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護國7/ 참전국이 본 전쟁 속의 대한민국3/ [6·25 60년, 참전 16개국을 가다] <1>미국(上)-‘잊혀진 전쟁’ 노병들의 분노 - <20·끝>전시 병동 외국의료진의 휴먼스토리

상림은내고향 2021. 9. 7. 19:14

護國7/ 참전국이 본 전쟁 속의 대한민국3/ [6·25 60년, 참전 16개국을 가다]

[6·25 60년, 참전 16개국을 가다]

2017-11-04 동아일보

<1>미국()-‘잊혀진 전쟁’ 노병들의 분노

“美교과서엔 다섯 문단만 수록… 희생을 너무 쉽게 잊어”
“참전했다 돌아왔더니 

한국에 무슨 일 있냐 되물어 
비기려고 희생했냐 하는데 
자유 지켜낸 우리의 승리”

 

 

6·25전쟁은 많은 미국인에게 잊혀졌다. 미국 참전자는 연인원 150만 명으로 이 중 사망자만 36000여 명이다. 많은 젊은이를 희생했건만 미국인들은 좀처럼 6·25전쟁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래서 6·25전쟁은 ‘역사의 고아가 됐다(orphaned by history)’는 표현도 생겨났다. 

낯선 나라를 위해 청춘을 바치고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참전용사들은 6·25전쟁을 어떻게 기억할까. 1 31일부터 2 3일까지 수도 워싱턴과 메릴랜드, 버지니아, 인디애나 주의 참전용사 10여 명을 만났다. 


○ “잊혀진 게 아니다” 

워런 위드한 대령은 1월 말 전우들에게 e메일을 돌렸다. 공영방송 PBS에 출연한 역사학자들이 ‘소련의 팽창주의에 대한 봉쇄정책을 처음 실행했다는 점에서 한국전쟁은 20세기의 중대 사건’이라고 평가한 대목을 전하면서 “한국전쟁이 의미가 있었느냐고? 물론이다”라고 썼다. 그만큼 6·25전쟁에 대한 긍정적 평가에 목말라 있었다는 증거다. 

 

 

“적 수류탄에 팔다리 잃어” 

 

미국 메릴랜드 주 자택에서 인터뷰에 응한 빌 웨버 예비역 육군 대령. 그는 육군 187공수부대 소속 대위로 6·25전쟁에 참전해 강원도 원주에서 적이 던진 수류탄에 오른쪽 팔과 다리(무릎 아래)를 잃었다.

 

육군 187공수부대를 이끌던 빌 웨버 대위는 1951년 초 강원 원주에서 북한군이 던진 수류탄에 오른쪽 팔꿈치 밑과 오른쪽 무릎 아래를 잃었다. 그는 “역사교과서에 한국전쟁이 너무 안 다뤄진다. 사람들이 모를 수밖에 없다”며 가슴을 쳤다. 그는 2시간의 인터뷰 도중 두 번이나 눈시울을 붉혔다.
 

웨버 대위는 6·25전쟁이 교과서에서 다섯 문단밖에 안 다뤄지는 ‘다섯 문단 전쟁(5-paragraph war)’으로 불린다고 자조했다. 그 다섯 문단도 트루먼 행정부와 맥아더 사령부 간의 갈등, 정전협상 등을 다룰 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은 6·25전쟁에 대한 미국 내의 냉정한 인식이었다. 행정병이던 리처드 로빈슨 육군 원사는 “휴전 후 몇 년 뒤에도 한국전쟁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참전용사회 인디애나 주 지회장인 타인 마틴 씨는 “내가 한국전쟁에 갔다 왔더니 ‘한국에 무슨 일 있었느냐’고 물어본 대학생 친구도 있다”고 말했다.

 

○ “무승부가 아니었다” 

노병들은 “겨우 비기려고 그렇게 죽었느냐(to die for a tie)”라는 일각의 평가를 경멸했다. 무공훈장(Purple Hearts)을 3개나 받은 스탠 벤더 해병대 병장은 “무슨 소리냐. 미국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한국은 금방 공산화됐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웨버 대위는 “무조건 이겼다고 말하지는 않겠다”면서도 “하지만 오늘의 한국이 내가 본 1950년대에 머물렀다면 난 실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쩍 성장한 한국의 오늘이 6·25전쟁의 의미를 재조명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몬태나 주 출신의 에드 보처트 대위는 이번에 인터뷰한 참전용사 가운데 유일한 대학 졸업자. 1949년 입학한 스탠퍼드대에서 동아시아 역사를 전공하면서 해병 장교 프로그램에 가입했다. 그는 “역사학도로서 나는 자유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고, 해병 장교로서 자부심과 명예를 갈망했다. 한국과 미국은 승리했다”고 말했다. 

 

○ 각양각색의 전쟁 체험기 

벤더 병장은 서울 수복 직후 친한 친구가 눈앞에서 죽었을 때 오열했고, 처음으로 적군을 쏴 죽였을 때 구토를 했다.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적군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만 20세 때 겪은 일이었다. 

 

멜빈 버틀러 육군 상병은 적군이 쏜 총에 등을 맞아 전쟁포로가 됐고 9일 동안 끌려 다니다가 잠시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 도망칠 수 있었다. 그는 “단지 살아남기 위해 비탈을 굴렀고, 논바닥을 기었다”고 말했다. 

 

웨버 대위는 평양 북쪽의 숙천에서 공중 투하 작전에 참여했다. 그는 “한국의 자유 회복? 그것도 전쟁터에 안 가본 사람의 소리가 아닌가 싶다. 내 부하가 총에 맞으면 눈이 뒤집혔고, 내가 살기 위해 방아쇠를 당겼다”고 말했다.

 

라디오 수리공이었던 월트 크로닌 육군 병장은 “나를 테스트하기 위해 참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자란 만큼 큰 부담은 없었다”고 말했다. 

 

로빈슨 원사는 “대구에서 타이핑을 할 수 있느냐고 묻기에 손을 번쩍 들었다. 최전방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에서였다”고 말했다. 그는 참전 사실을 서로 몰랐던 사촌동생과 부대에서 조우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 워싱턴·포트웨인(인디애나 주)=김승련 기자 srkim@donga.com

 

▼ 한미軍전우애 보여준 ‘58년 전 피묻은 태극기’

▼ “부상 국군, 파편 빼주자 건네” 

슬로트씨, 주미대사관에 기증 

 

▲미국 워싱턴의 주미 한국대사관에는 이달 초 오래된 피 묻은 태극기 하나가 걸렸다. 텍사스 주에 사는 로버트 슬로트 씨(81·사진)가 지난해 말 “6·25전쟁 때부터 피 묻은 태극기를 보관해 왔다”며 기증한 것이다.


슬로트 씨는 전쟁 당시 미 육군 73전차대대 C중대 소속 소대장으로 싸웠다. 청력이 약해진 그는 2 e메일 인터뷰를 통해 한 국군 장병의 조국사랑과 한미 양국 군인의 뜨거운 전우애를 전해줬다.

슬로트 소대장은 1952년 말 강원 철원지구에서 탱크로 이동하던 중 길가에서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던 한국군 병사를 발견했다. 이름도 계급도 기억할 수 없는 이 병사는 동료의 부축을 받고 전차에 올라 응급처치를 받았다. 

그때 이 병사는 가슴 속에서 붉은 피로 물든 태극기를 꺼내 내밀었다. 슬로트 씨는 “그가 한국말로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고 당시를 설명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태극기를 손에 쥔 그의 환한 미소를 아직도 기억한다. 내가 지금껏 받은 ‘생큐’라는 말(표정) 가운데 단연 최고였다”고 회상했다. 둘 사이에 정상적인 대화는 없었지만, 같은 군인으로서 많은 걸 교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국군 병사는 옆구리에 포탄 파편이 박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응급처치를 마친 뒤 슬로트 소대장은 뽑아낸 파편을 보여줬고, 두 사람은 함께 웃었다. 슬로트 소대장은 붕대를 감아주면서 이후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를 전우에게 “당신은 최고의 군인”이라고 말해줬다. 

이후 슬로트 씨는 이 태극기를 간직했고 한국을 떠나 미국과 유럽에서 군 생활을 하면서 액자에 넣어 보관해 왔다. 그는 “내 자녀들은 아버지가 소중히 간직하는 그 국기를 보며 자랐다. 한 나라의 국기가 얼마나 신성한 것인지를 아이들에게 가르쳤다”고 말했다.

 

<2>미국()-참전 가족들의 가슴앓이

“실종됐다던 오빠가 57년만에 돌아왔다… 한 줌 유해로”

부상 송환 거부 트렌트 상병 
다시 참전해 청천강서 전사 
2000년 유해발굴 신원확인 
 
칠순 노파된 ‘9세 막내동생’ 
“기다림의 납덩이 내려놓고 
굴곡의 가족사 한 장 접어”

▲미국 네바다 주의 소도시 스파크스 자택에서 만난 해리엇 듀란 씨가 2007 10월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열린 오빠 도널드 트렌트 상병의 안장식 사진을 컴퓨터에 띄운 채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1]. 듀란 씨가 아홉 살 소녀이던 시절 17세의 나이로 군에 입대한 오빠는 여전히 앳된 모습으로 기억된다 [2]. 오빠는 서울에서 최전선 배치를 명령받고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3] 

 

그는 지긋지긋한 학교를 떠나 군인이 됐다며 환하게 웃었다. 얼마 후 코리아라는 낯선 전쟁터로 떠나갔다. 참전 5개월 만에 ‘전쟁 중 실종’을 알리는 전보가 그의 가족에게 날아들었다. 그리고 가족들의 가슴앓이는 시작됐다.

2007 10월 미국 워싱턴 외곽 알링턴 국립묘지에 도널드 트렌트 미 육군 상병이 묻혔다. 가족들은 실종 57년 만에 한 줌의 뼛조각으로 돌아온 그를 보면서 상처로 얼룩진 가족사의 한 장()을 이제는 마무리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다. 트렌트의 부모님은 이미 1970, 80년대에 숨을 거뒀다. 

해리엇 듀란 씨(71)는 도널드의 막내 여동생이다. 9세 소녀 시절 큰오빠의 입대와 실종 소식을 접한 이래 수십 년 동안 사라진 오빠의 기억을 안고 살아 온 그를 5일 네바다 주의 소도시 스파크스 자택에서 만났다. 

그는 국방부로부터 “오빠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은 2007 5월을 떠올렸다. 그전까지 정부가 설명했던 것과 달리 오빠는 전쟁포로가 된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증언에 따르면 트렌트는 1950 11월 말 평안도 구장군의 청천강변에서 중공군의 총을 맞고 전사했다. 

듀란 씨는 “그 소식을 듣고 납덩어리를 내려놓는 느낌이었다. 이제나 저제나 소식을 기다리지 않아도 됐으니…”라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고통이 길었을) 포로수용소 생활보다는 빨리 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도 했다. 듀란 씨는 1990년대 말부터 전쟁 중 실종된 미군 가족들과 교유하면서 서로를 위로하며 지내왔다.

 

트렌트 상병은 죽음을 피할 수도 있었다. 참전 1개월 만에 부상해 ‘본국 송환’을 요청할 수 있었지만, 그는 1개월간 일본에서 병원 신세를 진 뒤 “동료와 함께 싸우겠다”며 다시 한국행을 희망했다. 

그의 유골은 청천강변 농가 주변에서 발굴됐다. -미 간에 반짝 화해 기류가 흐르던 빌 클린턴 행정부 말기인 2000년의 일이었다. 그는 총에 맞아 죽은 뒤 이 농가 주변에 매장됐고, 젊은 시절 이를 목격했던 한 북한 농부의 신고에 따라 미군은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발굴 결과 뼛조각 20여 개와 치열 흔적이 나왔고, DNA 검사를 통해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듀란 씨는 어릴 적 ‘(키가) 큰 오빠’로만 기억했던 오빠의 신장이 167cm 정도로 그리 크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트렌트 가족의 지난 50여 년은 망가진 삶(devastation)이었다고 듀란 씨는 회고했다. 아들의 공백에 부모는 괴로워했다. 집으로 부친 편지에서 어머니의 걱정을 염려하고 가족에 대한 사랑의 표현을 빼먹지 않던 아들이었다.

특히 군인이 되어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다른 오빠가 타고 가던 헬리콥터가 추락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받은 부모님의 충격은 컸다. 다행히 이 오빠는 죽지 않고 생존했다. 어머니는 눈을 감는 순간에도 “절대 오빠 찾는 것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듀란 씨는 ‘북한과 중국을 원망하느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오빠는 군인이 되고 싶어 했고, 자신의 선택에 따라 전쟁에 참여한 것을 잘 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오빠는 1947년 고향 웨스트버지니아 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군 입대를 위해 가출했다. 사라진 오빠 때문에 집안이 발칵 뒤집혔지만, 그날 밤 오빠는 켄터키 주의 훈련소에서 전화로 “아버지, 오늘 군에 입대했어요”라고 소식을 알려와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듀란 씨는 “유일한 여동생인 나를 오빠는 각별히 예뻐했다”며 “(비록 통화였지만) 그때처럼 오빠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당시 오빠는 만 18세가 돼야 하는 군 입대 조건을 맞추기 위해 나이를 거짓으로 한 살 올려 신고했다고 한다. 

“생후 13개월 때 죽은 큰언니가 있었지. 난 만나 본 적도 없지만. 부모님은 각각 숨을 거두면서 하늘에서 첫딸과 큰아들이 자신들을 기다릴 것으로 확신했을 거라고 믿어.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재회의 기쁨을 누렸을 거야.

듀란 씨는 이렇게 스스로를 위안하며 삶의 새로운 장을 살아가고 있었다.

글·사진 스파크스(네바다 주)·포트웨인(인디애나 주)= 김승련 기자srkim@donga.com

▼美에 6·25 알리는 참전용사들의 방송국 “큐! 
참전 4명 자원봉사로 제작 
“한국서 우릴 찾아오다니” 
녹화 끝난뒤 눈시울 붉혀▼ 

30평 남짓한 스튜디오에 조명이 켜지고 6·25전쟁 참전용사 20여 명과 가족들이 자리에 앉았다. 카메라맨, 엔지니어, 디렉터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오전 10 45. 출연자에게 응시해야 할 카메라 번호를 숙지시키고 마이크 테스트가 끝나자 큐 사인이 떨어졌다. 

 

▲미국의 ‘한국전쟁참전용사회(KWVA)’가 만드는 ‘텔아메리카방송’은 미국인에게 6·25전쟁의 실상을 알리는 창구다. 텔아메리카방송이 3일 인디애나 주 포트웨인에서 동아일보 김승련 기자(가운데)가 참전용사들을 인터뷰하는 장면을 녹화하고 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 방송의 산파역을 한 제임스 예니 씨다. 사진 제공 텔아메리카방송

 

“굿 이브닝, 아메리카. 오늘밤은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의무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던 제임스 예니 씨(당시 육군 일병)가 잊혀져 가는 6·25전쟁의 참된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2005년 시작한 ‘텔아메리카(Tell America)방송’의 3일 녹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예니 씨와 참전용사 3명은 인디애나 주의 포트웨인에서 공익방송인 액세스(ACCESS)TV 스튜디오를 무상으로 빌려 3주에 1번씩 녹화를 한다. 순수 자원봉사로 만들어진 이 녹화물들은 매주 목요일 오후 9시에 케이블TV 채널 57번에 1시간씩 방송되고, 인터넷TV(IPTV)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이날 녹화는 독특한 형식으로 진행됐다. ‘게스트’인 기자가 이 프로그램의 ‘호스트’ 역할을 맡아 인터뷰를 진행했다. 기자가 예니 씨를 포함해 출연한 노병들을 인터뷰하는 ‘방송 속 신문 인터뷰’ 형식이었다. 

사정은 이랬다. 동아일보가 60년 전 6·25전쟁에 참전했던 노병들의 생생한 개인사를 듣기 위해 인터뷰를 요청하자 예니 씨는 “그래, 인터뷰를 하자. 출연자를 10명 이상 섭외해 주겠다. , 조건이 있다. 우리 카메라 앞에서 인터뷰하고, 우리는 그 촬영 내용을 방송하겠다”고 수정 제안한 것이었다. 

이날 참전용사 인터뷰 과정에서 인디애나 주의 한 중학교 사회 교사인 리네트 월리스 씨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수업시간에 참전용사를 초청해 어린 학생들에게 자유를 지킨 영웅의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소개했다. 

30분간의 휴식을 빼고 4시간 넘게 계속된 이날 방송은 특별한 NG 없이 술술 진행됐다. 맨 마지막 순서로 예니 씨와 3명의 방송팀을 인터뷰했다. 예니 씨는 “한국전쟁에 대한 미군의 희생과 감회를 뉴스레터 제작, 중고교 1일 교사 등을 통해 미국인에게 알려왔는데, 이런 것을 방송에 올릴 수는 없을까라는 황당한 생각을 현실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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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전쟁 참전용사이자 방송팀 일원인 윌리엄 헐린저 씨는 “이 방송은 미국인과 교감하는 좋은 창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근 버지니아 주의 중학교 1학년생이 인터넷을 통해 ‘한국전쟁에 대한 학교 숙제를 도와 달라’고 연락해 왔는데, 이들은 “질문거리를 알려주면 관련 방송을 만들 테니 참고해서 글을 쓰라”고 답한 적도 있다고 소개했다.

방송 녹화가 끝나 카메라의 빨간 불이 꺼진 뒤 예니 씨는 방송인이 아닌 60년 전의 향수를 지닌 노병으로 돌아왔다. 그는 한국 고아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옛 전우의 흑백사진을 보여주면서 거기에 적힌 ‘산타 노릇을 했다(play Santa)’는 문구를 읽으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또 한국의 신문기자가 지구 반대편의 방송국을 찾아왔다는 사실에 눈시울을 붉혔다.


▼인터뷰에 온 老兵 손엔 참전당시 먹었던 캐러멜 한통이…▼

미국의 참전용사들은 60년 전 6·25전쟁의 기억을 되살릴 물건이나 자료를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다. 특히 멜빈 버틀러 씨는 미 육군부가 그의 가족에게 보낸 ‘1952 2 13일 이후 아들이 실종됐다’는 실종 통보 전보의 원본을 간직하고 있었다. 버틀러 씨는 “실제로 나는 9일간 포로로 잡혔다가 도망쳐 나왔다”고 회고했다. 한 노병은 투치롤(Tootsie Roll)이라는 캐러멜 한 통을 들고 왔다. 그는 “꽁꽁 언 햄과 쇠고기를 먹으면 소화불량으로 힘이 더 빠졌다. 그래서 즐겨 먹은 게 이 캐러멜이었다”며 “최소한 이걸 씹는 동안에는 얼굴 근육을 움직일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투치롤은 ‘탄약(ammo)’이란 별칭으로 불렸다고 한다. 중공군 감청을 피하려 본부에 “탄약을 공수해 달라”고 무전을 치면 얼마 뒤 공군이 ‘캐러멜’을 공중 투하하곤 했다고 이들은 회고했다. 

전쟁의 기억이 모두 고통뿐이었을까. ‘언제 크게 웃어봤느냐’는 질문에 한 참전용사는 “노란 눈(yellow snow)은 먹지 말아야지”라고 답했다. 이 말에 다른 노병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마실 물이 얼어 주위에 쌓인 눈으로 갈증을 풀 수밖에 없었는데, 누군가의 소변이 섞인 눈을 먹는 경우가 가끔 있어 그때마다 깔깔 웃었다는 얘기였다.

 

<3>미국() ―맥아더를 만나다

노병은 사라졌지만, 정신은 죽지 않았다 
 
부인과 함께 묻힌 기념관 
자유-평화의 메시지 전해 
지도엔 ‘독도’ 표기 선명

/버지니아 주 (맥아더 기념관)

 

미국 버지니아 주 남부 군항(軍港) 노퍽 시 한복판에 자리 잡은 맥아더 기념관은 연간 7만여 명의 관광객이 찾는 명소다. 250만 점의 문서와 86000여 장의 사진 등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맥아더 장군이 남긴 유물이 보존돼 있다.

 

1950년 6월 29일 경기 수원 공군기지. 검은 선글라스에 코코넛 파이프를 문 더글러스 맥아더 미국 극동군 사령관이 쌍안경으로 한강전선을 바라본다. 6·25전쟁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북한군에 속절없이 내준 다음 날이다. 파죽지세로 남진하는 북한군을 막기 위해 맥아더 사령관은 주일 미군 3개 사단의 한반도 차출을 명령했다. 이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창설된 유엔군사령부 최고사령관이 된 맥아더는 해리 트루먼 당시 대통령에게 전권을 이임 받아 한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전쟁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훗날 사가(史家)들이 “3일만 늦었더라면…”이라고 회고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지난달 7일 버지니아 주 남부 군항(軍港) 노퍽 시에 있는 맥아더 기념관을 찾았다. 이곳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맥아더 사령관의 모든 것이 보존된 성지다. 그는 1951년 유엔군 최고사령관에서 해임돼 미국에 돌아온 뒤 어머니 고향인 노퍽을 자신의 ‘제2의 고향’으로 정했고 영욕의 군 생활 48년의 기록을 고스란히 시에 기부했다. 노퍽 시는 그를 기념하기 위해 1850년에 지은 시청 건물을 맥아더 기념관으로 헌정했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맥아더 사령관과 부인 진 맥아더 여사의 무덤이 있다. 맥아더 사령관이 이곳에 묻힌 날은 1964년 4월 11일. 13년 전인 1951년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유엔군 최고사령관직에서 해임된 날과 똑같다. 2000년 1월 22일 사망한 맥아더 사령관의 부인 진 여사는 나흘 뒤 남편 곁에 묻혔는데, 이날은 맥아더 사령관의 출생일(1880년 1월 26일)과 같다. 홀의 한가운데에는 6·25전쟁 당시 유엔군 최고사령관기와 미 육군 역사상 넷밖에 오르지 못했다는 5성 장군 깃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극동군 총사령관기가 있다.  

 

6·25전쟁 관련 전시관은 1층 왼쪽에서 맨 처음 만날 수 있다. 20세기 전쟁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상륙작전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전황도 및 맥아더 사령관의 제복과 모자, 파이프 등이 보존돼 있다. 음향장치를 통해 전해오는 당시의 포성과 폭발음을 듣고 있자니 맥아더 사령관이 금세라도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눈앞에 나타날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동해(East Sea)라는 표기가 선명한 한반도 지도도 눈에 띄었다. 기념관 측은 “약 7년 전 당시 주미 한국대사가 이곳을 찾아 ‘일본해’라고 표기된 데 문제 제기를 했다”며 “대사관과 한국 정부가 아예 동해라는 표기가 있는 유리패널을 제작해 와 기증했다”고 말했다. 10년 전인 2000년 6·25전쟁 발발 50주년 당시 한국과 미국 정부가 공동으로 제작한 기념기도 전시돼 있다. 이 깃발에는 ‘FREEDOM IS NOT FREE’라는 영어 문구와 ‘자유는 아무런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한국어 문구가 병기돼 있다. 맥아더 기념관의 사료실장 제임스 조벨 씨는 “맥아더 사령관의 취미는 독서였고 하루에 3시간씩 책을 읽었다”고 말했다. 기념도서관에 보관된 20만 권의 장서 중 5000여 권은 맥아더 사령관 개인 책. 맥아더 사령관의 노란색 대학노트 900쪽에 1961년부터 2년 동안 연필로 눌러 쓴 ‘회고록(Reminiscences)’의 친필 원고를 보고 있자니 그의 향취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의 필체는 힘이 있으면서도 고상한 기품이 흘러 넘쳤다. 

 

맥아더 사령관은 1962년 5월 12일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를 찾아 ‘의무, 명예, 조국(Duty, Honor, Country)’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그는 “군인은 어느 누구보다도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 그 이유는 군인이 전쟁으로 인한 가장 깊은 상처와 흉터를 아파하고 그 고통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맥아더 장군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다”고도 했다. 그가 남긴 평화와 자유에 대한 메시지는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


■ 기념관 사무국장 데이비스 씨 “한국 발전상 보면 무덤서도 춤을 출 것”

 

“한국의 전후 발전상을 본다면 무덤에서 맥아더 사령관이 일어나 춤을 출 겁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당시 그의 목표는 분명 대한민국의 통일이었습니다.” 1995년부터 맥아더기념관 사무국장 겸 맥아더재단 사무총장을 맡아온 윌리엄 데이비스 씨(67·사진)는 “오늘날 한국의 모습은 맥아더 사령관이 모든 것을 바쳐 지키고자 한 자유와 번영의 상징”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맥아더 사령관의 외아들 아서 맥아더 씨(72)의 법적대리인인 데이비스 씨는 1966년 해병대에 입대해 29년 만에 제대한 예비역 대령이다. 

 

그는 1951년 당시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의 불화에 따른 맥아더 사령관 해임에 대해 “중공군 참전이라는 변수를 만나 만주에 있는 중국의 후방기지를 공격하려 했을 만큼 승리에 대한 집념이 강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데이비스 사무총장은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면 한국이 통일됐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원자탄 사용을 고려했다는 설에 대해서는 “사실무근”이라고 단호히 부정했다. 데이비스 사무총장은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고 한 그의 발언은 그가 했던 일들을 통해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존재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글·사진 노퍽(버지니아 주)=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

 

▼김남조 시인, 남편 김세중 씨의 6·25기념 조각 공개
“흔적조차 사라진 유엔탑… 참전국에 송구할 뿐”▼


1981
년 철거… 서울시, 복원 재추진 

▲김남조 시인이 7일 서울 종로구 효자동 자택에서 작고한 남편인 조각가 김세중 씨가 유엔군자유수호참전기념탑을 위해 만든 부조 작품 2점을 동아일보에 공개했다. 오른쪽이 ‘수호 남신상’, 왼쪽이 ‘자유 여신상’이다.

이훈구 기자

 

7일 오후 서울 용산구 효창동 비탈길에 있는 하얀 2층 양옥집의 대문이 열렸다. 언론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원로시인 김남조 숙명여대 명예교수(83)가 자신의 집을 모처럼 공개했다. 작고한 남편인 조각가 김세중 씨의 작품에 대해, 또 6·25전쟁 때 참전한 유엔군의 고마움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였다.

 

김 교수는 지금은 창고로 쓰는 2층 남편의 작업실로 안내했다. 높이 325cm, 폭 115cm의 청동 부조 2개가 한쪽 벽에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남편이 1963년에 만든 ‘유엔탑 수호 남신상’과 ‘유엔탑 자유 여신상’이다.

 

1964년 6월 25일 제2한강교(현재 양화대교) 다리 위에 유엔군자유수호참전기념탑이 세워졌다. 북한군에 밀리기만 하던 유엔군이 최초로 한강을 넘었던 그 자리에 참전 16개국의 자유수호 의지와 우의를 기리기 위해 국민성금 2300만 원으로 재건국민운동본부가 설립한 것이다. 

 

높이 50m의 v자형 탑신 양쪽 면에는 7일 김 교수의 집에서 본 ‘자유 여신상’과 ‘수호 남신상’이 2배 정도 크게 조각돼 있었다. 탑의 조각과 전체적 설계를 맡은 김 씨는 탑 제작에 앞서 작은 크기의 부조를 만들었다. 김 교수가 이날 공개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6m 크기의 자유 여신상과 수호 남신상 부조는 탑과 함께 1981년 5월 철거됐다. 당시 서울시는 4차로였던 다리를 8차로로 확장하면서 탑과 조각들을 부숴 다리 아래로 버렸다. 탑의 잔해는 다리 밑에 4년간 방치됐고, 이후에는 그 흔적마저 사라졌다.

