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역사5/ 삼성국2/
1 한국 경제 개척가 이병철
고정일 소설가 조선일보
1961년 6월 26일 저녁, 도쿄에서 서울로 오는 비행기에서 이병철은 창밖의 저녁놀로 붉게 물든 운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5·16군사정변 뒤 ‘부정축재자 1호’로 찍혀,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소환 명령을 받고 귀국길에 올랐다. ‘박정희는 어떤 사람일까? 목숨 걸고 혁명을 이루어 내다니 보통 강단과 투지가 아닐진대…. 그런 그가 나를 어떻게 처리할까?’ 이런저런 상념에서 헤어날 수 없었던 이병철은 마음이 무거웠다.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마중 나온 요원들에 의해 서울 명동 메트로호텔로 갔다. 이튿날에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있는 태평로 사무실로 안내되었는데, 박태준 의장 비서실장이 미리 나와 정중한 태도로 맞이했다. 그를 따라 자못 삼엄한 분위기가 감도는 방으로 들어서자 박정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검은 안경을 쓴 얼굴에서 차가움이 느껴지는 순간 이병철은 긴장감으로 굳었으나 박정희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조선왕조 500년 이래 고관대작들의 부정축재로 백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 왔소. 오늘날에도 국민이 이토록 굶주림, 질병에 시달림은 국민의 고혈을 쥐어짤 줄만 아는 정치인들 잘못이 반, 사회적 책무를 버리고 탐욕에만 빠져든 경제인들 잘못이 반이오. 정치, 경제가 썩어 나라가 무너지면 기업과 재산이 다 무슨 소용이오?”
질책하듯 카랑카랑 울리는 단호한 그의 목소리에 이병철은 입안이 바짝 마르며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가만히 입을 열었다.
“나라가 있어야 기업이 산다는 그 말씀은 옳습니다. 그러나 처벌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현행 세법은 6·25전쟁 때 기업의 수입을 훨씬 넘는 세금을 거둘 수 있도록 한 비상사태의 세제 그대로여서, 곧대로 세금을 내다간 모든 기업이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법을 개정하여, 기업인들에게 새로운 각오로 국가 건설에 참여토록 기회를 주십시오. 반드시 최선을 다해 국가 경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아울러 저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습니다.”
이때 박정희가 호통을 쳤다. “이보시오, 이 사장! 내가 언제 재산을 모두 내놓으라고 했소! 양복지나 설탕, 조미료 같은 소비성 물건이나 만들고 들여다 팔고 있으니 젊은이들이 삼성을 매판재벌이라고 하는 거요. 그런 장사치 노릇은 그만하고 제대로 된 사업을 한번 해보라는 말이오.”
설탕과 양복지! 이 말로 이병철의 마음은 아프고 크게 울렸다.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벌여온 장사가 그것뿐인데 어쩌겠습니까?” 이병철이 멋쩍게 웃자 박정희가 다그치듯이 말했다. “사나이로 태어나 한번 사업을 일으켰으면 제대로 벌여 봐야 할 것 아니오? 자동차, 배, 전자제품을 만들어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어째서 머뭇거리느냐고 세지마 류조 회장이 그럽디다. 이병철 사장이 앞장서시겠다면 힘닿는 데까지 내가 밀어드리리다.” 자동차, 배, 전자제품! 이병철의 머릿속에서는 번쩍 섬광이 스쳤다. 삼성이라는 브랜드가 전 세계를 누빈다! 냉철한 이병철도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순간 나쇼날전기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박정희가 이병철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듯 나지막히 말을 이어갔다.
“일본의 마쓰시타 고노스케를 보시오. 초등학교도 제대로 안 나왔지만 세계적인 전자회사 나쇼날을 이루어냈잖소! 이 사장도 이제 세계시장을 겨냥하는 국산품을 제조 수출하는 세계적 대기업을 일으켜, 진정으로 국가 경제에 기여해 보라는 뜻이오.”
한참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병철은 입술을 꽉 깨물고 박정희에게 다짐했다. “알겠습니다.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힘쓰겠습니다. 죄송한 부탁 올리겠습니다. 먼저 메트로호텔에 갇힌 기업인들부터 풀어주십시오. 그들의 잘못도 있겠지만, 광복을 맞아 열악한 경제 환경 아래에서 기업을 일으키고 운영을 해본 노하우가 있으므로 이들을 활용해야 합니다. 이들 또한 나라를 걱정하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크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기업인들 스스로도 자정(自淨)의 뜻에서 국가발전기금을 마련하겠사오니 그것으로 경제 개발을 추진하십시오.”
비로소 박정희는 웃음을 지으며 이병철의 두 손을 꽉 쥐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병철 회장, 우리 한번 조국을 일으켜 세워 봅시다.” 이때 박정희는 44세, 이병철은 51세였다.
“기업은 사람이다. 기업은 문자 그대로 업을 기획하는 것인데 세상의 많은 이들은 사람이 기업을 경영한다는 이 소박한 원리를 잊고 있는 것 같다.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이 널리 퍼져 있지만, 돈을 버는 것은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사람인 것이다. 나는 일생의 80퍼센트를 인재를 모으고 육성하는 데 보냈다. 삼성의 발전도 그런 인재를 많이 기용한 결과인 것이다.”(1980년 7월 3일 전국경제인연합회 이병철 강연에서) <②편에계속>
<①편에서 계속>
이병철은 1910년 2월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손위 누이 둘과 형 해서 사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지리산 지맥인 마두산이 완만히 이어지는 골짜기 마을 중교리는 예부터 벽촌이었다. 그해에 한일병합조약으로 조선총독부를 통한 일제의 한반도 지배가 시작되었다. 뒷날 경제계에서의 활약으로 한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 조국과 민족의 수난의 해에 탄생한 것이다.
이병철의 아버지 이찬우는 아들에게 한자를 가르쳤다. 아버지는 늘 엄했지만 아들이 세상 이치를 이해하도록 세심히 이끌었다. 어머니 권재림은 인정이 많아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특히 마을에서 누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이 들리면 미역과 쌀을 보내 축하하곤 했다. “찔레꽃이 필 즈음이 가난한 이들에게는 가장 힘들 때란다. 그들을 모른 척하면 안 돼.” 어머니는 곧잘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선왕조 연산군 시대에는 신변에 미칠 화를 피하려고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목숨을 보전한 선비들이 많았다. 이병철의 경주 이씨 가문 16대 선조도 이렇듯 중교리 땅을 은신처로 정해 이주했다. 조부 이홍석은 영남의 이름난 유학자 허성재의 문하생이었다. 그가 문산(文山)이라는 호를 붙여 ‘문산문집’을 펴내기도 했다. 이홍석은 이찬우에게 학문의 의의를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의 목숨도, 부귀영화도 유한하지만 문장의 생명은 영원하다. 문장은 인격 그 자체의 발로이니 모방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여섯 살의 이병철은 학교에 가지 않고 서당 문산정에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첫 교본은 ‘천자문’으로 뜻도 이해하지 못한 채 암기를 강요당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인지 두세 달 만에 통독한 동무들과 달리 그는 1년이나 걸렸다. 서당에 5년 가까이 다니는 동안 ‘논어’와 ‘자치통감(資治通鑑)’도 뗐지만, 영특한 편은 아니었던 듯 “문산 선생님의 손자가 이래 가지고서야”라며 더러 스승에게 매를 맞았다.
어린 이병철은 공부보다 장난치며 놀기를 더 좋아했다. 싸움을 잘하지는 않았지만 지는 것을 몹시 싫어했고 무엇보다 입담이 좋았다. 꼬치꼬치 이치를 따지고 드는 통에 상대가 질려 달아날 정도였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으면 집에까지 쳐들어가 결말을 짓기도 했다. 주위 사람들에게는 그런 그가 고집불통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병철은 어릴 적 자신이 골목대장이긴 했지만 ‘무기는 힘이 아니라 입’이었다고 떠올렸다.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조지 버나드 쇼의 말이 꼭 들어맞는다. “합리적인 사람은 자신을 세상에 맞춘다. 비합리적인 사람은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려 애쓴다. 결국 진보는 비합리적인 이들의 손에 달려 있다.” 그 시절 누구도 고집불통 장난꾸러기에게 그런 내일이 숨겨져 있으리라곤 여기지 못했을 것이다.
3·1 독립선언으로부터 2년 뒤, 열한 살의 이병철을 부모는 일본식 보통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친척들의 반대가 많았지만 부모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어린 이병철은 서당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시집간 둘째누나 집에서 가까운 진주시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둘째누나는 그를 이발소로 데려가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주었다. 소년 이병철에게도 개화의 물결이 밀어닥친 것이다. 때마침 서울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다 고향에 쉬러 온 사촌형이 그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비록 정치, 경제, 사회의 어려운 내용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시내는 많은 사람으로 붐비고 세련된 건물이 즐비하며 물자가 풍부하다는 등의 얘기는 소년을 들뜨게 하고도 남았다.
‘그래, 나도 서울에 가서 공부하자.’ 호기심이 왕성했던 소년 이병철은 부모의 반대에 부딪힐 각오로 말을 꺼냈다. 아버지는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진주나 서울이나 타향이기는 마찬가지”라고 거들자 뜻밖에도 흔쾌히 허락했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친정이 서울인 게 승낙을 얻어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병철씨는 틈틈이 서예로써 마음을 닦았으며 그의 휘호 무한탐구는 삼성인의 좌우명이 되었다.
상경하는 날 아버지는 조심해야 할 점들을 열심히 타일렀다. 어머니 또한 마음이 놓이지 않아 안절부절못했다. 겨우 열한 살짜리 아들을 300㎞나 떨어진 먼 곳으로 혼자 보내는데 어느 부모가 걱정하지 않겠는가. 이병철은 외갓집이 있는 가회동에서 가까운 수송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처음 등교하던 날, 설레는 마음으로 교문을 들어섰지만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반 아이들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반 아이들은 그의 사투리를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친절한 아이들은 그를 보살펴 주고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었지만, 개중에는 심술궂게 따돌리는 아이도 있어 한동안 고독감을 맛보았다. <③편에 계속>
<②편에서 계속>
서울에 올라왔다고 해서 갑자기 성적이 좋아질 리는 없었다. 이병철은 산수는 자신이 있었으나 국어와 일본어는 고작 60점을 받는 정도였다. 음악이나 미술은 겨우 낙제를 면했던 터라 반 등수는 50명 가운데 35등이나 40등에 머물렀다. 그런데도 무슨 배짱인지 그는 하루빨리 보통학교 과정을 마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렇게 서울에서 2년을 공부한 뒤 4학년을 마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제 보통학교에서 배울 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단기간에 끝낼 수 있게 속성과가 있는 중동학교로 옮기고 싶습니다.” 그의 뜻을 받아들인 아버지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을 거듭 강조했다. “어떤 일이든 성급히 뛰어들지 말거라. 일을 무리하게 해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든 결국 옳은 이치대로 돌아가는 법이다.” 거듭해 학교를 바꾸는 아들이 아버지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그는 아들 앞에서 그 일에 대해 끝까지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강조한 것은 사필귀정에 이어 “거짓과 위선은 자신의 일생뿐 아니라 국가와 사회에도 큰 재난이다”라는 말이었다.
이병철은 중동학교 속성과를 택했다. 여기서는 보통학교의 5, 6학년 과정을 1년에 모두 끝내지 못하면 중학부에 올라갈 수 없었다. 꽁무니에 불이 붙은 이병철은 계획대로 중학부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 학교는 지방 학생들이 많았다. 그들의 자유로운 자취생활을 부러워하던 그는 결국 공부를 잘하는 친구와 더불어 생활하고 싶다는 그럴 듯한 이유를 내세워 외할머니 집을 나왔다. 그즈음 아버지로부터 갑자기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네 혼담이 이뤄져 12월 5일 혼례를 올리게 됐으니 내려오너라.”
당시에는 조혼 풍습이 있었다. 개화의 물결로 자유주의 연애론이 득세하던 무렵으로 그는 여성이나 결혼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순순히 아버지의 뜻에 따랐다. 그리고 열여섯 살 겨울, 전통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는 같은 경상도 출신으로 두 살 위의 건강한 여성이었다.
여름방학으로 고향에 내려간 이병철은 아버지에게 일본으로 유학을 가겠다는 뜻을 전했다. 아버지는 크게 화를 냈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처음과 끝이라는 것이 있다. 열여덟 살이나 됐는데 아직도 그것을 모르느냐!” 아버지의 엄한 질책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유학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라며 며칠 뒤 아들의 유학을 허락했다. 이병철은 와세다대학으로 갈 계획을 세우고 서둘러 부관(釜關) 연락선에 올라탔다. 시모노세키로 향하는 배에서 그는 처음으로 조국을 잃은 국민의 서글픔을 깨닫게 되었다.
3000t급의 제법 큰 배였는데도 객실 시설은 변변치 못했다. 바람이라도 쐬려고 갑판으로 나간 이병철은 같은 고향 출신인 안호상 박사를 만났다. 독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교토대학에서 1년 더 동양철학을 연구하려고 일본으로 가는 중이었다. 배가 현해탄에 이르렀을 즈음 거친 파도 때문에 몹시 흔들렸다. 심한 뱃멀미로 고생하던 안호상과 이병철은 견디기 힘들어 2등 선실보다 시설이 좋은 1등 선실로 옮기려고 했는데 일본인 형사가 다가와 고함치듯 내뱉었다. “이봐, 너희는 조선인이잖아. 1등 선실은 너희가 들어갈 데가 아니야!”
몸도 좋지 않은데 당하는 설움은 자꾸만 고향을 생각나게 했다. 형사는 조선인이라는 사실만으로 대역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함부로 대했다. 결국 두 사람은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추스르고 2등 선실로 돌아가야 했다. 국가의 가치는 결국 국민의 가치라고 하지 않던가. 엄청난 굴욕감에 시달린 이병철은 처음으로 망국의 의미를 실감하면서 비애에 젖었다. ‘나라는 강해야 한다. 강국이 되려면 경제를 발전시켜 풍요로운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뒷날 불처럼 사업을 일으킨 배경에는 한창 감수성 예민한 청년기에 식민 지배를 받는 국민의 원통함을 가슴에 새기게 된 사건이 자리 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부산을 떠나 시모노세키에서 기차로 갈아탄 뒤 도쿄역에 내렸다. 그는 먼저 자취방을 정하고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 절차를 밟았다.
이병철은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으나 와세다대학에서는 달랐다. 강의를 절대 빼먹지 않았고 수업 내용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꼭 앞쪽에 앉았다. 또한 내용을 밝히지 않으려고 ‘○’나 ‘×’ 표시를 해둔 부분이 많아 읽기 어려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책도 곧잘 읽었다. 스스로도 신기할 정도로 그는 ‘열심이었다’고 와세다대학 시절을 떠올리곤 했다.
자취로 건강은 전혀 생각지 않고 편식한 탓에 이병철은 심한 각기병에 걸리고 말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몸이 몹시 피곤했다. 대여섯 명의 중산층 가정 한 달 생활비가 60엔이었던 시절에 그의 부모님은 달마다 200엔을 보내주었으므로 돈은 넉넉했다. 그는 2학년 때 1년간 휴학계를 낸 뒤 남은 돈으로 온천과 명소, 유적지 등을 여행하며 몸을 추스르려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이렇게 허송세월할 수 없다. 아쉽지만 대학을 그만두어야겠다.’ 오랫동안 고민한 그는 마침내 1931년 2학년 가을에 와세다대학을 중퇴했다. 그러고는 연락도 않고 조용히 귀향했다. 진주의 지수보통학교, 서울의 수송보통학교와 중동학교, 그리고 와세다대학까지 연속 네 번이나 중퇴한 셈이다. 결국 그는 졸업장이라는 것을 단 한 번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스스로 한심한 감회에 젖지도 않고 ‘앞으로는 더 잘될 것’이라는 대책 없이 낙천적인 생각을 했다. 고희를 맞았을 때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똥배짱만 남아 있던 나 자신이 생각나 고소를 금할 길이 없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2 땀흘려 일군 '삼성물산공사'를 북한군에 의해 몰수당하고 다시 시작한 이병철
▲1938년 3월 1일 대구시 수동(현재 인교동)에 세워진 삼성상회 전경.
1936년 봄, 이병철은 마산에 부지를 마련해 ‘협동 정미소’를 차려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장사의 기본도 몰랐다. 쌀값이 쌀 때 사서 오를 때 내다 팔아야 하는 것을 알지 못해 적자를 보기 일쑤였지만 다행히 정미소 사업은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37년 7월 중일전쟁으로 사업이 기울어 문을 닫고 말았다. 할 일이 없어진 그는 부산을 거쳐 중국 상하이에 이르면서 세상을 둘러보고 자신의 꿈을 다졌다.
반년 뒤 이병철은 다시 대구에서 ‘삼성상회(三星商會)’란 상호를 걸고 새로운 사업을 벌였다. 이것이 오늘날 ‘삼성’의 모태가 되었다. 그는 삼성이라고 이름 지은 까닭을 이렇게 밝힌 바 있다. “‘三’은 큰 것, 많은 것, 강한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우리 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이며, ‘星’은 밝고 높고 영원히 깨끗이 빛나는 것을 뜻합니다.” 이병철은 자신의 회사가 크고 강력하고 영원하기를 기원했다.
'삼성상회'의 실적은 순조롭게 커나갔다. 이병철은 자금에 여유가 생기면서 무언가 새로운 투자 대상을 찾던 끝에 양조업에 손을 댔다. 때마침 일본인이 경영하던 ‘조선 양조’라는 회사가 매물로 나왔는데, 연간 양조량 7000섬으로 대구에서 첫째 둘째를 다투는 규모였다. 가격이 10만원을 호가하는데도 이병철은 망설임 없이 곧바로 사들였다. 장사가 무척 잘되어 어느덧 그는 대구에서 손꼽히는 고액납세자 신분이 되었다.
1948년 11월, 이병철은 활동무대를 서울로 옮겼다. 종로2가 영보빌딩 근처에 이길수 소유의 건물 330여㎡(100여평)를 빌려 ‘삼성물산공사’ 간판을 내걸었다. 사업자본은 이병철 75%, 김생기·이오석·문철호·김일옥·조홍제 등이 나머지 25%를 냈으며 전무는 조홍제, 상무는 김생기였다. 직원은 20여명이었으나 여느 회사보다 좋은 대우를 해주었고, 참여의식을 높이자는 뜻에서 직원들에게도 조금씩이나마 사업자금을 내게 해 하루 빨리 한국에서 가장 배당률 높은 회사로 만들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6·25전쟁과 1·4후퇴를 겪으면서 ‘삼성물산공사’는 북한군에 의해 회사 자산 일체를 몰수당하고 만다.
의기소침한 것도 잠시, 이병철은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함께 1951년 10월 ‘삼성물산 주식회사’를 새로 설립한다. 전쟁으로 생활필수품마저 모자라는 상황에서 삼성물산은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수입, 공급하는 데 한몫을 했다. 생필품 무역으로 큰돈을 벌면서도 그는 완제품을 수입하는 것이 국민 경제에 무슨 공헌을 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에 잠겨 있었다. 일상적으로 쓰는 소비물자를 수입에만 기댄다면 영원히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깨달음이었다.
이병철은 국민에게 필요한 물자를 직접 만들어 값싸게 공급함으로써 국민의 편의를 도모함은 물론 대한민국 자립경제의 기반을 닦는 것이 무엇보다 절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값싼 원조물자가 쏟아져 들어오는 판국에 막대한 자금을 들여 공장을 세우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며 말리기에 바빴다. 하지만 많은 이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쟁의 폐허 위에 국내 최초의 근대적 시설을 갖춘 ‘제일제당’을 설립했다. ‘제일제당’은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제일제당’을 설립한 지 2년 만에 또다시 수입대체산업 가운데 생필품과 관계 있는 모직산업에 도전했다. 최신 시설의 대규모 공장을 지어 생산원가를 낮추고 품질 좋은 상품을 싼값으로 공급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한국이 제 힘으로 건설한 공장에서 3년 안에 제대로 상품이 생산되면 내가 하늘을 날겠다"는 미국 업자들의 비아냥 속에서도 그는 망설이지 않았고, 1년6개월 만에 국제 수준의 대단위 공장을 건설해 냈다. ‘제일모직’에서 만든 국산 모직은 그때까지 국내 모직시장을 휩쓸고 있던 수입 ‘마카오 복지’를 이 땅에서 몰아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이병철은 모직 공장을 세우며 기숙사를 먼저 완공시켰다. 기숙사 전관에는 일류 호텔에서나 볼 수 있던 스팀 난방 설비가 깔렸다. 그의 인재 중심 경영은 이때부터 빛이 났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통해 수입대체산업을 일으켜 눈부신 성과를 낸 이병철은 1960년대부터 소비재산업에서 중공업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식량 증산이야말로 한국의 시급한 선결 과제임을 절실히 느끼고, 그즈음 원조금에 의한 수입품목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비료산업에 뛰어든 것이다. 1969년에 그는 전자산업에 도전했으며, 1970년대 문턱을 지나면서 중화학공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이러한 그의 사업 행로를 두고 사회 한쪽에서는 삼성이 주로 소비재산업에 치중해 왔으며 이는 한국의 경제 건설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경제 발전에도 단계가 있음을 여러 번 강조해 왔다. 물론 생산재산업은 국가 경제 발전의 근간을 이루지만 기술 축적도, 자본 축적도 전무한 상태에서 생산재산업으로 나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1970년대 초까지 그는 소비재산업의 기반을 굳히는 과정에서 기술과 경험을 쌓아가면서 자본을 축적해 중화학공업으로 이행하는 단계를 충실히 밟았다. 그 뒤 조선, 기계, 석유, 화학, 건설, 반도체 등 더욱 더 적극적인 사업의 변신을 꾀했다. 이는 스스로 ‘선택한 길’이면서 국가와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선택된 길’이기도 했다.
