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딴따라 이야기9/ 2021. 03월 한국영화사에 ‘다시 없을 傳說’ 신영균 - 이영애는 누구?

상림은내고향 2022. 1. 7. 14:11

월간조선 03월 호

■ 한국영화사에 ‘다시 없을 傳說’ 신영균

“남 험담 못 하는 ‘상남자 스타일’의 남성 매력 아이콘”

⊙ 고교시절, 예명 申一天으로 연극무대서 활약
⊙ 배우는 우선 울림통이 커야 한다는 생각에, 목이 터져라 소리쳐
⊙ 머슴 役과 임금 役… “어느 쪽이 더 내 몸에 맞는 역인지 지금도 결론 못 내”
⊙ “늘 대본을 끼고 살아. 연기 중에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들어”
⊙ 인생작 10편… 〈연산군〉 〈빨간 마후라〉 〈대원군〉 〈남과 북〉 〈갯마을〉 〈상록수〉 〈5인의 해병〉 〈달기〉 〈저 하늘에도 슬픔이〉 〈미워도 다시한번〉

申榮均
1928년생. 서울대 치과대학 졸업. 서강대 명예문학 박사 / 해군 대위 전역(군의관), 동남치과 개업, 영화 〈과부〉(1960)로 데뷔. 작품 300여 편에서 주연으로 활약 / 한국영화배우협회장, 한국영화인협회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장, 15·16대 국회의원 역임 / 대종상 남우주연상(3회),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3회), 백상예술대상 최우수연기자상(2회),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2회) 수상 / 現 신영문화예술재단 명예이사장

▲사진=조준우


한국영화사에 그만 한 인물이 다시 없을지 모른다. 신영균(申榮均), 그는 살아 있는 전설이다. 한국영화의 전성기인 1960~70년대를 활활 불태운 배우다. 한국영화의 마지막 자존심, 연기력을 갖춘 정통파 배우다. 배우 신성일(申星一)을 알랭 들롱과 비교한다면 그는 한국의 말론 브랜도, 존 웨인이다.
 
  그는 배우(actor) 그 이상의 스타(star)다. “신성일·김진규(金振奎)·최무룡(崔戊龍)과는 다른 외모로, 장동휘(張東輝)·박노식(朴魯植)·허장강(許長江)과는 다른 아우라”로 당대 최고 스타가 되었다.

 

  원로 영화평론가 김종원의 표현을 빌리자면 ‘스타는 여왕벌처럼 초인격적인 로열젤리를 흡수하여’ 배우와 완전히 다른 존재다. 설령 배우는 죽어도 스타는 죽지 않는다. 불멸이다. 대중을, 관객을 한갓 비굴한 노예로 부리는 거대한 독재자다. 신영균은 1960년대 수많은 군왕(君王)으로 출연했을 만큼 상남자 스타일의 왕 중 왕이자 한국영화 ‘남성 매력’의 아이콘이었다.
 
  다른 스타들처럼 스캔들에도 휩싸일 법한데 그 흔한 루머조차 없었다. 아내 김선희(金善姬·87) 여사가 늘 지근에서 매니저 역을 맡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기독교적 품성이 몸에 뱄기 때문이리라. 죽기 살기로 영화를 했으니 어쩌면 영화가 그의 신앙일지 모른다.
 
  ‘인간 신영균’을 가장 가까이에서 오래 취재해온 대한언론인회 김두호 이사(‘인터뷰365’ 발행인)를 만났더니 기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지미(金芝美) 배우가 제게 배우 신영균의 장점이 뭐냐고 물은 적이 있었어요. 서슴없이 ‘남 욕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 답하자, 그녀는 ‘맞아, 맞아요. 그 양반 입에서 남의 험담 들어본 사람이 없다’면서 손바닥으로 식탁을 치며 정답임을 인정했어요.”
 
  배우 엄앵란(嚴鶯蘭)씨의 회고에 따르면 “(신영균은) 다른 사람들이 잡담할 때 혼자 대본만 읽고, 영화 밖에선 목사님”이었다.


  첫 대사가 인생을 바꾸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스토리인 영화 〈화조〉(1978) 이후 영화배우로선 사실상 은퇴했다. 이후 사업가,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금호극장·명보극장을 인수했고, 우리나라 4대 제과인 명보제과를 운영했다. 국내 최초의 개인 볼링장을 차렸고, 부동산임대업·한국맥도날드·부티크 호텔업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8년간 정치 일선에서 뛰었다. 그러더니 2010년 제주 신영영화박물관과 명보아트홀을 사회에 기부했다. 기부 규모가 500억원이 넘는다.
 
  기자는 이 ‘전설’을 만나기 위해 인터뷰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지난해 10월에 나온 회고록을 서점에서 일찌감치 구입했고 사인을 받으리라 결심했다. 지난 2월 5일 서울 명보예술극장 뒤편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빨간 마후라’의 신영균이 저 멀리서 빨간 넥타이를 매고, 빨간 행커치프를 꽂고서 성큼성큼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첫마디는 이랬다.
 
  “오랜만에 하는 인터뷰이기에 잠을 설쳤어요.”
 
  영화평론가 전찬일이 “90대인 그가 ‘아직도 연기를 꿈꾼다’고 했다”고 한 말이 사실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한 첫 대사도, 어느 영웅의 서사시처럼 드라마틱하다. 신영균은 초등학교(당시 소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이사한 뒤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닌 것이 그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당시 크리스마스 성극(聖劇)에서 단역을 맡았는데 8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일본어 대사를 잊을 수 없었다. 번역하면 이런 뜻이다.
 
  “모두 여기에 좀 와 봐. 작은 개미가 자기보다 더 큰 벌레를 등에 지고 간다.”
 
  ― 처음 소화했다는 첫 대사가 인상적입니다.
  “회고록에서도 밝혔는데 이 한마디 대사가 내 운명을 바꾼 것 같아요. 어린 생각에 ‘작아도 강하면 큰 사람을 압도할 수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감명을 받았지. 이 대사를 외우며 자그마한 소년이 한국 최고의 배우가 되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게 됐으니까요.”
 
  신영균의 충무로 공식 데뷔작은 1960년 11월 5일 조긍하(趙肯夏· 1919~1981) 감독의 〈과부〉다.
 
  영화 포스터엔 ‘여불사이부(女不事二夫)의 죄의식 속에 더듬는 정염과 절망의 세계!’라고 써 있었다. 서울대 치대를 나와 치과의사로 개업한 그는, 들끓고 있던 ‘딴따라’ 기질을 주체할 수 없어 의사 가운을 벗고 충무로에 뛰어들었다. 만 서른두 살 늦깎이 신인배우가 첫 영화 출연부터 주연이 된 것이다. 물론 고교와 대학 시절부터 연극으로 기본기를 닦은 상태였다

‘申一天’과 서울대 연극부 시절
 
  레슬링 웰터급 대회에서 2년 연속 우승
 
  
이미 신영균은 고등학생(한성고) 때 극단 청춘극장 오디션에 합격해 배우로 활약했다. 처음엔 잔심부름을 하거나 창을 들고 서 있는 엑스트라가 고작이었다. 연극 〈대원군〉에서 겨우 단역을 맡았지만 그의 포부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고 한다.
 
  대원군은 아니더라도 주연급인 김아지 역할(양반 계급에 반기를 든 상놈)을 따내고 싶었다. 연극 단장이 머무는 옆방에서 큰 소리로 김아지 대사를, 홀로 거울 앞에서 연기 연습을 하기도 했다. 우연찮게 김아지 역을 맡은 배우가 병이 나자 하늘이 기회를 주었다.
 
  이후 김춘광 단장이 ‘신일천(申一天)’이란 예명을 지어주었다. 〈과부〉로 스크린에 데뷔하기 전까지 그는 신일천으로 연극 활동을 했다.
 
  그는 고교 시절 신설동 집 근처에 있던 종로 YMCA 레슬링 도장을 다녔는데, 아마추어 대회에서 웰터급으로 2년 연속 우승할 만큼 체력이 단단했다. 지금까지 나름 단단한 체형을 유지하는 것도 그때 단련한 레슬링 덕이 아닐까.
 
  ‘대본 외우듯’ 공부해 서울대 치과대학에 입학한 점도 놀랍다. 암기과목은 그렇다 쳐도 수학공부는 어떻게 했는지, 놀랍기만 하다.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임이 분명하다. 어쨌든 대학에 들어가서도 단과대 연극반을 하나로 합친 ‘서울대 연극부’를 만들기도 했다.

 
  임금 전문 배우

▲영화 〈연산군〉은 개봉된 지 올해로 60년이 된다. ‘사극=신영균’이란 도식을 완성한, 신영균에게 뜻깊은 영화다.

 

1961년 신상옥 감독의 〈연산군〉은 그의 출세작이다. 제1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첫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이 영화 덕에 시쳇말로 ‘벼락스타’가 됐다. 연산군은 이후 ‘사극(史劇)=신영균’이란 등식을 만들어줬다.
 
  이후 〈폭군 연산〉(1962), 〈강화도령〉 (1963), 〈달기〉(1964), 〈대원군〉(1968), 〈세종대왕〉(1970), 〈세조대왕〉(1970) 등 임금 전문 배우가 됐다.
 
  ― 그러고 보니 〈연산군〉이 개봉된 지 올해로 딱 60년입니다. 당시 사극이 인기 있던 이유는 뭘까요.
  “영화의 주제나 작품 형식이 하나의 유행을 탈 때는 두 가지 동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 특정 작품이 관객 동원에 크게 성공하고 호평을 받으면 비슷한 장르와 주제의 작품이 쏟아져나오죠. 또 심의 검열을 주도하는 정부기관의 규제를 피해 또는 혜택을 염두에 두고 제작 경향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내가 〈연산군〉으로 성공한 시기 사극류가 제작 경향을 주도하였지만 이어서 멜로 애정물과 소설을 원작으로 한 문예영화, 첩보 액션오락 영화가 주류를 이룰 때도 있었지요. 한때 독립군 활동을 소재로 한 영화가 많이 제작되거나 반공영화가 외국 영화 수입쿼터를 염두에 두고 경쟁적으로 제작되는 때도 있었습니다.”
 
  ― 초기 작품에서는 상남자 스타일의 연기를 많이 했는데… 원래 성격은 어떠셨나요. 임금 역할과 노비 역할 중에서 어느 역할이 더 편한가요.
  “영화배우가 되기 전 연극배우로 연기 활동을 시작했잖아요. 그러니 남자답고 파워풀한 무대 연기가 초기 영화 배역에서도 내 몸에 맞는 캐릭터가 되었고, 작품에서도 주목받았죠. 데뷔 작품인 〈과부〉에서 머슴 역, 〈연산군〉에서는 타이틀 롤인 왕으로 출연해 초기에 양극의 배역을 연기했지만, 어느 쪽이 더 내 몸에 맞는 역인지 지금도 결론을 못 내고 있어요.
 
  어느 쪽이든 관객의 갈채를 많이 받는 쪽이 내가 보람을 느끼고 애정을 갖는 쪽으로 생각됩니다.

 
  “배우는 타고난 재질보다 후천적 자질·감각이 더 중요”

― 자신의 ‘배우론’이 궁금합니다.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로 생각하면 됩니다. 배우는 카메라 앞에서 배역 인물로 승화하지 않으면 직업정신에서 결격사유가 되지요. 목회자는 기도 중에 죽는 것이 가장 성스럽다고 생각한다는데 나는 배우가 되어 연기를 하면서 연기 중에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었어요.
 
  배우는 배역에 함몰되지 않으면 좋은 연기, 관객에게 리얼리티를 전달하지 못합니다.”
 
  ― 배우의 조건 중에서 ‘등장인물이 지닌 내적 진실의 표현 능력’을 중시한다고 합니다. 연기와 인격의 상관관계는.
  “연기자의 인격은 가장 먼저 연기로 평가받아야 합니다. 배역 인물의 내적 진실도 가식을 보이지 않고 그려내야 감동을 받고 평가를 받습니다. 배역 인물의 성격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면 배역의 역할은 겉돌게 됩니다.
 
  배역 인물로 살아날 때 배우의 품격도 돋보이고 배우의 인격도 돋보입니다.”
  
  ― 배우가 무대(스크린) 위에서 얻는 행복이나 기쁨은 어떤 것인가요. 배우가 되려면 어떤 자질이 필요한가요. 배우의 감성은 선천적인 가요, 후천적인가요.
  “관객의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직업이 배우입니다. 배우에게 박수갈채보다 더 듣기 좋은 소리는 없습니다. 배우는 타고난 재질도 있어야 하지만 후천적인 직업정신, 즉 연습과 노력에 의한 후천적 자질과 감각이 더 중요해요.”
 
  ― 원래 술, 담배는 못 하나요? 취미는 무엇입니까. 잡기(雜技)가 궁금합니다. 외람되지만, 짠돌이·구두쇠 이미지로 알려진 이유는 무엇인가요.
  “일·가족·운동의 3박자에 맞추어 살려고 노력해왔던 것 같아요. 술과 담배, 갖가지 즐길 수 있는 잡기를 즐기면 그 3박자가 엇박자가 되어 심신이 고달파지고 마음먹은 대로 굴러가지 못합니다. 생활이 불규칙해지고…. 그럼 사는 게 힘들어집니다.
 
  나의 교훈은 힘들게 살아가는 선배 동료들의 실패한 삶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아야 한다는 노력이 지금까지 길을 이끌어준 것 같습니다.
 
  ‘구두쇠다’ ‘인색하다’는 말을 듣습니다만, 아끼고 검소하지 않으면 절대로 재산이 모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써야 할 돈을 쓰지 않고 남에게 부담을 준다거나 분수에 맞지 않은 처신을 하는 것은 옳지 않지요.
 
  이런 생각이 스스로 훌륭하게 살아왔다는 자화자찬이 아닙니다. 나도 부족하고 못난 점이 많지만 옳게 살아가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왔을 뿐입니다. 어머님이 일깨워준 기독교 정신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노력해왔지만 그럼에도 평범한 인간 이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머니 신순옥 여사 이야기

▲어머니 신순옥 여사와 신영균 가족.

 

이 대목에서 어머니 신순옥 여사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신영균의 고향은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필대리의 작은 마을이다. 1928년 11월 6일, 아버지 신태현(申泰賢)과 어머니 신순옥(愼順玉·1902~1972)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동네 면장이자 소학교 이사장이었는데 말을 타고 다녔다고 한다. 어린 그의 눈에도 꽤나 늠름해 보였다.
 
  그러나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30대 초반에 홀로 된 어머니는 어린 삼남매를 키우느라 갖은 고생을 하였다.
 
  “영균아, 너는 절대 탈선하지 마라. 교회도 열심히 다녀야 한다.”
 
  신앙심이 두터웠던 어머니는 아침저녁으로 기도했다. 평생 술·담배를 멀리한 것도 어머니의 영향이었다. 충무로에서 셋방살이할 때부터 아들과 같이 살던 어머니는 1972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다음으로 어린 시절 우상이자 연기 멘토는 누굴까. 놀랍게도 〈아리랑〉 (1926)의 나운규(羅雲奎·1902~1937)와 〈마부〉(1961)의 김승호(金勝鎬·1918~1968)를 꼽는다.
 
  “나운규라는 인물은 한국영화와 영화인들의 뿌리와 같습니다. 나와 모든 배우들이 가슴 안에 모시고 살아가는 우상과 같습니다. 나는 영화 〈아리랑〉을 수없이 보고 자랐으니 그 천재의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가 교본처럼 남아 있습니다.”
 
  ― 김승호의 연기는 어떤 점에서 남달랐습니까.
  “열 살 위인 김승호 배우를 연극무대에서 활동할 때부터 잘 알고 있었어요. 영화에서도 〈마부〉(1961)와 〈나그네〉(1961), 〈서울의 지붕밑〉(1961) 등에서 부자(父子)로 출연했죠. 물론 제가 아들로요.
 
  그분 몸짓에는 꾸밈이나 과장이 없으면서도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사람 같았어요. 자연스러운 애드리브도 인상적이지만 관찰력이 뛰어났어요. 〈마부〉에서 마차에 깔려 다리를 다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다리 장애를 가진 이들을 찾아 그들이 한쪽 다리로 어떻게 걷는지 연구했다고 하죠.
 
  젊은 제 눈에 김승호 배우는 한마디로 ‘연기를 위해 태어난 사람’ ‘연기에 신들린 배우’로 보였습니다. 신상옥(申相玉·1926~2006) 감독이 영화감독으로 온몸을 불사르며 산 영화인이라면, 김승호 배우는 연기에 자신의 열정을 모두 쏟아부은 영화인으로 서슴없이 꼽을 수 있습니다.”


  “준비와 예열이 없는 도약과 폭발은 존재할 수 없다"

  ― 신상옥 감독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신영균은 수도꼭지예요. 우는 장면에서 열 번 NG가 나면 다시 찍어도 열 번을 모두 진짜 울어요.” 혹시 지금도 가능하십니까.
  “하하하, 연기를 하지 않고 있어서 나 자신도 지금 그런 반응이 나타날지 모르겠군요. 배역이 주어지면 지금이라도 한번 실연해보고 싶군요.”
 
  역시 대(大)배우다운 답변이었다.
 
  ― 우는 연기, 비극적 캐릭터 연기의 노하우가 궁금합니다.
  다소 느슨한 질문이었는데 그는 정색을 하며 답했다.
 
  “우는 연기에 무슨 노하우란 게 없습니다. 배역 인물로 내가 바뀌면 그 인물의 감정이 내 몸에서 저절로 표현되어야 하고 우러나오는 게 연기입니다.


  그게 배우의 직업적인 역량입니다. 내가 〈연산군〉으로 제1회 대종상을 받았을 때 갑자기 등장한 혜성 같은 배우로 보는 시각도 있었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연기력을 키워온 준비된 배우였지요. 어쩌다 배우가 된 것이 아니라 작심하고 철저히 연기 공부를 하고 체험하며 그 영예를 차지한 것이었습니다.”
 
  신영균은 “상식을 벗어난 진실은 없다. 준비와 예열이 없는 도약과 폭발은 존재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 어떻게 해야 대본과 시나리오 분석을 잘 할 수 있을까요.
  “나는 대본을 철저히 암기합니다. 후시(後時) 녹음으로 대사를 외울 필요가 없는 시절에도 시나리오에서 내가 해야 할 말을 기억해야 연기가 나옵니다. 분석은 시나리오 공부 열심히 하면 저절로 나오죠.”
 
  1960년대 신영균은 ‘대사 외우는’ 배우로 유명했다. 밤잠을 미뤄가며 대사를 외웠다. 당시 겹치기 출연에 익숙한 배우들은 프롬프터를 보면서 연기를 했다. 또 동시녹음을 엄두도 못 내던 시절이어서 입만 벙끗 해도 됐지만 신영균은 달랐다.
 
  “나는 굉장한 노력파인데, 차로 이동할 때나 쉬는 시간에도 늘 대본을 끼고 살았어요. 누가 물으면 ‘대사를 외워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연기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말했죠. 실제 그러니까….
 
  당시만 해도 주연급 배우는 한 해 수십 편의 작품에 겹치기 출연을 했잖아요. 그렇다 보니 대본 외우는 게 쉽지 않아 스태프들이 읽어주는 대로 연기하는 일이 다반사였죠. 무엇보다 1960년대 초에는 동시녹음이 불가능했기에, 촬영 후 성우들이 별도로 대사를 더빙했어요. 대사와 배우의 입 모양이 맞지 않을 때가 일쑤라, 나는 어지간하면 직접 녹음을 고집했죠. 시나리오를 철저히 파악하고 대사를 100% 외운 상태에서 연기해야 실감이 나죠.”

