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여행/ 국가별66/ 카자흐스탄 - 카타르 - 캄보디아
■ 카자흐스탄 Kazakhstan
카자흐스탄 공화국, Republic of Kazakhstan
▲국기
터키어를 사용하는 ' 카자흐족'에서 유래되었으며 상당수 러시아인들이 유입되었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유목민 제국을 통합해 스텝 지역 전체를 지배했다. 1919∼20년에는 러시아에 점령당했고 1920년대 초 카자흐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다. 소련 붕괴 후 독립하여 초대 대통령의 지도하에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 서부의 공장 시설들을 카자흐스탄으로 옮겼기 때문에 제조업이 크게 발달했다. 20세기 말에 집약농업과 핵무기 실험으로 심각한 환경문제를 일으켰다.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했다. 수도는 누르술탄이다.
동쪽은 중국과 접하며, 남쪽은 키르기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서쪽은 카스피 해와 투르크메니스탄 일부 지역, 북쪽은 러시아와 이웃한다.
역사
카자흐스탄의 여러 지역들은 수세기를 거치는 동안 몽골 제국을 비롯해 다양한 중앙아시아 제국들의 일부분을 이루었다. 많은 우즈베크인들이 몽골의 보호하에 지금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는데, 이들이 '방랑자' 또는 '독립자'의 뜻을 가진 카자흐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들은 정착하여 농사를 짓는 선조와는 달리 유목민으로 생활했다.
15세기말에서 16세기초에 걸쳐 카자흐인들은 유목민 제국을 통합하고 1488∼1518년 사실상 스텝 지역 전체를 지배했다. 이 부족연합은 칸국이 부족장과 씨족의 우두머리들이 이끄는 유목민의 무리로 갈라지기 시작하면서 약화되었으며 17세기에는 오이라트족의 기습으로 더욱 약화되었다. 이무렵 북쪽에서 남하한 러시아인들이 처음에는 오이라트족을 막아내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였으나 결국에는 거꾸로 러시아인들의 지배를 받게 되어 1948년에 칸국은 완전히 사라졌다.
1917년 카자흐인들은 러시아 군주의 몰락을 몰고온 내전에 참여했으나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는 못했고, 1919∼20년에는 적군에게 점령당했다. 1920년 소련이 강제한 키르기즈 자치공화국에 편입되었다가 1925년 카자흐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927년 소련 정부는 카자흐 유목민이 국영집단농장에 정착하도록 강요하기 시작했으며, 또한 많은 러시아인들과 그밖의 슬라브인들도 이 지역에 정착하도록 전제적인 정책을 계속했다.
1950년대에는 그 동안 충분히 개발되지 않았던 카자흐스탄의 방대한 목초지에 대해 농업의 극적인 신장을 요구하는 소비에트 처녀·유휴지 개발사업에 따라 특히 많은 러시아인이 이주했다. 20세기말에 이르러 집약농업의 발전과 핵무기 실험장소로 이용되면서 심각한 환경문제를 일으켰다.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카자흐스탄은 여러 중앙아시아 공화국들과 함께 독립했다. 카자흐스탄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지도하에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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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의 동반자’ 카자흐스탄

▲조용천 駐카자흐스탄 대사

▲ 지난 2015년 5월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개최된 국제보건박람회에 우리 의료기관들이 참가해 한국 의료홍보회를 열고 있다
‘우리는 원동(遠東)에 살다가 카자흐스탄 실려 와서…카자흐스탄 사람들 우리를 돌봐주고, 집에 모여서 음식을 권하고….’ 지난 추석 무렵 고려인 동포들의 음식 문화를 소개한 KBS1 TV ‘한국인의 밥상’에 소개된 동포들의 옛 노래 중 한 대목이다. 지금도 고려인 동포들은 1937년 카자흐스탄이란 낯선 땅으로 이주해 갔을 때, 대기근으로 아사자가 속출하던 처지였던 카자흐스탄인들이 베푼 온정으로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카자흐스탄 거주 고려인 동포의 수는 10만 명 정도로 전체 인구 1800만 명 중 0.6%밖에 되지 않지만, 고려인들은 각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민족화합 우선정책과 고려인 동포들의 근면성, 성실성과 높은 교육열 때문에 가능했다.
