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여행/ 국가별78/ 프랑스1
■프랑스 France
프랑스 공화국, République française
▲국기
수도는 파리이고 국민은 프랑스계이며 종교는 로마 가톨릭 신자가 압도적이다. 화폐단위는 유로를 사용한다. 국가수반은 대통령이고, 정부수반은 수상이다. 문화적, 정치적으로 세계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인권선언’을 통해 구체제를 무너뜨렸다. 혁명 후 나폴레옹 통치, 1, 2차 세계대전까지 다양한 정치적 변화를 겪었으며 1944년에 의회민주주의를 회복하였다. 육지의 반 이상이 농업에 적당하고,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간직한 넓은 삼림지역이 영토의 1/4가량을 덮고 있다.
북동쪽으로 룩셈부르크·벨기에, 북서쪽으로 영국 해협, 서쪽으로 대서양과 비스케이 만, 남쪽으로 스페인·안도라·지중해, 동쪽으로 이탈리아·스위스·독일과 맞닿아 있고, 지중해의 코르시카 섬이 포함된다. 수도는 파리이다.
국민은 주로 프랑스계이다. 공식언어는 프랑스어이고, 종교는 그리스도교인에 로마 가톨릭 신자가 압도적이며 개신교·이슬람교·유대교도 있다. 화폐단위는 유로(€)를 사용한다. 육지의 반 이상이 농업에 적당하고,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간직한 넓은 삼림지역이 영토의 1/4가량을 덮고 있다.
프랑스는 소규모 기업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발전된 혼합 경제이다. 국가 수반은 대통령이고, 정부의 수반은 수상이다. 의회는 양원제로 구성된다. 프랑스는 세계의 주요 경제 대국이고 유럽공동체(European Union/EU)의 창립 회원국이었다.
문화적으로, 프랑스는 중세 초기부터 세계 무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프랑스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들은 구석기 시대부터 정착생활이 이어져왔음을 보여준다. BC 5세기까지 갈리아인이 라인 강 유역에서 지금의 프랑스 지중해 연안으로 이주해 왔다. BC 600년경에는 이오니아계 그리스인이 마르세유에 있는 정착지를 포함하여 여러 식민지를 건설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BC 50년에 갈리아에 대한 로마의 정복을 완성했다.
AD 6세기 동안에 프랑크계 잘리어족이 통치하였다. 8세기에 이르러 권력은 카롤링거 왕조로 넘어갔는데, 이 왕조의 가장 위대한 왕은 샤를마뉴였다. 100년 전쟁(1337-1453)으로 인해 프랑스는 영국이 지배해왔던 프랑스 영토를 되찾았다.
15세기말 무렵에 이르러 프랑스 영토는 오늘날과 거의 같게 되었다. 16세기는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가톨릭교도 사이에 벌어진 종교전쟁으로 얼룩졌다. 앙리4세는 낭트 칙령(1598)을 공표하여 상당한 종교적 자유를 보장했다. 그러나 절대 왕권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린 루이 14세가 1685년에 이것을 폐지했다.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인권선언’을 발표했으며, 앙시앵 레짐(구체제)을 무너뜨렸다. 나폴레옹(1799~1814/15)의 통치 아래에서 프랑스는 프랑스령을 확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제2공화정(1848~52)이 설립될 때까지 다시 왕정으로 되돌아갔다. 제2공화정 이후 1871년에 제3공화정이 설립되기 전까지 나폴레옹 3세가 황제로 지배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1914~18)은 프랑스 북부 지역을 폐허로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나찌 독일에 의해 점령된 이후로 친독일주의자 비시 정권이 통치하였다. 1944년에 연합국과 자유 프랑스군에 의해 해방을 맞은 프랑스는 제4공화정 하에서 의회민주주의를 회복시켰다. 제4공화국은 1950년대 인도차이나에서의 값비싼 전쟁과 프랑스 식민지들에서 대두된 민족주의 운동을 감당할 수 없었다. 샤를 드 골을 대통령으로 1959년 1월에 제5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그는 프랑스의 해외 식민지들 대부분을 독립시켰다.
1981년에 프랑스는 사회당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프랑수아 미테랑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1986년부터 21세기 초에 이르는 동안 프랑스는 여러 차례 각각 다른 정당의 대통령과 총리로 이루어진 ‘동거정부’라고 알려진 권력이 분리된 정부 형태의 균형을 유지했다.
역사
프랑스는 유럽 가운데서도 가장 복잡한 인류사를 지니고 있다.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들은 최고 10만 년도 더 된 것으로, 프랑스 지방에서 구석기시대부터 정착생활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BC 1200년경에 켈트계 갈리아인이 라인 강 유역으로부터 현재의 프랑스와 이탈리아 북부지역을 향해 남쪽과 서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BC 600년경에는 이오니아계 그리스인이 마실리아에 상업식민지를 건설했다. 현재의 남프랑스 지역에서 수세기 동안 번창한 많은 이오니아인 취락 가운데 가장 유명했던 이 식민지가 오늘날 마르세유로 발전했다.
BC 121년에 시작된 로마인의 갈리아 정복은 BC 58~50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정복으로 끝났다. 갈리아는 로마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 철저히 로마화되었다.
로마가 쇠퇴하면서 갈리아는 게르만족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5세기말까지는 프랑크계 살리족(支族)이 루아르 강 북쪽 지역을 점령했고, 서고트족이 아키텐과 프로방스를, 부르군트족이 론 강 유역을 차지했다. 살리족은 6세기에 메로빙거 왕조의 영도하에 갈리아 대부분을 장악했다.
8세기에 이르러 메로빙거 왕조의 왕권이 카롤링거 왕조로 넘어갔는데, 이 왕조의 가장 위대한 왕인 샤를마뉴는 9세기초 서유럽의 대부분까지 제국을 넓혔다. 그의 죽음은 제국의 분할을 야기했다. 843년 베르됭 조약 이후 샤를마뉴 제국의 가장 서쪽에 해당하는 영토는 프랑키아 오키덴탈리스로 알려지게 되었다. 카롤링거 왕조의 마지막 왕이 987년에 죽자 위그 카페가 프랑키아 오키덴탈리스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카페 왕조는 처음에는 힘이 약했지만 1328년까지 존속했으며, 플랑드르·브르타뉴·부르고뉴·아키텐을 제외한 현대 프랑스의 대부분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1328년에 프랑스의 왕위는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6세에게 넘어갔으며, 이것이 백년전쟁(1337~1453)으로 알려진 잉글랜드와의 투쟁을 촉발했다.
이 전쟁으로 발루아 가문은 프랑스의 왕가로 확고히 자리잡았고, 잉글랜드는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내의 영지를 전부 상실했다. 15세기말 부르고뉴와 브르타뉴가 발루아 가문의 지배하에 들어감으로써 프랑스의 영토는 오늘날과 거의 같게 되었다.
16세기에는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되어 일련의 종교전쟁과 내란을 야기했다. 프로테스탄트(위그노)와 로마 가톨릭교도 사이의 전쟁은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전야에 파리에서 약 3,000명의 위그노교도가 학살당하는 것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뒤이은 혼란 속에서 부르봉 가문의 프로테스탄트인 앙리 드 나바르(앙리 4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그는 결국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는 낭트 칙령(1598)을 공포하여 위그노교도에게 상당한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다. 17세기에는 추기경 리슐리외와 마자랭 같은 뛰어난 정치가들이 국왕을 보필하여 프랑스를 유럽의 최강국으로 만드는 데 힘썼다. 부르봉 가문의 후기 왕들, 특히 루이 14세는 베르사유에 호화로운 궁전을 꾸미고 태양왕을 자임함으로써 프랑스의 절대왕권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18세기에 막대한 비용을 들인 해외원정이 연이어 실패한 결과 프랑스는 여러 개의 해외영토를 상실하고 거의 파산상태에 이르렀다.
1789년에 일어난 혁명은 왕을 몰아내고 '인권선언'을 발표했으며 앙시앵 레짐(구체제)을 무너뜨렸다. 프랑스 혁명은 유혈사태를 거쳐 5인 총재(總裁)의 약체 정부가 들어서는 것으로 끝났다. 정권은 이내 나폴레옹에게 넘어갔는데, 나폴레옹은 1799~1814년에 처음에는 통령으로, 후에는 황제로 프랑스를 지배했다.
나폴레옹의 대대적인 군사원정은 1815년 그의 몰락과 함께 끝났다. 제한적으로 복고된 왕정은 짧은 공화정 기간(1848~52)을 제외하고는 1871년까지 계속되었고,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71)의 패전으로 인해 제3공화정이 들어섬으로써 종지부를 찍었다. 프랑스는 1871년에 알자스-로렌 지방을 독일에 빼앗겼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이곳을 되찾았다.
1940년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침략한 후 비시 프랑스의 필리프 페탱을 수반으로 하는 친독일 정권이 수립되었다(제2차 세계대전). 영국으로 망명한 샤를 드골 장군의 영도하에 '자유 프랑스'가 결성되었고, 국내에서는 레지스탕스 운동이 일어났다. 프랑스는 1944년 연합군과 자유 프랑스군에 의해 해방되었으며, 이어 제4공화정하에 의회민주주의가 회복되었다.
