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 2021-09/ 동아빌보 2021
09-01(수) 성범죄자 화학적 거세
“그게 사람입니까? 악마보다 더한 악마예요.” 생후 20개월 된 손녀를 잃은 할머니는 말을 잇지 못했다. 손녀를 성폭행하고 잔인하게 살해한 혐의를 받는 사람은 딸과 함께 지내던 20대 남성 양모 씨였다. 범행을 저지른 뒤에도 양 씨는 손녀의 행방을 묻는 할머니에게 성관계를 요구하는 메시지를 보내는 패륜을 저질렀다고 한다. 정상적인 사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곤 믿기지 않는다. 이에 법조계에선 양 씨에 대해 ‘화학적 거세’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화학적 거세의 정식 명칭은 ‘성 충동 약물치료’다.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의 분비를 감소시키는 약물을 투여해 성욕을 저하시키는 방식이다. 우리나라에서 화학적 거세 대상자를 정하는 요건은 까다롭다. 성범죄자 중에서도 성도착증 환자로서 재범의 위험성이 높은 사람으로 한정된다. 전문가의 감정을 바탕으로 검찰이 약물치료 명령을 청구하고 법원이 결정하는 과정을 거친다.
▷체코나 미국 텍사스주 등에서는 성범죄자의 성기능을 영원히 잃도록 하는 물리적 거세가 허용된다. 반면 화학적 거세는 주기적으로 약물을 투여해야 하고, 투약을 중단하면 효과도 사라진다. 한국에선 법원이 최장 15년 동안 화학적 거세를 명령할 수 있다. 일각에선 남성호르몬 억제만으론 성범죄를 완전히 막을 수 없다는 의견도 있지만 지금까지는 재범을 막는 데 효과를 거두고 있다. 2011년 한국에 이 제도가 도입된 이후 지금까지 49명에게 시행됐는데, 이들 가운데 다시 성범죄를 저지른 사례는 없다.
▷성범죄라고 하더라도 형기를 마치고 나온 사람에게 추가 제재를 하는 것은 이중처벌이고 인권침해라는 시각이 있다. 뼈엉성증(골다공증), 우울증 등 약물 주입에 따른 부작용 발생 가능성도 문제로 지적된다. 이에 신체의 자유, 자기결정권, 인격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법원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2015년 화학적 거세 자체에 대해선 “수단의 적절성이 인정되며 과잉금지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재범 가능성이 있는 범죄자라고 해서 무조건 무기징역 이상의 중형을 선고해 평생 감옥에 가둬둘 수는 없고, 이들의 인권도 존중돼야 한다. 그렇지만 재범의 위험을 방치할 수도 없기 때문에 사회적 논의를 거쳐 전자발찌를 채우거나 화학적 거세를 하는 등의 안전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2019년 미 앨라배마주에서 아동 대상 성범죄자에 대한 화학적 거세법을 발의해 통과시킨 스티브 허스트 의원은 인권침해라는 비판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조차 없는 어린아이가 성범죄 피해를 당하는 것보다 화학적 거세가 더 비인간적인 일인가.”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9-02 무산된 남양유업 매각
남양유업은 국내 유통업계에서 ‘트러블 메이커’로 통한다. 대리점주에 대한 갑질과 과대광고, 상대 회사 비방 댓글 논란까지 10년 넘게 흑역사를 썼다. 유기농과 엄마 마음을 강조하는 이 회사 분유로 아이들을 키운 소비자들의 배신감은 컸다. 일이 터질 때마다 “남양이 남양하네”라고 고개를 내저을 정도다.
▷남양유업은 올해 4월 “불가리스가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죽인다”고 발표했다. 국내 백신 기근으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던 소비자들은 실낱같은 희망으로 불가리스를 사 마셨다. 질병관리청이 즉각 “사람 대상 연구가 아니다”라고 부인하면서 사회적 혼란이 빚어졌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식품표시광고법 위반으로 고발하면서 경찰 수사로 이어졌다. 이 회사 홍원식 회장은 5월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며 대국민 사과를 했다. 사모펀드 한앤코에 오너 일가 지분을 3107억 원에 매각한다는 계약도 맺었다.
▷그랬던 홍 회장이 어제 회사를 팔지 않는다고 했다. 석 달여 만에 매각 계약을 뒤집은 것이다. 홍 회장 측은 “당초 지난달 31일 계약 종료 시점까지 양측이 맺었던 사전 약속을 한앤코가 지키지 않아 내린 결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한앤코 측 얘기는 다르다. 한앤코 측은 “홍 회장이 거래 종결을 계속 미루면서 무리한 요구들을 하다가 일방적으로 주식매매계약 해지를 통보했다”고 한다. 업계에서는 홍 회장이 위기를 모면하려고 회사를 내놓겠다고 했지만 생각할수록 싸게 판 게 억울해 계약을 파기한 것 같다고 본다.
▷홍 회장은 5월 대국민 사과 때 말했다. “국민의 사랑을 받아왔지만 제가 회사의 성장만을 바라보면서 달려오다 보니 구시대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소비자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남양유업 회장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하면서는 검지로 눈물을 훔쳤고 ‘자식에게도 경영권을 주지 않겠다’면서는 울먹였다. 혁신을 거듭하는 경쟁 회사와 달리 남양유업은 ‘황제 경영’으로 난파선 신세가 됐다는 평가도 받는다.
▷업계에 따르면 최근 홍 회장 측의 요구사항에는 매각가격 인상과 두 아들의 지위 보장 등이 포함됐을 가능성이 크다. 대국민 사과 이후에도 홍 회장은 상근 회장으로 사옥에 출근하며 올해 상반기에만 8억 원이 넘는 보수를 챙겼다. 매각 발표 바로 전날엔 두 아들을 임원으로 복직과 승진시켰다. 남양유업 관계자는 “회장님이 회사를 매각하겠다는 의지에는 변함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주식시장에서는 홍 회장의 매각 의지에 신뢰를 보내지 않고 있다. 소비자들 사이에서도 “남양유업 제품을 사먹지 않겠다”는 싸늘한 반응이 나온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09-03 파이브아이스
영미권 5개국 기밀정보 동맹체인 ‘파이브아이스(Five Eyes)’에 한국과 일본, 인도, 독일을 포함시키는 방안이 미 하원에서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참여 희망 및 가능성이 간간이 보도된 적은 있지만, 한국이 구체적으로 거명된 건 처음이다. 파이브아이스에 참여하면 영미권 5개국과 고급 정보를 공유할 길이 열리고, ‘정보동맹’을 더 폭넓게 강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다만, 중국의 반발이 뻔해 사드 배치 이상의 고난도 외교 이슈로 부상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파이브아이스는 원래 ‘투아이스’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정보 교환 경험을 쌓은 미국과 영국이 1946년 공식 ‘정보공유협약’으로 발전시킨 것.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가 가세하면서 5개의 눈이란 틀을 갖췄다. 이름은 미국 기밀문서 등급 분류의 ‘AUS/CAN/NZ/UK/US EYES ONLY’에서 나왔다. 애초 소련 등 동구권과의 냉전에 대응하기 위해 출범했지만, 냉전 붕괴 후 산업기밀 획득이나 테러 예방 등으로 목적이 옮겨갔다. 5개국 이외의 주요국 정치인이나 민간 영역도 감시 대상에 오른 사실이 2013년 내부 고발자 에드워드 스노든에 의해 폭로되기도 했다.
▷파이브아이스는 세계 최대 통신감청 시스템인 ‘에셜론(ECHELON)’을 개발, 운용하고 있다. 위성 활용은 물론이고 해저광케이블에 특수 감청기기를 부착하기도 한다는데, 기술 수준은 베일에 가려 있다. 특정 지점의 해저광케이블에 특수 감청기기를 설치하려면 해당 국가의 협력이 필요하다. 미국이 중국 인접 국가인 한국을 참여시키려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수도 있다.
▷“파이브아이스는 조 바이든 정부가 보다 더 적극적으로 중국에 맞서 동맹국들을 규합할 수 있는 잠재적 플랫폼이다.” 올 초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의 분석이다. 미 하원의 논의는 아직 초기 단계이고 상하원 각각의 군사위 및 본회의 심사와 표결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바이든 정부의 전략을 일찌감치 내다본 것이다. 중국 환추시보가 파이브아이스를 “미국을 중심으로 결성된 인종주의적 색채가 강한 조폭 행동 공동체”라며 맹비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이 문재인 정부, 또는 다음 정부에 파이브아이스 참여 협의를 공식 요청해올 가능성이 농후하다. 특히 내년 2월 중국 베이징 겨울올림픽을 ‘하노이 노딜’ 이후 멈춰 선 북핵 문제 진전의 사실상 마지막 기회로 보고 있는 문재인 정부로선 그리 반길 만한 이슈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북한 정보 등을 공유하는 유용한 플랫폼이 될 수 있다. 정보강국으로의 위상 강화에도 도움이 된다. 국익 관점에서 파이브아이스 참여의 득실을 미리 고민할 때가 됐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09-04 태아 심장박동법
생명은 언제 시작되는가. 낙태 허용 시기를 결정할 때 제기되는 질문이다. 낙태 반대론자들은 ‘생명은 잉태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모든 낙태는 살인이라는 것이다. 대부분 선진국에선 태아가 모체 밖에서 생존 가능한 임신 22∼24주를 기준으로 조건부 낙태를 허용한다. 그런데 미국의 생명운동가들이 2013년 태아의 심장이 뛰는 순간부터 낙태를 금지하는 ‘태아 심장박동법’을 제안했다.