이병철과 기업인들은 한국경제인협회(현 전국경제인연합회)를 만들고 이병철이 초대 회장이 되었다. 지금은 그 역할이 줄어들었지만, 지난 30년 동안 대한민국 수출의 산파 역할을 해온 것은 종합무역상사였다. 1975년 한국에 종합무역상사 제도가 신설된 것도 박정희 대통령의 적극적 권유와 이병철의 실행 덕분이었다.
/1979년 당시 삼성전자 이코노컬러TV 생산라인.
그가 일본의 전설적인 상사맨이자 대하소설 ‘불모지대’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세지마 류조 회장에게 물었다.
“한국이 일본처럼 세계적인 수출대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지마 회장이 말했다.
“한국에 당장 종합상사를 만드십시오.”
그 뒤 이병철에게 ‘종합무역상사 육성을 위한 리포트’를 요구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세지마 리포트’였다. 이병철과 세지마 류조의 만남을 주선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박정희는 이낙선 상공부 장관에게 지시해 둘이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세지마 류조는 박정희의 일본 육군 사관학교 2년 선배였다. 그는 관동군 사령부의 참모였으나 소련군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에서 8년 동안 유형 생활을 하다 풀려나 귀국하여 이토즈상사를 세계적 대기업으로 키운 인물이었다.
사실 박정희 생애에 그만큼 영향을 준 사람도 드물 것이다. 관동군 사령부의 정보참모로서 뛰어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음은 이미 만주 시절에 들은 적이 있었다.
5·16군사정변 이후 박정희가 넘겨받은 한국의 현실은 다 썩어 무너지려는 집안과 다름없었다.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때 세지마 류조를 떠올렸다. 박정희에게 그는 어둠 속 한 줄기 빛과 다름없었다. <③편에 계속>
<②편에서 계속>
세지마 류조가 경영하는 이토즈상사는 예전에는 일본 재계 서열 20위권 안에도 들지 못하는 중견기업이었다. 그러나 그는 세계 경영사상 유례가 없는 ‘종합상사’를 만들어 중동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일본 생산품을 팔게 되면서 이토즈상사를 재계 서열 10위권까지 급성장시켰다.
세지마 류조와 만난 자리에서 박정희가 말했다.
“한국은 어떻게 살아가면 좋겠습니까?”
세지마 류조는 조국을 살리겠다는 박정희의 진정성 넘치는 너무나 무거운 말에 감동을 받아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이제 바다를 건너 세계로 나아가 인재를 팔고 물건을 팔고 아이디어를 팔아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무엇으로 해야 합니까.”
“현재 한국은 GNP 60달러이고, 북한은 400달러입니다. 예전에 일본이 북한을 대륙 진출의 전진기지로 만들었는데, 북한이 그것을 고스란히 이어받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이제 바다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수출입니다. 자동차를 만들고, 배를 만들고, 그리고 곧 다가올 전자시대에 대비해야 합니다.”
박정희는 세지마 류조의 그 말을 언제나 마음속에 품고 있었고, 나중에 이병철을 만났을 때 세지마 류조와 그가 만날 수 있도록 주선을 해 주었던 것이다. 1974년 ‘삼성물산’은 ‘종합무역상사’로 확대되었으며, 1975년 5월 종합무역상사 1호로 지정됐다. 그리고 그해 삼성물산은 수출 2억달러를 달성해 영예의 ‘2억불 수출탑’을 받았다.
이병철의 사업보국 경영이념은 ‘사람이 행해야 할 도’를 설득하는 도의론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는 사업을 통해 국가에 힘을 보태는 일은 의무나 헌신의 범위를 뛰어넘어 자신의 삶 자체이며 기쁨이라고 했다. 그는 어느 잡지에 이러한 글을 싣기도 했다.
"내가 한결같이 사업을 확장해 온 이유는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언제까지나 신선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늘 안일함을 혐오하고 굳이 도전과 시련의 나날을 선택해 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한다는 것은 곧 살아 있음을 뜻한다. 세상을 떠날 때 후회 없이 살았다는 만족감을 느끼려면 후회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나에게 후회 없는 삶이란 좋은 일을 하는 것을 뜻한다. 일이야말로 삶의 보람이다. 그리고 좋은 일은 사람, 사회,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일을 뜻한다. 기업 경영은 경영자 인생관 그 자체를 반영한다.”
▲삼성전자는 1996년 세계 최초로 1기가 D램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세계 메모리 반도체시장에서 주도권을 장악했다.
자기 자신의 영달만을 꾀하는 것은 이병철의 관심사가 아니었음을 확고히 보여주고 있다. 그의 글은 계속된다.
“기업을 이용해 사리를 도모하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 부하를 아는 데 3년이 걸리고 상사를 아는 데 3일이 걸린다고 하듯, 사리사욕을 채우는 경영자는 부하들로부터 곧 인품과 자질을 의심받는다. 만약 이런 일이 생기면 위에 있으면서도 아랫사람을 제대로 부릴 수 없다. 또한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경영자에겐 뚜렷한 견해가 없으며 확고한 인생관도 찾아보기 어렵다. 선악의 판단도 잘못되기 일쑤이다. 따라서 신상필벌을 엄격히 실행할 수도 없을 것이다.”
지치지 않는 도전으로 자기 삶을 부단히 가꾸어 가는 것도 평범한 사람으로서 쉬운 일은 아니다. 또한 시대와 국가의 요구에 부합한 삶을 사는 것 또한 녹록지 않다. 양자의 결합이란 모든 인간의 소망이겠지만, 그 소망을 삶에서 실천하기란 더더욱 어려운 노릇이다. 그런 뜻에서 이병철의 삶은 뜻있는 삶의 한 본보기였다.
그는 중소기업과 대기업, 본사와 대리점, 공급자와 수급자, 근로자와 소비자, 이들 모두가 적정한 이윤을 취하고 각자가 견실한 경영을 추구함으로써 서로 발전할 수 있다는 공존공영 원칙을 갖고 있었다. <④편에 계속>
<③편에서 계속>
그의 공존공영 원칙은 국제사업으로까지 확대된다. 그는 상대국가에 기술이전을 요구할 때도 그들이 삼성에 기술을 제공함으로써 얻는 이득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점을 원칙으로 삼았다. 과다경쟁을 하는 대신 서로의 이익을 보존하면서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생산가격을 낮추고 질을 높여서, 그 이익을 소비자에게 돌려준다는 것이 공존공영 이론의 귀착점일 것이다.
국가와 인류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고, 국가와 인류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기업이야말로 이병철 사업 인생의 좌표였다. 그러나 이윤을 남기지 못한다면 기업의 존재 이유가 없다는 것 또한 그의 주장이었다. 공존공영의 원칙은 결국 기업의 확실한 이윤과 미래를 보장하는 제일의 합리적 경영원칙이었던 셈이다.
1974년 동양방송 이사였던, 이병철의 셋째 아들 이건희는 커다란 서류 뭉치를 비서실에 건네면서 검토를 지시했다. 부도가 난 한국반도체 인수에 대한 것이었다. 반도체가 뭔지도 모르던 비서실에서는 충무로에 있는 외국 서점에 가서 ‘반도체(半導體)’라는 글자가 써 있는 일본 서적과, ‘세미컨덕터(semiconductor·반도체)’라고 쓰여 있는 영국과 미국의 서적을 모두 사들였다.
일찍부터 반도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던 이병철이 셋째 아들 이건희에게 반도체에 대해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처음에 이병철은 규모가 너무 작아 인수를 망설였지만 인수하고 나서는 크게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반도체의 중요성과는 별개로 반도체 분야는 너무나 낯설었다. “왜 전도체(全導體)가 아니라 반도체(半導體)라고 한담?” 그래서 궁금한 것을 알 때까지 물고 늘어지며 열성적으로 파고들었다.
이병철은 일본에 직접 가서 반도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여 검토하고는, 반도체사업 참여를 결정했다. 대부분의 계열사 사장들이 너무 어렵고 무모한 사업이라며 반대했지만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언제나 이병철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그 기준이 명확했다. 국가적 필요성이 무엇인가, 국민의 이해가 어떻게 되는가,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가 등이다. 이 기준에 견주어 현 시점에서의 국가적 과제는 ‘산업의 쌀’이며 21세기를 개척할 산업 혁신의 핵인 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이라고 그는 판단했다.
이병철은 수원 기흥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면서, 18개월 걸린다는 VLSI(초고밀도 집적회로) 공장을 6개월 만에 완공하라고 지시했다. 그즈음 한국에는 반도체 경험자가 없던 터라 그는 전 세계를 뒤져 한국인 반도체 전문가를 찾아 모조리 발탁했다. 일본 기술자도 영입했다. 그렇게 해서 6개월 만에 반도체 공장을 만들었지만, 삼성 반도체의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1969년 수원에 삼성 공장을 지을 때의 일이다. 계열사 사장 회의에서 이병철은 수원 공장 부지를 142만m²(약 43만평)로 정하라고 했다. 이에 사장들은 “규모에 비해 공장 부지가 너무 크다”며 반대했다. 그래도 그는 굳이 뜻을 굽히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일본 히타치 공장은 132만m²이다. 우리는 언제고 일본과 일본 기업을 뛰어넘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러니 그들보다 한 평이라도 크게 지어야 한다.”
경영자로서 그가 가진 진정한 덕목은 기업가로서 타고난 열정, 삼성의 패러다임을 바꾼 자유로운 발상과 통찰력일 것이다. 그는 경영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국내외 역사와 문화의 흐름을 한눈에 읽었다. 이병철의 이야기는 늘 군더더기 없이 일목요연했다. 그는 1987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반도체 호황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닦아 놓은 기초 위에 이건희는 다음과 같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삼성전자를 세계 최고의 반도체 회사로 끌어올리는 성과를 이루었다.
사업보국의 ‘보국’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나라의 은혜를 갚는 것 또는 나라에 충성을 다함’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이 말처럼 이병철은 나라에 은혜를 갚고 국가의 번영을 위해 한결같은 열정과 신념으로 과감한 결단과 실천을 거듭해 여러 사업을 일으키고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3 한국 경제 개척가 이병철 下 ①-④
넥타이 하나라도 최고가 아니면 매지 않아…이병철의 완벽주의·최고주의
1979년 10월 26일 전화벨이 울렸다. 새벽 5시가 조금 넘어가는 시각이었다. “청와대에 유고가 생겼습니다. 박 대통령께서 돌아가셨다는 급보입니다.”
비서실 보고자의 목소리는 몹시 떨렸다. 박정희의 죽음! 순간 이병철의 뇌리는 혼돈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비서실 보고자가 무언가 계속 이야기하고 있었으나 이병철의 머릿속에는 아무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 무슨 소리인가, 청천벽력이란 말이 이것인가! 우리 역사에 그만 한 인물이 다시 나타날 수 있을까.’ 나이로는 동생뻘이었지만, 이병철은 박정희에게서 배운 바가 적지 않았다. 모든 승리는 죽음의 패배로서 끝난다고 한다. 그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러면 패배는 죽음의 승리로 이루어진단 말인가.
문득 박 대통령의 강건하고 다부진 모습이 떠올랐다. “이 회장, 힘내시오.” 박 대통령의 음성이 곁에서 들리는 듯하다. 그러면서 입가에 조금 웃음을 띤다. 이병철은 눈시울이 붉어짐을 느꼈다.
1981년 교보문고가 문을 열던 날 이병철은 을유문화사 은석 정진숙과 함께 밝은 얼굴로 대산 신용호의 손을 꼭 잡고 한 손으로 테이프를 잘랐다. 이들 셋은 평생 골프 친구였다.
“대산, 애썼어. 정말 수고했소. 도쿄에 가면 야에스 북센터, 산세이도 서점, 기노쿠니야 서점이 부러웠는데 이제 한국도 교보문고가 있으니 됐어. 참 잘됐어!” 그는 이렇게 말하며 소년처럼 즐거워했다.
이병철과 신용호는 일본에 갈 때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형서점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젊은이의 물결로 꽉 찬 서점은 나라의 진정한 미래를 보여 주었기에, 그들은 서울 종로에 새 건물을 올리면 꼭 큰 서점을 열기로 의기투합했다. 신용호가 그 약속을 먼저 지킨 것이었다. 대산 신용호는 출판계 원로인 정진숙 을유문화사 회장에게 규모가 작은 서점들의 반발을 막아 달라고 간청했다. 옆에서 이병철도 껄껄 웃으며 거들었다. “내가 보증을 하지요. 은석께서 나서서 대산을 좀 도와주세요.”
이윤추구를 기본 생리로 하는 기업가이면서도 언제나 한 개인이 너무 많은 재산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주장해 왔던 그는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의 “잉여재산이란 신성한 위탁물”이란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병철은 1965년 개인 주식 10억원 상당과 부산의 임야 33만㎡의 사재를 털어 삼성문화재단을 설립했다. 그의 한국 문화에 대한 애착은 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발전했다. 그래서 문화재의 해외 유출을 적극적으로 막았을 뿐만 아니라 비밀리에 일본으로 유출되었던 명품들을 수도 없이 서울로 다시 들여왔다. 지금이야 외국으로 유출된 한국 문화재에 대한 관심도 높고 되찾으려는 움직임도 활발하지만,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시급하던 1960~1970년대에는 아무도 우리 문화재의 해외 유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일찍이 민족의 문화 유산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에 앞장선 그는 더 나아가 조상들의 미적 가치를 상실해 가는 젊은이들에게 한국 문화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겠다는 의욕을 갖게 된다. 평생 소중하게 모아 온 소장품 1167점을 문화재단의 사업 일환으로 공영화하여 호암미술관에 기증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서예를 즐겨하고, 말년에 이르러 중진 서예가로부터 글씨 지도를 받았던 것도 어쩌면 그의 내면에 예술혼이 꿈틀거리고 있었던 까닭인지도 모른다. 그가 가장 즐겨 썼던 구절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였다. 빈손으로 귀의하는 그 담담한 무심의 경지, 기업이 단순히 산술적 계산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도전과 창조라는 인간 정신의 발현이라는 점을 재삼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평생 힘들여 번 전 재산을 바쳐 민족정신과 예술정신의 고취에 앞장설 수 있었던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람이면 누구나 좌절의 시기를 경험하게 된다. 그 역시 다르지 않았다. 오늘의 삼성을 만들기까지 그 또한 몇 차례의 실패와 시행착오를 거쳤다. 차이가 있다면 어떤 사람은 실패 앞에서 좌절하고 포기하는 반면, 그는 그 실패를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그에게 실패란 인간의 그릇을 넓히고 단련하는 훈련의 장이었다.
이러한 자기계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세간에 널리 알려진 이병철의 완벽주의, 최고주의로 이어진다. 그는 넥타이 하나라도 최고가 아니면 매지 않았다. 어떤 사람에게는 부의 과시로 보여 빈축을 사기도 했지만, 그의 이러한 생활태도는 자기계발에의 집착에서 기인한 것이다. 미술품부터 골프채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것들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던 그는 틈나는 대로 모은 물건들을 어루만지곤 했다고 한다. 아마도 수집한 물건들에서 최고의 것을 만들어 내는 장인의 손길과 위대한 창조의 정신을 느꼈던 것이리라.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최고가 되었다는 그 결과가 아니라 최고가 되려고 노력하는 인간 불굴의 창조 의지야말로 이병철 자신의 삶이었으며, 또한 그가 꿈꾸는 삶이었다. 그는 결코 결과 그 자체를 중시하지 않았다. 사람이 최선을 다하더라도 상황이 따라주지 않으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실패에 대해서 그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최고가 되기 위해, 자신의 삶을 확장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자체가 그에게는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래서 이병철은 노력하는 인간, 근면한 인간을 최고의 덕목으로 꼽았다. 그리고 자신도 그러한 노력을 부단히 계속해 왔다. 그의 성공은 성공의 집착이 아니라, 노력의 과정에서 얻어진 부산물일 뿐이었다.
이병철은 1971년 1월 ‘현대문학’에 게재한 수필 ‘담(淡)’에서 삶이란 결국 죽음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는 인과연기(因果緣起)의 무상이라고 말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죽고 나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돈이 아니라 자신의 용기와 창조, 노력과 도전의 산물인 기업을 남기고 싶어했다. 더 나아가 그러한 소망조차 집착이며,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담담여수(淡淡如水), 초탈의 세계야말로 그가 마침내 닿고자 했던 무욕무빈(無慾無貧)의 경지였던 것이다.
이병철은 그야말로 스스로를 다스리고 억제하며 하루하루 살아간 인물이다. 어느 날 그에게 국가의 기본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질문했을 때, 이런 대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입니다.”
유교, 특히 정치와 도덕의 학문으로 유학이 지향하는 바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다. 나를 수양하고 나서 사람을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국민을 지도하고 다스리는 국가 경영에 임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스스로를 수양해야 한다. ‘대학(大學)’ 원문을 번역하면 이렇다. “스스로를 바로 하고 닦은 다음 집안을 다스린다. 집안을 다스린 다음에야 나라가 안정된다. 나라가 안정된 다음에는 천하가 태평하다.”
이것은 기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지도자가 수양을 통해 덕을 쌓아야 기업이 평온하게 발전하고 일하는 이들의 생활도 안정돼 국가와 사회에 공헌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이병철은 수기치인이라는 말을 매우 좋아했고 동시에 ‘수기지인(修己知人)’이라는 말도 즐겨 사용했다. 스스로를 바로 해야 비로소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지인’을 실천하지 못하면 ‘치인’은 실현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데 있어서 이병철은 명인의 경지였다. 특별한 용건이 있다면 모를까 마주 보고 있어도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는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30분이든 1시간이든 힘들어하지 않고 잘 들어주었다. 애용품인 워터맨 만년필로 메모를 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가벼운 맞장구나 ‘예’ ‘아니오’ 정도가 전부였다. 그만큼 그는 경청을 중요시했다. 그렇다고 이병철이 멍하니 앉아 남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말투나 말의 내용으로 상대의 됨됨이를 파악했다. 특히 성실한지, 신뢰할 만한지, 의도하는 바는 무엇인지, 화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을지 등에 주목했다. 한마디로 그는 ‘한 번 말하기 전에 두 번 들어라’를 실천했고, 이야기가 뜻하는 바를 100퍼센트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논어’에 ‘멀리서 보면 다가가기 어렵다. 실제로 만나 보면 의외로 상냥하다. 그러나 그 의견을 들어보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만큼 엄격하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는 이병철을 만난 손님들의 이야기와 기막히게 일치한다. 이병철은 가끔 그룹 계열사 사장들과 중역들을 불러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이나 당면과제 등에 대해 질문을 했다. 그때 설명과 대답이 충분히 정리돼 있지 않아 이해하기 어렵거나 정확함, 신속함이 결여돼 있으면, 그는 엄격한 회장으로 돌변한다. 그렇다고 얼굴색이 바뀌거나 큰소리를 질러대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는 조목조목 따질 뿐이었다. 문제는 왜 일어났는가. 거기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연신 ‘왜’와 ‘어떻게’를 사용해 핵심을 콕콕 찔렀다.
