하고, 각 도시국가의 정치인들이 모여 은밀하게 외교 회담을 갖기도 했어요.
고대올림픽의 경기 종목은 레슬링, 달리기, 높이뛰기, 원반던지기, 창던지기처럼 근대 올림픽과 비슷한 종목이 있었고, 전차 경주나 레슬링과 복싱을 결합한 격투 경기 '판크라티온'처럼 근대 올림픽에 없는 종목도 있었어요. 이중 가장 인기가 많은 종목은 기수가 말 4마리가 끄는 전차를 모는 전차 경주였다고 합니다. 재미난 점은 전차 경주의 주인공은 기수가 아니라 바로 전차를 끈 말의 주인이었다는 것이죠. 그리스인들은 1등을 한 전차는 전차를 끈 말의 주인이 튼튼하고 날쌔게 말을 잘 키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다른 종목에 출전하는 남성들은 모두 옷을 입지 않은 나체 상태로 시합에 나섰다고 합니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운동할 때 당연히 알몸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또 알몸으로 경기하는 것은 신에게 자신의 아름다운 몸을 제물로 바친다는 의미가 있었다고 합니다.
1·2·3등에게 금·은·동메달이 주어지는 근대 올림픽과 달리 고대올림픽에서는 오로지 1등만 승자로 인정하였다고 해요. 고대올림픽에서 1등 한 사람에게는 올리브 관을 씌워 주었다고 했죠? 나뭇잎을 엮은 관을 1등에게 선사한 이유는 고대 그리스에서 나무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농경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 그리스는 여름철이 무덥고 건조해 나무가 잘 자라지 못했다고 해요. 그나마 뿌리를 깊이 박고 자라는 포도나무와 올리브 나무가 잘 자랐는데, 올리브 나무도 제대로 열매를 맺으려면 40여 년이 걸려 아주 귀한 나무로 여겼다고 해요. 올리브 나무는 또 '아테네 여신이 준 지혜의 작물'이라는 신성한 의미도 담고 있었지요.
◇쿠베르탱, 올림픽을 부활시키다
고대올림픽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아요. 다만 기원전 776년부터 올림픽이 열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요. 올림픽은 마케도니아의 정복왕 알렉산더대왕이 폴리스 국가들을 정복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열렸고, 로마제국이 그리스를 통치할 때에도 계속되었다고 해요. 그러다 393년 로마제국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올림픽은 이교도의 제사 의식이니 금지하라'고 명령하면서 자취를 감추었어요.
그렇게 잊혔던 올림픽이 근대 올림픽으로 재탄생한 건 프랑스의 남작 피에르 쿠베르탱(1863~1937)에 의해서예요. 고대올림픽 기간에는 모두 전쟁을 멈추었다는 사실에 감동한 쿠베르탱이 전 세계에 평화의 정신을 퍼트리자는 취지로 올림픽 부활을 추진했어요. 그 결과 1894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가 생겨났고, 2년 뒤인 1896년 올림픽의 기원지 그리스에서 제1회 하계올림픽이 막을 올렸답니다. 근대 올림픽은 제1·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될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이번 리우올림픽에서도 변함없이 전 세계 스포츠인이 모여 스포츠 정신과 평화의 정신을 나누는 모습을 보여주었답니다.
공미라
09.01 아프리카의 엘도라도… 찬란했던 역사 잊힌 이유
세계 황금 70% 생산했던 말리 왕국
전성기 이끈 통치자 '만사 무사'… 건축가·학자 데려와 문명 꽃피워
문화유산 파괴하는 '반달리즘', 유적 일부 훼손… 지금도 계속 자행
지난 22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형사재판소(ICC)에서는 세계문화유산인 아프리카 말리의 팀북투 유적을 파괴한 이슬람 극단주의자 알마디에 대한 재판이 열렸어요. 문화유산을 파괴하는 범죄에 대해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재판이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알마디처럼 고의적으로 문화유산을 파괴하는 행위를 반달리즘(vandalism)이라고 합니다. 프랑스혁명 당시 교회의 건축물과 예술품을 파괴하는 군중을 본 가톨릭 주교 투르 앙리 그레구아르가 "마치 고대 게르만족의 일파인 반달족(Vandals)이 고대 로마 문명의 유적을 파괴한 것과 같다"며 반달리즘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고 합니다.
한번 파괴된 문화유산은 다시 원상태로 되돌릴 수 없어요. 알마디가 파괴한 팀북투 유적도 아프리카에서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말리 왕국의 문화유산이기에 많은 사람이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어요.
◇'아프리카의 엘도라도' 말리 왕국
아프리카에도 이집트 외에 찬란한 문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아프리카 서쪽에 사하라사막을 끼고 있는 말리 공화국의 자리에는 13~17세기 '황금의 나라'로 불린 말리 왕국이 있었어요. 당시 전 세계 황금의 70%가 말리 왕국에서 생산될 정도로 말리 왕국에는 엄청난 양의 금이 매장되어 있었답니다. 게다가 말리 왕국 북쪽에는 암염(돌소금)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어 소금 무역으로도 막대한 수익을 거뒀어요. 말리의 상인들은 낙타에 금이나 소금을 싣고 사하라사막을 건너는 목숨을 건 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거머쥐었다고 해요. 말리 왕국의 수도 팀북투는 당시 사하라사막을 가로질러 아프리카의 서쪽과 북쪽을 연결하던 서아프리카 교역의 중심지였답니다.
▲ 말리의 고대 도시 팀북투에 있는 징게르베르 사원의 모습이에요. 지난 2012년 말리의 이슬람 반군은 이 사원의 내부에 있는 이슬람 성자들의 무덤을 파괴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어요. /Flickr
왕국의 전성기를 이끈 것은 14세기 말리 왕국을 통치한 만사 무사였어요. 만사 무사가 통치하던 시기 말리 왕국은 경제적 번영을 누리는 동시에 영토도 방대하게 넓었어요. 아라비아의 탐험가 이븐 바투타는 자신의 여행기에 "말리 왕국의 북쪽 끝에서 남쪽 끝으로 여행하는 데 4개월이 걸렸다"고 적었답니다. 만사 무사가 소유한 재산도 어마어마했는데, 오늘날 기준으로 그의 재산을 환산하면 4000억달러(약 455조원)라는 천문학적인 액수가 나온다고 해요.
◇만사 무사의 호화로운 성지순례
만사 무사가 당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호화로운 여행으로 꼽히는 그의 성지순례 때문이에요. 열렬한 이슬람교 신봉자였던 만사 무사는 1324년 이슬람교의 성지인 메카를 향해 성지순례에 나섰는데 노예 1만2000명과 아내 800명, 그리고 황금 11t을 실은 낙타 100여 마리와 만사 무사를 호위할 5만여 명의 군대가 동원됐어요. 말을 탄 만사 무사 앞에는 금장식의 지팡이를 든 노예 500명이 앞장섰다고 합니다. 이 거대한 행렬이 니제르 강가를 출발해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까지 장장 4000㎞를 이동했다고 상상해보세요. 정말 장관이었겠죠? 번쩍이는 황금과 페르시아 비단옷으로 치장한 만사 무사의 일행은 어디서나 이목을 집중시켰고,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만사 무사를 '아프리카의 태양'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씀씀이가 컸던 만사 무사는 매주 금요일 행렬을 멈추고, 멈춘 곳에서 이슬람 모스크(이슬람교의 예배당)를 짓도록 돈을 기부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금을 나누어주었어요. 역사 기록에 따르면 이집트 카이로에 도착한 만사 무사가 친선의 표시로 엄청난 양의 금을 선물했는데, 그 양이 얼마나 많았던지 카이로의 금값이 대폭락한 뒤 12년이 넘도록 원래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고 해요. '아프리카의 엘도라도(황금의 나라)'라는 말리 왕국의 별명은 이런 일화들이 유럽에 전해지면서 생긴 것이죠.
만사 무사의 성지순례는 말리 왕국이 문화적 번영을 이루는 계기가 되기도 했어요. 만사 무사가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수많은 건축가와 예술가, 학자를 팀북투로 데려왔기 때문이죠. 이후 팀북투는 신학과 법학, 의학, 수사학, 논리학, 천문학 등이 활발히 연구되는 세계적인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어요. 당시 세계 각지에서 팀북투에 모여든 학생만 2만5000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반달리즘은 인류 전체에 대한 범죄
하지만 만사 무사가 죽은 뒤 말리 왕국은 점점 쇠퇴했고 17세기 무렵 송가이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하고 말았어요. 말리 왕국의 찬란한 역사가 잊힌 것은 말리의 자연환경이 급속도로 사막화된 영향도 있지만 말리 왕국의 유적에 대한 반달리즘이 여러 흔적을 지웠기 때문이에요.
우리 민족도 병인양요 때 외규장각 문서가 소실되거나 약탈돼 반달리즘 피해를 겪었어요. 유럽에서는 종교개혁 후 신교도들이 가톨릭 성당의 조각과 벽화를 파괴하거나 이슬람 국가가 그리스 정교의 문화유산을 파괴하는 반달리즘이 끊이지 않았고요. 2001년에는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 석불이 파괴됐고, 지난해에는 시리아의 팔미라 고대 유적이 훼손되는 등 최근에도 반달리즘은 계속되고 있답니다. 세계의 문화유산은 인류 공동의 재산이며 문화유산을 파괴하는 반달리즘은 전쟁범죄와 같은 행위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해요.
