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조선일보
2021.05.18
[41] 나폴레옹 서거 200주기 어떻게 신화가 됐나
히틀러처럼 수백만명 죽였지만… 나폴레옹은 영웅으로 부활했다
지금부터 200년 전인 1821년 5월 5일, 남대서양 한복판에 위치한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폐되어 있던 나폴레옹이 사망했다. 그 소식은 두 달이 걸려서야 유럽에 전해졌다. 마지막 시기 나폴레옹은 한때 스페인에서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유럽 대륙을 지배했던 황제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40일 넘게 시름시름 앓으며 자리를 보전하다가, 죽으면 배를 갈라 혹시 자신이 아버지처럼 위암에 걸린 게 아닌지 확인해 보라고 요청했다. 검시 결과 실제로 위암이었다. 독살설은 뜬소문에 불과하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평등한 법, 황제의 마지막은 그 어느 필부와 다를 바 없다.
▲“후퇴하는 자는…”나폴레옹의 마지막 순간 - 1821년 5월, 40여일을 앓던 나폴레옹이 유배지인 남대서양 세인트헬레나섬에서 죽었을 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들은 마지막 말은“후퇴하는 자는…”“군의 선두에서…”같은 불명확한 구절들뿐이었다. 사후 그는 자유주의적 인물이자 프랑스 혁명 정신의 계승자로 묘사되고‘뻥튀기’무용담이 더해지며 낭만주의 문예 사조를 타고 극적인 영웅으로 기억됐다. 실제로는 그의 유해는 죽은 지 20년 가까이 지나서야 모국 프랑스로 송환됐고, 지금 파리 앵발리드에 있는 거대한 붉은 석관이 만들어진 것은 사후 40년 넘게 지난 뒤였다. 나폴레옹 시대에 활동했던 독일 태생의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석판화가 샤를 드 스튜벤 남작의 그림‘나폴레옹의 죽음’. /위키피디아
나폴레옹은 영웅인가 악마인가? 프랑스혁명을 계승한 투사인가, 총칼을 휘둘러 권력을 장악하고 국정을 농단한 독재자인가? 프랑스의 법과 제도를 일신한 유능한 정치인인가, 세상을 불바다로 만든 군국주의자인가? 그 모든 면들을 다 품고 있는 모순에 찬 인물임에 틀림없다.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으로 보면 히틀러 급 악당이지만 프랑스인들의 기억에는 주로 고귀한 이상을 위해 헌신한 영웅으로 남아 있다.
‘위대한 나폴레옹’이라는 신화가 만들어지려면 재료가 필요하다. 나폴레옹은 개인 비서 자격으로 세인트헬레나 섬까지 따라온 에마뉘엘 드 라스 카즈(Emmanuel de Las Case)에게 구술하여 회고록을 남겼다. 이 원고를 정리하여 1823년에 2000페이지에 달하는 ‘세인트헬레나 회고록'을 출판하면서 라스 카즈는 나폴레옹을 자유주의적 인물이며 혁명 이상의 계승자로 그렸다. 여기에 나폴레옹을 따라 전쟁에 참전했던 병사들의 뻥튀기 무용담이 더해졌다. 시간이 갈수록 나폴레옹의 이미지가 미화되고, 지난 시대는 영광의 시대로 기억되었다.
1820년대는 프랑스혁명 이전의 부르봉 왕조가 다시 들어선 왕정복고기였다. 이 시대에는 나폴레옹을 영웅시하는 일체의 행위를 엄금했다. 언론 검열도 심했고, 나폴레옹을 찬미하는 발언을 하는 사람은 체포했다. 그렇지만 당시 왕정은 전혀 인기가 없던 반면 사람들 사이에 나폴레옹 열기는 뜨거웠다. 심지어 오스트리아에 있는 나폴레옹의 아들을 모셔 와서 나폴레옹 2세로 추대하겠다는 어이없는 모의가 적발된 적도 있는데, 의외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19세기 중반에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다시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 나폴레옹 3세가 된 것도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이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극적인 영웅을 주조하려는 낭만주의 문예 사조도 한몫했다. 빅토르 위고는 나폴레옹을 추모하는 시를 썼고, 스탕달은 ‘적과 흑'이나 ‘파르므의 승원' 같은 소설에서 나폴레옹 열기를 고조시켰다.
▲첫 부인 조제핀과 두번째 부인 루이즈 - 나폴레옹의 첫 황후 조제핀(왼쪽)과, 오스트리아 프란츠 2세의 딸인 두 번째 황후 마리 루이즈. /위키피디아
그러는 동안 황제의 유해는 여전히 세인트헬레나 섬에 그대로 묻혀 있었다. 죽기 20일 전에 쓴 유서에서 나폴레옹은 “프랑스 땅에서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프랑스인들 사이에 묻히고 싶다”고 밝혔으나 정치적 이유로 유해 송환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1830년 파리에서 ‘7월혁명’이 일어난 뒤에야 분위기가 바뀌었다. 권력을 잡은 루이 필리프 1세는 황제 숭배 열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싶어 했다. 많은 프랑스인들이 본격적으로 재(cendre, 시신의 높임말로 ‘재’라는 표현을 썼다)를 고국으로 모셔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려면 세인트헬레나 섬을 영유하고 있는 영국의 양해가 필요한데, 당시 프랑스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던 영국도 기꺼이 승인했다. 이후로도 수많은 논의가 이루어진 끝에 1840년에 가서야 프랑스 의회가 나폴레옹 유해 송환을 가결했다.
그러면 유해를 어디에 모셔야 하는가? 나폴레옹과 관련이 있는 ‘기억의 장소들’ 중 어디가 적절한지 또 논란이 이어졌다. 개선문, 팡테옹, 바스티유 광장, 방돔 광장 등이 거론되다가 결국 앵발리드(Invalides)로 결정했다. 이곳은 현재는 군사박물관이 되었지만 원래 노병들의 휴양소였다. 이곳에 유해를 모신다는 것은 그의 지위를 황제가 아니라 군사최고지휘관으로 규정하는 의미가 된다.
나폴레옹 사후 20년 만에 드디어 송환 작업이 이루어졌다. 무덤을 파고 관을 열어 보니 죽은 지 20년이 지났는데도 원래 모습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어서 이 또한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신화에 일조했다. 장례 때 입혔던 유니폼, 레지옹도뇌르 훈장, 게다가 다리 사이에 놓아둔 그의 유명한 모자까지 온전히 남아 있었다.
▲파리 인근에 도착하는 유해 - 나폴레옹이 죽은 지 20년 뒤에야 비교적 온전히 보존됐던 그의 시신과 유품들이 다시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전쟁 화가 앙리 펠릭스 에마뉘엘 필리포토의 그림 ’1840년 12월 14일 쿠르브부아(파리 교외 도시)에 도착하는 나폴레옹의 유해’. /위키피디아
국왕의 동생 주앵빌 공이 운구 책임을 맡았다. 시신을 실은 배가 셰르부르 항에 도착했을 때 10만 명의 인파가 운집했다. 육로로 이송할 경우 혹시라도 많은 사람들이 한곳에 모인 끝에 자연스럽게 봉기로 이어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강으로 이송하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센 강을 따라 운구용 배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교회마다 타종을 했다. 12월 15일, 시신이 파리에 도착했다. 운구 행렬은 개선문에서 시작해서 샹제리제 거리를 따라간 후 센 강을 건너 앵발리드에 도착했다. 주앵빌 공이 “전하, 나폴레옹의 시신을 전합니다” 하고 보고했고, 국왕 루이 필리프는 “프랑스의 이름으로 받습니다” 하고 응답했다.
현재 앵발리드에서 볼 수 있는 나폴레옹의 관은 1861년에 가서야 완성되었다. 녹색 화강암 받침대 위에 놓인 길이 4미터, 높이 2미터의 거대한 관은 러시아 북부 카렐리아 지방에서 구해온 규암(硅巖)으로 만들었다. 아마도 이처럼 위풍당당한 관은 보기 드물 것이다.
나폴레옹의 역사적 의미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나폴레옹과 연관된 기념행사는 시대의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 2005년은 나폴레옹의 최대 승전인 아우스터리츠 전투 200주년이었으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행사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을 참담하게 격파한 사건을 프랑스가 대놓고 자랑하는 일이 외교적으로 좋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15년 워털루 전투 200주년 관련 행사들도 대개 소규모로 치렀다.
나폴레옹 서거 200주년을 맞아 마크롱 대통령은 앵발리드의 나폴레옹 묘에 헌화하였다. 이에 대해 비판 여론이 없지 않으나, 엘리제궁 측에서는 나폴레옹 개인을 미화하는 의도가 아니라 역사를 직시하는 것이며, 나폴레옹이 걸어온 길을 “부정하지도, 후회하지도 않는다”고 애써 강조했다. 위인의 죽음은 정치화를 피할 수 없다.
나폴레옹 2세
나폴레옹은 첫 부인 조제핀을 사랑했지만, 황제위를 물려줄 아들을 얻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자 1809년 이혼하고 다음 해 오스트리아 황실의 마리 루이즈와 재혼했다. 대신 조제핀에게는 저택과 많은 재산을 주어서 풍족한 삶을 살도록 배려했다. 새 부인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1811년 아버지를 빼닮은 아들을 낳자 나폴레옹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고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쫓겨난 후 나폴레옹은 처자식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곤 했다. 죽기 전, 마리 루이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남겼다. 그렇지만 이때 부인은 나폴레옹의 라이벌이었던 아담 나이페르크 백작의 연인이 되었고 조만간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아들에 대해서는 ‘혹시 이 아이가 빈에서 오스트리아 귀족이 되면 차라리 목을 쳐버리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말이 씨가 되었는지, 정말로 아들은 외가인 빈 궁정에 가서 라이히슈타트 공작이라는 작위를 얻었다. 게다가 외조부 프란츠 2세는 그의 이름에서 나폴레옹을 빼고 프란츠(Frantz)를 넣었다. 자기 아들이 ‘오스트리아 귀족 프란츠’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심정이 어땠을까.
프란츠는 1832년 폐결핵에 걸려 젊은 나이에 죽었다. 후사 없이 죽었기 때문에 프랑스 황제위에 대한 권리는 루이-나폴레옹에게 돌아갔고, 실제로 그가 나폴레옹 3세로 황제가 된다. 후일 히틀러가 프랑스를 지배했을 때 아마도 프랑스인들의 환심을 사려는 의도였던지 빈에 있는 프란츠의 유해를 파리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호부견자(虎父犬子)라고나 할까, 거대한 나폴레옹 관 근처에 아들의 유해도 조촐하게 자리를 잡았다.(나중에 그의 유해는 아래층으로 옮겼다.)
[42] [나폴레옹 다시 보기] [상] 권력 잡은 섬소년
나폴레옹으로 이름 바꾸고 30살에 쿠데타… 코르시카 ‘촌놈’, 대권을 잡다
“천재적인 인물들은 자신을 불태워 세기(世紀)를 밝히는 유성(流星)이다.”
초급 장교 시절이던 1791년, 나폴레옹이 리옹 아카데미 콩쿠르에 참가하여 쓴 글이다. 마치 자신의 미래를 예견하는 듯하다. 이 악마적인 영웅은 조만간 자신을 불태우고 유럽 대륙을 불바다로 만들 것이다.
▲나폴레옹 신화의 시작, 이탈리아 1차 원정 -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공화국 정부가 탄생하자, 오스트리아·프로이센·영국·러시아 등 제정 국가들은 혁명의 기운에 긴장했고, 1792년‘프랑스 대혁명 전쟁’이 발발한다. 내부 반란과 외국의 침입에 동시에 맞서야 했던 혁명정부는 국가 총동원령을 내리고 반격에 나섰다. 젊은 포병장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영국군을 격퇴한 툴롱 포위전 승리(1793)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조제핀과 결혼 직후 떠난 이탈리아 원정에서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의 영향하에 있던 이탈리아 북부 주요 전투에서 잇따라 승리를 거뒀다. 베로나 인근 아르콜에서 벌어진 나폴레옹의 승전을 묘사한 프랑스 화가 오라스 베르네의 그림‘아르콜 다리 너머로 군대를 이끄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부분). /위키피디아
나폴레옹은 1769년 8월 15일, 유럽에서 가장 낙후한 섬 코르시카의 아작시오에서 태어났다. 그가 프랑스 장군이 되고 황제로 등극하는 것은 코르시카의 운명과 관련이 있다. 그가 태어나기 1년 전인 1768년, 이탈리아 제노바 공화국 소속 영토였던 코르시카가 프랑스 영토가 된 것이다. 그의 아버지 카를로 마리아 디 부오나파르테(Carlo Maria di Buonaparte)는 코르시카의 독립을 지지하는 편에서 싸우다가 프랑스 편으로 돌아섰다. 덕분에 프랑스 국왕에게서 귀족 작위를 얻었다. 나폴레옹의 운명은 여기에서부터 방향이 잡혔다.
당시는 장교가 되려면 귀족 작위가 필요하던 때다. 나폴레옹은 브리엔(Brienne-le-Château)의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파리의 군사 학교(Ecole Militaire)에 진학했다. 동급생 귀족 자제들은 코르시카 사투리가 심한 그를 거의 외국인 취급을 하며 놀려댔다. 코르시카어는 불어와 크게 달라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진격 명령을 못 알아들은 코르시카 출신 병사가 명령불복종 죄로 처형당한 일도 있다. 말수 없고 친구 없는 곱슬머리 코르시카 청년은 독서에 매진하였고, 계몽주의 사상과 문학, 역사에 흠뻑 빠졌다.
