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여행/ 국가별40/ 이란
■ 이란 Iran
이슬람공화국, Jomhuri-ye Eslami-ye Iran, Islamic Republic of Iran
▲국기
국교는 시아파 이슬람교이며 유대교·조로아스터교 등을 믿기도 한다. 해발 460m 이상의 고원지대이고 10% 정도가 경작지이다. 세계 석유매장량의 약 10%에 해당되는 풍부한 석유매장량이 이란 경제의 기반이다. 여러 이슬람 왕조들이 오랜 기간 통치했으며, 19세기에는 영국 등의 경제적 지배를 받았다. 1979년 팔라비 정권을 무너뜨린 시아파 지도자 호메이니는 이슬람 공화국을 세웠다. 1980~90년까지 치렀던 이란-이라크 전쟁은 막대한 경제 파탄을 가져왔고, 이후 정부의 국정운영은 점차 자유주의적 방향으로 바뀌었다.
이란 국민의 3/4은 페르시아인들과 쿠르드족 등으로 구성된 이란인이다. 그 외에 투르크족은 인구의 약 1/5을 구성하며, 나머지는 아랍인과 아르메니아인등이 있다. 서부 산악지대에는 정부의 동화 노력에 저항해온 유목민족인 쿠르드족과 페르시아 원주민으로 보이는 반(半)유목민족인 루르족이 살고 있으며, 에스파한(이스파한) 서쪽 자그로스 산맥에는 루르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바흐티아리족이 거주하고 있다.
루르족과 바흐티아리족 모두 페르시아어 방언인 루르어를 쓰며, 발루치스탄에 사는 발루치족도 루르어를 사용한다. 이란에 거주하는 또하나의 민족 집단인 아르메니아인들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고유 언어를 계속 쓰고 있다.
인구 가운데 투르크계의 비율은 적은 편이지만 이란인의 1/4가량이 튀르크어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한다. 3개의 주요 투르크계 민족집단은 이란 서북부 모퉁이의 아제르바이잔인과 페르시아 만 동쪽 시라즈 지역의 카슈카이인, 동북부 호라산 지역의 투르크멘족 등이다. 소수의 셈족(유대인·아시리아인·아랍인)도 거주한다.
이란인들의 거의 다 이슬람교도로서 대부분 공식 국교인 시아파 이슬람교를 신봉하며, 기타 조로아스터교 등의 소수종교가 분포한다. 공식어는 페르시아어이고, 터키어·쿠르드어·아랍어 등도 사용되고 있다. 2022년 기준 이란의 인구는 8,568만 3,745명이고 인구밀도는 51명/㎢ 이다. 15세 이하 인구가 전체 인구의 1/4을 차지하고, 도시거주자는 인구의 3/4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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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이야기
◇2017.07.20 다리우스 대왕의 다언어주의 - 세계 최초 제국 건설자 그가 남긴 베히스툰 비문의 비밀
세계 최초로 제국을 건설한 왕은 누구인가? 우리는 흔히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고대 페르시아제국의 다리우스 대왕(기원전 550~486년)이 인류 최초로 제국을 건설한 왕이다. 그는 기원전 550년경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파르티아 통치자 히스타스페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세 번째 왕으로, 기원전 522년부터 기원전 486년까지 36년간 통치하였다. 그는 서쪽에서 새롭게 등장한 아테네와 기원전 490년 마라톤전쟁을 치렀던 왕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다리우스 대왕은 제국에 필요한 경제구조, 도로망, 통화 등을 정비하여 인류 최초의 제국을 만들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다리우스에 관한 자료를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저작 ‘역사’에 의존해왔다. 페르시아에 관한 사료를,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그리스 역사가의 눈으로 해석해온 셈이다. 헤로도토스의 해석이 객관적 사실을 표방하고 있지만 왜곡될 수밖에 없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시작된 ‘오리엔트 르네상스’로 페르시아 쐐기문자가 판독되기 시작했다. 쐐기문자는 19세기 초 판독될 때까지 1500년 이상 사람들에게 장식으로만 여겨져왔다.
1618년 피구에로아가 고대 페르시아 다리우스 대왕과 그의 후손들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에서 수많은 유적지의 흔적을 보았다. 그리스, 로마의 저자들이 자신들의 작품에서 숱하게 언급했던 바로 그 왕이었다. 그는 이 유적지에서 새로 발견한 알 수 없는 문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 문자들은 아람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혹은 아랍어도 아니다. 이들은 삼각형으로 피라미드나 오벨리스크 모양과 거의 유사하다.”
1657년, 필사한 쐐기문자가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당초 쐐기문자는 이집트의 성각문자와는 달리 유럽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1700년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히브리어와 아랍어 교수였던 하이드는 이 문자들이 쐐기처럼 생겼다 하여 설형문자(楔形文字·cuneiform)라 불렀다. 영어의 cuneiform은 cuneus(쐐기)+forma(모양)의 합성어다. 1712년 네덜란드의 의사이며 고전학자인 캠퍼가 1686년 유적지를 방문해서 그린 쐐기문자 문서를 출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1770년대까지 쐐기문자 판독에는 진전이 없었다. 그러다가 덴마크의 여행가였던 니부르가 페르세폴리스에 써 있는 문자는 모두 세 종류라는 것을 알아냈다. 이 세 종류의 문자는 후에 인도-유럽어인 고대 페르시아어, 고립어인 엘람어, 그리고 셈어인 아카디아어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니부르의 작업은 18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쐐기문자 판독의 기초를 놓은 셈이다.
쐐기문자 판독에 첫 진전을 본 사람은 독일 괴팅겐의 고등학교 라틴어 교사였던 그로테펜트였다. 그는 중기 이란어와 산스크리트어, 그리고 고전문헌 등에서 반복되는 관용어구를 대입시켜 1802년 고대 페르시아어를 거의 판독하게 된다. 그가 만든 음절표에 실수가 있었고 그가 대학교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그가 쐐기문자 판독의 선구자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베히스툰 비문의 발견
쐐기문자 판독이 진행되면서 단문보다는 페르세폴리스에 있는 장문의 쐐기문헌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란의 자그로스산맥의 서쪽 베히스툰산에는 한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영국의 장교이자 외교관인 로린슨(1810~1895)은 1826~1833년까지 인도에 장교로 머물면서 힌디어, 아랍어, 현대 이란어를 배웠다. 그 후 이란 국왕 군대를 훈련시키기 위해 베히스툰산이 속해 있는 케르만자 지방의 책임자로 부임했다. 그는 탁월한 체력과 동네 양치기 소년의 도움으로 1100행 이상이 되는 베히스툰 비문을 모두 베끼는 데 성공하여 판독하였다. 이 베히스툰 비문에 바로 다리우스 대왕의 족적이 남겨져 있었다.
기원전 522년 페르시아 전체는 정치적 혼란기였다. 키루스 대왕의 아들 캄비세스 왕이 이집트 정벌에 나서자 페르시아는 내분에 휩싸였다. 캄비세스의 동생이라고 자칭한 가우마타는 스스로를 왕이라 칭했다. 이 소식을 들고 페르시아로 돌아오는 도중 캄비세스가 시리아 부근에서 죽는다. 베히스툰 비문에 의하면 캄비세스가 말을 타다 칼집이 실수로 벗겨지면서 칼에 허벅지가 찔려 그 상처로 죽었다고 기록한다.
