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숨어있는 세계사/ 조선일보 2013
2013.09.02 스님들은 왜 고기를 멀리할까?
올 여름방학에는 온 가족이 산사(山寺) 체험을 하기로 했어요. 자연 속에 자리한 절에 들어가 먹고 자면서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할 기회를 갖자는 거지요. "아, 절에 들어가니까 고기는 못 먹겠구나. 그 전에 실컷 먹어 둬야지!"라고 입맛을 다시자 뒤에서 누나가 "돼지야!"라며 꿀밤을 때렸어요. "아얏! 왜 때려? 고기를 먹는 게 뭐가 어떻다고 그래?" 누나한테 대들면서도 궁금해졌어요. 대체 불교에서는 왜 스님들에게 고기를 못 먹게 할까요? 게다가 사찰 음식은 맵고 짠 양념도 쓰지 않아서, 솔직히 맛을 잘 모르겠거든요.
"대안탑(大雁塔)에 갔을 때 생각 안 나? 탑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 들었잖아." 누나가 말하자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어요. 대안탑은 중국 시안의 대자은사(大慈恩寺)란 큰 절에 세워진 불탑이랍니다. 당나라 태종 때인 7세기에 인도를 방문해 수많은 불교 경전을 갖고 돌아온 현장 스님이 그 탑을 짓고 경전을 보관했대요. "'큰 기러기 탑'이라는 뜻은 기억나는데…, 왜 '기러기'란 이름이 붙었다고 했더라? 아, 모르겠다!" 누나는 '그러니까 네가 고기 타령을 하지!' 핀잔이라도 주듯 제 기억을 되살려 줬어요.
▲ 중국 시안의 대안탑이에요. 현장 스님이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보관하기 위해 당 고종 때 지었고, 무측천이 재건했다고 해요. /Corbis 토픽이미지
현장 스님이 인도로 간 것은 석가모니의 고향에 가서 불교를 제대로 탐구하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당시 당나라는 나라의 허락 없이 개인이 외국과 교류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지만, 현장 스님은 인도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몰래 당나라를 탈출했어요. 험준한 산과 불타는 사막을 건너 인도에 간 현장 스님은 불교 성지도 방문하고 열심히 경전도 모았답니다. "어느 날 현장 스님은 안탑(雁塔·기러기 탑)이라고 이름 붙은 탑을 보았어. 인도 곳곳에서 많은 탑을 봤지만, 기러기 탑은 처음이어서 이상하게 여겼지." 그곳의 비구승(★) 한 분이 현장 스님에게 안탑의 유래를 설명했어요. 어느 날 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바라보며 비구승이 농담처럼 이야기했대요. "오늘은 승도(僧徒)들의 식사가 충분치 못했어. 만약에 보살이 기러기 모습을 하고 나타난 거라면 우리한테 고기를 베풀어 주었을 텐데." 그 말이 끝나자마자 기러기 한 마리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비구승 앞에 떨어져 죽었대요. 승도들은 기러기의 죽음을 애도하며 탑을 세워 '기러기 탑'이라 이름 붙이고, 고기를 멀리했대요.
"당나라로 돌아온 현장 스님은 그 기억을 되새기며 자신이 쌓은 탑을 대안탑이라고 부른 거야." 누나는 한참 전에 들었던 얘기도 똑 부러지게 떠올리네요. 하지만 그 이야기는 내 의문을 가라앉히기는커녕 더욱 키웠어요. "뭐야, 불교에서도 처음에는 고기를 먹었다는 얘기네?" 옆에서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엄마가 무슨 생각이 난 듯 끼어드셨어요. "맞아! 티베트 불교의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가 외국을 방문했을 때 비프스테이크를 좋아한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한참 산사 체험 계획을 짜고 계시던 아빠도 한마디 하셨어요. "아빠도 태국에 갔을 때 그곳 스님들은 고기 요리를 거절하지 않는다고 들었단다."
▲ 현장 스님은 부처의 가르침을 제대로 탐구하고자 인도에 다녀왔지요(왼쪽 사진). 태국의 스님들이 신도들에게 음식을 공양받는‘탁발’모습이에요(오른쪽 사진). /Corbis 토픽이미지
우리 가족은 뜻하지 않게 불교의 음식 문화에 대해 조사하게 됐어요. 대안탑 유래에서도 알 수 있듯 인도에서 처음 불교가 생겨났을 때는 육식을 특별히 금하지 않았다고 해요. 그러다 석가모니가 열반에 드시고 한참 지나서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났고, 육식도 금했어요. '대승(大乘)'은 '많은 사람을 구제해 태우는 큰 수레'를 뜻하는데, 불교를 출가한 승려만의 종교에서 모든 사람을 위한 종교로 넓히려는 생각이 담겨 있었어요. 대승불교는 중국과 우리나라·일본 등으로 퍼졌고, 초기 불교를 잇는 소승불교는 태국·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나라들로 퍼져 갔어요. 티베트 불교는 대승불교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유목을 하는 티베트 지역의 환경에 맞춰 육식을 엄격히 금지하지는 않는다고 해요.
"아하, 그래서 중국 스님인 현장 스님이 죽은 기러기 이야기에 감동했던 거구나. 중국에서 스님이 됐으니까 처음부터 대승불교를 믿었을 거 아냐?" 누나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어요. 사찰 음식 먹고 날씬해질 자기 모습을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 왜 공연히 심술이 날까요? 나는 현장 스님이 삼장법사로 등장하는 소설 '서유기'를 떠올리며 한마디 툭 던졌어요. "쳇, 그러면 삼장법사 따라갔던 저팔계도 고기 안 먹고 채식만 했을 거 아냐!"
★비구승(比丘僧): 출가해 계율을 따르고 독신으로 불도를 닦는 승려.
강응천 역사 저술가
09.09 중남미 국가에 왜 흑인이 많은 걸까?
▲ 쿠바 해변의 모습이에요.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건너 긴 항해 끝에 서인도제도에 도착했어요. 콜럼버스는 쿠바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다고 해요. /Corbis 토픽이미지
"쳤습니다! 아, 큽니다. 커요!"
중계 캐스터의 흥분된 목소리를 따라 아빠랑 나도 같이 외쳤어요.
"와아~! 홈런!"
신이 나서 만세를 부르고 있는데, 날아온 야구공에 맞은 것처럼 갑자기 뒤통수가 얼얼했어요. 아빠와 저를 기다리다 화가 난 엄마가 달려오셔서 저에게 꿀밤을 먹이신 거죠. 식탁으로 끌려가면서도 구장을 도는 푸이그 선수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어요. 바로 그때, 갑자기 궁금한 게 떠올랐어요.
"아빠, 쿠바가 아프리카 어디에 있는 나라예요?"
"쿠바는 라틴아메리카에 있어. 카리브 해에 떠 있는 섬나라지."
잘난 척한 사람은 당연히 누나였지요. 그 말을 듣자 궁금증이 더 커졌어요.
"아, 아프리카가 아니고 라틴아메리카야? 거기에도 흑인이 많이 살아?"
"그것도 몰랐어? 세계에서 제일 빠른 육상 선수 우사인 볼트(Bolt)도 카리브 해에 있는 자메이카 출신이잖아."
그런데 누나도 말하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나 봐요. 바로 엄마와 아빠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었답니다.
▲ 육상 선수 우사인 볼트(왼쪽)와 야구 선수 야시엘 푸이그(오른쪽)는 카리브 해에 있는 자메이카와 쿠바 출신이지요. /조선일보 DB·AP 뉴시스
"정말 그러고 보니 카리브 해 쪽에 있는 나라에는 흑인이 많은데, 멕시코나 아르헨티나처럼 대륙에 있는 나라에는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아르헨티나의 축구 스타 메시는 백인이고…. 같은 라틴아메리카인데 왜 이렇게 다르죠?"
"궁금하지? 그래서 역사를 알아야 하는 거야."
아빠는 냉면을 비비면서 말씀하셨어요.
쿠바, 자메이카, 아이티 등 카리브 해에 줄지어 있는 섬나라들을 서인도제도라고 해요. '서인도'라면 서쪽 인도라는 뜻인데, 왜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섬나라들에 그런 이름이 붙었느냐고요? 그건 바로 500여 년 전인 1492년 이곳에 도착한 이탈리아 출신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olumbus)가 그곳을 인도라고 착각하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해요. 나중에 진짜 인도가 동쪽에 있다는 걸 알고는 그곳을 서인도라고 부르게 된 거지요.
"아하, 그래서 아메리카 원주민을 인도 사람이라는 뜻인 '인디언'이라고 하는군요? 정말 잘못된 말이네요."
누나는 역시 이해가 빨라요. '아메리카 인디언'은 콜럼버스의 착각에서 생겨난 이름이니 잘못된 게 분명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아메리카 원주민도 흑인은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푸이그 선수의 조상은 대체 언제부터 쿠바에 살았을까요?
▲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에 도착해 원주민과 만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에요. /Getty Images 멀티비츠
"콜럼버스가 그곳에 도착한 후의 일이야. 콜럼버스의 항해를 지원한 에스파냐는 서인도제도에서 금을 충분히 찾지 못하자 원주민을 마구 부려 먹고 죽였어. 유럽인들이 옮긴 전염병도 치명적이었지. 얼마 안 가 원주민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단다."
아빠는 흥분한 듯 젓가락을 탁 내려놓으시곤, 입에 들어간 냉면도 제대로 넘기지 못하셨어요.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에스파냐인을 비롯한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데려와 사탕수수를 재배하도록 했어요. 이런 노예무역은 1800년대까지 계속됐고, 1000만 명이 넘는 흑인이 짐짝처럼 노예선에 실려 대서양을 건넜다고 해요. 그래서 다른 지역보다 서인도제도에 흑인이 많아진 거랍니다.
"노예선을 탄 많은 이가 항해 도중 병에 걸리거나 굶어 죽었다는구나."
