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한의 전쟁사] 2021 동아일보 역사학자
05-11
〈161〉 만들어진 영웅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다 이유가 있다. 뒤를 캐 보면 기나긴 역사의 뿌리가 있다. 어떤 것은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 걸 보면 어이없기도 하고 가끔 무섭기도 하다.
이집트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수단을 만난다. 고대 이집트 시대에는 이곳을 누비아라고 불렀다. 이집트 유물에 누비아인들이 곧잘 등장한다. 파라오가 누비아인을 정복하는 벽화도 있고, 목에 밧줄을 걸고 포로가 되거나, 공물을 운송하는 누비아인도 있다. 누비아인 파라오 상도 있다. 누비아인은 거친 전투 민족이었다. 이집트는 누비아인을 용병으로 고용했는데, 한때 이집트를 정복한 적도 있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누비아는 이집트와 티격태격하는 관계를 유지하는데, 대개는 이집트가 누비아를 속국처럼 지배하는 형태였다.
4000년이 지난 1948년 1차 중동전, 이집트군은 이스라엘로부터 수치스러운 패전을 겪는다. 이집트군이 멋지게 승리한 전투도 있었다. 아슈켈론 동쪽 알 팔루자라는 작은 마을에서 이집트군 3개 대대가 이스라엘군에게 포위됐다. 완전 포위된 상태에서 종전 때까지 이집트군은 버텨낸다. 이 전투에서 제일 잘 싸운 부대는 수단 대대였다. 최고 영웅은 검은 이리라고 불린 수단인 사이드 타하 대령이었다. 하지만 종전 후 영웅이 된 사람은 이집트인 가말 압델 나세르 소령이었다. 나세르는 이때의 인기로 이집트 국민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고, 1953년 쿠데타 성공 후 종신 대통령이 된다.
나세르는 유능한 장교였고, 팔루자 전투에서 훌륭하게 싸웠다. 그러나 타하 대령은 더 큰 공을 세우고도 그만한 영웅이 되지 못했다. 나세르는 인기를 더하기 위해 팔루자 전투 경험담을 상세하게 저술했는데, 타하 대령의 활약은 거의 서술하지 않았다. 타하는 유능한 군인이었고, 이집트인이 기대하는 영웅은 국가를 수렁에서 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군사적 영웅은 전장에서 탄생하지만, 국가의 영웅은 국민이 선택한다. 가끔 그 기준이 감정과 환상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162〉 약자의 비극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결이 전쟁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언하자 바로 다음 날 1차 중동전이 발발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무력충돌은 그 이전인 1920년대부터 지속됐다. 19세기 말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기 시작했을 때, 이곳은 오스만 제국 치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는 영국 위임통치 지역이 되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소박하고 순박한 농부들이었다. 그들은 바깥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잘 알지 못했고,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운동도 너무 늦게 일어났다. 1930년대 저명한 지도자였던 알 후세이니는 적의 적은 우리 편이라는 논리에 따라 독일로 건너가 히틀러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1차 중동전이 발발했을 때, 팔레스타인은 국가적인 결속을 유지할 정치적 지도력도 조직도 없었다. 알 후세이니와 측근들은 외국에 있었다. 이스라엘은 군사조직을 통합해 국방군을 조직했다. 팔레스타인은 그런 조직도 없다시피 했고, 게릴라 민병대 조직조차 미약한 수준이었다. 1차 중동전은 팔레스타인 보호 명분으로 요르단,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 군과 의용군인 아랍해방군 조직이 전쟁을 주도했다. 아무도 진심으로 팔레스타인을 도울 마음은 없었다. 요르단은 팔레스타인을 병합하려고 했다.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을 원했던 나라가 있기나 했는지 의심스럽다.
그 사이에 이스라엘은 영토 내의 팔레스타인 주민을 몰아내고 마을을 파괴했다. 그 과정에서 ‘못된 짓’도 많이 했다. 파괴한 마을이 존재했던 기억을 지웠다. 지금도 이스라엘 곳곳에는 그때 사라진 마을 터가 나무뿐인 동산, 도로변의 공터, 묘지 등으로 남아 있다. 옛 지도와 대조하지 않으면 마을이 있었다는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강자의 폭거도 비난해야 하지만, 약자의 비극도 교훈으로 새겨야 한다. 약자가 되어 비난하기보다는 약자가 되지 않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163〉 전쟁과 기술
이번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분쟁에서 날아오는 로켓포탄을 요격하는 이스라엘 아이언돔의 활약은 인상적이었다. 그 아이언돔도 곧 레이저 방어막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소문이 돈다. 공상과학(SF) 영화에서나 보던 무기가 눈앞에 다가왔다.
전쟁은 역사를 바꾸고 사회를 바꾼다. 전쟁을 바꾸는 요소가 무기다. 어느 지역을 점령하는 데 엄청난 인명과 재력이 요구된다면 국가는 정복보다는 타협과 공생을 모색한다. 새로운 무기가 발명되어 그 난관을 해결해 준다면 타협보다는 전쟁을 택한다. 역사에서 실제로 이런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다.
전쟁과 역사를 바꾼 무기로 늘 언급되는 리스트가 있다. 활, 화약, 총과 대포, 항공기, 잠수함, 원자폭탄 등이다. 이상하게 이 리스트에서 잘 빠지는 중요한 무기가 투석기이다. 돌을 날린다는 뜻으로 발석거(發石車)라고도 하고, 포차(抛車)라고도 했다. 서양에서는 캐터펄트, 오나거, 트레뷰_ 등으로 불렸다. 기계적 구조에 따라 명칭이 달라지는 게 특징이다. 반대로 중국에서는 사람이 줄을 잡아당기는 인력식으로 일관했다.