제4공화국은 1950년대에 인도차이나에서 민족주의자 게릴라들을 상대로 한 값비싼 전쟁과 알제리를 비롯한 프랑스의 식민지들에서 대두한 민족주의 운동을 감당할 수 없었다. 1958년 공직생활로 복귀한 드골은 제5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프랑스의 해외식민지들을 대부분 독립시키는 데 앞장섰다. 1981년 사회당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1988년에 재선되어 1995년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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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이야기
◆2014.12.05 '부조리한 이방인' 알베르 까뮈
유수(幽囚)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해준 아비뇽 교황청의 위압적인 자태며 론강을 가르다 뚝 끊어진 성(聖) 베네체다리에 다시 올라 허무한 세월을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뭐랄까, 사람과 하늘이 함께 녹아버릴 듯이 다같이 들뜬 분위기, 이제는 사진 속에만 남아 멈춰버린 풍광이 오라고, 다시 오라고 손짓하고 있습니다. 보르도에서 5시간 차를 몰아 프로방스 가는 길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엑상프로방스는 남부 알프코트다쥐르주(洲), 즉 레지옹(Region-우리의 道)의 주요 도시입니다. 아래쪽 코트다쥐르는 지중해 쪽 프랑스에서 이탈리아 해변을 일컫는 말이지요. 흔히 프랑스령(領) 리비에라라고도 합니다. 코트다쥐르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뤼브롱산맥입니다. 알퐁스 도데의 ‘별’의 배경이 되는 산군(山群)이 동서로 달리며 이 지방을 장벽처럼 감쌉니다. 다른 명소가 론강(江)이지요. 빈센트 반 고흐가 아를의 정신병원에 머물 때 그렸던 ‘별이 빛나는 밤’의 무대가 됐습니다.
▲엑상프로방스에서 니스로 달리는 7번 국도에 우뚝 솟아있는 생투빅투아르. 뭔가 돌무더기 안에 로맨스가 싹틀 것 같은 느낌을 준다./사진=이서현
▲이것이 뤼브롱 산맥이다. 뤼브롱은 대-소 산맥이 루르말랭 협곡을 싸고 달린다. 알퐁스 도데의 '별'에 등장하는 무대이기도 하다./사진=이서현
뤼브롱산맥, 론강과 함께 코트다쥐르를 상징하는 것이 ‘미스트랄(Mistral)’입니다. 이탈리아 알프스에서 발원해 아비뇽-아를-지중해로 이어지는 계곡을 따라 겨울부터 봄까지 부는 차가운 북서풍을 이렇게 부릅니다. 영국 작가 피터 메일은 ‘프로방스에서의 1년’이라는 책을 통해 미스트랄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미스트랄의 위력을 프랑스인 특유의 과장이라고 콧방귀를 뀐 적이 있다. 그런데 24시간만에 기온이 20도나 떨어지고….”
여기에 지중해쪽 온기까지 남쪽에서 밀려오니 변화무쌍하겠지요. 사람들은 니스-칸느-몬테카를로-이탈리아 산레모로 이어지는 해변을 떠올리지만 예술가들에겐 산과 바람과 바다가 영감(靈感)을 불러일으킨다고 합니다.
아비뇽에서 1시간 거리에 루르말랭(Lourmarin)이란, 인구가 1000명 남짓한 동네가 있습니다. 작가 알베르 카뮈(1913~1960)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이지요. 여기서 살던 카뮈는 파리로 가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합니다.
▲루르말랭 마을의 전경. 앞에 솟은 시프레 나무가 화살같은 느낌을 준다. 시프레 나무는 프로방스의 대표적인 가로수다./사진=이서현
▲루르말랭 마을 초입에 있는 분수와 피잣집.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카뮈의 집이 나온다./사진=이서현
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를 점령한 독일은 이런 말을 남겼다지요.
“이 나라를 지배하는 두 정부가 있다. 프랑스 중앙은행과 갈리마르 출판사다.”
1911년 창립돼 100년이 넘은 이 지성의 산실에서 나온 통계가 있습니다. 프랑스 최대의 베스트셀러 겸 스테디셀러를 집계해보니 2위가 ‘어린 왕자’의 작가 생텍쥐베리(2600만부), 3위가 장 폴 사르트르(2100만부)였다는 겁니다. 그럼 1위는 누구일까요? 바로 알베르 카뮈(2900만부)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카뮈는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뤼시앵 카뮈는 주아브 보병연대에 근무하던 군인이었고 어머니는 스페인 출신으로 문맹(文盲)에 고아였습니다. 카뮈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지요. 아버지는 그가 한살 때 제1차 세계대전 중 마른 전투에서 사망합니다. 할머니, 어머니, 형, 두명의 외삼촌과 알제리에서 살던 카뮈는 1923년 프랑스 중학교에 진학했으나 어머니가 ‘하녀(下女)’라는 사실에 고민합니다. 알제리대학을 폐결핵으로 중퇴했고 고학(苦學)하면서 가정교사-자동차수리공-기상청 인턴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가난했지만 멋쟁이여서 명배우 험프리 보가트에 비교됐고 골키퍼를 할만큼 축구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젊은 시절 카뮈는 방랑했습니다. 어머니의 나라 스페인에서 내전이 일어나자 프랑스 공산당원이 됐고 알제리 공산당에도 가입했습니다. 훗날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제명당한 뒤 공산당의 교조주의를 비난하긴 했지만. 결혼생활도 순탄치 못했지요. 시몬 이에와 1934년 결혼했지만 서로의 불륜으로 상처받다 이에가 모르핀에 중독되자 6년 만에 이혼합니다. 수학자이자 피아니스트인 프랑신 포르와 재혼하지만 아내는 상처만 받습니다. 1945년 쌍둥이 카트린(여)과 잔(남)을 낳았는데도 카뮈는 혼외관계를 계속했습니다. 그의 상대 가운데에는 스페인의 유명 여배우 마리아 카자레스도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문학에서 입지를 다진 계기가 제2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군입대를 결심했으나 폐결핵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자 카뮈는 레지스탕스 조직 ‘콤바’에 가담해 지하신문을 통해 항독(抗獨)의 필치를 휘두릅니다. 이 기간 사르트르와 교제하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를 놓고 소원해지지요. 아시다시피 사르트르는 공산주의를 흠모했지만 그 실체를 이미 안 카뮈는 ‘반항하는 인간’이라는 책을 통해 공산주의의 실체를 폭로합니다.
카뮈가 쓴 명작 ‘이방인’(1942년) ‘페스트’(1947년)’ ‘시지프신화’(1942년) ‘전락’(1956년)은 전쟁의 전후(前後) 암울했던 시대상황이 낳은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상징처럼 된 부조리(不條理)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부조리를 이야기하다보면 우리는 또다시 햇빛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라고요. 이런 말도 남깁니다. “우리는 삶과 존재가 위대해지길 바란다. 동시에 우리가 언젠가 죽을 것을, 존재가 무의미해질 것도 알고 있다.”
이중적이며 이원적으로 살아온 식민지 출신 작가를 파리의 사회는 경원(敬遠)하지요. 그는 ‘도피처’를 찾습니다. 1946년 카뮈는 처음 보클뤼즈를 찾지요. 아비뇽이 주도(州都)로, 알프코트다쥐르 옆 레지옹이었습니다. 카뮈는 보클뤼즈에서 고향 알제리를 떠올렸고 ‘늘 무엇인가 용서받아야 할 것이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파리의 지식인 사회를 떠나고 싶어’ 그곳에 시골집을 얻습니다. 친구였던 시인 르네 샤르가 도움을 줬지요.
▲정면에 보이는 카페가 루르말랭 초입에 있는 것이다. 프랑스인들의 아침은 이런 카페에서 진한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시작된다./사진=이서현
▲루르말랭의 대표적인 레스토랑 거리. 관광객들과 주민들이 어울려 이 작은 마을을 활기차게 만들고 있다./사진=이서현
1957년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그는 명성과 함께 ‘부(富)’도 얻습니다. 그걸 바탕으로 밝고 한적한 집필 환경을 찾지요. 처음 떠올린 곳이 어머니의 나라 스페인이었지만 프랑코 총통 독재 치하여서 꺼림칙했습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도 생각했지만 문학과 평론의 기반 파리를 떠날 순 없었지요. 그에게 루르말랭을 권한 사람은 대학 시절부터의 스승인 철학자 장 그르니에입니다. 1958년 9월25일 카뮈는 그르니에에게 편지를 씁니다.
“저도 선생님의 영역으로 발을 들여놓은 거지요. 곰곰히 생각한 끝에 이 참한 집을 샀습니다.”
그가 말한 참한 집이 루르말랭 골목 언덕으로 이어지는 외과의사 올리빙 모노의 집이었습니다. 당시 가격 930만 프랑. 카뮈는 루르말랭의 집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1958년 8월31일 작가수첩에는 “뤼베롱쪽 전망이 아름다운 셋집을 돌아본다. 세찬 빛, 광대무변한 공간이 나를 흥분시킨다. 드디어 좀 정착을 해보고 싶다….”
그해 10월 집을 산 이후 처음 혼자 루르말랭으로 돌아오면서는 이런 글도 남기지요.
“나는 건조하고 싸늘한 미스트랄 바람 속에서 밤기차를 타고 와 내렸다. 반짝이는 햇빛 속에서 하루종일 기분좋은 흥분을 주체할 수 없다. 전신(全身)에 힘이 솟아나는 기분이다. 텅빈 집에 붉은 낙엽들이 바람을 타고 날아드는 것을 바라본다. 미스트랄 바람.”
