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역사1
◆ 조선 창조경영의 도전자들
2015-01-07 몰락양반 출신 조선 최초CEO, 우국의 경영 파천황 이용익(상)
“떳떳 상(常) 평할 평(平) 통할 통(通) 보배 보(寶). 구멍은 네모지고 사면이 둥글어서 댁대글 구울러 간 곳마다 반기는구나. 어떻다 조그만 금(金)조각을 두 창이 다투거니 나는 아니 좋아라.”
보부상들이 팔도장터 떠돌며 흥얼대던 조선 돈타령이다. 군주 권력에 기댄 대신과 내시들이 조정과 백성을 호령하고 거액 뇌물을 거둬들이며, 관아 벼슬아치들까지 으스대며 상민들을 마구 쥐어짜 잔돈을 챙기니, 권력은 크나 작으나 오로지 축재의 지름길이었다. 이를 꿰뚫어본 사나이가 바로 보부상 이용익(李容翊)이다.
파천황(破天荒)이라 불린 이용익은 하늘이 준 기회를 알아보는 분별력과 그것을 놓치지 않는 결단력으로 왕조시대에 맨손으로 부를 쌓은 뒤 질곡의 현실에서 조국의 미래를 그려나간 조선 최초 창조경영가이다. 파천황은 ‘하늘땅이 아직 열리지 않은 혼돈의 상태를 깨뜨리고 새 세상을 만든다’는 뜻으로 이용익의 장대한 포부이기도 했다.
/근대식 관복을 입은 이용익.
“세상사에 정통하면 그것이 곧 학문이다. 그저 책만 읽고 과거체 팔고문(八股文)만 지어 세상이치 깨달은 이들은, 배움은 적으나 온갖 밑바닥 고생하며 세상이치 깨달은 이들만 못하다. 왕후장상 씨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내 기필코 조선 천하를 쥐락펴락해 보이리라.”
가슴속에 큰 뜻을 품은 이용익은 저무는 조선왕조 끝무렵 계급 편견을 극복, 근대 산업과 교육발전에 힘써 한국 미래의 싹을 키워낸, 조선 최초 창조경영 파천황 CEO(최고경영자)였다.
이용익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들이 분분하다. 아비가 누군지 모른다는 설에서부터 말장수 자식이라는 설, 북방의 천민 출신이라는 설 등 그의 출생신분을 깎아내리려는 사람들과, 반면 이용익이 대대로 명문 유교 가문 출생이라는 입장으로 나뉜다. 명문 출생임을 주장하는 쪽은 이용익의 신분을 깎아내리려는 사람들을 식민사관에 젖은 친일파들이라 단정한다. 그들은 이용익이 이태조 백형인 완풍대군 이원계의 17대손이며, 이준(李儁) 열사도 그 18대손이라고 지적, 이용익의 아버지 이병효는 고산현감(高山縣監) 겸 병마절제전주진영(兵馬節制全州鎭營)이었고 어머니 또한 명천의 이름난 선비 유시권(劉時權)의 딸이었으므로 이용익은 명문 출신이었음을 강조한다.
이용익의 출생에 대한 객관적 자료가 있다. 1887년 작성된 ‘남병영기사(南兵營記事)’란 문서로 이용익이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 근무하는 동안 사건·건의를 기록했는데, 기록한 이는 이용익 밑에서 영선업무를 담당한 윤형태(尹炯台)로 추정된다. 이에 따르면 이용익의 아버지는 ‘고산현감 병효(秉斅)요, 그의 장조카는 급제한 1860년생의 윤재(允在)’라고 쓰여 있다.
기록이 있음에도 왜 그가 천민 출생이라는 설이 존재하는 것일까? 앞서 말했듯 이런 주장은 식민사관을 따랐다고 볼 수 있다. 그 무렵 일본 침략자들은 온갖 수단을 다해서라도 이용익이라는 가장 큰 장애물을 내쫓기 위한 중상모략이 필요했다. 또한 그 시절 고위관원들은 승승장구하는 북방 출신 이용익의 출세를 시기한 나머지 어떻게 하든지 그의 흠집을 찾아내 이용익을 관직에서 몰아내려 들었다. 이런 한국적 병폐가 큰 원인이었으며 그 틈을 이용해 일본 앞잡이 일진회의 지독한 모략이 함께 작용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거기에 조선이 개항한 1876년 전후로 팽배했던 서북 사람들(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에 대한 차별의식을 밑바탕으로 이용익의 승승장구에 대한 질투심 또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용익의 출신이 천민이었든 양반이었든 객관적 사실을 넘어 여러 전설이 전해 온다. 전설은 인간이 자신의 숭고한 위대성을 의식하게 만드는 참된 거울이 아닌가.
팔도 보부상 떠돌이
이용익은 1854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 자는 공필(公弼)이며 호는 석현(石峴)이다. 아버지 이병효는 한말의 몰락한 양반이었다. 그는 체계적인 학문을 익히지는 못했지만 소년 시절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뒤 고향을 떠나 젊은 시절을 보부상과 물장수로 연명하며 전국을 떠돌게 된다. 이용익이 열일곱 되던 해 한 사건으로 그의 운명은 바뀐다. 40리 떨어진 마을로 시집가는 이웃집 색시의 사인교 가마 상머리를 그가 메게 된 것이다. 산속 좁은 비탈길을 오르내리느라 가마꾼들이 애를 먹는 판에 때마침 맞은편에서 혼행 가마 한 채가 내려오다 길 복판을 가로막고 섰다. 호사롭게 꾸민 가마 모양을 보아 상대는 지방호족임에 분명했다. 두 가마 사이에 시비가 붙었고, 이용익의 가마가 물러나 길을 터줄 수밖에 없었다.
“아, 뉘기 양반이 아니랬슴둥, 또 길을 비키지 않겠다고스리 버텼슴둥, 그저 길이 좁아스리 머뭇거리기지. 그쪽이 좀 비켜서기 쉬운데 그럼 안 되는 둥, 정말 너무들 하느만서리. 아, 그렇게 호령을 마구 치다간스리 콩밭에다 간수 뿌리고 두부 내놓으란 격이 되겠슴둥.”
이용익은 북받치는 울화통을 억누르며 중얼중얼거렸다. 양반 가마가 조금만 비켜주면 모두 좋을 일이었다.
“네 이놈! 감히 양반 행차가 어디라고 시비를 가리려 들어! 흠씬 두들겨 패고 놈의 상투 꼭지를 내 말꼬리에 매달아라!”
말 위에 앉아 긴 담뱃대를 든 단천부(端川府) 이방 유패돌이었다. 말단이라도 지엄한 벼슬아치 명에 아무도 맞설 수 없었다. 이용익은 피투성이 초주검이 됐고 이방의 말꼬리에 상투 꼭지가 매달려 5리나 끌려갔다. 그리고 단천옥에 갇혀 한겨울 석 달 동안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던가. 설상가상 아버지마저 재산을 몽땅 털어 유패돌에게 속전(贖錢)으로 바치는 바람에 집안까지 거덜 나버렸다. 이용익은 이 일로 고향을 떠나 보부상으로 전국을 떠돌게 된다. 소금 짐을 지고 두만강을 건너 연변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때로는 러시아 깊숙이 들어가 성냥을 받아 북청·회령 일대를 돌며 팔기도 했다. 이러구러 스물에 이르렀다. 그때 원산항이 개방되고 정식 무역이 시작되었다. 이미 그전부터 두만강 일대에서 러시아 사람들과의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들이 무엇보다 눈독을 들인 것은 금이었다. 함경도에는 금을 몰래 캐는 이들도 늘어났다. 농민은 물론이고 보부상 또한 작은 밑천이라도 손에 쥐면 광산을 파들어 갔다. 이용익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도 골드러시에 눈을 뜬 것이다. 소금장수로 몇백 냥을 손에 쥐면 그는 금을 찾아 가슴 설레며 산속으로 들어갔다.
귀신도 구렁이도 두렵지 않은 집념
금광을 찾아 몇 달씩 반미치광이로 떠돌던 이용익은 어느 산골 주막에서 재미난 이야기를 듣는다. 단천 고불티고개 아래 큰 금점이 났다가 그곳에서 한 밑천 잡은 이들 모두가 괴이한 사고로 목숨을 잃어 얼마 전 폐광되었다는 소리였다. 굴을 뚫으려고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리자 흙과 바윗덩이에 섞여 몸길이가 세 발이나 되는 큰 구렁이가 공중으로 획 날아와서 사람들 목을 휘감아 죽여버렸다고 한다. 고불티광산에 손을 대면 구렁이 귀신에게 죽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제는 어느 누구도 얼씬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죽으면 한 번 죽지 두 번 죽는다더냐. 에라, 내가 한번 그놈의 무섭다는 구렁이 광산에 도전해 보리라!’
이용익은 홀로 솥단지를 짊어진 채 산으로 들어갔다. 시커먼 굴 속을 끝없이 파들어가는 그의 망치질, 곡괭이질은 한 달, 두 달, 석 달이 되도록 그칠 줄 몰랐다. 그런데 웬일인지 광굴에서는 구렁이는커녕 사금 낱알 한 줌 나오지 않았다. 여름도 다 지나 어느새 한가위가 다가왔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젠장! 내일 아침 떠나련다. 이놈의 구렁이 광산 때려치우고 미련 없이 떠나련다!’
이용익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 쌀 한 줌을 입에 털어 넣고 분풀이라도 하듯 아득아득 씹으며 허기를 달랬다. 그러고는 먹다 남은 백소주병을 들어 병나발을 불다가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배 위를 스멀스멀 기어가는 차가운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벌떡 일어나 배를 만져 보았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돌아누워 다시 잠을 청하려는데 굴 안쪽에서 똑! 똑! 똑!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굴에 들어온 지 여섯 달 만에 처음 듣는 물방울 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천장을 올려다본 그는 깜짝 놀랐다. 북쪽 암벽 사이로 누런 구렁이 한 마리가 꾸물꾸물 기어 올라가는 게 아닌가! 순간 너무 놀란 그는 손에 잡히는 바위 조각 하나를 들어 구렁이를 향해 힘껏 던졌다. 그러고 나서 불빛을 비추어 보니 그것은 구렁이가 아니었다. 불빛에 드러난 누런 광맥 줄기였다.
“와, 노다지구나! 노다지!”
그는 정과 망치로 누르스름한 광맥을 사정없이 마구 쪼아댔다. 거의 탈진 상태로 미친 듯이 망치질을 하다가 의식을 잃고 쪼아놓은 광석 무더기 위로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깨어보니 굴 안으로 새벽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밤새 쪼아낸 광석을 두 주먹 안에 움켜쥐고 굴 밖으로 뛰쳐나갔다. 햇빛에 금을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금이 아니었다. 밤새 헛것을 본 것이다. 마침내 그렇게 허무하게 산을 내려온 이용익은 다시 보따리를 메고 팔도강산 떠도는 등짐장수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집념은 사그라들 줄 몰랐다. 그 다음 해에도 봄이면 겨우내 번 돈으로 양식을 사서 짊어지고 구렁이 광굴로 들어갔다. 어느새 동굴 밖은 초가을 찬 이슬이 내리는데 그는 여전히 홀린 사람처럼 헛손질만 해댔다.
“그래, 이 굴에서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냥 빈손으로 물러설 수는 없다!”
고독과 실의, 울분, 탄식의 시간이 외로운 다짐 속에 그렇게 흘러갔다. 날이 갈수록 옷차림은 후줄근해졌다. 제멋대로 자란 수염이 초췌한 얼굴을 뒤덮었다. 오로지 집념으로 불타는 두 눈만이 번득였다. 컴컴한 굴 속, 밤낮없이 울려 퍼지는 곡괭이와 망치 소리는 마치 성난 호랑이 울부짖음 같았다. 때때로 그는 망치질을 멈추고 뚝뚝 눈물 흘리며 엉엉 소리 내어 울기도 했다. 지쳐 주저앉은 그는 갈고리처럼 흉측해진 손가락으로 입담배를 한 대 말아 피우며, 암벽 귀퉁이로 가물가물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꼬리 끝을 허망한 눈길로 좇아갔다. 그러다가 순간 이용익은 저도 모르게 담배를 떨어뜨렸다.
‘오! 누런 구렁이 귀신의 긴 콧수염 한 가닥!’
그러나 그것은 구렁이 콧수염 따위가 아니었다. 그토록 애태우며 찾아 헤매던 금맥이 아닌가! 마침내 금을 캐냈다. 무려 2관6돈이었다(1관은 3.75㎏). 이용익은 그 금 부스러기를 정성껏 싸 짊어지고, 오랫동안 세워 온 큰 뜻을 이루고자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민영익(閔泳翊)의 집 식객으로 머물어 금광에 대한 정보를 전하면서 친분을 쌓았다.
민영익을 딛고 조선 근대사 흐름 속으로
1882년 임오군란이 터지자 장호원에 피신해 있던 명성황후와 민씨 정권 최고 실세 민영익 사이의 비밀연락 업무를, 이용익은 그 특유의 빠른 걸음으로 수행했다. 그가 길을 떠나면 발은 보이지 않고 팔랑팔랑 나부끼는 두루마기 자락만 보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도보로 장호원까지 한나절이면 도착했다 하니 대단히 빠른 걸음이었음이 분명하다. 조선팔도 방방곡곡 뛰다시피 돌아다닌 보부상 걸음, 이로써 마침내 민영익의 신임을 얻는 데 성공한다. 이용익의 운명은 격동하는 조선 근대사의 흐름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청군의 파병으로 임오군란이 진압되고, 명성황후 세력이 복권하자 이용익은 민영익의 천거로 종9품 벼슬인 감역이 되었다. 곧이어 그는 청년 시절 곤욕을 치렀던 단천에 부사로 부임하였다. 그 뒤 1885년 북청부사를 거쳐 1887년 영흥부사로 옮겨가며, 이어 함경남도 광무감리(鑛務監理) 겸 병마절도사에 올랐다.
그 시절 고관대작들 어느 누구도 지하자원에 관심이 없었지만 이용익만은 달랐다. 그는 주어진 벼슬과는 별도로 조선팔도 산천곳곳 금광 개척에 열중했다. 단천부사 배명을 계기로 그는 단천 사금(沙金)을 찾는 데도 크게 성공, 그 사금을 고종황제에게 모두 바쳐 국고금으로 충당케 함으로써 황제의 신임을 얻고 극진한 총애를 받기에 이른다. 1894년 함북 병마절도사 겸임 광무사(鑛務使), 1895년 함흥부 관찰사 겸임 갑산부(甲山府) 관찰사, 1896년 감리서북제부(監理西北諸府) 금광사무(金鑛事務)를 거친 뒤 1897년 종2품 평안도 관찰사 겸 감독각부각군(監督各部各郡) 각광사무(各鑛事務)가 되어 마침내 조선 광산 전체를 감독하는 위치에 올랐다. 조선왕조 나라 살림의 돈주머니를 손에 쥔 것이다. 이용익은 광산 경영에 남다른 수완을 발휘, 광산은 왕실 재정의 근원이라 하여 관리권을 내장원에 소속시키고, 외국인이 광산 운영에 끼어드는 것을 철저히 막는 한편, 국내 유력한 광산업자를 선정 그 개발을 촉구해 나갔다.
그러나 이런 승승장구에는 단연 기득권 양반들의 시기와 질투가 따랐다. 느닷없이 나타난 촌놈이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하니 그 누가 그의 거침없는 출세를 반겼겠는가. 양반가의 계율과 격식, 유가적 형식에 어두웠던 것도 비난의 꼬투리가 되었다. 이용익은 무식꾼이라는 헛소문까지 떠돌았다. 하지만 소문과 달리 그의 한문 문장이 매우 뛰어났다. 유자후가 ‘이준선생전’에서 이용익이 한문 편지를 쓴 적이 있다고 특별히 언급한 일은, 그 무렵 그에 대한 세인들의 편견과 모략이 얼마나 지독했는지를 방증한다. 이 책에 따르면 이준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고자 이위종에게 통역을 부탁하는 편지를 이용익에게 써줄 것을 부탁했다. 이용익은 처음에는 거절하다 편지 한 통을 써주었다.
“세상 사람들 모두 무식한으로 멸시하는 이용익이 이처럼 학식이 풍부한 글을 쓰다니.” 이준은 그 편지를 읽고 매우 놀라며 감동했다고 한다. 이런 일화는 그의 출생에 대한 왜곡과 마찬가지로 그때 고급 관료들의 질시와, 일본의 조선책략에 따른 악의적 음모가 뒷받침되어 ‘이용익은 일자무식꾼’이라는 설이 정형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공복들 재벌들 명심하라! 재물은 메기와 다름없다
“재물을 다루는 공복의 마음씀은 마땅히 광풍제월과 같아 털끝만큼 가리어짐이 없어야 한다. 무릇 하늘에 부끄럽고 사람에게 떳떳지 못한 일은 단호히 끊어 범하는 일 없도록 하라. 그러면 절로 마음이 드넓어지고 몸이 편안해져서 호연한 기상이 생겨나리라. 만약 한 자의 베나 몇 푼 재물에 팔려 마음을 저버리는 일이 있다면 이 기운은 곧바로 위축돼 무너지고 만다. 이것이 쌓여 국가재정이 파탄 나면 나라가 망한다. 너희는 이를 마음 깊이 경계토록 하라.”
이용익은 행정경영인으로서 늘 아랫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는 공리공론에 그칠 이론적 경제정책을 세우기보다는 실체험 창조경영으로 나라 살림을 개척해 나가는 현실행정가였다. 국제 경제에도 일가견이 있던 이용익은 그 무렵 조선으로 밀려들어오는 외국 경제 세력에 맞서 철저한 보호주의적 경제체제를 정비하려고 애를 썼다. 수억만금을 움직이는 이용익이었지만 생활은 청빈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용익은 아들 이현재, 손자 이종호를 이렇게 가르쳤다.
“무릇 재물을 간직하는 비결은 백성에게 베푸는 것만 한 게 없다. 도둑에게 빼앗길까 염려치 않아도 되고, 불에 탈까 근심하지 않아도 된다. 또 소나 말에 실어 옮기는 수고로움도 없다. 그런데도 나는 능히 내 죽은 뒤까지 꽃다운 이름을 천년토록 지닐 수 있으니, 천하에 이처럼 큰 이익이 어디 있겠는가? 욕심을 부려 단단히 쥐려 들수록 끝내는 더더욱 미끄러워 빠져나가니, 재물이라는 것은 메기와 무엇이 다르랴.”
오늘날 탐욕을 부려 나라 경제를 부패케 하고 자신을 망쳐서 감옥을 제 집처럼 들락거리는 천박한 재벌들이나 공복들이 정신 차려 들을 말이다.
주간조선
◆세계를 꿈꾼 수출산업 개척자 근대경영 선각 전택보 (상)-①②③④
보잘것없는 자작농 집안에서 태어난 전택보…만주에서의 삶
‘질박한 모습에다 진솔한 마음씨, 뛰어난 자질에다 경륜 또한 갖추시고 한평생 경제 입국에 앞장을 서셨었네. 이 땅의 모진 풍상 견디고 이기시며 공익과 봉사 속에 몸마음 바치시니 그 공덕 눈봉우리인 듯 드맑은 빛을 뿜네.’
시인 구상이 전택보에게 보내는 헌사이다.
