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벨상 이야기
◆ 노벨상 제정한 알프레드 노벨
알프레드 노벨, 유언을 남겨 사후에 노벨상이 제정되다
알프레드 노벨(Alfred Bernhard Nobel, 1833~1896)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큰돈을 벌었다.1) 그는 1893년에 한 평화운동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산의 일부를 한 재단에 기부하여 5년마다 수여되는 상을 제정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같은 해 3월 14일에 최초의 유언장을 작성하여 유산 가운데 20%는 일가친척에게 나누어주고, 17%는 병원과 의학연구소 등 여러 단체에 기부하고, 나머지는 학문적으로 공적이 큰 사람들에게 상으로 줄 것을 구상했다. 이어 1895년 11월 27일에 세 번째로 수정하여 확정한 유언장에서, “지난해에 인류에게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 상을 주라”(“prizes to those who, during the preceding year, shall have conferred the greatest benefit to mankind.”)고 밝혔다. 그는 1896년 12월 10일에 죽었다.
그가 죽은 후 노벨상위원회와 기금 등이 마련되어 1901년부터 ‘물리학, 화학, 의학, 문학, 세계평화에 대한 기여’ 다섯 분야에 걸쳐 노벨상이 수여되었고, 1968년부터는 스웨덴 제국은행이 별도로 기금을 마련하여 수여하는 ‘노벨경제학상’이 추가되었다.
노벨은 누구인가?
알프레드 노벨은 1833년 10월 21일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한테서 공학을 배웠고, 아버지를 닮아 손재주가 뛰어났다. 그는 1842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지뢰 공장을 차려 성공한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로 갔다. 주로 가정교사한테 교육을 받았는데, 17세에 모국어인 스웨덴어를 비롯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등 5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그는 17세가 되던 1850년에 파리에서 1년 동안 화학을 공부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스웨덴 출신의 발명가인 존 에릭손 밑에서 4년 동안 일하며 기계공학을 공부했다. 그 무렵 폭약 등 군수물자 생산으로 번창하던 아버지의 사업이 크림전쟁이 끝나면서 몰락하기 시작하자 그는 미국에서 돌아와 아버지를 도왔으나 아버지 사업은 1859년에 끝내 파산하고 말았다.
그 후 그는 스웨덴으로 돌아와 1860년경에 니트로글리세린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 다음 해 니트로글리세린 제조법으로 특허를 받아 사업가 기반을 마련했다. 1864년 9월에 스톡홀름 공장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나 동생을 비롯하여 다섯 명이 사망했는데도 그는 한 달 후에 첫 합자회사를 차렸다. 스웨덴 정부는 공장 재건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배 위에서 니트로글리세린 취급에 따른 위험을 극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실험했다. 그는 니트로글리세린을 규산질 충전물질인 규조토로 스며들게 한 뒤 건조시켜 안전한 고형 폭약 다이너마이트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는 1867년과 1868년에 영국과 미국에서 다이너마이트 관련 특허를 따냈고, 1876년에는 폭발성 젤라틴을 개발하여 특허를 받았다. 그는 40세의 나이에 큰 부자가 되었다.
그는 스웨덴, 독일, 영국 등에서 계속 공장을 세웠고, 1886년에는 세계 최초의 국제적인 회사 ‘노벨다이너마이트트러스트사’를 세웠다. 그동안 그의 형인 로베르트와 루트비히는 카스피해 서안에 있는 바쿠 유전지대 개발에 성공하여 노벨 가문은 유럽 최대의 부호가 되었다.
이렇게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업에 몰두했지만 그는 은퇴 후에는 가급적 조용히 지내려고 애썼고, 결혼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유주의자, 심지어는 사회주의자로 알려지기도 했다. 자신의 발명품과는 달리 평화주의자였던 그는 자신이 발명한 무기로 세상이 평화로워지길 기대했으나 기대대로 되지 않았다. 문학에도 관심이 많아 젊은 시절에는 영어로 시를 쓰기도 했다. 유품으로 남은 서류뭉치에서는 그가 쓴 소설의 초고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알프레드 노벨은 1895년까지 협심증으로 고생하다가 이듬해 12월 10일에 이탈리아 산레모에 있는 별장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 그의 사업체는 폭탄 제조공장과 탄약 제조공장을 합해 전 세계에 걸쳐 90여 곳이 넘었다. 그는 평생 355개의 특허를 취득했다. 그가 1895년 11월 27일에 파리에서 세 번째 마지막으로 수정해 스톡홀름의 한 은행에 보관해 두었던 유언장을 근거로, 그의 사후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노벨상이 제정되었다.
어떻게 베풀었는가?
알프레드 노벨은 1893년에 평화운동가 베르타 폰 주트너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한다.
“나는 기꺼이 내 유산의 일부를 한 재단에 기부하여 5년마다 수여되는 상을 제정하고 싶습니다. … 남자이건 여자이건 유럽에서 평화의 실현에 가장 공로가 큰 인물에게 수여할 상을 말입니다.”
같은 해 3월 14일, 그는 최초의 유언장을 작성했는데 이에 따르면, 유산 가운데 20%는 일가친척에게 나누어주고, 또 17%는 병원과 의학연구소 등 여러 단체에 나누어 기부하고, 나머지는 기금을 조성해 ‘생리학과 의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하고 선구적인 발견이나 발명’에 상을 수여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1895년 11월 27일에 파리에서 세 번째 마지막으로 수정하여 스톡홀름의 한 은행에 보관해 두었던 유언장의 내용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 알프레드 베르나르드 노벨은 심사숙고한 결과 이 문서로 내가 죽을 때 남기게 될 재산과 관련하여 내 유언이 아래와 같음을 천명하는 바이다.”
그의 유언장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앞부분에서는 그의 재산이 그의 조카와 친척들, 지인들, 고용인들 등에게 얼마씩이 지급될 것인가를 상세하게 적고 있다.
이어 뒷부분에서는 “유언 집행인에 의해 안전한 유가증권에 투자된 재산으로 기금을 만들고, 거기에서 매년 나오는 이자를 지난해에 인류에게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 상금으로 수여한다”고 명시되어 있고, 이자는 다음과 같은 5개 분야에 걸쳐 골고루 배분된다고 밝히고 있다.
첫째, 물리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
둘째, 가장 중요한 화학적 발견이나 개선을 이룬 사람.
셋째, 생리학이나 의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한 사람.
넷째, 문학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이상적 경향의 작품을 쓴 사람.
다섯째, 국가 간의 우호를 증진시켰거나 군대의 폐지나 감축에 기여한 사람 또는 평화회의를 개최하거나 추진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
알프레드 노벨의 사후에 공개된 유언장에 따라 1896년에 설립된 노벨재단은 노벨의 유언 실행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친척, 친지 등에게 지급되고 남은 스웨덴 화폐로 총 3,300만 크로나의 노벨의 유산은 세금을 내고 3,100 크로나가 남은 것으로 집계되었다. 알프레드 노벨은 순자산의 90.3%를 베푼 것으로 추계된다. 이 돈으로 1901년부터 물리학, 화학, 의학, 문학, 세계평화에 대한 기여 다섯 분야에 걸쳐 노벨상이 수여되었고, 1968년부터는 스웨덴 제국은행이 별도로 기금을 마련하여 수여하는 ‘노벨경제학상’이 추가되었다.
오늘날에는 노벨상이 세계 최고의 영예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지만, 노벨의 유언장이 공개된 직후 스웨덴 내부에서는 이 상의 제정을 놓고 격렬한 비난이 일었다. 노벨의 일가친척은 물론이고 한때 애인이었던 소피까지도 자신들의 정당한 유산이 엉뚱한 상에 빼앗기게 되었다고 생각한 나머지 법적 대응을 고려했다. 또 수상자 선정에서 국적이나 성별에 구애되지 말라는 유언 때문에 스웨덴 국민 사이에서 국부가 해외로 유출된다는 비난도 일었다. 평화상 수상자를 스웨덴이 아니라 노르웨이 국회에서 선정하게 한 것을 놓고도 논란이 일었다. (당시에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연합 국가였기 때문에 스웨덴 국왕이 노르웨이 국왕을 겸했는데, 두 나라는 1905년에 별개의 국가로 분리되었다).
노벨은 왜 베풀었는가?
노벨상 사이트에 들어가 아무리 뒤져봐도 알프레드 노벨이 왜 베풀었는가에 대한 답은 찾지 못했다. 일설에 따르면, 프랑스의 한 신문이 1888년 알프레드 노벨의 형이 사망했는데 그를 알프레드 노벨로 착각하여 “죽음의 상인, 사망하다”라는 표제 하에 “사람을 더 많이 더 빨리 죽이는 방법을 개발해 부자가 된 인물”이라고 폄하하는 부고 기사를 실었다고 한다.