투석기는 공성용 무기만이 아니라 수성용, 대인무기로도 사용됐다. 그러나 공성구 역할이 중요하다. 충차, 운제 등 다양한 무기가 있지만 공성구가 나오기 전에는 성을 공략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바람에 정복과 국가 형성이 늦어진 곳도 있다.
공성구는 기계장치 발달에도 영향을 미쳤다. 공성구의 기본 원리는 지렛대 원리지만, 인력이 부족했던 서구에서는 톱니바퀴와 윈치를 이용한 기계식 지렛대를 발달시켰는데, 이는 태엽 장치를 낳고, 근대 기계공업 정밀공업으로 발전한다. 태엽과 기계가 동양과 서양의 근대사를 바꾼 결정적 요인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전쟁이 기술 발달을 촉진한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도 유익하다. 긍정적이다’라는 의미는 아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움직이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이 수천 년 동안 전쟁과 재난을 겪어도 변치 않는 인간의 속성이어서 그렇다.
〈164〉 명분,그리고 악용되는 역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가 평화협정을 체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중국의 대만 침공 준비 보도가 나왔다. 중국의 명분은 ‘하나의 중국’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대입하면 한반도는 오랜 기간 하나의 국가였고, 방법과 과정이 문제일 뿐이지 통일이 민족적, 역사적 과제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과 대만은 하나의 중국일까? 중국 황허 유역은 지구상에서 문명이 제일 먼저 발달한 지역 중 하나이다. 황허 문명은 국가를 빨리 탄생시켰고, 강력한 중앙정부, 치밀한 행정망을 세상 어느 지역보다 빠르고 철저하게 발전시켰다. 그리고 주변 이민족을 정복하거나 몰아내면서 중국이란 나라의 영역을 넓혀 갔다.
그러나 대만은 꽤 오랫동안 중국의 관심 밖에 있었다. 대만은 의외로 지형이 꽤 험하고, 험준한 고원 지역도 많다. 문명지역과 고립되면서 원주민들이 오랫동안 독자적인 문명을 누리며 살았다. 대만 국립박물관에서 16세기에 찾아온 유럽인들이 그린 대만 원주민 생활상에 대한 스케치들을 본 적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중국 문명을 생각하고 보면 대단히 낯설고 이질적이다. 상당히 원시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대만 원주민들은 강인하고 사나운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16세기에 네덜란드인들이 찾아와 도시를 세웠다. 한족이 본격적으로 이주한 건 명나라가 멸망할 때 끝까지 저항했던 정성공이 이주하면서부터였다. 정성공은 네덜란드 세력을 쫓아냈고, 한족 이민을 받아 정씨 왕조를 세웠다. 조선 후기에 유행한 정감록의 정도령이 대만의 정씨 왕조 이야기가 와전된 설이라는 추측도 있다.
대만의 한족 왕조를 방치할 수 없었던 청조는 17세기 말 대만을 침공하고 대만을 행정구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후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공산군에 패하면서 대만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현재의 중국과 대만이 대립하기 시작했다.
역사는 늘 전쟁의 명분을 위해 악용된다. 역사의 당위성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현명한 해결책은 무엇일까.
〈165〉그들에게 더욱 감사하자
1360년 홍건적이 고려를 침공했다. 갑작스러운 침공에 고려군은 북방에서 홍건적을 저지하지 못했다. 홍건적이 황해도에 도착했다. 고려군은 훗날 정방산성이 들어서는 절령에서 최후의 방어선을 펼쳤다. 여기가 뚫리면 수도 개경도 함락이다.
11월 16일 밤, 홍건적 1만 명이 방어선에 접근했다. 고려군은 이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했다. 야간에 철기 5000명이 급하게 세운 나무 울타리로 돌격해 목책을 돌파했다. 고려군과 이곳으로 피란 왔던 주민들이 몰살했다. 전사한 고려군의 병력과 주민 수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참상이 지독했던 모양이고, 홍건적이 시신을 버려두고 남하하는 바람에 들판에 백골이 나뒹굴었다고 한다.
나중에 정부는 이곳에 여단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여단은 원래 전염병 같은 액운을 막기 위해 세우는 제단이다. 절령에 세운 여단은 조선시대까지 있었는데, 전사한 장병들의 영혼을 위로한다는 의미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보다는 전염병 예방 의미가 더 강했다.
병자호란 중에 벌어진 쌍령전투는 조선군 3만 명이 청군 300명에게 패배했다는 잘못된 통설 때문에 오랫동안 비난 받았다. 그 현장에는 지금 정충묘라는 작은 사당이 서 있다. 놀랍기도 하지만, 반갑고 고맙기도 하다. 어느 사회나 그렇지만 패전은 생각하기 싫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원인 분석은 소홀히 한다. 그것도 잘못이지만,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바친 장병들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장병들이 실패자는 아니다. 그들을 기리고, 감사하고, 패전의 원인을 정확히 되짚어 그런 잘못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아는 것과 실천은 다르다. 개개인도 일상에서 수없이 결심하지만 거의 작심삼일이다. 사람은 무언가 큰 실패를 경험해야 진심으로 반성하고 고친다. 국가와 사회의 반성과 개선은 더 힘들다. 그래서 전쟁사에서도 이런 비극이 반복된다. 패전을 인정하고 그 땅에 누운 병사들에게 두 배로 더 감사해야 한다.