/전택보
한국 근대경영의 고난과 시련을 오직 강한 의지로 이겨내며 바르게 살다 간 경영인 전택보(1901~1980년). 그는 이익만 탐하는 한낱 장사치가 아니라 기업인으로서 철학과 정신의 지도자였다. 조국의 산업 부흥을 위해 경제협의회를 창설했고 보세가공 등 독창적 제안으로 수출산업을 개척했으며, 포플러운동 제창자이자 축산 근대화의 선구자였다.
전택보는 1901년 9월 30일 함경남도 문천의 한 농가에서 아버지 전종석, 어머니 김하익 사이 3남2녀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김하익은 여걸이었다. 어려운 형편에도 아이들만은 제대로 먹이고 가르치며, 인생의 길잡이가 되었다.
아버지 전종석은 간도중앙교회 장로로서 신앙생활을 이어가다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김하익도 간도에서 성경학교를 마치고, 여전도사로 마적단 빨치산이 출몰하는 만주 벌판에서 여러 번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전택보 집안은 보잘것없는 자작농이었다. 전종석은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 택보가 일곱 살 때 초가삼간을 겨우 벗어나 좀 큰 집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생활이 나아지자 전종석은 함경남도 안변에서 광산 사업을 시작했다. 농사만 짓던 사람이 광산에 손을 댄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빚만 잔뜩 지고 생활은 다시 어려워졌다. 그 뒤 전종석은 자신이 자본을 마련하고 원산에 사는 김경문이라는 사람이 물건을 대서, 문천 읍내에 ‘덕청상회’라는 포목상을 차렸다. 처음에는 장사가 잘되었으나 가게에 두 번이나 불이 나 모조리 타버렸다. 그 때문에 농토를 모두 팔았어도 빚은 여전히 남았다.
1914년 12월 30일 전택보 가족은 고향을 떠나 북간도로 이주했다. 친척과 이웃들이 역에 나와 눈물 흘리며 배웅했다. 겨울철 찬비가 뿌렸다. 원산까지는 기차로, 청진까지는 배를 탔는데, 연말이어서 그런지 승객조차 없는 다데가미마루(立神丸)는 더욱 쓸쓸했다. 국경도시 회령에 닿자 집안 할아버지뻘 되며 보신여학교 교감이던 전계렴 집에서 며칠 묵었다. 회령에서 룽징(龍井)까지는 120리 길. 마차가 구해지자 전택보 가족은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만주 땅 룽징으로 향했다.
룽징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문천 서당에서 독선생으로 모시고 한문을 배우던, 형님뻘 되는 전택후를 룽징에서 만나 반가움에 엉엉 울기도 했다. 비록 이국땅이었지만 학교생활만은 무척 즐거웠다. 그즈음 간도에 있는 한인학교들은 1년에 한 번씩 대운동회를 열었다. 택보는 멀리뛰기에서 거푸 2년이나 1등을 차지해 선생님이 목말을 태우고 악대를 앞세워 운동장을 돌기도 했다. 전택보의 영신(永新)학교 시절 가장 가까운 친구는 고덕수였다. 그는 뒷날 결혼한 아내의 외사촌 오빠였다. 고덕수는 룽징에서 터진 3·1만세 사건 뒤 공산당원이 되어 광복 뒤 월북했다. 고덕수의 소개로 나운규와도 사귀게 되었는데, 나운규는 전택보에게 평생 꿈이라면서 ‘아리랑’ 영화 습작노트를 보여주며 비평을 듣기도 했다.
1918년 영신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전택보는 영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0년 여름, 룽징에서 60리쯤 떨어진 양무정재에 사는 김정신과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 일찍이 매부의 중재로 두 사람이 혼인하기로 집안 간에 약속이 되어 있었으나 당사자들은 서로 만난 적이 없었고, 부모도 며느리 될 처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혼담이 오가자 전택보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약혼이 되고서야 비로소 영신학교 동료교사 집에서 두어 번 아내 될 사람과 만날 수 있었다. 1920년 12월 스무 살 전택보와 열아홉 살 김정신은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뒷날 현재·억재·순재 3남을 두었다. 평양이 고향인 장인 김정흥은 청부업자로서 상당한 재산가였다. 그는 평양의 숭실전문학교, 함흥의 영생학교 및 룽징의 여러 기독교 계통 학교를 세웠다. <②편에계속>
<①편에서 계속>
그즈음 전택보는 간도에서 일본에 유학 갔던 이주화를 만나 도쿄에 가면 고학해서도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그는 뜻이 맞는 젊은이들과 도쿄 유학길에 올랐다. 그들은 청진까지 가서 원산을 거쳐 일본으로 가는 다데가미마루를 탔다. 일본 땅을 처음 밟았을 때 받은 인상을 그는 평생 잊지 못했다. 쓰루가(敦賀)에 내려 도쿄까지 기차를 탔는데, 논에서는 개구리들이 개골개골 울어댔고 역에 멈춰 설 때마다 도시락 장수들이 “센토! 센토” 외치는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 정도였다. 또한 역마다 오르내리는 승객들의 게다 소리마저 딸그락딸그락 했으니, 일본은 참으로 시끄러운 나라라고 느꼈다. 일요일이면 택보는 YMCA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 무렵 일본의 조선인 유학생 5000여명의 분위기는 매우 진지했다. 3·1운동을 촉발시킨 조선 유학생들은 독립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배우고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 무렵 택보는 여름방학 중이었지만 룽징(龍井)으로 돌아가지 않고, 고등학교 입시 준비를 위해 도쿄에 남아 있었다. 지진은 방학이 거의 끝나가던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58분쯤 지진이 일어났다. 그날 오후 전택보는 홀로 조선에 간 이기윤의 가족 안부가 궁금해서 그의 집으로 가 보려 했다. 그런데 한길에서 죽창을 든 일본인 청년단원들에게 붙들려 몸 수색을 당했다. 말하자면 그것은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들이 당한 수난의 시작이었다. 청년단이 그의 몸을 수색하려 했을 때만 해도 그는 아무 영문을 몰라 대체 무슨 권리로 이러느냐고 대들었다. 그러자 청년단원들은 그에게 발길질을 해대며 우악스럽게 팔을 꺾어 묶은 뒤 경찰서로 끌고 갔다. 경찰서 마당에는 피투성이 조선인 수십 명이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누워 있었다. 이 모습을 본 그는 일본 경찰이 증명서를 써 주고 풀어준 뒤에도 다리가 후들후들 겁이 나서 감히 경찰서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지진이 일어난 9월 1일부터 모든 경찰서에 조선인을 보호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9월 5일까지 수많은 조선인이 길에서 청년단원들 죽창에 학살되었다. 몇 대 얻어맞고 풀려났을 뿐인 택보는 참으로 하늘이 도운 것이었다. 한마디로 공포의 도가니였다. 심지어 시골에서 올라온 일본인마저도 청년단원의 검문에 대답을 잘못하는 바람에 죽는 일까지 있었다. 밤이 되면 사방에서 조선인을 죽이라는 소리가 요란했다. 하숙방에 숨어 지내는 조선인 유학생들의 목숨은 풍전등화와 다를 바 없었다.
도쿄에서 명교(名敎)중학 4학년 1학기를 마친 전택보는 그해 겨울에 관서(關西)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그만두고 이듬해 봄 관서학원 문학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특히 인생의 심오한 문제를 연구하는 철학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관서학원 문학부에 입학하고서부터 그의 인생관이 바뀌었다. 문과를 졸업하고서는 변변한 취직자리 하나 없다는 게 큰 원인이었다. 더욱이 주변의 문과 출신 사람들을 볼 때마다 문과에 대한 실망은 더욱 커졌다.
1924년 봄 전택보는 고베고상(神戶高商)에 응시했다. 결과는 낙방이었으나 이듬해 다시 시험을 쳐서 합격했다. 그가 고베고상을 졸업할 무렵 심한 불경기여서 조선인이 취직자리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는 재학 시절 여선교사의 도움으로, 뉴욕내셔널시티은행 고베지점에 겨우 취직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미국인 15명과 일본인·중국인 30여명이 있었고 조선인은 전택보 혼자였다. 그는 민족 자긍심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항구도시 고베에는 조선인 막노동자가 몰려와 살고 있었다. 조선인이 경제적 하층구조의 태반을 차지하자 ‘조센징’ 차별도 노골적으로 바뀌어 갔다. 그것이 전택보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주었다. 취직을 했으니 아내를 룽징에서 데려올까 생각했지만, 아내에게 조센징이란 비아냥거림을 듣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내와 떨어져 마냥 고베에서 일할 수도 없었기에 고민 끝에 그는 룽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몇 달만 참으면 하얼빈이나 펑텐 지점으로 보내주겠다는 지점장의 만류도 뿌리치고 1929년 간도로 돌아왔다. 아내와는 9년 만에 함께 살게 된 것이었다. <③편에계속>
<②편에서 계속>
/1979년 서울 YMCA 70주년 기념식의 기념사진 활영. 왼쪽부터 최태섭, 전택보, 이용설, 허정, 백낙준, 전택부.
전택보는 다시 만주 영신학교 교사로 교편을 잡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함경남도 금융조합에서 일했다. 금융조합에서 일한 지 3년째 되던 해, 전택보는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에게서 함께 일하자는 권유를 받았다.
그 무렵 조선일보는 한창 사세를 확장하는 중이어서 전택보는 망설임 없이 승낙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무부장을 맡은 그는 밤낮 없이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신문사 일은 무척 고되었고 일제의 탄압 또한 심해 몸과 마음이 몹시 지쳤다. 전택보는 자기 사업을 해 볼 결심을 했다. 그즈음 만주사변이 끝난 뒤여서 만주에서는 모든 사업이 호경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는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룽징으로 돌아갔다.
전택보는 먼저 잣 장사와 소 장사를 벌였다가 좀 더 안정적인 사업을 위해 정미소를 차렸다. 그런 뒤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기로 마음먹고 만주 벌판을 샅샅이 답사한 뒤 교하현(蛟河縣)에서 토지 500헥타르를 사들였다. 그즈음 만주에는 비적떼가 많아 대단위 농장을 경영하려면 먼저 흙으로 성부터 쌓아야 했다. 전택보는 중국인 농민 130여호를 유치해 돈을 주고 집을 짓게 하는 한편 흙성도 쌓았다. 나중에는 조선인 농민들도 40여호 들어서서 벼농사를 지었다.
벼는 남방식물이므로 만주에서는 그전까지 벼농사를 짓지 않았다. 벼농사 가능성을 만주에서 맨 먼저 시험한 것은 일본인이었다. 첫 번째 시험적 벼농사는 만주에서 비교적 따뜻한 지역인 안둥현(安東縣)에서 시작되었다. 이 시험재배에서는 전체 이삭 가운데 3분의 1만이 결실을 보았다. 안둥현에서 수확한 볍씨는 그보다 조금 더 추운 지방에서 시험재배되었고 그곳에서 거두어들인 볍씨는 더 추운 곳에서 다시 시험재배되었다. 이리하여 2차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마침내 북만주의 헤이룽강(黑龍江) 유역에서까지 벼농사가 가능해졌다.
전택보가 만주에서 농장 경영을 시작했을 무렵에도 벼농사는 수익성이 좋았다. 그러나 이때 그는 밤새우기 일쑤인 조선일보사 근무 때 얻은 지병인 심장경련증이 악화되었다. 한번 발작하면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그는 서른아홉 살 되던 해 12월 만주 지린(吉林)병원에 입원해 6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그가 조금씩 건강을 되찾으면서 농장도 차츰 궤도에 올랐다. 그의 농장이 큰 집단취락으로 되고 보니 자녀교육 문제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그래서 전택보는 농장 안에 중국인 학교를 세우는 한편 조선인 교사를 초빙해 조선인 자녀들을 따로 가르치게 했다.
농사도 잘되었고 농민 수입도 괜찮았지만 만주 특유의 기후 탓으로 문제가 있었다. 만주는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기 때문에 농민들은 여름에 번 수입을 겨울에 다 없애버렸다. 전택보는 농민들이 농사만 지어 가지고는 재산을 만들기가 어렵다고 판단해 농민들에게 축산을 장려했다. 또한 만주에서는 해산물이 귀했으므로 만주 토문(土門)에다 ‘동만(東滿)상회’라는 회사를 차리고 수산물 판매사업을 시작했다. 만주 생필(生必)주식회사를 통해 주로 명태를 팔았다.
전택보가 만주에서 벌인 사업들이 비교적 순조롭게 빛을 발해 갈 때, 태평양전쟁은 치열해져 가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도 일본이 패망할 것이 분명해졌다. 그는 가족들부터 본국으로 돌려보내기로 마음먹고 만주에 있는 재산을 어떻게 처리할지 여러모로 생각해 보았다. 그중 덩어리가 가장 큰 농장부터 처분하기로 했다. 전쟁 끝 무렵 전택보는 농장을 고베고상 일본인 동창생 나카가와와 공동경영하고 있었다. 전택보는 가족과 함흥에 머물고 있었기에 농장 처분을 나카가와에게 맡겼는데, 나카가와는 만주철도와 교섭해 매매가 성립되었다는 기별을 보내왔다. 전택보는 판매대금을 받으러 만주로 떠났다. 그 무렵 일반인에게는 만주로 가는 기차를 태워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둔화현(敦化縣) 고문이라는 증명서를 보이고 어렵게 기차표를 살 수 있었다. 기차가 성진을 지났을 때 소련 전폭기들이 나타나 심하게 폭격을 해댔다. 그래서 그는 함흥으로 되돌아와 가족과 함께 피란을 가려고 짐을 꾸리다가 조국 광복 복음을 들었다. 일왕의 무조건 항복 방송을 들으며 전택보는 조선인으로서 수모받던 설움과 광복의 기쁨이 뒤얽혀 한없이 울었다. <④편에계속>
<③편에서 계속>
그러나 기쁨도 한순간이었다. 며칠 뒤 뜻밖에도 소련군이 들어왔다. 실업가의 큰 꿈을 품은 전택보의 앞날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철학 공부의 꿈을 접고 생활 때문에 상업을 공부해야 했던 전택보는 본격적인 기업 운영을 꿈꾸고 있었다. 그는 함흥에서 YMCA를 재조직하고 사무실도 냈다. YMCA가 함흥에서 한 첫 사업은 포로로 잡혀와 흥남 질소비료공장에서 사역당하고 있던 호주 군인 80여명을 위문한 일이었다.
공산당이 지방행정을 맡으며 세상은 하루아침에 붉은 천하로 바뀌고 말았다. 전택보는 당장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느냐를 걱정하는 처지가 됐다. 그는 재산이 있는 부르주아인 데다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층이므로 공산당이 그를 용납하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더욱이 그는 기독교인이었다.
이런 판단이 서자 전택보는 남한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1945년 10월 8일 그는 가족을 남겨둔 채 홀로 기차를 타고 정든 함흥을 떠났다. 38선을 걸어서 넘었다. 그때만 해도 감시가 그다지 심하지 않아서 비교적 쉽게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서울에 들어온 전택보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는 먼저 예전 일터였던 조선일보를 찾았다. 그때 사장 방응모는 신문사 경험이 없는 이종민과 공동경영을 하면서 갈등을 빚고 있었다. 방응모는 전택보에게 조선일보 주식 계약서를 써 주며 말했다.
“이종민과는 더이상 같이 일할 수 없소. 그러니 전 선생이 경영에 참여해 주시오.”
아버지의 경험도 있었듯이 전택보는 동업에 부정적이었다. 그는 절친인 방응모와 경영 문제로 다투게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정중히 사양했다. 한편으로는 자기 사업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조선일보사는 방 사장님의 하나뿐인 재산이고 사업입니다. 제가 낄 일이 아니므로 혼자서 경영하시는 게 나을 것입니다. 언제든 제 도움이 필요할 때는 기꺼이 나서겠습니다.”
대신에 전택보는 이종민의 주식을 회수할 수 있도록 자금을 융통해 줬다. 그 돈과 상업은행 융자금으로 방응모는 이종민 소유의 주식을 모두 사들일 수 있었다. 전택보는 조선일보의 숨은 조력자였다.
그 무렵 만주에서 피란 온 젊은이 대부분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는데 전택보는 이들의 취직 부탁을 받고 미 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을 찾아다니다가 조병옥의 권유로 경무부 이재(理財)과장 일을 맡게 되었다. 1946년 봄, 아내가 가족을 이끌고 서울에 왔다. 그때는 소련군의 감시로 38선 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기에 가족들을 다시 만난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김상필이 전택보에게 이화여대 김활란 총장을 소개해 주었다. 그는 이 인연으로 이화여대에서 돈을 빌려 조선일보사 건물 3층에 사무실을 얻어 1947년 3월 8일 천우사(天友社)를 세우고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전택보는 천우사를 시작할 때 만주에서 동만상사 시절부터 함께 있었던 김지희를 데리고 일했고 곧이어 전택환도 합류했다. 그러는 동안에 김상필 또한 전택보와 마찬가지로 김활란으로부터 이화여대 돈을 빌려 ‘천광사(天光社)’라는 광학공업회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천광사는 장사가 잘 되지 않아 곧 파산했고 천광사 이화여대 부채는 천우사에서 해결해 주었다. <(하)편은 다음주에 계속>
02.16 이승훈을 다시 일으켜 세운 안창호의 연설
"이 젊은 놈들아 정신 차려!" 청년들의 가슴에 민족정신을 새기다①
영원한 성공이란 없는 법. 이승훈은 중년 즈음에 크나큰 실패를 잇따라 겪어야 했다. 그 무렵에는 화폐제도가 통일되어 있지 않아 경기·황해도 일대에서는 백동화가 쓰이고 엽전은 별 가치가 없는 데 비해, 경상·전라도 일대에서는 반대로 백동화보다도 엽전이 널리 쓰이는 형편이었다.
1901년 이승훈은 3만냥어치 엽전을 배에 싣고 부산으로 향했다. 모두 팔면 운임과 잡비를 제하고도 6만냥은 남길 수 있었다. 그런데 목포에서 일본영사관 배와 부딪혀 엽전이 고스란히 바닷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이승훈은 부산에서 거두었을 6만냥을 물어내라고 일본영사관에 소송을 걸었으나, 재판은 한두 해 질질 끌더니 마침내 원금 3만냥만 배상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승훈은 엽전사건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조급해졌다. 그는 해마다 가격이 폭등하며 외국 배가 싹쓸이해 사가던 수수와 옥수수 등 황해도 잡곡만 수만 석을 사들였다. 그러나 그해 전라도 지방에 유례없는 대풍이 들어 황해도 수수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모든 무역선이 그쪽으로 몰렸다. 그 다음해, 다음다음 해까지 버텨 보았지만 지방마다 풍년이 이어지는 바람에 제때 팔지 못했다. 곡식은 썩어버려 결국 한 섬에 서 돈씩이나 밑져 가며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1902년 10월 이승훈은 원산에 터를 잡고 동태를 싹 사들였다. 한 달 만에 동태 값이 엄청나게 뛰었다. 동태는 섣달과 정월에 명태(생태)가 많이 잡히면 제값을 받을 수 없었다. 그는 최근 몇 년간의 어획량과 기상을 면밀히 조사하여, 그해도 명태는 그리 많이 잡히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러나 그해 정월 스무 날 즈음 수백 척의 배들이 모두 명태를 수북이 실은 채 돌아왔다. 싱싱한 명태가 이렇게나 많은데 오래 묵은 동태가 팔리겠는가. 창고에 가득가득 쌓여 있던 동태는 모두 썩어버리고 말았다.
