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이탈주민(탈북민) 이야기1
■탈북민의 대모
●'역사의 조난자(탈북자·국군포로·납북자·위안부)'에 구명조끼 던지는 작은 산타
北정권엔 '눈엣가시'라네요
키 156㎝에 처녀땐 30㎏대… 학창시절 개근상 한번 못타
80년대초 열혈 기자 명성… 의원 된 후 '탈북자 代母'로
물망초, 그들을 잊지 말아요
탈북자·국군포로·납북자… 우리 근현대史의 희생자들
이 분들의 눈물 닦아줘야 한국의 미래가 있지 않겠나
"탈북 청소년들 잘 가르쳐서… 한국의 메르켈(東獨 출신 독일 총리)로 키워내고 싶어요"
탈북자 '4등 시민'이라 자조
사회 밑바닥으로 내몰려… 南 오는 탈북자 확 줄었죠
'탈북이 인생 대박'이란 말… 北에 들어가야 통일 이뤄져
북송반대 斷食, 인생 변곡점
딸 끌려갔다고 SOS 치는데 구해줄 힘도 능력도 없더라
그들만큼 마음 아프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결심했죠
정치인 박선영, 이젠 없다
국회의원, 구름처럼 떠 있어… 땅에 발 닿지 않는 존재들
票 안되면 절대 안 움직여… '풀뿌리 운동'이 내 갈 길
지난 21일 경기도 여주에 있는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 '물망초학교'에선 송년(送年) 행사가 한창이었다. 외국인과 국내 자원봉사자 10여명이 크리스마스 캐럴을 불렀고 풍선 놀이, 얼굴에 그림 그리기 등도 이어졌다. 선물을 받은 아이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 박선영 ‘물망초’ 이사장은 2012년 18대 국회의원 임기를 끝낸 뒤 탈북자·국군포로 등을 돕는 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지난 21일 경기도 여주에 있는 탈북청소년 대안학교인 물망초학교 송년 행사에서 만난 그는 “국회의원 옷을 벗으니 족쇄를 푼 것처럼 홀가분하다. 이제부터 제대로 일을 해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 이태경 기자
한쪽에서 잠시 이 광경을 바라보던 박선영 물망초 이사장도 몸놀림이 빨라졌다. 행사장 가운데에 음식을 차리고 따뜻한 국을 그릇에 퍼담았다. 키 156㎝에 비쩍 마른 몸, 빨간색 스웨터에 빨간 목도리를 감고 있는 모습은 작은 산타 같았다.
그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약 3년 전 서울 종로구 중국 대사관 앞에서 '탈북자 강제 북송에 반대한다'며 11일간 단식투쟁을 벌였을 때의 비장한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탈북자 북송 반대 운동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물망초를 만들었고 3년 가까이 활동하고 있다"며 "탈북자 이외에 국군포로와 전시·전후 납북자, 일본군위안부와 관련된 다양한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이사장은 동국대 법대 교수를 하다 18대 국회의원(자유선진당)이 됐다. 2012년 초 탈북자 북송 반대를 위한 단식 투쟁을 벌여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켰다. 지난 22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 인권 상황을 정식 안건으로 채택하도록 씨앗을 뿌린 일등 공신이다. 북한 정권 입장에선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그런 그가 최근 다시 북한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이달 초 라오스에서 북송된 탈북 청소년 9명이 처형됐거나 수용소로 보내졌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극렬하게 반발했다. 북한은 그에게 '극악한 호전 분자' '반통일 광녀(狂女)'라며 욕설과 비방을 퍼부었다.
◇斷食, "내 마음도 아프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박선영 이사장을 얘기할 때 2012년 단식투쟁을 빼놓을 수 없다. 그에겐 인생의 변곡점이기도 했다. 그는 "단식은 그날 아침에 결정했다.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정치인들이 종종 단식이란 방식을 통해 자신의 뜻을 세상에 알린다. 그때 왜 단식을 결심했나.
"(한숨을 쉬며) 내가 무슨 힘이 있었겠나. 초선 국회의원, 그것도 교섭단체도 없는 작은 정당(자유선진당)의 비례대표였다. 그런데 국회에서 탈북자와 관련해 한두마디 한 걸 듣고 탈북자들이 찾아왔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어느 날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왔다. 새벽에 전화해 '엄마가 잡혀갔어요, 살려주세요' '내 딸이 끌려갔어요, 어떡해요' 울부짖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진 않았나.
"외교부에 전화하면 '가만있으라, 시끄럽게 하면 다 죽는다'고 했다. 매번 그런 식이었다. 통일부는 국내에 들어오기 전까진 자기네 소관이 아니라고 했다. 난 무력했다. 이 사람들은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 SOS를 치는데 난 구해줄 힘도 능력도 없었다. 그래서 단식을 했다. '나도 당신들만큼 마음이 아프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단식엔 고비가 온다. 언제가 가장 힘들던가.
"이튿날. 못 일어나겠더라. 이러다 죽겠다 싶을 정도로. 하늘이 빙빙 돌고 귀에선 '윙∼' 소리가 들렸다. 누가 그러더라. '겨우 이틀째인데 벌써 이러면 어떡해'라고. 쇼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정말 창피했다. 남들은 30일도 하고 40일도 한다는데. 그날 새누리당 김세연 의원이 찾아와서 날 보더니 '소금은 드세요?' 물었다. 무슨 소린지 몰랐는데, 김 의원이 준 죽염을 입에 넣는 순간 시들었던 식물이 파릇파릇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원래 그렇게 몸이 약했나.
"고3 때까지 12년 동안 개근상을 타본 적이 없다. 허구한 날 토하고 밥을 잘 못 먹었다. 어머니는 찬 바람 분다고, 비 온다고, 열난다고 툭하면 학교에 안 보냈다. 세 살 어린 동생보다 키가 컸던 기억이 한순간도 없다. 어릴 때 꿈은 '나도 커서 대학에 가봤으면…' 하는 거였다. 그전에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혼 시절 몸무게가 30㎏대였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을 때 한참을 울었다."
◇역사의 조난자들에게 구명조끼를 던진다
박 이사장은 주말이면 장을 봐서 여주에 간다. 물망초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며 공부하는 탈북 청소년들의 일요일 점심식사를 챙겨주기 위해서다. 월요일 오전엔 물망초 전체 사업 진행을 체크하고 조율하는 회의를 주재하고 주중엔 동국대 법대 교수로 일한다.
―법인 이름을 '나를 잊지 마세요'라는 꽃말의 '물망초'라고 지었다.
"탈북자 북송 반대 운동을 하면서 국민이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이런 마음을 계속 이어갈 그릇이 필요했다. 아직도 눈물 흘리는 분들에게 구명조끼라도 던져주자, 그러려면 그들이 존재하는 걸 잊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야 했다. 그들은 역사의 조난자들이다."
―역사의 조난자, 무슨 뜻인가.
"자신은 잘못한 게 없는데 나라가 힘이 없어 망하고, 전쟁 과정에서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굴러 떨어진 분들이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조난당한 것이다. 탈북자는 물론이고, 징용에 끌려가고 위안부로 끌려갔던 분들이 다 그런 사람들이다. 학교 다니다 참전했고 포로가 됐는데 60년 넘게 나라가 구해주지 못했다. 전쟁통에 납북된 민간인만 12만명이다. 이분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을 누군가는 해야 하지 않을까."
―정부가 해야 하는 일 아닌가. 개인이 나선다고 될 일인가.
"국회의원 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건 정부는 할 생각도, 능력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떠들었는데 안 되더라. 어느 순간 '아, 이게 정부가 아니라 국민이 나서야 하는 거구나' 생각하게 됐다. 4년 동안 국회에 있으면서 깨달은 건 실제로 일이 되도록 하는 데는 '풀뿌리 운동'이 더욱 강력하고 효과적이란 사실이었다."
―국회의원처럼 힘 있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들은 하늘에 구름처럼 떠 있어 땅에 발이 닿지 않는 존재들이다. 선거 때 표가 안 되면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탈북자 3만명은 정치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없다."
―단식 이후 지난 약 3년을 돌이켜보면 무엇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나.
"탈북자와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움직임에 가속이 붙었다. 우선 강제 북송이 줄었다. 북송 소식이 별로 없지 않나. 외형적으로 엄청난 성과다. 중국도 국제 규범을 중시해 북송을 자제하는 분위기다. 더 중요한 건 유엔이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전 세계가 북한 인권에 눈을 부릅뜨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물망초는 어떤 역할을 하려는 것인가.
"탈북자를 통해 통일을 준비하는 일이다. 탈북자들은 우리에게 미리 온 '리트머스 시험지'이다. 통일을 준비하는 교과서다.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통일 후엔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구체적인 통일 준비는 어떻게 하나.
"동독 출신 메르켈이 훗날 통일 독일의 총리가 됐다. 탈북 청소년들을 잘 키워 한국의 메르켈을 배출하고 싶다. 탈북 청소년을 일 년에 한 명씩 뽑아 미국에 유학을 보내고 있다. 독일 통일이 안착할 수 있었던 건 대통령과 총리가 동독 출신이기 때문이다. 머리 좋은 탈북 청소년이 꽤 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가장 많은 사또를 배출한 곳은 전라도, 경상도도 아니고 평안북도 정주였다."
―물망초 활동을 하는 데 어려운 점은.
"탈북자를 돕자고 하면 꺼리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도와주자면 지갑을 여는데 탈북자 돕자면 고개를 돌린다."
◇우린 북한과 탈북자를 너무 모른다
그의 이름은 원래 박운희였다. 박선영이란 이름을 갖게 된 건 1995년. 어렸을 때 이름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았다. 박운희를 '바구니'로 바꿔 '꽃바구니' '감자바구니' 하는 식이었다. 결혼 후 어느 날 남편과 상의해 이름을 '베풀 선(宣), 비출 영(映)'으로 바꿨다.
박 이사장은 1980년대 한국 언론계에 여기자가 별로 없던 시절 꽤 유명한 방송기자였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보건사회부를 출입했는데, '땡전뉴스'에서 대통령 소식에 이은 두 번째 뉴스는 거의 그의 차지였다. 당시 방송사 메인 뉴스는 오후 9시를 알리는 '땡' 하는 시보(時報)와 함께 "전두환 대통령께서는…"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해서 땡전뉴스라고 했다.
건강보험 대상 확대, 국민연금 도입과 생수 판매 허용 논란 등 그가 맡은 분야에서 대형 뉴스가 계속 터졌다. 뉴스마다 그가 등장하니 북한 고위층에서도 그의 이름을 알았다고 한다. 기자 생활을 10여년 한 뒤 그는 언론계를 떠나 법 공부를 시작했다. 나이 서른셋, 두 아이의 엄마였다.
―인정받는 기자였는데 왜 법 공부로 진로를 바꾸게 됐나.
"5공 직전 계엄령 시절, 기사 원고를 들고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 시청 본관 2층에 가면 군인들이 검열을 했다. 중위나 대위가 빨간 펜으로 북북 지워버렸고 왜 그러느냐고 해도 대꾸도 안 했다. 돌아오면서 하염없이 울곤 했다. 입사 동기들은 언론 통폐합 때 다 쫓겨났다. 국가란 무엇인가 회의가 많이 들었다.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됐다. 일본군위안부와 사할린 한인, 731부대 등이 눈에 들어오더라."
―탈북자도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차원에서 관심을 갖게 됐나.
"북한은 나라가 사람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곳이다. 하지만 북한은 이제 수명이 다한 엔진이다. 문제는 우리가 북한을 너무 모른다는 것이다."
―북한의 어떤 면을 모른다는 건가.
"북한은 돈이 다스리는 곳이 됐다. 돈이 사람을 살리고 죽인다. 북한 체제를 지탱하는 건 골수분자 20만명에 불과하다. 혜산에서 난 감자를 청진에 갖다 팔면 6배가 남는다. 옛 보부상 같은 사람들이 북한 전역 장마당을 돌아다닌다. 배급은 종말을 고했다. 장마당이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 공교육도 다 무너졌다."
―교육은 어느 정도로 무너졌나.
"평양·개성·신의주 등 6개 주요 도시와 지방 도시의 대표적인 학교 한두 곳을 빼곤 다 붕괴했다. 교사도 없고 학생도 없다. 교사에겐 월급도 제대로 안 준다. 학생들은 교과서 한 권으로 세 명이 공부한다. 무엇보다 먹고살기 바쁘다. 장마당 가서 장사하고 먹을 거 찾아다녀야 하는데 언제 학교에 가겠나."
―북한 엘리트 교육도 그렇게 망가졌나.
"그렇진 않다. 김일성대학 나오고 외교관 하다 온 사람들은 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이다. 일반 탈북자들은 다르다. 국내 대학에 넣어줘도 수업을 따라가지 못한다. 국어도 안 되고 영어도 안 된다. 서로 똑같은 한글을 쓰는데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대학에 진학해도 60%가 중도 탈락한다."
―그렇게 교육받지 못하고 방치됐던 사람이 남한에 오면 적응하기 어렵겠다.
"탈북자들은 스스로를 한국 내 4등 시민이라고 한다. 남한 사람, 조선족, 외국인 노동자·며느리 그다음이란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다. 탈북자들의 자살률은 우리 평균의 6배다. 서독에선 동독을 탈출한 사람들의 취업률이 90%를 넘었다.
우린 탈북자의 90% 이상이 비정규직 또는 실업자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 극빈층으로 내몰리고 있다. 최근 남한으로 오는 탈북자들이 줄어든 것도 이 때문이다." 통일부에 따르면 국내 입국 탈북자는 2011년 2706명에서 2012년 1502명, 2013년 1514명으로 큰 폭으로 줄었다. 올해는 10월 말 현재 1131명에 그쳤다.
―먼저 온 탈북자들이 한국에 오지 말라고 하기 때문인가.
"탈북자들이 북한 가족과 친지에게 나오지 말라고 한다. 여기선 피눈물난다고. 자기가 개처럼 돈 벌어 보내줄 테니 장마당 잘해서 집 사고 땅 사라고…. 통일되면 만날 수 있으니 나오다 죽지 말고 거기 남아 있으라고 울면서 전화한다. 나중에 북한 정권이 무너지고 주민들이 투표로 미래를 선택하게 된다면, 과연 그들이 남한과 합치겠다고 할까. 그 생각을 하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통일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하지만 그건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얻어야 이뤄진다. 그걸 좌우하는 게 탈북자들의 민심이다. '탈북이 내 인생의 대박'이란 말이 북한으로 흘러들어 가야 통일이 되지 않겠나."
―남북 간 교류가 차단된 현실이 답답하겠다.
"남북 간 정부 대화는 단절됐지만 탈북자를 통한 물밑 교류는 엄청나게 이뤄지고 있다. 올해 초 한 탈북 학생의 어머니가 다쳤다. 당일 휴대전화로 연락이 와서 300만원이 필요하다고 하기에 보내줬다. 브로커 비용 35% 빼고 나머지 돈으로 중국 의사를 불러다 수술받아서 지금은 완쾌됐다. 작년에 우리 학교는 북한 채소 '영채'로 김치를 담갔다. 돈과 물건이 왔다 갔다 하는 건 쉽다."
―탈북자 문제 외에도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분야는.
"누구보다 국군 포로들을 생각할 때 가슴이 가장 아프다. 북한에 있는 국군 포로를 만나는 것이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다. 북한엔 생존자가 350명 정도 있을 것으로 추산한다. 이분들이 언제까지 살아계실까. 너무 늦게 실현되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안타까운 일도 많을 것 같다.
"일년에 두 번 국군 포로 위문 행사를 한다. 올해 6월과 11월에 했는데 그사이 네분이 돌아가셨다. 우리 품에 돌아온 국군 포로 81명 중 살아계신 분이 35명에 불과하다. 또, 폐지 등을 주워 생활하는 분들을 보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대가가 이것인가 하고…."
◇정치인, "크게 욕을 두 번 먹었다"
그가 한창 단식 투쟁 중이던 2012년 2월 자유선진당 당직자들이 찾아왔다. 서울 2곳과 충청, 강원 지역 여론조사를 해보니 당선 가능성이 높게 나왔다며 지역구 출마를 권유했지만 거절했다. 그는 "정치 시작할 때 딱 4년만 하고 학교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건 나 자신과 학생에 대한 약속이었다"고 했다. 그는 정치를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만둘 때도 엄청나게 욕을 먹어야 했다.
―정치 시작할 때 욕을 먹었다는 게 무슨 말인가.
"비례대표로 국회의원 배지를 달면서 당을 위해 왜 돈 한 푼 안 내느냐는 거였다. 면전에서 쌍욕을 해 댄 사람도 있었다. 대변인 열심히 하면서 그런 욕이 잦아들었다."
―왜 갑자기 정치에 뛰어들었나.
"정말로 어느 날 갑자기였다. 그전에도 입당 제의는 많았지만 다 거절했었다. 그런데 문득 현실도 제대로 모르면서 헌법과 입법 과정을 가르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4년만 실습하고 오자'고 생각했다. 공천 신청 마감 이틀 전에 자유선진당에 입당했다."
―정치를 그만둘 때는 왜 욕을 먹었나.
"지역구 한 석이 절실할 때였다. 나가면 당선될 텐데 왜 안 나가느냐는 거였다. 혼자 고고한 척, 잘난 척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나는 정치인이 아니다."
―국회의원 4년 하고 나서 정치인이 아니라니.
"비례의원은 정치인이라기보다 전문가이다. 좋은 정책을 만들고 실행하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
―앞으로도 정치를 안 할 건가.
"물론!" 그가 정치를 시작했을 때 남편 민일영 대법관은 화가 나서 1년 동안 말도 안 걸었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엔 큰 힘이 되어준다고 했다.
"남편이 물망초 회비 꼬박꼬박 내주고, 주변에 물망초 얘기도 해준다. 그 정도면 엄청나게 도와주는 거다."
장일현 주말뉴스부 차장
○ 2012.05.23 4번 탈북한 여대생, 종북주의에 "북한 가서 살아라"
[탈북자 지원단체 '물망초' 출범… 1기 어학연수생으로 뽑혀] "중국에 몇 차례 가보니 北 잘못됐단 생각 들어… 그래서 탈북 멈출수 없었다 주민들 굶어 죽는 북한을 종북주의자, 이상 국가로 여겨… 그렇다면 北에 가 살아라"
"어떻게든 북한체제 안에서 살아남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네 차례의 탈북과 세 차례의 강제 북송(北送) 끝에 2008년 한국에 정착한 박혜진(가명·여·23)씨. 그는 북한 주민들을 향해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계속 커지고 있으니 조금만 더 견뎌달라"며 22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박씨는 어머니를 따라 1998년 처음 탈북한 뒤 2000년, 2002년, 2003년 강제 북송을 당했다. 그때마다 오뚝이처럼 일어난 박씨는 "처음엔 배가 고파서 탈북했는데 중국에 몇 번 가보니 이 나라(북한)는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만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너무 달랐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에는 쌀과 전기만 없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적인 자유가 없다. 그래서 탈북을 멈출 수 없었다"고 했다
박씨는 8월 미국 어학연수를 앞두고 있다. 탈북자 지원 활동을 펴기 위해 22일 발기인 총회를 갖고 출범한 사단법인 물망초의 제1기 어학연수생으로 선발된 것이다.
박씨는 "저와 같은 탈북자들이 한국 정착 과정에서 가장 어려워하는 게 영어"라며 "이번 기회를 통해 영어도 배우고 미국의 제도와 체제도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박씨는 어학연수를 다녀온 뒤 교육대학원에 진학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북한은 모든 교육이 세뇌교육이잖아요. 탈북자들이나 통일 후 북한 주민들에게 '당신이 지금까지 배운 게 잘못됐다'는 것을 알려주려면 저 같은 사람이 교육에 종사해야 할 것 같아요."
한국에 와서 고2 나이(17세)에 중학교 3학년에 편입한 박씨는 대입 검정고시를 치르고 현재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다. 한국 정착 과정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언어였다고 한다.
영어는 고생을 각오했지만 우리말이 더 문제였다. 유년기와 청소년기 9년간을 중국에서 지내느라 중국어는 유창해졌지만, 한국어를 거의 다 잊어버린 것이다. 외래어를 섞어 쓰는 남한의 언어 습관도 극복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박씨는 "하나원(통일부 북한 이탈 주민 정착 지원사무소)에서 젓가락을 문 채 한국 드라마 대사를 따라 하는 훈련을 많이 했는데 퇴소 후에도 혼자서 그런 노력을 몇 년 동안 하고 나서야 겨우 말문이 트였다"고 했다.
박씨는 최근 정치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종북주의와 관련, "그분(종북주의자)들이 정말 북한체제를 사랑하는 건지, 아니면 그동안 믿어온 이념을 부인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종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인간이라면 주민들이 굶어 죽는 나라를 이상적인 나라로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만약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북에) 가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한편 이날 오후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는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이 주축이 된 사단법인 물망초의 발기인 총회가 열렸다.
지난 2월부터 시작된 탈북자 북송 반대운동의 동력을 이어가기 위해 결성된 이 단체는 앞으로 탈북자와 국군포로 등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각종 정책 연구와 지원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물망초 설립에 관여해온 북한인권시민연합의 김석우 고문(전 통일부 차관)은 "중국 대사관 앞에서 100일 가까이 계속된 탈북자 북송 반대 집회는 국내는 물론 국제사회의 여론을 움직여 탈북자 인권문제의 중요성을 인식시켰다"며 "이 에너지를 결집해 자발적 운동으로 승화시킨다는 데 물망초 설립의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물망초의 발기인으로는 김태영 전 국방장관, 권영해 전 안기부장, 김태우 통일연구원장 등 사회 각계 인사 126명이 함께했다
▲22일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사단법인 물망초’ 발기인 총회에서 모임을 주도한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과 김길자 경인여대 명예총장, 이우열 이북도민차세대위원회 대표(왼쪽부터)가 ‘물망초 1기 어학연수생’으로 선발된 탈북자 출신 대학생 박혜진(가명·오른쪽)씨로부터 연수 관련 서류를 받고 있다. /이명원 기자 mwlee
▲"탈북자 북송하지 말아주세요" 오늘 100번째 집회 - 22일 서울 종로구 옥인교회 앞에서 '탈북자 강제 북송 반대 100일 기념 촛불집회'에 참가한 학생들이 촛불을 들고 있다.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이 주도한 이번 북한 인권운동 집회는 지난 4월 30일 공식 종료됐지만,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23일로 100일째를 맞는다. /김지호 객원기자 yaho@chosun.com
○ 2012. 05.25 미 하원 외교위원장 “나도 쿠바 난민 출신” 탈북자 북송 반대 촛불
일리애나 로스 레티넌 미국 하원 외교위원장(사진 오른쪽)과 박선영 자유선진당 의원이 24일 서울 효자동 중국대사관 앞길에서 촛불 모양의 피켓을 들고 중국대사관을 바라보고 있다. 12선의 레티넌 위원장은 한·미동맹 논의차 미 하원 의원단을 이끌고 방한한 길에 집회에 참석했다.