1784년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부르고뉴 지방에서 근무할 때 프랑스혁명을 맞이했다. 혁명 정부가 그에게 맡긴 첫 번째 중요한 임무는 왕당파가 불러들인 영국군을 축출하고 툴롱(Toulon)항을 되찾는 일이었다. 나폴레옹은 항구 주변 언덕에 포를 배치하여 영국 전함들을 내쫓았다. 이때 그의 능력을 알아본 혁명정부의 실력자 폴 바라스(Paul Barras)는 파리 시내에서 일어난 왕당파의 봉기를 진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나폴레옹은 무려 14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사살하며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폴레옹은 정권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갔다.
▲쿠데타로 의회 해산시키는 나폴레옹 - 1799년 11월 9일, 프랑스 혁명력‘안개 달(브뤼메르)’18일, 나폴레옹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쿠데타로 프랑스 혁명은 끝을 맞은 것으로 여겨진다. 프랑수아 부쇼의 그림‘브뤼메르 18일 쿠데타의 나폴레옹’(부분), 베르사유궁 소장. /위키피디아
이때 조제핀을 만난다. 조제핀은 카리브해의 섬 마르티니크에 이주한 프랑스인의 후손(크레올)이었다. 16세에 파리로 온 그녀는 보아르네 장군과 결혼하고 아이 둘을 낳았는데, 혁명 와중에 수감되었다가 남편은 처형되고 조제핀은 석방되었다. 어떻게든 자신의 사교술과 매력으로 파리 상류사회에 진입하려던 그녀는 바라스의 연인이 되었고, 곧 그의 부하 나폴레옹의 연인으로 변신했다. 두 사람은 1796년 3월 2일 결혼했다. 결혼 직후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조제핀에게 완전히 푹 빠져 있었다. 그래서 이탈리아에서 불같은 사랑의 편지들을 써 보냈는데, 정작 조제핀은 편지를 전달하러 온 장교들과 연인 관계에 들어갔다.
이탈리아 원정군을 지휘하던 무렵 나폴레옹은 자신의 이름을 살짝 바꿨다. ‘나폴레오네 디 부오나파르테(Napoleone di Buonaparte)’보다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가 훨씬 더 프랑스 장군 이름으로 어울리지 않는가. 그는 곧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매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피에몬테, 트리에스테, 베네치아 같은 곳들을 점령한 다음 프랑스에 충성하는 ‘자매 공화국’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회화와 조각품 수백 점을 빼앗아서 프랑스로 가지고 갔다. 이 덕분에 후일 루브르박물관 소장품이 더욱 풍성해졌다. 밀라노에 있는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도 훔쳐오고 싶었으나 거대한 벽 전체를 뜯어내는 일이 힘들어서 포기했다. 대신 베네치아 산마르코 성당에 있던 유명한 말 조각상은 파리로 가져와 카루젤 개선문 위에 올려놓았다(나중에 베네치아로 반환했다).
다음 과업은 영국 정복이다. 영불해협은 고작 30여 킬로미터에 불과해서 건너편 지역에서 차가 지나가는 것이 보일 정도다. 케자르나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처럼 이 해협을 건너느냐, 나폴레옹이나 히틀러처럼 못 건너느냐가 유럽 역사의 큰 흐름을 좌우하곤 한다. 오랜 준비를 했지만 나폴레옹은 끝내 강력한 해군이 지키는 영국에 상륙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이집트를 정복해서 영국의 인도 무역을 방해하자는 것이다. 1798년 소위 피라미드 전쟁에서 승리하고 거침없이 카이로에 입성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넬슨이 지휘하는 영국 함대가 지중해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자 나폴레옹군은 이집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갇힌 신세가 되었다.
프랑스의 정치·군사 상황을 지켜보던 나폴레옹은 영국 해군이 떠난 틈을 타서 부하에게 군대를 맡기고 파리로 돌아갔다. 명령 없이 이탈했으므로 사실은 탈영이지만, 당시에는 누구도 그를 제재하지 못했다. 귀국 한 달 뒤 그는 권력을 장악할 기회를 잡았다. 혁명정부가 위기에 빠지자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시에예스가 쿠데타를 계획한 것이다. 그는 나폴레옹을 ‘개혁의 칼’로 선택했다. 자신처럼 노련한 인물이면 30세의 젊은 장군을 떡 주무르듯 조종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완전한 오산이었다. 거꾸로 나폴레옹이 시에예스를 인절미 주무르듯 가지고 놀았다. 권력을 잡은 후 나폴레옹은 시에예스에게 예우는 해 주되 실권을 빼앗았고, 사실상 그가 대권을 잡았다.
권력을 정당화하는 새 헌법이 필요했다. 헌법 초안을 만드는 회의에서 한 사람이 “헌법은 단순해야 합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이 거들었다. “그리고 불투명해야죠!” 불투명해야 독재가 가능하다. 한 달 만에 뚝딱 만들어진 소위 혁명력 8년 헌법을 투표에 부의하자 찬성 300만 대 반대 1567로 통과되었다. 새 체제는 여전히 공화정 모양새였지만 사실상 나폴레옹 독재였다. 국왕이 돌아온 거나 다름없었다. 그는 튀일리 왕궁에 거처를 정하고, 여행할 때도 국왕의 의상을 입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다. 경찰 조직을 강화하고, 스파이들을 동원해서 국민을 감시했다. 1802년에는 레지옹도뇌르(Légion d’honneur) 훈장 제도를 만들었다. 훈장은 원래 용맹한 군인들에게 하사하는 것이지만, 예술가와 작가 역시 그들의 재능으로 국가에 공헌하는 건 똑같다는 주장이다. 그러고는 농담처럼 이렇게 말했다. “이런 딸랑이로 사람들을 부리는 걸세.” 나중에는 프랑스 문화 발전에 기여한 외국인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전쟁 중에 존경하는 작가 괴테를 만나 독일 문학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다. 괴테도 ‘딸랑이’ 훈장을 받았다.
그의 태도를 보여주는 이런 일화도 있다. 어느 장군이 강도 혐의자를 찾는다며 마음대로 농민들 집을 뒤지고 다녔다. 나폴레옹은 군인들에게 즉각 귀대하고 민간 기구에 조사를 넘기라고 지시했다. 나폴레옹 자신은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법을 지켜야 한다. 독재는 한 사람만 하는 거다.
루브르박물관
▲약탈품으로 키운 루브르박물관 - 나폴레옹은 스페인,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예술품들을 전리품으로 챙겼고, 이는 파리 루브르의 명성으로 이어진다. /로이터 연합뉴스
혁명 정부는 군주제 폐지 1주년 기념으로 ‘공화국 중앙박물관’을 열어 지난날 왕실 예술품들을 일반에 공개했다. 이것이 발전하여 현재의 박물관 모습을 갖춘 것은 나폴레옹 덕분이다. 동양학자 마르셀(Jean-Josephe Marcel)과 서지학자 드농(Dominique Vivian Denon)의 노력으로 ‘나폴레옹 박물관’이 자리를 잡아갔다.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다음 스페인,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이탈리아의 국보급 예술품들을 빼앗아 자신의 박물관에 두었다. 워털루 전쟁 이후 각국은 프랑스에 약탈품들을 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박물관장 드농은 가능한 한 버텼다. 결국 많은 작품이 그대로 루브르에 남았다. 대신 매입 대금 명목으로 상당한 액수의 돈을 지불하든지, 혹은 베로네세의 대작 ‘가나의 혼례’ 같은 경우는 프랑스 화가 르브룅 작품과 교환하기로 했다. 나폴레옹이 훔쳐온 장물 덕분에 파리는 세계 최고의 예술 중심지로 거듭났다.
[43] [나폴레옹 다시 보기] [중] 제국의 끝없는 전쟁
교황을 들러리로 만든 나폴레옹, 유럽을 가족기업처럼 주물렀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나폴레옹은 무력 팽창을 시도했다. 우선 프랑스혁명 중 상실한 식민 제국을 재건하겠다며 1801년 말에 처남 르클레르 장군이 지휘하는 2만명의 원정군을 카리브해의 생도맹그섬에 파견했다. 이 원정은 재앙으로 끝났다. 프랑스혁명 당시 해방되어 이미 자유의 맛을 알게 된 흑인들은 다시 노예제로 돌아가느니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여기에 가공할 만한 감염병인 황열병이 퍼져 엄청난 수의 프랑스군이 희생됐다.
결국 프랑스군은 항복하고 생도맹그는 1804년 1월 1일 세계 최초의 해방 노예 출신 흑인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식민 제국 회복이 가망 없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이참에 루이지애나도 처분했다. 원래 프랑스령 식민지였던 이 광대한 땅은 7년전쟁(1756~1763) 패배로 스페인에게 넘어갔다가 나폴레옹이 되찾으려 했지만, 강력한 영국 해군 때문에 지켜낼 자신이 없었다. 영국으로 넘어가게 내버려두느니 차라리 미국 정부에 판매했다. 1803년 매매 협정을 체결하는 자리에서 프랑스 외무장관 탈레랑은 미국 대표 먼로에게 “싼 물건 잘 사신 겁니다” 하고 덕담을 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미국은 1500만달러를 써서 순식간에 영토가 2배로 커졌다.
▲황제가 되는 나폴레옹과 조연으로 밀려난 교황… 유럽 권력의 정점이 바뀌는 순간 - 프랑스가 영국을 정복하려 상륙 훈련을 진행하는 동안, 영국의 나폴레옹 암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나폴레옹은 반혁명 세력을 봉쇄하기 위해 스스로 황제가 되겠다는 계획을 국민투표에 부쳤고, 압도적 찬성을 이끌어냈다. 1804년 12월 2일, 교황 비오 7세가 참석한 가운데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대관식이 열렸다. 스스로 왕관을 집어들어 교황보다 황제가 우위에 있음을 천명한 나폴레옹이 조제핀에게 황후의 관을 씌워 주는 모습을 그린 자크루이 다비드의 그림‘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열린 나폴레옹 1세 황제와 조제핀 황후의 대관식’(부분). 루브르 박물관 소장. 관을 들고 선 나폴레옹 뒤편(그림에서 오른쪽)의 교황 등 참석자들의 초상도 명확히 그려졌다. /위키피디아
프랑스는 영국을 정복하기 위해 20만명 가까운 병력을 영불해안 근처에 주둔해 놓고 상륙 훈련을 했다. 영국은 망명 와 있던 왕당파 지도자 조르주 카두달(Georges Cadoudal)을 프랑스 내에 잠입시켜 나폴레옹을 살해하려 했다.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나 카두달은 처형되었다. 문제는 내심 왕정 복고에 찬성하던 프랑스 장군들 다수가 이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등 뒤에서 비수를 꽂는 영국과 내부의 적 왕당파를 싸잡아 공격하며 여론몰이를 했다. 혁명을 되돌려 과거로 회귀하려는 반동 세력을 원천 봉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 자신이 황제로 등극해서 부르봉 왕실의 회귀를 막겠다는 희한한 안을 내놓았다.
이 계획을 관철하는 데 국민투표를 이용했다. “현재 공화정의 제1집정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 황제가 된다”와 “황제의 권위는 세습한다”는 두 사안에 대해 찬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하니 99% 찬성했다. 나폴레옹은 합법적으로 황제가 되었다. 프랑스인들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몰표를 주었을까? 10년 이상 지속된 혁명과 전쟁 그리고 내전에 지쳐서 차라리 강력한 인물이 전권을 틀어쥐고 안정을 찾아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이런 흐름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미약한 지배자의 통치를 받는 것만큼 가공할 재앙은 없다.”
1804년 12월 2일 일요일,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황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 행사를 위해 교황 비오 7세가 파리로 왔다. 나폴레옹은 무릎 꿇고 교황으로부터 머리, 팔, 손에 기름 부음을 받는 의식을 치렀다. 이제 황제는 ‘기름 부음 받은 자(그리스도)’로서 신의 뜻을 이 땅에 펼치는 신성한 통치자가 되었다. 이것은 프랑스 국왕의 대관식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다만 대주교가 아니라 교황이 의식을 집전하여 격이 더 높아졌다). 그러더니 벌떡 서서 자기 손으로 황제 관을 집어 스스로 머리 위에 쓰는 제스처를 했다.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유럽 역사 내내 갈등을 일으킨 문제 중 하나가 황제와 교황 중 누가 더 상위권을 가지느냐인데, 나폴레옹은 스스로 답을 제시했다. 교황이 황제를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황제가 된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천명한 것이다. 이어서 나폴레옹이 조제핀에게 황후의 관을 씌어주었다. 다비드의 그림이 바로 이 장면을 포착하여 그렸다.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이 모여 있고, 그 주변에 정부 고위직 인사들과 새로 임명된 장군들, 재편성된 도와 시청을 맡은 도지사들과 시장들도 포진해 있다. 이 그림은 황제를 중심으로 가족과 제국 지휘자들이 단합하여 새 체제에 봉사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전쟁터에선 천재, 아우스터리츠 전투 압승으로 이끈 나폴레옹 - 1805년 12월 2일, 나폴레옹1세의 프랑스군은 지금의 체코 땅인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퇴한다. ‘세 황제의 대결’로 불리는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나폴레옹은 당대의 신화가 됐다. 프랑수아 제라르의 그림‘아우스터리츠 전투’(부분), 베르사유궁 소장. /위키피디아
유럽 대부분의 국가는 프랑스의 황제 체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명목상 최고 지배자였던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오스트리아 황제’로 격하됐다. 영국과 러시아만 반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폴레옹은 제국을 자기 식으로 확대·개편해 나갔다. 1805년 이탈리아 공화국을 왕국으로 개편하고 자신이 왕위를 차지했다. 이탈리아 일부 지역들은 아예 프랑스의 도(道)로 편입했다. 이와 같은 팽창주의에 주변국들이 다시 긴장했다.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대불 동맹을 맺어 위협하자 나폴레옹은 18만명에 달하는 대군(大軍, Grande Armée)을 구성한 후 울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이어서 아우스터리츠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했다. 대승을 기념하기 위해 파리 시내에 두 개의 개선문(카루젤과 에투알)을 건설했다.
