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2021-6/ 조선일보
06.01(화) 우후죽순 유튜브 ‘거짓의 城’
헛소문의 성(城)을 쌓는 재료는 거짓이 아니라 사실인 경우가 많다. 2016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터진 ‘피자 게이트’가 그랬다.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 캠프의 선대본부장 이메일이 해킹으로 공개됐는데, ‘치즈’ ‘피자’란 단어가 유독 많았다. ‘치즈 피자’는 미국에서 아동 성착취물을 뜻하는 은어다. 그러자 코밋 핑퐁이란 피자 가게 지하가 힐러리 측 정치인들의 아동 성착취 아지트란 소문도 퍼졌다. 가게 주인이 ‘나는 랑팡(L’Enfant·어린이)을 사랑한다’고 새긴 티셔츠를 입는다는 증거까지 더해졌다. 한 청년이 응징하겠다며 가게에 난입해 총을 난사했다. 그런데 지하실이 없었다. 티셔츠 입은 이도 ‘랑팡’이란 상호를 쓰는 인근 술집 주인으로 드러났다.
/우후죽순 유튜브 '거짓의 城'
▶총을 난사한 청년은 극우 정치 유튜브의 열혈 구독자임이 밝혀졌다. 단편적 팩트를 짜깁기해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채널의 신자였던 것이다. 저술가 김내훈은 책 ‘프로보커터’에서 이런 엉터리 유튜브 제작자들을 프로보커터(도발자)라 명명한다. ‘도발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란 의미다. 교통사고 현장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견인차처럼 사회적 이목을 끄는 현장을 찾아다닌다고 해서 ‘사이버 레커’로도 불린다.
▶서울 반포 한강공원에서 숨진 채 발견된 손정민씨 사건도 이런 이들의 타깃이 됐다. 손씨 사건을 다룬 유튜브 채널만 3000개가 넘는다. ‘반진사’(반포 한강 사건 진실을 찾는 사람들)란 사이트도 개설됐다. 보름 만에 회원 3만명을 넘어섰다. 이들은 진실을 요구하지만 정작 퍼 나르는 것은 가짜 뉴스다. ‘여자 문제이고 분실된 휴대전화에 여자 사진 등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는 점괘가 나왔다”는 주장을 편 무속인 유튜버도 있다. 이런 동영상이 30만 가까운 조회수를 기록했다.
▶말도 안 되는 뉴스인데 사람들은 지갑까지 연다.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을 찾아내 연결하는 추천 알고리즘과 ‘좋아요’가 돈이 되는 수익 구조가 그 바탕에 있다. 손씨 사건을 다룬 한 유튜버는 라이브 방송 한 편으로 600만원을 벌었다고 한다. 한 달간 3800만원 번 사례도 있다.
▶인터넷 검색창에 ‘유튜브 수익’이라고 치면 ‘무조건 돈만 보고 유튜브 키우기’ 같은 광고가 뜬다. ‘좋아요 50개에 월 4만원' 상품을 내건 업체도 등장했다. 보다 못했는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이 ‘좋아요’ 숫자를 사용자가 가릴 수 있는 기능을 탑재하겠다고 발표했다. 유튜브도 이를 채택해야 한다. 미디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사회적 책무다.
06.02 ‘서울 된 평양’
2018년 1월 민주당 정책위의장이 당 회의에서 “동계올림픽이 다음 달 ‘평양’에서 열린다”고 했다. 옆자리 원내대표가 “평창, 평창”이라고 알려주자 “아, 평창”이라고 바로잡았다. 당시 태극기 없는 개회식 등 평양에 대한 정치적 고려가 평창의 스포츠 정신을 압도하면서 ‘평양 올림픽’이 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많았다. 머릿속이 어떤 생각으로 꽉 차 있으면 말실수도 나오기 쉽다.
/'서울 된 평양'
▶그해 9월 국방부는 남북 군사 합의에서 “서해 완충 수역이 남측 40㎞, 북측 40㎞씩 총 80㎞”라고 발표했다. 해상 포 사격 등을 중단하기로 한 구역이 “남북 동등하다”는 말도 했다. 그런데 구글 지도로 재보니 북측은 50㎞, 남측은 85㎞였다. 총 80㎞가 아니라 135㎞였고 우리가 35㎞를 더 내준 합의였다. 거짓말 논란이 일자 국방부는 “실무자 실수”라고 했다. 한 치가 중요한 군비 통제 구역을 협상하면서 어떻게 거리를 ‘실수’로 틀리나.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은 북이 쏜 미사일을 “단도미사일”이라고 했다. 처음엔 ‘탄도미사일’이라고 말한 줄 알았다. 탄도미사일이면 북한의 유엔 결의 위반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러자 청와대는 “대통령이 ‘제가 그랬나요. 단거리 미사일이죠’라고 답했다”는 내용까지 공개했다. ‘단거리’를 ‘단도’로 잘못 말할 수 있는지를 떠나 무슨 코미디 같다. 문체부는 대통령 발언을 전하며 ‘올바르게’를 북한식 표기법인 ‘옳바르게’로 적기도 했다. 보훈처는 현충일 추념식에 천안함·연평도 유족을 빼놓고 “직원 실수”라고 했다. 실수로 세월호 추모식에 세월호 유족을 안 부를 수도 있나.
▶이번엔 문 대통령이 주재한 ‘P4G 서울 정상 회의’ 개막식 영상에 서울 아닌 평양 위성사진이 들어가는 일까지 벌어졌다. 대동강 능라도를 시작으로 평양, 평안도, 한반도 순으로 줌아웃되는 영상이다. 평양을 개최지로 둔갑시킨 것이다. 이번에도 정부는 “외주 제작사의 단순 실수”라고 해명했다.
▶이번 서울 행사는 우리나라가 개최한 첫 환경 분야 정상 회의로, 청와대가 각별한 관심을 갖고 준비해왔다. 탁현민 비서관이 라디오에서 두 번이나 행사 홍보를 했다. 청와대도, 정부도 전 세계에 생중계하는 개막식 영상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동네 음식점도 홍보 영상을 만들면 위치가 맞는지부터 챙길 것이다. 그러니 인터넷에서 “실수 아닐 것”이란 댓글이 쏟아지는 것이다. 평양이 아니라 도쿄 영상이 들어갔다면 이 정권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06.03 ‘T방역’의 추락
/방역모범국 대만, 백신 부족해 비상. /EPA 연합뉴스
지난해 9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은 ’2020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을 선정하면서 차이잉원 대만 총통을 표지 인물로 실었다. 영국의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2020 코로나를 가장 잘 극복한 국가로 대만과 뉴질랜드를 꼽았다. 조기에 중국인 입국 금지, 마스크 수출 금지 등 조치와 철저한 방역으로 대만 내 확진자가 한 명도 없는 ‘코로나 청정국가’를 상당 기간 유지했다. 조선일보 만물상도 지난해 말 방역과 경제 두 토끼를 다 잡은 ‘T(타이완)방역’을 소개했다.
▶그런 대만의 코로나 상황이 요즘 180도 달라졌다. 지난달 27일 하루 671명의 코로나 환자가 나왔고 13명이 사망했다. 하루 사망자 수로 역대 최다였다. 급증한 환자로 중환자실 등 병상이 부족해 의료 붕괴를 걱정할 정도다. 요즘에도 하루 500명 안팎의 확진자가 추가로 나오고 있다. 방역 모범 국가에 뒤늦게 코로나 ‘1차 파도’가 덮쳤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백신 접종도 전 세계 최하위권이다. 대만 인구 중 1일까지 코로나 백신을 맞은 사람은 1.94%에 불과하다. 전 세계 평균(22%)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치다. 차이 총통의 지지율은 수직 하강하고 있다.
▶백신 접종이 늦은 이유는 ‘T방역’ 성공에 안주해 백신 확보를 서두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체 백신을 개발하겠다며 백신 도입 계약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데자뷔를 보는 것 같다. 대만 정부가 6월 안에 들여오겠다고 밝힌 백신은 200만회 분량에 불과하고 대만 제약사들이 자체 개발하는 백신은 일러야 8월 이후 사용 가능해 대만의 백신 부족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백신 도입은 중국과의 관계 때문에 더욱 꼬여 있다. 차이 총통은 지난달 26일 바이오엔테크 백신 구매 계약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중국의 개입으로 최종 계약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중국은 연일 “(시노팜 등) 중국 백신을 받으라”고 압박하고 있다. 대만 정부는 ‘통일전선을 통한 분열 획책’이라며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지만 야당인 국민당은 이를 수용하자고 주장해 갈등도 커지고 있다.
▶대만이 코로나 방역 모범국에서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실패 사례국으로 전락한 것은 정말 한순간이었다. 대만의 사례는 결국 백신과 치료약만이 코로나 사태를 끝내는 근본 해결책이라는 점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조금만 방심하면 허점을 파고들어 폭발적으로 확산하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특징도 잘 보여준다. 제대로 된 치료약이 나올 때까지 최대한 백신을 맞고 손을 잘 씻으며 버텨야 한다.
06.04 BTS 번역계와 돌민정음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개그맨이 쓰던 사투리 유행어 ‘머선 129’(무슨 일이고)가 엊그제 갑자기 전 세계로 퍼졌다. 방탄소년단(BTS)이 신곡 ‘버터’로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100’ 1위를 차지하자 BTS 리더 RM이 이 표현을 써서 ‘머선 129, 너무 감사하고 보고 싶습니다’라고 소감을 올렸기 때문이다. 이를 BTS 번역계가 발 빠르게 영어, 스페인어 등으로 번역해 각국 팬들에게 알렸다.
/BTS 번역계와 돌민정음
▶작년 말 BTS의 멤버 지민이 띄운 노래 ‘크리스마스 러브’에 등장하는 단어 ‘소복소복’을 놓고 해외 팬들 사이에서 흥미로운 반향이 일었다. BTS 번역계에서 ‘소복소복(sobok sobok)’은 ‘커다란 눈송이가 폭신한 눈침대를 만들며 소리 없이 땅에 쌓이는 것을 묘사하는 단어’라고 영어로 설명한 뒤 ‘falling falling’이라고 옮겼다. 그러자 “정말 사랑스러운 표현” “한국어는 감성이 풍부한 언어” “한국어를 너무 배우고 싶다” 등의 반응이 쏟아졌다.
