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9/ 문화재2/
◎서체
■ 朝鮮朝列聖御筆 - 朝鮮朝 임금님들의 친필
肅宗大王御筆
▲使人長智英如學:지혜를 기름은 배옴만한 것이 없고
若玉求文必待琢:구슬의 문채는 다듬기를 기다리는 법.
經書奧旨干誰問:경서의 깊은 뜻을 누구에게 물으랴?
師傳宜親不厭數:스승을 친히하여 자주 물어야 한다네.
英祖大王御筆
仁祖大王御筆
宣祖大王御筆
▲夭桃一孕花:온 가지에 곱게 핀 복사꽃이
變幻三二色:두세 가지 빛갈로 변환했네.
植物尙如玆:식물도 오히려 이와 같아니
人情宜反覆:인정이 번복함은 마땅하구나.
정조국문어필첩
▲정조(1752~1800)가 외숙모에게 보낸 한글 편지를 묶은 어필첩이 경매에 나온다.
세종대왕 친필
■ 붓글씨에 드러난 지도자들의 기질
꼬장꼬장하고 칼칼한 글씨(박정희 전 대통령), 여백 없이 종이를 꽉꽉 채운 제멋대로 글씨(김영삼 전 대통령), 기교 없이 굳세게 써내려간 글씨(백범 김구)…. 대한민국 역대 지도자의 서예 작품엔 그들의 기질이 녹아있다.
글자는 당대의 시대정신과 정치사상을 담았고 글씨는 성격을 드러낸다. 다음 달 7일까지 서울 소공동 롯데갤러리에서 열리는 ‘홍익인간 1919∼2013: 정전 60주년 기념 대통령 휘호전’에서 역대 대통령을 닮은 글씨를 볼 수 있다.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자 대한민국 첫 대통령 이승만과 임시정부 주석 김구부터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전 대통령까지 역대 대통령과 대통령 부인의 휘호 50여 점을 전시한다. 무료. 02-726-4430 필체로 읽은 이승만은 의지가 강하고 원칙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기교가 빼어나고 굳세면서 부드러워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뛰어난 필체로 평가받는다. 또박또박 굵게 쓴 김구의 ‘홍익인간’에는 그의 신념과 고집이 묻어난다.
김영삼의 글씨엔 자신 있게 밀고 나가는 고집과 좌충우돌 성격이 배어 있다. 여백 없이 쓰는 통 큰 사람이다. 오뚝이 같은 삶을 살았던 김대중의 휘호 ‘행동하는 양심’엔 민주화에 대한 그의 신조가 담겨있다.
전주영 기자 aimhigh@donga.com
백범 김구 선생의 휘호
▲【서울=뉴시스】국내 미술품 대표 경매회사 A-옥션이 8일 광복절 68주년을 맞아 백범 김구 선생의 유묵인 '휘호(종이에 먹, 101 x 27.5 cm, 1940, 추정가 800만원~1,500만원)'를 경매에 출품한다고 밝혔다.
이번 경매에 나온 백범 김구 선생의 휘호는 940년 10월 한국광복군 창설을 기념하고 의지를 다지고자 이용하(李龍夏)동지(운허스님 1892~1980)에게 써준 것으로 백범 자신의 확고한 독립철학과 신념을 반영하고 있어 특유의 떨림서체가 주는 느낌이 단아하면서도 강직함을 보여준다. 경매는 오는 14일부터 20일까지 진행된다.
2013.08.08. (사진=A-옥션 제공)
■ 法古創新(법고창신)의 김충현 현판 글씨
▲서울 경복궁(景福宮) 영추문(迎秋門), 1975.
붓을 통해 국어 사랑을 실천한 선각자,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1921~2006) 선생. 그는 일찍이 한글 쓰기에 관심을 두고 1942년 《우리 글씨 쓰는 법》이라는 궁체 쓰기에 대한 저서를 냈고,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월인석보》 등을 연구해 ‘한글 고체’를 창안했다.
일중선생기념사업회(이사장 김재년)가 1월 15일부터 서울 관훈동 백악미술관에서 기획전 〈김충현 현판 글씨, 서예가 건축을 만나다〉를 열고 있다. 전시는 김충현이 다양한 계층에게 써준 현판(글자나 그림을 새겨 문 위나 벽에 거는 널조각)을 통해 20세기 한국 사회 지성인들 간의 교유관계를 밝히고, 그의 현판이 가진 역사적 의미를 찾아보고, 시기별 글씨를 통해 그의 서풍의 특징과 변화를 살피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1. 서울 한강대교(漢江大橋), 1957.
김충현은 〈한강대교〉의 창작 경위를 이렇게 말한다.
“6·25전란으로 파괴된 한강대교가 1956년 완전히 복구되어 준공식을 가졌다. 지금까지 제1한강교 입구를 지키고 있는 제자(題字)를 부탁해 온 시청 직원의 태도나 그가 준비해 온 물건을 보고 나는 놀랐다. 그 보따리 안에는 당시에는 보기 드문 한지가 글씨 쓰기 좋은 크기로 수십 장 준비되어 있었다.
시청 직원은 말했다. ‘이 대통령께 휘호를 받으려고 경무대에 이것을 준비해 갔는데 대통령께서 한글 서예는 익숙지 않으니 선생을 찾아보라는 지시가 있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이승만 대통령이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 시청 직원의 정중한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또 한 번 놀란 것은 제자에 대한 사례금이었다. 대통령의 한마디 덕분에 지금 돈으로 100만 원 정도의 많은 사례금을 받았다.”
이는 35세 젊은 서예가 김충현의 당시 위상을 충분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2. 서울대학교 석제, 1964.
〈서울대학교〉는 세로쓰기인데 정연하면서 전아(典雅)한 서풍이 한글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다. 600년 한글 서예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김충현 궁체의 전범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국립대학의 위상이 해정한 글씨와 잘 어우러진다.
