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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이야기15/ [새로 쓰는 우리 예절 新禮記(예기)2] <21>개성과 예절 사이 ‘노출 패션’ - <30 끝> 명절 앞두고 커지는 벌초 고민

상림은내고향 2021. 5. 30. 16:18

상식 이야기15/ [새로 쓰는 우리 예절 新禮記(예기)2] 동아일보

21>개성과 예절 사이 ‘노출 패션’

그댄 시원하십니까? 나는 민망합니다

■ 지하철이 피서지? 노출 너무 심해 난감합니다

 

여름이 되니 출근길부터 난감한 시선 처리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지하철을 타면 양 어깨를 드러낸 오프 숄더를 입은 여성부터 겉옷인지 수영복인지 헷갈리는 탱크톱을 입은 대학생까지 곳곳이 노출의 연속입니다. 더워서 그런다지만 애꿎게도 제 얼굴이 화끈거릴 때가 많아요. 괜히 드러난 몸매를 쳐다본다고 오해받을까 싶어 제 시선은 오늘도 휴대전화에 고정됩니다.

 

전 그래도 ‘양식 있게’ 갖춰 입었다고 생각하는데 사무실에 오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쿨비즈(Coolbiz·시원하고 간편한 비즈니스 복장)’가 대세인 시대 아닙니까. 그런데 부장님은 넥타이 없이 출근했다는 걸 에둘러 훈계하듯 “요즘 회사가 편하지?”라고 한마디하시더라고요. 자외선이 눈 건강에 치명적이라고 해서 선글라스를 끼고 출근했더니 건물 입구에서 절 본 동료 과장은 “연예인이냐”고 비웃고요. 여름철 복장, 대체 어디까지 벗고, 어디까지 입어야 하는 걸까요.   

 

■ 때-장소 맞는 의상 매너 지키는 게 멋쟁이

 

서울의 한 사립대 교수는 얼마 전 난감한 상황을 겪었다. 언뜻언뜻 속옷이 보일 정도로 짧은 치마를 입은 학생에게 한마디 했더니 “대학생인데 옷도 맘대로 못 입어요?”라고 톡 쏘아붙이더라는 것. 그는 “해가 갈수록 학생들의 여름 옷차림에 당황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개성’과 ‘예절’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학생이 많아지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했다.


여름철 대학가는 노출과의 전쟁으로 몸살을 앓는 대표적인 곳이다. 대학생 장수민 씨(26)는 “교양 수업 때 ‘브라렛 패션’(브라톱을 겉옷처럼 입은)을 한 신입생이 들어왔는데 강의실에 있던 남학생들이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며 “패션 코드 자체가 몸매를 과감하게 드러내는 게 대세가 되다 보니 여자가 보기에도 난감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직장인들은 대학생들보다는 보수적인 여름 옷차림을 선택하지만 이 역시 세대차가 있다 보니 나름대로 고충이 있다. 특히 2010년대 들어 시원한 소재와 캐주얼한 스타일의 ‘쿨비즈 룩’이 도입되면서 난해한 상황이 더욱 많아졌다. 권고된 ‘허용기준’을 무시하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하는 직원이 늘어난 것.

2015년부터 쿨비즈를 도입한 유통업체에 근무하는 정모 씨(33)는 몸에 착 달라붙는 티셔츠를 입거나 트레이닝복과 다름없는 옷차림으로 출근하는 동료를 볼 때마다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다. 정 씨는 “영화 ‘글래디에이터’에 나오는 로마시대 무사 같은 샌들을 신고 온 후배를 볼 때면 한마디 할까 싶다가도 꼰대라는 지적을 받을까 봐 참는다”며 “치마 없이 레깅스만 입은 여사원을 보면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라고 했다. 

단정함을 중시하는 성당이나 교회 등 종교시설도 여름철만 되면 신도들에게 ‘노출 자제’를 요청하느라 진땀을 뺀다. 천주교서울대교구는 매년 7, 8월이 되면 주보를 통해 ‘여름철 미사 때의 복장’을 공지한다. 서울대교구 관계자는 “교회법에서 옷 규정을 엄격히 정해 놓은 것은 아니지만 심한 노출 패션으로 인해 불편함을 호소하는 신자가 증가해 슬리퍼와 소매 없는 옷 등은 피해야 한다고 알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달리 여름철에도 단정한 정장 차림을 요구하는 법원 등 특정 업계에서는 ‘의상 자유’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서울지방변호사회 관계자는 “협회 차원에서 법원에 협조 공문을 보내 ‘여름철에는 넥타이를 매지 않게 해달라’고 요구했다”며 “그럼에도 여전히 관행과 분위기 때문에 넥타이를 매는 변호사가 많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주요기사전문가들은 “결국 여름 옷차림 선택은 자신의 취향·개성과 상황별 의상규칙 사이에서 조율점을 찾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이청청 디자이너는 “이슬람 문화권에선 여성들이 수영장에서도 온 몸을 가리는 수영복을 입듯이 어떤 상황에서 이상한 일이 어떤 상황에서는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 될 수도 있다. 그 반대일 수도 있다”며 “직장과 종교시설, 학교 등 시간과 장소 상황에 따라 의상 매너를 숙지하고 지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예컨대 직장인들의 경우 업무와 관련한 외부인을 만날 상황이 많은 만큼 사내에서뿐만 아니라 회사 바깥에서도 무례하게 느껴지지 않을 ‘비즈니스 드레스 코드’를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언영 장안대 스타일리스트과 교수는 “남성의 경우 유두점이 드러나는 얇은 셔츠나 통이 너무 좁거나 넓은 반바지 등은 글로벌 복장 매너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덥더라도 속옷을 갖춰 입고 남들이 언짢아할 만한 복장은 피하는 게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 직장인의 경우 속옷이 훤히 비치는 시스루 소재나 가슴골이 너무 드러나는 옷 등은 피해야 한다. 상대방이 눈 둘 곳을 고민해야 하는 짧은 치마나 슬리퍼 등도 비즈니스 매너와는 거리가 멀다. 이 교수는 “여름철엔 회사 내에 격식을 갖춘 신발이나 정장을 따로 준비해 두는 것도 요령”이라며 “출퇴근할 때는 편한 복장을 하더라도 보고나 회의에선 바꿔 입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유원모 기자 

 

22>배려 필요한 多세대 여행 

휴가인지, 사역인지 가족 금가는 여행은…

■ 화합 위한 동행, 부모님과 갈등… 얼굴 서로 붉혀요

 

“아가, 초밥 맛이 한국에서 먹는 거랑 다르더라.


지난해 여름 형님네와 일본으로 온천여행을 다녀온 이후로 시부모님은 저와 남편을 볼 때마다 그때 얘기를 하십니다. ‘올해는 너희가 우리를 해외에 데려갈 차례’라고 은근히 압박하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없는 살림에 여행 한 번 제대로 못 가시고 아들 둘 번듯하게 키워내신 시부모님…. 저도 마음 같아선 해외는 물론이고 우주여행이라도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두 분이 다녀오시면 안 될까요? 꼭 아들 내외와 함께 가야 하는 건가요?

재작년 처음으로 시부모님을 모시고 태국을 다녀왔는데, 기억에 남는 추억이 하나도 없습니다. 음식이 짜다, 다리가 아프다, 밖에선 덥다, 실내에선 에어컨 때문에 춥다…. 어머님 불평만 듣다가 3 4일이 끝났으니까요. 

 

1년에 한 번 가기 힘든 해외여행을 또 그렇게 다녀와야 하는 걸까요? 그런 휴가보다는 차라리 출근하는 게 낫다는 생각마저 드는 건 막심한 불효겠죠. .