캄비세스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페르시아제국의 10개 속국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이 정치적 혼란기에 페르시아제국 전체의 왕이 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한 이가 바로 다리우스다. 그는 페르시아제국의 속국이었던 파르티아 태수의 아들이었으며 캄비세스 왕과 함께 이집트 원정을 갔던 페르시아의 일만용사 중 한 명이었다. 다리우스는 고대 이란인들이 오래전부터 ‘거룩한 산’이라고 불리는 베히스툰산에 자기의 등극 과정을 자세히 새기기로 결심한다. 그는 고대 이란의 아후라마즈다 신에게 비문을 헌사하여 신으로부터 왕으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성산에 비문을 새긴 이유
다리우스 대왕은 인류 최초로 제국을 건설하였다. 좌우로는 터키에서 인도, 상하로는 박트리아에서 이집트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다. 박트리아는 힌두쿠시산맥과 아무다리아강 사이에 고대 그리스인이 세운 나라다. 그는 자신의 공적을 이란 중부 베히스툰산 절벽에 새겨놓았다. 베히스툰산은 이란 케르만자로부터 30㎞ 동쪽에 위치한 산이다. 베히스툰산은 독립적인 산이 아니라 케르만자 지역을 감싸며 북쪽으로 계속되는 산맥 중의 일부이다. 하마단 쪽에서 보면 베히스툰산은 평원에 갑자기 생겨난 500m 정도의 산이다. 다리우스가 이곳에 베히스툰 비문을 남긴 이유는 뭘까.
다리우스 왕이 이곳을 고른 이유는 우연이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실제적인 것이었다. 비문과 부조석상을 새기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평평한 바위가 필요했다. 왕의 대로(大路)를 따라 있는 여느 자그로스산맥의 산들과는 달리 베히스툰산은 메데 왕국의 목초지를 포함한 매우 평평한 절벽을 지닌 산으로 쐐기문자를 정으로 새기기가 용이했다. 둘째, 베히스툰산 아래에 메소포타미아나 이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몇 개의 샘터들이 있었다. 왕의 대로를 지나간 수많은 행상들과 병사들이 지친 몸을 달래던 쉼터였다. 이곳을 지나는 모든 군인이나 대상들이 다리우스 부조물과 비문들을 보았을 것이다. 셋째, 그리스 역사가 디오도러스에 의하면 베히스툰산은 ‘바가스타나’로 불렸다. 바가스타나를 직역하면 ‘신들의 장소’다. 즉 이곳은 오래전부터 성스러운 곳으로 이 근처에서 가로 10m, 세로 10m의 제단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다리우스가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신들에게 제사드릴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네 번째, 다리우스 대제가 등극하면서 최고의 정적인 가우마타를 잡아 처형한 곳이 바로 베히스툰산 근처이다. 다리우스에게 페르시아제국의 왕권을 가져다준 결정적 사건인 가우마타 처단을 기념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베히스툰 비문 안에는 그 처단 장소를 ‘메데 지방, 나사야 지방의 시카유바티’라고 말하는데, 그곳이 바로 베히스툰산 뒤로 100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이런 이유들로 베히스툰산은 다리우스 왕이 자신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한 최적지였다.
세 가지 언어로 기록된 비문
베히스툰 비문은 엘람어, 아카드어, 그리고 고대 페르시아어로 기록된 삼중 쐐기문자 문헌이다. 이 비문은 고대 페르시아제국 왕들이 남긴 비문들 중 가장 길며 역사학적·문헌학적으로 가장 중요하다. 베히스툰 비문은 서양인들이 쐐기문자를 판독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학자들은 이 비문을 ‘고대 비문의 여왕’이라고 부른다. 베히스툰 비문은 바빌론, 수사, 그리고 엑바타나(현재의 하마단)를 잇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까지 연결되는 고대의 중요한 무역로에 위치해 있었다. 이 길을 따라가는 대상무역상들은 지상으로부터 60m 높이의 절벽 위에 새겨진 다리우스의 부조물과 비문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다.
이 베히스툰산에 다리우스는 자기가 왕으로 등극한 과정을 쐐기문자로 상세히 기록했다. 베히스툰산의 중턱에 비문과 부조물이 있는데 지상으로부터 69m 위의 경사면에 가로 18m, 세로 7m의 크기로 새겨져 있다. 워낙 험한 곳이라 사람이 이를 보려면 지상으로부터 고작 40m 위까지밖에 접근하지 못한다. 1839년 영국 학자 헨리 로린슨은 베히스툰산 정상에서 자일을 타고 내려와 공중에 매달린 채 쐐기문자를 일일이 베꼈다고 한다. 이 비문과 부조물이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이유는 이와 같이 난공불락의 지점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베히스툰 비문의 상단 중심에 부조물이 있는데, 실물 크기(173㎝)인 다리우스 대왕과 두 신하인 인타파르나스와 고르바야스, 그리고 다리우스가 정복하여 처단한 10명의 왕들이 새겨져 있다. 이 부조물 위에는 조로아스터교 최고의 신인 아후라마즈다가 강복하고 있다. 이 부조물들의 위아래로는 반란군들의 이름과 행적을 적은 설명문이 세 가지 쐐기문자로 새겨져 있다. 이 부조물의 오른편으로는 다리우스 왕의 등극 과정을 새긴 엘람어 비문이 손상된 채 있고, 왼편으로는 같은 내용이 아카드어로 적혀 있다. 밑은 고대 페르시아어로 적혀 있다. 당초 다리우스 왕도 ‘왕위 찬탈자’에 불과했지만 현란한 업적으로 결국 키루스가 창건한 페르시아제국을 완성하는 왕이 되었다.
베히스툰 비문에서 다리우스 대왕은 캄비세스를 둘러싼 정치적 혼란기를 설명하고 있다. 다리우스 대왕에 따르면, 캄비세스가 그의 친동생 바르디야를 살해했지만 페르시아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그때 조로아스터교의 제사장인 가우마타가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한다. 즉 자신이 바르디야라고 속이고 백성들로부터 왕으로 추대받기에 이르렀다.
그때 이집트를 정벌 중이던 캄비세스는 가우마타가 반란을 일으켜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페르시아로 돌아오다가 자기가 찬 칼에 찔려 실수로 죽게 된다. 이 모든 사건을 감지했던 다리우스는, 자기가 페르시아제국의 패권을 잡을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6명의 경호대원과 함께 신속히 가우마타와 그의 군대에 대한 정벌에 나선다. 그는 곧 가우마타를 죽이고 6명의 경호대원의 추대로 페르시아의 왕으로 등극한다.
이러한 기록은 베히스툰 비문 이외의 사료에서는 증명될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캄비세스가 죽은 후 반란이 일어나 페르시아가 혼란에 빠졌고, 다리우스는 그것을 이용하여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페르시아에서의 반란은 도화선처럼 번져 페르시아제국의 모든 나라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다리우스 대왕은 즉위 후 1년간 이런 반란들을 진압하는 데 전력투구하였다.
다리우스는 베히스툰 비문과 부조상의 구성을 고대 근동의 아주 오래된 예술사적 전통에 따라 재현하였다. 그의 부조상과 구성, 그리고 비문들은 이라크와 이란의 국경 지역인 ‘사리-폴리-주합’에서 발견되는 룰루비의 왕 아누바니니의 부조물과 아키드 왕족의 나람신 왕의 비문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다리우스 왕은 파르티아의 왕 히스타스페스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이러스나 캄비세스처럼 아케미니드 왕조의 정통성이 결여돼 있었다. 그런 다리우스가 성산 베히스툰에 조로아스터교의 가장 위대한 신 아후라마즈다에게 인정받아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면서 자기의 정통성을 천명하게 될 때, 당시 고대 근동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사적 자료를 이용한 것은 당연하다. 특히 아누바니니 비문은 아누바니니 왕이 새벽별의 여신 이난나로부터 왕권을 상징한 원형을 받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 부조에서 이난나는 2명의 발가벗은 포로를 포승줄로 묶고 있다. 아누바니니 왕은 헬멧을 쓰고 왼손에는 활과 화살을,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이 비문의 배열은 베히스툰 비문의 배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이 없다.