〈166〉스스로 기관차가 된 조조
삼국지 최고의 악역은 동탁이다. 낙양을 점거한 동탁은 강족을 포함한 유목기병을 풀어 궁궐, 낙양의 부호, 수도 인근 도시를 가리지 않고 약탈을 일삼는다. 참다못한 사도 왕윤은 동탁 제거 음모를 꾸미는데, 이때 동탁의 신임을 받던 교위 조조가 등장한다. 조조는 왕윤에게서 보검인 칠성검을 빌려 동탁의 침소로 들어갔다. 낮잠을 자는 동탁을 찌르려고 했지만, 동탁이 잠이 깨는 바람에 실패한다. 조조는 보검을 동탁에게 바치러 왔다고 둘러대서 위기를 모면하고는 바로 낙양을 탈출한다.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명장면이다. 당연히 사실은 아니다. 조조가 변장하고 낙양을 탈출한 것은 사실인데, 여기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조조는 전국에 만연한 동탁 정권에 대한 반감을 감지했던 것 같다. 곧 반란이 일어나면 이미 반군벌화한 지방 태수들이 주역이 될 것이다. 원소를 비롯한 미래의 라이벌들은 이미 태수로 포진하고 있었다. 반면 조조는 낙양에서 빈둥거리고 있다. 반란의 열차는 곧 출발할 텐데, 조조는 열차에 승선할 자격이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럴 때 자신의 비운을 한탄한다. 조조는 달랐다. 자신의 일족이 있는 도시로 달려가 군사를 모았다. 간신히 겨우 군현 하나를 장악할 병력을 모았지만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전국에서 태수들이 호응했다. 열차에 승선하지 못했던 조조는 자신이 기관차가 되었고, 우리가 알다시피 삼국시대를 이끄는 주역이 되었다. 조조는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은 많이 했지만, 결단과 행동으로 옮기는 부분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빨랐다. 때로는 너무 성급해서 위기도 맞았지만, 그럴 때면 후회하는 대신 더 빠른 행동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손실을 극복하곤 했다.
필자도 지난 삶을 돌이켜 보면 지나가는 열차를 보면서 “저 열차에 내 자리가 없구나”라고 슬퍼했던 적이 많은 것 같다. 기다리기만 했다면 언젠가 열차가 내 앞에 섰을까? 아마 아직도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을지도 모른다.
〈167〉 전쟁이 남긴 진짜 상처
이번 주 6·25전쟁과 관련한 두 가지 역사적인 날짜가 다가온다. 첫째는 1950년 6월 25일 개전일이다. 두 번째는 소련이 유엔 주재 소련 대표 야코프 말리크를 통해 휴전협상을 제의한 날인 1951년 6월 23일이었다. 종전까지는 2년이나 남은 시점이었지만, 1951년 6월 23일까지 1년 동안 전황은 그야말로 반전과 반전이었다. 6월 25일 북한군 남침으로 시작한 전쟁은 8월에는 낙동강 전선으로 축소되었다. 이것도 원래 북한군 계획대로면 벌써 전쟁이 북한의 승리로 끝났어야 했다. 개전 당시 소련군 지휘관들은 북한군의 능력이 우수하고, 진격 속도가 빠르다고 극찬했었다.
유엔군 참전 결의로 전황은 북한의 예측과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11월에는 거꾸로 유엔군이 압록강-두만강 라인까지 진격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 단계에서 중공군이 참전하며 전세가 다시 역전되었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대는 궤멸될 뻔한 위기를 맞았다. 중공군의 규모와 전술은 연합군에겐 너무 낯선 것이었다. 대응책을 찾지 못하면서 전선은 다시 중부 지역까지 밀렸다.
그러나 1951년 2월부터 연합군은 다시 반격 태세로 돌아섰다. 이쯤에서 중공군 야전사령관들은 기습의 효과가 끝났고, 전쟁에 승리를 거둘 가망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마오쩌둥은 야전군의 제안을 탐탁지 않게 받아들였지만, 소련과 중공이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잃으면서 휴전 제안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6·25전쟁은 체제를 두고 벌인 이념전쟁이었다. 단 1년 사이에 전선이 남북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에 수많은 사람들이 체제를 찾아 이동했다. 전후에는 남북에 다른 체제가 고착화되면서 갈등과 비극을 양산했다.
이젠 전쟁 중에 태어나고 자라난 세대도 노인이 되었다. 육체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잊히고 묻힌다. 그러나 이념의 갈등은 더 고약하게 변해 간다. 현실의 갈등, 어쩔 수 없는 선택과 모순은 얄팍한 지식인의 현학이 되고, 이념과 정치의 장난감이 되어 간다. 역사에 대한 진실한 성찰은 이렇게 멀다.
〈168〉 준비 없는 전쟁
1950년 6월 25일 아침. 이때만 해도 개성은 대한민국의 땅이었다. 개성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는 1사단 12연대였다. 개전과 함께 가장 먼저 공격을 받은 도시가 개성이었다. 북한군 1사단과 6사단이 개성 방면 공격을 맡았고, 개성 시내로 진군을 시도한 부대는 6사단이었다. 북한군 6사단은 미군과 한국군 지휘관이 6·25전쟁 중 가장 유능했다고 인정한 북한군 부대였다.
6사단 선두 부대가 개성으로 근접해 오자 송악산 자락에서 최초의 교전이 벌어졌다. 당시 12연대는 다른 부대와 마찬가지로 3분의 1의 장병이 휴가로 부대를 비운 상태였다. 당시 국군이 정상적인 상태였다고 하더라도 병력 부족으로 방어전면이 너무 넓었다. 자연히 방어력이 허술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취약한 전선에 전차까지 앞세운 북한군 최정예 사단이 엄습했으니 국군이 제대로 저항하기 힘들었다. 북한군이 침공을 시작했다는 보고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 벌써 사령부에서는 개성이 함락당했을 것으로 판단했을 정도였다.