이럴 때의 이병철은 겉은 부드럽지만 속은 상당히 매섭다. 갑자기 지방에 있는 공장을 방문하는 일도 있다. 당연히 공장 측은 느닷없는 회장님의 방문에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방문지가 제조업체라면 그는 제품 디자인과 관련해 미국과 일본의 패션이 어떻게 다른지 등을 질문한다. 미국은 기존의 것을 버리고 하루라도 빨리 패션을 재창조하는 디자이너가 살아남는 교체 문화가 주류를 이룬다. 반면 일본 문화의 주류는 지속의 문화이다. 기모노는 3대에 걸쳐 일곱 번은 고쳐 입고, 이불과 다다미도 목화솜을 틀어 다시 만들거나 겉을 바꿔 몇 년 몇십 년씩 쓴다.
이병철은 적어도 이 정도의 답변이 나와야만 만족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자칫 긴장을 풀고 자만에 빠질 수 있는 삼성의 현장을 꾸짖기도 하고 격려도 하면서 더욱 분발하게 만들었다. <③편에 계속>
<②편에서 계속>
돌이켜보면 그의 사업 발자취는 불가능에 대한 도전의 역사였다. 공장을 짓는 기간은 늘 설계자 측에서 말하는 기간의 절반이거나 그보다 짧았다. 기계 설비를 새로 수입하면 제조업체 전문기술자의 지도 감독 아래 설치하고 시운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병철은 그것을 경험 없는 국내 기술자와 함께 도전해 성공했다.
설탕, 모직, 비료 등 삼성이 초기 단계에 건설한 공장은 모두 이런 방식으로 성공을 거뒀다. “절대 불가능하다. 제품의 품질을 보장하지 못한다.” 이런 기계 제조업체의 조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삼성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또한 자금 부족으로 벽에 부딪히면 해외차관 도입에 도전하는 등 스스로 조사하고 궁리해 반드시 이루어 냈다. 초기의 이러한 성공은 그에게 절대적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사람이 하려고 하면 못할 일이 없다. 못하는 것은 단호한 의지와 결사적인 노력 없이 모호한 자세로 임하기 때문이다.’ 그의 거대하고 그칠 줄 모르는 에너지의 근원은 이런 확신에 있었다. 최우석은 이병철에 대해 “사업은 추상열일(秋霜烈日·한 치의 미흡함도 없는 완벽주의자), 일 외에는 따뜻한 정을 지닌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실제로 이병철은 부하직원들의 가족을 비롯해 그들 신상에 일어난 일 등에 대해 세세한 것까지 신경 썼고, 편안하게 말을 거는 배려를 잊지 않았다. 특히 동양방송이 국영방송에 강제 흡수됐을 때 남고 싶어하는 사원은 전원 삼성에 남게 했으며, 삼성을 떠난 사원도 돌아오고 싶어하면 다시 받아주었다. 최우석은 말한다. “회장님의 그런 면모 때문에 사원들은 회장님을 두려워하면서도 존경하고 따랐다.” 이필곤 역시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고 행동이 반듯하며 흐트러짐이 없었기 때문에 부하직원들은 그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의 카리스마에 대해 들려주었다.
‘논어’는 공자에 대해 “온화함 속에 엄격함이 있고 위엄이 있으나 과격하지 않으며 행동이 공손하고 마음은 평온하다”고 했다. 이병철의 인물상도 온화하면서 불타는 투지가 있고, 위엄이 있으나 두려운 느낌은 없으며, 지극히 정중하고 여유가 있다.
그는 문화재단을 통해 인재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이를 위해 삼성장학금제도를 만들었으며, 대학 경영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삼성의 발상지인 대구에 위치한 대구대학이 경영난에 처했을 때 문화재단의 힘으로 구제했고, 뒤에 대구대학은 청구대학과 합병되어 영남대학으로 거듭났다.
그뿐 아니라 삼성문화재단은 경영난에 빠진 성균관대학을 인수해 운영했다. 인문계 대학에 이공계 학부를 추가해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고 인재들을 양성했던 것이다. 그런 다음 대학이 홀로 설 수 있게 된 시점에서 운영을 정부에 일임하고 일단 문화재단으로서의 역할을 끝냈다. 국가의 운명은 청년교육에 달려 있다는 그의 신념에 따른 사회공헌 활동의 일환이었다.
문화재단 설립으로부터 6년 뒤인 1971년에 이병철은 또다시 사재를 처분했다. 금융기관에 그의 모든 재산에 대한 평가를 의뢰한 결과 그 액수가 180억원으로 밝혀졌다. 그는 이를 삼등분해 60억원은 삼성문화재단에 추가 출자하고, 그 다음 60억원은 직계자손들을 위한 생전 상속과 회사에 큰 공적을 세운 사원에게 증여하는 데 썼다.
나머지 60억원 가운데 10억원은 사원공제조합에 기부했으며, 그 잔금은 그가 갖고 있다가 뒷날 유용한 용도를 결정하기로 했다. 그는 각고의 노력으로 쌓아올린 재산을 내놓는 것은 딸을 시집보내는 마음과 똑같다고 하면서도 사회 환원에 대한 자신의 철학에 따라 행동했다.
“부는 개인이 쓸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면 이미 내 것이 아니다. 또한 관리할 능력 이상의 재산을 자손에게 남기는 것은 잘못이다.”
부의 사회 환원에는 호암미술관의 창설과 그가 전 생애에 걸쳐 수집하고 소장해 온 고미술품 증여도 포함되어 있었다. 서화, 골동품 등 그의 민족 미술품 수집 역사는 1982년 4월 호암미술관의 개관으로 결실을 맺는다. 용인 에버랜드 그의 분묘 옆에 세운 이 미술관은 지상 2층, 지하 1층, 건면적 4000㎡(1200평)의 규모로 그는 여기에 20억원을 투자했다.
그 무렵 호암미술관은 민간 미술관으로는 동양 최대로 알려졌으며 최첨단 습도조절 장치까지 갖춘 이병철의 자랑거리였다. 그는 여기에 자신이 40년에 걸쳐 수집한 고미술품 모두를 기증했다. 이에 따라 호암미술관은 청자, 백자, 금관 등 국보 7점을 비롯해 일본의 중요 문화재에 해당하는 보물 4점을 중심으로 회화, 자기, 붓글씨, 금속품 등의 걸작을 갖추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행히 나는 기업을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왔고, 나의 갈 길이 사업보국에 있다는 신념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이병철은 자신의 바람대로 인생이라는 석재의 사업을 위해 산 사나이의 위대한 초상을 남겼다. 근대화를 위해 치달린 격동의 시대에 그의 사업 인생은 그대로 조국의 산업화 역사와 맞물려 있었다. 그의 사업 인생이 곧 한국 근대화의 역사였다. <④편에 계속>
<③편에서 계속>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는 저서 ‘21세기 자본’에서 “계급 간 부의 격차보다 세대 간 부의 격차가 커진다는 것은 환상”이며 “격차의 대부분은 같은 세대 안에서 일어나고 있고, 그것은 유산 상속에 의해서 확대 재생산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자산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커지면서 소득불평등 또한 점점 심화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돈이 돈을 벌어들이는 속도(자본수익률)’가 ‘사람이 일해서 돈을 버는 속도(경제성장률)’보다 빠르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빈부 격차가 심해진다는 뜻이다.
역사적이고 통계적인 접근을 통해 경제적 불평등을 연구한 피케티의 이론에 따르면, 부는 자본을 소유한 최상위 계층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이며 오랫동안 세계 최고 부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빌 게이츠는 해마다 사회에 엄청난 액수의 기부를 하고 있음에도, 2008년 경영에서 물러난 뒤에도 재산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화장품 최대 기업 로레알 창립자의 딸 릴리안 베탕쿠르(Liliane Bettencourt)는 직접 돈을 벌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음에도 2015년 현재 세계 3위, 여성으로서는 1위 자산가이다. 이처럼 상속관계로 이어지는 재벌 2세, 3세 등 부유층의 재산은 마치 금융기관처럼 안정적이고 빠르게 수익을 늘리고 있다.
아무런 노력 없이 어마어마한 부를 차지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렇게 차지한 부를 가지고 점점 더 부당하게 재산을 늘려가는 그들의 금권만능주의는 이제 멈추어야 한다.
‘피와 땀과 눈물로 얻는 것이야말로 상속으로 얻는 것보다 참된 자기 것’이라는 박정희의 말이 있다. 호암 이병철은 천신만고 산을 넘으며 얼마나 많은 피와 땀과 눈물을 쏟았겠는가. 한국의 상속자들은 오만함과 자만심에 빠져 이를 바르고 진실하게 깨닫지 못하는 것만 같다. 이제라도 선구를 본받아 윤리적이고 투명한 경영을 통한 기업 발전을 지향하고, 더불어 국가적·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활동을 해 국민의 사랑을 받아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병철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사업가로서의 긍지를 잃지 않았다. 이는 그가 고액의 추징금 부과 파문이 가라앉은 뒤 사원들 앞에서 말했던 내용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정부가 무리한 요구를 해오더라도 협조하십시오. 광복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치권력과 결탁해 적산(미 군정청이 몰수한 일본인 재산)을 헐값에 넘겨받거나 부도덕한 매점매석으로 순식간에 졸부가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부정한 재산과 관계없이 이만큼 훌륭한 회사를 만들어 온 겁니다. 이 회사를 더 크게 발전시키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위와 폐에 암이 발병한 이병철은 두 번에 걸친 투병생활을 해야 했다. 그가 자신의 인생을 두고 ‘천신만고’라고 표현한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이병철은 1987년 78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인생 절창(絶唱)을 남겼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뜻하지 않은 불행이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일이 잘되어 나갈 때는 오히려 다가올 불행을 각오해야 한다. 기쁨 뒤에는 반드시 슬픔이 따르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난날의 불행을 잊지 않고 거울 삼는 것이 오늘의 행복에 도취되는 것보다 몇 곱 더 중요하다. 기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뜻하지 않은 좌절을 겪어본 기업가는, 좌절을 모르고 자라난 기업가보다 훨씬 더 강인한 기업경영 능력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니다불대 수장선고(泥多佛大 水長船高)’라는 말이 있다. 진흙이란 좋은 흙이 아니다. 더럽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진흙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불상도 더 큰 것을 만들 수 있다. 물이 들고 파도가 거칠면 위험하기도 하지만 대신 배는 그만큼 높이 올라앉는다. 떫은 감도 정성으로 잘만 말리면 달고 맛있는 곶감이 된다. 그러나 급히 서두르거나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감은 달게 되지 않는다. 이렇게 떫은 감을 달게 만들기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기업가에게는 늘 지난날에 겪은 일들을 돌이켜보는 마음도 필요하다.”
고정일 소설가
2015-08-17 이건희 방패막이로 신현확 세우고 후계작업 서둘러
지난 5월 11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럽게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하면서 ‘포스트 이건희’에 대한 관심이 크다. 글로벌 일등 기업 삼성전자의 ‘오너 리스크’는 세계 IT업계에도 엄청난 회오리를 가져올 수 있어 외신도 이건희 회장의 병세에 주목한다.
삼성 측에선 이에 대한 준비를 착실히 마련, 경영구도에 특별한 변동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건희 회장이 입원했음에도 주가의 급락 없이 평온한 것은 시장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다. 삼성은 ‘회장 유고’를 대비한 일들을 착착 준비해 왔다. 2016년까지 계열사 순환출자를 전부 해소하고 삼성생명, 삼성전자, 삼성물산을 중심으로 74개 계열사를 재편한다는 목표를 지난해 발표한 적이 있다. 현재 삼성그룹은 삼성에버랜드가 삼성생명 지분 19.3%를 보유하고, 삼성생명이 삼성전자(지분 7.2% 보유)와 삼성물산(지분 4.7% 보유)을 거느리는 순환출자 구조를 큰 골격으로 유지되고 있다. 순환출자 구조의 정점에 있는 삼성에버랜드의 경우 이건희 회장의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5.1%의 지분을, 이건희 회장의 장녀와 차녀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이서현 삼성에버랜드 사장이 8.37%의 지분을 각각 보유하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의 지분이 절대적으로 많다.
이 회장이 쓰러지기 이틀 전인 5월 8일 삼성SDS를 연내에 상장하겠다는 계획도 천명했다. 삼성 안팎에서는 삼성SDS 상장을 통해 삼성가 3세들이 이건희 회장 개인 소유의 지분을 물려받을 자금을 마련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에버랜드 지분 3.72%를 비롯해 삼성생명 20.76%, 삼성전자 3.38%, 삼성물산 1.37%, 삼성종합화학 0.96% 등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지난 5월 13일 종가 기준 이 회장이 보유한 상장사 지분 가치만 11조1796억원으로 집계됐다. 상속이나 증여 형태로 이를 물려받기 위해서는 적어도 5조원대의 세금을 납부해야 하고, 이를 위한 ‘실탄’을 마련해야 한다는 관측이다.
삼성이 이건희 회장 이후를 대비하는 듯한 스케줄을 하나씩 공표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포스트 이건희’에 대한 깊숙한 내부 논의가 이뤄지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1남2녀의 후계 준비를 마쳤다는 방증이다.
삼성은 1987년 11월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이 타계할 때도 형제간 분란이나 혹시나 있을 재산 싸움에 대비, 이중 삼중의 포석을 깔아뒀다. ‘관리의 삼성’이란 당시 명성에 걸맞게 이병철 회장 생전에 준비를 다 끝내두었다. 당시 후계 작업의 원칙 중 하나는 이병철 회장의 부인인 박두을씨와의 사이에 난 자녀들에겐 회사 경영을 맡기고 후처 소생들에게는 회사를 물려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딸 중에 이인희(한솔그룹 고문), 이명희(신세계그룹 회장) 두 자매에게만 계열사를 분할해 준 것도 이 때문이다. 이병철 회장은 공식적으로 3남5녀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계도 참조> 5녀 중 3녀 이순희, 4녀 이덕희씨는 혼외자녀다. 차녀 이숙희씨는 박두을씨 소생이지만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아들인 구자학 아워홈 회장과 결혼하면서 계열사를 물려받지 못했다.
이들 3남5녀 외에 이병철 회장은 일본인 여성과 1남1녀를 뒀다. 필자는 2005년 저서 ‘재벌가맥’을 취재하면서 이병철 회장 호적에 올라있던 일본인 여성과의 자식인 이태희·이태자씨가 어느 순간 호적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한 바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 글을 통해 처음 밝힌다. 이건희 회장 동생으로 호적에 올라있던 이태희씨는 선친이 살아있을 때만 해도 제일제당 상무를 지내는 등 로열패밀리로 잘나갔었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 타계 후 일본으로 돌아가 완전히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일정 부분의 재산을 주고, 한국 호적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찌감치 3남인 이건희 회장을 후계자로 지목한 이병철 회장은 후계 구도의 장애물들을 하나씩 제거하면서 후계 작업을 실행에 옮겼다. 1980년대 초 이병철 회장이 위암 수술을 받고 나서 후계자 수업이 빨라진다. 이병철 회장 타계 12일 만인 1987년 12월 1일 전격적으로 이건희 회장을 삼성 2대 회장에 임명할 수 있었던 것도 사전 정지작업을 잘했기 때문이다. 유교적 전통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장자와 차남을 배제한 3남을 후계자로 선정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자신의 자서전인 ‘호암자전’(1986)에서 집안에 엄격한 유교 가풍이 내려오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관례를 깨고 3남을 회장으로 앉힌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 시기는 1987년 대통령 선거일을 며칠 앞두고 정국이 소용돌이 칠 때였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 등 당시 내로라하는 정계 거물들이 ‘6·10 민주항쟁’으로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 선거에 출마하고 있었다.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12월 19일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투표일 전에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는 박빙을 점치고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노태우 전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 장남인 이맹희 회장(당시 제일비료 회장)과의 관계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이맹희 회장은 경북고등학교 동기(32회) 동창으로 학생 때부터 친하게 지냈다. 1995년 필자가 이맹희 회장을 인터뷰했을 때 비화를 들려준 적이 있다.(필자는 1994년과 1995년 총 3차례 이맹희 회장과 단독 인터뷰를 가졌고 특히 1995년 2월 대구 자택에서 가진 인터뷰 때는 이 회장 동의하에 4시간 동안의 인터뷰 내용을 녹취하기도 했다.) 이맹희 회장은 노 전 대통령뿐만 아니라 당시 실세였던 육사 11기 정호용, 김복동씨와도 학생 때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고 밝혔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탄생한 후 이들이 자신에게 찾아와 “삼성을 되찾아 줄 수 있다”고까지 했다고 말했다. 후계 구도에서 멀어진 친구를 위해 뭔가를 도모할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인터뷰 내용도 이 글에서 처음 밝힌다.
이맹희 회장은 전두환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주인집 아들과 직원 아들(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친이 이병철 회장이 운영하던 정미소 공장장이었다)이라는 특이한 신분 때문에 전두환 대통령이 자신을 어려워했다고 말했다.(전 대통령은 이맹희 회장과 나이는 같았지만 대구공고를 졸업했다.) 전 대통령의 동생인 전경환씨는 자신의 보디가드 겸 운전사로 한동안 아들인 이재현 CJ 회장의 학교 통학일을 맡아왔다는 얘기도 당시 인터뷰에서 했다.
이맹희 회장은 “친구들이 정권 실세가 된 뒤 삼성 회장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고 인터뷰에서 솔직히 털어놨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이 이를 눈치채고 철저하게 감시했고 자신을 경원시했다고 말했다. 이병철 회장은 혹시나 해서 1986년에 신현확(2007년 작고) 전 총리를 삼성물산 회장으로 앉혀 후계자로 지목한 이건희 회장의 방패막이로 삼았다는 것이 이맹희 회장의 회고다. 이때는 이병철 회장의 건강이 매우 악화됐다. 부총리와 총리를 지낸 신 회장은 당시 자타가 인정하는 TK(대구·경북)의 대부다.
이맹희 회장은 “어느날 정호용군과 노태우군이 신 회장을 만나고 오더니 아무래도 삼성 회장으로 복귀하는 것은 힘들 것 같다”면서 “그 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지 말자”고 얘기해 상당히 불쾌했다고 필자에게 들려줬다. 나중에 알아봤더니 1987년 1월인가 신현확 회장을 만나고 나서 친구들의 태도가 돌변했다는 것이다. 이런 일들을 겪은 상황에서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당선될 것 같으니 삼성 측이 서둘러 이건희 회장을 회장으로 앉혔다는 것이 이맹희 회장의 전언이다.
1987년 당시만 해도 삼성그룹은 연간 매출액이 13조5000억원에 불과했고 그룹 구조도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았다. 또한 차명으로 주식을 보유할 수 있었고 상장기업도 몇 개 안 돼 오너가 마음만 먹으면 후계자를 바꾸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때였다.
그렇다면 이병철 회장은 왜 장남과 차남을 버리고 3남을 후계자로 삼았을까. 이에 대한 얘기는 1960년대 후반에 터진 ‘사카린 밀수 사건’ 수습 과정에서 이병철 회장과의 갈등 때문이라는 것이 거의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 이병철 회장도 호암자전에서 ‘장남 맹희는 주위의 권고와 본인 희망대로 그룹 경영을 일부 맡겨 봤지만 6개월도 못 가 맡겼던 기업은 물론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고 경영 능력을 폄하했고 ‘(차남) 창희는 그룹 산하의 많은 사람들을 통솔하고 복잡한 대조직을 관리하는 것보다는 알맞은 회사를 건전하게 경영하고 싶다고 희망해 그대로 해주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맹희 회장은 필자에게 이 부분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다. ‘한국비료 밀수 사건’(일명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1960년대 말 정권을 흔들 정도의 스캔들로 비화. 당시 사카린은 단맛을 내는 데 사용되는 식료품 원료로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한국비료는 이병철 회장이 짓던 비료 공장으로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자 국가에 헌납했다)은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다고 강변했다. 이맹희 회장에 따르면, 당시 밀수품으로 알려진 사카린은 한국비료가 일본 미쓰이공업으로부터 받기로 한 100만달러의 대용이었다. 일본 미쓰이공업이 공장 설비를 사주는 대가로 한국비료에 100만달러를 주기로 했는데 정상적인 방법으론 도저히 돈을 가져올 수 없어 대신 사카린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때 정권 실세들과 의견조율을 하고 사카린을 들여왔는데 언론에서 대서특필되고 야당에서 문제 삼자 삼성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이 이맹희 회장의 말이다. 결국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이병철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맹희·창희 두 형제가 선두에 서서 삼성을 이끌었다.
이후 이맹희 회장이 아버지의 미움을 사는 결정적 사건이 벌어진다. 아들들에게 기업을 맡기고 경영을 하는 것을 지켜본 이병철 회장이 아들들에게 맡겨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다시 회장으로 복귀하려는 즈음 투서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청와대에 전달된 투서의 내용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이병철 회장이 경영 일선에 나서려고 한다고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즉 이병철 회장의 경영복귀를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발끈했다. 이 투서 사건을 이맹희 회장이 주도한 것으로 알고 맹희·창희 두 형제를 경영에서 완전 배제하고 이맹희 회장은 삼성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만들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도 이맹희 회장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투서는 이창희 회장이 했다”고 주장했다.