회사에 출근하여 이 기사를 읽고 충격을 받은 알프레드 노벨이 속죄를 위해 재산을 기부하게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에 관한 확증은 없다고 한다. 그런데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하여 엄청나게 큰 돈을 번 알프레드 노벨이 ‘죽음의 상인’이라는 폄하 기사를 읽고 속죄할 마음을 갖지 않았겠는가? 비록 확증은 없다 할지라도 신문기사는 있다고 하니 ‘죽음의 상인’이라는 표현에 세계적인 부자 알프레드 노벨이 베풀고 싶은 충격을 받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대로, 알프레드 노벨은 1893년에 평화운동가 베르타 폰 주트너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기꺼이 내 유산의 일부를 한 재단에 기부하여 5년마다 수여되는 상을 제정하고 싶습니다. … 남자이건 여자이건 유럽에서 평화의 실현에 가장 공로가 큰 인물에게 수여할 상을 말입니다”라고 썼다고 한다. 평화주의자였던 그가 자신이 발명한 무기로 세상이 평화로워지길 기대했으나 기대대로 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가 언제부터인가 베풀 계획을 세우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가 다섯 번째로 명시한 수상 분야가 ‘국가 간의 우호를 증진시켰거나 군대의 폐지나 감축에 기여한 사람 또는 평화회의를 개최하거나 추진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임을 감안할 때 그는 언제부터인가 베풀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부자이니까 베풀었다
노벨상 사이트에 들어가면 알프레드 노벨이 ‘이미 40살에 부자가 되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앞선 글에서, 앤드루 카네기는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을 때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고 밝히고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했다. 마찬가지로 젊은 나이에 어마어마한 부자가 된 알프레드 노벨도 친척, 친지, 심지어 자기를 위해 일한 과거와 현재의 고용인들(주: 유언장에서는 servant로 표현되었음)에게까지 유산을 분배하면서 자신이 개발한 다이너마이트가 세계 평화를 위협한다고 생각했을 때 세상을 위해 베풀고 싶은 마음을 갖지 않았겠는가.
다시 말하면, 알프레드 노벨은 부자가 된 다음에야 베풀고 싶은 마음을 갖지 않았겠는가.
각주
1) 이 글은 노벨상 사이트인 Novelprize.org와 Nobel.or.kr의 정보를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다
◆1901년부터 573번 수여…한국선 노벨 평화상 한 번 받아
▲알프레드 베르나르드 노벨(1833~1896)은 인류와 평화를 사랑한 과학자이다.
알프레드 베르나르드 노벨(1833~1896, Alfred Bernhard Nobel)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스웨덴의 과학자입니다.
노벨상의 모든 것
인류와 평화를 사랑한 그가 자신의 발명품이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무기가 된 것을 알고 이를 안타까워하며 노벨상을 만들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지요.
오는 10일은 노벨의 사망일이자,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평화상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노벨상 수상식이 열리는 날이에요.
올해의 수상자들을 만나기 전에 노벨상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볼까요.
노벨은 30세 때인 1863년 니트로글리세린과 흑색 화약을 혼합해 폭약을 발명했어요. 당시 강한 폭발력으로 주목받은 무색투명한 액체 니트로글리세린은 진동이나 충격에 쉽게 폭발해 사고 위험이 컸죠. 노벨 역시 공장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나 막내 동생과 조수들을 잃습니다. 이 사고로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연구한 끝에 1866년 고체 폭약을 발명, 그 이듬해부터 다이너마이트란 상표를 붙여 판매합니다. '힘'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나온 다이너마이트란 신조어는 폭약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게 됐죠. 기존 폭약보다 강력하고 안전한 다이너마이트는 영국·스웨덴·미국 등지에서 특허를 얻고 굴착 공사나 철도·도로 건설 등에 널리 이용됩니다. 이후에도 그는 계속 다른 폭약들을 개발했는데, 사람을 죽이는 무기로 사용되면서 쌓이는 재산만큼 악명도 높아졌죠.
▲`인류의 복지를 위해 공헌한 사람이나 단체에게 상과 상금을 수여하라`는 내용이 담긴 노벨의 유언장 중 일부.
은퇴 후에도 연구와 실험을 계속한 노벨은 평생 독신으로 살다 1896년 사망합니다. ‘내 재산을 기금으로 삼아 인류를 위해 공헌한 사람에게 조금의 차별도 없이 상과 상금을 수여하라’는 유언을 남기고요. 이에 따라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는 노벨의 유산 3100만 크로나를 바탕으로 노벨재단을 설립했고, 1901년 겨울 최초로 수상자를 냈죠. 문학·평화·물리학·화학·생리의학의 5개 부문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남겨 인류에 공헌한 사람이나 단체를 정해서요. 1969년에는 경제학도 추가됐습니다. 물리·화학·경제학상은 스웨덴 학술원이, 생리의학상은 카롤린스카 연구소가, 문학상은 스웨덴 한림원이, 평화상은 노르웨이 국회가 선출한 5인 위원회가 각각 선정합니다. 노벨이 살던 당시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연합국가였기 때문에 나눠 맡게 된 거죠. 1901년부터 지난해까지 총 567번의 노벨상이 수여됐고, 공동수상자를 포함해 전체 수상자는 864명의 개인과 25개 단체 등 총 889명이에요.
노벨상 수상자는 어떻게 정할까
▲2015 노벨상 수상자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생리의학상 아일랜드의 윌리엄 C 캠벨 교수, 일본의 오무라 사토시 교수, 중국의 투유유 교수, 물리학상 일본의 카지타 타카아키 교수, 캐나다의 아서 B 맨도날드 교수, 경제학상 영국의 앵거스 디턴 교수, 문학상 우크라이나의 스베틀라나 알레시예비치, 화학상 터키의 아지즈 산자르 교수, 미국의 폴 모드리치 교수, 스웨덴의 토마스 린달 교수. 사진에 없는 평화상은 튀니지 국민 4자 대화기구가 받았다.
올해도 정확히 노벨이 죽은 12월 10일 오후 4시 30분(현지시간)에 시상식이 열립니다. 올해는 어떤 사람들이 노벨상을 거머쥐었을까요.
지난 5일 가장 먼저 발표된 생리의학상 분야에서는 아일랜드의 윌리엄 C 캠벨 교수와 일본의 오무라 사토시 교수, 중국의 투유유 교수가 주인공이었습니다. 물리학상은 일본의 카지타 타카아키 교수와 캐나다의 아서 B 맥도날드 교수가, 화학상은 스웨덴의 토마스 린달 교수, 미국의 폴 모드리치 교수, 터키의 아지즈 산자르 교수가 수상했답니다. 문학상은 우크라이나의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작가가 받았고, 평화상은 민주화의 모범이 된 튀니지 국민 4자 대화기구가 수상했지요. 마지막으로 경제학상은 영국의 앵거스 디턴 교수에게 돌아갔답니다.
▲스웨덴 조각가 에릭 린드버그가 디자인한 노벨상 메달은 지름 6.6㎝, 무게 평균 175g이다. 18K 금 위에 24K 순금을 씌워 만든다. 앞면에는 노벨의 얼굴이 양각돼 있다. 물리학·화학·생리의학·문학상 디자인은 같고 평화상·경제학상 디자인만 조금 다르다.
노벨상 수상자 선정 작업은 시상식 1년 3개월 전부터 시작됩니다. 올해 노벨상 선정을 지난해 9월부터 시작한 셈이죠. 노벨상 심사위원회는 우선 분야별 심사위원단에 이듬해 1월 31일까지 후보자를 추천해 달라는 안내장을 보내요. 심사위원단은 학술단체 직원, 유명 교수, 전임 노벨상 수상자 등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지며, 자기 자신을 스스로 추천할 수는 없답니다. 위원회는 7개월간 추천자를 검토하고, 9월에 노벨상 수여기관에 최종 후보 명단을 보내요. 이곳에서 다시 엄정하게 재평가해 10월에 최종 수상자를 결정합니다. 논란을 피하기 위해 후보에 누가 올라왔었는지부터 최종 선정까지 모든 과정을 50년간 비밀에 부친답니다. 그 후에도 역사적 연구의 필요가 있을 때에만 논의를 거쳐 선정 과정을 공개한다니 매우 복잡하고 섬세하지요.
노벨상 상금은 부문별로 약 800만 크로나(약 11억원)정도입니다. 기존 1000만 크로나였는데 세계적인 경제 위기로 2012년부터 800만 크로나로 줄었죠. 2인 이상이 공동으로 수상을 하는 경우엔 상금을 나눕니다. 경제학상을 제외한 5개 부문은 노벨이 유언에 남긴 바와 같이 노벨재단이 한 해 동안 운영한 이자 수입의 67.5%에서 상금을 마련하죠. 경제학상은 스웨덴 중앙은행에서 별도로 마련한 '중앙은행 창립 300주년 기금'에서 상금을 줍니다.
한국의 노벨상 수상자는
우리나라의 노벨상 수상자는 한 명뿐이에요. 2000년 평화상 부문 수상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랍니다. 김대중평화센터에 따르면 노벨위원회는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그리고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한 업적을 기려 2000년 노벨평화상을 김대중 대통령님께 수여하기로 결정”했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동티모르의 인권탄압에 반대하며 북한과의 긴장 완화를 위해 노력하여 큰 공을 세웠다고 평가한 것이지요.
아쉽게도 아직 과학·문학·경제학 등 다른 분야의 수상자는 없어요. 2004년 노벨상을 받은 이스라엘 아론 치에하노베르 교수는 한국의 ‘질문하기를 창피해 하는 문화와 실패를 두려워하는 문화’ 때문에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는다고 지적했어요. 성공은 수십 번의 실패를 겪어야 이룰 수 있는 것인데 실패를 너무 두려워하고 있다는 거죠.
