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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여행/ 국가별75/ 파나마 - 파키스탄 - 팔래스타인

상림은내고향 2022. 7. 31. 19:26

지구촌 여행/ 국가별75/ 파나마 - 파키스탄 - 팔래스타인 

■ 파나마 Panama

파나마 공화국, Republic of Panama

▲국기

 

중앙 아메리카에 있는 나라. 수도는 파나마시티이며, 국민의 70%는 메스티소이다. 화폐는 발보아이고 파나마 운하와 관련된 수송·통신·저장 서비스업, 국제금융, 관광업 등에 바탕을 두고 있는 시장경제이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중앙 아메리카의 다른 나라에 비하면 높은 편이다. 위생상태는 양호한 편이며 6학년 또는 15세까지의 의무교육을 실시한다. 1980년대 반정부 한거 이후 대중매체는 엄격한 검열을 받게 되었다.

 

남아메리카의 북서쪽 끝부분에 연결되는 파나마 지협의 남쪽 끝부분 연장 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수도는 파나마시티이며 긴 S자 모양의 나라이다. 북쪽 카리브 해 쪽으로 1,160km의 해안선이 형성되어 있으며, 동쪽으로 콜롬비아에 접해 있다. 남쪽 태평양 쪽으로 1,690km의 험준한 해안선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코스타리카에 접해 있다. 면적 74,979㎢, 인구 3,116,000(2003 추계).

 

16세기 스페인인들이 파나마 지협을 최초로 식민지화했을 때 이곳에는 쿠나족·과이미족·초코족 등 여러 인디언 부족들이 살고 있었다. 스페인인과 인디언의 통혼으로 메스티소가 생겨났다. 아프리카 흑인이 유입되면서 다른 혼혈인종도 발생했다.

 

19세기에 주로 미국 출신의 북아메리카인, 프랑스인, 중국인 등이 철도건설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도착했다.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는 동안 카리브 섬들에서 온 흑인, 스페인인, 이탈리아인, 그리스인 외에 많은 미국인들이 이주했다. 전체 인디언 부족 가운데 상당수가 파나마 서부에 사는 과이미족이다. 이들은 '평원의 언어'로 불리는 '모베레'라는 언어를 사용한다.

 

쿠나족이 과이미족 다음으로 많다. 이들은 지협의 다른 부분인 투이라 강과 그 지류들의 기슭, 산블라스 제도와 부근에 있는 해안에 거주한다. 언어는 쿠나어를 사용한다. 초코족은 국토의 1/3을 차지하는 동부에 주로 산다. 파나마 남서부와 중부에는 메스티소가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 앤틸리스 흑인은 파나마시티에 주로 사는 소수 인종이다.

 

파나마의 공용어는 스페인어이다. 국민의 80% 이상이 로마 가톨릭교를 믿지만 헌법상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중앙 아메리카에서 출생률이 가장 낮으며 사망률 또한 비교적 낮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입국 이민자들이 감소함에 따라 1960년대초부터 매년 인구증가율이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2020년 기준 연간 인구증가율은 1.61%였으며, 2022년 추계인구는 442만 명이다. 전체 인구의 27%가 15세 이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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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마 이야기

▲파나마 대성당

 

파나마 운하의 태평양 입구 부근 파나마 만에 있다. 원래 인디언 어촌이었으며, 파나마라는 이름은 '많은 고기'를 뜻한다. 옛 도시(파나마비에호) 1519년 페드로 아리아스 다빌라 총독에 의해 건설되어 세속과 종교적 권위의 중심지가 되었다. 안데스 산지에서 나는 금은괴가 북쪽으로 파나마 시까지 배로 운송되었고, 그곳에서 짐을 나르는 동물들로 지협을 가로질러 카리브 해안의 놈브레데디오스 또는 포르토벨로까지 수송되어 스페인으로 가는 배에 선적되었다. 도시는 한창 번영했으나 해적선과 사략선들의 약탈로 무역량이 차츰 줄어들게 되었다. 1595년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은 지협을 건너 군대를 보내 옛 파나마를 약탈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1671년 헨리 모건(나중의 헨리 경)이 약탈군을 완전히 물리쳤다. 1674년 파나마비에호가 있던 자리에서 서쪽으로 8㎞ 떨어진 곳에 스페인인 정복자 알론소 메르카도 데 비야코르타가 새 도시(파나마누에보)를 세웠다. 정치적·경제적으로 잇달아 쇠퇴했으며, 1751년 도시와 그 일대가 누에바그라나다의 일부가 되면서 결국 콜롬비아에 속하게 되었다. 19세기 동안 파나마에서는 많은 소요가 일어났다. 1903년 콜롬비아로부터의 독립이 선언되었고, 파나마 시는 수도가 되었다. 같은 해 헤이-뷔노-바리야 조약으로 미국은 파나마 시내의 질서를 유지하고 위생을 관리할 권한을 갖게 되었다. 미국이 확보했던 이런 권한은 1936, 1959년 조약을 통해 각각 파나마에 양도되었다.