당시만 해도 이병철 회장은 아들들에게 기업을 물려줄 마음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병철 회장은 호암자전에서도 ‘고생스러운 기업 경영의 일을 자손들까지 억지로 강요하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3남 이건희에 대해서도 ‘(건희가) 일본의 와세다대학 1학년 때 중앙매스컴을 맡아 인간의 보람을 찾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그 길이 가장 좋은 것 같다고 대답했다. 매스컴 경영은 기복이 심해 재정적 지원이 가능한 몇 개의 회사를 붙여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건희에게는 고생스러운 기업경영을 맡기는 것보다 매스컴을 생각했던 것이다’라고 전하고 있다.(당시 중앙매스컴은 이건희 회장의 장인인 홍진기 전 장관이 회장으로 있었다.) 이를 액면으로 받아들이면 장·차남에 대해서는 경영 능력에 대한 회의 때문에, 3남은 성품 등으로 가업을 맡기는 것을 유보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어쨌든 이병철 회장은 3남을 후계자로 낙점하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장남을 버렸다. 반면 차남이 새한미디어를 창업할 때는 상당한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이맹희 회장도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창희는 그후 아버지한테 사과도 하면서 굽히고 들어갔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이병철 회장은 심지어 임종을 할 때도 장남은 부르지 않았다. 대신 이맹희의 아들이자 자신의 장손인 이재현 현 CJ 회장을 불렀다.
이재현 회장에 대한 이병철 회장의 애정은 각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맹희 회장의 말에 따르면, 이재현 회장이 고려대를 졸업하고 1983년 씨티은행에 입사했을 때도 자신에 대한 이병철 회장의 노여움이 극에 달했었다고 했다. 그 이유를 알아봤더니 장손을 삼성에 입사시키지 않고 씨티은행에 취직시켰기 때문이라고 주변에서 귀띔해 결국 1년 뒤 아들의 직장을 제일제당으로 옮겼더니 아버지의 노여움이 가라앉았다고 했다.
이맹희 회장에 따르면, 아들 이재현 회장이 제일제당을 거쳐 1992년 삼성전자 전략기획실 이사대우로 승진하자 자신을 보는 삼성의 분위기도 달라졌다고 한다. 아들이 임원으로 승진하자 승진에서 밀린 삼성그룹 사람들 중 일부가 자신에게 줄을 대려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건희 회장이 1993년 서둘러 제일제당을 삼성에서 분리한 것도 그런 저변의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맹희 회장은 주장했다. 이맹희 회장은 당시 분리 자체를 그리 반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맹희 회장은 장손인 이재현 회장이 삼성의 적통을 잇는 것이 선대 회장의 뜻이라고 해석하고 있는 듯했다.
1987년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한 이건희 회장은 ‘마누라와 가족 외에는 다 바꾸라’는 유명한 신경영을 주도하며 오늘의 삼성기업군을 만들어냈다. 지난해 기준으로 500조원이 넘는 자산규모에다 연간 400조원이 넘는 매출을 기록한 거대한 삼성호가 탄생하는 데 이건희 회장의 공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문제는 ‘포스트 이건희’로 자리매김한 이재용 부회장이 아버지의 그늘을 벗고 탄탄한 삼성호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아버지 때에 비해 이재용 부회장의 후계 승계는 순탄할 것으로 보이지만 삼성호를 둘러싼 경영환경은 아버지 때보다 더 큰 도전을 요구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홍성추
서울신문 기자. 산업부장. 서울신문 STV 대표이사 역임. 저서 ‘재벌가맥’(무한출판사·2005), 논문 ‘재벌가 분쟁이 기업 이미지에 미치는 영향’(성균관대 문학석사 학위 논문·1998) = 출처 | 주간조선 2014.05.19
08-17 삼성家 재산 다툼- 이맹희와 이건희 유산 전쟁의 전말
삼성그룹의 창업주인 고(故) 이병철(李秉喆) 회장은 슬하에 4남6녀를 뒀다. 이 중 여덟 명은 고 박두을(朴杜乙) 여사와의 사이에서 태어났고, 둘은 일본인 부인의 소생이다.
첫째는 한솔그룹 고문 인희(仁熙)씨, 둘째는 제일비료 회장을 지낸 맹희(孟熙)씨다. 이맹희씨는 이번에 삼성그룹 이건희(李健熙) 회장을 상대로 유산 소송을 제기한 이다. 이씨의 장남이 CJ그룹 이재현(李在賢) 회장이다. 삼성 이씨 가의 장손이다.
셋째는 새한미디어 회장을 지낸 고 창희(昌熙)씨다. 그는 지난 1991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떴다. 넷째 숙희씨는 LG 구씨가의 구자학씨와 결혼, 회사 경영에서 손을 뗐다. 이숙희씨 역시 동생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이번에 소송을 냈다. 다섯째 순희씨는 서강대 교수를 지낸 김규씨와 결혼했고, 삼성 회사에 몸담지 않았다. 여섯째 덕희씨는 사실상 혼외 자식이어서 회사 경영 및 상속에 끼지 못했다. 일곱째가 삼성그룹 회장인 건희씨다. 그는 형(이맹희)과 누나(이숙희)로부터 소송을 당한 상태다. 여덟째는 신세계그룹 회장인 명희(明熙)씨다. 아홉째(태휘씨)와 열째(혜자씨)는 일본인 부인이 낳았다.
“아버지가 맡긴 차명주식 달라” vs. “상속은 과거에 끝난 일”
국내 재계(財界)가 삼성가의 재산 다툼으로 떠들썩하다. 지난 30여 년간 삼성과 담을 쌓고 지낸 이맹희씨가 동생 이건희씨를 상대로 7100억원대의 소송을 제기해서다. 이맹희씨의 동생이자 이건희씨의 누나인 숙희씨까지 소송에 가담해 싸움이 커졌다.
소송의 요점은 이렇다.
이맹희씨는 “선대(先代)회장(이병철 회장)이 차명으로 관리해 온 주식은 모든 형제가 나눠 상속해야 하는데, 이건희 회장이 2008년 단독으로 처리했다”며 돌려달라는 주장이다.
이에 맞서는 이건희 회장은 “유산 상속은 선대회장 타계(他界) 시에 다 끝난 일인데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는 입장이다.
원고 이맹희씨의 소장 내용 중 일부다.
< 선대회장이 차명주주 명의로 소유하고 있던 삼성생명 주식을 이건희가 다른 상속인에게 알리지 않고, 2008년 12월 31일에 자신의 단독 명의로 변경했다. 상속인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니, 법정 상속분을 반환하라. 또 선대회장이 차명으로 관리한 삼성전자 주식 역시 이건희가 같은 방식을 취했다. 삼성전자 차명주식의 실체가 불분명하지만 우선 보통주 10주, 우선주 10주를 달라. 또 이건희가 이들 회사(삼성생명, 삼성전자)로부터 지급받은 배당금을 돌려달라.>
이맹희씨는 법무법인 화우에 이 소송을 맡겼고, 동생 숙희씨가 여기에 가세해 자기 몫을 돌려달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맹희 對 이건희’ 소송이 ‘삼성 對 CJ’로
▲이재현 CJ회장이 부친(이맹희)을 대신해 소송을 맡고 있다.
처음 소송 소식이 알려졌을 때, 삼성은 그룹 차원에서는 자제하는 모습이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개인 대 개인의 소송이라서 그룹 차원에서 나서기가 애매하다”고 했다. 하지만 재계 몇몇 관계자의 생각은 달랐다. 베이징에 머물고 있고, 건강상태가 썩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이맹희씨가 ‘단독으로’ 소송을 했겠느냐는 식(式)의 시선이었다. 한동안 삼성그룹 안팎에서는 이맹희씨의 아들인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관여를 했느냐, 아니냐를 두고도 말이 많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CJ 측은 “이재현 회장은 전혀 몰랐다”는 입장이었다. 오히려 이재현 회장이 부친을 설득해 원만한 합의를 볼 수 있도록 노력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맹희씨의 소송에 첨부서류를 신청한 사람이 이재현 회장이라는 점이 알려지면서, ‘이맹희-이건희’의 다툼은 ‘삼성 대(對) CJ’로 확대됐다.
두 그룹은 ‘이재현 회장이 배후에 있다’, ‘이번 소송 때문에 삼성직원이 이재현 회장을 미행했다’는 등 각종 볼썽사나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여기에 고 이병철 회장의 둘째 딸까지 큰오빠(이맹희) 편을 들고 나옴에 따라, 상속권이 있는 다른 형제들의 행보에까지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작년 6월에 알아”(이맹희) vs. “2008년 알아”(이건희)
삼성그룹 측이 ‘이맹희 혹은 CJ’와 일절 합의할 뜻이 없다고 밝힘에 따라 향후 두 사람은 지루한 법정 공방을 벌일 가능성이 커졌다.
소송의 내용이 복잡한 듯 보이지만, 쟁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이맹희씨가 이 사실을 언제 인지했느냐’다.
이맹희씨 측은 지난해 6월에 이건희 회장 측으로부터 상속 관련 문건을 받은 다음에야, 선대회장이 삼성생명 차명주식을 남겼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입장이다.
반면 이건희 회장 측은 “검찰이 삼성의 비자금 수사(2008년 4월) 결과를 발표할 때 삼성생명 차명주식의 존재를 발표했으므로, 그때 이미 알았을 것이다”는 입장이다.
둘째는 ‘침해 행위가 있은 날’에 대한 부분이다.
이맹희씨 측은 “이건희 회장이 선대 회장 주식을 단독 명의로 변경한 2008년 12월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이건희 회장 측은 “선대회장 사망 직후부터 관리했고 배당금도 수령했다. 고 이병철 회장의 사망 시점인 1987년에 침해행위가 있었으니 20년이 넘었다”는 주장이다.
민법 999조는 ‘침해를 안 날부터 3년, 침해행위가 있은 날부터 10년’으로 규정하고 있다.
법원이 이들 중 누구의 손을 들어줄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3분의 1로 나눌까 했지만 한 명에게 몰아주기로”(고 이병철 회장)
고 이병철 회장의 4남6녀에게 어떤 일이 있었을까.
고 이 회장에게 있었던 가장 큰 시련은 ‘청와대 투서 사건’(1969년)이었다. 당시 차남이자 셋째인 고 이창희씨는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에 이병철 회장이 관여했다’는 내용의 투서를 청와대에 건넸고, 이 일로 고 이병철 회장은 경영권을 상실했다.
그가 시련을 겪을 즈음에 아들 셋은 삼성에 있었다.
장남 맹희씨는 안국화재를 거쳐 삼성전자 부사장이었고, 차남 창희씨는 한국비료에 있었다. 삼남 건희씨는 동양방송·《중앙일보》에 몸담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고 이병철 창업주는 ‘장자(長子)승계’ 원칙에 따라 그룹을 맹희씨에게 넘길 생각이었다. 맹희씨는 서른 즈음에 삼성 계열사에 입사(入社)해 벌써 10여 년을 그룹에 몸담은 상황이었고, 건희씨는 그룹으로서는 ‘변방’으로 볼 수 있는 매스커뮤니케이션 부문에 이제 막 발을 담근 시점이었다.
고 이병철 회장은 이즈음부터 ‘후계구도’를 염두에 뒀다.
그의 명을 받아 《호암자전》(이병철 회장이 유일하게 남긴 회고록)을 집필했던 최우석(崔禹錫) 전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의 기록에 있는 내용이다.
< 삼형제에게 공동으로 승계할 것이냐 또는 3분의 1씩 균분해서 맡길 것이냐 등을 놓고 수십 년 동안 생각해 왔다. 삼성이 분산되면 복합기업, 국제기업 시대에 그나마 힘이 약해져서 안 되겠다는 결론을 얻었다. 하다가 안 되는 것은 할 수 없지만 처음부터 분할할 필요는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1970년대 초에 모든 법적 절차를 끝내고 그런 방향으로 체제를 굳혀왔다.>
삼남 이건희가 대권 승계
/故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좌측 두 번째).
고 이병철 회장은 나중에 그룹 회장직에 복귀했지만, 건강이 썩 좋지 못했다. 뇌종양 수술(1979년)과 폐암 수술(1986년)을 받았다. 그리고 이즈음 그의 마음은 삼남 건희씨에게 쏠렸다.
고 이병철 회장은 세 가지 사건을 계기로 후계 구도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
장남 맹희씨는 ‘한국비료밀수사건’(1966년, 삼성 계열사인 한국비료가 일본에서 사카린을 밀수입하다가 걸린 사건)을 두고 부친에게 반기를 들었는데, 끝내 화해를 하지 못했다. 차남 고 창희씨는 고 이병철 회장에게 싹싹 빌고 용서를 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맹희씨는 사실상 그룹 경영에서 손을 떼고 야인(野人)으로 지내게 된다.
고 이병철 회장은 《호암자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 맨 처음에는 주변의 권고도 있고, 또 본인의 희망도 있어서 장남 맹희에게 맡겨보았다. 그랬더니 좋은 업적이 안 나오고 본인 스스로도 정상의 자리를 단념하면서 유능한 경영자를 찾아야겠다는 것을 자청했다. 2남 창희는 많은 회사와 복잡한 조직하의 많은 사람을 거느리는 것에 흥미를 갖기보다 작은 규모의 것을 건전하고 알차게 경영하고 싶다는 본인의 희망이 있어 그렇게 하도록 했다.
3남 건희에겐 처음에는 매스컴을 맡기기로 하고 매스컴 경영의 기복에 대비하여 재정적 지원을 할 수 있도록 몇 개의 회사를 매스컴에 붙일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자신도 통합 경영에 뜻을 두고 성의껏 노력하고 있으므로 삼성의 경영을 3남에게 승계시키기로 했다.>
이건희 회장이 명실공히 삼성 왕좌의 주인이 되는 순간이었다.
맏딸 인희씨에 각별한 애정
고 이병철 회장은 여느 당시 사람들이 그러하듯 아들과 딸에 대해 구분이 확실했다. 딸들에게는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는 이유를 들어 삼성 관련 경영에서 일절 배제했을 정도다. 그런데 5녀(일본인 부인에게서 태어난 1녀 제외) 중 유독 맏딸 인희씨에 대해서는 애틋한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이 계열분리를 할 때 삼성에 출입했던 한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계열분리를 하면서 인희씨에게 고려병원ㆍ전주제지(현 한솔제지)·호텔신라 외에 골프장 ‘오크밸리’가 있는 부동산이 떨어졌습니다. 당시에는 종이 사업이 유망했습니다. 고 이병철 회장은 인희씨의 남편(조운해·趙雲海)이 의사라는 점을 의식하고 병원을 물려줬습니다. 게다가 부동산으로서 가치가 높은 호텔신라와 ‘오크밸리’까지 물려준 것은 맏딸이 회사 경영에 신경을 쓰지 않고 편하게 살기를 바라는 의중이 반영된 것이라는 얘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고 이 회장은 5녀 명희씨에게는 ‘경영능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명희씨는 신세계백화점 상무라는 타이틀은 달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경영에 나서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 이병철 회장은 언제든지 그가 ‘경영인’이 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줬다. 고 이 회장은 그에게 신세계백화점과 조선호텔 주식을 상속했다.
이맹희·이숙희 남매 유학 같이할 정도로 돈독한 관계
하지만 넷째 숙희씨(이번에 소송 제기한 사람)와 다섯째 순희씨(김규 전 서강대 교수 부인)에 대한 처우는 달랐다. 여섯째 덕희씨는 사실상 혼외 자식이라는 점에 상속 부문에서 제외됐다.
고 이 회장은 숙희씨에 대해서는 “럭키금성가(현 LG)로 시집을 간 이에게 삼성 주식을 줄 수 없다”고 했다.
혹자들은 숙희씨가 이번에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을 두고, 선친에 대한 섭섭함이 한 몫을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사실 숙희씨를 LG가로 시집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고 이병철 회장이었다.
1950년대 초의 어느 날, 고 이병철 회장과 고 구인회(具仁會) 회장은 골프를 치다가 사돈을 맺기로 결정을 했다. 그리고 1956년 2월, 숙희씨는 고 구인회 회장의 아들인 구자학(具滋學) 아워홈 회장과 결혼식을 올렸다. 삼성과 LG가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동양방송’을 공동 운영했고, LG 임원들을 삼성의 대표 골프장인 ‘안양골프장(현 안양베네스트)’ 회원으로 자동 가입시킬 정도로 사이가 막역했다.
실제로 구자학 회장은 LG가 오너 일가임에도 불구하고, 줄곧 삼성에서 일을 했다. 제일제당, 동양TV, 호텔신라 초대사장, 중앙개발(에버랜드 전신) 대표이사 등을 지내며 중용됐다. 하지만 삼성의 전자사업 진출을 두고 LG와 갈등이 깊어지자, LG 측은 구자학 회장에게 “집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재계의 관계자는 “이숙희씨 입장에서는 딸이라는 이유로 회사 경영에 참여하지 못했고, 남편이 10여 년 넘게 삼성에서 중책을 맡았다가 하루아침에 그만뒀으니, 아버지에게 섭섭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숙희씨는 큰오빠인 맹희씨와 유독 가까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남편인 구자학 회장과 이맹희씨는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고, 미국 유학도 함께 떠났다. 1957년 2월이었다. 숙희씨와 이맹희씨의 부인인 손복남씨 역시 두 달 뒤에 남편들을 따라 나란히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이들 부부는 미국에서 3~4년을 같이 생활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 부부의 친분이 두 사람이 이번에 함께 소송을 하게 된 계기라는 시선도 있다.
이숙희씨는 얼마 전 TV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이병철 회장의 사망 후에 유산을 한 푼도 받지 못한 이유가 재판 과정에서 밝혀질 것”이라며 “오빠(이맹희)에게 삼성이 나쁘게 굴어 힘이 되기 위해 동참하게 됐다”고 밝혔다.
출가외인 딸들에게는 현금으로 상속한 듯
이번 소송에 나설 뜻이 없음을 밝힌 고 이병철 회장의 다섯째 순희씨도 공개적으로는 상속분이 많지 않다.
하지만 삼성은 고 이병철 회장의 8남매가 어떤 방식으로든 상속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고 이병철 회장이 타계한 후인 지난 1988년 세무서의 자료 때문이다.
< 고 이병철 회장의 상속 재산은 237억2300만원이고, 이에 대한 상속세 납부액은 150억1800만원으로 신고됐다. 이건희 그룹 회장을 대표 상속인으로 하여, 고 이 회장의 부인 박두을 여사와 자녀 등 모두 8명의 상속인이 세무서에 신고서류를 접수시켰다.>
위의 내용에 따르면, 고 이병철 회장에게 회사 또는 주식을 상속받지 못한 순희씨와 숙희씨는 현금으로 어느 정도 상속받은 듯하다.
고 이병철 회장은 둘째이자 장남인 이맹희씨에게는 일절 재산을 주지 않았다. 대신 그의 부인인 손복남씨에게 안국화재를 줬고, 창희씨에게는 제일합섬을 남겼다. 장손이자 이맹희씨의 장남인 이재현 CJ그룹 회장에게는 CJ(당시 제일제당) 주식을 차명으로 남겼다.
그 외의 간판 회사는 모두 일곱째인 건희씨에게 넘겼다. 삼성물산, 삼성전자, 삼성반도체통신, 제일모직, 동방생명(현 삼성생명) 등이었다.
그리고 고 이병철 회장은 타계 석 달 전인 지난 1987년 1월에 도쿄로 자녀들을 불렀다. 이날 자리에는 그의 상속 배분 순서처럼, 딱 다섯 명의 자녀가 모였다. 인희씨, 창희씨, 건희씨, 명희씨와 장손 재현씨였다.
이 회장 타계 후 다른 처지가 된 8남매
▲고 이병철 회장의 배분에 따라, 그동안 삼성가 형제들은 겉으로 볼 때에는 평탄한 시기를 보내왔다.
첫째 인희씨는 삼성그룹에 호텔신라 지분 등을 넘기고, 오늘날의 한솔그룹을 일궈냈다. 한때 재계서열 8위까지 올랐던 한솔그룹은 IMF를 거치면서 한솔텔레콤, 한솔종금의 부실처리 문제로 위험에 시달렸으나 현재 연(年)매출 6조원대의 재벌그룹이다. 인희씨는 이번 일에 대해 “유산문제는 과거에 끝난 문제”라고 밝혀 소송전에 뛰어들 뜻이 없음을 밝혔다.