노벨상 수상자는 없지만 국내에서 노벨상에 가장 근접했다고 평가받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기초과학연구원에서 나노 물질을 연구하는 유룡 교수, 유전체 전이 연구의 개척자인 재미 한인 찰스 리 박사, 형광물질을 연구한 윤주영 교수, 고은 시인 그리고 황석영 소설가 등이 거론되고 있어요.
국립과천과학관의 정광훈 이학박사는 “과학 분야의 노벨상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참신한 방식으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일상에서 자연현상을 볼 때도 자기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보려고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라고 조언했습니다. 세계문학박물관 정경혜 관장은 “노벨상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물론, 훌륭한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고 인문학적 소양을 길러야 한다”며 “윈스턴 처칠은 정치가였지만 훌륭한 역사서를 써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처칠은 ‘전기와 역사서에서 보여 준 탁월함과, 고양된 인간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행한 훌륭한 연설’을 이유로 195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지요.
★노벨상 YES or NO
☆노벨상 수상을 스스로 거부한 사람도 있다?
YES : 노벨상을 자진해서 거부한 사람은 2명이나 있었습니다. 바로 소설 『구토』의 저자이자 사상가이기도 한 프랑스의 장 폴 사르트르(왼쪽 사진)와 아시아 최초로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던 당시 베트남 총리 레둑토랍니다. 사르트르는 “작가는 제도화되기를 거부해야 한다”며 작가로서 독립성의 중요함과 노벨상이 특정 기득권에 돌아갈 수 있음을 지적하며 상을 받지 않았답니다. 레둑토의 경우 “아직 조국(베트남)에 평화가 오지 않았다”며 노벨 평화상을 받을 수 없다고 거부했어요. 이 경우 노벨상 상금은 노벨재단의 기금으로 환수됩니다.
☆노벨상은 가장 상금을 많이 주는 상이다?
NO : ‘아프리카판 노벨 평화상‘이라고도 불리는 이브라힘상은 노벨상보다 더 많은 상금을 주고 있어요. 이브라힘상 수상자는 처음 약 57억원을 받고 이후 사망할 때까지 매년 약 2억원을 받는답니다. 상의 권위는 상금의 액수에서 나오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죠.
☆미성년자도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다?
YES : 노벨상에 나이 제한은 없습니다. 파키스탄의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17세의 나이로 2014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어요. 유사프자이는 아동 억압과 교육권 쟁취를 위해 국내외에서 투쟁한 공로를 인정받았답니다. 물론 나이가 많다고 수상자 명단에서 제외되지도 않아요. 미국의 레오니드 후르비츠는 90세 고령의 나이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답니다.
☆사후 노벨상을 받은 사람도 있다?
YES : 1974년부터 노벨상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수여되고 있어요. 그래서 비폭력주의로 유명한 간디도 유력한 노벨 평화상 후보자였지만 노벨상을 수상하지는 못했죠. 하지만, 이러한 원칙을 깨고 죽은 뒤 노벨상을 받은 사람이 있답니다. 바로 캐나다의 랠프 스타인먼 교수에요. 스타인먼 교수는 노벨상 발표 3일 전 2011년에 췌장암으로 사망했어요. 노벨상 심사위원회는 "수상자 결정 과정에서는 사망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수상은 유효하다"며 수상을 확정했어요. 74년 이전에는 3명의 사후 수상자가 있었죠.
☆히틀러도 노벨상 후보자였다?
YES : 독재자이자 유대인 학살의 장본인인 히틀러는 1939년 노벨 평화상 후보자에 올랐어요. 앞서 노벨상 선정 과정에서 정말 많은 사람이 후보자를 추천할 수 있는 것을 보았지요. 스웨덴 국회의원 E G C 브란트는 히틀러를 노벨 평화상 후보자로 추천했어요. 이후 브란트는 “당시 스웨덴의 정치적 논의를 비판하고자 추천했다”며
진정으로 히틀러의 수상을 바란 것은 아니라고 했어요.
글=김유진 기자 kim.yoojin@joongang.co.kr
◆ 2016.10.05 뜨거운 관심 '노벨문학상'
노벨상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스웨덴 과학자 알프레드 노벨(Alfred Bernhard Nobel)의 유산을 기반으로, 생리의학·물리학·화학·평화·문학·경제학 등 6개 분야에서 1년간 가장 높은 업적을 달성한 인물을 선정, 상금 800만크로나(한화 약 10억 2,416만원, 2016년 9월 29일 오전 기준)와 함께 시상한다. 1901년 시작된 노벨상은 역사가 깊어 세계에서 가장 권위적인 상으로 여긴다.
▲2015년 노벨상 시상식, 노벨 재단
올해 노벨상은 10월 3일 생리의학상부터 물리학상(4일)·화학상(5일)·평화상(7일)·경제학상(10일) 수상자를 잇달아 발표한다. 문학상 발표는 10월 13일이다.
문학이 대중에게 친숙한 분야이기도 한 데다 수상자가 받는 상금이 가장 많기 때문에 노벨 문학상에 대한 관심이 높은 편이다. 노벨상은 수상자가 다수이면 상금을 나눠 갖는데, 문학상은 대체로 단독 수상이다.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맞춘 '래드브록스'
노벨 문학상은 발표 직전까지 철저히 비밀에 쌓여 있어 공식적인 수상 후보들은 알 길이 없다. 영국의 도박 사이트 ‘래드브록스(Ladbrokes)’에서 공개하는 유력 수상 후보 순위가 수상자를 예측하는 좋은 척도다. 래드브록스에서 배당률이 높은 순서가 곧 유력 수상 후보 순위다.
문학 분야의 전문가들조차 래드브록스에 꼽힌 순위를 관심있게 본다. 래드브록스의 적중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최근 5년만 살펴봐도 상위권에 꼽힌 작가나 시인이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래드브록스'는 어떤 곳?
래드브록스는 영국에서 1886년 문을 연 이래 온라인 사이트는 물론이고, 유럽 전역에 2100여개 오프라인 가게도 운영하며 세계적인 도박 업체로 성장했다. 도박 분야는 스포츠를 비롯해 정치, 문화 등 전 분야를 망라한다. 최근에는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여부를 내기에 걸었고, ‘탈퇴한다’에 도박사들이 몰려 결과를 맞혔다.
▲래드브록스 사이트 캡쳐
노벨문학상의 경우 래드브록스 소속 직원들이 1년간 전 세계의 서평과 블로그, 트위터 등을 통해 추적한 정보로 명단을 작성한 후 임의로 배당률을 산정해 공개하면 도박사들이 베팅하고, 실시간으로 배당률이 변한다.
올해도 래드브록스에 배당률에 따른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 순위가 공개돼 있다. 이름이 알려진 스타 문인도 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문인도 있다. 1위부터 10위까지 선정된 문인과 그의 작품을 소개한다.
다음 순위는 2016년 9월 29일 오전 기준으로 작성된 것이며, 배당률은 실시간으로 변하는 중이다. 일본과 중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의 경우 문인 이름과 저서 제목을 영문 표기했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2012년부터 2년 연속 래드브록스에서 가장 높은 베팅 순위를 기록했고, 2014년과 지난해는 2순위였다. 올해도 5대 1의 배당률을 보이며 가장 유력한 수상 후보로 꼽혔다.
1989년 ‘노르웨이의 숲(ノルウェイの森, 첫 출간 당시 제목은 ‘상실의 시대’)’을 시작으로 ‘해변의 카프카(海辺のカフカ)’, ‘1Q84(いちきゅうはちよん)’, ‘여자 없는 남자들(女のいない男たち)’ 등 그의 작품은 출간될 때마다 베스트셀러 구역에 자리 잡는다. ‘하루키 신드롬’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국내 팬층도 두껍다.
▲시리아 시인 아도니스는 배당률 6대 1로 하루키의 뒤를 추격하고 있다. 고은 시인과 함께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에 수년째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특히, 2010년에는 AP통신이 ‘스웨덴의 노벨상 관측통이 시인 아도니스와 고은을 유력 수상 후보로 거론했다’고 보도해 기대를 모았지만, 실제 수상자는 스웨덴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Tomas Transtromer)였다
▲그는 1980년대 말까지 총 14권의 시집을 발표했다. 우리나라에는 ‘바람속의 잎새들’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시집만을 찾아볼 수 있다. 아랍어로 시를 쓰지만, 전통적인 아랍의 시 형식을 부정하고, 서구 시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미국 현대 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필립 로스는 배당률 7대 1을 보인다. 1998년 그의 22번째 소설 ‘미국의 목가(American Pastoral)’로 미국 작가 퓰리처상을 받았고, 2001년에는 미국 ‘타임(Time)’지에서 최고의 소설가로 선정했다. 이 밖에도 2002년 미국 예술문학아카데미 골드메달, 2005년 미국 역사가협회상, 2011년 맨부커상 인터내셔널부문 등 각종 상을 휩쓸었다. 항간에 “노벨 문학상만 수상하면 된다”는 말이 떠돈다.
