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의 一聲
■ 좌파, 마지막 단계, 종말 현상이 보인다 - 김지하 직격 인터뷰 上
2013.11.12 조선일보
"박근혜 정부는 유신세력 끌어들이지 말라"
김지하 시인(72)을 지난 9월 9일 자택이 있는 강원도 원주에 가서 만났다. 이어 지난 11일 전화로 추가 인터뷰를 했다. 김 시인은 외로운 맹수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한때 동지였던 사람들도 노선을 달리하면서 다 멀어져갔고 지금은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 원주에 있는 ‘박경리(김 시인의 장모·2008년 작고) 토지문화관’에서 인터뷰를 했다. 점심 때가 돼 인근 식당에 가서도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고, 식사 후 문화관으로 돌아와서도 인터뷰가 계속됐다. 아래 기록은 원주 인터뷰와 11일 전화 인터뷰를 합친 것이다.
“국정원 댓글 때문에 정보기관 없애서는 안된다”
―요즘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시국이 어수선하다.
“위법을 한 당사자들은 당연히 법에 따라 책임지고 처벌받아야 한다. 그렇지만 국정원 폐지나 정보수집기능 축소를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내가 과거 안기부(국정원 전신) 취조실에서 1주일동안 잠 못 자게 하는 고문을 받은 사람이다. 거기서 고문당하고 얻어터졌지만 정보기관의 필요성은 부인하지 않는다. 더구나 북한이 매일같이 핵위협을 하는 요즘 상황에서 이에 대응하려면 정보기관이 꼭 있어야 한다. 종북세력을 취조 안해서야 되겠는가.”
―박근혜 정부가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다른 것은 다 잘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박 대통령에게 예전에 ‘유신세력’ 끌어들이지 말라고 얘기했는데 그게 안 지켜지는 것 같다. 유신세력을 끌어들이면 북한이 비판할 명분을 주게 된다.”
―청와대 대변인으로 발탁됐던 윤창중씨 인사에 대해 잘된 인사라고 했던데 사람 잘못 본 것 아닌가.
“(대변인 되기 전에) 방송에 나가서 올바른 얘기를 하더라. 그래서 잘 데려왔다 그랬다, 그런데 미국 가서…. 어째서 국가일하는 인간이, 최소한의 국가 의식도 없나?”
“윤창중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어쨌든 사람을 잘못 본 것 아닌가.
“나와서 떠드는 것만 봐가지고는 알 수가 없다. 내가 뭐 만나기라도 했나, 뭐 알기나 했나. 알아야 뭘 잘보고 잘못 보고 할 게 있지.”
―이석기 내란 음모 사건이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좌파가 마지막 단계에 들어가고 있다. 맑시즘은 사회적 현상으로서 종말 현상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 자본주의의 왜곡된 모습이 이석기같은 사람이 활개치는 꼬투리를 만들어줬다. 모든 자본주의가 다 그런가? 그렇지 않다. 대통령 출마까지 한 이정희가 이석기 사건 얘기하면서 ‘총 얘기는 농담’이라고 했다. 총 얘기가 농담인가? 그런 것들이 뭔가? 내가 학생시절 때 만난 맑시스트들이 있다. 얘기해보면, 쉽게 얘기하자면 다들 점잖았다. 격조가 있었다. 말 속에 국가나 민족에 대한 의리 같은 게 있었고. 어디 저런 순 깡통 같은 00들이 나와 가지고 어쩌고 저쩌고 떠드는가?”
“난 시위 주동했지만 조직 행동은 하지 않았다”
―김 시인은 한때 반독재 투쟁을 치열하게 하지 않았나.
“나는 스스로 마르크스 만세를 부른 사람은 아니지만 상당한 정도로 진보라든가 좌익의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해온 사람이다. 그러다가 감옥에 가면서 자꾸 투쟁만 갖고는 안되겠다, 그래서 생명 사상을 주창해온 거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렇다. 적어도 저들처럼 이데올로기를 내걸고 목숨을 내걸고 죽음을 감수하면서 남북관계에 대해 투쟁을 하겠다 그러면 정직해야 된다. 정직. 그 사람들이 정직한 건가? 진짜 공산주의가 뭔가? 단적으로는 유물론하고 변증법이나 실증주의겠지만 그래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뭔가를 하려고 하고 부자하고 같이 평등하게, 뭐 그런거 아닌가. 정직해야 한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오랫동안 재산 추징을 거부한 것도 말이 많았다.
“부끄러워해야 한다. 우파가 두 사람을 부끄러워 하는 건 잘하는 거다. 잘한 생각이고. 그게 정말 양심적인 거다. 그러나 ‘총은 농담이다’ 이런 건 더러운 짓이다. 사기 축에도 못 낀다.”
―김 시인도 39년전 내란선동죄 같은 걸로 사형선고까지 받지 않았나.
“난 민청학련하고 관련이 없다. 당시 민청학련에 연류됐던 류근일 등등이 다 내 친구긴 했다. 그렇지만 난 조직적 행동은 안했다.”
―시위 계획 같은 건 만들지 않았나.
“계획이라기 보다 중요한 행동은 늘 했다. 그러나 조직적 움직임은 안했다. 조직에 안들어가면 당원이 아니다. 맑시즘은 개인적 행동이 없다. 조직적 액션이 맑시즘이다.”
“택시비 많이 쓴다고 마누라한테 얻어터진다”
―얼마전 김 시인의 내란선동죄 등에 무죄 판결이 났다. 그 때 돈 얘길 한 게 화제가 됐다. 경제적으로 그렇게 궁한가. 비판자들은 김 시인이 타락했다고 한다.(김 시인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7년간 복역했다. 지난 1월 민청학련 무죄 판결이 났을 때 그는 “보상금을 목적으로 재심을 신청했다. 국가가 보상금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정부가 27억원을 주고 먹고 튀게 한 여자(이정희 전 대선 후보)도 있는데, 난 예전에 사형선고도 받고, 그 손해배상은 어디서 청해야 되냐"고 울분을 터뜨렸다.)