공미라
09.08 칭기즈칸의 정복 전쟁, '건조한 날씨' 탓에 시작되다
초원 풀 줄어 어려움 겪던 몽골족
흩어졌던 유목민들 통일해 살기 좋은 지역 찾으려 전쟁 시작
14세기 유럽 소빙하기 때 바이킹족은 기후 적응 못 해 사라져
유난히 더웠던 여름이 끝나고 어느새 가을이 성큼 우리 곁으로 다가왔어요. 올해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무더운 날씨가 이어졌어요. 세계기상기구에 따르면 지구 온도는 14개월 연속으로 최고 기록을 넘어섰답니다. 중동 지역은 한때 최고기온이 50도를 넘기도 했고요. 전 세계에 날씨가 유독 더운 '이상기후'가 나타난 것이죠. 이상기후는 예상치 않은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을 가져와 많은 피해를 낳기도 한답니다.
이상기후는 지구온난화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에요. 지구의 기후는 자연적으로 수백 년, 수천 년 단위로 계속해서 변화한답니다. 그리고 이런 기후변화는 때때로 역사를 바꾸는 역할을 하기도 했어요.
◇칭기즈칸이 정복 전쟁에 나선 이유는?
많은 역사가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위세를 뽐냈던 나라로 13세기 무렵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한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을 꼽아요. 동쪽으로는 중국 전체를, 서쪽으로는 중동을 지나 동유럽 일부를 지배한 몽골제국의 넓이는 우리나라 영토(약 10만㎢)의 약 330배가 넘는 3300만㎢에 달한 것으로 추정돼요.
몽골족은 왜 하필 이 시기에 정복 전쟁을 벌여 광대한 제국을 건설한 걸까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학자들은 당시 기후변화가 정복 전쟁의 원인이 되었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몽골족은 원래 초원 지역을 돌아다니며 목축을 하는 전형적인 유목 민족이었어요. 풀이 많이 자란 곳에서 말을 키우고, 풀이 고갈되면 다시 풀이 잘 자란 지역으로 이동하며 살아가죠. 그래서 유목민들은 말을 키우기 좋은 초원 지역을 굳이 벗어날 이유가 없답니다.
▲ 13세기 말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골군과 맘루크 왕족의 군대가 전투를 벌이는 장면을 그린 그림(왼쪽)과 그린란드에 처음으로 도착한 바이킹 ‘붉은 머리의 에리크’를 그린 그림(오른쪽)이에요. /위키피디아
그런데 학자들이 몽골족이 살았던 초원 지대의 오래된 나무 나이테를 분석한 결과, 칭기즈칸이 정복 전쟁에 나섰던 시기에 이 지역에 '이상건조기후'가 나타난 것으로 확인됐어요. 초원 지대에 건조한 날씨가 이어지자 풀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자연히 풀을 먹고 사는 가축 수도 줄어들었을 거예요. 학자들은 칭기즈칸이 이상기후로 어려움에 놓인 몽골 부족들을 통일한 뒤 말을 키울 수 있는 초원 지대를 찾아 정복 전쟁을 벌였을 것으로 추측해요. 몽골족이 13~14세기 세계사의 중심에 나타나게 된 배경에 초원 지대에 나타난 이상건조기후가 있었던 것이죠.
오스트리아 근처까지 진격했던 몽골족이 서유럽을 공격하지 않은 것에도 기후변화의 영향이 있었어요. 몽골군이 유럽에서 물러나던 때 초원 지역의 기후는 서늘하고 비가 자주 오는 기후로 바뀌었답니다. 비가 내리면서 초원 지역에 다시 풀이 자라자 몽골족들은 굳이 새로운 초원 지역을 찾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죠.
◇이상기후에 적응 못 한 그린란드의 바이킹
북아메리카 북서쪽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섬 그린란드는 육지의 80%가 얼음으로 뒤덮여 있어요. 이 땅에 처음 정착한 사람들은 얼음집 '이글루'로 유명한 이누이트족입니다. 이누이트족은 농경과 목축 대신 사냥과 고기잡이로 그린란드의 혹독한 환경에 적응했어요. 눈으로 이글루를 짓고 바다표범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어요. 바다표범의 가죽을 배에 씌워 먼바다까지 나가 고래를 사냥하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985년 아이슬란드에서 추방된 바이킹 '붉은 머리 에리크(Eric the red)'가 그린란드를 발견했어요. 당시 유럽은 비교적 날씨가 따뜻한 '중세 온난기'였답니다. 그래서 그린란드 남부 지역에도 풀이 잘 자라 목축을 하기에 큰 무리가 없었어요. 에리크가 섬 이름을 '그린란드'로 지은 것도 풀과 나무가 풍성한 풍경을 보았기 때문으로 추정돼요.
이후 다른 바이킹도 하나둘 그린란드로 이주하면서 그린란드에는 바이킹의 거주지가 형성되었어요. 그린란드의 바이킹은 목초지에서 목축하는 동시에 이누이트족과 영토·자원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답니다.
그런데 14세기 날씨가 추워지는 소(小)빙하기가 시작되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어요. 그린란드에도 매서운 추위가 닥치면서 풀과 나무가 줄어들었어요. 설상가상으로 아이슬란드와 노르웨이로 가는 해로는 유빙(바다에 떠다니는 얼음)이 가로막았고, 유럽 대륙에는 페스트라는 무서운 전염병이 돌았어요. 그린란드의 바이킹은 목축도 할 수 없고 유럽 대륙과도 완전히 고립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죠.
목축도 교역도 할 수 없게 된 바이킹 사람들은 굶주림에 쓰러져 죽어가기 시작했어요. 얼마나 먹을 것이 없던지 옷의 단추나 짐승의 발굽을 먹기도 했답니다. 그렇게 그린란드의 바이킹은 15세기 이후 완전히 소멸되고 말았어요. 학자들은 "그린란드의 바이킹이 소멸한 건 이누이트족을 야만인으로 취급하고 그들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폐쇄적인 태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린란드의 바이킹은 목축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물고기를 잡을 시도조차도 하지 않았다고 해요.
기후의 급격한 변화는 이렇게 대제국이 탄생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한 문명이 소멸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지구온난화라는 급속한 기후변화를 겪고 있는 오늘날 인류는 기후변화에 잘 대응하고 있는 걸까요?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세요.
윤형덕 하늘고 역사 담당 교사 |
09.29 영국, 바다 지배한 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해군·해운업 키운 엘리자베스 1세
무적함대와 겨룬 칼레 해전서 승리… 이후 지중해·대서양 해상 장악
향신료 무역 주도, 막대한 부 쌓아
서양보다 항해 기술 앞섰던 명나라
세력 다툼·왜구 침략으로 해운 포기… 국력 약해지는 원인 되기도 했어요
최근 한진해운이라는 해운(海運·배로 사람이나 물건을 날라 전달하는 '해상 운송'을 줄여서 부르는 말) 회사가 심각한 경영난에 빠지면서 국제적인 문제가 되고 있어요. 경영난에 빠진 한진해운의 선박들이 곳곳에 압류를 당하고, 항구 이용료와 항구에서 물건을 내리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항구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다 위에 떠 있어야 하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죠.
대부분 기업은 무역을 할 때 해운을 이용해요. 해운은 비교적 저렴한 돈으로 많은 물건을 한 번에 나를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해운에 문제가 생기게 되면 무역을 통해 거래되는 물건이 제때 전달되지 않는 물류난이 일어나게 됩니다. 한진해운의 배들이 바다 위에서 오가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서 한진해운에 물건 운송을 맡긴 수많은 기업도 연달아 피해를 입고 있어요.
▲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위 사진)는 16세기 영국의 해운업과 해상 무역을 일으켜 영국 경제의 번영을 가져왔어요. 정화의 원정대가 탔던 함선을 실제 크기로 복원한 모습이에요(아래 사진). /위키피디아
이렇게 해운업을 잘 관리하지 않으면 국가 경제는 물론 세계 경제에도 큰 피해가 발생합니다. 반대로 해운업이 튼튼한 나라는 경제적으로 큰 번영을 누릴 수 있지요. 역사를 살펴보아도 해운을 중시한 나라와 해운을 소홀히 한 나라의 운명은 정반대로 나타났답니다.