둘째 맹희씨는 고 이병철 회장의 눈 밖에 난 뒤에 줄곧 해외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소송은 사실상 아들이 이끄는 CJ그룹이 맡고 있다.
셋째 창희씨는 고 이병철 회장이 타계한 지 4년 만에 세상을 떴고, 아들 재관(在寬)씨가 새한미디어를 끌고 있다. 새한미디어는 지난해 6월 삼성그룹 측이 ‘상속포기 각서’를 형제들에게 보냈을 때 이에 동의했고, 이에 대한 대가로 400억원 정도를 챙겼다는 소문이 재계에 나돌고 있다.
넷째 숙희씨는 그동안 삼성의 경영에 참여하지 않았고, ‘LG가의 며느리’로만 알려져 왔다. 재계에서는 이맹희씨보다 숙희씨가 먼저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했다는 얘기가 솔솔 흘러나오고 있으나 사실확인은 되지 않고 있다.
다섯째 순희씨 역시 회사 경영에 참여하지 않았고 가정주부로 지냈으며, 이번 소송에 ‘불참’의사를 밝혔다. 일곱째 건희씨는 선친으로부터 건네받은 삼성을 재계 서열 1위그룹으로 만들었다.
여덟째인 명희씨는 가장 적극적인 여성 경영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선친에게 주식을 받을 당시에 경영에 참여하지 않았던 그는 이후 그룹 경영에 뛰어들어 백화점, 호텔, 할인점 등 유통업의 절대 강자로 떠올랐다. 그는 이번 소송에 아무 의사를 표명하지 않고 있다.
고 이병철 회장의 타계 이후 8남매가 걸어온 길은 이처럼 사뭇 달랐다.⊙
글 | 정혜연 월간조선 기자
출처 | 월간조선 2012년 4월호
2015-11-05 이병철 회장과 신격호 회장의 불편했던 감정을 풀어낸 자손들
삼성 창업 회장과 롯데 창업 회장과의 ‘앙금’이 3대와 2대에 와서 풀리고 있다. 지난 10월 30일 삼성그룹이 석유화학 분야를 롯데그룹에 매각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창업 3대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창업 2대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만나 3조원대의 ‘빅딜’을 이뤄냈다. 이병철(1987년 작고) 삼성 그룹 창업주와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는 서울 소공동 요지를 놓고 격돌, 한동안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롯데 호텔의 부지는 원래 반도호텔이 있었던 곳으로 이병철 회장이 오랫동안 눈독을 들였던 땅이었다.
그러나 신격호 회장이 1973년 반도호텔을 매입하면서 두 창업주간 앙금이 생겨났다. 인근에 조선호텔과 신세계 백화점을 갖고 있던 이 회장으로서는 신격호 회장에게 일격을 당한 셈이다. 소공동 일대를 삼성 타운으로 만들려던 계획 역시 물거품이 됐다. 이후 이병철 회장은 신격호 회장에게 서운한 감정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에서의 만남도 거의 없었다. 이재용 부회장과 신동빈 회장이 만나 빅딜을 성사시킴으로써 선대의 불편했던 감정도 사그러졌다는 얘기가 그래서 나오고 있다.
/이병철 삼성 설립자와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 /조선일보 DB
특히 이번에 롯데에 넘긴 삼성정밀화학(한국비료 전신)은 삼성그룹과 이재용 부회장에겐 아주 의미 있는 회사였다. 삼성그룹으로서는 ‘애증’의 회사로 불리기까지 한다.어쩌면 창업주의 3남인 이건희 회장이 삼성의 적통을 잇도록 한 계기를 만들어 준 회사이기도 하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오늘의 이재용 부회장을 만든 회사였다고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5·16’으로 집권한 당시 군부는 모든 것을 경제살리기에 집중했다.당장 먹고 사는 것이 문제였다. 재벌들에게도 이러한 국가정책에 동참하기를 강요했다. 최대 재벌이었던 이병철 회장은 비료공장 건설을 맡았다. 1964년 이 회장은 세계 최대 비료공장을 짓기로 작정하고 ‘한국비료공업’을 설립,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이 회장은 자서전인 ‘호암자전’에 “비료의 자급자족이야말로 농촌의 사활을 좌우하는 문제"라고 썼을 정도로 애착을 보였다. 박정희 대통령 역시 비료공장 설립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천명할 정도였다. 실제로 1965년 한국비료공업은 일본 화학회사 미쓰이로부터 4880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받았고 차관에 대한 지급 보증은 정부가 섰다.
공장을 거의 완공할 무렵 문제가 터지고 만다. 이른바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아려진 ‘한비사건’이다. 1966년 한국비료공업이 사카린을 건설 자재로 꾸며 밀수를 하다 부산 세관에 발각됐다. 사카린은 비싼 설탕 대신 단 맛을 내는데 쓰이던 주요 원료였다. 이 사건은 ‘한국비료공업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불렸다. 정치권과 언론의 질타가 봇물을 이뤘다. 이 사건의 여파로 이병철 회장의 차남인 한국비료공업 이창희(1991년 사망) 상무가 구속됐다. 이병철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고 삼성그룹은 한국비료공업의 주식 51%를 국가에 헌납했다. 한국비료공업은 이후 산업은행이 최대주주가 되면서 공기업 형태로 경영됐다.
이병철 회장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며 후임으로 장남인 이맹희(2015년 타계) 회장을 지명했다. 이맹희 회장으로의 경영권 이양은 자연스런 것으로 비쳐졌다. 그러나 이맹희 회장의 ‘대권’은 오래가지 못했다.경영방식을 놓고 사사건건 부친인 이병철 회장과 부딪혔다. 잠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이병철 회장은 장남을 경영에서 배제하고 다시 경영 전면에 나섰다. 이후 장남인 이맹희 회장은 한번도 부친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한비사건’으로 인해 3남인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을 물려받는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이재용 부회장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회사다.<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정부에서 운영하던 한국비료는 지난 1994년 민영화가 이뤄졌다.당시 대림그룹과 동부그룹 등에서 군침을 흘렸다. 특히 현금 유동성이 풍부했던 동부그룹은 상당한 관심을 가졌으나 막판 입찰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삼성에서 인수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알고 포기한 것이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다시 한국비료를 품에 안았다. 삼성은 인수하자마자 삼성정밀화학으로 개명하고 비료생산에서 첨단 화학제품을 생산하는 회사로 탈바꿈시켰다. 이건희 회장이 한비를 인수할 당시 삼성 그룹은 거의 혁명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 때였다.
1년전인 1993년 6월 7일 이건희 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사장단과 주요 간부를 불러 모아 “나부터 바꾸자. 마누라, 자식만 빼놓고 다 한번 바꿔보자”는 말로 요약되는 신경영 선언을 선포했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질 위주의 경영'으로 기업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 선진 경영시스템을 도입하고, 삼성의 경영 전 부문에 걸쳐 대대적인 혁신을 추진하였다. 같은 해 7월 삼성그룹은 모든 계열사에 조기출근제도를 도입했다. 당시 삼성그룹 계열사의 근무 시간은 오전 7시~오후 4시였다.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가져다 준 혁명적 발상이다. 이 선언으로 삼성은 대 변혁이 일어났다.제일제당과 신세계백화점,전주제지를 가족들에게 분가해 준 것도 그때였다. 자동차 산업으로의 진출 등 지금까지의 삼성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건희 회장은 선대회장의 애증이 서린 한국비료를 인수하면서 많은 상념에 잡혀 있었다. ‘석유화학’분야가 삼성의 ‘신수종’사업으로 자리잡을 것임에 방점을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3대인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 10월30일을 기해 ‘석유화학’분야에서 완전히 손을 떼는 ‘결단’을 내렸다. 지난해 삼성종합화학과 방위산업 분야를 한화그룹에 넘긴데 이어 이번에 롯데그룹에 나머지 화학분야를 넘김으로써 삼성에서 석유화학 분야는 찾아 볼 수 없게 됐다.
삼성 그룹의 이와같은 선택에 대해 재계에선 대체로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고 있다. 전자와 전자소재, 금융 등 선택과 집중을 통해 초 일류 기업으로 계속 나가겠다는 것이 ‘이재용식 삼성’이라는 지적이다. 특히 이번 롯데그룹과의 ‘빅딜’에선 밑지지 않은 장사를 했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롯데 그룹은 3조원에 이르는 인수가격을 삼성그룹에 줘야한다. 롯데그룹 인수합병(M&A) 역사상 가장 대형 거래다. 삼성으로서는 이 자금을 바탕으로 전자 전지 등 필요한 부분에 투자할 여력이 생겼다. 물론 롯데그룹 역시 전자 전기 바이오 산업에 진출하는 계기가 돼 긍극적으로는 ‘윈윈’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신동빈 롯데 그룹 회장(왼쪽)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조선일보 DB
이번 빅딜에 눈길을 끄는 것은 이재용 부회장과 신동빈 회장과의 관계다. 나이는 13살 차이로 신 회장이 위지만 두 사람은 상당히 가깝게 지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 부회장이 일본 유학 경험이 있어 의사 소통 등 돈독한 관계를 가져왔다고 주변에선 얘기하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의 할아버지인 이병철 회장과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 회장의 껄끄러움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병철 회장의 ‘소공동 삼성타운’의 꿈은 신격호 회장 때문에 깨졌으나 후대에선 돈독한 관계가 된 것이다. 이병철 회장과 신격호 회장은 백화점과 호텔 등 유통과 서비스 업종에 부딪히면서 냉랭한 관계는 지속되었다. 신격호 회장이 국내 재계 인사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던 사람은 정주영(2001년 작고) 현대그룹 창업주였다. 정 회장은 매년 주한 외교 사절을 위한 신년 하례회를 롯데호텔에서 개최할 때 항상 상석에 신격호 회장을 초대해 자리를 같이했다. 신 총괄회장은 재계에서 가장 친한 분으로 정주영 회장이라고 서슴없이 말할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끈끈했다.
그러나 2세와 3세 경영인으로 이어지면서 창업 회장간의 어색함은 없어지고 오히려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고 있다.특히 이번 빅딜을 위해 신동빈 회장이 직접 이재용 회장을 만나 성사시켰다는 후문이 있다. 신 회장은 형인 신동주 부회장과의 송사 등 내부의 사정이 있음에도 빅딜을 성사시킴으로써 ‘경영능력’을 대내외에 과시한 셈이 됐고,이재용 부회장은 화학사업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라 서로의 이해가 맞았는지 모른다.
창업주의 애증이 서린 삼성정밀화학(한국비료 전신)을 롯데 그룹에 넘긴 이재용 부회장의 선택이 옳은 것인가,형제간 갈등을 경영 능력으로 보여주려고 한 신동빈 회장의 결단이 나은가에 대한 판단은 한참후에 나올 것이다. 창업 회장간의 앙금도 씻어낸 이번 빅딜이 우리 경제계에 어떤 여파를 몰고 올 것인가는 또 다른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홍성추의 재벌가 인사이드 조선일보
★ 이건희의 세계 1위 방정식
홍하상 작가 조선일보
(1)-① 까만 고무신 신던 이건희, 흰 고무신 생기면 아끼겠다고 구석에 숨겨
이건희와 장난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2일 청년들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청년희망펀드에 200억원의 사재를 출연한다고 삼성그룹이 밝혔다. 이 회장은 아버지 이병철 회장 세대를 이어 대한민국 산업계를 이끌어온 2세대 총수들 가운데 얼굴이다. 총수 1세대가 대한민국 경제근대화의 초석을 낳았다면 그가 주도한 2세대는 대한민국 경제를 세계화시켰다. 이 회장의 삶과 업적을 시리즈로 되돌아본다./편집자
먼저 어린 시절의 이건희부터 살펴본다. 이건희 회장은 세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 같진 않다. 이건희는 1942년 1월9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선친인 이병철은 대구 서문시장 근처에서 삼성상회를 경영하고 있었다. 삼성상회는 청과물과 건어물을 취급하는 무역회사로 이병철이 이제 막 사업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때였다. 당시 대구에는 이건희 위로도 6명이나 되는 자식들이 있었으므로 그의 어머니는 어린 이건희를 돌보기 어려웠다. 이건희의 어머니인 박두을 여사는 3남인 이건희를 낳은 후 젖을 떼자마자 그를 의령의 시어머니 댁으로 보낸다. 의령의 친가로 보내진 이건희는 갓난 아기때부터 친할머니집에서 친할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유모의 손에서 컸다. 유모에게는 이건희 또래의 딸이 있어 그 딸과 함께 오누이처럼 함께 자랐다.
/젊은 시절의 이병철 전 삼성회장과 아들 이건희 회장.
그가 엄마를 다시 본 것은 네살이 되어서였다.네살이 되어서 그는 대구의 어머니에게 보내졌던 것이다. 어머니를 처음 보았을 때 이건희는 좀 혼란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때까지 할머니를 어머니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머니에게 누구냐고 물어보기까지 할 정도였다. 또 형과 누나도 그때 처음 보았다. 누나들을 같은 형제인줄 모르고 ‘네 엄마는 누구냐’고 물을 정도였다.
그는 거기서 유치원을 다녔다. 어린 시절의 그는 예상 밖으로 풍족하게 지내지 못했다. 주로 까만 통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어쩌다 흰 고무신이 생기면 아낀다고 구석에 숨겨놓고 신을 정도였다. 먹고 살만 한 집안이었지만, 근검절약하는 가풍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집안은 증조모 때에 부를 쌓았다. 증조모가 한끼를 덜 먹고 베 한필을 더 짜는데 몰두했다. 안 먹고 안쓰는 것이 재산을 늘릴 수 있는 유일한 시대였다. 증조모 시절에 그렇게 악착같이 노력해서 4백석 지기의 부를 이루었다. 조부는 거기에 1백석을 더 늘려 5백석까지 만들었다. 그 5백석을 이병철의 형인 이병각이 3백석,동생인 이병철이 2백석씩 물려받았다. 대구 시절 그의 집안은 두평짜리 방3개, 세평짜리 방 한 개 등 4개의 방에 모두 열 대여섯식구가 살았다. 이병철 내외와 3남4녀, 그리고 일군들이 함께 살았던 것이다. 방4개에 열대여섯 식구가 살았으니 매우 비좁았다.
유치원 때 이건희가 소풍가는 날, 그의 어머니는 김 다섯장과 삶은 달걀 한개를 다른 형제들보다 더 넣어주었다. 그날이 이건희의 생일날이어서 특별 보너스로 더 준 것이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근검절약으로 재산을 모아온 집안이어서 허풍더풍 쓰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당시 이건희 위로는 이맹희, 이창희 두 형과 인희, 숙희, 순희, 덕희 등 네명이나 되는 누나가 있었다. 이병철은 그 당시 사업 때문에 몹시 바빴고 누나와 형들은 학업 때문에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 온 가족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것이 이건희가 중학교 3학년때였다고 한다. 그날 온가족이 처음으로 만난 것을 기념해서 가족사진을 찍었을 정도였다. 그는 초등학교를 여섯군데나 옮겨다녔다. <②편에 계속>
비싼 장난감들을 분해하고 조립하는 것을 즐기다
<①편에서 계속>
대구에서 사업을 하던 선친 이병철이 좀더 크게 사업을 하기 위해 1947년 5월 서울로 상경한다. 종로구 혜화동 163-25번지에 60평짜리 집을 사서 자리를 잡고 그 이듬해엔 서울의 종로2가에서 무역회사인 삼성물산공사를 차렸다. 이건희는 종로의 혜화국민학교에 다녔다. 혜화국민학교 2학년 때 6·25가 터졌다.
이병철은 6·25가 일어났을 때 미처 피난가지 못했다. 이병철 일가는 적 치하에서 3개월 동안 상당한 고생을 했다. 자본가여서 인공치하의 내무서에 수시로 불려갔고, 그가 타던 48년형 미국산 시보레 승용차는 징발되어 남로당 총책이었던 박헌영이 타고 다니기도 했다.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이병철 일가는 9월 28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자 마산으로 내려갔다.
이건희는 거기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마산에 살 땐 산에 가서 나무를 해오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대구로 전학을 했다. 대구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부친이 부산의 동광동으로 자리를 옮겨 고철수집업, 설탕과 비료 수입업 등을 했기 때문이다. 그도 부산으로 전학을 가게되었다. 부산에서는 두 번 전학을 했다.
/어린 시절의 이건희 회장.
“건희가 천장에 매달면 끈을 물고 빙빙 돌아가는 비행기, 레일 위를 달리는 모형기차 등 당시로서는 구경하기도 힘든 장난감을 가져와서 함께 놀던 생각은 나는데 말이 없고 장난도 잘 치지 않던 아이라 다른 기억은 거의 없다.”
부산사범부속 초등학교 시절, 4, 5학년을 같이 다녔던 권근술 전 한겨레 신문 사장의 기억이다. 아버지 이병철이 1950년대 피난지 부산에서도 사업에 성공했을 때이니까, 집안은 부유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게 있다. 그 비싼 장난감들은 그저 갖고 노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뜯어보고 다시 조립해보는 과학탐구의 대상이었다.
이것은 이건희 뿐만 아니고,그 위의 형들 즉 이맹희와 이창희가 모두 그랬다. 그들 3형제는 신기한 장난감이나 물건이 생기면 갖고 놀다가 결국은 분해해보고 다시 조립하는 것을 즐겼다. 이러한 취미는 줄곧 계속되어 그는 카메라를 뜯어보기도 하고, VTR, 훗날 심지어는 자동차까지 뜯었다가 조립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른다. 그의 형 이맹희도 60대에 이르는 나이까지 세계의 명품 AV시스템은 모조리 구입해서 왜 그 성능이 좋은 지 그 구조을 뜯어보고 살펴보는 걸 낙으로 삼을 정도였다.
이건희가 부회장이었던 1980년대초 삼성그룹은 삼성정밀을 설립했다. 삼성이 처음에 카메라 사업에 진출했을 때 그는 삼성정밀 사장을 불러 집에 카메라가 몇대 있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삼성정밀 사장이 카메라가 한 대밖에 없다고 대답하자 그는 카메라 회사의 사장이면 세계적인 카메라는 다 갖고있으면서 밤낮으로 연구해야한다고 권유한 적도 있었다. 이미 세계 일류 카메라의 구조에 대해 상당한 식견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의 이건희는 말은 별로 없고, 혼자서 골똘히 생각에 빠지거나 장난감을 뜯어보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이 점은 그의 부친인 이병철도 그랬다. 이병철 회장도 혼자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는 스타일의 경영인이었다.
“좀체 화를 내는 법도 없었고, 큰 소리와 욕설은 물론 보고 받을 때도 겉으로 좋다, 싫다는 표현을 하지 않았다. 평생동안 아버지가 큰소리를 내면서 웃는 모습을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병철의 장남인 이맹희가 쓴 <묻어둔 이야기>이라는 책에서 그린 아버지의 성격이다.이건희 회장은 수줍어하고,부끄러움을 타며 남 앞에 나서길 싫어하는 체질이다. 그의 이러한 성격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형성되어 온 것이라고 볼 수있다.
(2)-1,2 이건희가 평생 친구로서 마음을 준 대상
이건희는 부산사범부속 초등학교 5학년때인 1953년 일본의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선진국을 보고 배우라’는 아버지의 지시였다. 일본말도 배워야 했고, 공부도 해야했다. 친구도 없었고, 또 집으로 돌아와 봐야 아버지,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상당히 외로웠을 것이다.
<나면서부터 떨어져 사는 게 버릇이 돼서 성격이 내성적이 됐고, 친구도 없고 그러니까 혼자 생각을 많이 하게 됐고, 생각을 해도 아주 깊이 하게 됐다…. 가장 민감한 때에 민족차별, 분노, 외로움, 부모에 대한 그리움. 이 모든 걸 다 느꼈다.>
그가 한 인터뷰 중의 한 귀절이다. 중1때 그는 집에서 페키니스라는 개를 기르기 시작했다. 페키니스를 친구삼아 놀았고, 그후 지금까지 개는 그의 평생 친구로서 아이스크림을 같이 나누어 먹고, 한방에서 잠을 자며 때로는 직접 목욕도 시켜주고 빗질도 해줄 정도로 친한 대상이 되었다. 그가 개를 좋아하는 이유는 ‘거짓말 안하고 배신할 줄 모르는 충직함’ 때문이라고 훗날 술회한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개. /홍하상
이건희 회장은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도 알아주는 애견가에 속한다. 중학교를 다니면서 특기할만한 것 중의 하나는 그가 1200~1300편의 영화를 보았다는 것이다. 1200~1300편이면 그 무렵 일본에서 10년간 만들어진 영화 편수이다.
