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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6 정부조직 65년간 30여차례 개편
YS·DJ 각각 3차례씩 바꿔… 盧는 기능조정, MB는 통합
15일 대통령직인수위가 발표한 정부 조직 개편안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는 17부 3처 17청 체제로 출범하게 됐다. 1948년 정부 수립 당시 조직은 11부 4처 3위원회였다. 이후 65년간 정부 조직은 중앙 부처 차원의 큰 개편만 30번 이상 이뤄졌다.
노태우 정부 말기 정부 조직은 내무부·외무부 등 16부 외에 경제기획원·통일원 등 2원과 환경처·공보처 등 6처, 통계청·기상청 등 15청이 있었다.
1993년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지향하며 3차례에 걸친 조직 개편을 통해 16부를 14부로 줄였다. 문화부·체육청소년부가 문화체육부로, 상공부·동력자원부가 상공자원부로, 건설부·교통부도 건설교통부로 합쳐졌다. 해양수산부가 생겼고, 환경처가 환경부로 격상됐다. 경제기획원은 재무부와 통합해 재정경제원이 됐다.
김대중 정부도 정부 조직을 3차례 바꿨다. 1998년 출범과 동시에 재정경제원을 재정경제부, 통일원을 통일부로 바꿨다. 1999년 기획예산처·국정홍보처, 2001년 여성부가 생기면서 김대중 정부 말기 정부는 18부 4처 16청 체제였다.
노무현 정부는 대규모 정부 조직 개편보다 기능 조정을 선호했다. 여성부를 여성가족부로, 소방방재청·방위사업청을 신설한 대신 철도청을 철도공사로 개편하면서 18부 4처 17청 체제가 됐다.
이명박 정부는 부처를 통합·광역화해 15부 2처 18청 체제를 만들었다. 정보통신부·해양수산부를 없앴고 교육인적자원부와 과학기술부는 교육과학기술부로 통합됐다. 재정경제부와 기획예산처를 통합해 기획재정부를 신설했고, 국정홍보처는 폐지했다. 건설교통부를 국토해양부로 바꾸면서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을 떼냈다.
조선일보 김진명 기자
2014-11-19 정부조직 개편/장차관급 11명 인사
2016-09-23 안 하느니만 못했던 정부 조직개편
“이번 정부 조직개편은 국민 안전과 경제 부흥이라는 당선인의 국정 철학과 실천 의지를 담고 있다.”
2013년 1월 김용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은 박근혜 정부 조직개편안을 발표하며 이같이 개편 취지를 소개했다. 당시 인수위가 발표한 정부 조직안은 미래창조과학부와 해양수산부를 신설하고 통상 조직을 이관하는 등 정권 교체 수준의 대규모여서 눈길을 끌었다. 정부 출범 후 26일이 지나서야 개편안이 국회에서 처리될 정도로 진통을 겪었지만 정부 조직을 확 바꿔야 한다는 대통령의 강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큰 기대와 함께 우여곡절을 겪으며 새 정부 조직이 출범한 지 이제 3년 8개월이 지났다. 그런데 개편 성과는 기대를 크게 밑돈다. 경주 지진에 대한 부실 대응과 만성적인 경제 저성장을 보게 되면 ‘뭐 하러 그 난리를 치며 그렇게 부처를 뗐다 붙였다 했나’라는 탄식이 나올 정도다.
국민 안전을 최우선 가치로 삼겠다며 문패를 바꿔 단 안전행정부는 세월호 사고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안전’이라는 이름마저 국민안전처에 넘겨줘야 했다. 국민안전처는 연간 3조 원 넘는 예산을 쓰고 있지만 지진 발생에 재난문자 발송조차 제때 못 해 빈축을 사고 있다. 경주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하는 일도 지진 발생 8일 만인 20일 대통령이 경주를 찾아 “선포를 검토하라”고 지시한 뒤에야 결정할 정도로 굼뜨다.
원자력 안전을 책임지는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조직 개편에서 차관급으로 강등됐다. 안전이 최고의 가치라는 현 정부의 철학과 다른 결과여서 결정 당시부터 논란이 됐던 사안이다. 당시 인수위 관계자는 “신설 부처가 2개라 장관급 수를 늘리지 않아야겠다는 판단을 했다”고 설명했다.
대통령 공약에 따라 미래부와 해수부를 만들면서 장관 자리가 2개 늘어나 하나를 없앨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이처럼 시작부터 정부에서 홀대받은 조직이 국회에서 제대로 대접받을 수는 없었다. 20대 국회에서 야당 반대로 본회의에서 부결된 첫 번째 안건이 새누리당이 제출한 신임 원안위원 추천안이었다. 이 때문에 지진으로 월성 원자력발전소 4기가 정지됐는데도 이를 관리할 위원회는 위원 9명 중 5명이 공석인 채 운영이 중단된 상태다.
경제 부문도 예외는 아니다. 외교부에 있던 통상 기능을 실물경제 부처(현 산업통상자원부)로 옮기는 개편이 단행됐다. “경제적 이슈에 정무적 판단이 개입돼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등에서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는 게 조직 개편의 변이었다.
하지만 정작 미국 정부가 한국산 철강 등에 고율의 반덤핑 상계관세를 매기고 미국 유력 대선 후보가 “한미 FTA를 손보겠다”며 통상 압력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도 이렇다 할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 해외 순방 때마다 산업부 장관이 수행하며 FTA 협상 검토 및 개시를 정무적 판단으로 추진하는 관행은 그대로다.
