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현의 전쟁 이야기5/ 조선일보
■우려스러운 북한의 잠수함 전력
①② 노후한 북한 잠수함이 여전히 위협적인 이유
상당히 위협이 되는 존재
모든 나라는 예외 없이 자국 군대가 세계에서 가장 강하다고 선전한다. 미국 같은 초강대국뿐만 아니라 아프리카나 중남미에 있는 약소국도 마찬가지다. 실전을 벌일 경우 승패가 충분히 예측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무조건 강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국민에게 믿음을 주고, 반대로 적대국에게 함부로 도발을 벌일 수 없도록 경고를 주기 위해서다. 사실 위정자나 정부에게 그런 모습이 필요는 하다.
하지만 실무자들은 일단 상대가 더 강하다고 전제해 놓고 국방 정책을 수립한다. 예를 들어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무기가 질적으로 우세하더라도 상대가 양적으로 앞서고 있다면 이를 일단 불리한 평가 요소로 보는 것이다. 이처럼 대외에는 강하다고 자랑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반대로 행동하는 이유는 국방은 가장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래야 실전에서 이길 가능성이 커진다.
▲2014년 국방백서에는 북한군의 전력을 총량적인 숫자로 표기하고 있다. 하지만 정확한 전력을 평가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국방부에서 매년 발간하는 국방백서에서도 그런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다. 가장 최근에 나온 2014년판을 보면 무기 보유 측면에서 북한이 압도적인 우세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남북 간 전투함정이 110여척 대 430여척, 전투기가 400여대 대 800여대로 나와 있다. 따라서 이 숫자만 놓고 본다면 상당히 우려스러울 수밖에 없고 언론에서 그렇게 보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북한이 보유한 수상함정 대부분은 배수량 100톤 이하여서 연근해에서나 작전을 펼칠 수 있는 수준이고 전투기는 약 40대로 추정되는 미그 29 정도를 제외한다면 전력 이외 수준으로 취급받고 있을 정도다. 한마디로 현시점에서 전쟁이 벌어진다면 3일 안에 북한 해군과 공군은 궤멸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모든 북한군의 무기가 성능이 형편없고 단지 숫자만 많을 뿐이라고 폄하할 수는 없다.
가장 대표적인 분야가 수중 전력이다. 현재 북한은 약 70여척의 각종 잠수함정을 보유하여 일단 수량으로 10여척을 보유한 국군보다 상당히 앞서고 있고 심히 우려스러운 부분이기도 하다. 북한이 잠수함 전력에 집중한 이유는 그들의 능력으로 결코 제해권 확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북한은 제2차 대전 당시 독일 해군처럼 항로 차단이나 기습 등을 위한 일종의 비대칭 전력으로 잠수함정을 운용하고 있다.
<②편에 계속>
▲북한이 보유한 최대 규모의 잠수함인 로미오 급은 만재배수량이 1390톤(수상), 1712톤(수중)으로 20여척을 운용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 선전매체 사진
<①편에서 계속>
적보다 더 무서운 적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국군은 함정에 탐지 장비인 소나(Sonar)를 장착하고 있고 십 수기의 해상초계기, 초계헬기를 운용하고 있다. 더불어 일부에서는 북한의 잠수함정이 건조된 지 오래 된 구닥다리이고 소음이 심하며 수중에서 작전을 벌일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었기에 크게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구형 잠수함이라도 일단 잠수가 이루어 진후 찾아낸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바다에서 사고로 조난당한 이들을 찾는 것조차 힘들 정도인데, 일부러 물속에서 숨어 다니는 잠수함정을 정확히 찾아내어 요격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려운 일이다. 지난 1982년 포클랜드 전쟁 당시에 아르헨티나가 투입한 1척의 구닥다리 잠수함을 잡기 위해서 당시 모든 영군 원정군의 최신예 함정들이 총동원되어 한 달이 넘게 작전을 펼쳤지만 결국 수색에 실패하였던 사례가 있을 정도다.
▲한국 해군이 운용중인 P-3C 해상 초계기. 총 16기의 P-3C와 P-3CK가 24시간 한반도 해상을 감시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그래서 최근 북한의 도발로 인한 남북한 간의 군사적 대치 상황 당시에 우리의 주의를 가장 많이 끌었던 것 중 하나가 북한 잠수함정의 움직임이었다. 그들이 보유한 70여척 중 무려 50여척이 작전에 투입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이전에 보지 못하던 행태였다. 당시 당국의 발표처럼 일단 모든 가용 전력을 총동원하고 있지만 일단 물속으로 들어간 적 잠수함정을 추적하는데 어려움이 많음을 실토하였다.
전시라면 수중전력이 가동되기 전에 격파하겠지만 이번처럼 대치 상태일 경우에는 추적하여 차단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은 상당히 고무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유념하여야할 점은 따로 있다. 바로 우리 내부의 문제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2010년도에 있었던 천안함 폭침사고가 그러한 예다.
백령도 인근 서해안은 수심이 얕아 잠수함이 활동하기 어려운 곳이라고 방심하다가 낭패를 보았다. 이는 어쩌면 좋은 반성의 기회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선용 소나를 장착하여 문제가 되었던 통영함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스스로의 전력을 깎아먹는 행위를 군 수뇌부가 앞장서서 벌인다면 결국 전력 증강이나 대비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역사 이래 내부에 적이 있는 군대가 승리한 사례는 없기 때문이다.
▲어군 탐지기 수준에 불과한 70년대 소나를 장착하여 작전 능력에 문제가 발생한 통영함. 이처럼 군 수뇌부가 앞장서서 부정을 저지른다면 결코 강군이 될 수 없다. /조선일보 DB
■의외로 잠잠했던 북한 공군
① 북한 잠수정은 전면 기동하면서 북한 공군은 왜 조용했을까?
우려스러웠던 부분
지난 8월 25일, CNN 방송은 상당히 흥미로운 소식을 전하였다. 이번 남북한 긴장 상태 당시에 북한군이 보여준 대응 태세를 토대로 한미 연합군이 기존에 수립하여 놓았던 전시 계획(war plan)을 재검토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번에 북한군의 전력 증강이 우려스러울 만큼 상당한 수준까지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기존 계획을 대대적으로 손 볼 필요가 생긴 것이라는 내용이다.
휴전선 일대에 지상군 전력이 집중되고 장거리 미사일의 발사 징후가 포착된 것은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다. 하지만 잠수함정과 상륙용 공기부양정의 대대적인 출동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전시라면 당연히 이들도 작전을 벌이겠지만 고질적인 경제난으로 말미암아 가동률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완전히 빗나갔다. 특히 보유 잠수함정의 7할에 가까운 전력이 동시에 작전에 들어간 상황은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2014년 동해상에서 실시된 훈련에 등장한 북한군의 공방급 공기부양정. 이번에 신속히 전진배치되어 많은 우려를 불러왔다. /조선중앙통신
북한은 남침을 재개할 경우 장거리 미사일과 장사정포로 남한의 요충지를 대대적으로 공격함과 동시에 잠수함정, 공기부양정 그리고 AN-2 수송기를 이용하여 특수전 병력을 외곽으로 침투시켜 후방의 혼란을 야기한 후, 주력이 휴전선을 돌파하는 방법을 사용할 것이 확실해졌다. 물론 이번에 이렇게 행동했다고 앞으로도 같은 패턴으로 북한군이 움직일 것이라는 단정은 당연히 금물이다.
문제는 이런 북한의 전략을 충분히 알고는 있었지만 이번에 보여준 준비 태세가 예상보다 완성도가 높은 수준이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들이 보유한 무력을 최대한 과시하기 위해 능력이상으로 가동시켰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수중 전력의 7할 정도가 동시에 작전을 펼친 것도 그렇다. 그런 점을 의심할 수 있게 한 것이 바로 공군의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전면전을 가정한 준비 태세에 돌입하였다면 당연히 공군의 움직임이 활발하여야 한다. 하지만 특수전 병력을 실어 나를 AN-2 수송기 운용 기지를 제외한다면 여타 북한 공군 작전기들의 움직임이 거의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방공 레이더망을 최대한 가동하면서 한미 연합 공군의 공격을 대비하는데 급급한 수세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하늘에서의 싸움을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②편에 계속>
▲로켓을 발사하는 북한군 An-2의 모습. /조선일보 DB
<①편에서 계속>
북한 스스로도 알고 있는 무능
수시로 기지를 방문하고 훈련을 참관할 만큼 김정은이 평소 공군에 대해 보이는 관심은 상당하다. 특히 지난 7월 30일에는 원산 갈마비행장에서 열린 공군 지휘관 전투비행술 경기대회에 전용기인 '참매 1호'를 타고 공중 사열을 벌이는, 독재자다운 파격까지 연출하였을 정도였다. 당연히 북한 공군은 핵무기, 미사일과 더불어 선전 매체에서 최강의 전력으로 소개되는 단골 메뉴가 되었다.
하지만 앞에 언급한 것처럼 정작 이번에 북한 공군이 보여준 것이 없다. 결론적으로 북한군 스스로도 전시에 공군이 할 수 있는 역할이 거의 없다고 자인한 것과 다름이 없다. 단지 숫자상으로 북한 공군은 한국 공군보다 약 2배 정도의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지만 전시에 가미카제 식 자폭 공격용 정도로나 겨우 사용할 수 있는 구닥다리 전투기가 대부분이다. 사실 현대전에서 이런 전투기의 숫자는 아무리 많아도 의미가 없다.
▲공군 전투비행술 대회를 참관한 북한 김정은이 환하게 웃고 있다. /노동신문
1980년대 이후 남북 간의 경제적 격차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벌어지면서 북한은 전통적인 군비 경쟁은 포기하고 핵과 미사일로 대변되는 비대칭 전력 확보에 열을 올렸다. 그런 와중에 상당한 경제적 부담이 요구되는 공군 전력 증강은 언감생심과 같았다. 결국 1970년대까지 상당한 수준의 전력을 보유하였던 것으로 평가되던 북한 공군은 지금까지 거의 그 수준에서 머물러야 했다.
한국 공군도 도입한 지 40년 가까이 된 F-4E 전투기처럼 노후기 대체 문제가 있지만 한국전쟁 때나 주력기로 활약하던 미그-15 전투기를 아직도 일선에서 운용 중인 북한 공군에 비할 정도는 아니다. 물론 북한 공군의 주력은 미그-19, 미그-21 전투기를 중국에서 카피 생산한 F-6, F-7이지만 이 정도로도 한국 공군의 주력인 KF-16과 F-15K를 상대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북한 스스로 잘 알고 있다.
만일 북한 공군이 상당한 수준이라면 당연히 이번에 출격 횟수를 늘리며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1970년대까지 서해 5도에 위협적인 도발을 가장 많이 했던 것도 사실 북한 공군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자랑하던 북한 공군이 실제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보니 이번에 상대적으로 한미 정보 당국에게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잠수함정과 공기부양정의 가동을 일부러 능력 이상으로 대폭 늘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북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첫 여성 전투기 조종사와 함께 기념촬영하는 모습. /조선일보 DB
■상륙전에 대한 집념
①②북한군이 공기부양정 20여척을 남쪽으로 전진배치시킨 이유
눈에 띠었던 공기부양정의 활동
목함지뢰 공격으로 촉발된 이번 군사적 대치 상황에서 북한군은 다양한 남침 준비 태세를 선보였다. 그것이 의도된 것이었든, 아니면 평소에 수립된 작전계획대로 진행된 것이든 관련 없이 한미정보 당국의 관심을 끄는 다양한 수단이 동원되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공군의 움직임이 없다시피 하였고 오랫동안 우리를 위협하던 기갑전력 또한 별다른 이상 징후를 보이지 않았던데 반하여 바다에서는 상당히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
이전부터 우리의 안보를 위협하는 북한 해군의 주요 전력인 잠수함정의 움직임도 분주했지만 이와 더불어 그 동안 성능에 대해서 의문이 많았던 공기부양정(LCAC)의 신속한 이동 전개가 눈에 뜨일 정도로 활발하였다. 준전시상태를 선포한 직후 북한은 평안북도 철산 기지에 배치되어 있던 공기부양정 20여 척을 남포로 전진 배치했고 그 중 일부는 백령도 북방 50여km에 위치한 고암포까지 이동하였다.
