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15/ 세계저명인사5/
■일본
□2015.06.03 "日서 아베 반대 목소리 커지게 韓·中이 도와야"
이노구치 다카시 니가타현립大 총장
日 유권자 절대다수는 일본의 군사적 팽창 반대
중국의 위협은 크게 느껴…
한국과 달리 美와 동맹 만족 한국, 통일을 하겠다는 건지 하면 좋다는 정도인지 모호
효과적으로 권력 유지한 北, 미친 정권 아닌 영리한 집단
北붕괴 바라는 주변국 없어… 한국, 통일 위해 친구 늘려야
韓·日 관계 좋아지면 日보다 한국이 더 이익
정치학자 이노구치 다카시(猪口孝·71) 니가타현립대 총장은 영어와 일어로 논문을 쓰고, 독어·불어·한국어·중국어·러시아어로 구두(口頭) 발표를 한다. 한때 베트남어와 인도네시아어도 배웠다. 일본인들이 '천재'라고 부르는 사람 중 하나이자, 복잡한 현실을 숫자와 모형으로 간명하게 풀어내는 계량정치학의 대가다. "한·일을 둘러싼 세계가 도대체 어떻게 변해갈지 궁금하다"고 묻자, 그는 듣기 좋은 말 따위 하지 않고 핵심으로 직진했다.
"중국은 30년 고도성장이 끝나고 한 자릿수 성장 중이다. 그게 중국의 뉴노멀이다. 제조업 설비 과잉 때문에 수출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민족 간, 도농 간 격차가 커지는 중이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강자들이 충돌하는 위치에 있는데, 한국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은 새로운 세계 질서에 대해 아직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미국은 세계 어디서나 미국이 우위라고 주장한다. 중국은 최소한 태평양 절반과 아시아는 중국 세력권에 넣어야겠다고 맞서고 있다. 일본은 긴 평화를 누렸지만, 이젠 세계의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데 일본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국민 과반수가 미국과의 동맹에 만족하지 못하는 한국과 달리, 일본은 국민 대다수가 미국과의 동맹에 만족한다. 이 점이 한·일이 완전히 다른 점이다. 일본은 강력한 과학기술과 제조 능력을 매개로 미국과 뭉치는 중이다."
▲이노구치 다카시 니가타현립대 총장은“전후 일본 국민 대다수는 전쟁을 반복하거나 군국주의 노선에 들어서는 데 줄곧 반대해왔으나 그런 목소리는 이상하게 한국 국민 귀에 안 들리는 것 같다”고 했다. /조선일보 DB
이노구치 총장은 일본 지식인 사회에서 이념적으로 '중도 리버럴'이다. 이상을 내세우는 것보다 현실을 정확하게 읽는 걸 중요시한다. 그는 여러 번 허를 찌르는 예측을 했다. 2003년 미국이 막 후세인을 몰아냈을 때 "지금 당장은 미국 일극 체제가 강고할 것 같지만, 머지않아 문득 돌아보면 '아시아·유럽·미국 3극 체제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했던 게 대표적이다. 분위기에 휩쓸려 모두가 놓치고 있는 대목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것도 그의 장기다. 한국은 "일본이 군사대국화한다"고 경계해왔다. 그는 "일본이 중국에 대해 느끼는 군사적 위협은 과장이 아니다"라고 했다.
"중국은 이미 핵무기를 갖고 있다. 중국 공군이 굉음을 울리며 남중국해와 태평양 상공을 수시로, 위협적으로 비행한다. 일본이 군사력을 증강하면 중국과 한국이 즉각 반발한다. 일본이 한 발짝 떼면 그게 곧 아흔아홉 발짝의 시작이라는 논리를 댄다. 그런데 사실 일본 유권자 절대다수는 (한·중이 우려하는 군사적 팽창에) 반대다. 중국과 북한은 한국을 공격한 전력이 있고, 그럴 수 있는 현실적 능력도 갖추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중국과 북한보다 일본에 위협을 느끼는 걸 좋아한다."
그는 "한국인 과반수가 통일을 원하는데, 과연 어떻게 통일을 이룰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물었다. 한국과 북한을 둘러싼 외부 세력 중 북한의 붕괴를 진심으로 바라는 나라는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중국과 미국에 북한은 서로의 중간에 가로놓인 '완충장치'다. 중국 입장에서 북한이 무너지고 한국이 흡수하면 '미국 세력이 턱밑에 왔다'고 느낄 수 있다. 반대로 북한이 잔존하고 한국도 미국과 멀어지면 중국 입장에선 미국과의 완충장치가 두 개가 된다."
요컨대 정말로 통일에 관심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고 보면 된다는 의미일까. 이노구치 총장은 "한국도 통일을 정말로 하겠다는 건지, 그냥 했으면 좋겠다는 건지 정확히 모르겠다"고 했다. '욕망만큼 준비도 치열한가' 하는 반문이 숨어 있었다. 그는 "북한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미친 정권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면서 "그들은 누구도 그들이 존속하길 바라지 않는 적대적인 세계 속에서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매우 영리한 판단을 거듭하면서 효과적으로 권력을 유지해온 집단"이라고 했다.
앞으로 10년 뒤 동북아는 어떻게 변해있을까. 이노구치 총장은 "중국이 아닌 미국이 세계 최고 강국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중국은 국내적으로 자치(自治)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지금보다 커져 있을 테지만 아주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일본은 지금과 큰 변화 없이 평화로울 것이다. 일본 자위대가 세계 곳곳에서 미군을 후방 지원하겠다고 했으니, 그때쯤 되면 '전후 첫 전사자'가 나오지 않겠느냐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일본이 직접적으로 군사 개입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긴 안목으로 보면 동북아 국가들이 무력충돌할 가능성은 낮다. 한·중·일이 노력하면, 그리고 '천천히' 가면, 유럽연합 같은 3자 FTA를 이룰 수 있다. 큰 흐름은 이쪽이다. 다만 2025년에 한·중·일 FTA가 이뤄져 있을 가능성은 아직 25~30% 정도다."
그는 "착각이 참화를 부른다"면서 "중국은 영국을 얕보다 아편전쟁에 졌고, 일본은 중국을 깔보고 무모한 전쟁을 일으켰다"고 했다. 지금 한국은 어떤 착각을 하고 있을까. 이노구치 총장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우익 성향 망언들과 관련해 "일본 사회에는 아베 총리가 그런 발언을 해주길 바라는 소수가 있고, 아베는 때로 그걸 만족시켜주는 것뿐"이라고 했다.
"노래로 치면 '사이드 멜로디'다. 한·중이 침묵하면 오히려 일본 국내에서 아베의 그런 언동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커질 것이다. 한·중이 목소리 높이기 전까지는, 일본 사회에서 그런 사이드 멜로디가 지금처럼 큰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한·일 관계와 관련해 그는 달콤한 말을 하지 않았다. "한·일 관계가 좋으면 일본도 이익이지만 한국이 더 이익"이라고 했다. "일본에 한국은 중요하지만 불가결하지는 않다. 기술적으로 일본이 한국에서 배울 게 많지 않다. 반면 한국은 통일이라는 난제를 짊어지고 있다. 될 수 있으면 친구를 늘려야 한다."
[이노구치 총장은…]
한국어 등 7개 국어에 능통… '천재'로 불리는 정치학자 1944년 일본 니가타현에서 태어났다.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도쿄대 교수를 거쳐 니가타현립대 총장에 취임했다. 소장 교수 시절 냉전 이후 국제 관계의 흐름을 정확하게 예측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정치학, 국제관계론, 일본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탁월한 학문적 업적을 쌓았다. 일본 정치학자 중 논문이 가장 많이 인용되는 학자 중 한 명이다.
조선일보 김수혜 사회정책부 기자
□ 2015.06.10 [무라야마 前총리·고노 前관방장관 처음으로 한 자리서 대담… 아베에 쓴소리]
무라야마, 벼르고 나온 듯… - "담화 반드시 계승해야"
방명록에 '진실'이라 쓴 고노 - "담화는 개인 의견 아니다"
벼르고 나온 것 같았다. 9일 오후 2시 도쿄 도심 일본기자클럽에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91) 전 일본 총리와 고노 요헤이(河野洋平·78) 전 관방장관이 들어섰다. 일본군위안부를 강제동원 했다고 인정한 '고노 담화'와 식민지 지배를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의 주인공이다. 이념도, 정당도 다른 두 사람이 이 문제로 한자리에 선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 시간 전부터 200석 회의실을 꽉 채우고 기다린 기자들 앞에서 두 원로가 아베 정권을 향해 돌직구를 던졌다. 구라시게 아쓰로(倉重篤郞) 마이니치신문 논설위원이 사회자 겸 질문자로 나섰다.
▲한·일 갈등의 실타래를 풀어온 두 담화의 주인공 무라야마 도미이치(오른쪽) 전 총리와 고노 요헤이 전 관방장관이 9일 일본 기자클럽 회의실을 가득 메운 취재진 앞에 나란히 앉았다. 두 사람은 아베 총리가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할 것을 당부했다. /김수혜 특파원
―무라야마 담화와 고노 담화를 평가한다면.
▲고노=무라야마 담화는 전후 50년을 맞아 나왔다. 그때 일본은 자민당 정권이 무너지고 자민당·사민당·사키가케 3당 연립정권이 성립됐다. 과거 50년간 일본이 어떤 길을 걸어왔나 돌아보고, 앞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여러 가지 문제를 생각했다. 자민당 의원들도 다수가 공감했다. 무라야마 담화는 (무라야마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다수의 생각이 표출된 것이다. 전후 50주년에 이 담화가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무라야마=(위안부 이슈가 처음 불거졌을 때) 한국은 '반드시 일본이 국가의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용서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일본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모든 걸 해결했다'는 입장이었다. 이래선 서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때 고노 담화가 나왔다. 일본 정부의 노력을 보여줬다. 유익했다.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풀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 국민 전체가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요즘 '침략'에 대해 여러 이견이 있는데.
▲무라야마=일본군이 중국을 침략했던 것,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고, 만주에 가서 만주국을 세운 것에 대해 침략 말고 다른 표현을 쓸 수 없다.
―위안부 강제동원에 대한 의견은.
▲고노=미야자와 정권(1991~93년) 때 한국의 요청으로 위안부 문제를 조사한 뒤 고노 담화를 냈다. 위안부는 본인의 의사에 반해 모집되고 관리됐다. 거짓말로 속여서 끌고 간 경우도 있고, 최근 아베 총리가 말한 것처럼 인신매매 당한 경우도 있다. 본인의 의사에 반한 경우가 많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렇게 모집된 뒤에는 분명히 강제로 끌려갔다. 군이 준비한 운송수단을 타고 이동한 것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여성들이 끌려간 사건을 봐도, '강제동원 사실이 없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
▲무라야마=작년에 한국 갔을 때,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에 이렇게 관심이 큰 줄 몰랐다. 중국에서도 모두 이 문제를 알고 있었다. 일본만 잘 모른다. 모두가, 특히 한국이, 일본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그런 걱정 하지 않게 해야 한다. 위안부 문제는 일본이 결자해지(結者解之)해야 한다. 위안부 문제 해결책도 역시 일본이 정상회담을 통해 해결책을 찾았으면 한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한·일 관계에 진전이 없다. 한국도 일본이 전후 평화국가를 위해 노력한 점, 일본 경제가 발전해 한국과 중국의 발전에 도움이 된 점을 인정해야 한다.
―아베 담화, 어떤 내용이 돼야 할까.
▲무라야마=나는 과거에 대해 좋은 것은 좋았다고 인정하고, 나쁜 것은 나빴다고 사죄해야 한다는 결의에서 무라야마 담화를 냈다. (아베 총리는 '같은 말을 반복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역사를 직시하는 것은 일본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니까) 반복할 수 있다.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를 반드시 계승해야 한다.
이날 고노는 일본기자클럽 방명록에 '진실(眞實)'이라고 썼다. 그는 "우선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면서 "있었던 일을 없었던 척하면 안 된다"고 했다. 무라야마 전 총리는 '사무사(思無邪)'라고 썼다. 논어의 한 귀절로 '생각에 간사함이 없다'는 뜻이다. 그는 "고노 장관이 말하는 '진실'이라는 것과 표현은 달라도 같은 의미"라고 했다. 일본 기자 한 명이 마이크를 잡더니 "실례지만, 두 분 같은 분이 다시 한 번 현역으로 돌아와주시면 안 되겠느냐"고 했다. 박수와 웃음이 터졌다.
- 도쿄=김수혜 특파원
도쿄=양지혜 특파원
□ 나리사와 마사루(66) 전 일본 도호쿠대 교수 인터뷰
2015.06.20 글 | 김정현 주간조선 기자
“위안부 납치 부정은 전후 일본의 존립근거 뒤흔드는 일”
▲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한국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준비가 돼 있습니까?”
나리사와 마사루(66) 전 일본 도호쿠대 교수는 서툴지만 또렷한 한국어로 말했다. 70살 가까운 노인이 막내아들뻘 되는 내 앞에서 시종일관 무릎을 꿇고 말을 이어갔다. 하얗게 센 머리와 수염을 한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는 “얼마 전 아베(일본 총리)가 위안부 할머니 강제 동원에 대해 ‘인신매매’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것은 너무나도 뻔뻔한 행동”이라고 말했다.
내가 나리사와 마사루 박사를 만난 건 지난 5월 초였다. 그는 일본 도호쿠대에서 동북아시아 역사를 연구하고 강의해 왔다. 도호쿠대 퇴임 후에는 역사적 사실을 둘러싸고 국가 간 견해 차가 발생하는 메커니즘과 이를 축소하는 방안에 대한 연구를 해왔다. 나리사와 박사는 이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그는 도호쿠대에서 자신이 가르쳤던 한국인 제자들의 초청으로 이번에 방한했다. 한국인 기자를 만난 건 처음으로,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아베 정권의 잘못에 대해 할 말이 많았지만 현직에 있을 때는 발언을 자제해 왔다고 한다.
나리사와 박사는 아베 신조 정권의 잘못도 잘못이지만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 외교부의 안일함을 질타했다. 그는 한국 정부가 일본의 역사왜곡 행위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일본 정부 주장의 오류를 논리적으로 드러내 공론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정확히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2차 대전 전범국인 일본이 국가주권을 회복하고 국제사회에 복귀하기 위해 준수하겠다고 약속한 것들이다. 예컨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는 “유엔헌장 55조와 56조를 지키겠다”는 약속이 들어 있다. 이 조항은 인종, 성별을 가리지 않고 평화와 평등, 자유권을 보장하기 위해 모든 협력을 다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범국인 일본으로서는 2차 대전 중 저지른 반인권 범죄를 반성하고 국제적인 차원의 인권 정신을 따르겠다는 약속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증거와 증언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2차 대전 당시 저지른 위안부 납치와 같은 대표적인 반인권 범죄 사실조차 부인한다면 이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준수 의무를 어기는 꼴이 된다. 나리사와 박사는 “일본 정부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강제 납치를 부정하는 건 현대 일본의 존립근거를 뒤흔드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일본 정부는 1976년 발효된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b항(ICCPR-b)’에 대해서도 구속력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국제규약은 북한 인권법 등의 근거가 된 것으로 일본도 이를 적용받으면 자신들이 저지른 반인권 범죄인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 이러한 국제규약은 국제법보다 국내법이 우선하는 일반 국가라면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리사와 박사에 따르면 일본은 상황이 다르다. 그 이유는 ICCPR-b가 성립한 근거가 유엔헌장(특히 55조와 56조) 및 세계인권선언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일본은 이러한 유엔헌장과 세계인권선언을 준수하는 것을 조건으로 전범국 책임을 면했다. 그런 일본이 만약 국내법이 국제법보다 우월하다는 이유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다면 전범국의 책임을 다시 물어 마땅하다는 것이 나리사와 교수의 주장이다. 일종의 계약 위반이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1979년 이전의 사항에 대해서는 ICCPR-b가 소급 적용되지 않는다(2008년 10월 16일 우에다 유엔인권대사 발언)는 주장도 펴고 있다. 하지만 나리사와 박사에 따르면, 인권(자유권) 문제는 법 개념상 일반적 사법 절차를 뛰어넘는다. 즉 일본이 준수를 약속한 ‘기본적 자유의 보편적인 준수’(유엔헌장 55조 C항)라는 조항으로 미루어 ‘기본적 자유는 보편적’이라고 봐야 한다. 이는 법 제정의 시간을 초월하는 개념이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는 1979년 이전에 벌어진 일이므로 소급 적용되지 않는다고 발뺌할 수 없다는 것이 나리사와 박사의 주장이다.
