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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1/ 대한민국 이미지 - 태극기 이야기

상림은내고향 2021. 6. 7. 15:39

☆ 대한민국1/ 태극기 이야기

외신들도 감탄한 G20 대한민국 소개 영상 - 제목 클릭

■ 한반도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닳도
                              록하느님이보 
                  우하사우리나라만세무
           .궁화삼천리화려강산대한
        사람대한으로길이보전
   하세남산위에저소나무철
  갑을두른듯바람서리불
      변함은우리기상
         일세무궁화삼
        천리화려강산대
      한사람대한으로길이
     보전하세가을하늘공활
           한데높고구름없이밝   ........ . ←독도는 우리땅이다
               달은우리가슴일편 
                 단심일세무궁화삼천
                리화려강산대한사
                람대한으로길이보전
                하세이기상과이맘으로
               충성을다하여괴로우
            나즐거우나나라사랑하
          세무궁화삼천리화려
           강산대한사람대한으
             로길이보전

             하세

 

 

태극기 그리기 영상

 

■ 태극기에 담긴 뜻

 

■ 태극기의 수난

/1910년 구한말 워싱턴 공사관에 게양된 태극기. 태극기의 모양이 현재와는 다소 다른 면이 있다

 

/1910년 군인수첩에 그려져 있는 대조선 국민단원의 국민기와 대조선 국기

 

/1942년 일제시대 말기 의병들이 서명한 태극기. '自主自立', '自由' 등의 글자들이 선명하게 쓰여있다.

 

/1906년 제작된 불원복기 태극기.

 

/1907년 동진학교에서 사용하던 태극기. 현재의 태극기와 모양이 다소 다르다.

 

/1883 36일 고종의 최초 제정국기.

 

/1941년 임시정부 주석 김구선생의 친필로 서명한 태극기.

 

/1909년 안중근의사가 단지혈서로 쓴 엽서의 태극기. '大韓獨立' 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서기 1900년경 서재필이 만들어 사용하던 태극기. 현재의 태극기와 거의 흡사하다

 

/1890 D.N 데니의 태극기.

 

/1950 91일 학도병들이 서명한 태극기. ''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1950 6.25사변 당시 학도병들이 서명한 태극기. '萬歲' '必勝' 등 학도병들의 의지가 담겨있다.

 

/사진은 1949년 국기시정위원회에 건의한 대한민국 태극기의 5개 시안.

 

/1942 629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제정한 국기. 현재의 태극기와 유사하다

 

/1919 3 1일 평양숭실학교에서 사용된 3.1운동 시위태극기.

 

/1919년에 사용된 남상락의 태극기.

 

/1919년 독립운동의 선전 외교책자와 태극과 쌍태극기.

 

/1884년 쥬이 태극기. 스미스 소니언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태극의 모습이 현재의 것과 다르다

 

2014.06.18 3태극 태극기의 유래 - 박석재 한국천문연구원 연구위원

월드컵이 시작됐다. 붉은악마의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붉은악마가 축구장에 내거는 여러 종류의 태극기는 의미심장하다. 붉은악마는 3태극기도 많이 내걸고 있는데 3태극은 ‘천지인(天地人)’, 즉 하늘과 땅과 사람을 뜻한다.

 

/3태극 태극기

 

현재 우리나라 국기의 태극은 하늘과 땅이 돌면서 조화를 부려 사람을 창조하기 전의 불완전한 모습이다. 천지인이 동등하게 맞물려 있는 3태극이 완벽한 궁극적 모습이다. 원래 태호복희가 5,500년 전에 만든 태극기는 3태극을 8괘가 둘러싸고 있었다. 남북통일이 되면 태극기를 3태극 8괘로 바꿔야 마땅할 것이다.

 

/원래 태호복희가 만든 8괘 3태극.