외무 장관 탈레랑은 이런 정도에서 무력행사를 멈추고 유럽의 균형을 유지하는 정책을 펴라고 권했지만, 나폴레옹은 생각이 달랐다. 내친김에 힘으로 더 밀어붙이자는 것이다.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왕국으로 쳐들어가 국왕을 축출하고 자기 형 조제프를 새 왕으로 앉혔다. 네덜란드에는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를, 베르크-클레브 공령에는 처남 뮈라와 여동생 카롤린(Caroline)을, 또 신생 베스트팔렌 왕국에는 막내 동생 제롬을 지배자로 앉혔다. 유럽 주요 국가들을 재벌가의 가족 기업처럼 운영한 것이다.
모든 나라들이 고분고분 따르지는 않았다. 라인 지방의 노른자 땅을 빼앗겨서 발전의 싹이 잘린 프로이센의 반발이 제일 거셌다. 과감하게 프랑스군에 도전했으나 막상 전쟁에 돌입해 보니 프로이센은 과거 명성을 떨치던 군사 강국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나 전투(1806년 10월 14일)에서 승리를 거둔 나폴레옹군은 베를린에 입성했다. 자신감에 넘쳐나는 나폴레옹은 영국을 경제적으로 압박하겠다며 대륙의 모든 국가들에게 영국과 교역을 금지하는 대륙 봉쇄 정책을 폈다. 이에 저항하는 러시아군을 상대하여 힘겨운 전쟁을 벌였다. 사실 나폴레옹군이 매번 손쉽게 대승을 거둔 것은 결코 아니다. 가까스로 러시아 대군에 승리를 거둔 다음 차르 알렉산더 1세와 담판을 벌여 틸지트 평화 조약을 맺었다(1807). 러시아는 엘베강 동쪽의 프로이센 영토 일부를 넘겨받고 대신 대륙 봉쇄 정책에 동참하기로 했다.
다음에는 이베리아 반도로 침공해 들어가서 스페인과 동맹을 맺어 포르투갈을 분할하더니, 스페인 국왕을 축출하고 조제프를 국왕으로 앉혔다. 형님의 보직을 나폴리왕에서 스페인왕으로 변경한 것이다. 바그람(Wagram)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에 승리한 후에는 오스트리아 영토를 일부 떼어내서 바르샤바 공국에 넘겨주었고, 네덜란드는 아예 프랑스 영토로 편입시켰다. 이런 식으로 편집한 제국 체제를 온전하게 지탱할 수 있을까?
칼로 일어난 자는 칼로 망할 때까지 멈추려 하지 않는다. 한번 시작한 군사 정복은 적이 없어질 때까지 지속해야 한다. 1811년 즈음이 권력의 정점이었다. 나폴레옹은 이렇게 선언했다. “5년 내 나는 세계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 오직 러시아만 남을 텐데 이 나라마저 파괴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고야의 ‘5월 3일’>
▲프랑스군의 학살 고발한 '5월 3일' -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벌어진 나폴레옹군의 학살을 그린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5월 3일’(부분). 프라도 미술관 소장. /위키피디아
1808년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가 스페인 왕이 되었을 때 스페인 국민들은 극도로 분노했다. 나폴레옹은 조제프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가장 말 안 듣는 도시 두어 곳을 약탈하세요. 그들에게는 본보기가 될 테고 병사들에게는 즐거움을 안겨줄 겁니다.” 마드리드에서 봉기가 일어나자 나폴레옹의 매제(여동생의 남편) 조아생 뮈라 장군은 군을 동원하여 강경 진압에 나섰다. 5월 3일, 새벽 시간에 수백명의 시민들이 처형되었다. 스페인의 화가 고야는 처음에 프랑스혁명의 이상과 계몽주의 철학에 찬성했지만 곧 프랑스군의 참혹한 탄압 앞에서 몸서리쳤다. 후일 그는 폭군에 저항하는 영웅적인 행위를 화폭에 담아 영원히 남기겠노라고 결심했다. 학살의 현장은 온통 암흑이어서 온 세상이 죽은 듯하다. 나폴레옹군이 사용하는 군용 랜턴(당시 개발된 군사 용품)의 기계적 빛이 총살 직전의 희생자를 환하게 비추고 있다. 그의 오른손에는 예수의 성흔(聖痕)처럼 상처가 나 있다.
[44] [나폴레옹 다시 보기] [下] 제국의 종말
자신만이 정의라 믿은 독재자 나폴레옹… 러시아 눈밭서 신화는 끝났다
1811년경, 나폴레옹은 권력의 정점에 섰다. 유럽 대부분 지역이 같은 법률과 행정 체제를 따랐고, 모두 프랑스에 군 병력을 제공해야 했다. 2~3년 후 이 체제가 종말을 맞으리라고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제국 체제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외국의 침략과 지배를 받는 나라에서 민족 감정이 분출하는 것은 정해진 이치다. 한번 제국 체제에 균열이 생기면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 등 피압박 국가들이 곧장 저항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프랑스 내부적으로도 왕당파, 공화파, 가톨릭 세력 등 다양한 집단이 다양한 이유로 체제에 저항했다.
▲하얀 눈이 수의처럼 내려앉았다, 비참했던 러시아 침공 후퇴의 길 - 나폴레옹도 러시아의 겨울을 이길 수는 없었다. 1812년 여름, 60만 대군으로 진군했던 나폴레옹군은 러시아군의 지연 전술에 당하며 항복을 받아내지 못했고, 10월 말 후퇴를 시작했다. 극심한 추위 속에 식량 부족이 겹치고 전염병까지 번졌다. 병력 57만명, 말 20만 마리, 1050문의 대포를 잃었다. 독일 화가 아돌프 노르텐의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퇴각’(1851). 올해 1월엔 폼페이오 당시 미 국무장관이 “트럼프 정부만큼 러시아를 터프하게 압박한 정부는 없었다”는 트윗을 올리자, 러시아 외무부가 “터프 가이들, 이게 자네들 길이라네”라는 말과 함께 이 그림을 트윗하며 맞대응하기도 했다. /위키피디아
그 전에 나폴레옹 자신부터 문제였다. 그는 황제가 된 후 권력에 도취되어 균형을 잃었다. 1806년에는 자기 생일인 8월 15일을 성 나폴레옹 축일로 선포했고, 아이들에게 제국 교리문답을 부과했다. 몰락의 길을 걷는 모든 독재자의 공통점은 자신만이 정의롭고 유능하다고 믿고 비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점에서 나폴레옹은 여느 독재자와 다를 바 없다. 결과적으로 나폴레옹 체제는 합리적 전략 전술 대신 모험의 연속이었다.
나폴레옹은 천재적인 군사 전략가인가? 최근 역사학자들의 평가는 다소 부정적이다. 그의 전술은 사실 단순하다. 가능한 한 최대의 전력을 집중하여 적의 중심을 깨는 것이다. 나폴레옹 자신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 가지만 본다. 적의 몸통! 그것을 깨면 부차적 문제는 스스로 정리된다.” 이런 전술의 실상은 무엇일까? 엄청난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주 재앙에 가까운 희생을 치렀다. 1813년 6~9월 스페인과 독일 지역에서 치른 전투에서 프랑스군 15만명이 사망했고, 라이프치히 전투 때 또 7만명이 사망했다. 그러고 보면 그는 유능하다기보다 냉혹한 장군이었다.
나폴레옹이 겪은 최악의 실패는 러시아 침공이다. 러시아는 대륙 봉쇄 정책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고, 폴란드에서 프랑스의 이해를 침해하려 했다. 이 사태를 방치하면 안 된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선수를 쳐서 러시아 침공을 결정했다. 20국 출신의 병력 60만명으로 대군을 구성하여 1812년 6월 24일 네만강을 넘었다. 원정군으로서는 빨리 결전을 벌여 승리를 거머쥐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이를 간파한 러시아는 전투를 피하며 시간을 끌었다. 9월 7일에 가서야 보로디노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여기에서 승리를 거둔 대군은 모스크바로 진격해 갔다.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전쟁이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항복하지 않았다. 러시아군의 쿠투조프 장군은 스스로 초토화작전을 벌였다. 9월 15일부터 20일까지 모스크바가 화염에 휩싸였다. 나폴레옹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다만 성스러운 도시를 불태운 적그리스도라는 오명만 얻었다. 추위와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대군은 10월 말 후퇴를 결정했다.
도망가는 프랑스 대군 위로 수의(壽衣)를 입히듯 눈이 내렸다. 러시아의 동장군(冬將軍·General Winter) 앞에서 프랑스군은 맥을 못 추었다. 이해 유독 극심한 겨울 추위 속에 식량 부족과 전염병으로 대군은 궤멸 직전이었다. 말이 죽어 쓰러지면 곧 배를 갈라 따끈한 내장을 꺼내 먹었다. 인육도 먹는 지경이고, 심지어 옆 사람의 빵을 훔치기 위해 살인도 주저하지 않았다. 낙오된 병사들은 러시아 농민들에게 잡혀 참혹한 고문 끝에 죽었다(투르게네프의 소설에서 보듯 강의 얼음을 깨고 밀어 넣으며 ‘파리까지 헤엄쳐 가라’고 놀렸다). 뒤에서는 쿠투조프 장군이 맹렬히 추격해 왔다.
▲“나폴레옹 못 나오게 막아” - 프로이센군 폰 블뤼처(왼쪽) 장군과 영국군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가 나폴레옹을 쓰레기통에 넣고 뚜껑을 닫으려는 것처럼 묘사한 풍자화(1815). /위키피디아
12월 5일 나폴레옹은 처남 뮈라에게 지휘를 맡기고 자신은 급히 파리로 돌아가 군을 재조직하려 했다. 4일 후 리투아니아의 빌뉴스(당시 이름은 빌나)에 도착한 군인 수는 이제 수만 명 수준으로 줄었다. 티푸스가 돌아서 매일 아침 시체들이 수두룩하게 쌓였다. 이때 코사크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빨리 100㎞를 행군하여 네만강을 건너야 목숨을 구한다. 후위를 지키는 미셸 네(Michel Ney) 장군 부대의 헌신으로 생존자들은 무사히 도강했다. 이 때문에 네 장군은 ‘러시아에 제일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나폴레옹도 그를 ‘용맹한 자 중 가장 용맹한 자’라고 칭했다. 빌나에 도착한 러시아 군은 수천구의 시체, 말 시체, 그리고 아직 살아있는 부상병까지 한 번에 땅에 묻었다!
최악의 패배였다. 병력 57만명, 말 20만마리, 1050 문의 포를 잃었고, 무엇보다 불패의 신화가 깨졌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영국군이 스페인으로 침공해 왔다. 반대편에서는 러시아가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고 진격해 왔다. 곧이어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영국, 스웨덴이 제6차 반불동맹을 맺고 백만 대군으로 쳐들어왔다. 1814년 3월 31일, 동맹군이 파리에 입성했을 때 나폴레옹은 퐁텐블로 성의 자기 방에서 고독하게 최후를 기다렸다. 한때 독약을 먹고 자살할까 고민했지만 결국 퐁텐블로에서 양위한 후 지중해의 엘바섬으로 추방되었다.
최후의 종말 전에 짧은 반전이 일어났다. 나폴레옹은 사제들과 망명 귀족들의 귀환으로 앙시앵레짐이 재건되는 게 아닌지 두려워하는 민중의 심성에 기대 재기를 노렸다. 엘바섬을 탈출한 후 600명의 지지자들과 함께 쥐앙만에 상륙했고, 긴 행군 끝에 파리에 입성했다. 나폴레옹이 파리로 진군해 오는 동안 정부 기관지인 ‘르 모니퇴르 위니베르셀’지의 헤드라인은 매일 변화해 갔다. ‘식인종 자기 소굴에서 탈출’ ‘코르시카의 식인귀 쥐앙만에 상륙’ ‘괴물 그르노블에서 숙영’ ‘독재자 리옹을 지나다’ ‘찬탈자 수도에서 60리외까지 근접’ ‘보나파르트가 전진해 온다’ ‘황제께서 퐁텐블로 도착’ ‘황제 폐하께서 어제 파리에 입성하시다’.