고대 페르시아어를 창제한 다리우스
베히스툰 비문에서 다리우스 왕은 두 명의 신하들과 서 있다. 왼쪽의 신하는 고르바야스로서 페르시아 창을 들고 서 있고, 오른쪽 신하는 인타파르나스로 활을 들고 있다. 아누바니니처럼 다리우스 왕은 왼발로 그의 정적 가우마타를 밟고 있고, 그 뒤로 8명의 포로를 포승줄로 목을 감은 채 연결하고 있다. 그러나 다리우스 왕은 스키타이 정벌에서 ‘스쿤카라는 고깔모자를 쓴 반란군’을 잡은 후에는 본래 새겼던 글씨 부분을 삭제하고 스쿤카의 부조상을 첨가했다. 이 모든 일이 아후라마즈다의 허락으로 이루어짐을 강조하기 위해 날개 달린 아후라마즈다가 손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원형을 달고 다리우스 왕을 축복하고 있다. 이처럼 다리우스 왕은 왕권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베히스툰 비문이 계속하여 뭔가를 새겼고, 같은 내용이 당시에 국제 공용어인 아람어로 쓰여져 23개의 페르시아제국의 속국에 보내지게 되었다.
다리우스 왕은 왕으로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문자를 창제한다. 조선의 세종대왕과 더불어 문자를 창제했다고 확실하게 기록을 남긴 유일한 왕이다. 그는 당시 학자들을 동원하여 쐐기문자로 고대 페르시아어를 창제한다. 하지만 다리우스 왕은 페르시아제국의 공식문서에는 당시 고대 근동에서 널리 쓰이던 전통적인 문자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제국의 속국들 간의 원활한 통신을 위해서 이란어가 아닌 셈어인 아람어를 국제공용어로 사용한 것이다. 아람어는 이미 레반트, 이집트, 동부 이란 지역에 통용되고 있었다. 아람어 알파벳은 엘람어나 아카드어의 쐐기문자보다 배우기가 쉬웠다. 베히스툰 비문에 쓰인 또 다른 언어인 엘람어는 페르시아제국의 행정수도 수사를 중심으로 모든 행정·경제 문서에 사용되었고, 아카드어는 지난 1000년 이상 고대 오리엔트의 외교문자로 쓰였다.
페르시아제국은 처음부터 다문화주의와 다언어주의를 표방하였다. 고대 근동의 긴 역사 가운데 처음으로 다언어 비문이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페르시아제국의 원동력은 페르시아제국을 창건한 키루스의 다종교주의와 다문화주의, 그리고 다리우스가 표방한 다언어주의에 있었다.
출처 | 주간조선 2466호
◆'세계 최초의 제국, 페르시아의 화려한 기억'
페르세폴리스 궁전 등에 자취 남아… 사막·소금호수 트레킹도 이색체험
이란은 인류의 4대 문명 발상지는 아니지만 페르시아제국이라는 세계 최초로 세계제국을 건설한 국가다. 페르시아제국 이후 몇 개의 왕조를 거치지만 페르시아의 화려했던 고대문명의 명성을 잇기 위해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그대로 이어받았다. BC 6세기부터 AD 7세기까지 페르시아란 제국의 명칭은 계속되지만 실질적으로 가장 번성했을 시기는 BC 5세기 전 후 다리우스 대왕 때다. 지금의 인도 서부와 그리스 동부 일부와 이집트까지 점령한 대제국을 건설했다.
이란은 또한 세계 최초의 종교로 알려진 조로아스터교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페르시아제국의 강력한 사상적 기반, 즉 통치이데올로기가 조로아스터교였던 셈이다. 조로아스터교 교리는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으로 요약된다. 페르시아 제국의 가장 번성기 였던 다리우스 대왕 때는 국교였다
▲폐허가 돼 고대문명의 자취를 전하는 페르시아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궁전 터에 황혼이 물들고 있다.
▲페르시아제국의 가장 화려했던 시절을 보여주는 페르세폴리스 궁전의 거대한 진입로에 이어 웅장한 입구가 과거영화를 대변하는 듯 하다.
▲페르시아제국을 거대 제국으로 발전시키는 기초를 닦았던 키루스 대왕의 석관묘. 그의 고향 파사르가대에 세계유산으로 보존돼 있다.
▲가장 화려한 페르시아제국을 열었던 다리우스 대왕의 묘를 자연 암벽을 이용해서 만들어 아직 보존하고 있다
▲페르세폴리스 궁전은 깨지고 부서진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조로아스터교에서 불을 태우는 화로가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키루스 대왕의 동상.
▲이슬람국가에서 가장 넓은 이맘광장. 주변 건물은 이슬람사원과 바자르(전통시장)로 활용하고 있다.
▲고대 신전으로 이용했던 지구라트신전. 이곳은 '비봉포란형으로 봉황이 날아 알을 품은 자리'로, 이곳에서 무녀가 접신했고 시신을 조장(鳥葬)했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로아스터교 교주. 조로아스터.
▲소금호수트레킹을 즐기고 있는 일행. 끝없이 펼쳐진 소금호수를 걷고 있다
▲소금호수에서 소금을 채취해 운송하는 화물차가 지나고 있다
▲대상들의 숙소였던 카라반사라이가 마치 철옹성을 연상케 한다
▲페르시아 제국에 공물을 바쳤던 국가를 일일이 적어놓았다.
▲페르시아제국에 공물을 바치던 나라의 신하가 절을 하는 모습을 조각해놓았다.
▲이란인들의 원조인 아리안계통의 조각상이 이란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아리안족’ 하면 잊을 수 없는 세계 역사적 사건이 있다. 바로 히틀러가 아리안족의 순수혈통을 보존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유대인 대학살’을 일으킨 것이다. 나찌의 심볼과 불교의 만(卍), 십자모양의 문양 등은 조로아스터교의 지․수․화․풍(地水火風)에서 나왔다. 영어로 조로아스터이지만 페르시아식 발음은 짜라투스트라다. 니체는 조로아스터와 불교에 매우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신은 죽었다’로 대변되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세계적인 철학서를 썼다고 한다.
▲페르시아제국이 이라크에 있던 세계 최초의 법전인 함무라비법전 석상을 약탈해 왔으나 다시 가져가고 이란박물관에는 모조 함무라비법전이 전시돼 있다.
영겁회귀로 순환되는 삶은 조로아스터교에서 나왔고, 그 순환의 대표적인 형태가 바로 나찌의 심볼과 불교의 만, 십자모양의 문양 등이다. 자연의 지수화풍도 영겁회귀로 순환되는 과정을 나타낸다. 애초의 아리안족은 중앙아시아에 거주했으며, 이후 남쪽과 서쪽으로 이주했다. 남쪽으로 이주한 아리안은 페르시아에 정착했고, 서쪽으로 이주한 아리안은 유럽 아리안의 원조가 됐다. 이들이 지금 독일인의 선조다.
이란 여행루트를 론리플래닛에서 출간한 <이란>에는 다음과 같은 일정을 2주로 잡고 있다.
이란에서는 즐길거리가 많다. 테헤란은 6개월이 겨울이다. 테헤란 바로 뒷산이 이란 최고봉 다마반드산. 여기서 스키와 트레킹을 즐긴다. 카샨에서는 사막트레킹과 소금호수트레킹까지 체험할 수 있다. 동시에 대상들이 다니고 묵었던 캐러반사라이 체험도 가능하다. 론리플래닛에서 나온 <이란> 안내서에는 테헤란~카샨~나탄즈~이스파한~야즈드~파사르가대~페르세폴리스~시라즈까지 고대 도시들을 두루 즐기는 일정을 2주로 잡았다. 사막트레킹과 소금호수트레킹도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일주일 코스까지 있다.