▶BTS 번역계란 방탄소년단 팬들 중에 자청해서 트위터, 인스타그램, 유튜브 같은 소셜 미디어 계정에 BTS 노래 가사는 물론이고 그들의 말 한마디, 일정 하나하나까지 각국 언어로 번역해 올려주는 열정적인 팬 번역가들을 말한다. 이 BTS 번역계 덕에 BTS 팬들은 언어 장벽을 넘어 좋아하는 가수의 일거수일투족을 들여다본다. 방탄소년단이 ‘칠첩반상을 드림’이라고 글을 띄웠더니 ‘칠첩반상’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 영어 번역이 바로 올라왔다. BTS 번역 트위터 계정 ‘둘셋’은 팔로어가 45만명, ‘클레어7’은 37만명이나 된다.
▶아이돌과 훈민정음을 합해 ‘돌민정음’이라는 신조어도 있다. 오빠(oppa), 언니(unnie), 막내(maknae) 같은 단어는 한류 팬들 사이에서 한국어 자체로 통용되는 돌민정음이다. 최근 맥도널드가 ‘BTS 메뉴’를 전 세계 40여 국가에 내놓으며 포장지에 한글로 ‘보라해’라고 인쇄했다. ‘보라해’는 BTS가 자신들의 상징색 ‘보라’에서 착안해 팬들에게 ‘사랑해’ 대신 ‘보라해’라고 말하면서 유행어가 된 ‘돌민정음’이다. 작년에 한 국내 업체가 ‘보라해’를 상표 등록하려다 BTS 팬들의 거센 항의로 출원을 취소했다.
▶1970~80년대에는 팝송 듣다 영어 공부했다는 청춘이 적지 않았다. 일본 만화에 빠져 일본어 배운 사람도 있다. 이제는 K팝이나 한류 드라마 덕에 한국어 배우겠다는 수요가 늘고 있다. BTS 번역계 같은 민간 외교관들이 그런 시대를 앞당기고 있다.
06.05 조폭 통치 국가
콜롬비아 마약왕 에스코바르는 1980~90년대 미국 마약 시장의 코카인 공급을 독점했다. 세계 부자 7위에 오를 정도로 떼돈을 벌었다. 미국이 그를 잡아가려 노력했지만, 국가 채무 140억달러를 대신 갚아주는 조건으로 의회를 움직여 미국의 범죄인 송환 압력을 피해갔다. 학교, 병원을 지어 기증하고 무료 급식소를 운영하며 환심을 사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정부를 마음대로 주무른 그의 스토리는 나르코스(마약상), 시카리오(암살자) 같은 드라마 소재가 됐다. 콜롬비아 국민 중엔 대통령 후보를 3명이나 암살한 그를 의적(義賊)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민생이 도탄에 빠지면 의적과 해방구가 등장한다. 중국 수호지의 양산박, 홍길동의 율도국, 영국 로빈 후드의 셔우드 숲 같은 곳들이다. 하지만 이런 유토피아는 소설에서나 가능하다. 국민 재산과 생명을 지켜주는 대가로 세금을 걷는 국가와 해방구는 병존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마피아 같은 범죄 조직은 뇌물을 매개로 정부와 공생하려 하지 통치권을 넘보진 않는다.
▶2014년 중동에서 등장한 이슬람국가(IS)는 특이한 사례다. 시리아가 내전으로 나라 구실을 못 하는 틈을 타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단체가 국가 수립을 선포했다. 자원 입대 용병들로 군대를 만들고, 정부 조직을 갖추고 화폐까지 발행했다. 시리아 외 이라크 영토 상당 부분을 차지할 만큼 세력을 키웠지만 서방 연합군의 공격에 궤멸됐다.
▶마약왕의 모델과 IS의 모델을 합친 것 같은 새로운 유형의 국가가 베네수엘라에 등장했다. 좌파 포퓰리즘 22년 만에 경제가 완전히 망하면서 국민 10%가 해외로 탈출하고 남은 사람은 음식을 찾아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다. 정부가 공무원, 경찰 월급도 주지 못하게 되자 범죄 조직이 정부를 대체하고 있다. 1만8000개를 웃도는 범죄 조직이 지역 치안과 식량 공급, 주민 문화 생활까지 책임지며 ‘자치 정부’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주민들은 “정부보다 낫다”고 한다지만, 뒤로는 마약 거래, 밀수 같은 범죄로 검은돈을 챙기고 있을 게 뻔하다.
▶1950년대 국민소득 세계 4위였던 나라의 몰락을 이끈 사람이 차베스 전 대통령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반미, 반시장 노선으로 한때 한국 좌파 사이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다. 노무현 시절 KBS는 ‘신자유주의를 넘어서, 차베스의 도전’이란 특집 방송으로 차베스를 미화했다. 그 황당한 방송이 전파를 탈 때 KBS 사장이 문재인 정권 방송심의위원장으로 한때 거론됐다. 부끄러움을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다.
06.07(월) 정용진의 ‘미안하다, 고맙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입이 화제인 기업 오너는 일론 머스크일 것이다. 전기차 테슬라 성공으로 주목받았지만, 잇단 가상 화폐 관련 실언에 사기꾼으로 몰렸다. 머스크가 왜 이러는지 아무도 모른다. 어쨌거나 사람들은 “제발 그 입 좀 다물라”고 통사정한다. 우리 기업 오너들도 숱한 말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기억에 남는 어록엔 비난보다 대중의 공감을 산 말이 많다.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은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는 말을 남겼다. LG그룹 구인회 창업주는 “한번 사람을 믿으면 모두 맡기라”고 했다. 현대그룹 정주영 전 회장의 “이봐, 해봤어?”는 인생 지침으로도 손색없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말과 생각을 퍼뜨리는 사람을 ‘인플루언서’라고 한다. 요즘 정용진 신세계 그룹 부회장이 인플루언서 강자로 부상했다. 인스타그램 팔로어가 65만명을 넘는다. 6일 오후 현재 게시물이 32개뿐인데, 댓글은 900개를 넘고 ‘좋아요’는 1만7600개에 이른다. 댓글에 정 부회장이 직접 ‘대댓글’을 단다고 해서 ‘공답 요정’이란 별명도 얻었다. ‘공개 답변을 하는 요정’이란 뜻이다.
▶정 부회장은 레이디 가가나 방탄소년단처럼 소셜미디어를 홍보에 영리하게 활용한다는 평가도 있다. 신세계 조선호텔이나 신세계푸드가 개발한 요리 사진을 올릴 때마다 완판 기록을 쓴다. 최근엔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과 글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달 우럭찜에 이어 엊그제 해물 요리 사진을 올리며 한글과 영어로 ‘미안하다, 고맙다’고 썼다.
▶식재료가 된 동물에게 미안하고, 맛있으니 고맙다고 한 게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정 부회장은 이 문장이 지닌 사회적 함의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대선 후보 시절, 팽목항에 마련된 세월호 희생자 분향소에 찾아가 방명록에 이 문장을 썼다. 정 부회장은 한우 사진에는 “너희들이 우리 입맛을 세웠다”고 쓰기도 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세월호 분향소에서 “너희들이 대한민국을 다시 세웠다”고 쓴 것의 패러디라는 지적이 나온다.
▶어떤 사람들은 정 부회장이 사회적 메시지를 던진 것이라고 해석한다. 기업인의 자유분방한 글에 정치적 의미를 달지 말자는 반론도 있다. 정 부회장의 속뜻을 알 도리는 없다. 다만 문 대통령의 ‘미안하다, 고맙다' 방명록 이후 많은 사람이 이 표현을 접할 때마다 그날의 불행을 떠올리며 고통스러워하거나 대통령이 ‘고맙다’고 한 것에 분노한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에서 “사람은 비수를 손이 아닌 말 속에 숨길 수 있다”고 했다. 65만 팔로어를 거느린 인플루언서의 말이 연일 화제를 낳고 있다.
06.08 남매 전쟁
▲최근 식품 대기업 아워홈에서 벌어진 ‘남매의 전쟁’이 재계에서 화제다. 세 자매가 의기투합해 ‘보복 운전’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고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오빠의 대표이사직을 박탈했다. 구본성 아워홈 부회장과 구지은 아워홈 대표.
삼성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재벌 그룹 중 하나이지만 여성의 경영 참여에 트인 문화를 보여왔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장녀 이인희 한솔 고문, 막내딸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은 아버지의 지지 속에 여성 기업인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생전에 이병철 회장은 이인희 고문을 가리켜 “사내로 태어났으면 그룹을 맡겼을 큰 재목”이라며 그의 능력과 포용력을 높이 샀고 해외의 중요한 사업 파트너를 만날 때마다 데리고 다녔다. 똑똑한 막내딸도 무척 아꼈다고 한다.
▶장자 승계 원칙이 강한 집안에서 야심 있는 딸들은 자신의 몫을 인정받기 위해 상당한 불협화음도 감수하곤 했다. 대성그룹 김수근 회장의 3남3녀 중 막내딸 김성주 성주그룹 회장은 대학 졸업하고 “시집가라”는 부모 희망을 물리치고 미국 유학을 떠나 집안의 지원도 끊겼다. 귀국 후 아버지 집무실 옆방에 책상 하나 놓고 사업을 시작했는데 자신이 키운 브랜드 사업권을 놓고 큰오빠와 격렬한 다툼까지 벌였다. 결국 자신의 회사를 차렸다. 고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1남2녀에게 지분을 엇비슷하게 나눠주고 두 딸도 경영에 적극 참여시키다가 갑자기 타계했다. 그 애매한 지분 구조가 화근이 돼 큰딸이 남동생의 경영권에 도전하면서 가족 간 반목이 커졌다.
/일러스트=김도원 화백
▶최근 식품 대기업 아워홈에서 벌어진 ‘남매의 전쟁’이 재계에서 화제다. 세 자매가 의기투합해 ‘보복 운전’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고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오빠의 대표이사직을 박탈했다. 세 자매 가운데 일찍부터 아버지를 도와 회사를 키워온 막내 여동생 구지은씨를 대표이사로 선임했다.