신설된 경제부총리는 한진해운 법정관리, 미세먼지 대책 등에서 제대로 된 조율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해수부는 세월호 사고 처리나 조선·해운 구조조정 과정에서 존재감마저 상실한 상태다. 창조경제 실현을 위해 신설된 미래부는 국민에게 단말기유통구조개선법(단통법)을 만든 부처라는 인상만 남겼다.
이쯤 되면 국민 안전과 경제 부흥이라는 조직 개편의 취지는 이미 물 건너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지금이라도 초심으로 돌아가서 조직이 생긴 취지에 걸맞은 성과를 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 주길 당부하고 싶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조직을 뜯어고쳐 봐도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다”고 푸념해야 하는 국민이 안쓰럽지 않은가.
이상훈 경제부 차장 january@donga.com
■ 청와대 비서실의 조직도
□ 비서실 공무원의 급수는
대통령비서실의 직제는 대통령령 제25489호에 규정돼 있다. 대통령비서실에는 정무직인 수석비서관을 두며, 그 아래로 비서관과 선임행정관, 행정관을 둔다. 비서관 및 선임행정관은 고위공무원단에 속하는 1~3급의 일반직 또는 별정직 공무원이며, 행정관은 3~5급의 일반직 공무원 또는 3급 상당부터 5급 상당까지의 별정직 공무원이다. 각 수석 산하에는 2~6명의 비서관이 있으며, 각 비서관실에는 선임행정관과 행정관이 5~10여 명 존재한다.
현재 대통령비서실의 공무원은 지난 7월 기준으로 비서관이 35명, 선임행정관과 행정관은 241명이다(표 참조). 단 정부조직법이 연내 통과되면 재난안전비서관이 신설돼, 비서관은 36명이 된다. 일반적으로 비서관은 1급, 선임행정관은 2급 또는 드물게는 3급, 행정관은 3~5급이다.
수석과 비서관은 대통령이 직접 인선하거나 대통령비서실장과 의논해 비서실장이 위원장인 인사위원회에서 결정하는 경우가 많지만, 행정관은 대부분 해당 수석실의 수석이나 비서관이 추천한다. 결재권자인 비서실장은 수석이나 비서관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임기 초에는 행정관 인사까지 대통령이나 비서실장이 일일이 챙기기도 한다.
□ 비서관과 행정관이 하는 일은?
비서실의 각 수석, 비서관, 행정관의 업무는 직책의 명칭 그대로다. 총무비서관은 비서실 인사관리 및 재무·행정 업무, 국유재산 및 시설·물품 관리, 경내 행사 등을 지원한다. 의전비서관은 대통령 일정관리 및 접견, 행사를 준비한다. 국정과제비서관은 국정과제 및 주요정책 추진상황 보좌를, 정무수석은 대(對) 국회·정당 관련 업무 보좌를, 민정비서관은 국민여론 및 민심동향 파악, 경제수석은 재정경제·금융·산업 등 업무를 담당한다. 외교안보·교육문화·고용복지 등 분야의 수석 및 비서관은 해당 부처와 관련된 업무를 수행한다. 홍보기획비서관과 국정홍보비서관은 대통령과 관련된 홍보 업무를 맡는다. 각 비서관 아래 행정관들은 세부 분야별로 대통령 업무에 필요한 자료를 준비하거나 업계·사회 동향을 파악하는 일을 한다.
청와대를 오랜 기간 출입했던 기자로 대통령비서실 내부를 파헤친 저서 《도대체 청와대에선 무슨 일이》(네모북스)를 펴낸 송국건 《영남일보》 서울취재본부장은 “청와대 각 수석은 정부 17부3처17청을 파트별로 맡아 국정을 조율하는 역할을 하며 이들은 국정의 분야별 컨트롤타워”라고 설명했다. 그는 “과거엔 청와대 수석이 장관과 부처를 사실상 통제하기도 했다”며 “수석 아래 비서관과 행정관은 분야별로 부처의 각 부서를 맡아 소통하는 일을 한다”고 덧붙였다.
행정관들은 자신의 분야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동향을 점검하고 파악하며 관계자들을 만나 소통해 국정을 논의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외부로부터 전달받은 의견은 보고서로 작성해 비서관에게 보고하고 수석을 거쳐 청와대 수석회의에 올라간다.
이전 정권 문화체육비서관실에서 종교를 담당했던 행정관 A씨의 업무는 문화체육관광부 종무실 공무원들과 주기적으로 의견을 교환하고 각 종교 및 종파의 지도자와 종교 관련 단체 등을 만나는 것이 주요 업무였다. 국회 보좌관 출신인 그는 “청와대 업무는 부서별로 구성원들이 조직적으로 사회 각 분야를 커버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는 언론사 기자, 국회, 국정원 종사자들의 업무와도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비서실 행정관 수는 한때 400명을 넘기도 했지만 현재는 300명 이하로 관리되는 상태다. 사회 전반을 커버하는 메이저 언론사의 기자 수와 엇비슷한 상황이다.
□ 비서실장 직속 부서 행정관은
각 수석실의 행정관들은 부처 업무를 하지만 비서실장 직속인 총무비서관, 제1부속비서관, 제2부속비서관, 의전비서관, 연설기록비서관실의 행정관들은 어떤 일을 할까. 각 수석실이 부처와 연계해 국정을 담당하는 조직이라면 이들 비서실장 직속 비서관실은 대통령과 관련한 일을 처리하는 조직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오랜 측근인 이른바 ‘문고리 3인방’은 총무비서관(이재만), 제1부속비서관(정호성), 제2부속비서관(안봉근)을 맡고 있다. 세 비서관실이 대통령의 개인적인 최측근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서관실의 행정관들도 마찬가지다.