◇세계 최초의 제국 페르시아 대제국시대를 연 ‘세계문화유산’ 키루스대왕의 석묘
BC 6세기부터 AD 7세기까지 동쪽으로는 인도 서부지역까지, 서쪽으로는 그리스 동부까지 지배한 세계 최초의 대제국 페르시아, 그 영광의 흔적을 한 번 찾아가보자. 가장 번성했을 시기는 BC 5세기 전후 다리우스대왕 때다. 페르시아제국시대를 활짝 연 대왕은 키루스대왕. 그의 무덤은 페르시아제국의 중심지였던 파사르가대(Pasargadae)에 있다. 시라즈(Shiraz) 인근 페르세폴리스 궁전을 건립하기 이전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석묘 안에는 키루스 대왕이 남긴 글씨로 알려진 ‘나는 아키메니드 키루스왕이다’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페르시아제국의 키루스대왕은 그의 고향인 이곳에서 거대한 제국의 기틀을 다진다. 키루스대왕은 엄격히 말하면 키루스2세다. 메디아왕조의 마지막 왕의 외손자로 캄비세스 1세의 아들이자 키루스 1세의 손자다. 키루스대왕은 이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불리며, 이란 사람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다. 그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리디아․바빌로니아 등 주변국을 잇달아 점령했으며, 다양한 민족의 문화와 왕조를 존중하면서 통치했다.
▲파사르가대 주변엔 궁전 흔적만이 과거의 영화를 대변할 뿐이다.
역사상 키루스대왕처럼 여러 민족으로부터 칭송을 받은 왕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찬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적국이었던 그리스에서도 오랫동안 위대한 군주로 칭송받았다. 그리스의 역사가 크세노폰(Xenophon)은 키루스대왕을 ‘비길 자가 없는 가장 위대한 세계 정복자’로 표현했다.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리스의 헤로도토스도 최고의 역사서 <역사>에서 ‘페르시아인들이 말하기를 다리우스는 상인이고 캄비세스는 장인인 반면 키루스는 아버지라고 한다. 다리우스는 늘 어떤 결과나 이익을 중시 여겼고, 캄비세스는 거칠고 가혹했지만 키루스는 자상하게 배려해 주었기 때문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글자가 궁전 기둥 벽에 남아 있다.
유대인들조차 그를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 ‘하느님의 목자’ 등으로 칭송했다.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알렉산더 대왕도 키루스대왕을 위대하게 여겨 그의 무덤인 파사르가대만은 파괴하지 않았다.
입구엔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이란 이정표가 붙어 있다. 이젠 페르시아제국을 가장 번성시킨 페르세폴리스로 이동한다. 3대 다리우스대왕 때 페르시아제국은 중심지를 파사르가대에서 페르세폴리스로 옮긴다
▲궁전 흔적은 매우 넓고 컸고, 사방은 산으로 둘러싸여져 있었다.
이란 지역의 고도는 전부 2000m 내외로 나온다. 수도 테헤란도 해발 1500~1700m를 나타냈다. 테헤란 바로 뒤 앨부르즈산맥의 정상은 다마반드산이다. 고도는 무려 5,604m. 테헤란에서 버스를 타고 수백㎞ 내려오는 길에 유심히 고도를 체크했다. 제일 낮은 고도가 1,500m였을 정도다. 페르세폴리스 가는 길에 2,500m 꼭지점을 찍고는 서서히 고도를 낮췄다. 이란고원이란 말이 그냥 생긴 게 아니었다. 페르세폴리스는 해발 1,600m를 가리켰다.
◆2015-04-06 이란의 거대한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글 |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대표
몇년 전 중동에 주재하는 한 한국대사를 만났다. 그는 이슬람 문화와 역사에 관련된 책도 번역하고 현지 대학에 나가 강의도 하는 학구파였다. 이런 말을 했다.
'미국이 이란을 저렇게 대우하면 안됩니다. 이란과 페르샤의 역사를 알면 그렇게 마구 대할 순 없습니다.'
그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하자 미국 등 서구가 저지책으로 경제봉쇄를 가하더니 협상 쪽으로 돌아 며칠 전 핵개발 동결과 제재해제를 핵심으로 하는 타협이 이뤄졌다.
영국의 이슬람 전문학자 버나드 루이스가 쓴 '바벨(Babel)에서 드라고만스(Dragomans)까지: 중동을 통역한다'라는 논평집을 읽다가 대사와 비슷한 설명과 만났다. 그는 이란이 인류역사, 특히 이슬람 문화에 끼친 막중한 영향력을 강조했다. 이 글을 읽고나니 호메이니로 대표되는 이란이 아닌 다양하고 풍성하고 교양 있는 페르샤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의 문제점을 가지고, 그것도 서구식-기독교적 관점에서만 본 문제의식을 가지고는 파악할 수 없는 거대하고 깊은 나라가 이란이다. 인구는 약7800만 명, 면적은 한반도의 약8배인 160만 평방킬로미터이다.
▲사진 : 테헤란은 고원지대에 있다.
이란의 독특하고 위대한 역사와 문화는 먼저 이슬람과 연관되어 설명하는 것이 편하겠다. 이란을 아랍국가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다. 이란은 이슬람 국가이지만 아랍국가는 아니다. 이란인들은 아랍족이 아니고 아랍어를 쓰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의 유럽, 특히 게르만족과 뿌리가 같은 인종이다. 히틀러는 독일사람들의 인종적 뿌리를 아리안족이라 불렀다. 이란과 아리안은 같은 뜻이다.
이란은 이슬람화되었지만 다른 中東국가처럼 아랍화되지는 않았다. 첫째, 언어가 아랍화되지 않았다. 서기 7~8세기에 이슬람을 받아들인 거의 모든 중동(中東)국가들은 고유언어를 버리고 아랍어를 쓰기 시작했다. 이집트, 이라크, 시리아 같은 최고(最古)의 문명과 언어를 자랑하는 나라들도 모국어(母國語)를 버리고 아랍어를 쓰게 되었다. 따라서 자신들의 고유문화와 상당부분 단절되었다. 이슬람은 또 이슬람의 종교사(宗敎史)를 중점적으로 가르치지 국가와 민족의 역사는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사진 : 페르샤식 城. 기원 전 500년에 만든 알그 에 밤 성.
이란은 아랍인들에 의해 점령되고 이슬람을 수용했지만 이란어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란어는 독일어나 영어와 비슷한 구조이고 단어도 비슷한 게 많다. 17세기에 비엔나에 파견된 오토만 투르크 대사는 '합스부르그 왕조 사람들은 잡스러워진 이란어를 쓰고 있다'고 오해했다고 한다.
이란인들은 이슬람을 받아들이면서 모국어를 지켜갔지만 동시에 아랍어도 배웠다. 이란의 많은 문학가와 지식인들이 아랍어로 시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는 이슬람 문화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발상한 이슬람은 문화적 깊이가 약했다. 아랍 이슬람은 이란을 이슬람화함으로써 제2의 도약을 했다. 사막적인 종교가 아닌 문화적 종교, 세계적 종교로 변한 것이다. 메디안-페르샤-파르티아-사산 조(朝)로 이어지면서 축적된 독창적이고 풍성한 이란문명이 이슬람에 수혈되어 이슬람을 생동감 넘치는 종교로 거듭 태어나게 만든 것이다. 이란의 예술, 건축, 문학이 이슬람과 접목됨으로써 기독교와 경쟁할 수 있는 내용을 갖게 된 것이다.