▶아워홈은 구인회 LG 창업주의 셋째 아들(구자학)이 세웠다. 구자학 회장은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둘째딸(이숙희)과 결혼해 1남3녀를 뒀다. 구 회장은 장남이자 외아들 대신 능력 있는 막내딸을 입사시켜 일을 가르쳤다. 막내딸 구지은 대표는 자신의 외가쪽 사촌자매인 삼성가의 이미경 CJ그룹 부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정유경 신세계 총괄사장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기업 여성 경영인이 될 것이란 기대까지 받았다. 하지만 연로한 아버지가 마음을 바꿔 외아들에게 경영권을 넘기는 바람에 남매간 골이 깊어졌다.
▶능력 있는 여성들이 딸이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감수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사람 보는 안목, 사업 키우는 안목이 탁월한 기업인도 기업 승계 문제에 직면하면 능력 있는 딸보다 무능한 아들로 기울어 분쟁을 만들곤 한다. ‘딸들의 반란'은 앞으로도 자주 보게 될 것 같다.
06.09 치매 치료제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 있는 바이오젠 본사에서 연구원이 알츠하이머 치료제 연구를 하고 있다. 바이오젠은 2003년 이래 처음으로 FDA로부터 알츠하이머 신약 승인을 받았다. /AP연합
박완서 작가는 26년 동안 시어머니와 같이 살았다. 1남 4녀를 둔 작가는 “시어머니는 아들딸 가리지 않고 우리 집에 새로 태어난 생명을 기쁘고 극진하게 모신, 천사의 마음을 타고난 분”이라고 했다. 이 시어머니가 말년 3~4년 ‘노망이 드셔서 가족들을 힘들게 했다’. 작가는 “지금으로 치면 치매”라고 했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와 살다 정신과 치료까지 받고 결국 화해하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 ‘해산바가지’다.
▶박완서 작가가 들었으면 크게 반길 뉴스가 나왔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미 제약사 바이오젠이 일본의 에자이와 함께 개발한 알츠하이머 치료제를 승인한 것이다. 알츠하이머 치료 신약이 FDA 승인을 받은 것은 2003년 이래 18년 만이다. 기존 허가 받은 알츠하이머 약은 기억력 감소 등 증상을 완화하는 데 그쳤기 때문에 뇌 손상 자체를 늦추는 약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러스트=김도원 화백
▶노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질병이 치매다. 현재 국내 치매 환자 수는 84만명으로, 연평균 16% 증가하고 있다. 65세 이상에서는 10명 중 1명 이상이 치매를 앓고 있다. 이처럼 환자는 늘어나는데 치매 치료제는 특히 개발이 어려운 난공불락 영역으로 꼽혀왔다. 인간의 뇌는 우주에 비견될 만큼 복잡하다. 우리가 뇌에 대해 아는 것도 부족하다. 바이오젠 신약은 뇌에서 ‘베타-아밀로이드’라는 해로운 단백질 덩어리 제거를 돕는다. 글로벌 제약사들도 중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라이릴리는 지난 30년간 30억달러(약 3조원)를 투자했지만 아직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화이자도 2018년 개발을 포기하고 대규모 감원을 했다. 알츠하이머 치료제의 임상 실패율은 99.6%라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바이오젠도 천신만고 끝에 승인을 받았다. 이 회사는 2019년 임상시험에서 개선 효과가 나오지 않았다며 개발 중단을 발표했다. 그런데 자료를 다시 분석한 결과, 고용량을 투여한 환자의 사고 능력 저하가 대조군보다 22% 덜했다며 FDA에 신약 승인을 신청했다. FDA의 외부 전문가 자문위는 작년 11월 “설득력 있는 증거가 없다”며 불허를 권고했지만 FDA가 후속 연구를 조건으로 승인한 것이다.
▶바이오젠 외에도 카사바사이언스, 알렉터, 로슈 등 해외 제약사와 젬백스 등 국내 제약사들도 치매 치료제를 개발 중이다. 과학자들은 임상 시험 실패에서 새로운 것을 많이 배우고 있다고 했다. 초기 임상에서 인지 기능 회복 가능성을 보여주는 후보 물질도 있다. 실패에서 배우며 도전을 계속하면 치매라는 성도 함락하는 날이 올 것이다.
06.10 트래블 버블
지난 일요일 밤 한 여행사가 TV홈쇼핑을 통해 발 빠르게 유럽 패키지 여행 상품 3종을 팔았다. 이탈리아 일주 8일, 동유럽·발칸 9일, 스페인 일주 9일 여정이었다. 1시간 방송에 무려 5만2000명이 예약하고 결제액이 200억원을 넘었다. 해외여행 못 가 답답해하던 소비자들이 언제 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예약부터 해두는 통에 홈쇼핑 여행상품 판매 실적 중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이르면 오는 7월부터 코로나 백신 접종자에 한해 단체 해외여행이 가능해진다. 싱가포르, 태국, 대만, 괌, 사이판 등과 ‘트래블 버블’을 추진하는 덕분이다. 트래블 버블이란 코로나 방역 안전 국가들끼리 하늘길을 열어 14일간의 자가 격리 없이 자유롭게 오가는 것을 말한다. 비누방울(bubble) 안에 들어앉은 것처럼 외부 위험 요소는 차단한 채 안전 권역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인다고 해 붙여진 표현이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지난 4월 19일부터 ‘트래블 버블’을 시행했다. 올 초만 해도 2만6000명 정도이던 뉴질랜드의 입국 출국 여행객 숫자가 5월에 19만명으로 늘었다. 뉴질랜드 스키 리조트는 2년 전보다 예약이 2배 늘었다고 한다. 국내 증시에서도 항공주, 여행주가 펄펄 끓고 있다. 트래블 버블이 가능해져도 아직 자유 여행은 힘든데 주가는 이미 고공 행진이다. 어제 대한항공 주가는 코로나 이전보다 더 높아 5년 내 최고였다. 하나투어 주가도 작년 상반기 바닥 칠 때 비하면 거의 3배가 돼 있다.
▶OECD가 ‘코로나 우울증’을 조사했는데 우리나라의 우울감 확산 지수(36.8%)가 코로나가 훨씬 심각했던 미국(23.5%)이나 영국(19.2%), 이탈리아(17.3%)보다도 높았다. 한참 해외여행 인구가 퍼져가던 참에 좁은 국토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된 요인도 영향을 미친 것일까. 코로나 직전까지 해외여행은 현기증 나게 늘어왔다. 2000년 500만 돌파, 2005년 1000만 돌파, 2016년 2000만을 돌파했다. 2019년 해외여행객 숫자는 인구 절반도 넘는 2871만명이었다. 그러다 작년에 출국자 수가 85% 급감해 1990년대 후반 수준이 됐다(427만명).
▶‘보복 소비’를 능가하는 ‘보복 여행’이 폭발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해외여행 못 나가는 바람에 국내 골프장, 가구업체 등 내수 업종이 ‘코로나 특수’를 만끽했다.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이들이 폭리 횡포를 부린다는 불만도 커져가고 있었다. 코로나 백신이 기업들의 희비 곡선도 엇갈리게 만들 것 같다.
06.11 진짜 게임 체인저 ‘코로나 치료 알약’
/머크사(MSD)가 임상시험 중인 먹는 코로나 치료제 몰누피라비르(Molnupiravir). /AFP연합뉴스
2009년 신종플루 대유행 당시 국내 발생 환자는 76만명이 넘었다. 지금 코로나의 5배다. 그런데 신종플루 환자가 그렇게 많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도 드물다. 그만큼 당시 사람들이 신종플루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타미플루라는 치료약이 있었다. 사람들은 치료약이 있으면 안심한다. 지금은 신종플루를 독감 종류의 하나로 취급하고 있다.
▶다국적 제약사 MSD(미국 머크사)는 알약 형태로 먹는 코로나 치료제 몰누피라비르(Molnupiravir) 공급 계약을 미국 정부와 체결했다고 밝혔다. 미국 보건 당국의 긴급 사용 승인을 받는 즉시 170만명분을 미국에 공급하는 조건으로 약 12억달러(1조3000억원)를 받는 계약이다. 미국 정부가 먹는 코로나 치료제를 선구매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러스트=김도원 화백
▶이미 항체 치료제 등 코로나 치료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는 길리어드의 렘데시비르가 코로나 치료제로는 처음으로 미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았고 리제네론의 항체 치료제도 사용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셀트리온의 항체 치료제 렉키로나가 식약처의 긴급 사용 승인을 받아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 치료제들은 정맥에 투여하는 링거 주사제다. 치료 효과도 기대에 못 미친다.
▶머크사의 알약 치료제는 12시간 간격으로 하루 두 번, 5일간 먹는다. 그러면 몸속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복제를 억제하는 효과를 나타낸다고 한다. 먹는 약이니 병원에서 처방만 받으면 집에서 쉽게 복용할 수 있다. 미국 정부가 계약한 내용으로 추산해 보면 가격이 1회분에 약 8만원, 5일분에 80만원 정도다. 이미 백신을 내놓은 화이자도 얼마 전 먹는 코로나 치료제를 개발해 올해 말까지 공급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현재 코로나 환자 60명을 대상으로 임상 1상을 진행 중이다. 화이자 외에도 많은 국내외 제약사가 먹는 코로나 치료제, 먹는 백신, 스프레이로 코에 뿌리는 백신 등을 개발하고 있다.
▶에이즈는 아직도 백신이 없지만 치료제 효과가 좋아서 약만 잘 복용하면 증상 발현 없이 오래 살 수 있다. 한때는 천형과도 같던 무서운 불치병이 만성 질환의 하나처럼 된 것이다. 머크사는 진행 중인 임상 3상에서 긍정적 결과가 나올 경우 올 하반기 긴급 사용 승인을 신청할 예정이다. 우리 정부도 머크사와 선구매를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먹는 치료 알약이 나오면 그것이 코로나와 벌이는 전쟁에서 승기를 잡는 진짜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다. 백신과 알약 치료제로 코로나를 종식시키는 희망이 곧 현실로 다가오기를 기도한다.