이전 정권까지 제1부속비서관실은 대통령의 관련 사무를, 제2부속비서관실은 영부인의 관련 사무를 담당하는 조직이었다. 대통령 부부의 개인적인 일정까지 담당해야 하는 만큼 ‘충성심이 강하며 입이 무겁고 믿을 만한 사람’만이 갈 수 있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실제로 이전 정권의 제2부속비서관실은 실장 이하 모든 행정관, 비서가 영부인의 모교(이화여대) 출신 후배로만 구성되기도 했다.
미혼인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이 출범하면서 제2부속비서관실은 암묵적으로 대통령의 개인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조직이 됐다. 이전 정권 제2부속비서실 행정관이었던 B씨는 “미혼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제2부속비서관실이 없어질 것이라는 예상도 있었지만 제1부속비서관실에서 하기 힘든 여성의 개인적인 일도 있고, 그런 분야에는 제2부속비서관실이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어 지속시키는 것으로 결론났다”고 설명했다. 그는 제2부속비서실 소속인 트레이너 출신 윤전추 행정관에 대해 “대통령이 운동할 시간이 많지 않지만 트레이너는 아니고 사실상 개인적인 여비서라고 들었다”라고 말했다.
□ 어떤 사람들이 들어가나
대통령비서실의 직원을 채용하는 권한은 대통령비서실장에게 있다. 대통령령 25489호에 따르면 대통령비서실장은 비서실의 사무를 처리하고 소속 공무원을 지휘 감독하는 역할을 한다. 비서실장에게 인사권이 있다는 얘기다. 최종 결재는 비서실장이 하지만 사실상 행정관을 인선하고 검증하고 추천하는 일은 수석과 비서관에게 많은 권한이 주어진다.
비서실 행정관은 크게 부처에서 파견한 공무원과 정치권 또는 각 분야에서 영입된 별정직 공무원으로 나뉜다. 내부에서는 비공식적으로 ‘늘공’(늘 공무원)과 ‘어공’(어쩌다 공무원)으로 부르곤 한다. 수석과 비서관은 행정관 인선 시 늘공과 어공이 필요한 자리를 고려해 부처에서 파견직으로 추천한 공무원을 인선하기도 하고, 보좌관이나 측근 출신을 별정직으로 임용하거나 여당 사무처에서 일정 인원을 파견하기도 한다.
부처 파견 공무원은 대통령 임기를 채우고 돌아가기도 하지만 1~3년만 지내고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이전 정권에서 법무부 파견으로 민정수석실에 근무했던 C씨는 “80~90년대에는 청와대 파견이 엄청난 특권이었고 부처로 돌아와서도 승승장구할 수 있는 조건이었지만 요즘은 정치에 관심 있는 공무원이 지원하는 정도”라며 “하지만 청와대에서 원하는 기준도 있기 때문에 지원한다고 갈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주로 능력 있는 ‘A급’ 공무원 중에서 지원하고 청와대에서 오케이 하면 가게 된다”고 설명한다.
각 수석실에 파견되는 공무원은 각 해당 부처 소속이다. 산업통상자원비서관실 행정관은 산업통상자원부에서, 해양수산비서관실은 해양수산부에서, 교육비서관실은 교육부에서, 보건복지비서관실은 보건복지부에서 파견하는 식이다. 따라서 이들 전문 분야의 비서관실은 대부분 파견공무원으로 구성돼 있다.
‘어공’인 별정직 공무원이 주로 가는 곳은 명확한 주관부처가 없는 정무비서관실, 홍보기획비서관실, 국정홍보비서관실, 인사비서관실 등이다. 한때 일부 행정관들의 성접대 등 비리가 보도된 바 있는데, 김행 전 청와대 대변인은 기자의 이와 관련한 질문에 “청와대 행정관이 엄청난 특혜와 비리를 저지르는 것처럼 보는 사람도 있는데 어쩌다 문제를 일으키는 극히 일부 행정관은 공무원 생활에 익숙하지 못한 이른바 ‘어공’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 ‘어공’의 다양한 출신성분
어공으로 청와대에 진입하는 행정관의 전직은 다양하다. 대통령 임기 초에는 대통령 선거 캠프 실무진 출신이 많다. 이후 수석이나 비서관이 국회 시절 보좌관을 데리고 오기도 하고, 주변의 추천으로 대기업이나 전문직 출신을 기용하기도 한다.
야당 의원들은 윤전추 행정관에 대해 ‘30대 초반 청와대 행정관은 어불성설’이라고 공격하고 있지만, 젊은 행정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보좌관이나 정치권 출신 30대 초반 행정관이 적지 않았다. 현재 야당이 집권했을 당시 32세 행정관이었던 D씨는 야당 다선 의원의 장남이다. D씨는 “대선 때 아버지를 도와 캠프에서 일을 했는데, 당시 팀장이 비서관으로 청와대에 입성하면서 행정관 제안을 받아 들어가게 됐다”며 “청와대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으면 각 분야 많은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라고 말했다. 현재 사업을 하고 있는 그는 “당시 청와대를 나올 때 공공기관 임원 공모에 응모하라는 제의도 받았지만 당시 쌓은 노하우와 인맥으로 관련 사업을 하고 싶어 포기했다”며 “사업을 시작할 때 청와대에서 만난 인맥이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고 털어놨다.