▲사진 : 파르티아 제국 시절의 동전
세계로 퍼져간 것은 사막적(아랍적)인 이슬람이 아니라 페르샤적인 이슬람(Persian Islam)이었다고 버나드 루이스는 강조한다. 중앙아시아, 오토만 투르크, 인도지역이 페르샤적인 이슬람 문화권에 들어갔다. 17세기 무굴제국이 세운 타지마할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히는데, 이란 건축 기술이 바탕이 되었다. 당시 세계최대 제국이었던 무굴의 지배층은 이슬람 교도였고, 핵심 관리들은 이란 계통이었다.
이란의 이런 문화적 힘은 역사에서 우러난 것이다. 이란은 중동국가들 가운데 독자성을 가장 오래 유지한 나라이다. 다른 중동(中東)국가들은 이 민족, 저 민족에 의하여 침공받고 점령되어 정치적, 문화적 독자성을 오래 유지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시리아를 예로 들면 약8000년의 역사를 통해 33개 문명이 교차했다.
▲사진 : 사파비드 왕조 때 만든 나그시 이 자한 광장
이란(페르샤)은 그리스로 대표되는 서양에 대해서 항상 우위(優位)를 지켜오다가 서기 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에 의하여 잠시 점령되었으나 곧 파르티아 제국을 만들어 독립했다. 파르티아 제국은 로마의 침공도 저지하여 페르샤 지역을 서양화(기독교화)시키지 않았다. 그리스-로마 문화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파르티아를 이은 제국은 사산朝였다. 이 제국은 7세기에 시리아에 본부를 둔 움마야드 왕조에 의해 점령되어 이슬람화되었으나 이란인들은 이슬람을 페르샤화해버렸다. 우수한 문화를 가진 민족은 저급한 문화를 가진 민족에 의해 정복되지만 그 문화의 힘으로 정복자를 다시 정복해버린다. 이란은 이슬람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셈이다. 압바시드 왕조가 움마야드 왕조를 멸망시키고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기는 과정에서도 이란 장군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압바시드 왕조를 실질적으로 움직인 관료, 지식인들은 거의가 이란인들이었다.
▲사진 : 팔스 지역의 경치
13세기에 몽골, 15세기에 티무르의 침공을 받은 이란은 황폐되었다. 이란이 몽골의 서정(西征)으로부터 가장 큰 피해를 당한 곳이다. 특히 관개시설이 파괴되어 복구에 수백년이 걸렸다. 인구의 약 반이 죽었다고 한다. 몽골이 중국의 宋을 점령하고 세운 元의 관료층 안에는 이란 지식인들이 많았다. 이슬람을 믿는 16세기의 몽골 기마군단이 인도를 점령하고 세운 무굴 제국의 지배층안에도 이란인들이 많았다. 이란은 주변지역, 즉 中東, 중앙 아시아, 터키, 인도를 밝히는 문화적 등불이었다.
1501년 이란에서 사파비드 제국이 일어나 오스만 투르크와 맞섰다. 이란인들은 세계 역사에 남을 만한 다섯 개의 大제국을 만든 민족이다. 메디안-페르샤-파르티아-사산朝-사파비드 제국이 그것이다.
▲사진 : 아자디 타워
16~20세기에 中東 이슬람 세계에는 두 라이벌이 있었다. 오토만 투르크와 사파비드 제국 등을 세운 이란이었다. 오토만 투르크는 중동, 유럽,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여 두 차례 비엔나를 포위하는 등 유럽을 위협했으나 이란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영국의 이슬람 전문가 버나드 루이스에 따르면 오토만 투르크 제국은 문명적 측면에선 이란의 영향권 아래 들어 있었다고 한다. 루이스는 현재의 中東도 터키와 이란이 양대(兩大) 축을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호메이니
국부(國父) 케말 파샤의 정교(政敎)분리 원칙에 입각한 터키는 세속적인 공화국이고 호메이니의 원리주의에 입각한 이란은 政敎일치의 이슬람 공화국이란 차이가 있다. 인구도 두 나라는 비슷하다(약8000만 명). 터키는 이스라엘과 미국과 친하고 이란은 원수지간이다. 이란이 핵무장하면 터키도 대응 핵무장을 할 것이라고 한다.
이란의 이런 독자성을 유지해온 여러 가지 힘중의 하나는 과거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란인들의 자부심이다. 이런 이란을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 북한의 김정일 정권과 함께 '악(惡)의 축(軸)'이라고 불렀다. 김정일이야 惡의 軸이 아니라 악마 그 자체이다. 하지만 이란을 이런 김정일 정권과 동격(同格)에 놓을 수 있는가?
10년 전 할리우드에서 만든 '300'이란 영화는 페르샤의 大軍을 무찌른 스파르타의 300 용사를 超人으로 만들고 페르샤 군대를 괴물이나 바보멍텅구리 집단으로 그렸다. 이란 사람들이 화를 낸 것이 이해가 된다. 이란에 대해서 무식하면 그렇게 할 수 있다. 역사는 문학, 철학과 함께 교양인의 필수과목이다. 역사공부는 다른 문화와 민족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마음을 넓혀주고 생각을 깊게 해준다. 다른 민족과 문화에 대한 존중심을 심어준다.
부시가 이라크 침공작전을 펴기 전에 버나드 루이스 같은 대가(大家)를 백악관으로 초빙하여 몇 시간 강의를 들었다면 다른 전략이 나왔을지 모른다. 당시 미국 CIA 국장 테닛은 최근 회고록에서 '이라크를 왜 굳이 쳐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한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易地思之(역지사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역사공부이다.
이란은 시아파의 본산(本山)이다. 시아파가 다수인 이라크도 IS와 싸우는 데 이란의 도움을 받는다.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 가자의 하마스, 레바논의 헤즈블로 세력도 이란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다. 이란의 내부 사정도 간단하지 않다. 젊은층과 중산층은 친미적이고 지배층은 반미적이다. 이란은 북한과는 특수관계이다. 북한으로부터 무기와 미사일 기술을 수입하고, 현금이나 기름을 지원한다. 이란에 종속된 시리아도 북한과 친하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이 이란을 적대적(敵對的)으로 몰 필요는 없다.
한국의 가장 번화한 거리 이름이 이란의 수도 이름이다. 이란이 세계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가장 큰 이유는 지정학적 조건이다. 중동, 중앙아시아, 인도, 유럽을 연결하고, 인도양과 페르샤만, 그리고 카스피해를 잇는 자리에 있다. 특히 석유자원이 많을 뿐 아니라 석유수송로를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를 품고 있다. 이란이 1979년 이후 거의 홀로 미국 및 서구와 맞서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역사적, 문화적, 지리적 강점 덕분이었다. 이란-이라크 전쟁 때 미국은 이라크 편을 들었다. 고립된 이란을 도와준 것이 북한이었다. 이란 핵협상 타결이 북한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도 주목된다.
2016.04.25 이란의 찬란한 文明
▲ 이란 블루 모스크 / 사진출처=pixabay
朴槿惠 대통령이 이란을 방문한다. 테헤란 路가 수도 한복판에 있어도 한국인들은 이란을 잘 모른다. 다수 한국인들은, 이란이 북한과 친하다는 것 정도, 그리고 호메이니라는 이름을 아는 수준이다. 수년 전 중동에 주재하는 한 한국대사를 만났다. 그는 이슬람 문화와 역사에 관련된 책도 번역하고 현지 대학에 나가 강의도 하는 학구파였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미국이 이란을 저렇게 다루면 안됩니다. 이란과 페르샤의 역사를 알면 그렇게 마구 대할 순 없습니다.'