  

배우는 우선 울림통이 커야 한다는 생각에, 목이 터져라…

▲2013년 7월 1일 영화 〈빨간 마후라〉의 주연 배우 신영균이 영화 속 배경인 경기도 수원 공군제10전투비행단을 방문, F-5 전투기에 탑승하고 있다.

 

 ― 아니, 대사는 지독하게 외우면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고작 두 곡(‘미워도 다시한번’ ‘빨간 마후라’)밖에 안 됩니까. 어떻게 된 겁니까.
  “하하하. 가사를 다 못 외우고 있다 뿐이지, 알고 있는 음악이 나오면 흥얼대며 부르는 노래가 많습니다. ‘황성옛터’ ‘신라의 달밤’ ‘봄날은 간다’ 등 좋아하는 노래가 많아요. 그러나 마이크를 잡으면 흘러나오는 자신 있는 노래가 ‘빨간 마후라’와 ‘미워도 다시한번’ 등 내 영화 작품의 주제곡들입니다.”
 
  그제야 수긍이 갔다. 신영균의 굵고 중후한 목소리는 남성미가 넘친다. 연극무대에서 기초를 닦은 그는 〈연산군〉과 〈빨간 마후라〉 등 주요 작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고집했을 정도.
 
  ― 신영균 배우만의 발성법이 궁금합니다. 목소리 음량, 목소리 명석도, 억양, 포즈(사이), 템포, 리듬, 호흡, 토운 등 자신만의 발성법 노하우를 알려주세요.
  “나는 고향이 황해도지만 일찍 서울로 옮겨와 표준말로 성장한 덕분에 연극이든 영화든 사투리 억양이 없어서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특별히 나 자신만의 목소리 표현에 따른 기교나 기술적인 노하우는 없습니다. 주어진 배역의 성격과 감정 표현에 맞는 목소리를 구사하는 것이 직업적으로 몸에 밴 것 같습니다.”
 
  다소 밋밋한 답변이지만 그의 회고록에는 이런 사연이 등장한다.
 
  〈틈나는 대로 나는 동네 뒷산이나 남산에 올라가거나, 아무도 없는 텅 빈 창고에 들어가 발성 연습을 했다. 배우는 우선 울림통이 커야 한다는 생각에, 목이 터져라 소리를 내며 단련하고, 또 단련했다.
 
  일본 사무라이 액션영화를 보고 나서는 반도 쓰마사부로(阪東妻三郞) 같은 일본 배우들의 칼싸움과 대사를 따라 하기도 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그만한 기쁨과 즐거움이 없었다. 주먹구구로 흉내내는 것에 불과했지만 하루 연습을 끝내고 나면 가슴 벅찬 성취감마저 느꼈다.〉(48~49쪽)
 
  하지만 연극과 영화의 발성법은 엄연한 차이가 났다. 아무래도 연극은 동작이 크고 발성이 우렁찰 수밖에 없다. 그의 말이다.
 
  “데뷔작 〈과부〉를 찍을 때 조긍하 감독으로부터 ‘과장된 발성과 몸짓’을 자주 지적을 받았어요. 연극배우 시절 몸에 밴 습관 때문에 자꾸 카메라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일쑤였죠. 조 감독은 ‘동작과 목소리를 좀 더 자연스럽게 하라’고 주문했어요. 영화와 연극의 차이를 익히는 수련기라고나 할까.” 

 

 ‘3대 인생작’… 〈빨간 마후라〉 〈연산군〉 〈미워도 다시한번〉

▲영화 〈빨간 마후라〉의 한 장면. 배우 신영균이란 이름을 세상에 각인시킨 영화다.

 

신영균은 ‘3대 인생작’으로 〈빨간 마후라〉 〈연산군〉 〈미워도 다시한번〉을 꼽았다.
 
  사실 신상옥 감독의 〈빨간 마후라〉 (1964)는 한국전쟁이 낳은 찬란한 유산이다. 1952년 평양에서 10km 떨어진 승리호 철교 폭파작전에 투입됐던 유치곤(兪致坤·1927~1965) 장군에 대한 실제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이다.
 
  “〈빨간 마후라〉가 명보극장에 처음 개봉됐을 때 극장 앞에 늘어선 줄이 을지로까지 이어졌죠. ‘암표’의 기원이 된 영화예요. 관객수 25만명으로 당시 서울 인구가 100만명이었으니 서울 사람 네 사람 중 한 사람이 영화를 본 셈이죠.
 
  또 신상옥 감독의 〈연산군〉은 ‘카리스마 연기자’ 신영균을 탄생시킨 영화이고 〈미워도 다시한번〉(1968)은 한국영화사에서 특기할 기록을 남겼는데 히트작 연작물의 효시가 됐지요.”

 

▲1968년 대히트를 쳤던 문희, 신영균 주연의 최루성 멜로영화 〈미워도 다시한번〉. 과거 북한 김정일이 이 영화를 좋아한 것으로 알려졌다.

 

1980~1981년 변장호(卞張鎬) 감독이 〈미워도 다시한번 ’80〉 〈제2부 미워도 다시한번〉을 내놓았고, 2002년에는 원조 연출자인 정소영(鄭素影) 감독이 〈미워도 다시한번 2002〉를 선보였다. 30년 넘게 시리즈의 생명력이 유지된 셈이다.
 
  “이 3개 작품은 한국영화의 중흥기로 분류되는 1960년대 사극과 멜로드라마의 대표 작품입니다. 모두 엄청난 관객들의 갈채를 받은 흥행 영화입니다. 수백 편의 출연 작품이 있지만 일생을 두고 내 이름과 함께 붙어 다니는 작품들이니 어쩔 수 없이 앞머리에 올릴 수밖에 없어요.”
 
  〈빨간 마후라〉 촬영 당시 지금처럼 특수촬영 기법이 없었다. 신상옥 감독은 주인공 나관중(신영균 분)이 전투기에서 적군의 총탄에 맞아 죽어가던 장면에서 정말 실탄을 썼다. “총알이 그의 머리를 스쳐 조종석 앞 유리를 뚫고 지나가는 명장면이 완성됐다”고 한다.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연기를 해야 좋은 배우로 평가받던 시절이 1960년대였습니다. 연기 도중 죽는 것을 영예롭다고 믿었죠. 카메라 앞에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아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어요. 상처로 생긴 흉터가 아직껏 여기저기 남아 있어요.
 
  〈빨간 마후라〉는 사격 장면이 많은데 엔딩 때는 실제 실탄을 사용했고 배우는 스턴트맨 없이 위험한 연기를 감당해야 했지요.”
 
  김기덕(金基悳) 감독의 〈5인의 해병〉(1961)도 실탄이 날아다니는 위험한 장면을 찍으면서 완성한 작품이다. 〈5인의 해병〉 촬영 당시 전투장면을 실감나게 한다며 진짜 폭탄을 터뜨렸다고 한다. 또 강변 모래사장에서 배우들을 뛰게 한 다음 뒤에서 실탄 사격을 가했다.
 
  “그때 같이 뛰던 곽규석(郭圭錫)과 최무룡, 황해(黃海), 박노식 모두 세상을 떠나고 이제 나만 남았네요.”

 

‘키스신’에 얽힌 이야기 

  ― 당시 키스신을 찍을 때 입술에 셀로판지를 왜 붙입니까.
  “비록 연기라 해도 남녀간 접촉을 조심스러워 하던 시절이었어요. 보수적인 관념의 예의가 따랐고, 영화가 검열 규정을 지켜야 하던 시절이었죠. 예민한 부위의 신체 접촉 땐 그런 장치물을 활용했어요. 그야말로 ‘뽀뽀’ 형식만 갖추는 데도 민감한 화젯거리가 됐지요.”
 
  〈빨간 마후라〉가 히트할 당시 배우 윤인자(尹仁子)와 키스신이 화제가 됐다. 뜻밖에 그녀는 (키스) 흉내만 낼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의 입안에 혀를 쑥 밀어넣었다. 신영균은 깜짝 놀라 몸을 움찔하는 바람에 NG가 나고 말았다고 한다.
 
  ― 어떻게 된 겁니다.
  “하하하, 장난을 친 거죠. 신상옥 감독이 ‘컷’도 외치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어요. 그러더니 아내 최은희(崔恩喜·1904~1984)를 불러 ‘최 여사, 당신은 집에 가서 연탄이나 갈지?’라고 했어요. 키스 연기에서 윤인자가 낫다는 거지요, 하하하.”
 
  윤인자는 한국영화사에 최초의 키스신과 누드신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한형모(韓瀅模) 감독의 〈운명의 손〉(1954)에서 입술에 셀로판지를 붙인 키스신이 처음 등장하는데 그 배역이 윤인자다. 한국영화사에 등장한 최초의 키스신이었다.
 
  “회고록에도 썼는데요, 윤인자씨는 ‘이왕 하는 거 화끈하게 한번 보여주자’ 생각했다고 해요. 나는 짓궂은 장난에 당한 꼴이 됐지. 이후 그녀가 종종 나를 놀렸어요.”
 
  ― 어떻게요.
  “신영균씨가 원래 거칠었는데, 입 한번 맞춰줬더니 ‘레이디 퍼스트’를 외치며 나긋나긋해졌다는 식으로…. 하하하.”
 
  회고록에서 신영균은 윤인자를 이렇게 묘사했다.
 
  〈윤(인자)씨는 충무로의 군기반장으로도 유명했다. 그의 표현을 옮기면, ‘호랑이 짓거리’를 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낸 구술록에서 그는 “엄앵란이도 내가 들어가서 있으면 신발 바로 놓고, 내가 숟갈 든 다음에 숟갈을 들었어. (내게) 귀싸대기 안 맞은 여배우가 없었지. 그 대신 우리 선배들한테는 깍듯이 해드렸어. 그렇게 해서 기강을 잡았지”라고 서슴없이 털어놓았다.〉(31쪽)
 
  ―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인생작 10편’을 꼽아주실 수 있을까요.
  “〈연산군〉 〈빨간 마후라〉 〈대원군〉 〈남과 북〉 〈갯마을〉 〈상록수〉 〈5인의 해병〉 〈달기〉 〈저 하늘에도 슬픔이〉 〈미워도 다시한번〉 시리즈 등의 작품이 먼저 떠오릅니다. 모두 화제를 남긴 작품이기도 하지만 배우로 기억에 남는 사연도 많이 간직한 영화들입니다.” 

 

  인생작 10편은…

▲1971년 3월 제8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인기남우상을 수상한 신성일, 신영균, 남궁원(왼쪽부터).

 

김기덕 감독의 〈남과 북〉(1965)은 분단의 상처를 다룬 영화다. 북한 인민군 소좌 장일구(신영균 분)는 6·25 때 헤어진 아내 고은아(엄앵란 분)를 찾기 위해 귀순한 인물이다. 남한 이해로 대위(최무룡 분)는 고은아의 현재 남편이다. 장일구는 정보참모(남궁원 분)에게 인민군의 주요 정보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아내와 다시 만나지만, 남편이 이미 죽은 줄로 생각한 아내는 이 대위의 아이를 배 속에 가진 상태다.
 
  세 남녀의 기구한 운명을 담은 이 영화는 개봉 당시 10만이 넘는 관객이 들었고, 그해 대종상 각본상(한운사)과 청룡영화상 각본상, 남우주연상(최무룡) 등을 받았다. 가수 곽순옥이 부른 영화 주제가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의 인기도 대단했다. 1983년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찾기〉에서 패티김이 다시 불러 전국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신영균이 신상옥 감독과 함께한 첫 영화가 〈상록수〉(1961)다. 이 영화로 신영균은 그해 제9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당시 아시아영화제는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번갈아 개최되었는데 그해 개최국이 한국이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의장을 맡아 영화계 인사들을 청와대로 초청했고, 최우수작품상 등은 직접 시상하기도 했죠. 그 후 나는 신상옥 감독, 최은희씨와 함께 종종 청와대에 초청받아 박 대통령 내외와 식사를 했어요.”
 
  박 대통령은 말수가 적은 편이었지만, 영화에 대한 관심은 매우 컸다고 한다.
 
  “박 대통령이 ‘신영균씨, 수고했어요. 〈상록수〉는 참 좋은 영화입니다. 우리나라도 농촌을 개발해야 잘사는 나라가 될 겁니다’라고 말했죠.”
 
  1970년대 시작된 국가 재건 프로젝트인 ‘새마을운동’은 박 대통령이 영화 〈상록수〉를 보고 감동받아 구상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신영균은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김수용(金洙容) 감독의 영화 〈갯마을〉(1965)도 신영균의 뇌리에 박힌 영화다. 오영수(吳永壽)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남편을 바다에 빼앗기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갯마을 아낙들의 애환을 담았다. 여우 고은아(高銀兒)는 당시 스무 살 신인으로 고작 두 번째 출연작이었다.
 
  “〈갯마을〉은 10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문예영화였어요. 나는 이 영화에서 지나친 욕망으로 스스로 파멸해가는, 제법 수위가 높은 마초 연기를 시도했죠. 온몸이 땀으로 흥건한 두 남녀 옆으로 바닷가 포말이 겹치는 장면이 지금도 선합니다.”


    ‘러브신’과 프로 정신

▲1967년 제5회 청룡영화상 인기상에 빛나는 남녀 베스트6. (왼쪽부터) 윤정희, 신영균, 남정임, 엄앵란, 김지미, 김진규씨

 

― 1960~1970년대에 세계 영화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많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입니까.
  “1960년대와 1970년대는 영화와 가요가 대중문화의 양대 기둥이었습니다. 그중 영화는 연간 200편이 넘는 작품을 제작하며 작품이 흥행에 성공할 때마다 스타들이 쏟아져나와 화려한 조명을 받았죠.
 
  라디오 시대가 끝나고 흑백TV가 나오면서 방송 드라마가 눈길을 끌기도 했지만, TV는 1980년대 컬러시대로 접어들면서 눈길을 받았으므로 영상시대의 모체인 영화 전성기는 영화배우들의 전성기이기도 했어요.
 
  그러나 스타 시스템의 주인공인 배우들의 인기 관리나 활동 스케줄 관리는 지금처럼 전문 기업형 소속사가 없이 개인 매니저나 가족들이 맡아 화려한 시선 이면에는 고충의 일화도 많았습니다.”
 
  ― 여배우 이야기를 안 들 수가 없는데 만약 전성기 시절로 돌아가 다시 호흡을 맞출 수 있다면 누구와 연기하고 싶은가요.
  “가끔 기자들에게 그런 질문을 받을 때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운 고민을 합니다. ‘수많은 작품의 파트너 중에 누가 가장 좋았느냐’는 질문에 특정 인물을 꼽기란 힘들어 대충 나와 작품을 통해 관객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최은희, 김지미, 황정순(黃貞順), 문정숙(文貞淑), 주증녀(朱曾女), 윤인자, 엄앵란, 윤정희(尹静姬), 문희(文姬), 전계현(全桂賢) 배우들의 이름을 쉽게 떠올립니다.
 
  지금 다시 누구와 연기를 하고 싶은가의 질문은 작품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지적하기 어렵습니다.”
 
  ― 19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문희·윤정희·남정임) 중에 호흡이 가장 잘 맞은 배우는 누구일까요? 대표작을 꼽아줄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영화사에서 대표적인 멜로드라마로 꼽히는 〈미워도 다시한번〉의 배우 문희씨를 나를 알고 있는 분들이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시리즈로 제작되기도 했지만 시대가 바뀌어 리메이크된 작품도 크게 성공한 영화가 〈미워도 다시한번〉입니다.”
 
  ― 여배우 성공요건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배우는 눈이 또 하나의 얼굴입니다. 눈에서 나오는 눈빛으로 감정의 흐름을 표현하는데 배우 문희의 눈은 단연 돋보이는 명배우의 보고(寶庫) 같아요. 절묘한 선을 지키며 분위기를 이끌어냅니다.”
 
  ― 영화 속 수많은 여배우의 남편이자 연인이었는데 영화와 일상을 엄격히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러브신’ 장면할 때 실제 연인처럼 마음이 뜨거워지기도 합니까.
  “훌륭한 연기력의 배우는 연기를 연기로 나타내지 않고 실제 사건의 주인공으로 착각을 일으키게 할 정도의 현실감을 느끼게 하는 리얼리티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건 비록 카메라가 돌고 있지만 순간적인 감정의 몰입을 위해서는 연인처럼 열정을 느껴야 하는 것인데, 그럴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어요. 연기가 끝나면 꿈에서 깨어나듯이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도 기품 있는 배우가 가져야 할 프로정신이죠.”

 

아! 배우 윤정희

“영화를 다시 찍게 된다면 상대역 1순위”

▲1973년 제10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서 남녀주연상을 받고 기뻐하는 신영균과 윤정희.

 

  신영균의 회고록에 배우 윤정희씨에 대한 긴 추억이 담겨 있다. 1960~70년대를 풍미한 배우 중 “죽는 순간까지도 배우일 단 한 사람”으로 윤정희를 꼽는다. “영화를 다시 찍게 된다면 상대역 1순위”도 수많은 여배우 중 윤정희다. 그녀가 출연한 이창동 감독의 〈시(詩)〉(2010)가 큰 반향을 얻은 뒤 신영균은 이 감독에게 “둘이 나오는 영화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다.
 
  신영균이 영화배우로서 출연한 마지막 작품 〈화조〉(1979년 개봉)에 윤정희가 나온다. 1978년 3월, 김수용 감독과 그는 촬영차 프랑스로 향했다. 당시 윤정희는 1976년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결혼해 파리에서 둥지를 튼 상태였다. 다음은 회고록에 실린 글 일부다.
 
  〈…영화 〈화조〉를 찍으면서 윤(정희)씨의 파리 신혼집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삐그덕 소리가 나는 나무 계단을 오르니 방이 하나 나왔는데, 백건우의 피아노가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을 뿐 침대조차 없었다. 신혼시절 형편이 넉넉지 않아서일 수도 있지만, 소박한 그들 부부의 성격이 묻어났다.…〉(196쪽)
 
  신영균의 말이다.
 
  “우리 부부와도 평소 가깝게 지내던 터라 두 사람이 서울에 올 때는 자주 우리 집에서 식사를 했어요. 최근 뉴스에 이름이 오르내려 무척 마음이 아픕니다. 서로가 큰 나무 같은 그늘이 되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가 함께 보낸 즐거웠던 시간이 다시 올 수 있을까, 마냥 그립기만 합니다.”

 

 500억원대 사재를 내놓은 이

▲2014년 12월 31일 서울 명동 로얄호텔에서 배우 신영균이 한국영화인총연합회·한국영화배우협회·한국영화인원로회 3개 단체로부터 ‘자랑스러운 영화인’으로 선정받아 대형 기념백자를 헌정 받았다. 이날 신씨가 헌정 받은 백자는 도예가 조규영씨의 작품이다.

 

 ― 매니저 역할을 아내가 맡으셨는데, 지금도 그 선택에 후회는 없으신 거죠? 대개의 배우가 사생활을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많은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내가 활동하던 시기는 지금처럼 배우들이 소속된 전문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없고 개별적으로 매니저를 두고 활동하던 시대였어요. 그래서 주로 여배우들은 어머니가 보호자 겸 매니저 역을 맡았는데, 나는 아내가 내조에 외조까지 해서 좋은 점이 많았어요. 철야 촬영이나 장기간 외박을 하게 되면 식사나 의상 준비, 대외적인 일정과 활동 섭외 등 매니저들이 할 수 없는 건강관리 일까지 편하게 뒷바라지를 해주어 연기 활동을 효율적이고 편안하게 할 수 있었어요.
 
  사생활도 눈총받을 일이 없었습니다. 아까운 연기자들이 사생활 문제로 고민하거나 활동을 중단하는 사태도 많았던 시절이라 그런 점에서 아내에게 감사를 느끼며 살았어요.”
 