결국 아빠는 냉면 한 그릇을 다 비우지 못한 채 일어나셨어요. 평소 같으면 그런 아빠를 보고만 있으실 엄마가 아니지요. 그렇지 않아도 오늘 요리를 맡겠다는 약속을 어긴 아빠 때문에 뾰로통해 계셨거든요. 하지만 이번엔 달랐어요.
"볼트랑 푸… 뭐라는 그 선수들은 모두 그때 살아남은 노예의 후손이구나. 너희도 응원 많이 하렴."
엄마의 말씀이 천사의 목소리처럼 들리네요. 역시 우리 엄마가 최고야!
강응천 | 역사 저술가
09.16 가자, 金 캐러!… 이민자 몰려든 미국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네."
이 노래를 알고 있나요? 딸을 잃고 혼자가 된 늙은 아버지가 자신의 딸인 클레멘타인을 애타게 부르는 미국의 민요이지요. 이 슬픈 노래는 사실 바닷가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 아니에요. 미국의 서부 개척이 한창이던 시절, 금광을 찾아 나선 아버지와 그 딸의 이야기랍니다.
미국은 원래 대서양 연안의 동부지역에서 시작된 나라지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무역과 공업을 통해 큰 이익을 얻었어요.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사들이고, 멕시코와 전쟁을 하는 등 국제정세와 전쟁을 이용해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어요. 1848년 2월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Treaty of Guadalup e Hidalgo)을 맺으면서, 미국은 대서양에서부터 태평양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갖게 됐어요. 문제는 이 넒은 땅에 거주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영화 '파 앤드 어웨이(Far and away)'에서처럼 말을 타고 달리면서 깃발을 꽂으면 땅을 주는 경주를 하기도 하고, 아주 싼 값에 땅을 분양하기도 했어요. 포장마차에 부자의 꿈을 싣고 서부로, 서부로 향한 이들은 이렇게 개척자가 되어 갔어요. 아메리칸 드림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답니다.
▲ 1848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됐어요. 이후 수많은 사람이 일확천금을 꿈꾸고 캘리포니아로 몰려들어 금을 찾았지요. /Corbis 토픽이미지
1848년, 미국의 인구변동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바로 금이었어요. 존 수터(John Sutter)가 헐값에 사들인 지금의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금이 나온 거죠. 수터는 일꾼들에게 비밀로 하라고 했지만,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이지요. 곧 금을 캐려는 사람들로 무법천지가 되고 말았어요. 사람들은 배를 타고, 혹은 마차 먼지를 날리며 속속 모여들었어요. 동부지역까지 금 소식이 알려지는 건 수개월이 걸렸어요. 1849년, 소식을 들은 약 10만명의 사람들이 벌 떼처럼 몰려들었죠. 이렇게 모여든 사람들을 '포티나이너스(forty-niners·49년의 사람들)'라고 부르는데요, 이들은 약 10년 동안 엄청난 양의 금을 채굴했어요. 6개월간 금광에서 일하면 다른 곳에서 6년 동안 일한 만큼의 돈을 벌 수 있었다고 해요. 광부들만 돈을 번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이 모여들면서 다른 산업들도 덩달아 발전해 나갔어요. 청바지 회사 '리바이스'는 이 지역에서 광부를 상대로 질긴 바지를 만들던 리바이 스트라우스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답니다.
처음에는 동부에 살던 사람들이,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사람들이 몰려왔어요. 이어 유럽인들과 오스트레일리아인, 뉴질랜드인, 중국인들까지 이민자 대열에 합류했고요. 미국 역사상 유례없는 대 이민의 시대였지요. 전 세계에서 몰려든 이민자들로 순식간에 인구가 증가한 캘리포니아는 1850년 미국의 31번째 주(州)로 승인됐어요. 1860년대 캘리포니아 인구는 38만명이 되었고, 도시와 도로·철도가 만들어졌어요. 금을 찾아 모여든 이들이 이룬 많은 변화를 '골드 러시(Gold Rush)'라고 부르는데요, 미국 역사상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변화를 가져왔답니다. 광활한 미국 영토는 세계 각지에서 온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다민족 국가가 되기 시작했어요. 아메리카 대륙의 동쪽과 서쪽을 연결하는 대륙횡단철도가 건설돼 동서의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지요.
▲ 체로키 족을 비롯한 수많은 원주민은 오랜 삶의 터전을 잃고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강제이동해야만 했어요(위 사진). 당시 골드러시 열풍을 보여주는 책자 그림이에요(아래 사진). /Corbis 토픽이미지
그렇다면 처음 캘리포니아 땅의 주인이었던 존 수터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됐을 거라고요? 아니에요. 그는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 이전에 얻은 소유권을 인정받지 못했답니다. 수없이 많은 재판을 통해 결국 소유권을 인정받았지만, 돈에 눈이 먼 사람들 때문에 아무것도 얻지 못했어요. 클레멘타인의 늙은 아버지가 금을 찾아 부자가 되려고 서부에 왔지만 결국 딸을 잃은 것처럼, 누구에게나 기회가 된 것은 아니었지요.
원래 아메리카 대륙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던 인디언들도 많은 것을 잃어야만 했어요. 미국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원주민과 이주민은 끊임없이 충돌해왔어요. 1830년 미국 정부는 '인디언 추방법'을 만들어 인디언보호구역으로 강제 이동하도록 했어요. 이에 저항하는 인디언들은 죽임을 당하기도 했죠. 디즈니 애니메이션 '포카혼타스'의 주인공처럼 새로운 서양 문명을 받아들인 부족도 있었지요. 체로키 족은 기독교를 비롯한 백인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는데, 그들 역시 고향에서 약 2000㎞ 떨어진 오클라호마의 인디언보호구역으로 강제 이동해야만 했답니다. 눈보라 속에서 피눈물을 뿌리며 이동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원주민이 사망했습니다. 이때 그들이 부른 노래가 유명한 'Amazing Grace'라는 노래입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큰 비극이라 할 수 있는 이 이동을 '눈물의 길(Trail of Tea rs)'이라고 부른답니다.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고서 서부로 몰려든 사람들과 원주민 사이에 충돌이 더 자주 일어났고, 인디언 보호구역은 갈수록 좁아졌습니다. 인디언 자녀는 미국식 교육을 받으면서 인디언의 문화를 잃어갔어요. 인디언 조상의 무덤 위로 넓은 도로가 만들어졌고, 그들의 삶의 터전은 사라졌지요. 미국은 넓은 영토를 이민자로 가득 채웠고, 세계 강국으로 부상했어요. 하지만 인종 차별과 노예제 문제로 갈등을 겪어야만 했지요. 진정한 발전은 통합에서 나오는 힘이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공미라 경기 구리 인창중 교사(세계사 저술가)
09.23 영국의 여왕은 왜 '대통령'이 아닐까
영국, 덴마크, 스웨덴, 벨기에, 노르웨이, 스페인, 네덜란드, 일본, 캄보디아, 사우디아라비아.
이 나라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차이는 있지만, 아직 왕과 왕비가 존재하는 국가들이에요. 이 중에는 왕이 직접 통치하는 왕정을 실시하는 나라도 있고, 통치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요.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상징적 존재이며 통치는 하지 않아요. 정치는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를 중심으로 법에 따라 이뤄지고 있지요. 이러한 영국 정치의 전통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영국은 국민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의회가 다른 나라보다 앞서 만들어진 나라입니다. 1215년 존 왕은 귀족들의 권리를 재확인한 문서인 '대헌장(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에 서명했어요. 대헌장 이후 귀족·성직자의 힘이 강해져 의회 탄생으로 이어졌어요. 의회정치의 전통은 큰 자부심이었겠지요? 17세기, 평생 독신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가 죽고 친척인 스코틀랜드 출신의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가 차례로 왕위를 계승했어요. 이때부터를 스튜어트 왕조라고 불러요. 하지만 그들은 스코틀랜드와는 다른 영국의 의회를 이해하지 못했답니다. 의회를 무시하고 탄압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던 찰스 1세는 결국 왕위에서 쫓겨나 처형당하지요. 혁명에 가담한 의회 의원 대부분이 청교도였기 때문에 '청교도 혁명(Puritan Revolution, 1640~1660)'이라고 해요.
▲ 영국 런던에 있는 버킹엄 궁전이에요. 영국 왕실의 사무실이자 영국 국왕의 주거지로 쓰이고 있지요. /Corbis 토픽이미지
의회파를 이끌던 올리버 크롬웰(Cromwell)은 왕정을 폐지하고 호국경(護國卿)이 돼 공화정을 실시했어요. 이때가 영국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화정이 시행된 시기예요. 당시 영국은 해상무역으로 경제가 발전했지만, 크롬웰의 독재에 시달려야만 했어요. 그는 성서에 따르는 청빈한 생활을 주장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혹했거든요. 크롬웰이 병으로 죽자 사람들은 프랑스에 도망가 있던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를 다시 왕위에 앉혀요. 다시 '왕이 통치하는 나라'가 된 거예요.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새 왕의 인품은 훌륭하지 않았어요. 찰스 2세는 아버지를 죽게 한 의원과 판사들을 찾아내 처형했어요. 이미 죽은 크롬웰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에 형벌을 내리기도 했지요. 가톨릭을 믿지 않는 사람을 차별하고, 여전히 의회를 무시하는 정책을 폈어요. 왕의 권력은 신이 준 것이라는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주장하며, 태양왕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절대 권력을 부러워했지요.