06.12 ‘아침이슬’ 50년
/일러스트=김도원 화백
가사 좋고 곡이 아름답다 해서 국민가요 반열에 오르는 건 아니다. 많은 이의 심금을 울리려면 시대와 공감해야 한다. 김민기의 ‘아침이슬’도 그런 노래 중 하나일 것이다. 1987년 7월, 경찰 최루탄을 맞고 숨진 연세대생 이한열의 운구 행렬이 모교를 떠나 시청 앞 광장으로 향했다. 도로를 가득 메운 인파가 그 뒤를 따라가며 이 노래를 불렀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의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당시만 해도 애국가 빼면 온 국민이 아는 유일한 노래라 했다. 넥타이 부대, 청바지 차림 학생 할 것 없이 모두 불렀다. 현장에서 지켜보던 김민기는 생각했다. “이건 이제 내 노래가 아니구나.”
▶김민기 노래에 담긴 저항적 정서와 1970~80년대의 권위주의적 사회 분위기 탓에 그의 노래에는 민중가요, 저항가요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아침이슬’은 발표 당시 아름다운 가사가 돋보여 서울시문화상까지 받았는데 4년 뒤 이른바 긴급조치로 금지곡이 됐다. 김민기 1집에 함께 수록된 ‘친구’도 그런 곡이었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중략) 그 깊은 바다 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함께 여행 갔다가 사고로 죽은 친구를 애도한 곡인데 학생들은 민주화 운동 희생자들을 떠올리며 불렀다. 창작자는 그럴 의도가 없었어도 시대가 그렇게 해석했다.
▶민주화 이후 금지곡의 멍에를 벗은 김민기 노래는 국민 애창곡으로 거듭났다. 김민기가 만들고 양희은이 부른 ‘상록수’(1979)는 1998년 대한민국 50주년을 축하하는 공익광고에 배경 음악으로 등장했다. US여자오픈에서 양말 벗고 물에 들어가 스윙하는 박세리 선수와 ‘우리 가는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는 가사가 IMF로 힘들어하던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고 등을 토닥였다.
▶'아침이슬'이 올해로 50년을 맞았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진행 중인 아침이슬 50년 기념 전시회엔 서울대 미대 졸업 후 자기 이름으로 공식 작품을 발표한 적 없는 김민기의 그림을 볼 수 있다. 후배 가수들은 헌정 앨범을 만들고 축하 공연도 준비하고 있다.
▶가수 조영남이 “음대 나온 나는 그림 그리는데 미대 나온 김민기는 노래한다”고 했다. 노래하지 않는 김민기를 상상할 수 없다. 3년 뒤엔 그의 또 다른 역작인 뮤지컬 ‘지하철1호선’도 30주년을 맞는다. 뛰어난 예인(藝人)을 갖는 것은 사회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아침이슬’을 흥얼거리며 젊었던 시절의 추억에 젖어본다.
06.14(월) 발레의 여왕 박세은
/'백조의 호수'에서 여주인공 오데트를 연기한 박세은 /박세은 제공
발레 ‘백조의 호수’ 무용수들의 무대 뒤 삶을 다룬 영화 ‘블랙스완’은 아름답고도 소름 돋는 작품이다. 백조가 되어 춤추는 발레리나로 나오는 배우 내털리 포트먼은 아름다우면서도 근육질인 발레 무용수 몸을 표현하기 위해 마른 몸을 쥐어짜 9㎏을 감량했다. 영화 속 포트먼은 몸이 망가지는 고통과 싸우면서도 백조 깃털이 피부에서 솟는 착각을 느낄 정도로 춤과 혼연일체가 된다. 이 연기로 아카데미 주연상도 거머쥐었다. 1년간 발레 연기자로 살았던 포트먼은 “1주일만 더 아몬드를 먹으라고 했으면 미쳐버렸을 것”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강수진 국립발레단장은 그 고단한 세계를 상처투성이 발가락 사진으로 보여준 적이 있다.
▶포트먼은 이 영화에서 프랑스인 발레리노 뱅자맹 밀피에로부터 발레를 배우다가 사랑에 빠져 그와 결혼했다. 밀피에는 이후 파리오페라발레단(POB) 예술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곳에서 한국인 발레리나 박세은과 한솥밥을 먹었다. POB는 러시아의 마린스키와 볼쇼이, 영국로열발레단, 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와 함께 세계 5대 발레단으로 꼽힌다.
▶세계 주요 발레단 수석 자리를 언제부턴가 한국 젊은 무용수들이 꿰차고 있다. 서희와 김기민이 각각 ABT와 마린스키 수석 무용수다. 보스턴발레단의 채지영, 네덜란드국립발레단의 최영규, 워싱턴발레단의 이은원 등 내로라하는 발레단 수석과 주역을 한국 발레리노와 발레리나가 맡았다. 이들은 20대 후반~30대 초반으로, 슈투트가르트발레단 수석을 지낸 강수진을 보며 자란 ‘강수진 키즈’들이자 K발레의 황금세대로 불린다.
▶황금세대의 대표주자였던 박세은이 엊그제 POB 수석무용수인 에투알(‘별’이란 뜻)이 됐다. 2011년 준단원으로 들어가 10년간 자신과 싸워가며 도약을 거듭한 끝에 정상에 올랐다. 에투알은 POB 무용수 150여 명 중 남녀 합해 16명에 불과하다. 한국인은 물론이고 아시아인 중에서도 처음 있는 쾌거다. 발레리노 못지않은 파워로 도약하는 그녀의 명품 점프는 눈물과 땀의 결정체다. 2018년 무용계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도 받았다.
▶강수진이 어린 시절 발레 유학을 떠난 것과 달리 박세은·김기민 등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우리 시스템으로 육성된 토종이다. 2010년 세계 4대 발레 콩쿠르인 바르나발레콩쿠르에 출전한 박세은 김기민 등 한국인 4명이 남녀 금메달 4개를 싹쓸이했을 때부터 세계가 한국 발레의 웅비를 예견하고 주목했다. K팝에 이어 발레까지 최정상에 오른 우리 젊은이들의 활약이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06.15 민간인 우주여행
네덜란드의 한 기업가가 2024년 출발하는 화성 여행 상품을 내놨다. 무인 우주탐사선 뉴호라이즌의 속도를 기준으로 화성까지 최장 289일 걸린다. 편도 여행이고 화성에 식민지를 만들어 정착한다는 사기성 상품이었는데 10만명이 몰렸다. 회사가 2019년 파산하며 없던 일이 됐지만, 우주로 떠나고픈 인류의 열망이 얼마나 뜨거운지 보여준 사건이다.
▶나사 소속 우주인이 아닌 민간인으로 우주에 다녀온 첫 사례는 1989년 5월 옛 소련 우주선 소유스를 타고 우주정거장(ISS) 미르에 다녀온 영국인 여성 과학자 헬렌 셔먼이다. 민간 우주인 배출 프로젝트여서 관광은 아니었다. 이소연씨도 그렇게 해서 우주인이 됐다. 첫 우주 관광객은 2001년 4월 소유스 TM-32를 타고 ISS에 올라가 8일간 머물다 돌아온 미국인 사업가 데니스 티토다. 여행 경비로 2000만달러를 썼다. 지금까지 모두 8명이 러시아 우주선을 타고 우주 관광을 다녀왔다.
▶상업용 민간 우주선을 이용하는 우주여행은 아마존 최고경영자 제프 베이조스와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개척하고 있다. 베이조스의 우주 탐사기업 블루 오리진이 다음 달 20일 우주관광 로켓 뉴셰퍼드를 띄운다. 왕복 티켓 가격은 20만달러 정도이지만, 베이조스와 함께 여행 가는 조건으로 경매에 내놓은 첫 티켓이 엊그제 2800만달러에 낙찰됐다. 추진 로켓은 76㎞까지 올라간 뒤 귀환하고 여행객을 태운 캡슐이 관성으로 100㎞ 높이 목표 지점에 도달한다. 이후 3 분 정도 무중력 상태를 경험하고 돌아온다.
▶머스크가 내년 1월 민간인 3명과 나사 출신 우주인 1명을 태워 보내는 왕복 우주선 크루 드래건은 뉴셰퍼드보다 훨씬 높이 올라가 고도 350~450㎞에 떠 있는 ISS까지 간다. 왕복 10일 코스이고 ISS에 8일간 머물기 때문에 티켓 가격만 5500만달러에 이른다. 머스크는 몇 해 전 우주여행 사업을 시작하면서 아폴로 11호의 달착륙 54년이 되는 2023년에 인류를 달에 여행 보내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가는 데 3일, 왕복 6일짜리 상품이다. 실현될지 관심이다.
▶우주여행의 끝판왕은 태양계 너머로 나가는 성간(星間) 여행이다. 여행 시간 단위가 수백년~수만년으로 바뀌기 때문에 현재로선 불가능한 꿈이다. 그러나 라이트 형제가 하늘을 난 것부터가 불가능한 꿈이었다. SF 영화 ‘패신저스’에선 냉동 상태로 수백년 여행하고, 베르베르 소설 ‘파피용’에선 우주 범선이 돛에 바람 대신 태양풍을 받아 우주 끝까지 날아간다. 민간 우주여행은 그 꿈을 향해 내딛는 첫발이다.
06.16 은행원
지난달 한 금융 소비자 단체가 국내 은행 18곳을 대상으로 ‘좋은 은행’ 순위를 발표하자 시중은행들이 당황했다. 작년만 해도 18은행 가운데 13위에 머물러 있던 카카오뱅크가 별 같은 대형 은행들을 제치고 소비자 평가 1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은행의 1인당 생산성 지표에서도 점포 없는 인터넷 은행 카카오뱅크가 단번에 2위에 올랐다.