여덟 살 때 쿠바에서 가족과 함께 탈출한 난민 출신인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탈북자의 강제북송을 강력 비난해 왔다. 그는 ‘Mr. Hu’(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를 세 번이나 언급하며 “탈북자들을 한국이나 다른 민주국가로 보내고, 모든 한국인과 일본인 납북자를 풀어달라고 평양에 말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국에 억류된) 김영환씨와 다른 한국인도 즉각 풀어달라”고도 했다.
이날 집회엔 태디어스 매코터(5선) 미 하원의원을 포함해 국내외 인권운동가, 취재진 등 100여 명이 몰렸다.
글=백일현 기자, 사진=김도훈 기자
● 탈북자들의 代母 수잰 숄티
2014. 12.21
“김정은 체제는 수년 내에 무너집니다. 북한 땅이 열리는 날, 북한 주민들은 ‘당신들은 우리의 고통에 대해 알았습니까? 만약 알았다면 그 고통을 멈추기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라고 물을 것입니다. 특별히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통일이 됐을 때 이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도록 각자가 행동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지난 10월 25일 서울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수잰 숄티(Suzanne Scholte) 미국 디펜스포럼재단(DFF) 회장이 1시간 반 동안 이어진 인터뷰 중 가장 목소리를 높인 대목이다. 수잰 숄티 회상이 이끄는 디펜스포럼재단은 인권보호를 위해 활동하는 미국의 비영리 재단이다.
숄티 회장은 인터뷰에서 북한의 체제변환을 유도하고, 적극적으로 대비하는 ‘과도정부(Transitional government)’ 사업을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숄티 회장에 따르면,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등 탈북 인권운동가들과 함께 추진 중인 이 사업은 ‘북한의 체제가 변환되었을 때를 대비한 북한 재건사업 프로젝트의 일종으로 2014년 북한자유주간’을 통해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날 전망이다. 숄티 회장의 설명이다.
“현재 북한의 상층부에 있는 엘리트 계층들은 김정은 독재를 반대할 이유가 거의 없습니다. 이들은 김정은이 망하면 자신들도 함께 끝장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김정은이 망해도 전혀 걱정할 것이 없고, 오히려 김정은이가 없어질 경우 북한을 재건하고 개혁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북한 내부 정보에 의하면 현재 북한 엘리트들은 김정은의 통치방식에 엄청난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무런 대안이 없으니까 반대를 못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과도정부 프로젝트를 통해 북한의 체제변환 시 북한의 기간산업 등을 재건할 효과적인 대안을 제시하여 북한 엘리트들이 김정은에게 반기를 들 수 있도록 유도할 것입니다.”
미국의 북한 인권운동단체 연대기구인 북한자유연합(NKFC, 2003년 창립) 대표이기도 한 수잰 숄티 회장은 지난 10월 23일 방한 후 ‘평택 해군 2함대 초청강연’, ‘부산의 탈북자교회 방문’, ‘북한 민주화를 위한 대학생들과의 만남’, ‘아산정책연구원에서의 특강’, ‘대북전단살포’ 등 ‘북한의 자유화’를 위한 7일간의 바쁜 일정을 소화한 후 29일 출국했다.
숄티 회장은 인터뷰에서 탈북자들을 강제 북송하는 중국 정부의 야만성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그는 “중국은 지금 당장 탈북자들의 북송을 멈추고 국제법을 준수하여 문명국의 일원으로서 국제사회에 책임 있는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잰 숄티 회장과 인터뷰를 일문일답(一問一答)으로 정리했다.
"북한은 세계인권선언에 명시된 단 한 건의 인권도 누릴 수 없는 유일한 국가"
‘탈북자의 수호천사’ 수잰 숄티 여사는? ‘탈북자들의 대모(代母)’로 불리는 수잰 숄티 여사는 1996년 미 의회에서 의원 비서관으로 일하면서 북한 인권 상황을 알게 된 후 이를 세상에 알리는 일에 몸바쳐 오고 있다. 1999년에는 미 상원에서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관한 청문회를 여는 데 앞장섰고,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미 의회 증언을 성사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후 많은 탈북자가 미국의 의회와 강연회에 등에서 증언할 수있게 주선하여 미국 정치권이 북한 인권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힘을 쏟았다. 숄티 여사는 또한 2004년 북한인권법의 미 의회 통과에 큰 기여를 했으며, 탈북자와 북한 인권, 탈북난민 강제북송 금지운동 등을 주도하고 있다. 2004년부터 매년 4월 마지막 주 워싱턴 D.C.에서 ‘북한자유주간’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이 행사는 2010년부터는 북한인권법의 국회 통과를 촉구하기 위해 서울에서 이 행사를 매년 열고 있다. 이밖에 유럽 등 세계 여러 나라를 오가며 탈북난민을 위한 국제 집회를 열고, 탈북난민 고아들의 입양운동도 전개하고 있다. 2008년에는 서울평화상을 받았으며, 올해 2월 한국 정부로부터 수교훈장 숭례장을 받았다. |
-탈북자단체들과 26일 파주 임진각에서 대북 전단을 풍선에 매달아 보낼 예정인데, 이번에는 미군 포로 송환을 촉구하는 내용의 전단을 함께 보낸다고 보도 되었는데요.
“지금까지 북한은 6ㆍ25 참전 포로와 일본인과 한국인 납북자의 존재를 부인해 왔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사람들은 북한에 살고 있고, 이들에 대한 증언과 정보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미군 6ㆍ25 참전 포로도 아직 북한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평양에서 미국 전쟁포로와 납북된 백인들을 봤다는 탈북자들의 증언이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살포한 전단에는 미군 포로 가족이 보내는 호소문과 이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달라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숄티 회장께서는 지난 5월 라오스에서 강제 북송된 탈북 청소년 9명의 탈북 준비 과정을 2년 년 이상 도왔는데, 현재 그들의 소식은 들었나요.
“북한 내부에 있는 소식통으로부터 평양보육원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국제사회의 커다란 관심이 계속됐기 때문에 최악의 결과는 면했습니다. 라오스 정부가 국제사회의 너무나 많은 비난이 쏟아진 것에 굉장히 놀랐던 것 같고, 한국 정부가 이 일에 굉장히 빠르게 반응해서 아이들의 안전과 신변에 대해 라오스 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한 것이 그나마 최악의 결과를 막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라오스에서 북송된 청소년 사건을 되돌아보면 ‘그때 만약 이렇게 했으면’하는 후회스러운 부분이 많지만, 결국은 김정은과 중국이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김정은이 그들을 데리고 오라는 지시가 없었고, 중국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없었을 테니까요.”
-지난 6월 열린 미중(美中) 정상회담 때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탈북자 강제북송을 중단할 것을 시진핑 중국 주석에게 요청하라’는 서한을 보내셨다면서요.
“지금까지 미국 정부는 우리가 하는 일을 허락하는 정도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탈북자 난민보호센터를 설치하거나, 미국 내에 탈북 고아들을 위한 보육원 시설을 짓는 등의 적극적인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탈북자들이 라오스나 태국, 몽골 등 멀고 위험한 탈북 루트를 택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전적으로 중국 정부 때문입니다. 탈북자들이 중국에서 잡혔을 경우 중국 정부가 이들을 북한으로 보내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제3국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중국은 국제 난민협약에 가입된 나라입니다. 이런 중국이 탈북자에 대한 강제북송 정책을 계속하는 것은 국제법 위반입니다. 중국은 당장 이런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 정책을 멈춰야 합니다.”
-북한의 독재체제가 일부 아프리카, 중동 등의 국가에 존재하는 독재와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보나요.
“북한의 독재는 이 세상의 그 어떤 독재보다 가장 극악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북한은 세계인권선언에 명시된 단 한 건의 인권도 누릴 수 없는 유일한 국가이기 때문이죠. 여행, 결혼, 직업 선택의 자유조차 없는 모든 것이 통제된 국가입니다. 만약 인권선언에 명시된 ‘여행의 자유’만이라도 보장되었더라도 대기근 시 그처럼 대규모 참상이 벌어지지는 않았겠죠. 사람들이 음식이 있는 곳의 정보를 얻고, 그리로 쉽게 이동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중국의 탈북자 강제북송을 막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
-현실적으로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가장 시급한 일은 무엇일까요.
“북한 인권문제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우선 시급한 것이 중국 내에 있는 북한 난민문제입니다. 중국 정부가 이들을 북송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한 국제적인 캠페인을 벌이고, 세계 여론을 모으려고 합니다. 현재 북한자유연합(www.nkfreedom.org) 홈페이지에서 중국 내 탈북난민의 강제북송을 막기 위한 온라인 청원서를 받고 있습니다.
이 사이트를 방문하면 강제 북송된 자들의 명단이 담긴 유튜브(youtube)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영상에는 한국어와 영어, 중국어 자막을 넣었는데, 중국 사람들에게도 탈북자에 대한 중국 정부의 인권 유린 상황을 알리고, 강제 북송정책을 중단하는 일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중국 내에서 탈북 난민들에 대한 인권 유린 상황은 어느 정도인가요.
“통계를 보면 탈북 여성의 약 90퍼센트가 인신매매와 성매매에 노출되어 있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북한 난민문제는 세계 다른 난민문제와 달라서 하루아침에 해결이 가능한 유일한 난민문제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중국 정부, 특히 가장 큰 책임을 지닌 시진핑 주석이 정책을 바꾸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죠.
또한 탈북 난민은 세계 난민 가운데서 아주 특별한 경우에 속하는데, 바로 그들에게는 갈 곳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그들이 한국법 상 한국 국민으로 취급받기 때문에 중국 정부가 그들을 송환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의미입니다. 중국이 그냥 국제법을 따르는 것만으로 탈북 난민문제의 해결이 가능한 상황입니다. 중국은 핍박이나, 고문, 처벌, 공개처형이 이루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탈북자들을 북한으로 송환하고 있는 야만적인 정책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청원서를 받는 등의 방법으로 중국의 정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당연합니다. 탈북자를 돕다가 체포된 사람 중에는 중국인도 있습니다. 양심적인 많은 중국인이 탈북자에 대한 중국 정책을 비판하고 있고, 또한 중국이 북한이 아니라 한국과 미래를 함께할 때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중국인들이 많습니다. 세계 여론을 모으면 탈북 난민 문제에 대한 정 중국인의 동의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도 탈북자들을 돕다가 납북되는 사례가 자주 있나요?
“예전에는 북한이 탈북자들을 돕는 사람들을 직접 납치해서 감금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중국 내에서 인권운동가들을 사살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적어도 3건의 관련 암살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북한으로 잡혀간 사람들은 한국인뿐 아니라 미국, 일본 등 국적이 다양합니다.
이런 사람들 리스트가 우리 홈페이지에 올린 유튜브 영상에 나와 있습니다. 중국은 스스로 세계적인 리더 국가라고 하면서도 북한의 암살요원들이나 공작원이 들어와서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납치하는 일을 방조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국제사회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사진 영상미디어 김종연
"탈북자들은 북한 인권운동의 선봉대, 그들의 역량을 키워줘야"
-김정일을 이어 북한의 통치자가 된 김정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지금 북한에서는 그의 아버지 때보다 훨씬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탈북자들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데 이는 북한 내부의 상황이 나아져서가 아니라, 아니라 국경지역과 중국 내에서 단속이 너무 심해졌기 때문입니다. 김정은은 스키리조트를 짓거나 호화 요트를 구입하는 등 사치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시리아 등에 화학무기나 관련 기술을 수출하고 있습니다.
김정은 통치 이후 북한의 해외파견 근로자 숫자가 엄청나게 늘어났는데 통치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것입니다. 일부에서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규모도 줄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말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건 김정은이 너그러운 통치를 해서가 아닙니다. 그곳에 갇힌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죽어서 수용소의 규모가 줄었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오른 손날로 왼손 바닥을 여러차례 치면서) 절대로 안 됩니다. 내가 강연이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는 이야기가 ‘한 푼의 현금도 김정은 정권에 절대로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십년 동안 반복해온 실수를 또다시 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은 한국 사람의 세금과 현금을 들여 북한의 핵개발 능력을 키워주는 것입니다. 이는 다시 남한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용인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개성공단이 북한주민에 대한 노동착취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가 있을까요.
“북한에 현금을 줘서 위협을 키우는 것보다 남한의 탈북자들이 운영하는 기업을 양성하고, 지원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이들 기업의 기술과 역량을 키워서 북한이 개혁개방 됐을 때 북한의 개발을 이끌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훨씬 돈을 가치 있게 투자하는 방법입니다. 제가 한국을 방문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가 한국에 있는 탈북자 단체를 돕기 위한 것입니다. 제가 강연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이 한국 시민이 탈북자 단체를 많이 도와야 한다는 메시지 전달하는 것입니다.”
-북한 인권을 개선하기 위한 탈북자들의 구체적인 역할은 무엇일까요.
“탈북자들은 북한 인권운동의 시작이자 끝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수용소에서 살아나와 처참한 인권 상황을 증언해준 사람들, 자신들의 치욕스러운 인신매매 상황을 이야기해준 사람들…. 이들의 용기 때문에 북한 인권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런 탈북자들이 북한 자유화를 위해 하는 일을 지원하는 것이 북한 사람 전체의 자유를 주는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수단일 수 있습니다. 탈북자들은 북한을 가장 많이 알고 있고, 북한의 변화를 촉진할 수 있는 주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와 함께. 이 둘은 12년간 우정을 나누며 북한 인권운동에 앞장서 오고 있다. 숄티 회장은 "탈북자들이 운영하는 기업, 방송, 교회를 도와 이들을 통해 북한 내부의 변화를 유도하도록 하는 것이 북한 인권을 개선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 / 영상미디어 김종연
-탈북자의 역할이 있다면 남한 주민들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첫 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아직도 한국 국회에서 북한인권법이 통과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의 ‘국가적인 수치’입니다. 미국과 일본에서는 이미 2004년과 2006년에 각각 북한인권법을 제정했습니다. 국제연합(UN)과 미국, 일본에서 북한 인권을 한목소리로 고발하고 있는데 당사자인 한국이 아직도 인권법을 통과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오랫동안 나를 괴롭고 슬프게 하는 일 중의 하나입니다.
한국의 교회에도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한국의 일부 대형 교회가 ‘통일되면 북한에 교회를 짓겠다’면서 자금을 모으고 있는데, 그것보다는 한국의 탈북자 교회를 지원하고, 자유북한방송이나, 북한선교방송을 지원하는 것이 미래를 위해 훨씬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시민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북한이 무너진 후 지금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상황은 정말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북한이 무너졌을 때 우리는 훨씬 더 끔찍한 상황을 직면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북한 인권개선과 평화적 통일을 위해 역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실천을 했으면 합니다.”
북한에 현금을 지원하는 실수만 하지 않으면 김정은 붕괴
-지금 당장 북한 인권개선을 위해 해야 할 일은.
“정말 많은 일을 해야 하지만, 우선 북한 내에서의 인권침해사례를 수집하고 책임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수감자를 학대한 요덕수용소의 간부들의 리스트를 만드는 것 등이 해당하겠죠. 북한 내에서 인권을 유린한 사람들에게 통일이 되면 반드시 책임을 묻겠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보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일은 반드시 법적인 효력을 가지는 형태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인 황장엽 선생과는 오랫동안 교류를 해오셨는데요.
“황장엽 선생이 한국에 온 시기가 매우 불운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햇볕정책이라는 대북 유화정책을 펴면서 북한인권문제 자체를 수면으로 드러나지 않게 저지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황장엽씨가 본인이 하고 싶어했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이 가장 안타깝습니다. 생전에 황장엽 선생은 늘 ‘북한은 절대로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6자회담을 포함 북한의 그 어떤 대화 제스처도 결국 핵무기 개발의 시간을 벌고, 미국과 한국으로부터 돈을 뜯어내기 위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경고했습니다. 결국 그분의 말씀대로 진행된 것 아닙니까. 황장엽씨의 말씀을 귀담아들었으면 북한은 벌써 붕괴가 되었을 것이고, 그 사이에 죽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을 겁니다.”
-당신을 ‘북한인권 운동가’로 불러도 되는지.
“사실 저는 북한 외에도 아프리카의 ‘서사하라 공화국’이란 나라의 인권을 위해서 오랫동안 일해 왔습니다. 서사하라 공화국은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은 나라에요. 이 나라도 분단이 되었고, 이산가족이 있으며 한국의 군사분계선지역처럼 지뢰밭이 있습니다.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개인적인 동기는 물론 제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비슷한 시련을 안고 있는 이 두 분단국가로 이끄는 것 같아요.”
-북한 인권을 위해 헌신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기독교인으로서 이 일을 하면서 힘들 때마다 제가 예전에 간절하게 기도했던 한 구절을 떠올립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으로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해달라’는 기도였는데,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북한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기에 이 일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하실 건가요.
“통일이 되거나 죽거나 둘 중의 하나가 올 때까지 이 일을 하겠지만, 죽기 전에 통일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처음 제가 이 일을 시작할 때는 탈북자들이 나를 ‘누나’라고 부르더니, 근래에는 '대모'라고 부르고, 할머니가 될 때까지 일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하하. 그전에 통일되었으면 좋겠어요.”
-통일이 되어도 북한인권 개선을 위해 하실 일이 많겠지요.
“그 점은 동의하지 않아요. 탈북자들이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속도를 보세요. 분단된 독일이 빠르게 안정을 찾는 것을 보세요. 한국인은 정말 특별합니다. 최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는 중동의 국가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통일이 되면 한국은 몇 년 안에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김정은이 그 자식에게 정권을 물려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지요.
“김대중 대통령처럼 현금을 지원해서 죽어가는 독재정권을 살려내는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황장엽 선생이나 김동수(전 북한 외교관)씨 같은 이들은 북한이 곧 무너질 것을 예상하고 그 준비를 하기 위해 탈북했던 것인데 김대중의 햇볕정책으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금까지 대북정책을 잘해오고 있기에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 2013.05.31 숄티 “탈북 9명 한국행 꿈 못이루고 잡혀가…2년을 준비했는데 허망하고 분하다”
“망연자실(devastated)할 뿐이다.”
수잰 숄티 북한자유연합 대표(54·여·사진)는 29일 동아일보 기자에게 ‘꽃제비’ 출신 탈북 청소년 9명의 강제북송에 대해 이같이 심경을 밝혔다. 워싱턴에 본부를 둔 북한 인권단체 북한자유연합을 이끄는 숄티 대표는 선교사 주모 씨와 함께 이번 탈북 계획에 처음부터 관여해왔다. 그는 “2년여에 걸친 탈북 계획이 이렇게 허망하게 끝날 줄 몰랐다”며 “이렇게 어린 아이들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다시 잡아가느냐”며 분을 삭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
―탈북 청소년 9명이 강제북송된 것을 언제 알았나.
“이들이 라오스 이민국에 억류된 뒤 선교사 주 씨와 계속 국제전화로 통화하면서 사태 진전 상황을 체크했다. 주 씨는 지난주 금요일(24일)까지만 해도 ‘한국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그런데 월요일(27일) 아침 갑자기 주 씨로부터 9명이 추방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 시간으로 27일 늦은 저녁이다. 지난 주말에 사태가 급변한 것이 분명하다.”
―탈북 청소년 9명은 어떤 아이들인가.
“북송된 9명을 포함해 12명의 탈북 청소년이 그룹을 이뤄 선교사 주 씨의 도움 아래 중국에서 6개월에서 최장 3년까지 지냈다. 이들이 올해 초 탈북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중국 공안의 단속을 피해 숨어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상황이 악화돼 탈출하기로 했다.”
―탈출 그룹은 어떻게 나눴나.
“12명 본인의 의사에 따라 한국행 그룹과 미국행 그룹으로 분류했다. 미국행 그룹은 12, 13세의 가장 어린 아이 2명과 학습장애가 있는 16세 1명 등 3명이었다. 어린애들과 지적 장애가 있는 탈북자는 아무래도 미국으로 가는 것이 나을 듯하다는 주 씨의 의견도 참작했다.”
―탈출 계획은 언제 시작됐나.
“1년 8개월쯤 전인 2011년 9월 미국행 계획에 먼저 착수했다. 작전명은 ‘비상(飛翔)하는 독수리 작전(Operation Rising Eagle)’이었다. 나는 탈북 어린이가 직접 쓴 편지를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보냈다. 답장을 받지 못했지만 미 국무부와 긴밀하게 공조해 미국행 계획을 진행했다. 한국 측도 도왔다. 2012년 8월 3명을 비교적 협조적인 태국으로 데리고 나오는 데 성공했다. 나머지 9명의 안전 때문에 이들의 미국 입국 사실을 그동안 공개하지 않았다.”
―곧바로 한국행 계획이 이어졌나.
“미국행이 성공하자 한국행 계획에 착수했다. 미국행 루트대로 태국을 거쳐 한국으로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중간에 거쳐 가는 라오스에서 예기치 않게 불심검문에 걸린 것이다.”
―탈북자를 이송시킬 때 라오스를 경유한 적은 이번이 처음인가.
“아니다. 과거 여러 차례 라오스를 거친 적이 있다. 라오스는 최근까지만 해도 탈북자 문제에 협조적이었는데 북한이 그동안 라오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손을 쓴 듯하다.”
―지난해 중국의 탈북자 강제송환 때 관련 청문회 개최를 주도하고 주미 중국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각종 노력을 펼친 바 있는데….
“이번에도 한국과 미국을 포함해 세계 각국은 라오스에 항의해야 한다. 탈북자들이 북송되면 고문을 받고 심하면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데도 이를 눈감고 보낸 라오스의 처사를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
―김정은 체제 이후 탈북이 줄었다고 하는데….
“탈북 지원 현장에서 체감할 수 있다. 탈북 방지 감시체제가 훨씬 강화됐다. 배고픔을 참지 못해 탈출한 어린이까지 추적해 데려가는 것은 김정은 독재가 얼마나 악랄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 김정은 체제가 그만큼 허약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워싱턴=정미경 특파원 mickey@donga.com
○ 2016.04.27 북한 인권 20년동안 부르짖은 탈북자 대모 수잰 숄티 북한자유연합 대표 인터뷰
“탈북자보다 잔인하게 취급되는 난민은 없다”
▲수잰 숄티 북한자유연합 대표
-20년이나 북한 인권을 위해 투쟁했는데 원동력이 뭔가.
“1996년 처음 탈북자를 미국으로 데려와 북한의 현실을 알리기 시작했다. 97년 최주활 상좌(대령)와 고영환씨가 미국민 앞에서 연설했다. 당시 누구도 김씨 정권이 저지르는 반인권 행위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 98년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생존자 강철환씨와 수용소 경비원 안명철씨 등 20년간 수백 명의 탈북자를 데려 왔다. 그들의 끔찍한 사연을 외면할 수 없어 북한의 폭정을 끝낼 수 있도록 말하는 기회를 주게 된 것이다. 너무 힘든 일이라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었다. 기독교인이라 신에게 화도 내 보고 ‘왜 북한을 고통에 빠뜨리고 나한테 이런 막중한 일을 주었는지’ 질문했다. 기도 끝에 깨달았다.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은 신의 마음을 찢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수많은 난관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맡기로 결심했다.”
▲95년 귀순해 한국에 자리잡은 최주활 상좌(현 탈북자동지회 회장). [사진=중앙포토]
-그동안 한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성취는 뭐였나.
