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진단 13/ 종합2/ 조선일보2
■ 2017.01.10 복무기간 다시 줄이는 북한군...왜?
▲ 북한 김정은이 새해 들어 연일 민심을 얻기 위한 이른바 '애민 행보'를 펴고 있다. / TV조선 캡처본
지난해 12월 24일 북한 ‘인민무력성 발표’에 의해 남성군인들의 군복무가 10년으로, 여성군인은 5년으로 각각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소식을 전해온 북한군 관계자는 “지난해 12월 24일 김정일 최고사령관추대 25주기를 맞아 인민무력성이 발표한 제대방침에 따라 군 복무기간을 남성은 11년에서 10년으로 여성은 7년에서 5년으로 각각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북한당국은 군인들의 군 복무기간을 수시로 번복함과 동시에 이른바 ‘조국보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군인들에게 고무줄 같은 군복무를 강요해 왔다.
우선 1958년에 제정된 내각결정 148호를 살펴보면 북한군 군인들의 군복무기간은 지상군 3년 6개월, 해·군은 4년으로 정해져 있다. 하지만 법은 무시됐고 실지 군인들의 군복무기간은 5년에서 8년으로 고착되는 듯 했다.
1978년부터는 군복무 9년을 기준으로 한 ‘제대기준’이 총참모부에 의해 작성됐고 각 군에서 집행됐다.
또 1993년부터는 남자 10년 여자 7년이라는 ‘근무연한제’가 실시됐으며 1996년 가을부터 2002년까지는 ‘고난의 행군’후유증으로 급격히 줄어든 입대대상자들을 감안해 남자 서른 살, 여자 스물일곱 살로 제대 나이를 불려놓았다.
평균 17살에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나가는 북한청년들이고 보면 결국은 남자 13년, 여자 10년의 군복무를 강요당한 셈이다.
이러한 병역제도는 2002년 ‘전민 군사복무제’ 도입과 2003년 ‘군사복무법’ 채택에 의해 각각 10년(남성)과 6년(여성)으로 줄어들었다가 2014년, 아무런 설명함이 없이 남자는 다시 11년, 여자는 7년으로 다시 복무기간을 끌어올린바 있다.
그랬다가, 지난해 12월 24일 인민무력성 발표에 의해 남자는 10년, 여자는 5년으로 군 복무기간을 줄였다는 게 소식통의 설명이다. 그러면서 “일단 발표는 했지만 군 당국은 ‘본인이 희망하면 군복무를 더 연장할 수도 있다’며 이른바 ‘선택에 따른 조치’임을 강조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더하여 “이는 남자인 경우 하루라도 빨리 사회에 내보내어 간부로 활용하라는 장군님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고 했고 “여성들의 경우는 혼기를 놓치지 말고 결혼시킴으로 출산을 장려할 데 대한 장군님의 배려에 의한 것임을 당국자들이 강조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장군님’의 이 같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새해벽두부터 인민군 각 부대들에선 ‘통일되는 날까지 군사복무를 계속 하겠다’는 군인궐기대회가 진행되고 있으며 이 회의에서 채택된 ‘군사복무 연기’를 다짐하는 충성편지가 평양으로 올라가고 있다”고 소식통은 설명했다.
한편 “이같은 군인들의 ‘충성경쟁’ 속에서도 (북한)군 내부에서는 올해로 11년차인 남성군인들과 7년차 여성군인들에 대한 집단제대를 준비되고 있으며 그 시기는 2월부터 3월 사이가 될 것이다”고 소식통은 전망했다.
글 |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기자
■ 01.12 “북창군 18호 수용소 내 연안파 분리 수용 ‘8월 종파마을’ 있었다”'
[발굴: 탈북민이 증언한 숙청 연안파의 최후]
중일전쟁 당시 중국공산당의 항일 근거지였던 산시성(陕西省) 옌안(延安)엔 현재도 20대 청년들이 팔로군 군복을 입고 마오쩌둥(毛澤東) 토굴집과 혁명기념관 등을 답사한다. 서구 문화를 동경하고 개인주의를 옹호하는 현대 중국 젊은이들에게도 옌안은 여전히 혁명의 성지이자 대장정의 종착지다. 하지만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이 같은 시기에 옌안에 머물며 항일전쟁을 함께 치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1938년 우한(武漢)에서 조직된 조선의용군의 총부와 군정학교가 옌안에 있었다. 지금도 그들이 살던 토굴집이 남아 있고 군정학교 터와 그들이 일군 밭이 있다.
조선의용군은 중국 내 한인들의 정치결사대인 조선독립동맹 산하 무장조직이다. 중공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고, 광복 후 북한으로 들어가 초기 북한 사회 건설을 주도했다. 이들은 산시성 타이항산(太行山)에 거점을 마련해 주로 화북과 동북 지방에서 활동했다. 이들이 옌안에서 머무른 시간은 상대적으로 짧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연안파’라는 호칭이 붙었다.
이들 중엔 의열단원과 공산주의 이론가, 군인도 있었지만, 국문학자·조종사·음악가·소설가·교사·언론인도 있었다. 대부분 일본과 중국, 미국 등지에서 공부한 지식인 집단이었다. 출신도 지주의 아들부터 중간계급,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의 자녀까지 다양했다.
연안파는 마오쩌둥의 ‘자력동수 풍의족식(自力動手 豊衣足食)’ 구호 아래 직접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해야 했다. 험준한 타이항산 비탈을 개간해 감자와 옥수수를 심고, 군복을 만들기 위해 물레를 돌리고, 학교를 지을 벽돌을 구웠다. 그렇게 지은 학교에도 책걸상이 없어서 맨바닥에 앉아서 공부했다. 연안파들은 중국공산당으로부터 보조를 전혀 받지 못하자 타이항산 시장에 병원, 이발소, 상점 등을 세웠지만 장사 경험이 없어 손해를 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화북 곳곳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같은 시기 김일성의 빨치산파는 일찌감치 1940년 겨울께 소련령으로 이동했다. 1940년 이후 동북 지방은 완전히 일본 관동군의 수중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1938년 중국 우한에서 조사진. 연안파 주요 인사가 모두 모여 있다. /주간조선
연안파는 광복 후 북한으로 들어가 북한 정치를 이끄는 지도적 위치에 올랐지만, 김일성은 자신의 독재를 비판하는 연안파에 ‘반당종파’라는 죄명을 씌워 9만여명을 숙청했다. 1956년 벌어진 반당종파 사건은 현재까지도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북한 정치사에서 가장 유명한 대규모 숙청사건이다. 연안파는 북에선 김일성 독재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남에선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역사 속의 미아로 전락했다. 이들은 동아시아 최초의 공산주의자들이었고 1920~1940년대 독립운동사의 주인공들이었다.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통한 전투 경험이 풍부했고, 중국 혁명의 성공 과정과 경험을 고스란히 공유했다. 입북 후엔 당 이론을 확립시키고 토지개혁을 주도했으며 치안·검열·선전선동 부문을 담당했다. 연안파의 궤적 자체가 민족해방투쟁의 역사지만, 최후는 비극적이다.
최근 숙청 후의 연안파에 대한 증언이 새롭게 발굴됐다. 반당종파 사건이 일어나면서 연안파가 숙청된 후의 모습에 대한 증언으론 최초의 것이다. 평안남도 북창군 출신의 탈북민 A씨는 최근 필자에게 “우리 가족이 수감돼 있었던 18호 수용소(북창관리소) 안 봉골지구라는 곳에 ‘8월 종파마을’이라고 불리는 통제구역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A씨는 “8월 종파마을 수감자들은 수용소가 처음 생겼을 때 온 사람들이었다. 18호 사람들은 종파마을이라고 하면 다 알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에게 어릴 때부터 들은 내용”이라고 전했다
강제노역도 안 하고 단독주택서 지내
1960년생인 A씨는 국군포로의 자녀로, 평남 북창군 소재 18호 수용소에 어렸을 때부터 수감돼 있었다. 그는 1980년대 말 가족과 함께 사면돼 수용소에서 나왔고 2000년대 초 탈북해 남한에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고 황장엽 노동당 비서의 회고록 ‘어둠의 편이 된 햇볕은 어둠을 밝힐 수 없다’(2001)와 ‘북한인권백서’(2004)에도 ‘통제구역’은 1956년 8월 종파 사건에서 처음 유래했으며 정치범들의 씨를 말리려는 의도를 갖고 설치됐다고 기술돼 있다. 황장엽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김일성은 “종파 분자들은 머리 꼭대기까지 잘못돼 있어 가족과 함께 산간벽지로 보내 격리시켜 살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장엽의 증언으로 볼 때, A씨가 언급한 ‘8월 종파마을’ 역시 1956년 종파분자 숙청 후 설치된 통제구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A씨는 “8월 종파마을에는 1동 2세대 20가구 정도 있었다”며 “이들은 탄광 일을 안 했다. 대신 강으로 낚시를 다니며 소일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학대를 당하진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중앙에서 (이들에게) 직접 배급을 해줬다. 배를 곯지 않게 넉넉하게 줬다고 한다. 자기 구역 안에선 자유롭게 다녔다”고 했다. 그는 이어 “현재도 이들이 살던 주택이 남아 있다”며 “초가집이 아니고 단독주택 형식으로 나름대로 잘 지어줬다. 군대가 돌로 지은 집인데, 튼튼하게 잘 지었다”고 덧붙였다.
북한의 수용소가 보통 초가집으로 이뤄진 마을 형태인 것에 비춰 보면, 연안파에 제공된 돌로 지어진 단독주택은 이례적이다. 이들은 북한 최초의 통제구역에 수감된 정치범들로 사형을 면한 ‘고위급’ 인사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A씨에 의하면 수용소 관리자들뿐 아니라 18호 수감자들도 이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이들이 김일성에 반대하다가 숙청된 ‘항일투사’라는 것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연안파라는 용어는 처음 듣는다”고 했다.
북한 문제 전문가인 정창현 현대사연구소장은 “러시아 문서를 보면 황장엽은 1959년부터 벌써 당 중앙위 부부장직으로 나오는데 그가 회고록에서 밝힌 통제구역에 대한 언급에 비춰 볼 때 A씨의 증언은 개연성이 있다”고 했다. 정 소장은 “무엇보다 A씨의 증언은 8월 종파 사건 관련자들의 숙청 후 생활이 처음 공개됐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A씨의 증언 속엔 실존인물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는 “8월 종파마을 수감자들에게는 사상 교화를 많이 시켰다. 김일성이 림춘추를 보내 사상 교화가 됐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림춘추가 비행기를 타고 한 번 왔었다”고 말했다. 림춘추는 김일성 부대에서 부상병을 치료하던 의사 노릇을 했던 인물로, 김정일을 추종해 그가 후계자로 지목된 뒤 출세를 거듭했다. 1983년엔 부주석 자리에까지 올랐다. 림춘추는 김일성 부대에 합류하기 전,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처럼 한약방을 운영했고 빨치산파 중 중학교를 졸업한 비교적 높은 학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김일성과 동료들의 빨치산 활동을 찬양하는 문학작품을 다수 남긴 작가이기도 하다. 6·25전쟁 기록을 살펴보면 6·25 당시 북창군 내에는 이미 북창비행장이 건설돼 있던 것으로 확인돼 ‘림춘추가 비행기를 타고 왔다’는 증언에 신빙성을 더한다.
정창현 소장은 “(숙청된 사람들을) 지방 배치하면 가끔씩 중앙당에서 지도원을 파견해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는 예가 있다. 림춘추를 보낼 정도면 요주의 인물들일 수 있다”면서도 “지도원을 보낸 것은 다시 복귀시킬 생각도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복귀 가능성이 전혀 없는 반대파의 근황을 살피기 위해 굳이 림춘추 같은 거물을 보냈는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A씨는 8월 종파마을이 위치했던 ‘봉골지구’에 대해서는 “현 평남 북창군 봉창리·석산리 일대”라고 설명했다. A씨의 증언에 따르면, 봉창리 수용소에는 수용소가 해체된 1990년대 중반까지 수감자들이 머물렀지만 8월 종파마을 수감자들은 “1960년대 말에 갑자기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A씨는 “8월 종파마을 수감자들이 14호나 22호(회령 수용소)로 간 게 아닌가 싶다”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집단학살의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A씨가 언급한 14호와 22호는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 정치범 수용소로, 한번 수감되면 죽을 때까지 나올 수 없는 ‘완전통제구역’이다.
연안파 리더 최창익의 최후
▲조선의용대 대장 시절의 김원봉. 이 흑백 필름은 국민당 정부에서 조선의용대를 선전하기 위해 만 든 기록영화에 나오는 장면이다. 광복 후 부산에서 ‘조선의용대’라는 이름으로 극장 상영됐다. /주간조선
그렇다면 북한 최초의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된 연안파는 어떤 이들이었을까. 이들에 대한 체포 및 심문은 1957년 7월부터 시작됐고 1960년 초에 재판이 열렸으나 그 이전부터 중국 및 소련으로 망명하거나 병사, 옥사한 인물들도 다수 있었다.
우선 연안파 원로 김두봉은 국문학자로 광복 당시 이미 56세였다. 그는 강원도의 한 협동농장에서 재판이 열리기 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므로 북창군 통제구역에 수감됐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반당종파 사건의 주모자이자 연안파 리더인 최창익은 젊은 청년들 사이에서 신망이 높았다. 와세다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최창익은 권위 있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가로 꼽혔다. 부수상까지 오른 그는 김일성의 측근인 박정애(베라 최), 박금철, 정일룡 등이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협력했으므로 신뢰할 수 없다고 김일성에게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했었다. 그는 또 중공업 치중을 비판하고 경제계획을 개편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최창익의 아내 허정숙은 일제강점기 ‘민족변호사’로 이름이 높았던 허헌의 딸이다. 허헌은 독립운동가와 노동자를 무료 변론했고, 신간회 간부로도 활동했다. 허정숙은 연안파 중 유일하게 숙청을 면했는데, 부부가 광복 직후 이혼을 했기 때문이지만 허헌의 딸이라는 이유도 컸다고 한다. 허정숙은 그 후 당 비서까지 올랐고 1991년 사망하자 북한 정권이 국장으로 예우할 정도였다. 반면 최창익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먼 친척까지 모두 수용소로 보내질 정도로 극심하게 보복당했다. 그의 최후는 베일에 싸여 있으나 재판 당시 사형을 선고받았으므로 북창군 통제구역에 보내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널리 알려진 연안파 거물 중 한 명인 무정은 조선의용군 총사령관 겸 팔로군 포병연대 사령관을 지냈다. 대부분의 한인 공산주의자가 훗날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이 되는 류사오치(劉少奇) 계열의 대도시 공작자인 반면, 무정은 일찍부터 중국 남부로 내려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周恩來), 주더(朱德), 펑더화이(彭德懷) 등 중공 핵심그룹에 합류해 농촌 지역의 소비에트운동에 참여했다. 무정은 또 대장정에 참여한 10여명의 한인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고, 유격대로 시작한 홍군이 연안에서 첫 창설한 포병대 사령관 겸 포병학교 교장에 임명되면서 명성을 확고히 했다. 김일성에겐 열등감과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무정은 1951년 패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제거됐다.
연안파는 아니지만 이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로 김원봉이 있다. 김원봉은 1919년 지린(吉林)에서 결성된 의열단 의백이자, 좌우 연합의 상징인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조선의용대 대장 등을 지냈다. 좌우를 통틀어 가장 빛나는 항일 경력을 가졌다. 그는 코민테른이나 중공과 연계를 갖고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국제주의자가 아니었고 계급보다 민족에 더 우위를 둔 민족주의자였다.