루르말랭에서 카뮈의 집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동네 어귀 무료주차장에서 차를 세우고 50여 미터를 걸어가면 두 갈래 길이 나옵니다. 맨 왼쪽이 카뮈의 집으로 가는 언덕, 그 끝에는 작은 성당이 있습니다. 가운데로 가는 길은 중심부 작은 광장으로 카페들이 늘어서 있지요. 세명에게 물었는데 할머니와 청소부는 곧장 카뮈의 집을 손으로 가리킵니다. 한 중년 여성은 “딸이 살고 있다는데 본 적이 한번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곳이 카뮈의 집이다. 딸이 살고 있다는데 아무리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었다./사진=이서현
▲정면에 보이는 집이 카뮈가 살던 곳이다. 대문에 붉은색 표시를 해놓은 것이 마치 우리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다./사진=이서현
카뮈의 집은 그리 지형이 좋다고 볼 순 없습니다. 정면에서 보이는 문은 무슨 공사를 하는지 굳게 닫혀있었지만 기계들이 어지러이 놓여있었고 측면 쪽 정문은 굳게 닫혀있습니다. 몇번을 두드렸지만 대답이 없었지요. 아마도 무작정 찾아와 두드리는 ‘카뮈 순례자’가 많았을 겁니다. 언뜻 창(窓)틈으로 두툼한 책들이 보였습니다. 정면 쪽 문에 붉은 원에 대각선으로 쭉 그은 선이 마치 ‘성가시게 굴지마세요’라고 외치는듯 했습니다.
카뮈가 살던 루르말랭은 작지만 정이 넘치는 동네였습니다. 장이 열려 구경해보니 흥정이 요란했지요. 특이하게도 남자도 여자도 밀짚인지 갈대 비슷한 것으로 만든 가방을 들고 있습니다. 치즈며 과일도 풍성했고…. 카페와 식당은 점심나절 한껏 흥청대더니 오후 2시가 넘자 정적(靜寂)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와 가까워서 그런지 시에스타를 즐기러 모두 집으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거길 헤매는 두 이방인.
▲특이하게도 루르말랭 사람들은 남자고 여자고 간에 사진에 보이는 밀짚가방을 꼭 하나씩 들고 다녔다./사진=이서현
▲사진에 보이는 것은 양으로 만든 고트 치즈다. 가운데 치즈 위에 양의 얼굴을 앙증맞게 올려 놓았다./사진=이서현
1960년 1월3일 카뮈는 마지막 길을 떠납니다. 원래 열차로 아내, 아이들과 함께 파리로 가려했지만 마음을 바꿔 친구 미셀 갈리마르 부부의 승용차를 타고 가기로 했지요. 음울한 전조(前兆)는 며칠 전부터 있었습니다. 1959년 연말 카뮈는 느닷없이 아내에게 “만약 내가 죽으면 루르말랭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깁니다. 그에 앞서 알제리의 어머니에게 수표를 넣은 편지를 보냅니다.
“엄마가 언제나 변함없이 젊고 아름답기를 바라요.”
마지막 날 카뮈가 들고간 검은색 가방에는 훗날 발간되는 소설 ‘최초의 인간’ 원고와 일기, 니체의 ‘즐거운 학문’, 세익스피어의 ‘오셀로’, 신문에서 오려낸 운세(運勢), 그리고 소용없게 된 기차표가 들어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운세는 “불후의 명작을 1960년과 1965년 사이에 쓰게 된다”고 예언됐다지요. 다음날 카뮈가 탄 차는 안개 때문에 미끄러져 가로수를 두번 들이받습니다. 카뮈는 뒷문으로 튕겨나가 즉사하지요.
1월5일, 카뮈는 관(棺)속에 누워 그렇게도 사랑했던 루르말랭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의 묘는 마을 맞은편 공동묘지에 있었습니다. 아무 글귀없는 표석에 알베르 카뮈(1913~1960)라고만 새겨져 더 눈을 끌더군요. 그의 사후 가족은 카뮈가 그랬듯 우울한 삶을 이어갑니다. 마담 카뮈, 즉 카뮈의 부인은 정신병을 앓는 아들 장을 파리의 뤽상부르 공원 뒤 아파트에서 평생 돌보다 지금 루르말랭에 있는 카뮈의 묘 곁에 누워있습니다.
▲아무런 글귀도 없는 카뮈의 묘. 마을 맞은 편 공동묘지에 있다. 그 왼쪽 옆에는 아내의 묘가 있다./사진=이서현
루르말랭을 뒤로 하고 아비뇽으로 돌아가는 길, 멀리선 마을이 평화롭기 그지없습니다. 뒤로는 울퉁불퉁한 백색 암반을 드러낸 뤼브롱산맥이 저와 함께 질주하고 있습니다. 참을 수 없어 샛길로 산을 향해 들어갔습니다. 얼마나 셔터를 눌렀을까, 산 속에 사는 노부부와 사나운 개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하늘은 파란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 구름 한점 없었습니다. 이날도 석달 전의 그때처럼 사진 속에 남아 영원히 멈춰 있겠지요.
▲이것이 바로 프로방스의 색채다. 거친 담장에 누렇게 변색한 문틀과 거무튀튀한 여닫이문이 투명한 햇살 아래 조화를 이루고 있다./사진=이서현
▲프로방스 사람들은 해바라기를 좋아한다. 고흐도 이것에 반해 해바라기를 그렸는지 모른다./사진=이서현
▲집시인지 집시 의상을 한 것인지 두 남녀가 구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한낮의 정적과 나지막한 음악이 평화로운 조화를 이룬다./사진=이서현
월간조선 문갑식 편집장
◆2014.12.10 화가 샤갈이 바람 안피운 것은 집터 때문?
그것은 순전히 시인(詩人)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 코트다쥐르, 지중해와 맞닿은 리비에라 해변에 눈이 내린다니요. 청마 유치환이 지도를 놓고 ‘깃발’을 썼듯 ‘꽃’의 시인 김춘수가 부린 마법을 확인하고팠습니다.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같은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김춘수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입니다. 원문을 찾다 EBS국어교재에 등장한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이 시의 특징과 거리가 먼것은?’ ①사실적 묘사 ②산문적 어조 ③현재형 시제 ④회화적 이미지 ⑤환상적 분위기.
대체 답이 뭘까 궁금하면서도 30년도 더 된 제 예비고사(수능)날이 생각났습니다. 우리 국어교육은 왜 세월이 변해도 그대로일까, 맨날 틀린 것만 찾게하지말고 바른걸 가르치면 안될까하는 아쉬움같은 것이었습니다
▲마을 입구에서 본 생 폴 드방스. 언덕 위에 자리잡은 성곽 마을이다./사진=이서현
▲생 폴 드방스 성곽으로 들어가는 초입이다. 안내문에 샤갈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사진=이서현
보르도~아비뇽~루르말랭~칸으로 가는 길에 샤갈의 마을이 실제로 있다는 소식을 듣고 떠오른 이가 김춘수였습니다. 경남 통영 출신인 그가 샤갈이 살던 생 폴 드방스(Saint Paul de Vence)에 왔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생 폴 드방스는 영화제로 유명한 칸느(Cannes)~니스(Nice)가는 도로에서 벗어나 산으로 향하는 곳에 있습니다. 중간에 샤갈과 함께 현대회화의 대가로 불리는 파블로 피카소가 살았던 앙티브(Antibes)가 있지요. 알고보면 코트다쥐르는 그야말로 예술의 본향(本鄕)입니다. 제가 모르는 수많은 예술가들이 또 이곳 어느 마을에서 명작을 낳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과연 절경(絶景)은 절구(絶句)와 절창(絶唱)의 산실인 모양입니다.
마르크 샤갈은 1887년 8월7일 우리가 백(白)러시아라 부른 벨라루시 비테프스크에서 태어났습니다. ‘벨라’는 슬라브어로 ‘희다’, ‘루시’는 ‘러시아’를 말합니다. 냉전시절 소련(蘇聯)을 두고 이런 구분법이 많았지요. 청(靑)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불가리아 일대, 적(赤)러시아는 헝가리, 흑(黑)러시아는 러시아인데 이것은 중국인이 동서남북을 청-백-적-흑색으로 구분한데 기원했습니다. 이 관습이 터키에서 러시아로 전해졌다지요.
▲생 폴 드방스에는 골목이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다. 비오는 날 우산을 쓰고 이곳에 온 사람들이 보석을 찾듯 골목을 살피고 있다./사진=이서현
▲샤갈의 마을 생 폴 드방스는 성문처럼 된 곳을 지나야 한다. 중세시대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사진=이서현
샤갈의 본명은 ‘모이셰’였습니다. 이름에서 연상할 수 있듯 유태인이었지요. 그는 상트페테르부르그 왕실미술학교와 즈반체파 미술학교를 다녔습니다. 유명 디자이너 박스트의 제자였는데 1910년 처음 파리로 왔지요.
그가 파리로 온 데는 즈반체파 미술학교 때의 스승 레옹 바크스트의 권유가 있었습니다. 후원자의 도움으로 파리에 온 그는 많은 영감을 얻은 뒤 이름도 프랑스식으로 바꾸고 파리를 “제2의 비테프스크”라고 불렀습니다. 그곳에서 샤갈은 모딜리아니-수틴-아키펭코-레제같은 젊은 예술가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당시 실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야수파(野獸派)’와 ‘입체파(立體派)’였지요. 그것을 눈으로 목격하고 그들과 우정을 나눕니다. 샤갈은 “파리야말로 나의 예술과 인생의 진정한 배움터”라고 했습니다만 1914년 러시아로 돌아갔습니다. 8년간 미술학교를 세우면서 러시아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뒤 베를린을 거쳐 파리로 되돌아왔습니다.