김충현의 현판이 걸린 장소는 궁궐, 사찰, 사당, 서원, 서당, 미술관, 대교(大橋), 명사(名士)의 생가 또는 고택, 전적지(戰跡地), 자택 등 다양하다. 가장 이른 것은 1942년, 가장 늦은 것은 1997년으로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글씨를 벗 삼아 왔다.
정현숙 열화당책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김충현은 모든 서체에 두루 능숙했으나, 그중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예서(隸書·한자 서체의 일종)”라며 “법고(法古·옛것을 보존함)를 품은 창신(創新·새롭게 창조함)의 예서 서풍으로 ‘일중풍(一中風)’ 예서를 탄생시켰다”고 말했다. 덧붙여 “화려하면서도 세련되고 유려하면서 힘차고 정연하면서 변화가 많아 노련미와 원숙미를 갖춘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서울 경복궁(景福宮) 건춘문(建春門), 1961.
그의 현판으로는 경복궁의 〈영추문(迎秋門)〉 〈건춘문(建春門)〉과 한글로 쓴 〈한강대교〉 〈독립기념관〉 등이 있다. 김충현은 ‘옛날에는 대궐문의 현판은 명필로서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썼다는 전통이 있어 지금도 나는 경복궁의 〈건춘문〉 〈영추문〉 두 대궐문의 현판을 쓴 데 대해 일생의 영광으로 삼고 있다’며 ‘작가의 말’을 남기기도 했다. 전시는 2월 25일까지.⊙
▲서울 사직단(社稷壇), 1962.
▲순천 송광사(松廣寺) 무무문(無無門), 1991.
▲고창 선운사(禪雲寺) 일주문(一柱門) 전경.
▲서울 보문사(普門寺) 석굴암(石窟庵), 1971.
▲김제 모악산(母岳山) 금산사(金山寺), 1975.
▲천안 독립기념관(獨立紀念館), 1986.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2015.01.27
■ 김상진 = 서각 작품 토담
■ 백남준 = 1989년 텔레비전 드로잉 친필사인
■ 이주희 - 진용
◎ 세계문화유산
■ 세계문화유산 한국의 산사를 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한국의 산사를 가다] 동아일보
2018-07-11
<1> '불교문화재의 보고' 양산 통도사
바람이 춤추고 서늘한 소나무 숲길… 그 끝에서 부처를 만나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통도사 금강계단. 가운데 종 모양의 부도 안에 진신사리가 있다. 송광사, 해인사와 더불어 3보 사찰로 꼽히는 통도사는 국보 제290호인 대웅전과 금강계단을 포함해 보물 18점, 경남유형문화재 50점을 보유한 불교 문화재의 산실이다. 양산=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 ‘산사(山寺), 한국의 산지승원’ 7곳이 지난달 3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 사찰들은 1000년 넘는 역사를 이어오는 신앙·수도·생활 기능이 이어진 종합승원이자 각종 문화재가 가득한 문화유산의 보고다. 동아일보는 한국의 13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사찰 7곳의 아름다운 모습과 숨은 역사를 시리즈로 소개한다. 》
▲통도사 대웅전에는 다른 사찰과 달리 불상이 없다. 그 대신 부처의 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을 볼 수 있도록 한쪽 벽면을 유리로 만들었다. 양산=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장맛비가 오락가락 내린 9일 경남 양산시 통도사. 입구에 들어서자 울창한 소나무 숲길이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넨다. ‘무풍한송로(舞風寒松路)’라는 이름처럼 바람이 춤추고 서늘한 소나무가 가득한 길. 시끌벅적한 바깥세상과 단절되는 듯한 오묘한 기분을 선사한다.
길의 끝자락에 다다르면 통도사에 시주한 이들의 이름을 새겨 넣은 바위 조각들이 오른쪽에 쌓여 있다. 쉽사리 지나치기 쉽지만, 단원 김홍도(金弘道·1745∼?)와 그의 스승인 김응환(金應煥)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역사 속 이름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숲길을 지나 일주문을 건너 사천왕문 사이로 들어섰다. 통도사 전각과 영축산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통도사는 크게 상·중·하 노전으로 나뉜다. 646년 신라 자장율사가 창건한 뒤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며 지속적으로 중건·중수되면서 규모가 계속해서 커졌기 때문이다.
동서로 이어지는 이동 축을 따라 가장 먼저 하노전이 등장한다. 오른편에 위치한 극락보전에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이란 벽화가 그려져 있다. 승려와 백성이 배를 타고 극락세계로 떠나는 모습을 담았다. 자세히 보면, 뱃사람 가운데 한 명만 뒤를 돌아보고 있다. 속세에 미련이 남아 이승을 바라보는 것. 사찰은 이런 ‘숨은 코드’를 찾아보는 즐거움이 있다.
하노전의 중심 전각인 영산전(보물 제1826호)에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그린 팔상도(보물 제1041호)가 걸려 있다. 통도사는 팔상도를 비롯해 불교회화 작품만 600여 점을 소장한 보물창고. 이날 동행한 문화재위원회 위원인 명법 스님은 “통도사에는 예부터 유명 화승(畵僧)들이 계보를 이을 정도로 문화·예술의 가치를 중시했던 사찰”이라고 설명했다.
본당에 들어서는 마지막 문인 불이문(不二門)을 지나면 사찰의 가운데 공간인 중노전이 등장한다. 여기엔 스님들이 실제 수행을 하는 공간인 ‘원통방(圓通房)’이 있다. 매일 오전 6시 통도사 스님들이 다같이 발우공양을 드리고, 경전 공부 등을 진행한다. 내부로 들어가 보니 사찰의 가장 큰 어른인 방장(方丈) 스님부터 막내 스님의 자리까지 벽면에 위치가 표시돼 있다.