그간 김원봉은 연안파 몰락 때 함께 퇴출됐다는 것이 정설이었으나, 정창현 소장은 소련의 평양 대사를 지낸 프자노프의 ‘일지’(1958년 10월 24일) 중 “김달현은 미국인들과 연결돼 있고 최근 체포 직전에 남쪽으로 도주하고자 온갖 방법을 사용한 전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 김원봉(현재 체포돼 있음)과 교류했다”를 인용해 그의 해임 및 체포가 청우당 당수 김달현의 간첩사건과 연관이 있다고 봤다. 정 소장은 같은 일지에서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 김원봉 등을 반국가적 및 반혁명적 책동의 죄를 물어, 대의원 권한을 박탈한다는 정령을 비준하였다”(1958년 10월 1일)는 대목을 들어 “러시아 측 문서를 통해 김원봉에게 적용된 ‘죄목’이 처음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그간 김원봉의 최후는 추측과 불확실한 진술만 난무했으나, 기록문서를 통해 죄목이 확인됐다는 것이다. 정 소장은 “김원봉이 조사과정에서 자살하지 않았다면 평양 인근에서 살다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고, 북창군 통제구역에 수감됐을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사실 김일성은 1956년의 반당종파 사건 이전부터 경쟁자들을 하나씩 퇴출시켜왔다. 1953년 7월 정전협정을 전후해서도 각 계파의 우두머리였던 박헌영, 박일우, 허가이, 이승엽 등이 차례로 퇴출됐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실무적으론 여전히 다수의 연안파와 소련파가 김일성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하지만 1956년 8월부터는 숙청이 본격화됐다.
9만명 숙청, 허무하게 끝난 이상
반당종파 사건 때 숙청된 인물들은 연안파의 리더 최창익처럼 이런저런 이유로 김일성과 맞선 전력들이 있다. 예컨대 직업총동맹위원장을 지낸 서휘는 노동자들이 기본적인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적 자주성과 파업권을 가져야 한다고 발언했다. 상업상을 지낸 윤공흠은 김일성 개인숭배를 비판했다. 윤공흠은 중국으로 망명했다가 1962년 강제송환됐다는 주장이 제기된 인물이다. 육군대학 총장을 지낸 김을규는 인민군 전통이 빨치산이 아니라 농민운동에서 계승돼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부수상을 지낸 소련파 박의완은 소련 주재 북한대사 리상조가 쓴 개인숭배를 배격하는 내용의 편지를 당에 전달했다가 김일성의 미움을 샀다. 이밖에 조선독립동맹 부주석 출신이자 당 중앙위원이었던 한빈, 황해남도당 위원장을 지낸 고봉기, 인민군 5군단장을 지낸 방호산, 자강도인민위원장을 지낸 박창식 등이 이런저런 이유로 반당종파 분자로 몰렸다.
반당종파 분자들에 대한 실제적인 숙청은 1956년 바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김일성이 최창익과 박창옥(소련파)을 포함한 관련자들의 처분을 제안해 당이 채택하긴 했으나 중국과 소련이 개입해 이들의 원상복귀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한발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했으나 오래가진 않았다.
다음해 7월부터 대대적인 체포가 벌어졌다. 지방으로 좌천돼 있다 ‘인민의 적’으로 몰려 체포된 최창익과 박창옥을 비롯해 연안파가 모두 투옥됐다. 소련파는 50여명이 처형되거나 강제실종됐고 약 250여명이 소련으로 도망갔다. 도쿄대 명예교수 와다 하루키(和田春樹)에 의하면, 이들에게는 당내 투쟁, 즉 상호비판을 통한 권력 쟁취는 불가능했고, 폭력적 변혁(무력 동원)이 필요했지만 군부에 세력이 부족했고 중공이나 소련의 협력을 이끌어내지도 못했다.
광복 후 연안파가 여타 계파들과 더불어 요직을 점령했을 때 이들은 아직 20~40대의 젊은 나이였다. 혁명의 세기, 세계전쟁의 한가운데서 사적인 삶을 포기하고 조국 해방과 공산혁명을 위해 싸웠지만, 이상은 실현되지 못했고 저항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이들이 바란 것은 타 공산권 국가처럼 ‘집단지도체제’의 실현이었다.
정병일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북한 국가 건설에 미친 연안파의 역할’이라는 논문에서 “빨치산파는 연안파가 초기 북한 국가 건설 과정에서 당·정·군을 아울러 구사했던 변용된 중국식 정책을 수용해 독식함으로써 연안파를 북한 역사에서 사장시켜 버렸다”고 평가했다.
<본 기사는 주간조선 2439호에서 발췌했습니다.> 신상미 기자 편집 김혜인
■ 01.12 北 김씨 일가는 기사회생 천운을 타고났나
한 안보 당국자는 한숨을 쉬었다. "촛불 시위, 탄핵 다 좋습니다.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타이밍이 너무 안 좋습니다. 안 좋아도 이렇게 안 좋을 수 있습니까?" 그에 따르면 북한 김정은 체제는 낭떠러지로 밀려가고 있다. 심심하면 나오는 식상한 북한 붕괴론이 아니었다. 북한 내부는 너무나 부패했으며 경제는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졌다. 계속된 대북 제재로 북한 민중은 물론이고 상대적 혜택을 누리고 있는 엘리트층에서조차 '희망이 없다' '미래가 없다'는 절망감이 퍼지고 있다. 태영호 전 북한 공사의 망명은 작은 징조일 뿐이다.
절망한 사회가 가는 길은 명백하다.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이 당국자는 분단과 핵의 질곡이 끝나는 문턱이 아직 멀기는 하지만 이제 눈에 보일 듯한데 또다시 과거처럼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되고 마는 거냐고 통탄했다.
그가 말하는 '과거'는 수십만명 이상이 굶어 죽으며 붕괴 일보 전까지 몰렸던 북한 체제에 숨통을 터준 햇볕정책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햇볕정책이 없었으면 1998년 이후 김정일 체제가 어떻게 됐겠느냐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궁금한 질문이었다. 전문가들의 생각은 갈렸지만 '햇볕이 없었으면 김정일 체제는 붕괴는 되지 않았다고 해도 껍데기만 남았을 것이며 아들에게로 3대 세습은 쉽지 않았을 것'이란 전망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1997년에 이뤄진 우리 정권 교체가 망해가던 북한 체제에 생명줄이 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렇게 하라고 표를 준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북에 던져 준 생명줄로 지금 남은 것은 북의 3대 세습과 핵폭탄 그리고 노벨 평화상 한 개다. 북한에 잘 해주면 북은 핵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만들 것이며, 그게 바로 북 체제의 본질이라는 경고는 당시에도 없지 않았다. 그런 경고를 전하던 언론사는 세무조사를 당했다. 이 햇볕론자들은 자신들의 오류를 일절 인정하지 않는다. 태영호 전 공사가 "북은 10조달러를 줘도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증언했지만 듣지 않는다. 햇볕과 지역감정이 불행하게 결합하면서 이제는 대북 전략 문제가 정치 도그마로 변질됐다. 햇볕을 비판하면 어느 지역에선 당선될 수 없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대북 전략을 끊임없이 왜곡시킬 것이다.
더 좋지 않은 것은 햇볕이 한 지역과 그 지역을 기반으로 한 정당의 정치 도그마가 되면서 여야로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우리 대북 전략이 제재와 지원이라는 양 극단으로 왔다갔다하도록 구조화됐다는 사실이다. 임기가 없는 김정은으로서는 어떤 경우에도 5년이나 10년만 버티면 남한에서 달러와 쌀이 들어오게 된다는 믿음을 갖게 돼 있다. 그러니 양보할 이유가 없다. 이미 지금 남한의 다음 정권을 요리해 대북 제재 전체를 무력화시키고 좋았던 햇볕 시대로 되돌아갈 궁리를 하고 있을 것이다. 김정은은 김씨 일가에 '천운(天運)이 있다'는 생각도 할 것이다.
이제 북한 정권은 핵을 포기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고 한다. '북한=김정은=핵'의 등식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북은 지금까지 북핵 협상 전체가 기만전술이었다고 내놓고 자랑하는 지경이다. 결국 실제로 북 체제가 무너지거나 아니면 망한다는 절박감 속에 협상에 나오도록 하는 수밖에 없다. 지난 9년간의 대북 제재, 최근 더 강화된 유엔 제재로 그런 조건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태영호 전 공사의 증언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대북 제재의 효과를 숫자로 판단하지 말라. 북한 주민의 심리 변화와 김정은 정책의 파탄 여부로 봐야 한다"는 말이다. 그 점에서 대북 제재는 강력한 효과를 내고 있다는 게 태 전 공사의 말이다.
우리 정권 교체로 이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건가. 햇볕론자들은 "그래도 전쟁을 막았다"고 한다. 전쟁을 막은 것은 한·미의 억제력과 북한의 전쟁 수행 능력 상실 때문이지 햇볕 덕분이 아니다. 그래도 햇볕정책을 재개하면서 또 '전쟁을 막는다'고 할 것이다.
햇볕을 신봉하는 야당이 집권하게 되면 북한 김씨 일가에 정말 기사회생의 천운이 될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야당의 집권이 역으로 북한 문제 해결의 결정적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만약 야당이 '우리가 집권해도 북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경우 대북 제재를 철저히 이행하고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도 없다'고 선언하면 북한 주민들의 절망감은 되돌릴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들이 이제는 정말 길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면 김정은이 셈법을 바꾸든지 북한 주민들이 들고일어나든지 무언가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우리 역사에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지만 도로 허사가 될 판'이란 한탄이 생각지 못한 희망으로 바뀌기를 기적을 바라듯이 기다려 본다.
양상훈 논설주간
■ 01.13 北 '전쟁영웅' 남일, 김정일이 교통사고로 위장해 암살했다
▲ 사진 좌측 남일 장군, 우측 김정은 / 출처=조선DB
한국전쟁에서 '신화'를 창조해 북한 주민들 속에 '장군'으로 널리 불렀던 남일 대장이 김정일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에서 김일성 호위사령부 출신으로 군(軍) 복무를 했던 탈북자 A 씨는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신화'를 창조한 영웅인 남일 대장이 장군으로 거듭나면서 명성을 떨쳤으나 김정일의 권력야욕에 의한 희생양이 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현재까지 베일에 싸인 '남일 장군'의 죽음에 얽힌 스토리를 펼쳐놓았다.
남일은 1914년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어나 1930년 소련의 연해주로 이민을 갔으며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쫓겨간 소련 국적의 재소 한인 중 한 명으로 제2차 세계대전 참전자이다.
그는 1946년 8월 소련군의 정책에 따라 재소 조선인 전문가 그룹 제4진으로 입북한 다음 김일성을 도와 한국전쟁에 참전한 후 수많은 영웅담을 창조하면서 유명해졌고, 대장으로 고속 승진한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1953년 7월 27일 판문점 정전협정 조인식장에 북한 대표로 참석해 주민들의 관심 속에 이목이 집중되면서 '남일 장군'으로 널리 알려졌다.
당시 김일성은 수령이 아닌 일반 군 고위간부를 장군으로 주민들이 호칭하는 것에 대해 기분이 언짢았지만, 소련의 노예국가로 대국의 지시를 받는 상황이라 감히 남일을 건드릴 수 없었다.
1960년대 중반 수령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노동당 조직비서)와 아들 김정일 간 치열한 사투가 벌어졌고, 이 싸움에서 결국 아들에게 손을 들어준 김일성의 지원에 힘입어 김정일이 승리한다.
김정일은 노동당에 들어와 처음으로 발기한 것이 수령의 유일사상체계와 유일 영도체계를 전당, 전군, 전 국민이 수립하는 규정이었다.
하지만 남일이라는 존재가 수령의 유일사상과 유일영도 실현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는 판단하에 전쟁영웅과 '장군'이라는 수식어로 주민의 뇌리에 굳어진 남일을 눈엣가시로 생각하게 됐으며 그를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모색한다.
군 총참모장의 직함을 가졌던 남일은 이 시기 군복을 벗고 정무원 부총리의 중책을 맡고 있었다.
한편 김정일은 김일성에게 나라의 경제 발전에서 중요한 부분이 화학공업이라며 평안남도에 신설된 화학 공장을 남일이 직접 맡도록 제안한다.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남일 장군은 월 수차례 화학 공장에 내려가 현지 시찰을 하면서도 이것이 자신의 목숨을 노린 김정일의 음모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1976년 2월 신안주 화학 공장에서 평양으로 향하는 검은색 승용차가 좁은 산골짜기로 들어설 때였다. 앞에서 국가정치보위부의 번호판을 단 6t짜리 대형트럭이 주저 없이 남일이 탄 승용차에 돌진하면서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 사건으로 결국 남일은 유언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김일성의 충복으로, 영웅으로, 장군으로 떠받들던 시대를 멀리하고 작고했다.
당시 김일성과 김정일은 남일의 사고에 대해 분노를 표하면서 노발대발했으며 공안기관에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에 착수하라는 지시를 하달한다.
국가안전보위부의 트럭 운전기사는 40대 중반의 민간인으로 공안기관의 조사를 받는 과정에 고의가 아닌 차체 결함에 의한 사고로 일관한 진술을 반복했다.
일반 주민에 대해 사망사고를 발생시킨 운전기사들도 1년 정도의 노동교화형을 받던 시기라 남일과 같은 이름난 영웅을 죽인 사람에 대해서는 종신형 내지는 사형이 선도될 것으로 주민들의 인식은 한결같았다.
하지만 웬일인지 사고를 낸 트럭 기사는 두 달 동안 보위부 유치장에 있었을 뿐 이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그가 함경북도 명천군 당위원회 조직비서로 둔갑해 평양에서 열린 중앙회의에 참석한 모습이 눈에 띄면서 그를 취급했던 보위부 요원이나 주민들이 의아해했다.
김정일은 이후 그에게 국가수훈을 수여하는 등 국가적 차원에서 열린 대회에도 빠짐없이 참석도록 했다.
그때에야 비로소 김정일의 지시로 남일이 암살됐다는 파다한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김일성과 김정일 주변을 지켜왔던 탈북민 A씨도 미스터리 사건의 실마리를 풀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김정일의 음모를 김일성이 몰랐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방치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내용을 보고 독자들이 판단할 부분이다.
훗날 김일성은 김정일에 대한 '위대성'을 강조하는 교양자료에 "나는 우리나라에 또 한 사람의 장군 '김정일 장군'이 있는 것을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억울하게 하늘나라로 간 그가 주민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있을 것이라고 본다.
"독재자는 또 다른 독재자를 낳고 신하는 오직 독재자의 먹잇감으로밖에 될 수 없다"고.
김성주 기자
■ 01.31 북한 최초 만화영화 제작자 장영환은 왜 처단자 가족이 됐나
⊙ 10년 전 탈북, 《월간조선》이 보도한 공작원 왕 사장과 인연
⊙ 아버지 장영환, 외할아버지 이력 때문에 흥행 만화영화 연출가 자리 빼앗겨
⊙ 어머니, 김정일 지시로 피아니스트 지위 하루아침에 잃어
⊙ ‘처단자 가족’에 이어 ‘탈북자 가족’으로 낙인 찍힐 북의 가족 생각하면 눈물
2016년 11월 30일 한 통의 메일이 왔다. 기자가 쓴 ‘북한 정찰총국의 미군 수륙양용 장갑차 밀수 계획/정찰총국 5국(해외정보국) 공작원 왕 사장, 돈에 눈먼 국내 사업가 포섭!’이란 기사(《월간조선》 12월호·11월 17일 발간)를 읽었는데 만나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신분도 밝히지 않은 데다, 만나려는 이유도 적혀 있지 않아 답 메일을 보내지 않았다. 며칠 뒤(2016년 12월 11일) 또다시 메일이 왔다. 자신이 기사에 나오는 왕 사장을 잘 알고 있어, 대화를 한번 나누고 싶다는 것이었다. 기자는 그런 이유라면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답을 했고,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2016년 12월 29일 예약해 둔 광화문 한 음식점에서 그와 만났다.
그는 진한 북한 말투로 자신을 탈북한 지 10년이 된 장○○라고 소개했다. 기사에 나오는 왕 사장의 사업과 그의 해외생활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는데 그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보도돼 놀라 연락한 것이라며 기자와 만난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2시간 가까이 대화를 하면서 그가 북한 최초의 만화영화인 〈금도끼와 쇠도끼〉를 제작한 장영환씨의 아들임을 알게 됐다.