“그럼 궁하지. 택시비 너무 많이 쓴다고 마누라한데 얻어터지고 하는데. 우리 애들 둘다 대학을 못 갔다. 돈이 없어서라기보다 내가 감옥에 들락날락하고 정신병원을 열두번 드나들면서 장모한테 약값을 다 꾸었었다. 애들이 공부가 됐겠나. 돈이 넉넉하게 있었으면 애들 유학이라도 보냈을 것이다. 살다보니 돈은 악마의 징표가 아니라 소통수단이더라.”
―이제 시는 안 쓰는가.
“당분간 안쓴다. 나중에. 뭔가 새로운 시상(詩想)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다. 그림하고 시가, 내가 상상도 못했던 어떤 독특한 장르가 내게 오지 않을까 하고 기다리고 있다.”
“역사에 시골 노인으로 기록되면 그만이다”
―역사에 어떤 사람으로 기록되고 싶은가.
“그저 시골 노인으로 기록되면 그만이다. 나는 그런데 신경 쓰지 않는다. 요즘 독공(獨功)하고 있다. 혼자 공부하는 거다. 곧 책을 낼 거다.”
―일상은 어떤가.
“매일 아침 아파트 아래 초등학교에서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병아리 소리처럼 시끄럽다. 하지만 그걸 보고 있으면 내 어릴 때 생각도 난다.”
―부인(김영주 토지문화관 원장)한테 많이 의지하는 것 같다.
“1991년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워라’라는 칼럼을 쓰고 난 뒤 저쪽에서 엄청난 협박전화를 해왔다. 원래 마음이 여린 마누라가 그때 독하게 변했다. 전화를 워낙 강경하게 받으니까 ‘측천무후’라는 별명을 얻었다.(부인 김 관장은 평소 경상도 사투리 섞인 토속적인 말투도 그렇고 기본적으로 소탈하고 따뜻한 사람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역대 한국 최고의 문인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내 보기에 최고의 시인은 서정주고 최고의 소설가는 박경리다. 서정주는 절대적이다.”
―박경리 선생하고 관계가 원만치 않았지 않은가.
“장모는 나 때문에 좌우 양쪽으로부터 워낙 많이 시달리고 딸 고생시킨다고 나를 ‘000’라고 욕했다. 난 그분 떠날 때(2008년 작고) 임종도 못했다.
하지만 그 분은 언제 그 많은 책을 읽었는지 맑스·레닌 저작부터해서 엄청난 독서를 했다. 거대한 ‘토지’ 드라마에 그대로 녹아 있다.”
“박근혜 지지했다고 협박전화 많이 받았다”
―그동안 반대파들로부터 여러가지 곤욕을 치렀다는 얘기가 있었다.
“박근혜 지지한 것 가지고 협박전화가 얼마나 많이 온 줄 아나. 협박 전화가 수없이 왔다. 그렇지만 우리 마누라가 보통내기가 아니다. 그냥 맞받아치더라.”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여러가지 악연이 있었다.
“부마사태가 났을 때 1000명의 리스트가 있었다. 차지철(대통령 경호실장)이가 만든 거다. 그 리스트 보고 박정희가 한 말이 있다. 박정희가 ‘(요주의 인물) 1호가 누구냐’고 물어서 김대중이라고 했더니 박정희가 ‘김대중 빼’라고 했다더라. 그럼 누가 첫번째냐고 물었더니 ‘김지하’라고. 내가 감옥에 있을 때 감옥에 뒤늦게 들어온 박선호(중앙정보부 요원·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지시로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에 가담)한테 직접 들은 이야기다. ‘통곡의 미루나무’라는 책에 다 나와 있다.”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였는데 내가 공산주의 하겠나”
―원주에는 어떻게 오게 됐는가.
“옛날에 사람들은 내가 공산주의자인줄 알았다. 우리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였는데 내가 또 공산주의를 하겠나? 아버지는 공산주의자로 찍혔지만 오사카에서 7년간 전기기술을 배워온 기술자여서 육군에 전기조명 기사로 다시 채용이 됐다. 6·25가 끝나자 공산주의자로 찍혔던 고향 목포에 가지 않고 원주로 온 거고.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13살 때 원주에 아버지 만나러 왔다가 여기서 같이 살게 됐다. 아버지가 그 모양이었는데, 내가 그 판잣집에 살면서 다시 공산주의를 했겠나? 난 외아들이지만 아버지를 좋아하진 않았다.”
―대학 생활은 어떻게 보냈나.
“나도 좀 빠꼼이었다. 내가 유물론도 하고 철학도 하고 그러니까 내가 그런 쪽에 유능한 걸 친구들이 다 알았다. 문리대 다닐 때 강의실에서 막 잠을 자고 그랬다. 하숙비도 안들고. 그래서 내 별명이 거지였다. 조선일보에 있었던 리영희씨가 나한테 거지라고 했다가 나하고 싸웠다.”
―80년대 들어서 동학 얘기와 생명사상 얘기를 많이 했는데.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이 아주 가난했으니까 조그만 방에 아버지, 할아버지가 맨날 동학 얘기를 해서 내 귀에 못이 박였다.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 책을 많이 봤다. 맑시즘 좋다. 가난뱅이 살리고 골고루 살자는 거. 하지만 유물론이 철학인가? 그때 조동일(서울대 명예 교수)하고 알고 지냈는데 내가 그 사람한테 ‘내 평생에 유물론 뒤집어놓고 말겠다’고 하니 조동일이 ‘자신 있냐’고 그러더라. 그때 사실 자신은 없었다.”
<계속>
■ 나보고 박정희 조지는 글을 계속 쓰라고? 날 잘못 봤다 - 김지하 직격 인터뷰 下
"한·일수교회담 당시로 돌아간다면 또 투쟁한다"
<전편에서 계속>
―왜 유물론을 뒤집을 자신이 없었나.
“내가 역사를 좀 했는데, 그 기억을 대학 때 지웠어. 사람 기억이라는게 지우면 지워져. 그러다 다시 살아난 게 언제냐 하면 붉은 악마 하고 촛불 시위 때야. 촛불 시위할 때 애기 데리고 나온 여편네들, 비실비실 비정규직들이 나와서 바글바글 하는거야. 새벽에 갔을 때 회의 하는 걸 보고 기억이 살아난 거야.”
―감옥에 있을 때 어떤 일이 있었나.