나리사와 박사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 아베 정부를 일부 일본인들이 지지하는 이유 중 하나는 “위안부 문제와 같은 잘못을 인정하는 행위가 국민의 정서와 품위를 손상시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리사와 박사는 “특히 아베 정권이 들어선 이후 일본의 언론과 학회는 한국 위안부 문제에 대해 왜곡을 조장하고 있다. 진실된 의견을 내면 배신자로 취급받는다”고 말했다.
심지어 학계에서는 한국이 일본을 칭했던 왜(倭)라는 표현을 쓰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라고 했다. 대표적 진보 성향 학자인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학 명예교수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역사인식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바로 등 뒤에서 “명예교수가 아닌 불명예 교수”라는 조롱 섞인 비판을 듣기도 했다는 것이 나리사와 박사의 전언이다. 이는 일본 사회에서 굉장히 무례한 행동으로, 자국을 비판하는 발언이 일본 학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했다.
나리사와 박사는 주간조선과의 인터뷰 다음날 일본으로 돌아갔다. 지난 5월 25일 일본 역사학자들로 구성된 16개 단체가 ‘군 위안부 왜곡 반대’ 집단 성명을 냈다. 성명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강제 연행된 위안부의 존재는 그간의 많은 사료와 연구에 의해 입증됐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외면하는 것은 국제사회에 일본 스스로가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나라임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나는 이 성명이 계기가 돼 일본의 나리사와 박사와 다시 연락을 취했다. 양심적인 일본 학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 정부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듣고 싶었다.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나리사와 박사는 지난해 10월부터 12월 사이 한국의 국회의원, 외교관들과 주고받았던 이메일을 내게 보내왔다. 그 내용을 보니 나리사와 박사가 ‘한국의 위안부 문제 대응과 관련해 도움을 주고 싶다’며 편지를 보낸 한국의 국회의원과 외교관들은 수차례 만남 약속을 잡고도 약속을 취소하거나 바쁘다는 이유로 답신을 피했다. 주일 한국대사관의 K 과장은 나리사와 박사에게 ‘일본 측 정서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위안부 일을 거론하지 않는 게 좋다’는 답신을 보내기도 했다.
나리사와 박사에 따르면, 한국의 대학 역시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말 나리사와 박사는 일본의 위안부 역사 인식을 바로잡는 취지의 연구를 하겠다며 한국의 K대 일본연구소가 운영하는 ‘일본 연구, 지적교류연구조성 프로그램’에 자신의 연구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제공하는 일본교류기금을 받아온 K대 일본연구소는 나리사와 박사의 요청을 거부했다.
나리사와 박사는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에 동조해온 일본 학자는 물론, 한국 학자들의 모습에도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 그는 “위안부 문제가 정치·외교적인 이유로 감춰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위안부 문제는 한국과 일본만의 문제가 아닌 국제사회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 예로 네덜란드의 위안부 문제를 들었다. 나리사와 박사는 “2차 대전 때 음식접대, 사무보조, 성 서비스 등 일본군 시설에서 노동하던 네덜란드 여성이 300명 가까이 된다”고 말했다. 그중 강제 성 서비스를 한 여성이 65명으로 드러났다고 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1948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임시 국제군법회의에 소송을 제기한 네덜란드 여성 35명 중 25명은 강제연행을 인정받았다. 강제연행을 주도한 육군소좌 오카다 케이지는 사형을 선고받았고 이 재판은 이미 잘 알려진 고노담화 작성의 근거 자료가 됐다. 이렇게 작성된 고노담화조차 최근 일본에서 부정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나리사와 박사는 “아베 정부가 한·일 역사를 왜곡하려고 하는 것은 자명하다”며 “한국 정부의 똑똑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출처 | 주간조선 2360호
□ 2016-08-27 “사드-美MD 결합때 효과 탁월… 中 트집은 주권 간섭일뿐”
요동치는 한반도 주변 정세… 日-中전문가에게 듣는다 [日 모리모토 사토시 前방위상]
▲일본 최고 안보 전문가로 꼽히는 모리모토 사토시 다쿠쇼쿠대 총장은 “주권 국가는 자위 수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며 “(한반도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의 반대는 주권 간섭”이라고 말했다. 모리모토 총장은 민간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일본 방위상을 지냈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한반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는 동북아시아 안정에 크게 기여할 겁니다. 미국과 일본이 가진 미사일방어체계(MD)와 합쳐 생각하면 그 공헌도는 현저한 것이 됩니다.”
일본 최고 안보전문가이자 민간인 첫 방위상(한국의 국방부 장관)을 지낸 모리모토 사토시(森本敏) 다쿠쇼쿠(拓殖)대 총장은 최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며 한반도 내 사드 배치 결정에 힘을 실었다.
한미의 사드 배치 결정에 중국이 반발하며 북한에 대한 제재를 완화하는 동시에 한국에 대해선 보복 움직임이 잇따르고 있다. 일본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을 근거로 미일 동맹을 강화하며 세계 속에서 군사적 역할을 확대하고 있다. 미중 대결을 중심으로 주변국이 국가 이익을 확대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는 동북아 정세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한반도 사드 배치 결정에 중국의 반발이 거세다.
“중국이 반대하는 것은 사드보다는 X밴드 레이더다. 중국 국토 남쪽 절반의 전략시스템이 탐지되는 것을 경계한다. 왜 반대하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한반도 긴장 고조’ 등을 들먹이지만 거기(중국 남부)에 가상 적국인 미국을 공격할 전략 시스템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과 미국이 사드는 북한에 대한 방어 수단이며 중국은 대상이 아니라고 거듭 설명해도 막무가내이다. 이는 주권 간섭이라고 생각한다. 무릇 주권국은 자위(自衛) 수단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사드의 실효성이 있는지도 논란의 대상이다. 일본은 아직 도입하지 않았는데….
“어떤 시스템이건 100% 방위란 불가능하다. 다만 사드가 일본의 지대공 패트리엇 미사일(PAC―3)보다 유효한 방위 수단인 것은 분명하다. 훨씬 광역이고 높은 고도를 커버한다. 사드 배치국은 앞으로도 늘어날 것이다. 일본도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다만 일본은 이미 이지스함과 PAC―3로 중층 방어망을 짜놓았다. 여기에 사드를 더하면 전체적으로 어떤 시스템이 될지 신중하게 분석하고 있다.”
―누가 새 대통령이 되든 미국이 동맹국에 대한 비용 분담 요구를 늘릴 것 같다.
“주둔 미군에 대한 경비 분담만으로 동맹국을 보면 안 된다는 것을 미국의 전문가들은 잘 알고 있다. 미국의 불만은 ‘동맹국이 대가를 부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역 안정을 위해 미국을 지원하는 여러 가지 노력을 다양한 분야에서 해달라는 것이다.”
―일본은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
“2017년도 미국 국방부 예산안에 들어간 ‘제3 오프셋(상쇄) 전략’이란 게 있다. 중국 러시아 등에 대해 기술 우위로 미국의 리더십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이에 발맞춰 미국과 일본 간에 갖가지 기술 협력이 이뤄지고 있다. 특히 미사일 방위 분야에서 SM―3를 개량한 고고도 요격미사일 방위기술(SM―3-블록2A)을 개발 중인데, 2018년에는 테스트에 들어갈 것이다.”
―사드와 유사한 것인가.
“전혀 다르다. 사드는 종말 단계인데 이건 중간 단계에서 요격하는 시스템이다. 북한에서 발사돼 하와이나 괌, 미 본토로 날아가는 미사일을 도중에 요격한다. 현재 시스템은 사정 1300km ‘노동’급 미사일에 대비하는데 이보다 높은 고도와 높은 속도를 막는다. 이 밖에 일본은 탄소섬유나 부품 기술을 미국에 제공한다.”
―최근 일본은 중국 견제를 강화하면서 여차하면 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공백을 메우려는 각오인 것으로 보인다.
“일본 여론이 중국에 호의적이지 않다. 중국은 대국(大國)이 분명하지만 공산당 독재 체제하의 중국 경제는 성장에 한계가 명확하다. 남의 것을 흉내 내고 이용할 뿐인 데다 국제 규범을 따르지 않는다. 요즘 중국인 관광객이 늘었지만 매너가 없다. 그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아무 데나 쓰레기를 던지면 일본인 직원이 청소하는 모습을 보면서 일본인들은 속이 끓는다.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다. 군사력을 키워 주변국을 위협하는 태도를 보며 싫은 감정이 커지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은 이런 중국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한다. 국민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베 정권의 인기는 북한과 중국 덕인지도 모른다.”
―중국은 남중국해 문제와 관련해 네덜란드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PCA) 결정을 무시할 태세다.
“공산당 일당 독재에 대한 국내 불만을 수습해야 하는 시진핑(習近平) 체제는 국제법과 타협하기 어렵다. 하지만 ‘국제법 위반국’이라는 지적은 그들에게도 유쾌하지 않다. 결국 외교적 주장은 계속하되 행동에서는 페이스를 늦추는, 미소(美蘇) 냉전 당시와 유사한 상황이 이어질 것이다. 동중국해에서도 긴장은 고조돼도 충돌은 피할 것이다. 문제는 미국의 존재감 부재다. 결국 미국 대선이 끝나고 중국에 대한 명확한 정책이 나올 때까지, 불안정한 정체 상태가 이어질 것이다.”
―강대국들의 자국 이기주의 강화 속에 세계 질서가 유지될 수 있을까.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미국의 리더십 부재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13년 9월 시리아 문제에 대해 ‘미국은 더 이상 세계의 경찰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앞서 2012년 1월 발표한 ‘신국방전략’은 전 세계 미군을 서서히 철수시킨다는 계획을 담았다. 힘의 공백을 틈타 러시아와 중국이 군사 확장에 나섰다. 2014년 3월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합병하고 시리아에 개입했다. 중국도 2014년부터 남중국해 군사 거점화를 진행했다. 이슬람국가(IS)의 테러도 2014년부터 세계로 확산됐다.”
―‘핵 없는 세계’를 내세운 오바마 정권이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는 역설인가.
“과거에는 깡패 국가가 나타나면 가치관을 공유한 나라들이 연합군을 만들어 법질서를 회복하고자 했다. 현재로서는 국제법에 기초한 질서 유지와 법 집행을 할 방법이 없다. 북한 탄도미사일 발사에 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규탄 성명도 채택 못 하지 않았나. 오바마 정권은 미국이 지난 50년 이상 국제 문제에 군사적으로 관여했지만 재정은 조여들고, 병사들은 상처받았으며, 각국에서 반미 감정만 고조됐다고 판단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의 주장과 유사하지 않은가.
“세계 최강국인 미국이 함부로 ‘세계의 경찰관을 안 하겠다’고 발언하면 안 된다. 가만히 있으면 그 존재 자체가 억지력으로 작용하는데, 딱 잘라 그렇게 선언하니 러시아나 중국이 안심하고 본색을 드러냈다. 그래서 지금은 어느 나라건 자기만 챙기는 ‘내향성(內向性)’이 강화돼 있다. 자국 이익이 최우선으로 아무도 국제사회를 위해 희생할 생각이 없다.”
―미국인 상당수는 고립주의에 찬동하는 듯하다.
“국내 여론은 그렇다. 하지만 과거 미국은 국내 반대를 무릅쓰고 타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해왔다. 특히 미국이 주도한 전쟁 상당수는 민주당 행정부가 시작했다. 전쟁이 좋아서가 아니고 그것이 미국의 리더십을 회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자 미국의 국익, 경제 이익으로 연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클린턴이 집권하면 미국의 리더십이 회복된다는 것인가.
“오바마 정권보다는 나을 거다. 수전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미국의 희생은 일절 안 된다’는 교조적 생각을 가졌다. 클린턴은 오바마 정권의 국무장관 시절부터 그런 나이브한 정책에 비판적이었다. 가장 바람직한 모양새는 동맹국들이 좀 더 미국의 역할을 보완하면서 미국이 보다 큰 리더십을 발휘하게 해주고 지역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다.”
―지금 일본이 하려는 것 말인가.
“일본은 헌법 문제가 남아 있다. 지난해 안보법제는 통과됐지만 미군에 대한 후방 지원이 겨우 가능한 정도다. 미국의 다음 정권과 미일 동맹을 어떤 방향으로 가져갈지, 일본은 어떤 역할을 추가로 해 나갈지 논의해야 한다.” 안보법제 개정은 아베 정권이 미국의 국방 전략에 보조를 맞추고 미일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무리해 추진했다는 평가도 들린다. 하지만 아베 총리의 개헌 로드맵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8일 생전퇴위 의사를 밝혀 더 복잡해지고 있다.
―아베 총리는 ‘임기 중 개헌’을 누차 말하고 있다.
“헌법 9조가 아니고 헌법에 손대고 싶다는 것이다. 작은 조항, 가령 재해 시 긴급사태 조항 같은 것이라도 고친 총리로 역사에 남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어떤 부분을 손댄다면 국회 발의와 국민 과반 찬성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해 헌법심사회에서 연구안을 내달라는 것이다. 그는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참배한 2013년 12월 전까지는 원리주의자에 가까웠지만 그 뒤 현실주의자로 변모했다. 이 점을 유의해서 봐야 한다.”
:: 모리모토 사토시 프로필 ::
○ 1941년 일본 도쿄 생
○ 1965년 방위대 전기공학과 졸업, 항공자위대 자위관
○ 1979년 외무성 주미 일본대사관 1등 서기 관, 정보조사국 안전보장정책실장 등
○ 1992년 노무라종합연구소 수석연구원 등
○ 2000년 다쿠쇼쿠대 국제학부 교수
○ 2009년 일본 초대 방위상 보좌관
○ 2012년 제11대 방위상(민간인 최초·노다 요시히코 총리 정권) ○ 2016년∼현재 다쿠쇼쿠대 총장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 2016년 02월 12일(金) 파워인터뷰- 후카가와 유키코 와세다大 교수
한국 경제에 대한 애정… “‘우리 한국’도 국가자본주의에서 벗어나야”
▲ 후카가와 유키코 와세다대 정치경제학술원 교수가 지난 2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 연세대 새천년관에 위치한 자신의 연구실에서 아베 신조 일본 정권의 아베노믹스 전망과 한국 경제의 구조개혁 방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최근의 한국 경제에 대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당시의 유동성 위기와는 다른 구조적 위기가 조용히 진행되고 있는 ‘충분한 위기’ 상태라고 지적했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지난 2일 진행된 후카가와 유키코(深川由起子) 와세다(早稻田)대 정치경제학술원 교수의 인터뷰에서 준비된 질문에 대한 문답이 모두 끝나고 한국 경제에 대해 충고나 조언을 부탁했다. 그러자 후카가와 교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한국 경제에 대한 뼈아픈 지적을 쏟아냈다. 그의 말은 한국 경제에 대한 비판임이 확실했지만, 한국 경제를 바라보는 외국인 학자의 애착도 여실하게 느껴졌다.
후카가와 교수는 이날 인터뷰 말미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 한국’도 옛날의 국가자본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너무 지나치게 (경제에) 개입해서 정경유착이 생기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때가 됐다 싶으면 수시로 정치인들이 기업 비리에 연루돼 검찰청에 소환되는 풍경이 연출되는 것을 감안할 때 후카가와 교수의 지적은 적확한 것이었다.
