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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이탈주민(탈북민) 이야기2/ 탈북 지성인들이 말하는 북한1/ 강철환 - 김수경 자유북한방송 기자

상림은내고향 2021. 10. 30. 12:11

북한 이탈주민(탈북민) 이야기2/ 탈북 지성인들이 말하는 북한1

■ 강철환

 47. 한양대 무역학과 졸업.
⊙ 요덕수용소 수용, 《조선일보》 통한문제연구소 기자. 현 북한전략센터 대표,
국민대통합위원회 자문위원.
⊙ 저서: 《수용소의 노래》 등.

2015.11.25  北 김경희, 김정은을 향해 “네가 사람새끼냐?”

⊙ 김경희, 張成澤 처형 강력 반대… 노동당 경공업부 간부들도 줄줄이 몰락
⊙ 김정은, 2014 4월 黨 조직비서대회 비공개로 열어 장성택 발호 방치한 책임 물어
2014 10월에는 ‘세력화’ 이유로 조직지도부 간부사업담당 부부장 등 12명 집단 처형
⊙ 현영철 처형은 과도한 마약 흡입 때문… 老간부들은 기력 보충 위해 마약 사용

▲장성택은 2013년 12월 12일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됐다.


북한의 권력실세로 일컬어지던 장성택(張成澤)이 갑작스럽게 체포, 처형된 지도 2년이 지났다. 2013 12 9일 긴급 소집된 노동당 비상회의 장소에서 노동당 행정부장으로 있던 장성택이 국가보위부 요원에게 체포되어 끌려 나가는 사진이 공개됐다. 4일 후 그는 처형됐다.
  
 
장성택 처형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그가 왜, 누구의 주도에 의해 처형됐는지는 모두의 관심사가 됐다.
  
 
그동안 장성택 처형은 노동당 조직지도부가 주도하고 김정은의 고모 김경희의 동의를 얻어 결정됐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조직지도부와 김경희가 장성택 처형을 반대했다면 김정은이 과연 장성택을 처형할 수 있었겠느냐는 상식적인 판단에 따른 관측이었다. 과연 그럴까.
  
 
최근 장성택과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해 온 북한 노동당 핵심간부 한 명이 입국했다. 그는 장성택과 친했지만 보위부에 미리 손을 써서 장성택으로 인한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하지만 평소에 좋아했던 장성택과 많은 지인(知人)들이 처형당하는 것을 보고 김정은에 대한 배신감을 느꼈고, 결국 탈북(脫北)을 감행했다. 이 고위탈북자와 북한 내 소식통에 따르면 장성택 처형 과정에 아주 복잡한 사건들이 얽혀 막판까지 많은 간부들과의 조율이 있었지만, 결국 김정은이 주위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장성택 처형을 집행했다고 한다.
  
 
김정은이 장성택 처형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장성택이 최고지도자에 대한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했다는 것이다.
  
 
장성택의 죄행(罪行) 가운데 그를 ‘1번’으로 칭하면서 부하들이 그를 떠받들게 했다는 대목이 있다. 이는 어느 정도 사실로 보인다. 장성택의 핵심측근인 노동당 행정부 부부장 리용하와 장수길은 사실상 김정은의 지시보다 장성택의 지시를 우선했다. 그 과정에서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벌어져 장성택 처형에 빌미를 주었다.    


  
장성택 휘하 부대와 인민군의 총격전 

  2013 8월경 황해북도 해안가 지역의 인민무력부가 관장하는 미사일기지 옆에 당 행정부 무역기관이 있었다고 한다. 미사일 부대는 행정부 무역기지 철수를 요구했다. 행정부 측이 이 요구를 거부했다. 양측의 갈등이 격화되던 끝에 행정부가 관할하는 인민내무군(국내 치안부대)과 미사일 부대 병력이 총격전까지 벌였다. 해당 미사일 부대는 인민군 총정치국을 통해 김정은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당시 인민군 총정치국장 최룡해는 자기보다 권력 서열은 낮지만 훨씬 더 강력한 파워를 갖고 있는 장성택을 질투하고 있었다. 최룡해는 김정은에게 이 사건을 보고하면서 장성택의 노동당 행정부가 관할하고 있던 인민내무군 병력을 인민무력부로 이관하자고 건의했다. 김정은이 그렇게 하라고 지시했다.
  
 
최룡해의 명령을 받아든 총참모장 리영길은 최고사령관 명령을 받들고 당 행정부로 찾아갔다. 장성택은 그 자리에 없었고 리용하, 장수길 등이 리영길을 맞이했다. 두 사람은 최고사령관의 명령문을 읽을 때에는 일어서서 잘 듣고 있었는데, 명령서 낭독이 끝난 다음에 장수길이 “이 결정을 장성택 동지와 의논해서 했는가?”라고 따져 물었다. 리영길이 “최고사령관의 명령인데 이자가 미쳤나”라고 하자, 장수길도 “최고사령관이고 나발이고…”라고 맞받았다.
  
 
최룡해는 이날 사건을 김정은에게 보고하면서 “엄중하게 사건을 총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장성택을 처형까지 몰고 가려는 심사는 아니었다. 장성택에게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었지만, 김정은이 장성택을 처형까지 할 것으로는 상상조차 못했다. 하지만 이미 김정은은 장성택과 그의 부하들에게 분노를 감추지 않고 있었다.  


  
20만 인민내무군 창설 

  두 번째는 중국에서 날아온 장성택에 대한 보고서였다. 장성택의 오른팔이었던 주중(駐中) 북한대사 지재룡이 장성택과 중국 간의 비공개 협력문건들을 김정은에게 보내온 것이다.
  
 
중국 측은 장성택을 미래의 지도자로 사실상 인정했고, 장성택은 앞으로 북한이 갈 길은 중국식 개혁개방이라고 인식했다고 한다. 더 나아가 장성택은 중국 지도부에 김정은이 중국식 개혁을 거부할 경우 그를 권좌에서 끌어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넌지시 전했다고 한다. 지재룡의 보고를 받은 김정일은 폭발하기 시작했다.
  
 
세 번째는 장성택이 실제로 김정은의 권력에 도전하는 세력화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당시 보위부는 장성택의 죄행 중 하나로 국가의 주요기관을 자신이 관장하도록 했다는 것을 꼽았다. 실제로 장성택은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노동당 행정부가 관장하던 인민보안부(경찰)의 고위층 간부들을 장성택 측근들로 교체했다. 인민내무군을 창설해 약 20만 병력을 장성택이 직접 지휘하면서 장성택과 측근들은 장성택을 믿고 의지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인민무력부 소속 ‘승리’ 무역회사를 당 행정부 54부로 바꾸고 그 자리에 측근 장수길을 임명했다. 중국에 파는 석탄 수출권을 독점, 연간 5~10억 달러의 수익을 얻으면서 당 행정부 54부는 김정은의 비자금 부서인 당 39호실을 넘볼 정도로 자금력이 커졌다.
  
 
장성택은 당시 김씨 일가의 개인 소유물이던 당 38호실을 해산하고 민간에 넘겼다. 김씨 일가가 전용하던 ‘8호’, 9호’ 농장을 해산해 그것도 민간으로 이관했다. 장성택은 과도하게 김씨 일가를 위해 집중된 부조리한 기구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며 국가를 정상화시키려고 했다.
  
 
이러한 것들을 국가보위부는 장성택의 권력 확대로 보았다. 김정은도 장성택이 자신의 돈줄과 파워를 야금야금 먹어 들어오는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39호실부터 먼저 검열해 방심시켜

▲2013년 12월 마식령스키장을 시찰하는 김정은. 

최근 김정은이 방문한 나선지구 복구공사에 마원춘이 다시 나타났다. 김정은 주변에서 사라진 지 11개월 만이다. 북한 내 고위간부들은 마원춘만큼은 신()이 내린 아들이라고 말한다.
  
 
현영철처럼 평생을 고생하다가 마약 한번으로 고사총에 맞아 죽는데 마원춘은 마약중독으로 김정은의 부르심도 제대로 받들지 못해 횡설수설하는 죄를 짓고도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핵심측근 마원춘이 김정은에게 미운털이 박히기 시작한 것은 그가 설계한 평양 순안공항 재건축 결과 때문이다. 물론 설계도면은 김정은에게 사전 보고해 허락을 받은 사항이었다. 하지만 김정은은 완공을 앞둔 순안공항 건설장을 찾아와 버럭 화를 내면서 마원춘을 질책했다. 김정일이 화를 낸 이유는 “조선민족의 주체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는데, 중국의 베이징(北京) 서두우(首都) 공항과 흡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중국에 대한 반감이 드러난 것이다.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처형장 신세였겠지만, 그나마 그간 공로를 인정해 별을 두 개 정도 강등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김정은의 진노를 사고도 별 한두 개 강등으로 끝난 것은 마원춘이 처음이었다.
  
 
이때부터 의기소침해진 마원춘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마약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원래 마약흡입을 가끔씩 하는 정도였지만 김정은에게 질책을 당한 이후부터는 마약을 하지 않고서는 견디기 힘들어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김정은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제대로 받지 못해 횡설수설하는 대죄(大罪)를 저질렀다. 김정은도 더 이상 못 참았는지 마원춘을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게 하고 함경북도 산골 농장원으로 추방했다.
  
 
그런 그가 다시 김정은 곁으로 돌아왔으니 사람들은 그를 보고 신이 내린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마원춘은 두 번 다시 마약에는 손을 대지 않겠다는 충성맹세를 김정은에게 하고 복귀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은 현영철, 마원춘 등 핵심 측근들이 마약에 연루되는 사건들이 잇달아 터지자 최근 “마약과 국가공금 횡령은 민족반역죄”라고 규정했다고 한다. 그만큼 고위층 마약은 북한체제를 흔드는 뇌관이 되고 있다.

출처월간조선 12월호

 

2016.04.23  北 려명거리의 저주

최근 발생한 북한 주민 13명의 집단 탈북과 고위층의 잇따른 이탈은 김정은 체제 위기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탈북의 유형이 일반 주민에서 체제 수호의 핵심 계층으로 옮겨가고 있기 때문이다.

 

"부자가 3대 가기 힘들다"는 말처럼 북한 정권은 3대에 이르러 거의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 3대 세습 체제의 원조인 김일성은 자식들보다 비교적 검소하게 생활했고 인민 생활에 관심도 있어 내각 수상으로 국가 경제를 주도했다. 하지만 김정일은 민생 경제를 하찮은 것으로 치부했다. 느닷없이 국방위원회를 만들더니 자신은 국방과 외교를 책임지고 경제는 알아서 하라고 내팽개쳤다. 노동당 38·39호실을 만들어 공화국의 돈 되는 '노른자위'를 모두 독차지했다. 여기에 제2경제라고 하는 군수 경제까지 만들면서 민생 경제를 다루는 내각은 빈 껍데기만 남게 됐다. 김정일 사후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은 38호실을 전격 해체해 민생에 돌렸고 자신이 직접 내각을 맡아 민생을 챙기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의 죄만 하나 더 늘었다.

 

김정일의 돈 쓰는 취향은 기쁨조와 특각(특급 별장)이었다. 40여개의 개인 특각과 기쁨조를 운영하는 데 수억달러의 현금을 물 쓰듯 썼다. 김정은의 취향은 아버지와 달랐다. 그는 엉뚱한 취미로 사람들을 들볶았다. '미림승마장' '마식령스키장', '문수물놀이장'이 대표적이다. 이 문제로 사치성 시설보다 경제 인프라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 장성택과 다퉜다. 하지만 장성택 처형 이후 누구도 그런 주장을 하지 않는다.

 

2015년 당 창건 70주년을 맞아 김정은이 업적 쌓기의 일환으로 평양 곳곳에 사치성 건물을 지었다.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이 이 중 '과학의 전당'이란 건물은 중복 건설이라는 의견을 냈다가 즉결 처형되자 누구도 토를 달 수 없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김정은은 미래 과학자 거리에 한국의 주상복합과 같은 최고 수준의 초고층 아파트를 모든 성, 기관별로 몇 개씩 맡아서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천만달러 이상의 현금이 들어가는 아파트를 간부들 호주머니를 털어서라도 지으라는 불호령이었다. 각 기관은 이 비용을 하부 조직에 떠넘겼다. 특히 해외에 나가 있는 외화벌이 기관들이 고통을 짊어졌다. 당 창건 70주년 행사가 끝나자 해외에 나가 있는 간부 상당수가 빚더미에 올랐다.

 

다음 달 36년 만에 열리는 노동당 대회를 계기로 김일성종합대학 인근 '려명거리'를 세계에서 가장 현대적인 거리로 건설하라는 김정은의 새로운 지시가 또다시 하달됐다. 이번에도 외화벌이 하부 단위들에 감당하기 벅찬 부담금이 할당됐다. 대북 제재로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결정에 곳곳에서 분노가 폭발했다. 13명의 집단 탈북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지금 평양과 해외의 간부 다수가 자포자기 상태라고 한다. 그들은 남조선으로 도망가든지 북한에 끌려가 수모를 당하든지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다. 김정은 한 사람이 자초한 국제 제재와 엉뚱한 아파트 건설이 체제 붕괴를 재촉하고 있다

 

2016.09.02 김정은이 직면한 3대 위기

지난 70년간 사회주의 간판을 달고 봉건적 3대 세습을 이어온 김씨 왕조가 최대 위기에 직면해 있다. 김씨 지도자의 신임하에 자본주의 국가에서 일해온 핵심 외교관 망명이 줄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망명은 꽤 있었지만 최근의 핵심 간부층 이탈은 북한 내부에서 심각한 균열이 시작되고 있다는 증거다.

 

김정은 정권은 전에 없던 3대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 중 김정은 자신의 리더십 위기가 가장 크다. 김정은의 행태는 거의 광인(狂人) 수준에 이르고 있다. 난데없는 고사총 처형에 핵심 간부 70여 명이 시신도 건지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갔다. 과거 김일성과 김정일은 중요한 정책에 대해선 반드시 참모와 전문가들 의견을 종합해 결정했고 부하 관리도 철저했다. 군주국가의 왕에겐 멀리 있는 백성보다 가까이 있는 측근 관리가 중요하다. 김정일도 철저한 측근 관리를 통해 권력을 유지했다. 인민은 툭하면 공개 처형해도 간부의 공개 처형은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김정은에 이르러 상황이 바뀌었다. 장성택이 살아 있을 때에는 그나마 김정은의 잘못을 바로잡아주었지만 그가 처형된 후론 누구도 김정은에게 제동을 걸지 않는다. 김정일은 1994년 핵실험 준비를 끝냈지만 12년이 지난 2006년에 이르러서야 첫 핵실험을 했다. 대내외 환경을 모두 고려한 판단이었다. 반면 2016년 1월 4차 핵실험은 북한 내 누구나 위험성을 알고 있었지만 김정은 한 사람의 결정에 의해 저질러졌고 전 세계가 북한을 압박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두 번째 위기는 보위부 중심으로의 권력 구조 변화에서 온다. 김정일은 노동당 조직지도부를 중심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하부 조직을 관리했다. 그러나 조직지도부는 장성택 처형에 반대한 이후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당 조직비서 대회를 열어 권력의 핵심인 조직비서들이 자아비판을 하는 희대의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장성택 처형을 집행한 국가보위부가 조직지도부 간부들을 처형하는 월권행위를 저지르면서 국가보위부 부장인 '김원홍 세상'이라는 말까지 나돈다. 2014년엔 당 조직부 간부 부부장을 포함한 노동당 간부 11명이 처형됐다. 보위부를 중심으로 부정부패의 먹이사슬이 생기고 상대방 세력을 모함해 절멸시키는 권력투쟁이 일상화되는 조짐마저 보인다.

 

세 번째 위기는 북한 체제가 더는 생존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 여건이 고갈되고 있다는 것이다. 김일성 시대의 내각 중심 경제체제가 김정일 시대에 와서는 39호실 경제와 군수경제가 북한의 노른자위를 독차지하는 기형적 구조로 바뀌었다. 궁정경제로 불리는 39호실은 김씨 왕조의 사치와 권력 관리를 위한 비자금을 만들어내며 북한 정권의 개인 소유화에 일조했다. 그래도 최소 20억달러만 벌어들이면 시장을 확대하지 않고도 측근을 관리하고 자신의 사치를 유지하면서 얼마든지 살 수 있었다. 하 지만 김정은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중국까지 유엔 제재에 동참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39호실 경제의 핵심인 금, 아연, 석탄 수출이 중단돼 궁정경제가 사실상 마비되고 있다. 여기에 사치성 건물 축조까지 겹치면서 엘리트들은 본국의 자금 압박에 견디다 못해 탈북 길에 오르고 있다.

 

김정은 체제하에서 총체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2016.10.14 북한 체제 변화의 3요소 시작됐다

북한의 3대 세습과 5차 핵실험을 막지 못한 것은 한국 정부는 물론 국제사회의 대북 정책과 접근 방법이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현 정부는 햇볕정책을 넘어 다시 대북 압박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과거의 대북 정책 중 무엇이 실패했고, 무엇을 계승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검증 절차가 없다 보니 진영 논리에 빠져 실패한 정책의 아집만 내세우는 평행선이 고착돼 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를 포함한 엘리트 탈북자들은 햇볕정책만 없었다면 김씨 정권이 붕괴했거나 중국식 변화를 거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다. 북한 내 엘리트들도 위기의 김정일 정권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 데 한국 정부의 대북 지원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햇볕정책은 실패했다. 정권과 주민을 분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탈북자들이 생각한 햇볕은 북한 정권과 싸우며 철의 장막을 뚫고 외부 지원과 정보가 인민들에게 들어가는 길을 여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 정부가 현금 지원 등을 철저히 배제하고 식량과 기타 물품을 주민에게 직접 전달한다는 조건을 내세우고 그것이 관철되지 않으면 지원을 중단한다는 각오로 북한과 접촉했다면 상당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햇볕정책의 상징인 개성공단이 김씨 왕조의 자금줄로 전락한 것도 임금직불제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자유시장 원리가 아닌 북한식 통제 체제로 개성공단이 운영되면서 개성공단 노동자들은 핵개발 자금을 벌기 위한 노예로 전락했다.

 

▲2013년 8월25일자 노동신문에 게재된 김정일과 김정은 사진. /출처=노동신문

 

최근 박근혜 대통령은 강경한 대북 메시지를 북한에 보내고 있다. 5차 핵실험과 대륙간탄도탄(ICBM) 개발로 북한에 관용을 베풀 수 있는 한계는 이미 지나버렸다. 그래서 유엔 제재에 한국 정부가 앞장서서 북한의 고립을 주도하고 있다. 대통령의 탈북 유도 메시지는 우리의 대북 정책이 정권과 주민을 분리하는 전략으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정권과 주민을 분리해 김씨 왕조를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중국을 북한으로부터 완전히 떼어내야 한다. 훙샹그룹 제재는 중국이 김정은을 포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북한 체제 변화의 가장 중요한 변수이다. 두 번째는 북한 정권에 대한 지원과 대북 협력은 체제 변화를 요구하는 압력 수단이 되어야 한다. 두만강 수해 지원을 못 하는 이유는 북한 정권이 우선 복구하려는 것이 탈북 방지용 시설과 김 부자 동상 등 우상화 시설들이기 때문이다. 밖에는 지원을 요구하면서 정작 김정은과 북 지도부는 두만강 수해 현장에 얼굴도 내밀지 않고 있다. 지금 같은 체제하에서 외부 지원은 민생 지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보여준 것이다. 세 번째는 정보 확산을 통해 북한 주민들을 깨어 나게 하는 것이다. 동유럽 사회주의의 몰락은 주민들이 깨어나 들고일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다. 북한도 옛 공산권처럼 주민 70% 이상이 외부 정보에 접근할 때 변화가 가능하다. 여기에 중국 정부의 탈북자 강제 북송이 중단된다면 더 큰 변화가 올 수 있다. 이 세 가지의 변화 요소는 이미 시작되고 있다. 우리의 노력 여부에 따라 북한 변화는 더 빨라질 수 있다.

 

2017.01.04  태영호를 제2의 황장엽 되게 할 수 없다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 공사로 김정은 체제를 위해 제1선에서 활약하던 태영호 공사가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것은 북한 내부에 큰 충격이다. 그는 한때 런던에서 지도자의 친형 정철을 직접 안내했고 그의 처는 백두 혈통의 핵심인 오백룡 가문의 일원이다.

 

하지만 태 공사에게 신선한 충격을 받은 것은 그가 자청한 기자회견에서 보여준 의로운 모습 때문이다. 70년간 공포 독재로 저항의 싹마저 모두 잘려나간 최악의 동토에서 저렇게 목숨 걸고 자기를 희생하는 상류층을 오랜만에 봤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계보를 잇는 두 번째 저항 정신을 느낀다. 물론 많은 탈북 인권 운동가가 있다. 하지만 실제로 김씨 정권을 가장 뼈아프게 흔드는 것은 그 치부를 잘 아는 사람들의 저항이다. 그래서 과거 김정일은 황장엽 비서를 살해하고자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태 공사가 탈북의 길을 택한 것은 북한 내부의 많은 사람에게 신선한 충격을 줄 수밖에 없다. 그의 행동, 말 한마디는 이제 북한 고위층에게 큰 영향을 줄 것이다.

 

태 공사와 황장엽 비서에겐 공통점이 많다. 그중 핵심은 대한민국의 국가 정통성을 인정하고 대한민국 힘으로 남북을 통일하겠다는 의지다. 북한은 자신들을 항일 세력으로 포장하면서 대한민국에는 친일파 틀을 씌워 왔다. 대한민국의 상당수 좌파 인사도 그런 북한에 동조했다. 하지만 두 엘리트는 국가 정통성이 '반일'이나 '친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 '번영'에 있다고 생각했다. 한반도 5000년 역사 이래 개인의 인권을 완전하게 보장한 전례가 없었다. 지금처럼 번영해본 적도 없었다. 자유와 경제적 번영이야말로 '수령 독재'의 처절함을 경험한 북한 엘리트들에게는 목숨보다 소중한 진리가 될 수 있다. 거짓말로 만들어낸 항일 우상화와 그것을 명분 삼은 3대 폭압 체제는 인민에게 한없는 고통을 주었다. 이제 김정은 정권은 선대(先代)가 이루지 못한 '살인'의 기록마저 갈아치우고 있다.

 

▲2016년 12월30일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가 서울 조선일보사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서울에 온 소회를 말하고 있다. /이태경 기자

 

황장엽 비서와 태영호 공사의 망명 시점도 비슷하다. 두 사람 다 북한 정권이 최악 위기에 처했을 때 망명했다. 황 전 비서가 망명한 1997년은 북한에서 수백만 명이 아사(餓死)하며 체제 붕괴 초읽기에 들어가던 시기였다. 황 전 비서는 북한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대한민국에 끼칠 수 있는 피해를 최소화하고 통일을 이루는 데 이바지하려 했다고 망명 동기를 밝힌 바 있다. 그는 이미 "김정일의 핵은 흥정 대상이 아니며 천만금을 준다고 해도 그들은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6자회담은 미 국무부 관리들 월급 주려고 필요한 것인가" 하며 허탈해하기도 했다. 그는 남북한이 짜고 벌이는 햇볕 놀음을 온몸으로 막고 나섰다. 저서 '어둠의 편이 된 햇볕은 어둠을 밝힐 수 없다'를 발간하며 저항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황 전 비서가 이미 했던 말을 태 전 공사가 또다시 강조하고 있다. 그는 "김정은 정권은 10조달러를 준다 해도 핵무기를 없애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한·미 양국의 리더십이 바뀌는 2017년에 김정은 정권은 핵실험을 두 차례 감행해 핵무기 소형화를 완전하게 이루려고 한다는 목표까지 구체적으로 밝혔다.

 

황장엽 비서의 20년 전 경고를 무시하고 북한에 막대한 현금과 식량을 퍼부은 결과는 우리 민족의 운명을 파괴하는 핵과 미사일로 돌아왔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는 북한 체제의 본질을 외면한 채 진영 논리에 빠져 정도(正道)를 포기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 대북 정책이 뒤집힐 위험마저 보인다. 태 공사의 꿈이 황장엽 비서의 좌절된 염원처럼 비극으로 끝나지 않길 바란다. 한민족의 운명과 미래를 위해 태 전 공사만 총대 메고 나가라고 등 떠밀 수는 없다. 이제 한국 사회가 태 공사의 진심 어린 목소리에 화답할 때가 왔다.

 

2017.04.10 김일성 경기장에 내걸린 태극기

北 주민에게 공포였던 태극기… 이젠 평양 하늘에 휘날려

여자축구 평양 예선 때도 태극기 펼치고 애국가까지 남북 영구분단 획책하며 金씨 왕국 보존하자 속셈

북한 주민들에게 '태극기'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필자도 북한에서 24년간 살면서 단 한 번도 태극기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태극기로 발생한 여러 사건은 간접 경험한 적이 있다.

 

1977년 요덕수용소에 수감됐을 때 옆자리에 앉았던 친구의 고향은 평북 철산이었다. 그런 산골에서 요덕까지 끌려온 것은 태극기 사건 때문이다. 철산은 해안을 낀 산골 마을이어서 상륙부대 훈련지였다. 1970년 초 인민군 특수부대의 남침훈련을 철산에서 했는데 남한 군복을 입고 상륙하는 부대를 진짜 국군으로 오인한 일부 주민이 태극기를 들고 환영한 사건이 발생했다. 놀란 김일성과 김정일은 태극기 소유자들을 철저히 응징했다.

 

1992년 탈북한 나는 베이징 주재 한국대표부에 진입해 처음으로 태극기를 봤다. 그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다. 북한이 싫어 대한민국행을 결심했는데도 막상 태극기를 봤을 때 감정은 '공포심'이었다. 태극기는 세뇌당한 북한 주민에게 적대감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집권 이후 남북관계가 활발해지자 북한은 정체불명의 한반도기를 만들어서 행사장에 나부끼게 했다. 남한 측도 정치적인 이유로 한반도기를 흔들도록 유도했다. 서로 정치적 대립을 피하자는 취지였지만 북으로선 태극기가 가진 흡인력이 두려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류는 북한에 유입되면서 남한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태극기를 보게 되는 북한 주민이 늘고 있지만 그것을 드러내놓고 말하는 이는 거의 없다.

 

2008년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북한을 방문해 '동평양 대극장'에서 성조기와 인공기를 나란히 걸고 미국 국가를 연주한 적이 있었다. 부시 행정부의 압박을 무마하기 위해 김정일이 벌인 '쇼'이지만 참석했던 평양 상류층엔 엄청난 충격이었다. 2013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세계역도대회에서 국제 관례상 애국가와 태극기가 처음으로 평양에 소개됐다. 그때 북한에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사건으로 평가했지만 실은 그때부터 김정은 정권은 이미 새로운 남북관계와 전략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것은 남북 영구분단 전략이고 그것의 실행이 시작된 것이다. 남한의 실체를 인정해 각자 살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주민에게 주입하는 것이다. 지난 5일 평양 김일성 경기장에서 열린 AFC 여자축구 아시안컵 예선 때도 평양 군중 5000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애국가가 연주되고 대형 태극기가 펄럭였다.