▲남대천 하구에 위치한 고암포 기지에 정박 중인 북한 해군의 공방 급 공기부양정. 평소 20여척의 공기부양정이 배치되었는데 이번 사태 때 증강이 이루어졌다.
고암포 기지는 최대 70여 척의 공기부양정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유사시 전방에서 작전을 펼칠 경우를 대비하여 2012년 완공되었다. 만일 여기서 최대 속도가 50노트(약 시속 90km)로 알려진 북한의 공기부양정이 발진한다면 백령도까지 40분 정도에 불과하므로 우리 측 정보자산이 항상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고암포의 위치와 공기부양정의 능력으로 볼 때 유사시 이들의 우선 목표는 서해 5도와 인근이 틀림없다.
구 소련의 지원을 받아 개발한 것으로 알려진 북한의 공기부양정은 흔히 공방급이라 표현하는데, 크게 I, II, III형의 세 종류로 구분되며 약 140여척을 보유하고 있다. 공방 급은 배수량 150톤, 길이 20m 내외에 대략 중무장한 1개 소대 병력이 탑승할 수 있으므로 북한이 보유한 공방급 모두를 일시에 작전에 투입하면 이론상 1개 여단 규모의 상륙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은 평시에 공방급을 서해 철산 기지와 동해 문천 기지에 배치하여 운용하다가 실전 투입이 임박하면 이번 사례에서 보듯이 전방 기지로 전개한다. 순항미사일을 탑재한 러시아의 보라(Bora) 급처럼 전투 능력을 보유한 거대 공기부양함도 있지만 군용으로 운용 중인 대부분의 공기부양함정은 병력이나 장비의 신속 이동이 가장 큰 목적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생각한다면 상륙전에 대한 북한의 집념이라고 할 수도 있다.
<②편에 계속>
▲북한 해군의 공방급 공기부양정. 1개 소대의 병력을 탑승시키고 시속 90km의 속도로 운항이 가능하다. /조선닷컴
<①편에서 계속>
진정으로 우려스러운 것
지난 한국전쟁 당시에 김일성이 두고두고 아쉬워하던 순간이 1950년 8~9월 사이에 있었던 낙동강 전투다. 엄밀히 말해 당시 방어선은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북한군의 우회 돌파를 막기 위해서 유엔군의 전략에 따라 형성된 것이지만, 김일성의 입장에서는 한반도의 90퍼센트를 손에 넣고 승리가 바로 목전에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이었다. 바로 이때 벌어진 인천상륙작전은 김일성의 꿈을 일거에 무너뜨린 결정타였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상륙전에 대한 북한의 거부감은 대단하다. 서해와 동해에 배치된 2개 군단의 주 임무가 아군의 상륙 저지일 정도인데, 이는 다시 말해 우리 해병대가 2개 군단 규모의 엄청난 북한군의 전방 이동을 막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신들도 유사 시 남한 배후나 전선 일각에 상륙하여 아군의 전력을 분산시키고 싶어 하였다. 사실 한국전쟁 당시 최초의 상륙전도 북한이 먼저 실시했다.
개전 당일 새벽 3시 북한군 특수부대가 동력선과 전마선 등을 이용하여 동해의 안인진과 정동진에 기습 상륙하여 강릉을 방어하던 국군 8사단의 배후를 차단한 적이 있다. 또한 같은 날 부산항을 점령하려던 1개 대대 규모의 특작부대를 수송하던 북한 선박이 상륙 시도 전에 백두산함의 분전으로 대한해협 부근에서 격침되었던 사례도 있다. 이처럼 북한도 능력이 있으면 상륙전을 펼치고 싶어 하였다.
▲2014년 11월쯤 서해 모처에서 실시된 북한군의 상륙훈련 모습. /조선중앙통신
해군력이 부족하여 언감생심 꿈도 못 꾸던 북한에게 공기부양정은 좋은 대안이 되었다. 1991년 10월 4일,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는 북한이 자체적으로 공기부양정을 제작하여 김일성 참관 하에 침투 훈련까지 실시하였음을 밝혔다. 이때 존재가 처음으로 일반에게 공개된 것인데, 이를 근거로 판단하면 적어도 1980년대 초부터 개발에 나섰음을 유추할 수 있다.
공기부양정은 바다와 육지를 쉽게 오가지만 민간용으로 사용하기 어려울 만큼 유지비용이 많이 든다. 그래서 북한의 경제가 몰락한 1990년대 중반 이후 부품 도입에 애를 먹으면서 가동률이 상당히 떨어진 것으로 분석되었었다. 때문에 이번에 대규모의 기동을 선보였다는 것은 공기부양정 뿐 아니라 북한군의 전반적인 전력 투자가 증가하였다는 증거와 같다. 어쩌면 이것이 진짜 우려스러운 부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2013년 총 36대 도입이 확정된 AH-64E는 대 전차전에 탁월한 능력을 보유한 공격 헬기지만 한국군에서는 북한군 공기부양정 침투 저지 임무도 담당한다.
■북한군의 특수전 전력 운용
①② 준전시 상태 선포한 북한, 전면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증거는?
당연히 당국에서 제공한 소스에 근거한 것이지만 이번 대치 상황 당시에 북한군의 움직임이 언론을 통해 마치 생중계 하듯이 알려졌고 SNS 등으로 급속히 전파되어 북한을 놀라게 만들었다. 물론 북한이 한미연합군의 정보 자산의 위력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당연히 당국 또한 모든 정보를 공표한 것도 아니지만 예전과 달리 이렇게 북한군의 움직임이 시시각각으로 노출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은 북한이 이번에 대대적인 군사 행동을 펼치면서 노렸던 부분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자신들의 움직임이 노출될 것이라면 판을 크게 벌려 남한 사회에 불안감을 조성하는 것도 좋은 도발 전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우리 국민들은 아무런 변화 없이 일상을 유지하며 의연하게 대처하였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북한이 선전 매체를 통해 혼란이 벌어진 것처럼 묘사하였지만 비웃음만 샀을 뿐이었다.
▲대남 선전 매체를 통해 허위 사실을 보도해 스스로 웃음거리를 자초하였을 만큼 북한은 우리 사회의 침착한 대응에 상당히 당황해 하였다. /우리민족끼리TV 유튜브 영상화면 캡처
반면 우리는 북한군이 눈에 뜨일 정도로 활발하게 보여준 움직임 덕분에 그들의 유사시 행동 태세를 새롭게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물론 이미 수립되어 있던 여러 계획들 중 하나일 뿐이고 계속하여 같은 방식을 쓸 것도 아니겠지만 북한이 장거리 타격수단과 비정규전을 위주로 한 움직임을 선보였다는 것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그 동안 북한이 해당 분야의 전력 증강에 유독 힘써온 것을 고려한다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다.
미사일 부대와 해상의 잠수함정, 공기부양정의 움직임이 활발하였던 반면 포병, 기갑, 공군은 의외라 할 만큼 조용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포병은 이미 요새와 진지에 전진 배치된 상황이라서 크게 변동이 없었지만, 전면 남침이 개시되면 4개 전연 군단을 후속하여 제2 제파로 돌파구를 확대하는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은 4개 기계화 군단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공군도 AN-2 운용기지를 제외하면 아무런 이상 조짐이 포착되지 않았다.
이런 북한군의 모습에서 여러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준전시 상태를 선포하고 연일 호전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애당초 전면전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쟁은 일단 벌어지면 간을 보고자시고 할 것 없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자산을 총동원하여 싸워야하는 치열한 행위다. 북한이 아무리 전략 타격 수단과 비대칭 전력에서 자신감이 있다하더라도 정규군의 동원 없이 전면전을 벌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②편에 계속>
▲북한군 기갑부대는 6-25 당시에 남침의 선봉장 노릇을 톡톡히 하였다. 하지만 이번 비상사태 당시에는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①편에서 계속>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있었던 제1차 대전을 끝으로 상대방도 준비할 수 있도록 언제 전쟁을 시작하겠다고 선포한 후 싸움을 벌이는 행위는 이제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당연히 침략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자는 기습의 효과를 최대한 얻기 위해서라도 전쟁 직전까지 최대한 비밀을 유지하려 든다. 그래서 이번에 북한이 동네방네에 대놓고 준전시 상태라고 선포한 행위는 그 자체가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아무리 전면전까지 생각하지 않았더라도 의지를 표명한 이상 긴장감을 최대한 고조시키기는 하여야 했다. 바로 여기서 비정규전에 대한 북한의 뿌리 깊은 자신감이 발동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38선 이북으로 후퇴하지 못한 패잔병들로 하여금 지리산과 태백산맥 등지에서 후방 작전을 펼쳐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 우리는 공비들보다 몇 배나 많은 병력을 투입하여 후방에서 소탕 작전을 펼쳐야 했다.
1968년 1·21사태, 삼척울진 무장공비 사태,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사태처럼 북한은 휴전 이후에도 수시로 특수부대를 후방에 침투시켜 전쟁 분위기를 조성하며 위협을 가하고는 했다. 그래서 전면전까지는 고려하지 않았어도 이처럼 비정규전 도발 경험이 많은 북한 입장에서는 특수부대의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충분히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지 모른다.
▲1996년 9월 19일 강릉 해안에 좌초된 무장간첩 잠수함을 조사하고 있는 모습. 이를 타고 온 무장공비를 소탕하는데 약 49일간 연인원 150만의 병력이 동원되어야 했다. /조선일보 DB
현재 북한의 특수부대는 대략 20만으로 추산되는데, 이중 약 2만 정도의 육상항공육전여단, 해상저격여단 병력이 유사 시 이번에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 준 잠수함정, 공기부양정, 그리고 AN-2 수송기를 이용하여 제일 먼저 침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사실 이동 수단은 전투 능력이 없다시피 하니 그 자체가 두려운 것은 아니다. 가장 우려스러운 부분은 이들을 타고 온 특수부대가 무사히 도착하여 산개하는 것이다.
침투 완료 이후에는 공비를 제거하는데 많은 시간과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이들이 이동 수단을 타고 움직일 때 격파하는 것인데, 당연히 군 당국도 다양한 대비를 하고 있다. 처음 언급한 것처럼 이들의 동태가 생방송처럼 보도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러한 증거 중 하나다. 북한은 위협을 가하기 위해 분주함을 떨었지만 세밀할 정도로 감시당하고 있다는 자체가 역설적으로 북한에게는 공포가 되었을지 모른다.
▲공기부양정처럼 고속으로 기동하는 소형선박을 격파하기 위해 국방과학연구소와 미국 해군항공무기연구소가 합작으로 개발중인 로거(LOGIR) 대함 미사일의 실험 장면. 2016년 전력화 예정이다. /US NAVY
■북한에게 공포로 다가오다
①② 北 수뇌부가 가장 두려워 하는 미군의 전략무기는?
가장 무서웠던 언급
이번 남북한 군사 대치 상황 당시에 각 언론 매체에서 북한군의 움직임 못지않게 한미연합군의 대응 태세도 자세하게 보도하였다. 국민에게는 안심을, 북한에게는 경고를 주기 위해서였다. 특히 2+2 회담이 막판으로 치닫던 8월 24일 오전, 국방부는 정례브리핑에서 “한·미는 현재 한반도 위기 상황을 주시하면서 미군 전략자산의 전개 시점을 탄력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북한을 압박하였다.
정확하게 어떤 수단이 동원될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언론에서는 B-2 폭격기, B-52 폭격기, 공격잠수함, 항공모함 등을 대상으로 손꼽았다. 그런데 같은 날 마크 웰시 미국 공군참모총장은 B-2 폭격기 3대가 조만간 괌에 위치한 앤더슨 공군 기지에 배치될 예정임을 밝혔다. 이번 사태와 무관하게 이미 예전에 수립된 순환 배치 계획에 따른 것이지만 굳이 B-2 폭격기를 언급한 것은 북한에게 끼칠 효과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었다.
▲마크 웰시 미국 공군참모총장은 8월 24일 미 국방성에서 기자들에게 B-2 폭격기의 괌 배치에 대해 언급하였다. 정확히 시기를 밝힌 것도 아니고 원래 예정된 계획에 따른 것이었지만 이를 굳이 언급한 것은 북한에게 끼칠 효과가 크기 때문이었다. /USAF public domain
그리고 다음날 33시간 만에 마라톤 회의가 타결되면서 한반도에 드리워졌던 위기가 해소되었다. 물론 이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미군의 전략자산, 특히 B-2 폭격기가 북한에게 상당히 심각한 부담감을 안겨주었음은 틀림없다. 오래 전부터 한반도에 위기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미군이 전략자산을 제공하거나 혹은 제공 의사를 강력히 표출하다보니 정작 우리는 무덤덤하게 받아들이지만 이를 대하는 북한의 입장은 그야말로 피가 마를 정도다.