기자는 박근혜 정권 초기 벤처사업을 하는 한 지인으로부터 “청와대 행정관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1억(원) 정도 건네면 되느냐”는 문의를 받기도 했다. “수석이나 비서관으로 가는 인물은 보통 보좌관이나 주변인물을 행정관으로 데려가던데 수석이나 비서관한테 정치자금 격으로 좀 사례를 하면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왜 청와대 행정관을 하고 싶은 것이냐”고 물으니 “일단 청와대 행정관을 지냈다고 하면 출마를 하든 사업을 하든 여러모로 내밀 수 있는 경력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대선 캠프에서 일하다 현재 정부부처에서 장관정책보좌관으로 일하고 있는 40대 후반의 E씨는 “대선 캠프의 실무자들은 상당수가 청와대 행정관을 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청와대 행정관이 부처나 공기업, 일반기업 대관(對官) 업무 담당자들에게는 ‘수퍼갑’이기도 하지만 그게 목적은 아니죠. 청와대 행정관으로 어떤 분야에서 일하면 그다음엔 그 부처 산하기관 임원이나 감사 등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어찌 보면 그걸 위해서 행정관직을 원한다고 해도 무리가 아닙니다.”
□ 행정관의 특권
낙하산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행정관직을 원하는 사람은 많다. 전 정권 행정관 출신으로 현재 보건복지부 산하기관 임원으로 일하고 있는 F씨는 “갑자기 여러 명이 산하기관으로 나가면 비서실 업무에 공백이 생기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어차피 들어오고자 하는 사람은 줄을 서 있기 때문에 상관없다”며 “심지어 행정관들이 빨리빨리 자리 찾아 나가서 새로운 (행정관) 자리를 만들어주는 게 좋지 않으냐는 의견도 많다”고 했다.
아무리 대통령비서실의 권력이 예전같지 않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청와대 행정관’ 명함이 주는 비공식적 특권은 적지 않다. 지난해 청와대 모 행정관이 해당 부처 공무원의 법인카드를 개인적으로 쓰다 경고받은 일도 있었고, 공기업 납품과 관련해 뇌물을 받은 경우, 성접대를 받은 일 등이 잇달아 보도되기도 했다. 청와대 행정관들이 해당 부처에서 법인카드와 성접대, 뇌물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수퍼갑’이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전 정권에서 몇 개월간 청와대 행정관으로 재직하다 퇴직한 G씨는 “물론 국정을 담당한다는 보람도 있었지만, 아무리 청렴하게 살려고 해도 상대방(담당자)이 ‘청와대에서 오신 분이니 극진히 대접해야 한다’며 이런저런 혜택을 내놓는데 보통 사람이라면 거절하기 쉽지 않다”며 “물론 대부분의 행정관은 깨끗하게 일하지만 그런 유혹에 시달리기 쉬운 자리가 바로 행정관”이라고 토로했다.
□ 대통령 임기 끝나기 1년 전이 낙하산 ‘골든타임’
행정관의 공공연한 특권으로 여겨지는 것이 바로 ‘퇴직 후 낙하산 인사’다. 여기엔 한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산하기관 ‘낙하산’이 되기 위해선 행정관 본인의 공무원으로서의 직급이 매우 중요하다. 산하기관에 응모하기 위해서는 이력서에 전직 및 급수를 적어야 하기 때문에 3~5급 행정관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퇴직 시 급수를 한 급이라도 올리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공무원 사회에서도 3급 퇴직자와 1급 퇴직자의 연금 및 향후 처우가 다르듯 별정직 역시 그렇기 때문이다.
청와대도 공무원 조직인 만큼 그 안에서 임명과 퇴직, 승진 등 다양한 현상이 이뤄진다. 행정관으로 들어갔다가 선임행정관-비서관으로 승진해 ‘1급 공무원’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 들어갈 땐 3~4급 행정관이었지만 나올 땐 1급 비서관이 돼 이후 산하기관 기관장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연 것이다.
전 정권 홍보수석실에서 언론 업무를 담당했던 행정관 H씨는 “행정관으로 들어갔다가 수석이나 비서관에게 잘 보여 몇 달 만에 2급 선임행정관이 되는 경우도 많고, 선임행정관이나 비서관이 원래 제자리로 돌아가거나 물러날 경우 그 자리를 운 좋게 차지하는 경우도 많다”며 “업무보다는 윗선에 줄을 잘 대고 이른바 ‘정치 잘하는’ 사람이라면 1~2급 공무원 되는 게 이렇게 쉬울 수가 없다는 생각도 든다”고 털어놨다.
별정직 행정관들은 보통 청와대에서 2~3년을 근무한 후 산하기관 대표나 임원 등의 자리를 찾아간다. 이들 사이에선 대통령 임기가 끝나기 1년 전을 ‘골든타임’이라 한다. 대부분 감사직은 2~3년이 임기인데, 임기 말 1년 전쯤 감사로 임명받으면 정권이 바뀌더라도 1~2년은 억대 연봉의 감사직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행정관 출신으로 현재 공공기관 임원으로 재임 중인 I씨의 얘기다. “대통령 임기 말을 몇 달 앞둔 레임덕 시점에서는 제대로 된 자리를 찾아가기가 쉽지 않아요. 대통령 임기가 1~1년 몇 개월 정도는 남아 있어야 청와대 후광이 먹히거든요. 그 시점을 놓치면 이른바 ‘순장조’(대통령 임기 만료와 함께 전직 대통령 비서로 옮기는 공무원을 지칭하는 은어)가 되거나 정권교체 후 백수로 당분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임기 말 2년 정도 시점이면 대통령비서실이 들썩들썩합니다. 또 그때까지 1급을 달아야 산하기관 대표로 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승진 여부가 가장 뜨거운 이슈이기도 하죠.”
