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여행/ 국가별42/ 이집트
■ 이집트 Egypt
이집트 아랍 공화국, Arab Republic of Egypt

▲국기
세계에서 가장 오랜 문명의 역사를 가진 나라 중 하나인 이집트는 동쪽으로는 이스라엘·아카바 만·홍해와 접해 있고, 남쪽은 수단, 서쪽은 리비아, 북쪽은 지중해로 둘러싸여 있다. 이집트에는 겨울과 여름의 두 계절만 있다. 겨울은 서늘하고 온화하며, 여름은 일반적으로 무덥다. 이집트의 종교는 이슬람교이며, 대부분이 수니파에 속한다. 이집트는 부분적으로 자유기업을 인정하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가진 개발도상국이며, 산업의 약 70%가 국유화되어 있다.
이집트 국민은 신체적인 특징상 상당히 동질적인 집단을 이루는데, 이는 셈족과 함족의 피가 섞였기 때문이다. 나일 강 삼각주의 주민들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상(上)이집트(즉 나일 강 상류 유역의 남부 이집트) 주민들보다 중동의 다른 지역 및 유럽과 더 많은 접촉을 가져왔다. 소수민족 집단으로는 나일 강 유역 남부의 누비아인, 동부 사막 남부의 함족 계통의 베자인, 서부 사막의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의 혼혈족이 있다.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유럽인은 얼마 되지 않는다.
거의 13세기 동안이나 아랍어가 이집트의 문어이자 구어였다. 639년 아랍인이 침입하기 이전에는 고대 이집트어의 직계 언어인 콥트어가 종교와 일상생활에서 다 같이 통용되는 언어였다. 그러나 12세기까지는 거의 아랍어로 대체되었고, 콥트어는 콥트 교회에서 전례용(典禮用) 언어로만 존속하고 있다. 이집트의 공인 종교는 이슬람교이며, 국민의 약 90%가 이슬람교도인데, 대부분이 수니파에 속한다. 종교적으로 소수인 그리스도교도는 대부분 콥트교도들이다.
출생률과 사망률은 북아프리카의 평균수준이다. 연인구증가율은 세계 평균치보다 상당히 높은 편이며, 유아사망률 역시 높다. 국민의 1/3가 15세 미만이다(2017). 정부는 신생아와 아동의 높은 사망률을 줄이기 위해 산모와 어린이를 위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수준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특히 학령아동의 건강 관리에 비중을 두고 있다. 2022년 추계인구는 1억 534만 7,419명이다.
입국이민이나 출국이민은 전통적으로 아주 적었으나 국외로 이주하거나 외국에서의 임시취업을 원하는 사람의 수는 꾸준히 늘고 있다. 인구는 비옥한 나일 강 삼각주에 크게 밀집, 카이로 도시주(都市州)를 포함한 하(下)이집트 지방에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거주한다. 그러나 전체 이집트인의 절반은 아직도 시골생활을 한다. 20세기 동안 도시화가 꾸준히 진행되어왔지만, 수치상으로 나타난 도시화의 일부는 시골의 성격이 많이 남아 있는 여러 부락들을 중소도시로 지정한 행정제도의 개편에 불과한 것이었다.
다음백과
◆2015-09-11 알카에다, 9·11테러 14주기 앞두고 IS에 전쟁선포
9·11테러 14주기를 앞두고 테러조직 알카에다가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번 전쟁 대상은 미국이 아닌 극단주의 수니파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이다.
10일(현지시간) ABC 보도에 따르면, 알카에다와 이슬람국가가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은 미국에는 어부지리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알카에다 최고지도자인 아이만 알자와히리는 9일(현지시간) 공개된 음성 메시지를 통해 IS의 최고지도자인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를 "난동가" "이라크 테러리스트 은둔자"라고 칭하며 그는 "무슬림(이슬람교도)들은 그를 칼리프(이슬람의 최고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며 비판했다. 알바그다디는 14개월 전 이라크 모술 사원에서 자신을 '칼리프'라고 자칭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매튜 올슨 전 미국 국가대테러센터장은 "꽤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자와히리가 공개적으로 IS의 최고지도자 바그다디를 비난한 것은 처음이다"며 "이것은 알카에다와 IS간의 분열이 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두 테러단체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IS와 알카에다가 힘을 합쳤다면 "끔찍했을 것"이라고 올슨은 설명했다. "미국은 이 두 테러집단 간의 균열을 대테러 작전에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미국은 거짓정보를 흘려 두 테러단체가 서로 전투를 벌이거나 암살을 하도록 유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올슨은 설명했다. 실제로 지난해 2월 시리아에서 IS는 휴전을 요청하려던 알카에다의 특사를 살해하기도 했다.
