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조선일보
2021.11.24
[281] 시대착오의 상징, 고종이 만든 평양 풍경궁 ②
“백성에게서 갈취한 돈으로 남에게 빼앗길 궁궐을 짓는구나”

▲1904년 3월 러일전쟁 종군기자인 미국 소설가 잭 런던은 대동문을 통해 평양성에 진입 중인 일본군 행렬을 목격했다. 헌종 계비 홍씨 국상 중이라 백립을 쓰고 있는 군중 속에 일장기가 보였다. /미국 헌팅턴대 도서관 잭 런던 컬렉션
1904년 2월 29일 대한제국 황궁인 경운궁(덕수궁)이 전소(全燒)됐다. 새벽녘 함녕전 온돌에서 발화한 불이 온 궁전을 홀딱 태웠다. 아직 불길이 잡히지 않은 그날 아침 고종은 “궁색하지만 반드시 중건하라”고 명했다.(1904년 2월 29일 ‘승정원일기’) 두 번째 황궁인 평양 풍경궁은 정전 태극전과 동궁전인 중화전이 완성되고 부속 공사가 한창이었다.
석 달 뒤 개화파 지식인 윤치호가 일기를 쓴다. ‘이 황제는 이 저주받은 나라의 저주받은 백성에게서 갈취한 수백만원을 불타버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쓸모없는 궁궐들을 짓는 데 낭비하고 있다.’(국역 ‘윤치호일기’ 5, 1904년 5월 27일, 국사편찬위)
조선을 휩쓴 전운(戰雲)
비슷한 때에 대한제국에 와 있던 미국 소설가 잭 런던은 이렇게 기록한다. ‘평양 주민들은 공포에 떨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평양이 (청일전쟁에 이어) 다시 전쟁터가 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민 중 1만여 명은 이미 평양을 떠났고 다른 사람들도 계속 피란을 떠나고 있었다. 압록강 근처에서 내려오는 피란민 수만명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잭 런던, ‘조선사람 엿보기-1904년 러일전쟁 종군기’, 한울, 2011, p15)
그해 2월 8일 일본군이 청나라 여순항에 있는 러시아 극동함대를 공격했다. 다음 날 대한제국 제물포에서 또 다른 러시아 군함 2척이 일본군 공격에 침몰했다. 그리고 2월 10일 일본은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온 나라가 공사판이던 그때, 전쟁이 터진 것이다. 풍경궁은 일본군 병영으로 전용됐다가 식민 시대 병원으로 바뀌었다. ‘남에게 빼앗기리라’는 윤치호 일기는 예언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전쟁, 중립선언, 현금 250억원
1903년 8월 15일 대한제국 광무제 고종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밀서를 보냈다. 러시아를 염두에 둔 평양 풍경궁 공사가 막 시작된 때였다. 내용은 이러했다. ‘누대의 원수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벌이면 대한제국은 반드시 러시아군을 돕고 최대한 편의를 제공하겠노라.’(조재곤, ‘1904~05년 러일전쟁과 국내 정치동향’, 국사관논총 107집, 국사편찬위, 2005) 그해 11월 23일 광무제 고종이 선언했다. “장차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할 때 우리는 중립을 지킨다.”(1903년 11월 23일 ‘고종실록’) 중립 선언은 이듬해 1월 21일 공식화됐다. 군사력도 외교력도 없는 중립 선언은 열강에 의해 무시당했다. 2월 10일 러일전쟁이 공식 개시됐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2월 17일 고종이 창덕궁을 일본군 12사단 병영으로 사용하도록 칙허한 것이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23, 2. 전본성왕 (144) 창덕궁 일병 병사 사용칙허건) 그뿐 아니었다. 2월 23일 대한제국은 일본과 한일의정서라는 협약을 체결했다. 내용은 ‘조선 전역을 일본군 군사용지로 사용하도록 허락한다’였다. 특정 지역이 아니라 ‘임기(臨機)’, ‘마음먹으면 마음대로’ 어디든 수용할 수 있는 권리를 일본군은 획득했다.
한 달 뒤인 3월 20일 일본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 황제를 알현했다. 그 자리에서 이토는 광무제 고종에게 30만엔(현 시가 250억원)을 선물로 주고 경부선 철도에 대해 고종이 가지고 있는 지분을 보장한다고 확언했다.(조던이 랜스다운 외무상에 보내는 편지, 1904년 3월 31일, 영국외무성 문서 FO/17/1659: 박종인, ‘매국노고종’, 와이즈맵, 2020, p332, 재인용)
피란민과 창덕궁 전승 파티
1년이 채 안 돼 황제는 친러 밀약을 중립 선언으로, 중립 선언을 구중궁궐과 조선팔도 일본군 사용지 제공으로 바꾸더니 현금 250억원과 철도 지분 확보로까지 바삐 움직인 것이다. 3월 4일 한성에 도착한 종군기자 겸 소설가 잭 런던은 이렇게 기록했다. ‘황제는 일본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해주라고 지엄하게 공포했다. 예를 들면 일본군이 잘 자리를 마련할 수 있도록 자기네 군인들을 병사에서 쫓아내는 일 같은 것들이었다.’(잭 런던, 앞 책, p54)
8일 뒤 평양 옆 순안에서 잭 런던은 피란민들을 목격했다. 그들은 ‘역사의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산으로 은신처를 옮기고 있었다. 난민들은 처음에는 값나가는 것들만 가져갔으나 그런 일을 계속하다 보니 나중에는 집에서 쓰던 쇠로 만든 가재도구 심지어 문짝이나 창문짝까지 들고 갔다.’(잭 런던, 앞 책, p122)
5월 6일 일본군 병영으로 둔갑한 창덕궁 후원 주합루에서 구련성전투 일본 승첩 파티가 벌어졌다. 고종은 정3품 홍순욱을 ‘일본 진북군 접응관’에 임명해 파티에 대리 참석시켰다.(1904년 음력 3월 21일 ‘승정원일기’) 다섯 달 뒤 황제는 ‘먼 땅에서 여러 달째 비바람을 맞고 있는’ 일본군을 위해 육군 부장 권중현을 위문사로 보냈다.(1904년 10월 26일 ‘고종실록’)

▲평양 외곽에서는 피란민들이 바리바리 가재도구를 지게에 싣고 전쟁에서 달아나고 있었다. /미국 헌팅턴대 도서관 잭 런던 컬렉션
끝없는 부패와 착취
1904년 대한제국은 두 차례 국상을 치렀다. 헌종 계비 홍씨(1월 2일)와 황태자비 민씨(11월 5일)다. 음산한 전운과 매캐한 화약 냄새 속에 사람들은 상을 치르는 백립(白笠)을 쓰고 일상을 살았다. 북상하는 일본군을 따라 잭 런던이 평양에 입성했을 때 일본군을 맞은 조선 백성 또한 대개 백립을 쓰고 있었다. 평양성 동쪽 대동문으로 일본 보병이 진입할 때 백립 군중은 성벽과 문루와 바깥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평양성 서쪽 풍경궁 공사장에서는 목수들이 거목(巨木) 목재들을 다듬고 있었다. 정문인 황건문은 완공돼 있었고, 궁장 바깥에는 아직 목재가 가득 쌓여 있었다.
3월 12일 종군기자들은 일본군을 따라 평양 북쪽 순안에 도착했다. 머핏이라는 선교사 알선으로 순안 주민이 런던에게 몰려와 이렇게 하소연했다. “일본군에게 군수품을 팔았는데, 군수가 70%를 떼먹었다.”(잭 런던, 앞 책, p144)
이미 ‘향례전(鄕禮錢)’과 ‘원조전(援助錢)’ 명목으로 1000만냥을 공사비로 털린 백성이었다. 그런데 그런 공식적 착취 아래 또 파렴치한 착취와 부패가 은폐돼 있는 것이다. 평양군수 팽한주는 무명 잡세를 마구 만들어 건축비 명목으로 150만냥을 강제 징수하고 있었고, 이에 항의하는 주민들을 사나운 포졸 수십명이 난타해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1904년 9월 15일 ‘제국신문’) 평남관찰부 주사 박학전은 목재 수만그루 벌채와 운반에 주민을 징발하고 품삯을 떼먹고 목재 값을 횡령하고도 처벌을 받지 않았고(1906년 5월 16일 ‘대한매일신보’), 이로 인해 10만여 평양 주민은 모두 저며낸 어육(魚肉)이 될 판이었다.(1904년 11월 22일 ‘제국신문’)
매천 황현에 따르면, 공사 책임자인 평남관찰사 민영철은 ‘백성 재산 3분의 1을 적몰해 관아에 바치므로 유민(流民)이 서로 줄을 이어 천리길이 소란하였다. 그나마 자금은 토목비로 다 사용되지 않았다.’(황현, ‘매천야록’ 3권 1903년② 19. 고종 및 태자 초상화 풍경궁 봉안과 민영철의 탐학, 국사편찬위) 1904년 그 유민 무리에 잭 런던이 목격했던 전쟁 피란민들이 합류했다. 세상은 더욱 어지러웠다.

▲전쟁이 한창인 평양성 서쪽에서는 제2황궁인 풍경궁 완공을 위해 목수들이 한창 목재를 켜고 있었다./미국 헌팅턴대 도서관 잭 런던 컬렉션
“황제여, 제발 정신차려라.”
창덕궁 전승 파티 보름 뒤인 1904년 5월 21일 황제가 황명을 내렸다.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한 방도를 생각하지 않은 적 없으나, 탐학한 지방 관리들이 백성으로 하여금 근심과 고통을 나에게 호소할 수 없게 하였다. 이제 관리들은 청렴과 근면, 공정과 신의로 백성을 편안케 하라(廉勤公信以安斯民⋅염근공신이안사민).” 고종은 ‘廉勤公信以安斯民’ 여덟 글자를 직접 써서 각도에 내려보냈다.(1904년 5월 21일 ‘고종실록’)
두 달 뒤 중추원 의관 안종덕이 작심하고 이리 상소했다. “윗사람이 청렴하면 아랫사람이 감히 어떻게 탐오하는가. 폐하가 청렴하지 않은데 어찌 아래가 탐오하지 않겠는가. 나랏돈이어야 할 땅과 산과 못과 어장과 염전과 인삼과 광산을 왜 폐하가 가지고 있는가. 관리 월급이 없으면 대뜸 내탕금에서 꺼내서 주고 빚 독촉하듯 갚으라고 하지 않는가. 벼슬은 왜 파는가. 어찌하여 길거리에는 목재와 석재 수레가 끝이 없고 도끼와 톱 소리가 귓전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인가. 서경에 궁전을 건축하는 것이 나라에 무슨 이익을 주는가. 백성 원한을 쌓으며 폐하 초상화를 모셔놓는 게 어디서 나온 생각인가. 기근까지 닥치고 전쟁까지 덮친 마당에 백성을 부리다니.” 황제가 답했다. “말은 물론 옳다. 그렇지만 시의(時宜)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1904년 7월 15일 ‘고종실록’) 고종이 생각한 ‘시의(상황)’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
열흘 뒤 이번에는 봉상사 부제조 송규헌이 상소했다. “군신 상하가 밤낮없이 바쁘게 뛰어도 모자랄 판에 어찌 토목공사나 벌이고 대궐을 수리하며 벼슬자리를 말아먹고 인재를 버리며 관리들을 마구 내보내 잡세를 거둬들이고 쓸데없는 관리들을 늘리는가. 특히 주청공사 민영철은 풍경궁 공사판에서 수많은 재물을 축적해 사리사욕을 채우고 국경 너머 도주한 자다. 속히 정죄하시라.” 이번에는 고종은 아무 답을 하지 않았다.(1904년 7월 25일 ‘고종실록’)

▲1925년 12월 13일자 ‘매일신보’ 3면. 평양 풍경궁에 있다가 이 해 경성 조계사 정문으로 이건된 황건문 사진을 싣고 있다. 풍경궁은 1904년 일본군 병영으로 수용됐다가 1914년 도립 자혜의원 본관 및 부속건물로 사용됐다.
‘남에게 빼앗긴 궁궐’과 기이한 황제
그렇게 질식할 것 같은 세월이 갔다. 내탕금 100만냥을 내려보낸 황제는 1000만냥짜리 궁궐을 얻었고, 나라를 외국 군사에게 내주고 황제는 30만엔과 철도 지분을 얻었다. 황제는 아래 관리들에게 청렴과 근면, 공정과 신의로 백성을 대하라고 명했고, 백성은 산속으로 숨었다.
1904년 8월 조선에 진주한 일본 한국주차군은 ‘한일의정서’에 따라 ‘임의로’ 평양 외성 일대를 군사용지로 수용했다. 풍경궁도 포함됐다. 궁에 있던 고종 부자 초상화는 1908년 4월 2일 덕수궁 정관헌으로 옮겨왔다.
(1908년 4월 2일 ‘순종실록’) 풍경궁은 일본군 보병여단 사령부, 여단장과 부관 숙사 따위로 사용됐다. 이후 비워져 있던 풍경궁은 1914년 총독부가 주도한 도립 병원인 평양 자혜의원에 인수돼 병동과 사무실로 사용됐다.(김윤정, ‘평양 풍경궁의 영건과 전용에 관한 연구’, 부산대 석사 논문, 2007) 그리고 1925년 8월 정문인 황건문이 ‘통행 불편’을 이유로 매각돼 경성에 있는 일본 사찰 조계사로 이건됐다. 윤치호 예언대로, ‘백성에게서 갈취한 돈으로 지었다가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 궁궐’이 된 것이다.
1905년 7월 20일 최익환이라는 풍경궁 관리가 황제에게 이리 상소했다. “풍경궁 공사를 다시 벌여 완공하소서.” 황제가 이리 답했다. “의정부에 명을 내려 처리하겠다.”(1905년 7월 20일 ‘고종실록’) 풍경궁이 일본군에 수용되고 근 1년이 지나고 나라는 껍데기만 남아 눈 녹듯 사라지고 있던 여름날이었다.<다음 주 계속>
282. 평양 풍경궁③/끝 망국까지 성리학에 집착한 고종
“공부하는 선비가 드물어 안타깝구나, 성균관을 보수하여라”