샤갈은 1941년부터 7년간 미국에 체류했습니다. 유태인을 인종사냥한 나치를 피하기 위해서였지요. 이렇게 삶의 전반기를 혼돈 속에 보냈기에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파괴성’은 혁명과 전쟁의 산물이란 생각이 듭니다. 세상을 떠돌았지만 샤갈은 평생 고향을 그리워했습니다. 다만 돌아갈 수 없었을 뿐이지요. 그는 이런 글을 남깁니다.
“러시아제국도 소련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나는 신비에 쌓인 낯선 사람일 뿐이다.”
그러면서 예언과 같은 말도 합니다.
“아마도 유럽이 나와 나의 조국 러시아를 사랑해줄 것이다.”
그가 프랑스에 평생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중동(中東)을 여행했을 때라고 합니다.
혁명과 1차 대전을 겪은 그는 뭔가 비극적인 일이 일어날 것같은 공포를 느꼈는데 우려는 적중합니다. 나치를 피해 1948년까지 미국에 있던 그는 위험이 사라지자 프랑스로 돌아오며 파리 아닌 리비에라를 선택하지요.
샤갈의 반려는 어릴적 친구 벨라 로젠펠트였습니다. 그는 ‘생일’(1915년) ‘술잔을 들고 있는 이중초상’(1917년)에 등장합니다. 1944년 미국에서 그녀가 바이러스에 감염돼 갑자기 사망하자 샤갈은 우울증에 빠집니다.
▲샤갈의 가족 사진. 왼쪽 여성이 아내인데 샤갈의 그림에 자주 등장한 익숙한 얼굴이다./사진=이서현
▲샤갈은 다른 미술가들과 달리 아내를 사랑했다. 보통 프로방스에 자리잡은 미술가들은 복잡한 여자관계로 스캔들을 낳았다./사진=이서현
아홉달이나 붓을 들지못했던 샤갈은 딸 이다의 소개로 버지니아 해거드를 만나 7년간 연인으로 지냈고 1952년 발렌티나 브로드스키와 재혼합니다. 그때 활력을 얻어 그가 만든 것이 성경(聖經) 속 삽화작업이었지요. 누군가는 샤갈을 두고 평생 여자때문에 고생한 피카소보다 훨씬 행복하게 산 것 같다고 평했습니다. 제 단견으론 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살았던 샤갈과 바다 바로 옆에서 파도를 맞으며 산 피카소의 차이로 보였지요.
샤갈이 평생 열정을 가진 대상은 성서였습니다. 1950년부터 그 스스로 “성서속의 인물들이 내 영혼을 자극했다”고 했지요. 그는 마침내 성서 속의 삽화를 그리는데 69세에 시작한 작업이 81세가 돼야 끝나게 됩니다.
1973년 국립 마르크 샤갈 성서미술관이 개관할 때는 이런 말도 남깁니다.
“나는 성서야말로 시대를 불문하고 시문학의 가장 위대한 원천이라고 믿었으며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성서는 자연의 메아리입니다.”
이래서 샤갈의 삽화가 든 성서를 덜컥 사들였는데 제 지식으로는 이해하기가…. 포털을 뒤져보니 서울대 배철현 교수가 그 책에 대한 해설서를 냈다고 하니 우리말로 된 책을 먼저 읽고 영문 성서를 펼쳐볼까 합니다.
샤갈의 활동폭은 넓었지요. 회화 뿐 아니라 스테인드글라스-도자기-판화-벽화에서도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첫 개인전은 1차대전 직전 베를린에서 열었고요. 일부 비평가는 그의 활동폭 때문에 “깊이가 얕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피카소와 함께 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로 꼽힙니다. 1977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대십자(大十字) 훈장을 받았고 생존화가로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작품이 걸리는 영광도 맛보았습니다. 그는 1985년 97세로 사망할 때까지 마지막 20년을 생 폴 드방스에서 살았습니다. 난해하기 그지없는, 초현실주의로 불린 자기 작품에 대해 그는 “그것은 비이성적 꿈이 아니라 실체의 추억을 그린 것”이라고 했습니다.
▲샤갈 미술관은 다른 곳과 달리 촬영을 허용한다. 그래봤자 이런 작품을 그릴 수 있느냐는 자존심 같은 것이 엿보인다./사진=이서현
▲샤갈의 그림은 암호문 천국이다. 온갖 상징으로 가득 차 있어 그것을 모르면 이해하기 힘들다./사진=이서현
이를테면 샤갈의 그림에는 동물이 많이 등장하는데 거기서의 동물은 인간과 동등한 존재입니다. 물론 초록색 염소는 러시아에서 살아가는 유태인 가정, 비둘기는 연인(戀人), 안개꽃은 평화, 소는 고향을 표현했지만….
일례로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나와 마을’에도 상징이 가득합니다. 염소와 염소젖 짜는 여인은 샤갈이 염소를 사서 집으로 돌아가면서 자기 아내가 될 사람이 자신과 가족을 위해 젖을 짜는 장면을 암시하지요. 그림 아랫부분의 생명나무는 여인에게 영원히 헤어지지 말자는 프로포즈로, 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담과 이브가 따먹은 선악과가 달린 생명나무를 염두에 둔 것이며 윗부분의 교회는 여인과 결혼식을 올릴 암시라는둥. 여인이 거꾸로 매달린 장면은 하루종일 남편을 맘졸여 기다리는 여인의 심정을 보여주며 낫을 든 남자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행복감의 표현이고 검은색은 죽음의 뉘앙스가 아니라 밤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도 아쉬움이 있습니다. ‘샤갈의 52가지 상징’이라는 흥미로운 책을 니스의 샤갈박물관에서 발견했는데 하필 영문판이 없고 불문판만 있는 겁니다. 어찌나 아쉬운지, 영문판이 있었다면 도전해봤을텐데요.
각설하고 샤갈이 생을 마감했던 생 폴 드방스는 정말 프로방스적 색채가 물씬 풍기는 마을이었습니다. 언덕을 한참 올라가면 마그재단 미술관이 나오고 그 오른쪽으로 중세 성곽(城郭)에 둘러싸인 마을이 시작됩니다. 철제 대포가 뜬금없이 성벽에 박혀있는 궁륭형 문을 지나면 좁은 골목 사이로 아틀리에와 기념품 판매점과 프로방스 냄새로 가득한 각종 향(香)을 파는 가게가 이어지지요. 성곽 너머로는 니스의 지중해변이 펼쳐집니다. 반대편 산으로는 또다른 마을이, 아랫쪽에도 또다른 마을이 샤갈이 살던 동네를 감싸고 있는 풍경이 비현실적이리만치 아름답습니다. 햇볕 좋은 날에는 니스의 해변에서 넘실대는 푸른 파도와 멋진 조화를 이루겠지요. 마을 한복판, 성곽 옆에 오래된 나무를 중심으로 멋진 레스토랑에 온세계 사람들이 다 모여있습니다. ‘tilleul’이라는 간판이 걸려있는데 서버에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바로 옆 나무를 가리킵니다. 보리수.
▲이 색채가 바로 프로방스적인 색깔이다. 햇빛과 돌이 묘한 조화를 이뤄 내는 색깔이다./사진=이서현
▲프랑스 지중해변에는 언덕 위에 지은 집들이 많다. 이곳에서는 지중해가 손에 잡힐듯 보인다./사진=이서현
▲샤갈의 마을 한복판에는 나이 먹은 보리수가 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한 보리수나무다./사진=이서현
▲보리수 나무 그늘밑의 레스토랑 이름도 '보리수'였다./사진=이서현
생 폴 드방스는 마을 전체가 샤갈 박물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의 진품은 없지만 도로표지판이나 게시판에 샤갈 그림이 빠짐없이 들어가있고 후배 예술가들이 앞다퉈 마을 곳곳에 자신의 작품을 헌정했지요. 샤갈의 마을에 맘을 뺏긴 나머지 이틀 연속 그곳을 찾았습니다. 첫날은 봄이 온 것처럼 화사하리만치 햇볕이 좋았는데 둘쨋날은 비가 촉촉히 대지를 적시고 있었습니다만 구름낀 비오는 날도 그런대로 운치가 있었습니다. 몇백년이 된듯한 돌 사이로 빗물이 흐르고 어두운 구름속에 대낮부터 불을 밝힌 골목속 상점을 보며 샤갈이 그렸던 환상의 세계에 진입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요. 이렇게 세상은 날씨를 바꾸며 변주(變奏)하지요.
생 폴 드방스에서 가까운 니스에는 국립샤갈박물관과 국립마티스박물관이 있습니다만 정작 마을어귀 마그재단 미술관은 가지 말기를 권합니다. 안내원으로부터 ‘샤갈작품이 많다’는 말에 15유로를 낸 뒤 후회했습니다.