알자와히리는 음성 메시지에서 "(알바그다디의 칼리프 선언에 대해)우리는 되도록 반응을 하지 않으려 했다"며 "그러나 알바그다디는 충성맹세를 어기고 자신을 칼리프로 칭하고 칼리프국가(IS)를 세웠다. 우리에겐 (전쟁 외의)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또 "알바그다디가 무슬림(이슬람교도)과 상의 한마디 없이 자신을 이슬람 역사 이래 4대 칼리프로 자칭해 모두 놀라 자빠졌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9일 공개된 알자와히리의 음성 메시지는 지난 봄에 녹음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가들은 밝혔다. 그는 음성 메시지에서 탈레반 지도자 물라 모하마드 오마르에 대한 충성을 반복해서 맹세한 점 때문이다. 그러나 탈레반은 오마르의 사망을 지난 7월 30일 공식 확인한 바 있다.
니콜라스 팔라리노 전 미 의회 대테러 고문이자 현 조지타운 대학 교수는 "알자와히리가 바그다디를 지목하며 전쟁을 선포하는 것은 알카에다와 IS 두 테러 집단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밝혔다.
"중도 무슬림은 이들 테러집단 간의 균열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고 팔라리노는 덧붙였다.
마이클 헤이든 전 미국 중앙정보국(CIA)장은 "알카에다는 오사마 빈 라덴의 사망 이후 이미 균열의 조짐을 보였다. 지금 알카에다와 IS간의 균열과 비슷하다. 이들 균열은 미국에게 이로울 것"이라고 말했다.
"오사마 빈 라덴 이후 알카에다의 지도자가 된 알자와히라가 이집트인이기 때문에 알카에다 내부에서 이집트인들과 다른 아랍인들 간의 균열이 일 것으로 예측했고, 역시나 예상대로였다"고 그는 설명했다.
【서울=뉴시스】
◆볼거리
◆아부삼벨
사막의 끝에 핀 인류 문명의 금자탑
▲네페르타리 신전
현재 아부심벨 관광은 하루 두 차례로 제한되고 있다. 지난 1997년 룩소르 하트셉수트 신전(神殿)에서 62명의 관광객이 테러집단에 의해서 희생된 사건 이후 아스완, 아부심벨 구간은 지금까지도 관광객이 탄 차량의 앞뒤에서 경찰의 호위를 받아야만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부심벨은 수단과의 국경지역으로 수백㎡나 되는 사막을 거쳐 가야 하기 때문에 테러리스트가 마음만 먹으면 그곳을 오가는 관광객을 표적으로 삼을 수 있다. 새벽 4시와 11시 두 차례 차량들이 출발하고 있다. 아스완에서 아부심벨까지는 280㎞로 대략 3시간 소요된다. 나와 아내는 새벽 3시 호텔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승용차를 타고 두 번의 검문을 받으면서 집결지에 도착했다. 출발시간이 가까워지자 대형버스, 승합차, 승용차 등이 집결하기 시작해 40여 대가 넘게 보였다. 선두차량의 호위 하에 길게 늘어서 사막을 달리는 모습이 장관(壯觀)이다.
시야를 뿌옇게 흐려 놓았던 새벽녘의 안개가 연기처럼 흩어지면서 벌써 동이 트기 시작한다. 잠시 후 사막의 지평선을 가르면서 붉게 물든 동녘하늘을 뚫고 솟구쳐 오르는 장대한 일출을 볼 수 있었다. 새벽에만 볼 수 있는 사막여행의 또 다른 백미(白眉)였다. 사막의 아침은 짧았다. 사막은 단 한 번의 기지개로 태양을 품속으로 받아들였다. 아부심벨 가는 도로변에는 화장실이나 편의시설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용무는 봐야 하니까 나는 중간쯤 가다가 차를 세우고 오줌줄기를 날림으로써 사막과 첫 대면을 했다. 바람이 심하게 불었으나 모래먼지는 날리지 않는다. 승용차가 가끔씩 버스에 추월당하는 이유가 바로 바람 때문에 몸집 큰 버스보다 속력을 더 낼 수 없기 때문임을 알았다. 사막은 누런 황토 빛 바탕에 검게 탄 듯한 봉우리가 점점이 흩어져 있어 신화적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공기는 청량하고 시야는 넓어서 상쾌한 기분이 든다.