“2004년 첫 번째 북한자유주간 행사였다. 처음에 아무도 나타나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날 미국 전역에서 1000명이 넘게 찾아와 상·하원을 방문, 북한 사람들을 도와야 하고 인권법이 통과돼야 한다고 호소했다. 나는 탈북자들의 친구이자 옹호자가 된 걸 영광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현대사 최악의 폭정에서 살아남은 자들이므로.”
-북한자유주간에는 어떤 행사를 하나.
“미국 대통령을 만났고 의회에서 청문회를 열었다. 중국 대사관에 항의하고 유엔 패널과 NGO를 만나는가 하면 철야 농성을 하기도 했다. 서울에서는 국회 토론회와 비무장지대 풍선 보내기, 서울역 집회 등을 열었다. 북한에 자유와 인권, 존엄을 불어 넣기 위해서다. 마침내 2004년 북한 인권법이 미국에서 통과됐고 최근에는 대북 제재를 강화하는 법안이 가결됐다.”
▲13회 북한자유주간을 맞아 26일 오전 서울 종로에서 열린 '북한여군들의 인권유린참상 규탄 집회'에서 수잰 숄티 북한자유연합 대표가 물감이 담긴 물풍선을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게 던지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올해 북한자유주간의 계획은 뭔가.
“올해 초점은 북 정권의 교체와 한국의 평화통일이다. 사람들은 항상 ‘북한 정권이 언제 무너질 것 같냐’고 내게 묻는다. 나는 대답한다. ‘내일’이라고. 김씨 정권은 무너지게 돼 있고 따라서 우리는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북 정권의 붕괴와 평화통일을 준비하는 가장 위대한 자원은 바로 탈북자들 자신이다. 북한 주민들에게 이런 움직임을 알리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며 우리가 그들의 안위와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 주력할 것이다.”
-국내에서 최근 북한인권법이 11년 만에야 통과됐다. 당신의 공이 컸다.
“2002년부터 알아온 한 한국 외교관이 나보고 '당시에는 외로운 늑대였지만 지금은 많은 걸 얻었다'고 말하더라. 맞다. 지금은 북한이 반인권 범죄를 저지르며 인권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는 사실에 논쟁의 여지가 없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탈북자 단체를 돕는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북한을 잘 알고 변화시키는 데 헌신할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현재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
-개성공단 폐쇄와 사드 배치 압박 등에 대해 논란이 있다. 어떻게 보나?
“개성공단과 같이 북한 체제를 돕는 프로그램은 김씨 정권을 연장하고 북한 사람들의 고통을 확대시킬 뿐이다. 북한 노동자들을 착취해 김정은에게 현금을 갖다 바치게 할 뿐이다. 나는 한국 정부가 사드를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중국이 북한을 구제해 주는 걸 막는 데 사드가 압력이 될 것이다.”
▲수잰 숄티 북한자유연합 대표는 지난 2013년 임진각에서 미군 포로 송환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다. [사진=뉴시스]
-요즘 한국의 10대는 통일이나 북한 인권 같은 주제에 관심이 없다.
“요즘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아주 중요한 시기이다. 왜냐하면 통일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10대들이 학교나 교회 등에 탈북자들을 초청해 듣고 이런 이슈에 대해 배웠으면 좋겠다. 또한 어린이 탈북자들을 가르치고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데 도움을 줬으면 한다. 통일을 위해 꼭 해야 하는 일이다.”
-한국의 10대에게 하고픈 이야기가 있다면.
“라오스와 중국 당국에 의해 압송된 9명의 탈북 청소년들(‘라오스 나인’)이 어떻게 됐는지 염려하고 있다. 이 사건을 절대로 잊을 수 없다. 전세계에서 탈북자보다 더 잔인하게 취급되는 난민은 없다. 그들이 단지 DMZ 남쪽이 아니라 북쪽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10대 고아들이 인신매매단에 팔리고 중국 국경수비대에 맞으며 엄청난 고초를 겪고 있다. 이들이 바로 여러분일 수도, 내 아이일 수도 있다. 제발 그들을 돕자.”
인터뷰=오영란·최윤서(매산여고 3) TONG청소년기자, 청소년사회문제연구소 매산여고지부
글=박정경 기자 park.jeongkyung@joongang.co.kr
● 2014.08.30 눈물로 '통일씨앗' 키우는 脫北 아들딸들의 선생님
1997년 12월 초 13명의 탈북자 이야기가 국내에 알려져 파문을 일으켰다. 탈북자 13명이 중국 동북 지역을 출발해 7000㎞를 강행군한 끝에 제3국을 통해 국내로 입국하려 했지만 한국 대사관의 외면, 중국과 제3국의 '핑퐁'식 떠넘기기로 현지 국경에서 9명이 실종된 사건이었다.
당시 언론에 탈북자들의 대장정을 기획하고 이끈 주인공으로 '통일강냉이'라는 단체와 한 선교사가 등장한다. 실제로는 현장에 3명의 동료가 더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조명숙(44)씨. 서울 남산에 있는 탈북 청소년을 위한 고등학교 과정 대안학교 '여명학교' 교감이다.
"1997년 10월 중국에서 탈북자 13명을 데리고 제3국으로 가기 위해 국경을 넘는데, 내 역할은 제3국 쪽 국경수비대 시선을 딴 데로 돌리는 것이었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파란색 아이섀도를 짙게 칠했다. 그런데 하필 걸어 들어간 곳이 지뢰 지대였고 곧 군인들에게 잡혀버렸다."
그와 좀 떨어진 곳에서 월경을 시도하던 탈북자들도 두 번째 초소에서 발각됐다. 작전이 드러날까 두려워 조명숙은 "나만 영어를 한다"고 나섰다. 밤새 군인 10여명에게 둘러싸여 심문을 받았다. 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로 무서운 분위기였다. 당시 그는 27세, 결혼한 지 6개월밖에 안 됐을 때였다. 남편이자 동료 활동가인 이호택씨는 중국 쪽에서 상황을 챙겼다.
"한 군인이 나를 옆방으로 끌고 갔다. 침침한 조명 아래 침대 하나가 있었다. 절망적이었다. 하나님이 이런 피까지 필요하신 건가.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랬더니 담이 커지더라."
조명숙은 용기를 내 주머니를 뒤져 20달러를 그 군인 손에 쥐여주었다. 군인은 웃으면서 방을 나갔다. 문이 열리는 순간 경악했다. 밖에는 아까 그를 심문했던 군인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조명숙은 그들에게도 차례로 돈을 쥐여줬고, 결국 탈북자들과 함께 풀려날 수 있었다. 이렇게 힘들게 구출한 탈북자들을 한국대사관으로 데려갔는데 관련국들이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바람에 9명이 실종됐다.
조명숙 부부는 몇 달 후 다시 중국으로 가서 6개월 넘게 수소문한 끝에 실종 탈북자를 모두 찾아냈다. 이듬해 8월까지 남한행을 포기한 부부를 제외하고 7명을 모두 한국으로 입국시켰다.
"그렇게 어렵게 한국에 데리고 온 사람들과 2년 동안 연락을 안 했다. 부담 주지 않으려고. 나중에 보니 애들은 학교를 중퇴했고 어른들은 신용불량자가 됐더라. 북한에선 당이 다 결정해서 학교 보내주고 취직시켜줬는데 여기선 모든 결정을 스스로 해야 하니 적응을 못 했던 거다. 한두 개 몰라야 물어보지 아무것도 모르니까 물어볼 엄두가 안 나더란다. 그래서 이들을 위한 학교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2004년 여명학교 설립… 궁금증이 없는 학생들
학교를 세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탈북자를 위한 활동은 성과가 없다는 패배주의가 퍼져 있었다. 가능한 일이라는 걸 보여줘야 했다.
"2002년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20세 탈북 여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듬해 학생 한 명이 더 늘었다. 지하방을 얻어 '자유터'라는 야학을 시작했다."
주변에선 얼마 안 가 그만둘 거라고 수군거렸다. 그러는 사이 학생 수는 30여명으로 늘었다. 주변의 시선도 달라졌다. 2004년 교회와 후원자, 활동가들의 도움을 받아 '통일의 새벽을 연다'는 뜻을 가진 여명학교를 열었다. 여명학교 재학생은 현재 94명. 그중 23명은 부모가 없다.
―탈북 학생만을 위한 학교가 꼭 필요한 것일까.
"만일 우리 보고 지금 북한에 가서 살라면 6개월 내에 정치범 수용소에 가게 될 거다. 우리나라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도 학교 다니기를 힘들어 한다. 그런데 어떻게 탈북 청소년들이 적응하겠나. 탈북 청소년들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아이들이다.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품고 있다. 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보호와 치유도 병행해줄 공간이 필요했다."
―보호와 치유가 필요하다니.
"낮에 아이들이 웃는 모습을 언뜻 보고 '이 애들에게 무슨 상처가 있겠어'라고 할지 모른다. 밤이 되면 달라진다. 이상한 잠꼬대를 한다. '엄마 피해, 숨어, 도망가' 그런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한 상처가 있는데 그 위에 옷만 입혀 놓은 꼴이라고 할까. 반갑다고 껴안으면 그 상처를 눌러 고통을 주게 된다. 어제까지 별의별 농담을 다 하며 잘 지내다가도, 천안함·연평도 사건이 터진 뒤 '야, 너희 삼촌이 했냐'라는 농담 한마디에 패닉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도 한국에 왔으니 이곳 교육에 익숙해져야 하지 않을까.
"상처를 먼저 치유하지 않으면 공부를 계속할 수 없다. 지식을 줘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눈앞에서 아버지가 처형당하는 걸 본 아이의 마음속 상처가 그대로 있는데 무슨 공부를 하겠나."
―그런 상태라면 수업을 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공부 잘 하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가 있다. '북에 있는 엄마가 결핵에 걸렸다' '가족이 보위부에 잡혀갔다'는 전화를 받은 거다. 그런 일이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있다. 북한과 휴대전화로 실시간 전화를 할 수 있게 된 걸 아이들은 '과학이 혁명한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그 혁명 때문에 아이들의 가슴이 찢어진다. 도울 방법이 없는 것이 더욱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거다."
―북한 학생들이 정말 다르다고 느낄 때는 언제인가.
"이 아이들이 한 번도 궁금증이란 걸 가져보지 않은 것 같다고 느낄 때이다. 우리는 사고력과 창의력을 키운다고 난리다. 이 애들은 질문을 하면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요. 내가 배우려고 여기 온 학생 아닙니까. 선생님이 답을 얘기해 주셔야지'라고 한다."
◇"주민등록증 주는 동사무소 직원 되고 싶어요"
―탈북 청소년들은 어떤 꿈을 갖고 있나.
"동사무소 직원이라는 애들이 꽤 있다. 신분증이 없어 감금당하고 고생했던 아이들이다. 학교 가고 직장 갖고 결혼하는 일상이 이 아이들에겐 기적이 일어나야 가능한 일이었다. 안전하게 보호받는 한 사회의 일원이 된다는 건 기적이다. 주민등록증은 그것을 상징한다. 자기가 가장 기뻤던 순간이 주민등록증을 받을 때였으니, 주민등록증을 주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여명학교의 교육법은 특이하다. 수업 시간은 45분, 일반학교보다 5분 짧다. 2교시가 끝나면 10분간 '업간(業間) 체조'를 하고 매주 금요일 오전엔 남산을 한 바퀴 뛴다. 다들 체력이 약하다.
―영양 상태가 부실해서인가.
"아이들이 축구를 하다가 뼈가 자꾸 부러진다. '고난의 행군' 때 태어났거나 혹은 그때 갓난아기였던 학생일수록 심하다. 그래서 수시로 아이들을 병원에 데리고 간다." '고난의 행군'은 김일성 사망 이후 자연재해 등이 겹치면서 식량이 부족해져 북한 주민 수십만명이 굶어 죽은 시기이다. 1996~97년 절정을 이뤘다. 대안학교 설립 과정에서 부딪힌 장애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임대 건물에서는 학력을 인정받는 학교 설립 인가를 받을 수 없었다. 6년간 줄기차게 싸웠고 결국 인가를 받는 데 성공했다.
―여명학교가 고등학교 과정을 인가받았으니 아이들에겐 좀 여유가 있겠다.
"학력을 인정 못 받으면 검정고시를 봐야 한다. 짧은 시간에 많은 걸 단순 암기 하는 것이라 시험이 끝나면 다 잊어버린다. 하지만 이젠 이 학교에 다닌 것만으로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으니, 남한 적응 교육도 할 수 있게 됐다."
―남한 적응을 위한 교육 과정은 구체적으로 뭘 말하나.
"북한에선 스포츠를 가르칠 때 '이기는 게 도덕'이라고 한다. 아이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승리를 위해 뛴다. 그런 아이들에게 체육 활동뿐 아니라 규칙과 스포츠맨십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걸 모르고 통일 시대를 맞으면 교육은 큰 혼란을 겪을 거다."
―이 학교가 통일을 준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인데.
"중국에서 탈북자 돕는 일을 했을 때 통일이 곧 온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현장에선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촉이 발달한다. 탈북자 학교를 통해 많은 걸 배우고 준비할 수 있다. 하지만 여명학교가 갈 길은 아직 멀고 험하다. 탈북자 중 일부만 북한에서 마친 교육 과정을 인정받고 있고, 여명학교는 일반 학교와 달리 교원 인건비 등을 국가에서 지원받지 못하고 있다."
◇1970년대 어린시절… 빈민 출신, 어머니의 인정(人情)을 물려받다
조명숙 교감은 자신이 빈민 출신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돈을 벌지 못했다. 방 하나인 판잣집에 여섯 식구가 살았다. 학교에 들어가서야 남들은 하루에 밥 세 끼를 먹는다는 걸 알았다.
―세상에 대해 적대감도 컸을 것 같은데.
"대통령 선거 때마다 우리 동네가 TV에 나왔다. 대통령 후보가 저소득층 거주지를 방문해 운동화를 주고 갔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엔 신기하고 좋았지만 클수록 자존심이 상했다. 반항도 했고 방황도 했다. 공부는 당연히 못했다." 그가 열살 때쯤 어머니는 막걸리 장사를 했다. 막걸리 한 잔에 200원 하던 시절이다. 시인 천상병이 단골이었다. 어머니가 아플 땐 어린 딸이 대신 장사를 했다. 어머니는 딸이 술 파는 것이 싫어 그가 중학생이 되자 가게를 접고 공장에 취직했다.
―어머니가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살림이 그렇게 어려운데도 어머니는 걸인이 오면 항상 따뜻한 밥을 해줬다. 내가 고등학생 때 어머니가 구멍가게를 했는데 그때도 물건 대주는 사람, 우체부에게 모두 밥을 해 먹였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왜 그러느냐고 따지기도 했다. 나중에야 그게 인생을 재미있게 사는 방법이란 걸 알았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기질은 어머니를 닮았나 보다." 그가 어렵게 대학을 간 건 어머니의 비수 같은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가 고3 때 어머니는 딱 한마디 했다. '나처럼 고생하며 살지 않으려면 대학에 가라.' 이 말이 가슴에 콱 박혀 삼수 끝에 단국대 한문교육학과에 합격했다.
대학 3학년 때 집으로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은 게 그의 인생을 바꿔놨다. 어느 날 무심코 전화를 받았더니 외국인이었다. 그가 떠듬떠듬 영어를 하자, 그 외국인은 병원에 입원한 친구를 꼭 도와달라고 했다. 그들은 불법 체류 외국인 노동자들이었다.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세상엔 자신보다 훨씬 더 불쌍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렇게 활동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어떤 일을 했나.
"불법 체류 외국인 노동자는 산업재해를 당해도 보상을 못 받았다. 이들이 인간다운 대접을 받도록 데모도 많이 했다. 2~3년 뒤 이들도 산재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보상은 3년 소급 적용이었다. 이미 모국으로 돌아간 사람들을 찾아 동료들과 함께 동남아 각국을 돌아다녔다. 나는 필리핀에 가서 수십명을 찾아냈다.
◇1997년 결혼… 신혼여행 때 만난 탈북자
외국인 노동자 돕는 일이 4년쯤 됐을 때 동료 활동가 이호택씨와 결혼했다. 신혼 여행지는 중국. 탈북자와 운명적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신혼 여행지를 중국으로 택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당시 조선족 상대 사기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였다. 한국에서 일하고 싶어도 비자가 없어 맘대로 들어올 수 없는 시대였다. 이걸 이용해 한국으로 보내주겠다고 사기 치고 돈만 챙겨 달아나는 사건들이 많았다. 남편을 중심으로 2년 정도 억울한 사연을 접수하여 해결하는 일을 했다. 신혼여행 7박8일 중 절반은 여행하고 나머지는 조선족을 만나 현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중국으로 간 거다."
―그런데 어쩌다 탈북자를 만나게 된 건가.
"조선족 동포들이 정말 어려운 사람들이 있는데 꼭 만나달라고 했다. 솔직히 북한 사정은 잘 몰랐고, 그저 몇 명 어려운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쾅 하고 충격을 받은 거다."
―도대체 어떤 상황이었길래.
"죽음의 그림자가 붙어 있는 모습들이랄까. 굶어 죽는 가족을 지켜본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외국인 노동자와 탈북자 중 누굴 위해 일할지 선택하는 상황이 된 건가.
"외국인 노동자들이 성폭행·구타·산재로 고통받는 걸 보면 늘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인류애적인 차원에서 그들을 도왔다. 그런데 탈북자는 좀 달랐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남의 일 같지 않았다. 6·25 전쟁 때 우리 할머니가 북쪽으로 피란을 갔다면 내가 그 사람일 수 있는 거다. 그냥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여행하러 갔던 부부는 일단 중국에 눌러앉았다. 조명숙과 동료들은 산속에 움막을 치거나 시내에 아지트를 구해 탈북자들과 같이 살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버스를 타고 가는데 중국 공안이 들이닥쳐 60대 노인을 오랏줄로 묶었다. 누가 봐도 탈북자였다. 얼굴에 기름기 하나 없고 옷은 20년도 더 된 낡은 군복이었다. 눈이 딱 마주쳤는데 인간의 눈이 그렇게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을 줄 몰랐다. 그는 살려달라는 말을 못했고, 나는 살려준다는 말을 못했다."
조명숙은 남편과 의논했다. 탈북자 돕는 일에 뛰어들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한번 시작하면 목숨을 내놔야 하는 일, 상황은 절박했다. 북한 주민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중국 국경을 넘고 있었다.
―그들을 어떻게 도왔나.
"살게 해주는 거다. 국경에서 사람들을 데리고 안전지대로 와서 건강 회복하게 해주고, 돈이나 식량을 줬다. 90% 정도는 이런 지원을 받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갔다."
―적잖은 돈이 들었을 텐데.
"결혼 자금도 털어서 썼고 결혼반지도 팔았다. 친구와 지인들에게도 도움을 청했다. 양희창 간디학교 교장은 적금을 깼고, 법륜 스님, 김진홍 목사 등도 힘을 보탰다."
―중국 공안의 단속과 감시도 심했을 텐데.
"외국인 노동자 돕는 일을 하면서 조선족 교포 사기 사건을 접수한 게 1만건이었다. 우리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곳곳에 있으니 그들이 우리를 도와줬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을 거다."
―그런 단순 지원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그 참혹한 현실을 한국에 알리기로 했다. '통일강냉이'라는 이름으로 국내 언론에 현장 상황을 전달했다. 이게 보도되면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북한에 쌀 보내기 운동도 시작됐다."
북한과 탈북자들의 실상이 세상에 알려졌지만 이 과정에서 탈북자들 신원이 공개되는 바람에 중국에 더 이상 체류하기 어렵게 됐다. 결국 그 탈북자들을 중국에서 데리고 나오기로 결심했다. 그게 바로 1997년 탈북자 13명을 한국으로 보내기 위한 대장정을 시작한 계기였다.
"재밌는 건 외국인 노동자 돕는 일을 할 땐 우리를 보고 좌파라고 하더니, 탈북자 돕는 일을 하니깐 보수 우익이라 하더라. 우린 달라진 게 없고 돕는 대상만 바뀌었을 뿐인데 말이다."
◇2012년 강제 북송 반대… 차인표는 형부
2012년 국내 언론에 여명학교 학생들이 등장했다. 당시 중국 정부가 탈북자 수십명을 북송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는 집회가 연일 열린 것이다. 여명학교 학생들은 마스크를 쓰고 나타났다.
―그때 학생들은 왜 거리로 뛰어나왔나.
"북송 위기에 처한 탈북자 중에 우리 학생들의 지인이 있었다. 우리 애들이 제일 걱정한 건 그들이 북송 도중 자살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제발 포기하지 말고 살아만 달라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자신들도 그런 과정을 거쳐 탈북했으니까."
그는 탤런트 차인표씨를 '형부'라고 불렀다. 영화 '크로싱' 시사회에 갔다가 우연히 알게 됐다. 이후 가족끼리 왕래할 정도로 친해졌다. 그는 차인표·신애라 부부에 대해 "사람을 위로할 줄 아는 분들"이라고 했다.
―차인표씨가 북송 반대 집회에도 참석했다.
"한 학생이 새벽에 전화를 걸어 '우릴 돕는다면서 왜 가만히 있느냐'고 울부짖었다. 학교에 미칠 파장을 우려해 조심했던 건데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집회에 나가기 전 차인표씨에게 '형부, 아무래도 애들을 보호하려면 내가 나서야 할 것 같아요.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라고 문자를 보냈다. 그랬더니 전화가 왔다. 혼자 어떻게 나가느냐고 함께 가자고…. 동료 연예인 수십명도 함께 왔다. 형부는 그 이후 비자가 안 나와 중국에 가지 못했다." 그는 한 가지 꿈이 있다고 했다. 언젠가 남북한 아이들 모두 행복하게 해주는 학교를 만드는 꿈이다. "부모 마음은 다 똑같다. 애들이 행복한 것. 그건 이념적인 학교는 아닐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언제까지 기다릴 수 있다. 인내력 하나만은 끝내주니깐."
▲지난 26일 조명숙 여명학교 교감이 학교 건물 지하 1층 미술실에서 탈북 청소년이 그린 그림 앞에 앉았다. 이 그림은 중국 공안에 잡힌 여학생이 오랏줄에 묶인 채 북송당하는 장면이다. 여학생 뒤에는 공포의 대상인 북한군이 언제 어디서든 지켜보고 있다는 듯 희미하게 그려져 있다. 탈북 청소년들은 이런 장면이 등장하는 악몽을 많이 꾼다. / 김지호 기자
▲지난 2011년 여명학교 입학생 오리엔테이션 때 찍은 사진. 당시 조 교감이“이렇게 견디고 살아 와 줘서 고맙다”고 말했더니, 한 여학생이 조 교감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 / 조명숙 제공
장일현 주말뉴스부 차장
※ 2014.11.14 북한의 메구미 사망 주장 이유와 일본의 생존 주장 근거는?
▲실종 이전 요쿠다 메구미의 모습. 그녀는 중학교 1학년 때인 1977년에 북한에 납치됐다. /조선DB
요코다 메구미는 일본인 납북자 문제의 상징이다. 메구미는 중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77년에 북한에 납치됐다. 13세 때였다. 2002년 당시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방북했을 때 북한 김정일은 메구미 등 북한이 납치한 일본인 8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북한 측의 메구미 사망 통보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생존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메구미의 소환을 주장해왔다.