유독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북한 권력층에게 가장 현실적인 위협 수단이기 때문이다. 흔히 전략폭격기라고 하면 예전에 시도되었던 융단폭격을 머리에 떠올리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특정 지역 전체를 제압하는 이런 방식은 어쩔 수 없이 많은 민간의 희생을 동반하여야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정밀유도무기로 목표한 곳만 골라서 폭격을 가한다. 즉, 전략폭격기는 김정은을 비롯한 권력 실세들을 직접 겨냥하는 수단인 것이다.
전시에 미군의 전략폭격기는 이미 목표로 선점하여 놓은 곳만 골라서 신속히 작전을 펼치게 된다. 당연히 제일 먼저 타격할 곳은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주요 군사 목적물과 더불어 북한 정권이다. 그래서 미군의 전략폭격기는 북한 수뇌부에게 막연한 위협이 아니라 마치 항상 뒤통수 가까이 다가온 비수와 같은 존재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당연히 하늘에서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불벼락을 막기 위한 노력은 필사적이다.
<②편에 계속>
▲유명한 B-52 폭격기와 무장이 가능한 다양한 종류의 무기. 1963년 생산을 종료하였기 때문에 개수를 꾸준히 하였지만 현재 운용 중인 기체들은 기본적으로 최소 50년이 된 것들이다. /위키피디아
<①편에서 계속>
계속되어야 할 자주국방 노력 지난 한국전쟁 당시에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유엔군의 폭격에 시달렸던 북한은 미군의 폭격기에 대해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그래서 평양의 방공망은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조밀한 감시망과 화기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될 만큼 강력하다. 북한이 보유한 최고 성능의 전투기인 미그 29도 김정은 경호를 담당하는 호위사령부 예하에 있는 평양방어사령부에 소속되어 있을 정도다.
더불어 권력자의 거처는 어지간한 공격을 견디어낼 수 있도록 요새화 되었고 유사시 도피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북한 각지에 수량 미상의 수많은 별장과 초대소가 설치되어 있다. 이처럼 김정은과 정권 수뇌부의 안위를 지켜내기 위해 북한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도 북한이 안심하지 못하는 이유는 방공망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스텔스 기능이 있는 B-2 폭격기 때문이다.
▲Mk 82 폭탄을 투하하는 B-2 폭격기. 이처럼 재래식 폭격도 가능하지만 대개 스텔스 기능을 앞세워 은밀히 적진 가까이 침투하여 정밀유도무기로 공격을 가한다. /위키피디아
많이 알려진 B-52 폭격기도 대단한 폭장량을 자랑하고 정밀유도무기를 운용할 수 있지만 이미 제작된 지 50년이 지난 구형 기종이다. 따라서 북한도 대공 감시망으로 충분히 움직임을 파악하여 대비할 수 있다. 반면 스텔스 비행이 가능한 B-2 폭격기는 상대방이 폭격을 당하고 난 이후에나 침투 사실을 알 수 있을 만큼 사전에 동태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당연히 무서울 수밖에 없다.
사실 B-2 폭격기 이외에도 한미연합군은 훨씬 많고 다양하며 강력하게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여타 공격 자산들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에 공습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트라우마가 있는 북한 입장에서 B-2 폭격기는 가장 현실적인 위협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미군의 전략자산을 우리 언론에서는 한반도 위기 시 흔하게 접하고 흘리는 정보로 취급하지만 북한에게는 그야말로 심각한 당장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B-2 폭격기는 한미동맹이라는 울타리가 없다면 유사 시 도움을 받기 어려운 무기이고 우리가 이를 보유 운용한다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종국적으로 B-2 폭격기 같은 압도적인 전략무기가 아니더라도 최악의 경우 우리 단독으로 북한의 군사적 도발을 충분히 감시하고 억제할 수 있는 능력은 갖추어야 한다. 당장 실현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자주국방은 어렵다고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될 명제다.
▲SLAM-ER, Taurus 같은 장거리 대지 공격 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F-15K. 우리군도 다양한 전략타격 수단을 갖추고 있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공군 제공
2015.09.09
■항공모함의 탄생
(1)독보적인 해군력의 미국, 그 힘의 상징은 항공모함
바뀐 전쟁의 모습
혁명적이라 할 만큼 무기의 성능이 향상되었던 20세기 초반은 전쟁의 패러다임이 급격하게 바뀌게 된 시기였다. 당시에 탄생한 무기 중 M1911권총이나 M2중기관총처럼 현재도 생산하여 사용 중인 것들이 있을 만큼 엄청난 기술적 비약이 있었다. 사실 여타 무기에 비한다면 총은 사용 방법과 목적이 거의 변하지 않아 진화가 더딘 편이기는 하다. 그것은 반대로 생각하면 잘 만든 총은 오래도록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기사에서 특히 이 시기가 주목받는 이유는 전혀 새로운 장르의 무기가 등장하여 전쟁의 방법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마치 화약의 등장으로 칼, 창, 활로 대변되는 냉병기(冷兵器)의 시대가 저물어간 것과 같은 변화가 벌어졌다. 예를 들어 현대 전쟁터의 주역인 전투기와 전차가 이때 등장하였다. 물론 당시의 전투기와 현재의 전투기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지만 하늘을 싸움의 공간으로 삼는다는 것은 이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인간은 비행기를 만든 지 불과 10년 만에 하늘을 싸움의 공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처럼 20세기 들어 전쟁의 방법은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위키피디아
인류 최초의 비행기인 플라이어가 37미터의 거리를 12초 동안 날았던 때가 1903년이었지만 불과 10년 만에 인간은 비행기를 전쟁의 도구로 이용하였다. 현대 문명의 이기인 컴퓨터와 인터넷도 군사적인 목적으로 먼저 개발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새로운 수단을 싸움의 도구로 이용할 줄 아는 인간의 능력은 가히 탁월하다. 그렇다 보니 오랜 평화 끝에 찾아 온 제1차 대전에서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가 벌어진 것은 너무 당연하였다.
더구나 무기의 성능은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으로 발전하였지만 전쟁을 이끌고 지휘하던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 머물러 있었다. 물론 20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종류의 무기 중에 현재 도태된 것도 많지만 위에서 언급한 전투기나 전차 같은 무기는 계속하여 발전을 하여 오늘날도 당당한 전선의 주역으로 맹활약 중이다. 그러한 무기 중에 해상 무기의 총아인 항공모함도 있다.
바다를 지배하여야 세계를 재패할 수 있으므로 패권국은 당연히 해군력 확충에 열과 성을 다한다. 20세기 전반기만 해도 미국, 영국, 독일, 일본 등이 바다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였지만 모두 몰락하였고, 현재 미국 해군에 도전할 세력은 전무할 정도다. 특히 제2차 대전 이후 현재까지 엄청난 수준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항공모함 전력은 감히 비교 불가의 대상이다.
▲조지 워싱턴 항공모함 전투단의 모습. 아직까지 이러한 미국의 항공모함 전력에 맞상대할 수 있는 국가는 없다. /미 해군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정체성
냉전 시기에 급속히 해군력을 증강시켰던 소련조차도 항공모함 보유 경쟁은 포기하였고 최근 경제 성장을 발판으로 자신감을 얻은 중국이 이 분야에 도전하려 하지만 미국에 근접하기는 아직 요원해 보인다. 가장 큰 이유는 미국과 맞먹는 항공모함 전력을 구축하는데 엄청난 경제적 부담이 따르기도 하지만 그보다 운영에 관한 노하우를 구축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 노하우를 사거나 전수받을 수 있는 상업적 거래와 달리 군사 분야는 국가 간 이동이 극히 제한된다. 지난 2011년 F-15K에 장착된 첨단 센서인 타이거아이를 우리가 무단으로 분해하였다는 의혹이 있다며 미국이 항의하였을 정도로 동맹국이라도 함부로 기술이나 정보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다른 한 편으로 미국이 현재의 항공모함 전력을 구축하는데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거액을 주고 샀음에도 무단 분해하였다는 의심을 사서 한미 군 당국 간에 문제가 되었던 타이거아이. 이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무기는 관련 기술이나 정보를 쉽게 공개하지 않는 품목이다. /조선일보DB
20세기 들어 전함을 밀어내고 해군력의 상징이 된 항공모함은 이처럼 초강대국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상당히 의외지만 최초의 항공모함에 대해서는 의견이 중구난방으로 나뉘는 편이다. 100 년 전은 인류사 전체로 본다면 극히 최근의 과거라 할 수 있어 최초의 전차인 Mk1에 대한 자료도 쉽게 얻을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정작 거대하고 눈에 잘 뜨이고 뚝딱하고 만들 수도 없는 항공모함의 시작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자료가 망실되어 그런 것이 아니라 어느 선까지를 항공모함으로 보아야 하는 원초적 문제로 귀결이 된다. 즉 항공모함의 정의에 관한 문제인데, 생각보다 이 점 때문에 의견이 많이 나뉘는 편이다. 우리는 흔히 미국이 보유한 슈퍼캐리어만을 항공모함으로 인식하지만 한국 해군의 독도함보다 작은 태국의 차크리 나루에벳처럼 경량의 항공모함도 존재하고 있다.
반면 미군이 현재 운용중인 상륙강습함(LHD)은 미국 이외의 나라가 운용하는 항공모함들보다 크지만 명목상 항공모함이 아니다. 사실 미국의 상륙강습함은 항공기를 운용하므로 항공모함이라 부른다고 해도 하등 이상하지 않다. 원론적으로 단 한대의 비행기만 겨우 운용할 수 있는 작은 배를 광의의 범위에서 항공모함이라 해도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최초의 항공모함이 무엇이냐에 대해 의견이 갈리는 것이다.
▲AV-8 공격기를 탑재한 미 해군의 상륙강습함 와스프. 웬만한 국가의 항공모함보다 크고 함재기도 많이 탑재하지만 미국에서는 이를 항공모함이라고 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만큼 항공모함은 정의 내리기 어려운 무기이기도 하다. /미 해군
(2)비행기 발명 7년 만에 항공모함의 역사가 시작되다
바다에서 비행기 날리기
라이트 형제의 최초 비행 이후 비행기가 속속 실용화되자마자 사람들은 이를 무기로도 사용하려 하였다. 물론 전투기나 폭격기처럼 당장 실전에서 활약할 수 있는 기체를 먼저 구상하였지만 1910년 이전의 기술로는 실현이 어려웠고 일단 정찰 용도로 사용하는 방법을 고려하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보다 편리하고 좋은 정찰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비행기가 탄생하기 훨씬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높은 고지를 선점하여 상대의 동태를 살피는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해왔던 군사 행위였고 비행기가 탄생하기 이전에는 기구나 비행선이 이런 목적에 투입되었다. 새롭게 등장한 비행기는 인간이 만들어 낸 다른 비행체에 비해 자유자재로 비행이 가능하고 속도가 빨라서 군사적 효과가 탁월하다는 사실이 입증이 되었다.
▲1871년 보불전쟁 당시 파리가 포위되자 기구를 이용하여 적진을 정찰하고 외부와 연결을 시도하였다. 이처럼 높은 곳에서 감시하는 방법은 상당히 오래되었다. /위키피디아
그런데 높은 고도에서 내려다보며 정찰하는 행위는 별다른 장애물이 없는 바다에서 더욱 효과적안 정찰 방법이다. 현재 군함의 마스트는 감시, 통신 장비들을 부착하는 용도로 주로 사용되지만 원래 견시(見視)를 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높을수록 더 먼 곳을 감시할 수 있기 때문에 레이더가 아직 일반화되지 않았던 제2차대전 초기만 해도 군함들의 마스트는 상당히 높았다.
따라서 배에서도 항공기를 운용할 수 있다면 그 효과는 대단할 것이 틀림없었다. 문제는 비행기가 날아오르려면 활주로가 있어야 했는데 배에 그런 공간을 확보하기는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인간은 최초의 비행이 이루어진지 불과 7년 만인 1910년, 미 해군 순양함 버밍햄(Birmingham)에 나무로 임시 비행갑판을 만들어 복엽기를 이함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처럼 새로운 무기에 대한 인간의 집념은 대단하였다.