샤갈 작품은 두점뿐, 화가 나 “왜 거짓말을 했느냐”고 따지니 서른살 안팎의 젊은이가 미술관 벽을 가리키며 “저기 있다”는 겁니다. 샤갈의 타일작품이었는데 그거 하나로 샤갈작품이 많다고 했으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유럽에서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대부분 루브르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5~10유로 정도지요. 택일을 잘하면 무료인 경우도 많고 영국같은 경우는 대부분 국가자산은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관념 때문에 무료로 공개합니다. 아무래도 개인 미술관이다보니 수지를 맞추려했겠지만 그렇더라도 비싼 가격에 부정확한 광고를 일삼는 것을 보니 아름다운 프랑스의 아름답지 않은 상술(商術)이랄까, 그런 일면을 본 것같아 마음이 꽤 언짢았습니다.
▲마히트 미술관에 있는 샤갈 벽화. 이 벽화와 다른 그림 한점이 있다며 15유로를 받는 아주 비싼 곳이다./사진=이서현
▲니스에 있는 국립샤갈미술관. 프로방스답게 심플하게 건축됐다./사진=이서현
▲프랑스인들은 멋쟁이다. 나이에 관계없이 멋을 부릴줄 아는 국민이라는 생각이 프랑스를 다녀보면 든다./사진=이서현
▲생 폴 드방스 마을 뒤쪽으로는 또다른 산위의 마을이 보인다. 마치 우리 성북동처럼 자연과 사람이 어울린 곳이다./사진=이서현
월간조선 문갑식
◆2015.08.29 ‘사자의 언덕’서 진군 멈춘 나폴레옹 … “비가 유럽사를 바꿨다”
▲워털루 기념관의 파노라마관에 그려져 있는 당시 전투 장면. 워털루 인근 벌판에서 프랑스군과 연합군이 맞붙었다. 1815년 6월 18일의 이 전투로 프랑스군 4만 명, 영 연합군 1만5000명, 프러시아군 7000명 등 6만 명이 넘는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사진 신세계]
“만일 1815년 6월 17일과 18일 사이의 밤에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유럽의 미래는 달라졌을 것이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 제2부 1편 ‘워털루’의 3장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위고는 적었다. “물이 몇 방울 더 많으냐 적으냐로 나폴레옹의 운명이 갈렸다. (…) 하늘을 가로질러 간, 때아닌 구름 한 조각은 세계 하나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지난 15일, 벨기에 중부에 있는 소도시 워털루(Waterloo)를 찾았다. 200년 전 그날처럼 비가 내리고 있었다. 1815년 6월 18일, 유럽을 호령하던 나폴레옹 1세(1769~1821)는 워털루에서 영국·프러시아·네덜란드 등으로 구성된 연합군에 패한 후 두 번째로 오른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유배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로써 프랑스의 유럽 지배는 끝나고, 주도권은 영국으로 넘어갔다. 이후 나폴레옹에 의해 촉발된 민족주의가 유럽을 휩쓸었고 유럽의 지도는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워털루 벌판에서 10시간 동안 벌어진 하나의 전투가 유럽사·인류사를 바꿔놓은 것이다.
기자와 함께 이곳을 찾은 건 한국 대학생 20명. 신세계가 지난해부터 진행 중인 인문학 프로그램 ‘지식향연’에 선발된 ‘청년영웅단’ 2기 학생들이다. 이들은 워털루 전투 200주년을 맞아 ‘세상을 바꾼 청년영웅, 나폴레옹’을 테마로 서유럽 곳곳에 있는 나폴레옹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나폴레옹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파리 개선문, 나폴레옹이 잠들어있는 앵발리드 등을 거쳐 워털루에 도착했다. “어? 오늘 나폴레옹 생일이네.”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던 누군가의 말에 학생들이 웅성댔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69년 8월 15일, 지중해 서쪽의 작은 섬 코르시카에서 태어났다.
▲왼쪽부터 워털루 기념관의 마네킹으로 꾸민 나폴레옹과 부하들의 작전회의 장면, 파리 앵발리드에 있는 나폴레옹의 관, 사자의 언덕 사자상 아래서 벌판을 바라보는 신세계 ‘지식향연’ 참가 대학생들.
워털루 벌판 중심에 있는 ‘사자의 언덕(Butte du Lion)’을 오른다. 비 때문에 계단이 미끄럽다. 올라서니 사방이 드넓은 벌판이다. “결전의 날 나폴레옹은 날씨 때문에 공격을 지연시킵니다. 땅이 질척여서 진군이 어려우리라 판단한 겁니다. 결과적으로 블뤼허의 프러시아 군대가 워털루에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준 셈이 됐어요. 의도치 않은 실책이었죠.” 대학생들을 인솔하고 유럽 탐방에 나선 역사저술가 송동훈(45)씨가 언덕 한편에 있는 군사 배치도를 들여다보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나폴레옹의 패전은 개인의 오만 때문?=워털루 전투는 전쟁사에 길이 남을 박빙의 승부였다. 사령관들의 치열한 두뇌 싸움과 전술적 판단, 엎치락뒤치락했던 혼전은 지금도 역사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6만9000병력과 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영 연합군 6만7000명이 맞붙었고, 말 3만5000마리와 대포 500문이 동원됐다.
전투는 오전 11시25분쯤 프랑스군이 연합군이 포진한 몽생장(Mont-Saint-Jean)을 향해 포격을 가하면서 시작됐다. 포격과 동시에 프랑스군이 진격했다. 웰링턴의 군대는 산등성이에 횡대로 포진해 프랑스군을 맞았다. 밀고 밀리는 공방이 계속됐고 오후 5시가 되자 견고하던 연합군은 프랑스 기병의 돌격에 밀리는 듯했다. 위기에 처한 웰링턴을 구원한 것은 워털루에 당도한 4만8000명의 프러시아군이었다. 블뤼허 장군이 이끄는 프러시아군의 합류로 연합군은 확실한 승기를 잡게 되고, 프랑스는 근위대까지 투입하며 최후의 결전을 펼쳤지만 결국 퇴각한다.
전투 200주년을 맞아 사자의 언덕 아래에 문을 연 워털루 기념관은 그림과 지도, 다양한 시청각 자료를 활용해 관람객들이 당시 상황을 상세히 이해하도록 안내한다. 전투 과정을 찍은 3D 극영화도 상영 중이다. 연구자들은 이날 나폴레옹이 여러 가지 전략적 오판을 했다고 말한다. 농가에 소수의 병력을 배치해 프랑스군을 끌어들인 웰링턴의 ‘미끼’에 말려든 것, 3만 병력을 이끈 그루시 후작에게 프러시아군을 계속 뒤쫓도록 명령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본대를 지원할 병력이 부족하게 된 것 등이 대표적인 실책으로 꼽힌다. 다혈질인 네 원수에게 좌익을 맡긴 ‘인사상의 실수’도 지적된다.
기념관 중앙에는 나폴레옹이 참모들과 함께 회의를 하는 모습이 마네킹으로 재연돼 있다. 나폴레옹은 입을 꾹 다문 심각한 표정이다. 송동훈 작가가 학생들에게 말했다. “나폴레옹의 오만과 실수, 잘못된 인물 기용이 패배를 불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워털루에서 이겼다면 나폴레옹의 유럽 제패가 가능했을까요. 1808년 스페인 원정에서 실패했을 때부터 나폴레옹에겐 몰락의 징후가 나타났다고 할 수 있어요. 나라뿐 아니라 개인과 조직도 마찬가지입니다. 몰락에는 늘 징후가 있기 마련이죠.” 워털루에서의 패배가 결정적이긴 했지만, 이전의 수많은 전쟁으로 인해 국력을 소모한 나폴레옹의 프랑스에 더 이상의 승리는 어려웠다는 의미다.
▲워털루 벌판 한가운데 있는 ‘사자의 언덕(Buttedu Lion)’. 계단 226개를 올라가야 한다.
◆승자와 패자, 다른 기억=워털루 전투의 피해는 컸다. 양측 합쳐 6만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올해 6월 18일 사자의 언덕에서는 유럽 각국의 왕족과 전투에 참여했던 프랑스·영국·독일·네덜란드·벨기에 군인의 후손들이 참석해 워털루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열었다. 워털루 평원에서는 당시의 전투복을 갖춰 입은 5000명의 자원자들과 말 360마리, 대포 100문이 동원된 모의 전투도 펼쳐졌다. 유럽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장에서 싸우다 목숨을 잃은 이들을 기억하자는 의미였다.
하지만 200주년을 맞는 각국의 표정은 사뭇 다르다. 영국에서는 윈저궁을 비롯해 곳곳에서 워털루 전투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조용하다. 6월에는 벨기에가 사자의 언덕 모습을 담은 워털루 200주년 기념주화를 발행하려 하자 프랑스가 이에 반발하는 일도 있었다. 이미 통합의 길에 들어선 유럽이지만, 아직도 민족의 기억은 유효하다.
개인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나폴레옹은 유럽의 근대화를 앞당긴 주역이었다. 신분에 상관없이 관리를 선발했고 모든 국민이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갖는다고 선언했다. 세계의 근대법과 행정체계는 그의 아이디어에 기반을 뒀다. 나폴레옹은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역사는 그가 가리켰던 곳을 향했다. “비록 실패했지만 나폴레옹은 역사가 향하는 방향을 읽어내고 구체제에 계속해서 도전했다. 이번 여행을 통해 한국 청년들이 그런 도전정신을 배웠으면 한다”고 송 작가는 말했다. 한 영웅의 삶과 업적을 돌아본 대학생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이창훈(경북대 영어교육과 4학년)씨는 “개인이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제대로 갖춰진 시스템과 역사의 도도한 흐름은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유리아(건국대 국제무역학과 4학년)씨는 “근대의 뿌리가 된 장면들을 현장에서 접하면서 세계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고 했다. 빅토르 위고는 위 책에서 나폴레옹의 삶을 이렇게 정리한다. “위대한 시대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위대한 사람의 소멸이 필요했다.”