“허허, 어쩌려고 이러는가? 아, 하늘이 날 망하게 만드는구나!” 서울로 다시 돌아온 이승훈은 마음을 잡을 수가 없었다. 몇 해 동안 계속 손해를 본 이승훈은 그것을 한 번에 복구할 기회를 찾아 궁리했다. 그는 1904년 일어난 러일전쟁을 그 기회로 삼았다.
남강 이승훈(왼쪽)과 도산 안창호
그 무렵 러시아의 힘은 막강했으며, 일본은 까딱하다간 모처럼 피를 흘려 빼앗은 요동반도를 러시아에 빼앗길 판이었다. 수십만 명 일본군의 움직임에 따라 유례없는 전쟁 경기가 이 땅에 엄습해 왔다. 이승훈은 쇠가죽을 선택했다. 쇠가죽은 군수품으로 군인들의 배낭이나 구두 등에 엄청난 양이 쓰였으며, 그 값은 전쟁의 잣대였다.
이승훈은 모든 자본력을 동원, 쇠가죽을 사들였다. 서울 한강 용산창 백사장에다 쇠가죽을 엎어 널었다 뒤집어 널었다 하면서 최고가를 받을 수 있는 때를 노리고 있었다. 강화조약이 맺어지지 않고 전쟁이 끝내 이어지리라 믿었던 것이다. ‘일본이 자신들이 이기는 전쟁을 배상금 없이 그만두겠는가? 틀림없이 끝까지 이어갈 것이다.’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러일전쟁은 허망하게 끝났다. 황급히 쇠가죽을 배에 싣고 잉커우(營口)로 갔으나, 약속했던 중국 상인들은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 많은 쇠가죽을 팔 곳이 없었다. 쇠가죽은 달포 넘게 잉커우 항구에 매인 채 천시를 받다가 끝내는 헐값에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훈은 모든 피가 한꺼번에 온몸에서 다 빠져나가는 듯한 허탈감을 맛보면서 터덜터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참담한 실패 앞에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황해도 연등사(燃燈寺)로 들어가 버렸다. 이승훈이 연등사에서 쉬고 있을 때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명근(安明根)이 찾아와서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서 말하곤 했다.
오산 용동 본집에 남은 재산이 조금 있었기에 이승훈은 다시 그 마을로 돌아가 지냈다. 그곳에서도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는데 마침 도산 안창호가 평양 모란봉에서 연설을 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이승훈도 그의 연설을 듣고자 찾아갔다. 구름같이 모인 사람들 앞에서 양복 차림의 서른 살 청년이 열성적으로 호소하고 있었다.
그는 서양인들이 발달한 문명을 앞세워 동양을 침범해 오고 있으며, 그들에게서 힘을 배운 일본이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 말했다. 4000년 역사의 조국을 잃지 않고 지키려면 썩어빠진 옛날의 모든 나쁜 버릇을 버리고 새 힘을 길러야 하며, 그 길은 오로지 새로운 교육으로 모든 국민이 새사람이 되는 것밖에 없다고 부르짖었다.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나서 이승훈은 크게 감동을 받았다.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옳다고 생각되었고, 답답하던 속이 다 풀리는 것 같았다. 이승훈은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로 상투를 잘라 단발을 하고, 앞으로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튿날 그는 안창호를 찾아갔다. 오랜 이야기 끝에 그들은 단체를 만들어 나라를 구하고 민족을 깨우치는 데 뜻을 모았다. <②편 계속 읽기>
◆최헌규·최남선 부자 민중계몽운동을 이끌다
[대한제국 최초 출판언론그룹 총수 최헌규 ]
조선 살리는 길은 출판운동! 1000억 쏟아붓고 빚더미에-①
조선광문회는 신문관을 통해, 민중계몽운동의 하나로 한국 최초의 문고라 할 ‘육전소설’을 펴낸다. 그즈음 양갓집 부녀자, 농촌 남녀들은 ‘춘향전’을 비롯 ‘심청전’ ‘흥부놀부전’ ‘장화홍련전’ ‘추월색’ ‘홍길동전’ 등 딱지본을 많이 읽었다. 이 소설들은 원본과는 달리 음담패설이 가득 찬 책으로, 온 나라에 퍼져 있었다. 최헌규는 이를 내버려두면 사회에 끼칠 해독이 크다고 여겨 ‘춘향전’ ‘옥루몽’ ‘사씨남정기’ ‘전우치전’ ‘심청전’ 등 옛 소설들을 아름다운 현대문으로 고쳐 펴내도록 육당에게 일렀다. 값도 아주 싸게 6전(錢)으로 매기도록 했다. 이 육전소설이 시골 장터까지 깔리자 조선팔도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국학서인 김두봉의 ‘조선말본’ ‘원효’ ‘조선불교약사’를 포함, 세계명작 ‘이솝훈화’ ‘검둥이의 설움’ ‘로빈슨크루소’ ‘걸리버 여행기’ ‘신지식초 100종’ ‘태서교육사’도 이때 발간되었다.
1912년 7월 새로운 소년잡지 ‘붉은 저고리’가 나왔다. ‘소년’처럼 청소년의 취미와 교양을 목적으로 했다. ‘붉은 저고리’도 기사의 대부분을 최남선이 쓰고 시인 김여제가 교정을 보았다. 이 잡지가 인기를 모으자 총독부는 탄압에 들어갔고, 창간 이듬해인 1913년 16호를 끝으로 강제 폐간되고 만다. 최헌규·최남선 부자는 내 나라에서 내 마음대로 책도 펴내지 못하는 울분을 밤마다 토해냈다. 1913년 9월 신문관은 다시 월간 ‘아이들 보이’를 펴낸다.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려 만든 잡지였다. 국판 40면으로 표지도 아름답게 꾸몄다. 이 잡지에서 주목할 점은 국내 최초로 국주한종(國主漢從)·언주문종(言主文從)의 새 한글문장 건립운동을 일으켜 나아갔다는 사실이다. 어려운 한자투성이 딱딱한 문장체로 되어 있던 책들을 고쳐 한글 국문(國文)이 주인이 되고 한문(漢文)이 보조수단이 되는 글을 쓰자는 것이 ‘국주한종’ 운동이고, 문장체로 쓰지 말고 입으로 말하듯 쉽게 쓰자는 것이 ‘언주문종’ 운동이다. 조선의 미래를 걱정하는 최헌규·최남선의 한글 혁명 운동이었다.
조선 최초의 출판그룹 조선광문회와 신문관의 구국문화사업은 일제의 방해 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았다. 최헌규는 여기서 꺾일 수 없다며 아들 남선의 의지를 북돋우고 새로운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1914년 10월 잡지 ‘청춘’이 창간되었다. 이광수·홍명희·현상윤·이상협 등 젊은 문사들이 글을 쓰고, 일본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돌아온 고희동이 표지를 새롭고 산뜻하게 그려냄으로써, 그간 잡지들보다 현대적인 교양잡지로 꾸며졌다. ‘아모래도 배워야’라는 창간사에서 프랑스의 루소·디드로의 계몽주의 출판사상을 엿볼 수 있다.
“아모래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더욱 배워야 하며 더 배워야 합니다.”
‘청춘’은 ‘소년’보다 내용과 수준을 더욱 높여 과학·역사·지리·세계고전 소개 등 다채로운 편집으로 종합교양잡지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현상금까지 내걸고 ‘문예쟁선응모’로 여러 분야의 작품을 모집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신춘문예의 시작이다. 주요한·강용흘·유광렬·김윤경·방정환·김명순·방인근이 ‘청춘’ 독자문예 출신들이다. ‘청춘’은 이 잡지를 읽는다는 것만으로도 젊은이의 자랑거리가 될 만큼 호황을 누리다가 1918년 9월 15호로 막을 내린다. ‘청춘’의 뒤를 이어 1922년 종합교양잡지 ‘개벽’이 발간되었다.
/감옥에서의 육당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를 쓴 죄목으로 서대문감옥에 갇혔다. 그런 뒤 1920년 9월 2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경성감옥에 수감되었다. 최헌규는 아들의 옥바라지를 하면서 일제 탄압으로부터 조선광문회와 신문관을 지켜내기 위해 맏아들 창선과 온 힘을 기울였다. 이 무렵 최헌규는 조선 여자 교육 사업에 써 달라며 거금 30원을 동아일보사에 내놓는다. 1921년 10월 최남선은 가출옥으로 풀려난다. 2년 가까이 옥살이를 하고 나온 아들의 몰골을 본 최헌규는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그는 애써 속으로 삭이고 아들의 의지를 북돋웠다. 그 이듬해인 1922년 9월 3일 신문관은 이 나라 최초의 시사주간지 ‘동명’을 발간한다. 검은색 표지에 수탉 한 마리가 힘차게 홰를 치는 심전 안중식의 그림을 넣었는데 일요일마다 발행, 2만부가 매진되는 큰 인기를 끌었다.
조선 살리는 길은 출판운동! 1000억 쏟아붓고 빚더미에-②
<①편에서 계속>
“조선 민중을 계몽하여 독립의지를 고취하려면 주간지보다 일간신문이 더 효과적입니다.”
최헌규는 남선의 뜻을 흔쾌히 받아들여 주간 ‘동명’을 23호로 끝내고 일간신문 ‘시대일보’를 창간했다. ‘동명’ 폐간사에서 남선은 쌓여만 가는 적자 때문에 온 집안 자산이 모조리 언론출판 사업에 바쳐짐에 아버지께 죄송한 마음을 담아 이렇게 썼다.
“조선 사람이여! 염치 없는 조선 사람이여, 용기 있거든 있다고 대답할지어다. 아아, 가련한 것은 조선 사람이 아니라 ‘조선의 산하’ 그것이요, ‘조선 산하의 정령’ 그것이오.”
1924년 3월 마침내 최헌규·최남선의 오랜 숙원인 일간신문 ‘시대일보’가 창간되었다. 그러나 날마다 총독부 관리가 들이닥쳐 이걸 지워라 저걸 고쳐라 훼방을 놓고 신문을 압수하며 발간을 막았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로도 골치가 아픈데, 거기에 최헌규·최남선의 일간신문이 하나 더 발행되는 게 더더욱 두려웠던 까닭이다. 총독부의 ‘시대일보’ 억지 탄압이 계속되는 가운데 무엇보다 마지막 자금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침내 최헌규는 울분을 무릅쓰고 남선과 의논해 신문 경영에서 손을 놓기로 한다. ‘시대일보’는 1926년 이상협에게 인수되어 ‘중외일보’로 제호를 바꾸었다가 1930년대 여운형의 ‘조선중앙일보’로 이어가게 된다.
최헌규가 아들 최남선을 앞세워 조선광문회와 신문관을 이끌어 나간 것은 국민 계몽만이 조선 독립을 이루고 조선의 정신을 살리는 길이라는 일념 하나에서였다. 그래서 온 재산을 몽땅 쏟아부어 엄청난 손해를 보면서도 달게 받아들이며 잡지와 단행본, 일간신문을 발행해 나간 것이다. 최헌규의 재산은 이미 바닥이 나고 빚만 눈덩이처럼 불어나 더는 지탱할 수가 없게 되었다. 어느 저녁 양삿골 집에 빚쟁이들 앞잡이인 일본인 몽둥이패들이 들이닥쳤다. 가족들은 공포에 떨고, 최남선은 손목이 비틀리며 몽둥이로 얻어맞는 수모까지 겪었다. 그럼에도 최헌규는 두려워하지 않고 마루에 나와 꼿꼿이 서서 외쳤다.
“여보시오! 진정들 하시오, 내 말 좀 들어보시오!”
그러나 몽둥이패는 막무가내였다.
“우라질, 뭘 진정하란 말이야! 다리 분지르기 전에 빨리 돈 내놔!”
“옳거니, 댁이 이곳 주인, 그 유명한 최헌규 선생이구먼. 그렇다고 봐줄 줄 알아? 무슨 놈의 빌어먹을 조선광문회, 출판언론 선각운동이야!”
그들은 한바탕 집안을 들쑤셔 놓고는 돌아갔다. 최헌규·최남선 부자는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라 사랑의 깊은 샘과도 같은 조선광문회와 신문관의 끊임없이 솟아나는 근대정신의 싹을 아예 뭉개버리자는 것이 일제의 의도였다. 자괴감과 막막함이 가슴 그득 차올라 아버지와 아들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날이 저물어 깊고 푸른 별들의 바다가 눈에 밀려들어 온다. 복받치는 눈물에 별들이 구겨져 흘러내린다. 출판보국의 일념으로 반평생을 보내며 재산 30만원과 3만여섬 소출(현 1000억원)을 언론출판 구국문화사업에 쏟아붓지 않았던가. 전기와 수도는 이미 끊기고, 쓸 만한 가재도구도 모조리 팔아버린 뒤였다. 그나마 하나 남아 있던 전화기까지 ‘조선문단’ 발행인 춘해 방인근에게 양도했다. 뒷날 방인근은 최헌규 선생을 뵐 면목이 없어 어쩔 줄 몰랐다고 한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괜찮다. 오로지 우리가 나라를 위해 힘써온 일임을 세상이 다 아는데 무얼 걱정하겠느냐.”
아들은 그저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위해 일하겠다는 아버지의 뜻을 정직하게 받들어 왔다. 최헌규는 아들에게 무언가 위로의 말을 주려 했으나 목이 메어 더는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씁쓸히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최헌규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닥쳐왔다. 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는 조선역사편찬 10개년 계획을 세웠는데 통일신라 이전부터 연대순인 편년체가 채택되고, 단군을 인정하지 않고 빼버린 것이었다.
1928년 이에 분개한 최남선은 최헌규와 오랜 의논 끝에 누가 무어라 곡해하더라도 편찬위원으로 들어가 싸우기로 결심했다. 최헌규도 아들의 깊은 뜻을 헤아려 허락해 준다. 최남선은 먼저 조선 역사를 일본 역사의 한 부분으로 만들려는 음모를 막고,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쓴 단군론·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을 바탕으로, 동방문화는 단군신화 무대인 태백산에서부터 생겨났다고 주창하기 위해서였다. 동방문화라 하면 반드시 중국이나 인도로 연원(淵源)을 삼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기도 했다. 이 두 논문은 최초로 단군신화의 중요성을 학계에 밝힌 역사적 대사건이었다. 그러나 ‘작약이 대붕의 뜻을 어이 알랴.’ 사람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모두 육당이 변절했다면서 거세게 비난했다.
조선 살리는 길은 출판운동! 1000억 쏟아붓고 빚더미에-③
<②편에서 계속>
‘돌바닥 맑은 샘아/ 돌우는 듯 멈추어라/ 진흙밧 구정물에/ 행여 몸을 다칠세라/ 차라로 막힐지언정/ 흐려 흘러가리오’.
참뜻을 몰라주는 세상에서 아버지와 함께 흐르는 맑은 물이고자 남선은 다짐했으리라. 온갖 시련에도 최헌규·최남선 부자의 출판보국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1929년에는 세계 곳곳의 기담(奇談)·기설(奇說)을 뽑아 실은 ‘괴기’라는 잡지를 펴낸다. 이는 남녀노소 모두 흥미롭게 읽게끔 하여 독서력을 키워주려는 국민독서 운동이었다. 박은식과 함께 조선광문회를 세운 뒤 각고심혈 30여년, 아들 최남선에게 출판보국 의지의 든든한 거목이었던 동운 최헌규는 1933년 4월 76세로 세상을 떠난다. 아들 최남선이 43세 되던 해였다. 조선 각계 명사들을 비롯해 ‘조선일보’ 방응모, ‘동아일보’ 김성수, ‘조선중앙일보’ 여운형 등은 조선 언론출판계의 큰 인물이 떠나셨다며 매우 슬퍼했다. 최헌규는 한국 근대정신의 선각이며 한국 최초 언론출판그룹 총수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기울어가는 나라 사랑 정신을 펼치기 위한 ‘조선 언론출판에의 헌신’은 한국 문화 융성의 밑거름이며 씨앗이었다.
최헌규가 후손에게 남긴 마지막 유훈이 있다. “박은식 선생과의 언약을 잊지 말라. 민족의 얼이 샘솟는 조선광문회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서울 우이동에 있었던 최남선의 장서각 소원.
최헌규 조선 사랑 정신의 요람인 우이동 ‘소원(素園大書庫)’은 육당의 마지막 학문의 전당이었다. 육당은 광복을 맞아 온갖 출세 권유를 물리치고 이곳에 은거하며 ‘한국역사대사전’ 집필에 전념한다. 최헌규는 양삿골(종로 효제동) 시절 김포평야에 토지 수만㎡를 소유하고 있었고, 광화문 세종로 132 교보문고 자리에 826㎡(250평) 규모의 큰 한옥을 가지고 있었다. 최헌규의 후손들은 조선의 개화와 국권회복을 열망한 증조할아버지 최헌규의 우국사상, 이를 국학으로 대성한 최남선의 조선정신을 이어받았음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최헌규 손자이자 최남선의 아들인 최한웅은 교보문고 자리에 있던 최헌규의 한옥을 거액에 매각, 그 10분의 1로 뒷길에 있는 165㎡(50평)짜리 작은 건물을 사들여 동명사 사옥을 마련하고 학술교재 출판을 이어나갔다. 그 뒤 최헌규 증손자 최국주가 동명사 건물마저 큰돈을 받고 넘긴다. 이어서 최헌규·최남선의 얼이 깃든 상계동 선영(先塋)위토(位土), 그리고 우이동 ‘소원’마저 팔아버리던 날, ‘조선일보’ ‘동아일보’ 사회면 머리기사에는 전국 고서상들이 ‘소원’으로 몰려들어 귀한 서책과 자료를 한 장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사진이 크게 실렸다. 그때 뜻있는 이들이 얼마나 개탄했던가. 더욱이 동명사 사옥, 선영위토, 소원까지 팔아버린 거액을 둘러싸고 최학주·국주·기주·명주·혜주, 증손들 분쟁 풍문까지 들려왔다. 끝내 ‘육당시조문학상’까지 없애버렸다. 최영 장군 가문임을 자랑하는 최헌규·최남선 후손들이 어찌 졸부들 후손처럼 이토록 못난 흉내를 낸단 말인가.
이에 앞서 1970년대 서울 개발이 본격화될 무렵 월탄 박종화(대한민국예술원회장), 아능 조용만(고려대 영문학교수)은 김현옥 서울시장을 방문, 한국 근대정신의 발화점인 조선광문회 복원을 호소했다. 그러나 삼각동 집터는 물론 최헌규 선생 후손이라면 자부심으로 지켜야 할 조선광문회 건물마저 최헌규 손자 최한웅이 팔아버린 뒤였다. 김현옥 서울시장은 조선광문회 건물을 육당 선생 집안이 아직 가지고 있었으면 복원이 될 터인데 제삼자인 김아무개에게 넘어가버렸으니 이를 어찌 복원하겠냐며 난색을 표했다. 울화가 치민 박종화 선생과 조용만 선생은 최한웅을 찾아가, 어떻게 최헌규 선생의 정신이 담긴 조선광문회 건물을 함부로 팔아버릴 수 있는가 통탄했으며, 최한웅 또한 천려일실이었음을 고개 숙여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강영훈 전 국무총리,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이 앞장서 조선광문회정신연구회가 발족되고 서울대학교 김용직 교수, 성균관대학교 최박광 교수 주도로 육당학회가 창립되었다. 무려 15년간 필자(고산 고정일)와 김현경, 박중현, 서울시장 이명박·오세훈, 중앙대대학원장 신상웅, 국회의원 이재호, 서울문화재단 유인촌, 서울고적 살리기에 진력하는 출중한 중구청장 최창식, 그리고 100여일 고생 끝에 조선광문회 뒤채 원형을 찾아낸 세계적 한옥건축가 조인숙이 힘써 마침내 청계천 역사공원에 조선광문회가 복원되기에 이르렀다.