데뷔작 ‘굿바이, 콜럼버스(Goodbye, Columbus)’와 퓰리처상 수상작 ‘미국의 목가’, 1950년대 반공산주의를 다룬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I Married a Communist)’, 영화로도 제작된 ‘휴먼 스테인(The Human Stain), 죽음과 섹스 등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에 관한 ‘죽어가는 짐승(The Dying Animal)’, 맨부커상 수상작 ‘에브리맨(Everyman)’ 등이 유명하다.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는 “유태계 작가인 그는 유태 민족의 소외와 정체성 문제, 베트남 전쟁·매카시 선풍 등으로 훼손된 미국적 가치 등 사회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문학적 주제로 삼고 있다”라고 필립 로스의 작품을 평가했다.
▲케냐 소설가 응구기 와 시옹오의 배당률은 10대 1로 네 번째로 높다. 지난 2014년은 1위, 지난해는 3위 등 꾸준히 높은 순위에서 그의 이름을 볼 수 있다. 1986년 나이지리아의 극작가 윌레 소잉카(Wole Soyinka) 이후로 아프리카 대륙에서 노벨 문학상이 나오지 않아 도박사들이 그의 수상 가능성을 높이 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울지 마, 아이야(Child weep not)’와 ‘한 톨의 밀알(A Grain of Wheat)’, ‘피의 꽃잎들(Petals of Blood)’ 등이 출간돼 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케나에서 태어나 주요 작품이 모두 케냐의 독립 전쟁 전후를 배경으로 한다. 그는 지난 9월 20일 토지문화재단이 주관하는 '박경리문학상' 제6회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알바니아 소설가 이스마일 카다레는 배당률 16대 1로 5위에 있다. 맨부커상 인터내셔널부문이 2005년 처음으로 생겼는데, 이스마일 카다레가 제1회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 후 노벨 문학상 유력 후보로 부상했다.
그의 첫 장편 소설인 ‘죽은 군대의 장군(Le General de l''armee morte)’을 시작으로 ‘꿈의 궁전(Le Palais des reves)’, ‘부서진 사월(Avril Brise)’, ‘H 서류(Le Dossier H)’, ‘아가멤논의 딸(Vajza e Agamemnonit: roman)’ 등이 주요 작품이다. 공산 독재 정권이나 세계 대전과 같은 역사적 비극을 독특하게도 신화, 전설 민담 등을 활용해 우화적으로 그린다.
▲스페인 소설가 하비에르 마리아스는 앞선 이스마일 카다레와 함께 공동 5위에 올랐다. 스페인어를 쓰는 작가 중에서 노벨 문학상 수상이 가장 유력하다고 평가받는다.
또, 그는 ‘20세기의 셰익스피어’라는 영예로운 수식어를 갖는다. 필력도 필력이지만 소설 제목들이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따와서다.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Manana en la batalla piensa en mi. 3. Ed)’는 ‘리처드 3세(King Richard the Third)’에, ‘새하얀 마음(Corazon Tan Blanco)’은 ‘맥베스 (Macbeth)’에 나온 말이다.
▲20대 1의 배당률로 7위에 오른 작가는 3명. 미국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는 소설가 조이스 캐롤 오츠와 유럽 연극의 정점에 이르렀다는 찬사를 받는 노르웨이 극작가 욘 포세, 그리고 지난해 맨부커상 인터내셔널부문을 수상한 헝가리 소설가 라슬로 크라스나호르카이다.
라슬로 크라스나호르카이의 주요 작품은 '사탄탱고(Satantango)'와 '저항의 우울(The Melancholy of Resistance)', '저 아래 서왕모(Seiobo Down Below)' 등이 있으나 현재 우리나라에는 번역·출간되지 않았다.
▲25대 1의 배당률을 기록한 문인은 3명으로 공동 10위다. 오스트리아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페터 한트케와 헝가리 소설가 피터 나다스는 게오르크 뷔히너상, 프란츠 카프카 문학상 등 독일의 저명한 문학상을 수상한 공통점이 있다. 나머지 한 명은 이스라엘 소설가 아모스 오즈다. 그는 창작 이외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 공존을 주장하는 정치 활동에도 참여해왔으며, 지난해 제5회 박경리문학상을 받았다.
조선일보 구성 및 편집=큐레이션팀
◆노벨상 수상자들의 이모저모
▲노벨상 받은 국가별 순위
▲2013 노벨상 수상자들
▲역대 최연소 노벨평화상을 받은 파키스탄의 말랄라 유사프자이 17세 - 14.12.10 놀,웨이 오슬로 시상식, 인권운동가
▲파키스탄 말랄라 와 인도의 카리라쉬 사티아르티가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
▲노벨상 수상자들의 거창한 만찬 - 14.12.10 스웨덴 스톡홀름 시청 올해의 노벨상 다섯 부문 시상식이 열린 뒤 참석자들이 연회장에서 식사
◇2016.10.14 유대인 음유시인 밥 딜런, 아브라함의 행위에 반기를 들다
유대인 음유시인 밥 딜런, 아브라함의 행위에 반기를 들다
▲시대적 메시지를 전한 음유시인 밥 딜런
올해 노벨문학상은 노래하는 시인 밥 딜런이 수상했다. 가수로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밥 딜런이 처음이다. 도박사들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가장 유력한 수상자로 예상했지만 결과는 밥 딜런이었다.
스웨덴 한림원은 밥 딜런의 수상 이유로 "위대한 미국 음악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표현을 창조해 냈다"고 평했다. 노벨상위원회 새라 대니어스 사무총장은 “밥 딜런은 귀를 위한 시를 쓴다. 그의 작품은 시로 옮겨놔도 완벽하다”고 말했다.
그는 1960년대부터 자유, 평화, 인권 등 시대적 ‘저항의 메시지’를 노래로 읊조린 미국의 포크락 싱어송 라이터이자 음유시인이다. 신랄하면서도 예리한 그의 가사들은 그를 히피 세대의 대변인으로 자리 잡게 하며 대중음악인 포크 가사를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이다.
그는 유대인으로 본명은 ‘로버트 앨런 지머먼’ (Robert Allen Zimmerman)이다. 1962년 음반 <밥 딜런>으로 데뷔한 이래 반항과 자유, 사랑과 평화의 상징으로 세계 팝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저항음악은 그의 음악 인생 전체를 봤을 때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밥 딜런은 포크와 블루스는 물론 컨트리송과 로큰롤, 재즈, 가스펠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섭렵했다.
10살부터 시를 쓰다
그는 1941년 미네소타에서 러시아계 유대인 자녀로 태어나 시적 감성이 조숙해 10살서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게다가 음악적 감성이 풍부했던 그는 엘비스 프레슬리, 리틀 리처드의 광팬으로 고등학교 시절에 벌써 로큰롤 밴드를 조직해 공연했다. 그는 특히 시인 ‘딜런 토머스’를 좋아했다. 그는 딜런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를 많이 만들고 스스로 그의 예명도 ‘밥 딜런’으로 붙였다.
그는 1959년 미네소타 대학에 입학해 문학을 전공하다 1961년 중퇴하면서, 그 즈음 로큰롤에서 포크송과 흑인 전통 블루스로 관심을 돌렸다. 1961년 뉴욕으로 올라와 카페에서 반주를 하며 간간이 노래를 불렀는데 이듬해 컬럼비아 레코드의 눈에 띄어 첫 앨범인 "Bob Dylan"을 발표했다.
본격적으로 재능이 발휘되기 시작한 것은 1963년에 발표한 앨범이었다. "Blowin' In The Wind",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 등의 명곡이 쏟아져 나왔다. 저항적인 노랫말은 당시 사회적 이슈였던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저항의 표상이 되었다. 시적이면서도 정치적 깊이가 있는 가사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 주었다.
그의 음악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자신이 의도치 않았던 저항가수로서의 굴레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는 단조로운 포크와 폐쇄적인 포크 커뮤니티에 질렸다.
비틀즈와의 운명적인 만남
그 즈음 그는 비틀즈를 만난다. 당대의 스타였던 두 뮤지션들은 곧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특히 비틀즈의 존 레논은 딜런의 가사에 깊은 인상을 받은 반면 딜런은 비틀즈의 로큰롤이 가진 에너지와 환희에 매료되었다.
당시 비틀즈의 노래는 음악적으로는 굉장히 새롭고 강렬했지만 가사내용이 사랑타령 등 큰 의미 없는 것들이었다. 당시 음악으로 세상에 저항했던 밥 딜런의 정신세계는 비틀즈에게 엄청난 자극이었다. 그 뒤 존 레논은 “밥 딜런이 비틀스의 음악을 통째로 변화시켰다”고 고백한 바 있다. 또한 밥 딜런역시 포크뮤직의 틀에서 벗어나 락음악을 도입해 소위 '포크락' 으로 불려지는 새로운 음악세계를 선보인다.
유대인 밥 딜런, 아브라함의 행위에 반기를 들다
신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한다. 아브라함은 산에게 순종해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 했다. 마지막에 신이 명령을 철회했지만. 이 이야기를 해석한 키에르케고르와 프로이트, 칼 융은 모두 아브라함의 신앙을 여러 각도에서 찬양한다. 하지만 이를 비판한 가수가 있다. 바로 밥 딜런이다.