명법 스님은 “일본의 산사들은 외형적 전통은 유지하고 있지만 승려들이 출퇴근을 하면서 생활 기능을 잃었고, 중국은 문화대혁명 등 굴곡진 현대사를 거치면서 전통 불교의 명맥이 끊기다시피 했다”며 “통도사는 1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통적인 신앙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불교의 살아있는 역사를 보여주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마지막 상노전으로 가면 통도사의 대표 문화재인 대웅전과 금강계단(국보 제290호)을 만날 수 있다. 통도사 대웅전은 다른 사찰의 중심 전각과 달리 불상이 없다.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셔 놓은 금강계단을 바라볼 수 있게 한쪽 벽면을 뚫어놨기 때문이다. 사각형 2중 기단으로 구성된 금강계단은 소나무 숲과 대웅전에 둘러싸여 아늑하다. 볼록한 종 모양으로, 고대 인도의 부도와 같은 모습이다.
잠깐 발걸음과 숨소리를 멈췄다. 소나무 숲에선 딱따구리가 ‘똑똑똑’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정각마다 수행을 알리는 목탁소리도 함께 퍼져나갔다. 자연과 문화유산, 살아있는 신앙의 어울림을 한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곳. 세계유산의 품격을 지닌 통도사다.
양산=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2> 건축의 백미 영주 부석사
돌계단 끝에서 툭 터지는 시야… 소백산맥 품은 ‘극락 세계’
https://youtu.be/X9poVOFcKzI
《“몇날 며칠을 두고 비만 내리는 지루한 장마 끝에 홀연히 먹구름이 가시면서 밝은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듯한 절은 영주 부석사다.”(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2’ 중에서)
장마 끝에 맑게 갠 날씨를 선사한 16일. 경북 영주시 소백산국립공원에 있는 부석사(浮石寺)에도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여느 유명한 산사 입구처럼 피서를 온 인파로 북적거리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산세가 험하고, 계곡이 없는 이곳은 취락시설이 거의 없어 조용한 경관을 자랑한다. 고요한 산사(山寺)를 즐기고 싶은 이들에게 안성맞춤인 곳이다. 》
▲한국 전통 건축의 백미이자 부석사의 법당인 무량수전(오른쪽) 등 소백산맥을 감싸고 있는 부석사 모습. 무량수전 앞에는 석등(국보 제17호)과 건물 내부에 위치한 소조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45호) 등 다양한 문화재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영주=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부석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찰의 정중앙에 위치한 범종루와 안양루 등 일렬로 배치돼 있는 누각들이다. 이날 동행한 문화재위원인 명법 스님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겹치는 험준한 지형에 위치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누각 밑의 계단을 지나야 상층부로 올라갈 수 있는 ‘누하(樓下)진입’ 구조를 채택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사찰의 아래쪽에선 한눈에 파악하기 힘든 부석사의 전경이 계단을 오를 때마다 조금씩 얼굴을 내비친다.
부석사의 법당인 무량수전(無量壽殿·국보 제18호) 앞에 위치한 안양루에 올라서면 봉황산을 포함한 소백산맥의 수려함이 눈앞에 펼쳐진다. 선선한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와 30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임에도 기분 좋은 시원함을 선물한다. 안양루의 벽면에는 이곳을 방문하거나 시주한 이들의 이름이 적힌 편액이 걸려 있다.
“그림 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있고, 천지는 부평 같아 밤낮으로 떠있구나”
이곳에서 조선 후기의 방랑 시인 김삿갓(본명 김병연·1807∼1863)이 남긴 수려한 시 한 수를 감상하는 여유를 즐겨 보자.
▲16일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진이 부석사 장경각 내부에서 인경 작업을 하고 있다. 영주=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안양루 뒤편에는 부석사의 자랑이자 한국 건축의 백미 무량수전이 위치한다. 특징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는 배흘림기둥. 가운데가 볼록하게 보이는 시선의 왜곡 현상을 활용해 배 부분을 더 두껍게 강조하는 엔타시스 기법을 사용했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에서도 볼 수 있는 기법으로 당나라를 거쳐 우리나라에까지 유입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건축 기법을 동아시아의 사찰에서 만난다는 점에서 시공간이 무한하다는 무량수전의 의미가 더 깊게 다가온다.
무량수전 바로 옆에는 부석사의 창건설화와 관련된 큼지막한 너럭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625∼702)와 그를 흠모한 중국의 선묘낭자의 애틋한 로맨스를 간직하고 있다. 선묘낭자는 당나라로 유학 온 의상대사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깨닫고, 대신 용이 돼 신라로 귀국하는 스님을 수호한다. 이후 사찰을 짓기 위해 토착세력과 갈등을 겪던 의상대사를 돕기 위해 뜬 바위(부석)로 변해 반대 세력을 무찔러 준 것이다. 실제로 바위의 밑부분은 떠있는 것처럼 가파르게 꺾여 있다.
주요기사의상대사는 한국 불교의 화엄종을 집대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안양루 아래쪽에 위치한 ‘장경각’은 고려 시대 때 화엄사상의 내용을 적어 놓은 ‘화엄경판’ 500여 판을 보관 중이다. 마침 이날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진이 경판을 인쇄하는 인경(印經)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먹 냄새 가득한 곳에서 경판을 인쇄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고려시대 불교 수행자의 흔적이 내 눈앞에 얼핏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부석사의 숨은 매력은 사찰 동쪽 끝에 위치한 식당이다. 미리 예약한 일부 방문객에 한해 허용되는 식당은 소백산맥을 바라보며 식사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건강한 음식과 풍경을 함께 즐기고 있으면 저절로 몸과 마음이 모두 홀가분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영주=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3> 유교 향취 짙게 밴 안동 봉정사
투박한 주춧돌… 푸근한 정원… 소탈한 멋, 조선 선비 같네
▲봉정사는 가파른 산지라는 지형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건물을 조밀하게 짓고, 건물 전면에 툇마루를 설치하는 등 효과적인 가람 배치를 자랑한다. 만세루에서 바라본 대웅전의 모습. 안동=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이곳에서 노닌 지 오십 년, 젊었을 적 봄날에는 온갖 꽃 앞에서 취했었지. … 훗날 호사가가 묻는다면 말해주오, 퇴계 늙은이 앉아 시 읊었다고.”