/이용우(왼쪽), 윤호영(오른쪽) 카카오뱅크 공동대표가 지난 2017년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카카오뱅크
▶올 3월 광주은행이 여수 웅천지구에 새 지점을 내면서 건물 ‘1층’에서 개점한다는 점을 내세웠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번화가의 임대료 비싼 건물 1층은 으레 은행이 차지했다. 그런데 이제는 1층에 은행 지점 내는 게 홍보거리가 될 정도다. 작년 한 해 문 닫은 은행 점포는 304곳. 온라인, 모바일 거래가 급증하면서 은행들은 비싼 1층 지점 대신 임대료 싼 2층으로 올라가거나 지점 자체를 없애고 있다. 은행 지점은 8년 새 1300곳 가까이 폐쇄돼 2020년 기준 6405곳만 남아 있다.
▶오랫동안 은행원은 화이트칼라의 대명사요, 직업 선호도에서 줄곧 상위에 꼽혔다. 점포 폐쇄로 은행원 수는 감소하지만 월급은 꾸준히 올라 1억원 안팎의 고액 연봉자다. 네 대형 은행의 연평균 급여는 2017년 9025만원에서 2020년 9800만원으로 늘었다.
▶그런데 디지털 혁명의 충격을 심하게 받는 업종 중 하나가 은행이 됐다. 지난해 전 세계에서 은행원 8만5000명이 감원됐다. 국내도 마찬가지다. 신한은행이 이달 들어 만 49세 이상, 15년 이상 근무한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 퇴직 신청을 받았다. 지난 1월에 이어 벌써 두 번째다. 통상 은행권의 희망 퇴직은 임금 피크제 적용을 받는 50대 중반을 대상으로 했는데 연령도 점점 낮아진다. 올 초 KB국민은행은 40대한테도 희망 퇴직 신청을 받았다. 더 나이 들기 전에 일찌감치 새 인생 찾아 떠나라고 하는 것이란 시각도 있다.
▶KB국민은행이 올 상반기 공채 인원 200명 가운데 170명을 IT·데이터 분야에서 뽑겠다고 발표했다. 인터넷 은행인 카카오뱅크 이용자가 1600만명을 넘어 은행 앱 1위이고, 조만간 제3 인터넷 은행이 출범한다니 시중은행들이 다급하게 IT 인력 구애에 나섰다. 은행은 인문계 졸업생들이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연봉의 안정된 일자리였는데 그마저 위태로워지고 있다. 과학을 모르면 살 수 없는 시대가 이미 와 있다. 교수들 철밥통을 깨고 교육을 혁명적으로 바꿔야 한다. 그게 일자리 창출이고 진정한 복지다.
06.17 文의 ‘높은 윤리’
침팬지와 보노보는 먹을 것을 다른 놈에게 양보하는 이타적 행동을 한다. 그럴 때면 뇌에 인간처럼 행복 호르몬인 옥시토신이 쏟아진다. 그럼에도 학자들은 영장류가 윤리적이지 않다고 한다. 윤리를 이루는 핵심 요소에는 선행과 선의 외에도 공정과 정의에 대한 개념이 포함되는데, 인간 이외 어떤 동물도 그런 개념이 없다는 게 이유다. 영장류 학자 마이클 토마셀로는 책 ‘도덕의 기원’에서 윤리를 “나와 남을 같은 잣대로 판단하고, 그 기준을 제3자에게까지 확대해 적용하는 도덕 관점”이라고 설명한다. 법률·종교 같은 인간의 문명·문화가 이런 의식을 제도화하면서 생겼다고 한다.
▶역사상 많은 비극이 “나는 윤리적이다”라는 자아도취에서 비롯됐다. 13세기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나는 인간보다 고귀하다”는 말로 자신을 윤리적 심판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후 그를 이은 후대 교황들은 잔인해졌다. 평생 검소하게 산 16세기 교황 식스토 5세는 자신의 윤리 기준을 절대화하고 이에 미치지 못하는 이들을 거침없이 목매달았다. 아이들까지도 처형했다.
▶유럽을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엊그제 오스트리아의 한 수도원에서 “가톨릭의 가치가 평생 내 삶의 바탕을 이루었고, 정치인이 된 이후에도 높은 윤리 의식을 지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말 높은 윤리 의식을 지니고 살아온 사람들은 남들 앞에서 스스로 “높은 윤리 의식을 갖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 겸허함 자체가 윤리의 표지이기도 하다. 문 대통령의 윤리 의식은 특이하다.
▶문 대통령이 직간접으로 간여한 비윤리적 행태는 이루 헤아리기도 어렵다. 이 정권의 수많은 내로남불만큼 비윤리적인 것이 어디에 있겠나. 친구를 위해 경찰을 동원해 선거에 개입한 혐의, 드루킹 개입 의혹, 유재수 비리 비호 의혹, 딸을 위한 이상직 비리 비호 의혹, 자신을 수사하는 검찰을 공중분해시킨 사실 등 열거하기도 힘들다. 청와대 내부 감찰을 하는 특별감찰관은 임명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자신은 “높은 윤리 의식을 지켜왔다”고 말한다.
▶문 대통령은 남에겐 윤리적으로 높은 곳에 서서 아랫사람 꾸짖는 태도를 보이곤 한다. 30대 청년을 모욕죄로 고소했다가 취하할 때도 “성찰의 계기로 삼으라” 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선 한 번도 제대로 반성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는 엄격하다. 마태오복음서에 실린 예수의 산상설교는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며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 있는 들보를 빼내어라”라고 했다. 모두가 새겨들어야 할 교훈이다.
06.18 디지털 노인稅? 배우면 다 한다
유튜브에 ‘깔고 또 깔고’라는 제목의 영상이 있다. 한 시민이 정부 사이트에 접속해 공문서를 발급받는 과정을 보여준다. 사이트에 접속하니 ‘액티브X’를 깔라고 한다. 그걸 다운받으려니 ‘키보드 보안 프로그램’을 깔라고 하고, 그걸 다운받으려니 또 ‘보안 프로그램’을 깔라고 한다. ‘본인 인증’이 필요하다고 해 ‘은행 공인인증서’를 다운받으려 하니 ‘회원 ID’가 있어야 한다면서 비밀번호를 만들라고 한다. 10자리, 영문, 특수문자 조건 맞추느라 3~4차례 시행착오를 겪고 마침내 회원 가입 절차를 마치고 로그인을 하려는데 ‘아뿔사, 비밀번호를 까먹어 버렸네.’
/2021년 6월 17일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에서 안길주(74) 씨가 스마트폰에 있는 앱을 통해 드론을 조종하고 있다. / 오종찬 기자
▶돌고 돌아도 늘 제자리인 미로에 빠진 느낌. 누구나 한두 번쯤 겪었을 일이다. 어르신들에겐 이런 디지털 세상의 진입 장벽이 훨씬 더 높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어르신들의 디지털 소외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인터넷 쇼핑몰 이용률이 20대는 97%에 달하는 반면 70대 이상은 11%에 불과하다. 30대는 93%가 인터넷 뱅킹을 이용하는데 70대 이상은 5%에 그친다.
▶디지털 무능은 ‘불편함’을 넘어 ‘불이익’이 되는 세상이 됐다. 생필품 최저가 구매는 온라인 쇼핑몰을 빼곤 생각할 수 없다. 가족관계증명서를 뗄 때 인터넷으로 발급받으면 공짜지만, 주민센터 창구에서 받으면 1000원을 내야 한다. 100만원을 송금할 때 은행 창구를 이용하면 수수료 2000원을 내야 하지만, 은행 앱을 활용하면 공짜로도 가능하다. 주식 투자도 스마트폰 앱을 활용하면 수수료를 3분의 1로 줄일 수 있다.
/일러스트=김도원 화백
▶우리나라 인구 6명당 1명이 65세 이상 어르신들이다. 이 중 20%인 167만명은 홀로 사는 ‘독거 노인’이다. 노인 중 월소득이 중위소득의 절반(92만원)이 안 되는 빈곤층이 43.4%에 달한다. 이런 노인일수록 디지털 기기를 활용하지 못해 추가로 부담하는 비용, 이른바 ‘노인세(稅)’를 더 많이 내는 실정이다.
▶어르신 중엔 가족 단톡방을 만들고 매일 동영상을 올리며 자녀와 소통하는 분도 있고, 쇼핑몰, 배달 앱을 활용해 자녀들에게 먹거리를 보내주는 분들도 적지 않다. 유튜버로 고소득을 올리는 ‘디지털 만렙(게임의 최고 레벨)’ 수준의 어르신도 있다. 이분들이 공통으로 하시는 말씀은 “배우면 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도 새똥 치우기 같은 노인 일자리에 헛돈 쓰지 말고, 어르신과 청년을 1대1로 연결해 ‘스마트폰 활용법’을 익히게 하면 어떨까. ‘노인세’로부터의 자유, ‘디지털 세상과의 연결’을 돕는 게 더 나은 복지가 될 수 있다.
06.19 日 박물관의 ‘일본인 손기정’
▲도쿄올림픽 주 경기장 인근에 있는 '일본 올림픽 박물관' 내 '역대 일본인 금메달리스트'를 전시하는 코너에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를 최상단에 배치했기 때문이다. 사진은 '일본인 금메달리스트' 코너에 손기정 선수를 소개하는 모습./서경덕 교수 제공
성화봉을 든 백발노인이 경기장으로 들어왔다. 가슴에는 태극 휘장과 오륜(五輪) 마크를 달았다. 덩실덩실 춤추는 듯 세상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펄쩍펄쩍 뛰었다. 수만 관중이 일제히 기립했다. 들어서는 순간 누구나 그가 누군지 알았다. 역사적 의미도 알았다. 성화를 들고 서울올림픽 개막식장을 달리는 태극 마크의 손기정. 그를 향해 박수를 쏟아낸 관중 속에 다케시타 노보루 일본 총리도 있었다.
▶개막식이 열린 1988년 9월 17일. 일본은 긴장했다. 한국의 관중들이 일장기를 든 선수단에게 야유를 퍼붓지 않을까. 당시 니혼게이자이신문의 한 대목이다. “한국인에게 과거의 불행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일본 국기지만, 국기를 들고 일본 선수단이 입장했을 때 경기장은 박수로 끓어올랐다. 일본 선수단은 한국의 국화(國花) 무궁화를 들고 있었다. 관중을 향해 무궁화를 흔들었다.” 요미우리신문은 일본 선수단 기수(旗手)의 말을 이렇게 전했다. “굵은 눈물이 쏟아졌다. 한 바퀴 행진은 너무 짧았다. 더 걷고 싶었다.”