◇해운을 장악한 영국, 세계를 지배하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 들어본 적 있나요? 이 말은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33~1603)의 총애를 받던 월터 롤리 경이 한 말이에요.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했을 때 영국은 심각한 경제 위기에 놓여 있었어요. 엘리자베스 여왕은 롤리 경의 말처럼 바다와 해운을 장악해야 경제 위기에서 벗어나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영국 해군에 많은 투자를 하였어요. 심지어 신하들의 반대도 물리치고 당대 가장 유명한 해적이었던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영국 해군의 지휘관으로 끌어들였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이렇게 해군에 공을 들였던 이유는 당시 유럽 최고의 강대국인 스페인을 꺾어야만 바다와 해운을 장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일찍이 콜럼버스를 후원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식민지를 건설한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채굴되는 막대한 은을 바탕으로 경제 대국으로 떠올랐어요. 또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무적함대(아르마다)'를 바탕으로 지중해와 대서양의 해운을 장악하고 있었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지원으로 영국의 해군과 해운업이 점점 힘을 키워나가자,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는 결국 무적함대에 영국을 공격하도록 지시했어요. 프랑스 칼레 연안에서 무적함대를 만난 영국 함대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지원과 드레이크의 뛰어난 전술에 힘입어 승리를 거두었답니다. 이 전투가 세계 3대 해전 중 하나로 꼽히는 '칼레 해전'이에요.
이후 지중해와 대서양의 해운을 장악한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예견대로 놀라운 발전을 거듭했어요. 동인도회사를 통해 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스페인이 독점하던 향신료 무역을 주도해 막대한 부를 벌어들였어요. 이를 바탕으로 해군력과 해운업에 힘을 더한 영국은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해상 무역을 하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발전했어요.
◇서양보다 앞선 정화의 대원정
서양 문명이 뱃길을 통해 처음 인도에 도달한 것은 1497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쿠 다 가마가 아프리카 최남단을 지나 인도 캘리컷에 도착한 순간이었어요. 그런데 중국에는 이보다 80~90년 앞서 인도양 항로를 발견하고 아라비아의 메카와 아프리카 케냐 해안까지 도달한 인물이 있었답니다. 바로 명나라 황실의 환관이자 탐험가인 정화(1371~1433?)예요.
"명나라의 부강함을 세계 각지에 알리고 세계의 진귀한 물건을 찾아오라"는 황제의 명령을 받은 정화는 대함대를 꾸렸어요. 정화가 이끈 원정대의 규모는 대항해시대를 열었던 유럽의 원정대보다 훨씬 컸다고 합니다. 콜럼버스의 함대는 배 3척에 선원 120여 명으로 꾸려져 있었는데, 정화는 무려 배 62척에 승무원만 2만7800명을 태웠다고 해요. 또 정화가 탔던 함선의 크기는 콜럼버스가 탔던 산타마리아호보다 30배나 더 컸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지요? 정화는 20여 년간 총 7차례의 원정을 통해 동남아시아와 인도, 아라비아 반도와 동아프리카 해안으로 나아갔어요. 약 30여 개의 나라와 새롭게 외교 관계를 맺었고, 세계 각지의 보물은 물론 아프리카에 사는 기린까지 중국에 가져왔다고 합니다.
◇해운을 경시한 명나라의 몰락
서양보다 뛰어난 항해 기술을 자랑했던 명나라는 정화가 죽고 난 뒤 오히려 바다를 멀리하게 됩니다. 정화와 같은 환관들이 해운과 해양 원정을 통해 세력을 키우는 것을 두려워한 문신들이 견제에 나선 것이죠. 해양 원정은 완전히 중단되었고, 정화의 함선들은 모두 분해되어 버려졌어요. 정화의 원정대가 쓴 항해일지와 보고서도 모두 불태워 없어졌답니다. 급기야 명나라는 '왜구들이 바다와 해안가에서 약탈을 일삼는다'는 이유로 조공 무역 외에 모든 해상 무역을 금지시키는 해금령(海禁令)을 내렸어요. 정화의 원정을 통해 세계 최고의 해운 강국이 될 수 있었던 중국은 이렇게 스스로 세계 해운의 주도권을 서양에 넘겨주고 말았답니다.
명나라가 조정 내 세력 다툼과 왜구의 침략으로 해운을 포기한 것은 이후 국력 쇠퇴의 원인이 되기도 했어요. 해상 무역을 통한 경제적 이익이 사라졌고, 국제 정세에 대한 소식도 빠르게 접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죠. 해운을 중시해 세계 최강대국으로 올라선 영국과 해운을 간과해 몰락의 길을 걸은 중국 명나라의 이야기는 해운과 해상 무역이 여전히 중요한 오늘날에도 뜻깊은 교훈을 전해주고 있어요.
김승호 인천포스코고 역사 담당 교사 |
10.20 18번의 쿠데타에도… 태국 안정시킨 왕
1950년대에 영화와 뮤지컬로 제작된 '왕과 나'는 시암 왕국의 왕 몽구트와 영국인 가정교사 애나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특히 애나가 맨발로 왕과 함께 춤추는 장면은 명장면으로 꼽히지요. 많은 사람이 몽구트를 서양의 왕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시암은 태국의 옛 이름이고 몽구트는 지난 13일(현지 시각) 서거한 태국의 국왕 푸미폰 아둔야뎃(88·라마 9세)의 증조부 몽꿋(라마 4세) 국왕입니다. 참고로 몽구트와 가정교사 애나의 사랑 이야기는 순전히 허구랍니다.
푸미폰 국왕의 죽음으로 태국은 깊은 슬픔에 빠져 있어요. 태국 짜끄리 왕조의 아홉 번째 왕으로 70년간 국왕 자리를 지킨 푸미폰 국왕은 태국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그가 죽기 전 병에 걸렸다는 소식에 "국왕 대신 내가 죽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태국 국민도 매우 많았다고 합니다.
◇태국의 독립을 지킨 짜끄리 왕조
푸미폰 국왕이 태국 국민의 지지를 받은 배경에는 나라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짜끄리 왕조의 역사가 있어요. 18~19세기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가 서유럽 강대국의 식민지배를 받았지만, 태국은 드물게도 식민지배를 받지 않았답니다. 짜끄리 왕조의 국왕들이 현명한 외교를 펼쳤기 때문이죠.
태국 국민의 조상인 타이 민족은 13세기 무렵 수코타이 왕조라는 첫 독립 왕국을 세웠지만 15세기에 멸망하고 말았어요. 그 뒤를 이어 아유타야 왕조가 수립되었지만 아유타야 왕조도 18세기 중엽 버마(오늘날 미얀마)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고요. 이때 프라야 짜끄리라는 장군이 타이족을 이끌고 방콕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왕조를 세웠는데, 이게 바로 짜끄리 왕조입니다.
영화 '왕과 나'의 주인공이자 짜끄리 왕조의 네 번째 왕인 몽꿋 국왕이 즉위한 19세기 중엽 태국은 식민지배를 당할 위기에 놓여 있었어요. 인도차이나반도를 점령한 프랑스와 인도와 버마를 굴복시킨 영국이 동·서 양쪽에서 태국을 압박했기 때문이었죠.
이때 몽꿋 국왕과 그의 뒤를 이은 쭐랄롱꼰(라마 5세) 국왕은 '일부 영토와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나라의 독립을 지키겠다'는 결단을 내렸어요. 몽꿋 국왕은 강대국과의 불평등 조약을 받아들였고, 쭐랄롱꼰 국왕은 영국과 프랑스에 태국이 지배하던 땅 일부를 넘겨주었어요.
이로써 태국은 갖고 있던 영토의 절반을 잃었지만, 대신 프랑스와 영국을 중재하는 국가로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답니다. 국제 정세의 흐름을 정확히 읽은 두 국왕의 판단이 태국의 독립을 지킨 것이지요.
◇쿠데타를 도와 '국왕개발계획' 시작하다
푸미폰 국왕은 8대 왕이자 자신의 형인 아난타 국왕이 의문의 총격으로 사망하면서 왕위를 물려받았어요. 당시 태국은 정치적으로 크게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답니다. 1932년 법학자와 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태국을 입헌군주제 국가로 바꾸었지만, 그 이후 피분송크람 장군을 중심으로 한 군인 세력(군부)의 독재정치가 이어지고 있었지요.
▲ 지난 13일(현지 시각) 서거한 태국 푸미폰(왼쪽 사진) 국왕은 1992년 ‘검은 5월’ 사건 등 쿠데타가 발생할 때마다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어요. /뉴시스·AFP
푸미폰 국왕은 무너진 태국 왕실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 1957년 사릿 타나랏 장군의 쿠데타를 지원했어요. 이로써 태국 정부의 실권은 타나랏 장군에게 넘어갔고, 푸미폰 국왕은 쿠데타를 지원한 대가로 여러 권한과 막대한 돈을 받았어요.
이를 바탕으로 푸미폰 국왕은 낙후된 농촌을 개발하고 의료단을 보내는 한편, 수력발전소를 짓고 농업기술을 발전시키는 데에 왕실의 돈을 아끼지 않았어요. 덕분에 푸미폰 국왕은 태국 국민의 지지를 얻게 되었지요.
◇푸미폰 국왕에 대한 엇갈린 평가
푸미폰 국왕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혼란스러운 태국의 정치 상황을 안정시킨 것입니다. 1932년 이후 약 60년간 태국에서는 쿠데타가 무려 18번이 일어났는데, 이때마다 푸미폰 국왕은 정치 세력 간의 갈등을 안정시켜 태국 국민의 지지를 받게 되었어요.
특히 '검은 5월' 사건 때 푸미폰 국왕은 태국 국민과 전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답니다. 검은 5월 사건은 1992년 수찐다 끄라쁘라윤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이 시위를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사상자가 발생한 일이에요.