나폴레옹은 제국을 재건한 후 입헌주의를 약속하고, 이웃 국가들에 평화조약 체결을 제안했다. 그렇지만 유럽 각국은 이 괴물의 말을 믿는 대신 확실하게 꺾어놓는 게 낫다고 결정했다. 나폴레옹은 워털루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했다. 사실 워털루는 영국 웰링턴 장군의 캠프가 있던 곳이고, 실제 전장(戰場)은 브렌랄뢰(Braine-l’Alleud)였는데, 영국인들은 발음하기 불편한 이 지명 대신 ‘워털루 전투’라고 불렀다. 승자가 전투 이름까지 편하게 결정한 것이다.
나폴레옹은 두 번째로 양위했다. 1815년 11월 30일 체결된 2차 파리조약은 1년 전보다 훨씬 엄격했다. 사부아와 니스, 그 외 프랑스 동부와 북부의 여러 곳에서 영토를 빼앗았다. 프랑스가 두 번 다시 침략하지 못하도록 네덜란드(벨기에는 이 당시 네덜란드에 속했다가 1830년에 독립했다), 피에몬테-사르데냐, 프로이센(폴란드 쪽 땅을 러시아에 양도하고 대신 라인 지방 땅을 받았다) 등 주변 국가들의 힘을 키워 프랑스를 둘러쌌다. 나폴레옹 자신은 또다시 탈출하지 못하도록 대서양의 고도(孤島) 세인트헬레나섬에 유폐했다. 이렇게 역사의 거대한 물결이 또 한 차례 흘러갔다.
[나폴레옹 최후의 장군, 미셸 네]
반역죄로 총살형 받자 “마지막 명령을 내린다, 내 심장을 향해 발사!”
▲용맹함으로 명성 떨친 네 장군 - 나폴레옹이 ‘용맹한 자 중 가장 용맹한 자’라 불렀던 미셸 네 장군. 샤를 메이니에르의 1805년작, 베르사유궁 소장. /위키피디아
나폴레옹이 패배하자 네 장군도 체포되었고, 반역죄로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그는 엘바섬에서 탈출하여 파리로 행진해 오는 나폴레옹을 체포하라고 보냈더니 나폴레옹 편으로 넘어갔고, 마지막 전투까지 나폴레옹과 함께 싸웠다.
변호사 앙드레 뒤팽은 그의 무죄를 끌어내기 위해 나름 ‘신의 한 수’를 시전했다. 1815년 파리 조약으로 네 장군의 고향 자르루이(Sarrelouis)가 프로이센 영토가 되어서 이제 네 장군은 법률상 독일인이니 프랑스 법정에서 재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말을 들은 네 장군은 벌떡 일어나 외쳤다. “나는 프랑스인이고 앞으로도 프랑스인으로 남을 거요!” 결국 그는 사형선고를 받아서 뤽상부르 공원 근처에서 처형당했다.
눈가리개를 거부한 그는 스스로 사형 집행을 명령할 마지막 권리를 행사했다. “병사들이여, 내가 발사 명령을 내리면 내 심장을 향해 쏴라. 그것이 마지막 명령이 될 것이다. 나는 재판 결과에 항의한다. 나는 프랑스를 위해 백번의 전쟁을 했지만 단 한 번도 프랑스에 대항해 싸운 적이 없다. 병사들, 발사!”
[45] [17세기 영국 명예혁명] [상] 민심 거스른 국왕… 자리에서 쫓겨나다
종교·신념 강요한 왕의 일방통행… 군대도 딸도 등 돌렸다
1688년 11월 5일, 네덜란드의 오렌지 공 윌리엄(William·네덜란드어로는 빌럼 Willem)이 2만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도버 해협을 건너 토베이(Torbay)에 상륙했다. 이제 그는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2세를 공격하기 위해 런던으로 진격할 준비를 마쳤다. 사실 제임스 2세는 장인이었다. 어떻게 하다가 사위가 군대를 이끌고 장인을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을까?
▲의회 승인으로 왕좌에… 영국 윌리엄 3세 대관식 - 1689년 4월 11일 영국 상원(House of Lords)에서 잉글랜드의‘공동왕’으로 즉위하는 윌리엄 3세 왕과 메리 2세 여왕 대관식. 신교도였던 딸 메리와 달리 가톨릭 구교도였던 아버지 제임스 2세는 절대왕정과 보호주의 무역으로 영국을 위협하던 프랑스 가톨릭왕 루이 14세 편에 섰고, 영국 귀족들은 메리와 윌리엄 공의 군대를 영국으로 불러들였다. 민심을 잃은 제임스 2세는 결국 프랑스로 패주했다. 왕이 의회와 타협하며 통치하는 새로운 시대를 연‘명예혁명’이었다. 네덜란드 후기 바로크 예술가 호메인 데 후게는 성대한 대관식을 새 왕과 여왕의 마차 행렬, 템스강 불꽃놀이 등 판화 9개 장면으로 기록했다. 중앙부 대관식 장면(부분), 네덜란드 왕립도서관 소장. /위키피디아
17세기 영국은 격랑의 시대를 보냈다. 1640~50년대에는 왕당파와 의회파 간 내전(보는 시각에 따라 ‘청교도혁명’이라고도 부른다)을 겪으며 국왕 찰스 1세를 처형했고, 영국 역사상 유일하게 공화국 시대(the Commonwealth)도 경험했다. 1660년 왕정 복고가 이루어져 찰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겉으로는 사회 전체가 뒤집어졌다가 원래 질서로 되돌아간 것처럼 보이지만, 온전히 과거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17세기 후반 영국인들은 지난날과는 달라져 있었다. ‘뉴스에 목말라하는 사람들(news-hungry people)’이라 할 정도로 정보에 민감하여, 신문, 잡지, 팸플릿을 읽고 비판적으로 토론하는 풍조가 자리 잡았다. 대륙에서 바다를 건너 영국에 도착한 사람들은 지붕을 이던 일꾼이 쉬는 시간에 지붕에 그대로 걸터앉아 신문을 읽는 모습을 보고 경탄했다. 대륙에서는 아직 귀족이나 부유한 집안 출신 아니면 글을 읽지 못하던 때다. 수도 없이 생겨나는 커피하우스에서는 정치 논쟁을 하거나 주식 투자 이야기를 했다. 이렇게 똑똑해진 시민들이 맹목적으로 국왕에게 복종할 리는 만무하다.
어차피 무능한 군주라면 찰스 2세처럼 우유부단한 가운데 개인적으로 방탕한 생활을 즐기며 지내는 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다. 1685년 찰스 2세가 사망하고 동생인 제임스 2세가 왕권을 이어받았다. 문제는 신왕이 절대왕권의 신봉자인 데다가 드러내놓은 가톨릭 신자였다는 점이다. 국왕이 조용히 자기 믿음을 지키는 정도라면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영국 국민들은 과거의 피비린내 나는 종교 갈등을 다시 겪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신왕은 자신의 신념과 종교, 이데올로기를 적극 관철하려는 스타일이었다. 정부 요직과 군 고위직에 가톨릭 인사를 임명하고, 심지어 비밀리에 가톨릭을 신봉하는 인사를 영국 국교회 주교로 중용했다. 옥스퍼드 대학 막들린 칼리지(Magdalene college)에 가톨릭 학장을 임명하려 했을 때 평의원들이 반대하자 그중 다수를 파면한 다음 학장 임명을 감행했다. 이쯤 되면 문제가 안 될 수 없다.
이런 사태가 국제 정치 동향과 맞물렸다. 무엇보다 프랑스의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루이 14세는 한 국가에는 한 국왕과 한 종교만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낭트칙령(일정 정도로 신교도의 존재를 용인한 앙리 4세의 1598년도 칙령)을 폐기하고 신교도(위그노)를 압박했다. 가톨릭으로 개종하든지 프랑스를 떠나라는 것이다. 실제로 수많은 위그노가 프랑스를 떠나 영국으로 와서 그들이 처했던 지옥 같은 상황을 전했다. 그러지 않아도 프랑스의 강력한 절대주의 정책이 영국과 충돌하고 있었다. 루이 14세는 네덜란드, 독일 등과 전쟁을 벌였고, 높은 관세 장벽으로 국내 산업을 보호하려는 콜베르(Colbert·루이 14세의 재상)의 무역 정책도 위협적이었다.
▲사위의 침공 소식에 낙담 - 네덜란드 윌리엄공의 군대가 자신을 축출하기 위해 영국 해안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고 좌절하는 제임스 2세. 19세기 영국 역사화가 에드워드 매슈 워드 작, 영국 랭커셔 번리 타운리홀 미술관 소장. /게티이미지코리아
지금까지 영국은 정치·군사·경제 면에서 네덜란드와 충돌했다. 그렇지만 이제 유럽의 패권을 장악한 프랑스가 점점 더 명료하게 영국의 라이벌로 부상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 중 어느 나라를 우방으로 선택해야 하는가? 이는 단순히 정치적으로 유리한 파트너를 고르는 정도를 넘어 상이한 두 세계 중 하나를 고르는 문제처럼 비쳤다. 마치 냉전 시대에 미국과 소련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영국 국민은 대체로 프랑스를 더 위협적으로 간주하는데 국왕 제임스만 반대로 판단하고 있지 않는가. 국왕과 국민의 간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영국 국민은 성격이 정반대인 다음 국왕을 기다리며 위안을 삼았다. 제임스 2세는 왕위를 이어받을 왕자를 얻지 못한 상태였다. 첫 번째 왕비 앤 하이드는 4남 4녀를 낳았으나 두 딸 메리와 앤만 생존하고 나머지 아이들은 다 일찍 사망했다. 바로 이 장녀 메리가 네덜란드의 오렌지 공 윌리엄에게 시집가 있었다. 왕비가 37세에 사망한 후 재혼한 두 번째 왕비 모더나의 메리는 10번 이상 임신했는데 유산과 사산을 거듭하거나 태어나도 어린 나이에 죽었다. 이대로 가면 50대 중반에 이른 국왕이 왕자를 낳을 가능성이 희박해지고, 네덜란드에 시집가 있는 신교도 메리가 1순위의 왕위 계승자가 되어 모든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소되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1688년 6월, 국왕 부부가 뒤늦게 왕자를 출산했다. 왕실의 득남에 대해 온 국민이 이토록 슬픔과 분노에 휩싸인 사례가 또 있나 싶다. 곧 영국의 귀족들은 메리와 윌리엄 공에게 영국으로 침공해 오라는 ‘초청장’을 보냈다.
윌리엄의 병력이 무사히 도버해협을 건넜지만 국왕의 반격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렇지만 제임스는 이미 신망을 잃었다. 망하는 첫 징조는 주변 인물들이 떠나는 것이다. 국왕의 오랜 친구였던 최측근 인사 존 처칠(John Churchill·20세기 처칠 총리의 조상)을 비롯한 고위직 인사들이 국왕을 버렸다. 가장 큰 충격은 친딸 앤 공주가 이들을 따라간 일일 것이다. 궁지에 몰린 제임스는 국외 도주를 결정했다. 도망가는 길에 국새를 템스강에 던져버렸다. 국새도 새로 만들고 왕도 새로 정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어부들이 용케 왕을 알아보고 런던으로 잡아왔다. 윌리엄은 공연히 ‘순교자’를 만들어서 더 큰 분란을 일으키는 대신 조용히 프랑스로 떠나도록 도주 길을 열어주었다.
다음 해인 1689년, 의회는 새로운 통치자와 일종의 협약을 체결하는 방식으로 국정을 매듭지었다. 도주한 제임스는 스스로 왕위를 포기한 것으로 간주했고, 차제에 가톨릭 신자의 왕위 계승을 금지했다. 보수적 세력은 메리를 여왕으로, 남편 윌리엄은 단지 여왕의 조력자 정도로 만들고자 했으나 윌리엄은 왕권을 원했다. 결국 윌리엄과 메리 모두 ‘공동 왕’으로 모시는 방향으로 결정했다. 그렇다면 새 통치자는 혈통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회가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왕이 된 것이다. 대신 의회는 윌리엄에게 왕권을 제약하는 내용의 권리장전(Bill of Rights)을 들이밀며 서명할 것을 종용했다. 이후 국왕은 자의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의회와 타협하며 통치하게 되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루어낸 혁명이라고 해서 당시부터 이 사건을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이라고 칭했다. 이 혁명의 성격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권력자만 바뀐 일종의 쿠데타에 불과하다는 주장부터 국민을 억압하던 족쇄를 끊고 완전히 새로운 체제를 출범시킨 근본적 혁신이라는 주장, 혹은 정반대로 이전 국왕의 일탈을 바로잡고 과거 질서로 되돌아간 보수 회귀라는 주장까지 다양하다. 다만 파괴적 갈등을 피하면서도 국가의 도약을 위해 필요한 체질 개선을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영국은 유럽 변방의 양치기 섬나라에서 세계의 패권 국가로 도약하는 과정에 들어섰다(김대륜 ‘패권의 대이동’).
<권리장전(Bill of Rights)>
▲권리장전 서명 요구하는 의회 - 영국 의회로부터 권리장전을 전달받는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 작자 미상의 19세기 중반 그림. /게티이미지코리아
1689년 12월 16일 ‘신민(臣民)의 권리와 자유를 선언하고 왕위 계승을 정하는 법률’이라는 이름의 의회제정법이 공포되었는데, 이것이 곧 권리장전이다. 그 내용과 형식은 실로 ‘영국적’이라 할 만하다. 그동안 제임스 2세가 저지른 행위를 12항으로 정리하여 불법행위라 선언한 다음, 새 국왕은 어떤 이유에서든 국가의 기본법을 침해할 수 없으며 그러기 위해 지켜야 하는 것들을 제시했다. 국가의 경비는 매년 의회 의결을 거칠 것, 평화 시기에 의회 동의 없이 군을 징집하지 말 것, 국민의 자유로운 청원권과 언론 자유를 보장할 것, 적어도 3년에 한 번은 반드시 의회를 소집할 것 등이 주요 내용이다. 이 이상 명료할 수 없다. 휘황찬란한 추상적 개념을 선포하기보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중요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못 박는 게 자유를 지키는 데 훨씬 효과적이다.