카자흐스탄은 영토 면적이 서유럽 전체(한반도 12배)와 비슷한 크기의 대국이자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원유(12위), 천연가스(22위), 우라늄(2위), 석탄(8위), 크롬(1위)을 자랑하는 자원 부국이기도 하다. 동서양을 잇는 지정학적 위치, 풍부한 자원, 1991년 독립 이후 이룩한 지속적인 경제발전 등으로 카자흐스탄에 대한 세계 각국의 관심이 최근 들어 더욱 커지고 있다. 중국은 일대일로 정책의 첫 관문인 카자흐스탄과 에너지 물류 분야 등에서의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철군이 본격화함에 따라 카자흐스탄을 포함한 중앙아시아와의 협력을 더 강화하기 위해 작년부터 중앙아시아 5개국과 연례 외교장관회의를 개최하는 등 실질협력을 확대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러시아 또한 유라시아경제연합(EEU), 독립국가연합 등을 통해 전통적인 정치적·경제적 유대를 공고히 하고 있다.
2014년 6월 박근혜 대통령의 국빈 방문 시 한·카자흐스탄 간 전략적 동반자 관계의 호혜적 발전에 합의한 이래, 양국관계는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다. 안보 분야에서 자발적인 핵 포기 국가인 카자흐스탄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에 대해 ‘용인하지 못할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강력 규탄해 왔다. 카자흐스탄이 유라시아경제연합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했고, 동서양을 잇는 물류·교통의 요충 국가로 거듭나려는 야심 찬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라시아 대륙을 하나의 경제공동체로 발전시켜 나가려는 우리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정책과 지향하는 바가 크게 다르지 않다.
카자흐스탄은 우리 기업들의 누적투자가 2015년 말 기준으로 36억 달러에 달하는 중앙아시아 지역 최대 투자 대상국으로서 현재 금융, 제조업, 에너지, 건설 등 다양한 분야에서 200여 개의 한국 기업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은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고, 우리나라는 카자흐스탄이 필요로 하는 산업기술과 인적 자원에 강점이 있어 양국은 상호 보완적 경제구조를 바탕으로 한 협력 잠재력이 매우 크다. 특히,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경제 발전을 위한 산업다변화 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어 카자흐스탄은 우리 기업들에 기회의 땅이 될 수 있다.
카자흐스탄 젊은이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도 폭발적이다. 지난 9·24 아스타나에서 열린 K-팝 콘서트 입장권은 예매시작 40여 분 만에 동날 정도였다. 이와 같은 한국에 대한 호감도 상승으로 2011년 8421명에 불과했던 국내 입국자 수도 매년 30% 가까이 꾸준히 늘어, 2015년엔 2만9188명, 올해는 8월에 이미 2만3006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카자흐스탄은 지난해 한국을 찾은 의료관광객 수에서 5위, 1인당 평균 진료비에서 2위를 기록하는 등 우리 의료관광의 주요 고객이기도 하다.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지 25년 만에 카자흐스탄은 명실상부한 중앙아시아의 대표국가로 국제적 위상을 높여가고 있다. 그 카자흐스탄의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9일부터 2박 3일 일정으로 우리나라를 찾는다. 북핵 공조, 에너지·자원 협력뿐만 아니라 유라시아 경제공동체 실현을 위해서도 우리에게 매우 귀한 손님이다.
문화일보
◇조용천(58) △제15회 외무고시 △주중국1등서기관 △주선양참사관 △동북아2과장 △주중국참사관 △동북아시아국심의관 △주미국공사겸총영사 △주중국공사 △주홍콩총영사 △주카자흐스탄 대사
◆ 일상
◇ 카자흐스탄 지하철
◇ 카라간다에서 실제 일어난 5층 아프트 붕괴 사진
http://www.youtube.com/watch?v=MsdKwRSnRn4&feature=player_embedded
▲카자흐스탄의 소유즈 유쥬선 발사 기념물 공원
▲늑대 가죽을 상으로 받은 전통 씨름 우승자들 - 13. 5. 23
▲얼음나무
▲얼음속의 풀을 뜯는 말
■ 카타르 Qatar
카타르 국, State Of Qatar
▲국기
사우디아라비아 및 아랍에미리트와 접해 있다. 이민 노동자들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남성과 여성의 비율은 2대 1 정도이다. 대다수가 아랍어를 쓰며, 영어도 제2공용어다. 1940년 석유가 발견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급속히 현대화되었다. 1971년 독립 되었으며, 국제연합(UN)과 아랍 연맹에 가입했다. 모든 농경지가 국유이며, 대부분의 경제활동을 정부에서 관장한다. 최근 차츰 민간 부문의 경제 참여를 확대하는 정책을 펴나가고 있다. 1인당 GNP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
대체로 평평한 지형은 동쪽에서 중부 석회암 고원을 향해 조금씩 고도가 높아지는 것이 특징이다. 서부 연안을 따라 높이가 40m에 이르는 구릉들이 솟아 있으며, 동부 연안의 북쪽 끝에는 몇 개의 낮은 벼랑이 있다.
