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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역사12/ 기업가 열전/ <1> 이범택 크린토피아 회장 - <31> 김재철 에스텍파마 사장

상림은내고향 2021. 5. 11. 21:32

기업의 역사12/ 기업가 열전 동아일보 김상철 기자  박경모 기자

2015-03-18

<1> 이범택 크린토피아 회장

“빨래로부터 주부 해방” 세탁 산업화 선도 

/이범택 크린토피아 회장이 세탁공장을 찾아 다림질 공정을 마친 와이셔츠를 살펴보고 있다.

 

세탁을 통해 깨끗한 세상, 풍요로운 생활을 만들겠다는 의지로 세탁사업에 나선 지 23. 크린토피아를 설립한 이범택 회장(63)은 세탁을 산업화해 주부가 힘들어하는 세탁과 다림질에서 해방되도록 세탁문화를 바꾼 주인공이다. 세탁 프랜차이즈 1위 업체인 크린토피아는 전국 135개 세탁공장에서 2285개 가맹점이 접수한 세탁물 30만 점을 매일 처리한다. 본사와 가맹점 종사자가 6000명에 이른다.


○ “직장생활 미래없다” 3년만에 대기업 퇴사 

이 회장은 한양대 섬유공학과를 마치고 럭키( LG화학)에 다니다 회사 생활이 자신의 꿈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입사 3년 만에 사표를 냈다. 아내와 부모가 말렸으나 사업을 하고 싶다고 끈질기게 설득해 무언의 동의를 얻었다.

10년 후 내 모습을 떠올려 봤어요. 잘하면 부장, 아니면 본부장? 상사를 보면서 내 길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대학 선배로부터 의류 수출이 괜찮다는 얘기를 듣고 사업에 나섰다. 선배가 도와줘 큰 납품 주문을 받았지만 품질과 납기를 못 맞춰 투자비를 몽땅 날렸다. 옷 한 벌 만드는 데 원단이 얼마나 드는지, 통관은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초짜였다.

“사업 실패로 음식물을 못 삼킬 만큼 스트레스가 심했어요. 잘 알고 잘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지요. 

 

절치부심하던 이 회장은 섬유와 염료의 특성을 제대로 알고 가공하는 염색업체가 없다는 얘기를 지인에게 듣고 기회라고 생각했다. 부모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한때 포목점을 했던 아버지는 자녀(2 2)의 학비를 대느라 몇 마지기 남지 않은 농지를 담보로 자금을 대줬다. 1986년 경기 김포에서 축사를 개량한 공장 50평을 월세로 빌려 중고 기계 3대를 설치했다.  

벼랑 끝에 선 이 회장은 기술 개발에 승부수를 걸었다. 줄어들지 않는 울 제품 염색법을 선보이자 기술이 좋다는 소문이 퍼졌다. 대기업에 있던 선배가 탈색한 수출용 청바지 쪼가리를 주면서 만들 수 있느냐고 물었다. 코피를 쏟고 밤을 새우며 한 달간 매달린 끝에 스톤 워싱으로 얼룩덜룩한 ‘스노우 진’을 개발했다. 

청바지 업체들이 제품을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양산하려면 외국산 뜨는 돌이 많이 필요했으나 살 돈이 없었다. 리바이스로 유명한 한주통상이 선뜻 2억 원을 내놔 기계 3대를 추가하고 공장을 경기 성남으로 옮겼다. 풀가동해도 모자랄 정도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500원에 ‘세탁+다림질’ 서비스로 도약 

이 회장은 의류 트렌드를 보려고 이탈리아에 갔다가 청바지가 사양길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른 사업 아이템을 찾다 일본에서 본 세탁편의점에 꽂혔다. 1992년 세탁사업부를 발족하고 공장 한쪽에 세탁기계를 설치했다. 세탁물을 접수하는 가게를 열고 프랜차이즈 사업에도 나섰다.  

세탁물의 종류, 소재, 형태가 다 달라 힘이 들고 예상보다 적자 규모가 커지자 세탁사업을 접을까 고민했다. 이 소식을 듣고 한국전력에 다니던 동생(이범돈 크린토피아 사장)이 집에 찾아와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졸랐다. 그러면 내가 손을 못 뗀다며 만류하다가 사업 전망을 믿고 동생을 받아들였다. 이때 이 회장이 세탁사업의 미래를 제대로 내다보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크린토피아는 없었을 것이다.


○ 글로벌 세탁 전문기업을 향해 

세탁업은 설비와 물류를 갖추는 데 자금이 많이 드는 장치사업이라 초기 5년간 적자를 내며 고전했다. 오랜 연구와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세탁과 건조, 다림질은 물론이고 세탁물을 가맹점별로 분류하는 자동화 시스템을 완성해 생산성을 크게 높였다. 외환위기 시절 500원에 와이셔츠를 세탁해 다림질까지 해주는 서비스로 시장 공략에 나섰다. 폭발적인 반응에 힘입어 성장 가도를 달렸다. 

 

이 회장은 업계에서 처음으로 항균세탁, 하루 3회 배송, 의류 보관 서비스를 도입하는 등 고객에게 더 좋은 세탁 품질과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1, 2인 가구가 증가하고 캐주얼 의류 확산으로 물세탁 수요가 늘어나자 세탁편의점과 코인빨래방을 합친 세탁멀티숍 ‘크린토피아+코인워시’를 선보였다. 

이 회장은 중국에 상표 등록을 하고 제휴를 추진하는 등 해외 진출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최고의 기술력을 가진 글로벌 세탁 전문 기업, 그의 꿈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2> 정우현 MPK그룹 회장

300% 레시피’ 개발… 피자를 국가대표 브랜드로

/정우현 MPK그룹 회장이 매장을 찾아 직원에게 운영 상황을 들은 뒤 격려하고 있다.

 

1호점을 신호탄으로 대한민국 1등 브랜드로 우뚝 서겠다.

 

정우현 MPK그룹 회장(67) 1990년 이화여대 앞 미스터피자 개점식에서 밝힌 목표다. 피자가게 하나 내고 1등 운운하자 애써 웃음을 참는 참석자도 있었다. 그로부터 18년 뒤 미스터피자는 기름기 없는 수타 피자를 앞세워 국내 시장을 선점하고 있던 다국적기업을 제치고 업계 1(점포 수 기준)에 올랐다. 미스터피자는 국내 450여 개, 중국 미국 등 해외에 70여 개 매장을 두고 있다. 외식업종에서는 처음으로 지난해 세계일류상품에 선정됐다.


○ 동대문시장서 섬유도매로 사업 첫발 

1974년 학군단(ROTC) 장교로 군 생활을 마친 정 회장은 아내의 권유에 따라 입사가 예정됐던 금융회사 대신 장인이 막 인수한 서울 동대문시장의 섬유제품 도매업체 천일상사에 들어갔다. 가게를 맡겨 주면 시장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도매상으로 키우겠다고 장인을 설득해 승낙을 받았다. ‘퇴직금 지급 점포’라고 쓴 액자를 매장에 걸고 봉급 없이 주인집에서 먹고 자며 일하던 점원들에게 월급은 물론이고 퇴직금까지 주겠다고 약속했다. 10년 후 사장이 되라”며 주인의식도 갖게 했다. 점원을 믿지 못해 주인이 화장실도 맘대로 못 가던 시절 기를 살려주자 종업원들은 정성을 다해 고객을 맞았다.

“아마추어는 돈을 벌지만 프로인 ‘꾼’은 사람을 벌어요. 아마추어는 주는 것을 손해라고 생각하지만 꾼은 선뜻 줍니다. 하나를 주면 그 이상을 받게 됩니다.

 

정 회장은 거래처에 줘야 할 돈은 달라고 하기 전에 주고, 받아야 할 돈은 상대방의 사정을 감안해 최대한 늦게 받았다. 소매상이 보내온 돈이 한 푼이라도 많으면 즉시 알리고 돌려보냈다. 받아갈 돈이 적은 사장에게는 “세어 가져가시라”며 아예 돈 통을 맡겼다. 신용이 쌓이자 단골이 늘면서 매장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그는 천일상사를 연매출 100억 원이 넘는 도매상으로 키워내 장인과의 약속을 지켰다.

성장을 거듭하던 사업이 호황기를 지나면서 수익성이 나빠지자 정 회장은 다른 사업을 모색했다. 그러다 일본 미스터피자가 한국에 진출하기 위해 파트너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생각한 그는 호소카와 요시키 미스터피자 저팬 사장을 만나 한국 영업권을 따냈다. 

한 달 넘게 하루 세 끼를 피자로 때우며 전국 피자집을 찾아 배운 뒤 이화여대 앞에 1호점을 냈다. 기존 피자가게와 달리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주방에서 ‘300% 원칙’으로 만든 기름기 없는 담백한 피자는 돌풍을 일으켰다. 300% 원칙이란 저온 숙성한 도(dough)를 이용한 100% 수타, 토핑 재료를 일일이 손으로 얹는 100% 수제, 기름을 안 쓰는 100% 석쇠구이를 뜻한다. 조리가 어려워 불가능하다던 새우나 감자를 토핑한 피자도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개발했다.  


○ 미스터피자 돌풍… 해외매장도 70여개 

1997년 외환위기가 생기자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고 환율과 대출 금리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다. 치즈와 밀가루는 현금을 줘도 구하기 어려웠다. 어음 거래가 중단되고 은행 대출도 안 되자 건물을 팔아 급한 불을 껐다.  

“이대로 가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곤 했어요.

속이 타들어갔으나 자신만 쳐다보는 직원들을 의식해 의연하게 행동했다. 퇴직자가 늘면 창업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보고 위기를 기회로 활용했다. 가맹비 3000만 원을 안 받는다는 광고를 내면서 점포 확장에 나섰다. 신청자가 몰렸다. 1999 100호점을 돌파하고 2000년 중국, 2007년 미국 등 해외 시장에도 진출했다.

MPK
그룹의 사훈(社訓)은 ‘신발을 정리하자’이다. 피자를 배달하러 간 고객 집의 신발들이 흩어져 있으면 자연스레 몸을 낮춰 정리해줄 만큼 고객에 대한 정성이 몸에 배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맹점을 ‘가족점’으로 부르는 정 회장도 매장에 가면 화장실을 둘러보고 지저분하면 문을 잠그고 손수 청소한다

 

“성공하려면 을()이 돼야 합니다. 성공은 주변 사람이 도와준 결과예요. 우위에 있다고 갑()처럼 행동하는 순간 실패가 시작됩니다. 

일본에서 시작한 미스터피자를 인수해 해외에서 로열티를 벌어들이는 국부 브랜드로 만든 정 회장은 세계 1등을 향해 뛰고 있다. 창업 18년 만에 국내 1위 업체로 키운 노하우와 돌파력을 보면서 그의 꿈이 이뤄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

<3>류덕희 경동제약 회장

의약품 국산화 ‘뚝심 40년’… 10여국에 약-원료 수출

/류덕희 경동제약 회장은 “찾으면 길이 있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해결된다”고 말했다.

 

“회사를 창업한 1970년대 국내 제약회사의 주업은 대부분 외국 약을 수입해 파는 거였어요. 수입 약이 비싸 아파도 못 사 먹는 사람이 많았지요.

류덕희 회장(77)은 좋은 약을 싸게 공급하겠다는 일념으로 경동제약을 창업한 뒤 수입약품 국산화에 나섰다. 골리앗 같은 다국적 제약회사가 특허를 무기로 시장 진입을 막는 바람에 국내 간판급 제약회사들조차 기술 제휴나 합작을 통해 약품을 만들던 때였다.

 

○ 국산 무좀 진균치료제 첫 개발

그는 굴하지 않고 무모하게 보이는 제약 사업에 도전해 어려움을 하나씩 이겨냈다. 다른 회사가 수입약품을 팔 때 원료를 들여와 국산 약을 만들고, 다른 회사가 의약품 원료를 수입할 때 원료를 자체 개발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제약업계에서 세 번째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류 회장은 성균관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화학 박사를 꿈꿨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60 4·19혁명 때 문리대 학생회장이던 그는 대학 대표로 4·19의거학생대책위원회에 참여하고 데모를 주도했다. 이를 문제 삼아 교수들은 “대학원이 정치에 물들면 안 된다”며 진학을 반대했다.  

미련 없이 입대한 그는 제대 후 부친의 도움을 받아 도장과 인주를 넣는 플라스틱 용기를 위탁 생산해 결혼식 답례품으로 파는 사업을 했다. 총판들은 물량을 조금씩 늘려 가져간 뒤 대금을 떼먹고 잠적했다. 사기를 당해 투자비도 몽땅 날렸다.

 

“사업을 하려면 그 분야를 잘 알아야 합니다. 특히 경험하는 게 중요해요.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만 보거나 들어 아는 얕은 지식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실패하지 않으려면 경험과 지식을 함께 갖춰야 한다는 것을 배웠어요.

공무원으로 일하다 사업 실패에 따른 스트레스에 장출혈까지 겹쳐 입원했다. 병문안을 온 친구가 “제약업을 함께 해 보자”고 제안했다. 기업가의 꿈을 버리지 못한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친구들과 1969년 ‘선경제약’을 세워 부사장을 맡았다. 약품 총판사업으로 짭짤한 수익을 냈으나 친구와 회사 경영에 대한 견해차가 커 그만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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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간 제약 사업을 경험한 류 회장은 1975년 동료 4명과 자본금 500만 원으로 ‘유일상사’를 설립했다. 직원과 같은 액수의 월급을 받고 직원들에게 주식도 나눠주는 등 임직원이 함께 키우고 성과도 나누는 공동체 같은 회사를 지향했다.

“인색하게 이윤을 따지기보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양보하면 더 큰 성과를 얻고 주위도 밝아져요. 

서울 광화문 인근 사무실에 책상과 전화 한 대만 놓고 수입약품 파는 일을 시작했다. 3개월 뒤 인천 부평공장과 부도난 제약회사의 의약품 제조업 허가권을 사들였다. 회사 이름도 ‘경동제약’으로 바꿨다. 약품 제조에 나서 1976년 무좀 진균치료제(톨나프 액)를 처음으로 내놓았다. 종합비타민제 등 연질캡슐 제품에 이어 100% 수입에 의존하던 고혈압 치료제 등 주사제도 개발해 출시했다.  

“초기에 수입약품의 국산화가 가능하겠느냐는 의견이 많았어요. 누군가 먼저 만들었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고 설득했죠. 

류 회장은 주사제를 개발하면 임상시험 대상을 자처해 먼저 맞아 보는 등 연구에 온 힘을 보탰다. 약품 국산화에 필요한 원료를 확보하기 위해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남미까지 찾아가고, 기존 거래처 외에는 팔지 않는다는 독일 제약회사를 끈질기게 설득해 원료를 구입하기도 했다. 약 생산 품목이 외용제에서 캡슐제, 주사제, 정제 등으로 늘어나면서 약국 중심이던 거래처를 병의원으로 확대했다.  


○ 다국적기업 “로열티 팔라” 제의 거절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1984년 부평공장에 불이 나 생산시설과 자재를 못 쓰게 됐다. 임직원이 한마음으로 복구에 나서고 소실되지 않은 완제품을 팔아 한 달여 만에 공장을 재가동했다. 특허가 끝나지 않은 원료를 다른 제조법으로 만들어 약으로 내놓자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소송을 걸어 왔다. 10여 차례 소송을 당했으나 뚝심으로 맞서 모두 이겼다. 경동제약의 새 특허를 양도하면 로열티로 수십억 원을 주겠다는 제의를 거절하기도 했다.

경동제약은 일본 파키스탄 등 10여 개국에 의약품 원료와 약을 수출하고 개량 신약을 내놓는 중견 제약회사로 성장했다. 올해 9월 창립 40주년을 맞는다.

 

“대기업이라고 모든 제품을 만들 수는 없어요. 틈새시장은 어디든 있어요.

인류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시장이 크지 않더라도 꼭 필요한 약을 만들어 강한 치료제 전문 제약회사로 키우겠다는 류 회장의 다짐은 현재진행형이다
.

 

<4>홍완기 홍진HJC 회장

재봉틀 몇대로 시작… 세계 헬멧시장 석권 

/홍완기 홍진HJC 회장이 고급 오토바이 헬멧인 ‘알파 10’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오토바이 헬멧 만드는 것만이라도 일본 기업을 이기자.

요즘에는 일본 기업과의 경쟁에서 앞서는 한국 기업이 적지 않다. 하지만 홍완기 홍진HJC 회장(75)이 창업해 해외시장을 개척하던 1970, 80년대만 해도 한국 제품은 일본 제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질이 낮았다. 홍 회장은 앞장서서 신제품 개발을 이끌며 직원들을 독려했다.

“일본과의 축구경기나 권투경기에서 패하면 열을 받으면서 한국 기업이 일본 기업에 지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게 싫었어요. 

그로부터 27년 뒤 홍진HJC의 오토바이 헬멧은 일본 제품을 제치고 세계 시장 점유율 1위에 올랐다. 세계 60여 개국에서 연간 200만 개가량 팔린다. 세계 일류 상품으로 수출 비중이 95%를 넘는다. 홍진HJC 15년째 세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히든 챔피언이다.

충남 논산시 농가에서 7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난 홍 회장은 강경상고 졸업 후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대학 진학을 못하게 되자 무작정 상경했다. 우유 배달과 생수 판매로 학비를 마련해 한양대 공업경영학과(현 산업공학과)에 다녔다. 그는 취업 대신 사업의 길을 택했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게 지상과제였어요. 그러려면 상품을 만드는 사업가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농사는 열심히 지어도 1년에 1회전밖에 못 해 큰돈을 벌기 어렵고 월급쟁이는 더 그렇잖아요. 

1971
년 재봉틀 몇 대로 봉제품을 만드는 홍진기업을 세웠다. 초창기에는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이 입는 가죽옷, 마스크, 토시 등을 생산했다. 헬멧 내장재를 납품하다 알게 된 ‘서울헬멧’이 경영난에 처하자 친인척에게 돈을 빌려 1974년 인수했다.

“오토바이 헬멧은 생명을 보호하는 장비여서 만들면 보람이 크고 인체공학도 필요해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봤어요. 

1978
년 국내 1위를 차지했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미국 시장을 두드렸다. 바이어들은 국제 규격에 못 미치는 강도와 무게, 서양인 두상에 맞지 않는 크기와 모양 등을 이유로 저급 제품으로 취급했다. 

좌절을 겪으면서 기술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세계무대를 겨냥해 미국 연방교통부(DOT) 규격 인증을 받기로 했다. 유명 제품을 구입해 분해와 조립을 반복하는 등 2년 넘게 구슬땀을 흘린 끝에 1984년 인증을 따냈다. 

내친김에 스넬(SNELL) 인증 획득에도 나섰다. 오토바이 경기 도중 넘어지면서 헬멧이 깨져 숨진 미국 선수 스넬을 추모하기 위해 기념재단이 만든 최고의 품질 인증으로 DOT 규격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받기 어렵다. 각고의 노력 끝에 1987년 스넬 인증까지 따내자 제품 인지도가 확 달라졌다. 

미국 최대 헬멧 판매업체가 50만 달러어치를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로는 큰돈이고 단번에 미국 시장에서 자리 잡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세계적 기업이 되려면 자체 브랜드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해 거절했다. 마침내 1992년 미국 시장 1위에 올랐다. 

“투자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남의 것을 베끼거나 똑같이 해서는 이길 수 없어요. 

어렵게 국제 인증을 따면서 연구하지 않는 기업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경영철학을 갖게 됐다. 그래서 매년 매출액의 10%를 연구개발비로 쓴다. 가볍고 튼튼한 플라스틱 신소재로 만든 헬멧을 업계에서 처음으로 출시하는 등 국내외 특허만 60여 건에 이른다.

사업 과정에서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으나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초기인 1974년 헬멧 내피를 만들던 서울 강북구 수유동 공장에 불이 나 설비와 제품을 모두 잃었다. 수출 물량이 늘어나던 1991년에는 큰 수해로 경기 용인시 공장이 흙과 물에 잠기고 완제품이 급류에 휩쓸렸다.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무척 힘들었어요. 하지만 불에 타지도, 물에 떠내려가지도 않는 기술이 있으니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자위했어요. 