“밖에 있는 내 동지라는 인간들이 교도관 전병용이라는 사람을 통해 맨날 나한테 연락이 왔어. 박정희 조지는 글을 계속 써야 한다는 거야. 근데 내 대학 때 별명이 ‘의심의 천재’야. 그 인간들이 나보고 맑시스트의 대장이 돼야 한다는 거야. 그 인간들은 내가 공산주의자인줄 알았지. 난 아닌데.”
―그동안 주창해왔던 동학사상의 현대적 의미가 뭔가.
“동학에 공산당이 있어. 수왕회(水王會)라고. 화엄개벽을 추진하는데 여자를 우두머리로 삼지. 해월 최시형 선생 밑에서 수발 들던 이수인, 그 여자가 맹주야. 이 수왕회가 남조선에서 자주자립운동을 펼쳤어. 그 속에 공산주의가 있고. 나름의 공산주의지.”
“난 원래 중도파”
―왜 같이 운동하던 사람들과 갈라서게 됐나.
“그 인간들이 나를 이해 못한 거야. 저 새끼는 행동도 하고 이론도 밝은데 왜 조직에 안 들어오느냐. 내가 들어가겠나? 애비가 공산당이었고 목포에서 당해 가지고 열세살에 (원주로) 쫓겨난 놈이 공산당을 또 해? 당신 같으면 하겠어? 난 원래 중도야.”
―김 시인은 앞으로 전세계적으로 여성이 지배하는 시대가 온다고 했다.
“일본에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 마르크스 경제학자<1879-1946>)라고, 맑시스트 왕초가 있었어. 그가 늙어가면서 공부하다 보니까 아! 하고 깨달은 게 있었어. 그래서 발표를 해버려. 마오쩌둥(毛澤東) 시절에 동양에서 맑시즘 그거 안된다고. 그럼 뭐냐. 동양의 신시(神市), 정전법(井田法), 팔상시(八湘市)를 현대적으로 부활시켜 봐라고 했지. 가와카미가 마오쩌둥 시절 중국에 3번인가 충고했어. 과거 정전법이나 팔상시 같은 걸 현대적으로 부활시켜 봐라. 그렇게 안 가면 동양의 혁명은 불가능하다고. 그런데 시진핑(習近平)의 공부론(共富論)이라는 놈이 있어. 그의 개혁 주장 뒤엔 그림자가 비쳐. 가와카미의 그림자가.”
―그럼 중국이 앞으로 어떻게 변하나.
“반드시 변할 거야. 크게. 일본? 저건 안돼. 요사노 가오루(與謝野馨)같은 경제통들이 ‘따뜻한 자본주의’라는 걸 얘기하기 시작했어. 아소 다로(麻生太郞) 총리 시절 경제상이었던 가오루가 ‘따뜻한 자본주의’, ‘착한 경제’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지.”
―따뜻한 자본주의가 뭔가?
“너무 혼자 다 처먹지 말고 적당히 좀 같이 분배해서 자본주의 하자 이거야. 그게 착한 경제지. 일본 여성들 중 귀족 계통 여성들은 백제 혈통이 강해. 일본의 건강한 세력은 여성들 뿐이야. 1000년 전에 야마토 정권이란 첫 국가가 일본에 성립됐을 때 바로 백제 정치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았지. 일본 여자들, 상당수가 한국계야. 한국문화(한류) 열풍이 옮기 시작하면서 일본 여성들의 자발적인 내부 개혁 동기가 일어난 거야. 그런데 2년쯤 있다가 ‘욘사마’가 터졌지. 욘사마는 배우 배용준의 이름이 아니라 배용준의 이름을 빌린 일본 여성들의 자발적 자기부활 운동이야.”
“한국과 미국에서 여성시대 오면 일본 여성도 움직인다”
―진짜 여성의 시대가 오는가.
“일본 여성들이 움직이는데 그 시작이 욘사마였다는 거. 박근혜가 이쪽에서 정치를 잘하고 여성권력이 또는 그 지지가 여론 속에서 시민들 여론 속에서 얼마만큼 올라가느냐가 일본 여성들이 다시 부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촉발제야. 내가 미국 가서 LA와 스탠포드에서 특강을 하고 왔는데 거기서 얘길 들으니까 힐러리 인기가 88%나 되더라. 작년 얘기다. 그런가 하고 돌아왔는데 돌아온 후에 신문에 힐러리가 그동안 한다 안 한다 하다가 다시 나오려 한다네. 한국과 미국에서 여성 권력이 대가리 들고 효과를 내기 시작했을 때 일본 여성들이 가만히 있을까.”
―김 시인은 한 국가의 발전 과정에 문화의 중요성을 여러 번 강조했다.
“백범이 해방 직후에 동아일보하고 인터뷰할 때 문화창달을 강조했다. 이제 와서 ‘아! 그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어. 박근혜가 러시아 가서도 문화 얘길 했고. 내가 원주에 온 박근혜를 만났을 때 두 가지를 요구했어. 문화와 국방이야. 박근혜가 러시아에 가서 싸이의 말춤, 즉 강남스타일이 창조경제의 가장 확실한 씨앗이라고 했어. 내가 속으로 ‘이 여자 봐라’ 싶었지. 문화가 경제의 씨앗이라는 말 아무나 할 수 있는 것 아니야. 그런 대담한 말을 할 수 있는 건 좀 모라자서 그런 것 같아. 공부를 깊이 하면 그렇게 대담해지지 못해.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 말은 폭탄이야. 창조경제가 뭔지 고민하는 놈들 많지만 그 말을 말춤에 묶어버렸잖아.”
―김 시인의 저항 정신은 타고난 것인가, 길러진 것인가.
“우리 집안은 증조부 때부터 동학이야. 동학 마지막 전투에서 증조부가 조부하고 같이 참가했다가 총을 여섯발인지 일곱발인지 맞았는데 죽진 않았어. 동학난이 일어난 1894년 영광으로 가서 7년을 숨어살았지. 거기서 동학하고 화엄을 결합시키는 화엄개벽을 구상하고 광주에 일이 있어 올라가다가 어느 굴에서 동학쟁이한테 칼 맞아 죽어. 우리 집안에 그런 전통이 있어. 아버지는 나중에 빨갱이가 됐고. 내가 수왕회의 공생주의 얘길 하는 것은 어디서 주워들은 얘기가 아냐. 우리 집안의 근원이야. 내가 어렸을 때 맨날 들었다가 지운 얘긴데 그게 붉은 악마 촛불 때 살아났어.”