 

▲북한 축구의 성지 김일성 경기장에 사상 처음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5일 열린 여자 아시안컵 예선 인도와의 경기에서 한국 선수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애국가를 부르는 모습.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북한의 이런 '관용'은 한국의 차기 정부와 남북관계를 개선해 새로운 돌파구를 열겠다는 제스처로 보기도 하지만 속내는 다른 곳에 있다. 지난 2014년 9월 인천 아시아게임 때 북한은 대규모 미녀응원단을 준비하다가 남측에 트집을 걸어 전격 취소한 적이 있었다. 고위 탈북자는 그때 미녀응원단 취소가 응원단 모집에 과열 양상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김원홍 당시 보위부 부장이 이 사실을 김정은에게 보고했고 김정은은 "청년들이 남조선 말 쓰는 것을 유식한 것으로 착각한다"며 질책했다고 한다. 평양 중심부에서조차 북한의 미래를 이끌어갈 청년들이 남한에 품은 환상은 상상외로 컸던 것이다.

 

요즘 북한에선 전쟁하자고 떠들면 보위부의 감시 대상이 된다. 체제에 불만을 품은 자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무력통일 의지가 시들해진 자리를 채운 한류가 북한 주민들에게 통일의 꿈을 새로이 품게 한다. 지금 김정은 왕조 집단은 겉으로는 남침 무력통일을 부르짖지만 본심은 영구적 정권 유지로 바뀌고 있다. 김정은의 잇단 실책과 국제사회의 강도 높은 봉쇄로 북한 내부는 전례 없는 경제적 압박을 받고 있다. 국가보위성 숙청까지 맞물리며 체제 유지에 빨간불이 켜지고 있다. 태극기를 본 북한 주민들이 영구분단의 절망에 빠질지 아니면 남북통일의 새로운 꿈을 품을지는 이제부터 지켜봐야 한다.

 

2017.04.24  민족의 인권을 외면한 죄

1997년 미국 의회에서 북한 수용소 출신들의 첫 청문회가 열렸고 그해 유엔인권소위에서 북한 인권에 대한 논의가 처음으로 시작됐다. 필자와 요덕 수용소 출신인 안혁, 그리고 회령 정치범 수용소 경비병 출신인 안명철에 의해 북한 정치범 수용소가 1992년 처음으로 공개된 이후 국제사회가 북한 인권 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 황장엽 노동당 비서가 대한민국에 망명하면서 당원 5만 명을 포함한 97만 명이 굶어 죽은 노동당 문서를 확인한 사실을 공개했다. 대량 아사(餓死)가 진행되고 있음이 처음으로 알려졌다.

 

김정일은 대량 아사가 시작되던 해에 김일성 무덤인 금수산 기념궁전을 세우는 데 약 9억달러를 탕진했다. 수용소와 대량 아사는 수령 독재 체제의 필연적 결과물이었고 이를 파악한 국제사회는 경악했다. 베일에 감춰져 있었던 북한의 심각한 인권 상황이 드러나자 국제사회가 움직였다. 2003년 유엔인권소위에 처음으로 북한인권결의안이 상정됐다. 정치범 수용소에서, 북한 전역에서 죽어간 수백만 인민의 원혼을 달래는 순간이었다. 목숨 걸고 수용소를 탈출한 이후 그 처참하고 억울한 모든 것이 국제사회에 알려진다는 것에 감격했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한국 정부가 첫 유엔 결의안에 불참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처음에는 '이 사람들 미쳤나?' 생각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동족이 유엔 인권결의안에 불참한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필자를 포함한 수용소 출신 탈북자들은 이 어이없는 상황에 분노해 '정치범수용소해체운동본부'를 창설하고 직접 활동에 나섰다. 자유북한방송 김성민 대표는 직접 방송국을 만들어 북한 동포들에게 정보를 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체불명의 종북(從北) 단체들이 몰려들어 노골적으로 살해 협박을 하기 시작했고 탈북자들은 여기가 대한민국인지 의심할 정도로 불안에 떨어야 했다. 유엔 인권결의안은 2004, 2005년에도 상정됐고 한국 정부는 연이어 기권했다. 2006년 김정일이 첫 핵실험을 강행하자 그해 마지못해 찬성했다. 2007년에는 지금 논란이 불거진 '송민순 회고록'이 그 실상이다. 당시 노무현 정권이 김정일에게 물어서 기권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 정권은 이미 유엔 대북 인권결의안에 조직적으로 불참·기권했기 때문이다.

 

▲2010년 6월8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천안함 주범-전쟁범죄자 김정일 ICC 고발' 기자회견장에서 평안남도 북창군 석산리 제18호 관리소(북창 18호 관리소) 수감자였던 김혜숙씨가 직접 그린 수용소 그림을 공개하고 하며 실상을 알리고 있다. /이진한 기자

 

대한민국 헌법 제3조에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고 명시돼 있다. 헌법에 따라 북한 주민은 그 신분만 확인되면 대한민국 국민으로 바로 인정된다. 김씨 정권이 북한 지역을 불법 점거해 북한 인민을 통치하고 있지만 그들은 대한민국 국민이고 우리가 보호해야 할 대상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 주민에 대한 인권 결의를 기권할 권리 자체가 없다. 자기 국민에 대한 인권을 기권하는 국가는 이 지구 상에 북한 빼고 없기 때문이다. 북한 동포의 인권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헌법 위반이다.

 

한반도 북쪽에서 우리 민족이 살인 폭력 정권을 만나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다 파악한 한국 정부가 노골적으로 유엔 인권결의안에 연속해서 기권한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김씨 일가로 인해 죽어간 수백만 영혼이 용서하지 않고, 하늘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2017.05.22 북한 주민이 원하는 대북 정책을 펴라

진보 10년도 보수 10년도 북 비핵화 저지에 모두 실패

보수의 제재 의미 있었지만 北 주민은 정권 타도를 원해

개성공단 금강산 재개하려면 김정은에 햇빛 비추지 말아야

 

요즘 미국의 주요 한반도 전문가들은 문재인 정부의 향후 대북 정책과 한·미 관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미국 여행 중 만난 많은 이가 "문재인 정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요즘 미국에서는 'sanction(제재)'이 유행이라고도 했다. 제재 법안은 공화·민주 가리지 않고 통과되는 법안이라고 한다. 이런 분위기의 미국과 한국의 새 정부가 충돌할 가능성에 대해 그들은 우려했다. 시진핑 중국 주석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상 회담은 북한에 대한 부분적 타격을 용인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평가까지 나온 마당이다.

 

진보 정권 10년, 보수 정권 10년을 거치면서 북한의 핵무장을 막지 못했고 결국 양 진영의 대북 정책은 모두 실패했다. 필자는 보수 정권 10년간 대북 지원을 중단하면서 북한의 국력을 고갈시켜 북한 내부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한 것은 북한 문제 해결의 한 부분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그럼에도 대북 정책은 보수 정권에서도 실패한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북한 주민에 의한, 북한 주민을 위한 대북 정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북한 인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들을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그저 드러난 현상(핵 문제)을 제거하는 데만 몰두했기 때문에 핵심적 문제를 풀 수 없었다.

 

지금 북한 인민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김정은 정권의 붕괴다. 70년 장기 독재에 환멸을 느낀 북한 동포들은 지긋지긋한 그 정권의 유지를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북한을 물리력을 써서 무너뜨리려 하면 평화의 파괴라는 편향된 딜레마에 빠진다. 북한을 변화시킬 무기는 사실 외부 세계가 갖고 있다. 그중 하나는 중국에 있는데 그것은 북·중(北·中) 국경에서 일어나는 변화다. 옛 공산권 국가들의 붕괴는 국경 붕괴로부터 시작됐다. 탈출자가 급증하면 그 체제는 급속히 와해된다. 동독이 대표적 사례다. 따라서 국제사회는 중국과 협상할 때 대북 경제 제재보다 탈북자 문제에 집중했어야 했다.

 

둘째는 북한 내 정보 확산이다. 북한 국가보위성의 주요 임무가 탈북자 방지와 정보 유입 차단임을 감안하면 북한 지도부가 체제 유지를 위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정보 유입은 과거 전 세계의 독재 정권 모두가 변화에 앞서 경험한 필수 요건이다. 세계 최악의 정보 차단 국가에 외부 정보를 유입시키는 것은 사실상 강력한 제재 수단 중 하나이지만 국제사회와 한국 정부는 이 수단을 거의 쓰지 않았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지난 14일 새로 개발한 지대지 중장거리 전략 탄도미사일(IRBM) '화성-12' 시험발사에 참관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5일 전했다. /연합뉴스

 

마지막 남은 수단은 북한과의 교류·협력이다. 하지만 교류·협력은 북한 체제가 최소한 덩샤오핑의 개혁 체제로 전환된 이후 가능하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대북 포용은 북한 정권 유지에 악용되고 말았다. 진짜 포용 정책은 수령 우상화와 일인지배 체제를 중국 같은 집단 권력으로 바꾸는 수단으로 활용돼야 한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은 그래서 중요했다. 포용과 햇볕은 말 그대로 이행하면 그 자체가 대북 압박이 된다.

 

개성공단을 재개하려면 그 소속 기관부터 바꿔야 한다. 노동당 39호실·군수공업부가 관장하는 구조를 내각으로 바꾸고 임금을 북한 근로자가 직접 받도록 직불제를 강제해야 한다. 개성공단에 대한 노동당, 보위성의 간섭을 배제하고 중국의 초기 경제 개혁 모델을 철저히 적용해 개성공단을 북한 정권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이런 조건들이 수용되면 개성공단은 북한 체제 변화의 전초 기지가 될 수 있다. 개성공단 4만 북한 근로자는 물론 북한 주민들도 환영할 것이다.

 

금강산 관광도 마찬가지다. 금강산에 만들어진 철조망을 걷어내고 북한 인민들의 자유로운 금강산 관광을 먼저 허용해야 한다. 그리고 금강산을 방문한 남한 동포들과 누구나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남북 화해의 장으로 금강산 관광이 바뀌면 국제사회 그 누구도 그 관광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경제 제재보다 자유의 물결이 북한 내부에 들어가게 하는 새로운 대북 정책이 필요하다

 

2017.07.04 '대북 지원의 代父'마저 억류한 北

반인권적 인질 외교 벌여온 北… 340억 지원한 동포 목사 억류

"변화 시도 말고 지원만 하라" 대북 지원 단체들에 경고한 것

남북 접촉 무작정 나서기보다 억류 목사 석방 촉구부터 해야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의 비극은 북한 정권의 반()인권적 속성을 또 한 번 드러냈다. 웜비어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북한에는 다수의 외국인이 억류돼 있다. 그중엔 처음부터 북한 당국의 기획 공작에 의해 붙잡혀 있는 사건도 있다. 북한에 억류되는 대부분 외국인은 적절한 용도로 사용될 목적으로 죄가 만들어진다. 이런 일이 끊이지 않는 것은 북한 정권의 이른바 '인질 외교' 때문이다. 북은 무고한 사람들을 붙잡아 외교적 협상 수단으로 써먹는 이 잔혹한 방식을 자신들이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로 여기고 있다.

 

2009년 미국 커런트 TV의 로라 링, 유나 리 기자가 취재차 국경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가 북한 국가안전보위성에 입수됐다. 당시 해외 반탐(反探·방첩) 담당 류경 부부장은 이들을 유인해 억류할 계획을 세웠다. 두 여기자를 안내하는 조선족 브로커는 보위부에 매수된 사람이었다. 이미 매복해 있던 북한 보위성 요원들과 경비대 군인들이 두만강 국경에 나타난 두 사람을 체포해 북한으로 끌고 갔다. 북은 두 여기자를 이용해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을 이끌어냈고, 김정일은 클린턴과의 회담을 아주 만족스러워 했다고 한다. 이 사건을 주도한 류경 부부장은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

 

지금 북에 억류된 외국인 가운데 가장 억울한 사람은 2015 1월 북한에 들어갔다가 억류된 캐나다 한인 임현수 목사일 것이다. 그는 1997년부터 100번 넘게 북한에 드나들며, 3000만달러(340억여원)어치의 현금과 물품을 지원했다고 한다. 그런 임 목사를 북한은 갑자기 억류하더니 온갖 모욕을 다 주고 있다. 그에게 국가 전복 음모라는 어마어마한 죄명을 뒤집어씌우더니 무기 노동교화형을 선고했다.

 

▲북한이 억류하고 있는 한국계 캐나다인 임현수(가운데) 목사가 2015 12 16일 평양에 있는 북한 최고 법원에 출두하고 있다. 이날 임 목사는 국가 전복 음모 등의 혐의로 종신 노역형을 선고받았다/AP 뉴시스

그의 억류 이유를 놓고 그가 북 권력자 김정은의 고모부인 장성택 세력과 가까웠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돌고 있다. 또 미국의 대북 압박을 피하는 우회 통로로 캐나다를 택했고, 이를 위한 협상 카드로 쓰기 위해 임 목사를 붙잡았다는 말도 나온다. 그러나 이런 이유보다 대북 지원 단체들 사이에선 '대북 지원 분야의 대부(代父)격'인 그를 무자비하게 체포함으로써 다른 단체와 개인들에게 경고를 보낸 것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북을 변화시킬 마음으로 북에 다가서는 이들에게 '딴생각은 하지 말고 지원만 하라'는 경고를 보냈다는 것이다. 2년 반 가까이 북에 붙잡혀 있는 임 목사는 밖에서는 짐작하기 어려운 고초와 고통, 공포를 겪은 듯하다. 북 당국은 임 목사를 몇 차례 공개 기자회견장에 세웠는데 평소 호탕한 것으로 알려진 임 목사가 북 당국에 쩔쩔매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임 목사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고 한다. 그의 석방을 촉구하는 온라인 청원 운동에 서명한 사람은 지난달 현재 18만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북은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임 목사는 지금 이 순간 세계 어느 정부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동토(凍土)의 감옥에 갇혀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적잖은 대북 지원 단체들이 북한과 접촉을 재개하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통일부도 남북 접촉에 긍정적이다. 하지만 임 목사 억류 사태는 대북 지원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게 만든다. 북한 정권이 원하는 방식으로 북을 돕는다면 현재 북한 체제상 정권 유지에만 이로울 뿐, 주민에게 돌아갈 혜택은 거의 없다. 북한 정권이 정해놓은 규칙을 그대로 지키면서 '지원을 위한 지원' 사업밖에 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렇게 해서는 '가짜 대북 지원'만 가능하다. 대북 단체들은 서둘러 북으로 달려갈 게 아니라 한때 대북 사업을 했던 임 목사의 석방을 먼저 요구해야 한다. 그것이 대북 지원·협력 사업이 정상화되는 첫걸음이다. 

 

2017.09.18 김정은의 위험한 '원맨쇼'

中 무시하고 핵실험 한 김정은, 6년째 訪中도 못 한 국제 고아 

장성택 처형, 김양건 사망 후 '바른 소리' 할 측근 사라져 

남한 내 우호세력도 적으로 돌려… 北 엘리트, 金의 최후 생각할 것

 

최근 일본 열도를 통과한 화성-14호 미사일에 이어 6차 핵실험, 괌 타격용 중거리급 탄도미사일 도발을 감행한 김정은 정권은 오래전부터 핵과 미사일 보유만이 궁극적으로 체제를 지켜준다고 생각하고 이를 추진해왔다. 하지만 그 길이 매를 불러 화()를 자초할 수도 있다.

 

1994년 북한은 1차 핵실험 준비를 끝냈다. 하지만 당시 미사일, 핵 능력이 전무했던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했더라면 파국적 종말을 맞았을 가능성이 크다. 1990년대 중반 최악 식량난에 따른 체제 붕괴 위협을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역이용해 극복했고 마침내 10년 만인 2006년 김정일은 1차 핵실험 버튼을 눌렀다. 그 후 김정은 시대에 3차 핵실험이라는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고모부 장성택과 의견이 벌어졌다. 당시 장성택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집권하는 첫해이고 김정은 정권 초기이므로 무리한 핵실험보다 국력을 키우고 시기를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김정일이라면 시 주석의 체면을 봐서라도 그가 집권하는 시점에 핵실험을 강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핵실험 후유증으로 김정은은 6년째 중국을 방문하지 못하는 국제 고아 신세가 됐다.

 

장성택 사건으로 죽음의 문 앞까지 갔던 김양건 통일전선부 부장이 '목함 지뢰'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김정은의 눈에 들었다. 그는 장성택 다음으로 김정은에게 제대로 된 제안을 하는 전략가였다. 지도자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전략을 제시하는 그의 말이 김정은을 설득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2015 10월 북한 노동당 창건 70주년 때 '은하 3' 미사일 발사를 중단하는 대가로 류윈산(劉雲山)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을 평양으로 부르는 데 성공했다. 불행히도 그해 12월 김양건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며 전략 부재에 빠진 김정은의 제멋대로 '폭주'가 시작됐다. 2016 1월 모란봉악단을 베이징으로 보내 북·중 관계를 풀어보려던 김양건의 전략은 그가 사망하고 김정은이 또다시 독단적 판단을 내리며 물거품이 됐다. 베이징에서 자신의 모란봉악단을 무시한 시 주석에게 화난 김정은이 그 보복으로 즉시 4차 핵실험 버튼을 눌렀고 그해 가을에 연이어 5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중장거리탄도미사일(IRBM)인 화성-12형 발사 훈련을 현지 지도했다고 16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연합뉴스

사실 6차 핵실험을 결정하기 전 북한은 그들에게 유리할 수 있는 중요한 외부 변수를 맞고 있었다. 북한을 압박하던 박근혜 정권이 몰락하고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계승한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다. 노련한 김정일이었다면 이 호기를 그냥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의 대북 경제 압박을 대남 경제 협력 시도로 극복하고 국력을 안정시켜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물론 15년 전 북한과 지금 북한은 많이 달라졌다. 한류(韓流)가 북한 내부를 변화시켜 온 것이다. 통일전선부와 중앙 기관의 모든 단위에서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남 협력 사업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국가보위성은 남쪽에 지나치게 의지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김정은에게 보고했다. 김정은 옆에는 바른 소리를 할 사람이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과거 어떤 상황에서도 객관적 정세 판단과 정책 결정에 따른 후유증까지 정확히 보고하던 각 부서의 전문 집단이 김정은의 생각과 코드에 맞추는 광대로 전락했다. 김정은의 판단에 맞서다가 고사총에 처형당한 사람들을 목격한 이후의 현상이다. 2014년 중국과 맺은 관계 단절을 지시한 김정은에게 중국 인민해방군과의 교류는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변인선 총참모부 작전국장의 비참한 운명이 대표적이다.

 

누구 말도 듣지 않는 김정은의 독단적 '원맨쇼'는 김일성·김정일이 반세기 동안 남한에 만들어 놓은 '우군'도 적으로 돌려놓았다. 핵·미사일 성공을 축하하려 평양에 모인 10만 군중은 화려해 보이지만 이미 희망을 잃었다. 북한 내 엘리트들은 이제 무한 고립의 국제 고아가 된 김정은 정권의 최후를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2017.10.30 유엔 제재, 이번엔 김정은에게 진짜 위기다

김씨 일족 떠받친 '궁정 경제'와 핵·미사일 집중한 '군수 경제' 

민생 방치, 北 경제 파탄 지경… 유엔 제재로 '돈주'까지 자금난 

주민 생활 고통받고 어려워지면 김정은, 파국의 결과 맞을 것

 

과거 김정일은 아무리 유엔 제재 같은 것들이 있어도 우리는 끄떡없다고 말했다. 얼마든지 피해갈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연장 선상에서 김정은도 과거처럼 유엔과 그 주변국들이 아무리 북한을 압박해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최근 김정은 정권의 연이은 핵실험과 미사일 도발로 발생한 강력한 유엔 제재는 과거와 다르고 북한 내부에 미치는 영향도 심각한 것으로 보인다.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은 '군수 경제'와 김씨 일족의 사()적 경제인 '궁정 경제'에 집중된 기형적인 북한 경제를 바로잡고자 노력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장성택 처형 이후 39호실의 경제 파워는 더 강해졌다. 여기에 모든 국가 에너지를 핵과 미사일에 집중시킨 김정은의 지시로 군수 경제에도 막대한 자금이 소요돼 민생 경제의 시장 의존도는 더 높아졌고 거기에 방치됐다. 사치성 건축물 공사까지 맞물려 국가 경제는 더 망가졌다. 중국이 사실상 핵심적인 역할을 한 유엔 제재는 김정은의 궁정 경제와 군수 경제를 완전히 붕괴시키고 있다. 39호실의 핵심 자금줄인 금괴, 금 정광, , 아연 수출이 전면 금지됐고 석탄 수출도 완전히 끊겼다. 적어도 30억달러 규모의 수출 길이 끊겼기 때문에 통치 자금 70% 정도가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은 여기에 북한의 의류 섬유 수출까지 막았다. 막대한 외화벌이 품목이었던 비단 수출마저 중단됐다.

 

▲북한 조선중앙TV 29일 방영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평양화장품 공장 시찰 장면에서 김 위원장과 부인 리설주가 이 공장에서 생산한 화장품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금과 연, 아연은 39호실에서 철저하게 통제하기 때문에 통치 자금하고만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만 약 10억~14억달러로 추산되는 석탄 수출은 많은 사람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공화국 '사기꾼'들과 '돈주'들이 모두 석탄 사업에 투자할 만큼 그 규모가 컸다고 한다. 평안남북도 일대는 석탄을 실어 나르기 위한 대형 덤프트럭만 5000대가 될 만큼 석탄 산업이 호황을 누렸다. 평양의 고급 식당과 상점들은 석탄 수입에서 새는 외화로 흥청거렸다. 하지만 석탄 수출 중단으로 평양의 고급 식당과 상점들이 거의 폐점하다시피 했고 대형 시장들의 구매력도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고 한다. 석탄에 투자한 많은 돈주가 자금을 잃고 추운 벌판에 나앉아 아비규환 상태로 보인다. 39호실 핵심 자금이 다 끊겨 그 산하 회사들도 말 그대로 '올 스톱'인데 그 누구도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반면 밑바닥 시장경제는 당장 유엔 제재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서민의 절대적 필수품인 식량 가격이 안정을 보이고 있다. 수출이 중단된 석탄이 내수로 풀리면서 서민용 에너지 가격도 3분의 1로 떨어져 인민은 오히려 환호하고 있다. 유엔 제재를 계속하면 좋겠다는 반응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식량 가격이 안정적인 것은 시장에 의존한 농민들이 국가 수탈 정책에 맞서 죽기 살기로 식량을 비축한 결과로 보인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유엔 제재가 지속될 경우 그 여파가 인민의 삶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시장 규모가 축소되고 돈주들의 자금이 말라버리면 시중에도 그만큼 돈이 풀리지 않으니 시장에 기대어 먹고살아 온 인민의 삶도 어려워진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위기의 책임이 김정은 본인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김정일은 모든 책임을 부하에게 전가하거나 외부에 돌렸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김정은 자신이 모든 결정은 자신이 했다고 세상에 자랑했기 때문이다. 북한 사람들은 핵과 미사일을 원한 적도 없고 외부 세력과 싸워서 고생하길 원하지도 않는다. 북한이 당면한 총체적 위기는 김정은 주변 세력부터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북한 체제를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만성적 위기와 이번 위기는 다른 것이어서 앞으로 김정은 자신의 결정과 행동이 달라지지 않으면 파국적 결과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강철환 북한전략센터 대표

 

■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조선일보

2013.11.20 탈북여성 박주희, 노동당 간부의 집을 사다

 

11월7일 북한의 '우리민족끼리'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 비할 바 없는 커다란 우월성과 생활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력사적 실천을 통해 실증 되였다”면서 평양시에 새로 건축된 아파트 몇 채를 소개했다.  

 

그러면서 올해 평양시에 건설된 ‘은하과학거리’와 ‘김일성종합대학 교육자살림집’, 그리고 ‘체육인살림집’의 사진 몇 컷을 자랑삼아 내 보였다.  

 

계속해서 신문은 “궁궐 같은 이 살림집들을 모두 평범한 로동자, 사무원, 체육인, 교원, 과학자들이 돈 한 푼 안내고 국가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이 사람들의 가슴을 뿌듯하게 한다. 이러한 현실은 나라의 모든 시책이 인민을 위해 펼쳐지는 공화국의 품에 안겨 사는 우리 인민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다. 자본주의사회의 근로자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고 썼다.  

 

거짓말을 해도 좀 정도껏 하라고 꾸짖고 싶지만 북한의 이러한 감언이설에 속아 밀입북 했던 대한민국 국민도 있었다는 생각에 일단은 북한 아파트의 실상을 해부해 보기로 했다.

 

북한의 모든 아파트는 공짜(?)  

북한의 모든 주택은 국가의 소유물이다. 개인소유와 건축은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주민들은 국가로부터 살림집(가정을 단위로 하여 사람들이 살림하는 집/북한 대사전)을 배정받아 생활하게 된다.  

 

중앙과 도, 시, 군 인민위원회의 주택공급 부서들은 해당지역과 기관 및 공장들에 국가로부터 할당받은 아파트들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게 생겨나는 것이 ‘중앙당 아파트’, ‘체육인 아파트’, ‘과학자 및 노동자 아파트’이다.

 

북한에는, 어느 계층에도 소속되지 않은 사람이 없어서 위와 같은 획일적 도시계획과 공급구도 속에 너도 나도 용해되어야 하지만, 아직도 평양시와 지방 도시들에는 이러한 계획과 무관했던 5~60년대의 건물들이 많아서 이름 하여 ‘혼성아파트’에 사는 사람들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아파트들에 북한주민들이 돈 한 품 안내고 입주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러한 주택공급 시스템이 도입된 순간부터 북한주민들은 당국이 의도한 ‘충성경쟁’에 빠져버림과 동시에 인간의 본능이라 할 수 있는 ‘소유욕’을 상실해 버린다.

 

한마디로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은, ‘가정을 단위로 하여 사람들이 살림하는 집’을 미끼로 북한사람 모두를 맹목적인 충성경쟁 속에 처넣었으며 ‘내 것’이 필요 없는 ‘사회주의 노동환경의 도구’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아파트 공급을 통해 북한의 계급구조를 보다  

최고급주택인 ‘단독고급주택’은 노동당 및 내각 부부장급 이상 또는 북한군 소장 이상의 고위간부들에게 배정되며 이들을 북한에서는 5호 주택 공급대상자라 부른다.  

 

4호주택(신형고층아파트)은 중앙당 과장급 및 내각 국장급, 인민배우, 공훈예술인, 대학교수, 기업소 책임자 등에게 배정된다. 3호주택은 중급의 단독주택과 신형아파트로서 중앙기관의 지도원이나 도급기관의 부부장 이상 또는 기업소부장 및 학교교장 등에게 배정된다.  