 

양효와 음효가 만드는 8괘의 순서는 아래와 같다. 맨 왼쪽 첫 번째 괘를 1건천(一乾天)이라 한다. 양효가 3개나 모인 이 건괘는 하늘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1건천(一乾天), 2태택(二兌澤), 3리화(三離火), 4진뢰(四震雷), 5손풍(五巽風), 6감수(六坎水), 7간산(七艮山), 8곤지(八坤地)라 각각 불렀다. 즉 맨 오른쪽 마지막 괘는 땅을 상징한다. 음효가 3개나 모인 이 곤괘는 땅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태극기를 만든 태호복희의 천재성은 8괘를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원형으로 배치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1건천의 왼쪽으로 2태택 - 3리화 - 4진뢰 순으로 내려온 다음 다시 위로 올라가서 1건천의 오른쪽으로 5손풍 - 6감수 - 7간산 순으로 내려와 맨 아래에는 8곤지가 배치된다. 즉 동서남북 방향에는 하늘, 땅, 해, 달 같이 천문적인 것이 나타나고 대각선 방향에는 산, 강, 벼락, 바람 같은 지리적인 것이 자리를 잡는다. 따라서 8괘는 천문 4괘 ‘건-이-감-곤’과 지리 4괘 ‘태-진-손-간’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8괘의 이치를 깨닫는 것을 천문지리 무불통달(天文地理 無不通達) 같이 표현한다. 알다시피 고종황제는 박영효 수신사에게 대한제국의 국기로 8괘 태극을 사용하라는 명을 내렸다. 일본으로 가던 배에서 영국 선장이 ‘8괘 태극은 중국이나 일본에도 흔해 어느 나라 국기인지 모른다’ 충고하자 박영효는 즉석에서 지리 4괘를 뺀 국기를 만들게 된다. 이것이 바로 천문 4괘 ‘건-이-감-곤’으로 만들어진 현재의 태극기다. 태극기의 내력을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중국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없기를 바란다.

 

태호복희는 5,500년 전 배달국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 태극기는 5,500년이나 된 것이다. 세계 어떤 나라가 5,000년이 넘은 국기를 가지고 있을까? 아마 인류 4대 문명 발상지에 있는 나라들도 그렇지 못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태극기는 세계의 수많은 국기 중 유일하게 ‘우주의 원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만큼 신나고 자랑스러운 일이 어디 있는가? 태호복희는 음양오행(陰陽五行) 우주의 원리로 ‘水 → 木 → 火 → 土 → 金’ 순환을 정리했다. 첫 번째 ‘水 → 木’는 수생목(水生木), 즉 물이 나무를 살린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이하 목생화(木生火), 즉 나무가 타야 불이 살며, 회생토(火生土), 즉 불에서 흙이 태어났다가, 토생금(土生金), 흙 속에 쇠가 있으며, 금생수(金生水), 쇠에서 물이 나오도록 상생(相生)한다.

 

하지만 상생의 순서에서 하나씩 건너뛰게 되면 상극(相剋)이 된다. 이처럼 태호복희의 ‘5원소’들은 상생과 상극의 상호작용까지 한다. 단순히 자연을 구성하기만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에 비하면 훨씬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왜 아리스토텔레스 4원소만 가르치고 있는지 답답하기 짝이 없다.

 

음양오행의 원리는 한국 사람이라면 원하든 원하지 아니하든 영향을 벗어날 수 없다. 당장 태어나면 족보에 의해 부여받는 이름부터 살펴보자. 나는 밀양 박씨 숙민공파 69대손이고 이름은 박석재(朴碩在)다. 끝의 재(在)자가 돌림자이어서 내 친형의 이름은 박철재(朴哲在)다. 그러다보니 모두 건축자재가 됐다.

 

돌림자란 ‘水 → 木 → 火 → 土 → 金’ 순서로 정해진다. 즉 내 이름 ‘在’자에는 ‘土’가 있기 때문에 내 선친의 이름에는 ‘火’자가 있어야 하고 내 자식의 이름에는 ‘金’이 있어야 한다. 실제로 제 선친의 이름 가운데 글자 ‘炳’에 ‘火’가 들어가 있다. 나는 아들이 없지만 내 조카의 이름 가운데 글자 ‘鍾’에 ‘金’이 있다. 이처럼 이름조차 우주의 원리에 따라가고 있는 것이 우리 민족의 운명이다.

/붉은 악마의 상징 치우천황.

 

붉은악마란 곧 치우천황으로서 고조선 이전 배달국의 환웅이다. 치우는 대륙을 정벌하기 위해서 백두산 신시에 있던 배달국 수도를 청구로 옮겼던 위대한 민족영웅이다. 치우는 동두철액(銅頭鐵額), 즉 최초로 구리 투구를 썼기 때문에 무서운 도깨비와 같은 캐릭터로 표현된다.