박정희 사망 소식 들으며 떠오른 첫 생각은 ‘인생무상’
―박정희 시대, 그 독재 시대을 이제 용서하는 건가.
“난 그때 감옥 안에서 미친 상태였어. 문학적 표현이 아니고 정신병이었다고. 의사를 부를 수 없었으니 불교식 참선을 시작했지. 100일 참선. 잠 잘 때도 가부좌를 틀고 잤지. 정확히 100일 참선이 끝나고 그 다음날, 101일 째 되던 날 낮 12시, 교도소 방송에 박정희가 죽었다는 소리가 나와. 그 얘길 듣고 내게 바로 반응이 왔어. 머리 속에 공 3개가 떠올라. 첫째 공은 ‘인생무상’, 둘째 공은 ‘안녕히 가십시오’, 셋째 공은 ‘나도 곧 뒤따라 갑니다’. 그 때부터 내가 웃기 시작했지. 왜? 코미디니까. 나처럼 박정희 미워한 사람 별로 없을 거야. 그렇게 얻어터지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짓밟히고…욕을 안 한다면 그건 못난 놈이지.”
―지금은 왜 바뀌었나.
“그때 이미 변화가 왔어. 박정희를 더 이상 욕하지 않게 된 거지. 그 이전에 개XX 정도가 아니라 갈기갈기 찢어서 개한테 던져죽이느니 뭐니 지독한 욕도 많이 했는데, 그 때부터 욕을 안하게 되더라고. 굳이 얘기가 나오면 ‘지 나름대로는 우리 먹여 살리려고 하다가 정치 잘못해서 잘못 간 거지’ 이 정도로. 이 얘긴 지난해 박근혜씨를 처음 만났을 때 했어. 그 얘길 했더니 그 여자가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표정에 까딱 변화가 없어. 아버지 어머니 총맞아 죽고 난 뒤 18년을 고독 속에서 지내면서 생긴 내공이 아닌가 싶더만. 그래서 내가 ‘당신 내공이 있구만. 앞으로 독살스러운 기운으로 뿜지 말고 좋은 정치하는데 쓰시오. 당신 아버지 닮지 말고 어머니 닮으시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새 시대 여성 특유의 정치를 하면서 여성다우면서도 남자도 못할 일을 좀 해보시오’라고 했어.”
―육영수 여사를 왜 그렇게 높이 평가하나.
“육영수씨가 김수환 추기경하고 지학순 주교한테 한 말이 있어. 내가 두 사람하고 다 친했으니까 그 얘길 들었지. 육 여사가 두 사람한테 ‘우리 박정희씨를 잘 좀 봐주십시오. 박정희씨의 오류는 친일파였다는 것, 빨갱이였다는 것, 친미정보장교였다는 것, 이 3가지로부터 나옵니다. 지금 그의 고민은 이 3개의 오류를 극복하면서 그 안에 있는 작은 장점이라도 우리 식으로 살려내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니 두 분께서 제발 도와주십시오’라고 했다는 거야. 추기경과 주교가 나한테 그 얘길 하면서 ‘육영수가 대통령감이야, 하하’ 하고 웃더군.”
―그렇다고 박정희 대통령의 과오가 다 용서되는 건 아니지 않는가.
“나는 뭐 그 사람 잘못한 거, 종신 대통령 하려 했던 거, 그건 누구나 다 욕하니까 더 이상 말할 것도 없고. 그 사람이 잘못한 거 많아. 내 고향 전라도도 그렇고 경기도와 강원도 가는 곳마다 개발한답시고 다 개판을 만들어놨어. 무주 구천동까지 개발해가지고. 난 항상 욕쟁이니까, 저런 XXX 하면서 욕을 했지. 그런데 내가 원주에서 부산을 가면서, 안동으로 내려가는 그 고속도로를 가면서 내가 차를 세 번 스톱시켰어. 그렇게 깨끗하게 해놨을 수가 없더라고. 난 생태학을 공부해서 도로를 잘 알아. 또 하나 잘한 것은 그린벨트지.”
“한·일수교회담 당시로 돌아간다면 또 투쟁한다”
―64년 한·일수교회담 반대 투쟁을 적극적으로 했는데 과거로 돌아간다면 또 투쟁할 건가. 한·일 수교는 경제 발전 위해 불가피했다는 시각도 있다.
“명확하게 답변하지. 또 해. 또 한다고. 주최자들이 어떤 의도로 한·일 협정을 졸속 추진하게 됐는지 아는가. 김종필이 일본까지 가서 돼먹지 못한 일본 차관 뿐 아니라 여러가지 자금을…. 그런 짓이 일본인으로 하여금, 특히 국제관계와 한·일 관계에 있어서 느슨한 태도를 갖게 해준거야. 오늘날 일본 아이들 태도를 봐. 위안부도 가짜, 침략도 가짜, 독도도 저희 땅, 몽땅 그런 식이야.”
―대일 관계의 많은 문제점이 그 때 배태된 건가.
“사기도 용납할 듯한 일본 기업의 관행을 한국이 배워오기 시작한 게 그 때부터야. 근사한 이노베이션인 것처럼 들여왔지. 그로 인해서 아직도 이석기니 저 XX가 왕왕댈 수 있는 꼬투리를 만들어 준거야.”
―수왕회의 자조자립운동을 얘기하면서 새마을운동을 많이 거론했다.
“새마을운동이 자조자립운동이다. 정부가 밀고 그러니가 강했지. 그 이전부터 동학도 희미하고 불교도 희미하고 남학(南學·1862년경 이운규<李雲圭>가 창시한 종교. 현대를 선천시대에서 후천시대로 바뀌는 교체기로 규정)도 희미하니까, 이런 조직들이 빠닥빠닥할 수 있겠나. 그 자조자립 효과는 새마을운동 쪽으로 다 넘어가 버렸지. 박정희는 원래 공산당이야. 그리고 선조는 동학, 안동 동학이야.”
