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雜事(한국사 세계사) 2021
발굴 월간조선 06월 호 2021
■‘殉敎 100주기’ 1946년에 간행된 《김대건 신부》
“5000년 忠孝의 조선아! 이 보배 또 아느냐”
⊙ 일제강점기 펴낸 《수선탁덕 김대건》(1942)… ‘조선 귀국 100주년’ 기념 간행
⊙ 대구가톨릭청년회가 펴낸 《김대건 신부》(1946)… ‘殉敎 100주년’ 추모 간행
⊙ 《김대건 신부》에 실린 12수 聯시조… 문학적 가치 따져봐야
▲故 문학진 화백의 작품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초상화〉. 사진 제공=한국천주교주교회의
올해는 한국 천주교 김대건(金大建·1821~1846) 신부가 탄생한 지 200년이 되는 해다. 세례명 안드레아.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다. 유네스코는 제40차 총회에서 김대건 신부를 ‘2021년 세계기념인물’로 확정한 바 있다.
김대건은 1821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26세인 1846년 순교(殉敎)로 생을 마감했다. 비록 생애는 짧았으나 삶은 극적이었고 ‘밀알’이 되어 가톨릭을 뿌리내리게 만든 주인공이다.
▲《김대건 신부》(1946)와 《수선탁덕 김대건》(1942).
김대건 신부와 동향(同鄕)인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이근배(李根培) 시인이 두 권의 책을 《월간조선》에 공개했다. 《수선탁덕 김대건》(1942년)과 《김대건 신부》(1946년).
《수선탁덕 김대건》은 김대건 신부가 마카오 신학교를 떠나 1842년 조선으로 첫 귀국을 시도하던 때로부터 꼭 100년이 지난 1942년에 간행된 책이다. 지금은 잊혔지만 한국 천주교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알려져 있다.
또한 대구가톨릭청년회가 펴낸 《김대건 신부》는 지금까지 거의 소개되지 않은 김대건 관련 소(小)책자다. 꼭 100년 전인 1846년 순교한 김대건을 추모하기 위해 간행됐다. 간행 시기가 좌우이념 대립으로 어수선한 광복 직후라는 점, 천주교 대구교구장이 일본인에서 한국인으로 바뀐 직후라는 점에 눈길이 간다.
이 두 책을 통해 한국인 신앙 속에 가톨릭이 뿌리내릴 수 있었는지 모른다. 《월간조선》은 두 책의 내용 일부를 연대(年代) 흐름에 맞게 발췌해 소개한다. 원문을 살리되 현대어 표기에 맞게 수정했음을 밝혀둔다.
① 《수선탁덕 김대건》(1942)
[편집자 註]
▲《수선탁덕 김대건》의 책 판권. 책의 편집 겸 발행인은 구로가와(黑川米尾) 신부로 적혀 있다.
《수선탁덕(首先鐸德) 김대건(金大建)》은 1941년 10월경 서울 명동성당 유영근(兪榮根·1906~1950) 신부가 저술하였다. 책 머리말에 ‘소화(昭和) 16년’, 판권에 ‘소화 17년’이라 적혀 있다. 1941~42년 사이에 책이 만들어지고 출간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편집인 겸 발행인은 구로가와(黑川米尾) 신부다. 일본인 신부를 앞세워 일제의 종교탄압을 막기 위해서였다. 발행처는 ‘천주교회’.
김대건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1784) 이후 한국인으로서는 가장 먼저 사제(司祭)로 서품되어 ‘수선탁덕’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수선은 ‘가장 먼저’라는 뜻, 탁덕은 ‘사제(司祭)’를 뜻하는 중국식 표현이다. 수선탁덕은 1846년 순교 이후 김대건 신부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책이 간행되기 꼭 100년 전인 1842년 당시 김대건 신부의 행적은 이렇다. 김대건 신부는 그해 2월 15일 프랑스 함대 세실 제독의 에리곤호에 승선, 마카오를 출발했다. 조선 천주교회의 밀사 김 프란치스코와 상봉했으며 그해 12월 29일 평안도 의주를 통해 조선에 일시 귀국했다. 신학생 후보가 되어 조선을 떠난 뒤 7년 만의 귀국이었다. 다음은 《수선탁덕 김대건》의 일부 내용이다.
1. 탄생
▲김대건 신부의 생가가 있는 충남 당진시 솔뫼성지.
(전략) 성벽과 같이 솟아 있는 개산에서 뻗어 나온 작은 산맥들이 꿈틀거리는 벌레와 같이 소들을 향하고 엎드려 있으니 산맥과 산맥 간에는 들이 기어들어 가서 구불~ 시내의 모양을 이루었다.
작은 산등을 뒤에 지고 작은 들을 앞에 안고 몇십 호씩 들어앉은 촌락 중에 놀매라 하던 동리가 있었다. 지금은 솔뫼(원문은 솔미-편집자)라 하고 관명은 범천, 송산리(松山里)라고 한다. 여기가 곧 우리 복자(福者·순교자일 경우 순교 사실이 밝혀지거나 순교자가 아닐 경우에는 기적이 적어도 2회 이상 일어난 사람-편집자) 안드레아 김 신부님의 태생지요, 때는 성하염천 하 일만초목에 녹음이 짙던 8월 21일이었다.
안드레아는 1836년 영세할 때 받은 본명이요, 어려서는 재복(再福)이라 불렀으며 자는 대건(大建)이요, 보명(譜名·족보에 오른 이름-편집자)은 지식(芝植)이라고 기록되었다.
그 부친은 김제준(金濟俊), 자는 신명(信明)이요, 보명은 제린(濟麟)이니 이가 곧 복자 김 이냐시오이요, 모친은 고(高) 우르술라이시다.
2. 소년시대
▲2014년 8월 15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김대건 신부의 생가가 있는 충남 당진시 솔뫼성지를 방문해 기도를 올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조선 속담에 ‘나무는 떡잎 적부터 안다’ 하였다.
사실 성현이나 위인호걸의 역사를 본다면 흔히 그 어렸을 적부터 남다른 무슨 특점이 있음을 보게 된다.
안드레아 신부의 끼치신 그 위업(偉業)을 보아 그 어렸을 적에 얼마나 남달리 두뇌가 명철하였으며 심리가 바르고 성질이 민첩하며 또는 활발하였을까를 어렵지 않게 점칠 수 있는 바다. 그러나 그 소년시대의 일화(逸話) 한 토막도 전하여 있지 못함은 크나큰 유감이다. 오직 조선 가톨릭 교회사의 권위 높으신 삐숑(피숑·Leon Pichon·한국명 宋世興·1893~1945·한국 천주교회사를 처음으로 연구한 선교사 연구자-편집자) 신부님의 저서에서 아래와 같은 간단한 구절을 얻어 보게 된다.
‘(김재복) 소년은 그때 양반의 자제들과 같이 품행이 단정한 중 한문을 공부하고 있었다. 신체는 좀 허약한 편이었다.’
이는 추측상으로도 어그러짐 없는 사실로 믿는다.
우리의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주신 표양 그대로 재복이 소년은 그 ‘부모에게 순종하야 받드’셨다.(루카 2, 51) 성 아오스딩(아우구스티누스-편집자)의 말씀과 같이 ‘순명지덕이 가장 큰 덕행이다. 그리하야 말하자면 모든 덕이 근원이요 어머니다.’ (중략)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천부적으로 여러 가지의 권능이 있는 것이요, 그 받은 능이 강하다면 강한 만큼 그 능을 발휘시키기 전에는 불만을 멸할 수 없는 것이다.
명철한 두뇌를 가진 그들이 다시 말하면 철학적 정신을 가진 그들이,
인생은 어데서 온 것인가?
인생은 왜 세상에 사나?
인생은 최후에 어데로 갈 것인가?
등의 인생문제를 생각 아니 할 수 없는 것이요, 연구에 따라 복잡한 또는 다단한 번민을 느끼면서도 그래도 얼마간 해독을 얻기 전에는 불만의 불만을 품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역사가 또한 잘 증명하여 주는 일이다.
조선학자들이 역사 선배(先輩)의 끼쳐준 유서(儒書)나 불경(佛經)으로써 만족을 얻지 못하고 언제나 몇몇 동지가 모이는 때에는 흔히 우주론이나 인생문제 같은 고상한 문제가 화제에 오르게 되던 것이다.
중국에 리마두(利瑪竇·마태오 리치·1552~1610·이탈리아의 예수회 선교사-편집자), 남회인(南懷人·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1623~1688·벨기에의 예수회 선교사-편집자), 탕약망(湯若望·아담 샬·1591~1666·독일의 예수회 선교사-편집자) 같으신 학자 신부님들이 포교하시던 때이다. 이러한 신부님들의 저서가 다행히 조선학자들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 글을 읽음에 따라 조선학자들의 심중에 끼쳤던 의문의 안개가 사라짐을 깨닫게 되었다.
‘의덕을 주리고 목말라하는 자는 진복자로다. 저들이 배부를 것임이’(마태오 복음 5, 6)
(현재 가톨릭 성경은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편집자)
진리에 목말라하던 그들은 천주교회의 서적을 계속하야 탐독하였고 읽으면 읽을수록 환연빙석(渙然氷釋·얼음이 녹듯 의문이 풀리는 모양-편집자) 이연이순(怡然理順·기쁜 마음으로 도리에 순종함-편집자)이라는 문자가 있음과 같이 과거의 오류(誤謬)는 봄바람에 얼음같이 없어지고 순리를 깨닫게 되었다.
‘천주께 가까이 갈 지이다. 이에 천주 너희에게 가까이 오시리라.’(야고보서 4, 8)
(현재 가톨릭 성경은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편집자)
진리를 찾기에 여념이 없던 그들에게 주의 성우(聖佑·하느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편집자)가 박차를 달아주어서 급기야 그들에게 구령(救靈·신앙으로 영혼을 구원함-편집자)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 × ×
‘생애사정에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운 세속의 아들들은’(루카 16, 8) 이익을 위하야 험한 산을 오르고 바다를 건너며 양(洋)의 동서를 가리지 않고 답파하야 짐승의 꼬리 하나라도 남기지 않고 거두고 있었다.
교회가 성행하는 나라에 열심한 신도들 역시 남의 구령사정에 특히 여의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외방에 미신자(未信者)들의 구령을 생각하야 친척과 이별하고 고국을 등지며 멀리~ 극동으로 포교의 길을 떠나오는 서양 선교사들의 수가 늘어가고 있었고 그들의 동양의 땅을 밟는 때에 이미 먼저 장사꾼들의 발자국이 있음을 보고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만난을 무릅쓰고 생명을 걸고 온 그들의 열성은 놀라웠지만 여러 가지 환경은 그들에게 오직 불리하야 역사를 읽는 이는 누구나 안타까움을 아니 느낄 수 없다. 더욱 조선 전교 사정이 그러하였다. (중략)
조선에 들어오신 라 신부[Pierre Maubant·피에르 모방 신부·한국명 나백다록(羅伯多祿)·1803~1839-편집자]께서는 들어오신 그 즉시로 다대한 곤란 중에 조선어를 연구하시며 조선풍습을 배우시는 일방 조선교회의 당시 형편을 살피시며 사무를 시작하셨고, 또는 장래 방침을 생각하시기에 분망(奔忙)에 분망을 거듭하셨다.
그 어느 날이다. 협착한 조선집의 방 한 칸을 지키고 계신 라 신부께서 우울한 중에서 무엇을 깊이 생각하시고 계셨다.
그 얼굴은 더욱 엄중하셨고 그 입은 침묵에 굳게 닫혀 계셨다.
라 신부께서는 멀리 이역(異域)에 있는 외로운 몸으로서 고향이나 혹 친우들을 생각하심이런가?
아니다!
그러면 탁덕의 일생에 주요한 부분인 기도 중이시던가?
아니다!
혹 그러면 여러 방면에서 느끼시는 고통 때문에이시던가?
그도 아니다!
라 신부께서 조선교회를 얼마간 살피신 후 장래의 교회 발전상 몇몇 가지를 결정하셨다.
첫째, 당시에 이미 중국인으로서 조선에 체류 중이던 바드리시오 유(劉) 신부[유방제(劉方濟) 신부·순조 33년인 1833년 조선에 들어왔다-편집자]가 더 오래 조선에 계실 필요가 없음을 아시고 곧 중국으로 돌아가시게 할 것이었고, 둘째는 이미 국경에서 입선의 기회를 기다리고 계신 정 신부와 뒤따라 제2차 조선 교황 대리 감목으로 임명되신 범 주교 각하를 조선에 무사히 들어오시도록 주선할 것이었으며[정 신부는 샤스탕(Chastan) 신부, 범 주교는 앵베르(Imbert) 주교-편집자]
셋째로는 조선교회의 기초를 견고히 세우기 위하야 무엇보담도 본토인 성직자 양성의 필요를 느끼사 유망한 조선 아동을 선택하야 유학시킬 문제 등이었다.
이 문제의 소년은 곧 김재복이었다
사실 신학생 유학문제에 있어서 이미 소년 두 명을 결정적으로 간선하야 당신 집에 유숙시키시고 계셨다. 그러나 내포에 가서 전교하실 때에 장래성이 있어 보이는 소년 한 명을 보시고 당신 댁에 부르셨으나 이를 다 본 아이들과 함께 유학시키실 문제에 있어서는 십분 주저와 고려(考慮)의 필요를 느끼심이었다.
▲1972년 5월 14일 김대건 신부 동상 제막식(절두산) 모습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제막식에 참석했다. 사진제공=천주교 서울대교구
이 소년은 이미 그 증조 되는 김비오(운조·運祚)씨부터 교회를 알아 받들어 그 증조는 1814년경에 충청도 해미에서 사망하고 그 후 박해 당시임에도 신자들이 각각 헤어져 흔히 서로 소식도 없이 살았으며 또한 다년간 지도하여 주시는 목자도 없이 지냈고 설혹 신부께서 계신 때라도 신부를 만나 뵈옵기는 극난하였다.
하여튼 여러 가지 사정으로 김재복이라는 소년이 1836년에 이르러서만 라 신부님께 영세하야 안드레아라는 본명을 받았고 또한 견진(가톨릭의 일곱 성사 가운데 하나-편집자)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후 8월 11일부터는 신학생의 지원자로 신부 사택에 머물러 이왕 배우던 한문을 더욱 숙달하고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학생을 선택하시는 라 신부님께서는 그 책임상 소년의 일거일동에 있어서 또는 그 가진 소질과 성질에 있어서 살피실 바이었고 더욱 이 소년의 영세한 기간이 짧은 만큼 일층 더 충분한 시련을 하실 것이었다.
신학생으로 결정할 것인가? 그리고 다른 동무와 같이 유학을 보낼 것인가?이렇게 기도로써 주의 성의를 구하시는 동시에 깊은 생각에 잠겨 계시던 것이었다.
앞으로 만단고초와 싸우고 필요하다면 생명을 이바지할 것을 각오하며 주의 영광을 위하야, 교회의 사업을 위하야, 남의 구령을 위하야 모든 것을 희생할 일꾼인 만큼 주의에 주의를 기하야 고르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다.
② 《김대건 신부》(1946)
[편집자 註
▲《김대건 신부》의 책 판권. 인쇄일은 1946년 9월 26일, 발행일은 10월 1일로 적혀 있다.
책의 부제는 ‘조선이 낳은 세계적 위인 순교자 (안드레아)’이다. ‘대구가톨릭청년회’ 발행이다. 당시 대구교구는 전후(戰後) 한국 천주교의 중심 역할을 할 때였다. 책 판권에 인쇄 1946년 9월 26일, 발행 10월 1일로 적혀 있다. 머리말에는 ‘9월 12일 책을 펴낸다’고 밝히고 있다.
100년 전인 1846년 9월 16일은 새남터에서 김대건 신부가 군문효수(軍門梟首)로 처형된 날이다. 따라서 순교 10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책을 펴낸 것이다. 책 끝에 ‘축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 기념’이라 적혀 있다.
책의 저작자(著作者)는 주재용(朱在用·1895~1975) 신부다. 3대 대구교구장인 일본인 하야사카(早坂久兵衛·1887~1946) 주교가 1946년 갑자기 선종하자 뒤를 이어 교구 임시관리자가 되었다. 주재용은 그해 2월 27일 ‘십자가로 구원(Salus in Cruce)’으로 사목지표를 정하고 계산 주교좌성당에서 제4대 대구교구장으로 착좌하였다. 주 교구장은 해방 직후 어수선한 상황에서 교육 사업에 애정을 쏟았다. 그해 9월 대구 대건중학교, 11월 경북 왜관 순심중학교, 이듬해 1947년 4월 김천 성의학교, 1948년 부산공과학원을 설립하는 등 해방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앞장섰다는 평가다.
책의 발행자는 대구가톨릭청년회 총무부장 김점묵(金占默)이다. 그는 1928년 대구고보(현 경북고) 맹휴사건에 가담해 제적된 인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학생들이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 등을 요구하며 일으킨 동맹휴교 투쟁이다. “이순신 장군을 적(敵)”으로 규정한 일본인 교사의 발언이 빌미가 되었다고 한다.
《김대건 신부》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곳은 12수 연(聯)시조다. 김대건의 순교를 추모하고 고난을 찬양하는 시조가 인상적이다. 김대건이 15세 때인 1836년 경기도 용인의 은이 공소에서 세례받고 최양업(토마),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중국으로 출발하면서 겪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1940년대에 이런 연시조를 썼다는 사실이 놀랍다. 잘 쓴 작품이다. 시인 이근배도 “문학사적으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시조를 누가 썼을까. 주재용 교구장이 썼을까. 대구가톨릭청년회에서 썼을까. 책 머리글에 적힌 ‘일송(一松)’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책 내용 일부를 발췌해 소개한다
머리말
이 책은 한 사람의 역사를 간단히 적은 책자이로되 그 속에 스며 있는 암시(暗示)는 진실로 무한하도다.
‘인생은 어디로 쫓아오나 인생은 어디로 돌아가나 인생은 무엇을 하여야 하나’. 우리 민족의 철학적(哲學的) 세계관적(世界觀的)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투쟁, 이 투쟁이 마지막 낳은 씨가 이미 뿌려졌느니.
진리를 사랑하는 우리 민족의 넋, 정의에 희생하는 우리 민족의 피, 신앙을 전취(戰取)하는 우리 민족의 기상(氣像)… 한 사람은 이를 증명하였도다.
한 사람은 한 사람이로되 다시 억만 사람이요, 한 씨는 한 알의 씨로되 드디어 억만 광을 채우리로다.
1946. 9. 29. 일송(一松)
首宗徒 성 베드로는 이 우리 대건 선생에 비기면
저 소설가의 묘사의 한 장면으로서 웃통을 벗은 채 잠방중의만 허리에 두르고 어깨에 그물을 둘러메고 로마부 —저 마다니아가 그린 폐허의 폼페이를 능가하는 명실 그대로의 화도(華都) 로마부— 에 세계적 대학자, 대정치가로 뽐내는 그 철학가 그 귀족들 앞에 나타난 옛적 수종도(首宗徒) 성 베드로는 이 우리 대건 선생에 비기면 그래도 훌륭한 한 양반의 대우를 받음 직하였으리라.
그렇건마는 이 선생이 한번 상해 부두에 나타나매 그 남루한 차림 속에 그 학식(學識), 그 초췌한 몰골 속에 숨어 있는 그 인격(人格), 그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그 타고난 기상(氣像), 이 모든 것이 혜성(彗星)같이 한꺼번에 비추기 시작하였나니 영국 장교들을 만나면 영어로, 불란서 사람을 만나면 불어로, 지나(支那·중국-편집자) 관헌을 대하면 지나어로, 만나는 족족 거침없이 각각 그 나라 말로 담화를 걸며 개미떼처럼 달려들어 개구리떼처럼 시끄럽게 구는 지나 관헌들의 그 수없는 질문을 놀라운 웅변으로 일일이 막아내며 심지어 월권적인 불필요한 그들의 조사에는 작대기로 대답해주매 대국사람 지나 관헌들이언마는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 당시 두 나라 사이에 성문되어 있는 엄연한 국제법에 조선인으로서 지나 땅에 표풍해온 자는 반드시 북경천자께 보하여 그 배는 불사르고 그 사람은 조선 정부에 부치어 육로로 돌려보내야 할 명문이 소연함을 번연히 아는 그들은 이 법을 내세우면 “나도 두 나라 조약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육지로 조선에 돌아가는 것은 싫고… 우리 사정을 천자께 고하든지 말든지 당신네 권리이지만 그것은 나는 원치 않으니 그대들은 우리가 귀국(貴國) 연변에 와서 이 지방의 땅을 밟고 이 지방의 물을 마시는 것만 그대들이 알고 있으면 그만인 줄 안다” 하여 막아나가니 이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고민하던 끝에 그 상관인 송강부(松江府) 도독에게 보고한즉 “그이는 내가 잘 아는 이이니 천자께 보할 것도 없이 제 원하는 대로 제 배를 고쳐가지고 그 배로 제 나라에 돌아가게 가만두어라”는 밀령이 나리지 않는가. 이에 저 관헌들은 더욱 이상히 여기고 더욱 걱정되어 기어코 그 정체(正體)를 알아버려 아무리 머리를 썩여가며 애를 써보나 알아볼 길은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버려두자 하니 자기네 책임문제가 또한 크고 하여 오직 마음으로써 그 어서 하루 바삐 떠나주기만 고대하고 있었다 하니 이만하면 우리 선생의 그 기품과 인격이 어떠하였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이 선생은 송강부 도독만이 신임할 뿐 아니라 그 당시 엊그제 끝난 소위 아편전쟁의 전승자로서 상해 천지에 서슬이 푸르른 저 영국 장교들도 이 양반만은 극진히 후대하며 영국 공사는 바로 그를 팔인교(八人轎)에 태워 공사관을 무상출입하게까지 하지 않는가. 그 시 중국 관헌들과 민중이 이 어른의 정체를 알지 못하여 그 머릿속에 별별 가지 공상과 억측을 그려보아도 도저히 알아낼 길이 없으매 마침내 ‘구과이(古怪·불가사의하고 신비한 존재-편집자)’란 대명사(代名詞)를 덮어씌우고 말았다 함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이 이 폐의파립의 초췌한, 다 깨어진 죽장망혜 대활보(大步)로 좌왕우왕함 보는 우리 동족 겨레로서 그 아니 통쾌하며 그 아니 감개하랴. 저절로 어깨가 우쭐거려지고 저절로 뽐내고 싶은 생각이 절로 나지 않는가.