비록 버밍햄은 오늘날 개념으로는 항공모함이라 정의할 수 없지만 항공모함의 역사가 시작된 배라는 점에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리고 불과 1년 만에 장갑순양함 펜실바니아(Pennsylvania)에 설치된 비행갑판에 비행기가 착함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배에서 비행기를 자유자재로 운용할 수 있음이 입증되었다. 하지만 아직은 실험 단계였고 움직이는 선박에서 운용이 가능하여야 무기로써의 가치가 있었다.
▲1910년 11월 14일 미 해군 순양함에 설치된 임시갑판에서 유진 얼 리가 조종하는 비행기가 이함에 성공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시작을 알리다
이를 처음 성공시킨 곳은 영국 해군이었다. 미 해군의 시도에 자극 받은 영국은 1912년 전함 하이버니아(Hibernia)에 비행기를 탑재하여 운항 중 이함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미국이 맹렬히 도전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세계 최고의 해군을 보유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영국은 바다의 패권을 계속 유지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미국 외에도 많은 나라들이 배에서 비행기를 운용하는 방법을 연구하였다.
당시 임무를 마친 비행기는 부근 해상에 착수한 후 크레인으로 건져 다시 배에 올리는 시스템이었는데, 이후부터 이런 방식으로 함재기를 운용하는 전용함을 수상기모함(Seaplane Carrier 또는 Seaplane Tender)으로 구분하였다. 배에 직접 착함하는 방식은 아니지만 평소 함재기를 배에 탑재하고 보수까지 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으니 수상기모함도 광의의 항공모함이라 할 수 있다.
▲최초의 수상기모함으로 기록된 푸드르가 착수한 부아젱 카나르 수상기를 건져 올리고 있다. /위키피디아
이 때문에 1911년 최초의 수상기모함인 프랑스 해군의 푸드르(Foudre)를 최초의 항공모함으로 보는 의견도 존재한다. 원래 어뢰정 모함이었던 배수량 6,000톤의 푸드르는 탑재한 부아젱 카나르(Voisin Canard) 정찰기를 후방 갑판에 설치된 10미터의 활주대를 이용하여 이함시켰고 착수 후에는 크레인으로 건져 올렸다. 이처럼 수상기는 연락이나 정찰 용도로 주로 사용되지만 이를 이용하여 폭격 작전까지 벌인 예가 있다.
제1차 대전 당시에 연합국에 가담한 일본이 1914년 독일령 칭다오(靑島)를 공격할 때 수상기모함인 와카미야(若宮)에 탑재한 4기의 프랑스제 모리스 파르망(Maurice Farman) 수상기를 이용하여 독일군 기지를 폭격하는데 성공하였다. 전술적 효과가 크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함재기를 통한 최초의 전투 행위였다. 이것은 단지 정찰 용도가 아닌 전투용 무기로서 수상기와 수상기모함의 역할을 입증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와카미야의 폭격 작전은 육상에서 비행기를 통한 전투 행위가 벌어진 것과 거의 동시대에 벌어진 사건이었을 만큼 상당히 빨랐다. 효과가 입증되자 수상기모함보다 전투에 사용하기 편리한 함재기와 이를 운용할 항공모함의 등장이 촉진되었다. 1941년 진주만 급습을 통해 전략 공격 수단으로서 항공모함의 진가를 입증한 것처럼 일본은 항공모함 역사에 상당히 굵직한 발자국을 남긴 또 하나의 주역이었다.
▲와카미야는 사상 최초로 함재기를 이용하여 폭격 작전을 시도하여 성공한 군함이었다. 출격도 회수할 때처럼 크레인을 통해 수상기를 바다에 내려놓고 실시하였다.
(3) 거함거포주의에 흔들리던 초기 항공모함, 타협 속에 빛을 보다
커야 할 당위성
비록 바다 위에 착수시켜 크레인으로 끌어올리는 방식을 채택하였지만 비행기를 배에서 유지, 보수하고 이함시켜 작전을 펼치는 프로세스 측면에서 본다면 수상기모함도 분명히 항공모함의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이착함을 직접 할 수 있는 항공모함과 구별하기 위해 수상기모함이라는 단어가 별도로 사용되지만 적어도 이들이 처음 활약하였을 때는 그러한 구별은 없었다.
수상기모함도 마찬가지였지만 20세기 초반은 기존에 사용하던 함정이나 선박을 개조하여 비행기를 운용하던 과도기적 시기였다. 최초로 비행기를 이함 시킨 버밍햄이나 착함에 성공한 펜실바니아 그리고 영국 해군의 하이버니아 모두 순양함이나 전함의 갑판을 임시로 개조한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배에서 비행기를 운용할 수 있는 노하우를 하나하나 습득하였다.
특히 어레스팅 후크를 이용한 착함 기술은 항공모함의 등장을 촉진시킨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맞바람을 이용하여 쉽게 양력을 얻을 수 있었던 이함과 달리 함정 인근에 착수하여 끌어올리는 방식을 계속하여 사용하였을 만큼 여전히 갑판 위로의 직접 착함은 어려웠다. 하지만 작은 갑판에도 착함할 수 있도록 돕는 여러 기구들이 탄생하면서 번거로운 착수 및 회수 단계가 생략될 수 있었다.
▲1911년 1월 18일 미 해군 장갑순양함 펜실베이니아에 설치된 임시 갑판에서 유진 얼 리가 조종하는 비행기가 착함에 성공하였다. 이때 어레스팅 후크와 와이어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이후 기본적인 항공모함 착함 방법이 되었다. /미 해군
원래 배에서 비행기를 운용하려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정찰이었지만 일본 해군의 칭다오 폭격은 함재기가 전투 목적에도 투입이 가능함을 입증하였다. 그런데 단독으로도 수행할 수 있는 정찰과 달리 본격적인 전투 행위를 펼치려면 편대를 구성할 수 있는 적절한 수량의 비행기가 필요했다. 또한 함재기에 탑재할 무기와 연료를 보관할 여분의 공간이 배에 있어야 했다. 이것은 바로 항공모함이 필요한 이유였다.
이런 조건을 충족하려면 기존의 수상기모함보다 크기가 커져야 했는데 이때 많은 난관에 부딪혔다. 거함거포주의가 해군의 사상을 지배하던 당시에 전투함은 곧 그 자체가 무기였던 시절이었다. 적을 충분히 제압하기 위한 대구경의 포를 장착하려면 당연히 전함의 크기도 커야했다. 하지만 항공기를 운용하는 수상기모함이나 소수파가 신속히 도입을 주장하던 항공모함은 비록 덩치는 컸지만 무기가 아니었다.
▲구 소련의 항공순양함 고르시코프 제독호. 이처럼 자체적으로 중무장한 특이한 경우도 있었지만 항공모함은 여타 전투함과 달리 그 자체가 무기는 아니다. /위키피디아
타협 속에 탄생하다
전통을 중시하는 대부분의 보수적인 해군 지휘부에게 커다란 선체를 지닌 비싼 군함을 전투용으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 한마디로 어불성설이고 합리적이지도 않았다. 상대방보다 더 멀리 쏠 수 있는 강력한 함포를 장착한 거함을 한척이라도 많이 보유하는 것이 옳다고 보았던 시절의 자화상이었다. 더구나 1910년대의 함재기는 전투용으로 사용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따라서 기존 전투함에 정찰 용도로나 사용할 소수의 수상기만 탑재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 생각하였다. 제1차 대전 후 해군력 감축에 대한 국제적인 논의가 시작되었을 때 주요 쟁점이 전함이었을 만큼 여전히 바다 위의 힘의 질서는 전함을 비롯한 거함들이 주도하였고 이러한 사상은 제2차 대전 발발 당시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비록 가능성은 보였지만 함재기가 전투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는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출격 후 귀환한 정찰기를 회수하는 미 해군 순양함 필라델피아. 이처럼 수상기모함이 아니더라도 함재기를 운용할 수는 있었으나 보유할 수 있는 수량이 적었고 정찰처럼 용도도 제한적이었다. /위키피디아
그래서 같은 목표물을 향해 전함으로 공격할 수 있는 포탄의 양과 항공모함의 함재기로 폭격할 수 있는 폭탄의 양을 비교하여 전함이 더 효과적인 무기라고 단정을 하였을 정도였다. 비록 가능성이 보였지만 상당한 반대에 부딪혀 초기에 항공모함의 발전이 더뎠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였다. 많은 이들이 최초의 항공모함이라고 주장하는 영국 해군의 퓨리어스(Furious 47)도 이런 시대상을 배경으로 기구하게 탄생한 결과물이었다.
1915년 건조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퓨리어스는 경순양함으로 설계된 상태였다. 그런데 이듬해 선체를 진수한 후 정책이 바뀌어 함재기를 운용할 수 있도록 선두에 갑판을 설치한 형태로 개조가 이루어졌다. 정찰 및 폭격에도 이용할 수 있는 184 다목적 수상기를 탑재하기 위해서였는데, 그것은 엄밀히 말해 항공모함을 갈망하였던 이들이 거함을 중시하던 정책 입안자들과의 타협을 통해 얻어낸 산물이었다.
전통적 무기로서의 순양함 기능도 보유하고 수상기모함의 역할도 함께 할 수 있도록 제작된 것이었다. 하지만 실험 결과는 이도저도 아닌 실패작으로 판명되었다. 결국 1918년 선미의 포탑을 제거하고 갑판 전체를 평평히 만드는 개조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 때문에 일부 자료에서는 퓨리어스를 최초의 항공모함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연돌과 함교가 갑판 중간에 위치하여 단지 확장된 수상기모함의 형태에 가깝다는 것이 중론이다.
▲진수 당시의 퓨리어스. 선미는 순양함, 선수는 수상기모함을 절중한 형태인데 사실 이 시도는 실패로 막을 내렸다. /위키피디아
(4)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막강한 영국 해군이 만든 아거스
당연한 시행착오
이처럼 퓨리어스는 제작을 서둘렀지만 실전에 투입되기 전에 종전을 맞이하였다. 한마디로 여러 실험적인 시도로 말미암아 건조 기간도 늦어지고 정체성의 혼란만 키운 셈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과 시행착오가 있었기에 항공모함이 등장할 수 있었다. 오늘날 초강대국 무력 투사의 상징인 항공모함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여러 경험이 축적된 결과물이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는 항공모함의 시설이나 장비 그리고 운용 노하우들은 바로 이러한 노력의 산물이다. 예를 들어 착함 공간을 갑판에 비스듬하게 배치하여 함재기의 이함, 착함 그리고 주기(駐機) 공간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도록 만든 경사갑판(Angled Deck)은 페인트로 적당히 그린 것처럼 단순해 보이지만 항공모함을 위주로 한 치열한 함대 간 대결을 무수히 겪으며 얻은 결과물이다.
▲현대 항공모함에서 많이 채택하고 있는 경사갑판은 수많은 실전을 거쳐 얻은 경험에 따라 탄생하였다. /위키피디아
비록 경순양함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지만 퓨리어스는 만재 배수량이 23,000톤에 길이가 239미터여서 결코 작은 군함은 아니다. 현재 한국 해군의 강습상륙함인 독도함이 18,000톤에 199미터인 점을 고려한다면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결국 기본적인 하드웨어가 좋았던 퓨리어스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던 영국은 1922년 함교를 제거하고 상부를 완전 평갑판으로 개조하여 항공모함으로 바꾸는 재개조 사업을 실시하였다.