  ― ‘정치인 신영균’ ‘국회의원 신영균’, 지금도 잘한 선택이신 거죠.
  “잠시 의사로 적을 두기도 했지만 일생을 영화배우로 살았습니다. 국회의원 하고 정치 한 이력이 있지만 연기 활동을 하다가 영화인 단체와 예술인 단체의 회장으로 활동하고, 이어서 영화를 비롯한 예술인들의 권익을 위한 정치활동을 한 것이니 모두 영화배우라는 직업인의 연장선으로 보면 됩니다. 국회에 있을 때도 상임위원으로 활동한 전문성 정책 분야가 문화 분야였습니다.”

 

▲2011년 12월 26일 오후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1회 ‘아름다운 예술인상’ 시상식에서 안성기(왼쪽부터), 예술인상을 수상한 배우 김혜자, 신영균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2010년 충무로 시대를 상징하는 명보극장(명보아트홀)과 제주 신영영화박물관 등 500억원 규모의 사재를 한국영화 발전에 써달라며 쾌척해 화제가 됐습니다. 그런 기부를 결정한 배경이 궁금합니다.
 
  명보아트홀은 지하 3층, 지상 6층 규모로 서울 명동에 인접한 금싸라기 땅이다. 2004년까지 영화관으로 운영하다가 현재는 명보아트홀 등이 입주해 복합문화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제주 서귀포 해안 경승지 3만 평(9만9173m2) 터에 세운 신영영화박물관은 1999년 설립됐다. 한국영화 100년의 세월이 전시된 공간이다.
 
  “그 같은 결정을 한 데에는 아버지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위해 주는 가족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소중한 재산 중 명보아트홀 부동산을 인재 육성을 위한 기금으로 기부하는 것을 기꺼이 동의해 순식간에 결정하고 발표한 일이었습니다. 벌써 10년이 되어 지난 연말 내가 설립한 재단의 사업 중 하나인 제10회 아름다운예술인상 시상식 때 10주년 백서를 보았는데 새삼 10년 발자취에 보람을 느꼈습니다.”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은 ▲영화 및 연극인 자녀 장학금 지원사업 ▲단편영화 사전제작 지원사업 ▲아름다운예술인상 ▲어린이 영화체험교육 ▲영상작가교육원 창작지원금과 아시아나단편영화제, 한국영화배우협회 원로배우 복지기금, 남원 꿈빛 어린이 영화제 등을 지원·후원하고 있다.

 

 “〈노인과 바다〉 같은 영화 남기고 싶어”

― 100세 건강 비결과 노하우를 알려주세요.
  “특별히 건강을 위한 프로그램은 없습니다. 젊은 시절 당뇨 진단을 받아 그에 대한 식생활에 신경을 쓰고 헬스클럽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밤샘 촬영이 다반사였잖아요. 출출해 초콜릿을 많이 먹다가 당뇨에 걸렸죠. 이후 건강관리에 신경을 썼지요.
 
  만보기를 차고 걷는 운동도 꾸준히 하는데, 어느 글을 보니 4000보를 걸으면 우울증이 사라지고, 5000보를 걸으면 치매와 심장질환이 예방된다고 해요. 7000보를 걸으면 골다공증과 암, 8000보를 걸으면 고혈압과 당뇨, 1만 보를 걸으면 각종 대상증후군을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많이 걸을수록 좋아요.”
 
  신영균은 1978년 〈화조〉를 끝으로 충무로와 멀어졌지만 아직 그에게 남은 영화의 꿈이 있다.
 
  “스펜서 트레이시 주연의 〈노인과 바다〉(1958) 같은 영화 한 편을 꼭 남기고 싶어요. 건강이 허락하는 한 노년의 정점을 찍을 작품이었으면 합니다. 나보다 두 살 어린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영원한 현역으로 지금도 현역으로 뛰고 있잖아요. 연기도 나이에 맞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요. 혹시 아나, 칸영화제에서 공로상을 받을 수 있을지….”⊙

 

단답형 질문 10가지
 
  
― 일부러 찾아가 먹는 음식이나 식당이 있으시다면.
  “명동 호텔28의 딘타이펑의 만두요리와 조선호텔 ‘나인스 게이트’ 양식당 (1주일에 3, 4번 오찬)”
 
  ― 최근작 한국영화 중 기억할 만한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비롯해 화제의 작품은 대부분 보고 있다.”
 
  ― 당장 1억원이 생기면.
  “공돈에 관심 없다. 복권을 산 적도 없다. 노력의 대가 없이 굴러 들어온 돈이라면 기꺼이 좋은 일에 쓰겠다.”
 
  ― 노래방에서 즐겨 부르는 노래는.
  “〈신라의 달밤〉이나 〈황성옛터〉 같은 노래를 부르고 싶지만 〈빨간 마후라〉 〈미워도 다시한번〉이 자신 있는 18번이라 그걸 부를 수밖에.”
 
  ― 우울한 기분이 들 때 하는 일은.
  “성경을 본다.”
 
  ― 기억에 남는 스승이 있다면.
  “서울대 치대 교수 김용관 박사.”
 
  ― 코로나19 시대, 영화계를 살릴 비책이 있다면.
  “걱정이다. 텅 빈 영화관 관객석이 언제 되살아날지 영화산업 종사자들의 내일이 불안하다. 그러나 옛말을 믿는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길이 있는데 영화가 어떤 방법으로든 관객들의 사랑받는 문화로 인기를 회복할 날이 올 것이다.”
 
  ― 다시 태어난다면 하고 싶으신 일은.
  “나의 직업 영화배우는 아마 타고난 선천적인 끼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럼 다시 태어나도 아마 영화 쪽으로 발길이 갈 것 같다.”
 
  ― 요즘 배우 중에서 연기 좀 한다고 할 만한 배우는.
  “안성기·송강호·이병헌 등을 모두 좋아하고 사랑한다.”
 
  ― 최근 몇 년 사이 감명 깊게 읽으신 책은.
  “김동연 전 부총리의 저서를 보며 모처럼 감동의 눈물이 나왔다. 그의 파란만장한 어린 시절에 나의 어린 시절이 오버랩되었다.”


03.31  김지미 "6·25때 미군 시체 많이 봐" 美참전기념비 2만弗 기부

원로 영화배우 김지미(81)씨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카운티에 세우는 6.25 참전용사 기념비 건립을 위해 2만 달러(약 2270만원)를 기부했다. 30일(현지시간) 건립위위회 측에 따르면 김씨는 지난 26일 기념비 건립 부지를 방문해 기금을 전달했다.       

"6·25 당시 쓰러진 미군 시체 본 기억 나"
"생면부지의 나라 자유 지켜준 것에 감사"

▲지난 2019년 10월 5일 부산 남포동 비프광장에서 열린 '김지미를 아시나요?' 오픈토크 현장. 사진은 배우 김지미·전도연(왼쪽부터)씨.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에 거주 중인 김씨는 부산국제영화제 참석 차 오랜만에 한국을 찾았다. 송봉근 기자

 

김씨는 6·25전쟁 당시 자신의 경험을 회고하면서 참전용사들에 대한 감사의 뜻을 밝혔다고 건립위 측은 전했다. 김씨는 "전쟁 중 부모님들이 정미소를 해서 집 앞에서 밥을 지어 지나가는 미군 병사에게 줬는데 그때 많은 미군 병사들이 포로로 손이 묶여서 끌려가면서도 밥을 먹으며 고마워했다"며 "(전쟁)  당시 대전에 살았는데 길거리에는 전쟁에서 사망한 미군 병사 시체가 많이 쓰러져 있던 것을 봤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생면부지의 대한민국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젊은 군인들이 목숨을 바쳐서 우리나라를 지켜준 감사의 뜻을 조금이라도 전하는 마음으로 참전용사비 건립에 동참하고 싶었다"고 기부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로 불리며 한시대를 풍미했던 김씨는 2000년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을 끝으로 영화계를 떠났다. 이후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건너가 현재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에 살고 있다. 지난해 8월 착공한 기념비는 오는 9월 28일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별 모양으로 된 조형물 5개에 미군 참전용사 3만6492명의 이름을 모두 새길 계획이다.       
김상진 기자 kine3@joongang.co.kr 

 

04월 09일 ‘전원일기’ 일용이 박은수, 70세에 돼지농장서 충격 근황

▲  [서울=뉴시스]‘현장르포 특종세상’ 6일 방송분(사진=방송화면 캡처)2021.04.09 *재판매 및 DB 금지

 

드라마 ‘전원일기’의 일용이 역으로 인기를 누렸던 배우 박은수가 근황을 공개했다.


지난 8일 오후 방송된 MBN ‘현장르포 특종세상’에서 돼지 농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박은수의 근황이 전해졌다.


박은수는 “박은수 선생님 아니시냐”는 제작진의 말에 “어떻게 알고 왔나,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난감하다. 방송이라는 것이 가꾸고 꾸미고 나오고 좋은 이야기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이렇게 그냥 막일하는데 글쎄요”라고 머쓱해했다.


하지만 박은수는 며칠 후 자신을 다시 찾은 제작진에게 촬영을 허락했다. 그는 “방송 안 한 지 10년 넘었을 것이다. 한 15년 됐나. 연기하던 사람이 연기를 안 하고 그야말로 반성하고 있을 사정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2008년에 사기 혐의에 연루되며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구치소에 수감됐다. 이에 대해 그는 “세상 안 가보던 데도 가봤고 그러고 나와서 한 8일인가 10일인가 있었다. 그러고 (구치소를) 나왔는데 창피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그러던 와중에 누가 또 뭐 하자고 하는데 아무 것도 못 한다고 했다”고 밝혔다.


이어 “‘전원일기’ 때부터 이미지가 깨끗하고 사람들이 노인부터 시작해서 다 좋아하셨는데 어떻게 무슨 얼굴을 들고 그분들에게 나가겠나. 그래서 일부러 (방송을) 안 했다/ 그렇게 어영부영하니까 방송을 안 한 지가 10년이 넘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어떻게 보면 너무 분하고 억울하고 어딜 가든지 사연이 있고 이유가 있다. 분하고 억울하다고 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야말로 자업자득이구나, 내가 행한 일을 내가 겪는구나’ 한다”고 털어놨다.
< 뉴시스>

 

 05월 07일 법관 꿈 접고 가수의 길 “79세 현역, 나에겐 은퇴란 없어”

▲  지난달 16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한국연예인한마음회 사무실 앞에서 포즈를 취한 김상희 이사장. 그는 “부모님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수라는 직업으로 60년간 한 길을 걸어왔다”며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아 감사하다. 특히 지금까지 보살펴 준 남편 유훈근 씨에게 고맙고 미안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지금도 현역이고, 앞으로도 은퇴란 없다”고 말했다. 김동훈 기자

 

■ 여성 ‘학사가수’ 1호·여성MC 1호 김상

고대 법대 다니며 가수 오디션
‘삼오야 밝은달’로 데뷔후에도
엄격한 부모님-학교에 숨기려
수년간 얼굴없는 가수로 지내
남편이 DJ 공보비서란 이유로
1980년대 TV출연 못하기도
나는 고대 동창 MB 유세 참석
‘괘씸죄’로 찍혀 한때 활동제약
연예인 봉사단체 이사장 맡아
이젠 어디든 달려가 노래 위로


 데뷔 60주년을 맞은 국민가수 김상희는 세월이 비껴간 듯 우리 나이 79세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동안에 열정이 넘쳐 보였다. 비결은 “늘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 5일 ‘2021 자랑스러운 고대인상’을 수상한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전화를 하자 휴대전화 연결음을 통해 경쾌한 리듬의 그의 히트곡 ‘괜찮아’가 울려 퍼졌다. ‘괜찮아 괜찮아/다시 시작하면 돼/힘들면 잠시 쉬었다 가면 돼/괜찮아 괜찮아/멈춰 서면은 안돼/한 번 더 해 보는 거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힘들고 지친 국민을 위로하고 용기와 희망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인터뷰는 지난달 16일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서울 강남구 논현동 한국연예인한마음회 사무실과 5일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열린 ‘자랑스러운 고대인상’ 시상식장 등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난향(蘭香)을 품은 듯한 감미로운 목소리가 매력적인 김상희에게 붙는 수식어는 참 많다. 여자 학사 가수 1호, 여성 MC 1호…. 그러나 그는 “이런 호칭보다는 노래하면서 공부도, MC도 열심히 한 가수로 평가받고 싶다”고 했다. 그는 서울 풍문여고에서 전교 1등을 도맡아 했던 수재였다. 법관이 되기를 희망했던 어머니의 뜻에 따라 1961년 고려대 법대에 입학했지만 노래가 좋아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 “사실 처음부터 가수를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대학에 입학했던 해 서울 중앙방송국(현 KBS)에서 합창단을 모집한다기에 지원했어요. 그런데 덜렁대는 성격 탓에 실수로 동시에 공모한 전속가수 부문에 신청하는 바람에 가수 시험을 보게 됐어요.(웃음)” 그것도 당당히 1등으로 합격했다. 가수가 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데뷔곡은 1962년 발표한 ‘삼오야(三五夜) 밝은 달’이다. ‘삼오야 밝은 둥그런 달이/둥실둥실 둥실 떠오면/설레는 마음 아가씨 마음/울렁울렁 울렁거려요’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요즘도 심심찮게 들린다. 1980년 6인조 혼성 밴드 ‘들고양이들’이 ‘십오야’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해 더욱 널리 불렸다. 그러나 수년간 ‘얼굴 없는 가수’로 활동해야만 했다. “가수 활동을 집과 학교에 모두 숨겨야 했어요. 당시 고려대에서는 재학생이 가수로 활동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거든요. 부모님도 가수가 되는 것을 극렬히 반대했어요. 그래서 본명인 ‘최순강’ 대신 가장 흔한 김 씨 성에 친구 이름을 한 글자씩 조합해 예명으로 활동했어요.” 대중에게 얼굴을 드러낸 것은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었다.

 

이후 해마다 주옥같은 히트곡이 터져 나왔다. ‘코스모스 한들한들/피어 있는 길/향기로운 가을 길을/걸어갑니다’로 시작하는 불후의 명곡 ‘코스모스 피는 길’은 초가을 코스모스만 피면 김상희와 이 노래가 저절로 떠오를 정도다. 이 외에도 대표적인 히트곡은 ‘울산 큰 애기’ ‘경상도 청년’ ‘대머리 총각’ ‘즐거운 아리랑’ ‘빨간 선인장’ ‘참사랑’ 등 수두룩하다. 트로트가 대세인 시절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을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1970년대 초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연말 빅쇼 때 쟈니리의 ‘뜨거운 안녕’을 불렀는데 관객들이 일제히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어요. 당시 그 감동은 영원히 잊을 수 없어요.”


미국을 비롯해 일본과 홍콩 등으로 진출한 원조 한류 가수로도 평가를 받는다. 1966년 한국 뮤지컬의 효시인 ‘살짜기 옵서예’에서 애랑 역을 맡아 뮤지컬 배우로도 활동했다. 그동안 상도 많이 받았다. 2004년 문화훈장을 비롯해 제1회 대한민국방송가요대상, 제11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대상 등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을 정도다.


그러나 시련도 있었다. 데뷔 후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매년 히트곡을 선보였지만, 1980년대 갑자기 TV 브라운관에서 사라진 것이다. 남편 유훈근(82) 전 KBS PD가 김대중 전 대통령 공보비서를 맡았다는 이유였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탄압이 시작됐다. 결국 남편은 김 전 대통령과 함께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떠나야 했다. 김상희는 그의 아내라는 이유만으로 방송 출연 금지뿐만 아니라 가수활동을 일절 할 수가 없었다. 관계기관으로부터 사찰도 받았다. “막막하더라고요. 생계를 위해 이화여대 앞에서 햄버거 장사를 하기도 했어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고려대 동기동창으로 친분이 있어 대선 유세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하지만 “언젠가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당당히 살았다”고 회고했다.


지금까지 발표한 300곡이 넘는 노래 가운데 금지곡도 2곡이 있다. ‘단벌 신사’와 ‘어떻게 해’다. “단벌 신사 노랫말에 ‘주머니가 텅텅 비어 데이트를 못 해도/단벌 신사 노총각님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 노래를 북한이 궁핍한 남한사회를 선전하는 도구로 이용한다는 게 금지곡 사유였어요. ‘어떻게 해’는 당시 유신반대 시위자들이 이 노래를 불러 금지곡이 됐어요.”


김상희를 얘기하면서 남편을 빼놓을 수가 없다. 53년 함께 사는 동안 싸운 적이 거의 없었다고 할 정도로 이름난 잉꼬부부다. 60년 음악인생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다. 가수에서 MC로 발탁한 것도 그다. “당시만 하더라도 여성이 MC를 하는 것은 꿈도 못 꿨어요. 방송국 윗선에서도 반대했었고요. 당시 남편은 KBS ‘당신의 멜로디’라는 프로그램 담당 PD였는데, 김상희가 MC로 성공하지 못하면 사표를 내겠다고 했대요.” 결국 MBC와 TBC 등 방송국을 넘나들며 MC로 맹활약했고, 그와 결혼으로까지 이어졌다.


결혼 성사까지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양쪽 집안이 뒤집어질 정도로 반대가 심했어요.” 서울에서 극장을 3개나 소유하며 꽤 부유하게 살았던 김상희 부모는 딸을 종갓집 맏며느리로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편 집안에서도 600년 전통의 종갓집 종손 며느리로 가수를 맞으면 망한다며 극렬히 반대했어요.” 남편이 양쪽 부모들을 찾아가 설득했으나 여의치 않자 ‘반대를 해도 할 수 없다. 우리 둘이서라도 결혼하겠다’며 일방적으로 결혼식 날짜와 장소를 알려주고 집을 나왔다. “그 모습에 존경심을 가졌어요.” 막상 결혼식에는 양가 부모가 참석해 결과적으로 유 씨의 고집이 성공한 셈이다.


결혼식장에서 사건도 있었다. 신랑·신부 퇴장 직후 남편이 갑자기 쓰러진 것이다. 결혼을 위해 양가 부모를 설득하고 예식 준비 과정에서 심신이 지쳤기 때문이다. 신랑은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갔으나 다행히 바로 깨어났다. 신혼 여행도 못 가고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밤새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첫날 밤을 보냈다. “멋있고 능력 있는 남자지만, ‘김상희 남편’이라는 그늘에 가려 조용히 지낸 할아버지(남편)에게 늘 미안하고 고맙다”고 몇 차례에 걸쳐 말했다. 그러면서 “고난의 길을 꿋꿋하게 이겨내고 여기까지 온 그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젊은이에게 ‘본보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김상희는 자기 관리에 철저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가수가 되겠다고 하자 어머니가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더군요. 법관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컸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약속드렸어요. 집안 망신시키는 일은 절대로 없도록 하겠다고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지금까지도 애쓰고 있어요.”

 

그는 요즘 8년 만의 신곡 ‘초등학교 운동장에서’(김병걸 작사·곡) 발표 준비에 한창이다. “중년 이후 세대가 고향을 방문해 다니던 초등학교 운동장과 교실을 둘러보며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이에요.” 수년 전까지 라디오 프로도 진행하다가 지금은 KBS ‘가요무대’ 등에 가끔 출연하며, 전국 곳곳에서 강연과 공연요청이 오면 달려가고 있다. 그리고 어르신들과 소외 계층을 위한 소규모 위문공연도 빠트리지 않고 있다. “가수라는 직업을 늘 소중하고 감사하게 생각해요. 전 지금도 현역이고, 앞으로도 노래를 계속할 거예요. 나에게 은퇴란 없어요.”