후카가와 교수는 “관료나 정치인들, 특히 보수적인 정치인들이 옛날의 사고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며 “옛날과 똑같은 생각이란 것은, 어떤 기업을 뽑아서 정부가 집중적으로 도와주고 대단한 회사로 만들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한국의 재벌기업들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후카가와 교수는 “재벌은 회사가 이만큼 커지고 나서 자기네가 어려워지면 당연히 정부가 도와줘야 한다는 식으로 대마불사(大馬不死)의 논리를 가지게 됐다”며 “정부 입장에서는 그렇게 되면 정치 파워가 세지는 것이고 그것이 정경유착의 원천이 된다”고 말했다.
한편 후카가와 교수는 정부 주도의 국가자본주의 대신 사회보장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시장 원리가 작용하지 못하는 부분은 정부가 도와줘야 하고 그것이 사회보장”이라며 “세이프티 네트워크(사회적 안전망) 없이 (사업에) 도전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에서도 수많은 스타트업, 벤처기업들이 창업을 시도하고 있지만, 상당수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후카가와 교수는 “(사업에 실패해도) 자기의 인생이 망하는 것은 아니라는 인식으로 해야 한다”며 “한국 정부가 재정적으로 약간 여유가 있으니까 지금 (사회적 안전망 확보를) 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후카가와 교수는… 30년 넘게 韓경제 연구한 대표적 지한파 학자
후카가와 유키코(深川由起子) 와세다(早稻田)대 정치경제학술원 교수는 대표적인 지한파 경제학자다. 30년 넘게 한국 경제를 연구하면서 쌓인 예리한 분석과 정연한 논리로 한국 경제에 대한 칭찬과 비판을 서슴없이 해 한·일 관계 심포지엄이나 각종 학술회의에 항상 초청받는 인사다.
후카가와 교수가 한국 경제를 연구하게 된 요인에서도 한국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그는 “학자들이 한국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었지만, 나는 한국민들이 필사적으로 발전하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진 것에 주목했다”며 “이런 욕망을 한국민들이 안고 있는 한 한국이 선진국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예일대에서 국제 경제학 석사, 와세다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80년대에 한국산업연구원에서 방문 연구원으로 일했다. ‘대전환기의 한국경제’ ‘한국, 선진국 경제론’ 등 각종 한국 경제 관련 책도 썼다. 지금은 연세대 국제대학원 객원 교수로 한국에 머물며 한국 경제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그동안 위안부 문제 등 한·일 간 정치적 갈등이 적지 않았지만 그의 한국 경제에 대한 연구는 중단없이 지속됐다. 후카가와 교수는 “경제학이라는 학문에는 정치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며 “경제학이 근거 없이는 이야기할 수 없는 학문이다 보니 한국 경제학자들과 이야기하면서 어떠한 불쾌한 경험도 없었다”고 단호하게 말할 정도였다.
후카가와 교수의 한국에 대한 애정은 향후 계획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은퇴하기 전에 한국이 진짜 선진국이 될지 결정될 것 같아 이를 지켜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은 통일이라는 특수한 문제가 있다”며 “통일이 된 뒤 한국 경제가 어떻게 발전하게 될지 지켜보고 싶은 계획도 가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 졸업 △예일대 석사 △와세다대 박사 △일본무역진흥회·장기신용은행종합연구소 연구원 △한국산업연구원 방문연구원 △미 컬럼비아대 경제연구센터 객원연구원 △고려대 객원연구원 △와세다대 정치경제학술원 교수 △아베 정권 경제전략 상담역 △연세대 국제대학원 객원교수
“정치괴물 된 강성노조… 한국경제 구조개혁 가로막아”
후카가와 유키코 와세다大 교수
후카가와 유키코(深川由起子) 와세다(早稻田)대 정치경제학술원 교수는 한국 경제를 연구하는 일본인 여성 경제학자라는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일본인과 여성이라는, 어쩌면 한국 경제를 공부하는 데 있어 약점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었지만 그는 한국 경제 연구에 30년 넘게 천착해 오면서 손꼽히는 지한파 경제학자의 자리에 올랐다. 지난 2일 연세대 새천년관 국제대학원 연구실에서 2시간가량 진행된 인터뷰에서 후카가와 교수는 유창한 한국어로 한국은 물론 일본 경제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전망을 끊임없이 내놓았다. 한국 경제를 오랫동안 연구한 학자답게 한국이 추구해온 경제 성장전략과 성과, 또 그 전략이 갖는 한계에 대해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내놓았다. 일본 정부가 추진 중인 아베노믹스에 대한 설명에서는 아베 신조(安倍晉三) 내각 1차 집권(2006∼2007년) 당시 경제전략 상담역으로 일한 경험이 묻어났다. 후카가와 교수는 한국과 일본 경제를 넘나든 2시간 인터뷰에서 한국 경제가 ‘잃어버린 20년’을 경험한 일본을 따라가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을 여러 차례 드러냈다.
―지난 달 일본은행이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했는데, 이를 아베노믹스 진행에 차질이 있기 때문으로 해석해야 합니까.
“실물 경제 회복 속도가 생각보다 떨어졌다는 것이지요. 제조업 같은 분야는 경제가 워낙 안 좋아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일단 양적 완화를 하기는 했는데, 충분히 (경기 부양의)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마이너스 금리 정도의 조치를 더 해서 메시지를 전하려고 한 것 같아요. (1월 29일 일본은행의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마이너스 금리 도입에 대해 찬성·반대) 5대 4로 결정됐기 때문에 반대했던 사람도 상당히 많았지요. 아무 조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부작용까지 합쳐서 계산하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냐고 의심스럽게 생각한 사람이 (금융정책) 심의위원들 중 4명이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 총재는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하겠다고 밀어붙인 것이고요. 아마 일본은행이 상당히 정치적으로 독립된 존재이기도 하지만, 선거(7월의 참의원 선거)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정부 입장에서는 단기간에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무언의 압력이 있었을 것도 같습니다.”
―아베노믹스 진행에 차질이 있어서, 혹은 일본 경제가 주춤할 것이란 걱정이 있어서 마이너스 금리 도입 결정이 나왔다는 의미인가요.
“아베노믹스는 2015년 중에 2% 물가 상승이란 데드라인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거의 무리가 되다 보니까 연기를 시켰던 것이고. (아베노믹스를) 해봤더니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정책이라서 어느 정도 효과가 언제 나타날지 몰랐던 것이지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미국이나 유럽보다 일본에서 ‘잃어버린 20년’의 디플레이션이 생각보다 강력히 침투해 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의 생각이 ‘쉽게 인플레이션이 될 것이다’는 것보다는 너무 디플레이션 속에서 생활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서 쉽게 그런 기대(인플레이션)에 작용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디플레이션 탈출 기미 또는 전망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전 비교적 낙관적으로 봅니다. 다행히 (일본 산업계에서) 이노베이션(혁신)이 큰 변화를 가져오는 것 같아요. 사물인터넷(IoT)이나 인공지능(AI) 같은 뭔가 프런티어(선도적 분야)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당장 성장동력이 되는 건 아니지만, 방향이 보였다는 것 자체가 낙관적입니다. 이제까지 하드웨어 제조업에 치중하면서 ‘어떻게 중국과 싸울 수 있을까’ 했던 것보다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어요. 아베노믹스 ‘세 개의 화살’ 중에 첫 번째 화살, 즉 거시 정책(금융완화)은 사람들이 많이 공부가 됐고 일단 주가도 상당히 괜찮은 정도까지 올라갔어요. 최근에 중국이나 미국 때문에 많이 떨어졌다가 다시 회복되기도 했고요. 닛케이평균주가가 1만7000∼1만8000엔 정도면 괜찮은 수준이죠. 어쨌든 (일본기업들도) 역대 최고 이익을 내고 있고요. 의심스러운 것은 두 번째 화살(재정 확대), 세 번째 화살(성장전략)인데 두 번째 화살은 재정 건전화를 해야 하고, 그 길을 제시해야 하는데 자꾸 선거가 있다 보니까. 또 내년에 소비세 인상 문제도 있거든요. 그래서 이런 것에 대해 항상 정치적인 발언이 많기 때문에 장기적인 그림이 제대로 제시되지 못하는 것을 일부에서는 위기로 보고 있어요. 또 아무래도 세 번째 화살, 성장전략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아까 말했듯이 방향은 어느 정도 보이는 것 같아요. 여기저기서 핀테크(IT금융), IoT 등에 기업 투자가 이뤄지고 있어요.”
―일본 기업들의 성장전략은 어느 정도 방향이 잡혔어도, 물가 상승을 위한 임금인상은 잘 안 된다는 지적도 있는데요.
“지금 일본은 완전고용 상태입니다. 사반세기 만에 실업률이 떨어지고 있어요. 노동력이 부족해서 성장을 못 하는 상황이지요. 그렇다면 단순하게 생각해서 임금이 오를까요? 아니에요. 왜냐면 항상 기업은 리스크(위험)가 있다고 보는 동안에는 절대 연봉 베이스를 인상하기 어렵습니다. 연봉 베이스가 늘어나면 연금, 퇴직금 모두 연결돼 있는데 그렇게까지 (임금 비용의) 리스크를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거지요. 유럽이나 미국처럼 (디플레이션이) 최근의 일이 아니라 20년 동안 있던 것이라서 쉽게 (임금 인상 기조를) 따라갈 수는 없어요. 기업은 좋은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돈을 더 주겠다고 하겠지만, 아직은 그렇게까지 할 자신이 없어요.”
―그럼 언제쯤 아베노믹스의 성과에 따라 일본이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있을까요.
“아직은 절반 정도 아닐까 싶어요. 2017년에 소비세가 10%로 인상되고 나서, 그럼에도 물가가 계속 올라갈 것이라는 전망이 생겨야 되지 않을까요. 그게(소비세 인상이) 충격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그때까지 두고 봐야 할 것 같아요. 아베노믹스를 시작한 지 이제 5년 정도인데, 미국은 벤 버냉키(전 연방준비제도(Fed) 의장)가 양적완화를 시작한 지 10년 정도 됐어요. 그래서 당연히 일본은 시간이 더 걸리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것도 상당히 다른 경제 상황이고, 노동력 부족으로 힘든 상황이에요. 지금도 인구가 고령화 상태인데도 ‘베이비부머’ 세대가 완전히 은퇴하는 2017년 정도 이후에는 더 심해질 수가 있어요. 그게 미국하고 큰 차이지요. 어쨌든 2017년이 굉장한 고비가 될 것이라 봅니다.”
―아베 정권은 지난해 타결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경제성장의 한 계기로 삼겠다는 계획인데, TPP가 실제 발효되기까지는 시일이 더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현재부터 TPP가 발효되기까지 일본은 어떤 경제적 모멘텀을 활용할 수 있을까요?
“일단 한 가지 긍정적인 면이 있다면 일본이 과거에 비해서 상당히 개방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에요. 정부는 각 분야에 목표가 있어요. 관광객 유치도 목표치인 연간 2000만 명에 거의 조기 도달했고, 인바운드(내수) 투자유치도 옛날에는 말만 했지만 이제는 진짜 해야겠다는 곳이 있지요. 그런 게 TPP와 연결돼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비즈니스 환경이 좋아져야 외국인도 투자해주는 것이고, 그래서 노동시장도 유연하게 해주고 규제도 완화해야 하고요. 상징적인 예로, 미국의 아마존이 드론 배송망을 일본에 만들겠다는 것 등의 케이스가 몇 개나 있어요. 그런 것은 TPP의 높은 수준의 지적재산권 모델 환경 속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사실 아마존은 그런 모델을 중국에서 시도할 수도 있는데, 거기서 하기에는 뭔가 리스크가 있다고 판단해 일본에서 한번 실험을 해보겠다는 것이지요. 이런 부분들에서 성장전략과 TPP는 인터페이스(접점)가 있다고 봐야 되는 것이지요.”
―교수님의 과거 기고문 등을 보면 자유무역협정(FTA)을 중시하는 것 같은데 TPP 출범 멤버에서 빠진 한국은 어떤 경제적 피해를 입게 될까요?
“아직 TPP는 비준 자체도 안 됐으니까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생각할 것까지는 없다고 봅니다. 사실 한국은 거의 모든 나라들과 FTA를 맺고 있어 TPP에서 빠진 것이 큰 문제는 없겠지요. 다만 한국 국내에서는 FTA 정책에 대한 불신이 많아요. 여기저기서 FTA 체결해도 좋아진 게 없다는 인식이 있지요. 시장 개방은 됐는데 거기에 따라갈 수 있는 구조개혁이 안 돼 있어서 그 효과를 못 누리는 것 같습니다. 오래간만에 여기(한국) 와서 보니까 유통이나 물류체계는 상당히 뒤떨어진 것 같아요. (FTA가 체결되면) 결국 소비자들은 자기가 직접 외국공장에까지 가서 물건 사는 게 아니라 주변 슈퍼마켓에 가서 물건을 사는데요. 일본에서는 조금씩 개방하자마자 그 효과가 슈퍼마켓이든 어디든 바로 보이는 상황이에요. 과일이라든지 채소라든지 개방되다 보니까 수입된 게 많고, 중남미 지역 같은 반대 계절 지역의 상품도 많으니까 FTA 효과를 직감해요. 그런데 여기는 특별히 (외국)물건을 사려고 해도 외국산이 다양하게 없는 거 같고, 국산 농산물은 계속 비싸고요. 개방을 하면서 선택의 여지가 늘어났다는 느낌이 없어요. 전자상거래도, 국내에서 물건이 비싸니까 인터넷거래(해외직접구매)를 많이 한다고 하는데, 배달될 때까지의 기간이 일본보다 훨씬 길어요. 제가 네이버로 해외 건강상품을 샀는데, 일본은 수출하는 나라가 유럽이든 미국이든 일주일이면 오는데 여기서는 한 달이 걸렸어요. FTA는 관세 장벽만 해소되면 즉시 소비자들한테 효과가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도어 투 도어’입니다. 공장에서 소비자의 집까지 연결돼야 효과가 느껴지는 건데요. 그런 면에서 보면 한국에서 구조조정이 잘 진행되지 못한 부문이 서비스업이에요. 제조업보다 서비스업의 생산성이 계속 떨어지는 것이지요. 물류도 항상 트럭운전사, 택배기사 같은 약자보호의 명분이 있어서 사람을 자를 수 없고요. 유통도 마찬가지예요. 아마 선진국에서 대기업이니까 주말에는 영업 못 한다는 나라는 없을 겁니다.”
―구조조정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국의 조선업·해운업 등을 비롯해 제조업 분야에서 산업구조 개혁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는데, 한국 경제의 구조개혁에 대해서는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까?
“한국은 일본하고 거의 비슷해요. 정규직이 너무 보호되고 있어서 그 아픔은 결국은 비정규직으로 가지요. 일본보다 한국은 더 심각한 것이, 정규직 가운데서도 강성노조가 있다는 겁니다. 토요타자동차 규모의 3분의 1보다 조금 더 큰 현대자동차 노동자가 (토요타 노동자보다) 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는 게 말이 안 되지요. 그런데 한국은 이런 상태가 너무 오래됐어요. 또 노조의 정치 파워가 엄청나지요. 노조에는 경영자들도, 정치도 손을 못 대고요. 그러니까 이 나라는 누가 봐도 ‘노동시장 개혁의 1번지’입니다. 그게 안 되면 (구조개혁은) 거의 어렵습니다.”
―한국이 일본의 ‘버블 붕괴’ 혹은 ‘잃어버린 20년’을 따라가고 있다는 지적도 있지요.