16일 경북 안동시 봉정사에 들어서자 퇴계 이황(1501∼1570)이 가장 먼저 반긴다. 사찰 입구 계곡에 있는 정자인 ‘명옥대(鳴玉臺)’에서 퇴계가 이 시를 남긴 것. 열여섯 살 퇴계가 이곳에서 3개월가량 머물며 공부를 하고, 놀기도 했다고 한다. 원래 이름은 ‘물이 떨어지는 곳’이란 뜻의 ‘낙수대(落水臺)’였지만 귀향 후 50년 만에 다시 찾은 퇴계가 ‘옥구슬 소리가 나는 정자’라는 이름으로 바꿔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봉정사는 ‘선비의 고장’에 자리한 덕분에 불교뿐 아니라 유교의 색채도 짙게 배어 있다. 서애 류성룡(1542∼1607)을 기리는 병산서원과 퇴계를 모신 도산서원이 사찰과 가까우니 함께 둘러보면서 한국 정신문화의 뿌리를 같이 즐겨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우리나라 최고(最古) 목조건물인 극락전. 안동=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본격적으로 사찰에 들어서면 2층 누각인 만세루를 마주한다. 누각의 주춧돌을 자세히 보면 자연석 그대로를 활용하고, 기둥 돌 아래쪽과 자연스럽게 접합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물에서 볼 수 있는 ‘그랭이’ 공법으로,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추구했던 선조들의 숨은 코드인 셈이다.
만세루를 지나면 두 개의 주전(主殿) 중 하나인 대웅전(국보 제311호)이 정면에, 스님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화엄강당(보물 제448호), 무량해회 건물이 양 옆에 위치한다. 조선 초 건물로 추정되며 우리나라 다포계 건물(지붕을 받치는 공포가 여러 개인 양식) 중 가장 오래된 대웅전에는 독특하게도 건물 전면에 툇마루가 설치돼 있다. 이날 동행한 명법 스님(문화재위원)은 “전통 한옥식 구조를 사찰에 적용해 산사(山寺)라는 지형적 한계를 극복하려 한 것”이라며 “대부분 독립된 건물로 존재하는 ‘칠성각’이 대웅전 내부에 있는 등 봉정사에서만 볼 수 있는 이색적인 건축 요소가 많다”고 설명했다.
▲조선 후기 사대부 집안의 건축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영산암. 안동=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화엄강당 뒤편으로 이동하면 국내 최고(最古) 목조건물인 극락전(국보 제15호)이 나타난다. 12세기에 지은 극락전은 주심포 양식과 맞배지붕 등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유행한 다포식, 팔작지붕을 갖춘 대웅전과 비교해서 보면 한국 전통 건축의 변천사를 한곳에서 즐길 수 있다.
봉정사에서 놓치면 아까운 곳이 있다. 대웅전에서 동쪽으로 200여 m를 올라가면 나타나는 영산암(靈山庵)이다. 19세기에 지은 이 암자는 조선 후기 사대부 집안의 전형적인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마음을 바라보는 집’을 뜻하는 ‘관심당(觀心堂)’, ‘꽃비가 내리는 누각’의 ‘우화루(雨花樓)’ 등 예쁜 이름을 가진 건물에 둘러싸인 미음(ㅁ)자 구조다.
내부 정원에는 봉선화와 옥잠화처럼 수수한 꽃들이 주를 이룬다. 화려하기보다는 푸근한 매력을 선사하는 한국 정원의 미학을 대표하는 곳이다. 1999년 4월 방한한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이곳을 찾기도 했다. 명법 스님은 “조선의 선비와 한국 전통 불교는 소탈하며 끊임없이 도를 추구하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 매력을 가장 잘 발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봉정사”라고 말했다.
안동=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4> 국보.보물 15점 간직 보은 법주사
속리산 휘돈 바람에 ‘팔상전’ 추녀끝 풍경소리… 속세 번뇌 훌훌
사찰에 들어서면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탑인 팔상전(국보 제55호)이 반긴다. 전남 화순군 쌍봉사 3층 목탑이 1988년 화재로 소실되면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우리나라 전통 목탑이다. 이날 동행한 정병삼 숙명여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전통 탑은 화강암이 풍부한 특성 때문에 대부분 석탑이라는 점에서 팔상전은 매우 희귀한 문화유산이다”라고 설명했다. 5층인 팔상전 추녀 끝에는 물고기 모양의 풍경(종)이 달려 있다. 바람에 맞춰 화음을 내는 풍경소리가 그윽하다.
팔상전 내부에는 잉태부터 출가, 해탈 등 석가모니의 생애 중요 장면을 8개 그림으로 묘사한 팔상도가 있다. 팔상전에서 서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높이 33m의 금동미륵대불을 만날 수 있다. 금빛의 화려한 모습이지만 굴곡진 역사가 담겨 있다. 애초 금동미륵불상이 신라부터 조선 후기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 불상을 징발하면서 사라졌다. 이후 1950년대 시멘트로 불상을 만들었고, 1990년대 다시 청동불로 세운 것을 2002년 순금으로 덧씌우면서 현재의 모습이 됐다.