하이댐 완공으로 생겨난 거대한 사막의 호수
오전 7시20분경 아부심벨에 도착하자 먼저 마주한 것은 아스완 하이댐 완공으로 사막에 거대한 푸른 담수호(淡水湖)가 끝없이 이어지는 장관이었다. 수단 국경까지 이어지는 사막의 호수는 나일강을 끼고 5000년간 이어져 오던 문명의 풍토와 역사를 바꿔놓고 있다고 한다. 거대한 자연을 인위적으로 변화시켜 도전한 대역사(大役事)에 앞으로 신(하늘)은 어떤 인과응보를 내릴지 자못 두려움이 앞선다.
이집트 왕국 3000년 역사상 가장 번영한 시대를 이끌었던 람세스2세는 태양신 아몬(라), 창조신 프타 그리고 자신을 위해 거대한 신전을 건립했다. 이곳 아부심벨에는 람세스2세 신전으로 불리는 아부심벨 대신전(大神殿)과 그가 가장 사랑했던 부인 네페르타리를 위한 신전인 하트로 신전이 나란히 나일강을 바라보며 서 있다.
아부심벨 대신전 앞에는 20m 높이로 우뚝 서 있는 4개의 람세스2세의 거상(巨像)이 있다. 그의 두 다리 사이에는 그의 딸의 상(像)이 발가락을 딛고 미소 짓고 있다. 신전 내부에는 오시리스 신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람세스2세의 8개의 입상(立像)이 서 있고 기원전 1275년 시리아의 카데쉬에서 벌어진 히타이트와의 대규모 전투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고통스러워하는 병사들의 표정이나 내뿜는 힘의 열기가 대열주실(大列柱室)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람세스는 자신의 위대한 업적을 신전에 새김으로써 누구도 이곳을 지나 쳐들어올 생각 말라는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웃에 있는 왕비의 신전은 람세스의 그것에 비해 규모가 작고 소담스럽지만 건강미와 세련미가 돋보였다.
▲아부심벨에는 람세스2세 신전으로 불리는 아부심벨 대신전(大神殿)과 그가 가장 사랑했던 부인 네페르타리를 위한 신전이 나란히 나일강을 바라보며 서 있다.
아부심벨 신전, 수몰 막기 위해 통째로 자리 옮겨
우리가 아부심벨 신전에 더 애착이 가는 것은 물속에 잠겨 있어야 할 위대한 인류의 축조물이 지상에 남아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1959년 이집트 정부가 관개수로를 통한 농업혁명을 내세우며 아스완댐을 건설한다고 발표했을 때, 아부심벨도 나일강가에 있는 무수한 신전과 함께 수몰(水沒)될 운명에 처했다. 그러나 유네스코를 중심으로 하는 문명세계는 이 위대한 문화유산을 살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인류사회는 막대한 돈을 들여 두 신전을 1000여개 조각으로 나누어, 1967년 9월 드디어 원래의 위치보다 210m 뒤쪽, 63m 위쪽으로 통째로 옮겨놓는 데 성공했다. 이전(移轉)기금을 댄 50개국 중에는 한국도 포함된다. 당시 우리는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하지 못했지만 크리스마스 실(seal)을 판매한 수익금을 보냈다고 한다.
신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잘랐다 이어붙인 자국을 수없이 볼 수 있다. 조각조각 잘린 람세스의 근엄한 얼굴에는 현대인의 무지를 꾸짖는 뼈아픈 충고가 서려 있는 듯하다. 아무튼 아부심벨 이전공사는 인류 역사상 유례(類例)를 찾아볼 수 없는 사건으로, 아부심벨이 고대 이집트의 문화유산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유산임을 세계인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양 신전의 관람을 마치고 소나무 수십 그루가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는 돌벤치에 앉아 멀리 사막 가운데로 파랗게 펼쳐져 있는 아스완댐이 만든 나일호수를 바라보면서 끝없는 상념의 나래를 펼쳤다. 나일강은 저 사막을 가로질러 흘러오는데 나그네의 발길은 이제 아부심벨에서 끝나야 하는가! 여기서 50㎞만 가면 검은 아프리카 왕국 누비아 땅이었던 수단 국경이라는데. 나는 아프리카 내지(內地)로 향하는 사막의 소실점(消失點)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저 신기루가 어른거리는 사막의 바다도 사람이 가면 길이 되고, 그 길은 결국 사람과 해후하고 다시 나그네에게 영감과 상상력과 밝은 시정(詩情)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불현듯 나는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저 사막 깊은 곳을 향하여 훨훨 날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새로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하듯이 시간과 공간이 바뀐 낯선 세계의 풍경 속으로 때론 돈키호테처럼, 때론 고독과 절망을 벗삼아 내 안에 숨겨진 낯선 또 하나의 나의 세계, 저 ‘아브락사스(Abraxas)’를 향하여….