유대인인 밥 딜런은 이 이야기를 20세기 미국 상황에 빗대어 ‘하이웨이 61 리비지티드’라는 노래를 작곡한다. 이 노래에서 종교의 절대적 힘을 빌려 미국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아브라함을 개탄한다.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몰고 가는 미국 문화의 잔인성과 권력의 폭력성을 노래에서 드러낸다. 아브라함은 미국 역사에서 정의와 자유의 상징이지만 이 노래에서는 폭력의 상징으로 묘사된다.(출처; 신의 위대한 질문, 배철현, 21세기북스)
기독교로 전향한 밥 딜런, 아들의 종교 유대교를 지지하다
이스라엘을 방문, 순례한 적도 있는 철저한 유대인이었던 밥 딜런이 1970년대 말 기독교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가수 밥 딜런이 유대인이면서 기독교인으로 거듭나는 변신을 한 것은 큰 사건이었다. 밥 딜런 본인은 개신교로 개종한 뒤 가스펠 앨범을 내는 변화를 가지면서도 아들에게는 유대교 성인식인 ‘바 미츠버’를 치루게 하는 등 아들의 유대교 신앙생활을 지지했다.
밥 딜런은 기독교에 심취함을 넘어 전도사로도 활약했다. 1980년대 이후 그는 전도사 생활 비중을 늘리면서 앨범 발표와 공연과 반전 운동으로 1980년대를 보낸다. 밥 딜런의 ‘Knockin' on Heaven's Door‘은 일종의 복음성가인 가스펠이다.
빌보드 12위까지 진입했던 이 노래는 ‘죽음’ ‘종말론’ ‘악행을 저지른 자가 종교적 절대자에게 귀환을 선언하는 노래’로 해석되면서 시대를 초월한 명곡으로 자리 잡았다. 1997년 로마를 방문했던 밥 딜런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한 뒤 이 노래를 불러 주어 팝계 뉴스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복음성가 전파에 심취해 있다.
한국에는 밥 딜런의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원제 Chronicles)이 2010년에 번역 출간되었다. 이밖에 <음유시인 밥 딜런>, <밥 딜런 평전> 등이 나와 있다.
친구야, 바람만이 답을 안다네
(1965년 1월1일 밥 딜런(왼쪽)과 존 바에즈가 런던에서 함께 있는 모습. 연인이었던 두 사람은 자유와 평화 그리고 인권을 노래했다. AFP 연합뉴스)
그의 대표곡은 ‘Blowin’ in the Wind‘와 ‘Knockin’ on Heaven’s Door‘를 비롯해 ‘The Times They Are a-Changin’, ‘Like a Rolling Stone’, ‘Mr. Tambourine Man’ 등으로 이 노래들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 대중음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특히 'Blowin' in the wind’는 7~80년대 우리나라 학생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노래 ‘친구야, 바람만이 답을 안다네’('Blowin' in the wind)를 들어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315Ubn3VFvI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사람이라고 불리울 수 있을까
흰 비둘기는 얼마나 많은 바다를 건너야
모래밭에서 편안히 잠들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포탄이 날아가야
영원히 포탄 사용이 금지될 수 있을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결에 흩날리고 있다네
그 답은 불어오는 바람 속에 있다네
산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서있어야
바다로 씻겨갈 수 있을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세월을 살아야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도대체 얼마나 여러 번 고개를 돌려야
보이지 않는 척 할 수 있을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결에 흩날리고 있다네
그 답은 불어오는 바람 속에 있다네.
월간조선 글 | 홍익희 세종대 교수
◇2017.10.20 노벨문학상 수상자… 역대 수상자들 전공(專攻)은 무엇?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 왼쪽부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오르한 파무크, 르 클레지오, 귄터 그라스, 웰레 소잉카. 사진=조선DB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일본계 영국작가 가즈오 이시구로(63)다. 1954년 일본에서 출생해 1960년 영국으로 이민을 떠난 이시구로는 1974년 켄트대학교에 진학해 1978년 '영어학'과 '철학' 학사과정을 마쳤다. 소설 습작과 사회복지사 활동을 마친 그는 이스트앵귈라대학에서 학업을 재개했다. 1980년 그가 석사(碩士)로 졸업한 전공은 '창작문학(Creative Writing)', 즉 지금의 문예창작학(文藝創作學)이었다.
14일 자 《조선일보》 칼럼에서 어수웅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은 프랑스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의 트윗을 인용하며, 역대 최초로 '문예창작과' 출신 작가가 노벨문학상에 선정된 사실을 특이점으로 꼽았다. 어 차장은 '문창과 최초의 노벨문학상'이라는 제목의 해당 칼럼에서 "노벨문학상의 탄생은 19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문학 창작을 대학에서 가르친다는 발상은 상대적으로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등장할 수 있었던 기록일 것"이라며 이 같은 사실을 흥미롭게 해석했다.
이어 어 차장은 이 사실을 "전 세계 문예창작과의 경사라는 순진한 호들갑이나, 예술 창작이 과연 교육으로 가능한가에 대한 회의가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라며 "그보다는 최근 스웨덴 한림원의 문학적 태도를 한 번쯤 생각해 보고 싶은 이유가 더 크다"고 칼럼의 취지를 밝혔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문예창작학과(Literary Creation)'는 첫째, 문학의 이론과 창작을 세계문학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 둘째 인간 존재의 참모습을 언어를 매개로 해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성취하고자 하는 학문, 셋째 문학의 이론과 창작 과정을 체계적으로 연구해 우리 문학의 수준을 격상시키는 것에 가치를 두는 학문, 넷째 문학 작품의 실제적인 관찰과 분석을 통한 올바른 창작 교육을 토대로 깊이 있는 안목과 자질을 갖춘 창조적인 작가를 길러내는 것에 교육목표를 두고 있는 학문이다.
방점은 '세계문학 차원의 연구' '문학 이론과 창작 과정의 체계적 연구' '안목과 자질을 갖춘 창조적 작가 양성' 등에 찍힌다. 이를 토대로 본다면,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예는 기성작가들은 물론이겠거니와 문예창작학을 공부하는 국내외 학도들에게 있어서도 대단히 큰 영광일 것이다.
그럼에도 정식 교육기관에서 문예창작학을 전공한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올해가 처음이다. 어 차장의 칼럼 내용처럼 '문학 창작을 대학에서 가르친다는 발상은 상대적으로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등장할 수 있었던 기록일 것'이다. 어찌 됐든, 긍정의 눈빛으로 보든 회의의 시각으로 보든 신기한 일임에는 분명하다. 어쩌면 세계적 문학상 당선에 있어, 아니 문학 작가로서의 활동에 있어 자신의 전공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의 전공이 기기묘묘(奇奇妙妙)하고 백화제방(百花齊放)의 다양함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 수상자 이시구로는 영어학, 철학, 창작문학을 공부했다. 2011년 수상자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는 심리학을 배웠다. 1999년 수상자 귄터 그라스는 조각을 전공했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중도하차한 경우는 물론, 자신의 본래 전공과 달리 독학(獨學)으로 문학 공부에 열중한 수상 작가들도 많다. 《월간조선》이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의 국적, 장르, 전공(專攻) 등을 정리했다.