▲법주사는 속리산 기슭에 있지만 평탄한 지형을 가지고 있어 넓은 마당에 다양한 문화재가 가득하다. 3일 대웅보전(보물 제915호)에서 바라본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가운데 아래)과 팔상전(국보 제55호·가운데 위쪽), 금동미륵대불(오른쪽). 보은=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법주사에는 금동미륵대불처럼 웅장한 규모의 조형·건축물이 많다. 사찰로 들어서기 위해 거쳐야 하는 사천왕문은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대웅보전(보물 제915호)은 높이가 20m에 이른다.
이런 모습은 임진왜란의 상처에서 비롯됐다. 원래 법주사는 조선 중기까지 왕실의 지원 등을 받아 60여 동의 건물을 갖출 정도로 번성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대부분 건물이 사라지는 등 황폐해졌다. 전쟁이 끝난 후 당시 조선 불교를 이끌던 벽암 각성 스님(1575∼1660)의 주도하에 법주사는 전후 사찰 중건의 시범 사례가 됐다. 그 덕분에 각종 지원과 우수 인력이 집중적으로 투입돼 현재 국보 3점을 비롯해 보물 12점 등 각종 문화유산이 가득한 산사로 거듭날 수 있었다.
▲법주사 입구에 있는 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103호). 보은=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아름다운 공예 작품도 가득하다. 대웅보전 앞에 자리한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은 사자 두 마리가 마주 서서 뒷발로 석등을 떠받치고 있는 등 독특한 조형미를 자랑한다. 법주사 서편의 마애여래의좌상(보물 제216호)을 빼놓으면 아쉽다. 암벽에 조각돼 있는 불상으로, 두툼한 입술과 반듯한 어깨 등 정갈한 형태로 부처가 연꽃에 앉아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이 좌상 옆에는 법주사 창건 설화의 주인공인 의신조사가 불경을 실어오는 모습 등을 그려 넣은 조그마한 암각화가 새겨져 있다.
속리산 기슭에 위치한 법주사 일대는 1970년대까지 인기 있는 신혼 여행지 중 하나였다. 지금도 법주사 초입에는 수십 년 전통을 가진 식당들이 가득하다. 이달부터는 법주사와 대청호반에 있는 옛 대통령 별장인 청남대를 함께 방문하면 입장료 할인을 받을 수 있다. 대청호반에서부터 법주사까지 이어지는 약 50km의 드라이브 코스도 아름답다.
보은=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5> 畵僧의 산실 공주 마곡사
백범이 탈옥후 은거했던 흔적 경내 곳곳에 법당 벽면 불화 가득… 한국 3대 畵所사찰
▲마곡사에는 상륜부에 청동이 올라가 있는 독특한 구조의 5층 석탑이 있다. 고려 후기 원나라에서 유입된 라마 불교의 영향으로, 당시 동아시아의 수준 높은 문화예술을 보여준다. 5층 석탑(가운데)과 대광보전(석탑 뒤 건물) 등이 있는 마곡사 마당. 공주=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13일 찾은 충남 공주시 마곡사는 태화산 자락의 마곡천이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사찰 입구에서 볼 수 있는 해탈문(금강문)과 천왕문이 일렬로 서 있지 않고, 30도가량 꺾여 있었다. 굽어진 하천 지형에 순응하기 위한 겸손한 가람배치다. 극락교를 지나 산사 경내로 진입하면 왼편에 백범 김구(1876∼1949)가 머물렀던 ‘백범당’이 나온다.
“냇가로 나가 삭발진언을 쏭알쏭알 하더니 내 상투가 모래 위로 툭 떨어졌다. 이미 결심은 하였지만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백범일지 중에서)
1898년 백범은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 장교를 죽인 혐의로 인천형무소에 투옥된다. 이내 탈옥에 성공한 백범은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마곡사로 숨어들었다. 이곳에서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1년간 지내며 재개를 도모했다. 광복 이후인 1946년, 백범이 임시정부 요원들과 함께 마곡사를 다시 찾아와 심은 향나무는 지금도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마곡사 뒤편으로 200여 m를 걸어가면 백범이 머리를 깎은 장소인 ‘삭발바위’가 나타난다. 그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도록 마곡천을 따라 ‘백범 명상길’이 조성돼 있다.
백범당 옆에는 사찰의 주법당인 대광보전과 대웅보전이 있다. 대광보전에는 건물 내외부 벽면 전체에 불화가 새겨져 있어 마치 미술관에 온 듯하다. 내부의 비로자나 불상 뒤편에는 3m가 넘는 거대한 수월백의관음보살도가 그려져 있다.
이처럼 독특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배경에는 ‘우리나라 화승(畵僧) 배출의 산실’이라는 마곡사의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 경기 남양주시의 흥국사(경산화소), 금강산의 유점사(북방화소)와 함께 남방화소로 불리며 우리나라 3대 화소(畵所)사찰로 꼽힌다. 조선 후기의 보응, 문성 스님부터 근대 불교미술의 선구자 일섭 스님 등 당대 최고로 평가받는 화승들이 모두 마곡사 출신이다. 화승의 명맥은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불화장 중요무형문화재(제118호)인 석정 스님 역시 마곡사 화승으로 활동했다.
이날 동행한 정병삼 숙명여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화승의 미술 교육은 매우 엄격하기로 유명하다”며 “밑그림을 따라 1000번, 옆에 놓고 그리기를 1000번, 보지 않고 1000번을 그리는 등 한 그림마다 3000번의 연습을 거칠 정도”라고 말했다. 이어 “산사 중에서도 문화예술의 향기가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이 마곡사”라고 설명했다. 마곡사는 남방화소의 명맥을 잇고, 전통 불교미술 보존을 위한 교육원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그림뿐 아니라 빼어난 글씨도 함께 즐길 수 있다.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최고의 명필로 이름을 날린 해강 김규진(1868∼1933)이 마곡사 현판을 썼고, 대광보전이라는 글씨는 김홍도의 스승인 표암 강세황(1713∼1791)의 작품이다. 정조 때 문신이었던 송하 조윤형(1725∼1799)이 남긴 심검당 현판도 남아 있다.