김상희는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피어있는 인생의 가을 길에서 더 아름답게 익어가고 있었다. 그의 육성 노래를 들을 기회가 오랫동안 자주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다.
박현수 기자 
phs2000@munhwa.com 

 

‘김상희 사단’ 50여 명이 공연 봉사…소록도까지 찾아가

40년간 재능기부 ‘한국연예인한마음회’

 

사단법인 한국연예인한마음회는 국내 대중 문화예술에 종사하는 연예인들이 모인 사회봉사 단체로 1981년 설립됐다. 김상희가 이사장을, 권성희가 회장을, 배재우 배아트기획 대표가 상임이사를 맡아 행사 기획을 총괄하고 있다. 현숙과 설운도, 이은하, 남궁옥분, 주현미, 김국환, 김상배, 김혜연 등 50여 명이 재능기부로 참여하고 있다. 이른바 ‘김상희 사단’이다. 김상희만 믿고, 돈 한 푼 받지 않고 봉사하고 있다.

 

지난 40년간 공연횟수가 400회가 넘는다. 연 참가 인원수도 50만 명 정도다. 특히 서울시와 KB국민은행 후원으로 2019년까지 매년 21차례에 걸쳐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약 7000명의 어르신을 초청한 가운데 식사와 공연을 곁들인 ‘어르신을 위한 한마음축제’(사진)가 대표적인 행사다. 이밖에 보훈병원과 소록도, 양로원, 요양원, 교도소, 접경지역 군부대와 주민들을 위한 위문 공연과 봉사활동도 벌이고 있다. 김 이사장은 소외 계층 위문공연 등 사회봉사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2016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인터뷰 중간에도 “올해 공연은 언제 하느냐”는 문의 전화가 걸려왔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올해 23회째 행사도 지난해에 이어 온라인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그 대신 방역 수칙을 철저히 지키면서 탑골공원과 요양원 등에서 소규모로 위문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김 이사장은 5일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열린 ‘자랑스러운 고대인상’ 시상식에서 “40년간 봉사활동 하면서 손잡고 같이 울고 웃던 어르신들이 한 분씩 떠나실 때마다 많이 슬펐지만 그 날들이 지금까지 올 수 있게 했다. 소록도 공연을 비롯해 해외 동포 분들을 만나러 가던 길도 제가 걸어온 길이고, 우리나라 전국 방방곡곡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결코 저 혼자의 힘으로 상을 받은 것이 아니다. 함께 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박현수 기자 phs2000@munhwa.com

 

 06월 10일 최장수 드라마 ‘전원일기’ 배우들 마지막 동창회

▲MBC TV는 오는 18일 ‘다큐플렉스’를 통해 국내 드라마 사상 최장수 작품인 ‘전원일기’ 출연진이 한자리에 모인다고 10일 예고했다.

 

‘전원일기’는 1980년부터 2002년까지 22년간 방송된 농촌드라마로 장기간 사랑받았으며 최근에는 유튜브 등 새로운 플랫폼을 통해 재조명받고 있다.

 

이번 ‘다큐플렉스-전원일기2021’에는 최불암과 김혜자부터 순길이 역의 류덕환까지 30명이 넘는 배우들이 참석해 처음이자 마지막 동창회를 연다.

 

출연진은 최근 다시 ‘전원일기’가 화제가 된 이유부터 배우로서의 삶, 서로에 대한 애정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줄 예정이다.특히 김 회장 역의 최불암은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으로 ‘전원일기’를 집필한 김정수 작가를 꼽아 20년 만의 재회가 이뤄졌다.

 

김 회장네 세 며느리였던 고두심, 박순천, 조하나는 김 회장 어머니 역을 맡았던 고(故) 정애란 배우가 잠들어 있는 해양장을 찾아 그들만의 방식으로 유쾌하게 추모했다. 세 며느리의 저녁 식사 자리에는 깜짝 손님도 등장했다.

 

이밖에 ‘전원일기’ 2세대 배우들인 영남이 역의 남성진, 복길이 역의 김지영, 금동이 역의 임호, 남영 역의 조하나, 수남이 역의 강현종도 모였다.

 

김 회장네 못지않게 사랑받았던 일용이네 가족, 일용이 역의 박은수와 일용 처 역의 김혜정 또한 20년 만에 만났다. 사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쉽지 않았다고 하는데 숨겨진 이야기는 무엇일까.18일 오후 8시 50분 방송.

< 연합뉴스>

 

 06.26 뽀빠이 이상용 “박정희 파안대소, 침실서 본 사람 몇이나 될까”

[그 때 그 사람] ‘어린이 대통령’ 뽀빠이 이상용

 

1970~1990년대 ‘어린이 대통령’이라고 불리며 인기를 끌었던 ‘뽀빠이 이상용’씨가 《월간조선》7월호에 근황을 털어놓았다. 이상용(78)씨는 이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이야기, 방송 데뷔, 한국어린이보호회 활동, 어린이보호회 후원금 횡령 의혹으로 인해 받았던 고통과 재기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1980년 ‘모이자 노래하자’ 녹화장으로 선생님 한 분이 어린 제자를 데리고 찾아오셨어요. 얘가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는데, 아버지는 천식으로 일을 할 수 없고, 어머니가 시장에서 장사하며 홀로 6남매를 키우고 있다는 겁니다. ‘수술 안 하면 죽는다, 아이 좀 살려달라’기에 두말 않고 바로 ‘그렇게 하자. 알겠다’라고 했죠.”

 

문제는 수술비였다. 당시 살던 집 보증금이 600만 원이었는데 수술비는 1800만 원. 회당 출연료 16만 원으로는 감당 불가능한 액수였다.

 

“덜컥 약속을 하고 바로 도상국 어린이를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이미지 관리하느라 야간 업소 출연을 고사하고 있었는데, 오비스 캐빈, 라데빵스, 로즈 가든 세 군데 출연료 3달 치를 가불(假拂)했어요. 바자회도 하고 지인 돈도 빌리고, 발로 뛰면서 겨우 수술비 만들었죠.”

 

본인에게도 1남 1녀 어린 자녀가 있었지만, 어린 시절 병약한 몸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던 이상용에게 심장병 어린이의 비극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수술은 성공.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감격한 도 군의 아버지가 주변에 사연을 전했고, 전국의 심장병 어린이들이 뽀빠이의 사당동 집으로 몰려왔다.

 

“처음에 아내가 그러더군요. ‘돈도 없는데 어떻게 할 거냐. 우리는 수술비 반도 안 되는 액수의 전셋집에 사는데…’. 나중엔 ‘아이가 죽게 생겼는데 그 부모 마음은 어떻겠냐’며 이해해 줬습니다.”

 

아내의 인정과 격려에 용기를 얻어, 합정동에 ‘한국어린이보호회’ 사무실을 내고 16년 동안 567명의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 찾아줬다.

 

- 그런데 문제가 생겼죠?

“1996년 11월 여의도 목욕탕에서 잡혀갔어요. ‘우정의 무대’ 화천 군부대 녹화가 있던 날 아침이었죠.”

 

이른바 횡령 의혹이었다. ’4500만원짜리 집이 아니라 40억 호화주택에 산다', ’30년 고물차가 아니라 벤츠승용차를 탄다', ‘후원금 빼돌려 파주에 땅 만 평을 샀다’고 했다.

 

기자가 묻길래 “그런 집, 차, 땅 있으면 찾아서 당신이 가지시오”라고 했다. 수사를 받았지만 1997년 2월 무혐의로 사건이 종결되었다. 시작부터 함께했던 분신 같은 프로그램 ‘우정의 무대’(1989~1997년)는 아예 폐지되었다. 누가 왜 그랬는지 짐작은 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다. 대전역 앞에서 ‘우리 아들은 그렇지 않다’고 프린트물을 돌리던 아버지가 아들의 일에 대한 충격으로 78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것이 가슴 아플 따름이다.

 

“억울했죠. 한때 왼쪽 눈이 안 보였고, 수면주사 두 대를 맞아도 잠을 못 잤어요. 더 가슴 아픈 건, 수술을 기다리던 심장병 어린이들 중에서 사망자가 나왔다는 겁니다.”

 

미국 서부로 건너가 고려대 출신이 대표로 있는 여행사에서 관광가이드로 일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하루에 관광버스를 13시간 탔습니다. 미국에 있는 동안 무혐의 판결이 났고 한국 관광객들이 ‘억울하겠다, 우린 다 안다’며 팁을 많이 주셨어요. 팁 받는 사람이 그 돈으로 도박할 순 없잖아요? 라스베이거스를 수없이 갔어도 슬롯머신 한 번 안 했습니다. 2년간 팁 9000만 원을 모아 딸을 시집보냈죠.”

 

그의 버스 탑승 후 후배 회사를 찾는 관광객이 두 배쯤 늘었지만, “국민들이 당신을 보고 싶어 한다”는 아내의 한 마디에 귀국을 결심했다. 돌아오기는 했지만 세상에 나갈 뜻이 없어서 전남 구례 비닐하우스에서 상추, 마늘 농사를 짓고 경남 일대에서 꽃모종을 심으며 6개월을 보냈다. 일당 3만 원. 그 돈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했다. 가족에게 가장의 의무를 못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국 후 집에 오자마자 엉엉 울었던 기억도 지워주고 싶었다. 개그우먼 문영미와 녹음한 ‘이상용의 폭소열차’(1999년)는 그렇게 세상에 나온 음반이다.

 

“CD를 들고 제가 직접 행담도 휴게소 화장실 앞에서 3년 동안 팔았습니다. 손님들 오시면 몇 분 앞에 두고 즉석 개그도 했죠. 지나가던 분들이 신기해하며 ‘요즘은 잘 지내냐’며 걱정도 해주시고 덕담도 해주셨습니다. 응원만 해주신 것이 아니라 물건도 많이 사주셨어요.”

 

현숙, 유지나, 태진아, 조항조, 송대관 등 가수들이 행사장에 가는 길에 일부러 들러 도움을 주기도 했다. 같이 CD도 팔고, ‘화장실 앞’에서 노래도 불러줬다. KBS 전국노래자랑 사회를 2년(1985~1986년) 할 때 만났던 소중한 인연들이다.

 

CD는 10탄까지 제작할 만큼 대박이 났지만, 생각보다 가계에 보탬을 주지는 못했다. 저작권 개념이 모호하던 시절이어서, 정본보다 복사본 판매량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CD를 만든 건 잘한 일이다. 이상용을 처음 발탁했던 유수열 PD(당시 춘천 MBC 사장)가 소식을 듣고 전화를 했기 때문이다.

 

“상용아, 와라. 나는 너 알아.”

매주 1시간 진행한 ‘강원 매거진’(2000)이 이상용의 방송 복귀작이다. 이후 대전 MBC의 ‘주부 가요열창’, 경인방송의 ‘청춘 노래자랑’, 전주방송의 ‘와글와글 시장가요제’, MBC ‘늘 푸른 인생’ 등을 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한 달에 강의를 50여 차례 다니며 왕성하게 달리던 뽀빠이 열차는 하지만 지금 21개월째 발이 묶여 있다. 코로나 때문이다. 2월에는 계단에서 넘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일도 있었다. 아직도 보행이 조금 불편한데, 건강과 활력의 상징 뽀빠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일 수 없어 아파도 아픈 척을 하지 않는다. 2023년 팔순 기념으로 출간 예정인 자서전 《살아보니 인생 별 것 아니더라》 집필도 멈출 수 없다.

 

“제 방송이나 강연이 다 현장 중심으로 이뤄지잖아요. 그런데 집합금지 조치 때문에 일이 싹 끊어졌어요. 거짓말처럼. 먹고살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얼마 전에도 소장하고 있던 그림을 팔았죠. 저에게는 지금 일과 돈이 필요합니다. 불러주시면 어디든 달려가겠습니다!”

 

왜 그렇게 돈이 없나. 필요하다 싶으면 일단 지르고 보기 때문이다. 심장병만 해도 수술비 총액만 80억 원 남짓. 그래서 곳간에는 쌀이, 통장에는 돈이 늘 부족했다.

 

횡령 의혹으로 몰렸을 당시 통장 잔고는 불과 40여만 원. 담당 수사관이 “형님, 왜 이렇게까지 애쓰며 사셨습니까?”라고 했을 정도다.

 

- 그렇다면 본인이 꼽는 대표작, 생애 최고의 프로그램은요?

“1989년부터 했던 ‘우정의 무대’죠. 나를 완성시켰고, 나의 모든 것을 녹여 넣은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군(軍) 위문 프로그램을 만들 때 제가 만장일치로 사회자 추천을 받았답니다. 장교 출신에 전방에서 제대로 군 생활했다고, 장병들이 저를 보면 좋아할 거라고요. ‘우정의 무대’는 부대 내 사고도 줄이고 병영의 즐거움도 늘린 프로그램이었다고 자부합니다.”

 

- 모든 유머를 직접 만든다면서요? 독서량도 어마어마하다고 들었습니다.

“지금도 일주일에 4~5권은 꼭 책을 읽습니다. 필요한 부분만 메모하고 바로 버리죠. 그렇게 모은 소재 4만 개를 금고에 넣어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저한테는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료죠.”

 

- 유명인들과도 교분이 많았지요?

“그럼요. 김수환 추기경님 앞에서 ‘신부하시길 잘하셨어요. 그 얼굴에 누가 시집오겠습니까?’라는 코미디를 했고, 박정희 대통령 침실에서도 개그를 했습니다.

 

육영수 여사의 청으로 희극인 김희갑 선배님과 세 차례 청와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각하가 취기가 있고, 힘들어하시니 푹 주무실 수 있도록 우스운 얘기 몇 개 해달라는 말씀이셨어요. 품격 있는 19금 이야기도 하고, 잠드시는 것 같다가 깨면 다시 들어가 또 웃겨드렸습니다. 박 대통령이 파안대소(破顔大笑)하시는 모습을 침실에서 본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 방송가(放送街)에서 산전수전(山戰水戰)에 공중전(空中戰)까지 다 겪었는데,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하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습니까?

“그럼요, 있죠. 100세 이상 어르신들 모시고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죠. 제목은 ‘너희가 100살을 알아?’ 전국에 100세 이상 어르신이 1만 5000분이 좀 넘어요. 어르신들과 가족들을 모시고 어떻게 100세를 넘겼는지, 가족 분위기는 어떤지, 자손들이 자랑하는 어르신의 모습 등을 방송에 담고 싶습니다. 장날 약장수말고는 문화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시골 오지 마을을 찾는 ‘유랑극단’도 하고 싶어요. 차 한 대에 가수, 코미디언, 마술사, 의료진을 동행하고 전국을 도는 거죠. 동네 사람들이랑 잔치국수 끓여서 나눠 먹고, 상비약, 김치냉장고도 나눠드리는 겁니다.”

 

10년 이상 진행한 프로그램만 일곱 편이 넘는 전설적 사회자의 소망이 꼭 이뤄지기를 바라며 마무리 질문을 던졌다.

 

- 이상용은 어떤 사람입니까?

“집은 20평, 건당은 80평, 행복은 150평에 사는 사람입니다.”

 

- 이상용에게 코미디란?

“인생의 단면이죠. 코미디로 인해 내 인생이 좌우로 나눴으니까요.”

 

- 이상용의 인생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1억 원입니다.”

 

- 네?

“파란만장(波瀾萬丈) 했으니까요.”

 

‘파란’ 지폐 ‘만 장’이면 1만 × 1만, 그래서 1억 원이라는 이야기였다. 초구(初球) 못지않은 강력한 웃음이 터지면서 인터뷰가 끝났다.

조선일보 장원재 장원재TV 대표

 

 

08.07 월간조선 08월 호

■ 이장호 감독

“血稅 받으면서 대한민국 위기에 빠뜨리는 사람들이 ‘기생충’”

 

⊙ 공보처 영화 검열위원이었던 아버지 부탁으로 신상옥 감독 門下에 들어가… “신상옥 감독은 저에겐 아버지”
⊙ 동생 대학등록금 들고 고교 친구 최인호 찾아가 소설 〈별들의 고향〉 판권 따내
⊙ 〈바람 불어 좋은 날〉 〈바보선언〉 등으로 장선우·박광수·봉준호 감독 등에게 영향
⊙ ‘기왕에 망치는 것, 온갖 실험을 다 하는 쪽으로 가자’고 만든 〈바보선언〉으로 대박
⊙ 북한인권국제영화제·락스퍼인권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활동… “이건 내 餘生의 숙제”

▲사진=조준우

 

 이장호(李長鎬·76)의 영화는 1970~ 1980년대 한국 청년문화의 자화상(自畵像)이다. 농경공동체사회가 도시산업사회로 변모하던 격변의 20년. 산업화 초기의 풍요(豐饒)와 10월유신이라는 권위주의적 정치 환경이 교직(交織)하던 시대. 1970년대를 살아간 20대는 식민지와 전쟁을 체험하지 않은 신세대였다. 생존 방식과 삶의 목표가 앞 세대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는 뜻이다.
 
  통기타와 청바지, 생맥주는 그래서 우리 사회가 생존과 기아의 문제를 뛰어넘었다는 걸 웅변하는 소도구였다. 동시에 청춘과 지성의 상징물이기도 했다. 이어령(李御寧) 교수는 “청바지와 통기타 등은 생활양식의 공통성이자 청년들의 동질성 표현”이라며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권위에 대한 반항, 물질주의·기계주의·상업주의에 대한 반항 의지의 표현으로 봐야 한다”고 평했다. 고고춤과 장발, 미니스커트도 1970년대의 청년문화를 상징하는 또 다른 이미지다.
 

  신세대의 말, 생각, 행동은 확산이 빨랐다. 신선했고, 확실한 소비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청년문화는 대학가를 넘어서 문화판 전체로 침투했다. 해일(海溢)이었다. 영화와 노래가 위안과 오락을 위한 일회용 소모품에서 ‘문화상품’으로 신분 상승한 것도 이 무렵이다.
 
  1974년, 29세의 젊은 감독 이장호가 ‘청년문화의 결정판’ 같은 영화를 개봉했다. 〈별들의 고향〉이다. 그가 깃발을 든 곳에서 때로는 환호가, 때로는 포연(砲煙)이 피어올랐다. 빈민가 청년들의 생존일기 〈바람 불어 좋은 날〉(1980년), 망치려고 작정했다 희대의 실험영화로 격상한 〈바보선언〉(1984년), 성(性)과 트라우마의 만남 〈무릎과 무릎 사이〉(1984년), 에로물이냐 에로물로 포장한 정치영화냐 논쟁이 일었던 〈어우동〉(1985년), 이현세 원작 만화를 영화화한 1986년 흥행 1위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년), 이제하 원작 소설로 유수의 해외영화제가 작가주의 작품으로 격찬한 로드무비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7년)까지, 이장호가 있는 곳이 대중문화와 시대의 최전선이었다.


  아버지는 영화 검열위원

  이장호가 처음 영화를 접한 곳은 ‘아버지 무릎 위’다. 부친 이재형(李在亨· 1920~1999년)은 정부 수립 후 공보처 영화과 검열위원으로 일했다. 국내 개봉영화를 모두 봐야 했기에,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영화를 보았다. 집안 여기저기에 영화 필름이 있었고, 아이는 전등에 필름을 비춰보며 그 안의 ‘그림’에 흥미를 느꼈다. 영화 필름은, 불이 확 붙는 물건이니 절대로 성냥불을 붙이지 말라는 ‘불장난 엄금’의 위험물질이기도 했다.
 
  “중앙청 지하에 시사실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저를 데리고 가기도 했죠. 근무시간 중에 아이가 출입해도 뭐라는 사람이 없던 목가적인 시절입니다.”
 
  아버지의 꿈은 영화배우였다고 한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경수로 발전소 건설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함경남도 북청군 신포(현 신포시)가 고향이다. 명태잡이 선주(船主)였던 할아버지는 경성(京城)에도 근거지가 있었다. 명동 기쁜소리사 앞 커다란 명태가게가 할아버지 소유의 빌딩이었다. 그의 가족이 해방 전부터 서울로 이사해 살았던 배경이다.
 