“내 평생 소원은 그림 그리는 것”
―김 시인은 저항 시인으로 명성을 얻었다. 시대가 인물을 만드나, 인물이 시대를 만드나.
“내 평생 소원은 그림 그리는 거야. 그것도 조선화, 원래는 동양화. 내가 난초는 잘 쳐. 그렇지만 난초 치는 건 선비들 장난이야. 난 4살 때부터 그림을 그렸어. 우리 모친이 반대했지. 전라도, 가난뱅이 동네 아냐. 그림 그리면 가난하다 그래, 배고프다 그래가지고 그림 못 그리게 내 손을 묶어놨어. 조그만 놈이 손을 묶어 놓으니 얼마나 애가 타고 괴로울 거야. 손을 묶어 놓으니까 발가락에다 숯을 끼고 꽃, 새, 이런 걸 그리기 시작했어. 나중에 모친이라는 사람이 그걸 또 알아채가지고 내 발도 묶어 놨어. 그림을 못 그리다보니 나중에 연장을 가지고 기관총 같은 총을 만들어서 애들 주고 그랬어. 이것도 못하게 날 아예 묶어 놓더라고. 그러다 보니 나중엔 내가 스스로를 자가검열하고 감시하게 되고. 그야말로 고통의 세월이었지. 어머니 죽고 나니까 이제 좀 그려볼까 하는데 그림이 잘 안 돼.”
―우파 쪽에서 김 시인을 소설가 이외수와 비교하면서 김 시인을 높이는 목소리도 있다.
“이외수하곤 친하지 않아.두번 만났는데. 소문처럼 대마초를 피웠는지, 소마초를 피웠는지. 이외수는 엉터리야. 지 마누라를 우습게 아는 거야. 지 마누라 참 열심히 사는 사람이야. 그 XX 엉터리야. 나도 마누라한테 잘한 건 없지만.”
―근데 왜 욕을 그렇게 많이 하시나.
“15세기 피렌체 르네상스를 보면 욕은 진정한 르네상스의 시작이야. 가톨릭의 교황 사생아 두셋이 피렌체 거리에 대낮에 술 처먹고 여자들 끼고 흔들흔들 댕겨. 이걸 보고 똑똑한 피렌체 여자들이 뭐라고 한 줄 알아. ‘개똥구멍에 낀 살구씨 같은 새끼―’. 바로 거기서 세계를 지배한 근대 문명이 태어난 거야. 요즘 우리나라는 어때? 지하철에 열서너살 먹은 계집애들이 지들끼리 ‘졸라빨라, 졸라빨라’ 그러는 거야. 그런 애들 보고 욕을 하겠어? 조선일보가 계속 욕을 해. 으이그. 욕은 심리적으로 진정한 맑은 문화가 일어나기 위한 간절한 소망이야. 그래서 욕이 더러우면 더러울수록 심층에서는 정말 세상을 지배할 깨끗한 문화가 돌아오길 기다려. 르네상스의 시작은 욕으로부터야.”
(김 시인은 토지문화관에서 6시간 30분 동안의 인터뷰를 마친 뒤 원주 시내에 있는 아파트로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사라졌다.)
/글=여시동 기자 사진=이명원 기자
■ 2014.05.15 이 땅에 아직 五賊 있다
김지하(金芝河·73) 시인은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아직도 이 땅에 '오적(五賊)'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고급 공무원과 국회의원 등 오적들한테서 부패가 생겨난다. 지금도 그대로다"라고 말했다. 김 시인은 지난 1970년 '사상계(思想界)'에 을사오적(乙巳五賊)을 빗대 권력층을 비판하는 시 '오적'을 발표했다가 구속됐으며 이때부터 저항 시인 이미지를 갖게 됐다.
조선일보의 뉴스스토리 사이트 '프리미엄조선(premium.chosun.com)'은 14일 강원도 원주의 박경리토지문화관에서 김 시인을 만났다. 그는 인터뷰 도중 상의 주머니에 시집 '오적'을 넣고 있었다. 자신이 쓴 저항시들을 다시 보고 있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 "그저 슬퍼하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개헌을 포함해 국가 시스템을 다시 만들어가는 치열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 소식을 접하면서 무슨 생각부터 들었나.
"슬펐다. 학생들을 두고 먼저 탈출한 선장과 선원에 대해 한없이 분노했다. 장보고의 청해진이 있었던 그곳에서 왜 그런 일이…. 하지만 이 땅의 지성인은 슬픔에만 젖어 있어서는 안 된다. 사회 지도층은 이제 개인이 아닌 나라에 대한 생각을 앞세워야 한다."
―어디서 뭐가 잘못됐는가?
"몇몇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아직도 이 땅에 오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적이라는 시를 쓴 게 40년이 더 됐는데, 지금도 그 오적을 중심으로 부패가 나오고 사회가 굴러가고 있다."
―정치인들은 왜 이렇게 무기력한가?
"나라를 생각하지 않는다. 다들 자기 생각만 한다. 역사적 맥락에서 크게 생각하고 크게 행동해야 한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국회에서 모든 걸 논의해야 한다. 길거리에서 '대통령 물러가라' '너 책임져라' 하고 떠드는 행위는 자유당 시절 송목 시인이 얘기했듯 '정치가 아니라 치정(癡情)'이다. 규제 개혁 등 대통령이 내놓은 것을 다 엉터리라고 하지 말고 그 안에 들어있는 긍정적 요소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 박근혜 정부가 유신 분위기와 체제를 연상시키는 쪽으로 가서도 안 되지만 희생자 부모들의 슬픔을 이용해 판을 뒤엎으려는 비이성적 세력도 경계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가 여론의 비판에 몰려 있다.
"대통령의 만기친람(萬機親覽·모든 사안을 직접 챙김)에 대해 불만을 가진 사람이 많다. TV 볼 때마다 김기춘 비서실장 말고는 모든 각료가 받아쓰기하는 모습이 나온다. 김관진 같은 무골도 받아 적고 있더라. 더 이상 만기친람은 안 된다. 대통령이 결국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대통령이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다. 또 하루아침에 구조적 모순을 바꿀 수가 없기 때문에 시간을 주고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하나.