▷1일 미 텍사스주에서 발효된 심장박동법은 임신 6주 이후 낙태를 처벌한다. 의학적 긴급 상황만 제외하면 성폭력이나 근친상간으로 인한 임신일 때도 낙태할 수 없다. 성폭력이나 근친상간은 사후 피임을 할 수 있고, “강간범 잘못인데 왜 태아를 처벌하느냐”는 논리에서다. 아칸소 조지아 앨라배마 등 보수 성향의 10여 개 주의회가 비슷한 법을 만들었는데 주 또는 연방 법원에 의해 효력이 중지되거나 폐지됐다. 연방대법원은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로 임신 22∼24주 이전의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낙태 찬성론자들은 임신을 알아채기 어려운 6주 이후 낙태 처벌은 사실상 전면 낙태 금지라며 반발한다. 초음파로 감지되는 태아의 심장 박동은 전기적 충격일 뿐 심장이 충분히 발달된 상태로 볼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법적으로는 위헌이다. 그런데 지난해 9월 루스 긴즈버그 연방대법관 사망 후 후임으로 에이미 배럿 대법관이 임명되면서 대법원이 보수 우위로 재편된 것이 새로운 변수다. 배럿 대법관은 아이티에서 입양한 2명과 다운증후군 막내를 포함해 자녀 7명을 둔 가톨릭 신자다. 연방대법원은 텍사스주의 심장박동법 시행을 중단해달라는 긴급 신청을 기각했다.
▷국내에선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대체 입법 시한을 지난해 12월 31일로 정했지만 지금껏 보완 입법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부는 임신 14주까지는 무조건, 15∼24주는 제한적으로 낙태를 허용하는 개정안을 냈지만 국회에서 제동이 걸린 상태다. 여성계는 낙태죄 전면 폐지를 주장한다. 대한신생아학회는 요즘은 22주 된 태아도 살릴 수 있다며 22주 미만으로 하자고 한다. 임신 11주 이후 낙태를 금지하는 한국형 심장박동법도 발의됐다.
▷의료 현장의 혼란은 가중되고 있다. 낙태 가능 주수와 비용이 병원마다 제각각이다. A병원은 22주까지만 된다고 하고, 7주 낙태에 B병원은 48만 원, C병원은 75만 원을 부른다. 경구용 낙태약 허가가 늦어지면서 온라인에선 불법 판매가 횡행한다. 입법 공백을 9개월째 방치하는 무책임한 국회 탓에 위험에 내몰리는 여성들만 늘어나고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9-06(월) 보치아 9회 연속 금
패럴림픽(장애인올림픽)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종목이 있다. ‘골볼’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경기다. 방울이 든 공을 청각과 촉각만을 사용해 상대편 골대에 굴려 넣는다. ‘보치아’는 뇌성마비 장애인을 위한 경기로 고안됐다. 보치아 경기 중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든 BC3등급 장애인의 경기는 얼굴 앞에 홈통(램프)을 설치해 입에 문 막대기(포인터)나 머리를 이용해 민 공이 그 낙하하는 힘으로 표적구에 가까이 가는 걸 겨룬다.
▷보치아에서 한 팀은 적색구, 다른 팀은 청색구 6개씩을 사용하며 그 밖에 흰색 표적구(標的球)가 하나 있다. 공은 가죽 재질로 테니스공보다 약간 크다. 한 팀의 선수가 표적구를 던지는 것으로 경기가 시작된다. 이어 그 표적구를 던진 선수와 상대팀의 선수가 하나씩 공을 던져 표적구에 접근시킨다. 그 다음에는 표적구에서 멀리 떨어진 공의 팀이 새로 공을 던져 표적구에 더 가까이 접근시키거나 상대편 공을 밀어낸다. 최종적으로 표적구에 가장 가까이 공을 놓은 팀이 그 경기의 점수를 얻는다.
▷우리나라는 도쿄 패럴림픽 폐막 하루 전인 4일 보치아에서 또다시 금메달을 따 9회 연속 금메달 획득의 기록을 달성했다. 금메달의 주인공은 BC3등급에서 2인씩 겨루는 페어전에 출전한 정호원(35) 최예진(30) 김한수(29) 선수다. 결승전 연장 경기에서 최 선수가 머리로 밀어 홈통에서 떨어뜨린 다섯 번째 공이 우리 편 공을 밀어 표적구에 붙였고 일본이 네 차례 이 공을 쳐내려고 했지만 실패하면서 짜릿한 승리를 거뒀다.
▷BC3등급은 사지(四肢)의 기능성이 가장 떨어지는 뇌성마비 장애 등급이다. 손발로 직접 공을 던지는 BC1, BC2등급과 달리 홈통 같은 보조장치를 필요로 하는 것 외에 BC1등급에서처럼 보조자까지 필요로 한다. 보조자는 선수의 요구에 따라 홈통의 높이나 방향을 조절하는 등의 역할을 맡는다. 장애인 선수와 비장애인 보조자가 함께하지 않으면 경기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메달도 선수와 보조자가 함께 받는다.
▷우리나라가 패럴림픽 보치아 종목에서 9회 연속 금메달을 딴 것은 올림픽에서 양궁이 이룬 9회 연속 금메달 획득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 않은 성취다. 홈통의 높이와 방향을 조절하는 것이 중요한 보치아는 양궁처럼 정밀성을 필요로 한다. 그에 더해 장애인 선수와 비장애인 보조자의 호흡이 잘 맞아야 한다. 한국에는 최 선수와 김 선수처럼 어머니가 보조자를 맡는 선수가 많다. 한국 어머니들의 지극한 모성과 한국인 특유의 정밀성이 어우러져 이룬 감동적인 성취라고 할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9-07 스가의 1년 천하
‘스가루(추る).’ ‘기대다, 의지하다’는 뜻의 이 일본어는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를 지칭하는 현지 유행어다. 자신의 소신을 명확하게 밝히고 이를 관철시키기보다는 전문가 등 주변 의견에 기대거나 결정을 미루는 스가 총리의 소극적인 스타일을 빗댄 말이다.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로 뒤를 이었던 스가 총리가 코로나19 실정 등의 책임을 지고 ‘1년짜리 단임 총리’에 그치며 물러난다.
▷스가 총리는 3일 자민당의 차기 총재 선거에 나서지 않겠다며 총리 연임 도전 포기 의사를 밝혔다. 정치적인 입지가 좁아지자 떠밀리듯 물러나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난달 스가 총리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후보가 요코하마 시장 선거에서 10%포인트 이상 차이로 패배한 충격이 컸다. 스가 총리가 중의원 8년 등을 보낸 정치적 텃밭마저 그에게 등을 돌린 것. 그의 사퇴 소식이 전해지자 ‘당연하다’(57%)는 여론이 ‘반대한다’(35%)를 훌쩍 앞섰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물(魔物)’에 지고 말았다.” 결국 코로나19가 스가 총리의 발목을 잡았다. 여행을 가면 경비를 지원해주는 ‘고 투 트래블’ 정책으로 엇박자 방역 논란을 빚은 것이 시작이었다. 백신 확보도 늦고 시스템도 미비해 접종률도 지지부진했다. 이런 상황에서 도쿄 올림픽 강행이란 승부수를 띄웠지만 흥행은 참패했고, 코로나는 재확산됐다. 스가 총리는 방역에 집중하겠다며 총재 도전을 포기한다고 했다. 하지만 총재 선거에서 심판받는 상황을 피하려는 꼼수란 비판이 많다.
▷스가 총리는 부모의 후광, 파벌, 학맥이 없는 ‘3무(無)’ 정치인이었다. 그래서 그의 행보가 일본 전통극인 가부키의 ‘구로코(黑子)’ 역할 같다는 말도 있다. 어둠 속에서 검은 옷을 입은 채 극의 진행을 돕는 구로코의 보조 역할처럼 그는 아베 정권 시절 8년 가까이 관방장관을 맡는 등 2인자 역할에 익숙한 인물이었다. 총리가 돼서도 한일 과거사 같은 민감한 문제에서 그만의 철학이나 정책을 보여주지 못했다. ‘아베 노선 계승’만을 되풀이하며 관계 개선에 소극적이었다.