  “아버지는 우에노 음악학교에 다녔다고 합니다. 윤심덕, 홍난파 등이 졸업한 학교죠. 성악과 학생이었는데, 성대 이상으로 수술을 한 뒤로 예술가의 꿈을 접었다고 들었습니다.”
 
  도쿄 호세이대학(法政大) 경제학과로 적을 옮긴 이재형은 신포읍 유치원 교사던 한월춘(韓月春·1924~ 2019년)에게 반해 청혼했다. 결혼 후, 두 사람은 일본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부부의 3남 2녀 중 차남이 이장호다. 그의 밑으로 여동생 둘, 남동생 하나가 있다. 남동생은 이장호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배우 이영호. 매제(妹弟) 중 하나가 정치인 유인태다. 이재형도 훗날 아들의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하며 청년 시절의 회한을 풀었다. 

 
  영화 〈싱고아라〉의 기억

▲〈별들의 고향〉 개봉 직후 최인호(오른쪽)와 이장호 두 사람은 서울高 동기다. 사진=이장호 제공

 

― 유년 시절 본 영화가 생각납니까.
  “스토리도 모르고 인상 깊은 화면만 떠오르죠. 그래도 몇 작품은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싱고아라(Singoalla)〉 (1949년·한국 개봉 1952년)라는 프랑스 영화도 그 가운데 하나죠. 중세가 배경이고, 미혼 시절 낳은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가는 이야기인데, 아버지가 몽유병자입니다. 몽환적인 분위기가 스크린 전체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 영화는 부산으로 피란 가서 봤는지도 모르겠네요.”
 
  이장호는 1·4후퇴 때 피란, 부산 부민국민학교에 다녔다. 환도(還都) 후엔 북아현동 적산(敵産)가옥에 거주하며 바로 윗집 무역회사 사장님 댁 딸들과 동무를 하며 놀았다. 세 딸에게 니나, 엘라 등 서양 이름을 따로 붙여주던 집이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상하이를 오가며 사업을 해서 국제적인 분위기가 물씬 나던 이웃이다. 그때 읽었던 미국 동화책의 고급스러운 질감과 색감을 잊을 수 없다. 기독교 어린이 잡지 월간 《새벗》, 강소천(姜小泉)의 동화집 《꽃신》도 잊지 못할 독서 목록이다.
 
  “저보고 집에서 늦번지다(‘늦다’의 함경도 사투리)고 했죠. 저는 열등감이 많은 아이였어요. 덕수초등학교 시절 통지표에 담임선생님이 ‘머리는 좋은데 노력이 부족하다’라고 써주셨는데, 그게 위안일 정도였습니다. 소원이 세상과 떨어져 목장에서 로맨틱하게 살면서 아내와 아이들 음악도 시키고 자유롭게 사는 거였어요. 사회성이 낮고 꿈꾸듯 살아서, 나중엔 아버지가 넌 공부해서 성공할 타입이 아니라는 말도 하셨죠.”
 
  ― 유년 시절을 자유롭게 보냈다는데, 명문 서울중·고를 졸업했습니다.
  “운이 좋았으니까요. 1958년도 제가 6학년 때 교육제도가 바뀌었어요. 중학 입학시험이 주관식에서 사지선다로 나왔습니다. 어렴풋이 알아도 정답을 맞힐 수 있게 된 거지. 덕분에 갑자기 성적이 확 올랐습니다.”
 
  이때 서울중·고 동기가 소설가 최인호(崔仁浩), 음악가 정성조(鄭成朝)다. 중·고교를 거쳐 홍익대 건축과에 입학. 건축을 전공한 건 가정교사 김덕초의 영향이다. 평안도 실향민으로 서울대 공대 건축과를 다닌 김덕초는 오페라 아리아도 잘 부르고 악기 연주에도 다재다능하던 선배였다. 나중에 대우건설 사장을 역임하는 김덕초는 이장호에겐 〈데미안〉의 싱클레어 같은 존재였다. 그의 영향으로, 중1 때 밴드부에 들어갈 정도였으니까.


  신상옥 감독과의 만남

  대학에 들어갔지만 강의실보다 술집을 전전하는 아들을 보다 못해 아버지가 영화사에 자리를 부탁했다. 신상옥(申相玉·1926~2006년) 감독이 “뭘 하고 싶냐?”기에 ‘저도 연출하고 싶습니다’라고 답했다. 배우를 하고 싶었지만, 당대의 미남 신상옥 감독의 실물을 보고 주눅이 들어서 얼떨결에 뱉은 말이다. 바로 학교를 그만두고 신필름 연출부에 입사했고, 그때부터 현장에서 8년을 보냈다.
 
  “신상옥 감독님은 저한테 아버지였어요. 넥타이 대신 스카프를 하고 다니시는 것, ‘찌꾸’라는, 일본 단학사(丹鶴社) 제품 머릿기름 스틱 등 습관과 기호품이 아버지와 닮았으니까요. 심지어 두 분이 체취도 비슷했죠. 모두 함경도 분이기도 하고(신상옥 감독은 청진). 아버지와 신 감독님이 너무 비슷해서 혼란스러운 친밀감이 들 정도였습니다.”


  〈청일전쟁과 여걸민비〉(1965년)가 그의 입사 당시 신필름이 제작하고 있던 영화다. 1960년 설립한 신필름은 전성기 200여명의 제작진에게 월급을 주던 국내 굴지의 영화사였다. 서울 용산에 1000평 규모의 촬영소, 녹음실, 편집실, 영사실이 있었다. 안양 촬영소도 인수했으며 자체 연기자 양성소도 운영했다. 미국식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의 제작방식을 이식한 야심만만한 프로젝트였다. 국내 영화 제작의 40% 정도를 신필름 한 회사가 맡아서 진행할 만큼 독보적이었다.
 
  촬영장을 오가며 정신없이 살던 당시의 경험은 《모두 주고 싶다: 이장호의 스무 살 일기장》(1981년)이라는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출판사 일을 하던 지인이 이거 책으로 만들자며 일기장을 가져간 후, 광고 카피라이터 이만재가 원문에 평을 달아서 출간한 단행본이다. 촬영장 고생담뿐 아니라 20대 초반의 사회의식, 거센 성 충동 등이 날것 그대로 실려 있는 기록이다.  


  
“장호, 수고했다”

▲1996년 제1회 부천 국제판타스틱영화제. (왼쪽부터) 이장호 집행위원장, 최은희 심사위원장, 이해선 당시 부천시장 부부, 신상옥 감독.

 

 ― 신상옥 감독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거인(巨人)이죠. 천재의 차가움도 있고…. 1964년에 아시아 최대의 영화사 홍콩 쇼브라더스사(邵氏兄弟有限公司)와 신필름 합작으로 〈비련의 왕비 달기〉를 만들었습니다. 몇 편 더 협업을 했는데, 샤오런메이(邵仁枚) 회장이 홍콩 스태프들에게 ‘신 감독 영화를 그대로 카피해서 다시 찍어라. 이 영화를 그대로 극장에 붙이면 감독, 스타가 다 한국에서 나온다. 아시아 전체를 한국 영화가 석권할 것’이라고 했답니다.”
 
  영화에 미친 남자, 24시간 영화만 생각하는 신상옥에 대한 증언은 여러 편이 더 있다. 최은희(崔銀姬) 여사의 회고도 그 가운데 하나다.
 
  “가재도구가 뭐가 있는지 신경도 안 쓰며 살던 분이 어느 날 갑자기 소파며 탁자를 유심히 본다. 그럼 불안하다. 가구들이 며칠 후 촬영장으로 실려 가 소품으로 쓰이는 전조(前兆)이기 때문이다.”
 
  ‘영화만 생각하는’ 신상옥은 4년이 지나도록 이장호의 이름을 몰랐다. ‘야, 임마’ ‘이 자식’ 등의 대명사가 그의 호칭이었다. 〈전쟁과 인간〉 촬영 때 여주인공 마네킹을 산 아래로 떨어뜨려야 하는데 소나무에 걸렸다. 로프로 몸을 묶고 내려가 ‘마네킹 추락신’을 무사히 마치고 산 아래로 내려가니 “장호, 수고했다”는 칭찬이 들렸다. 다른 스태프들을 다음 장소로 먼저 보내고, 홀로 남아 그를 기다리던 거장이 처음 불러준 이름 석 자다. 감격, 무안함, 뛰어서 하산한 가쁜 호흡 등이 겹쳐 눈물을 쏟는데 “자식, 뭐 대단한 거 했다고…”라고 놀리며 거인은 그를 지프 앞자리 상석에 태워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재미는 있었지만, 영화사 월급이 지금 수준으로 30만원 정도? 생활이 불가능했죠. 양장점을 하며 가계를 책임졌던 어머니에게서 매일 용돈을 받아 끼니를 해결했어요.”
 

  결혼식 주례는 최은희

  점심은 굶고, 집에 오는 길에 중국집에서 우동 한 그릇 사 먹고 곯아떨어지는 나날이 이어졌다. 변화가 필요했다. 그래서 1971년 잠시 신필름을 나와 연극을 했다. 서울고 선배 무세중(巫世中), 박정규 등이 만든 ‘민족극단’이다. 이때 단원의 여동생과 사랑이 싹텄다.
 
  1972년 결혼식의 주례는 최은희 여사. 아버지가 신상옥 감독에게 주례를 부탁했는데, 신 감독이 자신은 주례를 서본 적이 없다며 최은희 여사를 추천했다. 결혼식은 이장호의 매스컴 데뷔다. 여성 주례가 화제가 되어 여기저기 화보가 실렸다. 주례가 처음이기는 최은희 선생도 마찬가지. 그래도 대배우는 땀을 뻘뻘 흘리는 신랑을 보고 주례 도중 한복에서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아줬다.
  
  1972년 극단은 해체했고 이장호는 신필름에 재입사했다. 군(軍) 문제는 이 무렵 정리했다. 지방 촬영을 다니느라 집으로 신체검사 통지서가 온 줄도 몰랐기에, 서류는 ‘소재불명’으로 반송되곤 했다. 이장호는 병역기피자 일제자수기간에 중부경찰서에 출두, 진술을 하고 신검(身檢)을 받았다. 판정은 연령초과로 소집 면제. 지금도 병역을 필한 동년배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1973년 홍콩합작영화 제작팀에 합류해 1년을 홍콩에서 보낸 시간이 영화인 이장호가 개안(開眼)한 시간이다.
 
  “말이 연출부지 제가 그간 한 일은 조수로 막노동하는 거였습니다. 합작 프로젝트가 지지부진해서 예정만큼 촬영일이 이어지지 않았어요. 그 시간을 틈타 열심히 심야영화를 보러 다녔습니다. 당시 한국에선 연간 20편 정도의 외화(外畵)를 수입했습니다. 그것이 일반인이 볼 수 있는 외국 영화의 전부였는데, 홍콩에선 찰리 채플린이며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프랑스・이탈리아 등 유럽 영화가 상시(常時) 상영이었거든요. 신세계였습니다. 제 연출의 감성은 이때 길러진 셈입니다.” 

 
  〈별들의 고향〉

▲이장호의 데뷔작 〈별들의 고향〉은 46만5000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대히트를 쳤다. 사진=이장호 제공
 

1972년 9월부터 1973년 9월까지 신예작가 최인호가 《조선일보》에 소설을 연재했다. 〈별들의 고향〉이다. 이 감독의 아버지는 이 소설을 스크랩해서 홍콩으로 우송했다.
 
  “최인호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동창이죠. 1963년 고2 때 단편 〈벽 구멍으로〉가 《한국일보》 신춘문예 가작으로 뽑혀서 난리가 났지만, 어렸을 때부터 백일장 장원은 맡아논 친구였어요. 중·고교 시절엔 선생님들도 깜짝 놀랄 만한 작품을 이미 쓰고 있었죠.”
 
  당시 신문 연재소설은 지금의 드라마 못지않게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점심을 마친 직장인들이 소설 속 주인공들의 대화와 행동을 주요 화제(話題)로 삼았다. 미처 소설을 못 읽은 사람은 주변의 해설을 기다릴 정도였다. 이병주, 유주현 등 연배가 있고 비중이 큰 작가들이 주요 집필진이던 신문연재를 20대 작가가 차지한 것도 화제였지만, 〈별들의 고향〉에 대한 시중의 인기는 상상 이상이었다. “어제 경아 어떻게 됐어?”라며 남자들은 술잔을 기울였고, “경아 그만 고생시켜라”며 여자들은 신문사로 전화를 걸었다. 주점(酒店)의 여급(女給)들 거의 모두가 예명을 ‘경아’로 바꾼 건 또 다른 전설이다.
 
  자연히, 영화화에 대한 기대 또한 적지 않았다. 판권 경쟁에 관한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이장호는 친구 최인호의 집을 급습, 버티기를 시전하며 판권을 따냈다. 군자금(軍資金)은 동생의 대학등록금. 친구라지만, 겨우 제2 연출부(조감독이 되려면 제1 연출부로 승진해야 했다)에 머물고 있던 이장호에게 영화 판권을 준다는 건 최인호로서도 흔쾌한 결정은 아니었을 터다. 최인호는 “야,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네 맘대로 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도장을 찍었다.
 
  이장호가 〈별들의 고향〉 판권을 샀다는 소문은 금방 충무로에 쫙 퍼졌다. 신상옥 감독은 “연출은 네가 하더라도 촬영은 베테랑 이형표 감독에게 맡기자”고 했다. 이장호는 “알겠다”고 답한 뒤 그날로 책상을 빼서 줄행랑을 놨다. 신상옥 감독이 나중에 “키워놓으니까 말도 없이 도망쳤다”고 섭섭해한 이유다.
 
  “윗분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제 마음대로 영화를 만들고 싶었거든요. 화천공사에 찾아가 제작 조건으로 ‘코닥 필름 3만 자’를 달라고 했습니다. 다른 영화의 두 배 남짓 필름을 쓰겠다고 한 거죠.”


  
이장희 작곡, 윤시내 노래

당시 필름은 비싸고 귀한 물품이었다. 필름을 횡(橫)으로 이등분해 두 배로 늘려 쓰는 신공(神工)이 유행하던 시절이다. 오죽하면 세계적 거장인 일본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도 평단의 지적에 “나도 펜만큼 싼 카메라를 가지고 원고지만큼 싼 필름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작품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항변했겠는가.
 
  화천공사는 소설 〈별들의 고향〉의 인기를 믿고 이장호의 제안을 받아줬다. 대신 개런티는 감독협회가 정한 최저선인 40만원에 합의했다. 동생에게 빌린 등록금 15만원을 갚고 조연출에게 25만원을 주며 전투 준비를 마쳤다.
 
  감독 경험이 없으니 콘티도 없이 즉흥 촬영이 많았지만, 서울고·홍익대 선배인 촬영기사 장석준이 이장호의 희한한 요청을 다 받아줬다. 영화음악 역시 관행을 무시한 결과다. 서울고 2년 후배 이장희와 홍익대 1년 후배 강근식에게 음악을 맡겼더니 영화를 보기도 전에 완성품을 만들어왔다. 소설만 보고 느낌에 따라 작업한 결과였다.
 
  다른 영화는 완성본이 나오고 단시일 내에 음악을 만들었는데, 두 사람은 신세계 레코드 스튜디오에서 40일 동안 숙식을 하며 작품을 내놨다. 다른 작품처럼 영상과 소리가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장면이 바뀌어도 노래가 계속 흐르는 건 노래가 먼저 만들어진 탓이다. 그래서 노래는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의 여운을 관객들에게 자연스레 전달한다. 마치 계절이 바뀌어도 그리운 이의 얼굴이 떠오르듯이.
 
  이후의 이장호 영화와 마찬가지로, ‘노래’는 영화 곳곳에서 풍성하게 흐른다. ‘음악’이 영화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시청각(視聽覺)이 병진(竝進)하는 것이다. 서두에 나오는 ‘한 잔의 추억’, 하이라이트 때 깔리는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와 ‘휘파람을 부세요’는 영화를 넘어 불후의 명곡이 되었다. 20대 초반의 가수가 청순한 목소리로 취입한, 경아가 죽을 때 들려오는 ‘난 그런 거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왠지 겁이 나네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로 시작하는 ‘나는 열아홉 살이에요’도 공전의 히트를 쳤다. ‘얼굴 없는 가수’는 잠시 사라졌다 몇 년 후 허스키한 목소리로 돌아와 가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열애’의 윤시내다.


  대마초 파동

이런 과정을 거쳐 세상에 나온 〈별들의 고향〉은 단관 개봉시대에 46만5000명의 관객을 모은다. 관객 5만명이면 대히트라고 평가하던 시절이다. 관행에 도전한 젊은 감각의 승리였다.
 
  청년 세대는 자기 세대의 감각이 투영된 영화에 열광했다. 맑고 순수한 오경아(안인숙)가 사랑에 배신당하며 여러 남자를 만나다가 마지막에는 눈 덮인 한강 얼음판 위에 쓰러져 수면제를 입에 털어 넣는 이야기를 청년들은 유신시대를 살아가는 자신들의 생애와 등치(等値)했는지도 모른다. 주인공 안인숙의 대사 “추워요, 안아주세요”와 경아의 마지막 남자 신성일의 대사 “경아, 오랜만에 같이 누워보는군”은 40여 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유행어의 지위를 내려놓지 않고 있다.
 
  〈어제 내린 비〉(1974년·음악 정성조) 등 3편의 영화를 감독하며 승승장구하던 이창호가 덫에 걸린다. 대마초 파동. 1976년의 일이다.
 
  “그땐 각 대학 앞에서 와이셔츠곽에 담은 개비 담배를 팔던 시절인데, 절반이 대마초였어요. 그만큼 흡연 문화에 관대했습니다. ‘환각’에 대한 호기심도 있어서 딱 한 번, 정말 딱 한 번 피워봤습니다. 그런데 별 감흥이 없더라고. 감흥이 있었다면 계속 피웠겠죠.”
 
  남대문 도큐(東急)호텔 건너편에 있던 검찰, 보건사회부, 내무부, 시경 합동조사반에 불려갔다. ‘딱 한 번’뿐이라 별 생각 없이 선선히 자백했는데 예상과 달리 응암동 정신병원으로 끌려갔다. 다른 ‘대마초 연예인들’이 갇혀 있던 곳이다. 
 

  〈바람 불어 좋은 날〉

혹시 ‘보복’은 아니었을까? 〈그래 그래 오늘은 안녕〉(1976년)을 동숭동 시민아파트에서 촬영했는데, 검열위원 중 누군가가 “이거 빨갱이 영화 아니냐”고 했다는 걸 나중에 들었다. 이탈리아의 고전 〈자전거 도둑〉(1952년)처럼, 서민 생활의 비참함을 묘사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대마초 흡연의 결과는 무기한 활동 정지. 1979년 10·26이 터지고 12월 대마초 규제가 풀릴 때까지 이장호는 4년을 야인(野人)으로 지냈다.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막걸릿집을 했고, 그는 울분을 삼키며 기약 없는 독서를 하고 다른 감독들의 영화를 봤다.
 
  본인이 가난해지니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눈에 들어왔다. 복귀작 〈바람 불어 좋은 날〉(1980년)은 4년 면벽수행(面壁修行)이 응축된 작품이다. 발랄한 청춘 이장호는 ‘진지한 장년’으로 진화해서 돌아왔다. 감각에 의존한 즉흥적인 연출방식에서 벗어나 꼼꼼하게 콘티를 짜고 메가폰을 잡았다. 시골에서 상경한 자장면 배달부 덕배(안성기 분)와 이발사 춘식(이 감독의 동생 이영호 분), 여관 종업원 길남(고 김성찬 분)의 험난한 도시생활 생존기. 여배우로는 유지인, 김보연, 임예진이 나온다. 이 영화는 아역배우 출신 안성기의 성인역 데뷔작이기도 하다.
 