대광보전 오른편의 고구려식 창고인 ‘고방’은 여전히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나무의 원형을 살린 이색적인 사다리와 습기 제거를 위해 외부로 개방된 1층 구조 등 우리나라 전통의 생활유산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공주=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6> 9세기 창건 순천 선암사
그림 같은 ‘승선교’ 너머 찬란한 천년 불국토
▲선암사에는 정호승 시인의 시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에서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라고 언급될 만큼 큰 규모를 자랑하는 해우소와 3, 4월이면 짙은 향기가 온 사찰을 뒤덮는 매화나무 등 독특한 문화유산이 가득하다. 순천=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한국의 산사는 대부분 개울을 끼고 있다. 수려한 경관을 더하지만 통행은 불편해 교량을 설치한 경우가 많다. 전남 순천시 선암사는 그중에서도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다리를 입구에서 만날 수 있다. 무지개를 닮은 아치교인 승선교(昇仙橋·보물 제400호)다. 아치 사이로 2층 누각인 강선루가 보이는데 이 전경이 계곡물에 고스란히 비쳐 신비로운 느낌마저 선사한다.
승선교 아래에는 용 모양 장식이 걸려 있다. 좀더 자세히 보면 용의 입 주변에 동전 3개가 걸려 있다. 1713년 호암 스님이 공사를 마무리하고 남은 돈을 허투루 쓰지 않고, 훗날 수리비용에 사용하라며 남겼다 한다. 청렴결백한 스님의 뜻이 통한 걸까. 300여 년간 다리는 튼튼하게 유지됐고, 동전은 고스란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강선루를 지나 조계산 자락으로 더 올라가면 일주문과 함께 본격적으로 사찰 경내로 들어선다. 일주문 뒤쪽 현판에는 ‘해천사(海川寺)’라는 글씨가 있다. 선암사는 1761∼1824년 이 이름으로 불렸다. 9세기 창건 뒤 1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찰 전체가 무너져 내릴 만큼 큰 화재를 여러 차례 겪다 보니 바다와 강을 뜻하는 ‘해천’이란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선암사 곳곳에 ‘수(水)’ ‘해(海)’와 같은 글자가 새겨진 전각이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이 덕분인지 19세기부터는 큰불이 나지 않았고, 6·25전쟁과 1948년 여수·순천 10·19사건 등 현대사의 굴곡진 위기도 이겨내며 지금껏 전통 사찰의 원형을 유지해 오고 있다.
▲우아한 곡선미를 자랑하는 선암사 승선교. 순천=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선암사는 특히 조선 왕실의 사랑을 받은 사찰로도 유명하다. 정조는 한동안 왕자를 얻지 못해 애가 탄 적이 있다. 정조의 부탁으로 눌암 대사가 선암사의 원통전 건물에서 100일 기도를 드렸는데 기적같이 순조가 태어났다고 한다. 순조는 즉위 이듬해인 1801년 원통전에 큰 복을 낳게 한 밭이란 뜻의 ‘대복전(大福田)’ 현판을 하사했다. 지금도 순조의 글씨가 남아있는 원통전은 사찰인데도 조선 왕실의 건축 양식인 정(丁)자형으로 지어져 있다.
선암사의 대웅전 현판에는 ‘김조순’이라는 글씨가 써 있다. 뛰어난 명필가라 하더라도 뒤편에 이름을 남긴다는 점에서 불손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순조의 장인으로 세도정치의 정점에 서 있던 김조순(1765∼1832)은 일부러 이름을 내걸었다. 당시 억불정책으로 각종 수탈과 핍박의 대상이었던 불교의 현실에서 선암사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최고 권력자의 이름을 통해 지방 관료들의 횡포로부터 보호하고자 했던 김조순의 배려였던 셈이다.
선암사 뒤편 산자락에는 약 3만3000m²(약 1만평)에 이르는 야생 차밭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규모의 재래 차밭이다. 지금도 선암사 스님들이 찻잎을 직접 따 9번을 덖는 전통 방식으로 생산한다. 은은하면서도 구수한 맛으로, 떫은맛은 느껴지지 않는 우리나라 전통 차의 원형을 느껴볼 수 있다.
순천=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7끝> '조선 불교의 중심' 해남 대흥사
만년이 가도 건재할 땅… 두륜산엔 부처가 산다
▲대흥사는 조선 정조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승군을 이끈 서산대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표충사’ 편액을 내린 뒤 전국 각지의 뛰어난 스님들이 모여들며 명실상부한 조선 최고의 사찰로 자리매김했다. 사진은 부처님이 누워 있는 모습을 닮은 두륜산과 대흥사. 해남=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18일 전남 해남군 대흥사. 해탈문을 들어서자 가지런히 손을 모은 채 편안하게 누운 부처님 품이 눈앞에 펼쳐진 듯했다. 대흥사를 둘러싼 두륜산의 두륜봉과 가련봉, 노승봉이 비로자나불상의 머리와 손, 발처럼 솟아 있기 때문이다. 천혜의 자연환경 덕분일까. 대흥사는 조선 후기 대종사(大宗師)와 대강사(大講師)를 13명씩 배출한 사찰로 이름을 떨쳤다.
대흥사의 유서 깊은 역사는 사찰 입구부터 만날 수 있다. 50여 기에 이르는 부도가 모여 있는 부도림이 삼나무 숲길 끝과 사찰 입구 사이에 있다. 서산대사(1520∼1604)와 연담유일(1720∼1799), 초의선사(1786∼1866) 등 조선을 대표하는 스님들의 부도가 가득하다.