▷스가 총리의 퇴임 효과는 즉각 나타나고 있다. 총리 연임 도전을 포기한 뒤 4, 5일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자민당 지지율은 지난달보다 6.5%포인트 뛰어올라 46%가 됐다. 일본 증시도 반색했다. 스가의 퇴임 의사가 전해진 당일 닛케이평균주가는 2.05% 오른 뒤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는 지난해 아베가 사퇴를 밝혔을 때 2.7% 급락했던 것과 대비되는 반응이다. 스가 총리의 급작스러운 퇴장 선언으로 인한 혼란보다는 새 총리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는 일본이다. 30일 임기를 마치는 스가 총리의 마지막이 이래저래 초라해지는 것 같다.
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09-08 SLBM
미국의 3대 핵전력(nuclear triad)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전략폭격기,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로 구성돼 있다. 땅과 하늘, 바다에서 쏘는 다양한 핵무기 투발 수단을 갖춤으로써 언제 어디서든 가능한 기습공격 능력과 함께 적의 선제공격에도 살아남아 보복하는 제2격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특히 SLBM은 바닷속 잠행의 은밀성 때문에 가장 안전하게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핵전력으로 평가받는다.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ICBM을 개발한 북한이 기를 쓰고 SLBM을 개발하는 것도 그 은밀한 파괴력 때문이다.
▷우리 군이 최근 SLBM 개발의 마지막 단계인 잠수함 시험발사에 성공했다. SLBM 개발은 지상 시험발사에 이어 바지선을 이용한 수중 시험발사, 잠수함 장착 시험발사까지 3단계를 거치는데, 지난달 취역한 3000t급 잠수함에서 실시한 두 차례 시험발사를 성공시켰다. 특히 잠수함 발사관에서 공기압력으로 미사일을 물 밖으로 밀어낸 뒤 엔진을 점화시키는 핵심 기술인 콜드 론치(cold launch)가 성공적으로 작동했다고 한다. 한 차례 더 시험발사를 마치고 양산에 들어가면 한국은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인도 중국 북한에 이은 8번째 SLBM 보유국이 된다.
▷북한은 2015년 ‘북극성-1형’, 2019년 ‘북극성-3형’ SLBM의 수중 시험발사에 성공했고 지난해 10월과 올해 1월 열병식에서 ‘북극성-4ㅅ’과 ‘북극성-5ㅅ’을 공개했다. 북한이 “강력한 선제타격 능력을 더욱 강화하겠다”고 큰소리치는 배경이다. SLBM 개발에서 북한이 한발 앞선 듯하지만 정작 SLBM을 탑재할 3000t급 신형 잠수함은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잠수함을 진수해 시험발사에 성공해야 완전한 전력화가 이뤄진다. 물론 북한 SLBM은 핵탄두 탑재 목적인 만큼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지만, 한국도 그 기술력은 충분히 입증한 셈이다.
▷한국의 미사일 개발은 1970년대 미국의 나이키허큘리스 미사일을 모방 개량하는 ‘백곰’ 사업으로 시작됐다. 백곰의 시험발사 성공에 놀란 미국이 ‘핵·미사일 확산 방지’를 내세워 개발 중단을 요구하면서 생겨난 것이 ‘미사일지침’이다. 그간 미사일 개발의 족쇄였던 이 지침이 5월 종료되면서 한국군은 탄두 3t짜리 전술핵급 탄도미사일도 개발한다. 인공지능(AI) 극초음속 무인자율 같은 미래 ‘게임 체인저’ 개발에도 나선다. 핵무기는 핵으로만 대항할 수 있는 절대무기지만, 자폭할 생각이 아니라면 사용하기 어려운 최종무기다. 핵무장은 아니더라도 북한의 섣부른 도발을 억제할 대항 수단 개발을 게을리할 수는 없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09-09 불로장생 꿈꾸는 거부들
80세 노인의 세포를 떼어내 40대로 되돌리는 것은 지금도 가능하다. 이를 ‘세포의 시간역전’이라고 한다. 인류는 시험관 안에서 세포를 다시 젊게 하는 ‘리프로그래밍’ 기술을 확보해 둔 상태다. 수명 연장 연구는 이 기술을 세포 단위에서 생체 단위로 확대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번 세기 중에 영생불사가 가능해질 수 있다는 성급한 전망도 나온다.
▷아마존 최고경영자에서 올해 7월 물러난 세계 최고 부자 제프 베이조스가 다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수명 연장 연구를 목표로 올해 설립된 알토스랩스에 그가 투자한 사실이 화제를 모으고 있는 것. 알토스랩스는 지난해 10월 러시아 출신의 정보기술(IT) 투자계의 거물인 유리 밀너가 과학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가진 세미나에서 태동했다. 베이조스와 밀너 등은 최소 2억7000만 달러(약 3105억 원)를 알토스랩스에 투자했다. ‘영원한 삶’에 대한 거부들의 공동 연구인 셈이다.
▷이론적으로 세포의 시간을 역전시킬 수 있으면 생체의 시간도 거꾸로 돌릴 수 있다. 세포에 단백질을 주입해 일반세포를 줄기세포로 되돌리는 리프로그래밍 기술은 동물실험에서 장기와 생체 기능을 젊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암 같은 비정상적인 세포가 발현하는 문제가 있다. 이 난관을 뚫기 위해 알토스랩스는 100만 달러 이상의 고액 연봉을 제시하며 유능한 유전학자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인간의 노화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생체 시계’의 개발자인 스티브 호바스 교수와, 리프로그래밍 기술 발견으로 2012년 노벨상을 공동 수상한 야마나카 신야 교수 등이다.
▷한국에서는 미국 하버드대 의대 데이비드 싱클레어 교수가 쓴 ‘노화의 종말’이 지난해 번역 출간되면서 수명 연장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그는 노화를 치료 가능한 질병으로 보는 새로운 관점을 확산시켰다. 그는 자신이 찾아낸 물질을 복용해 신체 나이를 젊게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효능이 완전히 검증되진 않았지만 그 노화 방지 물질을 미국에서 구매해 복용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것은 부자들만의 욕망은 아닌 것이다.
▷영원한 젊음을 간직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부단하게 이어져 왔다. 옛소련에서는 젊은 사람의 피를 나이 든 사람의 혈관을 돌게 한 뒤 되돌려 주는 방식으로 젊음을 찾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리고 젊은 피를 활용한 회춘 연구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원하는 것은 다 이룬 것처럼 보이는 베이조스와 밀너의 올해 나이는 57세와 60세다. 나이 든 부자가 가장 부러워하는 것은 ‘건강한 젊음’이 아닐까 싶다.
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09-10 北 심야 열병식
북한이 9일 0시에 정권 수립 73주년 열병식을 진행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 집권 이후 북한 열병식은 크게 달라졌다. 김일성 김정일 시절에는 대내 결집 성격이 커 대개 녹화방송으로 진행됐다. 이에 비해 김정은은 외신 기자를 부르거나 생중계를 하고 본인도 직접 연설에 나서 대외 메시지를 발신하는 기회로 삼고 있다. 비행 쇼, 시가행진 등 각종 화려한 볼거리도 추가하며 판도 키웠다.
▷그러나 이날 열병식에선 관례처럼 꺼내놓던 신형 무기의 공개가 없었다. 김정은이 참석했지만 연설도 없었다. 북한이 영변 플루토늄 원자로를 재가동했지만 미국이 강한 압박을 하지 않았고, 중국 러시아 주도로 유엔 안보리에서 대북 제재 완화가 논의되는 상황 등을 고려해 대외 메시지를 아낀 것일 수 있다. 이번은 김정은 집권 10년 차에 열린 11번째 열병식. 최근 3차례는 모두 심야에 열렸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각각 13회 열병식을 열었는데 모두 낮이었다. 김정은은 선대보다 열병식 횟수를 늘리면서 새로운 형식에 대한 집착을 보이는 것이다.
▷많게는 수만 명이 참가하는 열병식을 한밤에 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통념을 뛰어넘는 시간대 자체로 많은 관심을 끌 수 있다. 주요 무기의 이동 과정을 감추는 데도 유리하다. 화려한 조명으로 열병식 무대는 강조하되 초라한 주위 풍경은 숨길 수 있는 장점은 덤이다. 뇌과학적으로도 밤에는 세로토닌 분비량이 줄고, 멜라토닌 분비가 촉진돼 사람이 한층 감성적으로 변한다고 한다. 대규모 선동 쇼를 펼치기에도 안성맞춤 시간대란 것이다.