 

2호주택은 일반아파트로서 도급기관의 지도원과 시·군의 과장급 및 기업소의 과장급, 그리고 학교교원 등에게 배정된다. 1호주택은 일반주택과 농촌문화주택 및 구옥 등이 해당되며 일반근로자와 사무원, 협동농장원, 농촌지역 주민 등에게 배정한다.  

 

이처럼 불합리한 제도를 살면서도 불합리성을 모를뿐더러 오늘도 ‘사회주의 만세’를 외치는 북한주민들의 의식구조는 다음기회에 전하기로 하고 아래에, 북한식 주택공급구조가 ‘박살’하고 ‘붕괴’되는 과정을 피력하기로 한다.  

 

탈북여성 박주희(가명 39살), 都黨간부의 집을 사다  

2009년 4월, 평소부터 알고 지내던 한 탈북여성이 필자를 찾아왔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다짜고짜 “국장님, 나 이번에 도 당 선전비서의 집을 사버렸어요!”하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도 당 선전비서면 도지사 버금가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선전, 선동을 중시하는 북한의 특징상 그 이상일 수도 있는 권력을 가진 사림이 도 당 선전비서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남한에 와서 생활하는 탈북자가 북한 주요도시의 도 당 간부의 집을 ‘사버렸다’는 것이 도대체 믿어지지가 않았다.  

 

사연은 이랬다. 2004년 입국, 입국하자 바람으로 서울의 한 음식점에 취직해 일해 온 박 씨는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늘 그리워했고 그리움과 미안함을 덜기위한 방책으로 꼬박 꼬박 ‘어머니 몫’으로 저축을 해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1년에 두 번 정도 브로커를 통해 북한으로 송금을 했다. 한 번에 보내는 돈은 중국인민폐로 평균 1만 위안, ‘중국에서 일해서 번 돈이니 안심하고 쓰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는 그녀는 5년 후 음식점 사장이 되었고 “음식점도 개업한 김에 큰마음을 먹고” 어머니와 언니, 오빠의 몫으로 단번에 5만 위안을 송금했다고 했다.   그때로부터 1개월 뒤, 북에 계신 어머니로부터 “네 덕에 도 당 선전부장의 집을 샀다는 연락이 왔다”고 박 씨는 자랑했다.  

 

당시 인민폐 5만 위안이면 북한 돈 약 2천만 원, 화폐개혁 이전 북한 노동자 한 달 월급이 800~1000원이었으니 북한 돈으로는 어마어마했지만 다시 미화로 환산(암시장 환율)해 보면 약1만 달러로, 북한의 고위 간부가 살던 아파트를 구입하는데 드는 비용은 그리 요란한 것이 아니었다.   부인의 2차 간경화복수를 치료하기 위해 엄청난 돈이 필요했더라는 도 당 선전비서는 그날부로 탈북자 박 씨네가 살던 일반 아파트로 이사를 갔고 도당 간부들은 물론 보안부와 보위부, 일반 주민들까지 알아버린 이러한 ‘사태’는 묵인되었을 뿐 아니라 또 다른 ‘사태’와 ‘사태’로 이어지는 판국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배급에만 근거했던 북한의 주택공급체계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러한 사태는 주로 탈북자들에 의해서 주도된다는 이야기가 북한 내부에 퍼지기 시작했다. (계속) 

조선일보

 

2014-10-07 김정은의 ‘골방 외교’의 숨은 뜻은?

지난달 3일 김정은이 모란봉악단 공연을 관람한 후 돌연 북한의 정치무대에서 사라져버렸다. 한동안 양쪽 다리를 번갈아가며 절뚝거리던 그의 행보로 보아 외과수술과 성인병 치료 등이 보도된바 있지만 실지로 그의 몸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렇게 한 달 이상 외부에 나서지 못하는 김정은이 무엇을 해 왔고 또 하려고 하는지 눈여겨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지난 9월 독일과 벨기에, 스위스와 이탈리아 등 유럽국들에 대한 방문을 마치고 몽골과 중국을 거쳐 북으로 돌아간 강석주 국제담당비서의 행보가 눈에 뜨인다.

 

일각에서는 강석주의 유럽방문이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고 하지만 당시 조선중앙통신은 그의 유럽방문결과에 대해 “회담과 대화들에서는 조선과 유럽의 정치, 경제 정세가 통보되고 공동 관심사에 대해 깊이 있고 솔직한 의견 교환이 진행됐다”며 많은 문제에 대해 상호 이해를 표명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관계 발전을 위해 적극 노력하기로 합의했다고 전한바 있다.

 

1994년 북미 제네바합의를 이끌어낸 실무 주역이며 북한외교의 실세로 불려온 강석주가 이번만큼은 어떤 결과를 얻자거나 목표를 가지고 유럽을 방문한 것이 아니라 ‘김정은의 유럽국 대표자’로 공식 인정받기 위해 ‘그냥’ 다녀왔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이럴 경우 여기저기 다니며 눈도장만 찍으면 그만이고, 강석주를 파견한 김정은의 입장에서는 다녀온 그 자체가 ‘성과’일수 있다. 

 

다음은 북한 리수용 외무상의 미국방문이다. 지난 달 24일 유엔총회 기간을 기화로 뉴욕에서 외교행보를 펼치던 리수용은 박근혜 대통령의 기조연설 당시 단상 바로 앞에서 박대통령의 연설 장면을 지켜봤으며 단상과는 불과 5m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박 대통령의 발언을 경청하는 등 이외의 모습을 보임으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리수용은 반기문 사무총장을 만나 김정은의 친서를 전달했으며 이러한 행보 등으로 ‘북한이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 적극적인 외교행보로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려는 하고 있다’는 관측과 ‘현재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 케니스 배, 매튜 토드 밀러, 제프리 파울 등을 고리로 대미협상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려 한다’는 등의 추측만 남기고 북으로 돌아갔다. 

 

결국 리수용도 별 무리 없이 미국을 다녀왔고 유엔이라는 국제무대에서 북한 외무상으로서의 파트너십을 형성, 지금 당장이라도 미국과 유엔에 김정은의 대리인으로 달려가기에 손색없는 인물이 되어버렸다. ‘말 탄 김에 서울까지 간다’고 리수용의 역할은 여기에만 머물지 않고 이란과 러시아 등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그렇게 유럽과 미국 등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시킨 김정은은 지난달 18일 ‘청년동맹 초급일꾼대회’에 서한을 보내는가 하면 러시아, 중국, 수리아 등 각국 정상들과 서신을 주고받음으로 ‘건재’를 과시했고 자신의 건강에 별 문제가 없음을 각방으로 알리는 이른바 ‘서신정치’를 현재도 구도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 달 이상 공개석상에 나타나지 않고 있는 김정은을 바라보는 북한주민들의 시선은 다르다. 평양의 한 노동당 간부는 “그(김정은)의 현재 상태에 대해 주민들에게 따로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했고 북한 내 지인들과 수차 연계를 가졌다는 탈북민 채수용(가명)씨는 “지금 북한주민 전체가 김정은이 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거나 걱정하고 있다”고 했다.

 

한편 한국과 미국의 정보관계자들이 김정은의 통치력에 별 문제가 없음을 주장, 또 주장하고 있음에도 쿠데타를 동반한 현 북한체제의 전복 내지는 김정은 중병설이 꼬리를 물고 터져 나오는가 하면 ‘포스트 김정은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는 형편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세간의 우려를 단숨에 잠재우기 위해 김정은이 고안해 낸 것이 이번 황병서 일행의 인천방문은 아닐까.

‘선수격려차원의 방한’이라는 저들의 강력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온갖 의혹을 낳고 있는 황병서 일행의 방한을 다시 되짚어 보면, 저들도 강석주와 리수용처럼 ‘그냥 한국을 다녀갔고’, 가면서 ‘고위급 회담에 대한 미련’을 남기는 식으로 향후 김정은의 역할을 부각시키는 행위에만 충실한 셈이다.

 

그렇게 미국과 유럽, 유엔과 한국 등에 자신의 대리인들을 파견해 스스로의 입지를 굳혀온 김정은이 맞는다면, 이제 남은 것은 ‘동시 다발적인 결론’과 ‘명령’을 골방에서 구도함으로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도 북한 최고통치자로서의 리더십에 문제가 없음을 과시하게 되는 셈이다.

 

김정은이 왜 궂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향후에 대비하는 '안방정치'에 매달려 있을까. 그만큼 현재 김정은은 우리가 예측하고 있는 것 이상의 중병을 앓고 있거나 전형적인 외과수술로 인해 신체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며, 따라서 향후 남한과 국제사회는 위에서 언급된 각각의 상징성 있는 인물들과 대상해야하는 새로운 환경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게 필자의 또 다른 주장이다.

 

이들 대리인들의 역할을 김정은과의 대화로 착각하는 일도 없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2014-10-08  장성택 죽인 김정은은 참 나쁜 놈, 오래 못 살 것이다" - 탈북민 인터뷰

젊음과 패기를 과시하듯, 북한의 군부대와 산업현장들을 동서분주하던 김정은이 오늘로 35일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그토록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던 자가 한 달여 동안 밖으로 나대지 못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김정은은 건재하지 못할 뿐 아니라 추한 모습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젊었더라는 나이 때문에, 그렇고 헤어스타일에서부터 추구하던 승마나 스키 등과의 연계성 때문에 더욱 초라해 보일 것임에 틀림이 없다. 언젠가는 드러날 김정은의 모습이 항간에서 떠도는 뇌손상 및 내과치료와 연계된 것이라면 우리는 갑자기, 시체 말로 ‘반신불수’(半身不隨)이거나 스스로의 배설(排泄)조차 불가능해진 저능아를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현재로서는 가장 불확실해 보이지만 심정(心情)으로는 가장 바람직해보이는, ‘군부쿠데타’에 의해 김정은이 나타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얼핏 사담후세인과 차우셰스쿠의 비참한 모습이 떠오른다. 이도 아니라면, 지난달 25일 왼쪽 다리와 오른쪽 다리를 번갈아 저는 김정은의 모습을 공개하면서 ‘불편하신 몸’ 상태를 인정한 북한의 공식표명과 연계되는 것이 있다() 발목, 혹은 한쪽 다리 절단이다

 

남한과 국제사회를 향해 언제한번 진실을 말해본 적 없는 북한이 서세평 제네바 북한 대표부 대표와 인천을 방문했던 김양건을 내세워 "김정은 건강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자처한 것 역시 반대말 해석을 필요로 하고 있다. 뻔 한 해석이지만 “김정은 건강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의 반대말은 “김정은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북한주민들의 의식은 어떻게 작용하게 될까. 이른바 지도자에 대한 북한주민들의 심적 변화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7회에 걸쳐온 ‘장마당이 인민들을 먹여 살린다’는 제하의 탈북민 인터뷰를 오늘로 마감하면서 북한주민들의 체제에 대한 인식과 태도, 장성택 처형 으로 나타난 김정은의 독재성 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반 김정은 활동은 없나? 동유럽, 중동에서처럼 대중시위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뭐나? 

 

김00 : 과거에 비해 주민들의 사회의식과 지도자에 대한 불만은 높아졌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생각이 한데 모이기는 말처럼 쉽지 않다. 누가 혹시 당국의 비위에 거슬리는 말을 했다고 하면...그래서 당국의 귀에 들어가기만 하면, 당국은 반드시 출처를 따진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소식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너 그 소리 어디서 들었냐?’고 보위부가 나서서 따지면, 반드시 말한 사람이 나오게 돼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불만이 있어도 남에게 말하지 못한다. 

 

박00 : 내가 살던 회령, 그리고 청진 장마당 같은데 이따금 반정부 삐라나 낙서가 나오곤 했다. 하지만 그건 조직적으로 북한백성들이 한 것이 아니고 제도에 대한 불평 불만을 품은 개인들이 저지르는 것이다. 또 당국에서는 남조선 안기부가 일부 사람들을 매수해 간첩질을 한다고 하는데... 그걸 믿는 사람들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채00 : 2006년 6월에 ‘남조선에 도망간 탈북자들이 고향에 숨어 들어와 성경책도 뿌리고 낙서도 해 놓고 도망간다’는 말이 혜산시에 쫙 퍼졌던 기억이 난다. 후에 그 사람 가족이 몽땅 탈북했는데...여기 와서 그 사람을 만났다. 본인은 ‘아니다’고 하는데 북에서 돌던 소문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00 : 북한에서는 김정은을 음해하려는 불손한 기도가 있기 때문에 ‘김정은 장군님’을 모시는 호위 사업을 최우선으로 신경 쓰고 대단히 중시하고 있다. 「모든 사업의 첫 자리가 장군님을 모시는 사업으로 되게하라」,「김정은 행사, 노정에 관한 비밀을 보장하고, 행사 참가자를 선발할 때는 성분이 불확실한 사람은 배제하고 핵심 계급만 동원하라」등으로 점점 요구성을 높여가고 있다. 

 

양00 : 한국에 와서 인터넷을 통해 (과거 북에서)김정일 사진에 낙서하고 체제를 비판하는 프랑카드를 내 걸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런 일 은 북한에서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김정은에 대해 반감이 있더라도 공공연히 얘기할 수는 없다. 거미줄처럼 보위부 세력이 뻗어 있어서, 바로 색출하니까 그냥 개인적으로 생각만 하고 있지 실천하기 어렵다. 

 

장00 : 나도 그 런 일이 있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누가 돈벌이를 위해서 조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하면 그런 사진을 찍고 (한국에)보내고 할 여유가 없다. 확실히 얘기할 수 있는 건, 현재의 북한체제에서는 폭동이나 내부반란이란 일어날 수가 없다. 

 

이00 : 96~97년경 내가 일하던 농장의 남새 작업반 선전실에 걸려있던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가 깨진 사건이 있었다. 당시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이 있었는데, 조사해보니 그 사람은 범인이 아니어서 풀려났고, 결국 진범은 잡지 못했다고 들었다. 나도 한국 언론을 통해 반(反)김정일 벽보가 붙은 것을 보았는데, 나는 그런 일 정도는 어느 개인이 단독으로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북조선은 여러 명이 일 할 경우 준비단계에서부터 보위, 보안 스파이들에 의해 탄로될 가능성이 있지만 혼자서, 단독으로 준비하는 일은 절대로 알지 못하는 시스템이다. TV에서 방영된 것처럼 유리벽에 쓴 「김씨 왕조 타도! 독재타도」라는 짧은 문구는 혼자서도 간단히 만들 수 있지만, 프랭카트를 내 걸고나 여러 곳에 삐라를 붙이는 것 같은 일은 여러 사람이 해야 하는 일로 불가능 하다고 본다. 사회에 대해 물만을 품고 있는 사람들끼리 많으니 간단 간단한 일들은 그 사람들 혼자서 할 수 있다고 본다. 

 

장00 : 내 생각은 다르다. 반 김정은 구호를 내 거는 것 같은 체제를 비판하는 행동이 지금은 가능할 것으로 본다. 누가 갖다 붙였는지는 모르게 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할 수 있고 조직적으로도 가능할 것이다. 사람들이 그만큼 국가를 싫어하고 당을 싫어한다. 김정은은 더 싫어한다. 

 

핵개발에 대한 인식

 탈북자들 대부분은 막연하게 '핵을 갖고 있다', '전쟁이 일어나면 핵을 사용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고, 자신들도 그렇게 믿고 있다고 증언하였다. 각종 교양학습에서는 핵보유를 기정사실로 언급했다고 말했다. 

 

신00 : 북조선 당국이 큰소리치는 것 보면 핵을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 말에 의하면 전쟁방식이 예전처럼 총 들고 싸우는 게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핵 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이 5000명이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박00 : 일반주민들은 막연하게 북조선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핵무기 때문에 안전이 보장된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북한에 핵무기기 1개 있다면 미국에서는 100개, 1000개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민군 창건일 등 북조선의 공식적인 기념일에 정부 관리들은 우리에게 핵이 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면서, ‘그 누구든 우리를 건드리는 나라는 큰 나라든 작은 나라든, 가까이 있는 나라든 멀리 있는 나라든 우리의 타격 권내에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의 타격조건에는 한계가 없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일반주민들은 우리도 핵무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김00 : 나를 포함해서 북조선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핵무기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상상을 초월하는 대단한 화학무기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00 : 미국과 핵 때문에 회담하고 보상받았다는 사실을 주민들 모두 알고 있다. 평산의 우라늄 광산이나 영변 핵발전소에 대한 소식은 북한 주민들도 다 알고 있지만 핵폭탄이 있는지 없는지는 확실히 모른다. 미국이 아무리 회담하려고 해도, 김정은은 핵확산금지조약으로부터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것으로 알고 있으며 콧방귀만 뀌는 걸로 알고 있다. 

 

장00 : 언젠가 해군대학 졸업생으로부터 ‘해군대학은 보통 5년제인데, 거기에 6년제로 핵물리 기사 반 1개 학급을 특설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거기서 핵 기술자를 키우고, ‘그 사람들이 졸업을 하면 핵 군수공장으로 간다’는 것이다. 

 

장성택 처형 어떻게 봤나? 

신00 : 여기 와서 신문을 보니까 한국에서는 장성택 처형을 미리 안 것 같았다. 우린 노동신문을 통해 노동당 확대간부회의 소식과 함께 장성택 체포 소리를 들었는데 가슴이 쿵당쿵당 뛰는 걸 겨우 참았다. 세상이 어떻게 되는가 싶은게 장성택 과 같은 거물을 현장에서 체포한다는데 가슴 뛰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이00 : 나는 솔직히 장성택이 김정은을 너무 어린 애 취급 하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갖고 있었다. 어느 놀이공원장에서 김정은이 놀이기구를 타며 마구 좋아하는데 이를 바라보는 장성택의 눈길이 곱지 않아보였다. 신문에도 나 왔지만 대회장에서 박수도 건들건들 치고 삐딱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보기 안 좋았다. 처벌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김00 : 그래도 장성택을 총살한다는 것은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장성택이 누구냐. 김정은 그 어린 사람을 수반으로 내 세워준 사람이다. 이걸 모르는 북한 사람이 없다. 도대체 뭘 그렇게 잘 못 했길래 고모부란 사람을 총살하는지 머리를 흔드는 사람이 많았다. 난 그날 속이 메스꺼워서 구토를 했다. 

 

양00 :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놈이 참 재수가 없다. 박수 안친 게 뭐 그리 대단한가. 자기는 어려서부터 유학생활 하면서 북한의 실정에 대해 도대체 뭐 아는게 있는가. 그래도 장성택이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개방해야 한다고 북한의 개혁을 주도해 온 인물인데 그런게 눈에 가시여서 죽인 거라고 생각한다. 참 나쁜 놈이다. 오래 살 것 같지도 못하다. 

 

2014.11.04 북한의 회유, 협박, 테러위협에 대한 탈북민들의 입장

북한은 지난시기 탈북민들의 ‘대남전단 살포’를 ‘인간쓰레기들의 반공화국 책동’으로 규정하고 관련단체와 당사자들의 실명까지를 거론하면서 이른바 ‘처단’을 공언해 왔다. 

 

최근 들어서는 우리정부의 대화의지와, 평화를 바라는 국민들의 염원을 교묘하게 이용해 ‘대북전단 살포를 중단하지 않으면 대화도 없다’고 공언하는 등으로 대한민국 국민과 정부를 농락해 왔다

 

일부 지역민과 친북단체는 생존권을 전면에 내 걸고 대북전단 살포를 방해해 왔고, 여기에 일부정치인들까지 가세해 마치 우리정부가 대북전단을 살포하는 탈북단체를 지원해 온 것처럼 여론을 오도(誤導)하기도 했다

 

이를 기화로 북한은 박근혜 대통령이 대북전단 살포의 '배후주모자'라고 넋두리하면서 남북회담이 무산된 책임을 우리에게 떠넘기고 있으며, 독재공화국 북한처럼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탈북자들의 전단 살포를 막을 수 있다는 궤변만 늘여놓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대한민국정부가 유엔의 ‘북한인권 결의안’에 가담하게 될 경우 남북관계는 파국을 맞게 될 것이라고 협박하는 한편 북한인권문제의 심각성을 내외에 알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탈북자 및 단체장들에 대한 회유와 협박, 테러위협을 노골적으로 감행하고 있다

 

지난 10 25일에는 북한인권운동가 신동혁의 부모를 내 세워 ‘부모가 자식을 비난하는 연극’을 벌이도록 했고, 1030일과 31일에는 조명철 의원의 동생을 내 세워 ‘동생이 형을 비난하고 폄훼토록 하는 천하에 못쓸 짓’을 강요하기도 했다

 

11 1일 토요일에는 조국평화통일 위원회 성명이라는 것을 통해 “삐라 살포망동에 가담한 범죄자들을 온 민족의 이름으로 단호히 심판, 처단할 것이며...우리 제도, 우리 법 앞에 죄를 짓고 도망친 자들을 다스릴 권한은 우리에게 있으며 국제법과 관례를 보아도 남조선당국은 범죄자들을 우리에게 넘겨줄 의무가 있다. 남조선당국이 그것도 못하겠다면 우리는 인간쓰레기들을 단호히 쓸어버리기 위한 처단 작전을 단행하게 될 것이다그 처단대상으로 살생부에 오른 자들은 우리가 이미 선고한대로 임의의 시각에 임의의 장소에서 무주고혼이 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희떠운 수작을 늘여 놓았다.

 

이에 대한 탈북자들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하나, 대북전단은 우리 탈북민들이 두고 온 고향사람들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이며 더 이상 세습독재체제에서 짐승처럼 살지 말라는 정의의 호소이다. 편지조차 마음대로 주고받지 못하는 세계유일의 병영국가, 나라 전체를 완전통제구역으로 만들어 버린 북한의 현 체제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바뀔 때까지 북녘형제들에게 보내는 탈북민들의 메시지는 끊임없이 전해질 것임을 천명한다

 

하나, 전단 살포의 방식이 공개냐 비공개냐 하는 논의자체가 불필요했고, 이러한 논의가 이른바 남남갈등을 조성시키기 위한 북한의 대남전략에 말려든 꼴임이 증명되었다. 북한은 10 31, 이민복 풍선단장이 비공개로 날린 대북전단에 대해서도 “괴뢰패당이 대북전단 살포를 방임, 비호, 두둔하고 있다”면서 “지어는 박근혜까지 나서서 인간쓰레기들의 삐라살포를 막을 수 없다고 공언하는데 이르렀다”며 횡설수설하고 있다

 

그럼에도 향후 탈북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는 지역민들의 안전과 바람방향 등을 감안한 보다 효과적인 방법에 역점을 두고 비공개로 진행될 것임을 밝힌다. , 이른바 최고 존엄을 운운하는 북한이 5천만의 존엄이 있는 대한민국을 위협하고, 국민이 뽑은 대통령에 대한 모욕적 언사를 지속한다면 그 빈도, 그 수위에 걸맞게 국내는 물론, 전 세계의 면전에서 이른바 북한 ‘최고 존엄’의 반인륜적 실체를 폭로할 것이다

 

하나, 새정치민주연합 민병두 의원은 대북전단 살포와 관련해 허위사실을 유포시킴으로 안으로는 북한민주화단체 간의 반목을 꽤했고 밖으로는 우리 정부가 대북전단 살포 단체를 돕고 있다는 빌미를 북한에 제공하였다. 그는 국감기간을 이용해 대북전단 살포와 무관한 단체들을 무더기로 총리실에서 보조금을 받은 단체로 매도했고 ‘북한민주화추진연합회’와 무관한 단체들을 억지로 동 단체에 끼어 맞추면서까지 대북전단 살포를 방해하고 나섰다

 

이와 관련해 민병두 의원은 거짓 사실을 유포한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과 그가 그토록 알고 싶어 하는 대북전단 살포 단체는 ‘자유북한운동연합’,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북풍선단’, ‘북한민주화추진연합회’, ‘북한인민해방전선’, ‘대북전단보내기 국민연합’, 그리고 공개를 원하지 않는 네 개의 탈북민 그룹과 대북선교단체가 있음을 밝히며 이들 모두가 정부로 부터는 한 한 푼도 지원받은바 없음도 밝힌다

 

하나, 한편 북한당국은 조명철 새누리당 국회의원과 북한인권활동가 신동혁의 가족을 내 세워 당사자들을 회유, 협박, 공갈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북한인권문제에 관한 탈북민들의 증언 및 활동에 재갈을 물리려 꾀하고 있다. 이러한 북한당국의 반인륜적 만행은 이들 두 사람에게 그치지 않을 것이며 탈북민전체로 확산될 기미마저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조명철, 신동혁 가족들이 북한당국의 통제와 위협이 가능하지 않은 제3의 장소에서 ‘조명철, 신동혁에 관한 이야기들을 다시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그것만이 진실이라는 것을 내외에 천명한다. 또한 이를 위한 적절한 장소가 UN이 있는 뉴욕이며 조명철, 신동혁 가족을 대동한 북한당국과 만나는 시기가 11 30일까지임을 밝힌다

 

하나, “탈북민들에 대한 처단 작전’을 단행하며... 그 처단대상으로 살생부에 오른 자들은 우리가 이미 선고한대로 임의의 시각에 임의의 장소에서 무주고혼이 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북한독재자들의 망언에 대해서는 “대한민국국민과 정부가 우리 탈북민들을 지켜줄 것이며 설사 우리들 가운데 희생자가 생긴다고 해도 북한독재정권의 독재성을 만천하에 폭로하고 북한민주화운동의 새로운 도화선에 불을 지핀다”는 정신이 우리에게 있음을 다시 한 번 밝힌다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 박상학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 홍순경

세계 북한연구센터 소장 안찬일

대북풍선단 단장 이민복 (동의)

nk지식인연대 대표 김흥광

자유북한방송 대표 김성민

북한전략센터 대표 강철환

북한인민해방전선 사령관 최정훈

북한민주화위원회 부위원장 김영순 (동의, 현재 해외출장중)

뉴포커스 대표 장진성 (동의, 현재 해외 출장중) 

2014 11 3

 

2014.11.06 김정은이 김정일보다 잔인한 증거는?

지금껏 탈북자 전체를 ‘조국과 인민 앞에 죄를 지은 범죄자, 용서받지 못할 배신자’라고 낙인해온 북한이 이번에는 ‘신종협박 시리즈’를 통해 조명철(1), 박상학(2), 장진성(3)...등을 향해 차별화된 위해를 가해오고 있다

 

다음 시리즈의 타깃이 나일수도 있고 너일 수도 있다. “이자들은 미국과 남조선괴뢰들이 떠드는 것처럼 그 어떤 정치적 망명자나 난민이 아니며 그 무슨 인권투사는 더욱 아니다”고 강변하면서 “탈북자, 너는 누구냐?”고 묻기까지 한다. 

 

북한의 대남선전매체에 실린 ‘탈북자 비난 시리즈의 제목’이기도 한 이 질문에 답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지만, 대한민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27천여 탈북자들에게 한가지만은 명백히 밝혀두고 싶은 것이 있다

▲조명철 의원의 동생.