조선 살리는 길은 출판운동! 1000억 쏟아붓고 빚더미에-④
<③편에서 계속>
현재 최헌규 집안의 최고 어른인 최한혁 선생이 통탄을 한다.
“어찌 그간 온갖 고초를 겪으며 조선광문회를 지켜온 홍일식 고려대 총장이 재벌들을 찾아 동냥 다니게 한단 말인가! 고산 선생은 ‘최남선 평전’을 새 책으로 냈으며 15년 세월, 국회·국민고충위·서울시청 등에 새벽같이 달려가 강연을 하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에 조선광문회의 근대정신 의의에 대해 수십 차례 글을 썼다. 오세훈 서울시장을 압박, 조선광문회를 꼭 복원하겠다는 각서까지 받아냈다. 이렇게 각고진려 끝에 오늘 대업을 눈앞에 두고 있지 않은가. 이런데 적통장손을 자처하는 최학주가 미국에 앉아서, 최헌규·최남선 출판정신에 평생 헌신하며 90을 눈앞에 둔 김현경, 고정일 그깟 것들 믿을 수 없다며 오만을 함부로 말한단 말인가. 그는 김현경에게, 파주출판단지에 보낸 1억3000만원을 받아내겠다며 변호사를 선임할 테니 내용증명을 보내라고 해놓고는 치매환자란 말까지 듣게 만들었다. 최국주는 김현경을 불러, 조선광문회 복원이라는 쓸데없는 짓을 고산 선생과 벌이고 있다면서 면박까지 주었다. 이들을 어찌 선구자 최헌규의 후손이라 할 수 있겠는가. 저세상에서 어찌 할아버님을 뵐 수 있겠는가. 15년 세월 우리 집안 사람도 아닌 선생님들이 조선광문회 복원에 바쳐온 헌신이 눈물겹도록 고마우며 나 자신이 부끄럽다. 내 비록 생활 궁핍하고 누옥에 살지만 조선광문회 복원에 기꺼이 헌금하겠다.”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이 최창식 중구청장에게 조선광문회 터만 마련해주면 복원비 20억원을 당장 마련하겠노라 장담했는데, 이제 그가 돈을 구하러 노구를 이끌고 애걸복걸 다니게 되자 최학주·최국주 그리고 기주·명주·혜주, 최헌규의 증손들은 조선광문회 복원에 앞장서겠다고 나섰다. 그리하여 청계천 조선광문회, 상계동 선영위토, 수유리 ‘소원’, 광화문 교보문고 자리, 동명사 건물 매도 거금에서 조선광문회 복원비 18억원을 내놓기로 흔쾌히 결정했다 한다. 파주출판단지 열화당 대표 이기웅은 미국에서 최학주가 보낸 미완 육당기념원 조성비 1억3000만원 가운데 절반을 내놓겠다고 조선광문회복원위 사무총장 김현경에게 확약했다. 이로써 절세충절 최영 장군, 출판언론 선각 최헌규 선생, 대석학 최남선의 후손이라는 이름에 부끄러운 세간 풍문이 단번에 씻겨 내리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시인 박재륜은 청계천을 일컬어 ‘서울 한복판을 흐르는 지금은 맑은 시내(淸溪) 아닌 썩은 냇물의 이름’이라고 했다. 시인은 청계천 물은 썩고 냄새가 나지만 그 흐르는 소리는 옥처럼 맑다고 노래한다. 썩고 냄새 나는 오물 속에 서울의 온갖 도시문명적 잔해와 허위의 역사가 뒤섞여 떠내려가기를 바란다. 서울 중심을 흐르는 청계천. 이제 인간마저 오염된 서울의 퇴폐성을 청계천 모습에 비추어 비판하고, 그 혼탁한 흐름 속에 모든 위선과 기만이 배설되어 버리면서 진정 가치 있는 미래가 다가와 주기를 염원한다. ‘우리들을 달래고 울려줄 수 있는/ 꽃밭같이 초롱초롱한 그러한 밤을/ 당아욱빛같이 찬란한 그러한 아침을’ 맞이하겠다는 시구에서 잘 드러난다. 청계천은 현실에 대한 불안과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어우러지는 한국의 상징적 존재이다. 오늘 조선광문회 마당의 청계천은 황조롱이 날아들고 물고기들이 노닐며, 이곳을 찾는 시민들 웃음 속에 쉼 없이 흘러간다. 이제야말로 국권회복 문화운동 선구자인 최헌규·박은식·최남선이 주창한 조선광문회 정신이 살아 숨 쉬는 것이다.
08.17 이건희-반도체, 정주영-조선, 박태준-철강, 구본무-2차전지
[광복 70년 기획] 드라마 같은 한국 산업의 克日史
日과의 기술전쟁 승리로 이끈 4大 선봉장
한국 산업계에서 최고의 극일(克日) 선봉장으로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꼽힌다. 그는 1974년 30대 초반의 나이에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뒤, 40여년간 줄곧 기술 전쟁을 이끌었다. 이 회장의 극일 화두는 '일본을 철저하게 제대로 배우고 아는 것'이었다. 그는 2004년 삼성전자 임원들 앞에서 "도대체 왜들 이러는가? 우리가 소니보다 기술적으로 낫다고 생각하는가? 소니를 선생님으로 대하라. 우리는 아직 배울 게 너무 많다"며 크게 화를 냈다. 삼성의 안일한 태도를 꾸짖는 말이었다. 그 후 삼성은 TV 시장에서 세계 1위 소니를 넘었다.
고(故) 박태준 회장은 1973년 6월 9일 포항제철소 용광로에서 첫 쇳물을 생산, 산업화의 불을 댕겼다. 박 회장에게 극일이란 목숨 걸고 하는 치열함이었다. 그는 "포항종합제철은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해서 영일만에 빠져 죽어야 한다"는 말을 강조했다. 제철소 건설에 일제식민지 배상금이 쓰였기 때문이다. 숙명여대 권혁기 교수(일본학)는 "일본의 힘을 빌려, 일본을 능가한 사례"라고 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1971년 영국 선박 컨설팅 회사의 최고경영자 앞에서 거북선 그림이 있는 500원짜리 지폐를 꺼냈다. 울산조선소 건설을 위한 차관을 들여오기 위해 우리나라의 조선 능력을 입증해야 하는 자리였다. 정 회장은 "한국은 16세기에 철갑선을 만들었다. 영국보다 300년 빠르다. 한번 시작하면 잠재력이 분출될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했고 이를 현실화시켰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1992년 영국 출장 갔다가 충전해 여러 번 쓰는 2차 전지를 보고, 20여 년간 세계 1위에 오를 때까지 끈질기게 연구개발을 밀어붙였다. 2005년엔 2000억원 가까운 적자를 냈는데도 구 회장은 "끈질기게 하다 보면 꼭 성공할 날이 온다"며 독려했다. LG화학은 2009년 일본의 니켈수소 배터리보다 50% 이상 출력을 높인 제품 개발에 성공했고, 전 세계 20여 개 자동차업체에 공급하며 일본보다 한발 앞섰다.
성호철 산업부 기자
◆1994년 반도체서 시작된' 對日 승전보'… 디스플레이·스마트폰으로 속속 확산
'新日鐵 제자' 취급당하던 포스코도 도요타에 납품하며 40년만에 日 넘어
"정밀기계 등 아직 뒤처진 분야 많아"
1994년 9월 각 일간지에 '한민족 세계 제패 월드베스트 정신으로 해냈습니다'라는 전면광고〈사진〉가 실렸다. 메모리 반도체에서 256메가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삼성전자가 게재한 광고였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지면 절반을 차지하는 구한말 태극기 사진이었다.
공교롭게도 삼성전자가 256메가 D램 개발 성공을 공식 발표한 날(8월 30일)은 경술국치일(8월 29일) 다음 날이었다. 태극기 광고는 세계 메모리 시장 1~3위를 독식해온 일본을 기술로 눌렀다는 극일(克日) 선언이었던 셈이다.
◇일본의 하도급국가서 대등한 경쟁자로
광복 이후 70년은 한국 사회 전 분야에서 진행된 '극일의 역사'였다. 1945년 8·15 광복과 더불어 한국인의 대일 정서는 항일(抗日)에서 극일로 변천했다. 경제 분야에서는 부국(富國) 일본을 이기기 위해 그들이 성공한 발전 모델을 맹렬하게 뒤쫓아가는 식으로 승화됐다고 삼성경제연구소는 분석했다. 일본 경제에 대한 도전 의식과 추월 열망은 한국 경제 및 기업들에 더없이 큰 발전 원동력이었다.
그 역사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한 것은 역시 메모리 반도체다. 본지가 국내 대표적인 일본 및 산업·기술 전문가 11명에게 설문한 결과에서도 메모리 반도체는 총 9표를 받아 광복 이후 70년에 걸친 한·일 기술 경쟁사에서 단연 최고의 극일 사례로 꼽혔다.
▲한국 기업들은 광복 이후 70년간 일본에 대한 도전 의식과 추월 열망을 원동력 삼아 발전해왔다. 사진 위부터 1987년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3라인 기공식에 참석한 고 이병철(맨 오른쪽) 삼성그룹 창업자와 이건희(오른쪽에서 둘째) 회장, 1976년 현대중공업에서 해외 선주들을 안내하고 있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1973년 포항제철에서 첫 쇳물이 쏟아지는 순간 만세를 부르는 고 박태준(가운데) 포스코 명예회장과 임직원들, 2011년 LG화학과 함께 2차전지 설비 국산화를 이뤄낸 경기도 화성의 협력사를 방문한 구본무(가운데) LG 회장. /삼성전자·현대중공업·포스코·LG 제공
'산업의 쌀' 반도체에서 시작된 극일의 기운은 2000년대 IT(정보기술) 산업에 대한 우리 기업들의 과감한 투자로 절정을 맞았고, TV·디스플레이와 휴대폰 등 IT산업 전반에서 대(對)일본 역전극으로 이어졌다. 일본이 개발하고 세계 시장의 거의 100%를 장악했던 평판 디스플레이 시장 정상에 오른 LG디스플레이, TV의 대명사였던 소니를 제치고 글로벌 1등에 오른 삼성전자의 성취도 가슴 벅찬 이야기다. 허영호 전 LG이노텍 사장은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에 일본을 앞서는 시기가 올지 회의했던 기억들이 생생한데 이제 그 꿈이 현실이 됐다"고 말했다. 최문기 전 미래부장관은 "일본을 넘어 글로벌 넘버원이 된 반도체 기술이 디스플레이 산업 경쟁력의 바탕이 됐고 그것이 다시 스마트폰 등 다른 ICT(정보통신기술) 산업 전반에 경쟁력 상승이라는 선순환을 불렀다"고 말했다.
◇광복 70년은 기술 克日의 역사
포항 영일만과 울산 미포만에서 포항제철(현 포스코)과 현대중공업이 이뤄낸 신화도 빼놓을 수 없다. 사공목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생산성 면에서 신일본제철을 누르고 세계 최고 수준의 제철소가 된 포스코는 우리나라 산업화의 기반을 제공했다"고 말했다.
1968년 5월 포항 영일만 바닷가에 연건평 198㎡(60평)짜리 2층 가건물이 들어섰다. '롬멜 하우스'라 불린 포항제철 건설본부였다. 2차 세계대전 때 '사막의 여우'로 불렸던 독일 롬멜 장군의 야전사령부처럼 황량한 처지라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창립 요원 34명 가운데 제철소란 시설을 구경이라도 해본 이는 박태준을 포함해 단 2명. 현장을 찾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조차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건가"라고 혼잣말을 했을 정도였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2009년 1월. 아사히신문은 '신일본제철의 제자'로 취급받던 포스코가 드디어 그 꼬리표를 뗐음을 알리는 기사를 실었다.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들 가운데 마지막까지 포스코 강판을 외면하던 도요타 본사, 그것도 일본 내수용 자동차에 포스코의 자동차용 강판이 납품되기 시작한 것이다. 포스코가 자동차 강판을 생산한 지 27년 만의 일이었다. 도요타는 자체 실험 결과 포스코 강판이 신일본제철 등 일본 국내산 제품보다 가격이 훨씬 저렴한데도 품질상 차이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1972년 3월 현대중공업이 울산 조선소 기공식을 열었을 때 한국은 세계 시장에서 점유율이 채 1%도 안 되는 조선 약소국이었다. 1960년대에 글로벌 조선 시장의 절반을 차지한 일본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당시 세계 제일 조선소였던 미쓰비시중공업은 "한국이 대형 선박을 건조한다는 건 무모하다"고 했다. 그런 미쓰비시를 현대중공업이 추월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11년. 1983년 일본의 경제 전문지 '다이아몬드'는 현대중공업의 세계 1위 등극 소식을 전했다.
이어 현대자동차가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현대차는 1990년대 말부터 10년간 매달 모든 공장장과 부품협력업체 대표가 참여하는 총수 주재의 품질회의를 열었다. 그 회의가 100번 가까이 이어지면서 현대차는 이제 일본 자동차 메이커 그 누구도 얕잡아볼 수 없는 글로벌 메이커가 됐다. 이 밖에 삼성SDI와 LG화학이 세계 1·2위를 차지하고 있는 리튬이온전지, 한국이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CDMA(코드분할 다중접속) 이동통신 기술 등도 전문가들이 꼽은 대표적 극일 사례였다.
그러나 산업 전체로 보면 우리가 일본을 추월한 분야보다는 여전히 따라잡아야 할 분야가 더 많다. 이우광 전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디스플레이용 편광판과 기능성 필름 등 소재·부품과 리튬이온전지 음극재 등 기능성 화학소재, 정밀 공작기계와 산업용 로봇 분야 등이 대표적"이라고 말했다. 호흡이 긴 투자가 필요한 기반 기술 분야들이다. 권혁기 숙명여대 교수(일본학)는 "이제는 시야를 넓혀 다양한 선진 기업과의 협력과 상생의 기회를 증대하면서 한국식 성공 모델을 만드는 것이 진정한 극일을 이루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도움말 주신 분: 권혁기 숙명여대 일본학과 교수, 노준형 전 정보통신부 장관, 박대수 KT경제경영연구소장, 백흥기 현대경제연구원 산업정책실장, 사공목 산업연구원 연구위원, 이우광 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 연구위원,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 정대기 포스코경영연구원 수석연구위원, 정성춘 대외경제연구원 국제거시금융실장, 최문기 전 미래부 장관, 허영호 전 LG이노텍 사장(이상 가다나순)
◆한국 기업의 뿌리
2016.09.16 한국 거부(巨富)들의 원형은 애국이었다
▲경상남도 의령관문 앞을 지나는 남강에 솥바위가 있다.
물밑으로 솥처럼 세 다리가 뻗어 있는 방향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세 부자가 태어난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진주 지수면 승산마을은 GS-LG의 모태, 그들은 모두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경상남도 진주 근처에 지수면 승산마을이라는 곳이 있다. 멀리 방어산(防禦山)이 버티고 있고 거기서 뻗어 나온 보양산이 용(龍)이 머리를 조아린 듯 동네를 감싸고 있다. 나지막한 한옥들을 작은 개천이 가르고 있다. 상리, 하리라고 사람들은 부르는데 상리는 구씨(具氏), 하리는 허씨(許氏)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지수면 승산마을은 천하의 명당이다. 가운데 구름 사이로 방어산이 마을을 지키고 있고 왼쪽으로는 보양산이 승산마을을 감싸안고 있다. 풍수에서 말하는 회룡고조형이다.
▲지금은 폐교된 지수초등학교 터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명당의 기운이 뭉쳐 있다고 했다.
태풍이 불어도 학교 안에 들어서면 평온함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마을 맞은편에 지금은 폐교된 지수초등학교가 있다. 구령대 뒤에 큰 소나무의 뿌리가 머리를 맞댄 듯 자라고 있다. 사람들은 그것이 이 학교를 함께 다녔던 오늘날의 LG그룹 구인회(具仁會) 창업주, 삼성그룹 이병철(李秉喆) 창업주를 상징한다고 한다. 다시 마을로 돌아가 허씨들이 살았다는 한옥들을 살펴본다.
▲지신정 허준 선생 생가. 지신고가라고 쓰여진 집이 지금의 GS그룹의 모태가 된 지신정 허준 선생이 살던 곳이다
주인공은 지신정(止愼亭) 허준(許駿·1844~ 1932)과 그의 아들인 효주 허만정(許萬正·1897~ 1952) 선생이다. 영남의 만석꾼으로 불린 허준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자였다. 그는 승정원에서 봉직(奉職)하다 세상이 시끄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가난한 농민들에게 땅 200평씩, 모두 800두락을 나눠 줬다.
▲허씨마을 전경.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의 골목 풍경이다.
작은 개울을 경계로 왼쪽이 구씨 집성촌이고 오른쪽이 허씨 집성촌이다
▲관서오호장이라 불린 허동립 장군이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에 세운 연정(蓮亭)에는 지금 연꽃이 만발해 있다
이후 그는 독립운동과 육영(育英)사업에 매진했다. 땅을 농민들에게 나눠 준 것 외에도 국고(國庫)가 비면 스스로 채웠다고 한다. 그 맥을 아들 효주 선생이 이어 갔다. 학교를 세우고 백정들의 해방운동도 지원한 덕에 6·25가 터졌을 때 그의 마을은 빨치산의 횡포로부터 무사했다. 덕(德)은 말 그대로 넓은 품성을 말한다.
▲구인회 창업주가 살던 집이다.
효주 선생은 이병철이 지금의 효성그룹 조홍제(趙洪濟) 창업주와 삼성그룹을 세울 때 큰아들 허정구(許鼎九·1911~1999) 전 삼양통상 명예회장을 보냈고 허정구는 삼성물산 초대 사장을 지냈다. 그런가 하면 구인회가 LG그룹을 세울 때 도왔으니 이곳이야말로 애국적 한국 자본주의의 씨를 뿌린 시배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의령 정곡면 이병철 삼성 창업주 생가에는 기이한 모양의 바위들이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생가 뒤편에는 쌀가마니가 쌓여 있는 듯한 형상의 바위도 있다.
부자가 태어난 곳임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마을 사람들은 말한다.
승산마을에서 멀지 않은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에 이병철 창업주의 생가가 잘 보존돼 있다. 이 집 역시 풍수(風水)에 문외한이 봐도 예사롭지 않다. 집과 연결된 마두산 자락이 이 집 주변에선 노적가리가 쌓여 있는 노적봉(露積峰) 형상인 데다 집 바로 뒤의 바위들이 거북이 아니면 쌀가마니를 쌓아 놓은 듯 기이한 모습이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생가 뒤편에 있는 바위가 마치 거북이처럼 생겼다.
▲이병철 창업주 생가.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생가는 고인의 품성처럼 정갈하기 그지없다.
안내인은 말했다. “원래 집과 이어진 산의 이름이 말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마두산(馬頭山)이었는데 호암(湖巖·이병철 창업주의 호)이 유명해지면서 호암산으로 바뀌었지요. 한문은 틀리지만요. 산의 기운이 흐르다 혈(穴)이 맺힌 곳이 이 집으로 알려졌습니다.” 그 맞은편 한옥은 이건희 창업주의 생가라고 한다.