"개헌을 해야 한다. 개헌 방향은 이원집정제다. 이원집정제와 책임 총리제, 대통령 중임제 등을 도입하고 고급 공무원들, 소위 '관피아' 문제 해결을 통한 공무원의 자기 수습과 개혁 등 관료 체제의 대개혁이 필요하다. 이렇게 해야만 만기친람도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 그런 구체적 방안들을 내놓아야 한다."
―지난 대선 선거운동 기간에 박근혜 대통령 지지 발언을 했다. 지지가 아직도 유효한가.
"대통령이 지난번 규제 개혁 끝장 토론에 참가해서 발언하는 것을 보고 상당히 감동을 받았다. 역대 다른 대통령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염두에 두고 있더라. 북한에 대한 드레스덴 선언 등 외교도 잘하고 있다고 본다. 다만 여성이 오랫동안 괄시받았던 한국 사회에서 첫 여성 대통령이 되다 보니 심성에 날카로운 측면이 있지 않겠느냐. 그렇다고 무슨 일만 생기면 여자 대통령이 돼서 그렇다는 식의 고루한 생각은 곤란하다. 집권한 지 1년 좀 넘었다. 일을 하도록 좀 기다려주자."
―이번 사태에 어른들의 책임이 크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거세다.
"붉은 악마와 초기 촛불 시위에 담긴 젊은이들 열정의 의미를 기성세대가 알아야 한다. 좌도 우도 아닌 그들의 순수한 열정이 세상을 바꿔나갈 것이다. 팽목항의 부모들은 자식들의 생각과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자신들의 잘못을 가슴을 치며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젊은이들이 가감 없이 마음속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줘야 한다. 이는 부모와 자식 간 소통 의미를 뛰어넘어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와 국가가 발전할 수 있는 근본 동력이 될 것이다."
―참혹한 사건을 눈앞에 두고도 이념 투쟁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데모를 많이 해봤다. 데모에 이골이 난 사람이다. 좌익 공부도 많이 해봤다. 서로 상대방을 잡아먹으려고 기를 쓰는 거…. 역사에 대한 통관(通觀)이 필요하다. 이제 다 털어놓고 얘기할 때도 됐다. 좌익 이데올로기 중에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다 까놓고 얘기하는 것이다. 이제는 어떤 사상적 미스터리에 가려서 속을 정도로 우리 사회가 어리석지 않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우리가 진도의 아픔을 다 끌어안으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오적(五賊)
김지하 시인이 29세 청년이던 1970년 5월 잡지 '사상계'에 발표한 시(詩). 을사조약 체결에 앞장섰던 을사오적에 빗대 당시 권력층 다섯 부류의 부패와 부조리를 해학적이고 신랄하게 비판한 300여행의 긴 담시(譚詩)이다.
이 시로 인해 김 시인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고 사상계는 폐간됐다. 시 속의 오적은 재벌, 고급공무원, 국회의원, 장성, 장·차관 등이다.
여시동 | 기자(원주)
■ 2014.10.25 '수묵산수전' 여는 시인 김지하
올해 일흔셋의 노시인이 “좋다, 좋아”를 터뜨린다. 진한 먹물로 뱀처럼 굽은 길을 천천히, 강약을 조절하며 그려 낸다. 붓이 지나간 길에서 힘찬 기운이 느껴진다. 그 길 저 뒤로는 백운산이 엷게 펼쳐진다.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무수막길이다. 먹으로 빚어낸 농담(濃淡)의 차이가 묘한 조화를 이룬다. “외롭고 쓸쓸할 때 찾는 길입니다. 생각이 막히거나 결정할 일이 있을 때도 들르곤 하죠.”
붓질을 마친 시인이 ‘갑오(甲午) 영일(英一) 모심’이라고 쓴다. ‘갑오’는 2014년 올해요, ‘영일’은 그의 본명이다. 시인은 군사정부 시절 ‘저항의 아이콘’이었던 김지하씨다. 40여 년 전 ‘신새벽 뒷골목에 민주주의를 남몰래 썼던’ 시인은 이제 원주 주변의 산과 물을 화선지에 옮기며 또 다른 세상을 열어가고 있다. 다음달 8~18일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김지하의 빈 산’ 수묵전을 여는 그를 지난 20일 원주시 무실동 시인의 거처에서 만났다.
▲김지하의 자화상(위쪽)과 수묵산수. 강원도 원주 일대의 자연을 그만의 감수성으로 접근한 산수화가 다음달 40점 가까이 소개된다. 그가 바라본 우주의 진면목이다. 모란·난초·매화도 만날 수 있다.
- ‘지하’ 대신 ‘영일’이라 썼습니다.
“1963년 서울 동숭동 학림다방에서 첫 시화전을 열었을 때 지하(之夏)라는 필명을 썼죠. 이름 때문일까, 지하(地下)에 끌려가고, 사형선고도 받고, 천덕꾸러기 노릇만 했어요. 한번은 성명학자에게 물었더니 매일 감옥에 갈 이름이라나, 나 참. 이제는 그럴 일도 없고, 그림에서는 본래 이름으로 돌아갔어요. 꽃 한 송이, 좋잖아요.”
- 어릴 적 꿈이 글보다 그림이셨죠.
“네댓 살부터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제 고향이 전라도 목포, 순 가난뱅이 동네였습니다. 어머니가 ‘그림을 그리면 배고프다’며 제 두 손을 묶어 놓았죠. 발가락에 숯을 끼고 회벽에 꽃도, 새도 그리며 반항했지만 반대가 워낙 심하니까 포기하게 됩디다.”
- 그래도 서울대 미학과에 갔는데요.
“고등학생(서울 중동고) 때 공부를 잘했어요. 대학 결정을 앞두고 미학과 선배가 와서 꼬드겼죠. 그때 미학과에선 데생·사군자 등 동서양화를 다 할 수 있었어요. 교수가 되고, 돈도 벌고, 그림도 그릴 수 있겠다 싶어 들어갔어요. 이후 그림보다 문학이 본업이 됐지만….”
김씨는 난초 그림으로 이름을 떨쳐 왔다. 7년여 투옥 끝에 80년 석방된 후 난초를 치기 시작했다. 옥고로 약해진 심신을 추스르고, 정치권·운동권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수양법이었다. 먹참선이라고 했다. 바람과 난초를 동시에 포착한 ‘표연란(飄然蘭)’이 일품이었다. 빼어난 기량으로 문인화의 전통을 잇는다는 평도 들었다.