“(한국과 일본의 상황은) 두 가지 큰 차이가 있어요. 제가 무척 많이 해온 이야기인데요. 두 나라가 비슷한 면은 많지요. 지금 바로 개혁하려고 해도 반대 때문에 못하는 게 일본의 민주당(현재 일본의 제1야당) 시절과 똑같아요. 방향도 안 보이고요. 그런데 한국의 상황과 일본 상황은 차이가 있는 게, 정규직의 임금이 계속 떨어진 것이 일본의 디플레이션 시대입니다. 언제 일자리가 없어질지 모르니까 소비를 안 하고, 그러면 기업 이익이 안 남고 또 임금은 삭감되고. 일본에서는 경영 혹은 경영자라는 것이 ‘사람을 먹여 살리는 일’이라서 사람을 자르지 못했어요. 일본은 이렇게 계속 정규직 임금이 떨어지면서 디플레이션에 빠진 것인데 한국은 계속 정규직의 임금이 오르고 있어요. 그 대신 비정규직, 아르바이트생들은 기회를 잃고 있는 것이고요. 결과적으로 (양국이) 거시적으로는 비슷하게 보이지만, 이런 점이 하나의 차이고요. 또 하나의 차이점은 부동산이 안 깨진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계속 주택 가격이 떨어져 왔어요. 그래서 임금과 부동산에서 디플레이션 압력이 엄청났기 때문에 그런 (디플레이션) 사이클이 굴러갔지만, 한국은 아직 임금과 부동산이 살아 있어요. 굉장히 무리한 구조로요.”
―한국이 디플레이션에 빠지지 않는 좋은 구조이기는 하지만, 소수의 정규직 위주의 구조라서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인지요.
“그게 사회적 기준의 차이가 있는 것인데, 원래 일본이나 독일은 거의 사회주의에 가깝고요. 그런데 미국이나 영국은 큰 격차를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적 차이가 있어요. 한국은 문화적으로는 일본과 독일의 욕망이 있는데 다른 면에서는 영미계의 욕망도 있어요. ‘나만 받으면 된다’는 식으로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때부터 그런 집단 이기주의가 심해졌어요. 이런 차이를 해소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당연히 교육과 사회보장인데, 양측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아요. (한국의) 사회보장은 유럽은커녕 일본만큼도 안 돼 있어요. 그럼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세금을 더 내겠느냐 하면 ‘난 됐다’고 하고요. 교육은 또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갔어요. (학자금 대출 등) 무지하게 대출이 생기는 방향으로요. 어떤 대학을 나와도 대학을 졸업한 만큼의 일자리가 생겨야 되는데 그게 안 되니까요.”
―노동 구조개혁의 필요성이 다시 한 번 느껴지네요.
“제 생각에는, 제가 사회보장에 대해 관심이 있는데요. 결국은 이 상황에서 노조 사람들의 불안한 심리도 이해는 가더라고요. 한국에선 사회적 안전망이 완전하지는 않아요. 실업보험은 옛날보다는 나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하지 못한 게 있고요. 성장 속에서 구조조정을 하게 되면 다른 데 갈 데가 있어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그게 없어요. 사회적 안전망도 없고 방향성도 없는데, 노동시장 개혁하면 갈 데 없으니 당장 이 자리를 지키자는 식으로 되는 것 같아요.”
―최근 한국 경제는 수출 감소, 구조조정 부진 등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경제 위기론’이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충분히 위기이지요. IMF 구제금융 사태처럼 유동성 위기가 아니라 구조적 위기니까 조용히 진행되고 있어요.”
―한국 경제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한국 경제에는 어떤 장단점이 있다고 보십니까.
“아무래도 경제 문제의 정치화, 그게 옛날부터 이 나라의 단점인 것 같아요. 모든 게 정치적으로 이용돼 버려요. 경제는 시장의 논리가 있기 때문에 정부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런데 항상 명분을 만들어서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게 많아요. 아까 말한 강성노조만 해도 정치적으로 괴물이 됐어요. 중소기업의 하청 관계도 합리적이지 못해, 특별히 좋아진 것이 없고요. 다 정치랑 연결돼 있어서 개선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대신 장점은 집중적으로 순발력을 발휘해 뭐든지 하는 것, ‘스피드’이지요. 그런데 그 스피드가 엄청난 장점이었는데, 문제는 지금 그 스피드가 엄청나게 떨어졌다는 것이에요. 그만큼 민주화됐다는 것이기도 한데요. 옛날처럼 대통령이 하자면 다 따라가는 시대가 아니에요. 정치적인 것을 경제하고 분리해서 경제 논리에 맞게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한·일 관계도 사실은 위안부 문제하고 경제 관계가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런데 위안부 문제가 전부다, 원칙이다 했다가 중간에서 갑자기 경제는 분리해서 하겠다고 하니 일본에서 보기에는 대화하기가 어려운 나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지요.”
―한·중·일 3국 FTA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한 바 있는데,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대북 제재에 대한 입장 차이로 중국과 한·일 간의 입장이 엇갈리고, 한·중, 중·일 간의 각종 외교 현안이 제대로 해소되지 않아서 어려울 것이란 전망도 있는데요.
“지금 한·중·일 FTA는 당장 획기적으로 진행할 이유가 전혀 없어요. 그러지 않아도 지금 중국 경제가 어려운데요. 또 한·일은 대부분 사람들이 한국이 TPP에 들어올 것으로 보니까 자동적으로 한·일 FTA는 될 거라고 봐요. 그것도 아주 높은 수준으로요. 그래서 일본 쪽에서는 3국 FTA를 무리하게 하자고 할 이유는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한국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결국은 TPP 가입을 할 테니까 한·일 FTA를 먼저 추진한다든지 아니면 한·중·일 FTA 프레임 안에서 TPP를 준비한다는 명분으로 한·일 FTA는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만들어서 한·중 FTA를 업그레이드하는 협상을 할 수도 있고요. 이런 점은 한국 측에 매력 있는 선택지가 될 것입니다.”
인터뷰 = 김석 차장(국제부) suk@munhwa.com 정리 = 박준희 기자 vinkey@munhwa.com
□ 2018.03.19 [북한 정보의 핵심에 25년간 다가간 일본인… 이시마루 지로(石丸次郞)]
"이해할 수 없었다… '民主化' 위해 싸운 운동권이 北정권 편드는 것을"
"정보의 핵심에 더 가까이 가려는 게 기자의 욕심
목숨 걸고는 못했지만 내 인생을 걸고는 해왔다"
"北 경비병은 내 손에서 빵을 빼앗아 봉지 뜯고
얼굴을 처박고 먹으며 '하나 더 달라' 손 내밀어…"
우리 특사단의 김정은 면담 성과 발표가 있고 엿새가 지난 뒤였다. 일본 프리랜서 기자 모임의 인터넷 매체 '아시아프레스'에서 이런 특종(特種) 기사가 떴다.
'북한 북부 지역에 사는 취재 협력자 3명과 3월 11일까지 수일간 연락했다. 북한 주민들은 4월 말 진행한다고 발표한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회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기사를 쓴 이시마루 지로(石丸次郞·56)씨는 북한에는 3회, 북·중 국경 지역에는 90여 회 취재한 북한 전문 프리랜서다. 북한 안에 열 명의 유급(有給) 취재원을 갖고 있다. 때마침 서울에 출장 온 그를 만났다.
▲이시마루씨는“특사 회담은 경제 봉쇄로 공화국을 압살하려는 적들의 비열한 책동을 무찌르는 김정은의 위대한 업적으로 선전됐다”고 말했다. /오종찬 기자
"오늘(15일) 다시 내부 협력자들과 연락해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했다. 지난 9일 당(黨) 초급 이상의 간부들을 대상으로 '뛰어난 외교적 안목을 지니신 위대한 장군'이라는 강연이 열렸지만, '이번 특사 회담이 경제 봉쇄로 공화국을 압살하기 위한 적들의 비열한 책동을 무찌르기 위한 김정은 장군의 위대한 업적'이라고만 했지 남북과 미·북 정상회담에 대해선 언급이 없었다. 다음 날 주민을 대상으로 한 '생활총화'(자기비판모임)에서도 특사 방문 사실만 알렸고 그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특사가 다녀간 뒤로 북한 정권에서 남북 및 미·북 정상회담에 관해 침묵하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보나? "이런 급선회를 김정은의 권위 훼손 없이 어떻게 대내외적으로 설명·선전할지를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북한 내부 협력자들에게 '김정은이 비핵화 의지를 밝혔다'고 전하니, '진짜인가? 핵 강국인데 그걸 포기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는 우리 특사의 전언(傳言)밖에 없다. 그 뒤로 북한이 공식 확인을 해준 적이 없다. 물론 반박하지도 않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대화 국면이 진행되고 있다. 북핵 완성 단계에서 마침 문재인 정부라는 좋은 상대가 나타나 지금 같은 극적인 상황 전환을 만들었다. 북한이 원했던 것이다. 미·북 정상회담의 가능성까지 생겼으니, 유리그릇처럼 다뤄 안 깨지게 하겠다는 조심성을 보이는 것이다."
―북한 정권은 '경제적으로는 어려워도 핵무기를 가진 군사 강국'이라는 선전으로 지탱해왔다. 핵무기를 빼면 정권의 축(軸)이 무너진다. 그런 북한과의 핵 폐기 협상이 현실적으로 진전될 수 있을까?
"제재 압박이 계속될 경우 북한의 장래가 안 보인다. 말라죽게 될 것이다. 광물·수산물 등을 취급하는 무역 회사들 중에는 문 닫은 데가 많았다. 기름 수입이 막혀 군대 운반 수단으로 목탄차와 소달구지를 쓰는 일이 생겨났다. 군관에 대한 처우가 떨어지고 있다. 하지만 국제 제재에 굴복해 비핵화 회담을 한다는 말이 확산되면 김정은 정권이 흔들릴 수 있다. 이 때문에 북한은 '핵보유국'으로서 미국과 대등한 협상을 한다고 선전할 것이다."
일본 오사카 출신인 그는 도시샤(同志社)대 재학 시절 좌파 운동권이었다.
"우리는 '광주 민주화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한국 대학생들의 용감하고 자기 희생적인 모습에 감동했다. 한국 민주화운동에 연대하고 지원하는 활동을 했다. 북한에는 심정적으로 동조한 반면, 한국에는 어둡고 무서운 군사 독재국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1984년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그는 충격을 받았다.
"한국은 경제 발전의 과실을 누리고 있었고, 어둡고 무섭기만 한 사회가 아니었던 것이다. 학생들이 시위만 하는 게 아니라 청춘을 즐기고 있었다. 한국 학생들과 함께 디스코텍에 간 적 있었고 정치 토론도 벌였다. 외모는 닮았으나 생각이 많이 달랐기에 너무 재미있었다."
대학 졸업 뒤 그는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2년간 유학했다. 그 시절 동구권이 무너지고 중국에서는 천안문 사태가 발생했다.
"다음은 북한이 붕괴될 차례라는 관측이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북한에 대해 심정적인 연대가 있었다. 한국에서 말하는 북한 정보는 '반공(反共)에 의해 왜곡된 것'으로 봤다. 일본에서도 북한의 실체를 폭로한 책들이 나왔지만 그때는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뒤로 북한의 정체는 드러났다. 김씨 세습 독재에 의한 인권 탄압 참상이 공개됐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한국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운동권 출신들이 이런 북한을 위해선 싸우지 않는 것이었다. 이중 잣대를 들이댔고 오히려 북한 정권 편에 섰다."
그는 1990년 귀국해 광고 회사를 2년 다니다가 마이니치신문에 지원했다.
"내가 '서울특파원과 한반도 문제를 전문으로 하고 싶다'고 하니, 신문사에서는 '7년간 지방 근무와 사쓰마와리(경찰서 출입기자)를 해야 한다'고 했다. 7년을 그렇게 버리고 싶지 않았다. 일본에는 분쟁 지역 취재에서 활약해온 프리랜서의 전통이 있었다. 그들의 세계가 멋있게 보였다."
▲1998년 북한 나진에 지원 식량을 들고 갔을 때.
―한국이 아닌 북한을 전문 취재 영역으로 삼게 된 계기는?
"이미 한국은 민주화됐기 때문에 한국이 어떤 사회가 될지는 한국인이 결정할 수 있게 됐다. 우리 같은 외국인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일본 조총련을 통해 북한에 취재 의사를 전했으나 답이 없었다. 북한이 보이는 중국에 가서 기회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1993년 여름 두 달 동안 압록강에서 백두산을 거쳐 두만강까지 북·중 국경을 따라 여행했다. 탈북자와 조선족을 만나 북한 내부 상황에 대해 얘기를 들었다. 백두산 정상에서 만난 북한 병사는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조선족인 국경경비대가 운전하는 지프차로 정상에 올라가자 북한 경비병 두 명이 다가왔다. 몰골이 형편없었다. 사과·빵·맥주를 들고 나와 '같이 먹자'고 말하기 전에 이들은 내 손에서 빵을 빼앗아 봉지를 뜯고 얼굴을 처박고 먹었다. 그 광경에 충격을 받았다. 그런 북한 병사가 먹으면서 '하나 더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때까지 갖고 있던 북한에 대한 생각이 무너져버렸다."
한국의 말지(誌)에서 이를 사진 특집으로 실었고, 일본 위성방송에도 보도됐다. 프리랜서로서 데뷔작이었다. 그는 1995년 단체관광 팀에 끼여 평양에 갔다.
"일본 니가타에서 전세기를 탔다. '평양 여행에는 자유가 없고 보여주는 곳만 볼 수밖에 없다'고 이미 들어서 분위기만 느끼는 게 목적이었다. 평양 도착 다음 날 아침에 '배가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호텔에 남았다. 아침 10시쯤 빠져나와 시내를 돌아다녔다. 한 상점에 들어갔지만 '어디서 왔나? 여기 있으면 안 되니 호텔에 같이 가자'는 관리원들에게 이끌려 호텔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나는 다시 나와 전차를 타보고는 내려서 아파트 단지로 갔다. 거기서 다시 잡혔다. 평양에는 신고 체제가 돼있어 외국인이 혼자 돌아다닐 수 없음을 알게 됐다."
그는 1997년 조선족 여행객으로 위장해 함경북도 나진에 들어갔다. 일행인 조선족들이 그의 말투를 듣고는 '너 서울서 왔지?'라고 물었다. 북한 감시원이 들을까봐 조마조마했다. 이틀 뒤 중국으로 다시 나올 때 북한 보위부 직원이 다가와 귓속말로 '반갑수다. 또 만납시다'라고 말할 때는 소름이 돋았다고 한다.
―신변 위협을 무릅쓰고 이렇게까지 북한 취재를 했던 이유는 뭔가, 정의감인가?
"정의감에 앞서 실상을 알고 싶었다. 정보의 핵심에 더 가까이 가려는 게 기자의 욕심이 아닐까. 중국에서 만난 탈북자들을 통해 북한 참상을 들었다. 숱한 주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고, 세계에서 통제가 가장 심한 나라에서 이렇게 대량 난민이 발생하고 있는데, 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무너지고 있는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하고 싶었다."
다음 해 그는 또 나진에 갔다. 이번에는 북한 식량 지원을 위한 일본 민간단체의 모니터링 담당 직원 신분이었다.
"중국에서 쌀 230t을 사서 철도로 부친 뒤 일주일쯤 지나 들어갔다. 나진에서는 안내 없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 장마당을 가보니 꽃제비들로 득시글거렸다. 내가 빵을 사서 꽃제비들에게 나눠주려고 하자 서로 많이 갖겠다고 싸움판이 벌어졌다. 출국할 때 작년에 귓속말을 했던 그 보위부 직원과 다시 마주쳤다. 너무 섬뜩했다. 북한에서 3주간 체류하면서 외국인으로서 많은 걸 봤지만 여전히 한계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는 정보의 핵심에 접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정도로도 북한의 실상이 어떻다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았나?
"일시적으로 가서 보고 느낀 것은 주관적인 인상에 불과하다. 세상을 납득시키려면 영상·사진·문서 같은 '증거력'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1998년 옌지(延吉)의 아파트에서 함께 지내던 탈북자가 '비디오카메라를 달라. 내가 찍어 올게'라고 했다. 그는 원산에 들어가 장마당 모습을 찍어왔다. KBS를 통해 세계 최초로 꽃제비 동영상이 공개됐고, 다음 날 한국의 모든 신문이 사설로 다뤘다. 일본과 영국, 미국에도 보도됐다. 나는 운동권 출신이지만 운동권적인 해석이 필요 없었다. 팩트(사실)가 모든 걸 말했다."