전투력에서 압도적인 열세였지만 순식간에 벌어진 개성 함락에는 다른 비사가 있다. 전날 북한군 부대가 국군으로 위장해 이미 개성 시내에 잠입해 있었다. 그들은 개성 시내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야영하고, 새벽에 시내 진입을 시도했다. 침공이 시작되자마자 개성역에 북에서 온 열차가 도착했는데 당시 역으로 왔던 미군 고문관이 보니 열차에서 완전무장한 북한군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12연대가 섬멸당하지 않고, 일부라도 개성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 기적이었다. 그러나 그날 개성의 12연대가 완전 편제 상태로 단단히 대비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개성 함락 시간을 늦출 수는 없었을 것이다.
병력, 무기, 군사비. 이런 수치는 말 그대로 참고용 숫자일 뿐이다. 전쟁이 숫자로 결정되었다면 전쟁사란 과목이 존재할 필요도 없다
〈169〉 강한 병사들을 만드는 요인
트렌치코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병사들이 입던 우비에서 유래했다. 1차대전의 상징이 참호전이다. 연합군과 독일군이 막상막하의 전력으로 대치하면서 전선에는 10중의 참호와 철조망이 겹겹이 가설되었다. 참호는 고대, 중세 전쟁에서도 사용되었지만, 1차 대전 때는 상황이 달랐다. 야포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발전해서 구경 200mm 이상의 거포에 열차포까지 등장했다. 대구경포는 지름 수십 m의 포탄 구덩이를 만들었고, 여기에 물이 고이면 병사들이 빠져 익사하기도 했다.
포탄 세례를 피하기 위해 참호는 땅속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포격을 피하기 위한 대피호 깊이가 10m, 20m나 되었다. 이곳은 포격에서 안전했지만 간혹 입구가 붕괴되면 흙 속에 매몰되어 병사들이 단체로 매장되기도 했다. 참호의 가장 큰 적은 비였다. 병사들의 숙소, 식당, 모든 것이 참호 속에 갖춰져 있는데 비가 오면 참호에 물이 고인다. 배설물, 쓰레기 등 참호 바닥에 고여 있던 온갖 것들이 물과 함께 배어 나왔다.
비가 갠다고 참호가 맑아지지는 않았다. 바닥은 진창으로 변했고, 병사들의 삶은 진흙 속의 삶이었다. 트렌치코트는 오늘날 사용하는 군용 우비와 달리 진짜 일상의 코트처럼 생겼다. 군용 우비를 저렇게 만든 이유가 궁금했다. 실용보다 패션을 따지는 낭만이 살아 있던 시대여서 그랬던 것일까? 솔직히 필자는 정답을 모른다. 다만 맑은 날에도 참호는 진흙바닥이었기에 우기에는 맑은 날에도 병사들은 물과 진흙 속에서 살아야 했다. 이런 사정이 일상복 형태의 방수복을 채택했다고 짐작해 본다.
현대의 군사장비와 기술은 엄청나게 발달했지만, 1차 대전의 참호전에 투입하면 별 차이 없을 것이다. 좀 더 가볍고 방수성과 투습성이 좋다고 해도 진흙으로 뭉친 물 밭에서 잠들어야 하는 병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장비가 좋아진다고 군인이 편해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군대는 피와 땀과 강인한 정신, 그들의 고통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와 감사가 있어야만 강해질 수 있다.
〈170〉‘독일 국민에게 고함’
1807년 독일은 나폴레옹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다. 나폴레옹은 후퇴하는 독일군보다 빨리 전진해서 단숨에 베를린을 점령했다. 독일인들에게는 더욱 모욕적이게 자신이 프리드리히 대제의 군사적 계승자임을 과시한다.
같은 해 12월부터 14주 동안 일요일 저녁마다 프랑스군 점령하에 있는 베를린 학술원 강당에서 40대 후반 철학자가 열정적인 강연을 했다. 그는 독일 패전의 원인을 분석하고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마녀사냥식 위안을 늘어놓지 않았다. 반드시 극복해 낼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지도 않았다. 최악의 상황에서 그는 당당하게 선포한다. ‘독일인은 세계를 이끌어 가고 세계의 모범이 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민족이다.’
이 철학자가 피히테이며, 강연을 모은 글이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다. 독일은 이때까지도 프로이센, 작센, 바이에른 등 여러 공국의 연합체였다. 충격적인 패전은 희생양을 찾고 더 깊은 분열로 빠뜨릴 수 있었다. 피히테는 이런 위험을 직감하고 모든 악은 외국적인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선언한다. ‘독일인은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다. 이 장점이 외국의 언어와 문화에 오염되었다. 그 악을 제거하고 고유한 독일 국민의 본성을 되찾고, 국가적 단합을 이루면 독일은 위대한 국가로 거듭날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미래를 선도하기 위해서는 창의적이고 열정적인 인재가 필요하고 그런 인재를 만들어 내는 교육이 독일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라고 호소한 덕분이다. 다만 과도한 국가주의와 섞은 탓에 독일에 양날의 검이 되고 말았다.
피히테의 글에는 진실과 선동, 통찰과 궤변이 섞여 있다. 후대의 지성은 시대의 사정을 이해할 의무도 있다. 동시에 목적과 수단의 괴리를 걸러내야 할 책임도 있다. 우리 사회는 후자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을까. 아니면 ‘시대’라는 커튼 뒤에 숨어 자기 합리화에 몰두하고 있을까. 보약 한 그릇에 독 한 방울을 타면 그 약은 독약이 된다.
〈171〉 수십 명의 역할을 하는 병사
삼국지연의에서 조운은 혼자서 조조의 80만 대군 속을 헤집는다. 이건 허구지만, 현실 전투에서도 놀라운 용맹을 보인 사례가 있다. 장료는 결사대 800명을 이끌고 손권의 10만 대군 속으로 뛰어들어 손권이 있는 중심부까지 육박했다. 조조가 위기에 몰렸을 때 전위는 부하 몇 명과 성문을 지켰는데, 혼자서 수십 명을 죽이며 출혈로 탈진해서 쓰러져 죽는 순간까지 싸웠다.