찰스 2세를 이은 제임스 2세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그는 노골적으로 가톨릭에 편중된 정책을 펴서 강한 불만을 샀지요. 특히나 가톨릭교도인 왕비가 아들을 낳자, 가톨릭교도가 아닌 국민의 불만은 극에 달했어요. 왕자가 자라서 왕이 된다면 계속 이렇게 차별받고 살 것 같아 걱정이 된 거죠. 사람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혹은 정치적인 탄압을 피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기도 했어요. 불만을 지닌 의원들은 제임스 2세의 딸로 네덜란드에 있던 메리 공주와 남편 오렌지 공(公) 윌리엄 3세를 불러들여요. 그 소식을 들은 제임스 2세는 왕비와 어린 왕자를 데리고 프랑스로 도망쳤답니다.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는 공동으로 왕위를 계승했지요. 이렇게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이룬 정권 교체를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 1688~1689)'이라 불러요. 자부심이 느껴지는 이름이지요? 새로운 왕은 '권리장전(Bill of Rights)'이라는 문서를 인정했어요. 의회와 백성의 권리를 인정하고, 국왕이 누리던 잘못된 특권은 포기한다는 내용이었어요. 그 후부터 영국은 '왕은 있지만 통치하지 않는 나라'의 전통을 가지게 돼요. 왕은 상징적으로 존재하며, 국민의 대표인 의회가 법에 따라 통치하는 입헌군주제 국가로 발전한 거죠. 이 법은 자유와 평등을 기본으로 인권을 지키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 1953년 6월 대관식을 한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군중에게 손을 흔들고 있어요. 엘리자베스 2세는 1952년 왕위를 계승했고, 올해 6월 대관식 60주년을 맞았답니다. /Getty Images 멀티비츠
영국의 정치적 역사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왕과 의회의 다툼과 화합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왕정에서 공화정, 다시 왕정이 됐다가 결국 왕정과 공화정을 절묘하게 섞은 현재의 정치 형태가 됐으니 말이에요. 물론 영국에서도 "왕실은 불필요하게 예산을 낭비할 뿐 전혀 필요하지 않다"라는 폐지론이 있어요. 하지만 영국 왕실은 여전히 많은 영국인의 사랑을 받고 있지요. 아마도 어려운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 품위 있는 생활로 국민 통합을 이루어내기 때문이겠죠. 지난 7월 영국 왕실에서 태어난 로열 베이비 '조지 알렉산더 루이스 마운트배튼-윈저'는 태어나자마자 왕위 계승 서열 3위가 됐다고 해요. 미래의 영국 왕이 바르고 건강하게 자라기를 기원합니다.
공미라 | 세계사 저술가
10.04 우리나라 서쪽에 있는 시리아, 왜 中東이라 부를까
"아빠, 궁금한 게 있어요."
거실에서 아빠와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누나가 신문을 읽다 말고 달려왔어요. 요즘 신문으로 공부하는 프로그램에 푹 빠져 열심히 신문을 보고 있었거든요.
"신문에서 중동, 중동 하는데, 도대체 중동이 어디예요?"
누나가 들고 온 신문 지면에는 '중동의 화약고', '중동의 해결사' 등의 제목이 달린 기사가 실려 있었어요.
"시리아 문제를 다룬 신문 기사를 보고 있었구나. 시리아 내전이 계속돼 세계의 관심을 끌고 있지. 시리아 정부군과 반군이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화학무기를 사용하자 유엔(UN·국제연합)이 화학무기를 폐기하라고 결의하기도 했단다."
아빠께서 신문 기사의 내용을 설명하자 누나가 짜증을 냈어요.
"아이, 그건 저도 읽어서 알고요. 그런 시리아 문제를 왜 중동 문제라고 하느냐고요?"
그러고 보니 나도 어디에선가 '중동'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아요. 어디였더라? 아, 예전 축구 중계에서 이란이나 카타르 등의 나라를 가리켜 '중동'이라고 한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키득거리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 있는 사원이에요. 시리아 인구의 약 5분의 4가 이슬람교를 믿는다고 해요. /Getty Images 멀티비츠
"침대 축구 하는 나라들이 중동이에요? 자기네가 이기고 있으면 선수들이 자꾸 넘어져서 일어나지 않는다지!"
아빠는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어요.
"그래, 시리아나 카타르처럼 아시아 서쪽 아라비아 반도에 있는 나라들과 이란, 그리고 이집트처럼 북아프리카에 있는 일부 나라를 가리켜 '중동'이라고 한단다. 축구 경기를 할 때 가끔 이상한 행동을 해서 우리한테 싫은 소리도 듣지만, 그 지역 사람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 우리나라는 1970년대부터 이 지역 건설에 뛰어들어 경제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았단다."
그때 누나가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소리를 빽 질렀어요.
"아빠!"
"앗, 깜짝이야. 왜 이렇게 소리를 질러?" 잠시 후 아빠는 누나가 왜 그러는지 알고 멋쩍은 미소를 지으셨어요.
"아… 그렇지! 우리 공주님이 알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지? 거기를 왜 중동이라고 하느냐고? 가만있어 봐라, '중동(中東)'이라면 가운데 동쪽이라는 뜻인데…. 그 지역은 우리나라의 동쪽에 있는 게 아니라 서쪽에 있잖아?"
"제 말이 그 말이에요. 그런데 왜 중동이라고 부르냐고요?"
아빠와 누나는 똑같이 고개를 갸우뚱거렸어요. 나도 절로 고개를 흔들며 생각했죠. '아빠도 모르는 게 있다니 이거 뜻밖인걸?'
"우리나라를 가리켜 '극동(極東)'이라고도 하잖니? 그건 동쪽 끝이라는 뜻인데, 그렇다면 중동이나 극동이나 혹시 서양 사람들이 하는 말 아닐까?"
엄마가 설거지를 마치고 손을 닦으면서 셜록 홈스처럼 멋진 추리를 하시네요. 아빠는 서재로 들어가셔서 역사책을 뒤지시고, 누나는 컴퓨터로 달려가서 열심히 인터넷 검색을 했어요.
"알았다!" 이렇게 먼저 뛰어나온 건 누나였어요.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 싸우던 영국이 아시아를 세 지역으로 구분했대요. 중국과 우리나라가 극동, 인도가 중동, 인도 서쪽이 근동(近東·가까운 동쪽). 그런데 지금은 근동 지역을 중동이라고 부르게 됐대요."
▲ 시리아의 팔미라 유적지예요. 사막에 있어 낙타를 타고 찾아가기도 하지요. /Getty Images 멀티비츠
"그럼 그렇지! 도대체 왜 영국 사람이 만든 이름을 우리가 따라 불러야 하는지…. 그 사람들한테야 그 지역이 동쪽이지만 우리에겐 서쪽이니 정반대 방향이잖아!" 엄마가 이렇게 혀를 차셨어요. 누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어요.
"교과서에는 극동이나 중동이라는 말이 안 나와요. 그냥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 이렇게 표현하거든요.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도 교과서처럼 우리나라에 가장 맞는 이름으로 부르면 좋겠어요."
그러자 아빠가 서재에서 나오면서 말씀하셨어요.
"중동이라고 불리는 지역은 참 복잡해. 교과서에 나오는 지역 이름으로 표기하자니 '북아프리카, 서남아시아'라고 해야 하는데, 이건 너무 길잖아? 중동 대신 '아랍'이란 이름을 쓰자니 이란을 빼놓게 되고. 이란 사람들은 아랍 민족이 아니거든."
"그쪽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슬람교를 믿잖아요? 중동 대신 '이슬람 지역'이라고 하면 안 돼요?" 엄마가 아빠께 이렇게 물으셨어요.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들이라고 '이슬람 지역'으로 합해 부르면,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처럼 동남아시아에 있는 이슬람 국가들도 거기 포함해 불러야 하겠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 종교가 같다고 하나의 지역인 것처럼 부른다면 아무래도 더 혼동되고 불편할 것 같은데…"
이것 참 난감하군요. 북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에 있는 이슬람교 국가들을 가리켜 '중동'이라고 하는 건 유럽인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말이니 분명히 문제가 있어요. 그런데 그 말 대신 쓸 수 있는 쉽고 간단한 말이 잘 떠오르지 않는군요. 우리 가족은 이 문제를 숙제로 남겨 두고 각자 열심히 역사 공부를 하기로 했답니다. '신문은 선생님' 독자 여러분도 함께 고민해보는 건 어떨까요.
강응천 | 역사 저술가
10.18 ABCD… 알파벳은 누가 만들었을까?
"끼토산~ 야끼토~ 를디어~ 냐느가~"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친구들과 '산토끼' 노래 가사를 거꾸로 불렀어요. 할수록 재미있어서 집에 와서도 계속 불렀답니다.
"총깡 총깡 서면뛰 를디어 냐느가~"
그러자 누나가 귀를 틀어막으면서 빽 소리를 질렀어요. "아이 시끄러워! 노래도 못 부르는 애가 목청은 왜 그렇게 크니?" 미국에서 잠시 돌아온 삼촌 부부를 위해 과일과 식혜를 내오던 엄마는 웃으면서 말씀하셨어요.
"그게 그렇게 재미있어? 하긴 엄마가 네 나이일 때도 똑같이 부르곤 했지."
옆에 있던 삼촌은 반갑다고 제 볼을 두 손으로 쥔 채 한참을 흔들었어요. 그리고는 씩 웃으면서 이렇게 물으셨어요. "'산토끼'를 거꾸로 하면 정말 '끼토산'이 될까?" 누나와 나는 삼촌이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려는 것인지 궁금해 물끄러미 바라보며 귀를 쫑긋 세웠어요.
"한글로 '산토끼'라고 써 놓고 그 순서를 뒤집으면 물론 '끼토산'이 되지. 하지만 '산토끼'라고 읽은 것을 녹음했다가 거꾸로 돌려 들어보면 '끼토산'이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단다."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삼촌을 바라보았어요. 이번엔 엄마, 숙모도 궁금해하면서 삼촌의 입을 쳐다보셨지요. 삼촌은 종이와 연필을 꺼내 열심히 써 가면서 열띤 설명을 이어갔어요.