아버지 장영환
▲장씨는 북한 최초의 만화영화인 〈금도끼와 쇠도끼〉를 제작한 장영환씨의 아들이었다. 사진은 장씨가 직접 그린 아버지 초상화다.
장씨는 본인이 유명인사의 아들임에도 탈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승승장구하던 부친이 김정일에게 하루아침에 ‘팽’당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기사화해도 되느냐고 물으니,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글솜씨가 있는 본인의 아내가 자신의 이야기를 쓰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편집장에게 보고하니, 추진하라고 했다. 다음은 그의 아내인 신관복씨가 2017년 1월 10일 남편의 입장에서 써 보내온 글이다.
서울, 우리 세 가족이 이 땅에 온 지 꼭 10년이 되었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서 조금 나가면 한강이 흐르고 우리 집 13층에서 저 멀리 바라보면 남산타워가 보이는데 처음 서울에 왔을 때에는 한동안 한강을 대동강이라 했고 남산타워를 주체탑이라 불렀다가 정정하곤 했다. 36년 동안 살아온 평양 곳곳의 지명들과 모습들이 금방 하루아침에 잊힐 리 만무했다. 그래도 지금은 그냥 내 나름대로 반 서울 사람 되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우리 세 식구는 서울 와서 10년을 살았다. 강산이 변하는 그 나날 동안 우리 세 식구가 단 하루도 떠올리지 않은 적이 없는, 단 하루도 잊어버린 적이 없는 그것은 이북에 있는 가족들 생각이었다. ‘이산가족.’ 이 뼈아프고 가슴 아픈 말은 결코 우리가 서울서 산 10년 동안에만 가슴에 사무친 말이 아니었음을 여기 와서 새삼스럽게 깨달았고 그 아픔은 이미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기 전 38선이 그어져 남과 북으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그 시절부터 죽는 날까지 어떤 이들의 한생 전부에 걸쳐 마음속 한구석에 자리한 아픔이었음을 절감했다.
평안북도 신의주 출신인 아버지 장영환은 그림 재주를 타고난 분이었다. 아버지는 광복 전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그야말로 야생에서 동물들이 살기 위해 생존경쟁하듯 이리 뒹굴, 저리 뒹굴며 자랐다. 땔감이 없어 고향 가까이 흐르는 압록강에 떠다니는 뗏목의 껍질을 벗겨 내는 게 일이었다. 아버지는 형과 함께 그런 위험천만한 일을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도 그림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아버지의 낙은 뾰족한 돌멩이를 붓 삼아 땅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수탉, 강아지 등 보이는 족족 땅을 도화지 삼아 그리곤 했다. 아버지는 광복 후 신의주경제전문학교 수료 과정에서 자질을 인정받았다. 이는 평양미술대학 입학이라는 넓고 탄탄한 인생의 첫 주로에 들어서는 자양분이 됐다. 대학 졸업 후 본교의 교원으로 3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던 아버지 장영환은 1958년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만화영화제작단 연출가로 일했다. 이때 평생의 반려자(伴侶者)를 만났다. 바로 평양음악무용대학 피아노과를 나와 조선예술영화촬영소 교향악단 피아니스트였던 조태란이었다. 조태란 여사는 나의 어머니시다.
▲장영환씨는 북한 주민 모두가 사랑하고 좋아했던 만화영화 〈소년장수〉를 제작, 승승장구했다. 북한 사람들은 〈소년장수〉가 방영되는 시각이면 염치불구하고 TV가 있는 집에 미리부터 가 앉아 시청시각을 기다리곤 했다고 한다.
부모님을 떠올리면 한 가지 떠오르는 아름다운 기억이 있다. 지금의 부인과 대학 시절 학과정의 필수코스였던 대학생교도대라고 하는 군 복무를 80미리 포병부대에서 6개월간 같이했는데 어느 날 저녁에 단체로 TV를 시청하는 시간이 있었다. 당시 TV에서는 〈버들그네〉라는 만화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만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는데 연출과 영화문학, 책임미술, 모두 장영환이었다. 같이 시청하던 대학동기들은 나와 내 아내에게 우레와 같은 손뼉을 쳐줬다.
아버지는 북한 만화영화계에 한 획을 그은 분이다. 북한의 최초 만화영화 창시자로서 첫 만화영화인 〈금도끼와 쇠도끼〉, 김일성이 청소년 시절 어린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던 동화를 만화로 각색한 〈나비와 수탉〉을 비롯하여 〈두 장군 이야기〉 〈코끼리와 곰〉 〈영리한 너구리〉 등 100여 편의 만화영화를 창작했다. 북한 주민 모두가 사랑하고 좋아했던 만화영화 〈소년장수〉의 위력은 대단했다. 텔레비전이 없는 집 애들과 어른들은 〈소년장수〉가 방영되는 시각이면 염치불구하고 TV가 있는 집에 미리부터 가 앉아 시청시각을 기다리곤 했다. 하물며 수다 떠는 시간에 50부작인 이 만화영화에서 나오는 캐릭터들의 운명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부정 캐릭터였던 ‘호비’에게 북한 영화배우들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칭호인 인민배우라는 명칭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만큼 북한 만화영화는 인기가 있었다. 북한에서 만화영화는 김일성 일가를 우상화하고 찬양해야 하는 예술영화, 드라마와 달리 정치적 내용을 주제로 하지 않아도 돼 창작가가 자기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아버지에게 만화 제작은 꼭 맞는 옷과 다름없었다.
아버지는 1972년 당시 문화예술계를 총괄하던 김정일에게 직접 공훈예술가의 칭호를 수여 받았다. 아버지는 서구권 나라에 만화를 수출하는 데도 앞장섰다. 그야말로 60년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승승장구했다. 아버지의 위상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시점에 간부사업에서 낙선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음으로 양으로 이유를 알아봤고, 어머니의 계급 성분이 ‘처단자 가족’으로 분류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된서리를 맞은 것은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평양음대 피아노과 출신으로 조선예술영화촬영소 교향악단 피아니스트로 우아하고 도도한 자리에 있던 어머니는 문학예술계에서 출신 성분이 불건전한 자는 선동선전의 기수인 예술인의 대오에 있을 수 없다는 김정일의 지시로 하루아침에 피아니스트의 당당한 자리를 잃었다. 공부를 잘했던 나도 일류대 진학이 되지 않았다. 지역 전체에서 1등을 해도 최종 면접에서 탈락하기 일쑤였다. 나보다 공부 못했던 친구들이 떵떵대는 것을 보면 서러웠다. 탈북을 결심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처단자 가족’이 된 이유
▲‘처단자 가족’이 되면서 평의대병원 의사인 이모를 제외한 가족 모두는 광산이나 농촌으로 추방됐다. 그곳에서 시시각각 불온분자로 의심받고 툭하면 사상검열의 비판무대에 올려져 모욕적인 인신공격의 발언을 일상으로 들으며 비참하게 살다 세상을 떴다.
나의 어머니가 ‘처단자 가족’으로 분류된 것은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은 외할아버지(조인규)의 경력 때문이었다. 외할아버지는 광복 전 세브란스의전(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나온 의사였다. 광복 전 3·1운동이 있던 그해에 입학, 1925년에 졸업했다. 세브란스의전은 미국 선교사에 의해서 설립된 의학전문학교라 졸업생들을 전국 각지의 선교사병원에 파견했다. 외할아버지도 고향인 평안북도 선천군에 있는 선교사병원인 ‘미동병원’에서 근무했다. 실력이 출중했던 외할아버지는 나중에 개인병원을 차려 광복 전에는 돈도 꽤 많이 벌었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황해도 재령 나무리벌의 만석꾼 정씨의 딸이었다. 선천군에서는 그야말로 대단한 유지(有志)였다.
광복이 되고 나서 이북에 소련군이 들어오고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소위 그들이 말하는 기본 계층에 속하지 못하는 지주, 자본가들과 관리들, 그리고 재산깨나 있던 사람들은 이남으로 가야 할지 말지 갈팡질팡했다. 스물둘에서 갓난아이까지 아이들이 올망졸망 달린 가장이었던 외할아버지는 월남의 결단을 못 내리고 있었는데 이 와중에 전쟁이 터졌다. 온 강토가 전쟁의 참화에 휩싸여 도대체 왜 이 나라 백성이 이런 난리통을 겪어야 하는지 분간하기도 전에 수많은 죄 없는 사람들이 어딘가에서 죽었다. 날마다 라디오를 들으며 전세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온 신경을 가다듬어 판단하려고 애쓰던 어느 날 밖에서 의사선생님 찾는다는 소리에 ‘왕진 청하러 왔는가?’ 하며 집안 평상복 차림으로 대문 밖을 나섰던 외할아버지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 가문의 비극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후에 들은 바로는 퇴각하던 인민군들이 곳곳에서 식자깨나 있고 재산깨나 있던 사람들을 밖으로 불러내어 “우리랑 갈 거야? 안 갈 거야?” 물은 뒤 안 간다고 하면 근처 어딘가로 끌고 가서 무자비하게 죽이든지 아니면 강제로 끌고 가다가 죽였다고 한다. 외할아버지의 죽음은 ‘처단자 가족’이라는 주홍글씨로 남아 그들의 운명을 죽을 때까지 괴롭혔다. 김책공업대학 교수로 있던 첫째 외삼촌과 평양의대병원 소아과 의사였던 이모, 그리고 황해제철소 기술직으로 있던 셋째 외삼촌, 지방 어느 대학교 교수였던 작은이모를 비롯한 온 형제·자매에게 찾아온 운명의 소용돌이였다. 평의대병원 의사인 이모를 제외한 가족 모두는 광산이나 농촌으로 추방됐다. 그곳에서 시시각각 불온분자로 의심받고 툭하면 사상검열의 비판무대에 올려져 모욕적인 인신공격의 발언을 일상으로 들으며 비참하게 살다 세상을 떴다.
나는 서울에 온 후 2년간 연세세브란스병원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외할아버지가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나, 주치의에게 당시 졸업생들 명단을 어떻게 하면 확인해 볼 수 있는지 물었다. 주치의의 도움으로 졸업생 명단을 확인했다. 명단에는 정확히 적혀 있었다. ‘조인규, 1900년생, 1919~1925년 마취학과 수료.’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듣던 역사적 사실을 서울에서 직접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독립군에 돈 대준 듯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의 이력 때문에 승승장구하던 아버지가 피해를 보는 것을 상당히 미안해했다.
“당신이 원하면 시원하게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어줄게요, 나 때문에 그 좋은 데 못 가서 되겠소? 우리 아버지 때문에 간부사업 안 된다고 하는데 내가 어렸을 때 두루마기에 각반 차고 드나들던 그 많은 사람 나중 우리 어머니한테서 들어보니 뭐 만주에서 독립군 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얘기도 있는데 우리 아버지 독립군에 돈 대주었음 주었지 무슨 죄가 있어 인민군에게 처단될 사람은 아니오. 아마 무슨 청년단인가 그런 막돼먹은 젊은 놈들한테 당했다는 소문도 있소.”
아버지는 조금도 처가를 원망하거나 중앙당 선전부에 간부로 가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천성으로 좋아하는 그림과 만화를 계속해서 할 수 있는 데 대한 다행스러운 마음으로 물론 처가의 안 좋은 이력으로 젊은 후배들에게 계속해서 흥행한 만화영화의 연출과 책임미술가 자리를 뺏기기 일쑤였지만 그다지 깊은 회한도 없이 만 60세 되던 1990년 5월 31일 떳떳하게 퇴직의 날을 맞이했다.
최근 아내는 10년 전 읽었던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를 두 달 동안에 걸쳐서 다시 읽었다. 연해주에서 만주로, 만주에서 평양, 평양에서 서울, 서울에서 경남 하동과 진주까지 거침없이 오가던 일본강점기 때가 왠지 헛헛하게 다가왔다고 한다. 또 소설의 제일 마지막 장면이 왠지 쓸쓸하게 읽혔단다. “만세! 우리나라 만세! 아아 독립 만세! 사람들아! 만세다!” 두루마기와 모자는 어디다 벗어던졌는지 동저고리(남자가 입는 저고리) 바람으로 덩실덩실 춤추며 나루터에서 마을 길로 올라오며 장 서방이 하는 말이다. 그 해방으로 장장 20권의 대하소설은 막을 내렸는데….
부인과 함께 아들을 데리고 중국의 선전공항에서 캄캄한 하늘을 바라보며 과연 이 길이 옳은 길인지, 우리 세 식구의 탈출로 인해 ‘처단자 가족’에 이어 ‘탈북자 가족’으로 또다시 낙인찍힐 평양의 내 가족의 그 지긋지긋한 가족문건에 대해 생각했다. 나중에 내 가족의 후손 중 그 누가 또 나와 같은 회상을 하며 선대의 탈출로 하여 자기들의 부모나 형제들이 겪은 암담한 이야기를 가슴 아프게 펼쳐놓는다면 이것은 얼마나 큰 죄악이 될까? 춘하추동 사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오니 엄혹한 겨울은 때가 되면 가고 화창하고 아름다운 봄은 반드시 올 것이다.⊙
[월간조선 2017년 2월호 / 글=신관복 장영환 며느리]
■ 02.14 북한의 변화를 감당할 준비는 돼 있는가
피오나 브루스 영국 보수당 인권위원장
북한은 외부 사람들에게 불가사의하고 알 수 없는 '은둔의 왕국'으로 불린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관련 분야에 있는 사람들은 북한 내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세히 알고 있다. 1990년대 중반 북한 당국의 잘못된 정책과 방치에 따른 기근 악화로 최대 350만명이 아사했다. 북한 간부들은 취약 계층 여성을 상습적으로 고문하고 성폭행한다. 인신매매된 여성이 중국인과 강제 결혼하거나 성매매 대상으로 팔리고, 북송된 임신 여성에 대한 강제 낙태가 횡행한다. 수용소에 20만명이 구금돼 있음도 안다. 이러한 사실에 경악하기보다 우리의 행동을 바로잡을 계기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북한 당국이 지난 60년간 저지른 반인도적 범죄를 모른 척하면 안 된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연민, 자유, 책임감을 저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많은 의회가 시리아·리비아·남수단·예멘 등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사건에 대해 논의하고 핍박받는 민족적·종교적 소수자들의 고통을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북한 주민들이 겪는 인권 침해와 기본적 자유의 억압에 항의하는 목소리는 비교적 잠잠하다. 이것은 분명히 바뀌어야 한다. 영국 의회 내 초당적 단체 '북한에 관한 상하원 공동위원회'(APPG)는 이러한 문제를 꾸준히 제기해왔다.
▲"북한 여성들이 더이상 짐승처럼 팔려 다니지 않게 되길 소원합니다." 탈북여성 2명이 2009년 4월 29일 워싱턴 DC 내셔널프레스센터에서 미국의 비영리단체인 '북한인권위원회'가 주최한 북한여성 인신매매 인권보고서 기자회견장에서 북한을 탈출해 한국으로 오기 전까지 겪었던 형언하기 어려운 참혹한 고통을 눈물로 생생하게 증언해 참석자들을 울렸다. 무산광산 선전대 여배우 출신인 방미선 씨가 기자회견 중 강제수용소에서 맞은 허벅지 상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국민 수백만명을 굶주리게 하고 수용소에 감금하고, 핵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했을 뿐만 아니라 기본 합의서를 두 차례,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6차례 위반한 정부가 안보 관련 이슈에 성심껏 협상하리라 믿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영국과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 당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방법과 수단은 분명히 존재한다. 고가품 수출입을 엄격히 제재하고, 더 많은 북한 주민에게 외부 정보를 알리고, 평양과의 외교관계가 그저 허울일 뿐이라는 식으로 행동하는 것 등이 모두 효과적인 방법이다. 중국에는 북한에 대한 경제·정치·인도적 지원이 중국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설득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국제사회는 북한에 다가올 변화에 대비해야 한다. 어떤 현상도 영원할 수 없다. 북한처럼 파국을 초래하는 체제는 더욱 그러하다. 변화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대응해서는 안 된다. 최근 국가적 변화를 겪은 나라들을 통해 효과적인 대비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라크 사례를 토대 삼아 필요 시 식량 및 의료 지원을 즉각적으로 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 둬야 한다. 북한 내 의미 있는 반대 세력도 조용히 지원하기 시작해야 한다. 탈북자들이 언젠가 주인 의식을 갖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끔 돕고 리더십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또한 북한 내부에서 변화가 비롯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지난 10년 동안의 대북 정책은 북한의 근본적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주민 수백만명은 아직도 고난과 학대를 당하고, 북한 당국은 여전히 핵 도발의 길을 걷고 있다. 북한의 근본적인 변화를 촉진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변화는 올 것이다. 그것은 확실하며 우리는 도울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독일의 반(反)나치 저항운동가 디트리히 본회퍼의 명언을 되새겨보자. "실천은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책임질 준비를 하는 데서 나온다."