▷일찌감치 히틀러는 이런 효과를 알고 있었다. 나치 독일은 베를린 파리저 광장 등에서 횃불이나 전기 조명 등을 활용한 집회를 열었다. 1933년 뉘른베르크 나치당 대회에서 히틀러 측근인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는 152개 방공 조명을 12m 간격으로 하늘로 쏘아 올려 ‘리히트돔(Lichtdom)’을 연출했다. ‘빛의 대성당’이라는 이 퍼포먼스는 20세기 프로파간다의 상징처럼 남았다. 북한은 지난해 심야 열병식에서 인민대학습당을 비롯한 건물들에 비슷한 조명 연출을 했다.
▷평양은 정치적인 연출에 사활을 거는 곳이다. 김일성의 항일유격대 활동을 신격화, 우상화하며 여태껏 김씨 3대가 군림해온 곳이 ‘극장 국가’라 불리는 북한이다. 김정은이 굳이 야밤에 대규모 열병식을 고집하는 것도 선동 효과를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한 극적인 장치일 것이다. 하지만 화려한 무대일수록 조명이 모두 꺼진 뒤 마주하는 차가운 현실은 더 엄혹하다. 북한 주민들에게는 심야 열병식이 그럴 것이다.
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09-11 메르켈의 페미 선언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67)는 포브스지가 선정하는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순위에서 10년째 1위를 하고 있지만 여성계 반응은 부정적이다.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임에도 별다른 여성 정책을 내놓은 것이 없다. 그가 집권하는 동안 독일의 양성평등 순위는 6위에서 11위로 뒷걸음질쳤다. 공개 석상에선 “(페미니스트) 배지를 달고 싶지 않다”는 말까지 했다. 그런데 최근 반전이 일어났다.
▷그는 8일 나이지리아의 페미니즘 작가 응고지 아디치에와 여성계 인사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페미니즘이란 기본적으로 남녀가 동등한 참여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 뜻에서 난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했다. 더 나아가 “우리 모두 페미니스트가 돼야 한다”고 말해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2017년 주요 20개국(G20) 여성경제정상회의에서 “당신은 페미니스트인가”라고 묻자 부정적으로 답한 때와는 180도 달라진 것이다.
▷왜 묻지도 않았는데 ‘페미 선언’을 한 걸까. 혹자는 여당인 기독민주당 지지자들의 보수적 정서를 감안해 말을 아껴오다 26일 총선 후 퇴임을 앞두고 ‘본색’을 드러낸 것이라고 한다. 선거 판세가 좌파 사민당으로 기울자 진보 표심을 겨냥한 발언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가 일관된 태도를 보여 온 건 아니다. 2005년 총선에선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라는 선거 전략에 맞춰 “내가 당선되면 양성평등의 자극제가 될 것”이라며 여성임을 내세웠다. 집권 후엔 “메르켈은 여자도 남자도 아닌 중성인”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모호함으로 일관했다. “유연하고 실용적” “노회한 정치꾼”이라는 평가가 동시에 나왔다.
▷메르켈 총리는 ‘사이다’ 언행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기보다 조용하고 느리게 움직인다. ‘답답하다’는 뜻의 ‘메르켈스럽다’는 유행어도 있지만 1인자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대통령제와 달리 다양한 정치세력과의 연정이 필수인 의원내각제에선 ‘메르켈스러운’ 리더십이 통한다. ‘유럽의 병자’ 독일을 ‘유럽의 경제 발전소’로 일으켜 세우고 글로벌 금융 위기, 난민 위기, 코로나 위기를 극복한 건 그의 신중하고 유연한 말과 행동이다.
▷‘메르켈 다이아몬드’라 불리는 특유의 손동작이 있다. 엄지와 검지로 마름모 모양을 만들어 배 위에 두는 것인데 그는 “균형을 잡기 좋다”고 설명한다. 메르켈 총리는 16년간 집권하며 미국 대통령 4명, 영국 총리 5명, 이탈리아 총리 8명을 상대했다. 정체성 정치의 덫에 빠지지 않는 균형 감각이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에서 끝나지 않고 독일 최장수 총리, 독일 역사상 제 발로 퇴장하는 첫 총리로 남게 된 비결일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9-13(월) 진화하는 ‘괴짜’ 노벨상
아프리카에서는 헬리콥터에 거꾸로 매달린 채 다른 서식지로 옮겨지는 코뿔소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공중에 거꾸로 한참 매달려도 몸에 문제는 없을까. 이런 문제를 연구한 코넬대 연구진이 괴짜들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이그노벨상(Ig Novel Prize)의 올해 교통부문상을 수상했다.
▷코넬대 연구진이 검은 코뿔소 12마리를 마취시켜 크레인에 매달아 신체 변화를 측정한 결과, 거꾸로 매달릴 때가 엎드린 자세보다 심장이나 폐 기능에 더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사람이 물구나무를 설 때 혈액 순환이 좋아진다는 논리와 유사하다. 연구진은 “아무도 거꾸로 매달린 자세가 동물의 심장과 폐 기능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연구하지 않았다”면서 “‘웃고 나서 생각하게 한다’는 게 상의 메시지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맞는 상인 것 같다”고 했다. 코뿔소로선 난데없이 마취된 채 거꾸로 매달리는 ‘학대(?)’를 당하긴 했지만 유의미한 결과인 것 같기도 하다.
▷생물학상은 고양이의 울음소리에 담긴 메시지를 분석해낸 스웨덴 룬드대의 주자네 쇠츠 교수에게 돌아갔다. 고양이가 사료를 원할 때는 울음소리 끝을 올리고 동물병원에 가는 날에는 스트레스를 받아 울음소리 끝의 음조를 내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 이쯤이면 쉴 새 없이 나무를 쪼아대는 딱따구리가 왜 두통을 앓지 않는지에 대한 연구 등 과거 수상자들의 엉뚱함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일 듯하다.
▷프랑스의 몽펠리에대 연구팀은 정치인의 비만 정도와 부패 사이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연구로 경제학상을 받았다. 구소련에서 독립한 15개 나라 장관들의 사진 약 300장을 수집해 체질량지수를 측정한 뒤 국제투명성기구가 매년 발표하는 부패인식지수와 비교했더니 체질량지수가 높을수록 부패가 더 심한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최근 대선 부정 의혹으로 반정부 시위가 극심해진 벨라루스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의 ‘비만’을 꼬집으려는 주최 측의 의도가 깔린 게 아닐까 싶다.
▷1991년부터 미 하버드대의 유머 과학잡지(AIR)가 선정하는 이그노벨상은 올해로 31번째를 맞았다. ‘진짜’ 노벨상 못지않게 수준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자기장으로 개구리를 공중 부양시킨 실험으로 이그노벨상 물리학상을 먼저 받은 데 이어 스카치테이프를 이용해 그래핀을 발견한 공로로 진짜 물리학상을 받은 인물도 있다. 이그노벨상 수상자에겐 짐바브웨 화폐로 무려 10조 달러를 준다. 그러나 휴지 조각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돈으로 4500원 정도다. 창의의 원천은 엉뚱함과 유머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도 수상자가 4명 나왔지만 올해는 없다. 우스개 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해외 토픽에 나올 만한 기발한 수상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09-14 100원 택시
충남 서천군의 어르신들은 요즘 5일장에 갈 때 집에서 가까운 마을회관 앞에서 희망택시를 탄다. 희망택시는 대중교통 이용이 불편한 지역의 주민을 위한 맞춤형 교통복지 서비스다. 좁고 구불구불해 버스가 오지 않던 길을 택시가 와주는 것도 고마운데 요금도 싸다. 읍 소재지까지는 1500원, 면 소재지까지는 단돈 100원이다. 그래서 ‘100원 택시’로 불린다.
▷미국 뉴욕타임스가 서천군의 100원 택시를 소개했다. ‘신의 선물: 한국 시골에서 9센트(100원) 택시 타기’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외딴 마을에서 차도 없는 어르신들을 돕는 이 정책이 한국 시골의 대중교통 혁명을 일으켰다”고 했다. 희망택시는 마을회관과 버스정류장 간 거리가 700m 이상인 지역을 운행한다. ‘신의 선물’이라는 기사 제목은 이 택시를 이용하는 85세 할머니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서천군이 2013년 6월 희망택시를 도입한 이후 효도택시 행복택시 등의 이름을 가진 ‘공공형 택시’가 현재 전국 79개 군에서 운행 중이다. 이 택시는 ‘늙은 시골을 살리는 방법’으로 주목받는다. 서천군은 1960년대에 16만 명이던 인구가 올해는 5만1000명으로 쪼그라들었고 대부분 65세 이상이다. 교통편이 없어 외출이 힘들던 어르신들이 희망택시로 이동할 수 있게 되면서 장날에는 정형외과와 진료소 등이 붐비게 됐다. 택시운전사들은 어르신들을 정기적으로 태우기 때문에 이들의 건강상태 등을 빨리 알아챌 수 있다.