 

“조각품이 방치돼 있는 것을 본 남편은 서울시에 방치된 돌을 달라고 요청했죠. 자신이 보관하다 복원할 때 다시 쓸 생각이었나 봅니다. 하지만 거절당했고 결국 사진기를 직접 들고 다리 아래로 가 조각난 돌들을 일일이 찍어뒀습니다.” 그러면서 김 교수는 “남편은 1986년 세상을 뜰 때까지 (복원을) 진심으로 바랐고, 항상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1981년 탑을 철거하면서 규모를 축소해 원래 자리에 세우든지 통일로나 서울대공원 입구에 옮기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서울시는 김세중 씨 등 관계자들을 불러 수차례 회의를 하고 1987년에는 복원할 장소까지 물색하며 탑 복원을 추진했지만 이후 시장이 바뀌면서 복원은 없던 일이 됐다고 한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유엔 참전국 젊은이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습니다. 수십 년간 참전기념탑 복원에 무심했다는 것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전국에 송구스럽습니다. 남편이 만들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고마움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한편 서울시는 6·25전쟁 60년을 맞아 참전기념탑 복원을 재추진하고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9일 “오세훈 시장의 지시로 복원 계획을 마련하고 있다”면서 “복원할 탑의 크기와 장소, 향후 관리 방안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민혁 기자 mhpark@donga.com

 

<4>어느 열아홉살 英병사의 포로생활

28개월을 하루 한끼 연명… 63kg 몸무게 몇달새 38kg으로”

임진강 배치후 중공군에 잡혀 
열아홉밤 걸어 압록강변 도착 
탈출하다 잡히면 동굴 감금 
 
고기 달라고 아우성치자 
포로 400명에 닭 6마리 나와 
굶어죽는 동료만 40명 목격

 

그는 드럼부대 소속이었다. 기상과 취침 시간을 알리는, 전투와는 거리가 먼 부대였다. 그런 그에게 파병 명령이 떨어졌다. 지도를 펼치고서야 ‘코리아’라는 낯선 나라를 찾을 수 있었다. 그해 봄은 화창한 날씨마저 두렵게 느껴졌다. 전선에 배치된 지 사흘 만에 그는 중공군의 총부리 앞에 서야 했다. 28개월의 포로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 6·25 최대 전투가 벌어진 1951년 봄

열아홉 살의 테드 로즈 이병은 1951년 3월 4일 영국 글로스터연대 소속 병사 200여 명과 함께 한국 땅을 밟았다. 한 달 보름 남짓 전투훈련을 받은 로즈 이병은 4월 22일 경기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임진강변의 본부중대에 배치됐다.

 

부대의 구조도 익숙지 않은 첫날, 중공군의 대반격이 시작됐다. 2만7000명에 이르는 ‘인(人)의 장막’이 설마리 지역을 에워쌌다. 이날 전투는 6·25전쟁을 통틀어 중공군의 최대 공습이었다. 하지만 글로스터연대는 4000여 명에 불과했다. 

 

임진강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군이 가장 많이 희생된 전투였다. 140명이 죽고 900명이 다쳤다. 로즈 이병을 포함해 포로가 526명이나 됐다. 참패였지만 이들의 항전이 없었다면 중공군은 5월이 되기 전 서울을 함락했을 것이다.

 

보급병이던 로즈 이병은 쉴 새 없이 고지를 오르내리며 탄약과 식량을 날랐다. 사흘째인 4월 24일, 본부중대의 창고는 탄약 한 발, 식량 한 점 없이 깨끗이 비었다. 이튿날 오전 10시 긴급명령이 떨어졌다. “뿔뿔이 흩어져라!” 그리고 대규모 퇴각이 시작됐다. 하지만 사방은 이미 중공군 천지였다. 

 

중공군은 포로들을 이끌고 북으로 올라갔다. 포로들에게 지급된 음식이라곤 무슨 씨앗 같은 것뿐이었다. 포로들은 그걸 ‘새 모이’라고 불렀다. 5월 15일 압록강변의 한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열아홉 밤을 걸었다. 

 

○ 아무런 기약 없던 포로생활 

포로수용소라지만 철조망이나 감시초소 따위는 없었다. 그저 민가였다. 나중에 이곳은 ‘벽동포로수용소’로 불렸다. 화장실이라도 가려면 모두 일어나야 할 정도로 좁은 방에 10명씩 수용됐다. 

 

마을 중간 중간 중공군이 보초를 섰다. 탈출은 어렵지 않았지만 시도하는 이는 드물었다. 마을을 빠져나가면 바로 평지여서 숨을 곳이 없었다. 더욱이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다. 한 장교는 7번 탈출했지만 모두 붙잡혔다.

 

붙잡히면 동굴 같은 곳에 갇혔다. 처음에는 5일, 그 다음은 7일 하는 식으로 수감 기간이 늘어났다. 동굴에서 풀려나면 다른 포로들 앞에서 자아비판을 하도록 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북한군 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 그곳 생활은 더욱 끔찍하다는 소문이 흉흉했다. 

 

식사는 하루 한 끼만 제공됐다. 재료를 알 수 없는 가루였다. 한 번은 고기를 달라고 아우성치자 포로 400여 명에게 고작 닭 6마리가 나왔다. 몸이 아프다고 하면 갈색 가루약을 줬다. 그래도 낫지 않으면 그 다음은 흰색 가루약이었다. 어디가 아프든 약은 똑같았다. 

 

63kg이었던 로즈 이병의 몸무게는 몇 달 새 38kg이 됐다. 벽동수용소에서만 동료 30∼40명이 숨졌다. 그가 목격한 것만 그랬다.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없는 불안과 초조 속에서도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그가 풀려난 것은 1953년 8월 16일, 정전협정 체결(7월 27일) 20일 만이었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는 데 한 달 보름이 걸렸다.

 

○ 잊히지 않는 기억들 

지난달 말 영국 런던 근교의 로즈 씨 집을 찾았다. 작은 정원이 딸린 단층짜리 주택이었다. 이제 78세인 로즈 씨에게 포로생활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물었다. 로즈 씨는 한참을 망설이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짧게 말했다. 잠시 뒤 그는 다시 입을 뗐다. 

 

“포로수용소를 향해 밤마다 행군을 할 때였지. 중공군 부상자들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나게 됐어. 그들에게 식사가 나왔어. 그중 한 명은 양 손이 모두 없더군. 그 사람이 어떻게 음식을 먹었는지는 몰라. 더는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날이 1951년 4월 27일이지.” 

 

로즈 씨가 어렵사리 끄집어낸 60여 년 전의 기억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그는 빛바랜 수첩을 꺼내왔다. 수첩에는 수용소에 있던 동료들의 이름과 계급, 입대일자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따금 노래 가사도 있었다. “왜 이런 걸 적었느냐”고 묻자 “뭐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해 죽을 것 같았다”고 했다. 수첩 중간 부분이 찢겨 있었다. 중공군이 뭘 적었는지 알아본다며 찢어갔다고 했다. 그의 삶의 한 부분도 그렇게 찢겨 있는 듯 보였다. 

 

인터뷰 내내 부인 재키 로즈 씨(70)는 옆에서 손뜨개질을 하거나 낱말 맞히기를 했다. 하지만 남편 얘기에 한순간도 귀를 떼지 않았다. 부인은 남편의 포로수용소 얘기를 처음 듣는다고 했다. 느낌을 묻자 “끔찍하다”고 짧게 말했다. 그녀는 남편의 아픔을 더는 들추지 않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결국 ‘당시로 다시 돌아가면 참전하겠느냐’는 질문의 답을 듣지 못하고 로즈 씨의 집을 나섰다. 

 

▼환청… 공황장애… 끝나지 않은 ‘노병의 전쟁’ 

■ 6·25참전 용사들 만나보니 

정찰중 부하 잃은 볼러 씨 

불꽃축제가 폭격소리로 들려▼ 

 

포격에 팔 부상 사익스 씨

공포에 짓눌려 밤마다 악몽

 

지난달 말 영국 런던의 군 복지시설인 유니언잭클럽에서 한국전참전용사회(BKVA) 노병들을 만났다. 이들은 인터뷰에 앞서 모두 기립해 특별한 의식을 보여줬다.

마이크 스윈델스 회장(80·예비역 육군소장)이 “유엔헌장 아래 한국전쟁에 참전해 자유를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바친 우리 친구들을 기억한다”라고 선창했다. 이어 다른 참석자들이 일제히 “신 앞에서 어느 한 사람도 잊히지 않는다(Not one of them is forgotten before God)”라고 화답했다. 

BKVA가 모임을 열 때면 어김없이 행하는 의식이다. 영국은 6·25전쟁에 모두 14198명의 지상군을 파병했다. 이 중 1078명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들의 의식은 불귀의 객이 된 동료들은 물론 지금도 전쟁의 악몽에서 고통 받는 전우들을 위한 것이다. 

이 자리에 참석한 존 볼러 씨(78·당시 소위) 1951 12 21일 경기 연천군 고왕산 인근으로 정찰을 나갔던 일을 잊지 못한다. 부하 3명을 이끌고 적의 동태를 살피던 중 중공군 20여 명과 맞닥뜨렸다. 부하 한 명이 머리에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눈앞에서 벌어진 그 장면은 그에게 전쟁의 상흔으로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그로부터 58년이 흐른 지난해 12 31일 밤, 폭격 소리에 놀란 볼러 씨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다. “진격 앞으로!” 창밖에선 새해를 맞는 불꽃 축제가 한창이었다. 그는 한동안 그렇게 창가에 서 있었다고 한다. 

잭 사익스 씨(77·당시 일병) 1952 11 25일 적군을 생포해오라는 명령을 받고 중공군 진지로 향하다 포탄 공격을 받았다. 오른쪽 팔이 타들어가기 시작했고 어느새 피투성이가 돼 있었다. 처음에는 팔을 잘라야 할지 모른다고 했다. 다행히 지혈이 돼 잘라내진 않았지만 신경이 끊어져 엄지손가락을 영영 쓸 수 없게 됐다.

사익스 씨는 15년 전부터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 한곳에 오래 머물 수 없어 늘 움직여야 했다. 어둠을 피해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고 집 밖으로 뛰쳐나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악몽이 심해진다”고 말했다.


6·25참전 英 전함 ‘벨파스트’ 벽엔 숨진 장병 3명 이름이…▼

▲6·25전쟁에 참전했던 영국 해군의 자존심인 전함 ‘벨파스트’. 1978년부터 런던 템스 강에 전시돼 관광객을 맞고 있다. 벨파스트 뒤로 템스 강의 상징인 타워브리지가 보인다.

 

영국 런던 템스 강의 상징인 타워브리지 옆에는 거대한 전함이 있다. 길이가 187m로 타워브리지 높이(80m)의 2배가 넘는다. 1938년 진수된 이 전함은 영국 해군의 자존심으로 통하는 벨파스트(Belfast)다.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고도 유일하게 건재했던 전함이다. 

 

벨파스트는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비롯해 모두 4차례 실전 배치됐다. 그중 가장 오랜 기간, 그리고 마지막에 참여한 전투가 6·25전쟁이었다. 1971년 10월 템스 강에 전시된 벨파스트는 한 해 24만여 명이 찾을 정도로 런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광코스다. 

 

지난달 말 ‘매우 특별한 가이드’와 함께 벨파스트를 찾았다. 로널드 야들리 씨(78)는 이 전함을 타고 6·25전쟁에 참전했다. 그가 가장 먼저 안내한 곳은 어른 스무 명이 들어가기 힘든 작은 예배당이었다. 예배당 벽에는 전쟁 중 숨진 장병 3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갑판에 적의 포탄이 떨어졌소. 통신병이던 나는 전함 맨 아래층에서 근무를 하고 있어 당시 상황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엄청난 굉음이 들리더군. 우리는 북한의 한 외딴섬에 이들을 묻어줬소. 다신 누구도 찾아가보지 못했지만….”

 

벨파스트 곳곳에는 당시 승조원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밀랍인형이 설치돼 있다. 치과 앞을 지나던 야들리 씨는 “나도 이곳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드릴이 낡아 엄청 아팠다”며 인상을 잔뜩 구겼다. 럼주를 배급해주는 곳에 이르러서야 야들리 씨의 표정이 환해졌다. 단조로운 선상생활의 유일한 낙이었단다. 수술실을 지날 때였다. 한 관광객이 야들리 씨에게 “혹시 승조원이었느냐”고 물었다. “이 배를 타고 6·25전쟁에 참전했다”는 그에게 관광객은 기념사진을 함께 찍자고 요청했다. 그는 뿌듯한 표정으로 가슴을 쫙 폈다. 6·25전쟁 참전 무공훈장이 노병의 가슴에서 빛났다.

글·사진 런던=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5>호주 전사자 부인의 ‘또다른 전쟁’

 

“남편 떠나던 순간 아직도 선명”

 

호주 시드니 드러모인 자택에서 만난 올윈 그린 여사가 사진첩을 넘기며 6·25전쟁에서 전사한 남편 찰리 그린 중령(오른쪽 위 작은 사진)을 회고하고 있다. 그린 여사는 “180cm를 훌쩍 넘는 훤칠한 키의 찰리가 전장으로 떠나던 순간이 아직도 선명하다”며 “나를 지금까지 지켜주는 찰리의 영혼은 이렇게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편 잃은 충격에 어린 딸 보듬지 못해… 비극의 악순환”

48시간 전투 끝내고 쉬던 남편 나무에 떨어진 유탄 맞아
부대원 1000명중 그이만 사망 

결혼 7년만에 날벼락 소식 듣고 눈물도 닦지 못한채 ‘생존 전쟁’
딸도 깊은 상처… 아빠얘기 안해 

“딸은 아버지가 죽은 순간 어머니마저 잃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딸의 옆자리를 지키지 못했죠. 나 또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또 생활을 이어가는 데 급급했어요. 그게 바로 전쟁의 비극이지요. 

호주 시드니 항으로 연결되는 파라마타 강 하구의 드러모인 지역. 강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위 아담한 자택에서 만난 올윈 그린 여사(87)는 남편을 잃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평생 몸부림쳤다고 회고했다. 그 고통은 남편이 죽던 해 세 살밖에 안 된 외동딸 앤시아(63)에게도 마찬가지였다. 

 

1950 6 29. 호주 정부는 6·25전쟁 발발 4일 만에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참전을 결정했다. 해군 바탄호가 유엔군 휘하에 배속됐고 공군 77비행중대가 곧바로 전쟁에 투입됐다. 일본 점령군으로 배치됐던 호주 육군 3대대는 영연방 27여단에 배속돼 9 28일 부산항에 도착해 북진에 나섰다. 바로 남편 찰리 그린 중령이 지휘하던 부대였다. 

10월 말 4주 만에 약 650km를 행군해 평안북도 정주에 도착한 3대대는 압록강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밤에는 영하 20도 아래로 떨어질 정도로 추웠다. 10 29일 오전 10시에 시작된 격렬한 전투는 밤 11시에야 끝났다. 9명이 전사하고 30명이 부상당한 이날 전투 끝에 호주군은 북한군을 압록강 쪽으로 몰아냈다.

▲올윈 그린 여사가 1993년 남편을 회고하며 쓴 책 ‘아직도 그대 이름은 찰리(The Names Still Charlie).

 

 48시간 동안 잠도 못자고 전투를 벌였던 찰리는 30일 저녁 텐트 인근에 떨어진 포탄 5발 가운데서 나무에 떨어진 유탄에 맞았어요. 전투가 벌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근처에 1000명이 있었는데…. 단 한 사람의 사망자가 바로 찰리였어요.

갑작스레 날아온 남편의 전사 소식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의 애도 편지도 그의 슬픔을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충격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모르겠다”며 “아직도 당시의 충격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남편이 사망 며칠 전에 썼던 편지는 전사 통보를 받은 다음 날인 11 2일 도착했다.

‘정말 너무나 춥소. 최종 목적지(압록강)까지 약 20마일(32km) 정도를 남겨두고 있어요. 거기에 도착하면 모든 것이 끝날 거요. 조만간 집에 돌아가길 바라고 있소.(10 27일 편지) 

남편의 전사 이후 그린 여사는 생존을 위한 ‘전쟁’을 시작해야 했다. 딸 앤시아와 함께 먹고살 길이 막막했기 때문이다. 신혼의 단꿈이 남아있던 농촌마을 그래프턴을 떠났다. 어머니, 남동생과 함께 시드니에서 생활했다. 누군가 앤시아를 돌봐야 했기 때문에 친정의 도움이 필요했다. 남편의 사망으로 받은 연금과 참전용사들의 장학금으로 시드니대에 입학한 그는 졸업 이후 20여 년간 시드니기술전문대(TAFE)에서 영어 교사로 일했다.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났지만 앤시아가 자라면서 겪은 성장통을 보듬어주지 못한 것은 평생의 짐으로 남았다. “남편이 죽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나중에 아이에게 설명해 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지요. 그걸 제대로 설명했어야 했는데…. 

아버지의 부재(不在)를 느끼게 된 사춘기 시절, 앤시아는 아버지에 대한 언급을 피하는 것으로 마음을 닫아버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앤시아는 성공적인 삶을 꾸려왔다. 앤시아는 현재 청각장애 참전군인과 아동을 돕는 정부기관인 호주청각서비스(AH)의 셰퍼드지역 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그린 여사는 “앤시아가 AH에서 활동하게 된 것도 아버지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손자들은 음악가와 종교학자로 성장했다. 

그린 여사는 1993년 남편과 함께한 7, 그리고 남편을 생각하며 지낸 60년을 회고하며 ‘아직도 그대 이름은 찰리(The Names Still Charlie)’라는 책을 냈다. 최근 개정판 작업을 마무리했다. 그는 “남편으로만 알았던 찰리였지만 동료들의 증언과 전쟁기념관에 있던 기록을 모아 책을 쓰면서 ‘군인 찰리’의 모습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수없이 들었을 법한 질문을 던졌다. “왜 재혼하지 않으셨죠?”라고. 그린 여사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마도 가책과 충심(guilty and loyalty) 때문일 겁니다. 

찰리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중동에 배치돼 호주군 최연소 보병 대대장으로 전공을 세웠다. 결혼 이후에도 콜롬보, 뉴기니 내전에 참전했다. 농부 출신인 찰리는 전장에서 돌아와 농사를 짓고 싶었지만 새색시는 도시 생활에 익숙한 상태였다. 일자리를 찾기 힘들던 찰리는 군에 다시 복귀했다가 6·25전쟁에 참전했다. 그린 여사는 “내가 찰리를 군에 다시 보냈다는 죄책감과 그에 대한 기억 때문에 혼자 살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린 여사는 회고록 맺음말에서 이런 자신의 심정을 아이다 프록터의 시 ‘그 사람(The One)’으로 대변했다. 

We cannot weep/At tragedy for millions/But for one./In the mind/For the minds life/The one lives on. 무수한 사람들의 비극엔/눈물짓지 못하지만/단 한 사람의 비극엔/눈물짓는답니다./마음의 삶을 살고픈/마음속에서/그 사람은 영원히 산답니다.(번역: 김준환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그린 여사에게 이제 남편은 수호신 같은 존재인 듯했다. 그는 “항상 찰리의 영혼이 나를 보살펴준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며칠 전 그가 잠시 나에게 소홀했던 것 같다. 자동차를 몰고 나갔다가 딱지를 떼였다”며 활짝 웃었다.

남편을 앗아간 6·25전쟁과 한국에 서운함이 있을 듯도 하지만 그린 여사는 “한국인들은 호주군의 참전에 대해 끊임없이 진정으로 고마워한다”며 “한국인들과 좋은 우정을 나누고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 시드니·캔버라=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오늘은 1951 1 5, 갑자기 후퇴명령이…”

소위로 참전 크로퍼드 씨… 하루도 빠짐없이 전장일기 써

▲시드니 무어파크의 한국전쟁참전기념비 앞에서 만난 예비역 해군소장 이언 크로퍼드 씨가 6·25전쟁 동안 쓴 일기장을 보여주고 있다.

 

‘무전으로 급히 후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인천이 곧 적의 포화에 노출되니 모든 병력은 오전 2시까지 떠나라고 했다. 미군이 남은 장비들을 모두 폭파할 때 3km 떨어진 해상에 정박한 실론호에서도 섬광을 볼 수 있었다. 큰 진동이 느껴졌다. 1951년 1월 5일.’ 

 

해군 소위로 6·25전쟁에 참여한 이언 크로퍼드 씨(78·예비역 소장)는 빛바랜 일기장을 펼치며 과거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동안 받은 수많은 훈장보다 더 소중하게 보관해온 삶의 기록이다. 크로퍼드 씨는 “요즘엔 매년 초에만 일기를 쓰다가 한 달도 못 가 그만두곤 하지만 전쟁 중에는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록을 남겼다”고 말했다.

 

그는 영국 군함 실론호를 타고 6·25전쟁에 참가했다. 1950년 8월 부산항에 입항한 실론호는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합류해 호주군의 바탄호, 와라뭉가호와 함께 해상 함포 사격으로 육군과 해병대를 지원했다. 이후 중공군이 개입한 뒤 실론호는 호주 구축함과 함께 다시 전장에 투입돼 대청도와 진남포를 오가며 함포 사격과 군 병력 수송 임무를 맡았다. 

 

그는 일기장을 넘기며 1950년의 크리스마스를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호주 장교지만 홀로 영국 함정에서 근무했던 그는 호주 정부가 호주군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냈다는 소식을 라디오 방송에서 들었다. “선물을 받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보트를 타고 인근 해역에 있던 와라뭉가호에 가서 선물을 챙겨 왔지. 당시 선물은 두꺼운 겨울 양말과 캔 음식이었어.” 

 

■ “정전협정 다음날 중공군의 악수 제의 거부” 

지금도 ‘가평대대’ 애칭 호주군 3대대 출신 모스 씨

 

6·25전쟁 기간 호주는 육군 3개 대대와 항공모함 2척을 포함한 해군 함정 11척, 3개 전투비행대대를 한국에 파견했다. 교체병력을 포함해 연인원 1만7000여 명을 보낸 호주군의 전사자는 339명에 이른다. 1950년 9월 한국에 도착해 유엔군의 북진 작전에 참가한 호주 육군은 사리원, 정주, 가평, 마량산 전투 등에서 용맹을 떨쳤다. 특히 용맹을 떨친 호주군 3대대는 아직도 ‘가평대대’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시드니 북쪽으로 약 70km 떨어진 휴양도시 어리나에서 만난 잭 케이시 씨(79)는 3대대 소속 병장으로 정주전투, 사리원전투를 치렀다. 산소 호흡기 없이는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노쇠했지만 60년 전의 기억은 또렷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형 두 명에 이어 한국으로 간다고 하니, 어머니는 ‘(총알을 맞지 않게) 머리를 들지 말라’고 하더군. 북한군과 처음 마주쳤을 때 겁이 나기도 하고 ‘내가 왜 여기에 있나’ 하는 생각도 했지.” 하지만 2004년 한국을 방문해 발전상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케이시 씨는 “또다시 그런 전쟁이 벌어진대도 한국을 돕기 위해 갈 것”이라고 말했다.

 

3대대 D중대 기관총 사수였던 피터 모스 씨(79)는 6·25전쟁 막바지의 치열했던 전투를 되살렸다. 1953년 7월 25일부터 정전협정이 체결된 27일 밤까지 중공군은 임진강 근처 후크고지를 지키던 호주군을 집중 공격했다. “중공군의 피리소리와 인해전술이 아직도 생생해. 27일 오후 10시 (정전협정 발효를 알리는) 초록색 신호탄이 하늘로 솟구친 뒤에야 모든 것이 끝났지.” 

 

다음 날 아침 북한군과 중공군은 후크고지로 올라와 “전쟁이 끝났으니 악수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호주군 누구도 이들과 악수하지 않았다고 모스 씨는 강조했다. 호주군은 정전협정에 따라 후크고지를 북측에 넘겨주고 휴전선 밑으로 내려와야 했다.

 

<6>佛노병 16명 “한국은 제2의 조국”

▲한국의 동아일보에서 취재하러 왔다는 얘기를 듣고 파리 일대에 살고 있는 6·25 참전용사 들이 승용차와 기차 등을 타고 지난달 19일 파리 시내의 한식당에 모였다. 포즈를 취해달라고 하자 ‘역전의 용사들’은 “김치!”를 외치며 환하게 웃었다. 이들은 “축구경기 때도 한국팀을 응원한다”며 팬으로서의 열정을 보여줬다.

 

“佛혁명 가치 계승한 고귀한 전쟁… 참전 자체가 자랑스럽다”

1·4후퇴 직후 최전선 배치 
3421명 참전 269명 사망-실종 
“당시엔 한국의 미래에 회의적 
지금의 발전상에 찬사 보낸다” 

 

지난달 18일 정오 프랑스 파리 시내 샹드마르 광장 인근에 있는 한식당. 70대 후반, 80대 초반의 노인들이 모여들었다. 다들 양쪽 가슴엔 올리브 가지를 그려 넣은 유엔군 프랑스대대 배지, 그리고 태극기와 프랑스기가 교차한 기념 배지가 달려 있었다. 손에는 빛바랜 스크랩북과 낡은 사진첩이 쥐어져 있었다. 새로운 얼굴이 등장할 때마다 서로 양쪽 뺨을 맞대고 인사를 나눴다 

이들은 프랑스의 6·25전쟁 참전용사들의 모임인 한국전쟁참전용사회 회원. 한국의 동아일보에서 취재를 왔다는 얘기를 듣고 파리와 근교에 살고 있는 회원 30여 명 가운데 16명이 모인 것이다. 

한 참전용사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이것 좀 봐, 우리가 부산항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다룬 당시 신문 기사야”라며 누렇게 변색된 ‘프랑스수아’지를 펴 보였다. 앙드레 다샤리 씨(78)는 오래된 컬러 사진 10여 점을 자랑스레 테이블 위에 늘어놨다. 1951년 내가 찍은 한강과 용산, 남대문의 모습이야. 지금 서울은 마치 뉴욕 같지만 50여 년 전엔 시골 마을 같았다고. 

60년 전 10대 후반과 20대 초반 청년이었던 이들에게 전쟁은 낯설지 않았다. 1, 2차 세계대전의 무대였던 프랑스 젊은이들은 전쟁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생 독립국 ‘코레(Cor´ee)’는 미지의 세계였다 

 

“한국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어. 군 복무 중이어서 지원했는데 한국이란 나라를 지도에서 처음 찾아봤지.” 앙리 라무슈 씨(82)의 말에 옆자리의 마르셀 브누아 씨(80)도 거들었다. “인도차이나전쟁을 다녀온 뒤였는데 친구들이 ‘한국은 인도차이나만큼 덥지는 않다’고 하더군. 내가 자원한 것은 그게 이유였어.

프랑스대대는 마르세유 항을 출발한 지 36일 만인 1950 11 29일 부산항에 도착해 1·4후퇴 다음 날인 1951 1 5일 전선에 배치됐다. 이후 지평리전투(1951 2 1315), ‘단장의 능선’ 전투(1951 9 13일∼10 13), ‘화살머리 고지’ 전투(1952 10 610) 등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대부분 세계대전과 인도차이나전쟁을 겪은 베테랑들이었지만 혹독한 희생을 치러야 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 7월까지 세 차례 3개 대대를 교체하며 연인원 3421명이 참전한 프랑스군의 인명 피해는 전사 262, 부상 1008, 실종 7명이다. 참전용사의 3분의 1 이상이 사상자가 되거나 실종된 것이다. 세르주 아르샹보 씨(80)는 “1952 2월 중공군의 포격을 받았을 때 바로 앞에 있던 동료는 로켓포를 허리에 맞아 몸이 두 동강 났고 바로 뒤에 있던 동료도 쓰러졌다. 포격이 끝난 뒤 온전한 사람은 나뿐이었다”고 회고했다

 

낯선 한국 땅에서 생과 사를 넘나들었던 용사들에게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을까. 자크 그리졸레 씨(80)가 시원스러운 답을 줬다.