워털루(벨기에)=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워털루는 영국군 주둔 마을 … 실제 전투는 5㎞ 남쪽 ‘몽생장 고지’
나폴레옹의 최후 전투가 벌어진 곳은 사실 워털루가 아니었다. 워털루에서 남쪽으로 약 5㎞ 떨어진 곳에 위치한 몽생장 고지였다. 이날 워털루 마을에서는 실제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음에도 ‘워털루 전투’로 불리게 된 것은 승자의 선택이었다. 워털루는 영국군 총사령부가 있던 마을의 이름이다. 웰링턴은 승전 후 이곳의 이름을 따 ‘워털루 전투’라고 명명했다. 영국군 총사령부로 사용된 건물은 현재 ‘웰링턴 기념관’이 됐다. 기념관에는 웰링턴이 전투에서 이긴 후 여왕에게 승전을 알리는 편지를 썼던 책상이 남아 있다.
패전국인 프랑스는 처음 실제 전투가 일어난 곳의 지명을 따 ‘몽생장 전투’라고 불렀지만 차츰 영국의 표기를 따르게 됐다. 독일에서는 자신들의 지원으로 이긴 이 전투를 ‘아름다운 동맹 전투(Schlacht bei Belle-Alliance)’라고 부르기도 한다. 블뤼허와 웰링턴이 승리 이후 처음으로 재회한 여관의 이름이 ‘La Belle Alliance’였기 때문이다. 프러시아군 사령관이었던 블뤼허는 유럽의 여러 나라가 힘을 합쳐 프랑스에 맞섰다는 의미를 살려 ‘아름다운 동맹 전투’로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전투 중 나폴레옹의 사령부로 쓰이기도 했던 이 여관은 현재도 나이트클럽으로 사용 중이다.
이렇게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전투는 차츰 ‘워털루’라는 명칭으로 정착된다. 다른 명칭에 비해 영어권 사람이 쉽게 발음할 수 있었던 게 큰 이유라는 설도 있다.
<참고 : 위키피디아, 『빅토르 위고의 워털루 전투』(책세상), 블로거 Nasica>
Saturday - 중앙일보
◆2017.03.25 《 붓다의 예언 : 미륵부처는 계두국에서 출현한다 》
◎ 增壹阿含經 증일아함경 제49권
『미래세상에 미륵이라는 부처가 나올 것이다. 그때에 그 나라의 이름은 계두(鷄頭)로서, 왕이 다스리는 경계는 동서가 12요오나요 남북이 7요오나이며 국민이 번성하고 곡식이 풍성할 것이다.』
미래 세계를 이끌어 갈 미륵, 즉 정신적 지도자는 계두(닭머리,닭)라는 이름을 가진 강대국으로 농업이 발달한 나라에서 출현하리라는 것이 붓다의 예언이다.
《 계두국은 어느 나라인가 》
수천년전 석가모니 부처는 장차 계두(鷄頭), 『닭머리』라는 이름을 가진 국가에서 미륵부처가 출현할 것을 예고했다. 그렇다면, 오랜 역사동안 계속 계두, 『닭머리』라고 불리어왔고 또한 미륵출현 시기에도 계두라는 이름을 가진 국가는 어디인가?
아래 내용은 수천년 전에 석가모니부처께서 미륵부처의 출현국으로 예고한 "계두국"이 서방의 "프랑스"임을 역사적 및 지정학적 관점에서 밝힌 것이다.
《 계두국은 서방의 프랑스이다 》
수천년 전부터 그리스와 로마인들은 알프스산 너머에 거주하는 키가 크고 금발을 가진 종족을 Gaulois(골로와), 『골』인이라고 불렀다. 골로와는 “수탉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속칭으로는『닭대가리 민족』 이라고도 불렀다. 이는 로마의 시저가 갈리아의 집정사령관으로 있을 때 갈리아에 대해 기록한 <갈리아 전승기>가 역사적으로도 증명하고 있다.
켈트족은 조상 대대로 수탉을 숭배하였다. 그런 연유로 켈트 이외의 지역에서 켈트족을 호칭할 때는 “골”족이라고 불렀다. gaulois(수탉)은 라틴어로 gallus이며, 여기서 Gallia(갈리아) 또는 Gaule(골)이란 단어가 파생되었다. 고대 프랑스를 지칭할 때는 갈리아 또는 골이라고 불렀다.
골인들은 점차 세력을 확장했으나 BC 3세기경부터는 수세로 전환되어 로마에 의해 북부 골지역부터 점령되기 시작하였다. (아래 지도 참고)
▲골로 표기된 고대 서방세계의 지도
「프랑스」란 이름의 탄생역사
그후 골은 여러 지역으로 분리되어 소왕국 형태로 유지되어 오다가 프랑크족이 그 소왕국들을 다시 통합했다. 그리고 AD 486년경 프랑크왕국은 동서프랑크로 분리되어, 동프랑크는 독일이 되고 서프랑크는 현재 프랑스의 전신인 서프랑크왕국이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프랑스라는 국명은 프랑크왕국에서 전래되었다. 프랑스 역사가들은 그들의 조상 골인들이 로마인들의 눈에 수탉의 성질처럼 솔직하고 쾌활한 성격을 소유한 민족으로 여겨져서 골로와로 불리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사학자이자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투스(BC 5세기초)의 기록에 의하면, BC 6세기경 페르시아 다리우스왕이 골(갈리아)출신의 스키락스가 지휘하는 함대를 인도의 인더스강 유역까지 파견하여 탐색케 했다고 하니 당시 골족의 명성을 추정할 수 있다.
과거 붓다는 미래시대에 나타날 미륵을 예고할 때 이미 계두라는 민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계두(鷄頭)국이라고 표현하였다. 붓다 생존 당시는 인도 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국가들의 형성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개념보다 민족의 개념이 더 강조되었다. 인류의 역사과정상 과거부터 오늘까지 오랜 세월동안 닭이라는 호칭을 계승해 온 민족은 프랑스가 유일하다. 프랑스는 곧 골로와(Gaulois)이고 갈리아(Gallia), 골(Gaule)이며 골은 바로 “수탉을 숭배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붓다가 미륵의 출현을 예고한 계두국은 프랑스이다.
참고사항
「서방」석가모니부처께서 예고한 계두국이 지리적으로 인도의 서쪽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 계두국의 계두왕 드 골(De Gaulle) 〉
▲드골
드골(1890-1970)은 북프랑스 릴의 카톨릭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후일 장성이 되어 제2차세계대전 당시 기갑사단장이었으며, 1941년 히틀러의 침공으로 프랑스가 패망하자 영국 런던에 프랑스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1944년 프랑스 해방 후 드골은 임시정부 수반이 되었고 1945년~1946년 수상을 역임했으며, 1958년 국민투표를 통해 제5공화국을 출범시킨 뒤 1959년 프랑스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10년의 집권기간 동안 프랑스를 정치적으로 안정시키고 국제적으로 프랑스의 입지를 높였으나, 1969년 국민투표에서 패배하여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드골은 대통령 재직 중 위대한 프랑스의 재건을 위한 <골리즘>을 제창하기도 했다.(참고: 미륵라엘은 드골 치하의 1946년에 출생했다)
골리즘의 핵심은
1) 미국의 세력을 견제하면서 프랑스의 독립적 지위를 확보하고 아울러 유럽의 독립성을 추구하며,
2) 약화된 프랑스를 세계열강의 대열에 복귀시키고 프랑스가 역사상 누렸던 영광과 위대성을 회복하며, 유럽 재건과정에서 프랑스의 주도권 확보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그는 “함께 뭉친 유럽”, “단결한 유럽”을 구상하고 있었다. (종전 후 프랑스는 UN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이 되었다)
3) 국제정치사는 국제사회에서 유럽의 정통성을 재건하는 동시에 유럽이 세계정치에서 누렸던 주체적 역할을 다시 담당해야 한다는 그의 사상을 <골리즘>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프랑스 역사가들은 드골 대통령 재직 시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드골 집권 후 외국 자본이 프랑스로 유입되자 국내사정은 일변했고 외화보유고가 20억 달러에 달했다. 경제적 상황이 개선됨에 따라 자주외교정책을 추진하게 되었으며, 드골정부는 통합유럽 구상을 지지하고 유럽공동시장과 대서양공동체 등의 추진에 적극 찬동했다.
◎드골 집권 후 정부의 시책으로 인구가 현저히 증가되었으며, 국민 대부분은 자신의 소득으로 생활할 수 있었고 젊은 사람들은 과감히 일찍 결혼했다. 또 위생의 개선으로 사망률이 저하했으며, 의학의 발전으로 각종 질병을 극복할 수 있었다.
◎특히 프랑스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농업국으로서 러시아를 제외하면 밀과 우유의 생산량이 유럽국들 중에서 가장 많으며 과일, 육류 등 기타 농축산물도 매우 풍부하다.
이상 계두국 프랑스의 문화적 상황과 계두왕에 대한 정보를 살펴보았는데, 이는 불경에 예고된 계두국의 모습과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다음과 같다.
드골(De Gaulle)이라는 이름에 관해서이다.