▲ 레바논에서 출토된 석관의 일부예요. 여기에 왕의 시체를 보관했지요. 알파벳의 기원이 된 페니키아 문자가 새겨져 있어요. /AFP
"산토끼를 자음과 모음으로 풀어 쓰면 'ㅅㅏㄴㅌㅗㄲㅣ'가 되지? 그다음에 이걸 거꾸로 하면 'ㅣㄲㅗㅌㄴㅏㅅ'이 되겠지? 이걸 자음과 모음 소릿값대로 발음해보렴."
"이…, 꼬…, 트…, 낫?"
누나가 어렵게 발음하자 삼촌이 박수를 치셨어요.
"그래, 바로 그거야. '산토끼' 발음을 녹음해서 거꾸로 틀면 '끼토산'이 아니라 '이꼬트낫'이 된단다."
한글은 소리 나는 대로 적는 글자인데, 그 글자로 적은 단어를 거꾸로 읽는 것이 우리가 예상하는 발음과 다르다니 신기한 일이군요. 각각의 소리가 있는 자음과 모음을 따로 떼어 'ㅅㅏㄴ'이라 쓰지 않고 한데 합쳐서 '산'이라고 쓰기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거래요. 자음과 모음을 풀어 쓰는 알파벳은 어떨까요? 영어로 토끼를 뜻하는 'rabbit(래빗)'을 거꾸로 쓰면 'tibbar'이고, 그 발음은 '티바'예요. 래빗이라고 읽은 것을 녹음해 거꾸로 틀면 발음이 '티바'로 같아요. 우리 한글의 경우와 다르지요?
"삼촌, 알파벳을 만든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요?"
누나가 갑자기 묻자 삼촌은 "글쎄…, 그리스 사람들일까?" 하며 자신 없어 했어요.
누나는 두 팔을 허리에 얹고 잘난 척을 시작했죠. "흐흐, 삼촌도 모르시는 게 있네요. 페니키아 사람들이거든요! 아주 먼 옛날에 지금의 시리아에 살던 사람들이죠."
우리 가족이 시리아에 대해 얘기하다가 '중동(中東)'이란 말의 유래를 알게 된 다음부터 누나는 그 지역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래서 책을 찾아 읽다가, 아주 오래 전에 지금의 시리아와 레바논 땅에 살면서 지중해 무역을 하던 페니키아 사람들이 처음으로 알파벳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죠.
페니키아인이 발명한 알파벳은 지중해를 따라 그리스와 로마 등으로 전해져 나중에는 유럽 전체로 퍼져 나갔어요. 그리스 알파벳은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에 영향을 주었고, 로마 알파벳은 서유럽에 영향을 끼쳤어요. 꼬불꼬불하게 생겨서 마치 그림처럼 보이는 아라비아 문자나 이란 문자도 사실은 알파벳이 변형된 거라고 해요. 오늘날에는 인도네시아처럼 아시아 국가들도 로마 알파벳으로 자기네 말을 표현하고 있어요.
▲ 페니키아 사람들이 살았던 레바논 지역의 유적지예요. 그들이 만든 문자가 발전을 거듭해 오늘날의 알파벳이 되었어요(왼쪽 사진). 고대 페니키아에서 돌로 만든 궤예요. 페니키아 문자가 기록되어 있지요(오른쪽 사진). /Corbis 토픽이미지·조선일보 DB
"어머, 우리 공주님이 공부를 많이 했네. 그러고 보니 미국에서 만났던 중국 사람들과 일본 사람들도 자기네 말로 문자를 보내면서 알파벳을 사용해 입력하더구나." 숙모가 누나를 칭찬하셨어요. 중국의 한자는 글자가 너무 많아서 휴대폰 문자를 보낼 때나 컴퓨터에 입력할 때 불편해요. 그래서 소리 나는 대로 알파벳을 입력하면 그 발음에 해당하는 한자가 뜨고, 거기서 고르는 방식이지요. 이에 비하면 한글은 컴퓨터 시대에도 아주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멋진 글자예요. 세종대왕은 이렇게 먼 미래의 일까지 계산했던 걸까요?
"그런데 세종대왕은 왜 한글을 알파벳처럼 풀어쓰지 않고 자음과 모음을 합쳐 쓰게 한 것일까요?"
국어 시간에 맞춤법 때문에 골치 아팠던 기억이 떠올라 삼촌께 질문했어요. 그러자 삼촌은 다시 종이에다 글씨를 써가며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답니다. "만약 '국어'를 소릿값이 있는 자음과 모음으로 풀어 쓴다고 해보자. 'ㄱㅜㄱㅓ'가 되겠지? 그러면 소리는 알 수 있어도 '국어'라고 쓸 때처럼 뜻이 바로 들어오지는 않잖아? 한글은 이처럼 소리와 뜻을 함께 표현할 수 있는 멋진 글자란다."
아, 정말 한글은 장점이 많은 문자로군요. 아무리 알파벳이 세계로 퍼져나가도 한글은 없어지지 않을 게 분명해요. 저는 결심했답니다. 앞으로 맞춤법 공부 열심히 해서 한글을 더욱 발전시키겠다고 말이죠.
강응천 | '세계사와 함께 보는 타임라인 한국사' 저자
10.25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 원래 한 나라였죠
인구밀도는 1㎢의 면적 안에 살고 있는 사람 수를 나타냅니다. 인구밀도가 높을수록 좁은 지역에 사람이 많이 살고 있다는 의미이지요.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매우 낮은 나라 중 하나인 몽골에는 1㎢에 1.5명도 안 되는 사람이 살고 있어요. 반면 가장 인구밀도가 높다는 방글라데시에는 1000명이 넘는 사람이 살고 있지요. 이 나라는 인도를 사이에 두고 파키스탄과 마주 보고 있는데요, 원래 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는 하나의 인도였어요. 그런데 왜 인도에서 나누어져 다른 나라가 되었을까요?
인도는 종교의 나라로 알려져 있어요. 고타마 싯다르타가 자비와 평등을 강조한 불교가 생긴 곳이 인도입니다. 인도에서는 4세기부터 민간신앙과 불교 등이 섞인 힌두교가 발전했어요. 11세기 무렵부터 약 800년 동안은 이슬람교의 지배를 받기도 했습니다. 인도는 시대별로 왕조의 변천을 겪으면서 그만큼 많은 종교의 변화를 겪은 나라예요. 그래서인지 종교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다툼이 자주 일어났어요. 알라신만을 유일한 신으로 인정하는 이슬람교와 세상 만물을 신으로 섬기는 힌두교 간에는 충돌이 잦았고요. 영국은 힌두교와 이슬람교 신자들의 다툼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인도인들을 분열시키는 식민지 정책을 썼지요.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1905년, 영국은 벵골 분할령을 발표해요. 인도 북동쪽에 있는 벵골은 영국의 통치에 가장 거세게 저항한 곳이에요. 이 법은 이슬람 신자가 많이 살던 곳을 동벵골, 힌두교 신자들의 지역을 서벵골로 나누었어요. 인도의 민족운동이 힘을 얻지 못하게 만들려는 것이었죠.
▲ 파키스탄의 이슬람교 사원이에요. 종교뿐 아니라 다양한 공공 행사가 열리지요. 이슬람 사원을 ‘모스크’라고 해요. /Corbis/토픽이미지
분노한 인도인들은 한마음이 되어서 저항했어요. 영국산 면직물을 불태우고, 상점과 공장 문을 닫았어요. 인도국민회의에서는 '영국 물건을 사지 말자''국산품을 애용하자' '인도인의 손으로 인도를 통치하자''교육만이 힘이다'등의 구호를 내걸었지요. 결국 1911년 벵골 분할령은 폐지되었지만, 종교 간 갈등을 일으키려 했던 영국의 속셈은 오랫동안 인도 사람들 가슴속에 남았답니다.
드디어 1947년에 인도는 손꼽아 기다리던 독립을 했어요. 그러나 독립의 기쁨은 잠시였지요. 인도국민회의와 이슬람동맹이 각각 자기들의 나라를 세우려 했기 때문이에요. 이 문제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종교를 찾아 떠나는 혼란을 겪었어요. 인도의 독립을 이끌었던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는 "힌두교든 이슬람교든 기독교든 종교를 가리지 말고 한 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외쳤지만, 암살당하고 말았어요
▲ 인도의 힌두교 사원이에요. 이슬람 사원의 겉모습과 다르지요. /Corbis/토픽이미지
결국 힌두교를 믿는 인도와 이슬람교를 믿는 파키스탄으로 나뉘어 각각 독립국가를 세우게 되었답니다. 이슬람교와 힌두교 간의 종교 갈등이 영국의 식민 지배를 겪으면서 더욱 커져서 인도가 분리되는 결과를 낳은 것이에요.
그런데 옛 지도를 잘 보면 특이한 점이 있어요. 거대한 인도를 사이에 두고 파키스탄 영토가 두 지역에 흩어진 거죠. 동벵골이 있던 곳의 동파키스탄과 인도 서북쪽에 있는 서파키스탄. 인도를 사이에 두고 1000㎞가 훨씬 넘는 거리에 있는 이들은 이슬람교를 믿는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거의 없었어요. 언어도 문자도 민족도 풍습도 모두 달랐거든요. 게다가 인구는 동파키스탄이 훨씬 더 많았지만, 정치는 서파키스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어요. 정부의 예산도 서파키스탄 중심으로 쓰였고, 동파키스탄 사람들은 공무원이 돼도 높은 자리에 오르기 힘들 정도로 차별을 받아야 했지요. 이 밖에도 불편한 점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았어요.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 간에는 또다시 갈등이 시작되었어요. 물론 파키스탄과 인도 간에도 분쟁은 계속되었지요.