이날 동행한 정병삼 숙명여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서산대사가 대흥사를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으로 만년 동안 흐트러지지 않을 땅’이라고 평가하며 자신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보관하게 했다”며 “이후 조선 최고의 선승과 교학승을 배출한 중심 사찰이 됐고, 유네스코도 이 같은 역사성에 특히 주목했다”고 설명했다.
대흥사는 조선 정조 때부터 특히 번창했다. 정조는 사육신과 단종의 복위 등 역사 바로 세우기에 적극적인 군주였다. 당시 승려들은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운 서산대사를 기려 달라고 청원했다. 정조는 흔쾌히 받아들였고, 대흥사에 친필 편액을 내린 ‘표충사(表忠祠)’를 건립하게 했다. 금빛 글씨로 쓰인 표충사 내부에는 독특하게도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처영 스님의 영정과 함께 유교식 신줏단지가 모셔져 있다.
표충사 동쪽에는 선방 스님들이 머무르는 ‘동국선원’이 자리했다. 이 선원의 7번방은 문재인 대통령이 1978년 사법시험을 준비하며 8개월 남짓 머물렀다고 한다. 선원 뒤편엔 두륜산으로 향하는 산책길이 있어 수련과 공부에 안성맞춤이다.
두륜산으로 더 들어가면 ‘한국의 다성(茶聖)’ 초의선사가 머물렀던 일지암이 있다. 초의선사는 차 이론서인 ‘동다송(東茶頌)’을 집필하는 등 조선 후기 차 문화를 이끈 인물. 다산 정약용(1762∼1836)이나 추사 김정희(1786∼1856)와 같은 당대 최고의 문인과 폭넓게 교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초의선사와의 인연으로 추사는 ‘무량수각(無量壽閣)’ 등 대흥사 곳곳에 현판을 썼다. 무량수각 바로 옆 대웅보전에는 원교 이광사(1705∼1777)의 글씨가 걸려 있다. 수려하면서도 세련된 글씨체를 자랑한 추사는 생전에 “조선의 글씨를 망친 게 이광사”라며 향토적 색채가 짙은 원교의 글씨를 비난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화해라도 한 듯이 두 현판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원교의 글씨는 대흥사 한가운데에 있는 ‘천불전’에서도 만날 수 있다. 이름처럼 옥석으로 만든 부처상 1000개가 모셔져 있다. 이 중 300여 개의 부처상 바닥에는 ‘일(日)’자가 새겨져 있다. 1817년 경주에서 제작한 이 불상들은 3척의 배로 나눠 대흥사로 옮기던 중 태풍을 만나 한 척의 배가 일본 나가사키로 갔다. 일본에선 “부처가 왔다”며 반겼지만, 현지 승려가 현몽을 꾼 뒤 이듬해 조선에 되돌려줬다고 한다.
해남=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世界文化遺産(세계문화유산) 華城(화성)
■ 유네스코 등재된 우리나라 기록유산
1. 훈민정음
세종 28년(1446)에 정인지 등이 세종의 명을 받아 설명한 한문해설서를 전권 33장 1책으로 발간했는데, 이 책의 이름을 훈민정음이라고 했다.
▲ 훈민정음해례본.
한글창제가 상형원리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현존본은 1940년경 경북 안동 어느 고가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국내에서 유일한 귀중본이다.
한글과 같이 일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람이 이미 존재한 문자에 직접 영향을 받지 않고 독창적으로 새 문자를 만들고 한 국가의 공용문자로 사용하게 한 일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다.
새 문자에 대한 해설을 책으로 출판한 일 역시 역사적인 일이었다.
특히, 문자를 만든 원리와 문자사용에 대한 설명에 나타나는 이론의 정연함과 엄정함에 대해서 세계의 언어학자 들이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유네스코에서 문맹퇴치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세종대왕상을 주는 것은이 책의 문화사적 의의를 나타낸다.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로 지정돼 있으며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록됐다.
2.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의 시조인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한 책이며 총 1,893권 888책으로 돼있어 가장 오래되고 방대한 양의 역사서이다.
▲ 조선왕조실록 중 '중종실록'은 500여 년간의 왕정에 대한 기록이 하나의 체계 아래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동아시아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조선시대의 정치, 외교, 군사, 제도, 법률, 경제, 산업, 교통, 통신, 사회, 풍속, 미술, 공예, 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어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없는 귀중한 역사 기록물인 '조선왕조실록' 은 그 역사기술에 있어 매우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은 역사기록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이와 함께 일본, 중국, 몽고 등 동아시아 제국의 역사연구, 관계사 연구에도 귀중한 기본자료이기도 하다.
정족산본 1,181책,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27책, 기타 산엽본 21책을 포함해서 총 2,077책이 일괄적으로 국보 제 151호로 지정돼 있으며,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됐다.
3. 직지심체요절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은 백운화상이 1372년(고려 공민왕 21)에 원나라에서 받아온 불조직지심체요절 1권의 내용을 대폭 늘려 상·하 2권으로 엮은 것으로, 역대 고승들 간의 문답과 경전을 엮어 학승(學僧)들이 최고과정에서 배우던 교재였다.
▲ '직지심체요절'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세계 최고 금속 활자제작의 근거를 인정 받은 동시에 원산지와 소유국이 다른 약탈 문화재들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수 있다는 좋은 선례를 남겼다.
현재는 하권만이 유일하게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특별 귀중본으로 보관돼있다.
하권은 39장으로 이뤄져 있는데, 첫째 장은 없고 2장부터 39장까지 총 38장만이 보존되고 있다.
책의 끝부분에는 간행에 관계된 기록이 있어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1450년 독일의 쿠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활자보다 약 73년이나 앞선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직지심체요절'은 금속활자를 이용해 인쇄술을 보다 편리하고 경제적이며 교정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해줬다.
이 모든 것은 책의 신속한 생산에 공헌했다.