김대건 신부는…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되던 해 聖人 반열에 김대건 집안은 지금의 충청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에 자리했다. 김제준(이냐시오)과 고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1821년 8월 21일 태어났다. 경기도 용인의 은이 공소에서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1845년 8월 17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첫 미사는 그해 8월 24일, 마지막 미사는 1846년 4월 8일이었다. 그리고 그해 6월 5일 백령도에서 관헌에 붙잡혔고 9월 16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순교 후 김대건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1857년 ‘가경자’[可敬者·시복(諡福·복자로 선포하는 것) 후보자로 신자들에게 모범이 되는 사람]로, 1925년 ‘복자’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한국 천주교 선교 200주년인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해 성인[聖人·복자가 된 후 다시 두 번 이상 기적이 일어난 것이 입증되어 성인으로 선포하는 시성(諡聖)을 거친 사람]으로 선포했다. |
그의 學識, 그의 氣像, 그의 교양 깊은 人品
▲한국형 이콘으로 만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대관절 선생은 어찌하여 그때 거기서 이와 같은 인기(人氣)를 끌고 이와 같은 대우를 받게 되었던가.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의 학식(學識), 그의 기상(氣像), 그의 교양 깊은 인품(人品). 이것이 그렇게 만인의 인기를 끌게 하였던 것이니 이는 바로 저 미국 공사 포-베(M.Forbes)씨가 증명해주는 바이니 우리에게는 추호의 의점(疑點)의 여유도 있을 수 없는 바이다. 그 상해에 온 지 불과 며칠 되지 아니한 그는 “이 청년은 학식도 많고, 상식도 풍부하며, 여섯 나라 말을 할 줄 아는 청년이다. 그러기에 저 영국 장교들은 이 청년이 지식도 넓고 좋은 교양(敎養)도 받은 자이므로 그 교제하기에 매우 유쾌한 인격자임을 발견하였던 것이다”라 하여 이처럼 극구 찬양하는 말을 남겨두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평이며 이 얼마나 영예스런 찬사인가. 이러한 찬사, 이러한 평을 내린 자자가 그만저만한 보통사람이라면 또 모르되 적어도 일국을 대표한 고관(高官)으로서 문화의 수준이 높고 교양의 정도가 큰 학자, 정치가로서 그 보는 점이 남다를 것이요, 비판하는 판단력이 평범하지 아니할 것이어늘 이러한 자가 이러한 평을 내리게 될 적에야 다시 망설일 그 무엇이 또 있으랴. 더욱이 그 시대 그네들의 눈에는 저들만이 문화인(文化人), 저들만이 문명인(文明人)인 체 스스로 자처 자긍하는 한편 동양인은 보다 학식도 예의도 교양도 없는 야만인으로밖에 보이지 아니하던 그때인지라 동양 사람의 여간한 미점(美點), 여간한 우수성(優秀性)으로는 도저히 그들의 그 깊은 우월감, 그 강한 선입견을 깨뜨릴 수 없어 여간한 것쯤에는 그네들의 그 높은 코 끄트머리도 실룩거리지 아니할 정도이었다. 그렇거늘 이러한 그네들의 입에서 이러한 극도의 찬사, 찬평이 나오지 않고는 못 배길 지경이었다면 우리 선생의 그 인품 그 지식 그 교양의 정도가 어떠하였음을 가히 엿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선생의 육국말(6개 국어-편집자)에 대하여 조선말은 물론이려니와 중국말, 라틴말은 그 남겨둔 20여 통 서간이 증명함과 같이 우리네의 모어(母語) 이상 능란하였고 불란서말도 훌륭히 통어하실 만큼 배우신 증거는 약 8개월간 세실 함장의 통역관의 요직에 있음만 보아도 알 것이요, 영어 역시 오송항[우쑹(吳淞)은 중국 상하이 중심가에서 북동쪽으로 20km가량 떨어진 항구-편집자] 상해 등지에서 영국 장교들과 회화함을 보든지 더구나 당시 서간 중 친히 말씀한 바와 같이 영국 공사와 통변없이 직접 담화하였다 함을 보아 그 넉넉히 통화할 수 있는 정도임을 알겠는데 그 여섯째 나라말은 어느 나라 말이었는지 똑똑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음은 가장 애석한 바이다. 요동반도 대장하(大莊河) 부두에서 이태리말을 사용하였다 한 기록이 있으나 그때 그 환경을 보아 그 시에 사용될 말이 아니라 하여 보통 오자·낙서로 돌리거니와 천주교와 로마의 관계로 보든지 그 시 마카오에 포교선생 직속의 이태리인 선교사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사실 등을 참작하여 이태리말을 배웠거나 아니라면 적어도 포도아말(포르투갈어-편집자)을 배웠으리라 함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아! 그 시대 조선 안에 2000만 주민 중엔 서양 글의 꼴도 구경한 이가 없던 그 시대에 선생은 육국어를 알았으니 5000년 조선 유래에 이 어찌 끔찍한 일이 아니며 이 어찌 일대 경이적 인물(一大 驚異的 人物)이 아니리요. 근대적 세계 영웅 나파륜(나폴레옹-편집자)이 죽던 그해(1821)에 탄생한 우리 성웅(聖雄)으로 체번(替番)하신 것이나 아닐런가.
一大 驚異的 인물이 아니리요
▲김대건 신부의 두상. 가톨릭대 의과대학 해부학교실 응용해부연구소가 복원했다. 사진 제공=서울역사박물관
선생이 서울 옥중에 계실 때에 당신이 중국 어선(魚船)에 맡겼던 편지들이 발각 압수되어 경성에 들어오매 조정에서는 가장 큰 증거물이나 잡은 듯이 — 사실은 그 시대에 있어서 원자폭탄에 못지않은 위험물이 그 속에 있었음은 그 시 정부 몰래 조선 안에 잠복(潛伏)하고 있던 불국인(프랑스-편집자) 주교, 신부 두 분의 편지도 그 중에 들어 있었던 것인데 어전회의에 모인 그 정부 요로들은 서양 글씨를 처음 보고 놀라는 중, 선생의 쓴 편지와 서양인이 쓴 편지의 글체가 다름에 착안하여 “이 편지가 모두 네 손으로 쓴 것이라면 어찌하여 그 글씨가 이렇게도 다르냐” 하고 묻는 말에 그는 “한 사람의 글씨라도 그 잡은 편(철필)의 다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하여 이 일촉즉발의 위기를 모면하려 하였더니 그들은 또다시 “철필은 우리나라에 없으나 하여튼 한 사람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쓸 수 있다는 증거만은 댈 수 있으니 어디 이리 달라” 하여 그 새 깃을 먼저 매우 뾰족하게 다듬어가지고 가늘게 몇 자를 적어 보인 후에 다시 그것을 뭉툭하게 잘라 버리고 퉁퉁하게 만들어가지고 굵직굵직하게 큰 글자를 얼마 그린 후 “보시오. 이 두 글체가 그 얼마나 다른지 그러니 이 편지들은 다 모두 내가 쓴 것이지 다른 서양인이 이 땅에 있어서 쓴 것은 아니요” 하매 군신 상하가 모두 “○너니(옳거니?-편집자) 그, 그렇겠다”라 하여 곧이듣고 속아넘어가더라 하였으니 (중략)
대개 그 고대하던 순교의 날, 즉 군문효수(軍門梟首)의 날을 당하여 순량한 양(羊)과 같이 새남터 모래밭 사형장에 끌려온 선생님은 ‘사형의 죄목은 외국인(外國人)과 상종한 탓’이라 공포하는 포장의 사형선고문의 낭독이 끝나자 즉시 일어서 명랑하고 자약한 음성으로 자기의 사형당하는 참다운 이유를 설명함과 동시에 운집한 군중을 최후로 제성권면(큰소리로 격려하다는 뜻-편집자)코자 말씀하시기를 “나의 생명의 최후시각이 이르렀으니 제군은 나의 말을 들을지어다. 내가 외국인과 교제한 것은 다만 우리 믿는 종교와 우리 대군(大君) 대부모(大父母) 천주(天主)를 위하여 하였을 뿐이요, 그 외에 다른 뜻이 없었나니 나는 이제 오직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인즉, 내 앞에는 곧 영원한 생명(生命)이 시작될 것이다. 제군도 사후 영원한 복락을 얻으려 하거든 나와 같이 천주교인이 될지어다. 천주께서는 당신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영원한 불로 벌하시나니라” 하여 군중의 흉금을 울린 후 다시 좌 깃대 아래 꿇으시매 형역들은 그 머리에 줄을 잡아매어 좌 깃대 구멍에 꾀어 잡아당기니 자연 선생의 머리는 높이 달리었다. 이때이다. 선생은 극히 태연한 어조로 “이렇게 하면 칼로 치기가 좋으냐” 물어 형역의 “좀 몸을 이렇게” 하며 몸짓함에 따라 “자, 그럼” 하시면서 몸을 조금 고쳐주자 형역들의 칼날은 벌써 그 목을 한번 스르르 문지르고 지내간다. 이때 선생님은 “나도 이젠 내 할 일 다 했으니 너희도 어서 쳐라” 하시며 모래 우에 고이 내려놓이었다. 아 — 이 얼마나 태연자약한 기상이며 이 얼마나 순량한 고양(羔羊·어린양-편집자)의 희생인고. 종교적 입장을 떠난 순전한 민족적 견지에서 보더라도 이러한 위대한 인격자를 뉘 있어 부러워하지 않으며 뉘라서 심상히 보아 넘기고 말 것이랴. 오— 조선이 낳은 이 위인! 오! 조선의 이 보배! 이 보배를 아는 자 그 몇이나 되는고!
‘산천(山川)이 어둡거니 일월(日月)을 어찌 보며
지척(咫尺)을 모르거든 천리(千里)를 바라보랴
(중략) 그런데 이 대건 김 선생님의 그 십년간 남긴 행적이야말로 정말 너무나 극적이요 참말 너무도 탁월하여서 그를 일일이 소개하기는 이 제한된 면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므로 여기 오적 그 간단한 일람표를 제공하여 그 업적의 큰 윤곽만이나마 파악하게 하려 한다.
김대건 선생의 약력 일람표
1. 경기 용인 한덕동에 한문 사숙하는 어린 재복이 ‘글방 도련님’ 김대건(1821년부터 1836년 7월 10일까지)
2. 모정에 쌓인 조선을 뒤에 버리고 붕정만리의 길 떠나는 15세 ‘어린소년’ 김대건(만주 몽골 산서 중국대륙의 중앙을 뚫고 약 8개월 간 길손)
3. 산설고 물선 만리이역 마카오에 외로이 정학(精學)하는 ‘유학생’ 김대건(1837년부터 1842년까지)
4. 불국(프랑스-편집자) 동양함대장 세실 제독함 상에 오른 지나어(중국어-편집자) ‘통역관’ 김대건(1842년 2월 15일부터 9월 하순까지)
5. 양자강 하류 오송(吳淞)구에서 세실 함상을 하직하고 귀국 준비를 획책고자 황세흥(黃世興) 집에 신세기 치는 ‘외로운 손(孤客)’ 김대건(1842년 9월 하순)
6. 요동반도 대장하(大莊河) 부두 벌떼같이 덤벼드는 지나 관헌을 준책하여 외국인을 건져내고 백가점(白家店)에 은신한 ‘구호자(救護者)’ 김대건(1842년 10월 중순)
7. 8년 만에 다시 보는 내 고향 내 나라를 앞에 두고 동족에게 구축 받고 깊은 산, 찬 눈 위에 쓰러진 정체(正體) 모를 가련한 의주 변문[중국 국경 근처에 있는 변문진(邊門鎭)-편집자]의 ‘걸인(乞人)’ 김대건(1842년 엄동)
8. 장춘 서북 몽고 팔가자(八家子)에 전공의 신(神)철학을 완성하는 조선 초유의 ‘철학가’ 김대건(1843~44 양년간)
9. 백두산 눈보라는 뼈를 녹이고 만주벌 찬바람은 살을 에는 4000리 황야를 횡단하여 경원(慶源) 변문을 두드리는 수상스런 ‘홍차(紅茶)’장수 김대건(1844년 엄동)
10. 네 번째 모험으로 마침내 의주 변문의 경계망 뚫고 한양에 숨은 ‘저술가’ 김대건[1845년 춘(春)]
11. 일엽편주로 황해 노도(怒濤)와 싸우는 ‘모험적 항해가’ 김대건(1845년 4~5월)
12. 구사일생 오송구에 표류되어 영국함장의 구호를 청하는 눈치 빠른 ‘수완가’ 김대건(1845년 5월 하순)
13. 오송 관헌의 강경하게 주장하는 의법처치(依法處置)를 단호 거절하는 ‘웅변가’ 김대건(양국 조약에 배는 불사르고 사람은 나라에 부치어 육로로 귀국게 함)
14. 국제도시 상해 부두에 영국 장교들과 악수하는 조선 초유의 ‘사교가’ 김대건(1845년 6월 초순)
15. 영국 공사(公使)를 방문하고 팔인교(八人橋)에 태워 위의 품품하게 나오는 조선 초유의 ‘외교관’ 김대건(1845년 6월 초순)
16. 광풍노도에 찢기다만 일엽편주가 일시 전능 주(全能 主)의 엄엄한 성전으로 화할제 그 앞에 공손히 조력하는 ‘조제(助祭)’ 김대건(1845년 6월 초순)
17. 상해 관민(官民)들로 하여금 그 정체를 알지 못하여 머리를 썩히게 하는 그들의 구과이(古怪) 우리의 ‘신비객(神秘客)’ 김대건
18. 상해 관헌들의 그 성가신 질문을 작대기로 대답해주는 조선의 ‘큰양반’ 김대건
19. 그가 누군지도 모르고 열없이 전도하려 덤비는 영국목사 스밀 등을 함구무언케 하는 조선 초유의 ‘신학자(神學者)’ 김대건
20. 상해 김가항(金家港)서 성직(聖職)에 오르는 조선의 ‘첫 신부(神父)’ 김대건(1845년 8월 17일)
21. 상해 완당 성전에서 조선사람으로서 처음 미사성제를 거행하는 조선의 ‘첫 사제(司祭)’ 김대건(1845년 8월 24일)
22. 광풍노도에 포로되어 제주(濟州) 근해에 방황하는 라파엘호의 ‘선장’ 김대건(1845년 8월 31일부터 10월 12일까지)
23. 강경포 황산에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형설의 ‘개선자’ 김대건(1845년 10월 12일)
24. 10년간 그리웁던 어머님 모시는 ‘효자(孝子)’ 김대건[1846년 초 춘(春)]
25. 순위도(巡威島)의 이변으로 등산(登山) 해주(海州) 한양(漢陽)에서 열변 토하는 열렬한 ‘신앙표백자(信仰表白者)’ 김대건(1846년 5월 13일부터 9월 16일까지)
26. 서울 옥중에서 친히 만드신 세계지도 지리지(世界地圖 地理志) 등으로 임금을 위시하여 온 조선을 놀래게 하는 조선 초유의 ‘경이적 대인물’ 김대건(1846년 8월 하순)
27. 조선 위정자들의 사색(四色)투쟁과 실력무능을 보고 조선의 장래를 못내 설워하며 크게 우려하는 조선의 진수한 ‘우국지사(憂國志士)’ 김대건
28. 내외친지와 교우 일동에게 일일이 보내는 최후 고별사로서 순교를 각오하는 ‘부감목(副監牧)’ 김대건(1846년 7월 28일~8월 26일)
29. 새남터 모래사장에서 최후의 대(大)설교로 구름같이 모인 군중의 흉금을 울린 후 “내 몸을 이렇게 가지면 치기가 좋으냐” 물어 조금 이쪽을 땡겼으면 하는 형역의 말에 “자, 그럼” 하며 고쳐 앉은 후 시험해보는 듯 놀리는 희광이의 칼이 자릿자릿 하게도 그 울대머리를 스스로 문지르고 지내매 “나도 이젠 내 할 일 다 했으니 너희도 어서 쳐라” 하시며 사르르 눈을 감고 유유히 칼을 받는 영웅적 ‘대(大)순교자’ 안드레아 대건 김신부(1846년 9월 16일)
30. 십만 군중을 탄토하는 세계적 대(大)전당 로마 대성전에서 창조주 조물진주의 지상대리자 로마교황으로부터 세계의 사표(師表) 세계 인류의 활(活)모델로 표창받는 ‘성웅(聖雄)신자’ 안드레아 대건 김신부(1925년 7월 5일)
▲한국인 최초 신부인 김대건의 대형 동상과 순교박물관이 있는 절두산 순교성지 전경이다.
조선이 낳은 세계적 위인 천상 복자(福者) 안드레아 대건 김신부의 역사는 대강 이러하다.
× ×
十五세 어린몸이 괴봇짐 걸머지고
정든땅 뒤에두고 정처없이 길손되니
마카오 낯선땅아 박대말아 이少年
이역에 八개성상 반성공* 품에안고
네보山 찾노라고 요동땅 굽어드니
山川은 의구ㅎ건마는 건데없네 父子情
그립던 母子情을 지척에 끊어두고
편주에 맡긴몸이 노도에 포로되고
광풍에 까불린배는 그칠줄을 모르네
김가항** 탁덕승품 천고에 경사이요
강경포*** 금의환향 만고에 보배로다
五천년 忠孝의 조선아 이보배 또 아느냐
三千里 너른 강산 터좁다곤 못할지며
二천만 숱한동포 數적다곤 못하련만
沙장에 버린 저보배 임자없음 설어라
내겨레 내동포는 내몰라라 하던임을
하늘밑 온누리가 서로다퉈 찬양하네
鮮血에 주린조선아 언제까지 잠자려나
× ×
白頭山 나린물은 白鹿潭에 흘려있고
무궁화 고운꽃이 옥야청산 붉었으니
아마도 우리복자의 血滴인가 하노라
山허리 단풍잎은 실바람에 물결치고
가을밤 밝은달에 쌍기러기 노래하니
묻노라 철없는 너희들도 이날만은 아는고야
까마귀 눈비맞아 희는듯 검다마는
티없는 저달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信仰에 굳어진마음 칼날인들 어이리
솔숲을 이불삼고 돌틈에 베개삼아
三천리 너른땅에 갈데없어 헤맬적에
기어코 이기쁨있을줄을 뉘그때 알았으리
비단결 금수강산 가뜩이나 고운데다
때아닌 무궁화가 더한층 고운지고
무심한 조선兒들아 뉘덕인줄 아느냐⊙
[편집자 註] *반성공: ‘八개성상 반성공’은 마카오로 떠난 조선인 8명(3명의 신학생 후보 김대건·최양업·최방제 포함)이 황해도 개성(開成) 상인으로 변장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해석으로 여덟 해, 혹은 8개 성상(聖像)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또 ‘반성공’은 ‘반드시 성공’으로 추측된다. **김가항: 김대건 신부는 1845년 8월 17일 상하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탁덕은 ‘천주교회의 사제’를 뜻하는 중국식 표현이다 ***강경포: 김대건은 1845년 10월 12일 충청 강경 부근의 황산포에 도착해 포교활동에 나섰다. |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월간조선 07월 호 2021
■ 역사 속 세금, 세금 속 역사
“한 나라가 끝나고 다음 나라가 와도 稅吏는 있다” (6000년 전 수메르의 점토판)
“너에겐 神도 있고 王도 있고 사람도 있다.
하지만 네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稅吏이다.”
⊙ 오줌세, 난로세, 창문세, 수염세, 금욕세… 희한한 세금들
⊙ 근대적 소득세는 나폴레옹전쟁 중이던 영국에서 탄생… 美 소득세, 상위 1%가 내는 부유세로 출발
⊙ 뮌헨 세무서장, 히틀러의 체납액 면제해주고 국세청장으로 벼락출세
⊙ 스페인의 알카발라세, 상공업자와 서민들에게 과중한 稅 부담 안기고, 포르투갈·네덜란드 독립 촉진시켜
⊙ 세금이 원인이 된 청교도혁명, 미국 독립전쟁, 프랑스대혁명, 비틀스 해체
▲영국의 과중한 세금 부과에 대한 항의로 발생한 ‘보스턴 티 파티 사건’은 미국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1799년 7월 이집트를 원정 중이던 나폴레옹군(軍)은 알렉산드리아 동쪽의 한 작은 마을에서 망루 보수 작업 중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새겨진 현무암 돌조각을 발견했다. 후일 로제타석(石)으로 알려진 이 돌에는 세 가지 문자가 새겨 있었다. 하나는 고대(古代) 이집트 사제(司祭) 계급이 사용하던 신성(神聖)문자, 하나는 이집트 민중문자, 하나는 그리스 문자였다.
세 가지 문자로 그 내용을 기록했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바로 ‘세금’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 비석이 세워진 기원전 196년 무렵 이집트는 무거운 과세(課稅)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 끊이지 않았고, 그로 인해 나라는 내란(內亂) 상태에 빠져 있었다. 새로 즉위한 젊은 왕 프톨레마이오스 5세는 세금 체납자들과 조세저항으로 인해 투옥된 사람들을 사면하는 한편, 사원(寺院)에 대한 면세(免稅) 혜택을 재확인했다
죽음과 세금은 아무도 피해갈 수 없다고 했던가? 그중 하나인 세금만이라도 피해갈 수 있게 된 사제들은 무척 행복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그런 혜택을 안겨준 프톨레마이오스 5세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는 한편, 사원이 면세구역이라는 것을 길이길이 기억되도록 하기 위해 이 로제타석에 그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신성문자는 이 사실을 사제들에게 전하기 위해, 민중문자는 관료 및 민중에게 알리기 위해 사용한 것이었다. 그럼 그리스 문자는 왜 사용되었을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그리스계(系) 왕조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 이집트의 세리(稅吏)는 이재(理財)에 밝은 그리스인들이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세무서 직원들에게 ‘여기는 면세구역이니 들어올 생각 말라’고 포고(布告)한 것이다.
길이 125cm, 너비 0.7cm, 폭 28cm의 로제타석은 세금에 대해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과중한 세금, 조세저항, 그리고 세금을 면제받는 특권 기득권 계층의 존재….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지난 수천 년간 인류 역사를 통해 흔히 볼 수 있었고, 지금도 볼 수 있다.
오줌세
국가라는 체제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돈이 든다. 그 비용은 결국 국민의 주머니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국민의 주머니를 털기 위해 권력자들은 희한한 세금을 많이 만들어냈다. 그중에서 첫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것이 로마제국 시절에 있었던 오줌세이다. 네로 황제 사후(死後) 벌어진 내전(內戰)에서 승리하고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는 텅 비어버린 국고(國庫)를 채우기 위해 세제(稅制)를 정비하면서 오줌세를 신설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소변을 볼 때마다 세금을 냈다는 소리는 아니다. 당시 양모가공업자들은 양털에 묻어 있는 기름기를 제거하기 위해 공중화장실에서 수거한 오줌을 사용하고 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렇게 수거해간 오줌에 대해 양털가공업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한 것이다.