▲조선왕조의 법궁인 경복궁. 왕의 집무실인 사정전 월대에서 정전인 근정전 지붕이 힐끗 보인다. 해거름에 서쪽에 해가 진다.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경복궁을 버리고 경운궁(덕수궁)을 황궁으로 삼았고, 경운궁에 기거하며 평양에 또 다른 궁궐 풍경궁을 건설했다. 그가 입에 달고 살았던 단어는 ‘도리(道理)’였고, 을사조약 이듬해인 1906년에도 그는 “성균관에서 도리를 교육하라”고 명했다./박종인
1906년 4월 15일 대한제국 황제 광무제가 조령(詔令·천자의 명령)을 내렸다. “듣자니 태학(성균관)이 황폐하여 책을 끼고 다니며 공부하는 선비들을 보기가 드물다고 하니 짐은 대단히 안타깝다. 시급히 건물을 수리하고 뛰어난 선비들을 집결시킴으로써 우리의 도를 빛나게 하라.”(1906년 4월 15일 ‘고종실록’)
고종이 야심 차게 건설하던 평양 풍경궁은 1904년 러일전쟁 발발과 함께 일본군 병영으로 전용됐다. 러일전쟁 승리로 일본은 대한제국을 실질적으로 점령했다. 1905년 11월 17일 제2차한일협약(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다. 그리고 다섯 달이 지난 이듬해 봄날 대한제국 황제가 내린 조령이 ‘성균관 부활’이었다.
황태자 이척의 재혼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터졌다. 그달 대한제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한일의정서’를 맺었다. 대한제국 전역을 일본군 군사 용지로 내준다는 협정이다.
전쟁 와중인 1904년 11월 5일 황태자비 민씨가 죽었다. 이듬해 11월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실질적인 일본 보호국으로 전락했다.
넉 달 뒤인 1906년 3월 16일 대한제국 전역에 금혼령이 떨어졌다. “(재혼할) 황태자 가례(嘉禮)를 가을과 겨울 사이에 행하겠으니 13세부터 20세까지 처자들은 금혼(禁婚)하라.”(1906년 3월 16일 ‘고종실록’) 12일 뒤인 3월 28일 가례를 전담하는 예식원 장례경 김사철이 황제에게 이리 보고했다. “간택단자(揀擇單子)를 봉입하는 날짜가 서울에서는 오늘이 마감 날인데 들어온 단자가 여덟 장밖에 없습니다. 허다한 사대부 집안에 적령한 처녀가 이 정도에 그치지 않을 듯한데 보잘 것이 없습니다.” 고종이 화를 냈다. “도리상 이럴 수 없다. 내부대신을 견책하라. 그리고 처녀가 있음에도 단자를 올리지 않은 자들은 탐문해 벌을 주라.” 나흘 뒤 황제가 다시 한번 조령을 내렸다. “거듭 재촉한 지 며칠이 지났거늘 아직 보잘 것이 없구나. 놀라운 일이다. 조정 명을 무시하고 움직일 생각이 없으니 이게 무슨 도리인가. 위를 두려워하지 않는 버릇이 너무나 통탄스럽다. 다시 엄히 일러 일일이 간택단자를 올리라.”(1906년 4월 1일 ‘고종실록’)
조선왕조 500년에 유례없는 일이었다. 도무지 ‘도리(道理)’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절차였고 위를 무시하기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단순한 왕(王)이 아니라 황제의 며느리 황태자비가 아닌가.
어렵사리 후보에 오른 처녀들을 상대로 석 달이 지난 그해 7월 4일 초간택이 이뤄졌다. 통상 보름 정도 걸리던 재간택은 근 석 달 뒤 열렸다. 역시 보름~20일 뒤였던 최종 삼간택 또한 석 달 뒤에야 이뤄졌다.
혼례는 참으로 제국다웠다. 최종 간택된 그날, 미래의 황태자비인 윤택영의 딸 윤씨는 곧바로 가례도감이 설치된 안동별궁으로 모셔졌다. 1907년 1월 24일 안동별궁에서 황태자와 혼례를 치른 황태자비는 경찰 112명과 군인 418명이 호위하는 가운데 경운궁으로 가서 태자비에 책봉됐다. 황태자비는 대한제국 황실로부터 서봉대수장(瑞鳳大綬章)을 받았다. 여자에게만 주는 훈장이다.
땅에 떨어진 ‘도리’와 황제
1873년 친정을 선언한 이래 고종에게 ‘도리(道理)’는 늘 입에 달고 사는 화두였다. 아버지 대원군을 권력에서 내몰고 그가 시행하던 각종 정책을 적폐로 몰아 청산할 때도 ‘나라에만 이익이 되고 백성에게는 해가 된다(利於國而害於民·리어국이해어민)’(1873년 12월 1일 ‘승정원일기’)는 도리를 들어 청산을 강행했다.
그리고 그 도리는 철저한 성리학적 도리였다. 외적으로는 중국을 떠받드는 사대(事大) 제후요 내적으로는 만인에게서 떠받음을 받으며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여탈할 수 있는’(‘1894년 11월 24일 이노우에 가오루와 대화’, 주한일본공사관기록 5권 5.기밀제방왕2 (12)내정개혁을 위한 대한정략에 관한 보고) 군주이길 원했다.
대원군 섭정 시절인 1871년 고종은 명나라 황제 3명을 모신 창덕궁 대보단에서 이렇게 읊었다. ‘於赫皇恩幾百年(어혁황은기백년·혁혁한 황제 은혜가 수백 년 내려오니) 我家大義昭如日(아가대의소여일·우리 가문 대의는 해처럼 빛나네)’.(고종, ‘대보단친향일유감·大報壇親享日有感’, 1871, ‘주연집’)
이게 ‘제국에는 수도가 둘이어야 한다’며 평양 풍경궁에 집착한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황실 돈에는 인색하고 백성 돈 1000만냥을 투입해 ‘곧 남에게 빼앗길’ 궁궐을 만든 근본 이유였다. 하루하루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 그가 하필이면 대규모 궁궐 공사를 국가 생존 방안으로 선택했는지, 그 이유가 아래 기록에 나와 있다.
1899년 - 황제밖에 없는 ‘대한국 국제’
1898년 10월 서재필이 이끄는 독립협회가 종로 거리에서 ‘만민공동회’를 주최했다. 이 토론회에서 ‘입헌군주정’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고종은 “어리석은 백성들을 부추겨 현혹시키는 거짓말 집단”이라며 “패역함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으니 모두 잡아들이라”라고 명했다.(1898년 11월 6일 ‘고종실록’) 12월 25일 독립협회는 전격 해산됐다. 이듬해 8월 17일 고종 명으로 대한제국 헌법이 탄생했다. 모두 9조인 이 ‘대한국국제’는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한 1조를 제외하고 8개 조 전문이 황제의 권리와 황민의 의무를 규정했다. 황제의 의무와 황민의 권리 규정은 없었다.
1899년 - 유교를 국교로 만들라
독립협회 해산 후 한 달이 지났다. 1899년 1월 광무제 고종은 전주에 있는 전주 이씨 시조 묘에 조경단이라는 제단을 세웠다.(1899년 1월 25일 ‘고종실록’) 그리고 석 달 뒤 고종이 13도에 이리 유시하였다. “세계 만국에서 종교를 높이고 숭상하여 힘을 다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그것은 모두 사람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정사를 잘 다스리는 방도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종교는 어째서 존중되지 않고 그 실속이 없는가? 우리나라 종교는 우리 공부자(孔夫子) 도가 아닌가?” 고종이 이리 덧붙였다. “(도가 없기에) 욕심은 하늘에 넘치고 윤리는 퇴락하니 난신과 역적이 뒤따라 나와 변란이 극도에 달하였다.” 고종은 그날 초야에 숨은 선비들을 성균관으로 모시도록 성균관을 개혁하라고 명했다.(1899년 4월 27일 ‘고종실록’)
한 달 뒤 고종은 삼척에 있는 이성계 5대조 무덤을 준경묘라 명명하고 대대적인 보수 작업을 명했다.(같은 해 5월 25일 ‘고종실록’) 준경묘는 조선 건국 이래 묘를 찾지 못해 500년 동안 수색 작업을 벌였던 조상 묘였다. 고종은 바로 그해 몇 달 사이에 조상 묘를 찾아내고 성리학을 국교로 선언한 것이다.
1902년 - 주자 후손을 특채하라
1902년 5월 6일 고종이 “기자가 정한 천년 도읍지 평양에 제2수도를 세우라”고 명했다. 1902년은 고종이 만 12세로 등극한 지 40년을 기념하는 해였고 스스로 황제가 된 지 5년이 되던 해였다. 그해 가을 고종은 성리학을 체계화한 송나라 주희 후손들에 대한 특별 대우를 명했다. 대륙에서 송·원 교체기에 고려로 망명 와 숨어 살던 주자 후손들을 발굴해 특채하라는 명이었다.
“현자를 높여서 후손을 등용하는 것은 본래 이 나라 법이다. 주자 증손이 우리나라에 건너와 그 후손이 번성하게 되었다. (오랑캐가 두려워 본관을 바꿨던) 후손들을 신안 주씨로 회복해주고 그 후손들을 무시험으로 중용하라.”(1902년 음력 9월 10일(양력 10월 11일) ‘승정원일기’)

▲경복궁 근정전 월대에 있는 석물. 왕실과 국가의 안녕을 희구하는 상징물이다. 고종은 이 경복궁 대신 경운궁(덕수궁)을 제국 황궁으로 택했다./박종인
1906년 - “성균관에서 어진 선비를”
나라가 망해도 완전히 망한 그 1906년 봄날, 문득 황제가 조령을 내린다. 초라한 숫자의 처자들만 황태자비 후보에 올라 있던 그 즈음이었다. “본왕조는 도리를 존중하고 교육을 급선무로 여겨 성균관을 먼저 세웠다. 그 도리를 부흥시키는 방도를 서둘러 강구하라.” 1906년 4월 15일, 을사조약 5개월 뒤였다. 나라는 간 곳 없는데 도리를 빛나게 하라고, 황제가 명한 것이다.
‘의견을 낸다는 핑계로 국시(國是)를 뒤흔드는 상소를 한 자들을 징계하라’며 상소 금지령을 내렸던 황제였다.(1894년 음력 12월 16일 ‘고종실록’) 귀를 닫은 그가 행한 국정은 ‘역대 유례가 없는 전제정이었고 유교 숭상 논리는 황제 자신을 중심으로 충군(忠君)과 애국(愛國) 신민을 만들겠다는 의도의 표현에 불과했다.’(도면회, ‘대한국국제와 대한제국의 정치구조’, 내일을 여는 역사 17,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2004)
버려진 경복궁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만인의 반대 속에 강행된 평양행궁 풍경궁은 타국 병영으로 변해 있었다. 도리는 어디로 갔는지 행방불명이었다.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평양성 외곽에서는 전쟁을 피하려는 난민들이 바리바리 짐을 싸 피란중이었다. /미국 헌팅턴대 도서관 잭 런던 컬렉션
283. 금등지서의 비밀과 융건릉
노론을 떨게한 정조의 한마디 “난 사도세자의 아들이니라”

▲사도세자 무덤인 경기도 화성 융릉은 홍살문-정자각-봉분 배치가 일직선이 아니다. 봉분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방향도 다르다. 아버지 사도세자 복권을 필생의 업으로 삼은 정조가 ‘천 년 만에 있을 길지’를 고른 끝에 내린 풍수학적인 배치다. 정조는 세자를 죽인 영조가 적어내린 한(恨)을 품은 문서 ‘금등지서’를 17년 동안 숨겨놓고 노론 눈을 피해 아버지 복권 작업을 벌였다. /박종인
한가위를 7일 앞둔 1793년 8월 8일 왕위에 오른 지 17년이 된 노련한 국왕 정조가 문서 한 장을 꺼내 읽는다. 듣는 사람은 전·현직 대신과 기타 문무 관료들이다. 내용은 이러했다.
“피 묻은 적삼이여 피 묻은 적삼이여, 오동나무여 오동나무여, 그 누가 충신인고. 내 죽은 자식 그리워 잊지 않노라.”
필자는 선왕인 영조였고, 아들을 죽인 사실을 후회한다는 내용이었다. 정조는 1776년 3월 자기가 왕위에 오르고 두 달 뒤 이미 이 문서를 알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사도세자 죽음을 방조, 묵인, 사주했던 노론세력은 목에 칼이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으리라. 사사건건 국책 사업에 시비를 걸던 노론은 입을 꿰매고 정조에게 무릎을 꿇었다.
오랜 세월 비장한 이 문서를 ‘금등지서(金縢之書)’라고 한다. 금등지서는 쇠줄로 단단히 봉한 상자에 넣은 비밀문서를 뜻한다. 정조는 등극과 함께 확보한 이 문서를, 가장 필요한 때까지 숨겨뒀다가 공개한 것이다. 다섯 달이 지난 1794년 1월 25일 정조의 야심찬 신도시 화성 행궁 터 닦이 작업이 시작됐다. 화성으로 이장한 아비 사도세자 옆에 신도시를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금등지서에서 화성 신도시까지 숨 막히게 벌어졌던 왕실 권력 투쟁 이야기.
“세손은 정치 알 필요 없음”
1764년 2월 20일 영조는 자기가 뒤주에 가둬 죽게 만든 사도세자 아들 이산(李祘·‘이성’으로도 읽을 수 있다)을 세손에 책봉했다. 그날 그가 손자에게 이리 물었다.
“혹 사도세자 일을 말하는 자가 있다면 옳은 일이냐, 그른 일이냐?” 세손이 답했다. “그른 일이옵니다.” 왕이 거듭 물었다. “그렇다면 군자냐 소인이냐?” 손자가 답했다. “소인입니다.” 영조는 이 대화를 실록에 기록하라고 지시했다.(1764년 2월 20일 ‘영조실록’) 앞에서 보나 옆에서 보나 불상사인 사도세자 죽음을 재론하지 말라는 엄중한 명이었고, 세손은 명에 순종했다.
11년 뒤인 1775년 영조는 노쇠함을 견디지 못하고 세손 이산에게 대리청정을 지시했다. 노론 세력은 “세손은 노론, 소론도 알 필요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판서를 알 필요도 없으며 조사(朝事)도 알 필요 없다”고 일축했다.(1775년 11월 20일 ‘영조실록’) 당정도 국정도, 조정 일도 알 필요 없고 모든 정치는 자기들이 다 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른바 ‘삼불필지지설(三不必知之說)’이다. 열흘 뒤 영조가 “팔십 노인이 기력이 쇠했다”며 다시 대리청정 뜻을 밝혔다.
아니 될 일이었다. 아비 영조로 하여금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죽이게 만든 세력이 바로 이 노론이 아닌가. 아무리 ‘재론 불가’ 서약을 했어도, 그 아들이 세손이 되었고, 영조가 죽기 전 그 세손이 권력을 접수하게 되면 노론에는 가늠할 수 없는 거친 피바람이 몰아닥칠 판이었다.
삼불필지를 주장했던 좌의정 홍인한은 아예 왕명을 적어내리는 승지 앞을 가로막고 왕명을 듣지도 글을 쓰지도 못하게 막아버렸다.(같은 해 11월 30일 ‘영조실록’) 뒤주에 갇혀 죽어가는 아비를 목격했던 세손, 미래에 왕위를 이어받을 세손은 왕 앞을 가로막는 노론 대신들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창경궁에 있는 문정전. 1762년 여름 이 앞뜰에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다. /박종인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듬해 영조가 죽고 경희궁에서 정조가 즉위했다. 의례적인 교문을 반포하고 대사면령을 내린 정조는 빈전 앞뜰에서 대신들을 접견하며 이렇게 일성을 던졌다.
“아(嗚呼·오호),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1776년 3월 10일 ‘정조실록’) 망나니 칼 수십 개가 한꺼번에 노론 대신들 귀에 박혔다. 넋이 반쯤 나간 채 와들와들 떨어대는 대신들에게 정조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불령한 무리들이 사도세자를 추숭(追崇)하자는 의논을 한다면 선대왕 유언에 따라 형률로 논죄하겠다.” 사도세자 죽음을 둘러싼 의혹과 의문에 더 개입하지 않겠다는 말이었으니, 노론에게는 대사면령보다 더 기쁜 복음이었다.
한 달이 채 안 된 4월 7일 정조는 자기 대리청정을 극렬 반대했던 노론 홍인한을 여산으로 유배 보낸 뒤 사약을 먹여 죽여버렸다.(같은 해 4월 7일, 7월 5일 ‘정조실록’) 노론 넋을 끄집어냈다가 집어넣었다가 또 멱살을 잡고 흔들어대는 국왕 앞에서 노론은 오래도록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사도세자 묘 이장과 현륭원
이미 등극과 함께 노론을 휘어잡은 정조는 이어 부친 사도세자 묘 이장을 시도했다. 경기도 화성으로 옮기기 전 사도세자 묘는 양주 배봉산에 있었다. 묘는 수은묘(垂恩墓)라 불렸다. 즉위 한 달 전 정조는 수은묘에 참배를 하고 ‘목이 메여 좌우를 감동시킬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1776년 2월 5일 ‘영조실록’) 즉위 9일 후 정조는 그때까지 관리자가 없던 수은묘에 수봉관을 두고 다음날 수은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시켰다. 존호 또한 사도(思悼)에서 ‘장헌(莊獻)’으로 바꿨다.(1776년 3월 19일, 3월 20일 ‘정조실록’)
그런데 수은묘는 풍수상 좋은 자리가 아니었다. 봉분 뗏장이 말라죽고 청룡혈이 휑하니 뚫려 있는가 하면 정자각 기와에는 뱀이 살았다. 정조는 곧바로 이장을 하려 했지만 노론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실록에는 ‘즉위 초부터 이장할 뜻을 가졌으나, 너무 신중한 나머지 세월만 끌어온 지가 여러 해 되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후 자그마치 13년 세월이 흘러 금성위 박명원이 상소를 했다. 박명원은 사도세자 누나 화평옹주의 남편이니 정조에게는 고모부다.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나이다. 영우원 안부를 걱정하느라 깊은 궁중에서 눈물을 뿌리신 것이 얼마인지 모르며, 봄비와 가을 서리에 조회에 임해서도 자주 탄식하셨다는 것을 여러 번 들었나이다. 천장을 결정하시라.”정조가 말했다. “내가 어리석게도 지금까지 가슴속에 담아 두고 답답해하기만 한 문제였다.”(1789년 7월 11일 ‘정조실록’)
13년을 기다린 상소였다. 마침내 아버지 묘를 옮길 수 있게 된다는 생각에 정조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원래 가슴이 잘 막히는데, 지금 가슴이 막히고 숨이 가빠 말이 나오지 않는다. 잠시 쉬도록 하자.”
잠시 뒤 정조 입에서 너무나도 전문적인 풍수 이론과 배봉산 불가론 논리가 술술 튀어나왔다. 정조는 고려 때 풍수가 도선의 말까지 인용하며 “나의 뜻은 천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수원으로 결정하였다”라고 선언했다. (1789년 7월 11일 ‘정조실록’)
그해 사도세자 묘를 이장하게 된 이론적 배경과 화성 입지에 대해 정조가 쓴 ‘천원사실(遷園事實)’은 한자로 2만자가 넘었다. 게다가 정조는 “올해가 모든 운이 길한 해라 즉위 때부터 이날만을 기다려왔다”고 했다. 길년(吉年)을 잡아두고 자그마치 13년 동안 묘 이장에 대해 만반의 준비를 해왔다는 뜻이다. 자기 고모부가 상소를 올리기 전 이미 긴밀한 사전 협조를 거쳤음을 뜻하는 글이기도 했다.
그리되었다. 찌는 여름날 창경궁 문정전 앞뜰에서 뒤주에 갇혀 죽은 아비 사도세자가 형편없는 묫자리를 떠나 보무도 당당하게 왕릉에 버금가는 유택(幽宅)으로 천장을 하게 된 것이다. 이후 천장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석 달 뒤인 10월 4일 사도세자 유해를 담은 영가(靈駕)가 배봉산을 출발했다. 10월 16일 천장이 완료됐다. 정조는 새 묫자리 이름은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했다. 현륭원은 1899년 대한제국 황제 고종에 의해 융릉(隆陵)으로 격상되고 사도세자 또한 황제로 추존됐다.(1899년 9월 1일, 12월 7일 ‘고종실록’)