문득 눈을 돌려 벤치 앞을 보니 10여 마리의 개들이 떼거리로 몰려와 관광객이 던져준 음식을 받아먹는다. 나한테도 보시(布施)를 바라고 있다. 개들마저도 ‘원달러, 원달러’ 하는 듯이 보였다. 가이드가 나의 사색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추가설명을 한다. 이번 가이드는 가장 마음에 들었다. 진솔하기도 하였지만 그는 미리 준비해온 메모지와 사진첩을 보이면서 연대와 중요사건, 숫자 등을 적어 보이기도 하고 중요사항은 제스처 섞어 강조하기도 하는 등으로 성의를 다하여 설명해줘 놓치는 것이 거의 없었다. 헤어질 때 팁을 더 얹어주었다.
두고 떠나기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고 뒤돌아보는 심정으로 아부심벨을 뒤로 하고 11시에 아스완으로 향했다. 오는 도중 잠을 못 잔데다 피로가 겹치고 긴장의 이완으로 앉은 채로 눈을 붙이려 해도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아내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발을 뒷좌석 의자에 올리고 1시간가량 자는 둥 마는 둥 휴식을 취하고 나니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다.
멀리 바다에 푸른 물결이 일렁이고 푸른 산맥이 연이어 있는 풍광이 계속되고 있었다. 가이드가 저것이 바로 신기루(Mirage)라고 했다. 아무리 봐도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듯한 광경이었다. 사막에서 길을 잃고 그곳을 향하여 기진맥진 가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래 속에 묻혔는가.
아스완 시내로 들어오면서 구(舊)아스완댐(일명 브리티시댐) 위에서 차를 세웠다. 나세르 대통령이 이 댐 바로 상류에 아스완 하이댐을 건설함으로써 이 댐의 역할은 크게 줄었지만 이집트를 식민지로 관리했던 영국인들의 저력을 아직도 느끼기에 충분할 정도로 견고하고 당차보였다. 아스완은 이집트가 끝나고 누비아가 시작되는 지점으로, 많은 유적지와 사연이 산재(散在)해 있다. 아스완의 고대유적인 신전과 카르낙 유적지 및 세계 최고(最古)의 화강석 채석장 등을 차 안에서 상견했다.
▲아부심벨 신전 앞에는 20m 높이로 우뚝 서 있는 4개의 람세스2세의 거상(巨像)이 있다. 두 다리 사이에는 그의 딸의 상(像)이 미소 짓고 있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나일살인사건 집필한 호텔에 묵어
시내에 당도하자마자 곧바로 나는 오늘 묵기로 한 호텔을 포기하고 올드 카트락트(The Old Catract) 호텔로 옮겼다. 이 호텔은 내가 원래 머물고 싶은 호텔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가 머물면서 영화로도 만들어진 <나일살인사건(Death on the Nile)>을 집필한 곳으로, 역시 그녀가 <오리엔탈 특급살인사건>을 집필한 이스탄불 탁심 지구에 있는 패라팔레스 호텔과 더불어 이번 여정의 주요 탐사포인트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올드 카트락트는 과거 롬멜 원수, 처칠 수상 등이 휴식을 취한 바 있는, 100년이 넘은 이집트를 대표하는 유서 깊은 호텔이다. 내부 정원과 실내 장식, 주변 위치가 최상급이었다. 신관 내에는 최고의 스파시설과 각종 여가시설이 갖춰져 완벽한 휴양지로서 손색이 없었다. 객실 역시 가격에 비해 최고의 안락함과 최상의 전망을 자랑하고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나일강의 정경은 꿈속의, 아니 천국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 아늑함에 빠져들게 한다. 아스완은 나일강의 최고 풍경을 자랑하며 그 중에서도 이곳 올드 카트락트 호텔에서 보는 나일강과 석양의 노을은 으뜸이란다.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아내는 어젯밤 열차 안의 충격을 떠올리면서 하루 만에 지옥에서 천국으로 온 경험이라고 흡족해한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이 들면서 결혼 30주년 기념여행이기도 한 이번 여정의 과정에서 어느 정도 체면이 선 것 같기도 했다. 호텔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때우려다가 대신 아내가 준비해온 컵라면에 김치, 마늘장아찌, 볶은 멸치, 고추장 등을 곁들여 호텔 객실에서 맛있게 포식했다. 식사 후 직원의 안내를 받아 애거서 크리스티가 <나일살인사건>을 집필한 방을 찾았다. 구관 2층(1201호실)에 있는 방의 거실, 집필실, 침실 등을 보면서 그녀의 작품 집필의 고뇌와 희열을 느끼려 하였다. 집필 의자에 직접 앉아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녀가 사용했던 방은 현재도 스위트룸으로 손님을 받고 있다. 하루 방값은 7000달러(약 800만원) 정도라고 한다.