[46] [17세기 영국 명예혁명] [하] 재정 주도권 쥐고권력 견제한 의회
▲명예혁명으로 영국 왕이 된 윌리엄은 곧 유럽 각국이 합종연횡해 싸웠던 ‘9년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의회가 국가 재정을 장악한 영국 정부는 막대한 전비를 조달하기 위해 혁신적인 해결책을 도입했다. 조세 저항을 피하기 위해 상품과 서비스에 부과하는 간접세를 늘리면서, 동시에 매년 확정 이자를 지급하는 영구채(永久債·consol)를 발행한 것이다. 국민은 무거운 세금을 내기만 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던 시대, 영원히 나라에서 이자를 받을 수 있는 국채는 매력적이었다. 영란은행에 투자 배당금을 받으러 온 각계각층 사람들의 떠들썩한 모습을 묘사한 조지 엘가 힉스의 그림.(부분) 런던 영란은행 박물관 소장. /게티이미지코리아
1688~1689년 영국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전제적인 국왕을 몰아낸 소위 명예혁명에 성공했다. 새 국왕은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지 않고 의회와 협력하며 통치한다는 원칙에 동의했다. 그 약속을 실현하도록 만드는 방법이 무엇일까? 국왕의 ‘돈줄’을 통제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영국 의회는 잘 알고 있었다.
근대국가의 발전 과정에서 재정 문제는 핵심 사안이다. 국가를 운영하는 자금을 어떻게 조달하고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국가의 흥망에 직결되는 문제다. 효율적이고도 공평하게 재정 문제를 해결하면 국내 안정을 찾고 국제 경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다. 그러지 못할 경우 반란이나 심지어 혁명 상황에 직면한다.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가 혁명으로 무너지고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사태는 세금 문제 해결에 실패한 데에서 시작했다. 부유한 귀족은 면세 특권을 누리는 반면 무거운 조세 부담을 지고 있던 농민들이나 상공업자에게 계속 더 많은 세금을 내도록 강요하니 극심한 조세 저항에 직면한 것이다. 이런 불편을 피하는 방편 중 하나가 징세청부제다. 원래 정부가 거두어야 할 조세를 돈 많고 사업 재간이 있는 개인이 먼저 정부에 선납(先納)한 후 훨씬 많은 돈을 걷는 식이다. 당연히 비효율적이고 불공평한 수탈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무능력한 정부가 애용하는 또 다른 방법은 부유한 개인에게 자금을 빌리는 것이다. 전쟁이 발발하여 거액의 급전이 필요할 경우를 생각해 보자. 사업가들에게 높은 이자와 각종 특혜를 약속하고 자금을 조달한다. 대개는 거액을 빌렸다가 상환이 힘들면 다시 또 돈을 빌리는 일이 반복되면서 부채 액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악순환에 빠지곤 한다. 결국 돈을 빌려준 대상인들이 파산을 면치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곤 했다. 대부분의 국가가 이런 암담한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명예혁명을 거치면서 드디어 영국이 해결책을 찾았다. 그 핵심은 의회가 재정을 장악하는 것이다. 이를 ‘재정혁명’이라고 부른다.
▲의회가 왕권을 제한하도록 한 권리장전에 서명해 영국이 거대한 제국으로 가는 주춧돌을 놓은 윌리엄 3세 왕의 초상. 스코틀랜드 초상화가 토머스 머리의 1691년 작. /위키피디아
명예혁명으로 잉글랜드 국왕이 된 윌리엄은 곧바로 장기간의 전쟁(1688~1697, 영국사에서는 ‘9년 전쟁’이라고 부른다)에 직면했다. 9만명의 육군과 4만명의 해군을 동원하고 동맹국 지원까지 해야 하니 엄청난 거액이 필요했다. 그런데도 의회는 국왕에게 가급적 적은 자금을 주고 아주 꼼꼼하게 통제를 가하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가장 효율적인 재정 제도를 만들어내야 했다.
전쟁 비용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세금 징수의 확대다. 재산세와 소득세를 크게 올렸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저항이 심할 수밖에 없으니 온갖 상품과 서비스 소비에 간접세를 부과하였다. 마차⋅소금⋅맥주⋅포도주⋅브랜디⋅담배⋅차⋅커피 등의 소비품은 말할 것도 없고 출산⋅매장⋅결혼에까지 각종 세금을 물렸다. 지난날 영국과 프랑스를 비교하며 프랑스 국민이 훨씬 많은 세금에 시달렸으리라고 예단했다. 그렇지만 실제 연구 결과를 보면 영국 국민이 더 많은 세금을 내고 있었다. 과도한 조세 저항을 요령껏 잘 피했을 뿐이다. 하여튼 재정 문제 해결 방안으로 역진세 성격이 강한 소비세를 크게 늘린 것은 결코 긍정적인 방안이라고 할 수는 없다. 혁신적인 해결책은 영구채(永久債·consol)라는 새로운 개념의 차입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정부가 긴급하게 필요로 하는 자금을 일반 시민들에게 빌리는 것, 즉 국채 발행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던 방식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이 국채에 상환 기한이 따로 없고 이자만 영구히 지불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정부가 돈을 빌리기는 하되 그것을 갚을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다만 매년 이자를 확실하게 갚기만 하면 되고, 그러기 위해 이자 지급을 위한 재원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컨대 맥주세 같은 확실한 세입원을 이자 지불용으로 정했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예를 들어 보자. 정부가 연 3% 이자로 국채 1조원을 발행했다고 하자. 정부는 1조원을 갚을 필요는 없고 단지 세수입 중 매년 300억원을 확보하여 채권 소지자들에게 지불하면 된다. 정부에 돈을 빌려준 사람, 즉 채권 구입자로서는 이론상 자손 대대로 투자금의 3% 과실을 누리게 되니 약속대로 이자 지불이 잘 지켜진다면 좋은 투자인 셈이다. 만일 빌려준 돈을 되찾고자 하는 경우 정부에서 상환받는 것이 아니라 채권 시장에서 매각하면 똑같은 결과를 얻는다. 그러므로 국가는 원하는 액수를 빌리되 그것을 갚을 필요가 없고, 국가에 돈을 빌려준 사람은 이자소득을 누리다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원하는 때에 돌려받는 신기한 일이 가능해진 것이다. 다만 정부는 채권 액수가 점점 커져서 이자 부담이 감당할 수 없게 되는 사태는 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재정 여건이 호전되었을 때, 예컨대 전쟁이 끝나서 재정 여력이 생겼을 때, 정부 스스로 채권 시장에 들어가 이전에 발행한 채권을 구입하여 소각하면서 전체 액수를 관리한다.
사실 이 아이디어 자체를 영국에서 창안한 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제도가 실제로 운영되도록 실천한 것이다. 이 제도는 신용을 잃는 순간 끝장난다. 정부가 이자 지불을 못 하게 되는 게 대표적이다. 만일 국왕에게 이 제도의 운영을 맡길 경우 걸핏하면 거액의 국채를 발행할 것이고, 그러면 결국은 채권 총액이 너무 커져서 언젠가 이자 지불을 못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사태를 막으려면 의회가 철저히 관리하는 수밖에 없다.
▲윌리엄공의 군대를 피해 도망치면서 국새를 템스강에 버리는 제임스 2세를 묘사한 1690년 무렵의 판화. /게티이미지코리아
의회의 재정 통제는 명예혁명 이전부터 서서히 발전해 왔다. 1670년대부터 국고 지출을 특정한 목적으로 한정한다는 세출 규정(appropriation) 그리고 과연 실제로 그렇게 집행되었는지 따지는 감사(audit)가 자리 잡았다. 의회는 국왕과 정부가 원하는 대로 세금이나 차입을 허락하는 게 아니라 어떤 용도에 돈을 쓰려고 하는 건지 따져본 다음 합당하다고 판단할 때에만 승인했고, 또 정말 원래 계획대로 집행했는지 꼼꼼히 점검했다. 이런 식으로 국가 재정 운용에 대한 국민의 신용을 유지하는 게 관건이다. 국가의 공신력이 한번 무너지면 제도는 쉽게 망가지고 만다.
모든 정부는 가급적 많은 예산을 확보해서 쓰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후대에 어떤 부담을 지울지 고려하지 않고 방만하게 예산을 풀어 쓰면 반드시 비싼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국가의 돈 문제를 민주적으로 그리고 효율적으로 해결한 것이 영국이 세계 최강대국으로 성장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원금 안갚고 이자 안주고… 엉망이었던 英 재정관리, 명예혁명 이후에야 개선]
어느 국가의 재정 문제 해결 능력을 보여주는 척도 중 하나는 전비(戰費)의 해외 송금 방식이다. 거액의 돈을 적시에 외국에 보낸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점에서 명예혁명 이전 시대 잉글랜드의 수준은 다른 나라와 별반 차이가 없는 저급한 수준이었다. ‘팔라비치노(Pallavicino) 사례’가 그 점을 말해 준다. 1570년대에 잉글랜드는 에스파냐와 전쟁 중인 동맹국 네덜란드에 자금 원조를 해주어야 했다. 이때 이탈리아 상인 팔라비치노가 송금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제안해 왔다. 이런 식이다. 팔라비치노가 1만5000플로린어치의 명반(직물업에 필요한 소재)을 네덜란드 의회에 공급한다. 네덜란드 의회는 이 명반을 판매한 대금을 얻고 그 액수만큼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차입금 계정에 기록한다. 여왕은 1만5000플로린과 연 10%의 이자를 팔라비치노에게 지불한다. 그러나 약속했던 원금 지불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자도 어떤 해에는 지불하고 어떤 해에는 지불하지 않은 채 시간이 흘러가서, 1598년에는 원리금 합계가 8만8901플로린이 되었다. 팔라비치노는 이 액수를 다 받지 못한 채 1600년에 사망했지만, 사실 그동안 7만 플로린을 받았으므로 450%의 이익(48년 동안 연 9%)을 얻은 셈이다. 이런 저조한 재정·금융 기술 수준은 명예혁명 시대에 이르기까지 100년간 거의 변하지 않았다.
[47] 스포츠맨십 대신 권력·영예 얻는 길로 악용
고대 올림픽은 초고속 출세코스… 우승자는 軍지휘관으로 발탁
▲올림픽 정신은 ‘국제 평화 증진’에 있다고 하지만, 현실과 이상엔 늘 차이가 난다. 고대 그리스에서 열린 올림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인기 있는 경기였던 마차 경주에서 참가자들은 자신의 경제력을 과시하고, 이를 통해 권력과 영예를 얻으려 했다. 순수하지 않은 목적으로 스포츠를 악용해 개인과 국가 모두에 해로운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19세기 헝가리 화가 알렉산더 폰 바그너의 그림 ‘전차 경기’. 고대 로마 제국의 전차 경기장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참가자들은 전차 바퀴가 떨어질 정도로 치열하게 달린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올림픽 정신은 ‘스포츠에 의한 인간의 완성과 경기를 통한 국제 평화의 증진’에 있다고 한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인 쿠베르탱은 “올림픽 대회의 의의는 승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 데 있으며,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성공보다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대로 되었으면 좋겠다고 염원하는 바이지만, 늘 현실은 이상과 차이가 나는 법이다.
1896년 아테네에서 개최된 제1회 근대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자는 그리스 선수 스피리돈 루이스(Spyridon Louis)였다. 그가 1등으로 스타디움에 들어오자 그리스의 콘스탄티노스 공(장래 그리스 국왕)이 트랙으로 달려가 그를 맞았고, 관중들은 환성을 터뜨렸다. 현장에 있던 프랑스 작가 샤를 모라스는 옆자리의 쿠베르탱 남작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이 말한 국제주의는 민족주의를 죽인 게 아니라 더 강화시켰소.”
사실 고대 올림픽도 이상과 현실이 결코 같지는 않았다. 올림픽은 그리스 인 모두 공동으로 제우스에게 제사를 지내며 하나의 종교적·문화적 공동체에 속한다는 의식을 나누는 자리였고, 많은 웅변가가 모든 그리스인의 단합을 호소하는 연설을 하곤 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참가 국가 간 혹은 개인 간 치열한 우승 경쟁을 피할 수 없었다. 그와 같은 갈등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난 때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냉전 상태에 있었던 기원전 420년 및 기원전 416년 올림픽 경기였을 것이다.