“남쪽으로 향하는 끝없는 피란민의 행렬을 보면서 ‘과연 한국이란 나라에 미래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었지. 하지만 한국은 어느 나라도 부러워할 만큼 눈부시게 발전했어. 한국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한 내 자신이 자랑스러워.

피에르 마비요 씨(82)는 “한국인들이 한국전쟁 이후 이뤄낸 모든 것에 찬사를 보낸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을 무한한 자랑으로 여긴다”며 “프랑스는 나의 조국, 한국은 두 번째 조국”이라고 말했다 

한국전쟁참전용사회의 현재 회원은 366명으로 직접 참전한 용사가 151명이고 나머지는 유족들이다. 프랑스에는 인도차이나전쟁, 알제리전쟁 등 참전자들이 많지만 참전용사회란 조직이 구성돼 있고, 정례적인 모임을 갖는 것은 한국전쟁참전용사회가 유일하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묻자 스타니슬라스 살리츠 씨(79)는 “한국전쟁은 프랑스혁명 전사의 후손으로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평화와 자유를 위해 싸운 고귀한 전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레지스탕스 영웅’ 3성 장군, 중령급 대대장 자원해 중공군 격파 

몽클라르 장군 딸 회고록 집필 

▲6·25전쟁 때 프랑스 대대 지휘관이었던 랄프 몽클라르 장군의 딸 파비엔 뒤푸르 씨. 파리 외곽도시 르페크의 집에는 몽클라르 장군이 6·25 때 추위를 견뎌내려고 군복 위에 입었던 양모조끼 등이 눈에 띄었다. 군인의 딸로 자란 그녀는 군인과 결혼했다.

 

“아버지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독 한국에 대해서는 많은 얘기를 해주셨죠. 한국인들은 매우 용감해 만약 프랑스가 위험에 처하면 한국에 지원을 요청하면 되겠다 싶을 만큼 훌륭한 군인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6·25전쟁 참전 프랑스군을 지휘한 랄프 몽클라르 장군의 딸 파비엔 뒤푸르 씨(59)를 지난달 22일 파리에서 서쪽으로 20 km 떨어진 작은 도시 르페크의 자택에서 만났다.

몽클라르 장군은 프랑스의 전쟁영웅이었다. 육군사관학교인 생시르 4학년 생도 시절인 1914년 소위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2차 세계대전 때엔 프랑스군이 독일군을 상대로 유일하게 승리를 거둔 나르비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의 본명은 라울 마그랭베르느레인데 나치 치하 레지스탕스 활동 때 암호명으로 쓰던 몽클라르로 개명했다 

1950 8월 프랑스 정부가 미군 2사단 산하의 파견 부대 창설을 발표하자 3() 장군이었던 몽클라르 장군(당시 58)은 중령급인 지휘관을 지원했다. 상부에선 “장군이 어떻게 대대장을 맡느냐”고 만류했지만 그는 “계급은 중요하지 않다. 곧 태어날 자식에게 유엔군의 한 사람으로서 평화라는 숭고한 가치를 위해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몽클라르 장군이 72세 때인 1964년 각종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했을 때 딸 뒤푸르 씨는 겨우 열 세 살이었다. 하지만 딸의 뇌리에 아버지는 평생 군인으로 깊이 각인돼 있다. 

“아버지는 종종 ‘나는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참전했다. 평화는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 ‘한국전쟁은 반드시 참전했어야 했던 전쟁이었다’고 하셨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정당한 명분을 위해서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게 그분의 인생관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또 한국인들의 인내심을 높이 평가했어요. 아마도 한국인들이 36년이라는 긴 일제강점기를 이겨내고 독립을 쟁취했다는 점에 깊은 인상을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뒤푸르 씨는 최근 아버지의 일대기를 다룬 600여 쪽 분량 책의 집필을 마쳤다. 장군의 기고와 글, 편지, 딸에게 들려줬던 얘기들을 담았는데 특히 장군이 지휘했던 지평리 전투를 자세히 다뤘다. 당시 프랑스군은 중공군 3개 사단에 완전히 포위된 상황이었으나 사흘간 전 장병이 철모를 벗어던지고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채 백병전을 벌여 중공군을 격파했다. 유엔군이 중공군을 상대로 거둔 첫 승리였다. 몽클라르 장군은 “‘베르됭전투’(1차 세계대전 때 가장 치열했던 전투)와 비슷했다”고 회고하곤 했다.

뒤푸르 씨는 6·25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당부를 잊지 않았다.

“한국의 발전과 평화는 많은 희생을 치르고 얻어진 것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젊은이들이 한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 어떻게 싸웠는지를 기억해주세요.


▼ “전우 강호근 씨를 찾습니다” 철원 정찰부대 근무 브뢰유 씨 회고 ▼

▲전장에서 함께한 로베르 브뢰유 씨(오른쪽)와 강호근 씨. 사진 제공 로베르 브뢰유 씨 

 

1952년 프랑스 정찰부대 소속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던 로베르 브뢰유 씨(80)는 당시 정찰부대에서 함께 생활했던 강호근 씨를 찾을 길이 없겠느냐고 기자에게 부탁했다. 브뢰유 씨는 “강 씨는 당시 22세였으며 틈틈이 책을 읽던 문학청년이었다. M1카빈 소총을 다뤘다”고 기억했다.

브뢰유 씨는 1952 10 610일 강원 철원 서북방 15km 지점 화살머리(Arrowhead) 고지에서 벌어진 전투 상황을 기록한 글을 보내왔다 

10 6, 달도 없는 고요한 밤. 연발포탄이 비처럼 우리 진지에 쏟아졌다. 폭격은 며칠이나 계속됐다. 우리는 겨우 수백 명이었고, 그들(중공군)은 수천 명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저항’ 명령을 받았다. 중공군의 서울 진격로를 차단하라는 의미였다. 선발대는 거의 전멸했다. 탄약이 떨어져 칼과 괭이로 유격전을 벌였다. 10 10, 우리 측 공군이 중공군 진지를 폭격했다.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서울을 지켜낼 수 있었다.

 

▼ “美폭격기가 드럼치듯 폭탄 쏟아붓고 
흰옷 입은 인파 ‘하얀 강’ 이뤄 南으로” ▼ 
헝가리 종군기자 메러이씨 증언 

 

헝가리 공산당 기관지 ‘사바드 네프(자유인)’의 기자였던 티보르 메러이 씨(86·사진) 1951 8 14일 개성에 도착했다. 6·25전쟁 휴전협상을 취재하라는 지시였다. 메러이 씨는 지난달 18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 2주면 체결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지만 협상은 더뎠다”고 회고했다. 그가 주로 머물던 평양에는 끊임없이 미군 폭격기가 나타났다. “당시 내가 가장 무서워했던 한국말은 ‘뱅기(비행기)’였다. 드럼을 치듯 한바탕 폭탄을 쏟아 붓고 나면 거리엔 시체가 즐비했다. 매일 흰 옷 입은 사람들이 ‘하얀 강’을 이뤄 남쪽으로 향했다. 

2차 세계대전 때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매일 이어지는 폭격과 시가전, 즐비하게 쌓이는 시신들을 목격했지만 6·25는 더 참혹한 전쟁이었다. 그는 “같은 언어를 쓰는 민족이, 자신들이 전혀 원치 않은 전쟁을 하면서,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서로 죽고 죽이는, 유례가 없는 가장 비극적인 전쟁이었다”고 말했다. 메러이 씨는 1956년 스탈린주의에 반대하는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파리로 이주했다.
글·사진 파리·르페크=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7>뉴질랜드 사진兵렌즈에 담긴 6·25

휴가 가듯 참전한 ‘키위’들을 맞은 건 빗발치는 포탄이었다
 
외부에 대한 동경에서 지원 
파병 5350명중 120명 사상 
60년 전 참상 생생히 기록 

“한국에도 널리 알려주오”

 

▲16포병연대 승전 기념촬영 6·25전쟁에 참전했던 뉴질랜드 16포병연대 소속 부대원들이 1951 4월 가평전투에서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한 뒤 전투 중 사용했던 포탄 상자를 보며 기뻐하고 있다. 사진 제공 이언 매클리 씨

 

이언 매클리 씨(82). 뉴질랜드 군인들의 6·25전쟁 참전 역사를 추적하는 동안 공개된 여러 장소와 간행물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클랜드 시내 박물관의 6·25전쟁 홍보 코너와 웰링턴 시 외곽 자동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육군 제16포병연대 본부의 해외참전기념관, 뉴질랜드 역사가 3명이 쓴 두꺼운 뉴질랜드 전쟁사에도 그의 이름이 등장했다.

 

1950년 12월 22세의 나이로 한국에 왔던 매클리 씨는 16포병연대 소속 사진병이었다. 1952년 6월 귀국할 때까지 그는 참혹한 전쟁과 뉴질랜드 병사들의 활약상, 한국의 모습 등을 사진에 담아 본국에 알렸다. 당시 오클랜드위클리뉴스와 프리랜스 등 뉴질랜드 신문들이 거의 매주 두 페이지에 걸쳐 그의 사진을 소개했다. 그의 사진들은 60년이 지난 오늘도 뉴질랜드의 6·25전쟁 참전뿐 아니라 현대사의 증거물로 사용되고 있다. 

 

오클랜드 박물관은 6·25전쟁 홍보 코너 내부에 “(6·25전쟁을 위해) 뉴질랜드를 출발했을 때, 우리는 굉장한 휴가가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매클리 씨의 말을 소개하며 당시 아무런 준비 없이 지원병으로 전쟁에 따라 나섰던 ‘키위(뉴질랜드 사람의 애칭) 병사’들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전했다. 당시 뉴질랜드는 육군 제16포병연대와 해군 프리깃함 5척을 파견했다. 모두 5350명이 참전해 41명이 사망하고 79명이 부상했다. 

 

지난달 26일 웰링턴 시내 재향군인회관에서 만난 매클리 씨는 60년 전 ‘휴가’를 떠날 때처럼 밝은 표정으로 기자를 맞았다. 이어 그와 동료들이 찍은 낡은 흑백사진 30여 장을 내밀며 “한국에 가져가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에게 가장 애착이 가는 사진들을 골라 달라고 했다. 그는 1951년 새로 받은 신형 카메라를 들고 북한 쪽 전방을 살피는 자신의 사진을 먼저 골랐다. 그는 “당시 뉴질랜드에서 기다리던 가족들이 내 사진을 받아보고는 몹시 안심했다”고 회고했다. 그러고는 사진들을 한참 들추다 한국인 아이를 찍은 사진을 뽑아들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7, 8세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가 겨울 스웨터 차림에 베레모를 쓰고 사진을 찍는 매클리 씨에게 거수경례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사진①). 매클리 씨는 “우리가 ‘킴(Kim)’이라고 불렀던 전쟁고아”라고 소개했다. 아이는 부대의 잡일을 하며 병사들과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

 

다음으로 당시 16포병연대 부대원들이 적진을 향해 포를 발사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을 골랐다(사진②). 이 사진은 이후 2달러짜리 뉴질랜드 우표에 사용됐다. 이 밖에도 매클리 씨는 뉴질랜드 병사들이 참전 후 처음으로 38선을 넘어 북진하면서 찍은 사진, 16포병연대 병사들이 유명한 ‘가평전투’에서 중공군의 남하를 막아낸 뒤 사용한 포탄상자를 쌓아놓고 찍은 기념사진 등을 골라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매클리 씨는 60년 전 정말로 한국에서 ‘휴가’를 보내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한국전쟁에 지원한 것은 외부 세계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다”고 회고했다. 남반구의 섬나라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외부 세계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사진관에서 일했던 그는 18세 때 공군에 입대한 뒤 항공사진 등의 촬영기술을 체계적으로 배웠고 그 기술을 인정받아 6·25전쟁의 종군 사진병으로 발탁됐다.

 

그는 18개월 동안의 6·25전쟁 참전이 “위험했지만 굉장한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한번은 부대 안에 중공군의 포탄이 떨어져 2명이 죽는 사고가 일어났다. 파편은 그가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바로 옆 막사로 튀어 동료가 들고 있던 물통을 깨뜨렸지만 다행히 두 사람은 무사했다. 

 

그는 “한국전쟁은 나의 모든 것”이라며 “참전은 많은 경험과 많은 친구를 내게 선물했다”고 말했다.   그는 종군 사진병으로서 업적을 인정받아 귀국 후 현지 신문에서 35년 동안 사진기자로 일했다. 1998년 은퇴한 뒤 한국전쟁참전용사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왔다.

글·사진 웰링턴·오클랜드=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6·25전쟁에 참전했던 뉴질랜드 제16포병연대 부대원들이 지난달 26일 오전 웰링턴 시 국립전쟁기념관을 함께 방문했다. 왼쪽부터 블루 린스키, 월리 울스텐홈, 밥 해먼드, 데스 빈텐, 테드 매리언(영국군으로 참전), 그리고 종군 사진병이었던 이언 매클리 씨. 

 

▼“23일 꼬박 1만발 발사… 중공군 4월 공세 저지”▼

■ 노병들이 전한 ‘가평전투’ 

한국군 갑작스러운 후퇴에 
‘전방이 심상치 않다’ 술렁 
잠은커녕 선채로 전투치러 

 

1951 4 22. 경기 가평군 일대에서 한국군 6사단을 지원하던 뉴질랜드 제16포병연대 소속 병사들은 3일 뒤로 다가온 앤잭데이(Anzac Day·호주와 뉴질랜드 연합군이 1915 4 25일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기념일)를 기다리며 마음이 설렜다. 그러나 그날 밤 중공군은 유명한 ‘4월 공세’를 시작했고 뉴질랜드 포병들은 6·25전쟁 참전 후 가장 힘든 사흘을 보내야 했다. 

지난달 26일 뉴질랜드 수도 웰링턴 시 재향군인회 사무실에서 만난 70, 80대 노() 포병들은 59년 전 서로의 기억을 함께 더듬으며 당시 ‘가평전투’의 상황을 생생하게 재구성해냈다. 승전의 기쁨보다는 처절한 후퇴의 기억부터 터져 나왔다.

22일 오후 9시 반쯤이었지. 일부 부대원이 ‘전방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며 술렁이기 시작했어. 그래서 저마다 황급히 짐을 싸서 명령을 기다렸는데, 갑자기 어둠 속에서 한국군이 우리 부대를 지나 후퇴하는 모습이 보였어. 무언가에 놀라 겁에 질린 표정이었지.(월리 울스텐홈 씨·84) 

“그 이후의 상황은 혼돈 그 자체였어. 한국군이 후퇴하는 상황에서 전방에는 영국군과 캐나다군 등이 있었는데 우리 뉴질랜드 포병은 누구를 엄호 사격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당황했으니까.(블루 린스키 씨·82)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유엔군 전선이 흐트러지자 후방을 지키던 뉴질랜드 포병들도 후퇴하기 시작했다. 밥 해먼드 씨(79)는 “후퇴하는 동안 유엔군 한 명이 중공군의 총에 맞았지만 아무도 그를 구할 수 없었고 보고도 그냥 지나가야 했다. 길에서 소를 잡아 허기를 채우다 중공군이 쫓아와 도망쳐야 했다”고 회고했다.

뉴질랜드 포병들은 몇 차례 정지와 후퇴를 반복하다 23일 저녁에야 경기 가평군 가평천 부근에 진지를 다시 구축했다. 이후 전방에서 중공군과 맞선 호주군과 캐나다군을 연달아 엄호하며 2 3일 동안 1만여 발의 포탄을 발사했다.

“나와 동료들은 어떤 밭에 자리를 잡고 계속 포를 쏴댔지. 중공군이 언제 진격할지 몰랐고 포 소리가 커서 2 3일 동안 잠을 잘 수가 없었어. 음식도 먹을 수 없었고 포를 계속 쏴야 했기 때문에 내내 서 있을 수밖에 없었지.(해먼드 씨)

뉴질랜드 포병들은 포신이 달아올라 페인트칠이 벗겨질 때까지 포를 쐈고 끝내 중공군의 추가 남하를 막아냈다. 해먼드 씨는 “중공군이 물러난 다음 그들이 머물렀던 진지에 가보니 우리 포탄을 피하느라 챙겨가지 못한 군수물자가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뉴질랜드군의 전공을 치하해 표창을 수여했다. 이 표창은 현재 뉴질랜드 웰링턴 외곽에 있는 부대 본부에 보관돼 있다.

▼“어둠 틈타 압록강으로… 새벽 2시 신의주 향해 포격”▼

■ 참전용사회장 짐 뉴먼 씨 

 

“위험지역 진격” 침묵속 항해 해군 취약한 北 대응 못해

 

뉴질랜드 한국전쟁참전용사회 회장인 짐 뉴먼 씨(77·사진) 1951 9월 무렵의 압록강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해군으로 참전한 그는 뉴질랜드 해군 프리깃함 하웨를 타고 심야에 몰래 북상해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 신의주 지역을 직접 포격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지난달 말 오클랜드 시에서 만난 뉴먼 씨는 “언론에는 처음 공개하는 것”이라며 당시 상황을 기록한 회고록을 건넸다.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요약 발췌했다. 

“서해 지역을 지키던 하웨와 세인트브리지베이(영국 해군 소속)는 그날 오후 북쪽으로 향했다. 밤이 오자 해안선이 보이지 않았다. 선장 등 일부를 빼고는 배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낮 동안 충분한 포탄이 지급됐고 포를 면밀히 점검했기 때문에 뭔가 특별한 일이 있음을 짐작할 뿐이었다.

선원들은 이른 저녁식사를 한 뒤 전투대형을 갖췄다. ‘위험지역’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이 고지됐다. 배는 불을 끄고 레이더를 이용해 항해했다. 배가 속력을 줄이자 멀지 않은 거리에 희미하게 육지가 보였다. 달도 뜨지 않은 어둠 속에서 125명의 선원들은 무거운 침묵을 지켜야 했다. 

오후 11시경. 배는 압록강 어귀에 들어섰고 상류를 향해 9노트로 항해했다. 오전 2시가 되자 배가 갑자기 멈추더니 180도 회전했다. 이윽고 남쪽의 항구 쪽으로 총과 포의 사격이 시작됐다. 배 안의 모든 무기가 항구를 향해 불을 뿜기 시작했다. 사격과 포격은 1015분 계속됐고 포신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어 우리는 강을 빠져나왔다. 북한 쪽에서는 우리를 향한 어떤 대응사격도 없었다. 우리는 북한 쪽의 피해상황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북한은 스스로 (해군력 측면에서) 얼마나 취약한지 생각해 볼 기회가 됐을 것이다.

 

<8>터키 상이용사의 대 이은 한국사랑

“스탈린언덕서 지뢰 펑… ‘칸 카르데시’에 내 발목을 묻었소”

 

“터키-한국 가교 역할”

 

6·25전쟁 참전 상이용사인 압둘카디르 타브샨 씨(오른쪽) 9일 큰아들 우스트네르 타브샨 씨와 함께 한국-터키 민간협력단체인 ‘앙카라서울경제협회’ 사무실 건물 입구에서 협회 간판을 가리키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퍽∼.’ 1952년 5월 15일 오후 5시. 경기 파주시 문산의 일명 스탈린언덕에서 전투를 마치고 귀대하던 터키 2여단 1대대 2중대 1소대장 압둘카디르 타브샨 중위(당시 27세)는 순간 주저앉았다. 지뢰가 터지면서 오른쪽 복사뼈 아래 발목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피범벅이 된 발목에서는 격한 통증이 몰려왔다. 소대원들이 몰려와 허리띠를 풀어 발목을 묶었다. “소대장이 다쳤다”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대원들은 의무병에게 위치를 알리기 위해 하늘에 총을 여러 발 쐈다. 의무병이 들것을 가져올 때까지 40분이 더 걸렸다.》 

 

명예를 지킨 아버지 

“공산주의 싫어 참전 지원… 지금 전쟁나도 또 갈 것”

양국우호 앞장선 아들  “상이군인은 존경의 대상… 자긍심 갖고 교류 사업”

 

○ 6시간 동안 이어진 혈투 

▲박격포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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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압둘카디르 타브샨 당시 중위(왼쪽에서 네 번째)가 터키 2여단 1대대 2중대 1소대 박격포 분대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9일 앙카라에서 만난 타브샨 씨(85)는 58년 전 그날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여단장이 전날 오후 5시 2중대에 스탈린언덕을 점령하라고 명령을 내렸지. 스탈린언덕은 낮에 우리가 언덕을 점령하고 돌아서면 밤에 중공군이 차지하곤 했어. 10여 일째 이런 상태를 되풀이하며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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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 대원 90여 명은 이날 오전 8시부터 스탈린언덕으로 향했다. 오전 10시 멀리서 중공군의 총소리가 들렸다. 오후 4시까지 6시간이 넘는 혈투가 이어졌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터키군은 중공군의 총성이 멈추면 다시 전진했다. 이날 터키군은 중공군 20여 명을 사살하고 4명을 포로로 잡았다. 터키군은 4명이 숨지고 3명이 부상당했다. 

 

“발목이 잘려 나갈 때 ‘죽었다’고 생각했지. 순간 갓난아기였던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어. 이제 못 볼 것 같았지. 침착하게 소리를 지르지 않고 의무병을 찾았어. 전쟁터에서는 여러 상황이 있을 수 있지만 내가 다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소.”

 

○ 생후 보름 지난 아들을 뒤로하고 

그는 부인이 첫아들을 낳은 지 15일 만에 한국으로 떠났다. 타브샨 씨는 “공산주의를 싫어했고 이게 확산되는 것을 막고 싶어 한국전쟁 참전을 자원했다”며 “아내는 반대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터키에서 부산까지 배로 27일이 걸려 1951년 11월 20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타브샨 씨는 춘천, 원주, 수원, 파주 등을 돌며 7개월간 전장을 누볐다. 그에게는 주로 정찰 임무가 맡겨졌다. 

 

발목을 잃은 뒤 그는 서울 영등포의 한 병원을 거쳐 일본 도쿄(東京)의 적십자병원으로 후송됐다. 다시 미국 워싱턴으로 옮겨져 나무로 된 의족을 맞췄다. “처음 의족을 발에 끼웠을 땐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쓸 만했지. 아니, 다시 발이 돌아와서 오히려 기뻤어. 처음에는 목발도 같이 썼지만 점차 적응해 목발은 사용하지 않게 됐어.”

 

터키로 귀국해 해군병원에 입원했던 타브샨 씨는 1952년 11월 전역했다. “군인으로 자긍심이 컸는데 솔직히 안타까웠지. 나는 군사 중고교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해 당시에는 군인의 삶만 생각했었으니까.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걱정만 했어.”

 

6·25전쟁에 참전했던 동료 장교들은 대부분 장군으로 진급했고 그의 육사 동기 중에는 총사령관(합참의장)도 나왔다. 군복을 벗은 타브샨 씨는 1952년 12월 이스탄불에서 동쪽으로 1700km 떨어진 고향에 돌아왔다. 

 

“집에 도착했을 때 아내는 ‘환영한다’고 한마디만 한 뒤 나를 껴안고 울기만 했지. 젖먹이 아들은 내가 아빠인지 몰라보더군. 솔직히 죽지 않고 고향집에 도착할 수 있어 기쁘기만 했소.” 타브샨 씨는 이후 군수협력업체 직원을 거쳐 30년간 터키 산림청에서 근무했다. 

 

○ 아들과 함께 한-터키 우호 다져 

그의 큰아들 우스트네르 타브샨 씨(59)는 “터키인들은 상이군인을 놀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아들까지 존경한다.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큰아들은 지난해 12월 사재를 들여 한국-터키 민간협력단체인 ‘앙카라서울경제협회’를 세웠다. 타브샨 씨는 명예회장을 맡았다. 

 

큰아들은 “터키의 젊은이들이 ‘한국은 혈맹국가’라는 사실을 알게 하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단체를 만들었다. 경제, 문화 교류뿐만 아니라 양국 간에 우호협력을 증진시키는 일을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학생 교류 등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타브샨 씨도 “젊은층에 두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을 널리 알려야 하는데, 이런 것이 부족해 아쉽다”며 “두 나라가 형제 국가임을 드러낼 수 있는 문화 산업 경제 등 다양한 교류가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타브샨 씨는 인터뷰를 마치며 6·25전쟁 참전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한국을 사랑하고 좋아하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한국에 전쟁이 나서 다시 불러주면 이 다리를 끌고 갈 거요. 내가 거기서 피를 흘렸다는 것은 한국이 나의 다른 조국이요, 민족임을 뜻하는 거지.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이 터키를 응원했을 때 난 너무나도 기뻤어.” 

 

그의 성(姓) 타브샨은 터키어로 토끼라는 뜻이다. 타브샨 씨는 한국에서 ‘산토끼’ 노래를 배웠고 아들과 손자들에게 한국어로 이 노래를 가르치고 있다.

 

■ “아버지세대의 용맹 젊은층에게 알려야” 

6·25 연구하는 참전 2세대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절대 한국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죠. 역사 속에 아버지를 남기고 싶어 책을 쓰고 있습니다.” 

 

앙카라 우푹대의 알리 데니즐리 역사학과 교수(57)는 6·25전쟁 연구에 일생을 바쳐온 터키의 대표적인 6·25전쟁 연구 학자다. 육군 대령 출신인 그는 2006년 연구를 위해 장군 진급을 포기했다. 그의 장인은 1953년 6·25전쟁에 참전했고, 아버지는 1954년 유엔군 소속 터키군으로 한국에서 근무했다. 

 

데니즐리 교수는 올해 사비를 털어 ‘한국전쟁 군우리 영웅들’ 등 터키의 6·25 참전 관련 책 3권을 펴냈다. 앞으로 20여 권을 더 내놓을 예정이다. 그는 20여 년 전부터 6·25전쟁을 연구했고 1992년 앙카라의 하제테페대에서 6·25전쟁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요즘 터키 젊은이들은 터키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조차도 잘 모른다”며 “이런 책을 쓰는 게 밑 빠진 독에 물붓기라는 것을 알지만 당시 한국의 공산화를 막는 데 일조한 터키군을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이스탄불 아나돌루의료원의 네크메틴 오젤릭 사무장(52)은 1951년 6·25전쟁에서 숨진 5촌 아저씨를 기리기 위해 1985년부터 헌책방 등을 돌며 6·25전쟁 관련 사진과 자료, 훈장 등을 모아 박물관에 기증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2003년부터는 터키 육군사관학교와 중고교, 각종 단체에서 터키의 6·25전쟁 참전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그는 “터키 참전용사들이 얼마나 용감했는지를 터키인들에게 알리는 활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 터키군 희생 덕에 미군 주력부대 무사했다 

중공군 인해전술 맞서 평남 군우리서 게릴라전 

후퇴 길목 지켜냈지만 퇴로 차단당해 희생 커 

 

터키에서 한국은 ‘피로 맺어진 형제의 나라’라는 뜻의 ‘칸 카르데시(Kan Kardesi)’로 불린다. 터키어로 칸은 피를, 카르데시는 형제를 의미한다. 박학량 터키 주재 국방무관(육군 대령)은 “80세 이상의 참전 노병들은 스스로를 ‘코렐리(한국인)’라고 부를 정도로 한국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터키는 1950년 10월 19일부터 3차례에 걸쳐 3개 여단을 한국에 보냈다. 총인원 1만4936명이 군우리(평남 덕천), 금양장리(경기 용인), 네바다(경기 연천)전투 등에 투입돼 741명이 숨지고 2068명이 부상당했다. 163명이 실종됐고 244명은 포로로 잡혔다. 터키군은 1974년 10월까지 마지막 1개 분대가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에 머물렀다.