▲북한이 평안북도 방현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고 합동참모본부가 밝힌 12일 경기도 파주 오두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관산반도 일대 마을에 적막감이 흐르고 있다. /뉴시스 피오나 브루스 영국 보수당 인권위원장
피오나 브루스 영국 보수당 인권위원장
■ 03.10 위기로 치닫는 남과 북
지난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했을 때 사태 전개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가 주목받았다. 하나는 북 정권이 내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대남 국지 도발을 시도할지 모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김정일 후계 체제가 과연 장수할 수 있을 것인지였다.
2011년 말 김정일 사망 후에도 비슷한 전망이 제기됐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 상황은 그때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사실이다. 국정 경험이 거의 없는 김정은 리더십의 행동 양태가 예측 불가한 데다 핵과 미사일까지 쥐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선대의 병영 국가적 위기관리 시스템이 아닌 임의의 독단적 업무 처리 방식으로 대내외 정책에서 매우 충동적인 조급증마저 표출하고 있다. 지난 1년간 두 차례 핵실험과 20차례 막무가내식 미사일 발사 실험이 단적인 예다. 여기에다 장성택 처형부터 김정남 암살에 이르기까지 고위직 당·정·군 간부를 무려 200여 명 처단한 것은 외부에 준 충격보다 내부 파괴력이 훨씬 더 크고 지속적이어서 지금 지휘·명령·통신·정보 체계(C3&I) 사기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성택 처형은 전문적 대남 일꾼 및 대외 사업 엘리트들의 공백을 초래했고, 리영호 전 총참모장 제거는 인민군 상층부를 거의 맹목적인 정치적 친위 군대로 전락시켰으며, 김원홍 국가안전보위상 숙청 및 김정남 독살은 무차별적 피바람을 예고하고 있다.
▲지난 6일 진행된 스커드-ER 미사일 발사훈련과 관련해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조선인민군 전략군 화성포병부대들의 탄도로케트발사훈련을 현지에서 지도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7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김정은의 편집증적 정책과 전략이 지금처럼 지속된다면 어떤 형태로든 남북, 또는 미·북 간 우발적 충돌이 일어날지 모른다. 트럼프 미 행정부는 북핵 및 미사일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사드의 조기 배치는 물론, 외과 수술적 예방 공격과 전술핵 재배치, 나아가 북한 정권 교체(레짐 체인지)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여기서 정권 교체란 쿠데타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외교, 경제, 군사적 압박인 제2 봉쇄 정책(containment)으로 사실상 김정은 정권을 압살하는 것을 의미한다. 강도 높은 세컨더리 보이콧과 내부 교란용 정보 투입 작전, 연중 상시적 한·미 연합훈련 실시, 북에 중국식 실용 정권 수립을 위한 미·중 간 물밑 담판 구상 등은 이의 복안이다.
문제는 과연 이러한 특단 대책이 현실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북한 정권은 쉽게 전쟁을 결심할 수도 없으면서 수시로 핵전쟁을 위협하고, 연이은 고위직 탈북 행렬 같은 심각한 체제 피로 증후군을 겪으면서도 쉽게 무너지지도 않는 독특한 병영 국가 체질이다. 현재 김정은 리더십에 도전할 인물이나 내부 움직임은 거의 없다. 또한 김정은 정권도 급변 사태에 대비한 그 나름의 '비상 대책'을 갖고 있다고 판단된다.
김정은의 북한과 우리는 대결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유사시 북한 선제 타격론을 최후의 선택 사항으로 상정하고는 있지만 막상 제한적 예방 공격도 쉽지 않다. 한편 전술핵 재배치로 공포의 균형을 이룰 수는 있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북핵 해결은 북의 정권 교체 외에 대안이 없다는 것이 우리의 딜레마다.
중요한 것은 북도 정치적으로 '남한의 레짐 체인지'를 꿈꾸고 있다는 점이다. 남북이 모두 심각한 내우외환에 처해 있고 상호 체제 흔들기식 총력 심리 공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올해가 한반도 위기의 최대 고비이다.
남주홍 경기대 교수·前 국정원 1차장
■ 05.09 北의 또 다른 목줄, 압록강 수력발전소 주목해야 하는 이유
▲ 압록강 하류 태평만댐 photo 바이두
압록강 하구에 있는 중국 랴오닝성 단둥(丹東)에서 강을 50㎞ 거슬러 올라간 지점에 태평만(太平灣)댐이 있다. 압록강이 중국 측 지류인 포석하(蒲石河)와 합류하는 지점 위의 물굽이에 들어선 댐이다. 북한 평안북도 삭주군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대략 1㎞ 남짓의 제방이 압록강을 틀어막고 있다. 댐이 물을 막은 곳에는 한강의 팔당호(36㎢)보다 조금 작은 25㎢ 크기의 인공호수가 형성돼 있다. 태평만댐의 중국 측 하안(河岸)은 국가 4A급 관광지로 지정돼 있어, 주말이면 풍광이 수려한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도 상당하다.
태평만댐의 주요 기능은 각각 북·중 양국의 압록강변 최대 도시인 단둥과 신의주를 여름철 홍수로부터 방어하는 역할이다. 하지만 댐의 낙차를 이용해 전력을 생산하는 수력발전소 역할도 담당한다. 발전소는 중국 측에 각각 19만㎾급과 15만㎾급 두 곳이 들어서 있는데, 설비용량만 총 34만㎾에 달한다. 설비용량만 놓고 보면 국내 최대 수력발전소인 충주댐(41만㎾)과 비슷한 규모다. 이곳에서 생산한 전력은 북한과 중국으로 공동으로 배분되고, 북·중 간 최대 접경도시인 단둥과 신의주의 밤거리를 환하게 밝히는 데 이용된다.
압록강 위에는 태평만댐과 같은 대규모 댐이 네 곳이나 있다. 가장 하류의 태평만댐을 시작으로 수풍댐, 위원댐, 운봉댐 등이다.<지도 참조> 모두 북·중 간 공동으로 운영·관리하는 댐들로, 생산한 전력은 북한과 중국이 절반씩 나눠 가진다. 특히 북한 측 전기는 북한의 산업군수시설을 돌리는 데 사용하거나, 중국으로 되팔아 외화벌이의 수단으로 쓰인다. 미·중 정상회담에서 유력한 대북 제재방안으로 거론된 북·중 간 송유관(중·조우의수유관)이 북한의 목줄이라면, 압록강 위의 댐 역시 북핵(核)과 미사일 개발에 필요한 전력을 생산 공급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목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 총발전용량의 16%
실제 이들 압록강 수계의 수력발전소가 북한의 전력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동양 최대 댐이었던 수풍댐이 80만㎾급 발전설비를 갖춘 것을 비롯, 운봉댐 40만㎾, 위원댐 39만㎾, 태평만댐 34만㎾급 발전설비를 갖추고 있다. 압록강 위 4곳의 댐이 국내 최대 남한강 충주댐(41만㎾급)보다 크거나 엇비슷한 발전설비를 갖춘 셈이다. 이종석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전 통일부 장관)이 2016년 작성한 ‘북한·중국 간 수력발전 공동이용 현황’이란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과 중국이 공동으로 생산하는 수력 발전용량은 233만㎾에 달한다. 이 중 북한 몫은 절반인 116.5만㎾다. 이는 북한의 총발전용량 724만㎾(추정치)의 약 16%에 해당하는 수치다.
북한은 정권 수립 초부터 자력갱생 위주의 에너지 정책을 수립했다. 한반도 이북에 많이 매장돼 있어 자체조달이 가능한 석탄이나 강물을 이용한 수력 위주의 발전정책을 세운 것. 특히 북한이 주목한 것은 공짜로 얻을 수 있는 수력이다. 그 핵심인 압록강 수계상의 대형댐은 북·중 간 밀월기 동안 집중적으로 건설됐다. 시작은 일제강점기 때인 1944년 완공 당시 ‘동양(東洋) 최대 댐’으로 불렸던 수풍댐이 끊었다. 평안북도 삭주군과 중국 단둥시 콴덴(寬甸)현 사이에 놓인 수풍댐은 일제가 패망 직전인 1944년 완공한 댐으로 당시 발전용량만 70만㎾에 달했다.
하지만 소련군이 일제 괴뢰정권인 만주국(滿洲國)과 한반도 이북에 진주한 후, 발전기 대부분을 소련으로 뜯어갔다. 6·25전쟁 와중인 1952년에는 미 공군의 폭격을 받아 만신창이가 됐다. 하지만 일제가 워낙 견고하게 지은 댐이라 폭격에도 살아남았고, 6·25전쟁이 끝난 후인 1958년에는 소련 레닌그라드설계원과 중국의 인력과 자재 등을 지원받아 수풍댐을 완전복구한 뒤 전력을 생산해 북·중 간에 공동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수풍댐 재가동식에는 김일성이 직접 참석했다고 한다.
▲ 수풍댐 photo 바이두
▲ 위원댐(중국명 라오후샤오댐)
현재 80만㎾급으로 증설된 수풍댐 건설·관리 방식은 북·중 간 압록강 수계에 향후 들어선 수력발전소 건설과 관리의 전범이 되었다. 대개 인부들을 동원해 강물을 틀어막는 물막이 공사는 북한 측이 맡고, 발전설비 제공과 송전선 건설은 중국이 맡아 역할을 분담하는 식이다. 수풍댐 모델에 따라 수풍댐 상류에 일제가 짓다가 중단한 운봉댐을 다시 세우는 작업에 착수해 1974년 40만㎾급 규모로 완공했다. 이후 1987년에는 수풍댐 하류에 34만㎾급 태평만댐을 지었고, 1990년에는 수풍댐과 운봉댐의 중간 지점에 39만㎾급 위원댐을 세웠다. 이렇게 건설된 댐을 가동해 생산한 전력은 ‘중·조수력발전공사’(‘압록강수력발전공사’의 후신)라는 북·중 간 합작회사의 관리하에 북한과 중국이 공동으로 배분하는 것이다.
그 결과 북한에는 ‘수주화종(水主火從)’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수력이 주가 되고 화력이 종이 되는 기형적인 발전구조가 들어섰다. 통일부에 따르면, 북한의 에너지원별 공급에서 수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28.7%에 달한다. 이는 석탄(45.2%) 다음으로 높은 비중으로, 석유(11.2%)보다도 월등히 높다. 발전설비 용량만 놓고 보면, 수력은 60.1%로, 화력(39.9%)을 압도한다. 이는 남한의 화력(65%), 원자력(34%)과 비교하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수력에 과도하게 의존한 발전정책은 북한 산업 전반에 심각한 부작용도 야기했다. 수력발전의 경우 계절별로 전력 생산량이 들쑥날쑥하고, 갈수기(渴水期)에는 ‘천수답(天水畓)’과 같이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대규모 수력발전소가 위치한 압록강에서 평양과 같은 주요 전력수요처와의 거리가 멀다. 실제 한반도 이북을 동서로 가르는 낭림산맥을 기준으로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두만강에서 일으킨 수력발전에 전력의 대부분을 의존하는데, 송전 과정에서 생기는 전력손실이 상당하다고 한다.
하지만 대북 제재로 북·중 간 송유관 차단마저 공공연히 거론된 상황에서 수력발전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북한은 과거 소련의 지원을 받아 원자력발전소를 세우려다 구(舊)소련의 붕괴로 인해 무산됐다. 1994년 북·미 간 제네바합의 때 핵동결을 전제로 미국 주도 국제컨소시엄(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이 지어주기로 한 2000MW급 한국형 원전(경수로) 역시 북한이 비밀리에 핵 개발을 재추진하면서 스스로 걷어차 버렸다. 결국 석유도 끊기고, 원자력마저 안 되는 상태에서 택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선택지가 수력인 셈이다.
▲ 운봉댐 위 제방도로
현재 북·중 간에는 압록강 중류 구간에서 새로운 댐 건설도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인다. 북한 자강도 만포시 문악동과 중국 측 지린성 지안(集安)시 창촨(長川)촌 사이에 대규모 물막이 공사를 하는 장면을 구글 위성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위원댐과 운봉댐의 사이에 있는 지점으로, 2010년 북한과 중국이 만포에서 건설협약을 체결한 문악댐으로 추정된다. 지안시정부 측에 따르면, 문악댐의 총연장은 602m, 발전설비는
4만㎾급이다. 원래 예정인 2013년 완공보다는 많이 늦어졌으나, 강물의 절반 이상을 흙더미로 막은 것으로 볼 때 압록강 위의 새로운 댐 출현도 시간문제로 보인다.
압록강상의 댐들은 북·중 간 밀무역 통로로도 활용된다. 태평만댐을 비롯해 수풍댐, 위원댐, 운봉댐 위의 제방도로는 ‘2류 구안(口岸)’으로 지정돼 있어 북·중 간 자유왕래도 가능하다. 변경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발급하는 통행증을 가진 중국인은 댐 제방도로를 따라 북한으로 쉽게 건너갈 수 있다. 국제열차가 왕래하는 신의주~단둥, 만포~지안, 남양~투먼 같은 ‘1류 구안’에 비해 국제사회의 이목이 덜 쏠리는 장점도 있다. 제방도로를 통하면 유엔이 지정한 금수(禁輸)물자의 북한 반입도 용이하다. 국제사회의 물샐틈없는 대북 공조에 앞서 북·중 간 댐에서 물이 새지 않는지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다.
출처 | 주간조선 2456호 글 | 이동훈 주간조선 기자
■ 05.16 북한군인들은 남한이 보낸 식량을 먹고 김정일에 충성맹세했다!
▲2007년 7월 20일 오전 정부가 지원키로 한 대북 식량차관 40만t 가운데 1천500t을 실은 25t 트럭 60대가 북한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를 통해 북으로 향하고 있다. /조선DB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려면 김정은과 대화나 협상을 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적 수장을 만나는 것은 물론 단절했던 개성공단도 다시 열겠다던 새 대통령(문재인)에게 북한이 한방 먹였다.
북한정권에게 과감한 반격이 아니라 타협을 주장하던 친북성향의 남한 대통령을 김정은이 보란 듯이 배신한 것이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5일만에 북한은 신형 지상대지상 중장거리 미사일 ‘화성-12형’의 시험발사를 감행했고, 15일 선전매체를 통해 발사성공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번 도발은 남한대통령이 좌파성향이든 우파성향이든 주도권은 북한 김정은이 잡겠다는 의도이다. 햇볕정책시절이나 강경정책시절이나, 또 김정일 시대나, 김정은 시대의 도발 패턴에는 변함이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북한에 수많은 식량을 퍼부으며 자신이 한반도의 평화에 기여한 ‘영웅’인 마냥 자처할 때도 서해에서는 연평해전이 있었으며, 그 지원이 오늘날의 핵과 미사일이 되었고 김정은 으로의 세습도 가능케 했다.