미국발() 금융위기가 발생한 2008년에는 환율 변동에 대비하려고 가입했던 키코(KIKO) 탓에 한 해 매출액보다 많은 1383억 원의 손실을 봤다. 은행의 도움으로 부채 대부분을 출자로 전환해 위기를 넘겼다 

세계적 헬멧 기업을 키워낸 홍 회장이 들려준 조언은 마음에 새길 만하다.

“한 우물을 파서 하나라도 잘해야 합니다. 힘들다고 이것저것 하면 힘이 분산되고 집중력이 떨어져 원하는 것을 이루기 어려워요.

 

<5>천종윤 씨젠 사장

“세상에 없는 시약 만들자” 교수직 버리고 창업 

/천종윤 씨젠 사장이 한번에 여러 병원체를 검사할 수 있는 시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업을 한다면 자금을 대 주겠다.

천종윤 씨젠 사장(58)은 삼촌의 사업 자금 지원 약속을 믿고 이화여대 생물학 교수를 그만뒀다. 대학에서 후학을 키우고 순수 연구를 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사업을 통해 인류에 기여하는 게 더 가치가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2000년 삼촌에게서 3억 원을 받아 바이오 벤처기업 씨젠(Seegene)을 창업했다. 자금을 대 준 삼촌은 ‘애니콜 신화’의 주역으로 한때 100억 원이 넘는, 삼성 사상 최고 연봉을 받았던 천경준 전 삼성전자 기술총괄 부사장이다.  

뒤늦게 사업에 뛰어든 천 사장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남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생각도 못 한 원천기술을 개발하기로 했다. 세계 최고가 되려면 자신 있는 분야에 집중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전공인 분자미생물학을 살릴 수 있는 분자 진단으로 사업 방향을 정했다.  

“먼저 분자 진단 사업을 시작한 로슈 같은 글로벌 기업이 20년 전에 개발된 기술을 쓰는 것을 보고 새 기술로 신제품을 내놓으면 승산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어요.

 

분자 진단은 DNA, RNA 같은 유전자 정보를 분석해 메르스 같은 호흡기 질환, 성병, 간염, 결핵 등 각종 질병을 진단하는 선진 기법이다. 발병 전인 잠복기에도 진단할 수 있고, 항원 항체 반응을 이용하는 기존 면역진단법보다 빠르고 정확하다. 조기 진단으로 질병의 완치율을 높이고 치료비도 줄일 수 있다. 이런 장점으로 분자 진단은 산업화 초기이지만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분자 진단에 필요한 유전자 증폭 기술(PCR)을 확보하는 게 쉽지 않아 진입 장벽이 높다.  

천 사장은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연구에만 매달려 새 유전자 증폭 기술인 ‘ACP’를 개발했다. 유전자를 증폭하려면 프라이머(Primer)라는 미세 DNA가 복제하고자 하는 유전자와 정확하게 결합해야 한다. ACP는 새로운 개념의 프라이머 구조를 통해 DNA 사슬 중에서 원하는 타깃 유전자만 대량 증폭하는 신기술이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환자 진단에 쓸 수 있는 산업용 기술 개발에 나섰다.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2005년 여러 타깃 유전자를 한번에 증폭하는 ‘DPO’ 기술을 개발했다. 한 번의 검사로 여러 병원체를 동시에 진단하는 동시 다중 분자 진단 시대를 연 원천기술이다.

한국 미국 유럽 등에서 특허를 받은 이 기술로 호흡기 병원체 12종을 동시에 검사할 수 있는 시약을 만들어 2006년 세계에서 처음으로 내놓았다. 기존 제품은 한 번에 한 병원체만 검사할 수 있었다.  

“성 매개 감염 원인균 6종을 동시 검사하는 제품으로 성병 의심환자 600여 명을 검사했더니 19%였던 감염률이 82%로 높아졌어요. 매독과 임질 검사만으로 확인할 수 없던 환자까지 찾아낸 거죠. 

처음부터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미국 병원과 검진센터를 찾아가 시연을 하며 성능을 확인시켰다. 대다수 의사는 동시 다중 검사가 개별 검사보다 정확할 수 없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우수성을 입증하는 임상실험 결과가 나오고 논문들이 발표되자 2008년 미국 대형 검진센터인 바이오레퍼런스가 제품을 주문했다.

2010
년 실시간 유전자 증폭 기술(READ)에 이어 동시 다중 실시간 유전자 증폭 기술(TOCE, MuDT)도 개발했다. 이 기술로 호흡기 병원체 26, 성 매개 감염 원인균 28, 자궁경부암 원인균인 인유두종 바이러스 28종 등을 한번에 검사하는 제품을 만들어 세계 최초로 출시했다. 씨젠은 해외 50여 개국, 300여 개 병원에 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시가총액은 1조 원을 넘는다. 

천 사장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부친의 사업 부도로 끼니를 걱정할 만큼 가난하게 살았다. 결핵에 걸려 검정고시를 거쳐 건국대 농대에 입학했다. 학자의 꿈을 이루려고 대학 졸업 후 6개월 치 생활비를 들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업에 매진해 테네시대에서 생명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역경을 이겨 내고 자수성가한 그는 동시 다중 분자 진단 기술을 세계 표준으로 만들기 위해 미국 아코니바이오시스템, 영국 랜독스, 일본 에자이 등 세계적 기업에 핵심 기술을 이전했다 

 

“누구나 적은 비용으로 정확한 진단을 받을 수 있도록 분자 진단 대중화에 앞장서겠습니다.

임신 진단처럼 키트로 질병 유무를 바로 확인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그의 도전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6>이영규 웰크론 회장

극세사 클리너 개발해 세계시장 정복 

/이영규 웰크론그룹 회장이 극세사로 만든 알레르기 방지 침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991년 일본에서 열린 섬유 전시회. 관람객들로 붐비는 한 부스를 찾았다. 전시된 안경닦이를 써 본 뒤 사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머리카락 100분의 1보다 더 가는 극세사(極細絲)로 만든 원단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안경을 사면 무료로 나눠 주던 안경닦이를 돈을 주고 사는 것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극세사를 의류가 아닌 다른 용도로 개발하면 사업이 되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어요.

극세사의 부가가치에 눈을 뜬 이영규 웰크론그룹 회장(56)은 다니던 무역회사에 사표를 냈다. 그는 한양대 섬유공학과를 마치고 동양나일론(현 효성)에서 극세사를 개발한 경험이 있었다.  


사업 시작 4개월 만에 부도 위기 

1992년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2000만 원을 빌려 서울 강남구 포이동에 은성코퍼레이션을 세웠다. 부친의 세탁비누 사업 실패로 생활고를 겪었던 모친은 반대했다.

극세사로 걸레, 행주 같은 클리너를 만들기로 했다. 당시 우리나라도 극세사를 생산했으나 블라우스, 인조 스웨이드 등 의류에만 쓰고 있었다. 극세사 B급 원사를 구해 임가공업체에 맡겼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극세사 청소용품을 내놨지만 사업은 녹록지 않았다. 직장생활 때 창업하면 제품을 사 주겠다고 했던 사람들마저 외면했다. 사업 시작 4개월 만에 매출 부진에다 거래업체 부도까지 겹쳐 자금이 바닥났다. 아내는 생활비를 벌려고 보험설계사로 나섰다.  

사업을 접어야 하나 고민하다 암자를 찾아 1000배를 했다. 온몸이 아프고 일어설 힘조차 없었지만 복잡하던 머릿속은 백지처럼 비워졌다. 한번 실패했다고 좌절한다면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주위 사람에게 돈을 빌려 다시 출발선에 섰다.


극세사 클리너 세계서 두 번째로 만들어 

독일에 있던 대학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인조 섀미(흔히 ‘세무’라고 불리는 원단)를 만들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기회라는 생각에 “할 수 있다”고 덜컥 대답부터 했다. 독일에서 보내 온 원단을 보니 기존 극세사 원단에서 기모 공정은 그대로 두고 후가공만 바꾸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새 원단 개발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두 달 만에 스웨이드(S-100)를 만들어 독일로 샘플을 보냈다. 만족한 바이어는 15000달러어치를 주문했다.

해외에서 첫 오더를 받자 사업에 대한 자신감이 붙었다. 그때 면 제품만 생산하던 한 업체 사장이 극세사로 만든 타월 같은 제품을 보여 주며 만들 수 있느냐고 물었다. 유럽 바이어의 주문이라고 했다. 

물이 굴러 떨어지는 일반 극세사 원단과 달리 물을 빨리, 그리고 많이 흡수하도록 만드는 게 관건이었다. 면을 극세사로 대체하면 된다고 쉽게 생각했으나 완전히 달랐다. 6개월간 밤낮 없이 매달린 끝에 원단의 구조를 바꾸는 새 가공법을 개발했다. 물을 면보다 5배나 많이 흡수하는 극세사 클리너(T-101)를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만들었다.


日기업 제치고 3M과 독점공급 계약 

1998년 미국에서 열린 클리너 전시회(ISSA)에서 세계적 기업인 3M 구매 담당자를 만났다. 거래를 트려고 요구하지도 않은 샘플을 3M에 계속 보냈다. 몇 달 뒤 한국3M에 보내면 검토해 보겠다고 알려왔다. 천재일우의 기회라 생각해 새 샘플을 만들어 한국3M의 문턱이 닳도록 찾았다. 하지만 클리너의 모양, 색상, 성능 등을 꼼꼼하게 확인하는 3M을 사로잡기는 쉽지 않았다. 품질을 높여 가며 1t 트럭 3대 분량의 샘플을 2년 넘게 보낸 끝에 2000년 일본 기업을 제치고 3M과 독점 공급 계약을 맺었다. 이를 계기로 웰크론의 극세사 클리너는 세계 시장 점유율 1위에 올랐다.  

위기도 있었다. 제품을 자체 생산하려고 1997년 은행에서 자금을 빌려 경기 부천시에 공장을 세웠다. 두 달 뒤 외환위기로 환율이 치솟고 이자가 급등했다. 원리금을 갚느라 밤잠을 설쳤으나 수출 증가로 환차익이 크게 생기면서 고비를 넘겼다.

“투자도 때가 있다는 것을 배웠어요. 

해외 성공을 토대로 국내 시장에 진출했다. 세계 일류 상품으로 선정된 극세사 청소용품에 더해 목욕용품, 집먼지진드기의 서식과 이동을 차단하는 침구 등으로 제품군을 확대했다. 2001년 ‘세사(SESA)’ 브랜드로 백화점에 입점한 뒤 대리점 사업에도 나섰다.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시너지 효과가 예상되는 기술력 있는 제조업체를 인수한다는 원칙에 따라 2007년 예지미인, 2010년 한텍엔지니어링, 강원비앤이를 사들였다.

 

“일자리 창출로 사회에 기여하고 고객에게 새 가치를 제공하는 기업가가 되겠습니다.

극세사 클리너로 시작해 매출 2000억 원대 중견 그룹으로 키운 이 회장의 꿈, 100년 넘게 가는 장수 기업으로 성장하길 기대해 본다. 

 

<7>정명준 쎌바이오텍 사장

“토종 유산균 개발” 전국 돌며 신생아 분변까지 뒤져

/정명준 쎌바이오텍 사장이 프로바이오틱스로 만든 건강기능식품의 효능을 설명하고 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과제를 완수할 때까지 장가를 가지 않겠습니다.

젊은 패기로 동료들 앞에서 큰소리를 쳤다. 과제는, 발효를 통해 얻는 글루탐산나트륨(MSG) 비율(발효 수율)을 높이는 것이었다. 여러 방법을 시도했지만 수율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많은 연구원들이 20년 가까이 못 푼 과제가 쉽게 해결될 리 없었다.

끝장을 보겠다고 결심했다. 연구실에 야전침대를 놓고 박테리아와 씨름했다. 발효를 잘하도록 박테리아의 서식 여건을 좋게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성과가 안 나오자 환경을 나쁘게 만들면 어떻게 될까 생각했다. 박테리아가 스트레스를 받아 발효가 잘 안 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결과는 반대였다. 6년 만에 MSG 발효 수율을 20% 높이는 획기적인 방법을 찾아냈다. 

회사(당시 미원)는 공로를 높이 사 해외연수를 보내줬다. 연세대 생물학과를 거쳐 서울대에서 미생물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입사했던 그는 1989년 덴마크 왕립공대로 유학을 떠났다. 유산균 발효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1992년 귀국했다. 일하던 공장이 팔리자 1995년 경기 김포 끝자락에 작은 회사를 세웠다. 

정명준 쎌바이오텍 대표이사 사장(57)은 덴마크 유학 시절 알게 된 프로바이오틱스를 사업 아이템으로 정했다. 프로바이오틱스는 체내에 들어가 면역 강화, 장 질환 억제 등 건강에 도움을 주는 살아 있는 균으로 유산균, 비피더스균 등이 대표적이다.

 

“프로바이오틱스가 국내에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MSG 1kg 1달러일 때 유산균은 500달러에 팔릴 만큼 부가가치가 컸어요. 

해외에서 종균을 수입한 뒤 배양해 파는 손쉬운 방법 대신 국산 유산균을 추출해 제품화하기로 했다. 대기업도 국산화에 신경을 쓰지 않을 때였다. 전 직장과 덴마크에서 10년 넘게 발효를 연구한 기술자로서 정도(正道)를 걷기로 한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발효음식과 이를 먹어 온 한국인의 장에는 우수한 유산균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전국을 돌며 김치, 젓갈, 신생아 분변 등에서 균을 채취했다. 1년 만에 토종 균주를 확보했다. 유산균을 최적 조건에서 배양한 뒤 동결 건조해 요구르트나 건강기능식품 원료로 팔았다. 

그러나 매출이 적어 직원 봉급조차 주기 어려웠다. 유업회사에 있던 친구가 원료 대신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을 하라고 조언했다. 한 제약회사에 건강기능식품을 OEM으로 납품했다. 인기를 끌자 10여 개 회사가 앞다퉈 주문했다.

쇄도하는 주문을 소화하려고 1997년 대규모 공장 증설에 착수했다. 호사다마라고 외환위기가 오자 회사가 휘청거렸다. 생산시설에 무리하게 투자한 게 화근이었다. 거래처에서 받은 어음은 할인이 안 되고 자사 발행 어음은 속속 만기가 돌아왔다. 돈을 구하러 백방으로 쫓아다니며 하루하루 힘겹게 버텼다. 2000년 벤처 육성 정책으로 숨통이 트인 데 이어 코스닥에 상장하면서 자금난에서 벗어났다. 이후 무차입 경영을 하고 있다.

프로바이오틱스는 위를 지나 장에 도달해야 효능을 발휘한다. 유산균은 그냥 섭취하면 위산 탓에 위에서 대부분 죽는다. 위산을 견디는 유산균 코팅 기술 개발에 나섰지만 해결책을 못 찾아 애를 먹고 있었다. 


“바로 이거다. 단백질로 유산균을 싸면 되겠다. 

두부와 미꾸라지를 넣고 끓이자 미꾸라지가 뜨거워서 두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무릎을 쳤다. 이 원리를 적용하자 오랜 난제가 풀렸다. 유산균을 단백질로 코팅한 다음, 다당류로 한 번 더 코팅하는 ‘이중 코팅’ 기술을 개발했다. 1g 1000억 마리 이상 든 유산균이 위에서 견디고 장에서 풀리는 이 기술은 한국, 일본, 유럽 등에서 특허를 받았다.

세계 건강기능식품 흐름을 살피려고 2002년 스위스에서 열린 ‘비타푸드’ 전시회를 찾았다. 붐비는 관람객을 보자 욕심이 생겼다. 오퍼상의 부스 한구석을 빌려 이중 코팅 현미경 사진과 설명서를 내붙였다. 새 기술을 보고 바이어들이 찾아왔다. 상담하는 법도 몰랐지만 성심껏 대답했다. 이스라엘, 프랑스, 이탈리아 기업이 OEM 주문을 했다.

 

쎌바이오텍은 세계일류상품으로 선정된 프로바이오틱스 유산균을 세계 40여 개국에 수출하고 있다. OEM에서 탈피하려고 자체 브랜드 ‘듀오락’을 론칭했다. 프로바이오틱스로 대장암, 아토피, 여드름 등을 치료하는 새 의약품 개발에도 힘을 쏟고 있다.

‘벤처 1세대’ 정 사장의 꿈은 쎌바이오텍을 인류의 삶에 기여하고 미생물 전공자가 가장 일하고 싶어 하는, 정보기술(IT) 분야 구글 같은 바이오 메카로 만드는 것이다
.

<8>권동칠 트렉스타 사장

신발 혁신 27년… 그가 만들면 최초가 된다 

/권동칠 트렉스타 사장이 트레킹화에 들어 있는 여러 첨단기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세원에서 나와 신발회사를 세우세요.

영국인 하이텍 한국지사장은 일감을 줄 테니 독립하라고 제의했다. 영국 등산화 전문기업 하이텍은 세원의 거래처였다. 세원은 세계적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회사로 아식스 나이키 아디다스 등 유명 브랜드 신발을 만들어 납품했다.


“고맙지만 노(No).

동아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입사한 세원에서 특진을 거듭해 2 6개월 만에 영업 총책임자가 되는 등 잘나가고 있었다. 몇 차례 거절하자 하이텍 지사장은 회사 설립에 쓰라며 30만 달러를 내놓고 재촉했다.

고민 끝에 수락했다. 부산 사상구 삼락동 공장을 빌려 생산 설비를 설치했다. 100년에 한 번 온다는 길일을 택해 1988 8 8일 오전 8 8분 ‘동호실업’ 문을 열었다. 질 좋은 등산화를 20% 이상 싼 가격에 OEM으로 공급하자 하이텍은 주문량을 늘렸다. 권동칠 트렉스타 대표이사 사장(60)이 독립하던 27년 전 얘기다.

 

1993년 미국 스키 전문회사 K2의 직원들이 찾아와 새 인라인스케이트를 개발하자고 제의했다. 당시 인라인스케이트 부츠는 플라스틱이어서 딱딱하고 무겁고 공기가 안 통해 불편했다. 큰돈을 쏟아부었지만 실패의 연속. 인라인스케이트는 볼트, 베어링 등이 들어가는 특수화로 제조 공정이 일반 신발과 달랐다. 직원들은 지쳐 포기하자고 했다.


“해결책은 있다. 아직 못 찾았을 뿐이다. 

권 사장은 직원들을 격려했다. 8개월 만에 신소재와 새 가공법으로 마지막 난제였던 발목 보호 문제를 해결했다. 가볍고 통풍이 잘되고 발이 편한 소프트 인라인스케이트를 개발하자 K2는 즉시 계약을 맺었다. 특허를 받은 인라인스케이트는 세계 시장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주문량을 다 소화할 수 없어 1995년 중국 톈진에도 공장을 세웠다.

민주화 영향으로 인건비가 치솟자 유명 브랜드들이 해외로 하청기지를 옮겼다. 폐업하는 신발업체가 속출했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신발은 사양산업이 될 수 없다.

권 사장은 1994년 자체 브랜드 ‘트렉스타(Treksta)’를 론칭했다. 성공을 장담할 수 없고 오더가 끊기는 위험이 있지만 세계 최고 신발회사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등산화를 신었더니 발이 까지고 불편했다는 얘기를 듣고 새 등산화 개발에 나섰다. 당시 가죽 등산화는 군화처럼 딱딱하고 무거웠다. 5개월 만에 나이키 운동화를 접목한 신개념 등산화를 개발했다. 등산용품점은 “이게 등산화냐”며 받아주지 않았다. 인근 산을 찾아 등산객에게 무료로 신어 보게 했다. 가볍고 편하다는 소문이 퍼지자 판로가 열렸다.

1997
년 무게가 290g, 세계에서 가장 가벼운 등산화를 출시했다. 해외에서 큰 인기를 끈 등산화는 세계일류상품으로 선정됐다. 100만 족 OEM 주문을 받았으나 자체 브랜드를 키우려고 거절했다. 


“모든 신발은 잘못돼 있다. 

현재 신발을 미래 시점에서 보면 잘못됐거나 부족한 제품일 수 있다. 그래서 권 사장이 내놓는 신제품과 신기술은 여러 나라에서 특허를 받을 만큼 혁신적이다.