이때 푸미폰 국왕은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수찐다 장군과 야당 대표였던 짬롱을 불러들였는데, 국왕 앞에 무릎을 꿇은 수찐다와 짬롱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국왕의 권위가 크게 높아졌어요. 이후 푸미폰 국왕의 지지를 받지 못한 수찐다는 외국으로 도망가야 했고, 태국에는 민주 정부가 수립되었지요.
하지만 "푸미폰 국왕이 자신의 권력을 키우기 위해 쿠데타를 이용했다"는 비판도 적지 않아요. 입헌군주제의 취지와 달리 푸미폰 국왕은 쿠데타를 동의하거나 거부하면서 태국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죠.
서거한 푸미폰 국왕의 뒤를 이을 왕세자 와치랄롱꼰(64)은 아버지와 달리 거듭된 이혼과 기이한 행동 탓에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어요. 최근에도 정치 세력 간의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푸미폰 국왕을 잃은 태국은 과연 어떤 운명을 마주하게 될까요?
☞입헌군주제
입헌군주제는 의회에서 만든 헌법이 국왕의 힘을 제한하는 정치체제를 말해요. 대부분의 입헌군주제 국가에서는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만든 헌법을 통해 왕이 정치에 전혀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어요. 대신 시민들이 헌법에 따라 의회와 정부의 대표를 뽑아 나라를 다스려요. 그래서 입헌군주제 국가의 왕들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말로 표현되곤 합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있는 영국을 비롯해 일본, 스페인 등이 대표적인 입헌군주제 국가예요.
윤형덕 하늘고 역사 담당 교사 |
10.27 식민지 개척 시대부터 집과 재산, 총으로 지켰대요
지난 19일 서울 강북구 오패산터널 부근에서 전자 발찌를 끊고 달아난 성범죄 전과자가 사제 총기를 발사해 경찰관 한 분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있었어요. 이번 일로 우리나라에서도 불법으로 총을 만들어 범죄에 쓰는 일이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지요.
총은 군인들이 나라를 지키는 무기로 쓰기도 하지만, 범죄 수단이 되어 죄없는 사람의 목숨을 뺏기도 해요. 그래서 우리나라를 비롯해 대부분의 나라는 특별한 이유 없이 일반인이 총을 가질 수 없도록 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와 달리 일반인도 합법적으로 총을 가질 수 있게 허용하는 나라들이 있어요. 미국이 가장 대표적이지요. 미국 남성 약 32%, 여성 약 12%가 총을 갖고 있고, 지난해 미국에서 팔린 총기만 약 2314만정이나 된다고 합니다. 미국은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총을 가질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는 걸까요?
◇'미니트맨'과 수정 헌법 2조
미국은 원래 영국이 개척한 식민지였어요. 영국과 유럽 곳곳에서 넘어간 이민자들이 아메리카 대륙 동쪽 해안 지역을 개척해 자리를 잡았지요. 이때부터 식민지 개척민들은 대부분 총을 갖고 있었어요. 식민지에서는 원주민이 공격해오거나 짐승이 습격하면 스스로 집과 재산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죠. 사냥해서 고기를 얻기 위해서라도 총은 꼭 필요했지요. 즉 개척민들에게 총은 자신을 지키는 보호 수단이자 생활 수단이었던 거예요. 이런 사정을 알았던 영국 의회도 개척민들이 각자 총을 가질 수 있도록 '무장할 자유'를 법으로 보장해주었답니다.
▲ 1775년 4월 미국 민병대와 영국군이 처음으로 충돌한 렉싱턴 전투를 그린 그림이에요. 미국 민병대는 집에 보관하던 총을 들고 나온 식민지 개척민들로 조직되었어요. /위키피디아
그런데 1770년대부터 개척민들은 총을 독립운동 수단으로 사용했어요. 계속된 전쟁으로 재정난을 키운 영국 정부가 식민지에 매기던 세금을 지나치게 높이자 개척민들이 '우리 동의 없이 세금을 매길 수 없다'고 반발했어요. 그러자 영국은 아메리카 대륙에 군대를 보내 이를 진압하려고 했지요.
정규 군대가 없던 식민지 개척민들이 영국 군대에 맞서려고 각자 집에 둔 총을 들고 나와 민병대를 조직했어요. 이들은 '1분 안에 출동할 수 있게 준비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미니트맨(minute-man)'이라고 불렀답니다. 1775년 보스턴 근처 렉싱턴에서 영국 군대와 '미니트맨'이 처음으로 무력 충돌을 벌인 렉싱턴 전투를 시작으로 본격적 독립전쟁이 시작되었어요. 버지니아 민병대 대령 출신인 조지 워싱턴 장군은 40만명 가까운 민병대를 이끌어 영국군과 전투해 승리했고, 마침내 미국은 독립을 이루게 되었답니다.
민병대를 통해 독립을 이룬 미국인들은 '총은 곧 내 자유와 생명, 그리고 나라의 독립을 일궈낸 수단'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어요. 독립을 주도한 정치가들도 '개인이 총을 갖고 있어야 독재와 폭압을 벌이는 정치가를 언제든 몰아내고 자유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지요. 그래서 1791년 발효한 수정 헌법에는 "규율을 갖춘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정부의 안보에 필요하므로 무기를 소유하고 휴대할 국민의 권리가 침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포함했어요. 이것이 일반인의 총기 소유를 보장하는 '수정 헌법 2조' 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미국인은 이 수정 헌법 2조를 근거로 총기 규제를 반대하고 있지요.
◇남북전쟁과 미국총기협회(NRA)
미국 전역에 총기가 확산된 계기는 1861년에 일어난 남북전쟁입니다.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북부와 노예제 폐지를 반대한 남부가 나뉘어 4년간 전쟁을 벌이면서 총이 약 400만정 생산되었어요. 북부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자 미 연방정부는 군인들이 각자 갖고 있던 총과 탄약을 집으로 가지고 돌아갈 수 있게 허용했어요. '총은 나를 지키는 동시에 나라를 하나로 뭉치게 만든 수단'이라는 믿음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이때부터 총을 이용한 살인이나 강도 같은 범죄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특히 주머니에 넣어 숨길 수 있는 소형 권총이 개발되면서 총이 범죄 도구로 이용되는 일도 늘어났지요. 최근에도 미국에서는 죄 없는 사람들이 총격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계속되고 있어요. 지난 6월 플로리다주 올랜도의 한 클럽에서 총기 난사로 49명이 목숨을 잃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고, 2012년에는 코넷티컷주의 한 초등학교에서 총기를 난사해 어린이 20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어요.
이런 일을 막고자 총기를 규제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여전히 많은 미국인이 "총은 나라의 독립을 이루고 나의 자유와 생명을 지키는 수단"이라며 총기 규제에 반대하고 있어요. 특히 미국총기협회(NRA)는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이익 단체로 총기를 규제하는 법률을 번번이 가로막고 있답니다. 미국의 역사는 총이 개인의 자유를 지키고 나라의 독립을 이룬 수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너무 많은 사람이 쉽게 가지게 되면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는 걸 보여준답니다.
☞미국총기협회
미국총기협회(NRA·The National Rifle Association of America)는 남북전쟁에 참가했던 장교들이 “미국인들의 사격술을 향상시키자”는 취지로 1871년 만든 단체예요. 각종 사격대회와 사격 스포츠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미국인들에게 총기 소유와 사격을 권장하는 동시에 막대한 자금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총기 규제를 막기 위한 로비 활동을 벌이고 있어요.
미국총기협회에는 총기 제조업자와 사격 선수, 총기를 가진 일반인은 물론 전직 대통령과 스포츠 스타 등도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어요. 특히 영화 ‘벤허’의 주연배우였던 찰턴 헤스턴은 1998년부터 2003년까지 회장직을 맡아 총기 규제를 막는 데 앞장섰었어요.
지난 2000년 미국 대선 당시 민주당의 엘 고어 후보가 총기 규제 법안을 강력하게 추진하려 하자 헤스턴은 "총을 빼앗으려거든 나를 먼저 죽이라"며 반대 운동을 펼쳤고, 엘 고어는 공화당 후보였던 조지 부시에게 패배했어요. 총기협회의 반대 운동이 대선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죠.
김승호 인천포스코고 역사 담당 교사
11.03 로마노프 왕조의 멸망 부른 수도승의 정체는…
황태자의 병 고쳐 황실 신임 얻어 황후 조종해 장관들 수시로 바꾸고
황제에게 군사 작전 지시하기도
차르 측근이 뒤늦게 암살했지만 혁명 일어나 제국 무너졌어요
▲ 라스푸틴을 총애했던 황후 알렉산드라와 차르 니콜라이 2세. /위키피디아
온 나라가 '비선(秘線·몰래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 또는 단체) 실세' 논란으로 떠들썩한 가운데 '비선 실세'를 상징하는 역사적 인물로 라스푸틴이 자주 거론되고 있어요. 오늘은 근대 러시아 역사를 흔들었던 요승(妖僧·말이나 행동이 정상을 벗어나 세상을 어지럽히는 승려) 그리고리 라스푸틴(1872?~1916)에 대해 알아보도록 해요.