함안 군북면 효성 조홍제 창업주 생가에는 지금도 태극기가 휘날린다
▲효성 조홍제 창업주 생가. 경남 함안의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 생가는 기울어져 가는 그룹의 모습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
다시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로 가 본다. 자그마한 골목을 빠져나오면 양편에 태극기가 걸린 정갈한 한옥이 효성 조홍제 창업주의 생가다. 한창 때보다 기세가 꺾인 그룹의 모습처럼 돌보는 이 없이 굳게 닫혀 있지만 한옥의 자세가 빈틈없다. 누군가는 “명당이라기보다 자식 교육을 잘 시켰을 것 같은 집”이라고 말했다.
전북 고창 인촌 김성수 생가에는 두 형제의 우애가 어려 있어
▲전북 고창의 인촌 생가 가운데 가장 안쪽이 인촌 선생이 기거하던 집이다.
▲전북 고창의 인촌 김성수 선생 생가에는 고인을 비롯한 가족들의 작은 동상이 놓여 있다.
경상남도에서 삼성·LG·GS·효성그룹이 발아했다면 전라북도 고창의 인촌 김성수(金性洙·1861~1955) 선생 생가는 호남(湖南) 부잣집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일자(一字)로 지은 집은 인촌과 그의 동생 김연수 선생이 살던 곳이다. 앞에는 동생이 살던 집으로 작은 문을 통하면 뒤편의 인촌이 살던 집에 연결돼 있다. 인촌 생가는 집 자체보다 앞의 풍광이 일품이다. 부안과 변산반도 쪽 산맥이 너른 평야를 앞에 두고 든든하게 버티고 있다.⊙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사진 | 이서현
◆돌아온 자이니치… 우리가 간과해온 ‘우리의 기업가들’
경제계 “韓경제 발전 공헌 등 재조명 필요” 목소리
기아차·코오롱·롯데·신한銀
日서 일군 기업으로 母國 발전
日 반대·낮은 시장성에도 투자
韓경제 기여불구 평가는 인색
1905년 경북 칠곡에서 태어난 김철호(1973년 작고)는 1923년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갔다. 철공소에서 일하던 그는 1930년 일본에서 삼화제작소라는 자전거 부품회사를 만들었다. 일본에서 일군 부를 바탕으로 1945년 해방 직전 한국에 돌아온 그는 인천에 경성공정을 설립했다. 이후 그는 직접 밀항선을 타고 가 일본인 기술자를 데려왔고, 이를 바탕으로 자전거를 만들고 수출에도 앞장섰다. 이 회사는 규모가 커져 삼천리자전거가 되고, 기아자동차가 됐다. 일본에서 경험한 기술과 일군 돈이 사업의 근간이 됐던 셈이다.
코오롱 그룹의 연원도 따지고 보면 일본에서 시작됐다. 코오롱 창업자 이원만(1994년 작고)은 1933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현지에서 섬유회사를 설립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그는 대구에서 코오롱의 전신인 경북기업주식회사를 세웠다. 그는 일본 기업 운영에서 얻은 경험을 활용해 정부에 수출산업 육성을 적극적으로 제안했다. 여성의 머리카락도 활용 방법에 따라 훌륭한 자원이 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한때 가발 산업이 수출의 큰 부분을 담당하기도 했다.
재일(在日) 한국기업과 이 기업을 일군 창업 1세대 기업가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경제계 안팎에서 힘을 얻고 있다. 한국 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출신으로 인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19일 경제계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기업 활동을 하다가 해방 이후 국내로 돌아와 사업을 시작한 창업 1세대 기업가들은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일본에서의 기업 경험과 기업 활동을 통해 번 돈을 고국에 투자하기 위해 처절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경제계 관계자는 “당시 우리나라가 최빈국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점, 다시 말해 시장이 채 형성되지 못하고 경제적 전망이 불투명했던 점을 감안할 때 이들의 투자 행위는 애국심을 빼면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하나는 일본 정부의 큰 반대가 있었다는 점이다. 제2차 세계대전 패망 이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일본 정부 입장에선 자국에서 번 돈을 한국에 가져가는 이들의 행태를 좋게 볼 리 없었고 다양한 형태로 견제했다. 일본에서 이미 자리 잡은 가족들의 반대도 적지 않았다.
최근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롯데그룹의 신격호 총괄회장도 역시 이 범주에 속한다. 제과 사업으로 일본에서 큰 성공을 거둔 신 총괄회장은 귀화 제안을 물리치고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를 계기로 고국에 본격적인 투자를 하게 된다. 신 총괄회장이 1978년 명동 롯데백화점 본점 완공 때까지 일본에서 들여온 돈을 모두 합하면 약 1조5000억 원(액면가)에 달한다. 이 금액은 시기적으로 다소 차이는 있지만, 경부고속도로 4년 건설 비용과 비슷한 수준이다. 이밖에 고 이희건(2011년 작고) 신한은행 창업자,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정신적 지주 격인 박병헌(대성엘텍·2011년 작고), 우리나라 방적업계 선구자인 서갑호(1976년 작고) 등도 일본에서의 기업 활동을 우리나라 사업에 연계시킨 대표적인 기업인들이다. 유회경 기자 yoology@munhwa.com
◆한국의 창업 CEO 5인 - 박동운
①-이병철
한국은 반도체 생산 1등 국가다. 2014년에 반도체 메모리 부분에서 삼성전자는 세계시장 점유율 34.7%를 기록하여 단연코 이 부문 세계 1위다. 또 반도체 매출액은 2014년에 삼성전자가 382.73억 달러, 세계시장 점유율 10.9%로 인텔(499.64억 달러, 14.2%)에 이어 세계 2위다. 삼성과 SK를 합하면 2014년에 한국은 반도체 세계시장 점유율 15.4%로 세계 2위다.
세계 반도체시장에서 한국의 위상이 이렇게 높은 것은 고(故) 이병철 전 삼성 회장의 기여의 결과다. 대한민국은 자원이 없고 크기가 미국과 중국의 100분의 1에 불과한 작은 나라이지만 이병철 회장이 73세 때 반도체사업에 도전하여 반도체 세계 1등 국가가 된 것이다. 1986년 2월에 발간된 이병철 회장의 자서전 『호암자전(湖巖自傳)』을 텍스트로 삼았다.
그런데 삼성전자의 반도체사업은 이병철 전 회장이 단독으로 추진한 것이 아니라 이건희 회장이 아버지 이병철 회장의 결단을 먼저 이끌어냈고, 뒤이어 1974년 ‘한국반도체’ 인수에 깊숙이 관여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고 한다.1)
무위도식하다 사업을 꿈꾸다
이병철은 1910년 경남 의녕군 정곡면에서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다. 그는 5년 가까이 서당(書堂) 공부를 하다가 11살에 진주의 지수보통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했다. 그의 재종형 하나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고향에 와 있었는데 그는 이병철에게 서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병철은 서울에 가서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냈다. 서울의 수송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그는 산술은 늘 상위권이었지만 석차는 50명 중 35등에서 40등을 오르내렸다.
그는 보통학교 과정을 빨리 끝내고 싶어 4학년을 마치고 부모님을 설득하여 중동중학에 입학했다. 3학년 가을,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는 중동중학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일본 유학을 결심했는데 어렵게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냈다.
그는 1930년 4월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했다. 2학기 말에 각기병(脚氣病)에 걸려 2학년 가을 조도전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했다. 진주의 지수보통학교, 서울의 수송보통학교와 중동학교로 이어지는 네 번째 중퇴. 이렇게 해서 그의 학업은 마감되었다. 그는 자신의 학력을 “졸업증서 없이 끝난 학업”이라고 썼다.
귀국 후 그는 허전한 마을을 달래고자 골패에 열중했다. “노름은 한밤중까지 계속되어 지칠 대로 지쳐서 달그림자를 밟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무위도식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그가 전기(轉機)를 맞았다. “그날도 골패노름을 하다가 밤늦게야 집으로 돌아왔다. 밝은 달빛이 창 너머로 방 안에 스며들고 있었다. 달빛을 안고 평화롭게 잠든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문득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심정이 되었다. 너무 허송세월했다. 뜻을 세워야 한다. 잠자리에 들긴 했으나 그날 밤은 한잠도 이룰 수 없었다. 온갖 상념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리고 뜻을 굳힌 것이 사업이었다. …. 사업에 투신하자.” 26세 때의 일이다.
삼성상회(三星商會)를 설립하다
그는 “어느 달밤 순간적으로 결단한 것”이지 사업을 오랫동안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사업 얘기를 듣고 “사업자금으로서는 대수로운 것이 못되었지만 먹고 살기에는 넉넉할” 정도의 사업자금을 대주었다.
그는 다른 두 사람과 합작으로 <협동정미소>를 차렸다. 1936년, 그의 나이 26세. 정미소 사업은 잘 되었다. 이 무렵 그는 트럭 20대로 운수회사도 경영했다. 이 두 사업으로 그는 얼마 후 “연수(年收) 1만석, 2백만 평의 대지주가 되었다.” 이어 그는 세 번째 사업으로 토지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세계적인 대공황에다 일본의 농민수탈정책으로 이농자가 속출해 땅값이 엄청 쌌다. 그런 처지에서 은행 융자가 쉬웠다. 은행융자로 매입대금을 전액 지불하고도 돈이 남았다. 그는 “김해평야의 경작이 가능한 전답은 한 평도 남기지 않고 사들이기로 작정하고 매물로 나와 있는 물건을 조사했다.” 그는 토지 투자를 부산·대구의 주택용지까지 확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재난이 닥쳤다. 어느 날 일본의 식산은행으로부터 일체의 대출이 중단된다는 통고를 받은 것이다. 중일전쟁을 앞두고 일본 정부가 취한 비상조치였다. 하루아침에 그가 쌓은 부는 모두 사라졌다. 다행히도 엄청난 부채는 갚을 수 있었다. 그는 “이 실패는 그 후의 사업경영에 다시없는 교훈이 되었다고” 썼다.
그로부터 반 년 후 그는 새로운 사업에 착수하기로 마음먹고 새로운 사업을 찾아 여행길에 올랐다. 그는 서울을 거쳐 만주의 여러 도시, 중국의 여러 도시로 발을 뻗쳐 2개월에 걸친 조사여행을 마쳤다. 이 여행에서 그는 청과물, 건어물, 잡화 등이 무역에 적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1938년 3월 1일, 28세 때 자본금 3만 원으로 대구에서 <三星商會> 간판을 걸었다. 그는 ‘三星’의 의미를 “‘三’ 은 큰 것, 많은 것, 强한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우리 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다. ‘星’은 밝고 높고 영원히 깨끗이 빛나는 것을 뜻한다”고 썼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회사가 “크고 강력하고 영원하라―”고 기원했다.
이병철 이야기는 반도체에 있으므로 반도체사업으로 방향을 돌린다.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의 기점인 울산 공업단지 부지를 시찰 중인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조선DB
반도체사업으로 눈을 돌리다
이병철의 기업가정신은 반도체 사업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湖巖自傳』은 <제8편>에서 반도체를 다루고 있다. 반도체사업에 관한 이병철의 기업가정신을 이야기한다.
삼성이 전 세계에 70여 개의 현지법인을 갖고, 총매출의 절반을 해외에서 거두던 시점에 이병철은 삼성의 미래를 염려했다. 그는 삼성의 발전을 확신하면서도 “긴요한 것은 왕성한 도전 정신과 끊임없는 노력정신에 의해 모든 분야에서 계속 선구적으로 신기축(新機軸)을 열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삼성이 “많은 위험이 뒤따르는” 반도체사업에 진출하여 “그 위험을 뛰어넘어 성공을 쟁취해야만 삼성의 내일이 열린다”고 확신했다. 그의 나이 73세 때의 결단이다.
1980년 이른 봄. 동경에 체제하고 있을 때 사무실로 찾아온 도엽수삼(稻葉秀三) 박사와 그는 일본산업의 방향 전환을 놓고 얘기를 나누었다.
“그렇다면 일본산업의 살길은 무엇이냐?” 이병철이 물었다.
“일본 기업은 반도체·컴퓨터·신소재·광통신·유전공학·우주·해양공학 등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기술 분야로의 전환을 도모하고 있고, 특히 반도체 및 그 주변의 기계공업에 치중해 왔다. 정부도 이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하여 전략산업으로 육성했다. 그 결과 수출은 획기적으로 늘고 외화수입은 급증했다. 일본의 살길은 바로 경박단소(輕薄短小)의 첨단기술산업에 달려 있다.” 稻葉 박사의 설명이었다.
반도체에 관심을 가진 이병철은 6년 전에 위암 수술을 받았지만 72세 때인 1982년에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그는 21년만의 미국방문에서 우리가 지금 전환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미국이 제2차 오일쇼크 후에 불황을 합리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고난을 겪고 있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산업조정을 일찍 끝낸 일본이 철강, 자동차 등에서 미국시장을 휩쓸고 있었지만 미국은 맞설 경쟁력을 잃고 있었다. 미국에서 각 분야 유수 기업들의 생산현장을 자세히 살피고 경영수뇌들의 고충을 직접 듣고 나서 얻은 교훈은 한국의 살길은 첨단산업의 시급한 개발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삼성은 해방 후와 동란 중에는 무역을 통해 물자조달의 기능을 맡았다. 휴전 후에는 수입대체산업을 일으켜 한국경제가 원조경제에서 자립경제로 전환하는 기틀을 잡는 데 누구보다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어 중화학공업의 건설로 기간산업(基幹産業)의 기반 조성에 몰두했다. 이제는 그것을 터전으로 삼아 첨단기술산업을 개척해야 한다고 그는 판단했다.
언제나 삼성은 새 사업을 선택할 때 항상 그 기준이 명확했다. 국가적 필요성이 무엇인가, 국민의 이해가 어떻게 되는가,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가 등이다. 이 기준에 견주어 현 단계의 국가적 과제는 ‘산업의 쌀’이며 21세기를 개척할 산업혁신의 핵인 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이라고 그는 판단했다.
그러나 난제는 워낙 크고 많았다. 과연 한국이 미·일의 기술수준을 추적할 수 있을까? 막대한 투자재원을 마련할 수 있을까? 혁신의 속도가 워낙 빨라 제품의 사이클은 2, 3년인데 그 리스크를 감당해낼 수 있을까? 미·일 양국이 점유하고 있는 세계시장에 뒤늦게 뛰어들어 경쟁에 이길 수 있을까? 고도의 기술두뇌와 기술인력 확보, 훈련은 가능할까? 입지조건도 까다롭지만 무엇보다도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 이내에 공장을 세울 수 있을까? 공장의 구조도 아주 특수해야 될 텐데 필요 시설과 전문건설용역은 확보할 수 있을까? 등등. 이런 열악한 여건에서 그는 결심했다―“누군가가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프로젝트다. 내 나이 73세, 비록 인생의 만기(晩期)이지만 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어렵더라도 전력투구를 해야 할 때가 왔다.”
1982년 5월경. “수많은 미·일 전문가를 비롯하여 국내전문가들의 의견을 거의 다 들었다. 관계 자료는 손닿는 대로 섭렵했고, 반도체와 컴퓨터에 관한 최고의 자료도 얻었다. 그 결과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정부의 적극적인 뒷받침만 있으면 성공의 가능성이 있다”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본격적으로 반도체사업에 들어갔다.
∙1982년 10월 “삼성반도체에 내일을 걸고” 반도체·컴퓨터사업팀을 조직했다.
∙1983년 2월 동경에서 반도체투자의 단안을 내렸다.
∙1983년 3월 1년간에 걸친 기초조사와 검토 끝에 삼성의 반도체투자 계획을 공식으로 선언했다.
∙1983년 7월 미국 산타클라라에 기술개발 및 판매촉진을 위한 현지법인을 세웠다.
∙1984년 3월 말까지 64KD램의 양산 제1라인을 완성할 계획을 세웠다. 기술은 미국의 마이크론과 일본의 샤프에서 도입하기로 했다. 일본반도체업계는 한국에 대한 기술 제공에 반대했지만 기술 도입은 샤프의 호의로 이루어졌다. 기흥공장 부지는 반도체의 중요성을 인식한 정부의 배려로 확보되었다.
∙1984년 5월 17일 드디어 삼성반도체통신 기흥VLSI공장 준공식이 열렸다. 이로써 한국이 세계에서 미국, 일본에 이어 세 번째 반도체 생산국이 되었다.
∙1984년 9월 미국에 처녀 수출이 이뤄졌다.
∙1984년 10월 256K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미국과 일본의 전문가와 메이커들이 모두 “기적이라고 경탄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삼성전자는 2005년부터 반도체 메모리 부문에서 세계 1등자리를 지켜왔다.
▲1990년 7월 삼성전자 반도체 화성공장 기공식./<반도체 30년>. 조선DB
삼성이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면 삼성이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병철이 관계자들의 의견을 여덟 가지로 종합하여 답을 주었다. 그 가운데 첫 번째가 “첨단기술에 도전한 삼성의 확고한 기업가정신”이라고 이병철이 밝혔다.
이병철은 모험이 가득 찬, 그러면서도 강한 비전이 뒷받침된 기업가정신을 발휘했다. 기업가정신 없이 73세의 나이에 그처럼 큰 모험을 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이병철의 거창한 계획을 놓고 정부는 실현 불가능한 사업이라고 고개를 저었지만 이병철은 끝내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여 한국이 반도체 세계 1등 국가가 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기업가정신의 발로다.
그런데 ‘기업가정신’을 얘기하다 보니 북한이 떠오른다. 이병철은 1974년에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면서 반도체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준비를 했다. 1974년은 1인당 국민소득에서 남한(597달러)이 처음으로 북한(579달러)을 앞서기 시작한 해다. 그로부터 41년 후인 2015년의 모습은 어떠한가? 남한은 스마트폰 세계 1등 국가가 되어 있지만 북한은 중국으로부터 1억 달러 어치의 휴대폰을 수입하는 정도다. 반도체 관련 이병철의 기업가정신이 이런 격차를 만들어냈다. 이는 곧 기업가정신이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자유시장경제의 힘이다.
삼성은 영원할까?
‘기업은 영원한가?’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이병철은 이렇게 썼다. “이에 대한 대답은 물론 ‘노’이다. 영원은커녕 짧으면 10년, 20년, 길어서 40년, 50년의 사이클로 소장(消長)하고 있다. 영고성쇠(榮枯盛衰)를 거듭하는 기업의 수명은 인간의 그것보다도 훨씬 짧고 덧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에의 여로를 걷기 시작하지만 기업 또한 창업과 동시에 어느 날엔가는 쇠망의 위기에 직면할 운명을 지니고 있다.” 이병철의 말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노키아를 생각하게 한다.
삼성 잘하라고 한 경고일 것이다. 삼성은 참으로 잘해 오고 있다. 삼성전자는 1968년 11월 8일에 일본 산요전기와 자본·기술합작 협정서에 조인하고, 같은 해 12월 30일에 삼성전자 창립 발기인회를 개최한 후 1969년 1월 13일에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렇게 출발한 삼성전자는 산요는 물론 소니, 토시바, 샤프 등을 제치고 현재 세계 1등 전자기업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삼성에 반도체 기술을 제공한 미국의 마이크론의 매출액은 2014년에 163.89억 달러로 382.73억 달러인 삼성의 43%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의 샤프는 비교도 안 된다. 삼성의 빛나는 성과다.
삼성전자는 스마트폰에서도 미국의 애플과 세계시장에서 선두를 놓고 격돌해오고 있다. “기업의 수명은 인간의 그것보다도 훨씬 짧고 덧없는 것”이라는 이병철 회장의 경고를 삼성은 깊이 새겨들어 ‘영원한 세계 1등 기업’ 자리를 지켜주어야 한다.