 

터키군은 특히 군우리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군우리전투는 1950년 11월 26일부터 12월 1일까지 평양에서 북쪽으로 80km 떨어진 군우리 일대에서 인해전술로 밀려오는 중공군을 막으며 미8군 주력부대의 철수를 지원한 전투다. 터키여단은 중공군에 퇴로를 차단당해 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이런 희생 덕분에 군우리 서쪽에 있던 유엔군이 후방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8일 앙카라의 참전협회에서 만난 군우리전투 참전 노병들은 당시를 회고하며 눈물을 지었다. 

 

“85만여 명의 중공군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는데, 백기를 들고 항복을 가장하며 몰려 내려왔지. 우리는 퇴로의 병목에 해당되는 부분을 맡아 4박 5일 동안 버텼어. 터키군이 없었다면 추가로 사상자 25만 명 이상이 났을 거야.”(무자페 세부케베 씨·93·당시 수색중대장) 

 

“내가 본 것만 해도 트럭 27대에 부상병이 가득 실려 왔지. 나도 다친 다리를 스스로 치료해야 했어. 나는 결국 중공군에 포로로 붙잡혔지. 풀려날 때까지 하루 한 주먹의 옥수수로 끼니를 때워야 했어.”(벨리 아타소이 씨·80·의무병)

 

“너무 배가 고파 철수하기조차 힘들었어. 우리는 군우리 인근에 머물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주변에 모두 중공군이 가득했어. 게릴라전투를 펼칠 수밖에 없었지.”(케말 알칸 씨·84·소대장)

 

또 1953년 5월 베가스(강원 철원 인근)전투에 참여했던 야사르 에켄 씨(80)는 “포격이 시작돼 그저 한 번 붙겠다고 생각했는데, 그야말로 비가 내리는 듯한 폭격을 받았다”며 “스물여섯 시간 동안 열여섯 차례나 진지를 되찾고 빼앗기기를 반복했다”고 전했다.

글·사진 앙카라·이스탄불=이유종 기자 pen@donga.com

 

<9>그리스 청년들이 동쪽으로 간 까닭은?

“포탄속 부상 당한 나를 살린건 16세 한인 군무원”

○ 카라차스 소위의 또다른 전쟁 

 

7년동안 11차례 수술 
복부엔 그날의 상흔 뚜렷 
 
○ 좌우 내전서 싹튼 반공의식 
자유와 평화 지키려 참전 
“우리의 소원도 남북 통일”

 

▲6·25전쟁 당시 복부 관통상을 당한 알렉산드로스 카라차스 씨가 수술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카라차스 씨는 부상으로 7년간 11차례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1951년 10월 3일 오후 6시 강원 철원 인근 ‘스코치 313고지’. 알렉산드로스 카라차스 소위가 막 참호로 들어가려던 때였다. 몸을 숙이는 순간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뭔가가 복부를 관통했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 누군가 그를 질질 끌고 조금씩 뒤로 옮기는 걸 느꼈다. 카라차스 소위가 벌여야 했던 길고 긴 또 다른 전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 카라차스 소위의 참전기

18일 그리스 아테네 국회의사당 인근에 자리한 그리스한국전참전용사협회 사무실에서 만난 카라차스 씨(84)는 여느 노인이나 다름없었다. 세월의 흔적이 쌓인 굽은 등, 주인만큼 연륜이 엿보이는 낡은 파이프 담배…. 카라차스 씨가 상의를 올려 보여준 복부엔 전쟁의 비참함이 연대기처럼 새겨져 있었다.

313고지 전투는 미군이 좌우를 맡고 그리스군이 중앙을 담당하는 식으로 전개됐다. 유엔군은 3개 사단, 중공군은 9개 사단이었다. 압도적인 수적 열세 속에 미군이 진격을 못하자 그리스군은 3면에서 공격을 받게 됐다. 카라차스 소위의 부대도 중공군의 집중 포화에 갇혔다. 

당시 그의 부상은 심각했다. 파편이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가 배 앞부분으로 튀어나왔다. 갈비뼈 2개가 없어지고 간도 절반 정도 손실됐다. 십이지장도 반밖에 남지 않았다. 오른팔과 왼쪽 다리에도 파편이 박혔다. 

 

그는 일본 도쿄(東京)로 후송돼 7번 수술대에 올랐다. 그는 “동료들이 나를 나사로(예수가 부활시킨 성서 속의 인물)라고 불렀다. 죽을 줄 알았는데 살아났기 때문이다”며 “지금도 복부가 밭을 갈아놓은 듯하다”고 말했다. 카라차스 씨는 그리스로 돌아온 뒤에도 4번의 수술을 더 받았다. 11번의 수술이 끝날 때까지 7년이 걸렸다.  


카라차스 소위가 부상했을 때 그를 구출한 사람은 한국인이었다. 그는 “16세의 김 씨라고만 알고 있다. 나를 따르던 군무원이었는데 막사에 있으라고 했더니 어느새 내 곁에 와 있었던 것 같다”며 “포탄이 비 오듯 쏟아져 김 씨가 몸을 땅에 붙인 채 내 군복 뒷덜미를 잡고 끌었다”고 전했다. 그는 지금도 낡은 사진 속에 있는 김 씨를 수소문하고 있다. 

 

카라차스 씨는 이후 독일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뒤 경기 여주에 있는 그리스참전비를 설계하는 등 6·25전쟁이 잊혀진 전쟁이 되지 않도록 애쓰고 있다.

 

○ 그들은 왜 한국에 갔나 

그리스는 1950년 11월부터 보병 1만여 명과 수송기 1개 편대를 한국에 파병했다. 보병은 미 1사단에 배속돼 철원과 경기 이천 지역 등 주요 거점에서 많은 전과를 거뒀다. 특히 전쟁 막바지인 1953년 6월 강원 김화-철원-평강을 잇는 ‘철의 삼각지’에서 벌어진 해리고지 사수작전은 6·25전쟁 사상 아주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기록돼 있다. 해리고지 전투는 현재 미국에서 영화로 제작되고 있다.

 

참전용사들은 하나같이 6·25전쟁에 참전한 이유에 대해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하지만 자유와 평화라는 대의를 목숨과 바꿀 수 있을까. 돈벌이 목적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파병 군인의 98%는 자원해 참전했고, 당시 사병 월급은 20달러 정도로 그리스 기업의 평균 월급인 100달러의 5분의 1에 불과했다.

 

더욱이 그리스는 6·25전쟁 직전인 1944∼1949년 정부군과 공산군 간 심각한 내전을 겪었다. 사망자가 5만 명에 달했다. 게릴라전으로 진행된 내전에선 한국에서처럼 가족마저도 좌우로 갈려 서로 총부리를 겨눴다. 이 때문에 당시 그리스에서는 반공 정서가 매우 강했다. 현지에서는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 이후 최대 규모의 군인이 해외로 파병됐다고들 한다. 

 

6·25전쟁 때 목에 박힌 파편을 아직까지 제거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콘스탄티노스 피시오티스 씨(85)는 “내게 한국전쟁은 그리스 내전에 이은 2번째 전쟁이었다. 한국에서 공산주의를 몰아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고 말했다. 공군 조종사로 참전한 아크리보스 촐라키스 씨(80)는 “한국에 갔을 때 한복 입은 여자들은 왜 허리띠를 가슴에 맬까 하고 의아해할 정도로 한국을 전혀 몰랐지만 우리에게는 자유를 수호해야 한다는 이상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스틸리아노스 드라코스 참전용사협회장은 “우리의 작은 도움으로 한국이 성공한 나라가 돼 고맙다.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참전용사들이 눈을 감기 전에 한국이 통일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우릴 잊지않고…” 

본보 그리스 현지 취재하자 한국전참전協 감사패 전달▼

▲그리스한국전참전용사협회는 21일 동아일보에 그리스의 6·25전쟁 참전용사들을 취재해준 데 대한 감사의 뜻을 담은 명예패(Honoris Causa·사진)를 전달했다. 명예패는 6·25전쟁 파병 당시 그리스군의 문양을 본떴다.

 

스틸리아노스 드라코스 협회장은 이날 전몰용사 추모식에서 “전장에서 숭고한 생명을 희생한 동료전사들의 영혼이 편히 쉴 수 있기를 기원하는 오늘 이 거룩한 추모식에 동아일보가 참여해 준 데 대해 감사드린다”며 명예패를 전달했다. 그는 또 “한국을 대표하는 신문사의 이번 취재가 한국과 그리스 간 친선관계 증대에 기여하리라 믿는다”고 밝혔다. 

 

명예패 증정은 당초 이날 행사 일정에는 없었다. 참전용사협회 측은 동아일보가 그리스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조명하기 위해 직접 기자를 파견했다는 점에 감동해 명예패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동아일보를 대표해 패를 받은 기자는 “그리스 참전용사들이 한국을 제2의 조국으로 삼을 정도로 한국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는 데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6·25전쟁 영웅들을 조명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큰 박수로 화답했다. 이날 행사는 6·25전쟁 전몰용사 추모비가 있는 아테네 인근 파파고스 시에서 열렸으며 참전용사 80여 명과 장태신 주그리스 한국대사 등이 참석했다.

 

▼단신 월남→소년 통역병→신학생→사업가 역경의 ‘그리스 드림’

그리스軍 입대 한국인 

알 렉산드로스 장 씨 스토리▼ 

 

▲알렉산드로스 장 씨(오른쪽)가 스틸리아노스 드라코스 그리스한국전참전용사협회 회장과 함께 협회 사무실에서 한국 지도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6·25전쟁 참전용사들을 만나기 위해 그리스 아테네를 찾은 18일, 한 동양인이 그리스한국전참전용사협회 사무실에 들어오더니 기자의 손을 꼭 잡았다. “나, 알렉산드로스 장이라고 하오. 참전용사협회 회원이오.” 북한 억양이 녹아 있었다.  


한국명 장려상 씨(74). 그는 그리스한국전참전용사협회의 유일한 한국인 회원이다. 고향은 평양. 장 씨의 인생 역정은 14세 때이던 19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장 씨는 지하반공활동을 벌이던 친형 때문에 가족과 함께 토굴 등에서 숨어 지냈다. 그러다 그해 12월 대동강을 건너 홀로 월남했다. “연합군이 퇴각할 때 대동강 다리를 끊었어. 강이 얼어 있었는데 가운데는 배가 지날 수 있게 얼음이 깨져 있었지. 그래서 거기를 헤엄쳐 건넜어.

남한으로 건너온 뒤 그는 먹고살기 위해 그리스군 군무원으로 입대했다. 당시 연합군은 군수물자 보급 등을 위해 한국인들을 고용하곤 했다. 머리가 좋았던 장 씨는 다른 사람보다 빨리 그리스어를 배웠다. 덕분에 1951년 말 부대장 통역원으로 진급했다. 정식 그리스군 병사가 된 것이다. 

장 씨의 업무는 통역과 군수품 보급이었지만 전투가 일어나면 총을 들고 나가야 했다. 전투요원과 행정병 간 구분이 없었다. 장 씨도 철원 낙타고지에서 다리에 포탄 파편이 박히는 부상을 입었다. 

전쟁이 끝나고 그리스군이 1955년 본국으로 철수할 무렵 장 씨는 그리스 정부의 장학생으로 선발돼 다른 병사들과 함께 아테네에 첫발을 디뎠다. 처음에는 아테네대 신학대를 다녔다. 사람들은 장 씨가 한국인 최초의 그리스정교회 신부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사제의 길을 포기하고 같은 학교 고고학과를 한 번 더 다닌 뒤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리스정교회가 한국에 교회를 세울 때 나를 신부로 파견하려고 했어. 그런데 월남 이후 혼자 살다 보니 가족이 그립더군. 결혼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싶어서 보통 사람의 삶을 살기로 했지. 

장 씨는 현지인과 결혼한 뒤 군납사업을 크게 했다. 아테네 상공회의소 위원, 그리스 신민당 교육분과 위원으로 활동할 정도로 성공한 기업인이 됐다.

 

▼“방랑시인 ‘김삿갓’을 아시오? 
참전 유가족 마초카스씨 한국 문학 전도사 맹활약▼

▲드미트리오스 마초카스 씨가 한국 문학을 소개하는 자신의 가제본 저서를 들고 있다. 저서의 표지 그림은 세종대왕.

 

벽안의 그리스인이 대뜸 시인 ‘김평연’을 아느냐고 물었다. 당황한 기자에게 그는 다시 ‘김삿갓’이라고 발음했다.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 김병연에 대한 질문이었다.

 

드미트리오스 마초카스 씨(73). 여덟 살 많은 형이 6·25전쟁에 소위로 참전했다가 1951년 사망한 전몰 유가족이다. 전사한 형 때문에 한국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그는 통신회사에 다니다 은퇴한 뒤 개인적으로 한국 문학을 그리스에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그가 정리한 문집 ‘한국시선집(Anthology of Korean Poetry)’은 고려가요, 한시, 판소리, 근현대시 등 375편을 담고 있다. 시인도 윤선도, 정철, 조지훈, 이육사 등 86명이 소개돼 있다. 신화의 나라 그리스에서 내는 책답게 첫머리에는 한국 문학의 철학과 정서를 가늠할 수 있도록 단군신화를 수록했다. 

 

마초카스 씨는 “한국 문학은 왕에 대한 충성, 자연에 대한 애정, 부모에 대한 공경 등을 담고 있는 게 특징”이라며 “몇 년 전 그리스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발간하는 소식지를 접한 뒤 한국 문학에 매료됐다”고 설명했다. 

 

마초카스 씨는 6·25전쟁의 발발 배경도 연구하고 있다. 그는 미국 우드로윌슨센터 등에서 자료를 입수해 1949년 중국과 소련 간 비밀협정, 소련과 북한 간 전보 등을 분석하고 있다. 그는 “수많은 사료가 한국전쟁 발발의 원인이 북한에 있다는 점을 증명해주고 있는데 아직까지도 미국이나 남한 측의 전쟁 유도설 등이 나오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글·사진 아테네·파파고스=고기정 기자 koh@donga.com

 

<10>에티오피아 황실 근위대의 참전

전사는 있어도 포로는 없다… ‘트라이앵글 힐’서 중공군과 사투”

 

《중공군이 아편을 맞고 술에 취한 채 미친 듯이 싸운다는 소문은 사실 같았다. 고지 위의 중공군을 향해 총을 아무리 쏘고 또 쏴도 그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총을 맞고 쓰러진 중공군이 다음 날 살아나 다시 싸우러 나오는 것 같았다. 전투가 끝나고 전우들의 시체를 메고 내려오며 ‘내일 나는 누구 어깨에 실려 내려오게 될까’라는 상상을 수십 번이나 했다. 에티오피아의 6·25전쟁 참전부대인 칵뉴부대 소속이었던 일마 벨라추 씨(79)는 “사람이 아니라 마치 악령을 붙들고 사투를 벌이는 것 같았다”고 1952년 10월 강원도 김화 부근의 ‘트라이앵글 힐’ 전투를 회상했다.》 

 

6037명 참전 121명 사망 

피로 물든 고지 끝내 탈환 

처음 겪는 혹한에 동상 속출 

 

“4월 서울방문 설렌다” 

정부초청 20명 방한 예정 

“발전상에 기절할지 몰라” 

 

○ 트라이앵글 힐에서의 사투 

 

“이곳이 ‘트라이앵글 힐’입니다. 참전한 전우들 대부분이 이곳에서 죽었어요.” 

 

지난달 23일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6·25참전용사회관에서 만난 벨라추 씨는 지도 한구석에 그려진 삼각형을 짚었다. 색 바랜 지도에는 당시 주요 전투지역과 지명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삼각형 아래쪽에는 ‘김화(金化)’라는 한자가 또렷했다. 철원, 평강과 함께 ‘철의 삼각지대’의 한 축을 이루는 곳이었다. 당시 미군 제7사단에 배속돼 있던 칵뉴부대에 주어진 임무는 중공군이 점령한 이 고지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매일같이 하늘에서는 폭격기의 포탄이, 그리고 고지 위에서는 중공군의 총알이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중공군의 꽹과리 소리와 비행기 폭격 소리가 뒤섞여 귀가 먹먹해지는 바람에 옆에서 쓰러지는 전우들의 비명도 제대로 듣지 못할 정도였다. 테세마 멜레세 씨(80)는 “이때 들은 꽹과리 소리와 비행기 폭격 소리가 귀에 박혀 한 번은 귀국한 뒤 거리를 걷는데 공사장의 요란한 소리를 듣고는 ‘엎드려’라고 소리치며 물웅덩이로 몸을 던진 적이 있다”고 말했다. 

 

지독한 전투 끝에 칵뉴부대는 1952년 겨울이 가기 전에 트라이앵글 힐을 중공군으로부터 빼앗았다. 하지만 희생은 컸다. 6·25전쟁에 참전한 에티오피아군 전사자 121명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멜레세 씨는 “이후에도 콩고 등 아프리카 여러 곳에서 전투를 했지만 흙이 (피 때문에) 검붉게 변한 것을 처음 봤다”고 회상했다.

 

○ 황실근위대였던 칵뉴부대 

6·25전쟁 발발 직후 유엔의 파병 요청을 받은 하일레 셀라시에 당시 에티오피아 황제는 황실근위대를 주축으로 참전부대를 창설했다. 칵뉴는 현지 암하라어로 ‘격파하다’ ‘혼란에 질서를 잡다’는 의미로 황제가 부여한 명칭이다. 에티오피아는 5차례에 걸쳐 모두 6037명을 한국에 보냈다. 

 

1951 5월 부산항에 도착한 칵뉴부대는 화천 김화 철원 등 격전지에서 전투를 수행했다. 이들의 기억 속에는 인해전술로 덤벼드는 중공군 못지않게 영하 30도를 넘나드는 혹독한 강원도의 겨울이 크나큰 적으로 남아 있다. 두꺼운 군용 잠바가 지급됐지만 4계절 내내 평균 온도가 20도를 넘는 중부아프리카에서 살아온 그들에게 생전 처음 겪는 혹한은 말 그대로 살인적이었다. 내의를 몇 겹이나 껴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병사는 끝내 동상으로 전선을 떠났다. 

카사 그저우 씨(80)는 “처음 보는 눈은 신기하기도 했지만 정말 끔찍한 추위였다. 가장 친한 전우가 동상으로 귀를 잘라내야 했다”고 말했다. 방아쇠가 얼어붙어 총을 제대로 쏠 수도 없었다. “중공군이 밀려오는데 방아쇠가 안 당겨지는 거야. 언 손가락도 아프고 해서 끈을 방아쇠에 묶고 발에 연결해 페달을 밟듯이 총을 쏘도록 장치를 만들었지. 한결 낫더군. 

근위대답게 절도와 명예를 강조했던 칵뉴부대의 철칙은 절대 포로가 생기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전투가 끝나면 반드시 그 자리에서 인원을 점검했다. “한 번은 인원점검을 해보니 한 명이 없는 거야. 전원이 그 지역으로 다시 가보니 중공군 5, 6명에게 끌려가고 있더군. 결국 달려들어 구출해 왔지. 전우의 시체도 적에게 넘기면 안 된다는 규칙 때문에 전투 중 전사하면 어깨에 멘 채로 이동을 했지.(멜레세 씨)

 

▲지난달 23일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참전용사 회관에서 오랜만에 재회한 참전용사들이 근처에 마련된 전사한 전우들의 묘비를 매만지며 당시 상황을 회상하고 있다. 에티오피아는 6037명을 파병했으며 이 중 121명이 전사했다. 왼쪽부터 일마 벨라추, 테세마 멜레세, 칼릴리루 데스타, 카사 그저우 씨.


○ “4월 서울 방문…가슴이 설렌다” 

요즘 6·25참전용사회의 화제는 4월 한국 방문이다.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카사 그저우 씨를 비롯해 참전용사 20명이 5 6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이미 춘천시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는 벨라추 씨는 그저우 씨에게 짐짓 아는 체 했다. “당신 이번에 한국에 간다고? 아마 놀라서 기절할지도 몰라. 거기는 완전히 별세계라고. 

그저우 씨는 갑자기 생각난 듯 “‘슨타요’는 잘 지내고 있을까”라고 물었다. 슨타요는 암하라어로 ‘얼마나 많은 비참한 것을 봤겠느냐’는 뜻으로 에티오피아군이 돌봐주던 당시 여섯 살짜리 한국 소년이다. 하지만 테세마 씨는 고개를 가로지었다. “쓸데없는 소리. 그 친구는 아마 우리를 잊었을 걸. 하지만 다른 한국인처럼 큰 부자가 되어 잘살고 있을 거야. 

멜레세 씨는 “1951년 한국에 들어온 순간 앞으로 한국이 잘살게 될 것이라고 느꼈다”며 강원도 전선에 배치됐을 때의 첫인상을 회상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상태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낙담한 채 동냥을 다닐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사람들이 바지를 걷은 채 열심히 농사를 짓고 있더군. 무척 놀라운 광경이었어.

 

▼“옛 사회주의 정권이 내 모든 것 앗아가”▼  

■ 참전용사 베다다 씨 

재산 몰수되고 가족 흩어져…참전용사 거의 궁핍한 생활

 

 

6·25전쟁 참전용사 마이클 베다다 씨(79·사진)의 집은 움막에 가까웠다. 가로세로 4m가 채 안 되는 방에서 딸과 며느리 손자 등 여섯 식구가 모여 살았다. 양철 지붕은 곳곳에 구멍이 나 있었다. 화장실은 이웃집과 함께 쓰는 공용화장실이고 수도시설이라곤 집 밖에 설치된 수도꼭지 하나가 전부였다. 베다다 씨 가족의 고정 수입은 월 160비르(약 1만6000원)의 연금. 이 중 집세 30비르, 수도료 15비르, 전기료 40비르를 내고 나면 남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며느리가 일용노동자로 돈을 벌고 싶어 하지만 일자리가 마땅치 않다.

 

1974년까지만 해도 베다다 씨는 황실근위대로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6·25전쟁 참전 후에도 정부가 아디스아바바 북쪽의 거대한 임야를 참전용사들 몫으로 마련해줬다. 그러나 멩기스투 소령을 주축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의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참전용사촌(코리안빌리지)의 집과 땅을 몰수당하고 군에서도 쫓겨난 뒤 아디스아바바 외곽의 판자촌으로 이주했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더군. 누구도 나를 써주려고 하지 않았어.” 결국 이웃에 도움을 청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해야 했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공부를 잘했던 자식들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며 모두 학업을 포기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고등학생이던 큰아들은 농사를 짓겠다며 시골로 내려갔고 둘째, 셋째아들은 지방으로 이주해 일용노동자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소식을 가끔 들을 뿐이다. 

 

이런 까닭에 그동안 가족들은 베다다 씨의 6·25전쟁 참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렸다. 손자인 립사 군(15)도 할아버지의 6·25전쟁 참전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베다다 씨는 그동안 고이 보관해왔던 6·25전쟁 참전 당시의 빛바랜 흑백 사진들을 꺼내 보여주며 “멩기스투 정권은 6·25전쟁에 대한 기록 대부분을 없애버려 이후 에티오피아에서 6·25전쟁은 잊혀진 전쟁이 됐고 굳이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자신 때문에 집안이 가난해지고 충분한 지원을 해주지 못하는 것을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6·25전쟁 참전용사 대부분이 베다다 씨와 비슷한 형편이었다. 이제 참전용사들도 몇 명 남지 않은 코리안빌리지는 아디스아바바의 대표적인 슬럼가다. 베다다 씨는 “생활이 어려워진 참전용사들은 돈이 되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팔았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에티오피아의 최대 시장인 마르카토 시장에서는 6·25전쟁 참전 훈장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기자가 지난달 24일 마르키토 시장을 찾았을 때도 훈장 한 개가 150비르 정도의 가격에 팔리고 있다. 

 

매년 각종 단체에서 지원금이 지급되고 있지만 참전용사 가족들이 체감하기에는 부족한 형편이다. 이곳에서 16년 동안 선교활동을 해온 박국도 목사에 따르면 “이제 참전용사 대부분은 4, 5년밖에 더 살기 어렵기 때문에 가족들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 많다”며 “매년 돈을 얼마씩 주고 할 일은 끝냈다는 식으로 진행할 것이 아니라 교육이나 사업시설 등 이들이 자립할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생큐, 코리아▼ 
한국민관단체 참전용사촌 학교-병원 운영 
수업료-점심 무료… 진료비도 절반만 받아 

취재 기간 중 만난 참전용사들은 인터뷰가 끝날 무렵 항상 “한국인들에게 매우 감사하고 있다고 전해 주세요”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비록 충분치는 않지만 그래도 한국이 자신들을 돕는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시민단체인 ‘월드투게더’가 참전용사촌인 ‘코리안 빌리지’에서 각각 운영하는 학교 두 곳의 수업료는 모두 무료다. 학생들에게 제공되는 점심 식사도 공짜다.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대부분 참전용사들의 자녀들이지만 일부 저소득층 학생들도 다니고 있다. 할아버지가 6·25전쟁 참전용사로 ‘월드투게더’가 운영하는 ‘아디스 비르하루 스쿨’에 다니는 아베르니제르 바유 군(12)은 “한국이 그런 것처럼 나 역시 이곳에서 공부해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코리안 호스피털’로 더 유명한 병원 MCM(Myungsung Christian Medical Center)도 대표적인 사례다. 내과, 외과, 산부인과, 신경정신과, 정형외과, 치과 등 7개 과가 있는 이 병원은 에티오피아에서 가장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병원으로 꼽힌다. 특히 아디스아바바 시에서 최초로 응급실을 갖춘 곳이어서 매일 많은 환자로 북적인다. 병원은 6·25 참전용사들에게는 진료비의 절반만 받고 있다

지난달 22 MCM 부설 간호학교의 기공식에 참석한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는 “6년 전 이곳을 방문했는데 6·25 당시 우리를 도와준 나라가 의료시설이 없어 고생하는 것을 보고 돕기로 했다”며 “이곳의 빈부격차가 워낙 심해 부자 환자들에게는 진료비를 조금 더 받고 가난한 환자들에게는 진료비를 덜 받는 식으로 운영한다”고 말했다.
글·사진 아디스아바바=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11>콜롬비아인들이 갖는 한국전 의미

“코리아의 자유를 위해 피 흘리며 쓰러진 친구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지난달 23일 정오 남미 콜롬비아 보고타 시내 베라크루스 성당. 가톨릭 국가의 수도 중심부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성당의 본당 의자마다 태극기와 콜롬비아 국기가 나란히 꽂혀 있었다. 수백 명의 콜롬비아인들이 좌석은 물론 복도까지 가득 메운 가운데 ‘불모고지(Old Baldy) 전투 희생자 추모 미사’가 시작됐다 

57년 전 이날 한국 땅에서 쓰러져간 젊은이들을 추모하는 신부의 강론이 이어졌다. “오늘 우리가 추모하는 친구들은 형제국가인 한국의 자유를 위해 싸우다 쓰려졌습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부활했듯이 그들의 희생은 한국과 콜롬비아가 형제국가로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거름이 되었습니다.”》

 

“한국은 형제국가” 
매년 4차례 기념행사… 시민들도 “코리아” 하면 반겨

국방부에 만든 기념공원 
“한국서 동아일보기자 왔다”… 보안구역 이례적 공개

미사가 끝나자 참석자들은 양국 국기가 꽂혀 있는 대형 조화를 앞세우고 성당 밖으로 행진했다. 노구를 이끌고 온 참전용사들과 전사자 유족들은 부둥켜안고 인사를 나눴다. 성당 외벽에는 6·25전쟁에서 숨진 전사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콜롬비아인들에게 ‘코리아’란 이름은 기자가 보고타에 도착하기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만큼 중요한 의미로 자리 잡고 있었다. 콜롬비아는 남미에서 유일하게 유엔의 파병요청에 호응했다. 보병 1개 대대와 해군 프리깃함 등 총인원 4314명을 보내 전사 143, 실종 65, 부상 567명의 인명피해를 봤다. 6·25전쟁은 콜롬비아가 국경 인근의 자잘한 분쟁을 제외하고 20세기에 젊은이들을 외국에 보낸 유일한 전쟁이었다.