아들 티투스가 “아버님, 그렇게까지 할 것은 없지 않습니까”라고 진언하자, 베스파시아누스는 은화 한 줌을 아들에게 내밀면서 “냄새가 나지 않느냐”고 물었다. 티투스가 “냄새가 나지 않는데요”라고 답하자, 베스파시아누스는 말했다.
“냄새가 안 난다고? 이건 오줌세로 거둔 세금인데?”
지금도 이탈리아에서는 ‘베스파시아노’라고 하면 공중화장실을 의미한다고 한다.
영국에는 난로세라는 것이 있었다. 1662년 만들어진 이 세금은 네덜란드, 스페인, 프랑스 등과 계속되는 전쟁의 와중에서 전비(戰費)를 충당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난로 하나당 2실링씩 부과했는데, 가난한 가정은 교회에서 ‘빈곤증명서’를 발급받으면 세금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이 세금은 상대적으로 재산이 적은 이들의 부담이 큰데다가, 과세 대상인 난로의 수를 파악하기 위해 세리들이 집안에까지 들어왔기 때문에 납세자들의 거부감이 컸다. 심지어 집으로 들어온 세리들이 납세자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또 ‘빈곤증명서’를 발급받는 과정에서 부정이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영국 정부는 난로세를 폐지했다. 대신 집안에 들어가지 않고도 과세 대상을 파악할 수 있는 세원(稅源)을 발굴했다. 바로 창문이었다. 1696년 만들어진 창문세는 하나의 건물에 6개의 창문까지는 면세였지만, 7~9개인 경우에는 2실링, 10~19개인 경우에는 6실링, 20개 이상인 경우에는 8실링의 세금을 매겼다. 사실 유럽 역사에서 창문세는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백년전쟁 중에 영국과 프랑스에서 이미 창문세를 도입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상유정책 하유대책(上有政策 下有對策)’이라는 말처럼, 국민들은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냈다. 아예 창문을 없애는 쪽을 택해버린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대로변에 난 창문을 기준으로 세금을 물리자, 대로변의 창문은 없애고 집 뒤편이나 중정(中庭) 쪽에만 창문을 내는 형태의 집을 짓기도 했다. 이런 형태의 집들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렇게 해서 햇빛을 쬐지 못하게 되자 국민의 건강이 악화됐다. 세금은 피했지만 그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더 커졌다. 그래도 영국에서 창문세는 1851년까지 존속했다.
가구세와 수염세
제정(帝政)러시아의 표트르 1세는 집의 문(門)에 세금을 매겼다. 표트르 1세는 당초 농가마다 가구세(家口稅)를 부과했다. 농민들은 세금을 피하기 위해 같은 집에 모여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집에서도 가구마다 입구는 달리했다. 그러자 정부는 가옥의 문(입구)을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한 것이다. 그런다고 그냥 당할 농민들이 아니었다. 농민들은 아예 문을 하나만 내고 공동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표트르 1세는 수염세라는 것도 부과했다. 네덜란드와 영국 등지를 직접 순방한 적이 있는 표트르 1세는 낙후된 러시아를 근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수염 기르는 것을 240년간에 걸친 몽골 지배가 남긴 악습(惡習)으로 규정하고 이를 근절하기 위해 수염을 기르는 농부들에게는 1코페이카, 도시민에게는 30루블, 상인에게는 60루블, 귀족에게는 100루블을 부과했다. 그래도 수염을 남성다움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던 많은 이가 세금을 내고서라도 수염을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
엽기적 통치로 악명(惡名) 높았던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가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인구대국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국민들에게 자녀를 4명 이상 낳으라고 요구했고, 이를 위해 이혼을 금지시켰다. 이혼을 못 하게 된 부부들은 별거를 선택했다. 그러자 차우셰스쿠는 금욕세(禁慾稅)라는 것을 만들어 의도적으로 아이를 갖지 않은 경우 연(年) 소득의 25%를 세금으로 내게 했다. 생물학적 문제로 아이를 낳지 못할 경우에도 연 소득의 10%의 세금을 물렸다. ‘무자식 상팔자’라는 말을 무색하게 하는 무자식세(無子息稅)였던 셈이다.
독일의 세금 중에는 스파클링 와인세라는 것이 있다. 탄산이 들어간 와인에 매기는 세금인데 영국과의 건함(建艦) 경쟁이 한창이던 1902년 전함(戰艦) 건조를 위해 만들어졌다. 스파클링 와인병에는 ‘이 세금은 독일제국의 전함 건조를 위한 세금’이라는 문구가 적힌 인지(印紙)가 붙었다. 이 세금은 독일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에도 굳건히 살아남아 존속했다. 독일제국-바이마르공화국-나치독일-동서분단 시절의 독일연방공화국을 거쳐 통일 이후까지도 살아남았다. 스파클링 와인세는 세금은 일단 만들어지면 당초의 목적과는 무관하게 끈질기게 생명력을 유지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세금’
▲근대적 소득세를 도입한 윌리엄 피트 영국 총리.
이렇게 보면 국가나 권력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세금을 만들어 국민들을 쥐어짤 수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권력자들은 새로운 세금, 특히 일반 국민들도 체감(體感)할 수 있는 세금 만드는 것을 무척 조심스러워했다. 잘못하면 민심이반을 야기하고, 정권이 넘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루이 14세 때 프랑스의 재상 콜베르는 “세금을 걷는다는 건 거위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깃털을 살짝 떼 내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박근혜 정권 시절 조원동 경제수석비서관도 세제개편안을 설명하면서 이 말을 했다가 구설에 휘말렸다).
하지만 거위의 고통을 모른 척하고 깃털을 뽑을 수 있는 경우도 있다. 바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이다. 국가 존망의 위기상황 아래서 민중은 숨을 죽여야 했고, 이를 틈타 국가는 새로운 세금을 만들거나 증세(增稅)를 감행할 수 있었다. 앞에서 말했던 창문세도 백년전쟁을 비롯해 전쟁 때마다 단골로 등장했던 세금이다.
오늘날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소득세도 전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실 국민들의 소득을 낱낱이 파악해 세금을 매기는 것은 통치자들의 오랜 로망이었다. 하지만 전근대(前近代)의 행정 능력으로는 국민들의 소득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았거니와 소득세 징수에 따르는 사생활(私生活) 침해 등에 대한 반발도 거셌다. 이 때문에 중세에도 소득세를 도입하려는 시도들이 여러 번 있었지만 실패로 돌아가거나 도입하더라도 오래가지 못했다.
근대적 의미의 소득세는 나폴레옹전쟁 중에 영국에서 만들어졌다. 영국은 당초에는 물품세(소비세), 관세, 상속세, 토지세 등 전통적인 세금과 전시국채(戰時國債) 등을 통해 전비를 조달했지만, 이내 한계가 드러났다. 그러자 윌리엄 피트[소(小)피트] 총리는 1798년 의회를 설득해 ‘세금 및 세금납부법’을 제정, 소득세를 걷기 시작했다. 이 법은 부유한 정도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연간 소득이 60파운드 미만이면 세금을 물리지 않았지만, 60~200파운드는 10개의 소득구간에 따라 1/120~1/10, 200파운드 이상이면 소득의 10%를 과세했다. 영국은 소득세라는 세원을 발굴해낸 덕분에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소득세는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세금’이라고 불렸다.
반면에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영국의 흉내를 낼 수 없었다. 조세저항이 단초가 되어 혁명이 일어났고, 국왕(루이 16세)이 단두대(斷頭臺)에서 목이 잘린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기 때문이다. 결국 나폴레옹은 창문세, 소금세 같은 구태의연한 세금에 의존해야 했다. 모자라는 부분은 군대의 ‘현지조달’, 즉 약탈로 메워야 했다. 이는 점령지 주민들의 반발을 야기했다. 포르투갈, 스페인, 러시아, 독일 등 곳곳에서 반(反)프랑스 봉기가 일어났고, 이는 나폴레옹의 패배를 앞당겼다.
“소득세는 神의 형벌"
영국은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인 1816년 ‘전쟁 중 임시로 만들었던’ 소득세를 폐지했다. 의회는 소득세를 폐기하면서 소득세가 되살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 소득세 관련 과세 기록을 폐기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재무부는 몰래 과세기록 사본(寫本) 1부를 감추어두었다.
영국 재무부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었다. 30년 후 로버트 필 총리는 크림전쟁으로 인한 재정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소득세를 부활시켰다. ‘국가재정이 정상화되면’ 소득세를 다시 폐지하겠다는 약속을 덧붙였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한번 열린 판도라 상자의 뚜껑은 다시 닫히지 않았다. 소득세 반대론자들은 “우리의 죄를 돌이키려는 신(神)의 형벌”이라며, 소득세를 저주했다. 그런데 ‘신의 형벌’의 세율은 도대체 얼마나 됐을까? 3%였다.
사실 소득세 반대론자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경제적 부담이 아니었다. 소득세제가 국민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자유를 짓밟는 관료주의·전제주의·독재주의의 첫발을 떼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더 컸다.
시민들의 이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각국 정부가 탄탄하고 풍족한 세원인 소득세를 외면할 리 없었다. ‘세금계의 슈퍼스타’인 소득세는 각국으로 확대되어나갔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기간 중에 북부와 남부 모두 전비 조달을 위해 소득세를 도입했다. 여기서도 소득세와 전쟁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10% 정도의 국민이 소득세를 납부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미국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도금(鍍金)시대’라고 불리는 시대가 도래했다. 빈부(貧富)격차가 커지고, 천민(賤民)자본주의의 폐해가 드러나면서 소득세를 통해 정부가 소득 재분배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런 여론에 힘입어 1894년 소득세 법안이 의회를 통과했지만 연방대법원으로부터 위헌(違憲)판결을 받았다.
이 위헌판결에 대해 당시 미국의 전체 주(州) 가운데 4분의 3이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1909년 연방 상하양원(上下兩院)은 헌법을 개정해 연방정부가 소득세를 징수할 수 있는 근거 규정을 마련했다. 이 수정헌법은 각 주의 동의를 거쳐 1913년 확정됐다. 이에 따라 1913년 새로운 소득세법이 만들어졌는데, 부부에게는 연간 소득 4000달러, 독신자에게는 3000달러까지 공제해주었다. 당시 노동자 연평균 수입이 1200달러였다. 당초 소득세는 ‘부유세’ 개념으로 출발했던 셈이다.
美 소득세, 상위 1%가 내는 ‘부유세’로 출발
이런 상황은 제1차 세계대전과 경제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바뀌고 말았다. 미국의 보수논객인 글렌 벡은 “1913년 상위 1%의 부자들에게만 적용한다고 약속했던 세법은 1939년 상위 5%의 부자들에게로 확대된 데 이어,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미국인 75%로 크게 확대되었다”면서 “‘부자들’에게 세금을 물리는 정책은 언제나 그 대상을 확대하게 되어 있다”고 꼬집는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권 시절 소득세의 한계세율은 1936년 79%, 1940년 81%로 높아졌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루스벨트는 1942년 4월 27일 의회 연설에서 “미국 시민이라면 그 누구라 할지라도 모든 세금을 내고 난 후에는 연 2만5000달러 이상을 벌 수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만5000달러는 요즘 화폐가치로 따지면 100만 달러에 해당한다. 급여를 비롯해 모든 종류의 소득을 망라해 이 액수를 넘는 돈은 100% 세금으로 거두어가겠다는 것이 루스벨트의 구상이었다. 의회는 그것은 조금 지나치다고 생각해 최고한계세율을 94%로 결정했다. 이런 최고한계세율은 당시 연간 20만 달러 이상의 고소득자들에게 적용되었는데, 현재 가치로 따지면 이는 600만 달러에 해당한다. 당시 평균 국민소득의 92배에 달하는 액수였다. 오늘날의 가치로 120만 달러 이상의 소득에 대해서는 72~94%, 100만 달러 내외의 소득에 대해서는 25~50%의 한계세율이 적용됐다.
이러한 과도한 누진세율에 대한 반발도 생겨났다. 공화당의 중진 상원의원이던 로버트 태프트는 “정부 탈취를 통해 사회주의화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미 도달한 30% 이상의 과세 부담의 지속적인 증대를 통해서도 사회주의화될 수 있다”면서 “무거운 세금의 부과야말로 자유에 대한 제한”이라고 역설했다.
1964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배리 골드워터는 《보수주의자의 양심》에서 “연간 1만 달러를 버는 사람이 수입의 20%를 내도록 되어 있는 데 반해, 연간 10만 달러를 버는 사람이 정부에 수입의 90%를 내놓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은 공정에 관한 나의 관념으로 용납할 수 없다”면서 “나는 성공을 징계해야 한다는 가치를 지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그의 노동이 그의 이웃보다 좀 더 풍성한 결실을 생산한 사람에게 그가 산출한 풍성함을 즐길 기회를 부정하는 것은, 재산에 대한 자연권에 배치되고 따라서 부도덕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누진세는 몰수적 세금”이라면서 “그 효과와 그 의도의 상당 부분은, 모든 사람을 보통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사상을 계승한 사람이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었다. 그는 끈질기게 의회를 설득, 세금개혁법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최상위 구간의 소득세율은 28%로 뚝 떨어졌다. 1986년 10월 22일 세금개혁법 서명행사에서 레이건은 그간의 조세체계가 ‘비(非)미국적’이었다고 단언했다. 그는 “현행 세법의 가파른 누진세율은 개인의 경제적 활기의 심장을 옥죄고 있었다”면서 “새로운 세법은 지금껏 미국 의회가 만들어낸 일자리 창출 프로그램 중 최고의 것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레이건의 말대로, 그가 단행한 감세(減稅)정책은 1990년대 경제활황의 밑거름이 됐다. 비록 그 과실은 공화당이 아닌 민주당 출신 빌 클린턴 정부가 따 먹었고, 미국 내 양극화(兩極化) 현상이 극심해졌다는 비판도 있지만 말이다.
누진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금을 많이 내는 만큼 누진적으로 투표권을 더 주는 나라도 있었다. 프로이센에서는 공직선거나 투표에서 최고액 납세자에게는 최대 3표, 중산계급의 시민들에게는 2표, 소득이 낮거나 거의 없는 빈털터리에게는 1표를 주었다. ‘국가재정에 기여한 바가 클수록 발언할 권리도 크다’는 논리에서였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이집트 稅政의 産物
국가의 출현과 함께 세금이 출현했고, 그와 함께 세금을 다루는 전문 직업인, 즉 세리(稅吏)도 나타났다. 세리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6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메르문명의 도시 라가시에서 발견된 점토판(실은 세금영수증이었다!)에는 “한 나라가 끝나고 다음 나라가 와도 세리는 있다” “너에겐 신(神)도 있고 왕(王)도 있고 사람도 있다. 하지만 네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세리이다”라고 적혀 있다.
비옥한 나일강 유역에서 발전한 고대 이집트에서는 국유(國有)농지를 농민들에게 임대하고 농산물의 5분의 1을 수확세로 거두어들였다. 이를 위해 일찍부터 이집트에서는 토지측량술과 기하학이 발달했다. 고대 그리스의 유클리드 기하학은 바로 이집트의 이러한 기하학 업적들을 정리한 것이다.
이집트에서 세무행정을 담당한 이들은 ‘서기’로 일컬어지는 공무원들이었다. 이들을 교육하는 국립서기학교까지 있었다. 기록에는 “서기가 되어라. 그러면 부드러운 손으로 일할 수 있다. 하얀 옷을 입고 신하들이 인사를 한다” “서기가 되면 누구한테도 지시받지 않고 어떤 직업보다 편하게 살 수 있다”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공무원은 아득한 고대부터 선호 직종이었던 셈이다. 어쩌면 공시생(公試生)도 있지 않았을까?
반면에 고대 그리스에서는 ‘징세청부인(徵稅請負人)’이 세리 역할을 대신했다. 관세를 징세할 수 있는 징세권(徵稅權)을 경매(競賣)를 통해 낙찰받은 징세청부업자들이 세금을 징수했던 것이다.
일종의 ‘민영(民營)국세청’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제도는 로마로도 이어졌다. 징세청부인은 세율 10%인 속주세(屬州稅)를 거두고 그중에서 10%를 수수료로 챙겼다. 《성경》에 나오는 마태나 삭개오와 같은 세리들은 바로 이런 징세청부인, 혹은 이들로부터 재하청(再下請)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세리는 유대 사회에서 외세의 앞잡이, 죄인으로 지탄을 받았기 때문에 이들과 소통하고 구제하려 했던 예수도 눈총을 받아야 했다.
징세청부업 제도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럽 각국에서 그대로 살아남았다. ‘근대화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화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도 징세청부인이었다. 그는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후 공포정치 시기인 1793년에 ‘적폐(積弊)’로 몰려 단두대에서 목이 달아났다.
脫稅의 달인 히틀러
권력자가 관련된 사건들을 덮어주고 출세한 검사나 경찰관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어느 시대에나 공무원은 권력자에게 약하다. 세리, 세무공무원 역시 마찬가지다.
히틀러는 그의 저서 《나의 투쟁》으로 1923년에 123만 라이히스마르크(RM·독일제국부터 1949년까지 쓰였던 독일의 화폐 단위. 1949년 화폐개혁으로 도이치마르크로 바뀜)의 수입을 올렸다. 뮌헨시 세무 당국은 이에 대해 60만 마르크의 세금을 물렸다. 히틀러는 20만 마르크만 납부하고 나머지는 체납(滯納)했다. 입만 열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떠들었던 히틀러지만, 세금을 내는 것은 싫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대단한 사치품이었던 자동차를 구입하고 이를 업무용으로 비용 처리하는 꼼수를 쓰기도 했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집권하자 뮌헨 세무서장은 그에게 “체납액을 소멸시켜주겠다”고 제안했다. 히틀러는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한 달 후 그 세무서장은 국세청장으로 승진하고 월급이 40% 올랐다.
히틀러는 국가예산으로 구입해 국민들에게 뿌리다시피 한 《나의 투쟁》의 저작권료, 자신의 초상이 들어간 우표에 대한 초상권료 등도 챙겼다. 재무부와의 협상(?)을 통해 급여에 대한 세금도 면제받았다. 대독일민족의 지도자인 총통이 세금 같은 사소한 문제 때문에 신경을 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히틀러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에게 재산이 거의 없다고 주장했지만, 2014년 6월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메일》은 “역사가들이 세금 및 은행 서류를 조사한 결과, 히틀러는 탈세, 저작권료 등으로 국민 몰래 약 11억 라이히스마르크(2014년 가치 6조2000억원) 규모의 축재(蓄財)를 했다”고 보도했다.
원천징수
이렇게 자신은 탈세를 일삼으면서도 국민의 주머니는 철저히 털었다. 이를 위해 그는 원천징수제도를 도입했다. 종전에는 1년에 1회 세금을 부과하던 것을 12회로 나누어 매달 급여에서 원천징수하도록 한 것이다. 세무 당국의 입장에서는 세금 징수가 편리해졌다. 직장인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회사가 먼저 세금을 떼서 납부하니, 조세저항도 적었다. 나치독일의 동맹국이던 일본도 1941년에 이 제도를 도입했다. 일제(日帝)가 남겨준 많은 행정시스템과 함께 원천징수제도도 해방 후 대한민국으로 승계됐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봉급쟁이들이 ‘유리지갑’ 신세를 한탄하게 만든 것은 히틀러인 셈이다(히틀러 이전에 영국과 미국에서도 원천징수제도를 시행하기는 했다).
1642년 프랑스의 한 젊은이는 세무서장이던 아버지의 세금 계산을 돕기 위해 덧셈과 뺄셈을 할 수 있는 계산기를 발명했다. 그의 이름은 블레즈 파스칼, 《수상록》으로 유명한 바로 그 사람이다.
스페인을 몰락시킨 알카발라稅
세금은 개인의 삶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소득세가 나폴레옹전쟁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승패(勝敗)를 갈랐던 것처럼, 한 국가의 흥망성쇠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나라를 망친 세금으로 꼽히는 대표적인 사례가 스페인의 알카발라(alcabala)세이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슬람권에서 비롯된 세금으로 스페인이 800년 가까이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 자연스럽게 이식됐다.
처음에는 부동산과 일부 상품 거래에만 적용되다가 16세기 후반 필리페 2세 때부터 대폭 확대된 이 세금은 일종의 부가가치세다. 현행 한국의 부가가치세가 최종 거래 단계에서 10% 부과되는 것과는 달리 알카발라세는 거래 단계마다 10%씩 부과되었다. 예컨대 맥주가 양조장에서 도매상, 소매상을 거쳐 가정으로 팔려 갈 때 단계마다 10%씩 세금이 부과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원가가 1000원인 맥주는 도매상으로 넘어갈 때에는 1100원이 된다. 도매상에서 소매상으로 넘어갈 때에는 1210원, 소매상에서 가정으로 넘어갈 때에는 1331원이 된다. 물론 이것은 따로 매 단계에서 업자가 이윤을 붙이지 않았을 경우에 그렇다는 얘기다. 단계마다 업자가 이윤을 붙이면 그에 따라 세금도 당연히 올라간다. 세무 당국 입장에서는 앉아서 돈을 버는 것이겠지만, 이러한 과도한 세금은 상공업 발전을 위축시키고 서민들에게도 부담이 됐다.
지리상의 대발견 시대 이후 남미의 식민지에서 착취해 오는 금은(金銀) 이외에는 다른 산업 기반이 없던 스페인은 이 알카발라세에 과도하게 의존했다. 더 나아가 스페인은 이 세금을 자기들 지배 아래 있던 포르투갈(포르투갈은 1580~1640년 스페인에 합병됐었다)이나 네덜란드에 강제하려고 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치열한 항쟁 끝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 이후 스페인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19세기 초 스페인은 알카발라세를 폐지했지만, 이때쯤이면 스페인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약소국으로 전락한 뒤였다.
스페인의 에르난 코르테스나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불과 수백명의 병력으로 아스테카제국과 잉카제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아스텍이나 잉카제국의 가혹한 세금 수탈에 원한을 품고 있던 현지 원주민들과 연합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가 초기에 급속히 확대될 수 있었던 것도 이슬람교로 개종하면 토지세와 인두세 등을 면해준 것이 큰 요인이 됐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중동지역을 장악한 오스만튀르크가 향신료 등에 매기는 관세를 회피하기 위해 동양과의 새로운 항로를 찾아 나섰는데, 이것이 바로 ‘지리상 대발견’의 시발이 되었다.