살라미스 해전(기원전 480년)에서 페르시아의 대군을 물리친 후 아테네는 절정기를 맞았지만, 이후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놓고 스파르타와 경쟁이 극심해졌다. 이 시기에 그리스의 많은 국가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라는 두 강대국 중 한 나라의 편에 서야만 했다. 그 중 엘리스(Elis, 혹은 일레이아라고도 한다)는 경제나 군사 면에서는 약소국이지만 올림픽을 주재하는 나라로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이 나라의 올림피아라는 곳에서 제우스에게 제사를 지내고 스포츠 경기를 벌였다(북쪽 지방의 올림푸스 산은 우연히 이름이 비슷할 뿐 아무 관련이 없는 곳이다). 그런데 엘리스는 스파르타와 국경 분쟁을 겪은 후 아테네의 동맹이 되었다. 420년 올림픽 직전 엘리스는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스파르타의 올림픽 경기 출전을 금지시켰다. 제우스에 대한 공동 제사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은 문명 세계의 일원이 될 자격이 없다는 지극히 심각한 굴욕적 사태다. 한때 스파르타는 군을 동원해서 올림피아로 진격해 들어갈까 고민하기도 했다.
▲젊은 알키비아데스를 가르치는 소크라테스. 이탈리아와 폴란드의 화가 마르첼로 바차렐리의 1776~1777년 작. /위키피디아
고대 올림픽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경기는 마차 경주였다. 2두 마차와 4두 마차 경기 두 종류가 있었다. 사실 언덕이 많은 그리스 지형에서 마차는 실제 전투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지만, 대신 의장이나 마차 경주에서 멋진 장면을 연출하는 데 최고였다.
마차 경주는 정말로 특이한 경기다. 참가자는 자신이 직접 마차를 모는 게 아니라 단지 좋은 말과 좋은 기수를 출전시키기만 하므로, 체력이나 기술의 경쟁이라기보다 경제력의 경쟁에 가깝다. 그리스 전역에서 부유하고 위엄 있는 가문에서 길러낸 40팀 정도가 경주에 참여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스파르타는 전통적으로 마차 경주에서 강세를 보였다. 그런데 420년 올림픽에서 스파르타의 참여가 금지되자 리차스(Lichas)라는 인물은 동맹국 보이오티아 소속으로 참전해서 우승을 차지했다. 명백하게 금지를 어긴 게 밝혀지자 심판진은 리차스에게 채찍질을 했다. 스파르타인들이 극도로 분개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음 번 416년 올림픽에서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경쟁이 더 격렬해졌다. 이때 아테네의 마차 경주 참가자는 알키비아데스였다. 아테네의 영웅 페리클레스의 양자이며 소크라테스와 친분이 있고 유력한 젊은 정치인이며 아테네 최고 부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자신의 세를 과시하기 위한 과도한 소비 행태로 자주 구설에 오르곤 했다. 그런데 올림픽 경기에서 전무후무한 일을 했다. 마차 경주에 무려 일곱 팀을 동시에 출전시킨 것이다. 자신과 집안의 명예를 드높이고 스파르타의 기세를 꺾어 놓으려는 목적도 있으나, 동시에 정치 권력을 얻기 위함이다. 오늘날 올림픽에서 우승했다고 권력을 얻지는 않지만, 고대에는 올림픽 우승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큰 영예를 얻는 데다가 이로 인해 군 지휘 혹은 식민 도시 통치 등의 임무를 맡기도 했다.
한번에 일곱 팀을 내보내려면 엄청난 자금이 필요하다. 당시 팀 하나를 내보내는 데에는 5달란트가 든다고 하는데, 1달란트는 숙련공의 9년치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당연히 많은 ‘협찬’을 필요로 했다. 그의 처가가 마침 말을 키우는 명가였기에 말을 제공해 주었고, 에게해의 도시 키오스는 말 사료를 대주었다. 마차 경주 참가자는 거대한 파빌리온(pavilion·임시 건물)을 세우고 이곳에서 거주하며 파티를 열었다. 이에 비해 각지에서 올림피아에 몰려온 관람객 약 8만 명은 각자 알아서 텐트를 치고 숙식을 해결했다. 알키비아데스의 파빌리온은 에페수스 시가 마련해 주었고, 제사용 고기는 키오스 시민들이, 포도주는 레스보스 시가 제공했다. 이와 같은 거액의 후원은 모두 장래를 위한 정치적 투자의 일환이었다.
▲권력과 영예를 위해 올림픽 전차 경기를 이용했던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군인 알키비아데스의 흉상. /위키피디아
실력 있는 일곱 팀을 참가시킨 결과 알키비아데스는 1등·2등·3등을 다 차지했다(기록에 따라 1등·2등·4등이라고도 한다). 아마 금·은·동메달을 동시에 타는 일은 역사상 유일한 사례일 것이다. 승리 파티도 엄청난 규모로 거행했다. 올림픽 대회 중 절정은 소 백 마리를 잡아 제우스에게 바치는 행사인데, 의도적으로 그 역시 같은 날 파티를 열어 유사한 수준의 희생을 바쳤다. 또 고대 그리스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인 에우리피데스는 그에게 바치는 승리의 찬가를 지었다.
이후 알키비아데스는 정치적으로 탄탄대로를 걸었을까? 정반대다. 그는 올림픽 우승의 영예에 힘입어 시칠리아 정복을 위한 아테네 원정군의 지휘관으로 뽑혔으나, 전쟁에 나가 있는 동안 정적들에게 고발을 당했다. 아테네의 공식 파빌리온보다 두 배 더 큰 건물을 짓고, 공식 행사보다 더 큰 규모의 희생을 바치는 데 든 돈이 다 어디서 왔단 말인가? 그가 이런 일을 하면서 권력을 탐하는 것으로 보건대 참주(僭主·독재 정치인)가 될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게다가 술 마시고 놀다가 헤르메스 신상의 팔을 부러뜨린 사고를 친 것도 드러났고, 신성한 제의용 선박을 사적으로 사용한 일도 밝혀졌다. 알키비아데스는 사태가 심각하다고 느끼고 적국인 스파르타로 도주했고, 그곳에서 환영을 받았다. 피고가 도망간 상황에서 아테네 법정은 그에게 유죄판결을 내려서, 전 재산을 몰수하고 모든 사제가 그를 저주하도록 지시했다. 스파르타에서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의 군사 작전 내용을 알려주었고, 이것이 시칠리아 원정군의 몰살을 불러온 한 가지 원인이 되었다. 약 10년 후인 기원전 404년,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패배하여 패권을 잃었다.
순수하지 않은 목적에 스포츠를 악용하는 것은 개인에게나 국가에나 해로운 결과를 가져오기 십상이다.
[“카멜레온보다 뛰어나다” 변신의 귀재 알키비아데스]
아테네서 호화 생활하다가 도피… 스파르타서 거친 생활 즐겨 탄성
스파르타로 망명한 알키비아데스는 지난날 스파르타에 가한 손해는 앞으로 충성을 다해 갚겠다고 약속했다.그는 스파르타의 생활 습관을 완전히 몸에 익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머리를 짧게 깎고 찬물로 목욕을 하고 이 나라의 검소한 보리빵과 검은 수프를 맛있게 먹었다. 그가 예전에 집에 요리사를 두고, 향수로 몸을 가꾸며, 진홍색 외투를 입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플루타르코스의 평가에 따르면 알키비아데스는 카멜레온보다 변신 능력이 더 뛰어나다. 카멜레온은 모든 색으로 변하지만 흰색으로만은 변할 수 없다고 하는데 알키비아데스는 흰색으로도 변신이 가능했다.
스파르타에 있을 때에는 운동을 즐기며 검소한 생활을 하다가, 이오니아에 있을 때에는 호화롭고 쾌활한 사람이 되었고, 트라키아에서는 술독에 빠져 살았으며, 테살리아에 가면 말타기를 즐겼다. 페르시아 총독과 사귀는 동안에는 호탕한 생활을 해서 페르시아인들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역사상 가장 탁월한 변신의 귀재라 할 만하다.
[48] 20세기 세번의 전쟁 참전백전노장 전함 미주리호
피란민 흥남철수 작전땐, 든든한 뒷배 돼준 미주리호
하와이의 진주만 해상에는 애리조나호 기념관(USS Arizona Memorial)과 박물관 선박 미주리호(USS Missouri·BB-63)가 마주 보고 있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 공격 당시 이곳에 정박해 있던 애리조나호는 일본 함재기의 공습을 받아 침몰했고, 약 1100명의 선원이 사망했다. 미국 당국은 이 배를 인양하지 않고 그대로 둔 채 바다 위에 추모 기념관을 지었다. 한편, 전함 미주리호는 제2차 세계대전 말에 건조되어 곧바로 일본과의 전쟁에 투입되었다가, 1945년 9월 2일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을 치르는 장소로 사용됐다. 그 후 이 배를 옮겨와서 애리조나호 기념관 앞에 배치했다. 한 척은 태평양전쟁의 비극적 시작을 알리는 기념물이고, 다른 한 척은 승리로 전쟁을 마친 사실을 증언하는 기념물이다.
▲6·25전쟁 발발 뒤 미주리호는 1950년 8월 19일, 미국 전함으로는 처음 한반도에 도착해 곧장 작전에 투입됐다. 9월 15일엔 인천상륙작전을 돕기 위한 양동작전으로 삼척 지역을 포격했고, 이어 흥남철수 작전에서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사진은 흥남철수작전 당시 철수 선박에 탄 피란민들의 모습. 미주리호는 12월 24일 마지막 철수하는 배가 떠날 때까지 해상에서 거대 함포로 배후 지역을 포격하며 중공군 접근을 막아냈다. /거제시청
미주리호는 길이 270m, 기준 배수량 4만5000t의 거구에 구경 40㎝의 주포(主砲) 9문과 고각포(高角砲) 20문 그리고 많은 기관총을 장착한 아이오와급 전함이다. 장차 미국이 일본과 전투를 치를 때를 대비하여 1930년대부터 준비한 대함거포주의(大艦巨砲主義) 시대 전함의 마지막 사례라 할 수 있다. 1941년 건조 작업에 들어가 1944년 1월 29일에 진수했는데, 이때 미주리주 상원 의원이었던 해리 트루먼이 기념 연설을 하고, 그의 딸 마거릿 트루먼이 명명식에 참석했다. 곧바로 태평양전쟁에 투입되어 이오지마 전투, 오키나와 전투 그리고 혼슈와 홋카이도 공습 작전에 참여했다.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항공기가 폭격하는 동안 적군의 해상 혹은 공중 공격을 방어하는 역할이 주 임무였다.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던 날, 미주리호는 일본 북부 지역을 공격하고 있었다. 얼마 후인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이 나왔고, 항복문서 조인식을 이 배의 선상에서 거행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선원들은 청소와 페인팅을 새로 하며 조인식 준비를 했다.
미주리호는 8월 27일 도쿄 만에 진입하여 8월 29일에 정박했다. 92년 전인 1853년 페리 제독(Commodore Matthew Perry)이 ‘흑선(黑船)’을 타고 와서 일본의 개항을 강요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미군 당국은 페리 제독이 사용했던 성조기를 급히 공수해 와서 조인식 장소 배후에 걸어서 역사의 무게를 강하게 각인시키고자 했다. 원래 일정은 8월 31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기상 상황이 좋지 않아 9월 2일로 연기했다. 이날 아침 8시, 니미츠 제독과 맥아더 총사령관이 배에 올랐고, 연합국 참전국인 중국⋅소련⋅오스트레일리아⋅네덜란드⋅프랑스⋅뉴질랜드 대표들이 뒤따랐다. 일본 대표단을 이끈 사람은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였다. 다리를 저는 시게미쓰가 철제 계단을 올라가는 데 힘들어했기 때문에 약간 지체되었다. 그가 다리를 저는 이유는, 1932년 상하이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전승 기념 및 천장절(天長節) 기념식을 할 때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한쪽 다리가 잘려서 10㎏에 달하는 의족과 지팡이를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1945년 9월 2일 일본 도쿄만에 정박한 미주리호 함상에서, 미 육군 리처드 서덜랜드(왼쪽 군인) 중장과 미군 장병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오른쪽 정장 입은 사람)가 일본 정부를 대신해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맥아더 장군이 “피와 살육으로 얼룩진 과거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존엄, 자유·관용·정의가 실현되는 세계”가 찾아오기를 염원한다는 연설을 마치고, 연합군 측과 일본 측이 한 부씩 보관하도록 2부의 항복문서에 각국 대표들이 차례로 서명했다. 일본 측 보관용 문서에 서명할 때 약간의 실수가 있었다. 캐나다 대표 코스그레이브(Lawrence Vincent Moore Cosgrave)가 원래 서명해야 할 칸보다 한 줄 아래 서명한 것이다. 미국의 서덜랜드 장군이 상황을 파악하고는 코스그레이브가 서명한 칸의 ‘프랑스 공화국’에 줄을 그어 지우고 대신 ‘캐나다 자치령’이라 썼다. 이하 각국 대표는 다른 나라 이름을 지우고 자기 나라 이름을 쓴 다음 서명했고, 마지막에 서명한 뉴질랜드 대표는 빈칸에 자기 나라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써야 했다. 코스그레이브는 1차대전에 참전했다가 한쪽 눈을 실명해서 그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미국이 보관하는 문서에는 똑바로 서명을 했다).