제1차 대전 시작 당시에 비행기는 단지 정찰 용도로나 사용되었지만 전쟁이 끝날 무렵에 이르러서는 공중전과 폭격이 일상이 되었을 정도로 급격한 변화를 이루었다. 더불어 비행기를 보다 편리하게 운용할 수 있도록 군함의 형태도 새롭게 체계를 잡으면서 마침내 진정한 항공모함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이처럼 이전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군함은 여러 분야의 발전이 함께 있었기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퓨리어스는 1925년 진정한 항공모함으로 환골탈태하게 되었고 제2차 대전에서는 호위항공모함(Escort Carrier)으로 역할을 다하였다. 퓨리어스는 전쟁 말기인 1944년 4월에 있었던 독일의 거대 전함 틸피츠(Tirpitz)의 격침 작전에 참가하였고 종전 후인 1954년에 폐선처리 되었다. 이러한 기념비적 삶 때문에 퓨리어스를 최초의 항공모함으로 보는 이들이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1922년 퓨리어스는 갑판 전체를 개조하여 순수한 항공모함으로 재탄생하였고 이후 제2차 대전에서 맹활약하였다. /위키피디아
달랐던 출발
반면 퓨리어스보다 크기는 조금 작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역시 영국 해군이 만들었던 아거스(Argus I49)를 최초의 항공모함이라고 보는 이들도 많다. 수상기모함의 군사적 능력을 깨달은 영국 해군은 전쟁이 격화되자 이를 확보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여전히 바다의 주역은 전함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다양한 무력 투사를 갖춰서 나쁠 것은 없었고 특히 전시에는 이런 조급증이 더할 수밖에 없다.
시간이 촉박하다보니 처음부터 새로운 형태의 군함을 만들 수는 없었고 건조 중이거나 이미 건조된 선체를 이용하였다. 영국이 이처럼 다양한 시도를 충분히 펼칠 수 있었던 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거대한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쟁 직전 치열한 건함 경쟁을 펼쳤던 독일도 정면 대결을 회피하였을 만큼 영국 해군은 강하였다. 하지만 이런 영국도 서둘렀을 만큼 전쟁은 엄청나게 확대되고 있었다.
앞서 소개한 퓨리어스도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수상기모함으로 변경된 사례였다. 그런데 아거스는 조금 달랐다. 1914년 계획 당시에는 수상기모함으로 예정하였지만 1916년 계획을 완전히 바꾸어 평갑판을 갖춘 항공모함으로 제작이 이루어 진 것이었다. 제1차 대전이 한참 진행되면서 수상기가 아닌 함재기를 직접 갑판에 이착함시킬 수 있는 항공모함이 보다 효과적인 무기임을 깨닫게 되면서 방침이 변경된 것이었다.
퓨리어스와 달리 아거스가 이렇게 신속히 변신을 꾀할 수 있었던 것은 기본이 되었던 선체가 이탈리아의 상선인 콘테로소(Conte Rosso)였기 때문이었다. 포탑이나 여타 구조물이 많은 순양함이나 전함보다 상선은 상부 구조물이 단순하여 평갑판을 설치하여 개조하기가 용이하였다. 이렇게 아거스는 1918년 항공모함으로 개조되어 취역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이를 많은 이들이 최초의 항공모함이라고 주장한다.
제1차 대전 동안 만들어진 관계로 정작 해당 전쟁에서 활약을 하지는 못하였지만 아거스는 새로운 전운이 고조되던 1930년대에 대대적인 개장 공사를 벌여 제2차 대전 발발 1년 전인 1938년 재 취역하였고 이후 전쟁에서 많은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때는 수많은 신형 항공모함들이 속속 등장하였기 때문에 아거스는 노장이 되었지만 한 척의 군함도 아쉬웠던 상황이라 훈련 및 호위 항공모함으로 종횡무진 활약하였다.
▲1942년 격납고에 씨허리케인을 탑재하고 작전을 준비 중인 아거스. 제2차 대전 당시에는 이미 노후된 함정이었지만 종횡무진 역할을 다했다. /위키피디아
(5) 진주만 습격 직전 일본 항공모함 전력은 미국보다 다소 앞서
발전을 촉진시킨 군축
무기사를 살펴보면 넓은 의미에서 항공모함은 비행기의 탄생과 함께 시작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당장은 기존에 있던 인프라와 하드웨어를 최대한 이용하여 항공모함이 연구되고 개발되었다. 처음으로 비행기의 이착함 실험을 실시하였던 여러 군함들도 그렇고 최초의 항공모함들로 논쟁 중인 퓨리어스와 아거스도 순양함과 상선을 개조하여 탄생한 것들이다.
이러한 개발사는 현재 세계 최강의 항공모함 전력과 운용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는 미 해군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최초의 항공모함이자 실험함이었던 랭리(Langley)도 기존에 석탄운반선으로 사용하던 주피터(Jupiter)를 개량한 것이다. 1922년 최초로 실전에 배치된 항공모함인 2척의 렉싱턴(Lexington)급도 원래는 순양전함으로 설계가 되고 건조중이던 선체를 개조하여 탄생하였다.
▲오늘날 세계를 선도하고 있는 미 해군 최초의 항공모함이었던 랭리. 석탄운반선을 개조한 실험용 항공모함이었다. /위키피디아
사실 1920년대에 등장한 초기의 항공모함들 대부분은 기존함이나 건조 중이던 다른 함을 개조하여 탄생하였는데, 이 부분은 군축과 관련이 많다. 제1차 대전의 여파가 워낙 크다보니 전후 군축 협상이 활발히 벌어졌다. 그 중 강대국의 상징이지만 건조와 보유에 엄청난 국력이 소모되는 해군력의 축소는 가장 중요한 안건이었다. 흔히 워싱턴 조약과 런던 조약으로 대변되는 일련의 다자간 협약에 의해 해군력 조정이 이루어졌다.
당시 세계 해군의 패권을 나눠 쥐고 있던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등 5개국은 1921년에 현재 건조중인 주력함은 제작을 중단하고 추후 계획 중인 함 또한 향후 10년간 제작을 실시하지 않는다는 데 합의하였다. 규정된 대부분의 주력함은 거함거포의 상징이었던 전함과 순양함이어서 각국 별로 보유할 수 있는 해당 군함의 총 톤수와 주포의 구경도 구체적으로 제한되었다.
이때 항공모함도 제한이 가해졌지만 기존에 건조하던 일부 함을 폐기하지 않고 항공모함으로 개조하도록 허락하였을 만큼 아직까지는 위협적인 무기로 보지는 않았다. 항공모함이 서서히 실용화되고 있었지만 당시까지는 단지 비행기를 운반하는 덩치 큰 수송함 정도로 생각하였던 것이었다. 역설적이지만 이처럼 해군 군축 조약은 차세대 바다의 주역이 될 항공모함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건조 도중 발효된 워싱턴 조약에 따라 폐기처분되는 미 해군 전함 사우스캐롤라이나. 그런데 이러한 군축은 항공모함의 발전을 더욱 촉진시켰다. /위키피디아
아직도 논쟁 중인 주제
이런 급격한 환경의 변화 덕분에 항공모함들이 속속 등장하였지만 처음부터 항공모함으로 설계되고 건조된 함들이 아니다보니 운용상에 많은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물론 처음부터 항공모함 전용함으로 설계되고 건조되었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생소한 분야의 군함이어서 문제가 없지는 않았겠지만, 아무래도 다른 선박을 개조하다보니 운용 도중 부족한 부분이 더욱 눈에 잘 뜨인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확연히 알 수 있는 예가 바로 1937년부터 실전배치된 미국의 요크타운(Yorktown) 급 항공모함이다. 처음부터 항공모함으로 설계되고 제작된 3척의 요크타운 급은 갑판 길이가 230미터 배수량이 25,000톤이었는데, 이는 순양함을 개조한 렉싱턴 급보다 훨씬 작은 규모였다. 하지만 항공모함의 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인 함재기의 운용 효율은 훨씬 높았다. 그런 기대대로 태평양 전쟁 초기에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산호해 전투 당시 함께 출동한 요크타운(CV-5)에서 바라 본 렉싱턴(CV-2). 크기는 렉싱턴이 컸지만 작전 효율성은 처음부터 항공모함으로 설계하고 제작하였던 요크타운이 좋았다. /위키피디아
이처럼 개조함들의 문제점이 하나 둘 드러나고 항공모함이 새로운 전투수단으로서의 가능성이 점점 커지자 목적에 적합하게 만들어진 전용 항공모함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처음부터 항공모함으로 설계가 이루어지고 건조된 최초의 함이 일본의 호쇼(鳳翔)다. 영국의 허미스(Hermes 95)보다 1년 늦은 1918년 건조를 시작하였지만 1922년 먼저 실전에 배치됨으로써 최초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호쇼를 최초의 항공모함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은 제2차 대전 패전 직전까지도 거함거포주의를 버리지 못했지만 호쇼와 이후 항공모함 함대를 이용한 진주만 급습처럼 항공모함 전력의 구축과 운용에 있어서 많은 성과를 남긴 나라다. 1943년 이후부터 미국에게 압도당하기 시작하였지만 태평양 전쟁 발발 직전에 일본은 항공모함 전력에서 미국을 근소하게 앞서고 있었을 정도였다.
지금까지 알아본 것처럼 프랑스의 푸드르, 영국의 퓨리어스와 아거스, 일본의 호쇼는 자신이 항공모함 분야의 선구자라고 주장할만한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탄생한지 불과 100년 밖에 되지 않은 무기지만 어느 것이 최초의 항공모함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 이처럼 갈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지금까지 알아 본 것처럼 어느 기준으로 바라보냐에 따라 답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항공모함의 범주를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부합되는 임무를 수행하는지가 핵심 포인트인데, 정작 이것조차 정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이렇게 그리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지만 시작점을 잡기 애매한 항공모함은 조그만 옹달샘에서 시작된 거대한 강처럼 어느덧 강대국을 상징하는 전략 무기가 되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처럼 강력한 위상을 계속 가지게 될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1922년 취역한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 호쇼. 처음부터 항공모함으로 설계 건조되어 이를 최초의 항공모함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위피키디아
■병참(兵站)이란 지명에 담긴 역사
(1) 일본군 포병부대가 대규모 실사격 훈련을 위해 찾던 곳
잊혀진 이름
설령 병역을 치루지 않았더라도 '병참(兵站)'의 의미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사전에 '군사 작전에 필요한 물자를 관리, 보급하는 일 또는 그 병과'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처럼 전투 병과와 더불어 군을 구성하는 핵심 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아는 이들은 거의 없지만 인천시 부평구에 병참이라는 지명이 있었다. 그런 지명이 운명이었는지 결국 병참과 관련된 시설지로 이용되었고 지금도 그렇게 사용 중이다.
현재 대규모 아파트단지와 더불어 군사 시설이 밀집한 산곡동 일대가 구한말까지 병참이라 불렸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병참은 군수품 조달과 관련한 임무를 맡은 곳인데, 공교롭게도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이곳 일대에 조병창을 만든 후 군수 관련 시설 및 부대들이 들어섰고 일부는 현재도 국군과 주한미군이 사용 중이다. 하지만 원래 허허벌판이던 이곳에 1930년대까지 아무런 군사시설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허허벌판인 1920년대 장끝말 부근에서 촬영된 부평의 모습. 전면이 오늘날 산곡동 일대인데 구 한말이전에 병참으로 불렸다.
따라서 예전에 병참이라 불리게 된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구한말 이곳의 행정구역명은 부평군 마장면(馬場面)이었는데, 마장은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군마나 파발마를 비롯한 각종 말을 방목하여 키우던 목장을 의미한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경기도에만 26개소의 마장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이곳도 그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서 병참으로 불린 것이 아니었는지 추측되기도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현재 산곡동이라는 정식 행정명보다 버스 정류장이나 노선표에서 보듯이 일대를 백마장(白馬場)이라고 많이 부른다. 하지만 정작 백마장이라는 명칭은 마장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1940년 4월 1일, 행정구역을 일본식으로 개편할 때 당시 인천부윤(仁川府尹)이던 나가이 데라오(永井照雄)가 마장면 산곡리를 아무런 관련도 없는 하구바죠(白馬町)로 임의적으로 개칭하면서 생긴 명칭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명명된 백마정이 해방 후 원래 지명인 마장과 어울리면서 백마장으로 변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아무런 정정 노력 없이 사용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일제의 잔재가 담긴 지명이 생각보다 우리나라 곳곳에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흔히 ‘삼릉’으로 불린 부평역 남측 일대의 부평 2동도 그런 곳이다. 일제가 부평에 설치한 조병창 시설 중에 '미쓰비시(三菱)' 공장도 있었는데 여기서 일하는 직원들의 사택이 부평 2동 일대에 있었다.