◇황태자의 병을 고친 떠돌이 수도승
19세기 중반 시베리아에 사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라스푸틴의 본명은 그리고리 예피모비치예요. 수도원을 떠도는 수도승 생활을 하며 농민들의 환심을 사 유명세를 탄 라스푸틴은 "내가 기도를 하면 황태자 알렉세이의 혈우병(조그만 상처에도 쉽게 피가 나고 피가 잘 멎지 않는 병)을 치료할 수 있다"며 차르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알렉산드라에게 접근했답니다.
라스푸틴이 어떤 방법을 썼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라스푸틴이 기도를 하면서 의사들도 어찌 하지 못하던 황태자의 병세가 호전되었다고 해요. 라스푸틴은 "황후의 친구인 안나 비루보바가 사고를 당할 것이다. 살아나긴 하지만 장애가 남을 것"이라는 예언을 했는데, 실제로 이 예언이 정확히 들어맞었다고 합니다.
이를 계기로 황후와 차르는 '라스푸틴은 실제로 하늘이 내려준 성스러운 사람'이라고 믿게 되었어요. 심지어 황후는 라스푸틴에게 "나의 스승인 당신이 내 곁에 있고, 내가 당신의 손에 키스하고, 내 머리를 당신의 성스러운 어깨에 기댈 때 비로소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습니다"라는 편지를 적어 보내기도 했답니다.
라스푸틴은 황실의 총애를 얻게 되자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어요. 황후와 가까이 지내던 귀족 부인들은 물론 수녀와 여러 여인을 희롱하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죠. 교회 지도자와 여러 사람이 라스푸틴을 고발하면서 이 사실이 드러났고, 라스푸틴도 자신의 죄를 인정했어요.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고위 경찰을 비롯해 라스푸틴을 처벌하려는 관리들이 모조리 해임되는 일이 연이어 벌어졌어요. 라스푸틴을 총애한 황후가 그를 처벌하지 못하게 가로막은 것이지요.
이런 상황을 걱정한 러시아 수상 스톨리핀은 라스푸틴이 요사스럽고 수상한 인물이라고 차르에게 보고했지만, 니콜라이 2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경이 한 말은 모두 진실일 것이오. 그러나 라스푸틴에 관해서는 다시는 나에게 말하지 말 것을 부탁해야겠소. 여하간 나는 그것에 관해서 아무 조치도 취할 수 없소."
◇황후를 앞세워 국정을 주무르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차르는 황궁의 일을 황후에게 맡기고 직접 전쟁터에 나가 군대를 지휘했어요. 이 틈에 라스푸틴은 황후를 마음대로 조종하며 러시아 정부의 모든 실권을 장악했답니다.
심지어 "꿈에서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전쟁터에 나가 있는 차르에게 '군사 명령'을 전하기도 했어요. 차르는 전쟁이나 전략은 전혀 모르는 라스푸틴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고, 그 결과 전쟁 상황은 러시아에 점점 더 불리해지기만 했어요.
▲ ‘요승’ 그리고리 라스푸틴(가운데)이 러시아 제국의 고위 군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에요. 라스푸틴은 황후의 총애를 이용해 러시아 국정을 혼란에 빠트려 로마노프 왕조의 멸망을 초래했어요. /Getty Images 이매진스
차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러시아의 국정(國政·나라의 정치)도 엉망이 되었어요. 라스푸틴이 황후를 조종해 며칠 간격으로 장관들을 바꾼 탓에 내각이 해산되는 일이 반복됐기 때문이죠. 라스푸틴이 보리스 슈튀르머라는 어리숙한 인물을 수상으로 임명하자 러시아에 머물던 프랑스 대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슈튀르머는 무능하고 지시를 잘 따르기 때문에 수상에 임명된 거다. … 라스푸틴이 황제에게 그를 극진히 천거한 것이 틀림없다."
◇라스푸틴의 죽음과 제정 러시아의 멸망
국정 혼란이 계속되면서 차르와 황후는 민심을 완전히 잃고 말았어요. 급기야 차르를 따르던 귀족 사이에서도 차르를 몰아내고 다른 사람을 황제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답니다.
위기감을 느낀 차르의 측근들은 차르의 조카사위였던 펠릭스 유스포프 대공을 앞세워 라스푸틴을 제거하기로 결심했어요. 라스푸틴이 죽고 나면 차르와 황후가 정신을 차리고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것이라 생각한 것이죠. 1916년 12월, 유스포프 대공과 차르의 측근들은 라스푸틴을 식사 자리에 초대한 뒤 그를 암살하였어요.
하지만 라스푸틴을 죽여 민심을 돌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상황이었요. 다음 해 3월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과 봉기를 시작으로 공산당의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제정 러시아와 로마노프 왕조는 멸망하고 말았어요. 황제 자리에서 쫓겨난 차르와 황후, 그리고 그 가족은 모두 처형당했고요. 라스푸틴의 전횡으로 멸망에 이른 제정 러시아의 이야기는 비선 실세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로 남아 있답니다.
☞러시아 황제 칭호 '차르(tsar)'
차르는 ‘황제’를 뜻하는 라틴어 'kaiser'에서 유래한 말로 러시아를 비롯해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등 슬라브족 국가의 '군주'를 의미하는 단어예요.
러시아에서는 1547년 이반 4세가 '차르'를 러시아 황제의 정식 칭호로 정했고, 그 이후 러시아 황제를 '차르'라고 부르게 되었지요.
대대적인 서구식 개혁으로 러시아의 근대화를 이끈 로마노프 왕조의 표트르 대제(표트르 1세)는 1721년 '모든 러시아의 황제'라는 뜻의 '임페라토르'라는 새로운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답니다.
하지만 이때에도 차르라는 칭호를 함께 사용하고, 로마노프 왕조가 몰락하기 전까지도 차르는 계속해서 러시아 황제의 칭호로 사용되었어요.
윤형덕 하늘고 역사 담당 교사
11.10
11.10 中 공산당 정권 수립의 '영웅'… 문화대혁명 큰 오점
최근 '핵심' 지위 받은 시진핑 "제2의 마오쩌둥 아니냐" 논란
마오, 대장정 후 공산당 이끌어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
대약진운동 실패로 수천만명 희생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겸 공산당 총서기가 지난달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공식적으로 '핵심' 지위를 부여받았어요. 집단지도체제를 표방하는 중국 공산당이 주석에게 '핵심'이라는 지위를 부여하는 건 14년 만의 일이랍니다. 그래서 "시진핑 주석이 장기 집권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전망과 "시진핑이 제2의 마오쩌둥이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어요.
오늘은 시진핑에 앞서 중국 공산당을 이끌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해 '핵심' 지위를 처음으로 부여받았던 마오쩌둥(1893~1976)에 대해 알아보도록 해요.
◇대장정을 거쳐 '중공'을 수립하다
마오쩌둥은 중국 후난성 창사 인근의 한 마을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어릴 때부터 지독한 책벌레였던 마오쩌둥은 러시아혁명을 계기로 공산주의에 매혹되었고, 1920년부터 창사 일대에서 중국 공산당원으로 활동하게 되었어요.
이후 장제스가 이끌던 국민당과 대립하던 공산당은 1934년 국민당 군대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으로 궤멸 위기에 놓였어요. 이때 마오쩌둥은 공산당을 이끌고 국민당 군대의 포위망을 탈출한 뒤 1여 년간 무려 1만2500㎞를 이동하는 '대장정'에 오르게 됩니다. 마오쩌둥과 공산당원들은 하루에 40㎞ 이상 쉬지 않고 행군해 산맥 18개와 강 17개를 넘어 국민당 군대의 추격을 따돌리고 산시성 옌안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했어요.
대장정을 이끌고 공산당을 재정비하며 공산당의 지도자가 된 마오쩌둥은 '일본의 침략을 물리친다'는 명분으로 국민당과 잠시 손을 잡는 '국공합작'을 벌였지만,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다시 국민당과 치열한 내전을 벌였어요. 마오쩌둥은 대장정 때 포섭한 농민과 노동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내전에서 승리했고, 1949년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하며 중국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어요.
◇대약진운동의 실패
이후 마오쩌둥은 본격적으로 공산주의 실험을 시작했어요. 공장 등 모든 산업 시설은 물론, 토지와 농기구까지 국가 소유가 되었어요. 농민들이 공공 토지에서 공동으로 일하고 수확물을 똑같이 나누어 가지는 집단농장도 운영되었고요.
하지만 잘 알려진 대로 이런 공산주의 경제 방식은 비효율과 부패만 가져왔답니다. 위기감을 느낀 마오쩌둥이 "중국을 산업화된 강대국으로 만들겠다"며 대약진운동을 시작했지만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갔어요. 마오쩌둥의 한마디에 경제가 휘청거렸고 애꿎은 참새들이 비명횡사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어요.
▲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중국 베이징 톈안먼 앞에서 중국 공안들이 줄을 맞추어 행진하는 모습이에요. /AP
어느 날 논밭의 벼를 쪼아먹는 참새를 쫓는 농민을 본 마오쩌둥이 참새를 가리키며 "저 새는 해로운 새다"라고 말하자 중국 전역에서 참새 박멸 운동이 일어난 것이죠. 그 결과 참새의 수가 급격히 줄면서 해충이 번성했고, 오히려 전보다 농작물 피해가 더 커졌답니다. 여기에 1960년부터 대기근이 일어나면서 급기야 수천만 명이 굶어 죽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고, 마오쩌둥은 주석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어요.