기자가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 김일성 정치대학에서 공부할 때 일이다. 사회주의 진영이던 동구라파 나라들이 하루아침에 몰락하고 그 여파로 북한에는 식량배급 중지로 굶어죽는 사람의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인민군도 하루 한끼 죽을 공급하던 시기여서 젊은 군인들은 배고픔을 참지 못해 탈영과 약탈을 감행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일반군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김일성 정치대학 학생들도 그 시기 탈영을 할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당시 인민무력부(지금의 무력성)와 총정치국에 보고된 1994~1996년 인민군 병사들의 탈영수는 4만을 넘었다. 이들은 가는 곳마다 주민마을을 약탈하고 일부 부대에서는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까지 한 탈영병들도 있었다.
이들속에는 7~8년 군복무를 한 분대장도 있었고, 강건군관학교에서 탈영한 학생은 물론 김일성 정치대학 학생들도 속해있었다. 그 시기 이들이 서로 만나 대열을 형성했다면 북한에 치명적인 타격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1996년 남한(김영삼 전 대통령)에서는 북한의 남포항에 수만톤의 식량을 보냈으며 이는 즉시 북한 전군에 공급되었다. 배부르면 고마움을 모르지만 인간에게 제일 배고플 때 식량 1kg는 천금보다 더 귀하다.
식량부족으로 영양실조 군인들이 부대의 20%를 차지하던 시기여서 그들에게 공급된 식량은 곧 김정일에게 충성맹세로 이어졌고, 김일성이 사망한 불과 3년만인 1997년 김정일은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될 수 있었다.
이후 김대중-노무현 시절에도 북한 김정일에게 한반도의 평화와 긴장완화를 위해 식량과 금품을 바쳤지만 돌아온 것은 오늘날의 핵과 미사일이다.
한마디로 한반도의 적화를 꿈꾸는 김정은의 야망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금 이 시점에서도 개성공단 재개나 김정은과의 타협을 주장한다면 5천만 국민은 물론 북한 2천3백만 국민에게도 배신을 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글 | 이석영 자유북한방송 기자
■ 05.24 북한 체제 보장? 해주고 싶어도 불가능하다
"공격·체제 붕괴 시도 안 해" 美, 北에 유화 사인 보내지만
김정은 정권 본질적 결점 탓에 핵·미사일 개발 포기 않을 것
폭압만으로 유지되는 정권과 협상도 외부 도움도 불가능해
지난 20일 미사일 도발로 북한은 김정은 집권 후 5년5개월 동안 53번 미사일을 발사했다. 김정일이 집권한 17년5개월 동안 탄도미사일을 16발 발사한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일이다. 북한은 강경파로 알려진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4개월 동안 8회에 걸쳐 12발의 미사일을 쏘아 올렸고 온건한 대북 정책을 표방할 것으로 기대되는 대한민국 신정부가 수립되고 불과 열흘 동안 미사일을 두 번이나 발사했다. 이처럼 집요한 핵과 미사일 개발 계획은 평화적 수단만으로 북한의 의지를 꺾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지난 14일 북한이 시험 발사한 화성 12형 미사일은 30분간 비행함으로써 역대 공산국가들이 시험 발사한 그 어떤 미사일보다 비행시간이 길었다는 기록을 세웠고, 지구 밖 우주로 2000㎞ 이상 날아올랐다가 대기권에 재진입(Reentry)함으로써 대륙간탄도탄에 필수적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도 증명해 보였다. 화성 12형 미사일은 장거리 비행의 가능성과 핵탄두 장착 가능성이 우려할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려 주었다.
북한 중앙통신은 성공한 화성 12형 미사일을 후손만대에 물려줘야 할 '주체탄'이라고 묘사했고, 자축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한다. 미사일 성공 소식에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하는 북한 엘리트들로부터 두 세대에 걸친 노력의 결과물인 핵과 미사일을 포기시키겠다는 희망이 얼마나 현실과 거리가 먼 일인지 알아야 한다. 그런 연후에야 현실적인 대안들을 강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은 6·25전쟁 직후 김정은의 조부(祖父) 김일성에 의해 시작된 북한 국가 대전략의 핵심 요소이며 북한이 꿈에도 그리는 강성 대국의 결정적 요소가 아닐 수 없다.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핵과 미사일 없이 북한은 결코 강성 대국이 아니고 북한 정치를 선군정치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북한이 14일 신형 지상대지상 중장거리 미사일 '화성-12형'의 시험발사에 성공했다고 북한 노동신문이 15일 보도했다. 사진은 북한이 발사한 직후의 화성-12의 모습. /연합뉴스
최근 미국은 북한에 대해 정권 교체를 시도하지 않을 것이고 침략도 하지 않을 것이며 체제도 보장해 줄 테니 미국을 믿고 핵을 포기하라고 설득했다. 북한이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제안이다. 우선 북한이 핵을 보유하려는 '본질적'인 이유는 미국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은 중국도, 러시아도 믿지 않는다. 북한은 6·25 직후부터 독자적인 전쟁 수행 능력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 6·25 동란 중 북한 편이라던 중국과 소련이 보인 행동에 치를 떤 김일성이 수립한 독자전 수행 전략에 핵무기와 선군 사상은 필수다.
북한이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미국이 북한의 '체제를 보장'해 줄 현실적인 방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 체제를 보장해 주려면 미국은 우선 김정은의 폭압 통치에 대한 비방을 멈춰야 할 것이다. 미국 국민 혹은 다른 자유주의 국가들에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또 다른 체제 보장 방안은 경제 원조인데 그것이 북한 주민들의 먹고사는 일이 아니라 김정은 통치 체제를 강화하는 데 사용되더라도 미국은 개의치 않아야 한다. 북한에서 주민 봉기가 일어난다면 체제 보장을 약속한 미국은 김정은 체제를 지켜주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말이 되지 않는 질문 같아 보이지만 바로 이런 딜레마들 때문에 북한 정권은 개혁·개방을 외면하고 고립과 핵무장, 강성 대국의 길을 택한 것이 아닌가. 혹시 북한이 정말로 핵을 제거한다면 그 이후의 김정은 체제와 현재의 김정은 체제를 동일한 체제라고 볼 수 있을까.
키신저 박사는 "어떤 나라가 핵무장에 성공하는 경우 그 나라의 핵무기는 이웃 나라들과 무언(無言)의 '불가침 협정'을 체결한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독자전 수행 능력을 갖춤과 동시에 이 '무언의 불가침 조약'으로 미국의 한반도 문제 개입을 배제하는 그날을 오매불망 그리고 있다.
이춘근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정치학 박사
■ 06.19 조선공산당 본부 - 해방 후 조선정판사(朝鮮精版社) 사건의 무대
1946년 5월 15일 제1관구경찰청은 장택상(張澤相) 청장 명의로 ‘조선정판사(朝鮮精版社) 위폐(僞幣)사건’을 발표했다. 경찰은 “300만원 이상의 위조지폐로써 남조선 일대를 교란하던 지폐위조단 일당이 일망타진되었다”면서 “이 지폐위조단에는 조선공산당 간부 2명, 조선정판사에 근무하는 조선공산당원 14명이 관련되었다. 이 지폐위조단의 소굴인 《해방일보》를 인쇄하는 조선정판사 소재지 근택(近澤)빌딩은 조선공산당 본부이다”고 발표했다.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은 해방정국에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종래 공산당에 대해 유화적 태도를 취하던 미 군정청은 이 사건 이후 공산당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공산당에 대해 막연히 호의를 갖고 있던 대중도 지폐를 위조해 경제를 교란하는 민생범죄를 저지른 공산당을 보는 시선이 싸늘해졌다. 곤경에 처한 공산당은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 등 좌익계 정당들과 통합해 남조선노동당을 창당해 화장을 고치는 한편, 9월 총파업과 대구폭동 등 극좌폭력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일제시대 근택인쇄소 자리
▲조선정판사 사건 주범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이관술. ‘부당수’라고 불릴 정도로 조선공산당의 실세였다.
조선정판사와 조선공산당이 있던 근택빌딩은 서울시 중구 소공동 74번지(옛날 지번)에 있었다. 이곳에 일제(日帝)시대에 근택인쇄소라는 인쇄소가 있었다. 한국은행과도 멀지 않은 위치에 있던 이 근택인쇄소에서는 조선은행권을 발행했다. 조선공산당은 이 인쇄소를 접수, ‘조선정판사’로 간판을 바꾸어 달았다. ‘정판(精版)’이라는 말에서, 이 인쇄소가 당시로서는 최고급의 시설을 갖춘 인쇄소였음을 엿볼 수 있다. 조선공산당 본부와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도 이 건물로 들어왔다.
《해방일보》는 1945년 9월 19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로 창간됐다. 사장 권오직은 일제시대에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 등으로 두 차례에 걸쳐 13년간 복역했던 거물 공산주의자였다. 후일 월북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주중(駐中)대사 등을 지내다가 숙청당했다. 《해방일보》는 ‘만국 무산자는 단결하라!’는 구호를 1면에 내건 철저한 공산주의 선전선동 매체였다. 이승만·김구·한국민주당 등을 공격하는 게 일이었다.
언론사학자인 정진석 전 한국외국어대 교수에 의하면 판권상 《해방일보》가 이곳에서 발행을 하기 시작한 것은 1946년 3월 20일(제92호)부터라고 한다. 판권대로라면 《해방일보》가 이곳에서 인쇄를 한 것은 두 달이 채 못 되는 셈이다. 1946년 5월 18일 조선정판사 사건으로 신문이 폐간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정판사 사건 당시 경찰의 발표에 따르면, 위조지폐 발행을 지시한 자는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과 조선공산당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 이관술이었다. 이관술은 일제시대에 경성콤그룹 등에서 활동했던 골수 공산주의자로 당시에는 ‘부당수’로 불릴 정도로 비중이 있는 인물이었다.
조선정판사 사건
조선정판사에는 일제가 남기고 간 100원권 지폐원판 10개와 지폐인쇄용 잉크, 종이들이 남아 있었다. 권오직과 이관술은 1945년 10월 20일 조선정판사 기술과장 김창선에게 지시, 그해 말부터 이듬해 2월까지 1200만원(처음에는 300만원으로 발표했으나, 이후 1200만원으로 늘어남)의 위조지폐를 발행해서 공산당 활동자금 등으로 사용했다.
경찰 발표에 의하면, 조선은행(한국은행의 전신)은 1945년 9월 근택인쇄소가 갖고 있던 지폐원판들을 조선도서출판주식회사에 넘기라고 했지만, 그중 100원권 인쇄원판 10개가 행방불명됐고, 그 인쇄원판들이 조선정판사로 넘어갔다고 한다. 이들이 만든 지폐는 조선은행권을 만들 때 사용하던 인쇄원판과 종이, 잉크 등을 사용했기 때문에 진짜 지폐와 차이가 없었다. 위조지폐를 만든 주범 김창선은 자신에게 충분한 반대급부가 돌아오지 않자 지폐원판 가운데 하나를 빼돌려 위조지폐를 만들려다가 여의치 않자 이를 다른 사람에게 팔아넘겼다가 경찰에 꼬리가 잡혔다. 경찰은 1946년 5월 15일 사건을 발표하면서 증거로 100원권 원판 9개, 인쇄용 잉크, 소각 아연판 잔해 등을 제시했다.
사건이 발생하자 미 군정청은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종, 조선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 등을 구속, 재판에 회부했다. 권오직은 월북해서 체포를 면했다. 5월 18일에는 미군을 동원, 조선공산당이 사용하는 부분을 제외한 근택빌딩 나머지 부분을 폐쇄했다. 《해방일보》도 폐간됐다.
조선공산당은 즉각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들은 5월 15일 즉각 성명을 내고 권오직·이관술 두 사람은 이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으며 “이 사건과 조선공산당 간부를 관련시킨 것은 어느 모략배의 고의적 날조와 중상으로 미소(美蘇)공동위원회 휴회의 틈을 타서 조선공산당의 위신을 국내외에 걸쳐 타락시키려는 계획적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이어 공산당은 1946년 7월 26일 이른바 ‘신전술’을 발표했다. ‘신전술’은 “지금까지 미군정과 그 비호하의 반동들의 테러에 대하여 그저 맞고만 있었으나 지금부터는 맞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정당방위의 역공세로 나가자. 테러는 테러로써, 피는 피로써 갚자”면서 극좌폭력투쟁으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정판사 사건 재판이 열리기 직전인 1946년 6월 27일~7월 12일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은 비밀리에 북한에 들어가 김일성 등과 만났다. 이때 허가이·김책·주영하 등 북조선공산당(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관계자들은 박헌영에게 “미군정이 정판사사건을 만들 만한 빌미를 조선공산당 측에서 제공한 꼴이 아닌가” “일제 때 근택빌딩에 있던 인쇄소에서 총독부가 지폐를 찍어 냈던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냐. 그렇다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기계 같은 것들은 미리 다 치워 버렸어야 하지 않느냐”고 따졌다.
좌익의 재판투쟁
▲조선정판사 사건 재판. 피고인들은 고문 조작 주장 등을 하면서 재판정을 정치투쟁이 장으로 만들었다. 사진=조선일보DB
조선정판사 사건에 대한 재판은 1946년 7월 29일~10월 31일 33차례 열렸다. 공산당은 재판을 투쟁의 장(場)으로 활용했다. 재판정 내외에서의 구호 및 투쟁가요 외치기, 범죄 혐의 부인, 고문 주장, 재판 지연전술, 대규모 변호인단 구성 등 1980년대 이후 좌익사범 재판에서 흔히 보게 되는 풍경들이 이때 이미 등장했다.
재판 첫날에는 수천 명의 공산당원과 좌익세력들이 법원을 둘러싸고 적기가(赤旗歌)를 부르며 “조선공산당 만세!” “판·검사를 때려 죽여라!” 등의 구호를 외쳐 댔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미군 헌병까지 출동해야 했다. 진압 과정에서 총격이 발생, 3명의 사상자가 생기고 47명이 체포되었다.
김창선은 경찰의 고문에 못 이겨 허위진술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문당한 증거를 보이겠다면서 옷을 벗어던지기도 했다. 박낙종 등 피고인들은 재판부 기피신청을 내고, 피고회의를 열겠다고 주장했다.
이들을 돕기 위한 변호인단의 진용은 막강했다. 일제시대에 항일변호사로 이름을 떨쳤던 허헌이 변호인단의 좌장 역할을 맡았다. 그는 후일 남조선노동당이 결성되자 위원장(당수)을 맡았고, 북한 정권에 참여해 김일성대학 총장,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을 지냈다.
이에 맞서는 검사는 조재천과 김홍섭이었다. 조재천은 후일 민주당 정치인으로 활약하다가 장면 정권하에서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김홍섭은 대법원판사, 서울고등법원장 등을 역임했다. ‘사도법관(司徒法官)’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김홍섭은 피고인들에 대해 동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피고인들이 경찰의 고문을 받았다고 주장하자 당대 최고의 안과의였던 공병우 박사, 외과수술의 1인자였던 백인제 박사(백병원 창립자)가 나와 그들을 검진했다. 이들은 피고인들의 신체에서 고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고 감정했다. 두 사람은 6·25 때 서울이 적치하(赤治下)에 들어가자 체포되었다. 공병우 박사, 백인제 박사와 친했던 장기려 박사는 이들이 체포되었던 이유를 조선정판사 사건 때 피고인들에게 불리한 감정을 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고 진술했다. 한글타자기 발명가이기도 했던 공병우 박사는 납북되어 가다가 극적으로 탈출했지만, 백인제 박사는 결국 북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1946년 11월 28일 서울재판소는 이관술, 박낙종, 김창선 등 4인에게 무기(無期)징역을, 신광범(조선정판사 인쇄과장), 정명환(인쇄공) 등 3인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종이 “남조선 사법권은 이로써 자살하였다. 우리는 조상(弔喪)해야 한다”고 말했다. 피고인들은 대성통곡하면서, 적기가를 불렀다. 이관술과 박낙종은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 6·25가 발발해 보도연맹 관련자들을 처단할 때 죽었다. 이관술의 유족은 노무현 정권 시절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하는 한편, 국가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은 2015년 3월 “수감 중인 사람을 전쟁이 발발했다는 이유로 총살한 것은 불법부당하다”며 “국가는 유족에게 1억60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국내 좌파세력은 “당시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이 돈을 싸 들고 올 정도로 자금이 풍족했던 조선공산당이 위폐를 찍어 낼 만한 이유가 전혀 없었다”면서 “정판사 위폐 사건은 미군정과 우익이 조작한 사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남로당 지하총책이었던 박갑동은 “자금난에 시달리던 공산당이 근택빌딩에 지폐 인쇄 시설이 있는 것을 알고 건물을 손에 넣은 것”이라는 취지의 회고를 남겼다.