1952년 서파키스탄은 오직 우르두어만을 공식 표준어로 지정했어요. 벵골어를 쓰던 동파키스탄에선 대학생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반대 운동을 벌였어요.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면서 벵골어도 표준어로 인정한다는 선언이 나왔어요.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벵골 지역의 동파키스탄인들은 서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어요. 마침내 1971년 동파키스탄이 독립해 방글라데시가 된 거예요. 인도가 힌두교를 믿는 인도, 이슬람교를 믿는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로 분리된 셈이에요. 참고로 인도 남쪽의 스리랑카는 불교 국가예요.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분쟁과 다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어요. 인도처럼 종교 갈등으로 나라가 갈라지기도 하고 자원 다툼 등 여러 이해관계 때문에 나라가 분열되기도 하지요. 때로는 국제 분쟁으로 확산되기도 합니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평화를 지키려는 마음과 상대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태도 아닐까요?
공미라 | 세계사 저술가
11.04 우리의 독도, 일본은 왜 자기네 땅이라 우길까?
아빠 친구 분이 저희 집에 오셨어요. 아빠 고향은 강원도 동해안에 있는 강릉이에요. 친구 분은 그곳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계신답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오징어는 잘 잡히죠?" 엄마가 반갑게 인사하며 음식을 내오셨어요.
"아이고, 오징어 안 잡힌 지 오래됐습니다. 게다가 요즘엔 일본 방사능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나라 해산물까지 꺼리고 있어요."
아빠께서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셨어요.
"그래. 일본에서 가까운 우리나라 사람들이 불안해할 만도 하지."
"그러니 큰일 아닌가? 이렇게 방사능 때문에 우리 국민이 예민해져 있는데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대며 불을 지르니까 말이야. 일본 사람들 참 이해할 수가 없어."
그때 생각난 것이 있어서 제가 끼어들었어요. "학교에서 들었어요. 10월이 독도의 달이래요."
방에 있던 누나가 제 얘기를 듣고 한마디 했어요. "너 독도의 달이 어떻게 정해진 건지 알아?"
제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누나는 거드름을 피우며 아는 척을 했답니다. "1900년 10월 25일은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공포해서 독도를 울릉도에 부속시킨 날이야. 독도수호대가 이날을 '독도의 날'이라 부르며 기념하기 시작했고, 경상북도 의회가 10월 전체를 '독도의 달'로 선포했지."
▲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 일본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거문도·울릉도를 포함한 영토에 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고 했지요. 그런데 지금 일본은 독도가 이 조약에 나오지 않으니 자기네 땅이라고 억지 주장을 펴고 있지요. /뉴시스
이 말을 들은 아빠 친구 분이 식혜를 마시면서 물으셨어요. "그런데 어쩌다가 독도가 경상북도가 됐지? 원래 강원도 땅 아니었나?" 아빠도 한잔 드시면서 거드셨죠. "그랬지. 독도가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건 신라 지증왕 때 하슬라주 군주인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면서부터야. 그 하슬라주가 바로 강릉이거든." 그러자 누나가 옆구리에 두 손을 얹고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한마디 했어요.
"아빠! 일본 사람들이 독도를 내놓으라고 도발하는 마당에 독도가 강원도니 경상도니 하는 건 너무 한가로운 말씀 아니에요?" 아빠 친구 분은 씩 웃으며 누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어요. 아빠도 누나를 대견스럽게 바라보며 말씀하셨죠.
"역시 내 딸이라니까. 그럼 일본이 도대체 뭘 가지고 그렇게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대는지 아니?"
누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빠가 이렇게 설명을 시작하셨어요. 일본 사람들은 옛날부터 해양자원이 풍부한 울릉도와 독도 주변 바다를 탐내 왔대요. 그래서 1905년 2월 22일 러일전쟁이 한창일 때 슬그머니 독도를 일본 시마네 현으로 편입시켰답니다. 그런 다음 1910년에는 우리나라 전체를 강제로 식민지로 삼았죠.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부르는 일본 사람들은 지금도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이라고 부르면서 그날부터 독도가 자기네 땅이 된 걸로 선전하고 있답니다.
"20세기 초 세계는 힘센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집어삼키는 약육강식의 시대였어. 그렇게 남의 땅을 강제로 차지하는 것을 제국주의라고 하지. 지금은 세계 거의 모든 사람이 제국주의는 낡은 시대의 범죄행위였다고 생각한단다. 그러니 제국주의 시대에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으로 강제 편입한 것도 당연히 범죄지."
그런데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 건 해방 뒤인 194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회담이었어요. 이 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일본이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국과 새롭게 외교 관계를 맺기 위해 열렸죠. 당시 일본이 다른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으려면 그동안 피해를 준 나라들에 보상해야 했죠. 빼앗은 땅도 돌려줘야 했고요. 그런 문제를 의논하는 회의라면 당연히 우리나라도 참여해야 했는데, 연합국들은 우리나라를 부르지 않았어요. 이유는 우리나라가 일본과 싸워 이긴 승전국이 아니라는 거였죠.
▲ 연합국과 맞선 전쟁에서 진 일본은 1951년 9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평화에 관한 조약을 맺었어요. /Getty Images/멀티비츠
"그래서 우리도 없는 데서 일본과 우리나라 영토가 결정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단다."
그렇게 진행된 회담의 결과로 1951년에 일본과 연합국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맺었어요. 여기서 일본이 우리나라에 돌려줘야 할 땅은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한 한반도'로 정했답니다. 처음에는 '독도'가 포함됐다가 나중에 빠졌다고 해요. 소련과 냉전을 벌이던 미국이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과정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거예요. 그런데 일본은 그 이후에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근거로 내세우며 '독도가 원래 일본 땅이었기 때문에 한국에 돌려줘야 할 땅에서 뺀 것'이라고 우기는 것이죠.
"왜 우리가 참여하지도 않은 회담에서 결정된 걸 가지고 야단이죠?"
누나와 저는 흥분해서 한목소리로 소리쳤어요.
"일본이 저렇게 나오는 것 자체가 제국주의 범죄를 아직도 반성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야. 그러니까 독도는 영토 분쟁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바로 세우는 문제이기도 하지."
아빠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빠 친구 분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씀하셨어요.
"허허허. 그래. 일본이 더는 억지 주장 못 하도록 만드는 게 우선이지. 그다음에 우리끼리 독도가 강원도니 경상도니 따져보자고. 빨리 그 날이 오면 좋겠어!"
강응천 | '세계사와 함께 보는 타임라인 한국사' 저자
11.22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함무라비법전은 야만적?
▲ 함무라비법전 비석 윗부분엔 태양신이 함무라비 왕에게 법전을 건네는 장면이 담겨 있지요. /Getty Images/멀티비츠
겨울이 다가오면서 야외보다 실내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어요. 우리나라는 인구의 절반 이상이 공동주택에 거주하고 있다고 해요. 그래서 겨울철이면 위층에서 쿵쿵거리는 층간 소음 문제로 많은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지요. 평소 이웃 간에 인사를 자주 하고,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키워나가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3700여년 전 바빌로니아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한 왕이 있었어요. 바로 함무라비 왕입니다. 함무라비는 왜 이런 원칙을 만들었을까요?
함무라비는 바빌로니아의 여섯 번째 왕이에요. 바빌로니아가 위치한 메소포타미아는 주변에 큰 강이 흐르고, 넓은 평야로 이뤄져 있어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이었어요. 이곳에서 인류는 처음으로 농사를 짓고 도시를 만들기 시작했지요. 최초로 이 지역을 통일했던 사람들은 수메르인이었답니다. 뒤를 이어서 다시 찾아온 혼란한 시기. 함무라비가 막 왕이 되었을 무렵에도 강한 나라들이 주변에 가득 있었어요. 그는 군사력을 기르고, 주변 국가들과 동맹을 맺거나 배신을 하면서 이 지역을 통일해 나갔어요. 마침내 바빌로니아는 메소포타미아 전체 지역을 통일한 나라가 되었어요.
함무라비왕은 전쟁이 끊임없는 이 땅에 정의를 세우는 왕이 되고 싶었어요. 상업과 농업을 발달시키고, 언어를 통일하고, 조세제도와 군사 제도를 변화시켰어요. 무엇보다도 넓은 제국 안의 다양한 문제를 공평하게 처리하고 싶었지요. 하지만 영토는 넓고 왕의 몸은 하나이니 그럴 수 없는 노릇. 그래서 각지에 왕을 대신해서 문제를 해결해 줄 관리를 파견했어요.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왕이 재판하는 것처럼 똑같은 기준을 만들어 주기로 결심했지요. 당시 일어나고 있던 문제들, 예를 들면 도둑질·폭행·사기·가족 관계·의료사고 등 분야별로 해결 기준을 마련했어요. 이것을 '함무라비법전'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법전은 너비 65㎝, 둘레 1.9m, 높이 2.25m의 큰 돌에 당시에 사용하던 쐐기문자로 새겼어요. 그러고 나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신전에 놓았답니다. 어떤 내용이 있었을까 궁금하지요?
비석의 상단에는 태양신으로부터 법전을 받는 함무라비왕의 모습이 있어요. 뿔 모양모자를 쓰고 왕좌에 앉아 이글거리는 태양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가 바로 태양신이에요. 함무라비는 그 앞에서 공손하게 예를 갖추고 서 있지요.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도 이 그림을 보면 '신이 내려준 법이니 꼭 지켜야지' 생각했을 거예요. 그림 아래 서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어요. "태양신 사마슈가 이 세상에 빛을 준 것처럼 백성의 행복을 위해 이 세상에 정의를 주노라. 그리하여 강자가 약자를 못살게 굴지 않도록, 과부와 고아가 굶주리지 않도록, 평민이 관리에게 시달리지 않도록…."