◇문화대혁명을 일으키다
한동안 숨죽이던 마오쩌둥은 1966년 전후로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 자신을 비판했던 공산당 지도자들을 "농민을 착취하는 지주와 자본주의를 중국에 끌어들이고 있다"고 공격하며 대중을 선동하고 나섰어요. 동시에 유교적 전통과 지주·부르주아·자본가 계급을 아예 말살시키는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답니다.
문화대혁명을 바탕으로 마오쩌둥은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을 모두 몰아내고 다시 주석이 되었어요. 마오쩌둥을 지지하는 공산당원은 물론 평범한 학생들도 마오쩌둥의 지시를 절대적으로 따르는 '홍위병'이 되어 유교 문화재를 파괴하고 죄 없는 사람을 '공산당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몰아 마구 죽이는 끔찍한 일들도 벌어졌고요.
마오쩌둥이 죽은 1976년까지 문화대혁명이 계속되면서 중국에서는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거나 감옥에 가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어요. 중국은 혼돈 상태에 빠졌고, 경제 상황은 전보다 더 악화되었지요. 중국은 마오쩌둥이 죽고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비로소 사회적 안정과 경제를 회복할 수 있었답니다.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중국을 이끈 덩샤오핑은 극단적인 공산주의를 추구했던 마오쩌둥과 달리 실용적인 경제정책을 추진했어요. 그의 경제 정책을 일명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라고 부릅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라는 뜻으로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중국 인민을 잘살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경제정책"이라는 덩샤오핑의 말에서 따온 이름이에요.
이에 따라 덩샤오핑은 1970년대 말부터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하고 외국과의 교류·교역을 늘리는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했어요. 그 결과 중국은 정치는 공산당이 통제하면서도 경제는 시장 체제로 운영되는 독특한 나라가 되었지요. 1990년 전후로 공산주의 경제를 고집하던 소련과 여러 공산권 국가가 무너질 때에도 중국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경제성장을 계속할 수 있었어요.
김승호 인천포스코교 역사 담당 교사
11.24 "예루살렘 언덕으로"… 중동 갈등의 뿌리된 시오니즘
반유대주의 성향 보인 스티브 배넌, 최근 백악관 전략가로 임명돼 시끌
유럽 민족주의 영향받은 유대인들, 팔레스타인 지역에 민족국가 건설
수천 년간 살아온 아랍인들 분노… 네 차례 중동전쟁 벌어졌어요
▲ 백악관 수석 전략가 및 수석 고문으로 임명된 스티브 배넌. /AFP 연합뉴스
최근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스티브 배넌을 백악관 수석 전략가 겸 수석 고문으로 임명한 것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어요. 배넌이 인종차별주의와 반유대주의를 주장하는 극우 성향의 인터넷 매체 '브레이트바트'의 공동 창업자이기 때문이죠.
민주당 하원 의원과 많은 사람이 배넌의 임명에 반발하고 있지만, 배넌처럼 극단적이진 않더라도 미국 내 유대인에 대한 좋지 않은 시선도 점점 커지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은 유대인과 이스라엘, 그리고 반유대주의에 관한 역사를 함께 알아보도록 해요.
◇추방된 유대인을 향한 차별과 멸시
유대인들은 기원전 1500년 무렵부터 중동의 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해 살았어요. 그러다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자 독립을 위해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켰고, 서기 135년 로마제국에 의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모두 추방당했답니다. 그 후 유대인들은 나라와 땅을 잃고 유럽과 세계 각지를 떠도는 신세가 되었어요.
유대인들은 유럽 각지에 흩어져 정착했지만, 여기서도 멸시와 탄압을 피하지 못했어요. '유대인은 예수를 살해한 집단 책임이 있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고, 상업과 금융업에 종사하며 악착같이 살아가는 유대인들을 '돈밖에 모르는 민족'이라고 폄하하는 일도 흔했지요. 흑사병 창궐과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죄 없는 유대인들이 학살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어요.
이런 상황에서도 유대인들은 '우리는 신에 의해 선택된 민족이며 언젠가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답니다. 그리고 19세기 무렵 이를 현실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나타났어요.
◇시오니즘과 밸푸어선언
당시 유럽에서는 "단일민족은 민족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민족주의가 일어나고 있었어요. 그러자 유대인들도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 민족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유대주의(Judeaism)'를 주장하기 시작했답니다. '시오니즘(Zionism·예루살렘 중심부에 성지가 있는 언덕 시온(Zion)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으로도 불린 이 운동을 펼치던 유대인들에게 제1차 세계대전은 민족국가를 세울 절호의 기회가 되었어요.
▲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 박물관에 모인 유대인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언하는 모습이에요. 액자 속 인물은 시오니즘 운동을 공식적으로 처음 주장한 오스트리아 국적의 유대인 테오도어 헤르츨이에요. /이스라엘 외교부
오스만제국과 전쟁을 벌이던 영국의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는 1917년 영국 국적의 유대인 로드쉴드에게 "영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국가를 인정할 것을 약속한다"는 편지를 보냈어요. 미국 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 미국의 지원을 얻기 위한 것이었죠.
'밸푸어선언' 이후 영국은 유대인과 미국의 지원을 받아 전쟁에서 승리했고, 오스만제국이 지배하던 팔레스타인 지역을 영국의 식민지로 편입하였답니다. 그러자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하는 유대인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오랫동안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아온 아랍인들은 반발하고 나섰어요. 갑자기 이주해온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하고 나라를 세운다는 건 이들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죠. 아랍인들은 영국의 이중적인 태도에도 크게 분노했어요. 밸푸어선언에 앞서 영국 고등판무관인 맥마흔이 1915년 "아랍인이 오스만제국에 맞서 전쟁에 참가하면 팔레스타인 지역에 아랍 국가의 독립을 보장해주겠다"는 거짓 약속을 했기 때문이었죠. 결국 아랍인들은 영국과 유대인을 향한 폭동을 일으켰고,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어요.
◇이스라엘의 건국과 중동전쟁
사태 수습을 떠맡은 유엔은 1947년 아랍인과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각자의 국가를 건설하는 방안을 채택했답니다. 사실상 유대인의 국가를 인정해준 결정이었기 때문에 수천 년간 팔레스타인에 살아온 아랍인들은 이 방안에 큰 불만을 품었어요.
드디어 1948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영국군이 철수하자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건국을 공식으로 선언했어요. 1000년 넘게 세계를 떠돌던 유대인들의 간절한 꿈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지만, 강대국과 이스라엘에 땅을 빼앗긴 아랍인들과 주변 중동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몰아내기 위해 동맹을 맺고 전쟁을 선언했어요. 이렇게 중동 국가들과 이스라엘은 1979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중동전쟁'을 벌였답니다. 네 번의 전쟁은 모두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어요.
이 전쟁의 결과로 아랍인 100만명 이상이 난민 신세가 되었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남은 아랍인들은 가자지구 등 '보호구역'으로 불리는, 장벽이 둘린 지역에 갇혀 살게 되었어요. 이 지역에서는 오늘날까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갈등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답니다.
☞반유대주의란?
반유대주의는 유대인과 유대인들이 주로 믿는 유대교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이나 이념, 행위를 뜻해요. 셰익스피어의 작품 ‘베니스의 상인’에서 안토니오의 살점을 요구하는 냉혹한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유대인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지요.
유대인에게 관대한 미국에도 반유대주의가 커지고 있어요. 엄청난 재산과 영향력을 지닌 유대인들이 미국의 금융과 정치를 장악해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지요. 특히 9·11테러 이후 무슬림에 의한 테러가 늘어나면서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미국 내 유대인들이 중동의 반미주의와 테러를 유발했다”는 인식도 커지고 있답니다. 그럼에도 특정한 민족과 인종을 멸시하고 차별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행동이에요.
김승호 인천포스코고 역사 담당 교사
12.08 카스트로가 부른 미·소 갈등, 핵전쟁 직전까지 갔어요
사회주의 정권 세운 카스트로, 미국에 맞서기 위해 소련과 밀착
소련, 쿠바 미사일 기지 건설 진행
미국, 쿠바 봉쇄하고 중단 요구… 전쟁 직전 극적으로 합의 이뤘죠
지난달 25일 피델 카스트로(1926~2016)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사망했어요. 반세기가량 쿠바를 지배한 카스트로는 1958년 쿠바혁명으로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한 이후 이웃 나라이자 자본주의 진영을 대변해온 미국과 끊임없는 갈등을 벌였어요. 1962년에는 카스트로가 미국에 맞서기 위해 공산주의 진영의 종주국인 소련을 끌어들이면서 미·소 양국이 인류의 멸망을 초래할 수 있는 핵전쟁 직전까지 갔었던 아찔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어요.