혼자서 수십 명의 역할을 하는 용사가 현실에서 존재하기는 한다. 그러나 지극히 드물다. 옛날 기록은 평민 출신 용사, 지위가 낮은 병사의 공로를 기록하는 데는 아주 인색하므로 이런 용사가 우리가 아는 것보다는 많았겠지만, 그래도 전체 병사에서 아주 소수였다.
군량을 운송하는 병사는 전투병들보다 훨씬 고생한다. 그들도 개인 차이에 따라 등에 멜 수 있는 식량의 양이 다르다. 장사라고 해서 몇 인분이나 더 멜 수 있었을까. 험산, 장거리 운송에서는 이런 차이가 더욱 줄어든다.
첨단 무기 덕분에 현대 병사의 화력과 살상력은 어마어마하게 늘었다. 보통 병사가 전위나 장료의 무력을 따라잡는 것은 기본 훈련만으로도 충분하다. 현대의 개틀링 기관포는 분당 2000발은 가볍게 발사할 수 있다. 식량 20kg을 메고 산비탈을 오를 수 없는 병사도 5t 트럭을 몰고 하루 종일 산곡을 왕래할 수 있다.
듣고 보면 다 아는 뻔한 이야기인데 우리가 이상하게 혼동하는 이야기가 있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가치와 인권은 크게 높아졌다. 이런 것이 의식의 고양, 교육, 가치관의 변화, 개개인이 자각한 결과라고만 생각하는 것이다. 아니다. 기술과 자본이 인간 개개인의 역량을 크게 높여 주었기 때문이다. 기계와 자본이 물신화, 인간성의 말살을 초래한다고 비판하는 분들은 동전의 반쪽만 본 것이다. 아니면 탁상 앞에서만 사는 지식인의 무지다.
〈172〉 승부를 좌우하는 결정적 능력
개릿 매팅리의 명저 ‘아르마다’는 무적함대의 탄생과 소멸 과정에 관한 가장 훌륭한 역사서다. 이 책에 이런 일화가 소개돼 있다. 영국과 스페인 간 전운이 고양되던 시기 영국의 전설적인 해적왕 드레이크는 스페인 전력에 조금이라도 타격을 주기 위해 선제공격을 제안한다. 전설의 해적답게 스페인 항구를 습격하고 약탈하던 그는 건조 중이던 무적함대에 공급하기로 돼 있던 물통용 판자를 불태우는 전과를 올린다.
독에 있던 전함이나 대포나 화약도 아니고 겨우 말린 판자를 전과라고 할 수 있을까. 식수를 저장할 물통은 1년 이상 잘 건조한 판자로 제작해야 했다. 당장 물통을 공급해야 했던 스페인군은 허겁지겁 자재를 재발주해 물통을 제작했는데, 급하게 만들다 보니 완전히 건조하지 못한 판자가 납품되었다. 무적함대가 출항하자마자 식수에서 냄새가 나더니 색깔마저 이상하게 변했다. 그 물을 마시면 당연히 탈이 났다. 대원들은 식수 부족과 탈수로 허약해지기 시작했고 사기가 저하됐다.
지치고 병든 몸을 이끌고 도버해협에 도달한 스페인 함대는 기다리고 있던 쌩쌩한 영국 함대에 무참한 패배를 당했다. 패전 원인이 물 때문만은 아니다. 함선의 성능, 전술, 수병의 능력 등이 있었지만 물통에서 썩어가던 식수도 작지 않은 요인이었다. 물통의 저주는 패전 후에 발생했다. 도버 해전에서 패했어도 함대와 선원의 생존자는 아직 많았다. 스페인으로 생환한다면 다음 기회를 노려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고, 병과 탈수로 거의 대부분의 병사가 사망했다.
전쟁이라고 하면 독자들은 사령관의 책략, 야전군의 활약에 경도된다. 그러나 전쟁의 승부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능력이 군수지원 체제와 야전의학이다. 많은 전쟁에서 무기로 인한 사상자보다 질병에 의한 사상자가 훨씬 많았다.
이번 청해부대 백신 사건을 보면서 정말 충격이 크다. 고난도의 훈련과 첨단 무기는 국방의 일부분일 뿐이다.
〈173〉 교과서와 현장의 차이
기원전 216년 8월 2일. 분명 먼지와 지열이 땅에서 피어오르고, 타는 듯 무더웠을 이탈리아 남부 칸나에 평원에서 역사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타렌티우스 바로가 지휘하는 로마군 약 9만 명과 한니발이 지휘하는 카르타고군 5만 명이 맞붙었다.
이 역사적인 장소는 찾아가기도 쉽지 않다. 도로 사정도 좋지 않고, 기념관은 일주일에 절반쯤 문을 연다. 15만 명에 가까운 병사와 2만 마리 말들로 덮여 있었던 벌판에는 올리브 나무만 빽빽하다. 이날 벌어진 전투는 전술가와 사관학교 생도들이 가장 많이 연구하는 전투가 되었다. 카르타고의 일방적인 승리도 승리지만, 로마군 5만 명 내지는 7만 명이 현장에서 학살당했다. 2배나 많은 적을 상대로 승리하기도 어렵지만, 대포와 기관총도 없던 시절에 이렇게 적을 완벽하게 섬멸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어떤 학자는 칸나에 전투라고 하지 않고 칸나에 섬멸전이라고 부른다.