이하 문헌상으로 기록이 남아 있는 경우, 정보의 색인이 가능한 범주 내에서 최대한 정리한 도표다. 혹 부족한 부분이 있거나 바르게 교정해야 할 정보가 있다면 독자분들께서 '댓글' 참여로 조언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1901~2017년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의 국적, 장르, 전공>
연도 | 수상자 | 국가 | 언어 | 장르 | 전공 |
1901 | 쉴리 프뤼돔 | 프랑스 | 프랑스어 | 시 | 법학 |
1902 | 테오도어 몸젠 | 독일 | 독일어 | 역사 | 법학, 고고학 |
1903 | 비에른스티에르네 비에른손 | 노르웨이 | 노르웨이어 | 소설 | 신극(新劇) 운동 |
1904 | 프레데리크 미스트랄 | 프랑스 | 오크어 | 시 | 법학 |
1904 | 호세 에체가라이 | 스페인 | 스페인어 | 희곡 | 토목 공학 |
1905 | 헨리크 시엔키에비치 | 폴란드 | 폴란드어 | 소설 | 의학, 문학 역사, 철학 |
1906 | 조수에 카르두치 | 이탈리아 | 이탈리아 | 시 | 문학 |
1907 | 러디어드 키플링 | 영국 | 영어 | 소설 | 유나이티드서비스 대학에서 공부(전공 미상) |
1908 | 루돌프 크리스토프 오이켄 | 독일 | 독일어 | 철학 | 고전문헌학(古典文獻學) 및 형이상학 |
1909 | 셀마 라겔뢰프 | 스웨덴 | 스웨덴어 | 소설 | 여자고등사범학교(교육학 추정) |
1910 | 파울 요한 루트비히 폰 하이제 | 독일 | 독일어 | 소설 | 고전언어학 |
1911 | 모리스 마테를링크 | 벨기에 | 프랑스어 | 희곡 | 법학 |
1912 | 게르하르트 하웁트만 | 독일 | 독일어 | 희곡 | 생물학, 철학 |
1913 |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 인도 | 벵골어 | 시 | 법학, 문학 |
1914 | 수상자 없음 | ||||
1915 | 로맹 롤랑 | 프랑스 | 프랑스어 | 소설 | 철학, 역사 |
1916 | 베르네르 폰 헤이덴스탐 | 스웨덴 | 스웨덴어 | 시, 소설 | 미술, 문학(독학) |
1917 | 카를 아돌프 기엘레루프 | 덴마크 | 덴마크어 | 소설 | 신학 |
1917 | 헨리크 폰토피단 | 덴마크 | 덴마크어 | 소설 | 공학 |
1918 | 수상자 없음 | ||||
1919 | 카를 슈피텔러 | 스위스 | 독일어 | 시, 소설 | 법학, 신학 |
1920 | 크누트 함순 | 노르웨이 | 노르웨이어 | 시, 소설 | 문학(독학) |
1921 | 아나톨 프랑스 | 프랑스 | 프랑스어 | 소설 | 문학 |
1922 | 하신토 베나벤테 | 스페인 | 스페인어 | 희곡 | 법학 |
1923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 아일랜드 자유국 | 영어 | 시 | 미술, 문학 |
1924 |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 | 폴란드 | 폴란드어 | 소설 | 문학(독학) |
1925 | 조지 버나드쇼 | 아일랜드 자유국 | 영어 | 희곡, 소설 | 음악, 미술, 문학(독학) |
1926 | 그라치아 델레다 | 이탈리아 | 이탈리아어 | 소설 | 문학(독학) |
1927 | 앙리 베르그송 | 프랑스 | 프랑스어 | 철학 | 철학 |
1928 | 시그리드 운세트 | 노르웨이 | 노르웨이어 | 소설 | 상학(商學) |
1929 | 토마스만 | 독일 | 독일어 | 소설 | 사학, 경제학, 미술사학, 문학 |
1930 | 싱클레어 루이스 | 미국 | 영어 | 소설 | 예일대학교 졸업(전공 미상) |
1931 | 에리크 악셀 카를펠트 | 스웨덴 | 스웨덴어 | 시 | 교육학, 문학 |
1932 | 존 골즈워디 | 영국 | 영어 | 소설, 희곡 | 법학 |
1933 |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 | 소련(망명) | 러시아어 | 소설 | 문학(독학) |
1934 | 루이지 피란델로 | 이탈리아 | 이탈리아 | 소설, 희곡 | 문학 |
1935 | 수상자 없음 | ||||
1936 | 유진 오닐 | 미국 | 영어 | 희곡 | 연극(연구) |
1937 | 로제 마르탱 뒤가르 | 프랑스 | 프랑스어 | 소설 | 고문서학 |
1938 | 펄벅 | 미국 | 영어 | 소설 | 심리학 |
1939 | 프란스 에밀 실란패 | 핀란드 | 핀란드어 | 소설 | 자연과학 |
1940~1943 | 수상자 없음 | ||||
1944 | 요하네스 빌헬름 옌센 | 덴마크 | 덴마크어 | 시, 소설 | 약학 |
1945 |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 칠레 | 스페인어 | 시 | 문학(독학) |
1946 | 헤르만 헤세 | 독일 | 독일어 | 소설 | 신학, 문학(독학) |
1947 | 앙드레 지드 | 프랑스 | 프랑스어 | 소설 | 문학(독학) |
1948 | T.S. 엘리엇 | 미국/영국 | 영어 | 시 | 철학, 프랑스 문학 |
1949 | 윌리엄 포크너 | 미국 | 영어 | 소설 | 문학(독학) |
1950 | 버트런드 러셀 | 영국 | 영어 | 철학 | 수학, 철학 |
1951 | 페르 라게르 크비스트 | 스웨덴 | 스웨덴어 | 시, 소설, 희곡 | 미술, 문학 |
1952 | 프랑수아 모리아크 | 프랑스 | 프랑스어 | 소설 | 문학 |
1953 | 윈스턴 처칠 | 영국 | 영어 | 수필 | 육군사관학교 졸업(군사학) |
1954 | 어니스트 헤밍웨이 | 미국 | 영어 | 소설 | 문학(독학) |
1955 | 할도르 락스네스 | 아이슬란드 | 아이슬란드어 | 소설 | 문학(독학) |
1956 | 후안 라몬 히메네스 | 스페인 | 스페인어 | 시 | 법학 |
1957 | 알베르 카뮈 | 프랑스 | 프랑스어 | 소설 | 철학 |
1958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정치적 압력으로 수상 거부) | 소련 | 러시아어 | 소설 | 철학 |
1959 | 살바토레 콰시모도 | 이탈리아 | 이탈리아어 | 시 | 공학 |
1960 | 생 존 페르스 | 프랑스 | 프랑스어 | 시 | 법학 |
1961 | 이보 안드리치 | 유고슬라비아 | 세르보크로아트어 | 소설 | 철학 |
1962 | 존 스타인벡 | 미국 | 영어 | 소설 | 영문학 |
1963 | 요르기오스 세페리스 | 그리스 | 그리스어 | 시, 수필 | 아테네 및 파리 대학 졸업(전공 미상) |
1964 | 장 폴 사르트르(수상 거부) | 프랑스 | 프랑스어 | 소설 | 철학, 사회학, 심리학 |
1965 |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숄로호프 | 소련 | 러시아어 | 소설 | 문학(독학) |
1966 | 슈무엘 요세프 아그논 | 이스라엘 | 히브리어 | 소설 | 문학 |
1966 | 넬리 작스 | 독일/스웨덴 | 독일어 | 시, 희곡 | 문학(독학) |
1967 |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 과테말라 | 스페인어 | 소설 | 의학, 법학, 인류학 |
1968 | 가와바타 야스나리 | 일본 | 일본어 | 소설 | 영문학 |
1969 | 사뮈엘 베케트 | 아일랜드 | 영어/프랑스어 | 희곡, 소설 | 불문학 |
1970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 소련 | 러시아어 | 소설 | 수학, 물리학 |
1971 | 파블로 네루다 | 칠레 | 스페인어 | 시 | 철학, 불문학, 교육학, 문학 |
1972 | 하인리히 뵐 | 독일(서독) | 독일어 | 소설 | 독문학, 고전문헌학 |
1973 | 패트릭 화이트 | 오스트레일리아 | 영어 | 소설 | 문학 |
1974 | 에위빈드 욘손 | 스웨덴 | 스웨덴어 | 소설 | 문학(독학) |
1974 | 하뤼 마르틴 손 | 스웨덴 | 스웨덴어 | 시 | 문학(독학) |
1975 | 에우제니오 몬탈레 | 이탈리아 | 이탈리아어 | 시 | 문학 (독학) |
1976 | 솔 벨로 | 캐나다/미국 | 영어 | 소설 | 인류학, 사회학 |
1977 |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 스페인 | 스페인어 | 시 | 법학, 경영학 |
1978 |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 폴란드/미국 | 이디시어 | 소설 | 신학, 히브리어학 |
1979 | 오디세아스 엘리티스 | 그리스 | 그리스어 | 시 | 문학 |
1980 | 체스와프 미워시 | 폴란드 | 폴란드어 | 시 | 법학 |
1981 | 엘리아스 카네티 | 불가리아/영국 | 독일어 | 소설 | 화학 |
1982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 콜롬비아 | 스페인어 | 소설 | 법학, 언론학 |
1983 | 윌리엄 골딩 | 영국 | 영어 | 소설 | 자연과학, 영문학 |
1984 |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 | 체코 | 체코어 | 시 | 문학 (독학) |
1985 | 클로드 시몽 | 프랑스 | 프랑스어 | 소설 | 문학 (독학) |
1986 | 월레 소잉카 | 나이지리아 | 영어 | 희곡, 소설 | 영문학 |
1987 | 조지프 브로드스키 | 소련/미국 | 러시아어/영어 | 시 | 문학(예일대학교 명예문학박사학위) |
1988 | 나기브 마푸즈 | 이집트 | 아랍어 | 소설 | 철학 |
1989 | 카밀로 호세셀라 | 스페인 | 스페인어 | 소설 | 의학, 문학(독학) |
1990 | 옥타비오 파스 | 멕시코 | 스페인어 | 시 | 법학 |
1991 | 네이딘 고디머 | 남아프리카 공화국 | 영어 | 소설 | 비트워터스랜드대학교 중퇴(전공 미상) |