 

1914년 운하의 개통과 함께 파나마 시는 급속히 발달했다. 카바레, 나이트클럽, 불결한 빈민가(나중에 일부는 철거됨)들이 있고, 곳곳에서 여러 나라 언어를 사용하는 근대적인 도시가 되었다. 미국이 공사를 맡았던 상하수도에 대한 권리는 1942년 공화국 정부에 이양되었으며, 경영권 역시 1953년에 이전되었다. 1826, 1939, 1959년 이곳에서 라틴아메리카 의회가 열렸다. 파나마 시에 편의를 제공하는 항구시설들이 인접한 발보아에 있으며, 운하 관련업무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도시 주변의 앙콘에 거주한다. 경제는 주로 운하 교통과 운하 직원들에게 제공되는 서비스업에 의존한다. 공업시설로는 양조장, 정유소, 강철 압연 공장, 의류·목재 공장 등이 있다. 파나마 시는 운하, 파나마 철도, 지협횡단고속도로로 콜론과 연결되고, 카레테라 인테라메리카나(팬아메리카 고속도로)를 통해 다비드·체포와 연결된다. 27㎞ 떨어진 토쿠멘에는 국제 공항이 있다. 파나마 시에는 여러 광장과 바르톨로메 무리요의 로사리오 동정녀 그림이 소장된 성당(1673)과 산프란시스코 교회 등 많은 식민지시대의 유물이 남아 있다. 현대식 건물로는 정의의 궁전, 라프레시덴시아, 국립왕궁, 엘파나마 호텔 등이 있다. 국립대학교(1935), 산타마리아라안티과대학교(1965), 국립문화협회 부설 음악·무용·미술·연극 학교들이 있으며, 학술단체·도서관·박물관·연구소 등도 많이 있다. 1928년 고르가스 기념 열대성·예방의학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인구:시 415,964(2000), 대도시권 1,202,000(2001).

 

◆ 2016.04.06  파나마는 어떻게 돈세탁 천국이 됐나?

파나마 국민들은 오래 전부터 마약 밀수업자, 탈세자, 부패한 독재자의 자금은신처로 ‘돈세탁 천국’이란 오명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던 것이 사실이다. 로펌 모색 폰세카의 '조세도피'문건 1150만건이 폭로된 후 파나마는 다른 선진국들도 같은 수법을 쓰고 있다며 오명에 반박하고 나서고 있다.

 

모색 폰세카의 공동창업자 라몬 폰세카는 4(현지시간)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폭로사태에 대해 "세계적 금융위기 이후 치열한 경쟁과 규제에도 불구하고 파나마가 역외 거대은행 국가로 자리매김한 데에 대해 다른 경쟁국들이 질투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날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파나마와 선진국은 동등한 입장에서 공평하게 경쟁할 수 없기 때문에 이번 일은 부당하다”며 “익명으로 회사 소유을 허용하는 미국 델러웨어주()에서 한 회사가 이 같은 일을 벌였다면 당연히 별일이 아니었겠지만, 파나마라서 이 일이 외신 1면을 장식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의 출신지이자 남한 면적의 15분의1 정도로 작은 주인 델라웨어는 주 밖에서 발생하는 이익에 대해서는 세금을 물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페이퍼 컴퍼니’도 인정하는 등 조세 천국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최근 규제가 강화되기 전까지는 세계 1위 조세도피처로 지목되기도 했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 4일 파마나 로펌 모색 폰세카가 세계 부유층이 돈을 세탁하고 조세를 회피하는 자세한 정황이 담긴 약 1500만 장의 비밀문건을 공개했다.

 

1980년대 파나마 실권을 장악한 군 출신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가 당시 세계 최대 마약조직이던 콜롬비아의 메데인 카르텔로부터 돈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뒤 파나마는 돈세탁 천국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미국 달러화를 쓰는 파나마는 북남미를 잇는 나들목에 자리잡고 있어 지형적 이유로 합법자금 뿐 아니라 불법자금도 흘러들어가고 있다. 지난 10년간 연 8.5%씩 경제 성장을 이룬 파나마는 이같이 유입된 자금 덕분에 '중미의 두바이'로 탈바꿈해왔다.

 

그러나 파나마만 페이퍼 회사에 관대한 국가는 아니다. 영국의 조세정의네트워크(TJN·Tax Justice Network)는 부유층이 전 세계 곳곳에 있는 조세피난처에 숨겨 놓은 자산이 21~32조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TJN가 지난 2월 발표한 ‘2015년 금융비밀지수(FSITax Justice Networks Financial Secrecy Index 2015)’에 따르면 미국은 스위스, 홍콩에 이어 3번째로 부유층의 역외 조세도피를 조장하는 환경이 강한 국가로 꼽혔고 이에 비해 파마나는 13위에 이름을 올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파나마는 회사의 무기명 주식 발행을 허용했지만, 지난해 이를 금지하는 법안이 의회를 통과해 시행되고 있다. 그래도 상당한 양의 무기명 주식이 아직도 유통되고 있다.

 

후안 카를로스 바렐라 파나마 대통령은 4일 이번 파문과 관련 모든 법적 조사에 협조하기로 약속한 데 이어 파나마 검찰청도 이날 이번 파문과 관련 조사에 착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바렐라 대통령과 모색 폰세카의 유착관계 때문에 바렐라 대통령의 약속 이행의 투명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폰세카는 집권당 파나메니스타(Panamenista)의 대표였다고 대통령실의 자문으로 일했다가 지난 2월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 등 정가를 강타한 부패 의혹이 자신에게 불똥이 튈 것을 우려해 자문역을 그만뒀다.

뉴시스

 

"세계적 파문 파나마 로펌 '모색 폰세카', 북핵 자금 관련 회사 도왔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파나마 로펌 '모색 폰세카(Mossack Ponseca)'의 이른바 ‘파나마 페이퍼’를 통해 전 세계 전·현직 정상 12명 등 200여 개국 14153명의 재산 은닉과 조세 회피용 해외 페이퍼 컴퍼니 설립을 폭로해 세계적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모색 폰세카가 북한의 핵무기 개발 자금 조달과 관련된 회사도 도와온 것으로 드러났다.