▲영조가 쓴 사도세자묘지문. 자기가 왜 사도세자를 죽게 만들었나에 대한 이유가 적혀 있다. 하지만 채제공에게 전해준 비밀 문서에는 사도세자 죽음을 후회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화성 신도시 건설과 금등지서
정조는 천장 결정과 함께 이렇게 선언했다. “고을을 옮길 계획을 세우라. 백성을 옮길 일은 이미 계획돼 있느니라.”
노론이 득실거리는 한성을 떠나 권력을 과시할 신도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천장 결정 나흘 뒤 새로운 능묘 주변인 수원도호부 백성이 10리 북쪽 팔달산 아래로 이주됐다. 그리고 능묘 주변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니, 그 도시가 화성이다.
신도시 건설 디자인은 규장각 초계문신 정약용이 맡았다. 1793년 1월 12일 정조는 수원부를 화성으로 개칭하고 부사를 유수로 승격시켰다. 그날 판중추부사 채제공을 수원 유수로 전격 임명했다. 그해 4월 정약용이 행궁 건설계획서를 제출했다. 정조는 채제공을 영의정으로 임명했다.(1793년 5월 25일 ‘정조실록’)
사흘 뒤 영의정 채제공이 상소문을 올렸다. “극악무도한 자들의 지친과 인척들이 벼슬아치 장부를 꽉 메우고 있다. 사도세자를 추숭하고 저들을 처벌하시라.”
정약용도 채제공도, 화성을 길지라고 주장한 윤선도도, 수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던 유형원도 모두 남인이었다.(1793년 12월 8일 ‘정조실록’) 그 남인의 수장 채제공이 ‘조정에 가득한 극악무도한 자들을 처단하라’고 주장한 것이다. 피 냄새가 조정에 넘실거렸다. 노론인 좌의정 김종수는 “채제공은 역적 앞잡이”라며 저항했다.(1793년 5월 28일 ‘정조실록’)
추석 일주일 전, 끝없는 노론 저항 속에 정조가 문무백관을 모아놓고 말했다. “영조께서 당시 도승지 채제공을 휘령전으로 부른 적이 있었다.”
휘령전은 사도세자 혼전으로 쓰이던 창경궁 문정전을 가리킨다. “영조께서 친필 문서를 채제공에게 주며 위패 아래 방석 속에 감춰두라고 했다. 이게 그 문서다.”
그리고 정조가 보여준 글이 ‘피 묻은 적삼’이었다. “즉위 직후 채제공이 이 문서를 나에게 알려줬느니라. 상소는 이 문서에서 연유한 것이니 입 다물라. 오늘 이후 시끄럽게 굴면 한 사람 한 사람 일일이 다스릴 것이다.”
17년 동안 독기를 품고 간직했던 글이었다. 즉위 일성이었던 ‘사도세자의 아들’, 노론 대신 홍인한의 처형과 현륭원 천장, 남인 중용에 이어 노론에게 던진 마지막 경고였다. 이듬해 1월 13일 정조가 화성 현륭원에 행차했다. 향을 피우며 감정을 삭이듯 낮은 소리로 울다가 무덤가로 올라가서는 오열했다. 노론 입은 열리지 않았다. 화성 신도시는 예정대로 진행됐다. 행궁은 일사천리로 준공됐다. 이상 사도세자 죽음에 맺힌 한이 신도시 개발로 이어진 ‘금등지서’ 이야기였다.
284. 사도세자 아들 정조가 은폐해버린 기록들
화성에 행차한 정조 “내 아버지처럼 군복을 입고 산성에 올랐느니라”

▲경기도 팔달산 수원화성에 있는 화성장대. 장대는 군사작전을 지휘하는 사령부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사도세자가 묻힌 현륭원(현 융릉)에 참배한 뒤 화성장대에서 야간 군사훈련을 지휘했다. 많은 의혹 속에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는 아들 정조에 의해 상당량의 사료가 왜곡되거나 삭제되고, ‘무사 기질과 현명함을 갖춘’ 군주로 변신했다. 현륭원 참배길에 정조는 ‘그 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해’ 어김없이 군복을 입고 말에 올랐다. /박종인
재위 15년째인 1791년 마침내 화성으로 이장한 사도세자에게 정조가 첫 참배를 떠났다. 무덤 이름은 현륭원이다. 사도세자에게는 일찌감치 장헌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출발 전 정조는 이렇게 하명했다. “옛날 온천에 행차할 때도 평융복(平戎服)을 입기도 하고 혹은 군복을 입기도 했다. 앞으로 현륭원에 행차할 때 복장도 이대로 해야겠다.”(1791년 1월 14일 ‘정조실록’) 평융복 또한 군복 일종이다. 1월 16일 한성을 출발한 참배 행렬은 진눈깨비 속에 수원부에 도착했다. 다음 날 정조는 현륭원에 올라 제사를 올린 뒤 18일 궁으로 돌아왔다. 뒤주에 갇혀 죽은 전주 이씨 왕실 비극의 주인공은 그렇게 공식적으로 복권됐다.
그리고 4년 뒤 어머니 혜경궁 홍씨 회갑을 맞아 정조가 화성으로 행차를 한다. 어머니가 탄 가마가 앞서고 군복을 입은 정조가 백마에 올라 뒤를 따랐다. 윤2월 꽃들이 만발한 봄날이었다.
참배를 마친 그날 밤 정조가 황금 갑옷으로 갈아입고 화성 산성에 올라 야간 군사훈련을 벌였다. 훗날 정조가 ‘화성장대’라 명명한 서쪽 지휘소, 장대(將臺)에서 포성이 울리자 화성 동서남북문에서 잇따라 청룡기와 주작기와 백호기와 현무기가 나부끼고 포를 응사했다. 발아래에는 야심작인 신도시 화성이 펼쳐져 있었다. 장관이었다. 만족한 정조가 시를 썼다. ‘한나라 고조 대풍가 한 가락을 연주하니 붉은 해가 비늘 갑옷에 있구나(大風歌一奏 紅日在鱗袍·대풍가일주 홍일재린포)’.(화성장대에 걸린 정조 어제시(부분))
위 글에 나오는 ‘장헌세자’와 ‘온천행차’와 ‘화성장대의 장엄함’에는 몇 가지 정조가 은폐해버린 진실이 숨어 있다. 그 진실 이야기.
지워진 진실 1: 승정원일기
왜 영조가 친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였나.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 종류다. 당쟁의 희생물이라는 말도 있고 아들 사도세자가 비정상적인 광기를 보인 탓에 그리 됐다는 분석도 있고 반역을 기도하다가 실질적으로 처형됐다는 말도 있다. 탕평책을 쓸 정도로 당쟁은 극심했었다. 실제로 대리청정을 하는 세자에게 사사건건 노론이 시비를 건 흔적도 보인다. 세자가 광기 속에 여러 목숨을 앗았다는 기록도 있다. 그 기록들이 저마다 당파가 다른 입장에서 쓰인 기록들이라 명쾌한 파악이 쉽지 않다. 불리한 사실을 왜곡하거나 은폐한 흔적들도 숱하게 보인다.
그런데 실록에 기록돼 있는 ‘공개적인’ 왜곡 혹은 은폐 흔적이 있으니, 바로 사도세자 사망 직후 그 아들 이산(정조)에 의해 시도된 왜곡이다.
1776년 2월 4일 왕세손 이산이 관료들 앞에서 펑펑 울면서 이리 하소연했다. 처음으로 자기 아버지 사도세자 묘인 수은묘에 참배를 하고 온 날이었다. “승정원일기에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볼 수 없는 말이 많이 실려 있다. 이것을 버려두고 태연하게 여긴다면, 이것이 어찌 아들의 도리이겠는가?” 그리고 왕세손은 곧바로 할아버지 영조에게 상소를 한다. 내용은 이러했다. “실록 기록은 영원히 남아 있으니 승정원일기에서만는 (사도세자 부분을) 삭제해주소서.” 그날 영조는 뒤주에 갇혀 죽기까지 경위를 적은 승정원일기를 세초(洗草·물에 씻어 없애버림)하라고 지시했다. 이리 말했다. “천민도 다 보고 사람들 이목을 더럽히며 죽은 사도세자가 보면 눈물을 머금을 것이다.”(1776년 2월 4일 ‘영조실록’) 한 달 뒤 영조가 죽었다. 그 흉악한 날에 대한 기록은 승정원일기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사라진 진실 2: 실록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1762년 윤5월 13일 자 ‘영조실록’은 이렇게 끝난다. “이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났었다. 임금이 전교를 내려 중외에 반시했는데, 전교는 사관(史官)이 꺼려하여 감히 쓰지 못하였다(傳敎史官諱而不敢書·전교사관휘이불감서).” 이날 밤 영조가 내린 전교는 세자를 서인으로 강등시키는 이유를 담은 ‘폐세자반교’다. 이리저리 얽혀 있는 사도세자 죽음의 원인을 가장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자료인데, 이 반교문이 ‘사관이 꺼려서’ 삭제된 것이다. 다른 문집에 기록된 반교문에는 ‘백여 명에 이르는 사람을 죽이고 불로 지졌고 주야로 음란한 짓을(...)’이라고 적혀 있다.(‘현고기 번역과 주해’, 김용흠 등 역주, 서울대출판문화원, 2015, p80)
사도세자가 영조에게 반역을 기도했다는 내용까지 적힌 이 반교문이 실록에서 사라져 있으니, 이는 “승정원일기를 삭제해도 실록에는 기록이 남는다”는 왕세손과 영조 논리에 맞지 않는다. 어찌 보면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
영조실록은 정조 때 편찬됐다. ‘영종대왕실록청의궤’에 따르면 정조는 편찬 작업 당시 이렇게 명했다. “1758~1762년 사이 각 부서 업무 기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사람들 눈을 어지럽힐 부분이 있으니 당분간 꺼내지 말라.” 그리고 이 기간 사료 분류 작업을 담당한 사람은 이휘지라는 인물 한 사람이었다.(정병설,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 동아문화 58,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 2020) 대개 집단적 취사 선택으로 이뤄지는 실록 편찬 작업이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던 시기만은 한 사람에 의해 단독으로 진행됐고, 그마저 어명에 의해 진행이 늦춰진 것이다. 이유는 ‘사람들 눈을 어지럽힐 부분이 많으니까.’ 이미 영조 또한 승정원일기 세초를 명하면서 “일기를 보더라도 다시 그 글을 들추는 자는 흉악한 무리로 엄히 징계한다”고 경고했었다.(1776년 2월 4일 ‘영조실록’) 그리하여 승정원일기에 이어 실록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라지고 말았다.
▲정조릉인 건릉 분묘에서 바라본 정자각. 생전에 사도세자를 항상 염두에 뒀던 정조는 사후에 아버지 옆에 묻혔다. /박종인
사라진 진실 3: 영조가 쓴 묘지명
즉위 열흘 뒤 정조는 영조로부터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받았던 자기 아버지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존호를 추가했다. 사도는 무엇이고 장헌은 무엇인가. 사(思)는 ‘追悔前過(추회전과·지난 과오를 뉘우침)’이다. 도(悼)는 ‘年中早夭(연중조요·일찍 죽음)’다. ‘사도’는 ‘죄를 뉘우치고 일찍 죽었다’는 뜻이다. 아들 정조에게는 끔찍하기 짝이 없는 시호다. 정조는 즉위와 함께 아버지에게 무인(武人) 기질을 지닌 총명한 사람을 뜻하는 ‘장헌’으로 존호를 올렸다.
그리고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묘 수은묘를 영우원으로 격상한 뒤 이를 화성 현륭원으로 천장했다. 그때 천장 기록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배봉산 사도세자묘 관을 꺼내던 날, 묘 속에서 영조가 직접 쓴 묘지문이 발굴됐다. 묘지문은 무덤 주인의 행적을 기록해 함께 묻은 기록이다.(1789년 8월 12일 ‘일성록’: 정병설, ‘이장 과정을 통해 본 현륭원지의 성격’, 장서각 43, 한국학중앙연구원, 2020, 재인용) 그런데 영조 때 승정원일기에는 ‘영조가 묘지문을 구술했다’는 기록만 있고 내용은 삭제돼 있다. 이 또한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정조는 본인이 새로운 묘지명을 작성하면서 ‘한 글자를 쓰면 쓰는 대로 감추고 비문이 완성되자 곧바로 묘 속에 묻어버려 세상 사람들이 내용을 알지 못했다.’ 그 덮개에는 ‘장헌세자 현륭원지’라고 새겼는데, 현장에서 ‘사도’라는 글자가 빠졌다고 하자 그제야 추가하라고 명했다.(’현고기 번역과 주해’, p262)
정조 생전에는 아무도 몰랐던 이 묘지문 내용은 정조 사후 출간된 정조 문집 ‘홍재전서’에야 수록됐다. 정조의 명(혹은 묵인)에 의해 다시 배봉산 옛 무덤에 묻힌 영조 묘지문은 1968년 기적적으로 배봉산 땅속에서 발견됐다. 묘지문에는 ‘무도한 군주가 어찌 한둘이오만 세자 시절 이와 같다는 자의 얘기는 내 아직 듣지 못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서장대야조도(西將臺夜操圖) 부분. 정조가 현륭원 참배 후 화성 산성에서 야간 군사훈련을 지휘하는 장면이다. /화성박물관 복제본
황금갑옷과 군복과 온천
아버지와 갈등 끝에 말기에 광증과 기행을 보이다 죽은 세자는 그렇게 무사 기질을 가진 위풍당당한 비운의 군주로 둔갑했다. 1793년 정조는 ‘영조 선대왕 또한 세자 죽음을 후회했다’는 내용을 담은 ‘금등지서’를 공개하면서 자기 판단과 주장에 대한 반론을 결정적으로 봉쇄해버렸다.(2021년 12월 8일 <박종인의 땅의 역사> 참조)
그리고 그가 군복을 입고 자기 아버지를 찾아간 것이다. 왜 군복이었나.
1796년 정조가 다시 화성으로 행차를 한다. 참배 후 귀경길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는지, 이리 시를 읊는다. ‘오늘 또 화성에 와 보니/궂은 비는 침원에 부슬부슬 내리고/이 마음은 재전을 끝없이 배회하누나’ 그리고 그가 말을 이었다. “1760년 (내 아버지가) 온천에 행행하실 때 군복을 입으셨다. 기유년 이후 내가 참배할 때 군복을 입은 것은 (영정도 제대로 그리지 못한) 내 아버지를 추억하겠다는 뜻이다(必用軍服 蓋出於追述之意也 필용군복개출어추술지의야).”(1796년 1월 24일 ‘정조실록’)
기유년은 배봉산에 있는 사도세자묘 천장을 결정한 1789년이다. 1760년 온천 행행은 사도세자가 군사 호위 속에 온양온천으로 행차했던 사실을 가리킨다. 한해 전인 1795년부터 정조는 이 온천행차를 세세히 조사해 ‘온궁사실’이라는 책을 편찬하기도 했다.
정조는 이 온천 행차를 아버지 사도세자가 ‘수원부 산성에서 군사를 사열하고 연도에서는 민심을 청취한 뒤 행궁에서는 날마다 경연을 열었던’ 행차로 기억한다.(정조, ‘홍재전서’ 16권, ‘현륭원지’)
위풍당당하게 군사를 지휘하고 민심을 묻는 그 모습. 누구인가. 바로 정조다. 그 풍경이 무엇인가. 백마를 타고 군복을 입고 장엄한 행렬 속에 산성에 올라 수천 병졸을 지휘하고 연로에서 민심을 직접 듣는 화성행궁 행차 풍경이다. 사도, 아니 장헌세자가 아들 정조로 환생한 것이다. 사도세자 죽음의 진실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창조해낸 장헌세자가 스스로에게 환생했으니까.
285. 중국에 바친 여자, 공녀(貢女)
“못생긴 계집을 내놓으면 왕명 불복종으로 벌한다"