콜롬비아 병사들은 미군 24사단 예하에 편입돼 금성 진격작전(1951 10), 김화 400고지 전투(1952 6), 볼모고지 전투 등 굵직한 전투들에서 주역으로 뛰었다. 군율이 엄하고 용맹하기로 소문났으며 ‘절대 후퇴하지 않는다’는 특유의 모토를 지켰다.

 

▲보고타 시내 국방부에 있는 한국전쟁 참전기념물. COREA(한국)’에서 맹위를 떨친 병사의 동상 뒤로 콜롬비아군이 격전을 벌인 불모고지(Old Baldy)와 금성(Kumsong)을 상징하는 야산 모양의 돌담이 세워져 있다.

 

참전 후 반세기가 훨씬 더 지났지만 콜롬비아인들은 참전의 의미를 기리는 데 매우 적극적이다. 3월 불모고지 전투 기념식(참전용사회 주최), 6월 기념식(대한민국 무관부 주관), 10월 금성전투기념식(참전용사회 주최), 11월 파병기념식(파병해군회 주관) 등 공식 기념행사만 매년 4차례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참전용사들은 물론 거리와 식당에서 만난 일반 시민들도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한국은 형제국가”라며 반겼다 

추모미사 이틀 뒤엔 보고타 시내에 있는 국방대 경내에서 ‘불모고지 전투 57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국방대의 정문을 통과하자 거대한 석가탑이 눈에 들어왔다. 2003년에 한국정부가 기증한 석가탑 모양의 참전기념탑이 대학 경내의 중심부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날 기념식은 참전용사 100여 명과 콜롬비아군 지휘관들, 홍성화 주콜롬비아 한국대사, 김근준 무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진행됐다.

▲지난달 25일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 시내에 있는 콜롬비아 국방대 영내에서 ‘한국전 불모고지 전투 57주년 기념식’이 참전용사회 주최로 열렸다. 홍성화 주콜롬비아 대사(가운데)와 김근준 무관(오른쪽) 등이 영내에 설치된 석가탑 모양 참전기념탑에 헌화한 뒤돌아나오고 있다.

 

이날 오후 콜롬비아 국방부는 한국에서 동아일보 기자가 왔다는 소식에 보안구역인 국방부의 문을 열어줬다. 국방부 건물은 ‘ㄷ’자 모양으로 배치돼 있는데 그 안의 잘 가꿔진 정원에도 대형 6·25참전 기념물이 세워져 있었다. 콜롬비아 정부가 2003년 3월 23일 건립한 야산 모양의 대형 조형물엔 OLD BALDY(불모고지)와 KUMSONG(금성)이란 글자가 선명했다. 여러 나라의 기념물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거의 독보적인 존재로 6·25참전 기념물이 설치돼 있다.

 

안내를 맡은 콜롬비아 병사에게 기념물 동판에 새겨진 문구의 통역을 부탁했다. 6·25전쟁 당시 미군 24사단장이었던 브라이언 블랙스헤드 소장의 글이었다.

 

“나는 봤다.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병사들이 싸우는 것을. 콜롬비아 병사들은 내가 일생에 걸쳐 본 사람들 가운데 가장 용감했고 자랑스러웠다.” 

 

:불모(不毛)고지 전투: 

1953년 3월 23∼25일 지금은 비무장지대(DMZ) 너머 북한 지역인 275고지(경기 연천군의 북쪽 방향)에서 콜롬비아군 대대가 중공군 제141사단 제423연대와 치른 전투. 사흘간 콜롬비아군 95명이 숨지고 30명이 실종됐으며 중공군은 600명가량 숨졌다. 1952년 6∼8월 미군이 중공군과 벌인 불모고지 전투와는 별개다.


■ 참전 용사가 전하는 전투 

“중공군 물밀듯… 참호속 항복할까 자폭할까 고민”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의 변두리에 있는 한국전참전용사회 사무실에 모인 노병들. 왼쪽부터 에르난도 고메스 회장, 오를란도 가르시아 부회장, 카를로스 프랭크, 페드르 에르난데스, 호르헤 마르키네스 씨.

 

“정확히 57년 전 오늘이었어. 중공군의 포격이 쏟아진 뒤 쓰러진 병사들을 향해 뛰어갔어. 시신을 옮기는데 얼굴이 낯익은 거야. 어릴 적 친구였어. 워낙 사상자가 속출하니까, 병력 보충이 연거푸 이뤄졌는데, 친구는 그날 신규 투입되자마자 변을 당한 거지.”

 

페드르 에르난데스 씨(78)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구 반대편 낯선 나라의 민둥산인 불모고지에서 기적처럼 어릴 적 친구와 재회했는데,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엔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는 그는 “요즘도 술 한잔 먹으면 그 친구가 생각난다”며 씁쓸해했다. 

 

불모고지 전투 57주년 기념일인 지난달 23일 찾아간 한국전참전용사회는 보고타 시 남쪽의 가난한 고지대 마을에 있었다. 낡은 건물이었지만 내부에는 6·25전쟁 관련 사진과 양국 국기, 기념물 등이 단정히 정리돼 있었다. 동아일보의 6·25참전국 탐방 취재 소식을 들은 노병들은 정성스러운 전통음식을 준비한 채 아침 일찍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에르난도 고메스 용사회 회장(74)은 고교 3학년에 재학 중인 16세 때 6·25참전을 자원한 소년병 출신이었다. 

 

“한국이 어디에 있는 줄도 몰랐지만 젊었기 때문에 모험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강했고, 공산주의가 민주주의를 해치는 걸 방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 모병관을 찾아갔더니 ‘더 자란 다음에 오라’며 퇴짜를 놓았지만 사흘 연속 찾아가니 결국 받아주더군.” 

 

역시 고교생이던 16세 때 자원했다는 오를란도 가르시아 부회장(74)은 “어린 병사들이 많아서인지 철모를 엉덩이에 깔고 언덕에서 미끄럼을 타며 놀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실전은 기억하기 괴로울 만큼 치열했다고 노병들은 입을 모았다.

 

“중공군이 눈앞에 보일 만큼 지척에서 대치했어. 밤낮없이 포격이 계속되고 중공군은 빨간색 목도리를 맨 채 피리와 나팔을 불면서 돌진해왔지. 옆에 있던 동료의 하반신이 순식간에 없어져 버리더군. 나도 다리에 파편이 박혔지. 기관총마저 고장 나 참호 속에서 다들 기도만 했어. 항복할까, 자폭할까 논의하다가 해가 뜨자 자폭용 수류탄을 나눠들고 참호 밖으로 나왔어. 그런데 ‘담배 달라’는 영어가 들리는 거야. 미군이 온 거지.”(카를로스 프랭크 씨·76세)  

 

6명의 노병에게 “참전을 후회해 본 적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다들 단호히 “없다”고 했다. 한국에서의 경험이 인간적 성숙에 큰 도움이 됐으며, 한국의 놀라운 발전을 보면서 “아주 작은 부분일지언정 나도 기여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소령으로 참전했던 알프레도 데만시아 준장의 부인 올가 데만시아 씨(77)는 자택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9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은 생전에 한국 얘기를 정말 많이 했는데 특히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운 게 자랑스럽다고 강조하곤 했다”고 말했다.


■ 에스피노자 참전장교회장 

“지구 반대편 파병, 반대 강했지만 한국 민주주의 위협 외면 못했다”

 

콜롬비아에는 사병 출신 모임인 한국전참전용사회(회원 707명)와 참전장교회(회원 32명)가 활동하고 있다. 참전장교회 라울 마르티네스 에스피노자 회장(82·사진)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콜롬비아 정부가 6·25 참전을 결정한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콜롬비아는 게릴라들 때문에 ‘내 코가 석자’인 상황이었고 ‘한국에 가봐야 총알받이만 될 뿐이다’ ‘지구 반대편에 왜 우리 젊은이를 보내느냐’는 등의 반대론도 강했다. 하지만 콜롬비아는 200년 넘게 민주주의 전통을 지켜왔으며 국제적 약속과 책임을 다하는 나라라는 자부심이 강하다. 소련의 위협으로 전 세계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전쟁이 터졌는데 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생존 참전 용사는 1200명가량으로 추산되는데 상당수가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보고타 시내 서쪽 빈민가에 사는 참전용사의 부인 마리아 바제스테로스 씨(49)는 “38세 연상인 남편은 한국에서 중상을 입어 4년 반 동안 병원 신세를 졌고 제대 후 이발사로 일했다”며 “2년 전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참전용사 부인모임에 나가는데 참전자 가족들에 대한 지원이 없어 생계가 어렵다”고 말했다.

 

기자를 만난 참전자 가족들은 콜롬비아 정부의 지원 부족에 대해 섭섭함을 토로했다. 아무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한국에서 도움의 손길을 펴주길 기대하는 시선도 느껴졌다. 콜롬비아는 남미에서 인구와 면적이 3번째로 큰 나라지만 1인당 국민소득은 3000달러 수준이다. 

글·사진=보고타 이기홍 기자 sechepa@donga.com

 

<12>남아共공군 파병…미군 배속돼 맹활약

쌕쌕이 몰고 敵보급로 폭격… ‘창공의 치타’ 평양하늘 누비다

평양에 다시 가본 스위니 씨 
전역 후 화물기 조종사 근무 
회사 지시로 北화물 수송…“공산국 위해 일 못한다” 사표

공군참모총장 지낸 어프 씨 
적에 붙잡혀 포로생활 ‘고난’ 


“가치있는 전쟁이었나” 물으면 나의 대답은 단호하게 “YES

 

1981년 가을 한 국제화물항공사의 조종사였던 제임스 스위니 씨(87)는 회사로부터 평양에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대공포를 비롯한 북한의 중고 무기를 짐바브웨로 실어 나르라는 것이었다. 북한의 김일성이 건재하고 독재자 로버트 무가베가 당시 짐바브웨 총리로 있던 시절이었다. ‘특수화물’을 싣기 위해 평양을 찾았을 때 그는 북한 측 보안요원으로부터 “혹시 여기 왔던 적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그런 적 없다”고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내가 여기 왔던 건 폭탄 투하하러 왔던 때뿐이다’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 임무를 끝으로 “더는 자존심을 구기며 공산국가를 위해 일할 수 없다”며 사표를 냈다.

그는 6·25전쟁에 참전한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 조종사였다. 1950 8 4일 남아공 정부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파병을 결정하고 다음 달 26일 참전국 가운데 유일하게 공군(SAAF)만을 파병했다. 이웃 국가들의 공산주의 확산에 위협을 느끼던 상황에서 남아공은 주력군인 공군, 그것도 제2차 세계대전 때 활약한 정예요원들로 구성된 제2전투비행중대를 보냈다. 

부대의 배지가 타조의 날개를 단 치타 문양이어서 ‘창공의 치타들’로 불리는 제2전투비행중대의 조종사와 비행지원병력 등 총 826명이 한국에 왔다. 이들은 미군이 제공한 F-51D 머스탱과 F-86 세이버 전투기로 평양 개성 등 최전선 상공을 누볐다. 교량과 철로 파괴 등을 통해 적군의 퇴로와 보급로를 차단하고 전력시설과 탄약고를 파괴하는 한편 아군의 공격을 지원하는 임무였다. 

이들은 1952년까지는 경남의 진해비행장(K-10)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머스탱보다 성능이 뛰어난 세이버로 출격한 1953 1월부터는 경기 평택 오산비행장(K-55)을 근거지로 삼았다. 스위니 씨는 1950 12 29일 진해비행장에 도착했다.

 

“남아공 항구도시 더반에서 배를 타고 일본 요코하마 항구에 닿았지. 16000km가 넘는 거리여서 44일 동안 배를 탔네. 그러고는 도쿄 근처의 미군 존슨공군기지로 이동해 머스탱 비행 훈련을 하고선 한국에 들어왔지. 정말 추웠던 기억이 나. 

▲6·25전쟁 당시 경남 진해비행장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의 비행지원 병사들이 머스탱 전투기 앞에서 공을 차며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남아공 공군은 1952년까지 진해비행장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사진 제공 남아공 한국전참전용사협회(SAKWVA)

 

남아공 공군은 적군 2276명을 사살하고 152개의 교량과 철로, 891대의 차량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전쟁 후 총 797개의 메달과 2개의 은성훈장(미군 이외 참전군에게 수여되는 최고의 훈장)까지 받을 만큼 맹활약했다.

이들이 집중 투입된 전선은 적의 주요 보급로였던 서울∼사리원 복선 철로와 원산∼장진호를 잇는 도로였다. 1951 5 2일 당시 스위니 중위가 머스탱을 몰고 출격한 곳도 사리원이었다. 

“인근 지역에서 북한군 열차를 파괴한 뒤 사리원의 한 계곡 길에서 적군 트럭 5대를 발견했지. 3대를 명중시킨 뒤 나머지 2대를 맞히려고 저공비행을 할 때 조종간과 내 좌석에 순식간에 뭔가가 스쳤어. 매복한 적군이 쏘아댄 총알에 맞았지. 아픈 줄도 모르고 간신히 320km가량을 날아 서울 남쪽의 한 비행장에 착륙한 뒤 정신을 잃었어.

척추와 엉덩이 부분에 총상을 입은 그는 곧바로 진해의 군병원으로 후송돼 이틀 동안 치료를 받은 뒤 다시 일본의 영국군병원으로 옮겨져 3개월을 보냈다. 당시의 부상으로 한동안 조종간을 잡을 수 없었던 그는 남아공으로 돌아와 6·25전쟁에 참전할 공군의 조종훈련 교관으로 근무했다. 

활약이 컸던 만큼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조종사 34명이 사망(23)하거나 실종(11)됐고 2명의 전투지원병이 목숨을 잃었으며 모두 95대의 머스탱 중 74대가 부서졌다.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데니스 어프 예비역 중장(80)은 ‘1951 9 17일’을 잊지 못한다. 당시 소위였던 그는 개성 동북쪽에서 머스탱을 타고 적의 후방을 날던 중 지상에서 날아온 적의 총격을 받아 비상착륙한 뒤 몸을 피했다. 하지만 적진 한가운데였고 곧바로 중공군에 붙잡혔다. “참전한 뒤 불과 4개월 만의 일이었소. 그러곤 23개월을 포로로 지냈지. 

그는 당시 포로로 붙잡힌 조종사들이 ‘전쟁에서 세균무기를 사용했음을 인민들 앞에서 털어놓아라’라는 세뇌 작업과 고문을 당했다고 전했다. “평양 북쪽에 우리를 고문하는 비밀장소가 있었어. 내가 들어갈 때 붙잡혀온 유엔군이 21명이 있었는데 몇 달 뒤 나올 때는 14명만 살아남았지. 몽둥이질은 약과였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고문이 있었지. 그나마 난 그때 나이가 어린 편이어서 덜 심하게 대했던 것 같아.

 

▲남아공 프리토리아 공군박물관의 한국전쟁 부스 앞에서 공군조종사로 6·25전쟁에 참전했던 조 주베르 씨(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영국군에 파견돼 전차부대를 지휘했던 J 더튼 씨(왼쪽에서 두 번째), 공군 조종사였던 고 애티 보시 씨의 부인(오른쪽), 참전용사 지원을 담당하는 데릭 페이지 공군 준장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남아공 공군은 미 공군에 배속돼 있었기 때문에 한국군과 접촉할 일은 많지 않았다. 그들이 기억하는 한국의 모습은 대부분 창공에서 본 것이었다. 6·25 참전 남아공 공군 중 가장 많은 175차례의 출격 기록을 세운 조 주베르 씨(85)는 한국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묘사했다. “고공에서 바라본 서울의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었지만 적군을 폭격하며 저공비행할 때 눈에 들어온 광경은 폐허 그 자체였지.” 

 

진해비행장에서 지낼 때엔 이따금 기지 근처의 마을까지 걷기도 했지만 ‘민간인 속에 적군 스파이가 숨어 있다’는 소문이 돌아 외출하는 경우가 드물었다고 한다. “숙소에서 청소와 빨래를 해주는 한국인 여성들이 있었지만 말이 안 통해서 서로 얘기를 나누지 못했지.” 

 

남아공 참전용사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어프 전 총장은 6·25전쟁이 그의 인생에 어떤 의미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내게 ‘그것은 가치 있는 전쟁이었느냐’고 물으면 난 이렇게 말하지. ‘지금 북한은 최악의 독재국가가 됐고 남한은 자유민주주의를 이룩한 국가이자 세계의 경제리더가 됐다. 대답은 단호하게 예스(absolutely yes)다’라고.” 

 

현정부 “6·25 백인정권 때 일” 참전의미 깎아내려

■ ‘잊혀진 전쟁’ 안타까운 현실 

 

“이제 우리가 참전했던 전쟁은 잊혀진 기억이 돼 버렸다.”

 

남아공 프리토리아와 케이프타운에서 만난 참전용사들은 한결같이 6·25전쟁이 남아공 역사에서 ‘잊혀진 전쟁’이 되고 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1994년 넬슨 만델라 대통령 취임 이후 흑인 정권 아래에서 6·25 참전이 ‘백인의 역사’로 폄하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참전한 남아공 공군은 100% 백인이었다.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 시절이었기 때문에 흑인은 군대에 갈 수 없었다. 남아공 한국전참전용사협회 파이엇 피셔 회장(79·사진)은 “현 정부는 남아공의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참전에 대해선 백인 정권 때의 일로만 치부하며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학교에서 가르치지도 않고 역사로 인정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데니스 어프 전 공군참모총장은 “공산주의 소련과 쿠바에서 영향을 받은 현재의 집권세력은 한국전쟁 때 우리가 잘못된 진영에서 싸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남아공 주재 한국대사관도 답답함을 호소한다. 대사관 측은 “남아공 정부가 참전용사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정부 차원에서 추모행사나 기념행사에 나서 달라고 협력을 요청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참전용사 모임도 활발하지 않다. 한국대사관 주최로 매년 참전용사들이 출항한 9월에 기념행사를 여는 게 전부다. 이렇다 할 참전 기념비도 없고 프리토리아와 케이프타운에 하나씩 있는 공군박물관 안에 16m²(약 5평) 규모의 한국전쟁 부스가 마련된 게 사실상 전부다. 회원이 대부분 80대 고령이어서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늘고 있는 데다 현재 연락이 닿는 회원도 70명 정도에 그치고 있다. 

 

피셔 회장은 “우리끼리라도 좀 더 자주 모임을 갖고 후손들에게 기억을 남기자고 뜻을 모아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6·25전쟁 60주년 기념행사를 여는 9월까지 공군 측과 함께 케이프타운 공군박물관의 한국전쟁 부스에 경기 평택시의 남아공 6·25참전기념비를 본뜬 조형물을 세울 계획이다. 

 

2002월드컵 열기, 뛰어난 전자제품 그리고, 부지런함

■ 남아공서 한국 이미지는 


월드컵, 전자제품, 성실…. 

 

프리토리아와 케이프타운에서 만난 남아공 6·25전쟁 참전용사들이 묘사한 한국의 이미지다. 2002년 월드컵 기간 한국 정부의 참전용사 초청 행사 때 방한했던 제임스 스위니 씨는 “서울의 넓은 도로와 서울에서 부산까지 이어진 고속철도를 보며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할 만큼 발전한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남아공은 아직까지 월드컵 기간에 교통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답이 안 나오고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3년 전 6·25 참전용사였던 남편 애티 보시 씨와 사별한 보시 부인(61) 2002년 서울에서 본 월드컵 응원의 열기를 떠올렸다. 

6·25전쟁 때 영국군에 파견돼 남아공 공군과의 업무협력을 지원하다가 전차부대를 이끌었던 J 더튼 예비역 육군 중장은 “한국은 전자부문에서 세계적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뛰어나다. 기아 현대 대우의 자동차는 남아공에서도 아주 유명하다”고 말했다. 파이엇 피셔 참전용사협회장은 “과거 남아공보다 훨씬 뒤져 있던 한국이 지금은 남아공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 부지런함과 성실성이 한국의 발전을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글·사진 케이프타운·프리토리아=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13>네덜란드… 자원 참전한 용사들

Killed or captured…” 2개중대로 중공군 4개연대 격퇴 목숨걸고 지킨 325고지 

지형도 모르고 전선 투입 
중공군 나팔소리에 소름 
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아 

네덜란드 첫 6·25박물관 
“자유수호한 전쟁 잊지말자” 
낡은 철모-식판-훈장 등 
전우들 유품모아 21일 개관 

 

《“Killed or captured but you take that hill(죽든, 포로로 잡히든 고지를 사수하라)! 1951 2 15일 강원 원주 인근의 네덜란드 대대에 긴급명령이 하달됐다. 목숨을 걸고 지키라는 엄명이 내려진 곳은 325고지. 레인더르트 슈뢰더르스 중위(86·예비역 육군 대령)가 지휘하는 중대는 이곳을 놓고 중공군과 벌이는 처절한 전투에 투입됐다. 미군 제2사단 제38연대에 배속돼 있던 네덜란드 대대는 당시 극도의 패배감과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불과 3일 전 횡성에서 한국군으로 위장한 중공군이 한밤중에 침투해 대대장인 M P 오우던 중령이 전사한 뒤 대대 지휘부의 기능이 사실상 마비된 상태였다. 

325고지는 횡성에서 원주로 이어지는 중심 도로에 있었다. 고지를 사수하지 못하면 중공군의 2월 공세를 막아낼 길이 없었다. 슈뢰더르스 중대를 포함해 3개 중대가 325고지에 배수진을 쳤다. 병력은 사실상 2개 중대 수준이었다. 중공군에선 4개 연대가 밀려들었다. 

“솔직히 우리는 지형조차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상태였소. 더 밀리면 끝이라는 절박함과 강인한 정신력만 있었지. 죽기 살기로 지키겠다는 각오가 가장 큰 무기였어.

네덜란드 대대는 참혹한 전투 끝에 325고지를 지켜냈다. 슈뢰더르스 씨는 “당시 중부전선 전세의 전환점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325고지 전투에서 많은 부하를 잃었다. “네덜란드에 ‘어리석은 사람은 운이 좋다’는 속담이 있지. 내가 살아남은 건 운이 좋았기 때문이 아닐까…. 

 

○ “잊혀져선 안 되는 전쟁” 

6·25전쟁 이후 오랫동안 네덜란드에서 참전용사들의 희생은 잊혀졌다. 네덜란드 파병 대대가 소속됐던 판 하우츠 연대에서 6·25전쟁 박물관 개관을 준비하던 판 에베이크 원사(45)는 “당시 네덜란드에서 전쟁은 잊고 싶은 대상이었다”고 말했다.

 

파병 병력 5282명 전원이 징집이 아니라 자원해 6·25전쟁에 참전했던 만큼 참전용사들에게 무관심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참전용사 요제프 미할스키 씨(83)는 “네덜란드로 돌아올 때 환영식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그는 가족에게도 전쟁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네덜란드 참전용사협회장인 슈뢰더르스 씨를 비롯한 참전용사들은 40년 전부터 네덜란드군이 6·25전쟁에 바친 희생을 기억할 박물관 개관을 꿈꿔왔다. 

 

참전용사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며 유족들이 판 하우츠 연대에 기증하는 유물들이 조금씩 늘어났다. 슈뢰더르스 씨 등 참전용사 4명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6·25전쟁 60주년인 올해 개관이 가능해졌다. 

 

○ 60년 가까이 트라우마로 남은 중공군 

▲네덜란드 6·25전쟁 참전용사들이 13일 스하르스베르헌 시에 있는 판 하우츠 연대 내 6·25전쟁박물관에 전시된 중공군 모양 마네킹을 보며 상념에 잠겨 있다. 마네킹의 전투복과 무기는 전쟁 당시 노획한 것이다. 이 박물관은 21일 정식 개관했다. 앞줄 왼쪽부터 참전용사 스하위테마커르, 베임스터르, 스미트 씨.

 

암스테르담에서 100여 km 떨어진 스하르스베르헌의 판 하우츠 연대에는 21일 최초의 네덜란드 6·25전쟁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슈뢰더르스 씨 등 박물관 개관에 기여도가 큰 참전용사 4명의 노력을 기리는 축포 4발이 연대 하늘에 울려 퍼졌다.

 

개관을 1주일여 앞둔 13일 참전용사들이 박물관을 미리 찾았다. 박물관은 이승만 대통령이 하사한 표창 깃발과 훈장, 낡은 식판, 노획한 북한군 모자와 노동당 당증, 네덜란드 병사가 공부하던 한국어 교본 등으로 가득했다. 네덜란드 대대가 마지막 전투를 치른 강원 철원군 김화읍의 340고지에서 발견된 철모와 화약통도 있었다.  

 

참전용사들이 중공군 전투복과 장비를 입힌 마네킹 앞에 섰다. 할 말을 잊은 듯 한참 뚫어져라 응시했다. 침묵의 시간 끝에 기자가 “‘중공군’을 다시 보니 어떠냐”고 물었다. N 베임스터르 씨(82)는 “60년이 지난 일이다. 당신 심리학자냐”며 다소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극도로 기억하기 싫은 상대와 마주친 인상이었다. 중공군은 여전히 심신의 트라우마(외상·外傷)로 남아 있었다. 

 

C 스미트 씨(80)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저들을 무조건 쏴야 했어. 중공군들은 사계절 언제나 저 복장으로 우리를 괴롭혔지.” 중공군의 낡은 나팔을 발견하자 스미트 씨는 “중공군이 밀려드는 것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중공군들이 스미트 씨의 등 뒤에 총구를 겨눴다. 1953년 3월 경기 연천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스미트 씨는 엎드린 채 중공군을 향해 정신없이 사격하고 있었다. 갑자기 1m 후방에서 중공군이 나타나 그의 등과 왼쪽 무릎, 엉덩이에 3발을 쐈다. 스미트 씨는 순간 정신을 잃었고 후송돼 사경을 헤맸다. 2주간 치료를 받은 뒤 상태가 호전됐다. 네덜란드로 돌아가지 않고 전장으로 복귀했다. 그는 “천사가 돌봤다”고 회고했다. 

 

○ “우리가 죽어도 박물관은 남을 것” 

베임스터르 씨는 박물관을 둘러보는 내내 감격한 표정이었다. “다른 어떤 나라도 이렇게 박물관을 잘 꾸민 나라가 없을 거야. 우리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만들어져서 참 다행이오.” 스하위테마커르 씨는 기자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에베이크 원사가 “네덜란드법에 박물관은 1주일에 최소 2일 이상을 개방하게 돼 있다. 일반인에게도 박물관을 공개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참전용사들이 도슨트(전시 설명 안내인)를 자청했다. 에베이크 원사는 “참전용사들이 떠나도 박물관은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선배들의 한국전 참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들은 네덜란드군의 선구자”라며 “1950년에 내가 군인이었다면 당연히 한국에 갔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클라스 스하위테마커르 씨(82)가 헤어지는 기자의 손을 붙잡았다. “아이 앰 해피(I am happy)….” 그의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 

글·사진 암스테르담·스하르스베르헌=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 “한국어선 옮겨타 암호무전에 답신… 오폭막아” ▼

■ 해군 통신병 모차헌 씨 

▲6·25전쟁에 파병된 네덜란드 군함 판 할런의 통신병으로 근무했던 모차헌 씨가 당시 미국 신문에 게재된 판 할런 승조원들의 기사를 보여주고 있다.