□ 비밀주의와 不通 이미지
현직 청와대 행정관인 J씨는 “솔직히 이전 정권까지는 청와대 낙하산이 있었다고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행정관 인사도 일일이 챙기는 데다 퇴직 행정관 낙하산을 보내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도 꼼꼼히 챙기고 있어 상황이 예전같지 않다”며 “비서실 출신 공기관 낙하산 인사는 이번 정권에서 결국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청와대 행정관들은 국정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고 있는 만큼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은 물론 비밀 유지에 대한 책임감도 강했다. 취재 중 만난 한 행정관의 답변은 행정관들의 입장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듯했다. “윤전추 행정관의 역할이 정말 여비서라면 굳이 3급 공무원직을 받아야 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통령을 가장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사람인데 그 정도 처우를 안 해주면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재만 총무비서관이 국정감사에서 윤 행정관의 신상에 대해 답할 수 없다며 “국가 최고책임자를 보좌해 국가 기밀을 다룰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던 답변과 일맥상통하는 얘기다. 그가 하는 일을 일반인이 알아서는 곤란하다는 뉘앙스였다. 이런 업무 스타일이 그들의 ‘책임감’일지는 모르겠으나 청와대의 불통(不通)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 기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청와대 행정관, 대체 어떤 자리이기에’라는 기사를 써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권세진 월간조선 기자
□ 청와대
□ 청와대 경비대의 첫 교대식
2017년 04월 21일 대선 앞 또 불거진 檢-警 수사권 갈등
警 “무소불위 檢… 수사권·기소권 분리로 견제해야 ”
檢 “경찰, 수사권 독점 땐 통제불능 거대 권력기관”
정권 교체기마다 불거졌던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 갈등이 5월 9일 19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국의 핵심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20년 가까운 양측의 ‘전쟁’에서 검찰은 수사지휘권·영장청구권·기소권을 경찰에 넘겨주지 않았다. 이번에도 과연 검찰이 수성에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수년간 연이어 터진 검찰의 자충수가 많기 때문이다. 경찰이 자신감을 보이는 이유다. 전·현직 고위 검사의 비리, 되풀이되는 ‘하명 수사’ 논란은 검찰에 전례 없는 위기를 초래했고, 정치권에서는 고강도 검찰 개혁의 목소리가 높다. 눈치 빠른 경찰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공범으로 검찰을 지목하는 강수를 두며 고지탈환을 노리고 있다. 경찰의 깃발에 달린 구호는 ‘수사는 경찰, 기소는 검찰’이다. 검찰은 경찰의 부족한 수사 능력을 우회적으로 부각하며 맞서 있다. 검찰은 특히 경찰이 원하는 방식으로 수사권 조정이 이뤄질 경우, 경찰의 비대화에 따른 ‘통제 불능의 거대권력’ 등장을 경고하고 있다.
1 또다시 불거진 배경은 최근의 수사권 조정 논의는 검찰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 지난해 검사장 출신 홍만표(58) 변호사는 정운호(51)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로부터 뒷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다. 진경준(50) 전 검사장은 현직 신분으로 김정주(49) NXC(넥슨 지주회사) 대표로부터 넥슨 공짜 주식을 받아 130억 원대의 이익을 본 혐의(뇌물) 등으로 기소됐다. 전·현직 검사의 비리가 잇따르자 막강한 권한을 가진 ‘공룡 검찰’을 견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를 위한 수단으로 수사권 조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에 더해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수사에서 불거진 ‘청와대 눈치보기’ ‘제 식구 감싸기’ 비판은 수사권 조정 논의에 불을 붙였다. 유력 대선 후보들은 검찰 개혁이 필요하다고 입장을 같이하고 있다. 수사권 조정의 수혜자인 경찰도 검찰에 전례 없는 공세를 가하고 있다.
2 수사권·기소권 현황은 현재 강도·절도와 같은 일상적 범죄 사건 등은 대부분 경찰이 수사한 대로 검찰이 기소하고 있다. 대검찰청의 ‘2015년 검·경 사건처리 건수 비교’ 통계에 따르면, 전체 163만8549건의 범죄 중 검찰은 2만9837건(1.82%)을 처리하는 데 그쳤다. 경찰은 무려 160만8712건(98.18%)의 사건을 처리했다. 2012년 이후 경찰이 검찰로부터 사전 수사지휘를 받는 비율은 14%에서 0.5%로 줄었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경찰은 이미 수사 자율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경찰은 “현실을 반영해 수사권을 달라는 것인데 검찰이 권력을 놓기 싫어서 거부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특히 검찰이 수사를 지휘하거나 직접 수사하는 0.5%의 사건에서 검찰제도의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정치인과 판·검사 등 고위공직자 연루 비리나 기업범죄 등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민감한 사건의 경우 경찰이 먼저 단서를 포착해 제대로 수사하려고 해도 수사권과 영장청구권을 독점한 검찰이 협조하지 않으면 현실상 어렵다는 게 경찰의 큰 불만이다. 수사에 필수적인 압수수색·체포·구속영장 등의 청구권은 현재 헌법상 검찰의 고유 권한으로 돼 있다.