천주교, 《경향신문》 발간
이후 근택빌딩과 그 안에 있던 인쇄시설은 천주교 서울교구유지재단이 인수, 1946년 10월 6일부터 《경향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경향신문》이라는 제호는 1906년 프랑스 신부 플로리안 드망주가 창간한 주간지 《경향신문》의 제호를 이어받은 것이었다. 초대 사장은 양기섭 신부였다. 주간은 시인 정지용, 편집국장은 소설가 염상섭이 맡았다.
《경향신문》은 중도우파 성향이었다. 경향신문사는 창간 11개월 만에 6만2000부를 기록, 시중 신문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고 자랑한다.
1950년대는 《경향신문》의 전성기였다. 이승만 정권의 비정(秕政)을 가차없이 비판해 인기를 끌었다. 결국 《경향신문》은 1959년 2월 4일 자 ‘여적(餘滴)’ 난에 실린 논설위원 주요한의 칼럼이 문제가 되어 그해 4월 30일 폐간당했다.
《경향신문》이 당시 ‘야당지’로 처신한 데에는 민주당 신파(新派)의 지도자이자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장면 부통령과의 관계도 작용했을 것이다. 《경향신문》과 함께 양대 야당지였던 《동아일보》는 민주당 구파(舊派)의 대변지로 인식되고 있었다.
《경향신문》은 4·19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지 이틀 후인 1960년 4월 28일 복간했다. 장면 정권 시절 한창우 《경향신문》 사장은 정권의 숨은 실세(實勢)로 꼽혔다. 좋은 시절은 이듬해 5·16군사혁명으로 끝났다. 12년간 재직했던 한창우 사장이 물러났고, 1962년 2월 천주교유지재단은 신문사를 매각했다. 주식회사로 다시 출발한 《경향신문》은 1965년 5월 이준구 사장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다시 주인 잃은 신문이 되었다. 기아산업, 신진자동차 등으로 주인이 바뀌다가 5·16장학회(정수장학회)가 신문의 대주주가 되었다. 1974년 11월에는 문화방송(MBC)과 합쳐 주식회사 문화방송·경향신문이 되었다. 이와 함께 《경향신문》은 소공동 시대를 마감하고 서울 중구 정동의 현 사옥(社屋)으로 옮겨갔다.
롯데백화점 주차빌딩 들어서
▲옛 조선정판사 자리는 지금은 롯데백화점 주차타워가 되어 있다.
사진=배진영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 본부와 조선정판사가 있던 곳, 《경향신문》 기자들이 이승만·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필봉을 휘두르던 소공동 74번지는 지금 번지수 자체가 사라졌다. 그 일대에 있던 3~5층짜리 낮은 건물들은 지난 몇 년 사이에 하나둘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오인환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의 도움으로 옛 소공동 74번지가 어디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자리에 지금은 롯데백화점 주차빌딩이 들어서 있다. 무산(無産)대중 혁명을 외치던 공산당의 본부는 상업자본주의의 상징인 재벌계열 백화점의 부속건물이 된 셈이다. 공산당이 위조지폐를 찍어 내던 자리에는 자본주의화한 공산국가 중국에서 온 유커(遊客·중국인 관광객)들이 돈을 뿌리고 간다.
출처 | 월간조선 2017년 6월호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 07.03 올코트 프레싱 北을 끊어라!
▲ 북한 만수대창작사가 제작한 세네갈 다카르의 아프리카 르네상스 기념상. photo 위키피디아
세네갈 수도 다카르에는 ‘아프리카 르네상스 기념상(Le Monument de la Renaissance Africaine)’이라는 대형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이 기념상은 2010년 세네갈의 독립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높이 49m인 이 기념상은 미국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높이 46m)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예수상’(높이 38m)보다 크다. 이 기념상은 북한의 만수대창작사가 2700만달러를 받고 제작한 것이다. 당시 북한은 200여명의 기술자들을 세네갈에 파견해 이 기념상을 세웠다. 만수대창작사는 예술가 1000명을 포함해 4000여명이 일하고 있는 거대한 ‘예술공장’이다. 특히 만수대창작사는 외화벌이를 위해 아프리카를 비롯해 동남아 등에서 조각상 등 각종 예술작품들을 만들어왔다. 독재자였던 압둘라예 와데 전 세네갈 대통령의 지시로 만들어진 이 기념상은 북한과의 밀접한 관계를 대변하는 상징물이었다. 세네갈은 1974년 수교한 북한과는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그랬던 세네갈 정부가 최근 만수대창작사의 북한 핵 프로그램에 대한 재정적 지원과 관련된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북한 노동자들에 대한 입국과 단기체류 비자 발급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세네갈 정부의 이런 조치는 만수대창작사가 기념상 제작비로 받은 자금이 북한의 핵 개발에 사용됐을 가능성 때문이다. 세네갈 정부는 또 북한 외교관들의 은행계좌를 1개로 제한하는 조치도 내렸다.
세컨더리 보이콧 카드 꺼내나
호주 정부는 최근 북한이 외국인에게 가하는 제약, 여행자들에게 적용되는 매우 다른 북한의 법률과 규정, 국제사회에 대한 북한의 간헐적인 위협 등을 지적하며 자국민들에게 북한 여행을 재검토하라고 권고했다. 호주 정부는 앞으로 더욱 강력한 여행 제한 조치를 추진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 북한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은 지난해 10만여명으로 이 가운데 중국인 관광객이 80%를 차지하고 있고, 서방 국가 관광객들은 5000여명으로 추정된다. 북한에는 외국인 관광객이 중요한 외화수입원이다. 호주 정부는 또 지난 6월 2일 북한인 5명에 대해 자국 여행금지와 금융제재 조치를 내렸다. 이들은 중국, 러시아, 베트남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북한 국영기업의 임원들이다. 줄리 비숍 호주 외교장관은 “북한이 핵과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을 포기하지 않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들을 위반하고 있어 이들에 대한 자체적인 제재를 추가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싱가포르 정부도 최근 자국민들에게 북한 여행을 재검토하라고 권고했다. 특히 싱가포르 정부는 자국민들이 북한을 여행하다가 사고 등을 당할 경우 북한에 외교 대표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영사 지원도 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 암살사건으로 곤욕을 치렀던 말레이시아 정부는 자국에서 취업허가가 끝나거나 합법적인 취업허가 없이 일해온 북한 노동자 296명을 추방했다. 북한 노동자들은 보르네오섬 사라왁주의 건설현장과 탄광 등에서 외화벌이를 해왔다. 이들은 월급의 90%를 상납해왔고 심지어 쿠알라룸푸르 주재 북한대사관의 유지비까지 조달했다고 한다. 말레이시아의 유일한 북한 식당인 고려관도 문을 닫았다. 말레이시아와 북한은 김정남 암살사건으로 한때 국교 단절이 거론될 정도로 심한 갈등을 빚어왔다. 지난해 420만달러에 달했던 말레이시아와 북한 간의 교역도 대폭 줄어들었다. 다툭 아마드 마슬란 말레이시아 무역산업부 차관은 북한과의 관계 악화가 말레이시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고 밝혔다. 북한과의 말레이시아 전체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001%에 불과할 정도로 미미하지만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 상당한 타격이 될 수밖에 없다.
각국이 이처럼 북한에 대한 제재 조치를 강화하고 있는 이면에는 미국의 눈에 보이지 않는 역할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캐티나 애덤스 국무부 동아태 담당 대변인은 “미국은 외교·안보·경제적 조치로 북한을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기 위한 강력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지난 5월 아세안 10개 회원국 외무장관들과 만나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이행을 강화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최소화하고 돈줄 차단에 적극 나서줄 것을 당부했다. 아세안 10개국은 모두 북한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 이 중 인도네시아·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말레이시아 5개국은 평양에 대사관이나 대표부를 두고 있다.
미국은 북한을 고립시키기 위해 세컨더리 보이콧(secondary boycott·2차 제재)이란 카드를 꺼낼 방침이다. 세컨더리 보이콧은 제재국가와 거래하는 제3국의 기업과 은행, 정부 등에 대해서도 제재를 가하는 것을 말한다. 틸러슨 장관은 지난 6월 13일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서 “미국은 현재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전 세계 모든 나라의 대북 제재에 동참할 것을 설득하고 있는 단계”라면서 “만일 상대국이 북한과의 교역이 500만달러에 불과하다고 답하면, 이를 200만달러로 줄일 것을 요청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틸러슨 장관은 “북한과 거래하는 사례가 포착되면 해당 정부에 이 사실을 공개하고 자국 법으로 처리할 것을 요청한다”면서 “하지만 정보를 제공받고도 조치를 취하지 않고, 취하길 원치 않거나, 취할 능력이 없는 나라들이 있으면 미국은 이에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 독일 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이 운영하고 있는 호스텔. photo Dentsche Welle
미국의 당면한 최고 위협은 북한
미국이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사회를 대상으로 ‘올 코트 프레싱(all court pressing·전면 압박)’ 작전에 나선 이유는 무엇보다 북한이 미국의 ‘제1위협’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은 지난 6월 12일 하원 군사위원회에서 미국이 당면한 최고의 위협으로 북한을 지목했다. 또 다른 이유는 유엔 안보리의 제재 조치로는 북한을 고립시키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2006년 첫 번째 핵실험을 실시한 이후 유엔 안보리는 그동안 대북 제재를 강화해 왔지만 실제적인 효과는 없었다. 북한의 지난해 교역 규모는 66억달러에 달했다. 각국과의 교역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중국(61억달러)·인도(1억4500만달러)·필리핀(8900만달러)·러시아(8400만달러)·태국(5300만달러)·파키스탄(4900만달러)·부르키나파소(3400만달러)·도미니카(2000만달러)·베네수엘라(1600만달러)·칠레(1500만달러) 등의 순이었다.
북한은 또 47개국에 대사관을 두고 있다. 이들 국가에 주재하는 북한대사관은 주로 식당 운영, 건물 임대, 무기 판매, 마약 밀매 등으로 김정은 정권에 자금을 지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유엔에 따르면 북한이 각국의 주재 대사관들을 통해 벌어들인 돈은 연간 15억~23억달러로, 이 중 60~90%는 ‘충성 자금’ 형태로 김정은 정권을 위해 쓰이는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 식당은 12개국에서 100여곳이 운영되고 있다. 북한 식당들도 주요 외화벌이 수단이다. 북한은 또 50여개국에 6만여명의 노동자를 파견하고 있다. 북한 노동자들이 한 해 벌어들이는 돈은 15억~23억달러로 추정된다.
트럼프 정부는 북한이 핵·미사일 실험을 계속 실시해온 것은 북한과 교류하는 국가들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이에 따라 트럼프 정부는 북한과 외교·무역 관계를 지속하는 국가들을 대상으로 압박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국대사는 “북한을 지원할지 아니면 우리를 도울지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면서 “만약 북한을 지원하면 우리는 저지에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을 완전하게 고립시켜 핵·미사일 실험을 할 수 있는 재원을 끊어버리겠다는 것이다. 트럼프 정부는 아직까지 국가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북한과 교류를 계속하고 있는 국가와는 외교·경제적 관계를 하향 조정할 계획이다.
트럼프 정부의 대북 압박과 제재 강화에 발 맞춰 의회도 북한의 돈줄을 차단하기 위한 대북 제재 법안을 통과시켰다. 하원에서 찬성 419 대 반대 1표로 통과된 ‘대북 차단 및 제재 현대화 법안(H.R.1644)’은 원유·석유제품의 대북 판매·이전 금지, 북한 노동자를 고용한 외국 기업 직접 제재, 도박·음란 인터넷 사이트를 포함한 북한의 온라인 상업행위 차단, 외국 은행의 북한 금융기관 대리계좌 보유 금지, 북한산 식품·농산품·직물과 어업권 구매·획득 금지, 전화·전신·통신 서비스 대북 제공 금지, 북한산 물품의 미국 수입 금지 등의 내용으로 돼 있다. 공화·민주 양당이 초당적으로 공동 발의한 이 법안은 북한의 국제금융망 차단 불이행자 목록, 북한 송출 노동자 고용 외국인 및 외국 기관 목록, 북한 선박 및 운송 제재 불이행 목록, 타국의 안보리 결의 이행 현황 등을 정부가 의회에 정기적으로 보고하도록 규정했다. 에드 로이스 하원 외교 위원장은 “새 대북 제재 법안은 북한 정권과 거래하는 자들을 추적하고 제재함으로써 미국 정부에 북한의 자금줄을 차단하는 강력한 수단을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법안은 상원을 통과할 것이 확실시된다. 이 법안은 트럼프 대통령의 서명을 거쳐 발효된다. 의회가 이런 법안을 마련한 것은 트럼프 정부를 적극 지원하기 위해서다.
에콰도르, 북한 비자면제 폐기
트럼프 정부의 올코트 프레싱 작전이 작동하기 시작하면서 각국에서 북한의 돈줄을 끊거나 교류를 제한하는 조치를 시행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독일 정부는 최근 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 경내에 있는 호스텔의 영업을 금지하라고 명령했다. 북한대사관은 2004년부터 건물 1개 동을 호스텔 운영 업체에 임대해주고 매달 4만유로의 수익을 올려왔다. 북한은 유럽권의 부동산 임대료가 비싸다는 점을 악용해 폴란드·루마니아 등에서 공관 건물 일부를 외부 업체에 임대해 외화벌이를 해왔다. 독일 정부의 조치로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도 유사한 대북 제재가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에콰도르 정부는 북한을 비자 면제 대상국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는 북한인들이 비자 없이 에콰도르에 입국해 90일간 체류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입국비자를 받아야 한다. 북한인은 그동안 에콰도르에 무비자로 입국한 후 외화벌이를 해왔다. 국경 개방 정책을 취해온 에콰도르 정부가 북한에 대한 비자 면제를 폐기한 것은 이례적이다. 북한은 그동안 에콰도르와의 외교 관계 수립을 위해 공을 들여왔다. 에콰도르 정부의 조치로 북한에 대한 비자 면제국은 38개국으로 줄어들었다. 불가리아·체코·루마니아 등 동유럽 3국은 북한 노동자 고용을 중단했다.
원유 공급 중단 방안도 추진
트럼프 정부는 북한의 생명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원유의 공급을 중단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틸러슨 장관은 “북한에 원유와 석유 제품 등 필수품 공급을 불허하기 위해 다른 나라들과 논의를 시작할 것”이라면서 “북한에 대한 원유를 차단하려는 노력은 최대 공급자인 중국과 러시아의 협력이 없으면 효과를 낼 수 없다”고 밝혔다. 원유 공급 차단은 북한에 대한 초강수 제재다. 트럼프 정부는 북한과 거래하는 10여개 중국 기업의 명단을 중국 정부에 넘기고 이에 대해 조처를 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중국의 5000여개 기업이 북한과 거래를 하고 있으며, 이 중 일부는 군사용으로 전용될 수 있는 품목의 무역 거래를 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는 중국 정부가 자국 기업들을 처벌하지 않을 경우 미국이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미국 연방검찰은 제재 대상인 북한 조선무역은행의 돈세탁을 대신해준 중국 기업인 밍정(明正)국제무역회사를 기소하고 법원에 관련 자금 190만달러에 대한 압류를 요청했다. 선양에 본사를 둔 이 회사는 중국 계좌를 이용해 돈세탁을 한 뒤 북한에 자금을 이체했다. 190만달러는 미국 정부의 북한 자금 몰수로는 최대 규모다.