▲경복궁 행랑에 석양이 내린다. 조선 전기에 이 궁궐에 딱 한 번 놀러와 보고 명나라로 떠났던 여자들이 있다. 명 황실에 바쳐진 공녀(貢女)들이다. 공녀들은 크게는 나라를 위해 작게는 집안을 위해 희생된 ‘물건’ 취급을 받았다./박종인
‘(명나라로 가는 공녀(貢女) 선발을 피하기 위해) 딸자식 둔 어떤 자는 사윗감 서넛을 동시에 부른 뒤 맨 먼저 온 사내에게 시집보낸다. 강보에 싸인 어린 계집을 유모가 안고 시집을 보내기도 한다. 심지어 어느 집에서는 하루에 딸 서넛을 한꺼번에 시집보내기도 한다. 서울에 남은 총각과 처녀가 전혀 없었으니 천고(千古)에 들어보지 못하던 일이었다.’(1521년 1월 21일, 22일 ‘중종실록’)
그랬다. 잊을 만하면 어김없이 나타나 처녀들을 내놓으라고 닦달했던 중국 사신들과, 그들로 인해 공포 속에 던져졌던 조선 처녀들 이야기.
여자들의 삶-1: 수절(守節)
조선 과부가 정정당당하게 재혼할 수 있게 된 때는 자그마치 서기 1894년이었다. 동학농민전쟁 이후 성립한 갑오개혁정부가 이 너무나도 당연한 권리를 500년 만에 인정한 것이다. 그때까지 조선 여자에게는 ‘수절(守節)’이라는 규범이 강요됐고 그녀들은 강요된 규범임을 깨닫지 못한 채 당연한 일로 지켜왔다. 해도 너무했다.
고려는 달랐다. 예컨대 이런 일. ‘충렬왕(재위 1274~1308) 때 종3품 대부경 박유가 이리 주장했다. “고려가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데 처가 하나밖에 허용되지 않는다. 계급에 따라 첩을 여럿 둘 수 있게 하자.” 부녀자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두려워하며 박유를 원망하였다. 그 박유가 임금 행차를 따라가는데, 거리에서 한 노파가 손가락질했다. “저자가 바로 그 빌어먹을 늙은이다!” 사람들이 연이어 손가락질하니 거리에 붉은 손가락들이 줄줄이 엮어놓은 듯했다. 당시 재상들 가운데 공처가가 많아(有畏其室者·유외기실자) 결국 일부다처제는 시행되지 못했다.’(‘고려사’106 열전19 박유)
여자들의 삶-2: 고려 공녀
당당한 여자들이 고려에 살았고, 그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되었다. 여자들은 수절이 강요됐고 남자들은 어느덧 첩을 거느리며 살게 되었다. 두 왕조를 관통해 여자들을 벌벌 떨게 만들고 남자들을 애타게 만든 일이 있었으니, 공녀(貢女)다. 역대 왕조에서 중국으로 바친 여자다. 위 충렬왕 때인 1275년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가 이리 요구했다. “칭기즈칸이 세계를 정복할 때 그 나라 왕들이 앞다퉈 미녀를 바쳤다는 사실을 들은 적이 있겠지? 그저 알려주기 위한 것이지 그대에게 자녀를 바치라는 것은 아니다.”(‘고려사’28 세가 충렬왕 원년 10월)
바치라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고려에서는 처녀들을 원나라에 바치기 위해 국내 혼인을 금지시켰고 결국 공녀로 선택된 처녀 10명이 원나라로 갔다. ‘고려사’에 기록된 원나라 공녀는 모두 44차례에 170명이었다.(정구선, ‘공녀’, 국학자료원, 2002, p28) 고려 여자들이 퍼뜨린 풍속도 원나라에 역수입돼 ‘사방의 의복, 신발과 모자, 기물 모든 것을 고려를 모방해 온 세상이 미친 것 같았다(皆仿高麗 擧世若狂·개방고려 거세약광).’(필원, ‘속자치통감’ 214 원기(元紀) 32 1358년)
▲경복궁 사정전에서 바라본 석양. 조선 왕실은 명과 청이 요구하는 여자 조공 요청에 무기력했다./박종인
조선의 은폐된 조공품, 공녀
명나라 행정법전인 ‘대명회전’에 따르면 조선이 연례적으로 명나라에 바치는 공물(貢物)은 아래와 같다. 금은기명(金銀器皿), 나전소함(螺鈿梳函), 백면주(白綿紬), 색색 저포(苧布)와 용문염석(龍紋簾席), 색색 세화석(細花席), 초피, 수달피, 황모필(黃毛筆), 백면지(白綿紙), 인삼, 종마.(‘대명회전’ 권105)
그런데 이와는 별도로 조선에 요구해 가져갔던 공물이 두 가지 더 있었으니 여자, 공녀(貢女)다. 공녀는 효종 때까지 모두 146명이 명나라로 조공됐다.(정구선, 앞책, p51, 56) 명나라 공녀는 정치적인 목적보다는 황제 개인의 유희성이 짙었다. 원나라는 고려에 대대적, 공개적으로 공녀를 요구한 반면 명 황제는 관리를 보내 비밀리에 공녀를 요구하곤 했다. 하지만 사대 질서 속에 생존하던 조선 왕실은 그 무리한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임상훈, ‘명초 조선 공녀의 성격’, 동양사학연구 122, 동양사학회, 2013)
황제 특명을 받은 이 관리들은 출신이 조선이다. 정확하게는 조선이 바쳐야 했던 또 다른 공물, 고자들이다. 성종 때까지 성기능을 상실했거나 거세당한 조선 고자 198명이 명나라로 끌려갔다.(정구선, 앞책, p122) 여자보다 52명 더 끌려간 저 사내들 삶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남자의, 남자를 위한, 여자
참 딱했다. 여자는 정식 공물 리스트에 들어 있지 않은, 은밀한 공물이었다. 공녀 선발 명 또한 물증이 남지 않는 구두로 통보됐다. 선발은 조선에 파견된 사신들이 결정했다.
건국하고 20년이 채 되지 않은 1408년 봄, 명나라 사신 황엄이 경복궁 근정전 서쪽 계단에 무릎을 꿇은 조선 국왕 태종에게 명황제 영락제 명을 전했다. 황엄은 조선 고자 출신이다. “황제께서 나에게 ‘조선국에 가서 국왕에게 말하여, 잘 생긴 여자 몇 명을 간택해 데리고 오라’고 명하였다.” 태종은 머리를 계단 바닥에 조아리며(叩頭·고두) 이리 답했다.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해 명령을 받들지 않겠습니까(敢不盡心承命·감부진심승명)?”(1408년 4월 16일 ‘태종실록’)
그해 10월 경복궁에서 최종 5명이 뽑혔는데, 태종이 관료들에게 이리 말했다. “하나같이 추색이니 이 뭐하자는 건가?”(같은 해 10월 11일 ‘태종실록’) 과연 이듬해 5월 또 사신으로 온 황엄이 황명을 전했다. 이번에도 구두(口頭)였다. “황명을 전한다. ‘지난해 너희가 바친 여자들은 살찐 것은 살찌고, 마른 것은 마르고, 작은 것은 작아서 모두 매우 좋지 못하였다. 너희 국왕 체면을 봐서 받긴 했으나, 다시 뽑아라’.”(1409년 5월 3일 ‘태종실록’)
여자를 숨기는 남자
‘이날 평성군 조견의 딸은 중풍 걸린 듯 입이 삐뚤어졌고 이조참의 김천석 딸은 머리를 흔들었으며 전 군자감 이운로 딸은 다리가 병든 것처럼 절룩거렸다.’(1408년 7월 2일 ‘태종실록’)
딸 가진 부모들은 처절했다. 침이나 뜸을 떠서 병신 흉내를 내기도 하고(앞 실록 기사) 뽑힌 자 중에는 스스로 삭발하는 자도 있었다. 처녀를 숨긴 자를 색출하기 위해 온 마을 아전과 부녀자를 가두고 매질을 하는 일까지 생겼다.(1408년 7월 5일 ‘태종실록’) 명에서 청으로 대륙 주인이 바뀐 효종 때 또 공녀 선발이 진행되자 7~8세 되는 아이 부모는 아이들을 거의 모두 혼인시켰다.(1650년 9월 9일 ‘효종실록’) 그 같은 풍경을 보고받은 중종은 이리 탄식했다. “여자 뽑는 일이 어찌 원통한 일이 없겠는가? 혹시라도 구덩이에 몸을 던진다든가 목매 자살하는 폐가 있을까 염려스럽다.”(1521년 6월 2일 ‘중종실록’)
여자를 보내는 남자
1417년 태종 때 명나라에 공녀로 간 두 처녀 가운데 한씨는 지순창군사 한영정의 딸이었다. 한씨는 그 미색이 명나라 영락제 눈에 띄어 황제 후궁이 되었다.(1417년 5월 9일 ‘태종실록’) 사람들은 그녀를 여비 한씨(麗妃 韓氏)라 불렀다.
10년 뒤 1427년 세종 9년 여름, 한씨 막냇동생 또한 그 미색이 알려져 공녀로 뽑혔다. 마침 병에 걸려 오라버니 한확이 약을 지어주니 그녀가 이리 말했다. “누이 하나 팔아서 이미 부귀가 극진한데 뭘 위해 나에게 약을 주시오?” 그녀는 시집가려고 만들었던 이불채를 칼로 찢어버리고 재물을 주위에 나눠줘 버렸다. 이듬해 그녀가 떠날 때 사람들은 그녀를 산 송장(生送葬·생송장)이라 했다.(1427년 5월 1일, 1428년 10월 4일 ‘세종실록’) 실록에 따르면 ‘한확은 재산이 넉넉하면서도 장차 공녀로 뽑히기 위해 혼기가 지난 누이를 시집보내지 않았다’며 사람들이 누이를 슬피 여겼다.(1435년 7월 20일 ‘세종실록’)
먼저 공녀로 갔던 여비 한씨는 영락제가 죽으면서 다른 후궁들과 함께 자살을 강요당하고 순장(殉葬)됐다. 그 여동생 한씨는 선덕제 후궁이 되었다. 그런데 그녀는 ‘황제를 권하여 자주 조선에 사신을 보내 친족을 입조(入朝·명 황실로 찾아오게 함)케 하니 이후 한씨 일족은 앉아서 부귀를 취하고 해를 나라에 끼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1479년 7월 4일 ‘성종실록’)
세종의 선택 – 금은보화와 처녀
1409년 10월 자기 딸을 공녀로 보냈던 임천년이라는 자가 밀무역 혐의로 탄핵당했다. 태종은 “탄핵하지 말라”고 명했다.(1409년 10월 10일 ‘태종실록’) 1425년 9월 두 누이를 공녀로 보낸 한확이 간통 혐의로 탄핵당했다. 세종은 이를 불허했다. 이유는 “이 사람은 내가 죄 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1425년 9월 28일 ‘세종실록’) 한확은 훗날 자기 딸을 왕실로 시집보내 왕실 외척이 됐다. 성종의 어머니인 이딸이 인수대비다.
명이 됐든 청이 됐든 대중(對中) 사대 외교에 또 다른 큰 이슈가 있었으니 바로 금과 은 조공이었다. 금을 캐는 데 민폐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1429년 8월, 세종이 명 황제 선덕제에게 친서를 보냈다. 이러했다. “우리나라는 땅이 좁고 척박해 금 은이 생산되지 않나이다. 금은 조공이 면제되면 황제의 덕(德) 가운데 춤출 뿐이겠습니까.”(1429년 8월 18일 ‘세종실록’) 백성 눈물 속에 공녀 20명을 떠나보내고 한 달이 지난, 한가위 사흘 뒤였다. 그해 12월 황제가 금은 조공 면제를 허가했다.(같은 해 12월 13일 ‘세종실록’) 세종이 보낸 친서에도, 명 황제가 보낸 칙서에도 공녀 면제 관련 사항은 없었다.
이미 1427년 공녀 문제에 대해 세종이 명쾌하게 이렇게 결론을 내려놓았다. “그 원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으나 간쟁 대상이 될 수 없다. 명이 떨어지면 좇아야 하느니라(唯令是從而已·유령시종이이).”(1427년 7월 21일 ‘세종실록’) 어디에서 무엇부터 잘못됐는지 모르겠으나, 어찌 됐건 공녀는 여자가 아니라, 공물(貢物)인 나라였다.
2022.01.05
286. 갑오년 삼국지, 운명의 청일전쟁① 전조(前兆)들
운명의 청일전쟁… 갑오년 7월, 천하가 뒤집어졌다