 

전통적 해운 강국인 네덜란드는 6·25전쟁에 군함 6척을 파병했다. 1951년 4월 해군 통신병으로 참전했던 CP 모차헌 씨(81)도 군함 ‘판 할런’을 타고 한국으로 향했다. 현재 참전용사협회 총무를 맡고 있는 그는 “파병기간 1년 동안 한국 땅에 내린 적은 없지만 서해에서 한국인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

 

당시 미군 군함들은 레이더에 잡힌 선박에 암호화된 전신을 보내 적인지 아군인지 확인했다. 1분 안에 암호에 맞는 답신이 없을 경우 바로 발포했다. 하지만 전쟁 중에도 생계를 위해 바다에 나온 한국 어선들은 이런 통신을 몰라 미 군함의 발포로 침몰되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이 때문에 통신병인 모차헌 씨는 한국 어선에 옮겨 탄 뒤 새벽까지 아군 군함의 전신 신호를 받아 어선이 한국 배임을 알리는 임무를 수행했다. 밤마다 헬기를 타고 한국 어선에 옮겨 타 수행하는 일은 여간 고되지 않았다. 1분 안에 답신하지 못하면 모차헌 씨 자신의 목숨도 위태로웠다. 

 

“전투와 다른 방식으로 한국인들의 목숨을 보호했던 일이었지. 암호가 매일 바뀌어 두꺼운 암호책을 숙지하는 일이 힘들었어. 긴장 속에서도 한밤중에 주판 사용법을 가르쳐주려 하던 한국인이 생각나는군.” 

 

판 할런을 포함한 네덜란드 군함 3척은 1952년 원산항 봉쇄작전에도 참가했다. 군함 3척이 120도 간격으로 배치돼 원을 그리며 교대로 150mm 주포를 3일간 발사했다. 네덜란드 해군으로선 처음으로 전투기가 상공을 비행하며 표적을 지정한 뒤 군함이 포를 쏘는 ‘에어슈팅’ 전술을 시도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그는 판 할런에서 먹은 건조한 음식 탓에 젊은 나이에 이가 상해 틀니를 해야 했다. 그런데도 지금 그의 컴퓨터 바탕화면에는 판 할런의 사진이 깔려 있다. 그는 “판 할런을 볼 때마다 역사의 중요한 현장에 있었다는 자부심이 든다”고 말했다.

글·사진 암스테르담·스하르스베르헌=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14>캐나다 18세 이병의 ‘한국전 13개월’

가평서 중공군에 포위… 36시간 폭격에 소총 하나로 버텨”

남침 소식듣고 다음날 자원 
날 도와주던 한국인 인부 폭사 
함께 근무한 동료 귀국뒤 자살 
방황 끝 재입대 30년 군생활 

 

“내겐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한국대사관 천안함 전사자 영정에 경례 6·25전쟁 참전용사인 빌 베리 소령이 지난달 28(현지 시간) 캐나다 오타와의 주캐나다 한국대사관에 마련된 천안함 침몰 사건 희생자 분향소에서 거수경례를 하며 애도를 표시하고 있다

 

《“‘킴’ 가족을 찾을 수 없을까요? 꼭 만나야 하는데…. 그래야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지난달 28(현지 시간) 캐나다 오타와에 있는 주캐나다 한국대사관에서 만난 6·25 참전용사 빌 베리 소령(78)은 ‘킴’ 얘기부터 꺼냈다. ‘킴’은 6·25전쟁 당시 부대의 잡일을 도와주던 18세의 한국인 인부로 빌 소령은 대학생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에게 ‘6·25’는 소중한 두 사람의 죽음과 맞닿아 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그를 도왔던 킴과 캐나다에서 함께 파병된 친구 존 마틴이 그들이다. 6·25전쟁에 이등병으로 참전한 베리 소령은 귀국 후 한때 분노와 좌절을 겪는 등 극심한 전쟁후유증에 시달렸다. 

 

○ 1951년 4월 가평전투 

1950년 여름 오타와 인근의 아버지 농장에 있던 빌은 6·25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행을 결심한다. 아버지와 삼촌은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였다.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컸는데 소련 공산당이 남한을 침범했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다음 날 자원했어요.” 

 

빌은 캐나다퍼트리샤보병부대(PPCLI)에 입대해 미 워싱턴 주 포트루이스 요새에서 파병훈련을 받았다. 일본에서 추가훈련을 거친 뒤 1951년 4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연합군이 어려움을 겪던 가평전투에 투입됐다. 중공군의 반격으로 서울이 다시 함락될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었다. 캐나다군과 호주군은 경기 가평계곡을 둘러싸고 중공군 6000명과 대치하면서 혈투를 벌였다. 4월 24, 25일 이틀 동안 중공군에게 포위된 연합군은 밤새 이곳을 수호해 중공군의 서울 진입을 막았다. 이 전투에서 캐나다군 10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다쳤다.

 

“36시간 동안 폭격이 이어졌어요. 소총 하나로 버텼는데 무력하다는 것을 절감했죠.” 

 

한 방씩 쏘는 소총은 연발하기 어려웠고 발사 때마다 조준을 해야 해 시간이 많이 걸렸다. 가평전투 후 그는 상관에게 집요하게 요구해 무게가 18파운드나 되는 ‘브렌 건(경기관총)’으로 바꿨다. 이 총은 한 사람이 탄창을 따로 드는 2인 1조가 돼야 발사할 수 있다. 훈련 동기생인 존 마틴이 탄창을 들고 다녔다.

 

○ 1951년 겨울 철원계곡의 ‘악몽’ 

가평전투가 끝난 뒤 배치된 곳은 강원 철원계곡. 무엇보다 살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추위가 고통스러웠다. 동굴에서 담요 하나로 버티기도 했지만 견디다 못해 벙커를 만들기로 했다.

 

“킴이라는 18세 부대 도우미가 있었어요. 부대 일을 도와주는 수당으로 하루에 주먹밥 1개를 받았지요. 어느 날 내가 킴에게 터키 고기(칠면조)를 주었더니 다음 날부터 나를 ‘터키, 터키’라고 부르며 잘 따랐지요. 내가 벙커를 만들던 날이었어요. 잠시 쉬는 사이에 킴이 기둥으로 쓸 나무를 들고 올라왔는데 갑자기 ‘휘릭∼’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느낌이 안 좋아 ‘조심해!’라고 고함쳤어요. 킴이 있는 곳에 포탄이 떨어졌습니다. 큰 웅덩이가 하나 파였고 킴은 그 자리에서 죽었어요.” 함께 생활한 지 3주일 만이었다. 

 

“전부 내 잘못이었습니다. 죄책감을 떨칠 수 없어요. 일을 시키지 말았어야 했는데….” 베리 소령은 말을 잇지 못했다. “요즘도 킴의 목소리가 들려요.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라도 하면 ‘터키, 천천히(Slow down)!’라고 귓가에 대고 얘기하는 것처럼 목소리가 들려요. 수호천사처럼 말이지요.” 

 

○ 절친한 친구 존의 자살 

그는 파병 13개월 후인 1952년 5월 귀국했다. 생활은 엉망이 됐다. 만나는 사람 아무에게나 신경질을 부렸고 걸핏하면 사람을 때렸다. 친구들은 그가 6·25전쟁에 참전했는지도 잘 몰랐다. 당시 캐나다 사람들은 한국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베리 소령에게 전쟁의 기억은 나날이 새로웠다. 전쟁터에 널브러진 중공군 시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중공군과 밤새 총격전을 하다가도 다음 날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체를 수습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루는 시체가 너무 많아 중공군이 시체 수습을 포기하고 가 버린 적도 있어요. 부대장 지시로 중공군 시체를 뒤져 이름을 찾는데 가족과 여자친구 사진, 연애편지, 부적 같은 것들이 나왔어요. 무자비한 이 중공군들도 나랑 똑같은 인간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순찰을 같이 돌던 친구가 나와 2인 1조로 브렌 건을 쏘던 존 마틴이었습니다.”  

 

그러나 마틴은 귀국 후 다시 군에 입대한 뒤 우울증으로 자살하고 말았다. 부대로 돌아오는 지프에서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그렇지 않아도 방황하던 빌에게 존의 죽음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대학을 마친 베리 소령은 1955년 군인이 돼 1985년까지 30년 동안 군인의 길을 걷는다.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에서 평화유지군으로 근무한 뒤 1985년 소령으로 은퇴했다. 인터뷰 당시 주캐나다 한국대사관에는 천안함 침몰 장병의 분향소가 마련돼 있었다. 그는 “너무 슬프다”며 거수경례를 했다. “젊은 친구들이 이렇게 생을 마감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북한 소행이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글·사진·오타와(캐나다)=최영해 특파원 yhchoi65@donga.com

 

79세 참전용사 우즈씨 ‘한국전’ 책 낸 까닭은 
“잊혀져가는 전쟁 안타까워 집필… 한국 발전상 보며 큰 자부심 느껴”▼

6·25전쟁 참전용사인 존 우즈 중위(79·사진)는 지난해 12월 책 한 권을 썼다. ‘한 젊은 장교가 한국전쟁에서 겪은 일화(Episodes: A Young Officer in the Korean War 1951-1952)’라는 제목이다.

 

“가족과 친구들이 이제 한국전쟁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조언했어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 책상에 앉아 단숨에 썼어요. 더 늦기 전에 다른 참전용사들도 책을 썼으면 좋겠습니다. 캐나다에서 한국전쟁이 잊혀져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는 6·25전쟁 발발 당시 캐나다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한국전이 터졌을 땐 캐나다에선 전쟁에 대한 반감이 많았어요. 제2차 세계대전에 6년 동안 시달렸기 때문이었죠.” 

 

1950년 6·25전쟁 참전 당시 그는 20세의 중위였다. 1951년 3월 부산에 도착했을 때 참담한 상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전쟁고아가 사방에 널려 있었고 민간인과 농민의 삶은 참담하기 짝이 없었다.

 

“탄약과 식량 등 보급이 아주 부실했습니다. 군인들에게 참호를 만드는 방법을 적은 책자가 한 권씩 주어졌는데 1915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연방에서 만든 것이었어요. 당시 보급품은 티셔츠와 바지, 총과 탄창밖에 없었습니다.”

 

적군인 중공군에 대한 연민의 감정도 드러냈다. “중공군 포로를 붙잡아놓고 보면 농민이나 매한가지였어요. 마구잡이로 징집하는 바람에 농민에게 총 한 자루 쥐여주고 전쟁터로 내보낸 겁니다. 운동화를 신은 중공군이 많았고 전쟁터에서 배고파 쓰러지는 경우도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중공군이 몰려 있는 곳을 골라 집중 포격해 모두 사살해도 똑같은 수의 인원이 다시 배치됐지요. 이게 중공군의 인해전술이었습니다.”

 

우즈 중위는 “시시각각 발전하는 한국의 모습을 보면 우리가 전쟁에 참전하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며 “우리는 한 나라를 구했다. 한국전쟁은 정말 값어치 있는 전쟁이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6·25전쟁이 점점 잊혀져가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냈다. “많은 캐나다인은 캐나다가 참전한 전쟁을 꼽으라고 하면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꼽을 뿐이에요.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1970년 한국을 다시 찾았을 때 그는 서울프라자호텔에 묵었다.

 

“호텔에서 내려다본 성벽(덕수궁)은 내가 중공군을 추적한 기억을 되살렸어요. 바로 그 길이 내가 중공군을 미행한 장소였습니다.” 

 

▼“순찰중 지뢰 ‘펑’… 부대원 7명 부상”▼ 

■ 보훈병원서 만난 브렌넌 씨 


207호 레이몬드 브렌넌. 

 

오타와에 있는 보훈병원 ‘펄리 리도 퇴역군인 건강센터’에는 6·25전쟁 참전용사 30명이 요양하고 있었다. 6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휠체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참전용사들이다. 브렌넌 씨(82·사진)도 그중 한명. 

 

지난달 27일 기자가 찾은 브렌넌 씨 입원실 문 앞에는 6·25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받은 메달과 사진들이 진열돼 있었다. 진열대에 있는 훈장을 보고 참전용사 병실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이곳에 입원한 환자 400명 가운데 250명이 참전용사였다.

 

그는 “6·25전쟁이 터졌을 때 아무 주저 없이 한국행을 선택했어. 당시 미혼이었고 자식도 없었지”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18개월 동안 탱크를 운전했다. 

 

“밤에 우리 부대가 언덕에 있을 때 순찰병이 지뢰를 밟는 바람에 7명이 부상했지. 하지만 부대엔 의무병이 한 명밖에 없었지. 정말 열악한 상황이었어.”

 

그는 휴전회담 중에도 전쟁은 계속됐다고 회고했다. “가평 동쪽에 있는 256전선에 있으면서 탱크 안을 벗어날 수가 없었어. 용변이 급하면 탱크 밑바닥에 뚫린 구멍으로 내려가 해결했지.” 

 

캐나다 보건복지부와 보훈처는 오타와 내 3곳의 보훈병원을 통합해 이 병원을 1994년 건립했다.

글·사진·오타와(캐나다)=최영해 특파원 yhchoi65@donga.com 

 

<15>필리핀-소위로 참전 라모스 前대통령

“철원서 중공군 진지 덮쳐 70명 사살… 아군 사상자는 제로”
 
옆집에 난 불 보고만 못있어 
자유 지키려 죽을 각오 참전 
 
이리고지 탈환 큰 전과 올려 
이승만 대통령에 표창 받아 
 
여러나라 젊은이 피흘린 것 
한국 젊은이들 꼭 기억해야

▲피델 라모스 전 필리핀 대통령이 지난달 14일 마카티 시의 라모스평화발전재단(RPDEV) 사무실에서 필리핀의 6·25전쟁 파병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아래 사진의 점선 안은 6·25전쟁 당시 제20대대 전투단 소속 소대장(소위)으로 활약했던 라모스 전 대통령의 모습.

 

《1952년 5월 21일 오전 4시. 강원도 철원의 한 능선에 필리핀군 제20대대 전투단 수색중대 소속 장병 40여 명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기습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이 공격할 고지의 이름은 ‘이리(Eerie) 고지’. ‘으스스하다’는 뜻의 이 고지에는 중공군이 진지를 구축해 버티고 있었고 이미 사흘간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벌어졌다.》오전 7시. 날이 밝자 폭격기와 대포가 고지에 포탄을 퍼부었다. 어둠 속에 몸을 숨겼던 필리핀군은 정상으로 돌격했다. 저격조와 소총조, 정찰조로 나뉜 이들은 이 작전을 총괄한 2소대장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20분간 중공군을 향해 총을 쏘고 참호와 진지 안에 수류탄을 던지며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다. 중공군은 70여 명이 죽었으나 기습 후 철수한 필리핀군은 사상자가 한 명도 없었다. 이 작전의 성공을 발판으로 적극적인 공세를 펼친 필리핀군은 한 달 후 이 고지를 점령했다.

 

필리핀 전투단은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 이리 고지 전투의 전과를 인정받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부대표창을 받았다. 가장 큰 전공(戰功)을 세운 이는 수색중대 2소대장 피델 라모스 소위였다. 이후 그는 4성 장군으로 필리핀군 참모총장과 국방장관을 거쳐 1992∼1998년 대통령을 지냈다.

 

○ ‘자유 수호’ 위해 찾은 공포의 전장 

“자원했지. 참전 전까지 전쟁은 두렵지 않았소.” 

 

지난달 14일 필리핀 마카티 시의 라모스평화발전재단(RPDEV) 사무실에서 만난 라모스 전 대통령(82)은 “이웃 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주기 위해 죽을 각오로 참전했다”며 “국내에서도 공산 반군과 싸워 본 경험이 있어 파병에 대한 공포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필리핀이 한국 파병을 결정한 데 대해 “옆집에 난 불이 우리 집에 옮아붙을 수도 있는데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고 비유했다. 한반도가 공산화되면 필리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얘기다. 

 

한국에 도착하기 전까지 무서울 게 없었던 그도 전장에서 중공군과 맞서면서부터는 “항상 두려움 속에 지냈다”고 말했다. 그는 “적을 맞을 준비를 완벽히 해 놔야 두려움이 줄어들었다”며 “전투에 나서기 이틀 전부터 소대원의 소지품을 일일이 검사했다. 필요 없는 물건은 빼고 탄약을 더 챙기도록 했다”고 회상했다.    

 

라모스 전 대통령은 전장에서의 긴장감을 설명하면서 ‘중공군’을 지칭할 때는 한국말로 또박또박 발음했다. 당시 휴전을 앞두고 중공군과의 지리멸렬한 싸움을 이어가며 수없이 들었을 그 단어를 그는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 “한국의 자유, 필리핀과 함께 싸워 얻은 것” 

라모스 전 대통령은 한국의 놀라운 발전상을 얘기하며 6·25전쟁 당시 자신의 부대를 따라다니던 한국인 피란민 20여 명의 궁핍함과 생활력을 떠올렸다. 그 피란민들은 등짐 하나만 짊어지고 군부대를 쫓아다니며 음식이나 옷가지 등을 얻어 생활했다. 라모스 전 대통령은 “그들은 부대가 한곳에서 머무르면 수레를 이용해 인분을 모아 비료로 만들고 밭을 일궜다”며 “한국인의 근면함이 놀라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사무실 벽에 ‘화합(Unity) 단결(Solidarity) 협력(Teamwork)’이라고 써 있는 표어를 가리켰다. 자신이 설립한 재단 RPDEV의 모토라고 했다. RPDEV는 그가 대통령 퇴임 후 필리핀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민주화를 위해 설립한 비영리 재단이다. 그는 “6·25전쟁을 경험하고 전후 한국의 발전을 보면서 결속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다. 저 모토는 필리핀이 6·25전쟁을 통해 배운 가치이며 앞으로의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한 가치들”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한국인들은 공익 앞에서 희생적이고 과감한 모습을 보이며 힘을 모아 왔다”며 외환위기 당시 ‘금 모으기 운동’과 전직 대통령을 재판대에 올린 사실 등을 예로 들었다. 반면 필리핀은 7000여 개의 섬으로 이뤄져 하나로 뭉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그는 “현재의 한국을 보며 한국의 민주화와 성장에 일조했다는 점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한국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거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싸워서 쟁취한 것이죠. 필리핀 사람들은 필리핀이 한국과 함께 싸웠다는 사실을 점점 잊어가고 있어요. 하지만 한국의 젊은이들은 여러 나라의 젊은이가 피를 흘려 자유를 지켰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길 빕니다. 


::라모스 전 대통령은:: 

미국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를 나온 군인 출신으로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했고 대장으로까지 진급해 군 참모총장을 지냈다. 1986년 군 수뇌부로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의 독재에 항거한 대규모 민중봉기 ‘피플 파워’에 동참해 자신의 6촌인 마르코스를 내쫓는 데 일조했다. 이후 코라손 아키노 정권에서 국방장관이 됐으며 1992년 새 헌법에 따라 치른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돼 6년간 대통령으로 재직했다. 현재 아시아지역 경제와 사회발전을 논의하는 연례 회의인 보아오포럼의 의장을 맡고 있다. 

500페소 속의 ‘6·25 
종군기자 활약 아키노 前의원 
한국전쟁 기사와 함께 새겨져▼ 

■ 참전의미 되살리는 필리핀 

▲필리핀 500페소 지폐 뒷면에 새겨진 6·25전쟁 종군기자 시절의 베니그노 아키노 전 상원의원의 모습.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할 당시 기사를 배경으로 아키노 전 상원의원이 카메라와 펜을 들고 있다.

 

필리핀은 미국 영국 다음으로, 아시아 국가 중에선 가장 먼저 6·25전쟁 파병을 결정했다. 모두 5개 전투대대 7500여 명이 1950년부터 5년간 필리핀한국원정군(PEFTOK)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 싸우다 112명이 죽고 299명이 다쳤다. 57명은 실종됐다.

 

하지만 네빌 마나오이스 아테네오대 교수는 “필리핀인 대다수는 필리핀이 한국에 파병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말했다. 6·25전쟁에 대해 안다면 500페소(약 1만2600원)짜리 필리핀 지폐 뒷면에 국민적 영웅인 베니그노 아키노 전 상원의원이 한국에서 종군기자로 활약한 모습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 정도라는 것이다.

 

이런 점을 안타깝게 여긴 이들은 필리핀의 6·25 참전 역사를 기록하고 그 의미를 되살리는 일에 나서고 있다. 

 

주필리핀 한국대사관과 PEFTOK협회는 지난달 23일 타기그 시의 국립묘지에서 ‘율동전투의 날’ 기념식을 가졌다. 이 행사는 1951년 4월 22, 23일 경기 연천 지역에서 필리핀군이 중공군과 치열하게 싸워 승리를 거둔 율동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열린다. 이날은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델핀 반깃 필리핀군 참모총장과 참전용사 자녀들까지 300여 명이 참석했다. 유덕호 주필리핀 무관은 “6·25 참전용사뿐 아니라 자녀 세대도 한국과의 인연을 유지할 수 있도록 ‘PEFTOK자녀회’를 만드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루이스 크루즈 주한 필리핀대사의 아들 카를로 크루즈 씨는 지난해 필리핀의 6·25 파병에 관한 영화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을 제작했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가 섞인 형태로 한국전에 참전한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전장에서의 전우애와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크루즈 씨는 “필리핀인에게 아키노 전 상원의원이 종군기자로, 라모스 전 대통령이 소위로 활약한 6·25전쟁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필리핀 젊은이들이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인기 한류 드라마밖에 없다”며 “그들이 한국과 필리핀은 6·25 참전 등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는 역사적 사실도 알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6·25참전기념 동상도 만들어져 제막식만 남겨두고 있다. 두 필리핀 용사가 한국군을 부축하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이 동상은 필리핀 마닐라의 명소인 리잘 공원에 세워졌다. 한국대사관 측은 “6월 초에 참전용사들과 함께 공식 제막식을 열 예정”이라고 말했다. 국가보훈처는 마닐라 근처 필리핀군 총사령부 근처에 6·25참전기념관을 건립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北장군의 호위병이 된 ‘운 좋은 포로’▼ 

■ 파뮬레라스씨의 기이한 사연 

“이념? 그런 건 몰랐고 그저 운 좋은 포로였던 거야.

 

필리핀의 6·25전쟁 첫 파병 부대인 제10전투대대에 소속됐던 마리아노 파뮬레라스 씨(85·당시 병장·사진)는 1951년 봄 북한군에 잡혀 포로가 됐다. 하지만 그의 포로 생활 2년은 함께 잡힌 다른 필리핀 포로들과는 달랐다. 포로 신분임에도 한 북한군 장군의 비서 역할을 하며 포로수용소가 아닌 적장의 집에 머물렀다.   


그 북한군 장군의 부인은 필리핀인이었다. 파뮬레라스 씨는 “그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으로 필리핀에 싸우러 갔다가 그녀를 만났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 부인과 내 고향이 같았어. 내가 ‘이로카노어()’로 말하니까 그 장군이 나를 데려갔던 것 같아. 

북한 장군은 이로카노인 부인이 고향 말을 편하게 쓰도록 하려고 파뮬레라스 씨를 곁에 뒀다는 것이다.

파뮬레라스 씨는 장군의 집에 있을 땐 빨래와 심부름 등 허드렛일을 했고 밖에서는 장군을 따라 다니며 호위병 역할을 했다. 장군은 총까지 줄 정도로 그를 신임했다고 한다. 파뮬레라스 씨가 그 장군의 집을 떠난 건 1953 8월 남북 간 포로교환 때였다. 그가 남쪽으로 돌아갈 때 필리핀인 부인은 그에게 가족에게 전할 편지와 선물을 건네줬다. 그 속엔 권총도 한 자루 있었다. 휠체어에 몸을 싣고 한마디씩 말을 이어 나간 파뮬레라스 씨는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는 걸 매우 힘들어했다. 포로로 잡혔던 시기나 북한 장군의 정확한 직책, 필리핀 부인의 이름 등을 기억해 내려 애썼으나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포로 생활 중 인상적이었던 일들은 어렴풋이 그려지는 듯했다. 

“장군 부부와 함께 셋이서 밥을 먹곤 했는데 그때가 제일 즐거웠어. 중간에 다른 포로들과 같이 도로 만드는 작업에 동원됐을 땐 너무 힘들었지만….

글·사진·마닐라·마카티·칼루칸(필리핀)=류원식 기자 rews@donga.com

 

<16>룩셈부르크 - 노병의 ‘특별한 여행’

“잊혀지는 6·25를 환기시키는게 내게 주어진 마지막 임무”

 

《하필이면 여행 직전 심장에 이상이 왔다. 요제프 바그너 씨의 나이는 이미 85세였다. 급히 수술을 마친 의사는 여행이 힘들 것이라며 만류했지만 바그너 씨에겐 반드시 가야 하는 여행이었다. 2008년 10월 23일 아침. 바그너 씨는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거저 얻는 게 아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룩셈부르크 한국전쟁 참전용사회’의 모자를 챙겼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딸을 뒤로한 채 바그너 씨가 탄 비행기가 룩셈부르크 공항을 이륙했다. 캐나다 토론토, 미국 뉴욕, 캐나다 밴쿠버 섬으로 이어질 17일간의 여행이 시작되고 있었다. 6·25전쟁 참전 뒤 룩셈부르크를 떠난 전우들을 만나기 위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를 여행. 바그너 씨는 잠시 눈을 감았다.》

 

소위로 참전했던 바그너씨, -加 방문 옛전우들 만나 금굴산 전투등 ‘그날’ 회상
17일간 여행, 다큐로 제작… “한국 발전상 자부심 느껴”


○ 그날의 기억 

 

1951 4 22일 바그너 소위가 이끄는 룩셈부르크 소대가 배치된 미군 3사단은 임진강 북쪽 금굴산에서 일촉즉발의 위기를 맞았다. 중공군의 4월 공세가 시작됐다. 중공군 188사단이 임진강 남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무차별 공격을 시작했다.

이대로 무너지면 경기 전곡리, 연천군, 철원군을 잇는 도로가 차단돼 다른 연합군까지 위기에 빠질 급박한 상황이었다. 적의 수와 위치, 행동반경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절실했다. 바그너 소위의 룩셈부르크 소대가 정찰을 자원했다. 적진 10km 깊숙이 숨어들었다. 적의 화염에 무방비로 노출됐지만 바그너 소위는 단 한 명의 소대원도 잃지 않았다 

 

중공군은 금굴산을 완전히 포위했지만 바그너 소위를 비롯한 연합군은 다른 연합군 부대가 안전하게 철수할 때까지 금굴산을 포기하지 않았다. 룩셈부르크 소대가 얻어낸 정보가 방어에 큰 힘이 됐다. 

 

○ 옛 전우들과의 만남

첫 도착지인 토론토에서 바그너 씨는 6·25전쟁 당시 소대원으로 생사고락을 같이했고 이후 캐나다로 이주한 레옹 무아얭 씨(79)와 포옹했다. 무아얭 씨는 1952년 5월 김포전투에서 수류탄 파편에 다리를 다쳐 일본의 미군 병원으로 후송됐다. 의사는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했지만 무아얭 씨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전우들을 놔두고 집으로 갈 수 없다”며 전장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무아얭 씨의 전우애는 시공간을 뛰어넘었다. 무아얭 씨는 6·25전쟁 당시 부상했던 미군 참전용사 제임스 허버트 씨를 2002년에 만났다. 무아얭 씨는 그에게 미군이 전투 중 다친 장병에게 주는 훈장인 퍼플하트를 나무로 만들어 선물했다. 이때부터 무아얭 씨가 나무 퍼플하트를 만들면 허버트 씨가 이를 미국 워싱턴의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한 이라크전쟁 부상자들에게 전해주는 일이 시작됐다. 미군들의 감사 편지가 이어졌다. 