▷공공형 택시는 공공형 버스와 함께 정부가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농촌형 교통모델’이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각각 50%씩 사업비를 대기 때문에 주민들은 비용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다. 전남 신안군의 ‘1004 버스’는 공공형 버스의 한 예다. 공영버스가 다니지 않는 새벽이나 심야시간대에 이용을 원하는 주민이 전화하면 대기하던 버스가 운행하는 수요 응답형 버스다. 농촌형 교통모델을 이용하는 주민은 2018년 193만5000명에서 지난해 481만5000명으로 크게 늘었다.
▷일본 국토교통성이 2014년 수립한 ‘국토그랜드디자인 2050’의 예측은 일본 열도를 충격에 빠뜨렸다. 2050년에 국토의 60% 이상 지역에서 인구가 절반 이하로 줄고 그중 20%는 무인지대로 전락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은 세계에서 고령화 속도가 가장 빨라 2049년이면 고령화율이 일본을 추월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방 고령화와 인구 감소를 막으려면 사람을 연결하고 불러 모아야 한다. 100원 택시 같은 농촌형 교통모델을 키워야 하는 이유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09-15 부스터샷 논란
지금까지 부스터샷(백신 추가 접종)에 관한 논란은 도덕적 논쟁에 가까웠다. 코로나19 백신 접종 완료율이 높은 선진국들이 델타 변이의 전파력에 놀라 부스터샷을 서두르자 “구명조끼를 여러 벌 챙기는 동안 백신 빈국은 익사하고 있다”며 이들의 백신 독식에 비난이 쏟아진 것이다. 이번엔 부스터샷의 효과를 놓고 과학적 논쟁이 뜨겁다.
▷미국식품의약국(FDA)과 세계보건기구(WHO) 소속 과학자 등 18명은 최근 영국 의학전문지 랜싯 기고문에서 “일반인에게 부스터샷이 필요하다고 볼 만한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접종 완료 후 시간이 지나면 경증 감염을 예방하는 효과는 떨어지지만 중증 질환을 막는 효과는 75세 이상 고령층을 제외하면 지속된다는 것이다. 몸 안의 항체는 줄어도 면역 세포가 바이러스를 오래도록 기억해 중증 진행을 막는다. 연구자들은 혈전, 심근염, 길랭바레 증후군 같은 백신의 희귀 부작용은 2차 접종 후 더 자주 나타나는데 3차 접종을 서두르다간 부작용의 위험도 커질 것이라고 했다. 또 부스터샷이 강한 면역 반응을 야기하므로, 하더라도 접종 양을 줄여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 같은 신중론은 앤서니 파우치 미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장을 포함해 부스터샷을 밀어붙이는 미국 정부 전문가들과 충돌한다. 미국은 접종 완료 8개월이 지난 16세 이상에게 20일 부스터샷을 개시한다고 발표부터 한 뒤 17일 화이자를 대상으로 FDA 승인 절차를 밟는다. 이들에게 나침반 역할을 하는 건 올 7월 가장 먼저 부스터샷에 들어간 이스라엘이다. 접종 완료 후 5개월이 지난 이들을 대상으로 화이자 3차 접종을 하고 있는데 2차 접종만 했을 때보다 중증 예방 효과가 5, 6배 높았다. 하지만 랜싯 기고자들은 이스라엘의 단기 데이터로는 장기 효과를 알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스라엘은 부스터샷의 부작용에 대한 데이터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백신 접종에도 확산세가 가라앉지 않는 나라들은 부스터샷에 기대를 건다. 독일은 이달부터 취약 계층을 대상으로 3차 접종을 진행 중이다. 프랑스는 이달부터, 영국은 올겨울부터 노약자 대상 3차 접종을 계획하고 있다. 칠레 우루과이 태국은 중국 백신 접종자들 사이에서 감염이 확산되자 다른 백신을 이용해 부스터샷을 하는 중이다.
▷부스터샷이 시기상조라고 지적하는 전문가들도 면역 체계가 약한 이들에게는 부스터샷을 권한다. 한국 예방접종전문위원회는 백신 접종 완료 후 6개월이 지난 뒤 고위험군을 대상으로 한 부스터샷을 권고한 바 있다. 부스터샷이 일반인들에게 확실한 이득이 될지는 더 많은 데이터가 쌓여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9-16 억울한 민사고
19년 전 강원도 횡성의 민족사관고를 찾아 학생들이 실제로 어떻게 공부하는지 본 적이 있다. 한 학생이 쓴 영어 에세이의 첫 문장이 취재수첩에 아직 남아 있다. 그 학생이 혼자 운동장 트랙을 돌며 지난 학교생활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밤이 두 팔로 지평선을 감싸면 가로등 빛은 더욱 밝아져 구석구석과 틈까지 비춘다(As the night wraps her arms around the horizon, the street lamps glow ever brighter, revealing every corner and cranny).’
▷사재 1000억 원을 들여 민사고를 세우고 키운 최명재 파스퇴르 회장은 국내 대학교육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 대학에서 공부해 노벨상을 받을 사람은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라고 했다. 민사고에는 국내 진학반과 해외 유학반이 있다. 최 회장은 국내 진학반을 유지하는 이유에 대해 “당장 유학 갈 여건이 안 되는 영재를 모른다 할 수 없어서”라고 했다. 민사고는 학부 과정에서부터 유학할 학생을 길러내는 데 주력했다.
▷민사고는 1999년부터 올해까지 하버드대 13명, 예일대 20명 등 985명을 해외 유명 대학에 진학시켰다. 1970년대 중반 고교 평준화가 시작되면서부터 유학은 주로 국내에서 대학을 마치고 해외에서 석박사 과정을 하는 것이었다. 민사고를 시발로 외고 과학고 등에 해외유학반이 생기고 나서야 학부 과정부터 해외에 나가서 하는 글로벌 인재 육성 코스가 복원됐다. 이런 교육의 첫 수혜자인 30대 후반이 사회 곳곳에서 이미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민사고는 정부의 자립형사립고 폐지 정책에 따라 2025년까지 일반고로 전환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당장 내년 신입생 모집부터 영향을 받는다. 일반고로 전환하면 전국이 아닌 강원도 상대의 인재 선발에 한계가 있고 석박사급의 교사를 유지하기 힘들어 폐교할 수밖에 없다. 민사고는 ‘대안교육 특성화고’로라도 지정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해직교사 출신의 민병희 강원도교육감은 꿈쩍도 않는다.
▷민사고는 파스퇴르유업이 부도가 나 재정 지원을 중단한 후 학비가 비싼 학교가 됐다. 민사고는 정부로부터 한 푼도 지원받지 않는다. 정부가 학교를 지원해 비싼 학비를 못 낼 형편의 학생도 능력이 있으면 들어가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전형을 만들면 불평등 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된다. 그렇게 하지도 않으면서 내버려두면 잘 굴러갈 학교에 어깃장을 놓고 있다. 양식이 있다면 보태주는 건 못해도 최소한 망하게 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9-17 중국판 리먼 위기 오나
“너무 커서 무너질 수가 없다.” 작년 10월 홍콩의 한 경제지는 중국 최대 부동산 재벌 헝다(恒大)그룹 관련 기사에 이런 제목을 달았다. 부채 문제가 심각하다는 말이 나오지만 디폴트(채무불이행)가 현실화할 경우 파장이 너무 커서 정부가 손놓고 볼 수 없을 것이란 분석이었다. 하지만 11개월이 지난 지금 헝다가 ‘중국판 리먼 위기’의 도화선이 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부실 부동산 채권에 투자했다가 2008년 무너지면서 글로벌 금융위기를 촉발했던 미국 투자은행(IB) 리먼브러더스에서 따온 말이다.
▷작년 말 헝다그룹 부채는 1조9700억 위안(약 350조 원)으로 올해 7월 한국 국가채무(914조2000억 원)의 38%나 된다. 중국 280개 도시에 870여 개 아파트 단지를 짓고 전기차, 리조트, 스포츠 사업에 진출하는 자금을 금융권 차입에 주로 의존했기 때문이다. 내년 가을 시진핑 국가주석의 3연임 결정을 앞두고 국민 불만이 큰 부동산 시장 과열을 통제하기 위해 중국 정부와 공산당이 돈줄을 조이자 자금난이 심화돼 파산설이 돌고 있다.