못 다한 이병철 이야기
①: “기업은 자선단체가 아니다”
이병철의 기업관은 뚜렸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기업은 자선후생의 단체가 아니다. 이익을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익으로 종업원에게 충분한 급료를 지불하고,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고, 주주에게 배당을 지불하고, 그리고 재투자를 한다. 기업이 그 이익을 얻는 방법에는 적부(適否)의 문제가 있을지언정, 이윤추구 그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기업이 적자를 내게 되면 그것은 하나의 사회악이라 할 것이다. 자본·자재·사람 등 사회의 귀중한 자원이 낭비가 되기 때문이다. 기업부실화의 부담은 결국은 국민에게 돌아온다.”
이탈리아어에 ‘페카토 모르탈레(Peccato Mortale)’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용서받지 못할 죄’를 뜻한다. 이탈리아인들은 용서받지 못할 죄로 기업이 이익을 남기지 못하는 경우를 꼽는다. 기업인이 이익을 남기지 못하여 세금을 내지 못하고, 종업원들에게 임금을 주지 못하고, 나아가 처자식을 먹여 살리지 못하면 그것은 죄 중에서도 최악의 죄 곧, 용서받지 못할 죄가 된다는 것이다.
한 때 삼성전자는 6조 원이 넘는 순이익을 낸 적도 있다. 그 이익으로 삼성전자는 무엇을 했을까? 일자리를 만들었다. 삼성은 일자리를 가장 많이 만드는 기업이다. 일자리를 가장 많이 만드니 소득 증대에도 가장 많이 기여한다. 어떤 사람들은 삼성의 이 같은 기여를 인정하려 하지 않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다.
②: 노비를 해방시키다
이병철은 자신의 낭인시대(浪人時代)를 회상하며 “흐뭇한 추억” 하나를 소개했다. 사업에 투신하려고 했던 무렵 자신의 제안으로 “집의 노비(奴婢)를 해방시킨 일”이다.
그의 집에는 노비가 5가구, 30명가량 있었다. 그는 “조도전 유학시절부터 이것은 인도에 어긋날뿐더러 사회발전에도 큰 장애 요인이 된다고 생각해 왔었다. 일본에서 귀국한 후에 이들을 해방시킬 기회를 얻으려고 여러 모로 궁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아버지에게 “그들에게 자유를 주면 어떨까요?” 하고 건의했다. 아버지는 “뜻밖으로 선뜻 허락해주었다.” 미국은 애브러햄 링컨이 남북전쟁 중인 1863년에, 조선은 고종이 1894년에 노비제도를 폐지했다. 이병철은 26세 때인 1936년에 집의 노비를 해방시켰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조도전대학 시절에 한동안 탐독했던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받은 영향이 적지 않게 작용했던 것 같다”라고 썼다.
각주
1) 삼성전자(1999), 『삼성전자 30년사』. 이 책에서 1999년에 삼성전자를 이끌었던 이학수 전 사장은 반도체산업 발전과 관련하여 이건희 당시 부회장의 기여를 자세히 밝혔다.
박동운 단국대 경제학과 명예 교수
② 정주영, 자동차·조선 사업 일구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다
▲1991년 11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서울 종로구 계동 본사옆 공원에서 회사 임직원, 마을주민등 2백여명과 함께 간편한 옷차림으로 체초를 하고 있다. /조선DB
고려대는 고(故) 정주영 전 현대 회장에게 1995년 3월 18일에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면서 추천 이유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내세웠다―“선생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이, 빈손으로 일어나 끊임없는 시련과 도전을 극복하면서 한국 최대이자 세계 굴지의 기업을 구축했다. 이것은 입지전적인 인간 승리의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정주영 회장은 맨손으로 자동차와 선박 회사를 설립했다. 현대·기아자동차는 세계 5위, 현대중공업의 조선(造船)은 사실상 10년 넘게 세계 1등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정주영 회장의 기업가정신이 가져온 결과다. 그의 자서전을 텍스트로 삼았다.1)
배고파 네 번이나 가출하여 쌀가게 사장이 되다
정주영은 1915년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눈 오는 긴 겨울을 아침에는 밥 해먹고, 점심은 굶고, 저녁에는 죽 쑤어먹고 지내는 지독한 가난이 싫어서 16살 때부터 19살 때까지 네 차례나 가출했다. 그는 네 번째 가출로, 인천의 한 쌀 도매상에서 배달원이 되었다. 수소문하여 찾아온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새경으로 1년에 쌀 열여덟 가마를 받는다고 하자 아들의 가출을 허가했다. 그는 23살 나이에 일하던 쌀가게를 운 좋게 인수받아 1938년 1월에 ‘경일상회’ 쌀가게 간판을 걸고 사장이 되었다. 나이 스물 넷, 네 번째로 가출한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곧 이어 중일전쟁이 일어나 총독부가 배급제를 실시하자 1939년 12월에 쌀가게 문을 닫아야 했다.
A. 자동차
‘아도서비스’ 자동차 수리공장을 설립하다
정주영은 쌀가게를 닫은 후 서울로 와 할 일을 찾아다녔다. 그는 오윤근 씨라는 사람에게서 빚을 얻어 1940년 3월 1일에 아현동고개에 있던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인수했다. 돈이 잘 벌렸다. 그러나 그 해 3월 20일경에, 그의 잘못으로 자동차 수리공장이 불에 타고 말았다. 그는 엄청난 빚더미에 올라섰다. 그는 오윤근 씨에게 가서 돈을 또 빌려줄 수 없겠느냐고 사정했다. 오윤근 씨는 “내 평생에 사람 잘못 봐서 돈 떼었다는 오점을 찍기는 나도 싫네” 말하고 거액을 다시 빌려주었다.
그 돈으로 그는 신설동에 무허가 자동차 수리공장을 차렸다. 그는 다른 데서 열흘 걸린다는 일을 사흘 만에 마쳤다. 일감이 쌓여갔다. 그러던 중 일제는 1942년에 기업정비령을 내려 1943년 초에 ‘아도서비스’를 ‘일진공작소’에 흡수시켜버렸다. 자동차 수리사업을 접어야 했다. 그 후 2년 남짓 광산에서 운반 일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다
해방 직후 한국은 어수선했다. 정주영은 미군정청(美軍政廳)이 1946년에 적산(敵産)2) 일부를 불하할 때 땅을 불하받아 같은 해 4월에 중구 초동에서 ‘현대자동차공업사’ 간판을 걸고 자동차 수리공장을 차렸다. ‘현대자동차공업사’는 처음에는 청부받아 미군 병기창에 가서 엔진을 바꿔 다는 일을 하다가 나중에는 낡아빠진 일제 고물차를 용도에 따라 개조하는 일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은 한 번에 30~40만 원 정도를 받는데 건설업자들은 1천만 원씩 받아가는 것을 보고 건설업을 할 계획으로 ‘현대자동차공업사’ 건물에 ‘현대토건사’라는 간판을 하나 더 달았다. 1947년 5월 25일, 바로 ‘현대건설’이 출발한 날이다. 그러다가 1950년 1월에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현대토건사’를 통합해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같은 해 6․25가 터져 피난처 부산에서 엄청나게 고생하다가 미군 관련 건설 사업으로 큰 행운을 잡았고, 다시 서울로 와 미8군 발주공사를 맡았다.
건설 얘기는 이 글의 주제가 아니므로 자동차와 선박 얘기로 돌린다.
▲현대 포니엑셀 신차 발표회장에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조선DB
100% 국산 모델 ‘Pony’가 탄생하다
정주영은 1967년 12월에 ‘현대자동차’ 설립 허가를 받고 오랜 꿈이었던 자동차 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자동차 업계는 일명 딸딸이라는 애칭의 삼륜차를 생산하던 ‘기아’와 승용차 시장을 독점하고 있던 ‘신진’이 지배하고 있었다.
정주영은 기술 제휴를 목적으로 처음에는 포드자동차사와 제휴를 맺었는데 포드 실무자들이 경영권 참여까지 요구해오자 미쓰비시로 바꿨다. 이를 계기로 ‘현대자동차주식회사’는 1968년 1월 4일에 새롭게 출발했다. 그는 많은 난관을 거쳐 1968년에 ‘코티나 1호’를 생산했다. 그러나 악운이 겹쳐 코티나는 실패작으로 끝나고 말았다.
정부는 1969년 12월에 ‘자동차 국산화 3개년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한 마디로, 현대, 신진, 아세아, 기아 4개 차량 조립업자들 가운데 하나만 살리고 나머지 셋은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정주영은 박정희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청하여 이렇게 말했다.
“경쟁 상대가 없으면 제품의 질을 향상시켜야 할 필요도 없고, 생산에 박차를 가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주영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는 이 사건이 한국 자동차산업의 발전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만일 정주영의 제안이 없었거나, 또는 박정희 대통령이 정주영의 제안을 거절하고 자동차산업을 독점기업이나 공기업에 맡겼다면 한국 자동차산업은 오늘날처럼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발전은 경쟁의 산물이니까!
정주영의 동생 정세영 씨는 유럽의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자동차에 관한 온갖 제작기술 계약을 맺었다. 정주영은 1억 달러 이상을 쏟아 부어 1974년 7월에 연간 생산 능력 5만6천 대 규모의 국산 자동차 공장을 착공했고, 1년 만인 1976년 1월에 고유 모델 제1호 ‘PONY’가 탄생했다. 1차 유가파동 여파로 포니는 탄생 전부터 62개국 228개 상사에서 수입을 희망했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3)
한국은 자동차 생산 세계 5위 국가
정주영은 1998년에 한국 자동차 산업의 위상을 다음과 같이 전망했다.
“1967년에 설립한 ‘현대자동차’는 이제 3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100% 국산 자동차 1호로 ‘포니’가 탄생한 이후 20여 년이 흐른 지금 ‘현대자동차’는 그룹 안에서 가장 중요한 기업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것은 ‘현대’가 자동차 수리업에서부터 출발했다는 창립 배경과 역사 때문이기도 하고, 발전과정에 쏟아 부은 땀과 정열 때문이기도 하고, 앞으로 전개될 희망찬 미래 때문이기도 하다. 금액이 큰 것, 이익이 많은 것만 쫓아다니다 보니 건설이 주종 산업이 되었지만 ‘현대’의 입장으로나 국가의 입장으로나 장차 자동차가 미래의 주종 사업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4)
정주영의 말 가운데 나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현대’의 입장으로나 국가의 입장으로나 장차 자동차가 미래의 주종 사업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정주영의 ‘비전’은 실현되었다. 정주영의 ‘기업가 정신’이 가져온 성과다. 그 성과를 보자.
현대차는 1986년에 자동차의 나라 미국에 진출했다. 그로부터 30년이 되는 2015년 1월 현재 현대·기아차의 미국시장 점유율은 7.9%나 된다. 현대·기아차는 여러 나라에서 현지 공장을 갖고 있고, 전 세계에서 불꽃 튀는 경쟁을 벌이며 여러 나라에서 판매 선두를 달리고 있다. 2013년 말 현대·기아차는 판매량 756만 대로 세계 5위다.5) 2014년에 현대·기아차가 대부분인 자동차의 수출액은 489.2억 달러로 총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5%에 이른다. ‘창업 CEO’ 정주영의 기여다.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전경./조선DB
B. 배 만들기
경험 없이 조선 사업을 시작하다
정주영이 조선소를 짓겠다고 하자 ‘무슨 경험이 있다고 조선소를 만드느냐’고 얘기들이 많았다. 그러나 정주영의 생각은 달랐다. “조선업이라는 것이 철판으로 큰 덩치의 탱크를 만들어 바다 위에 띄우고 동력에 의한 추진력으로 달리는 것밖에 더 있느냐”는 것이었다. 배를 큰 탱크로 보고 그 탱크 속에 엔진을 붙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마침 그 무렵 정부도 제철(製鐵)을 시작했다. 덕분에 조선소는 당시 정부의 4대 핵심공장의 하나로 지정되어 제철의 실수요자로 선정되었다.
백사장 사진 하나로 선박 수주를 하다
조선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차관(借款)을 들여오는 수밖에 없었다. 미쓰비시와 접촉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미국, 캐나다와도 접촉했으나 거절당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메리도라고 하는 유태인 한 거상을 만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는 커미션만 챙기려는 사람이었다. 그 후 차관을 주선하는 데이비스라는 미국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미 공군의 조종사 출신으로 한국전에도 참전한 사람인데 프랑크푸르트에서 변호사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 덕분에 1억 불 정도의 차관이 마련되었다. 영국의 버클리은행에 관련 서류를 제출했다.
영국 은행이 외국에 차관을 주려면 영국 수출신용보증국의 보증을 받아야 한다. 차관을 얻는 데는 수출신용보증국의 심사가 결정적인 관문이다. 하루는 수출신용보증국의 최고 책임자가 정주영을 만나자고 했다. 그의 말이다―“우리는 우리나라의 권위 있는 기술회사가 당신네들이 배를 만들 수 있다고 판정을 했으니까 기술면에서 이의가 없다. 그런데 당신들이 설사 배를 만들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배를 살 사람이 없다면 우리나라는 원리금을 어떻게 받을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배를 살 사람이 있다는 확신을 나에게 주지 않는 한 이 차관을 승인할 수가 없다.” 그 사람 말의 요점은 배가 팔린다는 증명서를 갖다 붙여야만 돈을 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정주영은 ‘우리나라처럼 가난한 나라로부터 4천만 불, 5천만 불짜리 대형 선박을 사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배를 만들어 본 경험도 없는 나라가 아닌가?’ 생각하며 “알았다”는 말을 남기고 물러나왔다.
정주영은 그날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조선소로부터 배를 살 선주를 찾아 세계를 돌아다녔다. 당시 울산 미포만의 잡초 우거진 백사장 사진과 그 지역의 5만 분의 1 지도 한 장, 그리고 스코트 리스고우 회사에서 빌린 26만 톤짜리 유조선 도면 한 장을 들고 다니면서 배를 사줄 선주를 찾아다녔다. 정주영은 배를 살 만한 사람을 만나 이렇게 설득하려 했다―“당신이 이런 배를 사준다고 하면 영국에서 돈을 빌려서 이 백사장에다 조선소를 세우고 거기에서 배를 만들어 주겠다.” 정주영은 스스로를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운 좋게도 그는 그 배를 사겠다고 나선, 정주영보다 더 미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선박 왕 오나시스의 처남 되는 리바노스라는 선주가 정주영의 배 두 척을 사겠다고 나섰다. 스위스에 있는 몬슬이라는 그 사람의 별장에서 계약을 마쳤다. 정주영이 제안했다―“우리는 틀림없이 좋은 배를 만들어서 제 때에 준다. 만약에 제 때에 되지 않았을 때에는 계약금의 원금에다 이자를 얹어 주겠다. 그것을 은행보증을 하겠다. 그리고 앉아서 찾을 수 있게 해주고 배 값도 싸다. 계약금은 조금만 받겠으며 중간 중간에 우리의 배 만드는 진척을 보아 가면서 조금씩 달라. 배를 다 만든 다음에도 하자가 있으면 인수하지 않아도 좋고 그 때에도 원리금을 다 쳐주겠다.”
정주영은 26만 톤 두 척을 4천만 불씩 8천만 불에 팔기로 계약을 하고, 계약금으로 우리 돈 13억 원을 받아와 외환은행에 넣었다. 그렇게 해서 배를 팔 수 있다는 증명서를 첨부해 조선소를 지을 돈을 빌리게 된 것이다.
최단 시일에 세계 최대의 조선소를 건설하다
차관도입 협정을 끝마치고 1972년 3월 22일에 조선소 도크를 파기 시작했다. 불과 2년 3개월 만에 조선소를 준공했다. 그 짧은 기간에 리바노스에게 주문받은 배 두 척을 건조하면서 방파제를 쌓고, 바다를 준설하고, 안벽(岸壁)을 만들고, 도크를 파고, 14만 평 규모의 공장을 짓고, 근로자 5천 명이 살 수 있는 집을 지었다. 최대선 건조 능력 70만 톤, 부지 60만 평, 70만 톤급 드라이 도크 2기를 갖춘 국제규모의 조선소를 정주영은 2년 남짓 만에 건설한 것이다. 정주영은 1차 공사를 진행하던 도중에 다시 확장공사를 시작하여 1975년에 최대선 건조능력 1백만 톤, 부지 1백50만 평, 드라이 도크 3기 240만 톤 시설능력을 준공하여 규모로 보아 세계 최대의 조선소를 건설했다.
우스운 일도 많았다. 26만 톤급 배를 만든다고는 하지만 26만 톤짜리 배가 얼마나 큰가를 설명할 사람이 없었다. 제일 크다는 배를 만들어 본 것이 조선공사에서 만든 1만7천 톤짜리가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1호선을 밖에서 조립하여 그것을 도크 안으로 운반해야겠는데 그 때는 아직 골리아스 크레인이라고 하는 대형 자동이동 크레인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기술자들은 손을 쓸 수가 없다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래서 정주영은 트레일러에 선수(船首) 블럭을 싣고 불도저가 뒤에서 당겨가면서 속도를 줄여 도크의 경사로로 내려가게 했다. 이 과정을 정주영은 “이처럼 조선소 건설은 사람들 저마다의 고정 관념을 깨고 또 깨면서 온갖 창의를 다 발휘해서 지었기 때문에 그렇게 최단 시간에 지을 수가 있었다”고 썼다.
리바노스가 주문한 배 두 척은 울산 조선소가 준공되는 자리에서 명명식을 가졌다. 조선소가 준공되는 자리에서 명명식을 갖다니!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정주영의 생각은 달랐다. 배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니까 배만 만들면 되는 것이지 꼭 조선소를 지어야 배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만든 첫 번째 배를 보고 리바노스는 “이 배가 내가 본 중에서 가장 잘 만든 배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울산 조선소는 도크를 파내는 것도, 배를 짓는 것도 모두 세계 기록을 세웠다. 이렇게 해서 미국과 중국의 100분의 1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 대한민국이 조선입국(造船立國)으로 태어났다. 한국은 조선 수주(造船 受注)에서 세계 일등 자리를 놓고 중국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오지만 사실상 10년 넘게 세계 일등 자리를 지켜왔다.
2014년에 한국은 반도체, 석유제품, 자동차에 이어 ‘선박해양구조물 및 부품’이 품목별로 수출 4위인 398.9억 달러로, 총수출의 7.0%를 차지했다. 2014년에 ‘자동차’와 ‘선박해양구조물 및 부품’을 합한 수출액은 888.1억 달러로, 총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5.9%에 이른다. 이는 기업가 정신을 발휘한 정주영의 기여다.
각주
1) 정주영(1986), 『鄭周永 이 아침에도 설레임을 안고』, 삼성출판사. ___(1991), 『나의 삶 나의 이상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제3기획. ___(1998), 『이 땅에 태어나서 나의 살아온 이야기』, 솔.
2) 1945년 8월 해방 이전에 한국 안에 있던 일본인 재산의 속칭.
3) 정주영(1986), 『鄭周永 이 아침에도 설레임을 안고』, 삼성출판사.
4) 정주영(1998), 『이 땅에 태어나서 나의 살아온 이야기』, 솔.
5) 다음은 2013년 판매량 10대 회사다: 1위 도요타(998만 대), 2위 폭스바겐(973만 대), 3위 GM(971만 대), 4위 르노·닛산(826만 대), 5위 현대·기아(756만 대), 6위 포드(625만 대), 7위 피아트·크라이슬러(435만 대), 8위 혼다(410만 대) 9위 푸조·시트로엥(282만 대), 10위 스즈키(266만 대).