 

과거 김일성은 탈북자들의 북에 남은 가족모두를 정치범수용소로 보내버렸다. 탈북한 당사자의 직위나 남은 가족이 처해있는 환경에 따라 직계는 물론 4촌에서 8촌까지 사회와 완전히 격리(隔離)시켜 버렸다

 

이후 중첩되는 식량난과 경제난에 ‘고난의 행군시기’를 선포했던 김정일은 “대오(隊伍)안에 많은 적을 만들 필요가 없다”면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탈북자의 남은 가족을 도시에서 추방시키거나 무시하는 정책을 폈다

 

하지만, 이제 김정은은 김일성과 김정일을 훨씬 능가해 탈북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정신적으로 피로케 하고, 심리적으로 붕괴시키려 하고 있으며 나아가 인간적으로 매장시키려 하고 있다

▲탈북자 신동혁씨의 아버지.

 

10 25일엔 탈북자 신동혁의 아버지를 내 세워 “내 아들이 한 이야기가 거짓이다”고 증언케 함으로 신동혁의 활동에 제동을 걸었고, 탈북자출신 국회의원 조명철에 대해서는 북에 있는 친동생을 내 세워 ‘심리적 붕괴’를 꽤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박상학, 장진성에게 창끝을 돌렸고 김흥광, 강철환, 안찬일, 김영순, 최정훈 등을 향한 회유와 협박을 예고하고 있다. “나는 아니다”고 피해갈 사안이 아니며 “나는 다만 밥 벌어 먹기 위해 대한민국에 온 사람이니 나와 우리가족은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해서 되는 일도 아니다

 

김정은은 그만큼 잔인한 방법으로 탈북자들을 굴복시키려 하고 있고 탈북민사회의 붕괴를 꽤하고 있다. 그로 인해 북에 남은 우리가족들의 고통이 커가고 있으며 여기서 누구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이쯤에서 고 황장엽 선생의 이야기를 김정은과 그 하수인들에게도 전하고 싶다. 너희들이 드디어 뱉어내기 시작한 “탈북자란”, “죽기를 각오하고 그 땅을 탈출해야만 했던 독재정권의 희생자들이다” 

 

그 때문에, 쫓기듯 고향을 떠나야 했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야 했던 우리는, 상실과 고통의 크기만큼 북한민주화운동에 매진하고 있다는 사실도 여기에 밝힌다아울러 “너는 누구냐?”고 내게도 묻는다면 김정은 네가, 두고 두고 아파할 이야기가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장담(壯談)해 둔다

 

2014.11.26  북한군 땅굴에 철문이 뜯겨나간 까닭은?

북한은 군인들의 병종 식별표며 벨트에 쇠붙이를 사용하고 있다심지어 소위부터 시작되는 군관(장교)의 계급장에도 쇠로된 오각별을 밖아 넣도록 규정하고 있다복장에 별로 쇠붙이를 사용하고 있지 않는 한국군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경기도 제1사단지역 제3땅굴의 내부./조선DB


한편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군인들이 차고 넘치지만 북한군에 남아돌아가는 것은 숟가락과 젓가락이다. 물론 쇠로되어 있고, 한때는 “모든 군인들을 정찰병 수준으로 준비시키라”는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숟가락과 젓가락이 목표물을 향해 날아가는 흉기가 된 적도 있다

 

그만큼 열악한 환경을 사는 북한에 그나마 남아도는 것이 쇠붙이란 이야기며 특히 무기와 장비 외에도 북한군엔, 늘 쇠붙이가 필요했더란 이야기다. 대표적인 것이 갱도마다 설치된 철문인바 북한군은 중대마다 100미터 이상의 ‘병력은폐 및 지휘갱도(땅굴)’를 가지고 있다

 

신설(新設)되는 부대가 있다면 병실(막사)을 짓기 전에 갱도를 먼저 굴설(掘設)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을 만큼 갱도에 대한 북한군 수뇌부의 집착은 대단하며, 이를 두고 당국은 ‘전시동원준비의 핵심 사안’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땅굴 형 갱도의 수자는 북한군 전체 중대의 수와 비례하며 여기에 연대와 사단, 군단과 총참모부의 지휘통신 갱도가 별개로 구비되어 있다

 

벌써 짐작한 이들도 있겠지만 그 모든 갱도의 입구엔 ‘적의 포격과 항공 타격’에 대비하기위한 철문이 있는데, 놀랍게도 북한군 군인들이 그 철문마저 뜯어다 팔아먹는다는 황당한 소식이 전해졌다최근 김정은의 지시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동계훈련에 대비한 검열’에서 드러난 사안이어서 충격을 더하기도 한다.

 

25일 자유북한방송과의 전화에서 북한군 소식통은 “웬만한 중대와 대대 갱도의 철문들이 언제 뜯어 낸지도 모르게 사라져버렸으며 이를 보고 받은 김정은이 대노하여 관계자들을 모두 색출해 엄중처벌하라”고 지시, “전군에 총참모부와 총정치국, 보위부 합동으로 편성한 ‘갱도 검열단’이 들이닥치고 있다”고 했다

 

소식통은 이어 “연대와 사단, 군단 급 갱도에는 지휘통신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평소에도 인원들이 투입되는 상황이어서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철문을 뜯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대대와 중대의 모든 갱도는 동계훈련이 시작되는 연말이나 연초에 한번 정도 사용되는 형편이어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뜯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그는 “갱도 양쪽에 2중으로 설치되어 있는 철문 한 짝의 무계가 대략 300㎏이 넘는다. (북한의)모든 갱도는 산중턱에 설계되어 있어 한 두 사람이 뜯어낸다거나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이는 중대 및 대대의 초급지휘관들이 개입된 조직적인 행위로 보여지며 때문에 북한의 모든 초급지휘관들이 벌벌 떨고 있다”고 말했다

 

“황당한 것은 대부분의 갱도용 철문들이 중국으로 넘어가 kg당 쌀 1kg과 맞바꾼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고 전한 소식통은 “그나마 남아돌던 숟가락과 젓가락이 사라지는 것도 시간문제다. 일부에서 ‘자동보총(소총)을 사겠다는 사람은 왜 없는가’고 말하기까지 해 수요자만 있다면 무기를 내가 파는 군인들도 곧 나올 것이다”고 전망했다.  

 

2014.11.29 가장 더럽고 창조적인 '욕'을 만들어 내는 者가 충신

지난 11 25일 북한조선중앙TV는 신천박물관을 찾은 김정은이 “미제야 말로 인간 살육을 도락으로 삼는 식인종이며 살인마다”면서 “미제 살인귀들과 계급적 원수들이 감행한 야수적 만행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함”을 강조했다고 했다

 

이런 엽기적인 용어를 김정은이 직접 사용했다는 것이 이례적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가운데, "그게 그거다"는 탈북민들의 주장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북한 노동신문은 오바마 대통령을 향해 “사악한 검은 원숭이, 혈통도 불명확 자”라고 비난한바 있다. 자위권을 주장하는 일본을 향해선 “쪽발이 놈들이 지구상에서 제일 먼저 불벼락 맞을 것”이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시절엔 대한민국을 통틀어 “이명박 쥐새끼 패당”이라고 소롱했는가 하면 2014 4월과 5월엔 온갖 저질스러운 표현들로 박근혜 대통령을 비난하기도 했다

 

당시에 나왔던 말이 <늙다리 창녀> <치마 두른 대결 광> <갈보 년> 이고 보면 저들은 오래전부터 정상적인 언어생활을 포기한 족속들이다

 

왜일까. 무엇 때문에 북한은 신문, 방송은 물론, 최고통치자까지 나서서 이 같은 악담을 쏟아 내는 것일까. 김일성의 아바타라고 하더니 김정은이 과거 김일성이 쏟아내던 악담을 그대로 따라했을 뿐이라는 주장이 우선이다

 

예를 들면 ‘미국 놈의 털가슴에 복수의 총창을 꽂자’, ‘미제의 가슴팍에 불을 지르자’, ‘아세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미제의 각을 뜨자’며 반미를 수출하던 김일성처럼 이제 김정은도 대한민국과 미국을 향한 막말공세에 도전장을 내 밀었다는 것

 

또 다른 탈북자들은 북한사회를 지탱하는 두 개의 정신적 구조가 있는바 하나는 수령에 대한 우상숭배와 경외심이고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과 미국에 대한 증오심이기 때문에 그러한 막말들이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외 북한에선 어릴 때부터 ‘국어’와 ‘혁명력사’, (공산주의)도덕’ 등을 통해 대한민국과 미국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고 있다는 증언도 나왔다북에서 중학교 교사를 하다가 20124월 대한민국에 입국한 탈북자 김순성씨는 “북한주민들은 어릴때부터 배우는 것이 욕질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북에서 공산주의도덕과목을 가르치다가 온 사람이다. 북에서는 학생들에게 이른바 공산주의 도덕을 가르치면서 계급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 적에 대한 투철한 적개심을 가져야 한다고 교육하고 있다”고 했다

 

실지로 북한의 도덕 교과서(1)를 살펴본 결과 교과서 내용가운덴 10대 초반의 학생들에게 가르친다고 보기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런 교과과목을 통해 배우고 자란 ‘어른’들 가운데 “가장 상스럽고 창조적인 욕설을 만들어 내는 자들이, 북한의 신문과 방송을 ‘욕’으로 채우고 있다고 탈북민들은 입을 모았다

 

2014.12.01  탈북자들의 수가 급감한 이유

▲북한 국경 초소에서 군인들이 탈북 여성을 취조하는 장면. /자유북한방송

 

올해 국내에 입국한 탈북자 수는 1500명 규모. 통일부에 따르면 최근 연도별 탈북자 국내입국 현황은 20072548, 2008 2805, 2009 2929, 2010년과 2011년에는 증가세가 꺾이며 각각 2402, 2706명으로 주춤했고 2012년과 2013년에는 1502명과 1500명으로 2009년에 비해 절반수준으로 급감했다

 

이러한 통계치를 보며 “북한이 좀 낳아졌는가?”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럴 리 있겠는가?”고 반문한 탈북자가 있었다. 올해 2, -중 국경지대에서 장교로 근무하다 대한민국에 입국한 이철석(가명, 35)씨는 “김정은 등장한 이후 ‘탈북자를 도와주거나 탈북행위에 협조하다가 제대된 자는 제대 후라도 법적 제제를 가하라’는 지시가 있었고 그 후부터 탈북자 수가 급감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김정은 사망은 2011 12 17, 이후 김정은이 최고사령관으로 등극했고 그가 권좌에 오른 지 얼마 안 되던 2012 2월에 이런 지시를 하달했다고 하니 탈북자 문제로 골치가 아프긴 아팠던 모양이다. 당시 김정은은 끊이지 않는 북한주민들의 이탈행위를 막기 위한 대책 보고서를 본 뒤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 주민들의 탈출행위를 막기가 어려우니 탈북을 묵인하거나 도운 자들을 끝까지 추적해서 색출해야 한다”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결국 돈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저들의 도강을 돕던 국경경비대 군인들의 수족을 묶어 버린 것. 실지로 북한 신의주와 무산시, 회령시, 혜산시, 만포시 등 국경지역 통신원들도 이 같은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증언하고 있고 지난해 3월 국경경비대 25여단에서 벌어진 공개총살사건도 이 같은 사실을 뒤받침하고 있다고 이 씨는 말했다

 

당시 북한주민들의 탈북을 돕던 주민 2명이 공개총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데 주위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건 그 주민들 곁에 이미 제대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던 옛 국경경비대 군인이 나란히 서 있었던 것. 알고 보니 북한보위부에 체포되어 막다른 처지에 빠진 주민들이 국경경비대 군인의 도움을 받았다고 실토했고 결국 이미 제대된 사람이지만 공범으로 체포되어 형장에 서게 된 사건이었다

 

“제발 잘못했다”고, “돈에 눈이 어두워져서 이 같은 행위를 저질렀다”고 울고 불고 하는 제대군인과 주민들을 향해 “조국과 인민의 이름으로 발사!”하는 사격명령이 내려졌고 이 사건이 있은 후 어느 국경경비대원도 감히 주민들의 도강행위를 방치하거나 도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이 씨는 설명했다

 

지난해 말까지 국경경비대 대원이었다가 현재는 북한인민해방전선의 안보강사로 일하고 있는 김영수(26, 가명)씨도 “제대될 때 돈을 가지고 가야 부모들 앞에서 자식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군인이 없지만, ‘제대된 후에도 탈북을 도운 혐의가 드러나면 집까지 쫒아와 잡아가겠다는데 누가 그 위험한 일을 하겠는가”고 말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2012년 초부터 그간 뒷돈을 받고 주민들의 탈북을 돕던 북한 국경경비대원들의 이른바 ‘탈북방조행위’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다음으로 김정은은 별도의 탈북자방지대책반을 만들어 중국내 탈북자들을 체포, 북송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탈북자들의 재 입북을 유도해 주민동요를 막고 체제 선전에 활용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한 시점일 뿐 아니라 적극적이고 공세적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2015-02-02 탈북 오누이의 서울대 입학 사연..

탈북 오누이의 서울대 입학 사연..

“집에 TV가 없어서요. 특별히 아는 연예인이 없습니다.  

▲ 서울대 정문

 

성공한 자식 뒤엔 어머니가 있다는 말이 있다. 탈북민으로 서울대에 입학한 이영준(가명·21)의 어머니 채인옥(가명·53)씨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북에서 의사였기 때문이 아니다. 2009년 가족과 함께 탈북 했다가 중국공안에 의해 강제 북송되었고, 감옥에서 남편을 잃고 다시 자식들을 데리고 북한을 탈출했던 용감한 여성이어서도 아니다

 

아니, 여기까지는 오히려 평범했다

 

북한에서 당 간부로 있다가 탈북한 여성이 있는가 하면 교수며 박사, 의사는 헤일수도 없을 정도다. 군에서 장교를 하다가 세습체제와 등진 어느 탈북여성은 다섯 번 북송, 여섯 번째 탈북에 성공한 케이스다

 

어머니로써, 채인옥씨의 진가는 2012 3, 대한민국에 입국해서부터 빛을 발했다. 큰애 영실과 아들 영준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심했다는 그는, 탈북민 정착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오면서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목동의 어느 도넛가게에서 만난 영준의 이야기다.

 

“북에서는 의사라고 하지만 여기서는 약사라고 하데요. 우리 엄만 의학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에서 일했었는데...한국에 온 첫날부터 늘 엄마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어요. 

 

큰딸 영실이에게도 아들 영준에게도 엄마는 대한민국에서 믿고 의지해야 할 집안의 유일한 기둥이었다. 한편으로는 부모일이 잘되어야 자식 일도 잘 된다는 북한 식 고정관념으로 바라보던 가정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채 씨의 생각은 달랐다. 내가 다시 공부를 시작해서 약사자격을 따고 일을 시작하려면 적어도 5년 이상은 걸리겠는데, 그 사이 애들 뒷바라지는 어떻게 할 것인지가 걱정이었다고 한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건물청소 밖에 없어 청소관리원이 되었고 그것이 직업이 되었다. 자식 또래의 애들이 계절 따라 입는 옷과 신발을 유심히 봐 두었다가 밤늦게 퇴근해서는 애들 머리맡에 조용히 놓아두고 다시, 새벽 출근길을 이어갔다

 

그런 삶속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오로지 ‘자식들이 잘되는 것’ 뿐이었고 그런 엄마의 마음을 영준이는, ‘어머니의 당부’로 받아들였다. 하루는 영준이가 이가 아파 수업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일주일 내내 밤새껏 약을 달여 영준의 머리맡에 놓아두곤 했다

 

그리고는 다시 새벽 출근길을 이어가는 엄마를 보며 영준은 ‘죽어도 수업은 빠지지 말아야 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오후 네 시에 수업이 끝나면 밤 11시까지 학교에서 진행되는 야간자율학습에 참가했다는 영준이. 아침엔 수업준비를 하고 다시 학교에 간다는 영준에게 하도 물을 게 없어 “대한민국 연예인 가운데 제일 좋아하는 연예인이 누군가”고 물었다

 

“집에 TV가 없어서요. 특별히 아는 연예인이 없습니다.” 황당해 하는 필자를 배려해서인지 멋쩍은 해석을 덧붙였다. “집에 TV를 볼 사람이 없어요. 

 

‘없다’와 ‘필요 없다’는 말이 그렇게 다르다는 걸 처음 느꼈다. 영준이와 영준이 누나가 왜 서울대에 입학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더 이상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20대 초반이라는 가장 진취적이고 민감한 나이에 ‘공부’가 목표였던 젊은이들...“아빠 엄마가 교수고 의사여서 생활은 그럭저럭 괜찮았던 걸로 기억해요. 하지만 아빠가, 너희들의 장래를 위해 꼭 남조선에 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나요” 

 

그런 아빠의 이야기가 늘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투영되고 나를 위해 손이 터 갈라지도록 청소관리원의 일손을 놓지 않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남매가 할 수 있는 일은 공부를 잘 하는 것뿐이었다고 영준이 말했다

 

그렇게 영준이 2015학년도 서울대 정시에 합격했고 그보다 앞선 2014 2월에 영준의 누나도 서울대에 입학했다

* * *  

이야기 하는 동안 도넛 세개를 열심히 해치운 영준에게 “빵 정도는 사 줄 수 있으니 종종 연락하라”고 하자 “시간되면요!” 하는 삭막한 대답이 돌아왔다

 

헤어지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없냐는 질문엔 “엄마가 우리 형제를 남조선에 데려오지 않았으면 난 지금쯤 뭐가 되어 있을지가 궁금하다”는 엉뚱한 답변을 했다

 

! 잊을 뻔 했다며 교수며 양천경찰서의 여경이며 목사님이며...동네 독서실 사장이며를 차례로 섬기던 영준이가 헤어지면서 남긴 이야기가 가슴언저리에 매 달렸다

 

“도너츠는 우리엄마가 좋아하는건데... 

 

2015-02-09 '된장녀'가 된 탈북여성 허진 씨 이야기

지난 4일 강원지방경찰청은〈남한에 정착해 살다가 적응하지 못해 입북과 탈북을 번복해온 30대 탈북자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고 밝혔다. 탈북자간첩사건이 사회적응과도 연계된다는 이색적인 뉴스가 퍼지는 순간이었다

 

같은 날 필자는 ‘북한이탈주민 자활사업’의 일환으로 서울 강서구에 새로 개점한 탈북민들의 ‘행복커피숍 오픈식’에 참석해 축하하고 난 뒤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다. ‘탈북민들 가운데 사회적응자가 많은가, 부적응자가 더 많은가’ 당연히 적응자가 훨씬 더 많다는 대답이 쏟아져 나왔다. 

 

"이 좋은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적응하지 못해 간첩이 됐다는 식의 경찰브리핑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비판에 이어 주변 사람들이 등을 떠미는 40대 후반의 한 탈북민과 마주 앉았다. 

 

 

허진 씨(사진)는 탈북민들속에 널리 알려진 이름 하여 '된장전문가'다. 청진에서 자랐고 철도대학을 졸업했으며 2006년 2월 대한민국에 입국한 탈북여성으로, 입국한 첫날부터 북한식품 개발자의 남다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어떻게 되어 사람들의 시선이 덜 미치는 된장과 인연을 맺게 됐고 된장을 만든다는게 탈북민들의 사회적응과는 또 어떻게 연계되는지를 묻는 필자에게 허 씨는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인간의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인데 만지기를 꺼려하더라고요” 

 

그러면서 그는 된장 한 숟갈이 없어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드리지 못했던 ‘과거’를 이야기 했다. 1997년 이른바 ‘고난의 행군’시기 만성질병에 영양실조까지 겹친 그의 어머니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였다고 한다. 

 

어느날 의식을 회복한 어머니가 된장국을 찾으시는데 집안엔 서발막대를 휘둘러도 돈 되는 물건은 이미 다 거덜이 났을 때의 일이다. 겨우 마련한 쌀 한줌으로 죽 한 공기를 떠 드렸는데 죽은 입에 대지도 않고 된장국이라니 허 씨는 다시 집안 곳곳을 뒤져 돈이 될 만한 ‘물건’을 싸 들고 장마당으로 달려갔다. 

 

돈이 될 만한 물건이라고 해봐야 이 빠진 밥사발 몇 개가 전부였는데 사겠다는 사람도 없고 된장과 바꾸겠다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도 사정을 아는 건너 마을 먼 친척이 주는 된장 한 숟가락을 들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왔지만 이미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더라고 이야기하는 허 씨의 눈가엔 피 같은 이슬이 방울방울 맺혀있었다. 

 

“나에겐 그렇게 귀한 된장이고 한 맺힌 된장국인데 막상 한국에 와 보니 화려하고 기름진 음식들에 밀리고 있더라고요. ‘하나원’에서 생활할 때도 정말 먹고 싶었던 게 된장국이었는데 생선과 고기, 갖가지 채소에 밀려 된장국 먹는 날은 정말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원’ 생활을 마치고 서울의 한 임대아파트에 밥 가마를 걸어놓은 순간부터 열심히 끓여 먹으려던 된장국이었는데, 웬일인지 날이 갈수록 입에서 멀어지게 되었다는 허 씨. 처음엔 자신의 ‘교만해진 입맛’에서 원인을 찾았고 며칠 후엔 ‘남조선 된장의 문제점’을 발견했다고 했다. 일단 쓴맛이 섞여 있는 게 흠이라면 흠이라고 허 씨는 말했다. 

 

“그래서 나만의 된장을 만들기로 작심을 했습니다. 메주콩을 푹 삶아서 메주를 만들었고 저만의 배합률을 공식화 했으며 물엿대신 설탕을, 보리쌀로 식혜를 만들어 독특한 장맛을 선보이기도 했죠.” 처음엔 집에서 만든 ‘나만의 된장과 고추장’을 양천구 소재의 탈북민교회 성도들에게 ‘무료로 봉사’했고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제법 그럴듯한 용기에 담아 ‘주문’봉사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허진 표’ 된장과 고추장을 상품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무척 고민스럽더라고요. 된장국 한 그릇 제대로 못 드시고 하늘나라로 가신 어머니가 생각났고, 제대로 된 장맛을 주변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이게 상품으로 되자면 얼마나 ‘높은 산’을 넘어야 하는지 제대로 된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했고’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된장을 ‘먹어보았고’, 시골 어머니들의 밥상 앞에서 제대로 된 장맛의 비결을 배우기도 했다. 이런 허 씨를 두고 처음엔 ‘된장에 미친 된장 여, 되지도 않을 일에 정신을 놓아버린 여자’라는 평가가 따랐고 지어는 ‘적응을 못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여자’라는 소문도 났다. 

 

그럼에도 허 씨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고 남과 북 주민들의 입맛을 제대로 평정할 ‘통일된장’으로까지 꿈의 오작교를 펼쳐나갔다. 서울에서 생활한지 1년도 채 못돼 허 씨는 강원도 태백으로 이사를 갔고 태백산기슭의 양지바른 곳에 한 개, 두 개, 장독을 차려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해서 지금은 160개의 장독이 줄지어 늘어섰고 자칭 대한민국의 대표 브랜드 ‘진록정’이 탄생했다. 강원도 태백시 절골2길에서 한껏 무르익은 허 씨의 메주가 된장이 되고 고추장이 돼서 지역주민들에게는 물론 전국곳곳에 퍼져나가데 된 것이다. 

 

2010년과 2013년엔 강원도 특산물 박람회에서 1등을, 2013년 2월엔 한국음식박람회에서 2등을 석권했다. 지난해 서울 양재동에서 열렸던 ‘한가위 음식 기획전’에선 평가위원들로부터 “국내에서 최고의 장맛을 가진 ‘진록정’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그렇게 허 씨의 ‘진록정’은 전국적으로도 꽤 알려진 향토식품의 대표브랜드도 발돋움했다. 15년을 된장에 바쳤고 된장과만 어울려 살아온 ‘된장 여’ 허 씨의 인생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한식, 중식, 양식요리사 자격과 아동음식, 웰빙음식, 기초약용 음식 등 음식 쪽 자격은 물론 검퓨터 활용과 일러스트, 영상미디어 등 그가 소유한 자격증만 해도 수십 가지가 넘는다. 이처럼 악착같이 섭렵한 자격증들과 한국문화 모두가 “제대로 된 장맛을 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고 허 씨는 말했다. 

 

지금은 강원관광대학 호텔조리학과를 다니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제대로 된 장맛’을 내기위해 ‘필요한 과정’을 거치고 있을 뿐이라고 허 씨는 말했다.

 

“언젠가는 통일이 될 거잖아요. 장독의 장은 오랜 것이 좋지만, 오래다고만 좋은 것이 아니고 환경도 꾸준히 개선돼야 하거든요. 배워서 나쁠 게 없죠. 통일되는 그날 꼭 세상에서 제일 맛난 된장을 들고 고향사람들을 찾아가고 싶어요!” 

 

허 씨가 왜 주변 탈북민들의 귀감이 되는지를 구구한 설명 없이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하는 일의 필요를 알고 목표가 있으며, 곁눈 한번 팔지 않고 목표만을 향해 정진하는 도전정신이 사람들의 머리를 끄덕이게 하였으리라... 

 

바라는 것이 있다면요? 

 

필자의 질문에 “엄청 소개해 주세요. 장맛만큼은 어디 내 놓아도 손색이 없는 ‘진록정’입니다. 된장과 고추장, 간장과 청국장, 그리고 가시오피 청국장 가루까지 대한민국 최고의 맛을 내는 ‘진록정’이라고 자랑하고 싶어요. 참, 주문전화요? 033, 553,9579번 ‘진록정’입니다! 휴대폰도 있어요. 010-9301-7579번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현재 160개의 장독으론 조금 부족하고 500개 정도의 장독이 있으면 발효와 숙성을 동시에 진행하는 제대로 된 생산 환경을 만들 수 있다는 아쉬움을 털어 놓았다. “콩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맛을 살리자면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장맛을 낸다는 건 시간과의 싸움이고 시간은 곧 장독에서 얻어지는 것이죠.” 

 

 

2015-03-06  누가 김기종을 정신병자라고 하는가 ?

북한의 관영 중앙통신이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에 대해 흉기를 휘두른 테러범 김기종을 ‘반전 평화를 주장하는 시민단체 대표’라 지칭하며 고무, 격려하고 나섰다

 

통신은 ‘전쟁광 미국에 가해진 응당한 징벌’이란 글의 제목에서 보듯이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는 징벌의 대상으로, 김기종의 테러행위는 응당한 일로 묘사했다. 

 

이어 통신은 “김기종은 이날 아침 강연회장에 나타나 강연준비를 하고 있는 리퍼트에게 불의에 달려들어 남북은 통일되여야 한다, 전쟁을 반대한다고 웨치며 그에게 정의의 칼 세례를 안겼다”고 썼다. 

 

그러면서 “이 사건은 남조선에서 위험천만한 합동군사연습을 벌려놓고 조선반도전쟁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는 미국을 규탄하는 남녘민심의 반영이고 항거의 표시이다”고도 썼다. 