그는 북한 주민들이 기자가 되어 직접 취재하는 게 더 낫다는 판단을 했다. 이에 동의한 탈북자들에게 촬영 장비 작동법과 취재 기법, 윤리를 가르쳤다. 2008년 북한 내부 저널리즘의 출현과 성장을 지원한다는 취지로 격월간지 '림진강'도 창간했다. 이 잡지는 그 뒤 경영상 문제 등으로 중단됐고, 현재는 일본어판만 부정기적으로 발행된다.
―당신과 연락하는 북한 내부 협력자는?
"10명쯤이다. 이들이 직업의식을 갖도록 정기적으로 보수를 송금해준다."
―당신의 수입원은?
"영상과 사진 사용료, 원고료, 광고료, 출연료, 강연료 등으로 팀을 끌어간다. 경제적으로 힘들지만 '조선 반도를 알아가는 그런 인생을 살겠다'는 것은 젊은 시절부터 꿈이었다. 북한 취재에 목숨을 걸고는 못 했지만 내 인생을 걸고는 해왔다."
조선일보 최보식 선임기자
■중국
□2015-09-03 [韓·中 정상회담] 전문가 인터뷰 - 中인민대학 국제관계학원 스인훙 교수
"열병식 온 朴대통령에 시진핑, 매우 감동해… 양국 통일협력 늘릴 기회
中, 북한 문제 때문에 韓·中 관계 훼손 원치않아… 올해 김정은 訪中 힘들 듯"
중국 스인훙(時殷弘·사진) 인민대 국제관계학원 교수는 2일 "박근혜 대통령의 열병식 참석은 중대한 사건"이라며 "한국이 미국과 군사 동맹을 맺고 있지만 중국과의 정치·경제 관계도 고도로 중시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진핑 국가주석의 한반도 정책은 이전 최고 지도자들과는 다르다"며 "(현재 북한보다) 한국과의 우호 관계 발전을 더 우선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제 관계 전문가인 스 교수는 중국 총리가 지명하는 자문 그룹인 국무원 참사(58명)이며, 중국 외교부에도 조언한다.
―이번 한·중 정상회담의 의미는.
"박 대통령은 장시간 진지한 고민 끝에 이번 방중, 즉 열병식 참석이라는 중대한 결정을 했다. 박 대통령의 열병식 참석을 놓고 주변국에서 말이 많았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한·미 동맹만큼 중국과의 정치·경제 관계도 중시한다는 원칙에 따라 한국이 외교정책에 독립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시 주석은 항일전쟁 승전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이번 열병식을 매우 중시한다. 중국 정부는 이런 열병식에 와준 박 대통령에게 매우 감동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얻는 게 많을 것이다. 통일 등 한반도 문제에서 중국과 협력을 한층 강화하고, 중국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기회를 얻었다."
―김정은은 오지 않았다. 시 주석의 대북 전략에 변화가 있을까.
"시 주석의 대북 정책은 이전 최고 지도자들과 다르다. 특히 (친중파인) 장성택 처형 이후 중·북 관계는 계속 나쁜 상태다. 반면 한·중 관계는 계속 발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시 주석이 어떻게 할지는 비교적 분명한 것 아닌가? 시 주석은 한국과의 우호 관계를 먼저 발전시킬 것이다. 장성택 처형 등 북한이 중국에 보여준 태도는 북·중 관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했다. 시 주석은 북한 문제 때문에 한·중 관계를 훼손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미국과 일본은 박 대통령의 이번 방중을 반기지 않는 분위기다.
"최근 일본은 한국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보였다. 나는 (일본의 비판은)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본다. 일본 입장에선 한·일 관계의 악화가 한·중 관계의 강화를 불러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일본은 한·중 밀착을 막기 위해서라도 한국에 일부 양보하는 모습을 보일 가능성이 있다. 박 대통령의 이번 방중이 현명한 결정인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도 박 대통령 방중이 만족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군사 동맹인 한국과의 관계를 흔들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한반도 안정과 '아시아 복귀' 전략을 위해 한국과 관계를 중시한다."
▲메달 수여받은 中·해외 항일 참전 용사들 -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전승절 기념행사를 하루 앞둔 2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2차대전 당시 일본에 맞서 싸운 중국 및 해외 참전용사 30명에게 메달을 수여했다. 정복을 입은 참전 용사들이 시 주석이 목에 걸어준 메달을 달고 앉아 있다. /신화 뉴시스
―북한이 10월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할 것이란 관측이 있다.
"지금 북한 외교정책의 특징은 변동성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북한은 한·중 관계가 빠르게 발전하는 것을 보고 중국과의 해빙을 더 늦출 수 없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있다. 이럴 경우 북한은 미사일을 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평화 국면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판을 바꾸기 위해 도발을 할 수 있다. 계속 지켜봐야 할 문제다. 최근 남북 간 긴장이 풀리는 것을 보면 북한이 어떤 변화를 시작하는 단계일 수도 있다."
―김정은이 올해 내 방중할 가능성은.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문제다. 그러나 가까운 장래에 김정은이 중국에 올 가능성은 희박하다. 지금 김정은이 방중할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은 줄곧 북한의 비핵화를 요구해왔다. (김정은이 방중하려면) 먼저 비핵화에 대한 진일보한 태도 표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베이징=안용현 특파원 조선일보
□ 2016-01-09 쑤하오 中 외교학원 교수
“中 지지없인 北 생존 못해… 핵실험 왜 위험한지 깨닫게 해야”
▲쑤하오 중국 외교학원 교수가 5일 베이징 시 외교학원에서 가진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은 핵실험이 지역 안전에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지, 왜 극단적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지를 북한이 깨닫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뒤편의 동상은 외교학원 설립을 주도한 저우언라이 전 총리의 동상이다. 뒷벽에는 ‘중국 외교관 양성의 요람’이라는 글씨가 붙어 있다. 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 새해 벽두를 때린 북한의 수소폭탄 실험 소식에 가장 당황한 국가는 중국이다. 북한을 믿었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으로선 동맹국으로부터 뒤통수를 맞는 상황이 됐다.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전략과 일본의 군사대국화, 남중국해에서의 주변국과의 갈등, 점차 동력이 약해지는 경제엔진으로 고심하는 상황에서 북한은 또 다른 골칫거리가 됐다. 앞서 중국은 1일 남중국해 인공섬에서 항공기 이착륙 시험 운항을 하고, 제2항모 건조 계획을 밝히는가 하면 ‘싸워서 이기는 군대’를 위한 대대적 인 군 개혁에 나서는 등 군사 외교적으로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중국의 외교 국방 및 동북아 전문가인 쑤하오(蘇浩) 외교학원 교수 겸 ‘전략 및 평화연구중심 주임’ 에게서 북한 핵실험 이후 중국의 대응을 비롯해 올해 군사 외교 정책 방향을 들었다. 인터뷰는 5일 베이징(北京) 시청(西城) 구 외교학원에서 가진 뒤 6일 북한 핵실험 이후 전화인터뷰를 해 보충했다. 》
―국제사회에서는 북한의 핵 개발 억지에 중국이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높았으나 이번 실험 감행으로 중국의 대북 영향력이 별것 아니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적지 않다.
“북한에 대한 영향력으로만 보면 중국은 북한의 생존 여부를 좌우할 수 있을 정도다. 북한은 중국의 지지 없이는 생존이 어렵다. 이처럼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오히려 (힘을) 가볍게 쓸 수 없고 신중한 것이다.”
이 같은 쑤 교수의 발언에는 중국의 고민이 잘 묻어나지만 중국이 국제사회로부터 지속적으로 비판을 받는 까닭도 드러난다. 중국이 석유 공급 중단 등의 ‘살상력 있는’ 조치를 동원하면 북한의 목줄을 죌 수 있는데도 제대로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그렇게 영향력이 크면 중국이 이번에야말로 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중국은 국제사회와 함께 이 문제에 대한 논의에 나설 것이다. 유엔 틀 내에서 새로운 제재 방안을 모색하고 대응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여러 루트를 통해 북한에 대한 중국의 우려를 전달할 것이다. 나아가 핵실험과 같은 행동이 지역 안전에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지, 왜 신중해야 하고 극단적인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지 북한이 깨닫도록 할 것이다.”
쑤 교수의 어투는 단호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제재 이외에 단호한 중국의 단독 조치 가능성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북한이 중국의 비핵화 원칙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핵실험을 한 이유는….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으나 국내 정치적인 목적도 크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집권 이후 별 성과가 없다. 당과 국가지도자로서 보여줄 만한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올 5월 36년 만에 당 대회를 여는 김정은으로서는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뭔가 필요했다. 어떻게 보면 핵실험이야말로 이런 목적을 달성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핵실험 이후 북-중 관계는 앞으로 중국이 어떤 조치를 취하느냐에 따라 많은 변수가 있을 것이다. 화제를 돌려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듯한 상황에 대해 속내를 물었다.
―한국 정부 당국자나 학자들과 교류가 많은 것으로 안다. 한국에 해주고 싶은 충고는….
“한국이 중국 미국 중 한 국가를 선택해야 한다는 말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한국은 자주독립국가다. 미국의 동맹국이지만 주권국가로서 자신의 이익과 주권, 정책결정권이 있다. 중국이나 미국에 의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에 따르면 된다. 그런 점에서 최근 몇 년간 한국의 외교는 비교적 성숙했다. 최근 수년간 중한 관계가 전면적으로 발전한 것은 한국이 자신의 이익에 따라 선택한 결과다.”
인터뷰 내내 쑤 교수는 온화한 화법을 썼지만, 이 대목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높아졌다.
“미국은 한국이 너무 중국에 가까워졌다며 불만을 토로한다. 한국에 압력을 가해 남중국해 문제에 대해서도 일정한 역할을 하라고 한다. 미국은 한 지역에서 동맹국에 미국 방식대로 갈 것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남중국해 문제도 한국에 자국의 이익을 버리고 미국을 추종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한국은 이성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중국으로서도 한국이 양자 간에 선택을 해야 하는 곤경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간 협상 타결을 어떻게 보나. 역사 문제에서 한중 간에 대일 공동전선이 약해졌다고 중국 관영 언론이 평가하기도 했다.
“일본의 사과를 받아낸 것은 분명 한국 외교의 성과다. 나아가 일본은 한국에만 사과할 것이 아니라 중국 동남아 등 다른 국가에도 사과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에 대한 사죄가 진정한 마음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역사 문제로 갈등을 겪는 일본과 한국에 미국이 영향을 미쳐 두 나라 모두에 양보를 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이후 가장 큰 관심사는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주변국이 벌이는 갈등이다. 중국은 1일 인공섬에서 항공기 비행 연습을 하면서 주변국과 마찰을 빚고 있다.
―중국이 지난해까지는 남중국해 인공섬 건설에 주력했다면 올해는 본격적으로 군사적 이용에 나서려 한다는 지적이 있다.
“암초섬(중국은 인공섬이라고 부르지 않고 암초 혹은 암초섬이라고 부른다)에는 군용과 민용 기능이 모두 있다. 주변 국가나 미국이 어떻게 나오는가에 따라 기능은 달라질 수 있다. 미국이 12해리 이내로 군함을 파견하고 폭격기를 중국 영공에 진입시키는 도발을 한다면 중국도 부득불 군사 기능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도발이 중국의 안전을 위협하느냐가 관건이다.”
지난해 초 인공섬 건설 장면이 위성사진을 통해 외부에 공개됐을 때만 해도 중국 정부 당국자나 학자들이 나서 “인공섬은 군사화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분위기는 바뀌었다. 쑤 교수의 답변도 이제는 군사적 사용을 당연한 것처럼 여긴다.
―미국이 지난해 10월 27일 처음으로 남중국해에 인공섬 12해리 이내로 군함을 보낸 데 이어 1월에도 보낼 수 있다고 미 해군 관계자가 밝혔다. 지난해 중국은 ‘신속히 영해에서 나가라’고 경고하는 데 그쳤는데 직접적인 충돌 가능성은 없나.
“미국 군함이 지난해처럼 ‘무해통항(無害通航·innocent passage)’한다면 중국의 반응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본다. 미국이 도발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중국의 행동 방식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이 제2항모 건조를 공식 발표했다. 중국에 항모는 무엇이고, 몇 척이나 필요한가.
“중국은 1만8000km에 이르는 긴 해안선이 있고, 대만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도 대양 해군이 필요하다. 중국에 현재 해군 역량은 너무 부족하다. 인도도 3척의 항모를 보유하기를 원하고 있다. 중국도 최소한 3척의 항모는 필요하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 중에서 이슬람 무장테러단체 ‘이슬람국가(IS)’ 등에 무력 사용을 하지 않는 국가는 중국밖에 없는데….
“중국은 경제 지원 등 나름의 방식으로 중동 문제에 기여하고 있다. 중국이 국내의 테러 세력에 대응하는 것도 반(反)테러 전선에 있는 것이다. (중동의 테러 세력에 대한) 무력공격에 나설 경우 중국이 받을 영향이 크다. 중국은 상당 기간 무력을 사용한 반테러 전선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외국에서 군사력을 사용한 적이 없다.”
―지난해에는 일본의 안보법제 통과 이슈나 과거사 문제 등으로 중일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올해 중일 관계 현안은 무엇인가.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전략적으로 중국을 주요 경쟁상대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일본의 일련의 행동과 외교정책이 중국을 겨냥한 것이 적지 않다. 일본이 이런 태도로 일관한다면 양국 간은 물론이고 동북아 전체 안정에도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올 하반기 중국과 한국 일본 간 3국 정상회의가 일본에서 열릴 가능성이 있는 등 양국 간 협력 기조는 더욱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이라는 사자가 깨어났다는 말이 있다. 주변국은 깨어난 사자를 두려워해야 하는가.
“중국에 있어 시 주석이 집권한 2013년 이전 30여 년간이 국제사회에 책임 있는 국가로서 편입 융화되기 위해 노력한 시기였다면 그 이후는 국제사회를 이끄는 국가로 위상을 세운 시기다. 시 주석이 주창한 일대일로(一帶一路·21세기 육지와 해양 실크로드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2015년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설립을 통해 새로운 위상을 실현하는 한 해였지만 2016년은 더욱 그런 해가 될 것이다.
중국이 올해 ‘보다 크고 대담해진다(BIG AND BOLD)’는 화법은 미국 언론이 만들어낸 것이다. 한국 등 중국 주변국 친구들은 미국 화법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중국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물론이다. 중국은 오히려 국제사회에 많은 기회를 줄 것이다.”
:: 쑤하오 교수는 ::
1958년 중국 윈난(雲南) 성 훙허(紅河)시 출생. 베이징사범대에서 역사학과 국제관계사로 석사를, 외교학원에서 국제관계학 박사를 받은 뒤 30년째 외교 학원 교수로 일하고 있다. 외교학원은 1955년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가 세운 학교로 중국 ‘외교관 양성의 요람’이라 불린다. 2011년부터 ‘전략 및 평화연구중심 주임’을 맡는 등 외교안보분야 직함만 10여 개. 관영 TV와 라디오에 전문가로 출연하는 등 대외활동도 활발하다. 미국 학자들의 북한 관련 논문에 빈번히 인용되는 한반도 전문가이기도 하다. 한중 양국의 주요 싱크탱크 전문가 모임인 ‘한중 싱크넷’의 중국 측간사를 맡아 한국 학자들과의 교류도 잦다.
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 2016-03-05 방한 우다웨이
▲동아일보 황호택 논설주간(왼쪽)이 2일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한반도사무특별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 우다웨이(武大偉) 중국 외교부 한반도사무특별대표는 “북한이 핵시설을 동결하고 핵 포기 의사를 보여줘야 미국과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이 제재 국면에서 거론한 ‘평화협정’ 논의도 북한의 비핵화 의지와 맞물려 있음을 강조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주간은 2일 서울에서 진행된 중국 전문가 모임에서 우 대표와 일문일답을 가졌다. 우 대표는 ‘비보도’를 조건으로 말했으나, 그가 몇몇 언론사 대표와의 회동에서 비슷한 내용을 반복해서 말했고, 관련 내용들이 보도됐기 때문에 인터뷰를 게재한다. 》
―방한 목적은….