가톨릭 사제들은 ‘조세피난민의 후예’
세금의 역사, 세리의 역사가 뿌리 깊은 것처럼 조세저항의 역사 역시 뿌리 깊다.
가장 기본적인 조세저항은 세금을 피해 달아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역사상 백성들이 세금을 피해 섬이나 산으로 도망치거나 마을을 떠나 유랑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284년 권좌에 오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제국 재건을 위해 세금 징수를 강화했다. 그때 이집트에는 안토니우스라는 독실한 기독교 사제가 있었다. 그의 신앙심에 감화된 신자들은 안토니우스를 중심으로 한 신앙공동체를 만들었다. 세리들의 손길은 이들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그러자 안토니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사막으로 달아나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었다. 사막의 척박한 기후 때문에 여자나 아이들은 이들을 따라가지 못했다. 결국 이들은 독신으로 살면서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여기서 가톨릭의 수도원과 사제 독신주의가 출발했다. 안토니우스는 후일 성인(聖人)으로 추대됐다. 《세금전쟁》의 저자인 하노 벡과 알로이스 프린츠는 “은수사(隱修士)의 독신생활은 깊은 통찰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안락한 삶과 면세(免稅) 중에서 면세를 택한 결과에 가까웠다”면서 “이런 관점에서 사제들은 적어도 이데올로기로서는 조세피난민의 후예들”이라고 말한다.
안토니우스가 세금을 피해 사막으로 떠났다면, 독일의 축구 스타 프란츠 베켄바워와 전설적인 카 레이서 랄프 슈마허, 스웨덴의 테니스 스타 비외른 보리, ‘프랑스의 국민배우’로 사랑받던 제라르 드파르디외, 아일랜드의 밴드 U2, 영국의 롤링스톤스와 록 스타 데이비드 보위 등은 세금을 피해 조국을 등졌다.
이들처럼 일찌감치 해외로 도망치는 방법을 몰랐던 비틀스는 최고 90%에 달하는 소득세에 시달려야 했다. 비틀스는 절세(節稅)를 위해 애플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하지만 비틀스는 뮤지션이었지, 사업가는 아니었다. 애플은 비틀스의 돈을 노리고 달려든 인간들에게 이리저리 뜯기는 신세가 됐다. 결국 애플의 경영을 둘러싸고 폴 매카트니와 존 레넌 간에 갈등이 벌어졌고, 이는 비틀스 해체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비틀스는 1966년에 내놓은 곡 ‘Taxman’을 통해 노동당 정부의 과도한 누진세 부과를 공격했다. 비틀스 멤버 조지 해리슨은 후일 자서전에서 “우리는 돈을 벌기 시작했지만, 번 돈의 사실상 대부분을 세금으로 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술회했다.
사람만 세금을 피해 망명을 떠나는 게 아니다. 기업도 떠난다. ‘스웨덴 국민기업’ 이케아의 본사는 스웨덴이 아니라 네덜란드에 있다. 이케아 설립자 잉바르 캄프라드는 1974년 85%의 소득세를 얻어맞자 스위스 국적을 취득했다.
알몸의 백작 부인
▲고디바 초콜릿은 백성들을 위해 조세 감면을 탄원했던 고디바 부인의 모습을 로고로 사용하고 있다.
세금을 피해 도망치는 것이 싫으면 세금을 감면해달라고 통사정하는 방법이 있다. 11세기 초 잉글랜드의 머시아왕국(지금의 코번트리)에는 레오프릭 백작이라는 영주가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고 있었다. 그의 젊은 아내가 백성들을 위해 세 부담을 줄여달라고 호소하자 레오프릭은 “당신이 대낮에 알몸으로 말을 타고 거리를 한 바퀴 돌면, 그 청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아내가 세금 감면 탄원을 그만둘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내는 백성들을 위해 알몸으로 말을 타고 시내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주민들은 백작 부인이 말을 타고 마을을 도는 시간에 아무도 거리에 나오지도 않고,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지도 않기로 했다. 백작 부인은 결국 알몸으로 말을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그의 행동에 감동받은 레오프릭 백작은 개과천선, 이후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백작 부부는 수도원을 하나 건립했는데, 이 수도원을 중심으로 발전한 도시가 코번트리다.
1926년 벨기에인 조셉 드랍스는 초콜릿 회사를 만들면서 레오프릭 백작 부인처럼 우아한 초콜릿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고 말을 탄 알몸의 여인 그림을 자기 회사의 로고로 삼았다. 그게 바로 고디바 초콜릿이다.
세금을 감면해달라는 탄원이 먹혀들지 않으면 말과 행동이 거칠어지게 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곡괭이나 쇠스랑, 칼, 죽창을 들고 폭동을 일으키게 된다. 프랑스의 자크리의 난(1358년), 영국의 와트 타일러의 난(1381년)은 백년전쟁 와중에 농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린 것이 원인이 됐다. 중국에서는 한(漢)나라 말기의 황건적의 난(184년), 남송(南宋) 말기의 방랍의 난(1120년), 원(元)나라 말기의 홍건적의 난(1351년), 명(明)나라 말기의 이자성의 난(1644년), 청(淸)나라 말기의 백련교도의 난(1796~1804년) 등에서 보듯, 왕조 말기마다 과중한 세금 부과에 항의하는 민중반란이 일어났다. 조선 말기인 1862년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임술민란(壬戌民亂)도 삼정[三政: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의 문란이 그 원인이 됐다.
청교도혁명으로 번진 선박세
서양에서는 조세저항이 의회민주주의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1215년 잉글랜드의 대귀족들은 실정(失政)을 거듭하던 존 왕을 겁박하여 봉건귀족들의 특권을 확인하는 대헌장(大憲章·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하도록 했다. 주된 내용 중 하나가 “병역면제세 또는 보조금은 어떠한 것을 막론하고 짐의 왕국 일반회의에 의하지 않는 한, 짐의 왕국 내에서 부과되지 아니한다”는 것이었다(제12조). 이 문서는 당초에는 봉건귀족들의 기득권을 확인하기 위한 문서였지만, 근대 이후에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헌법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일례로 찰스 1세 시절 선박세 20실링 납부를 거부해 재판에 회부된 존 함덴이라는 하원의원은 “마그나 카르타에서 국왕은 의회의 승인 없이는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세금은 무효”라고 항변했다. 함덴은 근소한 차이로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의회는 1641년 함덴에 대한 재판이 위법이라고 결정하고 그에게 유죄선고를 내린 법관을 탄핵했다. 이로 인해 의회와 국왕 간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 갈등은 국왕과 의회파 간의 내란, 즉 청교도혁명(1642~1645년, 1648~1649년)으로 번졌다. 청교도혁명을 승리로 이끌고 찰스 1세를 처형한 올리버 크롬웰은 바로 존 함덴의 사촌이었다.
미국 독립혁명(독립전쟁) 역시 세금 문제가 발단이 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7년전쟁(1756~1763년) 이후 영국은 그동안 지출한 전비와 식민지 주둔군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설탕법(1764년), 인지세법(1765년), 타운센드법(1767년), 차조례(茶條例·1773년) 등을 잇달아 제정, 아메리카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했다. 차조례는 영국 동인도회사가 아메리카 식민지에 직접 차를 팔 수 있게 한 법률인데, 이렇게 해서 값싼 차가 들어오게 되자 그동안 재미를 보던 차 밀수업자들이 곤경에 처하게 됐다. 이들은 시민들을 선동해 인디언으로 가장하고 동인도회사 선박을 습격, 차가 들어 있는 상자들을 바다에 던져버렸다. 이를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이라고 한다. 이 사건은 후일 자유를 위한 항쟁으로 미화(美化)되었지만, 실상은 차 밀수업자들의 난동이었다. 이 사건 이후 영국은 군대를 동원해 반영(反英)시위를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시민 네명이 사살됐다.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식민지 대표들로 구성된 제1차 대륙회의가 1774년 열렸다. 이들은 영국 헌정의 전통을 원용(援用)해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식민지 대표들의 동의 내지 참여 없이 영국 본국의 정부나 의회의 입법으로 식민지에 과세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대륙회의는 1776년 7월 4일 아메리카 식민지의 독립을 선언했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7년간의 전쟁 끝에 1883년 독립을 쟁취했다.
프랑스대혁명
1789년 발생한 프랑스대혁명 역시 세금 문제가 도화선이 됐다. 프랑스에서는 타이유(토지세 겸 재산세)세를 비롯해 중세봉건제의 잔재인 다양한 세금이 농민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반면에 귀족과 성직자들은 세금을 면제받고 있었다.
1777년 루이 16세에 의해 재무장관으로 임명된 스위스 은행가 자크 네케르는 파탄에 이른 재정을 재건하기 위해 세정개혁에 나섰다. 그는 징세청부업자 제도를 폐지하고 국가공무원들이 세금을 징수하도록 하는 한편, 귀족과 성직자 계급으로부터도 세금을 거두어들이려 했다. 당연히 이들 기득권 세력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네케르는 이에 맞서 국가재정 실태를 공개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왕실비가 국가재정의 10% 가까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국민들은 분노했다. 네케르는 1781년 해직됐다.
1788년 루이 16세는 재정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네케르를 복직시켰다. 이듬해에는 1614년 이후 열리지 않았던 신분제 의회인 삼부회를 소집했다. 삼부회에서 과세에 대한 동의를 얻어 재정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곪을 대로 곪은 프랑스의 모순은 그해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폭발했다. 대혁명의 시작이었다.
세금으로 무너진 정권들
혁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세금 문제 때문에 정권이 무너지는 일은 현대에서도 비일비재하다. 1979년부터 11년간 집권하면서 ‘영국병(英國病)’을 치유했던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주민세(인두세)를 도입하려다가 민심 이반으로 1990년 11월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캐나다의 브라이언 멀로니(진보보수당) 총리는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부가가치세 도입을 강행했다가 1993년 총선에서 156석이던 의석이 2석으로 줄어드는 기록적인 참패를 당하고 몰락했다.
박정희 유신 정권의 몰락도 1977년 실시된 부가가치세제와 관련이 있다. 1978년 12월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공화당은 중선거구제 덕분에 의석수에서는 앞섰지만, 득표율에서는 1.11% 뒤졌다. 부가가치세 도입으로 인해 종전의 과세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상공인들, 부가가치세제 도입 후 물가상승으로 고통받게 된 서민들의 불만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씨는 후일 “당시 새로이 부가가치세제의 적용을 받게 되는 사람은 16만명 정도였는데, 그들의 조세저항이 그토록 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술회했다.
야당인 신민당은 제10대 총선에서의 승자를 자처하면서 그 여세를 몰아 이듬해 5월 전당대회에서 ‘선명야당’을 내건 김영삼을 총재로 선출했다. 이후 김영삼 총재의 신민당은 사사건건 박정희 정권과 각을 세웠다. 그 갈등은 결국 부마사태와 10·26사태로 이어졌다.
공교롭게도 박근혜 전 대통령도 담배에 붙는 세금을 올리고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상공인들에 대한 과세를 강화했다가 민심 이반을 야기했고, 그것이 탄핵사태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있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09.17 월간조선 09월 호
■ 세계사의 결정적 戰場 | 워털루 들판에서 나폴레옹은 누구에게 졌나?
⊙ 神이 자신에게 도전한 나폴레옹의 포병을 비[雨]로써 응징했다?
⊙ 프랑스 사람들은 나폴레옹이 웰링턴에게 진 것이 아니고 프로이센軍에게 졌다고 강변
⊙ 그날 나폴레옹은 치질과 고열에 시달렸다
⊙ 마지막에 투입한 황제근위대의 후퇴로 무너지다
⊙ 206년 전 신음과 비명으로 뒤덮였던 그 들판은 지금도 잡초만 무성하다
▲사자의 언덕. 브뤼셀 남쪽 워털루 전장에 평화를 기원하며 세운 기념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 황제의 사망 200주년 석 달 뒤인 지난 8월 초, 나는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우버 택시를 타고 남쪽 워털루 마을로 향했다. 약 30분 걸렸다. 운임은 30유로. 워털루 결전장은 1815년 6월 18일 오전처럼 간밤에 내린 비로 젖어 있었다. 2004년 봄에도 여길 온 적이 있어 기념관에 들르기 전에 전장(戰場)이었던 들판을 먼저 걸어보았다. 206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전원 풍경, 잡초가 무성한 평지이다. 그날처럼 땅이 질퍽거렸다. 그날 나폴레옹은 대포를 제대로 운용할 수 있도록 땅이 굳기를 기다리느라 세 시간 이상 개전(開戰)을 미뤘는데 이게 치명적이었다.
연합군 총사령관 웰링턴 영국군 장군(공작, 이름은 아서 웰즐리)이 현장 지휘소를 설치했던 곳엔 ‘사자의 언덕’이란 기념물이 있다. 226개 계단을 40m쯤 기어 올라가면 사자상이 있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펼쳐진 전투현장이 내려다보인다. 웰링턴이 선점한 북쪽이 약간 높다. 남쪽에 포진한 나폴레옹은 그날 줄곧 완만한 비탈을 올라가면서 공격하였다. 이것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정치나 전쟁에선 상대가 선택한 무대나 조건에서 싸우는 건 늘 위험하다. 유럽 역사가 바뀐 그날 아침 나폴레옹은, 한 번도 웰링턴과 싸운 적이 없었는데도 그를 깔보는 논평을 하곤 했다.
사자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전장은 3×3km쯤 되어 보였다. 여기에 쌍방 약 20만명의 병력이 뒤엉켜 아홉 시간 동안 대포, 소총, 칼, 창, 기병돌격, 백병전, 포격전으로 격돌했다. 전투가 끝났을 때는 늦은 밤이었고, 이 좁은 땅에 약 5만명의 전사자와 부상자가 쓰러져 있었다. 신음, 비명, 확인사살, 확인자살(刺殺) 속에서 동맹군 소속 군인과 근처 주민들이 몰려와 전사자와 부상자들의 소지품을 빼앗거나 훔쳤다. 특히 전사자들의 이를 뽑아 치과에 판 이들이 많았다.
워털루 전투 기념관에는 이긴 웰링턴보다 진 나폴레옹이 더 부각되어 있다. 이 부근이 프랑스어권이고 당시 벨기에가 프랑스 지배하에 있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다소 편향적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은 웰링턴에게 지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운이 나빴고, 오후에 웰링턴 군대와 합류한 프로이센군의 블뤼헤 장군 때문에 졌다는 식으로 설명하곤 한다. 거의 1000년의 역사를 가진 프랑스-영국의 라이벌 의식이 워털루에 투영되고 있다. 특히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이 워털루 전투를 자세히 묘사하면서 나폴레옹의 불운(不運)을 적극적으로, 사실을 왜곡하면서 변호했다. 위고는 신(神)이 나폴레옹을 질투하여 불운의 덫을 놓았다고 했다.
한국의 나폴레옹 팬 朴正熙
▲기병돌격. 파노라마관의 기록화로 전투 100주년 때 프랑스 화가가 그렸다.
‘웰링턴 때문에 졌을까, 블뤼헤 때문에 졌을까, 아니다 그가 신을 건드렸으니 이길 수 있었겠는가.’
신의 질투가 나폴레옹의 신기(神器)인 포병을 무력화(無力化)시켰다는 것이다. 전날 밤 비를 내려 땅을 진창으로 만드는 식으로. 워털루 기념관의 짤막한 3D 영화보다는 파노라마관에서 본 길이 110m 기록화가 압권이다. 이 그림도 전투에 진 나폴레옹 군대 중심이다. 그날 전투는 나폴레옹군의 포병 일제사격, 보병돌격, 기병돌격, 황제근위대의 최후돌격 순으로 진행되어 공세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 그림은 워털루 100주년을 맞아 프랑스 화가가 그린 것이다. 그림의 주제는 ‘프랑스 기병돌격’이다. 실패로 끝난 돌격을 지나치게 미화(美化)한 것은, 소설적 비장미(悲壯美)는 몰라도 정확한 역사기록은 아니다.
기념관 서점도 나폴레옹 관련 책이 많았다. 나폴레옹 이미지는 여러 상품의 브랜드로 활용되는데, 이 서점에서 산 책을 읽어보니 한 한국 기업인은 나폴레옹의 유명한 모자를 100만 달러 이상을 주고 매입해 회사에 전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티픈 클라크라는 저술가가 쓴 책을 샀는데, 《프랑스는 어떻게 워털루에서 이겼나(혹은 그렇게 생각하는가)》였다. 프랑스인들이 영국을 질투, 나폴레옹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려 요설(饒說)을 구사한다는 비판서이다.
한국의 가장 유명한 나폴레옹 팬은 박정희(朴正熙)일 것이다. 그는 보통학교 다닐 때 이순신과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병정놀이를 하면서 군인이 되고 싶어 했다고 한다. 박정희의 최후는 이순신과 닮았지만(“난 괜찮아”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그의 비장한 생애는 나폴레옹의 판박이다. 두 사람은 식민지에서 태어나 종주국 군대에 들어갔고, 포병장교가 되었으며, 쿠데타로 집권해 국가의 기틀을 세웠다. 독서인의 교양으로 근대국가 건설을 주도했으며 이혼 경력, 단신(短身), 사후(死後) 재평가도 공통점이다. 두 사람은 군인, 혁명가, 교사, CEO의 자질을 갖추었지만 큰 차이점도 있다.
나폴레옹은 알렉산더 대왕, 시저, 칭기즈칸급의 군사적 천재로서 16년간 이어진 나폴레옹 전쟁에서 약 300만명의 죽음을 불렀다. 박정희는 국가건설 과정에서 최악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단기간에 최대의 업적을 남겼다(18년간 수많은 시위에 직면했지만 한 번도 발포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인구 5000만명 이상의 큰 나라로서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 이상이고, 민주주의를 하는 진정한 강대국은 일곱뿐이다.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그리고 한국!
파괴자와 건설자(나폴레옹 법전, 프랑스 은행, 교육제도, 특히 교사 양성제도, 기병·포병·보병을 일체화한 국민군 건설)의 양면(兩面)을 지닌 나폴레옹에 비교하면 박정희는 건설자의 면모가 압도적이다.
러시아 원정 실패의 결산이 워털루
1815년 6월 18일 워털루 결전은 약 20년간 유럽 대륙을 석권하였던 나폴레옹 군대를 파멸로 몰고 가, 루이 14세 전후부터 약 200년간 패권(覇權)국가 행세를 하던 프랑스를 내려 앉혔다. 1789년 일어난 프랑스대혁명 이후 25년간 진행된 대격동의 시대가 지고 19세기의 새로운 격변이 시작된다. 프로이센과 러시아가 강대해지기 시작하고(독일 통일로 이어진다), 영국은 라이벌을 제거함으로써 ‘팍스 브리태니커’ 시대를 연다. 영국은 늘 마지막 전투에서 이긴다는 말이 있다. 전광석화의 군사적 천재 나폴레옹에게 이긴 웰링턴은 우직하고 끈질긴 지휘관이었다.
워털루 전투는 그로부터 3년 전 러시아 원정 실패의 결산이었다. 1799년, 프랑스대혁명 10년 뒤 쿠데타를 일으켜 29세에 집권한 나폴레옹은 1804년에 황제가 되고 그 이듬해 숙적 영국을 치려다가 트라팔가르 해전(海戰)에서 넬슨 제독이 이끄는 함대에 의하여 저지된다. 넬슨은 이순신(李舜臣)처럼 목숨을 바쳤다. 19세기 영국의 가장 유명한 두 장군 넬슨과 웰링턴은 나폴레옹 덕분에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트라팔가르 해전에도 불구하고 1805년은 나폴레옹 최고의 해였다. 그해 12월 2일 지금의 체코 브르노 근방 아우스터리츠에서 벌어졌던 이른바 ‘3제회전(三帝會戰)’에서 나폴레옹군 7만5000명은 러시아 알렉산드르 1세와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 프란츠 2세가 이끈 동맹군 8만5000명을 격파(사상자 2만7000명), 사실상 유럽 대륙의 패권을 잡게 된다(이 전투 패배로 오스트리아 황제가 겸하던 신성로마제국도 거의 1000년 만에 해체되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나폴레옹의 거의 예술적 지휘로 그의 최고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나폴레옹의 야망은 1808년부터 분수를 넘게 된다. 러시아 알렉산드르 1세와 독일 에르푸르트에서 만난 그는 프랑스와 손잡고 영국을 고립시키자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꽁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러시아가 영국에 대한 대륙봉쇄령을 어긴다는 트집을 잡아 거대한 전투를 구상한다.
나폴레옹은 프랑스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바르샤바공국(公國) 등 동맹국 병력까지 동원, 약 60만명의 대군을 편성해 1812년 6월 24일 러시아로 쳐들어갔다. 병력 수에서 역사상 최대 규모였다(정확한 수치이다). 수레가 3만 대, 전마(戰馬) 수십만 마리, 포도주를 2800만 병이나 싣고 갔다. 개전일은 공교롭게도 1941년 히틀러가 소련을 기습한 날(6월 22일)과 비슷한 날짜이고, 두 야심가에게 종말의 시작을 연 점에서도 비슷하다.
사라져간 60만 대군
러시아는 약 40만명을 동원했으나 결전을 피하고 초토화(焦土化) 작전을 펴면서 후퇴, 나폴레옹군의 길어지는 보급선을 게릴라전으로 괴롭혔다. 나폴레옹은 9월 중순 모스크바를 점령했으나 러시아 측이 불을 질러 도시의 90%를 태우니 잘 곳도 먹을 것도 없어졌다(당시 수도는 페테르부르크). 한 달 뒤 나폴레옹은 철수를 결심, 후퇴하는데 겨울이 일찍 닥쳤다. 러시아군은 쿠투조프 장군의 지휘하에 나폴레옹군을 공격, 60만 대군은 러시아 대평원에서 사라져갔다(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이 대목을 실감 나게 묘사했다). 20만명이 죽고, 18만명은 포로, 20만명이 탈영했다. 겨우 3만명이 생환(生還)하였다. 이런 인적 손실만큼 치명적이었던 것은 수십만 마리의 말을 잃은 점이었다.