2005
년 자동차 서스펜션 원리를 적용해 울퉁불퉁한 지면을 밟아도 발목이 거의 흔들리지 않고 충격을 흡수하는 IST 기술, 2006년 유리섬유로 빙판 미끄러짐을 줄인 ‘아이스 그립’ 신발창, 2010년 발의 굴곡대로 신발을 만드는 ‘네스핏’ 기술을 개발했다. 3D 스캐닝한 2만여 명의 데이터로 만든 네스핏은 발 모양의 세계 표준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올해는 손을 쓰지 않고 신발 뒤축 장치로 끈을 매고 풀 수 있는 ‘핸즈프리’를 출시했다. 이 신발은 중국에서 열린 아웃도어 스포츠용품 박람회에서 황금상 및 올해의 아시아 제품 대상을 받았다. 

 

고비도 있었다. 자리가 잡힐 즈음인 1992, 1993년 공장에 3차례 불이 나 출고를 기다리던 신발과 설비를 태워 큰 피해를 입었다. 2000년대 들어선 인라인스케이트 열풍이 사그라지면서 많은 재고를 떠안아 수백억 원의 손실을 봤다. 그러나 기회는 또 온다는 생각으로 어려움을 이겨냈다. 

트렉스타는 현재 세계 60여 개국에 수출한다. 아웃도어 신발 매출 아시아 1, 세계 14위 기업으로 성장했다. 권 사장은 신발산업협회장으로 세계 최대 신발 수출국 명예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발의 경혈을 자극해 치매를 예방하는 신발, 늘 시원한 신발 등을 만들어 인류 건강에 기여하는 신발왕이 되는 게 그의 꿈이다.

 

<9>김순자 한성식품 사장

“세계인 입맛 잡자” 30년간 김치 1000여종 개발 

/김순자 한성식품 사장이 김치를 담그기 위해 무를 자르고 있다. 한성식품 제공

 

“김치는 나를 살린 음식이다.

충남 당진에서 2 4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알레르기가 심해 대부분의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예외가 김치. 그래서 늘 김치와 밥을 먹었다. 겨우내 먹는 김장김치가 맛있으면 살이 오르고, 그렇지 않으면 꼬챙이처럼 마르곤 했다. 종갓집에 대가족이라 어머니는 김치를 잘 담갔지만 허약한 딸이 안쓰러워 여러 집을 찾아다니며 비법을 배우는 등 더 맛있는 김치를 만들려고 애썼다. 어머니가 김치를 담글 때면 메모를 하며 열심히 비법을 익혔다. 

1985
년 한 호텔 음식점에 갔다가 우연히 “김치 맛이 없다는 고객 불만이 접수됐다”는 조리사의 얘기를 들었다. 맛있는 김치를 만들어 공급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결혼 후 집들이를 앞두고 총각무로 처음 담근 김치를 맛본 지인들이 “정말 맛있다”고 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사업 구상을 가족에게 말하자 “여자가 무슨 사업이냐”, “누가 사준다고 하더냐”며 반대했다. 여자라서 더 무시하는 것 같아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김순자 한성식품 대표이사 사장(61)은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32세 때인 1986년 김치 사업에 나섰다. 폐업한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109m² 규모의 단무지 절임공장을 사들인 뒤 설비를 갖췄다 

 

부식 공급업체가 김치 15kg을 주문했다. 가장 좋은 재료를 구해 배추김치를 담가 원가에 인건비만 붙인 가격으로 납품했다. 김치를 공급받은 대기업 쪽에서 맛있다고 했다며 부식업체는 주문량을 50kg으로 늘렸다. 

손맛이 좋다는 소문을 들은 유명 호텔 2곳에서 샘플을 요청했다. 몸뻬를 입고 김치를 담그다 정장으로 갈아입고 달려갔다. 3차례 샘플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얻어 주문을 얻어냈다. 

1986
년 서울 아시아경기를 앞두고 당국 측이 각국 선수가 묵을 호텔의 준비 상황을 점검하다 공장을 찾아왔다. 제조 과정을 꼼꼼하게 체크한 뒤 공식 김치 공급업체로 지정했다. 브랜드가 알려지면서 매출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 등에도 김치를 공급했다. 

어느 날 “젓갈 맛이 덜 난다”는 클레임이 들어왔다. 맛을 봤으나 평소와 차이가 없었다. 지역에 따라 김치 맛에 대한 평가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누가 먹어도 맛있다고 할 만한 김치 개발에 나섰다. 팔도에서 쓰는 각종 재료와 방법으로 한 달 넘게 연구한 끝에 모두가 맛있다고 하는 비법 레시피를 개발했다. 

그때까지는 김치 담그는 방법도 각양각색이었다. 김치 표준화를 위해 제조법을 매뉴얼로 만들었다. 김치 회사로는 처음으로 1996 ISO 인증을 받았다.

외국인이 김치 냄새와 맛에 기겁하는 것을 보고 세계인이 먹을 수 있는 김치 개발에도 착수했다. 피망 양배추 브로콜리 수박 사과 등 100여 가지 채소와 과일로 색깔과 향기가 좋고 맵지도 않은 김치를 만들었다. 2년간 샘플 10t, 연인원 6만 명의 시식을 거쳐 2002년 미니롤보쌈김치와 깻잎양배추말이김치 등을 개발했다. 2003년 일본과 싱가포르국제발명전에 출품해 금상을 받았다. 심사위원들이 “원더풀”을 연발하는 것을 보고 김치 세계화에 매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세계인이 먹는 여러 채소로 김치를 만들 수 있어요.

2005년 백년초로 백김치를 만들었다. 김치로는 처음으로 미국 특허를 받았다. 이어 미국식품의약국(FDA)에서 백년초 백김치와 포기김치에 대한 품목 승인을 받아 수출길을 열었다. 2007년에는 미 국방부의 위생 심사를 통과해 미군에도 김치를 공급하게 됐다.

 

고비도 많았다. 사업 초기 관공서 김치 납품권을 따냈으나 태풍 ‘셀마’의 영향으로 재료비가 5배로 뛰어 큰 손해를 봤다. 2005년 ‘중국산 기생충알 김치’ 파동 때는 하루 120t이던 김치 생산량이 20t으로 급감했다. 폐업까지 고민했으나 한성식품 김치는 안전하다는 고객의 믿음 덕분에 매출이 다시 늘면서 위기를 넘겼다.

대한민국김치협회장을 맡고 있는 김 사장은 세계 15개국에 김치를 수출하고 있다. 한성식품은 연매출 500억 원대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김치 분야에선 처음으로 2009년 식품명인, 2012년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됐다. 지금까지 개발한 김치만 1000종이 넘고 미역김치 브로콜리김치 등 24개의 특허도 갖고 있다. 세계 각국의 요리사가 찾아와 배우는 김치전문학교를 세워 운영하는 게 그의 꿈이다. 

 

<10>김철호 본아이에프 회장

부도… 거리 호떡장사… 죽 창업으로 인생역전 

/김철호 본아이에프 회장이 자수성가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호떡 만드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1998 30대 남자가 서울 세운상가 부근 호떡가게를 찾았다. 가게 주인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삼고초려의 심정으로 계속 찾아갔다. 감복한 주인은 “양복 차림이라 진정성이 없는 줄 알았다”며 반죽 비법을 알려줬다.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그도 한때는 잘나갔다. 충남대 국문학과를 마치고 1988년 한국일보 광고국에 입사했다가 인삼사업이 괜찮다는 고향 선배의 얘기를 듣고 회사를 그만뒀다. 1993년 우신산업을 세워 인삼 생산과 판매를 하다 다이아몬드 유통, 통신판매 등에도 손을 댔다. 1995년 순식물성 목욕용품을 수입해 프랜차이즈 사업으로 가맹점 400개에 연매출 500억 원을 올렸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외환위기로 환율이 치솟고 자금이 안 돌면서 부도를 맞았다.  


“재기해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버텼다. 

집까지 잃고 빈털터리가 된 그는 숙명여대 인근 요리학원에서 무료로 요리를 배우는 대신 월급 없이 총무로 일하며 재료 준비, 청소 등을 했다. 아이가 3명이나 있는 집에 월급을 못 갖다 주자 살림은 엉망이었다. 돈벌이가 절실했다. 원장은 학원 앞 공터에서 오후 4시부터 오후 10시까지 호떡을 팔 수 있게 해줬다. 호떡 만드는 방법은 그래서 배웠다. 리어카에서 호떡을 크게 만들어 3개를 1000원에 팔았다.

 

외환위기 여파로 실업자가 늘면서 창업할 수 있는 요리 과정이 있느냐고 묻는 전화가 학원에 종종 걸려 왔다. 당시 학원은 조리사 자격증 취득에 필요한 요리를 가르쳤다. 창업 과정을 만들자고 했으나 원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격증 취득 요리가 아니라 창업 요리를 가르치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인의 도움을 받아 1999년 창업요리학원을 열었다. 개업 중인 요리사를 초빙해 칼국수 우동 돈가스 만드는 법 등을 가르쳤다. 과정을 마친 사람들이 “가게를 어디에 내면 좋겠느냐” “인테리어는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내친김에 음식점 창업 컨설팅을 시작했다.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자금을 댔던 지인이 학원과 컨설팅을 직접 하겠다고 나섰다.


“죽은 웰빙 음식이다. 

음식점 창업 컨설팅을 할 때 여러 사람에게 권유했으나 모두 거절했던 죽집을 열기로 했다. 과외, 보습학원 강사 등을 하며 생활비를 벌던 대학 1년 후배 부인은 하던 일을 접고 6개월간 죽만 쑤며 메뉴를 개발했다.  

김철호 본아이에프 회장(52) 2002 9월 서울 대학로 길가가 아닌 뒷골목 건물 2층에 80m² 규모로 죽집 ‘본죽’을 냈다. 기존 가게가 폐업한 뒤여서 권리금도 없었다. 창업 컨설팅을 하며 알게 된 지인들이 “성공한 뒤 갚으라”며 간판과 설비를 해줬다. 타깃 고객을 환자가 아닌 일반인, 그중에서도 젊은 여성으로 정하고 인테리어를 카페 형태로 꾸몄다.

김 회장은 양복을 입고 부인과 지하철 혜화역 출구에 나가 행인에게 90도 인사를 하면서 전단을 건넸다. 첫날 손님 20명이 가게를 찾았다. 고객의 주문을 받은 뒤 죽을 쑤다 보니 늦게 나온다고 항의하거나 돌아가는 손님도 있었다. 여러 종류의 죽을 한꺼번에 빨리 만드는 게 과제였다. 시행착오 끝에 10분 내 죽을 쒀 내놓을 수 있는 표준 조리법을 개발했다. 맛있는 죽을 혼자 다 못 먹을 만큼 많이 주는 카페 같은 죽집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손님이 몰렸다. 목표였던 하루 100그릇 판매를 개업 3개월 만에 달성했다.

가맹점을 내줄 수 있느냐는 문의가 많았다. 가맹사업에 나선 지 7년 만에 가맹점이 1000개를 넘어섰다. 폐업률은 2% 수준이다. 2006년 본비빔밥, 2009년 본도시락, 최근에는 본설렁탕을 론칭했다. 

고비도 있었다. 2011년 일부 가맹점이 남은 음식을 재활용하는 모습이 TV에 보도됐다. 비난이 쏟아졌다. 모든 가맹점과 본사는 운명공동체라는 것을 절감했다. 김 회장은 가맹점을 늘리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맛, 재료, 위생 등 기본과 원칙을 철저히 지킬 것을 가맹점주에게 주문했다. 


“한식 세계화는 꼭 이뤄야 할 과제다. 

김 회장은 환자나 먹는 음식으로 여기던 죽을 산업화해 시장을 3000억 원 규모로 키웠다. 한식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2006년 미국을 시작으로 중국, 일본 등에 13개 매장을 냈다. 초기엔 ‘한국식’을 고집하다 어려움을 겪었다. 지금은 현지 문화와 현지인 입맛을 반영한 메뉴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김 회장은 세계에서 5000개 가맹점을 운영하는 최고 한식 프랜차이즈 기업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뛰고 있다
. 

 

2015-10-14

<11> 박정부 다이소아성산업 회장

1000원짜리 상품’ 찾아 1년에 절반 지구촌 누벼 

/박정부 다이소아성산업 회장이 매장을 찾아 운영상황을 살펴보고 있다.

 

“유리잔을 30센트(당시 약 300)에 주세요. 

2007년 루미낙 브랜드로 유명한 프랑스의 세계적 유리회사 ‘아크’ 본사를 찾아 단가를 제시했다. 공장장과 판매 책임자는 황당한 듯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루미낙 브랜드를 안 붙이고 ‘메이드 인 프랑스’ 표기에 프랑스 국기만 쓰겠다”며 제품을 만들지 않는 밤 시간에 자동 설비를 활용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아크 측은 본사 공정까지 꿰뚫고 있는 그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단가로는 안 돼요.
40센트로 하죠. 그 대신 이윤을 낼 만큼 오더를 줄게요.

 

와인잔과 유리컵 등 10여 개 제품을 10만 개 이상씩 주문했다. 국내에 도착한 아크 제품을 프랑스 코너를 만들어 개당 1000원에 내놓자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아크와 샅바 싸움을 벌인 주인공은 박정부 다이소아성산업 회장(71)이다. 국내 최대 균일가숍 다이소는 생산시설이 없어 글로벌 아웃소싱으로 상품을 조달한다. 그는 질 좋은 새 제품을 싸게 공급받기 위해 1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내며 단가를 10원이라도 낮추려고 애쓴다. 직거래하는 협력업체는 국내 500여 개사를 포함해 세계 35개국, 3600여 곳에 이른다. 

박 회장은 우연히 균일가숍과 인연을 맺었다. 1973년 한양대 공업경영학과를 마치고 전구 제조업체 풍우실업에 입사해 생산 책임자가 됐으나 사내 갈등으로 15년 만에 그만뒀다. 가족을 먹여 살릴 돈벌이가 절실했다. 44세 때인 1988년 한일맨파워를 세워 국내 대기업 임직원의 일본 연수와 세미나를 주선했다.  

그러다 안정적인 수입을 얻기 위해 무역업에 손을 댔다. 재떨이 열쇠고리 등 판촉행사 물품을 일본 가전회사와 자동차회사 등에 공급했다. 1991년 일본에 살던 동생의 소개로 일본 다이소에 이태리타월 수세미 비눗갑 등을 납품했다. 품질과 가격, 납기를 준수하자 깐깐한 야노 히로다케 회장은 더 많은 상품을 일본 다이소에 공급해 달라고 주문했다.

균일가숍을 알게 된 그는 국내 사업을 위해 1992년 아성산업을 설립했다. 5년간 준비해 1997 5월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 ‘아스코 이븐 플라자’를 열었다. 초기에는 싼 게 비지떡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장사가 잘 안됐다. 몇 달 뒤 외환위기로 경제가 어려워지자 고객이 몰리며 성장가도를 달렸다.  

2001
년 일본 다이소는 균일가 제품을 다른 일본 업체에 주지 말고 독점 공급해 달라고 했다. 고심 끝에 받아들였다. 일본 다이소가 반대급부로 4억 엔( 40억 원)을 투자해 사명(社名)을 다이소아성산업, 브랜드를 다이소로 바꿨다.


1000원에 팔 수 있는 상품은 무한하다. 

다이소가 파는 상품은 식품 주방용품 문구 등 3만 종이 넘는다. 가격은 모두 5000원 이하다. 1000원짜리가 전체 상품의 절반이나 된다. 종이컵 주방장갑 등 100여 개 생필품은 10년 넘게 1000원 그대로다.  

박 회장은 가격을 먼저 정한 뒤 제품을 공급할 수 있는 업체를 찾는다. 원가에 이윤을 붙여 판매가를 정하는 일반 기업과 반대다. 제조업체가 펄쩍 뛰면 공정 단순화, 포장 간소화 등 원가 절감 방안을 제안한다. 이어 대량 주문에 현금 결제를 약속해 거래를 튼다. 이런 방식으로 매달 신제품 500600개를 내놓는다. 


“가격, 그 이상의 가치를 제공한다. 

어느 날 1000원짜리 면봉에서 이물질이 나왔다. 협력업체가 자동설비로 만든 면봉을 동네 주민들이 가져가 밥상 위에 놓고 포장하다 머리카락, 고춧가루 등이 들어간 것이다. 영세한 업체 사장은 봐 달라고 사정했다. 그는 “품질은 타협 대상이 아니다”라며 거절했다. 100만 개가 넘는 면봉을 전량 회수해 반품했다.

 

박 회장은 균일가숍을 국내에 들여와 많은 고비를 넘기고 국내 1000개 매장에 연매출 1조 원이 넘는 기업으로 키웠다. 지난해 다이소를 찾은 고객은 18000만 명, 판매한 상품은 87000만 개였다. 경기 불황 속에서도 매장 수를 꾸준히 늘리며 매년 700800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다. 해외로 눈을 돌려 2010년 중국에 ‘하오쓰터(好思特)’ 브랜드로 진출했다.

박 회장은 다이소를 단순히 저렴한 제품을 파는 곳이 아니라 고객이 다시 찾고 싶어 하는 ‘넘버원 생활문화숍’으로 만들기 위해 지금도 뛰고 있다.  

 

<12> 김현겸 팬스타그룹 회장

“선주 되자” 꿈 하나로 맨손 창업… 한국 크루즈 개척

/김현겸 팬스타그룹 회장이 부산 연안에서 주말 크루즈를 하는 팬스타드림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안녕하십니까? 

“……. 

막 창업한 그는 일감이 절실했다. 공장 담 너머로 컨테이너가 보이던 회사의 사장 집을 무작정 찾아가 일주일 동안 인사를 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음 날 다시 가 인사했다. 

“젊은이. 회사 일이면 회사로 와야지. 이게 무슨 짓이야.

생면부지인 사장이 차창을 내리고 말했다. 역정 반, 호감 반이었다. 경기 안산시 반월공단에 있는 회사로 찾아갔다. 사장은 “일단 부닥쳐 해결하는 도전정신이 부럽다”며 일감을 줬다  

 

이런 패기로 그 회사가 만든 건축자재를 일본으로 수송하는 일을 따낸 주인공은 김현겸 팬스타그룹 회장(53)이다.  


“배를 갖겠다. 

부산 앞바다를 보며 자란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도로스가 되기로 결심했다. 해양대 진학을 원했으나 시력 기준 때문에 지원조차 하지 못했다. 성균관대 토목공학과를 마친 그는 바다에 미련이 남아 해운회사에 입사했다. 국내 기업이 만든 제품을 일본으로 수송하고 수수료를 받는 해외영업을 주로 했다. 

언젠가 선주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다니던 회사를 2년 만에 그만뒀다. 28세 때인 1990년 동료 2명과 화물운송 중개업체 팬스타엔터프라이즈를 창업했다. 자본금 5000만 원이 없어 신혼집을 담보로 잡혔다. 일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롯데 삼성 등으로 거래처가 늘어났다. 

화물선을 가지려고 2001년 조양상선 자회사 인수에 나섰다. 그러나 기존 선사들이 반대해 무산됐다. 화물선을 포기하고 승객도 싣는 카페리로 눈을 돌렸다. 마침 일본에서 건조한 지 4년 된 카페리가 매물로 나왔다. 가격은 화물선의 10배가 넘는 350억 원이었다. 2002년 자산을 처분하고 금융회사에서 돈을 빌려 간절히 바라던 배를 샀다. 승객 681명과 화물 220TEU(1TEU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를 실을 수 있는 21688t급 카페리였다. ‘팬스타드림’호로 명명했다. 


“세금을 많이 내는 선주가 되겠다. 

선주는 세금을 덜 내고 값싼 외국인 선원을 쓰려고 선박을 제3국에 주로 등록한다. 그는 주위의 권유를 뿌리치고 우리나라에 등록했다. 대한민국 선적 1호 카페리 선주가 됐다. 이전에 없던 부산∼오사카 항로도 개설했다. 태극기를 휘날리며 일본 지중해로 불리는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사상 처음으로 지나자 가슴이 뭉클했다.

운항 초기에 물동량을 확보하지 못해 매출이 200달러도 안 되는 화물을 싣고 떠나기도 했다. 한 번 운항하면 수천만 원을 손해 봤다. 누적 적자가 100억 원에 이르자 주 6일 동안 3회 왕복하는 부산∼오사카 노선을 줄이자는 건의가 올라왔다. 결항하면 망한다며 정기 운항을 밀어붙였다.  