 

김기종의 이번 테러행위가 ‘단독범행’이거나, ‘정신 나간 자’의 행위 등으로 끌려가선 안 될 이유가 설명되는 대목으로, 북한은 이미 대한민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간첩, 테러분자들에게 이 같은 상황을 공개적으로 지시한 바 있다. 

 

3월 5일 북한 조평통은 “후과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몸서리치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란 성명을 통해 “지금이야말로 민족의 운명을 수호하기 위한 거족적인 투쟁에 결연히 떨쳐나서 반미통일성전의 불길을 세차게 지펴 올려야 할 때이다”고 선동했다. 

 

같은 날 노동신문을 통해서는 6. 15남측위원회 청년학생본부가 반전평화수호투쟁에 떨쳐나설 것을 주장하여 2월 26일 호소문을 발표하였다고 소개하면서 “남, 북, 해외 청년학생들은 전쟁반대, 평화실현을 위해 견결히 투쟁해나가자”고 역설했다. 

 

이보다 하루 앞선 3월 4일엔 ‘6. 15공동선언실천 민족공동위원회 결의문’이란 것을 통해 “대세의 흐름에 역행하는 합동군사연습을 단호히 저지시키기 위한 전민족적인 전쟁반대, 평화수호운동을 보다 강력히 전개해 나가야 한다”며 한미합동훈련 저지운동을 공개적으로 지시했다. 

 

그리고 김기종에 의한 테러가 발생한 다음날인 오늘은 “지금 우리 군대는 지상과 해상, 수중과 공중, 싸이버 공간의 모든 타격수단들이 적들의 목표물을 겨누고 격동상태에 있다”고 대한민국을 협박하고 나섰다. 

 

한편 “괴뢰패당의 북침전쟁연습을 반대하는 남조선 각계 층과 해외동포들의 분노에 찬 웨침은 전쟁광신자들에게 내려진 무서운 철퇴가 되여 온 강토를 뒤흔들고 있다”며 김기종의 테러행위에 대해 박수를 보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강조했듯이 이번 김기종의 행위는 “한미 동맹을 향한 테러행위”이다. 이를 위한 계획된 ‘살인미수행위’며 그 배후엔 종북 커넥션, 김정은과 북한 노동당의 대남혁명 노선이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2015.04.01  북한이 선전하는 '간첩사건', 진상은?

북한이 우리 국민 두 명을 억류하고 ‘국정원 지령을 받은 간첩 두 명’을 체포했다며 기자회견을 열어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나섰다

 

북한 국가안전보위부는 지난 26일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어 올해 61살인 김국기 목사와 56살인 최춘길 선교사를 간첩혐의로 체포했다고 밝히고 이례적으로 체포 순간을 담은 동영상까지 공개했다. 

 

김국기 목사는 언제, 어떻게 체포됐을까 

북한이 공개한 체포 장면을 담은 동영상을 보면 김국기 목사는 평양시 중구역소재의 대동교를 배경으로 한 대동강변에서 소위 비밀서류를 넘겨받다가 체포되게 된다. 

              

 

김 목사가 넘겨받는 자그마한 편지봉투 안에 어떤 내용이 담겼고 봉투를 건네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둘째 치고 김 목사가 어떻게 북한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평양시 중구역의 대동강변에 서 있는가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정상적인 경로로, 정상적인 절차를 받아 갔을 리 만무다. 필자가 이해하기로 대한민국국민이 평양으로 가는 길은 막혀있으며, 이는 북한이 대한민국 국민의 국내 입국을 허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비밀스럽게 간다는 것 또한 말이 되질 않는다. 북한에서 살다온 필자도 압록강을 건너고 열차와 버스를 갈아타면서, 더욱이 특별통행증이 있어도 통제의 계선과 계선을 넘어야 하는 평양으로의 길을 생각하기 어렵다. 

 

누군가 초청하는 사람이 있어 특별통행증이 가능했다는 이야기이고, 안내자가 있어 통제 및 단속초소들을 무사히 넘어섰다는 이야기다. 또 북한의 사회구조 및 시스템 상 이런 일들을 개인이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결국 북한의 국가보위부가 김 목사를 유인, 납치하기 위해 함정을 팠고 국경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일거수일투족이 보위부의 감시 속에 드는 줄도 모른 채 김 목사는 평양으로 갔고, 어느 날 불쑥 간첩이 되어 버렸다. 

 

이른바 기자회견을 통해 북한이 발표한 대로라면 김국기 목사는 2014년 9월 어느 날 평양의 대동강변에서 북한 내부의 면식자로부터 문건을 건네받다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이러한 체포 장면이 담긴 동영상은 2014년 10월 북한보위사령부에 의해 만들어 졌다. 

 

최춘길 선교사는 왜 북한 측 선박을 탔나?

김국기 목사와 최춘길 선교사가 북방선교를 위해 중국에서 다년간 일해 왔다는 것은 관련 교회와 선교단체들에서 이미 공식적으로 밝힌 상태고 본인들도 북한당국이 마련한 기자회견에서 누누이 밝혔다. 

 

그 중 한사람인 최춘길 선교사는 중국단동의 동강이라는 북한 측 선착장에서 무장군인들에게 체포되게 된다. 북한이 공개한 짧은 동영상에서 최 선교사는 무릎을 꿇고 양손을 머리위로 올린 채 체포의 순간을 맞고 있다. 

 

여기서 잠간 중국의 동강 시에 위치해 북-중 무역의 가교역할을 하고 있는 동항(선착장)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인들과 대북통신원들이 말하는 이곳은 ‘북한군부 산하 외화벌이와 노동당 대남연락소 외화벌이 기지와의 거래가 가장 빈번한 곳’이다. 

 

또 온갖 밀무역이 시도되는 곳이며 이른바 북한최고의 마약 유통로로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다. 

 

밑돈을 받은 북한군 국경경비대원들의 묵인과 형식적인 세관절차에 의해 북한산 꽃게 거의 전량과 바지락 등이 유통되고 있는 이곳에서 “군수공장에서 쓰는 귀금속을 빼낼 목적으로 불법 침입했던 최춘길이 체포되었다”고 북한은 주장한다. 

 

또 그가 체포된 시각이 2014년 12월 30일 새벽4시임을 밝히면서 제법 그럴듯한 체포 장면을 공개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12월이면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冬至)달이며 30일은 동지 날(22일)부터 열흘도 채 안된 때인데 새벽 4시에 찍었다는 동영상 화면이 너무 밝아 어안이 벙벙해 진다. 

 

중요한 게 또 있다. 동강 항을 거쳐 북에서 나오는 어떤 물건도, 설사 그것이 북한이 주장하는 천만 냥짜리 ‘귀금속’이라고 해도 수고스럽게, 또 그 위험한 배에 올라 북한으로 건너가는 위험까지를 감내하면서 가져올 바보는 없다는 것이다. 

 

귀하면 귀할수록, 또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안전지대에서 ‘물건’을 넘겨받는 게 순리이고 그곳 동항의 ‘원칙’이다. 더욱이 배에 이미 실려 있는 물건이라는데 굳이 배에 올라야 할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다. 

 

결국 최춘길 선교사도 북한보위부에 의해 유인, 납치되어 간첩으로 둔갑한 희생양이다는 게 필자의 주장이다. (계속)

 

2015.07.13 北 무속인, "수도될 도시는 평양 아니라 서울"이라 했다가 끌려가

최근 북한 무속인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갓 태어난 아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가 하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결혼 날자며 승진 수까지 알려주는 등으로 주민들의 삶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관련소식통은 “이곳(북한)에서 점이나 손금을 보는 행위는 반사회적 일탈행위라고 형법에도 밝혀져 있다”고 전제한 뒤 “하지만 사람들의 의존도가 너무 높아 이미 당국의 통제에서 벗어난 상태다”고 말했다

 

과거엔 곤고한 일상에서 탈피하기 위해 이른바 미신행위에 매달렸던 북한주민들이 최근엔 “장사의 득과 실”, “우리 집 풍수”, “우리 부부 오래 살기위한 비법” 등으로 담론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과거처럼 “이, 썩을 놈의 세상”과 연계되는 측면은 적어진 대신 삶의 지혜와 교훈을 주문하고 이에 답하는 무속인들이 늘고 있으며 당국도 정책에 협조적인 이들을 통제할 명분을 잃고 있다

 

대신 “점이나 운수를 보아주는 대가로 술이나 농산품을 받던 점쟁이들이 이제는 꿈 해몽하는데 얼마, 이름을 짓고 결혼 날짜를 잡아주는데 얼마 하는 식으로 금액을 정해놓고 현금을 받고 있다”고 소식통은 전해왔다

 

주민들도 이를 시장에서 거래되는 물건 값처럼 당연하게 여기고 있고, 이러한 풍토 속에 과거 당국의 통제 때문에 사라졌던 ‘점 집’과 ‘손금 보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게 소식통의 주장이다

 

하지만 ‘미신행위’에 대한 당국의 태도가 변한 것은 아니라고 소식통은 말했고, “특히 체제를 비판하거나 정책에 반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대해서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처벌을 가하고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지난 4월에도 “풍수지리상 우리나라의 수도가 될 도시는 평양이 아니라 서울이다”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그 지방의 유명 점집 여인이 관리소로 끌려갔다고 소식통은 말했다

 

또 중앙당 고위간부들까지 드나들었다는 평양시 어느 점집여인을 조사한 결과 저들이 주로 ‘나의 앞날’을 걱정했고 이는 당과 수령을 믿지 못하는 반당적 행위로, 관련자 모두가 강도 높은 처벌을 받았다는 소식도 전해왔다.

 

끝으로 그는 “최근 점을 좀 본다는 사람들은 남조선 무속인들의 흉내를 많이 내고 있다”면서 “그런 사람들의 입을 통해 ‘김정은 운수, 길어봐야 5년’, ‘김정은 운명 재촉하는 리설주’같은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퍼지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제 ‘집단주의’ 대신 ‘개인주의’를 택한 북한주민들의 마음속 공간을 일종의 생활종교가 파고드는 순간인 듯하다

 

2015-07-16 北 전당포에서 군복과 군화가 쏟아져 나온 이유는?

 

북한의 전당포는 2004년 3월, 재정성 및 상업성 공동지시 제18호에 의해 생겨났다. 당시 북한은 두 기관 명의로 된 ‘전당포 관리운영규정’(운영규정)이라는 것을 내부에 하달했으며 문서의 서두에 “전당포 같은 것도 꾸려놓고 인민들이 리용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는 김정일의 지시를 앉혔다.

 

2003년 초 김정일이 ‘인민들의 이익의 견지에서 전당포를 운영할데 대한 말씀을 주시었다’고 토를 달고 있으나 전문가들은 ‘내부로부터의 시장화 현상이 되돌릴 수 없는 단계에 이르자 궁여지책으로 내 놓은 이른바 경제관리 개선조치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생겨난 전당포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을까.

 

운영규정(4조)에는 “전당포에 대한 지도는 상업성과 도, 시, 군 인민위원회 상업 부서와 편의봉사기업소가 한다”고 되어 있으며 또 다른 조항(5조)을 통해 “관리운영에 필요한 노력은 편의봉사기업소의 자체실정에 맞게 책임자와 접수원, 평가원, 출납원, 판매원, 창고원 등으로 배치 할 수 있다”고 되어있다.

 

또한 “전당포는 개별적주민이 가지고 오는 담보들의 값을 호상 합의하여 정한 출납을 통하여 해당한 금액을 대여해 주어야 한다”(11조)고 규정하고 있으며 “전당포에서 대여한 금액에 대한 반환계약기일은 최고 60일로 정하고 실정에 따라 30일간의 대여기일을 더 연장할 수 있다”(12조)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나름의 정공법을 갖고 주민들에게 다가섰던 전당포의 취지가 최근 들어 크게 훼손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4일 관련 소식통은 “과거 주민들의 생활향상에 이바지하라고 만들었던 전당포가 최근 들어서는 당, 정, 군 간부들의 독점물로, 재산을 불리는 개인 창고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관련규정 제8조에 “전당포가 취급할 수 없는 물건은 △국가 기관, 기업소, 협동단체들이 가지고 오는 물건 △군수품을 비롯한 국가적으로 통제하는 물건과 자재 △개별적주민이 가지고 오는 같은 물건이 10개 이상 되는 무더기 상품” 등으로 되어 있으나 최근에는 신통히도 이에 반하는 물건들만 쌓여있다는 게 소식통의 전언이다.

 

그에 따르면 과거 개인들이 손목시계나 양복, 가전제품들을 맡기고 급한 돈을 돌려쓰던 전당포에 지금은 국가 기관, 기업소들의 물건만 차고 넘친다. 평양시의 어느 한 책임간부는 시안의 학교들에 보내야 할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 유리(교체용)를 통째로 전당포에 맡기고 뭉칫돈을 타 냈다가 적발, 처벌되었다 한다.

 

또 지난 4월엔 평양시 중구역 편의봉사사업소에서 운영하는 전당포에서 200여벌의 군복과 군화 80여 켤레가 나왔고 출처를 알아본 결과 인근의 호위사령부 대대장과 그와 공모한 후방장교의 소행으로 드러나 두 사람 모두 불명예제대에 처벌을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들 간부들과 군인들의 특징은 “물건을 맡길 때 신분을 감추거나 속이는 것이다”고 소식통은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특별한 지위를 리용해 신분을 감춘 이들은 물건을 맡길 때부터 애초에 돈만 받고 물건을 찾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피해는 고스란히 전당포에 돌아간다”고 했다.

 

또 “전당포가 운영된지 10여년이 지난 지금 전당포 운영자들의 횡포와 비리도 도를 넘는다”고 소식통은 말했다. 예컨대 급전이 필요해 전당포를 찾는 일반 주민들에겐 터무니없는 가격을 책정하고 물건을 강탈하다 십이 하는 반면 친척이나 권력자들에겐 허술한 물건을 받아놓고 장사밑천을 안겨주다 적발되는 일도 심심치 않다는 설명이다.

 

지방은 더하다고 관련소식통은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처럼 오롯이 당국의 지침과 반대로만 운영되는 전당포에 대해 주민들은 ‘간부들에겐 보금자리일지 몰라도 힘없는 일반주민들에겐 물건을 집어삼키는 식인하마와 같은 것이다”고 말했다.

 

2015-08-12  대북 방송 재개...우리가 옳았다

▲2004년 6월, 남북장성급군사회담 부속합의서에 따라 16일 서부전선 무력부대 오두산전망대에서 군인들이 대북선전용 대형확성기를 철거하고 있다./조선DB

 

2003년 노무현정부가 대북방송 및 전단살포를 중단한다고 했을 때 탈북민들이라도 나서서 ‘대북방송의 맥을 이어야 한다’는 취지로 자유북한방송을 시작했다. 1년간의 준비기간(인터넷 방송)을 빼면 올해로 꼭 10년째다. 

 

그리고 이제 민간대북방송이 감내해야 했던 길고 긴 고난의 시간들을 지나, 방송을 재개한다는 국방부의 발표를 들으며 우리의 믿음이 옳았다는 것을 다시금 확신한다. 

 

방송은 거짓과 역사의 반동으로 점철된 북한독재정권을 흔드는 강위력한 무기이다. 북조선인민들에게 역사의 진실을 알림과 동시에 저들이 세상에서 가장 비인간적이고 비문화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준다. 

 

세상 밖의 진실을 알지 못하는 저들에게 알 권리를 주고, 인간이 누려야할 권리는커녕 생명권마저 지키지 못하는 저들에게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깨우쳐 준다. 

 

북한당국자들은 그렇게, 자기의 처지를 깨닫고 미래를 개척하기위해 거리로 달려 나올 인민들이 두려워 반세기가 넘는 동안 외부소식을 차단하고 있으며 이를 통치이념의 핵심 사안으로 간주하고 있다. 

 

북한당국이 구축해 놓은 이러한 ‘철의 장막’을, ‘독재의 아성’을 뒤흔들어 놓을 절대의 무기가 대북방송임에도, 이것이 북한군의 지뢰도발에 대한 전술적 대응책으로 사용된다는 데엔 아쉬움이 남는다. 

 

만행에 대해서는 응징해야 한다. 주범과 하수인들을 끝까지 밝혀내고 처벌해야 하며 비무장지대에서의 지뢰매설과 같은 북한의 비열한 음모에 대해서는 원칙적인 군사작전과 무자비한 공격으로 대응해야 한다. 

 

국방부가 재개한 대북확성기방송도 부분적이고, 전술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3.8도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전체를 함락시키는 공격적인 방송이 되어야 한다. 또한 이 기회에 전파를 통한 대북방송과 대북전단, 전광판에 의한 외부소식 유입 등 전체적이고 통합된 대북심리-공격전이 펼쳐지기를 바란다. 

 

정의를 지키기 위해 희생을 각오하지 않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각오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원하는 정의와 평화는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명심해 할 시기이다

 

2015-08-19 대북심리전 재개, 北에게는 혹독한 대가 맞다

▲탈북자 단체인 자유북한운동연합 회원들이 대북 전단이 든 풍선을 북한으로 띄워 보내고 있다. /조선DB

 

북한군 전선사령부는 15일 '공개경고장'을 통해 최근 우리 군이 재개한 대북 확성기방송에 대해 "중단하지 않으면 무차별 타격을 가하겠다"고 위협했다. 

 

한편 우리 군은 북한의 지뢰도발사건을 '정전협정 위반행위‘로 다시 한 번 규정하고, 이에 대해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다시 한 번 경고했다. 

 

우리 군이 말한 ‘혹독한 대가’엔 어떤 것들이 포함되게 될까. 일단은 지난 10일부터 재개된 대북확성기방송이 첫 시작인 듯하다. 

 

확성기 방송 

2001년 입국한 전 북한군 대위 류철영씨는 대북확성기방송에 대해 “집요하게 마음을 파고드는 방송”이라고 표현했다. 북한군 2군단 6사단에서 근무한바 있는 류씨는 “저녁어스름이 깃들 무렵부터 잠복근무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하는 새벽시간까지 지속되던 방송은 ”그것 없이는 잠복의 긴긴 밤을 보낼 수 없을 만큼 초병(전투근무병)들에게 친밀했던 방송이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그는 “지휘관들은 적들의 심리전방송에 절대로 귀 기울이지 말라고 요구하지만 귀를 잘라내지 않는 한 방송을 아니 들을 수 없고 특히 북한의 정치가요와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남한의 생활가요는 사랑과 고향에 대해...나도 인간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던 삶의 길라잡이 었다”고 회고했다. 

 

지금도 ‘북한군 지역에서 벌어지는 부대이동과 간부인사’ 등에 대해 너무나 소상히 알려주던 방송내용을 기억하고 있다고 말한 류씨는 “당시 대북확성기 방송이 북한의 정치학습효과를 이겨내지 못했지만, 제대 후 탈북을 결심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자유를 강조하던 남조선 방송’이었다”고 밝혔다. 

 

대북전단 

북한군의 3/1정도가 집결되어 있는 북측 철책선 지역(1.2.3.5군단)에서 군 복무를 한 경험이 있는 탈북자들은 거의 모두가 ‘적들의 삐라’에 대한 경험을 갖고 있다. 저들은 한결같이 ‘특수한 재질과 컬러틱한 컨셉의 삐라’를 말하고 있으며 삐라가 강조했다는 ‘대한민국의 자유와 풍요로움’을 기억한다. 

 

김일성부자를 풍자한 그림을 보면서는 오히려 ‘(위대한 수령을 욕보이는)적에 대한 적개심’을, ‘승용차가 늘어선 남조선 거리’를 보면서는 대한민국에 대한 동경심을 키웠다는 등으로 주장이 엇갈리지만, 삐라 한 장으로 ‘남조선의 존재’을 알게 되었다는 공통분모는 삐라를 접했던 모든 이들에게 작용하고 있었다. 

 

전광판과 애기봉 등탑 

과거 북한의 황해남도와 강원도, 개성 지역을 상대로 실시되었던 10여개소의 남측 전광판과 김포의 애기봉 등탑은 다양한 외부소식과 ‘남조선의 풍요로움’을 전해주던 신기루 같은 존재였다고 증언하는 탈북자들이 있다. 

 

이들은 “멀리 남조선(산등성이)에서 밤이면 밤마다 어둠을 밝히며 번쩍거리던 전광판은 전기가 부족한 북쪽 주민들에게 ‘남조선에선 전기걱정을 모르고 산다’는 것을 일깨워주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밤새도록, 날이 밝을 때까지 멀리서 비춰지던 그 불빛은 마음먹기에 따라 언제라도 다가갈 수 있는 희망의 등대였고 안식처 같았다”는 증언도 나온다. 

 

또 당시로서는 잘 믿겨지지가 않았지만 ‘자가용 승용차 천만대 돌파’, ‘자유는 눈앞에 있다’, ‘김정일의 고향은 하바롭스크’와 같은 문구들은 한번 보면 절대로 잊혀 지지 않고, ‘그게 사실일까’라는 질문을 두고두고 갖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고 말한다. 절대의 가치로 여겨온 교과서와 노동신문에 의문을 품게 했던 전광판이란 얘기다. 

 

물포작전 

대형기구에 생필품과 먹거리 등을 매달아 북쪽으로 보내는 것에 붙여진 이름은 ‘물포작전’이다. 북한에서는 이 대형기구들로부터 ‘공수’되는 물건을 ‘심리전 차원에서 적들이 투하하는 물건’이라며 ‘적지물자’라는 이름을 달아놓았다. 

 

70년대와 80년대엔 “적들이 보낸 손목시계를 차면 손목이 썩어나가고, 사탕이나 과자를 먹으면 내장이 썩는다”는 말로 군인들과 주민들을 ‘적지물자’로부터 차단시켰던 북한이다. 실지로 그 이상의 피해를 보았다는 사람들을 내세워 순회강연을 진행한 바도 있다. 

 

하지만 이처럼 무식하고 철면피한 방법이 통할 리 없던 80년대와 90년대였다. 당시 필자는 정말 ‘죽을 각오’를 하고 하늘에서 떨어진 불티나 표 라이터로 역시 하늘에서 공수된 아리랑 담배에 불을 붙인바 있다. 이 힘든 사병생활...죽으면 죽자~는 생각도 없지 않았는데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멀쩡히 살아있었다. 

 

음식물은 그렇게, 주민들과 군인들의 목숨 건 시험을 통해 북조선인민들에게 다가갔다. 추리닝과 팬티스타킹, 모나미 표 볼펜 등 갖가지 생활용품도 산에만 오르면 주어올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궁핍한 삶을 사는 북한주민들이 하늘만 바라보고 있던 찰나, 노무현정부의 국군은 매정하게도 물포작전을 중단해 버렸다. 

 

승산 있는 싸움, 대가는 ‘혹독할 것’ 

열을 주고 하나를 받을 때가 있고 하나를 주고 그 이상의 효과를 거둘 때가 있다. 

 

과거의 대북전단과 방송, 물자투입과 전광판은 투자한 것에 비해 응분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측면이 있다. 그만큼 외부세계, 특히 남조선 소식을 차단하려는 북한당국의 의지가 강했고 굶주림에 지친 주민들의 의식도 화석처럼 굳어가고 있던 시기였다. 

 

하지만 이제 북조선인민들, 특히 신세대 인민군 군인들에게 남조선은 그리 먼 나라가 아니다. 남조선 비디오에 익숙하고 남조선 노래 한두 개쯤은 암기하고 다니는 북한의 젊은이들에게 대북확성기 방송을 통해 다시 듣게 될 노래는, 노래-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 

 

전단도 마찬가지다. 국방부가 북한의 도발에 대비한 전력증강에 쏟아 붓는 자금의 적은 부문만 대북전단 살포에 투자한다면, 그리하여 북한주민들과 군인들이 ‘당신들이 굶어죽고 있을 때 김정은은 해외 유학을 다녀온 유학파’라는 것과 그의 엄마 고영희가 재일교포 출신이란 것만 알게 된다고 해도 저들은 큰 충격에 빠지게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하늘에서 다시 사탕과 볼펜이 떨어진다면 손모가지를 잘라낸다고 해도 산으로 달려갈 인민군 군인들이다. 누가 뭐래도 작금의 북한군 군인들은 ‘반항과 가치관의 변화’를 경험한 북한의 신세대이며 처형까지를 각오하고 한류에 근접했던 사람들 아닌가. 

 

이들의 손과 귀를 잘라내고 눈알을 뽑아내지 않는 한 대한민국이 북한에 비해 훨씬 우월하다는 걸 저들이 아는 건 시간문제다. 독재의 시스템에 갇혀 김 씨 왕조를 대를 이어 받들어야 하는 저들의 비참한 처지를 깨닫게 되는 것 역시 시간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대북심리전 재개는 우리 국방부가 말한 ‘혹독한 대가’가 맞다. 이번 지뢰도발 사건으로 우리 군이 치명타를 입은 것도 사실이지만 ‘비열한 수법’으로 도발을 걸어온 북한이 ‘비참한 운명’을 고할 날도 멀지 않은 듯하다. 

 

2015-08-24 "北 김정은 본심 파악됐다...김 부자 동상과 군사시설 조준하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고위급 회담이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청와대에서 브리핑을 갖고 "쌍방은 최근 조성된 사태의 해결방안과 앞으로 남북관계 발전방안에 대해 폭넓게 협의했다"고 했다. 

 

'북한의 도발로 인해 조성된 남북간 긴장상황에서 대화의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 천만다행인 일'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본 방송 웹사이트 게시판에 드러난 청취자들의 생각은 조금 다른듯 하다. 

 

구월산이란 아이디를 가진 네티즌은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김정은 놈의 본심을 분명히 알게 됐다. 놈은 한 마디로 전쟁할 능력도 없으면서 무너져가는 제 놈의 기반을 다잡기 위해 충성파 몇 놈들과 국지적인 도발쇼를 벌이면서 폭력으로 남쪽을 협박하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놈의 어떠한 행동에도 겁내거나 휘둘릴 필요 없이 여차하면 우리가 먼저 '전면전'을 벌이겠다는 각오로 강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 그 놈은 앞으로, 절대로, 1년도 못 넘긴다. 두고봐라!"

 

"아무래도 김정은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일 뿐 별 것 아닐것 같다. 얼마나 존재감이 없으면 저런 뻘짓이나 하는 걸까. 예라~이, XX도 안서는 놈한테 충성하는 북한 또라이들 하곤...그냥 뒤에서 (김정은을 향해) 한방 쏘고 영웅이나 되지" (네티즌: 김정은 XXXXX) 

 

"미친듯한 북한의 반응은 내부가 그만큼 허약하다는 것이며 국내 종북세력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울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어 모두 재더미로 만들겠다는 정은이가 '빈말이 아니다'는 말을 노래부르듯 하고 있는 것은 얍삭한 협박으로 한국언론을 흔들어 보자는 것이다" (네티즌: 콩나물)

 

"고모부도 죽이고 주위의 사람들을 마음대로 죽이는 흉악한 정은이가 목적달성을 위해 남한에 핵 안쓴다고 담보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 자존심 버리면서 꼬리 내리는것을 보면 아직까지 핵이 그닥지 않은 것이다. 시간을 좀더 벌어 보자는 수작입니다. 확성기를 핵과 바꾸자고 해야 맞습니다." (네티즌: 콩나물)

 

"주둥아리만 그랬지 (북괴)놈들은 절대로 전쟁 벌이지 못한다. 6.25 때는 사전에 '전면전 벌이겠다'고 예고했나?