전쟁이 끝나자 2차대전 당시 사용한 함정들이 필요 없게 되었다. 일부는 매각하거나 고철로 팔았고, 일부는 퇴역시킨 다음 예비 함정으로 계류했다. 그런데 트루먼 대통령은 미주리호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 퇴역을 막고 계속 사용할 것을 지시했다. 그 때문에 이 배는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대서양에 배치되어 있던 미주리호를 한국에 파견하였다. 1950년 8월 19일, 미국 전함으로는 처음 한반도에 도착한 이 배는 곧장 작전에 투입되었다. 9월 15일, 미주리호는 삼척 지역을 포격하였는데, 이는 반대편 지역에서 수행하던 인천상륙작전을 돕기 위해 적의 군사력을 다른 쪽으로 분산시키기 위한 작전이었다. 이후 한반도 주변 해역에서 적군에 포격을 가하거나 항공모함을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런데 이해 10월, 38만명의 중국 인민해방군이 한반도로 물밀듯이 쳐들어와서 전황이 바뀌었고, 유엔군이 급히 후퇴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 직면했다. 미주리호는 흥남 철수작전에서 결정적 공헌을 했다. 12월 24일 마지막 배가 떠날 때까지 해상에서 거대한 함포로 배후 지역에 계속 포격을 가하여 중공군의 접근을 막았기에 피해를 최소화하며 군인과 피란민이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었다. 그 후 1952년까지 한국전에서 활약하다가 다른 전함과 임무를 교대한 후 본국으로 귀환했고, 1955년 퇴역했다.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 장소라는 이유 때문에 매년 25만 관광객을 맞이하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이 배의 운명은 이렇게 끝이 나는 걸까?
▲1945년 9월 2일 일본 도쿄만에서 역사적인 일본 항복 문서 조인식이 열렸던 미국 전함 미주리호. 이후 6·25전쟁 참전 뒤 1955년 퇴역했다가 현대식 무기와 장비로 개수돼 1986년 재취역했고, 1990년대 초 걸프전에서도 전공을 세운 베테랑 전함이다. 지금은 하와이 진주만에 박물관 선박이 됐다. /Mike/Flickr
놀랍게도 이 배는 30년 후 다시 전쟁에 참전한다. 레이건 행정부는 전함 600척을 증강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아직 건재한 미주리호를 그냥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1984년 이 배에 장착되어 있던 구식 무기들을 해체하고 하푼 미사일, 토마호크 크루즈 미사일, 그리고 레이더와 전자전 장비까지 탑재하는 보수 작업을 마친 후 1986년 5월 10일 재취역했다. 당시 중동 지역 정세가 불안했기에 미주리호는 페르시아만이나 인도양에서 유조선 보호 같은 임무를 소화했다. 그러던 중 1990년 8월 2일 걸프전이 발발하자 본격적으로 다시 전쟁에 돌입했다. 이해 11월 미주리호는 페르시아만으로 향했고, 1991년 ‘사막의 폭풍 작전’에 투입되었다. 먼 해상에 위치한 거대한 선체에서 내륙을 향해 가공할 위력의 포탄을 날려 보내는 공격은 여전히 효과적이었다. 미주리호는 이 기간 토마호크 미사일 28발을 쐈고, 이라크의 해안 방어 시설을 포격했다. 한때 이 배는 장렬하게 침몰할 위기도 겪었다. 이라크군이 발사한 중국산 실크웜 미사일 한 발이 미주리호로 날아왔다. 근처에 있던 영국 구축함이 시다트(Sea Dart) 대공미사일을 발사하여 640m 전방에서 적 미사일을 터뜨린 덕분에 목숨을 구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그리고 걸프전 등 세 번에 걸친 전쟁을 겪은 미주리호는 사람으로 치면 백전노장이라 할 수 있다. 최종적으로 퇴역한 후 지금은 진주만에서 박물관 선박으로 노후를 보내는 중이다. 이 배는 파란만장한 20세기 세계사를 증언하는 놀라운 기념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가미카제>
미주리호가 오키나와 전투에 돌입하고 열흘이 지난 1945년 4월 11일, 일본군의 제로 전투기 15대가 이 배를 향해 돌진해 왔다. 정오경 레이다로 적기 접근을 확인한 후 곧바로 방공포를 발사하여 대부분 격추시켰으나, 한 대가 끝까지 남아 접근해 왔다. 적기는 해상에서 수직 이륙한 후 선박의 중심부에 충돌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비행기 날개가 선체와 충돌했고, 파괴된 비행기의 잔해가 갑판에 쏟아졌다. 비행기에 실은 500파운드 폭탄이 터지지 않아 큰 피해를 보지 않고 갑판 일부만 손상을 입었다. 비행사의 하체는 어디론가 날아갔고 찢긴 상체만 남아 있었다. 선원들이 사체를 바다로 던져버리려 하자 선장 캘러헌(William M. Callaghan)이 만류했다. 적이지만 “용기와 헌신의 자세로 자기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전사”에 대해 예우를 갖추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부 선원은 여전히 반발했으나, 선장의 지시에 따라 의사가 시신을 수습하고 급히 만든 일장기에 감싼 후 선원들의 경례와 예포 가운데 수장(水葬) 의식을 치렀다. 후일 이 비행사는 이시노 세추오(石野節雄)로 밝혀졌다. 당시 그의 나이 19세, 미주리호 선상에 전시한 사진 속 젊은 군인은 한없이 순박한 모습이다.
[49] 미국 배가 구해준 어부, 일본 근대화 스승으로 돌아오다
나라 운명 바꾼 존 만지로 上 - 신문물 배운 첫 일본인
▲일본인 눈에 비친 미국의 흑선 - 1853년 7월 일본 에도만에 페리 제독의 미 해군 함대가 들어와 개국을 강요한 사건을 일본인들은 ‘흑선 내항’이라고 불렀다. 서방에서 온 거대한 검은 군함이 당대 일본인들 눈에는 연기를 뿜는 뿔 달린 괴물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는 만지로(万次郞)가 있었다. 만지로는 우연한 난파 사고 뒤 미국 포경선을 타고 세계를 일주했으며 미국서 영어와 항해 기술을 익히고 서구 사회와 경제 발전을 경험한 인물. 그는 개항 협상 당시 쇼군 정부에 미국에 대한 정보를 상세히 제공했으며, 협상장 옆방에서 대화를 엿들어 바로 내용을 알려주는 비밀 통역 역할도 맡았다. 그림은 2004년 미 콜로라도주에서 열린 한 전시회에서 공개됐던 ‘흑선’을 묘사한 일본 에도 시대 목판화. /게티이미지코리아
사회와 국가의 발전 역량은 사람 능력을 얼마나 잘 살리느냐에 달려 있다. 때로 한 사람의 지식과 경험이 역사 발전을 크게 촉진하는 수도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우연한 난파 사고 끝에 미국 포경선을 타고 세계를 일주하고 미국에서 생활하며 서구식 사회와 경제 발전을 경험하고는 천신만고 끝에 귀국하여 일본 개화에 큰 공헌을 한 만지로(万次郎)가 그와 같은 사례라 할 수 있다.
만지로는 시코쿠의 나카노하마라는 작은 마을의 빈한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1841년, 열네 살 만지로는 일거리를 찾아 이웃 도시인 우사(宇佐)로 가서 작은 어선에 타게 되었다. 5명이 승선한 배는 물고기 떼를 쫓아 먼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을 만났다. 난파한 배는 일주일 동안 하염없이 태평양 쪽으로 표류하다가 도리시마라는 무인도에 표착했다. 동료 한 명은 다리까지 부러진 상태였다. 이들은 다섯 달 동안 동굴에서 근근이 연명하다가 근처를 지나던 미국의 포경선 존 하울랜드(John Howland)호에 구조되었다. 윌리엄 위트필드 선장이 지휘하는 이 배는 미국 매사추세츠의 뉴베드퍼드항에서 선원 28명을 태우고 조업 기간 3년 예정으로 출항하여 고래를 쫓아 태평양 각지를 돌아다니던 중이었다. 본격 석유 시대가 도래하기 이전인 18~19세기에 고래 기름은 조명 원료나 윤활유로 사용하는 핵심 자원이었고, 포경업은 신생 미국을 상징하는 국민 산업으로 발전했다. 특히 뉴잉글랜드의 포경선들은 전 세계를 항해했다. 그러던 중에 만지로 일행을 구조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 시기에 일본이 철저한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외국 선박뿐 아니라 심지어 어떤 이유에서든 외국에 나갔던 자국인마저 입국을 막았고, 이를 어기면 자칫 사형당할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터라 구조한 어부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낼 방법이 없었다. 별수 없이 만지로와 동료들은 미국 포경선을 타고 세계 일주를 하게 되었다. 미국 선원들은 만지로를 ‘존 멍(John Mung)’이라 불렀는데, 어감으로 보건대 분명 놀리는 의미일 것이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는 못했으나 만지로는 ‘멍~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선원들이 일하는 것을 면밀히 관찰했고 기본적인 영어도 터득해 갔다. 다섯 달 후 존 하울랜드호는 중간 보급 기지인 하와이에 들렀다.
▲그때 구조되지 않았다면… - 우연한 기회에 미국 문명을 배워 개항기 일본 통역, 교육자로 활동한 만지로(1827~1898). /위키피디아
위트필드 선장은 일본 어부들이 호놀룰루에서 새로운 삶을 살도록 주선해 주었다. 그렇지만 만지로는 계속 배에 남아 일하고 싶어 했다. 다시 한 철 포경 항해를 마친 후 만지로는 위트필드와 함께 1843년 5월 뉴베드퍼드에 입항했다. 위트필드는 곧 결혼하여 이웃 도시 페어헤이븐(Fairhaven)에서 만지로를 데리고 살았다. 만지로는 최초의 미국 거주 일본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위트필드는 만지로에게 선생을 붙여서 영어 실력을 키워준 다음 수학, 항해, 측량 등을 가르치는 발리트 학교(Bartlett School)에 입학시켰다. 이곳에서 만지로는 서구의 항해 기술을 온전히 습득할 수 있었다. 게다가 방학 기간에는 통 제조술을 습득했는데, 이것은 고래 기름을 담는 통이 많이 필요한 포경선에서 일자리를 얻는 데 유리한 기술이었다.
1846년, 19세의 만지로는 포경선 프랭클린호에 승선할 수 있었다. 이 배는 대서양으로 나가서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양을 지나 태평양으로 향했다. 이 배가 일본 근해에 도착하여 만지로는 최초로 세계 주항을 한 일본인이라는 기록도 남기게 되었다. 하와이에 들러 옛 동료들을 만났을 때 이 중 두 명을 배에 태웠다. 프랭클린호는 1849년에 귀항했고, 만지로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거액인 350달러를 손에 넣었다. 그는 언젠가 일본으로 돌아가려면 돈을 더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침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던 소위 ‘골드러시’ 시대였다. 그는 배를 타고 캘리포니아로 가서 사업을 벌여 몇 달 만에 600달러를 벌었다. 이제 귀향 계획을 실천에 옮길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하와이로 가서 중고 보트를 한 척 산 후 태평양 횡단 항해를 하는 화물선에 싣고, 일본 근해에 이르렀을 때 세 사람을 보트에 태워 내려달라는 계약을 했다.
1851년 2월, 류큐 근해에 내린 세 사람은 몇 시간 노를 저어 오키나와섬에 들어갔다. 난파 사고 후 10년 만의 일이다. 그렇지만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철저한 취조였다. 류큐 왕국 관리가 6개월 동안 그들의 행적을 자세하게 조사한 후 가고시마로 인계하여 6주 동안 조사하고, 그 후 다시 나가사키에서 불러 쇼군 관리가 조사했다. 만지로가 전보라는 신기술에 대해 설명하자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았고, 미국의 민주주의 체제에 대해 우호적으로 말하면서 일본도 빨리 개방 정책을 펴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자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다. 다시 몇 달이 지난 후 드디어 석방 결정이 났고, 만지로는 꿈에 그리던 고향 나카노하마로 가서 어머니와 동생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고향에 온 지 사흘 만에 도사번 다이묘인 야마우치가 만지로를 소환했다. 야마우치는 개혁 지향적 인물이어서 만지로에게 지역 엘리트 자제들에게 외국 경험을 가르치도록 주선했다. 미천한 어부 신분으로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으므로 만지로를 다이묘의 가신, 곧 하급 사무라이 신분으로 승격시켰다. 만지로는 서구의 항해, 포경술 외에 알파벳도 가르쳤다. 후일 그는 일본 최초 영어 교과서를 집필하였는데, 이 교과서는 오랫동안 일본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에게 영어를 배운 제자 중에는 일본 개화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후쿠자와 유키치도 있다.
▲세계를 한바퀴 돈 만지로의 여정 - 1850년대에 만들어진 나카하마 만지로의 여행 지도. 어선 난파로 미국 포경선에 구조된 뒤 하와이와 태평양, 대서양과 아프리카, 인도양 등을 종횡무진한 그의 여행 경로가 표시돼 있다.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 /위키피디아
다음 해인 1853년 페리 제독(Commodore Matthew Perry)이 흑선을 이끌고 에도만에 들어와서 미국 정부를 대표하여 개항을 강요했다. 쇼군 정부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난감했다. 무엇보다 미국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이 상황에서 미국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 만지로였다. 에도로 소환된 만지로는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소상하게 정보를 제공했다. 그렇지만, 관료 중에는 그를 의심하는 사람도 많았다.