<영화를 감상할 때면 대개 주인공에게 치중해서 보게된다. 그런데 등장 인물 각자의 처지에서 보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사람의 인생까지 느끼게 된다. 거기에 감독, 카메라맨의 입장에서 두루 생각하면서 보면 또 다른 감동을 맛보게 된다.>
그가 권하는 영화 감상법이다. 그는 영화를 볼 때 주인공 뒤의 배경까지도 본다고 알려져있다. 이런 취향은 훗날 VTR을 만들 때 반영된다. VTR을 생산하기에 앞서 외국제품을 뜯어서 그 내부를 본다. 거기에 들어가 있는 부속 하나하나의 역할과 만든 회사까지도 모두 보게 만들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한국인 프로레슬러 역도산(力道山·1924-1963)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건희도 역도산에 매료되어 있었다. 이건희 어린 시절의 일본유학은 3년으로 끝난다. 중1을 마치고 귀국, 서울 사대부중에 편입한 것이다. 고교도 서울사대부고를 다녔다. 고교 때는 레슬링부에 들어간다. 역도산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레슬링은 2학년말까지 계속된다. 웰터급 선수로 운동을 했고, 전국대회에 나가서 입상을 하기도 했다.
그가 훗날 레슬링협회 회장이 된 것이나 비인기종목이었던 레슬링을 88서울올림픽 때는 금2, 은 2, 동5개라는 메달밭으로 가꾸게 된 것도 고교시절 그가 레슬링을 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런 스포츠맨십은 경영과 자주 접목된다. 93년 신경영을 주창할 당시, <심판이 없는 골프에서는 자율을, 야구에서는 팀워크를, 럭비에서는 투지를 배워야한다> 고 그는 설파했다. 그러면서 근대 5종 경기를 빗대 경영자의 5대 종목을 1.기술에 대한 지식, 2.경영에 대한 감각, 3.컴퓨터에 대한 관심, 4.제1외국어, 5.제2외국어라고 빗대어 설명하기도 했다. <②편에 계속>
일본 근로자들이 불량품을 만들지 않는 비결
<①편에서 계속>
일견 그는 사색적이고, 연구에만 몰두하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 그는 상당한 스포츠맨이며 그러한 자질들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길러진 것들이다. 서울 사대부고를 졸업한 이건희는 국내에서 대학 진학을 하지 않고 일본 와세다 대학으로 건너간다.
와세다 유학
그의 부친 이병철은 이건희에게 다시 ‘선진국을 배우라’고 권유한다. 이병철도 와세다 대학 상과 출신이다. 1961년의 일이다. 이건희는 와세다 경영학과로 진학했다. 학창 시절 책읽기를 좋아하는데다 일본 역사에 관심이 많아 거기서 많은 교훈을 얻었다고도 한다. 그는 와세다 대학 시절, 일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일본에서 프로레슬러로 당대를 풍미했던 역도산도 골프장에서 자주 만났고, 사기나 절도범 중에서 전과 20범같은 최고수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연구를 했다. 심지어는 1류 야쿠자들과도 퍼블릭 코스에서 같이 골프를 치며 1년간 놀아보기도 했다. 그가 그런 부류들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어느 분야에서나 톱(top)은 뭔가가 있기 때문에 연구해볼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나름대로의 결론도 내렸다.
‘1류란 자신이나 일에 대해 철저한 사람들이고, 인간미가 넘치며, 벌줄 때는 사정없이 벌 주고, 상을 줄 때는 깜짝 놀랄 정도로 준다는 것이다.’
/1970년대 중반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 암수술을 받은 뒤 처음으로 야외에 모인 가족들. 왼쪽부터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 이건희 삼성 회장, 고(故) 이병철 회장, 이명희 신세계 회장. /신세계 제공
그렇다면 한때 일본이 상품으로서 세계를 제패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는 <20분 정신>을 얘기한다. 일본사람들은 아침8시까지 출근하라고 하면 7시50분에 사무실에 도착해서 전화기나 팩스를 닦고 서류를 정돈하는데 비해 미국 사람들은 8시 5분에 사무실에 나타나며 한국 사람들은 8시 정각이나 플러스 마이너스 1분에 온다는 것이다. 또 퇴근 할 때도 일본사람들은 10분 늦게 퇴근하면서 그 10분 동안 기계를 닦고 정리정돈을 하고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 사람은 기계의 나사를 조이다가도 퇴근시간이 되면 멈추고 가버린다. 이것이 한국과 일본, 미국의 차이라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의 출퇴근 전후의 그 <20분 정신>이 결국은 불량을 없애주고 생산성을 높인다는 것이다. 그는 그 20분을 이렇게 계산해낸다. 삼성그룹은 18만명의 직원이 있다. 그 20분을 물리적으로 계산해보면 1년에 7000명을 고용한 효과가 난다는 것이다. 이걸 금액으로 따지면 89년 당시 1000억원이다. 이건희는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일본과 비지니스를 하면서 한국과 일본의 차이를 그렇게 보고 있었다.
(3)-①② 미국 유학시절에 차를 6번이나 바꿨던 이유
와세다 유학이 끝나자 이번엔 미국의 조지 워싱턴 경영대학원에서 경제학과 부전공으로 매스컴학을 공부한다. 미국 유학 시절, 그는 자동차에 빠졌다. 이건희가 자동차와 처음 친해진 것은 7살 때, 당시 아버지 이병철이 1948년형 미국산 시보레를 타고 다녔기 때문이다. 6·25동란 때 공산당이 징발해 박헌영이 탔다는 바로 그 차였다.
/2010년 이건희 삼성 회장이 일본 와세다 대학 명예박사 학위 수여식에 참석했다. /뉴시스
자동차 대국, 미국에서 그는 차를 여섯 번이나 바꿨다. 재벌집안의 막내 아들로서의 호사취미가 아니라 차의 구조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음 산차는 이집트 대사가 타던 차였다. 50마일도 타지 않은 새 차였다. 아랍전쟁이 터져 이집트 대사가 본국으로 귀환하면서 급하게 내놓은 차를 그가 사게 된 것이다. 새 차값이 6600달러였는데 그는 4200달러에 그 차를 샀다. 서너달 그 차를 타고 다니면서 차의 구조와 특성을 파악하곤 깨끗이 분해소재한 후 600달러를 남기고 팔았다. 이어 미국인이 1년도 안탄 증고차를 사서 타고 다니면서 구조를 들여다보고 다시 왁스를 먹이고 청소한 후 또 팔았다. 그런 식으로 1년반 동안 차를 여섯 번이나 바꿨다. 돈도 600~700달러쯤 벌었다.
그러는 사이 자동차의 구조에 관해 점점 전문가가 되어갔다. 그의 이런 엔지니어로서의 자질은 그 후 삼성이 중요기술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상당한 작용을 했다. 말하자면 반도체를 스택(위로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할 것인가, 트렌치(파고들어가는) 방식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단안을 내린 것도 그 자신이었고, 핸드폰의 크기, 단추의 위치 등에 대해서도 의견을 제시, 소위 <이건희 폰>을 만든 것도 그 자신이었다. 그는 또 방송사에서 송출된 화면이 TV수상기에 비춰질 때 화면 좌우에서 각각 8mm씩 잘려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개선을 지시, <숨겨인 1인치를 찾았다>는 광고문안으로 유명한 명품 플러스 원 TV를 탄생시켰다. 그는 경영자 시절, 세계적인 가전 회사들의 신제품이 나오면 곧바로 사서 뜯어보고, 다시 재조립한다.
이건희는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기계광이다. 그의 서가엔 경영학 서적보다 전자, 우주, 항공, 자동차, 엔진공학, 미래공학 등의 책이 더 많다. 훗날 67년부터 87년까지 선대 회장 밑에서 경영수업을 받을 때도 술자리를 좋아하지 않던 그는 퇴근 후에는 기계와 씨름했다. 전자제품이나 각종 기계를 분해해보고 다시 조립하면서 그 기능과 성능을 공부했다. 기술관련 서적도 숱하게 보았고, 그래도 잘 모를 경우엔 아예 일본기술자를 집으로 불러 직접 설명을 들었다. 그의 집을 다녀간 일본 기술자만도 수백명이었다. 그러한 노력 덕택에 그는 전자부품의 소소한 기능까지도 두루 꿰고 있다.
이건희의 미국 유학은 세계 최강국, 미국의 힘에 대한 탐구의 시간이었다. 미국이 강한 것은 ‘달걀을 품어 알을 까려는’ 에디슨과 같은 사람들이 원천기술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들은 에디슨처럼 지금까지 아무도 해보지 않은 일에 도전함으로써 인류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기술을 창조해낸다. 그것이 미국의 힘이다. 판을 새로 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미국은 상상력을 허용하는 사회이다. 반면에 일본은 원천기술을 응용한 생산기술의 대국이다. 일본과 미국에서의 유학 경험이 오늘날 삼성전자가 첨단과학으로 무장한 반도체, 휴대폰과 LED TV를 만들어 새로운 판을 짜고 자기 씨름판을 스스로 만든 원동력이 된다.<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자, 이제 이건희의 공부의 계절은 끝난다. 현업이 기다리고 있다. 68년 12월, 그는 비로소 공식적으로 첫 직장 중앙일보, 동양방송에 입사한다. 대학원에서 그의 부전공이 매스컴학이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직책은 동양방송, 중앙일보의 이사. 본격적으로 부친인 이병철 회장과 장인인 홍진기 동양매스컴 회장으로부터 경영수업을 받기 시작한다. 부친이 주재하는 모든 경영회의에 말석에 껴서 참석하고, 아버지의 골프 라운딩에도 따라 다니면서 부친과 라운딩하는 인사들이 나누는 대화를 경청한다. 이 실전 수업은 부친이 타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하나 특이한 것은 74년 그는 동양방송 이사의 자격으로 부친인 이병철 회장에게 반도체 산업에 진출할 것을 건의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병철 회장은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반도체 산업은 1개 라인을 건설하는데 1조5000억원(2000년 기준)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만큼 그에 대한 리스크가 워낙 크고, 공정과정이 500여과정이 될 정도로 복잡한데도 단 한군데도 불량이 없어야 하며, 1평방 미터 안에 현미경으로 보았을 때 한 개의 먼지도 존재하지 않는 초청정 기술이 필요한 사업이었다. 말하자면 반도체 사업은 삼성이 그때까지 해왔던 기존의 사업과는 그 개념부터 다른 사업이라고 이병철은 판단했던 것이다.
자신의 건의가 무산되자 그후 이건희 이사는 사재 4억원을 털어 부천의 한국반도체라는 작은 회사를 스스로 인수한다. 그후 불과 10년이 채 안된 83년에 삼성은 본격적으로 반도체 개발에 나서게 되고, 삼성의 반도체 산업은 한국을 먹여살리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는 업종으로 발전한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기공식에 참석한 이건희 삼성 회장(왼쪽에서 두번째). /조선일보 DB
삼성의 부회장이 되다
이건희가 삼성의 후계자로 공식거명된 것은 77년8월 이병철 회장이 <닛케이(日經) 비지니스>와 가진 인터뷰가 최초이다. 이병철 회장은 그 인터뷰에서 <3남 승계>를 최초로 밝히고 공론(公論)화했다. 이로써 삼성의 후계자가 3남 이건희 임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본격적인 차기 계승자 수업이 시작된 것이다. 78년, 그가 삼성의 부회장이 되어 첫 출근하던 날, 이병철 회장은 그를 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붓을 들어 직접 경청(傾聽)이라는 휘호를 해주었다.
경청. 즉 남의 말을 잘 듣는 것이야말로 대기업을 이끄는 총수로서의 금과옥조임을 강조한 것이다. <경청>이라는 부친의 가르침때문인지 이건희는 사장단 회의 때나 보고를 받을 때 대부분 듣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주로 듣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지금도 그의 좌우명 중의 하나가 <좋은 경청자가 되자>이다. 하지만 한 번 말을 시작하면 3-4시간은 기본이고, 10시간을 얘기할 때도 있다. 단 그가 말을 꺼냈을 때는 철저한 사전 검증을 거친 경우이다. 비서들이나 구조조정본부 등에 조사를 시키고 그 보고서를 검토한 후 다시 그 자신이 직접 각계의 전문가를 만나 의견을 들은 후 지시를 내리기 전에 스스로에게 최소한 여섯 번 이상 ‘왜?’냐고 묻는다. 그의 여섯 번의 <why>는 ‘왜 그 사업을, 왜 그 곳에서, 왜 그 시기에, 왜 그사람으로 하여금, 왜 그만한 돈을 들이고, 어떤 목적으로 하느냐’ 하는 것 등을 생각한다고 볼 수 있다.
이건희는 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조사시키고 분석한 후 자신이 답을 스스로 찾고나서 열번 정도 더 생각한 후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 한다. 그만큼 철저한 검증을 거친다는 말이다. 그는 돌다리도 두드리면서 걷는다는 그의 선친보다도 한술 더 뜬다. 이런 그의 사전검증은 이병철 회장 밑에서 경영수업을 받으면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건희는 78년부터 이병철 회장이 서거한 87년까지 햇수로 약 10년간 그러한 경영수업을 받았다.
(4) 이병철과 이건희의 같은점과 다른점
1987년 11월19일, 이병철 회장이 7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1938년 대구에서 과일과 건어물을 취급하는 삼성상회로 출발해서 1987년 작고할 때까지 37개 기업을 거느린 삼성그룹을 50년 가깝게 경영해온 경영의 달인이 세상을 뜬 것이다. 그가 50년간 기업경영 일선에서 얻은 교훈은 남의 말을 잘 듣는 경청과 목계였다. 이병철은 자본금 3만원으로 시작했다. 창업 49년후인 1987년 삼성그룹은 자본금 6310억원에 수출은 11억2500만불, 총매출액은 17조4000억원이었다. 경상이익 2668억원에 종업원 16만 596명으로 키운 삼성그룹의 바톤을 이병철은 이건희에게 넘겼다.
이건희는 이병철 스쿨의 수제자이다. 이병철은 살아 생전에 한국을 대표하는 수많은 기업인들을 길렀다. 그는 ‘인재제일’이라는 그의 기업관에 의해서 20-30년간에 걸쳐서 인재를 길렀고, 그들을 활용했다. 이병철과 이건희는 공통점도 있지만, 다른점도 많았다.
/이병철 삼성 설립자. /조선일보 DB
우선 공통점. 이병철 회장은 한 번 연구해야할 사안이라고 생각하면 아예 끝장을 낼 정도로 지독한 편집증이 있었다.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기전 그는 반도체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의 연구는 조직적이고 치밀했다. 연구해야할 사안이 발생하면 우선 관련서적을 최대한 수집해서 꼼꼼하게 읽어본다. 이어 해당 사안에 대해 정통하고 나름대로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 기자나 교수들을 식사에 초대하여 얘기를 나눈다. 그것도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한사람 한사람 따로 만나서 연구사안에 대한 사정을 소상히 파악했다. 그후 해당분야 사업가를 만나 실제 사정을 들은 후 나름대로 사업구상을 하고나서 구체적인 검토 내용을 비서실에 지시했다. 그는 입안(立案)에서부터 실시까지 그 과정을 지시하고 점검했으며,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에버랜드를 만들 때도 세계 일류의 테마파크를 모조리 조사시켜서 그걸 검토해본 후 구체적으로 지시했다. 제일모직이 와이셔츠를 만들 때도 전세계 명품 와이셔츠를 150장이나 구해서 매일 하나씩 입어본 사람이 이병철이었다. 이병철이 진출한 모든 신규사업은 철저한 검토와 검증 끝에 이루진 것들이었다. 이건희도 연구라면 부친과 막상막하이다. 그도 취미가 연구인 사람이다. 자동차, VTR, 핸드폰 등 기계 뜯어보기에서부터 금융실명제 연구 등 기업경영과 기술에 대한 연구는 말할 것도 없고, 개 기르기, 골프장 조성, 자동차 수집, 승마, 비단잉어, 히노키(檜)나무, 일본역사 등 연구범위가 다양하다. 그것도 아마추어 수준이 아니라 모두 끝장을 보는 타입이다.
이병철, 이건희 두사람 모두 어떤 사안에 대해서 대충대충 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그러나 이병철과 이건희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그 결정적인 차이는 인재제일과 품질제일이다. 이병철은 기업도 사람이 하는 것이므로 인재를 제일로 쳤다. 그러나 이건희는 인재보다는 품질을 제일로 친다. 인재도 결국은 좋은 품질을 만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또 이병철 회장이 카리스마가 강하고, 정확하며, 현실을 중시하는 스타일인데 비해 이건희는 사고가 유연하며, 융통성이 있고 미래지향적이다.
87년12월1일, 호암 아트홀에선 삼성그룹 신임회장의 취임식이 있었다. 관객석을 1천3백여 삼성의 임직원들이 가득 메웠고, 신임 회장인 이건희는 복도중앙을 걸어나가 단상에 올랐다. 이병철 회장이 타계한지 20일이 갓 지났을 때였다. 이건희는 사장단의 추대형식으로 삼성그룹의 승계를 인정받았다. 단상에 신현확 삼성물산 회장과 그룹 사장단 전원이 배석한 가운데, 이건희는 거기서 입사 최고참인 삼성중공업의 최관식 사장으로부터 삼성그룹의 사기(社旗)를 물려받음으로써 경영의 대권을 쥐었다. 부친을 여윈지 며칠되지 않아서 취임사를 읽는 그의 목소리는 매우 떨렸고, 때로 울먹이기까지 했다. 분위기는 매우 가라앉아 있었으며 숙연하기 까지 했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46세. 젊은 총수의 취임이었다. 취임식이 끝나고 사장단과의 식사가 있은 후 이건희와 사장단은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108-1의 고 이병철 회장의 자택으로 가서 고인의 상청 앞에서 명복을 빌었다. 그후 1년2개월간 시간이 날 때마다 국내 재계의 선배들은 물론 미국 제네럴 일랙트릭의 잭 웰치 회장 등 전세계의 대기업 회장들에게 인사를 다녔다. 바쁘게 87년 12월 한달이 지나고, 88년이 되었다. 88년은 그가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 삼성이란 대그룹을 직접 경영해본 첫 해이다.
또 1988년은 삼성의 창립 50주년이 되던 해였다. 그해 3월 이건희는 <제2의 창업>을 선언한다. 그는 제2의 창업으로 신규사업 추진과 사업구조를 재편하겠다고 발표했다. 신규사업 추진이란 우주항구, 월면기지, 화성기지 건설 등을 현실화하기 위한 우주항공 산업으로의 진출과 유전공학, 고분자 화학 등의 진출을 말한다. 사업구조 개편은 그때까지 분리되어 있던 전자와 반도체, 통신을 하나로 합병하는 것이다. 경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나름대로의 판단이었다. 바로 이때의 구조 개편이 오늘날 삼성전자가 세계적인 가전, 반도체, 정보통신 메이커로서 자리잡게 된 시초라고 볼 수있다. 그러나 이건희 체제 하의 삼성의 구조개편은 생각만큼 쉬운 것은 아니었다. 우선 벽이 두터웠다.
/총수를 물려받은 시절의 이건희 회장. /조선일보 DB
“회장으로 취임한 이듬해 제2창업을 선언하고 변화와 개혁을 강조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50년 동안 굳어진 체질이 너무도 단단했다. 내가 제일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1992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나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삼성 전체가 사그라질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체중이 10Kg 이상 줄었다.”
당시 그의 고백 중의 하나이다. 그가 여기서 얘기한 <굳어진 체질>은 무엇이고, 그는 무엇 때문에 당시 한국 제일의 기업 삼성이 ‘사그러질 것같은’ 위기감을 느꼈던 것일까. 당시 삼성은 선대의 이병철 회장이 거의 50년간에 걸쳐 경영해오면서 나름대로 한국 최고의 기업이라는 성취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 취임한 이건희의 눈으로 볼 때 삼성은 국내에서 최고라는 안일함에 빠져 자만감에 도취해있던 기업이었다.