이 엄청난 승리의 비결은 무엇일까. 로마 사령관 바로는 과거에 기대어서 싸웠다. 로마군이 승리했던, 제일 잘하는 전술에 의지하고 병력을 한번에 투입해 전술의 위력을 높이려고 했다. 한니발은 로마군의 전술을 예측하고 창조적으로 대응했다. 과도한 병력이 전투 현장에서 약점이 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보병 대형을 교묘하게 움직여 로마군이 좁은 공간에 더 밀집하도록 유도했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교과서와 현장의 차이다. 교과서는 상황과 변수를 고정시킨다. 나무를 밀면 뒤로 넘어진다. 현장은 다르다. 나무를 밀면 나무가 반동으로 되돌아오고, 옆의 바위를 건드려 돌무더기를 쏟아낸다. 교과서는 모형이고, 현장은 살아 있는 생물이다. 교과서는 정답이 아니라 현장을 이해하기 위한 가상의 공간이다. 바로가 교과서와 현장의 차이, 교과서 이용법을 몰랐던 것이 불행이었다.
칸나에 올리브 숲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나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들이었다.
〈174〉 먕품 무기
유럽 박물관에 가보면 인기 있는 컬렉션이 중세 기사의 갑옷이다. 그중에서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싸는 풀 플레이트 메일(판금갑)은 밀리터리 마니아에겐 로망의 경지다. 고급 갑옷은 거의 주문 제작이므로 갑옷마다 장식과 소소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미적 감각도 뛰어나다. 국왕과 왕자용 갑옷은 실전도 중요하지만 퍼레이드에 사용할 효과도 빼놓을 수 없으니 강력함과 우아함을 아우르는 실루엣을 갖춰야 했다.
명품 갑옷, 왕과 귀족의 갑옷들을 국가별로 보면 또 특징이 다르다. 독일 갑옷을 만져 보거나 두드려 보지는 못했다. 유럽에서도 소문난 대장장이들의 합금 기술 덕에 강철은 우수한 것 같은데, 디자인이나 장식은 볼품이 없다. 멋을 부리거나 동물 조각을 넣은 것을 보면 차라리 넣지 않는 것이 좋았겠다 싶을 정도로 안쓰럽다.
예술의 나라라는 선입견과 다르게 프랑스 갑옷들은 의외로 풍부하고, 실용적이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많다. 제일 놀라운 건 이탈리아 제품이다. 황금빛 갑옷에 투구, 몸체, 방패까지 어마어마한 조각과 장식. 정말 전쟁터에 저런 예술품을 입고 나갔을까 하는 의문이 절로 든다. 아무리 부유하다고 해도 작품이 아까워서 입고 나가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정말 입고 나간 사례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더 놀랐다. 전장에서 노획되어 적국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매입한 물건일 수도 있긴 하다. 아무튼 이해하기 힘들다. 왜 이렇게 과하고 수준 높은 조각을 갑옷에 입혔을까?
현대 무기는 중세 장비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다. 디자인도 꽤 비중이 높아졌다. 항공기, 전차, 제식 소총까지 성능 못지않게 디자인도 날이 갈수록 중요해진다. 우리 모두가 귀족이 된 것일까? 아니면 20세기 세상을 흔들었던 징병제 시대가 지나고 이제 군인이 특수한 전사들의 직업이 되면서 무기에서도 디자인을 중시하는 기사, 귀족 마인드가 되살아난 것일까?
〈175〉 군대다운 군대[임용한의 전쟁사
동학, 의병 활동에 참여했던 청년 김구는 을사늑약 이후 무장투쟁을 접고 애국계몽 운동에 투신한다. 그러나 신민회 활동 및 105인 사건으로 체포돼 수감됐다. 1915년 출옥한 김구는 애국계몽 운동의 한계를 깨달았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김구는 참여를 거부한다. “만세로 나라를 되찾을 수 없다.”
바로 상하이로 망명한 김구는 임시정부에 투신했다. 이때부터 항일 무장투쟁의 주역이 된다. 김구의 꿈은 번듯한 군대, 광복군을 결성하는 것이었다. 그에겐 아픈 추억이 있다. 그가 최초로 지휘한 군대는 동학군이었다. 18세로 병력 700명 정도를 거느렸던 김구는 해주성 공격에 선봉으로 참여했다. 성에는 조선군 200명과 일본군 7명이 있었다. 이 병력으로는 4곳의 성문을 다 방어하기도 힘들다. 김구가 작전을 짰다. 주력이 남문을 향해 진격한다. 이것은 양동이다. 수비대가 남문에 집중하는 사이 김구가 진짜 주력인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서문으로 쾌속 진군, 단숨에 성을 함락시킨다는 것.
전투가 시작되자 일본군이 남문에서 공포 3, 4발을 쐈다. 그러자 주력이 바로 도주했다. 김구 부대는 서문에 도착해 공격 중이었는데 퇴각 명령이 내려왔다. 오합지졸로는 전쟁을 치를 수 없다고 깨닫고 병사를 조련하기 시작했다. 백범일지에 이때 상황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포수들과 총 든 사람이 제일 많아 최정예였다는 부대 수준도 알고 보면 정말 한심했다. 구한국군 장교 출신과 지략이 있는 인사를 모사로 초빙했고, 동학군에서는 좋은 평을 얻었지만 전투를 치를 수준까지 올라갔는지는 의문이다. 이 부대는 인근 동학군과의 알력으로 그들의 공격을 받아 궤멸했다.
아무리 애국심이 충만하고 무기가 좋아도 군대는 군대다워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 그러려면 군은 내적으로 정직하고 건전해야 하고, 국민도 군대를 이해하고 지원해 줘야 한다. 요즘 우린 둘 다 붕괴되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다.