자꾸 미국에 우호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진정 일본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건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협상장에서 미국 대표들과 마주 앉는 공식 통역 직위를 주지는 않았다(공식 통역은 네덜란드 상인에게서 영어를 배운 모리야마 에이노스케(森山榮之助)였는데, 미국 측 반응은 거의 완벽하게 영어를 구사한다는 것이었다). 만지로는 협상장 옆방에서 미국인들 대화를 엿듣고 바로바로 그 내용을 알려주는 비밀 통역 역할을 했다. 쇼군은 만지로가 제공한 정보가 매우 유용했고, 그가 성실하게 도와주었다고 판단하여 막부의 가신으로 승격시켜 주었다. 평민에서 귀족 지위로 올라선 만지로는 성을 가지게 되었고, 고향 이름을 따서 나카하마(中濱)로 지었다.
이후 나카하마 만지로는 메이지유신 시기에 일본의 개화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엘리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서구 정치 제도에 대해 논하고, 외교 업무를 돕고, 조선(造船)과 해군 창설 등에 직접 간여했다.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자.
[미국 간 또다른 일본인 오토키치]
14개월 표류끝 美서부 도착
인디언 노예 됐다가 영국행… 귀국시도했지만 일본이 거부
만지로와 유사한 인생 행로를 보인 인물이 또 있다. 1832년 오토키치(音吉 또는 乙吉·1818~1867)는 14세에 쌀 운반선 호준마루(寶順丸) 선원으로 일하다가 풍랑을 만나 태평양 멀리 떠밀려가게 되었다. 무려 14개월 동안 표류한 끝에 1834년 미국 서부 해안에 도착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이와키치(29), 규키치(16), 오토키치(15) 등 3명의 ‘키치 브러더스’였다.
이들은 이 지역 마카(Makah) 인디언들에게 붙잡혀 노예로 살다가 영국계 회사 직원에게 인계되었다. 이들을 이용해 일본의 문호를 개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런던으로 보냈으나, 영국 정부는 그 아이디어를 수용하지 않고, 이들을 마카오로 보내 일본에 귀향시키려 했다. 그렇지만 일본 측은 이들의 입국을 완강히 거부했다. 오토키치는 마카오와 상하이, 싱가포르 등지를 전전하며 두 번 결혼했고, 번역가와 선원 일을 하다가 영국 국적을 얻었다.
‘오토상’은 ‘오토슨(John Matthew Ottoson)’이 되었다. 그는 일본어를 잘하는 중국인 행세를 하며 일본에 들어가기도 했고, 1854년 영국-일본 우호 조약을 체결할 당시에는 영국 측 통역을 담당했다. 후일 귀국 허가를 받았으나 아내와 헤어질 수 없어서 싱가포르에서 여생을 보냈다. 2005년 싱가포르의 일본인 묘지에서 그의 유해 절반을 수습하여 고향 미하마(美濱)에 묻었다.
[50.하] 나라 운명 바꾼 존 만지로… 日해군·조선업의 산파
서구 항해·造船기술 전수받아… 日 근대 해군의 기반 다졌다
▲워싱턴 도착한 日사절단 - 1858년 맺어진 미·일통상조약 비준을 위해 미국으로 파견된 첫 일본 사절단이 1860년 5월 15일 워싱턴 DC의 해군 조선소에서 미군 장교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이들은 네덜란드에 주문 생산한 목제 기선 ‘간린마루’와 미국이 제공한 배 포해튼호를 타고 미국 선원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우여곡절 끝에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도착했고, 임무를 완수한 뒤 무사히 귀국했다. 간린마루의 태평양 왕복 항해는 일본에 ‘우리도 서구 열강들처럼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고, 이후 일본의 조선업과 해군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미 해군 역사유산 사령부 소장. /게티이미지코리아
만지로는 일본 개화의 숨은 주역 중 한 명이다. 미천한 어부 출신으로 우연한 기회에 미국 포경선을 타고 세계일주 여행을 했고 미국에서 거주하며 항해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쌓은 후 귀국한 만지로는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일본의 근대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당시 일본이 무엇보다 긴급하게 필요로 한 것은 대선(大船)을 갖춘 강력한 해군이었다. 1854년 5월, 막부가 주도하여 마스트 3본 형태에 용골(龍骨)을 갖춘 최초의 서양식 범선 호오마루(鳳凰丸)호를 건조했고, 이어서 증기선 건조도 기획했다. 이 과정에서 만지로가 조선(造船) 디자인에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 미국의 항해 학교에서 공부할 때 너새니얼 보디치(Nathaniel Bowditch)의 ‘미국 항해술 개설(The New American Practical Navigator)’이라는 교과서로 열심히 공부해서 많은 지식을 얻었기에 귀국 후 이 책을 공들여 번역했고, 이 책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네덜란드에서 증기선 도입
그러는 동안 막부에서는 네덜란드에서 증기선을 도입하고 해군 운용에 관한 지식을 전수받자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1855년 네덜란드 국왕 빌럼 3세가 호의로 증기선 숨빙호(Soembing, 자바의 화산 이름에서 유래했는데, 후일 간코마루(觀光丸)로 개칭했다)를 선사하는 동시에 해군 교관단을 파견하여 해군 관련 지식을 교습해주었다. 1857년에는 일본이 주문한 증기선 군함 야판(Japan)호와 제2차 교관단이 함께 들어왔다. 이 배는 3본 마스트에다가 외륜이 달린 목제 기선이었다. 기관(機關, 모터)은 항구를 드나들 때에만 사용하고, 항해할 때에는 돛을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곧 이름을 ‘역경(易經)’에서 따온 ‘간린마루(咸臨丸)’로 바꾸었다. 막부는 1년 반의 1차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교관이 되어 다음 기수 학생들을 가르치는 식으로 군함교수소(軍艦敎授所)를 운용했다. 이렇게 하여 일본 근대 해군이 첫걸음을 뗐다.
▲日 최초의 증기 함선 - 일본 나가사키에서 관광객 유람선으로 쓰이는 일본 최초 증기 함선 ‘간코마루’의 복제 선박. /데이비드 스탠리/플리커
미국 총영사 타운센드 해리스의 압박으로 1858년 미⋅일통상조약을 맺자, 2년 후인 1860년 이 조약의 비준을 위해 미국에 사절단을 파견하게 되었다. 만지로는 통역으로 사절단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태평양을 건너는 항해에도 직접 도움을 주었다. 쇼군은 워싱턴에 대사를 파견하는 이 기회를 이용해 지난 수년간의 노력을 통해 근대 선박을 운용할 실력을 갖추었음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 선원들 또한 그동안 갈고닦은 원양 항해술을 직접 실험해 보기를 원했다. 그래서 사절단을 간린마루호에 태워 태평양을 건너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런데 미국 측이 보기에 이것은 너무 위험한 실험이었다. 그래서 간린마루호는 시험 항해를 하고, 사절 일행은 미국이 제공하는 선박 포해튼(Powhatan)호로 가기로 결정했다. 사실 경험이 부족한 선원들이 처음 태평양을 건너는 항해를 한다고 하니 죽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많은 사람이 탑승을 정중히 거절했다. 이렇게 빈자리가 남는 것을 이용해 후쿠자와 유키치 같은 호기심 많은 인물들이 선원 자격으로 동행할 수 있었다.
미국 측도 걱정이 되어 항해 엔지니어 존 브루크(John Brooke)와 10여 명의 미국 선원을 간린마루에 태웠다. 외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항해한다는 사실에 자존심 상한 선장 가쓰 가이슈(勝海舟)와 사무라이들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그렇지만 막상 먼바다로 항해해 나가자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브루크는 일본 선장과 선원들의 항해 실력이 형편없다는 기록을 남겼다. “배가 구로시오해류를 타자 롤링이 심해졌다. 모든 일본 선원이 병이 났다. 안개가 끼어 시계가 안 좋았다. 일본인들은 돛을 잘 조정하지 못했고 사관들은 무능력했다. 아마도 이들은 악천후에 대한 경험이 없는 것 같았다. 선원들은 완전히 우리에게 의존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나마 항해 경험이 풍부한 만지로가 배의 운항에 큰 도움을 주었다. 브루크는 만지로의 활약에 대해 찬탄했다.
美병원·천문대 둘러보며 문화충격
간린마루호와 포해튼호는 1860년 2~3월 중에 어렵사리 태평양을 건너서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공식 사절인 77명의 사무라이들은 기차를 타고 파나마지협을 지난 다음 다시 배를 이용해 워싱턴으로 향했다.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을 만날 때 이들은 에보시(烏帽子)라는 검은 모자에 비단 기모노를 입고 두 자루의 칼을 차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 측 인사들이 소박한 프록코트를 입고 있고, 부인들도 동행한 데다가 식사 후에 남녀가 함께 춤추는 광경을 보고는 놀라움에 입을 벌리고 서있었다. 의회를 방문해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는 모습을 보자, 자기네 같으면 진작 칼을 뽑았을 거라고 수군댔다. 이후에도 미국 여러 도시를 돌며 병원⋅천문대 등을 둘러보고는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일본의 선각자들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직접 보고 눈을 떠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간린마루호는 귀국길에 올라 성공적으로 일본에 돌아왔다. 간린마루의 태평양 왕복 항해는 당시 엄청난 위업으로 칭송받았다. 일본도 서구인들처럼 최신 항해 기술을 구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실제로 이 시기 이후 일본의 조선업과 해군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중 특기할 인물이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弥太郎)다. 만지로에게 항해와 조선에 대해 배운 제자 중 한 명인 이와사키는 1875년 미쓰비시 증기선 회사를 설립하고 상하이 노선을 열었다. 정부와 유착 관계에 있던 미쓰비시 회사는 정부로부터 나가사키 조선소를 인수받아 조선회사로 발전시켰다. 조만간 일본은 주요 증기선 조선 국가로 발돋움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세워진 日 사절단 기념비 - 1860년 3월 17일 최초의 일본 사절단을 태운 일본 함선 간린마루가 도착한 것을 기념해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 세워진 기념비. 샌프란시스코의 자매 도시인 오사카가 1960년 기증한 것이다. /Eugene/Flickr
메이지유신 이후 새 체제에서도 만지로는 여러 학교의 교수 요원으로, 혹은 해상 사업의 운영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중 하나가 유럽 시찰이다. 근대화된 군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메이지 정부는 1870~1871년 유럽에서 보불전쟁이 일어나자 전쟁 상황을 직접 관찰한다는 목표로 시찰단을 파견하는데, 만지로 또한 여기에 동참하게 되었다. 유럽으로 가려면 먼저 태평양을 건너 미국 서부로 간 다음 뉴욕으로 이동하여 유럽행 배를 타야 했다. 일행이 뉴욕에서 5일 동안 머물 때 만지로는 이틀간 외출을 허락받아 페어헤이븐을 방문했다. 1870년 가을 어느 날, 위트필드는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나가보았다가 만지로가 서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무인도에서 죽을 위험에 처해 있던 자신을 구출하여 포경선에서 함께 일하며 세계의 바다를 돌고, 그 후 미국 생활과 교육을 주선했던 은인을 20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해 만지로는 공직을 떠나게 되었다. 공무로 출장을 나가서 사사로운 일로 대열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시기에 이르면 그의 건강 상태도 안 좋았을 뿐 아니라, 메이지 정부로서도 그동안 많은 경험이 쌓여서 만지로의 지식과 정보에 전적으로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은퇴한 만지로는 1898년 71세 나이로 사망했다. 그에 대한 기억은 사람들 뇌리에서 점차 사라져 갔다.
직접 쓴 영어교재, 학생들 필독서 돼
그렇지만 만지로의 영향은 그 후로도 알게 모르게 지속되었다. 예컨대 그가 저술한 영어 교과서는 오랫동안 학생들의 필독서였다. 게이오 대학 창설자인 후쿠자와 유키치도 만지로에게 영어를 배웠다.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만지로의 지식은 메이지 체제의 중요 인물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서 1889년 헌법에 반영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만지로는 서구인은 야만인이라는 편견을 깨고, 일본의 문호를 개방하는 데에 일조했다. 아마도 만지로는 일본이 국력을 키우는 동시에 미국식 민주주의 체제를 배워서 평화로운 국제 협력 관계를 이루기를 꿈꾸었을 터이지만, 실제 역사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강대국으로 부상한 두 나라는 20세기 전반 세계대전에서 충돌하게 된다.
[만지로의 제자 후쿠자와 유키치]
게이오대학 창설자 “서구 사회 보고싶다” 訪美 사절단 동행
간린마루를 타고 미국에 간 사람 중에는 젊은 시절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도 있었다. 그는 서구를 직접 보고 싶다는 일념에 선원 자격으로 이 배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그가 직접 경험한 미국의 과학 기술은 그리 큰 흥분을 안겨주지 못했다. 철도 같은 것은 이미 책을 통해 알고 있던 그대로였다.
그가 주목한 것은 미국의 사회·정치 제도다. 그는 미국인들에게 초대 대통령 가문의 후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보았다. 일본은 도쿠가와 가문의 자손들이 2세기 반 동안 통치하지 않는가. 그런데 미국인들은 워싱턴 대통령의 후손에 대해서는 아예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혹시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있을까 해서 그는 웹스터 사전을 사가지고 왔다. 미국에서는 신분이 큰 의미가 없고 오직 능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에 가쓰 가이슈 선장도 감동을 받았다.
여성에 대한 미국인의 태도도 매우 인상적이어서 선장은 미국에서 들었던 ‘레이디 퍼스트(lady first, レディーファースト)’라는 말을 일본에 퍼뜨렸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진관을 찾았다가 그 집 딸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귀국한 후 사람들에게 젊은 서구 여자와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했다. 그때까지 일본인들은 서구 여성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