◇쿠바혁명과 미국과의 대립
쿠바 올긴(Holguin) 주에서 태어난 카스트로는 1945년 아바나대학교 법학과에 다니면서 사회주의혁명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어요. 대학을 졸업한 후 변호사가 된 카스트로는 당시 쿠바를 장악하고 있던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앞장섰답니다. 1953년에는 혁명 동지 150여 명과 함께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다 실패해 15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지요.
1955년 특사로 풀려난 뒤 멕시코로 망명한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와 만나 의기투합하고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새로운 계획을 세웠답니다. 군사조직을 꾸려 1956년 쿠바에 침투한 카스트로는 쿠바 내 혁명 세력을 모으고 게릴라 전술을 펼쳐 1958년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렸어요. 이를 쿠바혁명이라고 하지요.
▲ 1963년 모스크바를 방문한 피델 카스트로가 당시 소련의 지도자였던 니키타 흐루쇼프와 손을 잡은 모습이에요. /AFP 연합뉴스
쿠바의 1인자가 된 카스트로는 강력한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사회주의적 개혁을 추진하면서 이웃 나라인 미국과 대립하게 되었어요. 카스트로가 쿠바에 있던 미국인 소유 기업과 은행들을 모두 국유화하자 미국이 쿠바와의 외교를 단절하고 강력한 경제 제재 조치를 내린 것이죠.
미국의 경제 제재로 위기에 처한 카스트로는 당시 미국과 대립하던 공산주의 진영의 종주국 소련과 손을 잡았어요. 미국과 가까운 위치에 있는 쿠바의 영향력을 갖길 원했던 소련은 경제 위기에 놓인 쿠바에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요.
◇핵전쟁 직전까지 치달은 '미사일 위기'
1961년 피그만 침공 사건 이후 카스트로는 공산주의자와 친소련 인사들을 중용하면서 소련의 신임을 얻어갔어요. 소련의 강력한 군사력을 이용해 미국을 위협하기 위한 것이었죠.
그 결과 쿠바와 소련은 군사조약을 체결하고 '남미에 있는 사회주의국가를 보호한다'는 명분 하에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기로 했답니다.
이 소식은 1962년 10월 항공사진을 통해 미국 백악관과 펜타곤에 전달되었어요. 미군 정찰기가 소련이 비밀리에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는 모습을 촬영한 것이죠.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존 F. 케네디는 적국인 소련의 미사일 기지가 미국 본토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쿠바에 세워지는 걸 용납할 수 없었어요.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은 소련이 미사일 기지 공사를 감행한다면 제3차 세계대전도 불사하겠다"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답니다. 그리고 미국의 항공모함과 전함을 동원해 쿠바의 모든 항구를 봉쇄하고 소련의 물자와 미사일이 쿠바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완전히 가로막았어요.
하지만 소련은 이러한 봉쇄 조치를 비판하며 핵 잠수함이 호위하는 미사일 운반선을 계속해서 쿠바로 몰았어요. 미사일 기지 건설 사업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고요.
이 가운데 카스트로는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는 즉시 미국을 향해 핵 공격을 해 달라"며 갈등을 부추겼고, 미국의 정찰기가 소련에 의해 격추당하고 소련의 잠수함이 미군의 공격을 받는 일도 벌어졌답니다. 미·소 간 갈등은 언제 전쟁이 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까지 치달은 것이죠.
당시 미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가 "회의를 끝내고 백악관을 나오면서 노을이 드리운 가을 하늘을 보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다음 주 토요일이 오기 전에 다 죽을 것이라는 예감에 공포에 휩싸였다"고 말할 정도였답니다.
당시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치열한 군비 경쟁으로 미국과 소련은 엄청난 양의 핵무기를 갖고 있었어요. 실제로 두 나라가 전쟁을 벌였다면 양측이 사용한 핵무기로 인해 인류 전체가 멸망하는 끔찍한 결과를 낳았을 겁니다.
카스트로와 미국의 갈등에서 시작된 쿠바 미사일 위기는 다행히 미·소 간 전쟁이 가져올 위험을 알았던 케네디 대통령과 소련의 지도자 흐루쇼프의 합의를 통해 해결되었어요. 미국은 쿠바의 해상봉쇄를 풀고 향후 쿠바를 침공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소련은 쿠바의 미사일 기지를 포기하기로 한 것이죠.
소련이 미사일 기지를 폐쇄하고 미국이 이 과정을 감시하는 것도 허용하자 카스트로는 이런 소련의 조치에 강하게 항의했다고 해요. 하지만 카스트로도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두 나라의 합의를 바꿀 수 없었답니다.
☞피그만 침공 사건
쿠바혁명 이후 카스트로의 주도 하에 쿠바가 공산주의 독재국가로 변한 것에 위기감을 느낀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카스트로의 독재를 피해 미국에 망명한 쿠바인 1500명을 무장시켜 쿠바 피그만을 침공하게 했어요.
이들은 미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아 신식 무기로 무장하고도 쿠바군과의 전투에서 완패를 당했어요. 단 3일 만에 100여 명이 죽거나 다치고 1000여 명이 쿠바군에 생포되었답니다.
미국은 포로 1000여 명을 다시 미국에 데려오기 위해 몸값 수천만달러를 카스트로 정권에 지불해야 했어요. 이 사건은 쿠바가 소련과 더 가까워지는 계기도 되었지요.
김승호 인천포스코고 역사 담당 교사
12
12.15 대공황 틈타 집권한 나치당, 최악의 전쟁을 일으키다
오스트리아 대선서 극우파 선전… 호퍼, 6.6%p 차로 아슬하게 패배
유럽 곳곳에서 극우 정당 인기몰이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 배상금·대공황으로 심각한 경제난
분노한 시민들, 히틀러 뽑았어요
▲ 판데어벨렌, 노르베르트 호퍼
지난 4일(현지 시각) 오스트리아 대통령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 알렉산더 판데어벨렌이 53.3%의 표를 얻어 46.7%를 얻은 극우파 노르베르트 호퍼(오스트리아 자유당) 후보를 6.6%p 차이로 꺾고 차기 대통령에 당선되었어요. 선거 결과에 대해 외국 언론들은 "극우파 후보가 당선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 오스트리아 국민이 판데어벨렌을 지지했다"고 평가했답니다.
이번 선거는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전 세계의 관심을 끌었어요. 만약 호퍼가 당선되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 유럽에서 극우 성향의 국가 지도자가 탄생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죠. 호퍼가 속한 오스트리아 자유당은 독일 나치당을 추종했던 오스트리아 인사들이 설립한 극우 정당입니다.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등 유럽 각지에서는 최근 줄곧 외면당했던 극우 정당의 인기가 나날이 높아지고 있어요. 오늘은 많은 사람이 극우 정당의 인기몰이를 걱정하는 이유에 대해 알아보도록 해요.
◇베르사유 조약과 뮌헨 폭동
극우 정당은 극단적 우파 성향을 가진 정당입니다. 극단적 우파는 파시즘(fascism)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개인보다 국가와 민족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에 민족·국가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희생해야 한다"고 주장해요. 그래서 자유·평등·인권 같은 가치를 무시하고 국제 질서와 국제법을 거부하는 태도를 보인답니다. 또 자국의 민족·인종이 다른 민족·인종보다 우월하다고 믿기 때문에 다른 민족·인종을 배척하거나 공격하는 성향을 띠고 있어요.
극우 정당이 역사의 무대에 주연으로 등장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예요. 1918년 독일의 항복으로 1차 대전이 끝나자 전쟁을 마무리하는 베르사유 조약(1919년)이 체결됐어요. 이 조약으로 독일은 전쟁 범죄자로 규정되었고 보유하던 식민지를 모두 잃었어요. 무엇보다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내야 했답니다.
그 결과 독일은 빵 한 쪽을 사려면 손수레가 가득 찰 정도의 지폐가 필요할 만큼 물가가 폭등하는 등 심각한 경제난에 빠졌어요. 그러자 독일 국민은 기성 정치인들과 베르사유 조약을 강요한 승전국들에 큰 불만을 품게 되었답니다. 특히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에 너무 가혹한 책임을 물린다는 목소리가 커졌어요.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등장했어요. 이들은 1923년 11월 "위대한 독일 민족을 부흥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뮌헨 폭동'을 일으켰답니다. 시민들의 불만을 등에 업고 정부를 몰아낸 뒤 극우파 정권을 세우려 한 것이죠.
하지만 폭동은 곧 진압되었고 히틀러와 나치당 행동대는 감옥에 갇혔어요. 당시 독일 사람들은 히틀러와 나치당의 극단적인 주장에 공감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 1923년 11월 독일 뮌헨에서 폭동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사진 맨 오른쪽)와 나치당 행동대의 모습이에요. /위키피디아
히틀러는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도 극우적 주장을 계속했어요. "독일 내 공산주의자들과 유대인들이 나라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며 독일이 처한 위기를 그들 탓으로 돌렸어요. 나아가 공산주의자와 유대인을 독일에서 몰아내고 베르사유 조약에서 벗어나 독일 민족을 위한 강대국을 세우자고 주장했어요.
하지만 뮌헨 폭동 이후 슈트레제만 총리의 노력과 미국의 지원 덕분에 독일 경제는 안정을 되찾고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히틀러의 말에 여전히 냉담한 반응을 보였어요. 히틀러와 나치당원을 가리켜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답니다.