  

■ 여행지-음식, ‘꼭 함께’ 버리고 서로 취향 존중을

많은 직장인들이 불볕더위에도 마음 한구석 시원함을 느끼는 건 곧 있을 휴가 때문일 것이다. 직장인의 ‘오아시스’, 즐거운 휴가를 보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풍경 좋고 맛있는 음식 있는 곳으로 떠나는 여행이 으뜸이다. 지난 한 해 2650만 명의 한국인이 외국을 다녀왔다. 이 중 약 500만 명이 휴가철인 7, 8월에 출국했다. 5년 전과 비교하면 한 해 해외여행자 수는 두 배 이상으로 많아졌다.


덩달아 여행을 둘러싼 가족 내 갈등도 커지고 있다. 특히 부모와 자식이 동행하는 ‘다()세대 여행’에서 서로 얼굴을 붉히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여행은 가족의 화합을 다질 좋은 기회이지만, 자칫하면 가족 간 의만 상하는 ‘최악의 여행’이 될 수 있다.

박모 씨(35)는 올 여름휴가가 벌써 두렵다. 여름휴가지는 이미 장인이 동해로 결정했다. 처남이 동반한다는 점도 일방적으로 통보됐다. 박 씨는 “장인, 장모, 처남, 아내, 그리고 저까지 다섯 식구 중 돈을 버는 건 저 혼자”라며 “결국 제가 번 돈으로 가족 여행을 가면서 왜 한마디도 상의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토로했다. 더욱이 지난해 가족 여행은 쓰디쓴 기억으로 남아있다. “고맙다는 말은 한마디도 듣지 못했어요. 그저 저는 짐꾼이자 운전사일 뿐이에요. 


가족 여행은 언제 갈등이 터져 나올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6월 초 시부모와 동남아를 다녀온 최모 씨(29·여)는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시어머니는 애써 찾은 현지 맛집에서 “느끼하다. 김치 좀 달라고 해라”라고 하는가 하면, 자신의 비키니 수영복을 두고는 “결혼한 애가 어떻게 이런 걸 입니?”라며 핀잔을 늘어놓는 통에 현지에서 온몸을 가리기 위해 래시가드를 새로 구입해야 했다.

 

부모도 자식과 함께하는 여행이 즐겁지만은 않다. 올해 봄 세 살배기 아들이 있는 딸 부부와 제주도를 다녀온 양모 씨(65)는 자신을 ‘육아 도우미’ 취급하는 딸에게 서운함이 컸다. “저녁을 먹은 후 딸 내외가 ‘잠시만 아이를 봐 달라’고 하고는 나가더니 리조트의 바에서 3시간 가까이 둘이 술을 마시고 오더라고요.” 그는 다시는 딸 내외와 여행을 가지 않을 생각이다. 

 

전문가들은 ‘가족은 당연히 함께 여행을 가는 것’이라는 인식과 여행을 가서도 일상 속의 ‘가족 역할’을 요구하는 행태가 이런 갈등을 낳는다고 지적한다. 동반자의 체력이나 취향을 고려하지 않은 일정을 강요하거나 새로운 문화를 즐기려는 생각 없이 불평, 불만만 늘어놓는 태도도 가족 여행을 망치는 주범이다.

 

여행지나 음식 등에 대한 취향을 맞출 수 없다면 ‘꼭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는 편이 낫다. 여행은 시간과 돈, 체력을 모두 평소보다 많이 소진하면서 즐거움을 찾는 놀이다. 취향을 맞추기 힘든 동반자는 서로의 즐거움을 갉아먹을 수밖에 없다.

 

오스트리아에서 유학하며 동유럽 여행 가이드 일을 하는 권수진 씨는 “가족 단위 여행객을 안내하면서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일행 중 누군가가 원하지 않는 장소에 온 듯 지루해하거나 불쾌한 표정을 지을 때”라며 “호프부르크 왕궁 같은 명소도 누군가에겐 감동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그저 별 볼일 없는 서양식 건물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부터 각자의 기호에 맞는 여행을 따로 가거나, 같이 가더라도 짧은 시간이나마 서로 다른 코스를 짜는 게 좋다”고 강조했다. 

 

함께 여행을 가기로 정했다면 적어도 4가지를 명심해야 한다. △여행 계획에 대해 사전에 충분히 협의하고 △음식이나 문화가 낯설더라도 즐겁게 받아들이고 △다른 가족에게 많이 힘들 수 있는 일정은 과감히 포기하고 △여행을 함께 온 모두가 즐길 수 있도록 육아나 각종 잡일을 합리적으로 나누는 것이다. 오승환 하나투어 대리는 “서로의 취향을 파악해 일정을 짜고, 모두가 일상에서 벗어난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역할을 나누고 서로 배려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황태호 기자 taeho@donga.com

 

<23> 퇴직한 가장, 어깨 펴는 법

마눌님의 ‘삼식이’ 눈칫밥? 일단 앞치마 두르세요

■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 마음에 큰 상처

 

50대 후반인 남편은 두 달 전 은퇴했습니다. 이런 날이 언젠가 올 거라는 건 알고 있었죠. 그날이 오면 고생한 남편한테 잘해줘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막상 닥치니 그게 말처럼 쉽지 않네요.


처음엔 많이 노력했어요. 20년 이상 몸담은 회사를 떠난 남편이 너무 안쓰럽고, 남편의 축 처진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참 속상했죠. 남편 기죽이고 싶지 않아 직장 다닐 때처럼 밥도 꼬박꼬박 차려주고, 빨래며 청소며 예전처럼 제가 다 했답니다.

하지만 저도 점점 지쳐갑니다. 남편이 하루 종일 집에 있는 날이면 세 끼를 다 챙겨줘야 하는데 제 체력도 예전 같지 않아 때로 너무 힘들고 화가 납니다. 저도 평생 집안일을 했는데, 왜 저는 이 나이가 되도록 쉬지 못하는 걸까요?

더욱이 이제 고등학교 1학년인 아들을 생각하면 집에 있는 남편에게 도통 좋은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퇴직금이 있긴 하지만 앞으로 대학 등록금은 어찌 해야 할지 하루에도 몇 번씩 한숨만 나옵니다. 

 

결국 오늘 터지고 말았습니다. 남편에게 “앞으로 계속 이러고 살 거야? 삼식이 짓 좀 그만해”라며 버럭 화를 냈습니다.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집을 나갔죠. 상처받은 표정을 보니 미안했지만, 이렇게 몇십 년을 더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 부부가 함께 행복하게 지낼 접점이 있을까요?    

 

■ 제2의 인생 찾으려는 노력, 가족이 응원을

 

여보,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당신 말에 화가 나 집을 박차고 나왔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고. 당신이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겠어. 그동안 괜히 민망해서 하지 못한 말들을 좀 적어보려고 해.


나도 언젠가 퇴직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적응이 쉽진 않아. 그렇게 긴 시간을 회사에 쏟았는데, 직장을 나오고 나니 남은 게 하나도 없네. 퇴직금만으로 남은 3040년을 어떻게 버틸지 앞이 캄캄하고, 우리 애가 직업 없는 아빠를 부끄러워할까 위축도 되고…. 약한 모습 보이기 싫어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려 하지만 당신은 이미 눈치챘겠지. 

그래도 힘이 되는 건 역시 가족뿐이야. 회사 출근 마지막 날, 짐을 싸 집에 왔을 때 당신과 아들이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고마워요”라고 말해줬지. 그때 눈물이 날 뻔한 걸 간신히 참았어. 마냥 어리게만 보이던 ○○이가 “아빠, 걱정 마. 나도 열심히 할게”라고 할 땐 신기하고 대견하더라. 