▲일본 화가가 그린 청일전쟁 풍도해전도. 일본군에 의해 격침되는 청나라 함대를 그렸다. /영국박물관
<격주 연재 ‘갑오년 삼국지, 운명의 청일전쟁(淸日戰爭)’을 시작합니다. 청일전쟁은 128년 전인 1894년 청과 일본이 조선 땅에서 겨뤘던 전쟁입니다. 목적은 아시아 패권 쟁탈이었고 구시대 세계관을 고집했던 청은 근대 시대정신을 수용한 일본에 굴욕적인 참패를 당했습니다. 20세기를 6년 앞두고 벌어진 청일전쟁은 이후 아시아 판도를 완전히 뒤집어버렸고 중국을 중심으로 한 ‘천하(天下)’ 질서는 붕괴되고 아시아는 일본이 주도한 근대 ‘세계(世界)’ 속으로 내동댕이쳐집니다. 안타깝게도, 그 전쟁터는 조선이었습니다.
1894년 갑오년은 조선에서 동학농민전쟁이 터진 해이기도 합니다. 500년 동안 누적된 봉건 조선왕조 모순이 폭발한 사건이 동학전쟁이었습니다. 이 민란을 진압해달라고 조선 정부가 부른 청나라 군사가 일본군과 맞붙은 전쟁이 청일전쟁이었습니다.
그 전쟁에서 조선을 자기네에게 조공을 바치는 속국(屬國)으로 묶어두려고 했던 청은 무참히 패합니다. 아시아 주도권을 잡은 일본이 조선에 대해 본격적인 식민지화 작업에 착수한 계기가 이 청일전쟁입니다.
조선 농민은 왜 죽창을 들었고, 조선 정부는 왜 외국군을 불러 자기 백성을 탄압했으며, 청일 양국은 왜 조선에서 전쟁을 벌였을까요. 왜 남의 나라들이 국토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모습을 조선 정부는 무기력하게 바라봐야 했을까요. 일본은 왜 다름 아닌 조선을 타깃으로 삼아 전쟁을 일으켰을까요.
21세기 한·중·일 외교-경제 전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습니다. 덕담과 도덕은 통하지 않는, 힘과 국익만 존재하는 이 시대를 징비하기 위해서 청일전쟁을 돌아보겠습니다.>

▲청나라 화가가 그린 풍도해전 판화 '조선수전 득승첩도'. 사실과 달리 청나라 함대가 일본 함대를 격파했다고 묘사돼 있다. /영국박물관
전조(前兆) 1 – 유미유동(留美幼童) 심수창
1872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청나라 정부가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 청소년들을 유미유동(留美幼童)이라고 한다. 근대 문물을 배워 나라에 충성하라고 보냈던 이 120여 어린이들은 1881년 “배우라는 기술은 팽개치고 정신이 서화(西化)됐다”는 이유로 소환됐다. 학업은 마치지 못했다.
청나라 북양함대 제원(濟遠)호 부함장 심수창(沈壽昌)은 그 유미유동이다. 제원호는 1886년 북양함대가 독일에서 구입한 철갑선이다. 8년 뒤 조선에 동학농민전쟁이 터졌다. 조선 정부의 요청에 따라 북양함대 소속 군함 세 척이 조선 아산만 풍도 앞바다에 도착했다.
상해(上海)에서 태어난 심수창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자기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리라고는 꿈꾸지 않았을 터이고, 배수량 2355톤짜리 거대한 근대 철갑군함 부함장이 되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1894년 7월 25일 새벽, 안개 속에서 일본 군함 요시노(吉野), 아키츠시마(秋津洲)와 나니와(浪速)가 제원호를 향해 포격을 했다. 함장 방백겸(方伯謙)의 대응 사격 명령이 늦어지자 부함장 심수창은 직권으로 교전을 명했다. 한 시간 20분 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요시노함 포탄 하나가 퇴각하던 제원호 망루를 때렸다. 심수창은 머리에 포탄을 맞고 전사했다. 서른두 살이었다. 천하의 북양함대라고 자부했던 청나라 함대였지만 요시노호는 제원호보다 7노트가 빨랐다. 유미유동 심수창을 죽게 만든 요시노함 함장 가와하라 요이치(河原要一)는 독일에서 2년 동안 해군 교육을 완수한 유학파였다. 제원호는 훗날 일본군이 전리품으로 압수했다. 개전 직후 일본군은 이렇게 주장했다. ‘청나라는 일본을 이길 수 없다.’(’일청전쟁실기(日淸戰爭實記) 2편’, 박문관, 1894년, p96) 심수창은 몰랐을 것이다.
전조(前兆) 2 – 민영준의 부패와 고종
1894년 동학 농민들이 봉기했다. 타깃은 부패한 민씨 정권이었고 목적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이었다. ‘일청전쟁실기’에 따르면, 그때 민씨 가운데 가장 부자는 전 선혜청 당상인 민영준(민영휘)이었는데, ‘그 돈이 바로 민씨 정부를 유지하는 자금이었다.’(‘일청전쟁실기 1편’, p99)
굳이 일본 자료를 들추지 않아도 민영준은 당시 부패와 탐오(貪汚)의 상징이었다. 동학 농민들은 민영준 처단을 민란 해산의 제1조건으로 내걸었다.
처단 대상이 된 민영준과 고종 정권은 그해 6월 3일(음력 4월 30일) 조선에 와 있던 원세개(袁世凱)를 통해 청 황실에 민란 진압 군사를 요청했다. 다음은 그 요청문 전문이다.
‘폐국(弊國) 전라도 관할의 태인과 고부 등은 민풍이 사납고 성정이 음험하고 간사하여 평소 다스리기 어려운 곳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입니다. 몇 개월 사이 동학 교비 만여 명이 현읍 10여 곳을 함락시켰고, 전주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이 흉악하고 완고한 자들이 다시 북으로 잠입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경기 지역이 시끄럽게 요동을 칠 것이니 손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새로 훈련한 폐국 부대는 현재 인원이 겨우 도성을 지킬 만할 뿐이고 아직 전투를 치른 경험도 없으니 흉악한 구적(寇賊)을 섬멸시키는 데 쓰기 어렵습니다. 만약 오랫동안 만연하면 청에 많은 근심거리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임오년(1882년 임오군란)과 갑신년(1884년 갑신정변)에 폐국에서 두 차례 내란이 일어났을 때 모두 중국 병사들이 대신 평정해 주었습니다. 이 같은 사례에 의거해, 청컨대 번거롭더라도 몇 개 부대가 속히 대신 토벌케 하고 폐국 각 병사들로 하여금 군무(軍務)를 따라 익히게 하여 앞으로 수비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고자 합니다. 급박한 형세를 구원하기를 절실하게 기다립니다.’(‘이홍장전집’(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9) G20-05-001,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7, p110)
조선 정부가 청군을 요청한 명분은 ‘성정이 음험하고 간사한 흉악한 구적 섬멸에 군사 태부족’이었고 청나라가 출병한 명분은 ‘속방(屬邦) 조선 보호’였다. 원세개는 요청 문서를 받은 즉시 청국 총리아문에 전보를 쳤고, 총리아문 수장 이홍장은 제원호와 양위(揚威)호 군함 두 척을 조선으로 출항시켰다.

▲청나라 화가가 그린 평양성전투 판화. 붉은 테두리 속 확대된 부분에는 '고려 의병'이라는 이름으로 청군을 지원하는 조선군이 그려져 있다. /영국박물관

▲평양성 전투 후 청나라 병사들을 체포한 조선 병사들. 청일전쟁 당시 조선군은 청-일 양쪽편으로 참전했다. /映像が語る「日韓併合」史
전조(前兆) 3 – 김옥균의 암살
그랬다. 부패한 조선과 그 조선을 속국으로 눌러 앉히려는 중국이 손에 손을 맞잡고 조선 민란 진압을 위해 청국 군사를 들여왔다.
이보다 두 달 전인 3월 27일 일본에 망명 중이던 조선 정치범이 중국에서 조선인 손에 죽었다. 갑신년 1884년 겨울 정변을 일으켰다가 일본으로 망명한 정객, 김옥균이 죽었다. 조선 정부가 반복해서 보낸 자객을 피해 활동하던 김옥균은 일본에서 조선인 홍종우와 친분을 쌓게 되었다. 홍종우는 프랑스에서 공부를 하고 온 지식인이었고, 김옥균은 “조선을 동아시아의 프랑스로 만들겠다”는 신념을 갑신정변 명분으로 삼았다.
3월 23일 상해행 배에 오른 김옥균은 3월 28일 동행했던 벗 홍종우가 쏜 총에 맞고 죽었다.
김옥균이 상해에 가리라는 사실, 조선의 운명을 두고 이홍장과 만나 담판을 하겠다는 사실, 그리고 홍종우가 그를 죽이리라는 사실을 중국과 일본과 한국 모두 짐작하고 있었다. 10년 전 조선을 뒤흔든 정치범이 다시 세상을 어지럽히게 놔둘 세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세상은 그 죽음으로 삼국 갈등 요소가 사라졌다고 안도했다. 그런데 그게 시작이었다.
중국은 중국 군함에 그 시신을 실어 조선으로 보냈고, 조선 정부는 그 시신을 관에서 꺼내 토막을 내버렸다. 이 조선 왕조 최후의 부관참시 한 달 뒤 암살자 홍종우는 조선 왕조 최후의 과거시험에 급제해 관료로 임용됐다.(1894년 음력 5월 27일 ‘고종실록’)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 삼국 가운데 가장 급속한 근대화 작업을 진행 중이던 일본은 김옥균 사후 처리 방식이 야만적이라며 극렬히 비난했다. 시신을 조선으로 보낸 중국을 비난하고 원시적인 복수극을 벌인 조선을 비난했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 화가가 그린 판화. 제목은 '일청한 담판지도'다. 아시아 패권과 조선의 운명을 놓고 청과 일본이 담판을 벌이는 상상도다. 가운데 침울하게 앉아 있는 조선 관료들이 그려져 있다. /영국박물관
전조(前兆) 4 – 한 통의 전문(電文)
일본에서는 근대화 과정에서 숱한 구시대 사무라이들이 신분을 박탈당하고 떠돌고 있었다. 그 불만을 분출하고 근대화 자산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 지도부는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전쟁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동학란이 터진 것이다. 김옥균을 사상적으로 가르쳤던 일본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렇게 주장했다. “지나 정부가 원병을 파견할 경우 일본 정부도 같은 세력의 군사를 보내 대등한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조선 동학당의 소동에 대해서’, 1894년 5월 30일: 윤상현, ‘근대 지식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김옥균’, 동아시아고대학 57집, 동아시아고대학회, 2020, 재인용)
유키치가 저리 주장하고 며칠 뒤 청나라 황실에서 보낸 전문(電文) 한 장이 일본 정부에 접수됐다. 발신은 이홍장이다. 내용은 이러했다.
‘청일 양국이 협의한 조약 중에 장차 조선에 변란이 나서 청국에서 파병하여야 할 경우가 생기면 당연히 공문으로 조회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조선 정부에서 온 문서를 받아 본 바에 의하면 전라도 관할 하 백성은 습성이 흉하고 사나워서 동학교도와 무리를 지어 현읍을 공략하고 또 북쪽에 있는 전주를 함락시켰다고 하였습니다.
얼마간의 군대를 파견하여 속히 와서 정토(征討)를 대신해 달라고 간청해 왔습니다. 우리 조정이 속방을 보호하는 예로부터의 관례이므로(하략).’(‘주한일본공사관기록’3, 2.동학란과 청일관계1 (17)조선에 속방 보호를 위해 출병한다는 이홍장의 통고, 1894년 6월 7일)
일본은 기다리지 않았다. 학수고대하던 일본은 즉각 대기 중이던 군사를 조선으로 보냈다. 전쟁은 시작됐다. 천하(天下)가 요동치기 시작했다.<다음 회에 계속>
287. 1882년 조미수호조약에 숨은 對中 굴욕외교
조미조약 체결 전 조선 대표는 청 황실에 삼궤구고두례를 올렸다

▲인천 개항장거리에는 거대한 공자상이 서 있다. 청국과 일본 조계지를 경계 짓는 계단 꼭대기다. 그 위에는 1882년 미국과 조선이 수호조약을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 기념비가 서 있다. 오른쪽 난간 위 황금 용이 장식된 담장 아래다. 당시 조선 대표는 중국의 속국 신하로 청나라에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례를 치렀다. /박종인
인천 개항장거리는 영역이 두 부분으로 나뉜다. 높은 계단을 경계로 동쪽은 일본 조계지였고 서쪽은 청나라 조계지였다. 복원된 지금 풍경도 비슷하다. 계단 북쪽 끝에는 큰 석상이 서 있다. 공자(孔子) 상이다. 2002년 5월 중국 칭다오(靑島) 남구 인민정부가 세웠다. 계단을 오르면 정면 담벼락에 황금으로 조각한 용들이 붙어 있다. 앞길이 ‘삼국지 벽화 거리’임을 알리는 장식물이다. 용들은 발톱이 네 개인 사조룡(四爪龍)이다. 황제나 왕보다 한 급 아래인 태자와 세자를 상징한다.
사조룡 아래에는 동판에 새긴 기념비가 있다. 화강암 기단에 이렇게 적혀 있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 1882년 양력 5월 22일 조선이 미국과 조약을 맺고 세상에 문호를 연 역사적인 장소다.
왜 역사적인가. 일본(1876년 강화도조약)에 이어 서구 열강과 최초로 맺은 개국 조약이 이 조약이다. 그해 미국을 필두로 조선은 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와 연달아 조약을 맺었다. 500년 닫아놨던 나라 문을 세계(世界)로 연 계기가 이 조약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조약과 무관해야 마땅한 청나라 관리 마건충(馬建忠)이 그 체결 현장에 있었으며, 그가 이런 기록을 남긴 것이다. ‘조선 대관 신헌과 김굉집이 먼저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先行三跪九叩頭禮·선행삼궤구고두례).’(마건충, ‘동행초록’, 소방호재여지총초 조선편, 인하대한국학연구소, 2010, p203) 병자호란 직후 조선국왕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행했던 그 삼궤구고두례를 200년 뒤 바로 이 땅에서, 제3국 조약 체결 현장에서 중국에게 행한 그 이야기.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 기념비. 그 위 담장에는 발톱이 네 개 달린 황금 용이 장식돼 있다./박종인
무너지는 천하(天下), 포위된 중국
1792년 9월 26일 영국 백작 조지 매카트니가 영국을 출발했다. 목적지는 청나라였고 매카트니는 특명전권대사 신분이었다. 대포 64문이 장착된 라이언호는 이듬해 5월 마카오에 도착했다. 여행 목적은 영국과 청의 국교 수립이었다. 매카트니는 이를 위해 조지 3세가 쓴 친서를 보석함에 넣어 가져왔다. 9월 14일 새벽 3시 톈진에서 축하연이 벌어졌다.
이에 앞서 청 황실은 매카트니 사절단에게 청나라 전통 황제 알현 의식인 삼궤구고두례를 요구했다. 3회에 걸쳐 세 번씩 머리를 땅에 박고 절을 하라는 것이다. 복잡한 협상 끝에 매카트니는 국서가 든 보석함을 머리 위로 들어 건륭제에게 바치고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는 영국식 의례를 올렸다. 조선과 태국, 베트남에서 온 축하 사절은 이미 아홉 번 절을 하고 난 다음이었다. 북학파 실학자 박지원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10월 3일 조지 3세에게 보내는 건륭제 칙서가 나왔다.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유럽 야만국에서 우리 차와 비단을 원하므로 이제껏 조공에 응해줬다. 하지만 천조국은 부족한 물건이 없다. 따라서 교역은 불허한다. 그대의 대사가 무지하여 내 신하들로 하여금 훈계를 하라고 했다.’(S. 플랫, ‘Imperial Twilight’, 알프레드 노프 출판, 2018, p43)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칙서를 받은 매카트니는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청나라는 난파한 채 바다를 떠다니다가 산산이 부서져 해변으로 밀려올 것이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청나라라는 배는 재건될 수 없다.’(G 매카트니, ‘Some account of the public life, and a selection from the unpublished writings of the earl of Macartney’ 2권, T. Cadell and W. Davies, 1807, p398~399)
그때 제정신을 차렸다면 세상은 달라졌을 터이다. 47년이 지났다. 1840년 영국이 아편전쟁을 도발했다. 두 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청나라는 베이징 초입인 톈진(天津)까지 털렸다. 대륙은 제국주의 놀이터로 전락했다.
1871년 청 정부는 일본과 ‘청일수호조규’를 맺었다. 1000년 넘도록 눈길 한번 주지 않았던 오랑캐와 대등한 관계를 맺었다. 청나라 요청에 따라 조약 1조는 이러했다. ‘소속방토(所屬邦土) 상호 불가침’. ‘토(土)’는 청국 영토를 의미했고 ‘방(邦)’은 속방을 뜻했다.