 

중국은 치우를 삼황오제의 하나인 황제헌원이 죽인 오랑캐로만 취급했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나자 동북공정의 연장선상에서 치우를 자기들 조상으로 편입시키려 하고 있다. 이러다가 우리는 조상도 빼앗기고 붉은악마도 중국 응원단이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2002년 월드컵의 감격을 잊지 못할 것이다. 붉은악마의 신명나는 기운이 전국을 감싼 가운데 수없이 많은 태극기가 휘날렸고 천지를 진동하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질풍노도와 같은 그 기세로 장엄했던 태호복희와 치우천황의배달국 역사를 밝혀 나아가자. 홍산 문명의 주인이 바로 우리 배달민족이었음을 세계에 널리 알리자.

 

■ 대한민국은 '한국'인가 '대한국'인가?

한국(韓國)’과 ‘대한(大韓)’에 대한 짧은 생각

글 쓴 날짜: 2004년 10월 1일 / 이상흔

 

오늘날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가리켜 대부분의 사람이 ‘韓國’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고종황제가 국호를 정했을 당시 사람들은 ‘韓國’이라고 부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독립신문은 국호가 ‘大韓帝國’으로 바뀌고 나서 우리나라를 ‘大韓國’이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조선 사람’은 ‘大韓 사람’으로 ‘조선 땅’은 ‘大韓 땅’ 등 ‘韓國’이 아니라 반드시 ‘大韓’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大韓民國’을 ‘韓國’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한민국’의 줄임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100여 전 ‘大일본제국’ ‘大영제국’처럼 당시 통상 국호 앞에 ‘大’자를 붙였고, 실제 칭할 때는 ‘대’자를 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우리의 국호에서도 ‘大’자는 붙여도 되고 붙이지 않아도 되는 하나의 수식어 정도로 이해하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물론 제가 여기서 ‘대한민국’을 ‘한국’이라고 부르는 것을 굳이 잘못되었다고 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고종황제와 당시 학식이 높으셨던 우리 선조께서 국호를 제정한 의미를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국호 제정 당시의 고종실록을 살펴보겠습니다.
 
<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三韓의 땅으로서 나라의 초기에 하늘의 지시를 받고 한 개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나라의 이름을 ‘大韓’이라고 한다고 해서 안될 것이 없고, 또한 매번 일찍이 보건대 여러 나라의 문헌에는 조선이라 하지 않고 ''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전에 이어 ‘韓’으로 될 징표가 있어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포하지 않아도 세상에서 모두 ‘大韓’이라는 이름을 알 것이다” 라고 하였다.>- 고종실록 권 36. 광무원년(1897) 1011일조
 
먼저 황제의 말씀인즉, 우리나라가 원래 스스로 ‘韓’이라고 불러왔으니 ‘韓’으로 국호로 정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 후 고종황제는 “三韓이 하늘의 지시를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나라의 이름을 ‘대한’으로 해서 안 될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고종의 이 말을 국호 앞의 ‘大’자를 ‘뺏다 넣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통합된 三韓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하늘의 가호를 따르겠다는 의미를 포함해서 ‘大韓’으로 국호를 정했다는 것이지, 大자를 넣었다 뺐다 하는 수식어로 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국호를 직접 만든 당시 사람들의 나라 이름에 대한 인식입니다. 독립신문은 ‘한국’이 아니라 ‘大韓國’이라고 쓰고 있다는 것은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安重根 의사는 휘호 마지막에 항상 ‘大韓國人’이라고 썼습니다. 저는 예전에 安 의사가 한국을 높여 부르기 위해 ‘大’자 하나를 더 집어넣은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극히 근래서야 당시 국호가 ‘大韓’이었기 때문에 국호를 그대로 쓴 것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애국가의 마지막 후렴에도 ‘大韓사람 大韓으로 길이 보전하세’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후렴구는 원래 가사 ‘조선 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전하세’에서 조선이란 국호만 그대로 대한으로 바꾼 것입니다. ‘大조선’에서는 흔히 ‘大’자가 탈락하는 경우가 더 많고, 주로 대외적 호칭위주로 ‘大조선’이 쓰였습니다. 내부 사람끼리 스스로 칭할 때는 ‘大조선’이라고 잘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선이 아닌 대한제국을 말할 때 우리 조상들은 大韓의 ‘大’자를 탈락시키지 않았습니다.