그는 빠른 화물 수송으로 차별화하기로 했다. 한국 업체로는 처음으로 현지법인 산스타라인을 통해 일본 면허를 따서 통관과 철도 운송을 직접 하자 4일 이상 걸리던 배달시간이 2일 이내로 줄었다. 항공 운송보다 싸고 빠르게 일본에 화물을 보내는 루트로 자리 잡으면서 취항 1 6개월 만에 이익을 내기 시작했다.


“크루즈 시대에 대비하자. 

2004년 팬스타드림호가 쉬는 토요일을 이용해 부산 연안을 둘러보며 선상에서 1박을 하는 주말 크루즈를 국내 처음으로 선보였다. 국제선을 국내에서 운항하자 관계당국이 반대했으나 해양관광의 중요성을 내세워 승인을 받았다. 한일 월드컵 이후 화물과 여행객이 늘어 2007년 일본에서 카페리 ‘팬스타써니’호(26847t), 이듬해 ‘팬스타허니’호(14036t)를 사들였다. 

호사다마일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자 물동량과 여행객이 급감해 대출금을 갚기 어려웠다. 매각의 기로에 섰으나 일본 선주가 채권 회수를 유예해줘 위기를 넘겼다. 팬스타써니호는 팔고 팬스타허니호는 반환했다.  

 

3척이 오가던 항로에 1척만 운항하자 다시 화물과 승객이 몰렸다. 2010년 ‘산스타드림’호(11820t), 2012년 ‘스타링크원’호(12968t), 2013년 ‘스타링크호프’호(3593t) 등 고속 화물페리 3척을 구입했다. 항로도 가나자와, 쓰루가, 요코하마, 도쿄 등으로 넓혔다.

김 회장은 샐러리맨으로 시작해 팬스타그룹을 대형 선박 4척에 연매출 1500억 원이 넘는 카페리선사로 키웠다. 크루즈 개척자인 그는 승객 2500명이 탈 수 있는 7 t급 크루즈선을 들여와 국적 크루즈선 시대를 열기 위해 지금도 뛰고 있다
.

 

<13> 강성희 오텍그룹 회장

병원 응급실 같은 앰뷸런스-닥터 헬기 국산화 

/강성희 오텍그룹 회장이 첨단 의료장비를 갖춘 한국형 앰뷸런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기술 개발이 어려우니 부품을 수입해 쓰겠습니다.

앰뷸런스의 승차감을 개선하라고 하자 담당자가 말했다.

“우리만의 기술이 없으면 평생 휘둘리다 결국 망하게 된다. 

목소리를 높이며 반드시 자체 개발하라고 지시했다. 직원에게 화를 낸 것은 창업 후 처음이었다.

당시 앰뷸런스는 1t 트럭을 개조해 만들었기 때문에 노면이 좋지 않은 도로에서는 덜컹거렸다. 뇌나 척추를 다친 응급환자는 앰뷸런스 때문에 상태가 더 나빠질 수 있었다. 승차감을 개선하려면 스프링으로 된 쇼크업소버 대신 컴퓨터로 제어하는 충격 완화 장치인 에어 서스펜션이 필요했다. 국내에는 그런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없었다. 기술 제휴 중이던 네덜란드 기업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수소문 끝에 미국 카네기멜런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신동헌 서울시립대 교수가 정밀기계 전문가라는 사실을 알았다. 거절하는 신 교수를 삼고초려하며 설득했다. 신 교수팀과 공동 개발에 나서 3년 만에 에어 서스펜션을 국산화했다. 

이렇게 한국형 앰뷸런스를 개발한 주인공은 강성희 오텍그룹 회장(60)이다

한양대 사학과와 고려대 경영대학원을 마친 그는 1982년 서울차체에 입사하면서 특장차와 인연을 맺었다. 특장차는 완성차에 특수장비를 더해 목적에 맞게 개조한 차량이다. 서울차체는 적재함, , 소음기 등 자동차 부품과 탑차, 청소차, 트레일러 같은 특장차를 만들어 기아자동차에 납품하는 1차 협력업체였다. 

1997
년 기아차 부도 여파로 서울차체도 부도를 냈다. 영업담당 이사이던 그는 특장차 사업부를 분할해주면 맡겠다고 제의했다. 서울차체는 특장차사업부 직원 50여 명을 전원 고용하고 퇴직금 지급을 책임지는 조건으로 승인했다. 

2000
45세의 나이로 오텍을 창업했다. 그는 일감을 확보하기 위해 휴일 없이 일했다. 17년 넘게 쌓은 영업 노하우와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현대자동차에 인수된 기아차와 제과회사 등에서 주문을 따냈다. 조달청이 발주한 앰뷸런스 공급 입찰에 참여해 납품권도 확보했다.


“나는 나쁜 놈이다. 

2001년 미국 응급의료서비스(EMS) 전시회에서 앰뷸런스와 응급 구조장비를 보고 동행한 임원에게 말했다. 첨단 의료장비를 갖춘 미국의 앰뷸런스는 종합병원 응급실과 같았다. 당시 오텍의 앰뷸런스에는 들것과 의료용품 20여 가지가 비치돼 있었으나 환자를 이송하는 차량에 불과했다 

앰뷸런스를 제대로 모르고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앰뷸런스는 대부분 경쟁입찰이어서 수익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응급환자를 살릴 수 있는, 이동식 병원 같은 앰뷸런스를 개발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대당 2억 원이 넘는 앰뷸런스를 미국 독일 등에서 들여와 분해하며 연구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진동을 최소화한 방진 베드, 번쩍거리는 스트로브 경광등, 환자의 흔들림을 막는 들것 등 주요 장비를 국산화했다. 탑재 공간도 넓혀 의료장비 120여 가지를 구비한 한국형 앰뷸런스를 개발했다. 국내 앰뷸런스의 약 70%는 오텍 제품이다. 해외로 눈을 돌려 베트남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등 10여 개국에 의료장비가 내장된 앰뷸런스를 수출했다 


“진화는 생존의 필수 전략이다. 

닥터 헬기, 슬로프와 전동시트를 갖춘 장애인차, 경사 35도에서도 전복되지 않는 짐칸 높이 175cm의 탑차 등을 처음으로 개발했지만 특장차 수요는 한정돼 있어 기업을 키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인수합병(M&A)에 나섰다. 2007년 한국터치스크린, 2011년 캐리어에어컨, 캐리어냉장을 차례로 사들였다. 캐리어에어컨 인수 후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려고 사재를 털어 신문에 광고를 냈다. 10년 만에 처음이었다. 직원의 사기를 높여주자 1년 만에 적자 상태에서 벗어났다 

 

그는 기술과 디자인이 경쟁사에 뒤지면 잠을 못 잔다. 아이디어가 있으면 일단 해 보자고 할 만큼 스피드와 실행력을 중시한다. 계열사 기술연구소를 통합해 시동을 꺼도 에어컨이 가동되는 탑차, 인버터 기술로 전기 사용량을 절반 수준으로 줄인 쇼케이스, 냉난방에 제습, 공기청정 기능까지 갖춘 에어컨 등을 개발했다.

강 회장은 샐러리맨으로 출발해 직원 1100명에 연매출 7000억 원의 중견그룹을 일궜다. 그는 매년 20% 이상 성장하고 30% 진화해 세계 시장에서 기술로 인정받는 전문기업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뛰고 있다.

 

<14> 임수복 강림CSP 회장

신혼집 골방서 시작… 年매출 3000억 철강유통회사로

/임수복 강림CSP 회장이 부산 화전산업단지 3 3000㎡의 터에 세운 물류창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거래를 끊기로 했습니다.

대선조선 상무는 사장이 결정한 것이라고 했다. 최후통첩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독립해 납품하거나 다른 업체를 소개하라고 제안했다. 창업한다면 밀어주겠다고 했다. 대선조선이 자금난으로 6개월짜리 어음을 끊어준 것을 천일철강 대표가 공개 석상에서 비난한 게 거래 중단을 몰고 왔다. 


○ 가족 반대 뿌리치고 29세에 창업 

시간을 좀 주십시오. 


뜻밖의 제의를 받은 그는 10년 넘게 일한 회사에 대한 의리를 생각하며 고민을 거듭했다. 대선조선 측은 빨리 결정하라고 재촉했다. 기회라는 생각에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29세 때인 1976년 강림파이프상사를 세웠다. 자금이 부족해 신혼집 한 칸에 사무실을 내고 철강제품 유통사업에 나섰다. 주인공은 임수복 강림CSP 회장(68)이다.

밀양실업고 재학 시절 주산을 잘했다. 학교 대표로 여러 경진대회에 나가 상도 받았다. 고향을 떠나 1964년 부산우체국 저금관리국에서 학생들이 맡긴 예금 이자를 계산하는 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안정된 직장이었으나 월급이 적어 이듬해 천일철강 경리로 옮겼다.

3
년 뒤 사장은 ‘일솜씨를 보니 다른 일도 잘하겠다’며 영업직으로 발령을 냈다. 타향인 부산에 인맥 학맥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다른 직원이 맡지 않은 거래처를 개발하려고 건설 현장을 찾아다녔다. 현장 관계자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눈길이라도 주면 깍듯이 인사하고 철근 파이프 등을 소개했다 

받은 주문은 제때 정확하게 공급했다. 공사가 끝날 때까지 수시로 음료수를 사 들고 현장을 다니며 관계를 다졌다. 젊은이가 성실하고 싹싹하다며 오더를 주는 거래처가 늘어났다. 능력을 인정받아 조선업체 같은 큰 거래처를 담당하다 일본에서 철강제품을 수입하는 일까지 맡게 됐다. 


○ 日서 배운 JIT 시스템 도입해 대박 

창업을 결심하는 데 그런 경험이 한몫했다. 창업한 그는 일본에 출장을 다니다 알게 된 JIT(just in time) 시스템을 떠올렸다. JIT 시스템은 필요할 때 필요한 양만큼만 부품을 조달해 재고를 없애는 도요타의 경영 방식이다. 당시 국내 조선업체는 선박 건조에 필요한 강관을 일본에서 수입해 썼다. 품귀 현상이나 가격 변동에 대비해 20%가량 많은 여유분까지 야적장에 쌓아 놓다 보니 밑에 깔린 강관은 녹슬어 폐기 처분하는 일이 잦았다


JIT 시스템을 도입하자. 

그는 무계목(無繼目) 강관을 일본 스미토모, 관서강관 등에서 수입해 대선조선에 납품했다. 무계목 강관은 용접으로 이어 붙이지 않고 봉강을 뚫어 만든 파이프로 높은 압력과 열에도 잘 견뎌 조선, 석유화학, 발전, 해양플랜트 등에 쓰인다

회사를 키우려고 이전에 알던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 담당자를 찾아갔다. 일본에서 직접 구입하지 않아도 되고 대량 구매로 가격까지 낮출 수 있다고 설득해 무계목 강관 공급계약을 맺었다. 대한조선공사가 JIT 시스템으로 구매 비용을 30%가량 줄인 게 알려지자 다른 조선업체와 화학회사들도 잇달아 주문했다. 선금을 받고 공급할 만큼 사업이 번창했다.


○ 폐암 고쳐준 유기농 전도사로 제2 인생 

호사다마일까. 2004년 일본 종합상사 이토추가 거래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건강검진권을 줘 일본 병원에서 검진을 받았다. 폐에서 종양이 발견돼 조직검사를 했더니 폐암이라고 했다. 청천벽력 같은 말에 눈물이 쏟아졌다. 베트남전 참전에서 얻은 고엽제 후유증이었다. 항암 치료를 받으라고 의사가 권했으나 종양 제거 수술만 받고 귀국했다


“유기농이 살렸다. 

고향인 경남 밀양에서 유기농 농장을 운영해 신지식인 농업인으로 선정된 그는 농약과 비료를 전혀 쓰지 않은 유기농 식단으로 건강을 회복했다. 이를 계기로 유기농에 푹 빠졌다. 부산대와 함께 유기농 들깨에서 식물성 오메가3를 추출하는 방법을 국내 처음으로 개발해 고향에 공장까지 세웠다. 

그는 생사의 기로에서 돈보다 중요한 삶의 가치를 깨달았다. 사재(私財) 70억 원을 출연해 장학재단과 문화재단을 세웠다. 모교에 인조잔디를 깔아주고 100인조 오케스트라의 악기 구입비도 지원했다.


임 회장은 맨손으로 출발해 강림CSP를 동양 최대 강관 물류창고를 가진 매출 3000억 원대 중견기업으로 키웠다. 그는 유기농이 환경과 국민 건강을 지키고 농민의 소득 증대에도 기여하는 효과를 알리는 ‘유기농 전도사’로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15) 박상일 파크시스템스 대표

교수직 뿌리치고 창업… 원자현미경 세계 첫 상용화

/박상일 파크시스템스 사장이 살아있는 세포를 볼 수 있는 원자현미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1985년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실. 응용물리학 박사 과정을 밟던 그는 원자 모습이 현미경에 연결된 컴퓨터 화면에 나타나자 환호성을 질렀다. 원자는 너무 작아 어떤 도구를 써도 볼 수 없다던 과학계의 통설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원자현미경 개발 이론을 정립한 캘빈 퀘이트 교수의 지도를 받아 시제품 개발에 나선 지 3년 만에 신의 영역으로 여기던 초미세 세계를 볼 수 있는 길을 연 것이다.


“서울대 교수 자리를 왜 포기해?

서울대 물리학과를 마친 뒤 유학을 떠나 1987년 스탠퍼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가 모교의 교수직 제의를 거절하고 사업을 하겠다고 하자 가족과 주위 사람들이 말렸다.


“나만 할 수 있는 일에 도전해야죠. 

제록스, NTT 등 기업 관계자들이 대학 연구실로 찾아와 원자현미경 시제품을 본 뒤 정식 제품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수요가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창업하기로 결심했다.

30
세 때인 1988년 스탠퍼드대 인근 실리콘밸리에 얻은 셋집의 차고에서 박사 동기 1명과 원자현미경 제작에 나섰다. 그리고 현미경 탐침과 시료의 원자가 서로 끌어당기고 밀어내는 힘을 레이저로 측정해 이미지화하는 새 원자현미경(AFM)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다. 회사 이름은 자신의 성()을 따 PSI(Park Scientific Instrument)로 정했다. 주인공은 박상일 파크시스템스 대표이사 사장(58)이다. 

원자현미경은 광학현미경, 전자현미경에 이은 3세대 현미경으로 배율이 수천만 배나 돼 전자현미경으로 볼 수 없는 nm(나노미터·1nm 10억분의 1m) 크기의 물체를 관찰할 수 있다. 진공 상태에서 고체 시료만 볼 수 있는 전자현미경과 달리 대기 중에서 혈액 같은 액체 시료의 형상은 물론이고 물리적 전기적 성질까지 알 수 있어 나노 및 바이오 분야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계측장비다. 

박 사장은 판로 개척에 나서 하버드대,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등에 연구용 원자현미경을 공급했다. 1989 48만 달러에 불과하던 매출은 3년 후 595만 달러로 늘었다. 한때 사업 확대에 따른 운영자금 부족과 경쟁회사의 등장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더 큰 문제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 그는 1997년 연매출 1200만 달러의 PSI를 미국 계측장비업체 서모피셔에 1700만 달러에 매각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잠재 시장이 큰 산업용 원자현미경을 만들자. 

한국에 돌아오자 KAIST 포스텍 등 국내 유수의 대학에서 교수직을 제의했다. 고민 끝에 초심을 살려 다시 창업하기로 결심했다. 

귀국 몇 달 뒤 서울 서초구에서 사무실을 빌려 PSIA를 설립했다. 초기엔 서모피셔에 매각한 PSI의 연구용 원자현미경을 수입해 대학과 기업 등에 판매했다. 수익이 생겼지만 만족하지 않고 반도체 생산 공정에 쓰이는 원자현미경 개발에 나섰다. 1998년 첫 제품으로 200mm 웨이퍼의 결함 여부를 파악할 수 있는 원자현미경 ‘SM5-200’을 만들었다.

2000
년 삼성전자가 600×720mm 액정표시장치(LCD) 제조용 원자현미경을 주문했다. 그렇게 큰 시료를 검사하는 원자현미경은 세상에 없었다. 원자현미경 틀을 크게 만들면 진동 탓에 성능 유지가 안 되기 때문이다. 1년 만에 문제를 해결하고 자동화 기능까지 갖춘 LCD용 원자현미경을 개발했다. 

성장 가도를 달리던 2001년 돌발 변수가 생겼다. PSI 매각 당시의 계약에 따라 기술을 제공하던 서모피셔가 세계적 제조장비 업체인 비코에 넘어간 것. 비코는 기술 개발을 중단하지 않으면 연구용 원자현미경은 물론이고 주요 부품도 줄 수 없다고 했다.


“홀로 서자. 

그는 이를 기회 삼아 기술 독립하기로 결심했다. 6개월간 하루도 쉬지 않고 개발에 매진해 ‘XE-100’을 내놓았다. 콜럼버스의 달걀에 비유되는 분리형 스캐너를 세계 최초로 적용한 이 원자현미경은 탐침과 시료가 접촉하지 않아 해상도가 높은 게 특징이다.

여세를 몰아 시료가 70도로 기울어진 입체 모양까지 측정할 수 있는 3D 원자현미경도 개발했다. 이를 본 IMEC가 기술 제휴를 요청했다. IMEC는 세계 최고 장비로 차세대 반도체 기술을 개발하는 컨소시엄. 인텔 삼성전자 등이 회원사다.


박 사장은 파크시스템스를 세계 최초 기록을 여러 개 보유한 원자현미경 선도기업으로 키웠다. 동아일보 ‘10년 후 한국을 빛낼 100인’에도 선정된 그는 파크시스템스를 글로벌 넘버원 브랜드로 키우기 위해 오늘도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16> 김영달 아이디스 사장

테이프 없이 CCTV영상 저장하는 DVR 첫 개발 

/김영달 아이디스 사장이 초고화질 TV처럼 화면이 선명한 IP카메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우리도 회사 하나 만들어 보자.

1996년 미국에서 돌아온 그는 대학 연구실 동료들에게 뛰어난 기술 하나로 세계적인 기업이 되는 실리콘밸리의 동향을 전하고 공동 창업을 제안했다. 박사 과정 지도교수였던 이광형 KAIST 교수의 주선으로 1995년 벤처기업 PSI에서 교환연구원으로 일하다 귀국한 직후였다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실업계 고교에 가라는 부모를 설득해 인문계 고교를 졸업하고 학비가 없는 KAIST 전산학과에 진학했다. 그리고 교수를 꿈꿨다. 그러나 실리콘밸리에서 새로운 세상을 본 뒤 기업가로 진로를 바꿨다. 


“그래. 한번 해보자. 

연구실을 함께 쓰던 박사 과정 류병순, 정진호 씨가 흔쾌히 동의했다. 의기투합만 했지 정해 놓은 사업 아이템은 없었다. 동료들과 논의해 벤처기업 역량으로 할 수 있고, 시장이 원하는 제품을 개발한다는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대기업이 진출할 만큼 시장 규모가 크지 않고, 기술력을 갖추면 세계 1위를 할 수 있는 사업 아이템을 찾기로 했다. 대학원 동기 김정주 씨( NXC 대표)가 매달리던 게임과 인터넷 분야는 고수익을 기대할 수 있지만 실패 확률도 높다는 판단에 따라 제외했다. 


“바로 이거다. 

우연히 들른 대학 경비실의 구석에 쌓여 있는 폐쇄회로(CC)TV 녹화 테이프를 보고 무릎을 쳤다. 비디오테이프는 녹화시간이 26시간에 불과해 수시로 교체해야 하고, 보안 문제가 생겼을 때 일일이 테이프를 돌려 화면을 찾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이런 단점을 없앤 새로운 영상 저장장치를 만들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사업 아이템을 제대로 잡았는지 알아보려고 1997 8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보안장비 전시회를 찾아 글로벌 보안업체의 기술 수준을 살펴봤다. 보안장비 시장이 막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되는 시점이어서 유명 회사 제품도 별로 없었다.


“승산이 있다. 