일본 언론이 올 3월 몽골에서 있었던 메구미의 딸(김은경)과 메구미 부모의 만남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것도 이런 희망과 관심을 반영한 것이다. 그런 메구미가 북한이 주장했던대로 사망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납북자가족모임 최성룡 대표에 의해서다.
최 대표는 최근 탈북자들 증언 채집 등의 조사를 통해 메구미가 30세 때인 1994년 평양의 한 정신병원에서 숨졌다는 증거를 확보했다고 공개했다. 사망 원인은 북한이 메구미 사망의 원으로 밝힌 자살이 아니고 약물 과다 투여로 독극물을 먹인 의심도 든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메구미를 타살시켰다는 주장인 것이다.
최 대표는 메구미가 입원했던 정신병원에서 근무했던 탈북자 2명이 제3국에서 이처럼 증언했고, 일본의 납치문제대첵본부 조사관 3명도 함께 증언을 청취해 보고서까지 공동 작성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공동조사 자체를 부인했다. 아베 총리도 일본 TV에 출연해 “신빙성이나 증거가 없다”며 메구미 사망 확인설을 부인했다.
메구미는 공작원 김현희 동료의 일본어 교사
이런 논란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왜 북한은 한사코 메구미가 사망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일본은 메구미의 생존 가능성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최 대표의 주장대로라면 메구미는 북한 당국에 의해 타살됐다는 건데 북한이 메구미를 타살시켜야 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던 걸까.
최성룡 대표는 이를테면 메구미 전문가다. 납치 관련 일본 정부 관계자들이 메구미에 관한 단서를 얻기 위해 의존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월간조선≫은 2006년 2월호와 3월호에서 ‘요코다 메구미씨의 남편 김철준은 한국인 납북자 김영남’이라는 사실을 특종 보도했다. 최성룡 대표의 도움을 받은 기사였다. 김철준은 북한이 메구미의 남편이라고 밝혔던 인물이다.
김영남은 1978년 여름 전북 군산 성유도 앞바다에서 납북됐던 인물이다. 당시 북한은 1977년과 78년 두 해에 걸쳐 남한 고교생 5명을 납치해 강제 납북시켰는데 김영남도 그 중 한 명이다.
최 대표는 이들 납북 고교생 5명의 가족을 만나 그들의 혈액과 모발을 채취해 한일(韓日) 양국 정부에 납북 고교생 가족의 DNA와 일본 정부가 2004년 일·북(日北) 협상 당시 평양에서 만나 채취한 메구미의 딸 김은경 양의 DNA를 비교해달라는 공문을 보냈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답이 없었다. 대신 일본 정부는 DNA 검사를 통해 메구미의 남편이 납북 고교생 김영남이라는 사실을 2006년 4월 공식 확인했고 북한도 이를 인정했다. 2006년 6월 금강산에서 있었던 남북이산가족 상봉장에 김영남은 딸 은경 양을 데리고 나와 남쪽의 어머니 최계월씨와 만났다. 최 대표가 메구미의 북한에서의 가족관계를 밝혀내는데 일등공신인 셈이다.
그 전인 2002년 9월, 북한 김정일은 평양을 방문한 당시 고이즈미 일본 총리에게 북한이 일본인 13명을 납치해간 사실을 인정하는 한편 그 가운데 다구치 야에코와 메구미를 포함한 8명은 사망했다고 밝혔다. 생존자는 5명뿐이라는 것이다. 이들 생존자는 2002년 10월 일시 방문 형식으로 일본을 방문했지만 일본 정부는 국내 여론에 밀려 이들을 북한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메구미가 자살했다고 밝혔을 당시 북한이 밝힌 메구미의 사망년도는 1993년이었다. 하지만 북한은 일본으로 돌아간 납치 생존자들로부터 1994년에도 메구미를 목격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메구미의 사망년도를 1994년으로 바꿨다.
북한은 왜 사망년도까지 바꿔가며 메구미가 죽었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는가. KAL 858기 폭파사건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사건의 범인은 북한 공작원 김승일-김현희다. 김승일은 사건을 저지른 후 체포 과정에서 자살했고 김현희는 자살에 실패했다. 북한은 이 사건 발생 후 남한 정부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해왔다. 남한 정부의 자작극이라는 주장의 전제는 살아 있는 김현희씨가 가짜라야 가능한 일이다.
메구미는 김현희가 공작원임을 증언할 수 있는 목격자
▲2006년 5월 16일 오후 서울 송파구 수협중앙회에서 고교생 강제 납북자 김영남의 어머니 최계월씨와 일본인 납치피해자 요코다 메구미의 아버지 요코다 시게루씨가 만났다. 가운데는 납북자가족모임 최성룡 대표. /조선DB
하지만 메구미는 김현희가 북한에서 공작원 교육을 받았던 북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언해줄 수 있는 인물이다. 또한 북한이 납치를 인정하면서 메구미와 함께 사망자로 발표했던 다구치 야에코는 공작원 김현희의 일본어 교사였다. 김현희가 체포된 후 일본인 행세를 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김현희씨는 메구미가 자신이 공작원 교육을 받을 당시 동료였던 김숙희에게 일본어를 가르친 사람이었다고 증언했다. 다구치 야에코와 요코다 메구미 둘 다 KAL858기 폭파사건에 관계가 돼 있는 것이다.
북한은 KAL 858기 폭파사건이 남한의 자작극이라는 주장을 계속해 오고 있다. 남한의 일부 단체나 인사들도 지금까지 ‘김현희는 가짜’라고 주장하고 있다. 두 사람이 생존해 있으면 북한은 원하지 않았음에도 일본인 납치 생존자 5명을 일본에 돌려보냈던 것처럼 일본으로 돌려보내야 할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김정일 스스로 일본인 납치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일본으로 돌아간다면 그들은 공작원 시절 김현희씨를 북한에서 만났고 그녀와 그녀의 동료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다는 증언을 할 가능성이 높다. 그 증언은 북한이 남한의 자작극이라고 우겨왔던 KAL 858기 폭파사건이 김정일 지령에 의한 테러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북한 뿐만아니라 그들의 주장에 동조해온 남한의 일부 인사들에게도 치명타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남한에서 ‘김현희 가짜’ 주장이 일부 좌파적 단체나 인물들에게서 본격적으로 제기됐던 시기는 북한이 그토록 부인해왔던 일본인 납치 문제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했을 정도로 일·북 협상을 통한 일본의 지원을 절실하게 원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미국에 의한 테러지원국 해제 문제 역시 절실하던 시기였다. 북한으로서는 경제난을 해결할 수 있는 탈출구가 일본의 지원과 테러지원국 해제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KAL 858기 사건으로 1988년부터 미국에 의해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되면서 국제사회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는 게 철저하게 봉쇄돼 오면서 경제난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이 역시 남한에서 ‘김현희 가짜’ 논란이 본격적으로 또 무차별적으로 제기되던 때와 맞물려 있는 것이다. 공교롭다고만은 할 수 없는 여러 상황의 맞물림이다.
북한이 메구미 등이 사망했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다.
일본은 왜?
일본은 왜 메구미의 생존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는 걸까. 북한의 사망 주장에 석연찮은 부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북한은 다구치 야에코가 1986년 7월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했지만 김현희씨는 1987년 중국에서 현지화 공작교육을 받고 귀국했을 때도 다구치의 사망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야에코의 사망년도도 일본으로 귀환한 납치자들의 증언 이후 1993년에서 94년으로 바뀌는 등 일본인 납치자 구출회가 북한이 다구치와 메구미가 사망했다는 주장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수없이 많다. 그 가운데는 메구미가 94년 이후에 김정은 또는 김정철의 일본어 가정교사를 지냈다는 정보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4년에는 북한이 메구미의 것이라고 보낸 유골 일부에서 다른 사람의 유전자(DNA)가 검출되는 일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최성룡 대표에 의해 메구미 타살설이 제기된 것이다. 자살이라고 주장하는 북한이나 생존을 주장하는 일본 정부에게나 최성룡 대표의 주장이 쉽게 받아들여질 리 없다.
최 대표는 기자가 “메구미 타살설을 제기한 시기가 왜 일본인 납치자 문제를 놓고 일·북 협상이 난관에 봉착해 있던 시기였나”를 묻자, “발표 시기에 특별한 의미는 없고 이런 보도가 나가면 일본이 북한에 메구미씨 등의 납치자 문제 재조사를 북한에 강력하게 요구할 줄 알았는데 그런 요구 대신 (메구미 사망 관련) 증거가 없다고 나와서 당혹스러웠다”며 “나는 이 사실이 보도되기 하루 전 메구미 문제를 함께 조사했던 일본 측 조사관에게 사실을 알렸다”고 말했다. 최 대표는 또 “국내 언론이 아베 총리나 (메구미 사망설에 신빙성이 없다는) 일본 정부 대변인 격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의 말은 크게 전하면서 일본 납치 담당 부서가 (메구미가 사망했다는 보도에 대해) ‘노 코멘트했다’는 이야기는 왜 축소하려는 지 이해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 납치 담당 부서의 '노 코멘트'가 주는 의미를 잘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어쨌든 최 대표는 메구미가 94년에 타살됐다는 것을 자신이 참여한 조사를 통해서 굳게 믿고 있고 일본 정부는 ‘일본 정부가 승인한 조사 보고서’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불거진 메구미 사망설이 난관에 봉착해 있는 일·북 협상에 또 하나의 어려움을 보태는 일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장기적으로 보면 북한으로서는 자살과 타살이라는 큰 차이가 엄존하기는 하지만 메구미의 사망설을 기정사실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고 일본인 납치자 문제의 상징인 메구미의 죽음을 지금까지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일본은 ‘충격의 완충 지대’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김성동 조선pub 기자
※ 2014-11-15 “北의 ‘메구미 거짓말’ 증거 나와… 전면 재조사 요구해야”
[납북 메구미 조사가 남긴 것]
日정부와 협력조사 뒤 진실 밝힌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
“日정부 대책본부가 직접 질문서 작성… 국민 세금으로 진실 조사해놓고 부정
사람 생명을 정치적 이용하면 안돼”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가 14일 서울 송파구 신천동 납북자가족모임 사무실에서 “‘남북이 한국 납북자들의 전면적 생사 확인에 합의했다’는 뉴스가 하루빨리 나오도록 박근혜 대통령이 전력을 다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사무실 벽은 ‘송환 생사 확인’이라는 글과 함께 수많은 납북자들의 현재 상황과 각종 소식들로 채워져 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정부가 인정한 6·25전쟁 이후 납북자는 517명이다. 그중 탈북에 성공한 사람은 모두 9명. 8명은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62)가 2000년 이후 북한에서 탈출시켰다. 나머지 1명은 스스로 탈북했다. 정부가 공식 귀환시킨 납북자는 한 명도 없다. 통일부 장관들을 상대로 호통을 마다하지 않는 최 대표를 보면 사람들은 두 눈을 부릅뜬 초강성 이미지부터 떠올린다. 그런 그가 13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엄마!”라고 고 김애란 씨(2005년 사망)를 부르며 한참을 울었다. 그가 항상 지니고 다니는 가방 속 붉은 주머니엔 화장한 ‘엄마’의 유해 일부가 있다. 지칠 때마다 주머니를 꺼낸다. 김 씨는 최 대표가 21년간 납북자 구출에 온몸을 던지게 한 버팀목이다.
“납북자를 구출하기 시작한 것은 1993년 ‘어떻게든 납북된 아버지의 뼈라도 구해 오라’는 엄마의 한(恨) 어린 ‘지시’에서 시작됐어요. ‘아부지’가 납북된 뒤 엄마가 생선장사로 모은 돈을 쏟아부었죠. 북한 내부 정보원들이 늘어나면서 납북자 국군포로와 관련된 정보가 내게 모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6·25전쟁 당시 대북첩보 임무를 맡았던 ‘8240유격백마부대(켈로부대)’ 출신 고 최원모 씨. 1967년 납북돼 북한에 의해 처형됐다. 올해 6월 부친의 위패가 대한민국 호국의 성지인 국립현충원에 봉안됐다. 김애란 씨도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11월 7일자 A1면 보도.
최 대표가 손때 가득한 납북자 명단을 보여줬다. 1997년 한국 정보당국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이다. 낱장 여러 개이던 이 명단을 김애란 씨가 과거에 직접 바느질로 다 꿰맸다고 한다. 납북자를 구출할 때마다 최 대표는 이 명단을 보여준다. “명단 순서대로 내려가며 ‘이 사람 아냐’고 묻습니다. 우리 아부지 순서가 될 때마다 가슴이 쿵쾅쿵쾅 떨립니다.”
초강성 이미지 내면에는 분단의 질곡으로 얼룩진 가족의 슬픔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엄마, 아부지’에겐 언제나 아버지가 납북됐던 그해, 열다섯 살 아이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다.
최 대표는 2004년부터 일본 납북자 문제의 상징인 요코타 메구미(橫田惠)와 관련된 정보를 접하게 됐다. 납북자 문제를 오래 다루다 보니 관련 정보가 그에게 몰리기 시작한 것이다. 15일은 메구미가 1977년 11월 15일 납치된 지 37년이 되는 날이다.
▼ “납북자 517명 외면하는 한국 정부, 너무해” ▼
최성용 대표 인터뷰
―메구미의 남편이 납북된 한국인 학생이라는 얘기를 처음 알렸는데….
“2004년 북한 관계자로부터 ‘메구미의 남편 김철준은 한국에서 끌려온 학생’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 직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일본 총리, 당시 일본 외무상, 고 노무현 전 대통령, 현 유엔 사무총장인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에게 ‘한일 정부가 공동으로 조사해 달라’는 청원서를 속달로 보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현 일본 총리가 관방장관이었던 때다.”
―어떻게 됐나.
“한국 정부는 묵묵부답이었다. 일본 정부는 1주일 만에 응답했다. 일본 외무성 고위관계자와 서울 롯데호텔에서 만났다. 일본 정부는 메구미 딸의 DNA를 확보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와 함께 한국에서 납북된 학생 5명의 남쪽 가족 DNA를 구했다. 혹시라도 외교 문제가 될까 싶어 한국 외교부에 전화했더니 ‘대표님이 알아서 하세요’라는 답만 돌아왔다. 통일부는 가관이었다. ‘조사 자체를 안 했으면 좋겠다’고 요구했다. 일본 정부와 협의하는 과정에서 김영남 씨가 메구미의 남편이라는 게 밝혀졌다. 이후 일본 정부의 납치문제담당 부서와 계속 협력해 왔다.”
―이번 메구미 사망 조사에 대해 일본 정부가 부인하는 등 반응이 묘한데….
“메구미 사망 당시 북한 병원에 근무했던 관계자의 존재를 파악하고 일본 정부 납치문제대책본부와 협의하는 과정에서 대책본부가 조사를 결정해 질문서를 직접 만들었다. 일본 국민 세금으로 납치 문제의 진실을 조사한 공무원을 부정하는 정부가 어디 있나.”
―일본 정부가 어떻게 해야 순리에 맞는 것일까.
“메구미의 죽음이 북한 주장과 달리 자살이 아니고 타살이며 북한이 시신을 유기했다는 인권 유린의 증거가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의 거짓말에 초점을 맞춰 진상조사를 요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일본 정부가 솔직하지 않다는 뜻인가.
“북한의 송일호 북-일 국교정상화교섭담당 대사는 협상 때마다 일본 기자들과 저녁 술자리를 하며 공공연히 ‘2002년에 일본에 통보한 공식 납북자에 대한 보고(메구미 등 사망 8명)가 바뀌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내가 만났던 일본의 납치문제담당 고위 공무원들도 메구미의 사망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고 했다. 사람의 생명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면 안 된다.” 그러면서 그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진심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많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어떤가.
“정부가 납북자 생사를 알려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내가 정부에 알리는 실정이다. 상봉은 기회 몇 번 없는 이산가족 상봉 때 비공개로 납북자 몇 명 끼여서 만나는 게 전부다. 북한은 대남 선전에 적합하지 않은 납북자를 모두 ‘생사확인 불가’라고 통보한다. 그간 통일부 장관들을 만나 ‘생사확인 불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거냐’고 물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무기력한 답만 들었다. 정부가 역할을 못하다 보니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처럼 극우적 일본 인사와 납북자 운동을 이유로 손을 잡고, 정부는 이런 한국 단체에 지원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지난해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감에 증인으로 나와 호통을 쳤는데….
“김정일은 일본에 납북을 시인하고 사과했다. 한국 정부는 납북자에 대한 인정조차 못 얻어냈다. 범죄를 쉽게 시인하는 범죄자가 어디 있나. 노력을 해야지. 국회의원들에게 ‘517명이 눈 뜨고 북한에 납치당했는데 전담부서 하나 없다. 그러고도 외국 나가 선진국이라고 자랑하고 다니느냐, 창피하지 않느냐’고 했다. 조국을 위해 죽은 사람도 외면한다. 아버지가 있었던 켈로부대에서 552명이 산화했지만 국회는 예우 법안 통과마저 방치하고 있다.”
―대통령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보는 것인가.
“박근혜 정부가 헌법 가치인 자국민 보호를 포기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든다. 박 대통령이 납북 문제에 관심이 있는지 묻고 싶다. 오히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납북자 가족들을 만나서 위로했다. 박 대통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최 대표는 1977년 납북된 이민교(납북 당시 18세) 씨 얘기를 꺼냈다. 이 씨의 어머니는 지금도 아들을 그리며 집 뒷산 나무를 껴안고 운다고 했다. 매일 아들을 위한 밥상을 차린다고 했다. 하도 껴안다 보니 나무가 닳았다고 했다.
“북한의 범죄를 용서해줄 테니 만나게만 해달라는 게 이 씨 어머니 소원이다. 그 소원 못 들어주면…, 나라도 아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 2014-12-30 심장에 남는 사람 박준재
▲박준재 씨가 숨지기 한 달 전인 2004년 12월 중국 쿤밍에서 찍은 사진.
▲주성하 기자
1996년 초겨울, 연변은 몹시 추웠다. 피골이 상접한 탈북자들이 밤마다 두만강을 넘어 몰려왔다. 거리와 마을은 동냥하는 탈북자로 넘쳐났다.
그때 머리 흰 50대 남성이 나타났다. 그는 연길에선 가장 넓은 축에 속하는 120m²짜리 아파트를 3채나 사서 탈북 고아들을 데려가 돌봤다. 1999년까지 3년 동안 그곳을 거친 탈북 고아는 200명이 넘었다.
그의 이름은 박준재. 미국 시민권자로 제프리 박이라고도 불렸다.
그는 한중수교가 막 이뤄졌던 1992년 즈음 중국에 처음 왔다. 초기엔 흑룡강 성에서 사비를 들여 50여 개의 교회를 만들어 농민들을 전도했다. 미국에서 모텔 사업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던 그가 무엇에 끌려 중국 전도에 나섰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던 중 박 씨는 연변에 탈북자들이 몰려든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곧바로 연길로 자리를 옮긴 박 씨는 흑룡강 성에서 전도했던 조선족들의 도움을 받아 탈북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꽃제비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 알린 것이 박 씨라는 주장도 있다. 당시엔 연변에서 활동하는 한국인도 없었다.
탈북 고아를 돌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중국 공안에 두 번씩이나 체포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미국에 가서 잠깐 돈을 벌고는 그 돈을 들고 다시 태평양을 넘어 지구 반대편 중국으로 날아오기를 50여 차례나 반복했다.
그럼에도 2004년경부턴 더이상 탈북자를 돌볼 수 없었다. 당시 탈북자의 공관 진입이 잇따르자 중국 당국은 대대적으로 탈북자를 검거했다. 박 씨는 도와주던 조선족에게 계속 탈북자를 돌본다는 조건으로 연길의 집 세 채를 넘겨주었다.
2004년 11월 23일 그는 마지막까지 돌보던 10대 부흥이를 포함한 6명의 탈북자를 데리고 연길에서 한국행 길에 올랐다. 하지만 유일한 길이던 베트남 루트는 그 즈음 한국 정부가 베트남에 머무르던 탈북자 468명을 한꺼번에 데려오면서 막혀버렸다. 박 씨는 미얀마 쪽으로 새 루트를 개척하기로 결심했고 12월 초 중국 국경을 넘어 미얀마에 도착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미얀마 주재 한국 대사관에 두 차례나 연락했지만 도와줄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정글 속에서 오도 가도 못한 이들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미얀마를 거쳐 라오스로 가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박 씨는 어느덧 63세의 노인이 됐지만 항상 일행의 맨 앞에서 열대림을 헤쳤다. 정글에서 헤맨 지 7일 만에야 드디어 라오스가 건너다보이는 메콩 강에 도착했다. 밀항선을 구해 보았지만 1인당 1만 위안을 불렀다. 돈이 없었다. 고민하던 박 씨는 마을 시장에 가 튜브를 사려 했다. 시장을 다 돌아봐야 4개밖에 살 수 없었다.
강을 넘기 전 일행은 시장의 한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박 씨가 기도했다.
“하나님, 천국에 가게 해 주세요. 아내에게 미안하고…. 제 아들이 계속 선교활동을 하게 해 주세요.” 무엇을 예감했을까. 그는 이것이 ‘최후의 만찬’이라 몇 번이고 되뇌었다.
일행은 가장 연장자인 박 씨에게 튜브를 양보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이래 보여도 미군 출신이다”라고 주장하며 기어코 여성과 아이들에게 튜브를 넘겨주었다. 그러곤 자신은 배낭만 메고 메콩 강에 뛰어들었다.
유유하게 흐르는 듯했던 메콩 강은 막상 사람이 뛰어들자 사납게 변했다. 일행은 40분 가까이 정신없이 떠내려가다 강 가운데서 보트를 만나 구사일생으로 구조됐다. 일행 중 막내였던 부흥이는 이렇게 회상했다.
“물살이 세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어느 정도 정신이 든 뒤 돌아보니 할아버지는 안 보이고 배낭만 물에서 들락날락하는 것이 보였어요.”
부흥이는 나중에 알았다. 박 씨는 헤엄을 잘 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강가에서 몇 시간째 할아버지를 부르며 목 놓아 울었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일행은 라오스 경찰에 체포됐고 한국 대사관에 통보가 됐다. 하지만 라오스 대사관도 이들을 무시했다. 이들은 목숨 걸고 넘어왔던 메콩 강을 다시 넘어 미얀마 경찰에 넘겨졌다.
미얀마는 이들을 북송하려 했다. 하지만 박 씨의 넋이 이들을 끝까지 지킨 것일까. 미국 시민권자의 실종 사실을 알게 된 미국 정부가 미얀마 한국 대사관에 박 씨의 생사 확인을 요청했다. 그제야 한국 외교관이 나타났다.
미얀마 경찰이 말했다. “여기 들어온 북한 사람은 다 북에 보냈지만 너희는 한국 외교관이 왔으니 한국에 가게 될 것이야.” 정글을 헤맨 지 석 달 뒤 그들은 한국에 왔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2005년 1월 2일 메콩 강에서 탈북자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박준재, 제프리 박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잊어서는 안 될 그 이름을 다시 부르며 소박한 이 글을 그가 머물고 있을 천국에 바친다.