1928년 크리스티는 첫 남편과 이혼하고 14세 연하의 옥스퍼드대학 출신의 고고학자와 결혼한다. 그녀는 해마다 남편과 함께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로 몇 개월씩 탐사여행을 떠났다. 소설로 번 돈을 고고학에 투자했다.
탐사여행은 그녀가 68세였던 1958년까지 계속 되었으며 남편인 맥스 멜로원은 우르, 니네베, 님루드 발굴에 큰 업적을 남겼다. 부부는 금슬이 좋았다. 탐사여행의 추억은 크리스티 소설의 배경으로 활용되었으며, <나일살인사건> 역시 그 여행의 산물이었다. 크리스티는 매우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 일화 하나, 1962년 고급호텔에서 개최된 <쥐덫>(1952년 막을 올린 이래 지금까지도 상연되고 있는 그녀가 쓴 희곡) 상연(上演) 10주년 행사에 온 크리스티를 현관안내인이 알아보지 못하고 입장을 막았다. “내가 행사의 주인공이요” 하면 될 것을 그녀는 아무 말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울었다고 한다.
이어 석양이 내리는 나일강가에서 예약해둔 페루카(손으로 노를 저으면서 바람의 힘으로 나가는 작은 돛단배)를 타고 편안한 마음으로 한가하게 아스완 시내를 끼고 흐르는 나일강변을 감상했다. 강 중간지점에서 돌아오는데 바람이 불지 않아 페루카가 움직이지 않는다. 손으로 노를 젓다가 여의치 않아 작은 모터선을 불러 옮겨타고 호텔 선착장으로 돌아왔다. 객실에 도착하니 두 아들에게서 안부전화가 왔다. 오늘이 어버이날임을 축하드리며 행복하고 건강한 여정이 되라는 말에 가슴이 뿌듯하고 고마웠다. 객실의 테라스에서 나일강의 밤풍경을 바라보면서 담소하다 꿈나라에 빠져 푹 자고 나니 피곤함과 찌뿌둥한 몸 상태가 완전히 풀리고 활력이 찾아왔다. 이집트 여행의 정수이자 생의 보람과 환희를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것이 인생의 참멋과 삶의 희열이 아닐는지!
오늘은 카이로를 거쳐 터키 이스탄불로 간다. 아침 6시55분 카이로행 항공기를 타기 위해 새벽 5시30분 호텔을 출발했다. 호텔에서 맛있는 아침식사를 하면서 좀 더 여유로운 시간을 못 가진 것이 못내 아쉽고 서운했지만 언제 올지 모를 후일을 기약했다. 비행기는 정시에 출발, 아침 8시20분 카이로 신공항에 착륙했다. 카이로 신공항은 넓고 쾌적했으며 그렇게 붐비지도 않았다. 예정했던 이집트 맞춤여행을 주선한 현지여행사 사장이 초대한 아침식사를 취소하고 공항 구내에서 이집트 여행을 정리하는 글을 쓸 시간을 갖기로 하였다. 공항식당에서 샌드위치와 빵으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드넓은 공항을 바라보면서 이 글을 쓰다 보니 벌써 터키항공 탑승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아부심벨 신전
이코노미조선 글 | 이석연 변호사 사진 | 이집트관광청
◆스핑크스
▲왕가의 계곡,파라노 무덤 24기와 64기의 왕가 무덤이 있다
◆세계 최고(最古)의 고고학 유적지 룩소르
나는 이집트에서 거추장스러운 문명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거기서 모든 것을 꿈꾸었고, 꿈꾸었던 모든 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이집트에서 보낸 시기는 나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순간이었기에
▲ 룩소르 신전
이집트 원정을 통하여 5000년 이집트 문명의 신비를 벗기고 이집트학(學)의 기초를 세웠던 보나파트르 나폴레옹이 황제로 취임하기 전에 읊었던 시이다. 어찌 보면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 이미 황제를 꿈꾸면서 당시 세계를 제패한 람세스 2세를 닮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카이로 일대가 대(大)피라미드로 연상되는 이집트 고왕국의 중심이라면 카르나크 신전이 있는 테베는 침입자 힉소스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이집트를 건설한 곳이다. 파라오 중심의 역사에서 이집트 대중의 시대, 람세스 2세의 시대가 화려하게 꽃피웠던 곳, 바로 테베가 오늘날의 룩소르 일대이다. 3500년 전 나일강 상류에 번성했던 왕묘와 신전의 도시, 이집트 문명의 혼과 대중적 신화가 살아 숨쉬는 룩소르를 빼면 이집트여행은 나에게 별 의미가 없다.