 

영국 BBC방송과 인디펜던트지() 5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모색 폰세카는 미국 재무부의 제재를 받고 있는 개인 또는 기업 33곳과 거래를 해왔다. 1977~2015년 업무를 맡았던 고객사 214488곳의 각종 금융·주식 거래와 재산 변동 등의 내용을 담은 자료 1150만건이 공개돼 궁지에 몰린 모색 폰세카는 미 재무부뿐 아니라 국제사회 제재 대상인 ‘고객’들과도 비밀리에 거래를 해왔는데, 그 중에 북핵 프로그램과 연관된 회사도 있다는 것이다.

 

BBC방송은 모색 폰세카가 이런 ‘고객’들을 자신들의 로펌 이름으로 역외 법인인 것처럼 등록, 공문서상으로는 확인이 안돼 실제 주인들의 신원을 추적하기 힘들게 만들어 놓았다고 전했다. BBC에 따르면 모색 폰세카는 국제적 제재 대상 블랙리스트에 오른 회사의 ‘프락치’ 역할을 하는 비밀 거래를 계속해왔다.

 

북핵 개발 관련 회사로 지목된 DCB 파이낸스는 소유주와 경영진이 북한 평양에 근거지를 둔 회사로, 2006년 설립됐다. 주소지는 평양의 국제문화회관으로 돼있다. DCB 파이낸스는 북한 정권 자금 조달과 북한의 핵무기 개발 자금 조달을 돕는다는 혐의로 미국 재무부의 제재 대상이 된 회사다.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에 등록돼 있는 이 페이퍼 컴퍼니의 공동 대표는 북한 고위 관리인 김철삼이라는 인물, 역시 제재 대상인 평양 대동신용은행의 은행장이었던 영국인 은행가 나이절 코위로 돼 있다.

 

전문가들은 이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북한 정권이 유엔 등 국제사회의 제재를 피해 해외에 무기를 팔고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에 들어가는 자금을 조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재무부 해외자산국통제국(OFAC)은 지난 2013년 핵개발 및 탄도 미사일 등 대량 파괴무기(WMD) 확산에 관여한 북한 금융기관으로 DCB 파이낸스와 대동신용은행을 제재 대상 리스트에 올린 바 있다. DCB 파이낸스의 중국 다롄 지점 김철삼 대표도 제재 대상에 포함됐다.

 

대동신용은행은 유엔과 미국의 제재 대상인 조선광업개발무역회사(KOMID)와 단천상업은행에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며 북한의 주요 무기 거래를 주도해왔으며, DCB 파이낸스는 북한 정권이 제재를 피해 금융거래를 하는 수단으로 활용돼왔다.

 

DCB 파이낸스의 공동 대표로 돼 있는 영국인 나이절 코위는 홍콩 HSBC에서 근무하다가 김정일 정권 시절인 1995년 북한으로 건너가 북한 최초의 외국계 은행인 대동신용은행의 은행장이 됐으며, 20년간 북한을 오가며 생활해왔다. 영국 에딘버러대를 졸업한 그는 한국어와 중국어에 능통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희영 조선Pub 부장대우

 

◆풍경

▲파나마 시티

 

◆ 6년 독재와 60년 징역형, 파나마 독재자 노리에가 사망

1980년대 파나마 독재자 마누엘 안토니오 노리에가
공산권 국가와 정보 이중거래, 마약 밀매 등으로
베트남전 이후 미국 최대 군사 행동으로 축출

▲파나마의 독재자 노리에가. 1989년 미국으로 축출되기 전의 모습. [AP 연합뉴스]

 

6년의 독재와 60년 징역형. 파나마 '비운의 독재자' 마누엘 안토니오 노리에가가 사망했다고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이 3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83세. 1980년대 파나마의 독재자로 군림했던 노리에가는 뇌종양 수술을 받은 뒤 병원에서 회복하던 중 지난 29일 숨을 거뒀다. 노리에가는 1983년 군대를 장악하면서 사실상 집권한 이후 6년간 권력을 휘두르다 1989년 미국의 침공으로 축출됐다.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의 가장 큰 군사 행동이었다. 한때는 미국의 동맹이었지만, 노리에가의 마약 밀매와 이중 정보 거래 등이 문제였다.

 

▲[AP 연합뉴스]

 

그는 미국에 쿠바에 대한 비밀 정보를 제공하는 동시에 쿠바의 비밀 요원들이 쓸 수 있도록 수천장의 파나마 여권을 개당 5000달러에 피델 카스트로(1926-2016) 당시 쿠바 총리에게 팔아넘겼다. NYT에 따르면 그가 이런 식으로 불법적으로 축적한 자산이 7억7000달러(약 79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처음에는 이를 알면서도 파나마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중앙 아메리카의 정치적 안정을 꾀하기 위해 눈감아줬다고 한다. 그러나 마약 밀매 때문에 1986년 미국 의회가 파나마에 대한 군사 및 경제 원조를 중단하면서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됐다. 파나마의 경제 사정은 급격히 나빠졌고, 급기야 외채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했다.