영국의 이슬람 전문학자 버나드 루이스가 쓴 '바벨(Babel)에서 드라고만스(Dragomans)까지: 중동을 통역한다'라는 논평집을 읽다가 비슷한 대목과 만났다. 그는 이란이 인류역사, 특히 이슬람 문화에 끼친 막중한 영향력을 강조했다. 이 글을 읽고나니 호메이니 세력으로 대표되는 이란이 아닌 다양하고 풍성하고 교양 있는 문명 건설자 페르샤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의 문제점을 가지고, 그것도 서구식-기독교적 관점에서만 본 문제의식을 가지고는 파악할 수 없는 거대하고 깊은 나라가 이란이다. 인구는 약8000만 명, 면적은 한반도의 약8배인 160만 평방킬로미터이다.
이란의 독특하고 위대한 역사와 문화는 먼저 이슬람과 연관되어 설명하는 것이 편하겠다. 이란을 아랍국가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다. 이란은 이슬람 국가이지만 아랍국가는 아니다. 이란인들은 아랍족이 아니고 아랍어를 쓰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의 유럽, 특히 게르만족과 뿌리가 같은 인종이다. 히틀러는 독일사람들의 인종적 뿌리를 아리안족이라 불렀다. 이란과 아리안은 같은 뜻이다.
이란은 이슬람화되었지만 다른 中東국가처럼 아랍화되지는 않았다. 첫째, 언어가 아랍화되지 않았다. 서기 7~8세기에 이슬람을 받아들인 거의 모든 中東국가들은 고유언어를 버리고 아랍어를 쓰기 시작했다. 이집트, 이라크, 시리아 같은 最古의 문명과 언어를 자랑하는 나라들도 母國語를 버리고 아랍어로 넘어갔다. 따라서 자신들의 고유문화와 상당부분 단절되었다. 이슬람은 또 이슬람의 宗敎史를 중점적으로 가르치지 국가와 민족의 역사는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란은 아랍인들에 의해 점령되고 이슬람을 수용했지만 이란어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란어는 독일어나 영어와 비슷한 구조이고 단어도 비슷한 게 많다. 17세기에 비엔나에 파견된 오스만 투르크 대사는 '합스부르그 왕조 사람들은 잡스러워진 이란어를 쓰고 있다'고 오해했다고 한다.
이란인들은 이슬람을 받아들이면서 母國語를 지켜갔지만 동시에 아랍문자도 배웠다. 이란의 많은 문학가와 지식인들이 아랍문자로 시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는 이슬람 문화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사우디 아라비아 사막에서 발상한 이슬람은 문화적 깊이가 약했다. 아랍의 이슬람은 이란을 이슬람화함으로써 제2의 도약을 했다. 사막적인 종교가 아닌 문화적 종교, 세계적 종교로 변한 것이다. 메디안-페르샤-파르티아-사산朝로 이어지면서 축적된 독창적이고 풍성한 이란 文明이 이슬람에 수혈되어 이슬람을 생동감 넘치는 종교로 거듭 태어나게 만든 것이다.
세계로 퍼져간 것은 사막적(아랍적)인 이슬람이 아니라 페르샤적인 이슬람(Persian Islam)이었다고 버나드 루이스는 강조한다. 중앙아시아, 오스만 투르크, 인도지역이 페르샤적인 이슬람 문화권에 들어갔다.
이란의 이런 문화적 힘은 역사에서 우러난 것이다. 이란은 중동국가들 가운데 독자성을 가장 오래 유지한 나라이다. 다른 中東국가들은 이 민족, 저 민족에 의하여 침공받고 점령되어 문화적 주체성을 오래 지켜내기가 매우 어려웠다. 시리아를 예로 들면 약8000년의 역사를 통해 33개 문명이 교차했다.
이란(페르샤)은 그리스로 대표되는 서양에 대해서 항상 優位를 지켜오다가 서기 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에 의하여 잠시 점령되었으나 곧 파르티아 제국을 만들어 독립했다. 파르티아 제국은 로마의 침공도 저지하여 페르샤 지역을 서양화(기독교화)시키지 않았다. 그리스-로마 문화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파르티아를 이은 제국은 사산朝였다. 이 제국은 7세기에 시리아에 본부를 둔 움마야드 왕조에 의해 점령되어 이슬람화되었으나 이란인들은 이슬람을 페르샤화해버렸다. 우수한 문화를 가진 민족은 저급한 문화를 가진 민족에 의해 정복되지만 그 문화의 힘으로 정복자를 다시 정복해버린다. 이란은 이슬람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셈이다. 압바시드 왕조가 움마야드 왕조를 멸망시키고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기는 과정에서도 이란 장군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압바시드 왕조를 실질적으로 움직인 관료, 지식인들은 거의가 이란인들이었다.
13세기에 몽골, 15세기에 티무르의 침공을 받은 이란은 황폐되었다. 이란이 몽골의 西征으로부터 가장 큰 피해를 당했다. 인구의 약 반이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몽골이 중국의 宋을 점령하고 세운 元의 관료층 안에는 이란 지식인들이 많았다. 이슬람을 믿는 16세기의 몽골 계통 기마군단이 인도를 점령하고 세운 무갈(이란어로 몽골) 제국의 지배층안에도 이란인들이 많았다. 이란은 주변지역, 즉 中東, 중앙 아시아, 터키, 인도를 밝히는 문화적 등불이었다. 타지마할 등 인도의 위대한 건축물엔 이란의 예술과 기술이 들어 있다.
1501년 이란에서 사파비드 제국이 일어났다. 투르크 계통의 지배층이 이란 사람들을 다스렸다. 무갈 제국과 비슷한 구조였다. 이란인들은 세계 역사에 남을 만한 다섯 개의 大제국을 만든 민족이다. 메디안-페르샤-파르티아-사산朝-사파비드 제국이 그것이다.
16~20세기에 中東 이슬람 세계에는 두 라이벌이 있었다. 오스만 투르크와 사파비드 제국을 세운 이란이었다. 오스만 투르크는 중동, 유럽,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여 두 차례 비엔나를 포위하는 등 유럽을 위협했으나 이란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영국의 이슬람 전문가 버나드 루이스에 따르면 투르크 제국은 문명적 측면에선 이란의 영향권 아래 들어 있었다고 한다. 루이스는 현재의 中東도 터키와 이란이 兩大 축을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國父 케말 파샤의 政敎분리 원칙에 입각한 터키는 세속적인 공화국이고 호메이니의 원리주의에 입각한 이란은 政敎일치의 이슬람 공화국이란 차이가 있다. 인구도 두 나라는 비슷하다(약8000만 명). 터키는 이스라엘 및 미국과 친하고 이란과는 원수지간이다. 이란이 핵무장하면 터키도 대응 핵무장을 할 것이라고 한다.
이란의 이런 독자성을 가능하게 만든 여러 힘중의 하나는 역사와 문명에 대한 이란인들의 자존심이다. 이런 이란을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 북한의 김정일 정권과 함께 '惡의 軸'이라고 불렀다. 김정일이야 惡의 軸이 아니라 악마 그 자체이다. 하지만 이란을 이런 김정일 정권과 同格에 놓을 수 있는가?
10여년 전 할리우드에서 만든 '300'이란 영화는 페르샤의 大軍을 무찌른 스파르타의 300 용사를 超人으로 만들고 페르샤 군대를 괴물이나 바보멍텅구리 집단으로 그렸다. 이란 사람들이 화를 낸 것이 이해가 된다. 이란에 대해서 무식하면 그렇게 할 수 있다. 역사는 문학, 철학과 함께 교양인의 필수과목이다. 역사공부는 다른 문화와 민족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마음을 넓혀주고 생각을 깊게 해준다. 다른 민족과 문화에 대한 존중심을 심어준다.