 

만약 당시 사람들이 국호의 ‘大’ 자를 ‘大조선’처럼 강조하기 위해 덧붙인 글자로 알았다면 애국가 가사는 ‘한국사람 한국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바뀌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 밖에 대한제국 탄생 후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성문헌법인 ‘大韓國 國制’에도 나라 이름을 ‘대한국’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때 사람들의 인식에는 ‘대한’이 국호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서울대 사회학과 신용하 교수에 따르면 大韓民國의 국호 결정에는 아래와 같은 사연이 있다고 합니다.
 
< ‘大韓民國’은 3·1운동으로 탄생한 상해임시정부의 국호였으며 1948 815일 건국과 함께 계승한 우리의 국호이다.

 

1919 410일 오후10시 중국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의 김신부로(金神父路)에 있는 허름한 셋집. 밤을 새워 열린 임시정부 첫 의정원(오늘날의 국회)의 가장 중요한 안건은 국호의 결정이었다.

 

참석 의원은 29. 처음 ‘大韓민국’이란 명칭을 제안한 사람이 신석우(申錫雨·1894-1953)였다. 그러나 논란이 만만치 않았다. 여운형(呂運亨) 의원이 반대했다.
 
“大韓이란 말은 조선 왕조 말엽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니 부활시킬 필요가 없다”
그러자 신석우가 되받았다.

 

“大韓으로 망했으니 大韓으로 흥하자”

결국 표결에 부치기로 했고, 다수결로 ‘大韓民國’ 국호가 채택됐다.>
  
어쨌든 고종황제께서는 국호를 거룩한 ‘대한(大韓)’으로 정했고, 당시 사람들은 다 그렇게 불렀지만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大’ 자가 떨어져 나간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後記:

말이 나온 김에 국호에 이어 우리가 고종황제에게 빚지고 있는 것을 하나 더 살펴보겠습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가 국기로 사용하는 태극기 입니다.   우리는 흔히 태극기를 박영효가 일본 가는 배 위에서 만들었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말하고 배웁니다. 그러나 박영효는 단지 국가의 공식 대외 업무에서 태극기를 국기로 처음 사용할 기회를 가졌던 사람입니다. 이를 두고 ‘박영효가 태극기를 처음 만들었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조선시대의 관료조직을 아프리카 어느 부족 수준 정도의 것으로 보지 않는 이상 상상도 할 수 없는 표현 발상입니다.   아래 태극기에 관한 좋은 글이 있기에 소개합니다. 참고로 필자는 제가 평소 잘 아는 사람입니다.

 

/1885년 고종황제가 당시 외무담당 미국인 데니씨에게 선물한 태극기.

 

<태극기는 과연 박영효가 만들었을까?

많은 사람이 태극기의 기원을 일본으로 파견된 수신사(修信使)중 한명인, 박영효(朴永孝)가 선상(船上)에서 제작했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지극히 단순한 생각일뿐더러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다.
 
나라를 대표하고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 국기를 당시의 군주인 고종과 어떠한 상의도 거치지 않고 신하가 마음대로 제작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요즘과 비교하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중요한 국가 정책을 대통령 협의 없이 행정부처 마음대로 결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한 국기제작이 가벼운 낙서의 비중을 가진 일도 아니며, 요즘의 삼행시를 짓는 것처럼 즉석에서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박영효가 영국 선장의 건의를 받아 즉석에서 국기를 제작했다는 것 자체는 말도 안되는 단순화의 오류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태극기는 어디에 그 뿌리를 두며 그 제작과정은 어떠했을까? 고종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은 국기 제정의 필요성을 1876년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체결 때부터 느끼기 시작했다.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1880 12월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군국기밀(軍國機密)과 일반 정치를 총관하던 관청)을 설립하고 1881년 외국과의 국교 수립에서 국호를 대조선(大朝鮮)으로 칭하고 군주의 칭호도 대군주(大君主)로 사용하도록 한 무렵이었다. 외국과의 외교와 국제질서에의 편입을 위해서 국기는 필수불가결한 사항이었고, 이에 필요한 국기의 도안에 대한 검토가 구체화 되어 1882 5월 한미수호통상조약(韓美修好通商條約) 체결시에는 태극기의 효시인 '태극팔괘도'를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극 팔괘도가 이미 제작되어 있는 상황에서, 3차 수신사 일행이었던 박영효는 고종으로부터 태극 팔괘도를 국기로 사용하라는 명을 받았던 것이다. 이에 박영효는 일본으로 가는 선상에서 영국선장 제임스에게 '태극팔괘도'를 대조선의 국기로 소개하고 게양할 것을 요청하게 된다.
 