▲개항장 거리 공자상.
매카트니를 조롱했던 그 천자국은 사라지고, 세상은 수직적으로 구성된 천하(天下)에서 정글 같은 세계(世界)로 무너지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천하 질서에 남은 속방은 여전한 조공국 조선과 류큐 왕국(현 오키나와) 그리고 안남(베트남) 셋이었다.
그런 와중에 1872년 일본 메이지 정부는 청 조공국 류큐를 자기네 번으로 삼겠다고 일방선언했다. 또 1874년 일본은 3년 전 대만에 표류했던 류큐 어민들이 살해당하자 ‘일본국 속민에게 해를 가했다’며 대만을 침략했다. 1879년 일본은 류큐 왕국을 멸망시키고 가고시마현으로 편입시켰다. 안남은 이미 1850년대에 절반쯤 프랑스 식민지로 변해 있었다.
그리하여 문득 보니 이제 청 제국(帝國)에 남은 속방은 오직 조선, 자기네가 동방예의지국이라며 아꼈던 조선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그 나라가 일본과 조약을 맺더니(1876년) 이제 아메리카 제국과 조약을 맺겠다는 것이다.
맹렬한 속도로 제국을 포위하는 일본과 서구 제국에 맞세울 유일한 속국, 조선은 절대 버릴 수 없는 카드였다.여기까지가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까지 전사(前史)다.
중국 땅에서 중국인이 진행한 협상
1871년 개항을 요구하며 미국이 강화도를 침략했던 신미양요는 대실패로 돌아갔다. 오히려 조선 정부는 전국 팔도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쇄국을 강화했다. 그리고 11년이 지난 1882년 마침내 조선이 세계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조미조약은 전통적 속방 관계 속에 조선을 독점하려 한 청나라와 조선에 대한 대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미국 사이 갈등이 만든 결과물이다. 미국 전권대사인 해군 제독 R. 슈펠트(Shufeldt)는 “잉여 생산품을 처분할 판매 시장 확보가 통상의 목적”이라고 주장해왔다.(김원모, ‘조미조약 체결 연구’, 동양학 22집, 단국대동양학연구소, 1992) 반면 청 정부는 속방인 조선을 조종해 ‘미국과 연합해’ 러시아를 견제할 계획을 품고 있었다. 청나라 실권자인 북양대신 이홍장은 지속적으로 조선에 미국 수교를 권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외세를 배격하는 위정척사파가 극렬하게 활동 중이었다.
일본에 이어 서구 오랑캐와 조약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 회에 자세하게 나오겠지만, 그래서 이날이 올 때까지 그 조약 문구 하나하나를 다듬고 협상한 팀은 미국과 청나라 관료들이었다. 협상 장소도 중국 톈진이었고 협상 멤버도 중국 관료들이었고 초안을 작성한 붓도 중국 붓이었다. 그 억장이 무너지는 이야기는 다음 회로 미룬다. 오늘은 인천 앞바다에서 벌어진 풍경만 구경해본다.

▲조미조약 실무 대표인 청나라 관리 마건충
아홉 번 머리 조아린 신헌과 김굉집
1882년 5월 8일 위원(威遠), 양위(揚威), 진해(鎭海) 3척 군함에 분승한 청나라 관리 마건충과 제독 정여창이 인천부 호도(虎島)에 도착했다. 나흘 뒤 아메리카합중국 전권위원 해군대장 슈펠트가 군함 스와타라를 이끌고 인천부 호도에 도착했다.(‘고종시대사’ 2집 1882년 3월 21, 25일) 소식을 들은 조선 정부는 서둘러 청나라 사람들이 묵을 객관을 국비로 마련해줬다.(1882년 3월 15일 ‘고종실록’) 마건충은 프랑스 유학파 법학박사였고 정여창은 영국으로부터 양위호를 인수해 끌고 온 장교였다. 두 사람은 두 달 뒤 벌어진 임오군란 때 흥선대원군을 납치해간 주역이었다.
조선측 전권대신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을 때 전권대신인 신헌(申櫶)이 임명됐다. 부관(副官)은 김굉집(金宏集)이었다. 본명은 김홍집(金弘集)이다. 5월 13일 조선 선발대가 위원호로 와서 내일 ‘진알(晉謁: 알현)’에 대해 설명했다. 마건충이 말했다. “아래 나라(下國·하국) 대신은 대신이라 하지 말고 대관(大官)이라고 하라.”(마건충, 앞 책, p202)

▲전권대신 신헌. 기록에는 '대신'이 아니라 '대관'으로 돼 있다.

▲김홍집(김굉집)
다음 날 오전 11시 조금 지나서 정사 신헌과 부사 김굉집이 군함에 올랐다. 이들은 ‘큰 기가 휘날리고 거대한 천막 아래 군용 장막이 설치된 청 선박 네 척에 올라 위원호로 향했다. 대취타가 울려 퍼지며 병사들을 호령하는데, 실로 장엄하였다.’(신헌, ‘미국통상실기(美國通商實記)’)
신헌에게는 석희(奭熙)와 덕균(德均)이라는 동행이 있었는데, 각각 아들과 손자였다. 승선 후 이들은 통역을 통해 “배신(陪臣·황제 아래 제후의 신하) 모모가 등선했다”고 전한 뒤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례를 치르며 국왕을 대신해 공손히 황태후와 황상 안부를 물었다. 마건충과 정여창은 의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제야 이들과 상견례를 치렀다.(마건충, 앞 책, p203) ‘미국통상실기(美國通商實記)’에는 신헌이 아들·손자를 데려간 사실과 고두례를 행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또 신헌은 마건충이 지시한 대로 본인과 김홍집을 ‘대신(大臣)’이 아닌 ‘대관(大官)’으로 기록했다.
중국 초안 그대로
조선 대표들은 이어 옆에서 대기 중이던 미군함 스와타라호에 승선해 슈펠트와 상견례를 가졌다. 스와타라호는 이들을 환영하는 예포 3발을 쐈다. 다음 날 인천부사 정지용이 미국 측에 선물을 줬는데 소 한 마리와 돼지 두 마리, 계란, 닭, 생선과 쌀이었다. 이에 미국 측은 달러화와 빵과 시가로 화답했다. 이날 신헌은 인천 객사에서 연회를 주관했다. 게스트는 미국 사신 슈펠트와 청나라 사신 마건충이었다. 5월 17일 중국 측이 마련한 조약 초안을 조선 부사 김홍집이 최종적으로 검토했다. ‘쌀 수출은 금지한다’라는 조항만 삽입하고 모든 문안이 청나라 안대로 통과됐다.

▲미국측 대표 슈펠트.
5월 22일 오전 10시 45분 바다가 보이는 제물포 언덕에 화려한 천막이 설치되고, 그 천막 속에서 대조선국과 대미국의 수호통상조약 조인식이 열렸다. 체결 직후 마건충은 천막 옆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체결 후 체결장에 들어왔다. 조선 대표 신헌과 김홍집은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다’라는 내용을 담은 국왕 조회문을 슈펠트에게 전달했다.(마건충, 앞 책, p207) 그리고 그해 10월 4일 청은 조선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맺었다. 조약이 아니라 ‘장정(章程)’이다. 중국 국내용 문서라는 뜻이다. 이런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 이유가 무엇일까. <다음 회에 계속>
288. 갑오년 삼국지, 운명의 청일전쟁 ②풍도(豐島)의 포성
淸, 일본에 격침되다

▲1894년 7월 25일 새벽 아산만 풍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청-일 풍도해전은 선전포고 없이 일본이 개시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청 해군을 위탁수송하던 영국 상선 고승호가 침몰하고 탑승했던 승무원은 몰살됐다. 영국은 민간 선박을 공격한 일본에 항의를 하지 않았다. 지원군을 잃은 청나라는 이후 육전과 해전에서 연전연패했다. 사진은 일본측이 제작한 판화다. /영국박물관
1885년 4월 18일 청나라 북양통상대신 이홍장과 일본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천진(天津)에서 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한 해 전 12월 벌어진 갑신정변을 청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조선 주재 일본인들이 입은 피해 보상과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 조약문에는 ‘한 나라가 조선에 출병하면 다른 나라에 통보한다’는 조항이 삽입됐다. 이 조항을 청은 단순한 통보로 이해했고 일본은 ‘동시 출병’으로 이해했다. 장차 천하를 뒤집어엎을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우리가 속방을 사랑하여 왔노라”
9년이 지난 1894년 조선에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탐학과 학정에 저항하는 민란, 동학농민전쟁이다. 민란을 해결할 의지도 진압할 치안력도 없는 조선 정부는 청나라 조정에 파병을 요청했다. 당시 농민들이 죽창을 겨눴던 선혜청 최고책임자가 조선에서 1인자 행세를 하던 청나라 관리에게 파병을 부탁했고 그는 수용했다. 최고책임자는 훗날 민영휘로 개명한 민영준이고 청나라 관리는 훗날 중화민국 총통이 된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원세개다. 보고를 받은 청국 총리각국사무아문 통상대신 이홍장은 북양함대 소속 순양함 제원호와 양위호를 조선으로 출항시켰다. 북양함대 소속 나머지 군함도 속속 조선으로 진입했다. 육군 또한 인천과 아산을 통해 속속 조선에 진입했다. 아산에 상륙한 청 육군 엽지초(葉志超) 부대는 주민들에게 이렇게 포고문을 내걸었다. ‘애휼속국(愛恤屬國·속국을 사랑하고 돕기 위해 출병했노라)’(‘주한일본공사관기록’ 2권 6.철병청구 및 담판 파열까지 왕복문서 (5)속방문제와 청국군 철퇴건) 그리고 6월 6일 청나라는 군사를 조선으로 파병하겠다고 일본에 통보했다. 통고문은 다음날 접수됐다.
학수고대했던 일본
역설적이게도, 조선은 물론 나아가 대륙 진출을 계획하던 신흥 강국 일본에 기회가 왔다. 일본은 청일수호조규(1871), 강화도조약(1876)을 통해 청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그런데 1882년 청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통해 다시 조선을 속국으로 규정한 데 이어 군사력까지 동원해 조선 내정에 개입한다고 통보한 것이다. 일본 정치권은 메이지유신(1868) 이후 폭증하던 내부 실업 문제와 정치 문제 돌파구를 이 ‘외사(外事·국외의 일)’에서 찾았다. 전쟁 준비는 이홍장 통고 이전에 시작됐다. 5월 31일 일시 귀국한 주조선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는 이렇게 보고했다. “동양 정계의 신천지를 열기 위해 조속히 출병하자.”(‘무쓰 무네미쓰 관계문서’, 박종근, ‘청일전쟁과 조선’, 일조각, 1989, p16 재인용)
이미 5월 하순 이토 히로부미 내각은 데라우치 마사타케 대좌(초대 조선총독) 팀을 꾸려 군사 수송 작전에 돌입한 상태였다. 이홍장 통고 도착 닷새 전인 6월 2일 일본군 제5사단이 파병 부대로 결정됐다. 5일 일본 정부는 대본영을 설치한 뒤 곧바로 소장 오시마 요시마사가 이끄는 혼성여단 선발대를 출항시켰다. 10일 선발대는 조선 수도 한성으로 전격적으로 진입했다. 또 인천에는 이미 일본 최신 군함 쓰쿠시, 지요다, 야마토, 아카기함이 파견돼 있었다. 인천에 6척, 부산에 1척 이렇게 일본 해군 군함 절반이 조선에 도착해 있었다.(이상 박종근, 앞 책, p17) 그렇게 인천과 한성은 일본군에 점령됐다. 남쪽 아산 땅과 바다는 청나라 군사에 점령됐다. 동학란 해결 능력이 없는 조선 정부의 SOS 요청이 부른 살벌한 풍경이었다.
풍도의 포성(砲聲)
1885년 청은 북경에 ‘총리해군사무아문’을 설치했다. 1840년 아편전쟁 참패 이후 근대 해군 시스템을 갖추기 위한 기관이었다. 1885년 11월 청은 독일로부터 정원(定遠)과 진원(鎭遠) 두 철갑함을 수입했다. 당시 세계 최고 전함이었다. 1888년 청 북양함대가 정체를 드러냈을 때 일본은 충격을 받았다. 1853년 미국 페리 함대가 동경만에 나타났을 때 받았던 충격이 자발적 근대화로 나타났듯, 아시아 최강 북양함대는 일본에게는 공포 대신 군비 확장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일본이 경쟁에서 승리했다(그 승리의 근본 계기는 자만에 빠진 청나라가 제공했다. 이는 다음 회에 이야기하자).
1894년 7월 25일 새벽, 아산만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청나라 북양함대 소속 철갑 어뢰순양함 제원호가 안개 속에 나타났다. 제원호는 광을, 위원호와 함께였다. 광을호는 소형 순양함이었고 위원호는 연습선이었다. 오전 6시 매복해 있던 일본 제1유격대 소속 순양함 요시노, 나니와, 아키쓰시마호가 나타났다. 이미 대본영으로부터 공격 명령을 받은 일본 함대는 곧바로 포격을 시작했다. 화력이 가장 강한 제원호가 첫 목표물이 됐다.
교전 개시 직후 제원호 함장 방백겸이 백기를 내걸고 도주를 명했다. 승무원들이 항의하자 방백겸은 백기를 거두고 계속 도주를 명했다. 철골 목제선인 광을호는 나니와와 아키쓰시마호로부터 집중포화를 맞고 침몰했다.
오전 8시 청 해군 병력 1116명을 수송하던 영국 상선 고승호가 전투 지역에 나타났다. 도고 헤이하치로가 함장이던 나니와호가 항복을 요구했으나 승선한 청군은 거부했다. 오후 1시 영국인들이 하선한 직후 나니와호가 고승호에 어뢰를 발사했다. 30분 만에 고승호는 침몰했다. 피격 전 고승호 임검 장면을 목격한 군량미 수송선 조강호는 퇴각 도중 아키쓰시마호에 포획됐다. 오후 2시였다.(조세현, ‘청프전쟁과 청일전쟁에서의 해전’, 중국사연구 vol 84, 중국사학회, 2013)
전투 개시부터 종료까지 8시간 걸렸다. 그 8시간 동안 천하무적 북양함대 소속 군함 1척은 파손된 채 도주했고 한 척은 침몰했고 한 척은 피랍됐고 임차했던 상선은 침몰했다. 상선에 탑승했던 병력 1116명 가운데 871명이 전사했다. 일본군 피해 상황은 전무(全無)였다. 2000년 중-일 교류사 가운데 가장 치욕적인 패배가 청조(淸朝) 말 조선 내해(內海)에서 벌어진 것이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시작이었다.