그래도 퇴직 후 찾아오는 우울함은 어쩔 수가 없더라고. 다시 일하고 싶지만 이 나이에 직장 찾기가 어디 쉽겠어? 솔직히 당신이 무심코 던진 말들이 큰 상처가 돼. 당신이 며칠 전 친구들과 여행을 갔다 왔을 때 베란다에 가득 쌓인 빨랫감을 보고 “나 없을 때 집안일 좀 해놓는 게 그렇게 힘드냐”고 했잖아. “나도 바쁘다”고 큰소리쳤지만 사실 세탁기 사용법을 잘 몰라. 순간 내가 정말 쓸모없는 사람이 됐구나 싶었지. 이제부터 당신이 집안일을 가르쳐주면 나도 열심히 해볼게.

 

 

또 한번은 당신이 “돈은 언제 다시 벌려고?”라고 조심스레 물었지. 솔직히 ‘나는 평생 가장이라는 짐을 벗어버릴 수 없는 건가’ 싶어 마음이 무거웠어. 친구들 중엔 아내도 일하는 경우가 적지 않잖아. 남편보다 돈 잘 버는 아내들도 간혹 있고…. 이제 시대가 변했는데 왜 당신은 나만 쳐다볼까 싶어 답답했어. 은퇴 후 경제적인 문제는 우리가 함께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나도 열심히 일자리를 알아볼 테니, 당신도 함께 방법을 고민해주면 좋겠어. 

 

나는 애하고 대화하는 게 참 어려워. 그동안 해 뜨기 전 집을 나서서 해진 뒤 집에 들어왔으니 제대로 얼굴 볼 시간이 없었잖아. 말을 걸어보려 하는데, 막상 기회가 생겨도 할 얘기가 없더라고. 결국 “공부는 잘되니?”로 시작한 대화의 마지막은 늘 “아빠랑 얘기하면 짜증 나”란 말로 끝나더라고. 쾅 닫히는 문을 볼 때면 자식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아 더 슬퍼. 주말에라도 “아빠, 같이 영화 보러 갈래?” 하고 말을 걸어주면 정말 고마울 텐데…. 

 

하소연이 길었지? 그래도 요즘 먼저 퇴직한 선배들을 만나면 제일 먼저 바뀌어야 할 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생각을 해. 어제 만난 선배가 “은퇴는 곧 자기 삶의 전성기”라고 하시더라고. 맞는 말 같아. 회사를 나왔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건 아니잖아. 이제 나도 내 삶에 온전히 투자할 기회를 얻은 거라고 생각할래. 그러니 당신도 “나이 많이 먹어서 할 수 있겠어?”라는 말보다 “당신도 잘할 수 있어. 응원할게”라고 말해줘.

먼저 요리부터 배워보려고 해. 요샌 퇴직하고 요리교실을 다니는 이들이 많더라고. 아내 없이 밥 잘 챙겨먹는 게 퇴직자의 첫 번째 매너라면서? 나도 집 근처 복지관에서 하는 요리교실을 다음 주부터 나가볼까 해. 평생 나한테 밥해줘서 정말 고마워. 이제는 내가 당신 밥 차려주는 남편이 될게. 또 조만간 취직자리가 생길 테니 너무 돈 걱정 하지 마.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앞으로도 서로 믿고 의지하자.
위은지 기자 wizi@donga.com

 

<24> 휴가철 숙소 사용 에티켓

“한국인 투숙객 떠난뒤 룸 청소… 악 소리 납니다”

■ 호캉스 기분 취해 뒷정리 나몰라라… 정말 곤란해요

저는 일주일 중 토요일 오후가 제일 무섭습니다. 저뿐 아니라 저와 같은 일을 하는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제 직업이 궁금하다고요? 전 호텔에서 ‘메이드’라고 불리는, 객실청소 담당 직원입니다.


저희가 토요일 오후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전날 밤 ‘불금’을 보내는 한국 손님들이 집중되기 때문이에요. 호텔방을 빌려 지인들과 파티를 즐기는 ‘룸파티’나 ‘호캉스(호텔+바캉스)’ 문화가 확산되면서 주말엔 한국인으로 넘쳐나거든요.

 

이들이 떠난 자리는 충격적일 때가 많아요. 카펫 바닥과 침대 위에 토사물이 있는가 하면, 청소하러 들어갈 공간이 없을 정도로 바닥에 술병이 널브러져 있기도 하죠. 스카치테이프로 붙인 풍선을 떼려 했는지 벽지가 찢어진 방도 있어요. 카펫 위에 케이크가 통째로 짓이겨진 모습도 봤어요. 문을 여는 순간 ‘헉’ 소리가 난다니까요.

 

한국 손님들은 이렇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내가 내 돈 내고 왔는데 뭐가 문제냐.’ ‘대신 치워달라고 비싼 돈 낸 것 아니냐.’ 하지만 같은 돈을 낸 손님 중에 그렇지 않은 손님들도 많답니다. 메이드 일을 오래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라별 투숙객 문화가 비교되더라고요. 이제 우리도 경제력에 걸맞은 숙소 사용 예절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요?  

 

■ ‘떠나면 그만’, 생각 버리고 배려도 챙기세요

 

직장인 윤호영 씨는 5년 전 대학생 때 해외연수를 갔다가 일본과 대만 등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건 그들의 숙소 사용 매너다. 윤 씨는 “퇴실할 때 사용한 이불을 마치 자신의 침대를 정리하듯 각 잡아 정돈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며 “그동안 내가 숙소를 얼마나 함부로 사용했는지 처음으로 반성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제 많은 한국인에게 여행은 삶의 일부다. 지난해 해외여행에 나선 국민은 2600만 명에 이른다. 하지만 여행이 보편화된 데 반해 숙소 사용 예절은 일천하다는 지적이 많다. 이를 가장 피부로 느끼는 이들은 여러 나라 투숙객을 접하는 호텔 직원들이다.

외국계 체인인 서울 I호텔 직원 이모 씨는 “숙소 예절은 예약 단계부터 시작된다”며 “투숙객 인원을 속이고 예약하거나 흡연자이면서 비흡연자로 체크하는 일 등 난감한 상황이 많다”고 말했다. 특히 흡연자이면서 담배 냄새가 나지 않는 상쾌한 방을 얻기 위해 비흡연룸에 투숙한 뒤 담배를 피울 경우 냄새 제거가 쉽지 않아 큰 문제가 된다. 이 씨는 “보통 방 하나를 청소하는 데 40분을 잡는데 이런 방은 3시간 이상 별도의 환기장비를 돌려도 냄새가 완전히 빠지지 않는다”며 “최악의 경우 다음 손님을 받지 못하는 일도 생긴다”고 말했다. 

한국인의 화장실 사용 매너도 메이드들에겐 골칫거리다. 대다수의 외국 호텔과 외국계 국내 호텔들은 배수관 냄새 등 위생상 이유로 화장실 바닥에 배수구를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이를 무시하고 샤워커튼도 치지 않은 채 샤워를 하다가 화장실을 물바다로 만들기 일쑤다. 서울 M호텔 관계자는 “화장실 밖 객실 카펫까지 다 젖으면 일이 아주 복잡해진다”며 “샤워커튼을 반드시 욕조 안쪽으로 치는 것은 호텔 이용 시 필수 매너”라고 말했다. 