 

조만식과 김삼룡, 이주하를 맞바꾸자고 딴전 피우다가 일요일 새벽에 기습 남침했다. 내가 김정은이라도, 진정으로 남침하고싶다면 절대로 예고 안한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북한을 해방시키겠다'는 각오로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 

 

북한의 중요군사기지와 김부자 동상을 미리 조준해 놓아야 한다. 유사시 방아쇠만 당기면 목표물이 명중되여 완전이 아작내 버림으로, 전쟁 좋아하는 정은이에게 진짜 전쟁맛을 보여주어야 한다. 할바에는 좀 확실하게, 통쾌하게! 대한민국이 장성택하고 다르다는 것을 똑똑이 보여주어야 한다." (네티즌: 구월산)

 

2015.11.23  탈북자들에게 영웅이셨던 김영삼 전 대통령님의 영전에..

2004 9, 연세대학 후문께 어느 한식집에서 당신을 처음 뵀습니다.

 

저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셨다면서 “용기를 가지고 시작한 일이니, 열심을 다해 통일에 이바지하는 방송을 만들어 보라”며 제어깨를 두드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상도동 저택으로 찾아가 “자유북한방송국의 명예위원장을 맡아주십시오. 힘을 실어주세요”라고 말씀 드렸고 당신께선 흔쾌히 승낙해 주셨습니다. “좋아요, (장엽) 선생이 이미 이야기 했어요” 


이후로 설날이면 상도동 저택으로 황장엽 선생님과 함께, 혹은 방송국 동료들과 당신을 뵈러 갔고, 북한주민들에게 보내는 자유북한방송국의 신년메시지도 녹음 해 오곤 했었습니다.


2005
1월 당신께선 자유북한방송의 신년메시지를 통해 북한주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말씀 하셨습니다.

 

“북한동포 여러분, 여러분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힘을 모아 북한의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북한 땅에 민주주의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싸웁시다.


인권과 민주주의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는 오래가는 법이 없습니다. 이런 사회의 지도부는 타도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싸우는 길 밖에 없습니다. 자유는 목숨보다 귀중하며 자유를 위해 싸울 때만 자유가 찾아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북한민주화위원회의 전신인 북한민주화동맹 결성식을 앞두고 다시 당신을 찾아 뵀을 때 “이거 순 북한식이구만”라고 말씀하셨고, “네. 북한식입니다. 북한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조직인 만큼... 


(북한) 민주화위원회로 하세요. 아무리 북한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단체라고 해도 현재 활동하는 곳은 대한민국 아닙니까. 내 생각엔 민주화위원회가 더 낳아요. 북한민주화위원회!” 라고 말씀 하셨죠.


그 때로부터 3년 뒤인 2007 4 10일 북한민주화위원회로 거듭난 탈북민들의 연합단체 출범식이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렸고, 김영삼 전 대통령님께선 단체의 명예위원장으로 대회에 참석해 주셨습니다.

 

 

 

대통령님과 황장엽 선생의 사연이 각별하다는 건 모두가 아시는 일로, 한 가지 사연만 떠올려 보려 합니다.


2010
10월 황선생께서 돌아가셨을 때 저는 제일먼저 대통령님께 황선생님의 부고를 알려드렸고 당신께선, 아직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고인의 장지(葬地)문제를 거론해 주셨었습니다.


“어디다 묻어요?

“통일전망대 부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현충원이 있는데”

?! 


그렇게 고 황장엽 선생의 장지가 대전현충원으로 정해진 후, 고인을 만나려 오신 대통령님을 다시 뵀었습니다.


“내가 황 선생께 ‘우리 집이 넓진 않지만 함께 살자고 여러 번 이야기 했어요. 내가 황 선생께 늘 미안했어요. 약속은 그렇지 않았는데...정권이 바뀌다 보니 황 선생이 어려움을 많이 겪었어요.”라고 하시며 눈시울을 붉히셨죠

 

그렇게 황장엽을 사랑하셨고, 탈북자들이 하는 일에 깊은 관심과 배려를 돌려주시던 김영삼 전 대통령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니...가슴이 먹먹하고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많이 먹어두세요. 우리 집에 오면 칼국수하고 떡국밖에 없어”하시던 그 말씀, 다시는 들을 수 없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탈북자들에게 영웅이셨던 김영삼 전 대통령님의 영전에...

황장엽 선생의 장지를 현충원으로 정해주시기도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2004 9, 연세대학 후문께 어느 한식집에서 당신을 처음 뵀습니다.

 

저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셨다면서 “용기를 가지고 시작한 일이니, 열심을 다해 통일에 이바지하는 방송을 만들어 보라”며 제어깨를 두드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상도동 저택으로 찾아가 “자유북한방송국의 명예위원장을 맡아주십시오. 힘을 실어주세요”라고 말씀 드렸고 당신께선 흔쾌히 승낙해 주셨습니다. “좋아요, (장엽) 선생이 이미 이야기 했어요” 


이후로 설날이면 상도동 저택으로 황장엽 선생님과 함께, 혹은 방송국 동료들과 당신을 뵈러 갔고, 북한주민들에게 보내는 자유북한방송국의 신년메시지도 녹음 해 오곤 했었습니다.


2005
1월 당신께선 자유북한방송의 신년메시지를 통해 북한주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말씀 하셨습니다.

 

“북한동포 여러분, 여러분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힘을 모아 북한의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북한 땅에 민주주의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싸웁시다.


인권과 민주주의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는 오래가는 법이 없습니다. 이런 사회의 지도부는 타도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싸우는 길 밖에 없습니다. 자유는 목숨보다 귀중하며 자유를 위해 싸울 때만 자유가 찾아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북한민주화위원회의 전신인 북한민주화동맹 결성식을 앞두고 다시 당신을 찾아 뵀을 때 “이거 순 북한식이구만”라고 말씀하셨고, “네. 북한식입니다. 북한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조직인 만큼... 


(북한) 민주화위원회로 하세요. 아무리 북한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단체라고 해도 현재 활동하는 곳은 대한민국 아닙니까. 내 생각엔 민주화위원회가 더 낳아요. 북한민주화위원회!” 라고 말씀 하셨죠.


그 때로부터 3년 뒤인 2007 4 10일 북한민주화위원회로 거듭난 탈북민들의 연합단체 출범식이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렸고, 김영삼 전 대통령님께선 단체의 명예위원장으로 대회에 참석해 주셨습니다.

 

 

 

 

내 마음의 영웅이신 고 김영삼 전 대통령님. 평안히, 영면하십시오!

탈북자 김성민 올림

 

2015.12.29  안가도 되는 군대에 자원 입대한 탈북 청년 이야기

/조선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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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어느 평범한 날에 대한민국국군에 입대한 한 탈북자가 있다. 22살이다. 모대학 경찰행정학과 1학년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2학년 대신 입대를 선택한 장일영(가명)이다. 10대 후반에 북한을 탈출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두만강을 건넌 꼬맹이였음을 기억한다. 정말 꼬맹이였는데, 대한민국 입국 3년 만에 훌쩍 커버린 모습을 본바 있다.

 

탈북단체장인 아버지를 따라와 여느 탈북청소년들과 어울리고, 종종 공차는 모습도 보았지만 평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일영이가 군인이 되다니본인은 어떤지 몰라도 아빠 엄마의 걱정이 산 같다. 공부에만 열중인줄 알았던 아들인데 어느날 갑자기 군에 입대한다고 하니 가슴이 철렁했을 줄 안다. 한편으론 외아들이라고 곱게만 키우지 않았음을 은근히 자부하는 듯 했다.

 

“몰랐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찰행정학과를 선택하기에 그 꿈을 믿고 지지하고만 있었는데 어느날 불쑥...” 아버지의 말이다. 어머니 이선옥씨는 “이 나라의 어머니들은 누구나 치르는 ‘홍역’인데 나라고 뭐 다르겠냐”며 아들의 어깨를 꽉 끌어안는다. 그리고 나선, 슬쩍 눈 굽으로 손을 가져가는데, 역시 어머니는 강했다.

 

그래도 일영이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탈북자는 군 면제대상인데 왜 입대를 결심했는가를. 돌아오는 말이 참 명쾌했다. “병무청에서도 그렇게 이야기해요. 탈북자는 군에 입대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고”

 

그런데

 

“국방의 의무는 국민의 의무이자 권리인데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면, 그럼 난, 대한민국 국민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그냥 국민의 의무를 다하려는 것뿐입니다” 

 

꼬맹이라고만 생각했던 일영이가 산처럼 다가와 ‘국민의 의무’를 깨우쳐주고 있었다. 필자만이 아닌 탈북민 모두에게 받아 안은 사랑과 믿음에 어떻게 보답해야 하는가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서 서툴지만, 결의가 담긴 거수경례를 남긴 채 영일이는 떠났다. “대한민국청년이라면 누구나 하는 일을 가지고 너무 그러지 마세요. 군복무 잘 마치고 돌아올 테니 모두 건강하십시오. 충성!

 

2016.01.26  대한민국 풍요를 보며 北서 어머니가 해주신 달걀밥을 떠올리는 이유는?

탈북자가 대한민국에서 살아간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이는 언어소통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고 또 어떤 이는 성격 차나 문화의 차이를 말하기도 한다.


탈북자가 아닌 사람들은 한수 더 떠서 “대한민국에서 박사였던 사람도 미국에 가면 온갖 허드렛일을 다 해 가며 적응해 사는데,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데도 탈북자는, 왜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 하는가”고 힐난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이야기다고 본다. 대한민국에서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민 간 사람들은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옮겨간 사람들이기 때문에 언어만 익히면 생활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을 터, 하지만 탈북자는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이동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삶의 방식 자체가 다르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북한군 장교였던 나는 북한을 탈출해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새로웠지만 충격적이었던 것은 사람들이 수돗물을 외면한 채 생수나 정수기의 물만 마신다는 것이었다. 수돗물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던 곳에서 살다온 내가 정수기의 물을 받아먹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조사기관에서 조사를 받던 때의 일인데, 하루 일과가 끝날 때 쯤 늘 먹을거리와 음료수를 가져다주는 사병이 있었다. 하루는 이 친구가 바나나를 가져다주었고, 난생처음 손에 든 바나나 앞에서 고맙다 못해 ‘황송’하기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튿날, 동료들과 함께 서울 대공원 견학을 갔다. 공원 한편에 동물원도 있어 여기 저기 둘러보고 있는데 원숭이가! 엊저녁 내가 그리 황송해 마지않던 바나나를! 껍질까지 벗겨가며 자연스럽게 먹어대고 있지 않는가


귀뿌리가 빨개지고, 수치심 같은 것이 가슴 한복판을 흩고 지나갔다. 짐승도 저리 자연스럽게 먹는 것을 감격해마지않았던 자신의 처지가 부끄러웠고 이런 심정을 누가 엿보기라도 할까봐 더 속이 상했던 기억이 난다.


그뿐이 아니다. 아직도 나는 이 나라에 차고 넘치는 음료수에 물음표를 던지며 산다. 대한민국에 그 많은 음료수를 일일이 먹어본 사람이 있기는 할까. 아니, 먹어보기는 고사하고 음료수의 종류를 아는 사람이 있기는 있는 걸까... 


식당은 또 얼마나 많은가. 죽는 날까지 나는, 우리 동네와 사무실 근처의 식당을 다 들려 볼 것 같지가 않다. 돈가스 집에, 불고기 집, 샤브샤브 집에 일식집...북에서 생활할 땐 어느 하나도 경험한 적 없는 식당과 음식들인데, 작금의 나에겐 그 많은 식당을 경험해 볼 돈도 없고 시간도 없다.


생각이 예까지 미치면 나는, 이제는 저세상 사람이 된 어머니를 떠 올리곤 한다. 그러면 내 어릴 적 기억 속으로 조용히 다가와 ‘달걀밥’ 한 그릇을 차려주시는 어머니. 배급날이되면 어머니는, 곯지도 남지도 않게 딱 한 그릇의 쌀밥을 짓곤 하셨다.


그리고는 익어가는 쌀밥위에 달걀 한 알을 까 넣으셨다. 조금 뜸을 들였다가 노랗게 익어가는 달걀위에 기름 반 숟가락, 간장 한 숟가락을 넣고 비빈 그 밥을 나는 기꺼이 ‘달걀밥’이라 불렀다.


이 ‘달걀 밥’은 누이 다섯 명을 제치고 외아들인 나만 받게 되는 어머니의 사랑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내가 ‘달걀밥’을 먹는 그날은 오로지 배급 날이어야만 한다는 것도 일찌감치 깨달았다.


그렇게 사람들을 배급제도에 묶어놓고, 오로지 먹이 줄 시간을 기다리는 짐승마냥 북한의 모든 사람들을 배급소에 줄 세우던 사회, 그날이 오면 북한의 어머니들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집으로 달려왔고, 마을 배급소 앞에 줄지어 기다리곤 했다.


다른 집 어머니들이 어찌 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나의 어머니는 그 보름 치 식량을 다시 하루하루의 식량으로 나누고 하루 식량을 다시 세 끼 분으로 나누어 작은 종이봉투에 정성스레 담으시곤 했다. 그렇게 쪼개고 쪼갠 식량에 무슨 여유가 있었겠냐만 외아들인 나의 ‘달걀밥’을 위해 소중한 쌀 한줌을 늘 덜어내시던 어머니.


내가 열네살때,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이제 겨우 열 네 살이었던 나는 어머니를 다시 못 본다는 생각보다 이제는 ‘달걀밥’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더 빠져있었던 것 같다. 눈물도 그래서 났다.


칠이 벗겨질 대로 벗겨진 양은쟁개비지만 그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의 분신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양은쟁개비를 지금도 가슴에 품고 산다.


그런 나에게 대한민국의 넘치는 풍요는 아직 그림의 떡이다. 과거의 추억에 얽매여서가 아니라 그런 과거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조차 버겁다는 이야기다.


아픈 과거는 털어버리고, 내일을 바라보며 웃으며 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대한민국은 누구에게나 동등한 기회를 제공하고, 조선족도 탈북자들보다 더 열심히 일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탈북자에게 ‘나처럼 살라’고 말기하기 전에 저들이 어떤 사회를 살아왔는지를 생각 해 보았으면 좋겠다. 저들은, 살아온 환경과 생활해온 방식, 지어는 식생활 습관까지 달랐더라는 자신의 과거와 싸우고 있는 사람들임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출발점이 동일하지 않은데서 비롯된, 잘못된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 이 ‘다름’은 극복하는 게 아니고 인정받는 것이라는 말이 그래서 더 와 닫는 것 같다.

 

2016.02.05 "더민주당은 차라리 ‘김정은 지원법’을 만들라"

지난달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북한인권법 통과가 또다시 무산됐다. 북한인권법의 문구 조율이 발단이 되었다고 한다


새누리당 김정훈 정책위의장과 더민주 이목희 정책위의장은 이날 오전 비공개회의를 열고 북한인권법 제정안 최종조율에 나섰지만 합의를 보지 못했다


새누리당이 제시한 북한인권법 제2 2항은 '국가는 북한인권증진노력과 함께 남북관계의 발전과 한반도에서의 평화정착을 위한 방향으로도 노력해야 한다'고 돼있다


이에 더민주는 '북한인권증진노력을 한반도평화정착과 함께 추진해야 한다'는 문구로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함께'라는 단어를 어디에 붙일지를 두고 회동 내내 첨예하게 맞선 것이다


문장 하나가 뭐 그리 대수인가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새누리당의 주장엔 북한주민들의 인권증진이 우선이고 이를 위해 남북관계발전과 한반도에서의 평화정착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 강조되여 있다.


하지만 더민주당은 북한인권법의 핵심인 북한주민들의 인권증진노력과 한반도에서의 평화정착 문제를 동시에 풀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의 인권문제와 평화정착문제가 극과 극임을 정말 모를까


인권증진문제는 그 대상이 북한주민들이고 한반도의 평화정착문제는 현존하는 북한의 독재정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주민들에게 무권리한 삶을 강요하는 북한정권과 독재에 억눌린 대상(주민들)이 어떻게 같을 수 있는가.


결국 ‘이 두 가지를 함께 추진해야 한다’는 말은 첫째, 이것도 저것도 하지 말자는 말이고 둘째, 북한의 무권리한 주민들을 위할 때 김정은을 위해서도 마음을 써야 한다는 뜻이 된다


세 번째로는, 대한민국의 헌법적 타도대상인 북한의 독재정권과 무권리한 북한주민들을 한데 뭉뚱그려 적도 아군도 없게 만들자는 기만적인 ‘우리민족끼리 정신’의 복사판에 다름 아니다.


새누리당이 더민주당의 배신적 북한인권법안과 타협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울러 더민주당은 북한주민들을 위한 북한인권법을 더 이상 훼손시키지 말고 차라리, ‘김정은 지원법’을 새로 만드는게 낳을 상 싶다.

 

2017.01.19 북송 재일교포 조막손은 왜 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했나?

▲북한은 1959 8 13일 일본과의 "재일교포 북송 협정"을 맺는데 성공, 그 해 12월 한 달 동안에만 약 3천여 명의 북송을 이끌어 내는데 골인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시작된 재일교포들의 북송은 1970년 말까지 거의 10만 여명에 달했다.

 

한편 탈북자들의 대거 북한탈출은 당국의 배급 중으로 인해 대량아사사태가 빚어지던 1990년 중반부를 정점으로 하고 있으며 2000년부턴 해마다 1000~2000여명의 국내입국을 기록, 2017 1월 현재 총 3 208명에 달하고 있다.

 

이들 북송된 재일교포들과 탈북자들의 북에 남은 가족들에겐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아마도 당국으로부터의 통제와 감시를 받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둘째는 최하의의 정치적 환경을 살고 있다는 것.

셋째는 외부로부터의 지원을 받았거나 받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필자가 경험했던 어느 재일교포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려고 한다.

 

내가 살던 마을에 재일본 교포출신인 조순덕(66, 남자)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조막손이란 별명으로 더 잘 알려졌는데, 해마다 정기적으로 일본에 있는 친척들이 돈을 보내 주곤 했고 그래서 유명세를 탔다.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들보다 늘 여유를 부렸고 기름진 삶을 살고 있었다. 300만 명이 굶어 죽었다던 ‘고난의 행군시기’때 조차 조막손은 일본에서 들어온 자가용 승용차와 전자제품, 현금 등을 지방정권 기관에 기부하고 훈장까지 수여받았었다.

 

굶는 사람들을 위해 식량까지 내어주던 조막손을 두고 사람들은 ‘애국자’라고 했고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평안남도 북창지역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조막손이 거리에 나서면 아이들이 졸졸 따라다니기까지 했다.

 

그러던 조막손이 어느날 간첩누명을 쓰고 처형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람들은 ‘애국자’가 처형당하는 이유를 궁금해 했고, 한입건너 두입건너 그가 처형당한 이유가 알려지면서 “그러면 그렇지”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기 까지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조막손에겐 딸 두 명과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자녀들 모두가 인물 체격이 출중해 주변사람들의 시선을 독차지 했다. 특히 아들 녀석은 고등중학교 졸업반이 되면서 누가 보이에도 탐이 날 만큼의 성인으로 성장해 갔다.

 

이런 애들은 대체로 중앙당 5과 대상으로 특정되는 게 북한이다. 조 씨의 아들도 5과대상이 되어 지역 당 관련부서를 들락거렸고 역시나 도내에 ‘조막손의 아들이 5과 대상이 되어 호위사령부에 입대한다’는 소문이 발 빠르게 퍼져나갔다.

 

두 딸 중 한명은 고려민항 스튜어디스로 뽑혀간다는 소문도 났다.

 

그래서 늘 입가에 미소를 지을 줄 모르던 조막손에게 어느날 청천 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당에서 재일교포들을 믿는 건 사실이지만 5과나 민항은 워낙 출신성분을 엄격히 따지는 곳이라 아무래도 다른 곳을 알아 보라나 뭐라나...

 

이튿날부터 조막손을 입에 대지 않던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어느날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도당 간부부의 한 지도원과 마주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누군데, 내가 조국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얼마나 헌신했는데”

 

...나라에서 어려워 할 때 전 재산을 털어 바쳤고, 국가에서 주민들에게 식량배급을 주지 못할 때 가족이 먹을 식량까지 퍼 주면서 아픔을 같이 했는데, 재일교포 출신이라고 5과 대상에서 밀리고 민항채용에서 밀리고...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술 취한 자의 불만으로 들어줄만 했지만 다음 말이 문제였다고 한다. “속아 살아왔어. 재일교포들을 혁명의 동반자로 믿고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해 놓곤, 뒤에선 재일교포들을 절대로 믿지 않는게 노동당의 정책이란 걸 내가 정말 모르고 살았어!

 

이튿날 조막손은 보위부로 끌려갔고, 곧 진행된 공개재판에선 ‘당에서 재일교포들을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였음에도, 당을 비난하고 헐뜯었다’는 첫 번째 이유와 ‘지금까지 조순덕이 국가에 낸 모든 자금은 일본반동들과 남조선 안기부놈들이 보낸 공작금이었다’는 두 번째 이유가 거론되었다.

 

그날 사형장에 운집해 있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 말을 믿은 사람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사형집행자의 구령에 따라 총소리가 울리던 순간 으악~하고 외치던 군중의 고함 속에는 아쉬움의 흔적이 역력히 묻혀 있었음을 지금도 기억한다.

 

2017.05.11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의 병상 편지- 그리운 나의 아버지

[편집자주]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가 지난 3월 뇌종양 수술을 받은 사실을 지난 5월 6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밝혔다. 다음날 그는 자신의 '병세'에 대해 '폐에서 전이된 뇌종양'이라며 현재 '폐암 4기를 앓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상태'라는 진단결과를 소개했다. 김 대표는 병상에서도 독재에 신음하는 북한 주민들과 선거를 앞두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글을 올렸다. 아래 소개하는 글은 김성민 대표가 북한에서 유명한 시인이었던 자신의 아버지를 회고하며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최근 뇌종양 수술로 입원한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 김성민 페이스북

 

제가 살아본 대한민국은 노동자, 농민의 아들, 파트관리원의 아들이 대통령의 꿈을 꿀 수 있는 나라였습니다. 북한은 그 반대죠. 꿈을 꾸어도 노동자, 농민의 꿈을 꾸어야 하고 대통령의 아들은 당연히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나라입니다. 그런 북한을 생각하면서 어버이날, 아버지의 추억을 떠 올려 보았습니다.

※ ※ ※

제 아버지 이름은 김순석(金淳碩)입니다. 함경북도 청진시가 고향이고, 23살에 해방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해방 후 북한유일의 문학잡지인 ‘조선문학’을 통해 등단하게 됩니다. 북한 문학사에 ‘해방 후 첫 시인’으로 기록되기도 했죠.

 

이후 북조선 작가동맹 함경북도 지부장으로 임명되었고 곧 평양으로 소환되어 작가동맹기관지 ‘조선문학’ 편집부장, 평양시 창작실 시분과위원장으로 일하다가 종군기자로 6.25를 치르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 후 평양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 창작지도교수로 일하시면서 현재 북한의 대표적 시인들인 차승수, 조빈, 서진명 등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이때까지 시인 金淳碩은 북한의 대표적인 서정시인, 향토시인으로 불렸고 북한 작가동맹 대표단의 일원으로 구 쏘련과 동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쏘련 방문 기념으로 ‘찌플리쓰의 등잔불’이란 시집을 냈고, 종군기자 시절엔 ‘영웅의 땅’, 해방의 기쁨을 노래한 ‘황금의 땅’과 ‘호수가의 모닥불’이란 시집도 내셨습니다.

 

탈북 해 한국에 와보니, 북한의 대표적 향토시인이라며 金淳碩의 시를 소개하는 책이 있어 놀란바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 金淳碩의 시는 ‘자연주의’와 ‘수정주의’의 된서리를 맞고 사라져버렸습니다. 1961년 8월 북한에선 김일성의 유일사상체계가 대두하게 되고 김일성의 사상을 추종하지 않던 많은 사람들이 반당, 반혁명분자로 낙인 되었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교직원과 학생들 앞에서 ‘자연주의와 수정주의를 가르친 타락한 교원’으로 낙인 되었고 북한작가동맹에서는 金淳碩의 이름과 시집, 창작물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렸습니다. 믿어지지는 않지만 재가 탈북한 후에도 金淳碩 작사로 만들어진 ‘빨찌산의 노래’나 ‘벼 가을 하려 갈 때’와 같은 노래는 북한방송에서 나온다고 하는데, 무슨 사연이 또 있겠죠.

 

결국 아버지는 만삭인 제 어머니와 함께 북한의 산간오지인 자강도(평북도) 희천시 공작기계공장으로 추방되게 되었습니다. 저도 그때 어머니의 뱃속에서 자강도로 갔고 그곳 자강도의 산골마을에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서론이 많이 길었습니다만, 그래서 제 고향은 북한 자강도 희천시 전평구라는 어느 시골마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혁명화라는 이름으로, 또 추방이라는 명목으로 운명이 뒤바뀌고 고향이 뒤바뀐 이들이 어찌 저와 저의 부모님 뿐 이겠습니까. 북녘의 시인들과 예술인들, 그리고 일반 주민들까지 그곳 사람들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에 이르는 세대교체와 이른바 후계구도 속에서 저의 가족이 겪은 수난의 역사를 되풀이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북한엔, 한번 추방되고 한번 혁명화 대상자가 되면 다시 소생하기가 힘들다는 불문법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반 범죄를 짓고 감옥에 가는 것 보다 정치적 낙오자가 되어 타도대상이 되는 걸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저의 아버지는 가족의 장래를 위해 변신을 꿈꾸게 되죠. 희천공작기계공장이라는 곳에서 2년 동안 노동을 하면서, ‘항상 그이는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북한 최초의 노동자 시집을 만들어 출판하게 됩니다.

 

북한 최초라는, 또 수령은 항상 노동자들과 함께 계신다는 ‘노동자 시집’은 김일성에게 보고되게 되고 金淳碩을 원상 복귀시키라는 김일성의 ‘감격적인’ 지시가 하달되었다고 합니다. 1963년 3월, 저의 가정은 다시 평양으로 복귀되고, 저도 한 살 때부터 평양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꼭 열일곱살 동안 평양에서 살다가 군대에 나갔고, 탈북 전까지 군에 몸담고 있었습니다. 북한의 어느 산, 어느 골짜기에나 병사의 땀방울이 스며있다고 자부해 왔지만 대한민국에서 생활하다 보니 전 정말 고향도, 사랑하는 이들도 모두 없는 불행한 인생을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열네 살에 부모님까지 여의다 보니 다름 아닌 내가, 천애고아였더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렇게 고향은 사라지는 것일까요? 그렇게 집없이 살고, 부모없이 살다보면, 고향은 영원히 소멸되는 것일까요? 시인이기를 꿈꾸던 때, 고향을 떠올리면서 썼던 이름 하여 ‘병사의 자서전’입니다.