부시가 이라크 침공작전을 펴기 전에 버나드 루이스 같은 大家를 백악관으로 초빙하여 몇 시간 강의를 들었다면 다른 전략이 나왔을지 모른다. 당시 미국 CIA 국장 테닛은 최근 회고록에서 '이라크를 왜 굳이 쳐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한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易地思之(역지사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 역사공부이다.
글 |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대표
◆2016.02.17 이란의 조로아스터교 성직자가 들려주는 ‘조로아스터교’ 이야기
3,753년 전 개교… 페르시아제국 때 국교로 번성하기도
조로아스터교는 세계 최초 종교로 알려져 있다. 교주 조로아스터에 대한 기록은 전혀 전해지는 바가 없다. 하지만 알려진 바로는 테헤란 북쪽 우루미예 출신이라는 주장과 이란 동부 박트리아(현재 아프가니스탄 지역) 출신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의 출생도, 활동시기도 불확실하다. 이란 관련 책에서도 설이 분분하다. 어떤 책에서는 BC 1,000~500년 전에 태어났고 활동했다고 하는 반면, 다른 책에서는 BC 7,000년 전이라는 주장도 한다. 이란에서 만난 조로아스터교 모베드(Moubed․ 목사나 신부, 승려와 같은 성직자)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753년 전이라고 한다.
▲테헤란의 조로아스터 사원에 걸려 있는 교주 조로아스터 영정.
그의 출생과 활동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조로아스터교는 유대교․기독교․이슬람․불교 등 세계 주요 종교에 큰 영향을 미친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조로아스터교는 세상은 시작과 끝이 없고 무한대로 순환한다고 여긴다. 니체가 언급한 영겁회귀와 순환은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는 불교와 힌두교의 교리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기독교에서는 결혼식 때 주고받는 반지에 나타난다. 반지는 링으로, ‘영원히 사랑으로 순환하면서 살아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십자가 문양도 자연의 구성요소인 ‘지수화풍(地水火風)’ 네 요소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이를 신성시하고 잘 보존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나왔다고 한다. 실제로 2,500년 이상 유지하고 있는 이란의 전통마을 아비아네(Abyaneh)에는 십자가 문양이 문과 벽 곳곳에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들은 항상 불을 들고 다닌다. 이는 세상을 밝히고 바른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로아스터교가 어떤 종교인가 이해를 돕기 위해 테헤란 조로아스터교 신전에서 모베드와 일문일답한 내용을 그대로 전한다. 간호사로 이란에 취업하러 갔다가 이란 남자와 결혼한 뒤 40여 년 간 이란에 살고 있는 경북 고령 출신의 한국인 가이드 이성주씨의 통역으로 진행했다.
-조로아스터교 교주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는데 어떻게 연혁을 파악하나?
“조로아스트가 살았던 시기를 BC 8,000~6,000년 혹은 BC 600년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그의 탄생은 BC 1768년으로 보는 것이 가장 믿을 만하다. 이는 페르시아에 서사시가 많이 있는데, 거기서 유추해 보면 이 시기가 나온다. 또한 조로아스터교는 천문이 매우 발달해 있다. 천문에 대한 지식으로도 이 시기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이란 국내외 자료들을 비교 연구했을 때도 이 시기가 타당하다.”
-조로아스터교의 교리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무엇이며, 그 중에서 지수화풍이 왜,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됐는지?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른쪽이 바르다는 것도 조로아스터교에서 나왔다. 조로아스터교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이란인들은 ‘물․불․땅․바람’을 인간에게 중요한 요소로 여기고 신성시했다. 조로아스터교 사원에 있는 불은 수 천 년 동안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 네 요소를 더럽히지 않고 잘 지키고 보존해야 한다고 믿었다. 4요소 중에서도 특히 불을 더 중시했다. 불은 모든 불결한, 정(淨)하지 않은 것들을 깨끗이 해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오염되지도 않는다. 이리저리 삐뚤어지지도 않고 똑 바로 위로 향해 타오른다. 인간에게 따뜻함과 깨끗함을 주고 어둠을 밝히고, 음식을 할 수 있게 하는 등 이로움이 매우 많다. 그래서 불을 조로아스터교의 상징으로 여기기도 한다. 지금 야즈드(Yazd)의 불사원(Fire Temple)에 모셔진 불은 1,500년 이상 됐다. 조로아스터교도들은 기도할 때 한 곳으로 바라본다. 야외에서는 아침에는 동쪽, 오후에는 서쪽으로 향한다. 빛이 있는 태양과 같은 방향이다. 실내에서는 빛이 있는 방향으로 향한다. 예전에는 집에 불을 모신 곳이 기도하는 방향이었다. 이슬람 도래 이후엔 불을 쉽게 모실 수 없어 각 직종별로 모시던 불 16가지를 한데 모아 지금의 성지 야즈드에 모시게 됐다. 테헤란 불사원에 있는 불은 야즈드에서 갖고 왔으며,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됐다. 불은 상징이지 불 자체를 신으로 모시는 것은 아니다. 나치의 심볼, 불교의 만(卍)자, 십자모양 등이 4요소의 상징이라 볼 수 있다.”
▲테헤란에 있는 조로아스교 사원
그래서 중국에서 조로아스터교를 한자어로 ‘배화교(拜火敎)’라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한때 우리 교과서에도 배화교로 소개됐다.
-조로아스터교는 세상을 이원론으로 나눈다. 이는 무슨 의미인가?
“조로아스터교에서는 하느님을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h)’라 부른다. 아후라는 ‘생명을 주다’, 마즈다는 ‘학식, 지식’이란 뜻이다. 그래서 아후라 마즈다는 ‘큰 지식의 창조자’란 의미다. 선하고 참되며 공평하고 지혜로운 아후라 마즈다는 세상을 질서정연하게 창조했다. 아후라 마즈다가 계획하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에게 바른 사람으로 살도록 가르치고 이끄는 것이 조로아스터교의 역할이다. 조로아스터교는 창조주의 질서를 지키는 역할로, 두 가지의 보석 같은 에너지를 사람들에게 알려준다. 바로 선(善)과 악(惡)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이나 우주에도 서로 끌거나 미는 힘, 또는 반대의 힘이 서로 영향을 미친다. 이 두 반대의 힘은 창조주의 질서에 꼭 필요한 것이다. 아후라 마즈다의 창조에 나쁘거나 못나거나 악한 것이라고는 없다. 다만 사람 생각의 선택에 따라 선과 악이 될 수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바른 길로 사는 일에 노력한다. 무지한 사람은 바르지 못한 나쁜 생각으로 거짓말을 하거나 옳지 못한 행동을 한다. 자연을 신성시하므로, 거스르지 않는 그대로의 자연의 기능을 유지하는 것도 선한 일에 속한다.”
▲조로아스터교의 상징물.
-조로아스터교의 제1 성지는 어디이며, 매년 어떤 행사를 하는지?
“Pir-e-Chak Chak(피레 착착)이라는 곳이 제1 성지다. pir은 ‘늙은, 오랜된’이란 뜻이고, Chak Chak은 똑똑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말한다. 야즈드 북동쪽 52㎞ 떨어진 경사 가파른 깊은 계곡에 위치해 있다. 사산왕조의 마지막 왕 야즈드게르드 3세의 딸인 ‘Nik Banu(니크 바누)’가 아랍군의 침입을 피해 이곳에 와서 숨게 된 후 찾지 못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 후부터 바위사이에서 똑똑하고 물이 떨어지는데, 그녀의 눈물이라고 전한다. 이 성지는 조로아스터교가 생기기 전에도 사람들의 성소로 사용했다. 매년 6월14일부터 18일까지 이란 국내외의 조로아스터교도 1천여 명이 참석해서 아베스타 경전을 읽으며, 아후라마즈다를 예배하며 음식을 만들어 참석한 사람들과 나눠먹는 행사가 있다. 이 시기가 여름이 시작되는 때다.”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은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되는지?