“북한의 핵실험과 위성(장거리 미사일) 발사와 관련해 중한 양국의 정책 조정을 위해서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박근혜 대통령과 통화를 늦게 했다는데, 북한이 어떤 종류의 폭탄을 터뜨렸는지 평가하는 데 시간이 걸린 것이다. 폭탄의 성격에 대해 정확한 결론을 내린 국가는 아직 없다.”
―북한에 가서 미사일 발사를 막으려 했을 텐데….
“두 가지 요구를 했다. 첫째, 한반도 비핵화 협상에 복귀하라. 둘째, 새로운 위성을 발사하지 말라고. 북한은 나의 조그마한 체면도 살려주지 않았다. 핵 보유는 확정된 방침이고 위성 발사도 권리라고 했다. 북한의 핵 보유 의지가 확고하다고 결론 내렸다. 북한 핵무장을 막기 위해서는 새로운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강력한 대북제재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북한의 핵 포기 가능성은 없나.
“북한의 최우선적인 관심은 정권 안보다. 이 문제가 해결된다면 핵 포기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북한은 내 말을 듣지 않았지만 내가 분석하기로는 북한은 핵 포기 의사가 있고, 미국은 북핵을 포기시키려는 의지가 있다. 북한이 핵시설을 동결하고 핵 포기 의사를 보여줘야 미국과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결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지금까지 나온 모든 대북 관련 결의 중에서 가장 강력하다. 북한이 핵 보유의 길로 나가지 못하게 이 결의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이 점에 관해 한중 정부 의견이 일치했다.”
―북한 핵실험 이후 한중 관계에 대해 속았다는 등의 말이 나오는데….
“과거 한국 대통령은 미국 일본을 방문한 뒤에 중국을 찾았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미국을 방문한 뒤 중국을 먼저 방문했다. 시 주석도 북한보다 한국을 먼저 방문했다(2014년). 관행을 깬 것으로 새 영도그룹(지도부)이 중한 관계를 중요시하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지난해 9월 3일 전승절 행사에 박 대통령이 내부의 반대와 외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참석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중한 관계는 현재 오르막길에 서 있다. 내리막길로 가거나 과거로 회귀해서는 안 된다.”
―중국의 안보리 결의 이행에 대한 의구심이 있는데….
“한국 외교부도 우리가 착실히 이행할지 의심을 떨치지 못했다. 덩샤오핑(鄧小平) 어록을 인용하겠다. ‘실천은 진리를 증명하는 유일한 길(實踐是檢驗眞理的唯一標準)’이다. 중한 정부는 대북 제재와 관련해 밀접한 소통을 유지하겠다.”
―6자회담은 왜 실패했다고 보나.
“미국과 한국은 중국 책임을 거론하지만 중국은 미국의 북핵 해결 의사를 의심했다. 미국이 북핵을 이용해 한국 일본과 군사동맹을 강화하려 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했다. 북한을 제외한 5자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고, 서로 불신하고 있다. 5자가 힘을 모아야 한다. 북핵이 타결되지 않는 근본 원인이 바로 이것이다. ‘홍루몽’이라는 소설에 할머니가 죽고 모두 우는 장면이 나온다. 가슴 아픈 이유는 제각기 다르다. 6자회담도 마찬가지다. 공동으로 협력하지 못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 3개국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개국이 있지만 서로 견제하다 보니 대북 압력이 제로(0)가 됐다.”
―안보리 제재 이후 상황을 어떻게 보나.
“안보리 제재가 북한에 큰 압력이 될 것이다. 이런 어려움은 북한이 자초한 것이다. 남을 원망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북한을 지지할 적도, 친구도 없다.”
―사드에 대해 한국 정부에 의견을 표시했나.
“사드는 중국의 전략적 안보 이익에 엄중한 손해를 끼친다. 레이더 시스템이 문제다. 작은 물체는 1300km까지, 큰 물체는 2000km까지 감시가 가능하다. 한미 양국 정부에 모두 사드 문제를 제기했다.”
(배석한 중국 외교부 실무자는 미국이 한국에서 사드를 배치한다면 대만, 일본, 필리핀으로 확장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국에 고정 설치되면 중국의 모든 비행물체에 대한 빅데이터를 만들 것이라며 사드는 온갖 귀신이 들어간 ‘판도라의 상자’라고 주장했다.)
―사드 배치 파장은….
“한국이 사드를 배치한다면 앞으로 북핵 논의는 사드 논의로 바뀔 것이다. 이에 기분 좋아할 사람은 북한에서 핵무장을 밀어붙이는 사람들이라고 본다.”
정리=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 2016.10.14 “북한이 먼저 전쟁 일으킨다면 중국은 한국 편에 설 것”
지난 7월 초 한국 정부의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결정 이후 역대 최상으로 평가받던 한·중 관계는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국내에선 한동안 방한 중국 관료는 물론 학자 또한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북제재를 놓고 한·중이 엇박자를 내는 것은 물론 중국은 북한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중국은 왜 북핵 불용(不容)을 외치면서도 대북제재엔 미온적이고 또 한국을 중시한다면서도 한국의 사드 도입엔 반대 목청을 높이는 걸까. 또 중국이 생각하는 북핵 해결 방안은 무얼까. 이와 관련, J글로벌·채텀하우스·여시재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중국 내 최고의 미국통 자칭궈(賈慶國) 중국 베이징(北京)대 국제관계학원 원장을 10일 만났다.
▲자칭궈 중국 베이징대학교 국제관계학원 원장은 “중국이 갈수록 북핵을 중국의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며 “한국이 중국에 이래라저래라 재촉할 게 아니라 중국이 스스로 변화하도록 여유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 김상선 기자]
질의 :지난해 가을엔 한국이 중국에 기울었다는 ‘중국경사론(中國傾斜論)’이 나왔다. 한데 지금은 한·중 관계가 냉랭하기만 하다.
응답 :“대다수 중국인은 중·한 관계가 여전히 좋다고 생각한다. 경제나 문화 교류 또한 빈번하다. 그러나 중국 입장에서 말하면 한국이 중국의 비교적 큰 이익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 결정할 때는 미리 중국과 상의하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질의 :사드 배치 결정이 중국과 상의 없이 이뤄졌다는 것인가.
응답 :“적어도 중국이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결정됐다고 할 수 있다. 사드 배치로 한국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 북한은 재래식 무기로도 서울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 사드 아닌 더 고성능의 무기로도 서울의 안전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 만일 중·한 관계가 좋다면 중국은 한국에 보다 많은 안전을 제공할 수 있다. 북한을 압박할 수 있고 또 만일 북한이 먼저 전쟁을 일으킨다면 중국은 한국 편에 설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드 문제로 중·한 간에 충돌이 생겼고 이는 결코 한국에 이롭지 않다.”
질의 :자 원장은 중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드 배치의 근본 원인이 북한 핵에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응답 :“한반도 사정을 자세히 추적해 보면 나와 같은 결론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몇몇 다른 이유로 인해 그렇게 말하려 하지 않는다. 이들은 미국의 음모라면서 미국이 사드 배치를 마음먹고 한국에 시키니 한국이 그렇게 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한·미 관계를 잘 모르고서 하는 이야기다. 한국 정부의 자주성을 지나치게 낮게 본다.”
질의 :북핵 해결과 관련해 ‘중국의 역할’에 거는 한국의 기대는 크다.
응답 :“인내가 필요하다. 중국에 이래라저래라 재촉하는 것은 효과가 없다. 현재 중국의 한반도 정책은 변하고 있다. 물론 그 변화 속도에 한국이 만족해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은 변하고 있으며 변화의 방향은 옳다. 중국은 갈수록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왜냐하면 점점 더 많은 중국인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 다른 나라뿐 아니라 중국에 대해서도 날이 갈수록 더 큰 위협이 돼 가고 있다고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중국은 과거보다 한층 더 강경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이는 커다란 변화의 흐름이다. 과거엔 이 문제가 미국 일이고 미국에 대한 위협이라고 봤지만 이제는 중국 일이고 중국에 대한 위협이라고 본다. 한국이 중국에 좀 더 여유를 줘 중국 스스로 변하게 해야 한다. 아마 최종적으론 중국이 한국보다 더 서두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지금 당장 중국에 압력을 가해 중국에 이래라저래라한다면 중국은 이는 당신이 신경 쓸 일이고 중국의 일이 아닌 당신의 일이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국제 관계란 참 미묘한 것이다.”
질의 :한국은 사드 배치에 따른 중국의 보복을 우려한다.
응답 :“한국이 중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드 배치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중국 정부가 어느 방면에서는 불만을 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 보복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것은 사드 배치와 관계없이 그저 때가 돼 터질 일이 터진 것일 수도 있다.”
질의 :사드 부지 결정 등 사드 배치의 진전에 따라 중국의 보복 수위도 높아지리라 보나.
응답 :“중국의 불만 표시는 있을 수 있다. 그게 어느 수위까지 올라갈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중·한 관계는 한국은 물론 중국에도 매우 중요하다. 중국 정부는 여전히 한국 정부가 사드 문제를 다시 검토해 일부 조정해 주기를, 특히 사드 배치가 중국 안보에 미치는 잠재적 영향을 최소화하는 조치를 취해 주기를 기대한다.”
질의 :사드 배치로 냉각된 한·중 관계를 어떻게 회복해야 하나.
응답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신중해야 할 것이다.”
질의 :혹시 중국은 내년 한국 대선 때까지 기다려 보자는 것 아닌가.
응답 :“그렇지는 않다. 한국이 취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중국이 제시한 일대일로(一帶一路·육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에 한국이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게 한 예다. 중국과 한국이 일부 프로젝트를 공동 추진한다면 쌍방 모두 좋은 일이다. 또 한반도 문제에서도 더 많은 상의를 하게 될 것이다. 이해가 일치하는 걸 먼저 추진하면서 이견은 점차 좁혀 나가는 구동존이(求同存異) 정신이 필요하다.”
질의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행동은 거칠 게 없어 보인다. 중국이 북한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즉 기댈 게 있어서가 아닌가.
응답 :“그는 북한이 중국의 전략적인 완충 지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중국이 결코 북한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보는 것 같다. 중국 내에서도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중국이 아직까지는 북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확고한 결심과 의지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서 행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질의 :최근 중국이 북한에 유화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김정은의 방중 가능성은.
응답 :“북한이 핵실험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이 사드를 배치한다면 김정은의 중국 방문 가능성은 커질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을 방문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질의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에 중국이 동참하고 있지만 ‘구멍’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응답 :“그런 걱정이 있지만 중국의 대북제재는 과거에 비해 더 엄격하게 집행되고 있다. 일각에선 중국이 원유와 식량의 대북 공급을 끊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수많은 북한 인민이 굶어 죽는 등 엄청난 후과(後果)가 따를 것이다. 한국이 정말 이런 상황이 생기기를 바라나. 설사 많은 북한 인민이 굶어 죽어도 김정은 정권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질의 :북핵 위협이 커지면서 한국 일부 인사가 ‘핵 무장’이나 ‘전술핵 도입’을 주장한다.
응답 :“중국 정부가 주의 깊게 봐야 할 대목이다. 몇 년 전 나는 중국이 북핵에 대해 보다 강경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글을 쓰면서 만일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면 이는 다른 나라들의 핵무기 개발을 자극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중국의 주변 국가들이 핵보유국이 된다면 핵전쟁 위험은 더 높아지고 이는 중국에 커다란 위협이 된다. 현재 중국의 점점 더 많은 이가 이 같은 위험을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질의 :최근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미국 정부가 북한과 거래하는 중국 기업과 개인을 제재하는 세컨더리 보이콧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이 세컨더리 보이콧을 실행에 옮기면 중국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응답 :“만일 김정은 정권이 현재와 같은 위험한 길을 계속 걷는다면 중국은 어느 날인가는 세컨더리 보이콧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김정은이 최후까지도 변하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순간까지 가야 하지만 말이다. 이 경우 중국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막는 걸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놓을 것이다. 현재는 아직 균형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을 뿐이다.”
질의 :미국에선 심지어 북한에 대한 ‘선제 타격’을 거론하는 이도 있다.
응답 :“그런 가능성은 북한의 핵무기 발전에 따라, 특히 장거리 미사일 발전에 따라 증가할 것이다. 중국은 이러한 상황 진전을 중시해야 한다. 만일 미국이 북한에 대해 ‘외과 수술식(surgical strike)’ 타격을 가한다면 한반도뿐 아니라 중국 주변 지역이 모두 혼란에 빠질 것이다. 핵 시설 파괴로 인한 오염은 중국에도 영향을 미친다. 핵무기는 어떻게 처리할지, 대량으로 발생할 난민은 어떻게 수용할지 등 고려해야 할 사항이 한둘이 아니다. 심지어 내전의 위험도 있다. 따라서 가장 좋기로는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이다.”
질의 :미국은 다음달 대통령을 새로 뽑고 한국과 중국은 내년에 새 지도부 선출이 있다. 북한이 이런 시기를 이용해 몸값을 높이려 도발할 가능성이 크다. 어떻게 막아야 하나.
응답 :“먼저 유엔의 대북제재 결의를 엄격하게 준수해야 한다. 통치자에 대한 압박은 계속 하되 북한 주민의 생존 공간은 확보해 줘야 한다. 둘째는 협상과 소통의 강화다. 셋째는 비가 오기 전에 창문을 수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북한에 정작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와 관련해 1.5트랙, 아니면 적어도 민간 차원에서는 논의할 필요가 있다. 내가 보기엔 북한에서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질의 :자 원장이 생각하는 북핵 해법은 무엇인가.
응답 :“바로 단기간에 효과를 볼 수 있는 북핵 해법은 없다고 본다. 과거 이런저런 많은 시도를 해 봤다. 내 생각엔 6자회담의 여러 나라들, 그중에서도 중·미가 소통을 강화해 여러 경우의 수에 대한 서로의 의견을 분명하게 나눠야 한다. 특히 민감한 문제에 대해선 철저하게 이야기를 해 공감대를 형성해 놓는 게 필요하다. 그런 뒤 북한 자신의 변화를 기다려 보자는 것이다. 아마도 북핵 문제의 최종적인 해결은 북한 내부의 변화에 달려 있다고 생각된다. 현재 이런 문제들과 관련해 정부 차원에서 대화를 나눌 여건이 성숙돼 있지는 않지만 민간 레벨에서는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자칭궈는…
1956년 중국 허난(河南)성 출생. 베이징 외국어대 졸업 후 미국 코넬대에서 정치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유학파 인물.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주석의 외교 책사로 불렸던 왕지쓰(王緝思)와 더불어 중국 내 최고의 미국 전문가 중 하나로 꼽힌다. 민주당파인 중국민주동맹의 일원이며 국정자문기관인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외사위원회 위원이기도 하다. 그는 한반도의 미래와 관련해 한국이 미국뿐 아니라 중국과도 전략적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중앙일보 유상철 논설위원 정리 도움=왕철 중국연구소 연구원 사진=김상선 기자
■프랑스
□ 2015-07-06 佛 INVS 질병통제본부 호흡기전염병 총괄책임자 레비브륄 박사
《 프랑스 국립보건통제센터(INVS) 질병통제본부 호흡기 전염병 총괄책임자인 다니엘 레비브륄 박사에게 한국이 메르스 사태를 겪게 된 이유를 묻자 이런 답이 나왔다. “한국이 주변국에 비해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의 고통을 거의 겪지 않았기 때문 아니었을까요. 사스를 잘 극복했다는 자신감이 오히려 의료진과 시민들 사이에서 메르스 바이러스에 대한 방심을 낳은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한국의 부실한 방역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 나오리라 예상했는데 의외였다. 실제로 한국은 사스가 전 세계를 강타했던 2003년 사망자가 한 명도 없어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모범국’이란 칭호를 얻었다. ‘김치가 사스를 예방해줬다’는 설(說)이 주변국들 사이에 퍼지기도 했었다. 》
▲프랑스 파리 외곽 생모리츠에 있는 국립보건통제센터(INVS) 질병통제본부에서 만난 다니엘 레비브륄 박사. 그는 “전염병을 막기 위해선 투명한 정보 공개와 소통 시스템이 가장 중요하다”며 “평소에 준비된 나라만이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고 강조했다. 파리=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 24시간 바이러스 정보 올라오는 ‘작전상황실’
레비브륄 박사는 “전염병 방역시스템은 결국 경험에서 배울 수밖에 없다”며 “프랑스도 사스를 호되게 경험한 후에 전국적인 감시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한국으로선 이번 사태가 질병통제시스템을 거듭나게 하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프랑스는 바이러스 방역 시스템 면에서 선진국 중에서도 모범 국가로 꼽힌다. 아프리카와 중동지역 이민자와 관광객이 많다 보니 일찍이 각종 열대성 질병에 쉽게 노출돼 그만큼 경각심을 갖고 대응해 왔기 때문이다.