 

<산에 살다 고향으로 돌아온 인민군 전사(戰土)가 있었습니다. 누구를 찾느냐는 경비실 노인네 앞에서 머뭇거리는 스물일곱 살의 제대군인입니다. 4층7호를 찾아왔는데요. 세대주 이름이… 귀뿌리가 빨개진 전사는 고개를 숙인 채 돌아섭니다. 고향집은 그가 바친 석삼년의 군복무 기간에 모래성처럼 사라져버렸습니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돌아가셨고 누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가고, 스물 세평 작은 집은 얼굴도 모르는 심 아무개의 차지가 되어 버렸나 봅니다. 살아갈 집이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파트 골목을 빠져나와 색 바랜 벤치에 앉아 강기슭의 4층집을 멀거니 바라보았습니다. 첫 글을 익히던 조그마한 칠판과 그 곁에 놓여 있던 댑싸리 빗자루, 위험하리만치 가냘픈 어머니의 허리는 그 집 베란다에 늘 걸려 있었습니다. 순이야, 순자야, 얘, 진이야…. 그 어머니 만날 듯싶어 산으로 올랐습니다. 오르고 내리도록 아무도 없는 고향 모란봉 기슭에서 푸드덕, 꿩 한 마리가 날아올랐죠.> (병사의 자서전 전문)

 

10년 6개월 동안 사병생활을 마치고 찾아온 고향 집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일체의 개인소유를 허락하지 않는 북한에선 사람이 살다 죽으면 집마저도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어 버린답니다. 그때, 내가 살던 집에 다른 사람이 살고 있으리란 걸 뻔히 알면서도 끝까지 계단을 올랐던 심정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후 저는 사병생활 때 군인잡지 등에 열심히 투고했던 시’조각’들의 도움을 받아 평양 김형직사범대학 작가 양성반의 軍위탁생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후엔 장교로 임관해 어느 시골부대의 예술선전대작가가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제가 해야 할 일은 사령관, 정치위원의 보고서를 써주고, 예술단 공연의 코미디 작품을 쓰는 것이었지만, 틈이 나는 대로 시인의 꿈을 키워 나갔었습니다.

 

당시엔 타부대의 군인들도 제 이름을 부르면 아, 그 사람! 하고 기억해 줄 만큼 여러 편의 시와 수필 등을 잡지에 냈었고, 지금 생각하면 많이 부끄럽지만 군무자축전 때 발표한 작품이 김정일의 칭찬도 받을 만큼 ‘작가’로서의 본분에 충실했었습니다. 그렇게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던 시점에, 덜컥 탈북을 결심해야만 했고 결심한지 3일 만에 북한을 떠났습니다.

 

이쯤에서 사람들은 왜 탈북했고, 어떤 경로를 통해 한국으로 왔느냐고 끈질기게 묻곤 하죠. 그에 대한 설명을 수백 번 했던 것 같고, 월간지 등에 연재한 바도 있습니다만, 여기선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여타의 탈북자들처럼 북한의 독재체제에 환멸을 느껴야 했던 계기가 있어 대한민국에 왔음을 밝히고 싶습니다.

 

대부분의 탈북자들은 북한을 탈출할 때 목숨까지를 걸어야 했던 두만강과 압록강에서의 고투와, 4~5000㎞ 거리를 에돌아야 했던 몽골과 베트남 등의 탈북노정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전 정말 탈북을 결심했을 때, 이제 떠나면 고향땅을 다시 밟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에 진저리를 쳤던 것 같습니다. 외아들인 내가 이 땅을 떠나면 아빠 엄마 산소는 누가 돌보고, 누이들은 또 이 못난 동생을 얼마나 원망할까...

 

막상 떠나려고 하니 꼬리를 무는 추억이 나의 발목을 잡았고, 이제 떠나면 죽어서도 고향땅에 묻힐 자격을 잃는 것 같아 온 밤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른 새벽, 잠들어있는 조카애들을 마음에 품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그 날, 그 순간을 떠올리며 썼던 시도 아래에 소개하려 합니다.

 

<떠나던 나를 위해 아무도 울어준 이 없는 곳이 고향입니다. 
하지만 그곳은 내 나서 첫 걸음 익힌 곳, 못 다한 나의 사랑일지 모릅니다.> 
(시 고백 전문)

 

그렇게 사랑했던 모든 것이 추억이 되어버렸습니다. 자라온 환경 때문에, 또 누군가는 자유란 이념 때문에 고향을 떠났다지만, 우리는, 고향을 떠난 그 순간부터 고향사람들이 말하는 ‘배신자’가 되었고, 분단시대의 사생아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다 자란 어른이 되어서도 탈북자들은, 고향이야기만 나오면 눈시울을 붉히는지도 모릅니다.

 

어느 해 추석 때, 통일전망대를 찾았던 한 친구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꺼이꺼이 울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땅에서 아들과 딸과 아내가 굶어 죽었는데 나만 살자고 대한민국에 왔고, 이렇게 살아있음이 부끄럽다고 마구 우는데, 친구의 눈엔 눈물이 아니라 피 같은 것이 고여 있었습니다.

 

그때, 탈북자들이 떠올리는 고향은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추억이 아니라 그 땅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가슴 아픈 사연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들은 굶어죽고, 얼어 죽고, 맞아죽었는데 나는 살아있다는, 살아서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그 자괴감이 우리 모두를 슬픈 과거 속에 처박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고향은 슬픔의 대명사이기도 합니다. 명절 때마다 고향으로 달려가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는 떠올리기조차 실어지는 게 고향이기도 합니다. 길은 있어도 갈 수 없는 곳, 그립고 보고 싶은 사람들은 있어도 저들이 과연 나를 그리워 할까가 근심인 그 땅...탈북자인 내게 고향은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잊으려하면 할수록, 기억에서 지우려 하면 할수록 고향은 언제나 내 곁에 머무르며 멀어지려는 내 마음을 꽉 부둥키고 있습니다. 기억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어느 `한시도 잊으면 안되는 게 고향이라고...깊은 밤 꿈속에서조차 고향은, 네가 고향을 버렸다고 해도 고향은 결코 너를 버린 적이 없음을 날마다 속삭이고 있습니다.

 

이런 탈북자의 마음을 담은 시 한편을 소개하면서 두서없는 저의 이야기를 마치려고 합니다. 제목은 ‘동작대교 위에서’이고 2006년 3월,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작품으로 내 놓았던 조촐한 시집 갈피에 끼워두었던 시이기도 합니다.

 

<다리 위를 걷는다. 강물이 비껴간다. 잿빛 연기 속에 질주하는 승용차들, 어디선가 굴러 온 휴지 한 조각이 광란의 소용돌이에 몸을 던진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바람소리로부터 차창 속 번들거리는 눈빛들로부터 피할 길 없는 삶이 야속한 만큼 보고파지는, 그리워지는 옥류교 난간에 몸을 기댄다.>

※ ※ ※

모란봉 기슭, 내 고향 평양의 대동강변에서 배고픈 사람들의 눈뿌리를 슬그머니 부여잡는, 그 식당 난간에 서면 손에 닿을 듯 한 거리에 東평양과 西평양을 잇는 옥류교’가 놓여 있답니다. 열두 개 교각 밑에 구슬같이 맑은 물이 흐르는, 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집으로, 매일처럼 지나던 그 다리는 길이가 팔백 미터, 너비는 이십 이 미터, 흔치않은 승용차가 쌩쌩 달리곤 했죠. 그래서인지 학교 갈 땐 어머니가, 집에 갈 땐 단임 선생님이, 늘 서있던 그 다리, 커서 군대 갈 땐 옆 집 옥이가 내손 꼭 잡고 서있던 다리랍니다. 그 다리 머릿돌 한구석에 이름 석 자 적어놓았다가 관리원 영감한테 뒤통수 얻어맞던 기억도 있고, 친구들과 옹노를 놓아 강 비둘기 잡아먹던 기억도 있는, 멀리 멀리 떠날 때는,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던 그 밤엔 무슨 놈의 다리가 그리도 길든지...예까지 닿아 있다면 믿으시겠나요.

 

2017-05-15 김성민의 병상편지(2) -  북한군관 '김진'은 왜 대한민국 시민 '김성민'이 되었는가?

▲뇌종양 수술 후 투평중인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진실 게임
 

지난 3월 병원에서 뇌종양을 제거하고 있을 즈음에 북한의 대남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가 이런 글을 썼더군요.

 

<육체적생명을 이어준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첫 선물이 바로 이름이다. 그런데 부모가 준 이름과 자라온 행적마저 조작하며 추악하고 비굴한 거짓증언으로 생을 부지해가는 가련한 존재들이 있으니 다름아닌 악질《탈북자》놈들이다.

 

그 무슨 《자유북한방송》대표라고 하는 김성민놈 역시 이름과 경력을 바꾸고 미국과 남조선괴뢰패당의 반공화국모략소동의 돌격대가 되여 유엔을 비롯한 국제무대에까지 낯짝을 들이밀고 거짓나발질에 열을 올리고있는 추악한 배신자, 너절한 인간쓰레기이다.

 

본명이 김진인 이자는 1962년 6월 5일 자강도 희천시에서 출생하여 공화국의 따뜻한 품속에서 무료의무교육의 혜택으로 유치원과 소학교, 중학교과정을 마치였다.

 

나라에서는 그의 자그마한 재능의 싹도 귀중히 여기여 예술전문학교에서 마음껏 희망의 나래를 펼칠수 있게 하였으며 이름 있는 대학에까지 불러주었다. 그 혜택속에 문예일군으로, 군관으로까지 되였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하늘같은 나라의 은혜에 천만분의 하나라도 보답하기 위해 땀을 아끼지 않고 정열과 재능을 다 바쳐야 할것이였다. 그러나 그런것은 안중에도 두지 않은자가 바로 인간의 탈을 쓴 너절한 추물 김진(김성민)이다>

 

저들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예까지는 대체로 맞는 듯한 주장이어서 더 할 말이 없다만 이름에 관해서만큼은 정리가 필요 할 것 같아 몇 자만 더 보충하려고 합니다.

 

제 본명이 김진이고 지금도 누이와 조카들은 저를 김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아빠 엄마의 산소를 뒤로 하고... 대한민국에 와서야 두 삼촌을 만났고삼촌들과 가족들로부터 돌아가신 할머님께서 북에 두고 온 맏아들을 얼마나 그리워 하셨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해방 후 14, 16살의 두 아들을 이끌고 서울로 오신 할머니는 삯빨래와 삯바느질로 당신의 두 아들을 끝내 연희전문학교 졸업생들로 키우셨다고 합니다.

 

자식들이 장성해서 장가들 무렵에는 20여평 남짓한 자그마한 거처를 마련해 놓으시고 여기서 살다가 통일이 되면 맏아들이랑 맏며느리랑 살아야 겠다고 늘 입버릇처럼 외우셨다고 했습니다그 할머니께서 이곳 남한에서의 첫 손자에게 김성진이란 이름을 지어주셨고그 때부터 제 4촌들의 이름엔 성자가 돌림자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성진성호성환... 두루 살펴보다가 그나마 민이란 이름이 없다싶어 성민(聖玟)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대한민국의 첫 신분증에 김성민이란 이름을 새겨 넣었더랬습니다이북에서 온 손자의돌아가신 할머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표였을지도 모를 소중한 이름이었습니다.

 

이를 마치 <부모가 준 이름과 자라온 행적마저 조작하며 추악하고 비굴한 거짓증언으로 생을 부지해가는 가련한 탈북자>들의 경력위조나 신분세탁으로 생각한다면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김정은은 얼마나 많은 진실을 외면하고 있고그 진실로부터 도망치고 있을까요.

 

2017.05.22  암투병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의 눈물

▲ 지난해 9월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북한인권법 실천을 위한 단체 연합회’ 발대식에서 김성민 대표가 출범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photo 오종찬 조선일보 기자

 

“제가 살아본 대한민국은 노동자, 농민의 아들, 아파트 관리원의 아들이 대통령의 꿈을 꿀 수 있는 나라였습니다. 북한은 그 반대죠. 꿈을 꾸어도 노동자, 농민의 꿈을 꾸어야 하고 대통령의 아들은 당연히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나라입니다.
   
   
탈북민들이 운영하는 대북 라디오 방송매체 자유북한방송(FNK)의 김성민(55) 대표가 지난 5 8일 “어버이날, 아버지의 추억을 떠올린다”며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그는 북한에서 34년을 산 뒤 1996년 탈북해 1999년 한국에 입국했다. 한국에 정착한 지 올해로 18년이 된다.
   
   
김씨는 현재 폐암 4기 투병 중이다. 지난 3월 두통으로 병원을 찾아 뇌종양 수술을 받는 과정에서 두통의 원인인 뇌종양이 폐에서부터 전이된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현재 5~6개월의 시한부 선고를 받은 상태다. 집에서 통원치료를 하면서 환경이 좋은 근교로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한다. 최정훈 자유북한방송 국장에 따르면 김씨는 최근까지도 자유북한방송 사무실에 종종 들러 일을 봤지만, 현재는 건강이 악화돼 출근을 못 하고 있다. 지금은 건강 문제로 통화조차 어려운 상태다. 병원비는 탈북단체 대표들이 십시일반 모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가 최근 관심을 기울여온 문제는 북한인권법 문제다. 김씨는 지난해 9월 ‘북한인권법 실천을 위한 단체연합’을 결성해 상임대표를 맡아왔다. 이 단체는 북한인권법 제정에 따른 여러 사업에 탈북민들의 참여를 보장하자는 목적에서 결성됐다. 북한인권법은 11년간 국회에 묶여 있다가 지난해 3월 제정됐다. 북한인권재단은 북한 인권 실태 조사, 인권 개선 관련 연구·정책 개발, 북한 주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 등을 수행하는 기구다.
   
   
하지만 김씨가 중병에 걸리면서 현재는 본업인 자유북한방송 자체의 유지가 어려워진 상태다. 김씨와 함께 일해온 최정훈 국장은 “자유북한방송 사이트에 기사를 게재하거나 방송을 송출하는 활동은 계속하고 있지만 금전적인 부분이 많이 어려워진 상태”라면서도 “대북방송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니 계속한다”고 말했다. 투병 중인 그와의 대면 인터뷰 대신 본인의 동의하에 그가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글들을 바탕으로 그의 삶의 궤적을 정리했다.
   

북한 최고 시인의 아들   

   김성민씨는 1962년 북한 자강도(평안북도) 희천시에서 태어났다. 본명이 김진인 그는 시인의 핏줄을 물려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북한의 유명 시인 김순석(1921~1974)씨다. 김순석씨는 광복 후 문학잡지인 ‘조선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그는 종군기자로 6·25전쟁을 겪은 뒤 평양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 창작지도교수로 일하면서 북한의 대표적 시인인 차승수, 조빈, 서진명 등을 가르쳤다. 2007년 ‘문학과 지성사’가 출판한 ‘북한 문학’의 편집진은 김순석씨를 “북측 최고의 시인으로 꼽아도 무리가 없다”고 평가한다. 1958년 낸 ‘황금의 땅’이 그의 대표 시집이다.
   
   
시인의 아들인 김성민씨가 평양이 아닌 자강도 산골에서 태어난 이유는 아버지 김순석씨가 1961년 ‘혁명화 대상자’로 낙인찍혀 평양에서 추방됐기 때문이다. 흔히 공산주의 사상과 김일성을 찬양하는 시를 쓰는 다른 시인들과 달리 개인적이고 서정적인 시를 주로 쓴 것이 추방 이유다. 김순석씨는 이 때문에 “배부른 부르주아적 사고에 물든 시인”이라는 비판을 북한에서 받아왔다.
   
   
북한에선 일반적으로 한번 혁명화 대상자가 되면 복귀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일반 범죄를 짓고 감옥에 가는 것보다 정치적 낙오자가 되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는 것이 김성민씨의 설명이다. 하지만 김순석씨는 희천공작기계공장에서 2년간 일하면서 ‘항상 그이는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북한 최초의 노동자 시집을 만들어 출판했다. “수령이 항상 노동자들과 함께 계신다”는 내용의 김일성 찬양 시집이었다. 찬양 시집의 내용에 감명받은 김일성이 “김순석을 원상 복귀시키라”고 지시하면서 1963년 김순석씨는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평양에 돌아왔다.
   
   
평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김성민씨는 17세 때 군에 입대했다. 106개월 동안 사병으로 생활하며 군인잡지에 시를 투고했다. 사병 생활을 끝낸 뒤 북한 최고의 교원양성기관인 평양 김형직사범대학 작가양성반의 군위탁생으로 들어갔다. 투고한 시 덕분이었다. 대학에서 시를 전공한 김씨는 3년간의 교육을 마친 뒤 장교로 임관해 예술선전대작가로 활동했다. 사령관이나 정치위원의 보고서를 써주고 예술단 공연의 코미디 작품을 쓰는 것이 주 업무였다고 한다.
    

▲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는 고 황장엽 노동당 비서의 양아들로 불렸다. photo 뉴시스

  

총살 피하려 기차에서 뛰어내려   

   김씨는 북한군 장교로 활동하면서 틈나는 대로 시인의 꿈을 키워 나갔다. 다른 부대의 군인들도 김진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알 만큼 여러 편의 시와 수필 등을 잡지에 냈고 축제 때 발표한 작품이 김정일의 칭찬도 받을 만큼 작가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군에서 승승장구하던 김씨가 탈북을 결심한 것은 대위 시절이던 1996년이다. 당시 한국에는 김씨의 작은 아버지 두 명이 있었다. 김씨는 중국 보따리상을 통해 남쪽의 숙부들과 편지를 주고받다가 북한 보위부에 적발됐다. 평소에 김씨를 잘 아는 장교가 적발 사실을 미리 알려줘 체포 직전 탈출했다. 탈북을 결심한 지 3일 만이었다.
   
   
두만강을 건넌 뒤 쫄쫄 굶으며 자동차 바퀴에 깔린 바나나를 주워 먹던 김씨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교회였다. 북한에서는 ‘교회에 가면 사람을 죽인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김씨는 “북한에서 읽은 소설 ‘레미라제블’을 통해 교회에 가면 적어도 밥은 줄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교회 전도사의 안내로 버스를 타고 12시간 동안 달려 도착한 옌지의 조선족교회에서 머물렀다.
   
   
김씨는 중국 다롄에서 한국으로 가는 배에 타려다 중국 공안에 적발됐다. 족쇄를 찬 채 42일 동안 중국 감옥에서 조사받은 뒤 국경의 탈북자수용소에서 북한 군보위부원에게 넘겨졌다. 호송당해 북한으로 돌아가면 꼼짝없이 공개처형을 당할 판이었다. 김씨는 감시가 느슨한 사이 양손에 족쇄를 찬 채 열차의 유리를 깨고 뛰어내렸다. 8일 만에 다시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숨었다. 부인 문명옥씨와도 이때 중국에서 만났다. 김씨는 약 3년 뒤인 1999 2월 한국에 입국했다. 현재는 부인과의 사이에서 딸 1명을 두고 있다.
   
   
탈북민들은 기억에 남는 북에서의 경험으로 흔히 고된 탈북노정을 꼽는다. 목숨을 걸고 넘던 두만강과 압록강에서의 고투, 4000~5000㎞ 거리를 에돌아야 했던 몽골과 베트남에서의 노정 얘기다. 하지만 김씨는 탈북을 결심했을 때 이제 떠나면 고향 땅을 다시 밟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진저리를 쳤던 때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외아들인 내가 이 땅을 떠나면 아버지 어머니 산소는 누가 돌보고, 누이들은 또 이 못난 동생을 얼마나 원망할까.
   
   
김씨는 고()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요청으로 탈북자동지회 사무국장을 맡은 뒤 북한 민주화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2010년 황장엽 전 비서가 사망했을 때 장의위원회 대변인을 맡기도 했다. 이후 한국 탈북자 사회의 한 축으로 활동해왔다.
   
   
김씨는 2004 10명가량의 탈북민과 함께 민간 대북방송 자유북한방송을 설립했다. 탈북민들의 수기를 소개하고 북한의 체제를 비판하는 것이 방송의 주된 내용이다. 미국에 있는 영국 중계업체를 통해 전 세계에 송출하는 방식으로 북한에 전달해왔다. 2008년에는 국제 언론인 인권보호단체인 ‘국경 없는 기자회’로부터 ‘올해의 매체상’을 받기도 했다. 방송 내용은 2015년 국방부가 재개한 ‘대북 확성기 방송’을 통해 직접 북쪽에 송출되기도 했다.
   
   
북한이 체제 비판에 특히 민감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때문에 김씨는 북한으로부터 끊임없는 암살 위협을 받아왔다. 2012년부터는 북한으로부터 공개적인 위협을 받아왔다.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 홍순경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 등 주요 탈북 인사들과 함께 북한으로부터 ‘처단 대상’이라는 위협을 받아왔다. 식칼을 꽂은 인형, 피를 묻힌 도끼, 가족을 해치겠다고 위협하는 편지 등이 사무실로 배달되기도 여러 번이었다. 지난해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공사가 탈북한 이후 북한의 위협은 더욱 강화됐다. 하지만 김씨는 북한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대북 심리전 활동을 오히려 강화했다. 같은 해 출범한 탈북자단체 연합체인 ‘북한민주화추진 연합회’를 구성해 강화도 인근에서 대북 전단을 살포하기도 했다.   
   
   
김씨는 한국에 와서도 시인으로서의 꿈을 잃지 않았다. 연세대 국문과 3학년에 편입해 공부한 뒤 중앙대 예술대학원(문예창작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4년 계간 문예지 ‘자유문학’ 여름호에 총 12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탈북민 1호 시인’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 2010년 5월 서울 가양동 자유북한방송 스튜디오에서 김성민 대표가 방송 6주년을 맞는 소감을 말하고 있다. photo 오종찬 조선일보 기자

   

고향 옥류교   

   ‘다리 위를 걷는다. 강물이 비껴간다. 잿빛 연기 속에 질주하는 승용차들, 어디선가 굴러온 휴지 한 조각이 광란의 소용돌이에 몸을 던진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바람소리로부터 차창 속 번들거리는 눈빛들로부터 피할 길 없는 삶이 야속한 만큼 보고파지는, 그리워지는 옥류교 난간에 몸을 기댄다. - ‘동작대교 위에서’ 중(2006년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작품으로 낸 시집 갈피에 끼워두었던 시)
   
   
생의 고비를 맞은 김씨가 가장 그리워하는 곳은 고향인 평양 대동강의 옥류교다. 김씨는 5 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 옥류교에 얽힌 추억을 회상했다.
   
   
‘모란봉 기슭, 내 고향 평양의 대동강변에서 배고픈 사람들의 눈뿌리를 슬그머니 부여잡는, 그 식당 난간에 서면 손에 닿을 듯한 거리에 동평양과 서평양을 잇는 옥류교가 놓여 있답니다. 열두 개 교각 밑에 구슬같이 맑은 물이 흐르는, 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집으로, 매일처럼 지나던 그 다리는 길이가 팔백 미터, 너비는 이십이 미터, 흔치 않은 승용차가 쌩쌩 달리곤 했죠. 그래서인지 학교 갈 땐 어머니가, 집에 갈 땐 담임 선생님이, 늘 서 있던 그 다리, 커서 군대 갈 땐 옆집 옥이가 내 손 꼭 잡고 서 있던 다리랍니다. 그 다리 머릿돌 한구석에 이름 석 자 적어놓았다가 관리원 영감한테 뒤통수 얻어맞던 기억도 있고, 친구들과 옹노를 놓아 강비둘기 잡아먹던 기억도 있는, 멀리멀리 떠날 때는,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던 그 밤엔 무슨 놈의 다리가 그리도 길던지… 예까지 닿아 있다면 믿으시겠나요.
   
   
김씨가 쓴 시 중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말하는 작품이 유독 많다. 김씨는 14살에 양친을 모두 여의었다. 집 없이 부모 없이 산 그에게도 고향 집은 남다른 의미였다. 그는 사병생활을 마치고 고향 집을 찾았을 때의 소회를 ‘병사의 자서전’이라는 시를 통해 밝혔다.
   
   
‘산에 살다 고향으로 돌아온 인민군 전사가 있었습니다. 누구를 찾느냐는 경비실 노인네 앞에서 머뭇거리는 스물일곱 살의 제대군인입니다. 47호를 찾아왔는데요. 세대주 이름이…. 귀뿌리가 빨개진 전사는 고개를 숙인 채 돌아섭니다. 고향집은 그가 바친 석삼년의 군복무 기간에 모래성처럼 사라져버렸습니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돌아가셨고 누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가고, 스물세평 작은 집은 얼굴도 모르는 심 아무개의 차지가 되어버렸나 봅니다. - ‘병사의 자서전’ 중
   
   
사병생활을 마치고 찾아온 고향 집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개인 소유를 일절 허락하지 않는 북한에선 사람이 살다 죽으면 집도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된다. 김씨는 당시의 소회를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살던 집에 다른 사람이 살고 있으리란 걸 뻔히 알면서도 끝까지 계단을 올랐던 심정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20
년 가까이 탈북민으로 살아온 김씨는 스스로를 ‘분단체제의 사생아’라고 표현했다. 고향을 떠난 순간부터 고향 사람들에게는 배신자로 기억되겠지만, 끝내 고향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명절 때마다 고향으로 달려가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 고향을 떠올리기조차 싫어질 때가 여러 번”이라면서도 “잊으려 하면 할수록, 기억에서 지우려 하면 할수록 고향은 언제나 내 곁에 머무르며 멀어지려는 내 마음을 꽉 부둥키고 있다”고 말했다.
   
   
‘떠나던 나를 위해 아무도 울어준 이 없는 곳이 고향입니다. 하지만 그곳은 내 나서 첫걸음 익힌 곳, 못 다한 나의 사랑일지 모릅니다. - ‘고백’ 중

배용진  기자

 

2017-06-03  서울대 입학한 탈북 오누이와 엄마

성공한 자식 뒤엔 어머니가 있다는 말이 있다. 탈북민으로 서울대에 입학한 이영준(가명·21)의 어머니 채인옥(가명·53)씨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북에서 의사였기 때문이 아니다. 2009년 가족과 함께 탈북 했다가 중국공안에 의해 강제 북송되었고, 감옥에서 남편을 잃고 다시 자식들을 데리고 북한을 탈출했던 용감한 여성이어서도 아니다.

 

아니, 여기까지는 오히려 평범했다.

 

북한에서 당 간부로 있다가 탈북한 여성이 있는가 하면 교수며 박사, 의사는 헤일수도 없을 정도다.