“이슬람 도래 이후 많은 불 신전들이 파괴됐고, 신도들은 죽임을 당했다. 그래도 이스파한이 수도였던 사파비왕조 때만 해도 400만 명이 됐다. 당시 이란 총인구가 1,000만 명으로 추정한다. 요즘은 이란에 15만 명, 인도에 20만 명, 전 세계 합쳐 약 40만 명으로 추정한다. (책에는 전 세계적으로 15만 명 정도 되며, 테헤란에 1만 명, 야즈드에 4천명 등 이란에 2만 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조로아스터 신전은 영국에 하나, 미국에 6개, 캐나다에 2개 있다. 이슬람 도래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인도로 넘어갔다. 그들을 인도의 페르시안이라 부른다. 인도의 상류층에 속하며, 이란 국내에 있는 조로아스터교도들에게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이슬람 사회에서 사라지지 않고 유지하는 힘은 무엇인가?
“이슬람의 지배적인 힘 아래에서 개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지금까지 유지하는 힘은 각 개인 가정에서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를 잘 지킨 덕분이다. 7살까지는 주로 어머니 중심으로, 그 후는 아버지 중심으로 자녀교육을 한다.”
글 | 박정원 월간산 부장대우
◆2016년 08월 24일 이란에서 배우는 종교적 관용과 배려
▲ 구약성서에 나오는 유대인 출신 페르시아 왕비 ‘에스더’의 묘(왼쪽 사진)와 구약성서 ‘하박국서’의 저자 ‘하박국’의 묘(오른쪽)는 이슬람 국가인 이란에 남아 있는 기독교 유적들로서 이란의 타 종교에 대한 관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김승호 駐이란 대사
이란은 국민의 98∼99%가 무슬림이다. 국명부터 이슬람공화국이다. 이런 곳에 기독교 유적이 많고 구약에 나오는 사람과 지명 중 상당 부분이 이란 사람이고 이란 지명이라는 사실에 다들 놀란다.
구약에 등장하는 바사가 바로 페르시아이고 고레스, 다리오, 아헤수헤로는 페르시아 왕들이다. 이들이 살던 수산성(城)은 이란 서남부에 있다. 사자굴에 떨어졌어도 끝내 믿음을 지킨 선지자 다니엘의 무덤이 여기에 있다. 유대 민족을 살리기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 각오를 하고 아헤수헤로 왕에게 탄원했던 에스더와 그의 사촌이며 나중에 왕의 중신이 된 모르두개의 무덤이 하메단이라는 도시에 있다. 여기에서 남쪽으로 100㎞ 남짓 떨어진 곳에는 선지자 하박국이 묻혀 있다. 12사도 중 한 명인 다대오의 묘지가 이란 북부 마쿠라는 곳에 있으며 북서단 우루미에에는 세 분 동방박사의 묘지가 있다.
페르시아가 이 지역의 패권국이었고 영토가 방대했으므로 구약에 자주 등장하고 유대인이 이란에 여러 족적을 남긴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놀랄 일은 아직까지 그러한 유적이 보존되고 있다는 점이다. 2001년 3월 탈레반은 바미안 석불을 폭파했다. 무슬림의 땅에 불상이 있을 수 없다는 협량함과 독선 때문에 1500년 이상된 인류의 문화유산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런 반달리즘은 무슬림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새롭게 권력을 잡게 된 종교 세력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전의 종교에 대해 폭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 기독교도가 벌인 석상 파괴가 그렇다. 조선 초 훼불폐사(毁佛廢寺)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란에는 이런 반문명적 행위가 없었다. 7세기 이슬람화됐을 때도, 16세기 초 시아파 이슬람을 국교로 정했을 때도 1980년 이슬람 공화국을 세웠을 때도 그러했다.
필자는 그 이유를 이란의 성숙된 문화와 오랜 제국 경영 경험에서 찾고 있다. 이란은 이미 기원전 6세기부터 전 중동 지역을 장악해 4차례에 걸쳐 제국을 유지해 온 나라이다. 피정복민을 제국 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사회 통합을 위해 이들은 일찌감치 언어와 종교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고 실행해 왔다. 힘센 자의 관용과 아량을 베풀어 왔다.
바빌론에 갇혀 있던 유대인들이 해방자 고레스 대왕을 따라오자 기꺼이 받아들였고 오스만튀르크의 탄압을 받던 아르메니아인 15만 명을 수도 이스파한으로 이주시켜 모여 살게 했다. 현재 이란 내에 다수의 유대인과 아르메니아인이 살게 된 연유이다.
수천 년 축적된 문화적 소양은 타 종교에 대한 폭압적인 탄압을 취하지 못하게 했고, 타 종교는 수준 높은 이란 문화에 동화되거나 이란인 스스로 자신의 문화를 더욱 다양하게 발전시키는 거름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자세는 현재 이란 정부도 따르고 있다. 테헤란에만도 기독교회가 십수 개 있고 이란 전역에 유대교당이 60여 개 운영되고 있다. 소수 종교에 5석의 의회의석을 헌법으로 배정하고 있으며 국가 중요 행사에 이들의 대표는 상석에 모셔진다. 이슬람 성직자이기도 한 최고지도자나 대통령이 이들을 접견하거나 교당에 찾아가는 일도 드물지 않다.
이러한 관용과 배려가 각종 종교 유적이 온전히 보존되고 자신의 종교 생활을 하는 데 지장이 없는 현재 이란 상황의 바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란은 이슬람공화국이다. 99%가 무슬림이다. 이런 사회에서 이슬람과 적대되는 행위를 하는 것까지 관용과 배려가 작용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오산이다.
종종 우리나라 선교사들이 체포된다. 이란에서의 선교활동은 형법상 사회질서 교란단체 구성죄에 해당한다. 3년 이상 징역 내지 사형에 처하는 중죄이다. 선교는 이슬람공화국인 이란 입장에서는 자국의 정치 체제에 대한 위해 활동이다. 어느 정부든 반체제 활동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다. 과거 우리나라도 그러했다.
무슬림인 사회에서의 선교활동은 예의의 영역에도 속하는 문제이다. 남들 모두 자고 있는데 고성방가하는 것과 같다. 이란인이 타 종교에 대해 관용과 배려를 하는 만큼 그들도 자신의 종교와 문화에 대해 존중받기를 기대할 것이다.
이란은 최근 핵협상 타결로 인해 활짝 열린 자국으로 우리 국민이 방문하는 것을 환영한다. 성지 순례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우리 국민의 방문이 증가해 양국 관계가 강화되기를 기대한다. 타 종교에 대한 이란의 관용과 배려를 배워 가는 데에도 좋은 기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김승호(54) △제18회 외무고시 △주프랑스 1등서기관 △주OECD 1등서기관 △주이란 참사관 △구주 통상과장 △주벨기에 구주연합참사관 △주제네바 참사관 △대통령비서실 파견 △에너지자원협력과장 △지역통상국 심의관 △주벨기에 유럽연합공사 △양자경제외교국장 △주이란 대사
문화일보
◆볼거리
◇사막에서 만난 고풍스런 보석, 이란 아비아네
◇아스파한 하쉬트
▲하쉬트 베헤쉬트 궁
▲체헬 소툰궁
▲사파비 왕조의 샤 아바스 1세
▲페르시아 왕궁 페르세폴리스로 들어가는 만국의 문
▲북부 아르다빌 왕궁의 돔천장
▲이스파한에 있는 모스크의 아라베스크 타일
▲테헤란의 하늘을 뒤덮은 모래폭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