▲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남쪽에 있는 바빌론 유적지예요. 바빌론은 함무라비왕 때 크게 발전했답니다. /AFP
그리고는 282개의 법 조항과 맺음말이 이어져요. 법 조항에는 '자식이 아버지를 때리면 그 손을 잘라버린다' '다른 사람의 뼈를 부러뜨리면, 그 사람의 뼈도 부러뜨린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이를 부러뜨리면, 그의 이를 부러뜨린다' '황소나 양, 나귀나 돼지 혹은 배를 훔쳤을 경우, 그것이 신전의 것이라면 30배로 갚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것이라면 10배로 갚아야 하며, 만일 갚을 수 없으면 처형당한다' 등 듣기만 해도 소름이 오싹 끼치는 내용이 있어요. 이처럼 똑같이 복수하거나 돈으로 보상하도록 되어 있지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속담처럼 말이에요. 이런 법을 '탈리오의 법칙' 혹은 '복수법'이라고 하는데요, 함무라비법전은 복수법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의를 위해서 만들었다면서 왜 이렇게 잔인하게 만들었을까 의아하지요?
그런데 사실은 일부 내용만 보았기 때문이에요. 함무라비법전은 재산이나 가족 관계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고, 잔인한 신체 형벌에 관한 내용은 20여건에 불과해요. 과부나 고아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고요. 당시에는 감옥이 없었기 때문에 저지른만큼 똑같이 당하거나 재산으로 물어줄 수밖에 없었던 거죠. 이렇게 판결함으로써 더 큰 복수를 막을 수 있었지요. 만약 이런 법전이 없었다면 누가 재판을 하느냐에 따라 더 큰 형벌이 내려질 수 있기 때문이에요.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지만, 과거의 기준으로 보면 오히려 따뜻한 배려가 담긴 법이었답니다. 함무라비가 죽은 후 바빌로니아 왕국은 급속도로 약해졌어요. 함무라비법전은 약탈 문화재가 되어 세계 여러 곳을 떠돌다가 지금은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함무라비법전을 만든 따뜻한 정의는 로마법대전, 나폴레옹법전을 거쳐 또 다른 모습으로 지금도 살아있어요. 만약 여러분이 친구와 다툼이 생겼다면 어떻게 해결하는 게 가장 정의로울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공미라 | 세계사 저술가
11.29 카이로 선언 '독립국가 한국'을 처음 인정했죠
이모께서 저희 집에 찾아왔어요. 이제 아기가 나올 때가 다 되었는지 배가 남산만 했어요.
"이모, 아기 언제 나와요?"
"이제 한 달 남았어. 이모가 아기 낳으면 너희가 잘 봐줘야 해."
"네! 물론이죠."
그날 밤, 누나가 영어 일기를 쓰다가 아빠께 달려왔어요.
"아빠, '한 달 후에 아기가 나올 예정이다'를 영어로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아빠께서 눈을 껌뻑거리셨어요. 역사에 밝은 아빠지만 외국어 실력은 그렇지 않은가봐요. 그때 엄마께서 구원투수로 나서셨지요.
"예정이라고 할 때는 'due'를 쓰더라. 그러니까 '다음 달에 아이가 나올 예정이다'는 'Baby is due next month.'라고 표현하면 되지 않을까?" 누나와 저는 한목소리로 "와!" 하고 감탄했어요. 우리는 아빠한테는 "에에!" 하며 실망했다는 표현을 했지요. 아빠는 몰랐다는 걸 인정하고, 고개를 끄덕이셨어요. "아하! 'due'라는 단어를 그럴 때 쓰는구나. 아빠는 그 단어만 보면 '카이로 선언'이 가장 먼저 생각나거든." 그 말에 누나도 거들었어요. "저도 교과서에서 봤어요. 우리나라 독립을 처음으로 약속했다는 선언 말이죠? 거기에 그런 단어가 있었나요?" "그래. 'in due course'라는 말이 나온단다."
▲ 우리나라의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 선언에 서명한 연합국 정상들이에요. 왼쪽부터 중국의 장제스,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이랍니다. /위키피디아
카이로 선언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던 1943년 11월 27일에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제스 총통이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만나 합의한 선언이랍니다. 당시 세 나라는 제2차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일본 등에 맞선 '연합국'이었어요. 세 정상은 전쟁이 끝나면 침략국가 일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의논한 끝에 카이로 선언에 서명했지요. 그리고 12월 1일 세계를 향해 발표했답니다. 그런데 왜 연합국 지도자들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나라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선언에 독립을 약속하는 문구까지 넣었을까요? 다른 얘기를 나누기도 바빴을 텐데 말이에요. 이렇게 제가 속으로 궁금해했는데, 아빠께선 어떻게 알아차리셨는지 차근차근 설명해주셨어요.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의 동북지방 만주와 남쪽의 타이완,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태평양의 섬들까지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었어." 당시 일본은 엄청나게 큰 제국을 이루고 있었나봐요. 그런데 그게 모두 남의 땅을 폭력적으로 빼앗아 만든 것이랍니다. 미국·영국·중국의 세 정상은 카이로 선언에서 일본이 강제로 식민지로 삼은 그 땅들을 모두 원래대로 돌려놓는다는 데 합의한 거예요.
"원래 중국 땅이었던 만주와 타이완은 중국에 돌려주면 되었지.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원래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니까 그 나라들에 처리를 맡기면 된다고 생각했겠지."
문제는 대한민국이었어요.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 전에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국이었거든요. 그래서 연합국 정상들은 한국을 어떻게 할지 그 자리에서 분명히 해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일본의 여러 식민지 가운데 유독 한국에 관한 이야기가 카이로 선언에 따로 들어가게 되었지. 이렇게 말이야. '세 강대국은 한국인의 노예 상태에 유의해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주 독립시키기로 결의한다'. 여기서 '적당한 시기에'가 영어로 'in due course'란다
▲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어요(왼쪽 사진). 제2차 세계대전 때 만든 포스터예요. 미국·영국·브라질 등 연합국 국기가 그려져 있지요. /위키피디아
그 많은 식민지 가운데 특별히 우리나라 얘기만 했다니까 기분이 묘하네요. 강대국들이 우리나라를 인정하고 독립을 약속한 건 좋지만, 다른 나라들은 당시 식민 지배로 여전히 고통받던 때였으니 마냥 기뻐할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아서요.
"아빠, 그때 왜 하필 '적당한 시기(적절한 절차)'라는 말을 넣었을까요? 당시 우리 민족은 모두가 하나 되어 일제에 맞서는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일본이 연합국에 패한 뒤엔 우리나라는 자동으로 독립국이 돼야 하는 것 아닌가요?" 엄마께서 고개를 갸우뚱하시더니 이렇게 대답하셨어요. "글쎄 말이다. 이모 배 속에서 아기가 열 달 있다가 태어나는 것처럼, 연합국이 우리나라도 당분간 다른 나라 보호를 받다가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아닐까?" 엄마 말씀을 들은 아빠께서 이야기를 이어갔어요. "실제로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고 연합국에 항복한 뒤에도 미군과 소련군이 당시 남한과 북한에 들어오는 바람에 우리나라는 바로 독립하지 못했어. 게다가 강대국들은 우리나라를 길게는 5년 동안 신탁통치하려고 했단다. 물론 우리 민족의 반대에 부딪혀 포기했지만 말이야."
흠, 우리나라가 엄마 배 속 아기도 아닌데 왜 강대국들은 굳이 '적당한 시기'란 말을 쓰며 우리의 독립을 미뤘을까요? 그것 때문에 정말 적당한 시기를 놓쳐 우리나라가 남북한으로 갈라진 것 아닐까요? 다시 대한민국으로 남과 북이 하나 되는 날이 빨리 오면 좋겠어요. 그리고 나서 '카이로 선언'의 문제점과 역사적 의미를 함께 나눌 수 있길 바랄게
12.06 이곳에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존
튤립의 원산지는 어디일까요? 커피 향기 가득한 카페를 처음 만든 나라는 또 어디일까요? 아마 여러분 중 상당수는 유럽의 어느 나라라고 대답할 거예요. 그런데 정답은 터키랍니다. 이슬람교를 믿는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던 시절, 술에 취하는 대신 튤립 정원에서 커피를 마시는 카프베(커피 전문점, 프랑스어로 카페)가 만들어졌다고 해요. 오스만 제국이 커지면서 튤립과 카프베도 유럽으로 전파된 것이지요. 동서양의 문화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던 터키. 이 나라를 찾는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빠짐없이 이스탄불에 있는 성소피아박물관을 둘러보고 오지요. 1500여년을 한자리에서 지켜온 성소피아박물관의 역사가 바로 터키의 역사이기 때문이에요
▲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성소피아성당이에요. 뾰족 솟은 네 개의 기둥은 이슬람 양식이에요. /Corbis/토픽이미지
4세기, 고대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새로운 로마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는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기고 크리스트교(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했어요. 당시 백성들은 크리스트교를 믿으면 탄압받았지만, 이제부터는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된 거예요. 이때 처음 성소피아성당이 만들어졌어요. 그리스어로 '하기아 소피아', 즉 '신성한 지혜의 성당'이라고 불렀어요. 하지만 위기를 겪던 로마 제국은 결국 두 개로 분리되었어요. 로마를 수도로 한 서로마 제국과,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한 비잔틴 제국으로 나뉘었지요.
6세기 비잔틴 제국은 지중해를 품에 안고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거대한 영토를 갖게 되었죠. 그 전성기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있었어요. 유스티니아누스는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군인이었던 삼촌이 얼떨결에 황제가 되면서 그의 인생도 달라졌어요. 자식이 없었던 삼촌의 뒤를 이어서 황제의 계승자가 된 거예요. 아마도 황제가 되기까지 큰 어려움이 있었을 거예요.