  “주인공들이 다 농촌에서 무작정 상경한 젊은이들이었으니까 영화에 필요한 세부묘사의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서울역과 남대문시장 주변 인력시장을 돌아다녔어요. 그런데 가서 보니까, 초 5·6, 중학교 1·2학년 또래 아이들이 팔려 가기를 기다리고 있더라고. 사환이나 식당 홀 정리를 한다고 그래요. 충격이었죠. 울컥해서 배창호 조감독한테 좀 근사한 데를 가자고 그랬어요. 시청 앞 플라자호텔 커피숍에서 창밖을 보니까 거기는 또 완전히 다른 세상인 겁니다. 걸어서 닿을 수 있는 거리 안에 완전히 다른 세상이 공존하는 느낌?” 


  장선우·박광수·봉준호 등에게 영향

  운동권의 울분을 담은 듯한 영화는 대학 영화 동아리에 큰 울림을 전했다. 장선우, 박광수 등이 그를 찾아왔다. 사회적으로 충격을 준 화제작이 또 있다. 2019년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자 봉준호 감독이 인생영화 가운데 하나로 꼽은 작품이다. 〈어둠의 자식들〉(1981년),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1981년), 〈낮은 데로 임하소서〉(1982년)를 거쳐 나온 문제작 〈바보선언〉(1983년)이다.
 
  “그때는 영화사마다 1년에 4편을 의무 제작하고 반대급부로 외화수입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둠의 자식들〉 속편 시나리오가 사전검열에서 계속 반려되더라고요. 우리나라의 실상을 북에서 악용할 우려가 있다면서 〈어둠의 자식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해외 반출 불가라고 하고.
 
  반려당하면 수정본 넣고 또 반려당하고 하다가 한 달이 지났어요. 제작자는 초조하지. 의무 제작 편수를 못 채우면 그해 외화수입 쿼터를 못 받으니까. 〈별들의 고향〉 이후에는 영화가 내 천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때는 영화를 관두고 싶더라니까. 그런데 내가 못 하겠다고 하면 제작자가 계약서 갖고 와서 법적으로 걸거나 아무튼 그냥은 안 넘어갈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영화를 찍되 망치자!’라고 생각했죠. 영화를 말아먹은 감독한텐 기회를 안 줄 테니 제가 자연스럽게 은퇴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사전검열 통과용으로 교과서적인 모범답안 시나리오를 만들고, 제목도 여러 개 만들어서 문공부 사람들에게 고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화천공사 박종찬 사장도 좋다고 그랬어요.”
 

  망치려고 작정하고 만든 영화

▲망치려고 작심하고 만들었다가 히트작이 된 〈바보선언〉.


 훗날 문화부 장관을 하는 김명곤이 다리 저는 역할로 나오고, 이보희는 뭣도 모르고 여주인공을 했다. 저속으로 찍었다가 고속으로 찍었다가, 시나리오도 없이 현장에 나가서 다큐멘터리처럼 찍으며 좌충우돌(左衝右突)했다. 배우들의 대사가 없고, 영화 제목과 감독, 배우 이름이 나오는 타이틀도 크레파스로 그려서 썼다. 감독 자살 장면도 넣고 판소리도 넣고, 나중엔 전자오락 음향도 넣으며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게 만들었다.

 
  시사회 하던 날, 지방 흥행사들이 하나둘 일어나더니 모두 중간에 나가버렸다. 혼자 남은 박종찬 사장이 “야, 이장호, 잠깐 사이에 개판 쳤구나!”라고 일갈할 정도였다. 이장호는 그렇게 영화계에서 강제 은퇴했고, 새마을 영화를 찍으며 생계를 해결했다.
 
  영화 완성 후 1년이 지났다. 화천이 수입한 외화의 흥행성적이 좋지 않았다. 얼른 다른 외화를 거는 것이 해결책이었다. 외화와 한국영화를 교차 상영하는 것이 규칙이었기에 1년 전 완성 후 창고에서 잠자던 〈바보선언〉을 단성사에 걸었다. 딱 일주일만 돌리고 내리는 패전처리용이었다. 그런데 대박이 났다.
 
  “사실은 촬영 중간에 김희수 편집 기사가 저를 부르더라고요. 자기가 편집한 걸 보여주면서 ‘이 감독, 이번 영화는 한국영화에서 못 보던 독특한 영화 같아’라는 겁니다. ‘무서운 영화가 될 것 같다’고 하기에 ‘기왕에 망치는 것, 온갖 실험을 다 하는 쪽으로 가자’라고 마음먹었죠.

 

  1987년 이후 시련의 연속

▲1986년 관객동원 1위 〈이장호의 외인구단〉 촬영현장. (왼쪽부터) 주인공 까치 역의 최재성, 이장호, 원작자 이현세, 손병호 감독 역의 안성기. 사진=이장호 제공


 
망치려고 작정한 영화가 극찬을 받으니 기회가 다시 왔다. 〈무릎과 무릎 사이〉(1985년), 〈어우동〉(1986년)으로 연타석 안타를 쳤고, 영화사 설립 규제가 풀린 후엔 직접 영화사 ‘판’을 설립해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년)을 제작했다.

 

 하지만 1986년 흥행 1위 〈외인구단〉을 끝으로 흥행감독 이장호의 전성기는 다시 오지 않았다. 소설가 이제하의 원작을 AFKN 제2차 세계대전 다큐멘터리처럼 세피아 톤으로 찍은 로드 무비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7년)는 흥행은 저조했으나 평단의 극찬을 받은 이장호의 마지막 걸작이다. 유수의 해외영화제가 그를 초청했다.
 
  이후에 만든 영화는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거의 외면당했다. 김지미의 지미필름이 제작한, 사할린 현지촬영까지 감행한 야심작 〈명자 아끼꼬 쏘냐〉(1992년) 역시 완전히 망했다. 1987년 이후 지금까지는 시련의 연속이다. 제작한 8편의 작품이 하나같이 실패했고, 집도 경매에 들어갔으며, 외도로 가정을 무너뜨렸고, 교통사고도 크게 당했다.
 
  ― 대중이 갑자기 이장호의 영화를 외면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가 너무 상업적으로 흘렀으니까요. 매력을 잃은 겁니다. 자연도태(自然淘汰)죠.

 

  북한 인권 戰士가 되다 

이장호의 현직은 서울영상위원회 위원장이다. 서울에서 영화를 찍고 싶은 국내외 영화사를 유치・지원하는 기관이다. 시나리오 창작, 영화 편집 등 작가와 연출가를 지원하는 공간도 운영해 영화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2011년부터 집행위원장을 맡아 진행한 북한인권국제영화제도 그의 주요 활동 무대다.
 
  “저 자신이 실향민(失鄕民)의 아들이기도 하고, 탈북민(脫北民)이 많아지면서 저도 북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어요. 북한의 실상을 제 눈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첫해 초청작 중에 〈노스 코리아 VJ〉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었죠. 북한 지하 언론인들이 촬영해 넘겨준 영상을 일본의 이시마루 지로 감독이 40분으로 편집한 작품입니다. 비쩍 마른 여자아이가 남루한 옷에 거무튀튀한 얼굴로 토끼풀을 뜯고 있죠. 자기가 먹으려고 한다면서요. 나중에 그 아이가 죽었다는 기사도 나왔어요. 초등학교 5~6학년으로 보였지만, 촬영 당시 그 아이의 나이가 22세인가 23세입니다. 영양실조죠. 고운 이름을 가진 아이였는데, 부모님이 예쁜 이름을 지어줬을 때 심정을 생각하니 눈물이 막 쏟아졌습니다.”
 
  이장호 감독은 ‘자유·정의·인권’을 기치로 내걸고 지난 6월에 열린 ‘제1회 서울락스퍼인권영화제’에서도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박선영 조직위원장(물망초 이사장·제18대 국회의원)의 권유도 있었지만, 북한인권국제영화제를 하며 느낀 문제의식이 그를 북한 인권 전사(戰士)로 만들었다.
 
  “몇 해 전 서울역 광장에서 북한인권국제영화제 개막식을 하는데 젊은이들이 무관심하더라고요. ‘삼국시대처럼, 아예 다른 나라로 가자’는 친구들도 있고. 노숙자들은 ‘우리도 먹고살기 힘든데 왜 북한까지 도와야 하나’ 하더군요. 누군가 계속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북한인권은 사각지대(死角地帶)가 되겠구나, 이건 내 여생(餘生)의 숙제다, 숙제가 크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1970~1980년대 내내 정부에 비판적이었는데, 좌(左)에서 우(右)로 방향을 튼 겁니까.
  “그때도 제가 좌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군부독재가 영화를 마음대로 못 만들게 해서 반발했던 겁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청렴결백했고, 국가를 위해 헌신한 점은 인정합니다. 다만, 국민과 상호 소통했다면 나라를 좀 더 발전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은 지금도 합니다.”
 
  이번 영화제에 관해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문제가 있다. 폐막작 미국 라이언 화이트 감독의 영화 〈암살자들〉 이야기다. 2017년 2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벌어진 김정남 피살 사건을 재구성한 다큐멘터리인데, 2020년 1월 미국 내 독립영화제 ‘선댄스 영화제’에서 처음 상영한 이래 세계의 여러 영화 평점 사이트에서 만점에 가까운 호평을 받았다. 평점만 보자면, 〈기생충〉과 거의 동급이었다. 배급사 측은 한국 내 정식 개봉을 준비했는데, 한국 영화진흥위원회는 이 영화를 예술영화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영진위가 지원하는 극장과 대형멀티플렉스 극장 등에서의 상영을 사실상 막은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말고, 대한민국의 기생충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민의 혈세(血稅)를 받으면서도 오히려 대한민국을 위기에 빠뜨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이 바로 ‘기생충’이죠.”
 
 

  최은희·신상옥 拉北 

  북한인권에 눈을 뜬 계기라면 신상옥·최은희의 납북(拉北), 그리고 그들의 탈출과도 연관이 있을 터이다. 홍콩에서 최은희 여사가 납북된 해가 1978년, 곧이어 신상옥 감독도 북으로 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최은희 선생님이 실종되었을 때 먼 나라 얘기 같았어요. 현실감이 없었으니까. 선생님은 감독님과 이혼한 뒤 우연히 충무로 뒷골목에서 뵌 적이 있어요. 함께 소주를 마시면서 신상옥 감독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상당히 쓸쓸해 보였어요. 홍콩 출국 불과 얼마 전입니다.”
 
  안양예고 운영 문제 등으로 최은희 여사는 스트레스가 많았다. 학교 운영비 투자 제안을 받고 홍콩으로 출국한 후 종적이 끊어졌다. 얼마 후 신상옥 감독도 홍콩에서 사라졌다. 신상옥 감독의 상황은 더 나빴다. 검열법 위반으로 신필름의 영화사 등록이 취소되었고, 정권과 척을 졌다는 건 비밀도 아니었다.
 
  “DJ 납치 사건을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는 말씀을 자주 하고 다니셨거든요. ‘화제성이 있는데다 흥미진진한 활극의 요소도 있고, 한・일을 오가며 찍는 국제적 작품이다’라고. 그만큼 재미있는 영화 소재도 없다는 뜻이었는데, 정보기관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습니다.”
 
  두 예술가의 납북은 이장호에겐 이해하지 못할 충격이었다. 두 사람 모두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현실인데 믿기지 않았다.
 
  “신문에 두 분 납북 소식이 실렸지만, 영화계에선 별별 소문이 다 돌았습니다. ‘중앙정보부에서 고문을 받다가 뇌를 다쳤다’ ‘한양대 병원에서 극비 뇌수술을 했다’ ‘부산에서 신 감독님이 변장하고 아이스크림을 파는 걸 봤다’…. 그래서 처음엔 납북 자체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재회

  1986년 북한에서 탈출한 두 사람을 다시 만난 건 워싱턴에서였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로 뉴욕필름페스티벌에 초대를 받고 미국 도착 즉시 전화를 넣었다. 필라델피아에서 공부 중이던 김홍준 현 한예종 교수와 동행했다. 약속 장소인 워싱턴 레스토랑에서 창밖을 보고 있는데 벤츠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와 거칠게 회전했다. 운전 솜씨만 보고도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왈칵 눈물이 나고 신기하고 반갑고 서러웠다.
 
  “저보다는 두 분이 더 궁금하신 게 많았습니다. 한국영화의 현실이라든가…. 북에서 〈어둠의 자식들〉(1981년) 같은 제 영화를 보셨다고 해서 깜짝 놀랐죠. ‘해외반출 불가(不可) 영화였는데, 김정일이 영화를 좋아하기는 좋아하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신상옥 감독이 북에서 만든 영화는 보셨습니까.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년)를 보고 실망했어요. 연기, 화술(話術) 등 배우들 감각이 너무 떨어지더군요. 〈소금〉(1985년)은 인상적입니다.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탔죠. 신상옥 감독님이 〈벙어리 삼룡이〉(1964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년)를 찍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일부러 흑백으로 만들었고, 문학성이 영화로 잘 흡수된 명작이었습니다. ‘배우들 연기를 단기간에 끌어올리기는 어려우니까, 사극이라면 연기력의 약점이 덜 드러나리라’ 고심하신 흔적도 읽혔습니다.”
 
  이장호 감독이 보기에 신상옥·최은희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북한 주민들에게 혁명적 변화와 충격을 줬기 때문이다. 김씨 일가 찬양 일색이던 북한 예술계에 감독과 배우 이름, ‘신필름’이라는 제작사가 크게 쓰인 크레디트는 그 자체가 변화의 상징이었을 터이다.
 
  이후에 자주 찾아뵙고 들은 두 사람의 북한 시절 경험담, 북한 수뇌부의 대남관(對南觀), 김정일이 고백했다는 한국 내 정치・사회・문화 공작 등은 통일이 되어야만 진실 확인이 가능할 것이다

 
  “영화는 영혼을 깨우는 수단” 
 

 (사)신상옥기념사업회 전(前) 이사장으로서 이장호는 또 다른 꿈을 꾼다. 신상옥 감독이 남에서 만든 영화, 그리고 신상옥・최은희 탈출 이후 북에서 상영 금지한 모든 작품을 세계 전역에서 자유롭게 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제 인터뷰를 마무리할 시간이 왔다.
 
  ― 이장호에게 영화란 무엇입니까.
  “영혼을 깨우는 수단이죠. 삶의 문제, 영혼의 문제를 다루고 영혼을 살리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 젊은 후배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균형감각을 길러라. 젊다는 건 열정이 넘치지만 다른 면에선 편견에 빠지기 쉬우니까요. 사회, 인생을 보는 눈을 기르고, 인문적 소양을 길러야 오래갈 수 있습니다.”
 
  ― 본인의 인생을 평가한다면.
  “나를 이룬 것에는 위장(僞裝)이 많다. 다 청소하고 싶다. 나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하나님이 계셔야만 구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하나님 계신 곳이 ‘별들의 고향’일지 모른다. 경아가 그곳에선 행복하길 빈다.⊙     

글 : 장원재  장원재TV 대표  

 

09.03 ‘여고시절’ 부른 70년대 톱가수 이수미, 폐암으로 별세

▲'여고시절' 등의 히트곡을 부른 1970년대 인기 가수 이수미가 폐암 투병 중 69세를 일기로 지난 2일 별세했다고 유족 등이 3일 전했다. /연합뉴스

 

‘여고시절’ 등을 부른 1970년대 인기 가수 이수미(69)가 폐암 투병 중 별세했다.

 

3일 유족과 가요계에 따르면, 이수미는 지난해 12월쯤 폐암 3기 판정을 받고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투병 생활을 하던 중 전날 별세했다.

 

1952년 전라남도 영암에서 태어난 이수미는 1969년 ‘당신은 갔어도’로 데뷔했다. 1972년 발표한 ‘여고시절’이 히트곡이 되면서 톱스타 반열에 올랐다.

 

허스키하고도 호소력 있는 음색으로 높은 인기를 누린 그는 TBC 7대 가수상, MBC 10대 가수상을 잇달아 수상했다. 가수들의 권익 보호에도 관심을 갖고 대한가수협회 이사와 감사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B1) 3호실. 발인은 5일 오전 11시. 장지는 양평 선영.

조선일보 이혜운 기자

 

09.13 검객물 휩쓴 유도 8단 원로배우 윤양하 별세

▲배우 윤양하. [중앙포토]

 

한국 검객물을 휩쓴 유도 8단 원로배우 윤양하(본명 윤병규)씨가 4일(현지시간) 미국 버지니아 자택에서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향년 81세. 아들 윤태웅씨는 고인이 낮잠을 자던 중 깨어나지 못했다고 연합뉴스에 전했다.

 고인은 1940년 5월 1일 전북 순창에서 태어났다. ‘평화의 날개’로 데뷔한 가수 윤연선이 동생이다. 고인은 중‧고교 시절 씨름선수를 하다 서울 유도대학(현 용인대)에서 유도를 전공했다.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고배를 마신 뒤 합동영화사 오디션에서 배우 윤정희와 나란히 뽑혀 연기의 길에 들어섰다.

 

검객물 스타 "임권택이 아낀 배우"

영화 출연작은 230여편에 달한다. 데뷔작은 1967년 김수용 감독의 멜로영화 ‘빙점’이다. 톱스타 남정임의 상대역으로 출연 비중은 작았으나 다부진 체격에 짙은 눈썹의 호남형 매력이 인상을 남겼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 검객물이 인기를 끌면서 고인은 주연급 스타로 올라섰다. ‘월하의 검’ ‘필살의 검’ ‘내장성 대복수’ 등 검객물 20여 편에서 주연을 맡았다.

 

1970년대 이후론 조연 배우로 토속영화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물레방아’, 역사물 ‘악인의 계곡’, 전쟁영화 ‘일송정 푸른 솔은’ 등 다양한 장르에 출연했다. 특히 임권택 감독과 1971년 ‘원한의 두 꼽추’를 시작으로 ‘만다라’ ‘아벤고 공수군단’ ‘씨받이’ 등 여러 작품을 했다. 원로 배우 한지일은 13일 페이스북에 “거장 임권택 감독님께서 무척 아꼈던 선배 배우”라 추모했다.

 

국회의원 낙선 후 유도 부흥 힘써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명예회장을 역임했다. 1996년 고향 전북 순창‧임실 지역구에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첫 출마했다가 낙선한 뒤론 체육활동에 열정을 쏟았다. 바르셀로나‧아틀란타 올림픽 한국 유도 대표팀 단장, 대한유도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유족은 부인 서성미씨와 배우인 장남 윤태웅, 전 아이스하키 국가대표인 차남 윤세웅이 있다. 장례식은 13일 오후 7시 30분(현지시간) 버지니아주 센터빌의 ‘함께하는 교회’에서 동료 배우 이대근‧이구순‧원미경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릴 예정이다.

나원정기자na.wonjeong@joongang.co.kr

 
 

 10.01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재밌다. 필자를 포함해 주변 사람들이 이구동성 “오지게 재밌다”고 했다. 우리는 왜 재밌다고 느낄까. 왜 이웃 나라, 먼 나라 관객도 빠져들까.

넷플릭스 '오징어게임'

 

한마디로 실감나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그럴듯해야” 재밌다. 소설가 이청준이 갈파했듯 “스토리 속 감동의 본질은 실감(實感)에 있다”고 본다. 실감이 나야 관객은 몰입한다. 바로 “눈을 뗄 수 없었다”고 할 때다.

“재미없는 글은 범죄”라는 각오로 목숨 걸고 써내려간 이야기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모르는 이야기는 잘 쓸 수 없다. 그래서 장르 불문, 작가는 자신의 삶을 베낀다.