프랑스 역사가들의 기술에 의하면 드골 가문의 성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역사적 유래를 가지고 있다. De Gaulle이라는 성은 프랑스 전역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외세의 침략에 애국적으로 저항한 영웅적인 행위와 관련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Gaulle"이란 고대 프랑스의 국가 이름이며, 용맹한 켈트인들(프랑스인들의 조상)을 부를 때 골(Gaulle)인이라고 불렀다. 이런 연유로 언제부터인가 <골>이라는 성이 출현했으나 그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골<Gaulle>은 수탉을 의미한다!
즉, De Gaulle은 이름 그대로 계두국의 계두왕 <수탉왕>이다!
〈 프랑스의 심볼들 〉
닭은 새벽을 알리는 조류로서, 그리스의 아폴로 신화에서는 닭을 천지개벽을 알리는 존재의 상징으로 삼았다. 또한 닭은 싸울 때 후퇴하지 않는 용맹성이 있어서 강력한 민족성을 표상하는 심볼로 사용되었다.
고대 프랑스 사람들은 자신들의 심볼을 닭으로 나타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수탉은 용맹하면서도 사랑스럽고 또 싸우기를 좋아하는 강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이미 고대부터 옛 프랑스인들은 민병대를 구성할 때 용맹한 파이터의 상징으로 닭을 사용했다고 한다.
고대부터 프랑스의 심볼이었던 닭은 중세시대에는 각종 무기, 메달에도 문양으로 새겨졌다.
특히 중세시대에는 희망과 신념을 나타내는 종교적인 상징으로도 쓰였으며, 프랑스 왕들의 초상화와 화폐에도 프랑스를 대표하는 동물로 등장했다.
프랑스 혁명 시기 혁명군들의 깃발과 모자에도 닭을 그린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수탉 심볼은 루브르박물관과 베르사이유궁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집정관의 도장에도 새겨졌고, 박애와 우의의 상징으로도 그려졌다. 제1차세계대전 기념탑에서도 발견되며, 프랑스 시골촌락에서는 지금도 수탉 심볼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또 우표, 각종 스포츠용품에도, 에펠탑 기념메달에도 사용되고 있다.
1998년 월드컵 축구대회를 프랑스가 개최했을 때 프랑스는 수탉을 표현한 푸틱스(Footix)를 마스코트로 사용했으며, 국제적인 경기 때마다 항상 닭을 상징물로 쓰고 있다. 극성스러운 프랑스 관중들은 살아있는 닭을 들고 흔들며 열광적으로 응원하기도 한다.
현대에 들어와서 프랑스는 자신들의 심볼을 골로와(골)의 코커넬<닭>이라 부르고 있다.
18세기 프랑스혁명 당시 시민들은 닭을 그린 깃발을 앞세웠다
《 프랑스 국토는 수탉머리(鷄頭: 닭머리)형태와 육각형 》
오른쪽의 벼슬을 달고 있는 수탉 머리와 비교하면, 프랑스의 국토는 마치 닭이 입을 벌리고 목을 길게 빼며 소리를 지르는 형상에 가깝다. 이런 국토 모습은 공중에서 조감하였을 때 잘 드러나며, 마치 새벽을 알리는 수탉의 모습이 상상된다. 특히 프랑스 역사학자들은 프랑스 국토를 육각형(Hexagon)이라고 주장한다.
육각형은 우주의 무한성을 나타내는 무한의 상징(The Symbol of INFINITY)과 연관됨을 생각하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다. 프랑스 국토가 과연 육각형인가에 대해서는, 한국인들이 한반도가 호랑이 형상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상기한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일보
◆나폴레옹 피의 전투
▲1812년 나폴레옹 군대와 러시아 군대가 모스코바 외곽에서 9.7. 하로동안 피의 전투를 벌여 양측 10만여명이 전사한 전투 200주년을 기념 재현 - 러시아
◆프랑스 혁명기념일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 13, 7. 14. 외인 용병대를 선두로 아프리카 13개국 군인 독일 프랑스 순인들이 참여하는 바스티유데이 퍼레이드가 개선문을 배경으로 펼쳐지고 있다
▲ 혁명 224주년 기념 13. 7. 14. 파리 에펠탑의 불꽃놀이
▲혁명 기념일 14.7.14
▲파리 니스 불꽃놀이 16.7.14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
◆2015.11.16 파리 학살 현장
▲이소벨 바우더리가 15일 페이스북에 올린 파리 테러 상황을 전하는 글./이소벨 바우더리 페이스북 캡처
13일 밤 벌어진 ‘파리 연쇄 테러’ 생존자가 1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전하며 희생자를 위로하는 글을 올렸다.
글을 본 전 세계 240만명은 ‘좋아요’를 눌러 생존자를 위로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대학 졸업생인 이소벨 바우더리(22)는 피묻은 자신의 옷 사진과 함께 “당신은 당신에게 이런 일이 닥칠 거라곤 절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라며 글을 시작했다.
바우더리는 “금요일 록 공연에서 모두가 즐거운 분위기에서 춤추며 웃고 있었다”며 “한 남자가 정면 입구로 들어와 총을 난사할 때도 우리는 순진하게 쇼의 일부일 거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그것은 단순한 테러 공격이 아닌 학살이었다”며 “내 바로 앞에서 십여 명이 총에 맞았고 사방은 피바다가 됐다”고 했다. 그는 “여자친구의 시신을 안은 남자들의 울음이 공연장에 울려 퍼졌다”며 “짓밟힌 미래, 가슴 찢어지는 가족, 모두가 순식간에 벌어졌다”고 했다.
그는 “충격과 공포에 빠진 나는 한 시간이 넘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이들 속에서 죽은 척했다”면서 “나는 운이 좋아 살아남았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이 그러지 못했다”고 했다. 이어 “독수리처럼 원을 그리며 돌던 테러범들의 모습은 남은 평생 나를 쫓아다닐 것”이라며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고, 누군가 이 모든 게 악몽이었다고 얘기해주길 바랐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바우더리는 “이 공포에서 살아남으면서 영웅들을 조명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그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흐느끼는 나를 안심시키고 머리를 감싸준 남자, 죽어가면서도 사랑의 말을 전하며 내게 용기를 준 연인, 수백명을 구한 경찰, 사랑하는 이를 잃을 것을 뒤늦게 실감하는 나를 위로해준 낯선 사람들, 생존자에게 집 대문을 열어준 여성, 피로 얼룩진 이에게 새 옷을 사준 친구 등 모두가 영웅”이라고 했다.
이어 “공연장에서 살해된 불운한 80여명, 오늘을 맞이하지 못한 그들이 안쓰럽다. 그 고통을 치유할 길이 없다”면서도 “나는 희생자들이 마지막 순간에 테러를 저지른 금수 같은 자들을 생각하지 않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렸다고 확신한다”고 했다.
그는 “피바다 속에 누워 22년 인생을 끝낼 총알을 기다리면서도 나는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을 떠올렸고 그들에게 사랑한다고 되뇌었다 ”고 했다. 그러면서 “그들이 내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 알아주길 바랐고,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인간의 선함을 믿길 바랐다”고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숨진) 천사들이여, 저 세상에서도 평안하길, 당신들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라며 글을 맺었다.
바우더리가 쓴 이 페이스북 글은 ‘좋아요’ 240만 개 이상을 기록했고 70만 회가량 공유됐다.
◆2015.11.16 또 다른 테러 시대의 시작, 그 불안한 前兆
베이루트 테러, 러시아 여객기 폭파에 이어 지난 주말 파리 테러까지 이슬람 무장 단체 '이슬람국가'(IS)는 숨 가쁘게 외부를 향한 공격을 이어왔다. 무모하다. 이들은 지금 미국, 영국, 프랑스 및 러시아의 공습을 받고 있다. 여기에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정부군은 물론 역내 강국인 터키, 이라크 및 이란 민병대와도 싸워야 하는 형국이다. 하나같이 감당하기 힘든 상대들이다. 그럼에도 자꾸 전선을 넓히고 적을 양산한다. 최근에는 중국 내 신장(新疆)위구르 자치구 무슬림들의 봉기를 촉구하기도 했다. 전쟁의 일반적인 셈법에 견주어보면 전선을 막무가내로 넓히는 전술은 상식적이지 않다. 왜 이들은 비상식적인 행태를 지속하는 것일까?
전쟁관과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서방 정보 당국에 따르면 IS에 가담한 지하디스트 중 최소 20%가 자살 테러 명부에 자신들의 이름을 올려놓았다고 한다. 전투 요원 1만5000명 중 약 3000명이 언제든 자살 테러를 자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비단 현재 활동하는 전투 요원뿐만 아니다. 극단주의에 동조하는 역외의 잠재적 테러 세력들도 자살 테러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자살을 감수하는 지하디스트를 '샤히드'(순교자)라 부른다. 교활하고 노회한 IS 핵심 지도부는 샤히드를 이용, 전선을 구성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은 기존 전쟁 상대와 사뭇 다르다. 파시스트들이나 볼셰비키들이 자살 테러를 했다는 기록을 본 적이 없다. 일본 군국주의 가미카제(神風) 정도가 비근한 예라 할 수 있으나 최근에는 그들도 분위기에 휩싸여 어쩔 수 없이 떠밀려갔다는 증언도 다수 나오고 있다. 반면 일부 무슬림 젊은이들은 IS 지도부에 속아 내세에 대한 그릇된 환각에 사로잡혀 무모하게 생명을 던진다. 이 땅의 승리와 영광도 좋지만, 거기에만 국한되지 않고 죽음과 동시에 가게 될 천국 환상에 사로잡혀 싸운다. 500명 가까운 사상자를 낸 파리 테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들은 적이 강할수록 투쟁 의지를 더욱 불태운다. 신장위구르에서의 도발로 만일 중국마저 끌어들이게 된다면 IS는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전체와 전쟁을 벌이는 구도를 만들게 된다. 유례없는 일이다. 동시에 이들이 바라는 일이다. 어쩌면 미국의 지상군 투입을 내심 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죽어도 상관없으니 세계 초강대국과 맞서 싸우며 칼리프의 나라를 세운다는 이들의 망상은 국제사회가 그간 경험하지 못했던 미증유의 대테러 전장(戰場)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별다른 희망 없이 무능한 정부 밑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던 아랍 젊은이들 일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높은 실업률과 낮은 삶의 질로 무기력하고 불만 가득했던 이들에게 IS가 마치 이슬람 세계를 구원하는 영웅들인 것 같은 잘못된 환상을 품게 한다. 가담자가 줄지 않는 이유다.