◇대공황과 나치당의 집권
그런데 1929년 대공황이 일어나면서 독일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되자 독일 국민은 절망과 분노에 빠져들었어요. 나아가 "1차 대전 패배와 계속된 위기는 공산주의자와 기성 정치인, 유대인들 탓"이라는 히틀러와 나치당 주장에 넘어가기 시작했어요. 그 결과 군소 정당이던 나치당은 1930년 의회 선거에서 107석을 얻었고, 1932년 선거로 230석을 차지해 독일 내 최대 정당이 되었어요.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되던 히틀러는 이렇게 합법적 선거에 따라 독일의 총리가 되었어요. 총리가 된 히틀러는 군부·자본가들과 손잡고 나치당에 반대하는 정당·정치인을 탄압한 뒤 일당 독재 체제를 갖추었답니다.
재벌과 군부의 지원 속에 경제 위기를 타개하는 데에도 성공했지만, 세계 정복을 꿈꾼 히틀러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전쟁 범죄를 저지른 인물로 기록되었어요. '독일 민족이 가장 우월하다'는 위험한 생각으로 전쟁을 일으킨 히틀러 탓에 군인 2700만명과 민간인 2500여만명이 2차 대전 도중 목숨을 잃었답니다. 이 기간에 나치당은 '인종 청소'라는 명분으로 죄 없는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했어요.
최근 유럽에서 극우 정당들이 인기를 얻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것도 불과 80여년 전 극우 정당인 나치당이 이런 끔찍한 일들을 저질렀기 때문이에요. 여러 전문가는 "난민 문제와 경제 불황이 해소되지 않으면 극우 정당의 인기는 계속해서 올라갈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답니다.
☞대공황(Great Depression)
1929년 10월 24일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에서 주가가 갑자기 폭락하기 시작했어요. 약 2주 사이에 300억달러의 주식 가치가 허공으로 사라졌어요. 주가 폭락은 물가 폭락과 기업들의 줄도산을 불렀고, 미국 경제는 순식간에 심각한 위기에 처했어요.
미국의 경제 위기는 독일과 영국, 프랑스 등으로 옮겨갔고 전 세계가 심각한 경제난에 빠지게 되었어요. 그 결과 독일과 일본 등에서는 "제국을 건설해 경제 위기를 해결하겠다"고 주장한 극우파들이 정권을 잡게 되었답니다. 여러 역사학자는 "대공황이 극우파의 집권과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윤형덕 하늘고 역사 담당 교사
12 22 미국 국무장관의 '바보짓', 사상 최고의 거래로
크림전쟁 후 재정난 빠진 러시아, 미국에 알래스카 거래 제안… 수어드 장관, 720만달러에 매입
'바보 같은 짓'이라 비난받았지만 이후 지하자원 발견되며 가치 폭등… 현재 가치 수조달러에 달한대요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차기 국무장관으로 거대 정유 회사 엑손모빌의 최고경영자인 렉스 틸러슨을 지명했어요. 틸러슨은 17년 전부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친분을 쌓았고, 러시아 정부로부터 '우정훈장'을 받을 정도로 러시아와 가까운 인물이랍니다. 틸러슨이 미국의 외교를 이끌게 되면서 그간 사이가 좋지 않았던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어떻게 바뀔지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어요.
과거 러시아와 미국은 서로 영토를 사고파는 거래를 하기도 했어요. 당시 미 국무장관인 윌리엄 수어드(1801~1872)가 주도한 이 거래는 향후 두 나라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쳤어요. 거래의 주인공은 바로 북아메리카 대륙 북서쪽에 있는 알래스카(Alaska)입니다.
◇러시아 모피 무역의 거점이 되다
'알래스카'는 알래스카 원주민인 알류트족의 언어로 '위대한 땅(또는 거대한 땅)'이라는 뜻을 갖고 있어요. 한반도보다 7~8배 넓은 알래스카에는 약 1만년 전 북동아시아에 살던 사람들이 건너가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 1867년 윌리엄 수어드(왼쪽에서 둘째) 미 국무장관과 워싱턴 주재 러시아 공사 예두아르트 스테클(오른쪽에서 셋째)이 알래스카 조약을 체결하는 장면이에요. /위키피디아
이누이트족과 알류트족이 살던 알래스카는 1741년 안나 여제의 요청을 받은 덴마크 출신 탐험가 비투스 요나센 베링(1681~1741)에 의해 발견되면서 러시아제국의 영토가 되었어요. 이후 해달이 많은 알래스카로 러시아 모피 상인이 하나둘 이주하기 시작했고, 19세기 초 알래스카는 모피 무역의 거점으로 번성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1853년에 시작된 크림전쟁에서 러시아제국이 오스만제국과 영국·프랑스 등으로 구성된 연합군에 패하면서 알래스카는 애물단지로 전락했어요. 크림전쟁 도중 연합군 함대가 캄차카 반도를 점령하자 러시아제국은 "우리 해군력으로는 시베리아 해안과 알래스카를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했답니다. 게다가 과도한 모피 생산으로 해달이 멸종 위기에 처하면서 알래스카의 모피 무역도 전처럼 많은 돈을 벌어주지 못하고 있었어요.
◇720만달러에 알래스카를 매입하다
이런 상황에서 승전국인 영국이 알래스카를 빼앗으려는 조짐을 보이자 러시아제국은 영국과 사이가 좋지 않던 미국에 알래스카를 팔기로 결정했답니다. 영국에 거저 빼앗길 바에 적은 돈이라도 받고 파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크림전쟁 패배로 정부의 재정난이 심각했던 것도 러시아제국이 알래스카 판매에 적극적으로 나선 또 다른 이유였어요.
러시아 측의 제안을 받은 앤드루 존슨 미국 대통령과 윌리엄 수어드 국무장관은 알래스카를 사들이기로 했어요. 이런 미국의 결정에도 영국이 큰 영향을 미쳤답니다. 과거 미국을 지배한 영국이 알래스카를 차지할 경우 다시 미국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1867년 미국은 러시아제국과 협상을 통해 알래스카의 땅 1㏊당 5센트로 환산해 720만달러를 지불하고 알래스카를 사들였답니다(알래스카 조약). 이 소식이 알려지자 미국 내에서는 불만이 터져나왔어요. 당시 많은 사람이 "우리한테 왜 이렇게 큰 얼음 박스가 필요한 거냐"라며 알래스카를 사들인 정부를 조롱했답니다. 알래스카를 사들인 수어드 장관의 결정은 '수어드의 바보짓(Seward Folly)'이라고 불렸어요. 미국 사람들은 알래스카에 '수어드의 냉장고' '다 빨아먹은 오렌지' '북극곰의 정원'이라는 조롱 섞인 별명을 붙이기도 했답니다.
◇'바보짓'이 '역사상 최고의 거래'로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알래스카는 '위대한 땅'으로 불릴 만한 반전을 선보였어요. 1897년에 금광이 발견된 이후 석유, 석탄, 천연가스, 철 등 각종 지하자원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거예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이 팽팽한 대립을 보인 냉전 시대가 열리자 알래스카는 군사적 요충지로도 거듭났어요. 미국은 시베리아와 가까운 알래스카에 미사일을 배치해 소련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었답니다.
1959년 미국의 49번째 주로 편입된 알래스카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잘사는 주 중 하나로 꼽혀요. 최근에는 잘 보전된 자연환경이 훌륭한 관광 자원이 되어 막대한 수입을 벌어들이고 있답니다.
현재 알래스카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수조달러라고 해요. 720만달러에 사들인 알래스카의 가치가 수십만 배 폭등한 것이죠.'수어드의 바보짓'이라 불렸던 알래스카 매입은 오늘날 미국 사람들에게 '역사상 최고의 거래'라는 칭찬을 받고 있답니다. 반대로 러시아 역사학자들은 알래스카 조약을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멍청한 짓'이라 한탄하고 있어요.
[알래스카를 향한 베링의 모험]
덴마크 출신으로 러시아 해군에 소속되어 있던 베링은 1724년 33대의 마차에 짐을 싣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출발했어요. 당시 러시아 사람들은 시베리아 동쪽 끝이 다른 대륙과 붙어 있는지 떨어져 있는지를 두고 갖가지 추측을 하고 있었답니다. 이에 황제인 표트르 1세가 베링에게 시베리아 동쪽 끝을 탐험해 답을 찾아내라고 지시한 것이죠. 약 9900㎞의 대장정을 거쳐 시베리아 동쪽 끝에 도착한 베링은 시베리아가 다른 대륙과 이어져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한 뒤 1730년 수도로 돌아왔답니다.
3년 뒤 베링은 "바다 너머에 땅이 있는지 확인하라"는 안나 여제의 지시를 받고 다시 시베리아 동쪽으로 갔어요. 1741년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던 베링은 우연히 알래스카를 발견하였지만, 곧 식량 부족과 괴혈병으로 목숨을 잃었답니다. 훗날 태평양을 탐험한 영국 해군 장교 제임스 쿡은 베링의 모험 정신을 기려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사이 해협의 이름을 '베링 해협'이라고 지었어요.◎
김승호 인천포스코고 역사 담당 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