▶손기정은 원래 최종 주자였다. 비밀이 새 나가 개막식 직전에 외신에 보도됐다. 조직위는 막판에 최종주자를 미래 세대로 바꾸기로 결단했다. 경기장에 들어와 끝까지 달릴 줄 알았던 손기정은 다음 주자에게 성화봉을 넘겼다. 열아홉 육상 선수 임춘애였다. 두 주자의 나이 차는 57년. 그 순간 경기장을 가득 채운 과거의 감격이 미래의 희망으로 승화됐다. 더 큰 박수와 환호가 터졌다. 이 선택이 서울올림픽 개막식을 역대 최고 올림픽 개막식 중 하나로 만들었다.
▶최근 일본 올림픽 박물관이 ‘역대 일본인 금메달리스트’ 전시장에 손기정 선수 사진을 상단에 배치했다고 한다. 손기정이 월계관을 쓰고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 시상대에 선 사진이다. 그때 심훈은 사진을 보고 시를 썼다.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오오, 조선의 남아여!’) 하지만 손기정의 가슴엔 커다란 일장기가 그려져 있었다. 아래로 향한 그의 눈은 월계관 그늘에 가려졌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올림픽 시상식”으로 불리는, 바로 그 순간이다.
▶일본은 지금 올림픽을 치르려는 나라다. 올림픽은 세계인의 축제다. 그런데 일본이 올림픽 홈페이지 일본 지도에 독도를 굳이 넣고, 손기정을 일본 선수로 전시해 이웃 나라의 상처를 들쑤신다. 코로나 사태로 1년 연기된 올림픽이다. 그러지 않아도 일본의 방역 문제로 경기를 제대로 열 수 있을지도 의문인 상황이다. 그래도 많은 한국민은 일본 올림픽이 열리고 선수들이 펼치는 드라마를 기다리고 있다. 일본은 그런 기대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한일 외교 갈등 격화엔 한국 정권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지만, 일본의 이런 치졸한 행태를 보면 혀를 차지 않을 수 없다.
06.21(월) 메르켈 리더십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G7 정상회의에서 유럽 지도자 가운데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가장 먼저 미국으로 초청해 화제다. 메르켈은 오는 9월 말 독일 총선이 치러지면 16년의 임기를 마치고 총리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했다. 임기가 3개월 남았는데 영국이나 프랑스 정상보다 앞서 초청한 건 메르켈의 리더십과 인기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난 15년간 이렇게 힘든 겨울이 있었나 싶다.” 2020년의 마지막 날, 메르켈 총리가 마지막 신년사를 했다. 독일도 심각한 코로나 팬데믹을 겪었지만 그 와중에 메르켈의 지지율은 더 올라갔다. “코로나 팬데믹이 전후 최대의 도전”이라고 일찌감치 국민에게 심각성을 알렸다. 방역 상황을 설명할 때는 ‘과학자 총리’로서의 면모를 보여 신뢰를 받았다. 2021년 사상 최대 규모의 적자 예산을 편성하면서 “이런 수준의 재정 지원을 끝없이 지속할 수는 없다. 2023년부터는 막대한 빚을 갚아나가겠다”고 했다. 이전에도 그런 약속을 엄격히 지켰다. 글로벌 금융 위기와 유럽 재정 위기에 대응하느라 유럽 국가들의 국가부채 비율이 껑충 뛰었는데 독일은 나랏살림을 아껴 부채 비율을 20%포인트 이상 도로 낮췄다.
▶메르켈 리더십은 외교에서 먼저 빛을 발했다. 취임 첫해인 2005년 말 EU 정상회의가 일정을 넘겨 새벽까지 마라톤 협상으로 이어졌다. 향후 7년간의 예산안을 놓고 영국과 프랑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붙었다. 메르켈이 중재자 역할로 외교 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프랑스가 도맡아 온 유럽의 맹주 역할이 독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이념이나 친분에 치우치지 않는 합리적 중재자 메르켈의 리더십에 힘입어 유럽은 글로벌 금융 위기, 재정 위기, 난민 위기의 파고를 헤쳐왔다.
▶정치 인생 내내 스캔들도 없었고 늘 검소한 차림이었다. 한 기자가 “항상 같은 옷만 입는데 다른 옷은 없냐”고 물었더니 메르켈은 “나는 모델이 아니라 공무원”이라고 대답했다. 총리가 되기 전에 살던 아파트에 그대로 살면서 퇴근 길에 수퍼마켓 들러서 장 보고 집안 일도 남편과 나눠서 직접 하는 평범한 시민의 삶을 이어간다.
▶집권 16년째인 이 여성 지도자의 인기도가 임기 말년에도 63%로 차기 총리 후보들을 압도한다. 인기에 영합하는 정책을 펴서 인기가 높아진 게 아니고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로 나라 위해 뚜벅뚜벅 제 할 일을 하면서 경제와 외교에서 눈부신 성과를 냈기 때문이다. 메르켈 덕분에 독일은 경제 대국의 기반 위에 유럽의 외교적 맹주로 부상했다. 이런 지도자를 가진 나라가 부럽다.
06.22 에이즈 40년
▲세계 에이즈의 날을 맞이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여성들이 2020년 12월 거리 바닥에 에이즈 희생자의 이름을 적고 있다. /ap뉴시스
미국 뉴욕에 센트럴파크가 있다면 샌프란시스코엔 골든게이트파크가 있다. 이 공원 한쪽엔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 희생자를 추모하는 작은 숲이 있다. 샌프란시스코는 에이즈 초창기 발병자가 가장 많이 나온 지역 중 한 곳이다. 지난 5일 이곳에선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에이즈 발병 4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1981년 6월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주간 보고서에서 새로운 증상의 환자 발생을 처음 알렸다. 폐렴 증상을 보인 남성 5명에게서 면역 세포에 손상을 입은 특이 사례를 발견했으며 이 중 2명은 이미 숨졌다는 내용이었다. 에이즈의 시작이었다. 배우인 미국의 록 허드슨과 앤서니 퍼킨스, 록그룹 퀸의 프레디 머큐리, 러시아 태생의 세계적 무용가 루돌프 누레예프,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 1980년대 중반과 1990년대 초반 에이즈로 숨진 유명 인사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일러스트=김도원 화백
▶에이즈를 일으키는 HIV(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는 사람 몸 안으로 들어와 면역 세포를 파괴하는 바이러스다. 전문가들은 한 번의 성관계로 감염 가능성은 0.1~1% 정도로 보고 있다. 1990년대 초반까지도 에이즈는 불치의 천형(天刑)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1996년 여러 약을 동시에 쓰는 ‘칵테일 요법’이 등장하면서 인간이 승기를 잡았다. 이젠 치료제 효과가 좋아서 약만 잘 복용하면 에이즈를 당뇨나 고혈압 같은 만성 질환처럼 관리하며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 얘기다. 현재 전 세계 3700만명이 HIV와 함께 살고 있다.
▶샌프란시스코는 현재 인구의 약 80%가 1회 이상 코로나 백신을 접종받았고 68%는 접종을 완료했다. 그 결과, 최근 샌프란시스코 코로나 신규 확진은 하루 평균 10여명 수준의 소규모 감염만 나오고 있다. 샌프란시스코가 미국 최초로 코로나 집단면역에 도달하는 대도시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과거 이곳이 에이즈와의 싸움에서 선봉에 선 도시였다는 사실이 보건 조치에 대한 대중의 신뢰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HIV는 같은 RNA 바이러스여서 변이가 잦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도 인류는 끈질기게 추격해 HIV는 사실상 무력화시켰고 코로나 바이러스도 약점을 포착해 공략하고 있다. 에이즈엔 ‘U=U’(Undetectable=Untransmittable) 원칙이 있다. 꾸준히 치료제를 복용해 HIV가 검출되지 않으면 감염력도 없다는 것이다. 코로나는 치료제 이전에 백신이 그 역할을 하는 것 같다.
06.23 ‘기습 성추행’
▲<YONHAP PHOTO-2598> 법정 향하는 오거돈 (부산=연합뉴스) 강덕철 기자 = 강제추행치상 혐의로 기소된 오거돈 전 부산시장이 21일 오전 2차 결심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부산 연제구 부산지방법원 법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2021.6.21 kangdcc@yna.co.kr/2021-06-21 11:17:36/< 저작권자 ⓒ 1980-2021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범죄 재판에서 ‘기습 추행’이라는 낯선 용어가 튀어나왔다. 변호인이 “(오씨의 행위는) 충동적, 우발적, 일회성인 기습 추행”이라며 강제 추행 치상죄로 처벌할 수 없다고 했다. 마치 총을 정면으로 겨눠 피해자를 공포에 빠뜨린 뒤 쏘면 살인죄가 되지만, 느닷없이 쏴버리면 무죄라는 식이다. 오씨 재판 기사에는 ‘행동도 더럽게 했지만 변호도 더럽게 한다’는 댓글이 달렸다.
▶기습 추행은 법원 판결문에 나오는 용어다. 피해자가 예상할 틈도 없이 불쑥 신체를 만지는 범죄를 뜻한다. 피해자를 폭행하거나 협박한 뒤 저지르는 일반 강제 추행과 구분된다. 그러나 대법원은 기습 추행도 강제추행죄로 처벌한다. 피해자 의사에 반해 성적 수치심을 주는 점에서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기습 추행 판례는 다양하다. 회사 대표가 노래방에서 여직원에게 “힘든 것 있으면 말하라”면서 허벅지를 쓰다듬었다가 유죄가 됐다. 피해자 옷 위로 가슴이나 엉덩이를 더듬는 행위, 교사가 여중생 얼굴에 자기 얼굴을 비비거나 여학생 귀를 만지는 행위 등도 처벌받았다.