③100년 기업 두산을 창업한 보부상 박승직
박용곤 두산그룹 전 회장은 두산그룹이 창립 100주년을 맞은 1996년에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마침내 우리나라도 1세기에 달하는 기업을 갖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우리 민족에게 있어 지난 1세기는 개화기를 필두로 일제 압박기 및 국토의 아픈 분단과 동족상잔, 그리고 경제개발기 등 파란만장한 격동의 세월이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이 같은 역경과 시련을 딛고 반만년 역사를 통해 유례가 없는 눈부신 산업화를 이룩해 냈으며, 바로 그 역사의 한 증인으로 두산그룹이 성장해 왔다.”
두산그룹은 박용곤 전 회장의 할아버지 박승직(朴承稷) 창업자가 1896년 8월 1일에 개점한 ‘박승직 상점’에서 출발한 기업이다. 두산그룹은 창업 CEO 박승직의 기여로 한국의 대표기업으로 발전했고, ‘한국 최초의 100년 기업’이 되었다. 여기서는 박승직 창업자를 다룬다.1)
보부상(褓負商)으로 돈을 벌다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은 두산인프라코어 부회장 시절인 2006년 8월 28일에 전남 해남의 땅끝마을에서 ‘배땅 프로젝트’를 마무리했다. ‘배땅 프로젝트’란 일제시대 보부상으로 사업을 일으킨 할아버지 고(故) 박승직 두산 창업주의 발자취를 더듬기 위해 박영만 회장이 기획한 행사다. ‘배땅’은 서울 종로 4가 배오개에서 해남 땅끝마을까지를 줄인 말이다. 박 회장은 젊은 직원들과 함께 2004년 11월 6일에 배오개를 출발하여 매주 토요일마다 20∼30km씩 걸어 2005년 추석 때까지 해남에 도착하기로 목표를 정했었으나 그룹 내분으로 지연되다가 2006년 8월 28일에야 마무리했다.
박승직은 1864년 6월 22일에 경기도 광주 탄벌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박문회는 몰락한 양반 후손으로 8남매를 거느린 소작인이었다. 5형제 중 셋째인 박승직은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8세부터 한문공부를 했고, 15세에 결혼했다.
군수 민영완이 전라도 해남으로 발령을 받았는데 그는 17살 박승직을 개인비서로 쓰려고 데리고 갔다. 박승직은 해남에 도착하자마자 행상의 길을 모색했던 것 같다. 원래 해남, 강진은 제주도 산간지방 생산물의 내륙 집산지였고, 행상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곳이었다. 박승직은 해남장터에서 장사를 배웠는데 맏형에게 꾸준히 송금하여 타향살이 3년 동안 300냥을 모았다. 3년 후에 박승직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돈을 관리했던 맏형이 2년 후에 100냥을 박승직에게 돌려줬다.
이 돈으로 박승직은 마판상(馬販商)이 되어 광목과 옥양목 등을 말에 싣고 장사하러 다녔다. 그의 장사 길은 제물포에서 면포(綿布)를 사서 경기도 산간지방과 강원도 일대를 다니며 행상을 하는 것이었다. 강원도 산길을 다닐 때 그는 두 달 동안 오직 감자만 먹으며 근검절약했다고 한다. 그는 1888년 25세 무렵에 어느 정도 저축이 되자 30여 석을 추수할 수 있는 전답을 마련했다. 박문회 가족은 형편이 풀리게 되었다.
박승직은 서울에서 사업하고 싶어 서울에 정착한 맏형과 상의하여 1889년에 배오개에다 집을 마련했다. 서울에 정착한 후에 박승직은 경기도와 강원도뿐만 아니라 전라도의 영암, 나주, 무안, 강진 등지까지 왕래하면서 여러 종류의 포목 행상을 했고, 때로는 위탁판매도 했다. 그는 포목 행상을 하면서 정직과 신용을 생명처럼 지켰다.
1896년 8월 1일에 ‘박승직 상점’을 개설하다
서울로 이주한 지 7년이 지나 박승직은 1896년 8월 1일에 종로 4가 15번지에 ‘박승직 상점’을 개설했다. 이는, 10여 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오직 행상으로, 근면과 절약으로, 상인정신으로 이루어낸 자신의 꿈의 실현이자 두산그룹 100년 역사의 출발이었다. 그의 나이 33세.
박승직이 상점을 개설한 때는 우리 근대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시기다. 상점 개설 2년 전에 단행된 갑오개혁으로 어용(御用)·독점상점이었던 육의전2)(六矣廛)이 폐지되어 일반 상인들은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박승직은 상점을 개설했다.
장안의 거상(巨商)이 되다
박승직은 뛰어난 상술과 넘치는 정력으로 사업에 크게 성공했다. 그는 서울지역 포목상계의 지도자가 되었고, 장안의 거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덕분에 그는 사회활동도 활발하게 펼쳤다. 그는 1884년에 ‘한성상업회의소’를 발기하여 창립총회를 갖고 상임위원으로 활동했다. 한성상업회의소는 후에 ‘대한상공회의소’로 발전했다. 그는 1905년 7월에 종로와 동대문 포목상들과 손잡고 동대문시장 경영을 목적으로 조선인으로만 구성된 국내 최초의 주식회사인 광장주식회사(廣藏株式會社) 설립에 참여했다. 그는 1907년에 장안의 주요 객주 계통 포목상인 30∼40명과 연합하여 삼정계(三井系)의 광목 독점 횡포에 대항하기 위해 공익사(共益社)를 설립했다. 그는 1940년까지 공익사의 사장직을 맡았는데, 친일파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사업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정생활은 굴곡이 심했다. 그는 15세에 결혼했던 부인 김 씨와는 서울로 이주 전에 사별했고, 그 후 노 씨와 결혼하여 딸 넷을 얻었으나 1905년에 상처했다. 그 해에 그는 정 씨와 결혼하여 3남 3녀를 두었다. 그런데 딸만 있는 집안에서 정 씨와의 사이에 1910년 10월 나이 36세에 첫 아들 두병(斗秉)을 얻었다. 그는 아들 두병을 애지중지했고, 학교는 줄곧 일본 학교만을 다니게 했는데 이는 일본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얘기된다.
/두산 박승직 창업주 생가./조선DB
박가분(朴家粉)이 히트를 치다
수입 면포를 주로 취급하던 ‘박승직 상점’에 이색 상품 ‘박가분’이 떴다. 이 제품은 1915년 4월부터 그의 부인 정 씨가 사업을 돕기 위해 면포 고객들에게 사은품으로 주려고 집에서 손으로 만든 화장품이다. 그런데 화장품을 사용해본 여성들의 반응이 뜻밖에 좋았고, 방물장수를 통해 전국적인 판로가 생겨나면서 박승직 상점의 거래상품으로 어엿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소규모 가내 수공업으로 시작된 ‘박가분’은 당시 국내 화장품 시장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박가분’은 1920년대와 1930년대 초 불경기에 박승직 상점 운영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다가 일본 상품보다 질이 떨어진다고 알려져 1930년대에 사라지고 말았다.
‘주식회사 박승직 상점’으로 개편하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불경기 여파로 박승직 상점도 어려움이 많았다. 그는 궁여지책으로 상점을 1925년에 ‘주식회사 박승직 상점’으로 개편하여 사장이 되었다. 그는 1921년에 경성곡물신탁주식회사 감사역에 취임했고, 1925년에 ‘한국 상공업계의 발전에 기여하고 상공인 상호 간의 협동적 이익을 도모한다’는 취지 아래 중앙번영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이 단체는 1930년에 ‘경성상공협회’로 변경되었는데 박승직은 1931년에 회장에 취임했다. 1919년 고종 장례식 때와 1926년 순종 장례식 때에 박승직은 상인봉도단(商人奉悼團)을 조직하여 단장이 되었다.
소화기린맥주주식회사의 주주가 되다
소화기린맥주주식회사는 일본인의 소유였는데 일본이 유화정책으로 박승직과 김연수 두 명의 조선인을 주주로 참여시켰다. 1934년부터 첫 시판이 이루어진 소화기린맥주는 1939년에 최고의 판매액을 올리는 등 맥주산업의 시작을 알렸다. 박승직은 소화기린맥주의 대리점을 개설해 위탁판매를 시작했는데 맥주도 배급제였다.
1945년에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이 물러갔다. 그러자 소화기린맥주의 한국인 종업원들이 자치위원회를 구성하고, 주주였던 박승직에게 지배인이 되어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그는 81세라는 고령을 이유로 사양하고, 대신 그 책무를 장남인 두병에게 맡겼다. 이를 계기로 훗날 동양맥주가 탄생했다.
상점 개설 후 48년 만에 휴업하고 5년 후에 타계하다
일본은 1941년 12월에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하여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후에 장기전 체제로 들어갔다. 이에 따라 국내경제는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박승직 상점의 운명도 시대적 상황에 좌우되지 않을 수 없었다. 매출과 순이익이 뚝 떨어졌다. 박승직은 불황에 대비하여 1942년부터 사업을 정리해갔다. 박승직은 모든 사업을 중단하고 1945년 8월 13일에 창고에 쌓인 상품을 공정가격으로 처분한 후에 휴업에 들어갔다. 개점한 지 48년 만의 휴업이었다.
박승직은 휴업 중인 박승직 상점을 1946년에 ‘두산상회’로 다시 개업하여 두산의 여명기를 열었다. 박승직이 아들 두병에게 물려준 ‘두산(斗山)’은 ‘한 말(斗) 두 말 쌓아 올려 큰 산을 이루라!’는 뜻이라고 한다. 모든 것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나서 박승직은 1950년 6·25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같은 해 12월 20일에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박승직의 경영이념
박승직의 경영이념은 어떤 것인가? 이에 관해 김성수는 다음과 같이 썼다.
“매헌 박승직은 초창기에는 생소한 제조업분야의 경영을 기피했고, 상업에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그는 인화, 근검, 정직, 신용 등 4대 경영이념을 시대의 흐름에 따라 기업정신으로 활용했다. 그의 인화사상은 동양맥주의 사시(社是)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그는 가정에서와 마찬가지로 기업경영에서도 늘 인화를 강조했고, 종업원들에게 인화, 근검, 정직, 신용 4대 기업정신을 주지시켰다. ... 그가 거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인화, 근검, 정직, 신용의 4대 경영이념을 실천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3)
박승직은 1929년에 “勤者成功”, 곧 ‘부지런한 사람이 성공한다’는 휘필(揮筆)을 남겼는데, 이는 후손은 물론 두산그룹 사원들도 좌우명으로 삼아왔다고 한다.
▲2009년 7월 두산중공업이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수주한 슈웨이하트(Shuweihat) 2단계 해수담수화 플랜트에 설치될 담수증발기 1호기를 창원공장 자체 부두를 통해 출하하고 있다./두산중공업 제공
박두병이 두산그룹을 이끌다
박두병은 1945년 해방 직후에 시국을 관망하면서 소일하고 있을 때 소화기린맥주주식회사의 지배인이 되었다. 그는 어려운 여건에서 맥주 생산을 재개했다. 그는 1947년에 상호를 동양맥주주식회사로, 상표를 OB(Oriental Brewery)로 바꿨다. 그는 1948년 7월에 동양맥주 사장에 취임하여 ‘두산상회’라는 간판을 걸었다. 1950년에 6·25동란이 일어나자 그는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두산상회는 1951년에 ‘주식회사 두산상회’로 발족하여 박두병이 사장에 취임했다. 박두병은 1952년에 정부로부터 동양맥주주식회사를 인수받아 두산의 창업기를 열고 두산그룹의 발전을 이끌었다. 그는 대한상공회의소 소장이었을 때 1973년 8월 4일에 6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박두병은 박용곤, 박용오, 박용성, 박용현, 박용만 다섯 아들을 두었다. 박두병이 타계하자 큰 아들 박용곤이 회장을 맡았고, 그 후 남은 아들들이 차례로 회장을 맡으면서 두산그룹을 이끌어오고 있다. 현재 다섯째 아들 박용만이 회장을 맡고 있다.
이 글은 창업 CEO 박승직 이야기가 목적이므로 두산 이야기는 여기서 마친다.
각주
1) 박승직 이야기는 한국경영사학회가 2002년 5월에 발간한 『경영사학』 제17집 제1호에서 김성수 외 5인의 학자들이 쓴 <特輯: 梅軒 朴承稷·蓮崗 朴斗秉 硏究>를 텍스트로 삼았다.
2) 육의전은 육주비전(六注比廛)이라고도 하는데 여섯 종류의 어용(御用)상점으로 국가 독점이었다.
3) 김성수(2002.5), 「梅軒 朴承稷과 蓮崗 朴斗秉의 生涯와 經營理念」 , 한국경영사학회(2002.5), 『경영사학 제17집 제1호』, pp.22∼23.
④ 유일한 - 유일한, 세금 제대로 내고 기업을 대물림하지 않다
고(故) 유일한 유한양행 전 사장은 9살 때 미국으로 가 고학으로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마친 후 GE 회계사로 잠시 일하다가 ‘라·초이식품회사’1)를 운영했다. 그는 자기 회사 상품의 주원료인 ‘숙주나물’ 구매를 알아보려고 1925년에 잠시 귀국했다가 조국의 열악한 현실을 보고 영구 귀국하여 1926년에 ‘유한양행(柳韓洋行)’을 창립했다.
유일한은 제약 사업에 성공했다. 그는 사업을 투명하게 운영하고, 정직하게 세금을 내고, 사업과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재산을 대부분 사회에 환원한 기업인으로 유명하다.2)
9살에 미국으로 가 고학으로 대학을 졸업하다
유일한은 성공한 상인이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버지 유기연 씨의 장남으로 1895년에 평양에서 태어났다. 이 무렵 외국 선교들이 평양에서 전도를 하면서 서양 문물을 전하고 있었다. 또 이 무렵 이승만 등 젊은 애국지사들이 여기저기 순회하면서 보다 많은 젊은 사람들을 외국에 보내 서양의 문물을 배우게 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해야 한다는 개화입국론(開化入國論)을 호소하고 있었다. 이 같은 분위기에 이끌려 애국심이 강한 유기연은 아들을 외국에 보내기로 작정했다. 그는 9살밖에 안 된 어린 아들을 대한제국 순회공사 박장연 씨에게 딸려 1904년에 미국으로 보냈다.
유일한은 미국행 배 안에서 가지고 있던 돈을 몽땅 잃어버렸다. 그는 네브라스카에 정착하여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자매(姉妹) 가정에서 살면서 고학으로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때는 미식축구 선수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그는 1915년에 미시간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을 다닐 때는 중국 등에서 값싼 제품을 사다가 동양인들에게 팔아 학비를 마련하는 등 장사 수완을 발휘했다. 1919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GE(General Electric)에 입사해 잠시 회계사로 일했다. 이 무렵 학창시절에 알았던 중국 광동 출신의 의학 전공 호미리(胡美利)와 결혼했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에 관여하다
GE에서 일할 무렵 유일한은 인생 전환의 계기를 맞게 된다. 1919년에 조국에서 3·1만세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 미국 내의 조선인들이 서재필 박사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을 하고, ‘한인자유인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 ‘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釋明)하는 결의문’이 채택되었는데 유일한이 이 결의문의 기초작성위원으로 지명된 것이다. 유일한이 이 일을 맡게 된 것은 그가 어렸을 때 본 아버지의 애국심, 한말의 나라 없는 슬픔, 기독교정신과 개척정신, 한국 유학생들과의 교류, 서재필 박사의 영향에 도움을 받은 것으로 이야기된다.
유일한은 GE에서 잠시 일하다가 그만두고 1922년에 대학 친구와 합작으로 ‘라·초이식품회사’를 차려 자신은 부사장이 되었다. 그는 중국요리에 많이 쓰이는 숙주나물의 원료인 녹두를 구하기가 어려워 중국요리에서 숙주나물이 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숙주나물 공급으로 돈을 벌기 위해 식품회사를 차렸다. 그는 이 회사 설립으로 4년 만에 50여만 달러를 벌었다. 그는 숙주나물 원료인 녹두를 확보하려고 1925년에 조국을 찾았다.
그는 북간도로 이주한 부모님을 만나려고 그곳에 가는 도중에 인생의 전기를 또 한 번 맞게 된다. 당시는 일본이 창씨개명(創氏改名)에 들어간 때였다. 조국에는 철마다 찾아드는 돌림병, 각종 기생충, 결핵, 학질, 피부병 등이 창궐하고 있었는데도 치료할 약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제약회사 설립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헐벗고, 굶주리고, 질병에서 헤매는 국민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제약회사 설립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유한양행을 설립하다
미국에 돌아간 후 귀국할 방법을 찾고 있던 유일한에게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1925년에 세브란스병원의 에비슨 학장으로부터 초청을 받았는데 그는 연희전문학교 상과에서 강의를 맡고, 그의 부인 유호리는 세브란스병원 소아과 과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사업을 정리하고 1926년에 귀국했다.
귀국한 유일한은 교육계에 몸을 담을 것인가, 사업을 할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섰다. 그는 제약업에 종사하기로 하고, 미국에서 가지고 온 50만 달러의 자본금으로 1926년 12월 10일에 종로에 있는 덕원빌딩에서 유한양행을 창립했다. 이 빌딩의 아래층에서는 유일한이 유한양행을, 2층에서는 부인이 소아과병원을 경영하기로 했다.
유한양행은 의약품을 주된 품목으로 삼아 처음에는 유일한의 아내가 귀국할 때 가지고 들어온 약품을 팔기로 했다. 그러나 유일한은 호적이 없고, 약업 허가가 없다는 이유로 세관 통과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때 경성세관 서무주임 예동석이 도왔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의 인연은 오래 지속되었다. 예동석은 유호리의 국내의사면허 취득도 도와줬다. 이렇게 해서 유한양행은 초기에는 의약품을 주로 판매했다. 이와 함께 우리나라 실정에 필요한 농기구, 염료, 도료, 화장지, 껌, 초코렛, 아이스크림 등도 수입하여 판매했다.
사업이 잘 되었다. 유한양행은 1929년에 사무소를 YMCA로 이전하고 헤노플, 네오톤, 아스피린 등을 수입 판매하고, 안티프라민을 생산하여 시판했다. 1933년 5월에는 사옥을 신문로 2가로 이전하고, 거래처인 미국의 아봇트사와 교섭하여 중국의 대련에 유한양행이 팔려고 하는 약품 3∼6개월분을 비축할 수 있는 창고를 짓고, 대련지점도 개설했다.
자본이 축적됨에 따라 유한양행은 1936년 6월 20일에 자본금 75만 원을 출연하여 주식회사로 발족했다. 경성방직에 이은 두 번째 주식회사다. 주식 배분을 놓고 황명수는 이렇게 썼다.
“그는 사업이 확실한 기반 위에 서자 회사의 소유권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줄 계획을 수립하고 회사를 법인체인 주식회사로 발족시켰다. 그는 기업이 개인의 것이 아니라 회사의 것이며 종업원의 것이라는 뜻에서 주식을 분산하여 종업원들에게 공로로 나눠준 것이다. 1937년에 개최된 주주총회에서 보고된 자료에 의하면, 주식 총수가 15,000주에 주주는 24명이었는데 유일한 사장은 9,625주로 64%에 지나지 않았고 유호미리의 1,000주를 합해도 전체 주식의 71%만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나머지 주식은 사원들에게 배분되었다.”3)
1937년에는 경기도 소사에 대지 20,000평에 건평 2,000평의 공장을 짓고, 사옥, 기숙사, 홀, 운동장, 화원, 등 각종 종업원들을 위한 복지시설을 세웠다. 1937∼8년에는 만주와 중국대륙에서 판로를 개척하여 이곳에 의약품뿐만 아니라 토산품까지 수출하기 위해 수출품 제조공장을 세웠다. 또 1938년에는 미국과 캐나다 지역의 수출 확대를 위해 미국 LA에 출장소를 개설했다.