▲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위키피디아
황제가 되고는 세금을 지나치게 많이 걷어서 시민의 불만이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갔지요. 532년 전차 경주 중 소란이 발생했어요. 그러더니 한목소리로 "니카! 니카!(그리스어로 이겨라. 이겨라)"라고 외치며 황제에 대항하는 반란으로 변해갔어요. 당황한 황제는 바다로 도망가려 했죠. 이때 테오도라 황후가 단호하게 말했어요. "황제 폐하, 우리는 돈이 있고, 바다가 있고, 배가 있으니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황제가 도망가는 것은 수치입니다. 저는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것을 택하겠어요. 황제가 입는 자줏빛 옷은 가장 훌륭한 수의(壽衣)입니다." 결국 황제는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을 제거하고, 더욱더 강한 권력을 갖게 되었어요.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은 이미 불에 타 폐허가 되어 있었지요. 그리스 정교의 심장 역할을 하던 성소피아성당도 잿더미 속으로 사라져 버렸어요. 비잔틴 제국의 영광을 살리고 강력한 황제의 권위, 신앙심을 보여주기 위해 대대적인 건축이 시작되었어요. 최대한 웅장하고 빠르게, 그리고 내부를 화려하게 꾸미기 위한 작업이 이루어졌죠. 공사 시작 5년이 지난 537년, 드디어 성당이 완공되었어요. 너비 32m, 높이 48m의 거대한 둥근 천장 아래로 40여개나 되는 창문이 있어 천국의 햇살이 눈부시게 들어왔어요. 황금으로 된 모자이크에는 성경 이야기를 담았어요. 아기 예수를 쌌던 포대기, 최후의 만찬에 사용되었던 식탁, 베드로를 묶었던 사슬 등의 유물이 가득 채워졌지요.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어요. 성당에 처음 방문한 날, 유스티니아누스는 작은 소리로 이렇게 읊조렸다고 해요. "이 아름다운 성당을 내가 만들었다니…. 솔로몬, 내가 당신을 이겼소." 물론 이 말이 사실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답니다.
▲ 성소피아성당 내부의 모습이에요. 터키 공화국이 들어선 후 박물관으로 쓰고 있지요. /Corbis/토픽이미지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침입으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비잔틴 제국은 역사에서 사라졌어요.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죠. 그리고 성소피아성당은 이제 이슬람교의 사원을 뜻하는 모스크로 변신했어요. 성당 바깥에는 모스크의 특징인 미나레트라는 기둥이 4개 세워졌고요. 내부에는 천장에 남아있는 크리스트교 성화와 함께 아랍어로 된 이슬람 장식이 생겨났죠. 이후 470여년 동안 성당은 모스크로 쓰였어요.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를 호령하던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 패배하면서 사라졌어요. 성소피아성당은 파괴되지 않았고, 운명은 다시 바뀌게 되었어요. 1923년 터키 공화국이 들어선 이후, 지금껏 이곳은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어요.
현재 터키와 그리스는 성소피아박물관의 용도를 두고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어요. 이슬람교도들이 대부분인 터키에서는 다시 모스크로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어요. 물론 그리스 정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그리스에서는 절대 반대하고 있고요. 터키의 파란만장한 역사와 함께 해온 성소피아박물관의 운명은 이제 어떻게 될까요?
공미라 | 세계사 저술가
12.13 요일 속에 神의 이름이 숨어 있다?
오늘 드디어 기말고사가 끝났어요. 게다가 금요일이에요. 저는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소리쳤어요.
"야호, 불금이다!" 그러고는 친구들을 만나러 가려고 바로 뛰어나갈 준비를 했지요. "얘, 왜 이렇게 수선을 떠니? 그리고 도대체 불금은 무슨 말이야?" 엄마께서 빨래를 널다 말고 달려오셨어요.
"불금요? 그거 '불타는 금요일'을 줄인 말이에요."
"요즘 애들은 정말 이상한 말을 만들어 쓰는구나. 그런 말 꼭 써야겠니?"
"친구들이 다 쓰니 덩달아 따라 하나 봐요." 학원 갈 준비를 하고 있던 누나가 거들었어요. 그러면서 저한테 한마디했지요.
"아무리 신나더라도 조심하렴. 오늘은 금요일이 맞기는 하지만 13일의 금요일이거든! 괜히 친구들하고 돌아다니다가 사고 치지 말고."
"어, 그런가? 오늘이 13일의 금요일이었나?" 달력을 보니까 오늘이 정말 13일이지 뭐예요.
"누나, 그런데 왜 13일의 금요일이 불길한 날이야?" 누나도 어깨를 으쓱거리며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어요. 그러자 엄마께서 설명해 주셨어요.
"사실 근거 없는 미신이야. 서양에서도 19세기 이전에는 '13일의 금요일'을 불길하게 여겼다는 뚜렷한 기록도 없단다. 오히려 20세기 들어 널리 퍼지게 된 미신이지."
▲ 화요일(Tuesday)-티르, 수요일(Wednesday)-오딘, 목요일(Thursday)-토르, 금요일(Friday)-프레이야. /위키피디아
"엄마, 저는 종교와 관련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아요.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혀 목숨을 잃었고, 그 전에 있었던 최후의 만찬에선 모두 열세 명이 함께했다면서요?"
"그렇게 금요일과 13일을 끼워맞추는 게 억지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고대 유럽의 켈트족 전설에서 비롯됐다는 주장도 있단다. 왕이 12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전쟁터에 나가 승리했는데, 돌아와보니 장군이 13명으로 늘었다는 거야. 그래서 왕이 13번째 장군한테 이름을 물었더니 '죽음'이라고 대답했대. 그리고 며칠 후 왕이 죽었다는 얘기야."
"그래서 13을 불길하게 여겼다는 거군요. 어쨌거나 13이든 금요일이든 근거 없는 미신이네요. 서양에서 온 얘기니 우리나라와는 상관없네요." 저는 이렇게 말하고 쏜살같이 뛰어나갔는데, 얼마 가지 못해 걸음을 멈춰야 했어요. 친구한테서 문자가 왔기 때문이에요. '엄마랑 마트 가야 해서 너랑 못 놀아. 미안' 이런! 부랴부랴 다른 친구들한테 전화를 돌려 봤더니 모두들 다른 일이 생겨서 나올 수 없다는 거였어요.
"쳇, 역시 13일의 금요일은 별로 안 좋은 날인가 보네." 혼잣말로 투덜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다가 문득 궁금해지는 게 있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날이 금요일이라면, 그렇게 오랜 옛날부터 '요일'이라는 게 있었다는 걸까요? 아빠께서 제 궁금증을 풀어주셨어요.
"7일을 한 주(週)로 삼는 방식은 무척 오래되었단다. 예수가 태어나기 오래전에 쓰인 '구약성서'에도 하나님이 첫째 날부터 세상을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하루를 쉬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거든."
"아빠! 그런데 토요일이라고 할 때 '토(土)'는 토성(土星)을 가리킨다고 배웠어요. 영어로 토요일을 가리키는 'Saturday'도 토성을 뜻하는 새턴(Saturn)의 날이라고 들었고요. 그런데 금요일은 왜 금성을 뜻하는 비너스(Venus)의 날이 아니에요?" 역시 우등생인 누나의 질문은 다르군요. 언제 저런 것까지 알고 있었을까?
"우리 딸 똑똑하구나. 일요일(Sunday)은 해(sun), 월요일(Monday)은 달(moon), 이렇게 요일에다 별이나 행성 이름을 붙인 건 로마 사람들이었대. 네 말처럼 비너스는 로마신화에 나오는 아름다움의 여신이면서 금성의 이름이지. 그런데 왜 금성의 날인 금요일이 'Friday'냐고? 로마제국이 멸망한 다음 유럽의 주인이 된 게르만족의 신화에는 프레이야(Freyia)라는 미(美)의 여왕이 나온단다. 게르만족은 비너스의 날을 프레이야의 날로 바꿨는데 그것이 바로 'Friday'야."
그렇게 해서 금요일뿐 아니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도 게르만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날로 바뀌었답니다. 로마신화에서 전쟁의 신이자 화성을 가리키는 마르스의 날(화)은 티르의 날(Tuesday), 지혜의 신이자 수성을 가리키는 머큐리의 날(수)은 오딘의 날(Wednesday), 천둥의 신이자 목성을 가리키는 주피터의 날(목)은 토르의 날(Thursday)이 된 거죠.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요일을 사용했어요?"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 서양에서 들어온 역법(曆法)을 사용하면서부터라고 해. 역법은 시간을 구분하고 날짜의 순서를 매겨 나가는 방법을 뜻하지. 서양에서 들어온 요일이 행성을 뜻하는 이름으로 되어 있으니까 동양에서도 화성·수성·목성 등에서 요일 이름을 따서 쓰게 되었단다."
우와, 요일 이름에 이렇게 재미난 유래가 있었다니! '13일의 금요일'이 재수 없는 날만은 아니군요. 이날에 대해 궁금해하다가 유익한 지식을 얻게 되었으니까요.
강응천 | 세계사 저술가
12.20 두 민족 가로막은 이 장벽, 언제쯤 허물어질까요?
아침의 5분은 귀하기만 합니다. 알람은 울려대고, 빨리 일어나라는 재촉이 심해져도, 따뜻한 이불을 박차고 나오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에요. '5분만 더 자자' 하고 누워 있으면 어느새 지각이지요. 혹시 이런 생각 해 봤나요? '집에서 학교까지 일직선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디까지나 상상은 상상일 뿐. 아파트 단지나 건물을 둘러싼 담장 때문에 이리저리 돌아서 가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이렇게 작은 벽 하나만 있어도 마음이 답답한데, 거대한 장벽이 눈앞에 가로막혀 있다면 어떨까요? 팔레스타인 지역에 사는 아랍인들이 그런 환경에서 살고 있답니다. 그들을 둘러싼 벽이 왜 생겼는지 살펴볼까요?
▲ 팔레스타인의 베들레헴을 둘러싼 이스라엘의 장벽이에요. 거대한 벽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을 보여주고 있지요. /토픽이미지
아시아 서쪽 팔레스타인 지역은 유대인과 아랍인들의 다툼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신에게서 약속받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바로 이곳이에요. 유대인들은 이곳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웠다가 분열된 후 뿔뿔이 흩어졌다고 해요. 유대인이 떠나고 이 땅에는 팔레스타인인(人)이라고 하는 아랍인들이 이슬람의 문화를 만들어 나갔지요.