“박준재 할아버지. 당신이 나침반을 들고 처음으로 헤쳤고, 어디엔가 넋이 머무르며 지금도 지켜주는 그 루트를 따라 2만 명의 탈북자가 한국에 왔습니다. 메콩 강에서 당신의 배낭을 건져 올리고 엉엉 울던 막내 부흥이는 얼마 전 컬럼비아대에 입학해 탈북자 최초의 아이비리그생이 됐답니다.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시죠?”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탈북자의 대부 최성용
● 2015년 04월 15일 “北의 납치, 제3국서 지금도 계속… 탈북간첩이 신변 위협도”
▲ 지난 3일 서울 송파구 오금로의 납북자가족모임 사무실에서 최성용 대표가 벽에 걸려 있는, 생사확인이 안 된 납북자들의 얼굴 사진을 가리키고 있다. 김동훈 기자 dhk@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
최성용(62) 납북자가족모임 대표는 납북자와 국군포로를 북한에서 탈출시킨 유일한 민간인으로 국민뿐만 아니라 세계인들로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지난 1967년 북한에 납치된 풍복호 선주 최원모 씨의 아들로 납북자 문제에 대한 정부와 국민의 관심을 얻는 최선의 방법은 북한에 억류된 납북자를 구출하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일까. 최 대표가 2000년부터 직접 북한에서 탈출시킨 납북자는 8명, 국군포로는 12명에 달하고 있다. 그의 ‘납북자 구출운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8240유격백마부대(켈로부대) 전우회장이기도 한 그는 아버지의 사망을 계기로 납북자 구출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납북자 생사확인을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주기를 바라고 있다.
최 대표는 또 2000년 임진각에서 비전향장기수 북한 송환을 온몸으로 막고 2008년 10월에는 백령도 및 동해상에서 납북자 명단이 기록된 전단지 10만 장을 북한으로 날려보내는 등 대북 전단을 살포한 대북 운동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토론회 등 각종 모임에서 공개적인 대북전단 살포를 반대하고 나섰다.
그를 만나기 위해 지난 3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오금로의 납북자가족모임 사무실을 찾았다. 26㎡ 남짓한 사무실 벽에는 납북된 어부와 소년들의 사진 및 편지 등이 잔뜩 붙여져 있었고 책상에는 문서 자료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최근 일부 탈북자단체가 접경지역에서 주민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대북전단을 살포하는 데 대한 입장은 무엇입니까.
“초기 대북전단을 뿌린 사람으로서 상당수의 전단이 북한에 가지 않고 경기 양평 등의 농지에서 발견돼 농민에게 쓰레기 수거비용을 지불했습니다. 전단이 안 가는 줄도 모르고 쇼를 한 데 대해 국민들에게 사과를 하고 싶어요. 북한 김정은이 대북 전단을 이용, 남남갈등을 유발함으로써 도발할 수 있는 빌미를 주고 간첩 수백 명을 보낸 거나 마찬가지죠. 처음에는 납북자 소식도 알고 송환해줄 수도 있다고 생각해 인천 앞바다와 고성 등지에서 어선을 타고 ‘삐라’를 살포했지만 병력이 출동하는 등 긴장이 고조되고 결국 북한을 돕는다는 것을 깨닫고 중단했습니다.
지난해 통일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할 때도 이산가족과 납북자의 생사확인을 위해 시간이 없으니 보수·진보 할 것 없이 대화를 해보라는 차원에서 전단지 살포를 중단한 것입니다. 납북자 및 이산가족 생존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가운데 박근혜정부가 북한과 대화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라도 전단 살포는 중단해야 합니다. 대북 전단살포는 김정은의 존엄을 건드리는 것보다 오히려 북한의 갑질 행위를 돕게 됩니다. 전단이 가지 않았는데도 북한이 항의성명하는 것이 단적인 예입니다.
지난 3월 26일 열린 국회 토론에서도 대북 전단살포가 공개보다는 비공개적으로 이뤄져 북한 당국이 전단을 주워서 항의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왜냐하면 납북자와 국군포로, 이산가족의 생사확인, 상봉에 전혀 도움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주민안전을 우려한 파주시의 중재로 전단살포 대신 납북자 합동위령제를 지낸 적도 있습니다 .”
잠시 멈추더니 자신이 뿌렸던 납북자 명단이 적힌 전단과 천안함 폭침을 규탄한 전단을 보라며 건네주었다.
최 대표는 부친이 중학생 때인 1967년 연평도에서 조업하다 북한에 납치된 이후 주변의 괄시가 싫어 홀어머니 밑에서 반항아처럼 성장했지만 비겁과 불의를 보면 못참는 성격이었다. 가족들이 연좌제로 인한 피해를 보면서도 당당히 군에 입대, 동해안경비사령부에서 복무한 것도 그의 강한 신념과 켈로부대원이었던 부친에 대한 자긍심이 크게 작용했다.
― 납북자 구출을 추진하게 된 주된 이유는 무엇이며 현재 납북자와 국군포로 현황은 어떻습니까 .
“평북 정주 출신인 부친이 1970년 공개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 아버님 유해를 모셔와야겠다는 생각으로 납북자 구명운동을 벌였습니다. 1993년에 비전향장기수 이인모 씨가 북한에 보내질 때 북한에 납북자 송환을 촉구하거나 단순히 납북자 생사확인만을 위한 운동을 했지만 2000년 63명의 장기수가 북한에 보내지고 납북자 1명을 탈출시킨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납북자 구출 운동으로 전환했습니다. 제3국 현장에서 직접 발로 뛰며 어부 이재근 등 납북자 8명과 이완섭 등 국군포로 12명을 구출해 정부당국에 인계했습니다.
특히 납북자 8명의 북한 탈출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납북자는 모두 516명으로 어부 457명, 군인·경찰 30명 , KAL기 납치 11명, 기타 국내 6명(학생 5명 포함), 해외 12명입니다. 이것도 제가 확인해 늘어난 숫자입니다. 이산가족 상봉 시 북한은 대부분 생사확인이 불가하거나 사망했다고 통보합니다. 정부는 납북자에 대해 생사확인만이라도 할 수 있도록 북한에 공식 제안해야 합니다.
북한 지인 덕분으로 활동해 보니까 납북자 탈출시키는 요령이 생기고 성공하니까 또 할 수 있구나 하며 일해 왔습니다. 납북자 하나하나의 소식을 듣고 구출하면 쾌감을 느낍니다. 어머니가 10년 전 돌아가시기 전에 10명을 데려온다고 약속했는데 아직 2명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중국 동포가 납북자·국군포로 정보를 갖고 오는 등 많은 역할을 해왔고 각종 통신수단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서로 가족들과 납북자들이 쓴 편지를 전달해 주고 망설이는 국군포로를 설득해 억지로 데려오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지금 고마워합니다.”
최 대표는 드라마틱한 탈출의 한 예로 가족들이 납북자들에게 보내기 위해 편지글을 빼곡히 적은 하얀 광목을 보여주었다. 정보원이 이 하얀 천을 치마로 만들어 입고 북한에 들어가 납북자에게 소식을 전달했다는 얘기였다. 납북자의 생사확인을 위해 북한의 의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현 정부가 남북관계를 잘 풀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납북자와 국군포로,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색된 남북관계가 개선돼야 한다고 보십니까. “느슨한 남북교류는 필요합니다. 대통령이 납북자·국군포로·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하면 노벨평화상 감입니다. 송환을 바라지도 않지만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장에서 납북자·국군포로·이산가족들을 비공식적으로 만나게 해줘야 합니다. 5·24조치를 해제하고 금강산관광을 재개하는 등 남북관계는 개선돼야 합니다. 핵문제 등 민감한 부분을 제외하고 납북자 전면 생사 확인을 전제로 말입니다 .”
―정부와 정치권이 납북자와 국군포로, 이산가족에 대해 관심을 갖고 보다 적극적인 정책을 이행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자국민 보호차원에서 풀어야 합니다. 6·15공동선언에 납북자 생사확인 등을 넣었어야 하는데 아쉽습니다. 국가가 자국민 보호 의식이 결여돼 있어 외국에서 한국인 납치가 빈번히 발생하는 것입니다. 과거정부는 실패했다고 봅니다. 납북자 문제는 유엔에 의존할 게 아니라 남북 당사자 간에 풀어야 합니다. 8240부대원 556명이 수장됐지만 그 유족 6000여 명은 양재동에 충혼탑을 세우고 바라는 것도 없이 국가에 충성하자고 말합니다.
국군포로도 30여 명밖에 남아있지 않아 가족들은 송환보다 생사확인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는 1987∼2005년 충남 서천 수협에 근무하는 동안 틈나는 대로 서울을 오가면서 납북자들을 구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어머니가 그를 강하게 키운 덕분이었다. 부인도 횟집을 운영하면서 활동비용을 지원해 주었다.
2005년 서천수협 홍원리소장을 그만두고도 배 한 척을 건조해 운영했다. 오로지 납북자들을 세상에 알리고 배로 데려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는 납북자 송환문제와 관련, 2004년 미 의회에서 증언을 한 데 이어 2013년 스위스 제네바 유엔인권이사회를 방문하는 등 국제 활동도 벌였다. 2003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단식농성을 하며 납북피해자 보상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을 이끌어냈지만 위로금만큼은 받지 않았다. 사람을 찾아와야 하는 국가의 책임을 묻기 위해서였다. 생활이 어려워도 그는 켈로부대 추모사업과 안보 강연, 납북자 송환 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납북된 오대양 선원 전욱표 씨를 마지막으로 탈출시켰는데 납북자를 계속 구출하면서 탈북자도 도울 예정입니까.
“한국에 오고 싶다는 정보를 알고 탈출시켰지요. 납북자를 탈출시키기 전에 남한 실상을 얘기해 설득하는 사전작업이 필요합니다. 납북자는 자발적인 탈출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시기적으로 명절 때가 좋습니다. 미 워싱턴포스트지는 제가 무리하게 납북자와 국군포로를 탈출시킨다고 보도하기도 했지만 정부가 안 하니 때로는 억지로 데려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국정부도 납북자를 탈출시킬 경우에는 협조적입니다. 제가 탈출시킨 어부 최우길 씨는 경기도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통영에서 납치된 어업지도선 공무원 최장근과 부친과 함께 납북된 문경식을 추가로 구출할 예정입니다.
그러나 탈북자들은 구출하지 않습니다. 순수한 탈북자도 있지만 제3국에서 탈북자로 위장해 북한보위부를 돕기도 합니다. 탈북자들이 국가와 국민에게 고마워해야 애국심이 생깁니다. 현재 많은 탈북자들이 정부 정착금을 받고 해외에 출국한 후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탈북자 정책을 엄격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월북한 사람도 제외대상입니다.”
―평양에 거주한다는 납북자 21명은 전체 납북자 516명에 포함됩니까.
“평양에서 찾은 21명은 홍도에서 납치된 이민교 , 최성민 등 학생 5명과 서독 유학생들이며 이들의 혈액형 및 DNA를 북한에 공식 요청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들 가운데 이산가족 상봉장에 나온 사람도 있고 간첩양성소에서 일하며 가족을 이룬 사람도 있습니다. 요코타 메구미 남편이 김영남임을 제가 밝혀내기도 했는데 김영남 어머니는 지금도 매일 밥을 떠 놓으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북한이 확인불가로 통보했는데 어떻게든 김영남이를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만나게 해주어야 합니다. 특히 5명의 학생에 대해서 정부가 나서야 합니다. 또 오대양호 사진 2장을 400만 원에 샀는데 추가 납북자가 나왔지요.” 그는 생사를 확인하기 위한 시간이 너무 없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2004년 일본정부와 공동으로 요코타 메구미 남편 김영남에 대해 DNA검사를 했는데 납북자를 바라보는 일본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세기의 사돈인 메구미 아버지와 영남이 엄마를 수협중앙회에서 만나게 했을 때 일본 관계자가 수협건물의 독도 사진을 지우라고 요청했으나 거부한 바 있습니다. 일본정부 및 단체는 납북자 문제에 독도, 일본군 위안부, 교과서까지 포함시켜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등 납북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우리와는 다릅니다. 일본은 메구미가 살아있고 메구미와 김영남이의 딸 은경을 한·일 간 공동의 자식이라고 주장합니다. 일본은 메구미 등 납북자에 대해 북한으로부터 사과를 받아내고 5명 모두 송환시켰습니다. 우리가 단합해 일본에 주장할 것은 해야 합니다.” 잠시 한숨을 돌리고는 아쉬운 듯 한 권의 시나리오를 보여주며 자신의 실화를 테마로 한 영화가 추진됐던 얘기를 꺼냈다.
―납북자 구출에 관한 얘기와 부친의 켈로부대 활동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려고 했는데 왜 무산됐습니까 . “영화제목은 ‘올인’으로 제 얘기(배우 이성재 분)를 실화로 해달라고 했으나 영화사가 투자자를 구하지 못한데다 일본인 메구미를 시나리오에 넣길래 제작을 중단시켰습니다. 탈출과정과 일본인 포함에 대한 이견으로 거부한 것입니다.”
―현재도 북한이 유인 납치를 한다고 보십니까.
“북한의 납치전담 부서가 중국 단둥(丹東)과 선양(瀋陽)에 있고 간첩선보다는 김국기 사건처럼 선교사 및 미국·일본인들을 제3국에서 유인 납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켈로부대원 출신 미국 관광객이 억류된 적이 있지 않습니까. 중국에서 북한에 접근하는 선교사나 민간단체들은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2의 김국기 사건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제3국에서 활동하는 탈북자들이 연루돼 있다고 봅니다. 저의 경호원이 철수하자 탈북자 간첩이 저에게 접근해 신변을 위협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 납북자 정책 가운데 개선할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우리나라는 자국민 보호에 대한 기준이 없어요. 여론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하며 기준이 없어요. 납북자로 밝혀졌는데도 90일 이상 연락이 되지 않으면 법으로 실종자 처리하고 법원에서 실종된 지 3년이 지나면 사망으로 인정하는 그것이 잘못된 것 아닙니까. 납북자 가족들이 연좌제로 인한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해 납북신고 대신 실종신고를 하는 겁니다.
북한에 납치돼 있는데 실종이라니 말이나 되나요. 미 국방부를 방문했을 때 미군 유해발굴단 9명이 북한에 들어가 미군유해를 찾아 돈을 주고 송환해 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엉엉 울었습니다. 납북자조차 해결 못하는 우리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납북자가 이미 북한주민화해 송환은 어렵지만 생사확인이 꼭 필요한 이유입니다.” 최 대표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며 박근혜 대통령의 남은 임기에 반드시 납북자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납북자 전담부서가 설치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들었는데 정부와 정치권에 요구사항은 무엇입니까.
“납북자 전담부서가 총리실 산하에 설치되는 것은 사상 처음입니다. 납북 피해자 보상에 관한 법 개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이지만 여야가 노력해서 통과시켜야 합니다. 정부는 납북자와 이산가족 등 천륜 같은 것은 군사문제와 분리해 북한에 따로 요구해야 합니다.”
인터뷰 = 오명근 차장 (전국부) omk@munhwa.com
■ 2016.03.29 한국의 쉰들러, 탈북자에 무료 점포
갈렙선교회 김성은(52) 목사는 1999년부터 작년까지 탈북자를 구출해오는 데 온 힘을 쏟았다. 16년 동안 수백 명의 탈북자가 김 목사 덕분에 자유를 찾았다. 27일 충남 천안시 갈렙선교회에서 만난 김 목사는 "이제는 탈북자의 한국 정착이 중요한 시점"이라며 "목숨 걸고 한국에 온 탈북자를 이방인으로 만들 수는 없다"고 말했다. 작년 말 현재 한국에 온 탈북자는 2만8600여명이다.
김 목사는 지난해 어머니가 평생 모은 돈과 자신의 전 재산, 은행 대출 등을 합쳐 천안시 서북구에 3층짜리 교회 건물을 마련했다. 단순한 선교 활동용이 아니다. 그는 "교회 건물 1층을 모두 탈북자를 위한 '무료 점포'로 내줬다"고 말했다. 현재 1층에는 'S·P(서울·평양의 영문 이니셜)' 커피전문점과 '햇살 담은 빈티지'라는 간판의 옷가게가 문을 열었다. 탈북자가 점포세를 내지 않고 영업한다. 앞으로 탈북자가 경영하는 문구점과 분식점도 들어설 예정이다.
▲충남 천안 갈렙선교회 건물 1층에는 탈북자들이 운영하는 커피전문점과 옷가게가 자리 잡고 있다. /김명성 기자
김 목사는 "교회 1층 점포에서 보증금·권리금 각 1억원, 월세 120만원을 내고 장사하겠다는 분이 있었지만, 탈북자의 자립 공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거절했다"고 말했다. 그는 "갈렙선교회 건물에서 탈북자가 남한 사회에 정착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 공동체 모델을 만들어 보고 싶다"고 밝혔다. 탈북자 1명에게 교회 점포를 무한정 빌려주는 것은 아니다. 3년 동안 보증금·점포세는 물론 전기료도 낼 필요가 없지만, 그동안 사업 노하우를 터득해 남한 사회에서 자립할 수 있는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김 목사는 "탈북자에게 3년간 '창업 인큐베이터'를 제공하는 개념"이라고 말했다. "최근 한국으로 데려온 탈북자가 '집에 쌀 6포대가 있으니 일을 안 해도 된다'고 말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지금 탈북자에게 필요한 건 '고기(돈)'가 아니라 '고기를 잡는 방법(돈 버는 법)'이다."
교회 2~3층은 탈북 고아와 청소년을 위한 공간으로 꾸미고 있다. 탈북자의 북한 내 가족을 금전적으로 돕기도 하고, 탈북 과정에서 붙잡혀 중국 교도소와 태국 이민자 수용소 등에 갇힌 탈북자에게 생필품을 보내기도 한다. 북한 내 지하 교회도 그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다. 김 목사는 "통일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서도 탈북자의 안정적인 한국 정착이 중요하다"며 "더 많은 관심과 후원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김명성 기자
■ 탈북 꽃제비 9명 돕던 선교사가 밝힌 북송 전모
“중국에서 3년을 같이 산 아이도 있어요. 한 여자아이는 이번에 잡혀가면 4번째 북송된 겁니다. 라오스 이민국에 있을 때 내가 탈진해 링거를 맞으니까 걱정하며 밤을 새워주던 아이들인데….”
꽃제비 탈북자 9명을 돕다가 라오스에서 구금됐던 선교사 주모 씨는 1시간 내내 하염없이 울었다. 동아일보와의 단독인터뷰는 29일 서울 시내 모처에서 진행됐다. 그는 28일 저녁 라오스 이민국에서 추방돼 29일 새벽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그의 인터뷰로 사건을 재구성해봤다.
○ 한국대사관 “탈북자라고 말하라”라고 안내해
▲탈북 청소년 9명의 북송 사실을 단독 보도한 동아일보 29일자 A1면.
5월 10일. 10여 일 동안 중국 대륙을 횡단한 뒤 라오스 북부 우돔사이에 도착하자마자 경찰 불심검문에 걸렸다. 주 씨 부부와 탈북 청소년 9명 등 11명이었다. ‘신분을 밝히라’는 경찰 요구에 주 씨가 “한국에서 온 관광객이다”고 답하자 경찰은 ‘알선 여행사를 전화로 연결하라’고 재차 요구했다. 주 씨는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고 담당자가 경찰과 직접 통화했다. 대사관 관계자는 “이미 북한에서 온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으니 경찰에 협조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고 그대로 따랐다. 경찰은 3번이나 “진짜 북한에서 왔느냐”고 물을 만큼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에 대해 외교부는 “탈북자들이 미성년자여서 인신매매범으로 오해받을 수 있어 불법 입국 사실을 솔직히 말하는 게 낫다고 안내했다”고 해명했다.
“체포 이후부터 서울의 어머니와 현지의 내가 하루 수백 통의 전화와 문자 메시지를 한국대사관에 보냈다. 그때마다 대사관은 ‘우돔사이는 너무 멀어서 못 간다’는 답이었다. 내게는 ‘도청이 될 수 있으니 전화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주 씨)
닷새가 지나자 우돔사이 이민국은 ‘한국대사관으로 데려가겠다’며 이송경비를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1500달러(약 170만 원)를 줬다. 하지만 도착한 곳은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 이민국.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두 번째 북한 요원 방문 때 상황 급변”
5월 20일 한국말을 쓰는 남자 2명이 이민국으로 찾아와 탈북자를 1명씩 조사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조사를 받은 아이들이 “2명이 북한 말을 쓰는 데다 ‘최근 탈북자들이 한국에 갔다가 살기 어려워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는데 너희는 왜 한국으로 가려느냐’고 얘기했다”고 전했다. 한국대사관에 이 사실을 알렸으나 “이민국이 진짜 탈북의사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떠보는 거니까 겁먹지 말라”는 설명이 돌아왔다. 22일 주 씨가 불안해하며 “여기서 한국, 미국대사관이 가까우니 탈출을 시도하면 어떠냐”고 물었으나 대사관은 위험하다며 만류했다.
“16일 수도 비엔티안으로 온 이후 이민국에서 조사를 받으면서도 아이들과 우리 부부는 매일 외출할 수 있었다. 자유롭게 사먹고 자유롭게 시내를 다녔다. 매일 30분 거리의 미국대사관 근처까지 갔고 걸어서 1시간 반∼2시간 거리인 한국대사관까지 가는 방법을 매일 숙지했다.”
금요일인 24일 남자 2명이 다시 이민국에 나타나 탈북자의 자필 사인을 받아갔다. 이민국은 9명의 외부 출입과 면담을 전면 불허하는 등 태도가 급변했다. 외교부도 “‘한국에 신병을 인도하겠다’던 라오스 정부가 23일경부터 ‘시간이 필요하다’며 태도를 바꿨다”고 말했다. 23일 전후로 북한의 공식적인 신병인도 요청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우리는 이민국 3층에서 먹고 자고 했고 2, 3층에서 조사를 받았다. 3층 미팅룸에 누가 오면 1층으로 우리를 몰아넣었다. 아이들 증명사진을 찍고, 자필 사인을 받아간 것이 북한대사관이 아이들의 여권을 만드는 과정임을 뒤늦게 알게 됐다.”
27일 이민국은 “한국으로 데려다 주겠다”며 아이들을 나오라고 했다. 주 씨 부부는 별도로 억류됐다. 창문으로 차가 떠나는 모습을 본 주 씨가 한국대사관에 “아이들을 빼돌렸다”고 신고하자 그때서야 대사관 직원이 이민국에 모습을 드러냈다.
외교부는 “억류 사실이 파악된 10일부터 영사 접견을 요구했으나 라오스 정부가 허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 씨는 “라오스는 현지의 내 지인에게는 3차례나 면담을 허용했고 23일까지는 태도가 온건했다. 한국 정부의 무사안일한 대응이 낳은 참사”라고 강조했다.
“한국 정부는 ‘북한의 신속함이 이례적’이라는 말만 하는데 내가 느낀 건 한국 정부가 우리에게 이렇게 무관심한 게 더 이례적으로 느껴졌다. ‘최선을 다했으니 잘못 없다’는 말만 하지 말고 ‘결과적으로 이렇게 돼 미안하다’는 위로의 말부터 건네야 하는 것 아니냐.”