어젯밤 카이로 신공항에서부터 1시간의 비행 끝에 룩소르에 도착했다(2013년 5월5일 오후 9시10분). 훈훈한 사막의 기운이 온몸을 덮친다. 카이로 기자지역과 더불어 이집트 최대의 관광명소이자 고고학 유적지 룩소르, 기원전 1550년부터 1075년까지 500여 년간 고대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수도였던 테베가 있던 곳이다. 고대 세계 아니 현대를 통틀어서도 최고(最古) 품격의 문명을 이루었던 룩소르(Luxor)의 번영에서 화려함과 품격, 사치스러움을 뜻하는 영어 ‘Luxury(럭셔리)’의 어원이 파생되었음은 익히 알려진 바다.
현지인 가이드의 마중을 받아 공항에서 20여분 거리에 있는 나일강변 바로 앞의 윈터팰리스 호텔에 여정을 풀었다. 이미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관광 도시답게 사람들이 거리에서 마차를 타거나 삼삼오오 모여 얘기꽃을 피우고 있다. 카이로와는 달리 고대 유적도시다운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가 감돈다. 호객꾼들의 극성은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시내 산책을 하려다가 너무 피곤해서 내일을 대비해 11시경 잠자리에 들었다.
‘Luxury’의 어원이 된 룩소르
▲ 카르나크 신전 입구 양쪽에 줄지어 선 양머리 형상의 스핑크스 행렬
새벽 객실 발코니에서 바라본 유람선과 크고 작은 선박이 정박해 있는 호텔 앞 나일강의 정경은 투명한 하늘에 물감을 물에 헤쳐 놓은 듯 뚜렷하면서도 환상적인 이국적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었다. 아침 식사 전 호텔 바로 옆에 있는 룩소르 신전을 산책, 조깅 겸해서 외부에서 둘러보았다.
정말 웅대하고 고색창연함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설렘과 호기심을 돋우고 있었다. 이곳은 오후에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조식을 하러 가면서 호텔 1층 벽면 사진을 보니 유명인들이 꽤 다녀간 전통 있는 호텔이었음을 직감했다.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과 각국의 저명인사들이 다녀간 사진을 흑백에서 컬러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담아 전시하고 있었다. 최근에만도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과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전 수상이 투숙한 사진이 걸려 있다.
8시경 먼저 왕들의 계곡을 찾았다. 룩소르 시내에서 애스완 방면으로 30여분 거리다. 관심 있게 공부해 둔 내용에다 가이드의 설명을 곁들이니 많은 부분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왕가의 계곡은 관광객 1인당 한 장의 티켓에 3군데 파라오 고분(무덤)의 관람만 허용하고 있다. 투탕카멘의 묘를 보려면 별도의 입장권(100 이집트 파운드)을 따로 구입해야 한다. 왕들의 계곡 입구에서부터는 사진, 비디오 등의 촬영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나는 람세스4세, 람세스6세, 메렌푸타 왕의 묘를 선택해 내부에 들어갔다. 화려한 벽화와 엄청난 크기에 말문이 닫힌다. 중국 황제들의 묘도 크고 웅장하지만 그들보다 1500~2000년 더 오래된 이집트 파라오의 그것에 비하면 오히려 비교를 삼가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어 그렇게 기대하고 가보고 싶었던 소년왕 투탕카멘의 묘실로 향했다. 투탕카멘 묘실은 다른 파라오에 비하면 규모가 작다. 다만 유일하게 도굴이 안 된 상태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에 엄청난 양의 고고학 유물들이 쏟아져 세계를 놀라게 하고 고대 이집트사를 다시 쓰게 하였던 것이다. 가장 초라하고 허약했던 한 파라오의 무덤이 이러할 진데 아직도 숨겨져 있는 수많은 파라오들의 무덤의 규모나 그 부장품은 상상을 초월한다. 고고학에서 발굴의 시대는 끝났다고들 하지만 나는 인간의 상상력과 호기심이 빛을 발하는 한 모험과 낭만의 시대는 계속되고 있다고 굳게 믿는 고고학의 아웃사이더이다. 세계 도처에서 그 지하에서는 수많은 부장품이 도전적인 모험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수천 점에 달하는 투탕카멘 묘실의 부장품들은 모두 어제 가본 카이로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묘실의 맨 끝 석실에 황금마스크를 벗겨낸 투탕카멘의 실제 미라와 황금관 두 개가 발굴 당시의 그 지점에 그대로 보존 전시되고 있었다. 바로 이 실제 미라를 보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 온 것이다. 3400년 전에 어린 나이로 등극해 18세에 요절한 투탕카멘의 미라 앞에서 나는 잠시 묵념을 한 다음에 한참 동안 서성이면서 발길을 뗄 수가 없었다.