〈176〉 ‘정복되지 않는 나라’
아프가니스탄 사태가 세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 충격에 이어 의문이 꼬리를 문다. 탈레반의 폭정은 부활할까? 탈레반은 정말 변했을까? 미국은 왜 이렇게 어설픈 철수를 한 걸까? 오판일까? 무슨 음모가 있는 걸까? 다음번 아프가니스탄의 희생자는 중국일까? 아프가니스탄은 다시 알카에다 같은 테러 조직의 온상이 될 것인가?
이런 질문은 관찰자들의 입장이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한 질문은 ‘이제는 총성이 멈추고 평화가 찾아올까’일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은 강대국의 무덤, 정복되지 않는 나라라고 불린다. 사실 정복은 여러 번 됐다. 그러나 그 누구도 장기적인 통치에 성공하지 못했다. ‘정복되지 않는 나라’라는 표현이 잘못됐다는 지적도 있다. 아프가니스탄이란 나라는 없다. 아프가니스탄이라고 불리는 지역 안에는 20개의 부족, 30개의 언어가 존재한다. 몽골 영국 소련 미국이 통치에 실패했다는 것은 아프가니스탄이란 영역을 하나의 나라로 만드는 작업이 실패했다는 의미다.
사회가 통합되려면 경제적 소통이 중요하다. 물자가 유통되고, 사람들의 이동과 교류가 활발해져야 한다. 이 나라는 거친 지형이 이런 통합의 길을 막는다. 험한 산악 지역과 사막으로 이루어진 이 나라는 국토의 3분의 2가 해발 1500m 이상의 고지이기도 하다.
이런 고립적이고 험한 지형에서 아프간의 부족들은 수없이 싸우며 살아왔다. 강대국의 침공 이전에도 국토의 일부분은 항상 전쟁 중이었다. 탈레반이 집권하면서 이슬람의 교리, 신정정치가 강력한 통합을 이룩할 것처럼 보이지만 과거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지역, 부족세력은 여전히 독립성이 강하고 군벌화의 가능성도 버리지 않고 있다.
안타깝고 미안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의 평화는 집권 탈레반의 분열, 지역 분열, 부족 전쟁, 내전, 그리고 폭력이 사라질 수 있는 국가적 기반이 갖춰진 다음에야 가능할 것이다.
〈177〉 전쟁과 지형
751년 고구려 후예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난생처음 보는 험준한 산악지대를 가로질러 행군했다. 중국 군대로서는 실크로드를 따라 가장 멀리 간 고선지 부대는 산맥을 넘어 이슬람군을 만나 격전을 벌였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탈라스 전투이다.
탈라스는 현재의 키르기스스탄에 있다. 이곳을 지나면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가 나온다. 그 아래가 아프가니스탄이다. 고선지가 넘었던 산맥이 힌두쿠시산맥 북단인데, 이 험준한 산맥은 남북으로 타지키스탄을 지나 아프가니스탄으로 내려간다. 반(反)탈레반 세력의 중심인 판지시르주가 아프가니스탄 영역에서 끝나는 힌두쿠시산맥 끝자락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이 끝나지 않는 이유,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조각조각 분열된 지역사회, 다양한 종족과 부족, 전근대적인 산업과 생활 방식에 있다. 이런 환경을 만들어 내는 요인이 바로 험준하고 독특한 지형이다. 산과 평원, 사막, 고원지대가 국토를 나누고 있다. 힌두쿠시가 창출한 산악지형은 전쟁을 위해 특화된 지형이란 말이 정확하다.
병법의 기본은 아군은 집중하고 적은 분열시키는 것이다. 여기에 퇴로도 없고, 적군이 진형 변화를 주기 힘든 극단적인 곳에서 싸움을 벌이면 몇 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판지시르로 들어가는 도로망을 보면 거의 모든 곳이 이런 지형에 해당한다. 산으로 올라가면 더 깊은 지옥이다. 과거 소련군은 바위 뒤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순식간에 포위하는 아프간 전사에 질려 그들을 유령이라고 불렀다. 낮은 교육 수준 때문에 장교 자원, 첨단 무기를 다룰 기술자들이 극히 부족하다. 정규군을 약화시킨 중요 요인 중 하나다. 그러나 게릴라전에 풀어놓으면 천혜의 지형 덕분에 배우지 않아도 전사가 될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안타깝지만 총성은 쉽게 그치지 않을 것이다. 강대국이 개입해도 늪이고, 철수하면 비난받는 상황은 변하지 않을 듯하다.
〈178〉 종교적 극단주의
“하산은 알라무트 주변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포교 선전으로 차지하고, 감언이설에 넘어오지 않는 지역은 살육, 마취, 약탈, 전쟁으로 점령했다.”
하산 이 사바(1148?∼1124)는 이슬람 역사상 가장 신비롭고, 잔혹한 종파였던 아사신파의 창설자이다. 아사신파는 이슬람 종파에서 소수파였던 시아파 중에서도 강경파였던 이스마일파의 갈래였다. 이들은 반대파를 향해 암살과 테러를 거침없이 자행했다. 대표적인 암살 수법은 목표로 하는 인물에게 접근해 이웃, 심복, 하인 등 충직한 인물로 잠복해 있다가 명령이 내려지면 서슴없이 결행하는 것이었다. 오랜 시간 함께 생활하다 보면 정이 들어 살해를 망설이거나 생각이 바뀔 수도 있는데, 아사신파는 그런 게 없었다.
이 무섭고 변치 않는 신념이 아사신파를 더더욱 공포의 존재로 만들었다. 이 신념이 믿기 힘들었던 사람들은 하산이 신비한 수법이나 환각을 사용해 젊은이들은 세뇌했다고 믿었다.