○ 납북 일본인 확인 땐 북-일관계 충격파
한편 강제 북송된 탈북 청소년 9명 중 일본 정부가 납북 피해자로 인정한 여성의 아들이 있었다는 한국 정보당국의 첩보가 사실로 밝혀질 경우 일본 사회에 적지 않은 충격파가 예상된다. 이지마 이사오(飯島勳) 내각관방 참여(총리자문역)를 최근 북한에 보내 납북자 문제 해결과 북-일 국교정상화 협상을 모색하던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정권도 일본 내 여론의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있다.
아베 총리는 29일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일본인 납치는) 부친(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한 일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는) 기본적으로 납치 행위와 관계가 없다. 새로운 시대의 지도자로서 올바른 일을 한다는 결단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납치 문제의 휘발성을 의식한 발언인 셈이다.
북한은 결국 탈북자 문제에다 일본인 납북자 문제까지 이슈화될 수 있는 불씨를 조기에 진화하기 위해 치밀하고도 신속하게 탈북 청소년들을 압송했다는 관측이 가능하다. 북한은 북한 외교관도 잘 이용하지 못하는 항공편으로 중국을 경유할 단체여행비자와 북한 여권까지 갖춰 탈북 청소년들을 ‘합법적인 북한 여행객’ 신분으로 탈바꿈시키는 행정적 외교적 준비를 완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중국 당국도 이들의 북송에 영향력을 행사할 여지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 정부 관계자가 전했다.
윤완준·조숭호 기자 zeitung@donga.com
▲탈북자들과 탈북지원단체 회원들이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 앞에서 탈북 청소년 9명의 강제북송 사태를 규탄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 정부의 미숙한 대응도 강하게 비판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16-06-17 南에 온 아이들 삶의 나침반이 되다
▲탈북 학생들 돌보는 탈북 교사 최경옥씨
‘코디네이터’로 일하는 최경옥 씨는 탈북학생들에게는 또 하나의 엄마, 탈북학생의 엄마들에게는 무엇이든 물어볼 수 있는 언니 같은 존재다. 인천=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한 뼘 정도 열린 문틈 사이로 조그마한 눈동자가 요리조리 굴러가는 것을 알아챈 최경옥 씨(49·여)가 크게 손짓을 했다. 두 학생의 고사리 같은 손 위로 사탕과 초콜릿 한 움큼이 쏟아졌다. “수업 끝나면 다시 와. 선생님이랑 문제집 같이 풀어 보자.”
최 씨의 직함은 인천 동방초등학교 ‘탈북학생 전담 코디네이터’다. 수시로 최 씨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리코더를 가져오라는데 이게 무슨 뜻인가요?” “파일 속지를 준비해 오라는데 뭔지 모르겠어요.” 가정통신문을 받아든 탈북학생 엄마들이 가슴을 탁탁 치며 연락하면 자세히 설명해 주는 것도 최 씨의 업무 중 하나다.
이 밖에도 최 씨의 수첩에는 ‘1. 가정방문―부모에게 한국의 교육과정 및 학교에서 주로 쓰는 외래어 설명 2. 방과 후 학습지도 3. 학생 개인 상담 4. 학생들과 한국잡월드(청소년 종합직업체험관) 방문’ 등 그의 업무가 빼곡히 적혀 있다.
학교에서는 물론이고 가정까지 찾아가며 이 학교 탈북학생 44명을 돌보는 일은 쉽지 않다. 2006년 사선을 함께 넘어온 아들(고진송 씨·21) 덕분에 얻은 직업이라 그런지 2013년 6월 이후 최 씨는 누가 직업을 물어볼 때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듯하다.
○ 친구 없는 탈북자 아들의 방황
2007년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은 친구들과 밖에 나가 뛰어노는 일이 거의 없었다. 어느 날부턴가 아들이 집에 돌아올 때 시계를 보면 오후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친구와 게임을 하고 왔다니 그나마 다행이라 여겼다. 한국에 온 이후 뭔가를 사달라고 조른 적 없던 아들은 컴퓨터를 원했다. 탈북 과정에서 밥도 제대로 못 먹인 게 안쓰러운 아들인데…. 최 씨의 발은 다음 날 곧바로 전자제품 대리점 문턱을 넘고 있었다.
이게 실수였다는 걸 깨달았을 때 이미 아들의 상태는 심각했다. 컴퓨터 게임을 못 하게 하려고 집에선 악을 쓰는 소리가 종일 들렸다. 컴퓨터를 숨겨버리자 오후 10시가 넘어 전화벨이 울리는 날이 잦아졌다. “여기 PC방인데 댁 아들이 낮부터 지금까지 계속 여기 있으니까, 어서 요금 내고 데려가요.”
PC방에 가보면 아들 자리엔 빵 봉지와 우유팩이 뒹굴고 있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종일 게임에 몰두해 걱정이 된 주인이 준 것이라 했다. 입에선 긴 탄식이, 눈에선 한 줄기 눈물이 나왔다. 최 씨는 동네 PC방을 찾아다니며 “이렇게 생긴 아이가 오면 절대 받아주지 말라”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하지만 아들이 돌아올 때 거실 시계는 여전히 자정 무렵을 가리켰다. ‘내년이면 너희도 고교 입시생’이란 말을 듣기 시작했을 때도 악순환이 계속됐다.
최 씨의 손가락이 힘겹게 ‘전문 치료병원’이란 곳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꼭 입원해야 하나요?” “좋아질 수 있는 거죠?”라는 질문이 전파를 타고 저 멀리 병원으로 건너갔다. 결국 ‘장기입원치료 동의서’에 사인을 했다. 철문이 쾅 닫히며 아이가 입원병동으로 들어간 순간 최 씨도 주저앉았다. ‘행복하려고 온 건데….’ 집에 돌아온 최 씨의 눈은 퉁퉁 부었다.
초중고교에 재학 중인 탈북학생은 2008년 966명에서 지난해 2475명으로 늘었다.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해 탈북학생의 학업중단율은 2.2%다. 2008년 10.8%보단 좋아졌지만 일반 학생의 학업중단율(0.8%)에 비하면 크게 높다.
아들은 다행히 두 달 뒤 다시 교복을 입었다. 무표정하게 가방만 메고 학교를 오가는 사이 아들은 중학교 3학년이 됐다. 아이의 표정을 바꾼 건 담임교사가 최 씨를 부른 날 이후였다. 담임교사는 “진송이를 예고에 보냈으면 좋겠다”고 했다. 예고? 인생에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미술교사가 첫 달 치 학원비를 내줬고 이후부터는 학원에서 50%를 할인해 줬다. 엄마조차 몰랐던 재능을 알아봐 준 교사 덕분에 아들은 지난해 홍익대 회화과 합격증을 손에 쥐고 펄쩍펄쩍 뛰었다.
○ 아들 같은 아이들 없도록…
▲홍익대 회화과에 입학한 고진송 씨가 학교 적응이 힘들어 게임중독에 빠졌던 시절을 보낸 모교에 지난해 그려준 벽화. 최경옥 씨 제공
“아이고, 북한에선 엘리트셨네요.”
탈북 직후 최 씨의 경력을 들은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말했다. 북한에서 최 씨의 초등학교 교단 경력은 8년. 한 달 월급으로 고작 쌀 1∼2kg을 살 수 있었지만 출퇴근할 때면 동네 사람들이 다들 쳐다보는 게 일상이었다. 남한에 들어오기 직전 머릿속에선 ‘북한에선 상위 1%만 가는 대학을 졸업해 교사로 오래 일했으니 남한에서도 교단에 설 수 있을 거야’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원을 나온 뒤 그의 손에는 생활정보지가 들려 있었고 눈은 ‘아파트 입주 청소 하실 분 구합니다’라는 공고만 찾고 있었다.
기회는 우연히 왔다. 딸이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코디네이터’라는 사람이 가정방문을 왔다. “저도 북한에서 선생님이었어요”라는 그의 말에 최 씨의 귀가 커지는 듯했다. 아들 같은 아이들이 더는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절차를 밟아 코디네이터가 된 뒤 최 씨의 이름이 적힌 자격증도 사회복지사 미술치료상담사 자살예방상담사 등 여러 개 생겼다. 아이들을 정말 열심히 돕겠다는 욕심에서였다. 통일부 산하 남북하나재단에 따르면 최 씨 같은 탈북학생 전담 코디네이터는 현재 전국 21개 학교에 21명이 근무하고 있다. 모두 북한 교사 출신이다.
탈북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최 씨는 아들이 왜 게임에 빠졌었는지 이해하게 됐다. 주변의 ‘관심’이 부족한 탓. 탈북학생들은 대개 위축돼 있는데 말투나 북한 관련 이슈 등으로 친구들로부터 소외되기 시작하면 학교생활에 적응하기가 어렵다.
“코트 선생님.” “코치 선생님.” 탈북학생 엄마들은 외래어가 낯선 탓에 최 씨를 이렇게 부른다. 하지만 언제든 전화를 걸어 상담할 수 있는 최 씨가 있어 든든하다고 한다. 최 씨는 올해 3월 ‘탈북학생 교육지원 사업’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상도 받았다. 최 씨의 꿈은 통일 후 ‘남북 통합교육’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인천=최예나 기자 yena@donga.com
■ 2018.02.26 [탈북자 3500명 구출한 '수퍼맨'] - 인터뷰
"北대표단의 미소와 평화 선전만 보고… 그 뒤에 감춰진 本質을 못 봐"
"銃聲이 나고 일어서려니 오른발이 젖은 것 같았다
운동화가 일자로 찢겼고 갑자기 통증이 느껴졌다"
"태국 루트로 탈출시킬 때 일곱 번의 인계인수 거쳐
안내자는 정말 위험한 직업… 대부분 2년 안에 적발돼"
'긴급'이라는 제목의 이런 메일이 종종 날아온다.
〈평창올림픽과 남북단일팀 등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지만, 소리 없는 전쟁으로 인해 늘 쫓기고 숨는 것이 일상인 북한 난민들, 혹한의 추위 속에 떨고 있는 이들에 대해선 관심이 멀어지고 있지 않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어젯밤, 탈북한 모녀와 20대 초반의 여성이 도움을 요청했습니다(중략).
세 명의 북한 난민을 구하려면 6백만원가량이 소요됩니다. 이 여성들은 지금 여러분의 도움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불안에서 벗어나 편안히 살 수 있도록 도움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구호금 입금 계좌 및 계좌명: 우리은행 142-097009-01-201 북한인권시민연합〉
이는 북한인권시민연합의 김영자 사무국장이 보내오는 것이다. 그녀는 탈북자 구출을 위해 후원금을 모으는 역할을 맡고 있다.
"중국 선양(瀋陽)을 기준으로 북한 난민 한 명을 데리고 들어오는데 실비로 약 200만원이 듭니다. 우리 단체는 그 경비를 모으는 일만 맡고, 실제 이들을 구출하는 사람은 따로 있어요. 우리는 그를 '수퍼맨'이라고 불러요. 그는 중국과 북한에 협력자와 조직을 갖고 있어요. 그는 지금까지 3500명쯤 구출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수퍼맨’은 “한국에 온 탈북자들은 북한 독재 정권의 증언자들”이라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음지(陰地)에서 활동해온 '수퍼맨'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54세의 목사였다.
"이 일은 숨어서 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지금껏 해왔지만,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가 20년간 왜 이렇게 해왔는지 알릴 필요는 있지 않을까, 그동안 만난 북한 사람 수천명을 통해서 본 독재 정권의 변치 않는 본질을 얘기해줘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북한 체제에 대해 아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정작 너무 모릅니다. 평창올림픽 기간 북한 대표단의 미소와 평화 선전 공세만 봤지 그 뒤에 무엇이 감춰져 있는지 안 보려고 합니다."
그는 신학대를 나왔지만 곧바로 목회자 코스를 밟지 않았다. 대학원에서 전공을 국제경제학으로 바꿨다. 사회에 나와 섬유업체를 운영했고, 1990년대 중반 중국에 진출해 원단 수입업을 했다. 1997년 국내 본사가 부도나면서 사업 기반이 무너졌다고 한다.
"어느 날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그때 중국의 옌지, 선양, 다롄의 역전(驛前)에서 떼 지어 다니며 구걸하던 '북한 꽃제비'들이 떠올랐습니다. 수많은 북한 주민들이 굶어 죽은 '고난의 행군' 시기에 아이들은 생존을 위해 중국 땅으로 넘어왔으니까요. 중국 공안은 대대적인 단속에 들어갔습니다. 하필 죽으려는 순간에 '내 형편이 저 애들보다는 낫지 않은가, 내가 죽었다 치고 저들을 위해 한번 살아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스쳐 간 겁니다."
그는 콩, 참깨, 장뇌삼 등 중국 농산물을 수입하면서 자신의 계획을 추진했다. 거주하던 집을 저당 잡혀 빌린 돈으로 옌지, 선양, 다롄 등에 쪽방을 얻었다. 공안의 단속을 피해 탈북자들이 숨어지낼 수 있는 은신처를 만들어준 것이다. 그가 보호한 탈북자 수는 1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의 아내도 봉제공장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도왔다.
"1999년 가을에 옌지(延吉)의 은신처로 한 남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풍계리 핵 실험장 터널공사에 관여한 기술자였습니다. 자신을 중국 바깥으로 탈출시켜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북한 난민을 보호만 했지 탈출시키는 일은 그때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중국 공안이 이곳을 덮쳤습니다. 그를 포함해 4명이 체포됐습니다. 공안에게 뇌물을 줘 두 명은 빼냈지만, 그는 결국 북송됐습니다."
그 사건이 있고서 그는 북한 난민을 탈출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몽골 루트'를 선택했다. 그는 조선족 통역과 함께 탈북자 4명을 환자로 위장시켜 병원에 데리고 가는 것처럼 열차를 탔다. 탈북자들은 한밤중에 국경을 넘어 몽골의 고비사막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첫 번째 탈출은 성공했다.
그는 중국 변경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대대적인 탈북 계획을 세웠다. 몇 주 뒤 탈북자 6명을 다시 데리고 왔다. 낮에 국경 사전 답사를 갔던 조선족 통역과 탈북자가 밤이 돼도 돌아오지 않았다.
"느낌이 안 좋아 나머지 탈북자들에게 다른 곳에 피신해 있으라고 했습니다. 한밤중에 조선족 통역이 전화를 걸어와 '공안에 붙들렸습니다. 사장님이 우리를 구해주세요'라며 울먹였습니다. 그 전화를 받고는 도망갈 수도 없었습니다. 얼마 뒤 공안이 들이닥쳤습니다."
피신했던 탈북자들은 그 뒤 국경을 넘어 몽골로 탈출했다. 그는 '서방의 간첩'으로 몰려 조사받았다.
"좁은 방에서 높은 의자에 앉혀 묶어놓고는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받았습니다. 여자 공안이 할퀴고 뺨을 내리갈겼습니다.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공포감이 대단했습니다. 조선족 통역의 아내가 보석금 1700만원을 내줘 두 달 만에 풀려났을 때 몸무게가 14㎏이나 빠져 있었으니까요."
그가 귀국하자, 이 소식을 들은 국경없는의사회와 일본인 인권운동가 등이 그의 보석금을 대신 갚아줬다.
"중국 감옥의 경험은 오히려 제가 가야 할 길을 분명하게 해줬던 셈입니다. 본격적으로 북한 난민 구출에 뛰어들었으니까요."
몽골 탈출 루트가 너무 알려져 위험해지자, 그는 태국과 라오스 루트를 개척했다. 열차나 버스를 타고 중국 쿤밍(昆明)까지 와서 접경지역에서 메콩강을 따라 내려오는 루트였다.
▲태국 감옥에 갇혔을 때. 오른쪽이 ‘수퍼맨’.
―세간에서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을 '탈북 브로커'라며 낮춰보는 시각도 있지요?
"처음 일을 할 때는 '이게 비즈니스가 될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탈북자 한 명당 얼마를 남기면 돈 버는 계산이 나오니까요. 실제 그렇게 접근한 브로커들은 대부분 끝이 안 좋았습니다. 설령 이득을 남긴다 해도 사실 따지고 보면 몇 푼 되지 않습니다. 가령 '태국 루트'로 탈출시킬 때 안내자끼리 일곱 번의 인계인수 과정을 거칩니다. 경비 200만원을 받아서 7명이 나누면 얼마 안 됩니다. 게다가 이들 안내자는 대부분 2년 안에 적발됩니다. 정말 위험한 직업입니다."
―북한에 있는 주민을 한국까지 데려오는데 200만원이 든다는 뜻입니까?
"북한에서 중국으로 데려 나오는데 1500만원, 중국 국경지역에서 선양까지 데려다주는데 약 350만원입니다. 저는 주로 선양에서 우리나라로 데려오는 일에만 관여합니다. 탈북자들을 인계받아 이동시키고 중국을 벗어나는 데 약 일주일 걸립니다. 작년에만 186명이나 왔으니, 이 탈북 루트에는 늘 탈북자들이 서 있는 셈입니다. 이 때문에 저는 한시도 방심을 못 합니다."
2004년 그는 태국에서 다시 체포됐다.
"탈북자들은 중국 쿤밍에서 관광객으로 위장해 메콩강 유람선을 타고 대여섯 시간쯤 내려옵니다. 저는 태국의 국경도시인 치앙마이에 숙소를 잡아놓고 이들을 받습니다. 그날은 마침 덴마크의 왕자가 이 지역을 방문했습니다. 경비가 강화되면서 우리 일행이 눈에 띄었을 겁니다. 체포된 뒤 두 발에 족쇄를 차고 태국 감옥에 갇혔습니다. 재판에서 9개월 형을 받았지만, 보석금을 내고 두 달 만에 풀려났습니다."
그의 오른쪽 엄지발가락에는 총상(銃傷)도 남아 있다. 인신매매에 처한 북한 여성을 구하기 위해 중국 국경 마을의 한 집에서 마피아와 몸값 협상을 하다가 그렇게 됐다고 한다.
"저는 돈이 없으니까 그쪽에서 제시한 액수를 깎으려고 했지요. 그렇게 합의를 이룬 뒤 '지금은 그 돈이 없고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말하자 그 친구는 흥분했지요. 그냥 겁주려고 방아쇠를 당겼을 겁니다. '땅' 소리가 나고서, 제가 일어서려니 오른발이 젖은 것 같았습니다. 운동화 밑바닥이 일자로 찢겨 있었고, 갑자기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다행히 발가락에 스쳐 지나갔습니다."
―중국 인신매매단이 어떻게 당신을 알고 연락해오는 겁니까?
"제가 중국에서 오래 활동해 왔으니까요. 며칠 전에는 '탈북 여성 3명을 팔아넘기겠다. 한 사람당 1000만원씩'이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한 명당 3백만원으로 협상한 뒤 송금해주겠다고 했지만 어떻게 돈을 마련합니까. 그 여성들은 팔려갔습니다. 이런 일을 하면 눈물을 많이 흘리게 됩니다."
―탈북자는 법적으로 한국 국민이고, 우리 정부는 이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현실에서는 정부가 아닌 민간이 개별 후원에 의지해서 하는군요.
"정부는 안 합니다. 통과된 북한인권법 안에는 북한 난민을 구출하고 돕는 내용이 없습니다. 돈을 주면 한 생명을 구하고 한 인생을 바꿀 수 있는데도 외면합니다."
―탈북자 구출에는 현실적으로 돈 문제에 맞닥뜨리는군요.
"제가 데려온 탈북자들이 정착하면 후원금을 내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 돈으로 또 구해올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탈북자 1000명을 데리고 왔을 때까지 그렇게 후원금을 내주는 이들은 단 두 명밖에 없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29번이나 이사를 했습니다. 의료보험료를 70개월 동안 못 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일을 계속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들이 그런 체제에서 삶을 살아왔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받아들였습니다. 거짓말하고 속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겪었던 고통과 불행을 알면 마음이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일을 해오면서 보잘것없는 저 혼자라도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섰습니다. 한국에 온 탈북자들은 북한 독재 정권의 증언자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북한에 남은 가족에게 송금도 합니다. 그런 돈과 정보가 북한을 바닥에서 변화시킬 겁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천안함 주적' 김영철이 내려왔다. 우리 정부의 특급 대접을 받으며.
조선일보 최보식이 만난 사람
■ 2016-10-06 탈북(脫北)과 망명(亡命)의 유래
▲중국 내 북한 식당에 파견됐던 북한 종업원 13명이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이후 북한 당국의 외화 상납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2016년 3월 탈북해 다음달인 4월 한국에 입국했다. (사진 통일부 제공)
요즘 북한을 빠져나와 한국을 비롯해 다른 나라로 가서 정착하는 사람이 많이 늘고 있다. 뚜렷한 최근의 추세는 빠져나오는 북한 사람들의 신분과 계층이 점차 더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세습 왕조 식의 공산독재라는 형용을 머리에 이고 있는 나라 북한, 그 가혹한 왕조 식 전제에 시달리다 결국 그곳을 도망쳐 자유를 찾는 사람들이 바로 탈북자(脫北者)다.
‘탈북’이라는 단어는 근래에 만들어진 새 조어(造語)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북한(北)을 빠져나오다(脫)’라는 뜻. 중국 정부는 2002년경 제법 많은 탈북자들이 베이징(北京) 주재 외국 공관의 담을 넘는 사건이 벌어지자 이들에 대한 처리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초기의 중국 외교부는 ‘탈북자’라는 한국식 명칭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불법으로 (중국의) 국경을 넘은 사람’이라는 의미의 ‘不法越境者(불법월경자)’ 등으로 호칭했다. 탈북자의 수가 많아지면서 그 중국식 명칭은 원래의 뜻에 가까운 ‘북한으로부터 도망친 사람’이라는 의미의 ‘逃北者(도북자)’로 바뀌었다. 이제는 ‘탈북자’라는 한국식 명칭도 혼용하고 있다. 탈북의 행위는 결국 ‘망명(亡命)’이다.
이 망명이라는 단어는 일차적 한자 의미만으로 볼 때는 이해가 쉽지 않다. ‘죽다’ ‘사라지다’ ‘없다’라는 뜻의 亡(망)이라는 글자에, 목숨을 의미하는 命(명)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목숨이 사라지다? 그냥 죽는 것? 죽은 목숨?…. 뭐, 이런 식의 의문이 이어질 수 있다.
중국 고전에 등장하는 이 ‘망명’이라는 단어의 뜻풀이는 대개 이러하다. 우선 앞의 亡(망)은 ‘빼내다’ ‘없애다’의 의미, 뒤의 命(명)은 ‘이름’ 또는 ‘호적’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단어의 뜻은 ‘(원래 살던 곳에서) 이름을 지우고 빠져나감’이다.
이 때문에 망명은 도망(逃亡)과 동의어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망명은 또 ‘죽음을 무릅쓴다’는 의미도 있다. ‘없다’라는 앞 글자의 새김, ‘목숨’이라는 뒤 글자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사용한 경우다. 이 뜻은 다시 발전해 ‘목숨 걸고 덤빈다’의 의미도 획득했다.