이병철 회장의 시대에는 모든 지시가 회장실로부터 내려왔고, 그걸 각 계열사가 실천하는 전형적인 상의하달식의 경영이었다. 또 사장단에 대한 문책도 이병철 회장 자신이 직접 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작고한 이병철 회장은 대단한 메모광이었다. 그의 메모 수첩에는 그날 해야할 일, 어제까지 미결된 일, 알아보아야 할 사항, 재확인 해야 할 사항, 점심식사를 같이 해야 할 사람, 전화해야 할 곳, 방문할 곳, 구입할 물건, 상을 줄 사람, 벌을 줄 사람, 구입해야 할 책의 제목, TV와 신문에서 본 자료 요약 등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그는 사람과의 면담시간을 사전에 정해놓고 꼭 그 시간만큼만 면담을 했다. 스위스 시계보다 더 정확하게 평생을 산 기업가가 이병철이었다. 돌다리도 두드려서 건너는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는> 스타일이었던 그는 자신의 경영을 돕기위한 분신으로 비서실이라는 대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삼성의 비서실은 80-90년대 한국 최강의 정보분석조직이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일도 잘했지만, 그만큼 권한도 강했다. 그러나 이건희는 그룹 비서실의 개혁없이는 삼성의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그 비서실의 책임자는 소병해였다. 소병해는 이건희와 동갑으로 이병철 회장 시대에 그를 12년간이나 보필해온 최고의 가신.
이건희는 3년 탈상 시점인 90년12월 소병해 비서실장을 삼성생명 부회장으로 전격적으로 전출시키고, 신임 비서실장에 사대부고 4년 선배이자 제일제당, 제일합섬, 삼성생명의 사장을 지낸 이수빈씨를 기용한다. 이른바 친정체제의 구축을 시작한 것이다.
(5)-(1)(2) 마쓰시타의 VTR 제품을 사서 분해해 본 뒤 깜짝 놀라다
이건희의 개혁의 초점은 비서실의 기능이 회장의 상의 하달과 관리에 치중해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삼성을 병들게 했으므로 그걸 개혁하자는 것. 당시 삼성의 주력기업이었던 제일제당이나 제일모직 등에서는 전년보다 물건을 얼마나 더 많이 생산해서 판매했는가가 주관심이었다. 당시는 설탕이나 양복지 등이 만들면 팔리던 시절이었으므로, 양으로서 모든 것이 결정되고 있었다.
물건의 질보다는 양 위주의 물량적 사고방식이 팽배해있다는 것도 삼성 조직의 문제점으로 파악되었다. 계수가 늘어나는 것은 뭐든지 좋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고가 50년간 삼성을 암암리에 지배해오고 있었다. 88년에 회장에 취임하면서 <제2의 창업>을 선언했지만, <제2의 창업>이 문제가 아니라 당시의 삼성은 근본적으로 고쳐야 할 문제점을 수도 없이 안고 있었던 것이다.
/젊은 시절의 이건희 회장. /조선일보 DB
이런 일도 있었다. 91년 미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이건희 회장은 일본의 마쓰시다사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마쓰시다의 VTR 생산라인을 둘러본 후 이건희 회장은 마쓰시다의 VTR신제품을 하나 구해서 그걸 분해보았다. 분해해본 결과 마쓰시다 즉 내셔날의 VTR제품은 화질, 선명도 및 화면 해상도, 스타트 시간 등이 삼성전자의 제품보다 월등히 우수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품질은 우수한데 부품수는 오히려 삼성제품보다 30%가 적다는 것이었다.
이 회장은 그 즉시 이수빈 그룹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한일간의 기술격차가 이렇게 큰 상황에서 향후 유통시장 개방시 소니, 마쓰시다 제품이 상륙할 경우 그에 대한 대응책이 마련되어 있는가를 물었다. 비서실 입장에선 별다른 대응책이 없었다. 이건희는 ‘지난 81년부터 내가 계열사 및 비서실에 지시한 내용을 모두 취합하고 그 지시사항들이 지금까지 어떻게 이행되었는지 각사별로 종합해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그룹 비서실에서 파악한 81년 이후의 지시사항은 무려 284페이지나 되었다. 그 과정에서 지시사항이 이행되지 않고 상당부분 실종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실망이 컸다. 91년 12월 5일의 사장단 회의에서는 이런 내용도 나왔다.
‘기술을 강조했더니 효율은 무시한 채 사람 머릿수와 연구개발비를 무턱대고 늘리고 개발과제도 지나치게 방만하게 펼쳐 외형적이고 전시적인 기술중시에 치우치고 있다.’
이건희 회장 자신이 엔지니어 이상으로 기술을 잘 알다보니 지시사항은 쌓이고 기술부서에서는 그 지시사항을 이행하느라 태스크 포스팀을 자꾸 신설하게 되고, 그럴 듯하게 겉포장만 흉내내는 일들이 빈발해지자 사장단을 질책한 것이다. 연구원 수는 많이 늘어났는데도 막상 진행되는 일은 별로 없고, 새로 만든 기술도 실용성이 떨어지는 것들이었다. 그러다보니 비용부담만 늘어나고, 회사 자체의 수익구조가 나빠지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90년도에는 2500억원의 순익을 기록했던 삼성이 91년도에는 매출은 늘어나는데도 순익은 감소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90년, 91년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건희가 회장으로 취임한 88년 이후 계속 반복되어 오고있는 현상이었다.<②편에 계속>
"삼성전자는 암 2기, 삼성종합화학은 선천성 불구기형..."
<①편에서 계속>
게다가 사원들의 의식구조도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시대는 국제화로 가고 있는데, 사원들의 의식은 아직도 국내시장 1등에 만족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예컨대 사원을 해외에 파견할 때도 유능한 사원을 시장잠재력이 큰 후진국에 파견해야 하는데 실제로 유능한 사원은 이미 시장의 기반이 다 잡힌 선진국으로 파견되고, 후진국에는 오히려 실력이 떨어지는 사원이 파견되는 등 인사의 난맥상도 있었다. <제2창업> 시기 5년간 이건희의 눈에 비친 삼성은 생각보다 상당히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병철은 <집권조직>의 상징이었으나, 세상은 <분권조직>의 시대로 가고 있었다.
미국은 이미 1920년대에 그것이 이루어졌고, 일본은 70년대에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1980년대 후반, 세상은 컴퓨터의 급속보급으로 획기적으로 바뀌고 있는데 한국의 기업문화는 철저한 톱다운 방식, 즉 집권조직의 시대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11명이 뛰는 축구에서 전원이 다 잘 뛰어야 게임을 이길 수 있는데, 감독만 혼자서 잘 뛰었던 것이다. 이것이 당시 삼성의 문제점이었다.
/삼성전자 임원들에게 지시하는 이건희 회장. /조선일보 DB
인재 중시에서 품질 중시
93년1월부터 삼성은 <바꾸자 경영>을 선언한다. 93년 1월 한달동안 그는 <바꾸자 경영>을 위한 자신의 생각을 신년사를 비롯한 사장단 회의 등에서 쏟아냈다. 그해 1월4일에 있었던 신년사의 내용. 그를 위해 이건희 회장은 ‘일석오조의 경영정신으로 21세기에 꼭 해야될 사업과 안해도 될 사업을 구분해서 사업구조를 정비하고 자립경영의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고 밝혔다.
87년에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한 후 5년이 걸려 삼성의 진면목을 이렇게 표현했다.
<삼성전자는 암2기. 삼성중공업은 영양실조. 건설은 영양실조에 당뇨병, 종합화학은 선천성 불구기형으로 타고 날때부터 잘못 태어난 회사. 물산은 전자와 종합화학을 합쳐서 나눈 정도의 병>
그가 파격적인 수사를 구사하면서 본 삼성계열사들은 거의 대부분이 모두 중병에 걸려있는 셈이다. 그 중병을 고치기 위해 그가 선언한 것이 제 2의 창업이다. 그런만큼 93년의 이건희 회장은 아주 바빴다. 해외 출장만 68일.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다. <마누라와 자식빼고는 다 바꾸자>, 파격적인 수사의 <신경영선언>이다. 그 신경영의 핵심 어휘는 <나부터 변하자>였다. 이른바 <바꾸자 경영>이라 불리우는 신경영의 선언은 93년 6월 7일 프랑크푸르트의 캠핀스키 호텔에서 있었다.
이미 그는 그해 2월부터 세계 대도시를 순회하면서 해외지사 사원들을 대상으로 직접 강의에 나섰다. 2월에 로스엔젤레스 회의, 3월에 도쿄회의, 오사카 회의, 그리고 프랑크푸르트에서 두번의 회의가 있었다. 회의 중간중간에 세계에 산재해있는 삼성지사를 68일간 돌면서 1800명의 임직원을 상대로 직접 강연을 했다. 그중에 캠핀스키 호텔에서 발언해서 일약 주목을 받았던 것이 바로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다. 캠핀스키 호텔은 세계의 대도시에 체인을 가지고 있는 최고의 현대식 호텔. 거기서 그는 삼성의 임직원 60명을 대상으로 강연했다.
(6)-①② 이건희의 프랑크푸르트 선언
삼성의 운명을 바꾼 이건희의 프랑크푸르트 선언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선언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강연이었다. 부문 직급별로 4회에 걸쳐 모두 100여명의 임직원을 대상으로 93년 6월 13일부터 14일까지 실시한 강연이 프랑크푸르트선언이라고 불리운다. 첫강연은 93년6월13일 프랑크푸르트 에쉬본의 삼성유럽총본부에서부터 시작해 캠핀스키 호텔에서 끝이 난다. 캠핀스키 호텔은 시내 중심에서 2킬로쯤 떨어진 최고급호텔로 마치 전원형 펜션과 같은 분위기이다. 거기서 그는 삼성의 임직원 60여명을 대상으로 강연했다. 다음은 강연요지.
<삼성그룹은 15만명이다. 15만명의 가족이 제각각 움직이면 배는 제자리에서 뱅뱅 돌게 되지만, 한방향으로 나아가면 속도는 15만배 빨라진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은 뱅뱅 도는 상황이다. 삼성가족들은 누구나 나름대로 고민하고 고생하지만, 저마다 다 제각각이다보니 악순환이 거듭되고 모두 손해를 본다. 세계에서 일류가 되면 이익이 3-5배까지 늘어난다는 것은 반도체 메모리 분야에서 이미 입증됐다. 전자는 40만평에서 3만4000명이 일하지만 이익은 겨우 400억-5000억원에 불과하다. 반면 반도체는 겨우 10만평에서 1만명이 5000억-6000억원의 순익을 내고 있다. 삼성그룹이 대대적인 변신을 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건희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에서 200여명의 임직원들에게 품질경영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프랑크푸르트 강연은 최하 여덟시간이었다. 때로 사장단을 대상으로 한 강의와 질의는 무려 14시간이었다. 그는 거기서 담배를 피우면서 물수건에 손을 닦으면서 어눌하지만 확신에 찬 어조로 강연했다. 삼성그룹은 이 강연내용을 전국사업장에 방영했다. 삼성의 임직원은 누구라도 다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헌데 그 강연내용이 상당히 센세이셔널해서 일간신문은 물론 KBS-TV에까지 방영됐고, 이 내용은 한국의 기업문화를 바꾸는 일대 전환점이 된다.
LA에서부터 출발한 회의는 동경과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대장정이 끝났다. 이른바 신경영 대장정이라 불렀던 이건희의 강연은 68일간 계속되었는데 350시간 강의에 1800명의 임직원이 참석했고, 토론시간만도 800시간이나 되었다. 새벽4시까지 강의가 계속되기도 했다. 참석자 전원은 햄버거로 식사를 때우고, 화장실 갈 시간조차 없었다. 그만큼 사안이 심각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평소에 말이 없고, 조용조용하게 일을 처리해오던 이건희는 이때 삼성의 위상에 대한 솔직한 진단, 경영진에 대한 질타, 자신의 경영에 대한 구상 등을 사원들 앞에서 직접 설파했다. 신경영 대장정 후 삼성의 수뇌부는 신경영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수립에 들어갔다. 그 최종 결론은 ‘배우자’ 였다. 즉 벤치마킹을 통해 삼성의 취약점을 보강하자는 것이었다. 벤치마킹은 삼성의 장점이다.
‘100년전 신사유람단을 해외에 파견했던 심정으로 국내용 관리자를 조속히 해외에 보내 글러벌 전략가를 육성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기업의 기본적 책무이다.’
그렇게 설파했다. 신경영 대장정 이후 삼성이 벤치마킹 대상기업으로 확정한 기업은 다음과 같다.
전자부문-일본의 소니 및 마쓰시다
중공업-일본의 미쓰비시
섬유-일본의 도레이
재고 관리부문-미국의 웨스팅 하우스, 애플 컴퓨터, 페더럴 익스프레스
고객서비스-제록스, 노드스트롬
생산 작업관리-휴렛팩커드, 필립모리스
마케팅-마이크로소프트, 헬렌 커티스, 더 리미티드
신제품 개발-모토로라, 소니, 3M
구매 및 조달-혼다, 제록스, NCR
품질 관리-웨스팅 하우스, 제록스
판매 관리-IBM, P&G
물류-허시, 메리케이코스메틱
당시만 해도 소니, 마쓰시다(파나소닉), 미쓰비시 중공업이나 미국의 가전회사들은 모두 삼성보다 앞서 있었을 때였다. 위의 기업들에 대한 철저한 벤치마킹이 이루어진다.<②편에 계속>
삼성그룹을 발칵 뒤집어 놓은 세탁기 몰카 사건
<①편에서 계속>
불면의 계절
이 무렵, 삼성 내부에서는 이상한 사건들이 많이 발생했다. 한쪽에서는 기술과 경영의 진보를 위해 그룹차원에서 벤치마킹을 하고 있는데 내부적에서는 여전히 과거와 같은 구시대적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건들이 터진 것이다. 그 중 대표적인 사건은 아래와 같은 것이다.
당시 삼성그룹에는 몰래카메라라는 것이 있었다. 한때 공중파 TV에서 몰래카메라라는 것을 많이 했지만, 삼성그룹은 이미 지난 83년부터 몰래카메라로 촬영한 장면들을 그룹내 방송인 SBC를 통해 방송해왔다. 93년 6월의 어느날, 몰래카메라는 삼성전자의 세탁기 생산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거기 담긴 장면은 세탁기 생산라인이었는데, 납품된 세탁기 뚜껑 여닫이 부분의 플라스틱 부품이 규격이 맞지 않자, 현장에서 칼로 2밀리를 깍아내서 조립하는 장면이었다. 주문은 밀려오고 생산대수는 맞추어야 하는데, 납품된 부품의 규격이 맞지않자 고육지책으로 임시변통으로 깍아서 넣고 있었던 것이다.
/삼성전자 냉장고 생산 라인. /삼성전자 제공
제대로 하려면 아예 뚜껑부문의 플라스틱을 새로 설계해서 금형을 뜬 후 다시 생산을 해야 하지만 그럴만한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 생산직 사원들은 플라스틱 부품을 깍아 조립하면서도 거기에 대해 어떤 거리낌도 없었다. 깍아서 넣어도 물건을 쓰는데는 지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불감증이었다. 이 장면이 그룹방송인 SBC를 통해 방송되자, 관계자들은 물론 회사의 경영진까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국에서 물건을 제일 잘 만든다는 삼성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이 테이프는 당시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 선언을 하고있던 이건희 회장에게 공수되었다.
<3만명이 만들고 6000명이 불량품을 수리하는 회사가 무슨 경쟁력이 있는가.>
이건희 회장이 당시 ‘세탁기 몰카’를 보고 던진 말이다. 6월19일 프랑크푸르트 현지에서 그는 세탁기 생산라인의 가동을 중단시켰다. 본래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은 그 골자가 국제화와 복합화였다. 그러나 몰카를 지켜본 이건희 회장은 국제화, 복합화보다 우선 품질개선이 더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품질경영’이었다. 삼성전자의 세탁기 생산 라인을 비롯한 가전제품 139개 생산라인에 라인 스톱제가 도입되었다. 불량이 발생하면 즉시 라인을 세워 문제가 완전해결될 때까지 가동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세탁기 생산라인에서는 261개 항에 달하는 설계입력 자료를 처음부터 다시 검토했다. 또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일류 세탁기 제품의 세탁방식도 다시 비교연구되었다. 세탁기 몰카 사건으로 삼성은 양적 성장을 중단하고 품질로 거듭날 때까지 새로운 노력을 경주하겠다고 선언한다
(7)-(1)(2) 자기 집 팩스를 직원과 대리점 운영자에게 개방하다
자기 집 팩스를 직원과 대리점 운영자에게 개방하다
라인스톱제
LA, 동경, 프랑크푸르트 현장경영과 몰래카메라 사건 이후 삼성에는 근본적인 몇가지 변화가 생겨났다. 삼성은 계열사 사장단 명의로 “모든 제품의 불량수준률을 일본 수준으로 낮춰 세계 최고의 품질 수준 달성을 위한 질 우선 경영에 주력할 것”을 선언하고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발표했다. 이 내용은 당시 김광호 삼성전자 사장을 비롯한 정보컴퓨터본부 서재설, 안광수 전무와 수원공장 이종률 상무, 해외운영실 박찬호, 김홍수 이사 등 각 사업본부 실무 임직원 50여명이 이건희 회장과 함께 논의한 내용이다.
이 논의와 더불어 삼성전자는 그 해 6월 19일부터 21일까지 3일 동안 수원공장 세탁기 생산라인을 세우고 불량률을 조사했으며 이어서 컬러TV, VTR, 캠코더, 전자렌지 등 모든 품목을 대상으로 불량률 조사에 들어갔다. 그 결과 컬러TV와 VTR이 불량을 내면서도 250억원 이상의 흑자를 냈다. 그렇다면 불량률을 더 낮추면 이익이 더 많이 날게 뻔하므로 품질을 일본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려 이익을 극대화시키는 쪽으로 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삼성전자 생산라인. /조선일보 DB
이를 위해 품질수준에 문제가 있으면 생산출하판매를 중단하고 품질개선 후 다시 생산라인을 가동시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러한 목표를 실천하기 위한 벙법으로 도입된 것이 라인스톱제. 라인스톱제란 생산공정에서 문제점이 발견되면 그 즉시 라인을 세우고 잘못 만들어진 제품을 폐기하며 불량요인을 제거하고 나서 다시 가동하는 생산관리 방식이었다.
요즘에는 이미 새로울 것이 없는 방식이지만, 당시의 이 방식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본래 이 방식은 일본의 토요타 자동차가 도입해서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삼성에서도 라인스톱제를 도입하게 된 건 완벽한 품질의 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소위 질경영, 즉 품질로서 승부를 걸겠다는 생각때문이었다. 과거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생산라인은 세우지 않는다>는 것이 생산현장의 불문율이었는데 그게 깨진 것이다. 삼성전자가 혁신적인 불량방지 시스템을 도입할 경우, 제로성장, 또는 전례없는 매출감소도 우려되었으나 문제가 발생하면 그 즉시 생산라인을 세우고 며칠이 걸리더라도 결함을 근본적으로 고치는 것 쪽으로 방식을 바꾸었다. 사무실 관리자들은 책상에 앉아서 숫자놀음을 하고 있던 시스템에서 직접 생산현장에 나가 문제점을 파악하고, 심지어는 6개월간 생산라인에 관한 교육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삼성이라는 대조직의 문제점이 개선되는 것은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또 사원의 아이디어가 중간 간부에 의해서 차단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 회장은 자신의 집에 있는 팩시밀리도 개방해버렸다. 에프터서비스를 개선하기 위해서 대리점 사장들에게도 팩스를 개방했다. 이 회장에게 직접보고하는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회사를 개혁하기 위한 이건희의 특단의 조치였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삼성이라는 대조직이 쉽게 바뀌지는 않았다.<②편에 계속>
'실패=문책'에서 '실패=자산'으로 인식 대전환
이건희는 오랜동안 국내 1등이라는 자만심에 도취해 있는 삼성 직원들의 정신을 깨우기 위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구상인 질경영에 대해 관심을 촉구했다. 8월 6일에는 비서실 임직원 1백30여명과 간담회를 갖고, “가장 좋은 물건을 가장 싸게 만드는 것이 일류기업”이라며 “선진국은 다품종, 소량, 다양화, 고기능으로 가는데 우리는 아직 양으로 채우려 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변화는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삼성중공업은 다섯가지의 질경영 실천방안을 확정해서 시행에 들어갔다.
그 실천방안이란
1. 주간 실패 사례 발표회
2. 3단계 협의 결제
3. 주일 일기 학습
4. 바로 소리 듣기
5. 부서간 벽 허물기
등이다
/삼성 SDI의 생산라인. /조선일보 DB
‘실패 사례 발표회’란 실패도 공개되고 축적되면 큰 자산이라는 인식하에 기계, 조선, 중장비 건설 등 사업본부별로 주 1회에서 월 1회까지 실패한 내용을 담당자들이 공개하는 것. 그전까지 삼성그룹 내에서는 ‘실패는 곧 문책’이라는 인식이 사원들간에 부지불식간에 퍼져 있었는데 실패를 스스로 공개하는 것 자체가 이미 큰 변화였다. 3단계 협의 결제란 기안에서 최종 결제에 이르기까지 평균 9개, 협의부서 포함하면 무려 12개의 사인을 받아야 했으나 그것을 입안, 심사, 결정의 3단계 구조로 축소한 것이다.