3 경찰의 공격 논리는 경찰은 막강한 권한과 지위를 누려온 검찰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검사에게 집중된 수사권과 기소권을 반드시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미권 국가와 마찬가지로 ‘수사는 경찰, 기소는 검찰’이라는 수사구조가 정착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경찰은 검사가 수사권은 물론 수사지휘권·수사종결권·영장청구권·기소독점권·공소유지권·형 집행권 등을 모두 행사함으로써 견제할 수 없는 권력이 됐다고 지적한다. 부작용으로 △검찰 부패와 비리, 권한남용 △검·경 이중조사에 따른 사회적 비용 증가 △유죄 입증을 위한 무리한 자백 강요 등 인권침해 등을 꼽았다. 최근 이철성 경찰청장은 “수사권 조정은 국민 뜻에 따라 국회에서 정해주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경찰) 스스로 역량을 강화할 것”이라고 말해 정치권의 지원을 기대하는 눈치다.
4 검찰의 방어 논리는 거꾸로 검찰은 경찰이 수사권을 독점할 경우 통제 불능의 거대 권력기관이 될 수 있다는 논리로 맞서 있다. 검찰은 “현재 중앙집권화된 14만 명의 인력을 바탕으로 광범위한 공권력을 행사하는 경찰이 사법적 통제를 받는 유일한 분야가 수사 부문”이라며 “경찰이 수사를 독점하면 정보 기능과 결합해 통제가 어려운 권력이 될 것”이라고 반대를 분명히 했다. 경찰에 영장청구권을 줄 때 생기는 부작용도 강조하고 있다. 검찰은 “검사의 심사 기능이 폐지되면, 국민의 자유와 인권보호가 후퇴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이 같은 논리에 따라 검찰은 경찰에 대해 지금처럼 수사지휘권을 행사해야 하고, 영장청구권·기소권을 경찰에 내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현행 유지’ 외에 답이 없다는 것이다.
5 검찰이 독점한 역사적 배경은 검찰은 영장청구권과 기소권을 갖게 된 역사적 배경을 강조하고 있다. 1954년과 1957년 정부의 형사소송법 개정안에는 ‘사법경찰관은 검사를 경유해 영장을 청구해야 한다’ ‘사법경찰관리가 직접 판사의 영장을 받아 강제수사를 하면 검사가 범죄수사의 책임을 다할 수 없게 된다’고 적시돼 있다. 검사 영장청구권 규정은 1962년 형사소송법에서 헌법으로 격상돼 명문화됐다. 그해 12월 26일 개정헌법 제10조에 ‘체포·구금·수색·압수에는 검찰관의 신청에 의해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해야 한다’고 담겼다. 공식 설명자료에는 “인권침해를 막기 위해 헌법 규정으로 효력을 높였다”고 돼 있다. 김수남 검찰총장이 “근대적 검찰 제도는 시민혁명의 산물로서 국민의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강조한 것도 이의 연장선상에 있다.
6 그동안 수사권 조정 논의 과정은 굵직한 갈등만 이번이 4라운드째다. 1998년 학계와 정치권 등에서 이뤄진 경찰 수사권 독립 논의가 1라운드였다. 2라운드는 2005년 노무현정부 당시 허준영 경찰청장이 취임과 동시에 검찰과의 전면전을 선포하면서 벌어졌다. 당시 허 청장은 “지구상에 없는 두 가지는 다케시마(竹島·일본이 주장하는 독도 명칭)와 한국 경찰의 수사권”이라며 대국민 선전전을 폈다. 3라운드는 2011년 형소법 개정 전후다. 이때 개정된 형소법은 경찰의 수사개시권과 수사진행권을 인정했다. 김준규 당시 검찰총장은 이에 반발해 사퇴할 정도였다. 수사권 조정은 헌법 및 형소법 개정이 필요한 사안이다. 그런데 검찰 출신 국회의원들은 ‘친정’을 의식, 법 개정에 매번 소극적이었다는 평가다.
7 외국 사례를 놓고서도 검·경은 공방을 진행 중이다. 검찰은 일본·독일·프랑스 등은 수사지휘권·영장청구권·기소권을 모두 검사가 행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 오스트리아·스위스에서는 검사가 경찰을 지휘하고 직접 수사도 가능하도록 최근 사법제도를 바꿨고, 국제형사재판소·구(舊) 유고전범재판소·유럽검찰청 등에서도 검사에게 수사와 공소를 맡긴다고 설명하고 있다. 모든 권한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가 많을 뿐 아니라 최근 여러 나라가 검찰 본연의 역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제도 개선을 하고 있어 현 제도가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한다는 주장이다. 경찰의 주장은 다르다. 경찰은 영국·일본·프랑스·독일 등은 사실상 경찰이 ‘수사의 주체’이며, 검·경이 ‘대등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한국의 수사환경과는 매우 다르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8 검·경 갈등 주연은 누구 김수남 검찰총장과 이철성 경찰청장이 점잖고 우회적 표현으로 고공 플레이를 하고 있다면, 일선 현장의 격돌은 보다 직접적이고 감정적이다. 지난 7일 정점을 찍었다. ‘검찰 저격수’라는 별명을 가진 황운하(55) 경찰청 수사구조개혁단장이 포문을 열었다. 경찰청은 지난해 말 수사권 조정 업무를 책임지는 수사국 수사구조개혁팀을 개혁단으로 격상시키고 황 경무관을 단장으로 임명했다. 황 단장은 “경찰 생활 32년간 수사구조개혁을 목표로 살아왔다”고 말할 정도다. 황 단장은 “지난해 발생한 숱한 (검찰 내부) 비리 등을 통해 지금의 검찰 제도 자체가 잘못됐다는 게 이미 드러났다”며 “현재 국정농단 사태의 공범은 검찰이라는 것이 많이 드러나지 않았느냐”고 공격했다. 이에 권순범(48·사법연수원 25기) 대검찰청 형사정책단장은 이례적으로 즉각 자료를 내고 반박했다. 권 단장은 “황 단장의 도를 넘은 발언에 깊은 유감을 표시한다”고 맞받아쳤다. 권 단장은 “국가공무원인 황 단장의 발언은 기관 간의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시킬 뿐만 아니라 검찰 구성원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검찰은 앞으로 감정적 대응을 자제한다는 방침이지만, 이 같은 검·경 간 감정싸움이 또다시 벌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9 주요 대선 후보 입장은 제19대 대통령선거에 나선 다섯 후보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한 10대 공약집에 따르면, 모두 검·경 수사권을 조정하겠다고 밝혔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검찰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해 수사권을 경찰에 이관하겠다고 밝혔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는 경찰에 영장청구권을 부여하겠다고 공약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 역시 검·경 수사권을 조정하겠다고 했다.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는 검찰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해 기존 검찰과 경찰의 수사 인력으로 제3의 수사청을 별도로 설치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했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특정 범죄 및 피해 수준, 범죄 횟수 등을 기준으로 경찰에 수사권을 부여하겠다고 밝혔다.