 

▲노리에가가 미스 USA(왼쪽), 미스 파나마, 미스 콜롬비아(맨 오른쪽) 등과 함께 찍은 사진. [AP 연합뉴스]

 

노리에가는 미국에 대한 대규모 시위를 조직했다. 또 대통령 선거를 무효화하고 스스로를 '최대 지도자'라 자처하며 1989년 미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2만7000여 명의 병력이 투입된 침공 결과를 발표하면서 "그거면 충분했다"고 말했다. 당시 백악관은 "미국인의 삶을 보호하고 민주주의의 과정을 복원하며, 파나마 운하 조약을 보존하기 위해 노리에가를 체포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파나마 운하는 중미의 파나마에 위치하며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국제운하다. 미국이 1904년 건설을 시작해 1914년 개통했다.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의 항로가 획기적으로 단축됐다. 운하 반환을 끊임없이 요구하던 파나마 정부는 1977년 운하의 영구 중립을 보증하는 조건으로 1999년에는 돌려받는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파나마 운하 조약을 미국과 체결한다. 이 조약으로 인해 파나마 운하는 중립적인 국제 수로로서 모든 국가의 선박이 안전하게 통행할 수 있게 됐다.

 

미국의 군사작전으로 체포된 노리에가는 마이애미로 이송된 뒤 마약 거래, 돈세탁 등의 혐의로 20년간 복역했다. 이후 프랑스로 인도돼 마약 조직의 자금을 세탁해 준 혐의로 6년형을 선고받고 2년여 복역한 뒤 2011년 12월 본국으로 추방됐다.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온 그를 기다린 건 감옥이었다. 파나마 법원의 궐석재판에서 살인·횡령·부패 등의 혐의로 사실상 종신형에 해당하는 60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엘 레나세르 교도소에서 복역했다.

 

올해 1월에야 뇌종양 때문에 감옥에서 벗어나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왔다. 그는 지난 3월 수도 파나마시티 산토 토마스 병원에서 양성 뇌종양 수술을 받은 후 출혈로 상태가 위중해지자 긴급 수술을 받았다. 수술 이후 집중치료 병동에 머물고 있었고 그의 가족들은 그의 상태에 대해 함구해왔다.

 

카를로스 바렐라 파나마 대통령은 30일 오전 공식 트위터 계정에서 노리에가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바렐라 대통령은 "노리에가의 죽음으로 우리 역사의 한 장이 닫힌다. 그의 딸들과 친척들은 그를 평화롭게 매장할 자격이 있다"고 남겼다.

 

노리에가는 1934년 파나마시티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인회계사, 어머니는 요리사 혹은 세탁부로 알려져있다. 여러가지 이유로 대모의 손에서 자랐다고 한다. 파나마 최고의 공립 고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정신과 의사 혹은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의대 진학이 좌절되고 사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면서 군인의 길을 걸었고, 독재와 범죄를 거쳐 오욕의 삶을 마감했다.

이경희 기자 dungle@joongang.co.kr

 

 

■ 파키스탄 Pakistan

파키스탄 회교 공화국, Islamic Republic of Pakistan

 인도대륙 북서부에 있다. 수도는 이슬라마바드이다. 파키스탄의 대표적인 언어는 펀자브어이며, 전국민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없다. 문맹률이 높아 라디오가 가장 중요한 통신매체 역할을 하며, 관영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20개 이상의 언어로 방송하고 있다. 국민 대부분이 이슬람교도이다. 1인당 GNP는 아시아에서 가장 낮은 편이다. 주요작물은 밀이며, 사탕수수도 널리 재배된다.

 

파키스탄 국민은 여러 토착 주민들이 혼혈된 복잡한 구성을 보인다. 이들의 인종적인 특징은 서북부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들어왔던 아리아인·페르시아인·그리스인·파슈툰족(파탄족)·무갈인의 영향을 받았으며, 아랍인의 흔적도 남아 있다.

 

공식 언어는 우르두어와 영어이지만, 지역 방언의 특색도 강하다. 대표적인 언어는 인구의 절반이 사용하는 펀자브어이며, 그밖에 파슈토어·신드어·사라이크어·우르두어·발로치어가 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에서 온 난민들도 고유의 언어권을 형성한다. 90% 이상 국민 대부분이 이슬람교도이며, 소수의 힌두교도와 그리스도교도가 있다.

 

파키스탄의 인구는 2022년 기준 2억 2,763만 4,531명이고, 인구밀도는 246명/㎢이다. 기름진 인더스 강 유역과 북동부 및 북부의 주요지류들 유역에 인구가 집중되어 있다. 이에 비해 서부와 남서부 지역은 인구밀도가 낮다. 총 인구의 약 38%가 도시에서 살지만, 농촌주민들이 인구가 많은 몇몇 도시로 이주해 주택 부족현상이 생기고, 빈민가가 형성되었으며 교통난도 발생했다. 인구의 1/3 가량이 15세 미만이다.

 

여러 해 동안 군사정권의 지배가 계속되었으나 1988년 의회선거에 의해 순수한 민간 정부가 다시 들어섰다. 1973년 개정된 헌법에 따라 대통령은 국회에서 다수의 의석을 얻은 정당의 지도자를 총리로 임명하는 권한을 가진다. 사법부의 최고기관은 대법원이며 각 주에 고등법원을 두고 있다.

1980년대에 이슬람 법(샤리아)에 따라 판결하는 연방 샤리아 재판소가 세워졌다.

 

사회복지사업은 일부에 편중되어 있으며, 보건시설과 의료진이 부족해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심각한 전염병이 널리 퍼져 있고, 식량이 부족한 경우도 있다.

 

전체인구 가운데 1/4 정도만 읽고 쓸 줄 알며, 여성의 경우 더욱 비율이 낮아져 1/6에 그친다. 초등교육은 무상이지만 학교에 입학하는 아동은 전체 학령기 아동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정기적으로 검열을 받고 있는 신문은 거의 정치 관련 뉴스만 싣고 있다. 문맹률이 높아 라디오가 가장 중요한 통신매체 역할을 하며, 관영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20개 이상의 언어로 방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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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11월 04일   파키스탄의 ‘인더스강 기적’

▲인더스강 유역의 평원.