메이드들은 이것을 보면 투숙객의 매너를 알 수 있다고 한다. 바로 ‘수건’이다. 작은 부분이지만 다 쓴 수건을 어디에 어떻게 놓느냐를 보면 투숙객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 H호텔 관계자는 “한국 손님들은 쓰고 난 수건과 샤워가운을 주로 바닥에 던져 놓는다”고 말했다. 반면 일본이나 유럽지역 투숙객들은 대부분 사용한 수건을 욕조 안에 넣거나 세면대 위 한쪽에 쌓아둔다. H호텔 관계자는 “수건을 한쪽에 모아놓으면 치우는 사람도 편하고 바닥에 있는 것보다 위생상으로도 좋다”며 “다음 손님을 위한 일종의 배려인 셈”이라고 말했다. 보통 매일 갈게 돼 있는 침대 시트나 이불 커버를 하루 이상 쓰겠다고 의사 표시를 하는 것도 좋은 매너다. 시트를 갈 때 힘이 들기도 하지만 한 번 갈 때마다 나오는 엄청난 양의 빨래를 줄일 수 있어 환경오염을 막는 데도 도움이 된다. 

 

다른 선진국에 비해 인색한 한국인의 ‘칭찬문화’도 개선해야 할 부분으로 꼽힌다. 외국인 투숙객의 경우 객실 상태나 서비스에 만족했을 때 적극적으로 감사 메시지를 남기거나 칭찬카드를 쓴다. 외국계 체인인 서울 C호텔 관계자는 “프런트에 남긴 칭찬 메시지는 객실부를 통해 해당 메이드에게 모두 전달된다”며 “그 무엇보다 메이드들이 고마워하는 것이 칭찬이다. 비록 손님은 떠나도 손님의 나라에 대한 이미지는 좋게 남는다”고 말했다.

 

여행 시 이용하는 숙소는 ‘떠나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가정집을 숙소로 공유하는 산업이 활성화되면서 나의 숙소예절이 단순한 매너를 넘어 다음 숙소 예약 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김지윤 씨는 “숙소 공유 경제의 대표 주자인 에어비앤비의 경우 손님만 집을 평가하는 게 아니라 집주인도 손님을 평가해 별점을 준다”며 “집을 함부로 쓰는 ‘진상 고객’은 다른 집주인들이 꺼려 추후 원하는 숙소 예약에 실패할 확률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임우선 imsun@donga.com·위은지 기자

 

<25>휴가철 해외 패키지여행 예절

해외 식당서 꺼내먹는 김치 꿀맛? 남들은 죽을맛

■ 냄새 나는 음식 꺼내고 뷔페 커피 따로 담고 이러시면 안돼요

얼마 전에 동네 엄마들과 서유럽 8일 패키지여행을 다녀왔어요. TV에서만 보던 에펠탑, 콜로세움을 실제로 본다는 생각에 얼마나 기대가 됐는지 몰라요.

 

하지만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말이 맞더라고요. 음식이 가장 큰 문제였어요. 관광 첫날부터 세 끼를 빵과 면으로 때우니 소화가 안 돼 배 속이 부글부글 끓더군요. 결국 둘째 날 점심을 먹으러 간 현지 식당에서 반찬통에 싸온 김치를 꺼냈어요. 파스타에 김치를 한 점 얹어 먹으니 좀 살겠더라고요. 그런데 그때 저희 테이블 옆을 지나가던 웨이터가 화들짝 놀라 “노! ! 김치!”라고 소리치는 거 있죠. 소란을 듣고 가이드가 달려와 “여기서 김치를 드시면 안 된다”고 하는데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더라고요. 현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김치를 가져간 건데, 그렇게나 에티켓 없는 행동인가요? 해외여행을 할 때 어디까지는 되고, 어떤 행동은 안 되는지 잘 모르겠네요.   

 

■ 여행은 관광 아닌 그 나라 문화체험… 에티켓 지켜주세요

 

아아∼ 여러분. 제 목소리 잘 들리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앞으로 일주일간 여러분의 유럽 여행을 책임질 경력 30년 차 가이드 ○○○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짝짝짝) 긴 시간 비행하느라 힘드셨죠? 주무시고 싶겠지만 저에게 딱 5분만 내주시면 ‘즐겁게 여행하는 법’을 알려드릴게요.


외국 나오면 제일 고생하는 게 음식이죠? 한국에선 절대 내 돈 주고 사먹지 않는 느끼한 음식을 먹다 보면 왜 한국 음식 생각이 나지 않겠어요. 하지만 유럽 식당에선 외부 음식을 반입하는 게 법적으로 금지돼 있어요. 특히 저희한테 친숙한 김치 냄새가 그들에겐 고역일 수 있어요. 유럽 관광객이 한국 식당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 치즈를 꺼낸다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도 눈살 찌푸리겠죠?

그래도 현지 음식을 먹기가 정 힘드시면 냄새가 많이 나지 않는 김이나 고추장 정도 들고 가세요. 그 대신 식당 종업원에게 먼저 양해를 구하는 게 예의겠죠. 호텔에서 라면 드실 때도 마찬가지예요. 라면 냄새가 호텔 방에 밸 수 있으니 먼저 호텔에 취식해도 되는지 물어보는 게 좋아요. 

좋은 거 구경하다 보면 절로 술 생각이 나죠. 캐리어에 소주 많이 챙겨 오셨죠? 하지만 외부 주류도 식당 반입 금지예요. 저희가 한국 식당 갈 때도 슈퍼에서 소주 사들고 가진 않잖아요. 특히 유럽은 엄격해서 식당 쓰레기통에서 초록 소주병이 발견되면 관할 지방자치단체에서 벌금을 부과해요. 그 벌금은 고스란히 저희 여행사가 물어야 해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페트병에 몰래 소주 담아 오시는 분들이 꼭 계신데, 한국인 관광객을 많이 받는 식당들은 그 수법을 다 알아요. 

 

비싼 해외여행, 조금이라도 돈 아끼면 좋죠. 하지만 너무 지나치면 민폐예요. 호텔에서 조식 뷔페 드실 때 보온병에 식당 커피 담아 오시는 분, 빵에 햄이랑 채소 넣은 샌드위치 만들어 들고 나오시는 분들 아직도 있어요


심지어 어떤 분들은 식당에 커피믹스를 챙겨 가 종업원에게 뜨거운 물을 달라고 한 뒤 타 먹기도 해요. 한국에선 공짜로 커피 주는 식당이 있지만 유럽은 그렇지 않아요. 식당에서 커피를 드시고 싶으면 제 값 주고 사먹어야 해요. 현지 커피 맛을 보는 것도 여행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이제 앞으로 모르는 분들끼리 같이 여행 다니려면 서로 배려해야 트러블이 없겠죠? 요즘은 다들 잘 지켜주시지만 시간 약속은 기본이에요. 일정이 밀리지 않아야 최대한 많이 보실 수 있어요. 또 버스 이동이 많다 보니 한 사람이 버스에서 두 자리를 차지하려다가 자리싸움이 벌어지는 일도 간혹 있어요. 지난번엔 좋은 자리 차지하려고 집합 시간 1시간 전부터 버스 앞에서 줄을 서는 해프닝까지 벌어졌어요. 조금 불편하더라도 한 사람이 한 자리씩 앉아 주시면 좋겠어요. 

 

현지에서 만나는 외국 사람들에 대한 예의도 잊지 않았으면 해요.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말하는 건 주변 사람들에게 실례예요. 특히 아이를 부를 땐 본인이 직접 가서 데려오시고, 호텔 방은 방음이 잘되지 않는 곳이 많으니 안에선 소곤소곤 말하는 게 좋아요. 한국에서 하듯이 식당에서 ‘헤이!’ 하고 웨이터를 부르는 것은 실례예요. 조용히 손을 들고 웨이터를 보고 있으면 웨이터가 와요.