1992 | 데릭 월컷 | 세인트 루시아 | 영어 | 시, 희곡 | 불어, 라틴어, 서반아어 |
1993 | 토니 모리슨 | 미국 | 영어 | 소설 | 예술학 |
1994 | 오에 겐자부로 | 일본 | 일본어 | 소설 | 불문학 |
1995 | 셰이머스 히니 | 아일랜드 | 영어 | 시 | 영문학 |
1996 |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 폴란드 | 폴란드어 | 시 | 문학, 사회학 |
1997 | 다리오 포 | 이탈리아 | 이탈리아어 | 희곡 | 건축학 |
1998 | 주제 사라마구 | 포르투칼 | 포르투칼어 | 소설 | 문학(독학) |
1999 | 귄터 그라스 | 독일 | 독일어 | 소설 | 그래픽, 조각 |
2000 | 가오싱젠 | 프랑스 | 중국어, 프랑스어 | 소설 | 프랑스어학 |
2001 | V.S. 나이폴 | 트리니다드 토바고 / 영국 | 영어 | 소설 | 영문학 |
2002 | 임레 케르테스 | 헝가리 | 헝가리어 | 소설 | 문학(독학) |
2003 | 존 맥스웰 쿠체 | 남아프리카공화국 | 영어 | 소설 | 언어학 |
2004 | 엘프리데 옐리네크 | 오스트리아 | 독일어 | 소설, 희곡 | 미술사학, 음악사학, 연극학 |
2005 | 해럴드 핀터 | 영국 | 영어 | 희곡 | 연극 |
2006 | 오르한 파무크 | 터키 | 터키어 | 소설 | 언론학 |
2007 | 도리스 레싱 | 영국 | 영어 | 소설 | 문학 (독학) |
2008 |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 | 프랑스 | 프랑스어 | 소설 | 프랑스 문학 |
2009 | 헤르타 뮐러 | 독일 | 독일어 | 소설 | 독일 문학, 루마니아 문학 |
2010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 페루 | 스페인어 | 소설 | 문학 |
2011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 스웨덴 | 스웨덴어 | 소설, 시 | 심리학 |
2012 | 모옌 | 중국 | 중국어 | 소설 | 문학 |
2013 | 앨리스 먼로 | 캐나다 | 영어 | 소설 | 법학, 언론학, 영문학 |
2014 | 파트리크 모디아노 | 프랑스 | 프랑스어 | 소설 | 문학 (독학) |
2015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 벨라루스 | 러시아어 | 산문 | 언론학 |
2016 | 밥 딜런 | 미국 | 영어 | 시 | 미네소타 대학교 자퇴(문학 전공) |
2017 | 가즈오 이시구로 | 영국 | 영어 | 소설 | 영어학, 철학, 창작문학(문예창작) |
글=신승민 월간조선 기자 월간조선 11월 호
◇2017.10.12 노벨과학상의 연령 공식 … 20대에 박사, 40대에 연구 완성, 50대 후반 수상
노벨상 발표가 끝났다. 올해 노벨상은 미국이 휩쓸었다. 특히 노벨 과학상은 수상자 9명 중 7명이 미국인이었다. 가위 과학계의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수준이다. 지난해와 2015년 일본·중국 등 아시아 국가를 비롯한 비교적 다양한 국가에서 노벨상이 나왔던 것과 대조적이다. 미국은 이로써 과학상 기준 총 265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해 2위인 영국(87명)과 3위 독일(68명)을 다시 한번 멀찌감치 밀어냈다. <표 참조>
늦어도 30대에 독자적 연구 시작
50대 중반 주목, 비중있는 상 받아
역대 최연소는 1915년 상 탄 25세
올해는 68세로 평균치 훌쩍 넘어
▲국가별 노벨 과학상 수상자 현황
물론 노벨상은 현재가 아닌 과거의 뛰어난 성과에 대한 상이라는 점에서 올해 미국이 거둔 노벨상이 현재의 미국 과학계의 수준을 보여준다고 말할 순 없다. 한국연구재단이 최근 공개한 ‘노벨과학상 수상 현황 및 트렌드’에 따르면 노벨상 수상자는 ‘30세 이전에 박사학위를 마치고 독자적 연구를 시작해 40대에 노벨상을 받을 만한 연구를 완성한 사람’이 많다. 그들의 연구결과가 50대 중반에 학계에 주목을 받고, 울프상 등 노벨상에 버금가는 관련 상을 받은 뒤 50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그 분야에 최고 권위자가 되고 노벨상을 받게 된다.
올해 노벨 과학상 최연소 수상자는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한 마이클 영(68) 록펠러대 교수로, 어느 때보다 평균 연령이 높다.
예외는 있다. 역대 최연소 수상자는 1915년 ‘결정에서 X선을 이용한 회절에 관한 법칙’으로 물리학상을 받은 영국의 윌리엄 로런스 브래그다. 당시 그의 나이는 만 25세에 불과한 학생 신분이었다. 연구를 시작한 첫해에 얻는 성과였다. 케임브리지대 지도교수였던 그의 아버지 윌리엄 헨리 브래그 교수와 공동수상이었다.
▲2017 노벨 과학상 수상자
이번 노벨상의 또 다른 특징은 해가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는 ‘공동연구’ 경향이다. 과학상 세 분야인 생리의학상·물리학상·화학상 모두 각 3명의 수상자가 발표됐다. 노벨재단에 따르면 노벨상은 최대 3명까지 공동 수상할 수 있다. 그 외 차점자는 노벨재단 정관에 따라 아무리 뛰어난 업적을 쌓아도 수상할 수 없다. 특히 물리학상을 받은 중력파의 경우 전 세계 1200명의 연구자가 참여했다는 점에서 사실상 국제 공동협력 연구다. 한국도 15명의 과학자가 연구진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 중력파연구협력단 소속인 강궁원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책임연구원은 “중력파 연구는 장비 설치와 이론·실험·분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학문이 참여하는 대표적 분야”라며 “중력파 검출을 위해 지금껏 연구해 온 연구자 입장에서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노벨 과학상 수상자 선정 과정
노벨상은 어떤 과정을 통해 결정될까. 노벨재단은 정관에 선정을 위한 과정을 명시해 놨다. 우선 노벨위원회는 수상식 2년 전부터 전년 8월까지 노벨상 수상 후보를 추천할 추천인 2000~3000명을 선정한다. 이들 추천인은 노벨상 수상 발표가 되는 해의 1월 말까지 추천서 제출을 마감한다. 여기에서 약 200명을 후보자로 결정한다. 노벨위원회는 이를 바탕으로 3월 1일까지 후보자를 20~30명으로 압축하고, 다시 외부 국제 전문가들에게 의뢰해 정밀 평가를 진행한다. 이들은 8월 말까지 후보자 1차 지명과 최종보고서를 작성한 후 이를 각 스웨덴 왕립과학원 등 분야별 노벨상 선정 기관에 올린다. 선정 기관은 9월 한 달 동안 최종보고서를 검토하고, 10월에 다수결 투표를 통해 노벨상 수상자를 최종 선정해 곧바로 발표한다.
시상식은 알프레드 노벨의 사망일인 12월 10일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의 콘서트홀에서 열린다. 또 이와 별도로 매년 12월 6~14일을 노벨 주간으로 지정해 수상자들의 강연과 회견이 이뤄진다. 여기서 나온 내용은 이듬해 책으로 출간된다.
임경순 포스텍(포항공대) 과학문화연구센터장은 “노벨상이 미국 등 특정 국가와 대학에 치우치는 이유는 노벨상 후보 선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해외 전문가 평가단에 이들 초엘리트 집단이 포함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며 “기초과학 연구에 대한 투자뿐 아니라 노벨상에 준하는 각종 과학상 수상 등 국가 전체의 브랜드 향상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생체시계 비밀 밝혀내 생리의학상
한편 지난 2일 노벨상으로는 제일 처음 발표된 생리의학상은 생체시계의 비밀을 밝혀낸 미국 과학자 3명에게 돌아갔다. 제프리 C 홀(72) 메인대 교수, 마이클 로스배시(73) 브랜다이스대 교수, 마이클 영(68) 록펠러대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생체시계로 알려진 ‘서캐디언 리듬’을 통제하는 분자기구를 발견한 공로다. 노벨위원회는 성명에서 “이들의 발견은 식물과 동물, 인간이 어떻게 생체리듬을 조정해 지구의 회전과 일치시키는지를 설명한다”며 “이들은 생체시계의 내부를 엿보고 내부 작동 원리를 설명할 수 있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중력파 존재 실제로 확인해 물리학상
3일 발표된 물리학상은 아인슈타인이 1세기 전 주장한 중력파의 존재를 실제로 확인한 ‘라이고·비르고 협력단’ 연구진 3명에게 돌아갔다. 라이너 바이스(85·미국)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명예교수와 배리 배리시(81·미국) 캘리포니아공과대(칼텍), 킵 손(77·미국) 칼텍 명예교수가 주인공이다. 라이고는 미국이 주도하는 중력파 관측단, 비르고는 이탈리아·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이 주도하는 중력파 관측단이다. 라이고 연구진은 지난해 2월 공간과 시간을 일그러뜨린다는 ‘중력파’의 존재를 직접 측정 방식으로 탐지했다고 발표했다. 중력파의 간접 증거가 발견된 적은 있었으나 직접 검출이 이뤄진 것은 인류 과학 역사상 처음이었다. 노벨위원회는 “중력파 확인은 세계를 흔들었던 발견”이라며 “수상자들은 40여 년간의 노력 끝에 마침내 중력파를 관측하는 데 성공해 완전히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열었으며 천체물리학에서 혁명을 이뤄냈다”고 평가했다.