▲지금도 백마장이라는 지명은 남아있으나 하루 속히 청산해야 할 일제의 잔재다. 최근 지하철 7호선의 연장 공사가 시작되면서 이곳에 설치되기로 예정된 역명이 마장사거리로 잠정 결정되었는데 바람직한 일이다./사진=다음지도 캡처
훈련 장소로 낙점된 곳
원래 이곳의 옛 이름은 '동수(東樹)'였는데, 미쓰비시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든 많은 외지인들이 정착하면서 언제부터인가 삼릉으로 불렸다. 지난 1999년 인천지하철 1호선 개통을 앞두고 아무 생각 없이 부근 역명을 ‘삼릉역’이라고 예정하였다가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동수역’으로 결정되었다. 덕분에 이제는 삼릉에 대한 기억이 사라져가고 있고 젊은이들 중에는 모르는 경우도 많다. 긍정적인 변화라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삼릉이라 불렸던 부평 2동에는 미쓰비시 공장에서 근무하던 노무자들이 살던 사택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사진=다음지도 캡처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어떻게 병참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는지 모르지만 마치 정하여 놓은 것처럼 이름에 걸맞게 이곳에 군수 관련 시설이 본격 등장한 것은 일제 때부터다.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드는 과정에서 일제가 점령군을 최초로 주둔시킨 곳이 용산에 있는 오늘날 미 8군 자리다. 그런데 당시 서울이 오늘날 같은 세계적 대도시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일본군이 마음 놓고 야외 훈련을 할 정도로 한적한 곳도 아니었다. 이때부터 일본군 포병부대가 대규모 실사격 훈련을 위하여 찾아왔던 곳이 바로 병참이다. 경인선 철도로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한데다 인천항을 통하여 일본으로부터의 군수 물자 조달도 용이했던 점도 이유였지만 사람이 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부평구, 계양구, 부천시 일대는 1920년대 말 부평수리조합(富平水利組合)이 생기기 전까지 농사를 짓기 힘든 상습 침수 지역이라 일부 촌락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황무지였다.
오늘날 신도시가 형성되면서 새로 유입된 주민들은 모르는 사실이지만 중동, 상동, 계산동, 삼산동, 부개동 일대에 조성된 대규모 택지 지구는 약 10~20미터 이상 복토를 하고 형성되었을 만큼 저지대였다. 일대가 수해의 우려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2011년 굴포천 방수로가 완공되고 나서부터다. 건설 도중 이를 좀 더 확장한 것이 이른바 아라뱃길로 불리는 경인운하지만 사실 애초 목적은 방수로였다.
▲1920년대 기동 훈련을 하는 일본 육군 포병부대의 모습. 용산에 주둔한 일본군이 실사격 훈련을 하러 찾던 곳이 병참이라 불리던 오늘날 인천시 부평구 산곡동 일대다.
어쨌든 요즘도 실 사격 훈련을 할 만한 장소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당시 서울 근처에 이런 천혜의 장소를 일본군이 애용하였음은 어쩌면 당연하다. 향토사 자료를 찾아보면 처음에는 몇 달에 한번 정도 훈련을 오고는 하였지만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장기간 야영하며 많은 실사격 훈련을 하였다. 아마도 오늘날 국군의 승진훈련장 정도는 아니지만 비슷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② 일제가 포탄 사격장으로 쓰던 도둑굴은 어디?
한때 신수도 후보지로 거론되던 곳
사격 훈련을 한다면 당연히 포탄이 떨어지는 탄착 지점이 필요한데 아무 곳이나 탄착지로 정할 수는 없다. 통상적으로 안전이나 관측 등을 고려하여 사격장에서 잘 보이는 능선에 탄착지를 설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특히 통신이 열악했던 당시에는 정면에 탄착지가 있어야 훈련 성과를 쉽게 확인 할 수 있었다. 당시 병참에서 북쪽 정면으로 바라다 보이는 계양산 일대가 그러한 여건을 갖춘 곳이었다.
▲1938년 촬영된 계양산 아래 부평도호부 일대의 모습. 일제는 현재의 계산동인 이곳을 피해 서쪽의 효성동 골짜기를 포사격장 탄착 지점으로 설정했다.
오늘날 엄청나게 도시화가 진행되었지만 예전에 부평평야라 불리던 지역은 동쪽의 원미산에서 서쪽의 원적산까지 그리고 남쪽의 만월산에서 북쪽의 계양산에 걸친 거대한 분지를 의미한다. 행정구역으로는 인천시 부평구, 계양구, 경기도 부천시를 아우르는 지역인데 200여만의 인구가 몰려 사는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1960년대 이전만 해도 부평역, 부천역 인근을 제외하고 이 일대 대부분은 논밭이었다.
이 때문에 한때 이곳이 새로운 수도의 후보지로 거론된 적도 있었다. 6·25전쟁 당시였던 1951년 3월 7일 피난지였던 부산에서 열린 수도재건 회의에서 기존 서울은 상징성이 많은 사대문 안만 복구하고 문화, 거주, 경제 관련 시설은 허허벌판에 새롭게 만드는 것이 좋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때 후보지로 집중 거론된 곳이 바로 부평평야였다. 당시 자료를 살펴보면 새로운 거주 형태로 '아바트(아파트)'를 언급한 점이 상당히 흥미롭다.
이처럼 텅 빈 곳이다 보니 일제는 북쪽의 계양산 남측 능선 일대의 광활한 지역을 탄착지로 쉽게 낙점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계양산 바로 아래인 현재 계산삼거리 일대에 부평도호부청사와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오늘날 기준으로 본다면 면소재지도 안 되는 작은 규모였지만 1930년대까지만 해도 이 일대가 부평평야 일대에서 가장 번화하던 곳이었다.
▲폐허가 된 서울을 대신할 신수도 후보지로 부평평야를 거론한 당시 신문.(동아일보 1951년 2월 16일)
현재 부평의 원래 이름은 부내면(富內面)이었고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기 이전인 구한말까지 부평은 지금의 계산동을 의미하였다. 인천이라는 지명도 이와 비슷한 경우인데, 흔히 인천역과 인천항이 있는 중구 일대를 인천이라 생각하지만 이곳의 원지명은 제물포였고 원래 인천은 인천도호부가 위치하던 문학 야구장 부근이었다. 부평이나 인천 모두 철도와 항구라는 새로운 교통 인프라가 구축되면서 중심지가 완전히 바뀌어버린 대표적 사례다.
진짜 임꺽정이 활약했을까
결국 일본군은 부평도호부 인근의 마을을 피해 서쪽의 효성동 골짜기를 탄착지로 설정하였다. 오늘날 경인고속도로를 따라 서울에서 인천으로 가면 청라신도시를 못 미쳐 우측에 골짜기를 볼 수 있는데 이곳 안쪽에는 국군의 해외 파병 환송 행사 등으로 뉴스에 종종 등장하는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바로 이곳이 일제가 최종 선정한 포병 실사격 훈련 탄착지로 원래 지명이 재미있게도 ‘도둑굴’이다.
지금도 주요 부대가 주둔하고 있을 만큼 도둑굴은 상당히 골짜기가 깊다. 그래서 대대로 도적 떼들이 이곳에 은신하면서 부평(현 계산동)과 서곶(현 연희동)을 오고가던 이들을 상대로 노략질을 하였다. 특히, 구한말에 이곳의 도적 떼가 너무 날뛰어 백성들의 고초가 극심하자 선혜청 당상관을 지낸 정병하가 부평부사로 와서 도적 떼를 소탕시킨 공로로 중앙 정부의 칭송을 받았다는 기록까지 남아있다.
단지 해발고도로는 얼마 되지 않지만 주변이 평지여서 일대는 상대적으로 높게 느껴지는 곳이다. 홍명희가 지은 소설 임꺽정을 보면 도둑굴 부근인 징매이 고개에서 부하들을 조련시키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실제로 이 일대에서 임꺽정이 활약하였는지는 모르지만 구전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아마 홍명희가 도둑굴과 더불어 내려오는 야기를 참고삼아 각색하였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만큼 도둑이 많이 날뛰던 외진 곳임은 틀림없다.
일본군 포병대가 실탄연습을 할 때 병참에서 도둑굴을 목표로 포탄을 쏘면 부평도호부 인근의 고을이 진동하였을 정도로 도둑굴과 부평도호부는 가까웠으나 골짜기가 워낙 깊어 옆으로 포탄이 잘못 날아가거나 파편이 튈 염려가 없어 인명 피해는 없었다고 전해진다. 다음은 향토사에 기록된 내용이다. '... (전략) 이 곳 사람들이 군대가 자주 나타나는 곳이라서 병참(兵站)이라 불러왔을 뿐이다. 여기서 쏜 댕구알(砲彈)은 안아지 고개 옆 깊숙한 도둑굴 안에 떨어져 인가에서는 전혀 피해가 없었으나 그 포탄 터지는 굉음은 모든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후략)...'
▲구한말 서구인이 묘사한 일본군과 조선인의 모습. 국권을 상실당하다보니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국토의 이곳저곳이 능욕 당했다.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유래가 불분명한 '병참'과 '도둑굴'이라는 지명은 향토사의 일부로 뚜렷이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이러한 지명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병참과 도둑굴은 우리의 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국권을 침탈당하고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마구 능욕을 당한 아픈 역사를 지닌 현장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에 설명할 것처럼 그러한 흔적을 아직까지도 찾아 볼 수 있다.
③ 송나라 범종이 인천박물관에 오게된 기막힌 사연
80여년간 병참기지로서 이용된 부평지역
수탈의 현장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하면서 막대한 군수 물자를 편리하게 조달하기 위해 무기 제작 시설을 오늘날 부평구 일대에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조병창이다. 일제가 본토 이외에 유일하게 건설한 전략 시설이었을 만큼 일본의 침략 의지는 강력하였다. 포병대가 산개하여 마음껏 포사격 훈련을 하였을 정도로 넓었던 병참을 비롯한 이 지역에 본격적으로 군수 관련 시설이 들어서면서 부평은 공업 지대로 변신하였다.
▲1953년 촬영된 부평 포로수용소의 모습. 사진 윗부분의 시설들이 바로 조병창을 이루던 공장들인데, 일본이 본토 이외에 설치한 최초의 무기 제작 시설이었다./LIFE
이때부터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개통된 경인선의 역들 중에서 가장 마지막인 1934년에서야 겨우 전기가 들어왔을 만큼 오지 중의 오지였던 부평역 일대에 도심이 본격 형성되었다. 당연히 이런 외형적 발전은 우리 민중의 복리 증진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일제는 조병창을 대외 침략과 식민지 수탈에 철저히 이용하였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조병창과 관련하여 일제의 수탈이 어떠하였는지 알려주는 글이 있다.
'(전략)..중학 3학년부터 공부하는 날보다 강제 동원되는 날이 많았다..(중략)..1945년 초에는 서울 연희 보성전문학교와 경기고 경복고 서울고 학생들 모두 인천 부평의 무기 공장에서 기관총을 만들었다. 나는 총신 칼 손잡이 부위에 구멍 뚫는 일을 배정받았다. 매일 800개씩 뚫어야 했는데 제대로 하지 못해 발길에 배를 차이고 뺨을 맞기도 했다..(후략)'(아름다운 재단 이사장 박상증)
이처럼 노동력을 강제로 착취한 것 외에도 전쟁 물자 조달을 위해 광분하던 일제는 각종 물자를 징발하였다. 철강재를 모집하기 위하여 안성-장호원, 문경-안동을 연결하던 철도가 철거되었고 집에 있던 금속성 그릇과 수저까지 빼앗아 갔다. 이렇게 강탈한 수집물들이 무기로 가공되기 위하여 최종적으로 모인 곳이 바로 부평의 조병창이었다. 역설적이지만 일제가 날 뛸수록 조병창의 가동률은 높아갔다.
▲인천박물관에 보관 중인 송(宋)대 범종. 무기 제조를 위해 중국에서 수탈되어 조병창까지 오게 된 기구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인천광역시립박물관 제공
이러한 일제의 뒤집힌 눈에 문화재 또한 결코 안전할 수 없었는데 수많은 철재 문화재가 일본군의 전쟁물자로 사용되기 위해 약탈되었다. 다행히 파괴는 모면하였지만 이때 전등사의 범종, 종로의 보신각종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수많은 금속 문화재가 약탈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약탈은 한반도뿐 만아니라 중국의 점령지에서도 자행되었는데 현재 인천박물관에 있는 송나라 시대의 범종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한반도까지 오게 된 것이다.