이 무렵 유한양행은 전성기였다. 1938년을 기준으로 할 때 민족계 제약업체는 총 33사에 총자본금은 1,676,000원이었는데 유한양행은 자본금이 750,000원으로 전체의 45%에 이르렀다. 당시 최대의 민족계 단일 기업인 경성방직의 자본 규모가 1,000,000원 정도였음을 감안할 때 유한양행의 자본금 750,000원은 대단한 액수였다. 또 사세 신장으로 유한양행은 동북아 일원에 방대한 시장을 확보했다.
유일한은 1939년에 고려인삼, 나전칠기, 공예품 등 동양물산을 구미 각국에 수출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그가 미국에 머무는 동안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일본은 통제 위주의 전시경제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수입이 본격적으로 통제되기 시작했다. 유한양행은 큰 타격을 받았다. 그는 미국에서 발이 묶여 귀국하지 못했다.
1941년 12월 주주총회에서 동생 유명한이 그의 후임 사장으로 취임했다. 1942년 12월에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났다. 일본은 유일한이 미국시민권을 가졌다는 이유로 유한양행을 ‘적산(敵産)’으로 간주하여 탄압했고, 세금 공세로 도산까지 기도했다. 유한양행은 견디기 어려운 수난을 당했다. 유한양행은 겨우 명맥만 유지할 뿐이었다. 이 무렵 유일한은 미국에서 미군의 군속(軍屬)으로 활약했다.
▲2013년 유한양행 오창공장 직원들이 삐콤씨 상자로 숫자 50을 만들어 제품 탄생 50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유한양행 제공
해방 후의 유일한과 유한양행
해방이 되자 유일한은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북한과 중국 등에 있던 지점이나 공장 등은 모두 잃고 말았다.
유일한은 1946년에 초대 상공회의소 소장으로 취임하여 상공업 재건에 앞장섰으나 뜻한 바가 있어 미국으로 돌아가 스탠포드대학원에서 국제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유한양행이 해방 후의 혼란 속에서 재건 작업을 진행하던 중 6·25동란이 일어나 유한양행의 자산은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유일한은 1953년에 귀국하여 복구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1955∼1957년간에 ICA(국제협조처)원조자금으로 기계 설비를 최신의 것으로 대체했다. 유한양행은 1950년대 말에 한국 최대의 제약회사로 다시 태어났다. 유한양행은 1954년에 부천에 기능공 양성학교인 ‘고려공과학관’을 설립했는데 1964년에 이를 유한공업고등학교로 개명했다. 1962년에는 대방동에 사옥을 짓고, 화장품 제조 시설을 갖췄다. 1965년에는 ‘유한교육신탁관리기금’을 설립하여 장학사업과 사회복지사업에 열중하다가 이후 ‘유한재단’으로 이름을 바꿨다. 1970년에는 안양공장 내에 유한킴벌리 제지공장을 신축했다. 유한양행은 이렇게 발전해 갔다.
1970년에 유한양행의 시장점유율은 8.7%, 유일한이 세상을 떠난 1971년에는 9.4%로 올랐다. 유한양행은 다양한 의약품을 생산했다.
은퇴하면서 기업을 혈연관계가 아닌 후임자에게 맡기다
1969년 10월 30일에 유한양행 ‘제44기 정기주주총회’가 열렸다. 이 날 유일한은 500여 명의 주주 앞에서 50년간 맡아온 창업 CEO 자리를 물러나면서 전혀 혈연관계가 아닌 조권순 부사장을 후계자로 공표했다. 이어 그가 1968년에 모범납세 우수업체로 인정받은 국내 최초의 ‘동탑산업훈장’을 신임 조 사장에게 물려주면서 남긴 말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정직함을 상징하는 이 메달은 대대로 이어져갈 사장에게 전하시오.”
그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 잠시 활동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1971년 3월 11일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재산을 사회에 기증하다
그는 1971년 76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재산 전부를 공익법인에 기증했다. 그의 경영 이념은 ‘정성껏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 봉사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인재를 양성 배출하는 것’이었다. 그는 기업이익에 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첫째, 기업을 키워 일자리를 만든다.
둘째, 정직하게 납세한다.
셋째, 남은 것은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한다.
유일한은 자신의 경영철학을 실천에 옮긴 기업가다. 사후에 공개된 유언장이 이를 말해준다.
유언장에 따르면, 손녀를 위한 학자금으로 자기 주식의 배당금 가운데 당시 환율로 3백만 원에 해당하는 1만 달러를 마련하고, 딸에게는 유한중·공고 내의 묘소 및 주변 대지 5천 평을 상속하되 ‘유한동산’을 만들고, 자신의 소유주식 전부를 재단법인 ‘한국사회 및 교육신탁기금에 기증한다’고 되어 있다. 또 미국에 있는 장남에게는 ‘너는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라’는 유언만 남겼다. 그로부터 20년 후 1991년에 세상을 떠난 딸 유재라도 전 재산을 유한재단에 기부했다.
유한양행은 2014년 12월 19일에 이날 기준으로 국내 제약사로서는 처음으로 매출 1조원을 돌파했다고 밝혔다. 국내에서 제약업이 시작된 지 120여 년 만의 첫 사례다.
각주
1) ‘라 초이’는 중국어인데 우리말로 ‘숙주나물’이라고 한다. 아내가 중국인이어서 이 말을 쓴 것 같다.
2) 유일한 이야기는 한국경영사학회가 1994년 12월에 발간한 『經營史學硏究』 제9집에서 황명수 외 8인의 학자들이 쓴 <特輯: 柳一韓 硏究>를 텍스트로 삼았다.
3) 황명수(1994. 12), 「柳一韓의 生涯와 經營理念」, 한국경영사학회(1994.12), 『經營史學硏究 제9집 <特輯: 柳一韓 硏究>』, p.23. 박동운 단국대 경제학과 명예 교수
⑤ 구인회
구인회, “남이 미처 안 하는 것을 선택하라”
▲1961년 구인회 LG 창업회장(가운데)이 국내 최초 국산 화한 자동전화기로 시험통화를 하고 있다. / LG전자 제공
LG 창업자 구인회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남이 미처 안 하는 것을 선택하라. 국민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것부터 착수하라. 일단 착수하면 과감히 밀고 나가라. 성공해도 거기에 머물지 말고 그보다 한 단계 높은 것에 도전하라.” 이런 경영철학을 가진 구인회는 ‘수많은 국내 최초’를 만들어냈다.1)
‘구인회 상점’을 개설하다
구인회는 1907년 8월 경남 진양군 지수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연 수입 3백석 정도의 지주였다. 그의 조부는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그는 조부 밑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그는 13세에 김해의 만석꾼 집안 허 씨와 결혼했다.
그가 태어날 무렵 우리나라는 일제에 지배당하기 직전의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1908년에 일본은 경제를 독점하고 토지·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우리나라에 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를 세웠고, 1909년에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만주에서 폭사시켰고, 1910년에 일본은 한일합방을 강행했다.
구인회는 결혼으로 허 씨 가문과 관계를 맺으면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보수적인 가정에서 자라나 한학을 익히던 그는 손위 처남 허선구의 권유로 지수보통학교에 편입하여 3년간 공부했다. 이어 그는 17세에 서울중앙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가 중퇴하고 말았다. 왜 그가 고등보통학교를 마치지 못했는가에 관해서는 이유가 확실하지 않다. 그의 장인이 세상을 뜨자 생활이 어려워졌다거나 그의 조부가 서울 유학을 청산하고 귀향하라고 명령했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귀향 후 구인회는 마을에 장근회(獎勤會)를 조직하여 소비협동조합운동을 전개했다. 이 마을에는 이미 일본인 상인이 잡화 등을 팔고 있었는데 그는 이 일본 상인에 대항하는 소비협동운동을 전개하기로 마음먹고 마을 청년들을 설득했다. 그는 석유, 비누, 광목, 비단 등 일용잡화를 공동구매하면 일본 상인에게서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싸게 살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의 설득이 주효하여 1929년에 지수협동조합이 결성되어 그가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 협동조합을 운영하면서 그는 포목의 유통경로와 마케팅 기법을 알게 되었고, 그 무렵 동아일보 진주지국장이 되어 활동 범위가 넓어졌다.
협동조합을 키우는 일에 3년간 열중하다보니 구인회는 승산마을은 자신의 활동무대로서는 좁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고민 끝에 그는 고향에 인접해 있는데다 유행의 도시요 소비의 도시인 진주에서 포목상을 경영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의 조부와 부친은 상업을 천시하는 입장이어서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가까스로 허락한 후 사업자금으로 2000원을 대주었다. 이 액수는 포목상을 경영하기에는 부족하여 구인회는 양자로 간 동생에게 1800원을 출자하도록 하여 사업 자금을 마련했다. 구인회는 진주 식산은행 건너편 2층 건물에 ‘구인회 상점’을 개설했다. 1931년 7월, 그의 나이 25세. 이 상점이 곧 LG그룹의 출발이다.
첫 사업은 적자였다. 쌀 100가마가 넘는 적자를 기록했다. 소규모의 점포로 기존 업체와 경쟁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아버지 소유의 토지를 담보로 8천 원을 융자 받아 경영 규모를 확대했다. 그는 값을 깎아주지 않는 대신 자를 속이지 않고 신용을 쌓아갔다. 그는 포목을 비수기에 싸게 사두었다가 성수기에 비싸게 팔았다. 그는 이익을 올리는 데 전념했다. 중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전시 특수경기를 내다보고 2만 필을 매점하여 무려 8만 엔의 이익을 남겼다.
토지에 투자하여 만석꾼이 되다
사업이 잘 되었다. 구인회는 사업 영역을 넓히기 위해 1940년 6월 회사를 ‘주식회사 구인회상회’로 바꿨다. 이 때 그는 40만 엔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주식을 발행하고, 근대적 경영체제를 갖춰갔다. 그는 눈을 해외로 돌려 무역업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만주와 일본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무역업 전환은 쉽지 않았다.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일어나 포목 공급의 길이 막혔고, 1939년 11월에 일본이 기업정비령을 공포하여 사업하기가 어려워졌고, 1940년 2월부터 일본이 민족 상인을 압박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청과물과 어물 거래에 투자하기로 계획하고 80톤 규모의 선박을 사서 운영했지만 한계를 느꼈다.
그는 토지에 투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은행예금을 모두 찾아서 진양, 의령, 함안, 고성 등지의 토지에 투자했다. 그는 만석꾼이 되었다.
부산으로 옮겨 락희화학공업사(樂喜化學工業社)를 설립하다
1945년에 해방이 되었다. 구인회는 넓은 곳으로 진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부산으로 옮겨 조선흥업사(朝鮮興業社)를 세웠다. 조선흥업사는 해방 이후 무역업 허가 제1호 업체로 기록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대마도에서 목탄을 수입하는 사업을 시작했는데 거센 파도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운수업도 시도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흥아화학공업사의 화장품 김준환 기사를 알게 되었다.
70만 원어치의 화장품을 사서 서울로 보내면 100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지구상에 여성이 있는 한 화장품은 영원하다’는 판단 아래 화장품사업을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화장품 판매업에 성공한 구인회는 아예 화장품 크림을 집에서 직접 생산해서 팔기로 마음먹었다. 화장품 크림 생산은 해방 후 그의 첫 사업이다.
1947년 41세 때 그는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했다. 그는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하여 ‘럭키표 크림’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럭키’라는 말은 동생 구정회의 제안에 따라 채택되었다. ‘럭키’라는 말은 ‘행운’을 가져온다는 뜻으로 알려져 크림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이 사업으로 구인회는 3년 만에 3억 원의 이익을 올렸다.
1950년에 6·25 전쟁이 일어났다. 서울의 화장품 공장들은 모두 파괴되었지만 구인회의 락희화학은 부산에 있었으므로 화장품 생산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회사는 전시에서도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그는 1952년 4월에 제5회 한국화장품공업협회 정기총회에서 이사장으로 선출되어 한국화장품업계의 제1인자가 되었다.
구인회는 깨지지 않는 크림통 뚜껑을 개발할 수 없을까 생각하다가 플라스틱 뚜껑이 좋다는 정보를 얻고 플라스틱산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플라스틱 공장을 세우고 미국에서 인젝션머신을 주문하여 1952년 9월부터 플라스틱 빗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인젝션머신으로 칫솔, 세수대야, 식기 등도 만들었다. 대박이 났다. 구인회는 계속해서 럭키치약, PVC파이프, 비닐장판, 폴리에틸렌필름, 스펀지레저 등을 개발하여 국민생활의 근대화에 기여했다. 럭키치약은 국내 기술로 개발한 순수 국산품으로, 출시 3년 만에 치약의 대명사로 불리던 ‘콜게이트치약’을 물리치고 국내시장을 석권했다.
구인회는 1956년에 락희산업주식회사를 반도상사주식회사(半島商社株式會社)로 바꾸고, 본격적인 무역상사 체제를 갖추어갔다. 반도상사는 한국 무역업의 성장과 궤를 같이 하면서 이 분야 발전을 주도했다.
/LG 충북 창조경제혁신센터 전경./ LG그룹 제공
전자산업의 효시 금성사(金星社)를 설립하다
금성사가 설립된 것은 1958년, 그의 나이 51세 때였다. 금성사는 1959년에 국산 라디오와 선풍기를 생산했으나 소비자의 외국산 선호 때문에 난항을 거듭했다. 구인회는 1959년에 금성사를 주식회사로 바꿨다. 1959년에 대망의 국산 라디오 제1호 ‘A-501’가 탄생했다. 국산 라디오는 5·16쿠데타 이후 밀수품 단속으로 한 때 고난을 겪었지만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 덕분에 매출이 무섭게 증가했다. 이어 금성사는 1966년 8월에 국내 최초로 흑백TV(10인치)를 조립·생산하기 시작하여 그 후 성장을 이어갔다. 금성사는 한국의 전자와 전기공업을 개척한 공신이다. 이는 구인회의 용단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의 사업가적 개척정신과 도전정신의 결과다.
구인회는 어떤 경영이념을 가졌는가?
구인회는 1969년 12월에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한국인의 원시적인 소비패턴을 근대적인 것으로 바꿔놓은 창업가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과 기여를 위해 문화재단 설립을 추진하여 그 해 12월 장학육영사업, 문화사업, 사회복리사업에 기초한 연암문화재단도 설립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장남 구자경이, 현재는 3세 구본무가 경영을 맡고 있다. 그가 창업한 기업은 2005년 구 씨 일가의 LG그룹과 허 씨 일가의 GS그룹으로 분리되어 한국경제를 이끌고 있다.
이 같은 업적을 남긴 구인회는 어떤 경영이념을 가졌을까?
경영사학자들은 구인회의 경영이념을 한결같이 높게 평가한다. 이 가운데 김성수는 구인회의 경영이념을 포괄적으로 정리했다.2) 여기서는 이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첫째, 구인회는 인화단결주의를 중시했다. 인화단결은 구인회의 생활철학이며 경영사상이다. 인화단결은 오늘날 LG의 사훈이라고 한다. 인화단결을 내세운 구인회는 인재 발탁을 위해 1957년에 한국 최초로 ‘대졸 공채’를 시행했다.
둘째, 구인회는 가족주의를 강조했다. 그는 창업 초기부터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러분들은 락희가족이 되었네. 락희가족이 인화단결하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네.” 구인회는 유교적 가족주의로 5명의 아우들, 6명의 아들들, 허 씨네 형제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셋째, 구인회는 근검절약주의를 실천했다. 자유당 시절 이재형 국회의장은 근검절약에 철저한 구인회를 지칭하여 “근검, 소탈을 가르쳐준 어른”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넷째, 구인회는 도전과 개척주의를 강조했다. 앞에서 그의 경영활동을 살펴보았듯이 그는 ‘남이 하지 않은 일’을 하여 성공한 기업가다.
다섯째, 구인회는 신념주의자다. 그는 “할 수 있다. 하면 반드시 된다”라는 신념으로 사업에 일관했다.
여섯째, 구인회는 인재존중주의자다. 그는 인재를 키워야 기업이 큰다는 신념으로 한국 최초로 공채제도를 도입하여 인재를 능력과 실력 위주로 발탁했다.
일곱째, 구인회는 기술혁신주의자다. 그는 연구개발의 바탕 위에서 국민생활 편의를 위해 신상품을 생산했다.
여덟째, 구인회는 국제화와 정도경영합리화주의자다. LG의 사훈, 사시, 기업윤리강령의 기본으로 승계되고 있는 경영철학은 구인회가 강조한 ‘국제화, 세계화주의, 정도경영합리화주의’라고 한다.
아홉째, 구인회는 사업보국주의자다. 그는 락희화학 공개로 주식의 대중화시대를 열었고, 이와 관련하여 자본시장 육성 공로로 대통령의 표창을 받아 ‘사업보국주의’를 실천한 기업가다.
열째, 구인회는 국민생활편의주의자다. 그는 “남이 미처 안 한 것을 선택하라. 국민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것부터 착수하라”고 강조하고 이를 실천한 기업가다.
구인회의 인화정신은 ‘사돈가(家)와의 57년간 동거’ 후 LG그룹과 GS그룹을 낳다
구인회의 인화정신과 관련된 미담(美談)을 빠뜨릴 수 없다. LG그룹 具씨 일가와 GS그룹 許씨 일가 간의 ‘57년간의 편안한 동거’는 ‘영원한 화젯거리’로 남을 것이다.
구인회가 1947년에 부산에서 락희화학공업사를 세울 때 구인회의 장인 허만식이 자신의 6촌 동생 진주 만석꾼 허만정을 사위에게 보내면서 사업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게만 해달라고 부탁했다. 여기에는 허만정이 투자비의 35%를 출자한다는 조건이 따랐다. 이 약속은 2005년에 LG그룹과 GS그룹이 분리할 때까지 1947년부터 2005년까지 57년간 잘 지켜졌다. 분리에서도 LG그룹 대 GS그룹의 지분은 정확하게 65% 대 35%로 지켜졌다고 한다. 구인회의 ‘인화정신’이 3대까지 이어져 오면서 가슴 뭉클하게 해주는 미담이 아닐 수 없다. 이따금 재산을 놓고 벌이는 재벌가의 분쟁을 생각하면 구인회의 인화정신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 수 있다.
분리 이후 LG그룹은 전자, 화학, 통신·서비스 전문기업으로, GS그룹은 에너지, 유통, 건설 전문기업으로 성장하면서 이 두 그룹은 여러 분야에서 계속 협력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현재 LG그룹은 구인회의 아들 구자경을 거쳐 3세 구본무가 회장을 맡고 있고, GS그룹은 구인회의 사업에 투자한 허만정의 아들 허준구를 거쳐 3세 허창수가 회장을 맡고 있다. (허창수는 현재 전경련 회장으로, 세 번째 연임 중이다.) LG그룹과 GS그룹은 현재 한국의 대들보 기업이다. ◎
박동운 단국대 경제학과 명예 교수