그리고 카페나 식당에서 음식이 나왔을 때나 현지인이 문을 잡아 주면 ‘생큐’ 한마디 건네주세요. 영어 쓰는 게 어색하겠지만, 지금 아니면 언제 영어로 말해보겠어요. 만약 길을 가다가 현지인과 부딪치거나 발을 밟았다면 먼저 ‘소리’ 하고 사과하세요. 관광객도 민간 외교관이라잖아요. 

 

※하수엽 모두투어 인솔자, 조용수 온라인투어 유럽인솔자 등의 얘기를 바탕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구구절절 설명했지만 이것 하나만 꼭 기억해 주세요. 여행은 단순히 유명 관광지를 구경하는 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문화를 경험하는 일이에요. ‘이 나라는 왜 이래?’가 아니라 ‘이 나라는 이렇구나’라고 생각하면 더 즐거운 여행이 될 거예요. 그사이 벌써 목적지에 도착했네요. 이제 버스에서 내릴까요?
위은지 기자 wizi@donga.com

 

<26> 직업에도 남여 유별, 이제 그만

“남자가 왜 간호사를 해?”… 억장 무너집니다

 

■ 적성 등 고려해 어렵게 선택한 직업… 색안경 대신 응원을

 

“아이고, 남자가 간호사셔? 어쩌다 간호사가 되셨어? 난 당연히 의사일 줄 알았지.


오늘도 제게 증상을 설명하시던 한 환자분께서 실망한 듯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 이제 익숙해요. 저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 이런 말을 듣는 ‘남자 간호사’입니다.

처음 간호대 입시를 준비한다고 했을 때부터 부모님께서 그러셨죠. “간호대를 간다고? 남자가 의사를 해야지 어떻게 간호사를 하냐?” 친구들 중에는 “여자 만나려고 간호대 가는 거 아니냐”며 놀리는 친구도 있었고요. 심지어 제가 지원한 한 간호대 면접에서조차 교수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남자가 일반적인 회사를 두고 왜 간호사가 되려고 하죠? 

전 제 적성과 직업의 전문성을 고려해 간호사란 직업을 택했을 뿐이에요. 남을 도울 수 있는 일인 게 좋았고, 고령화 시대에 맞는 전도유망한 직업이라고 생각했죠. 외국에는 남자 간호사도 많잖아요. 무거운 환자를 부축하거나 의료장비를 옮기고 발버둥치는 환자를 제압할 때는 확실히 남자의 힘이 필요하죠. 그런데 아직도 ‘남자가 오죽 못났으면’ 하고 색안경을 끼는 분이 많아 씁쓸해요. 저를 ‘남자’ 간호사가 아닌 그냥 간호사로 봐주실 순 없는 걸까요.

 

■ 男요리사, 女전투기 조종사… 男女직업 따로없죠

 

각 소방서에서 체력과 구조능력이 뛰어난 소방관들만 출전하는 ‘최강 소방관 뽑기 대회’. 6월 열린 올해 대회에는 특별한 참가자가 출전했다. 경기 송탄소방서 김현아 소방교(30·여).


무게가 70kg인 마네킹을 옮기고 11층을 뛰어 올라가야 하는 등 험난한 경기 방식 때문에 최강 소방관 대회는 그간 남자 소방관들만 출전해 왔다. 첫 여성 참가자인 김 소방교는 “키가 177cm로 어릴 때부터 체격과 체력이라면 남자에게 뒤지지 않았다. 11층에서 구조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남자들과 똑같이 열심히 뛰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출전 뒤 생각지 못한 주변 반응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대부분 응원을 보냈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자가 억세다”, “별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성적이 하위권이었다는 기사에는 ‘역시 그렇지’, ‘우리 집 불나면 여자 소방관은 오지 마라’란 댓글도 달렸다. 김 소방교는 “급박한 현장에서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고 현장에 따라 여자 소방관이 더 필요한 순간도 있는데 ‘여자가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한다’는 식의 부정적 반응에 속상했다”고 말했다. 

남자 요리사, 여자 전투기 조종사 등 성 고정 관념을 깬 직업인들이 많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특정 직업들에 편향된 시선을 가지고 있다. 이는 청소년들의 꿈에도 영향을 준다. 최근 교육부가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진로 희망을 조사한 결과 남학생이 원하는 직업 13위는 교사, 기계공학자 및 연구원, 군인 순으로 나타났다. 반면 여학생은 교사, 간호사, 승무원 순이었다. 


여러 세대에 거쳐 이런 인식이 만연하다 보니 ‘독특한’ 직업을 선택한 이들은 성차별적인 언행을 접하기 일쑤다. 서울의 한 어린이집에서 일하는 남자 교사 이현직 씨(26)는 언젠가부터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자신의 직업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씨는 “대학에서 유아교육과를 들어갔다고 하자 친척들조차 ‘남자답지 못하다’며 웃음거리로 삼았다. 교사가 된 뒤에도 불편한 시선은 떠나지 않았다. 최근에는 한 여자아이의 부모로부터 “선생님이 아이 엉덩이를 닦는 게 불쾌하다”는 취지의 항의 전화를 받았다. 이 씨는 “여교사가 남자아이의 대소변을 닦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 나는 교사에 앞서 남자로 보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지방에서 아이돌보미로 활동하는 공영철 씨(56)도 여성가족부 건강가정지원센터가 제공하는 이수 교육을 받으러 갔다가 “남자가 왜 여기 있느냐”며 숙덕대는 중년 여성들 틈바구니에서 껄끄러운 열흘을 보내야 했다 


이현혜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교수는 “성에 관한 고정관념은 한번 형성되면 고치기 어렵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올바르게 교육하는 게 중요하다”며 “아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대중매체와 보호자”라고 강조했다.


실제 대중매체에서는 여전히 직업에 대한 성차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지난해 9월 진흥원이 일주일간 6개 방송사의 시청률 상위 드라마 22편을 분석한 결과 회사 임원이나 중간관리자 역할은 대부분 남자(73%)였고, 변호사 의사 등 전문 직업군 또한 여성보다 남성이 많았다. 반대로 요리연구가 백종원 씨가 진행하는 ‘집밥 백선생’ 같은 프로그램은 ‘셰프(전문 요리사)’뿐 아니라 집밥을 만드는 사람도 남자일 수 있다는 인식을 퍼뜨리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교수는 “대중매체에서 성평등 인식을 계속 개선해 나가면서 동시에 부모들에 대한 교육도 확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동안 성평등 교육은 아이들을 중심으로 이뤄져 왔는데, 아이들 스스로 인식을 바꾸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접하는 환경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영국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부모 교육에 더 가중치를 두고 있다”며 “우리도 학교나 직장, 지방자치단체에서 성인들이 성평등 교육과 시민 교육을 접할 기회를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27> 편견에 두 번 우는 이혼가정

아이들 놀림 받을까봐… 이혼전 등본 잔뜩 떼놔

■ 여자에 가혹한 이혼 꼬리표, 죄인은 아닌데…

 

“애를 생각했으면 네가 좀 더 참았어야지. 어쩌자고 애를 두고 이혼을 했어?


오늘도 동창모임에서 전 ‘죄인’이 됐습니다. 지난해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아들을 남편에게 맡긴 채 이혼을 했습니다. 이혼했다는 사실만으로 손가락질을 받는데, 아이까지 두고 나왔다니 사람들은 저를 ‘세상에 둘도 없는 매정한 엄마’로 봅니다.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도 구차해 전 오늘도 “그러게…”라고 말하며 쓴웃음만 지었죠.