그러나 한국식 한자 사용은 ‘정치적인 동기 등에 따라 살던 곳을 빠져나와 다른 곳에 정착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해외에 주재했던 북한 외교관, 특수 계층 출신이랄 수 있는 해외 북한 식당 종업원, 김정은의 건강을 옆에서 챙겼던 권력 핵심부의 전문가들도 이제는 탈북 행렬에 뛰어들고 있다.
청와대는 이런 사실을 미리 알았던 것인지, 북한의 붕괴 가능성에 탈북을 장려하는 발언까지 하고 있다. 사물이 궁극에 달하면 상황은 전변(轉變)으로 치닫기 십상이다. 북한의 완고하며 잔혹하기 짝이 없는 지배 체제도 이제 끝장에 닿는 상황인지 모른다. 늘 대비해야 하는 일이 북한의 급변 사태다. 동토(凍土)에서 벌어지는 많은 상황을 특별히 주시해야 하는 때다.
<한자풀이>
脫(벗을 탈, 기뻐할 태): 벗다. 벗어나다. 벗기다. 사면하다. 풀다. 나오다. 빠지다. 떨어지다. 거칠다. 소홀하다. 잃다. 혹시. 만일. 전부. 매우. 기뻐하다 (태).
北(북녘 북, 달아날 배): 북녘, 북쪽. 북쪽으로 가다. 달아나다, 도망치다 (배). 패하다 (배). 등지다, 저버리다 (배). 나누다, 분리하다 (배).
越(넘을 월, 부들자리 활): 넘다, 건너가다. 넘기다, 넘어가다. 초과하다. 지나다, 경과하다. 빼앗다. 멀다. (물정에)어둡다. 어기다. 흐트러지다. 떨어뜨리다, 떨어지다. 드날리다.
亡(망할 망, 없을 무): 망하다, 멸망하다, 멸망시키다. 도망하다, 달아나다. 잃다, 없어지다. 없애다. 죽다. 잊다. 업신여기다, 경멸하다. 죽은, 고인이 된. 없다 (무).
命(목숨 명): 목숨, 생명, 수명. 운수, 운. 표적, 목표물. 명령, 분부. 성질, 천성. 말, 언약. 규정, 규칙.
<중국어> 脫北者 tuōběizhě: 일반적으로는 脫 대신 逃táo를 더 많이 쓴다. 그러나 脫北者로 표기하는 경우가 점차 느는 추세다.
越境 yuèjìng: 국경 등의 경계선을 넘는 행위. 훌쩍 건너뛴다는 뜻의 跨越kuàyuè라는 단어도 많이 쓰인다.
亡命 wángmìng: 우리의 ‘망명’과 같이 쓰인다. 이 단어와 비슷하게 쓰이는 게 ‘보호를 요청하다’라는 뜻의 尋求庇護(寻求庇护 xúnqiúbìhù)다. 앞의 尋求는 ‘찾다’ ‘요구하다’, 뒤의 庇護는 ‘보호’ ‘피난’ 등의 새김이다.
流亡 líuwáng 이리 저리 떠도는 流落, 그리고 逃亡이라는 두 단어가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다. 직접적으로 ‘망명’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영토를 빼앗겨 해외에 떠도는 망명정부를 일컬을 때 흔히 流亡政府 líuwángzhèngfǔ라고 한다.
유광종(劉光鍾) 뉴스웍스 콘텐츠 연구소장
■ 탈북민 3만명 시대
[1] 2015.03.09 '脫北民 3만명' 그들의 꿈도 보듬자
의사·교사 등 전문직 脫北 533명, 관련 취업은 10%뿐 "탈북자 지원은 통일준비 위한 투자… 경력 활용 도와야"
2012년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 최순임(가명·43)씨는 지방의 한 방직공장에서 생산직 노동자로 일하며 한 달에 150만원을 벌고 있다. 식구가 없어 그럭저럭 끼니 걱정은 없지만, 하루 8시간 이상 기계와 씨름하다 보니 온몸에 근육통이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픈 몸보다 최씨를 괴롭히는 것은 "왜 굳이 남한까지 넘어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하는 자괴감이다.
최씨는 탈북하기 전까지 북한에서 내과 의사로 일했다. 15년여 경력을 쌓으면서 안정적인 생활을 누렸다. 하지만 "북한 체제에는 미래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탈북을 결심했다. 북한에서의 경력을 살려 남한에서도 의사 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컸다. 그는 탈북자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퇴소한 후 바로 의사면허 시험을 준비했다. 하지만 북한에서 제대로 된 영어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최씨에게 영어 원서 교재는 넘기 힘든 벽이었다. 게다가 북한과는 판이하게 다른 유형의 국가고시 시험을 접하고는 결국 의사의 꿈을 접었다. 그는 요즘 공장 외엔 주변과 접촉을 거의 끊은 채 신세 한탄을 하는 날이 늘고 있다.
조강현(가명·37)씨는 북한 교원대학을 졸업한 후 함경북도에서 초등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2009년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온 뒤에도 학생들을 가르치길 원했다. 하지만 조씨의 교사 경력을 인정하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그는 막노동, 대리운전, 치킨 배달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는 "자존심은 버린 지 오래"라며 "돌이켜 보면 이곳에서도 교사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너무 순진했다"고 했다.
통일부에 따르면 작년까지 의료·교육·법률·군사·정보통신 등 전문 경력을 가진 탈북자는 533명이다. 이 중 관련 분야에 취업한 사람은 10%에 그쳤다. 나머지는 막노동이나 식당일 등을 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2014년 말 현재 탈북자 수는 2만7518명으로 '3만 탈북자 시대'를 코앞에 두고 있다. 김병로 서울대통일평화연구원 교수는 "탈북자 관리는 통일 준비를 위한 투자"라며 "전문직 탈북자들의 경력을 살리고 빈곤의 늪을 헤쳐나올 수 있도록 유도하는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북한에서는 ‘엘리트’ 대접을 받던 이들 상당수는 남한에서 사회의 하위층으로 전락한 상태다. 북한에서 지질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다 현재 경기도에서 노동 일을 하고 있는 정모씨는 “모든 탈북자들이 다 고생하기 마련이지만, 북한에서 좀 대접받고 살았던 엘리트층은 ‘목숨 걸고 압록강·두만강을 건넌 대가가 이런 것이냐’는 생각에 더 적응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평양의대 임상의학부를 졸업한 뒤 북한에서 30년간 의료활동을 한 탈북 의사 최희란 서울의대 통일의학센터 연구원은 “나는 밤을 새우며 영어 단어를 외워 남한에서 간신히 면허를 따긴 했지만, 전문의는 포기했다”며 “나이가 들어서 나온 의사들은 한국에서 면허를 따기가 거의 불가능한 구조”라고 했다.
정부도 전문직 출신 탈북자들의 경력 단절 현상에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점을 뒤늦게 파악, 의사·교사·공무원 취업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남북하나재단)은 교사 출신 탈북자들을 전문 상담사로 채용하고 있다. 임민혁 기자
김명성 기자
[2] 차별 받는 '외딴 섬'
직장서도 - "탈북자들은 불만 많다" 꺼려
학교서도 - 北연평도포격 때 班친구들 "너희 나라로 꺼져" 책상 빼
결혼 때도 차별의 벽 - 南 출신과 결혼 26%뿐
"식당일 알아보려 전화해서 '탈북자'라고 하니 '우린 탈북자 안 쓴다'며 바로 끊어버리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조선족'이라고 거짓말하고 감자탕집에 취직했어요."
2008년 탈북한 오모(여·51)씨는 일자리 구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차별 대우를 떠올리며 가슴이 울컥했다. "왜 조선족은 되고 탈북자는 안 되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식당 사장의 말을 듣고 더 서러웠다고 했다. 사장은 "조선족은 돈 벌어 고향 가서 가족들과 잘살겠다는 목적이 뚜렷해서 더러운 꼴을 봐도 그냥 넘기는데 탈북자들은 조금만 안 좋은 대접을 받으면 '목숨 걸고 내려왔는데 왜 우릴 차별하느냐'고 불만을 터뜨리니 다루기가 힘들다"고 했다. 오씨는 "남한 사람들 눈에 우리가 이렇게 비치고 있다는 생각에 비참했다"고 했다.
▲탈북자들이 밀집해 살고 있는 서울의 한 임대아파트촌에 철망이 둘러쳐져 있다. 이곳에 사는 탈북자들은“우리끼리 몰려 살다 보니 한국 사회에서‘소외된 섬’으로 격리된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오준영 인턴기자
탈북 여대생 정경미(가명·22)씨는 2010년 연평도 포격 사건 때 같은 반 친구에게 참기 힘든 모욕을 당했다. 반에서 일진회 멤버 중 한 명이 다짜고짜 "너 간첩이지. 김정일한테 우리 얘기 막 다 전하는 거 아니냐"라고 몰아붙였다. 다른 친구가 "무슨 소리 하는 거냐"고 막았지만 "닥쳐, 이 빨갱이 같은 X"이라고 욕을 했다. 정씨는 "온몸이 떨리고 화가 나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며 "처음으로 내가 이들과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절감했다"고 말했다. 정씨 주변의 다른 탈북 여학생은 연평도 사건 다음 날 아예 책상이 없어졌다고 한다. 반 아이들에게 "내 책상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너희 나라로 꺼져"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탈북자 상당수는 이 같은 '차별과 편견의 벽'에 부딪히며 산다. 남북하나재단(이사장 정옥임) 측은 "탈북자들이 차별·무시를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문화적 소통 방식의 차이'와 '탈북자에 대한 부정적 편견' 때문"이라고 했다. 통일부 관계자는 "북한에 대한 거부감을 탈북자들에게 그대로 투영하는 잘못된 인식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고 했다. 탈북자 학교인 '하늘꿈나무'의 강윤희 교무팀장은 "한 탈북 학생이 학원 수강을 하고 싶어 문의했더니, 학원 측에서 '탈북자를 받으면 다른 학부모들이 싫어한다'며 거부했다"고 말했다.
탈북자들은 결혼에서도 차별을 받고 있다. 2007년 북한에서 혼자 탈북한 최모(여·29)씨는 "남자 친구가 집에서 반대할까 봐 내가 탈북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며 "조만간 상견례를 해야 하는데 솔직히 털어놓을지, 아니면 대행업체에서 '가짜 부모님'이라도 구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탈북자 전문 결혼정보회사인 '남과북'의 박지아 대표는 "한국 남성들이 처음에는 북한 여성이 순종적이고 순진하다는 기대와 막연한 호기심 때문에 선을 보지만, 문화적 이질감과 서로 다른 생활 방식 때문에 피로감을 느끼고 결국 피하는 경우가 많다"며 "반면 북한 여성들은 한국 남성들이 젊고 예쁜 여자만 찾는다고 기분 나빠 한다"고 했다. 국내에 온 탈북자 중 남한 출신과 결혼한 사람은 전체의 25.6%에 불과하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일반 국민의 47.2%는 북한 출신과 결혼이 꺼려진다고 답했고, 별 거리낌이 없다는 답은 19%에 그쳤다. 탈북자들이 한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하려면 남한 출신과 쉽게 결혼할 수 있어야 하는데, 북한 출신이라는 사실이 '결격 사유'로 작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황대진 기자
오준영 인턴기자(중앙대 신방과 4년)
윤재민 인턴기자(서울대 언어학과 4년)
2013.03.28 탈북자 경력 논란, 누가 돌을 던질 수 있나
탈북자 출신 첫 국회의원인 새누리당 조명철 의원이 지난 15일 학력 위조 누명을 벗었다는 보도 자료를 냈다.
작년 4월 조 의원이 총선 비례대표로 출마하자 탈북자 이모씨가 "석사 학위에 해당하는 김일성종합대학 준박사를 박사 학위로 허위로 기재해 선거법을 위반했다"며 고발했고, 이에 조 의원은 "귀순 당시 한국 정부의 결정에 따라 학력과 경력을 표기했을 뿐"이라고 맞섰다. 검찰은 "혐의가 없다"며 불기소 처분을 내렸고, 이씨가 불복해 재정신청을 내자 법원은 이를 기각함으로써 학력 위조 시비는 일단락됐다.
하지만 조 의원의 학력 논란은 그동안 쉬쉬해온 문제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는 계기가 됐다.
조 의원의 학력 문제를 제기한 탈북자 이모씨에 대해선 또 다른 탈북자가 나타나 "이씨의 일부 경력은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등 이름이 알려진 탈북자들의 경력 관련 의혹이 인터넷 게시판을 달궜다.
국내 입국 탈북자 수가 2만4000명을 넘어서면서 당초 '공산대학 교수' '인민군 군관' 등으로 알려져 있던 인물들의 경력이 과장됐거나 위조된 것이라는 증언이 잇따랐다. 러시아 유학을 다녀왔다고 주장하는 피아니스트에 대해선 "재능도 있는 친구가 왜 경력을 과대 포장하는지 모르겠다"며 주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다고 한다.
북한군 군의관 출신으로 알려진 탈북자는 TV에 출연하면서 '김일성만수무강연구소' 연구원 출신이라는 경력이 슬쩍 추가됐다. 최근 TV에 자주 나오는 탈북 여성은 "나는 김일성의 주치의였다"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으나 사실과 다르다는 소문이 확산되고 있다. 일부 탈북자들이 '김씨 왕조(金氏王朝)'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과장해서 증언하는 경우도 있으나 "북한에 있을 때 김정일을 만났다", "김일성 앞에서 공연했다"는 등의 '과시성 증언'도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극히 일부 탈북자들에게 국한된 이야기지만 탈북자 사회에 대한 신뢰를 허물 수 있는 심각한 문제다.
이들이 학력이나 경력을 속이거나 부풀려도 불이익을 받지는 않는다. 북한에서 높은 지위에 있었다고 주장할수록 각종 강연이나 TV 출연 기회가 늘어나고 생계에 도움이 된다. 한국 사회에서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과장'과 '거짓말'이 생계에 도움이 된다면 그런 성공 사례는 탈북자 사회에서 아주 빠르게 소문이 나고 동경의 대상이 된다.
국내외 언론의 책임도 크다. 자극적인 소재에만 관심을 갖다 보니 탈북자들의 경력 위조를 대충 눈감아주고, 그러다 보면 검증되지 않은 학력과 경력이 자꾸 만들어지는 것이다. 관계 기관도 거짓인 줄 알면서도 "탈북자들의 인권 사생활 침해 우려가 있다"며 방치하는 듯한 인상이다. 하기야 탈북자들이 국내에 들어와 맨 처음 수용되는 '하나원'에서부터 이들을 재교육하고 정착시키는 노력에 소홀하고, '귀찮은 존재'쯤으로 대접해온 것이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 아닌가.
탈북자를 "배신자"라고 저주하고 북한의 3대 세습을 옹호하는 따위의 인간들이 국회에 들어가는 상황에서 탈북자들이 우리 사회에서 신분 상승 가능성을 절망적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반대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라도 신분 상승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는 한 '먹고살기 위한 거짓말' 정도는 약과일지도 모르겠다. 거의 매일 지도급 인사들의 논문 표절과 파렴치 행각이 주요 뉴스가 되는 사회에서 사선(死線)을 넘어온 그들에게 누가 돌팔매를 던질 자격이 있겠는가.
조선일보
2013-10-12 탈북자 납치 노린 ‘탈북자 위장 간첩’ 늘었다
2003년 이후 10년간 적발된 간첩 49명 가운데 42.9%인 21명이 탈북자로 위장해 국내에 잠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의 주된 임무도 탈북자 동향을 감시하고 이들을 납치해 북한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민주당 심재권 의원(서울 강동을)이 법무부로부터 제출받아 11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03년 이후 공안당국에 검거돼 구속된 간첩은 49명이었다.
시기별로 보면 노무현 정부 때는 14명이었지만 이명박 정부에선 31명이나 됐다. 올 2월 박근혜 정부 출범 후 9월 말 현재까지 구속자는 4명이다. 이명박 정부 이후 정권 차원의 간첩 검거 의지가 강했고, 공안 조직과 예산이 증가한 점이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탈북자로 위장한 간첩이 대폭 늘어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탈북자 위장 간첩 21명 가운데 노무현 정부에서 구속된 사람은 3명에 불과했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14명으로 늘어났다. 박근혜 정부 출범 후 구속된 간첩 4명은 모두 탈북자로 위장한 간첩이었다.
위장 탈북 간첩을 소속 기관별로 보면 우리의 국가정보원에 해당하는 국가안전보위부(보위부)가 절반에 가까운 10명(47.6%)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정찰총국(대남작전 및 비정규전 담당) 5명, 군 보위사령부(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친위부대 격) 3명, 조선노동당 35실(공작활동 및 비자금 조성 담당) 1명, 기타 2명 등으로 조사됐다. 공작원 남파를 담당해온 225국(과거 대외연락부) 소속은 없었다.
이에 대해 1995년 ‘부여 무장간첩 사건’으로 검거됐던 김동식 씨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탈북자 검거 전담기관이 보위부여서 보위부 소속이 많은 것 같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보위부 소속 간첩의 경우 활동을 탈북자에 집중했다. 지난해 탈북자의 재입북을 유도한 혐의로 구속된 김모 씨, 올 들어 탈북자를 북한으로 데려간 혐의로 구속된 채모 씨가 대표적인 사례다.
정찰총국 소속 간첩은 고위층 출신 탈북자 암살이 임무였다. 2010년 남파된 정찰총국 소속 간첩 3명은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암살을 시도했고, 2011년에 남파된 정찰총국 소속 안모 씨는 탈북해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로 활동하고 있는 박상학 씨 살해가 임무였다.
2003년 이후 10년간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는 2만2076명. 탈북자 위장 간첩의 증가는 한국 사회에서 탈북자에 대한 인식을 악화시키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통일부에 따르면 재입북 탈북자는 13명으로 집계돼 있지만 실제 숫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 언론매체에 등장해 재입북 사실을 공개한 사례만 집계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탈북자에게 남파 간첩이 접근해 재입북을 권유하고 실제 재입북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늘어날 경우 탈북자 사회를 흔들어놓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한편 공안당국은 탈북자 위장 간첩 수가 늘어난다고 해서 다른 형태의 간첩활동이 줄어드는 건 아니라고 설명했다. 공안당국 관계자는 “전체 남파 간첩 가운데 검거되는 수가 극소수이고, 자생(自生) 간첩이 늘고 있기 때문에 경계심을 늦춰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조숭호·김철중 기자 shcho@donga.com
2013-10-15 구멍 숭숭 뚫린 탈북자 관리
북한을 탈출해 국내에 들어온 탈북자 2만5560명 중 796명이 ‘거주지 불명’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가운데 689명은 제3국에 체류 중이며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 사람과 구치소에 수감된 탈북자도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남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살한 사람도 26명이다. 우리의 탈북자 관리에 큰 구멍이 뚫려있음을 보여준다.
최근 5년 동안 한국인의 난민(難民) 신청을 받은 국가가 한국 정부에 지문 확인을 요청한 155건 중 126건(81.3%)이 국내에 정착한 탈북자였다. 처음부터 한국에 살지 않고 제3국으로 가기 위해 탈북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탈북자 51명은 국내에 들어온 뒤 이민의 길을 택했다. 탈북자도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제3국으로 이주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한국 정부로부터 적지 않은 액수의 지원금을 타낸 뒤 그 돈을 챙겨 제3국으로 가는 식이라면 곤란하다. 현재 정부는 정착금 직업훈련비 등의 명목으로 탈북자 1인당 최소 2000만 원에서 최대 4800만 원까지 지급하고 있다. 북한에서 탈출한 4인 가족이 모두 성실하게 직업훈련에 임한다면 1억 원이 넘는 탈북자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외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기 위해 한국 사회가 탈북자를 정치적으로 박해하고 사회적 차별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과장하는 탈북자들도 있는 듯하다. 위장 망명을 알선하는 조직도 활개를 치고 있다. 그동안 탈북자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영국은 최근 한국 정부에 “위장 망명자를 데려가라”고 요구했다. 캐나다가 한국을 ‘특별 관심국가’로 지정해 한국인에 대한 망명 심사를 강화한 것도 이에 따른 부작용이다.
2003년 이후 검거한 간첩 49명 가운데 21명(42.9%)이 탈북자로 위장해 국내에 잠입했다는 사실도 충격적이다. 이들 간첩은 국내 탈북자 동향을 파악하고 탈북자를 납치해 북한으로 다시 데려가는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탈북자 간첩이 늘어날수록 다른 탈북자들은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데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북한이 국내 요인이나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인사를 납치하고 테러를 가하는 데 탈북자 간첩을 이용할 가능성도 높다.
탈북자들이 국내에 들어온 뒤 뿌리를 잘 내려야 훗날 남북통일이 이뤄졌을 때 남북한 사회를 잇는 가교가 될 수 있다. 국내 탈북자들을 아우르는 ‘작은 통일’조차 이루지 못하면서 7500만 한민족이 하나 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동아일보
2013.12.27 '북조선 서울 임시정부' - 조선 박정훈 칼럼
장성택 사태 때 각 방송에서 쏟아진 북한 보도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그 많은 탈북 출연자가 없었다면 방송사들은 어떻게 방송을 메웠을까. 한국 사회 곳곳에 포진해 활약하는 탈북자가 그렇게 많다는 사실부터 놀라운 일이었다. 이들은 북한 민주화 운동을 통해 실시간으로 얻는 정보력, 그리고 자신의 북한 체험을 토대로 사태의 본질을 실감 나게 풀어주었다.
북한 내부에 네트워크를 박은 탈북자 그룹이 다른 전문가를 압도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북한 총리의 사위였던 강명도 교수(경민대)는 장성택과 김정남(김정은의 이복형)의 접촉 사실을 알렸다. 북한군 장교 출신의 김성민 대표(자유북한방송)는 북한 발표 전에 일찌감치 장성택이 총살됐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물론 억측도 있고 틀린 사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탈북자들 아니었다면 우리는 북한의 난해한 정변(政變) 방정식을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 틀림없다.
장성택 사태는 우리가 의식 못했던 탈북자들의 존재 가치를 새삼 일깨워 주었다. 북한에 큰일이 터지자 우리가 왜 이들을 필요로 하는지 발견하게 된 것이다. 알고 보니 탈북자들은 북한을 보는 우리의 눈이자 귀였다. 앞으로 북한에서 긴급 사태가 터지면 현지 사정에 어두운 우리를 대신해 손과 발 역할도 할 것이다. 탈북자 집단은 언젠가 닥쳐올 북한 변혁을 위해 시대가 미리 선물해준 통일 자산(資産)이었다.
탈북자들은 인권이라는 북한의 아킬레스건(腱)을 사정없이 파고들고 있다. 강철환은 요덕수용소를 전 세계에 고발했고, 신동혁은 14호 정치범 수용소의 실태를 폭로했다. 전 세계가 북한 주민의 참혹상을 알게 된 것은 전적으로 탈북자들 덕이었다. 이들 아니었다면 유엔이 매년 북한 인권 결의안을 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탈북자들이 한국에 와서 조직한 단체는 100여개에 달한다. 그 상당수가 북한 민주화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다. 중국 등지에 떠도는 탈북자를 구출하거나 북한에 민주화 복음(福音) 방송을 쏘고 전단을 날려 보내기도 한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매일같이 듣고 보는 이런 활동이 대개는 탈북자 단체가 주도하는 것이다. 북한은 이들이 얼마나 미웠던지 간첩을 보내 탈북자 운동가(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를 살해하려 한 일도 있다.