▷쉬자인(許家印·63) 헝다그룹 회장은 재작년 가을 ‘신중국 건국 70주년 행사’ 때 시 주석과 함께 톈안먼 성루에 오른 대표적 ‘홍색 자본가’다. 유명 축구클럽 ‘광저우 헝다 구단’을 2010년 인수한 게 축구를 좋아하는 시 주석 때문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최고 권부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 왔다. 허난성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마오쩌둥 사후 문화혁명이 끝나자 국가보조금을 받으며 대학을 다녔고, 여러 직장을 전전하다 1997년 광저우에 헝다부동산을 열어 부동산 개발 사업을 시작했다.
▷헝다 사태는 전형적인 ‘회색 코뿔소 현상’이란 분석이 나온다. 권력의 지원을 받으며 차입을 통해 문어발식으로 확장하는 사업의 위험성을 누구나 알지만 ‘별일 있겠어’ 하는 식으로 넘어가다가 현실로 닥치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됐다는 뜻이다. 돈을 빌려준 중국과 해외의 금융회사들은 헝다의 자금난이 심화하는데도 ‘설마’ 하다가 지난달 국제 신용평가사들이 신용등급을 투기단계로 떨어뜨리자 비상이 걸렸다.
▷2017년 중국 1위 부호에 올랐고 작년에도 알리바바의 마윈, 텐센트의 마화텅에 이어 3위 부자 자리를 지킨 쉬 회장의 운명 역시 풍전등화다. 쉬 회장은 “(덩샤오핑이 주도한) 개혁개방 정책이 없었다면 헝다는 존재할 수 없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덩의 실용주의 노선이 급속히 힘을 잃고 공산당 통제를 강화하는 시 주석의 ‘중국식 시장경제’로 급속히 전환하면서 문혁 이후 성장한 개혁개방 세대가 중국의 경제무대에서 빠르게 퇴장하고 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9-18 둘째도 다둥이
“A사는 자녀가 셋인 직원에겐 ‘퇴사 경고’를 하고 넷이 되면 사표를 받기로 했다. 얼마 전엔 넷째를 낳은 4대 독자에게 시범 케이스로 사직서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970년대 신문의 사회면에서 종종 볼 수 있었던 뉴스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는 살벌한 산아제한 표어가 지배하던 시대였다. 이후 ‘하나 낳아 젊게 살고 좁은 땅 넓게 살자’던 시절을 거쳐 이젠 ‘다둥이가 행복이다’라며 출산을 장려하는 시대다.
▷현행법상 다자녀 기준은 3명 이상이다. 정부는 다자녀 가구에 주택특별공급과 주택구입 및 전세자금 대출을 포함해 다양한 혜택을 준다. 자동차 취득세 면제, 도시가스 전기료 난방비 할인, 대학 장학금 지원에 학자금 대출, 국립수목원 관람료 면제, 기차표 할인 등이다. 1970년대 정부가 불임 시술을 받은 이에게 분양 우선권을 주는 청약제도를 도입해 서울 반포주공이 ‘고자촌’으로 불리던 시절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내년부터는 자녀가 2명만 돼도 다자녀 지원을 받는다. 출산율이 0.84명으로 1명도 안 되는 데다 전체 유자녀 가구에서 3자녀 가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7.4%로 쪼그라들었기 때문이다.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최근 발표한 다자녀 지원 강화 방안에 따르면 기초·차상위 가구의 둘째도 대학 등록금 전액을 지원받는다. ‘아이 돌봄 서비스’도 만 12세 이하 자녀가 2명 이상이면 지원 대상이 된다. 내년에 도입되는 통합공공임대주택의 다자녀 기준도 2자녀 이상으로 하향 조정되고, 고속열차 2자녀 할인 혜택은 당장 올 하반기부터 SRT로 확대된다.
▷정부 지원과 별개로 대부분 광역자치단체는 카드회사와 손잡고 이미 2자녀 가정에 깨알 같은 혜택을 주고 있다. 롯데월드 에버랜드 반값 자유이용권, 패밀리 레스토랑과 주유소 요금 할인, 전화영어회화 40% 할인, 헤어 커트비 1000원 할인, 종합보험 무료 가입 등 일일이 챙기기 어려울 정도다. 충남 서천군이 둘째를 낳으면 1000만 원을 주는 등 인구 소멸 위기를 겪는 기초자치단체에선 둘째부터 출산 장려금을 올려주는 곳이 많다.
▷대선 주자들도 다자녀 기준을 2명으로 낮추거나 기준 자체를 없앤 저출산 대책을 내놓고 있다. 둘째부터 대학 등록금을 전액 지원하고, 만 5세까지 모든 자녀를 무상 보육하며, 민간 기업의 육아휴직 기간을 3년으로 확대하는 등의 공약들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건 요즘 출산 장려 표어대로 ‘다정한 첫째, 똑똑한 둘째, 장난꾸러기 셋째, 애교쟁이 넷째’들이 많이 태어나 ‘대한민국의 미래를 품어’ 주길 기대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9-23(목 추석 연휴) 주식거래 3경 원
지난해 주식 거래액이 3경(京) 원을 넘었다. 경이라는 단위 자체가 생소하다. 숫자로 표시하면 1 뒤에 ‘0’을 16개나 붙여야 한다. 거래액은 취합 방식이나 거래 종류 등에 따라 달라지는데 3경을 넘기는 사실상 처음이다. ‘동학개미’ 등장과 공모주 청약열풍, ‘빚투’ 등이 겹치면서 거래액이 전년보다 70% 늘었다. 주식거래 3경 돌파에는 한국 경제의 빛과 그림자가 함께 녹아 있다.
▷주식 거래액이 급증한 데는 일차적으로 동학개미가 큰 역할을 했다. 지난해 코로나 사태 직후 외국인들이 한국 주식을 대거 처분했다. 주가 급락 조짐을 보이자 개인들이 매수에 나섰다. 외국인의 매도 공격을 방어했다는 점에서, 외세에 맞선 동학농민운동에 빗대 동학개미라고 불렀다. 올해도 비슷하다. 지난달 미국의 긴축 조짐에 따라 외국인이 한국 주식을 내던지자 동학개미들이 쓸어 담고 있다. 외국인이 높은 값에 주식을 되산다면 올해도 동학개미의 승리일 테지만, 결과는 알 수 없다.
▷공모주 청약 열기도 뜨겁다. 우량 기업이라고 소문이 나면 주식을 배정받겠다고 내놓는 청약 증거금이 수십조 원을 쉽게 넘는다. 1억 원의 증거금을 냈는데 단 2주만 배정받은 사례도 있다. 적은 이익이라도 얻으려고 청약에 나서지만 결과가 좋지만은 않다. 지난해 하반기 상장한 기업 가운데 약 35%는 주가가 공모가를 밑돌고 있다. ‘따상’(거래 첫날 공모가의 2배로 시작해 다시 상한가)을 기대했는데 울상이 될 수 있다.
▷증권사들은 신났다. 거래가 늘면서 지난해 수수료 수입이 급증했다. 전년 대비 2배 이상 늘어 5조 원을 넘겼다. 증권사가 돈 잔치를 벌일 때 투자자들은 걱정이 늘었다. 미국이 본격적인 긴축에 나서면 주가가 떨어질 수 있고, 빚이라도 냈다면 이자 부담까지 커질 상황이다. 외국인의 매도 공세를 버텨내기도 힘겹다. 사고팔기를 반복하는 ‘단타’ 투자는 증권사만 배불릴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 주식투자 인구는 900만 명에 육박한다. 주식 계좌 수는 5000만 개를 돌파했다. 최근 2년 새 ‘주린이’(주식+어린이)가 200만 명 이상 늘었다. 건전한 투자 문화가 뿌리를 내려야 할 때다. 증시는 상상보다 넓은 시장이다. 커피 한잔 값이면 수천억 원짜리 선박이나 유전(油田)도 ‘일부’ 살 수 있다. 상장된 선박펀드나 유전펀드를 사는 방식이다. 증시에서 못 사는 재화는 거의 없다. 빚투 열풍도 있지만 증시에서 경제를 배우는 투자자가 적지 않다. 테마주를 좇으며 루머에 휩쓸리기보다 폭 넓게 공부하고 투자하는 문화가 정착되길 기대한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09-24 오징어 게임
‘미드 보려고 넷플릭스 가입했다 한드만 본다’는 이들이 많다. 요즘 한드는 K드라마로 불리며 아시아는 물론 유럽과 북미에서도 주목받는 콘텐츠로 부상했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17일 공개된 넷플릭스의 9부작 ‘오징어 게임’이 K드라마로는 처음으로 미국 넷플릭스의 인기 프로그램 순위 1위에 올랐다.
▷오징어 게임은 빚더미에 깔려 죽기 직전의 벼랑 끝 인생들이 모여 우승 상금 456억 원을 놓고 목숨 건 게임을 벌이는 내용. 영화 ‘도가니’ ‘수상한 그녀’ ‘남한산성’의 황동혁 감독이 연출을, 이정재가 주연을 맡았다. 공개된 지 4일 만인 21일 미국 태국 사우디아라비아 멕시코 등 22개국 넷플릭스에서 1위를, 일본 영국 프랑스 등 50개국에서는 2위를 기록했다. 전 세계 넷플릭스 드라마 순위에서도 K드라마론 처음으로 2위를 차지했다.