한 달 뒤 대전 유성구에서 창업했다. 자본금은 자신이 조교와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3000만 원과 동료들이 낸 2000만 원으로 마련했다. 사명(社名)은 지능형 통합 보안시스템(Intelligent Digital Integrated Security)의 영문 이니셜을 따 아이디스(IDIS)로 정했다. 임차한 26m²( 8) 크기 사무실에 책상 4개와 PC 4대를 놓고 디지털 영상 저장장치 개발에 나섰다. 김영달 아이디스 대표이사 사장(48)의 이야기다 

밤새는 줄 모르고 개발에 매달려 6개월 만에 시제품을 만들었다. 잔뜩 기대하며 시작 버튼을 눌렀으나 작동하지 않았다. 다시 만든다는 마음으로 시제품을 분해해 원인을 찾아 나섰다. 회로에서 문제점이 발견됐다. 보완하자 다행히 정상 가동됐다.

1998
6월 영상을 하드디스크에 저장하는 디지털비디오리코더(DVR) IDR 1016’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출시했다. 이 제품은 CCTV 16대의 영상을 한 달 치 이상 저장하고, 녹화 화면을 쉽게 검색할 수 있으며, 화질이 아날로그보다 선명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획기적인 제품을 본 에스원, 삼성전자 등이 제조자개발생산(ODM) 형태로 납품해 달라고 주문했다. 일부 보안기업과 보안장비 유통업체는 독점권을 요구했다. 벤처기업이 독자 판매망을 갖추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해 대기업에 영업과 서비스를 맡겼다

해외시장 공략에도 나섰다. 1998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보안제품 전시회에 내놓자 호평이 쏟아졌다. 1999년 호주 시드니 올림픽 경기장을 시작으로 미 항공우주국, 뉴욕 지하철, 중국 베이징 공항 등에 공급했다. 

CCTV
가 동축케이블이 아닌 인터넷과 무선으로 서로 연결되는 네트워크 보안 시대가 열릴 것으로 예상해 2000년부터 네트워크 저장장치(NVR), 원하는 곳의 화면을 어디서나 스마트폰으로 볼 수 있는 초고화질 IP카메라, 카메라 3만 대를 중앙에서 관리할 수 있는 영상관제시스템 등도 내놨다. 또 성장 동력을 확보하고 시너지 효과를 얻기 위해 2005년 카드 프린터 제조업체 아이디피, 2012년 아날로그 CCTV 제조업체 에치디프로, 카지노 모니터 제조업체 코텍을 인수했다

아이디스는 세계적 보안회사인 하니웰, 타이코, 지멘스 등에 DVR를 공급하며 세계 1위 기업으로 성장했다. 맨손으로 시작한 아이디스와 계열 기업의 연매출은 이제 5000억 원을 넘어섰다. 김 사장은 DVR를 넘어 보안 통합솔루션을 제공하는 글로벌 넘버원 기업을 만들기 위해 지금도 뛰고 있다. 

 

<17> 차근식 아이센스 사장

피 한 방울로 혈당 측정… 당뇨환자 고통 덜다 

/차근식 아이센스 사장이 혈당측정기 ‘케어센스’의 기능과 특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정부 담당자의 말을 듣자 묵은 체증이 싹 가신 듯했다. 대학 교수인 그는 3년짜리 정부 연구과제를 맡아 1년간 주관했다. 생체물질의 미세한 변화를 분석할 수 있는 초소형 기기인 바이오 멤스를 개발하는 과제였다. 그런데 2년 차부터 사업화할 중소기업이 과제를 주관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과제가 좋고 연구비도 많기에 계속 맡고 싶었다. 그래서 정부에 질의했는데 본인이 벤처기업을 설립해 계속해서 과제를 주관해도 된다는 답변을 들은 것이다.

같은 연구실을 쓰던 동료 교수에게 이 말을 전하자 창업에 동의했다. 전공을 살려 잘할 수 있고 성장 가능성이 있는 사업 아이템을 찾아 나섰다 

고려대 화학과를 나와 미국 미시간대에서 바이오센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국내 기업에 관련 기술을 이전하고 자문활동 경험도 있어 자신이 있었다

당시 로슈, 존슨앤드존슨, 바이엘, 애보트 등 글로벌 ‘빅4’가 세계 혈당측정기 시장의 98%를 장악하고 있었다. 철옹성처럼 높은 벽을 보지 않고 시장 규모가 7조 원에 이르는 매력에 더 주목했다. 세계 시장의 0.1%만 차지해도 매출이 70억 원이니 취업난을 겪는 제자들에게 일자리까지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소박한 꿈을 갖고 2000년 대학 화학과 센서연구실에서 벤처기업을 창업한 주인공은 차근식 아이센스 대표이사 사장(62·광운대 화학과 교수)이다. 남학현 교수(57·아이센스 사장)와 연구실에서 일하던 석·박사 과정 제자 6명도 참여했다.


국내 기업을 돌며 사업계획을 설명해 2곳에서 6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운영비를 확보했으나 총력을 기울이자는 뜻에서 개발까지의 데드라인을 제시했다

혈당측정기는 당뇨병 환자가 혈액 내 혈당을 측정하는 데 쓰는 진단기기다. 피부를 찔러 피가 나오게 하는 바늘 같은 랜싯, 혈액을 묻히는 종이 막대 모양의 스트립, 혈당 농도를 재는 명함 크기 장치인 측정기로 구성된다 

기존 제품으로 혈당을 측정하려면 혈액 4μL가 필요했다. 측정 시간도 30초가 걸렸다. 혈액의 양과 측정시간을 줄인 제품을 만들기로 했다. 2년간 많은 시행착오 끝에 피 한 방울 정도인 0.5μL 5초 만에 혈당을 재는 획기적인 시제품을 개발했다. 핵심 기술인 바이오센서가 들어가는 스트립은 자체 제조하고, 하드웨어인 측정기는 외주를 줬다

2003
년 말 자가 혈당측정기 ‘케어센스(CareSens)’를 출시하고 시장 개척에 나섰다. 경쟁력을 갖춘 만큼 기대가 컸으나 이름 없는 벤처기업 제품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제약회사와 병원 등에서 거푸 퇴짜를 맞을 때 행운의 여신이 찾아왔다. 대리점에 혈당측정기 판매를 맡겼던 글로벌 기업들이 이익을 더 내려고 직영체제로 전환하자 분개한 대리점들이 케어센스를 팔겠다고 나선 것이다. 

미국 혈당측정기 제조업체인 아가매트릭스 관계자가 찾아왔다. KOTRA 추천을 받았다며 자사(自社) 전용 스트립을 공급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기존 특허에 걸리지 않는 신기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스트립을 살펴보더니 1억 개를 주문했다. 세계 5위 혈당측정기 판매 업체인 일본 아크레이도 글로벌 제약회사 사노피에 납품할 스트립을 주문했다. 2010년에는 뉴질랜드 정부의 입찰에 참여해 글로벌 기업 ‘빅4’를 물리치고 스트립 독점 공급권을 따냈다

초창기에는 대학 앞 임대 공장에서 하루 3만 개의 스트립을 생산했다. 주문량이 늘어나자 2007년 강원 원주, 2012년 인천 송도, 지난해 중국 장쑤 성 장자강 시에 공장을 지어 연산 20억 개 이상으로 생산능력을 늘렸다. 

아이센스는 코딩이 필요 없는 혈당측정기, 무선통신이 가능한 혈당측정기, 현장검사용 혈액분석기 등 바이오센서 특허 146(해외 83, 국내 63)를 토대로 다양한 신제품을 내놓고 있다. 피를 뽑지 않고도 혈당을 알 수 있는 혈당측정기, 피부 아래에 작은 센서를 넣어 주기적으로 혈당을 재는 연속 혈당측정기 등은 현재 개발 중이다.

차 사장은 대학 실험실 벤처기업을 세계 80여 개국에 수출하는 직원 400, 연매출 1000억 원이 넘는 중견기업으로 키웠다. 지금은 1%인 세계 시장 점유율을 5% 이상으로 높여 매출 1조 원을 달성하겠다는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18> 파산 딛고 리어카 끌며 1000억 기업 일군 오뚝이

김영식 천호식품 회장 

/김영식 천호식품 회장이 활력이 넘치는 동작으로 건강식품을 소개하고 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학습지 어떻습니까?

형편이 어려운 가정의 7남매 중 셋째인 그는 1974년 제대일이 다가오자 뭘 해서 먹고살지 걱정이 됐다. 그때 친하게 지내던 후임병이 아이디어를 줬다. 학습지 대리점을 해보라고. 외출을 나가 가능성을 확인했다. 제대 5일 후 부친의 도움을 받아 고향(경남 고성군)에서 초등학생 일일 학습지 지국을 20만 원에 인수했다. 당시 23세였다

회원을 늘리기 위해 낡은 자전거로 비포장도로를 하루 100km씩 달렸다. 다른 지국과 달리 학습지를 채점한 뒤 정성껏 개인지도까지 해줬다. 학생들의 성적이 오르자 입소문이 났다. 90명이던 회원이 두 달 만에 550명으로 늘었다. 단기간에 전국에서 가장 많은 회원을 확보했다. 지국을 팔았던 사람이 100만 원에 다시 사겠다고 제의했으나 친형에게 넘겼다 

그는 트럭에 잡화를 싣고 다니며 구멍가게에 공급하다 부산에서 신발 깔창을 만들어 팔았다. 26세 때 펜팔로 아내를 만나 보증금 3만 원에 월세 7000원인 슬레이트집 단칸방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1980
년 세계 금연의 해를 맞아 금연파이프를 만들어 거리 판매에 나섰다. 하얀 모자에 하얀 장갑을 끼고 담배 끊는 파이프라고 선전하자 고객이 몰렸다. 주문이 전국에서 쇄도해 6개월 만에 6000만 원이 넘는 큰돈을 벌었다. 자만심에 돈을 물 쓰듯 하며 장난감과 주방용품 사업을 벌였다. 은행 대출까지 받아 많은 돈을 투자했으나 예상만큼 안 팔려 무일푼이 됐다.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하자. 

굴하지 않고 사채를 빌려 헐값에 나온 조끼 5000장을 사서 리어카에 싣고 다니며 팔았다. 다시 밑천을 모아 새 사업 아이템을 모색했다. 그러다 1984년 저주파 치료기를 만드는 천호물산을 세워 건강사업에 뛰어들었다. 주인공은 김영식 천호식품 회장(65)이다

2
년 뒤 교통사고로 왼팔이 부러졌다. 뼈가 안 붙어 애를 태우자 지인이 식용 달팽이를 먹어 보라고 권했다. 달팽이를 달여 먹고 효험을 본 그는 달팽이농장을 사들인 뒤 종자를 분양해 재미를 봤다. 1991년 회사 이름을 천호식품으로 바꾸고 ‘달팽이 엑기스’를 첫 건강식품으로 내놨다.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잘 안 팔렸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KBS를 수시로 찾아가 PD들에게 인사했다. 곧 망하겠다고 생각할 즈음 ‘6시 내 고향’에 소개됐다. 전화기에 불이 날 정도로 주문이 쏟아졌다 


“본업 아닌 일에 손대지 않는다. 

1994년 부산에서 현금 부자 100명에 들 만큼 잘나갔다. 찜질방, 황토방 체인사업 등을 한꺼번에 벌였다.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자 가맹점 해지가 잇따랐다. 하청업체에 줬던 어음이 무더기로 돌아왔다. 회사는 물론이고 집까지 경매에 넘어갔다. 직원들이 떠나자 자살 충동까지 느꼈으나 어렵게 이겨냈다 

공장에 재고로 있던 ‘강화사자발쑥 진액’이 눈에 들어왔다. 아내가 선물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전당포에 맡기고 받은 130만 원으로 전단지를 만들어 돌렸다. 18만 원 하던 60팩들이 한 박스를 5만 원에 팔며 여관에서 소주와 소시지로 숙식을 해결했다. 대학원 동기인 탤런트 이순재 씨에게 사정사정해 나중에 돈을 벌어 주는 조건으로 광고모델을 부탁했다. 매출이 늘어 2년 만에 빚 23억 원을 갚고 재기했다. 본업에 전념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듬해 ‘사슴한마리’를 내놓고 100억 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 


“남자에게 참 좋은데… 표현할 방법이 없네. 

2000년 ‘산수유환’을 출시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선물로 보냈더니 친필 사인이 든 감사 답장이 왔다. 이런 내용을 담은 광고를 해 히트를 쳤다. 신제품 ‘산수유1000’ 홍보 방안을 내놨다가 직원들에게 떠밀려 TV 광고에 출연했다. 사투리에 어설픈 연기였으나 큰 인기를 끌며 일약 유명인사가 됐다 


김 회장은 천호식품을 미국 일본 중국 등 13개국에 수출하는 연매출 1000억 원대의 중견기업으로 키웠다. 제조 특허를 받은 달팽이, 산수유, 마늘, 양파를 비롯해 다양한 자연 원료로 180여 가지 건강식품을 생산하고 있다.

김 회장은 넘어져도 오뚝이처럼 일어난 경험을 토대로 경영난을 겪는 중소기업들을 돕기 위해 최근 마케팅컨설팅회사를 세웠다. 많은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한국의 워런 버핏’이 되겠다는 것이 그의 꿈이다.

 

(19) 김원길 바이네르 사장 - 맨손으로 500억 기업 일군 중졸 구두장인

/김원길 바이네르 사장이 컴포트화 신제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구두 만드는 법 배워 볼래?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를 마친 뒤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취업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때 충남 서산에서 구둣방을 운영하던 작은아버지가 돈벌이도 괜찮다며 제화 기술을 권했다


“해보겠습니다.

16세 때 수습공으로 구두와 인연을 맺었다. 고교에 진학한 친구들은 ‘족쟁이’라고 놀렸다.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성공하겠다고 다짐했다. 적어도 1년은 걸린다는 제화 공정을 5개월 만에 익혔다. 배우려는 의지가 강한 데다 어려서부터 새총, 썰매 등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쓸 만큼 좋은 손재주도 한몫했다

서산 구둣방에서 10개월간 일한 뒤 더 큰 곳에서 배우기로 작정했다. 결심하면 바로 행동에 옮기는 그는 옷가방 하나 달랑 들고 상경했다. 영등포역 부근 구둣방 6곳에 일자리를 알아봤으나 거푸 퇴짜를 맞았다. 번화가를 벗어난 곳에 있던 양화점 주인이 월급 없이 숙식만 제공하는 조건으로 채용했다 

 

여름 비수기에 일거리가 없어 설악산 인근 산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피서철이 끝난 뒤 돌아와 참스제화에 수습공으로 들어갔다. 연탄가스를 마시고도 출근할 만큼 열심히 일해 1년 만에 기술자로 승격했다. 구두를 납품받던 케리부룩이 1983년 스카우트를 제의해 옮겼다 


“제가 출전하겠습니다. 

1984년 전국기능경기대회에 경기도 대표로 나갈 예정이던 기술자가 중압감을 못 이겨 잠적했다. 케리부룩에서 여성화 최고 기술자로 꼽히던 그는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해 대타를 자원했다. 공장장은 꼭 금메달을 따야 한다며 허락했다. 여성화가 아닌 남성화 제작이 경연 과제여서 70일간 연습한 뒤 참가했다. 결과는 동메달. 금메달을 따면 펼치려던 홍보 계획이 백지화돼 회사 분위기가 무거웠다. 휴가를 내고 무작정 부산으로 떠났다.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태종대에 갔더니 기암절벽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과 파도가 얼마나 오랫동안 다듬었을까.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단기간 준비해 금메달을 못 땄다고 신세 한탄이나 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겸손해야 하고, 실패했다고 좌절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듬해 구두 사업을 배우려고 생산관리부에 지원했다. 품질 검사를 하다 영업 관리를 맡았다. 1989년 인천백화점에 첫 매장을 냈으나 한 달도 안 돼 철수 통보를 받았다. 매출이 600만 원으로 다른 업체의 20%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1억 원어치 팔면 돼. 

백화점 측에 떼를 부려 말미를 한 달 얻었다. 회사와 상의해 5만∼6만 원짜리 구두를 25000원에 파는 특가세일에 나섰다. 인천 시내 곳곳에 현수막을 내걸고 전단도 돌렸다. 절박한 마음에 백화점에서 호객 행위까지 해 1억 원 넘는 매출을 올렸다. 콧대 높던 서울지역 백화점 2곳도 뚫어 재고를 다 처분했다. 회사에 오니 구두 판 돈을 챙겼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억울하고 섭섭해 8년간 일한 회사를 그만뒀다. 

1990
년 사장이 챙겨준 특별퇴직금 200만 원으로 구두 부속물을 만드는 회사를 차렸다. 당시 29세였다. 김원길 바이네르 대표이사 사장(55) 얘기다.

 

초기에는 신생 회사라 얕보고 물품대금을 제때 안 주는 거래처가 많아 자금난에 시달렸다. 1991년 우연히 케리부룩 실적이 형편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재고를 팔아주다 구두를 만들어 케리부룩 상표를 붙여 판매했다. 케리부룩의 부도로 구두가 안 팔려 큰 손해를 봤다

1994
년 활로를 찾으려고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구두 전시회를 찾았다. 발이 편한 기능성 구두인 컴포트화가 대세였다. 이탈리아 ‘바이네르’ 구두를 수입하며 신뢰를 쌓아 1996년 상표 사용권을 얻었다. 번 돈으로 자체 브랜드 ‘안토니’를 키웠다. 2010년 안토니 구두를 이탈리아에 수출했으나 실적이 기대에 못 미쳤다. 브랜드의 중요성을 절감한 그는 유럽 금융위기를 기회로 삼아 2011년 바이네르 상표권을 사들였다. 로열티를 주고 쓰던 세계적 브랜드를 인수한 것이다. 컴포트화 국내 1위에 머물지 않고 가방 벨트 골프화 등으로 생산품목을 늘렸다. 

김 사장은 가난의 아픔을 알기에 불우이웃을 돕는 데 매년 10억 원가량을 내놓고, 창업을 원하는 청년들도 돕고 있다. 맨손으로 연매출 500억 원대 중견기업을 일군 그는 바이네르를 세계 최고 구두회사로 만들기 위해 지금도 구두 굽이 닳도록 뛰고 있다.

 

<20> 황해령 루트로닉 사장 - 피부미용 시대를 연 레이저 의료기 국산화

/황해령 루트로닉 사장이 황반 치료 레이저 의료기인 알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레이저 의료기를 개발합시다.

40세 때인 1997년 창업한 그는 직원 6명에게 사업 방향을 밝혔다. 어떤 제품을 어떻게 만들지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다만 피부 미용에 쓰는 레이저 의료기를 개발하면 많은 사람에게 아름다움과 기쁨을 주고 회사도 성장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는 미국 아이비리그인 예일대에서 경제학을 전공(전자공학 부전공)했다. 그렇지만 ‘금수저’는 아니다. 먹고사는 게 힘들어 고향(경북 달성군 화원읍) 시골을 떠나기로 한 아버지를 따라 중학교 1학년 때 미국으로 건너갔다. 아버지는 태권도 사범을 하며 자녀를 뒷바라지했다. 노고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해 예일대에 진학했다.

대학생 시절 여러 아르바이트를 했던 그는 졸업 후 한국산 의류제품을 미국으로 들여와 팔았다. 사업 경험이 없어 적잖은 손해를 보고 접었다. 미국 레이저 기기 업체인 레이저시스템스에 들어갔다. 능력을 인정받아 부사장까지 올랐다. 레이저 기기를 일본 한국 등에 파는 아시아 지역 마케팅 담당으로 일했다. 

그러다 레이저 의료기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당시 한국산 제품은 없었다. 피부 미용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대당 1억∼3억 원이나 하는 고가의 외국 기기를 찾는 수요가 늘어나고 있었다. 레이저 의료기를 국산화하면 환자 부담이 줄고 일자리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나가던 회사를 그만두고 귀국해 벤처기업 맥스엔지니어링을 설립했다. 황해령 루트로닉 대표이사 사장(59) 이야기다. 

 

국내에 레이저 의료기 제조업체가 없어 외국 제품을 벤치마킹하고 해외 논문을 읽으며 관련 기술을 공부했다. 국내 레이저 전문가를 찾아다니고, 미국 인맥도 동원해 기술 도움을 받았다. 세계 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제품을 목표로 개발에 착수했다. 기세 좋게 출발했으나 얼마 뒤 자본금이 바닥나면서 난관에 부딪쳤다. 외환위기로 대출은 물론이고 투자자 모집도 어려웠다. 아파트를 팔았지만 월급조차 제때 줄 수 없었다. 직원을 설득해 가며 기술 개발에 매달렸다. 2년간 많은 시행착오 끝에 기미, 잡티, 주근깨 같은 색소 질환과 문신을 흉터 없이 안전하게 치료할 수 있는 레이저 의료기 ‘스펙트라’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레이저를 제 팔에 쏘겠습니다. 