나폴레옹의 동원력은 현저히 약화되어 이듬해 라이프치히 회전에서 패배, 1814년 황제 퇴위(退位), 지중해의 엘바섬을 일종의 영지(領地)로 받아 물러났다. 유럽을 호령하던 나폴레옹의 그때 나이는 44세, 그는 이 섬에서 쓰레기 처리 시스템까지 만들어주면서 마음을 붙여보려고 했으나 그의 뜨거운 피와 프랑스 상황이 나폴레옹을 마지막 무대로 불러냈다. 루이 18세의 실정(失政)과 감군(減軍)에 따른 제대군인들의 불만, 패전국으로 전락한 프랑스 국민의 상한 자존심을 전해 들은 나폴레옹은 1815년 2월 26일 대대 병력의 부하들을 데리고 엘바섬을 탈출해 남불(南佛) 앙티브 근방에 상륙, 투항하는 정부군을 흡수해가면서 3월 20일 파리로 들어왔다.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했을 때는 ‘괴물탈출’이라고 보도했던 신문이 ‘황제귀환’이란 제목으로 그를 환영했다.
그때 빈에서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 질서 재편을 논의 중이던 열강은 프랑스 외상(外相) 탈레랑의 제안과 오스트리아 메테르니히의 주도로 나폴레옹을 무법자(無法者)로 규정, 동맹군을 결성하기로 결정한다.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각기 15만명의 병력을 동원하기로 합의했다. 나폴레옹은 이 대군이 집결하기 전에 선제(先制)공격을 하여 각개 격파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영국군과 프로이센군 약 20만명이 벨기에로 집결하는 사이 나폴레옹은, 6월 12일 먼저 보낸 약 12만명의 프랑스군을 따라 벨기에로 들어왔다. 그는 6월 16일 워털루 남쪽 두 곳에서 웰링턴의 영국군(주력)과 블뤼헤의 프로이센군을 격파해 흩어버렸으나 치명타(致命打)를 가하는 데는 실패했다. 패전 후 갈라진 웰링턴과 블뤼헤 부대가 다시 결합하기 전에 우선 웰링턴군을 섬멸한 다음 블뤼헤군을 무찌른다는 나폴레옹의 작전은 성공할 것인가?
운명의 아침, 치질통
운명의 그날 벨기에 브뤼셀 근교의 작은 마을 워털루 민가 지휘소에서 나폴레옹이 일어난 것은 새벽 5시쯤이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잠이 적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는 평소에는 하루 8시간씩 충분히 잔 뒤 일찍 일어나면 측근들로부터 정보 보고를 받고 그 자리에서 명령을 구술(口述)하곤 했다. 하루 평균 15통의 명령을 내렸다. 그는 아침에 집중적으로 일을 했다.
그런 그가 워털루 결전 날은 달랐다. 새벽에 일어나 아침을 먹을 때까지 네 시간 동안 별달리 의미 있는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사후(事後) 여러 증언을 종합해보면 심해진 치질과 방광염 및 고열(高熱)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투병 중이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부하들에게 숨기면서 전투 지휘를 해야 하는 삼중고(三重苦)를 겪고 있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치질로 패전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섬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회고록을 구술할 때도 워털루 패전은 부하들의 잘못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아침을 먹은 뒤 나폴레옹은 식탁 위에 지도를 펴놓고 부하 장군들에게 말했다.
“우리에게 유리한 정황이 90이고 불리한 점이 10이다.”
워털루 전투의 실질적인 야전 지휘관이 되는 네이 원수(元帥)가 찾아와서 ‘웰링턴이 철수를 준비하는 것 같다’고 보고했을 때는 면박을 주었다.
“귀관은 오판(誤判)하고 있어. 웰링턴은 주사위를 던졌어. 그런데 우리에게 유리한 판이 되었어.”
나폴레옹은 참모장 술 원수가 ‘패주한 프로이센 군대를 추적 중인 글로시 원수의 3만3000 병력을 불러들이자’고 건의하자 무안할 정도로 잘랐다.
“귀관은 웰링턴에게 패배했기 때문에 그를 위대한 장군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말해두건대 그는 엉망인 장군이고 영국군도 엉망이며 이번 전투는 그냥 산보 가는 거야.”
이날 오후에 가면, 글로시 원수의 병력을 빨리 회군시키지 않은 나폴레옹의 선택은 치명적 실수로 판명된다. 다른 장군이 영국 보병은 끈질기고 조준이 정확하기 때문에 정면 공격으로 중앙을 돌파하는 것보다는 측면이나 후방을 치는 우회(迂廻)기동을 건의했을 때도 나폴레옹은 비웃듯이 감탄사를 내지를 뿐이었다.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이 찾아와서 또 다른 정보를 전했다. 전날 저녁 제롬은 웰링턴이 그 전에 식사를 했던 워털루의 한 식당에 들렀는데, 웨이터가 엿들은 이야기를 해주더란 것이다. 요지는 퇴각 중인 블뤼헤 원수의 프로이센 군대와 영국군이 합류하여 프랑스군에 대항하기로 약속을 하더란 것이었다. 나중에 정확한 정보로 밝혀지지만 나폴레옹은 “그건 난센스야. 두 군대가 합류하려면 이틀은 걸릴 거야”라고 일소했다.
보병과 기병
▲나폴레옹에게 승리한 영국의 아서 웰즐리(웰링턴 공작).
이날 나폴레옹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가 전투 시작을 못내 꺼려 한 낌새를 차릴 수 있다. 나폴레옹은 오전에는 별다른 이유 없이 허송했다. 전투 개시를 늦추는 명분이 생기긴 했었다. 포병사령관이 오더니 간밤에 내린 비로 땅이 젖어 포대를 움직이기 어렵다고 보고했다. 보통 때 같으면 그 정도의 이유로 결전 시간을 늦출 나폴레옹이 아니었지만 이날 그는 순순히, 혹은 기다렸다는 듯이 포격 개시 시각을 연기했던 것이다.
열병식을 마친 나폴레옹은 로솜이라 불리는 여관 앞에 지휘소를 차리고 의자에 앉았다. 그는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싼 채 생각에 잠겼다. 그를 지켜보고 있었던 한 사람은 나폴레옹이 갑자기 멍한 상태에 빠지는 듯했다고 기억했다. 이때 그는 치질로 인한 고통을 참으면서 전투 상황에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자리 잡은 지휘소도 전장(戰場)이 내려다보이는 곳이 아니었다.
해는 거의 중천에 떠올랐다. 오전 11시였다. 이때 영국군을 주력(主力)으로 하는 동맹군 6만7000명과 프랑스군 7만2000명이 1k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나폴레옹과 웰링턴은 이제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양군(兩軍)은 다 같이 보병, 기병, 포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보병이 가진 소총은 그 전 150년 동안 거의 개량된 적이 없었다. 당시의 소총 총탄은 지름이 2cm, 보병은 종이로 싼 화약을 가지고 다녔다. 입으로 봉지를 물어뜯어 화약을 발사판과 총대 속에 넣은 뒤 총알을 총대 속으로 밀어 넣고 쑤시개로 쑤셔 단단하게 틀어막고 발사하는 데 30초가 걸렸다. 훈련을 잘 받은 보병이라야 1분에 두 발을 쏠 수 있었다.
1815년 6월 18일 워털루에서 보병들이 쓴 소총은 50발 이상을 쏘면 화약을 점화(點火)시키는 장치가 작동하지 않게 되고, 총대 안에 화약이 차서 발사가 되지 않았다. 그러면 쑤시개로 총대를 쑤셔 소제하느라고 시간을 까먹어야 했다. 이 때문에 보병들은 여러 줄을 만들어 교대로 총을 쏘게 되었다. 유효(有效) 사거리(射距離)는 수백 미터였지만 좀처럼 명중하지 않았다. 전장에서는 조준사격보다는 한 방향으로 몰아 쏘는 지향사격이 주(主)였다. 근접하면 총검으로 백병전에 돌입했다.
기병(騎兵)은 칼, 권총, 소총, 창 등으로 무장했다. 칼보다는 창이 효과적이었다. 프랑스 기병만이 가슴을 보호하는 갑옷을 입었다. 기병이 말에서 내리면 갑옷 무게로 움직임이 둔해졌다.
포병술의 천재
워털루의 결전 날 웰링턴이 지휘하는 영국군 중심의 연합군 6만7000명은 156문의 대포를, 나폴레옹의 7만2000명은 246문의 대포를 갖고 있었다. 포병장교 출신인 나폴레옹은 포병을 활용하는 데 천재였다. 포격으로 적진을 흔들어놓은 뒤 보병, 기병, 마지막엔 정예 근위대를 투입해 결정을 짓는 방식이었다. 대포알은 세 종류였다. 터지지 않는 강철탄, 터지면서 파편으로써 살상(殺傷)하는 탄, 그리고 바늘・침 같은 것을 속에 넣었다가 폭파시키는 수류탄 비슷한 포탄. 터지지 않는 강철탄은 무게가 5kg 정도였는데, 보병·기병 밀집대형을 향하여 쏘면 수십명이 한 방으로 살상당하기도 했다. 대포의 발사 충격을 흡수하는 장치가 개발되지 않았을 때였다. 한 번 쏠 때마다 포대가 움직여 다시 조준하여야 했다. 발사속도는 소총과 같아 1분당 두 발 정도였다.
기병이 보병을 향해서 돌격하면 보병은 밀집대형으로 쪼그리고 앉아 총검을 숲처럼 세웠다. 말들도 이 총검의 숲을 향해서 질주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밀집대형을 만들면 보병은 두려움이 사라지고 달아나고 싶어도 이탈할 수가 없게 된다. 대형(隊形)을 벗어나면 기병에게 당하기 때문이다.
보병이 빨리 밀집대형을 갖추어 총검의 숲을 만들기만 하면 기병이 당해내기 어려웠다. 그런 대형을 갖추기 전에 돌격하여 보병을 패주(敗走)시켜야 했다. 이 때문에 기병이 돌격할 때는 보병이, 보병이 돌격할 때는 기병이 보조해주어야 했다. 이날 나폴레옹은 이런 상식을 무너뜨리는 이상한 작전을 편다.
통상적인 전투 절차를 보면, 먼저 포병의 집중 포격이 시작된다. 포격으로 적진이 흔들리면 보병이 앞장서고 기병이 뒤를 따른다. 보병은 적의 최전선(보통 포병)에 접근할 때까지 사격을 삼간다. 충분히 접근한 뒤 일제사격, 그런 다음 총검을 앞세워 바로 돌격을 개시한다. 그 직후 기병이 뒤에서 나타나 전열(戰列)이 흐트러진 적진(敵陣)으로 돌입, 적의 보병이 밀집대형을 갖추기 전에 전선(戰線)을 붕괴시켜야 한다. 이런 타이밍이 승패를 결정지었다. 어느 쪽이 끈질기게 버티는 보병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했다. 해군 국가인 영국은 그런 보병도 갖추고 있었다. 이것이 웰링턴의 자랑이었고, 이날 진가(眞價)를 발휘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군의 후방, 여관 앞에다가 지휘소를 잡았다. 이곳에선 적군이 장악한 능선 뒤에서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능선상의 웰링턴은 저지대의 프랑스군 동향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었다.
포격 시작
▲포병사격으로 시작된 워털루 결전.
머뭇거리던 나폴레옹이 웰링턴 군대를 향하여 포격을 명령함으로써 전투를 시작한 시각은 오전 11시30분쯤이었다[이 시각에 대해선 이견(異見)이 있다]. 첫 표적은 프랑스 군대의 좌익 앞에 있는 휴고몽이라 불리는 농장건물군(群)이었다. 2000명의 영국군이 지키고 있었다. 이곳에 대한 프랑스군의 포격과 잇단 보병 공격은 워털루의 본 게임은 아니었지만 전략적 중요성은 컸다.
요새화된 건물을 둘러싼 포격전과 백병전(白兵戰)은 종일 계속되었다. 영국 군대는 끝까지 건물을 지켜내었다. 한때는 정문이 돌파되어 약 100명의 프랑스 보병이 정원 안으로 들어왔다. 정원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한 영국군의 수기(手記)이다.
〈나(맥도넬 대령)는 프랑스 군인들의 함성이 등 뒤로 들렸을 때 정원에 있었다. 나는 마당으로 뛰어들었다. 양쪽 군인들이 뒤섞여 도끼, 총검, 칼로 백병전을 펼치고 있었다. 영국군의 일부는 계단을 따라서 저택 입구로 물러나고 있었다. 다른 군인들은 저택의 창을 통해 몰려오는 프랑스 군인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 나는 부하 세명을 데리고 정문 쪽으로 달려갔다. 프랑스 군인들이 바깥에서 문을 밀어붙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사이 문을 다시 닫고 큰 나무틀을 내려 안에서 잠그는 데 성공했다.〉
나중에 웰링턴은 ‘워털루의 승리는 이 정문을 닫는 데 성공했기에 가능했다’고 쓴 적이 있다. 영국군은 정문을 봉쇄한 뒤 안에 들어와 있던 프랑스 군인들을 찾아내 죽이느라고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북 치는 소년병은 살려주었다.
동맹군 요새로 변한 휴고몽 농가(農家)를 점령하기 위한 프랑스군의 공격은 한 시간을 넘어도 성공하지 못하고 국지적(局地的)인 공방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오후 1시 프랑스의 야전(野戰)지휘관 네이 원수는 전선(戰線)의 후방에서 의자에 앉은 채 지휘하고 있던 나폴레옹에게 전령(傳令)을 보내 보병 총공격 준비가 다 되었다고 보고한다. 이때까지도 나폴레옹은 이상한 모습이었다. 그는 전투가 진행 중인데도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잠시 일어나 망원경으로 전장을 훑어보고는 다시 앉고 했다.
프로이센군의 출현
▲워털루 전투 당시 프로이센군 사령관 블뤼헤.
네이의 연락을 받자 그는 다시 일어나 망원경을 눈에 대었다. 오른쪽으로 약 8km 떨어진 숲속에 정체불명의 부대가 보였다. 참모들은 부대의 복장으로 보아 프로이센 군인 같다고 말하는가 하면 다른 참모는 프랑스 군인 같다고 했다. 잠시 뒤 포로가 된 프로이센 기병장교가 불려왔다.
그는 웰링턴과 합류하기 위해서 달려오고 있는 블뤼헤 장군의 부하 장교라고 자백했다. 문제가 심각해진 것이다. 나폴레옹은 글로시 장군이 퇴각 중인 블뤼헤 장군 부대를 추적 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그 부대가 나타난 것이다. 나폴레옹은 약 20km 멀리 있는 글로시 장군에게 긴급 지시문을 보낸다.
‘즉시 아군 쪽으로 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이 명령서를 기병장교가 갖고 달려가는 데 두 시간 이상 걸리고 이 명령서를 수령한 글로시 장군이 워털루까지 온다고 해도 한밤중일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우선 기병과 보병을 보내 접근 중인 프로이센군의 선봉을 요격하도록 조치했다. 이 단계에서 전투를 중단시키거나 후퇴하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이렇게 말했다.
“오늘 아침 우리는 90대 10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다. 지금도 우리는 60대 40으로 유리하다.”
오후 1시30분 네이 원수는 포병에 웰링턴 군대를 향하여 일제 포격을 명령했다. 9~15kg짜리 포탄들이 날아갔다. 양쪽 합해서 14만 군대가 가로세로 3×3km 정도의 공터에 밀집해 있었다. 밀집대형을 향하여 포탄이 쏟아지니 죽고 다치는 군인들이 많았다. 강철탄을 맞은 군인의 몸이 두 동강 나고, 머리통이 날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웰링턴 군대는 잘 견뎠다. 동맹군은 유럽의 여러 나라 군대로 편성된 혼성군이었는데, 영국군이 약 4분의 1이었다. 이들은 스페인에서 단련된 고참이었다. 웰링턴은 영국 사병들을 다국적 군대 사이에 끼워 넣어 다른 나라의 신참 군인들을 붙들어놓도록 했다.
프랑스군의 포격은 포탄이 진흙땅에 박혀 불발하는 등 큰 타격을 주진 못했다. 웰링턴은 보병들을 능선 뒤로 일단 물려 포화를 피하도록 했다. 프랑스 포병은 저(低)지대에 있었으므로 능선 뒤의 웰링턴군 동향을 잘 알 수 없었다. 네이는 동맹군이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고 혼란에 빠져 붕괴하고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보병의 정면 공격을 명령했다.
보병 돌격 실패
약 1만7000명의 보병이 대열을 유지하면서 동맹군을 향하여 서서히 진격하는 모습은 장엄했다. 북소리에 맞추어 ‘황제 만세!’를 부르짖으면서 거대한 인간덩어리가 뚜벅뚜벅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양쪽에서는 기병이 따랐다. 엄청난 물체의 관성이 적진을 자연스럽게 돌파할 것 같았다. 여기에 약점이 숨어 있었다. 프랑스 보병은 너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장교들의 명령이 들리지 않았다. 간밤에 온 비로 땅이 질퍽질퍽했다.
많은 보병은 신발이 진흙에 감겨 벗겨졌다. 맨발의 보병이 되었다. 바지에 진흙이 붙어 행군에 지장이 컸다. 밀집대형 한가운데 있는 군인들은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적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태로 적진에 돌입하면 총을 쏠 수 있는 보병은 앞의 3열뿐이었다. 뒷줄 병사들은 덩어리로 엉켜 있어 장전도 발사도 할 수 없었다. 그런 공간이 나오지 않았다. 밀집대형은 포격의 좋은 표적이었다.
프랑스 보병이 접근하자 최전방을 지키던 네덜란드-벨기에군은 달아났다. 오후 2시30분쯤 프랑스 보병은 능선까지 올라갔다. 스코틀랜드 보병 3000명이, 능선 뒤에 숨어서 프랑스군의 접근을 기다리고 있었다. 능선을 넘은 프랑스 보병이 50보 거리로 접근했을 때 이들에게 명령이 떨어졌다. 그들은 능선으로 달려가 다가오는 프랑스 보병들을 향하여 일제 발사했다. 한 발을 발사한 다음 제2탄을 쏘려면 30초가 걸린다. 그사이 프랑스 보병이 덮치므로 제2탄 발사를 포기하고 총검에 의지하여 돌격, 백병전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두 덩어리의 인간 집단이 정면충돌했다. 찌르고 쏘고 비명과 함성과 괴성이 오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순간 웰링턴의 부하 욱스브리지 중장이 2600명의 중기병 부대를 투입했다. 그들은 동쪽 비탈을 달려 내려가면서 프랑스 보병을 흩어버리고, 일순의 승리에 도취하여 너무 깊숙이 진격했다가 프랑스 창기병 2400명의 반격을 받았다. 영국 기병대는 지휘관 폰손비 소장 등 1205명과 1303마리의 말을 잃고 물러났다. 이 중기병 돌격은 괴멸적 타격을 입었지만 웰링턴군의 중앙에 집중된 프랑스 보병 공격의 기세를 꺾는 데는 성공했다. 프랑스 보병은 적진 돌파에 실패하고 일단 물러나 전열을 재정비하는 데 몇 시간이 걸렸다. 두 군대가 일진일퇴하는 사이에 오후 3시가 지나고 프로이센군이 속속 도착, 동맹군에 합류하기 시작하였다. 전세가 웰링턴에게 유리해지고 있었다.
▲기병돌격. 파노라마관의 기록화로 전투 100주년 때 프랑스 화가가 그렸다.
기병 돌격도 실패
오후 4시를 넘은 시각, 네이 원수는 프랑스군의 공격을 받고 있던 웰링턴 진영의 중앙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판단하였다. 사실은 부상자를 뒤로 옮기는 것이었는데 후퇴라고 본 것이다.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네이는 프랑스가 자랑하는 기병 돌격을 명령한다. 보병 지원 없이 너무 서둔 돌격이었다. 67개 중대의 9000명으로 구성된 기병이었다. 돌격이 시작된 직후 이를 지켜보던 나폴레옹은 ‘한 시간은 빠르다’고 중얼거렸으나 멈출 수가 없었다. 영국군 진영의 한 기록자는 이런 글을 남겼다.
〈네 시경, 우리 앞의 적 포대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거대한 기병의 무리가 나타나더니 진격을 개시하였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영원히 그 장엄한 광경을 잊을 수 없었다. 기병이 다가올수록 바다의 파도가 햇볕을 받은 것처럼 번쩍거렸다. 말발굽 소리가 땅을 울렸다. 이 엄청난 질량을 저지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은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유럽 전장에서 용맹을 떨친 그들이 바로 눈앞에 다가왔을 때 영국군에 명령이 떨어졌다. 기병은 ‘황제 만세’를 외치며 돌진하고, 영국 보병은 무릎을 꿇고 총검을 세웠다.〉
기병은 비탈길을 질주하지 못했다. 너무 붙어 있어 그런 공간이 나오지 않았다. 웰링턴군은 이들에게 집중 포격을 가했다. 말과 기수가 무더기로 무너져 벽이 될 지경이었다. 웰링턴군은 대혼란에 빠졌으나 방어진을 만드는 데 성공, 무너지지 않았다. 동맹군은 두 시간 동안 이어진 프랑스의 기병 돌격에 보병·기병·포병 합동작전으로 저항하였다. 빅토르 위고는 《레미제라블》에서 기병 돌격의 실패를 지형에 돌렸다. 기병이 능선을 넘는 순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구덩이처럼 파인 지형이었고 이 속으로 기병이 쏟아져 들어가버렸다는 것이다. 1970년대에 상영된 영화 〈워털루〉(로드 스타이거 주연)는 이 주장을 따른 것이다. 위고의 이 주장은 근거가 약하다. 약간 파인 지형으로 실패의 원인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황제 근위대의 최후
▲1821년에 세인트헬레나섬에서 죽은 나폴레옹의 데스 마스크.
이날 오후 돌아온 프로이센 군대는 프랑스군의 우익으로 접근, 본격적으로 전투에 가담한다. 워털루 인근 마을을 공격하고 프랑스군이 응전, 수차례 주인이 바뀐다. 나폴레옹은 아껴둔 근위대에서 4200명을 빼내 이들을 막도록 보냈다. 웰링턴 군대를 제대로 제압하기 전에 프로이센군이 나타나 양면 전투를 강요당했다.
프로이센군을 추격하도록 3만3000명의 병력을 붙여 보냈던 글로시 원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그는 워털루 전투가 시작되어 포성이 들리는데도 프로이센군의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글로시군이 워털루에서 약 10km 떨어져 있어 즉각 추격을 포기하고 워털루로 돌아와 나폴레옹군과 합류했더라면 승패는 달라졌을 것이다. 참모들도 포성이 들리는 워털루로 돌아가자고 건의하였으나 글로시는 이를 거부하고 더 멀리 행군했다. 이 바보짓으로 두고두고 비판을 받는다. 나폴레옹도 세인트헬레나섬에서 회고록을 구술하며 글로시를 속죄양(贖罪羊)으로 삼았다.
오후 5시를 넘어 프랑스 보병은 연합군 정면의 농가를 점령, 포병이 이를 방패 삼아 동맹군의 중앙 방어선을 때릴 수 있도록 했다. 네이 장군은 부관을 나폴레옹에게 보내 증원군을 요청했다.