하지만 영국인 선장 제임스는 태극팔괘도가 너무 복잡하여 팔괘를 4괘로 간략화한 것을 국기로 하는 것이 좋겠다 했고, 태극팔괘기는 군주기, 즉 왕실을 상징하는 어기(御旗)로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밝혔던 것이다. 박영효가 쓴 '사화기략(使和記略)' 은 이를 잘 입증해 준다.
 
“태극에 8괘를 그린 도식(태극팔괘도를 말함)은 특별한 빛깔로서 아름다우나, 여덟 개의 괘를 태극 주위에 분포해 놓으면 너무 획이 조밀하고 복잡하여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고, 또 여러 나라에서 이것을 보고 제작하는 것도 심히 불편할 것이므로 단지 4괘만을 사용해 네 모퉁이에 그어도 아름다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외국에서는 국기 외에 반드시 君主의 旗가 있는데 그 표시는 대개 국기의 모양을 따고 채색과 무늬를 놓아 번선(繁鮮)을 아주 화려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의견 조율이 있은 후 박영효는 태극팔괘기를 간략화한 태극4괘기를 만들어 국기로 사용하면서 이 사실을 국왕 고종에게 보고하게 되었고, 보고를 접한 고종은 현재의 태극기와 모양이 근접한, 태극 4괘기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1883년 국기 제정 공포 때 건곤감리의 4괘를 그린 태극기가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던 것이다.
 
당시 서구의 여러 나라에서도 군주기와 민기는 병용되고 있었고, 이에 발맞추어 당시 조선이 군주기와 민기를 제작하고, 더군다나 고종은 어기(御旗)가 아닌 민기(民旗)라 할 수 있는 태극 4괘기를 국가의 제 일차적 상징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18세기 후반의 민국정치 이념보다 더욱 진일보한 것이라고 평가할 만 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볼 때, 그간 우리가 알고 있는 ‘박영효가 외국 선장의 제의를 받아 선상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라는 태극기의 제작과정이 얼마나 비상식적이고 허무맹랑한 것인지 보여준다. 우리 태극기의 제작과정을 마치 삼행시 짓는 것처럼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도 우리 스스로 자존심에 침을 뱉는 행위가 될 것이다.
 
태극기는 당시 근대화를 향해 나아가던 조선의 산물이었으며, 이 산물을 산출해 내기까지 국정의 핵심자였던 고종과 대신들의 충분한 논의가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더 이상 태극기를 단순히 한 개인의 즉석 창작물로 폄하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글쓴이: 바램(기원)>

 

민족의 얼과 염원 담은 '태극기'의 변천사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1890년경 데니 태극기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은 3월 '이달의 기록' 주제를 '민족의 얼과 염원 담은 태극기의 변천사 한눈에 본다'로 정하고, 관련 기록물을 오는 17일부터 누리집을 통해 제공한다고 16일 전했다. 

 

/'1919년 태극기 목판'.

 

/'1941년 김구 서명문 태극기'.

 

/'1907년 불원복 태극기'.

 

/'1950년 건국법정대학 학도병 서명문 태극기'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1945년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1948년 대한민국정부수립 경축식에 게양된 태극기'.

 

/'1950년 서울 수복 후 태극기 게양'.

 

/'1974년 권투선수 홍수환 귀국환영식서 태극기 흔드는 모습'.

 

/1967년 주월 한국군에 태극기를 기증하는 모습.

 

/1952년 3·1절 행사에 등장한 태극기.

 

/1962년 휴전선에서 광복절 기념으로 열린 대형 태극기 게양식 모습.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1932년 윤봉길의 한인애국단 입단'.

 

/1966년 제5회 방콕아시아경기대회 카드섹션 모습.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2002월드컵에서 대형태극기로 응원하는 한국응원단'.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1948 5.10 총선거 포스터'.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1946년 해방 1주년 기념 우편엽서'

사진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 제공

 

2015년 08월 13일 태극기

/예진수 / 논설위원

독립운동을 그린 영화 ‘암살’이 광복절인 15일쯤 관객 수 1000만 명을 돌파한다. 주연 배우 전지현은 태극기 앞에서 목에 출사표를 건 채 사진 촬영을 하고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는 장면을 찍을 때 “슬프기도 하고 가슴이 뭉클했다”고 말했다. 상하이(上海)임시정부가 통합정부 체제가 된 뒤 처음으로 개최한 1920년 신년 축하식의 기념사진에도 김구·이동녕· 안창호 등 50명의 임정 인사 뒤쪽에 거대한 태극기 두 개가 펄럭이고 있었다. 1940년대 초 태평양전쟁 당시 미주 한인들에게 ‘태극기 배지’는 목숨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었다. 1941년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침공한 뒤 많은 일본 이민자가 미국 땅에서 공격을 당했다. 한인들은 일본인으로 오해받지 않도록 태극기와 성조기가 함께 새겨진 배지를 가슴에 달고 다녔다.