또한, 활자 인쇄술에 적합한 기름먹을 발명하는 계기가 됐으며, 한국이 혁신한 실용적인 활판 인쇄술은 동양 인쇄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유럽등지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 9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됐다.
4. 승정원일기
승정원은 조선 정종대에 창설된 기관으로서 국가의 모든 기밀을 취급하던 국왕의 비서실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승정원 일기'는 일기 형식으로 조선 건국 초부터 정리됐으나, 조선전기분(朝鮮前期分)은 임진왜란 등으로 대부분 소실됐고 현재는 3,243책만이 남아 있다.
▲ 정치, 경제, 외교, 문화, 법제, 사회, 자연 현상, 인사, 국왕과 관료의 동정, 국정 논의가 광범위하게 기록돼있어 한국학 연구의 보고라 할 수 있는 '승정원 일기'는 국사연구 뿐만 아니라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외교, 문화, 군사등 모든 학문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인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 최대의 기밀 기록인 동시에 그 사료적 가치에 있어서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비변사등록과 같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에 자랑할 만한 자료다.
특히,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할 때 기본 자료로 이용했기 때문에 실록보다 오히려 가치 있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원본 1부밖에 없는 귀중한 자료로 국보 제303호(1999년 4월 9일)로 지정돼 있다.
이는 세계 최대 및 1차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 9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됐다.
5. 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경판
'고려대장경판(팔만대장경)'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정확하고, 가장 완벽한 불교 대장경판으로 산스크리트어에서 한역된 불교대장경의 원본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고려대장경판과 제경판'은 이미 사라진 초기 목판제작술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는 한편, 고려시대의 정치, 문화, 사상의 흐름과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역사기록물이기도 하다.
인도 및 중앙아시아 언어로 된 경전, 계율, 논서, 교리 및 불교와 관련된 역사적 기록물을 집대성해 한역한 내용과 더불어 중국어가 원문인 일부 문헌을 선정하여 수록하고 있다.
해인사에 소장되고 있는 '고려대장경판과 제경판' 87,000여장의 목판은 1098년부터 1958년까지의 오래 시간에 걸쳐 완성된 경판들로써 국가제작판과 사찰제작판으로 나뉜다.
국가제작판은 고려대장경으로 81,258판 5,200여 만자에 달하고, 사찰제작판은 5,987판이다.
고려대장경판은 이미 사라진 초기 목판제작술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는 한편, 고려시대의 정치, 문화, 사상의 흐름 과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역사기록물이기도 하다.
경판 표면에는 옻칠을 하여 글자의 새김이 760년이 지나도록 생생한 상태로 남아 현재까지 인쇄할 수 있을 정도이다.
해인사 '고려대장경판과 제경판'은 2007년 6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6. 조선왕조 의궤
의궤는 국가 중요 행사를 행사 진행 시점에서 작성한 조선왕조의 기록물이다.
같은 유교문화군에 속하는 중국, 일본, 베트남 등에서는 의궤의 체계적인 편찬이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 '조선왕조 의궤' 는 600여년전의 생활상을 시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희소성을 가지고 있다.
총 3,895 여권의 방대한 분량에 이르는 의궤는 조선시대 600여년에 걸친(1392-1910) 왕실의 주요한 의식이 시기별, 주제별로 정리돼있어서, 조선왕조 의식의 변화 뿐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의 문화를 비교연구 및 이해하는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귀중한 자료다.
특히, 반차도, 도설 등 행사모습을 묘사한 시각 콘텐츠는 오늘날 영상자료처럼 당시 모습을 입체적으로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이런 시각중심(visual-oriented)의 기록유산은 뛰어난 미술장인과 사관의 공동작업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는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조선왕조 의궤는 2007년 6월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7. 동의보감
1613년 한국에서 집필된 의학적인 지식과 치료기술에 관한 백과사전이다.
국왕의 지시 하에 여러 의학 전문가들과 문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허준'이 편찬한 '동의보감'은 동아시아 의학의 발전 뿐 아니라, 많은 부분에 영향을 줬다.
▲ 우리나라 최초의 의학백과사전인 '동의보감'은 동양의학의 총체적 접근법을 담고 있는, 매우 귀중한 가치를지니고 있다.
예를들어, 19세기까지는 유래가 없었던 예방 의학과 함께 국가적으로 이뤄지는 공공 보건정책에 대한 관념을 세계 최초로 구축했다.
한국적인 요소를 강하게 지닌 동시에, 일반 민중이 쉽게 사용가능한 의학지식을 편집한 세계 최초의 공중보건의서라는 점을 인정받은 '동의보감'은 2009년 7월 31일 '마쓰우라' 유네스코 사무청장이 바베이도스(Barbados) 브리지타운(Bridgetown)에서 열린 유네스코 제9차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회의의 권고를 받아들여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승인했다.
전문가들은 '동의보감'이 질병 치료와 관련해 정신적·심리적 측면을 강조하는 동양의학의 ‘총체적 접근법’을 담고 있어, 단순한 기술적인 가치를 넘어 사회적·철학적 가치가 인정된다고 봤다.
아울러 초간본 동의보감이 이상적인 보존 환경에 놓여 있다는 점도 높이 평가했다.
■ 강화 고인돌
◆ 일본, 중국 등과 기록(등재) 유산 비교 ◆
세계 주요 선진국의 기록유산을 살펴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바로 일본과 중국이다.
의아할지 모르지만 일본은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것이 현재 아무것도 없다.
이미 기원전부터 기록문화가 시작되어서 유구히 내려오고 있는 중국도 등재된 것은 5개뿐이다.
그것도 기본적으로 청조 이후의 것들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기록문화 보호의식 및 수준이 얼마나 뛰어난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북한
▲개성 고구려 강서큰무덤 벽화
▲고구려안악3호 무덤 벽화
▲공민왕릉
▲왕건왕릉
▲표충사 표충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