그가 일하는 국립보건통제센터는 1998년 광우병 위기 직후 창설된 곳으로 에볼라를 비롯해 메르스, 신종플루, 조류인플루엔자, 사스 등 호흡기 전염병에서부터 식품 오염에 이르기까지 각종 바이러스에 대한 경보를 내리고 추적하는 일을 총괄 지휘하는 정부기관이다. 지난주 파리 인근 생모리츠에 있는 본부를 찾았을 때 레비브륄 박사는 기자를 ‘작전상황실’로 안내했다. 1년 365일 24시간 가동된다는 방 안으로 들어서니 대형 스크린이 눈에 띄었다. 전국의 병원, 보건소, 소방서, 응급구조대로부터 올라오는 모든 감염 정보를 실시간으로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이곳 상황실에서는 국내는 물론이고 지구촌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바이러스에 대해 검토하는 전문가 회의가 매주 열린다. 마침 스크린에는 ‘한국의 메르스 상황에 대한 현황분석’이라는 제목의 자료가 띄워져 있었다.
레비브륄 박사는 “상황실이 가장 큰 위력을 발휘했던 것은 2013년 5월 프랑스에서 첫 메르스 환자가 발생했을 때였다”고 했다. 당시 북부 릴의 한 병원에서 아랍에미리트를 여행하고 돌아온 65세 남성이 확진 판정을 받자 상황실에 매일 50∼70여 명의 전문가들이 24시간 근무하며 바이러스를 추적했다. 환자와 접촉한 123명을 자가 격리시키고 이들에 대해 매일 2차례씩 체온을 측정하며 관리한 결과 확진 환자는 2명에 그쳤다. 그의 말이다.
“우리도 처음부터 그런 시스템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사스와 조류인플루엔자, 신종플루 등 각종 경험을 토대로 2012년 11월에 호흡기 전염병에 대한 대응 매뉴얼을 만든 게 처음이었다. 정부는 이 매뉴얼을 지방 개인병원은 물론이고 대형병원에서 일하는 모든 의사들에게 배포했으며 행동요령을 습득하게 했다.”
그는 이어 바이러스가 발견되면 어떻게 매뉴얼이 작동되는지 예를 들어 설명했다.
“브르타뉴 지방의 한 의사가 사우디아라비아에 다녀온 환자를 진료했는데 기침, 발열, 호흡곤란 등의 증상을 보인다면 즉시 지역 보건소에 알린다. 그러면 바로 우리 본부나 지부(CIRE)에서 역학조사관이 파견되고 의심 환자의 샘플을 채취해 국립인플루엔자표준연구소로 보내 메르스 유전자 검사(PCR)를 한다. 의심 환자로 분류되면 즉시 전문 병원으로 보내 격리 조치한다. 이와 동시에 환자와 접촉한 사람들 리스트가 작성돼 경로 차단 작업이 펼쳐진다. 매뉴얼도 중요하지만 평소 모든 의료 종사자들이 사태 발생에 대비해 행동요령을 숙지해 즉각 행동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 병원 정보 초기에 공개해야 바이러스 확산 막아
―사태 초기에 병원과 환자에 대한 정보공개는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나.
“환자와 병원 정보를 처리하는 게 각각 다르다. 환자에 대해서는 의심이든 확진이든 개인 신상정보를 공개할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사생활 침해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병원 정보는 즉각 공개돼야 한다. 확산을 통제하려면 환자든 의료진이든 일반 시민이든 메르스 환자가 지금 어느 병원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경우 의심 환자와 관련된 신상 정보는 법에 따라 강력한 보안이 돼 있는 중앙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자동적으로 우리 본부로 오게 돼 있다. 동시에 메일 리스트를 통해 바이러스 담당 전문가나 국립바이러스센터 소속 세균학자들에게 실시간 전달된다. 국민들은 감염자가 어느 병원에서 나왔다는 것은 알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는 이어 “이제 바이러스 대처를 안보 차원에서 다뤄야 할 시점”이라고도 했다.
“국경이 사라진 글로벌 시대가 되다 보니 바이러스 대유행과 같은 보건 위기도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발생할지 예측하기 어려워졌다. 이번에 메르스 경우를 통해서도 다시 깨달은 것이지만 바이러스가 확산된 후에야 움직이는 것은 이미 전투에서 진 것이나 다름없다. 한 전투에서 졌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다음 전투를 준비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프랑스도 사스에 잘못 대처해 비난 여론이 높았었다. 그렇다고 당시 전문가들을 모두 해임했다면 이후 닥쳐올 위험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바이러스와의 전투에서 이기려면 정밀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준비된 나라만이 이길 수 있다.”
기자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상황실’뿐 아니라 ‘협력 조정실(Salle de Coordination)’과 ‘결정실(Salle de decision)’이라고 적혀 있는 방이었다. ‘협력 조정실’은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50여 명의 다양한 전문가들이 즉석 토론을 하고 신속한 결정을 내리는 곳이라고 한다. 또 ‘결정실’은 격리조치, 접촉자 관리, 병원 폐쇄, 휴교령 등을 신속하게 내리는 장소이다.
―전문가들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
“대부분 의사 간호사, 약사들이지만 이들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우리 전문가 그룹은 수의사에서부터 사회학자, 기호논리학자, 통계학자, 인류학자, 미디어 전문가까지 포진해 있다. 바이러스 확산은 일반 국민들에게 미치는 심리적, 경제적, 사회적 영향이 크기 때문에 모든 발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고민하고 대응하는 전문가들 간 소통이 매우 중요하다. 수의사들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동물을 통해 전염되는 여러 병들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 외국에서 발생한 바이러스 정보를 신속히 얻기 위해 언제든 해외로 파견돼 역학조사를 할 수 있는 ‘국제감시정보 전담팀’도 상시 가동하고 있다.”
○ “한국, 더이상 퍼질 가능성 낮다고 본다”
호흡기 전염병 예방 전문가인 레비브륄 박사는 1986년부터 WHO와 유니세프(UNICEF)에서 전염병 백신 개발과 예방접종 프로그램 전문가로 활동해왔다. 1997년부터 통제본부에 합류해 전염병 예방 및 교육총괄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그는 기자의 질문에 매우 논리적이고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설명을 들을수록 프랑스가 방역 선진국이라 불리게 되기까지 많은 고민과 이를 실현할 사회적 합의가 있었으리라는 것이 느껴졌다. 화제를 ‘메르스’로 돌렸다.
―메르스는 병원을 통해서만 감염이 되나. 가정 학교, 지하철 같은 일반 시민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감염될 확률은 어느 정도인가.
“메르스 데이터도 많이 축적되어 가고 있다. 현재로서는 병원 감염 확률이 제일 높은 것으로 보인다. 만약 메르스가 학교나 지하철 등에서도 확산 능력을 가진 바이러스였다면 벌써 전 세계로 퍼졌을 것이다. 이는 한국을 봐도 마찬가지다.”
―지난겨울 프랑스에서는 독감으로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독감과 메르스 중 어느 것이 더 위험한가.
“올해 1∼2월 유행한 겨울독감으로 사상 최대인 1만1000명이 사망했다. 사망률이 19%에 이르렀고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치명적이었다. 이에 비해 메르스는 전염성 면에서 독감 바이러스보다 현저히 낮다. 우리 팀 연구 결과 메르스의 바이러스 생산력은 0.6으로 나타났다. 1보다 낮으면 대유행 병이 될 수 없다. 다른 나라의 연구팀들도 비슷한 결과를 보였다.”
―메르스 바이러스에 특히 취약한 사람들이 있다면….
“이미 다른 병을 앓고 있거나 노약자들이다. 그러나 건강한 젊은 사람도 감염되는 경우도 있고, 감염되고도 아무 증상을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들이 과연 메르스 항체를 보유했는지 혈청학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 30, 40대 젊은층은 감염 확률이 낮지만 일단 감염되면 ‘슈퍼 전파자’가 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한국 상황은 어떻게 보나.
“WHO와 프랑스 정부는 한국 여행에 대한 어떤 규제도 하지 않았다. 한국이 이대로 격리 조치를 잘 취한다면 더이상 퍼질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여행객들이 확진 환자가 발생한 병원을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한 문제는 없다고 본다.”
:: 다니엘 레비브륄 박사 ::
―1986년 세계보건기구 열대성 전염병 통제 프로그램 전문가
―유니세프 국제아동 예방접종 프로그램 진행
―개발도상국 보건부 백신개발 프로그램 참여
―1997년 프랑스 국립보건통제센터 전염병 예방 총괄팀장
―프랑스 보건부 사스, 메르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면역기술전문 자문위원
파리=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 2016.01.04 파스칼 보니파스 佛 국제관계전략연구소 소장
인터뷰 2016.01.04
▲4일 오전 프랑스 파리 11구 국제관계전략연구소(IRIS) 사무실에서 만난 파스칼 보니파스 소장은 “유로화 위기 속에서도 유로화가 죽지 않았듯이 유럽연합(EU)도 난민 사태와 테러의 위기를 뚫고 새롭게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파리=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와 맞설 줄 알아야 합니다. 독일의 과거사 인정과 사죄가 없었다면 독일 통일도, 유럽연합(EU)도 맞이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동아시아의 강대국인 한중일 간에도 실질적인 협력을 위해선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화해가 필요합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국제정치학자 파스칼 보니파스 국제관계전략연구소(IRIS) 소장(60)은 4일 동아일보와의 신년 인터뷰에서 최근 한일 간에 이뤄진 ‘위안부 합의’에 대해 양국이 화해를 위한 기초를 놓았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
보니파스 소장은 “일본이 과거 한국에 가했던 끔찍한 범죄와 가해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두 나라가 화해와 협력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한 번 사죄했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며 과거를 모두 덮어 버려서도 안 된다”며 “자라나는 후손들이 역사의 교훈을 잊지 않도록 교과서에 기록하는 등 양국이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위기와 분쟁의 아틀라스’ ‘세계의 진실을 가리는 50가지 고정관념’ 등으로 유명한 그는 유럽과 중동의 국제 관계와 핵문제, 군축 등을 다룬 50여 권의 저서를 펴냈다. 현재 파리 8대학 유럽학연구소 교수로 있으며, 글로벌 정치 전략 연구가들의 ‘바이블’로 통하는 ‘전략연감’과 ‘국제전략학술지’의 발행인 겸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공교롭게도 그와의 인터뷰 장소인 IRIS는 파리 11구의 대로변에 있었다. 지난해 1월 테러가 발생했던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사무실, 11월에 파리 최악의 인질극 중심지였던 바타클랑 극장에서 각각 800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그는 “지난해 프랑스는 끔찍한 한 해를 보냈다”며 “유럽인은 이제 테러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진단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최근 한일 간에 ‘위안부 문제’에 대해 역사적인 합의가 이뤄졌지만, 아직도 양국 여론은 부정적이다. 합의를 이행하고 발전시키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민족 간의 화해는 시간이 필요하다. 1950년대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정치권에서 과거 전범(戰犯) 행위에 대해 인정하는 것은 진정한 화해의 첫 단계로, 아주 중요한 일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 의지가 일반 국민에게도 전해진다. 가령 1950년대에는 프랑스인과 독일인의 결혼은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요즘은 아주 일상적인 일이 되지 않았나. 다만 이를 위해서는 ‘과거사의 교훈’을 끊임없이 후손에게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프랑스와 독일에는 양국의 역사가들이 공동 집필한 역사 교과서가 있다. 이처럼 한국과 일본이 교과서를 함께 발행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독일의 전후 사죄와 보상 노력이 전후 유럽 체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1970년 12월 폴란드 바르샤바를 방문해 유대인 추모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한 행동은 유럽인들의 마음을 녹였다. 이후로 프랑스와 독일 간에는 더 이상 적개심이 없다. 이것은 역사의 무게를 뛰어넘은 정치적 의지의, 그야말로 역사적인 예시다. 과거 잘못에 대한 인정이 없었다면 독일은 소련이나 바르샤바조약기구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개선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독일 통일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브란트 전 총리는 독일의 전범 행위를 모두 인정함으로써 독일 정부의 외교 영역을 크게 넓혔다. 이러한 시각에서 그는 위대한 애국자다.”
‘핵의 세계’라는 저서에서 미국과 소련, 중동과 북한 등의 핵무기 전략을 분석했던 보니파스 소장은 유엔 군축자문위원회 위원(2001∼2005)을 지내기도 했다. 그에게 북한 김정은 정권이 이란처럼 핵을 포기하고 개방하는 전략을 쓸 것인가에 대해 물었다.
보니파스 소장은 “북한 정권에 핵은 생명보험과도 같은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북한은 패배가 확실시되는 새로운 전쟁을 일으키기보다는 핵을 보유함으로써 외세의 군사작전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북한은 이라크가 2003년에 핵을 보유하고 있었더라면 미국이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이 새해 벽두부터 시아파 성직자 처형을 계기로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정면충돌하고 있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맹주 국가인 양국이 왜 죽기 살기로 싸우나.
“사우디와 이란의 라이벌 경쟁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측면에서 지속돼 왔다. ‘왕국 대 공화국’ ‘수니파 대 시아파’ ‘아랍인 대 페르시아인’ ‘미국의 최우방국 대 주적’….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7월 14일 서방과 이란의 핵 협상 타결은 상황을 반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즉 이란의 핵 무장에 대한 우려는 사라졌지만 사우디는 이 합의로 이란이 중동에서 세력을 확산시키는 것을 막을 수 없어 걱정스럽다. 두 나라는 시리아, 이라크, 예멘에서 동맹국을 통해 대리전을 벌이고 있다. 사우디와 이란은 이미 유가 하락으로 국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다. 이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신뢰할 만한 중재자를 찾아야 한다.”
―미국, 프랑스, 러시아, 아랍연맹 등 국제 동맹군의 ‘이슬람국가(IS)와의 전쟁’이 한창이다. 국제사회의 공습이 IS를 궤멸시킬 수 있다고 보나.
“IS와의 전쟁에 참여한 국제 동맹은 규모는 크지만 각자 속셈은 다르다. 터키는 쿠르드족의 독립을 막는 것이 목적이고, 사우디는 이란의 강대국화를 견제하고 싶어 한다. 이란은 시리아에 중요 전략적 거점을 지키면서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목표이고, 러시아는 시리아에 알 아사드 정권을 유지하기를 원한다. 모든 국가가 IS를 제거하기 위해 공습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서방 국가나 러시아 혹은 시아파의 지상군 직접 개입은 피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지상군 투입은 IS가 원하는, 가장 큰 함정이다. 지상군 투입은 수니파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 가장 유용한 조치는 IS의 주 수입원인 원유 수출을 막아 경제적 생명선을 끊는 것이다.”
―지난해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 파리 테러 사건으로 프랑스는 국가적 위기를 겪었다. 프랑스가 집중 타깃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수니파 무장 집단 IS는 프랑스가 말리에 파병해 IS가 그곳을 점령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프랑스를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 또 프랑스는 인구의 10%가 무슬림으로 유럽에서 가장 많다. IS는 프랑스에서 ‘이슬람 혐오’ 감정을 부추기고자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 프랑스만 테러의 표적이 된 것은 아니다. 터키, 영국, 스페인, 덴마크, 미국…. 현재 유럽을 비롯한 모든 국가는 일상에서 테러의 위협을 겪고 있다.”