 

이 드라마엔 이혼 실직자, 투자 실패자, 건달 양아치, 채무자, 외국인 노동자, 탈북 소매치기, 부랑 노인 등이 등장한다. “어느 날 없어져도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어두운 사회 현실을 거울처럼 비추면서 ‘살기 위해 목숨을 건다’는 역설의 게임에 마지막으로 자신을 내던진다. 루저들이 최후로 선택한 생사의 무대만큼 절박하게 “그럴듯한” 상황은 없다.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은 지구촌을 떠들썩하게 만든 성공 비결을 이렇게 정리했다. “룰이 매우 단순한 게임이다.” “가장 한국적인 게임이 세계적 소구력을 갖는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게임은 룰이 단순한 정도가 아니라 그냥 딱 하나다. 처음 나오는 딱지치기의 룰은 내 딱지로 상대 딱지를 뒤집느냐 못 뒤집느냐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룰은 술래 인형이 뒤를 돌아본 순간 내가 움직이고 있었나 정지해 있었나, 이것 하나다. 줄다리기 룰은 상대를 끌어오느냐 아니면 내가 끌려가느냐다. 구슬치기는 상대가 손에 쥔 구슬 수가 홀인지 짝인지 맞히면 된다.

 

언어적, 문화적, 역사적 번역 따윈 필요 없다. 섬뜩한 단순함이 우리를 얼어붙게 만들고 때론 들썩이게 만든다. 그것이 싸이의 ‘말춤’처럼 국경을 뛰어넘고 세대(世代)를 초월하게 한다. 또 룰이 단순하면 게임 참가 인원을 무제한 늘일 수 있다. 드라마 속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와 줄다리기에 사실상 수억 관객이 참여하고 있는 셈인데 전혀 불편하지 않다.

 

황 감독은 이 드라마를 처음 구상했을 때가 2008년이라고 했다. 당시 그는 “이런 이야기가 낯설거나 황당하다는 반응은 없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13년이 흘렀다. “(그 사이에) 슬프게도 살벌한 서바이벌이 잘 어울리는 세상이 됐다”고 했다. 이젠 주식, 코인, 부동산으로 한탕을 노리는 대박 신화의 경연대회가 매일 벌어지고 있다.

 

때로 작가적 상상력은 현실을 못 따라갈 지경이다. 드라마 속 최후 승자가 거머쥐는 돈이 456억원인데, 현실에서는 ‘4000억원 대장동 게이트’가 신문을 도배하고 있다. 필자가 아는 어떤 소설가는 자신의 작품 속에 엄마가 두 아이를 데리고 목숨을 끊는 장면을 넣었다가 후회했는데, 얼마 뒤 신문을 보니 세 아이를 데리고 투신한 엄마 이야기가 사회면에 실려 있더라고 했다.

 

‘오징어 게임’은 루저들의 피비린내 나는 목숨 잔치다. 일확천금이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다. 루저에게 다른 선택권은 없다. 극 중 대사처럼 체스의 폰, 장기의 졸 같은 존재다. 반면 생사의 무대를 조종하는 플레이어는 억만장자다. 플레이어와 폰의 극렬 대비가 높은 전압을 발생시켜 드라마를 온 세상에 퍼뜨리는 힘이 된다.

 

극 중 게임이 어디서 처음 발생했는지 원산지를 따지는 일은 시시하다. 문화의 본질은 섞인다는 데 있다. 필자도 어렸을 때 오지게 놀았던 게임들이다. 무엇보다 드라마가 한국 땅에서 한국어로 진행됐으니 일단은 한국 게임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일 수 있다”는 문화계 명제가 입증되고 있다.

조선일보 김광일 논설위원

 

 10.05 '안남시'의 '아수라'…망작의 역주행, 영화 아닌 다큐 찍었나

▲영화 '아수라' 속 박성배 안남시장(황정민 분)과 그의 충견인 현직 경찰 도경(정우성 분).

 

영화 '아수라'(2016)는 개봉 당시 희대의 망작으로 통했다. 황정민·정우성·주지훈·곽도원에 정만식·김원해까지, 스타성과 연기력을 두루 갖춘 배우들을 한데 모은 초호화 캐스팅으로 화제가 된 대작(제작비 120억원)이었고, 이 배우들이 전부 최고 인기 예능 '무한도전'(MBC)에 나와 몸을 불사르며 주말 동시간대 시청률 1위(13.8%)를 기록했다. 하지만 정작 영화는, CJ의 막강한 배급력으로 개봉 4일 만에 관객 100만을 넘겼으나 흥행은커녕 손익분기점(관객 300만명)에도 한참 못 미쳤다.

 

개봉 전 기대감은 개봉 후 급전직하했다. 개연성, 그러니까 김성수 감독이 직접 쓴 각본이 가장 큰 문제로 꼽혔다. "요즘 시대에 맞지 않는 올드한 느낌"(이동진 평론가)이라는 평은 그나마 점잖은 축이었다. 배우 황정민이 연기한 빌런(악당) 중의 빌런인 안남시장 박성배라는 인물이 특히 극에 몰입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혹평이 평론가뿐 아니라 관객들 사이에서 이어졌다. 주민 투표로 당선된 민선 시장인데 회칼 휘두르는 깡패 전주(錢主)와 어울리며 현직 경찰을 충견 삼아 부동산 개발 비리로 뒷돈 챙기는 건 기본이고 자기 머리에 커터칼을 들이대는 자해에다 자신의 충성스런 최측근을 없애라는 살인교사까지 서슴지 않는 폭력적인 행동은 조폭 두목과 다를 바 없어 현실성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진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차라리 그냥 악당이기만 했으면 또 모르겠다. 독기서런 눈빛과 사이다 같은 돌발 행동으로 시의회 의원들을 제압하고 언론플레이로 검찰을 압박하며, 화려한 언변으로 시민 지지를 이끌어내는 유력 정치인다운 모습까지 섞은 캐릭터이다 보니 대중이 "도저히 공감할 수 없다"며 외면했다.

 

안남시라는 공간도 문제였다. 정치인과 경찰·철거민·범죄자가 뒤엉켜 불법과 비리, 폭력이 난무하는 무법 도시로 묘사된 가상의 안남시는 근대화 이전도 아닌 2016년 대한민국의 도시라고 하기엔 너무 시대착오적이었다. 아니, 그땐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취재를 열심히 했다는 감독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현실성 제로(0)'라고 조롱받았던 '아수라'가 지금 역주행 흥행몰이 중이다. 코로나 19 와중에도 극장을 달궜던 일본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을 비롯해 신작이 즐비한 와중에 2016년작 '아수라'가 4일 현재 넷플릭스의 '오늘 한국의 톱10 영화' 4위를 기록하고 있다. 매일 1위 영화는 바뀌어도 '아수라'는 상위권에 계속 머물고 있다. 검색량으로는 전 세계적 화제작 '오징어 게임'과 '종이의 집'(스페인 드라마)에 이어 가장 많다. 개봉 5년 만의 역주행은 개봉 당시 비현실적이라고 외면받았던 스토리가 그 어떤 다큐멘터리보다 더 사실을 담고 있는 게 아니냐는 입소문이 나면서부터다. 재밌는 건 '아수라'의 역주행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2년 만에 손익분기점 넘기며 재평가

배우 황정민은 지난 2018년 신작 '공작' 개봉 당시 "최근 '아수라'가 손익분기점을 넘겼다"며 "개봉 당시 이런 반응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조금 아쉽다"고 말했다. 실제로 '아수라'는 IPTV 다운로드 1위에 오르는 등 VOD 수익에 힘입어 개봉 2년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통상 개봉 직후 영화에 관심이 쏠리는 걸 고려할 때 개봉한 지 2년 지난 영화가 주목받는 건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아수라'의 깜짝 인기엔 TV 시사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그알·SBS)'가 있었다. 그알 취재진은 이재명 경기지사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 성남 국제마피아파 조직원의 변호를 맡았고 이후로도 계속 인연을 이어오는 등 지역 조폭과 연루·유착한 의혹이 있다고 보도했다.

 

▲성남시와 조폭 연루설을 다룬 '그것이 알고 싶다' 화면.

 

당시 방송에 출연한 한 정치인은 "이 이야기를 국민한테 다 이야기하면 국민이 안 믿을 것"이라며 조심스레 폭로를 이어갔다. '아수라'의 안남시 이야기처럼 믿기 어려운 의혹이 가득했지만 그래 봐야 고작 조폭 연루설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이 지사는 당시 방송을 막으려고 SBS 대표는 물론 사회자인 배우 김상중 소속사에까지 압력을 가했으나 방송은 그대로 나갔다. 그러곤 담당 PD 등 취재진 4명을 명예훼손 혐의로 형사 고소하고 1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정정보도와 재방영 금지 요구도 빼놓지 않았다. 그렇게 1년이 지난 후 소송을 전부 취하했다. 법원으로부터 조폭 연루설에 대한 혐의를 벗었으니 "대승적 차원"이라는 게 취하의 이유였다. 정정보도는 없었고 여전히 웨이브 같은 OTT 서비스를 통해 해당 방송이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다시 3년 뒤인 2021년. 대선판을 뒤흔든 대장동 사건이 터졌다. 돈의 현실감각을 잊게 하는 천문학적인 개발 이익이 이름도 전근대적인 '화천대유'라는 회사를 내세워 이 판을 짠 몇몇 특정인에 돌아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민적 분노가 넘쳐났다. 이 판의 설계자와 최종 돈의 주인을 찾는 노력이 이어지면서 여당 유력 대선 후보의 측근 이름이 줄줄이 소환되고, 저격수로 명성을 떨치던 검찰 출신 야당 국회의원 아들 이름이 50억원의 퇴직금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등장하면서 '아수라'가 재조명받는 계기를 만들었다.

 

2018년엔 조폭 연루설이 전부였지만 이번엔 영화 도입부부터 대장동을 곧바로 떠올리게 하는 부동산 개발 비리로 시작해 결말 즈음엔 비리의 정점 박성배 안남시장이 대척점에 서 있던 검사와 야합하려 50억원을 제시하는 등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과 유사한 장면이 영화게 담겼다는 게 알려지면서 2016년 비현실적이라 외면받았던 영화가 재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 정치인 사진 건넨 감독  

지금 SNS에선 '아수라'와 현실의 연결고리를 찾는 숨은 퍼즐조각 찾기라는 놀이 아닌 놀이가 진행 중이다. 이미 지난 2018년 그알 방영 당시 화제가 된 몇몇 장면 외에 대중을 놀래킨 건 박성배 시장이 자신을 집요하게 좇던 검사 김차인(하필 배우 이름이 '곽'도원이다)에게 "사건을 묻어달라"며 뇌물 50억원(영화 속 정확한 표현은 "앞에는 5")을 제시하는 장면이다. 공식적으로는 2002년 분당 파크뷰 사건으로 이 지사와 처음 악연을 맺었던 곽상도 의원의 아들이 이 지사와 가까운 사람들이 포진된 화천대유 직원으로 입사 7년만에 50억원의 퇴직금을 받았다는 게 묘하게 겹쳐지기 때문이다.

 

박성배 시장의 최측근이었지만 검찰의 감시망이 좁혀오자 결국 자살을 위장해 살해당한 은충호 비서실장 상갓집에 서 있는 조화 중 하나인 '한성급유 이성한'이라는 이름도 화제다. 화천대유를 연상시키는 회사 이름에다 화천대유 자회사 천화동인의 대표이자 이화영 의원 보좌관 출신인 이한성 대표 이름과 너무나 유사해서다. 영화 마지막엔 물론 “모두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만일 실제와 같은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이라는 자막이 달려 있다

▲‘아수라’ 주연 배우들과 함께한 김성수 감독(맨 오른쪽). [중앙포토]

 

정말 이 모든 게 우연일까. 어릴 적 경험과 취재를 기반으로 각본을 썼다는 김성수 감독도 줄곧 "허구"라는 이야기만 했다. 하지만 개봉 당시 인터뷰에서 "우릴 위해 힘을 사용해 달라고 박성배 같은 민선시장을 뽑아 권능을 줬지만 정치인들은 권력이 그들에게 주어진 천부인권인 양 행세한다"며 "국가든 경찰이든 다 무력과 강제력을 갖고 있는 합법적인 폭력 조직"이라고 말한 바 있다. 또 박성배라는 이 전대미문의 악당 캐릭터에 대해선 "참고하라"며 배우 황정민에게 특정 정치인의 사진을 직접 건내기도 했다. 김 감독은 "나중에 황정민에게서 그 모습이 그대로 담겨져 있더라"고 했지만 그 정치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선 아직까지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영화 도입부에서 박성배 시장은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돼 벌금 350만원을 받고 시장직이 박탈될 뻔했으나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시장직을 유지해 반전의 기회를 잡는다. 그리고 마치 현실을 예견이나 한듯 몇년후 똑같은 장면이 재연된다. "사법부가 정의로운 판결을 해 줘서 다행"이라는 영화 속 대사가 “공정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려주신 대법원에 감사드린다”로 바뀌었지만. 그렇다면 "갈 때 가더라도 줄줄이 싹 다 엮어서 같이 가려고"라며 끝내 피비린내 나는 아수라판으로 끝나는 결말도 과연 같을까. 지켜볼 일이다.

중앙일보 안혜리 논설위원

 

■ 11.11 요절 가수 별곡(別曲)

‘젊은 나이에 죽음’을 뜻하는 ‘요절(夭折)’은 보통 20~30대에 세상을 떠나는 일을 말한다. 평균 수명이 늘어 요절의 기준 나이도 올라갔지만 그래도 40~50대 이상의 죽음을 요절이라 하기는 어렵다.

20~30대 요절한 가수 중엔 특히 11월에 세상을 떠난 이들이 많다.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을 부른 차중락(1942~1968.11.10),

‘안개낀 장충단 공원’의 배호(1942~1971.11.7),

‘이름 모를 소녀’를 부른 김정호(1952-1985.11.29)를 비롯해 유재하(1962~1987.11.1), 최병걸(1950~1988.11.7), 김현식(1958~1990.11.01) 김성재(듀스)(1972~1995.11.20) 등이 있다.

 

여성 가수로는 걸출한 싱어송라이터였던 장덕(1961~1990), 비교적 최근 이즈음 세상을 떠난 설리(최진리·1994~2019.10.14), 구하라(1991~2019.11. 24)의 죽음이 슬프고 안타깝다. 빛나는 아름다움 뒤에 숨어 있는 그들의 아픔을 알기 때문이다.

 

광복 이전에도 요절한 가수가 있었다. 1926년 29살 나이로 대한해협 차가운 물에 몸을 던진 윤심덕(1897~1926)이 대표적이다.

 

지금은 많이 잊혀졌지만 이경설(1912~1934)도 빼놓을 수 없다. 함흥 출신 가수 전옥(1911~1969) 이전에 ‘눈물의 여왕’이라 불린 이경설은 배우이자 가수였다.

 

영화 ‘아가씨’의 배경음악으로 흐르던 ‘세기말의 노래’(1932)가 그가 부른 노래다. 1932년 폐병에 걸려 약 2년 동안 병마와 싸우다 22세 나이로 숨을 거두며 그가 남긴 말은 “아, 무대에서 죽자 했더니!”였다고 한다.

 

투병 중 연인은 떠나갔고, 병원비 마련을 위해 음반을 취입하기도 했다. 당시 기사와 자료에 따르면 이경설은 ‘결혼전선 이상 없다’와 ‘먕향비곡’이란 극을 고안하거나 창작했고 ‘숨 죽은 주장’과 ‘망향비곡 주제가’를 작사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갈망하던 내일이라 했던가. 사람은 가도 노래는 남는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남길까. 그들보다 오래 산 것이 부끄럽지 않도록 우리의 흔적이 깨끗하고 따뜻한 것이기를. 하여 이상의 ‘이런 시’ 구절을 되새겨본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조선일보 장유정 단국대 자유교양대학 교수·대중음악사학자

 

11.11 ‘초대 청룡 여우조연상’ 원로배우 최지희씨 별세

영화 ‘김약국의 딸들’(1963년작) 등에서의 호연으로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원로배우 최지희(81·본명 김경자)씨가 17일 오후 12시쯤 별세했다.

​▲지난 2009년 5월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 '명동예술극장 개관식'에서 참석한 최지희씨./연합뉴스

 

유족 측은 “수년 간 루푸스병으로 투병 중에 폐렴 증세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일본 오사카에 살던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1946년 귀국 후에는 경남 하동에서 자랐다.

 

영화 ‘아름다운 악녀’(1958년작)로 배우 데뷔했다. 이후 영화 ‘김약국집 딸들’에 출연해 제1회 청룡영화상과 제3회 대종상영화제에서 각각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2011년에는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공로상을 받았다. 한국영화인원로회 회장을 지냈다.

 

빈소는 인제대서울백병원, 발인은 19일 오전 9시, (02)2277-4440.

조선일보

 

■ 이영애는 누구?

쌍둥이·텃밭·별… 영애씨가 웃는다 "뭘 더 바라겠어요"①

“만인의 연인으로 산다는 건 어떤 것이냐”고 묻자 배우 이영애(44)는 다른 대답을 했다. “여기선 그런 건 생각 안 해도 돼요. 자연이란 게 이래서 참 좋죠.”

 

10년을 쉬고 돌아왔다. 2003년 ‘대장금’, 2005년 영화 ‘친절한 금자씨’ 이후 작품 활동을 접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하루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몰랐다고 했다. 그러다가 지난달 초부터 내년 상반기에 방영된다는 SBS TV 드라마 ‘사임당’을 찍기 시작했다. 100% 사전 제작 드라마다. 스케줄은 다시 백과사전처럼 빽빽해졌다. 인터뷰 시간을 낼 여력이 없다며 며칠을 기다리게 하더니, 지난 일요일 이영애는 “우리 집으로 오라”고 했다.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에 자리 잡은 집. 서울 광화문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다. 시끄러운 도시의 간판이 하나 둘 자취를 감추고, 흐드러진 가을꽃과 은비늘이 반짝이는 북한강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람에 이지러지는 논밭을 끼고 골목을 돌았다. 잔디가 낮게 깔린 마당. 엄마 아빠를 똑 빼닮은 쌍둥이 남매가 내복 차림으로 돌아다니며 귤을 까먹고 있었다. 마당 샛문으론 밤송이가 툭툭 떨어져 내린 초가을 숲길이 이어졌다. 이영애가 말한 “여기”였다. 그는 “이곳에서 살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했다.

 

▲그녀의 다갈색 눈동자가 카메라를 응시하자 세상이 잠시 고요해졌다. 20일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만난 이영애. 그가 마당 샛문으로 이어진 초가을 숲길에 섰다. /김태은 사진작가

 

B코스를 뛰는 이영애

―도시인들이 꿈꾸는 자연 속의 마당 넓은 집이다.

“호화 주택이라는 소문 많이 돌았는데, 실제로 보니 영 아니지 않나? (웃음) 그냥 아이들 뛰어놀게 하려고 마당 넓은 곳으로 골랐다. 집도 텅텅 비었다. 책상과 식탁 외엔 가구도 별로 없다. 상추나 오이 키워 먹는 텃밭이 있고, 축구대가 있는 게 다다. 남편이 일일이 나무 심고 잔디 깔아서 가꾼 집이다.”

 

―원래는 서울 한남동 고급 빌라에서 살았던 것으로 안다.

“맞다. 한남동은 해가 저물어도 불빛이 휘황하고 사람들로 북적인다. 예전엔 그 기운과 에너지가 흥겹고 좋았는데 아이를 낳고 나니 달라졌다. 흙도 있고 풀도 있는 곳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양평으로 왔다. 여긴 그야말로 시골이다. 저녁 해가 지면 새까만 어둠 외엔 아무것도 없다. 대신 그만큼 별도 달도 또렷이 잘 보인다.”