10 국회에서의 법안 논의 상황은 국회에 계류 중인 검찰개혁 법안에는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공수처) 신설을 골자로 한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과 검·경 수사권 조정을 골자로 한 ‘형사소송법 일부개정법률안’ 등이 있다. 양승조·박범계 민주당 의원 등이 각각 대표 발의한 공수처 관련 법안은 고위공직자의 범죄 행위에 대한 수사 등을 위한 공수처 설치 내용을 담고 있다. 소관 상임위원회인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검·경 수사권 조정에 관해선 금태섭·표창원 민주당 의원 등이 대표 발의했다. 금 의원이 발의한 형소법 개정안은 범죄에 대한 직접적인 수사권을 경찰에 부여하도록 했다. 표 의원이 발의한 형소법 개정안은 수사의 개시부터 종결까지 전 과정을 사법경찰관이 수행하도록 하며 구속영장도 사법경찰관이 집행하도록 했다. 이 역시 법사위에 계류 중이다.
손기은·최준영·박세희 기자 son@munhwa.com
2016-02-20 3월 3일 50돌 맞는 국세청 ‘어제와 오늘’
▲박정희 대통령이 1965년 ‘조세행정 특별감사반’ 직원들에게 훈시를 하고 있다. 특별감사로 지하경제 및 탈세 현실을 파악한 박 대통령은 이듬해 국세청을 신설했다([1]). 이낙선 초대 국세청장의 관용차. 세수 700억 원을 달성하겠다는 의지로 관용차 번호판을 ‘서울 관 1-700’으로 달았다([2]). 1966년 국세청이 처음 자리 잡은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노라노양재학원’ 건물([3]). 현 국세청 청사. 2014년 12월 정부세종청사로 이전했다([4]). 국세청 제공
1965년 9월 8일 오전 청와대 본관. 박정희 대통령이 푸른 눈의 한 외국인과 자리를 함께했다. 근대 재정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경제학계의 거두’ 리처드 머스그레이브 미국 하버드대 교수였다. 한국 경제 정책을 조언하는 미국 네이선 경제고문단 자격으로 청와대를 방문한 머스그레이브 교수는 박 대통령에게 서류를 하나 건넸다. ‘한국 조세 개편을 위한 건의’라는 제목의 문건이었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세율 인상만으로는 세금을 많이 거둘 수 없습니다.” “동감하오. 마침 그저께 비서실에 조세행정 특별감사를 지시했소.” “잘하셨습니다. 하지만 일회성 감사로는 부족합니다.” “방법이 있소?”
“지하경제를 양성화하고 탈세를 막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미국 국세청(IRS) 같은 강력한 독립 징세기관이 필요합니다.” 박 대통령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듬해 1월, 박 대통령은 재무부에 국세청 설립을 공식 지시했다. 두 달간의 준비를 거쳐 1966년 3월 3일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노라노양재학원’ 건물에서 역사적인 개청식을 가졌다. 올해로 개청 50주년을 맞는, 대한민국 나라 곳간을 책임지는 국세청은 그렇게 탄생했다.
▲국세청장 명의로 광고가 실린 1967년 1월 24일자 동아일보 1면. 세수 700억 원 목표를 달성한 초대 이낙선 청장이 ‘국민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네모 안)라며 감사 광고를 냈다.
개청 첫해 ‘세수 700억 원’ 달성
‘누구도 죽음과 세금은 피할 수 없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1953년 1인당 국민소득 67달러의 세계 최빈국 대한민국에는 세금을 낼 개인도, 기업도 변변치 않았다. 국가 수입의 절반 이상(1957년 기준 52.9%)은 해외 원조로 충당했다. 국민들은 세금 하면 일제강점기 공출(供出)을 떠올릴 정도로 반감이 심했다. 일각에서는 탈세를 범죄가 아닌 경제 활동의 요령으로까지 여길 정도였다.
세수(稅收) 확보는 정부의 염원이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추진으로 돈을 쓸 곳은 날로 늘어 가는데 해외 원조는 되레 줄기 시작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로 일본에서 받은 8억 달러의 대일 청구권자금은 포항제철 등 경제 기반시설을 짓기에도 빠듯했다. 1965년 미국 경제고문단은 세무행정이 제대로 돌아가면 국내총생산(GDP)의 10% 정도를 세금으로 거둘 수 있다고 조언했다. 박 대통령은 고무됐다. ‘내년이면 GDP가 1조 원으로 늘어나니 세금을 1000억 원 거둘 수 있다는 말 아닌가.’ 그해 국세 수입은 421억 원. 박 대통령은 자신의 오른팔 격인 이낙선 당시 대통령민원비서관을 초대 국세청장에 임명했다. 지시는 간단명료했다. “올해 목표는 700억 원이네.”