/일러스트=김도원 화백
▶오씨는 일과 시간에 집무실로 피해자를 불러 강제 추행했다. 기자회견을 열어 “불필요한 신체 접촉이 있었다”며 자인했다. 그러나 법정에선 기습 추행은 죄가 안 된다며 감형을 노린다. 꼼수는 또 있다. 변호인은 “오씨가 사건 후 치매 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성범죄를 저지른 뒤 ‘시장직 사퇴는 총선 이후에 한다’며 공증까지 받은 오씨가 치매라는 걸 누가 믿겠나. 변호인은 “(오씨가) 힘없는 노인”이라고도 했다. 오씨는 부산시장 재직 당시 팔굽혀펴기 대회에 나가 138개를 기록하며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때 동영상이 지금도 유튜브에 떠있다.
▶오씨는 재판에서 “얼마 남지 않은 삶, 반성하고 자숙하며 살겠다”고 했다. 눈물도 흘렸다고 한다. 오씨는 눈앞의 위기를 넘기면서도 훗날까지 대비하는 비상한 능력을 가졌다. 그는 작년 영장 실질심사 때 “혐의는 인정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보통 사람 머리에선 나올 수 없는 희한한 말을 했다. ‘혐의를 인정한다’는 말로 구속을 면했다. 동시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 자락 깔아두며 재판에서 형량을 낮출 궁리를 했을 것이다.
▶오씨의 혐의는 강제 추행 미수, 강제 추행, 강제 추행 치상 등 성범죄 3단계 세트다. 검찰은 징역 7년을 구형했고, 법원은 이달 말 1심 판결을 선고할 예정이다. 유죄를 선고한다면 오씨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 예상하지 못한 ‘기습 판결’은 무효라고 우길 것인가.
06.24 코로나 백만장자
1998년 외환 위기를 맞은 한국에서 ‘코리아 바겐세일’ 장(場)이 펼쳐졌다. 미국계 사모펀드가 외환은행, 극동건설 등 알짜 기업, 부동산을 헐값에 사들였다. 몇 년 뒤 되팔아 5조원이 넘는 차익을 남겼다. 외환 위기를 다룬 영화 ‘국가 부도의 날’에는 위기를 기회로 잡는 국내 투자자도 등장한다. 한 종금사 직원이 투자금을 끌어모아 아파트를 헐값에 사들이고 원화 수익을 달러로 바꿔 이중 대박을 터트린다.
▶현금이 풍부한 부자들에게 경제 위기는 좋은 자산을 싸게 사들일 기회가 된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당시 부자들은 30년 전 가격으로 돌아간 주식을 헐값에 매집했다. 다급한 각국 중앙은행은 대공황을 막기 위해 새 돈을 무제한 찍어 뿌렸다. 자산 시장에서 유동성 잔치가 벌어졌다. 우리나라에서도 금융 자산 10억원 이상 부자가 2008년 10만5000명에서 2009년 13만2000명으로 불어났다.
▶유동성 잔치에 따른 자산 버블은 신흥 부자를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2000년 초 닷컴 버블이 수많은 투자자를 울렸지만,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 등 신흥 억만장자를 낳기도 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예상 밖의 글로벌 증시 활황은 기업공개(IPO) 붐으로 이어져 전 세계에서 신흥 갑부를 배출하고 있다. 올 1분기 중에도 세계 증시에서 창업자들이 IPO를 통해 1056억달러(약 117조원)를 거둬들였다.
▶스위스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코로나 사태에도 순자산 100만달러(약 11억원) 이상 백만장자가 520만명이나 새로 탄생했다고 한다. 2019년 증가 폭(110만명)의 다섯 배에 이른다. 한국의 백만장자도 105만명으로 1년 전보다 14만명 늘어났다. 백만장자 급증의 주 요인은 각국 정부의 돈 풀기에 따른 자산 가격 급등이다. 지난 3월 하나은행이 낸 ‘한국 부자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10% 이상 투자 수익을 냈다는 부자가 23%에 달했다. 1년 전엔 이 비율이 4%에 그쳤다.
▶자산 양극화가 심화되자, 학계와 정치권에선 기본 자산(basic capital) 도입 주장이 나온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25세 이상 모두에게 국가가 12만유로(약 1억6000만원)를 지급해 자산 격차를 줄이자고 제안한다. 국내 정치권에서도 ‘청년 기초 자산’ 아이디어가 나온다. 하지만 지금 우리 분위기라면 청년들은 그 돈을 들고 바로 코인 거래소로 달려갈 것 같다. 땀 흘려 저축해 내 집 장만 꿈을 이루던 시절이 아득하다.
06.25 “효과도 부작용도 없다”… 중국 백신은 물백신?
칠레는 백신 접종 속도가 빠른 나라 중 하나다. 칠레 인구 1900만 명 중 63.3%가 1회 이상 백신을 맞았고 접종을 모두 마친 비율도 50.0%에 달한다. 그러나 칠레 코로나 확진자는 감소하지 않고 있다. 최근에도 하루 5000명 이상 나오고 지난 8일엔 7294명이나 발생했다. 칠레는 중국산 시노백을 주력 백신으로 쓰고 있다.
▶칠레만이 아니다. 몽골도 전체 인구의 58.7%가 1회 이상, 52.1%가 접종을 모두 마쳤지만 인구 335만명인 나라에서 하루 2000명 이상 확진자가 생기고 있다. 인구 100만명당 확진자 수로 계산하면 세계 2위 수준이다. 몽골도 중국산 백신을 쓰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중국산 백신에 의존한 몽골, 칠레, 세이셸, 바레인 등 90여 나라 백신 접종률이 최고 70%에 달하지만 여전히 코로나가 급증하고 있다”고 전했다. 접종률이 높은 영국에서도 확진자가 많지만 미접종자인 젊은 층 위주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얼마 전 인도네시아에선 시노백 접종을 마친 의료진 350명 이상이 한꺼번에 확진 판정을 받기도 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달과 지난 1일 중국산 백신인 시노팜과 시노백을 긴급 사용 승인하면서 감염 예방 효과가 각각 79%, 51%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중국은 두 백신의 자세한 임상 자료를 공개한 적이 없다. WHO 사무총장은 여러 차례 친중 행보로 구설에 오른 인물이다.
▶홍콩대 연구진이 시노백 백신과 화이자 백신을 맞은 1000명을 대상으로 항체 조사를 해보았다. 연구진은 구체 수치는 공개하지 않고 화이자 접종자가 시노백 접종자보다 항체가 상당히 많았다고만 발표했다. 그러면서 “시노백을 맞은 사람들은 부스터샷(백신 효과를 높이기 위해 추가 접종하는 것)을 맞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했다. 시노백 효과를 신뢰할 수 없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 칠레 보건 당국은 9월에 세 번째 접종을 해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다행인지 중국 백신을 맞고 큰 부작용이 생겼다는 소식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일부 서구 매체는 “중국산 백신은 부작용도 없고 효과도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물'이라는 것이다. 중국에선 이미 자국 백신 접종이 10억회분을 넘겼다. 우리 정부는 내달 1일부터 백신 접종자는 국내 입국 때 2주 격리를 면제해주기로 하면서 중국 백신도 대상에 포함했다. 중국 백신 맞은 중국인이 쏟아져 들어와도 되는 건가. 델타 변이까지 퍼지고 있어 재검토가 필요한 것 같다.
06.26 광화문 떠나는 미국 대사관
▲주한미국대사관이 1968년부터 50년 넘게 사용해온 현재의 광화문 청사를 53년 만에 떠난다. 서울 광화문에서 50년 넘게 자리하고 있던 주한 미국대사관이 서울 용산구 용산미군기지 자리로 이전하는 계획을 확정했다고 서울시가 24일 밝혔다. 서울시는 광화문광장에 옛 의정부터 등을 복원하고, 용산을 거쳐 한강까지 연결하는 ‘국가상징거리'를 조성하는 등 광화문광장 일대를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하는 계획을 공개했다. 2021.06.24./뉴시스
을미사변 이후 암살 공포에 시달렸던 고종은 어떻게든 궁궐을 탈출하고 싶었다. 피신처로 미국 공사관을 택했다. 궐 밖 무사들이 경복궁 춘생문을 넘어가 고종을 파천(播遷)시키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러시아(당시 아라사) 공사관으로 가게 됐다. 아관파천이다. 만약 미국 공사관 피신이 성공했다면 역사에 아관파천이 아니라 미관파천으로 기록됐을 것이다. 그랬다면 우리 역사는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었을까. 그때 미국 공사관이 있던 자리가 지금 서울 정동 미 대사 관저이다.
▶광복 후 한·미가 정식 국교를 맺은 1949년, 미국 대사관은 현재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이 들어선 반도호텔에 자리 잡았다. 그러다 1968년 지금의 광화문 대사관으로 이전했다. 미 대사관의 광화문 이전 배경엔 한국의 눈부신 성장이 있었다. 한국에 대한 무상 원조를 담당하던 주한미국경제협조처(USOM)가 한국 정부에서 받은 광화문 땅에 1961년 쌍둥이 건물을 지어 하나씩 나눠 가졌다. 이후 USOM의 무상 원조 관련 업무는 줄어들었다. 반면 대사관이 처리해야 할 양국 정치·경제·문화·인적 교류의 비중이 커지면서 미 대사관이 USOM 건물을 차지하고 들어섰다.
/일러스트=김도원 화백
▶세계 모든 강대국의 대사관은 첩보 활동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독일 슈피겔이 몇 해 전 메르켈 총리의 휴대전화를 미국이 10년간 도청했다고 폭로했다. 도청 아지트로 베를린 주재 미 대사관을 지목했다. 광화문 미 대사관도 예외가 아니다. 로비스트 박동선의 미 의회 로비로 시끄럽던 1976년 워싱턴포스트는 미국이 청와대를 도청했다고 폭로했다. 뉴욕타임스는 도청 방법까지 보도했다. 미 대사관이 청와대 유리창의 떨림으로 사람 목소리를 알아내는 원거리 탐지 장치를 동원했다고 했다.
▶미 대사관은 세계 많은 나라에서 테러 대상이다. 그런데 혈맹이자 동맹인 한국에서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지금 광화문 미 대사관은 높은 담장에 육중한 2중 철문과 철조망, 바리케이드로 외부와 차단돼 있다. 대학생이 사제 폭발물을 투척하고, 반미 단체가 대사관 에워싸기 집회를 벌이며, 승용차로 정문을 들이받는 사고까지 터지는 마당이다.