이혼까지 이르게 된 제 속사정은 아무도 모릅니다. 결혼 초부터 남편의 경제적 능력은 ‘제로’였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술만 마시려 들었고, 취하면 늘 폭력이 따라왔습니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오는 건 제 몫이었죠. 아이가 클수록 아이 앞에서 얻어맞는 제 모습을 보이느니 헤어지자 싶었습니다. 그 대신 저는 양육비를 벌고 아이와는 일주일에 한 번 접견을 합니다. 

 

그런데도 제겐 늘 ‘자식 버리고 혼자 먹고 사는 여자’라는 꼬리표가 붙습니다. 같은 처지의 남자들에겐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유독 이혼한 여자에겐 더 가혹하죠. 함부로 묻거나 판단하지 말고, 이혼이 누군가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편견 없이 받아줄 수 없는 걸까요.   

 

■ 명절 때마다 ‘불쌍’ 손가락질… 편견 버려주세요

 

“야, 집에 가면 외롭지? 궁상떨지 말고 나랑 술 한잔하자.


결혼 2년 차인 3년 전 이혼한 직장인 김지훈(가명·37) 씨는 퇴근 때마다 건네는 상사의 인사가 늘 당혹스럽다. 이혼남은 언제나 ‘외로운 사람’일 뿐이다. 그렇게 시작된 술자리의 대화는 늘 한결같다. “야, 괜찮아. 요즘 애 없이 이혼한 건 흉도 아니야.” “근데 어쩌다 이혼까지 한 거야?” “돈은 어떻게 나눴어? 결혼은 로맨스지만 이혼은 비즈니스라던데….” 위로랍시고 건넨 말에 김 씨는 두 번, 세 번 이혼의 아픔을 곱씹는다.

누구나 주변에 이혼한 사례가 있을 만큼 이혼이 늘어난 시대다. 오죽하면 요즘 커플들은 결혼 1주년에 혼인신고를 한다고 하지 않나. 호적에 이혼경력을 남기지 않기 위한 일종의 ‘결혼 숙려 기간’이다. 하지만 이혼이 늘었다고 이혼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까지 옅어진 것은 아니다. 

2000년 이혼한 박재영(가명·54) 씨는 지난 18년 동안 가족과 친구들을 서서히 마음속에서 떠나보냈다. 이혼까지 이르게 된 마음의 상처를 봐주기보다 ‘이혼남’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이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박 씨는 “명절 때 가족들이 모이면 누나들은 입버릇처럼 ‘불쌍한 놈’이라고 했고 형수들에게선 ‘학창시절 놀았다던데 그럼 그렇지’ 하며 무시하는 느낌을 받았다”며 “집안 어른들은 ‘집안 망신’이라고 꾸짖는데 지옥이 따로 없었다”고 말했다. 


이혼자들은 직장생활에서도 위축될 때가 많다. 소송과정에서 법정 출석을 위해 부득이하게 결근을 자주 하게 되거나 급여명세 등을 ‘사실조회’하는 과정에서 원치 않게 이혼 사실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4년 전 이혼한 장모 씨는 “회사 승진에서 자꾸 밀렸는데 이혼 여부가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며 “보수적인 기업들은 인사고과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을 한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자녀를 둔 채 이혼한 경우엔 본인뿐 아니라 아이들까지 ‘이혼가정 자녀’라는 낙인이 찍힐까 더 큰 죄책감을 느낀다. 이혼 후 초등학생 딸을 혼자 키우는 서진우(가명) 씨는 “아이가 학교에 입학할 때 제일 불안했던 것은 새 학년을 맞을 때마다 학교에서 실시하는 호구조사”라며 “담임선생님이나 주변 엄마들이 우리 딸에 대해 편견을 가질까 봐 전전긍긍했다”고 말했다. 이혼 1년 차를 맞는 이모 씨(33·여)는 “증명서를 낼 일이 생기면 아이가 위축될까 봐 일부러 이혼 전 등본을 잔뜩 떼놨다”며 “그런데도 누가 ‘어른한테 똑바로 인사를 해야지’라고 아이를 훈계하면 나도 모르게 신경이 날카로워진다”고 털어놨다. 

 

이혼전문 한승미 변호사는 “가정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누구나 이혼이 특정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갈등이란 것을 안다”며 “그럼에도 남의 가정사에 대해 쉽게 말하고 그 가정의 아이들에게까지 편견을 갖는 것은 일종의 가혹행위”라고 말했다. 이어 “술자리든, 엄마들 모임에서든 남의 가정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은 곧 내 가정을 두고도 사람들이 쉽게 얘기할 수 있다는 뜻”이라며 “이혼을 내 가족이 겪을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다른 이의 사생활을 존중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 곳곳에서 이혼 등으로 인한 한부모 가정을 배려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6세 아들을 키우는 싱글맘 김모 씨는 “여섯 살 아들을 여탕에 데려갈 수도, 그렇다고 남탕에 혼자 보낼 수도 없어 올여름 폭염 속에서도 수영장 한 번 데려가지 못했다”며 “엄마나 아빠가 없는 아이들이 위축되지 않도록 사회가 더 많이 배려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지훈 easyhoon@donga.com·김수연 기자

 

<28> 배려는 없고 덩치만 커진 기부

■ 기증하는 중고품은 친한 친구에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세요

기부는 사랑입니다. 그 형태가 돈이든, 물건이든, 재능이든, 내가 가진 걸 나눠 남을 도우려는 마음은 아름답죠. 하지만 제가 일하는 곳에서 마주하는 기부의 현실은 종종 실망스럽습니다. 어디서 일하냐고요? 전 기부물품으로 들어온 재활용품을 분류하는 작업장에서 일해요.

 

쓸 수 있는 물건을 남과 나누고, 재활용으로 환경도 보호한다는 점에서 물품 기부는 계속 늘어납니다. 문제는 들어오는 물건 중 반 이상은 사실상 ‘쓰레기’에 가깝다는 점이에요. 오늘도 입던 속옷을 빨지도 않고 보낸 분부터 구멍 난 양말, 색 바랜 수건, 학원 이름이 적힌 태권도 도복을 보낸 분까지 있네요. 도시락통을 여니 썩은 음식물이 들어 있고 텀블러엔 음료 자국이 그대로고요. 분류작업을 하다 기증된 옷 속에 딸려온 커터 칼에 손이 베인 적도 있어요. 이 정도면 기부물품이라기보다는 폐품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중고품을 기증할 때 뭘 보내야 할지 잘 모르겠다면 ‘내 친한 친구에게 주는 물건’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기부의 예절이 자리 잡으면 우리도 선진국처럼 재활용 문화가 발달할 수 있을 텐데 말이죠. 

  

■ “어려운 아이 도왔다” 사진까지 공개하는 ‘후원 갑질’ 이제 그만

 

기부물품이 담긴 상자를 여니 30년 전에나 팔렸을 법한 펑퍼짐한 은갈치색 정장 한 벌이 나타났다. 목 부분에 색조 화장품이 묻은 흰색 맨투맨 티셔츠, 소변 자국 때문인지 사타구니 부분이 노랗게 변한 남색바지도 나왔다. 아…. 이걸 어떻게 다시 쓸 수 있겠나. 안타깝게도 쓰레기로 분류되는 기증품만 자꾸 쌓여갔다.


지난달 30일 본보 기자가 서울 성동구의 재사용작업장 의류분류장을 찾아 직접 기증 의류를 분류해봤다. 10년 전에 비해 국내 기부문화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지만 그 질에 있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지적 때문이다. 이날 들어온 의류는 2만 점 이상. 하지만 10점 중 7점 이상이 ‘폐기물’로 실려 나갔다.