“증원군? 없어. 내가 만들어내야 한단 말인가.”
웰링턴은 흔들리고 있었다. 중앙이 무너질 위기임을 감지한 것이다. 그는 참모들에게 “밤이 빨리 오든지 블뤼헤가 오든지 해야 할 텐데”라고 중얼거렸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 독백을 인용해 프로이센 원군의 주력이 오지 않았더라면 웰링턴을 끝장낼 수 있었다고 주장, 나폴레옹이 결코 영국군에 진 건 아니라고 강변한다.
오후 7시30분 드디어 나폴레옹은 마지막 카드를 꺼낸다. 예비로 아껴두었던 황제근위대를 투입하기로 한 것이다. 프로이센군의 주력이 웰링턴군에 속속 합류하고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승부를 내야 한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황제근위대는 항상 최후에 등장해 무너지는 적군의 심장에 대못을 박아 승부를 결정짓는 역할을 해왔다. 이 정예부대는 한 번도 전투에서 진 적이 없었다. 이날은 달랐다. 전세를 굳히는 결정타가 아니라 불리해지는 전세를 회복시키기 위한 마지막 도박에 투입된 것이다. 남은 근위대는 5000명이 안 되었다. 나폴레옹은 이들 앞에 나타나 짧은 연설을 했다.
“결정적 순간이다. 귀관들은 사격하지 말고 총검으로 돌진하여 저들을 쓸어버려라.”
프랑스 포병의 포격 뒤, 근위대는 비탈을 올라갔다. 능선에 접근해 속보로 달려드는 순간, 웰링턴군은 집중포화를 안겼다. 첫 포격에 500명이 쓰러졌다. 보병이 이어서 나타나 근위대를 향하여 20보 앞에서 총검 돌격을 감행했다. 근위대의 뒤편에선 휴고몽 요새를 지키던 동맹군이 나와서 후군을 공격했다.
근위대는 갑자기 진격을 멈추었다. 불패의 근위대가 멈칫하자 ‘졌다’는 패배감이 프랑스 전군(全軍)을 감싸고 순식간에 전염되었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웰링턴 장군이 능선 위에 나타나 모자를 벗어 흔들어 총진격을 명령하였다. 황제근위대를 비롯, 프랑스군 전체가 등을 돌려 비탈을 내려가면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20년간 유럽을 휩쓸었던 나폴레옹군의 총붕괴였다. 프로이센군이 앞장서서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했다. 블뤼헤 사령관은 포로를 살려주지 말라고 명령했다.
살아남은 근위대가 나폴레옹을 호위해 파리로 달아났다. 밤 10시쯤 웰링턴과 블뤼헤가 한 농장에서 만나 승리를 축하하였다. 들판엔 쌍방 약 5만명의 군인이 시신(屍身)이나 부상자로 변하여 누워 있었다. 이웃 농민들이 밤에 시신을 뒤지면서 물건을 약탈하고 프랑스군 부상자들을 죽였다. 달밤 아래 신음과 비명으로 뒤덮였던 그 들판에 차마 건물을 지을 수 없었는지 지금도 잡초만 무성하다. 웰링턴은 이날 밤 영국으로 보낸 전황 보고서에 ‘워털루 전투’라고 적어 이곳을 불멸(不滅)의 지명으로 만들었다.⊙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mongol@chosun.com
월간조선 09월 호
■ 딸이 본 拉北 전 춘원 이광수의 마지막 나날들
“이제 내가 또 대한민국에 不忠한 일을 할 수 없소”
⊙ “나는 親日派 노릇 한 것 이외에는 별로 죄가 없다”며 자백서 작성 거부
⊙ 납북되던 7월 12일 자백서 강요받자 책상 위에 놓인 종이, 만년필, 연필을 손에 잡히는 대로 꺾어버리고 찢어버려
⊙ 춘원, 6·25 당일 39도의 열에 시달려… 피란 위해 걷기 연습했지만 정원 끝까지 두 번 왕복하면 숨이 차서 꼼짝 못 해
⊙ 이미 7월 16일 평양감옥 수감하고서도 9월 15일까지 가족들로부터 차입품 받는 속임수 써
⊙ 계광순·신동기 선생 등이 평양감옥에서 춘원 목격
[편집자 註]
이 글은 6·25 당시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1892~1950년) 선생이 납북(拉北)되기 전, 춘원을 지척에서 지켜본 딸 이정화 박사의 수기다. 이 수기는 국내에서 근간(近刊) 예정인 《잊혀진 전쟁: 1950~1953》(화산문화 펴냄)에 실린 8편의 수기 가운데 하나다. ‘팔순이 넘은 여덟 명의 재미 한국인의 회고록’이라는 부제(副題)가 붙은 이 책에는 이정화 박사 외에도 최남선(崔南善) 선생의 손자 최학주 박사, 납북된 백관수(白寬洙) 전 《동아일보》 사장의 아들 백순 박사, 그리고 안홍균 박사, 최재원 박사, 김승곤 박사, 강창욱 박사, 고(故) 최연흥 전 서울시립대 교수 등의 6·25 수기가 실려 있다. 이 책은 원래 최연흥 전 교수가 2020년 편집한 《다섯 소년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해 영문판과 한국어판으로 발간을 추진해왔다. 최 전 교수가 지난 1월 타계한 후에는 고인의 지인(知人)인 송종환 전 주(駐)파키스탄대사(현 경남대 국제관계학과 석좌교수)가 중심이 되어 한국어판을 펴내게 되었다.
▲춘원 이광수
1950년 6월 25일. 이날은 일요일이어서 우리는 학교도 가지 않고, 어머니는 아버지 약을 구하러 나가셨다. 박근영 검사 따님 지혜가 놀러 와서 하루 종일 피아노를 치고 놀다가 저녁을 같이 먹고 내가 지혜를 바래다주려고 길에 나섰다. 지혜는 집이 신당동이고 나이가 나보다 어리다. 지혜 아버지는 6월 28일 아침에 공산당에게 잡혀가셨다. 길에 나서보니 웬일인지 길에 자동차가 안 다닌다. 군인들이 트럭을 타고 청량리 쪽으로 질주한다. 무시무시해서 나는 지혜를 바래다주고 달음질을 쳐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집에 돌아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공산당이 쳐들어온다고 인심이 흉흉하다”고 하신다. 우리 집 라디오는 어제부터 고장이 나서 안 들리나 신문은 여전히 매일 나왔다. “공산당이 대대적으로 쳐들어오려고 하나 우리 국군이 넉넉히 막아낼 수 있으니 백성은 안심하라”고 하였다. 그 다음 날 신문에는 정부가 수원으로 옮기려고 했으나 충분히 막아낼 수 있기 때문에 그만둔다는 것이다. 우리 집 라디오가 고장이 난 것이 우리에게는 한 가지 불행이었다.
아버지는 그날 밤 열이 39도였다. 우리 집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무슨 큰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아버지의 의견을 물으시는 것이다. 고열에 괴로워하시는 아버지에게 “세상이 야단이니 어떻게 해요? 공산당이 지금 대대적으로 쳐들어온다고 그러는데” 하니까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그러기로 서울까지야 오겠소. 대한민국이 그렇게 약하기야 하겠소” 하신다.
어머니는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으신지 어머니가 가장 신뢰하시고 그분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믿는 백붕제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하면 좋아요?’ 하고 어머니가 물어보시니까 역시 그분도 아버지 말씀과 같이, “설마 서울 장안에야 공산당이 들어오겠어요? 그저 가만히 계세요. 춘원 선생 병구완이나 잘 하시고” 이런 대답이었다. 아버님의 마지막 생신을 같이 축하해주신 그분도 7월 17일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잡혀가셨다. 그날 밤 우리는 안심하고 잠을 잤다.
開戰 다음 날 은행에 저금하러 간 어머니
▲춘원 이광수의 딸 이정화 박사. 사진=조선DB
어머니는 아버지 방으로 왔다 갔다 하시고 늦도록 무엇을 하고 계셨다. 그 이튿날 6월 26일, 우리 삼 남매, 영근 오빠, 정난 언니와 나는 평상시와 같이 학교에 갔다. 그날은 오빠와 언니가 같이 다니는 서울대학교의 입학식이 있는 날이었다. 그렇게 경쟁률이 심한 서울대학교 문리과(文理科) 대학에 합격한 언니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다. 학교 학생들이 수군수군하고 야단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서울에서 25마일 떨어진 의정부까지 쳐들어왔다고 하는 것이다. 사태가 위험하다고 해서 이화여중 학생들은 정오가 지나 전부 집으로 돌아갔다. 몇 명의 상급반 학생들은 전선에 있는 한국군들을 방문, 격려하자고 자진해서 지원했다.
집에 돌아오니 집에서는 그리 근심하는 빛이 보이지 아니한다. 어머니는 집에 있는 돈을 은행에 저금하러 가셨다 한다. 우리 집은 무슨 모순이었던가? 다른 사람들은 은행에 있는 돈을 찾아서 달아나는 판에 어머니는 집에 있는 돈을 저금하러 가셨다니 어리석다고나 할까 순진하다고 할까?
나중에 알고 보니 기가 막혔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날마다 신문 보도는 국군의 전과(戰果)가 유리하다고 하였고 정부는 옮기지 아니하고 대한민국의 수도를 사수(死守)하겠다고 방송하였으니 이것을 안 믿고 무엇을 믿는단 말인가? 정부의 속사정과 군의 동태를 알려주는 사람이라도 있었더라면 이러한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정부와 한국군은 도망가고 일반 국민들이 남쪽으로 가기 위해 한강을 건너기 전에 한강대교를 폭파했다.
우리 집에 오시는 분 가운데는 “그따위 소리 믿지 말고 어서 달아나요” 말해주는 이는 한 분도 없었다. 어머니가 은행에 갔다 오시더니 대단히 걱정하는 빛을 보인다. 은행에는 돈을 맡기러 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찾으러 오는 사람뿐이요, 여러 가족이 벌써 남쪽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저녁때 오빠가 돌아와서 서울의 동북쪽에 위치한 청량리에서 대포 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대학의 교수들도 어디로 도망갈 준비를 하더라고 한다. 어머니는 이때부터 허둥지둥하셨다. 아버지의 열은 조금 떨어졌지만 기침이 심해서 잠을 잘 수 없는 지경이었다.
오빠, “이 집을 떠날 사람은 아버지"
다음 날 27일 아침 어머니는 그 전 날 입금한 돈을 찾기 위해 은행에 갔다. 변동이 심한 인플레이션에도 불구하고 두툼하면서 무거운 그 지폐 다발은 우리가 다음 3개월 동안 한 끼니도 놓치지 않고 지탱할 수 있게 해주었다. 어머니는 정오 넘어 돌아와서 아이들은 남쪽으로 도주토록 결정했다. 그러나 오빠는 당장 떠날 것을 반대했다.
오빠는 “이 집을 떠날 사람은 아버지이다”라고 말했다. 어떻게 아버지를 두고 아이들만이 도망갈 수 있단 말인가? 이래서 우리는 다음 날로 출발을 연기했다. 박격포 소리가 멀리 계속 들렸지만 우리는 비교적 편안하게 잤다. 아버지의 열은 떨어지고 그의 기침 빈도도 가라앉아서 잘 주무셨다.
28일 새벽 2시경 사이렌 소리에 깨어났다. 공습경고가 아니었다. 남쪽에서 간헐적으로 오는 사이렌 소리는 긴박하게 들렸다. 나는 잠에 빠진 어머니를 흔들어 깨웠다. “엄마, 저 사이렌 소리 들어봐요. 소름 돋는 소리야” 하고 말했다. 반쯤 잠에서 깬 어머니는 “걱정 마라, 그냥 자자. 우리의 수도가 그렇게 짧은 시간에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야” 하고 다시 잠에 떨어졌다.
28일 아침 높은 소리의 기관총 소리가 박격포 소리와 함께 들렸다. 탱크가 굴러들어오는 소리가 침대 아래에서 진동하는 것 같았다. 서울 시민들은 북한 인민군들에게 붙들리게 된 것이었다. 도망가기에는 늦었다. 한강대교가 폭파되어 끊긴 것도 알았다. 공산주의자들로부터 탈출할 길이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이렌 소리는 국군에게 한강 남쪽으로 후퇴하라는 마지막 경보였다.
“설마 대한민국이 아주 망하기야 하겠느냐”
▲6·25 남침 사실을 보도한 1950년 6월26일자 《조선일보》. 사진=조선DB
곧 북한 공산군이 효자동 길을 점령했다. 정부의 정책들을 공공연히 반대하는 글을 계속 기고해온 아버지는 항상 공격의 대상이었다.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일제 치하에서 체포되었고 그 이후 일본과 협력했다는 이유로 한국 정부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제 서방 민주주의 동조자라는 이유로 박해의 대상이 될 것이었다.
우리는 아버지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체포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계획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아버지는 자신의 원기가 회복하면 집을 떠나서 어딘가 숨을 것이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허리 벨트 안에 6만원을 숨겼다. 아버지는 마당에서 걷는 연습을 하셨다. 아버지는 매번 정원의 끝까지 두 번 왔다 갔다 하시면 숨이 차서 꼼짝 못 하고 오랫동안 쉬었다. 아버지의 기침 빈도가 너무 잦아서 마루 밑이나 광 같은 데에 숨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아버지는 어느 날 집을 떠날 수 있다고 할 만큼 튼튼해졌다고 말할 때까지 여러 날 걷는 연습을 하였으나 곧 다시 편찮아졌다.
공산주의를 반대하거나 미국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재판을 받고 기소되는 인민재판이 매일 서울 거리에서 진행되었다. 체포를 피하기 위하여 도망가려고 한 자는 현장에서 즉결 처형되었다. 한편 북한 인민군들은 의용군(義勇軍)을 충원(充員)하기 시작했다. 말로는 자발적으로 지원했다고 하지만 젊은이들이 길에서 보이는 대로 징집이 되었다. 대학에서도 오빠를 나오라고 하고, 인민위원회에서도 오빠를 나오라 한다. 나가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당장 끌려간다. 그래서 아버지보다 오빠가 더 급하게 되었다.
오빠는 7월 3일 자그마한 자루 하나를 싸 들고 집을 떠나서 자하문 인근에 있는 숙모 댁 근처의 민가에서 떨어진 동굴에 숨기로 했다. 위급 시에는 동굴에 숨고 밤에는 근처의 숙모 댁에 있는 것으로 정했다.
어머니는 우시면서, “어떻게 하든지 목숨만 보전하여라. 며칠 안 갈 것이다. UN군이 들고 나섰으니 설마 대한민국이 아주 망하기야 하겠느냐. 목숨만 보전해라” 이러한 비통한 작별을 하였다.
아버지도 다시 걸음 연습을 하시며 금명간 하루 이틀 내에 어디로 달아나자고 하셨다. 아버지는 마치 덫에 걸린 다람쥐 같았다. 그는 높은 벽을 오르거나 먼 데를 갈 수 있을 만큼 튼튼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혼자서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머니는 공산주의자들과 좋은 관계를 갖고 가능한 한 집에 머물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체포
우리는 하늘에서 미군 비행기가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소리를 내는 폭탄을 투하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더 많은 폭탄이 쏟아져서 전투에서 이겨다오. 폭탄 투하로 민간 피해자가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며칠만 기다리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일주일이 한 달로 늘어났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의 희망은 사라졌다. 아버지의 체포 가능성도 그만큼 커지고 있었다.
7월 6일 우리 집은 공산당에게 차압을 당하였다. 아침 9시경 20여 명이 우르르 우리 집으로 들이닥쳤다. 아버지는 침대에 누워 계셨다. 그들은 빨간딱지를 각방의 문에 붙이면서 어머니, 언니와 나를 어느 한 방으로 몰아넣고 앉아 있으라고 했다. 문 뒤에 있는 우리의 옷과 책들이 거의 딱지가 붙어져서 압류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떠나면서 우리 집 대문 앞에 공산당 보초를 세웠다. 보초의 허락 없이는 식료품 가게에 가는 것을 포함하여 외부로 나갈 수 없었다. 아무도 집에 들어오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집 뒷문에는 빨간딱지가 붙고 우리 집 대문에는 ‘내무서가 압류한 재산’이라는 표시가 붙었다. 이제는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바로 그 이튿날 인민군과 인민위원회에서 나온 도합 열 명가량의 인원이 아버지를 잡으러 왔다. 그때 침상에 누워 있던 아버지는 몸이 약해서 못 걸어가겠다고 하였다. 그들은 가까운 파출소까지 가는 것이니 천천히 가자고 말했다.
파출소에는 여러분이 잡혀 오셨다. 지서장, 재판소 판사와 그 밖에 몇 명이 잡혀 왔다. 아버지가 두 시간 이후 풀려 나올 때까지 어머니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부모님은 걸어서 2마일 떨어진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숨이 차신 것 같았고 어머니는 괴로워하셨다. 아버지가 도망을 갈 만큼 건강하실까? 아버지가 사라지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될까?
“자백서 써도, 안 써도 잡혀갈 것"
아버지에 의하면 파출소에 붙잡아놓고 그들은 아버지에게 죄를 자백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체포된 사람들은 집에 돌아가서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에 잘못한 일에 대한 자백서를 써오라 하고, 그 자백서에 따라 다시 처분하겠다고 하면서 내보냈다고 한다.
이때가 아버지가 달아날 유일한 기회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건강 상태는 달아날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는 한이 있어도 집으로 돌아가지 말고 바로 어디로든지 달아났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그때 왜 아버지를 집으로 모시고 왔을까? 일단 집에 돌아오면 보초가 있으니 달아날 수가 없지 않은가. 그때 내가 분명히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그때를 천추(千秋)의 한(恨)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항상 어머니의 결정을 따랐으므로 그때 어머니가 결심했다면 어디론가 도피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셔서 곧 누웠다. 그날도 그 이튿날도 자백서를 안 쓰셨다. 어머니가, “당신 어떻게 하려고, 총칼 앞에서 안 쓰시고 있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겠소” 하시니까 아버지는, “자백서를 써도 잡혀갈 것이요, 안 써도 잡혀갈 것이오. 당할 대로 다 당하겠소. 이제 내가 또 대한민국에 불충(不忠)한 일을 할 수 없소” 하고 엄숙하게 거절하셨다.
무슨 이유인지 어느 날 아침 보초가 대문 앞에 서 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아버지가 시골 사람처럼 보이도록 무명 고의적삼을 입히고 고무신을 신겨서 달아나도록 준비를 했다. 그때 평복을 입은 함경도 사투리 쓰는 사람이 불쑥 들어왔다.
“우리는 선생님을 모셔서 지도를 받으려고 합니다. 잠깐 같이 가십시다” 한다. 곧 뒤를 이어 인민군복을 입은 젊은 사람이 들어와서 북쪽 사투리로 “자백서 썼소?” 하고 묻는다. 아버지는, “나는 친일파(親日派) 노릇 한 것 이외에는 별로 죄가 없는 것 같아서 안 썼습니다” 하였다.
젊은 사람이 천천히 “그러면 지금 써서 가지고 갑시다. 자백서를 써가지고 가는 것과 안 써가지고 가는 것과는 대우가 다릅니다. 우리가 현관에서 20분 동안 기다릴 터이니 쓰시오” 하고 종이 한 장을 놓고 현관으로 나가버린다.
아버지의 마지막 미소
▲1929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의 이광수. 사진=조선DB
어머니, 언니와 나는 놀라서 아무 말 없이 오랫동안 서 있었다. 어머니는 손과 몸을 떠셨다. 아버지는 책상 앞에 가만히 꿇어앉으셨다. 5분이 지나도 아버지는 쓰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책상 위에 놓인 종이, 만년필, 연필을 손에 잡히는 대로 꺾어버리고 찢어버렸다. 20분쯤 지나 그 인민군 장교는 다시 들어와서 아버지 앞에 놓인 종이와 내동댕이쳐진 만년필들을 보고는 “당신은 미국 비행기가 오기를 기다리는 자요. 어서 나와!” 하고 성을 내었다. 어머니가 덜덜 떠는 것을 보고는 “문화인이 비겁하게 떨기는 왜 떨어요?” 하고 조롱했다. 어머니는 땅에 무릎을 꿇고 그 인민군이 아버지를 데려가지 않도록 빌자 그는 “나에게 비는 것은 봉건주의 사회의 나쁜 버릇”이라고 일갈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하는 것이 봉건주의가 아니다. 그녀는 다만 남편을 걱정할 뿐”이라고 점잖게 말했다. 아버지는 잡혀가실 때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이 이후에 있었던 일에 대한 기억은 불확실하다. 내가 기억하는 것과 언니의 기억이 다르다. 언니는 아버지가 트럭에 실려 북한 인민군에 잡혀갈 때 나는 울기만 하고 길까지 배웅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잡혀간 날은 전쟁 발발 후 17일째가 되는 7월 12일이다. 아버지가 잡혀가신 후 우리 집에는 보초가 없어지고 의료 기구와 가구들을 실어 내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그때 순화병원에 입원하고 있던 콜레라, 장티푸스와 같은 전염병 환자들을 우리 병원에 입원시켰다. 우리 집에는 식구라야 단 셋이 남았다. 우리는 심부름하던 아이, 식모, 간호사들을 모두 자기 집으로 보냈다. 우리는 집에 더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오빠 일이 궁금하여 이 집을 떠날 수도 없었다.
7월 말경이었다. 새벽에 다 죽게 된 오빠가 집으로 들어왔다. 그동안 오빠는 자하문 밖 어느 바위굴 속에 숨어 있었는데 먹을 것은 떨어지고 아무거나 주워 먹어서 배는 아프고 이러다가는 죽을 것 같아서 왔노라고 한다. 여위고 파리하고 흉하고 비참한 몰골이었다.
이때는 ‘의용군’을 마구 길에서 붙잡아 가는 판이라 젊은 사람은 길에 마음 놓고 나타나지 못하였다. 오빠는 우연히 아버지가 잡혀가신 소식을 들었다. 이제 우리는 오빠의 안전을 걱정해야 했다. 어머니는 그를 숨기고 치료를 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오빠가 어느 순간에 체포되고 순화병원 환자들로부터 감염될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어머니는 의원 복도 아래에 있는 지하실로 갔다. 좁은 창문이 있는 구석에 장작들과 구공탄들을 쌓아 오빠를 위한 비밀 방을 만들었다. 밖에서 모르는 사람이 들어오면 바로 오빠는 여기에 숨었다. 날마다 주사를 놓고 영양분을 취하도록 하였더니 일주일 지나니까 오빠의 건강이 회복되었다. 이제는 돈을 넉넉히 주어 가지고 달아나도록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 지하실 위 복도가 사람 발자국 소리로 요란했다. 한 20명의 사복 한 젊은 내무서원들이 집 수색을 하기 위해 급습했다. 그중에는 멋모르고 날뛰는 의사 나부랭이도 있었다. 오빠는 민첩하게 지하의 숨는 곳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당장 우리에게 집을 비우고 나가라고 명령했다. 만일 지하실에 오빠만 감추어 놓지 않았다면 어머니는 “네. 나가겠습니다” 하였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하룻밤만 더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였다. 그 사람들은 우리를 조그마한 방 하나로 내몰고 그 방에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나가라고 했다.