남부지역은 대부분 바람에 날려온 모래로 뒤덮여 있으며, 특히 남동부지역은 사구가 지형의 중심을 이룬다. 나머지 대부분의 지역은 돌과 모래로 뒤덮인 불모지로서 사구, 건조한 평지대, 염분이 침착된 평지를 이룬다.
카타르에 속한 많은 섬과 산호초들 가운데, 도하에서 동쪽으로 97km 떨어진 페르시아 만의 할룰은 카타르에 있는 3개 해저유전에서 나는 원유의 집유·저장지로서 큰 몫을 한다.
카타르는 전통적인 군주국으로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난 1971년 독립을 선포했다. 1970년 4월에 공표되고 그후 개정된 헌법에서 독립 주권국가 임을 선언했으며, 행정권은 총리직을 맡은 에미르(토후)에게 부여되었다.
관직은 대부분 고대 아라비아 샤리프족 계통인 바니타밈족의 후손인 왕족들이 차지하고 있다. 행정부는 각료회의(내각)와 총리가 임명하는 35명으로 구성된 자문회의로 이루어지는데 지주·농민·상인을 대표하는 자문회의는 각료회의에서 넘어온 소송 사건을 심의한다. 1971년에 처음 민법과 형법이 도입된 후 세속법원에서 모든 민사·형사 사건을 다루는 한편, 종교법에 바탕을 둔 이슬람(샤리아) 법원에서는 기본적으로 개인문제와 가정문제만을 다룬다.
카타르는 10세기경 여러 아라비아 작가들의 문학작품에 처음 등장한다. 18세기에 멀리 아라비아 반도 서단과 북단 지역에 살던 할리파족(알할리파)이 카타르 북서부 앗주바라로 이주해오자 여기에 위협을 느낀 페르시아인들은 1783년 카타르를 침략했다.
할리파족은 이들에 맞서 싸워 이 지방에서 페르시아인들을 몰아낸 후 본거지를 바레인 섬으로 옮겨 마침내 독립국 바레인을 세우고 앗주바라 주변지역을 바레인 영토로 선포했다. 그후 바레인 토후들과 카타르에 있는 이름뿐인 국민들 사이에 불화가 심해져 1867년에 전면적인 전쟁이 일어났다. 이 기간중에 바레인인들은 아부다비 토후의 협조를 얻어 카타르를 향해 진격했으며, 도하 시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다음해에 카타르 지역의 정치적 불안과 해적 행위의 빈발을 염려한 영국이 카타르 지배 가문의 후손인 무하마드 이븐 타니 알 타니를 토후로 앉혔으며, 무하마드는 자신과 이웃 나라의 분쟁 해결에 관한 모든 문제를 영국 판무관에게 일임한다는 협정에 서명했다.
오스만 제국은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 지역의 명목상 종주국으로서 1871년부터 카타르에 군대를 주둔시키려고 노력했으나 이러한 시도는 무력충돌만을 불러왔으며, 1893년의 전투에서는 토후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페르시아 만에 대한 투르크 제국의 영향력은 사라졌으며, 1916년 11월에는 트루셜스테이츠(지금의 아랍에미리트)를 본보기로 카타르가 영국의 보호국이 된다는 협정이 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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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카타르 도하
▲멋진 건물군
■ 캄보디아 Cambodia
캄보디아 왕국, Kingdom of Cambodia
▲국기
수도는 프놈펜이다. 서쪽과 북서쪽은 타이, 북동쪽은 라오스, 동쪽과 남동쪽은 베트남, 남서쪽은 타이 만(灣)과 접하고 있다.