▶주한 미국 대사관이 대한민국의 영욕을 모두 지켜봤던 광화문 시대를 마감하고 옛 용산 미군 기지 내 캠프 코이너 부지로 이전하는 일이 최종 확정됐다. 새 대사관은 2년 후쯤 착공할 예정이다. 정동 공사관은 대한제국의 쇠망을 지켜봤지만 광화문 대사관은 대한민국의 기적적 도약을 지켜봤다. 용산에 들어서는 새 대사관은 한반도 통일을 보았으면 한다.
06.28(월) 문 정권 4년이 안겨준 ‘박탈감’
▲문재인 대통령이 25일 오전 청와대에서 화상으로 열린 제4차 한-중미통합체제(SICA) 정상회의에 참석해 중미통합체제 의장인 카를로스 알바라도 코스타리카 대통령의 환영사를 경청하고 있다./뉴시스
25세의 청와대 1급 청년비서관 발탁을 놓고 ‘박탈감 닷컴'이라는 웹사이트까지 등장했다. ‘고려대 재학생’이라고 밝힌 이 개설자는 사이트에서 “공정이라는 말 더 이상 하지 마세요. 매우 역겹습니다” “제안을 수락한 당신도 공범”이라며 청년들의 박탈감을 대신해서 쏟아냈다.
▶올해 국가공무원 7급을 815명 뽑는데 지원자는 3만8947명이었다. 경쟁률이 47.8대1이다. 2만3000명가량 뽑는 지방공무원 9급 공채에는 23만명 넘게 몰렸다. 9급 공채 낙방자 수는 20만명도 넘는다. 7, 9급 공무원 공채 응시자의 90% 이상이 2030 청년층이다. 원룸 고시원에 살면서 편의점 도시락이나 고시촌 컵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시험 준비 하느라 우울하게 지내는 수많은 2030 공시족들이 느닷없이 청와대 1급 비서관에 낙점된 25세 청년에게 위안 얻기는커녕 박탈감을 호소하는 것이다.
▶올 상반기에 구직자의 평균 입사 지원은 14회인데 서류전형 합격 횟수는 평균 1.7회에 불과했다는 통계도 있다(구인구직 플랫폼 사람인). 2, 3차 관문은커녕 1차 서류 전형도 단 한 번 통과 못 했다는 청년이 셋 중 하나였다. 박탈감 호소층은 비단 구직 청년뿐만이 아니다. 직장인들에게 부동산 시장이 직장 분위기에 미치는 영향을 물었더니 조사 대상자의 55.8%가 ‘근로 의욕 상실’이라고 응답했다. 집값 급등으로 직장 내 선망하는 상사 유형이 바뀌었다. 10명 중 8명이 ‘존재감 없어도 투자 고수인 차장’을 동경했고, ‘고속 승진하는 무주택자 임원’을 선망한다는 사람은 10명 중 2명에 불과했다.
▶문재인 정부의 최대 지지층이었던 2030 여성들이 모이는 온라인 맘카페 분위기도 예전 같질 않다. 경기도에 집 있고 맞벌이하며 애 둘 키운다는 워킹맘이 “부동산 주식 코인으로 평범한 동료들이 몇 억, 심지어 10억 벌었다는 소리에 행복지수가 곤두박질치네요”라고 맘카페 회원들에게 호소했다. 그러자 더 심한 처지를 호소하는 댓글들이 달렸다. “저는 일단 집 있는 사람 보면 상대적 박탈감 느껴요. 부동산 잡겠다더니 곱절로 뻥튀기 시켜놓고 이제 집을 사기는커녕 전세금 마련도 어렵네요.”
▶코로나 이전부터 심각하던 청년 실업은 더 악화돼 공식 청년 실업률은 10% 안팎이고 체감 실업률은 25%에 달한다. ‘일자리 정부’를 자처했는데 일자리는 더 없어졌고, “부동산은 자신 있다”고 했는데 집값은 2배가 됐다. 정권이 대변한다던 서민과 약자에게 지난 4년여 안겨준 것은 ‘박탈감’뿐이었다.
06.29 동해의 오징어 풍년
이준익 감독 영화 ‘자산어보’에는 흑산도로 유배 간 정약전이 섬 소년 창대에게 오징어에 대해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이건 버리는 거냐?” 이런 질문은 대개 그 반대 의미를 드러내려는 의도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에서 오징어의 다양한 쓸모를 나열한다. 지혈제가 대표적이다. 오징어 뼛가루를 상처에 뿌리면 탄산칼슘 성분이 피를 굳게 한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은 “오징어 살은 여성의 월경을 통하게 하고, 오래 먹으면 정(精)을 더해 자식을 낳게 한다”고 했다
/일러스트=김도원 화백
▶현대 들어 고단백·저칼로리인 데다 피로 해소에 좋은 타우린이 쇠고기의 16배나 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 정도면 먹는 보약인데 맛까지 일품이다. 자산어보는 “맛이 감미로워 회나 포로 먹기 좋다”고 했다. 살짝 데쳐서 초고추장에 찍으면 군침이 절로 난다. 이 밖에 국, 찜, 튀김, 무침, 볶음, 순대, 불고기, 덮밥, 심지어 버터구이까지 어떤 방식의 요리법과도 어울린다. 가시가 없어서 생선 싫어하는 사람도 오징어는 즐기는 이가 꽤 된다.
▶문학·영화의 비유로도 애용된다. 신뢰할 수 없는 약속을 ‘오적어묵계(烏賊魚墨契)’라 하는데, ‘오징어 먹물로 쓴 약속’이란 뜻이다. 조선 실학자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오징어 먹물로 쓴 글씨는 해를 넘기면 먹이 없어지고 빈 종이가 된다. 사람을 간사하게 속이는 자는 이것을 써서 속인다.” 서양에선 두족류(頭足類)인 문어나 오징어 비린내를 시신 냄새와 비슷하다며 기피한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의 유령선 선장 데비 존스가 문어발 수염을 하고 나온 배경이 이것이다. 남자가 치근대면 말린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뽀뽀할래?”라고 하라는 치한 퇴치법도 있다.
▶'울렁울렁 울렁대는 처녀 가슴/ 오징어가 풍년이면 시집가요~’ 이씨스터스의 1966년 노래 ‘울릉도 트위스트’다. 1960~70년대만 해도 울릉도는 오징어 산지로 유명했다. 그런데 몇 해 전 울릉도에 간 지인이 “섬에서 오징어가 자취를 감췄더라”고 했다. 2000년대 들어 동해의 북한 쪽 오징어 어장에 중국 어선이 수백~수천 척씩 몰려가 남획한 탓이다.
▶한동안 씨가 말랐던 오징어가 지난해부터 다시 잡히더니 올해 대풍이라고 한다. 해마다 10월에나 철수하던 중국 어선들이 올해는 어쩐 일로 6월 초에 일찌감치 돌아갔다. 수온도 난류성 어종인 오징어가 좋아하는 15~20도를 유지한 덕에 어획량이 평년의 3배다. 20마리 한 상자 가격도 5만~6만원으로 내렸다고 하니 올해는 오징어를 실컷 맛볼 기회다.
06.30(수) 한국도 ‘스콜’?
/29일 오후 광주 북구청 교차로에서 갑자기 내린 소나기로 우산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한 시민이 뛰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가 노는 곳은 햇빛이 쨍쨍하건만 앞벌에 짙은 그림자가 짐과 동시에 소나기의 장막이 우리를 향해 쳐들어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우리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기성을 지르며 마을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소나기의 장막은 언제나 우리가 마을 추녀 끝에 몸을 가리기 전에 우리를 덮치고 만다. 채찍처럼 세차고 폭포수처럼 시원한 빗줄기가 복더위와 달음박질로 불화로처럼 단 몸뚱이를 사정없이 후려치면 우리는 드디어 폭발하고 만다.’ 박완서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묘사한 유년 시절 기억 중 인상적인 장면이다.
▶그 당시엔 예고 없는 소나기가 일상이었겠지만 첨단 관측 장비로 무장한 채 예보하는 요즘에도 갑작스러운 소나기로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다. 수 일째 느닷없이 소나기가 쏟아지길 반복하고 있다. 지난 27일에도 퇴근할 때 세찬 소나기가 내려 당황했다. 시간당 20~30㎜의 매우 강한 소나기였다. 바람까지 불어 사람이 걷기도 힘들었다. 자동차 와이퍼를 빨리 해도 앞이 잘 안 보이는 수준이었다.
▶기상 전문가들은 요즘 우리나라 대기가 오뚜기가 거꾸로 서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우리나라 북동쪽 5㎞ 상층에 찬 공기가 두 달 가까이 머물러 있다. 위쪽 공기는 차가운데 낮 동안 저층부 기온이 오르면 대기 상태가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수시로 소나기가 내리고 천둥·번개까지 치는 것이다. 이런 소나기 구름은 이동해오는 것이 아니라 국지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예보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아열대 지역 스콜(squall)을 연상하는 사람이 많다. 스콜은 상층부에 찬 공기가 없는 상태에서 내리는 것이다. 그래서 스콜이 내린 후에도 습하고 무더운 상태를 유지하지만, 소나기는 내리고 나면 찬 공기가 내려와 선선해지는 경향이 있다. 스콜은 낮 동안 달궈진 열로 오후 늦게 비가 내리지만 소나기는 시간과 관계없이 요즘처럼 밤에도 내리는 점도 다르다.
▶기상청은 불안정한 날씨가 이어지다 다음 달 2일쯤 제주부터 장마철에 접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기상청은 지난 21일부터 기상항공기(나라호), 기상선박(기상1호), 기상관측 차량 등 육해공 장비를 총동원해 집중 관측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우리 여름철 날씨는 변화무쌍하며 특히 좁은 지역에서 단시간 내에 발달하는 집중호우는 예측하기 어렵다”고 했다. 작년 여름엔 한 달 가까이 하루도 쉬지 않고 비가 내리기도 했다. 기상은 여러 구성 요소가 다른 요소와 계속 상호작용하는 복잡계 과학이긴 해도 기상청이 분발해주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