 

송종환 / 駐파키스탄 대사

잊을 만하면 변경지역에서 발생한 테러가 보도되니 우리 국민에게는 물론 해외에 비치는 파키스탄은 테러가 자주 일어나는 나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런 이미지로 인해 현지에서 시간과 발품을 팔아 우리 자동차를 몇 천 대 팔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도 한국 본사의 반응은 매우 소극적이다

2013
5월 집권한 나와즈 샤리프 총리 정부와 군부는 합심하여 테러 및 종파주의 근절을 위한 ‘대테러 국가행동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파키스탄 테러가 이웃 아프간 탈레반과 연계되어 있거나 무슬림 내 수니파와 시아파 종파 간 고질적 분쟁이어서 단기간에 종식될 것 같지는 않다.

테러 보도로 인해 우리는 파키스탄의 찬란했던 문화, 우리와의 오래된 유대와 큰 잠재력을 간과하기가 쉽다. 파키스탄 남방 신드주에는 세계 4대 문명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인더스문명을 대표하는 모헨조다로 도시 유적이 있다

파키스탄과 우리나라와의 교류는 17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파키스탄의 마라난타 스님이 4세기에 중국을 거쳐 영광 법성포에 도착하여 백제에 불교를 전했고 8세기에 혜초 스님이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라는 다섯 나라 여행기록을 남겼는데 그중에 페샤와르, 길깃, 카슈미르 등 세 나라가 파키스탄 영토 내에 있다.

파키스탄은 1950년 북한의 남침 때 우리에게 30만 달러에 해당하는 식량과 의약품 등을 지원했고, 우리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을 세울 때 당시 개발계획차관이 우리 전문가들에게 파키스탄 계획을 설명하면서 조언을 해 준 고마운 나라다.

그러나 2015년 현재 연간 국민소득이 1513달러이고 양국 간 교역의 양은 12억 달러밖에 되지 않는다. 세계를 상대로 한 우리의 무역이 2011년부터 1조 달러 이상이 된 것을 생각하면 터무니없이 적다. 파키스탄 정부와 국민은 대한민국이 단기간 내에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고 세계 최초로 원조를 받던 국가에서 주는 국가가 된 한국의 성공을 배우고 무역과 교류를 확대하고 싶어 한다.

파키스탄 주재 대사로 2년 남짓 근무 중인 필자는 파키스탄이 우리를 따라 한다면 ‘인더스강 기적’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이러한 판단은 우리 기업들이 파키스탄의 큰 잠재력을 보고 많이 진출하려는 것과도 궤를 같이한다.

파키스탄 동북과 서북 지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K2봉이 있는 히말라야 산악지대이며, 남북으로 종단하고 있는 인더스강 유역 주변은 영국 식민지 시절 만든 관개시설이 잘 되어 있는 드넓은 평원지대이다.

파키스탄은 육로로 서남아, 중앙아, 중국, 중동을 연결하는 통로이며 해양으로는 페르시아만 입구여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있고, 인구가 19000만 명으로 세계 6, 면적은 한반도 3.5배 크기이다. 석탄, 구리, , 철광석 등 풍부한 광물자원과 세계 상위권의 면화, 우유, 밀 생산 능력을 보유하고 있고, 영어와 컴퓨터에 능한 1억 명이 넘는 청장년층 노동력이 있다.

이러한 잠재력에 더하여 ‘비전 2025’를 추진하고 있는 파키스탄의 올해 국민총생산 성장률이 5.5%가 되어 신흥경제국가가 되고 있다는 유엔, 세계경제기구와 신용평가기관들의 긍정적 평가도 들지 않을 수 없다

지난 9 27일 우리 대통령과 파키스탄 총리가 유엔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10 2일 필자와 파키스탄 경제차관이 각기 정부를 대표하여 5억 달러 상당을 제공하는 ‘20152017년 경제협력자금에 관한 기본약정’을 서명한 후 한국과 파키스탄 간의 관계는 최고조로 고양되어 있다

필자는 위험한 절벽 길을 따라 우리 기업의 수력발전소 건설 현장에 가기도 하고 진출 기업이 공사 대금을 제때 받지 못하고, 운송 중인 화물이 커서 고속도로에 며칠째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테러 우려는 까맣게 잊고 문제 해결을 위해 달려가곤 했다.

파키스탄이 우리의 새마을운동과 경제 발전 경험을 배워서 ‘인더스강 기적’을 이룩하고 또 국적기 취항과 우리 자동차의 파키스탄 진출 등으로 우리에게 큰 기회의 시장이 되는 꿈을 품고 혹시 있을지 모를 테러에 대비하여 방탄차를 타고 오늘도 정부 관계자와 우리 진출 기업인들을 만나러 간다.

◇ 송종환(71) △서울대 외교학과 △미국 플레처 국제법·외교대학원 △한양대 정외과(박사)△청와대 정무비서실 외무부·통일원담당 행정관 △주유엔대표부 공사 △주미대사관 공사 △충북대·명지대 초빙교수 △주파키스탄 대사

문화일보

 

◆풍경

▲파키스탄  트랑코 호수

 

 

 

 

 

 

 

 

 

 

 

▲라왈 호수

 

◆일상

 

 

 

 

▲라호르에서 물놀이 풍경  이날 44도

 

▲폭염 43도 13. 6. 9.

 

▲과일장사 13. 7.9.