―파리 테러 이후 각국에서 이슬람에 대한 증오 범죄가 발생하고 있다. 급기야 미국에서는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가 ‘무슬림 입국 금지’ 발언까지 했는데….
“이슬람 혐오와 테러리즘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볼 수 있다. IS는 서구권 국가를 공격하면서 해당 국가에 사는 무슬림 인구에 대한 혐오 감정을 유발해 이들이 이슬람 극단주의로 넘어가도록 하는 전술을 쓰고 있다. 이 함정에 빠지는 트럼프와 같은 정치 지도자들은 테러와 맞서 싸운다면서 테러를 도와주고 있는 셈이다. 무슬림과 IS가 행하는 테러 행위를 동일시하면 안 된다. ‘11·13 파리 테러’에서 사람들은 인종과 신앙을 불문하고 공격받았다.”
―지난해 말 프랑스 지방선거 1차 투표에서 극우 정당인 국민전선(FN)이 1위에 오르는 돌풍을 일으켰다. 유럽 곳곳에서 반(反)이민, 반EU를 내건 정당이 득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높은 실업률이 첫 번째 이유다. 어떤 정당이 집권하더라도 일부 국민에게는 현재의 경제적, 사회적 위기와 실업 공포에 대한 표적이 필요하다. 좋은 뉴스는 자국(自國) 정권의 치적으로 포장하고, 문제점은 EU 탓으로 돌리는 나라가 늘어나고 있다. EU는 세계 인구의 6%,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22%를 차지하지만 복지에는 세계의 50% 정도를 지출한다. 이 때문에 EU 밖의 국민은 유럽 모델이 굉장히 성공적이고 매력적으로 보여 가입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정작 내부의 유럽인들은 EU의 경쟁력 상실에 실망하고 있다.”
―테러와 난민 위기에 맞서기 위해 유럽 각국에서 국경에 장벽을 세우고 통제를 강화한다. 유럽 내 자유로운 통행을 보장하는 솅겐조약이 사라지는 것이 바람직한가.
“지금 상황은 서유럽과 구공산권 바르샤바조약 국가들의 분열이다. 서유럽은 이주민을 받아들인 경험이 많지만 바르샤바조약 국가들은 이런 경험이 전혀 없어 난민 수용에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이슬람에 대한 거부감도 매우 크다. 해당 국가에 무슬림 인구가 거의 없는데도 말이다.”
세계는 새해부터 테러와 분쟁, 실업과 난민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유럽에서는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등으로 EU가 사라질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도 잇따르고 있다. 국제정치학자로서 유럽연합의 미래를 어떻게 보는지 물었다. 보니파스 소장은 “지난 2년간 ‘유로화의 죽음’이 거론됐지만 유로화는 결국 살아남았다”며 “인간의 합리적 이성과 상호 존중의 정신을 바탕으로 세워진 유럽연합은 결코 해체의 길로 나아가고 있지 않으며, 위기를 겪을수록 더욱 새롭게 발전할 것”이라고 희망을 피력했다.
※ 파스칼 보니파스는
○ 1956년 프랑스 파리 출생
○ 1985년 파리 정치대(시앙스포) 국제정치학 박사
○ 1991년 프랑스 국제관계전략연구소(IRIS) 창설
○ 1999∼2003년 프랑스 국제협력최고자문위원회 위원
○ 2001∼2005년 유엔 군축자문위원회 위원
○ 2013년 프랑스 국가 공로훈장 기사장과 레종 도뇌르 기사장
○ 현재 파리 8대학 유럽학 연구소 교수
○ ‘전략연감’과 계간 ‘국제전략학술지’ 발행인 겸 편집주간
○ 주요 저서: ‘위기와 분쟁의 아틀라스’ ‘세계의 진실을 가리는 50가지 고정관념’ ‘핵의 세계’ ‘4차 세계대전이라고?’ 등 50여 권
파리=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 2015.08.29 피에르 가니에르… '요리계의 피카소'
"미슐랭 별은 날 돌아보게 하는 채찍… 내가 나를 최고라고 하는 순간 끝이다"
미슐랭 별을 두세개씩 받은 요리사 512명에게 물었다… 누가 최고의 요리사인가?
스타 셰프들이 대답했다… "그는 바로 가니에르다"
올해 초 프랑스 음식 전문지 '르 셰프(Le Chef)'는 세계적 레스토랑 평가서 미슐랭가이드에서 별 2~3개(별 3개가 최고 등급)를 받은 요리사 512명에게 물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가장 뛰어난 요리사는 누구인가?" 역대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자들에게 '가장 연기 잘하는 배우'를 묻거나, 그래미상 수상 가수들에게 '최고로 노래 잘하는 가수'를 물어본 격이다.
문자 그대로 '최고 중 최고'로 뽑힌 요리사는 '요리계의 피카소'라는 피에르 가니에르(65)였다. 1위로 뽑힌 그의 뒤를 이어 프랑스의 고답적 조리법에 새바람을 몰고 왔던 폴 보퀴즈, 스페인의 후안 로카, 토마스 켈러, 알랭 뒤카스 등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최고' 반열에 올랐다.
가니에르는 2008년 10월 미슐랭 별 셋 요리사로는 처음으로 한국에 자신의 레스토랑을 열었다. 롯데호텔에서 70억원을 투자해 서울 중구 소공동 본점에 그의 이름을 딴 식당을 유치했다. 파리, 런던, 도쿄, 라스베이거스, 두바이, 모스크바, 홍콩 등에 레스토랑 12곳을 운영하는 가니에르는 1년에 두 번씩 서울에 들러 레스토랑 운영 현황을 점검하고 조리 기법을 전수한다. 그가 머무르는 일주일간은 발 빠르게 예약해둔 고객들로 연일 만석이다.
방한 중인 가니에르를 지난 24일 그의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최고의 요리사'는 "아직도 가끔 내가 요리를 좋아하긴 하는지를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고 했다.
▲피에르 가니에르
아직도 자문한다, 내가 요리를 좋아하는가를
점심 시작을 한 시간 앞둔 오전 11시, 180㎝ 장신(長身)의 가니에르는 청바지에 흰 조리복을 입고 성큼성큼 식당으로 들어섰다. 대가(大家)에게 최고가 된 비결을 먼저 물었다. 부드럽게 웃던 그는 "남들이 나를 최고라고 해도, 내가 나를 최고라고 하는 순간 끝"이라고 말했다.
―스스로 보기에는 최고가 아니라는 뜻인가.
"최고라고 평가해준 것은 계속 더 노력하라는 뜻이다. 장점과 가치를 인정받는 데에는 책임감이 따른다."
―주방의 철학자라고들 하는데, 당신의 음식 철학은 무엇인가.
"정직한 요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리는 컴퓨터로 하는 게 아니라서 결과를 예측할 수 없고, 완벽하게 준비할 수 없다. 재료 앞에 정직하고 함께 일하는 팀에게 정직하며 손님에게 정직해야 한다. 가식 없이 진정한 자신만이 주방에서 돌아다녀야 한다."
―미슐랭가이드에서 일찌감치 별 셋을 받았다. 미슐랭의 별은 당신에게 무엇인가.
"별은 나의 요리를 돌아보게 하는 채찍과 같다. 여러 레스토랑을 총괄 지휘하다 보면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틈이 생긴다. 제3자의 날카로운 눈이 있어야 긴장과 경쟁이 있지 않겠나. 간혹 별 개수가 논란이 되기도 하는데, 요리사나 식당을 위해서가 아니라 손님을 위해서 요리사가 더 노력하도록 반짝이는 별로 존재한다면 가치가 있다고 본다."
―별을 잃을까 봐 자살한 요리사도 있다(2003년 프랑스 요리사 베르나르 루아조는 별 둘로 강등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자살했다). 별이 그렇게 중요한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걸 두고 걱정하지는 않는다. 걱정은 나약함의 증거다. 머리로는 고민을 하더라도 (남들에게 보이는) 손은 떨지 않아야 한다."
―별 2개와 3개의 차이는 뭐라고 보나.
“들라크루아나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좋아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거나, 느낌은 다를 수 있다. 공통적인 것은 그들의 작품을 보는 것이 다른 데서는 얻을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라는 점이다. 별 셋 레스토랑이 되려면 위대한 화가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특별하며 이야기가 있는 경험을 선사해야 한다.”
<②편에계속>
▲지난 24일 서울 중구 소공동에서 만난 피에르 가니에르는“요리는 영원한 탐구”라며“단 한 번도 내 요리에 만족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에게 만족감을 주는 것은 요리가 아니라 요리를 먹고 난 손님들의 가슴에 남는 즐거운 추억이다. / 김지호 기자
<①편에서 계속>
모태(母胎) 직업… 다른 길은 생각해본 적도 없다
가니에르는 프랑스의 루아르 지방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둘 다 요리사였다. 네 자녀 중 장남인 그는 가업(家業)을 이어받아 요리사가 되도록 정해져 있었다. 선택의 여지 없이 받아들여야 했다는 점에서, 그는 "요리는 운명"이라고 했다.
생테티엔(Saint Etienne)에 자신의 첫 레스토랑을 연 것은 서른한 살 때인 1981년. 이듬해 바로 미슐랭 별 하나를 땄다. 1993년 드디어 별 셋. 40대 중반에 정상에 선 듯했으나, 3년 만에 파산했다. 남자 나이 마흔여섯, 전 재산인 레스토랑을 잃은 그는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터널을 지나는 듯했다"고 회고했다. 모든 것을 잃었구나 싶었으나 한 가지 남은 것이 있었다. 자신의 요리에 대한 확신이었다.
▲피에르 가니에르가 2015년 8월 24일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지호 기자
"외부 평가는 좋았는데 워낙 경기가 좋지 않아 손님이 없었다. 그래도 내 음식을 믿었고, 내 음식을 믿어준 사람들을 믿었다."
대도시 파리로 간 그는 6개월 만에 다시 레스토랑을 얻었다. 별 셋을 다시 따는 데에는 2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정신적·재정적으로 충격이 컸을 텐데, 중년에 겪은 파산의 위기를 어떻게 넘겼나.
“요리 이외에 다른 걸 하는 건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이걸 하기로 태어난 거고,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요리로 망해도 요리로 돌파해야 하는 것이 내 운명이라고 믿고 받아들였다.”
―그때의 위기가 이후 요리에 영향을 끼쳤나.
“망했을 때도 내 요리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옳고 잘한다고 해도 그 외의 조건이 나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경험은 나의 시야를 크게 넓혀줬다. 돌아보면 40대 중반의 처절한 실패가 오늘의 나를 만든 것 같다.”
―요리사가 된 것을 후회해본 적은 없나.
"애초부터 내가 선택해서 요리사가 된 것이 아니었으니 후회는 없다. 그저 날 때부터 요리사로 태어났다. 굴레이지만, 유일무이한 길이라는 점에서 긍지이기도 하다."
―언제부터 요리를 진정으로 좋아하게 됐나.
"내가 음식을 만들지만, 식탁 위의 결과물을 보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해놓은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요리하는 순간에는 내가 아닌 사람이 하는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이 접시 위로 옮겨지는 걸 즐긴다. 미슐랭 별 셋을 받았어도, 아직도 가끔 나는 '내가 정말 요리를 좋아하긴 하는가?' 하고 자문(自問)한다."
◇미슐랭 별은 채찍… 손님 위해 요리사에게 내리쳐
가니에르는 미식가도 경탄하게 만드는 새로움으로 콧대 높은 파리지앵들을 사로잡았다. 맛, 향, 온도에 따른 식감 변화, 모양, 색, 닮음새, 분위기 등이 예상을 벗어나는 경탄의 연속이다.
일간지 르 피가로는 "피에르 가니에르에서 식사를 하고 있자니, 해변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고래가 된 기분이었다"고 쓰기도 했다. 그만큼 예측을 불허하는 메뉴가 이어진다는 뜻이다. 초콜릿 디저트를 먹는데, 알고 보니 장어가 들어 있다면? 그 맛이 어떤 디저트보다도 달콤하다면? 아이디어에 놀라고 조리법에 호기심이 부풀어오른다. 그래서 그의 파리 레스토랑은 1인 저녁 식사가 70만원에 가까운데도 몇 달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자리가 없다.
<③편에계속>
<②편에서 계속>
가니에르는 "요리는 영원한 탐구"라며 "한순간도 요리를 머리에서 떼어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식사가 손님의 식탁으로 옮겨지기 직전까지 조리법을 고민하다 마지막에 확 바꿔버리기도 한다. 재즈 트럼펫 주자 쳇 베이커, 화가 잭슨 폴록,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글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했다.
"자신을 예술가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는 한숨을 쉬며 "불행하게도 그렇다, 불행하게도"라고 했다.
―예술가인 것이 왜 불행한가?
"예술가는 절대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평생 피곤하다. 불행한 거지."
―자신이 만든 음식에 만족한 적이 없나?
"한 번도 없다. 요리는 결과물에 대한 만족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거나 새로운 발견을 하는 기쁨 때문에 하는 것이다."
―화가는 그림을 남기고 작가는 책을 남긴다. 음식은 남는 게 없다. 허무하지 않은가.
"어젯밤에 고객들에게 문자를 받았다. 런던의 한 고객은 '잘 먹었어요, 멋진 밤이었습니다'라고 보냈고 '매우 즐거웠다'는 문자도 왔다. 요리는 사라져도 추억이 남지 않는가. 순간의 감정이 빚어낸 둘도 없는 작품이다."
―다른 요리사의 요리를 먹고 질투해본 적이 있나.
"'이건 정말 훌륭한걸'이라고 감탄이 나올 때가 있었다. 제럴드 파세다의 별 셋 레스토랑 '르 프티 니스'에서 맛본 토마토와 성게 요리, 1983년 먹어본 미셸 호와스의 요리는 단순하면서도 우아해서 좋았다."
―정상의 요리사는 대부분 남자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나.
"요리사의 첫째 조건 중 하나가 체력이다. 하루 16시간 이상 서서 일해야 하는 고된 일이다. 체력적으로 남자들이 더 강하다 보니 생겨난 현상이라고 본다. 최근에는 여성 요리사가 많이 늘어나고 있다. 고무적인 일이다."
―한국에서는 요즘 TV 요리 프로그램에 나오는 요리사가 인기다. 실제와 달리 과장된 모습으로 요리를 오락화한다고 비판받기도 하는데, 어떻게 보나.
"내가 요리를 시작하던 시절만 해도 솔직히 직업을 밝히기 힘들 만큼 천대받았다. 지금은 뜨는 직업이 됐는데, 대중매체 속 스타 요리사가 공헌했다면 칭찬해줄 만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요리사라는 직업은 그렇게 멋지지 않고 누추하다는 점은 알아야 한다."
―만약 섭외를 받는다면 나설 생각이 있나.
"TV 프로그램은 게임이고 쇼다. 나와는 상관없다."
―죽기 직전 한 가 지 음식을 먹는다면 무엇을 먹고 싶은가.
"당장 오늘이나 내일 죽는다고 하면 뭘 먹을지를 생각할 것 같지 않다. 그 하루를 어떻게 충실히 살지를 고민해야겠지."
인터뷰 도중 그의 저서에 사인을 받으려는 손님들이 책 두 권을 전해왔다. 주방에서는 그의 지시를 기다리는 요리가 대기 중이었다. 자리를 뜨기 전 그는 "나는 나, 그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프로 요리사로 살아온 지 40년쯤 되는데, 그간 나의 요리도 피카소의 청색 시대나 장미 시대처럼 변화가 있고 구분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최고로 뽑히든 아니든, 시기가 변하든 아니든, 나는 피에르 가니에르다. 그거면 됐다."◎
신정선 주말뉴스부 기자 E-mail : violet@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