 

무아얭 씨가 바그너 씨의 여행에 합류했다. 뉴욕에서 노르베르트 에데르트 씨(76)를 만났다. 60년 전 앳된 얼굴의 젊은이는 백발의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세 사람은 술집으로 향했다.  

 

“적의 포화 속에서 헌신적이고 용감하게 고지의 통신선을 지켜내….” 옛 전우들을 만난 에데르트 씨는 큰 소리로 수십 년 전 무공훈장의 상훈을 달달 외웠다. 잊을 수 없는 최고의 순간이었던 듯 상기된 얼굴로 맥주를 들이켰다.

 

이어 캐나다 밴쿠버 섬에서 안드레이 네이 씨(76)를 만났다. 그는 여전히 결연했다. “당시 스탈린이 히틀러처럼 세계를 지배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나는 결심했소. ‘내가 그것을 막기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면 그걸 해야 한다!’고 말이오.” 

 

네이 씨는 1953년 잣골전투에서 중공군의 포격으로 머리를 크게 다쳤다. “얼굴이 심하게 부어오르고 왼쪽 눈이 끔찍할 정도로 튀어나왔소. 살아남은 게 기적이라고들 했지.” 

 

전쟁은 이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겼다.  

무아얭 씨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2년간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눈을 감기만 하면 보고 싶지 않은 걸 봐야 했다. 낮보다 밤에 담배를 더 많이 피웠다. “아내가 그걸 어떻게 견뎠는지….”  

 

○ 필름에 담은 전우애 

바그너 씨는 이 특별한 여행에서 자부심과 노스탤지어와 상처를 함께 느꼈다. 

 

이 여행은 다큐멘터리 영화 ‘참전(Tour of Duty)’으로 제작됐다. 지난해 10월 22일 룩셈부르크 시내의 가장 큰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시사회가 열렸다. 300석을 꽉 메웠고 서서 보는 관객도 많았다.  

 

지난달 9일 룩셈부르크 시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난 바그너 씨는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을 힘겹게 하나하나 토해냈다. 안경을 벗고 눈을 치켜떴다. 손은 떨렸다. 기억이 혼란스러울 때면 목소리가 커졌다.  

 

그는 전쟁 때 만난 한국 아이들 얘기에 갑자기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처절한 모습에….” 60년 전 강직하고 남자다웠던 바그너 소위. 그가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한참 뒤 그는 “2005년 한국을 찾았다. 세계로 진출하는 한국 젊은이들의 자신감이 인상적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군인의 사명이 무엇인지 다시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그에게 2008년의 여행은 또 하나의 ‘참전’이었다. “60년이 지났지만 흩어져 있는 전우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군인으로서 해야 할 마지막 의무라고 생각했네.”  

 

○ 에필로그 

다음 날 그는 기자를 룩셈부르크 시에서 차로 40분가량 떨어진 자신의 고향마을 에히터나흐로 초대했다. 만나는 마을 사람마다 “한국에서 참전을 함께 기억하기 위해 동아일보 기자가 왔다”고 소개했다. 

 

기자는 마을에서 바그너 씨가 털어놓지 않았던 젊은 시절의 상흔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18세 때인 1943년 독일 나치군에 강제 징용됐다가 1944년 탈영해 13개월 동안 좁은 농가에 숨어 지냈다. 그는 해방 뒤 룩셈부르크군이 창설되자마다 입대했다.

 

기자가 물었다. “나치즘에서 탈출해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전쟁에 참전하셨는데, 나치 치하에서 룩셈부르크가 받은 고통을 한국이 공산주의로부터 받아서는 안 된다고 직감하신 건가요?”  바그너 씨는 그윽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룩셈부르크 참전 개요: 

룩셈부르크군은 1951 18, 1952 3월∼1953 1월 두 차례에 걸쳐 벨기에 대대에 배속돼 6·25전쟁에 참전했다. 89명이 참전해 2명이 전사하고 15명이 부상했다. 참전 규모는 작았지만 임진강과 철의 삼각지대에서 벌어진 주요 전투에 참가했다. 당시 룩셈부르크의 인구는 20만 명에 불과했다. 

 

▼ 한국선 잊혀진 용사, 룩셈부르크선 영웅 ▼ 
현지 참전비에 자국 영웅과 함께 ‘강윤섭’ 이름 새겨

▲잣골전투의 ‘영웅’ 룩셈부르크 참전용사 레몽 베랭제 씨와 한국군 강윤섭 씨(오른쪽) 1953년 밝게 웃고 있다. 사진 제공 룩셈부르크 국립군역사박물관

 

1953년 4월 7일 밤 중부전선 철의 삼각지대에 있는 강원 철원군 잣골. 중공군 70사단의 무차별 공격이 시작됐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포탄과 총알에 연합군은 누구도 진지(벙커)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기세라면 룩셈부르크 소대가 속한 미군 제3사단뿐 아니라 후방의 그리스군까지 꼼짝없이 당할 판이었다. 

 

레몽 베랭제 당시 상병(2006년 별세)이 갑자기 함성을 지르며 기관총을 들고 진지 위로 뛰쳐나왔다. 무수히 많은 총알과 포탄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적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베랭제 씨의 용기에 자극받은 연합군이 반격을 시작했다. 

 

49년 뒤인 2002년 미군 제3사단이 룩셈부르크를 찾아 베랭제 씨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한국전참전용사협회 사무총장인 길베르트 하이펠스 씨(77)는 “그의 영웅적 용기 덕분에 철의 삼각지대를 적에게 빼앗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룩셈부르크 시에서 40km 떨어진 디키르슈에 있는 국립 군역사박물관 내 한국전쟁 코너도 베랭제 씨의 노력으로 탄생했다. 그가 당시 사용한 기관총도 전시돼 있다. 

 

그러나 베랭제 씨와 함께 진지 위로 뛰어올라 적에게 기관총을 난사한 또 다른 영웅이 있었다. 하이펠스 씨가 그의 이름을 수첩에 적었다. 

 

‘Kang Yun Soup(강윤섭).’ 

베랭제 씨는 6·25전쟁 이후 40년간 전우 강 씨를 찾았다. 주한 룩셈부르크대사관을 통해 마침내 강 씨의 소재를 알았고 룩셈부르크 참전용사협회는 1993년 강 씨를 룩셈부르크로 초청해 훈장을 수여했다.  

 

하이펠스 씨는 “전쟁 당시 부대에서 식량과 무기를 운반했던 그는 매우 성실한 전우였지만 40년 만에 만난 그는 참전에 대한 자부심보다 가난에 찌든 초췌한 모습이었다.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강 씨의 이름이 룩셈부르크 참전기념비에 추가됐다. 하이펠스 씨는 “한국 사람들은 강 씨를 잘 모르는 것 같다. 한국에서는 잊혀진 존재일 것”이라고 말했다. 

 

■ 다큐 ‘참전’ 감독 그로츠씨 

“용병 편견 깨… 자유 지킨 용사로 기억될 것”  

▲프렝크 그로츠 감독(32·사진)은 60년 전의 비극을 대면하기에는 너무 젊었다. 그는 다큐멘터리 영화 ‘참전’을 촬영하며 편견과 싸워야 했다. 


“학창 시절 두꺼운 역사책의 한 페이지나 차지했을까요?” 그는 이전까지 6·25전쟁에 참전한 룩셈부르크 용사들을 전쟁광이나 용병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2006 6·25 참전 용사들의 진솔한 모습을 필름에 담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촬영을 준비하며 그는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전쟁 당시 인구 20만 명밖에 되지 않았던 룩셈부르크에서 군인 89명은 한결같이 한국의 자유를 위해 기꺼이 싸우겠다고 결심했다. 고국에 돌아올 때는 환영행사도 받지 못했지만 자부심을 잃지 않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로츠 감독은 “가슴이 뜨거워졌고 그들을 존경하게 됐다”고 말했다. 2008년 참전용사 요제프 바그너 씨와 동행하며 촬영을 진행하면서 룩셈부르크인 단 한 사람에게라도 이들의 참모습을 전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로츠 감독에게 영화 제작을 제안한 주인공은 생존 참전용사 22명 전원을 만나 연구해온 룩셈부르크 역사가 파트리크 모르만 씨(36). 6·25전쟁 영화를 찍은 사람도, 연구한 사람도 모두 30대 젊은이였다.
룩셈부르크·디키르슈·에히터나흐=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17>벨기에 남작 가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국방장관도 소령으로 참전하는데…” 19세 귀족, 사병 자원

▲시몽피에르 노통브 남작이 6·25전쟁 당시 병원에서 만난 한국인 자매와 함께 찍은 흑백사진과 1998년 유로 파코리아를 설립한 이후 한국문화를 벨기에에 알리기 위해 만든 각종 팸플릿과 책자를 보여주고 있다.

 

장교 - 사병 구분 없다

“귀족이라고 장교돼야 하나”

1953년 통신병으로 격전치러

 

한국문화 전도사

부상 치료중 한국음식에 매료

은퇴후 ‘코리아 알리기’ 활동

 

1952 7 4. 19세의 젊은 귀족 시몽피에르 노통브 씨는 벨기에 국방부를 찾았다. 그날은 그의 생일이자 ‘성인이 되는 날’이었다. 노통브 씨는 6·25전쟁 참전 신청서에 서명했다. 장교가 아닌 일반 사병 자격이었다.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의무다. 하지만 군인으로서 귀족 남자의 이상적인 모습은 장교지 사병이 아니야!” 집에 돌아와 참전 사실을 알리는 노통브 씨에게 아버지 피에르 노통브 남작이 역정을 냈다. 벨기에 상원 외교위원장인 아버지는 “귀족은 장교로 참전해야 격에 맞는다”며 강하게 아들을 말렸다. 나이가 어린 점도 반대 이유였다. 노통브 씨의 형들은 벨기에 왕립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6·25전쟁에 참전한 시몽피에르 노통브 남작의 참전 당시 모습.

 

○ 참전: 사병 자격으로 전쟁터에

“많은 귀족이 먼 나라 한국의 전쟁에 참전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였네. 설상가상으로 귀족이 사병으로 참전하겠다는 것은 ‘스캔들’이나 다름없었지.”

 

그러나 벨기에의 명예를 걸고 한국의 자유를 위해 싸우겠다는 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고위층에 요구되는 높은 도덕적 의무)’에 장교와 사병의 구분은 무의미했다.

 

젊은 노통브 씨를 자극한 것은 아버지의 친구였던 모로 드 믈랑 상원의원(2002년 작고)의 참전이었다. 당시 국방장관이던 믈랑 의원은 1950년 6·25전쟁 지원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국무회의에서 장비 지원으로 제한하자는 제안을 일축하고 파병을 주도했다. 더욱이 그는 1951년 48세의 나이에 통신장교(소령)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이를 위해 당시 상원의원의 해외 참전을 금지한 법률이 개정되기까지 했다.

 

믈랑 씨는 1988년 펴낸 회고록에서 “한국전쟁은 한 국가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벨기에도 한국처럼 열강에 둘러싸인 소국이기 때문에 같은 처지의 한국을 도와야 했다. 전쟁은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인간은 전쟁 한가운데서 전우를 위해 목숨을 희생할 수 있는 위대한 창조물이다”라고 썼다.

 

“믈랑 씨의 참전을 보고 의지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사명감이 생겼네.” 

 

1952년 말 노통브 씨는 통신병으로 한국행 배에 올라탔다. 벨기에는 1951∼1955년 한국에 모두 3171명을 파병했다. 이 중 귀족 출신은 22명이었다.

 

○ 부상: 중공군 수류탄에 다리 다쳐 

노통브 씨는 1953년 2월 벨기에대대가 중공군 70사단을 맞아 치열한 방어전을 벌인 잣골전투(강원 철원군)에 배치됐다. 3월 중공군이 또다시 기습을 시작했다. 적을 향해 정신없이 사격하던 노통브 씨 주변에 수류탄이 떨어졌다. “쾅!”  사격에 집중한 나머지 다친 줄도 몰랐다.

 

사격을 계속했다. 의무병이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달려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네. 그때서야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어.” 의무병은 알코올을 병째로 먹였다. 

 

후송차로 이동해야 했다. 다른 전우가 그를 업었다. 알고 보니 그 병사는 눈을 다쳤다. “내가 그의 눈이 되고 그가 내 다리가 돼 전장에서 벗어났네.” 벨기에 신문에는 노통브 남작의 아들이 부상당했다는 기사가 났다. 

 

○ 후송: 한국음식에 매료되다 

노통브 씨는 부산의 스웨덴병원으로 후송됐다. 미세한 수류탄 파편 25개가 왼쪽 다리에 집중적으로 박혀 있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노통브 씨는 스웨덴병원에서 6주를 보내면서 한국과 한국인의 진정한 면모를 알게 됐다. 그는 특히 어느 10대 자매와 어머니를 잊지 못한다. 그는 유독 명랑했던 자매와 금세 친해졌다. 

 

“언니가 열여덟 살이었지. 동생은 나이가 생각나지 않는군. 자매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네. 전쟁 뒤에 삶을 일으키기 위해 영어를 배운다고 말했어. 그 모습이 파라다이스와도 같았지.” 

 

그는 자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자매는 병원 식당에서 한국음식을 손수 만들어줬다. “김치와 잡채, 비빔밥…. 기름기 많은 서양식 전투식량에 질린 나로서는 담백한 한국음식에 완전히 매료됐네. 중독이었지.” 

 

자매의 어머니는 교사였다. 어머니는 6·25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한국이 일제강점기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 한국의 역사를 설명해줬다. 노통브 씨는 차분하고 지적이었던 그녀를 통해 한국을 알아갔다. 

 

6주 뒤 그는 다시 전선에 배치됐다. 보통 연합군과 한국군 병사는 배식을 따로 받았고 연합군은 한국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다. 그가 한국군 배식 줄에 서서 김치를 달라고 부탁하자 모두 놀랐다. 

 

○ 전후: 유럽에 한국을 알리다 

1954년 귀국한 그는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 일했다. 1992∼1998년에는 유럽연합(EU) 경제사회이사회 사무총장도 지냈다. 바쁜 업무 속에서도 한국을 잊지 못했다.

 

1998년 노통브 씨는 은퇴와 함께 ‘유로파코리아’를 만들었다. 유로파코리아는 애초 벨기에에 입양된 한국 젊은이들에게 한국문화를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창설됐다. 

 

점차 문화행사가 많아지고 벨기에 주재 한국대사관과도 함께 행사를 열며 유로파코리아는 벨기에에 한국문화를 알리는 통로로 확대됐다. 노통브 씨는 특히 한국음식의 매력을 알리는 데 적극적이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제육볶음이다.

 

“한국문화는 미국문화의 강력한 영향 아래서도 정체성을 유지하며 세계적으로 발전하고 있네. 특히 음식문화가 그렇지. 그 점이 존경스러워.”

 

노통브 씨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의미를 물었다. “한국인들은 세계에서 자신들의 위상이 얼마나 높은지 아직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아. 한국인임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이들도 있어. 사소한 예지만 지위 높은 한국인들은 전부 외제차를 타더군. 한국에 그 지위에 걸맞은 좋은 차가 그토록 많은데 말이야.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모국 사랑에서 출발해. 전쟁을 극복하고 지금의 모습을 이룩해낸 용기에 왜 자부심을 갖지 않는지….” 

 

노통브라는 이름이 익숙하다. 그는 ‘살인자의 건강법’ 등으로 한국 독자에게도 잘 알려진 아멜리 노통브 씨의 삼촌이다. 

 

▼“하룻밤 포탄 3500발 비오듯… 매일 죽음의 공포”▼

■ 참전용사의 잣골전투 회고 

 

벨기에참전용사회 회장 쥘리앙 판 카우엘라어르트 씨는 1953년 강원 철원군 최전선에서 벌어진 잣골전투에서 보병중대를 이끌었다. 잣골전투는 중공군과 가장 치열하게 치른 전투 중 하나다. 

“하룻밤에 3500여 발의 포탄이 떨어졌소. 본국 귀대 하루 전 포탄에 맞아 전사한 중대원도 있었지. 중공군의 공격 징후를 알자마자 쏟아지는 포탄들이 정말 지긋지긋했어. 반격을 위해 포를 조준하면 이미 중공군은 사라지고 없었지.

포탄 소리의 끔찍함에 대해 카우엘라어르트 씨는 “철로에 묶인 채 전력질주하는 기차 아래 누워 기차 소음을 밤새 듣는다고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솔직히 말해 정말 두려웠네. 매일 밤 ‘오늘 밤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어. 포탄에 파묻혀 죽는 건 아닐까 하는 공포와 싸워야 했지. 잠을 자고 깨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했어. 

전장에 즐비한 시체들도 그를 괴롭혔다. “적군과 아군 할 것 없이 시체가 너무 많아 부대가 이동할 수 없을 정도가 되자 시체를 길 양쪽으로 치워야 했지. 그 쌓여가는 시체들….” 그는 그 충격 때문에 전투식량으로 지급된 고기를 먹지 못할 정도였다.

브뤼셀지회 부회장인 르네 베르 씨는 1951 4월 임진강에서 중공군 제188사단과 치른 전투를 떠올렸다. “전투를 치른 지 2개월 뒤 격전지에 돌아와 보니 민간인과 군인들의 시체가 그대로 방치돼 있었지. 그 와중에 군복과 전투화 등 ‘살아 있는 자’를 위해 쓸 만한 것들을 찾는 내가 비참해졌지. 그만큼 참혹했어.

마르셀 샤네 씨는 1953 4월 잣골전투에서 왼팔을 잃었다. 그의 나이 19세였다. 오전 2시경 포격에 막사가 무너지며 팔이 깔린 것이다. 눈앞에서 전우 3명이 전사했다. 그는 “비로소 내가 전쟁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은 참전을 후회하지 않았다. 카우엘라어르트 씨는 “제2차 대전 때 레지스탕스로 참전했지만 최전선은 아니었다. 6·25전쟁에서 군인으로서 진정한 전쟁을 수행했다”고 말했다 

참전용사회 부회장인 마르셀 와트 씨는 “2003년 한국에 갔을 때 한 택시운전사는 우리가 참전용사라는 말에 택시를 세운 뒤 정중히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건넸다. 한국인들은 우리의 참전을 잊지 않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벨기에 참전용사들이 지난달 7일 벨기에 주재 한국대사관에 모여 참전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왼쪽부터 시몽피에르 노통브, 마르셀 샤네, 쥘리앙 판 카우엘라어르트, 알베르 드웨베, 마르셀 와트, 르네 베르 씨.

 

▼당시 참전부대 건물에 ‘임진’ ‘잣골’ 등 이름 붙여

부대 안에 ‘6·25 박물관’도 참전용사 3171명 명단 기록▼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북쪽으로 100km 떨어진 안트베르펜(영어명 앤트워프) 지역 티엘렌 시에 있는 6·25 참전부대인 제3공수대대 건물들에는 ‘임진’ ‘학당리’ ‘잣골’ 등의 이름이 붙어 있다. 벨기에 대대가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들이다.

이 부대는 1952 6·25전쟁에서 전사한 피에르 가일리 대령의 이름을 따 ‘가일리 대대’로도 불린다. 벨기에의 왕위계승자인 필리프 왕세자가 군복무를 한 곳이기도 하다. 

부대 안에 6·25전쟁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박물관 앞 포탄 모양의 이정표에 ‘한국박물관’이라고 한글로 적혀 있다. 박물관 안에 들어서니 참전용사 3171명의 이름이 하나하나 적혀 있다. 이 부대에는 6·25전쟁 참전용사들의 후손이 많이 복무하고 있다. 박물관에 따라 들어온 파트리크 비넨페닌츠크 대위(30)가 이 명단에서 한 명을 가리켰다. 

“우리 할아버지입니다. 힘든 전쟁이었다며 6·25전쟁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진 않으셨지만 항상 자랑스러워하셨습니다. 한국과 한국인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셨죠. 

그는 “사관학교 필수과목인 군 역사에 6·25전쟁이 포함돼 있고 특히 임진강 학당리 잣골전투는 자세히 배운다”고 말했다.

박물관 입구에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라고 써놓았다. 한국박물관 관리위원인 참전용사 코르 페이트 씨(81)에게 참전이 잊혀지고 있는지 물었다. 페이트 씨가 웃으며 출구를 보라고 했다. 출구엔 ‘더는 잊지 않는다(Forgotten No More)’고 씌어 있었다. 
글·사진 브뤼셀·티엘렌=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18>태국―참전용사 父子‘代이은 인연’

6·25전쟁은 많은 사람에게 슬픔과 고통을 남겼지만 참전국 병사와 그 가족에게는 한국과 의미 있는 인연을 맺어주기도 했다. 이들에게 한국은 ‘제2의 고향’이다. 태국 육군대학 부총장인 통숙 타나꼰 대령(55)에게 6·25전쟁은 소중한 인연들을 만들어줬다. 6·25전쟁 참전용사인 아버지로 인해 한국과 처음 인연을 맺은 통숙 대령은 한국에서 두 차례 근무했고 한국인을 아내로 맞았다. 

 

▲통숙 위차이 씨

 

“아버지 세대가 피흘린 한국서 군생활-결혼… 제2의 고향”

육군대 부총장 통숙 대령

한국인 아내 만나 결혼…두 아이 출생지도 서울

“부친이 남긴 인연에 감사”

 

6·25때 태국군 활약

美 이어 두번째 파병 결정

총인원 8693명 참전…포크찹-사동전투 큰 성과 

▲통숙 타나꼰 대령

 

방콕 시내에 있는 육군대학 내 부총장 접견실에서 만난 통숙 대령은 가벼운 인사가 끝나자마자 군복 왼쪽 앞주머니에서 안이 들여다보이는 가로 2cm, 세로 5cm 크기의 사각 케이스를 꺼냈다. 그 안에는 금으로 된 불상이 있었다.

 

“아버지가 6·25전쟁 때부터 간직하던 불상인데 돌아가시면서 남겨주셨습니다. 저도 늘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통숙 대령의 아버지 통숙 위차이 씨(1925∼1970)는 태국 육군 군의학교에서 4년간 교육을 받은 뒤 장교로 임관했다. 그는 중위였던 28세 때 6·25전쟁 참전을 결심했다. 그의 첫 복무지는 경기 포천시 운천리 일대였다. 1953년 한국에 도착해 경기 일대 주요 전투지를 전투부대와 함께 이동하며 부상당한 환자들을 돌봤다.

 

1954년 어느 날 동료 병사들이 크게 다쳤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환자들이 있다는 현장으로 직접 차를 몰고 갔다. 비포장 길을 가던 중 차 아래에서 큰 폭음이 났고 그가 탔던 차는 심하게 파손됐다. 지뢰가 터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찰과상 정도만 입었을 뿐 크게 다치지 않았다. 몸에 지니고 다니는 작은 불상이 자신을 지켜줬다고 믿었다고 한다. 당시 사고로 불상은 두 동강이 났고 지금은 통숙 대령이 그 불상을 수리해 지니고 다닌다. 

 

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6·25전쟁 참전을 결정했고,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파병을 발표했다. 특히 육해공 3군 전투 병력을 모두 파병한 8개국 중 하나이기도 하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육군 1개 대대, 해군 프리깃함 2척과 수송선 1척, 공군 수송기 3대를 파견했다. 육해공군 및 적십자 요원 등을 모두 합쳐 총인원 8693명이 참전했다. 

 

6·25전쟁 때 보여준 용맹성 때문에 태국군은 ‘작은 호랑이’(Little Tiger·태국 사람의 체구가 서양인보다 작지만 용맹하다는 의미에서 비롯됐다고 한다)라는 애칭을 얻었다.

 

태국군은 1950년 11월 7일 부산에 입항해 평양으로 이동했다. 첫 임무는 평양에서 유엔군의 철수작전을 엄호하는 것이었다. 1·4후퇴 직후 미군 제1기병사단에 배속돼 1951년 3, 4월 반격작전을 수행하며 강원 화천까지 진격하기도 했다. 이후 1951년 8월 경기 연천 율동전투, 1952년 11월 경기 연천 서북쪽 포크찹고지(Pork Chop Hill)전투, 1953년 3월 경기 연천 고랑포 나부리전투, 7월 강원 김화 사동전투 등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아버지는 통숙 대령이 1970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던 날 교통사고로 숨졌다.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군인의 길로 들어서는 그날 세상을 떠난 것이다. 당시 통숙 씨는 군의관으로서 대령 진급이 확정된 상태였다.

 

통숙 대령은 장교로 임관한 뒤 아버지가 참전했던 한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마침내 한국을 경험할 기회가 찾아왔다.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태국 연락장교로 1987년부터 1년간 한국에서 근무를 하게 됐다. 그에게 찾아온 기회는 한국 근무뿐만이 아니었다. 연락장교로 있는 동안 주한 태국대사관을 자주 찾았는데, 이때 대사 비서였던 이경희 씨(46)에게 반해 1988년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부인 이 씨는 서강대 불문학과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통숙 대령은 위탁교육생 선발시험에 합격해 1990년 한국 육군대학에서 위탁교육을 받기 위해 한국을 다시 방문했다. 서울대에서 한국어 공부를 한 뒤 육군대학에서 기본과정과 고급과정을 이수하고 1992년 태국으로 돌아갔다. 이 기간에 두 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통숙 대령의 두 아들이 태어난 곳은 태국이 아닌 서울 은평구 녹번동이다.

 

통숙 대령은 “한국말을 많이 잊어버렸다”면서도 천천히 한국어로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한국 사람이 다 된 것 같습니다. 한국은 제2의 고향입니다. 한국이 발전한 것과 한국 사람들이 일하는 방식에 늘 감명을 받고 있습니다.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한국과 인연을 맺게 해 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6·25전쟁에 참여했던 태국 간호사들이 낙동강 전선에서 태국군이 설치한 기관총을 만져 보고 있다. 사진 제공 태국간호사협회

 

泰의사-간호사 68명 참전

야전 후송병원에서 근무 “공산주의에 맞서려 지원”

 

6·25전쟁에 참전한 태국군에는 민간인 의사와 간호사 등이 적잖이 포함돼 있다. 이들은 태국적십자 소속으로 전쟁에 참전했다. 총인원은 68명. 

 

이들 가운데 일부가 3월 말 방콕 교외에 위치한 타안반슥 참전용사촌 내 한 정자에 모였다. 참전용사촌은 태국 정부가 1950년대 6·25전쟁에 참전한 장병들을 위해 땅을 아주 싼 값으로 제공해 세워졌다. 

 

“잠을 잘 때 항상 나침반을 손에 꼭 쥐고 잤죠. 북한군이 밤새 쳐들어와 나를 붙잡아 가면 몰래 탈출해 남쪽으로 도망치려고요. 당시 22세였는데 아마 태국에서 참전한 간호사 가운데 가장 어렸을 겁니다. 후방이었지만 늘 폭탄 소리가 나서 밤마다 무서워 잠을 제대로 못 잤습니다.” 