식품의약품안전처 승인을 받아 판매에 나섰다. 외국 제품보다 30% 싸게 내놨지만 중소기업 제품을 사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피부과 의원을 찾아가 자신의 몸에 직접 시술해 성능을 보여줬다. 간절한 마음을 알았는지 의사가 효과를 확인한 뒤 구매했다. 이후 싸고 품질도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주문이 늘어났다. 

해외 시장 개척에도 나섰다. 외국에서 열리는 학회와 전시회를 돌아다니며 제품을 알렸다. 1년간 공을 들여 2001년 대만에 수출했다. 2003년 국산 레이저 의료기로는 처음으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았다. 레이저 출력시간을 조절하는, 이전에 없던 기능을 더한 신제품은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고난도 기술이 필요한 수술용 레이저 의료기에도 도전했다. 라식 기기 전문가인 이고르 그라도프 전 루메니스 최고기술책임자를 영입했다. 4년 고생 끝에 2013년 당뇨병성 황반부종을 레이저로 치료하는 ‘알젠(R:GEN)’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식약처와 유럽연합 인증까지 받았다. 주사기를 안구에 찔러 넣는 기존 약물 치료법보다 시술이 간편하고 효과도 좋다. 안과용 레이저 기기는 100% 외국산 제품이다. 신기술 평가와 보험수가 결정 후 판매에 들어가면 수입대체 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성장 동력을 확보하려고 2013년 미국 바이오비전 지분 51%를 인수한 뒤 초소형 내시경 카메라로 인체 내부를 보며 시술하는 척추 수술 카테터를 출시했다. 피부에 좋은 8가지 성분을 나노 리포솜 기술로 피부 속 깊은 곳에 보내는 병원 전용 화장품 ‘라셈드’도 내놨다.

루트로닉은 지방 제거, 주름 및 흉터 치료, 제모, 피부 재생 등으로 적용 범위를 넓혀 15종의 레이저 의료기를 내놓았다. 기술이 경쟁력의 핵심 요소라고 생각해 매출액의 약 20%는 연구개발에 투자한다. 전체 직원의 30%가 연구 인력이며, 국내외 특허 219개를 보유하고 있다. 

황 사장은 루트로닉을 60여 개국에 제품을 수출하는 연매출 700억 원대의 국내 1, 세계 10대 기업으로 키웠다. 세계 최고의 레이저 의료기술로 인류의 삶의 질을 높이는 100년 기업을 만드는 게 그의 꿈이다. 

 

 <21> 신경철 유진로봇 사장

국내 로봇산업 개척해 온 1세대 주자

/신경철 유진로봇 사장이 청소로봇 아이클레보와 배달로봇 고카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일생의 업으로 삼아도 되겠다.

1982년 국비 유학생(박사 과정)으로 미국 미시간대에 가 보니 로봇 연구가 한창이었다. 로봇이 상상 속에 머물지 않고 현실 가까이 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로봇공학을 처음 접했는데 너무 재미있었다. 아톰, 철인28호 같은 만화나 공상과학(SF) 영화 속의 로봇이 장차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해주는 동반자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서울대 기계설계학과를 나온 그는 로봇산업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1988
년 로봇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삼성종합기술원 정밀기기연구소에 들어갔다. 로봇개발팀장으로 전자제품 조립에 쓰는 로봇팔 등 공장 자동화를 위한 산업용 로봇을 개발했다 


“우리 회사에서 일하는 건 어떠냐? 

1990년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말했다. 부친은 포니자동차 개발과 마북리연구소 설립에 참여한 현대자동차 기술이사 출신으로 2년 전에 자동차 전장품(電裝品)을 만드는 유진전장을 세웠다. 평소 말을 아끼는 아버지의 성품으로 미뤄 ‘SOS’라는 것을 직감했다. 며칠 고민하다 직장을 그만두고 부친 회사에 들어갔다. 삼성에 입사했을 때 큰 감명을 받았던 이병철 창업주의 경영철학인 사업보국(事業報國·사업으로 나라에 이바지한다)을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대표로 취임해 회사 이름을 유진로보틱스로 바꾸고 로봇 개발에 나섰다. 신경철 유진로봇 대표이사 사장(60) 이야기다. 

첫 주문은 삼성전자에서 받았다. 냉장고의 바깥 틀을 작업대에 자동으로 옮기는 장치였다. 산업용 로봇을 제작했던 경험을 토대로 6개월 만에 완성해 수원공장에 납품했다. 이어 포스코의 오더로 아연도금강판 제조에 쓰는 자동화 장비를 만들어 광양제철소에 설치했다

일회용 가스라이터 ‘불티나’ 자동 조립장치 주문이 들어왔다. 단순한 제품으로 생각해 방향만 제시하고 개발은 직원에게 맡겼다. 약속했던 6개월 전에 제품이 완성됐다. 테스트를 하니 불량률이 높아 납품할 수가 없었다. 원인 파악에 나섰다. 각 부품이 제 위치에서 0.02mm 범위 안에 놓여야 불량 없이 조립되는데 오차가 0.06mm나 됐다. 1년 넘게 개발에 매달려 가스라이터 제조 설비를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정밀장비 제조 노하우를 축적하는 계기가 됐으나 시제품을 여러 번 만드느라 큰 손해를 봤다


“주력 품목을 바꾸자.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자 공장 자동화 장비 주문이 뚝 끊겼다. 산업용 로봇을 만들던 대기업들도 사업을 접었다. 경기 영향을 많이 받는 산업용 로봇 대신 인간과 상호작용을 하거나 상황을 판단해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지능형 로봇을 만들기로 했다.

1999
년 위험작업 로봇 ‘롭해즈’를 한국과학기술연구원과 함께 개발했다. 세계로봇경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이 로봇은 2004년 이라크 자이툰 부대에 배치돼 수색과 폭발물 제거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기술력은 알렸지만 시장에서 파는 제품이 아니어서 자금난을 겪었다 


매출을 늘리기 위해 가정용 로봇에 도전했다. 2004년 집 안 모니터링, 방문자 확인 등의 기능이 있는 홈 로봇 ‘아이로비’를 내놨다. 2006년 사용자를 인식하고 자율 주행이 가능해 친구, 비서, 교사 역할을 하는 네트워크 기반 로봇 ‘아이로비Q’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상용화했다. 아이와 대화하고 영어 등을 가르치는 교육로봇도 개발했다

수요가 많은 청소로봇 개발에 나섰다. 2005년 집 안을 스스로 돌아다니며 청소하는 ‘아이클레보’를 출시했다. 수입 제품의 절반 가격도 안 되는 30만 원대에 내놓자 인기리에 팔렸다. 성능 대비 싼 가격을 무기로 일본, 캐나다 등 해외 시장도 뚫었다. 글로벌 가전회사인 필립스에 이어 밀레의 주문을 받아 세계일류상품으로 선정된 청소로봇을 제조자개발생산(ODM) 방식으로 납품하고 있다. 성장동력을 확보하려고 2005년 봉제완구 제조업체 지나월드를 인수한 뒤 승용완구, 애니메이션 캐릭터 변신로봇 등을 내놨다 

로봇산업 1세대인 신 사장은 28년 넘게 한 우물을 파 유진로봇을 세계 30여 개국에 수출하는 연매출 400억 원대의 중견기업으로 키웠다. 그는 환자의 체온, 혈압을 재고 약 먹는 시간을 알려주는 헬스케어로봇, 인공지능을 접목한 완구로봇 등을 개발하고 있다. 로봇과 함께 따뜻한 세상을 여는 세계적 로봇기업을 만드는 게 그의 꿈이다.

 

<22> 신승영 에이텍티앤 사장 

LCD TV 실패 딛고 교통카드 결제시스템 개발

/신승영 에이텍티앤 사장이 버스, 지하철, 택시 등에 쓰이는 교통카드 시스템의 기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경북 영주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은행원을 꿈꿨다. 부친은 초등학교 교사였으나 박봉이라 6남매가 배불리 먹는 것조차 어려웠다. 굶지 않고 살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때 암산대회에 나가 입상할 만큼 산수도 잘했다. 당시 봉급을 많이 주는 은행은 최고의 직장이었다.

 

고교 때 수학여행으로 서울을 처음 찾았다. 고향과 달리 사람과 빌딩이 많고 활력이 넘쳤다. 서울에 사는 사촌은 얼굴이 뽀얀 데다 선물까지 줄 정도로 잘살아 부러웠다. 빨리 서울로 가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러나 현실은 생각과 달랐다. 서울권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이 발목을 잡았다. 대구에서 직장을 다니는 누나가 안 도와주면 서울권 대학은커녕 대학에도 못 들어갈 처지였다. 마침 전자공학 붐이 일어 영남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에 다닐 수 있게 된 것만도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1982년 대학 졸업 후 금성사( LG전자)에 합격했다. 인사 발령을 앞두고 구미공장에 배치될 것이라는 얘기를 우연히 들었다. 고향 가까운 곳에서 일하라는 회사의 배려였다. 그는 서울 근무가 아니면 입사를 포기하겠다고 인사팀에 말했다. 결국 서울에 있는 컴퓨터기술부에 배치돼 컴퓨터 수리를 했다. 맡은 일을 똑소리 나게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산업체 석사 과정을 뽑는다는 사내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가 탈락했다. 명문대 출신 위주로 선발된 것을 보자 조직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스펙 때문에 진급이 늦어져 동기나 후배 밑에서 일하는 장래 모습이 떠올랐다. 용납할 수 없었다. 마음속으로 성과에 따라 정당하게 보상하는 회사를 세워야겠다고 결심했다. 평택공장 근무를 자원해 가전제품 생산, 품질검사 등을 익혔다.


 
34세 때인 1989년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회사를 나와 에이텍시스템을 창업했다. 직원 2명과 용산전자상가의 23m²( 7) 사무실에서 컴퓨터 부품 수리를 시작했다. 같은 고장이 나지 않도록 철저히 수리해 주자 솜씨가 좋다는 소문이 퍼졌다. 신승영 에이텍티앤 대표이사 사장(61) 이야기다.

 

기술력을 인정받아 한전의 전력제어반 수리를 맡았다. 고장 나면 미국이나 일본에 보내야 할 정도로 복잡한 장치였다. 1000만 원이 넘는 해외 수리비의 30%만 받고, 6개월 걸리던 수리를 한두 달에 끝내자 철도청, 발전소 등도 정밀 전자장치의 수리를 맡겼다. 1993년 직원이 40명이 넘어 개인회사를 법인으로 전환했다. 사명(社名)도 ㈜에이텍으로 바꿨다.

 

외환위기 때 거리로 쏟아져 나온 기업 연구원 등 인재들을 영입해 숙원이던 자체 제품 개발에 나섰다. 1998년 데스크톱 컴퓨터 본체와 막 출시된 액정표시장치(LCD)로 만든 모니터를 결합한 신개념 ‘일체형 PC’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내놓았다. 컴퓨터 놓을 공간을 획기적으로 줄인 이 제품은 국산 신기술 인증을 받았다. 조달 우수제품으로 선정되자 관공서와 금융회사 등에서 대량으로 주문했다.

 

자신감이 생겨 2003 LCD TV 제조 사업에 뛰어들었다. 독일 드레스덴에 공장을 세우고 싼 가격을 앞세워 유럽 시장에서 재미를 봤다. 하지만 글로벌 기업들이 뒤늦게 시장에 진출해 가격을 확 낮춘 제품을 내놓자 재고가 쌓이기 시작했다. 결국 손해를 보고 LCD TV 사업을 접었다.

 

이를 계기로 대기업과 맞붙는 소비재에서 손을 떼고 정부나 기업에 공급하는 제품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런 방침에 따라 2007년 새 사업 아이템으로 정한 것이 교통카드시스템이다. 도로를 달리던 차가 덜컹하면 컴퓨터를 재부팅한 것처럼 시스템이 초기 상태로 돌아가 결제가 안 되는 등 개발 과정에서 많은 난관에 부딪쳤다. 밤낮을 잊고 연구에 매달려 진동에도 신호가 끊어지지 않는 장치 등을 개발해 문제를 해결했다.

 

버스, 지하철, 택시 요금을 카드로 결제하는 단말기와 발매기, 충전기, 정산기 등을 만들어 서울, 대전, 제주, 경북 포항 등에 납품했다. 해외로도 눈을 돌려 2010년 뉴질랜드를 시작으로 말레이시아, 콜롬비아, 몽골 등에 교통카드시스템을 수출했다. 지난해 에이텍에서 교통카드시스템 사업 부문을 떼어내 에이텍티앤을 세웠다.

 

신 사장은 LCD TV 사업의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았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생각으로 교통카드시스템 사업에 도전해 도약의 기틀을 다졌다. 에이텍티앤을 교통카드시스템 분야 세계 1위 글로벌 강소기업으로 만드는 게 그의 꿈이다.

 

 <23> 정석현 수산그룹 회장

/정석현 수산그룹 회장이 험난했던 인생 역정과 향후 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전북 장수에서 농부의 5남매(1 4)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학비가 없어 중학교에도 못 갈 만큼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 오수중 입학시험에서 1등을 해 3년간 학비를 면제받았다. 공부에 대한 열의로 집에서 8km 떨어진 중학교를 걸어 다녔다. 빨리 취업하려고 전주공고(기계과)에 진학했다. 담임교사가 알선한 아르바이트를 해 학비와 하숙비에 보탰다.

 

1970년 고졸 공채 1기로 현대건설에 입사했다. 포항제철소 터 조성 공사를 위한 영일만 준설선에 처음 배치됐다. 배에서 먹고 자며 낡고 침수돼 고장 난 엔진과 발전기 등을 수리했다. 이어 인천 저유소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 본사 기계부로 옮겼다.

 

공석인 부장 역할까지 하던 과장이 갑자기 현대조선소(현 현대중공업)로 발령 났다. 과장 대리로 정주영 회장과 정인영, 이명박 사장에게 결재를 받으러 다녔다.

 

“눈앞의 이익보다 멀리 봐야 돼.

 정 회장이 어떤 가치를 우선시하고 의사 결정을 어떻게 하는지 배웠다. 일류대학 경영학석사(MBA) 과정보다 더 귀중한 경험을 하며 안목을 키웠다. 큰 행운이었다.

 

직속 임원이 배려해줘 야간 대학에 다녔다. 1979년 한양대 기계공학과를 마친 뒤 사표를 냈다. 해외 건설 현장에 가면 봉급이 많았다. 현대그룹이 급성장하는 때여서 자동차, 조선 등 계열사로 옮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직장생활로는 대물림되는 집안의 가난을 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 계획 없이 용기를 낸 데는 소 판 돈을 갖고 집을 나와 쌀 배달부터 시작한 정 회장에게 받은 영향이 컸다. 길을 찾으면 자신에게도 열릴 것이라고 기대했다. 가족 생계가 급해 경기 안양에 뉴욕제과 분점을 내 아내에게 맡겼다.

 

사업 아이템을 찾으려고 돈이 모인다는 서울 남대문시장, 용산 청과시장, 노량진 수산시장 등을 살폈다. 모두 새벽시장이라 적응이 어렵겠다고 판단했다. 한동안 사업거리를 못 찾아 다시 취직할까 고민했다. 청계천에 공구를 사러 갔다가 현대건설 근무 때 공구를 납품하던 영업사원을 우연히 만났다. 그는 독립해 공구 장사를 시작했다며 동업을 제안했다. 주위에서 동업은 오래 못 간다고 조언했다. 시장 특성을 몰라 혼자 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각자 사업자 등록을 하는 대신 시장을 파악할 때까지 도와주면 이익 일부를 주기로 했다.

 

공구 판매를 위해 석원상사를 세웠다. 여러 공구상과 경쟁하려면 공구를 싸게 사는 게 관건이었다. 막 사업을 시작한 신출내기에겐 사실상 불가능해 초창기 1년을 힘겹게 보냈다. 어려움을 타개하려고 물품 대금을 현금으로 지급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당시 공구는 외상 또는 어음으로 거래했다. 청계천 공구상가에 없던 일이 생기자 물건을 대주겠다는 사람이 몰렸다. 주요 건설사와 조선업체의 작업 계획을 미리 파악해 그에 맞는 공구를 준비했다. 필요한 공구가 다 있고 싸게 판다는 소문이 나면서 고객이 크게 늘었다.

 

공구상을 친척에게 넘기고 1983년 석원산업을 창업해 플랜트 공사에 나섰다. 정석현 수산그룹 회장(64) 이야기다.

 

친정인 현대건설을 찾아 근황을 얘기했다. 옛 상사가 영광 원자력발전소 배관공사 일부를 맡겼다. 처음 하는, 어려운 작업이라 경험 있는 기술자를 영입했다. 현장에 나가 모든 시공 내용을 꼼꼼히 기록했다. 완공 후 데이터를 분석해 공사비와 공사 기간을 줄이고 안전도를 높이는 비결을 찾아냈다.

 

현대건설이 턴키로 처음 수주한 이라크 화력발전소 건설에 참여했다. 이를 위해 전문건설업체 1호 해외건설업 면허를 취득했다. 실적이 쌓이자 대림산업, 한국중공업 등이 일감을 줬다. 수많은 국내 원전과 화력발전소, 해외 플랜트 공사를 한 뒤 원전을 유지·보수하는 정비사업에 진출했다.

 

2004년 법정관리를 거쳐 매물로 나온 건설장비업체 수산중공업을 인수했다. 130여 개에 이르던 제품 수를 60여 개로 줄이고, 해외 시장 개척과 기술력 향상에 주력했다. 유압브레이커, 유압드릴, 트럭 크레인 등의 품질이 높아지자 3년 만에 매출이 2배로 늘었다.

 

위기도 있었다. 2008년 환율 변동 대비 상품 키코(KIKO) 탓에 200억 원의 손실을 입었다. 2013 70여 개국에 120억 원어치를 판 신제품에서 하자가 발견됐다. 고객과의 신뢰를 생각해 큰 손해를 보고 전량 리콜했다.

 

정 회장은 맨손으로 시작해 5개 계열사를 둔 연매출 3000억 원대 중견그룹을 일궜다. 독일 히든챔피언처럼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갖추고 지속 성장하는 일류 강소기업을 만드는 게 그의 꿈이다.

 

<24>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회장

혁신 장비로 한국을 반도체 세계 1위로 만들다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회장이 ‘세계 1등 제품만 만듭니다’라는 모토를 배경으로 서 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경북 고령에서 6남매(2 4)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약 40가구가 사는 작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방앗간을 운영했다. 가정 형편은 어려웠다. 빨리 취업하기 위해 인문계 고교 대신 공고에 입학했다. 동양공고를 나와 공장에 들어갔다. 친구들이 공부를 잘하는데 왜 취직하느냐며 대학 진학을 권했다. 부친을 설득해 인하전문대를 거쳐 인하대 전자공학과에 편입했다.

 

대학을 마치고 1984년 현대전자에 입사했다. 파견된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 관계자에게서 반도체 제조 공정과 기술을 배웠다. 국내 반도체 산업이 태동하는 때여서 선배 기술자의 지식과 실력도 일천했다. 원하는 반도체 엔지니어가 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네덜란드의 세계적 반도체 장비 업체인 ASM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1986 ASM 한국지사로 옮겼다. 반도체 장비를 공장에 설치하려면 여러 장비를 잘 알아야 한다. 동료들이 장비의 특성을 알려 주지 않아 퇴근시간 뒤 사무실에 남아 모든 장비를 스케치하며 제원과 기능을 익혔다. 스스로 만들거나 수집한 자료가 소형 트럭 한 대분이나 됐다. 출중한 역량을 갖추자 거래처에서 일이 생길 때마다 찾았다.

 

ASM 1993년 판매 부진을 이유로 한국지사를 대리점으로 줄였다.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표를 냈다. 무역업을 하던 친구가 서울 잠실의 사무실 한쪽을 빌려줬다. 책상과 전화를 놓고 34세 때 홀로 사업에 나섰다.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회장(57) 이야기다.