▷드라마는 노래 만화 게임에 비해 문화적 장벽이 높은 장르다. 오징어 게임은 보편적 특수성으로 이 장벽을 넘었다. 살벌한 경쟁이라는 글로벌한 주제를, ‘배틀 로얄’ ‘도박묵시록 카이지’ 같은 인기 생존 게임물의 형식에 담되, 게임의 룰을 단순화해 문화권이 다른 시청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면서도 뽑기나 구슬치기 같은 한국적 게임과 한국적 신파, 동화적 미장센을 가미해 익숙한 듯 낯선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영어와 일본어 더빙 버전을 추가한 것도 주요 시장에서 ‘1인치의 장벽’을 낮추는 데 기여했다.
▷K드라마의 경쟁력은 치열한 경쟁에서 나온다. 한류 붐을 처음 일으킨 ‘겨울연가’(2002년)는 지상파 3사의 전유물이던 드라마 시장에 외주 제작 부분적 의무화로 진출한 외주 제작사가 선보인 드라마다. 2세대의 시작을 알린 ‘미생’(2014년)은 다매체 다채널 시대에 케이블 채널에서 히트시킨 첫 작품. ‘비주류’ 미생의 메가 히트 후 K드라마는 재벌 2세와의 연애담에서 벗어나 판타지물 학원물 등 다양한 세부 장르로 진화한다.
▷3세대 K드라마의 디딤돌이 된 건 넷플릭스다. 넷플릭스의 수백억 원대 투자를 받고 넷플릭스를 통해 190여 개국의 시청자들과 시차 없이 만나면서 ‘킹덤’ 같은 좀비물이나 생존 게임물 등 더욱 과감한 콘텐츠 실험이 가능해졌다. 지난해 일본 넷플릭스 톱10의 절반, 싱가포르 톱10 중 8개가 K드라마다. ‘굿닥터’ ‘보이스’ ‘라이브’ 등 포맷 수출도 한다. 이어령 선생은 “끊임없이 변주되는 ‘꼬부랑 할머니’로 대표되는 이야기꾼의 DNA”를 한류의 원동력으로 꼽았다. 이 이야기꾼 DNA가 좁은 내수 시장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도전정신과 만나 K드라마의 새 역사를 써 나가고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9-25 필리핀 코리안데스크
필리핀의 대표적 부촌인 아얄라 알라방에 있는 그의 고급 저택에선 벤츠, 마이바흐, 링컨 등 외제차 10대와 각종 명품 가방들이 쏟아져 나왔다. 필리핀에서 불법 온라인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며 1조3000억 원의 부당 이득을 챙긴 주범 A 씨(40)가 18일 현지 경찰특공대에 검거된 현장이었다. 이번 검거는 필리핀에 파견된 한국 경찰인 ‘코리안데스크’가 무려 2년 동안 추적한 끝에 현지 당국과 함께 거둔 성과였다.
▷필리핀은 치안이 불안한 대표적인 국가로 꼽힌다. 한 해 살인 사건으로 1만 명이 죽는다고 하니 쉽게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총기 소유도 합법이다. 경찰서에서도 총기를 판매하고 10만∼20만 원짜리 조악한 사제 총도 판을 친다. 단돈 수백만 원이면 청부살인도 가능한 곳. 필리핀에서 8만 명 넘게 살고 있는 교민뿐 아니라 현지를 찾는 관광객의 안전이 언제든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경찰청은 한국인을 상대로 한 강력 범죄가 늘자 필리핀 당국을 설득해 2012년 코리안데스크를 설치했다. 코리안데스크는 강력 사건의 수사 공조와 한국인 범죄자 송환에 집중하고 있다. 필리핀 한국대사관의 경찰 주재관이 재외 국민의 전반적인 안전 관련 업무를 책임지는 것과 달리 특화된 임무가 부여된 것.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범죄를 저지르고 해외로 도피한 사람은 총 2977명이었는데 인접한 중국(988명)에 이어 필리핀(657명)이 두 번째로 많았다. 필리핀은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데다 섬이 7000개에 달해 추적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수도 마닐라에 처음 설치됐던 코리안데스크는 카비테, 앙헬레스, 바기오, 세부, 다바오에 추가돼 총 6곳으로 늘었다. 한국과의 공조 수사 필요성을 필리핀 당국이 인정한 결과다. 필리핀에서 피살된 한국인은 2013년 한 해 12명이나 됐다. 하지만 2018년 3명, 2019년 1명으로 줄더니 지난해에는 한 명도 없었다. 코리안데스크가 현지에서 살인범 검거에 잇달아 성과를 거두자 한인 대상 범죄 자체가 줄어드는 효과가 나오는 것이다.
▷코리안데스크는 범죄가 많은 곳에 보통 ‘나 홀로’ 파견된다. 필리핀에서 마닐라만 2명이고 다른 곳은 혼자 일한다. 앙헬레스에서 코리안데스크로 3년간 일했던 한 경찰은 “외지에 혼자 있는 탓에 항상 안전에 불안을 느꼈다”면서도 “코리안데스크로서 감내해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올 7월 보이스피싱 수사를 전담하기 위해 중국,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에 코리안데스크가 추가로 파견됐다고 한다. 코리안데스크가 우리 국민들이 안심하고 외국을 방문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한몫하기를 기대한다.
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09-27(월) 꿈의 배터리
전기차 사려고 할 때 한 번쯤 머리를 스치는 걱정은 화재다. 리튬이온 배터리는 충격이나 열로 배터리 속 분리막이 부서지면 한순간에 섭씨 1000도가 넘는 고열이 발생한다. ‘열 폭주 현상’이다. 기존 소화 장비로는 끄기도 쉽지 않다. 전기차 화재 발생 빈도가 내연차보다 적기는 해도 소비자로서는 꺼림칙한 문제다.
▷열 폭주 현상이 없는 ‘꿈의 배터리’로 불리는 전고체(全固體) 배터리가 장착되면 문제는 해결된다. LG에너지솔루션이 미국 샌디에이고대 연구팀과 함께 상온 충전이 가능한 전고체 배터리 기술을 개발했다고 24일 밝혔다. 1회 충전으로 800km 주행이 가능하다. 지금까지 나온 전고체 배터리 기술 중 충전 가능 횟수 500회를 넘긴 것은 처음이다. 전고체 배터리 상용화에 한발 다가선 기술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전고체 배터리는 자동차 제조사들까지 달려들어 개발하고 있다. 일본의 도요타자동차가 7일 전고체 배터리를 장착한 전기차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공개했다. 도요타는 아직까지도 순수 전기차는 양산하지 않지만 전고체 배터리 기술은 2008년부터 자체 연구소를 통해 개발해 왔다. 전고체 배터리로 세계 자동차시장을 단번에 석권하겠다는 야망이 엿보인다.
▷전고체 배터리는 아직 대중화까지 가야 할 길이 멀다. 추운 지방에서는 충전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등 넘어야 할 기술적 과제가 많다. 설사 누군가 먼저 양산에 성공한다 해도 경제성이 문제다. 차에 들어가는 배터리 가격은 지금보다 40% 이상은 더 떨어져야 경제성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본다. kWh당 120∼130달러인 가격이 70∼80달러대로 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배터리 값이 차 가격의 30% 안팎인 지금의 전기차는 보조금이 없으면 팔릴 수가 없는 불완전한 상품이다.
▷세계 전기차 배터리 시장은 한중일 3국의 싸움터다. 올해 상반기 사용량 기준 점유율은 중국(41.5%)이 가장 많고, 한국(34.9%) 일본(17.8%) 순이다. 내수시장을 기반으로 성장한 중국 기업이 해외 수주에도 적극 나서면서 성장률이 빨라지고 있다. 일본은 파나소닉의 시장 점유율이 급락해 점유율이 줄었다. 지난해와 비슷한 점유율을 보인 한국은 미국 현지 공장 설립과 화재 위험은 낮추고 에너지 밀도는 높인 ‘하이니켈 리튬이온 배터리’로 반등을 꾀하고 있다.
▷전고체 배터리는 2030년을 전후로 상용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앞으로 10년은 배터리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라는 의미다. 배터리는 결국 양극재와 음극재, 전해질 같은 소재과학의 싸움이다. 반도체를 이을 차세대 산업 중 하나가 배터리 산업이다. 기초소재 개발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10년이다.