한반도를 떠나 이산(離散)과 차별의 이중고를 겪는 사람들에게 태극기는 더욱 각별하다. 영토에 묶이지 않으면서도 같은 민족혼을 가진 개인들의 공통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지난 7월 광주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유도 남자 73㎏급 금메달을 딴 안창림은 재일교포 3세다. 그는 “일본 선수를 이기고 태극기를 달겠다는 목표가 있었기에 일본인으로 귀화하지 않았다”고 했다. 광복 70년을 맞은 올해 태극기는 한반도를 넘어 재외동포들이 사는 세계 곳곳에서 휘날리게 될 것이다. 재외동포 3·4세들에게 태극기 사랑의 열도를 높이려는 민·관의 노력도 절실하다.

디아스포라(이산자)의 귀환과 관련, 뜻깊은 행사가 열린다. 14일 부산항 일대에서 펼쳐지는 ‘1945년 해방 귀국선 재현 행사’가 그것이다. 1300t급 해군 수송선에서 봇짐을 진 귀국 동포 250명이 자갈치 부두에 내리고, 이들과 부산 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광복로 2㎞를 행진한다.

태극기 붐과 함께 태극기의 의미와 가치도 확산시켜야 한다. 태극기에는 음과 양의 무궁한 순환 발전을 뜻하는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가 태극을 중심으로 통일과 조화를 이룬다는 심오한 이념이 담겨 있다. 국민 모두가 재외동포는 물론 한류 붐으로 태극기에 관심이 높아진 외국인들에게 태극기의 복잡한 상징들을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킨 건국세대에 대한 기억과 감사다.

문화일보

 

2016.03.01 고종황제 행차에 함께한 태극기

/고종황제 행차에 함께한 태극기

 

2016.03.03  태극기를 만든 사람은 박영효가 아니라..

/고종황제 행렬이 종로를 지나고 있다. 1885년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가 촬영한 것으로, 어가 앞에 대형 태극기가 보인다. 신식 군대와 전통 군대가 섞여서 어가를 오휘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31 절을 맞아 전국이 다시 한번 태극기의 물결로 뒤덮였다. 이에 맞춰 광복회 광주ㆍ전남 지부에서는 ‘태극기 특별기획전’을 열고, 미공개 태극기 사진을 다수 공개했다.

 

이 가운에 눈길을 끈 것은 1885년 고종 황제의 어가 행렬을 이끄는 대형 태극기의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이 깃발이 국가 행사에 등장한 가장 오래된 태극기라고 한다.

 

태극기는 그동안 1882 8월 수신사 박영효가 일본에 가는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즉석에서 만든 것처럼 잘못 알려져 왔다. 일국의 상징인 국기를 대신(大臣)이 즉석에서 만들어 내걸았다는 얼토당토않은 비상식적인 이야기가 마치 정설처럼 퍼져 있는 것이다. 이는 시급히 바로 잡아야 할 문제다. 박영효가 태극기를 처음 만들어 내걸었다는 주장은 조선시대 관료 조직을 아프리카 어느 부족 수준 정도의 것으로 보지 않는 이상 상상도 할 수 없는 발상이다.

/광복회 광주전남연합지부가 공개한 1907년 순종황제즉위식 기념엽서에 나온 평양의 모습. 거리마다 온통 태극기 물결이다.

 

태극기 도안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조선시대 군사 지휘기인 좌둑기(左纛旗)와 기존부터 군주를 상징해왔던 태극팔괘도에서 연유한다. ()은 임금의 가마나 군대의 대장 앞에 세우는 군기(軍旗)를 말한다. 새로 공개된 고종황제 행렬 앞에 태극 깃발이 바로 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엄격하게 말하면 애초부터 태극기 창안자를 특정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태극 문양은 우리가 이미 오래전부터 즐겨 사용해오던 상징물이었다.