그는 이후 달마도를 비튼 ‘코믹 달마’ 연작과 눈보라 속에 피어나는 한매(寒梅)로 화제(畵題)를 넓혀 갔다. 2001년 회갑기념전 등 크고 작은 전시를 열어 왔다. 이번에는 총 100여 점이 나온다. 역대 전시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클뿐더러 그가 산수와 모란을 처음 시도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 전시에 대한 기대가 크겠습니다.
“도록 인사말에 ‘아가리가 딱 벌어진다’고 썼습니다. 그만큼 좋다는 거죠. 그림에 대한 한을 풀게 됐어요. 어린 시절 행복했던 기억을 되찾은 겁니다. 검은 함석집에서 자랐는데 지금 사는 아파트가 그때의 함석집 같은 느낌입니다. 나 때문에 고생만 해 온 아내에게 새 차 한 대 사 줄 수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어요.”
- ‘평생 난을 치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주위에서 잘한다, 잘하다 해서 쳤지만, 사실 난초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난초는 선비들이 그리는 문인화인데, 저는 타고나기를 ‘쌍놈 그림꾼’이거든요. 그런 사람이 난초에 취미가 있겠어요. 어려서 제일 그리고 싶었던 건 뜰 뒤의 모란이었습니다.”
- 80년대 재야 인사들이 난초 그림을 팔아 활동경비로 쓴 일화가 유명합니다.
“소문이 났죠. 아마 수천 장 그렸을 겁니다. 한꺼번에 열 장, 스무 장도 친 적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내 그림이 민주화운동에 사용됐다는 건 과장된 측면이 있습니다.”
- 이번에 ‘자화상’이 재미있습니다.
“달마 대사를 빌렸죠. 우락부락한 게 못생겼잖아요. 마귀같이 보이지 않나요. 사람들은 하늘로 치솟은 눈썹이 저를 빼닮았다고 합니다. 이 눈썹이 없었다면 아마 밥도 얻어먹지 못했을 겁니다.”
- 역시 수묵산수가 눈에 띕니다.
“원주가 제2의 고향입니다. 중1 때 아버지를 따라 처음 원주에 왔어요. 전쟁 직후라 쑥대밭이었죠. 2008년 장모(소설가 박경리)가 돌아가시고, 아내가 원주 토지문학관장을 맡게 되면서 저도 함께 내려왔죠. 그리고 영월·제천·충주·여주·이천·용인·철원 등을 돌아다녔어요. 택시 값도 꽤 들었어요. 주변 산하를 순례하며 우리 땅과 사람을 다시 보게 됐습니다.”
- 무엇을 배우셨나요.
“수묵산수는 우주의 본체에 대한 접근입니다. 서양화의 사실주의와 다르죠. 산(어두움)과 물(밝음), 농경과 유목 문화의 대비 등을 담채(淡彩)와 진채(眞彩)로 드러냈습니다. 원주 부근은 백두대간의 중심입니다. 저는 중조선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숱한 갈등을 풀어가는 해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 설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동학을 창시한 수운(水雲) 최제우(1824~64)의 시 가운데 ‘남신원만북하회(南辰圓滿北河回)’가 있어요. ‘남쪽의 샛별이 (중조선의) 원만을 얻어야 북쪽의 강물 방향을 바꾼다’는 뜻이죠. 무서운 얘기입니다. 제 삶의 주제가 됐죠. 한국이든, 세계든, 우주든, 남과 북이란 대립이 원만을 거쳐야 해소된다는 겁니다. 그런 생각을 그림에 담았어요.”
- 관념적 사변(思辨)이 아닌가요.
“지금은 절터만 남았지만 고려시대 원주 거돈사와 법천사 사이의 작은 고개에서 승려 13명이 싸우다 죽은 일이 있습니다. 문자를 멀리한 선종(禪宗) 사찰 거돈사와 학문을 내세운 법상종(法相宗) 사찰 법천사 간에 어마어마한 사상투쟁이 있었던 거죠. 문막에선 궁예와 왕건이 27차례나 피나는 싸움을 벌였습니다. 동학 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1828~98)을 마지막까지 지켰던 여성 갑년(甲年)이가 죽은 곳이 양평 두물머리입니다. 그 밖의 예가 수도 없습니다.”
- 우리가 잘 모르는 얘기입니다.
“역사학자들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임금 똥구멍 냄새를 맡는 게 역사가 아닙니다. 우리 민족·민중문화의 르네상스는 이 땅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됩니다. 아이들·여성 등 약자들을, 생각이 다른 이를 껴안는 넉넉한 포용이 필요합니다. 그게 개벽이요, 혁명입니다. 그런데 요즘 정치를 보면 욕부터 나옵니다. 야당은 매일같이 대통령 탓만 하고 있잖아요.”
- 2년 전 박근혜 대통령 지지의 연장인가요.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박 대통령의 만기친람(萬機親覽)은 안 된다고 여러 번 지적했어요. 정치는 강의가 아니라 대화잖아요. 우리는 민주화와 산업화를 뛰어넘는 새로운 국가 모델을 만들어야 해요. 저를 반동분자·변절자라고 하는데, 반동은 공산주의자나 쓰는 말입니다. 저는 원래부터 조직이나 붕당(朋黨)을 피해 왔습니다.“
- 이 시대에 한마디 하신다면요.
“자본주의·공산주의, 다 부차적인 겁니다. 판소리·동학·화엄불교 등 민족 전통을 끌어올리는 문화력이 바로 원만이요, 통일로 가는 길이죠. 해방 직후 김구 선생의 첫마디도 문화이지 않았습니까. 우리 모두 안에 하느님이 있다는, 즉 내가 나에게 절을 하는 동학의 ‘향아설위(向我設位)’가 대답입니다. 제게 그림은 그런 인간에, 세상에, 우주에 대한 모심입니다.”
글=박정호 문화·스포츠·섹션 에디터 jhlogos@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 BOX] ‘거리의 미학자’로 이끈 스승 김정록 교수
스승 없는 제자 없다. 학생은 선생님의 젖을 먹고 자란다. 김지하씨는 인생의 스승으로 서울대 미학과 김정록(1907~82·사진) 교수를 들었다. “지금도 가슴에 박혀 있다.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 현대사의 굽이굽이와 함께했던 그가 김 교수를 유달리 기억하는 사연은 뭘까.