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09-28 코로나에 약한 남자
겉으론 세 보여도 일찍 죽는 건 남자들이다. 한국 남녀의 기대수명 차이는 6년, 러시아는 12년이나 된다. 진화론적으로 수컷의 짝짓기 경쟁이 더 치열하고, 사회적으로는 남자가 위험한 일을 하거나 과로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으며, 생물학적으론 면역력이 본디 약하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코로나19에도 남자가 더 취약하다는 연구 결과가 속속 발표되고 있다.
▷영국 옥스퍼드대 연구팀이 세계 29개국의 지난해 기대수명을 조사한 결과 27개국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남자들의 수명 단축이 두드러졌다. 영국 남성은 1년 전보다 1.2년, 여성은 0.9년 줄었다. 미국은 남성이 2.2년, 여성은 1.7년으로 수명 단축 폭이 가장 컸다. 사회활동이 활발한 연령대에 코로나 감염이 집중된 탓이다. 영국 프랜시스 크릭 연구소가 46개국의 감염사례를 분석해 지난해 말 발표한 자료에서도 남성 사망자(12만 명)가 여성(9만1000명)보다 훨씬 많았다. 한국의 경우 26일 현재 남성 사망자가 1233명, 여성은 1217명으로 큰 차이는 없다.
▷1918년 스페인 독감이나 2003년 사스, 2015년 메르스 때도 남성들의 피해가 컸다. 메르스 당시 한국 남성 환자는 111명, 여성은 75명이었다. 남자들이 술 담배를 훨씬 많이 하고, 손을 자주 씻지 않으며, 건강관리에 무신경한 생활습관 탓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몸에 이상 신호가 와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병원을 덜 찾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남자는 선천적으로도 면역력이 약하다. 남성 호르몬(테스토스테론)은 면역계 활동을 방해하고, 면역계를 망가뜨리는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도 돕는다. 반면 여성 호르몬(에스트로겐)은 면역력이 강하다. 후손에게 강한 면역력을 물려주기 위해서라는 가설이 제기됐는데 실제로 모유를 먹은 아기가 면역력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염색체도 남자가 불리하다. 여성은 X 염색체가 두 개여서 어느 한쪽에 문제가 생기면 대체가 가능하다. X 염색체엔 면역을 담당하는 유전자도 많다. 반면 남성(XY)은 X 염색체가 하나밖에 없고, 염색체 간 대체도 되지 않는다.
▷코로나 장기화로 경제적 타격을 받은 이들이 늘고 만성질환자의 진료에 차질이 빚어지면서 기대수명은 당분간 더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반면 코로나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그만큼 건강한 사람들이니 기대수명은 곧 반등할 것이라는 낙관론도 있다. 남녀 차이를 고려한 치료 기술이 발달하고 남성들의 후천적 건강관리 노력이 병행된다면 코로나 피해의 성별 격차도 줄어들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9-29 구설 끊이지 않는 박영수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법조인이 박영수 전 특검이다. 7월 ‘가짜 수산업자’에게서 포르셰 파나메라4 차량을 공짜로 빌린 사실이 알려지면서 부적절한 처신으로 비판을 받더니 이번에는 대장동 개발 의혹 사건과 관련해 연일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박 전 특검에 대해 특검을 해야 할 판’이라는 개탄이 나올 정도다.
▷검사 시절 강력통으로 불렸던 박 전 특검은 돌파력이 강하다는 이유로 ‘돌쇠’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런 기질을 살려 2016년 말 국정농단 사건의 특검으로 임명된 뒤 90일간의 수사를 통해 박근혜 정부의 인사들과 기업인 등 30명을 줄기소했다. 당시 현직이던 박근혜 전 대통령을 기소하지는 않았지만 최순실(최서원) 씨에 대한 공소장에 뇌물수수 등의 공범으로 적시했다. 박 전 대통령 측은 “공포 검찰” “꿰맞추기 수사”라며 특검팀을 비판했지만 적폐청산 분위기 속에서 특검팀의 과(過)보다 공(功)이 부각됐다.
▷하지만 가짜 수산업자 사건에 박 전 특검이 연루되자 그를 보는 대부분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그는 ‘도의적 책임’만 인정하면서 형사 처벌을 피하기 위해 “특검은 청탁금지법을 적용받지 않는 공무 수행 사인(私人)”이라는, 일반인의 상식과는 거리가 한참 먼 법리까지 꺼내들었다. 특검으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박 전 특검이 책임 피하기에 급급하다고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박 전 특검이 결국 이 사건으로 검찰에 송치된 지 열흘도 지나지 않아 대장동 개발 사업 특혜 의혹의 핵심인 화천대유에서 고문을 맡은 사실이 드러났다. 또 박 전 특검의 딸은 화천대유에서 근무했고, 이 회사가 보유하고 있던 대장동 잔여 세대 아파트를 약 7억 원에 분양받았다. 이 아파트의 현재 호가는 15억 원 선이다. 박 전 특검 측은 “법규에 따른 분양 가격으로 정상 분양받았을 뿐”이라고 밝혔지만 여론은 부글부글하고 있다. 한 전직 검사는 “이런 모습을 본 국민이 법조인을 위선자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했다.
▷박 전 특검은 2014년 언론 기고문에서 “특검은 민주주의라는 토양에서 태어난 법치주의의 구현자”라고 규정했다. 본인이 특검으로 임명된 뒤 언론 인터뷰에선 “검사로서 불의에 대한 수사를 해 달라는 요청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검사도(道)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사기범과 어울리는 것이 법치주의의 구현자라는 특검에게 어울리는 일이고, 직원 14명의 부동산 업체에서 월 1500만 원을 받는 고문을 맡은 것이 검사도를 강조하는 전직 검사로서 합당한 처신인가. 박 전 특검이 답할 시간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9-30(목) 불 꺼진 세계의 공장
올해 3월 ‘꼬북칩 초코츄러스 맛’을 중국 시장에 내놓고 초코파이의 뒤를 이을 히트상품으로 키우고 있는 오리온은 중국 국경절 연휴(10월 1∼7일)를 앞두고 복병을 만났다. 랴오닝성 선양에 있는 과자 공장이 현지 당국으로부터 ‘전기 사용 제한’ 통보를 받고 30일까지 생산이 중단된 것이다. 오리온 측은 베이징 등 다른 지역 공장의 생산을 늘려 대응할 계획이다.
▷중국 23개 성 중 10여 개 성의 전력공급 사태가 특히 심각하다. 포스코의 장쑤성 스테인리스공장 생산라인 일부가 17일부터 멈춰 서는 등 현지에 진출한 한국 대기업들도 타격을 받고 있다. 장쑤성 정부는 철강, 시멘트 등 전력 사용량이 많은 기업들에 대해 우선적으로 전력공급을 제한했는데 국경절 연휴가 끝날 때까지 제한조치가 이어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작년 10월 중국 정부가 내린 호주산 석탄 수입 금지가 전력난의 직접적 원인이다. 호주가 3년 전 5세대 이동통신망 장비 입찰에서 화웨이 등 중국 업체 참여를 배제하며 시작된 양국 갈등이 작년 코로나19 발원지 국제조사의 필요성을 호주 정부가 주장하면서 격화됐고 호주산 석탄, 와인 등의 수입 금지로 이어졌다. 중국의 전력소비는 작년보다 15% 늘었는데 발전용 석탄의 60%를 의존하던 호주산 수입이 끊기자 석탄 값은 50% 폭등했다. 전력의 49%를 공급하는 중국의 화력발전소들은 비싼 석탄 값 때문에 전력생산 확대를 꺼리고 있다.
▷중국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광둥·저장·장쑤성 등 남동부 산업벨트의 충격이 제일 크다. 장쑤성에 진출한 대만 반도체 공장 일부가 멈춰 서면서 가뜩이나 부족한 차량용 반도체 공급이 더 줄고 세계 완성차 업체들의 생산 차질도 심해지게 됐다. 미국의 애플, 테슬라도 부품 공급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동북 3성에선 거리의 신호등이 꺼졌고 잦은 정전 때문에 양초 사재기에 나서는 주민들이 많아졌다. 전력난으로 중국의 올해 성장률이 당초 예상됐던 8%대 초반에서 7%대 후반으로 떨어질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기후변화로 바람이 약해져 랴오닝성 풍력 발전기들이 제 역할을 못 하고, 남서지역의 가뭄으로 쓰촨성 수력발전소 전기생산량이 감소한 것도 전력난의 원인이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공표한 ‘2060년 탄소중립’ 목표 달성을 위해 중국 정부가 전력공급을 의도적으로 제한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내년 2월 베이징 겨울올림픽 때 파란 하늘을 보여주기 위해 공장 가동률을 낮추고 있다는 추측까지 나온다. 부메랑으로 돌아온 무역보복과 친환경정책의 조급한 추진으로 ‘세계의 공장’에서 생산시설들이 멈춰 서고 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