 

초창기엔 반도체 장비를 만들 자금이 없었다. 그래서 아이디어와 기술력을 활용해 반도체 장비를 업그레이드해 주는 일을 시작했다. ASM 근무 시절 거래했던 삼성반도체에서 6인치 웨이퍼 제조 장비를 8인치 장비로 개조하는 일을 맡았다. 수많은 반도체 장비를 다루며 익힌 지식을 토대로 이전에 없던, 새로운 구조의 8인치 장비를 개발했다. 반도체 장비를 업그레이드하자 생산성이 2배 이상으로 높아졌다. 개조 비용은 새 장비 구입비의 절반에 불과했다. 이를 본 현대전자와 LG반도체도 6인치 웨이퍼 장비의 업그레이드를 맡겼다.

 

2년간 반도체 장비를 개조해 주고 5억 원을 모았다. 오랫동안 생각해 온 반도체 장비 개발에 착수했다. 1995년 웨이퍼에 분자 크기 박막을 입혀 반도체의 저장 용량을 2배 이상으로 늘리는 화학 증착 장비(CVD)를 개발했다. 세상에 없던 획기적인 장비였다. 그러나 국내 기업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반도체 같은 첨단 장비에는 나사 하나라도 국산을 쓰면 안 된다는 인식이 강했다.

 

미국 장비회사 지네스가 기존 제품과 융합시키면 세계 최고 반도체 장비가 되겠다며 3대를 주문했다. 이 장비는 미국 및 일본 기업, 삼성반도체에 팔렸다. 국산 반도체 장비로는 처음으로 해외에 수출됐다. 외국 기업에서 장비를 샀던 삼성반도체는 국산인 것을 뒤늦게 알고 더 좋은 제품을 요구했다. 생산성과 품질은 높이고 가격은 낮춘 장비를 만들어 삼성반도체에 공급했다. 현대전자와 LG반도체에도 들어갔다. 이 장비는 한국이 일본을 제치고 반도체 세계 1위로 도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001년엔 반도체 미세 공정을 위한 원자층 증착 장비(ALD)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공간 분할 기술을 적용해 화학 증착 장비보다 100배나 얇은 막을 더 빠르고 균질하게 입힐 수 있게 됐다. 생산성은 10배 이상 높아지고 제조비는 70% 이상 줄었다. 대용량 반도체를 양산하는 길을 연 이 장비는 독일 키몬다에 이어 하이닉스에 공급됐다.

 

 2006년 증착 과정에서 생기는 불순물을 없애고 필요한 곳에만 플라스마를 발생시키는 신개념 장비를 개발했다. 차세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에 쓰이는 이 장비는 하이닉스와 LG디스플레이에 납품됐다.

 

위기도 있었다. 2001년 경쟁 업체의 음해로 큰 거래처가 주문을 끊어 시련을 겪었다. 2011년 태양광산업이 꺾이자 태양광 장비를 샀던 중국 기업들이 대금을 안 줘 1000억 원이 넘는 손해를 봤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장비 주문이 늘면서 고비를 넘겼다.

 

주성엔지니어링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태양광 제조 장비 9개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국내외 특허는 1930여 건에 이른다. 1세대 벤처 기업가인 황 회장은 주성엔지니어링이 국가대표 기업이라는 자부심으로 경기 광주시 본사 건물에 3층 높이 대형 태극기를 내걸고 있다. 그는 세계 최초 기술과 세계에서 하나뿐인 제품으로 글로벌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오늘도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25> 박기석 시공테크 회장

전시산업 불모지이던 한국을 선진국으로 만들다

/박기석 시공테크 회장이 초등학생 가정학습 프로그램 ‘아이스크림 홈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1948년 전남 보성에서 3남매(2 1)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병환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 얼굴조차 기억에 없다. 졸지에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갖은 고생을 하며 억척스럽게 자녀를 키웠다. 독학으로 한글을 깨친 어머니는 자식들을 엄하게 가르쳤다. 품앗이로 모내기를 할 때 하나라도 비뚤게 심으면 무슨 일을 하든 제대로 하라며 혼냈다. 기본에 충실해야 하고 편법은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중고교에 갈 수 없을 만큼 형편이 어려웠다. 선생님들이 공부를 잘하니 상급 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어머니를 설득해 힘겹게 진학했다. 장학금을 받고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며 중고교를 다녔다. 처지를 알기에 대학 입시를 포기하고 교양서를 많이 읽었다. 독서를 하다 보니 미래를 위해 대학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려대 생물학과에 합격했으나 등록금이 없어 입학하지 못했다. 공사판 막일꾼과 초등학생 과외로 3년간 돈을 모아 고려대 독어독문학과에 다시 들어갔다. 다음 학기 학비가 없어 자원입대했다. 제대 후 학원 영어 강사와 과외로 학비를 벌어 고교 졸업 11년 만에 대학을 마쳤다.

 

 1977년 친구가 ‘묻지 않고 딸을 주는 회사가 있다’고 해 입사시험을 봤다. 급성장하며 신화를 써 나가던 율산실업이었다. 유일한 해외 지사인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지사에 배치됐다. 알루미늄 수출이 임무였다. 설립한 지 얼마 안 된 탓에 현지 수입업자 명단조차 없었다. 봉급을 털어 통역을 고용했다. 길가에 차를 세워 놓고 기다리다 알루미늄을 실은 트럭이 지나가면 무작정 쫓아갔다. 상인에게 얼마에 샀는지 묻고 더 질 좋은 제품을 싸게 공급하겠다고 제안했다. 1700만 달러어치를 팔아 새 시장을 개척했다. 신설한 미국 시카고지사로 발령 받았다. 그런데 율산그룹이 도산했다. 

 

 여러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1980년 중계무역회사 한웅을 세웠다. 알루미늄 수출 경험과 수입업자 인맥을 활용해 한국 일본 미국 유럽에서 시멘트, 대리석 등 건축 자재를 사서 중동에 팔았다. 20억 원 넘는 큰돈을 벌었다. 유가 하락으로 ‘중동 붐’이 꺾이고 시장 경쟁도 치열해져 사업을 접었다

 

 해외에 다닐 때 일이 없는 주말에는 과학관, 테마파크, 박물관 등을 찾았다. 우리나라에는 왜 이런 곳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 1988년 전시문화기업을 설립했다. 첫 프로젝트로 서울시 올림픽기획단에 제안해 88서울올림픽 전야제 행사를 맡았다. 63빌딩의 54개 층을 스크린으로 하는 영상 레이저 쇼를 미국 기업과 제휴해 국내 처음으로 선보였다. 1990년 스카이스캔과 협력해 원형 영상 옴니맥스를 국내에서 처음 만들어 국립과학관 천체관에 설치했다. 박기석 시공테크 회장(68) 이야기다.

 

 해외에 큰 전시관이나 박물관이 개관하면 직원들을 보내 배우게 했다. 전시사업에 필요한 영상, 음향, 모형 등 기술 축적에 많은 비용을 들였다. 그러나 일감은 거의 없었다. 4년 뒤 자금이 바닥나 처갓집까지 저당 잡혔다. 경제가 발전하면 전시산업도 성장한다는 믿음으로 버텼다.


 예상처럼 1993년 대전엑스포를 계기로 전시관과 박물관, 홍보관 설립 붐이 일었다. 앞선 기술력과 아이디어로 일감을 확보했다. 국립생물자원관, 서울역사박물관, 해남공룡전시관, 여수엑스포 주제관 등 1000개 넘는 전시관을 꾸몄다. 중국에 진출해 만리장성, 네이멍구, 허베이 성 박물관도 기획하고 구성했다.

 

 2002년 디지털 콘텐츠를 교육에 활용하기 위해 시공미디어를 세웠다. 책임지고 성공시키겠다는 뜻으로 자본금 절반을 개인 돈으로 냈다. 영국 BBC에 찾아가 영상 사용권을 얻는 등 13년간 1200억 원을 들여 사진 300만 장, 동영상과 컴퓨터그래픽 30만 개를 확보했다.

 

 이를 활용해 초등학교 교사에게 디지털 교재를 제공하는 ‘아이스크림(i-scream)’ 서비스를 2008년 세계 최초로 시작했다. 교사가 보여 주는 동영상과 사진으로 학생은 교과 내용을 쉽게 배울 수 있다. 국내외에서 디지털 콘텐츠 최고상을 받은 이 서비스를 체험하려고 53개국에서 찾아왔다. 2011년에는 초등학생이 태블릿PC로 예습과 복습을 하고 문제를 푸는 홈러닝 시스템 ‘아이스크림 홈런’을 내놨다.

 

 박 회장은 불모지나 다름없던 국내 전시문화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발전시킨 공로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그는 세계 1800개 한글학교에 아이스크림을 무료로 제공하는 등 최고의 디지털 교육 콘텐츠를 세계에 보급하기 위해 오늘도 뛰고 있다.

 

<26> 권혁운 아이에스동서 회장

맨주먹으로 매출 1조 기업 이룬 ‘망치 회장’

/권혁운 아이에스동서 회장이 부산 용호만에 건축중인 초고층 주상복합 ‘W’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광복 후 귀국한 재일동포 가정에서 8남매(6 2) 중 막내로 태어났다. 고향 집은 경북 의성군 다인면 중심가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제때 졸업하지 못했다. 그러나 주눅 들지 않으려고 늘 자신 있게 행동했다.

 

 그의 부모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신용이라고 가르쳤다. 거짓말을 하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엄하게 꾸짖었다. 손해를 보더라도 가르침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믿을 수 있는 친구라는 얘기를 주위에서 들었다. 

 

 어린 시절 부모는 남아 있는 재산을 정리하러 간다며 일본으로 떠났다. 예정했던 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누나를 따라 대구를 거쳐 중2 때 부산에 정착했다. 또래보다 3년 늦게 동아고를 마쳤다. 모 대학에 합격했으나 학비가 없어 군에 입대했다.


 3년 뒤 제대해 바로 손위 형(권홍사 반도건설 회장)이 세운 건설회사에 들어갔다. 일본에서 생활 기반을 잡은 부모로부터 일본에 건너와 대학을 다니라는 연락을 받았다. 회사에 다니며 주경야독으로 유학을 준비했다.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이 터졌다. 범인 문세광이 일본에서 오는 배편에 권총을 숨겨 들여온 사실이 밝혀져 한일관계가 악화하는 바람에 일본 유학길이 막혔다


 고향 선배가 큰 건설회사에서 일해 보라고 권했다. 일본 유학 문이 열릴 때까지 일할 생각으로 선배가 주선한 옥포기업에 취직했다. 배우는 게 재미있고 성취감도 있어 밤낮을 잊고 일했다. 동료보다 빨리 승진했다.

 

 우연히 합판이 없어 집짓기가 어렵다는 말을 형에게서 들었다. 1979년 성창기업을 찾아가 합판 대리점을 따냈다. 63빌딩을 비롯한 신축 건물에 합판을 공급해 꽤 많은 돈을 벌었다. 일솜씨를 보고 경남 1위 건설업체인 신동양건설 사장이 스카우트를 제의했다. 장사에 만족하고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신동양건설 전무로 옮겼다. 신동양건설이 자금난을 겪다 1983년 부도를 냈다. 당시 부사장으로 회사의 연대보증인이었다. 집이 압류되고 TV, 냉장고는 물론이고 아이 책걸상에까지 빨간 딱지가 붙었다. 건설업은 경기를 많이 타고 망하면 제조업과 달리 먼지밖에 안 남는다는 것을 배웠다.


 1985년 주위의 도움을 받아 반도통운을 세웠다. 축협에서 사료 수송을 맡았다. 컨테이너 트럭을 주문해 운송 중 땅에 떨어지는 낙곡을 없애자 일감이 늘었다. 그때 지인이 싸게 나온 좋은 땅이 있다며 사 두면 돈이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현장을 둘러본 뒤 부산 해운대의 명소로 꼽히는 달맞이고개 일대 약 1000평을 사들였다. 건설회사 근무 경험을 살려 1987년 일신(一信)주택을 설립해 건설 사업에 나섰다. 부모가 강조한 신용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회사 이름에 담았다. 권혁운 아이에스동서 회장(66) 이야기다.


 달맞이고개 땅에 빌라를 짓기로 하고 국내 빌라촌을 찾아다녔다. 구조와 조경 등을 보러 몰래 들어갔다가 경비원에게 붙잡혀 파출소에 끌려가기도 했다. 1급인 부산 파라다이스호텔에 들어간 캐나다산 참나무를 비롯한 고급 자재를 구해 빌라를 지었다. 방송국이 ‘달맞이고개 초호화빌라 신축’ 뉴스를 내보냈다. 국세청의 조사를 받는 등 시련을 겪었지만 운도 따랐다. 입소문이 나면서 며칠 만에 100% 분양됐다.


 기세를 몰아 1989년 일신건설산업을 세워 아파트 사업에 뛰어들었다. 부산 영도에 400여 채 규모의 아파트 건설을 시작으로 경남 창원, 진해, 울산 등에서 아파트를 지으며 기술력과 인지도를 쌓은 뒤 2006년 수도권에 ‘에일린의 뜰’ 브랜드로 진출했다.

 

 신동양건설 부도 때 전 재산을 날렸던 아픈 경험을 살려 망하지 않는 회사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부채비율 100%, 건설부문이 총매출의 40%를 넘으면 안 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를 위해 2008년 건자재 1위 업체인 동서산업을 인수한 뒤 일신건설산업과 합병해 아이에스동서로 사명(社名)을 바꿨다. 이어 2010년 비데회사 삼홍테크, 2011년 건설장비와 사무기기 임대업체 한국렌탈, 2014년 영풍파일 중앙레이콘 중앙물산을 사들였다.


 권 회장은 자신이 지은 빌라나 아파트에서 산다. 건설 현장이나 모델하우스를 수시로 찾아 소비자 입장에서 보고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바로 망치로 부숴 버린다. 이런 현장경영 덕에 지금까지 미분양을 낸 적이 없다


 권 회장은 맨주먹으로 시작해 아이에스동서를 당대에 연매출 1조 원이 넘는 중견기업으로 키웠다. 지속 성장하는 100년 기업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현장을 누비고 있다

 

<27> 정현호 메디톡스 사장

원조 보톡스 회사에 기술 수출한 거인

/정현호 메디톡스 사장이 보툴리눔 독소 치료제와 바이오 신약 개발 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어린 시절 호기심이 많았다. 궁금한 게 있으면 참지 못해 주위에 묻거나 백과사전을 보며 이해할 때까지 배웠다. 좋아서 하는 일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했다. 커서 과학자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서울대 미생물학과를 마치고 KAIST 대학원(생명과학과)에 진학했다. 양규환 교수 밑에서 단일항체클론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양 교수는 1970년대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딴 독성학 권위자였다.

 교수 연구실에는 독소가 많았다. 연구실 냉장고에 있던 독소가 눈에 들어왔다. 양 교수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때 가져온 클로스트리듐 보툴리눔이었다. 보툴리눔 독소는 생물이 만드는 물질 중에서 독성이 가장 강하다. 1g으로 100만 명 이상 죽일 수 있다

 양 교수와 상의해 보툴리눔 독소를 박사 연구과제로 정했다. 보툴리눔 연구의 메카인 위스콘신대를 중심으로 미국에서는 보툴리눔 독소 A형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다. 보툴리눔 독소는 AG 7종이 있다. A형 연구 결과를 참고하며 B형을 연구했다. 1992년 보툴리눔 독소 B형의 구조와 기능을 밝혀 그 분야 국내 1호 박사가 됐다.

 정부 요청으로 세균전에 대비해 보툴리눔 독소의 탐지, 해독, 백신에 대해 연구했다. 미국 국립보건원에서 연수를 마치고 귀국해 생명공학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일했다. 1995년 선문대 교수로 옮겨 미생물학과를 개설했다 

 

 외환위기가 터지자 교수에 대한 기초연구비 지원이 끊겼다. 정부의 지원 방향이 교수 창업과 산업기술 개발로 바뀌었다. 연구비가 필요해 궁여지책으로 2000년 후배 박사, 대학원 제자와 함께 대학 연구실에서 벤처기업을 창업했다. 정현호 메디톡스 대표이사 사장(54) 이야기다. 

 사업 아이템을 찾으려고 시장조사를 했다. 미국 제약회사 엘러간이 세계 최초로 만든 보툴리눔 독소 A형 제품(보톡스)이 신경과 근육질환 치료제로 수입돼 팔리고 있었다. 잘 아는 분야인 만큼 국산화하기로 했다. 국내 대형 제약회사 여러 곳에 투자를 요청했으나 퇴짜를 맞았다. 다행히 태평양제약이 관심을 보여 3억 원을 투자받았다. 

 밤낮을 잊고 개발에 매달려 2년 만에 보툴리눔 독소 제품을 국내 처음, 세계에서 네 번째로 개발했다. 2004년 공장이 우수의약품제조기준(KGMP) 인증을 받자 일본 제약회사가 제품을 사겠다고 해 수출했다. 임상시험을 거쳐 2006년 국내에 제품(메디톡신)을 출시했다. 병원과 세미나를 찾아다니며 제품을 알렸다. 의사들 사이에서 싸고 효능이 좋다는 소문이 조금씩 나면서 매출이 늘어났다

 어느 날 중동 약품도매상이 구매를 협의하러 찾아왔다. 제품에 보톡스처럼 돼지 성분이 들어 있느냐고 물었다. 배양액에 돼지 성분이 쓰인다고 하자 그냥 돌아갔다. 이슬람 시장까지 잡으려면 보톡스와 전혀 다른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3년간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2011년 동물성 성분이 없는 액체 상태 제품(이노톡스)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개발했다. 기존 제품들은 가루 형태로 식염수에 희석해 쓴다.

 2012년 엘러간 최고경영자(CEO)가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서울에서 만난 데이비드 파이엇 회장은 차세대 보톡스 중 메디톡스의 액상 제품이 가장 뛰어나니 기술을 사겠다고 제의했다. 그는 대외비인 호주에서의 임상시험 결과도 알고 있었다

 엘러간과 1년간 협상해 36200만 달러( 3900억 원)에 기술수출 계약을 맺었다. 국내 바이오 벤처기업으로는 유례없는 성과였다. 계약 다음 날 700억 원을 계약금으로 받기로 했다. 기술 개발에 40억 원을 지원했던 정부가 제동을 걸었다. 벤처기업이 많은 돈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임상시험을 세계 여러 나라에서 하기는 어렵고 국부 유출도 아니라고 설득해 총리 승인을 받았다. 


 2014년 보툴리눔 독소 제품에 포함된 비()독소 및 동물성 성분을 완전히 제거해 보톡스 내성을 줄인 신제품(코어톡스)을 개발했다. 피부미용 시장에서 보툴리눔 톡신 제품과 함께 ‘물광 주사’에 쓰이는 히알루론산 필러(뉴라미스)도 내놓았다.

 메디톡스는 지금 세계 60여 개국에 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국내 보툴리눔 독소 시장의 점유율도 40% 1위를 달리고 있다. 수출 비중은 60%이고, 시가총액은 2조 원을 넘는다

 정 사장은 새로운 원천기술로 보톡스의 원조 엘러간이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당뇨, 뇌질환 같은 특정 질병세포만 골라 공격하는 면역치료제를 개발해 메디톡스를 세계적인 바이오 제약회사로 만드는 게 그의 꿈이다

 

<28> 김병규 아모텍 회장

창업 위해 중소기업에 입사한 서울대 박사

/김병규 아모텍 회장은 “스마트폰 기술을 활용해 자동차 전장사업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서울에서 8남매(5 3)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광복 후 말 세 필로 곡물을 배달하는 운송업을 했다. 신여성인 모친은 자녀 교육에 힘썼다. 그 영향으로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았지만 8남매 모두 대학을 나왔다. 어린 시절 부모가 강조했던 정직을 지금도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어느 날 모친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일찍 여읜 어머니의 영전에 드릴 수 있는 효도는 공부라고 생각해 중학생 때부터 오전 2시에 자고 6시에 일어났다. 서울고를 거쳐 1976년 서울대 금속공학과에 진학했다. 우리나라 경제가 성장 궤도에 올라 기업들이 속속 생겨나던 때였다. 둘째, 셋째 형도 제조업체, 유통업체를 각각 설립했다. 대학을 마치면 기업을 세워 그룹으로 키우겠다고 결심했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세라믹으로 석사, 비결정질 고체인 어모퍼스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85년 형이 경영하던 가족기업 ㈜유유에 입사했다. 각종 전자제품을 자동 제어하는 부품인 릴레이를 만드는 중소기업이었다. 훗날 창업하려면 대기업에서 특정 업무만 하는 것보다 중소기업에서 여러 일을 경험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연구소장을 맡아 금형, 도금, 열처리 등 부족한 기술을 개발했다. 