▲고승호 격침을 묘사한 프랑스 잡지 화보.

▲성환 전투를 묘사한 일본 판화. 오른쪽 아래 종군기자들이 그려져 있다. 일본은 이 전쟁을 ‘문명과 야만의 대결’이라고 홍보했다. 판화 제목은 ‘대일본제국 만만세’다. /영국박물관
300년 만에 재현된 소사평 전투
사흘 뒤인 7월 28일 이번에는 육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충남 아산에서 엽지초가 지휘하는 청 육군과 일본 육군이 맞붙은 것이다. 아산만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 엽지초 부대 3500명은 두 부대로 나뉘어 1진은 천안 성환, 다른 1진은 공주로 이동한 상태였다. 이미 본격 전쟁을 염두에 두고 출병한 일본은 서울에 주둔한 혼성여단 가운데 4000명이 아산으로 남하 중이었다.
28일 새벽 성환 벌판에서 전투가 시작됐다. 안성천에서 조우한 첫 전투는 청이 승리했지만 이후는 일본군이 승리했다. 무엇보다 사흘 전 풍도 바다에서 함대가 궤멸돼 병력 지원이 끊긴 사실이 패배 원인이었다. 일본군은 이 모든 전개 상황을 예측하며 개개 전투를 설계한 것이다. 전투마다 일본은 각국 종군기자를 동행시켜 그 ‘문명이 야만을 이기는’ 상황을 세계에 적극 홍보했다.
1894년 여름 성환 전투로부터 자그마치 300년 전인 1597년 음력 9월 중국과 일본은 동일한 장소에서 격전을 치른 적이 있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였다. 북상하는 일본군과 이를 저지하는 명나라 군사가 바로 성환 ‘소사평’에서 맞붙어 명군이 승리했다. 이 소사평 전투는 행주대첩, 평양대첩과 함께 임란 3대 육전으로 불린다. 명군에 패했던, 그래서 대륙 진출이 무산됐던 옛 일본의 야망이 300년이 지난 1894년 동일한 장소에서 활활 재발화하고 있었다.

▲아산전투를 대승첩이라고 묘사한 청나라 판화. 제목은 ‘아산 포승도(아산 승리를 기리는 그림)’. 실제로는 청이 대패했다. /영국박물관
“중국은 일본 못 이긴다”
북양함대는 천하무적이었다. 하지만 첫 전투부터 청나라는 참패했다. 참패는 청일전쟁 내내 계속됐다. 집요하고 계획적인 일본군 전략과 강력한 공격에 청은 힘을 쓰지 못했다. 1888년 북양함대가 출범했을 때 움츠러들었던 일본이 아니었고, 출범했을 당시 위풍당당했던 북양함대가 아니었다.
청일전쟁 개전부터 끝날 때까지 종군했던 일본 박문관 ‘일청전쟁실기’ 기자들은 이렇게 보았다. ‘지나(중국) 병사는 공동을 위한 마음이 없고 오직 자기 혼자만의 안전을 기도한다. 군대가 곤경에 처하면 다른 것을 돌아보지 않고 재빨리 도망간다. 인종을 개량하지 않는 한 이 전쟁은 일본이 이긴다.’(‘일청전쟁실기’ 2편, 박문관, 1894년 10월 3일)
역시 종군기자였던 미국 뉴욕 헤럴드 특파원 제임스 크릴먼은 이렇게 기록했다. ‘군사과학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무기로 요새 하나를 무장시킬 수 있다. 교묘하게 만든 무기와 불량품 하나 없는 탄약으로 병사들을 무장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 기계들 뒤에 훈련된 두뇌와 눈과 육체가 없고 통제할 수 있는 규율이 없다면 소총도 대포도 반복되는 무장도 헛된 것이다.’(J. 크릴먼, ‘On The Great Highway’, 로드롭 출판, 보스턴, 1901, p38)
아편전쟁 이후 나름대로 근대화를 추구해왔던 청이었다. 하지만 그 근대화는 근대정신이 빠져 있는 근대화였다. 근대화 자체도 이가 빠진 근대화였다. ‘이홍장은 해군아문과 호부에 북양해군에 필요한 속사포 구입 예산을 배당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승인되지 않았다.’(유전홍, ‘독일 군사기술이 북양해군에 미친 영향’, 중국과기사료 19권 4기, 청화대과학기술사사기고문헌연구소, 1998) 왜? ‘당시 권력의 정점인 서태후는 여름궁전 이화원을 짓기 위해 해군아문 예산을 넘봤다. 해군 건설에 투입해야 할 예산 가운데 2000만 냥이 이화원 건설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 해군아문 창설 이후 외국으로부터 주문한 군함은 한 척도 없었다.’(김영림, ‘청조의 근대식 함선 도입과 동아시아의 충격’, 동국대 석사논문, 2006)
철저하게 봉건적인 부패한 권력 탓이었다. 풍도에서 청나라 철갑선 제원호를 포격한 대포가 바로 이홍장이 원했던 그 속사포였다. 제원호 함장 방백겸으로 하여금 공포 속에 도주하게 만든 그 포탄이 속사포로 퍼부은 포탄이었다. <다음 회에 계속>
289. 對中 굴욕외교와 1882년 조중상민수륙통상무역장정
140년전 굴욕외교...“양국관계, 청나라 대신과 조선 국왕이 협의해 처리”

▲서울 수유리 애국선열-광복군 합동묘역에 있는 헤이그 밀사 이준 묘역.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서 실질적인 총독 역할을 했던 청나라 관리 원세개가 쓴 이준 만가(輓歌)가 새겨져 있다. 청(淸)은 붕괴되는 천하(天下) 질서 속에서 조선을 끝까지 속국으로 규정했다. 조선과 맺은 통상조약은 조약이 아니라 내규(內規)를 뜻하는 ‘장정(章程)’이었다. /박종인
이준 묘역에 붙은 원세개의 만가(輓歌)
서울 수유리 애국선열·광복군 합동묘역에 헤이그 밀사 이준 묘가 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담으로 떠났다가 참석하지 못하고 순국한 애국지사다. 1963년 그 유해가 봉환돼 이곳에 묻혔다. 흉상이 걸린 탑 왼쪽 벽에 이준을 기리는 글이 보인다. 글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다.
‘…剖胸淺血示心眞 壯節便驚天下人 萬里魂歸迷故國 千家淚酒哭忠臣(부흉천혈시심진 장절편경천하인 만리혼귀미고국 천가루주곡충신·가슴을 갈라 피를 뿌려 그 진심을 보였으니/장한 절개 천하를 놀라게 했네/그 혼이 만 리에서 돌아와 고국을 헤매니/집집마다 통곡하며 충신을 기리네)…’
탑 오른쪽에는 1963년 이장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가 쓴 ‘殉國大節(순국대절·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큰 절개)’ 휘호와 1907년 밀사들이 소지했다는 당시 대한제국 황제 고종 신임장이 새겨져 있다.
탑 왼쪽에는 앞에 인용된 만가를 필자 육필로 따로 새겨놓았다. 필자 이름은 원세개(袁世凱)다.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에 들어와 1894년 청일전쟁 때까지 조선 국왕 고종 위에서 조선을 좌지우지했던 청나라 관리다. 조선이 부국도 강병도 체제 개혁도 할 수 없었던 속국 체제의 상왕이었다.
그러니 우습지 않은가. 조선 독립을 호소한 애국자 묘역에 그 조선을 일찌감치 말아먹은 청나라 관리와 대한민국 대통령, 대한제국 황제 흔적이 동격(同格)으로 붙어 있으니.
옛날에도 그랬다. 1882년 11월 27일 조선과 청나라가 맺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에는 이렇게 규정돼 있다. ‘중국이 속방(屬邦)을 우대하여 장정을 제정한다. (장정 개정은) 수시로 청나라 북양대신과 조선 국왕이 협의해 처리한다.’
중국에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고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 반년 뒤 조선이 청나라 속국으로 제대로 전락한 터무니없는 옛날이야기.(2022년 1월 12일 ‘조미조약 체결 전 조선 대표는 청 황실에 삼궤구고두례를 올렸다’ 참조)

▲헤이그 밀사 이준 묘역. 오른쪽에는 묘역 조성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 휘호와 밀사 사건 당시 대한제국 황제 고종 신임장이, 왼쪽에는 조선을 10년 동안 통치한 원세개 글이 새겨져 있다./박종인
임오군란, 그리고 작심한 청나라
조선이 미국과 조약을 맺고 두 달 뒤 임오군란이 터졌다. 1882년 양력 7월 23일이다. 8월 19일 청나라에 출장 중이던 조선 관료 김윤식과 어윤중이 이리 주장했다. “난군 뒤에는 대원군이 있으니 이는 내란이다. 일본이 개입하기 전 출병해 평정해 달라.”(김윤식, ‘음청사(陰晴史)’ 1882년 음력 6월 19일)
이미 청 정부 최고의사결정기관인 판리군기사무처는 이홍장에게 조선 출병을 지시한 터였다. 청 정부는 조선을 청의 마지막 속국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권혁수, ‘이홍장의 조선인식과 정책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논문, 1999, p90) 김윤식이 주문하기 전인 8월 10일 청나라 군사가 제물포 월미도 앞바다에 도착했다. 정여창 부대가 승선한 이 군함에는 조선 관리 어윤중도 탑승했다. 조미조약을 중개한 마건충도 함께였다.
조미수호조약 본문에는 조선이 중국 속국임을 삽입시키지 못한 청에게 또 기회가 왔다. 정여창 부대에 이어 김윤식이 동행한 오장경 부대가 아산만으로 상륙했다. 8월 25일 청나라 연합부대가 용산에 진영을 차렸다. 다음날 청군은 흥선대원군을 용산 병영으로 초대해 이렇게 통고했다. “황제가 책봉한 국왕을 속였으니 실로 황제를 업신여긴 죄, 용서 못한다(欺王實輕皇帝也罪當勿赦·기왕실경황제야죄당물사)!”(마건충, ‘동행삼록(東行三錄)’, 1882년 음력 7월 13일) “무슨 꿈속에서 뜬구름 잡는 소리냐(將作雲夢之遊耶·장작운몽지유야)”라고 대원군이 저항했다. 사령관 보좌관이 대원군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일으켜 세운 뒤 끌고 나갔다.
대원군은 천진으로 압송됐다.(심조헌, ‘용암제자기(容庵弟子記)’: 沈志遠, ‘袁世凱與張謇’2, 古今 52, 古今出版社, 上海, 1944, p1911, 재인용) 청 정부는 대원군에게 ‘영구 귀국 금지’ 처분을 내렸다. 그해 12월 또 심문을 받는데, 대원군이 말했다. “천하(天下) 대세에 따라 나라 개방도 해야 하니.” 그러자 젊은 청 관료 오여륜이 쏘아붙였다. “천하라고? 일국(一國)에 대해서만 말하라(莫言天下 執事且論一國·막언천하 집사차론일국).”(대원군, ‘보정부담초(保定府談草)’)
조청상민수륙장정과 속국 조선
조미조약 체결 나흘 뒤인 그해 5월 26일 청 정부는 천진에 있던 김윤식과 어윤중에게 조-청 교섭문제를 이리 통보했다. ‘조선은 중국 속국이어야 한다. 베트남과 프랑스가 조약을 맺을 때 베트남이 중국 속국임을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 침략을 받았다. 체결 업무는 북양대신 이홍장과 조선 국왕 대표가 진행한다.’ 어윤중은 기존 조공 체제에 대해 조공 물량 같은 부분적 수정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권혁수, 앞 논문, p109~111)
그리고 임오군란이 터졌다. 협상은 중단됐다. 군란이 청군에 의해 진압되고 중국은 갑(甲)이 됐다. 그리하여 그해 11월 27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됐다. ‘고종실록’에는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이라고 기록돼 있다. 내용은 이러했다. ‘조선이 오랫 동안 제후국임은 (중략) 다시 의논할 여지가 없다(朝鮮久列藩封 毋庸更議·조선구열번봉 무용갱의).’ ‘중국 관리가 조선 항구에 주재하며, 조선 관원과 견해가 충돌하면 북양대신에게 조회한다.’ ‘중국상인 범죄는 중국이 심의하고 조선인 범죄는 중국 관리와 협의해 처리한다. 중국 내 조선인 범죄는 중국이 심의한다.’ 전문에는 이런 조항이 더 붙어 있었다. ‘이는 중국이 속방(屬邦)을 우대하는 뜻이므로 다른 나라가 동일한 이득을 보라는 뜻은 아니다.’
중국은 조선 땅에서 마음대로 장사하고 조선은 중국에서 중국 법을 지키며 장사한다는 내용이었다. 조약 명칭은 대등한 국가 간 ‘조약(條約)’이 아니라 주국과 종국 사이 맺는 ‘장정(章程)’이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삽입시키지 못한 속국 조항을 청나라는 6개월 뒤 대놓고 장정 전체에 규정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서울 수유리 이준열사 묘에 있는 원세개의 만가(輓歌)./박종인
총독 원세개와 잃어버린 12년
임오군란이 평정되고 조중장정이 체결되고도 청나라 군사는 조선에 남았다. 군란으로 군사가 와해되자 고종은 청군 사령관 오장경에게 청나라식 친위군 창설을 요청했다. 그 창설 작업을 맡은 이가 바로 용산 청나라 병영에서 대원군을 납치해 그로 하여금 40대 관리에게 천하를 논하려는 입을 다물게 만든, 스물세 살짜리 젊은 사령관 보좌관 원세개(袁世凱)였다.(이양자, ‘조선에서의 원세개’, 신지서원, 2002, p29)
1884년 민비 척족 요청에 의해 갑신정변을 효과적으로 진압한 원세개는 이후 원대인(袁大人)이라 불리며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라는 직책으로 조선을 통치했다. 직책명은 조선에 주재하는 청나라 교섭 및 통상 대표라는 뜻이지만 인사권까지 장악한 실질적인 총독이었다.
그 1882년부터 1894년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 직후 원세개가 청으로 급거 귀국할 때까지 12년 동안 아시아에는 많은 일이 벌어졌다. 군사만 봐도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졌다. 청나라에서는 북양함대라는 아시아 최강 해군이 창설됐다. 이를 본 일본은 이에 맞서는 근대 해군을 조직하고 북양함대에 필적하는 군사력을 키웠다.
그사이 조선은 청나라 요청에 따라 영선사를 파견해 소총 공장을 견학하고 탄알 제조창을 만들었다. 임오군란이 폭로한 신분과 경제적 모순에 대한 해결책은 나오지 않고, 청나라에 기대던 민씨 척족 정권은 원대인과 더불어 사대 체제 속에 안락했다. 1894년 그 민씨 정권에 대한 반발이 동학전쟁으로 터졌을 때, 고종 정권은 바로 그 원대인에게 청나라 병사를 불러 민란 진압을 청했다. 20세기를 코앞에 두고 12년을 상실한 것이다.