지하실 창틀을 뜯어낸 어머니
▲춘원 이광수(오른쪽)와 부인 허영숙(가운데). 왼쪽의 아들 봉근은 8세 때 사망했다. 사진=조선DB
우리는 빈 몸으로 그 작은 방으로 가서 벌벌 떨고 앉아 있었다. 집에서 쫓겨나는 것, 빈 몸뚱이 거지꼴이 되는 것, 이것들은 다 우리에게 걱정이 아니었다. 오직 지하실에 있는 오빠가 걱정이었다. 저들에게 발각되었다가는 당장에 잡혀갈 것이다. 그들은 좋은 방을 하나씩 차지하고 들어갔다. 오빠가 어떻게 나올 것인가.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날은 저물어 어두워졌다. 그런데 그들이 저녁을 먹으러 간다면서 두 사람을 남겨놓고 모두 나가버렸다. ‘옳지, 이때가 오빠를 구할 때’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 남아 있는 두 사람이 하필이면 지하실로 들어가는 문 앞 마루에 앉아 있었으니 어떻게 오빠가 나올 것인가. 어머니는 무슨 궁리를 하였는지 “너희는 이 방에 가만히 있고 나오지 말아라. 내가 할 방법이 있다” 하셨다. 그러나 나는 궁금하여 가만가만히 어머니 뒤를 따라나섰다. 우리 집은 병원이라 다소 집이 커서 이리저리 움직여도 그 두 사람의 눈을 피할 수가 있었다.
지하실에는 출입구 이외에 공기 통하는 창이 두어 군데 있었다. 그러나 그 크기가 다섯 치가량이나 될까, 도저히 사람의 머리가 드나들 수 없었다. 이 창은 뒤꼍으로 나 있어서 그 두 사람의 눈에 뜨이지 않는 곳에 있었다.
어머니는 재빠르게 가셔서 창틀을 뜯었다. 창틀이 모래흙에 파묻히고 비바람에 삭아서 뜯을 수 있었는지 모르나 그래도 어머니의 힘으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죽고 사는 전쟁이었다. 적은 바로 저기 앉아 있다. 이것을 뜯다가 발각이 되면 우리가 죽고 마는 것이요, 요행히 성공하면 오빠와 우리가 살아나는 길이다.
나는 그들이 이리로 올까 망을 보고 있었다. 오는 듯하면 변소에 갔다 오는 체하다가 또 창틀을 파냈다. 창틀을 파내고 어머니가 당신의 머리를 그 안으로 넣어보았더니 넉넉히 들락날락한다. 창틀 파내는 일에는 성공하였다. 창틀은 파내었으나 여기서 나와서 어디로 가나! 바로 곁에 한 길이나 되는 높은 담이 있고 그 담 너머는 바로 예전 반장 집이다. 그 댁은 공산당 세상이 되고서는 반장 자리에서 물러난 집인데 어머니와 친한 분이다.
그 댁에는 반장 집 말고도 여러 가구가 살았다. 모두 하루하루를 노력하여 날품을 팔아 사시는 분들이다. 바로 그 담 밑에는 무연탄이 들어 있는 나무 궤짝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 궤짝 두 개를 포개어 놓고 담 너머로 머리를 내밀어 “여보세요” 하고 불렀다. 그러고는 “지금 곧 우리 아들이 이 담을 넘어갈 터이니 받아서 숨겨달라”고 부탁하였다.
“네, 그렇게 하겠으니 어서 넘겨 보내시오” 한다. 서로 정(情)이 통하는 우익 진영이다. 우리는 미국 비행기가 오지 않는 날이면 실망하고 낙심하는 대한민국 백성이다
오빠의 탈출
다음에 남은 일은 오빠에게 이 구멍으로 지금 곧 나오라는 기별을 할 일이다. 지하실이 30간이나 되고 기역자로 구부러지고 물건이 이리저리 쌓여서 오빠가 숨어 있는 장작더미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다. 어머니는 다시 복도 마루로 들어가서 오빠가 여기쯤 숨어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마루에다 입을 대고 “영근아!” 하고 부르니까 바로 그 밑에 있어서 “네” 하는 대답이 곧 들렸다.
“서쪽 창으로 나와서 반장 집으로 향한 담을 뛰어넘어라. 연락했다. 지금 곧 나와라. 지금 못 나오면 죽는다.”
다시 “네”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고 나서 어머니와 나는 창문이 있는 곳으로 가서 오빠 머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다. 얼마나 초조하였는지, 5분가량 지났을까. 오빠 머리가 나왔다. 그런데 현관문 종 울리는 소리가 났다. 그들이 돌아온 것이다. 오빠에게 “어서, 어서” 하고 재촉하였다. 오빠가 담을 뛰어넘었다. 우리는 뒷간에 갔다 오는 체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 일을 하는 동안이 한 30분 걸렸다.
우리는 방으로 돌아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는 내일 일찍 이 집을 떠나면 그만이다’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으나, 어머니는 생각이 다르셨는지 자다 깨 보면 일어나 앉으셨거나 오빠가 넘어간 담을 멍하게 내다보고 계셨다.
이날 따라 늦게 뜬 달이 휘황하게 밝았다. 붙잡혀가신 아버지의 생각을 할 겨를도 없고, 집 떠나는 슬픔도 없었다. 그날 밤 당장 오빠와 우리의 생명이 위태한 것이 무섭고 두렵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날 밤은 무사히 넘겼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우리는 어저께 쑤어놓았던 콩나물죽을 차가운 대로 먹고 집 떠날 준비를 하였다. 내가 그 사람들 앞으로 가서 지금 우리가 나가겠다고 하자 당장 갈아입을 옷 등을 넣을 한 개의 자루 지참을 허용하였다. 공산당원은 자루 속을 검사했다. 그는 불교 염주와 포켓 크기의 성경을 꺼냈다. 두 물건은 아버지가 내게 준 선물이었다. 그 검사관은 “이런 것들은 새 사회에 쓸모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 성경은 내 일생 동안 떼어놓은 적이 없고 아버지의 글씨가 있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나는 검사관에게 가져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반대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너희가 그동안 안락하게 잘 먹고 잘살았던 속죄(贖罪)를 하라고 하는 것’ 같은 당당함을 읽었다.
우리는 자하문 밖 어머니 둘째 언니 댁으로 갔다. 어머니의 언니는 조카와 혼자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우리 식구에게 작은 방을 내어준 언니에게 감사할 겨를도 없이 반장 댁에 두고 온 오빠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 집에는 여러 가구가 살고 어린 아이가 십여 명이나 있으니 어느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와서 붙잡혀갈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오빠에게 갔다.
어머니는 “영근아, 잡혀갈 것에 대비해라. 과거에 내가 너한테 섭섭하게 해준 일 있거든 용서해라” 그렇게 말씀하고 돈 5만원을 주며 우셨다. 오빠는 웃으면서 말했다.
“어머니, 내가 왜 잡혀가요. 국군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안 잡혀갈 테니 염려 마세요.”
반장 댁에 사는 10명이 넘는 아이들은 부지불식간에 오빠의 존재를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위험해도 자하문 밖 어머니의 둘째 언니 댁으로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우선 길에서 젊은 남자가 보이기만 하면 잡아가는 판국이니 문 밖을 나서기도 어렵고, 둘째 어머니 언니 집의 사랑채에 세(貰) 들어 있는 사람이 공산당원이었다. 그들 부부의 여자는 여성동맹의 위원장이요, 남자는 빨치산 부대원으로 나갔던 공산당 간부였다. 우리 세 식구는 정히 갈 데가 없어서 그곳으로 갔지만 이 집도 여러 날 있을 곳은 못 되고 오빠가 숨을 곳은 더구나 아니었다.
정신영 원장
우리가 집에서 쫓겨난 것은 8월 5일이었다. 자하문 밖 어머니 언니 집에서 우리는 이틀 밤을 잤다. 어머니는 이 집에 세 들어 사는 공산당원이 우리를 ‘서방 동조자’로 의심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절망적인 때 어머니는 인정 많은 사람을 발견했다.
사흘째 되는 날 우리는 마포에서 조그만 산부인과 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어머니의 15년쯤 후배인 정신영(鄭信泳) 원장의 상신의원으로 갔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에게 피란처를 제공했다. 상신의원 원장은 젊고 역동적인 분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 의원을 방문하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는 눈에 덜 띄게 되었다.
정신영 원장의 남편 조득준 선생님은 대한민국 우익 중에서도 우익이며 전 올림픽농구대회 챔피언이고 열정적 기독교인이다. 정 박사는 공산당 치하에서 겉으로는 공산당의 승리를 열망하는 것처럼 하면서 공산당원의 치료도 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집 지하에는 4명의 우익 인사를 숨겨주고 있었고 우리 식구 셋과 오빠까지 숨겨주겠다고 하였다.
원장님은 겉으로는 좌익처럼 행동하지만 우익으로서 포부가 크고 성격이 활달하시고 말하자면 여성 정치가 타입이었다. 오빠를 효자동에서 마포로 데려올 때에도 정 원장은 중국어로 ‘구호팀’이라고 쓴 붉은색의 ‘중국적십자’ 완장을 주어서 오빠는 그것을 팔에 두르고 대로를 걸어서 무사히 마포로 올 수 있었다.
이때 우리로서는 정 원장이 구세주였다. 누가 이 어려운 판국에 반동으로 몰린 우리 식구를 받아줄 사람이 있겠는가. 형제들도 일가친척도 우리를 꺼려 하였다. 우리와 가까이하다가는 자기네도 위태한 까닭이었다.
이 의원에 숨은 사람 가운데는 건축을 전공하는 분이 있어서 의원의 천정(천장) 안에다가 널빤지 쪽을 깔고 그곳에 사람이 올라가 잘 수 있도록 만들어놓았다. 천정 한구석으로 동아줄을 매어 그것을 타고 사람이 올라갔다. 저녁을 먹고는 천정으로 올라가고 낮에는 내려와서 방공호(防空壕) 속에 들어가 있었다.
이 집은 밖에서 들어오려면 반드시 의원 진찰실을 통해야만 하고, 직접 안으로 들어오는 문은 항시 잠가놓았다. 진찰실에는 간호사와 심부름하는 원장 조카아이가 있었는데 이 아이가 영리해서 안팎의 연락을 잘 해 주었다. 낮에라도 이상한 사람이 번뜩 보이기만 하면 우리에게 곧 연락이 되었다.
다가오는 위험
평소에 원장 선생은 천연스럽게 병원으로 인민군이나 내무서원을 데리고 들어왔는데, 그분의 용감함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원장은 젊고 인물이 잘나고 체격도 좋았다. 인민군 장교도 간혹 치료를 받으러 온다. 그러면 재빨리 연락원이 우리에게 와서 ‘쉬’ 하고 신호를 보내고 간다. 원장이 원체 사람이 잘나시고 인심이 좋고 활달하니까 내무서원에게도 호감을 샀다. 원장은 사람을 많이 숨겨놓았기 때문에 일부러 호감을 사려고 고심을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내무서원도 가끔 와서 유행가를 부르고 한 시간씩 간호사와 놀다 가는 일도 있었다.
한번은 내무서원이 진찰실에 와 있는 것을 모르고 어머니가 진찰실을 내다보다가 그 사람에게 들켰다.
“저 사람은 누구요?” 하고 내무서원이 물었다. 그러자 원장은 아주 천연스럽게 “저 노인 말인가요? 공습을 받아 남편이 죽고 병신이 된 분이에요. 여보, 팔 아픈 것은 좀 어떠시오?” 하고 물었다. 그러자 내무서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9월 15일이 가까워서는 원장도 겁을 냈다. 아마 상신병원 원장의 정체를 의심하는 사람이 생긴 모양이었다. 어쩌면 이 병원도 크게 수색을 당할 날이 머지않아 온다고 원장은 걱정을 하였다. 9월 10일쯤 되어서는 어머니는 아주 절망에 빠진 말을 하셨다.
“영근아, 이제는 저 마포 강으로 가서 빠져 죽는 수밖에 도리가 없을 것 같다. 이렇게 심하게 집 수색을 하는데 우리라고 피할 길이 있겠냐. 이젠 먹을 것이 떨어져 살 수도 없다.” 오빠는 어머니의 말씀을 용기 있게 반박하였다. “연합군들은 9월 말까지 꼭 들어옵니다. 두고 보세요. 나는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하는 말입니다. 그때까지만 어떻게든지 견디어봅시다” 한다. 오빠의 계산으로는 한국군과 유엔군이 군사 준비를 다시 해가지고 상륙을 하려면 시간적으로 9월 하순까지 걸린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오빠의 말을 믿고 다시 용기를 내어 마지막으로 몸에 지녔던 금가락지를 팔아서 7만원을 마련했는데 이 돈이 떨어지기 전에 연합군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때 7만원이면 죽을 쑤어 먹고 살더라도 우리 네 식구가 한 달을 지탱하기 어려운 돈이었다.
평양감옥의 춘원
▲북한군 점령하 서울에서 벌어진 인민재판. 양복을 입은 이는 소설가 김기진으로 인민재판 후 죽도록 구타당한 후 버려졌으나 극적으로 살아났다. 사진=조선DB
9월 12일경 공산주의자 신문은 범죄인들의 재판이 개시된다는 보도를 했다. 판사와 검사들이 임명되었다. 죄수들의 가족은 옷을 넣을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상세를 물어보기 위해 형무소에 갔다.
어머니와 나는 처음 마포형무소에 갔으나 그곳에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다. 다음 서대문형무소에 갔다. 하루 지나니 그들은 아버지가 여기에 수감되어 있다고 하면서 차입물을 받겠다고 하였다. 집에 와서 “아직 그래도 사셨구나” 하며 모두 울었다.
연합군이 인천에 상륙한 9월 15일 우리는 아버지의 재킷과 담요와 비타민 한 병을 가지고 서대문 감옥으로 갔다. 젊고 친절하게 보이는 인민군 간수는 ‘이광수’ 하고 아버님의 이름을 부르더니 가져간 차입물 자루를 받아 갔다. 크게 위안이 되었다. 우리는 최소한 아버지가 서대문 감옥에 계시고 어머니가 정성을 다하여 준비한 차입물을 수령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뒤에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이 우리를 속인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7월 12일에 붙잡혀가셔서 7월 16일 벌써 평양감옥으로 데려갔다. 아버지의 지인인 계광순(桂珖淳) 선생이 7월 28일 평양감옥에 있을 때 아버지와 한 방에서 한 달 동안 수감되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다른 지인인 신동기 선생도 수갑을 차고 한 달 동안 아버지와 같은 감방에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기침이 매우 심해서 독감(獨監)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계광순 선생과 신동기 선생은 공산군이 북쪽으로 후퇴할 때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도주하여 살아오신 분들이다.
계 선생과 신 선생은 그들이 잡혔을 때 건강하였다. 서울에 연합군이 들어온 것은 9월 27~28일이지만 그들이 평양에 진주한 것은 10월 24일이었다. 연합군이 북한에 진군할 즈음 후퇴하는 북한 인민군은 죄수들을 소규모 그룹으로 나누어 분산시켰다. 계광순 선생은 그 기회에 도망을 쳤다고 한다.
계 선생은 아버지가 평양감옥에서 방은 달랐지만 밤늦게까지 조사를 받으러 다니시는 것을 보았으며 그 후 아버지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연합군이 전진하자 공산주의자들은 급하게 북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으나 죄수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조직적인 전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계광순 선생은 인민군이 지키는 민가에서 탈출할 것을 엿보고 있다가 지키는 사람이 잠깐 없는 틈을 타서 용케 도망을 해 나오신 것이다. 산으로 산으로 여러 날을 굶고 구사일생으로 연합군 진영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인천상륙
건강하고 용감한 사람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아버지같이 병약하고 용기 없는 분은 공산당이 끌고 다니는 대로 끌려다니실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비열하게도 차입물을 받는 속임수를 쓴 것이었다. 그때 서대문 감옥에 옷을 차입한 사람들은 수백명이었다. 공산주의 간수들은 이름이 같은 것으로 실수를 할 리가 없다. 나는 그때 차입신청서에 이렇게 썼다.
〈이광수 59세 저술업
본적 서대문 1가 9번지
현주소 효자동 175번지
차입인 이녀 이정화〉
배경을 같이 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 것인가? 그들은 끝판에 달아날 때 자기네들을 가장하기 위한 남한의 민간 옷을 마련하느라고 이런 행동을 하였는지 모른다. 또 공산주의자들은 싸우는 것이 절망적인 상황이 되고 후퇴하게 될 때 이러한 일을 하였다.
아버지 옷을 서대문 감옥에 차입한 것이 9월 15일이다. 차입하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시간이 걸려 나는 저녁 7시에나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오빠가 대단히 기뻐하는 얼굴로 저 소리 좀 들어보라는 것이다. 과연 이상한 소리가 인천 방면에서 들린다. 이 집 뒤꼍은 백 평가량 되는 높은 지대다. 그리고 사방이 둘러싸여 밖에는 잘 보이지도 않고 앞뒷집이 모두 우리와 통하는 사람들이다.
지금까지 숨어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이곳으로 나와서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소리는 무척 형용하기 어려운 소리였다. 연속적으로 들려오는데 그것은 돌 깨뜨리는 소리와도 다르고 맷돌질하는 소리라고나 할까, 그런 소리가 연거푸 들린다. 오빠는 좋아서 껑충껑충 뛰면서 이것이 아군이 인천에 상륙하는 소리라고 한다.
“그것 보세요. 내 말이 맞지 않아요. 이달 안으로 들어온다고 그랬지요” 하고 어머니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바깥소문에 의하면 이미 연합군이 인천에 상륙하였다고 한다. 인민군은 원거리 대포를 바로 우리 집 맞은편 마포형무소의 마당에다 걸어놓고 인천을 향하여 연속적으로 쏘아댄다. 밤새도록 쏘았다. 우리는 귀가 먹을 지경이요, 어지러워서 정신을 못 차렸다. 대포는 인천 쪽에서도 쏘았을 터인데 우리 동네는 무사하였다.
서울수복
9월 16일 낮쯤 해서 공산주의자들은 연합군이 인천으로 상륙하려는 것을 격퇴시켰다고 발표하였다. 우리는 정말인가 하고 가슴이 가라앉았다. 인민군은 사흘가량 대포를 쏘더니 물러나서 아현동 로터리에다 옮겨놓고 쏘아댔다. 옳지! 국군이 더 가까이 온 모양이었다. 그 후부터는 대포 탄환이 비 오듯이 쏟아져 왔다. 잠시도 쉬지 않고 ‘꽝’ 하면 ‘쒸’ 하고 불덩어리가 우리 동네를 지나서 서울 시내로 들어가 쿵 하고 맞으면서 불길이 일어났다. 무섭고 끔찍한 광경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서 며칠을 보냈다. 그러나 요행하게도 그 대포알이 우리 동네에는 떨어지지 않았다. 한국군과 연합군의 대포 쏘는 거리는 점점 가까워져서 마포 강 바로 건너편에서 쏠 때에는 서울의 밤하늘은 온통 불을 켜놓은 것처럼 되고 귀가 따가웠다. 포탄의 파편이 우리 집 앞뒤로 떨어졌다.
9월 24일 밤이다. 공산당들은 최후의 발악으로 사람을 마구 총살하고, 총 없는 자는 나무때기에 쇠창살을 꽂아가지고 떼를 지어 다니며 양민을 함부로 찌르는 때였다. 마침 우리 집 건너편에서 불이 나서 그 불길은 거의 우리 집으로 옮아붙으려 하였다. 광 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은 다 밖으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공산당은 이리떼처럼 날뛰지 않는가. 이 판에 이 집에 불이 붙어 숨은 사람이 나왔다가는 당장에 잡혀 죽을 것이다. 사내들도 이제는 할 수 없다 하고 땅바닥을 쳤다. 그러나 기적이다. 그 불길이 우리 집으로 건너오지 않고 꺼져버린 것이다. 얼마나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는가. 아슬아슬한 일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런 가운데서도 동원을 시켜서 가마니에다 흙을 집어넣어 길을 막아놓고는 시가전 준비를 하였다. 비행기는 연합군을 엄호하느라고 연달아 쉬지 않고 날아와서는 폭격을 하였다. 하늘에서 내리쏘는 기관포의 파편이 우리 집 마당에도 수북하게 떨어졌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는 우물에 물을 길러 나갔고 밥을 지어 먹고 살아야 했다.
9월 27일 정오 때이다. 밖으로 망을 보러 나갔던 아이가 달음질쳐 들어오면서 미국 병정이 탱크를 타고 문 앞에 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뛰어나갔다. 과연 미군들이 탱크를 몰고 수없이 들어왔다. 뒤이어 국군이 들어왔다. 어머니는 소리를 내어 우셨다. 우리의 입에서는 절로 만세 소리가 나왔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리하여 우리는 9·28을 맞은 것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당장에 걱정되는 것이 서대문 감옥에 계시리라고 믿고 있던 아버지의 안부였다. 우리는 그날 가보려 하였으나 길이 막혀서 못 가고, 그 이튿날 29일에도 못 가고, 30일 아침 일찍이 집을 나서 서대문 감옥으로 갔다. 서대문 감옥은 텅 비어 있었다. 근처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9월 20일 전후하여 어디론지 모두 끌려갔다고 한다. 길가에는 인민군과 시민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널려 있고 사람들은 얼이 빠져 있었다.
우리는 그 길로 효자동 집으로 향했다. 공산당원들이 우리 가족을 쫓아내었던 효자동 집에는 문이 다 잠겨 있었다. 앞문, 뒷문, 병원 현관문도 모두 닫혀 있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에 들어왔는데 인민군이나 공산당원들이 아직도 우리 집을 차지하고 있을 리는 만무했다. 그래도 나는 혹시 누가 숨어 있지나 않을까 하고 겁이 났는데, 오빠가 담을 훌쩍 넘어서 대문을 열었다. 우리 집을 점령해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황급히 도망친 것 같았다. 마루 위 밥상에는 먹다 남은 반찬이 쉬어 있고 두 달 전 우리가 쓰던 밥통에는 그들이 만들어놓은 보리밥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들이 신고 있던 신발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어머니의 산부인과 의원의 수술실, 진찰실, 입원실들은 텅 비어 있었다.