 당시 서울대 박사가 중소기업에 취업한 사례는 찾기 어려웠다. 특이한 이력 덕분에 정부의 정책과제 심의위원과 산하기관 평가위원으로 위촉됐다. 정부 과제에 참여하면서 어떤 산업이 유망한지 알게 됐다. 

 1991년 중소기업 대표로 모스크바에서 열린 한-러 과학기술부 장관 회담에 따라갔다. 러시아 측에 따로 요청해 어모퍼스 연구소를 찾았다. 꿈의 신소재로 불리는 어모퍼스가 군수산업에 실제로 쓰이는 것을 봤다. 바로 이게 사업 아이템이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귀국 후에도 러시아 사람들과 수시로 연락하며 친분을 쌓았다. 그 중 한 명이 어모퍼스 제조업체를 소개했다. 러시아로 가서 공장을 살펴보고 제품 생산 아이디어를 얻었다. 38세이던 1994년 직장을 그만두고 아모스를 창업했다. 김병규 아모텍 대표이사 회장(61) 이야기다

정부 연구비를 받아 어모퍼스 자성(磁性) 재료를 개발했다. PC의 소형화, 고성능화에 따라 생기는 고주파 열로부터 반도체를 보호하는 신소재였다. 해외 전시회에 나가 대만 무역상을 거래처로 확보했다. B PC를 만드는 대만 업체에 50만 달러어치를 공급했다. 품질은 지멘스, 도시바 제품보다 떨어졌으나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좋다는 평가에 따라 판매량이 늘어났다

 자신감을 얻어 1995년 소형 모터를 만드는 아모트론, 1998년 정전기 방지 세라믹을 만드는 아멕스를 설립했다. 호사다마일까. 외환위기 영향으로 자금난이 생겼다. 1999 3개 회사를 아모텍으로 통합하고 영업을 강화해 부도 위기를 넘겼다. 아모텍은 신기술 기반의 신소재 부품업체(Advanced Material On Technology)를 만들겠다는 뜻이다

 가전제품이 작고 가볍고 얇아지는 흐름을 읽고 정전기 피해를 방지하는 부품인 칩 배리스터 개발에 착수했다. 미세 정밀기술이 100개가량 필요해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외국 기술자의 도움까지 받아 2000년 제품을 출시했다. 대만 가전업체 에이서가 이 제품을 납품받아 스마트폰 배터리 방전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자 삼성전자도 100만 개를 주문했다. 삼성전자가 스마트폰 사업을 키우고 애플, LG전자와도 거래를 트자 생산량이 2002 2000만 개, 2003 1억 개로 급증했다. 2004년 일본 TDK를 누르고 칩 배리스터 부문 세계 1위 업체로 올라섰다

시장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납품단가가 크게 떨어졌다. 모토로라 화웨이 소니에릭손 등을 새 거래처로 확보하고 전자파를 차단하는 필터, 메탈 케이스 스마트폰의 감전을 방지하는 소자 등으로 사업 범위를 넓혔다

 지속 성장을 위한 먹거리 확보에 나서 차량용 소형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안테나, 근거리 무선통신(NFC) 안테나, 무선 충전 안테나, 안전 결제를 위한 마그네틱 보안 전송(MST) 안테나 등을 개발했다. 벤츠 BMW GM 등에 GPS 안테나를 납품하고 있다. 소형 모터에 브러시 대신 전자회로를 넣어 소음이 적고 수명이 길고 효율이 높은 차세대 스마트 모터도 내놓았다. 컴퓨터가 뜨거워지면 자동으로 냉각팬을 돌려 온도를 낮춰준다.

 김 회장은 맨손으로 시작해 아모텍을 세계 40여 개국에 수출하는 연매출 3000억 원대 중견기업으로 키웠다. 고객이 원하는 제품을 언제든 개발해 공급하는 세계 최고 소재·부품 기업으로 만드는 게 그의 꿈이다.

 

<29> 이기형 인터파크 회장

국내 첫 인터넷쇼핑몰 연 벤처 1세대

/이기형 인터파크 회장은 “시장이 커지고 있는 해외 직구 및 역직구 사업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전북 익산에서 10남매(6 4)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많은 자식을 먹여 살리려고 농사를 지으면서 닥치는 대로 부업을 했다.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을 만큼 강하고 자존심이 셌다.

“등록금이 싼 서울대에 못 갈 거면 막노동이나 하고 살아라.” 어머니는 대학 학비를 대줄 형편이 못 되지만 이왕 공부할 거면 제대로 하라고 에둘러 말했다. 가난에서 벗어나 자립하는 지름길은 교육이라고 여겨 자녀 교육에 힘썼다. 가끔 경각심을 일깨워 줬으나 공부하라고 다그치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 자연 법칙과 사람의 존재 이유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커서 과학자가 되기로 했다. 서울대 천문학과에 입학했다. 진리를 찾았으나 손에 안 잡혀 한동안 방황했다. 학비를 스스로 마련하느라 학업에 전념할 수도 없었다. 졸업을 몇 달 앞뒀을 때 큰형이 전화로 진로 계획을 물었다. 스물두 살 많은 큰형은 병약했던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家長) 역할을 했다. 아직 못 정했다고 대답하자 취업하라고 했다. 1988년 삼성전관에 등 떠밀리듯 입사했다. 연구소에서 신기술 개발을 위한 기획을 맡았다. 외국 사이트에 접속해 주요 기술에 대한 정보를 보려고 하니 유료라는 안내문이 떴다. 가치 있는 데이터베이스(DB)는 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래는 정보와 지식이 중요한 시대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1991년 정보통신 서비스를 제공하던 데이콤으로 직장을 옮겼다. PC통신 ‘천리안’ 관련 기획을 위해 해외 출장을 다녔다. 국내에서는 개념조차 생소한 인터넷이 선진국에서 빠르게 보급되고 있었다. 인터넷의 대중화가 머지않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1995년 사내 게시판에 뜬 공고(公告)가 눈에 들어왔다. 소사장제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도입하고 사업 아이디어를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멀티미디어추진팀 대리이던 그는 동료 3명과 팀을 꾸렸다. 근무시간이 끝난 뒤 모여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인터넷에 문자 음성 영상 등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접목한 전자상거래를 사업안으로 정했다. 경영진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질의응답을 거쳐 아이디어로 채택됐다

별도의 사무실이 주어져 사업화에 착수했다. 전자상거래에 필요한 제조업체, 카드회사, 물류업체 등을 찾아가 사업을 제안했다. 대부분 인터넷을 잘 몰라 사이트를 본 뒤 검토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5개월 만에 전자상거래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를 보여주며 재차 설득하자 한번 해보자는 업체가 나타났다 

1996년 온라인쇼핑몰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열었다. 풀무원 코리아나화장품 도미노피자 등 10여 개 업체의 상품을 파는 구멍가게 수준이었다. 외환위기가 닥치자 데이콤이 사내 벤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원대 복귀냐, 사업 유지냐의 기로에서 도전을 택했다. 자식 같은 사업에 인생을 걸기로 한 것이다. 사측과 논의해 차후 갚기로 하고 지분 50%와 경영권을 확보했다. 34세 때인 1997년 데이콤에서 분사해 독립법인으로 출발했다. 이기형 인터파크 대표이사 회장(54) 이야기다. 인터파크는 인터넷 테마파크를 만들겠다는 뜻으로 직접 작명했다 

초기 운영자금이 부족해 여러 창업투자회사를 찾았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다른 회사의 홈페이지를 만들어주는 등 각종 용역을 하며 버텼다. 어렵게 대한투자신탁에서 10억 원을 투자받아 한숨 돌렸다. 매출과 고객 수를 늘리려고 전문몰인 북파크(도서), 티켓파크, 투어파크(여행 예약)를 차례로 오픈했다. 

국내에 없던 사업모델을 보고 대기업들이 온라인쇼핑몰에 속속 진출했다.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도서 ‘무료 배송’ 서비스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도입했다. 성장동력을 찾으려고 경험을 살려 사내 벤처 육성에 나섰다. 이때 탄생한 G마켓은 2000년 직거래 장터인 오픈마켓을 처음으로 열었다. G마켓을 미국 나스닥에 상장한 뒤 2009년 이베이에 매각했다.

새 수입원을 찾다 2011년 매물로 나온 아이마켓코리아를 인수했다. 삼성그룹에 소모성 자재를 공급하는 구매대행 업체였다. 이를 토대로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이 소모품과 자재를 쉽고 싸게 살 수 있는 전문몰인 아이마켓을 오픈했다. 또 각종 공연을 기획, 제작하고 공연장 블루스퀘어를 짓는 등 문화사업도 확대하고 있다

이 회장은 좌우명인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처럼 사내 벤처로 시작해 인터파크를 연매출 3조 원이 넘는 중견기업으로 키웠다. 그는 인공지능과 축적한 빅데이터를 활용해 고객이 만족할 수 있는 새로운 서비스를 개발하기 위해 오늘도 뛰고 있다

<30> 박혜린 바이오스마트 회장

/박혜린 바이오스마트 회장이 새로운 디자인과 재질, 인쇄 기술로 만든 신용카드에 대해 설명하고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경기 여주에서 5남매(2 3)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부모는 여주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다 서울로 이사해 미곡상을 크게 차렸다. 어린 시절 동네 어른을 볼 때마다 해맑게 웃으며 인사해 사랑을 독차지했다. 학교에 다닐 때는 통장에 돈이 조금씩 쌓이는 것을 보는 게 즐거워 용돈은 물론이고 버스비와 점심 밥값까지 아껴 저축했다

아버지는 말이 곧 법일 정도로 권위적이고 까탈이 심했다. 어머니는 집안 분위기를 생각해 아버지의 심기를 안 건드리려고 무던 애를 썼다. 그런 아버지도 늘 밝고 애교 많은 막내딸만은 좋아했다. 쌀을 사러 산지에 갈 때마다 데리고 다녔다. 또래들이 고무줄놀이를 하며 놀 때 쌀 한 가마니를 사서 팔면 얼마 남는다는 것을 배웠다. 숫자에 밝아 고교를 마칠 때까지 부모의 장부 정리를 도왔다. 

기자가 되고 싶어 신문방송학과를 원했다. 그러나 대입시험 성적이 기대만큼 안 나와 서울여대 도서관학과에 진학했다. 민주화 바람이 거셌지만 부모에게 유전자(DNA)를 물려받았는지 학생운동보다 경제·경영에 관심이 많았다. 3학년 때 통장에 있던 돈을 찾아 주식에 투자했다. 돈 버는 재미에 학비를 잠시 유용하기도 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외국계 정보기술(IT) 기업인 모토로라에 지원해 합격했다. 내심 자랑하고 싶어 가족에게 알렸다. 부모는 “그 월급 줄 테니 다른 꿈을 가져 봐라”고 말했다. 딸의 기질과 능력을 아는 부모는 취업 대신 사업을 넌지시 권했다. “넌 뭘 해도 성공할 수 있다”는 부모의 말에 용기를 얻어 창업하기로 했다. 

타이어 장사로 부자가 된 동네 아저씨가 떠올랐다. 부모에게 사업 계획을 설명해 종잣돈 3억 원을 빌렸다. 22세 때인 1991년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가인상사를 세워 수입타이어 유통사업에 나섰다. 박혜린 바이오스마트 회장(48) 이야기다.

 

매장을 타이어 판매와 설치는 물론이고 상태까지 진단해 주는 신개념 종합서비스센터로 꾸며 차별화했다. 수입타이어 주요 브랜드 5개의 판권을 확보한 뒤 SK네트웍스의 스피드메이트와 제휴를 맺었다. 수입차 정비센터와 카센터에 타이어 정보를 제공해 판매망을 넓혔다. 타이어를 납품받은 카센터 사장 몇이 결제대금을 떼먹고 달아나 남몰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젊은 여사장이 운영하는 서비스 좋고 깔끔한 매장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고객이 몰렸다. 수년간 수입타이어를 전국에서 가장 많이 팔아 큰돈을 벌었다. 부모에게 빌린 돈을 이자까지 쳐서 갚고 임대용 빌딩도 몇 개 지었다. 외환위기 때는 자금난에 처한 수입타이어 유통업체 3곳을 사들여 업계의 절대강자가 됐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는 생각에 새 사업을 모색했다. 2003년 자신의 빌딩 일부를 빌려 쓰던 케이비씨(현 바이오스마트)가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험에 처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친분이 있어 기업 대표를 만났더니 경영권을 방어하는 백기사가 돼 달라고 했다. 고민 끝에 지분을 사들여 최대주주가 됐다. 신용카드를 만드는 코스닥 상장기업을 인수해 제조업에 진출한 것이다 


경영진단을 해보니 들쑥날쑥한 매출을 안정화하는 게 급선무였다. 주문을 받은 뒤 신용카드를 만들어 납품하던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직접 연구개발(R&D) 팀장을 맡아 멤버십카드, IC카드, 스마트카드, 친환경 특수카드 개발을 이끌었다. 새 카드를 거래처에 제안해 일감을 확보하자 매출이 안정되면서 증가세를 보였다. 과당경쟁을 없애려고 국내 카드 제조업체 4곳 중 2곳을 추가로 인수해 시장 점유율을 70%대로 끌어올렸다. 해외로 진출해 태국에 전자주민증 3000만 장을 공급했다. 

자신감을 얻어 2006년 유전자 분석으로 질환 여부를 판별하는 분자진단 전문기업 디지탈지노믹스(현 에이엠에스)를 인수했다. 바이오 분야는 제조업과 달랐다. 원천기술을 사업화하겠다는 일념으로 연구비를 쏟아부었지만 10년간 매출이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 시료를 전용 칩에 놓으면 1시간 뒤쯤 결과를 알려주는 장비(스마트도그)를 지난해 개발했다. 유리판 위에 놓고 며칠간 현미경으로 검사하던 것을 바꾼 혁신 제품이다.

박 회장은 원격 검침 시스템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구축한 디지털 계량기 제조업체 옴니시스템, 전자세금계산서(스마트빌) 서비스업체 비즈니스온커뮤니케이션, 로레알에 납품하는 라미화장품과 한생화장품 등 여러 기업을 인수해 M&A 귀재로 불린다. “기업과 결혼했다”는 그는 총 2000억 원 넘는 매출에 만족하지 않고 계열사의 융합과 시너지를 통해 세계적인 기업집단으로 키우기 위해 오늘도 뛰고 있다 

 

 

2017-04-06

<31> 김재철 에스텍파마 사장

전량 수입하던 원료의약품 개발해 수출

/김재철 에스텍파마 사장은 “가족 같은 직원의 고용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것이 기업가의 기본 

책무”라고 말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다음에 크면 사업은 하지 마라.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자 아버지가 어린 자녀들(3 1)에게 당부했다. 탄광 소장을 지낸 아버지는 인쇄소를 운영해 번 돈으로 금광 개발에 나섰다가 빚까지 지게 됐다. 정든 서울 약수동 한옥을 떠나 무허가 판자촌으로 옮겼다. 초·중학생 때 형편이 어려워 학비를 제때 못 냈다

운동을 좋아했지만 공부도 곧잘 해 고려대 이과(理科)계열에 진학했다. 취업에 유리하다는 얘기를 듣고 2학년 때 전공을 화학과로 정했다. 대학 시절 야학(夜學) 교사로 주경야독하는 또래 청년들에게 중고교 과정을 가르쳤다.

1983년 대학 졸업 후 화장품을 만들고 싶어 태평양그룹 공채에 응시해 합격했다. 원하던 태평양화학에 배치됐다. 그런데 화장품사업부가 아니라 의약품사업부 연구원으로 발령 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의약품사업부가 태평양제약으로 분리됐다. 별도 법인이 되자 영업이 우선시되고 연구개발(R&D)은 뒷전으로 밀렸다.

피부염치료제와 스테로이드제 등을 동료와 개발했다. 약국을 찾아다니며 영업도 했다. 성공할 자신이 있는 의약품 개발을 제안했다. 그러나 새 장비와 인력이 필요한 건의는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자부심에 상처가 생기자 뜨겁던 열정이 식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연구를 마음껏 해야겠다. 

단순한 생각으로 약 10년간 일했던 직장에 사표를 냈다. 결심한 뒤 바로 행동에 옮겨 창업 준비는 안 돼 있었다. 아버지의 당부가 떠올랐지만 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일단 도전하기로 했다 

1992년 퇴직금 500만 원과 빌린 500만 원을 밑천으로 서울 강남구 포이동에서 33m²( 10) 남짓한 사무실을 세내 한쪽에 실험도구를 놓고 원료의약품 개발 사업에 나섰다. 김재철 에스텍파마 대표이사 사장(57) 이야기다.

운영비를 마련하려고 낮에는 염료 만드는 화학회사에서 기술 개발을 도왔다. 밤에는 회사 시설을 활용해 연구했다. 3년 넘게 생활비를 집에 주지 못했다. 그동안 공공기관에 다니는 아내가 먹여 살렸다. 

녹십자 계열사인 녹우제약에서 위궤양치료제 원료를 만들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분말이 돌처럼 굳어져 원인을 찾아내 다시 만드는 등 2 6개월간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제품을 개발했다. 1996년 유럽에서 전량 수입하던 위궤양치료제 원료를 처음으로 국산화했다. 이를 납품해 매출 2억 원을 올렸다. 기술보증보험과 기업은행에서 3억 원을 빌려 경기 군포에 330m²( 100) 규모의 임대공장을 마련했다.

오리지널 약의 특허가 끝난 뒤 처음 내놓는 복제약인 퍼스트 제네릭에 도전했다. 1997년 소염진통제 ‘아세클로페낙’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개발하고 양산 기술도 확보했다. 이어 혈전치료제(트리플루살), 근육이완제(아플로쿠알론), 자기공명영상(MRI)조영제(GDM, GDA)를 세계에서 두 번째로, 소염진통제 ‘아세메타신’을 세계에서 세 번째로, 빈혈치료제(폴리사카라이드 철착염)와 당뇨병치료제(글리메피리드)를 국내 최초로 개발했다 

호사다마일까. 국내 제약회사의 요청으로 제품을 개발하다 취소 통보를 받았다. 시간과 비용을 많이 들인 상태라 손해가 컸지만 갑을관계여서 마땅한 대응책이 없었다. 활로를 찾아 해외로 눈을 돌렸다. 마침 일본 제약회사가 파킨슨병치료제 개발을 주문했다. 까다롭지만 규모가 큰 선진국 시장에 진출할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벤처기업과 협업해 2년 만에 파킨슨병치료제 ‘드록시도파’를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개발했다. 고품질 원료를 싸게 만들 수 있는 새 제조법도 확보했다. 일본 원료의약품 업체가 못 만든 제품을 내놓자 일본 제약업계의 시선이 달라졌다. 이를 계기로 천식치료제(프란루카스트), 위궤양치료제(레바미피드) 등을 일본 제약회사에 공급하게 됐다

해외 수출이 늘어날 것으로 보고 2008 cGMP(미국 의약품 제조관리 기준) 공장을 경기 화성에 세웠다. 안산공장이 있는데 연매출과 맞먹는 250억 원을 들여 또 공장을 짓자 무리라는 우려가 나왔다. 주위의 걱정에도 도약할 적기라고 판단해 과감하게 투자했다. 기술력에 첨단 설비까지 갖추자 글로벌 제약회사들이 신약을 대신 생산해 달라고 맡겼다.

에스텍파마는 천식치료제, MRI조영제, 알코올의존증치료제 등 원료의약품 50여 종을 생산해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 중국 미국 등 30여 개국에 공급하고 있다. 김 사장은 맨손으로 시작해 에스텍파마를 세계에서 인정받는 원료의약품 제조 회사로 키웠다. 그는 개량신약 등 미래 성장동력을 발굴하는 한편 코스닥협회장으로서 아이디어가 참신한 후배 기업가를 돕기 위해 오늘도 뛰고 있다.◎

김상철 전문기자의 기업가 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