물건 재사용을 통해 공익활동을 지원하는 ‘아름다운 가게’에는 지난해 2200만 점의 중고기부물품이 들어왔다. 3년 전에 비해 20%가량 늘어난 수치다. 물건을 보내온 기증자 수는 더욱 빠르게 늘어 지난해 기준 46만 명을 넘어섰다. 3년 전에 대비 2배가량 늘어난 수치다. 물품을 기부하면 기부영수증을 받을 수 있고 소득공제가 가능하다 보니 폭발적으로 기증이 늘었단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쓸모없는 물건이 태반이다 보니 폐기율은 3년 전 4555%에서 최근 70%까지 늘어난 상태다.

권태경 아름다운가게 되살림팀 간사는 “한 번만 씻거나 세탁해서 보냈으면 쓸 수 있는 물건들이 참 많은데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많은 물건이 버려지는 형편”이라고 아쉬워했다. 서울의 한 구청 관계자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헌옷 수거함’도 최근 쓰레기통처럼 전락해 없애는 추세”라고 말했다.

배려가 부족한 기부는 물품 기부에서만 관찰되는 게 아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금전이나 재능을 기부할 때도 신경을 써야 하지만 무심한 경우가 많다. 올해 초 학교에서 끝내 울음을 터뜨린 초등학생 A 군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A 군을 후원하는 지역의 한 독지가가 지역 인터넷에 김 군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면서 A 군 친구들 사이에 그가 ‘후원 아동’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독지가는 김 군이 조손 가정에 이르게 된 개인사는 물론이고 얼굴과 학교, 이름까지 그대로 노출했다

A 군을 담당하는 복지사는 “아이들은 감수성이 예민해 친구들에게 ‘후원 아동’이라는 걸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며 “후원자들이 자신의 후원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이런 걸 노출하면 정말 난감하다”고 말했다. ‘나는 기부자’라는 기분에 도취돼 자칫 기부를 받는 이들의 자존감에 오히려 상처를 주는, 이른바 ‘기부 갑질’을 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기부자뿐 아니라 기부를 받는 자선단체도 올바른 기부문화를 위한 ‘기부예절’을 지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업계에서 소위 ‘빈곤 포르노’라 부르는, 빈곤이나 질병으로 곤경에 처한 이들의 상황을 자극적으로 등장시켜 경쟁적으로 후원금을 얻어내는 광고 방식이 대표적이다 


직장인 지모 씨(36)는 “길거리를 지나는 시민들을 가로막고 ‘스티커 붙여주세요’를 외치며 기부단체 홍보를 하는 것도 불편한 기부문화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한상욱 밀알복지재단 굿윌본부장은 “기부 물품 분류·판매를 발달장애인들이 담당하기 때문에 기부 그 자체가 장애인들의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는 셈”이라며 “기부자들이 직접 매장에 와 현장을 보면 기쁨도 커지고 더 좋은 기부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위은지 wizi@donga.com·이지훈 기자  

 

<29> 한국식 과잉 의전은 이제 그만

교수님 좋아하는 간식까지 의전?… 심하지 않나요

 

■ 일 못하는 것보다 의전 안챙기면 용서 못한다네요

 

‘이동 시엔 귀빈으로부터 좌전방 1보 거리를 유지한다. 시선은 귀빈의 표정과 진행 방향을 볼 수 있는 45도를 향한다. 이어지는 테이프 절단식에 앞서 흰 장갑을 전달할 때는 오른쪽 장갑이 위로 올라가도록 한 뒤 손목 부분이 보이게 전달한다….


이벤트 전문회사에 입사한 첫날, 부장님은 제게 ‘행사 의전 기본 매뉴얼’이라고 적힌 책 한 권을 건네셨습니다. 장편소설 한 권 분량의 이 문서에는 ‘귀빈’의 서열 판단 기준부터 안내 방식, 자리 배치는 물론이고 꽃장식의 방향까지 적혀 있더군요.

“요즘 이런 걸 따지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이 매뉴얼을 꼭 따라야 해요?” 부장님께 ‘유연한 의전’을 건의하자 바로 불호령이 떨어졌어요. “자네 미국 사람이야? 한국에서 이런 걸 지키지 않으면 일감 끊기는 건 시간문제라고!

 

다른 회사에 다니는 친구에게 고충을 토로하자 웬걸, 친구조차 부장님 편을 들더군요. 자기 회사에서도 ‘일 못하는 놈은 용서해도 의전 안 챙기는 놈은 용서받지 못한다’면서요. 이런 과도한 의전도 예절의 일부인 건가요?   

 

■ 배보다 배꼽이 큰 인력과 비용 낭비… 이젠 바뀌어야

 

대학원 졸업생 박지훈(가명·32) 씨는 일찍이 20대에 ‘의전의 달인’이 됐다. 연구실 조교 생활을 하며 ‘교수님 의전 매뉴얼’을 완벽히 익혔기 때문이다. 박 씨는 “한국의 대학원생에게 연구보다 중요한 게 교수님을 잘 모시는 것”이라며 “교수님이나 그 가족들 공항에서 태워오기, 자녀 숙제 돕기, 교수님이 좋아하는 간식 준비하기 등은 기본”이라고 말했다.


국내 유명 대기업에 다니는 김모 씨(38)는 입사 당시 받은 충격을 잊지 못한다. 선배들이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일명 ‘손가락 주걱 신화’를 들려주며 의전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기 때문이다. 손가락 주걱 신화란 윗사람이 구둣주걱을 찾는데 보이지 않자 자신의 손가락을 상사의 구두 속에 넣은 직원이 훗날 임원으로 승승장구했다는 이야기다. 김 씨는 “이런 얘기가 어처구니없었지만 현실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게 더 충격적이었다”고 했다. 

해외 주재원들의 업무는 ‘절반이 의전’이라는 말도 있다. 유럽 지역 주재원이었던 박모 씨(32)는 “입맛이 까다로운 임원의 방문을 앞두고 한 끼 식사를 위해 식당 3곳을 동시에 예약한 적이 있다”며 “예약을 취소하면 페널티가 있어 나머지 두 식당에는 직원들이 갔다. 의전을 위해 낭비되는 비용이 너무 크다”고 말했다.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을 보며 조깅을 하고 싶다는 한 대기업 부사장을 위해 현지 직원이 호텔 객실에 트레드밀(러닝머신)을 설치했다는 일화는 주재원 세계의 전설로 통한다.

 

과잉 의전이 여전히 극성을 부리는 곳은 정계와 관가다. A국회의원실에서 일하는 강주희(가명) 씨는 황당한 의전 경험을 숱하게 겪었다. 최근 중요한 현안을 두고 전문가 토론을 열었는데, 토론이 한창일 때 한 국회의원이 지각 입장을 했다. 그러자 사회자는 “귀한 발걸음 해주신 의원님의 인사말을 듣고 다시 토론을 이어 가겠다”며 토론을 중간에 싹둑 잘라 먹었다. 

그렇게 식순을 비집고 들어온 의원은 축사를 한 뒤 10분 남짓 자리에 앉아 있다가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행사장 밖에선 의원이 오기를 기다리며 오랫동안 잡아둔 승강기에서 계속 ‘삑삑’ 소리가 울렸다. 강 씨는 “VIP 간에도 서열이 있어 상급자가 하급자보다 행사장에 먼저 도착하면 위신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며 “제일 마지막에 등장하기 위해 차를 타고 행사장 주위를 빙빙 돌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런 문화로 행사의 주객이 전도되는 일은 흔하다. 매년 열리는 한 시상식을 기획하는 최모 씨는 “시상식의 주인공은 수상자들이어야 하는데, 행사 때마다 가장 힘이 드는 건 ‘내빈 의전’”이라며 “초청 순간부터 주차장에서 행사장까지 동선이나 내빈 호명 순서 등을 묻는 VIP 비서들의 전화에 응대하느라 다른 업무를 하지 못할 정도”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 전반에 뿌리 내린 과잉 의전 문화가 조직에는 물론이고 의전을 받는 당사자들에게도 ‘독’이 된다고 지적했다. 본인도 모르게 타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갑질 인사’로 전락할 수 있어서다. 과잉 의전을 받다 은퇴하면 적응에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고위직을 지낸 이모 씨는 “퇴직하고 나니 내 비행기표 한 장 예매하기도 힘들더라”고 말했다. 