 

▲소 달리기 대회

 

 

 

 

 

 

 

▲ 구두장사

 

▲구멍가게

 

▲손자와 낙타유 파는 노인

 

▲솜사탕 장사

▲풍선 장사

 

▲발렌타이 데이

 

 

 

▲낙타 투어 - 3. 4. 18. 클리프턴 해변

 

▲ 집으로

 

 

▲릭샤

 

▲버스

 

▲벌판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이상한 남자

 

 

▲시골 풍경

 

▲신학시험 모습=조선시대 과거시험 같은 모습으로 1300여 명의 학생이 이슬람 신학자 시험을 치르고 있다

 

▲어부의 귀환

 

▲이슬람 신자의 전통 장신구들

 

▲카라치 바다의 풍경

 

▲한가족의 귀가

 

▲ 홍수  2011.8.8.

 

 

▲폭우로 도시가 물에 잠기다 11.8.12.

 

▲폭우로 33명 사망 수십명 실종 11.8.26

 

▲홍수로 당나귀 타고 피신하는사람들   2011.9.20

 

 

▲홍수 11.7.22.-9.25

 

 

▲2013.8.4 홍수에 고립된 가축들 - 라비강

 

▲13. 5. 9. 파키스탄 플라자 7층에서 발생한 화재로  8명이 사망

 

 

 

 

■ 팔레스타인 Palestine

▲국기

 

팔레스타인은 고대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이 있었던 지역을 뜻하며, 동시에 2013년에 수립된 나라를 의미한다. 지역으로서의 팔레스타인은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에서 모두 신성시하는 지역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유대와 아랍의 민족운동 진영의 분쟁지로 주목을 받았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이스라엘 간의 오랜 분쟁 중 1993년 평화정착을 위한 기본적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수립되었고, 2013년에는 팔레스타인국이 수립되어 국가 지위에 대한 인정을 받았다.

 

국가로서의 팔레스타인

이스라엘과의 대립과 팔레스타인 공동체의 구성

 

1948년 이스라엘 수립에 뒤이어 전쟁이 벌어진 1948∼49년과 종전 직후의 기간 동안, 새로 생겨난 이스라엘 지역을 벗어나 이웃 아랍 국가로 망명해 정착한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인'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또한 6일전쟁 이후 웨스트뱅크, 가자 지구, 동예루살렘 내에서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거나 이웃 국가에 흩어져 사는 아랍인들도 팔레스타인 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되었다. 반면, 건국 이후에도 이스라엘 내에서 계속 거주하며 그곳의 시민이 된 아랍인들은 현재 이스라엘 아랍인으로 불리고 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아랍 연맹은 1974년 10월 모로코의 라바트에서 열린 정상 회담에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PLO)를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유일한 대표 기구로 인정했다. PLO는 1969년 헌장에서 분명하게 밝힌 것처럼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제거하고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지역 안에 이슬람교도·그리스도교도·유대교도 각각의 독립국가를 건설할 것을 천명해 왔으나, 1988년에 이를 약간 수정하여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을 위한 2개 국가 수립안, 즉 이웃 이스라엘과 공존하게 될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는 안에 대해 처음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인티파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수립

1993년 이스라엘과 PLO 간에 평화정착을 위한 폭넓은 기본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PLO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이스라엘의 실제적 권한을 인정한 대신, 이스라엘은 PLO를 팔레스타인 주민들에 대해 유일한 대표성을 갖는 단체로 용인했다. 그리고 양측은 웨스트뱅크, 가자 지구의 통치권을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점진적으로 이양하고 그 지역 내에 주둔한 이스라엘군을 단계적으로 철수시키는 5년간의 과도기간을 둔다는 데 합의했다. 이를 통해 1993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수립되었다. 1996년에는 웨스트 뱅크, 가자 지구의 영속적 지위에 관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팔레스타인국의 수립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국제적 발언권을 확보하기 위해 2011년 11월 유엔 산하기구인 유네스코에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내의 강경파인 하마스 세력과 협상파인 파타당 세력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내분 수준의 갈등을 겪고 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국가로 국제적 지위를 격상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 2012년 11월 29일 유엔 총회에서 팔레스타인을 옵서버 국가의 지위로 인정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었고, 2013년 1월 3일 팔레스타인국이 수립되었다. 전 세계 138개국에서 국가로 승인하는 데 찬성했다. 한국은 국가 지위 투표에서는 기권했으나 팔레스타인국의 대표성은 인정하고 외교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2005년부터 행정수도인 라말라에 대표부를 운영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은 아랍 및 이슬람권 국가들과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편이나, 적대적 상황이라고 볼 수 있는 이스라엘을 정점으로 하는 외교적 갈등이 다른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에서 쟁점이 되고 있다.

 

정치경제적 상황

팔레스타인국의 정치는 주로 온건파인 파타와 강경파 하마스에 의해 주도되고 있으며, 그밖에 이슬람 권의 시아파와 기독교도로 구성된 소수 정당들이 존재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하부조직이었던 하마스는 반 이스라엘과 반 서방의 성향이 강하여 온건파인 파타와 물리적 충돌을 마다하지 않는 편이다. 하마스 세력에 의해 통치되는 가자 지구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대하여 파타가 주도하는 팔레스타인국이 통치권을 실현하고 있다. 팔레스타인국은 미국과 이스라엘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팔레스타인국의 수도는 예루살렘이지만 실질적인 행정수도는 라말라이다.