 

설사 태극기의 도안이 전통적인 좌둑기나 기존의 태극 8괘에서 유래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런 깃발이나 도안과 한 나라를 상징하는 정식 국기는 차원이 다르다.

 

최초의 국기 제정 과정에 대해서는 현재 명확하게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고종실록 1883 1 27(고종 20기사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아뢰기를 '국기를 이미 제정했으니 팔도와 사도(四都)에 행회(行會)하여 다 알고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미 국기가 결정되어 있던 상태에서 이 때에 이르러 공식적으로 선포하고 전국적으로 사용을 확대하도록 한 것이다.

 

박영효가 일본에 수신사로 간 것이 1882 8월이다그동안 박영효가 일본으로 가는 배 위에서 국기를 최초로 만들었거나 아니면, 최소한 그가 국가 공식 업무에 태극기를 최초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최근 이보다 앞선 1882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 때 사용된 태극기 도안이 발견됨으로써, 박영효가 최초로 태극기를 만들었다는 것은 고사하고공식 업무에 태극기를 처음 사용했다는 것도 사실과 맞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소위 '이응준 태극기'로 알려진 1882년 5월 조미수호조약 체결 당시 사용된 태극기. 2004년 미국 해군부 해상국의 자료에서 그 실체가 발견됐다.

 

2004년 발견된  태극기를 세간에서는 ‘이응준 태극기’라고 부르는데, <태극기의 탄생>이라는 책을 쓴 소설가 박충훈씨는 “당시 역관이던 이응준이 고종의 명을 받아 현재와 같은 태극 4()의 도안을 처음 그렸다”고 주장했다. 현재 학자들도 김홍집의 명을 받은 이응준이 현재와 같은 4괘 태극기 도안을 그렸고, 이후 박영효가 일부 수정한 것을 사용했다는 것을 정설로 인정하는 분위기다하지만 이 국기의 도안을 이응준이 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1948 2 8일 경향신문에 태극기의 유래에 관해 <국기고증변()>이라는 글이 한편 실렸다. 이 글의 필자는 유자후(柳子厚ㆍ1895~ 납북)라는 분으로 경사(經史)에 해박하며 신학문(新學文)에도 능통하였다. 유자후의 국기고증 글에서는 이응준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전략) 국기의 ㅇ處(ㅇ처)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주설이 구구한 모양이니, 혹자는 병자강화조약 때에 제정된 것이라 하고, 혹자는 임오 한미 통상조약 때 선정된 것이라 하고, 또 혹자는 임오군란 후 일본 수신사 박영효씨가 작()하였다하기도 한다. 이 세 가지 주장 가운데 최후의 설이 근시(近是)한 것이다.

 

지금까지 참고된 결과를 보면 본래 김옥균씨의 創ㅇ(창ㅇ)로써 김홍집씨와 상의하고 어윤중씨의 찬성을 받은 후에 박영효씨의 동의를 얻어 고종황제께 품달하여 어재가를 받았다는 것이 사실에 가까운듯하다. 그리고 보면 우리 태극기의 창안자는 김옥균씨요. 그 제정자는 고종황제였던 것이다.

 

(중략)우리 태극 8괘의 국기가 이와 같은 경위와 이와 같은 뜻을 갖고 탄생하기는 실로 대조선개국 491년 임오년 725일 고종 19년 서력 1882년이니, 지금으로부터 67년 전에 특명전권대사 수신사 박영효씨가 국서를 받들고 일본으로 향하였던 날이다. 그리고 고종황제께서 각국의 기호와 비교하여 만약 고칠 점이 있거든 고치라는 품허까지 내리셨다. (후략)>

 

유자후는 태극기의 최초 창안자로 김옥균을 주목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하면 국기의 도안 과정에 김옥균, 김홍집, 어윤중, 박영효가 골고루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유추할 있다. 즉 국기의 필요성과 제정이라는 중대사를 두고 대신들이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관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모든 국기 도안과 제정 문제는 고종황제의 지대한 관심 속에서 진행되었고, 고종이 그 중심에 서 있었다는 사실이다이미 1975 8월 일본의 운양호사건 후 조일수호조규 체결 때부터 조선은 국기의 존재와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역사에 두루 밝고 국가의 독립과 왕권 강화 문제에 민감하던 고종이 국기를 결정하는 중대한 문제에 무관심했을 리가 없다.