출처 | 주간조선 2463호 글 | 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 07.19 독사를 품으면 물려 죽을 뿐
햇볕정책'은 아무래도 이름 덕을 봤다. 나그네 옷을 벗긴 건 사나운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이었다는 이솝 우화 덕분이다.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읽거나 들어 친숙한 이야기다. '햇볕'이라는 작명(作名)에 쉽게 고개를 끄덕인 이유였다. 상대를 인정하고 따뜻하게 품어야 상대도 바뀔 것이라는 순진한 낙관을 갖게 했다.
중국인이라면 바로 긍정하지 않는다. '동곽 선생'이란 전래 동화가 초등 교과서에 실려 있다. 한 농부가 추위에 꽁꽁 언 독사를 가엾이 여겨 가슴에 품고 따뜻하게 녹여주려다가 결국 물려 죽는다는 내용이다. 독사인지 모르고 품었더라도 어리석은 일이지만 알고도 품었다면 상대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일 뿐이라는 교훈을 준다. 늑대로 되어 있는 버전도 있다.
우화를 알려준 이는 일본 류코쿠대학 사회학부 리 소테츠(李相哲·58) 교수다. 태어난 곳인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고향 마을에선 '리상철'로 불렸다. 경북 포항 출신인 아버지(1913년생)가 1930년대 만주로 떠나지 않았다면 그는 대한민국 국민 '이상철'이었을 것이다. 베이징 중앙민족대학을 졸업하고 1987년 도쿄 유학 후 일본 국적을 얻었다.
언론사를 전공했지만 북한 전문가로 더 유명하다. 조선족 마을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평양 방송을 듣고 자랐다. 지금도 북한에 친척이 있는 주민들에게서 이런저런 소식을 듣는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흑룡강신문 기자 출신으로 이제는 일본인이 된 '경계인(境界人)'이란 정체성이 오히려 북한을 객관적으로 보게 했다. 2011년 '김정일과 김정은의 정체'란 책을 냈다. 2014년 12월부터 2년에 걸쳐 산케이신문에 '비록(秘錄) 김정일'을 연재했다. 시시콜콜한 정보를 어디서 얻었는지 흥미로운 대목이 많다. 책으로 묶인 연재물은 몇 달 전 번역 출간됐다.
리 교수는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이미 '햇볕정책'에 회의적이었다고 했다. 어릴 때 학교에서 배운 동화 '동곽 선생'이 바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의 핵개발을 둘러싼 교섭 과정을 지켜볼 때도 같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관련 자료를 찾다가 이솝 우화에도 '농부와 뱀'이라는 같은 스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솝 우화도 편식하고 '동곽 선생'도 모르는 우리만 헛된 희망을 가졌을 뿐이다.
상대가 고집스러운 나그네인지, 이빨을 드러낸 독사인지는 이미 명확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계승한 문재인 정부는 17일 남북 군사 당국 회담과 적십자 회담을 동시 제안했다. 선(善)의 정책을 펴면 선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여기는 이는 '정치적 어린아이'(막스 베버)일 뿐이다. 어린아이의 무지는 동정을 받을 수 있지만 나라의 운명을 책임진 이는 어린아이 같아서는 안 된다. 먼저 독(毒)이 뚝뚝 떨어지는 독사의 이빨부터 뽑아야 한다. 따뜻하게 품는 것은 그다음 일이다.
이한수 여론독자부 차장
■ 08.07 북한이라는 절대왕정의 본질
北, 3대 세습 개인숭배 체제… 사이비 종교집단의 확대판
철저한 사상 통제, 거짓 신화 강요, 충성 경쟁 유도하고 잔인한 숙청
내부 불만 잠재우려 전쟁에 '올인'… 유럽 절대왕정이 몰락한 이유
북한 체제는 아무리 보아도 알 수 없는 미스터리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에 걸쳐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일은 현대 세계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기이한 사례다. 단지 정치권력을 잡은 정도가 아니다. 홍수나 화재를 당했을 때 가족을 놔두고 수령 초상화를 먼저 건지려다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나오고, 북한 당국이 그런 행위를 애국적 모범 사례로 치켜세우는 것을 보면 사이비 종교 집단의 확대판 같은 느낌을 받는다.
북한은 2016년 개정한 헌법에 개인숭배를 아예 명문화했다. 서문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김일성 동지와 김정일 동지의 사상과 령도를 구현한 주체의 사회주의 조국이다'로 시작하여 동어반복에 가까운 내용을 줄줄이 읊어대다가 '위대한 김일성 동지와 김정일 동지를 주체 조선의 영원한 수령으로 높이 모시자'는 말로 끝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인민(people)이 주권을 가진 민주적(democratic) 공화국(republic)이라는 뜻일 테지만, 실상은 루이 14·15·16세로 이어지는 절대왕정과 다를 바 없다. 북한을 이해하는 데에는 다른 어느 정치 이론보다도 차라리 17~18세기 유럽의 절대주의 국가와 비교하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프랑스 국왕이 권력을 잡은 근거는 '신성한 존재'라는 데 있다. 대대로 국왕은 대관식을 할 때 랭스(Reims)대성당에서 대주교가 기름을 발라주는 의식을 치름으로써 마치 제2의 그리스도('기름 부음을 받은 군주'라는 뜻)처럼 나라를 통치한다. 북한 왕조는 '백두 혈통'이라는 전근대적 개념을 동원하여 신성성을 주조해냈다. 백두산이라는 일종의 성지(聖地)를 설정하고 이곳이 지배자 핏줄의 근원이라는 식으로 합리화하는 것이다. '혈통'에 근거한 정치적 정당성이란 누가 봐도 말이 안 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철저한 사상 통제로 인민에게 거짓 신화를 강요할 수밖에 없다.
▲북한 조선중앙TV는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정전협정 체결일인 지난 7월27일 조국해방전쟁 참전열사묘를 참배했다고 7월28일 보도했다. /뉴시스
정당성 없는 권력은 언제든 도전에 직면할 수 있다. 권력 누수를 방지하려면 신하들을 철저히 통제하는 것이 필수다. 부하들 사이에서 충성 경쟁을 유도하고, 이 경쟁에서 패배한 자를 잔인하게 숙청하여 누구든 딴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루이 14세가 성인이 되어 친정(親政)을 시작할 때 2인자 자리를 차지할 유력한 후보로는 푸케와 콜베르 두 사람이 있었다. 국왕은 그 가운데 콜베르를 선택하고는 그를 시켜 푸케를 공격하도록 배후에서 조종했다. 몇 달에 걸친 은밀한 준비 작업 끝에 푸케를 전격 체포하여 특별 법정에서 일종의 대역죄를 뒤집어씌웠다. 푸케는 알프스 산악 지대의 요새 감옥에 18년 동안 갇혀 있다가 병사했다. 고모부로서 후견인 역할을 자처했던 장성택의 처형 사건 또한 국왕 권력 강화를 위한 고전적 숙청 사례와 비슷하다.
이렇게 장악한 권력을 가지고 절대주의 왕정은 무엇을 했을까? 전쟁이다. 절대주의 국가는 쉽게 말해 전쟁 기구였다. 루이 14세는 전쟁은 군주가 할 수 있는 최고 영광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그의 치세 절반이 전시였다. 외부의 적으로 주의를 돌리는 것만큼 내부 불만을 효율적으로 잠재우는 수단이 없다. 그렇지만 '돈 먹는 하마'인 전쟁에 '올인'하다 보면 재정 파탄이 오지 않을 수 없다. 왕조 몰락을 가져온 프랑스혁명의 먼 기원은 사실 루이 14세의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핵·미사일 개발에 전력 질주하는 북한 또한 마찬가지다. 전쟁 준비에 들어가는 돈을 평화적 목적에 쓴다면 경제 사정도 훨씬 개선되고 동아시아 평화에 얼마나 좋은 일일까? 그렇지만 권력 유지·강화에 모든 것을 건 체제에서는 전쟁의 위협과 준비 외에는 다른 전략이 거의 없어 보인다.
역사의 흐름을 수백 년 거꾸로 거슬러가는 이런 기형적 체제가 영구히 지속될 수는 없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절대주의 체제는 결코 절대적으로 강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베르사유성에서 군주는 절대권력을 가진 지고(至高)의 존재인 척하고, 신하들은 국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척하지만, 사실 이 모든 일은 연극에 불과할 뿐이다. 무대 뒤편으로는 국정 전반에 걸쳐 심각한 모순들이 은폐되어 있고 부패가 만연해 있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의 미사일 도발에 대한 제재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것은 세계사의 큰 흐름에 역행하면서 세계 질서를 교란하는 이 해괴한 집단에 대해 국제사회가 공동 대응을 결정한 중요한 계기라 할 것이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 08.14 공산주의자들과 협상할 때 명심해야 할 10가지
▲ 1951년 11월 30일 판문점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유엔군 측 휴전회담 대표단의 모습. 왼쪽부터 하워드 터너 미 공군 소장, 한국 육군 이형근 소장, 회담 수석대표인 터너 조이 미 해군 제독(중장), 알 리비 미 해군 제독(소장), 헨리 호데스 미 육군 소장, 알레이 버크 미 해군 제독(소장).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7월 6일 독일 베를린에서 “한반도 평화와 남북협력을 위해 남북 간 대화가 필요하다”며 “여건이 갖춰지고 한반도의 긴장과 대치국면을 전환할 계기가 된다면 언제 어디서든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과 만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아마 북한의 ICBM 발사 등으로 조성된 긴장국면만 해소되면 문재인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남북대화에 나설 것이다. 남북대화에 나서는 이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 하나 있다. C. 터너 조이 제독이 쓴 《공산주의자는 어떻게 협상하는가?》라는 책이다. 조이 제독은 휴전협상이 시작된 1952년 7월부터 10개월 동안 유엔군측 수석대표로 일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농간 때문에 온갖 쓴맛을 다 보았다.
조이 제독은 회담 첫날부터 공산주의자들의 장난 때문에 골탕을 먹었다. 1951년 7월 10일, 개성 봉래장에서 정전(停戰)회담 첫 회의가 열렸을 때였다. 양측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첫 대면을 했을 때, 유엔군측 수석대표 C. 터너 조이 제독은 폭삭 주저앉은 듯한 모습이었다. 후일 그는 이때 자신의 모습을 ‘어뢰를 맞고 침몰하고 있는 모습의 해군제독’이라고 표현했다. 반면에 공산측 대표단장인 남일(당시 북한군 총참모장, 후일 외무상 역임)은 조이 제독보다 1피트는 솟아 있었다. 공산측이 조이 제독에게는 보통 의자보다 낮은 의자를, 남일에게는 보통 의자보다 4인치 정도 높은 의자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조이 제독은 재빨리 옆의 의자로 바꾸어 앉았지만, 공산측 사진사들의 사진촬영이 이미 끝난 다음이었다.
“똑같은 양보를 요구하라”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조이 제독은 이후 10개월 12일 동안 공산주의자들의 억지와 정치선전, 지연전술과 씨름해야 했다. 조이 제독은 휴전협상 과정에서 얻은 교훈을 이렇게 정리했다.
① 적이 정전(停戰)을 청할 때 압력을 낮추지 마라. 압력을 증가시켜라. 공산측이 진실로 알아듣는 논리는 오직 힘뿐이다.
② 회담을 열자는 공산측 제의에 서둘러 반응하지 마라.
③ 공산측이 일방적으로 회담장소를 선정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④ 공산측과 협상할 팀은 최고의 자질을 갖춘 사람들이어야 한다. 계급·명성·직위는 두 번째 고려 사항이다. 차선의 팀으로는 절대 안 된다.
⑤ 단순히 회담을 진척시키기 위하여 공산측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지 않고 양보만 해서는 결코 안 된다. 크건 작건 간에 모든 문제에서 공산측에게 똑같은 양보를 요구하라.
⑥ 서두르는 태도를 피하라. 언제든지 협상을 종결하거나 연기할 의사가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어라. 합리적인 기간이 지나도 진전된 것이 없다고 생각되면 협상을 종결시켜라.
⑦ 공산측과의 회담의제는 주의 깊게 검토해야 한다.
⑧ 당신의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장광설식으로 반복적인 발언을 하지 마라. 당신이 말을 많이 할수록 더 많은 표적들을 교활한 공산주의 선전용으로 제공하게 된다. 공산측 협상자들은 반응이 별로 없는 상대를 당혹해하고 두려워한다.
⑨ 회담에 들어가기 전에 정치적 목적을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일을 추진할 사람들에게 이를 알려주어야 한다. 국가이익에 치명적인 경우에만 그것을 변경시켜야 한다.
⑩ 오직 협상이 자유를 위해 공헌할 수 있을 때에만 공산주의와 협상에 들어가야 한다. 적이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협상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에도 유효한 조이 제독의 충고
지난 20여 년간 진행된 남북대화, 혹은 미국·북한 회담을 돌아보면, 조이 제독의 지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조이 제독은 공산측 대표단의 구성과 능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은 협상팀을 대단히 주의 깊게 선발한다. 대표단 요원 선정시 지적 능력이 첫 번째 고려 요소이며, 평판·계급 및 직책은 두 번째 고려 요소이다. 지구력 그리고 논리성에 대항하는 냉철한 처신이 정전회담 대표단의 가장 중요한 특성처럼 보였다.”
오늘날에도 북한의 ‘대남일꾼’들은 최고의 엘리트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네바 핵합의 등 북한과의 회담에 나섰던 미국측 대표들은 북한 외교관들의 능력과 끈기, 집요함에 혀를 내둘렀다.
조이 제독은 ‘공산측이 일방적으로 회담장소를 선정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하지만 제1·2차 남북 정상회담은 모두 평양에서 열렸다. 장소 선정에서부터 북한에 지고 들어간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정일을 서울로 초청했지만, 김정일은 오지 않았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햇볕정책은 끊임없이 논란이 됐다. 그 이유 가운데 상당 부분은 ‘단순히 회담을 진척시키기 위하여 공산측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지 않고 양보’만 하거나 서두르는 태도를 보인 데 기인한 것이다. 반면에 1992년 북한이 남북기본합의서에 동의한 것은 소련·동구 사회주의의 붕괴로 북한이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던 데다가, 당시 노태우 정권이 북한측에 대해 회담을 중단할 수도 있다는 의지를 강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조이 제독은 “공산주의자들은 상대편이 양보하면 이를 상대편이 약하다는 신호로 본다”면서 “공산주의자에게 1인치를 주면 그들은 1마일을 가지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그는 공산주의자들을 절대로 믿지 말라고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공산주의자들의 협정 신뢰성을 믿는 사람들은 낡은 동아줄에 위험천만하게 매달려 있는 것과 같다”, “어떤 식으로 되어 있든 간에 공산주의자와의 약속은 믿지 마라. 공산주의자의 행동만 믿어라”는 말도 했다. 평화협정 운운하는 달콤한 얘기가 나오는 오늘날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출처 | 월간조선 2017년 8월호 글 | 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 09.30 "김정은, 툭하면 핵 실험하는데… 백두산 火山 폭발 방아쇠될 것"
'폭발 가능성' 제기한 영국 화산학자 로빈 앤드루스 인터뷰
조짐이 수상하다. 중국 창바이산(長白山·백두산의 중국 이름) 관리유한공사는 최근 백두산 남쪽 관광지를 잠정 폐쇄하고 안전점검에 들어갔다. 북한이 지난 3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6차 핵실험을 한 뒤 낙석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지난 23일에는 풍계리 북북서쪽 6㎞ 지점에서 두 차례 자연 지진(규모 2.6과 3.2)이 일어났다. 핵실험 여파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백두산이 잠에서 깨어날지 모른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영국 화산학자 로빈 앤드루스는 지난달 23일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에 '북한이 우발적으로 화산 폭발을 일으킬 가능성'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풍계리 지하 수평 갱도에서 벌이는 핵실험이 인공 지진파를 일으켜 116㎞ 떨어진 백두산 아래 '마그마 방(magma chamber)'에 강한 압력을 전달하고 있는데, 더 위력적인 수소폭탄을 터뜨릴 경우 화산 폭발을 부를 수 있다"는 경고였다. 지난해 홍태경 연세대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도 비슷한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북한은 앤드루스 박사의 글이 실린 지 열하루 만에 6차 핵실험을 강행하곤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고 떠벌렸다. 위력은 약 50~100㏏. 지난해 5차 핵실험(10㏏)을 크게 뛰어넘는 규모였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이 15㏏급이었다. 앤드루스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전력(前歷)이 무시무시한 화산
백두산은 946년(고려 정종 원년) 대폭발로 유명세를 떨쳤다. 지난 5000년 동안 지구에서 일어난 큰 화산 폭발 중 하나로 꼽히며 '밀레니엄 분화'라 불렸다. 고려사(高麗史)에도 '하늘의 북이 울렸다'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80년 미국 세인트 헬레나 화산 폭발과 견주면 1000배 더 많은 에너지를 방출했다고 한다. 백두산에서 1000㎞ 이상 떨어진 일본 홋카이도에서 당시 화산재의 퇴적층(두께 5㎝)이 발견될 정도다.