 

팔레스타인국의 경제는 이스라엘 정부에 예속되어 있는 상황이다. 국가 재정의 많은 부분을 미국과 이스라엘의 지원에 의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역 일대의 농업과 산업의 기반 시설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국 자체의 경제활동은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다. 국민의 실업률은 50%가 넘으며, GDP는 이스라엘의 10% 수준에 불과하다. 팔레스타인국 전역이 분쟁지역이어서 여행은 제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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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의 눈물

 

 

 

 

 

 

 

가자지구에 대한 공습을 재개한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해변에서 놀던 어린이들이 희생됐다고 AFP통신이 16(현지시간)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날 오후 1시쯤 가자 해변에서 갑자기 폭발음이 들리며 어린이들이 급히 대피했으나 4명은 숨지고 10여명이 부상했다. 목격자들은 폭발이 이어지는 동안 이들이 인근의 안전한 호텔로 몸을 피했지만 일부는 뒤처졌고 그중 4명의 어린이가 사망했다고 전했다.

희생된 어린이들은 해변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으며 9~14세 사이의 나이였다. 이날의 공격이 해군의 함포 사격인지 아니면 공군 전투기의 공습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스라엘 군은 이에 대해 하마스를 목표로 한 공격이었지만 비극적 결과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스라엘 군은 성명에서 “조사가 진행중”이라면서 “예비 조사에 따르면 이 공격의 목표는 하마스 테러리스트들이었다”면서 “보고된 민간인 희생자의 발생은 비극적”이라고 말했다. 아슈라프 알 케드라 가자지구 보건부 대변인은 지난 8일부터 시작한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213명이 숨지고 1500명 이상이 부상했다고 말했다.

[뉴스1ㆍ뉴시스] 사진 [AP=뉴시스ㆍ로티어=뉴스1]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노석조 특파원 르포

가자지구 [Gaza Strip]

   2010년으로 3년째 이스라엘의 봉쇄조치가 가해지는 가자지구(Gaza Strip)는 이스라엘의 서쪽 끝, 이집트 국경과 맞닿아 있는 곳에 자리한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이다. 면적은 360, 인구는 약 150만명이며 가장 큰 도시는 가자 시티(Gaza City).

2007
6월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온건파인 파타(Fatah)를 몰아내고 주도권을 장악하자 이스라엘은 가자의 모든 육지와 해상 출입로를 봉쇄하고 하마스 고사(枯死)작전에 들어갔다. 하마스뿐 아니라 주민들까지 굶겨 죽인다는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유엔의 구호품 반입만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하마스가 로켓 미사일로 맞서자 2008 12월 이스라엘은 대규모 침공작전을 전개, 팔레스타인인 1400여명이 죽고 건물이 초토화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군사시설을 지을 수 있다는 이유로 전후 재건(再建) 물자의 조달조차 차단하고 있다. 가자의 주민들은 이집트 쪽으로 몰래 뚫은 땅굴을 이용해 건축자재나 생필품을 밀반입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땅굴을 발견하는 족족 파괴하고 있다.

 

하마스 [HAMAS]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를 주도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의 대표적인 무장단체. 아마드 야신(Ahmad Yasin) 1987년 말에 창설하였다. 이 조직은 이스라엘이 요르단강 서안(西岸)과 가자지구를 계속 통치하는데 저항한 ‘인티파다(Intifada)’라는 팔레스타인 민중봉기 시기에 PLO(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대신할 만한 이슬람 단체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하마스는 ‘이슬람 저항 운동(Harakat al-Muqaqama al-IslamiyyaIslamic Resistance Movement)’을 뜻하는 아랍어의 머리글자를 딴 것으로, 아랍어로 ‘용기’를 뜻한다. 이들은 이슬람 수니파()의 원리주의를 내세우며, 이스라엘의 점령하에 있는 모든 팔레스타인의 즉각적이고 완전한 해방 및 이슬람 교리를 원리원칙대로 받드는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로 한다.

이들은 1993년 이스라엘과 PLO가 맺은 오슬로협정에 반대하여 1996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에 참여하지 않고 자살폭탄공격을 서슴지 않는 무장 저항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공격과 거주 제한 등의 억압 속에 무장 투쟁과 병행하여 빈민가에 학교와 병원을 지어 팔레스타인 빈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2006 1 25일에 치러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총선에서 132석 가운데 73석을 차지하며 40년 동안 집권해온 파타당을 누르고 승리함으로써 집권당이 되었다.

3
개의 위원회로 된 중앙지도부 아래 활동 지역별로 4개의 하위 정치조직을 두고 각 지역마다 지역 책임자 아래 세분화된 세포조직 체제를 갖추고 있으며, ‘에즈 에딘 알 카삼(Ezz Eddin al-Qassam)’이라는 군사조직을 보유하고 있다. 창설자인 아마드 야신은 2004년 이스라엘의 미사일 공격으로 사망하였고, 2006년 총선에서 승리한 뒤 이스마일 하니야가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총리를 맡아 이끌고 있다.

 

수니·시아파 분쟁

 수니·시아파 간 분쟁의 발단은 이슬람교를 창시한 예언자 무함마드(570~632) 사후 ‘누가 무함마드를 계승하느냐’ 는 문제였다. 수니파는 선출로 칼리프(종교 지도자)를 뽑아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시아파는 알리(무함마드 사촌 동생)가 후계자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니’ 라는 말의 뜻은 ‘순나(무함마드의 언행과 관행)를 추종하는 사람들’ 이고 ‘시아’ 는 ‘분파 또는 알리를 따르는 사람들’ 을 말한다. 현재 무슬림 전체 인구 가운데 수니파가 90%, 시아파가 10%를 차지한다.