사연 많은 땅
조병창은 해방 후 미군이 이용하다가 1949년 철군 후 국군 병기대대가 사용하였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면서 애스캄(ASCOM)으로 불리는 군수지원시설이 설치되면서 미군이 다시 이용하였는데, 1960년대 말에 이르러 그 크기가 현재 부평구의 절반 정도를 차지할 만큼 어마어마하였다. 당시 애스캄은 미국 본토의 포트 브래그, 포트 후드, 독일의 프라이드리히펠트와 더불어 ESSC라 불린 미군의 4대 군수기지 중 하나였다.
▲미군의 4대 군수기지 중 하나로 운용되던 1963년 당시의 애스캄 전경.
1973년 애스캄이 해체되면서 크기는 1/4 정도로 축소되었지만 일부 미군 부대가 아직도 주둔 중이고 반환된 지역은 국군이 사용 중이거나 택지 혹은 공원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지만 현재 주둔 중인 미군부대인 캠프 마켓도 그렇고 국군부대인 제3보급단 모두가 병참과 관련된 부대들이다. 구한말 이전부터 병참이라 불렀던 무주공산이 희한하게도 그 의미대로 80여 년간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미군부대가 있는 위치는 조금만 손보면 도심 속 대규모 근린공원으로 개발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이어서 시민들의 관심 대상인데, 막상 미군부대의 철수가 가시화되자 송병준의 후손들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소송을 벌여 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나게 만들기도 하였다. 비록 패소로 막을 내리면서 정의가 구현되기는 하였지만 참으로 역사적으로 사연도 많고 굴곡이 많은 땅이라 할 수 있을것 같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실탄 사격 시 탄착지였던 도둑굴은 옛 부평도호부길을 근거지로 신출귀몰하면서 도적질을 일삼던 무리들이 은신하였던 천혜의 골짜기답게 현재도 국군 최강의 특수전 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비록 전자는 100여 년 전까지 백성을 괴롭히는 못된 일을 하였지만 후자의 경우는 대한민국을 보호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처럼 병참이나 도둑굴이나 단지 우연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인연이 크다.
▲송병준 후손의 소송을 규탄하는 시민들의 모습. 참으로 굴곡 많고 사연 많은 역사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부평신문
사실 우리나라에서 부평처럼 100여년 가까이 오로지 군사적 용도 때문에 도시의 개발이 제약을 받고 있는 지역도 그리 많지는 않다. 하지만 최근 도시의 급속한 팽창과 더불어 안보환경의 변화에 따라 이곳에 주둔한 부대들의 이전 주장도 공공연히 언급되고 있는 것 또한 주지의 사실이다. 과연 병참과 도둑굴이 먼 훗날에도 여전히 군사 시설로 계속 사용하게 될지 사뭇 궁금해진다.
남도현
DHT AGENCY 대표
E-mail : knclogix@yahoo.co.kr
젊은 시절부타 역사에 관심이 많아 취미로 세계사, 전쟁사 및 군사에 관한 공부를 하다가 온라인에 연재하여 많은 인기를 끌었다. 6·25전쟁 제60주년 사업단 블로그, 학술지인 계간『본질과 현상』, 시사지인 주간『시사저널』, 공군 발행 월간『공군』, 부정기 간행물『기상』, 대중지인 월간『Den』, 월간『MAXIM』등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글을 썼다. 현재 네이버캐스트, 국방부 정책블로그, 육군 발행 월간『육군』, 방위산업진흥회 발행 월간『국방과 기술』, 전쟁기념관 발행 월간『전쟁기념관』에 기고를 하고 있다. 강연 활동도 하고 있다. 책도 많이 썼다. 주요 저서로는 『잊혀진 전쟁』,『GUN』,『숫자로 풀어가는 세계 역사 이야기』,『전쟁, 그리고』,『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끝나지 않은 전쟁』,『히틀러의 장군들』,『히든 제너럴』,『발칙한 세계사』,(공저)『무기 바이블 2』,(공저)『BEMIL의 비밀스런 군사이야기』등.
· 성균관대학교 무역학과 졸업
· 럭키금성상사, 한국자동차보험 등 근무
2015-04-07 2차대전 승전국 정상들과 한국의 운명
사람들은 어느 시대를 살았든 가릴 것 없이 자기의 시대가 역사에서 가장 격동기였다고 느낀다. 삶의 방법과 시대적 배경이 각기 달랐겠지만 7세기의 고구려·신라·백제의 각축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나 글안(契丹)이나 여몽(麗蒙)전쟁, 조선조의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현대사에 들어와서는 망국과 광복, 그리고 분단과 한국전쟁,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왜 세상이 이토록 어려우며, 하필이면 나의 시대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슘페터(Joseph A. Schumpeter)의 말처럼, 인류가 살아가는 모습은 5만년 전이나 지금이나 본질적으로 다름이 없었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시류나 나라 사이의 역학관계도 중요하겠지만 끝내는 사람의 결심이고 행위의 모둠이었다. 역사주의자들은 역사의 흐름에 어떤 장엄한 예정조화나 시대정신이 존재했고, 거기에는 일관된 교훈이 연면히 이어져 왔다고 말하지만 의외로 역사는 단순했다. 인간의 오욕(色香聲味觸) 칠정(喜怒哀懼愛惡慾)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일상에서 겪는 애환이나 보대낌이 철학이나 이상을 비웃는 경우는 허다하게 많았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기본적으로 행태주의(behavioralism)를 중요한 도구로 삼아 해방정국을 살다간 사람들의 인성과 개인적 체험 또는 환경이 어떻게 역사를 편직(編織)해 갔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따라서 이 글은 역사학의 주류 논쟁에서 조금 비껴 서서 교과서나 연구서에서 말할 수 없었던 해방정국에서 사람 냄새 나는 삶의 모습들을 그려 보고자 한다. 광복과 분단 70년을 맞이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그 시대를 돌아보는 것은 그때나 이제나 역사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그래서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고치려는 소망에 기초를 두고 있다.
▲ 카이로회담. 회담장은 기자의 피라미드 바로 옆의 메나하우스호텔이었다.
1889년, 오스트리아의 한촌 브라우나우(Braunau)의 몰락한 귀족 시클그루버(Schicklgruber) 집안에서 아돌프(Adolf)라는 소년이 태어났다. 무슨 연유였는지 그는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아이는 총명했고 잘생겼으며 친구들에게도 상냥했으며 수줍음이 많았다. 목소리가 아름다워 교회 성가대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그의 꿈은 화가가 되는 것이었으며 재질도 있었다. 그러나 엄혹한 아버지는 아들의 꿈을 허락하지 않았다. 1903년, 아버지가 죽자 그는 성을 히틀러(Hitler)로 바꾸고 빈에 진출하여 그토록 바라던 빈예술학교에 입학했다. 졸업한 다음에는 출판사에서 삽화를 그리는 청년으로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영양 상태가 좋지 않던 그는 이때 고환결핵을 앓고 생식기능을 잃는 비극을 맛보면서 삶의 광기가 시작되었다.
스물네 살에 뮌헨으로 이주한 그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자원입대했으나 부상으로 전역하면서 철십자무공훈장(Iron Cross)을 받았다. 이때부터 그는 화가로서의 꿈을 버리고 ‘위대한 독일’을 이루리라는 집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는 혁명을 꿈꾸다가 5년형을 받고 출옥하여 온갖 시련을 겪은 뒤 1934년에 집권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결국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전쟁은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재앙이었고 그가 폴란드를 침공할 때까지만 해도 유럽이나 미국의 지도자들은 늘 벌어지는 전쟁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41년 6월에 소련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전쟁이 확대되자 유럽의 지도자들은 문득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공을 연상하며 긴장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일본이 1941년 12월 하와이의 진주만을 폭격하고 1942년 프랑스가 독일에 완전히 점령되었을 때 열강의 지도자들은 자리를 함께하여 이 문제를 논의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우선 미국의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와 영국의 처칠(W. Churchill), 그리고 중국의 장제스(蔣介石)가 만나는 데까지는 합의를 했지만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처음에는 시칠리아 남쪽 휴양지 몰타(Malta)섬에서 개최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독일이 이를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의 요격과 경호 문제를 걱정한 아이젠하워(D. D. Eisenhower) 장군의 권고에 따라 독일의 사정권을 벗어난 카이로에서 만나기로 했다. 시간은 1943년 11월 22일부터 11월 26일까지 5일간이었다. 그런데 당연히 와야 할 스탈린(J. Stalin)에게 문제가 생겼다. 의사가 장거리 여행은 위험하다며 출국을 말렸기 때문이었다.
지도자의 건강
스탈린은 얼마나 아팠기에 그 중요한 회의에도 올 수 없었을까? 본디 그루지아 태생인 스탈린은 홀어머니 밑에서 서럽게 크며 청년 시절에 신부가 되고자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세례명은 가정의 수호신인 요셉(Joseph)이었다. 미성을 타고났으며 마마 흉터가 조금 남아 있기는 했지만 호남아로 생긴 그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인기가 높아 성가대의 스타였다. 그런 그가 레닌을 만났을 때 그는 영혼의 구원보다는 당장 제정러시아의 압제에 시달리는 농노의 해방이 먼저라고 생각하여 혁명에 심취했다. 그에게는 케케(Keke Yekaterina)라고 하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는데 티푸스를 앓고 있었다. 어느 날 스탈린이 레닌에게 보낼 보고서를 탈고하고 침대에 돌아와 보니 아내는 첫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를 남겨 두고 이미 숨을 거두었다. 그는 이때 “나에게서 모든 연민은 사라졌다”고 울부짖었다. 그리고 냉혹한 혁명가가 되었다. 그에게 또 한 가지 문제는 독주를 폭음한 것이었다. 카이로회담 당시 그가 오지 않은 것은 심장질환의 악화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스탈린에게는 고소공포증과 광선기피증(photophobia)의 증후가 있었다. 이런 환자는 비행기를 타지 못하며, 사무실은 늘 어두컴컴하게 짙은 커튼을 드리우고 주로 밤에 일을 많이 한다. 고소공포증의 심층심리는 불의의 사고로 인한 죽음의 두려움이다. 그들이 아무리 표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손에 죽은 망령에 대한 무의식 속의 죄의식을 씻을 수 없었다. 건강 문제는 스탈린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소아마비 환자로서 휠체어를 타야 하는 루스벨트는 카이로에 이르렀을 때 이미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처칠은 허우대는 멀쩡했지만 그도 중증환자였다. 비만에다가 줄담배가 이미 그의 심장과 기관지를 많이 손상시키고 있었다.
장제스는 본디 강골의 무인 출신이어서 건강에는 문제가 없는 듯이 보였지만 그에게는 마음의 병이 있었다. 세계 4강이라는 위용은 이미 내란으로 퇴색되고 카이로에서 남의 문제를 논의하기에는 나라 안의 일이 더 걱정스러웠다. 장제스로서 더욱 마음고생을 하게 된 것은 중국을 야만의 나라로 취급하는 처칠의 냉대 때문이었다. 공식 회의가 아닌 사석에서 처칠은 루스벨트에게 “저 되놈(chink)은 왜 왔느냐?”고 투덜거렸다. 장제스도 그런 눈치를 잘 알고 있었다. 중국의 제자백가에 통달했고 수많은 병서를 읽은 그로서는 그들의 심중을 읽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전후 문제를 처리하면서 한국의 운명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이 없었다. 이 자리에서는 장제스만이 한국의 즉시 독립에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장제스가 전후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개인적 욕망을 가지고 있음을 간파하고 이를 반대했으며, 미국으로부터 군사 원조의 빌미가 잡혀 있는 장제스도 한국의 조속한 독립을 끝까지 주장하지 못했다.
자존심을 버린 테헤란 회의
이 자리에서 루스벨트는 한국인은 아직 독립 정부를 수립하거나 유지할 수 없으므로 40년 동안 후견(tutelage)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애당초 미국의 관리들이 한국의 신탁통치를 논의하면서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라고 표현했으나, 한국의 독립을 그렇게까지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루스벨트는 “적절한 시기에(at the proper moment)”라고 표현했고, 이를 본 처칠은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적절한 절차를 거쳐(in due course)”라고 수정함으로써 “한국인의 노예 상태를 유념하면서 적당한 절차를 거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최종 문안을 작성했다.