▲1887년 청의 방해공작을 뚫고 조선이 미국에 전권대사를 보낸 뒤 1889년 워싱턴DC에 설치한 공사관. 1893년 사진이다. /미 헌팅턴대도서관(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반전, 조선 국왕의 읍소(泣訴)
1887년 조선이 미국에 전권공사를 파견하려 하자 청나라는 ‘속국의 공사 파견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반발했다. 결국 청이 조건을 걸었다. ‘주재국에 도착하면 바로 청나라 공사관에 보고하고 부임인사 또한 청 관리와 동행하며’ ‘공식 모임에는 청국 관리 뒤를 따르고’ ‘중대 외교 문제는 반드시 청국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영약삼단(另約三端)’이다. 조선 정부는 이를 수용했다. 하지만 초대 공사 박정양은 워싱턴DC 도착과 함께 독자적으로 행동하며 대통령 클리블랜드에게 신임장을 제정해버렸다. 1888년 내내 원세개는 박정양을 소환해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1891년 10월 조선은 박정양을 중용하지 않겠다고 청에 약속해줬다. 조선의 자주 의지가 보이는 사건이었다.(권혁수, 앞 논문, p242~246)
그런데 1894년 동학전쟁이 터졌다. 청나라 군사를 부르자 일본군까지 출병했다. 일본군은 청군을 대신해 무자비하게 동학 농민을 진압했다. 경복궁까지 침입했다. 그리고 일본 지원을 받은 근대 개혁, 갑오경장이 시작됐다. 그러자 자주 외교를 반짝였던 그 고종이 청 황제에게 편지를 쓴다. 민씨 일가인 민상호(閔商鎬)가 밀사로 파견돼 이를 황실에 전달했다.
‘500년 동안 중국이 하사한 인물을 왜적이 가져갔으며 십수년 구입해 병기고에 소장한 무기를 모두 빼앗겼나이다. 천조(天朝)에서 구원을 내려 주시기를 단단한 충성과 정성으로 애걸하옵나이다(斷斷忠悃乞賜救援·단단충곤걸사구원).(‘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16, 1308, p9, 1894년 음력 7월 5일: 유바다, ‘청일전쟁기 조청항일 연합전선의 구축과 동학농민군’, 동학학보 51, 동학학회, 2019, 재인용) 그때 풍경이나, 2022년 겨울날 수유리에서 목격한 풍경이나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02.09
290. 갑오년 삼국지, 운명의 청일전쟁 ③황실 부패가 초래한 대참패
군함 만들 돈으로 淸 황실은 서태후 환갑잔치를 벌였다

▲청일전쟁은 일본 승리가 예견된 전쟁이었다. 작심을 하고 온 나라가 일치단결해 군비 확장에 뛰어든 일본과 파벌로 분열된 권력자들이 ‘서태후 환갑잔치’라는 허황한 행사를 위해 군사예산을 궁궐 신축공사에 투입한 청나라와는 겨룰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전쟁 전 천하 무적이었던 청나라 북양함대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허술한 군기를 노출하고 함대 중요 군사 기밀을 자발적으로 공개하는 오만까지 저질렀다. 청나라 패전은 필연이었다. '대고산만 대격전'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판화 왼쪽에 참전한 북양함대 군함 이름이, 오른쪽에는 일본 함대 군함 이름이 적혀 있다. /일본국회도서관
‘인종을 개량하지 않는 한…'
1894년 갑오년 7월 25일 조선 아산만 풍도 앞바다에서 시작된 청일 두 나라 사이 전쟁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번져갔다. 아산과 성환 육전에 이어 평양에서 두 나라가 맞붙었고, 전선은 압록강 앞 황해해전으로 확대됐다. 황해를 건넌 전선은 당시 무적함대라 불렸던 북양함대 사령부 대련항 포격으로 끝을 맺었다. 그 매 전투에서 청은 참패했다. 청에게는 대참패, 일본에게는 대승첩이었다. 성환 전투 직후 그리고 평양성 전투 직전, 당시 종군했던 일본 ‘박문관’ 기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지나인이 인종을 개량하지 않는 한 이 전쟁은 일본이 이긴다.”(‘일청전쟁실기’ 2편, 박문관, 1894년 9월 10일) 개전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그 가을날, 이 일본기자는 무슨 근거로 이렇게 예언을 한 것인가.
예언의 징조, 나가사키 난동
함대가 공식 출범하기 전인 1886년 8월 10일 북양함대가 일본 나가사키에 입항했다. 모두 6척이었다. 목적은 석탄 보충과 선박 수리였다. 군함 규모가 워낙 커서 중국에는 이들을 수리할 수 있는 독(dock) 시설이 없었다. 입항 사흘째인 8월 12일 미쓰비시 조선소에서 하선한 청 수군들이 함께 정박해 있던 일본 해군 병사들과 패싸움을 벌였다. 민간인까지 개입된 두 차례 싸움 끝에 청군에는 사상자가 50명 발생했고 일본 측은 31명이 죽거나 다쳤다.
8월 20일 협상을 위해 파견된 일본 관리에게 이홍장은 “청 해군을 공격한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거칠게 응대했다.(馮靑, ‘中國海軍と近代日中關係’, 금정사, 2011, p27) 게다가 7000톤급인 정원호는 1853년 도쿄만에 출현해 개항을 요구했던 흑선(黑船), 3000톤급 미국 군함 미시시피호보다 더 컸다. 그런 군함이 네 척이나 나가사키에 기항해 난동을 부린 것이다. 일본 민간인들은 충격을 받았다.
어렵사리 외교적으로 사건은 무마되고, 이후 북양함대는 두 차례 더 일본을 방문해 천조국의 위엄을 과시했다. 그때 북양함대는 아시아 최강이었다.
▲청나라 북양함대 사령관 정여창이 일본에 항복하는 장면을 그린 일본 판화 상상도. 정여창은 황해해전에 패색이 짙어지자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 /영국박물관
천조국의 오만과 혹독한 대가
1891년 6월 30일 북양함대가 두 번째 일본을 찾았다. 이번에는 연료 수급이 아니라 친선이 목적이었다. 함대는 모두 여섯 척으로 구성됐다. 7000톤급 진원, 정원호를 비롯해 경원, 래원, 치원과 정원호. 모든 군함에는 먼 곳을 누르고(鎭) 바르게 만들고(定), 경략하고(經) 따위 이름이 붙어 있었다. 일본 해군 또한 군함이 6척이었는데, 총 톤수(2만5260 대 1만5730)를 비롯해 군사력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난동은 없었다. 대신 청 사령관 정여창은 도쿄, 요코하마, 나가사키 같은 항구를 순방하며 고관대작을 함상으로 초대해 파티를 벌였다. 함내를 견학도 시키며 대국의 위엄과 교양을 한없이 과시했다. 이듬해 6월 23일 북양함대는 7000톤급 진원(鎭遠)호 대신 소형선인 위원호를 방문단에 포함시켜 일본을 찾았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그리고 1894년 압록강 앞바다에서 황해해전이 터졌을 때, 일본 함대는 북양함대 사령선인 정원호 하단 석탄창고와 상층 양쪽 사관실과 두 칸짜리 최상부 선장실을 집중 포격했다. 또 정원호 사령탑을 맹폭격해 사령관 정여창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 모두가 두 번째 나가사키 기항 때 북양함대가 일본 군부와 관료와 기자들에게 스스로 공개한 군사 기밀이었다. 세 차례 방일 과정에서 청나라는 흥에 겨워 함내 구조를 노출하고 치명적인 정보를 일본에 제공해 버린 것이다.(馮靑, 앞 책, p43) 천조국이라는 한물 간 오만과 일본을 그저 ‘먼 곳에 있는 근심거리(遠慮·원려)’로 생각했던 안이한 판단이 초래한 현실이었다.
일본의 각성과 굴기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근대화 작업에 뛰어들었다. 막부와 막부 토벌파는 속도를 달리하며 광적으로 서구화 작업에 몰두했다. 반막부파가 승리한 이후 메이지유신은 일본을 주변 아시아 국가와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올려놓았다.
1884년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터졌다. 정변은 청나라 군사에 의해 진압됐다. 이듬해 일본 전권대신 이토 히로부미가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을 만나 천진조약(天津條約)을 맺었다. ‘한 나라가 조선에 출병하면 다른 나라도 동시 출병한다’는 내용이다.
그때 이토가 이홍장에게 이리 말했다. “청나라는 진보와 개혁이 필요합니다.”(일본 외무성, ‘일본외교문서’ 28권 2책, p1089) 메이지유신을 이끄는 이토 스스로를 자랑하는 말이기도 했고 서양 제국주의에 시달리는 동족 황인종 국가에 대한 충고이기도 했고, 경고이기도 했다.
9년 뒤 조선에 동학농민전쟁이 터졌다. 조선 고종-민씨 척족 연합정권 요청에 청이 조선으로 출병했고, 일본이 그 조약을 내밀며 동시 출병했다. 조선에서 청일전쟁이 터졌다. 일본이 이겼다. 아시아는 일본 놀이터로 변했다.
북양함대가 나가사키에서 자폭(自爆) 수준으로 공개해버린 군사 정보가 일본 승리의 큰 요인이었음은 분명했다. 하지만 전쟁 전 청일 양국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면 천하무적 청나라 해군의 몰락은 ‘1+1=2′라는 셈법보다 더 답이 쉽다. 청은 자멸했고 일본은 각성한 것이다.
나가사키의 충격과 일본의 각성
북양함대가 일본 항구 곳곳에서 벌인 뻘짓은 일본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리고 1891년 2차 방일 때 정원호가 히로시마 구레(吳)에 기항했을 때, 당시 진수부 참모부장 도고 헤이하치로는 정원호 주포에 수병들이 더러운 빨래를 걸어놓은 장면을 목격했다. 함대원은 도박과 흡연이 만연했고 군복에는 치렁치렁한 소매가 달려 있었고 군화는 헐렁거려서 1리만 행군해도 적에게 포로가 될 판이었다. 일본은 저 거대한 철갑선이 던진 충격과 그 충격 아래 노출된 허깨비 군기(軍紀)를 놓치지 않았다.
이미 1872년 일본은 중국 대륙에 낙선당(樂善堂)과 일청무역연구소를 설립하고 정보 수집에 돌입했다. 낙선당은 5년 뒤 ‘청국통상총람’이라는 두툼한 보고서를 작성해 정부에 제출했다. 이 첩보전에 또 청 정부 뻘짓이 포함됐다. 1893년 일본군 참모본부 장교들을 답방 형식으로 초청한 것이다. 이들은 무기 제조창인 천진기기국과 군사훈련장인 무비학당을 이 잡듯 둘러보고 귀국했다. 이들이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숫자로 보면 우리가 참패하겠지만 정신적으로는 우리가 전승(全勝) 한다.”(李元鵬 外, ‘晩淸近代化軍事改革的悲歌’, 軍事歷史 2014(03), 軍事科學院軍事歷史和百科硏究部)
그 ‘숫자’ 또한 승리하기 위해서 일본은 거국일치로 군사력 증강 작업에 돌입했다. 북양함대 3차 방일 이듬해인 1893년 2월 10일 천황 메이지는 “군비 증강을 위해 매년 30만 엔을 하사하고 각료들 또한 봉급 10%를 갹출하라”고 명했다. 명은 이행됐다. 해군은 북양함대 거함(巨艦)에 맞설 수 있는 작고 빠르고 화력 또한 속공이 가능한 속사포로 무장한 군함을 속속 건조했다. 전쟁 직전 일본해군은 군함 31척, 어뢰선 24척을 보유한 강력한 군사집단으로 변신해 있었다.(馮靑, 앞 책, p38)
▲자희태후(서태후). 동치제 생모로 청말 권력을 휘두른 실세다. 극에 달한 사치와 부패로 청제국을 자멸시켰다. /위키피디아
궁궐 복원공사로 날려버린 군함들
그때 청나라 실권자는 서태후였다. 서태후는 당시 황제 광서제의 고모였다. 아편전쟁 이후 청 조정은 근대화와 전통적 쇄국 사이에 분열돼 있었다. 서태후를 지지하는 만주족 관료들은 쇄국을 주장했고 한족 관료들은 개방을 지지했다. 개방은 필연이었다. 두 계파가 타협해 나온 방책이 중체서용(中體西用), 서양 기술만 도입하는 개방이었다. 개방을 주도한 사람은 한족인 북양대신 이홍장이다.
1860년 2차 아편전쟁 때 북경에 있는 궁궐 청의원(淸議園)이 서구 열강 연합군에 파괴됐다. 서태후 파는 이 청의원을 복원해 수구파 구심점으로 삼으려 했다. 복원공사는 바로 그 자리에 해군학교를 건립한다는 계획으로 명분을 삼았다. 1886년 이화원(頤和園)으로 개칭한 청의원 복원공사가 시작됐다. 해군학교 건립 예산이 투입됐다.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1888년 3월 13일 광서제가 이렇게 발표했다. ‘이화원을 수리해 대경(大慶)의 해에 군신을 거느리고 축하하리라.’
‘큰 경사의 해’는 서태후가 환갑을 맞는 1894년이다. 그해 1월에 벌어질 환갑잔치를 위해 이화원을 복원하는데, 그 비용 조달을 ‘해군학교 설립’으로 포장해버린 것이다.(戚其章, ‘颐和園工程與北洋海軍’, 社会科學戰線 1989(04), 吉林省社会科学院) 황명이 떨어진 그 1888년 북양함대가 독일산 철갑선을 갖추고 공식창군됐다.
하지만 해군은 260만 냥이라는 거금을 확보해 놓고도 그 이자를 이화원 공사에 투입하도록 규정하는 바람에 원금은 한 푼도 사용하지 못했다. 이화원에 있는 곤명호 뱃놀이용으로 소형 선박을 자체 예산으로 제작하고 천진~이화원을 잇는 선로와 7량짜리 기차도 도입해야 했다. 1891년에는 100만 냥을 공사자금으로 대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후 청일전쟁이 터진 1894년까지 북양함대는 단 한 척의 군함도, 단 한 문의 대포도 새로 도입하지 못했다. 1893년 이홍장이 ‘(일본군과 같은) 속사포 12문을 정원, 진원호에 탑재해달라’고 주청했으나 이는 설치되지 않았다. 전쟁 직전인 1894년 5월 이홍장이 상소문을 통해 이렇게 고백했다. “아래에서는 신식 쾌속선을 주문하는데 우리 군은 창건 이후 단 한 척도 증강하지 못했다. 모두 신(臣)의 책임이다.”(李鴻章, ‘覆奏海軍统將折’: 游戰洪, ‘德國軍事技術對北洋海軍的影响’,中国科技史料 19권(04), 清華大科學技術史暨古文献研究所, 1998, 재인용)
함대 예산은 환갑잔치 비용으로 전용됐다. 대청제국이 호령하던 천하는 그 잔칫집 밥상으로 사라졌다. 벌 떼처럼 달려든 일본군에 의해 천하가 붕괴되던 그 꼬라지를 다음 회에 구경해본다.<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