/고종황제가 미국인 외교 고문을 지낸 데니(Owen N. Denny, 1838~1900)에게 하사한 태극기. 오른쪽은 이를 보관해 온 데니.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다. 가로가 263, 세로가 180센티미터인 대형 태극기 인데 기사 상단의 고종황제 행렬에 사용된 태극기와 비슷한 크기와 형태로 보인다. 태극기 제정 당시의 태극 소용도리는 지금보다 매우 깊어 전통 태극 문양에 가깝다. 

 

국기 문제를 한참 고민하고 있을 무렵 조선은 청나라의 극심한 내정간섭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여러 기록을 보면 청은 속국을 뜻하는 용기(龍旗)를 사용하라고 조선에 압력을 넣었다. 하지만자존심 강한 고종은 이를 묵살하고 조선을 상징하는 별도의 국기를 원했다. 청의 집요한 압력까지 물리치고, 별도의 독립된 국기를 제정하는 과정에서 고종의 확고한 의지가 없다면 진행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렇게 고종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 탄생한 것이 바로 태극기이고 이것을 최초로 국가대표의 상징으로 사용한 것이 한미통상 조약 때인 것이다.

 

다만, 이후로도 국기의 최종 도안 문제가 확실하게 매듭지어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박영효가 일본에 갈 때 8괘가 그려진 태극기를 가지고 갔는데, 이에 대해 소설가 박충훈씨는 고종황제가 자꾸 시비를 거는 청나라의 압력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8괘 태극기와 4괘 태극기를 두 종류를 가지고 가게 했다는 가설을 펴고 있다. 이후 8괘 태극기가 번잡하다는 영국인 선장의 의견을 내세워 그냥 4괘 태극기를 대외적으로 조선의 국기로 확정 짓는 기회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1882 10 2일 도쿄 일간신문인 <시사신보>에는 “조선에 지금까지 국기가 없었는데 청국에서 온 마건충이 조선의 국기를 청국의 국기를 모방하여 삼각형의 청색 바탕에 용을 그려 쓰도록 한데 대하여 고종이 크게 분개하여 결단코 거절하면서, 사각형의 옥색 바탕에 태극도를 적색, 청색으로 그리고, 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의 괘를 붙혀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는 명을 하교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 고종황제가 태극기 문제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하고, 박영효는 이 명령을 따라 태극기를 그렸을 뿐이라는 내용이다.

 

어쨌든, 1882년에서 1883년 태극기를 최종 확정 짓는 과정에서 고종황제와 대신들의 심도있는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졌다이 과정에서 고종이 국기의 기본 도안을 주도했다는 것도 여러 자료에도 드러나고 있다자료를 떠나, 고종의 명에 의해 국기 제정 작업이 진행되었다는 것은 국가라는 조직 체제를 생각할 때 상식에 속하는 문제다

 

이 태극기에는 군민일체(君民: 오늘날의 만민일체)의 사상이 들어있다오늘날 우리는 고종황제에게 두 가지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인데 태극기와 ‘대한(大韓)’이라는 국호가 그것이다.

 

▶태극기 거꾸로 든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이 2008 8 9일 북경 국가올림픽체육센터에서 열린 한국 여자핸드볼 예선 경기에서 거꾸로 걸린 태극기를 들고 응원하고 있다.

 

/2007 2 11일 노무현 대통령이 해외순방길에 오르기 위해 탔던 아시아나항공의 특별기의 태극기가 거꾸로 걸려 있다.

 

/2003년 10월 1일 서울공항에서 열린 건군 55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사열할 때 탑승한 무개 차량에 잘못 인쇄된 태극기가 걸려 있다.(乾 괘의 대각선 방향 괘가 잘못)

 

/2007 6 27일 국회에 주요 법안 처리를 촉구하는 노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때는 아예 태극이 잘못 제작된 태극기를 걸어 놓았다.(사진= 노컷뉴스)

 

/북경 올림픽 당시 박태환 선수가 금메달 시상식 하는 데 걸린 태극기. 4 ()를 이루는 爻()의 두께와 간격이 맞지 않고, 대각선에서 시작해야 하는 태극의 시작점도 잘못되었다

이상흔 조선pub 기자

 

태극기 이미지

 

/신정만국전도 - 1810년 일본 에도 막부가 제작

 

/낙엽 태극기 - 대전현충원

 

바람개비 800개로 만든 태극기 - 14.6.17 해운대해수욕장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 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