 

이영애는 2009년 재미교포 사업가 정호영씨와 미국 하와이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2011년 초 이란성 쌍둥이 아들 정승권, 딸 정승빈을 낳았다. 2012년엔 아이들 교육 때문에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로 내려왔다. 승권·승빈이는 요즘도 엄마가 집에 와야만 비로소 잠자리에 드는 ‘엄마바라기’다.

 

―귀촌을 위해 집을 지었다가 아이들 사교육 때문에 결국 다시 강남으로 가는 연예인도 있던데.

“여기 있으면 그런 소식은 잘 못 듣는다. 워낙 정보에 어두운데, 그게 차라리 마음 편하고 좋다. 만 네 살인 아이들을 여기에서 초등학교에 보내야 하나 고민이 되긴 한다. 주위 학교를 둘러봤는데, 가까운 초등학교에서 5~6학년 아이들이 페트병으로 땟목을 직접 만들어서 남한강 건너기도 해보고 그러더라. 참 좋아보였다. 지금은 유치원 안 보내고 가정교사를 집으로 오게 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근처 발도로프 유치원에 보내기도 한다. 저학년 때까지만이라도 여기서 흙 만지면서 놀게 하고 싶은 게 내 욕심이다.”

 

―텃밭 교육도 한다고 들었다.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고, 같이 상추 심고 오이 따고 당근 캐고 그런다. 승권이가 처음엔 당근을 거부했는데, 자기가 캔 당근은 싹싹 씻어서 깨끗이 다 먹더라. 아이들이 호박잎, 토마토, 된장국을 잘 먹는다. 자연과 가까이 있으니 구사하는 단어도 다르다. 말문 터질 때 제일 먼저 외쳤던 단어가 엄마 아빠 다음으로 거미, 무당벌레, 밤나무 같은 것이었다.”

 

▲드라마 '대장금'에 출연했던 이영애 /조선일보DB

 

―촬영장 오가기 멀지는 않나.

“멀긴 하지만, 일과 가정이 분리되는 맛이 있다. 여기 오면 다 잊는다. 그냥 시골 사람이 된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말끔해진다. 스트레스를 저절로 조절할 수도 있게 됐다. 전원 생활이라는 게 그렇게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게 있더라.”

 

―10년 만의 복귀다. ‘대장금2’를 찍을 거라는 소문도 있었다. “‘대장금2’ 제안을 받고 고민했던 건 사실이다. 워낙 큰 프로젝트였으니까.

‘대장금’은 역사 실록에 단 두 줄만 나왔던 인물을 새로 발견하는 희열이 있는 작품이었다. 드라마로 구현하기 어려운 것을 캐릭터로 살려내고 살을 붙여 나가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런 기쁨을 다시 누려보고 싶었다. 오랜만에 복귀하는데 기왕이면 옛날의 영광에 기대기보단 처음부터 제대로 시작해보고 싶었고. 그럴 때 ‘사임당’이 다가왔다. 신사임당 하면 고리타분한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500년 전 커리어 우먼이었던 여성의 일대기와 오늘을 사는 여자 이야기가 겹쳐지는 판타지 드라마다.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 특히 매혹됐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산소 같은 여자'에서 술집 작부로… 이영애의 변천사②

―엄마가 되어서 더욱 그런가 보다.

“가족 이야기, 육아 이야기, 교육 이야기가 남 얘기 같지 않다. 드라마 시작하면서 공부를 많이 했는데, 500년 전에도 사교육이 있었고 치맛바람이 있더라. 아이를 키우는 문제, 그러면서 한 여성이 차근차근 성장해 나가는 과정…. 몇 세대가 바뀌어도 풀리지 않는 고민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연기로 부딪혀가며 그려보고 싶었다. 신사임당이 너무 평탄한 인물이어서 드라마틱한 부분이 없지 않으냐는 지적도 들었는데, 그것 역시 내가 연기로 넘어야 할 숙제이자 도전이다.”

 

―아이를 낳고 일을 다시 시작하는 기분은 어떤가.

“마음가짐이 남다르다. 예전엔 주어진 일은 무조건 열심히 하는 식이었다. 앞뒤 안 가리고 무조건 직선으로만 달리는 단거리 선수 같은 느낌? A코스 외에는 가는 길도 모르고, 갈 줄도 몰랐다. 아이를 낳고 보니 비로소 B코스가 보인다. 예전엔 나만 열심히 연기해야지 싶었는데, 이젠 촬영장 분위기도 보게 되고 주변 사람들 건강이나 기분도 살피게 된다. 그저께도 양수리 근처 기차역에서 현재 여자 주인공이 남편을 찾아 헤매는 장면을 찍었는데, 촬영장이 좀 소란스러웠다. 뒤에 할아버지들이 우르르 구경을 오셨다고 했다. 그 말 듣고 촬영 감독님에게 ‘우리 아버지도 저 정도 연세가 들었고, 이 근처에서 자주 장어도 드시고 술도 한잔 하신다’고 했는데, 나중에 돌아보니 정말로 거기에 우리 아버지가 와 있는 게 아닌가! 아버지도 나인 줄 모르고 구경 오셨다고 하시더라. 예전 같으면 그저 열심히 촬영하느라 이런 일이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쳤을 것 같다(웃음).”

 

내성적인 AB형, 배우가 되다

이영애는 서울에서 태어나 송파구 잠실에서 줄곧 자랐다. 서울 잠실여고를 졸업했고, 한양대 에리카 캠퍼스 독어독문학과에 들어갔다. 대학교 2학년 때 오리온 투유 초콜릿 광고를 찍으면서 연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아모레퍼시픽 화장품 ‘마몽드’의 광고 모델로 오래 활동했다. ‘산소 같은 여자’라는 광고 카피가 이영애를 수식하는 문구가 됐던 것도 이때부터였다.

 

―대학교 2학년 때 데뷔했다. 늦은 편이다.

“학창 시절엔 그냥 조용했다. 기껏해야 사진 찍거나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는 정도? 뻔하지만 집-학교-집-학교, 뭐 그랬다. 대신 대학 들어가선 하고 싶은 게 많아 이것저것 다 해봤다. 전단 돌리는 아르바이트도 하고, 백화점에서 물건도 팔아봤다. 노래 창작 동아리에서 활동하기도 했고. 한때는 기자가 꿈이었다. 한 일간 스포츠 신문사에서 대학생 명예기자를 해본 적도 있다. 2학년 때 우연히 투유 초콜릿 광고를 찍게 됐는데, 그때도 그저 아르바이트한다는 생각으로 나갔다. 유덕화씨랑 광고를 찍었는데, 나중에 ‘대장금’ 홍콩 프로모션을 갔을 때 그와 전화 통화를 하게 됐다. ‘절 기억하세요?’ 하니 ‘그렇다’고 하더라. 참 고맙고 또 반가웠다.”

 

―소심한 것치곤 처음엔 성격 연기를 꽤 많이 했다.

“술집 작부(1997년 ‘내가 사는 이유’), 전과자(1996년 ‘그들의 포옹’), 센 건 한 번씩 다 맡아봤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편이지만, 또 그만큼 내 안엔 다른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은 욕심과 열정도 꽤 큰 것 같다. 막상 연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척 급해졌다. 머리도 뽀글뽀글 볶고 새빨간 립스틱도 칠하고. 강한 역할을 많이 해봐야 연기가 빨리 늘 거라고 믿었던 시절이다.”

 

―배우로서의 정점(頂點)은 역시 ‘대장금’ 시절이었을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대장금’은 분명 내게 배우로서 산다는 것의 보람을 크게 일깨워 준 작품이다. 그렇지만 1996년 ‘동기간’이라는 드라마에서 ‘용자’라는 날라리 고등학생 역할을 했을 때의 기억도 남다르다. 시청률이 높지도 않았고 그래서 조기 종영 했지만, 그 연기를 할 때 그렇게 재미있고 신이 났었다. 연기의 기쁨을 새삼 알게 됐다. 그때 시간들, 그 많은 좌충우돌과 실패가 쌓여서 나중에 ‘대장금’도 찍고 ‘친절한 금자씨’도 찍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싶다.”

<③편에 계속>

 

<②편에서 계속>

'TV만 틀면 나왔던 여자'… 그녀가 신용카드 CF 안 찍는 이유③

잘나가는 그녀가 중소기업 CF를 찍는 이유

 

2000년대 초반의 이영애는 ‘TV만 틀면 나오는 여자’였다. 드라마 ‘초대(1999년)’ ‘불꽃(2000년)’으로 큰 인기를 끌었고, 영화 ‘선물’과 ‘봄날은 간다’가 흥행하면서 충무로에서 티켓 파워가 가장 센 여자 배우로 꼽히기도 했다.

 

이영애가 안 나오는 TV 광고를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였다. 인터넷엔 ‘이영애의 하루’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돌았다. 비누·샴푸·정수기·통신사 영어공부 프로그램·신용카드·냉장고·휴대전화까지, 온갖 CF에 출연하는 이영애의 모습만 모아도 24시간 하루 이야기가 된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이영애는 “그 시절 생각하면 많이 부끄럽다”고 했다.

 

―부러움을 한 몸에 받던 시절 아닌가.

“그야말로 내가 ‘소비의 여신’처럼 보였던 시기인데, 처음엔 나도 그냥 인기가 많으니 좋다고만 생각했다. 정신을 차린 게 2003년 신용카드 대란 때다. 당시 신용카드 관련 신용불량자가 엄청나게 많아지면서, 빚을 갚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내가 찍은 광고가 누군가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구나’ 하는 걸 그때 알았다. 그 이후로 신용카드 광고는 찍지 않는다. ‘그래, 광고도 작작 좀 찍자’고 속으로 생각하게 됐다(웃음). 엄마가 되고 나니 요즘엔 아이들 과자나 음료수, 선크림 같은 광고 제안도 심심찮게 들어오는데 이 역시 무척 조심스럽다. 유전자변형작물(GMO)로 만든 과자인지 아닌지, 화학첨가물은 없는지, 피부에 유해하진 않은지 알아보고 거절할 건 정중하게 거절한다.”

 

―그렇지만 요즘에도 광고를 적지 않게 찍고 있다.

“젊었을 땐 대기업에서 하는 광고를 찍는 게 좋았다. 내 이미지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으니까. 지금은 반대다. 우리나라 중소기업 중 내실 있는 회사, 뛰어난 국산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있으면 기꺼이 모델이 되려고 한다. 착즙기 ‘휴롬’이나 프라이팬 ‘해피콜’ 같은 경우가 그렇다. ‘휴롬’은 내가 광고 모델로 나서고 나서 매출이 8배쯤 뛰었다고 들었다. ‘해피콜’도 내가 모델이 된 이후 판매량이 껑충 뛰었다고 하고. 그런 이야기 들으면 참 뿌듯하다. 최근엔 내가 이런 중소기업 모델로 나섰더니, 다른 연예인들도 점차 중소기업 광고에 적극적으로 출연하더라는 말도 들었다. 배우로서 제일 보람 있고 기쁜 순간이 이런 때가 아닌가 싶다.”

 

‘얼굴’이 된다는 것 최근 이영애는 문호리 집 옆 한옥을 개조해 작은 공방을 만들었다. 쌍둥이 남매를 위한 화장품을 직접 만들기 위해서다. 동백꽃·홍삼·해초 추출물 등을 넣은 친환경 화장품을 직접 개발했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도 매장을 냈고, 홍콩 하비니콜스 백화점에도 최근 입점했다. 이영애는 “아이들 물티슈에 유해 성분이 많다는 얘기를 듣고 시작한 일”이라고 했다.

 

▲베를린 영화제에 심사위원장으로 참석했던 이영애. /조선일보DB

 

―배우 이름을 걸고 제품을 낸다는 게 부담스럽진 않았나.

“아이들 건강을 생각해서 시작한 일이다. 모유 수유를 1년 반 동안 했는데, 내 몸에 스며든 성분이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나 역시 아무 제품이나 얼굴이나 몸에 바르면 안 되겠다 싶었다. 방부제, 화학성분, 유해 계면활성제 없는 화장품을 만드는 방법을 연구했다.”

 

―작년엔 우리나라 조선 음식의 맛과 멋을 탐구한 ‘이영애의 만찬’ 같은 책을 펴냈다. “대장금은 전 세계 99개국에 수출된 드라마다. 덕분에 전 세계를 돌며 해외 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내 손을 잡고 ‘당신 덕분에 한국이란 나라가 좋아졌어요’라고 말해준 외국 팬이 참 많다. 고맙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했지만, 책임감에 어깨가 뻐근해지기도 했다. 그들 앞에서 내가 우리 음식을 잘 모르면서 먹고, 한복을 잘 모르고 입으면 큰일 아닌가 싶더라. 맥적, 탕평채, 비빔밥 같은 우리 전통 음식을 공부했고 직접 만들어보기도 했다. 한복 디자이너 한은희 선생님을 통해 제대로 된 우리 한복이 무엇인지도 배우고 익혔다.”

 

―2006년 베를린 영화제에 심사위원 자격으로 참석했을 때도 한복을 입었다. “전 세계 사람들이 나를 통해 ‘한국 여성’을 볼 텐데, 우리나라 옷을 입고 나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또 막상 입고 나면 이브닝 드레스를 입을 때보다 반응이 훨씬 더 좋았다. 한복이 그만큼 섬세하고 또 풍성한 아름다움을 지닌 옷인 거다.”

<④편에 계속>

 

<③편에서 계속>

딸이 연기 관심 있다면 난 도와주고 싶은 마음④

―중국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이 한국에 왔을 때도, 미얀마 아웅산 수지 여사가 방문했을 때도 만찬을 함께했다.

“외국에서 정치 지도자들에게 ‘만나고 싶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대장금’ 효과일 거다. 어려운 자리가 아닐까 싶어서 망설일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남편이 ‘나가서 국위 선양 하고 오라’고 용기를 줬다.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하려고 한다.”

 

▲지난 20일 인터뷰를 하고 있는 배우 이영애. 그는 “예전엔 기자와는 집에서 절대 안 만났다. 나도 참 많이 변했다”며 웃었다. /사진=김태은, 비주얼디렉팅=이선희, 의상 협찬=막스마라·S막스마라·세그먼트A

 

―작년 서울에서 사고로 일찍 태어난 대만인 조산아를 위해 병원비 1억원을 몰래 내준 사실이 알려진 적도 있다.

“역시 남편이 아니었다면 실행에 못 옮겼을 거다. 누군가를 돕고 싶은 마음이 항상 있긴 했는데 정작 실천할 방법을 잘 몰랐다. 나는 매사 고민이 많은 만큼 결정을 빨리 못 하는 편인데, 남편은 마음에 먹은 일은 바로 실행에 옮기곤 한다.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남편과 꽤 오래 연애했다고 들었다. 아무리 사랑해도 미울 때도 있고 싸울 때도 있지 않나.

“난 부부싸움 할 때만큼은 기억력이 별로 좋지가 않아서 잘 진다(웃음). 연기할 때 대사는 어떻게 외우나 싶다. 반대로 남편은 A형이라서 뭐든 기억도 잘하고 그만큼 종종 삐치기도 잘한다. 아이들 교육 때문에 의견 충돌이 있을 때는 있다. 애들 아빠가 아이들이 그저 예쁘다고 TV 프로그램도 보고 싶은 것을 다 보여주는 편이라면, 나는 좀 엄하게 군다. 아이들 재울 땐 보통 내가 동화책을 읽어주는데, 이따금씩 남편이 읽어주면 아이들이 참 좋아한다. 아주 화끈하게, 재미있게 읽어주니까.”

 

―두 아이가 나중에 연기를 하고 싶다고 한다면?

“딸 승빈이는 재능이 좀 있어 보인다. 노래도 잘하고 춤도 곧잘 추고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한다. 재작년에 내가 출연한 TV 다큐멘터리에 우리 가족이 다 나와서 거실에 다 같이 앉아 본방 사수를 했더랬다. 그런데 그걸 다 보고 나서 승빈이가 엉엉 울었다. ‘내가 나오는 부분이 너무 짧다’면서(웃음). 반면 승권이는 TV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장난감 조립만 하더라. 딸아이가 연기에 관심이 있다면 나는 도와주고 싶은 마음인데, 아이 아빠는 어떨는지 모르겠다.”

 

▲SBS 다큐 '이영애의 만찬' 중에서. /SBS 제공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 이영애가 “밥을 같이 먹자”고 했다. 그녀가 사는 집 근처 동네 식당으로 갔다. 반찬으로 굴비가 나오자 그는 “우리 집에서 생선은 내 몫”이라며 접시를 가져가더니 생선 가시를 일일이 발라냈다. “아이들에게 먹일 때 목에 작은 가시라도 걸리면 안 되지 않나. 그래서 이것만큼은 남편이나 이모에게 안 맡기고 내가 직접 한다.” 마주 앉은 사람들의 밥 위에 생선살을 일일이 얹어주기도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렇게 물어봤다.

 

―집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해서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낯을 많이 가리는 줄 알았는데.

“맞다. 예전엔 누가 우리 집 오겠다고 하면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왜 우리 집에 오겠대?’ 하면서. 기자랑 밥을 같이 먹는 건? 당연히 생각도 못 했다. 그렇지만 나도 결국 변하더라. 요즘 우리 집 대문은 늘 열려 있다. 주말엔 남편과 손을 잡고 주말마다 장터를 다니기도 하고, 사람들 틈에 섞여 호떡도 사먹고 그런다. 요즘 우리 집 가훈은 ‘뭘 더 바래’다. 뭘 더 바라겠는가. 지금이 이렇게 좋은데. 이젠 나도 이 변화를 그저 느긋하게 즐겨보려 한다.”

 

말을 마친 이영애가 싱긋 웃었다. 어느덧 어둑어둑한 저녁이었다.

송혜진 주말뉴스부 기자

 

2016년 09월 01 6·25 참전용사의 딸 이영애, 육사에 1억 쾌척

 

▲ (서울=연합뉴스) 삼성물산 패션부문의 여성복 브랜드 ‘구호(KUHO)’에서 ‘하트 포 아이(Heart for Eye)’ 기부 티셔츠를 전국 54개 구호 매장에서 선보인다고 28일 밝혔다. ‘하트 포 아이’ 캠페인은 시각장애 어린이들의 눈을 뜨게 해주어 패션의 아름다움을 같이 나누자는 취지에서 여성복 ‘구호’가 2006년에 시작한 패션업계의 대표적인 사회공헌 활동이다. 사진은 이번 캠페인에 참여한 배우 이영애와 쌍둥이 자녀 모습. 2016.4.28 [JLOOK 제공]

 

한류스타 이영애가 기부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1일 육군사관학교에 따르면 이영애는 최근 육사발전기금에 1억 원을 쾌척했다. 이영애는 기부를 하면서 6·25 참전용사의 자녀들을 위해 써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영애의 아버지는 6·25 참전용사이며, 시아버지는 육사 2기인 고 정강 예비역 육군 준장이다. 그는 앞서도 군인들을 위해 많은 기부를 해왔다.

 

이영애는 또한 지난 7월 자신이 살고 있는 경기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서종중학교에 5천만 원을 기부했다. 서종중학교는 이 기부금으로 과학실 환경개선, 농구장 설치, 장학금 지급 등의 사업을 진행했다.

 

이영애는 평소 자신이 사는 지역의 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여왔으며, 서종중학교에 다문화 학생들이 많이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기부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서종중학교는 최근 열린 학교운영위원회에서 이영애의 기부와 함께 이같은 사업 보고를 했다.

 

이에 대해 이영애의 소속사는 “평소 이영애 씨가 개인적으로 기부를 종종 하기 때문에 자세한 사항은 모른다”고 밝혔다.

 

한편, 이영애는 올 하반기 한중 동시 방송되는 ‘사임당-빛의 일기’를 통해 12년 만에 안방극장에 복귀한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