김 교수는 중국의 시인이자 사학자였던 궈모뤄(郭沫若·1892~1978) 밑에서 배웠다. 궈모뤄는 향후 동양사상이 세계를 끌고 갈 것으로 내다봤다. 그 조건으로 서양의 좋은 것을 흡수하고, 또 조선의 고대사상을 주목하라고 권했다. 김 교수는 이 생각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그리고 “준비하라”고 요구했다. 동·서양 융합을 시도해 온 시인 김지하의 밑바탕이 됐다.
“서양도, 판소리도 공부하라고 하셨다. 대학원에 가지 말고 ‘거리의 미학자’가 되라고 하셨다. 내가 지금도 거리의 미학자로 남아 있지 않은가. 고생하려고 작정한 셈이다.”
젊음의 번뇌에 헤매던 김씨를 구한 것 또한 김 교수의 편지 한 통이었다. 가난과 방황, 폐결핵과 불면 등으로 “죽고 싶다”는 편지를 띄운 제자에게 스승은 열 장이 넘는 답장을 보내왔다. 체관(諦觀)만이 해결의 길이라고 일렀다. 스승은 편지에서 ‘노자에게 배우게. ‘허(虛)’라는 것은 그냥 ‘허무’가 아닐세. 그것은 참다운 용기의 근원이요 체관의 문이라네’라고 썼다.
“그날로 노자를 읽었다. 허의 본질로 깨달으면 절대 허무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걸 20대에 알게 됐다. 선생님은 나를 세상 밖으로 끌어냄으로써 도리어 세상 속에 편입시켜 주었다. 요즘에도 그렇게 자상한 스승이 있을까.”
■ 대한민국의 장래가 걱정된다
2014-07-29 김지하
본명은 영일(英一), '지하'는 필명이다.
원주중학교와 중동고등학교를 거쳐 196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했다.
세월호 피해자 ! 도대체 왜 특별히 하늘같이 비싼 사람들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개인목적의 여행을 가다가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다, 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들은 누가 희생시켰는가? 세월호 선주와 사고가 나도록 원인을 제공한 제한된 수의 공직자 들이다,
대통령도 정부도 이들에게 안전사고를 교사한바 없다, 안전사고에 대한 배상은 기업체로부터 받아야하고,
사고유발의 직간접인 책임이있는 공직자들로부터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국민모두가 물어줘야 하는가? 국민이 어렵게낸 세금을 이런데 지출해서는 안된다,
우리 현실로 보아 그돈으로 탱그, 비행기라도 몇대 더 사와야 한다,
사고를 당한 유족들이 대통령까지도 수사하고 기소하겠다는 이 발상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다른 안전사고 희생자는 껌값이고, 세월호 안전사고 희생자는 다이아몬드값 !
안전사고에 대해 추념인을 지정하고 추모공원과 추념비를 건립하는 역사도 이번이 처음이다,
사망자 전원을 의사자로 예우한다는 것은 온 세계 역사에 그 유래가 없는 일로 노벨평화상이라도 받아야 할 가공할 인도주의에 해당 할 것이다, 도대체 이들이 국가를위해 전쟁터에 나가 싸우다가 희생되었는가?
의사상자 !!! 현재 국가유공자가 받는 연금액의 240배까지 받을 수 있는 대우라한다, 이러니 "시체장사"라는 말이 나올만도 하다.
이와 유사한, 과거 크고 작은 안전 사고때 이런 터무니 없는 유족들의 행위는 한번도 없었다. 국가에 대하여 보상을 바라지도 않았고 그런 비겁하고 거지근성은 생각지도 않고 넘어갔다.
종북 정치인들은 이번 세월호 사건을 폭동의 불씨로 키우고 있을 것이라는 가정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빨갱이들은 원래 받아들일 수 없는 억지 주장을 하다가 폭동을 일으킨다는 것은 온국민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 2014.12.04 김지하 "통진당 당연히 해산돼야"
김지하(金芝河·73·) 시인은 3일 통합진보당 해산 논란과 관련, "통진당은 당연히 해산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본지 기자와 만나 "난 '내 좋은 아버지가 왜 공산당이 됐을까'를 공부하면서 마르크시즘을 꿴 사람"이라며 "일제, 해방, 미군·소련군 진주,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진보주의와 민중운동의 진행 과정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민족에겐 지난 200여년간 민중운동, 밑바닥 운동, 여성·아동 존중 사상이 이어져 오고 있지만, 통진당에 그런 민족적 사고가 하나라도 있는가"라며 "그런 곳에 왜 예산을 주느냐"고 했다.
김 시인은 또 정윤회씨의 국정 개입 의혹 파문과 관련, "박근혜 대통령이 '일벌백계'를 얘기하기 전에 '우리 가족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문제가 많아 참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관련자들에겐) '자네들은 혼 좀 나게' 했다면 국민이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윤회나 십상시(十常侍) 문제에 대해 어째서 이것이 마땅치 않으며, 어째서 이런 문제가 나오게 됐는지 박 대통령만 아는 얘기가 있을 것"이라며 "박 대통령이 '이 말썽은 나의 고민이었다'고 국민에게 솔직하게 얘기했다면 국민이 '박 대통령이 그동안 많이 아팠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김 시인은 그러나 "물론 대통령 잘못이지만, 박 대통령의 동생과 가족, 측근에 대한 아픔, 18년 동안 (부모) 두 사람이 총에 맞아 피살된 뒤 혼자서 공백기에 고민해온 여성으로서 아픔이 있었을 것"이라며 "(국민들이) 대통령의 이런 아픔도 아픈 마음으로 좀 봐주면서 기다려주자"고 말했다.
그는 개헌 논란과 관련해선 "박 대통령이 개헌을 발로 차지만 말고, 개헌 논의를 조금은 수용해야 한다"면서 "경제 문제까지 포함한 개헌의 전체적 윤곽을 용납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김 시인은 "그래야 박 대통령이 밝힌 '통일대박론'에 담긴 국책을 조정하고 진행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안준호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