이제 우리는 행복한 집으로 돌아왔지만 새로운 슬픔이 엄습해왔다. 아버지가 계시던 방에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왔다 갔다 하는 것 같고, 어머니는 자신의 잘못으로 아버지가 잡혀가시게 된 것 같아서 형언할 수 없는 낙망과 슬픔에 빠져 있었다. 아마도 우리의 안전이 아버지의 희생으로 얻어진 것 같았다. 어머니는 왜 그리도 서러워하셨을까? 7월에 잡혀가셨을 때 아버지는 얇은 적삼을 입고 계셨었다. 추운 겨울에 북으로 끌려간 아버지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서대문 감옥에 차입한 따뜻한 옷들이 아버지께 전달되었을까? 아마도 이런 생각들이 어머니를 괴롭혔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숨기는 데 실패했다. 어머니는 여생 동안 아버지를 보호하지 못한 실수로 울었다. 나는 나에게 아버지요, 스승이요, 신념이요, 희망이던 아버지를 이렇게 잃어버린 것이다.⊙
글 : 이정화 춘원문화교류센터 대표·美 채텀대학 생화학 박사
■ 09.24 노·소론 충돌한 그때, 인삼 찾아 조선 땅 뒤진 일본
조선의 ‘캐시 카우’ 인삼
▲① 일본 규슈박물관에 있는 인형 인삼과 관련 문서. 18세기 초반 부산 왜관에서 대마도를 거쳐 일본으로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② 대마도가 조선에서 수입한 인삼을 다시 일본 본토에 판매한 사정을 기록한 ‘인삼시종각서(人參始終覺書)’. [사진 부산박물관, 국사편찬위원회
요즘 인삼이 은만큼 귀해서 장사꾼이 몰려듭니다. 함경도 산들은 평소 삼이 난다고 알려졌으니 백성에게 생업으로 채취하게 하면 온갖 재화가 모여 삶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방관이 인삼에 세금을 너무 많이 매겨 산에 들어간 백성이 두려워서 삼을 건드리지도 않습니다. (…) 여진인은 우리나라에 삼이 많음에도 백성이 캐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매년 8월 누런 인삼 잎이 보일 때마다 두 사람씩 작은 배로 강을 건너와 수풀 속에 배를 숨겨 놓고 산과 계곡을 돌며 삼을 캡니다. (…) 심지어 산촌에 들어가 부녀자들이 모아 놓은 삼을 약탈해 가는데도 변장(邊將)들은 사실을 숨기고 보고하지 않습니다. 난리를 겪은 뒤 이런 우환이 더 심해졌는데 이것은 그들이 우리를 무시하기 때문이니 분노를 견딜 수 있겠습니까.
가혹한 세금에 인삼 채취 포기
유몽인(柳夢寅·1559∼1623)이 임진왜란 이후 함경도 지방에서 산삼 채취를 둘러싸고 일어난 정황을 증언한 글이다. 함경도가 산삼 주산지임에도 조선 백성들이 가혹한 삼세(蔘稅) 때문에 채취를 포기하고 있다는 것, 대신 여진인이 산삼 수확철에 두만강과 압록강을 몰래 건너와 함경도 산삼을 마구 캐가고 있다는 것, 그런데도 조선의 변장들이 수수방관하고 있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한국인은 예나 지금이나 인삼을 명약(名藥)이자 영약(靈藥)으로 여겼다. 중국인과 일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삼국시대 이래 한반도 인삼이 중국과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기록이 속출하는 것이 그것을 반증한다.
인삼 수입 급증에 부담 느낀 일본
조선인 시켜 한반도 동·식물 조사
인삼 생초 들여와 자국 재배 성공
중·일 인삼수요 폭증, 밀무역 성행
‘일본 극비작전’ 전혀 몰랐던 조선
인삼 수출길 막히며 가치도 하락
조선시대에도 조선 인삼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들은 인삼을 챙기는 데 혈안이었다. 어떤 사신은 의주에서 한양까지 오는 동안 “인삼과 은만 주면 식사나 차 제공도 필요 없다”고까지 했다. 고가(高價)의 조선 인삼을 중국으로 가져가 한밑천 챙기거나 요로(要路)에 상납하여 승진 밑천으로 삼으려는 열망이 컸다. 유몽인의 지적처럼 여진족이 조선 땅에 몰래 들어와 산삼 채취에 매달렸던 것도 까닭이 있었다. 인삼은 모피·진주와 더불어 여진 경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기둥이었다.
▲18세기 일본은 한반도에 서식하는 동·식물의 그림을 세밀하게 그려 남겼다. 조선 인삼을 구하려는 목적에서다. 역사학자 다시로 가즈이가 쓴 『에도시대 조선약재 조사의 연구』에서 인용했다.
일본에서도 조선 인삼 열풍이 불었다. 특히 『동의보감(東醫寶鑑)』이 전래한 뒤부터 조선 인삼에 대한 수요가 몹시 커졌다. 조선 인삼을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는 풍조까지 생겼다. 1732년(영조 8), 조문명(趙文命·1680∼1732)은 “일본인은 병에 걸렸을 때 조선 인삼을 구하면 살고, 그렇지 못하면 죽는 것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실제로 당시 부산 왜관(倭館)에 머물고 있던 일본인은 인삼을 주머니에 넣어 차고 다니면서 온종일 씹는다든가, 자상(刺傷) 등을 입었을 경우 인삼을 씹어 바른다고 할 정도였다. 일본 본토에서는 심지어 ‘가난한 효녀가 병든 부모를 위해 조선 인삼을 구하려고 몸을 팔았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일본인이 조선 인삼을 금처럼 귀하게 여기면서 대마도가 떼돈을 벌었다. 대마도는 1674년(현종 15) 에도(江戶·도쿄)에 인삼좌(人蔘座)를 설립했다. 그들은 독점적으로 수입한 조선 인삼을 인삼좌를 거점으로 일본 각지에 판매했다. 전매권(專賣權)을 장악한 대마도는 인삼값을 조작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18세기 초 일본에서 조선 인삼의 소매 가격이 두 배로 앙등했다.
인삼무역으로 번성한 개성상인
한편 대마도로부터 주문이 쇄도하면서 조선 인삼 대부분은 일본으로 수출됐다. 특히 상인이나 역관들은 일본인과 밀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밀무역, 즉 잠상(潛商) 행위가 발각되면 처형될 수도 있었지만 워낙 이익이 커서 근절되지 않았다. 1719년(숙종 45), 통신사(通信使)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귀환 중이던 역관 권흥식(權興式)은 대마도에 이르러 음독자살했다. 그의 짐 꾸러미 속에 인삼 12근이 들어 있었던 데다 일본인과 밀무역한 정황이 발각됐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인삼 무역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개성상인이었다. 그들은 전국적으로 인삼을 매점하여 일본 상인에게 넘겨주고 그 대금으로 은을 받았다. 일본은을 북경으로 가져가 다시 비단·생사 등을 구입하여 일본 상인에게 되팔아 대단한 이윤을 남겼다.
▲18세기 일본은 한반도에 서식하는 동·식물의 그림을 세밀하게 그려 남겼다. 조선 인삼을 구하려는 목적에서다. 역사학자 다시로 가즈이가 쓴 『에도시대 조선약재 조사의 연구』에서 인용했다.
대일 수출이 늘면서 인삼은 조선의 ‘캐시 카우(Cash Cow)’ 역할을 했다. 하지만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인삼 대부분이 유출되면서 18세기 중반 국내의 인삼 공급이 부족하여 가격이 급등했다. 양반가조차 인삼을 구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1752년(영조 28),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재상 유만중(柳萬重) 집안도 인삼을 구하지 못해 애태울 정도였다고 한다. 때문에 숙종 연간부터 국내 인삼 수요를 고려하여 대일 수출량을 매년 700근으로 제한하자는 주장, 인삼 채취를 원활히 하기 위해 화전(火田) 경작을 금지하자는 주장, 청나라 인삼을 수입하여 국내 공급을 늘리자는 주장 등 다양한 대책이 제시됐지만 인삼 부족 현상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일본은 인삼 수입 때문에 막대한 양의 은화가 조선으로 유출되자 고민에 빠진다. 일본의 은 생산량은 17세기 이후 점차 감소했다. 그 때문에 막부(幕府)는 1685년 중국과 네덜란드 상선의 무역 쿼터를 제한하여 은의 해외 유출량을 줄이려고 부심했다. 그뿐만 아니라 1695년 이후로는 종래까지 80%였던 은화(銀貨) 순도를 대폭 낮추는 개주(改鑄) 조처까지 단행했다.
조선 인삼 수입량을 줄이거나 일본 인삼으로 대체하려는 노력도 같은 맥락에서 시도됐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18세기 초까지 일본산 인삼의 경우, 뿌리와 이파리는 조선 것과 똑같지만 먹어봤자 별 효력이 없다는 지적이 계속 나왔다. 당연히 조선 인삼에 대한 수요는 줄어들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대마도는 고민에 빠진다. 조선 상인이 과거에 비해 순도가 훨씬 낮아진 은화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급해진 대마도는 조선과의 인삼 결제 대금은 예전처럼 순도 80%의 양화(良貨)를 쓸 수 있게 해달라고 막부에 호소한다. 막부는 고민 끝에 인삼대왕고은(人蔘代往古銀)이라 불리는 특주은(特鑄銀)을 조선과의 교역에서 사용하는 것을 허락한다.
“은 유출 막아라” 일본의 고민
▲일본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초상.
막부는 조선 인삼을 국산화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역사학자 다시로 가즈이(田代和生)에 따르면 그 중심에는 8대 쇼군(將軍)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가 있었다. 요시무네는 1721년(경종 1) 대마도에 특명을 내린다. 대마도가 운영하는 왜관을 통해 조선의 풀과 나무, 새와 짐승 등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조선의 동식물을 조사하여 『동의보감』에 실린 약재와 처방을 이해하려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요시무네의 진짜 목표는 조선 인삼의 생초(生草)를 입수하는 것이었다. 조선으로 막대한 은화가 유출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인삼 국산화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막부는 대마도와 왜관에 ‘조사 사업’ 수행을 위한 지침을 내렸다. 조선 곳곳의 동물과 식물을 현물로 입수하되 여의치 않으면 그림을 그려 보내라고 지시했다. 대마도는 1721년 조선의 전직 역관(譯官) 이석린(李碩麟)에게 사업 책임을 맡겼다. 이석린의 소개로 상인을 비롯하여 아전·의원·승려 등 다양한 조선인이 왜관과 접촉했다. 이들은 왜관으로부터 많은 돈을 받고 조선 곳곳을 누비며 각종 동·식물을 입수했다. 왜관은 그들이 가져온 동·식물을 측정하고 세밀한 그림을 그렸다. 또 식물 표본과 동물 박제를 만들어 일본으로 보냈다.
‘조사 사업’은 1721년 이후 약 30년 가까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조선 인삼의 생초도 일본으로 반출된다. 막부는 인삼 생초를 일본 곳곳에서 시험 재배한다. 재배를 거듭하면서 18세기 전반 일본은 마침내 조선 인삼을 국산화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조선 인삼의 대일 수출이 막힌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조선으로 들어오던 일본 은의 양도 격감한다. 조선의 ‘캐시 카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조선 정부는 매우 은밀하게 진행된 ‘조사 사업’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찜찜한 대목이 없지 않다. 1721~1722년에 걸쳐 조선에서는 노론(老論)과 소론(少論) 사이에 신임화변(辛壬禍變)이라 불리는 격렬한 정쟁이 빚어졌다. 처형과 유배가 잇따르면서 두 정파 사이의 원한과 복수심은 하늘을 찔렀다. 바로 그때, 일본에 매수된 조선인이 전국의 산야 곳곳을 휘젓고 다닌 것이다.
중앙일보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여순사건, 그날의 眞相
2021.05.13 ‘동포 학살 반대’한다던 여수 14연대 반란, 장교 21명 총살로 시작
[김기철 전문기자의 Special Report] 조선일보
지난 11일 오후 서울 동작동 서울현충원을 찾았다. 초병 둘이 지키는 현충문을 지나 31 높이 현충탑 안으로 들어갔다. 탑 내부 오석(烏石)으로 만든 벽마다. 이름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창군 초부터 6·25전쟁·베트남 전쟁 등에서 전사하거나 순직한 군인·경찰 위패를 모신 곳이다. 10만 위가 넘는다고 했다. 입구 왼편 4m 벽 맨 윗줄에서 김왈영·김순철·이봉규 소령 이름을 찾았다. 1948년 여순 사건 당시 14연대 1대대, 2대대, 3대대장이었다. 연대 대대장 전원을 위시해 반란군 총에 맞아 숨진 장교 17명 위패가 이곳에 있다. 현충원 홈페이지 소개에 따르면, 전사 일자는 10월 20~23일이다. 남로당 조직책 지창수 하사 선동으로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켜 여수를 장악했던 첫 나흘간이다.
▲현충탑 내부엔 여순사건으로 전사한 14연대 장교 17명의 위패가 봉안돼있다.
◇'제국주의 앞잡이인 장교 모두 죽이자'
여당 의원 152명이 발의한 ‘여순사건특별법’엔 여순사건을 ’14연대 일부 군인들이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으로 썼다. 고교생 4명중 1명이 쓰는 미래엔 한국사 교과서는 ‘부대 내의 좌익 세력은 ‘제주도 출동 반대’ ‘통일 정부 수립’을 내세우며 무장 봉기하여 여수와 순천 지역을 장악하였다'고 소개한다. 14연대 반란을 피켓 들고 구호 외치는 요즘 시위처럼 썼다. 하지만 14연대 반란군의 ‘그날’은 피로 얼룩졌다.
14연대 남로당 세력은 1948년 10월 19일 밤 무기고와 탄약고를 장악하고, 장교들은 보이는 족족 총살했다. ‘동족 살상하는 제주도 출병 반대’를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남로당 반란 지도부가 그날 밤 가장 먼저 한 일은 한솥밥 먹고 훈련하던 장교 집단 학살이었다. ‘제국주의 앞잡이인 장교를 모두 죽이자’(백선엽, ‘실록 지리산’ 153쪽)는 선동이 학살의 문을 열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1967년 낸 ‘한국전쟁사’ 1권(454~455쪽)엔 반란을 진압하려다 현장에서 사살된 14연대 장교 21명의 이름이 나온다. 대대장 3명 전원과 작전주임 강성윤 대위(모두 육사 2기), 진도연·이병우·길원찬 중위(3기), 정보주임 김래수 중위(4기), 김록영·맹택호·박경술·민병흥·김진용·이상술 소위 (5기), 장세종·이병순·유재환·김남수·김일득·노영우·이상기 소위(6기)다. 14연대 소속으로 여순사건 기간에 전사한 장병 명단이 잇따라 발견되고 있어 숫자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 ’99식 총검이 복부를 관통해 창자가...’
김왈영 1대대장을 비롯한 장교들의 최후는 분명치 않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1996년부터 발간해온 호국전몰용사 공훈록엔 14연대 장교 13명의 공적이 실려있다. ‘반란 진압 작전에 참가하여 임무 수행 중 장렬히 전사했다’는 간략한 내용뿐이다. 살아남은 장병들은 몸을 숨겼고, 반란군은 진압 과정에서 사살되거나 지리산에 들어가 현장 목격 자료가 부족해서다. 여수항에서 출동 준비하던 김래수 중위가 연대장 지시로 부연대장과 함께 귀대하다 반란군 총격으로 현장에서 즉사했다(국방부, ‘6·25전쟁사’ 1권 455쪽, 2004)는 내용 정도가 전해진다.
당시 육군 정보국장이던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실록 지리산)엔 생존 장교들의 증언이 나온다. ‘대대 부관 김정덕 소위가 양팔이 늘어져 덜렁거리는 상태로 달려 내려와 ‘저놈들이 나를 쐈다’고 소리치며 내 앞에 털썩 쓰러졌다.’(1대대 작전교육관 전용인 소위) ‘누구냐 하는 외침 소리에 나도 모르게 ‘주번사관’이라고 답했다. 그 순간 ‘쏴라’ 하는 소리에 이어 총성이 울렸고, 복부에 따끔한 통증을 느끼며 땅바닥에 엎드렸다조 소위는 99식 총검이 복부를 관통해 창자가 흘러나와 있는 상태였다.’(5중대장 대리 박윤민 소위) 반란군은 장교들을 사냥하듯 총검을 휘둘렀다.
▲현충원 위패봉안관에 봉안된 14연대 장교 위패. 맨 윗줄에 김왈영, 김순철, 강성윤, 이봉규 등 대대장과 작전주임 이름이 보인다.
◇현충원에 모신 14연대 장교는 18명뿐
1대대장 김왈영은 스물둘이었고, 김일득 소위가 서른으로 가장 나이 많은 축이었다. 장교들은 대부분 20대 초중반으로 부사관·사병과 비슷한 또래였다. 당시 열아홉이던 최석신(육사 6기) 전 노르웨이 대사는 임관 직후인 8월 초 14연대 소대장으로 부임했다가 진해에서 포병 교육을 받느라 ‘반란’을 모면했다. 최 전 대사는 12일 통화에서 “10월 말 교육을 마치고 광주 5여단 본부에 복귀 신고를 하러 갔는데, 김왈영 1대대장 등 장교 16명의 유골이 안치돼 있었다.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고 했다.
14연대 전사 장교 21명 중 국립 현충원에 모신 분은 18명뿐이다. 이 중 17명은 위패만 봉안됐다. 길원찬·김래수 중위, 노영우 소위는 현충원에 위패조차 없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14연대 장교 전사자 21명 중 8명에 대한 ‘공훈록’은 사건 73년이 넘도록 내지 않았다. ‘여순사건’은 신생 국군 내부에 침투한 남로당 좌익 세력을 소탕하는 계기가 됐다. 이런 내부 단속이 없었다면 6·25전쟁에서 나라를 보존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반란’에 맞서다 숨진 14연대 장병들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가.
[부실투성이 14연대 전몰장병 기록]
군사편찬연구소 기록 오류 많아
여순 사건으로 전사한 14연대 장교 21명에 대한 기록은 부실투성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작성한 공훈록이나 현충원 안장자 소개,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까지 기관마다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작성한 맹택호 소위 공훈록에는 1950년 10월 22일 운산전투에서 전사했다고 쓰여 있다. 여순 사건 전사자를 6·25 전사자로 둔갑시킨 셈이다. 같은 연구소가 펴낸 ‘한국전쟁사’와 현충원 안장자 기록엔 같은 군번과 이력의 맹 소위가 1948년 10월 22일 여순 사건으로 전사했다고 썼다. 현충원 관계자는 “사망 일시를 비롯한 인적 정보는 각 군에서 작성한 전사자 명부를 기준으로 한다”고 했다. 위패가 봉안된 이봉규 대위도 현충원은 사망 일자를 1952년 4월 30일로 썼다. 6·25 전사자처럼 보인다.
▲14연대 반란으로 전사한 장교 17명의 위패가 모셔진 국립서울현충원 위패봉안관. 왼쪽 윗 부분에 김왈영 대대장 등 14연대 장교들의 위패가 모여있다. /김연정 객원기자
소속 부대가 제각각인 경우도 있다. 박경술 소위는 국방부 공훈록엔 1연대, 현충원 자료엔 4연대 소속으로 나온다. 민병흥 소위는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에 14연대와 11연대 소속으로 두 번 올라있다. 진도연 중위는 위패는 서울, 유해는 대전 현충원에 안장돼 있다고 소개한다. 유해가 없는 전몰장병만 위패를 모신다는 현충원 설명과 어긋난다.
여순 사건 전사자는 창군 초기라서 관련 기록이 정확하지 않다는 얘기도 나온다.
하지만 명백한 오류를 방치한 경우가 많다는 게 문제다. 6·25 전사자를 여순 사건 때 해체된 14연대 소속으로 쓴 기록도 많다. 전사자 현황을 추적해온 정일랑(79) 무공수훈자회 여수지회장은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전몰장병을 이렇듯 허술하게 다룰 수 있느냐”고 안타까워했다.
07.01 가해자와 희생자를 구분하지 않은 여순사건 특별법
여순사건 특별법이 29일 국회를 통과했다. 국가 차원에서 여순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 회복과 합당한 권리 행사를 보장하는 내용이다. 여순사건은 대한민국 건국 직후 발생한 현대사의 비극이다. 북한에 동조해 폭동을 일으킨 반란군에게만이 아니라 폭동 진압 군경에게도 무고한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 무고한 사람들의 명예는 회복돼야 하고 피해는 보상받아야 한다. 하지만 특별법은 반란에 가담해 무차별 살인, 방화를 저지른 가해자와 억울한 희생자를 구분하지 않아 반국가, 반인륜 범죄자까지 보호할 수 있는 문제를 안고 있다.
여순사건은 국군 14연대에 침투한 남로당 세력이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켜 국군과 경찰, 민간인 다수를 살해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이번 특별법은 ‘국군 14연대 일부 군인들이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으로 표기해 사건의 책임 소재와 반란적 성격을 의도적으로 누락했다.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의 무장 폭동을 ‘소요(騷擾)’로 표기한 제주 4·3사건 특별법보다 더 문제가 있다. 특히 희생자 범위를 ‘사건과 관련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 후유 장애가 있는 사람, 수형자’로 폭넓게 설정했다. 별도 위원회 심사를 거친다고 하지만 법 규정이 없는 이상 반란 가담자까지 피해를 보거나 실종됐다는 이유로 명예를 회복시키고 보상할 가능성을 열어놓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남로당 반란군과 동조 세력이 여수, 순천 지역에서 저지른 범죄의 잔혹성은 제주 4·3사건 초기 남로당이 저지른 잔혹성을 훨씬 능가한다. 북한조차 남로당 세력의 초기 잔혹 행위가 반란 실패 원인이라고 지적했을 정도다. 2001년 헌법재판소는 제주 4·3사건 특별법과 관련해 ‘사건 발발 책임이 있는 남로당 핵심 간부, 군경과 가족, 선거 관여자를 살해한 자, 공공 시설과 방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한 자를 희생자로 보호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이들까지 무제한적으로 포용하는 것은 우리 헌법의 기본인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와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심각한 훼손을 초래한다’고 했다. 여순사건도 예외일 수 없다. 국민의 법 상식도 헌재의 이런 입장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