 

군에서 장교를 하다가 세습체제와 등진 어느 탈북여성은 다섯 번 북송, 여섯 번째 탈북에 성공한 케이스다.

 

어머니로써, 채인옥씨의 진가는 2012 3, 대한민국에 입국해서부터 빛을 발했다.

 

큰애 영실과 아들 영준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심했다는 그는, 탈북민 정착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오면서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목동의 어느 도넛가게에서 만난 영준의 이야기다.

 

“북에서는 의사라고 하지만 여기서는 약사라고 하데요. 우리 엄만 의학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에서 일했었는데…한국에 온 첫날부터 늘 엄마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어요.

 

큰딸 영실이에게도 아들 영준에게도 엄마는 대한민국에서 믿고 의지해야 할 집안의 유일한 기둥이었다.

 

한편으로는 부모일이 잘되어야 자식 일도 잘 된다는 북한 식 고정관념으로 바라보던 가정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채 씨의 생각은 달랐다. 내가 다시 공부를 시작해서 약사자격을 따고 일을 시작하려면 적어도 5년 이상은 걸리겠는데, 그 사이 애들 뒷바라지는 어떻게 할 것인지가 걱정이었다고 한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건물청소 밖에 없어 청소관리원이 되었고 그것이 직업이 되었다.

 

자식 또래의 애들이 계절 따라 입는 옷과 신발을 유심히 봐 두었다가 밤늦게 퇴근해서는 애들 머리맡에 조용히 놓아두고 다시, 새벽 출근길을 이어갔다.

 

그런 삶속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오로지 ‘자식들이 잘되는 것’ 뿐이었고 그런 엄마의 마음을 영준이는, ‘어머니의 당부’로 받아들였다.

 

하루는 영준이가 이가 아파 수업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일주일 내내 밤새껏 약을 달여 영준의 머리맡에 놓아두곤 했다.

 

그리고는 다시 새벽 출근길을 이어가는 엄마를 보며 영준은 ‘죽어도 수업은 빠지지 말아야 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오후 네 시에 수업이 끝나면 밤 11시까지 학교에서 진행되는 야간자율학습에 참가했다는 영준이.

 

아침엔 수업준비를 하고 다시 학교에 간다는 영준에게 하도 물을 게 없어 “대한민국 연예인 가운데 제일 좋아하는 연예인이 누군가”고 물었다.

 

“집에 TV가 없어서요. 특별히 아는 연예인이 없습니다.

 

황당해 하는 필자를 배려해서인지 멋쩍은 해석을 덧붙였다.

 

“집에 TV를 볼 사람이 없어요.

 

‘없다’와 ‘필요 없다’는 말이 그렇게 다르다는 걸 처음 느꼈다.

 

영준이와 영준이 누나가 왜 서울대에 입학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더 이상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20대 초반이라는 가장 진취적이고 민감한 나이에 ‘공부’가 목표였던 젊은이들…

 

“아빠 엄마가 교수고 의사여서 생활은 그럭저럭 괜찮았던 걸로 기억해요. 하지만 아빠가, 너희들의 장래를 위해 꼭 남조선에 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나요”

 

그런 아빠의 이야기가 늘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투영되고 나를 위해 손이 터 갈라지도록 청소관리원의 일손을 놓지 않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남매가 할 수 있는 일은 공부를 잘 하는 것뿐이었다고 영준이 말했다.

 

그렇게 영준이 2015학년도 서울대 정시 기회균형선발 전형으로 합격했고 그보다 앞선 2014 2월에 영준의 누나도 서울대에 입학했다. 

* * *

이야기 하는 동안 도넛 세개를 열심히 해치운 영준에게 “빵 정도는 사 줄 수 있으니 종종 연락하라”고 하자 “시간되면요!” 하는 삭막한 대답이 돌아왔다.

 

헤어지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없냐는 질문엔 “엄마가 우리 형제를 남조선에 데려오지 않았으면 난 지금쯤 뭐가 되어 있을지가 궁금하다”는 엉뚱한 답변을 했다.

 

! 잊을 뻔 했다며 교수며 양천경찰서의 여경이며 목사님이며…동네 독서실 사장이며를 차례로 섬기던 영준이가 헤어지면서 남긴 이야기가 가슴언저리에 매 달렸다.

 

“도너츠는 우리엄마가 좋아하는건데…”

필자 :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 김성주  자유북한방송 기자

2015-01-16 탈북민들...대한민국에 와서 제일 좋은 것들은?

 

북한 독재체제하에서 세기적 가난과 정신적 노예생활을 강요당하던 탈북자들...저들이 처음 바라보는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일까. 

 

대부분 ‘자유, 민주주의 국가’라는 통상적인 말로 대한민국을 이야기 하지만 조금 심도 있게 이야기 하다보면 구체적이고 다각적인 시각을 엿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극명하게 대비되는 남과 북의 차이조차 느끼게 된다.

 

아래는, 자유북한방송의 ‘내가 본 남조선’ 코너에서 간추린 탈북민들의 이야기로 저들의 일상에서 남과 북은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북한주민들에겐 ‘이밥에 돼지고기 국’이 대를 물려온 소원인데 반해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잡곡은 ‘특식’이다.”

 

“대한민국에 와서 제일 좋은 건 수도에서 더운물이 콸콸 나오는 것, 생활총화 안하는 것, 정전이 안 되는 것” 

 

“한국엔 같은 옷, 같은 모양의 신발을 신고 다니는 사람이 없다. 혹시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면 집으로 돌아가 다른 옷으로 갈아 입고 나온다는 말도 들었다. 북한 주민들은 대부분 유니폼 같은 단체복에 열중이다.”

 

“헤아릴 수 없다는 말을 늘 실감하면서 산다. 사탕과자의 종류를 셀 수 없고 음료수의 종류를 셀 수 없으며 신문과 방송, 심지어 내 집 TV의 채널이 몇 개인지조차 헬 수가 없다. 그냥 누리며 사는 것이 송구스럽다” 

 

“자본주의 사회는 공짜가 없다는데 사은품까지 얹어서 공짜신문을 준다. 공짜 쿠폰에 공짜 상품권은 기본이고 웬만한 모임에 가면 공짜 식사와 기념품이 모두 공짜다. 홍보용이라지만, 라이터와 볼펜이 공짜인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커피가 밥보다 비싼 나라. 밥먹는 시간보다 커피마시는 시간이 더 즐겁다는 사람들...” 

 

“멀쩡한 사람들이 약을 먹는다. 이 나라 사람들은 보약이라면 가리는 것 없다. 등산을 운동이라고 여기는 것 또한 신기하다” 

 

“쓸만한 물건을 돈을 주고 버린다. 내 집 TV와 쇼파, 책장과 거울은 길에서 주은 것이다. 버려지는 것들이 너무 아깝다” 

 

“대한민국 회사원들의 제일 큰 고민거리는 ‘점심 걱정’인 것 같다. 무엇을 먹을까. 누구와 먹을까...” 

 

“북한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보위원과 보위지도원. 대한민국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술에 취한 사람과 사고 당한 사람” 

 

“북에서 배나온 사람은 노동당 간부, 대한민국에서 배나온 사람은 성인병 환자, 몸관리 제대로 못한 사람”

 

“정전과 유치원교사의 행패가 뉴스가 되는 나라, 대한민국”

 

“내 것이라곤 없으면서도 북에선 우리공장, 우리병원, 우리학교...우리선생님. 내 것이 중시되는 사회여선지 내가 아니면 남인 대한민국. 옆집에 누가 사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 

 

“북한에서 듣던 말을 대한민국에서도 듣게 된다는 게 놀라웠다. 가장 대표적인 말은 ‘미군철수’, ‘국가보안법폐지’, ‘독도와 위안부’ 반일과 반미” 

 

“1호 행사가 없는 나라 대한민국. 새해(2015년) 신년음악회에 초청받아 갔었는데 대통령이 내 뒷줄에 들어와 앉는 바람에 바지에 오줌 지리는 줄 알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통령의 생일을 모르고, 어떤 아이의 꿈은 대통령이다. 북에서라면 대통령의 생일을 모르는 자는 간첩이고, 자식의 꿈이 대통령이라면 그 부모는 정치범수용소 감이다”  

 

2015-09-11 한 탈북자의 대북방송- '참 나쁜 최고사령관'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진실을 말 하다’ 시간의 김성주입니다. 오늘은 인민군정찰총국장 김영철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 시피 김영철은 북조선의 대표적인 군인 겸 정치인입니다. 군 정찰총국장이며 동시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당 중앙군사위 위원, 그리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는 량강도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났지만, 만경대혁명학원을 졸업한 쉽지 않은 배경을 갖고 군 생활을 시작했으며 소좌 때 벌써 군사정전위원회 련락장교를 맡아 미군의 프에블로호 사건에 관여한바 있습니다. 

 

인민군 소장이던 때엔 무력부 부국장의 자격으로 남북고위당국자회담의 예비접촉 북측 대표를 잇달아 맡았고 1992년 3월부터는 남북고위급회담 군사분과위원회 북측위원장을 일곱 차례나 맡은바 있는 대남 통입니다. 

 

1992년 5월엔 남북군사공동위원회 위원을 력임했으며, 2000년 4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이 만났던 남북정상회담 때에는 의전경호 및 실무분야의 북측수석대표를 맡기도 했습니다. 

 

또 2006년 3월부터 2007년 12월까지 인민군 중장으로서 남북장성급 군사회담 북측대표를 맡았으며 상장으로 승진, 인민무력부 정책국 국장에 이어 청찰총국 국장인 된 인물입니다. 

 

그래봐야 한갓 김정은의 꼬봉에 불과한 인물인데 왜 이렇게 장황한 설명을 곁들이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리유는, 현재의 인민군을 통 털어도 그와 어깨를 견줄만한 대남 통이 어디에도 없다는 제 개인적인 주장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다음으로는 그가 최고사령관으로 받들고 있는 김정은은 1946년생인 김영철이 군에 입대하던 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또 김영철이 무력부 부국장을 지냈던 1989년엔 소학교에도 입학하지 못했던 꼬맹이었다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랬던 꼬맹이가 최근 이른바 ‘혁명의 대 선배이며 원로’인 김영철에게 칼을 뽑아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번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에서 벌어졌던 지뢰폭발과 그 후속 사건들 때문에 벌어진 일인 줄 여러분들도 짐작하리라고 생각합니다만...다시 한 번 사건을 집어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우선 지난 달 4일 대한민국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참석 문제가 거론되고 있던 시기, 한편으론 김대중 전 대통령부인의 방북을 하루 앞둔 시점에 북한군이 남측 비무장지대에 몰래 심어둔 지뢰가 폭발했고, 남조선 군인 두 명이 심한 부상을 당했습니다. 

 

8월 10일에는 대한민국 국군이 엄밀한 검증을 거쳐 북한군의 도발로 지뢰폭파사건을 규정한 후, 2004년의 6.4 합의 후 11년 만에 DMZ 확성기방송을 재개하게 됩니다. 

 

8월14일 북한군은 국방위원회 정책국 대변인 이름으로 저들에 의해 벌어진 지뢰도발 사건을 부인했을 뿐 아니라 그 책임을 남조선에 전가하는 도전적 성격의 성명을 발표합니다. 

 

도적이 먼저 매를 드는 겪이라고나 할까요, 북한당국은 지뢰폭발사건은 천안호(폭침) 사건의 복사판이라면서 "무모한 도발은 기필코 응당한 징벌을 초래할 것"이라고 역공을 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전선 사령부명의로 대북방송 중단을 요구하면서 '물리적 대응과 군사행동'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떠들었습니다. 

 

8월 18일에는 조평통 대변인을 내 세워 남조선 대통령 "박근혜는 남북관계 파국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담화를 발표했고 20일에는 끝내 고사총 1발과 76미리 평사포 2발을 남측지역, 대북확성기방송 근방에 쏘아 댔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군은 북한군이 도적고양이처럼 몰래 발사한 총, 포탄의 실체를 찾아냈을 뿐 아니라 교전규칙에 따라 북측 지역으로 수십 배의 엄청난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결국 여기서 ‘문제’가 생겼고, 여기까지가 이번 도발사건의 지휘자였던 김영철의 잘못이라는 국방위 평가가 나왔다는 게 인민군 내부 소식통들의 전언입니다. 

 

꾹 찍어 말하면 군사를 모르는 김정은은 김영철에게 대남분야의 지휘봉을 맡길 수밖에 없었고 김영철은 사전 계획된 지뢰도발에 대해 김정은에게 보고하면서 이른바 ‘승리’를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꼬일 대로 꼬인 남북관계를 ‘군사적 도발에 이은 대화구조로 풀어가겠다“는 게 당초 김영철의 계획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시도는 좋았을지 모르나 ‘지뢰도발사건’은 북한군의 소행임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등으로 시작부터 김정은에게 불안을 가져다주었다는 후문도 있습니다. 하지만 김영철은 위에서 언급된 이른바 '과거의 전력'을 내세우며 계속하여 ‘도쯔께끼’를 외쳐댔고, 역시나 어린 김정은은 김영철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뒤짐만 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문득 달라도 너무 달라진 대한민국 국군과 국민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뢰 폭발로 발목과 두 다리가 잘려나간 군군장병들이 ‘명령만 내리면 적진으로 달려가 천백배로 복수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표명하는가 하면 대통령과 국민은 더 이상 북한의 도발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며 보복을 다짐하고 나섰습니다. 

 

과거에는 대북전단 살포를 막으려 북한군이 쏜 고사총 탄피로 인해 국민정서가 갈리고 공포감마저 감돌던 대한민국이었지만 이번에는 세발의 총포탄에 대해 대구경 포사격으로 맞섰던 것입니다. 

 

당시 남조선국방부가 기존의 작전수칙대로 도발원점과 지휘부를 공격했더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북한군의 피해가 발생했다는 점을 김정은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황망조한 김정은은 부랴부랴 국방위원들을 집합시켰고 김영철에게 지금까지 상황의 책임을 돌리는 한편, 이른바 ‘대안’을 찾게 됩니다. 

 

이후 북한은 준 전시상태를 선포함과 동시에 “48시간 내에 방송을 중단하라”는 최후통첩 보내기 까지 했지만... 방송을 중단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자 끝내는 꼬리를 내리고 대화를 제의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대한민국정부는 북측이 제의했던 김양건 외, 2인자라고 하는 황병서도 나오라고 요구했고, 남과 우리가 알고 있는 무박 4일 협상을 통해 6개 조항의 합의문이 나오게 됩니다. 

 

회담이 끝난 후 황병서는 방송에까지 출연해, 이번 지뢰 폭발사건은 "남측이 조작해낸 근거 없는 사건“이라고 우겨댑니다. 또 ”일방적으로 우리를 자극한 사건"이라면서 ‘유감을 표시했던 합의조항’을 통째로 엎어버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김정은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김정은은 틀림없이 “아버지 김정일이 사력을 다해 막아놓았던 대북확성기 방송이 자식의 경험부족 때문에 재개됐다”는 고민에 빠졌을 것이고 자칫 잘못하면 “두 손 싹싹 빌어서라도 방송만 막으면 된다”던 자신의 속심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이번 합의문 2항에 “북측은 최근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 남측지역에서 발생한 지뢰 폭발로 남측 군인들이 부상을 당한 것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하였다”고 명백히 밝혔음에도 ‘우리가 이겼다’며 흑, 백을 뒤집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 김정은의 령도가 있었기에 ‘조성된 위기국면을 타개하고’ 남북관계의 새로운 장을 마련했다고 하는 이유역시 ‘난국을 조성한’ 그 누군가에게 ‘패전의 책임’을 돌리고 ‘자신은 살겠다’는 궁여지책에 다름 아닙니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지금 인민군 지휘관들의 생각은 크게 두 가지로 엇갈리고 있는듯 합니다. 하나는 ‘남조선의 변화된 실정도 파악 못 한 채 이번 지뢰도발 을 기획, 지휘한 김영철의 지휘능력을 따져야 한다’는 쪽이고 다른 한편에선 "그대로 김영철이다"고 밀어부치는 모양새입니다. 

 

하지만 김정은은 이미 김영철의 운명을 결정하였다는 주장이 우세합니다. 

 

물론 이번 사건의 전 과정이 김정은의 비준에 따른 것이 맞지만 결과적으로 "북측 유감 표명"이라는 6글자를 합의문에 명기함으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장기간의 독재권력 가운데, 김정은 대에 와서 처음으로, 이른바 최고 존엄이 땅에 떨어지는 수모를 겪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책임을 김영철에게 밖에 물을 수 없는 김정은입니다. 아니면 그 책임을 고스란히 지고 ‘어린 왕자’에 ‘능력 부족자’라는 오명에 시달리다가 결국 권좌에서 내 쫒길 운명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김정은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초기에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지 않으면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도 막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김정은에게는, 이제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우직스러울 만큼 충실했던 김영철을 ‘죽여야 하는’ 잔인한 선택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김영철 본인은 아는지, 모르는지...이런 과정을 지켜봐야만 하는 우리는, 과거의 온갖 대남도발의 흉수이자 김씨 왕조의 저승사자였던 김영철에게 차라리 자살의 길이라도 택하라고 충고하고 싶습니다. 

 

아울러 이번 기회에 황병서나 김양건 같은 독재의 하수인들에게도 지금 당장 김정은과 결별하는 것이 목숨을 부지할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을 전하는 바입니다. 그 길만이 고모부마저 죽인 잔인한 김정은의 통치하에서 살아남는 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이시간 방송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6.04.04 北에서 꽃제비 출신 황해도 갑부 김석철이 총살당한 까닭은?

▲지금 북한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 탈북민들이나 북한문제전문가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이긴 해도 일일이 체크하기는 곤란하다


국경지역에서만 작동되는 중국산 휴대폰을 통해, 혹은 1차 자료라고 하는 내부동영상이나 문서들을 통해, 중국을 드나드는 사사여행자나 보따리 장사꾼을 통해 얻고 있는 자료가 있지만 역시나 북한에 대한 관심을 충족시키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여기에 국내에 입국한 탈북민들의 산 증언이 가미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3만 명에 육박하고 있는 국내입국 탈북민들이 제대로 된 기억을 되살려 내고 사실에 충실 한다면 통제된 북한사회의 진면목을 파악하기가 한결 쉬어진다는 이야기다.


아래는 2015 11월 국내에 입국한 한 탈북자의 증언으로, 이른바 체제에 반하는 북한주민들의 행동과 심리적 요인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어서 그대로 전한다.


“내가 살던 황해북도 토산군에 김석철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2013 3월 군당 청사 앞 공터에서 공개총살을 당했다. 어릴 때 부모를 잃고 꽃제비로 살던 그는, 인삼을 훔쳐 끼니를 때우려다가 인삼밭 한가운데서 보위대원의 총을 맞았고 그 후과로 한쪽 다리를 잃었다.


이후 그는 자기를 쏜 보위대원에게 복수한다며 신체를 단련했고 20살 될 무렵, 팔다리가 성성한 장정 세 명과도 거뜬히 싸울 수 있는 신체를 만들어 냈다. 불구자였는데도 말이다. 한편으로는 자신과 처지가 같은 꽃제비들을 규합해 사금을 캤고 이를 중국 등지로 내다 팔아 돈을 모았다.


처음에는 사금을 캐 무슨 돈을 만들겠냐며 위심하던 사람들이었지만 어느날 갑자기 신흥 돈주가 되어버린 김석철 앞에서 앞 다투어 허리를 숙이는 신세가 되었다. 간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토산군당 책임비서 리철영은 아들을 평양에 거주시키기 위해 15천 달러라는 큰 자금을 빌리기도 했다.


말이 빌렸다는 것이지 실지로 돈을 돌려줄 능력이 없던 리철영은 부모 없이 자란 김석철을 ‘양아들로 삼겠다’고 상급 당에까지 보고했고, 어머니 당 일꾼이라는 평가와 함께 중앙당 표창까지 받았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김석철은 2011 4,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토산군당 외화벌이 중대의 중대장까지 맡았다.


한편 북한의 2인자 최룡해의 측근으로도 알려진 군당책임비서는 20126월과 10, 레성강 발전소를 찾은 김정은을 두 차례나 만난 ‘접견자’가 되었고 ‘이제 나는 올라갈 자리는 있어도 내려갈 자리는 없는 사람이다’며 호언하고 다녔다.


이런 책임비서의 양아들이었던 김석철도 토산군내의 실력자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혹시 김석철이 잘못한 일이라도 있으며 책임비서가 직접 나서서 ‘다리하나 없는 병신을 잡아가선 뭘 하느냐’고 두둔했고 심지어 어느 군당간부의 딸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이처럼 돈이면 돈, 권력이면 권력, 인기까지 치솟던 김석철이 공개총살 당한다는 포고문이 내 걸리자 아연실색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또 군당 외화벌이 책임자와 금장을 갖고 말다툼하다가 싸워 중상을 입혔다느니, 사금을 금장의 사금을 빼돌리다 적발 되었다느니...말들이 참 많았다.


하지만 김석철의 ‘죄행’은 따로 있었다. 당시 공개처형장에선 ‘조국반역죄’와 ‘국가전복 음모’라는 어마어마한 죄명으로 김석철이 처형되었고 사람들은 다시 한 번 김석철의 존재를 바라보는 계기를 갖게 됐다. 김석철이 범했다는 조국반역죄는 뭘까...


김석철은 원래 못사는 사람들로부터 좋은 사람이라는 평을 받고 산 사람이었다. 군당책임비서의 ‘보호’역시 자신보다는 주변사람들의 방패막이를 위해 활용하곤 했다는 게 일반 주민들의 평가였다. 그 ‘방패막’을 이용해 권력에 맞섰고 때로 보위, 보안원들의 행패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곤 했다.


자신이 꽃제비 출신이어서 그랬는지 군내는 물론 사리원과 주변 도시 꽃제비들도 김석철 하면 구세주를 만난 듯 반기곤 했다. 참으로 김석철의 영향력은 황해북도 전역에 널리 퍼져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면 어디서 모여드는지 수십, 수백명의 꽃제비들이 모여들곤 했다는 후문이 자자했다.


그렇게 모인 아이들 앞에서 그는 늘 남조선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남조선 영화며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 했고 비디오로 남조선 액션 영화를 틀어놓고는 싸움동작을 익히기도 했다고 주변 사람들은 말했다. 그리고는, “봐라, 남조선이 이렇게 잘산다. 너희들 같은 꽃제비도 없다. 지금이라도 남조선으로 갈 애가 있다면 내가 국경을 넘겨줄수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그는 “우리에게 없는 자유가 남조선엔 있다”, “우리도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길이 있는데... 때가 되면 너희들에게도 알려줄 것이다”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아이들의 입을 통해 이런 이야기들이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결국 김석철이 죽음을 맞게 되었다“고 탈북자는 말했다.

 * * *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김석철 처형 후에 일어났다”고 탈북자는 말했다. 이른바 김석철 여파를 조사하는 과정에 북한정보당국은 군당책임비서를 비롯한 군내 거의 모든 간부들이 김석철의 의중을 알고 있었으며 침묵으로 그에 동의했다는 것을 알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총살된 사람이 세 명 더 있었고 그들은 모두 도당 간부였다”고 탈북자는 증언했다. “또 김석철 사건에 연유된 도 및 군내 간부 60여명이 직위 해제되고 오지로 추방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60여명의 간부들과 그 가족들이 이주 및 추방되는데 걸린 시간이 7주나 걸렸다고 하니 ‘사건’의 파장이 어지간히 컸던 듯하다.

김성주 자유북한방송 기자

 

■ 김수경  자유북한방송 기자

2016.10.12  北 학교와 학생을 망쳐버린 김정일 김정은의 축구열풍 이야기

▲2015년 8월 11일 동아시안컵에서 우승하고 귀국한 북한 여자 축구선수들을 평양 순안국제공항까지 직접 나가 격려한 김정은./ 조선DB

 

1974년 4월 김정일은 이른바 학교체육의 전문화방침을 제시했고 이에 따라 북한의 각 학교는 1개 이상의 전문체육종목을 선정해 선수 양성을 위한 전문화교육을 실시했다. 배구를 내세운 학교는 배구를, 농구를 내세운 학교는 농구 종목에 대한 집중적이고 전문화된 스포츠교육을 실시하는 방식이었다.

 

이번엔 축구에 미쳤더라는 김정은이 2011년, 각 학교들에 ‘축구반’을 설치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북한의 각 학교들에선 축구 인재를 조기에 발굴하고 육성한다는 명목 하에 전국의 소학교(초등학교)와 중(초·고급)학교에 한 학급씩의 축구반을 만들었다.

 

남학생들은 물론 여학생들 속에도 ‘축구선수’들이 있을 정도로 축구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다. 학교는 물론 동네에서도 아이들이 공을 갖고 노는 모습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띌 정도였다. 관련하여 김정은은 이러한 축구분위기를 살려 전국의 모든 학생들 속에서 축구분위기를 장려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축구반 학생들 가운데 실력을 인정받은 학생들은 북한의 대표적 축구 인재 양성기관인 평양국제축구학교와 전문 체육단에서의 조기교육을 받았다. 또한 북한 당국은 축구반 교육의 질을 높인다면서 전·현직 프로선수들을 학교에 파견하기도 했다. 정말 하늘을 찌르는 ‘축구열기’였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교사였던 필자의 생각은 달랐다. 수업이 끝나기 바쁘게 운동장으로 달려가는 학생들을 바라보면서 소리죽인 한숨을 몰아쉬곤 했다. 학생들은 공부를 해야지...교수안까지 바꿔가며 이른바 축구반 학생들을 ‘당의 체육전사’로 만들어가는 김정은의 체육방침이 당혹스러웠다.

 

이런 나의 우려가 곧 현실로 다가오기도 했다. 축구반 이이들은 물론, 다른 아이들도 공부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축구반 애들의 목표는 오로지 평양의 국제축구학교가 되어 버렸고 다른 학생들도 모두 공놀이에 빠져버렸다. 하지만 수용능력이 2백명도 안 되는 축구학교가 지방의 학생들에겐 하늘의 별이었다.

 

가관이었던 건 공부를 요구하는 교사들에게 돌아오는 학생들의 대답이었다. 걸핏하면 부모들을 내 세워 축구반으로 보내달라고 했고, 공놀이에 빠져 등교조차 안하는 애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학생들을 호되게 다그치면 아이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가 갸 거 겨만 알면 되는 거 아닙니까? 어차피 졸업하면 다 군대 가는데...”

 

이런 아이들에게 무엇을 더 가르치랴 싶었던 생각이 난다. 한편으론 이른바 축구열풍으로 학교와 학생을 망쳐버린, 학생들보다 더 철부지 같았던 김정은 대한 원망이 사무쳤던 기억도 있다. 그런 김정은에게 농락당해 축구에 미쳐 돌아갔지만, 내가 있던 학교에선 단 한명도 성공한 축구선수가 나오지 못했다.◎

글 | 김수경 자유북한방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