쉽지 않은 싸움이다. 국제사회의 공동 노력으로 화력(火力)을 집중해 이들의 거점을 타격하는 것은 필수적인 수순이다. 그러나 정작 더 중요한 싸움은 다른 곳에 있다. 죽음을 미화(美化)하며 무차별한 살상에 자신의 몸을 던지는 아랍 젊은이들을 그 비극적 미망(迷妄)에서 어떻게 깨워 내는가에 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극단주의로 몰려가는 이 힘을 되돌려, 자신의 나라, 자신의 고향에서 희망을 갖고 살아낼 수 있는 환경을 어떻게 만들어 내는가에 달려 있다.
조선일보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프랑스의 정치(인) 이야기
◆2017.05.22 마크롱의 사랑, 발자크의 사랑
지난 5월 8일 이후 세계인의 화제는 단연 프랑스 대통령 부부의 러브스토리다. 대통령 당선자 에마뉘엘 마크롱(40)과 퍼스트레이디 브리지트 트로뉴(64).
두 사람의 인연은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크롱이 지방의 고교 재학 시절 트로뉴는 문학 담당 교사였다. 트로뉴는 연극동아리 지도교사로 있으면서 고교 2년생인 마크롱을 만났다. 트로뉴는 당시 은행원 남편과의 사이에 자녀 셋을 두고 있었다. 마크롱과 트로뉴는 서로에게 끌려들어갔다. 학생과 교사 간의 사랑은 흔한 일이지만 두 사람 사이의 교감은 차원이 달랐던 것 같다. 마크롱은 자서전에서 “우리는 서로의 지적인 매력에 압도됐고, 점차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했다”고 썼다. 마크롱이 부모의 권유에 못 이겨 파리에 있는 고등학교로 전학을 가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잊지 못했다. 트로뉴가 2006년 남편과 이혼하면서 두 사람의 만남은 다시 이어졌고, 2007년 두 사람은 결혼했다. 트로뉴 나이 쉰네 살.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나이였다.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인들은 이 러브스토리를 한국에서처럼 특별하게 받아들이진 않는 것 같다. 한국 사회에선 충격 그 자체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마크롱의 사랑을 한국 남성의 관점에서 보자. 인터넷 우스개 중에 이런 게 있다. 20대 남자가 여자를 선택하는 최우선 기준은 ‘예쁜 여자’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이 기준은 변하지 않는다. 50대 남자 역시 ‘예쁜 여자’다. 한국처럼 여성을 겉모습, 즉 외면(外面)으로만 평가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 없다. 그 증거는 헤아릴 수도 없다. TV 뉴스 여성 앵커는 30대를 넘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뉴스앵커만 그런가. 기상캐스터 역시 외모가 최고의 선발 기준이다. 대놓고 외모로 차별한다. 그러다 물광 피부의 윤기가 마르면 어느 순간 팽(烹)당한다.
마크롱을 보면서 떠오른 사람이 프랑스 소설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0). 마크롱은 “아내가 없었으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발자크에게 트로뉴 같은 여성이 베르니 부인이었다. 표절·짜깁기 삼류 소설이나 써대던 스물두 살 발자크 앞에 마흔다섯 베르니 부인이 나타났다. 베르니 부인은 자녀가 일곱 명이나 되었고 손주까지 있었다. 발자크와 베르니 부인은 나이 차를 뛰어넘어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했고 이것이 발자크를 새롭게 태어나게 했다. 두 사람은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베르니 부인은 죽는 순간까지 작가를 격려하고 보살폈다. 발자크는 위대한 소설가가 되고 나서 베르니 부인을 이렇게 상찬했다.
“그녀는 내게 어머니, 여자친구, 가족, 동반자, 충고자였다. 그녀는 나를 작가로 만들었고, 젊은 나를 위로해주었으며, 내게 취향을 마련해주었고, 누이처럼 함께 울고 웃었다.… 그녀는 내게 자부심을 일깨워주었다. 내가 살아있는 한 이 점에 대해 그녀에게 감사한다. 그녀는 내게 모든 것이었다.”
두 사람이 특별한 관계로 발전한 곳이 파리 교외의 빌파리시스시(市). 발자크 가족이 살던 집터에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기념비의 플라크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의 문학적 영혼이 이곳에서 싹터서 프랑스 소설의 아버지가 되도록 했다.’
마크롱은 여성의 깊은 내면(內面)을 볼 줄 아는 남자다.
출처 | 주간조선 2458호 글 | 조성관 주간조선 편집장
◆2018.01.30 프랑스·스페인 사이의 섬 하나, 6개월마다 국적 바뀌네
양국 공주를 서로 왕비로 맞고 종전 협상도 이뤄졌던 '페장 섬'
2~7월엔 스페인·8~1월엔 프랑스… 360년째 주권 주고받고 있어
프랑스와 스페인 두 나라 사이에 있는 '페장(Faisans)'이라는 섬이 있다. 우리말로 '꿩섬'이라는 뜻으로, 면적 6820㎡(약 2060평)에 길이 200m, 폭 40m 정도밖에 안 된다. 이베리아반도의 서쪽 끝 부분에 있는 이 섬은 두 나라 사이를 흐르는 비다소아강 중간에 있다. 프랑스령(領)인 이 섬이 2월부터는 스페인 영토가 된다. 스페인이 주권(sovereignty)을 넘겨받지만 6개월 뒤인 8월 1일엔 다시 프랑스에 넘겨준다. 두 나라는 6개월마다 이렇게 주권을 주고받는 일을 360년 가까이 거듭하고 있다.
수풀만 우거진 이 작은 무인도를 놓고 왜 이런 일을 하는 것일까. 시작은 유럽이 가톨릭과 개신교 국가들로 갈려 싸움을 벌였던 '30년전쟁'(1618~1648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전쟁 중에 두 나라는 상대의 내정(內政)에 슬쩍 개입했다. 스페인이 1620년대 네덜란드 개신교 측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자 프랑스는 은밀히 스페인 카탈루냐의 반란을 지원했다. 작년 10월 자체 주민투표로 '독립'을 선언했던 그 카탈루냐다. 그러자 스페인은 당시 미성년자였던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왕정(王政)에 반발해 일어난 내란인 '프롱드의 난'을 지원했고, 두 나라는 1635년부터 24년간 영토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을 끝내는 두 나라 협상이 석 달간 진행된 곳이 바로 이 섬이었다. 이 섬은 당시에도 '중립적인 영토'로 간주됐다. 두 나라 협상단은 양쪽에서 나무다리를 놓아 건너왔고, 1658년 11월 7일 이곳에서 국경선을 정리하는 '피레네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스페인 펠리페 4세의 딸 마리아 테레사와 혼인함으로써 '봉인'됐다. 이보다 한 세대 전인 1615년에도 프랑스의 루이 13세와 스페인의 펠리페 4세는 각각 여동생 이사벨과 안 도트리슈를 상대국의 '왕비'로 교환했다. 이때 두 왕이 '동시에' 자신의 신부 얼굴을 처음 본 곳도 바로 양국 간 국경선에 놓인 이 섬이었다. 피레네 조약의 다른 이슈는 이 섬의 관할권. 두 나라는 이때부터 6개월마다 주권을 교대하기로 했다.
'페장'처럼 두 나라 이상이 주권을 행사하는 것을 '콘도미니엄(condominium)'이라고 한다. 독일과 룩셈부르크 사이 모젤강과 지류를 두 나라가 공동 주권을 행사하는 예도 있다. 페장은 현존하는 '콘도미니엄' 중 가장 오래됐다.
지금 이 섬엔 1659년의 이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기념비만 있을 뿐 당시 흔적은 하나도 없다. 게다가 수 세기 동안 피레네산맥의 눈이 녹아내린 물이 유입되면서 섬 자체가 계속 유실되고 있다. 하지만 양국 정부는 섬의 보호에는 관심이 없다. 두 나라는 한때 이 섬에 6개월마다 국기를 바꿔 게양하는 방안도 검토했지만 포기했다. 두 나라 국경 지역에 사는 바스크족(族) 분리주의자들이 몰래 자신들의 깃발을 올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철민 선임기자
◇이미지
▲프랑스 새 대통령 탄생 17.5.7 애마뉘엘 마크롱 39세 역대 최연소 대통령에 당선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 취임17.5.14 엘리제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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