―화산은 활화산·휴화산·사화산으로 분류된다. 지구에 얼마나 많은 화산이 존재하나?
"육지와 바다에 수천 개가 있지만 활화산이 몇 개인지는 파악이 안 된다. 과학자들은 최근에 남극 대륙이 강력한 화산 지대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화산 수백 개가 한 지역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얼음 아래에 있어 활화산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요컨대 지구는 화산 행성인 셈이고 백두산은 그 대가족의 구성원이다."
―백두산은 1903년 분화를 끝으로 잠잠해졌다. 왜 휴화산이 아닌 활화산인가?
"활동을 멈춘 게 아니기 때문이다. 백두산은 여전히 활발한 화산 시스템을 지니고 있다. 몇 년 전 영국과 북한 과학자들이 공동 조사한 결과 백두산 하부에서 마그마가 대량으로 모여 있는 거대한 마그마류(溜)가 판독됐다. 언젠가는 폭발해 밖으로 나올 것이다."
―그 마그마의 총량은?
"정확히 말하기 어렵다. 백두산 아래 약 5~10㎞ 깊이에, 화산으로부터는 20㎞ 거리에 뻗어 있다. 마그마의 부피를 가늠하려면 고해상도 이미징 작업이 더 많이 이뤄져야 한다. 다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일반적인 기준에 비추면 막대한 양이라고."
―백두산이 잠에서 깨어난다면 어떤 재앙이 일어날까.
"그 화산이 어떤 스타일의 폭발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1903년 분화는 946년에 일어난 대폭발에 비하면 약과였다. 여러 줄기의 흘러내리는 용암과 화산재 기둥을 보여줬을 뿐이다. 946년 밀레니엄 분화 때는 화산 잔해 100㎦가 화산재와 화쇄류(火碎流) 형태로 주변에 흩어졌고 그것들이 지나는 곳마다 짙은 어둠이 드리워졌다. 동시에 아황산가스가 분출되면서 공중에 황에어로졸 4500만t이 뿌려졌다. 햇볕이 차단돼 기온도 뚝 떨어졌다.
―목격자들에겐 어떻게 보였을까.
"세상의 종말 같았을 것이다. 다가올 백두산 폭발이 어떤 모습일지는 더 다양한 연구조사 없이는 예측하기 어렵다. 단, 한동안 잠잠했다는 사실은 대체로 안 좋은 징후다. '쇼'를 준비하려고 힘을 비축해온 것으로 볼 수 있으니까. 만약 1000년 전처럼 대폭발한다면 그 결과를 즉각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화산 잔해가 멀리 날아갈 테고, 북·중 국경지대는 하룻밤 사이에 전혀 다른 곳으로 돌변할 거다."
―유럽에 항공대란을 일으켰던 2010년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과 비교해달라.
"그 폭발과는 스타일이 다르다. 아이슬란드 화산이 폭발할 땐 대부분 두꺼운 얼음 벌판에 마그마를 주입하는 식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열에너지를 방출하는데 폭발력은 작지만 두꺼운 화산재 기둥이 오래 지속된다."
▲북한 핵실험이 자연 재앙을 부를 수 있다고 경고한 영국 화산학자 로빈 앤드루스. /로빈 앤드루스 제공
"북한 핵실험은 백두산의 방아쇠"
단군신화가 서려 있는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장소다. 북한 정권은 백두산을 김일성의 항일혁명 투쟁지이자 김정일의 출생지로 선전하면서 우상화 작업에 악용했다. 김정은에 대해서도 '백두혈통' 운운한다. 앤드루스 박사는 포브스 기고에서 "김정은이 걸어서 혼자 백두산 정상에 올랐다는 이야기는 김정일이 거기에서 태어났다는 주장만큼이나 터무니없어 보인다"며 "그 거짓 신화는 내버려 두더라도 백두산은 최근 화산학자들 사이에 우려를 낳고 있다"고 썼다.
―핵실험이 백두산 분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가설은 얼마나 믿을 만한가?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수학적이며 매우 견고한 지구물리학적 원리들이 밑바탕에 있다. 핵실험이 일으킨 충격파가 마그마 방을 고압(高壓) 상태로 만들면서 화산 폭발의 방아쇠 역할을 한다는 가설은 새로운 게 아니다. 확실히 파악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가설을 테스트해보는 것이다."
―북한의 6차 핵실험 소식을 접하고 무슨 생각을 했나?
"지진계 정보를 바탕으로 보면 수소폭탄 실험이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마도 성능을 높인 원자폭탄(souped-up atomic bomb)이었을 것이다."
―북한은 수소폭탄이라고 주장했다.
"7.0 규모의 인공 지진을 일으킬 만한 수소폭탄을 만든 것 같지는 않다. 6차 핵실험 규모는 6.3이었다(국가마다 다른데 한국 기상청은 5.7로 발표했다). 백두산 마그마 방에 불안정성을 촉발하기엔 강도가 미흡했다."
―지하 핵실험 때문에 화산이 폭발한 사례가 있었나?
"내가 아는 한 없다."
―북한이 더 강력한 핵폭탄이나 수소폭탄 실험을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국인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백두산이 폭발한다고 해도 북한과 중국에 위협적이지, 남한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화산재가 날아갈 수 있지만 심각하진 않을 것이다."
―일본은 어떤가.
"과거에 백두산이 폭발했을 땐 우세한 바람 때문에 북일본 지역 대부분이 화산재로 뒤덮였다. 화산이 폭발할 땐 풍향이 굉장히 중요하다. 만약 바람이 남쪽으로 분다면 서울의 지붕 위에서 많은 화산재를 보게 될 거다. 그 화산재를 마실 경우 호흡기가 심각하게 손상될 수 있다."
김정은에게 보내는 충고
앤드루스 박사는 "백두산은 활화산이라서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는 폭발할 운명"이라며 "그게 언제인가가 유일한 문제(The only question is when)"라고 했다. 그는 "북한의 핵실험에서 시작된 강한 압력파들이 마그마 방을 지탱하는 암석들에 균열을 일으키면 백두산 분화를 앞당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폭발 직전에 화산을 달래는 방법은 없나?
"아쉽지만 없다. 분출 단계로 접어들면 막을 수 없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장차 화산의 마그마 방을 통째로 냉동시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현재로선 화산 폭발 예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열 살 때 IQ 162로 멘사 회원이 됐다고 들었다. 화산학에는 왜 끌렸나?
"어렸을 때 '젤다의 전설: 시간의 오카리나'라는 비디오 게임을 즐겼다. 게임 안에 '데스 마운틴'이라는 화산이 있었는데 매우 스릴 넘치는 장소였다. 천체물리학자라는 꿈을 거쳐 화산학자가 됐다. 과학 저널리스트로도 활동하지만 해마다 한두 번은 활화산을 보러 간다."
―실제로 보면 어떤 기분인가.
"화산이 얼마나 힘세고 무서우며 아름다운 존재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이를테면 자연의 대장간(nature's forge)과 같다."
―화산과 사람 사이에 성격이든 행동이든 유사점이 있나?
"화산은 때때로 아무 경고 없이 폭발해 큰 피해를 끼치는 능력으로 악명이 높다. 그 폭력적인 예측 불가능성은 지금 정권을 잡고 있는 세계의 몇몇 지도자를 떠올리게 한다."
―김정은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면.
"그는 핵무기를 실험하면서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대자연의 변덕이라는 변수를 놓치고 있는 것 같다. 핵실험이 엉뚱한 결과를 자초할 수 있다는 충고를 새겨듣기 바란다."
박돈규 기자
■ 2017.10.16 "북한은 사이비 종교 광신 컬트...북핵 타협하느니 자살로 마감할 수도"
미국의 저술가이자 언론인인 이안 부루마(Ian Buruma)는 최근 미국의 한 온라인 사이트에 '북한은 광신적 사이비 종교집단이다. (The North Korean Cult)'이라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그는 이 글에서 북한 체제가 사이비 종교집단과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핵문제 등을 둘러싸고 외부와 협상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른 사이비 종교집단처럼 북한은 협상하기보다는 차라리 자살로 마감할 것이라며, 김정은이 미국과 충돌할 가능성도 있다고 우려하였다.
북한에 대한 정치학적인 분석과는 다른 재미있는 시각에서 작성된 글이라서 그의 글 전문을 번역하였다.
▲ 북한 항공육전병부대(공수부대)의 낙하산 훈련과 대상물 타격 훈련을 참관하고 있는 김정은. /조선DB
북한이 얼마나 어리석은 독제체제인지는 어렵지 않게 그려낼 수 있다. 김정은은 머리의 옆과 뒤를 바짝 쳐올리고 머리를 위로만 기르는 1930년대식 푸딩볼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다. (이는 북한 체제의 설립자인 할아버지 김일성과 닮아보이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게다가 구식 모택동작업복을 입고, 작은 키에, 뚱뚱한 몸집이다. 김정은 자체가 거의 만화 주인공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에서 그는 전능한 천재로 공인되며, 무슨 신(神)처럼 숭배된다. 외부에 보일 때에도 그는 주위에 항상 가슴에 훈장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최고위 군장교들을 비롯한 사람들에 둘러싸인 모습으로만 나타난다. 사람들에 둘러싸인 김정은은 웃거나, 박수를 치거나, 신경질적으로 소리친다.
물론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북한에서의 삶이란 전혀 즐거운 것이 못된다. 가뭄이 주기적으로 닥쳐서 많은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린다. 잔혹한 노동수용소에서 노예처럼 혹사당하는 정치범이 20만명이나 된다. 이들은 고문당해 죽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리고 언론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김정은의 신성한 지위를 부인하는 행위는 금지된다. 뿐만 아니라 누구든 살아남으려면 김정은에게 주기적으로 헌신해야 한다.
많은 북한 주민들이 무슨 종교를 믿는 신도들처럼 행동하는 것은 그래야만 살아남기 때문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잘 모르기 때문에 그냥 동조한다. 세계 어디에나 있는 사람들처럼 그 사람들은 뭐가 더 좋은지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 그냥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규범을 반사적으로 따른다. 그러나 일부 북한 주민들은, 아마도 많은 주민들이, 김씨 왕조를 받드는 사이비 종교(cult)를 순진하게 믿을 것이다. 이 사이비 종교는 다른 모든 사이비종교들처럼, 또는 진정한 종교들처럼 다른 문화, 종교, 그리고 전통들로부터 가져온 조각들로 구성되어 있다.
김씨 숭배(Kim cult)는 스탈린의 개인숭배, 기독교의 메시아 사상, 유교의 조상 숭배, 토착적인 샤머니즘, 그리고 20세기 전반에 한국을 지배했던 일본의 천황 숭배 등의 각각에서 뭔가를 차용하였다. 김정은의 아버지 김정일은 백두산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백두산은 한국 최초의 왕조를 건설한 단군이 4,000여년 전에 사람과 곰 사이에서 태어난 신성한 장소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친애하는 지도자로 알려진 김정일(그의 아버지 김일성은 위대한 수령으로 불렸다)이 태어나자 겨울이 봄으로 바뀌었으며, 하늘에서 별빛이 쏟아졌다고 북한에서는 알려져 있다.
전부 다 황당한 이야기들이지만, 어떤 신앙에서든지 기적에 대한 이야기들은 사람들에게 통한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그러한 이야기들을 믿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북한 주민들이 세계 다른 지역의 신앙인들보다 더 괴이쩍은 것은 아니다. 특정한 신앙이 강력한 호소력을 갖는 데에는 그럴싸한 이유가 있다. 이슬람교와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은 버림받은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 가운데 많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종교들은 신의 눈으로 본 평등을 제시하기 때문이었다. 북한의 김씨 숭배는 다른 종교들보다 포용성이 적다. 사실 그 핵심은 인종적 순수성에 대한 인식이다. 이는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외세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신성한 민족주의적 감성이다.
폴란드는 스스로 민족을 위하여 순교하는 강력한 기독교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있다. 한국도 강대국들에 의해 지배당했던 역사가 있다. 한국을 지배했던 강대국들은 주로 중국이었으며, 러시아도 포함된다. 일본도 16세기의 잔인한 침략 이후 가장 주목할만한 지배국이었다. 미국은 후발주자였다. 북한에서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공식적인 증오는 가혹한 한국전쟁 때문에 생기는 것만이 아니라, 외세의 억압에 대한 오랜 기억으로부터도 나온다.
외부 강대국들의 지배 때문에 한국역사에서는 외세와의 협력과 저항이라는 양극이 생겼다. 한국에 있었던 여러 왕조들의 지배세력 일부는 외세강대국들과 협력하였으며, 일부는 저항하였다. 이로 인해 한국인 자신들 사이에 상호간의 깊은 증오가 뿌리내렸다.
김일성의 경력은 처음에는 외세의 협조자로서 시작하였다. 그는 스탈린에 의해 북한 괴뢰공산정권의 지도자로 발탁되었다. 이 때문에 2차대전 중에는 일본에, 그리고 나중에는 미국과 남한의 친미 협력자들에 저항하는 영웅이라는 김일성 신화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북한의 민족주의는 주체사상을 신봉하는데, 이는 정치적일뿐만 아니라 종교적이기도 하다. 외세에 대한 저항의 상징인 김씨 왕조를 지키는 것은 성스러운 책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스러운 것이 정치를 덮치게 되면 타협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사람들은 이익이 충돌할 때 타협할 수 있지만, 성스러운 것이라고 간주되는 사안에 관해서는 타협할 수 없다.
도널드 트럼프는 부동산개발업자이므로 모든 일은 타협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사업하는 데 성스러운 것은 없다. 그가 협상을 하는 방법은 상대방에 대해 엄포를 놓거나 협박을 하여 압도하는 것이므로, 북한에 대해서도 “완전히 파괴한다”고 다짐하는 발언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약속을 실천하려면 북한 주민 2천만명 이상이 죽어야 한다) 김정은이, 자신의 신민에 대한 성스러운 수호자로서, 이러한 트럼프의 협박에 설득되어 협상장으로 나올 것이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김정은과 그의 독재체제의 일부 신하들은 굴복하는 대신 스스로 말살당하는 길을 택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사이비종교 집단이 자살로 막을 내리는 경우는 그 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실현 가능성이 있는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트럼프가 적대적으로 트윗을 날리고 허풍을 담은 발언을 할 때마다 그의 각료들은 조심스러운 발언을 이어갔다. 그러므로 김정은은 트럼프의 발언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트럼프는 위협만 할 뿐이지, 협박을 실천으로 옮길 것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로 인해 김정은은 어떤 무모한 행동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면, 괌에 미사일을 발사하는 일이 벌어지면 미국은 어떤 형식이든지 대응을 해야만 한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김정은이 신성한 과업을 수행하고 있다고 믿는 북한 주민들에게뿐만 아니라, 북한 국경으로부터 35마일 떨어진 곳에 살고 있으면서, 김정은 컬트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는 수백만 한국인들에게도 대재앙이 초래될 것이다.◎
글 | 이안 부루마 미국 저술가 겸 언론인 번역 | 우태영 조선뉴스프레스 인터넷뉴스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