카이로회담을 마쳤을 때 4대 강국의 핵심 멤버인 스탈린이 오지 않아 그의 동의를 얻지 못한 것을 어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았다. 그래서 처칠과 루스벨트와 장제스는 자기들 사이에 오고간 이야기를 스탈린에게 전달하고 동의를 구하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했다. 온몸이 괴로운 루스벨트는 가까운 지중해 어디에서 만나고 싶었지만 스탈린은 비행기를 타지 않고 갈 수 있는 곳을 요구했고 그래서 테헤란으로 장소가 결정되었다. 일자는 카이로회담이 끝나는 다음 날인 1943년 11월 27일부터 12월 2일까지로 결정했다.
이 회담은 루스벨트와 처칠과 장제스로서는 몹시 자존심 상하는 자리였다. 몸이 성치 않은 루스벨트로서는 이미 1만1000㎞를 비행기에서 시달렸는데 회의가 끝나자마자 마치 보고라도 하려는 듯이 회의 다음 날 줄레줄레 스탈린을 만나러 가는 길이 유쾌했을 리가 없다. 한 사람이 왔으면 될 일을 세 사람이 찾아가는 모양새가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소련이 독일의 동부전선을 공격하고 극동에서 만주군을 공격하는 문제에 결정적 열쇠를 쥐고 있는 상황에서 아쉬운 쪽은 영국과 미국과 중국이었으며, 스탈린은 그런 구도를 십분 즐기고 있었다.
이래저래 불만에 찬 루스벨트는 영국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일찍이 윌슨(W. Wilson) 대통령 정부에서 해군성 차관을 지내면서 자유주의에 대한 정치 훈련을 받은 터라 영국의 식민정책에 대한 짙은 혐오감에 젖어 있었다. 그는 8개월 전에 처칠과의 회담을 가지려고 카사블랑카를 간 적이 있는데, 그때 서아프리카와 모로코(Morocco)를 거쳐 회담 장소로 가면서 유럽의 제국주의가 남긴 악덕에 깊은 충격과 역겨움을 느꼈다. 그 뒤로 피식민지 국가들의 독립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그럴 때면 처칠은 루스벨트가 영국을 전제군주시대인 조지 3세(George III·1760~1820)의 시대로 보고 있다고 불평했다. 루스벨트가 해방을 전제로 한 신탁통치를 주장할 때 처칠은 그것이 자신을 두고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느끼면서, “우리가 죄인으로 참회하는 입장”이 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이 자리에서 한국 문제가 거론될 때 스탈린은 주로 듣는 입장이었고, “동의는 하지만 약속할 수 없음”을 강조하면서 한국의 조속한 독립을 요구했다. 그가 한국의 조속한 독립을 요구한 것은 한국에 대한 호의라기보다는 많은 식민지동화정책의 경험으로 북한에서의 인민위원회 작업을 미국보다 더 빨리 수행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한국의 신탁통치문제를 당초 40년 간의 후견에서 5~10년 간의 후견으로 대폭 후퇴했다. 처칠은 미국이 즉시 해방을 주장하지 않고 5~10년 간의 후견 기간을 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카이로회담과 비교해 볼 때 식민지 해방을 주장하는 미국의 톤이 많이 누그러진 것을 보면서 처칠은 만찬 석상에서 “eureka(바로 이거야)”를 외치고 조지 6세의 칼을 스탈린에게 선물하면서 “스탈린그라드를 위하여”라고 건배사를 외쳤다.
“해방은 시켜주되 독립은 시켜줄 수 없다.”
얄타회담에서는 더욱 두뇌 싸움이 심했다. 1945년 1월 30일부터 2월 11일까지 흑해 연안 크림반도의 휴양지인 얄타는 스탈린에게 많은 홈어드밴티지를 주었다. 회의는 제정러시아 니콜라스 2세 황제의 여름 휴양지였던 리바디아궁(Livadia Palace)에서 개최되었다. 스탈린은 이번에도 기차를 타고 왔다. 누가 먼저 회의장에 들어갈지를 놓고 처음부터 티격태격했다. 루스벨트는 심장병이 악화되고 마비된 다리가 찬 공기에 더욱 저려 모포를 무릎에 깔고 지겨운 표정으로 회의에 참석했다. 만찬 때면 처칠은 여전히 담배연기를 뿜어대고 스탈린은 마치 기를 죽이려는 듯이 보드카를 즐겼다. 처칠은 비만과 고혈압으로 산소호흡기를 곁에 두고 앉아 있었다. 이번에는 처칠의 입김이 작용하여 장제스는 부르지도 않았다. 불렀어도 아마 오지 못했을 것이다. 중국의 불참은 그나마 한국을 위해 한마디 해줄 스폰서가 사라졌다는 점에서 한국은 불운했다.
소련은 베를린 근교 65㎞까지 진격해 있는 터라 기세가 당당하고 느긋했다. 미국의 참모들이 볼 때 “소련이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우리가 부탁할 일만 남이 있었다”. 다급한 쪽은 영국과 미국이었다. 미국으로서는 태평양전쟁에 소련이 참전하는 문제와 UN 가입이 절박한 상태였다. 공식 회의가 없는 시간이면 스탈린은 넌지시 루스벨트에게 “저 사람(처칠) 빼고 우리 두 사람만이 할 얘기가 있다”고 말했다. 그럴 때면 루스벨트는 “그러면 저 친구가 우리를 죽이려 할 것(He will kill us)”이라고 말하면서 말을 막았다. 처칠도 그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풀 죽은 상황에서도 한국 문제만 나오면 처칠의 입장은 부정적이었다. 식민지 해방이 공론화될수록 식민지로 먹고사는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드는 것을 처칠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영국의 기본적인 입장은 “해방은 시켜줄 수 있지만 독립은 시켜줄 수 없다”는 것이었고, 그러한 주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준 것은 회담 이틀째인 1월 31일자로 올라온 토인비(Arnold J. Toynbee)의 보고서였다. 훗날 위대한 역사학자로 평가받은 그는 당시 옥스퍼드대를 졸업하고 영국 외무성 조사국의 중진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얄타회담을 위해 준비한 정책보고서 ‘한국의 독립 능력-그 역사적 배경(Korea’s Capacity for Independence:Historical Background)’에서 “한국은 독립할 수 없는 나라”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처칠은 그 보고서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루스벨트의 외교 양식에는 좀 특이한 부분이 있었다. 그는 모든 외교 문제를 혼자 처리했다. 부통령이나 국무장관의 의견을 묻지도 않았고 알려주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이 소련을 잘 다룰 수 있다는 순진함에 젖어 있었다. 개인 외교(personal diplomacy)라고 하는 이 독특한 방식은 주변 참모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얄타에 동행한 국무장관 스테티니어스(Edward Stettinius)는 한국 문제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처음으로 한국 문제를 토의하는 자리에 참석한 그는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냐?”란 질문으로 회의를 시작했다.
미국 수뇌부는 불가사의한 일본의 공격성에 대한 당혹감과 두려움에 싸여 있었다. 그들은 가미카제(神風)와 사이판의 자살절벽 사건을 이해할 수 없었고, 1945년 오키나와에 투입되었던 미군의 35%가 희생되었던 사실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해상 전투는 승리할 수 있다 하더라도 지상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향후 8~10개월의 시간과 13개 사단(57만)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극동에 산재한 일본군 640만~660만명을 섬멸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더욱이 ‘일본이 패전한 뒤에도 만주군은 항전할 것’이라는 오판도 그들을 걱정스럽게 만들었다. 이제 미국으로서 희망을 거는 것은 극동에서의 소련의 참전이었지만 소련은 선뜻 응낙하지 않았다.
얄타에서의 회담은 공식적인 토의보다는 사사롭게 오고간, 그래서 기록되지 않는 대화(unrecorded dialogue)가 더 유력하게 회의의 흐름을 이끌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얄타밀약설이다. 이른바 소련은 홋카이도 분할 등 일본 점령에서 양보하고 그 대신 미국은 북한을 소련에 넘겨주었다는 논지의 추론은 확인되지 않는 음모설일 뿐이다. 귓속말로 하고 손가락으로 지도를 가리키며 한 말을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런 점에서 얄타밀약설은 허구의 가능성이 높은 영구미제일 뿐이다.
기형(奇形)의 포츠담회담
▲ 테헤란회담. 회담장은 소련 대사관이었다.
포츠담회담(Potsdam·1945년 7월 6일~8월 1일)은 기이한 만남이었다. 장소가 소련이 점령한 독일 지역이었다는 점에서부터 소련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점령지역의 국가수반인 스탈린은 자신의 위상을 높이기에 충분했다. 처칠과 트루먼이 “스탈린을 찾아가는 모습”이 됐다. 그보다 더 어이없는 사실은 트루먼의 입장이었다. 1945년 4월 12일, 허약했던 루스벨트가 과로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트루먼이 대통령 직책을 승계했다. 루스벨트가 1944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그를 자신의 러닝메이트로 지명한 것은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서가 아니라 진보적이었던 공화당 후보 왈리스(Henry Wallace)의 도전을 견제하고자 우익적 분위기를 풍기는 트루먼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부통령에 취임한 지 85일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대통령에 취임한 트루먼은 미시시피강 서부 출신으로서는 최초의 대통령이었으며, 링컨(A. Lincoln) 이후 최초의 고졸 출신이어서 동부의 주류 사회에서 외면당했다. 철저한 개인 외교주의자였던 루스벨트가 죽기 직전까지 트루먼을 만난 것은 단 두 번뿐이었으며, 그에게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트루먼은 국정을 파악하고 있지 못한 상태였다. 그가 포츠담에 간 것은 미국의 정책을 관철하려는 의지보다는 스탈린을 만나 그동안 전개되었던 정황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회의를 진행하면서 7월 16일 국방장관 스팀슨(Henry Stimson)이 뉴멕시코주의 알라마고르도에서 원폭에 성공했다고 트루먼에게 귀띔해 주었다. 그런데 트루먼은 원폭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원폭의 과학적 속성이나 위력을 알지 못했다. 안타까운 스팀슨은 “인류 역사상 가장 가공할 무기(the most terrible weapon ever known in world history)”라는 말로 설명을 대신했다. 미국의 참모들은 원폭의 성공으로 소련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수 있다고 판단했고, 여기에서 한반도에서의 4대국 신탁통치 등 지나치게 영국, 소련, 중국에 양보한 정책을 수정하면서 미국주도형의 분단정책으로 선회했다.
그런 상황에서 더 어이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처칠이 포츠담회담에 참석하고 있는 동안에 그의 노동당이 총선에 패배하여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피와 땀과 눈물로 조국에 헌신하겠다”던 그의 공약도 허사가 되었다. 처칠은 7월 5일 런던에서 포츠담을 향해 출발했고, 그동안에 실시된 선거에서 처칠이 승전의 여세를 몰아 재집권하리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7월 26일에 총선에서 패배하자 처칠은 회의를 하다 말고 짐을 쌌고 새로 취임한 애틀리(Clement Attlee) 총리가 급거 회의 대표로 참석했다. 영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트루먼의 입장이 그렇고 영국 총리가 교체되는 상황에서 포츠담은 스탈린의 뜻대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미국과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한반도의 4국 지배는 2국 분단이라는 비극의 길로 흘러가게 되었다.
역사에서의 허망함과 우연함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전시 회담과 한국의 문제를 살펴보노라면 역사에는 어떤 공의(公義)로운 법칙이 작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보다는 역사의 우발성과 허망한 결말에 망연자실할 때가 많다. 역사에서 가정은 금물이라고 강변하면서도 “그러지 않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전시 회담에서의 한국의 운명은 “꼭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어떤 필연보다는 우발이론(contingency theory)의 회한이 더 크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이성, 철학, 합리성과 같은 거대 담론보다는 너무도 인간적인 소승(小乘)과 애환이 크게 작용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역사학은 더 어렵고 예언의 가능성이 더욱 낮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孔子)의 말씀처럼 “어디서 왔는지를 돌아보아야 다가올 일을 알기 때문에(告諸往 而知來者)” 우리는 다시 역사책 앞으로 다가가지 않을 수 없다.
신복룡
전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한국근현대사와 한국정치사상사를 공부하고 가르쳤다. 건국대학교 중앙(상허)도서관장과 대학원장을 역임한 후 퇴직하여 집필 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정치학회 학술상(2001· 2011)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