 

빠윤 아룬렉 씨(81·여)는 19명의 동료 간호사와 함께 1951년 7월 부산에 도착한 뒤 ‘부산 121 야전후송병원’에서 주로 미국 캐나다 터키 환자들을 돌봤다. 빠윤 씨는 50여 명의 환자가 있는 1층 병동을 담당했다. 그는 “후송되고 싶어서 자기 발목에다 총을 쐈던 알렉산더라는 미군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당시 병원 내 규율이 엄해 간호사들은 바지만 입어야만 했고 립스틱도 바르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1950년 10월부터 ‘8054 후송병원’에서 외과수술을 담당했던 의사 차뚜라뽄 홍사브라밧(84) 씨는 24세라는 젊은 나이에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당시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를 지키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에 부산으로 가는 배에 탔다”고 말했다. 그는 주로 부상한 한국군과 미군을 맡았는데 포탄 파편이나 총에 맞은 환자, 그리고 동상에 걸린 환자가 많았다고 회상했다.

 

 “파도처럼 밀려온 적군… 맞서 싸운 40명 중 2, 3명만 생존”

■ 전투일지 남긴 태국군 대대장 쁘라윤 씨

 

‘담롱 유포 중위가 끝까지 싸우며 아군 자리를 지키라고 명령했다. 적군은 앞줄에 있던 병사들이 쓰러지면 바로 뒷줄에서 또다시 총알받이를 하려고 밀려왔다. 파도처럼 적군이 밀려왔다. 밀려오는 적군을 보고 아군 중에서 이탈자가 속출했다. … 40명의 병력을 진지로부터 2km 이상 진격시켰다. 후방에서는 야포 지원사격을 했다. 하지만 살아 돌아온 인원은 두세 명밖에 없었다. 1km만 전진하도록 했어야 했다. 속상하다.’ 

 

1951년 11월 13일 태국군 대대장(중령)이던 쁘라윤 눗깐짜나꾼 씨(94·예비역 육군 중장·사진)가 경기 지역에서 벌어진 한 전투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쁘라윤 씨는 중요한 전투가 벌어질 때면 메모지에 꼼꼼히 전투일지를 기록했고 전쟁이 끝난 뒤 노트 한 권에 모두 옮겨 적었다. 

 

그는 “한국이 태국보다 춥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정말 추웠다. 태국군 중 많은 병력이 추위 때문에 발이 얼어 걸을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며 “많은 병력의 전사 소식을 접하면 한국군 장교들이 자주 ‘속상해’라는 말을 해 ‘속상해’라는 한국말을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태국군이 참여한 전투 가운데 큰 승리를 거둔 것은 포크찹고지 전투다. 태국군 대대가 미군 제2사단에 배속돼 경기 연천 서북쪽 저항선을 방어하던 중 중공군 제113사단 예하 2개 연대와 치른 전투다. 1952년 11월 1일부터 열흘간 벌인 전투에서 태국군은 12명이 전사하고 57명이 다쳤다. 반면 중공군은 204명이 죽고 400여 명이 부상했다. 중공군은 1952년 11월 1일과 7일, 1953년 1월 10일 야간공격으로 포크찹고지의 방어시설물을 파괴했다. 그러나 태국군은 돌격해 오는 중공군을 백병전으로 물리쳤다. 

 

태국한국전참전용사회 회장인 차웽 용차른 씨(90·씨비역 육군 대장)는 포크찹고지 전투 당시 인사 담당 소령이었다. 그는 “1952년 11월 10일 밤 중공군 2개 중대가 태국군 8명이 경계를 서는 동쪽 지역으로 진격해 와 처음으로 백병전을 치렀고 공격은 다음 날 오전 4시까지 계속됐다”고 회상했다. 그는 “후방에 있던 대대장이 최전선의 병사들에게 무전기로 ‘짜이 옌 옌(진정하라), 마이 떵 끌루어(무서워하지 마라)’를 반복했다”며 “태국군의 용맹과 미군의 105mm, 155mm 포 72문의 화력 지원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민혁기자 mhpark@donga.com 

 

<19>현지 취재기자 가슴 울린 참전 용사들

60년전 참상… 60년간의 고통… 노병들의 큰 희생 감사합니다
 
총상도 훈장도 자랑거리… 한국 발전상에 찬사 보내
낯선 땅서 받은 충격으로 평생 고난의 삶 살기도
극심한 생활고에 훈장 팔아… 해외원조, 참전국 우선을

▲동아일보 이유종 기자가 올해 3월 초 터키 앙카라에 있는 터키참전용사회 사무실에서 참전용사들과 만나 6·25전쟁 당시 터키군의 활약상을 취재하고 있다. 사진 제공 주터키 한국대사관

 

《동아일보는 올해 2월부터 지난주까지 18회에 걸쳐 ‘6·25 60년, 참전 16개국을 가다’ 시리즈를 연재했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6·25전쟁 참전 16개국을 방문해 생의 마감을 앞둔 노병들을 만나 60년 전의 전쟁을 더듬으며 한국의 오늘과 미래를 얘기했다. 그들은 또 가슴 한쪽에 묻어뒀던 삶과 죽음의 현장에 대한 기억에 아파하고 있었다. 하지만 잿더미 속의 한국이 일어서는 것을 도왔다는 자부심으로 한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정을 보여줬다. 때론 잊혀져 가는 참전의 기억을 아쉬워했다. 기자들의 취재 뒷얘기를 정리했다.》 


▼팔 잃었지만 자랑스러워 안감춰 

벨기에의 참전용사 마르셀 샤네 씨는 1953년 잣골전투에서 왼팔을 잃었다. 그는 “일부러 지난 57년 동안 의수(義手)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한국전쟁 참전이 자랑스럽기 때문에 감출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르네 베르 씨는 “내가 지금 한국전쟁 당시처럼 스물두 살이라면 당연히 다시 참전할 것이다. 왜냐고?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당연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에 파병하는 한국도 수십 년이 지난 훗날에는 똑같은 느낌을 가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노령인 탓에 저음으로 천천히 말을 이어갔는데, 이 말을 할 때만큼은 매우 단호하면서 힘이 넘쳐 보였다. 이번 취재를 통해 ‘남의 나라 일’처럼 여겼던 6·25전쟁과 마주 앉은 느낌을 받았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악몽같은 기억… 참전 후회 안해▼ 

콜롬비아에서 만난 상이용사 호세 미겔 토레도 씨는 군복무를 마친 상태에서 6·25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다시 한국행을 자원했다. 학업을 포기한 채 자원입대한 참전용사들도 수두룩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주는 게 그 나이에 그렇게 중요했느냐’는 질문을 던지곤 했지만 우문(愚問)이었다. “민주주의가 침공을 당했다는 데 분노를 느꼈고, 피 끓는 나이여서 정의를 위한 모험의 열망이 컸다”는 대답이 많았다. 악몽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국행을 후회한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약 한국이 전쟁 후 실패한 국가의 길을 겪었다면 지금 참전용사들이 자신의 한국행 선택에 대해 부여하는 자기평가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기홍 기자 sechepa@donga.com 

 

▼피 나눈 형제… 교류 확대되길 

터키의 앙카라와 이스탄불에서 만난 참전 노병들은 한결같이 한국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전장에서 다리를 잃은 상이용사조차도 6·25전쟁 참전 사실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그들은 “2002년 월드컵 당시 한국과 터키는 3-4위전을 치렀다. 비록 한국과 터키는 축구로 경쟁했지만 역시 피를 나눈 형제였다. 그래서 서로를 축하하고 위로했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면서도 “한국 젊은이들은 우리에게 감사하지 않고, 터키 젊은이들도 양국이 한때 그토록 가까웠다는 사실을 모른다”며 양국의 다음 세대가 6·25전쟁이 만들어준 우의를 잊어가는 것을 아쉬워했다. 이들은 전장에서 피를 흘리며 맺은 두 나라의 인연이 경제 산업 문화 등 전 분야에 걸친 교류와 협력으로 확대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했다.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폐허 딛고 번화한 도시 세워 놀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만난 참전용사들은 한결같이 “잊지 않고 찾아줘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6·25전쟁에 참전한 남아공 공군은 모두 백인이었는데, 1994년 흑인 정권으로 바뀌면서 6·25 참전이 ‘백인의 역사’로 폄하되어 잊혀지고 있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2002년 월드컵을 기억하는 참전용사들도 많았다. 당시 월드컵 기간에 서울을 방문했던 참전용사들은 “폐허였던 땅이 번화한 도시로 발전한 모습에 놀랐고, 그 넓은 도로를 가득 채운 (붉은악마의) 붉은 물결에 놀랐다”고 말했다. 고인이 된 한 참전용사의 부인은 “한국과 달리 요하네스버그나 프리토리아는 치안이 불안해 낮에도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는데, 월드컵을 무사히 치를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취재기자 손자 맞듯이 반겨▼

뉴질랜드 웰링턴과 오클랜드에서 두 번의 참전용사 간담회를 진행하면서 인사말을 할 기회가 있었다. “저는 1970년생입니다. 여러분들이 피와 땀을 흘린 덕분에 자유롭고 부강한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이렇게 기자가 되어 취재하러 올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노병들은 오랜만에 아들이나 손자를 만난 것처럼 감격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각자가 가진 전쟁의 기억과 경험은 물론이고 각종 사진과 문헌 등 오랜 세월 보관해 온 자료들을 꺼내놓았다. 이들은 한국이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뤄내는 것을 보면서 큰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한국 교포로는 최초로 뉴질랜드 국회의원이 된 멜리사 리 씨는 “참전용사 모두가 나를 딸과 손녀처럼 응원해 줬다”고 말했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한국은 나의 두번째 조국▼ 

올해 2월 프랑스 파리에서 참전용사들을 만났을 때 한국전쟁참전용사회 전체 회원의 절반인 16명이 부부동반으로 나왔다. 그들은 동아일보 기자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고, 들고 온 자료도 가지가지였다. 그래서 인터뷰를 진행한 4시간이 부족할 정도였다. 레몽 벤나르 씨 부부는 주말이면 불고기와 김치로 외식을 한다고 했다. 피에르 마비요 씨는 “한국은 프랑스에 이어 나의 두 번째 조국”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6일 유엔군이 중공군을 처음으로 꺾은 ‘지평리 전투’ 재연 행사가 경기 양평군에서 열렸을 때 벤나르 씨 부부 등 파리에서 만난 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2월에 만났던 기자를 또 본다”며 너무 반가워하는 그들의 모습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한국을 성공한 자식처럼 여겨  

태국 방콕 교외에서 만난 참전용사 30여 명이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그들의 말에 듣기도 전에 표정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교통편이 어긋나면서 1시간이나 지각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60년 전 이야기’에 관심을 둔 한국 기자를 박수로 맞이해 줬다. 연방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도 준비해 온 메모와 사진첩을 보여주며 하나라도 더 들려주고 싶어 했다. 그들의 얘기를 모두 듣지 못한 채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떠나야 했던 기자에게 그들은 과일 한두 개를 쥐여주며 등을 두드려줬다. 참전용사들은 한국을 마치 ‘자식 같은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한국이 크게 성장했지만 노병들은 한국을 ‘어려운 부모 곁을 떠난 뒤 성공한 대견스러운 아들딸’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박민혁 기자 mhpark@donga.com 


눈앞서 친구 잃은 얘기하며 눈물 

미국 인디애나 주에서 만난 스탠 밴더 씨는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고 했고 이마를 스치고 간 총알자국도 보여줬다. 그 노병은 “(1950 9) 서울을 수복한 뒤 총격전 와중에 친한 친구가 내 눈앞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눈물을 펑펑 쏟았다. 나 역시 총으로 누군가를 처음으로 죽였다. 견딜 수 없는 감정에 심하게 토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적군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면서 젊은 시절 경험한 밑바닥 감정을 털어놓았다. 오랫동안 묻어뒀던 잊고 싶은 기억을 헤집어 내는 참전용사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취재를 하면서 ‘만약 내가 같은 나이에 그런 충격적 경험을 했다면?’ 하고 되물을 때가 많았다. 그들은 낯선 코리아에 와서 영혼에 큰 상처를 입고 돌아갔다. 
김승련 기자 srkim@donga.com 


아리랑 가사 지금도 못 잊어 

그리스군의 수송기 조종사로 참전했던 아크리보스 촐라키스 씨는 한국군 장교의 눈을 감겨준 일을 잊지 못했다. 머리에 심한 부상을 당해 수송기로 실려 온 한국군 장교는 눈이 한쪽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 장교는 촐라키스 씨를 보고는 마지막 힘을 다해 권총을 뽑으면서 “당신한테 이걸 주겠다”고 말했다. 통역으로부터 그 말을 듣고는 의미를 짐작했다. 그는 그 총의 방아쇠를 가만히 당겼다. 촐라키스 씨는 “한국에 스무 살 청년으로 갔는데, 스물두 살 할아버지가 돼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수송기 사고로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넘겼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아리랑’ 가사를 잊지 않고 있다는 그는 “내 삶의 절반은 한국에 남겨두고 왔다”고 말했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다시 참전하겠나’ 묻자 묵묵부답 

전쟁이 병사들에게 미친 심리적 충격은 평생의 짐이었다. 영국군으로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혔던 테드 로즈 씨는 ‘포로 생활이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느냐’는 질문에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다시 당시로 돌아간다면 참전하겠느냐’는 질문에는 아예 못 들은 듯 외면했다. 이런 질문을 하는 기자로서의 책무가 원망스러웠다. 잭 사이크스 씨도 355고지에서 포탄 파편에 맞아 오른팔 신경이 모두 죽었고 15년 전 여름부터는 공황장애를 겪었다고 했다. 한곳에 머물 수 없어 늘 움직여야 했고 어둠이 싫어 셔츠도 입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간 적도 있다고 했다. 존 볼러 씨는 폭죽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 “진격, 앞으로!”라고 소리를 치기도 했다고 한다. 이들에겐 6·25 참전은 악몽이기도 했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뇌리에서 참상 안떠나 평생 괴로워 

캐나다 오타와에서 만난 빌 베리 예비역 소령은 참전 이후 정신의 황폐화를 겪었다. 그는 철원계곡에서 자신을 도왔던 18세의 한국인 ‘킴’이 중공군의 포탄에 스러지는 장면을 목도하면서 그에 대한 죄책감을 평생 떨치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2 1조로 생사를 같이했던 단짝 전우 존이 귀국한 후 자살한 일도 큰 충격이었다. 한국을 떠난 뒤에도 전쟁터에 널브러진 적군의 시체더미 잔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싸움판에 빠져드는 등 스스로 망가져갔다. 하지만 아무도 그가 겪은 참혹한 삶을 알지 못했다. 18세 때 낯선 나라를 위해 싸운 후유증은 평생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60년 전 우리가 기억도 못하는 어린 병사의 희생 위에 오늘의 한국이 서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 


남은 건 빛나지 않는 명예와 기억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은 혁명으로 정치가 뒤바뀌면서 박해받고 신음해야 했다. 참전 당시 대부분 황제 근위대 소속이던 이들은 1974년 쿠데타로 들어선 사회주의 정권에 박해받았다. 대부분 강제 예편됐고, 일부는 재산도 몰수당했다. 마이클 베다다 씨는 가로세로 4m도 안 되는 방에서 여섯 식구가 살고 있었다. 그는 “(참전 후 돌아와)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누구도 나를 고용하려 하지 않았다”며 이웃의 도움으로 연명했다고 했다. 마을 시장에서 생계가 곤란한 참전용사들이 무공훈장들을 내다파는 것도 목격했다. 이들에게 남은 것은 그다지 빛나지 않는 ‘명예’와 ‘기억’뿐이었다. 한국을 도운 사람에게 합당한 보답을 하는 일은 어떤 외교정책보다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기사 나간후 사망소식에 안타까워 

4월 필리핀에서 만난 85세의 6·25 참전용사 마리아노 파뮬레라스 씨는 5월 초에 유명을 달리했다. 그에 대한 기사가 나간 지난달 11일 안부가 궁금해 전화를 걸었다가 이틀 전 사망하셨다는 비보를 접했다.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에 탄 채 북한군 장군의 호위병 역할을 했던 기이한 포로 생활 얘기를 들려주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파뮬레라스 씨는 한국 초청 행사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들떠 있었다. 필리핀을 찾기 2주 전쯤에는 참전협회장이었던 빅토리노 아자다 예비역 대령이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그는 380쪽짜리 6·25 관련 책을 펴내는 등 참전용사들에겐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고 들었다. 좀 더 일찍 이들이 건강한 모습이었을 때 찾아가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면 좋았을 텐데…. 

류원식 기자 rews@donga.com


남편 전사후 한국 마니아로 60

호주 시드니에서 만난 올윈 그린 여사는 갓 결혼한 남편이 한국에서 전사했지만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내가 예상했던 ‘한 맺힌 삶’과는 딴판이었다. 그는 “한국인은 우리에게 늘 고마워한다”며 한국 행사만 열리면 남편의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나오는 ‘한국 마니아’가 됐다. 참전용사들은 지난 60년간 한국을 위한 ‘보이지 않는 응원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정리하는 단계에 와 있다. 결국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싸웠던 나라라는 이유로 한국에 애정을 갖는 2, 3세대가 연결고리가 될 것이다. 한국의 해외 원조금 지원대상에서 참전국을 가장 우선순위에 놓고 장학지원사업 초청행사 등 다각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할 때다.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20·끝>전시 병동 외국의료진의 휴먼스토리

5개국 의료진 한국 파견… 자유 지킨 전장에 ‘인도주의 꽃’ 피워

▲6·25전쟁 당시 스웨덴 의료팀의 일원이었던 칼 그루네발트 씨(왼쪽)가 부산의 스웨덴 적십자병원에서 한국인 환자 및 간호보조원들과 함께 카메라 앞에 섰다. 그루네발트 씨는 이때 병원에서 부인 엘사 라르손 씨를 만나 사랑을 꽃피웠다. 사진 제공 주스웨덴 한국대사관

 

《6·25전쟁 때 유엔군으로 전투병을 보낸 16개 참전국 외에도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인도 이탈리아 등 5개국은 의사 간호사 등 의료진을 파견해 한국을 도왔다. 특히 노르웨이와 덴마크, 스웨덴 3국은 전후 한국의 재건을 돕기 위해 ‘스칸디나비아 공동 프로젝트’를 통해 국립의료원을 세워 한국 공중보건 시스템의 선진화 기틀을 닦았다.》

 

포화 속 로맨스
스웨덴팀 의사 - 간호사 결혼… 현지 언론에 크게 소개돼
6개월간 3000여 차례 수술


○ 스웨덴 의료진의 전쟁 속 로맨스

 

칼 그루네발트 씨(89)는 스웨덴의 1차 한국 파견 의료팀 소속 소아과 의사로 6개월 동안(1950 8 24일∼1951 2 24) 근무했다. 스웨덴 스톡홀름 북부의 달라르나 지역에 거주하는 그루네발트 씨는 기자의 전화를 받고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15분 뒤에 다시 전화를 걸자 그루네발트 씨는 “우리 국제의료팀은 인도주의 실천을 위해 한국에 파견됐다. 부산에 도착해 보니 일회용 반창고도 제대로 없었다”며 60년 전의 기억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는 “한국인은 끝까지 고통을 참으면서 부상을 이겨냈다”며 이런 한국인의 모습은 그가 힘든 시기를 겪을 때마다 극복하는 힘이 됐다고 말했다. 스웨덴 의료진은 6개월 동안 약 3000회의 수술을 하는 등 헌신적인 지원을 했다. 

그루네발트 씨는 부산의 스웨덴 적십자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스웨덴 간호사 엘사 라르손 씨와 사랑을 키웠고 귀국 직후 결혼을 했다. 이들의 러브스토리는 ‘전쟁 중의 로맨스’라는 제목으로 현지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이탈리아 적십자 소속으로 6·25전쟁 때 간호사로 활약한 알마 파스쿠토 씨(오른쪽)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국방무관인 서남열 대령에게 당시 에피소드를 얘기하고 있다.사진 제공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아내는 몇 년 전 세상을 떠났지만 한국에서의 추억이 묻어 있는 물품들, 특히 아내가 좋아하던 탱화는 그의 집안 곳곳에 걸려 있다고 한다. 그루네발트 씨는 “부산에서 우리 부부가 구입한 세라믹 반지를 평생 간직해 왔다”고 말했다.

 

때로는 24시간 쉬지 않고 근무해야 하는 전시 병동에서 피어난 로맨스는 그루네발트 씨 부부만의 얘기가 아니었다. 1차 파견자 48명 가운데 5명이 스웨덴인 또는 미국인, 캐나다인과 결혼하거나 약혼하는 등 인연을 맺었다.

 

○ 이탈리아 간호사의 한국 사랑

 

“한국은 저에게 제2의 조국입니다. 그 당시 젊은 날의 정열이 오늘도 나를 붙들어주곤 합니다.”

 

이탈리아 적십자 소속으로 6·25전쟁 때 간호사로 활약했던 알마 파스쿠토 씨(100·여)는 최근 로마 파리올리의 자택을 찾은 이탈리아 주재 한국대사관의 국방무관 서남열 대령에게 60년 전의 기억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1950년 9월 20일 의료진의 한국 파견을 결정했다. 군의관과 군 약제사, 간호사 등으로 구성된 이탈리아 의료팀은 나폴리 항구에서 미국 군함 제너럴랭핏호를 타고 30일 만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파스쿠토 씨는 “이탈리아 적십자병원은 서울 영등포의 학교(현 신길초등학교)에 자리를 잡고 미8군 의료부대와 함께 활동했다”고 말했다. 150개의 침상에서 시작해 200개로 늘어난 이탈리아 병원에서는 입원환자 7041명과 외래환자 22만9885명이 치료받았다.

 

평생을 혼자 살아온 파스쿠토 씨는 쾌활하고 자유분방하던 당시의 에피소드도 전했다.

 

“땅에 닿지 않는 치마를 입은 우리에게 함장이 부산으로 향하는 동안 갑판에 나오지 말라고 했어요. 강풍이 불면 치마가 위로 올라가 수병들에게 이상한 광경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라면서요. 하하하.”

 

“외부 기온이 영하 26도로 내려갈 정도로 서울이 너무 추웠어요. 추위를 이기며 병원에서 근무하던 어느 날 여자 간호사들끼리 돈을 쓰기 위해 도쿄에 가자고 ‘모의’했죠. 미군 장교를 구워삶아 수송기를 타고 무작정 도쿄에 도착한 뒤 갖고 있던 달러를 펑펑 썼어요. 그러다가 도쿄 주재 이탈리아대사관 직원한테 발각됐죠. 강제소환이라도 당할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대사님이 저녁을 사주면서 위로해 줬죠. 그래서 처녀들끼리 스트레스를 푼 뒤에 다시 한국에 돌아가서 열심히 일했어요.”


파스쿠토 씨는 “영광스러운 임무를 함께 수행하던 사람들 가운데 현재 생존자는 10명 미만”이라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참전 전투병이 대부분 1820세의 젊은 청년이었던 것과는 달리 한국에 파견된 의사와 간호사들은 대부분 30대 이상의 나이였다.


헌신적 의료활동 
, -민간인 23만명 치료 
인도-노르웨이-덴마크도 병원船등 보내 환자 진료

○ 병원선 등을 통한 지속적인 협력 

덴마크는 1951 3월 의사와 간호사, 의료종사원들을 태운 병원선 유트란디아를 한국에 파견했다. 유트란디아의 임무는 부상한 유엔군을 치료하는 것이었지만 민간인 부상자가 늘어나자 병원선 책임자인 코리 함메리히 씨는 유엔군 측과 협상을 벌여 한국군과 민간인 부상자뿐만 아니라 아프고 허약한 아이들의 치료까지 맡았다. 유트란디아는 부산항과 전방을 오가다 1952년 가을부터는 인천항에 정박해 활동했다.

유트란디아에서 근무했던 코리 벨렌도르프 씨는 2008 6 22일 덴마크 일간지 일란드포스텐에 실린 기고문을 통해 “한국인들이 덴마크의 참전에 대해 아직도 잊지 않고 고마워하는 것에 감사한다”고 밝혔다 

노르웨이는 의료팀과 행정요원 등으로 구성된 병상 60개 규모의 이동외과병원(NORMASH) 1951 7월 개설했다. 서부전선에 처음 설립됐던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은 의정부를 거쳐 동두천에 자리를 잡아 3년간 환자 9만 명을 치료했다.

인도는 의사와 위생병들로 구성된 야전의무부대를 파견했다. 위생병들은 인도 공수사단에서 공수훈련을 받은 군인들이었다. 실제 인도가 운영한 야전병원의 공수의무분대는 1951년 경기 문산에서 벌어진 미군 187공수연대전투단의 작전에 참가해 의료지원을 했다.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스칸디나비아 3국 전쟁뒤에도 남아 국립의료원 세워 ▼

대학병원 주임교수들 파견… 한국에 선진의술-철학 전수

 

“스칸디나비아 3국의 의료진이 한국에 전수한 것은 선진의술이나 첨단의료장비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의사의 기본 자질을 배웠습니다. 환자의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성심을 다해 치료하는 것, 그것은 의사로서 내 평생의 철학이 됐습니다.”

 

국립의료원 인턴 1기 출신인 박인서 한국·스칸디나비아재단(한스재단) 이사장(75)은 11일 인턴 시절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국립의료원장, 삼성제일병원장을 지냈다. 한스재단은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등 스칸디나비아 3국과 국립의료원의 의학 및 문화교류 증진을 위해 1968년 설립됐다. 

 

국립의료원은 1958년 스칸디나비아 3국 정부와 유엔 한국재건지원단(UNKRA)의 도움으로 탄생했다. 6·25전쟁 때 스칸디나비아 3국은 대규모 의료진을 파견했다. 이들 정부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폐허가 된 한국을 위해 의료단을 남기고 국립의료원을 세웠다. 의료단은 1968년까지 국립의료원을 통해 한국에 선진 의술을 전파했다. 당시 국립의료원은 의료진과 시설 수준에서 동양 최고의 병원이었다.

 

1960년 4월 한국의 의대생 30명이 전문의 수련을 위해 의료원의 인턴 1기로 첫발을 내디뎠다. “공교롭게 당시 4·19혁명이 일어났어요. 부상당한 학생들이 몰려들었죠. 그때 외국인 교수들이 수술 받을 환자와 입원할 환자를 질서정연하게 나누고 침착하게 치료하는 모습을 보고 ‘선진의학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국립의료원의 외국인 교수들이 가난한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하면서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정계 인사들도 선진 의술의 덕을 보기 위해 국립의료원을 찾았다. 박 이사장은 “외국인 의사들은 그 인사들을 특별하게 치료해 달라는 부탁을 이해하지 못했다”며 “그들에게 환자는 다 똑같은 사람일 뿐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시 스칸디나비아 3국은 대학병원의 주임교수를 대거 파견했다. 그들은 환자대장과 병리검사대장 등 관련 기록 등을 꼼꼼히 남겼고 이는 국립의료원 내 박물관에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스칸디나비아 정부는 인턴들에게 선진의학을 직접 접할 유학의 기회도 제공했다. 박 이사장은 노르웨이 장학기관에서 전액 지원을 받아 1년간 노르웨이 대학병원에서 연수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65년 국립의료원 출신의 첫 전문의들이 배출됐다. 박 이사장은 “외국인 의사들이 없었다면 한국 현대의학의 발전 속도가 상당 기간 늦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8년 국립의료원은 개원 50주년 행사 때 당시의 의료진과 가족들을 초청했다. 국립의료원 이홍순 부원장은 “당시 덴마크국립병원 마취과 의사 아버지를 따라왔던 어린 소년이 같은 병원의 마취과 의사가 돼 한국을 방문했다”며 “그는 폐허나 다름없던 한국의 발전상에 감격해했다”고 말했다. 박 이사장은 “얼마 전 포울 호이네스 덴마크 대사도 이임 송별연에서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변모한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며 뿌듯해했다”고 전했다. ◎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