탈북자들은 나태해진 남한 사람을 대신해 사상전(思想戰)의 선봉에 서기도 한다. 이석기 재판 때 탈북자들은 통합진보당 당원들과 몸싸움까지 벌여가며 '노숙 방청(傍聽) 투쟁'을 벌였다. 북한 정권을 비호하는 종북(從北) 세력에 몸을 던져 맞서는 것도 탈북자들이다. 때로는 과격하다는 지적도 받지만, 이들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북한 문제를 보는 눈은 무디어질 대로 무디어져 있을 것 같다.
사선(死線)을 뚫고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는 2만6000여명에 달한다. 북한 인구(2300만명) 1000명 중 한 명꼴로 와 있는 셈이다. 수적으로도 만만치 않지만 구성원 분포를 보아도 북한의 축소판 같은 대표성이 있다. 한국에 적응 못 하는 일부 일탈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나 많은 탈북자가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국회의원 1호까지 배출됐고 사업가·학자·예술인 등으로 성공한 탈북자도 적지 않다. 탈북자 집단은 북한 개혁의 전위부대로 활약하기에 충분한 역량(力量)을 갖추고 있다.
얼마 전 한 탈북자 단체가 김정남을 지도자로 옹립하자는 서명운동을 펼친 일이 있다. 김정남을 내세운 데는 갸우뚱하는 반응이 많겠지만 '북한 림시(임시) 망명정부'라는 단체 명칭이 눈길을 끌었다. 단순한 인권 차원을 넘어 '김정은 이후'까지 겨냥한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100년 전 독립투사들은 '상하이 임시정부' 깃발 아래 민족해방운동을 펼쳤다. 지금 탈북자들이 하고 있는 것이 바로 북한 해방운동이다. 북한 정권의 잔악함을 못 이겨 탈출한 그들이 북한의 체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탈북자 사회는 출신 지역과 신분에 따라 복잡하게 분열돼 있다고 한다. 이제 북한 변혁이란 대의명분 아래 힘을 결집할 때가 됐다. 만약 범(汎)탈북자 조직이 탄생한다면 명칭은 '북조선 임시 망명정부'로 해주길 바란다. 북한 급변 사태를 겨냥한 대안(代案)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황장엽 같은 거물급이 망명해 합류해 준다면 범이 날개 다는 격일 것이다.
조선일보 박정훈 칼럼
2014.03.29 14명 뿐인 탈북자 박사…
도무지 귀가 안 열려
영어 표현까지 섞인 탓에 남한말, 北과 개념부터 달라
대학 강의 6개월간 들어도 용어·서술체계 등 못따라가
박사 따도 달라진 건 없더라
3040 남한 박사들 더 많아 맞는 직업 구하기 힘들어
정치·외교 등 특정 분야서 北실상 증언자로 주로 활동
"탈북자들이 한국에 와서 자리 잡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신뢰받을 만한 백그라운드(background)가 없어서다. 석·박사 학위를 따는 것은 그런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이었다."
'탈북 박사' 이애란(50) 북한전통음식연구원 원장은 지난 21일 "학위가 없을 땐 어떤 이야기를 해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학위를 받은 후엔 잘 인정하고 동의해주더라"고 말했다. 이 원장은 지난 1997년 탈북해 한국에 온 후 2008년 이화여대에서 식품영양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원장처럼 탈북 후 한국에 와서 박사 학위를 받은 탈북자는 2014년 3월 현재 총 14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됐다. 북한에서도 고학력자였던 이들은 박사 학위 취득이 "남한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기 위한 방편"이자 "낯선 한국 사회를 배워나가는 과정"이었다고 했다.
◇'남한어'와 영어가 어려웠다
통일부에 따르면 2013년 12월 현재 국내에 입국한 탈북자 수는 2만6124명. 박사 학위를 받은 14명은 이들 가운데 약 0.05%에 해당한다. '탈북 박사' 14명 중 남성이 8명, 여성이 6명이다. 이들 중 10명은 북한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나머지 4명은 군인 출신(2명)이거나 대학 중퇴자(2명)이다. 대졸자 출신의 탈북 박사 중엔 의사와 약사였던 이도 각각 1명씩 있고 '준박사'도 2명 있다. 준박사란 1996년 이전 북한에서 남한의 석사에 해당하는 학위를 부르던 명칭이다.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에서 근무했던 장진성 뉴포커스 대표는 "준박사는 북한의 대학 한 곳에서 연평균 3명 정도가 배출됐다"며 "북한의 대학이 약 20개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북한의 준박사는 한국에선 거의 박사급"이라고 말했다.
이런 '북한 고학력 엘리트'에게도 한국은 낯설고 뿌리내리기 힘든 땅이었다. 지난해 동국대에서 북한학 박사 학위를 딴 김영희(49) 한국금융정책공사 북한경제팀장은 과거 한 인터뷰에서 "남한 사회에 적응하려면 유념할 일이 여러 가지"라면서 "나를 완전히 바꾸고 무한히 낮춰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힘들었던 경험 때문에 '후배' 탈북자를 돕겠다며 공부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도 있다.
지난달 연세대에서 통일학 박사 학위를 받은 주승현(33)씨는 "'분단의 피해자'로서 같은 처지인 탈북자를 돕고, 또 통일에 이바지하고 싶어 공부를 계속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7월 사단법인 '북한 체제 트라우마 치유 상담센터'를 설립한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유혜란(51) 겸임교수 역시 "대인 관계 등의 문제로 괴로워하는 탈북민을 돕고 싶었다"고 했다. 유 교수는 지난해 2월 이 대학원에서 상담학 전공 박사 학위를 땄다.
탈북자가 완전히 다른 체제하의 교육기관에서 박사 학위를 받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우선 북한에서는 잘 쓰지 않는 영어와 한자, 컴퓨터, 낯선 '남한어' 등이 문제였다.
지난 2011년 동국대에서 북한학 박사 학위를 받은 김병욱(51)씨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탈북자 출신 학자 선배로부터 '강의를 들어도 6개월간 귀가 안 열린다'는 말을 들었는데, 알고 보니 영어와 남한어 때문이었다"고 했다. 북한에선 러시아어를 썼는데 한국에선 영어를 많이 쓰고, 한국말까지도 북한과 개념이 달라 이해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애란 원장도 남한의 한국어에 대해 "용어와 서술 체계 등이 북한과 완전히 다르다"고 말했다.
지난 2012년 경북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같은 해 통일교육원 교수로 임용된 정은찬(45) 교수에겐 처음 접한 '오리지널' 자본주의 경제학이 어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는 "북한에서도 자본주의 경제학을 배우긴 했지만 사회주의 경제의 우월성을 부각하기 위한 비교 차원이었다"면서 "한국에서 배운 자본주의 경제학과는 완전히 달랐다"고 말했다.
수백만 원에 이르는 등록금과 생활비도 큰 난관이었다. 탈북 박사 중 상당수가 "박사 학위를 따는 동안 직장 생활이나 강연, 아르바이트 등을 병행했다"고 했다. 북한에서 약사로 일하다 탈북해 지난해 2월 북한대학원대에서 북한학으로 박사 학위를 딴 이혜경(49) 박사는 "공부하는 동안 신문 배달, 전단 부착, 영화·드라마 엑스트라 출연 등을 했다"면서 "(영화·드라마에) 밤새워 출연하면 6만~7만원씩 벌었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한국 학생처럼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선·후배가 없으니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맥이 없다는 것도 어려움이었다.
◇박사가 되고 나니
낯선 남한 사회와 학교에 적응해가며 어렵게 공부해 박사가 된 후 이들의 삶은 달라졌을까. 대부분은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고 했다. 지난달 이화여대에서 북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현인애(57) 전 NK지식인연대 부대표는 "탈북자들은 오히려 박사 학위를 따고 나서 더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30~40대 젊은 '남한 박사'가 워낙 많아 탈북 박사들이 이들과 경쟁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현 전 부대표는 "'남한 박사'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박사 학위를 따는 것보다 이에 걸맞은 직업을 구하기가 더 힘든 것 같다"고 말했다.
남한 사회가 엘리트 교육을 받은 탈북자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2012년 충남대에서 농생명공학 박사 학위를 딴 이윤걸(45)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대표는 "탈북 박사가 지닌 전문성과 특수성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지 못하고 있다"면서 "정치, 외교, 군사 등 특정 분야 전문가만 북한 실상의 '증언자'로 활용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지난 1997년 탈북자 최초로 건국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탈북 1호 박사' 안찬일(60)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탈북자와 자신의 처지를 부평초에 빗댔다. 물 위에 떠 있는 풀처럼 여전히 이 땅에 뿌리내리는 데 어려움이 많다는 것이다.
지난 20여년 동안 탈북자 수는 놀라운 수준으로 늘었다. 통일부에 따르면 1990년대 중반까지 국내로 들어오던 탈북자 수는 매년 수십 명 수준이었다. 지난 2001년 처음으로 1000명을 넘어선 이후 연간 평균 2000명대를 기록하고 있다. 몇몇 탈북 박사는 "탈북자들의 정착과 취업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어려운 상황에서 탈북자 수는 점점 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직접 나선 이들도 있다. 지난 2011년 한세대에서 유비쿼터스 박사 학위를 취득한 정국용(56) 한민족직업능력진흥원 원장은 직업학교인 한국입체교육정보원을 운영 중이다. 그는 "탈북자는 영어, 남한어, 컴퓨터 등에 미숙해 노동부에서 정해준 직업교육 시간만으론 취업이 불가능하다"면서 "이들에게 무료로 반복 교육을 제공해 실제 취업을 하도록 돕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이혜경 박사는 다음 달 23일 탈북자 중 고문 피해자를 지원하는 단체인 '새 삶'을 창립(創立)하고 학술 대회를 열 예정이다. 이 박사는 "나 자신부터 탈북 후 딸을 데리러 재입북했다가 보위부에 잡혀 고문을 당했다"면서 "탈북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던 이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 한시라도 주춤거릴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허자경 기자
2015.02.24 세끼 잘 챙겨먹어서 탈… 脫北者 '풍요의 역설'
[국내 거주 700명 건강 추적] -
30代, 질병에 특히 취약
'고난의 행군' 때 출생·성장… 體內 혈당조절 기능 떨어져
잘먹으면 혈압·혈당 치솟는 대사증후군 발생 위험 커
37세 여성 최모씨는 탈북해 서울에서 지낸 지 6년이 됐다. 그동안 음식을 잘 챙겨 먹으면서 입국 당시 52㎏이던 체중이 58㎏으로 늘었다. 키가 160㎝가 채 안 돼 과체중 상태가 됐다. 이 정도 변화인데도 혈압이 치솟아 고혈압이 생겼다. 공복 혈당치도 오르고, 중성지방도 정상 수준으로 보는 150mg/㎗을 훌쩍 뛰어넘은 177로 나왔다. 그는 최근 건강검진에서 대사증후군 진단을 받았다. 이는 고혈압·고혈당·고지혈증 등이 동시다발로 생기면서 심혈관 질환 발생 위험이 큰 상태다.
이처럼 북한에서 성장기와 청소년기를 영양 결핍 상태로 보낸 탈북자들이 국내에 들어와 영양 상태가 좋아지면서 급속히 서구형 질병 발생 위험에 내몰리고 있다. 이른바 '풍요의 역설'이다. 현재 국내에는 약 3만명의 탈북자가 거주하고 있다.
◇대사증후군 급증하는 탈북자들
고려대 의대 내분비내과 김신곤 교수팀과 예방의학교실, 미국 존스홉킨스대 보건대학원 '난민과 재난 대응 국제건강센터'팀은 2008년부터 국내 거주 탈북자 700여명의 건강 상태를 추적했다. 관찰 기간은 3.5년에서 최대 7년이다. 연구팀은 39개 항에 대한 건강 설문과 일대일 면접 조사를 하고, 매년 건강검진을 시행해 탈북자들의 질병 패턴을 연구했다.
그 결과, 30대 탈북자들의 건강이 요동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30대 탈북자 남자는 입국 당시 같은 나이대 남한 남자보다 키가 6㎝ 작고(평균 166.5㎝) 체중이 9.5㎏(평균 62.8㎏) 가벼웠다. 30대 탈북 여성은 키가 5.1㎝, 체중은 6.0㎏ 적었다. 40~50대 남녀 탈북자도 키가 남측보다 작으나 그 차이는 2㎝ 정도고, 60대는 남과 북이 같았다.
문제는 남한 거주 이후 체중 증가로 인한 몸의 변화였다. 입국 후 8년 가까이 되면 남한 평균 체중에 접근했는데, 애초에 체중이 적게 나가 30대 탈북자의 복부 비만 비율은 5.6%이다. 같은 나이 남한의 30대 복부 비만 비율은 31.8%다. 탈북자 복부 비만율은 남측의 6분의 1 수준이다. 하지만 체증 증가로 인한 대사증후군 비율은 탈북자가 14.5%, 남한이 16.7%로 거의 같다. 즉, 30대 탈북자는 살이 조금만 쪄도 대사증후군에 매우 취약한 상태인 것이다. 이런 현상은 탈북자 전체에서 나타났으나 30대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고난의 행군 세대'의 비극
북한은 1990년대 대규모 기아 사태를 겪으며 아사자가 속출했다. 그 시기가 30대 탈북자들은 성장기, 청소년기와 맞물린다. 그런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저체중으로 출생한 데다 혈당을 조절하는 췌장 용량이 작다. 고려대 의대 조사 결과 혈당을 조절하는 호르몬 분비 용량이 이들은 남한 같은 나이 사람의 70% 수준에 머물렀다. 조금만 많이 먹어도 고혈당 상태가 된다는 의미다.
아울러 오랜 기간 영양 결핍 상태였기 때문에 음식을 먹으면 영양분을 체내에 어떡해서든 지방으로 장기 저장하려는 체질이 됐다. 이럴 경우 같은 양의 식사를 해도 체중이 급속히 늘고 비만이 되기 쉽다. 그런 몸이 남한에 와서 영양 섭취를 충분히 하다 보니 혈당과 혈압, 지방질이 치솟는 대사증후군이 급속히 늘어나는 것이다. 실제로 국내 입국 당시 자기 체중의 5% 이상 몸무게가 늘어난 탈북자는 그렇지 않은 그룹에 비해 대사증후군 발생 위험이 10배 높았다. 이 상태에서는 수년 내 당뇨병과 심장병 환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김신곤 교수는 "실질적인 통일이 됐을 때 북한 주민에게 어떠한 질병 변화가 올 수 있는지를 예측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라며 "성장 환경에 따라 체중 조절과 신체 활동 증진 등 건강관리 지침을 전략적으로 짜야 한다"고 말했다.
김철중 의학전문기자
2016.07.27 탈북민들의 실태
2016-08-31 탈북자 차별을 막는 길
이제 만나러 갑니다’는 개국과 함께 시작된 채널A의 장수 예능 프로그램이다. 채널A의 ‘잘살아 보세’ 역시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 두 프로그램 모두 동 시간대 시청률 1위에 오르고 있다. 무엇보다 두 프로그램 모두 주요 출연진이 탈북자들로 꾸며진 게 특색이다. 긴 분단에 따른 이질감을 드러내 보이면서도 섞이고 부대끼며 남과 북이 생활 문화를 절충해가는 모습이 호응을 얻고 있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아직도 ‘탈북자’라는 호칭에 둘러쳐진 벽은 높기만 하다. 최근 두 탈북자의 교차된 생사를 지켜보며 그런 걱정이 더 커졌다. 13일 인천 송도국제도시의 고층 빌딩 사이에서 40대 남성 청소원이 추락해 숨졌다. 그는 10년 전 탈북해 남한에 정착했지만 허망하게 삶을 마감했다. 그는 북한에서 산부인과 의사를 지냈던 엘리트 출신이다. 간 질환을 앓고 있는 아내의 병을 고쳐주겠다며 사선을 넘었지만, 남한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북한에서 받은 의사 자격증은 남한에서 통용되지 않았다. 다시 자격시험을 치를 수도 있었지만 아내의 병을 고치는 게 먼저였다.
정착교육 때 굴착기 운전자격도 땄지만 일거리 찾기가 쉽진 않았다. 그나마 남한에서 허락된 직업은 주차관리원이나 청소원이었다. 그래도 불평은 없었다. 유산으로 남겨진 이 탈북자의 일기장에는 맡겨진 일에 대한 고마움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안전장비도 없이 유리창을 닦다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 아내의 병은 꽤 치료가 됐지만, 남한에서 다시 의사가 되겠다는 꿈은 끝내 이룰 수 없게 됐다. 더구나 고용 업체와 보상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다가 장례도 열흘 뒤에나 치렀다.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근무하던 태영호 공사는 가족과 함께 자유 대한의 품에 안겼다. 태 공사 가족의 귀순은 1997년 2월 황장엽 전 비서의 망명만큼이나 신선한 충격을 줬다. 1997년 미국으로 망명한 장승길 당시 주이집트 북한대사에 이은 19년 만의 최고위급 북한 외교관의 탈북이라는 의미도 컸다. 특히 태 공사의 부인 오혜선 씨는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로 노동당 군사부장을 지낸 오백룡의 친척이다.
베테랑 외교관과 빨치산 가족이라는 북한 내 최고 ‘금수저’들의 탈북은 북한 내 ‘레짐 체인지(정권 교체)’라는 기대도 한껏 키웠다. 박근혜 대통령까지 나서 김정은 체제의 심각한 균열을 언급하기도 했다.
태 공사는 김정은 체제에 대한 염증과 자녀의 장래 문제로 탈북을 결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체제 불안에 대한 회의, 가족 문제라는 점에서 13일 숨진 엘리트 의사 출신 탈북자의 10년 전 탈북 배경과 닮아 있다. 의사 출신 탈북자처럼 엘리트 외교관 출신인 태 공사도 남한에서 탈북자로서의 삶을 걸을 것이다.
“남한 사람 눈 밖에 나지 않는 게 바로 살아남는 전술입니다.” 며칠 전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던 탈북자가 푸념처럼 던진 말이다. 고위 무관 출신으로 남한 생활 10년 차에 접어든 그의 말은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처절했다. “고위직이라는 출신 성분 덕분에 국가 기관 일을 맡게 되는데, 아무리 동료라고 해도 남한 출신이면 그 뒤에 연고나 학연이 줄줄이 엮여 있고, 결국 그런 연줄을 이용해 앙갚음을 해오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태 공사, 또 뒤이을 제2, 제3의 태영호가 이런 처절한 남한 생존기를 겪지 않길 바란다.
‘우리와는 다른 탈북자’라는 굴레를 씌우는 건 인종차별과 다름없는 가혹한 차별이다. 외면이 가장 가혹한 차별이라는 말이 있지만, ‘탈북자’라는 출신만큼은 외면해 버리는 게 차별을 막는 길이다.
홍성규 채널A 사회부 차장 hot@donga.com
2016.11.03 북한 사회의 계급구성을 뒤흔들고 있는 탈북자 3만명
북한독재정권은 오래전부터 주민들을 핵심계층과 개조대상 적대계층으로 분리해 놓고 관리하고 있다. 핵심계층은 북한사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당 정권기관과 사법기관 간부들, 군부의 장성들과 고위군관들은 모두 핵심계층이다. 그들은 한국사회의 금수저에 비유할 수 있다.
개조대상은 가장 광범한 계층으로, 그들은 당원도 될 수 있고 하급 간부도 할 수 있지만 “높이뛰기”는 바라보지 못한다. 북한사회에는 간부들도 분야별로 무게가 다르다. 무게가 다르다는 것은 권력의 순위가 다르다는 뜻이다. 당 간부, 보위 보안기관의 간부, 행정 경제부분의 간부, 공장기업소와 농장의 간부로 순위를 나열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선순위는 핵심간부, 뒤 순위는 비 핵심 간부이다. 개조대상이 기껏 오를 수 있는 위치는 공장 기업소와 농장의 관리 간부이다. 북한사회에서 적대 계층은 핵심계층은 핵심계층보다 많고 개조대상보다는 적다. 그들은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되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충성해도 당원이 될 수 없고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간부등용의 문턱에도 서보지 못한다.
북한사회에서 계급적 주민구성은 지역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다. 과거에는 신 해방지구(6.25전쟁이전에는 남한의 영토였다가 6.25전쟁이 끝나면서 북한에 넘어간 지역)와 황해도에 적대계층이 차고 넘쳤다. 이유는 6.25전쟁 당시 미군의 점령 기간이 다른 지역보다 비교적 길었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로 황해도 지역에는 반공단체 가담자들과 월남자들이 많았다. 그 후예들이 적대계층이다.
북한사회에서 핵심계층이 제일 많은 지역은 함경도와 양강도 지역이었다. 이유는 그곳은 6.25전쟁의 피해를 전혀 보지 않았거나 적게 보았기 때문이다. 미군의 점령지가 되지 못했거나 미군의 점령기간이 짧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관계로 그 지역에는 반공단체 가담자나 월남자가 적었다.
비공개 자료이고, 군부대들의 내부에서 수군거린 내용이지만, 80년대 북한군 군관의 40%가 함경도 출신이라고 했다. 그것은 주민들의 출신성분이 지역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함경도 사람들이 매사에 적극적이고 성격이 강인하다는 것도, 북한군 군관의 40%가 함경도 출신이라는 이유 중 하나지만 핵심 이유는 그 지역사람들의 계급적 성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90년대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 참상이후 북한사회에서 지역의 특성에 따라 형성 되었던 주민구성은 완전히 달라졌다. 북한의 북부 국경지역인 함경도와 양강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탈북하면서 그 지역은 과거의 황해도처럼 적대 계층이 가장 많은 지역이 되어버렸다. 쉽게 말하면 북한의 북부 국경지역은 현대판 “신 해방 지구”이다.
계급적 가정환경을 규정하는 범위에 사촌까지 포함시키는 북한체제에서 탈북자 한 사람이 만들어 놓는 적대계층은 평균 열 명 안팎이다. 당 간부나 보위기관의 간부들에 대한 임명이나 신원조사를 할 때면 6촌까지 따진다. 결국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 3만 명은 북한사회에 수십 만 명의 소외계층, 혹은 적대 계층을 만들어 놓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북한사회에서 적대계층은 첫째 탄압대상이다. 적대계층이 되면 독재정권에 대한 불만이나 불신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특히 북한독재정권의 연좌제는 북한사회에 적대계층을 끊임없이 만들어 놓고 있다. 북한독재체제의 구조는 적대계층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다. 독재정권에 의해 숙청당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탈북자들이 늘어날수록 북한사회에는 독재정권에 등을 돌리는 적대계층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 현상이 북한체제의 내구성을 약화시키며 독재정권의 파멸로 이어진다는 것은 누구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시기 북한을 떠난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북부 국경지역의 자방 당 정권기관 간부들은, 탈북자 가족들과 친척들로 차고 넘치는 국경지역에는 간부 등용의 대상들이 없어져 간다고 수군거린다고 한다.◎
글 | 박남일 자유북한방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