즉 기안 담당자와 과장이 입안하고 부장, 이사, 본부장이 동시 협의로 심사하여 대표이사가 최종 결정하는 3단계 의사 결정과정으로 압축. 그간의 비효율을 대폭 줄이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질 위주 경영이 삼성 계열사 간에 확산되자 삼성 협력업체들 또한 변신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부품 불량률을 줄이고 납기를 반드시 지켜야 삼성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는 사안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삼성의 협력업체들은 스스로 품질혁신 운동을 벌였고 작업현장의 문제점을 면밀히 파악해 개선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철저한 사전 품질 관리를 실시해서 불량부품을 골라내 반품하기도 했다. 그 결과 VTR의 경우 라인스톱제 실시 1년 후에는 불량율이 11.0%에서 7.0%로 낮아졌다.
(8)-(1)(2) 파격적 실험 '7.4제'를 도입한 진짜 이유
이건희는 삼성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한 대수술을 단행한다. 바로 그중의 하나가 소위 <7.4제>였다. 오전 7시에 출근해서 오후 4시에 퇴근하는 시스템이다. 과거에 대부분의 한국기업들이 오전 9시에 출근해서 오후 6시나 7시쯤 퇴근하던 시스템을 두 시간 앞당긴 것이다. 그러나 <7.4제>의 의미는 출퇴근 시간을 두시간 앞당기는 데 있진 않았다. 그때까지 오전 9시 출근 오후 6시 퇴근하는 시스템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여기에 대해 한 번도 검토해보지 않았다. 이 룰을 깬 것이 삼성의 이건희다.
삼성의 7.4제 도입은 한국의 기업문화는 물론 세계의 기업사회에서도 보기 드문 파격이다. 한마디로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당시 이건희가 이런 시스템을 도입했던 저의는 무엇이었을까. 첫째는 업무효율과 강도를 높이고 임직원들이 퇴근 시간후 건강관리, 어학연수, 동호회 활동 등 자기 개발에 힘쓰도록 하며 러시아워를 피해 출퇴근해 소요되는 시간을 크게 줄이는 효과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외의 목적은 고정관념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는 하나의 사례제시였던 것이다. 7.4제 도입은 초기엔 상당한 반발이 있었다. 본래 삼성의 근무 시간은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5시너머까지였다. 그것을 한시간 30분 앞당겨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까지 조정하라는 것이 이건희 회장의 지시였다. 그러나 실제 시행이 되자 오전 7시 출근에 오후 5시 너머까지 근무하는 계열사들이 많았다.
즉 벌건 대낮에 사원들을 퇴근시키는 것이 당시 한국인의 정서에 맞지 않고 봉급에는 이미 한시간의 야근 수당이 포함돼 있으므로 5시 너머까지 근무를 고집했던 계열사들이 있었던 것. 이를 안 이건희 회장은 진노했다. 7.4제 도입을 통한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계열사 사장들이 임의로 지시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오후 4시에 퇴근하면 어학연수나 자기 개발을 위한 취미생활이 가능했지만 오후 5시에 퇴근할 경우엔 그것이 무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건희 회장의 강력한 지시로 오후 5시 너머 퇴근은 오후 4시 퇴근으로 다시 당겨졌다. 이것이 오랫동안 관리에 물들여 있던 삼성의 관행이었다. 그룹은 조기출퇴근제가 실제로 어떤 효과가 있는지 조사해보았다. 조기출퇴근제 이후 임원들이 시간을 가장 많이 쓴 것은 현장방문. 하루 1시간 32분(21.7%)으로 가장 많이 쓰였고, 서류 및 자료 검토시간이 1시간 13분(15.5%), 혼자서 업무를 처리하는 시간이 1시간9분(14.4%), 회의참석이 1시간8분(14.1%)였다. 이는 세계적인 컨설팅 업체인 미국의 매킨지사가 제시한 ‘이상적인 시간배분’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일반직원들의 시간관리에는 상당한 문제점이 있었다. 이어 이건희는 더욱 파격적인 수사를 구사한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자.’ 그것은 우리가 관행적으로 해왔던 일에 대해 한 번 다 바꿔보자는 의식개혁의 촉구였다. 다 바꾸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자신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그는 선언했다. 그것이 바로 ‘나부터 변하자’였다.<②편에 계속>
임직원들을 사무실에서 현장으로 내보내다
<①편에서 계속>
‘나부터 변하자’는 사내에 상당한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처음엔 힘들게만 느껴졌던 조기출퇴근제도 막상 해본 사원들은 거기에 익숙해졌고, 러시아워 시간이 아닌 한가한 시간에 출퇴근하면서 그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조기출퇴근제가 사원들에게 가져온 무형의 자산 중 괄목할만 것은 우선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즉 어렵게만 생각했던 새벽 기상과 새로운 출근시스템이 막상 부딪혀보니 할만했고, 오후 4시 이후에는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게 뿌듯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사내의 분위기도 일신되었다. 자유로운 발언 분위기가 확산되었고, 업무재량권이 하부로 대폭 이양되었으며, 사내의 인간관계도 좋아졌고 라인스톱제 도입으로 고객을 중시하는 마인드가 사원들간에 생겨났다. <나부터 변하자>의 일환으로 시작된 이 7.4제 도입은 2002년에 삼성그룹 차원에서 전면폐지되었지만, 당시 7.4제 시행으로 임직원의 61%가 퇴근 후 시간을 개인학습에 활용, 각종 자격취득자가 크게 늘어났고, 업무적으로는 보고절차 간소화 및 회의 문화 개선 등의 효과가 있었다.
/이건희 삼성 회장. /조선일보 DB
<나부터 변하자>와 <7.4도제 도입>, <라인스톱제>가 93년 이후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자 이어 삼성은 사원에 대한 전면적인 재교육을 시작했다. 이 무렵 또 하나 바뀐 것은 현장경영이다. ‘임원들은 사무실에 앉아있지 말고 영업현장이나 생산공장으로 나가라.’ 이건희는 현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회장 자신이 미국의 가전제품 매장, 일본 도쿄의 가전제품 판매현장을 돌 듯이 간부들도 현장의 실상을 보라는 지시였다.
임원들은 오전에는 사무실에서 근무했지만, 오후에는 현장에 나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그 문제점을 개선하는데 앞장서라는 애기였다. 과거처럼 넥타이를 매고 사무실에 앉아있던 기업문화는 삼성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 당시 삼성그룹은 현장경영을 위해 임원이나 간부들을 차출해 6개월간 교육을 시키기도 했다. 93년 삼성이 일으킨 신경영은 경영이라기 보다 하나의 문화혁명이었다. 기업이 그동안 관행대로 해왔던 모든 사고의 틀과 방식을 바꾸는 일대 전환점이었던 것이다.
(9)-(1)(2) '삼성 타운'이 생기게 된 배경
삼성용어란 개념과 의미의 통일이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란 무엇이고, 어떤 개념이었는가. 우선 <인프라>. 인프라라는 말을 한국사회에 처음 등장시킨 것이 삼성이다. 인프라는 사회간접자본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삼성에서 사용하는 인프라라는 말 속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들어 있다. 즉 해외에 공장을 하나 지을 때 다음과 같은 인프라가 있느냐 없느냐 하고 묻는 것이다.
1.항만과 공장까지의 거리는 가까운가.
2.국제공항, 더 나아가서는 국내공항과 공장까지의 거리는 가까운가.
3.배후도시로부터 노동력의 조달은 가능한가.
4.값싼 전기의 공급은 원활한가.
5.공장에 필요한 용수는 풍부한가.
6.고속도로와 쉽게 연계할 수 있는가.
이 같은 인프라가 일단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프라라는 용어는 이렇게 쓰이는 것이다’ 하고 교육을 했다. 요즘은 그 개념이 더욱 확대되어 <어떤 사업을 구상하고 기획하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조건의 총칭>을 인프라라고 부른다
/삼성 깃발. /조선일보 DB
당시 삼성에서는 바로 그런 개념을 설정하고 그걸 사원들에게 이해시켰다. 그 방법은 매일 아침 10분씩 방송되는 사내케이블TV를 통해서였다. 임원은 물론 전사원이 그 방송을 보면서 개념을 익혀나갔다. 거기에서 <질 위주의 경영>, <복합화>, <메기이론>, <세기말 변화>, <에티켓>과 같은 어휘가 삼성 내에서는 뭘 의미하는 것인가를 주지시켰다. <복합화>란 삼성의 단지 내에 아파트, 직장, 회의실, 병원, 수퍼마켓, 학교, 유치원, 탁아소 등등 삼성의 사원들이 근무하고 생활하는데 필요한 모든 시설을 한꺼번에 다 집어 넣는 것을 의미한다. 그 목적은 시간을 경제적으로 쓰기 위해서이다.
회의를 하기 위해서 공장의 간부가 본사까지 차를 타고 1시간, 2시간씩이나 걸려서 오는 것은 시간낭비이기 때문이다. 100층, 200층의 고층빌딩을 지어서 그안에 삼성의 직원들이 필요한 모든 시설을 넣어놓고 40~50초만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회의장에 도착하기 위한 시스템이 그가 구상한 복합화였다. 현재 복합화는 진행중에 있지만, 복합화의 전신은 태평로에 있는 삼성빌딩군이다.
삼성의 빌딩군이 아래위로 생긴 것은 사원이나 간부들이 서로 짧은 시간에 만나서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1980년 서울의 봄 시절에는 대학생들이 <태평로는 삼성공화국>, <서울역은 대우공화국>이라며 재벌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삼성의 복합화는 94년에 들어 태평로 일대의 삼성타운, 서울 일원동(현재의 삼성 휴먼센터 및 삼성의료원),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매탄동 일대(삼성전자 지역) 및 용인(에버랜드 지역) 등 4개 지역을 그 대상지역으로 확정하면서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또 복합화의 개념도 <빌딩의 복합화> 즉 빌딩 하나를 작은 도시로 만들어 사무 외에 생활, 문화시설도 함께 확보한다는 개념에서 점차 확산되어 공장 복합화, 판매 복합화, 사업 복합화 등으로 더욱 확산되어 나갔다. 이것은 비단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실시되었다. 즉 일본 본사, 유럽 본사, 미주 본사, 동남아 본사 등에서도 해외지역 본사제를 도입, 공장과 사무실 등을 한곳에 모아 복합타운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②편에 계속>
이건희 회장이 본 뛰어난 인재상
<①편에서 계속>
<메기이론>이란 미꾸라지를 기르는 논 안에 메기를 한 마리 넣어놓으면 미꾸라지가 오히려 건강하고 살이 찐다는 이론이다. 즉 미꾸라지는 메기에게 잡혀먹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도망 다닌다. 적당한 긴장이 있어야 사람도 기업도 활력이 있다는 이론이다. <세기말 변화> 이론은 인류 역사에는 세기말에 항상 큰 변화가 있었다는 것으로 21세기말에는 창조적 기술시대와 초경쟁의 시대가 온다는 것. 과거 5000년간 변화한 것보다 근세기 100년의 변화가 더 크고, 근세기 100년보다는 최근 5,10년의 변화가 더 크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의 말대로 컴퓨터와 반도체의 획기적인 발전은 결국 인터넷이라고 하는 제3의 실크로드를 만들어냈고, 여기에서 유통되는 정보와 산업의 양은 예측불허의 일파만파로 치닫고 있다.
<에티켓>은 본래 이건희의 취미인 골프에서 비롯된 것으로 도덕과 예의를 가진 인간의 양성, 기업문화의 창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때 삼성에는 수백개의 용어가 탄생했고, 그 용어집도 발간되었다. 이어 삼성에서는 이른바 삼성메뉴얼, 개혁 33계명같은 것들이 만들어졌다. 자, 이렇게 삼성의 경영철학을 다져나간 이건희는 삼성그룹의 기본철학이 완성되자 대도약을 시작한다. 우선 인재 초빙, 즉 <한사람의 인재가 10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슬로건 하에 세계 각국의 유수한 인재를 삼성그룹의 각 계열사로 영입한다. 이른바 <인재경영> 시대의 도래이다.
/조선일보 DB
첫째, 향후 회사의 신수종(新樹種)사업을 주도할 인재. 즉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만들고 그 아이템으로 수요를 창출하고 산업 전체를 리드할 수 있는 인재를 말한다.
둘째, 변화와 혁신을 주도하는 인재. 즉 고정관념을 깨고 혁신적 아이디어를 제시하며 그걸 추진하는 능력이 있는 인재를 말한다.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 게이츠와 델 컴퓨터의 마이클 델, 골프천재 타이거 우즈와 같은 인재를 말함인데, 그 분류를 S급, H 급, A 급으로 나누어 초빙했다. S급(SUPER):높은 잠재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업무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올리는 인재, H급(High Potential):충분히 성과로 검증되지는 않았지만, 높은 잠재력을 지닌 인재. A급:S급보다는 못하지만, 뛰어난 성과와 능력을 지닌 사람.
이런 기준으로 수백명의 외국인 인재가 삼성그룹의 각 계열사로 투입된다. 인재의 보충이 끝나자 이건희는 <디자인의 시대>를 선언한다. 제품의 품질이 아무리 좋아도 디자인이 나쁘면 팔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보르도 TV이다. 이후 삼성전자의 가전 제품들은 디자인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고, 오늘날에는 디자인 면에서 세계가전 시장을 선도할 정도까지 발전되었다. 개혁에 개혁, 박차에 박차를 가해 삼성의 체질을 개선하고 그 마지막에 이건희는 그의 모든 철학을 집대성한 <지행 33훈>을 완성한다. 알고 행해야 할 33개의 금과옥조는 다음과 같다.
1.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파악하라로 시작되는 <지행 33훈>은 10년 후를 내다보라, 버릴건 버리고 시작할 것은 빨리 시작하라, 단지복합화로 효율을 증대하라, 성과를 내는 직원은 사장보다 더 많이 보상하라, 우수한 여성인력을 활용하라, 기술확보는 합작-제휴-스카우트의 순으로 가야한다, 21세기는 디자인과 소프트의 싸움이다, 해와현지에 맞는 경영모델을 개발하라, 해외 현지인력을 삼성화시켜라, 철학과 문화를 파는 마케팅을 하라, 존경받는 국민 기업이 되라 등이 그 골자이다. 한줄 한줄이 모두 의미심장하다.
(10)-(1)(2) 고종도 실패한 극일(克日), 이건희의 삼성전자가 첫 결실
1881년 고종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일본에 대한 <물정상탐>을 지시했다. 그 물정상탐팀을 조선에서는 신사유람단이라 불렀다. 신사유람은 신사들이 유람한 것이 아니었다. 놀러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목적은 ‘물정을 자세히 살피는’ 정보수집이었다. 단원 모두에게 암행어사의 자격을 주었고, 이들은 각자 따로따로 한양을 출발해서 부산에 집결했다. 그들을 출발시키고 나서야 조선정부는 하나부사(花房義質) 주한공사를 불러, 그들의 출발사실을 통고했다. 신사유람단의 파견은 철저한 보안 속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경비 또한 100% 조선정부가 부담했다.
지금까지 역사에 나타난 고종은 매우 무능한 임금으로 비춰지고 있으나 고종의 일본 벤치 마킹 내용을 보면 그도 조선을 문명개화시키기위해 상당한 노력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신사유람단은 81년4월10일부터 윤7월2일까지 약 4개월에 걸쳐 일본의 각종 현황을 조사했다. 총 12팀으로 한팀은 각 5명이었다. 즉 팀장인 조사가 1명이었고 그 아래 수행원 2명, 통역1명, 하인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신기수 선생이 사료 100여 점을 바탕으로 1979년 만든 기록영화‘에도 시대의 조선통신사’의 스틸컷. 영화 속 한 장면이다. /조선일보 DB
박정양(40·정2품 형조참판)팀은 일본 내무성 및 농상무성 등의 업무를 조사했다. 귀국 후 그들은 <일본 내무성 및 상무성 시찰 조계>라는 보고서를 써서 고종에게 제출했다. 민종묵(46·병조참지·정 3품)팀은 외무성을 조사한 후 <일본각국조약현황>과 <일본외무성 시찰기>를, 어윤중(33·응교·정4품)팀은 일본의 경제기획원인 대장성을 조사한 후 <문견록>과 <해관총칙>을, 조준영(48·공조참판·정2품)팀은 문부성을 조사했으며, 엄세영(50·이조참의·정3품)팀은 사법성을, 강문형(50·공조참의·정3품)팀은 공부성(건설부)를, 홍영식(27·참의·정3품)팀은 육군을 조사한 후 <일본육군총람>과 <일본육군조전>을, 이헌영(46·병조참지·정3품)팀은 세관을 조사한 후 <나가사키 세관총칙>의 보고서를 냈다. 당시 그들이 고종에게 올린 보고서는 무려 600여권에 이르렀다. 이것이 조선정부가 일본을 총체적이고 부문별로 상세히 벤치 마킹한 첫 사례였다.
그 후 고종은 벤치마킹한 보고서를 토대로 근대화에 나서려했으나 자금의 절대적 부족으로 근대화에 실패, 20년후에 결국 일본에 병탄당하게 된다. 그로부터 80년 후 박정희 대통령도 절치부심, 근대화에 나서 일본의 철강업계를 벤치마킹하기 시작했고 이후 민간기업들도 공업생산 거의 전부문에 걸쳐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벤치 마킹을 시도했다. 그로부터 50년 후인 2010년 이후 삼성전자는 일본의 모든 가전회사를 누르고 휴대폰, 반도체, LED부문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또 조선이나 철강 부분에서도 앞서거나 대등한 수준까지 도달했다. 고종도 이기지 못햇고, 박정희 시대를 지나 적어도 40년간을 이기지 못한 일본을 이긴 첫 사례는 이건희가 회장으로 있는 삼성전자이다.<②편에 계속>
스위스-네덜란드-벨기에에서 한국이 배울 점
<①편에서 계속>
최근 필자가 일본의 파나소닉을 비롯한 일본의 대기업을 방문해보면 삼성전자에 대한 두려움이 역력하다. 그들 스스로 <삼성전자 때문에 너무 힘들다>라고 토로할 정도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인구 13억명의 거대 강국, 중국의 굴기.
역사상 우리가 중국을 마지막으로 상대했던 것은 청나라 말기인 1894년 청일전쟁까지이다. 인구 4억명 청나라의 패배로 아시아경제의 주도권은 일본으로 넘어갔다. 그로부터 120년 후 중국은 인구 13억, 세계 최대의 거대시장으로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자본주의보다 더 자본주의 모습을 한 공산주의 경제 시스템을 갖춘 두 얼굴의 모습이다. 삼성전자의 중국 시안 반도체 공장은 가동 중에 있다. 일각에서는 벌써 부메랑 효과를 염려하고 있다. 중국과 경쟁할 것인가, 동업할 것인가. 중국이라는 용의 등에 올라탄 토끼가 될 것인가, 여우가 될 것인가. 이 답은 우리 스스로 찾지 않으면 안된다.
/삼성 서초사옥. /조선일보 DB
이 와중에 이건희 회장이 언제 끝날지 모를 긴 투병에 들어갔다.그는 지금 블랙프라이데이 단 하루에 17조원의 판매가 이루어진 중국 시장에 대해 어떤 분석을 내놓을 것인가. 창조경제는 진행 중이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노베이션은 스위스에서 답을 찾아야한다. 태양광 비행기, 위성청소용 위성을 만든 이노베이션 세계 1위 스위스의 이노베이션 시스템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 해외시장 개척 및 무역은 네델란드에서 배워야한다. 1600년 세계 최초로 주식시장을 만들고, 크라우드 펀딩으로 동인도 회사를 만들어 위험을 분산 시킨 후 아시아의 향신료와 도자기를 유럽에 내다팔아 막대한 국부를 쌓은 후 세계 1위의 정유회사 로얄 더치셀, ING 그룹 대기업을 세운 네델란드의 지혜가 필요하다.
틈새산업은 벨기에에서 배워야 한다. 진딧물을 잡아 먹는 말벌, 잡초를 파내는 로봇, 지정학적 입지를 살린 물류시스템과 놀고있는 창고지붕에 태양열 발전을 하고 있는 벨기에에서 배워야 한다. 해리포터 소설 하나로 영화, 뮤지컬, 게임들을 만들어 무려 74억 달러를 벌어들인 영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육성도 탐구대상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중국의 기업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동업해서 손잡고 중국의 국내시장, 그리고 세계 시장으로 함께 나가야 한다.◎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