1997년 62명 관광객 살해된 하트셉수트 신전
▲ 카르나크 신전 입구 양쪽에 줄지어 선 양머리 형상의 스핑크스 행렬 사이로 계단을 내려가면 장엄한 열주(列柱)의 행렬이 이어지면서 이 신전의 건설자인 람세스 2세의 거상(巨像)이 나타난다.
왕들의 계곡을 빠져 나와 반대쪽 산등성이에 있는 하트셉수트 신전을 찾아갔다. 남장을 하고 수염을 단 채로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긴 하트셉수트 여왕의 신전은 3층으로 되어 있으며 1층에는 별다른 벽화나 부조물은 없고 2층에 주요한 벽화 부조물들이 즐비했다. 3층은 그 뒤에 있는 신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 뒷면을 장식하는 벽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50여 분간 관람을 마치고 신전 주변을 보니 마치 고대 세계로 온 것처럼 온통 발굴 중이거나 이미 발굴된 또 다른 작은 신전들이 주변에 즐비한 것을 보고 인간의 겸손함과 역사에 대한 경외감이 솟구친다. 저 멀리 나일강변을 따라 파랗게 물든 룩소르 평야는 과연 이곳이 사막 한가운데인가를 잠시 잊게 하고 있다. 황량한 사막의 산맥에서 문명의 최정점(最頂點)을 달성한 고대 이집트인들에 대한 관심과 존경심이 갑자기 더해간다. 왕들의 계곡을 비롯한 왕비의 계곡, 귀족의 계곡이 이처럼 50℃까지 기온이 올라가고 1년 내내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곳에 자리 잡은 것이 오히려 그들의 자취를 오늘에 남겨준 것임을 생각할 때 풍수지리적 관점에서도 묘터를 잘 잡았다고 생각된다. 비록 도굴을 막을 수는 없었을 지라도.
이때 나는 불현듯 하트셉수트 신전 앞 광장 한가운데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바로 이곳에서 1997년 11월17일 이슬람근본주의 테러분자들에 의해서 62명의 관광객이 무차별 살해되는 참극이 발생했던 것이다. 테러분자들은 여왕신전의 왼쪽 언덕에서 갑자기 쳐들어 왔다고 한다. 그들은 아랍의 전통의상인 흰색 긴 옷 속에 무기를 감췄다가 갑자기 꺼내 방아쇠를 당겼다. 순식간에 문명의 참배지는 뜨거운 피로 물들었다. 신전의 왼쪽 언덕 쪽으로 따라 올라가 봤다. 산허리의 동굴 몇 군데가 눈에 들어왔다. 동굴은 아직도 철망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아래를 보니 광장에 있는 관광객들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테러분자들은 여기에 몸을 숨기고 기회를 봤던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타는 듯한 뙤약볕 아래 선 채 비명에 간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면서 향후 내 여정의 순탄함이 이어지기를 기원했다.