나라 없이 떠돌던 유대인들은 큰 설움을 겪어야만 했어요. 자기들만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자부심이 꽉 찬 민족이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한 민족이라고, 또 성경에서 금지하는 고리대금업을 한 민족이라고 많은 박해를 받았지요. 십자군 전쟁이나 흑사병 유행 같은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고난을 당했어요. 세상은 유대인들이 살기에 너무 혹독한 곳이었죠. 19세기 후반이 되자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이 살았던 땅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는 운동을 시작했어요.
이때부터 본격적인 문제가 시작되지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해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고 말았어요. 1915~1916년 영국의 고위 관료 맥마흔은 팔레스타인에 영국 편에서 전쟁에 참가하도록 편지를 10여 통이나 보냈어요. 전쟁이 끝나면 팔레스타인 지역에 아랍인의 나라를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도 함께 했지요. 그런데 약속이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어요. 영국의 다른 고위 관료 밸푸어가 1917년에 유대인과도 약속한 거예요. 영국에 전쟁 자금을 지원해 주면 유대인의 나라를 세우도록 돕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지요. 정말 큰일은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유대인들이 각각 영국을 믿고 협조했지만, 영국은 이 모든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다는 거예요.
전쟁 후 유대인들은 한둘 이 땅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의 히틀러를 피해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죠. 유대인과 이곳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 사이에 잦은 충돌이 일어났고, 영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어요. 결국 유엔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UNSCOP)가 설치되어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대인 구역과 아랍인 구역으로 나누었지요. 그리고 1948년 5월 14일 유대인 구역에는 이스라엘이 세워졌어요. 하지만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살아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기들의 땅을 빼앗아버린 이 조치를 이해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었죠.
▲ 팔레스타인 국기를 들고 이스라엘의 공격에 항의하고 있어요(위 사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분리 장벽으로 많은 사람이 불편을 겪고 있지요(아래 사진). /김상훈 객원기자, 조인원 기자
1948년, 1956년, 1967년, 1973년 4차례에 걸쳐 전쟁이 일어났어요. 중동전쟁이라고 부르는 이 전쟁은 모두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어요. 승리할 때마다 이스라엘의 영토는 더 넓어졌지요. 점점 좁은 땅으로 내몰린 팔레스타인인들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만들어 거세게 저항했어요. 일부 과격한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향해 각종 테러를 일으켰어요. 아랍인이 차지한 땅은 유엔에서 처음에 나누어 준 땅보다 점점 작아져서 현재 가자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지구에 있는 자치구만 남았답니다. 여러 차례에 걸친 협상 끝에 평화를 유지하기로 약속했지만, 아직도 평화를 위한 여정은 길기만 하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일부 과격파가 테러를 일으킬까 우려하고 있어요. 그래서 보안을 위해 요르단 강 서안 둘레에 거대한 장벽을 만들기 시작했지요. 일부 구간에는 콘크리트 벽 높이가 8m나 돼 장벽 너머에 무엇이 있는 지조차 볼 수 없을 정도랍니다. 장벽 때문에 팔레스타인의 사람들은 외부와 분리되어 고통받고 있어요. 이렇게 만든 장벽의 총 길이가 800여㎞나 된다고 해요. 이것을 이스라엘은 '보안 장벽'으로, 팔레스타인은 '분리 장벽'으로 부르고 있지요. 벽의 두께와 길이만큼 두 민족 사이의 골은 점점 깊어지고만 있어요.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이렇게 벽이 만들어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에요. 넬슨 만델라처럼 흑백 인종 간 벽을 없애는 사람도 있어요. 지역 주민들의 소통과 화합을 위해 담장 없는 학교가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지금 여러분 주변에는 어떤 벽이 존재하나요? 장벽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진정한 크리스마스의 소망이라는 생각이 드는 날입니다.
공미라 | 세계사 저술가
2013.12.27 12월은 원래 10월이었다?
"아빠, 신춘이 무슨 뜻이에요?"
신문을 뒤적이던 누나가 불쑥 아빠께 물었어요. 신춘문예 심사 관련 기사가 나온 모양이에요.
"새봄이라는 뜻이란다. '새 신(新)'과 '봄 춘(春)'이라는 한자를 쓰는데, 새해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이지. 신춘문예란 새해를 맞아 신문사에서 신예 작가를 발굴하는 행사를 말하지."
아빠 대답에 누나와 나는 동시에 고개를 갸웃하며 여쭈었어요.
"새해가 왜 새봄이에요? 새해 1월 1일은 한겨울에 시작되잖아요."
그때 과일을 내오던 엄마께서 웃는 얼굴로 한마디 하시네요.
"지금 우리가 쓰는 달력은 서양에서 들어온 거야. 옛날 우리 조상이 사용하던 달력은 봄이 찾아올 때쯤 새해가 시작됐단다."
누나와 내가 계속 어리둥절하자 아빠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셨어요.
"우리나라를 포함해 동양의 여러 나라는 음력을 사용했어. '설 명절'은 너희도 알지? 설날이 바로 음력으로 1월 1일, 새해 첫날이야. 설이 지나고 머지않아 봄이 오잖니?"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음력은 태음력이라고도 부른대요.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공전 주기에 따라 날짜를 계산하는 방식이랍니다. 초승달이 떴다가 보름달이 된 다음 완전히 이지러질 때까지가 한 달이지요. 반면 서양에서 들어온 태양력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주기에 따라 날짜를 계산해요.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이 1년이지요.
"그런데 우리 조상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주기에 따라 날짜를 계산하기도 했어. 춘분(春分)·하지(夏至)·추분(秋分)·동지(冬至) 같은 24절기가 바로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정해진 것이란다. 태음력과 태양력을 함께 사용한 셈이야. 이런 걸 태음태양력이라고 해."
엄마 설명이 계속 이어졌어요. 우리나라는 조선 말기인 1896년부터 서양에서 들어온 태양력을 나라의 공식 달력으로 썼다고 해요.
"그런데 태양력은 왜 추운 겨울에 새해를 시작해요? 1월 1일에 지구가 공전을 시작하기라도 하나요?"
누나가 엄마 아빠께 물었어요. 재미있는 질문이네요. 지구는 아주 먼 옛날부터 태양 주위를 돌고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1월 1일이라고 해서 새로 공전을 시작하는 건 아니겠지요.
▲ 로마 달력이 발전해 오늘날 서양 달력이 됐다고 해요. /Corbis/토픽이미지
"서양 달력은 로마에서 유래했어. 원래는 로마에서도 봄에 한 해를 시작했다는구나. 그런데 당시에는 봄에 시작하는 첫 달부터 가을에 끝나는 열 번째 달까지만 이름이 있었대. 겨울에 해당하는 나머지 두 달에는 이름이 없었다고 해. 그러다가 그 두 달에 이름을 붙이면서 1년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달로 삼았단다."
"엄마 말이 맞아. 이름이 없던 두 달이 지금의 1월(January)과 2월(February)이지. 그런데 1월과 2월이 앞자리를 차지하면서 나머지 달이 두 달씩 뒤로 밀려나 버렸어. 그래서 지금 영어의 달 이름을 원래 어원을 따져가며 풀어보면, 이해가 잘 안 되는 경우가 있단다. 예를 들어 오늘날 우리가 12월로 배우는 'December'는 원래 뜻이 '열 번째 달'이란다."
"아, 그렇군요. 원래 10월이었는데 아빠 말씀처럼 1·2월이 들어오면서 두 달이 밀려 12월이 됐군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누나가 아는 척했어요.
"맞아. 나도 학교에서 배웠어. 선생님께서 10월 'October'도 원래 이 말의 뜻을 따져보면 여덟 번째 달이 맞는다고 하셨어. 'September(9월)'도 본래의 뜻은 일곱 번째 달이 맞대. 'November(11월)'도 그 단어엔 아홉 번째 달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해."
▲ (사진 왼쪽)7월(July)은 로마 영웅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태어난 달이예요. (사진 오른쪽)아우구스투스는 황제가 되고 나서 8월을 자신의 달로 삼았답니다. /위키피디아
"아빠, 도대체 누가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었나요? 'January'와 'February'를 새로 넣으면서 하필 1·2월로 앞으로 빼는 바람에 나머지 달의 뜻까지 이상해진 거잖아요."
누나도 눈을 크게 뜨고 말했어요.
"맞아. 그럼 이제라도 순서를 원래대로 돌려놓으면 되지. 아빠, 'January'와 'February'를 11월, 12월로 하면 되겠죠?"
하지만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사용하는 달력 순서를 갑자기 바꿔 버리면 엄청난 혼란이 생기겠죠? 누나와 나는 달력을 뒤적이다가 궁금증이 하나 더 생겼어요.
"그런데 9월부터 12월까지의 영어 이름에만 '~ber'가 붙어 있어요. 그게 '~번째 달'이란 뜻이지요?"
"그렇지. 원래 6월까지는 신화에서 유래한 이름을 붙였단다. 7월과 8월은 나중에 'July'와 'August'로 바뀐 거란다."
7월을 뜻하는 'July'는 로마 영웅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비롯됐다고 해요. 카이사르를 추모하던 사람들이 그가 태어난 7월을 '율리우스(Julius)의 달'로 불렀는데, 그게 영어 'July'로 바뀐 거예요. 카이사르의 양아들 아우구스투스(Augustus)는 훗날 로마 황제에 오른 뒤, 8월을 자신의 달로 부르게 했답니다. 그게 영어로 'August'가 되었고요.
"우와, 힘 있는 사람들은 달도 자기 이름으로 바꾸네요. 저는 1월을 제 달로 만들래요. 날짜도 31일에서 60일로 늘릴 거예요. 그럼 겨울방학이 두 배로 길어지겠죠?" 제 말에 누나도 냉큼 덧붙였어요.
"그럼 난 여름방학이 있는 8월을 60일로 늘려야지! 하하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