여야 정치권은 물론이고 재무부조차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노력한들 전년 대비 66%나 많은 세금을 어떻게 거두냐는 것이었다. 육군 대령 출신이자 5·16 주역인 이 청장은 달랐다. 각오를 다지기 위해 청장 관용차 번호판부터 ‘서울 관 1-700’으로 바꿨다. 조사반 직원들에게는 ‘007 가방’을 지급했다. 검찰, 경찰, 재무부 등이 행사하던 세무사찰 권한은 국세청으로 일원화했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일선 세무서는 아침마다 관내 굵직한 업체에 전화를 걸어 협조를 요청하는 게 주 업무였다. 이듬해의 세금을 미리 받는 조상징수(繰上徵收)라는 기상천외한 방법까지 동원됐다. 여당인 공화당에서는 “이렇게 세금을 가혹하게 매기면 어떻게 선거를 치르나. 이낙선 청장은 박 대통령을 낙선(落選)시키려고 작정했나”라는 말이 나왔다. 결과는 704억 원으로 목표 초과 달성. 감격한 이 청장은 1967년 1월 24일자 동아일보 1면에 ‘국민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라며 청장 명의로 광고를 게재했다.
‘재정자립·고도성장’ 두 마리 토끼를 잡다
국세청 설립으로 안정적 세수 확보가 이뤄지면서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 신화가 본격화됐다. 국세청이 거둔 세수를 밑거름으로 정부는 경부고속도로 착공(1968년), 새마을운동 시작(1972년), 중화학공업 육성계획 발표(1973년) 등 일련의 경제 성장 정책을 힘 있게 추진할 수 있었다. 김준경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은 “국세청 설립 등 박정희 정부의 세정 개혁은 원조에 의존하던 한국 경제를 자립형으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며 “세수 확보로 재정 건전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거시 경제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국세청 개청 8년 만인 1974년, 마침내 해외 원조액이 ‘0원’이 되면서 한국은 재정 자립에 성공했다. 1975년에는 연간 국세 징수액이 1조 원을 돌파(1조442억 원)하며 ‘고도성장→세수 증가→투자 확대→경제 발전’이라는 선순환 고리를 구축했다. 세무행정의 틀이 갖춰지면서 종합소득세(1975년), 부가가치세(1977년) 등 선진화된 세제(稅制)도 본격 도입됐다. 징세만이 다가 아니었다. 기업 사채 감시, 부동산 투기 단속, 물가 점검 등 경제 분야에서 공권력을 필요로 할 때는 어김없이 국세청이 활약했다.
지난해 국세청은 사상 최대 징수 실적(208조1600억 원)을 달성했다. 발족 첫해와 비교하면 무려 2957배로 증가한 규모다. 세무자료 전산화, 신용카드 현금영수증 정착 등은 지하경제 양성화에 큰 힘이 되고 있다. 연말정산 간소화 서비스, 미리 채워주는(pre-filled) 사업소득 신고 서비스 등은 개발도상국에서 앞다퉈 배워갈 정도로 우수성을 입증받았다.
비리 척결, 역외탈세 대응은 과제
하지만 지난 50년간 국세청에 밝은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개청 당시 국세청의 3대 지표 중 하나가 ‘오명불식’이었다는 것은 세무공무원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뇌물수수 등 비리 사건은 국세청 이미지를 흐리고 있다. 국세청 직원의 견책 이상 징계 건수는 2010년 75건에서 2014년 157건으로 4년 새 2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임환수 국세청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극소수의 일탈로 모든 성과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악순환을 이제는 끊어야 한다”며 청렴문화 정착을 강력 주문했다.
검찰, 경찰, 국가정보원과 더불어 ‘4대 권력기관’으로 꼽히는 국세청의 강력한 힘은 세무조사 권한에서 나온다. 과거 국세청은 세무조사를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한 나쁜 선례를 남겼다. 1991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정치 참여를 준비하자 국세청은 현대그룹에 세무조사를 실시해 1361억 원의 세금을 추징했다. 김영삼 대통령 취임 직후의 포스코 세무조사, 김대중 정부 시절 언론사 23곳 동시 세무조사도 대표적인 정치 목적의 세무조사로 꼽힌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후원한 박연차 회장의 태광실업을 세무조사하며 ‘박연차 게이트’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지금도 논란거리다.
최근 잇따라 불거지고 있는 대규모 과세불복 소송과 역외탈세 문제도 국세청이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로 꼽힌다. 지난해 4000억 원에 이르는 KB국민은행과의 조세소송에서 국세청이 대법원 패소 판결을 받은 게 대표적이다. 그만큼 납세자의 권리가 높아졌다는 의미도 있지만, 법률로 집행되는 과세에 대한 불신이 커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국경을 넘나들며 이뤄지는 역외탈세를 잡기 위한 국제적 공조 마련도 절실하다.
김봉래 국세청 차장은 “세금 부과 처분이 취소되면 원인을 분석하고 문제점이 있는 제도는 고쳐 유사한 사례가 재발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며 “납세자 권익 보호를 최우선 순위에 두면서 비정상적 탈세는 모든 역량을 결집해 엄단하겠다”고 말했다. ◎
세종=이상훈 januar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