저온전자 현미경 기술 개발해 화학상
4일 발표된 화학상은 자크 뒤보셰(75) 스위스 로잔대 생물물리학과 명예교수, 요아힘 프랑크(77) 컬럼비아대 생화학·분자생물학과 교수, 리처드 헨더슨(72) 영국 케임브리지대 의학연구위원회 연구원이 받았다. 생체분자를 고화질로 영상화할 수 있는 저온전자 현미경 관찰 기술을 개발해 ‘생화학의 새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저온전자 현미경이란 수분을 함유한 세포나 수용액에 존재하는 생체 고분자를 초저온 상태로 유지한 채 자연적인 상태로 관찰하는 전자현미경을 말한다. 기존 전자식 현미경으로는 생물 시료를 직접 관찰할 경우 강력한 전자선에 의한 손상 때문에 온전한 이미지를 얻기 어려웠다. 하지만 저온전자 현미경으로는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과정을 시각화할 수 있게 됐다.
노벨위원회는 이들에 대해 “생체분자 이미지를 단순화하고 개선해 생화학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며 “신약 개발과 생체의 화학작용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노벨상의 A to Z
스웨덴의 다이너마이트 발명가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인류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세계 최고 권위의 상이다. 1901년부터 물리학·화학·생리의학·문학·평화 5개 부문으로 구분해 시상식이 열렸으며, 1969년 경제학 부문이 새로 추가됐다. 노벨상 기금은 노벨의 유언에 따라 만든 노벨재단에서 나오지만 선정과 시상은 내부 실무조직인 노벨위원회가 부문별 선정기관인 스웨덴왕립과학원(물리·화학·경제)·카롤린스카연구소(생리의학)·스웨덴한림원(문학)·노르웨이 노벨위원회(평화)와 함께 진행한다.
최준호 기자 joonho@joongang.co.kr
◆대한민국의 도전
◇2016.09.28 김빛내리 교수, 한국인 중 노벨과학상 1순위
[한국연구재단 설문조사 결과]
▲한국연구재단은 국내 기초과학 분야 핵심 연구자 14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김빛내리〈사진〉
서울대 석좌교수(IBS 연구단장)가 노벨 과학상 수상에 가장 근접한 한국 연구자로 꼽혔다고 27일 밝혔다. 김 교수는 생리의학 분야에서 마이크로 RNA 연구의 권위자로 지난해 세계 최초로 마이크로 RNA를 만드는 단백질 복합체의 구성과 기능을 밝혀내 주목받았다.
이번 설문 조사에서는 물리학 분야 김필립 미국 하버드대 교수, 화학 분야 유룡 카이스트 교수, 생리의학 분야 찰스 리 미국 잭슨랩 유전체의학 연구소장 등도 추천을 받았다. 올해 노벨 과학상 수상이 유력한 세계 과학자로는 중력파를 발견한 킵 손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명예교수와 라이너 바이스 미국 MIT 명예교수가 선정됐다.
연구자들은 국내 과학 분야 중에서도 생리의학(24%), 화학(20 %), 물리(15%) 순서로 수상 가능성이 높다고 답했다. 또 설문 응답자의 78%는 20년 이내에 한국인이 노벨 과학상을 수상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예상 소요 기간을 6~10년이라고 답한 비율이 27%, 11~15년이 23%, 16~20년이 22%로 나타났다. 노벨 과학상 수상을 위해선 연구 주제에 대한 장기적 지원(48%),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연구 주제 지원(17%), 과학기술 정책의 일관성 유지(14%)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現]서울대 자연과학대 생명과학부 교수
출생 1969년 (전남 영암)
직업 교육자(교수)
학력 미국 펜실베니아대 대학원 박사후과정 수료
경력
미국 국립학술원(NAS) 외국인 회원 선출
서울대 '창의선도 중견연구자' 선정(3년 동안 연 2억 6000만원의 연구비 지원
◇2016.10.06 한국인 유일 노벨상이 '정치상'인 것 우연 아니다
우리는 이상하게 일본인이 노벨상을 타면 흥분한다. '우리는 뭐하느냐'면서. 미국인·영국인·독일인이 탈 때는 아무 감정이 없다가 일본인만 타면 갑자기 한국의 과학 수준을 개탄한다. 얼마 전 일본의 한 언론이 이런 한국인들을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식으로 보도했다. 우리나라에서 '리우올림픽에서 일본은 선전했는데 한국은 뭐냐'는 식의 얘기나 보도가 많이 나오던 때였다.
올해도 일본 과학자가 22번째 노벨상을 받자 또 '일본은 하는데 우리는 왜?'라는 논의가 넘쳐난다. 얘기를 들어보면 일본이 하는 것은 당연히 우리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것 같다. 일본 사람들이 보면 어이없는 일일 것이다.
일본이 근대 과학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00년이 훨씬 넘는다. 과학, 수학, 물리학, 화학, 의학과 같은 말 자체가 다 일본인이 만든 것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구체적 과학 용어는 말할 것도 없다. 도호쿠대 오가와 마사타카 교수가 43번째 원소를 발견해 '닛포니움'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 1908년이다(20여 년 뒤 이 연구 결과가 부정됐지만 나중에 새 원소 발견 자체는 사실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로부터 100여 년 뒤인 2012년 규슈대 모리타 고스케 교수 연구팀이 113번째 원소를 발견했다. 올해 그 원소가 100여 년 전 '닛포니움'과 같은 '니호니움'으로 공식 명명됐다. 모리타 팀은 니호니움을 발견하기 위해 7년간 400조번 실험을 했다고 한다. 물질의 근본을 두고 100년의 시간을 관통해 일본인들이 보인 집념을 안다면 '일본은 노벨상 타는데 한국은 뭐하냐'는 질문은 할 수 없을 것이다.
100여 년 전 서양 선교사들이 찍은 우리 모습(젖가슴을 드러낸 여인들, 몇 달은 씻지 않았을 것 같은 아이들, 분뇨로 넘쳐나는 광화문길…)에 비하면 지금은 한·일 간 격차가 많이 좁혀졌다. 그래도 여전히 격차는 존재한다. 우리만 잘 모를 뿐이다. 우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일본을 우습게 아는 한국인'이란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쁘지 않다. 그런 소리에 우쭐하는 사람도 있다. 실은 거기에 '이상한 코리안'이란 뜻이 배어 있다. 실제로는 일본을 우습게 볼 수 있는 국가가 세계에 단 한 나라도 없기 때문이다. 일본을 우습게 볼 수 있으려면 일본을 몰라야 한다. 모르면서 큰소리치고 허세 부리는 사람들만 일본을 우습게 여길 수 있다.
노벨상에 목을 매는 것도 '모르면서 허세 부리기'의 한 현상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평소에는 과학에 아무 관심이 없다. 과학을 모르는 걸 무식하다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아주 떳떳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많이 보았다. 그걸 '지성인'의 한 특성쯤으로 여기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다. 그러다 노벨상 시즌만 되면 흥분하는 것이 꼭 배드민턴이나 레슬링에 아무 관심 없다가 올림픽 때만 되면 금메달 따라고 난리 치는 것 같다. 얼마 전 미국의 한 매체가 '세계에서 가장 책을 적게 읽는 한국인들이 노벨문학상은 애타게 기다린다'고 했다. 따로 보탤 말이 없다. 한국에서 매년 이맘때 한번씩 오는 노벨상 열기는 아무리 봐도 과시주의와 한탕주의 같다.
100여 년 전에 서양 군함이 한강 어귀에서 함포를 쏘자 놀란 왕과 왕비는 궁궐 뒤뜰에 솥단지를 묻었다고 한다. 무당이 시킨 대로 한 것이다. 옛날 일만은 아니다. 각종 선거 일자가 법에 규정되기 전에 우리 대선 총선 날짜는 점쟁이가 결정했다. 당시 대통령에게 좋고 야당 총재들에게 나쁜 날로 골랐다. 실무 최고 책임자에게 직접 들은 얘기다. 한국 사회와 한국인 의식의 바탕에는 아직도 과학과 이성이 아니라 미신과 감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비과학, 비이성이 지배하는 나라가 노벨상은 애타게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 과학자들이 머지않아 우리에게도 노벨상이 올 것이라고 한다. 유력한 후보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랬으면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 풍토가 과학과는 거리가 멀다는 문제는 노벨상 한두 개로 달라지지 않는다. 광우병 괴담이나 최근의 전자파 괴담은 과학과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선 결코 생명력을 가질 수 없다. 한국에선 사회를 휩쓸었다. 과학과 이성으로 입증되는데도 '미국 쇠고기 너나 먹어라'거나 '사드 안전하면 네 집에다 갖다 놓으라'고 한다. 괴담에 그렇게 속고도 새 괴담이 나오면 또 우르르 몰려간다.
한국이 처음으로 탔고 아직까지는 유일한 노벨상이 정치상(평화상)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그건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더 나올지도 모른다. 노벨문학상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노벨과학상은 다를 것이다. 한국인 노벨과학상 수상자도 언젠가 나오기는 하겠지만 특출난 개인의 성과일 것이다. 사회 풍토가 미국·영국·일본과 다르기 때문이다. 노벨상 몇 개보다 과학과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 풍토가 더 중요하다. 괴짜 같은 과학 집념도 그런 풍토에서 자라고 꽃필 수 있다.◎
조선일보 양상훈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