▲(좌) 남장을 하고 수염을 단채로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긴 하트셉수트 여왕의 신전에서는 1997년 11월 62명의 관광객이 무차별 살해되는 참극이 발생했다. (우)윈터팰리스 호텔 객실에서 바라본 룩소르 나일강변. (사진제공 : 이석연 )
이집트문명의 백미 카르나크 신전
5월 초인데도 섭씨 42℃의 찌는 듯한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다만 습기가 없고 바람이 불어와 그늘에서는 금방 땀을 식힐 수 있었다. 이어 하부 신전(Habu Temple)과 멤논(아멘호테프 3세)의 거상(巨像)을 보고 나니 어느덧 12시다. 호텔 윈터팰리스의 야외 가든에서 샐러드, 샌드위치, 빵 등으로 점심을 때웠다. 그늘이지만 40도가 넘는 날씨라 후덥지근함이 몸을 감싸고 있다. 오후 일정은 더욱 기승을 부리는 더위 속에서 강행군을 했다. 저 유명한 카르나크 신전과 룩소르 신전을 둘러보는 코스다. 카르나크 신전,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나는 이집트문명 아니 인류문명의 백미(白眉)라고 말하고 싶다! 신전 입구 양쪽에 줄지어 선 양머리 형상의 스핑크스행렬 사이로 의장대의 사열을 받듯이 계단을 내려가면 장엄한 열주(列柱)의 행렬이 이어지면서 이 신전의 건설자인 람세스 2세의 거상(巨像)이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아몬 신전의 134개의 거대한 기둥으로 이루어진 대열주실(Great Hypostyle Hall)은 더 이상 생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을 불허하고 있다. 1000년 후에 세워진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의 돌기둥은 이에 비하면 행랑채의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돌기둥마다 이집트 상형문자가 채색으로 새겨져 있다. 비록 많이 바래기는 했지만 채색의 아름다움이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몬 대신전의 이미지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영화화한 동명의 <나일 살인사건> 화면을 통해 내게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나란히 도열하고 있는 양 조각상, 현기증이 날 것만 같은 돌기둥, 돌기둥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낙석들의 공포…. 바로 이곳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1시간 반에 걸친 카르나크 신전 관람에 이어 아침에 조깅하면서 담 밖에서 둘러봤던 룩소르 신전으로 향했다. 현재 카르나크 신전과 룩소르 신전을 직선으로 연결하는 3㎞의 도로를 뚫을 계획이 진행 중이라고 가이드는 강조하고 있었다. 거대한 람세스 2세의 좌상(坐像)으로부터 시작되는 룩소르 신전은 카르나크 신전에 비하여 그 규모는 작지만 역시 람세스의 위대한 치적을 나타내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신전 입구의 오벨리스크는 하나만 외롭게 서 있다. 다른 하나는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으로 옮겨 파리의 명물이 되었음은 우리 모두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다. 앞서 카르나크 신전 입구의 오벨리스크 하나는 이스탄불의 히포드롬 광장에서 관광객을 맞고 있다. 역사는 이렇게 뒤섞이고 강자가 약자가 되고 언젠가 약자가 다시 강자가 되면서 약탈과 지배를 반복하면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후 4시경 호텔로 돌아와 로비 휴게실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이제 애스완으로 떠나는 오후 6시25분 열차를 타기 위해서 룩소르 역으로 갈 시간이다. 그리고 4시간 후면 이집트의 최남단에 위치한 애스완에 도착할 것이다.
이석연 변호사
▲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룩소르 사원 14,4.30 일반 공개
▲파라오= 3500년 된 룩소르 신전
◆풍경
▲아스완
▲와디 알 히탄(고래 계곡) 밤하늘 위의 은하수
▲태양속의 비행기 카이로
▲사하라사막의 오아시스 - 리비아 이집트 아랍
▲나일강
▲크루즈 야경
▲피라미드,스핑크스,황금마스크 문명을 잉태한 나일
▲룩소르 나일강 지역의 아름다운 일몰 풍경 - 13. 2. 27. 열기구가 폭발하여 관강객 19명이 사망한 곳
▲카이로 나일강 전경
▲서부의 백사막
▲서부의 흑사막
◆일상
▲이집트 비둘기장
▲112년만의 폭설 - 13. 12. 11부 내린 폭설 폭우로 4명이 사망, 아열대 및 사막 기후 기상 이변이 발생
▲무슬림
▲빵장사
▲카낙 궁전의 기둥
▲카이로 박물관
▲코대 태베
▲텅 빈 리조트 - 시나이 반도 소요 사태로 버려진 리조트 13. 7. 11
▲해변
◇시위
▲소요 기도하는 사람들 11.2.4. 카이로 -로이타
▲국민들의 시위와 기도
▲11.2.11.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서 무바라크 대통령 퇴진에 환호하는 군중들
▲민주화 시위대 수십만 명 11.11.22.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 모인 살라피스트 들 ( 초기 엄격한 이슬람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
▲대통령 궁앞의 시위대와 탱크부대
▲시위군중
▲이집트 군부 대통령 권한 박탈 13. 7. 3. 환호하는 시민들
▲모르시 실각 축하 - 13. 7. 3. 타흐리르 광장
▲모르시 대통령 축출 - 13. 7. 4.
▲카이로 축하 비행기와 석양 속의 남자
▲이집트 열차 추돌사고 2017.08.11 43명 사망 122명 부상
-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