넓은 평원과 여러 개의 큰 강으로 이루어진 캄보디아는 중국과 인도 및 동남 아시아를 잇는 주요 육상로 및 수로 가운데 위치한다. 프랑스와 미국의 영향 및 여러 아시아 문화의 영향이 수도인 프놈펜에 다양하게 나타난다. 프놈펜은 대부분이 농촌으로 이루어진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중심지 모습을 띠고 있다.
2,000년 동안 캄보디아는 인도와 중국으로부터의 영향을 흡수했으며, 그 흡수한 문명을 다른 동남 아시아로 전파했다. 1~8세기에 푸난과 첸라의 힌두교-불교 왕조에서부터 9~15세기 앙코르 시대를 통해, 캄보디아는 지금은 타이, 베트남, 라오스의 일부가 된 영토를 지배했다. 캄보디아의 크메르 제국은 12세기에 왕조의 전성시대를 누렸다. 이 시기는 앙코르와트, 바욘, 그리고 제국의 수도인 앙코르톰으로 알려진 거대한 사원 건축물 시대로 특징지어진다.
400년에 걸친 쇠퇴기 후에 캄보디아는 프랑스 식민지가 되었고, 20세기 동안에는 전쟁의 혼란을 경험했다. 그 후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립했고, 그 이후 다시 정치적 불안정을 겪었다.
1975~79년 나라는 농촌에서 공산주의 게릴라 운동을 펼치던 크메르루즈의 집권으로 황폐화되었다. 크메르루즈 집권기 동안 최소한 150만 명에 달하는 캄보디아인들이 피살되었거나 사망했다.
캄보디아는 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캄푸차 인민공화국 정권 아래서 회복을 위한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1990년대 이 나라는 정치적 자치를 회복했고 헌법에 기초한 정부를 재수립했다. 이어서 보통선거를 시행했다. 캄보디아 경제는 꾸준히 개선되었고, 이 나라는 "미래를 겁내지 말고 과거 때문에 슬퍼하지 말라."는 캄보디아의 격언대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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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시아누크 전 국왕 사망
▲캄보디아 노로돔 시아누크 전 국왕의 장례식을 앞두고 추모객들이 프놈펜 왕궁으로 모여들고 있다 13.2.4
◇캄보디아 국왕
▲14.10.29 프놈펜 노르돔 시하모니 국왕 즉위 10주년 기념행사
◆볼거리
◇세계 7대 불가사의 앙코르왓트
9-13세기 크메르제국의 수도였던 앙코르는 13세기 타이왕국의 침공으로 수도가 함락되는 바람에 지금의 프놈펜으로 수도를 옮김으로써 오랜세월동안 밀림속에 묻혀 잊혀졌던 곳이다.앙코르톰, 앙크로왓트 등 앙코르지역의 수 많은 유적들은 1860년 프랑스 동식물학자 '앙리무어'에 의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캄보디아 중소도시 '씨엠립'시 북쪽에 위치한 앙코르왓트는 12C전반 앙코르왕조의 수리야바르만 2세가 건축하였다. 동서로 약 1.5Km 남북으로 약 1.3Km 면적에 중앙의 탑을 중심으로 석조되였으며 주변에는 폭 200m의 인공호수로 둘러싸여있다.
세계적인 석조건물인 앙코르왓트는 그 웅대함이나 건축물 자체에서 풍기는 신비함 못지않게 세부적인 조각의 아름다움 또한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지정되기도 했던 앙코르왓트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의 하나로
인류의 값진 문화재이다.
▲힌두 사원 프레아 비히어 - 11세기에 세워져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사원 일대 소유권을 가지고 캄보디아와 태국이 치열하게 대립하였으나 13. 11.11. 국제사법재판소는 캄보디아의 손을 들어줬다
▲반얀트리 뱅골 보리수가 유적지를 감싸고 있는 따 프롬 사원 안젤리나 졸리가 주연한 톰레이더 촬영지
◆일상
▲대나무용
▲주택 철거로 집 잃은 캄보디아 여성
▲프놈펜 왕궁앞에 모인 사람들 - 13. 1.31. 시아누크 전 국왕 추모대
▲호수 위의 집 - 민속촌
▲호수 위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