소금물로 하루하루… 185만명의 'Gaza 감옥'

지난 6(현지 시각) 오전, 이스라엘 서부 에레즈 국경 검문소를 통해 가자(Gaza) 지구에 들어섰다. 다인승 승합차를 타고 1㎞가량 들어가자 소총을 든 군인 4명이 지키는 팔레스타인 측 검문소가 있었다. 이 곳 군인들은 가자지구를 통치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강경파 하마스 소속 이었다.

 

도심으로 가는 길은 곳곳이 크게 패어 있었다. 건물은 한쪽이 부서지거나 짓다가 만 곳이 많아 유령 도시를 떠올리게 했다. 지상 100m 높이 하늘에는 하얀색 풍선이 움직이지 않고 떠 있었다. 차량 옆좌석에 앉은 한 가자 주민은 "가자지구를 감시하느라 이스라엘군이 운용하는 '풍선 드론'"이라고 귀띔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무너뜨리려고 지난 2007 6월 가자지구를 봉쇄했다. 면적(365)이 서울의 60%에 이르는 가자지구를 높이 7~9m 콘크리트 장벽으로 둘러싸고 사람과 물품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생필품 등을 제외한 석유·철강·기계 장비 등은 반입이 엄격히 제한된다. 주민은 위독해 외부에서 진료를 받아야 하는 등 특별한 때를 제외하고는 장벽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가자지구에 거주하는 185만명이 10년째 '세계에서 가장 큰 감옥'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날 오후 9시 가자지구 도심에서는 달리던 차들이 급히 비상등을 켜거나 갓길에 서는 소동이 벌어졌다. 도로 양옆으로 길게 늘어선 가로등이 일제히 꺼져 버린 것이다. 주민 라흐만 가브리는 "이스라엘의 강도 높은 제재로 가자지구 내 연료가 부족해 전력난이 심각하다"면서 "대부분 지역이 하루 8시간밖에 전기 공급을 못 받는다"고 말했다.

 

▲‘하늘의 별 따기’ 이집트행 허가증 - 지난 5(현지 시각) 가자(Gaza)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이집트 시나이반도로 건너가기 위해 라파 국경 검문소에서 여행 허가를 요구하고 있다. 2006~2007년 무장 정파 하마스가 가자지구를 장악한 이후 국경 통제가 강화돼 주민들이 고통받고 있다. 가자지구와 이집트 국경은 두세 달에 한 번씩 개방된다. /신화 연합뉴스

 

물 부족도 큰 문제다. 전력 공급이 원활하지 못해 상수도 시설이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국제기구 소속 외국인이 거주하는 한 주택 욕실 수도에서는 옅은 짠맛이 느껴지는 물이 나왔다. 가자지구 수돗물은 소금의 주요 성분인 염소이온 농도가 1L 1500㎎으로 국제 기준치의 6배에 이른다. 2014년 이스라엘과 전쟁 당시 수도관과 저수지가 파괴된 지역은 아예 수돗물 공급을 못 받고 있었다.

 

10년째 계속된 제재에도 하마스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가자지구 서부와 맞닿은 이집트의 라파 국경을 통해 제한적이지만 부족한 물품을 들여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마스 관계자들이 이곳을 통해 빠져나가 카타르·사우디아라비아 등지에서 지원금을 받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요구로 이 국경 역시 폐쇄됐다. 이스라엘은 2014 50일간 전쟁을 벌이는 등 적대 관계를 계속하고 있는 하마스를 제재를 통해 고사시킨다는 전략을 펴고 있다.

 

이스라엘의 유력 인권 단체인 베첼렘은 최근 "하마스 봉쇄와 제재가 갈수록 세지고 있다"면서 "가자지구 내 많은 공장과 상점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고 전했다.


가자 주민들은 하마스의 강경 정책 일변도로 이스라엘과 불필요한 마찰을 빚어 제재를 당하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중고 자동차 사업가인 아부 탈립은 "경기 침체가 오래가면서 하마스에 대한 비판 여론이 커지고 있다"고 했다.


국제기구와 인권 단체들은 가자지구 봉쇄 해제를 요구하고 있다. 하마스와 무관한 일반 주민들이 받는 고통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유엔은 최신 보고서에서 "현재와 같은 상황이 4~5년 계속되면 가자지구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될 것"이라고 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3일 파리에서 열린 이·팔 분쟁 해결을 위한 국제회의에서 "국제사회의 감시 아래 지속 가능한 평화가 찾아올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가자는 1차 세계 대 전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으나, 1948 1차 중동전쟁 이후 이집트에 편입됐다. 하지만 1967 3차 중동전쟁으로 이스라엘에 넘어왔다. 1993년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이·팔 간 오슬로 협정이 체결되면서 가자는 다시 팔레스타인의 자치령이 됐다. 2006년 강경 매파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가자를 지배하고 있다

노석조 특파원 르포

 

◆일상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아이들이 연날리는 모습

 

▲가자시티의 말달리는 사람들

 

▲ 13. 6. 14. 가지지구 라파 해변

 

▲낙타를 타고 해변을  달린다 - 가자 라파

 

▲그림 같은 풍경

 

▲석양을 등지고

▲양치는 소년

 

▲파타당(정당) 48주년 기념 행사 13.1.4. 가자시티

 

▲파타당 기념

 

▲잔인성 - 이스라엘을 위해 일했다는 이유로 오토바이에 끌고 다니는 팔레스타인 무장 병사들

 

▲두더지 캠프 - 소년이 하마스 무장군 여름 캠프에서 훈련 13. 6.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