어쩌면 이들이 이슬람국가(IS)와 알카에다의 원조일 것이다. 어떤 이들은 묻는다. 왜 무슬림들은 유독 이렇게 고집이 세고, 신념에 의한 폭력을 버리지 못할까? 무슬림 탓이라기보다는 하필 그런 성향과 문화가 강한 지역에 전파되면서 문화와 종교라는 두 개의 강력한 성향이 결합한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여기에는 이슬람의 전통과 율법이 부족시대의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는 사정도 있다. 전성기의 이슬람 문명은 지적이고 합리적이고 고도한 도시문화를 이루었지만, 그 외곽에는 수천 년 동안 변치 않는 사막의 부족, 고립 지역이 있었다. 하산의 근거지인 알라무트는 카스피해 남단 험준한 엘부르즈 산맥에 있다. 여기서 정동으로 1000km를 가면 아프가니스탄이다.
폐쇄적인 문화와 피해의식은 자신의 문제를 세상 탓으로 돌리고, 새로운 조류를 악으로 간주하며, 그 악을 제거하면 안락한 삶으로 복귀할 수 있다고 믿게 한다. 어떤 종교든 극단주의는 있다. 문제의 본질은 종교가 아니라 폐쇄성이다.
〈179〉 ‘6일 전쟁’의 교훈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가 제공권(制空權) 장악이다. 숫자상으로는 주변 아랍국 전력의 3분의 1에 불과했던 이스라엘 공군은 개전 첫날 상상을 초월하는 기습 공격으로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공군력을 궤멸시켜 버리고, 멀리 이라크 공군까지 제압했다.
이집트 공군에 358대의 전투기와 폭격기가 있었는데 첫날 공격에 274대를 잃었다. 파괴되지 않은 전투기도 운용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다. 비행장, 활주로도 파괴돼 제공권을 잃은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하늘에서 아랍국가의 전투기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시나이 사막이란 특수한 지형을 감안했을 때 제공권 상실은 지상전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후퇴하던 이집트군은 하늘에서 덤벼드는 무자비한 추격자들로부터 끔찍한 피해를 입는다.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 공군의 승리는 군 수뇌부도 기대하지 않던 완벽한 것이었다. 지금의 우리는 결과를 알기 때문에 쉬운 승리처럼 느끼지만 당시 이스라엘 측은 공격 전 불안에 떨었다. 영공을 지킬 방어부대를 남겨 놓지 않고 거의 전 전력을 투입했기 때문이다. 만약 한두 군데라도 기습에 실패했다면 무방비 상태로 상대의 반격을 허용할 상황이었다.
전쟁사에서 보기 힘든 대담한 결단이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전쟁사에 변함없는 철칙은 너무나 일방적인, 대단한 승리에는 반드시 상대의 도움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집트군은 군용기를 격납고에 넣지 않고 방치했다. 이유는 지금도 미스터리다. 적이 습격했을 때 반격 부대를 출격시킬 예비 활주로가 없었다. 적이 공격해 오는데 오인 사격을 걱정해서 발포 금지령을 내렸다. 제일 큰 오류는 공군의 선제공격론을 묵살하고, 국제 여론과 대통령 나세르의 이미지를 위해 먼저 아군이 당한 후에 반격하라는 지침을 내린 것이었다. 군이 정치에 개입해도 안 되지만 정치가 군사에 개입해도 안 된다. 그것이 6일 전쟁의 첫째 교훈이다.
〈180〉 적은 예상보다 강하다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 통일을 추구하던 시기, 국내 전쟁이던 도시 정복전이 국제전으로 발전했다. 카르타고, 그리스-마케도니아 세력이 이탈리아 도시와 지중해에서 충돌한다. 로마가 뭔가 특별히 잘못해서가 아니다. 세상은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물을 마시기 위해 옹달샘에 도달했을 때, 다른 사람은 농업용수를 조달하려고 샘을 찾고 있을 수도 있다.
당시 떠오른 격전지가 그리스 이민자와 원주민, 카르타고 식민지배로 나뉘어 있던 시칠리아였다. 로마도 당연히 개입했다. 지상전에서 로마군은 카르타고 보병을 여지없이 격파한다. 하지만 카르타고의 주력은 해군이었다. 저명한 역사가 테오도어 몸젠은 이런 말을 했다. “카르타고군을 전장에서 패퇴시키기는 쉽지만, 최종 승리를 거두기는 어렵다.”
실제로 로마군은 지상전에서 승승장구했지만 바다가 봉쇄되자 위기에 처했다. 국가 운명의 갈림길에서 로마는 모두가 믿지 못할 일을 벌인다. 겁 없이 대규모 함대를 창설한 것이다. 간신히 배는 만들었지만 해전의 승리를 좌우하는 항행 능력과 숙련도는 크게 못 미쳤다. 로마는 여기서 자신의 장기인 백병전을 벌인다는 발상의 전환을 시도한다.
바다에서 육박전을 벌인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당시 로마는 ‘까마귀’라는 신병기를 고안했다. 뱃머리에 단 간이 부교(浮橋)다. 끝에 갈고리가 부리처럼 생겨서 까마귀라고 했다. 적함과 조우하면 까마귀를 내려찍는다. 부교가 놓이면 로마의 자랑 중장보병대가 건너가 백병전으로 적함을 제압한다.
까마귀로 거둔 위대한 승리가 밀라이 해전이다. 로마의 창의성과 도전정신의 승리다. 사실 까마귀는 기동을 힘들게 한다는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적을 얕보고, 아무런 정찰이나 탐색 없이 마구잡이로 달려든 탓에 패배했다. 어제 우리가 강했다고 오늘도 강하다는 보장은 없다. 무기, 재정, 수치화된 전력이 강하다고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전쟁사에선 용기와 헌신, 희생을 아는 민족만이 살아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