 

기업들도 임원 의전을 줄이는 추세다. 해외출장이 잦은 회사로 이직한 장기원(가명·34) 씨는 “전 직장과 달리 ‘임원 동행 출장 시 각자 체크인 뒤 현지 공항에서 만남’이란 문구를 명문화해 놓은 것을 보고 놀랐다”며 “짐 옮기기, 체크인, 면세점 쇼핑 보조 등 업무와 상관없는 의전이 줄다 보니 업무에 더 집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의전의 민낯’이란 책을 쓴 허의도 전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사무총장은 “아랫사람이 먼저 과잉 의전을 없애기 힘든 만큼 윗사람이 먼저 폐단임을 인식하고 달라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올해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내빈 축사 및 소개 생략’ ‘자율배석제’ 등을 통해 행사에 필요한 의전을 최소화하겠다고 밝히기도 했.

황태호 taeho@donga.com·김수연 기자

 

<30 > 명절 앞두고 커지는 벌초 고민

■ 조부-증조부… 어느 분까지 해야 하나요

 

추석이 한 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긴 연휴에 설레면서도 한편으로 심란합니다. 벌초 때문입니다.


올해 초 돌아가신 아버지를 유언에 따라 선산에 모셨습니다. 지난 주 추석을 앞두고 생전 처음 벌초를 하러 갔죠. 차로 4시간을 달려 선산에 도착했는데, 풀이 어찌나 우거졌는지 산소로 올라가는 길을 못 찾겠더군요. 겨우겨우 풀숲을 헤집고 올라가서는 경악했어요. 아버지 묘는 물론이고 할아버지 할머니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그리고 이름 모를 조상님들 묘가 온통 잡초더미로 엉망이더라고요. 도저히 혼자 벌초할 규모가 아니었어요. 

 

외동이라 형제도 없고 연락할 친척도 마땅치 않아 막막했습니다. 벌초 대행업체에 문의하니 우리 선산 규모면 100만 원 이상 든다더군요. 어쩔 수 없이 아버지 묘만 겨우 벌초하고 내려왔는데 기분이 영 찜찜했어요. 저는 어디까지 벌초를 해야 예를 다하는 걸까요? 내년 추석이 벌써 걱정입니다.  

 

■ 사위는 처가 묘 벌초하면 안되나 

 

추석 때면 집집마다 벌초 고민이 적지 않죠? 민속문화 전문가이자, 유교 전문가이자, 장례 전문가이자, 벌초 전문가인 저 ‘추성묘’가 지금부터 여러분들의 고민을 시원하게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일단 벌초가 무엇인지 봅시다. 사실 벌초는 틀린 용어입니다. 성묘가 맞아요. ‘살필 성()’에 ‘무덤 묘(), 말 그대로 묘를 살핀다는 뜻이죠. 여름엔 풀도 많이 자라고 비도 많이 오잖아요. 추석 전에 친지들이 모여 조상의 묘에 우거진 풀을 뽑고 무너진 흙을 정비하던 풍습에서 유래했죠. 효심을 표하고 가족 간 정을 다질 수 있는 좋은 전통입니다. 

문제는 저출산 핵가족으로 요즘은 어느 집이나 벌초할 자손이 적다는 점입니다. 친척들에게 연락해 함께 벌초할 가족공동체를 되살리면 좋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죠. 만약 벌초 대행업체에 맡길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부모님뿐 아니라 자신이 추억을 가진 조부모나 증조부모 묘까지 벌초를 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렵다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조상님들도 그 마음은 이해하실 거예요.

딸만 있는 집은 걱정이 더 많죠? 얼마 전 제가 만난 주부 한정숙(가명·41) 씨는 벌초 문제로 남편과 한바탕하셨더군요. 남편에게 친정아버지 묘 벌초를 부탁했더니 남편이 “한국 문화에선 처가나 외가의 벌초는 안 하는 게 불문율”이라고 했다는군요. 자신은 매년 남편 집 제사상을 차리는데 이렇게 말하는 남편이 얄미운 것도 당연하죠.

 

더욱이 우리 문화에 ‘처가나 외가 벌초를 안 한다’는 룰은 전혀 없습니다. 어떤 일을 대충할 때 ‘처삼촌 묘 벌초하듯 한다’는 속담이 있죠? 마음은 없을지 몰라도 그만큼 예전엔 처삼촌 벌초를 많이 했다는 방증입니다. 유교가 들어오기 전 한국은 처가살이 문화였습니다. 심지어 조선시대 문헌에도 퇴계 이황 선생이 장인어른의 벌초를 하고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벌초 방식을 두고 부모와 자식 세대가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얼마 전 직장인 김정현(가명·36) 씨는 벌초 때문에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녹다운이 됐다더군요. 김 씨 어머니는 벌초 대행은 불효라며 “네가 안 하면 내가 직접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답니다. 그러면서 일방적으로 벌초 날짜를 잡아 며느리랑 손주의 대동을 명했다는 겁니다. 이에 아내는 “벌도 있고 뱀도 있는 땡볕 산에 왜 세 살짜리를 데려가야 하느냐”며 버텼대요. 

 

이런 갈등, 요즘 흔하죠. 이건 서로 이해하는 수밖에 없어요. 이 세상 부모님들, 요즘 젊은이들이 워낙 바쁘기도 하지만 초보에게 벌초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예초기가 워낙 무겁고 위험해 하루 종일 벌초를 하고 나면 다음 날 팔이 덜덜 떨려 숟가락질도 못해요. 벌에 쏘이는 사고도 많고요. 그래서 벌초 대행이 이제는 일반화됐어요. 지난해 농협·산림조합의 대행 건수만 55000건에 달해요. 5년 전의 2배예요. 사설 업체도 500곳이 넘어요. 

 

벌초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가족이나 문중 차원에서 ‘결단’을 내려야 해요. 선산 일부를 팔거나 돈을 모아 묘를 개장한 뒤 가족 납골당을 만들거나, 관리를 대신 해주는 공원묘지로 옮기는 거죠. 우리 문화에서 가장 큰 불효는 ‘묵뫼’(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거칠게 된 묘)를 만드는 건데, 앞으로 상당수 묘가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아요. 농촌에 젊은이가 없어 벌초 대행도 오래 못 가요.

앞으로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잘 의논해 공원묘지 안에 가족 단위로 조성이 가능한 선산 형태의 장지를 만들어야 해요. 그래야 국토 관리의 숙제인 ‘무덤 산’이 줄어들어요. 화장(火葬) 문화가 일반화된 만큼 자기 집 화단이나 자투리 땅 등 가까운 곳을 장지로 활용하는 것도 좋아요. 일본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어요. 어차피 죽음은 삶의 일부니까요. 

임우선 imsun@donga.com·유원모 기자

  

<도움말 주신 분들> △김미영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박복순 전 한국장묘문화개혁범국민협의회 사무총장 △박종천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 △방동민 성균관 석전대제보존회 사무국장 △이필도 을지대 장례지도학과 교수 △정혁인 한국장례문화진흥원 정책기획부장 △농협중앙회 △산림조합중앙회 △벌초대행업체 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